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내가 읽은 책: 박기원씨의 이진섭(3,끝)

이진섭씨와 일본

박기원씨는 조금 그렇다 치더라도 이진섭씨는 시대적으로 보아서는 완전히 일본식의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이다. 그만큼 그들이 속했던 문화는 조금은 생각해 보아야 할 만큼 복합적일 것이다. 우리들의 부모님 세대가 바로 그 세대여서 사실 우리도 조금은 친숙하다. 일본..하면 우선 정치적으로 ‘죽일 놈의 나라’에 속했지만 확실히 앞서간 근대문명을 악착같이 따라가던 그들을 보고 다르게 봐야 하는, 말하기 싫은 시각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 뒤의 우리세대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1971년 국제회의 참석차 이들 부부는 쉽지 않았던 해외여행을 하게 되고, 일본을 경유해서 귀국을 하게 된다. 그때 느낀 일본에 대한 복잡한 심정이 이렇게 그려진다.

나는 교오토(京都) 등을 관광하고 싶었지만 결국 하지 못했다. 도쿄 시내는 택시로 한 바퀴 돌아 보았고, 식사할 때만 호텔 근처에 나가 사먹었다. 그래도 긴자(銀座)니 록봉기(六本木)니 하는, 옛날 소녀 때 일본 소설에서 읽었던 귀에 익은 거리 이름을 보니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이나 나나 왠지 일본에 대해서는 마음 깊이 아직도 용서 못할 풀리지 않는 감정의 찌꺼기가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이는 공항에서도 절대로 일본 말을 안 쓰고 영어만 쓰는 고집을 부렸다. 우리는 일본에서 아무도 찾지 않고 만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무조건 느낌이 좋은 것을 나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나 보다. 아주 이성적인 감정이라고나 할까. 1968년 이력서에서 ‘요주의 인물’의 딱지가 떨어지고 첫 일본여행 당시 느낌이 대표적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퍽 자유로운 곳이야. 그리고 먼지가 없어. Y셔츠, 신발 닦을 필요가 없으니 잔손이 안 가 참 좋군. 언젠가 가까운 날 당신하고 같이 오고 싶은 곳이야.

위의 글은 1968년 당시니까, 그 당시 서울의 풍경과 비교해 보면 짐작이 간다. 완전히 공해에 찌들었던 서울하늘이 완전히 먼지 범벅이던 그런 시절, 손수건이 없으면 100m도 못 걷던 시절을 생각하면 이미 올림픽 4년 후였던 그곳과 비교가 될 듯하다.

 

샹송과 이진섭

나의 기억에 이진섭씨는 불란서 풍의 문화를 좋아한 듯 하다. 특히 샹송 풍의 노래에 조예가 깊었고, 한때 샹송가수 <이벳드 지로, Yvette Giraud>가 서울에서 공연을 했을 때 공연무대에서 사회를 보았고 그 기사를 어느 잡지에서 사진과 함께 본 기억도 난다. 그렇다면 이진섭씨는 영어, 일어는 물론이고 불어도 잘 했을까? 그렇다면 과연 그가 팔방미인, 박학다식 하다는 말이 맞는 것이다. 그 당시 어렵게 살던 때 어떻게 세계적인 가수 <이벳드 지로>가 서울에 왔을까.. 생각해보니 이것도 역시 일본 때문이었다. 이 샹송가수는 그 당시 일본에서 활약을 하며 일본어로 샹송을 취입하기도 했던 것이다. 아주 후에 영국가수 Cliff Richard가 왔을 때도 비슷한 경우다. 어떻게 그는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음악에 관심이 있었을까..아마도 좋던 싫던 간에 일본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그이는 음악가는 아니었지만 음악을 좋아했고, 음악에 조예가 깊었으며, 그리고 음악 속에 살다 갔다.

그이는 젊어서 KBS 아나운서를 하던 시절, 한국 최초로 ‘라틴 뮤직’과 ‘샹송’ 음악을 소개하고 해설해서 그 당시 많은 젊은 음악 팬들에게 인기가 대단했었다.

그 후에도 프랑스 샹송 가수 ‘이벳드 지로’가 한국에 와서 공연했을 때 그 사회를 맡아 보기도 했다.

그이는 평상시에 가끔 이런 말을 했다.

“나의 소원은 지휘자가 되는 것이었어. 그래서 형님께 일본에 있는 우에노(上野)음악학교를 가고 싶다고 했더니 정신 없는 소리를 한다고 한 마디로 거절 당했지. 어쨌든 나는 그때 지휘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 꿈이고 소원이었어”

그는 음악을 듣는 귀가 예민하고 정확했다. 음악회에 가서 오케스트라를 들을 때도 어느 파트의 어느 악기가 지금 어떻게 잘못 연주하는지 잡아낼 정도로 그이는 음감(音感)이 예민했다. 악전(樂典)도 혼자 공부했고, 서양 음악사도 독학으로 공부했다고 한다.

