성성모씨를 회상하며.. (전편)

까마득하게 오래 전, 잠깐 알고 지내던 사람, 성성모씨. 그 당시는 몰랐는데, 지금 카톨릭신자가 되어서 생각하니 그것이 그의 특별한 이름이었다. 성모는 사실 발음상 Mother of God 그러니까 성모 마리아가 아닌가? 혹시 성형(그 당시는 그렇게 불렀다) 은 카톨릭 신자였을까? 그 당시 성형으로 부터 천주교회에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일이 없었다. 아니 들었어도 내가 전혀 무관심이라 잊었는지도..

1973년 말에 미국의 조그만 대학 캠퍼스에서 만났다. 나보다 한 학기 이상 뒤에 온 한국 유학생이었다. 학기시작보다 조금 일찍 캠퍼스에 도착한 것이다. 한국 유학생이 몇 명 밖에 없던 때 반가운 사람이었다. 나와는 나이가 비슷하고 성격이 털털해서 비교적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춘천고교 출신으로, 서울대학 사범대 지학과를 졸업하고 아마도 이곳에서는 본격적으로 지질학을 공부할 모양이었다.

파안대소의 성성모 씨 1974년
파안대소의 성성모 씨, 1974년 Purdue University

1973년이 저물어가던 무렵 Christmas다음으로 큰 holiday인 Thanksgiving holiday 를 미국에서 처음 맞게 되었다. 학교는 순식간 ghost town으로 변하고, 결국 우리도 조금 휴일기분에 젖게 되고, 우리는 New York을 가기로 즉흥적으로 의견을 모았다. 다른 유학생인 이승조씨와 셋이서 경비를 분담하고 나의 차로 가기로 했다. 사실은 두 명 다 그곳에 아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성형은 약혼자가 간호원으로 뉴욕근교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이승조씨도 어떤 간호원들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두 명은 이미 New York에 간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물론 처음이었다.

이 ‘유명한(최소한 나에게는)’ New York trip 1973은 사실 영화에서나 볼만한 disastrous trip 이었다. 그러니까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거의 생생한 것이다. 이 영화의 결말부터 말하자면 “불과 며칠 사이에 2 대의 차를 잡아먹은 여행” 이었다. 우리의 차로 떠났다가 한 명은 비행기, 다른 두 명은 Greyhound bus로 돌아오는 무슨 Napoleon의 Russia campaign을 연상케 하는.. 지금은 여유를 가지고 생각하지만 그때는 사실 조금 비참한 심정이었다.

기세 좋게 출발한 우리는 Oklahoma를 벗어 나기도 전에 차가 highway에서 서버리는 위기를 맞았다. 그 때의 나의 차는 그 당시 $900 주고 산 used car 1969 Volkswagen Beetle 이었는데 비교적 좋은 차였다. 하지만 long haul을 하기엔 역 부족인 차였는지.. engine oil이 새어나가는 큰 사고였다. 아마도 내가 engine oil을 너무 많이 넣었던 것이 문제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engine이 못쓸 정도로 망가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다른 차(Ford Fairlane 500)로 trade가 되어서 그 차를 몰고 여행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대로 돌아올 수도 있었지만 그때의 젊음이 여행을 계속하게 한 것이다.

그 trade한 차는 물론 고물 차에 속했지만 최소한 잘 구르는 차였다. 문제는 manual transmission, 그러니까 clutch가 있는 것이었다. 나는 clutch란 것을 써본 적이 없었다. 망가진 차는 비록 gear shifting을 하긴 했지만 clutch는 없었다. 그래서 공터에 가서 연습을 한 시간 정도 한 후에 출발할 수 있었다. 그때 운전면허를 가진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어깨가 더 무거워진 상태였다. 하지만 역시 젊음은 좋은가.. 우리들은 그 당시 전혀 힘든 것을 몰랐다.

