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육(5.16) 군사혁명, 50년 전

5.16 쿠데타 성공 후 서울 시청 정문에 선 장도영(왼쪽), 박정희(오른쪽)

5.16 쿠데타 성공 후 서울 시청 정문에 선 장도영(왼쪽), 박정희(오른쪽)

 

오늘아침, 코앞의 달력을 보니 오늘이 5월 16일이다. 무심코.. 아하.. 박정희의 오일육 군사혁명 기념일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작년 사일구(4.19)가 50년이 되었지..하는 생각이 들면서 곧바로 그러면 올해의 오일육이 50년이 되는구나 하는 조금은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반세기란 기간의 느낌이 그렇지만, 50년이란 것이 사실 그렇게 긴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늙어가면서’ 새롭게 느끼게 되는 사실을 재확인하면서…인간 10진법의 문화에 울고 웃는 사실이 흥미롭기도 하다.

서울시내를 내려다 보며 남산가도를 질주하는 혁명군의 Sherman tank
서울시내를 내려다 보며 남산가도를 질주하는 혁명군의 Sherman tank

작년 4월 19일 나의 blog은 분명히 4.19, 사일구 학생혁명 50주년을 회상하면서 쓴 것이었다. 그때는 내가 중앙중학교 1학년 때였고, 5.16은 그 다음해인 1961년, 내가 중앙중학교 2학년 때였다. 그날은 사일구 때와는 달리 아침부터 학교의 문을 아예 열지도 않았다. 사일구 때 최소한 등교를 한 후에 퇴교를 당했던 것에 비하면 더 심각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사일구 혁명은 4월 19일 낮에 그 열기가 절정에 달 했지만 오일육 혁명은 그날 새벽에 이미 일어난 상태였던 것이다.

그때는 ‘아마도’ KBS가 유일한 라디오 방송이었을 것이고, 그 방송에서는 앵무새처럼 군사혁명 공약이 되풀이 되면서 방송이 되었다. 중학교 2학년의 나이에 모든 것들이 다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기억에 제일 먼저 나온 것이 “반공을 제일의 국시로 삼고” 라는 혁명공약이었다. 물론 “국시”라는 말이 확실히 이해는 안 되었지만 “반공이 제일 중요하다” 라는 말로 들렸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제일의 반공국가였는데, 왜 이런 말을 제1의 혁명공약으로 삼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중학교 2학년 ‘어린아이’가 그것이 그렇게 중요했을까? 역시 사일구 때와 마찬가지로 학교를 ‘못 가는’ 것만도 고맙게 생각하며 우리들의 영웅, 산호의 라이파이를 보러 만화가게로 갈 수 있는 것만 생각해도 마음이 흥분 되었다. 국민감정을 의식해서였을까, 사일구 때의 계엄령과 다르게 비교적 자유로운 계엄령 치하가 시작되었다 (최소한 아이들의 눈에는).

달력을 다시 보니 역시 5.16에는 아무런 ‘표시’가 안 보이고 그 이틀 뒤인 5.18에는 “5.18 민주화 운동 기념일”이란 표시가 보인다. 그러니까 5.16 ‘군사혁명일’이란 것은 아예 기념일에서 조차 떨어진 모양이다. 호기심이 난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 그러니까 언제부터 달력에서 5.16군사혁명 기념일이 없어지고,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이 들어갔을까. 역사는 흐른다. 절대로 멈춘 것이 아닌 것이다.

혁명주체세력 제1인자 박정희 소장, 1961
혁명주체세력 제1인자 박정희 소장, 1961

사일구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좋아하던 “진짜” 탱크가 시내 곳곳에 보였지만 이번에는 아주 평화스럽게 보였다. 처음에는 장도영이란 이름만 요란하게 들렸고 박정희란 이름은 아주 나중에야 들리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우선 달라진 것이 있다면, 사회전체가 아주 ‘질서정연’하게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사일구 이후에 하루가 멀다 하고 거리는 데모대로 조용한 날이 없었기 때문일까. 비상계엄령 속에서 데모를 한 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신선한 기분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나는 느낀다. 사일구 이후에 전체적으로 퍼지던 지나친 자유의 공기를. 심하게 말해서 방종이라고나 할까. 이렇게 해도 법과 질서가 유지가 될까 할 정도였다. 그 예로 내가 다니던 중앙학교에도 지나친 자유의 표현으로 ‘교장선생, 물러가라’ 하는 데모가 있었다. 사일구의 독재정권 타도가 일반적인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변한 것이다. 그 당시 중앙학교(중, 고교)는 심형필 교장선생님이 계실 때였다. 수학자로서 아주 선비 풍의 나이 지긋하신 선생님에게 ‘비리’가 있다고 데모를 하고 물러가라고 학생들이 요구를 한 것이었다.

