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음은 하느님의 은총

요시야마 노보루 지음

김동섭 옮김

성바오로 출판사

 

 

“너희가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나는 너희를 업고 다녔다.

모태에서 떨어질 때부터 안고 다녔다.

너희는 늙어 가도 나는 한결같다.

너희가 비록 백발이 성성해도 나는 여전히 너희를 업고 다니리라.

너희를 업어 살려 내리라.”

(이사 46, 3-4)

 

 

머리말

 

얼마 전, 어떤 교양 강좌에서 ‘곱게 늙는다’는 주제로 이야기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왜 그런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 하고 좀 망설였습니다. 나는 내가 아직 젊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내 나이가 벌써 환갑에 다다랐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강의 준비를 위해 노년에 대하여 여러 모로 생각하던 중, 뜻밖에도 세상 사람들은 노년에 관하여 평가하는 일이 많지 않음에 놀랐습니다. 처음부터 새삼스럽게 ‘곱게 늙는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는 것은, 늙음이 추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기까지 했습니다.

여러 모로 생각하던 중에,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자칫 노인을 그 젊음의 정도를 기준으로 삼아 평가하려는 경향이 짙지 않은가? 만일 그렇다면 노년 고요의 가치를 일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몹시 기분이 언짢았습니다. 노년을 단순히 육체적인 생명의 쇠퇴기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을 단순히 일반 생물처럼 간주하는 것으로서, 본연의 생활 태도의 고유한 면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혀 부당한 사고방식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 신앙인의 입장에서는 노년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스도께서는, 33세의 젊은 나이로 돌아가셨으므로, 노인의 신앙 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 같은 것은 주시지 않으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상에서 잃으셨을 때 성모님의 연세는 50세에 가깝지 않았을까 생각하지만, 성모 마리아는 항상 소녀 마리아나 동정녀의 이미지로서만 하느님의 은총이 강조되어 있을 뿐입니다. 또한 신약 성서의 가장 오래 도니 문서인 성바오로 사도의 서간의 대부분이 성바오로의 50대에 씌어졌다는 사실도 충분히 고려되어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구약 성서가 노인을 소중히 여기고 있었음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성성한 백발이 지혜의 표징으로서 존대 받던 일로 미루어 구약시대의 노년은 결코 차별이나 보호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신약 성서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새로운 인간의 생활 태도로서 제시되고 있습니다. 노년은 부활의 신비에 기초를 둔 영성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평가되어도 좋지 않을까요? 죽음의 수용 방법과 노력이 오늘날처럼 과학적으로 문제가 된 때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늙음은 죽음의 전 단계로서 간과되는 수가 많습니다. 노년에 관한 고요한 가치를 찾아내어 좀더 깊이 있고 보람된 삶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교는 좀더 큰 공헌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난번 고령자를 대상으로 한 교양 강좌 때에, 출석한 사람 중에 꽤 많은 분들이 철학적인 사고 방식에 흥미를 보인 데 대해 무척 감동했습니다. 질의 응답 때에는, 자기의 깊은 생각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 난감해 하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도 그분들은 훨씬 더 실생활을 통하여 인생을 철학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제부터는 되도록이면 노인들과 함께 인생을 새롭게 생각해 보려고 하여, “노인을 위하여 상냥하게 말하라.”는 따위의 충고를 무시하고 이런 책자를 펴내 보았습니다.

종교적인 묵상이라든가 기도의 출발점에서는 노년의 생활을 통한 인생 철학이 어느 정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이 책은 노년의 영성을 계통적으로 서술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책은 앞으로의 노인들의 정신적인 생활 태도에 대한 문제 제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보편적인 이성에 기초를 둔 고찰로써 시작된 것이므로 감히 철학적이라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차례

 

제1부 늙음을 다시 본다
사고의 방향
‘숙년’보다는 차라리 ‘노년’
언제부터가 노년인가
늙음은 인간을 생각하게 한다
사회는 노인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늙음의 신비
노년은 마음을 터놓은 시기
노년-최고의 인격화
노년에 대한 동경
노인은 환자가 아니다
왜 노년은 여생인가
노년은 인생의 가을인가
늙은이와 늙은이 티
노약 老弱에 대하여
노인과 엄살
왜 노인의 부덕 不德에 좌절하는가
노년의 교양
젊은 날의 꿈이 사라질 때
죽음을 생각할 때
죽음이 두렵지 않을 때
노인과 미래의 희망

제2부 늙음은 은총
사고의 방향
늙음이란?
은총이란?
성모님과 은총
하느님 나라와 늙음
허무함의 밑바닥이 보이다
포기와 비약의 변증법
겸손에 대하여
삶에의 눈뜸
치매성 노인과 예수님
늙음이 지향하는 것
노인과 어린이
노년의 자유
노년의 죄
죄에 대한 회한
화해 和解와 은총
수모 당하는 노인과 그리스도
죽음
부활이란?
늙음은 부활의 은총
노년과 영성
특별한 빛으로 산다
무한하신 하느님 사랑에 눈뜨다

제3부 늙음을 어떻게 사는가
사고의 방향
노년의 건강 관리
질병도 살붙이
왜 젊은이와 비교하는가
인간이 산다는 것은
종말을 향하다
노인의 시중을 들면서
은밀한 교만 驕慢
늙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노쇠함과 함께 산다
죽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을 때
사후 死後를 생각한다면
지금이라는 시간을 소중히
하루의 노고는 하루로써 족하다
과거를 회고하는 방법
노인과 인생의 시련
언제까지 살면 좋은가?
왜 목숨을 부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거칠어지는 노년
노년 고독의 의미
고독에서 새로운 생활 태도로
노년과 직업
노년의 사랑
노년과 성 性
새로운 신체와 새로운 사랑

제4부 늙음과 기도
사고의 방향
인간이 무엇이기에 아니 잊으시나이까
당신의 날개 그늘 아래 나는 마냥 좋으니이다
내 기쁨, 내 즐거움이신 하느님께 나아가리이다
우리가 티끌임을 아시는 탓이로다
젊은이와 노인이 함께 즐거워하리라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네 청춘 독수리마냥 새로워지도다
내 허물을 깨끗이 없애 주소서
가엾던 이 몸을 살려 주셨도다
내 몸소 능욕을 당하여, 부끄러움에 낯을 들 수 없음을 오로지 님 때문이 아니오니까
한평생 주님을 찬양하리라
인간이란 하나의 숨결 같은 것
주님 품에 안겨 있는 어린이인 듯
희망 안에서의 죽음

맺음말

 

 

 

제1부

늙음을 다시 본다

 

사고의 방향

 

인간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견해만으로 인간사를 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숙년 熟年 이라든가 실년 實年이라고 하여 노년을 좋게 평가한다 하더라도, 성숙도라든가 실적을 기준으로 노년을 평가하게 되는 일이 많습니다.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합니다. 인간이 살아 있다는 것은 생각하면서 살아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공부나 일 따위를 생각한다는 뜻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노년이란 어떤 나이인가를 생각할 때, ‘생각하는 갈대’로서의 인간으로 평가 받는 것이 인간에 있어서 가장 어울리며 바람직한 일입니다. 현대의 기능주의적인 인간 해석을 노년에게까지 확대 적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노년을 새롭게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노년을 생물학적 인간관이나 기능주의적 인간관으로부터 벗어나서 있는 그대로 생각해 본다면, 다른 어떤 시절보다도 한층 더 인간 특유의 삶을 사는 시기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노약함이나 노쇠함을 느끼면서도 되도록이면 인간답게 살 것을 의식하며 살려고 애씁니다. 인생을 가장 신선한 감각으로서 시간적으로 보람있게 살고 있습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응당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의식하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노인들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큰 의문에 항상 노심초사하게 됩니다. 즉 우리들 개개인의 주체적인 자유의 의미가 문제가 됩니다. 이 자유는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생의 궁극적인 의미를 묻는 것입니다. 이 물음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면서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노년의 삶은 신비를 향하여 활짝 열려진 상태입니다. 인간 실존의 신비에 가장 깊숙이 관련되어 있는 것이 바로 노년입니다.

 

 

‘숙년’보다는 차라리 ‘노년’

 

노년이라는 말 대신에 숙년이라는 말을 듣고 노년이라는 말이 자못 초라하게 빛깔이 바랬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렇게까지 해 가면서 늙음을 기피하려는 심정의 쓸쓸함이 뚜렷이 드러난 것뿐이라고 반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실적인 문제로서, 나이를 먹어도 육체적인 쇠퇴를 실감하는 사람들이 적어졌으므로 예스러운 노인이라는 단어가 그리 들어맞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것보다도 현대인은 노인이라는 단어에 육체적인 쇠퇴라는 것 외에는 아무런 뜻도 찾아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일 것입니다.

실년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것은 인생의 결실의 때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편견이나 차별을 감추고 있는 노년이라는 말보다는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숙년이든 실년이든 간에 그 말들은 인간을 오로지 능력 위주로 보는 견해에서인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인간을 단순한 능력의 소유로가 아닌 인간 자신으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존재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늙는 것은 다른 생물 일반에 있어서의 노화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로서는 숙년이나 실년이란 말도 인간의 늙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고는 하지만, 인간의 늙음의 현실을 완전히 표현한 말이라고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숙년이나 실년과 다른 용어일지 몰라도 노년이라는 호칭을 그대로 상용하여 실존적, 종교적인 의미를 인간의 삶 안에서 찾아보고 싶을 것입니다. 인간의 늙음과 죽음만큼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노년에 대한 편견을 완전히 없애지 않는 한, 아무리 숙년이라든가 실년이라는 낱말들을 사용해 보아도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노년에 대한 편견, 노인에 대한 사회적인 차별을 냉정히 객관적으로 분석해 가는 가운데 둘도 없이 소중하고 풍성한 가치를 노년 안에서 찾아내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늙음과 죽음은 그 치욕과 무기력함의 현실을 통하여 영원한 가치에 사람을 눈뜨게 하는 것입니다. 노년을 숙년이나 실년이라 부른다 해도 노쇠와 죽음이라는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성숙이 노화와 함께 찾아온다는 현실은, 실로 불가사의한 현상입니다. 노성 老成 이라는 말이 있듯이 노화와 함께 인간의 완성이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완성 그 자체가 무엇인가 정신적인 것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노년을 숙년이라고 바꾸어 부르는 사이에 노년에 있어서의 인간의 신비가 구경 거리가 된다면, 얻는 것은 적을 것입니다.

어떻게든 노년의 신비에 접근할 수는 없을까요? 노년을 헛되이 신비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노년의 현실에 부딪치고 싶은 것입니다.

 

 

언제부터가 노년인가

 

60세를 넘어도 전혀 나이를 먹었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는 분들이 늘고 있습니다. 그와 더불어 마음이 언제나 젊은 것을 자랑하는 사람도 많은 듯합니다. 그것은 노년을 단순히 연령과 연관시켜서 생각하는 상식에 따르고 있을 뿐일 것입니다. 건강하기만 하다면, 젊은이들처럼 명랑하게 살 수도 있습니다. 또한 주저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나머지 인생을 깊이 사색하면서 살아가지 않는다면, 인생에 노년이라는 한 고비가 있다는 사실도 마음에 두지 않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노년의 가치가 상실되는 시대입니다.

육체적 건강의 쇠퇴는 노년의 중요한 징표이지만, 그와는 반대로 나타나는 마음의 깊이를 노년이라고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노년이라는 말이 너무나도 좋지 않은 의미로 쓰여지는 일이 많으므로 그 상식을 깨뜨리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노인’, ‘노인들’ 하고 부르면 어떻게든 회피하고 싶은 인간상을 돌아보게 됨으로, 노년을 의식하지 않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게 되는 것 같습니다.

