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極)에 달한 좌익(左翼)분탕질…

 

극(極)에 달한 좌익(左翼)분탕질, 구조적으로는 소멸된다

태평로포럼 2014. 9. 24

조영환 대표 (올인 코리아)

 

 대한민국은 비록 남북한 좌익선동세력의 억지와 깽판으로부터 협공 당하고 있지만, 결국은 이를 극복하고 정치적 선진국가로 발돋움할 것으로 낙관한다. 그 이유는 한국사회에 나타나는 정치적 적폐는 군중사회의 마지막 병리증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군중현상’은 김대중-노무현 좌익세력이 침투한 상층부에 깊이 남아있다. 김대중-노무현 좌익세력은 군중인간들을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에는 물론이고, 교육계, 종교계, 시민단체 등에 심었기 때문에, 군중현상이 한국사회의 저변에는 잘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상층부에 나타난다. 여기서 말하는 ‘군중현상’이란 오르테가 가세트, 윌리엄 콘하우저, 데이비드 앱터, 사무엘 헌팅턴, 로버트 니스벳 등이 지적한 군중의 파괴성을 뜻한다. 공동체(국가)에 대한 감사와 의무를 모르는 방자하고 무책임한 사회구성원을 ‘군중’이라고 부른다.

오르테가 가세트는 ‘완전한 직접 민주주의’는 전체주의를 초청할 것이라고 했는데, 전체주의적 선동꾼 김대중은 ‘아테네 이후에 최고의 직접 민주주의’라는 구호로써 2008년 광우병 촛불폭동을 부추겼다. 광우병 촛불폭동은 김대중의 선동능력이 구현된 반란현상이다. 김대중은 무자격적 군중인간에게 주권행사를 강조하면서, 오르테가 가세트가 말한, ‘민주적 폭군(democratic tyranny)’을 길러낸 민주주의 파괴범이었다. 오르테가 세세트는 군중인간을 문명파괴적 인간으로 봤다. 한국사회에서 광우병 촛불폭동, 국정원 댓글과 세월호 참사를 악용한 깽판극들을 벌이는 군중인간들은 사실상 민주주의를 할 자격이 없는 미개한 군중인간들이다. 정몽준 전 수울시장 후보자의 막내아들이, 성숙한 국민을 대변하여, 세월호 사건에 대한 군중인간들의 대응방식을 놓고 ‘미개인’이라고 지적한 것은 박원순 지지자들의 정치적 미개성과 기만성을 잘 지적한 것이다.

오그스트 콩트가 지적한 것처럼, 이런 군중인간들이 설치는 시대에 새로운 의식(정신)혁명이 없으면, 대한민국은 재앙을 맞을 수 있다. 지난 20여년 동안, 니체가 말한 ‘니힐리즘의 홍수’가 김대중-노무현 좌익세력에 의해 군중현상의 형태를 띠면서 한국사회를 휩쓸고 지나갔다. 오르테가 가세트가 지적한 것처럼, 옛날 제왕보다 더 풍족하게 살아가는 무자격적 군중인간들이 무의미성에 시달리면서 자신과 국가공동체를 파괴하는 자해극을 벌인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김대중-노무현 추종 좌익세력이 반정부 깽판질을 하는 한 심리적 원인 중에는 배부른 군중이 복에 겨워 지랄 발광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 좌익세력이 김대중-노무현 집권 기간에 분에 넘치는 부를 축적하여, 그 넘치는 자금으로 반국가적 억지와 깽판을 맘껏 치고 있는 측면도 있다. 지금 우익단체보다 좌익단체들이 더 군중 선동과 동원 자금을 풍족하게 확보해서 쓰고 있다는 사실도 자유민주체제 위협요인 중에 하나다.

그 결과 지금 한국사회에는 정상적으로 명령하고 정상적으로 복종하는 공권력이 약화된 상태가 됐다. 오르테가 가세트는 ‘군중의 반란’이라는 책에서 “국가는 정상적으로 명령하고 정상적으로 복종하는 것보다 더한 자유와 행복을 줄 수 없다”고 주장했는데, 지금 대한민국은 상층부에 뿌리내린 군중인간들에게 정상적으로 명령하고 정상적으로 복종하는 공권력 시스템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한국사회의 교육계, 입법계, 사법계, 종교계, 언론계, 문화예술계에 주도권을 장악한 군중인간들에게 정부도 정상적인 공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좌익교육감, 좌익국회의원, 좌익 검판사, 좌익기자, 좌익교사, 좌익연예인들은 정부의 공권력이나 국민의 상식과 국가의 법치를 파괴하는 주범으로 등장했다. 저변 국민들은 애국심으로 국가공권력 유지에 애를 쓰는데, 상층을 장악한 좌익세력의 군중인간들이 자해적으로 공권력 파괴에 주범 역할을 하고 있다.

