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서동, 苑西洞.. 1954

서울 특별시 종로구 鍾路區 원서동 苑西洞 비원 秘苑의 서쪽 담장을 따라 맑은 시냇물 (당시에는 개천 이라고 불린)을 따라 아늑하게 남북으로 펼쳐진 그 옛날 1950년대의 종로구 원서동, 전설의 고향 같은 느낌으로 나의 기억 제일 깊숙한 곳에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는 그곳.. 특히 1954년 경 그 동네의 모습은 아마도 내가 죽는 순간까지도 기억하며 그릴지도 모른다.

육이오 6.25란 글자가 보이면 원서동에 연관된 추억들이 왜 그렇게 지워지지 않고 생생하게 나를 깨우는가. 이런 이유로 나의 blog 특히 memoir 에는 이곳의 추억이 이곳 저곳 산재해 있다. 그만큼 이곳은 나의 추억에서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곳이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 된 것들이 이곳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오늘  6.25 동란, 66주년 아침에, 남기려는 것들, 6.25 동란 기록영화의 추억,  ‘더 늦기 전에‘라는 말을 되뇌며 생각하고 기억력을  총동원한 것이다. ‘원서동 극장, 한성택, 조흔파’ 정도가 keywords가 될 듯한 오늘의 추억은 정말로 아련한 추억들이다. 뒤 늦게 연대를 찾아보니 분명히 1954년 에서 1955년 사이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6.25 동란이 일단 끝난 휴전 바로 다음해 쯤이었다.

내가 너무 어려서 기억할 수 없었던 때, 전쟁 이후 휴전이 될 무렵까지 우리는 원서동의 아래쪽, 휘문중고교 바로 옆, 동섭이네 집이라고 불리던 집에서 살았는데, 그 집의 주인이 휴전 이후에 피난에서 돌아왔기에 우리 3식구 (아버지는 전쟁 초에 납북)는 가까운 곳, 아주 작은 ‘무당집’ 단칸 방으로 이사를 갔는데 이때의 기억들은 나의 오래 전 blog1에서 이미 회상을 하였다. 그 이후, 우리 세식구는 1954년 초에 이곳, 승철이네 집의 건넌방으로 이사를 왔고 본격적인 ‘재동국민학교 1~2학년’ 시절의 ‘평생 기억’을 만든다.

 

승철이네 집.. 최승철.. 어찌 잊으랴.. 나보다 2살 밑이었지만 그 나이에 나의 제일 친한 ‘한 집’ 친구가 되었다. 안 방 주인집은 양 부모가 있는 ‘정상적’인 주인이었지만 나는 우리 아버지가 없는 것이 그렇게 부끄럽거나 그 집이 부럽지는 않았다. 그저 다른 집이라고만 생각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비록 큰 집은 아니었어도 승철이네 집에서 보낸 2년 정도는 한마디로 즐겁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 집의 위치도 원서동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북쪽과 서쪽은 비원의 담으로 완전히 가로막힌 아늑한 곳, 여름에는 비원에서 들려오는 매미소리로 잠을 설칠 정도였고, 겨울에는 가운데로 흐르는 개천 (청계천으로 흐르는) 에서 썰매를 타는 그곳은 어린이들의 천국이었다.

승철이네 엄마는 우리 엄마와 나이도 비슷하고 친절한 분이셨다. 큰 딸 시자누나는 나의 누나와 동갑이었는데, 어머님이 재혼을 하셨는지 성이 ‘주’씨여서 원래는 주시자 누나로 통했는데 나중에는 성을 최씨로 바꾸었다. 그러니까 두 남동생인 승철이와 승관이는 현재 아버지와의 자식인 것이다. 당시에 그런 것이 그렇게 관심은 없었지만 기억에 뚜렷이 남은 것은 왜 그런 것일까?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 5명 그것도 두 누나들까지 포함 된.. 그런 승철이네 집은 어떻게 보면 재미있는 추억이 많은 곳이었다. 승철이 아버지는 경찰출신으로 (해방 전에도 그랬는지는 몰라도) 훤칠한 키의 호남형, 하지만 사나운 사나이 기절도 있었다. 일정한 직장이 없으셔서 거의 집에 계신 것이 특이한 점이었지만 그래도 부지런하셔서 놀지는 않으셨다. 항상 무언가 하신 것 같았다. 기계 쪽에 관심과 특기가 있으셨는지, 엔진 같은 것을 집에다가 갖다가 놓으시기도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얼음을 만드는 냉동기였다. 그것을 가지고 후에는 경기도 연천 인가 하는 곳으로 가셔서 가게를 차리셨다. 물론 아이들은 집에다 두고 부부만 가신 것이다. 물론 그것은 내가 그 집에서 이사 나온 후의 일이었지만.