노년을 의식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현실적인 인식이 그 계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살고 있지만, 그 죽음이 피할 수 없는 인생의 현실로서 실감될 때 인생 그 자체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인생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감회가 마음속 깊이 사무치게 될 것입니다. 노년은 이런 체험과 함께 시작되는 것입니다. 물론 중년에도 죽음의 현실을 단단히 체험하는 수도 있지만 그것으로 인생 그 자체를 다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노년의 본질은 인생 그 자체에 대한 깊은 의식에 있는 것 같습니다. 노약이나 죽음의 현실감은, 그러한 인생의 예지적인 것을 인식하는 관상을 불러일으키는 기회를 제공할 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육체적 건강의 축복을 받는다는 것은 좋은 일임에 틀림없지만 노년이라는 인생을 체험하지 못한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 노년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옛날처럼 인생을 깊이 사색하면서 살아가는 여유를 상실해 버린 결과가 아닐까요?

고령이 되어도 나이를 먹은 기분이 들지 않는다는 건강한 노인들을 생각하면, 노년에 대한 그릇된 사고 방식을 품게 하는 사회가 고령자마저도 지불유예 支拂猶豫 인간으로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들게 합니다. 문화적으로 생각해 보면, 노년을 풍요롭게 하는 문화가 현대의 세계에서는 차츰 자취를 감춰 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날의 종교가 노년에 대하여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실존을 깨닫지 못하게 된 노인에게 있어서 인생의 심오한 참 뜻을 찾아낼 수 없게 된다는 것은 불을 보듯 분명한 사실입니다. 종교가 죽음과 사후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이라면, 노인의 삶의 보람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노년이야말로 가장 진지하게 영원하신 하느님을 찾아서 현재를 충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시기입니다.

 

 

늙음은 인간을 생각하게 한다

 

노인에 관하여 씌어진 책들을 보면, 노인을 위로하는 내용이 압도적으로 많음에 놀라게 됩니다. 도대체 노인이란 친절히 돌보거나 위로해야 할 인간 계층이라는 사고 방식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그것은 노인의 주체성을 빼앗습니다. 사회는 좀더 노인이 자기 나름대로 노년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입니다.

늙음을 느끼기 시작하는 사람은 우선 삶과 죽음을 신중히 생각하게 됩니다. 자기 나름대로 자신의 인생을 가장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될 때가 왔다고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노년이 다가와도 막상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를 모르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비록 생각한다고는 해도 수학 문제를 풀 때처럼 인생을 깊이 파고들어 생각한다는 그런 생각은 아닙니다. 그 깊은 느낌의 방향을 어디로 이끌어가야 할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모르는 대로 주저앉으면 자연히 어둡고 울적한 기분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위로의 말보다는 함께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 본다든가, 사고 방식을 조언으로 인도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책을 읽는다든가, 강연을 들으러 갑니다. 그러면 자연히 종교적인 사색에도 관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죽음에 관한 인생 상담이 그저 죽음에 대한 불안을 없애기 위한 심리적, 철학적인 지도로 행해지는 모양이지만, 늙음에 대하여 생각하기 시작한 분들에게 좀더 적절한 조언 방법은 없을까요? 노인이 심리적으로 병들기 전에, 노년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이도록 돕는 일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의사나 심리학자 외에도 철학이나 종교를 연구하는 분들이 적극적으로 노년에 대하여 사색하기 시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인생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교에는 영성이라는 말이 있어서, 신자가 인생을 깊이 사색하기도 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하느님과의 만남을 두텁게 하는 길이 명시됩니다.

인간의 늙음에 관한 문제를 생각하는 데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적인 영성에 의한 지도 등은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분들에게도 크게 이바지하는 면이 있을 것입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는 분들도, 신앙을 이성적으로 고찰하면서 깊이 파고들기 위해서는, 늙음에 관한 문제를 생각해 보는 것이 의의가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쨌든, 현대 사회가 노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경우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노인의 주체성이라든가 그 인격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노년에 대한 보다 깊은 사고 방식이 더욱더 확대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인간 소회가 심한 현대 사회에서는 예전보다는 노년에 대한 통찰을 더욱 심도 있게 다루어 인간다운 노년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기초가 되어 참된 경로 사상이 온 세상에 확산될 것입니다.

 

 

사회는 노인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람은 나이가 들면 젊었을 때와는 달리 자기 자신과 인생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젊은이들까지 포함하여 사회 전체의 구성원들은 노인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에 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까닭은, 스스로 자신의 일을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사회가 자신들에게 대하여 고려해 주는 것을 그대로 쉽게 수용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노인들이 노년의 깊은 뜻을 사색하는 대신 사회가 과거부터 퍼뜨려 온 진부한 관념을 비판 없이 수용해 왔는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진실로 깊이 있고 알찬 노년을 자신의 것으로 하여 그리스도교적으로 영성까지 키워나가려고 힘쓰기 위해서는 자기 반성이 필요합니다. 그와 동시에 사회가 부당하게 억지로 떠맡기는 노인관, 노인의 역할 규정, 정치인들의 그릇된 노인 철학, 한마디로 말하면 제약된 사고 방식에 대한 올바른 비판이 내려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스스로 이해가 가는, 책임을 가지고 풍요롭게 삶을 영위한 노년은 영영 다가오지 않습니다.

사회는 반드시 노인들의 개성이나 주체성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노인들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개개인은 무시하고 사회 전체의 이익이라는 명분에 현실적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들을 추상적으로 고안해 냅니다. 그로 말미암아 개성이나 주체성을 무시한 생활 규범을 규정지어 내는 수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한 관념은 정치인이 이데올로기로 삼아 자신들의 권력 유지 기반을 든든히 다지기 위해 사용합니다.

예를 들면, 과거부터 흔히 전해져 내려오는 “늙으면 자식을 따르라”라는 따위의 노인 도덕은 진정으로 노인의 인격이나 주체성을 존중하여 생겨난 말은 아닙니다. 봉건적인 가정관의 이상을 기반으로 하여 노인에게, 특히 늙으신 어머니들에게 억지로 떠맡긴 생활 방식입니다. 한 집의 재산을 장자에게만 세습 보유하게 하여 부유 계층을 유지 발전시켜 나가려는 사조가 밑바닥에 깔려 있었을 것입니다.

현대의 노인 복지의 사상과 실태도 비판적으로 살펴본다면, 노인의 개성이나 주체성을 고려하기보다는 단순히 육체적인 의미로서의 건강, 가정 경제, 나아가서는 사회 경제의 견지에서만 노년의 이상적인 생활 방식을 고려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관념을 규정짓는 것은 소비 사회에 있어서의 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일 것입니다.

왜, 노년을 숙년 이라든가 실년이라고 부르게 한다든가, 또는 전혀 추상적인 호칭으로 고령자라고들 부르게 할까요? 확실히 노년이라는 호칭이 노인을 멸시하고, 사회적으로 차별대우하는 것을 제거하려는 인도적인 이상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 밖에도 노인을 사회의 한가운데서 보다 능률적인 일손으로 삼아 경제적으로 자립시키고, 또한 사회 그 자체의 경제 발전을 유지하려는 고령화 사회의 결제 정책이 그 기틀이 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인의 육체적 건강이 우선 제일일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심리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도 필요합니다. 인간은 더욱더 깊은 주체성이 있는 생활 방식을 고려할 틈도 없는 삶을 강요당합니다. 고령화 사회에는 노인이 예전처럼 경멸 당한다든가 무시되는 대신에 젊은이나 장년들보다도 인간 고유의 삶의 방식을 약탈당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현대인들은 노인들이 육체적으로도 건강하고, 심리적으로도 젊음을 되찾도록 하기 위해 애쓰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가장 폭 넓게, 의미 있게 살 수 있는 노년을 다만 경제 우선의 사회 생활 한가운데에 가두어, 노인의 삶을 옹색하게 규정하려는 오늘의 사회를 비판적으로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늙음의 신비

 

나이를 먹어도 늙음을 모른다는 것은 과연 좋은 일일까요? 요즘처럼 의학이 발달하고 생활 수준이 향상되면, 나이를 먹더라도 건강의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늙는 일 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으며, 그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늙음을 육체적인 노화 현상만이라고 생각한다면 노년이란 없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는 노화와 더불어 새로운 인생의 단계가 있어서 그 시기 이외에는 나타나지 않는 인간다운 삶이 시작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늙음을 모르는 사람이 과연 행복하다고는 단언할 수 없습니다.

노인의 병약함만을 모면하여 아프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이에 늙음을 보람 있게 사는 것에서 오는 인간다운 가치를 상실하는 사람들이 앞으로는 점점 더 늘어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젊은이 같은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어쩌면 인생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최근의 학문은 인생의 여러 단계를 인생의 주기라고 하여, 그 실태를 심리학이나 사회학에 근거하여 연구하고 있습니다. 과학은 그러한 실태를 잘 파악하고는 있지만 그 가치에 있어서는 분명한 해답을 얻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은 청년기에는 어떻게 사는가, 장년기에는 어떻게 사는가, 노년기에 이르면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을 소상히 객관적으로 해명하지만, 청년기보다는 노년기가 인간적으로 월등히 높은 가치의 혜택을 받고 있다고는 주장하지 않습니다.

과연 그것으로 족할까요? 학문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인생도 자연 현상과 같은 관점에서 연구하는 학문으로서는 노년기의 존귀한 가치를 도저히 찾아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노년기에 들어선 인간은 인생의 본질과 부딪치기도 하며, 인생을 초월하여 하느님이라든가 영원을 찾는다는 것은 과학으로서는 해명할 수 없는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처럼 과학적인 지식만이 정확한 지식이라고 인정하는 경향이 짙어질수록, 노년의 참 가치를 전혀 모르고 인생을 마치는 사람들이 앞으로 많이 생겨날 것입니다. 노년을 그저 육체적 노쇠로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 그 자체의 가치가 상실되어 간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노인 보호의 측면으로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 노년이라는 시기가 얼마나 풍요로운 시기인가를 되도록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노년은 결코 보호의 대상만이 아닙니다.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인생의 신비로서 죽음의 문제 이상으로 고쳐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노인학이라는 학문이 생긴 것은 좋은 일이지만, 노인은 노인학의 대상 이상의 것이라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노인의 신비 안에서야말로 인생의 신비가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노년은 과학이나 철학으로 그 가장 심오한 뜻을 밝혀낼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종교적인 인간학이야말로 노년의 가장 심오한 진리로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인간학을 기반으로 하여 노인의 가치를 되도록 깊이 알고, 어떻게 그 가치를 살릴 것인가를 사색해 가는 가운데 노년의 영성이라는 올바른 견해가 소중하게 됩니다.

 

 

노년은 마음을 터놓은 시기

 

우리들은 노년의 심신의 쇠약이라는 점만을 지나치게 중요시하는 나머지, 심신의 쇠약에도 불구하고 개개인이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노력 가운데 큰 가치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든가 과소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노년의 가치는 어떻게 평가해야 옳을까요?