군중은 ‘양적인 떼’를 지칭하지 않고, ‘질적인 성격’을 의미한다. 물론 군중인간들이 떼법의 횡포를 보여주지만, 군중인간은, 오르테가 가세트가 지적한 것처럼, ‘아무런 권위나 외부인의 충고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는 완전한 자족적 인간이라고 착각해서 억지부리는 방자한 인간’을 뜻한다. 전통사회(유교사회)가 붕괴되면서 어떤 사회적 권위나 통제도 무시하고 부자집 망나니처럼 불평과 불만에 찌든 인간이 바로 ‘군중인간’이다. 오르테가 가세트는 ‘군중인간’에 대해 “군중들의 토론 없는 직접적 의사표시는 문명을 파괴하는 폭력행사로 나타난다”며 “군중은 사회적 제약, 기준, 예절, 간접적 소통방식, 정의, 이성 등을 모조리 파괴하고 오직 단순화된 이분법적 구호를 사회적 난제에 대한 해답으로 강요한다”고 규정했다. 2008년 ‘광우병 촛불폭동’, 2013년 ‘국정원 댓글사건’, 그리고 2014년 ‘세월호 침몰사건’ 등에는 ‘군중인간의 이분법적 판단과 파괴적 횡포’가 두드러졌다.

한국사회에 나타나는 군중현상에서 군중의 속성은 바로 ‘극단주의’다. 극단적 좌절감과 소외감과 박탈감(‘을’의 콤플렉스)에 찌든 군중인간들이 갑자기 자신을 절대적 ‘갑’이라 되는 것처럼 폭력을 행사하는 양극적 행동양태를 군중인간들이 보여줬다. 과격한 ‘갑질’은 ‘을의 열등감 폭발’일 뿐이다. 에릭 호퍼는 이런 군중인간에 대해 “좌절과 소외에 시달리는 마음을 가진 군중은 모든 것을 자신이 신봉하는 망상에 내던질 준비가 되어 있는 자포자기의 확신범”으로 봤다. 이런 군중인간이 도덕적 성실성을 무시하고 후안무치 해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에릭 호퍼는 봤다. 광우병 촛불난동, 국정원 댓글, 세월호 사건 등에는 자신의 도덕과 체면을 무시하는 군중인간들이 정치적 광신도가 되어서 법치와 공권력을 부정했다. 구스타브 르 봉이 지적한 것처럼, 한국사회에 나타난 군중인간들은 자신의 체면과 개성을 잃고 파괴적 집단의식에 예속된 익명의 노예들이었다.

이렇게 파괴적 감정에 취하여 충동성, 과잉반응, 추론능력 결핍, 비판정신의 부재, 과장된 감정표현의 노예가 된 군중인간들이 파괴적 수구꼴통이 되어 반정부 횡포와 난동을 부리니, 국가의 공권력은 부재상태로 전락되었다. 이런 군중인간의 위험성에 대해 윌리엄 콘 하우저는 ‘사회적 다원주의(자유민주주의)에 가장 해로운 적’으로서 ‘군중인간’을 지목했다. 그는 “군중운동은 자유민주적 정치체제를 파괴할 수 있는 위험성을 가졌다”고 ‘군중사회의 정치학(The Politics of Mass Society)’에서 주장했다. 그는 현대사회의 저변에는 ‘군중성향’과 ‘다원주의성향’이 경쟁한다고 봤다. 주어진 자유와 민주를 잘못 작동시키면, 다원주의적 자유민주체제는 쉽게 군중의 난동질이 난무하는 무정부상태가 되고 이런 무질서가 지속되면 전체주의적 선동꾼이 민심을 얻으면서, 전체 국가가 전체주의사회로 전락할 수 있다. 민주화는 흔히 과잉민주화와 공권력붕괴로 실패한다.