물론 나의 나이로는 이해가 되지를 않았지만, 모든 것이 그런 식이었다. 이승만 정권 당시에도 일반적인 시민의 자유는 많았다. 그래도 치안에는 별로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사일구 뒤에는 기본적인 치안에 문제가 보일 정도랄까.. 왜 그랬을까? 결국은 이승만 ‘부패정권’ 뒤에, 거의 통치력이 없는 과도정권에 공권력이 너무나 약했던 것이 아닐까?

5.16 혁명 직후 시청 앞 육사생들의 혁명지지 대회, 1961

제일 극에 달한 것은 사회적인 것 보다는 정치적인 것이었다. 그 당시는 자세히 들 알려지지 않았지만 휴전선 너머의 김일성이 이것을 보고 얼마나 침을 흘렸을까 하는 것은 절대로 지나친 걱정이 아니었다는 것은 후세에 다 사실로 들어났다. 과도정권은 분명히 반공정권이었겠지만 극에 달한 자유의 표현은 결국 남북화해, 남북협상이란 말까지 허용하게 되었다. 그것은 분명히 현실적인 반공법 위반이었는데.. 휴전선의 포격사정권에 있던 수도를 가진 정권에게 이것은 정말 위험한 것이었겠지만 일반 시민의 정서는 거꾸로 흐르고 있었고, 결국에는 학생들 조차, “가자 판문점으로!” 라는 꿈을 꾸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이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조용해 졌다. 우리는 며칠 뒤 등교를 한 후에 긴급 혁명공약을 배우게 되었고, 일년 동안 만끽하던 ‘학원의 방종’을 되 돌려 주게 되었다. 한가지 아쉬웠던 것 중에 하나가, 그 동안 “스포츠 가리” 이발에서 완전히 “삭발”형으로 바뀐 것.. 그러니까.. 중학교 1학년에 입학하면서 전통대로 머리를 다 중처럼 깎았다가, 사일구가 나면서 ‘자유’가 주어져서 스포츠머리로 바뀌었는데, 다시 원래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목격한 것이 중앙학교 구내에 하나 둘씩 들어섰던 ‘잡상인’들이 없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예들 들면, 이발소, 식당, 문방구 같은 것들이었다. 상인들에게는 큰 일자리가 없어졌겠지만 사실 이것은 잘 된 것 같았다. 학교 밖이면 몰라도 학원 내에 그런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느슨하던 극장의 학생입장도 아주 까다로워져서 웬만한 영화는 거의 다 ‘학생입장불가’가 되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던 깡패들도 줄줄이 잡혀 들어갔는데.. 조금 심했던 것은 일부  ‘정치깡패’들이 사형에 까지 처해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일련의 정책들은 대부분 사람의 지지를 받았다.

역사적으로 오일육 군사혁명은 정권이 바뀌면서 해석도 달라지고 느낌도 달라짐을 안다. 군사혁명 10년 뒤인 1971년에는 거의 영구집권체제인 유신정권으로 바뀌고, 그 8년 후인 1979년에는 박정희도 부하에 의해서 사망을 한다. 속담에 “때는 때대로 간다” 라는 말로 그의 공과를 한마디로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세상이 그렇게 간단할까? 한때는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는 그가 싫기도 했다. 나는 기껏해야 김신조 사건 이후에 대학에 생긴 교련에 대한 반대데모와 3선개헌 반대데모로 학창생활이 끝났지만 아내 연숙은 70년대의 유신체제를 반대한 거센 ‘운동권’에 끼어들게 되어서 모든 현장을 목격까지 했고, 경찰과 정보부의 감시 속에서 살았던 때도 있었다. 이것 때문에 결혼 후에 나는 사실 고개를 못 들고 살았다. 데모만 나면 나는 ‘신나는’ 등산을 즐겼는데 반해서 연숙은 모든 것 잊고 최루탄 연기를 맞으며 살았던 사실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기도 했다.

