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st Si Bon 세시봉 아틀란타

C’est Si Bon.. 세시봉..시봉..시봉.. C’est Si Bon은 물론 French jazzy classic.. 1947년에 발표된 이것은 우리에게는 루이 암스트롱과 이브 몽땅 Yves Montand 이 같이 불렀던 것이 익숙한가? 어렸을 때 참 많이도 들었던 이 노래의 멜로디는 아직도 생생하다.1 세시봉의 뜻은 불어101 학생도 알듯이 영어로 하면 It’s so good 정도가 될 것이다. 이 곡을 들으면 나중에 ‘시봉 시봉..’을 계속하는데.. 그것도 so good so good 정도일 것이다. 예전에 나는 이 뜻을 ‘전혀’ 눈치도 못 채고 살다가 요새야 깨닫게 되었다. 참 오랜 세월이 걸린 French를 모르고, 무시하고 살았던 curse 라고나 할까.

 

 
Louis ArmstrongC’est si bon (1962)

 

하지만 여기 제목의 세시봉은 이미 한글의 ‘고유명사‘가 된 말로서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1960년대에 서울에 있었던 어떤 ‘음악감상실‘의 이름인 것이다. 반세기 전이면 사실 ‘골동품’ 냄새가 나겠지만 나에게는 과장을 하면 ‘엊그제’ 같은 느낌의 시절이다. 당시 서울은 99% ‘미국 류’를 따랐겠지만 간혹 이렇게 색다르게 ‘불 류’를 더 ‘멋지게’ 보던 ‘지식층’들도 상당했다. 특히 유행에 민감한 것들이 그랬다. 그래서 이 말이 음악감상실 이름이 이것이 되었는지는 그때의 사정을 잘 모르니 알 길이 없다. 희미한 기억으로 내가 ‘아직도’ 고등학생이었을 당시 대학생이었던 누나가 그곳을 다녔고 그때 나는 ‘세시봉’의 이름을 들었을 듯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당시 서울 장안의 ’20세 안팎 특별히 할일 없었던 아이들’2이 이곳에 모여서 한창 유행을 타던 ‘기타’를 치고 배우며 시간을 소일하던 것이 작은 역사가 되었고 그 중에 상당 수는 ‘프로’로 전향.. 반세기 뒤에는 ‘완전한 역사’가 된 것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세시봉’이다. 나중에는 여기에 70/80이란 것이 붙는데.. 글쎄, 왜 70/80인지.. 아마도 1970~80년대를 말하는 모양.. 하지만 세시봉에는 60/70이 붙어야 더 잘 어울릴 것이다. 아직도 서울의 세시봉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이름의 ‘가게’는 전 세계에 수도 없이 많이 있다. 주로 식당의 이름에 제일 많은 것 같다. 그 중에는 아틀란타에 있는 세시봉 을 빼어 놓을 수 없다. 이 blog의 제목이기도 하니까. 이곳이 바로 얼마 전에 개업한 ‘김철환’씨의 60/70/80 style 세시봉 음악 경양식 집이다.

며칠 전, 아틀란타 세시봉 70/80-style music cafe.. 두 번째로 가 보았다. 지난 년 말에 진희네 그룹3과 처음 가보았고 2개월 만에 다시 찾게 된 것이다. 이번에는 첫 번째 왔을 때보다 분위기가 익숙해져서 그런지 더 여유 있게 몇 시간을 즐긴 셈이다. 처음에 왔을 때 없었던 새로운 음식 메뉴들이 있어서 모두들 그 중에서 골라 식사를 하였다. 이채로웠던 것은 1970년대 우리들에게 익숙했던 ‘경양식’ 메뉴, 특히 큰 접시에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담아내는 수프 (아마도 portage soup이라고 했을 것이다), 함박스테이크 hamburger steak, 돈카츠 don katzu.. 등등 모두 서울 장안 60/80 style로 추억에 어린 것들이었다. 주인 겸 singer는 ‘김철환‘ 씨인데.. ‘소싯적’에 pan flute 프로였고 우리는 그곳에서 그의 연주 record album이 걸린 것도 보았다. 이채롭고 놀라운 것은 그는 ‘못하는 악기가 없을’ 정도로 수 많은 악기를 연주 ‘했고’, one-man band의 경지가 digital technology를 총동원 한 효과만점의 연기 실력이었다. 그의 vocal도 세월이나 나이에 비해 놀라울 정도의 가창력을 보여 주었다.

 

처음 가 보았을 때보다 더 가열된 관심이 생기고 같이 갔던 그룹의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이 가게.. 조금 오래 갔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요새 한인 business의 수명이 1~2년이 보통이라는데.. 어떨까? 이런 곳이 ‘명소’로 자리를 잡으려면 우선 ‘경제성 사업성’이 절대적인데, 어떨까.. 암만 연기가 좋아도 그것이 전부가 아니니까.. 나의 생각에는 1) 이곳은 ‘우리 또래를 위해서도’ 오래 지속해야 하고, 2)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또래들이 ‘단골’이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선전함이 필요하다.. 는 것이었다. 경제성이 맞으려면 기본적인 정기고객이 ‘절대로’ 필요한데.. 아틀란타의 고객덩치가 그것을 가능케 할지는 전혀 idea가 없다. 음식이 약간 pricey하지만 그것이 이곳의 특징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면 문제가 없고.. 70/80 style 을 이곳에 정착시키고 우리 또래의 연령층 이외의 세대들 에게도 이곳의 ‘역사적 의미’를 알리는 곳으로 만들게 되면, ‘명소’의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Owner/Performer인 김철환씨의 ‘약력’은 자세히 모르지만 ‘조영남’씨와 관계가 있는 듯 했고, vocal보다는 instrument쪽으로 경력을 쌓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vocal실력은 예상외로 ‘열창’에 가깝다고 할까.. 인상적이었다. 가끔 ‘신청 곡’도 받는데 4 가끔 ‘이것은 잘 모르겠는데..’ 하는 솔직함도 있었지만 대부분 큰 차질 없는 그는 그 신청을 받아 주었다.

 

경제/영업성은 아직 개업한지 1년도 안 되었으니 확실치 않지만.. 현재까지 주위의 ‘여론’을 들어본 바에 의하면 생각보다 빨리 ‘소문’이 퍼지는 것을 알았고, 대부분의 ‘잠정고객’들도 이런 곳을 아틀란타의 ‘명소’로 승격을 시켜가는데 관심을 보였다. 그 정도로 우리 세대들이 갈 곳이 없는 것일까? 하지만 들어보면 ‘서울에 가도’ 그런 곳이 ‘별로’ 없다는 말도 있어서.. 어떨까.. 부활절도 끝났으니, 또 한번 그곳을 찾을 때가 다가오지 않았나..


 

  1. 1960년대에 이 곡은 미국에서 상당히 hit여서 Dean Martin같은 ‘유행가’ 가수들도 많이 불렀다.
  2. 대표적 인물들: 송창식씨, 윤형주씨, 김세환씨, 이들은 나중에 같은 명동에 있었던 OB’s Cabin이란 곳에서 ‘합창, 중창’을 하기도 했다.
  3. 나의 아틀란타 15년 역사의 친지 그룹
  4. 그 옛날 음악다방에 앉아서 이런 ‘짓’을 참 많이도 했는데..

중앙고 동창 차정호

며칠 전에 예기치 않게 (of course!) 나의 모교 중앙고 57회 동창생 차정호와 연락이 되었다. 나의 blog motto 중에 ‘build it, they’ll come’ 이 바로 이런 case인데, 정말 가끔 예상치 않게 이런 기회가 온다. 나의 blog에서 중앙고 회고담에서 짧지 않게 언급이 되었고, 또 한번은 ‘차정호 사진전’ 이란 어떤 인터넷 상의 기사를 보고 그의 ‘사진 활동’ 을 언급을 했었지만 그와 개인적으로 연락이 되리라고는 기대하지는 않았었다.

어쩌다 ‘기적적으로’ 연락이 되면 물론 뛸 듯이 반갑다. 하지만 그 다음은 항상 미지수인데.. 이것은 어떻게 보면 근래 ‘사회심리’적 연구 대상이라도 될 듯이 흥미롭기도 하다. 예를 들면 남북한 이산가족의 반세기 만의 재상봉 같은 정도는 아니지만 아마도 예상치 못한 심리적인 현상은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 같다.

가장 감수성이 예민했고 세상이 무지개로만 보이던 시절 같은 시공간을 나누었던 동창 ‘친구’들, 그때의 자연스럽게 형성된 우정은 사실 너무나 순수해서 그 뒤로 길게 이어지는 ‘순수하지만은 않은’ 세상살이에서 너무나 아름답게 남는다. 문제는 각자가 그 순수하던 시절에 얼마나 ‘가치’를 부여하는가에 있는데 이것은 각자가 살아온 긴 인생여정에 따라 모두 다를 것 같다. 반세기 만에 다시 알게 된 오랜 친구들 중에는 나를 너무나 슬프게 한 ‘지독한 변신’ (아니면 나의 비현실적인 기대감) 도 있어서 이제는 이런 때 나를 ‘보호’할 준비를 단단히 하게 되었다. 여기서 ‘준비’란 간단히 말해서 ‘아주 낮은 기대치’를 말한다.

이번에 연락이 된 차정호, 중앙중 1학년 때와 중앙고 3학년 때 같은 반이어서 전혀 낯설지 않은 동창이다. 나와는 다르게 장난꾸러기, 외향적인 친구.. 나는 그런 성격이 항상 부럽기도 했다. 특히 중앙고 3학년 때 백정기 국어선생님께 ‘농담’을 잘못해서 심하게 얻어맞은 ‘사건’은 아직도 사진처럼 선명하게 기억이 되는데.. 이 친구도 나의 그 회고담을 보고 ‘너무나 아팠다고’ 해서 미안해지기도 했다. 나도 누구에게 얻어 맞은 기억을 하면 슬퍼지기도 하는데.. 하지만 이제는 세월이 그런 것들을 높은 차원에서 내려다 볼 정도로 흘렀지 않은가?

 중앙57회-1아직도 활발한 느낌이 드는 그의 ‘글’을 읽고 그 옛날의 그 활달하고 장난꾸러기 같은 그의 모습들을 떠 올린다. 어제는 가까이 지내는 동기동창들과 ‘허름한 곳’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담아서 보내 주었다. 그의 ‘자상함’에 찐~한 고마움을 느낀다. 이런 ‘소주잔’의 모습들은 사실 나는 이제 꿈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들이라서.. 너무나 그리운 모습들인 것이다. 몇 년 동안 뜸~ 했던 중앙고 동기동창들 소식.. 이제 다시 찾은 차정호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들을 수 있는 조그만 희망을 보게 된다.

이 친구가 어울리는 동창들은 사실 나에게는 조금 낯설게 느껴진다. 이름들이 그렇지만 얼굴은 ‘어디선가 본 듯한’ 정도의 동창들도 있다. 전영훈, 윤홍섭, 주창모는 ‘100%’ 알겠는데.. 나머지는 정말 미안하게도 기억이 희미하기만 하다. 거꾸로 이 동기동창들도 마찬가지로 나를 기억하기는 정말 힘들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월의 횡포 중에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이랴.. 한 때 같은 곳에서 3년 아니면 6년을 본 동창들이 아닌가..

 

날씨가 화제였던 세월들..

지금은 조금 낳아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머리 속에는 온통 추운 겨울, 아~ 고뇌..의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1월 28일인가..의 최악, 고통스러웠던 19시간 차 속에 갇혀서 떨던 일과 바로 지나가고 있는 주의 얼음대란 들.. 지나가는 주의 3일간 집에 있어야 했던 시간들은 비교적 덜 불쾌한 것일까.. 우선 밖에 나가지를 않았기 때문일까. 최악의 경우 전기가 나가는 것인데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2주 전의 snow jam은 정말 최악이었다.

까마득한 옛날, 시카고 시절 고대생 윤근흠이 갑자기 쏟아진 시카고 폭설로 12시간인가 걸려서 집에 왔다고 하는 추억이 생각은 나지만 내가 연숙과 같이 차 속에서 19시간 만에 집에 왔다는 사실은 지금도 믿어지지 않고 빨리 잊어버리고 싶은 악몽이다. 그때 나는 정말 ‘심신’ 모두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다.오랜 세월을 살면서 그렇게 ‘육체적, 물리적’인 위협을 느낀 적이 없었다. 혼자도 아니고 우리 부부가 같이.. 상상으로 가끔 그런 위협을 공포로 느끼곤 하지만 이것은 100% 실화인 것이다. 

최악의 경우는 무엇일까? 아마도 죽는 것 아닐까? 나는 죽는 것을 지금은 어떻게 받아드리고 있는 것일까? 믿음을 무기로 자신을 가지고 대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과연 그럴까? 언제 죽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만 진리로 알고 살자.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죽을 준비는 항상 하고 살자. 그것이 전부다.

날씨 이외에는 어떤 것들이 나의 머리 속에 있을까? 아하! 1월 중에 용감하게 실행한 나의 ‘약속’.. 도레미 가라오께에 가족들이 갔던 일.. 이것은 정말 나에게는, 아니 가족들에게는 놀라운 일일 것 같다. 어찌 아니 그렇겠는가? 우리 가족, 정말 같이 이렇게 ‘나가서’ 논 적이 있었던가? 아니 집에서도 그런 적은 없었을 것이다. 그저 조용히 우리는 살았다. 지금 생각하니 정말 가족들에게 미안하고 나는 몸 둘 바를 잊는다. 어떻게 그렇게 살았을까? 나는 내가 가정적이라고 항상 자부했지만 그와 못지않게 나는 재미 지독히도 없이 가족들을 대했다. 그것은 사실이다. 아마 우리가족들은 그것에 적응이 되었을 것이고 운명이라고 받아 들였을 것이고 체념을 하며 살았을 것이다. 나도 변명의 여지는 없지 않지만 이렇게 가족이 ‘나가서 노래를’ 부르고 보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정말 없다.

이런 나의 ‘심경의 변화’는 아마도 최근 3년간 나의 out-of-closet 덕분일지도 모른다. 그 전에는 꿈도 못 꾸었다. 새 세상을 보는 듯하고.. 어떨까.. 언제까지 그런 새 세상을 알고 즐기며 살 수 있을까? 나는 분명히 새로운 세상을 새로운 정신과 믿음으로 살고 있다. 그런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아마도 묵주기도와 레지오, 최근에는 순교자 성당에 조금씩 관여하는 것.. 이런 것들 때문일 것이다.