군중인간들에 의한 공권력 혹은 법치의 파괴를 군중연구가들을 모두 우려했다. 윌리엄 콘 하우저는 군중사회의 특징으로 ‘권위의 상실’를 주목하면서 ‘군중의 떼법이 교양인(엘리트)의 법을 대체하는 것이 군중사회의 조건’이라고 지적했다. 데이비드 앱터도 ‘정당한 공권력의 부재’를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군중현상의 적폐로 보면서 ‘권위적 정부의 부재가 민주주의를 구축하는 데에 적’이라고 주장했고, 구스타브 르 봉은 ‘문명을 무너뜨리는 수단으로서 군중 혹은 야만주의의 물결’을 지적했고, 오르테가 가세트는 ‘무자격적 주권 행사로써 군중은 사회적 권위를 파괴한다’고 지적했다. 콘 하우저는 “군중사회에서는 ‘공동체의 상실’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을 상실한 군중인간들과 지도력을 상실한 엘리트(사실상 군중인간)들은 사회를 원자화(파편화)시켜서 공동체로서 역할 하지 못하게 한다고 콘 하우저는 걱정했다.

한국사회에서 지도층이 깽판꾼이 되고 군중의 떼법에 공권력이 무력화 되는 현실은 전형적인 군중현상의 적폐다. 사무엘 헌팅턴은 ‘교육을 많이 받은 지식군중인간이 사회불안을 조성하는 주범이 되는 현상’을 주목했다. 한국사회에서 공권력을 마비시키는 과잉민주주의는 지식군중인간들의 법치파괴에 따른 병리증상에 가깝다. 좌익지식인들이 주도한 법치파괴에 대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정상적 공권력을 작동시키지 못했다. 언론계, 법조계, 입법계, 교육계, 종교계 등에 뿌리 내린 김대중-노무현 좌익세력은 정상적 법치를 거부했다. 한국사회에서 국가사회를 파괴하는 군중현상을 척결하기 위해서는 김대중-노무현 좌익세력의 척결은 필수적이다. 김대중-노무현 좌익세력은 대한민국에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좌우익에 연합한 추상적 연방제국가에 정서적으로 소속된 망상가들이다. 그래서 북괴의 독재와 폭압에는 침묵하고 대한민국의 넘치는 자유와 민주에는 불평하는 정치행태를 보여준다.

나쁜 군중사회를 김대중-노무현 추종세력이 만들어가는 것은 각성된 국민과 민주적 정부는 제압해야 한다. 우리 국민들은, 탈몬이 지적한 것처럼, 완전한 민주화를 요구하는 전체주의적 선동꾼의 군중 장악과 예속의 음모를 제압해야 한다. 이른바 ‘완전한 민주주의’를 외치는 좌익선동꾼들은 전체주의사회를 구축하려는 발악을 하고 있다. 2008년 남북한 좌익선동세력이 전개한 ‘광우병 촛불폭동’을 ‘아테네 이후에 최고의 직접 민주주의’라고 칭송한 김대중은 완전한 민주주의를 외치는 전체주의 선동꾼에 불과하다. 아직도 새정치민주연합이 김대중과 노무현을 민주주의의 화신으로 착각한다면, 이는 군중을 악용한 전체주의 추구세력으로 낙인 되어 마땅하다. 광주사태나 광우병 촛불폭동을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군중선동현상으로 비판하지 않는 한, 한국사회는 전체주의 선동세력에 취약하다. 김일성-김대중-노무현 추종세력은 대한민국의 안녕과 번성에 장애물이다.

그렇다면, 한국사회는 파괴적 군중선동에 기댄 김대중-노무현 좌익선동세력에 의해 자멸하는 군중사회로 악화될 것인가?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한국사회가 좌익선동세력의 억지와 깽판을 극복할 수 있는 두 가지 요인을 주목하는데, 하나는 바로 ‘군중현상은 시대적으로 일시적이라는 점’과 다른 요인은 ‘저변 한국인들 수준 높은 정치의식과 윤리성’을 꼽고 싶다. 망국적 군중현상이 ‘민주팔이’로 집권한 김대중-노무현 좌익세력의 쇠퇴와 함께 사라질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좌익세력이 그렇게 언론계, 문화예술계, 교육계, 법조계 등을 장악해서 군중을 기만하고 미혹했지만, 선거전에서 번번히 패배한 것은 남한 좌익세력에 대한 국민들의 각성과 반감이 고조되기 때문이다. 김대중과 노무현의 민주팔이, 통일팔이, 복지팔이는 서울이나 호남에서는 먹혀 들지만, 다른 지역들로부터 점점 배척되고 있다. 이정현 의원의 경우, 호남에서도 지역주의는 바람직하게 극복되고 있다.

