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판공성사, 2015

또 ‘그것’을 할 때가 다가왔다. 그것.. 판공성사, 고백성사, 고해성사.. 어떻게 표현해도 다 마찬가지다. 결코 쉽지 않은 ‘의무’, 가톨릭 신자의 의무다. 이것도 의무지만 자유로운 의무고 다른 쪽으로는 우리 교회만의 권리, 특권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 성사의 의미와 특징 (좋은 쪽으로)은 열거하면 한이 없이 많다. Matthew KellyRediscovering Catholicism 책을 요새 다시 읽으며(aka typing) timing 좋게 confession 에 대해서 복습을 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쓰레기로 쌓이는 집이나 차에 비유해서 정기적으로 청소를 하는 것과 비교한다. 많이 쌓이면 그런 사실자체에 둔감해져서 더 많이 쓰레기가 쌓인다고. 자주 하면 할 수록 좋은 것이라고.. 누가 모르나? ‘괴롭게 들어갔다가 날라가는 기분으로 나오는 곳’ , 그곳이 바로 고백성사란 것만 기억해도 좋은 것, 이것 하나, 나는 분명히 기억한다.

올해는, 아니 내일로 다가온 이 ‘것’을 어떻게 해야 하나? 무엇을 고백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10중 8/9는 하태수 신부님께 하게 될 듯 한데.. 그것이 상관이 있을까? 모두들 어렵다고 하는 이것, 나에게도 어려운 것인가, 아니면 귀찮은 것인가?

이제는 ‘양심성찰’을 해야 할 때가 온 듯하다. 지난 해 6월이었던가, Conyers의 수도원에서 가진 레지오 피정 때 내가 이것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알쏭달쏭하다. 한 듯하기도 하고, 안 한 듯 하기도 하고.. 하지만 작년 사순절 때는 100% 확실히 했다. 비록 ‘사소한’ 것을 고백한 기억이지만.

 

그 동안 나의 ‘죄’는 무엇이 있을까? 대죄는 물론 없다. 소죄는 있을 듯 하다. 확실히 기억은 안 나지만. 십계명으로 출발하면, 어떤 주일을 거룩하게 안 보낸 것은 확실할 것이다. 제일 쉬운 것이 이것인가? 하지만 이런 것을 하면 내가 만족할 수가 없다. “고백성사 101″을 다시 한번 볼까나..

아마도 십계명에 ‘정면으로 거역’ 된 일을 없을 것이다. 나에게 우상이란 것은, 분명히 없다. 하느님의 이름을 마구 함부로 ‘팔아 넘기듯’ 부른 적도 없다. 주일이나 종교적 축일들을 소홀히 보냈는가.. 다행히 지난 해에 우리는 ‘부지런히’ 주일, 축일을 보냈을 것이다. 부모님을 공경하는가.. 이것은 비교적 쉬운 듯 하지만, 실제적으로 우리는 죽어도 부모님을 잘 모셨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영원히 죄로 고백해야 할 것 중에 하나다. 살인한 적도 없고, 간음한 적도 없다. 훔친 적도 없고, 요상한 소문을 낸 적도 없고 거짓말 증언을 한 적도 없다. 남의 아내를 엿보거나 흠모하거나 사랑한 적도 없다. 남이 잘 사는 것에 질투심을 느꼈을까? 이것은 100% 부인할 수가 있을까? 나는 ‘지나치게 사치하게 잘 사는’ 사람을 가끔 ‘경멸’한 적은 있지만 그 정도로 부러워한 적은 거의 없었다.

 

죄를 안 짓는다는 소극적인 것에서, 과연 적극적으로 ‘선행’을 하고 살았던가? 이것은 자신이 없다. 죄를 피하며 살았을지언정 적극적으로 남을 인간으로 사랑하거나 물질적으로 도와 주었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의 ‘재주, 재능’을 하느님을 위해서 효과적으로 사용했을까? 이것도 자신이 없다. 비록 레지오라는 단체에서 ‘봉사’를 한다고 하지만 언제까지나 만족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할 수가 없다.

 

예수님의 사랑의 2계명: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This is the greatest and the first commandment. The second is like it: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The whole law and the prophets depend on these two commandments’(Mt 22:37-40).

“Love is patient, love is kind. It is not jealous, [love] is not pompous, it is not inflated, it is not rude, it does not seek its own interests, it is not quick-tempered, it does not brood over injury, it does not rejoice over wrongdoing but rejoices with the truth. It bears all things, believes all things, hopes all things, endures all things. Love never fails” (1 Cor 13:4-8).

 

지난 해 판공성사 (사순절부터) 이후 나는 어떻게 살았는가? 남이 보기에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았던가? 고정적인 일상생활의 pattern으로 두드러진 것은 생각이 안 난다. 가깝게 나를 ‘괴롭히는’ 것이라면 ‘겸손하지 않다고 보이는’ 연숙의 행동들에 대한 나의 짜증 정도? 이것도 죄가 될까? 마찬 가지로 두 딸들에 대한 나의 실망감..

하지만 조금 밖으로 눈을 돌리면, 미안한 것들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작년 여름 레지오 회합에서 큰 생각 없이 한 나의 ‘솔직한’ 말 때문에 장 실비아 자매가 퇴단까지 한 것은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는 뜻밖의 일이었고, 나의 말을 너무나 심각하게 받아들인 상대방만 탓하기도 했다. 하지만 원인은 무조건 나에게 있기에 나의 잘못이고 미안해 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나 뒤 늦게 들었다. 같은 여름 미국성당에서 ‘사소한 고정석’을 빼앗긴 것이 발단으로 ‘터진’ 나의 ‘분노’도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나의 ‘문제’에 의한 것이었다. 상대방이었던 필리핀 자매에게는 너무나도 잘못을 하였다. 기분이 쳐지거나 나의 ‘운전 불능’신세를 한탄하며 연숙의 운전 실력을 100% 매도하는 나날들 또한 어떨까.. 나의 일방적인 잘 못이 아닐까? 이런 것들을 떠나서 나는 언급하기 싫은 ‘잘못’을 했고 현재도 하고 있다. 가슴 속 깊이 잠자고 있는 나의 ‘깊은 상처, 수치’를 건들이거나 하고 싶지 않다. 그만큼 이것이 무서운 것이다.

근래에 너무나 가까워진 수 많은 ‘자매님들’.. 인간의 한 부류로 신선하게 다가온 수 많은 자매님들을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 것일까? 신앙적 동지일 수 밖에 없는 그녀들을 나는 가끔 어떤 생각까지 하며 ‘즐기고’ 있는 것일까? 아직도 나는 여성에게 여자의 미련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은근히 나는 이성들이 많은 곳에서 어떠한 환상적인 생각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생물적’인 충동이 아직도 있다는 사실은 나를 진정 놀라게 한다. 그것 때문이 예전의 ‘환상적 잘못’의 세계로 조금이라도 다가 갈까 봐 조바심도 나는 것이다. 성모님에 의지하는 내가 왜 다시 성모님께 의지하지 않는 것일까? 너무나 수치감을 느껴서 그런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상태를 초월하는 다음의 단계로 성숙해야 한다. 이것을 나는 어떻게 신부님께 고백을 해야 하는 것일까? 이것이 오늘 저녁에 예정된 성사에서 풀어야 할 과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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