그 운동권 출신들이 줄줄이 현재 모든 정권의 요직에 있다. 심지어 일부는 거의 ‘빨갱이’ 흉내를 낼 정도가 되었다. 오일육에 대한 해석도 극과 극을 치닫고 있다. 그들이 항상 거의 의도적으로 언급을 안 하는 것은 그 동안 그들이 그렇게 동정하던 ‘북녘’ 정권이 어떻게 그들의 ‘인민’들을 통치해 왔던가 하는 사실이다. 박정희의 반대파 탄압을 언급하려면 조금은 그것도 언급하면 조금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어느 정도 먹고 입기 전에는 의미 있는 민주주의를 뒤로 미루겠다는 말은, 그 당시를 살아보지 않았던 사람들은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다. 또한 반대로 박정희를 거의 ‘영웅시’하는 극우파들.. 그들이 사실 박정희의 진정한 의도와 업적에 먹칠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시청 앞에서 박정희와 차지철

혁명 성공 후, 시청앞에서 육사생들의 사열을 받는 박정희 소장과 차지철 공수부대장

오일육 혁명 주체, 박정희 소장

이 검은안경 사진은 후세에 남는 오일육 혁명의 상징이 되었다


 당시의 신문으로 보는 오일육 쿠데타 모습들

 

50년 전의 신문으로 그 당시를 회상하는 것, 조금 감당키 어려운 감정의 복받침과 싸우기도 했다. 글과 사진들.. 확실히 이것은 이제 역사가 되었고, 교과서에서 다시 배울 정도로 오래되었다. 이 신문들을 다시 보며 뚜렷하게 느끼는 것, 당시의 신문들.. 정말 중학교 2학년 생의 한자 실력으로는 읽고 이해하기에 역부족, 그러니까 거의 문맹에 가까울 정도라는 사실..을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여기 나온 신문들을 보라.. 얼마나 많은 한자가 섞여 있는가? 또한 한글조차 50년을 거치며 맞춤법이 많이 변했음을 절감하고, 언어의 변천에 50년은 그렇게 짧은 세월이 아니라는 것도 느낀다. 하지만 그것 보다 사진을 보며 더 깊은 생각을 한다. 50년 세월 동안 내가 기억한 모습들은 너무나 현재에 적응이 되었는지, 그 당시의 모습들.. 너무나 꾀죄죄하고, 볼품들이 없다. 물론 그 당시의 유행과 경제수준을 감안하면 조금 이해는 가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 당시 신문의 사진기술에 더 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조잡한 사진 조판에다가, 50년이 지난 신문지.. 그것이 ‘생생하게’ 보일 리가 만무하니까.

 

오일육 당시 경향신문 석간

오일육 석간지는 유동적인 사태로 군 검열을 받지 않았다.

성공적인 무혈 쿠데타

의외로 평온한 전국 주요 도시의 분위기

서울 주요 거점에 진주한 혁명군들

오일육 낮, 어리둥절한 시민들과 군인들, 세종로,시청 근처

생생했던 역사 현장, 희미한 모습으로

그 당시 모습, 사실 이 사진보다 훨씬 더 깨끗했다

육군사관생도 혁명지지 궐기행진

쿠데타 직후 육사생들의 지지 궐기는 혁명성공의 촉진제였다

시청 앞에 집결한 육사생도들과 장도영 중장

시청앞에서 혁명지지 궐기대회, 혁명의 얼굴, 장도영 중장과 육사생들

5월 17일부터 군 검열받던 신문들

계엄령하에서 언론에 대한 군 검열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서서히 등장하는 막후 1인자 박정희 소장

사실상 쿠데타 주역 박정희 소장, 장도영 중장과 기자회견에서

 


그 당시의 사회정서를 한눈에 보려면 영화광고를 보면 간단하다. 유행과 더불어 그 당시 최고 인기배우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서부영화와 대형 종교영화가 판을 치던 그 시절, 한국의 영화풍토는 지금 수준에서 보면 정말 아이들 장난과도 같았다. 한마디로 유치하게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또한 매력이었다. 여기의 영화광고를 보면서 손쉽게, 구봉서, 최은희, 신영균, 김진규, 허장강, 김희갑, 김혜정 등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당시 그들이야말로 국민배우들이었기 때문이다.

 

쿠데타 당시 상영되던 국산영화들

신상옥 감독이 한국 영화를 주름잡던 그 시절의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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