저변 한국인들의 높은 교육열과 도덕성은 언론계, 교육계, 법조계, 정관계를 장악한 좌익세력의 조작과 선동과 억압을 극복하는 주요 원인이 될 것 같다. 비록 서울과 호남에서 낡은 좌익이념과 지역주의에 찌든 군중인간들이 다수를 차지하지만, 전국적으로 보면, 저변 민중들은 무섭고도 급격하게 각성되고 있는 것이다. 만약 한국의 저변 민중들이 월남 패망 전의 월남인들 처럼 거짓과 자멸의 좌익선동꾼들에게 깊이 홀렸다면, 지금 한국의 정치상황은 내전적 상태였을 것이다. 하지만, 저변 국민들이 언론계와 교육계의 좌익선동꾼들에게 홀리거나 눌리기 않아서 대한민국은 서서히 좌익선동세력이 물러나고 있다. 언론계의 좌익선동세력이 광적으로 선전선동하지 않으면, 장차 선거들에서도 좌익선동세력은 패배를 거듭할 것이다. 지금은 중도인 것처럼 위장한 박원순 같은 좌익선동꾼들의 정체도 날이 갈수록 더 드러날 것이다. 박원순의 역할은 박헌영 같아 보인다.

그리고 사회구조적 혹은 시대추세적으로 군중들을 미혹하는 좌익선동세력은 설 땅이 좁아질 것이다. 과학의 발달로 사회구성원들이 정치의식적 측면에서 미개해진다는 우려도 있지만, 워낙 통신과 교통이 발달해서 전체주의적 선동세력은 방송과 신문과 인터넷을 장악해도, 워낙 신속하고 대대적인 정보유통 때문에, 끝내 저변 국민들을 다 속이진 못할 것이다. 그 결과 좌익선동세력은 가파른 언덕을 기어올라가는 이념전쟁을 앞으로도 계속해야 할 것이다. 공산주의가 퇴조하면서, 남북한 좌익선동세력도 고립무원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막강한 자금력과 선동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좌익세력은 집권에 막대한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김대중-노무현 추종 좌익선동세력은 한국사회에서 퇴조될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좌익선동세력을 퇴조시켜야, 대한민국이 다원주의적 민주사회를 유지시킬 것이다.

한국사회는 김대중 집권 후에 상층부가 좌경화, 군중화, 망국화, 무정부화 되었다. 지도층이 저변 민중들보다 정직성, 정의감, 민주의식, 애국심 등이 더 없다. 국가권공력은 입법부, 사법부, 언론계, 교육계, 종교계 등을 주도권을 장악한 좌익세력에 의해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떼법이 국법을 농락할 정도로 한국의 준법정신과 사법문화는 심각하게 훼손됐다. 간첩을 간첩으로 판결하지 못하는 판사들이 버젓이 법복을 입고 기업가들만 엄벌하고 있다. 우익세력의 도움으로 집권한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껍데기만 집권했지, 사실상 반국가세력을 제압할 통치력을 구사하지 못했다. 집권은 했는데, 통치력이 없는 중도세력의 한계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남북한 좌익세력의 준동을 보면, 대한민국이 내전적 상황으로 전락할 것 같기도 하다. 적어도 군중 선동력과 동원력의 측면에서 좌익선동세력은 우익애국세력을 압도한다. 이번 점은 대한민국의 장래에 비관적 변수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구조적으로 잘 유지될 것이며, 민심도 국가를 번성시킬 정도로 수준이 높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이 구축한 자유민주체제’와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저변 국민’에 의해 대한민국은 건재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좌익선동꾼이 두 번이나 대통령이 되어도, 국가를 지탱시킨 튼튼한 자유민주체제를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자유민주체제를 한국사회에 깔았던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기운은 지금도 대한민국을 지키고 있다. 군사력을 동원해서라도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체제를 지킨 박정희와 전두환도 군중선동세력에 맞서서 지금도 대한민국을 지키는 수호의 기운을 남겼다. 대한민국을 지키는 가장 핵심적 변수는 바로 누구도 함부로 대항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헌법과 자유민주체제인 것이다. 우리 헌법과 체제를 생뚱 맞은 핑계를 들이대면서 함부로 손대려는 좌익선동꾼들을 사회교란범이나 망국노로 의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저변 국민들은 상부 지도층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 광우병 촛불난동, 국정원 댓글사건, 그리고 세월호 침몰사건 등을 정권타도로 악용하려던 좌익선동세력을 제압한 주체는 언론인도 정치인도 교육자도 검판사도 아닌 바로 저변 민중들이었다. KBS, MBN, YTN, JTBC 등을 비롯한 좌익선동매체들이 아무리 사실을 왜곡해도, 저변 택시기사들의 현명한 판단을 유린하지는 못했다. 지식과 정보를 직업으로 다루는 전문가들이 무책임한 군중선동꾼으로 전락되어 있는 한국사회를 건전하게 유지하는 것은 저변 민중들이었다. 물론 서울과 호남의 일부 미개한 군중인간들이 골칫거리이긴 하지만, 한국의 전반적 민중들은 서서히 각성되어서, 이제는 좌익세력의 거짓선동이 민중들에게 쉽게 먹혀 들지 않는 것이다. 좌익세력의 준동 앞에, 상층부의 관군은 도피하고 저변 민병이 대한민국을 지킨다.