젊은이나 한창 일할 나이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체력이나 활동력을 기준으로 삼아 노인을 무능력자처럼 취급합니다.  물론 노인들 중에는 심리적으로 퇴보한 것으로 짐작되는 상태를 보이는 사람도 있지만, 때로는 정신적인 갚은 판단을 우수하게 나타내는 수도 있습니다. 노인의 삶의 태도의 가치는 결코 젊은이나 한창 일할 나이의 사람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노인들 자신들은 노년의 가치의 소중함을 이해하고 있는가 하면 사실은 그렇지도 않아서, 많은 노인들은 노년을 부정적으로밖에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적어도 그러한 경향이 짙음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젊은이들에 의해 좋게 평가 받지 못하여 스스로 자신을 비하하는 수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은 축복받은 노인들은 노년의 가치를 올바로 평가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인간이란 누구를 막론하고 완전히 자기 자신의 인생을 평가할 수 없는 것이므로, 노년 그 자체에 대해서도 그 가치를 바르게 평가한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노년이란 나이는 대단히 높이 평가할 인생의 시기인데도 아무도 그 평가를 확정 지을 수는 없다고 봅니다. 노년이란 풍성한 결실의 나이, 인간의 성숙을 달성하는 나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확실한 것은 인간으로서는 그 평가를 결정짓는 따위의 일은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노년이란 마음을 터놓은 나이라고 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노년을 인생의 신비라고 일컫는 것도 그 가치가 무한히 열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이외에는 아무도 진실로 그 가치로 결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노년은 아무리 높이 평가한다 해도 셈을 다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만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노년을 과소 평가한다든가 경멸하는 우리들의 과오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노년이 하느님 앞과 영원한 생명 앞에 마음을 터놓은 나이라는 견해는 옳다고 생각하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노년 그 자체의 인간적 평가는 모두 현세적으로만 평가하지 않기 때문에 노년은 마음을 터놓은 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노년 – 최고의 인격화

 

인간은 인생의 모든 단계를 통하여 인격적인 존재로서 완성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뜻에서 노년에 이르면 온전히 개성적인 나 자신이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젊은 시절의 큰 고민은 자기 자신을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에게 눈을 돌리면 돌릴수록 자기 자신을 알 수 없게 됩니다. 그 때문에 젊음에는 자기 도취에의 경향을 피할 수 없습니다. 중년이 되면 자기 탐구보다는 자기 능력의 발견에 관심이 집중됩니다. 일에 열중하다 보니, 나와 나 자신을 반성할 여유조차 없습니다.

결국은 죽음이 현실 문제로 다가올 무렵부터 새삼스럽게 자신과 자신의 인생의 뜻을 탐구하고 싶어집니다. 그것은 젊었을 때오 같은 어떤 이상을 찾아서가 아니라, 다가오는 인생의 종말의 시점에서 자신은 어떠한 인간이었던가를 객관적으로 반성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유전이라든가 환경과 같은 요소를 고려하고 나서, 젊었을 때와는 다른 객관적인 나 자신을 찾아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죽음을 목전에 두었을 때 자신과 그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죽음은 모든 이에게 닥쳐오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온전히 홀로 자기의 몫으로서 맞이하는 것입니다. 결코 그것으로부터 도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사람은 가장 개성적이 되고 참다운 자기 자신이 됩니다.

죽음을 느끼고 죽음을 묵상하는 일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젊었을 때의 이상으로서의 자기 추구도 아니고, 중년 때와 같은 능력이나 책임을 주체로 한 자기도 아닌 참다운 자기 자신에 눈떠 가게 됩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어떤 누군가와의 만남을 느끼기 시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죽음이 완벽한 고독으로서 두려워지는 것은 이 절대자 앞에 나서야 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노인의 고립은 정신적으로 위험합니다. 그러나 남에게 마음을 모두 터놓고도 외면할 수 없는 고독함에는 같은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참다운 결정적인 만남을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합니다. 고립이 노인을 고루하게 만드는 것에 반하여, 고독을 견디어 냈을 때 진정한 인격화가 실현되는 것이 아닐까요?

다만 이 노년에 있어서의 인격화는 심리학으로서 그 진수를 포착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 편에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과의 만남, 그리고 결정적인 친교에 걸맞은 인간이 되도록 인격화시켜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바오로 사도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심으로써 실현되고 있는 새로운 인격을 일컫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갈라 2, 20)

 

 

노년에 대한 동경

 

내가 20세가 되었을 무렵, 지금의 젊은이들과는 달리 나이가 든 분들에게 대한 존경심과 동경심에 사로잡히는 일이 많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젊은 선생이나 젊은 종교인에 대해서는 자칫 불신을 품기 쉽습니다. 요즈음의 젊은이들은 선생님보다는 선배에 대해서 더 큰 존경과 신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젊은이들이 빨리 나이를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지불유예 인간’이라는 말이 있듯이 젊은이들은 되도록이면 젊은 채로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나이가 든 사람들의 인간적 매력이 거의 없어져 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한 일본에서는 패전 후 상당 기간 동안 노인들은 존경 받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노인 중에는 전쟁 책임을 문책당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늙은이도 젊은이도 전쟁 후의 경제 부흥에 온갖 노력을 바쳐, 물질주의나 능력주의의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오늘까지 이어져 내려옴으로 노인에 대한 견해는 거의 기울어져 있는 것입니다. 노인에 대한 복지라고 하면 기껏해야 육체적 노약함이나 지탱해 주고 심리적인 갈등을 해소하며 치매증 癡呆症 을 예방한다든가 하는 등의 소극적인 원조에 머물고 있어서, 노인 고유의 정신적 가치를 발전시키는 일은 게을리하기 일쑤입니다.

그런데 나는 패전 후 몇 해 지나서 한 외국인 노인과 우연히 서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노인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젊은이에게 말을 걸어 왔습니다. 젊은이에게 아첨하는 것도 아니고 동정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나는 젊음에는 국경도 없고, 또한 시간도 초월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1년 가까운 친교를 통하여, 나 자신도 그분같이 가톨릭 사제가 되어 일생을 하느님께 바칠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젊은 노인들은 얼마든지 있지만, 그분의 경우 그 젊음이 영원을 느끼게 하는 것이며 초자연적 세계를 느끼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지나 미숙함이 젊음을 느끼게 하는 수도 있지만, 그분의 경우는 깊은 교양과 수도자로서의 오랜 수련의 극치에 도달한 영혼의 젊음이 육체적인 노쇠를 통하여 드러난 것입니다.

내가 그분과 만났을 무렵의 그분 나이에 가까워진 지금, 그러한 젊음을 토대로 하여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를 바라면서 노인들 세계에서만 찾을 수 있는 이 영원한 젊음을 동경하면서 이 <늙음은 하느님의 은총>이란 저서를 내기로 마음먹었다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이 이상한 노인, 프랑스계 系 캐나다인 선교사 레데프돌 수도 신부 루이 필립 레벡크 신부님께 바치고자 합니다. 또한 이러한 노인은 가톨릭 신부들 중에서는 별로 드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 드립니다. 가톨릭이라는 대단히 오래 된 교회 안에는 전통적으로 ‘늙음은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노인은 환자가 아니다

 

노인이 쇠약해진다고 해서 환자처럼 대우하는 것은 부당한 일입니다. 체력이 쇠약해지므로 질병에 걸리기 쉽다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질병으로 말미암아 노쇠함이 심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건강한 노인이 결코 적지는 않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점점 더 건강한 고령자가 많아지는 추세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앓고 있는 노인들의 일에 대해서만 주목하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앓는 환자의 일을 염려하는 나머지 노년 그 자체의 가치를 간과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불교에서는 인생이 겪어야 할 고통이 생로병사 生老病死 라고 합니다.  이런 사고 방식으로는 늙음이 곧 질병이라고 간주하기 쉽습니다. 늙음을 좀더 적극적으로 평가하게 된다면 앓는 노인이 단순히 동정만을 바라는 대상으로 취급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노인의 질병 중에서도 뇌의 질환에 관해서는 신체뿐 아니라 정신까지도 활동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여, 노인을 전혀 가치 없는 인간으로 간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특히 현대인은 인간의 정신과 뇌의 기능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데도, 인간의 정신적인 활동을 모두 뇌의 기능에 환원시켜 버림으로써 그렇게 가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뇌의 기능이 인간의 정신을 창출해 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은 뇌의 활동을 통하여 뇌의 활동이 완전해질수록 자유롭게 그 활동을 발전시킬 수가 있습니다. 인간의 신체와 정신은 깊이 연관되어 있지만, 이 둘은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정신 기능은 뇌의 기능으로 설명하지만, 뇌의 기능만으로는 인간 정신의 기원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뇌라는 인간 정신의 기능을 전달하는 도구가 파괴되어 버리면, 그 기능이 드러나지 못하게 된 정신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줄 것입니다. 따라서 노인에게 있어서 뇌의 질환은 불행한 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노인들이 걸리기 쉬운 질병 중에서 뇌질환의 연구와 치료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일이며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뇌의 기능과 인간 정신 그 자체의 존재론적 상이 相異를 이성적으로 인정함으로써, 뇌질환에 걸린 노인의 정신 그 자체에 대해서는 존경을 표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인권 문제이기도 합니다. 현대 의학이 뇌사를 가지고 인간의 죽음을 단정할 때, 중한 뇌질환을 앓고 있는 노인에 대해서도 인간으로서의 생명을 부정하게 될 두려움도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이따금씩 병에 걸린 것처럼 노인들도 병에 걸립니다. 노인 문제를 생각할 때에 질병의 측면으로서만 보는 경향이 있다면 노인에 대한 왜곡된 견해가 됩니다. 노인 고유의 질병이 있더라도 노인을 잠재적인 환자로 보는 견해로서는, 객관적으로 노인의 삶의 문제는 포착되어 있지 않습니다.

 

 

왜 노년은 여생인가?

 

노년을 여생 餘生이라고 보는 사고 방식이 예전과는 다르다고 하더라도 아직은 일반적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정년 퇴직 후의 인생을 여생이라고 했지만, 최근에는 완전히 일할 수 없게 된 노후의 생을 여생이라고 부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정년 퇴직 후를 제2의 인생이라고들 합니다.

여생이란, 노년을 인생 중에서는 이제 쓸모 없는 부분으로 간주하여 경시하는 사고 방식이 아닐까요? 제2의 인생이란 말도 제1의 인생보다 뛰어나다는 뜻이 아니라고 한다면, 여생이란 말과 같이 노년을 경시하는 것일 겁니다. 여생이란 어차피 여분의 인생이므로 특별한 뜻이 있을 리는 없습니다.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일지도 모릅니다.

노년을 여생이라고 보는 견해에는, 노년에 도달하기에 앞서 일단은 인생의 소중한 사업은 모두 끝마쳤다는 판단이 있겠지요. 그것은 인생에 있어 사회적인 활동을 중시하는 견해입니다. 살아 있다는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는 견해는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만일 사업에서 인간다운 삶으로 중심을 옮겨 인생을 생각해 보면, 노년을 단순히 여생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사업을 중심으로 한 인생관 대신에 인간다운 삶을 중시하는 인생관을 받아들인다면, 노년은 막판이 아닌 인생의 새로운 시련기 試鍊期라고 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심신의 쇠약 상태에서야말로 인간답고 풍요롭게 살아가는 연구와 노력,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쓰일 것입니다. 더구나 노년에 있어서는 병환을 비롯하여 정신적인 시련도 심하기 때문에 꿋꿋하게 살아 남기 위해서는 정신력이 필요합니다.

노후를 여생으로 그저 즐겁게 지내려는 생각만으로는 노후를 가치 있는 인생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노후가 얼마나 편안할 수 있을까요? 노년을 가장 현실적으로 가치 있는 인생으로 보내기 위해서는 안이한 노년 여생관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굳어져 버린 사회 일반의 고정된 노인관을 바꾸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노년에 대한 경시 풍조에 저항할 뿐 아니라, 사회 속에 노인의 올바른 위치를 확립시키지 않으면 안됩니다. 고령화 사회가 풍요로운 인간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노인관을 버리고 새로운 노인관을 창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노년은 인생의 가을인가?

