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n on Merton

2021년 summer reading 목록 중에서 제일 빨리 독서/필사가 끝난 책이 예수회 America magazine 편집장 James Martin신부의 ‘나의 멘토 나의 성인 (원제: My Life with the Saints, 2006)’ 이다. 이 책이 최근에 나의 손에 들어온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닌 듯 싶다. 몇 개월 전에 Martin fever로 이름한 나의 초 超관심 기간 중에 이 신부의 책 4권을 거의 한꺼번에 산 적이 있었다. 그것들을 천천히 이것 저것 조금씩 보기 시작했다. 그의 문체와 지적 철학에 조금 적응하려는 의도였다. 이 예수회 신부는 news media상에서 가끔 ‘지나친 진보적 신부’라는 비판을 받는 것 외에는 별로 큰 관심을 끈 것은 없었다. 하지만 나의 속단은 크게 잘못된 것임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하고, 결국은 Bishop Robert Barron에 못지않은, 아니 버금가는 미국 가톨릭 [거의] 차세대 최고 지성의 거목임을 알게 되었다.

 

이런 나의 생각을 연숙과도 나누었는데 놀랍게도 그녀는 벌써 그분의 책 몇 권을 이미 읽었던 과, 이 책이 우리 집에 있다는 사실[교리반 시절 선물로 받은]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모두 한국어 번역본이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나의 멘토 나의 성인’ 이었다.

이제까지 성인전 종류의 책은 나에게 별로 손이 가지 않은 것들이었다. 기억 속에서도 그런 책들은 우선 오래된 낡은 책들, 하나같이 고통을 지나치게 묘사한 것들, 감히 다다르지도 못할 인간의 능력을 넘은 초인간들, 난해한 고유명사 투성이의 조잡한 번역… 등등으로 나는 가급적 그런 책들을 피하며 살았던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이 책도 별로 선뜻 손이 안 가는 책이었는데, 이번에는 ‘이제는 친근한 모습의’ Martin 신부가 쓴 책이라는 것에서 느낌이 아주 달랐다. 조금은 ‘초현대적, 초이성적, 심지어 과학적’인 접근을 했을 거라는 희망이 있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책은 전통적인 고리타분 하고 녹 냄새가 풍기는 그런 성인전이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심지어 바로 나를 위해서 쓴 책이라는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이 책의 원제는 ‘성인과 함께한 나의 삶, My Life with the Saints‘ , 하지만 성찬성[역자] 번역본은 ‘나의 멘토 나의 성인’, 왜 멘토란 말을 넣었을까? 나중에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 책에서 언급한 ‘성인’이란 말은 가톨릭교회의 공식적인 성인은 물론 그 외에도 성인 같은 삶을 산 사람들[토마스 머튼, 도로시 데이 같은]도 포함되었기 때문이고, 그런 이유로 그 ‘성인과 비슷함’을 멘토 mentor 란 단어로 표현을 한 것이었을 것이다.

이 책에는 16명의 성인, ‘예비, 준’성인들이 소개되어 있는데, 이들의 특징, 공통점이 있다면 이들 모두 Martin신부 개인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그 중에서 으뜸으로 다루어진 ‘성인’이 바로 토마스 머튼 트라피스트 수사신부님인데, 솔직히 나는 그런 사실에 아직도 동감을 못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내가 ‘화장실에서’ 몇 년간 읽었던 그의 대표작 Seven Storey Mountain 이란 자서전이 왜 그렇게 수많은 예비신부들의 ‘고전적’ 필독서가 되었는지 쉽게 이해가 안 가는 것이다. 이유는 이 책은 솔직한 고백록일지는 모르지만 요점을 제외한 ‘군살’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 웬 고유명사들이 그리도 많은지, 본인에게는 익숙한 표현이겠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정말 난감한 것들인데 알고 보면 그런 것들이 모두 불필요한 표현들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머튼은 절대로 겸손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실망까지… 그래도,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가 99% 틀렸을 것이라는 것 [사실,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Bishop Barron과 Father Martin 모두가 그 책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마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이렇게 토마스 머튼과 그 칠층산을 열정적으로 소개하는 마틴 신부의 글은 다른 각도로 그 책을 재조명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아마도 다시 그 책을 읽을 때는 조금 더 겸손한 자세로 읽게 될 지도 모른다.

