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성모씨를 회상하며.. (후편)

비록 패잔병 같은 심정이었지만 다른 한 구석에서는 ‘대륙탐험’ 을 했다는 재미 같은 것도 없지 않았다. 물론 나이 탓이었을 것이다. 그 나이에 비관적이거나 한 감정은 몇 시간도 못 갔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 지루한 Greyhound bus는 급행이 아니라서 조그만 곳이란 곳은 모조리 들리면서 달렸다. 학교에서는 차를 두 대나 잡아먹은 여행이었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나는 웃음밖에 나올 것이 없었다.

성성모씨와 함께 Purdue Stadium 앞에서, 1974년
Purdue Stadium 앞에서 성성모씨와, 1974년

그때 축 쳐진 나를 위로하며 격려를 한 사람이 바로 성성모씨였다. 그때 성형이 나의 옆에 없었다면 참 오랫동안 쳐진 어깨를 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반대로 이승조씨는 한 마디로 실망 그 자체였다. 그렇게 가까이 지내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돌변을 해서 여행 중에 공동으로 쓴 돈을 갚으라고 하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그렇게 노골적으로 그것도 차게 바뀐 사람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어려워졌을 때 진정한 친구를 알아 본다더니 이것이 바로 그런 때였다. 나는 성형을 그때부터 친구로 생각하게 되었다. 학기가 무사히 끝이 나고 겨울 방학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약속대로 그 망가진 차를 찾으러 가야 했다. 이승조는 물론 그런 것은 관심에도 없었다. 나와 성형이 다시 Indianapolis까지 가야 했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차가 없었다. 다시 bus를 타고.. 와.. 아찔했다. 그때 또 성형이 도와주었다. 약혼자에게 돈을 빌려서 차를 한대 산 것이다. 물론 used car였다. Full size Buick Electra였다.

그 차를 사고 나서 우리 젊음의 모험심이 또 발동을 했다. Indianapolis까지만 갈 것이 아니라 아예 New York까지 또 가자고.. Why not? 그때는 이미 추운 겨울이 시작이 되어서 더 재미까지 느끼게 되었다. 눈에 쌓인 highway를 달린다는 생각만 해도 피가 용솟음 치는 기분이었다. 이번에 갈 때는 시간의 제한이 없었다. 마음껏 쓸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Oklahoma를 빠져 나오기 전에 성형과 기숙사를 같이 쓰던 미국학생, Gary Fugate 의 집에 잠깐 들렸다. 그 친구가 어떻게 집에 잘 이야기를 해 놓았던지 그 집에서 아주 환대를 받았다. 성형의 이야기로 기숙사에 있을 때 시간이 나면 그 학생에게 합기도를 가르쳐 주었다고 했다.

그 다음에는 차를 Nebraska주로 돌렸다. 이번에는 내가 아는 한국간호원들에게 들릴 차례가 되었다. Auburn, Nebraska라는 Kansas주에 가까운 조그만 town에서 3명의 한국간호원이 일하고 있었다. 나는 그 중에서 한 명을 한국서부터 알고 있었다. 김성혜씨.. 초가을에 나는 이미 이승조씨와 같이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성형은 이번에 처음 가는 것이고.. 처음에 갔을 때는 조금 문전박대를 당했지만 이번에는 조금 구면이 되어서 처음 갈 때와는 달랐다. 그 ‘촌’에서 근무하는 3명의 한국간호원들.. 생각만 해도 외로워 보였다.

그때는 이미 눈이 나리기 시작해서 모든 곳이 흰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때 우리를 세 간호원이 데리고 어느 곳으로 갔다. 근처에 있는 다른 작은 town.. Peru였다. 남미에 있는 나라이름도 Peru지만 이곳은 도시의 이름이었다. 그곳에는 Peru State College가 있었다. 조그만 liberal art college였는데 그곳에 외롭게 한국인 교수 한 분이 계셨던 것이다. 어떻게 그 교수가 세 간호원을 알게 되었는지 모른다. 이미 그들은 가끔 만났던 것 같았다. 그 교수님의 이름은 John Hahn이었는데 50년대의 초기 유학생이었다.University of Minnesota출신이었고 시카고에 누님이 사신다고 했다. 너무나 외로워서 시카고엘 놀러 가면 다시 오는 것이 무서워서 이제는 자주 대도시에는 안 가신다고 했다. 전공은 political science였다. 교수님의 조그만 apartment에서 같이 저녁을 해 먹었는데.. 눈이 펑펑 쏟아지던 그 때, 그곳을 생각하면 조금 감상적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거의 40년 뒤의 John Hahn교수가 조금 궁금해져서 Internet의 힘으로 찾아보니.. 와.. 그 같은 학교에서 retire를 하신 모양이었고, 명예교수로 이름이 남아있었다. 정말 자랑스럽다.