 

노년은 흔히 인생의 가을에 비유합니다. 결실의 가을이라는 뜻일까요? 가을은 확실히 수확의 계절이므로 노년이 오랜 인생의 결실을 가져오는 계절이라는 뜻에서는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가을철 수확이 끝나면 다음에 기다리고 있는 계절은 겨울입니다. 겨울은 사계절 중에서는 죽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계에 있어서는 겨울의 죽음도 봄의 생명을 준비하는 계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봄 소식과 함께 다시 네 계절로 변천하며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년을 가을에 비유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노년에 죽음이 뒤따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인간의 죽음은 젊은이나 중년층에서도 나타납니다. 인간의 죽음은 사계절 중의 겨울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틀림없이 노년에 닥쳐오기는 하지만 한창 나이인 봄에도 닥쳐오므로 가을 다음이라고는 단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죽음과 노년은 따로 떼어서 생각해야 하며 노년 고유의 인생을 찾아내야 합니다.

인간의 죽음은 사계절 중의 가을에 이어지는 겨울처럼 비유하지만 사계절에 있어서 겨울은, 또한 봄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진정한 종말이 아니라 생명의 리듬의 한 단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개개인의 인간에게 있어서는 죽음 뒤에 일어나는 일은 전혀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사후의 생명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초자연적 차원일 것입니다. 사후에 다시 생전과 같은 차원으로서의 삶이 이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죽음은 노년에 이어진다고 하더라도 죽음이 인간을 그때까지의 존재를 초월한 차원으로 이끄는 것이므로, 가을과 겨울처럼 연속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노년은 죽음으로 인하여 인간이 초자연적인 차원의 존재로 바뀔 수 있도록 인생을 정리할 시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노년은 전혀 독특한 인생의 단계입니다.

그러므로 노년의 삶을 겨울을 준비하는 가을의 자연처럼 오직 시드는 데 맡겨 둘 것이 아니라, 시들고 마르면서도 다시 되풀이 되는 일이 없는 전해 새로운 생명을 살 수 있도록 준비하면서 살아간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을 것입니다. 과연 그것을 단순히 가을이라고 단언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에 있어서 노년은 사계절의 한 단계에 지나지 않는 가을에 비유할 수는 없습니다.

애당초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이 되풀이될 수 없는 각자 전혀 다른 고유한 인생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자연계의 비개성적이고 규칙적인 현상에다 이를 비유한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우리들은 인생을 좀더 실존적으로 고찰해야 합니다. 인생이란 자연계에 있어서의 계절과 같이 순화하는 규칙적인 수레바퀴와 같은 시간적인 개념은 아닙니다. 그것을 어느 한 시점에서 깨뜨리고 초자연적인 차원에서 이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어느 한 시점이란 보통 노년의 어느 한 시점이므로 노년이란 인생 중에서 가장 소중한 시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늙은이와 늙은이 티

 

인간임과 인간 냄새를 풍긴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또한 남성임과 여성임 외에 남성답다든가 여성답다는 표현 방법도 있습니다. 남성답다는 것은 단순히 남성 이상으로, 굳이 남성인 것을 과시한다든가 고집하는 경우에 그렇게 불리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성임 그 자체만도 멋진 것인데 굳이 여성답다고 하는 것은, 여성임에 지나치게 구애 받는다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늙은이와 늙은이 티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늙어 가는 그 자체에는 인간의 순수한 자연 현상이라고 생각하지만 늙은이 티라는 것은 늙음에 지나치게 구애를 받아서 추해지고 빈축을 사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노인들 중에는 늙은이 티가 나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나이가 들면 어쩐지 늙은이 냄새를 풍길 가능성이 많음으로, 늙음이 좋게 평가 받기보다는 오히려 소외 당하게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늙은이와 늙은이 티를 동일시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늙은이 티란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나이가 들기 전부터 지니고 있던 본인의 부도덕한 마음씨가 나타난 것에 불과합니다.

늙음은 하느님의 은총이지만 늙은이 티에 빠지는 것은 우리들의 악덕입니다. 늙은이 티는 어떤 악덕에서 생겨날까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우선 늙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온다고 생각합니다. 젊음에의 집착 때문에 노년을 한탄하고 소극적인 삶에 머물러 늙음을 극복하려고 하지 않는 데서 비롯됩니다. 다음에는 늙음을 핑계 삼아 자기의 태만함이나 결점을 정당화하려고 엄살부리는 사람들은 늙은이 티가 나서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게 됩니다.

 인간 냄새를 풍기는 것은 인간임의 한계에 지나치게 제약을 받아서, 인간 이상의 것에 마음을 터놓으려는 이상을 상실할 때의 악덕입니다. 인간은 인간으로서 한정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어떠한 방법으로 뛰어넘으려고 할 때 인간임이 소중하게 보입니다.

남성임과 여성임도 단순히 남자다움 여자다움에 머물러 있다면, 굳이 남자 티 여자 티를 강조하는 못된 버릇을 나타내게 됩니다. 남성인 것과 여성인 것을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남녀가 서로 아집을 버리고 친교를 두텁게 하려고 노력할 때 그 멋진 진가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늙음은 어떠한가요? 늙은이 티를 내지 않기 위해서는 늙음이 어떠한 의미로서 극복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늙음은 그것을 통하여 영원한 그 무엇으로 지향할 때, 인간은 가장 멋진 생명의 발로로 나타날 것입니다. 늙음이 다만 죽음의 전 단계로서만 받아들여진다면 어떻게든 도피하고 싶은 인생의 단계입니다. 그 몸부림 가운데 늙은이 티에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늙음과 늙은이 티는 구별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약 老弱에 대하여

 

늙은이라는 말이 붙여지게 되면 흔히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평가가 따르게 됩니다. 예컨대 병약함과 노약함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병약함이란 병이 치유되어 회복되면 없어질 가능성이 있지만, 노약함은 제거될 수 없는 쇠약함입니다.

노인의 쇠약함은 노인의 입장에서 올바르게 평가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노인의 약함이야말로 오히려 노인의 강점이 되어 그 사람을 살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병약한 상황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노약함은 질병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육체가 쇠퇴함으로써 오는 것이지만, 쇠약함은 일시에 밀어닥치는 것이 아니고 서서히 시작됩니다. 노인은 그것을 직감으로 느끼며 그것에 대응할 줄 압니다. 그것은 주로 정신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쇠약함을 자신의 것으로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노약함은 정신까지도 약화시킬까요? 정신은 결코 단순한 능력이 아닙니다. 여러 능력이 일치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것에서부터 아주 낮은 것이 있습니다. 따라서 체력이 쇠약해져도 정신 전체가 쇠약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육체적인 약함 아래에서 정신의 어떤 면은 오히려 굳건해지고 분명하게 사물을 이해하는 수도 있습니다. 노인의 약함을 육체적인 쇠약함의 현상으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성바오로 사도에 의하면,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의 약함 속에서 활동하신다는 것입니다. 만년 晩年의 바오로 사도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강력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게 머무르도록 하려고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나의 약점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2 고린 12, 9)

그렇게 되면 노약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까 하는 것도 조금은 알게 됩니다. 육체적인 면도 있지만, 주로 정신적인 면에서 노약함을 보충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노년의 육체적인 약함은 노년의 지혜에 의하여 창조적인 삶을 가져올 가능성으로 바뀐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노년의 인간적 아름다움은 육체적인 약함을 매개체로 하여 나타나는 것입니다. 노약함이 없이는 노년의 인격적 완성은 이루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젊은이의 신체처럼 강건한 육체를 혜택 받은 노인에게는 아직 노년 고유의 은총은 나타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만 노년에 걸리기 쉬운 질환이 가져오는 체력의 쇠퇴와 노약함을 구별하여 고찰해야 합니다. 병은 젊은이나 늙은이나 누구나 걸릴 수 있습니다. 노약함이 병에 대한 저항력을 잃게 하는 수도 있지만 병은 체력의 약함만이 원인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노약함에 있어서, 육체적으로서만 노년을 볼 때는 소극적인 의미밖에 인정되지 않겠지만, 노년을 일반적 생물과는 다른 인간의 삶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볼 때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노인과 엄살

 

자신이 노인이라는 핑계로 기회 있을 때마다 대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을 엄살꾸러기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노인이라는 구실로 괴로운 일이나 어려운 일에서 몸을 사리려는 경우, 노년의 불리한 점만을 하나 하나 열거하여 노년을 과소 평가하게 됩니다. 그러면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노년을 그릇되게 인식하게 할 뿐입니다.

노년에게 어려움이란 으레 따르게 마련입니다. 우리들은 어느 연대를 막론하고 어려움을 이겨내기에는 퍽 어려운 약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은 나이가 많으니까 하고 노년을 핑계 삼는 데 에 문제가 있습니다. 마치 노년을 무능한 연대라고 일반화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체력은 쇠퇴했더라도 지혜는 뛰어나며, 기억력은 감퇴되었더라도 균형이 잡힌 훌륭한 판단력이 풍부합니다. 이러한 노년의 유리한 점을 숨기고 불리한 점만을 내세운다면 노년의 장점을 놓쳐 버리게 됩니다. 그것이 노년의 엄살이 가져오는 객관적 악일는지도 모릅니다.

응석부리는 어린이에게 부모가 지는 것처럼, 지혜를 악용하여 엄살을 부리는 노인이 늘어나면 노인을 무능시하는 사회의 편견은 고정되어 갈 뿐입니다. 노인에 대한 부당한 편견이 일반화될수록 노년의 장점을 살릴 방법은 사라져 버립니다. 오늘날 노년을 아무리 객관적으로 좋게 평하게도 신용을 얻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고정되어 버린 노인에 대한 편견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수모를 받으며 괴로워하는지 모릅니다.

인생의 어느 시기에 있어서도 그 장점과 단점은 공존하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의 장점을 뒤집은 것이 바로 그 단점입니다. 중년들에게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노년만이 장점보다도 단점을 더 강조한다면 전혀 부당한 일입니다. 더구나 그 실수를 노인이 고의로 범했다면 스스로 자기의 목을 조르는 것이 됩니다.

노년을 핑계 대는 시기로 만들지 말고 정직한 고백의 시기로 만들고 싶은 것입니다. 약함을 약하다고 솔직하게 털어놓고, 은총은 은총으로서 겸허하게 감사해야 합니다. 은총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장점을 지나치게 뽐내는 과오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노인의 엄살에는 여러 가지 뒤틀린 심리가 감추어져 있을지도 모르지만, 노년의 객관적인 진리에 눈뜨는 일이 심리적인 문제 해결에도 크게 도움이 됩니다.

 

 

왜 노인의 부덕 不德에 좌절하는가

 

노인의 시중을 들어 주는  사람들은 노인의 완고함과 참을성 없음, 심술궂음, 비겁함, 교활함 같은 것들에 대해 흔히 비난을 터뜨립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로잡아 보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노인을 무시하기도 하고 남몰래 보복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자신의 태도를 깨닫고는 자기 혐오에 깊이 빠져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들은 노년이 은총의 나이라는 것을 지나치게 믿고 있기 때문이지는 몰라도 노인에 대하여 예외 없이 높은 덕망을 바라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의 연약함 가운데에서 가장 깊이 있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므로 노년은 완성을 향한 승부의 시기이기도 합니다. 철없이 지나온 젊었을 때의 악덕에 대하여 결정적인 문제 제시를 하지 않으면 안될 시기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이 노인에게 높은 덕망을 지나치게 요구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진정한 덕망의 뛰어난 행실은 우리들의 생애를 건 노력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친히 갚아 주시는 것이므로 언제 그것이 실현되는가 하는 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 앞에서는 부덕한 채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오직 하느님의 은총만을 믿지 않으면 안됩니다.

노인도 죄를 범하는 일이 있으며, 노인도 덕을 닦기 위해 고민하는 일이 있음을 왜 인정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노인에 대한 부당한 차별 대우 가운데서도 가장 심한 것입니다. 노년이야말로 자신과의 깊은 싸움을 통하여 하느님과 이웃에 대하여 화해할 수 있도록 힘쓸 필요가 있는 나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노인의 악덕에 대해서도 다른 연령층 이상으로 준엄하게 비판당해서는 안됩니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의 죄에 대하여 상처를 받고 괴로워하는 일이 많을 것입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겸허하게 되기를 바라면서도 실망하거나 거짓으로 끝나 버리는 수도 있습니다.

