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며

 

로마학 세계로의 초대!

 

학창 시절의 나는 교사들에게 별로 달갑지 않은 학생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교사가 가르치는 내용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타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왜?’, ‘어떤 조건에서?’ 라는 두 가지가 설명되지 않으면 수업이 끝난 뒤 꼭 질문하는 내가 교사들 입장에서는 어쩌면 성가시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의문을 품고 계속 질문해 대는 나를 귀찮아하지 않고 자세히 설명해 준 몇몇 교사들 덕분에 나는 크게 좌절감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내 질문 가운데는 아무리 너그러운 교사라도 때로 곤혹스럽게 느낄 만한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질문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는 내용이라며 몇몇 교사는 내게 참고가 될 만한 연구서를 알려주면서 스스로 생각해 보라고 했다.

교사들을 곤란하게 만든 내 질문 중 대표적인 것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고대 로마는 고대 그리스를 본뜬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고대 국가가 어떻게 1000년이나 계속되었을까요? 게다가 대제국으로 번영했지 않습니까?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질문에 어느 교수는 대답 대신 영문으로 된 연구서 두 권을 소개해 주면서 읽고 생각해 보라고 했다. 그 후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도 내 모습은 그 무렵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참고도서가 영문만이 아니라 라틴어와 그리스어까지 확대되었다는 것 외에는…

십대 때 품은 의문을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지니고 있단 말인가 하고 웃을 수 도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밖에 없다.

“남자 친구한테서는 쉽사리 마음을 옮겨 버리지만 진실로 나를 매료시킨 것에는 의외로 끈질기게 달라붙은 결과”라고.

그 이유는 아마 후자의 경우는 내가 도전’을 했고, 남자 친구에게는 도전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도전만큼 흥미로운 것은 없다. 그래서 그 오랜 세월 동안 나를 붙들어 매고 있는지도 모른다.

독서란 실제 인생에서는 알 수 없는 것을 알게 해 주고, 만날 수 없는 사람도 만나게 해 주는 수단이다. 젊어서부터 내가 해 왔던 이들 두 가지를 여러분들이라고 못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이 책은 그런 것을 체험해 보고 싶은 여러분에게 드리는 나의 작은 선물로 생각하고 읽어 주기 바란다. 그리고 바라건대 여러분을 매료시킬 멋진 남자들을 이 책에서 꼭 만나기를.

 

시오노 나나미 (塩野七生)

 

 

 

1 장 왜 지금 ‘고대 로마’ 인가

2 장 로마는 이렇게 탄생했다

3 장 공화정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4 장 로마의 조직

5 장 한니발의 도전

6 장 승자의 혼미

7 장 ‘창조적인 천재’ 카이사르

8 장 ‘팍스로마나’ 의 길

9 장 로마에서 오늘의 우리를 돌아본다

 

 

 

1장 왜 지금 ‘고대 로마’ 인가

 

로마가 1,000년 이상이나 계속된 것은, 그대로의 모습을 직시하고 그것을 개선하려는 그들의 기개 덕분이었다.

로마인이 자기 개혁에 어떻게 성공했는지의 실제적인 예가 1,500년 뒤 마키아벨리에게 참고 자료가 된 것처럼, 역시 2,000년 뒤의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참고가 되지 않을까?

물론 2,000년이나 지난 로마의 사례가 그대로 현대에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힌트는 감추어져 있다고 나는 단언한다.

 

 

역사는 인간이다

 

나는 로마사 를 다룬 <로마인 이야기> 라는 책을 매년 한 권씩 써 왔다.

기원전 753년 로물루스 가 로마를 건국하고 나서, 서기 476년 멸망할 때까지 약 1,000년 동안의 통사를 전문적인 역사학자도 아닌 내가 왜 쓰게 되었을까?

이 의문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대답을 하려 하면 끝이 없다. 하지만 한마디로 간단히 말하면 “역사만큼 재미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고대 로마 역사는 특히 재미있다. 그래서 쓴다.”

간단히 말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지만 다행히 내 뜻에 공감해 주는 독자들이 있어 그 동안 <로마인 이야기>를 쉬지 않고 써 왔다.

그러나 ‘고대 로마 역사가 뭐 그리 대단해서?’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어쩌면 다수일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역사 자체에 흥미가 없는 사람도 적지 않다.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훌륭한 어른’이라고 알려진 인사 중에도 “나는 역사는 딱 질색”이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참으로 무미건조해 보인다. 그럴 경우 나는 감히 이렇게 말해준다.

“실례지만 그런 말씀은 아예 안 하시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요?”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놀라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다. 그때 나는 한마디 더 얹는다.

“왜냐하면 역사는 인간이니까요. 그래서 ‘역사는 딱 질색’ 이라고 하면 ‘인간은 딱 질색’ 이라는 고백이 되거든요.”

누구나 자신의 일생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있다. 유명한 정치가가 되어 큰 권력을 잡았다 해도 그 사람이 예술가의 인생을 체험할 수는 없다. 엄청난 노력을 해서 세계적인 대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기업의 최고 위치에 올랐다 해도 거기에서 경험할 수 있는 거 또한 주로 기업인의 인생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혹은 텔레비전을 본다. 거기에서 자신이 체험할 수 없는 다양한 인생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는 인류가 지금까지 경험한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그러한 역사가 재미있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왜 르네상스인 은 고대 로마에 관심을 가졌을까

 

역사가 재미있다고 하지만 하필이면 ‘왜 로마인가’, 그것도 아주 오래 전인 1,500여 년 전에 멸망한 로마인들인가 하는 의문이 남을 것이다.

그 의문에 대해서도 또한 “로마인만큼 재미있고 멋진 사람들은 없으니까.”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쓰면, ‘오호라! 말하자면 작가의 호기심이란 말이지.’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늘 일상생활로 바쁜데, 단지 색다르다는 이유로 그런 사람들에게 관심 가질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나 혼자만 느끼는 흥미가 아니다.

바로 앞에서도 썼듯이 지금부터 약 1,500년 전인 5세기에 로마제국은 멸망한다. 그리고 유럽인들은 대략 1,000년 가까운 기 세월 동안, 멸망한 로마에 대해 잊어버린 채 지낸다. 그것이 이른바 중세이다.

그런데 갑자기 고대 로마에 흥미를 지닌 사람들이 나타난다. 바로 13세기부터 15세기에 살았던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이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아는 최고의 힌트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은 왜 로마에 흥미를 가졌을까?

대표적인 르네상스인 가운데 한 명인 마키아벨리가 가졌던 문제의식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은 이유였다.

“기독교는 1,000년 동안 유럽인의 정신을 지배해 왔다. 그런데도 우리 유럽인의 인간성이 향상되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인간의 존재 자체가 원래 종교에 의해서조차 바뀌지 않을 만큼 ‘악’에 대한 저항력이 약해서가 아닐까? 그런 인간세계를 바꿔 나가려면 먼저 이 같은 인간성의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할 필요가 있다.”

르네상스 운동은 ‘고대 부흥’ 이라고도 한다. 이 새로운 사상이 비기독교적인 성격을 갖게 된 것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르네상스 사람들이 주목했던 것은 다름 아니 고대 로마, 그리고 고대 그리스의 역사였다.

고대 그리스나 고대 로마 사람들은 기독교가 없던 시대에 살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뛰어난 정치체제를 만들어 냈다. 뿐만 아니라 그 후로 이들 지중해 세계 사람들은 현재의 서유럽에까지 뻗어나간 광대한 제국을 여러 세기에 걸쳐 유지하면서 문명의 꽃을 피웠다.

그들 로마인들은 기독교회처럼 종교에 의해 인간성을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로마인은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철학이 인간성을 향상시킨다고도 생각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이 결코 인간에 대해 절망한 것은 아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선도 있고 악도 있다. 선악이 동거하고 있는 것이 인간이다. 그렇다면 선을 조금이라도 늘리고 악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노력을 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로마인은 이처럼 리얼리즘에 철저한 인간상을 생각했다. 이러한 로마인의 리얼리즘을 다시 부흥시키려고 한 것이 르네상스 시대였고, 마키아벨리도 그 시대의 한 인물이었다.

마키아벨리의 수많은 저작은 5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읽혀지고 있다. 그러데 그 공적의 시작은 고대 로마 사람들에게 있다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실제로 그의 저작 곳곳에 로마사가 언급되어있다. 고대 로마는 그에게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해 주었다. 그것은 ‘현대에도 로마는 참고가 된다는 예증’이다.

 

 

다시 로마사의 시대

 

그런데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르네상스 시대, 1,000년에 걸친 기독교의 ‘교화’가 인간성 향상에 전혀 공헌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은 인물이 또 한 사람 있었다. 바로 종교개혁을 한 마르틴 루터이다.

그러나 루터의 문제의식은 마키아벨리와 공유되는 점이 있지만 결과는 달랐다.

마르틴 루터는 인간성이 개선되지 못한 이유를 기독교라는 종교의 형식과 내용에서 찾았다. 즉 기독교는 본래의 뜻에 따르면 인간을 더욱더 향상시켜야 한다.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은 신과 신자 사이에 성직자라는 필터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기독교 성직자들은 정신세계의 지도자로 군림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의 존재는 오히려 기독교의 가르침을 해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과 신자의 연결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루터는 성직자 계급을 배제하고 신과 신자가 바로 결합되는 형태의 신앙을 주창한다. 이것이 프로테스탄티즘 운동이었다. 그렇다면 마키아벨리와 루터의 판단 중 어느 쪽이 더 옳았을까?

마키아벨리나 루터의 시대로부터 이미 5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과연 인간성이 얼마나 개선되었을까?

루터의 프로테스탄티즘 이후에도 인간성을 개선하기 위한 다양한 사상이 나타났다. 계몽주의 사상, 프랑스혁명을 불러온 자유, 평등, 박애의 사상, 또한 공산주의 사상… 증 인간을 ‘진보’ 시키겠다고 이름 붙인 수많은 사상들이 거쳐 갔다. 그렇게 해서 인간 사회는 개선되었을까?

그런 사상을 주창한 사람들의 동기 자체는 숭고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결과가 얼마나 달라졌을까? 반세기 이상 계속되고 있는 팔레스타인 분쟁, 혹은 아프리카에서 자행되는 내전의 비참한 상황 등은 얘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인간성에 대한 통찰의 적확 함에는 역시 마키아벨리의 생각에 손을 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현대를 사는 우리들 또한 마키아벨리처럼 고대 로마인들의 삶의 방식을 터득한다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전무후무한 ‘보편 제국’

 

인류는 과연 2,000년 전 로마제국 이후 조금이라도 진보했을까? 그것은 단지 개인 수준의 문제만이 아니다. 국가 본연의 모습인 집단 수준에서 비교해도 같은 답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로마제국 이후로 다시는 인류가 ‘보편제국’을 만들어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후세에 로마제국에 대한 비판이나 비난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만으로 보았을 때 민족의 차이, 문화의 차이, 종교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것들을 모두 감싸 안은 ‘보편 제국’을 수립한 것은 로마인뿐이었다.

이 보편 제국의 꿈을 사상 최초로 품었던 사람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알렉산더) 대왕이다. 그는 헬레니즘(그리스 문명)과 페르시아 문명 간의 ‘행복한 결혼’을 꿈꾸었다. 그리고 11년에 걸쳐 동방 원정을 행한다. 그러나 그 장대한 구상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고 30대 중반도 안 된 젊은 나이에 죽어 버린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고 나서 약 300년 후에 나타난 사람이 로마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줄리어스 시저)이다. 카이사르가 설계도를 만들고 그 후의 황제들이 만들어 낸 로마제국이 바로 알렉산드로스가 채 이루지 못한 그 꿈을 실현시킨 국가였다.

이 로마제국에는 로마인의 입장을 ‘야만족’ 이던 갈리아 족에서부터 아테네라든가 스파르타 등의 고대 도시국가를 만들어 낸 역사를 가진 그리스 민족, 또 유일신을 믿었던 유대인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살았다. 로마인은 그들의 다양성을 가능하면 존중해 주었다. 그리고 로마인은 그러한 이상을 단순한 ‘슬로건’ 에 그치지 않고 현실화했다.

그것을 가장 확실히 말해 주는 것이 로마 시민권의 확대였고, 이 시민권 확대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사람이 다름 아닌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

그는 당시 ‘알프스의 이편’ 으로 불리면서 로마 시민들로부터 외국인 취급을 당하던, 지금의 북 이탈리아 지역에 살고 있는 갈리아 인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었다. 그 다음에는 당시 로마에서 일하는 모든 의사나 교사에게, 그리고 바로 얼마 전까지 자신과 적이 되어 싸운 ‘알프스의 저편’ 에 사는 갈리아인 지도자들에게도 시민권을 주었다. 갈리아인 지도자들에게는 ‘고대 로마의 국회’라고 할 수 있는 원로원의 의석까지 주었다.

로마에서 시민권을 갖는다는 것은 비록 인종이나 민족, 종교가 다르다고 해도 로마 시민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 받는 것이었다. 즉 로마법에 따라 사유재산과 개인의 인권을 보장받는 것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시작한 로마 시민권의 확대는 그 후로도 계속되어 3세기 카라칼라 황제 시대에 정점을 맞이한다.

즉 로마제국 내에 사는 자유민 모두가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여기에 이르면 ‘정복자’ 와 ‘피정복자’의 구분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로마사를 읽어 보면 속국 출신의 황제들도 드물지 않다. 당시는 문명화의 척도가 로마화였는데, 수준 높은 스페인이나 프랑스 지역 출신도 있었고, 북 아프리카나 시리아, 도나우 강 하류 등의 후진 지역에서도 황제가 나왔다. 로마에서는 황제의 지위조차 출신지나 출생을 불문하고 개방되어 있었다.

 

 

실패와 고난의 로마사

 

이러한 사실을 살펴보면 ‘보편 제국’ 로마가 어떤 나라였는지, 그리고 로마 같은 형태의 제국이 그 후로 다시는 출현하지 않았음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대영제국은 식민지의 피지배자 모두에게 영국 시민권을 부여했을까? 아마도 그 중에서 몇몇 유력자에게는 영국 의회의 의석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에게는 그런 일이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영국은 인도를 식민지로 지배만 했을 뿐, 인도인을 결코 영국 시민으로 대우해 주지 않았다.

그럼 현재의 ‘미국’은 과연 민족의 차이, 문명의 차이, 종교의 차이를 허용하고 있을까? 이것 또한 ‘아니다’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미국은 그들 스스로 ‘최고의 가치’로 믿고 있는 민주주의 체제를 수용하지 안은 국가는 모두 적으로 간주해 왔기 때문이다.

로마의 최고 권력자가 된 카이사르는 그 시정 방침을 ‘관용’이라는 한마디로 표현했다. 그리고 그 표현에 걸맞게 자신을 멸망시키려고 했던 적조차도 말살하지 않았다. 그 정도의 너그러움은 그로부터 2,000년 이상 진보한 현대 국가들조차 충분히 갖추고 있지 못하다.

이 같은 현대 세계의 모습을 보면 볼수록 나는 로마인에게 매료된다. 그렇다고 단순히 회고 취미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옛 것이 좋았다’, ‘로마인이 현대인보다 우수하다’는 이유만으로 로마사 속으로 도망치려는 것은 아니다.

내가 로마인에 흥미를 갖는 것은 그들이 인간성에 대한 환상을 품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스스로에 대해서도 환상을 품지 않고 행동했다.

로마인도 인간인 이상, 실패가 없지 않았다. 로마사를 깊이 들여다 볼수록 그 역사는 실패와 좌절의 연속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동시대의 다른 민족들과 달랐다. 그들은 스스로의 실패를 인정하는 순간 주저 없이 개혁을 단행하는 용기를 잃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가능하면 그 실패에서 벗어나려는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상황을 정리하려 한다. 로마인이라고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도 그들은 실패한 상황에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로마가 1,000년 이상이나 계속된 것은 결코 운이 좋아서도 아니고 그들의 자질이 특별히 우수해서도 아니다. 다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직시하고 그것을 개선하려는 기개가 있었기에 로마의 번영은 오래 지속될 수 있었다. 그러니 로마인들의 역사를 배우는 일이 회고 취미일 리가 없지 않은가?

로마인이 자기 개혁에 어떻게 성공했는지의 실제적인 예가 1,500년 뒤 마키아벨리에게 참고 자료가 된 것처럼, 역시 2,000년 뒤의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참고가 되지 않을까? 물론 2,000년이나 지난 로마의 사례가 그대로 현대에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힌트는 감추어져 있다고 나는 단언한다.

 

 

시행착오가 로마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로마인의 어떠한 삶의 방식이 현대의 우리에게 참고가 되는 것일까? 결과만을 보면 카이사르가 등장한 뒤 제국이 탄생하기까지의 로마는 순조롭게 판도를 넓혀 간 것처럼 보인다.

처음에는 작은 도시국가에 지나지 않았던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에서 세력을 뻗어나가고, 포에니 전쟁 에서 승리하여 당시의 대국 카르타고 를 끌어내리더니, 마침내 지중해를 ‘우리의 바다’라고 명명할 정도에 이르게 된다. 더욱이 북유럽까지 세력을 확대해 나가 제국을 건설하고… 학교에서 배우는 세계사 연표만을 보면 분명 로마는 행운의 여신이 이끌어 쑥쑥 뻗어나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로마사는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일찍이 나치 독일은 자국민이 ‘세계에서 가장 으뜸가는 우수한 민족’이라고 선전하면서 ‘열등 민족’을 멸족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른 민족보다 압도적으로 우수한 민족은 있을 수 없다.

똑같은 인간인 이상, 능력의 차이란 크지 않다. 오십보백보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고대 로마인과 현대인도 큰 차이가 날 리 없다.

사실 기원전 1세기 카이사르가 출현하기 이전까지의 로마사를 들여다보면 무수한 좌절과 고난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 로마인은 처음부터 우수한 것이 아니었을 뿐더러 특별한 행운을 타고난 것도 아니었다.

예컨대 기원전 390년에 로마는 북방에서 쳐들어온 켈트 족의 습격을 받아 어이없이 점령을 당한다. 당신 상황으로 로마라는 도시국가의 멸망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역사를 파헤쳐 보면 그렇게 멸망한 도시국가는 수없이 많다.

그렇지만 로마는 이러한 수렁에서 일어섬으로써 ‘진정한 로마’를 이루어 나갔다. 켈트 족이 물러간 다음, 그들 로마인은 ‘야만족’에 불과한 켈트 족의 침략을 허용한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고민하였다.

실패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딛고 반드시 성공으로 나아가려 했던 정신 작용에서 로마인의 강인함을 발견할 수 있다. 이때 로마인들은 패배의 원인이 그들 내부에 있다는 것을 직시한다. 단순히 반성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국론 분열이라는 손실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활성화하고 정치 개혁 형태에 결부시켰다.

이리하여 완성한 것이 역사상 널리 알려진 로마 특유의 ‘공화정’, 즉 황제가 통치하는 제정으로 이행되기까지의 정치 체제이다.

그리스인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켈트 족에게 침략을 받은 것이야 말로 로마를 강대하게 만드는 첫걸음이었다고 기록했다. 그의 말처럼 로마는 굴욕적인 패배를 디딤돌 삼아 개혁을 이루어 냈고, 그 후로 착실하게 번영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흔히 정치 개혁이라는 한마디로 표현되는 것은 결코 간단히 이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고대 로마의 경우와 다르지 않다. 개혁은 반드시 기득권자의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모든 사람이 찬성하는 개혁이란 어느 시대에도 있을 수 없다.

사실 켈트 족에게 습격 당한 도시국가 로마가 신생국 로마를 이뤄내는 데는 2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 긴 세월 동안 로마는 결코 개혁의 의지를 상실하지 않았다. 그 결과 비로소 진정한 로마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의미의 개혁이란 결코 간단하게 실현될 수 없는 것이며,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많은 사람들은 그 노력을 꺼려 쇠퇴해 갔고, 그 노력을 아끼진 않은 소수의 사람만이 멋진 미래를 맞이할 수 있었다.

 

 

로마의 ‘커다란 혼미’

 

하지만 로마의 고난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혼란은 패배한 뒤에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승리한 뒤에도 찾아온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로마의 역사이다.

기원전 2세기에 로마는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는다. 이탈리아 반도와 좁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위치해 있는 시칠리아 섬을 북아프리카의 대국 카르타고가 지배하려고 노린 것이다. 이에 로마는 국가 방위 차원에서 카르타고와의 전쟁을 단행한다. 이것이 로마로서는 문자 그대로 사활이 걸린 포에니전쟁의 시작이다.

마치 챔피언과 도전자 사이의 사투처럼 진행된 이 전쟁의 전모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제2권을 통째로 할애했을 만큼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완전히 챔피언과 도전자 사이에서 벌어진 사투였다. 결과만을 말하면 세 번에 걸친 포에니전쟁에서 마침내 로마는 승리를 거두고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한다. 그러데 문제는 정작 그 다음에 나타난다.

승리를 거듭하면서 급성장을 이룬 로마에 점차 혼미의 골이 깊어져 자칫하면 국론 분열을 일으킬 정도로 심각한 지경에 이른 것이다. 대체 승자인 로마가 왜 이러한 벽에 부딪쳤을까?

포에니전쟁 이후 급격하게 영토를 확대하여 지중해의 패자가 된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거대해진 만큼의 덩치에 맞는 ‘체질 개선’이 뒤따르지 못한 나머지 급격한 경제 성장의 그늘 아래 다양한 모순들이 형성되었고, 그로 인해 정치적, 사회적으로 불안이 야기된 것이다.

그 결과 로마 내부에서는 끊임없이 정쟁이 일어났고, 그 희생자가 생겼다. 그것은 분명 국가 분열의 위기였다. 이 심각한 혼미에서 로마는 어떻게 벗어났을까?

그것은 천천히 이야기하기로 하고, 만약 이때 로마가 위기를 돌파할 수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다. 경제적으로는 풍부하다 해도 국가의 내부가 혼란스러우면 금방 타국의 간섭을 불러들인다. 이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틀림없이 로마는 이전에 자신들이 멸망시킨 카르타고와 똑같은 운명에 처해졌을 것이다.

로마가 이 위기를 뛰어넘어 대제국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후세의 우리는 알고 있다. 승자는 결코 처음부터 승자였던 것이 아니며, 수없이 많은 패배와 실패를 뛰어넘었기 때문에 그들은 싸워 이길 수가 있었다. 그래서 로마의 역사는 혼미한 시대의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과 삶의 힌트를 준다.

 

 

최상의 품격을 지닌 남자들

 

이제까지 나는 국가나 민족의 운명을 위압적인 태도로 말해 왔다. 그러나 역사를 읽는 재미란 그처럼 거국적인 면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꼭 ‘도움이 되는’ 것만도 아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만이 역사에서 취할 점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로마의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멋진 남자들이 차례차례 나타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이야기이기도 한 것을 알 수 있다.

독일의 역사가 몸젠*이 ‘로마가 낳은 최고의 창조적 천재’ 라고 말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물론 그런 면에서 선두주자이다. 하지만 로마사는 카이사르만의 것이 아니다.

조금 전에 소개한 포에니전쟁에서 천재 한니발을 짓밟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그리고 포에니전쟁 이후 ‘혼미의 시대’에 등장한 코르넬리우스 술라, 또한 카이사르 암살 뒤 초대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 …, 그들은 확실히 최상의 품격을 지닌 남자들이라고 할 만하다.

그리고 이들 외에도 독특한 인물, 파격적인 인간, 혹은 일은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사랑이 느껴지는 남자들이 로마사에는 무수하게 등장한다.

여기서 그 많은 남자들을 모두 여러분에게 소개한다는 것은 물론 불가능하다. 하지만 ‘역사는 인간’이라는 것을 로마사만큼 실감나게 전해 줄 수 있는 것도 없다. 역사란 역시 인간이 만드는 것, 그래서 재미있다.

그럼 서두는 이 정도로 끝내고, 이제 슬슬 로마사 본편의 막을 열어 나가겠다.

 

** 폴리비오스 – 기원전 200년경 ~ 기원전 120년경. 그리스 출생의 그리스인, 포에니전쟁 때 인질로 로마에 끌려갔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신흥국 로마에 흥미를 가지게 된다. 로마의 무장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와 친교를 맺고, 제3차 포에니전쟁에서 카르타고가 멸망하는 것을 현장에서 목격한다. 폴리비오스는 조국 그리스가 왜 혼미하고 로마는 왜 융성했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역사>를 저술했다. 이 <역사>는 로마사에 관한 본격적인 저작의 효시였다.

 

** 몸젠 – 1817년~1903년 19세기 독일을 대표하는 역사학자 1854년부터 간행된 그의 <로마사> (전 5권 그러나 제4권은 결국 쓰지 못했다)는 고대 로마, 특히 카이사를 새롭게 조명한 것이었다. 당시 유럽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190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본래 로마법 연구자로서 그 분야에서도 불후의 업적을 남겼다.

 

 

 

 

2장 로마는 이렇게 탄생했다

 

 

“여기를 넘으면 인간세계의 비참함, 넘지 않으면 이 몸이 파멸.”