항상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그대로 있고 나를 괴롭히지만 그래도 잘 꾸려나가는 내가 어떻게 보면 대견하기도 하다.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다. 이것이 나의 99% 노력이라고 볼 수도 있다. 나는 젖 먹던 힘을 내고 있다. 혼자만의 노력은 비록 아니지만 분명히 나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이것을 하느님은 아실 것이다. 그러면 됐다. 그러면 됐다.

두 번째 ice, snow day 2014

2 주 전의 ‘악몽’이 아직도 생생한데 또다시 ‘으시시’한 날씨 경보들이 만발을 하더니 결국은 그들의 예보가 정확함을 또 깨닫게 되었다. Never again의 심리적 도움으로 이번에는 꼼짝도 않고 집에 ‘웅크리고 hunker down‘ 있게 되었고 아마도 그런 식으로 이번의 날씨문제도 해결이 되리라..

두꺼운 얼음위에 밤새 내린 눈, 길이 전혀 안 보인다

아침에 예전처럼 늦은 새벽에 일어나려고 하니 방이 조금은 밝음을 느꼈고 아하~ 밖에 눈으로 ‘하~얀’ 모양이구나 짐작을 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windows blind를 열자마자 찬란한 하얀 빛들이 눈을 찌른다.

어젯밤 잘 때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고 하늘을 보니 아직도 조금씩 하얀 눈이 뿌리는 중이었다. deck rail에는 명암이 뚜렷이 눈의 ‘높이’가 보이는데 족히 2 inch는 될 듯 싶었다. 하지만 2 inch 의 높이는 어제 이미 얼어 붙었던 ice sheet가 더해진 것이어서 아마도 눈은 2 inch보다는 적을 듯 했다. 2011년의 ‘대설’ 이후 3년 만에 보는 ‘설경’이었다. 게다가 이곳에서 흔치 않은 ‘고드름’을 원 없이 많이 충분히 즐기게도 되었다.

고드름 고드름 수정 고드름.. 고드름 따다가..

 

비록 영상 above freezing 으로 올라간다고 하지만 밑에 깔리 얼음 때문에 차도가 다 녹으려면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했더니 결국은 오늘도 우리에게 관련된 business는 cancel되는 것 같다. 우리가 관련된 오늘 business는 사실 순교자 성당의 매주 목요일 저녁에 있는 예비자 교리반 봉사가 전부지만 저녁 미사와 더불어 교리반도 취소가 된 것이다. 또 하루 ‘공을 치는, 아니 쉬는’ 그런 날이 된다. 화요일부터 3일째 계속 집에 갇히게 된 것이지만 사실 별다른 choice가 없는 듯 하다.

2주 전의 snow jam(교통 대란)의 기억이 생생한 듯, 이곳 거의 모든 ‘인간’들 ‘꼼짝도’ 안 하고 집에 있을 것이다. 다행히 걱정하던 것처럼 electric power에 큰 문제가 ‘아직까지’ 없어서 심심하거나 한 것은 ‘하나도’ 없다. 사실 또한 예전처럼 ‘어린애’ 같이 신나거나 한 것도 거의 없다. 학교를 다니거나 출근을 꼭 해야 한다면 조금은 뜻밖의 ‘선물’을 받은 양 들뜬 기분도 들겠지만 우리는 그런 시절이 ‘다~~’ 지나간 것 같아서 조금은 서글픈 심정도 든다.

차도가 전혀 안 보이게 내린 이월 중순의 눈.. 올 겨울의 마지막일까..


 

꽁꽁 얼어붙은 아틀란타, 2주 전의 교훈으로 재빨리 제설작업에 나섰다.

 

2주 전 worst snow jam과 극단적으로 대조적인 freeway

안중근, 쪽발이 그리고 짱 깨

오늘 2월 8일자 The New York Times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바로 오래 전 우리들의 영웅 ‘안중근 의사’ 의 커다란 사진이었다.

 

중국 하르빈, 안중근 의사 전시관

 

어떻게 우리에게 그렇게 친숙한 얼굴에 이곳에 실렸을까? 안중근 의사의 기일이라도 되었나.. 하고 보니 그것이 아니고 기사의 실제 주제는 중국과 일본의 불편한, 아니면 추한, 험악한 관계발전에 관한 것이었다. 이 안 의사의 흉상과 사진 등은 전시장의 모습이었고 물론 중국의 일본에 대한 감정, 정치적인 각도를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이 기사는 해석을 하고 있었다.

이 전시장은 1909년 당시 안 의사가 일본의 원로(아니면 원흉)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를 총격하던 바로 그곳 철도 플랫 홈 에 있던 철도역사(驛舍)여서 전시의 의미가 더욱 증폭이 됨을 느낀다. 100여 년 전의 그곳의 지정학적인 역사로부터 지금의 사정은 어떻게 변했나.. 참 100여 년은 길게도 느껴진다. 그렇게 역사적인 강산이 변했나..

이 기사에 의하면 작년 6월,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당시 짱 깨 정부에 안중근 의사를 기려주기를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번 전시회는 대한민국 정부의 바램에 의한 것이고, 그것을 ‘쾌히’ 받아들인 것은 중국의 일본에 대한 감정의 표시일 것이다. 여기에 샌드위치처럼 끼어 있는 다른 민족의 원흉 ‘북괴’ 김씨 왕조의 언급은 없다. 그들의 느낌은 이제 별로 무게가 없어서 일지도 모른다. 중국, 일본, 빨갱이 북괴… 이 골치 아픈 족속들을 의식하며, 특히 짱 깨 와 쪽발이의 사이에서 박정희의 큰 딸 박근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과거 1960~70년대에 일본 경제 발전을 모델로 하고 그들의 도움을 철저히 이용해서 한국형 경제발전을 이루어내었던 그녀의 아버지를 잘 아는 그녀는 어떻게 과거를 그녀의 것으로 만들 것인가?

과거 전혀 모르고, 아니 피하고 살았던 일본을 최근에 나는 조금씩 ‘문화’를 통해서 접하고 역시 그들도 우리가 배우고 들었던 대로의 monster는 아닌 그저 평범한 인간들이었음을 알게는 되었지만 전체적인 집단으로써의 그들은 역시 과거의 monster를 떠올리게 되니.. 참 어려운 문제가 아닌가? 고치기 어렵고 숨기기 어려운 일단 벌어진 ‘역사’의 문제라서 더욱 골치가 아플 수 밖에 없다.

여기에서 나는 짱 깨에 대한 고민이 생긴다. 나는 체질적으로 그들이 싫었고 (주로 모택동의 빨갱이 집단에 대한 것)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들의 양심 없는 거짓과 기만, 경험적으로 느껴지는 중국여자들의 해괴한 행동들 등등 모든 것들이 나로 하여금 그들을 피하고 싫어하게 만든다. 물론 이런 것들은 나의 일방적인 편견이지도 모르고 아마도 그럴 것이다. 어떻게 이런 편견을 없앨 것인가.. 역시 ‘인간적’으로 그들을 접근해야 할 듯 하다. 일본의 경우에서 나는 그것을 배웠기에 여기에도 희망이 있다고 느낀다.

빨간 마후라 red scarf

1964년 4월 8일자 동아일보 영화 광고
1964년 4월 8일자 동아일보 영화 광고

얼마 전 역시 우연히.. stumbled upon.. ‘재수 좋게’ 이 영화를 정확히 거의 50년 만에 다시 보게 되었다. 이 영화는 1964년 봄에 개봉된 신상옥 감독, 신필름 제작의 전쟁영화로 당시에 장안의 화제를 상당히 끌었고, 흥행도 대 성공이었던 것도 기억을 한다. cast도 당시 최고의 인기 배우들이 등장을 했지만 그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전투기, 거의 모두 F-86 Sabre jetfighter 가 대거 등장을 했고 지금 다시 보아도 ‘우습지 않게 보이는’ 정도로 당시로서는 상당한 촬영 기술을 보여 주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혹시 이것도 ‘한국 영상원’ 어쩌구 하는 곳에서 ‘올려 놓은’ 것인가 했지만 정말 다행히도 ‘표준 youtube video protocol’ video여서 부지런히 ‘download’ 를 해 두었다. 이제는 ‘안심하고’ 언제든지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는 good news였는데 bad news는..  막상 보게 되니.. video quality가 ‘엉망’이었다. 그러니까 VHS video tape보다도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영화 첫 부분에 그 이유에 대한 ‘양해’ 메시지가 나온다. 이것도 역시 빨갱이 탓이었던가.. 신상옥씨가 강제 납북되면서 자신 소장의 original들이 모두 없어졌다는 말이 나온다. 여기에 의문은.. 신씨가 납북되면서 왜 그가 만든 영화들을 가지고 갔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발적으로 북을 간 것인가? 좌우지간 여기에 보이는 영화의 video는 영화를 상영하면서 video camera로 찍은 것이 분명했다.

이런 사연을 알고 보니 더욱 이 video가 값지게 느껴졌다. 아차..하면 이것도 못 보고 죽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가끔 이 영화가 생각나곤 하고.. 그 당시 보았던 영화의 장면, 줄거리 등을 머리를 짜내며 생각하기도 했다. 몇 장면과 대사는 아직도 기억을 한다. 또한 당시 인기 4중창단 불루벨즈 가 불렀던 주제곡은 이 영화의 전체적 분위기와 참 잘 어울렸고 또 영화와 별도로 인기곡으로 남게 되었는데.. 사실 그것이 전부였다.

이 영화는 1964년 봄에 개봉이 되었고 상당한 인기였지만 당시 중앙 고교 2학년 생이었던 나는 그렇게 관심이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그 나이에는 ‘외국영화, 미국영화’가 아니면 모두 ‘촌스럽게’ 느껴지고, 사실이 그랬다. 그 정도로 국산영화의 질은 한마디로 저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 ‘빨간 마후라‘ (당시 마후라 란 말은 가벼운 느낌의 목도리란 뜻으로 거의 표준어처럼 쓰였는데 알고 보니 muffler의 순 일본식 발음이었다) 는 조금 달랐다. 우선 당시 우리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있었던 박택규 화학 선생님이 이것을 보고 와서 아주 인상적으로 ‘선전’을 하셨던 것이다. 그것이 이 영화를 보게 된 이유가 됐다.

그 박택규 선생님은 화학을 ‘대학 교수’ 스타일로 ‘강의’하시던 독특한 선생님으로 역시 수년 후에 대학교로 ‘영전’이 되시어 가시기도 했다. 그 선생님은 우리들을 마치 친구처럼 생각할 정도로 화학 과목 이외의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시고 자신이 본 영화 같은 것도 감상을 나누곤 했다. 당시 입시위주의 분위기에서 그런 선생님은 참 드문 case였다. 그 선생님이 알려 준 이 영화 장면들 중에서 ‘최무룡’ 이 수송기에 의해서 ‘기적적으로’ 구출 되는 것.. 그것은 아직도 나의 머리 속에 남아있다.

나중에 직접 이 영화를 보고 느낀 것 중에는 한마디로 모조리 멋진 사나이들.. jetfighter pilot들의 ‘여성 편력’이 대단하다는 사실이었는데.. 이런 사실은 아마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마찬 가지인 모양으로 1980년대 미국 영화 Top Gun을 보아도 거의 비슷한 것이다. 여자들이 그 조종사들을 그렇게 멋지게 본다는 사실이 미국 영화보다 우리가 훨씬 앞서 이 빨간 마후라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신영균, 최은희, 최무룡.. 이 세 최고 배우가 주름잡는 이 영화는 6.25 전쟁 당시 강릉 공군기지를 무대로 펼쳐지는데 나도 당시의 느낌을 고스란히 간직한다. 강릉 공군기지는 나에게도 친숙한 이름이었고 그곳에서 ‘뜨는’ 공군 조종사들을 내가 9살 쯤인가 원서동 살 당시에 가까이 보기도 했다. 물론 그 조종사도 ‘여자’와의 관계로 더욱 우리에게 알려진 case라서 내가 갖는 이들의 playboy인상은 이 영화에서 재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100% 확실한 기억 속의 장면 중에는 최은희가 고급 술집에서 hostess로 아주 취한 상태로 ‘쉬~ 하러 간다’는 말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당시 고2의 나이에 이것은 아직도 기억에 남을 정도로 erotic하게 들렸다. 또한 크리스마스 파티가 끝나고 그룹의 조종사들과 여자들이 모조리 good night ladies’ kiss를 같이 하다가 비행단 최고 상관인 ‘박암’이 자동차 headlight를 키며 노려 보자, 신영균이 그가 누군지도 모르고 ‘이노무 새끼..’ 하며 다가가는 장면.. 50년이 되었지만 생생한 기억들이다.

당시 F-86 조종사들은 아마도 군인들 중에서 최고 ‘엘리트’ 급에 속했을 듯 하다. 왜냐하면 영어에 능통을 해야 미군들에 의해서 훈련을 받는데다가 비행기를 이해할 정도면 rocket scientist는 아니더라도 대학졸업 정도는 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군인들 중에서는 최고의 선망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물론 신영균, 최무룡 급의 미남들을 아니었어도 그것이 큰 문제가 되겠는가.. 하늘을 나르며 조국의 지킨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멋진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을 것 같다. 최소한 그 당시 이 영화를 본 나의 나이 또래는 그렇게 느꼈을 것 같다.

이 영화를 다시 본 느낌은.. 다 좋은데.. 끝 부분이 전체적인 ‘멋진 인상’을 구겨놓았다는 아쉬움이랄까.. 멋진 외국영화를 보다가 불현듯 ‘촌스러운’ 국산영화의 느낌으로 끝을 낸 것이다. 그 장면은 ‘한국적 정서’를 나타내려고 한 듯이 ‘죽은 신영균의 어머니, 한은진’ 이 조금은 부자연스럽게 불현듯 나타난 것인데.. 글쎄, 각본 때문에겠지만 이 장면으로 완전히 ‘멋진 꿈에서’ 깨어난 듯 느껴진다.