Joplin, MO를 지나고 St Louis, Indianapolis, Columbus, Pittsburgh, Harrisburg를 거쳐서 New Jersey turnpike로 들어섰다. 그러니까 뉴욕 city에 거의 다 온 것이다. 그때의 New Jersey turnpike는 정말 ‘공해’의 본산지였다. Highway 양쪽으로 늘어선 화학공장들에서 나오는 연기가 차의 창문을 닫아도 소용이 없었다. 뉴욕지방의 인상은 그랬다. 오랜 전통과 최첨단의 기술이 기가 막히게 융합이 되어서 미국의 이상(ideal)을 성취시키던 곳.

성형은 자기의 약혼자가 근무하던 Nyack Hospital로 가고 나는 이승조씨가 안다는 간호원 둘이 사는 apartment로 가서 여장을 풀었다. 그 당시 한국출신의 취업간호원들은 의사들과 더불어 전문직으로 이미 자리를 굳히고 있었다. 한국의 경제수준으로 보아서 그들은 분명히 훨씬 나은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뉴욕의 상징인 곳을 몇 군데 구경을 하고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고생해서 간 것에 비해서 너무나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장거리운전의 경험을 쌓았다는 위안으로 다음에 다시 오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차를 돌렸다.

이제 main attraction이 끝나고 나니 현실이 눈앞에 들어왔다. 내가 좋아하던 차가 갑자기 ‘고물차’로 바뀌어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얼마나 웃을까..하는 생각도 들고, 집에다는 뭐라고 변명을 할까..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밤을 새우며 운전을 하는데 도저히 잠이 참을 수 없어서 길옆에 차를 세우고 말았다. 조금 눈을 부치고 가려고 했지만 이승조씨가 월요일에 수업을 꼭 가야 한다며 갈 것을 주장하고, 결국은 자기가 운전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거의 운전경험이 없던 그 친구.. 결국 차를 몰고 가다가 운전미숙으로 curb에 차를 부딪치고 말았다.

나는 뒷좌석에 누워 자다가 요란한 소리에 깨고.. 우리가 발견한 것은 또 차에 문제가 생겼다는 bad news였다. 이번은 전번같이 engine이 아니고 front axle이였다. 차가 curb 에 올라타면서 그곳이 부딪쳐서 무언가 찌그러진 듯.. 차를 운전해 보니 속도에 비례해서 요란한 소리가 차 밑에서 들렸다. 고속으로 달리면 완전히 싸이렌 소리가 날 정도가 되고 옆의 차들이 다 쳐다 보는 정도가 되었다.

그때의 결론은 이 상태로는 더 갈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곳은 Indianapolis 근처여서 기를 쓰고 시내로 들어가 repair shop엘 갔더니 고치지 말고 버리라고 했다. 우리는 결국 차로 집에 가기는 틀렸다고 생각을 하고 우선 시간을 벌기로 하고 궁리 끝에.. 차를 어느 곳에 맡기기로 했다. 그냥 주차장에 놓고 가기는 뭐하고 해서 전화번호부를 뒤져서 한인들을 찾아보았다. Kim씨만 찾으면 되니까..하고 여기저기 걸어서 결국 재수 좋게 어떤 분이 겨울방학이 시작될 때까지 맡아 주겠다고 했다.

그 전화를 받은 분은 어떤 가정부인이었고 의사의 wife였다. 그래서 그곳을 찾아 가보니 어떤 apartment여서 그곳의 한 구석에 차를 주차시키고 그 부인을 찾았다. 놀란 것은 아무도 모르는 우리들에게 불고기 저녁을 대접해 주신 것이다. 그 의사인 남편 분까지 와서 계셨다. 아주 젊은 의사부부였는데 정말 불행하게도 성함을 기억할 수가 없다. 저녁을 잘 얻어먹고 이승조씨는 공항으로, 나와 성형은 Greyhound bus terminal로 남편 분께서 친절하게 데려다 주셨다. 아직도 그 분들의 도움에 감사를 드리는 심정이다.  — 계속

 

 

** 이곳에 있는 YouTube video는 그 당시 크게 유행하던 long haul trucker song: Convoy인데 운전중 하도 많이 들어서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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