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보나 자매님..

보나 자매님과의 ‘생각하기 싫었던’ 작별시간은 시계처럼 어김없이 왔고 사랑하던 가족, 열심히 보살피던 레지오 도우미 자매님들과 아쉬운 이별을 해야만 했던 연도, 장례미사, 운구, 장지동행 등이 모두 큰 차질 없이 끝났다. 허탈감, 피로감, 아쉬움, 슬픔 등이 뒤섞였던 며칠이 오늘로 다 막을 내렸다. 끈질긴 기도와 몇 개월에 걸친 레지오 ‘도우미’ 자매님들의 정성스런 방문도, 끊임없는 카톡의 chatter도 오늘로 다 끝이 났다. 또 한 명의 영혼이 저 세상, 하느님의 영역 domain 으로 간 것이다.

언제였나.. 약 1년 반 전 한참 찌듯이 덥던 한여름이었나.. 그 보나 자매님을 처음 만났던 것이.. 하 미카엘 본당신부님과 연숙이 보나 자매님 댁 병자성사 주러 처음 방문했었고 그 때부터 우리 둘의 비 非 규칙적인 봉성체 방문이 시작되었다. 병자같이 않게 항상 재잘거리고 명랑하고 지나치게 순진하게만 보이는 ‘젊은’ 자매님이었다. 그 나이에 어떻게 그런 ‘치명적’인 두 가지 병고를 10년도 훨씬 넘게 짊어지고 살았는지 솔직히 상상하기가 힘이 들 정도였다. 본인은 물론이지만 가족들의 견디기 어렵게만 보이는 간병 노고도 너무나 안타깝게만 느껴지는 그런 상황, 운명이라고 하기에는 어떨까? 자매의 남동생까지 몇 년 전에 병으로 타계를 했다고 들어서 할 말을 잃을 정도였다. 굳건한 믿음을 가진 어머님이 계시지만 가까이 살지를 못해서 그저 전화만 하시는 정도였다. 그러니까 모든 간병은 남편 형제님과 남매 자녀가 운명처럼 여기며 하고 있는 것이었다. 욥기가 생각이 날 정도로.. 왜 이 영혼들에게 이런 고통이 왔을까..

이 요한 본당신부님의 push로 레지오에게 정기 환자 방문 ‘도우미’ group이 3개월 전에 구성된 이후 운명하던 날까지 매주일 2~3회 ‘도우미 자매님’들이 정기적으로 방문, 말동무와 간단한 식사 등을 보살펴 주었다. 금전적인 도움이 금지된 레지오의 봉사는 아무래도 ‘신앙대화’, 그러니까 영혼을 간호하며 돌보는 일인데, 그것이 좀처럼 쉽지 않았다. 이 자매님.. 절대로 죽음을 정면으로 대하지를 못했다. 그러니까.. 끝까지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에 대한 언급이나, 대화를 못했던 것이다. 조금은 예외적인 case라고도 생각이 되었지만, 생각을 해 보니.. 왜 안 그렇겠는가? 쉰 살도 안 된 나이에 쉽게 죽음을 대할 용기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가급적 ‘저 세상, 하느님의 세상’에 대한 대화를 하려 했지만 그런 approach가 쉽지 않다는 것을 배운 기회가 되기도 했다.

거의 단장 급의 간부 자매님들로 구성된 팀이었지만 모두 다른 인생, 다른 기술, 다른 성격을 가진 관계로 항상 매끄러운 teamwork은 기대하기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결과적으로 참 ‘멋진 노력’을 했다고 나는 보았다. 운명 시에 신부님도 재빨리 모셔와서 보나 자매님 정식으로 사제의 전대사를 받으며 평화스럽게 임종을 했다 (우리는 traffic jam에 길이 막혀서 2시간 뒤에나 도착을 하였지만.) 관심을 많이 쏟으신 관계로 신부님의 ‘다정스런’ 장례미사도 잘 끝날 수 있었다.

오랜 기간을 예상할 수 없는 중병이었지만.. 그래도 언제나 느끼는 것..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 놀라움.. 암만 짐작을 해도 누가 운명의 정확한 순간을 알 수 있겠는가? 하느님만이 아신다고 하니까..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은 표정으로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았던 그 노력은 참 눈물이 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 그 형언할 수 없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주위의 가족들도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는 안도감도 어쩔 수 없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 동안 정이 들었던 자매님.. 숨겨놓은 눈물을 더 이상 감출 용기가 나지를 않았다. 자매님의 영혼, 평화로이 받아주소서..

 

 

Nearer, My God, to Thee – André Rie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