 


참된 자아

 

나에게 있어서 성인이 된다는 것은 곧 나 자신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성화와 구원의 문제는 사실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참된 자아를 발견하는 문제와 같다.

 – 토마스 머튼, <새 명상의 씨>

 

대학에서 미시 美詩 American Poetry 강의를 들을 때, 월트 휘트먼을 처음 소개받았다. 우리 젊은 교수는 휘트먼 예찬자이자 연구가였다. 그녀는 시인의 전기를 써서 호평을 받았다. 어느 날 그녀는 만일 우리가 스스로 모순에 빠져 있다는 비난을 받거든 <나 자신의 노래 Song of Myself> 에서 다음 구절을 인용하라고 말했다.

 

내가 나 자신과 모순되는가?

그래, 참 좋다. 나는 나 자신과 모순된다.

(나는 크고, 내 안에는 많은 것이 들어앉아 있나니.)

 

휘트먼은 이 시구로 또 다른 시인이자 신비가요, 수도승이요, 예술인이요, 평화 운동가요, 사제요, 영성 대가요, 교회 일치 주창자요, 선사 禪師 요, 성인인 토마스 머튼을 어렵지 않게 변호할 수 있었다.

머튼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바로 모순이다. 자신의 주변 세계를 사랑하는 사람이 봉쇄 수도회 수도승이 되는 길을 선택하는데, 그가 바로 트라피스트 수도승 머튼 루이스 OCSO the Order of Cistercians of the Strict Observance (엄률 시토 수도회) 신부다. 떠돌이요 타고난 여행가이면서 정주 서원을 하고 미국 켄터키 주 외딴 산중에 터를 잡은 겟세마니 성모 대수도원에 정착하기로 작정한 사람. 자진하여 순명 서원을 하고도 수도 생활 상당 기간을 자기 수도회의 장상들과 부딪히며 보낸 사람. 자신의 소명에 반하지만 [필사주: 反인가, 반대로 魅惑인가? 정말 성의 없는 번역] 끊임없이 의문을 갖는 사람. 동양 종교들에 매혹당한 신심 깊은 가톨릭 회심자. 명예직과 훈장을 싫어하는 (아니면 싫어한다고 스스로를 설득시키려 노력하는) 저명한 문필가. 하루는 결코 한 줄도 더 쓰지 않겠다는 결단을 글로 쓰는가 하면, 며칠 후에는 출간된 자신의 또 다른 저서를 보고 느낀 기쁨을 글로 쓸 수 있는 사람. (그는 주목할 만한 한 일기의 도입부에서, 새로 나온 자신의 책 표지를 싸고 있는 올이 굵은 삼베가 당시 맨해튼의 현대식 나이트클럽에 사용된 천과 똑같았다는 점에 은근히 만족감을 표시하고 있다.)

이런 역설들, 이런 휘트먼풍의 다중성은 머튼을 20세기 가톨릭 교회의 변화무쌍한 인물 중 한 사람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그가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이르는 여정을 소상하게 기록한 1948년도에 출간한 회고록 <칠층산>은 사리를 아는 머튼조차도 예견하지 못한 출판계의 기현상이 되었다. 이 책은 수백만의 독자에게 관상 기도를 소개했고, 전후 미국 수도 생활의 쇄신을 예고했다. 평화에 관한 그의 글들은 요한 23세 교황의 회칙 <지상의 평화 Pacem in Terris>의 전조가 되었다. 그리고 생명에 대한 그의 지속적인 자극은 지쳐 있던 한 미국인이 그리스도 신앙을 재정립하도록 도와주었다.

그의 책은 나를 재정리하는 데도 보탬이 되었다.

<칠층산>이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알려면, 내가 머튼을 만나기 이전의 삶을 얼마간 이해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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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열일곱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경영 대학 와튼 스쿨에서 수강했다. 내가 경영학을 공부하기로 한 이유는 설명하기 어렵거니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점에는 이해하기조차 힘들 것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고 싶은지 알지 못했다. 고등학교에서는 영어, 프랑스어, 미술처럼 신나게 공부한 과목은 많았지만, 어느 것 하나 직업으로는 실용적이지 못하다고 보았다. 일례로 나는 프랑스어를 무척 좋아했지만,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알 도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