 

 영화 빨간 마후라, 1964

 

 

Snow Jam, 아틀란타 교통대란 2014

매주 화요일은 예외 없이 우리부부가 레지오 주 회합에 참석하러 30분 freeway 드라이브로 도라빌에 있는 한국 순교자 성당에 나가는 날이다. 주 회합이 끝나고 곧 이어 정오 미사에 참례한 후 부근 Korea Town에서 가끔 shopping 을 하거나 점심을 먹기도 하고 귀가를 하면 보통 6시 정도가 된다. 돌아올 때쯤이면 보통 rush hour에 ‘걸려서’ 30분 드라이브가 1시간 이상 걸릴 때도 있다. mass transit system이 거의 없는 아틀란타 Metro인 만큼 우리 집이 있는 곳이 지역적으로 Korea Town과 꽤 멀리 떨어진 탓에 별도리가 없이 치러야 하는 ‘세금’ 같은 것으로 여기고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얼마 전 화요일은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1시간이 아닌, 무려 19시간 걸렸던 인생 최악의 드라이브 경험을 한 날이 되었다.

 

운명의 날, 2014년 1월 28일 화요일 오전 11시 부터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 눈은 일기예보를 통해서 들었던 시간보다 훨씬 이른 것이었다. 그러니까 모두들 ‘안심하고’ 출근해서 그저 집에 조금 일찍 돌아가면 될 것 정도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까.. 문제는 모두들 학교나 직장에 있는 상태에서 시간보다 빨리 내린 눈을 만난 것이다. 이러한 ‘절묘한’ 시간문제 이외에 설상가상으로 당국(주정부, 시정부들)에서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집에 빨리 가라고 모조리 ‘풀어놓은’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하였다. 아무리 도로망이 잘 되어있어도 차들이 모조리 길로 나온다면.. 불 보듯 결과는 뻔~한 것이 아닌가? 이 당국자들은 하루 종일 ‘일기예보’가 틀렸다고 발뺌을 하기에 바빴다가 나중에는 그들이 예보를 잘 못 들었다고 어처구니없는 변명을 하기도 했다.

 그 비상 퇴근 시간이 점심시간이 바로 지난 때였고, 모든 도로망은 귀가하는 차들로 완전히 묶이게 되었는데.. 여기에 급강하하는 기온 (섭씨 영하 10도까지) 에 쏟아지는 젖은 눈..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교통대란이 시작된 것이다. 얼어붙은 도로에서 차를 그런대로 끌고 가려면 어느 정도 최소한 속도를 유지해야 하는데.. 거의 서있는 상태에서는 도저히 타이어가 traction을 낼 수가 없는 것이다. 더욱 불쌍한 것이 18 wheeler semi들.. 그러니까 tractor-trailer들, 그 공룡 같은 덩치의 고철들이 그런 상태에서는 조금도 전진할 수 없는 것이다.

I-285 west@Buford Hwy에서 시작된 19시간 드라이브의 시작

이때만 해도 모든 차들이 거북이처럼 움직이긴 했다

 

결과적으로 worst of worst.. 아틀란타 전체 도로망에는 각종 귀가 차량들이 끈끈이 주걱처럼 모조리 jam에 빠진 상태로 서있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최악 중의 최악이 아틀란타의 ‘순환도로’인 I-285 system이었는데.. 바로 그곳에 우리 차 Sonata도 갇혀 있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오후 3시에 출발한 우리 차는 다음날 아침 10시에 집에 도착을 해서 19시간의 귀가 드라이브.. 최악의 경험을 한 것이 되었다.

 그날 따라 성당에서는 연도와 그에 따른 점심회식이 있었던 탓에 더욱 늦게 출발을 해서 I-285를 타고 보니 그곳은 거의 parking lot으로 변해 있었지만 그런대로 거북이처럼 조금씩은 움직였다. 비처럼 뿌려대던 진눈깨비가 떨어지는 기온으로 길은 조금씩 빙판으로 변하기 시작하고 차는 비례해서 더 거북이처럼 기어서 밤 9시경에는 Powers Ferry Road exit 까지 갔지만 그곳에서 모든 차량이 완전히 서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집에 혼자 있을 Tobey(dog)와 Izzie(cat)이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서서히 그 ‘놈’들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신변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차의 gas는 거의 바닥이 나고 길은 완전히 주차장으로 변한 상태에서 수많은 차들이 버려지기 시작하고 깜깜한 밤은 무섭게 얼기 시작하고.. 나 혼자가 아니고 연숙도 같이 있는 우리의 차 속은 조금씩 공포감이 휩싸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100% 완전히 정지 된 I-285 traffic

 

이제는 별 도리 없이 정지된 차 속에서 떨며 밤을 새우게 되었다. 1/4 정도의 gas로 출발한 우리 차는 이제 E(empty) 에서 떨고 있어서 gas를 아끼기 위해서 engine을 끄니 추위가 엄습을 해서 잠도 오지 않았다. 주위를 보니 모든 차량들이 우리와 마찬가지였다. 시동을 끄고 쥐 죽은 듯이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차를 ‘버리지’ 않고 그저 ‘구원군’만 기다리는 상태였다. 처음에는 우리도 차를 버리고 ‘걷자’는 생각을 했는데.. 도저히 엄두가 안 난 것이 주위가 평지가 아니라는 사실과 깜깜한 밤이어서 정말 신변에 위험을 느낀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아마도 가까운 곳에 보이는 건물들.. 호텔.. 주유소 같은 곳으로 간 모양이었지만 우리는 그것도 엄두가 나지를 않았다.

 

아틀란타에서 가장 복잡한 freeway가 차들로 100% 주차장으로 변한 얼어붙는 한밤중의 광경은 그곳에 있어본 사람이 아니면 상상이 가지 않을 듯 하다. 배 고픈 것도 잊었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제일 급한 것이 bathroom문제였던 것이다. 남자는 그런대로 문제가 없지만 여자들은 정말 골치 아픈 문제였다. 그 많은 차들의 여자들..어떻게 해결을 했을까… 나의 옆에 타고 있던 연숙도 정말 고민을 많이 했을 것이지만 한마디로 별 choice가 없이 해결은 해야 했다. 이런 것들로 며칠 동안 수많은 벼라 별 일화들이 website에 등장하기도 했다.

 시동이 꺼진 차에서 무섭게 추웠던 밤을 지새는 기분은 기가 막혔지만 별 도리가 있겠는가? 제설차 준비가 거의 없는 이 지역에서 재빨리 소금을 뿌려대는 구원군이 그렇게 빨리 올 리가 없었다. 동이 트고.. 주위를 둘러보아도 고요하기만 했다. 모두들 그저 그저 기다리는 모양.. 그러다가 최소한 밝은 밖을 보니 ‘걸어가자’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사실 그런 사람들이 주위에 보이곤 해서 희망을 갖고 생각을 해 보았다. 우리가 발이 묶여 있던 곳에서 우리 집까지는 최소한 10 mile 이상은 되어서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빙판으로 변한 언덕을 걸어가는 것은 장난이 아니었다. 우리와 같은 쪽에 사는 레지오 단원 자매님은 우리보다 먼저 출발을 했지만 역시 어떤 hotel 근처에서 차가 묶여서 그 hotel에서 밤을 지냈다고 했다. 최소한 편한 잠을 잤을 것이다. 그래서 만약에 걸어가면 그 hotel로 갈 것으로 정했다.

 

하지만 차를 버리는 것도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차를 가지러 와야 하고 안전문제도 있지 않은가? 가급적 차에서 버티고 있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었다. 이런 저런 고민을 하다가 아침 9시경이 되었다. 그런데 앞 쪽에서 무슨 큰 트럭 소리들이 나기 시작하고 우리 앞 쪽의 차들이 거북이처럼 움직였다. 드디어 소금을 뿌리는 트럭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면서 거북이 속도로 전진을 해서 나아가니.. freeway는 정말 가관이었다. 움직이는 차들이 거의 없이 길가는 완전히 버려진 차들로 즐비한 것이다. 거의 텅 빈 고속도로를 우리는 가고 있었다. 아무리 빙판이 되긴 했지만 그런 상태에서는 운전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다. 집 앞의 주유소엘 오니 드리어 차의 gas가 바닥이 났다. 한마디로 기적이었다. 집 앞에는 엄청난 비탈들이 있었지만 역시 차들이 없으니 큰 문제가 없었다. 최소한의 momentum만 유지하면 암만 미끄러워도 control에는 큰 문제가 없는 것이다.

 

집에 들어오니 아침 10시가 되었다. 모든 곳에 잠잠한 고요한 아침이었다. 다행히 두 마리 pet들은 잘 견디고 있었고.. 우리는 ‘궁전’처럼 느껴지는 home sweet home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되었다. 이때처럼 침대의 편안함을 실감한 적은 반생을 살면서 거의 없었다고 할까.. 비록 천재라고는 하지만.. 사람이 만든 실수도 무시할 수 없는 기억에 남는 하루가 되었다. 나중에 뉴스를 들어보니 우리가 경험한 것처럼 수 많은 각종 ‘해괴’할 수도 있는 이야기들이 난무했다. 무능한 해당 당국과 특히 담당한 사람을 막연히 믿는다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는 생각이라는 경험도 했다.

 이번의 ‘교통대란’의 주 원인은 물론 ‘절묘한 시간’에 도착한 얼어붙는 진눈깨비였지만 나머지는 모두 사람들이 만든 것이었다. 첫째는 공식적인 정확한 예보를 무시하고 서로 맞지 않는 지역예보에 의지한 것, 둘째는 주 정부를 위시해서 군소 지역 정부들(이것이 장난이 아닐 정도로 많다)이 ‘전체적인 상황’을 ‘무시’하거나 모른 상태에서 속수무책이었고, 모든 것이 거대한 자동차 도로망에 의존하는 아틀란타 수도권의 갖는 특성이 이런 2″도 안 되는 눈에 ‘완전히’ 무릎을 꿇었다는 뼈아픈 사실이다. 이런 상황이 다시 온다면.. 나는 freeway system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고 ‘동네 길’을 택할 것이라는 조금은 소극적인 생각과, 자동차 gas가 1/2 이하로 절대로 내려가지 않게 채우고 다닐 것을 ‘결심’하였다. 그리고 더 한가지.. bathroom kit를 차에 가지고 다닐 것도.. 굶는 것은 참아도.. ‘화장실’ 가는 것은 못 참지 않는가?

 

freeway를 벗어난 Cobb Parkway.. 길이 아닌 주차장으로 변했다

차를 버리고 걸어간 사람들로 길은 완전히..

추위, 상도동 종점의 고뇌

cold-jan-2014올해 겨울은 정말 춥다.  아~~ 고뇌.. 이 지독히도 오래된, 아득히 먼 옛날에 내가 자주 되뇌던 표현이 문득 되살아난다. 이유는 간단히 말해서.. 아주 쓸쓸하고 황량한 시베리아 같은 그 때와 같은 느낌의, 뼈 속 깊숙이 스며드는 추위를 느꼈기 때문이다.
정말 이런 느낌은 그 ‘때’ 이후 처음으로 느낀 것이다. 그것이 반갑기도 하고 춥고 쓸쓸하기도 하다. 여기서 말하는 ‘그때’는 거의 45년 전인 1960년대 후반이었고 그 ‘시베리아’는 연세대 재학 시 살았던 상도동 종점 부근이었다.

지금 내가 아틀란타 지역에서 느끼는 ‘연일 계속되는 지독한’ 추위는1 뉴스가 될 정도로 의외적인 기후현상이고 거의 25년간 이곳의 ‘전형적’인 ‘더운 겨울’에 적응이 된 탓에 지금의 지독히 추운 겨울은 바로 ‘그때’ 느꼈던 ‘고뇌’와 비슷한 느낌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지난 해에 발표되었던 북미주 장기 일기 예보가 정말 ‘까무라칠’ 정도로 적중한 것에 나는 놀라기만 한다. 일기예보과학이 참으로 발전을 한 모양이다. 그 예보에 의하면 서부를 제외한 전체 북미주 전체가 ‘더 춥고, 더 습한’ 그런 것이었는데 현재까지 거의 모두 맞고 있다. 이것으로 global warming 같은 ‘정치적’인 것과 연관을 시키는 것은 무리겠지만.. 과연 어떨까?

옛날 ‘그때’는 20세 전후의 팔팔한 젊음을 자랑하던 때였지만 우리세대들.. 6.25이후 잘 못 먹고 자랐는지 신체적으로 별로 건강한 편은 아니었고, 박정희 정부의 요란한 경제발전 소음은 요란했지만 그것에 비해서 ‘따뜻하고 편한’ 환경은 절대로 아니어서 지독한 서울의 매서운 바람은 정말 ‘고뇌’로 느껴질 수 밖에 없었다. 요새 그 흔한 storm parka같은 것도 없었고 overcoat도 너무나 비싸던 시절..시베리아 성 서울의 1월 맹 추위는 정말 겨울중의 겨울이었다.

특히 데이트 같은 것이 늦어져서 시내버스 막차로 상도동 종점 (숭실대학 입구) 에 내려서 집까지 가는 골목의 맞바람 추위는 정말 대단해서.. ‘그때’ 내가 ‘즐겨 되뇌던’ 말이 바로 ‘아~ 고뇌’였다. 이 말을 ‘계속’ 해서 내 뱉으며 어둠 속의 골목길을 걸으며 집으로 향했던 ‘그때’였다. 그 집이란 것도 당시에는 중류층 수준이었겠지만.. 글쎄.. 연탄이 거의 전부였던 시절, 온돌방과 연탄난로의 난방은 사람을 거의 꼼짝 못하게 만들고, 따라서 이불을 깔고 백일몽을 즐기며 아름다움 추억의 씨를 뿌린 기억들 뿐이다. 하지만 그 느낌들은 지금 ‘절대로’ 재현할 수 없는 정말 아름다운 그런 것들이었다.

같은 추위에도 같은 느낌이 꼭 들까? 아닌 것 같다. 이곳 아틀란타 지역으로 이사오기 전까지 나는 거의 Midwest 지방2에서 살았기에 그곳의 진짜 무서운 눈과 추위를 고스란히 경험하였지만 그곳 추위의 느낌은 ‘절대로’ 서울 1월의 느낌과 달랐고, 지금 느끼는 아틀란타 지역의 느낌과도 다르다.

그 ‘북쪽’의 추위는 심리적으로 너무나 추운 겨울을 예상해서 그런지 느낌이 ‘고뇌’성 같이 괴롭지 않았다. 그런 추위에서 거의 ‘걷는’ 일이 거의 없고 지독히 절연된 난방 된 집과 차에 의지하며 겨울을 나면 별로 추운 느낌을 기억하지 못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현재 이곳의 ‘겨울 환경’이 아마도 1960년대 말 서울과 거의 비슷한 것은 아닐까..하는 재미있는 추리를 해 본다.

