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1주일, 장례미사

¶  2월 26일, 재의 수요일 이후의 첫 일요일이다. 그러니까 2012년 사순절(Lent) 첫 주일인 것이다. 비록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 미사에서 이마에 ‘재의 십자가’를 받고, ‘고난의 40일 여정’ 은 시작 되었건만, 별로 크게 한 것도 없이 순식간에 사순 첫 주일을 맞았다.

가톨릭 신자들은 이 사순(40일)의 시기를 다음의 세 가지를 염두에 두고 지내게 된다. 즉, (1) 기도, (2) 자선,선행, (3) 절제, 단식과 금육 등이 그것이다. 이중에서 ‘절제, 단식, 금육’ 란 것 중에 절제는, 각자의 방식에 따라 다르겠지만, 오랜 역사를 통해서 흔히들 하는 것들은 거의 정해져 있다. 가장 흔한 것이 평소 ‘즐겨서 탐닉’하던 것(도박, 술, 담배 같은)으로부터 멀어지거나, 아주 끊어 버리는 것이다.

단식(fast), 금육(abstinence)은 글자 그대로 끼니를 거르고, 먹더라도 고기 (생선은 제외) 류를 안 먹는 것이다. 단식은 재의 수요일과 성 금요일(부활 전 금요일) 에 적용이 되고 그것도 하루 한끼만 거르면 된다. 금육은 재의 수요일과 사순절 매 금요일에 적용이 된다.

하지만, 이것도 꽤가 많은 이곳 사람들, 여러 가지의 예외를 만들어 두었다. 그 중에 있는 것이 14세 미만의 아이들과, 60+세 이상의 ‘노약자’에 대한 배려인데, 이것이 조금은 웃긴다. 여기서 60+세의 기준은 분명히 수십 년 전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어디를 보아도 요새 나이 60+세는 대부분 건강하지, ‘노약자’로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들이 조금 덜 먹거나, 한두 끼 굶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무리가 없는 것이다.

사실 예외조항은 나이보다 각자가 처한 건강상태에 두어야 할 듯하다. 우리 부부는 원래 ‘소식(小食)’ 이라서 사실 완전히 몇 끼 굶지 않으면 큰 의미가 없고, 금육도 그리 자주 고기를 먹지를 않아서 큰 문제가 없다. 절제에 대해서, 나에게 유일한 즐거움은 gourmet coffee 인데, 이것을 완전히 끊는 것을 예전에 내가 즐겨 사용하던 방법이었다. 이것은 실행하기 전, 처음 느끼는 고통이 ‘장난’이 아니었다.

특히 아침에 커피의 카페인에 의한 자극이 없어지면서 무언가 불안하고, 정신의 집중이 잘 되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적응이 되었다. 그러면서, 조금은 ‘맑아지는’ 머릿속을 느끼곤 했다. 그것이 바로 ‘절제’의 매력이었다. 그러다가 몇 년 전부터 커피는 절제대상에서 제외를 했는데, 조금 꽤가 났던 것일까.. 그것 보다는 사순절을 그렇게만 보내는 것이 너무 소극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고, 레지오에 입단하면서 생각도 조금 달라지게 되었다.

봉사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 효과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레지오는 ‘절제’같은 것 보다는 적극적으로 밖으로 나아가 사람 속에서 활동하는 것을 더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그런 활동은 사실 ‘무언가를 안 하거나 끊는 것’ 보다 더 어려울 수 있다. 특히 나 같이 원래 소극적이고 내향적인 사람에게는 더욱 그러하고, 그래서 더 보람이 있을 것 같다. 올해는 과연 그런 지향으로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하다.

 

¶  지나가는 주에는 정말 오랜만에 장례에 관한 뉴스가 두 건이나 있었다. 사실 그 동안은 연도나 장례행사가 뜸했었다. 그것(뜸한 것)은 정말 좋은 것이지만, 레지오 행동단원에게는 그만큼 한가한 시간을 주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의사들이 병자가 줄어드는 것을 보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두 가지의 장례에서 하나는 이번에 이곳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일가족 5명이 살해된 끔찍한 사건에 관한 것이고, 다른 것은 조금은 평범할 수도 있는 어떤 60대 남자교우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서 사실은 이 60대의 평범한 분에 관한 것이 결과적으로 나에게는 더 충격적인 이야기가 되었다. 이 ‘평범한’ 교우님은 해방둥이 남자로, 김태균 요한 교우이신데, 심근경색증으로 며칠 전 갑자기 돌아가셔서 23일에 연도가 있었고, 24일에는 장례미사가 있었다. 우리부부는 장례미사엘 갔었고, 예와 같이 고인의 명복을 빌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아주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인의 가족들을 보게 되었는데, 그 중에 고인의 형님이 바로 내가 한때 알았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거의 40년 전에 알았던 분이었다.

물론 모습으로 알 수는 없을 정도로 세월이 지났다. 하지만 장례미사 안내서에서 그 분 따님의 이름을 내가 알아본 것이다. 지금도 나는 어떻게 아직까지 그분 따님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아마도 나의 전 ‘서울식당’ blog에서 그 당시를 회상하며 쓴 것이 있었는데 그때 기억을 해 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 분의 이름을 모르고 지냈으니, 사실 그분을 알아 볼 수가 없었던 일이었다.

비록 70대의 나이였지만, 자세히 보니 역시 그분이었다. 훤칠한 키에 멋쟁이 스타일 (옷), 그대로였다. 그 부인, 그러니까 세란이 엄마는 한 눈에 알아 볼 수가 없었다. 너무나 나이보다 젊어 보여서 그랬는지도. 가서 인사를 드릴 까 생각을 했지만, 역시 주저하고 말았다. 옛 사람을 찾는 것과 서로 다시 알고 지내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임을 나는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역시 나만의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일까.. 하지만 지난 40년간 어떻게 지내셨는지 궁금하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