루비콘 강 하구에서 카이사르가 막료들에게 외쳤다는 이 한마디에는 당시 카이사르의 엄청난 고뇌가 담겨 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눈을 돌리지도, 현실의 무게에 눌리지도 않았다. 그는 뒤돌아 서서 제13군단 병사들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앞으로 나아가자. 신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우리를 모욕한 적이 기다리는 곳으로 주사위는 던져졌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기원전 49년 1월 12일 이른 아침,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오랜 세월 동안 로마 본국과 북이탈리아 속주의 국경을 이루어 온 루비콘 강가에 서 있었다.

국경을 이루는 강이라고는 하지만, 루비콘 강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만큼 크지는 않다. 실제로 그곳에 가 본다면 “이게 루비콘…?” 하고 말문이 막힐 정도의 실개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실개천 같은 강의 기슭에 선 카이사르도, 카이사르를 수행하는 제13군단 병사들도 입을 다문 채 한참 동안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루비콘 강은 폭이 좁아 쉽게 건널 수 있었으나, 카이사르 일행이 그 장을 건너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왜냐하면 이 강을 건너 로마 본국 내에 접어드는 것은 ‘조국의 적이 되는 거’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당시 로마의 법률에는 무장한 군단이 부대를 이루어 본국 내에 접어드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다. 만약 그것을 어기고 행동으로 옮기면 쿠데타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이 강을 건너면 카이사르와 그 병사들은 토벌군의 추격을 당한다. 그것은 로마인끼리 서로 죽이는 내전의 시작을 의미했다. 그렇다 고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에서 되돌아설 수도 없었다. 이미 로마공화정의 최고 권위 기관인 원로원이 ‘원로원 최종 권고’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비상사태 선언’에 해당하는 이 포고에 따라 카이사르는 이미 원로원에게 쫓기는 몸이 되어 있었다.

아직 루비콘을 건너지 않았다고 해도 원로원에 붙잡히면 카이사르는 달해야 국외 추방, 잘못하면 사형을 당할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만약 도망을 간다 해도 그 후의 생애는 유랑으로 보내야 한다.

“여기를 넘으면 인간세계의 비참함, 넘지 않으면 이 몸이 파멸.”

루비콘 강 하구에서 카이사르가 막료들에게 외쳤다는 이 한마디에는 당시 카이사르의 엄청난 고뇌가 담겨 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자신이 처함 현실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결코 현실의 무게에 눌리지도 않았다. 그는 뒤돌아 서서 제13군단 병사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앞으로 나아가자. 신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우리를 모욕한 적이 기다리는 곳으로, 주사위는 던져졌다!”

 

 

카이사르가 ‘창조적 천재’인 이유

 

비록 자신이 파멸한다 하여도, 혹은 로마인 간에 다투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진다 해도, 카이사르에게는 루비콘 강을 건너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공화정이 이대로 유지되어서는 안 된다.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목표를 세워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머지않아 로마는 멸망한다.’ 는 위기의식이었다.

아직 로마가 융성해 보이지만 그것은 외관일 뿐, 내면에서는 이미 쇠퇴의 조짐은 보이기 시작했다. 이것을 방치해 둘 수 없다는 것이 카이사르의 인식이었다.

카이사르는 이미 로마 정치체제의 대담한 개혁을 구상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고자 노력해 왔다. 하지만 항상 ‘공화정의 수호자’ 임을 자처해 온 원로원이 그 앞을 가로막아 왔다.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공화정의 파괴자’ 라고 비난하더니, 마침내 비장의 무기처럼 ‘최종 권고’를 발표하고, 그를 국가의 적으로 단정한 것이다.

상황이 이에 이르자 카이사르는 원로원과의 전면 대결을 각오한 것이다. 처음 그가 목표로 설정한 ‘체제 내 개혁’은 원로원의 강경한 저지로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원로원에 정면 대응하여, 실력을 행사하여서라도 로마의 개혁을 실천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 루비콘 강을 건너는 일이었다. 즉 카이사르와 원로원의 대립은 결코 차원 낮은 이해 다툼이 아니라, 로마의 국가 형태를 바꾸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고, 로마의 장래를 문제 삼은 것이었다.

결과를 먼저 말하면, 카이사르는 원로원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둔다. 그리고 그 후 로마는 카이사르가 그렸던 개혁의 시나리오에 따라 재 탄생한다.

그 후 생겨난 것이 황제가 통치하는 제정이었다. 로마제국에서 제정은 500년간 계속되었다는 엄연한 사실에 비춰 볼 때, 카이사르의 ‘도박’은 멋진 승리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언급되었지만, 독일의 역사가 몸젠은 카이사르를 평가하며 “그야말로 로마 역사상 최고의 창조적 천재였다.” 라고 했다.

‘천재란 예술가나 학자에게 부여하는 칭호’ 라고 생각한다면 몸젠의 말에 위화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세에 남겨진 위대한 건축물을 만든 건축가가 천재라고 일컬어진다면, 500년이나 계속된 로마제국의 설계도를 그린 카이사르도 분명 천재라고 몸젠은 생각했을 것이다. 게다가 카이사르가 발명한 제국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분명히 ‘창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원래 카이사르가 로마의 공화정에서 문제라고 생각했던 부분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리고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이 거대한 문제를 살펴보려면 먼 길을 돌아야 하지만 역시 원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즉 로마의 공화정이란 원래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로마라는 국가는 어떻게 수립되었을까? 이 역사를 파고 들어가면 비로소 그 대답이 나온다.

그런 점에서 우선 로마가 독자적인 공화정을 만들어낼 때까지의 간략한 역사를 한번 살펴보자.

 

 

건국신화

 

현대의 우리가 보기에도 이탈리아 반도에 있는 도시 로마는 확실히 절묘한 위치에 놓여있다.

로마는 장화에 비유되는 홀쭉한 반도 한가운데에 위치해있다. 게다가 기후도 온난하고, 지정학적 관점에서 봐도 로마는 이탈리아 전체의 수도로서 안성맞춤인 곳이다. 그렇게 보면 로마는 수도가 될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가지고 태어난 도시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뒤늦게 주어진 지혜로, 기원전 8세기 이 땅에 터를 잡기 시작한 사람들에게는 로마의 지정학적 가치와 같은 것은 전혀 염두에 두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말한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이 지방에서 ‘생계를 잇기 어려운 사람’ 들의 집단이어서, 그곳을 벗어나 달리 정착할 땅도 경작할 토지도 찾을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로마에 정착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것은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초라한 조상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낼 자손이 있을까. 그래서 로마인들 사이에 다음과 같은 건국 신화가 만들어졌고, 그것을 믿어 왔을 것이다.

도시국가 로마가 탄생한 것은 기원전 753년 4월 21일의 일이었다고 전해진다. 오늘날에도 로마에서는 이 날을 기념하여 다양한 이벤트로 채워진 성대한 축제가 벌어진다.

로마를 건국한 사람은 알바 롱가 왕족의 자손인 로물루스라는 젊은이였다. 로물루스는 이탈리아 중부의 도시국가인 ‘알바 롱가’ 왕족의 자손이었다. 혈통을 추적해 가다 보면, 알바 롱가 왕가는 소아시아의 트로이, 그 유명한 서사시 <일리아스>에서 ‘오디세우스의 계략에 의해 망했다’ 고 전하는 트로이의 왕족에 이른다. 즉 로물루스는 유서 깊고 위대한 혈통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강에 흘려 보낸 쌍둥이

 

그러나 로물루스의 탄생은 결코 축복받지 못했다.

로물루스의 어머니는 알바 롱가 의 왕녀였지만,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무력으로 빼앗은 숙부에 의해 베스타 신전의 무녀로 내몰렸다. 숙부로서는 그녀에게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은 자신의 위치를 불안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숙부에 의해 처녀인 채로 일생을 마치도록 운명 지어졌다.

그런데 신에게 제사 지내는 동안 강가에서 무심코 잠이 들어 버린 황녀의 모습을 보고, 군사와 전쟁의 신인 마르스 가 한눈에 반하고 만다. 하늘에서 내려온 마르스는 자고 있는 왕녀가 눈을 뜨기 전에 남녀의 연을 맺어 버렸다고 하니, 확실히 신의 조화이다.

이렇게 해서 왕녀는 로물루스와 레무스라는 쌍둥이를 낳는다. 물론 이 쌍둥이의 탄생 소식을 듣고 황이 기뻐할 리가 없었다. 왕녀를 가두고, 쌍둥이 형제는 바구니에 담아 지금도 로마 시내를 흐르고 있는 테베레 강에 흘려 보내 버린다. 알바 롱가는 테베레 강 상류에 있던 산간 지역의 도시국가였다.

강물에 버려진 쌍둥이를 구한 것은 한 마리 암컷 늑대였다. 어린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들은 늑대가 쌍둥이를 강에서 건져 내어 젖을 먹였다고 한다. 늑대 젖을 먹는 갓난 쌍둥이 형제 상은 대부분의 역사 교과서에 실려 있어서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짐승의 품에서 길러진 성장기를 가진 인물이면 <정글북>에 나오는 모글리 소년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왠지 그대로 로마의 건국에 연결시키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쌍둥이를 늑대에 이어 그곳에 사는 목동에 의해 길러진 것으로 하여 인간과의 접촉을 설정해 놓아야 했다.

이렇게 해서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인간의 아이로서 성장하고, 마침내 목동들의 우두머리가 된다. 그리고 주변 라이벌과의 항쟁을 통해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는 세력권을 키워 나간다. 그런 과정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출생에 관한 비밀을 알게 된다. 그들 형제가 어머니와 자신들의 운명에 관계한 알바 롱가의 왕에 대해 복수를 맹세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목동들로 이루어진 부하를 거느리고 형제는 알바 롱가로 쳐들어가 자신들을 추방한 왕을 죽여 복수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미 옥사한 뒤였다.

그들은 알바 롱가를 정복했으나 그 땅에 살지는 않았다. 산간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알바 롱가는 발전의 여지가 없어 보인데다 그들의 ‘기반’은 어디까지나 테베레 강 하류 유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 형제는 이 테베레 강을 따라 내려가는 그 일대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기로 하는데, 이 도시가 곧 훗날의 로마이다. 그런데 이즈음에 이르러 형제 사이가 험악해졌다. 누가 새로운 도시의 왕이 될 것인지를 놓고 두 사람의 대립이 시작된 것이다.

분할 통치 형태를 하기로 합의한 후 일단 대립이 중단되는 듯했으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레무스가 경계선을 침해하면서 분쟁은 다시 시작되었다. 결국 로물루스는 레무스를 죽여 버리고 왕의 자리에 오른다. 새로운 도시는 로물루스의 이름에 따라 ‘로마’라 하게 되었다. …. 라는 것이 로마 건국 신화의 개요이다.

 

 

로물루스의 ‘삼권분립’

 

이러한 건국 신화는 재미있을지 모르겠으나 결코 진실되지도 별로 새롭지도 않은 이야기이다. 왕족의 혈통을 이어받은 귀인이 영웅으로 활약하여 국가를 세운다는 이야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두룩하다.

그러나 로마신화의 경우, 이제부터의 이야기가 아주 독특하다. 작가의 모든 특징은 처녀작에 나타나는 것처럼, 로마의 특징 또한 건국에서 이미 나타나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로마는 로물루스라는 청년에 의해 기원전 753년에 건국되었다. 그런데 로물루스는 왕이 되어서도 권력을 독점하려 들지 않고 국정을 왕, 원로원, 시민회의 세 기관에 의해 운영되도록 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로마의 왕은 시민 전체가 참가하는 시민회의 투표에 의해 결정되었다. 황은 종신제였지만 다른 나라와 달리 왕의 자손이나 혈족이 자동적으로 왕위승계를 하지 않고 로마 시민의 동의를 필요로 했다.

뿐만 아니라 시민회는 왕의 정책을 승인해 주는 권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의회처럼 독자적으로 법을 만들 수 있는 입법권은 없었다. 그 대신 황이 새로운 정책을 행하려면 반드시 시민회에 찬반을 물어야 했고, 전쟁을 시작하고 끝내는 때에도 시민회의 승인을 필요했다.

이처럼 왕의 권리는 상당히 제한되어 있었지만, 그러한 황의 정책에 조언을 해 주기 위한 기관으로 창설된 것이 원로원이었다.

공화정 시대에 접어들면 원로원은 ‘로마 그 자체’라고 할 만큼 권위와 권력을 획득한다. 하지만 당시 왕정 시대의 원로원은 단순한 조언 기관에 지나지 않았다.

100면의 장로들은 원로원 의원이라는 칭호를 부여 받아, 유력자로서 왕에게 조언을 하는 역할만 했다. 어쨌든 충고를 해 주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공적으로 임명되었다면 왕이라 해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효과는 있었을 것이다.

만약 이들이 단지 왕의 ‘신하’ 였다면, 왕은 귀 아프게 충언하는 그들을 없애 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원로원 의원이라는 공적인 지위에 있어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현대 민주정치 체제는 국가권력을 사법, 입법, 행정의 삼권으로 나누어, 상호 견제함으로써 권력의 폭주를 막으려는 삼권분립의 메커니즘을 채용하고 있다. 물론 로마 제도는 현대식 민주주의에 완전히 부합하는 것은 아니지만 국가 권력을 셋으로 분할했다는 점은 유사하다.

 

 

로마는 왜 ‘빈 땅’ 이었을까

 

그런데 왜 로마는 왕, 원로원, 시민회라는 독특한 삼권분립 시스템을 채용했을까. 그것은 로마가 건국되었을 당시의 사정과 깊은 관계가 있다.

당시 로물루스와 더불어 3,000명의 라틴인 이 로마 건국에 참여했다. 라틴인 이란 라틴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당시 이탈리아 반도에서 라틴인 들은 결코 큰 세력을 갖지 못했다.

북이탈리아 지방에는 에트루리아인*들이 정착해 있고, 남이탈리아 연안 지방에는 그리스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상업 도시를 건설하여 살고 있었다.

에트루리아인이나 그리스인은 농사와 목축생활을 하던 라틴인 에 비하여 문명 수준이 높았으며 경제나 군사적으로도 훨씬 뛰어났다. 그런데도 에트루리아인 이나 그리스인은 중부 이탈리아로 세력을 넓히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 지방을 정복해도 실제적인 이익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들 중에서 소수파적인 라틴인 들만이 로마 건설에 참여하였는데, 사실 3,000명의 건국자들은 라틴인 중에서도 ‘배제 당한 사람들’의 집단이었다.

어떤 이유로 출신 부족에서 살 수 없게 되었거나 혹은 내쫓긴 무리들이 로마를 만들지 않았을까. 게다가 이 3,000명 대부분이 독신 남자들이었으리라 추정된다.

그렇게 추정할 수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처럼 거칠고 사나운 집단이 정착할 땅으로 발견한 곳, 즉 로마를 건설한 땅이 겨우 ‘빈 땅’으로 방치되어 있던 곳이었다. 뭔가 허술한 얘기 같지만 사실이다.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근거는, 오늘날의 고고학적 발굴에서도 로마 건국 이전에 그 곳에서 도시를 이루었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만약 로마가 인간이 살기에 적합한 땅이었다면 그 이전에 꽤 대규모로 취락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형태와 흔적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허술한 무덤이나 사람이 살았던 자취 정도는 남아 있지만 도시를 이루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로물루스 일행이 올 때까지 로마에는 왜 도시가 생기지 않았을까. 그 이유 중 하나는 지형에 있다고 생각한다.

초기 로마의 위치는 대략적으로 말하면 일곱 개의 언덕과 그 골짜기에 해당되는 저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근처에 테베레 강이 흐르고 있어 언덕과 언덕 사이의 저지대는 습지였다. 하지만 간척을 하고 치수만 잘하면 살아갈 수 있었으므로 습지 자체는 별로 큰 문제는 아니었다.

문제는 일곱 개의 언덕이었다. 도시가 만들어지는 데 언덕이 있다는 것은 결코 나쁜 요소가 아니다. 오르내리기는 불편하지만, 외적의 방어를 생각한다면 언덕 위에 사는 것은 이점으로 작용한다.

실제 에트루리아 민족은 기꺼이 높은 언덕 위에 도시를 건설했다. 이탈리아 중부의 아름다움 도시로 잘 알려져 있는 페루자, 고딕 양식의 대성당이 유명한 오르비에토 등은 에트루리아가 생겨난 도시인데 대부분 고립된 고지대에 만들어졌다.

이에 비해 로마의 언덕은 낮고 서로 근접해 있다. 그렇게 되면, 비록 한 언덕에서 적을 막고 있다 해도 다른 언덕이 점령당하면 거기서 공격을 당해 손을 들 수밖에 없다. 로물루스 일행이 자리 잡고 살기 전까지 로마에 도시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혈기 왕성한 젊은이 집단

 

이러한 상황을 알게 되면 로물루스가 로마의 정치체제를 왕, 원로원, 로마 시민 전원으로 구성된 시민회의 세 주역으로 정해야만 했던 사정이 어슴푸레하게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분명히 초대 황에 올라도 될 만큼 로물루스는 지혜나 역량이 뛰어났으며, 군중에게도 인기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우두머리인 로물루스의 명령만으로 부하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이 3,000명의 상당수는 홀몸인 데다 혈기왕성한 무리였다.

이들이 혈연으로 뭉쳐진 부족이라면, 역시 족장의 권위로 복종시킬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여러 갈래의 세대들이 모여 이루어진 집단이었기 때문에 로물루스에게는 그럴 만한 권위가 없었다.

그래서 로물루스는 그들 ‘로마 시민’ 에게도 발언권을 주고, 그들 중 유력자인 장로들에게 원로원의 의원 지위를 주기로 생각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로물루스 자신이 로마의 왕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이 3,000명의 시민이 떠받들어 준 덕택임을 실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로마 왕정은 언뜻 보면 아주 독특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주 현실적인 선택의 결과였다. 로마의 당시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이러한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장래의 발전을 꾀하기 이해서도 로마 시민들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사비니 족 여인들 강탈’

 

그런데 나는 바로 앞에서 ‘건국 당시 로마에는 거칠고 사나운 독신 남성들이 다수였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했다. 그 이유는 로물루스와 동지들 3,000명이 로마를 건국하고 최초로 실시한 ‘사업’과 깊은 관계가 있다. 로마 땅에 눌러앉은 로물루스 일행이 처음으로 한 일은 이웃한 지역의 사비니 족을 축제에 초대하는 것이었다.

당시 라틴 지방에는 축제가 열리는 동안은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규칙이 정해져 있었으므로, 사비니 족들은 어떠한 경계도 하지 않고 초대에 응해 새로 건설된 로마에 일족을 거느리고 방문한다.

축제 분위기가 고조되고 사비니 족들이 방심하고 있을 때 사건이 일어났다. 로물루스가 내린 명령에 따라 로마의 젊은이들이 사비니 족 여인들을 강제로 덮쳐 끌고 간 것이다.

이 전대무문의 ‘폭거’를 맞아 사비니 족 남자들은 아내와 노인, 아이들을 보호하면서 자신들의 취락지로 돌아가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비니 족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사비니 족 남자들은 여인들의 반환을 강하게 요구했다.

그러자 로물루스는 “사비니 여인들을 로마 남자들의 아내로 삼겠다.”고 알렸다. 이어서 그는 약탈한 여인 중 한 명과 서둘러 결혼해 버린다. 말하자면 축제는 처음부터 신부 조달을 위해 독신 남성들이 세운 계략이었던 것이다.

로마인들 입장에서 보면, 드디어 정착할 곳을 얻었으니 그 다음에는 가정을 이루고 자손의 번성을 도모해야 했다. 하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구실에 사비니 족이 납득할 리가 없었다. 결국 사비니 족은 로마를 향해 선전포고를 한다.

로마와 사비니 의 전쟁은 모두 네 차례에 걸쳐 벌어졌는데, 대부분 로마의 우세로 진행되었다. 그대로 가다가는 로마인들이 사비니 족을 멸망시켜 버릴 수도 있었다.

그 같은 상황에서 ‘돌발사건’이 생긴다. 네 번째 싸움이 한창일 때, 잡혀간 사비니 의 여인들이 갑자기 나타나 양 진영을 향해 “제발 전쟁을 멈추세요!” 라고 간절히 애원하고 나선 것이다.

강탈당한 신부라고는 하지만 그녀들에게 로마 남자들은 남편이다. 또한 로마인들로도 그녀들에게 아내로서의 대우를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같이 사는 동안 그녀들에게서도 애정이 솟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들은 남편과 친형제가 서로 죽고 죽이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생각지도 않은 중재 역의 등장에 로물루스도 사비니 족의 왕도 ‘화평을 맺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하고 전쟁을 종결한다.

 

 

놀랄 만한 화평 제안

 

서양의 결혼식에서는 신랑이 신부를 껴안고 신접 살림할 집의 문턱을 넘는 관습이 있는데, 이것은 사실 ‘사비니 족 여인의 강탈’ 에서 로물루스가 약탈한 신부를 껴안은 것에서 유래되어, 로마인들에게 의해 계속 이어져 온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 강탈 사건은 나중에 푸생 이나 루벤스, 다비드 같은 화가들이 그림 소재로 택했을 만큼 유명하다. 이 사건이 남긴 영향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로물루스는 화평 성립에 맞춰 사비니 족에게 “두 부족을 하나로 합치자.” 고 제안한다.

통상적인 화평이라면 서로의 세력권이나 권익을 확인하는 것이지만, 전쟁에서 줄곧 우세했던 로마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사비니 족에게 “로마에 이주해서 같이 살지 않겠는가?” 라고 제안한 것이다.

로마와의 전투에서 줄곧 열세에 몰렸던 사비니 족은 로마와 대등한 합병이라면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 많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이 로마의 제안을 기뻐하며 수락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로물루스는 대체 왜 이 같은 제안을 했을까? 가장 큰 이유는 건국 초기 로마의 인구 부족에 있었을 것이다.

로마로서 인구가 증가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병력 증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건국 당시 로마에게 병사 확보는 급선무였다. 사비니 족 여자들을 가로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이를 낳아 자손이 번성하는 일은 당장 이루어질 수 없으므로 로물루스는 사비니 족 모두를 자신들 편으로 끌어들이기로 한 것이다.

 

 

‘제국의 원점’은 여기에 있다

 

이리하여 사비니 족은 로마로 옮겨 와 살게 된다.

로물루스는 로마의 일곱 개 언덕 중 한 곳인 퀴리날리스 를 그들의 거주지로서 내주었을 뿐 아니라, 사비니 왕인 티투스와 왕위까지 나누기로 한다. 즉 두 왕의 공동 통치였다.

로물루스는 사비니 족에게 로마인과 똑같은 권리를 갖는 로마 시민권도 주었다. 즉 사비니 족도 시민회의 투표권을 갖게 된 것이다. 로물루스는 또한 사비니 족의 유력자에게는 원로원의 의석도 주었다.

언뜻 보면 진수성찬 같은 이 대등 합병은 로물루스의 입장에서 보면 건국 초기 힘의 약화를 커버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방책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대성공이었다.

사비니 족 이후로도 로마는 자신들과 전투를 치른 상대를 계속해서 로마 국민으로 편입시켜 나가는 노선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독특한 정책 덕분에 생긴 지 얼마 안 된 로마는 세력을 확장해 나갈 수 있게 된다.

그로부터 약 800년 후, 그리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는 처음에 ‘신부 강탈’을 계기로 시작된 로마인 특유의 동화정책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패자마저도 자신들에게 동화시킨다’ 는 이 방식만큼 로마를 강하게 만들고 영토를 확장시키는 데 기여한 것은 없다.

여기서 그가 말한 ‘로마’ 란 로물루스 시대의 작은 도시국가가 아니다. 1세기에 태어난 이 역사가가 본 것은 지중해 세계에서 패자가 된 로마제국이었다. 즉 로물루스가 고육지책으로 시작한 ‘패자도 동화시킨다’는 생존 방식은 후에 거대 로마제국을 만들어 내는 원점이 되었던 것이다. 로마인이 로물루스 이후로 그 전통을 어떻게 계승했으며, 그것을 시대에 따라 어떻게 적용해 나갔는지를 여러분은 이제부터 목격하게 될 것이다.

 

 

로마군 은 왜 강했을까

 

이야기는 건국 당시로 되돌아간다.

37년에 걸친 로물루스의 치세가 끝난 후에도 ‘패자도 동화시킨다’ 는 로마의 발전은 계속된다.

여기서는 상세히 역사적인 사실을 따라가지 않겠다. 제3대 왕 톨루스 호스틸리우스 는 라틴인의 발상지, 로마인에게는 조상의 땅이기도 한 알바 롱가 정복에 성공한다.

이것으로 로마는 ‘라틴인의 본가’ 라는 지위를 획득한 셈인데, 이때도 그들은 알바 롱가의 주민을 로마에 이주시키고 그들에게 시민권이나 원로원의 의석을 개방했다. 다른 부족이라면 정복한 백성을 죽여야 할지, 노예로 삼을지를 고민하지만 로마인은 그런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알바 롱가의 왕은 처형했으나 그 백성은 같은 시민으로 맞아들였다.

이때 알바 롱가에서 이주해 와 원로원의 의석을 받은 유력 가문 중에 ‘율리우스 가’ 가 있었다. 이 율리우스 가의 자손 중 한 사람이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이다. 카이사르 역시 ‘동화된 패자’ 출신이었다.