 

Bridge over Troubled Water – Simon & Garfunkel, 1970
classic oldie가 나의 당시 고뇌를 말해 주기도 했다.

 

  1. 최저 섭씨 영하 12도.. 최고는 빙점에서 오락가락..
  2. Illinois, Ohio, Wisconsin같은 모두 Big 10 지역

Davos, joy and surprise: 박근혜

 

 

나의 매년 1월은 크리스마스 ‘후유증’, 새해를 맞이하는 ‘고민’, 식구들의 생일과 결혼기념일, 가까운 친지들과 저녁을 함께하는 mid-Winter classic 등으로 다른 달에 비해서 조금 머리가 산란해 지기도 하지만 그 와중에 ‘항상’ 나를 즐겁게 하는 시간이 있으니 바로 연례 다보스 경제 포럼, Davos World Economic Forum(WEF)이다. 이 행사를 stream media로 보고 있으면 조금 과장된 표현으로 내가 흡사 ‘세계적인 인물’이 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그 유명인사들을 바로 옆에서 보며 이야기하고 토론하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 행사가 그래서 그렇게 매력적인가.. 아닐 것이다. 이곳을 통해서 일년에 한번 씩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가, 특히 경제적으로 변하는 세상을 피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눈으로 덮인 아름다운 배경으로 ‘멋지고, 힘있는’ 인물들의 열띤 토론과 행적을 보는 것.. 기분이 좋은 것이다.

올해의 forum은 나의 방심으로 며칠을 늦게 따라가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뜻밖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바로 대한민국 첫 여성 대통령,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녀.. 박근혜.. 감개가 무량할 수 밖에 없을까.. 나는 모국의 정치 풍토나 뉴스에 거의 무관심하게 살고 있지만 어찌 박근혜의 얼굴을 보고 감정이 일지 않겠는가? 우리 시절과 그렇게 가까웠던 (좋던, 싫던) 박정희의 장녀, 부모를 모두 정치적 비극으로 잃은 비극의 가족을 초인적으로 극복하고 아버지의 염원을 계승한 여성.. 참 자랑스럽다. 그 박근혜가 드디어 Davos에 한 나라의 원수 자격으로 등장하고 forum chairman과 일대일로 대담, 영어 연설을 하는 모습을 보니 코가 찡~해지기도 한다.

그녀의 영어 연설도 아주 ‘정석형’으로 잘 전달하였다. 약간의 Korean accent는 애교로 참 잘 어울렸다. 연설의 내용도 아주 직설적이고 호소력이 있었다. 그녀가 신봉하는 듯한 대한민국의 ‘발전 전략’, 거의 digital entrepreneurism에 관한 것인데.. 아마도 현 정권의 경제 청사진인 듯 들렸다. 100% 경제적인 주제의 연설이었지만 연설 후 사회자, forum 의장 (Dr. Klaus Schwab) 과의 대담에서 그는 빼놓지 않고 ‘북한 문제’를 꺼내었고, 박 대통령은 조금은 ‘판에 박힌 듯’한 (너무나 정치적이라서?), 예상적인 대답을 하였다.

1968년 1월 21일, 김일성의 김신조 무장공비 31명이 ‘박정희의 목을 따러’ 청와대로 침입한 것을 박근혜 씨는 기억을 하고 있을까? 1974년에는 김일성이 사주한 재일교포 빨갱이가 자기 어머니를 죽인 것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을까? 빨갱이들이 (심지어 천주교 계까지) 득실거리는, 완전히 갈라진 현 대한민국..그녀는 어떻게 이런 문제들을 헤치고 나아가 그녀의 아버지의 이름을 제자리에 갖다 놓을 것인가.. 참 나의 머리도 복잡해진다.

나의 첫성탄 12일..

My first ever, 12 days of Christmas.. 제목은 거창하지만 글자 그대로 나는 인생 처음 12일간의 2013년도 성탄 시즌을 보낸 경험을 하였다. 여기서 12일은 성탄절부터 시작되어 1월 5일 경까지 계속되는 기간으로 세속적이건 종교적이건 전통적인 의미를 가지는 기간이기도 하다. 더욱이 12일 째인1월 5일은 우리 큰 딸 새로니의 생일이 있어서 더욱 이 성탄 12일에 의미가 실린다.

‘상업적 소비자 문화’ 가 뿌리를 잡기 훨씬 전에는 이런 성탄 이후 12일 간의 기간이 더 의미가 있던 기간이었다. 그것이 ‘성탄 기분을 이용한 상업주의’ 가 성탄 훨씬 전부터 ‘북을 치기’ 시작해서 성탄절 그날 모든 것이 끝을 내는 괴상한 유행이 완전히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이런 것들이 올해는 견디기 힘들게 괴로웠다.   이번 성탄시즌은 글자 그대로 ‘탈 세속적’으로 보내려고 노력을 했던 기간이었다. 이렇게 보낸 것은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의도적인 측면이 많았다.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다는 ‘차분한, 의미 있는’ 크리스마스를 나는 그 동안 갈망했는지도 모른다.

성탄시즌이 오면 나는 사실 기분이 쳐지는 것을 많이 경험하였고, 이것이 바로 ‘세속병’일 것이라는 의심도 많이 해왔다. 그저 가족적 선물교환이나 휘황찬란한 shopping mall, 일년의 나라 경제를 좌우하게 된 미친듯한 상업성.. 한마디로 지겨웠다. 그 중에서도 나를 제일 괴롭힌 것은: 점점 이른 ‘성탄 경기’의 시작과 12월 25일이 지나자 마자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일 순간에 모든 ‘성탄 열기’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런 것들 때문에 나는 12월 달이 점점 싫어지기도 했다. 나이를 먹음을 느끼게 되는 연말연시의 냄새까지 곁들여서 더욱 싫어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무언가 너무나 잘 못 되었음을 절감하게 되고, 그것을 올해 성탄시즌은 ‘계획적’으로 바꾸려고 노력을 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까지 holiday season을 심각하게 보내려는 것은 조금 지나친 것 같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심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올해 나의 목표는 ’12일간의 성탄절’.. 성탄절 거의 2달 전부터 떠들어대는 모든 잡음을 ‘절대로 무시’하고, 성탄은 성탄의 의미로 12월 24일 밤 미사로 부터 시작해서 12일 정도 더 축하하며 지내기로 했다. 이것은 거의 ‘반 세속적’인 것으로 힘들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100% 성공을 거두었고 이제는 no turning back의 각오로 앞으로도 계속할 것을 다짐하게 되었다.

성탄절 불과 며칠 전에야 Christmas tree가..
성탄절 불과 며칠 전에야 Christmas tree가..

이런 나의 의도를 처음에는 가족들이 의아해 했지만 나중에는 체념을 하고 이해를 하는 듯 했다. 제일 큰 문제가 Christmas tree를 언제 장식하느냐 하는 것이었는데.. 평소에는 12월도 되기 전에 했지만 올해는 아슬아슬하게, 의도적으로 성탄 3일 전에야 세워 놓았다. 그것도 아주 조그만 것으로.. 이런 장식물들은 또한 의도적으로 거의 1월 중순까지 유지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새해가 되기도 전에 쓰레기 버리듯 치워버렸지만 나는 그것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성탄절 이전의 축제분위기를 거의 없앤 대신에 교회력 ‘대림절’의 의미를 찾으려고 애를 썼는데.. 주변의 분위기가 변한 만큼 효과가 적지 않았다. 감상적인 carol을 가급적 피하였고, 대신 성탄 주제의 가족적인 movie들을 보기도 했다. 인간은 역시 오감에 너무나 좌우됨을 이번에 실감하게 되었다. 성탄의 진정한 의미는 의외로 간단했다. ‘사랑’이었다. 그것을 왜 그 동안 그렇게 모르고 살았을까? 의외로 의미 있는 성탄 영화들이 꽤 있었고, 거의 모두 Youtube에서 찾았다. 그 중에 3편은 이번 성탄시즌에서 최소한 10번 이상을 공부하듯이 보았다.

모두 대주제는 성탄의 진정한 의미는 ‘천상적인 사랑.. agape‘임을 보여 주는 것으로 아마도 내년에도 같은 식으로 10번 이상 다시 보게 되지 않을까? 세파에 휩쓸리고, 깊은 생각 없이 남들을 쫓아가고, 주위의 인정을 받으려고 생각도 하지 않고 살아온 지난 날들을 생각한다. 왜 그렇게 살았는지도 사실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것이 올해 나는 무슨 ‘신들린 듯’ 진리를 찾게 된 것이다. 이런 나의 노력이나 변화가 그저 우연일까.. 아마도 아닐 것 같다. 두드리면 열리는, 찾으면 찾아지는 그런 진리일지도 모른다.

 

성탄 12일에 즐기며, 공부하며 보았던 Christmas 영화들

 

The Christmas Box

Richard Thomas, Maureen O’hara 주연의 이 family movie는 1980년대의 비교적 오래된 영화이지만 주제는 불변의 진리인 ‘성탄은 사랑’이라는 것을 주인공인 Thomas가 빌려 사는 으리으리한 저택의 여주인인 O’hara로부터 배우게 되는 과정이다. ‘성탄이란 과연 무엇이냐?’ 라는 간단하고 바보스러운 질문에 곤혹을 치르지만 결과적으로 딸을 가진 가장으로서 이 성탄의 진리를 찾아내는 감동적인 storyline.. 6번 정도 볼 때에 나도 그 수수께끼를 찾게 되었다.

The Christmas Wish

역시 1980년대 holiday family movie로 뉴욕에 거주하는 어떤 일류대학 출신 앞날이 밝기만 한 청년이 성탄 즈음에 조그만 고장 고향을 찾았을 때 자기의 할머니 성탄절 소망에 대한 얘기를 받아들여 서서히 자기 가족의 비밀을 알게 되며 성탄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가히 감동적인 이야기이다. 역시 ‘성탄은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The Christmas Hope

비교적 최근 영화, 10여 년이 조금 넘은 것이지만 역시 ‘성탄은 사랑’이라는 주제다. 비극적인 사건들을 통해서 알게 되는 눈물을 자아내는 사랑을 향한 이야기들.. waitress로 일을 하며 singer가 되려고 애를 쓰는 어떤 single mom, 성탄 며칠 전에 교통사고로 죽고 홀로 남은 ‘밝기만 한’ 어린 딸.. 아동보호 시설 담당자 여자가 임시로 맡게 되지만 그녀 역시 얼마 전 교통사고로 10대 아들을 잃은 고통으로 시달리는 입장이다. 그런 고통으로 거의 이혼 직전까지 갔던 그 부부는 기적적으로 그 엄마를 잃은 어린 딸을 자기집으로 입양하기로 비장한 결정을 하며 성탄전야를 맞는다. 사랑을 잃었지만 결국은 더 큰 사랑을 찾는 것.. 이것도 ‘성탄은 사랑’이라는 진리를 보여준다.

A Christmas Without Snow

이 영화는 1980년대 초에 나온 것으로 나는 아주 오래 전에 이미 TV에서 본 적이 있었고, 그 이후 다시 보고 싶었지만 잊고 살았다. 이번에 우연히 Youtube에 나온 것을 보게 되었고 이제야 ‘확실한 줄거리’를 알게 되었다. 그 옛날에 잠깐 보았을 때의 기억은, 교회 성가대를 지휘하는 ‘고약한 성질’의 할아버지와 성가대 대원간의 갈등 정도였다. 제목부터가 요상해서 ‘눈이 없는 성탄’.. 이것은 무슨 의미를 주는 것일까? 간단히 말해서 주인공인 이혼녀가 눈이 강산처럼 싸이는 Nebraska주에서 눈이 전혀 없는 San Francisco로 이사를 와서 맞게 되는 성탄절 풍경을 그린 것이다. 사실 눈 보여야 성탄절 영화..라는 공식을 완전히 깨어버린 영화가 되었고, 특이하게 교회(신앙)를 배경으로 ‘성가대’가 주제가 된 것도 특이했다. 성가대 지휘자인 John Houseman은 당시 The Paper Chase란 영화로 인기가 있던 원로급 배우로서 나도 참 좋아했다. 또한 여기 성가대원으로 나오는 ‘동양 여자’는 각본에 한국인으로 나오는데.. 배우 이름도 Kim이었다. 문제는 first name인 Daisietta였다. 한국출신 여배우라면 이런 이름은 너무나 생소하다. 과연 이 배우는 한국출신일까.. 이 영화에서 그것이 나의 주 관심사가 되었다.

 

훌~쩍 지나간 2013년..

그렇다.. 훌~쩍 2013년이 사라졌다. 아까운 느낌도 들지만 예전처럼 그렇게 연연히 더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아마 희망적으로 새로운 이경우의 모습이 되기를 바란다. 지난 것, 지나가는 것을 조금 더 건강하게 생각하고 간직하고 ‘즐기자’. 예년 매년, 이맘때면 겪는 야릇한 고통의 느낌, 아련히 느끼는 외로움..등등 이런 기분이 항상 기분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주위의 사람, 연숙에게는 괴로운 나의 우거지 상 일지도 모른다.

올해, 아니 지나간 성탄 시즌.. 그렇다.. 나는 작은 ‘금자탑’을 세우며 건강한 ‘축제시즌’을 만들고 보냈다. 나는 자부한다. 올해는 나의 근대사에서 한 획을 긋는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사실.. 거창한 듯 들리지만 사실은 웃기게 왜소한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성탄을 느끼고 지낸 2013년 성탄절이었다.

왜 이번에는 그렇게 유별난 생각을 했을까? 이것도.. 이것도..it’s now or never의 맥락이다. 나의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전에도 있었을 것이지만 그저 ‘실행’을 못했을지도 모른다. 진정한 의미의 성탄이란 무엇이었을까? 11월 중순부터 요란한 carol과 그것에 대한 추억, 감상에 젖으며 대림절을 지내고 막상 성탄이 가까워 오면 나는 거의 겁을 먹은 상태로 stress를 받는다. 성탄절 바로 그날로 모든 것이 완전히 깜깜하게 꺼지는 듯한 이 세속적인, 상업적인 축제분위기와 문화들에 나는 지쳐가고 있었다. 제일 무서운 것이 바로 12월 25일 저녁이면 ‘완전히’ 사라지는 성탄의 분위기.. 어떻게 세상이 그렇게 변했을까? 나는 완전히 100% 세속적인 성탄을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올해는 이것도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각오를 단단히 하고 진정한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생각하며 ‘건강하게’ 준비를 한 기분이다. 우선 축제의 분위기를 진정한 의미의 종교적인 일정에 맞추려고 노력을 해서 나라니의 냉소를 참아가며 크리스마스 며칠 전에 tree를 장식하였고 carol같은 것도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즐기기 시작하였다.

