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니, 1985년 9월 17일은..

2017년 9월 17일 깜깜한 새벽에 일어나 책상 앞에 앉으니, rage의 여운이 잔잔하게 남은, 복잡한 머리 속을 헤치고 ‘오늘은 우리 집의 둘째 딸 나라니의 생일이다’ 하는 그 미안함이 나를 일깨워주고 있는 듯 했다. 그렇다. 오늘은 우리 집 막내 둘째, ‘콩콩이’의 생일, 그것도 그 ‘애’의 서른 두 번째 생일이 되었다.  그 옛날,  나는 서른 일곱, 산모는 서른 셋.. 그러니까..  그러니까… 와~ 막내의 나이가 당시 엄마의 나이에 가까워진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세월이 쉴 새 없이, 끊임 없이  흘러 갔을까? 놀라움, 자괴감, 후회, 섭리, 인생역정, 순리, 선과 악의 실존, 삶의 의미와 목적… 별로 연관이 없는 모든 단어들이 머리를 맴돈다. 아직도 나의 머리 속은 요사이 청명한 초가을 하늘 같이 맑지 못한 것, 그 이유는?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오늘 창립 40주년을 맞는 날, 대주교 Gregory 께서 친히 방문 미사를 집전 하는 날, 우리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우리의 정든 동네 성당 Holy Family 로 차의 방향을 돌렸고 오랜 만에 온 이곳의 정든 파란 눈의 parishioner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은 몰라도 우리는 눈물이 날 정도로 더 반가운 마음이 들었던 이유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안다. 최소한 이곳에서는 그 ‘난동사건 미친X 의 추악한 얼굴’을 볼 가능성이 zero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복음말씀을 포함한 주제가 하필이면 ‘무조건, 언제나 용서해 주어라’ 였다. 이제까지 깊은 생각 없이 들었던 말씀이었지만 속으로 나는 ‘heaven forbid, NO!’ 란 고함소리를 허공에 쳐대고 있었다. 최소한 현재 나의 느낌은 그러하다. 이것은 앞으로도 나에게 최악의 spiritual challenge 중에서도 으뜸이 될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현재 나는 ‘love to hate’의 격랑 속에서 ‘누군가를 증오하여야만 한다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내 혼자만의 능력으로 이런 생각에서 벗어 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초자연적인 도움이 없는 한 나는 내면의 무서운 rage와 함께, 그 ‘난동사건의 미친 X, monster, 악마‘를 증오할 듯하다. 시간, 세월이 유일한 처방이 될지는 모르지만..

‘우리식구’만 ‘우리 집’에 모여서 생일을 축하하는 음식을 나누었다. 올해의  신청 음식은 미역국은 꼭 있어야 하고, 그 외에 ‘비빔밥과 잡채’ 였다. 그것 때문에 따로 장을 보아야 했지만 예년처럼 ‘거창한’ 느낌이 전혀 없이 조촐하게 즐겼다. 이제 올해 우리 집 ‘생일 행사’는 모두 끝이 났다. 조금은 어깨가 가벼워지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생일이라는 것, 어떤 때는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이런 내가 나는 싫기도 하다. 그래서 더 부담스러운지도.. 세월의 흐름과 나이 먹음이라는 것, 그렇게 즐겁지 않은 것이다.

이런 것 외에.. 나라니가 태어난 해, 1985년이란 때가 나에게는 어떤 때였나 회상하게 되었다. 가물거린다. 1968년이라면 어제 일처럼 거의 모두 기억을 하는, 나는 놀란다. Good Ole Days.. 가 이제는 기억 속에서 가물거린다는 사실에 또 놀란다. 그 당시가 별로 뚜렷이 기억이 안 나는 것이다. 특별한 것이 없었거나 추억에 남기고 싶은 즐거운 일들이 없었거나..   그래도 생각하고 생각한다. 그 당시의 사진을 보면 조금 기억이 살아날지는 모르지만….  문득 생각한다, 잊혀진 듯한 1980년대를 더 잊기 전에 개인역사로 남기자… 이것이 ‘정상적인 인생’일 것이다. 20대, 30대, 그리고 40대는 엄연히 느낌도 다르고 생각도 다른 것이다. 이것이 정상적인 것이다. 인생의 굴레바퀴… 서서히 돌아가며 잊혀지는 것, 생의 마감에서는 나의 개인 역사 중에서 어떤 시절이 제일 기억에 남을까 궁금해진다.

 

나라니가 태어났을 때 Ohio State University Hospital 1985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