이처럼 초대 로물루스부터 제6대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까지 로마는 이웃 부족과의 전쟁을 통해 세력권을 확장해 갔다. 그러나 그 길이 결코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한마디로 왕정 시대 로마는 전쟁의 연속이었다. 신참인 로마가 살아남기 위해 전쟁은 피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계속되는 전쟁 속에서도 로마가 순조롭게 거듭 승리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독특한 정치 체제에 있었다.

형식상 왕정이었으면서도 그 왕은 시민회에서 선출하였다. 즉 로마 시민의 의식 속에 로마는 ‘왕의 나라’ 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곧 국가’ 였다. 그렇게 때문에 그들 로마인들은 계속되는 전쟁조차 참고 견딜 수 있었으며, 전의도 상실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전쟁이란 자신들의 공동체를 지키는 것인 동시에 내일의 번영을 성취하기 위한 것도 되었기 때문이다.

군대란 결국 그 나라 국민이 심정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나라도 그 수준을 넘는 군대를 가질 수는 없다. 이것이 현실이다. 시민으로서의 자각을 가진 병사들이 조직적으로 싸우는 로마군 에게, 그런 자각이 없는 다른 부족이 패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직접세’ 였던 병역의 의무

 

로마인들은 그들이 역사에 용병, 즉 돈을 주고 외국인 병사를 고용하는 일은 없었다.

로마의 정치체제는 왕정, 공화정, 제정으로 옮겨 가지만 자국의 방위는 타인에게 맡기지 않고 자신들이 직접 맡아야 된다는 것이 그들의 일관된 생각이었다. 왕정 시대 때도 로마에서는 힘 있는 귀족이든 그렇지 않은 평민이든 병역을 치러야만 비로소 한 사람의 시민이 된다고 생각했다.

로마 시민에게는 누구나 시민회의 투표권이 주어졌는데, 시민에게 그 투표권은 ‘권리’였다. 그러나 권리는 반드시 ‘의무’를 수반하는데, 그 의무란 공동체의 방위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권리’와 ‘의무’에 대한 이러한 사고방식은 고대의 도시국가형(폴리스) 나라에서 공통되는 것으로, 결코 로마만의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그리스의 아테네에서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병역은 시민에게 부과된 ‘직접세’였다.

세금이란 무엇일까? 현대의 세제는 복잡하고 기묘하다고들 하지만, 요약하자면 세금은 국가를 유지하고 운영해 나가는 데 필요한 경비를 국민이 부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절대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국가 방위에 드는 비용이다.

로마는 국가 방위를 시민 자신이 직접 병역으로 치렀다. 그러니까 국방비를 금전이나 물건 대신 자신의 몸으로 지불하는 것이다.

실제 로마에서는 제정 시대에도 지금의 우리가 소득세를 지불하는 것과 같은 형태의 직접세란 없었다. 라틴어에서 말하는 ‘혈세’, 즉 병역으로 충분히 세금을 지불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병역이 곧 세금이라면, 가난한 사람에게나 부자에게나 똑같이 과세하게 된다. 오히려 불평등한 게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제6대 왕 세르비우스가 정한 군제를 예로 들면, 시민을 자신의 정도에 따라 여섯 단계로 분류했다. 자산이 많을수록 군무의 부담도 커졌다. 그래서 더 많은 수의 병사를 제공하게 되어 있었다. 더욱이 제1계급과 제2계급의 사람들은 중장비 보병이나 기병으로서 참가해야 했다.

당시는 중장비 보병이 사용하는 고가의 장비나 무기를 자기 부담으로 직접 준비해야 했기 때문에 경제적 부담이 적지 않았다. 기병의 경우, 말도 자기 부담으로 준비해야 했으므로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그에 비해 경장 보병으로서 군에 복무하는 평민일 경우는 몽둥이와 투석기 등, 장난감이 아닌 병기라고는 하지만 요컨대 놀이기구를 해도 될 정도의 군장 구비를 하는 것이어서 부담이 가벼웠다. 또한 재산이 없어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생활자이거나 집을 비우고 출정하는 것조차도 힘든 ‘프롤레타리’ (재산이 전혀 없는 시민, 후대에 무산계급을 가리키면서 사용된 프롤레타리아의 어원)는 예비역이 되기도 했지만, 사실상 병역을 면제받는 것이다.

로마의 병제는 이처럼 ‘국가 방위는 시민의 의무’ 라는 이념과 로마의 현실이 잘 조합되어 있었다. 그래서 로마의 군대는 주변 여러 부족과의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둘 수 있었다.

 

 

왕들의 프로필

 

로물루스로부터 시작된 왕정 로마는 금세 중부 이탈리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지만, 영토 확장 못지않게 중요한 국내의 내정은 어땠을까?

이 점에서도 로마는 아주 독특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말했듯이 로물루스는 시민회에 의해 황을 선출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았다. 이 독자적인 체제를 로마 시민들은 잘 활용해 ‘적재적소’ 라고도 할 만큼 왕을 제대로 뽑았다.

역대 왕의 치세를 정리해 보면 그것 또한 무척 흥미롭다. 제2대 누마 왕부터 제6대 세르비우스 왕까지 왕들이 프로필을 간단히 소개한다. 이것만으로도 로마의 독특함을 알 수 있다.

 

제2대 누마 폼필리우스

로물루스가 죽고 난 뒤 재발한 라틴인과 사비니인 의 내부 항쟁을 해소시키기 위해 외부에서 ‘스카우트’ 되었다.

로마로 이주하지 않은 사비니 족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의 높은 덕과 깊은 교양은 이미 정평이 나 있었고 신망도 두터웠다. 즉위 후에는 국내의 질서를 바로잡는 일에 중점을 둔 정책을 펼쳤다. 국가 세력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일관하다 마친 로물루스의 후임으로서 아주 적절한 인물이었다.

 

제3대 톨루스 호스틸리우스

로물루스와 같은 라틴계 로마인, 그래서인지 로마는 다시 확대 노선으로 바뀐다. 앞에서 소개했듯이 ‘라틴인의 본가’ 알바 롱가를 정복하고 알바 인을 로마에 동화시킨 인물.

 

제4대 앙쿠스 마르키우스

로마에 귀화한 사비니 족 출신, 테베레 강 건너편 기슭에 요새를 구축한다. 또한 테베레 하구 마을 오스티아를 정복해 그곳을 로마의 외항으로 삼는다.

 

 

이때까지는 왕좌를 라틴, 사비니, 라틴, 사비니 가 번갈아 가며 맡았다. 말하자면 ‘주고받으며 교대로 맡은 인사’ 라고도 볼 수 있는데, 제5대째가 되면 전혀 새롭게 전개된다.

 

제5대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타르퀴니우스는 실제 로마 시민은 아니고 그리스인과 에트루리아 인을 부모로 둔 혼혈아였다.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 나가고자 로마로 이주하여 공증인으로서 성공한다. 그리고 스스로 입후보하여 왕이 된다.

왕이 된 뒤에는 적극적인 공공 공사를 실시하여 로마의 사회기반 시설을 정비함으로써 시민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제6대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선왕 타르퀴니우스가 특별히 재능을 아껴 등용한 에트루리아인, 태생이 확실하지 않고 노예의 아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선왕이 암살당하자 시민회의 의결까지 않고 원로원의 의결만으로 취임한다. 군제(세제)를 정비했을 뿐 아니라 로마군 의 전법도 확립했다. 치세 34년(기원전 578~기원전 545) 동안 로마 군은 연전 연승했다.

 

 

오만왕 타르퀴니우스

 

초대 왕 로물루스에서부터 6대째 세르비우스까지의 업적을 보면 로마 시민들은 왕의 선택에서 꽤 지혜로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5대째의 타르퀴니우스, 6대째의 세르비우스에서 알 수 있듯이, 로마인은 결코 혈통이나 태생 등을 따지지 않았다. 세르비우스의 경우는 태생도 확실하지 않은 에트루리아의 고아였다.

아직 소년기에 지나지 안는 로마가 살아남기 위해서 로마인들은 민족 감정 같은 것은 일단 접어 두고 어디까지나 능력주의로 관철시킬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현실적인 선택이 이루어졌고, 또한 선출된 왕들도 그 기대에 부응했다. 하지만 어떠한 제도라도 제도 그 자체의 ‘수명’이 있다. 처음에는 잘 운용되던 시스템도 시대가 바뀌면 폐해들이 고개를 드는 것이다.

로마 왕정도 예외는 아니었다. 로물루스가 생각해 낸 왕과 원로원과 시민회의는 로마식의 삼권분립은 젊은 로마를 발전시키는 중추 역할을 하였다. 그 결과 로마의 위세가 확대되고 국내 경제도 안정되었다. 그러자 사정이 바뀌기시작한다.

아무리 국권을 셋으로 나누었다고 해도 왕정인 이상, 로마의 통치권은 역시 왕에게 있었다. 그 왕이 권력을 남용하고자 한다면, 왕위가 종신제이기 때문에 그것을 저지할 방법이 없었다. ‘시민에게서 선택된 왕’ 이라는 자각이 없는 왕이 나타나서 왕이 가진 권력을 남용하면 어떻게 될까? 그 실례가 7대째의 ‘오만왕 타르퀴니우스’ 에서 이미 나타나기 시작한다.

 

 

피로 물든 즉위 극

 

‘오만왕 타르퀴니우스’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제5대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의 아들(루키우스 타르귀니우스 수페르부스)이다. 그런데 로마 시민에게 자신의 신념과 정견을 호소하여 당당히 당선된 아버지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는 ‘왕을 살해’ 하고 왕좌를 차지했다. 시민회의 의결이나 원로원의 승인을 받지 않았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지만 왕을 살해한 실행범은 그 자신이 아니었다. 세르비우스의 숨통을 끊은 사람은 바로 왕의 친딸 툴리아 였다.

일의 발단은 세르비우스가 자신의 두 딸을 선왕 타르퀴니우스의 아들들과 결혼시키려고 마음을 정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세르비우스에게 있어서 타르퀴니우스는 에트루리아의 고아인 자신을 거두어 준 은인이었기에 그 은혜에 보답하려는 심정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결혼은 생각지도 못한 화를 불러일으켰다.

세르비우스에게는 성격이 강한 툴리아라는 딸과, 툴리아와는 달리 얌전한 성품의 딸이 있었다. 한편 타르퀴니우스 가에는 역시 성격이 강하고 야심가인 아들 타르퀴니우스와 성격이 온화한 또 한 명의 아들이 있었다.

세르비우스는 일부러 성격이 다른 사람끼리 결혼을 시켰다. 결혼에 의해 서로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부모의 마음은 통하지 않았다. 툴리아는 자신의 남편이 패기가 없다고 싫어했다.

결국 자신과 비슷한 성격의 시동생 타르퀴니우스를 유혹했으면, 얼마 후에 온화한 성격의 두 사람이 수수께끼 같은 죽음을 맞고 툴리아와 타르퀴니우스가 재혼한다.

이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해 왕 세르비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딸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서로 닮은 이 부부 사이에 주도권을 잡은 쪽은 아내 툴리아였다. 툴리아는 남편 타르퀴니우스를 부추겨 왕위에 대한 야망에 불을 붙인다.

이미 세르비우스의 통치는 40년을 넘겨, 그도 늙어 있었다. 하지만 로마의 왕위는 세습이 아니다. 시민회의 선거를 거치지 않고서는 왕이 될 수 없을뿐더러 선거에 출마한다 해도 당선된다는 보장도 없다. 가능하다면 실력으로 왕위에 올라 자신을 왕비로 만들어 달라고 그녀는 남편을 조른다.

원래 야심가이던 타르퀴니우스는 자신의 후원자들을 거느리고 원로원 앞에 나가 왕을 탄핵하는 연설을 한다.

“태생도 확실하지 않은 사람을 왕으로 섬긴다는 것은 로마의 수치가 아닌가?” 라고 외친 것이다. 그의 친아버지 타르퀴니우스의 프리스쿠스도 순수 로마인이 아니었다. 그 사실은 제쳐 놓은 탄핵의 연설이었다.

그 자리에 왕 세르비우스가 달려왔다. 그러나 세르비우스가 행동을 취할 틈도 주지 않고 타르퀴니우스는 왕을 원로원의 계단 위에서 밀어 뜨려 버린다.

그러나 왕은 바로 죽지 않았다. 다쳐서 고통스러워하며 왕궁으로 돌아가는 세르비우스의 숨통을 끊은 것은 바로 친딸 툴리아였다. 왕은 그녀가 모는 마차에 치여 죽었다고 전해진다.

 

 

스캔들은 왜 일어날까

 

이처럼 쿠데타로 왕좌를 차지한 타르퀴니우스는 반대파 원로원 의원들을 다 없애 버린다. 그 후로는 원로원의 승인을 요구하지도, 시민회의 찬반을 묻지도 않고 정치를 한다.

이쯤 되면 로물루스가 정해 놓은 제도는 완전히 붕괴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 전제군주는 군사적인 면에서만은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 그래서 로마 시민들은 뒤에서 ‘오만왕 타르퀴니우스’ 라고 비난하면서도,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했다. 그러나 25년에 이른 그의 통치도 후기에 가까워지면서 서서히 그늘이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그 계기가 된 것은 에트루리아 민족의 쇠퇴였다.

‘오만왕 타르퀴니우스’는 에트루리아 혈통을 이어받았으며, 로마에서 그를 왕으로 받들어 준 사람들도 에트루리아 계 시민이었다

로마가 발전하면서 로마에는 장사나 기술이 뛰어난 에트루리아 계 시민들이 유입해 왔고, 로마의 신흥계급이 되어 급속하게 힘을 가지게 된 그들은 자신들에게 이익을 줄 것으로 기대하고 타르퀴니우스를 왕좌에 앉히는 데 힘을 실어 주었다.

황위에 오른 타르퀴니우스도 에트루리아 계 시민을 우대해 주었으며, 에트루리아 본국과의 외교 관계도 강화해 나갔다. 그런 탓에 “로마는 에트루리아 인의 것이 돼 버렸다.” 고 한탄하는 시민들도 많았다. 그런데 에트루리아가 정확히 그 즈음부터 쇠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에트루리아 민족은 북이탈리아에서 급속히 세력을 늘려 왔지만 쇠퇴 또한 빨랐다. 에트루리아의 쇠퇴는 타르퀴니우스에게는 후원자들의 요동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떤 세상에서든 그 인물의 영향력이 강할 때는 스캔들이 쏟아지지 않는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힘이 약해지면, 마치 노리고 있었다는 듯 곧바로 터진다. 현대에도 정부나 대기업의 우두머리가 실적을 올리고, 그것이 숫자로 나타나고 있을 동안에는 아무도 괴문서를 뿌리거나 스캔들을 터뜨리지 않는다. 그러나 인기가 떨어지고 실적이 조금이라도 나빠지면 갑자기 돌변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타르퀴니우스의 경우 그 스캔들의 불씨가 된 것은 친아들이었다.

 

 

왕의 추방

 

사건은 타르퀴니우스의 외아들 섹스투스가 친족 콜라티누스의 아내 루크레티아를 연모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거기서부터 왕의 추방극은 말을 연다.

섹스투스는 루크레티아의 남편 콜라티누스가 없는 틈을 노리고 그녀를 찾아간다. 친족이기도 한 그를 루크레티아와 가족은 환대하고 집에 묵게 해 준다. 그런데 섹스투스는 야음을 틈타 그녀의 침실에 숨어 들어간다.

섹스투스는 강제로 뜻은 이루었지만, 그의 어리석은 행동에 루크레티아는 가슴에 상처를 입는다. 그런 그녀를 뒤로 하고 섹스투스는 서둘러 돌아가 버린다. 목적만 달성하면 나머지는 상관없다는 태도였으니, 무분별에도 정도가 있을진대 너무나도 감수성이 부족한 남자였음이 분명하다.

혼자 남겨진 루크레티아는 그가 돌아가자마자 하인을 시켜 전쟁터에 나가 있는 남편에게 급히 편지를 보낸다. 변고를 알아차리고 달려온 일행은 남편 콜라티누스와 그녀의 아버지 루크레티우스, 그리고 남편의 친구인 브루투스, 아버지의 친구 벨레리우스 네 사람이었다.

그들 네 사람 앞에서 루크레티아는 단검으로 자신의 가슴을 찔러 자살하며,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부디 제 원수를 갚아 주세요.” 라고 남자들에게 간청한다. 남자들이 그러겠다고 맹세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루크레티아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움직이기 시작한 사람은 브루투스였다. 브루투스는 소집한 시민들 앞에서 이 만행을 폭로한다. 그리고 섹스투스의 아버지가 선왕을 암살하고 왕위를 빼앗은 인물이라는 것을 청중들에게 상기 시키면서, 왕과 왕의 일족을 로마에서 추방하자고 제안한다.

그때까지 강력한 힘 앞에서 왕에 대한 불만을 억누르고 있던 시민들도 브루투스의 연설을 듣고 분노를 폭발하였다. 브루투스는 이를 위해 시민 병을 결집하자는 호소도 덧붙여 시민들의 동의를 얻어낸다.

일의 갑작스러운 전개를 전쟁터에서 알게 된 타르퀴니우스 왕은 즉시 수하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로마로 향했다. 하지만 로마 시민들은 그에게 성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자신이 추방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왕은 에트루리아로 달아난다. 아버지인 왕을 자신의 손으로 죽인 툴리아는 이미 로마에서 도망치고 없었다. 그녀는 무사했으나, 원래 이 사태의 원인을 만든 외아들 섹스투스는 도망치다가 죽임을 당한다. 이전에 그가 모독했던 사람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전해진다.

 

 

소년기의 마지막

 

기원전 509년, 브루투스에 의한 타르퀴니우스 추방극으로 로마의 역사는 큰 전환점을 맞는다. 이 사건을 계기로 244년 동안 7대까지 이어진 왕정은 끝이 나고 공화정 시대가 시작된다.

추방된 타르퀴니우스는 전체적인 업적을 보면 결코 나쁜 왕으로만 단정할 수는 없다.

정치는 어디까지나 결과로 평가된다. 동기가 아무리 선의로 가득 찼다고 해도 그 결과가 국가나 시민에게 불리하게 나와 있으면 그것은 악정이다. 반대로 동기는 불순해도 결과가 좋으면 선정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공인과 개인을 평가하는 기준의 차이이다.

타르퀴니우스는 그가 이끈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했다. 그것이 물론 로마에 이익을 가져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일에도 물때가 있다. 로마의 왕정도 썰물 때 접어들고 있었을 것이다. 왕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맡기기에는 로마가 너무 커진 것이다.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면 처음부터 ‘구시대적’, ‘반동적’ 이라고 단죄하기 쉬운 것이 왕정이지만, 왕정을 악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국가가 신생되어 작을 때는 왕이 중앙집권적으로 통치하는 것이 기동성도 있고 효율도 높다. 탄생되어 얼마 지나지 않은 국가는 무엇보다도 생존이 최우선 사항이어서, 사람들이 서로 논의나 하고 앉아 있을 여유가 없다.

되돌아 보면 7대까지 이어진 로마의 왕들은 놀란 만큼 ‘적재적소’ 였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로물루스가 정한 제도가 훌륭했던 것이다. 게다가 각각의 왕들이 모두 오래 통치했다. 자신의 생각을 실행에 옮기고 그 성과를 볼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잘못된 점도 고쳐 나갈 수 있고 방향 전환도 할 수 있다. 또한 대를 잇는 왕들도 선왕의 실적을 근거로 새로운 정책을 실행할 수가 있다. 이 점에서 당시의 로마는 행복했다.

그렇지만 신생 국가가 성장하여 규모가 커지면 계속해서 왕의 결단에만 맡겨 놓을 수가 없다. 시스템의 변화 없이 주변 환경만 바뀐다면 옛날과 다르지 않은 그 시스템에 의해 오히려 폐해가 초래될 것이다.

건국 당시에 작았던 로마도 ‘오만왕 타르퀴니우스’ 시대에 이르러 상당한 규모로 되어 있었다. 시민의 숫자가 늘어나면 초기와 같은 굳건함이나 단결도 어려워지고 이해가 상반되는 세력이 나오게 마련이다. 그런 탓에 그것을 조정하기 위한 기관이 필요하다. 왕 혼자서 일체를 결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리 추종 세력에 의한 지지가 있다 하여도, 더 이상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게 되었다.

타르퀴니우스의 ‘지지 모체’ 가 에트루리아 계 시민들이라는 점에 다른 시민들이 불만을 갖고 있다고 앞에서 거론했다. 그런데 이러한 불만은 타르퀴니우스 아닌 다른 누가 왕이 되었어도 틀림없이 분출되었을 것이다.

결국 로마 왕정이 쓰러진 것은 ‘오만왕 타르퀴니우스’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로마에서 왕을 선출하는 시대가 이미 끝났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작은 도시국가에서 펼쳐 나가던 로물루스 시대는 이제 옛날 얘기가 되어 가고, 로마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중이었다. 인간의 일생에 비한다면 젊고 꿈에 넘치는 소년기는 마지막을 고했으며, 이제 미혹은 많아도 체력에서는 지지 않는 청년기를 로마는 맞이하게 된 것이다.

 

 

** 에트루리아 인: 에트루리아 인의 기원은 아직까지 수수께끼로 여겨지고 있지만, 일찍부터 철기의 제조법을 알고 있었으며, 이탈리아 반도에 그들이 정착한 것도 반도 중부에 있는 광산이 목적이었으리라 생각되고 있다. 고대 에트루리아 인에게는 12개의 도시국가가 있었지만, 뛰어나게 힘을 자긴 국가는 없었으므로 에트루리아 전체가 함께 행동하는 경우는 없었다. 이것이 나중에 에트루리아가 쇠망하는 치명상이 되었다.

 

 

 

 

3장 공화정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로마의 원로원 의원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귀족 정신’의 소유자였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엘리트로서의 책무’ 라는 의미를 지니는데,

로마의 엘리트들은 문자 그대로 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견본과 같은 사람들 이었다.

 

 

‘바보’의 혁명

 

기원전 509년 오만왕 타르퀴니우스를 추방하고 왕정을 폐지한 중심인물은 브루투스였다.

브루투스의 어머니는 타르퀴니우스의 여동생이므로, 즉 왕과 왕을 추방한 브루투스와는 외삼촌과 조카 사이였다. 왕가에 연결된 인물이 왕을 추방한다는 것은 얼핏 기이해 보일는지 모른다. 하지만 권력을 가까이에서 보면 오히려 잘못된 부분이 제대로 보일 수가 있다.

브루투스는 원래 별명인데 ‘바보’라는 뜻이었다. 말하자면 왕정시대 때 브루투스는 주위에서 ‘바보’라고 멸시당하던 남자였다. 그러다가 어느새 브루투스는 통성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자신이 놓인 상황을 잘 알아차렸고, 참아야 할 때는 참아 내는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유사시에는 과감하게 행동에 옮기는 실행력도 있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권력 가까이에서 왕정의 실태를 냉철하게 관찰하면서 ‘로마의 왕정은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 고 간파하고 있었다.

개혁자는 간혹 체제 내에서 주목 받던 일물일 경우도 있다. 그러한 점에서 본다면 개혁, 보수라는 분류는 결코 간단하지 않은 일이다.

이보다 460년 뒤에 카이사르를 암살하는 사람도 마르쿠스 브루투스라는 이름의 인물이다. 이 두 브루투스 사이에는 혈연관계도 없었다.

그러나 공화정 창시자와 같은 가문의 이름을 가졌다는 이유로 카이사르를 죽인 마르쿠스 브루투스가 ‘내게는 공화정을 지켜야 할 운명이 주어져 있다.’ 고 생각했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인간이란 올바른 것인지 아닌지는 별개로 하고, 자신의 뜻을 내세울 대의 명분이 없으면 결코 큰일을 저지를 수 없기 때문이다.

 

 

왕에서 집정관으로

 

왕을 추방하는 일에 성공한 브루투스는 로마 시민을 모아 놓고, “앞으로 로마는 어떤 인물도 왕위에 오르는 것이 허용되지 않을 것이고, 어떤 인물도 로마 시민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 고 맹세하게 하였다. 그렇지만 권력자를 추방해 버리는 것으로 모든 것이 잘돼나가는 것도 아니다. 19세기의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가 지적한 것처럼 “인간은 온갖 통치 형태를 생각해 냈지만 지배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통치 형태만은 생각해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계급 없는 사회를 목표로 한 사회주의 혁명의 결말은 거론할 필요도 없다. 어느 사회에도 지도자는 필요 불가결하다.지도자가 존재하지 않고 구성원 모두가 평등하다면 결국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 무책임한 사회가 돼 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마도 추방한 왕을 대신할 수 있는 지도자를 세울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로마 시민의 자유를 지킨다는 것은 공허한 구호나 슬로건으로 전락할 것이다. 그래서 브루투스는 ‘집정관’ 이라는 최고 지도자의 지위를 생각하였다.

집정관은 왕과 다름없이 시민회에서 선출되어 로마의 내정에서 최고의 권력을 행사하며, 유사시에는 지휘관으로서 군대를 통솔한다. 그렇지만 백악관에 앉아서 ‘전쟁 지휘’를 하는 미국 대통령과는 다르다. 로마에서는 실제로 최전선에 나가 지휘를 맡는 것이 보통이었다. 따라서 공화정의 집정관은 총리 겸 합동참모회의 의장 겸 야전군 사령관을 합친 관직이었다.

