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윤동주

20대 윤동주 시인
20대 윤동주 시인

처음으로 고 윤동주(尹東柱) 시인의 첫 유고(遺稿)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전체를 읽게 되었다. 50대 초부터 재발견한 나의 시심(詩心)을 타고 ‘닥치는 대로’ 눈에 뜨이고 귀에 들리고, 향수에 어린 것들을 읽었지만 정작 윤동주 시인 것은 나를 요리조리 빠져 나가고 이렇게 60대 중반에 나에게 걸렸다. 특히 ‘옛날 것’을 접하려면 그렇게 어렵던 예전에 비해 keyword만 잘 구사하면 online으로 발견할 수 있기에, 이제는 keyword의 시대가 된 느낌이다.

이미 남들이 다 겪고 발견하고 느끼고 가슴에 간직한 것들을 나는 늦게나마 윤동주 시인의 짧았던 ‘서정적 일생’을 묵상하며 읽게 되었다. 어떤 기사에 대한민국의 20대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 윤동주 시인이라고 했는데, 나는 40년이 지난 60대에 음미하게 되었으니 참 늦어도 단단히 늦은 기분이다. 하지만 시인의 나이가 우리 부모님 세대여서 나는 그 시대와 세대를 지금의 20대보다는 훨씬 더 피부로나마 공감할 수 있고 그래서 그의 시를 더 가슴으로 읽을 수 있으니 큰 불만은 없다.

 

서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憧憬)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소년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뭇가지 우에 하늘이 펼쳐 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順伊)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順伊)의 얼굴은 어린다.

 

눈 오는 지도

순이(順伊)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내려, 슬픈 것처럼 창 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위에 덮인다.

방 안을 돌아다 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과 천정이 하얗다. 방 안에까지 눈이 내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처럼 홀홀이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에 일러둘 말이 있던 것을 편지를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 밑, 너는 내 마음 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쪼그만 발자욱을 눈이 자꾸 내려 덮어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욱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욱을 찾아 나서면 일년 열두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내리리라.

 

돌아와 보는 밤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이제 내 좁은방에 돌아와 불을 끄옵니다.

불을 켜 두는 것은 너무나 괴로롭은 일이옵니다.

그것은 낮의 연장(延長)이옵기에-

이제 창문窓을 열어 공기(空氣)를 바꾸어 들여야 할텐데

밖을 가만히 내다 보아야 방(房)안과 같이 어두어 꼭 세상 같은데

비를 맞고 오는 길이 그대로 비속에 젖어 있사옵니다.

하로의 울분을 씻을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사상(思想)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 가옵니다.

 

병원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 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 곳에 찾아 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문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간판 없는 거리

정거장 플랫포옴에

내렸을 때, 아무도 없어

다들 손님들뿐.

손님 같은 사람들뿐.

집집마다 간판이 없어

집 찾을 근심이 없어.

빨갛게,

파랗게,

불붙는 문자도 없이

모퉁이마다

자애로운 헌 와사등에

불을 켜놓고,

손목을 잡으면

다들, 어진 사람들.

다들, 어진 사람들.

봄, 여름, 가을, 겨울

순서로 돌아들고.

 

태초의 아침

봄날 아침도 아니고

여름, 가을,겨울,

그런 날 아침도 아닌 아침에

빠알간 꽃이 피어났네,

햇빛이 프른데,

그 전날 밤에

그 전날 밤에

모든것이 마련되었네,

사랑은 뱀과 함께

독(毒)은 어린꽃과 함께.

 

또 태초의 아침

하얗게 눈이 덮이었고

전신주(電信柱)가 잉잉 울어

하나님 말씀이 들려온다.

무슨 계시(啓示)일까.

빨리

봄이 오면

죄(罪)를 짓고

눈이

밝아

이브가 해산(解産)하는 수고를 다하면

무화과(無花果)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

 

새벽이 올 때까지

다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검은 옷을 입히시오.

다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흰 옷을 입히시오.

그리고 한 침실(寢室)에

가지런히 잠을 재우시오

다들 울거들랑

젖을 먹이시오

이제 새벽이 오면

나팔소리 들려 올 게외다.

 

무서운 시간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이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십자가

쫓아오든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 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바람이 불어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 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꼬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우에 섰다.

강물이 자꼬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우에 섰다.

 

슬픈 족속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눈감고 간다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밤이 어두웠는데

눈감고 가거라.

가진 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

발부리에 돌이 체이거든

감았던 눈을 와짝 떠라.

 

또 다른 고향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 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風化作用)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의 호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담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 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 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194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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