눈에 두드러진 두 현상이 있다. 하나는 요즘 대학가에서 좌익세력의 거짓선동이 먹혀 들지 않는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세월호 참사가 지난 6.4지방선거에서 서울을 제외하고 먹혀 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두 현상은 군중선동세력의 퇴조를 의미하는 사회변화의 징조로 보인다. 민주화를 빙자한 좌익세력에 의해 조장된 ‘군중사회’는 서서히 ‘선진사회’로 바뀌고 있다. 한국민들은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다원주의적 사고’로써 ‘복합적으로 판단’한다. 좌익선동세력의 이분법적 반미-반일-반한선동은 성숙한 국민들에겐 미개한 정치선동으로 취급되고 있다. 자유민주체제와 선진국민이 망국적 군중선동을 제압하니, 대한민국의 미래는, 군중의 난동질과 지도층의 무책임 등의 난관들에도 불구하고, 구조적으론 낙관적이다. 아니 정부와 국민이 대한민국의 장래를 낙관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나의 comment:    위의 글, 논설은 인호 형(한양대 명예교수, Dynamic Management학회장)이 보내 준 것이다. 주로 경영학 쪽의 논설을 발표하시던 형이 근래에 들어서는 부쩍 정치, 사회 쪽의 글들을 나누어 주시는 것을 보고 조금은 현재 대한민국이 돌아가는 ‘꼴’을 의식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다른 곳에서도 이런 류의 논설을 접하게 되는데 두드러진 특징 중에는 부쩍 늘어난 ‘강도 높은 표현들’인데, 이런 류의 단어들은 ‘좌익’이 즐겨 사용하던 것들이라.. 조금은 의아해지기도 한다. 그 정도로 대한민국의 정치현실도 미국 못지않게 polarized가 되어간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모든 나라들이 ‘돈’을 쫓는 자본주의의 ‘후기’로 치닫는 시점에 100년이 넘는, 실패한 ideology의 흙탕물 속에서 싸우는 것 같아 안쓰럽기까지 하다.

나는 그 동안 그런 ‘꼴’을 피부로 못 느끼고 살아서 왈가왈부할 자격이 거의 없지만, 그래도 의견과 느낌은 다른 사람들에 못지않게 유지하며 살았다. 좌익, 우익 하지만 그것은 조금은 ‘정제, 순화 된’ 표현일까.. 나의 집안을 100% ‘파괴’했던 김일성 개XX 집단’이 좌익이라고 순화 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위의 논설에서 자주 사용한 ‘강도 높은 표현’의 ‘강도’를 100배 이상 거세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자주 생각하는 것 중에 가장 쉽게 이들의 ‘행태, 작태’를 노출 시키려면 이들을 돈을 많이 주어서 (세금으로) 그들이 ‘선망하는’ 김씨 왕조의 나라에 ‘이민’을 시도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이들 미숙집단의 몇 %가 과연 이민 신청을 할 것인지.. 상상만 해도 즐겁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