이처럼 큰 권력과 무거운 책임을 주는 한편, 브루투스는 집정관이 장래에 왕이 되지 못하도록 제어 장치를 설치하였다.

그 제한이란 ‘집정관은 반드시 시민회에 의해 두 명을 선출하며, 그 인기는 1년으로 한다.’ 는 것이었다. 재선은 가능하지만 반드시 매년 선거 세례를 받게 되면 왕처럼 군림할 수는 없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브루투스는 집정관을 2인제로 만들어 더욱 강력한 보험을 걸어 놓았다.

두 명의 집정관에게는 상하 관계가 없고 각각 거부권이 주어져 있었다. 즉 한쪽 집정관이 어떤 일을 결정해도 다른 한쪽이 그것에 찬성하지 않으면 정책으로서 실행할 수가 없었다. 이 정도라면 집정관이 독단으로 로마의 정치를 움직일 수 있는 위험을 상당 부분 억지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새로운 관직인 집정관의 초대 취임 자는 브루투스와 자살한 루크레티아의 남편 콜라티누스였다.

 

 

공화정의 열쇠를 쥔 원로원

 

브루투스는 최고 지도자의 권력을 가능한 한 제한하기 위해 집정관 제도를 고안해 냈다. 물론 임기 1년에 2인 병립 제라는 시스템에는 큰 약점도 있었으며, 그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불과 1년뿐인 임기로는 장기적인 정책과 입안과 그 실시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집정관보다 조금 더 임기가 긴 미국 대통령조차 다음 선거 준비에 정신이 없다는데, 불과 1년으로는 안정된 정책을 바랄 수도 없다. 자연히 선거를 염두에 두고 인기를 얻으려는 행동 정치에 매달리게 될 것이었다. 그래서 브루투스가 생각한 것이 원로원의 기능 강화였다.

로물루스가 창립한 원로원은 당초 정원 100명으로 시작했다. 그 후 제5대왕 타르퀴니우스에 의해 정원이 배증되었는데, 브루투스는 이것을 300명으로 늘린다. 새로운 의원으로는 로마의 신흥 세력에 속하는 유력 가문의 가장이 선출되었다.

그렇다면 왜 원로원을 확대, 강화하는 것이 공화정의 안정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했을까? 그 이유 중 하나는 원로원이 가진 특성에 있다.

로마의 원로원 의원들은 현대의 국회의원과는 달리 임기가 종신제였다. 즉 원로원 의원들은 선거 세례를 받을 필요도 없고 따라서 인기몰이에 분주할 필요도 없었다. 또한 오랜 세월 국정에 관여하기 때문에 로마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잘 파악할 수 있다.

원로원은 왕정 시대부터 ‘의견 제시’ 적인 기능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원로원의 ‘무게’를 증대시켜 정치의 안정성을 활보하겠다는 것이 브루투스의 목적이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원로원의 정원을 증가하는 것이 오히려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로마에 한정해서 말하면 정원의 대폭 증가에는 의미가 있었다. 왜냐하면 300명으로 늘어난 원로원은 당대 사회의 유력자를 거의 망라했기 때문이다. 원로원 의원의 지위는 세습이 아니다. 가문도 중요했지만 식견, 역량, 행동력, 덕망 등도 심사 대상이었다.

따라서 로마 귀족 계급의 엘리트 계층 가운데 중요한 인재는 빠짐없이 원로원에 모였다고 할 수 있었다. 즉 로마의 원로원은 ‘인재의 총집합체’ 였다. 또한 집정관 후보는 원로원 의원 중에서 출마하는 것이 통례였고, 다음 차례 집정관을 추천하는 일도 원로원 내의 ‘여론’이 결정했다.

만일 원로원 밖에서 입후보자가 나올 경우에도 원로원은 유력한 대항 후보를 내서 상대를 낙선으로 몰고 갈 수도 있었다. 또한 1년간의 임기를 마친 집정관은 다시 원로원이라는 ‘옛 보금자리’ 로 돌아가기 때문에 맞대 놓고 원로원과 자주 부딪칠 염려도 없었다.

제도적으로는 시민회에서 선출한다고 하지만 집정관이 되려면 원로원의 지지가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것은 임기 중에도 원로원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유리한 방책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물며 재선을 바란다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래서 원로원을 강화하고 확대하는 것은 집정관의 독단과 폭주를 막는 길이 되었다. 게다가 원로원이라는 유력한 후원 세력을 갖고 있으니 집정관의 권위에도 훨씬 관록이 붙는다. 그래서 일석이조라는 것이 브루투스의 ‘전략’이었다.

이러한 로마의 원로원은 공화정이 시작되고부터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널 때까지 추정하여 약 450년에 걸쳐 기능을 완수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로마의 원로원은 어떻게 수백 녀에 걸쳐 그 역할을 완수할 수 있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한번 원로원 의원이 되면 선거 세례를 받지 않고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선거 없이 종신으로 의석이 보증된다고 하면 현대인은 ‘특권 계급’ 이라는 말을 연상할 것이고, 그런 사람들이 사익보다 국익을 중시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렇게 단정해서는 안 된다.

선거가 없으면 현대의 국회의원들처럼 자신의 지역구에 이익을 유도하거나 시궁창 같은 선거판 에서 전력투구할 필요가 없다. 하물며 선거 자금 긁어 모으는 데 급급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 국회의원보다 로마 시대의 원로원 의원 쪽이 정치가로서의 정신과 시간 사용법에서 훨씬 자유로웠다.

또 하나, 현대의 국회의원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로마 원로원 의원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귀족 정신’ 의 소유자였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엘리트로서의 책무’ 라는 의미를 지니는데, 로마의 엘리트들은 문자 그대로 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견본과 같았다.

로마인들은 공화정에서 이행한 후에도 지속되는 전쟁 수행을 한다는 점에서는 생활의 변화가 없었다. 그때 전쟁터에 맨 먼저 달려 나가고 최전선에서 지휘를 맡은 사람들은 다름 아닌 그들이었다. 그들은 원로원 의원으로서 로마의 장래와 관련된 정책을 논의하고, 또한 군사를 인솔하여 로마를 지키는 일도 자신들의 책무라고 생각했다. 그것에 조금도 의혹을 품지 않았다.

이러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은 로마가 제정으로 이행해 감에 따라 서서히 약해지기는 했지만 원로원이 오랫동안 그 기능을 수행해 온 결과 중추가 된 것만은 확실하다.

 

 

“아버지들이여, 신참자들이여”

 

그런데 로마에 전쟁 위기가 닥칠 경우 최전선에서 지휘를 맡는 로마 엘리트들의 책무감 은 또 다른 파생 효과를 원로원에게 안겨 주었다.

로마의 원로원 의원들은 유사시에 로마군단의 선두에 서서 싸우는 일이 많았던 만큼 전사자 또한 적지 않았다. 공화정 로마는 거의 매년 전쟁을 치르다 보니 전사자가 속출했다. 그러다 보니 원로원 의원 구성원이 수시로 바뀌었고, 그 결과 동맥경화가 발생할 위험성이 낮아졌다. 그래서 브루투스에 의한 공화정 이행 이후 원로원 연설에 앞서 ‘파트레스 콘스크립티!’ 라고 외치는 것이 관습으로 되었다. 이 말은 직역하면 ‘(건국의) 아버지들이여,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여!’ 라는 뜻이다.

왕정 시대 원로원은 건국에 종사한 로마의 아버지들인 유력자와 그 자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첫 말은 ‘파트레스’ 였고 그 다음은 원로원의 정원 확대로 들어온 ‘새로 들어온 사람들(신참자)’ 을 덧붙이게 된 것이다.

왕정 시대 의원과 추가된 신참 의원을 구별하는 이러한 호칭은 그야말로 구습의 폐단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은 그 반대의 효과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연설할 때 반드시 ‘신참자들이여’ 라는 호칭을 덧붙이면, 그것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원로원의 문호는 개방되어 있다.’ 는 이미지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말이 가지는 힘이란 이처럼 크다.

사실 그 후의 역사를 보면, 원로원은 항상 ‘콘스크립티’, 즉 신참의원들을 받아들이고 수용해 나갔다.

종신제와 조직의 신진대사가 함께하는 것이 얼핏 모순되어 보이는 두 요소를 겸비하였기 때문에 원로원은 수세기에 걸쳐 기능을 발휘해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젊은이들은 왜 ‘저항 세력’이 되었을까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브루투스의 개혁은 단지 로물루스가 정한 ‘왕, 원로원, 시민회’라는 삼극 체제에서 왕을 집정관으로 교체한 것만이 아니었다.

로마의 정치체제는 왕의 통치 체제를 바꿨다. 그리고 원로원을 중심으로 한 소수의 엘리트 집단지도 체제로 질적 전환을 한 것이다. 이 같은 정치 형태를 ‘과두정치 체제’ 라고도 한다.

정치, 군사의 최고 권력이 집정관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만을 보면 로마의 정치체제는 집정관이 통치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혹은 시민회에서 집정관을 선택한다는 점만을 보면 민주 정제와 혼돈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로마의 공화정은 단 한 사람이 정치를 독점하는 독재 체제도 아니고 시민의 총의 에 근거한 민주정제도 아니다.

로마에서 정치의 실권은 원로원이라는 소수의 엘리트 집단이 잡았다. 그러므로 ‘과두 정체’ 라고 하는 것이 가장 적격이다. 하지만 이처럼 정치 형태를 바꾼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마법처럼 정리되는 것은 아니다. 개혁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모든 개혁에는 그것을 저지하려는 저항 세력이 나오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개혁자 브루투스에게 그것은 전혀 생각지 못한 형태로 나타난다.

혁명이 일어나면 어디서나 예전의 ‘구체제’를 그리워하면 왕정복고를 목표로 한 운동이 일어난다. 그런데 로마의 경우는 그것이 기득권을 가진 노인들이 아니라 젊은이들 속에서 일어났다.

원로원에 의한 과두 체제의 확립은 로마의 유력 가문 출신 젊은이들에게 일종의 박탈감을 안겨 줬다. 젊고 야심 찬 청년들이 원로원에 들어갈 차례를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왕정 시대라면 경험이나 실적이 별로 없는 젊은이라도 왕의 눈에 들면 발탁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공화정이 되고 나서는 전혀 그럴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한 젊은이들은 추방당한 타르퀴니우스를 귀환시켜 왕정복고를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음모에 가담하여 혈서로 연판장에 서명까지 한 젊은이들 속에 자신의 아들이 둘이나 끼어 있으리라고 과연 브루투스는 상상이나 했을까?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즉시 소집된 시민회에서 이 젊은이들에 대한 재판이 이루어졌다. 민중은 집정관 브루투스의 복잡한 심정을 헤아려 그의 아들들을 국외 추방형 에 처하자고 제안 한다.

국가 반역죄는 사형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자식들의 사형을 집행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고 민중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브루투스는 집정관이 아니고 가장으로서 행동하기로 한다. 로마의 가장에게는 자식의 생살여탈권 까지 포함된 강력한 권한이 있었다. 만약 가족 중에서 가문의 이름을 더럽힌 행위를 저질렀을 경우에는 법과 관계없이 사형을 선고할 수가 있었다. 브루투스는 이 가장권을 행사했다.

그는 피고석 에 선 두 아들에게 세 차례 계속 죄의 유무를 물었다. 그들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 브루투스는 사형집행을 선고했다. 그 자리에서 바로 형이 집행되었다. 두 아들은 옷이 벗겨지고 채찍질을 당한 다음, 도끼로 목이 잘렸다.

“브루투스는 그 잔혹한 광경을 표정도 바꾸지 않고 끝까지 지켜보고 나서 자리를 떴다.” 고 사서는 전한다.

 

 

전쟁의 연속

 

브루투스가 자신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던 것은 단순히 가문의 이름을 욕되게 했다는 분노 때문이 아니었다.

젊은이들의 왕정복고 계획은 ‘아이들의 불장난’ 정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작은 불씨라도 확실하게 꺼 놓아야 할 만큼 로마 공화정은 아직 불안정했다. 그래서 브루투스는 그 반란 무리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브루투스의 이 예감은 적중했다. 추방당한 선왕 타르퀴니우스가 왕위 탈환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젊은이의 왕정복고 계획이 실패로 끝난 것을 알고, 이제 남은 것은 실력 행사의 길밖에 없다고 생각,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타르퀴니우스에게는 승산이 있었다. 그는 에트루리아의 혈통을 이어받았는데, 에트루리아 사람들은 급성장한 로마의 존재를 전부터 꺼림칙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한 에트루리아인 들이 타르퀴니우스에게 전쟁 원조를 해 주겠다고 약속하였기 때문이다.

타르퀴니우스는 왕으로는 부적합할지라도 장군으로는 이미 탁월한 재능을 인정받은 상태였다. 그러므로 에트루리아의 도시국가들 가운데 그에게 협력하겠다는 나라들이 나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쇠퇴기에 들어섰다고는 해도 에트루리아는 아직도 이탈리아 북부에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국력도 로마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로마 시민들의 눈에 에트루리아인 들은 모두 국왕으로 보일 정도였다. 이것을 보면 당시 로마와 에트루리아의 국력 차이를 짐작할 수 잇다.

더욱 불리한 것은 이 타르퀴니우스와 에트루리아의 불온한 움직임을 지켜보더니, 그때까지 로마와 동맹 관계에 있던 주변 부족들까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말하자면 ‘불 난 집에서 도둑질’ 하기를 하겠다는 것이다. 그 결과, 공화정을 수립한 이후 로마는 거의 매년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여기에 대해서는 <로마인 이야기> 제1권에 상세하게 썼다. 그렇게 계속 이어지는 전쟁으로 로마가 지불한 희생은 결코 적지 않았다.

브루투스는 에트루리아 군과의 첫 전쟁에서 타르퀴니우스 왕의 장남과 결투하여 상대를 찔러 죽이고 자신도 상대의 칼에 죽는다. 다시 습격해 온 에트루리아 군은 로마를 완전히 포위했다. 그로 인해 로마에는 밀 한 톨 들어올 수가 없었다. 그러나 존망의 위기에 직면하자 로마인들은 모두 일치단결했다. 로마는 에트루리아 군에게 승리를 거둘 수는 없었지만 항복하지는 않았다.

 

 

왼손잡이 무키우스

 

두 번째 에트루리아 군의 습격에서 그 유명한 ‘왼손잡이 무키우스’의 에피소드가 생겨났다.

정공법으로는 더 이상 압도적인 에트루리아의 포위망을 무너뜨리기 어려웠다. 이렇게 된 바에는 적의 왕을 죽일 수밖에 없다고 가이우스 무키우스라는 청년은 생각했다.

그는 에트루리아 군을 인솔하는 키우시의 왕 포르센나를 죽일 계획으로 혼자서 적진에 숨어 들어간다. 그러나 그 시도는 허망하게 실패로 끝나고 무키우스는 적에게 붙잡힌다.

 

꽁꽁 묶인 무키우스는 왕 앞에 끌려 나갔다. 그런데도 그는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왕에게 외쳤다.

“나는 로마 시민이다. 이름은 가이우스 무키우스라고 한다. 적의 왕을 죽이려다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나는 이제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 운명을 감수하는 것은 로마인의 특성이다.

로마의 젊은이들은 당신을 향해 끝없이 투쟁할 것이다. 전쟁의 결과란 정해져 있지 않다. 내가 죽으면 내 뒤를 이어 다른 젊은이가 나설 것이다. 그 젊은이도 실패하면 또 다른 사람이 나설 것이다. 우리의 전쟁은 당신하고만 계속된다. 당신도 각오하는 게 좋을 것이다.”

격노한 포르센나 는 고문을 해서라도 배후 관계를 캐려 했지만 무키우스는 더욱더 큰소리로 외쳤다.

“겁쟁이나 자신의 몸을 아낀다!”

이렇게 외친 젊은이는 타오르는 횃불을 왼손으로 움켜쥐고 그 것을 자신의 오른손에 대고 눌렀다. 살 타는 냄새로 숨을 쉬기 어려웠다. 포르센나는 무키우스에게 말했다.

“이제 됐다. 너는 네게 주는 것보다 훨씬 큰 고통을 너 자신에게 주었다. 너의 그 담대함을 칭송하지 않을 수 없다. 내 백성 중에도 너 같은 젊은이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너를 아무 조건 없이 놓아 주겠다. 자, 어서 가거라.”

가이우스 무키우스는 그 후로 ‘왼손잡이 무키우스’ 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불에 타서 문드러진 오른손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로마인 이야기> 1 에서

 

이 일이 있은 뒤 에트루리아 쪽에서 화평 제의가 온다. 포르센나로서도 로마 시민이 일치단결하여 왕정복고를 거부하는 상황에서 타르퀴니우스를 위해 전쟁을 계속해도 얻을 게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게다가 에트루리아의 장군조차 놀랄 만큼 로마인의 애국심과 전의는 높았다.

그 후로도 타르퀴니우스는 몇 번이나 로마로 쳐들어왔지만 로마는 굽히지 않았다. 결국 그이 야망은 무너졌다.

 

 

공화정의 약점

 

이렇게 해서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로마는 어떻게든 공화정을 지켜낼 수 있었다. 주위가 전부 적으로 둘러싸인 상황에서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로마 시민에게 ‘공화정을 지키겠다’ 는 의식이 충만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마인들은 힘든 상황에서도 위에서 아래까지 일치단결하여 결코 굽히지 않았고, 결국 승리를 거둘 수 없었지만 패하지는 않았다.

그러데 간신히 전쟁 극복에 성공하자 일치단결된 힘은 붕괴되고, 이번에는 귀족과 평민간의 계급 대립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물론 이것은 로마에만 한정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로마의 경우 이러한 대립이 그 후 100년간에 걸쳐 계속되었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전쟁보다 훨씬 더 심각한 위기였다고 할 수 있다.

왕정 시대에 로마에서 귀족과 평민 간의 대립은 별로 문제되지 않았었는데, 왜 공화정 시대에 들어 대립이 격화되었을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공화정의 구조에 있었다.

이미 말했듯이 로마의 왕정은 로물루스가 정한 ‘왕, 원로원, 시민회’의 삼극 구조로 되어 있었다. 시민회에서 선출된 왕이 원로원의 도움을 받아 통치하는 이 시스템에서는 귀족과 평민의 대립은 별로 심각하지 않았다.

왕정에서는 원로원 의원이 귀족 중에서 뽑혔다. 이 원로원은 단지 왕에게 조언과 권고만 하는 기관이라 권위는 있어도 권력은 없었다. 게다가 왕의 재위 기간이 길어지면서 원로원에 의지하지 않는 경향도 있었다.

이에 비해 고라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참가할 수 있는 시민회가 왕이 발표하는 정책이나 전쟁을 승인할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왕에게도 중요한 기관이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귀족의 권력이 제한 받게 되어 평민이 귀족에게 불만을 품는 경우도 적었다. 그런데 이 같은 구도가 공화정에 의해 크게 바뀐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브루투스에 의해 원로원은 왕정 시대와는 전혀 다르게 중요한 지위를 갖게 되었다. 원로원이 ‘인재의 총집합체’가 되면서 로마의 최고 지도자인 집정관과 원로원 사이에 강고한 결합을 이루어, 마치 2인조로 이루어진 팀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러자 원로원과 아무 연관도 없는 평민 계층에서는 당연히 불만을 느끼게 되었다.

이전의 왕정에서는 왕과 원로원, 시민회가 제 축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이 삼각 구조를 통해 권력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공화정에 들어서 그것이 집정관 – 원로원과 시민회라는 두 기둥으로 바뀌었다. 세 다리의 탁자는 있어도 두 다리 탁자는 없다. 따라서 로마의 정국은 공화정으로 이행되어 오히려 불안정해졌다.

 

 

평민들의 불만

 

게다가 이러한 대립 관계에 박차를 가한 것이 잇따른 대외 전쟁이었다.

여러 차례 거론했듯이 고대 로마에서는 나라에 큰일이 생기면 신분을 초월해 로마 시민으로 단결하는 아름다운 특성이 있었다. 그 덕분에 공화정 로마는 에트루리아나 주변 부족들 틈에서 전쟁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유사시에 귀족과 힘을 합쳐 전쟁을 치러 낸 평민들은 전쟁으로 인해 자신들의 생활이 더욱 힘들고 궁핍해졌다는 현실을 알아차렸다.

로마에서는 왕정 시대부터 직접세 대신에 병역에 나가는 것이 의무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전쟁이 시작되면 몹시 궁색한 프롤레타리를 제회하고 귀족이든 평민이든 무보수로 전쟁터에 나가게 되어 있었다. 물론 그 동안은 가업을 이어 갈 수 없다. 그러나 같은 무보수라 해도 귀족들은 넓은 농원을 경제 기반으로 삼고 있어 장기간 집을 비워도 생활이 곤궁해지지 않았다.

이에 비해 평민들에게 미치는 경제적 영향은 아주 심각했다. 수입이 없어 빚을 갚을 수 없다 보니 돈을 빌린 사람에게 노예처럼 혹사 당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이렇게 될 바에야 로마를 지키는 전쟁에 무엇을 위해 출전했는지 모르겠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이와 함께 평민들의 불만을 증폭시킨 것은 토지 분배를 둘러싼 문제였다.

로마는 플루타르코스도 지적한 것처럼 ‘패자도 동화시킨다’ 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에 이겼다고 해서 상대 부족을 모두 동화시킨 것은 아니다. 이 점에서 로마인은 원리주의자가 아니라 사례별로 대응하는 현실주의자였다.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지만 로마는 전쟁에서 이기면 보통 패자의 토지를 일부 몰수해 공유지로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증가한 공유지를 로마 시민에게 대여했다. 평민들은 이 공유지 대여에 대해 불만을 품었다.

로마인은 원래 농경민족이다. 그래서 다른 민족에 비해 토지에 대한 애착이 강했고, 그들에게 자신은 곧 토지를 의미했다. 분배 받은 공유지는 농경지로 쓰이므로 그들에게 토지의 질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런데 실제로 비옥한 토지는 귀족에게 빌려 주고 자신들에게는 좋지 않은 토지를 빌려 준다고 평민들은 의혹을 품고 있었다.

이 문제에서도 귀족과 평민의 대립은 격화되었고, 평민들은 원로원과 집정관이 행하는 정치에 불신감을 갖게 된다.

 

 

건국 최초의 ‘스트라이크’

 

결과부터 말하자면 귀족과 평민의 대립은 공화정으로 옮겨 가던 시기부터 대략 1세기 동안 해결되지 않았다.

평민들은 원로원에서 자신들이 납득할 만한 정책을 내놓지 않는 것에 분노하며 로마가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스트라이크’를 일으켰다. 즉 병역에 나가는 것을 거부하고 로마의 언덕에 모여 여러 차례 농성을 벌였다.

평상시에 일으킨 스트라이크도 아니고, 외적이 로마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시점의 병역 거부인지라, 원로원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원로원이나 집정관들은 다양한 형태로 평민들의 불만을 해소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러한 타개책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평민들은 고통스럽게 만든 부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정관이 제출한 법안을, 귀족들이 주도권을 잡은 시민회에서 부결시켰다. 시민회는 로마 시민이라면 누구라도 참가할 자격은 주어지지만, 병역 부담이 더 무거운 귀족은 평민들보다 더 많은 표 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민의 권리를 지키려면 명문화된 법률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당시의 선진국인 그리스에 조사단을 파견한 적도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십이동판법’ 이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그 내용은 구태의연한 것이어서, 이것 또한 평민들의 분노만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낳았다. 십이동판법에서는 귀족과 평민의 결혼조차 금지되는 것으로 하였으니, 평민들은 당연히 자신들이 모독 당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거부권’ 이야말로 권력 중의 권력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끌어 온 대립과 혼란 속에서도 성과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호민과의 창설이 그 중 하나였다.

기원전 494년에 만들어진 호민관 제도는 이름 그대로 평민계급의 권리를 위한 것이다. 호민관에 오르는 것은 평민계급 출신자로만 한정되었다. 또한 호민관 선출은 귀족이 출석하는 시민회가 아닌, 평민만 출석할 권리가 있는 평민회에서 이루어졌다. 임기는 1년으로, 초기의 정원은 두 명이었다.

호민관에게는 2가지 특권이 주어졌다. 하나는 집정관이 내린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고, 또 하나는 집정관에게도 주어지지 않은 ‘육체의 불가침권’ 이라 할 수 있는 특권이었다. 즉 누구라도 호민관에게 육체적 위해 를 주거나 암살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말할 나위도 없이 이것은 귀족 계급에 의한 호민관 공격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2가지 권리 중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거부권이다. 거부권은 모든 특권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으로 꼽을 수 있다. 거부권을 가진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따라 권력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엄청난 차이가 있다.

후대의 예를 들면, 영국에서 입헌군주제도가 언제 확립되었는지에 대한 지표가 되는 것도 이 거부권이다.