노인의 심중에 있는 끊임없는 투쟁에 대하여 이것을 밖에서 이해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흔히 “내 나이가 되면 알 것이다.” 라는 말은 맞는 말입니다. 나이와 더불어 노인의 내적인 투쟁은 개별적인 것이 되므로 깊은 동정이나 공감하는 이들은 적어지고 가장 냉엄하고 고독한 자신과의 싸움을 혼자서 계속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그것은 겉으로는 덕망이 있고 없음을 판단 지을 수 없는, 하느님 면전에서의 자기 완성에의 노력일 것입니다.

청년이나 장년들이 품고 있는 노년의 인격적 성숙에의 바람은 그들 입장에서 본 이상이나 신화에 불과한 것으로서 실제로 자기 완성을 위하여 노력하는 노인들에 대하여 어떤 이상을 강요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현실이 이상과 다르다 해도 현실에서야말로 우리들의 추측을 초월한 노년의 은총이 풍부하고 은밀하게 활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년의 교양

 

’50세의 학습’이라는 말이 예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것을 보면 노년은 교양을 깊이 쌓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노년에는 어떤 교양을 쌓을 것인가 하는 것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 흔히 머리가 둔해지지 않기 위해서 새로운 외국어를 공부한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진정한 인격 형성을 지향하는 교양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지금까지는 사업에 쫓기다 보니 좋아하는 공부를 못했기 때문에 좋아하는 문학을 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노년에 있어서의 공부가 이러한 건강상의 이유나 취미를 살린다는 취향 등으로 행해진다면 철저한 교양을 쌓는 일은 되지 못합니다. 일시적인 변덕일 수도 있고 소극적인 태도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노년에 절대로 필요한 어떠한 정신적인 훈련에 힘을 기울이는 공부가 있지 않을까요? 노년에 있어 진정한 교양은 그러한 활동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교양은 오락과는 다릅니다. 놀이도 노년에 있어서 중요한 교양 과목으로 자리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교양이 지향하는 인격 형성이라는 관점에서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년의 인격 형성의 이상이 분명히 제시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흔히 지방 자치 단체의 후원으로 열리는 노인 대학 같은 교양 강좌는 과연 노인의 인격 형성 등도 고려하고 있는 것일까요?

노인의 인격 형성이라는 말은 별로 듣지 못합니다. 명색이 노인이라면 일단은 인격이 형성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까닭에 지금까지의 사회 생활이나 어려운 인생을 꿋꿋이 살아 왔는데 이제 또 새삼스럽게 무슨 인격 형성이 필요한가 하고 이상스럽게 생각할 것입니다.

노인의 교양으로서 우리에게 우선 떠오르는 것은 노년을 잘 받아들이고 노후의 몸가짐을 잘 하는 정도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 사회라든가 인간 사회가 이해하는 인간의 숙명에 잘 적응하면서 살아가도록 인격을 형성해 가기만 하면 족하다고 단언할 수가 있을까요? 인간의 주체적인 자유는, 그러한 일반 사회가 결정하는 인격관 같은 것에 사로 잡히는 것에 만족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은 인간을 초월한 인격적 존재자와의 만남과 친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기에 인간적 교양을 초월한 하느님의 이끄심에 의한 초자연적인 인격 형성도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들을 성서에서 배우고 자신을 결정적으로 하느님께 향한 인간으로서 새로이 다시 태어날 결단을 내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성서에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하시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셨다.” 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노년에 있어서의 마지막 인격 형성은 바로 이 하느님의 모상에로의 자기 동일화를 지향하여 행해져야 하리라고 봅니다. 그것은 반드시 노인들만의 인격 형성의 이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적인 교육에 일관된 이념이기도 합니다. 노년에 있어서의 교양은 이 그리스도교적인 인격 형성을 본격적으로 완성하기 위하여 그 본질을 망각하지 말고 더욱 널리 펴나가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철학이나 종교는 소중한 교양 과목으로서 탐구해야 합니다. 철학이나 종교라면 그 용어의 난해함이나 논리의 정확성 때문에 경원시하는 경우가 많을지도 모르지만, 노년기야말로 인간은 진실로 철학 하는 것이 삶의 태도이기도 하며, 종교가 삶의 희망이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런 견지에서 본다면, 현대인은 참 노년을 사는 대신에 노화 현상에만 대응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젊은 날의 꿈이 사라질 때

 

젊은 시절에는 앞날에 대한 무엇인가의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활동에 있어서도 생활에 있어서도 꿈을 가질 수 있으므로 지금 당장의 불만을 잘 견디어 냅니다. 인생에도 세상에도 무엇인가의 꿈이 숨겨져 있을 것 같아서 살아갈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내 나라 안에서 꿈이 발견되지 않으면 다른 나라에는 아직 꿈이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이제 꿈이 샘솟아 날 여지가 없을 정도로 현실의 준엄함과 허무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을 체력과 행동력의 감퇴로 돌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체력의 감퇴가 모든 원인은 아닙니다. 인간으로서 성장함에 따라 상실하는 것은 무지함과 비현실적인 공상에 바탕을 둔 허무한 꿈입니다. 그것은 체력의 감퇴라기보다는 지혜가 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꿈은 무지함과 공상의 산물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노년에 이르러서도 현실적인 감각과 함께 꿈이 완전히 상실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꿈이 없는 인생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자살의 궁지에 몰리는 사람은 연령에 관계 없이 상상력이나 꿈을 완전히 잃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노년이란 독특한 꿈을 꾸는 나이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말하듯이 그것은 단순히 ‘풍족한 노후의 생활’을 꿈꾸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의 ‘풍족한 노후’는 현실적으로 모든 점에서 풍족하며 할수록 싫증이 나기 쉬운 것입니다. 지나치게 행복한 나머지 오직 다음은 죽음을 기다릴 뿐이라는 그런 노후는 삶의 의욕을 잃게 합니다.

노년에 접어들어 건강이나 생활의 풍부함보다 더 좋은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가기 위해서는 역시 꿈이 필요합니다. 물론 젊은이들 같은 꿈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손자들의 성장이나 사후 재산 분배에 대한 자손들의 감사함을 꿈꾸는 것뿐일까요?

노년의 꿈은 가장 개성적인 것이어서 일반화될 수는 없지만 초자연에의 꿈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내세라든가 하느님과의 만남에 꿈을 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현세에 있어서의 모든 꿈을 넘어서 맺어지는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꿈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희망입니다. 그 꿈의 내용은 각자의 그때까지의 인생을 반영하는 것이겠지만 그것까지도 뛰어넘으려는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의 신비는 이러한 노년의 꿈에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 경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진정한 하느님과의 만남도 있을 수 있습니다.

 

 

죽음을 생각할 때

 

늙음을 느끼기 시작하면 죽음을 생각하는 일이 많아집니다. 나이와 더불어 자연히 그렇게 되는 모양입니다. 물론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노인에 한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중요한 특징일지도 모릅니다.

나이가 들어서 죽음과 함께 인생을 돌이켜 보면, 죽음에 대한 사고 방식이 나이와 더불어 변천해 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젊었을 무렵 죽음의 불안에 휩싸일 경우에는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중년에 와서는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60세를 넘어서 죽음을 생각할 때에는 죽음을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여 구체적인 준비 같은 것을 생각합니다. 재산 처분이라든가, 묘지의 구입이라든가, 되도록이면 남한테 폐를 끼지 않고 죽고 싶다는 등의 생각을 혼자서 골똘히 하기도 하고 남에게 알리기도 합니다.

죽음을 그저 인생의 종말이라는 생각만이 아니라, 사후의 세계에 대해서도 이런 저런 상상을 하는 수도 있을 것입니다. 천국이라든가 지옥과 같은 여러 가지 종교의 가르침을 상기하면서 상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체념을 하고 죽을 때까지의 남은 인생이나 충실히 살려고 결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고는 인생을 황혼에 비유하여 남은 시간을 아끼며 살아간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생각하면서 선택하는 인생의 삶일 것입니다. 그것을 진리를 터득한 인생의 삶이라고 칭송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죽음을 초목의 마르고 썩는 자연 현상과 동일시하여 인간도 죽음을 숙명으로서 받아들이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사고방식인 것처럼 보이지만 과연 그럴까요?

틀림없이 인간도 생물임으로 죽음을 자연스런 예정 순서로 볼 수도 있지만 그것은 하나의 철학이며, 하나의 사고방식입니다. 제약된 사상 내지 경향일지도 모릅니다. 인생에 죽음이 있다는 것을 큰 모순이라고 느끼면서 몹시 괴로워하는 것도 인간으로서는 자연스러운 모습니다. 죽음이 임박할수록 도대체 죽는다는 엄연한 사실이 있는 우리들 인간의 생명이란 어떤 것일까 하는 물음을 새롭게 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자못 죽음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분명히 깨달은 것처럼 믿어 버리고 죽음의 준비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서 끝나는 인생의 신비 그 자체에 마음을 터놓고 자기로서는 아무런 해답도 내놓을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 끝내 꿋꿋이 사는 일만을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요?

그것은 삶을 팽개치듯 아무렇게나 죽음을 맞이한다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끝까지 악착같이 죽음에 저항하다가 죽는다는 것도 아닙니다. 죽음을 오직 인생의 종말로 단정하여 자기 스스로 해답을 얻어 받아들이는 대신, 우리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서 간직한 채 그 신비에 몸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늙음의 은총은 거기에 있지 않을까요? 인간이 생각하는 죽음의 준비 따위는 진부한 것입니다. 죽음을 분명히 이해하지 못한 채로 인간의 생사를 큰 신비로서 받아들일 때야말로 하느님만이 해답을 주시는 인생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을 때

 

“이제 언제 죽어도 좋다. 예전처럼 죽음을 생각해도 두렵지 않게 되었다.” 정말 본심인지는 몰라도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젊은이나 중년들이 죽음을 맞이할 때는 얼마나 괴로워하고 두려움에 떨까 하는 것은 누구라도 쉽게 상상합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육체적으로 쇠약해져 있으므로 죽음을 두려워한다든가 괴로워한다든가는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반화된 것은 아니지만 노년에 이르면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경우가 적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젊었을 때에 가졌던 삶에 대한 의욕은 없어지고 신체가 쇠약해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뿐일까요? 거기에는 정신적인 문제도 있다고 짐작합니다.

다시 말하면 삶의 의미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다가오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인생의 이상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거기에는 육체적인 쇠퇴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노년에는 순수한 정신적인 위기로 찾아오게 마련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은 이러한 위기를 어떤 의미로서 극복한 결과일 것입니다. 누구라도 노년이 되면 인생을 사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도, 노인은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정신적인 인생의 위기를 극복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허무적인 단념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것이 종교적인 체념이라면 별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통속적인 단념이라면 철저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순한 망상에 얽매여 방황하게 됩니다. 생각하는 노인이 교활하다는 비판을 받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허무적인 단념은 철저한 것이든 통속적인 것이든 노인의 사색을 풍족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꾸밈없이 순수하게 자신을 내놓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므로, 이른바 노인의 완고함의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노년의 정신적인 위기를 극복하고 도량을 넓게 가지기 위해서는 죽음까지를 포함하여 인간의 삶을 무한한 신비로 받아들이는 정신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의 생사를 제 나름대로 허무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은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고쳐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가장 심도 깊은 겸손을 뜻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린이같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어린이에게는 무량하신 분에 대한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노년의 정신적인 위기야말로 가장 정신적인 의미에서 어린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풍성한 인간의 삶의 의미를 알 은혜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음이 두렵게 느껴지지 않을 때에는 노년의 심정에 있어서의 정신적인 문제를 좀더 깊이 사색하는 노력이 요구될지도 모릅니다. 결코 육체적 심리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무관심하게 지나쳐서는 안됩니다.