더 큰 각오는.. 성탄절을 교회의 전례에 따라서 최소한 Epiphany까지.. 그러니까 12 days of Christmas를 따르기로 했고, 더 나아가서 진짜 가톨릭 관례대로 예수세례축일 전까지 지키기로 한 것이다. 이러한 ‘피상적’인 것들 모두 성공을 하였다. 나는 크리스마스 날 부터 모든 ‘성탄절’의 것들을 즐기기 ‘시작’한 것이다. Youtube에서 가정적인 영화들을 download해서 즐겼고 오늘까지도 즐기고 있다 너무나 너무나 생각할 것을 많이 주는 영화들..

그러니까 이것이다.. 성탄이란 ‘사랑’인 것이다. 의미는 100%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표현인 것이었다. 65 평생에 처음으로 이것을 가슴속으로 느끼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대림절과 성탄절이 아닐까? 이제.. 이제.. 내년부터는 자신이 있다 절대로 holiday stress에 시달리지 않으리라!

Guest Blog: 김인호의 조갑제 컬럼 3

제2차 경제위기가 다가오고 있다!

2014.01.10

우리나라를 먹여 살릴 첨단과학기술교육기관이 되라고 국민세금으로 지원해 주고 있는 KAIST 금융전문대학원에서조차도 그 머리 좋은 잠재인재들을 모아다가 이 파생금융상품을 전공하는데 대부분 매달리게 하는 꼴을 보면 참으로 기가 차고 아연실색해지기도 한다.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긴급경보: 2차 금융핵폭발(核爆發) 임박!

 필자는 2008년 이명박(MB)정부출범 바로 이틀 후인 2008년 2월 27일에 한국경제신문에 ‘파생상품에 대하여 주목하는 이유’라는 칼럼을 그리고 2013년 5월 14일 인터넷경제지 데일리안에 재차 ‘파생금융상품 망국론’이라는 칼럼을 통해 파생금융상품의 사기성을 지적하고 그 위험성을 경고한바 있다.

물론 2008년 필자의 경고성칼럼에 대해 관심을 두는 이는 별로 없었으나 경고 후 7개월 뒤 9월에 월가붕괴(Wall Street meltdown)라는 금융 핵폭탄(核爆彈)이 터졌고 그 낙진(落塵)피해는 5여 년이 지난 지금도 세계 여러 곳에서 여전히 심각할 정도이며 더 심각한 것은 2008년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초강력 파생금융시한폭탄이 찰각찰각 폭발을 향해 재빠르게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를 알리기 위해 2013년 5월 필자가 두 번째 경고성 칼럼을 썼던 것인데, 6개월쯤 지난 11월에 조선일보와 하나은행 사보에서 금융파생상품에 대한 특집을 통해 한국의 파생상품시장이 너무나 왜소하여 이대로 가다간 한국금융이 도태될 것이라는 우려와 경고에 가까운 입장을 피력하면서 이제부터라도 금융규제를 확 풀어서 파생금융시장을 키워야 한다는 기괴한 논리를 펴는 것이었다.

이는 아마도 금융파생상품을 염두에 둔 듯한 그간의 주장들, 특히 이제부터는 수출중심의 제조업대신에 규제를 확 풀어 관광, 교육, 의료, 소프트웨어와 금융을 함께 묶어서 내수중심의 서비스산업을 키워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 먹고 살자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이명박 정부의 출범 때와 마찬가지로 박근혜 정부 출범초반에 또다시 펴는구나 하는 의구심을 갖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박근혜 정부 출범초반에 맥킨지(McKinsey)는 성장공식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한국이 이제는 규제를 확 풀어서 금융선진화를 이루고, 금융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바 있는데 이제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 조선일보와 하나은행에서 특집을 꾸민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불쑥 들었던 탓이다.

더욱이 2008 월가붕괴 직전에 한국산업은행으로 하여금 리번 브라더스를 인수케 하려는 획책을 꾀했던 세력이 있었던 사실이 떠오르며 결국 외국금융사와 컨설팅사들이 한국에서 파생상품시장을 키워 한탕 하려는 숨은 의도가 있는 게 필자의 눈에 보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추론은 맥킨지의 비(非)전문성을 제대로 간파 못하고 오랫동안 그들의 컨설팅을 받아 오다가 낭패를 맛본 LG가 ‘맥킨지, 말만 들어도 치가 떨린다.’는 자극적 반응에서도 확인될 수 있었다. 그런데 LG의 이런 반응은 우리나라로 봐서는 시기상 절묘하게도 다행한 일이라 여겨졌다. 왜냐하면 박근혜정부가 출범한 절묘한 시기에 맥킨지를 앞세운 경제정책결정 근처에 있는 관료와 언론인과 정치학자(polyfessor)들이 여기저기서 서비스산업을 키워서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밑도 끝도 논거도 빈약한 말을 입에 올리는 꼴이 눈에 뜨일 뿐만 아니라 서비스라는 말에 담긴 금융서비스에는 필히 파생상품이 숨겨있음이 보이기에 말이다.

필자는 이런 배경에서 파생상품기사를 다룬 조선일보 기자에게 연락을 했더니만 자본시장연구원의 모 박사가 쓴 것이라며 뺑뺑이 돌리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 기사의 내용에 대해 일체의 정보를 제공했다는 그 모 박사에게 연락하여 미안하지만 금융파생상품에 대해서 뭘 좀 아느냐고 했더니만 자기네 연구원엔 파생상품전문가 여럿이 한 팀을 이루어 파생상품을 연구하고 있지만 솔직히 잘 모른다는 답변이었다. 필자는 이분들의 무지를 지적하고자 함이 아니지만 어떻게 모르면서 그런 기사를 다루는지에 대해 새삼 놀랐다.

허긴 우리나라를 먹여 살릴 첨단과학기술교육기관이 되라고 국민세금으로 지원해 주고 있는 KAIST 금융전문대학원에서조차도 그 머리 좋은 잠재인재들을 모아다가 이 파생금융상품을 전공하는데 대부분 매달리게 하는 꼴을 보면 참으로 기가 차고 아연실색해지기도 한다.

그러면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한마디로 금융전문가라는 분들조차도 금융파생상품에 대해 별로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파생상품에 대해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알려고도 하지 않고 그냥 아는 척 하는 사이비가 되다 보니 미국 금융계에서 행해지고 있는 대로 우리도 따라가면 되는 줄로 알 수밖에.

주식투자나 채권투자는 기본적으로 실물(實物)에다 투자하는 것인데 반하여 파생금융상품은 미래가치나 약속이라는 허상(虛像)에 투자할 수 있게 1980년대 초반 레이건 정부에서 허용한 법적투기(legal bet)다. 이는 마치 어떤 이가 여행을 하면서 주말에 어느 축구팀이 승자가 될 것인가에 대해 투기하는 것이나 앞으로 이자율이 어떻게 변동할 것인가에 대해서 투기하는 것이나 이후 어느 금융기관이 채무불이행할 것인가에 투기하는 것이나 심지어는 앞으로 물가지수나 주가지수나 날씨가 어떻게 변할 것인가에 투기하는 것과 똑같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성격의 완벽한 투기다.

사이비 금융전문가 중엔 파생금융상품에도 순기능이 존재한다고도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 역시 무지에 기초한 억지다. 그들은 파생금융상품은 위험을 사고 팔 수 있게 해줌으로 경제에 유익을 주는 순기능(virtuous circle)도 있다고 주장하지만 최초(最初)의 선물(先物) 이후의 파생금융상품은 ‘나의 위험을 더 큰 위험을 감수하면서 더 큰 수익을 기대하는 상대방’에게 전가하는 투기도구로서 본질상 다음과 같은 문제를 안고 있는 역기능의 투기수단일 뿐이다. 

 

(1) 파생금융상품은 본질적으로 제로섬의 비생산적 활동이다. 따라서 실제로는 그 유지비용만큼은 항상 국가경제에 부담을 주는 negative-sum의 비생산적 활동이다.

(2) 위험관리의 이론적 기초인 재무 포트폴리오 이론(portfolio theory)에 의하면 분산투자를 통해서 관리가 가능한 위험은 체계적 위험(systemic risk)과 비체계적 위험(un-systemic risk) 중에서 비체계적 위험뿐인데 파생금융상품의 경우 전 세계적으로 몇 개의 상위 글로벌 금융기관에 집중되어 있어 거기에서 오는 체계적 위험(systemic risk)은 이론적으로도 실무적으로도 도저히 관리할 방법이 전무(全無)한 금융상품에 불과하므로 위험을 헤지(hedge)해 주는 금융상품일 수가 없다.    

(3) 위험을 쪼개서 파는 파생상품의 특성상 팔고 사는 과정에 미결재 부채(outstanding debts)가 계속 연결되기 때문에 시장에서 약간 사기를 치거나 시장을 조작하거나 가격을 소폭 교란시킬 경우일지라도 연결고리를 타고 투자자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대량살상 재무무기(financial weapon of mass destruction)로 작용하여 엄청난 파국을 초래할 수 있는 투기상품이다.

(4) 돈이 일단 파생상품시장으로 흘러 들어가면 절대로 빠져 나오지 않는 불랙홀(black hole)로 작용하여 실물경제는 점점 줄어 들게 되고 그래서 결국은 경기침체나 공황을 초래할 수 있다.

 

파생금융상품은 한마디로 zero-sum인 도박이며 그 시장을 유지하는데 소요되는 비용만큼은 사회에 부담을 주는 negative-sum의 도박수단이라는 점과 도박은 도박인데 다른 도박들과는 달리 크게 문제될 수 있는 건 그 엄청난 파생상품시장규모와 파생상품거래의 불안정성이 엄청나다는 점이다. 파생금융상품은 1980년대부터 조금씩 선을 보이다가 1997년부터 급작스레 급증하면서 월가는 그간 누구든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면 그 어떤 것에든 투기하는 거대한 카지노(Casino)장으로 바뀌어 버렸고 그러다가 드디어 2008년 월가붕괴를 맞았던 것이다.

2008년 월가 붕괴 당시 미국의 GDP는 11조 억불임에 반하여 파생상품의 미결재 부채규모는 263조 억불로 GDP의 25배가 넘는 규모에서 2008 미국 발 월가붕괴가 터졌고  그 충격은 곧 지구촌 전역으로 그 폭발 피해를 증폭시켜갔던 것이다.

2008 월가붕괴 후 파생금융상품문제는 일단 리먼 브라더스(Lehman Brothers)하나의 희생양으로 외형적으로는 일단락된 듯 했지만 세계최대 보험회사인 AIG도 바로 이 금융파생상품투기에 걸려들어 파산지경과 다를 바 없는 상태가 되었고 MF Global 실패와 60억불을 날린 JPMorgan Chase의 경우도 다 파생상품으로 생긴 사건 사고였다. 최근 국내에서 터진 금융권 사고들, 예컨대 무슨, 무슨 저축은행, D그룹 H그룹의 금융파탄사건, 모 증권사의 파산, 유수그룹 회장단들의 비자금사고 등등은 모두가 파생상품과 직간접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아는 이는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2014년 현재 초강력 시한폭탄으로서 파생금융상품의 본질적 문제는 2008년 이후에도 계속 지속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더 심각한 것은 2008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그 규모가 천문학적이라는 사실이다. 즉, 2013년 12월 현재 US의 GDP는 15조억불인데 파생상품시장규모는 660조 억불로서 GDP에 대한 배수가 44배로 2008년의 25배보다도 엄청 커졌다는 사실이다. 한편 전 세계적으로도 파생상품시장이 1,500조 억불로서 GDP 70조 억불의 20배가 넘다 보니 한번 삐끗하면 글로벌 전체를 날려버릴 핵폭탄임을 절감케 하며 그 폭발장소는 역시 미국이 될 것임을 쉽게 알게 해준다.

파생금융상품의 폭발가능성에 관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점은 바로 실물이 아닌 허상에 대한 엄청난 규모의 93%가 미국 상위 4개 금융기관에 의해 자행되고 있으며 미국산업의 81%가 파생금융상품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잠시 미국 상위 4개 은행의 실상을 들여다보자.

이 들은 아마도 대마불사(大馬不死) 신화를 신봉하며 무모한 투기를 계속 가속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법이 만들어져 규제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이들은 미국경제 전체는 물론 글로벌 경제전체를 집어 삼킬 정도로 무모한 투기를 아무 제약 없이 지속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으며 2008년의 경우보다 훨씬 더 악화 일로에 있어 이제는 마치 암이 몸 전신에 퍼져 암을 죽이려면 몸 전체를 죽여야 하는 수준에까지 다다른 양상이 되었다. 

The Comptroller of the Currency에 의하면

  1. JPMorgan Chase는 1.8조 억불 자산에 파생상품 69조 억불로 허상인 빈 껍데기가 자산의 38배이며
  2. Citibank는 1.3조 억불 자산에 파생상품 52조 억불로 자산의 40배이고
  3. Bank Of America는 1.4조 억불 자산에 파생상품 44조 억불로 자산의 31배이며
  4. Goldman Sachs는 0.11조 억불 자산에 파생상품 41조 억불로서 자산의 372배다.

이들 숫자를 보면 직감적으로 턱이 빠질 지경의 한계에 가까워졌다고 느껴진다. 특히 골드만색스는 밑이 까마득하게 보이는 고공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형상인데 머지않아 곧 일을 낼 것 같은 직감이 든다.

결국 파생금융상품이 일을 낼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다만 그 시기가 얼마나 빠를 것이냐에 대한 논란만이 있을 수 있을 뿐 글로벌 패닉을 초래할 초강력 금융핵폭탄임에는 틀림없고 머지않아 폭발이 임박했음도 부정할 길이 없다.

필자는 국부(國富)창출과 이익(利益)추구와 관련하여 다이나믹 매니지먼트(Dynamic Management)라는 새로운 경영패러다임을 주창해 오면서 어떤 경우든 혁신의 효과를 추구하지 않고 돈을 번다는 것은 결코 오래 갈 수가 없으며 혁신은 실물경제 특히 제조업(조립산업, 부품산업, 소재산업)과 건설업 중심의 산업구조 위에서 서비스산업이 고부가치화 될 때 일국의 경제체질이 강화된다는 점을 강조하여 왔다.