입헌군주제 확립 이전부터 영국의 국왕은 ‘마그나카르타’ 등에 의해 특권을 제한 받아 왔지만 한 가지, 왕이 결코 포기하지 않은 것이 거부권이었다. 즉 의회나 내각이 내세운 정책 가운데 절대로 승인할 수 없는 것에 대해 국왕은 그것을 거부할 수 있었다. 왕이 거부권을 갖고 있는 한, 의회가 아무리 힘이 강해도 영국은 국왕 중심의 절대 군주제 국가인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 영국에서 국왕이 거부권 행사를 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고 국왕이 거부권 포기를 선언한 것은 아니고, 다만 행사하지 않았을 뿐이다. ‘비장의 수단’인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게 됨으로써 비로소 영국이 의회 중심의 입헌 군주국가로 되었고, 국왕은 ‘군림은 하지만 통치하지 않는다’ 는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고 구미의 학자들은 생각하였다. 거부권이야말로 권력 중의 권력이기 때문이다. 유엔의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인 미국, 영국, 러시아, 중국, 프랑스 5개국이 왜 국제 정치사회에서 힘을 갖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 계급 대립은 해소할 수 없었을까

 

호민관 창설에 따라 일시적으로 평민의 불만도 해소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원래 호민관에게 부여된 거부권은 전시에는 행사할 수 없도록 조건 지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위기관리 차원에서 보자면, 반드시 국론통일을 이루어야 했으므로 조건을 붙이는 것은 당연하였다. 하지만 당시 항상 전쟁을 치르고 있던 로마에서 호민관의 거부권은 사실 사용할 기회가 없는 권력이 되었다. 그런 이유에서 다시 평민의 불만이 높아져 갔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시대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귀족, 평민 양자의 대립이 쓸데없이 지속되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평민들은 자신들의 경제 상황을 개선해 달라거나 공유지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호소한다. 그것을 귀족이 무시하고 짓밟는다. 그래서 다시 평민이 분노한다…는 식이다.

같은 도시국가라도 그리스의 아테네라면 어느 시기는 평민 측이 주도권을 잡고 민주정치가 행해진다. 그러다가 귀족 측이 유리해지면 귀족정치가 된다. 이처럼 마치 추가 양극을 왕복하는 것처럼 움직인다. 하지만 로마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마치 진흙탕 싸움처럼, 아무리 허우적거려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태가 계속되었다.

이런 상황이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평민과 귀족 양쪽 모두가 ‘시민으로서의 프라이드’ 를 가졌다는 것이었다. 로마 시민들은 적이 쳐들어온다고 하면 그때까지의 경위는 다 잊어버리고 모두 힘을 합쳐 전쟁에 돌입한다.

평민들의 스트라이크가 큰 효과를 내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병역거부를 외치면 농성을 벌이던 평민들도 막상 ‘적이 쳐들어온다’는 연락을 받으면 즉시 농성을 해제하고 전쟁터로 달려갔다. 그래서 스트라이크조차 철저하게 벌이지 못하고 끝날 수밖에 없었다.

 

 

칼을 버리고 괭이를 쥔 독재관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귀족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지위나 권리에만 안주하고 있었다면 평민들의 불만도 폭발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로마의 귀족들은 앞에서 보았듯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기개로 가득 차 있었으니 그럴 리가 없었다.

로마에서는 이미 말했듯이 항상 두 명의 집정관이 각각 군단을 이끌고 로마 방위를 맡았다. 그러나 군사학의 기본을 거론할 필요도 없이 위기를 맞았을 때 명령 체계가 둘로 나뉘어 있다면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또한 집정관에게는 동료의 결정에 대한 거부권도 있었으므로, 만일 두 집정관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정치는 마비되어 버릴 수 있었다. 그래서 위기를 잘 넘기기 위한 특례 조치로서 독재관 제도를 설정하였다.

독재관은 두 명의 집정관이 지명하는 임시직이다. 정원은 물론 한 사람이다. 이 독재관에게는 정치 체제를 바꾸는 것을 제외한 모든 일에 대한 결정권이 주어져 있었다. 그래서 그가 내린 결정은 누구나 따라야 했다. 참으로 전지전능한 힘이 주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지만 독재관은 어디까지나 특례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이 독재관의 임기는 불과 6개월로 정해져 있었다.

한때 독재관 자리에 킹킨나투스 라는 이름의 귀족이 지명된 적이 있었다. 그는 평소 괭이를 들고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고 있었는데 집정관 지명을 받고 거절할 수가 없었다. 괭이를 버리고 전쟁터로 나간 그의 지휘로 로마 군은 불과 15일 만에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

제도에 따르면 독재관의 임기는 아직도 다섯 달 반이나 남아 있었다. 그대로 독재관의 임기를 채운다 하여도 누구나 간섭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는 주어진 임무를 마치자 즉시 독재관 자시를 반납하고 다시 농사일로 돌아가 버렸다.

이러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견본 같은 귀족이 있었기 때문에 평민들도 ‘썩어빠진 귀족들을 타도하자’ 고 말할 수가 없었다. 평민과 귀족의 대립이 결정적인 국면까지 이르지 않은 것은 이 같은 사정도 한몫 하였을 것이다.

 

 

로마인들의 ‘의리와 인정’

 

귀족과 평민의 대립이 로마에서 격화되지 않았던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로마의 귀족들에게는 강력한 ‘지지 기반’이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로마에서는 귀족으로 인정받으려면 넓은 농지와 풍부한 자산을 가진 것만으로는 불충분했다. 한 가지 더 중요한 요건은 그 귀족이 ‘파트로네스’ 로서 얼마나 많은 ‘클리엔테스’ 를 돌보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 말은 영어의 페이트런(후원자)과 클라이언트(고객)의 어원이 된 것인데, 이 관계는 로물루스가 건국할 당시부터 존재했다고 보는 학자가 있을 정도로 기원이 오래된 것이어서 간단히 정의하기란 힘들다.

요약해 보면 파트로네스인 귀족이 자신의 클리엔테스인 평민들을 돌보고 그 대신 클리엔테스는 귀족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얘기가 된다. 우선 염두에 둘 것은 이들이 단순한 이해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이해관계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정치가들처럼 로마의 귀족들도 끊임없이 클리엔테스의 상담이나 진정을 들어주어야 했다.

귀족들은 취직 문제, 결혼 상대 소개, 소송 문제에서부터 급기야는 빚 청산에 이르기까지 온갖 상담을 받아 해결해 주고 도와주어야 했다. 이것은 ‘십이동판법’ 에도 명기되어 있다. 말하자면 공적인 의무였다. 그래서 로마 귀족들은 매일 아침 한두 시간을 클리엔테스들의 고충을 들어주는 것으로 일과를 삼았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은혜를 클리엔테스들은 어떻게 갚았을까. 예컨대 자신의 파트로네스가 어떤 공직에 입후보하면 클리엔테스들은 그 선거회장에 가서 시민으로서 한 표를 주었다. 또한 전쟁이 일어나면 귀족에게는 자산액 에 따른 병력 제공의 의무가 있어, 큰 자산을 가진 대귀족이라면 다수의 병사를 모아야만 했다. 이때 이들 클리엔테스들은 자진하여 병사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의 관계는 결코 ‘돈만으로 묶어진 인연’은 아니었다. 이것은 중요한 사실인데, 이들 사이를 묶고 있는 것은 이해관계가 아니고 ‘신의(信義)’ 였다.

따라서 비록 파트로네스가 내리막길에 접어들어도 끝까지 따라가는 것이 클리엔테스의 도리였다. 마찬가지로 파트로네스도 끝까지 지켜 주었다. 그래서 로마법에서도 파트로네스, 클리엔테스 관계에 있는 둘 중 어느 한쪽이 고발당하면 다른 한쪽에게 증언을 요구하지 않도록 되어 있다.

현대처럼 고대 로마법정에서는 위증이 죄였다. 그런데 만약 증언자와 피고가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 의 관계에 있다면 증인에게 법정에서 진실을 말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신의를 버리라고 명령하는 것과 같다. 신의를 최우선으로 삼고 있다고 하여 위증을 용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국가의 법과 개인 간의 신의에서 딜레마가 발생할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이러한 규정을 설정했을 것이다. 비록 상대가 범죄자일지라도 신의를 끝까지 지키는 일이 파트로네스의 길이며 클리엔테스의 길이었다. 그것이 이들의 관계였다.

 

 

카이사르는 왜 ‘오른팔’을 잃었을까.

 

이러한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의 관계는 지연과 혈연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뭔가 큰 은혜를 입게 되면 은혜를 준 사람의 클리엔테스가 된다. 그리고 그 관계는 자손들까지도 이어졌다. 이처럼 로마 사회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관계 네트워크가 긴밀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이보다 한참 뒤에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려고 했을 때였다. 카이사르 휘하에서 도망치는 병사가 없었지만, 단 한 명 예외가 있었다. 그것은 카이사르의 부관 라비에누스 였다.

라비에누스는 아마도 카이사르가 가장 신뢰하고 있던 부하였으리라. 갈리아를 제패했을 때도 자신이 맡을 수 없는 일은 꼭 그에게 일임했을 정도였고 라비에누스도 카이사르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의 부하인 동시에 카이사르의 적이 되어 버린 폼페이우스 의 클리엔테스였다. 폼페이우스와 라비에누스의 관계는 조상 대대로 이어져 왔다. 평민 라비에누스의 출신지는 귀족 폼페이우스의 영지에 속해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은밀하게 라비에누스에게 사자를 보내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갈 것을 설득한다. 라비에누스의 고뇌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으나 그는 결국 클리엔테스로서의 신의를 지키는 길을 택한다.

라비에누스의 결단을 카이사르는 비난하지 않았다. 나중에 카이사르가 쓴 <내란기>에도 그의 배반을 비난하는 말이 한마디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루비콘 강을 건너기 전날 밤 몰래 카이사르 진영을 빠져나간 라비에누스의 짐을 나중에 보내 줄 정도였다. 자신은 귀족계급에 속해 있다 해도 같은 로마인으로서 카이사르는 라비에누스의 고뇌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귀족과 평민 사이가 명확하게 ‘단절’되어 있던 그리스와 달리 로마 사회는 이 두 계급은 신의라는 끈으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그래서 평민들이 귀족에게 불만을 품는다 해도 그것이 계급투쟁으로 나아갈 정도로 과격해지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귀족과 평민의 대립이라고는 하지만, 귀족 뒤에는 그들을 파트로네스로서 받드는 평민들이 있었기에, 항쟁에 대한 해결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아테네의 개혁, 로마의 개혁

 

로마 시민으로서의 의무감, 그리고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의 관계, 이러한 사정에 덧붙여 또 하나 잊어서 안 되는 것은 로마인이 원래 농경민족이었다는 사실이다.

킹킨나투스에 대한 언급에서도 알 수 있듯이, 로마에서는 귀족 계급도 직접 농사를 짓는 것에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드문 일도 아니었다. 이러한 점에서 ‘흙을 만지는 일은 노예가 해야 하는 것이라고 여겼던 아테네 시민과 크게 달랐다.

이러한 농경민족으로서의 정신은 다음 시대에도 계속해서 이어진다. 공화정, 제정을 불문하고 시대의 변천과 관계없이 로마인은 별로 유복하지 않아도 경제력에 맞는 집을 시내와 교외 두 곳에 마련했다. 그 경우 농경지에 둘러싸인 교외의 집이 본가이고, 시내의 주거지는 일을 하기 위한 거주지의 개념이었다. 농업이나 목축이라는 토지와 깊이 결합된 생활을 한다는 것은 좋게 말하면 신중하고 나쁘게 말하면 둔중한 의식을 형성해 왔다는 것이다.

로마인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절실히 느끼는 것은 로마에서는 개혁이 결코 단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을 들여 조금씩 개혁을 이루어 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때로는 답답함조차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들에 비하면 같은 도시국가라도 역시 그리스인 쪽이 훨씬 과격하고 급진적이다. 예컨대 아테네의 역사만을 보아도, 마치 통치 형태의 상품 전시장처럼 왕정, 귀족정, 독재정 으로 고양이의 눈처럼 정치 형태를 변화시켜 갔다. 이러한 소위 마음껏 펼쳐 보는 자세가 로마인에게는 없었다.

그렇다고 로마인이 개혁을 두려워하는 보수적인 민족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잘못이다. 한번 개혁을 행하겠다고 결정하면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도 둔한 소처럼 착실하게 전진해 나간다. 그래서 로마는 개혁의 속도는 늦지만, 그것이 일단 성공하면 장기간에 걸쳐 유지될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급성장을 이룬 다음 쇠퇴도 성장만큼 빨랐던 그리스와는 매우 대조적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1세기에 걸친 귀족과 평민의 대립은 역시 너무나 길었다. 왜냐하면 로마를 둘러싼 환경은 그러한 시행착오를 언제까지나 보고만 있을 만큼 온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밀루스의 예언

 

기원전 390년, 공화정체제 이행 후 대략 1세기가 지나 일어난 ‘켈트족 습격의 충격’ 또한 귀족과 평민의 대립이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로마가 당시 전력을 다해 매달리고 있던 것은 숙적인 에트루리아의 유력 도시 베이의 공략이었다. 독재관 카밀루스의 지휘 아래 10년에 걸친 전쟁을 치러 간신히 베이를 함락한 것은 기원전 396년의 일이었다.

베이 함락은 로마인에게 엄청난 희소식이었지만, 그것은 동시에 내부 항쟁의 재개를 의미하였다. 전시에는 일치단결하던 로마 시민이 다시 귀족과 평민이라는 두 파로 나뉘어 대립을 시작하였다. 게다가 이때의 항쟁은 대도시 베이를 손에 넣었기 때문에 더욱 심각한 것이었다. 그것은 평민 측에서 아름답고 잘 꾸며진 도시 베이를 로마의 제2의 수도로 삼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이 제안에는 ‘귀족이 판치는 로마는 싫으니까 우리를 베이로 이주시켜 달라’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이 같은 평민들의 제안을 선두에 서서 반대한 사람이 독재관 카밀루스였다.

“우리의 오늘이 있게 된 것은 로마 신들의 가호 덕분이다.. 그 신들이 사는 로마를 버리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다.” 라고 카밀루스는 연설했다. 이 연설을 듣고 평민들은 카밀루스를 몹시 증오하게 된다.

카밀루스는 무장으로서는 유능했으나 평민들 사이에서 평판이 나빴다. 그때까지는 로마가 여름 동안만 전투를 하고 겨울은 휴전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그는 그 관례를 깨고 겨울에도 전투를 했기 때문이다.

귀가도 허용되지 않는 겨울의 고생스러운 야영 생활을 잊지 않고 있던 평민들은 카밀루스의 연설을 듣고 더욱 격분했다. 그래서 그를 쫓아내기 위해 고발이라는 수단을 쓴다. ‘베이 공략에서 얻은 전쟁 이익금의 용도에 의혹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 고발했다. 고발당한 카밀루스는 스스로 망명의 길을 택한다.

로마에는 “스스로 국외로 퇴거한 사람에 한해서는 그이 죄를 묻지 않는다.” 는 규정이 있었다. 시민회에서 이루어지는 재판을 받을 경우, 자신이 분명히 유죄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카밀루스는 로마를 떠난다.

말 많고 귀찮은 존재인 카밀루스가 사라진 것을 알고 평민들은 쾌재를 불렀으며, 잇달아 로마를 떠나 신천지 베이로 이주를 시작했다. 하지만 주민 대이동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밀루스의 예언은 적중한다. 로마의 신들을 버린 로마인은 건국 이래 최악의 사태를 맞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숲의 주민들’의 침입

 

켈트 족은 원래 로마인 쪽에서 보면 ‘알프스 건너편’, 즉 유럽 내륙부의 삼림대를 근거지로 한 민족이었다. 로마인은 그들을 ‘갈리아인’ 이라 했다. 그러한 켈트 족 사람들이 마치 물이 스미듯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반도까지 이주하게 된 것은 기원전 6세기 무렵이었다.

그러나 이 켈트 족은 로마인에게 전혀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켈트 족과 로마인 사이에 에트루리아라는 큰 장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켈트 족은 용맹하다고 알려진 민족이었지만 북이탈리아 일대를 제패하고 있는 대국 에트루리아의 방위 망을 돌파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탈리아 반도의 남쪽으로 내려올 수는 없었다. 그런데 로마는 스스로 에트루리아라는 ‘방파제’를 무너뜨린 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왕정 시대부터 로마는 북쪽의 에트루리아와 공방전을 벌여 왔다. 한때 에트루리아는 로마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부와 힘, 기술을 갖고 있었지만, 로마가 발전해 가면서 서로 자리바꿈 한 것처럼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베이 의 함락도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일어난 것이다. ‘힘의 공백은 침략을 부른다’ 는 진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해당된다. 에트루리아의 약체화를 켈트 족이 놓칠 리 없었다.

기원전 390년 여름, 켈트 족은 대거 남하를 시작한다. 그들은 차례차례 에트루리아의 여러 도시를 공략하고 드디어 로마 국경까지 다가왔다.

 

 

로마, 불타다

 

‘켈트 족이 나타났다’ 는 비보에 로마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무엇보다도 평민들이 베이로 이주해 버려 로마 군의 병력이 반 가까이 줄어들었다. 게다가 역전의 용장인 카밀루스마저 스스로 국외로 퇴거해 버리지 않았던가.

그래도 로마의 지도자들은 힘겹게 군단을 편성해 침략해 온 켈트 족을 맞아 대항했다. 하지만 결국 실패했다. 로마 군은 무참하게 짓밟히고, 로마는 마침내 야만족이라고 무시해 온 켈트 족의 손아귀에 떨어져 버렸다. 로물루스에 의해 건국된 후 363년 만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 ‘켈트 족 습격 충격’ 으로 로마인이 맛본 굴욕은 필설로 다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야만족에 포위당해 갈 곳을 잃은 시민들은 시내의 카피톨리노 언덕에서 항전하기로 하였다. 로마의 일곱 언덕 중에서 이 카피톨리노가 가장 높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피톨리노 언덕은 시민이 항전을 하기에는 너무 좁았다. 현재의 로마에서 이 언덕을 ‘캄피돌리오’ 라고도 하는데, 정상에 올라 보면 이 언덕이 얼마나 좁은지 놀랄 것이다.

언덕 위의 평지에는 현재 콘세르바토리 와 카피톨리노라는 두 개의 미술관이 마주 보는 형태로 세워져 있다. 예전에는 최고신 유피테르(주피터)와 그의 아내 유노(주노)의 신전이 세워져 있었다. 역시 신전이나 미술관을 짓는 용도로밖에 달리 쓰일 수 없다고 생각될 만큼 카피톨리노 언덕은 좁았다.

이 작은 언덕으로 로마 시민들 모두가 도망칠 수도 없었다. 결국 이 언덕에는 철저하게 항전하겠다는 청장년 남자들과 그들의 아내들만 올라가기로 정해졌다. 원로원 의원이라도 고령자는 제외되었다.

언덕에서의 항전이 허락되지 않았던 사람들의 운명은 이루 다 말 할 수도 없었다. 남겨진 로마인들에 대한 켈트 족의 포학은 극에 달했다고 사서는 전한다. 켈트 족에 의해 동족이 살해당하고 정든 로마 시내가 불타오르는 것을 카피톨리노에서 항전해야 하는 사람들은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수렁에서 재출발

 

7개월에 이르는 항전 끝에 로마인은 켈트 족과 화평을 맺는다. 화평이라고는 해도 그것을 로마인들의 저항이 영웅적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본래 숲 속에서만 살아온 켈트 족에게 도시 점령은 별 매력이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들은 로마인들이 보낸 300킬로그램의 금괴를 받자마자 즉시 돌아갔다. 뒤에 남겨진 것은 얼마 살아남지 않은 로마인과 폐허가 된 로마의 거리뿐이었다.

3세기에 걸쳐 성장을 계속해 온 로마는 다시 무에서 출발하게 된다. 더구나 이 패배를 계기로 그때까지 동맹 관계였던 주변의 여러 부족들마저 로마를 노리게 되었으니, 무라기보다는 마이너스에 더 가까웠다. 수렁에 빠졌다가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민족은 수도 없이 많다. 그러나 로마는 그 수렁 속에서 20년이라는 세월을 들여 재기하였다.

기원전 370년을 전후하여 원래의 모습으로는 복구되지 않았지만 로마 시내는 어느 정도 부흥한다. 또한 로마군 은 방위 체제를 바로 세워 국경도 일단은 안전해진다.

이 정도도 굉장한 성과였다. 하지만 로마가 다른 점은 단지 부흥을 이룬 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정치체제의 개혁에 나섰다는 것이다.

 

 

재기를 위한 우선 순위

 

누구라도 패배를 당한 직후에는 여러 가지 원인을 찾아 반성할 것이다. 그러나 불완전하게나마 그럭저럭 회복이 되고 나면 ‘식도만 넘어가면 뜨거움을 잊는다.’ 는 말처럼 고통도 잊고 반성하던 자세도 흐지부지해진다. 그리고 중요하게 여겼던 개혁도 소홀해져 버린다.

하지만 로마인은 달랐다. 로마사 연구자들이 항상 지적하듯이, 로마인은 문제점을 추출해 내는 능력뿐 아니라 문제 해결을 할 때도 우선순위를 정하는 방법이 뛰어났다.

문제점을 알고 있다 해도 여러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은 때로 그것들을 동시에 해결하려고 서두르다 실패한다. 혹은 맨 처음에 정리해야 할 문제를 뒷전으로 미루어 오히려 상황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로마인은 그러한 실수를 웬만해서 범하지 않았다. 비록 시간이 걸린다 해도 하나하나의 문제점을 우선순위에 따라 해결해 나가면서 확실하게 골인을 한다.

이번 일도 그 같은 로마인의 특성대로 진행되었다. 켈트 족이 떠나고 난 로마에서 우선순위는 로마의 부흥이었다. 그 다음이 주변 여러 나라를 제압하면서 방위 체제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공화정이든 왕정이든 국가로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생존과 안전 확보이다. 그래서 그것부터 일단 정리해 나간다. 내정 개혁은 뒤로 미루어도 상관없다는 명확한 판단이었다.

방위 체제의 재 구축은 로마에 귀환한 카밀루스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그의 생애를 통해 다섯 번째의 독재관을 맡게 된 카밀루스는 스스로 군대를 인솔하고 주변 부족들과 싸웠으며, 승리를 통해 그들은 다시 로마의 동맹국으로 만들어 나갔다. 그의 전적은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로마의 방위 체제를 재 구축한 그는 로물루스를 잇는 ‘제2의 로마 건국자’ 라고 불리게 된다.

그러나 로마를 정말로 복구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그때부터였다. 복구의 우선순위에서 마지막으로 미루어졌지만 로마의 장래를 생각한다면 가장 중요한 과제인 정치 개혁의 문제가 아직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법’의 놀라운 내용

 

제1장에서도 소개했듯이 그리스인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후년의 ‘대 로마’를 이루게 된 원점은 켈트 족 습격의 충격에 있다고 했다.

분명히 폴리비오스의 말처럼 켈트 족의 내습으로 한 차례 괴멸 직전까지 갔던 로마는 미혹 많은 청춘기를 막 끝내고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확인한 젊은이처럼 보였다. 미혹을 던져 버릴 수 있는 인간의 강인함을 이 시대의 로마에서 느끼는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로마인은 켈트 족 습격 충격을 되돌아보고, 한 세기 동안이나 계속된 귀족과 평민 사이의 항쟁이 로마를 폐허로 만든 근본 요인이었음을 직시한다. 그뿐 아니라 그 항쟁을 근본적으로 해소하기 위해 과감한 개혁을 해야겠다고 각오한다. 이렇게 하여 창출된 것이 기원 전 367년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법이다. 이 법의 성립으로 로마 공화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강조해 두고 싶은 것은 이 법률 제출자는 평민 출신인 리키니우스였고, 법안에 찬성표를 던진 사람들은 원로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귀족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한가지만으로도 로마인의 의식이 얼마나 특별한지 알 수 있다.

게다가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내용이었다. 이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의 목적은 말할 나위도 없이 귀족과 평민의 대립 해소였다. 그렇다 하여도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로마인이 행한 개혁은 참으로 뛰어난 결단이었다.

흔히 귀족과 평민의 대립을 없애기 위해서는 양자를 대등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예컨대 집정관 정원이 둘이니까, 한쪽은 귀족에게 다른 한쪽은 평민에게 할당한다는 것이 ‘상식적’인 발상일 것이다.

그러나 로마인은 그런 형태의 평등을 택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은 ‘전면적인 개방’의 길을 선택하였다. 즉 공화국 정부의 모든 관직에 귀족이든 평민이든 로마 시민이면 누구나 다 오를 수 있게 만들었다.

이것이 오늘날의 ‘기회의 평등’ 과 같은 것이었다. 모든 관직을 귀족과 평민에게 기계적으로 배분한다면 그것은 ‘결과의 평등’ 이다. 결과의 평등은 언뜻 보면 분명 ‘차별’ 해소에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오히려 귀족과 평민의 ‘구별’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는다.

로마에게 소중한 것은 형식의 평등이 아닌 로마 시민으로서의 연대 확립이었다. 로마인들은 그와 같이 생각하고 그것을 단행한 것이다.

 

 

원로원 개방

 

로마인의 정치 개혁은 원로원이라는 ‘성역’ 에도 대담하게 발을 내딛게 된다.