 

 

노인과 미래의 희망

 

노인은 미래에 자신을 걸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노인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고작이어서 내일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제 자신에게는 앞날이 없다고 자타가 서로 타이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인은 참말로 미래에 살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미래가 없는 인간이 있을 수 있을까요? 아무리 죽음이 임박하더라도 그 앞에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기대하면서 죽는다는 기분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것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식으로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는 것 같은 시간에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과는 전혀 단절되어 있더라도 인간이 그것을 지향하여 살아가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미래라는 시간이 있는 것 같지만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미래란 현재를 기준으로 한 상상에 의한 가능성임으로 여러 가지의 가능성도 있을 것이고, 현재와는 완전히 단절된 것 같은 것도 있습니다. ‘한치 앞은 어둠’이라는 미래의 불확실성에 관한 격언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죽음으로서 반드시 미래가 끝난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현재로서 예측할 수 있는 미래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현재와는 완전히 단절된 미래도 있을 수 있습니다. 애초부터 우리들이 알고 있는 미래에도 현재와의 연속과 단절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인간은 미래 속에서 무엇을 가장 바라고 있을까요? 현재는 자신의 미래가 완전히 손에 잡힐 듯이 결정되어 있는 것일까요? 만일 그렇다면 사람은 살 의욕이 감퇴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에 의하여 살아갈 뿐 아니라 자연 법칙 등과는 사른 또 하나의 자유에서 생기는 사건과 마주치면서, 또 그것을 찾으면서 살 때 가장 싱그럽고 생기 넘치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자유란 하느님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인생에는 다른 누구도 알 수 없는 나 혼자만의 행운이 숨겨져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 스스로의 노력만이 아닌 그러한 행운에 몸을 맡기고 신뢰하면서 살아갑니다. 불안하기는 하지만 그럴 때 삶의 기쁨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요? 낭만이 없는 현실주의-실력주의-노력주의 등의 이념으로써 생각해낸 인생은 진짜 인생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비뚤어져 있습니다.

노년이란 죽음과 함께 완전히 미래를 잃고, 아무런 희망도 없이 꺼져가는 것으로 단념하는 시기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도 관념적인 인생관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노년은 미래의 진정한 가능성에 눈뜰 때입니다. 현재의 시점에서 예측할 수 있는 노후라는 시간이나 세계에는 권태를 자아낼 따름입니다. 미래의 본질은 차라리 현재로서는 예측 불가능한 단절된 시간과 세계라고 생각할 때 거기에 큰 희망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노년에 이르면 인간의 존재 그 자체에 그러한 신비가 항상 따라붙는 듯 느껴져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는 듯 합니다. 과학처럼 실증만을 앞세워 중시하는 견해를 넘어설 때 이러한 사고 방식이 은총처럼 자신 안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 방식을 찾아낼 수 없는 사람은 앞으로 얼마든지 불어날 것입니다. 노년이 이미 복지 사업의 대상으로 처리될 뿐인 상태로 되어 가는 사회에 있어서는 늙음의 은총은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제2부

늙음은 은총

 

사고의 방향

 

‘늙음은 은총’이라는 사고는 성서의 사상에 의거합니다. 성서의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에 항상 도전합니다. 인간의 자유는 하느님에 의하여 그것을 놓칠 우려가 있을 때마다 새롭게 보전됩니다. 성서의 하느님의 구원은 죄와 죽음에 갇힌 인간의 자유를 하느님의 사랑의 힘에 의한 자유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나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변증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하느님의 사랑의 자유야말로 늙음을 자유의 은총으로 바꿔 놓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참 사랑의 불모지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영원한 사랑으로서 사랑하실 것을 맹세하십니다 (호세 2, 21; 예레 31, 3 참조)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ㄱ서임,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 (마르 8, 35)

이 구원의 변증법적 실존은 성바오로 사도로 하여금 노년에 다음과 같이 진술하게 하였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낡아지지만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2 고린 4, 16-17)

‘늙음은 은총’이라는 고찰은 이러한 성서의 사상을 노년의 삶의 현실 한가운데에서 찾아내려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늙음이 은총으로서 인간의 실존을 변용시키고 자유로운 삶의 참 뜻을 발견하게 합니다.

 

 

늙음이란?

 

‘늙음은 은총’이란 말의 ‘늙음’의 뜻을 분명히 밝혀 놓고자 합니다. 나는 늙음을 단순히 노화 상태를 가리키는 형용사로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늙음이 만일 그저 노화만을 뜻하는 것이라면 노화 그 자체가 하느님의 은총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노화 상태 그 자체가 은총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늙음은 은총’이란, 인간은 노화 상태에도 불구하고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늙음’이란 늙어 가는 중인 인간을 뜻하는 것이지 노화 상태를 말함은 아닙니다. 여기에서 현대인은 노화 상태만을 문제 삼을 뿐 그것을 살고 있는 인간의 떳떳함은 간과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망각하고, 인간이 어쩌다가 얻을 수 있게 된 능력만을 높이 평가하는 현대인의 편협 된 견해는 노인에 대해서도 부당한 평가를 강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애당초 노인을 그저 소극적으로밖에 평가할 수 없기 때문에 노년이라는 단어를 기피하여, 숙년 熟年 이라든가 실년 實年이라는 말을 만들어 냈는지도 모릅니다. 노년이 성숙한 나이라든가 결실을 가져오는 나이라고 이해하는 것도 당연하지만, 능력주의적인 평가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이가 들어도 심리적인 성숙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도 있으며, 결실을 사회적인 성공이라고 한다면 전혀 맞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자식이나 손자가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어떤 상황하에 있건 노년을 살아 간다는 그것만으로도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싶기 때문에 ‘늙음은 은총’이라고 말하는 바입니다.

노년이라는 인생의 한 시기는 육체적으로 보면 과연 노화의 계절이지만 정신적으로는 극히 축복받은 나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노년은 정신적으로는 알찬 시절이기에 여태까지는 없었던 인간성의 풍요함을 노화상태에서도 발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정신주의자는 아니지만 노년에 대해 지나치게 생물학적으로 보는 평가에 대해서는 비판적입니다. 오히려 노년의 마음과 몸을 일체로 받아들여야 하지만 그 균형을 잡는 것이 어렵습니다.

의학심리학이 인간의 노화 상태를 특히 최근에 와서 깊이 연구하게 되었지만, 노년의 정신적인 충실함을 긍정적으로 높이 평가함이 없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심리학에 있어서는 병적 상태나 비정상 상태의 연구에서 정상적 상태를 연구하는 일이 진행되고 있지만, 정상적인 심리가 정신적으로 높은 차원의 것을 찾고 있다는 점은 강조하지 않습니다. 심리적인 미숙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으로는 트여 있는 마음도 있는 법인데, 오늘날의 심리학은 그러한 연구는 진척시키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내 고찰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입장에 입각하여 인간의 노년에 있어서의 정신적 풍요함을 확인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은총이란?

 

은총이란 우선 아름다운 것, 좋은 것, 뛰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노년을 사는 사람의 아름다움은 용모라든가 능력과 같은 인간성을 부분적으로 볼 때에 나타나는 따위와는 달라서 한 개인 전체의 아름다움입니다. 젊은이, 중년들, 각 개인의 아름다움이 있지만 노년을 있는 그대로 사는 사람에게는 인생의 다른 어떤 시기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전인격적인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노년을 사는 사람의 노력뿐이 아니라 노년이라는 나이가 가져다 주는 아름다움입니다.

은총이란 객관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아름다움이라든가 선량함이라든가 우수성을 일컫는 것이지만, 그것을 특히 인간의 노력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라는 관점에서 보는 데에 그 본질이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무엇인가의 우수성을 은총으로 볼 줄 아는 사람은 인생이나 이 세상을 그것을 초월한 견지에서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깊은 종교적인 견지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노년에 있어서 도달할 수 있는 인간의 선량함에는 단순한 도덕성의 높이가 아니라, 덕망의 높이를 은총으로서 인정할 수 있는 겸허함이 있음으로 마땅히 은총입니다. 기나긴 인생을 통하여 도덕의 의미를 의심하고 비판하고 덕망의 실현의 어려움에 실망하고 선악의 피안에로의 초월을 추구하기도 하면서 살아 오다가 노년에 이르러서야 인간의 선량함을 은총으로서 찾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인간 노력의 패배임에도 불구하고 주어지는 것이므로 은총입니다.

이처럼 은총이란 인간이 바라면서도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노력 가운데에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노년이 되어서야 그것을 가장 깊이 체험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인간은 노년에 있어서야말로 살아 있다는 것 그 자체를 은총으로서 느끼며, 그 은총의 무한하심을 감사히 여기는 듯합니다. 젊은 시절에는 살아 있다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느끼는 나머지 살아 있다는 것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소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년이 되면 하루하루를 정성을 다하여 살면서 그것이 자신의 노력으로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생명이라는 것을 잘 알게 됩니다. 이처럼 인간 생명의 존엄함을 가장 깊이 알 수 있게 됨으로 늙음은 은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년에 생명의 소중함을 아는 것은 흔히 말하듯이 그저 앞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자신의 인생에 남겨진 하루하루를 조심하는 것은 오직 인생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일까요? 하루하루 매일의 생활에서 알찬 삶을 찾을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영원’으로 마음이 열려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영원의 생명이 우리들의 꺼져가는 생명을 부지불식 不知不識 간에 감싸 안기 때문입니다. 늙음의 은총은 우리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새로운 생명이, 지금의 생명처럼 주어진다는 것을 믿게 된다는 데에 있습니다.

 

 

성모님과 은총

 

은총이라는 것을 가장 순수한 의미로서 생각할 때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님을 떠올리게 됩니다. 루가 복음에 의하면, 천사가 성모님께 말하기를 마리아님은 하느님의 은총에 충만하여 칭송받고 있다고 했습니다.

성모님은 오직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만 그리스도의 모친이 될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고, 감히 바랄 수도 없는 순수한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성모님은 그것을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노년의 은총도 그것을 순수하게 생각한다면, 성모님처럼 하느님만이 내려 주시는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노년의 은총이 이른바 ‘평온한 노후’의 모호한 가치가 아닌, 노약-질병-사별의 슬픔, 자기 자신의 죽음 등을 통하여 이들 일련의 사건으로서는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다는 것이라면, 성모님과 같이 마음으로부터 겸허하게 믿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은총에 대한 신앙이야말로 노년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젊음의 원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젊음은 무지함이나 경박스러움이 따르는 경험이 없는 젊은이들의 젊음과는 전혀 다릅니다. 모든 인생의 고난 끝에 자비로써 베푸시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신앙의 형태로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떠한 인간에게도 그러한 젊음을 바라십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아들의 삶일 것입니다.

노년은 죽음을 준비하는 시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리스도교적으로는 영원한 생명에 눈이 떠서 결정적으로 젊음을 되찾을 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영원한 생명에 사는 젊음입니다. 그것은 이른바 낭만적인 ‘영원한 젊음’ 같은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젊음이므로 초자연적인 신비입니다.