같은 맥락에서 혁신의 효과가 없는 금융서비스는 실물경제를 지원해주는 바탕 위에서만 금융업 본연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을 부여 받는다는 사실과 실물경제와 맞물려 돌아가는 금융경제가 아닌 금융활동은 결국은 거품만 키운다는 점을 강조하여 왔다.

그리고 더 나아가 경제운용과 관련하여 시장과 정부의 관계에서도 정부관여가 불가피하다는 케인즈(Keynes)의 주장과 시장에 전적으로 일임해야 한다는 하이에크(Hayek)의 주장은 보편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혁신효과의 유무와 그 강약의 견지에서 혁신효과가 큰 경우엔 시장에 맡기고 혁신의 효과가 미미한 경우엔 정부가 규제해야 한다는 관점으로 보강되어야 한다는 점을 또한 강조하여 왔다. 

이런 정책판단기준을 따른다면 외국 특히 미국에서 어떻게 하든 우리는 실물경제에서 니즈맞춤혁신(needs-focused innovation)으로 창조경제를 실현시키는데 전력해야 하며 금융선진화 금융전략산업화 금융허브육성이라든가 하는 실체가 없는 데에 힘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negative-sum인 파생금융거래는 즉시 전면 금지시키며 금융기관들을 엄격히 규제해야 한다. 

왜냐하면 일단 미국 발 2차 금융핵폭발이 터지면 아무도 그 엄청난 피해를 아예 피해 갈 길은 없겠지만 얼마나 핵폭발 반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느냐에 따라서 그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여 피해를 입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가 준거해야 할 중력법칙(gravity law)의 자연 질서로서 혜안을 지닌 사람들이라면 미리 예견할 수 있는 대목이다.

따 라서 이제부터 국내금융기관들의 경영 제1목표는 이익확대가 아니라 생존을 도모하는 일이며 생존을 추구하는 바탕 위에서 이익을 추구하는 경영지표가 추구되어야 한다. 적어도 머지않아 터질 파생금융상품의 폭발과 그 패닉이 지나갈 때까지는.

이것이 지혜로운 금융기관의 경영방식임을 금융인들은 미리 깨달아야 한다. 특히 주인이 없는 대형금융기관일수록 더 더욱 그러해야 한다. 지금은 글로벌 금융핵폭발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긴급경보가 발해진 상태와 전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미물인 개미도 태풍이 오면 미리 알고는 부랴부랴 대비하는 지혜를 발휘하거늘, 하물며 우리 인간들이 금융핵폭발을 미리 대비하거나 덜 피해 입는 지혜를 왜 발휘할 수 없겠는가? 우리 모두 선견력(先見力)이 요구되는 이 시대의 주역임을 잊지 말자!

메주고리예, Medjugorje 2014

메주고리예.. 비공식 성모님 발현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계속, 아직도 정기적으로 발현이 되는 곳이다. 1981년 6월 26일 첫 발현 후 현재까지 계속 이곳에 성모님이 발현을 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믿기 힘들 정도며 놀랍기만 하다.

내가 처음으로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을 안 것은 1989년 6월 인디애나 주 노틀담 대학(Notre Dame University, South bend, Indiana) 에서 열린 성령대회에 가족이 참가했을 당시 그곳 전시장에서 정말 우연히 보고, 구입하게 된 책, 메주고리예 발현 화보였다.

 

메주고리예 발현 화보, 1989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천주교 영세를 받은 지 7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모르는 것 투성이였던 시절.. 하지만 자세히 생각을 하니 1981년 경 뉴스를 통해서 들은 기억은 정말 희미하게 나는 듯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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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발현 당시 6 visionaries 들 모습

메주고리예의 위치가 공산권이었던 유고슬라비아 였기에 소련 연방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그곳의 소식이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소련이 무너지면서 순례자들이 그곳을 방문하면서 점점 자세한 소식들이 나오게 되었는데.. 나는 사실 그런 놀라운 발현 소식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성모발현’이란 것을 심각하게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3~4년 전부터 나의 신심적 르네상스를 거치며 비로소 나는 이 ‘믿기 힘든’ 성모발현을 믿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 과정은 조금 복잡했지만 간단히 말해서 지금은 이 성모님 발현이 나의 신심을 굳건히 지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나에게 사도 토마 같은 ‘의심’이 조금이라도 들면 나는 메주고리예 성모님을 생각하며 나를 달래곤 한다.

역사상 성모님 발현은 ‘수 없이’ 많지만 ‘공식화’ 된 중요한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 과달루페, 루르드, 파티마 같은 classic한 것은 교회에서 정식으로 인정된 곳이지만 그 외에도 ‘수 없이’ 많이 있고, 대부분 신빙성이 아주 높은 case들이다. University of Dayton에서 설치된 세계 마리아 학회의 website (Mary Page)를 보면 아주 매일 일기예보를 하듯이 전세계에서 보고되는 발현 소식을 ‘모조리’ 기록해 두고 있다.

medju-3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은 한마디로 놀랍기만 하다. 1981년부터 현재 까지 33년 동안 ‘계속’ 발현을 하기 때문이다. 성모님이 전하는 얘기는 한결같이 간단하고 성서적이다. 발현 목격자 중에 Mirjana 에게는 한번도 빠지지 않고 매달 2일에 발현을 하는데 이 발현은 비록 사적인 것이지만 미리 예고가 되었기에 많은 순례자들이 성모님을 못 보지만 같이 참석하고 있다. 이런 광경이 이제는 인터넷의 힘으로 편안히 집에서 같이 볼 수가 있지만.. 과연 어떨까.. 믿고 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일 것이다.

천주교 교리에 의하면 성모님은 비록 인간이지만 인간 중에서 아주 독특한 위치와 지위를 가지고 있다. 쉽게 말하면 성인 중에서 으뜸가는 성인이라고 할까.. 성모님의 그런 위치는 ‘전구자(우리의 기도를 예수님께 전하는)’의 역할을 하는데, 왜 그렇게 33년 동안 특별한 목격자들에게 계속 나타나는 것일까? 정식으로 인정이 보류된 상태에서 교회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지만.. 사실 그 이유(발현하는)를 나는 조금씩 깨닫게 되어가고 있다. 근래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그것이 아주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이곳에 보이는 비디오는 2014년, 주로  Mirjana에게 발현하는 성모님에 관한 것이다. 이런 비디오는 대부분 메주고리예와 가까운 이태리 순례자들이 주관해서 만드는 듯하고 여기 보이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이태리에서 온 듯하다. 발현이 끝나면 곧 이어서 성모님의 message를 각국어로 번역을 해서 발표를 하곤 한다.

 


2014년 12월 2일 메주고리예 성모님, ‘Mirjana,미르야나’에게 발현

 

 

2014년 10월 2일 메주고리예 성모님, ‘Mirjana,미르야나’에게 발현

 

“Dear children, with motherly love I implore you, love one another. May there be in your hearts, as my Son desired from the very beginning, love for the Heavenly Father and for your neighbour in the first place — above everything of this world. My dear children, do you not recognise the signs of the times? Do you not recognise that all of this that is around you, all that is happening, is because there is no love? Comprehend that salvation is in true values. Accept the might of the Heavenly Father, love him and honour him. Walk in the footsteps of my Son. You, my children, my dear apostles, you are always gathering around me anew, because you are thirsty. You thirst for peace, love and happiness. Drink out of my hands. My hands are offering to you my Son who is the spring of clear water. He will bring your faith back to life and purify your hearts, because my Son loves pure hearts and pure hearts love my Son. Only pure hearts are humble and have firm faith. I ask for such hearts of you, my children. My Son told me that I am the mother of the entire world. I ask of those of you who accept me as such to help me, with your life, prayer and sacrifice, for all of my children to accept me as a mother—so that I may lead them to the spring of the clear water. Thank you. My dear children, as your shepherds offer you the Body of my Son with their blessed hands, always in your hearts give thanks to my Son for the Sacrifice and for the shepherds that he always gives you anew. ”

 

2014년 9월 2일 메주고리예 성모님, ‘Mirjana,미르야나’에게 발현

 

2014년 8월 2일 메주고리예 성모님, ‘Mirjana,미르야나’에게 발현

 

2014년 7월 2일 메주고리예 성모님, ‘Mirjana,미르야나’에게 발현

 

2014년 6월 2일 메주고리예 성모님의 message

 

2014년 5월 2일 메주고리예 성모님, ‘Mirjana,미르야나’에게 발현

 

2014년 4월 2일 메주고리예 성모님, ‘Mirjana,미르야나’에게 발현

 

2014년 3월 2일 메주고리예 성모님, ‘Mirjana,미르야나’에게 발현

 

2014년 2월 2일 메주고리예 성모님, ‘Mirjana,미르야나’에게 발현
근래에 보기 드물게 ‘실내’에서 발현 하신 것이 특이하다

 

 

2014년 1월 2일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

12월 중순이 넘어가는 날

¶  12월의 중순이 완전히 넘어가는 날, 12월이 기울어가고 성탄을 코앞에서 기다리며 역사 속으로 사라지질 2013년,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었던 세월이었는지 조금씩 정리해야 한다는 심정이 나의 목덜미를 잡는다. 오래 전의 표현을 기억하면 ‘세모歲暮’라고 했던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한 해가 저물어가는 것을 표현한 그 말.. 참 느낌이 좋았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것이 과히 반갑지 않다고 느끼며 산 세월도 짧지 않았다. 숫제 그 ‘세모’란 것이 지나가지 못하게 붙잡고 싶은 간절한 심정도 많았다.

하지만 최근부터는 ‘의지적, 나아가 신앙적’으로 담담하게 느끼려고 안간힘을 쓰며 산다. 그러니까 조금은 편해진 기분도 느낀다. 어떤 현상이 자연적인 것이면 그것을 자연의 주인에게 맡기자.. 그것이 내가 보는 세상의 순리인 것이다. 순리에 너무나 도전하는 것.. 문제를 푸는 것보다 더 문제를 만드는 case가 얼마나 많았던가? 오너라, 세월아.. 지나가라 세월아.. 그것이 진리요 순리라면 얼마든지 편하게 받도록 노력을 하리라!

 

¶  올해의 초겨울 날씨 – 아직 공식적인 겨울의 시작, 동지가 이틀 남았지만 현재까지 보아서 올해의 winter season은 지극히 지극히 ‘고전적인 겨울’의 모습들이다. 체감으로 느끼는 추위의 느낌이 오래 전에 느꼈던 그런 겨울의 느낌인 것이다. 아틀란타 지역에 한정된 것인지도 모르지만 올해의 장기예보가 맞아가는 듯 하다. 평년보다 ‘조금 낮은’ 기온일 것이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지난 11월 중순부터 예년에 자주 입지 않았던 비교적 따뜻한 옷들을 입게 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비록 눈 같은 포근한 것은 없었어도 ‘겨울다운 겨울’ 은 너무나 신선하고 편안함을 주는 것이다. 이 지역의 추위는 사실 1월부터 3월까지가 진짜인데 이미 이렇게 싸늘했으니 그때는 과연 어떨까.. 지나간 여름이 너무나 시원해서 그에 맞는 따뜻한 겨울을 예상했는데 어찌된 일인가?

 

¶  레지오 남자들.. 레지오 마리애 남성 단원을 간단히 레지오 남자라고 부른다.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 올해는 이 단어가 자주 쓰이고 해서 조금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톨릭 교회 안에서 가장 막강한 조직력을 자랑했다던 레지오 마리애, 기도와 봉사를 목표로 군대처럼 모인 곳이다. 진짜 군대의 근처도 못 가보았던 내가 인생이 저물어가는 이때에 규율과 조직의 힘을 신선하게 느껴보며 살아간다. 이런 조직의 힘이 나에게는 생수와 피처럼 필요하다고 느낀다. 레지오 마리애가 나를 필요로 한 것 보다는 내가 ‘살아 가기’ 위해 더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교회내의 어느 신심단체, 조직들 정작 일이 필요한 곳은 거의 전부가 ‘여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니까 ‘자매님’들이 궂은일, 시간 걸리는 일을 떠맡고 있는 셈이다. 도대체 남자들은 어디에 숨어있는 것일까? 남자들 중에서도 제일 활동적일 수 있는 40~50대들.. 분명히 ‘먹고 살기 위해서’ 신심활동,봉사 등은 엄두도 못 내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60대는 어떤가? 그들도 먹고 살기 위해서 그런 것일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아마도 ‘즐기는데’ 너무나 바빠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하지만 내가 때늦게 절감, 통감한 교훈적 사실은.. 이러한 ‘높은 수준의’ 활동이 그들이 그렇게 시간을 쏟고 있는 경제,사회활동에서 시간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덤의 시간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진리’를 조금이라도 일찍 깨닫는 ‘형제님’들은 일단 ‘성공’한 삶을 살며 마칠 수 있다고 나는 진정으로 믿는다.

 

¶  의미 있는 Blogging의 절묘한 힘을 며칠 전에 ‘또’ 깨닫게 되었다. 가끔 찾아오는 이런 ‘절묘한 순간’들 때문에 귀찮더라도 계속 ‘쓰게’ 되나 보다. 간단히 얘기해서 내가 2년 전 여름에 불평의 마음으로 쓴 blog, ‘알피 램 생애를 읽으며’ 란 것이 인연이 되어서 연세대 전기과 동문을 알게 되었고 그 내가 불평했던 책의 새 번역본이 나오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레지오 마리애에서 신화적, 전설적인 인물인 ‘알피 램’의 전기에 해당하는 그 책의 첫 번역본은 너무나 실망적인 것이었고, 은근히 다시 써주기를 바라며 쓴 것인데 그것이 이렇게 기적奇蹟적으로 해결이 된 것이다.

게다가 새 번역을 한 사람이 바로 나의 연세대 전기과 ‘거의 동기’인 ‘김형기 스테파노’ 동문이어서 더욱 이채로웠다. 알고 보니 스테파노 동문은 1967년 가을학기를 나와 같이 공부한 것으로 밝혀져서 한참 반세기전으로 시간여행을 하며 그 당시를 추억하게도 되었다. 김 동문이 어떻게 레지오 마리애에 관한 책을 번역하는 입장이 되었는지 궁금하기만 하고 만약에 레지오 활동에 깊숙이 관여가 되었다면 서로 좋은 의견을 교환할 수도 있겠다는 상상적인 희망의 나래를 펴 본다.