그때까지 로마 원로원은 확실히 귀족들의 아성이었다. 능력에 따른 선별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귀족만 원로원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한 원로원 의석을 중요 공직에 오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평민에게도 주어 ‘신참자’로서 맞아들였다. 이 개혁은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법이 제정된 지 몇 년 지나 이루어졌다. 원로원 개혁에 의해 로마는 진정한 의미의 ‘과두 정체’로 옮겨갔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제도에 의해 평민들의 대표인 호민관조차 그 임기가 끝나면 원로원 의원이 될 수 있었다. 예컨대 기업의 노동조합위원장이 퇴임 후에 이사회에 참가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게다가 그 지위는 세습되는 것이 아니어서 원로원에 평민을 받아들여도 ‘새로운 귀족’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지혜였다.

이 개혁이 민중의 저항 의식을 빼내려는 ‘잔꾀’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역사가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귀족뿐만 아니라 평민 중에서도 널리 인재를 모집해야만 비로소 원로원은 ‘인재의 총집합체’ 로서 기능을 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 1년밖에 임기가 주어지지 않은 집정관 제도를 이어 나가려면 능력이 뛰어나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정치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공화정의 열쇠는 역시 원로원이 쥐고 있었다.

 

 

 

융화의 신전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 법 제정은 당시의 로마인에게 무척이나 기쁜 사건이었다.

그것을 나타내는 것이 고대 로마 중심부인 ‘포로 로마노’에 세운 콩코르디아 신전이다. 지금은 기둥 하나도 남아 있지 않지만, 이 콩코르디아 신전은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법 제정을 기념해 건축되었다.

콩코르디아란 영어 칸코던스(concordance)의 어원이기도 하다. 뜻은 영어와 같은 ‘융화, 일치, 조화’이다. 즉 콩코르디아 신전에 모신 신은 눈으로 볼 수 없는 융화, 일치라는 개념이록 할 수 있다. 개념 자체를 신으로서 모신다는 발상은 로마인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 콩코르디아 신전을 세운 의도는 말할 필요도 없이 오랜 세월에 걸쳐 국론을 둘로 갈라놓은 귀족과 평민의 대립을 해소하고, 앞으로는 양자가 융화하고 협조하여 로마를 위해 최선을 다하자는 이념을 구체화한 것이다.

콩코르디아의 신은 여신으로 되어 있는데, 그 후 로마는 이 여신의 미소가 지켜 주는 듯 발전해 거듭해 마침내 ‘지중해의 패자’ 라고 불리게 되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얘기하겠다.

 

 

 

 

4장 조직의 로마

 

로마는 ‘강한 조직’ 으로 존재했다.

이 조직력으로 로마는 이탈리아를 통일할 수 있었다.

평민 중에서도 뛰어난 인재를 모으고,

원로원 중심의 통치 체제 내에서 그 인재를 활용해 나간 로마의 방식은

오늘날의 표현으로 하면 ‘조직력’ 이라는 한마디로 집약된다.

 

 

이탈리아 반도 통일

 

기원전 367년에 완성된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법’을 통해 대략 1세기에 걸친 귀족과 평민의 대립은 해소돼 갔다. 원로원 의원을 시작으로 모든 국가 요직을 평민 출신에게도 개방함으로써 귀족과 평민이라는 계급의 차이는 사실상 의미가 없었다.

능력과 실적만 있으면 원로원 의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관점을 달리하면 평민을 엘리트 계급에 혼합시키는 것이다. 평민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호민관조차 임기 후에 원로원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계급 대립 사태란 일어나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로마에서는 귀족과 평민 사이에 결혼마저도 합법화하였다. 그 결과 귀족과 평민을 갈라놓았던 벽이 점점 더 낮아져 갔다. 이러한 로마인의 결단은 누차 반복해서 강조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과감했다. 어떤 사회에나 반드시 있게 마련인 계급 대립을 이러한 ‘혼합 방식’ 으로 해소한 곳은 로마뿐이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러한 선택이 얼마나 옳았는가는 훗날의 로마사에서 명확해진다.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법이 제정된 지 약 100년 후인 기원전 270년에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다.

바로 1세기 전, 켈트 족이라는 ‘야만족’에 의해 하마터면 멸망당 할 뻔했던 민족이 이탈리아의 패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귀족과 평민의 ‘융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계급 대립의 해소는 국가 분열의 위기를 막는 데 그치지 않고 로마를 더욱 강하게 만드는 결과를 만들었다.

 

 

아테네는 왜 망했을까

 

이 책에서 아테네에 대해 자세히 다루기 어렵지만, 고대 그리스 문명의 대표선수라고 할 수 있는 아테네는 다양한 시행착오 끝에 민주 정치 형태를 택한다. 즉 아테네 사람들은 귀족을 밀치고 평민에게 권력을 준다는 양자택일을 하였다.

그 결과 아테네에서는 모든 시민에게 참정권이 주어졌다. 뿐만 아니라 국가의 요직조차도 추첨으로 임명했으니, 이보다 더 나은 평등사회는 없을 정도였다. 국가의 요직조차도 추첨을 하다 보니 매년 같은 사람이 계속해서 정치의 중심에 설 수 없게 되었다. 아테네 시민들은 귀족 같은 엘리트 계층이 다시 생겨나는 것을 철저하게 싫어했다.

하지만 그 결과 아테네는 어떻게 되었는가. 페리클레스 라는 희대의 뛰어난 정치가가 사라지자, 그리스는 금세 대중들의 수준 낮고 어리석은 우민 정치로 전락해 버렸다.

30년에 걸친 아테네 정계에서 군림한 페리클레스는 민중파 의 거두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민주정을 맹신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민주정의 결점도 적나라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도자가 대중에 영합하는 것만을 생각한다면 민주 정치는 곧바로 우민 정치로 추락해 버릴 것이다. 반대로 민주정의 지도자가 여론을 무시하면 금세 실각의 쓰라림을 맞이해야 할 것이다. 이 또한 사실이다.

그런 만큼 민주 정체의 방향 잡기란 쉽지 않다. 이 점에서 페리클레스는 천재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대중 입장에서 서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실제로는 ‘국가를 이해서 필요한’ 일이라고 자신이 믿고 있는 정책을 차례차례 실행해 나갔다. 확실히 페리클레스는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 그는 만만치 않은 정치가였다.

이 숙련된 정치가가 이끈 결과 아테네는 국력도 권위도 높아졌고 그리스에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을 이루는 도시국가가 되었다.

사실 후세의 우리가 동경심과 존경을 담아 돌아보는 ‘그리스 문화’란 이 페리클레스 시대를 정점으로 하는, 고작 2세기 동안에 이뤄진 결과였다. 그러나 이 같은 아테네의 번영도 페리클레스의 실각과 죽음을 경계로 급속히 꺼져 간다.

강력한 지도자를 잃은 아테네는 숙적 스파르타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한창일 때조차 국론을 결정하지 못하고, 마침내 그리스 내에서 패권을 잃는다. 이 후 아테네는 분명히 문화의 중심지였지만 그 후로 화려한 빛을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다.

 

 

로마인이 얻은 ‘역사의 교훈’

 

이 부분은 내 상상이지만, 로마인들이 국가의 요직을 평민에게 전면 개방하겠다는 결단을 내린 것은 이와 같은 아테네의 실패를 자세히 관찰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사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격돌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한 것은 기원전 431년, 페리클레스가 실각하고 아테네 정계의 혼미가 시작된 것이 그 다음 해의 일이다. 그리고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패해 무너진 것이 기원전 404년이다.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법이 제정된 것은 그로부터 약 30년 후의 일이다. 그러므로 이 결단을 내린 로마인들의 머릿속에는 아테네의 역사가 ‘근현대사의 교훈’ 으로서 강하게 새겨져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당시의 지중해 세계에서 그리스는 일대를 아우르는 선진지역이었다. 그 중 가장 선진적이었던 곳이 아테네였다. 그 아테네가 민주정의 폭주를 허락했기 때문에 추락했다는 사실을 로마의 지도자들은 공통적으로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페리클레스와 같은 시대를 산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 는 페리클레스 시대를 총괄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외관은 민주정이지만 내막은 단 하나사람이 재배하는 나라.”

아마 로마인들도 아테네에 대해 이와 비슷한 감상을 품지 않았을까? 시민 모두가 평등하게 정치 프로세스에 참가하는 민주정은 언뜻 보면 이상적으로 보이지만, 그 제도가 기능을 발휘하게 하려면 뛰어난 지도자가 필요불가결 하다는 모순을 감추고 있다.

만약 뛰어난 지도자를 얻지 못하면 민주정치는 백가쟁명 의 대중 정치로 타락해 버린다. 그러나 뛰어난 지도자가 항상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실은 그 반대이다.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진실이다. 사실 그토록 문화와 예술 면에서 인재가 넘치던 아테네조차 페리클레스를 잇는 정치가가 나오지 않았으니까.

로마인들은 이러한 아테네의 교훈에서 ‘한 개인의 역량에 의지하는 사회는 위험하다’ 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귀족과 평민의 대립 해소에서 로마는 아테네와 같은 길을 택하지 않았다. 즉 민주정을 택하지 않은 것이다. 그 대신 그들은 ‘인재의 총집합체’ 로서 원로원을 전면 개방해 과두정치를 강화하고 발전시킨다.

한 사람의 천재에 의지하지 않고, 대중의 뜻을 모아 비록 수수해도 견실한 과정을 밟아 나가겠다. 이것이야말로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법 에서 시작된 일련의 정치 개혁 개념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조직의 로마

 

평민 중에서도 뛰어난 인재를 모으고, 원로원 중심의 통치 체제 내에서 그 인재를 활용해 나간 로마의 방식은 오늘날의 표현으로 하면 ‘조직력’ 이라는 한마디로 집약된다.

회사 경영에서도 한 사람이 통치하는 기업은 분명히 뛰어난 기동력으로 혁신적 시도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업은 만약 경영자가 불의의 사고로 쓰러지거나 혹은 사내 항쟁으로 퇴진할 경우는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간다는 약점을 안고 있다.

여기에 비해 ‘적당한 인재’ 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타입의 기업은 분명 화려하지도 않고 발전 속도도 느릴 것이다. 하지만 회사 전체가 하나로 뭉쳐 목표를 향해 전진해 나갈 걸이라고 생각하면, 이러한 조직이야말로 확실하게 목표 달성을 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이런 방식이라면 사장이나 관리직이 교체된다 하여도 그로 인해 조직이 받게 되는 타격은 적어지기 때문이다. 로마는 후자 타입이었다.

이미 말했듯이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법 제정 후 1세기 동안에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다. 그러나 그 통일의 진도는 결코 선명하지도 않고 속도감도 없었다.’천하 통일’ 을 말하면 우리는 흔히 영웅을 떠올리지만, 그 시대의 로마에는 눈에 띄는 영웅이 탄생하지 않았다. 그 대신 로마는 ‘강한 조직’ 으로 존재했다. 이 조직력으로 로마는 이탈리아를 통일할 수 있었다.

예컨대 이 시대 로마 전쟁사 에서는 명장으로 지중해 세계에 이름을 떨친 인물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 대신 천재적 이진 않지만 견실하게 지휘를 할 수 있는 인재들이 많이 있었다. 왜냐하면 로마에서 군단 인솔은 1년 임기로 정해진 집정관의 역할이었다. 그렇지만 전쟁이 1년 만에 끝내야 하는 것으로 제한되어 있지 않았기에 집정관의 임기를 한정하고 있는 것은 결점이 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점도 있다.

군단을 지휘하려면 자질도 필요하지만 실전 경험도 중요하다. 그렇게 보면 한 해에 한 번씩 ‘신인’을 등용할 기회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군단 지휘관 층이 두터워지는 셈이다. 예컨대 전쟁터에서 집정관이 쓰러졌다고 해도 로마 원로원은 경험자 가운데 즉시 후임 지휘관을 뽑을 수 있는 이점을 누릴 수 있다.

장대한 <로마사>를 쓴 역사가 티투스 리비우스 는 그의 저서 <즐겁게 돌아가는 길> 에서, 만약 로마군 과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가 싸우면… 이라는 시뮬레이션을 시도한 다음, “조직력에서 우수한 로마군 이 최종적으로는 이겼을 것” 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역사의 가정’ 이므로 정답이라고는 할 수 없다. 또한 리비우스는 로마인이었으니까 편향된 부분이 없다고도 단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제시한 이유를 주목해야 한다.

“한 명 한 명의 전사는 각자의 운에 따라 죽거나 살거나 한다. 다만 로마에서는 전사 한 사람의 죽음이 직접적으로 국가의 손실로 연결되지 않고 끝난다.”

리비우스의 이 말은 ‘전사’를 ‘지휘관’ 으로 바꾼다 하여도 그대로 통용된다. 그리고 확실히 이 점이 로마가 강하다는 것이다.

 

 

왜 로마인에게 ‘신상필벌’은 필요하지 않았을까

 

조직의 로마를 말할 때 빠뜨린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로마에서는 전투에서 졌을 경우에도 패한 군대의 지휘자를 처벌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비록 로마군 이 패전에 패전을 거듭했다 해도 – 이것은 나중에 설명하는 한니발과의 싸움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지만 – 지휘관은 바닥날 염려가 없다. 또한 패전 지휘관도 실패 경험을 다음 전투에서 활용할 수가 있다. 즉 패전 경험에서 다음 승리를 이끌어 낼 수 있는 효과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결과론이고, 로마인들이 그러한 효과까지 고려하야 패장을 재판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원래 로마인의 관념에서 보면 패장을 해임하거나 혹은 처벌할 필요성은 처음부터 고려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말했듯이 공동체 의식이 강한 로마에서는 무엇보다도 명예를 존중했다. 일단 전쟁이 나면 귀족도 평민도 모든 것을 내던지고 국가 방위에 나서는 로마인이었다. 귀족과 평민의 항쟁이 좀처럼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한 로마인이기에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여 패전의 책임자가 된다는 것은 가장 견디기 힘든 치욕이었다. 이것이 당시 로마사회의 상식이었다.

그러니 죽고 싶을 정도로 치욕스럽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지휘관을 굳이 재판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로마에서는 패장이 책임을 거론하지 않았다. 이미 그는 패장이 된 시점에 수치라는 큰 벌을 받은 셈이니까.

미국식 경영 이론서의 첫 페이지에는 큰 고딕 문자로 ‘신상필벌’ 이라는 말이 쓰인 경우가 많다. 그것을 보면 나는 놀려 주고 싶기도 하다.

과연 명예심 따위를 약으로 쓰고 싶지 않은 현재 조직의 운영에서는 신상필벌은 매우 중요하며 꼭 필요한 규칙일 것이다. 그러나 이 규칙을 일부러 꺼내 들지 않아도 잘 움직인 조직이 실제로 존재했던 것이다.

 

 

두 가지 네트워크

 

역사가 리비우스가 “알렉산드로스도 물리쳤을 것이다.” 라고 한 로마의 조직력은 공화정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법 이후의 로마에는 같은 시대의 다른 나라가 가지지 않은 두 가지 큰 ‘무기’가 있었다.

하나는 물건이나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네트워크로서의 도로망, 그리고 또 하나는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간 네트워크로서의 ‘로마 연합’.

이 두 가지 네트워크의 힘으로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패자가 되었고, 얼마 후에는 지중해 세계의 패자도 된다. 그런데 사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표현을 달리하면, 도로망이 하드웨어라면 ‘로마 연합’은 소프트웨어였다고 할 수 있다.

제2장에서 소개한 플루타르코스의 말을 기억할 것이다.

역사가인 플루타르코스는 로마가 주변국을 누르고 커진 이유를 한마디로 요약했었다.

“패자마저도 자신들에게 동화시킨다는 그들의 방식만큼 로마의 강대화에 기여한 것은 없다.”

이처럼 멋진 특성은 이미 로물루스 시대 사비니 족을 동화시킬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이행한 후에도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그 특성을 한층 강화했다.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 중부의 산악 지대를 본거지로 삼고 있던 삼니움 족과 싸우고, 또 이탈리아 남부에서 큰 힘을 가진 그리스 계 도시국가와도 싸운다.

그 전쟁은 결코 희망적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고전이었다는 표현이 적확 할 것이다. 삼니움 족과의 전투에서는 그들의 게릴라 전법에 휘말려 로마군 은 항복을 피할 수 없었다. ‘카우디움의 굴욕’ 이라는 이 패배는 오랫동안 로마인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또한 그리스 계 도시국가와의 전투에서는 북부 그리스에서 초빙해온 피로스 라는 명장에 의해 로마군단은 연패를 당한다. 로마는 수도 방위를 위해 프롤레타리의 소집이라는 전례 없는 긴급 수단을 실시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같은 고통을 안겨 주었던 적에 대해서도 로마인은 분노하면서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았으며, 또한 노예로도 만들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은 예전의 적을 자신들이 이끄는 ‘로마 연합’의 일원으로 포함시켜 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로마인들이 당시에는 아직 나타나지도 않은 기독교의 ‘박애 정신’에 눈을 떴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그들의 이러한 선택은 일찍이 자신들이 맛보았던 씁쓸한 경험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라틴 동맹은 왜 실패했을까

 

건국 이래 로마는 비록 느린 속도였으나, 그 세력을 넓혀 올 수 있었으면서도 항상 동맹 부족의 배반으로 골치를 앓아 왔다.

로마인은 왕정 시대부터 임 주변의 라틴 부족들과 동맹을 맺기에 그 이상 안전한 상대도 없다고 생각하여 시작한 것이 ‘라틴 동맹’ 이었는데, 이 동맹은 로마가 원하는 만큼 효과를 내주지 않았다. 그것은 원래 로마가 주체가 되어 시작한 이 동맹에서, 맹주 국인 로마의 힘이 그 당시 특출하지 못했던 탓도 있었다. 로마 이외의 라틴 족이 이 동맹에 참가한 것은 어디까지나 참가하는 것만으로도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맹주 국 로마의 힘이 충분하여 다른 부족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는 동안에는 전리품도 분배 받을 수 있으므로 그들은 로마를 따랐다. 그러나 로마의 힘이 약해지면 즉시 등을 돌렸다.

실제로 로마가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었을 때나 ‘켈트 족 습격 충격’ 과 함께 로마가 잿더미로 뒤덮였을 때나 피폐해진 로마를 맨 먼저 공격해 온 부족도 그들 동맹자였다. 켈트 족이 돌아간 후로 20년에 걸쳐 로마는 관계였던 부족들과의 전쟁에 전력을 기울여야 하는 처지에 놓이기도 했다.

이런 뼈아픈 경험을 통해 로마가 배운 것은 아무리 같은 라틴 부족의 피를 나눈 한패의 동맹이라 해도, 그 동맹을 유지시키는 것은 우정이나 신의 등의 추상적인 것이 아니 군사력이라고 하는 현실이었다.

그래서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법이 제정된 약 30년 후, 로마는 새로운 동맹 관계 형성에 착수한다. 이것이 바로 20세기의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가 ‘정치 건축의 걸작’ 이라고 말한 ‘로마 연합’의 시작이었다.

 

 

보수도 철저하면 혁신에 이른다

 

그 이전의 ‘라틴 동맹’ 과 새로 만들어진 ‘로마 연합’ 은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로마의 힘을 동맹국에 인식시키고 납득시키는 일이었다. 좀 더 단도직입적으로 만하면 외교교섭을 통해 동맹관계를 쌓아 올리는 것이 아니다.

전쟁에 이긴 후 패한 그들을 동맹에 가세시키는 방법이 로마가 택한 길이었다.

이렇게 설명하면, ‘말하자면 로마 연합이란 승지가 패자를 강압적으로 누르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사실 그렇다.

그러나 인류의 긴 역사를 돌아보면, 전쟁에 진 패자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예속의 운명뿐이었다. 재산을 몰수당하고 피정복민으로서 정복자의 지배를 받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노예로 팔리거나 더 심한 경우에는 민족 자체가 멸망해 버리는 경우도 흔하다. 이에 비하면 로마가 택한 동화 방식은 ‘패자에게 지나친 관용’ 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물론 로마인은 관용을 베풀려고 이 길을 택한 것은 아니다. ‘패자도 동화시킨다’ 는 옛적부터의 삶의 방식에 충실하겠다는 생각과 현실적인 이득도 냉철하게 판단해 내린 결론이 ‘로마 연합’ 이었다고 할 수 있다. ‘보수주의도 철저하게 한다면 일대 혁신이 일어난다’ 의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로마 연합이란

 

로마 연합의 과정을 간단하게 살펴보자.

 

로마 연합은 크게 다섯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제 1요소는 연합의 중심은 로마이다. 이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제 2요소는 한때 라틴 동맹에 속해 있던 나라들, 즉 켈트 족 습격 충격 때 일단 로마에서 등을 돌렸다가 다시 로마 군대의 발 밑에 엎드린 나라들이다.

 

이 같은 배반 국가들에게는 징벌을 내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로마는 달랐다. 그 대신 로마는 그들에게 완전한 형태의 로마 시민권을 주었다. 말하자면 로마 본국 사람들과 완전히 똑같은 참정권과 재산권을 보증해 준 것이다.

물론 로마 시민권에는 그 권리와 함께 병역의무가 뒤따르지만, 그것조차 완전히 평등했다. 유사시에는 로마 병사와 함께 전쟁에 나가야 했다. 결국 로마에게 완전히 합병당하는 것이었지만, 그 합병이 완전히 대등한 형태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로마에서만 가능했던 특색이었다.

‘패자도 동화시킨다’ 는 로마인들은 이미 로마에 반기를 들었거나 전쟁에서 패했다는 과거조차 전혀 묻지 않았다. 과거에는 적대 관계에 있던 사람들에게 로마의 공직에 오를 수 있는 피선거권까지 주었다. 실제로 그들 중에는 나중에 로마의 집정관이 된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일을 예사롭게 펼쳐 나가는 데 로마인의 강함이 깃들어 있었다.

 

제 3요소는 ‘무니키피아 (municipia)’ 라는 나라들이다.

현대 이탈리아어로 ‘무니치피오’ 라고 하면 지방자치단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로마 연합에 속한 무니키피아는 로마 내에서 자치가 허용된 나라들이었다. 로마에서는 무니키피아에 속하는 사람들을 ‘준로마 시민’ 으로 취급하기로 한다.

이렇게 말하면 그들을 마치 이류 시민처럼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무니키피아 거주자에게 로마 시민권은 주어지지 않았지만, 보통의 생활에서 그들은 로마인과 똑같은 법적 권리를 인정받았다. 로마인과의 결혼도 자유로웠다.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투표권과 피선거권뿐이었다. 그것은 무니키피아가 자치체인 탓에 당연한 조치였다. 하지만 로마는 이 무니키피아 사람들에게도 차례차례 로마 시민권을 주었다. 이 또한 한 순간이 아닌, 서서히 ‘패자의 동화’를 행한 셈이다.

 

 

이전의 적에게도 시민권을 준 ‘로마의 지혜’

 

‘로마 연합’의 제 4요소는 라틴어로 ‘소키 (socii)’ 라는 동맹국이었다. 이곳에는 로마 연합이 생긴 뒤에도 로마와 전투를 하였던 제국이 포함된다.

앞에서 말한 삼니움 족이라든가 나폴리를 선두로 하는 그리스 계 도시국가들은 모두 로마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소키’ 로서 연합에 가맹하게 된다. 그러나 군대의 발 밑에 엎드린 소키에 대해 로마는 아주 너그러웠다.

이들 소키는 로마에서 완전한 자치가 허용되어 있었고, 로마는 그들에게 동화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통치 형태, 문화, 종교… 모든 것이 전과 똑같아도 상관하지 않았다. 그리스 건국에서 시작된 나폴리 등에서는 그리스어가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것도 문제가 아니었다. 말하자면 패전국이 아니라 완전한 독립국으로서 대우 한다는 것이었다.

다만 ‘로마 연합’ 의 일원인 이상 조건은 있었다. 그것은 ‘만약 로마 연합이 전쟁을 일으키면 동맹국으로서 병력을 제공한다’ 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이 의무만 완수하면 소키는 로마에서 세금이나 공납금을 낼 필요가 없었다고 하니, 이 또한 관대한 조건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소키의 지배계급에 대해 로마 시민권의 취득을 적극적으로 권한 것이다. 로마 시민권을 취득하라는 것은 로마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로마의 국정에 참가해 달라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 경우에 자국 시민권을 버릴 필요가 없었으므로 소위 이중국정이 되었지만, 로마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 같은 로마의 조치가 얼마나 놀랄 만한 것인지는 형대 세계로 바꿔 놓고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예컨대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패전국 일본이나 독일의 국회의원에게 ‘미국 시민권을 취득해 우리나라 선거에서 투표해 주십시오.” 라든가 “뜻이 있으면 우리나라 선거에 입후보해도 좋습니다.” 라고 말한 예가 있을까? 물론 그런 일은 미국에도 없었고, 그 이전의 강대국인 대영제국에서도 없었다.

그런데 로마는 그것을 예사롭게 행했다. 로마인은 ‘동맹국이라도 등을 돌리 수 있다’ 는 현실을 냉정하게 지켜본 다음, 어떻게 하면 그것을 최소한으로 억제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그리고 주저하지 않고 실행에 옮긴 것이다. ‘로마 연합’ 의 결속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라면 체면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로마 시민권을 소키의 지배층에도 나누어 주기로 한 것이다.