노년기를 제2의 청춘에 비유하는 생각에도 어떤 진리가 있지만, 제1의 청춘을 이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쓸쓸함을 느끼게 합니다. 제2의 청춘은, 제1의 청춘도 주신 하느님께서 노년에게 주시는 결정적인 젊음이 아니라면 헛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노년에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청춘은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으로서, 젊었을 때의 청춘의 이상을 초월한 것이므로 젊은이를 표본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은총의 하느님께 가까이 감으로써 실현되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주님의 탄생 예고 때부터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무참히 돌아가시게 된 노년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 가운데서만 천주 성자의 모친으로서의 사명을 완수하시면서 꿋꿋이 사셨습니다. 그 까닭에 성모님의 죽음은 그 아들 예수님과 더불어 부활의 은총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주어진 노년의 은총도 성모님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기 위하여 주어졌습니다. 그것 때문에 이미 젊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 밑에 서 계신 성모님께서는 이미 50세가 넘으셨지만, 교회는 늙으신 마리아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성모님께 있어서 그 고난과 죽음은 아들 예수님의 부활에 가장 확실하게 동참하는 길이었으므로 싱싱한 젊음만이 마리아님을 감싸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젊음에 있어서는 이미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갈라 3, 28)라는 구원의 은총이 나타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남성에게 있어서나 여성에게 있어서나 순수하게 노년을 은총으로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과 깊이 결부되어 지금 부활의 은총을 사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와 늙음

 

신약 성서에서는 구약 성서에서 볼 수 잇는 것 같은 경로사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 到來와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에 의하여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되고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로서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가 확립되었으므로 늙음이나 죽음의 숙명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 까닭일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은 그런 뜻에서, 늙음을 그때까지의 숙명에서 해방시키는 복음임에 틀림없습니다. 적어도 소극적인 의미로서의 경로 사상 등은 불필요해졌을 것입니다. 구약 시대부터 높이 평가되었던 노인의 지혜는 시므온에게서 볼 수 있듯이, 성령의 비추심으로 참 구원을 찾아내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루가 2, 25-32 참조).

또한 늙음에 수반하는 노약함은 그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때, 참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은총이 되기도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은 미소한 자, 가난한 자를 위한 복음인 까닭에 그때까지 경멸당하고 무시당해 온 가난한 노인들은 진정한 해방의 복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인간 대신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지배하시게 될 때, 축복받지 못한 노인이나 어린이가 하느님 사랑에 의한 다스림 밑에서 존경받고 높임을 받아서, 이 세상을 바야흐로 하느님 나라로서 새롭게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을 그렇게 기대하셨기에 다음과 같이 하느님을 찬미하셨습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

(루가 1, 51-53)

 

어린이나 노인을 단순히 보호의 대상으로서만 여기는 한, 하느님의 결정적인 이 세상 지배의 현실을 받아들였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으로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의 기쁨을 아직 모르는 것입니다. 경로 敬老 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함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의 사랑의 표현으로서만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믿는 것 이외에는 노인의 진정한 고귀함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로서는 늙음의 은총은 우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보다 깊이 깨닫는 은혜로서 주어질 것입니다. 흔히 나이가 들면 어린이가 된다고 말하는데, 그 가장 깊은 뜻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에서부터 이해되어야 합니다. 노년의 영성은 근본적으로 복음적인 영성으로서,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구원에 보다 깊이 참여할 수 잇는 은총의 생활을 실현하는 것을 지향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허무함의 밑바닥이 보이다

 

인간은 철이 들 무렵부터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건강이 좋고 사업에 쫓기면서 살아갈 때에는 잊을 수가 있지만, 허무함은 나이와 더불어 도피할 수 없는 현실로서 다가옵니다.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기보다는 인생의 허무함에 대하여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고민하는 것에부터 노년이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노년들만의 문제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인생에는 아무것도 없다, 살아가는 의미 따위는 애당초 없었다 등등 자못 완전하게 마음의 눈을 뜬 기분으로 생각하는 것은 중년을 넘어 설 무렵부터일 것입니다.

이 무 無와 공 空, 헛되고 헛됨의 그 바탕을 한층 더 캐내어 규명하려고 마음을 통일한다든가, 시성을 갈고 닦는 것이 철학자나 종교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깊이 허무함을 느끼기도 하고 사색에 잠긴다 해도, 그렇게 사색하고 있는 인간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무만을 골똘히 생각할 것이 아니라 무를 생각하려고 하는 인간의 존재 쪽으로 마음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인간 존재의 신비를 생각하지 시작할 때, 무는 없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허무한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이는 인생을 열심히 살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 無 나 공 空의 철학적 위변 [필사주: 違變, 계약을 이행하지 않음] 으로서 사는 것이 아니라, 허무하더라도 인간으로서의 생사를 완수하려고 진지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이와 같은 허무함 속에서 살고 죽는 인간이란 대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에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은’ 인간 존재의 허무함을 발견한 초대 교회의 사람들은 이 인간으로서는 풀 수 없는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아낸 듯합니다. 허무함의 밑바닥에서 찾아낸 인간의 신비는 이 한 분, 그리스도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바로 우리들의 무 無일 뿐인 존재를 위해서였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헛됨과 죽음을 향하여 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아무도 자신의 인생에 깊은 참 뜻을 찾아낼 수는 없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전혀 우연한 사건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 있어서,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들 세상에 내려오셨다는 사실은 이 허무한 삶에 확실한 의미를 부여하시기 위함이었다고 확신합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서는 이 허무한 인생의 귀착점인 죽음까지, 가장 무의미한 고난에 찬 죽음까지도 받아들이심으로써 인간의 존재를 하느님께로 높이셨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가장 깊게 실감하는 은총은 노년에 주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포기와 비약의 변증법

 

무엇인가에서 손을 떼는 일은 어떤 경우이거나 괴로운 일입니다. 그것이 소중한 것일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나이가 들면 예전부터 집착하던 것을 놓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많아집니다. 금전이라든가 물질일지라도, 곁으로는 집착하지 않을 작정이지만 그것이 그렇게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체에 관한 문제인 경우에는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체력이 쇠퇴해 가는 것을 막아 낼 수는 없으므로 미련 없이 깨끗하게 포기하는 수밖에 없겠지요. 늙음의 은총은 그러한 포기를 동시에 비약으로 바꿔 놓는 데에 있습니다. 반대로 그것에 집착하여 굳어져 버린다면, 오직 집착하고 있는 물질이나 신체와 함께 멸망해 버립니다.

늙음의 은총을 살아가는 방법의 원칙은 포기를 비약으로서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포기의 괴로움이 단순히 초기의 괴로움으로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비약을 위한 괴로움으로 바뀌는 은혜가 늙음의 은총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발뺌이나 사고 방식의 변경이 아니라, 진실로 그렇게 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순수한 은총으로서 믿지 않으면 안됩니다.

과연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으신 분이셨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포기하시고,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시어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참고 견디신 겸손하심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아버지이신 하느님께로부터 받으시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필립비 2장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포기와 비약의 변증법적 변화의 은총을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습니다.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마르 8, 35)

노년의 삶은 모든 것이 사라져 갈 때 눈에서 보이지 않는 새로운 삶으로 비약하며 변모되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노년에서 주시는 하느님 사랑의 은총으로서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싶은 것입니다. 노년에 모든 것이 사라지는 그 이면에는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 이미 일고 있음을 믿고 인정하도록, 우리들의 선입견이나 편견을 제거하기 위한 자기 투쟁을 동시에 펴나가야 합니다. 그와 같이 늙음을 나날이 다시 보면서 늙음의 은총을 깨달아 가는 과정에서 포기와 비약이 실천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포기는 결코 물질이나 육체가 추악한 것이라든가 그러한 욕망은 더럽혀진 것이기 때문에 포기하고 이탈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어떠한 인간적 기쁨도 지금과 같이 하느님으로부터 이탈하여 살고 있어서는 진정한 인간의 기쁨에 미치지 못하므로, 지금은 포기하고 하느님과의 일치를 통하여 전혀 새로운 생활 방식 속에서 참된 인간의 기쁨을 찾아 누리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약입니다.

 

 

겸손에 대하여

 

누구라도 겸손해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 염원은 우리들의 삶의 태도의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오만한 태도로 인생을 도도하게 살아가려고 마음먹고 살 때도 있지만, 어쩐지 썩 어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인간은 겸손하게 살아야 할 존재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겸손을 덕으로서 닦으려고 힘쓰는 사람이 어느 시대에도 있지만 좀처럼 성공하지는 못합니다. 위선적으로 되기는 하더라도 막상 진지하게 겸손해지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여길 때에는 쉽게 그렇게 되지 않는 법입니다. 겸손은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대체로 좋은 대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그저 끝날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겸허해진다는 겸손은 은총으로서 주어질 뿐입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만으로는 그렇게 된 수 없다 하더라도 인간답게 살려고 애쓸 경우에는 되도록 성실하게 겸손을 찾으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늙음의 은총은 이 인생을 관철하고 있는 겸허한 삶의 태도를 가장 깊숙이 희망하고 있을 때에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겸손은 노력보다는 희망이나 바람으로써 한층 깊어지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인품이 원만해진다고 하는 것은 단순한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나이가 들면서 함께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참된 겸손은 은총이므로 그것에 따라 덕을 닦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겸손을 은총으로서 바라는 데는 무엇 때문인가 하는 것을 분명히 밝혀 둘 필요가 있습니다. 겸손을 오직 겸허한 인간이 되고 싶을 뿐인 자신의 인격적 향상만을 지향하는 것으로 삼는다면 남모르게 슬그머니 오만해질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어느 정도 겸손해졌다고 느낄 때부터 슬며시 오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겸손해지기를 갈구해야 하는지 여러모로 생각해 보면, 겸손은 인건적인 덕의 목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가장 깊은 의미로서의 인간의 생활 태도 그 자체의 이상입니다. 왜 그러한 이상이 우리들의 마음에 깊이 묻혀 있을까요?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신학 이외에는 이유가 없다는 느낌이 듭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은 그리스도로서 사람이 되시고 인간을 구속하심으로써 그 겸허하심을 계시하셨습니다. 겸손은 인간의 덕망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 본연의 자세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도 겸손을 단순한 덕으로서 닦을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따르는 심도 깊은 삶의 태도로 삼아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노력 이전에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은총인 것입니다. 노년은 그 은총을 눈떠서 가장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인생일 것입니다. 은총 그 자체로서 사신 성모님은 겸허하게 삶의 은혜를 받은 분임을 잘 일 수 있습니다.

 

 

삶에의 눈뜸

 

‘삶에의 눈뜸’이라면 젊은 사람들의 체험처럼 생각하기 쉬운 것이 보통이지만, 노년에 이르러 비로소 산다는 것은 과연 이런 것인가 하는 깊은 감동과 함께 삶에의 눈뜸이 있음을 일반적으로 잊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 있어 삶에의 눈뜸은 사춘기의 성 性에 대한 눈뜸이라든가 결혼 생활을 막 시작하여 생활의 구체적인 삶의 괴로움을 경험하는 일에서부터 비롯됩니다. 그렇다면 노년에 있어서의 삶에의 눈뜸이란 어떤 것일까요?

생활고 生活苦도 있을 것이며, 가족 관계의 불행한 사건 등으로 인간의 생의 모순 같은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꺼져 가는 생명 앞에서 처음으로 인간의 삶 전체가 무엇인가를 돌이켜보는 일이 있습니다. 그때에 가장 깊이 인간이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이었던가 하고 결정적인 삶에의 눈뜸에 다다를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귀중한 체험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늙음이 은총이라는 것에 대한 토대와 같은 것입니다. 그 까닭은 인생이라는 긴 세월 동안의 체험을 기틀로 자신과 세상을 가장 본질적으로 다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심오한 인간다움이 거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가장 자각적인 인간입니다. 인간 그 자체이며 인간이란 그런 생물인 것입니다.