구파발의 추억: 가끔 승철이 아빠는 우리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고향인 경기도 구파발로 놀러 가시기도 했다. 여름 겨울 모두 갔었는데, 나에게는 그것이 너무도 즐겁고 신기한 추억이 되었다. 구파발.. 어찌 잊으랴.. 그것이 그러니까 1954, 5년 경이었을 것이다. 서울역 염천교 옆에서 시외 버스를 타고 ‘한없이’ 달려서 간 곳.. 구파발, 구파발.. 그곳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 가보게 된 ‘시골’이었다. 시골, 시골,.. 처음으로 ‘쌀나무, 벼’를 보았고, 논을 보았고 ‘진짜 초가집’ 안에 들어가서 자 보았다. 처음으로 알았다.. 그곳은 아름답기 전에 너무도 가난한 곳이었음을.. 서울에 비해서 그런 것이지만, 어떻게 그렇게 ‘원시적’인 것인지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아름다운 곳, 진짜 시냇물에서 수영, 미역을 감고, 미꾸라지를 잡고, 차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깜깜한 밤에 술래잡기를 하고, 한없이 많았던 메뚜기를 잡으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우리가 가서 자던 초가집이 승철이 아빠와 어떤 친척인지는 아직도 확실하지 않지만 아주 가까운 사이였을 것이다. 그 집에 ‘희덕이’라는 우리보다 조금 나이가 많은 남자아이도 있었는데.. 이제는 기억이 희미해져서 그것이 전부다. 겨울에 놀러 갔을 때는 얼어 붙은 논에서 ‘한 없이 하루 종일’ 썰매를 타는 황홀에 빠지기도 했다. 승철이 아버지, 감사 드립니다. 셋방에 사는 아이까지 데리고 가신 것.. 아직도 이렇게 생생한 황홀경의 추억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당시 기억에 뚜렷한 것 중에, 그곳 (구파발)에서 나올 때 어떤 초가집을 지나가는데, 비명소리 울음소리가 나고 어떤 사람이 승철이 아빠에게 도와달라고 애원하던 것, 그러니까 그 집 남편이 아내를 구타하던 것, 그 아내가 살려달라고 울며불며 승철이 아빠에게 매달리던 것, 잊을 수가 없다. 어느 정도 해결이 된 후 그 집을 떠나는데 또다시 그 집 아내는 비명을 지르며 우리를 쫓아오던 모습.. 어린 나이에도 그것은 한마디로 공포의 장면이었다. 그것을 만류하고 해결해 주었던 승철이 아빠.. 존경을 받을 만 했다.

하지만, 사람은 언제나 어두운 쪽도 있다. 다른 기억에, 한 때 어떤 ‘장판지 외판원’을 구타했던 사건이 있었다. 나는 분명히 기억을 하는데, 한번 장판을 파는 젊은 청년이 왔었는데, 무언가 잘 못 되어서 승철이 아빠가 그 청년을 거의 구타하다시피 해서 쫓아 낸 것이다. 나는 너무나 혼동스러웠던 것이 어떻게 그렇게 사람이 변할 수 있는가, 그리고 사람을 어떻게 그렇게 심하게 대할 수 있는가 하는 것. 어린 나이에 그것은 나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아버지의 상에 흠이 간 것이다. 그런 아버지는 없는 것이 낫다 라는 생각까지도 한 것이다. 

 

작가 조흔파:  집에서 북쪽으로 50m 정도 올라가면 조금 더 좋은 집들이 나오는데, 그 중에 바로 ‘작가 조흔파’ 선생의 집이 있었다. 당시에 솔직히 조흔파가 누구인지 잘 몰랐지만 그 집의 둘째 아들 ‘조영환’과 같이 놀았기에 그 집엘 놀러 가며 그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소설가라는 것, 학생잡지를 보면 그의 이름이 눈에 뜨일 정도였지만 그런 것을 읽기에는 너무나 어렸다. 그 집의 큰 아들이 이름, 그러니까 조영환의 형의 이름이 조영수였다. 나중에 휘문중학교에 들어간 것도 기억이 난다. 조영환은 장난이 조금 심한 애였고 우리들을 조금 괴롭힌 기억도 나는데.. 의문은.. 분명히 나와 같이 재동국민학교에 다녔을 텐데.. 졸업 앨범에 그의 모습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마도 졸업하기 전에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을 것이다.