 

 

콜로니아 없이는 동맹 불가

 

‘로마 연합’을 구성하는 마지막 요소는 ‘콜로니아 (colonia)’ 였다. 콜로니아는 영어의 콜로니, 번역하면 식민지라는 라틴어이다. 콜로니아는 근현대 의 식민지와는 정취가 다르다. 그래서 나는 ‘식민지’ 라고 번역해서 생길지 모르는 오해를 막기 위해 콜로니아를 ‘식민 도시’ 라고 번역한다.

영국이나 네덜란드 등, 근대 유럽 제국의 식민지는 현지 노동자 에게 일을 시키고, 칼 마르크스 식으로 말하면 수탈하기 위한 곳이었다. 하지만 로마의 콜로니아는 그런 경제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이 아니었다.

이미 말했듯이 로마는 연합 가맹국에게 다양한 혜택을 주고 담대한 동화 정책을 펼쳐 동맹국의 배반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일이 해결된다고 여길 만큼 호인들은 아니었다. 아무리 궁리를 하고 지혜를 짰다고 해도, 동맹은 동맹인지라 그들이 배반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로마인이 생각한 것은 전략상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땅에 ‘쐐기’를 박듯 로마인을 배치해 가는 것이었다. 즉 일단의 로마 시민을 그곳으로 이주시켜 그들이 살면서 방위하는 마을을 건설하겠다는 것이다.

콜로니아뿐 아니라 당시 이탈리아의 마을은 모두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였다. 따라서 만약 주변 동맹국이 불온한 움직임을 시작하였더라도 중요 거점을 콜로니아라는 형태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동맹국들은 경거망동을 할 수 없었다. 만일 배반한다 해도 로마 시민이 살고 있는 ‘콜로니아’ 에서 보루 역할을 맡아 가로막았다. 그렇게 적의 발목을 묶어 놓고 있는 동안에 수도 로마에서 군단이 출격하는 것이다.

‘콜로니아’ 중에서 로마 시민이 아닌 동맹국 사람들이 이주한 ‘라틴 식민 도시’ 라는 곳도 있었다. 그러나 이 라틴 식민 도시도 목적은 같았다. 그들은 이러한 종류의 식민지에 이주하여 로마와 이해를 일치시키는 것이 자신들에게도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로마 측에서 보면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로 한정되어 있었다.

이 콜로니아를 전략 요지에 둔다는 ‘정략’ 은 제정 시대에 접어들어서도 유효한 수단으로 활용된다.

현대 서유럽의 주요 도시 중에서 로마제국 시대의 콜로니아가 기원인 곳이 적지 않다. 프랑스의 파리나 리옹 도 고대의 콜로니아이다. 라인 강 중류 쾰른 의 경우는 콜로니아를 독일어 식으로 읽은 것이 그대로 도시 이름이 되었다. 약 2,000년 전의 콜로니아가 현재도 도시로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로마인의 지세를 읽는 눈이 얼마나 적절 했는지 명확해진다.

 

 

왜 로마인은 가도를 만들었을까

 

지금까지 로마 연합을 대략적으로 설명했다. 그런데 그것이 로마 방위의 소프트웨어였다고 한다면 하드웨어로서 가능한 것은 도로망이었다.

이것은 인간이나 마차의 잦은 왕래에 의해 이루어진 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부설한 가도를 말한다. 그런데 이렇게 계획하여 가도를 부설한 것은 로마인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는 아니었다.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 제국에는 페르시아 만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가도가 정비되어 있었다고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놀라워했다.

그러나 가도를 단순한 물자나 사람을 수송하는 것만이 아니라 좀 더 유기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생각을 해내고, 게다가 가도를 네트워크화하면 비약적인 효과를 올릴 수 있다고 깨달은 것은 전적으로 로마인의 발명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로마인이 발명한 것이었다.

로마의 가도 부설은 기원전 312년, 당시 산악 민족인 삼니움 족과의 전쟁이 한창일 때 시작된다. 최초로 착공한 것은 지금도 이탈리아에 남아있는 ‘아피아 가도’ 이다. 로마 재무관인 아피우스 가 입안과 감독을 했던 것에서 이름 붙여진 아피아 가도는 그때까지 지구상에 존재한 가도와 목적을 전혀 달리하였다. 왜냐 하면 이 가도의 가장 큰 목적은 로마 연합을 강화하고 보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로마는 동맹 관계를 맺기 전까지는 전쟁을 하였어도, 그 후부터는 힘으로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동화를 통하여 동맹국과 관계를 강화하는 길을 택했다. 그래서 로마는 자신들이 제패한 땅에 일부러 병력을 주둔시키지 않았다. 군대를 배치한다는 것은 그 땅이 지배당하고 있다는 것을 어제까지의 적에게 확인시켜 주는 것과 같았다. 그러한 감정은 그 후의 동맹 관계에도 마이너스로 작용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만약 전쟁이나 분쟁이 일어났을 때 기지에서 급파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당시 로마군 주둔지는 수도 로마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1초라도 빨리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지 가 관건이었다. 그래서 로마 가도라는 아이디어가 나온 것이다. 역사상 유명한 로마 가도의 첫 번째 목적은 군용 가도였다.

 

 

왜 패자는 승자를 원망할까

 

그러나 가도의 부설 목적이 이 한 가지만은 아니었다.

내가 로마사를 공부하면서 경탄하는 것은 로마인들이 어떤 일을 행할 경우 그것이 단일한 목적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가도 부설에는 또 하나의 큰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인간이나 물건의 이동을 통해 ‘패자의 동화’ 노선을 더욱더 추진해 나가겠다는 것이었다.

군용 가도로서의 기능성을 첫 번째 목적으로 생각한다면, 가도는 수도인 로마를 기점으로 해서 일직선에 가까운 코스를 택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로마 가도가 부설된 경로를 보면 꼭 그렇지는 않다. 그것을 단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정략적, 전략적으로 중요한 땅에는 반드시 그 마을 중앙으로 가도가 통과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군대의 민첩한 이동만을 생각했던 군사 가도로서의 효율성을 우선시했다면 일부러 가도 가에 해당하는 모든 마을의 중앙부를 통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마을 근처를 지나간다 해도 그곳에서 마을 중앙부에 간선도로를 잇는 편이 훨씬 합리적이고 비용도 적게 든다.

하지만 로마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완벽하게 만들어진 가도라면 다름 목적으로 바꾸어 이용하는 것도 완벽하게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민첩한 군대 이동이 가능하도록 로마의 가도는 기본적으로 돌로 포장을 했다. 비가 내리거나 눈이 쌓인다 하여도 그 물이 길 양쪽을 따라 파 놓은 배수구에 흘러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기후가 나쁜 시기에도 이용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 로마 식 가도는 차도와 보도가 구분돼 있어, 기마대나 마차가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을 때도 보행자는 방해를 받지 않았다.

물론 이 같은 설계는 군사 가도의 용도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 정비된 가도라면 물자 이동이나 여행자의 왕래에도 최적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사람이나 물자 이동이 늘어나면 필연적으로 그 가도가 지나는 주변 일대의 경제가 활성화된다.

패자가 승자에게 불만을 느끼는 경우는 보편적으로 2가지 경우이다. 하나는 승자에게 자치권을 빼앗기는 경우이다. 이에 대해 로마는 이미 지방자치체인 무니키피아 및 동맹국에 대해 내부 자치권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대책을 세워 해결함으로써, 그러한 불만이 쌓일 위험을 최소한으로 억제하였다. 또 다른 이유는 경제상의 곤궁이다. 만약 패자인 자신들이 착취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아무리 정치적 자유가 주어진다 해도 불만은 쌓일 수밖에 없다.

로마의 가도 부설은 이러한 경제적 불만을 해결하기 위한 방책일 수도 있다. 로마와 동맹국 사이에 물류가 증가해 가면 요즘 말하는 광역 경제권 형식의 연결이 이루어지게 되어 저절로 현지 경제도 활성화되기 때문이다. 로마인 측에서 보면 다소 우회한다 해도 마을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형태로 가도를 부설할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운명 공동체의 필요성

 

또한 가도를 통해 운반되는 것은 물자만이 아니다.

로마인의 문화나 풍습도 다른 지방으로 흘러가게 된다. 이것도 동맹 강화를 위해서 꼭 필요했다. 승자가 승자로서 계속 존재하려면 단순히 무력뿐만 아니라 지도자로서 존경 받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무력만으로는 승자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상징해 주는 것이 그리스 스파르타의 몰락이다.

스파르타는 기원전 40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아테네를 항복시켜 그리스의 승자가 된다. 하지만 스파르타의 패권은 불과 30년밖에 유지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스파르타에는 패자를 끌어당길 만한 매력이 없었다는 점이다.

오늘날 ‘스파르타 식’ 이라는 용어에서 전해지는 것처럼, 스파르타 사람들은 모든 것을 희생시켜 군사 국가를 만들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어린아이들도 6세가 되면 부모에게서 떨어져 30세까지 공동생활을 하며, 하루 종일 전사로서 훈련을 받았다. 그 과정을 거친 후에야 가정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한 생활상은 ‘검소하고 강건’ 하다는 말 이외에 달리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아무튼 타락의 원인이 된다는 이유로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 문학이나 예술도 환영 받지 못하는 나라 였으니까.

이 정도라면 당연히 스파르타가 강해질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스파르타 인의 라이프스타일을 동경하고 그것을 따르겠다는 나라가 어디 있겠는가? 스파르타의 패권이 의외로 단명으로 끝났다는 것은 결국 여기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를 되돌리면, 로마 연합이 기능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로마와 동맹국, 다른 말로 하면 승자와 패자가 운명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필요불가결 하다고 로마인은 깨닫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로만 우호를 주창하여서는 의미가 없고, 물심양면으로 교류가 있을 때에 비로소 승자와 패자는 융합해 간다. 이를 알아차린 로마인의 지혜가 참으로 대단했음을 솔직히 감탄할 수 밖에 없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기원전 312년에 시작한 로마 가도의 부설은 기원전 1세기의 공화정 시대에 본국 이탈리아를 총망라하며 완성되었고, 제정 시대에 접어들어서는 유럽, 중근동, 북아프리카에 걸친 제국 전역을 망라해 나간다. 그 결과, 로마제국 전역에 둘러쳐진 가도는 주요 간선도로만도 375갈래, 그 전체 길이는 8만 킬로미터를 넘었고, 자갈 포장을 한 간선도로나 사도까지 합하면 총 연장 길이는 30만 킬로미터에 이르렀다.

이처럼 광범위하게 로마인을 가도 부설에 몰아넣은 원동력 중 하나가 건국 이래로 길게 이어져 온 ‘패자도 동화시킨다’ 는 로마의 유전자였다고 할 수밖에 없다.

국가 방위 면에서 생각하면 도로망 부설은 양날의 검이기도 하였다. 양날의 검이란 사용 여하에 따라 유용하기도 하지만 위험할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분명히 고대 판 고속도로라고 할 수 있는 가도가 있기 때문에 로마의 군단은 모든 벽지로 빠르게 이동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자국 군대가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있는 만큼 적 또한 그만큼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있었다. 라퐁텐 이 표현한 것처럼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기’ 때문에 로마는 모든 방향에서 오는 적을 경계해야만 했다.

물론 로마인들도 가도 건설이 방위 면에서 마이너스가 되는 이 위험성을 깨닫고 있었을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도로망을 충실하게 부설하는 쪽을 택했다.

이 점에서 정반대인 곳이 고대 중국제국이다. 물론 고대 중국에도 가도는 존재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가도를 둘러치기보다는 강대한 방벽, 즉 만리장성을 쌓아 올리는 쪽에 에너지를 쏟았다.

사람의 왕래를 끊는 방벽과 사람의 왕래를 촉진하는 가도…, 똑같이 고대 제국이라 일컬어진 로마와 중국이었지만, 두 나라의 ‘삶의 방식’은 전혀 달랐다. 그리고 로마의 도로망은 ‘팍스로마나(로마의 평화)’ 로 연결된 데 비해 만리장성은 중국에 ‘팍스(평화)’를 가져다 주지 못했다.

 

 

조직의 로마를 뒤흔든 남자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법의 제정으로 상징되는 평민에 대한 공직 개방, 로마 연합의 창설, 또 그것과 표리일체를 이루는 도로망의 부설…., 켈트 족 습격 충격을 계기로 로마는 조직의 로마로 향하는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조직이라고 해도 로마에서는 자기 완결 형의 폐쇄 조직이 아니었다. 로마인들은 항상 밖을 향해 조직을 개방했다. 이것이야말로 로마를 로마답게 하는 특색이었다.

로마의 강함은 귀족의 아성이었던 원로원을 평민에게도 개방하고, 로마 연합에 패한 자에게도 로마 시민권을 나누어 주었으며, 도로망을 깔아 로마 연합 내부에서 사람이나 물건의 흐름을 활성화시키는 등 여러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됨으로써 나타나게 되었다.

그 원점이 된 것은 몇 번이고 반복하지만 건국 때부터 지켜 온 ‘패자도 동화시킨다’ 는 유전자였다.

그러나 이 로마가 ‘지중해의 승자’ 가 되어 대제국으로 등장하기 까지는 아직도 넘어야 할 시련이 수없이 많았다.

그 최초의 시련은 로마의 이탈리아 통일이 끝나자마자 나타난다.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 통일을 완성한 것은 기원전 270년. 그리고 불과 6년 뒤 로마는 당시 지중해 최고의 해군 국가인 카르타고와 전쟁을 하게 된다. 간헐적으로 싸웠다 해도 그 후 130년간이나 계속된 포에니전쟁의 시작이다.

이 포에니전쟁에서 로마는 최강의 라이벌과 맞부딪친다. 그 라이벌은 다름 아닌 한니발. 한니발은 로마를 그저 위기에 빠뜨렸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로마인의 삶의 방식에 대한 도전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조직의 로마가 이 한 인물에 의해 17년이라는 긴 세월을 계속 농락당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천재보다는 조직 전체의 강함을 강구했던 로마가 이 위기를 어떻게 넘겼을까? 그것을 다음 장에서 얘기하겠다.

 

 

*카우디움 의 굴욕: 기원전 32년, 카우디움의 계곡으로 유인되어 나간 로마 군은 삼니움 족이 책략에 빠져들어 며칠 동안 갇혔다. 식량이 떨어져 로마 군이 항복하자, 삼니움 족은 로마 병사를 무장해제시키고 그들의 갑주마저 빼앗아 속옷 바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그 모습으로 창을 겨눈 군사들 사이로 걸어가게 만들어 조롱하였다.

 

 

 

 

5장 한니발의 도전

 

로마는 경제력에서도 군사력에서도 카르타고에 미치지 못했다.

또한 카르타고에는 희대의 명장 한니발이 있었다.

카르타고보다 “전혀 나은 것이 없는’ 입장에서

로마는 카르타고의 포에니 전쟁을 치른다.

이 전쟁은 로마의 조직력이 진가를 발휘한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카르타고는 ‘평화국가’ 인가

 

기원전 367년의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법 제정을 계기로 로마는 도약의 시기를 맞이한다. 내부에서는 귀족과 평민의 융화가 이루어지고, 밖에서는 그때까지 느슨했던 라틴 동맹을 해체하고 로마를 중심으로 강고한 로마 연합을 발족한다.

그 후 로마는 결코 화려하지는 않지만 착실하게 세력을 확대해 나간다. 그리고 기원전 270년, 마침내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을 이루어 낸다. ‘켈트 족 습격 충격’ 으로 부터 계산하면 120년째 되는 해였다.

한때 켈트 족의 습격을 받아 존망의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지만, 강한 조직, 강한 시스템을 확립할 수 있었던 로마는 이탈리아의 패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고투와 시행착오 끝에 이탈리아 반도를 제패한 로마에게 휴식의 시간은 허용되지 않았다. 반도 통일 후 불과 6년 만에 로마는 카르타고와 ‘포에니 전쟁’ 에 돌입하게 되기 때문이다.

카르타고는 통상에 뛰어난 페니키아 민족이 세운 국가였다. 같은 상업 민족인 그리스가 몰락한 뒤 지중해 세계에서 카르타고는 탁월하게 경제 대국으로 올라섰다.

당시의 로마는 지중해 세계 속에서 신흥국인 셈이었다. 가까스로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했을 때까지는 괜찮았지만, 토대가 농경민족이었기 때문에 항해술조차 변변히 알지 못하였다. 하물며 바다를 건너 카르타고를 정복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때까지의 로마는 카르타고와의 불평등 조약(기원전 348년)에 따라 사르데냐와 코르시카 섬 서쪽, 즉 지중해 서쪽 전역과 통상이 금지되어 있었다.

“카르타고의 허가 없이 로마인은 바다에서 손도 씻을 수 없다.” 라고 카르타고 사람들이 엄포를 놓았다고 전해질 만큼, 지중해 세계에서 카르타고의 힘은 압도적이었고, 그에 비해 로마는 그 발 밑에도 미치지 못했다. 양국의 경제력 차이는 두 나라의 통화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이전 페이지 참조).

 

 

‘자위전쟁’ 으로 시작된 포에니 전쟁

 

그렇다면 왜 대국 카르타고와 신흥 로마가 포에니 전쟁에서 맞붙게 되었을까? 로마 측에서 보자면 이것은 전적으로 방위전쟁이었다.

기원전 264년, 제1차 포에니전쟁의 무대가 된 곳은 부츠를 연상시키는 이탈리아 반도의 발끝에서 당장이라도 채일 것 같은 위치에 떠있는 시칠리아 섬이었다.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아 사이에 놓인 메시나 해협은 가장 좁은 곳의 폭이 불과 3킬로미터였다. 그 시칠리아 섬 서쪽의 반을 전부터 지배해 온 카르타고가 세력을 동쪽으로 뻗쳐 섬 전체를 차지하려고 한 것이 발단이었다. 만약 시칠리아 전체를 카르타고가 차지하면 로마 및 로마 연합 모든 나라의 방위 체제는 무너진다.

원래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엎드리면 코가 닿는 곳에 위치한 시칠리아까지 카르타고의 거점이 되면, 이탈리아 반도는 머지않아 해운에서도 으뜸인 카르타고의 지배 아래 놓일 것이다. 로마인들이 이렇게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 시칠리아 섬은 서쪽 절반은 카르타고, 동쪽 절반은 그리스 계 메시나 와 시라쿠사 가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르타고는 말할 것도 없고 메시나 도 시라쿠사도 ‘로마 연합’의 일원이 아니었다. 따라서 메시나 가 카르타고 내습에 대처하기 위해 원군 파견을 요구했을 때도 당시 로마의 원로원은 출병을 망설이다가 최종 결단을 시민회에 일임했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로마가 출병을 하게 된 것은 역시 로마 연합의 안전 보장을 위해서는 불가피하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결정을 내린 로마인들도, 아무리 그렇더라도 이 파병이 카르타고와의 전명 대결로 발전하리라는 것도, 게다가 130년이나 전쟁이 계속되리라는 것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로마의 관심사는 그저 단순히 눈앞의 위기를 넘기자는 것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이 포에니 전쟁이 카르타고의 멸망이라는 형태로 종결되었을 때, 로마는 지중해의 확고부동한 패권국가가 되어 있었다. 지중해는 로마인에게 ‘우리의 바다’ 가 되었고, 도시 로마는 ‘세계의 수도’ 라고 칭송 받게 되었다. 물론 이렇게 전개되리라고는 포에는 전쟁을 시작했을 무렵의 로마인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세부 속에 역사의 묘미가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이탈리아 반도의 신흥국인 로마가 대국 카르타고를 끌어내리고 지중해의 패권국가로 도약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흥미를 느낄 것이다.

그러나 먼저 양해를 구하지만, 그 ‘해답’ 을 한정된 페이지에 다 쓰라고 하면 ‘불가능’ 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역사란 살아 있는 인간들이 움직이는 것이다. 그 등장인물들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따라가다 보면 비로소 역사를 읽는 묘미가 생겨난다.

더 깊이 말하면 전쟁이란 우연의 연속이기도 하다. 전쟁터에서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자주 일어나고, 때로는 그것이 승패를 좌우한다.

그러한 상세한 것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마치 자연과학에서처럼 인과 관계를 간단하게 몇 줄로 요약해 보이는 것도 역시 역사 학자에게는 소중한 임무일지 모르지만, 2,200년 전 옛날의 로마와 카르타고의 남자들에게 빠져들어 상세한 이야기를 하나하나 좇아가며 <로마인 이야기> 를 썼던 나로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포에니전쟁에 관한 부분은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도 그의 저서 <로마사>에서 3분의 2 이상을 할애했을 정도로 로마사의 하이라이트 장면이다. 내 <로마인 이야기> 에서도 이 130년에 걸친 전쟁의 흐름을 쓰는 데 단행본 한 권이 필요했다.

이처럼 포에니 전쟁 이야기를 요령 있고 간결하게 쓴다는 것이 나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하지만 포에니전쟁을 하나의 관점에서 돌아본다면 어떻게든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즉 대국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조직으로서의 로마’가 어떻게 대처했는가 하는 관점이다.

로마는 경제력에서나 군사력에서나 카르타고에 미치지 못했다. 또한 인재 면에서도, 카르타고에는 한니발이라는 희대의 명장이 있었다. 말하자면 카르타고보다 ‘전혀 나은 것이 없는’ 로마는 단 하나, 조직력을 가지고 있었다.

포에니전쟁은 로마의 조직력이 진가를 발휘한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육지의 로마, 바다의 카르타고

 

라틴어로 ‘페니키아인과의 전쟁’을 의미하는 포에니전쟁에서 로마와 카르타고는 세 차례에 걸쳐 사투를 벌인다.

 

 

제1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 ~ 기원전 241)

 

주 전쟁터는 시칠리아와 그 주변 바다, 이미 설명했듯이, 기원은 로마의 방위전쟁이었다. 이 전쟁 결과, 로마는 지중해 서쪽 절반의 해상권 획득.

 

 

제2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18 ~ 기원전 202)

 

고대의 손꼽히는 명장 한니발이 이탈리아 반도에 쳐들어가면서 시작된다. 전쟁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스페인, 아프리카까지 확대되었다. 역사가에 따라서는 ‘역사상 최초의 세계대전’ 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을 만큼 큰 전쟁이었다. 강화조약에 의해 카르타고 해군 해체.

 

 

제3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149 ~ 기원전 146)

 

전쟁터는 카르타고 본국. 이 전쟁 결과 카르타고 멸망. 그 후 1세기에 걸쳐 카르타고의 수도는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 되었다.

 

 

이 세 차례의 전쟁 중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 제2차 포에니전쟁이다.

제1차 포에니전쟁에서 로마군 은 건국 이래 처음 바다를 건넌다. 그때까지 자기 부담의 군선은커녕, 상선조차 가진 적이 없는 로마인이 카르타고의 우수한 해군과 싸운다. 그런데도 이겼으니 이것은 주목해야 할 사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후의 역사에 미치는 영향력의 관점에서 보면 제1차 포에니전쟁의 중요성은 비교적 작은 편이다. 카르타고 해군에 이겼다고 해서 로마가 육군국 에서 해군국 으로 방향을 바꾼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로마인들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역량이 육상에 있어야만 충분히 발휘된다고 믿고 있었다.

여기서는 상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이 제1차 포에니전쟁의 해전에서는 능숙한 카르타고가 미수간 로마의 전술에 휘둘렸다. 또 로마측도 미숙했던 탓에 여러 차례 실패를 거듭한다.

게다가 로마가 승리한 그늘에는 ‘동맹국’ 인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 계 도시 국가들의 지원이 있었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그리스 민족은 원래 해상 민족이었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 로마는 급조한 것이기는 하지만 해군을 창설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 구도가 제2차 포에니전쟁에서는 역전한다. 육지에서는 압도적으로 강한 로마가 어이없게도 한니발의 이탈리아 반도 침입을 막지 못했다. 게다가 그로부터 햇수로 17년에 걸친 ‘본토 결전’ 을 치러야 했다.

왜 ‘육지의 로마’ 가 고전을 면치 못했을까? 그리고 이 경험에서 로마인은 무엇을 배웠을까? 이것을 아는 것은 그 후의 로마사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로마의 상식’에 대한 반대 명제

 

제2차 포에니전쟁은 로마 대 카르타고라기보다 로마 대 한니발의 전쟁이었다.

로마는 이 카르타고의 무장 한 사람에게 17년간이나 계속해 완전히 농락당한다. 로마 방위 망의 허를 찌른 ‘알프스 넘기’ 라는 전대미문의 전술을 시작으로 이탈리아 반도 공격에 들어간 후부터 한니발은 로마군단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마음대로 조종했다.

알프스를 넘는 시점에서 한니발의 군세는 보병 2만과 기병 6,000으로 합쳐 2만 6,000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비해 로마는 로마 연합을 포함해 동원 능력은 75만 명이었다. 숫자가 현황을 말해 주는 지상전에서 한니발의 군단은 사지에 몰려 있는 것과 다름없었는데도 로마군 은 계속해 전쟁에서 패한다. 로마인들 입장에서 보면 ‘도대체가 바보 같은’ 이라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나라를 사랑하고 명예를 존중하는 시민들에 의해 병사가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로마군단의 자랑이다. 사기가 충천되어 있고 군인의 질에서도 다른 어느 나라 군대에도 지지 않는다.