 

친구 정교성의 성탄카드, 너무나 멋지다.¶ 일주일 전쯤.. 캐나다에 거주하는 오랜 친구, 중앙중고 동창 정교성으로부터 성탄 카드가 도착하였다. 이 친구는 내가 기억하는 한 거의 매년 이맘때쯤 카드를 보낸다. 비교적 일찍 보내는 것이다. 얼굴을 맞대고 본지가 수십 년이 되었지만 그저 늙어가는 모습은 쉽게 상상할 수가 있어서 큰 문제는 없다. 보고 싶다.. 보고 싶어.. 할 정도지만 일부러 그를 찾아 갈 여력을 찾지 못한다. 인연이 있으면 ‘죽기 전에’는 만날 수 있겠지 하는 정도다. 요새는 인간관계가 그렇게 정착이 되어간다.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친척, 친지.. 어찔할 것인가.. 나는 떨어져 있어도 마음만은.. 하며 생각하며 살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마음도 멀어져 감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는가? 어떻게 그렇게 되어갈까? 최소한 나는 가까운 마음을 간직하는데 상대방이 꼭 그렇지 않은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솔직히 말해서 슬프고 무섭기조차 하다. 고국에 있는 그렇게 다정했지만 긴 세월 떨어져 살았던 인생들.. 아예 나만의 상상으로 다정했던 세월들만 간직하며 나의 인생을 보낼까..

 

¶  갑자기 장례미사, 연도 소식이 잇달아 들어왔다. 작년 여름에 하루가 멀다하고 겪었던 장례, 연도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지만 올해는 비교적 조용한 편이어서 이대로 ‘무사히’ 올해를 보내나 보다 했지만 결국은 올해의 마지막 달, 어제와 오늘 연세대 이원선 도밍고 동문의 93세 어머님의 선종으로 연도와 장례미사가 잇달아 있었다. 이 동문의 어머님이 돌아가신 사실은 93세라는 나이도 있고 어느 정도 예측이 된 것이라 크게 놀랄 사실을 아니었지만 이 동문의 나와 비슷한 환경: 홀 어머님, 외아들 등등으로 나의 경험을 되새기며 하느님 품으로 가신 영혼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 동문의 어머님은 우리 어머님보다 2살이 아래였는데 육이오 전쟁에서 군인이던 남편을 잃으셨다고 했고, ‘강철같은 의지’로 4남매를 모두 대학엘 보내셨다고 고인에 대한 추억담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 당시에 그런 여건 (아버지를 잃은) 의 가정이 수도 없이 많았고 대부분 어머니들은 ‘뒤를 봄이 없이’ 자식들을 키워냈다. 그러니까 어찌보면 흔할 수도 있는 이야기들인 것이다. 하지만 하나 하나를 자세히 알고 보면 모두 다 다른 눈물겨운 이야기들이다. 그런 환경에서는 생존이 제일 우선이고, 나머지 것들은 사실 희생이 되어야 했다. 우리들은 가끔 그런 사실을 깜빡잊고 겉으로 보이는 모습(완고한, 고집불통) 만으로 불평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앞뒤를 잘 못보는 불공평한 논리인 것이다. 이원선 동문도 이제는 한 세대가 완전히 지나간 사실을 이번 어머님의 타계로 실감을 할 것이고 ‘자식의 입장에서 완전한 부모’의 입장으로 세상을 보게 될 것을 예상해 본다. 한 세대가 완전히 흘렀다. 다음은 우리들이 갈 차례인 것이다.

레지오 총 친목회가 끝나고..

¶  12Scan10035월 1일, 2013년도 레지오 총 친목회 (Legion of Mary, Reunion)가 2013년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절(Advent)의 시작과 함께 멋지게 어울리며 결과적으로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본당 내에서 2013년 12월 크리스마스 season의 막을 제일 먼저 올리는 역할을 해냈다. 12월 1일에 성탄의 공기를 느끼기에는 조금 이른 듯도 하지만 요새의 ‘세속적 secular, 상업적 commercial’인 흐름을 보면 그렇게 빠른 것도 아닌 듯 싶다. 이미 지난 주부터 크리스마스 carol이 흘러 나왔기 때문이고 Thanksgiving 날 부터 아예 shopping season이 ‘요란하게’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친목회 프로그램의 하나인 합창 공연에서 참가자 모두가 빨간 산타크로스 모자를 써서 더 그러한 성탄절의 기분을 풍긴 듯 싶다.

 우선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레지오 총 친목회는 결과부터 보면 예상보다 잘 치러 진 느낌을 받았다. 꾸리아에서 공식적이고 전체적인 review를 해 보면 더 자세한 것을 알겠지만 친목회의 진행이 비교적 매끄러웠고, 지루한 느낌도 거의 없었다. 참가자나 연기하는 단원들의 움직임이나 표정을 보며 그런 것을 나는 느꼈다. 아틀란타 지역 한인 성당이 2개로 나누어지며 필연적으로 꾸리아 소속 단원 수가 줄어든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서 참가자의 수는 아마도 예년에 비해서 ‘많이’ 줄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지역 쁘레시디움 (Columbus, Augusta 같은)에서 장거리의 불편을 무릅쓰고 참가한 것은 보기가 좋았고, 참가 단원들의 참여 태도는 ‘수우미양가’ 에서 아마 ‘우’에 속하지 않았을까?

나와 연숙1은 올해 꾸리아 level에서 이 행사를 직접 간접으로 관여하며 한가지 각오를 하고 임했다. 그것은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이 더 중요하고 의미가 있다” 라는 조금은 진부한 표현의 각오였다. 물론 결과는 충실하고 진지한 과정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너무나 결과에 집착하며 아무래도 모든 것들이 즐겁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친목회의 제일 큰 목적이 잘 모르는 단원들과의 친교 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친목회 자체는 불과 1~2시간 정도의 친교시간을 주기에, 도저히 그 자리에서 의미 있는 친교는 힘들다. 게다가 친목회 자리에서조차 평소에 모이고 있는 단원들끼리 모이게 된다는 현실을 알면 더욱 친교는 힘들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해결하는 좋은 방법은 친목회에서 열리는 각종 프로그램에 서로 소속이 다른 단원들이 적극적으로 연습, 참여를 하며 그곳에서 시간을 두고 친교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해결책이었다. 실제로 각종 프로그램에서 평소에 겨우 얼굴 정도나 알던 단원들과 어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올해 나에게 이 친목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도 조금 생각을 하며 이날을 맞게 되었는데, 아마도 나의 ‘깊어가는’ 나이를 더 의식하지 않았을까? 이런 것도 세월이 깊어 갈 수록 ‘하고 싶어도 못하게 되는’ 그런 것 중에 하나일 것이다. 몸과 마음이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한 ‘최선’을 다해서 참여를 하자는 각오를 가지고 임했다. 특히 대다수가 여성 단원들인 우리 레지오에서 나 같은 남자단원들이 가질 수 있는 외로움, 소외감, 위축감 등등을 어떻게 이런 기회를 적절히 이용할 수 있는가도 생각을 했다.

사실 이러한 ‘요새 남자들의 문제’는 이곳만이 아닐 것이고 전반적인 사회적 현상이기도 하다. 어디를 가나, TV를 보나, 영화를 보나.. 요새는 여자들만 보이는 것 같고, 남자들의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드는 느낌을 떨칠 수 없는 것이다. 레지오는 그런 의미에서 이런 사회적, 문화적 흐름을 극단적으로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특히 나이 먹은 남자들에게는 더욱 뚜렷하다.

 이런 우울한 남자들을 생각해서 작년 총 친목회 때 의도적으로 남자들만의 시간을 만들려고 한 것이 결과적으로 두 남자가 sing-along 을 lead 한 것인데, 결과는 별로였을까.. 올해는 아예 다시 해달라는 요청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친목회 2주를 남겨두고 연습 진행상태가 별로였는지 급작스럽게 sing-along team을 다시 만들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작년의 2명 남자는 다시 목소리를 맞추게 되었는데 올해는 조금 욕심을 부려서 ‘숨어있는 남자 인재’를 찾아 보려고 하다가 결국 예상을 뒤엎고 3명의 남자를 ‘발굴’ 해 내었다.

이 남자들은 몇 년 동안 그저 얼굴만 간신히 아는 정도였는데 운 좋게 ‘의기투합’이 된 것이고, 이중에 2명은 끝 무렵에 연숙에게 ‘걸려서 등을 떠밀려’ 온 case였다. 그래도 그들도 정말 오랜만에 ‘목청’을 쓰는 듯 신기해하며 동참을 했고 우리의 의도인 ‘친목도모와 즐기자’ 라는 것을 잊지 않고 결국 친목회에서 남자 5명의 sing-along team이 debut를 한 것이다. 이것이 내가 ‘두고 두고 기억하고 싶은’ 올해 총 친목회의 추억이 될 것이다.

올해도 여흥순서의 사회를 연숙이 맡았는데, 조금은 피곤해 보였다. 나이도 그렇고, 3년째 계속하고 있는데 어찌 안 그렇겠는가? 다른 사람을 계속 찾아보라고 하는 모양이지만 쉽지 않은 모양이다. 그저 ‘인재’가 없다고 푸념들만 하는 모양인데, 참 알 맞는 사람이 없기는 해 보인다. 연숙의 부단장 직이 내년 중에 끝이 나기에 그때만 기다리는 모양이지만, 그것이 끝 나도 글쎄.. 작년에는 청년 단원들이 중심으로 강남스타일을 요란하게 멋지게 보여주었는데, 올해는 완전히 스타일이 바뀌어서 엄숙하고 느린 모습의 body worship이란 것을 보여주었다.

많은 단원이 참가한 합창은 기대 이상으로 멋진 화음을 연출하였고, 참가 인원이 적어 고민하던 ‘춤’ team 도 아주 귀엽고 신선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제일 시끄럽고 신명 나고 신났던 것은 역시 우리부부가 다 참가했던 난타가 아니었을까? 이 프로그램은 연습기간과 참여도가 제일 우수했던 것이어서 결과에 상관없이 대 성공을 이룬 case가 되었다. 국악을 전공한 자매님이 열성적으로 2달에 걸쳐서 지도한 열매였다.

 이 행사로써 올해 레지오의 주요 행사는 다 끝났고, 이제는 조용히 대림절 4개의 초가 하나씩 켜지는 것을 지켜보며 우리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리고, 그 후에는 또 한 해를 다 보낸다. 비록 구세주 탄생은 기쁜 것이나 이제는 솔직히 이 나이가 되니 내년 이맘때 다시 한번 친목회에 참가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곁들여서 그런지, 한 해가 가는 이 시점이 꼭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즐거움과 아쉬움이 교묘하게 교차되는 그야말로 미묘한 기분의 12월인 것이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 레지오 합창 team

 


베토벤 바이러스, 윤도현 아리랑 – 난타 team

 


Group Game – 참가자 모두

 


사랑으로‘ , 고 김수환 추기경 애창곡 – finale, 모두가

 

  1. 나는 현재 자비의 모후 쁘레시디움 서기로 있고 연숙은 같은 쁘레시디움의 단장인 동시에 천상은총의 모후 꾸리아의 부단장으로 모두 꾸리아에는 직접 간접으로 깊이 관련이 되어있다.

소까나.. 12월인가..

소까나~ 소까 소까 そうかそうか.. 참 이렇게 일본말이 다정하게 느껴지니.. 이럴 때, 그래, 그래 보다 소까 소까도 잘 어울린다. 2007년부터 시작된 ‘일본을 조금이라도 알고 죽자’ 라는 이상한 느낌에 끌려서 이제까지 거의 7년이 지나고 있다. 비록 몇 년 전부터 조금씩 slow-down이 되고 있고 새로 나오는 드라마 video가 없기도 하지만 지금은 그 동안 쌓였던 그 수많은 어떤 것은 classic이 되어가고 있을 정도의 좋은 이야기들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짧은 단어 정도는 알아 듣지만 그 이상은 아마도 무리 무리.. 조직적으로 배울 의욕과 생각도 사실은 없다. 이 정도면 나의 욕구를 채웠다고 생각하니까.. 최소한 이질감과 거부감 없이 그들의 ‘언동과 역사’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대 이상의 성과라고 생각한다.

그래.. 그래.. 12월이 벌써 6일로 접어든다. 이제는 놀라지 않는다. 다음에 눈을 깜빡 뜨고 달력을 보면 분명히 중순을 지나가고 있을 것이다. 정말 정말 어떨 때는 한 달이 오래 전의 하루와 같은 느낌이 든다니까.. 60대에서 60마일로 달린다는 ‘병신 같은 표현’이 그렇게 적절한 듯 느껴진다니까.. 조금은 슬프다. 내가 70대를 산다면 10마일이 더 빨리.. 그러니까 한 달이 아마도 8시간 정도의 느낌으로? 와.. 싫다.. 하지만 이것이 ‘정상’이고 자연적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잊고 있다. 순리와 진리를..

조그만 폭풍이 지난 듯한 느낌으로 며칠째 시간을 보낸다. 그 폭풍이란 물론 우리 부부가 ‘거세게 개입된’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였다. 성탄의 기분을 내기에는 너무나 빠른 12월 1일에 우리가 제일 먼저 성탄기분의 선두주자인 듯 tape을 끊은 것이다. 올해는 예년과 다르게 정말 이를 악물고 악물고 ‘즐겁게 준비하고 즐겁게 치르자’ 라는 결심을 하고 지냈다. 그것이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비교적 stress를 잘 조종하며 보냈다. 덕분에 얼굴로만 알던 단원들과 지척에서 어울릴 수도 있었고 특히 남자 단원들이 더 값지게 다가왔다. 전 요셉, 김 빠찌피코, 한 그레고리오 형제 같은 사람들은 처음으로 ‘편하게’ 어울릴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거기다 작년부터 알게 된 박 대건 안드레아 형제까지 5명이 친목회 lower stage에 서게 된 ‘큰 일’을 한 것이다. 나도 노력했지만 연숙의 pushy함이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우리가 얼마나 sing-along을 잘 주도했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선례를 남겼고, 새롭게 서로들이 만났으니 말이다. 난타 program도 마찬가지.. 우리부부 정말 열심히 참가하고 즐겼다. 거의 2달 한번도 빠지지 않고 연습했으니 최선을 다 했다고 자부해도..