Ford XL 옆에서, Nyack Hospital 1973년
Ford XL, Nyack Hospital 앞에서, 1973년 겨울

차를 바른쪽으로 돌려서 다시 Interstate 80를 달려서 Indianapolis에 갔다. 약속대로 그 의사부부가 사는 곳으로 가서 차를 끌고 폐차 장에다 처리를 하고 계속 동쪽으로 동쪽으로.. New York을 향해 달렸다. 이번에는 가는 곳마다 눈이 나리고 있었다. 두 번째의 New York trip은 별로 놀랄 것이 없었다. 아주 매서운 바람이 뉴욕의 빌딩 사이로 몰아치고 있다는 것 외에는.. 하지만 그것은 너무 빠른 결론이었다. 이번에는 성형이 조금 기분이 발동을 했는지 새로 사가지고 간 차를 약혼자와 같이 밤에 몰고 나갔다가 그만 사고를 내고 말았다. 이건 완전히 악연이 아닌가.. 또 차가?

다행히 사람은 다치지 않았지만 차는 또 disable이 될 정도였다. 성형은 약혼자에게 미안해서 할 말이 없었다. 적지 않은 $$이 없어진 것이니까. 우리는 또 차가 없어졌다. 발이 묶인 것이다. 또 생각 끝에 이번에는 내가 서울로 도움을 청하고.. 해서.. 내가 그곳에서 차를 사게 되었다. 68년형 Ford XL이라는 비교적 큰 차였다. 상태도 아주 좋았다. 그때 느낀 것은 미국에서는 ‘절대적’으로 자기 차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때 우리는 간호원 기숙사에서 ‘몰래’ 숨어서 잤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무모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때는 그야말로 스릴만점이었다. 성형이 차 사고를 낼 때, 그는 운전면허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오싹하지만 그때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만 해도 면허증에 사진이 없는 주가 많아서 나의 면허증을 빌려갈 정도였다. 아마도 Nyack,NY police의 accident report file에 나의 이름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2개월 만에 차를 3대나 잡아먹은 성형과의 인연이 계속 이어져서 우리는 같이 학교를 떠나 Dallas, Texas로 가서 학교를 옮길 준비를 하면서 조그만 아르바이트를 했다. 내가 먼저 시카고로 떠나게 되고, 성형은 그 당시 Purdue University의 admission을 받고 생각 중이었다. 그래서 결국은 헤어지게 되었는데, 물론 서로 연락은 끊지 않았다. 소식에 성형은 Dallas에서 약혼자와 결혼식을 올려서 부부가 되었고 Purdue University(Indiana)에 입학을 하였다고 들었다. 그곳 (West Lafayette, Indiana)은 시카고와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어서 1974년 9월 Labor Day holiday때 그곳으로 달려가 반가운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같은 해 Thanksgiving holiday때 또 그곳에 놀러 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는 한국유학생이 상당히 있었고 유학생 회도 있었다. 모두들 모여서 신나게, 건전하게 놀던 것이 참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졸업이 가까워진 어떤 선배유학생 부부의 초청으로 처음 Thanksgiving turkey 를 맛 볼 수 있었다. 그 분들의 정성들인 추수감사절 초청은 아직도 기억에 남고 아직도 감사를 드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 이듬해, 1975년 봄 무렵에 성형부부가 시카고로 놀러 왔다. 조금 있으면 Master’s degree를 받게 되고 취직을 생각 중이라고 했다. 그 때만 해도 한국의 취업조건이 별로 좋지 않아서 대부분 졸업을 하면 현지에서 취직을 하려는 풍조였다. 그리고 나서 연락이 끊겼다. 서로 연락처를 찾을 방법이 쉽지를 않았다. 게다가 나는 single이라서 이사를 수시로 하던 터라 더 쉽지를 않았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잊었다. 사진 밖에 남은 것이 없었다. 요새는 특히 겨울이 되면 설경의 Peru State College에서 성형과 같이 눈길의 언덕에서 헛바퀴 도는 어떤 차를 밀어주던 생각이 나곤 한다. 왜 그럴까? 나도 모르겠다. 성형은 어떻게 살았을까? 자식이 몇일까? 그대로 미국에 남았을까? 아니면.. 상관없다. 그저 건강하고 보람찬 인생이 되었기를 바랄 뿐이다. — 끝

 

 

**위의 music video는 그 당시 car stereo에서 거의 24시간 들려오던 힛트송 Charlie Rich(일명 silver fox)의 The Most Beautiful Gir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