이에 비하면 한니발 군대는 알프스를 넘어왔으므로 확실히 강자들로 구성되어 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이 용병이었다. 말하자면 오합지졸의 군대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그 오합지졸의 군대를 인솔하는 한니발은 이탈리아에 진공해 올 당시 불과 28세의 애송이였는데 무엇을 말하겠는가.

로마공화정에서는 이처럼 새파란 애송이가 지휘를 맡는 것 자체를 생각할 수 없었다. 종신제가 취지인 원로원 체제에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경험이 중시되었다. 즉 연공서열제였다. 원래 로마의 과두정 은 독재자를 만들어 내지 않기 위해서 짜낸 시스템이기 때문에 실력주의를 배제하는 것은 당연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군단을 인솔하는 집정관이 되려면 설령 능력 있는 인물이라도 여러 관직을 거치지 않고서는 어려웠고, 아무리 빨라도 40세까지 기다려야 했다. 반대로 말하면 40세를 넘지 않으면 군단을 지휘하는 중임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즉 한니발은 이러한 ‘로마의 상식’을 죄다 부정한 존재로서도 로마인에게는 충격적인 적이었다.

 

 

칸나에 전투

 

제2차 포에니전쟁 3년째인 기원전 216년, 로마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임한 칸나에 싸움에서도 한니발의 세력은 압도적이었다.

그 전해에 로마는 중부 이탈리아의 트라시메노 에서 한니발의 기습을 받고 2개 군단을 모두 잃는다. 칸나에의 결전은 로마에게는 트라시메노 패전의 설욕이라는 의미도 있어 절대로 질 수 없는 싸움이었다.

그래서 로마는 동맹국 병사를 포함하여 8만 5,000이라는 공전의 대군을 편성한다. 이에 비해 한니발 진영은 갈리아인(켈트 인) 용병 2만 4,000을 합쳐도 겨우 5만에 지나지 않았다. 조직의 로마로서는 최상의 준비를 마치고 필승 태세로 칸나에 에 기세를 몰아갔다.

그런데 이 칸나에 에서도 로마 군은 한니발 군대에게 문자 그대로 분쇄돼 버린다. 고대 역사서에 의하면 이 전쟁에서 로마 측 사망자는 7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런데 한니발 측의 희생자는 불과 5,500명. 확실히 완패였다. 로마의 대군은 한니발 한 사람에 의해 괴멸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칸나에 싸움은 2,2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세계의 모든 육군사관학교에서 강의하는 내용이다. 칸나에 에서 한니발이 보인 전술의 묘는 기술면에서 볼 때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진보한 현대 육군의 사관후보생조차도 배워야 할 점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한니발은 왜 강했을까

 

그렇다면 왜 한니발은 숫자에서는 열세인 군대를 이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대군을 쳐부술 수 있었을까?

그 비밀을 알려면 역시 현대의 육군사관학교 강의처럼 칸나에 에서 벌어진 양군의 움직임을 자세히 점검해 나가는 것이 올바른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글로 쓰기 시작하면 그것만으로도 이 장은 끝난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요점만을 짚어 나가면서 간단히 설명하겠다.

한니발이 로마 군을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은 특별한 신무기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한니발이 코끼리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온 얘기는 유명하다. 현대의 전차에 해당하는 코끼리는 추운 이탈리아 반도에서 치러야 하는 이 전쟁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그러면 한니발은 뭐가 달랐을까?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기병의 활용이었다. 로마에 한정하지 않고 옛날부터 전쟁에서는 보병은 보병끼리, 기병은 기병끼리 싸우는 것이 정법 이었다. 양쪽 모두 같은 기술을 가진 군사가 싸우므로, 당연한 일이지만 그곳에서는 질보다 양이 중요하다. 즉 육상의 전투에서는 병사의 수가 많은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이 상식을 뒤집은 최초의 인물이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며, 그 전쟁 방식을 계승한 사람이 다름 아닌 한니발이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창안하고 한니발이 계승한 이 전법은 기병이 가진 기동력을 최대한으로 살리는 것이었다. 즉 아군의 기병을 그대로 적의 기병과 맞붙게 하는 단순한 방법이 아니었다. 기병이 가진 스피드를 최대한 활용해 적을 배후에서 공격하거나 혹은 적진을 분산시키는 방법이다. 기병을 움직여 적진을 헝클어 놓고 거기에 보병을 투입해서 최종적으로는 적을 포위하고 섬멸해 버린다…. 이렇게 문장으로 표현하면 무척 간단해 보이겠지만, 이것을 실전에서 응용하여 승리를 거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말하자면 실제 전투에서는 기대대로 움직여 주는 것도 아니므로 임기응변적인 대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로스나 한니발이 명장이라고 일컫는 것도 ‘기병의 기동성 활용’을 축으로 하면서도 실제 전투에서는 기병을 보병과 맞붙게 하는가 하면, 이와 반대로 보병을 적의 기병과 맞붙게 하는 등 다양한 대응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로스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투란 격동하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전쟁터의 모든 행위는 격동적으로 이뤄지지 않으면 안 된다.”

천재란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인물’ 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다르다. 옛날부터 눈앞에 있었는데도 아무도 주목하지 못했던 것을 주목해 그것을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천재이다.

알렉산드로스나 한니발은 그런 의미에서 분명히 천재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느 군대나 똑같이 갖고 있는 보병이나 기병인데도 군사를 잘 활용하는 용병술 하나로 전혀 다른 타입의 전쟁을 할 수 있었음을 직접 보여 준 지휘자였다.

로마가 많은 군사를 동원해 카르타고 군을 양으로 누르려고 했지만 실패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명확해진다. 로마는 ‘낡은 전쟁’을 했고 한니발은 ‘새로운 전쟁’ 을 했던 것이다.

 

 

왜 로마군 은 바꿀 수 없었을까

 

그런데 한니발에게 여러 차례나 완패를 당한 로마는 심각한 이 사태를 어떻게 대응했을까? 그것이 문제이다.

한니발이 걸어 온 ‘새로운 전쟁’ 에 대항하려면 누구나 기병력 의 증강이 방법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로마는 그 길을 결코 밟지 않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기병을 늘리려고 해도 늘릴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기병이 타는 말을 조달하려면 준마 산지인 아펜니노 산맥의 산악 지대에서만 구할 수 있었고 말의 숫자도 적었다. 더구나 말이 입수되었다고 해도 곧바로 기병을 늘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시대에는 말등자 가 발명돼 있지 않아, 말을 탄 채로 무기를 사용하려면 자신의 두 다리로 말의 몸통을 단단하게 조이는 테크닉을 마스터해야만 했다. 이 같은 기능은 어렸을 때부터 말을 즐기지 않은 사람이라면 웬만해서는 금방 몸에 익힐 수가 없었다.

그 결과 로마 기병은 꽤 부유한 귀족이 자제이거나 아니면 준마 산지 출신의 기마민족이 맡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다. 로마 병제에서 기병이 가장 유복한 계층의 시민에게 할당되어 있었던 것도 그 이유였다.

그런데 한니발 군에게는 카르타고와 동맹 관계에 있는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 인과 이탈리아 침공 뒤 참가한 갈리아인 등 기마에 뛰어난 민족이 기병으로 포함돼 있었다. 로마에는 그러한 기마민족의 동맹국이 당시의 시점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곧바로 기병을 늘린다는 것은 아무리 지혜를 짜도 무리였다.

 

 

로마군 의 전력은 주로 중장비 보병

 

그리고 로마군 이 기병 중심의 군대로 다시 태어날 수 없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한니발의 카르타고 군을 그대로 흉내 내면 중장비 보병을 중시한 ‘로마군단다운 특색’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었다.

대개 어떤 나라에서도 군대란 그 나라의 국정을 비추는 거울이다. 로마의 경우 그것이 중장비 보병의 중시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제2장에서 얘기했듯이 로마에서는 시민권을 가진 사람 모두에게 병역의 의무가 있었지만, 그 내용은 자산의 액수에 따라 5등급으로 분류되었다. 로마 시민에게는 이른바 직접세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대신 병역의 의무가 부과되어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많고 적음에 따라 병역의 내용도 달라졌다.

그래서 로마 시민의 핵심세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제1등급에서 제3등급까지는 군단 입단 때 거의 예외 없이 중장비 보병으로 참가한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중장비 보병이라고 해도 그 시대에는 중세 유럽 정도의 장비는 아니었다. 머리에는 철이나 강철로 만든 투구를 썼지만 온몸을 가리는 갑옷은 입지 않았다. 그 대신 흉갑 이라 하여 상반신을 가리는 철제나 가죽제 가슴막이 를 걸쳤고, 같은 재료로 만든 정강이 보호대를 감았다.

이러한 방어용 기구와 함께 긴 지름이 1.5미터인 타원형 방패를 들었다. 그리고 무기는 검이나 창이었다. 검은 제2차 포에니전쟁 후기에 스키피오가 단검을 도입할 때까지는 가느다랗고 긴 검을 계속 채용해 그것으로 적을 베었다. 창의 길이는 3미터였다. 무게가 1킬로그램 이상인 창을 보통 두 개 준비한다. 창은 던지기도 하고 적을 찌르기도 했다.

이 같은 장비로 무장한 중장비 보병은 ‘백인대’ 라는 소대에 배속된다. 그리고 이 소대를 지휘하는 사람이 고대 로마를 무대로 한 영화에는 반드시 등장하는 백인대장이다.

로마군단에서는 이 백인대장이 ‘군단의 척추’ 역할을 했다. 현대의 군대라면 이 정도 등급은 겨우 대위 수준이고 군 전체로 보면 그저 하급 장교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고대 시민사회인 로마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중장비 보병은 로마 사회에서는 중류 이상인 시민이었으므로 그것을 통솔하는 백인대장의 지위도 자연히 높아졌다. 게다가 로마의 군제에서는 대대장 이상의 장성급은 시민회에서 선임했으나, 이 백인대장만은 중대 안에서 투표로 뽑았다. 따라서 백인대장은 백인대의 지휘관일 뿐만 아니라 ‘시민의 대표’ 라는 역할을 지지고 있었다.

또한 이 백인대장 가운데 상급 백인대장에게는 군단의 작전 회의에도 출석이 허용되었다. 그들 이외에 작전회의에 출석할 수 있는 사람은 군단의 지휘관인 군단장과 12인의 장성, 기병대장 한 사람, 그리고 여러 동맹국의 지휘관뿐이었다. 그러므로 백인대장과 그의 휘하에 있는 중장비 보병이 얼마나 존중 받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자기다움’을 빼 버린 개혁은 무의미하다

 

이러한 사정을 살펴 나가면, 로마가 한니발에게 계속 패배하면서도 쉽게 기병을 주 전력으로 하지 못한 이유가 명확해질 것이다.

만약 로마의 군단이 기병 중심으로 바뀌어 버리면 그 군단은 이미 로마의 군단이라고 할 수가 없다. 중장비 보병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은 로마 시민이 주권자인 로마의 공화정을 버리는 것이고, 로마인의 영혼을 버리는 것과 같다.

사실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 왕국이 기존 상식을 뒤엎고 기병 병력을 증강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제 국가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한니발이 기병에 힘을 쏟았던 것도 용병을 쓰고 있어 가능했다.

로마인들은 로마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리면서까지 한니발을 이기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국제화란 분명히 아름다운 단어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길을 잘 못 들어서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되고 단지 부평초로 끝나 버리는 결과에 이르기 쉽다. 로마인은 그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로마인들을 단순한 보수주의자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들은 ‘좋다’ 고 생각하면 그것이 적의 무기라도 서슴없이 채용할 만큼 유연성도 지니고 있었다.

예컨대 로마의 보병이 사용한 투창을 봐도 알 수 있다. 그것은 원래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싸운 삼니움 족이 사용하던 것이었다. 그 다음에는 스페인 원주민들이 사용하던 쌍날 단검도 실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로마군 은 정식으로 채용했다. 이처럼 로마군 은 자기 개혁에 관해서면 오히려 열심이었지만 기병 도입만은 그것이 급선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조직의 로마에 대한 자각

 

기병의 확보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밝혀진 이상, 어떻게 하면 한니발을 이길 수 있을까? 그래서 로마가 결단을 내린 것은 스스로가 가진 최대의 장점을 이용하겠다는 것이었다. 즉 조직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길을 선택했다.

로마는 한니발과 싸워 이길 만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씁쓸한 현실을 직시했다. 그런 다음 ‘한니발을 이길 수 없다면 지지 않으면 된다.’ 고 생각했다. 그래서 절대로 정면에서 맞붙는 전투는 피하고 철저히 지구전에 돌입하기로 한 것이다.

이 전략을 낸 사람은 칸나에의 전투 다음 해에 집정관으로 취임한 파비우스 막시무스 였다. 당시 60세였던 파비우스는 자신보다 30세나 젊은 한니발의 실력을 과소평가하지 않고 다음과 같은 전략을 제안한다.

‘한니발은 분명히 강하다. 하지만 그 한니발의 군대는 장군이라고 불릴 만한 사람은 한니발 외에는 한 사람도 없다. 그것이 그의 아킬레스건이다. 로마군 은 거기를 찔러야 한다.’

칸나에의 전투 이후 한니발은 남부 이탈리아 대부분의 지역을 지배했다.

‘그 젊은 지역을 한니발 혼자 지켜 낼 수가 없다. 그러다 보면 반드시 허술한 구멍이 어딘가에서 생기게 마련이다. 그런 지역에서 한니발이 부재일 때를 노려 카르타고 군을 치자. 그렇게 되면 아무리 한니발이 귀신 같은 강한 힘을 내세운다 해도 결국은 그가 이끄는 군 전체의 힘이 약해져 갈 것임에 틀림없다…’

이 파비우스의 전략을 채용한 원로원은 로마가 가진 힘을 모두 투입하기로 한다. 칸나에의 전투에서 큰 타격을 입은 로마군 을 재편성하고, 로마 역사상 최대 규모인 20개 군단을 투입한다.

로마의 군제에서는 보통 사령관 한 사람이 2개 군단을 통솔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20개 군단이라면 적어도 열 명의 사령관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한니발 정도의 명장은 없어도 열 명의 경험 있는 지휘관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 조직의 로마의 강점이었다.

 

 

한니발의 오판

 

이리하여 한 사람의 천재 한니발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로마는 갖고 있는 모든 조직력을 투입한다. 말하자면 목숨을 건 지구전으로 나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한니발에게도 오산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니발이 혼자 한정된 숫자의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반도에 쳐들어온 것은 그 나름대로의 승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불과 몇 만 명의 군세로서는 아무리 한니발이라고 해도 로마를 정복하기는 힘들었다. 그것을 한니발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한니발이 로마군 을 철저하게 눌러 힘의 차이를 과시할 수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철통 같은 결속을 자랑하는 ‘로마 연합’ 이라도 동맹 주체인 로마를 배반하고 한니발 진영에 들어오는 도시가 속출할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되면 이미 75만 명 대 2만 6,000명이 아니다. …. 이것이 한니발의 노림수였다.

그래서 한니발은 굳이 수도 로마에 군대를 끌고 들어가지 않고 로마의 여러 동맹국 영토 내에서 로마군 과 결전을 하기로 한 것이다. 눈앞에서 로마군 을 괴멸시키는 것만큼 동맹국의 동요를 유도하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트라시메노나 칸나에 에서의 대규모 작전은 정확히 그러한 전략에 따라서 감행된 전투였다.

그런데 한니발의 예상을 뒤엎고 로마 연합의 연대는 강고했다. 칸나에 에서 대승을 거둔 뒤 한니발의 편에 선 동맹국은 카푸아, 시라쿠사, 타란토 뿐이었다. 로마가 로마가 오랜 시간 공들여 완성한 ‘정치적 건축’ 은 역시 한니발의 심리 작전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이미 이탈리아 반도의 여러 동맹국들은 시민권 확대와 가도의 정비 등에 의해 ‘로마화’가 돼 있었으므로 로마와 자신들은 운명 공동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각지의 콜로니아(식민도시)는 연합 결속의 요지로서 기능하고 있었다.

굳건한 결속을 앞세운 것은 로마의 내부도 마찬가지였다.

국가적 위기에 직면하면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국론이 분열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가 진 것도 결국은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로마의 경우는 달랐다.

패하지는 않지만 선명한 승리를 거의 거둘 수 없는, 지구전 전략을 취하면서도 로마인의 단결은 시종일과 무너지지 않았다.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법 제정 이래 진행돼 온 귀족과 평민의 융화가 완벽하게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증거였다

 

 

지도자의 조건

 

로마 연합 내부의 도미노 식 붕괴를 노린 한니발의 전략은 예상이 어긋나고 실패로 끝난다. 하지만 한니발 군도 그 때문에 의기소침해지지는 않았다.

포에니전쟁의 역사 자료에는 한니발의 인품이나 사람됨을 알 수 있는 단서가 거의 없다. 사적인 일호조차도 전무할 정도이다. 그것은 부하들과 가깝게 지낼 기회가 거의 없었다는 증거이다. 그런데도 한니발의 부하들은 그를 우러르고 따랐다.

17년에 걸친 적지에서의 전쟁이다. 카르타고의 병사들은 하루라도 편하게 잠을 잘 수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부족한 식량 보급으로 제대로 먹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한니발에게서 도망치지 않았다.

더구나 한니발 밑에서 싸우던 사람들은 로마처럼 시민병이 아니라 아프리카, 스페인, 갈리아 출신의 용병들이었다. 로마군 의 지구전 작정으로 인해 보수마저 만족스레 받지 못했을 것이니 그들이 곧 바로 한니발을 떠나도 비난 받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떠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리비우스는 이 고고한 지도자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추위나 더위도 그는 묵묵히 참았다. 병사의 것과 똑같은 내용의 식사도 시간에 맞춰서가 아니고 공복을 느껴질 때만 먹었다. 잠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혼자서 처리해야 할 문제가 끊이지 않았으므로 휴식을 취하는 것보다도 그것을 처리하는 것이 항상 우선이었다. 그에게는 밤낮의 구분조차 없었다. 잠이나 휴식이 부드러운 침대와 평온함을 의미하지 않았다.

병사들에게는 나무가 그림자를 만들어 놓은 땅바닥에서 병사용 망토만 두르고 잠을 자는 한니발의 모습은 눈에 익은 풍경이었다. 병사들은 그 곁을 지날 때면 무기 소리만은 나지 않게 주의했다.”

한니발과 만난 적이 없는 우리는 추측할 수 밖에 없지만, 아마도 그에게는 부하들 스스로가 ‘우리가 없어서는 안 돼.’ 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뭔가’ 가 있지 않았을까?

부하 병사들에게 친밀하게 말을 거는 것도 아니고 격려해 주는 것도 아닌데, 부하들은 한니발을 한없이 경애했다. 한니발의 잠시뿐인 휴식을 무기가 내는 소리로 방해하지 않게 마음을 써 줄 정도였다.

동서고금에서 뛰어난 지도자로 알려진 사람들은 모두 이 ‘뭔가’ 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단지 통솔력만으로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이끄는 재능이 있고, 이와 함께 사람들에게 존경 받는 재능이 있어야 주위에서 그를 지도자로 인정한다. 한니발은 군사와 전술 면에서도 천재였지만, 확실히 진정한 지도자였다. 그래서 그가 이끈 병사들은 로마의 지구전 전략에도 버티어 나갔던 것이다.

 

 

스키피오의 등장

 

파비우스의 지구전 전략은 로마의 총력을 결집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칸나에의 전쟁에서 6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기원전 210년이 되어도 한니발을 궁지에 몰아넣지 못했다. 20개 군단이 넘는 로마군 은 한니발 부대의 포위망을 만들었다. 그 결과 행동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은 성공했지만 결정타를 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6년간은 로마에게 헛된 세월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로마는 그 해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라는 젊은 군단 사령관을 얻게 된 것이다.

나중에 ‘아프리카를 제압한 사람’ 이라는 의미의 아프리카누스라는 존칭으로 불리게 되는 스키피오는 당시 25세였다. 칸나에의 전투 때 19세의 소년이었던 그는 한니발의 싸우는 모습을 계속 관찰해 왔다. 그리고 로마가 왜 이길 수 없는지를 계속해서 파악했다. 그리고 그는 “한니발을 이기려면 한니발처럼 싸워야 한다.” 는 결론에 이른다.

연쇄살인사건 범인을 잡으려면 그런 종류의 범죄자 심리의 움직임을 따라가 보는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 그것과 아주 흡사하다. 어쩌면 그것이 성공의 열쇠인지도 모른다. 그렇긴 하지만 알렉산드로스의 제자라고 자인한 한니발도 설마 자신을 답습한 ‘제가’ 가 자신의 적인 로마인 속에서 나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설마’ 가 현실로 일어났다.

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등장으로 제2차 포에니 전쟁은 양상이 완전히 바뀐다.

그때까지 ‘천재 대 조직’ 의 전쟁으로 시종일관해 오던 것이 이제는 한니발 대 스키피오의 싸움이 되었다. 또한 싸움의 무대도 이탈리아 반도에서 카르타고 본국이 있는 북아프리카로 옮겨 갔다. 그리고 기원전 202년에 치러진 자마 의 싸움에서 한니발은 자신을 답습한 스키피오에게 패하고 만다.

이 일련의 이야기를 여기서 짧게 요약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기병 병력이 부족한 로마군 의 약점을 스키피오는 어떻게 극복했는지, 그리고 자마 전투에서 ‘스승과 제자의 대결’은 어땠는지에 흥미가 있다면 내가 쓴 <로마인 이야기> 제2권(한니발 전쟁)을 읽어 보라고 권할 수밖에 없다. 포에니전쟁에 한하지 않고 모든 역사 이야기는 상세함 속에 진정한 묘미가 있다. 불충분한 개요는 역사를 읽는 즐거움을 빼앗는다.

 

 

한니발의 ‘불길한 예언’

 

그렇다고 하더라도 젊은 스키피오의 등장이 로마에 커다란 과제를 안겨 주었다는 것만은 얘기해야겠다.

이미 말했듯이 처음 군단 사령관에 취임했을 때의 스키피오는 약관 25세였다. 평시의 원로원 체제에서는 지휘관은커녕 공직에도 임명되지 못하는 젊은 나이였다.

그런데도 그가 사령관에 오른 것은 장기간에 걸친 지구전으로 인해 역시 로마에도 지휘관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원로원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감이 있지만 내릴 수밖에 없는 결정이었다. 말하자면 그의 재능을 내다보고 발탁한 것은 아니었다. 원래 연공서열을 취지로 삼는 로마공화정에서는 ‘재능에 의한 발탁’ 같은 것을 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임기응변적으로 선택된 스키피오가 당치도 않게 한니발을 이기고 카르타고를 무너뜨려 버렸으니 이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스키피오의 활약에 의해 로마의 패권이 동쪽은 소아시아에서 서쪽은 지브롤터 해협까지 단번에 확대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승리는 굳건했던 로마 원로원 체제에 큰 균열을 가져온다.

한쪽은 스키피오 발탁으로 상징되는 능력주의를 요구하는 개혁파, 한쪽은 원로원 본래의 과두정의 견지를 확신하는 보수파의 등장이 그것이다.

개혁파가 포에니 전쟁의 승리는 스키피오의 발탁에 의해 이뤄졌다고 실적을 내세우면 보수파는 “그 스키피오의 승리도 총력 태세로 나갔던 한니발 포위망 전략이 성과를 올렸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일” 이었다고 주장했다. 어느 쪽이든 사실이다 보니 거리가 결코 좁혀지지 않았다. 이러한 대립이 실제적으로 나타난 것이 ‘스키피오의 재판’ 이었다.

 

구국의 영웅이라고 칭송할 만한 스키피오를 로마의 보수파는 못마땅하게 여기며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개인숭배만큼 로마공화정에서 위험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원래 공화정이란 ‘영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시스템’ 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제2차 포에니전쟁 후의 로마 정치는 제1인자라는 칭호가 주어진 스키피오의 주도로 이루어지게 되고 말았다. 이것은 로마에 있어서는 몹시 염려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보수파는 스키피오를 재판장에 끌어내어 ‘로마의 정치를 개인의 소유물처럼 여긴다’ 고 탄핵하기로 한다. 이에 대해 스키피오는 그 따위 시시한 일로 재판 받는 것은 떳떳하지 못하다며 스스로 정치적 은퇴의 길을 택한다. 그로부터 몇 년 지나 이 영웅은 별장에서 쓸쓸하게 죽는다.

이리하여 로마 정계는 일단은 보수파가 승리를 거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았다. 포에니전쟁이 기원전 146년 카르타고 멸망에 의해 완전히 종결된 뒤 로마의 개혁파와 보수파의 대립은 더욱 격렬해졌다.

리비우스의 <로마사>에 의하면 일찍이 한니발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무리 초강대국이라 할지라도 장기간에 걸쳐 계속 안정과 평안이 이어질 수는 없다. 국외에 적이 없다 해도 국내에 적이 생기게 된다. 밖의 적은 얼씬 못하게 하는 강건한 육체라 하더라도, 신체 내부에 질환이 있으면 육체의 성장을 따라갈 수 없다. 그것은 강건한 육체가 내장 질환으로 고통 받는 것과 흡사하다.”

이 ‘한니발의 예언’ 은 로마의 현실에서 소름 끼칠 만큼 적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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