Thanksgiving prayers, 2013

best ever.. roasted, 2013
best ever.. roasted, 2013

Thanksgiving prayer.. 추수감사절 기도.. 수십 년 동안 미국에서 이날을 맞곤 했지만 만찬 식사 table에서 가족 ‘기도’에 관한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명색이 가톨릭 크리스천이었지만 나는 가족들과 함께 앉아 turkey를 앞에 놓고 한 마디도 못하곤 했다. 언젠가 ‘가장’으로 기도를 하라는 연숙의 말에 깜짝 놀라 한마디 했지만 그것은 지금 생각해도 전혀 준비가 되지 않았던 ‘어불성설’ 같은 넋두리였고, 아이들도 속으로 웃는 것처럼 들렸다.

가톨릭 신앙인으로 내가 가톨릭을 좋아하는 이유 중에는 ‘자유 기도를 잘 못해도 괜찮은’ 묘한 전통에 있었다. 최소한 개신교인 들에 비해서 그렇다. 그들, 개신교인들은 정말 ‘기가 막히게도’ 잘하고 길게도 한다. 몇 년 전 동창회 모임에서 어떤 개신교 자매님의 식사 전 기도가 거의 30분을 끈 것을 보고 나는 그런 확신이 생겼다. 개신교인들은 자유 기도의 귀재 라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님, 주님’ 하며 남들이 보이게 지나치게 긴 통성기도를 하는 그들을 보면 성경에서 그런 모습의 바리사이 Pharisees 를 질타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기도 한다. 물론 모든 개신교인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닐 것이지만 비과학적인 통계에 의하면 천주교인들은 개신교인들의 기도 ‘실력’의 1%도 미치지 못할 듯 하다.

 나 개인적으로는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기도를 말로 하건 속으로 마음으로 하건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남에게 들리는 기도를 해야 할 때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또다시 강조하지만, 개신교 형제, 자매들은 ‘기도와 성경’의 실력에서 99% ‘본 고향’인 천주교를 완전히 앞지른다. 의식과 전통을 경시하는 그들에게 남은 것은 사실 성경과 기도일 것이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들은 정말 기가 막히게 잘 한다.

올해, 오늘 추수감사절 식사는 단촐 하기만 한 우리 식구만 모여서 지난 일년의 ‘은총과 은혜’를 감사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모이기 전에 연숙이 나보고 꼭 식사 전 ‘가장’ 기도를 하라고 귀 띰을 한다. 또 우물거리며 넘기려던 나의 희망은 사라졌지만 올해는 조금 예년과 다르게.. 이것 이것.. 한번 도전해 보자 라는 오기가 조금 생겼다. 이것도 근래 3년간 겪고 있는 나의 faith renaissance 중에 하나인지는 모르지만 작년과 다르게 나의 머리가 굴러가고 있었다. 시간은 2시간.. 어떻게 ‘작문’을 할 것인가.. 차츰 머리가 굳어짐을 느꼈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러다가 머리가 번쩍! 하였다. 아하! 우리 천주교에는 주옥과도 같은 ‘염경念經’ 기도문들이 즐비하지 않은가?

 예전 같으면 이런 ‘알려진 기도문’은 책에서 찾아야겠지만 요새는 internet이 있어서 쉽게 ‘감사기도문’을 찾을 수 있었다. 항상 감사하며 살라는 성경의 말씀은 사도 바오로의 서간에서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1테살 5, 18) 로 잘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자유기도에서 성경을 인용하기는 조금 무리였다. Thanksgiving Day 에 하기 알맞은 것을 찾아내었다.

 

Thank you Father, for having created us and given us in all our joys and sorrows, for your comfort in our sadness, your companionship in our loneliness.

Thank you for yesterday, today, tomorrow and for the whole of our lives.

Thank you for friends, for health and for grace.

May we live this and every day conscious of all that has been given to us.

We pray through Christ our Lord, Amen. +

 

하지만 우리 가족은 절대로 bilingual은 아니기에 우리들이 태어났을 때 얻었던 우리 말로 하는 기도도 필요하였다. 짧고 단순하고 유치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순전히 내가 ‘만든’ 것이다.

 

주님, 올해도 저희 가족들에게 건강과 평화를 주심에 저희 모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고, 우리 옆에 없는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 친지들에게도 같은 은총을 주신 것, 감사 드립니다.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

Deep November

¶  11월 26일, 이천 십 삼 년.. 이천, 이천, 2000 을 연상하며 문득 아~~ 지금은 2000년 대였지.. 하는 자괴감이 젖어 든다. 왜 천 구백.. 1900 이 아니고 2000인가.. 그러니까 나는 역시 어쩔 수 없이 천 구백이 고향처럼 따뜻하게 느껴지는 충분히 오래 산 ‘늙은’ 인간이다.

그것도 11월이 주는 을씨년스런 느낌 또한 나를 움츠려 들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것도 아주 깊은 11월, 깊도록 깊은 가을의 느낌, 나는 이런 진한 색깔의 나날을 어떻게 감당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작년과 비교하고 5년 전과도 비교하고 심지어 20년 전도 돌아본다. 작년과는 거의 비슷할 듯하지만, 5년 전과는 ‘하늘과 땅’ 같은 차이일 듯 하다. 그 때는 전혀 앞도 방향도 잃고 살았고, 지금은 최소한 앞도 보이고 방향도 제대로 잡은 것이다. 물질적으로 변한 것은 거의 없어도 그것이 전부가 아닌 것을 이제는 믿고, 믿고 싶은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올해 한 달.. 계속 그런 희망의 심정으로 살고 싶기만 하다.

 

¶  겨울 같은 느낌의 올해 가을, 이곳 지방 deep south의 첫 눈발이 예보가 되었다. ‘아주’ 추울 것이라는 북 미주 동부지방 장기예보에 눈에 대한 것은 기억이 없는데 어떻게 이렇게 일찍 snow flurries란 말이 나온 것일까? 그것은 역시 하늘에 지천으로 깔린 습기 때문이 아닐까? 기온만 떨어지면 언제든지 가능성이 있는 그 ‘물’이 하늘에 항상 떠 있는 상태가 올해 이곳 기상의 특징이었으니까.. Thanksgiving Day가 이틀이 남은 지금, 차갑게 내리는 비가 오늘 밤, 내일 아침 사이에 ‘분명히’ 눈발이 날리는 날씨로 바뀐다는 것이다. 물론 내려도 곧 녹겠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하늘에서 하얀 ‘떡 가루’ 들이 내려 온다는 사실이 문제인 것이다. 교통상 지장은 제로 일 것이지만 ‘포근한 느낌’을 주는 심리적은 효과는 대단할 듯 하고 벌써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요란하게 선을 보이기 시작해서 나도 어쩔 수 없이 그런 ‘공동체적 심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듯 하다.

올해 우리 집의 Thanksgiving Day는 어떨까 했지만.. 역시 조금 게으르기로 작정하고 우리 식구, 작기만 한 네 명만 모이기로 했다. 한 때는 손님들과 어울려 볼까도 생각했지만 무언중에 ‘피곤할 듯’한 예감이 들었는지 그렇게 되고 말았다. 한 때는 손님들과 어울린 적도 없지 않았지만 이제는 손 꼽을 정도로 기억으로만 남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기회가 된다면 조금 더 노력을 해면.. 식구가 너무나 적은 우리는 될 수 있으면 누군가와 같이 있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그래도 우리 식구는 최소한 ‘비행기가 필요 없는’ 곳들에 살고 있어서 궂은 날씨도 큰 상관이 없어서 더 포근하게 느껴진다.

작년부터는 엄마가 주 요리인 turkey와 stuffing같은 것을 준비하고 아이들은 나머지 side dish들을 모조리 준비한다고 해서 나는 크게 할 일이 없다. 유일한 것이 mashed potatoes 정도일까. 그저 먹어주기만 하면 되니, 조금은 편한 하루가 될 것이다. 물론 조금 힘이 들어가는 dish wash는 주로 나의 담당이지만 그것은 이제 나의 몫이 되었으니 별 다를 것은 없다. 그저 그저, 평화스럽게 올해의 100% 일어난 일들에 감사한 마음을 나누는 시간이 되기만 빌고 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다행이 아닌가 하는 심정 바로 그것이다.

 

¶  First white stuffs & ‘Kenny G‘ time again.. 하루 종일 세차게 뿌리던 비가 오늘 아침에 드디어 하얀 물체로 변해서 풀밭이나 deck, 차의 유리창에 얹혔다. 아주 이른 아침 세찬 바람소리에 깨어서 어두운 밖을 살펴보니 무언가 하얀 것들이 보였고 곧바로 아하~ 올해 첫 white stuff임을 알았다. 바뀌어가는 계절의 상징들.. 어찌 이 나이에 조금은 철학적, 더 조금은 신앙적으로 안 볼 수 있겠는가? 더구나 무섭게 몰아치는 차가운 바람소리는 6.25 직후의 서울의 ‘덜 난방 된’ 온돌 방에서 화로 불에 이불을 쓰고 모여 앉았던 어린 가족들의 걱정 없었던 천진난만한 모습들을 연상 시키기에 너무나 충분한 것이었다. 작년 보다 더 빨라진 holiday in the air.. 일 주일 안으로 다가온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 준비 연습의 바쁜 움직임에서 느끼는 이른 12월의 느낌을 떨칠 수 없다. 결국은 또 Kenny G season이 온 것이다. 올해 들어 처음 듣는 Kenny G의 saxo.. 너무나 너무나 잘 어울리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Winter classic, Kenny G

My Winter classic, Kenny G

What A Wonderful WorldKenny G

 

 

눈 나리는 buckeye stadium

우연히 TV(on pc)를 보니 Ohio Stadium이 보이고 football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자세히 보니.. 그 turf에는 눈이 조금 쌓인 것이 보였다. 아.. 그랬지.. midwest 의 그 추운 밤이었다. 그것이 30년도 훨씬 넘었을 적이었지. 다른 channel을 보니 이곳은 또 다른 midwest인 Norte Dame football의 광경이고 여기도 눈발이 세차게 날린다. 같은 지방이니까 같은 눈이 나리는 것이다. 또 역시 깊은 추억에 잠기고 고뇌를 느낀다. 하지만.. 하지만.. 그런 고뇌 속에, 그래도 그때 나는 ‘젊었었지’ 하는 환상적인 기쁨이 교차되기도 한다.

나이를 먹고 머리가 빠지고 젊은 외모가 그렇게 그리워짐은 나이가 먹는 과정에 따르는 고문일까, 쓸데없는 걱정일까.. 나만 그런 것일까, 이것도 ‘독특한’ 나이기 그렇게 고문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가장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은 ‘무섭게 피하고 싶은’ still picture, 나의 사진.. 옛날 이동준씨가 그렇게 사진 찍히는 것을 피할 때 의아했던 심정, 내가 그 꼴이 되었다. still picture의 요술.. 지난 20년 동안 마음에 드는 모습의 사진은 거의 없지만 있었다면 그것은 나를 며칠이고 황홀하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거의 없었다.. 그저 ‘몰골’이 나를 도망가게만 했다.

가을 시 3선

불과 한 주일 만에 완전한 ‘진짜’ 가을의 풍경으로 변했다. 그 전에는 사실 가을로 부르기에는 주위가 너무나 ‘파~란’ 모습들이었지만, 며칠 전 ‘썸머 타임, Daylight Saving Time‘의 해제로 하루아침에 너무나 어두워진 저녁 6시의 냄새와 더불어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깊은 가을 임을 나 자신의 ‘생애의 가을, Autumn of my life‘과 연루시키며 묘한 감상에 젖어 들고, 낙엽 탄 냄새가 구수하게 느껴질 것 같은 ‘fireplace의 따뜻한 연말 휴일’ 의 공기마저 느껴진다.

유별나게 시원하고 축축했던 올해의 여름은 정말 행복할 정도였고, 하늘의 은총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예년에 한두 번씩 나타나는 hurricane이 하나도 없는 대신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길목이 또한 유난히도 지루하고 길었다. 늦여름과 초가을이 교대하는 기간이 길었던 것인데 그것이 이제 작별을 하고 있는 듯하다. 덕분에 예년에 흔히 느끼던 전형적인 ‘가을의 감상’ 을 많이 놓치는 듯 하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 대부분의 ‘감상적’ 시간은 남이 보기에, 내가 보아도 조금은 유치할 것처럼 보이니까.. 이 나이에 무슨 주책인가 할 정도로.. 이맘때면 꼭 생각나고 기억나는 가을의 시는 역시 도종환 시인의 ‘가을 시 3선’ 이다. 시인은 가을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듯해서 나도 10대의 감상에 흠뻑 젖는 듯한 느낌으로 그의 시를 감상한다.

 

 

단풍드는 날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放下着)

제가 키워 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늦가을

 

가을엔 모두들 제 빛깔로 깊어갑니다

가을엔 모두들 제 빛깔로 아름답습니다

지금 푸른 나무들은 겨울 지나 봄 여름 사철 푸르고

가장 짙은 빛깔로 자기 자리 지키고 선 나무들도

모두들 당당한 모습으로 산을 이루며 있습니다

목숨을 풀어 빛을 밝히는 억새풀 있어

들판도 비로소 가을입니다

피고 지고 피고 져도 또다시 태어날 살아야 할 이 땅

이토록 아름다운 강산 차마 이대로 두고 갈 수 없어

갈라진 이대로 둔 채 낙엽 한 장의 모습으로 사라져 갈 순 없어

몸이 타는 늦가을입니다

 

 

깊은 가을

 

가장 아름다운 빛깔로 멈추어 있는 가을을 한 잎 두 잎 뽑아내며

저도 고요히 떨고 있는 바람의 손길을 보았어요

 

생명이 있는 것들은 꼭 한 번 이렇게 아름답게 불타는 날이

있다는 걸 알려 주며 천천히 고로쇠나무 사이를 지나가는

만추의 불꽃을 보았어요

 

억새의 머릿결에 볼을 부비다 강물로 내려와 몸을 담그고는

무엇이 그리 좋은 지 깔깔댈 때마다 튀어 오르는 햇살의

비늘을 만져 보았어요

 

알곡을 다 내주고 편안히 서로 몸을 베고 누운 볏짚과

그루터기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향기로운 목소리를 들었어요

 

가장 많은 것들과 헤어지면서 헤어질 때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살며시 돌아눕는 산의 쿨럭이는 구릿빛 등을 보았어요

 

어쩌면 이런 가을 날 다시 오지 않으리란 예감에 까치발을 띠며

종종대는 저녁노을의 복숭아빛 볼을 보았어요

 

깊은 가을,

 

마애불의 흔적을 좇아 휘어져 내려가다 바위 속으로

스미는 가을 햇살을 따라가며 그대는 어느 산기슭

어느 벼랑에서 또 혼자 깊어가고 있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