그 집에 몇 번 놀러 갔을 때 느낌은.. 어린 나이에도 무언가 다른 집이다.. 그러니까.. ‘작가, 문필가 소설가’의 집이란 느낌을 받은 것이다. 물론 그 아빠 조흔파 씨는 집에 없어서 못 보았다. 그리고 그 엄마도 못 보았는데.. 그 집 툇마루에서 이상한 것을 본 기억, 바로 수영복이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남자 수영복을 보았다. 그리고 들었던 소문이 있었다. 그 집 엄마는 진짜 엄마가 아니고, 후처였다는 사실.. 어린 나이에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몰랐다. 게다가 그 후처는 당시에 숙명여대 학생이었고 조영환이 엄마는 ‘쫓겨 났다’는  이야기도 듣고 자랐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아하~ 그 새 엄마는 조흔파씨가 아마도 숙명여대에서 가르친 학생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 아마도 맞지 않았을까? 그 이후 ‘사라진’ 조영환이네 기억은 서서히 사라졌지만 TV가 나오면서 가끔 조흔파씨가 출연하는 game show 같은 것을 보게 되면 그 집 생각이 나곤 했다. 또한 알게 된 것은 조흔파씨의 이름은 생각보다 훨씬 유명한 이름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김관형, 종맹이 형들:  집 바로 앞, 골목길 건너에 붙어있는 두 집이 있었다. 한 집에는 어머니와 아들, (김) 관형이 형 살고 있었고 (나머지 가족은 기억이 안 남) 또 한 집은 ‘원서동 극장’ 이라고 내가 기억하는 집, 종맹이 형이 사는 곳이었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관형이형, 종맹이 형으로 기억이 나는 두 집이다. 관형이 형, 어린 눈에도 그 형은 여자처럼 예쁘게 생긴 형이었다. 말도 부드럽고 우리들, 나와 같은 동생뻘 아이들을 잘 돌보아 준 형.. 가끔, 옆집인 종맹이 형네 집에서는 극장처럼 영화를 상영하였다. 아마도 종맹이 형의 아버지가 기록영화에 관련된 사람이 아니었을까? 심심하면 여름 밤에 우리를 포함한 동네 사람들 몇 집을 불러다가 대청 마루에서 영사기를 돌렸다. 극장가는 것 당시에 그렇게 쉽지 않았는데 ‘활동사진’을 집에서 본다는 것은 참 희귀한 일이었다. 문제는 그 ‘영화’라는 것이 모조리 6.25 전쟁 기록영화였다는 사실.. 대부분 모인 사람들이 동네 아낙네들인데 그들이 그것에 열광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우리 같은 아이들은 아주 달랐다. 만화를 보아도 전쟁, 군인들에 관한 것만 보는데.. 실제 전쟁 기록 영화를 집에서 생생하게 본다는 것은 완전히 꿈같은 일이었다. 심심치 않게 많이 보았던 6.25 기록영화들.. 군대 사열식하는 것부터 실제 대포를 쏘는 것, 군인들이 쓰러지는 것.. 그것은 당시 여름 밤을 다시 회상할 수 있는 멋진 추억으로 남았다. 종맹이 형은 그 이후 다시 볼 수 없었지만 관형이 형은 나중에 중학교까지 가서도 멀리서 가끔 본 기억이 난다. 나를 특별히 잘 돌보아 주었다는 나만의 상상인가..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은 이름이 되었다.

 

한성택 형.. 집 옆에 흐르는 개천 건너 쪽에 있는 나즈막 한 집들에 ‘한씨 일가’가 살고 있었는데, 그 집에 나의 다른 기억을 만들어준 성택이 형이 있었다. 그 나이가 얼마 정도 였을까? 아마도 중학생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 집에는 사촌으로 알려진 한성우도 있었는데 그는 나와 동갑으로 재동국민학교도 같이 다니고 졸업도 같은 때 하였다. 성택이 형, 전형적인 ‘형 type’ 이라면 어떨까.. 동생뻘 아이들을 아주 능숙하게 다루고 ‘조종’을 하는 type, 나와 승철이는 그를 ‘하느님’처럼 따르기도 했지만 내가 훨씬 더 ‘보살핌’을 받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돈을 갖다 바쳤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웃긴다.. 그 나이에 어떻게 야쿠자도 아니고, 그런 ‘돈 관계’가 있을 수 있었을까? 나의 사고방식은 간단했다. 그 형에게 더 보호를 받고 싶다는 일념으로 내가 받는 용돈을 그에게 바치곤 한 것이다.

덕분에 동네에서 나는 주먹 같은 아이들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를 받고 어린 나이에도 ‘돈의 위력’을 실감하게도 되었다. 우리 어머니는 그런 것도 모르고 그 형만 보면 고맙다고 칭찬을 하곤 했다. 그 성택이 형의 심정은 어땠을까? 돈을 받으니 좋았을 것이고, 졸졸 따라다니며 ‘숭배’를 하는 꼬마가 있었으니 좋았을지 모른다. 한번은 한 겨울에 눈이 왔을 때, 그 형을 따라서 ‘한없이 걸어서’ 썰매를 사러 간 적이 있었다. 그 위치는 나중에 생각해 보니 아마도 삼선교 부근이 아니었나.. 돈화문, 창경원 앞 전차 길을 따라 걸어 간 곳, 눈부신 쌓인 눈을 밟으며 걸었던 그 추억.. 결국 간 곳에서는 썰매를 살 수가 없었다. 

6.25의 기억을 다시 생각하면 100% 생각나는 원서동 어린 시절, 그 중에서도 1954년 무렵의 승철이네 집 주변의 추억들은 나의 6.25에 대한 심각한 역사를 조금은 부드럽게, 포근하게 만든다. 절대로 잊을 수가 없는 너무나 아름다운 추억, 인물들.. 지금 다 어떻게 살고들 계신지..

 

  1. 육이오, 원서동, 동섭이네집, 영구차 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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