 

 

Yvette Giraud, 이벳트 지로

 

파리의 연인

유럽에서 만난 연인 부부, 1971
유럽에서 다시 만난 연인 부부, 1971

이진섭씨 부부는 어떻게 보면 정말 행복한 부부였을 것이다. 1971년 그 당시 부부동반 파리여행을 한 다는 것은 이미 평범한 부부의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니까. 지극히 낭만적인 이진섭씨는 거의 의도적으로 이런 영화 같은 ‘파리의 연인’의 모습을 연출한 것이다. 낭만인 이진섭씨가 세계적인 낭만의 도시에서 부인과 만나게 여행계획을 짰다는 것은 정말로 부러운 일이다. 이런 기회가 일생에서 한번 올까 말까 한다는 사실은 박기원씨가 느낌으로 알아차리고 100만원 짜리 적금을 이 “일생의 여행”에 투자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9월 27일, 1971년

파리 거리의 가운데를 세느 강이 흐르고 있다. 그 세느 강에는 20개 이상의 크고 작은 다리가 있다.

그 다리에서 파리를 바라보는 경치는 유별난 게 있었다. 세느 강변에는 탐스런 푸른 허리띠 같은 나무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北回歸線)>이라는 소설 속에 이 경치가 묘사돼 있는데, 이 소설에서 제일 아름다웠던 것이 생각 난다.

우리는 그 세느 강변을 걸었다. 강변에는 화상(畵商), 골동품 가게, 그리고 책 가게가 즐비하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여행자의 강변이기도 하다. 우리는 마치 젊은 연인들 같이 어깨를 감싸고 걸었다.

그이는 49세, 내가 42세! 우리는 좀 늙은 연인들인지도 모른다. 세느 강변의 산책은 아마 영원히 우리를 즐겁게 해주리라.

 

죽음과 재회

거의 영혼의 친구같이 살았던 두 분의 관계를 볼 때, 배우자의 타계는 아주 심각한 것이었을 것이다. 평범한 부부보다 더 고통을 느꼈을까? 일생 문필가로서 서서히 꺼져가는 남편 생명의 촛불을 보며 남긴 일기는 참 감동적이다. 그런 와중에서 글을 쓴 것은 보통사람 같았으면 힘들었을 것이다.

그이, 깊은 잠에 빠지는 혼수 상태 계속, 산소 호흡, 주사로만 지탱한다. … 가사상태.. 집에서 하던 몸부림도 없어졌다. 거친 숨소리뿐 – 무슨 꿈이라도 꾸고 있나? 그래도 그의 숨소리가 내 곁에 있고, 눈은 감았지만 살아 있는 몸체가 내 곁에 있는 실재감(實在感)!

….

저토록 잠잠할 수 있을까? 나에게 들려주었던 그 많은 다정했던 말소리. 나를 당황하고 슬프게 했던 그 많은 일들.. 그 모든 것은 모두 어디 두고 저토록 잠잠하단 말인가.

어쩐지 죽음과 같이 있을 이 시간이 점점 두려워진다. 나의 영혼과 육신이 같이 살던 30년. 그 세월이, 그 순간이 순간마다 단절돼 간다.

절대 절명인 이 순간… 도망갈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이 순간….

 

이 부부는 가까운 분의 감화로 자연스럽게 하느님을 믿게 되었다. 이진섭씨는 비록 열정적인, 모범적인 크리스천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분명히 하느님의 존재를 믿고 갔다. 그래서 남아있게 된 ‘연인’은 저 세상에서의 재회를 믿고 싶고 믿으면 살고 싶은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다 읽고 나서…

처음 읽기 시작 할 때, 이진섭씨가 못 채우시고 가셨던 환갑이 멀게만 느껴졌지만 이제 그것을 넘어서, 이렇게 조금 내 나름대로 정리를 해 보니 이 책의 느낌이 새롭다. 이것은 분명히 나의 나이 때문일 것이다. 많은 부분에 나와 감정이 일치하는 부분은 내가 마음속에 새기며 흉내를 내 보기도 하곤 했다. 그리고 반대로 ‘술’의 멋에 대한 나의 생각에 ‘경고’를 보내기도 했다. 멋도 중요하지만 정도껏.. 그러니까 ‘중용’, 알맞은 멋과 건강과의 균형을 생각하기도 했다. 이제는 박기원 여사도 많이 연로하셨으리라 짐작이 된다. 이렇게 솔직한 “일기의 진수”를 남겨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리고 행복하고 건강하신 노후를 하느님께 기도하고 싶다. 다시 한번 팔방미인, 다재다능 님의 명복을 빌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