기나긴 세월의 흐름과 넓은 세상 속의 시야에 서서 지금까지 생각을 거듭해 온 자기 자신이란 존재를 가장 본질적으로 파악하여, 남은 세월을 진정한 자신으로서 살려는 것입니다. 이런 때에야말로 참된 인간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에 눈뜰 시기에, 이제부터 어떻게 살 것인 하는 결단을 내리는 것은 본인의 자유일 것이므로 큰 시련을 내적으로 체험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 시련이란 오만에의 유혹입니다. 요컨대 인간으로서 살고 있는 것은 자신의 능력에 의한 것도 사회의 힘에 의한 것도 진화의 역사에 의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으로서는 설명을 다할 수 없는 어떤 존재의 사실 그 자체를 받아들이느냐 어떠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존재 그 자체는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오만입니다.

젊은 시절의 삶의 눈뜸은 오직 생명 현상 그 자체 만에 한정되는 일이 많지만, 노년에 있어서의 삶의 눈뜸은 자신의 생명의 존재 그 자체의 이유, 즉 존재의 신비에 눈뜨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자신의 지금까지 살아 온 사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살고 있다는 사실은 인간적인 어떤 이유로도 결정적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것 만으로서는  충분하지 못하며, 그렇다고 그대로 덮어 둔다는 것은 불성실하다는 것을 자각하는 사람은 생명을 근원적으로 내려 주시는 존재에 마음을 열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그러한 초자연적인 존재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느냐 하는 것은 더욱 큰 은총으로 분명히 밝혀질 것을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겸허함에 머무를 수가 있습니다.

노년 그 자체는 이러한 은총이며 은총은 다시 은총으로 우리들을 인도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치매성 노인과 예수님

 

노인 문제 중에서 치매성 [痴呆症] 노인 문제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나이를 먹으면 누구나 다 저렇게 되는가 하고 젊은 사람들조차도 걱정을 하지만 노인들 사이에서 끊임없는 불안의 요인이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손과 발을 움직일 수 없어서 기동을 못하더라도 머리만은 또렷하기를 바라면서도, 그것은 누구를 막론하고 확실하게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불안해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치매에도 여러 가지 단계가 있어서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주위의 사람들로 하여금 매우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느끼게 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한 노인의 시중을 들 때 남다른 양심과의 투쟁을 체험하는 수도 있습니다. 치매증에 걸린 사람을 어디까지 인간으로서 존중하여야 하는가, 인간의 존엄이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하는 윤리적 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치매증이라는 병의 상태와 그 질환을 앓고 있는 한 사람의 인간은 잘 생각해 보면 구별되는 것이지만 병이 심해지면 우리들이 받아내는 방법은 아무래도 감정적이 됩니다. 냉정히 생각해 보면 거기에는 감정뿐이 아니라, 현대인의 사고 방식의 바르지 못함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유물 사상에 의한 삐뚤어짐입니다. 뇌가 인간의 정신을 만들어 낸다고 믿기 쉬운 것입니다.

‘치매성 노인의 세계’ 라는 영화를 촬영한 하네다 스미코 여사는 많은 치매증 노인과 접촉하여 생각한 바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치매증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어도 역시 무엇인가 그 사람의 가장 심지가 되는 인품 같은 것은 잘 살펴보면 끝까지 남습니다. — 인간은 치매증에 걸리더라도 그 사람이 이제까지 살아 온 것처럼 살 수밖에 없으며, 매만지고 겉모양을 꾸미던 부분이 망실되어 간다는 두려움으로 보아, 무언가 그  사람의 생활태도 같은 것이 모두 눈에 드러나 보인다는 느낌도 듭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보시는 시각이라는 것을 문득 느끼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신체 활동이 아무리 정신적으로 보이더라도,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초월하여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장 깊은 데에 있는 인격과의 친교를 바라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치매증에 걸린 노인이 뇌의 활동의 미비한 점 때문에 신앙의 표현마저 잃었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한없이 깊은 사랑 가운데 살고 있음을 의심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당연히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 25, 40) 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노인은 치매증에 걸림으로써 삶의 의미가 없어졌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의 하나로서 사랑 받을 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인간의 존엄성의 가장 깊은 이유를 상기시키는 귀중한 역할을 하는 사람임에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형제란, 그저 신자에 한한 것은 아닙니다.

 

 

늙음이 지향하는 것

 

인간은 목표라든가 목적을 지향하면서 생활함으로써 합리적으로 살며 사는 보람을 느끼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근본적인 우리들의 인생 체험이므로 아무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인생의 가장 깊은 목적 같은 것은 아무도 모른다 하더라도, 살아 있는 한 무엇인가를 지향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젊은이나 한창 일할 나이의 사람에게는 지향하는 것이 다음에서 다음으로 계속 생겨남으로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 수도 있습니다. 노년에 이르러 가장 괴로운 것은 무엇을 해야 좋을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 것조차 모르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한도의 목표라는 것은 모두 생각해 보았으나, 그 어느 것도 이제부터 내가 진정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은 아니라고 느낍니다. 이런 기분으로 그냥 살아간다는 것은 점점 더 허무해질 뿐이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아무런 삶의 바람도 찾을 수 없게 될 때가 바로 인생에 있어서의 위기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인생이나 세상을 초월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시점이기도 합니다. 인생은 자신의 소지품처럼 왜 존재하고 있는가 하는 식으로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서, 주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도리가 없는, 우리들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초월한 절대자에게 마음을 돌리게도 됩니다.

현대인은 이러한 사고 방식을 쓸데없는 일이라고 하며 기피해 버립니다. 그 결과 인생을 마치 자신의 물건처럼 생각하여 자신의 힘만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살려고 합니다. 그런 사고 방식은 인생을 고의로 하느님으로부터 떼어놓고 자기라는 허무한 존재에 의하여 더욱 허무하게 만들어 갈 뿐입니다. 자신을 진정으로 살리는 길은 인생 그 자체를 하느님의 것으로서 받아들이는 데에 있습니다. 오만한 자아에 의하여 인생을 그 참된 존재 이유로부터 갈라 놓는 한, 인생도 자신도 덧없는 것이 되어 헛됨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노년이야말로 자신의 인생을 주시고 살리시는 초자연적인 절대자의 마음에 깊이 생각이 미치게 하여, 그 바라심에 뜻을 깊게 합치하면서 살아야 할 가장 은총 받은 나이입니다. 노년은 젊었을 때나 한창 때에는 그냥 지나쳐 버렸던 인생의 궁극적 목적을 지향하면서 살 수 있는 가장 인간다운 나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중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9마태 6, 10)라는 말씀은 인생의 가장 심오한 목적을 찾을 수 있게 하는 말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지상에서 오로지 하느님의 뜻대로 살 수가 있다면 그것은 영원한 현재를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노인과 어린이

 

나이를 먹으면 어린이가 된다고들 흔히 말하는데 왜 그럴까요? 노인들은 대부분 어린이에게 상냥하게 대합니다. 특히 자기 손자 손녀에 대해서는 자신도 어린이처럼 되어서 함께 놀아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노인이 어린이에게 끌리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러나 어린이들끼리 서로 좋아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어린이의 단순함이 좋은 노인은 기 인생 끝에 복잡한 인간 관계를 피하고 싶어지며 단순한 사고 방식이나 행동이 그리워서, 그것을 어린이의 생활에서 찾을 수 있어 기뻐하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정신적인 동기에서인 듯합니다.

또한 노약함 때문에 어른보다 어린이의 생활의 단순함에 친근감을 찾아낸 노인은 어린이가 좋아지겠지만 일방적으로 사랑하다 보면 어린이의 세찬 활동력에 압도되어서  그만 허둥지둥 도망쳐 버리는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린이의 생명력의 왕성함에 끌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노인이 어린이를 좋아하는 것은 자신도 어린이처럼 되어가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객관적으로 말해서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일 어린이처럼 된다면 그것은 정신적인 노력일 뿐 육체적인 원인은 아닙니다.

어린이처럼 되려는 노인의 정신이나 기분은 꽤 복잡합니다. 그것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노인을 어린이 취급할 때 노인들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노인의 시중을 들어주는 사람이 노인을 완전히 어린이 취급을 하면 분노를 느끼게 됩니다.

늙음의 은총의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노인이 비로소 어린이의 생활 안에서 인간의 심오한 진리를 찾아낸다는 점을 덧붙여야 할 것입니다. 양관 良寬 스님이 하루 종일 어린이와 손으로 공을 치면서 놀았다는 이야기는 깊은 깨달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어린이에게도 부모로부터 유전되는 악습이 있으며, 또한 세상이 만든 악습도 발견됩니다. 그러나 국민학교 저학년까지의 어린이에게 공통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부모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아직 고민하지 않는 나이 또래의 어린이들의 단순함과 청순함을 바로 거기에서 오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힘만으로 살아온 것 같지만, 결국은 인간을 추월한 어느 분에 의하여 생을 부지하는 것이라고 깨닫는 노인은, 무심하게 오로지 부모만을 믿고 살고 있는 어린이와 더불어 자기 동화 同化를 하고 싶어질 겁니다.

이러한 뜻에서 어린이를 사랑할 수 있는 노인은 하느님의 은총 속에 있는 것입니다. 많은 노인은 반드시 어린이가 좋은 이유 중에 그것을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늙음의 은총은 다음과 같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 (마태 18, 4)

 

 

노년의 자유

 

젊은이들은 자유를 얻기 위해 싸웁니다. 자유를 얻지 못함에  대하여 고민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자유를 획득했을 때에는 긍지를 느끼며 삶의 행복을 기뻐합니다.

인간은 평생 자유를 갈구하며 살고 있지만 과연 자유란 인간의 손에 의하여 얻어지는 것일까요? 늙음의 은총의 중요한 요소는 자유입니다.

50세 무렵부터 이 세상에는 두려운 것이라고는 별로 없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그때까지보다 훨씬 편안한 기분으로 인생을 살 수 있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때까지의 노고가 열매를 맺었다는 것이 아니라 나이와 함께 저절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물론 나이를 먹어도 예전부터의 열등감으로 계속 고민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심리 작용의 문제일 뿐 넓은 안목에서 볼 때, 노년에는 인간으로서의 생활 태도가 젊었을 때에는 없었던 여유가 생깁니다. 그것은 노년에 있어서의 자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자유를 살려고 실 사회에서의 대인 관계를 관대하게 처리하는 사람도 많은 것입니다.

이 자유는 나이와 더불어 더욱 확대되어 갑니다. 노년에 있어서 인격 형성이 완성되는 것은 이 자유의 은총에 의한 것입니다. 노년의 행복은 이 자유를 어떻게 자신 안에서 확대시켜 나가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육체적인 쇠약함이나 정신적 활동의 정체가 일어나더라도, 마음속에서 퍼져 나가는 자유는 자기 자신까지도 뛰어넘는 것 같습니다. 늙음을 신비화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수련을 쌓고 노년을 맞이한 종교인 가운데는 초자연적인 힘을 느끼게 하는 수가 있습니다.

왜 자유가 노년에게 은총으로서 주어질까요? 인간이나 세상까지 초월한 존재자와의 친교에 마음이 열린 탓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그것은 과학으로서의 노인학 따위로서는 해답을 얻을 수 없는 문제입니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깊은 반성을 한 뒤에 자유롭게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노년에 있어서의 자유란 젊은이들로서 알기 힘들고, 노인들로서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짐을 의식하기 어려운지도 모르지만 노년의 인생이 현실이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젊은이가 자유를 남용한다고 흔히 비난 받지만, 노인도 은밀히 악용하는 일이 있습니다. 교활하다는 말이 그런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교활하다는 말로서 상기되는 것은 자유와 더불어 지혜가 잘 움직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운동은 별로 하지 못하게 되고 생활력이 부족해지는 반면 통찰력 같은 것은 깊어짐으로써, 젊은이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지혜의 활동이 자유와 더불어 노인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것입니다.

노년에 있어서의 지혜를 동반한 자유는 그것을 악용하지 않는다면 성령에 의한 보다 큰 보람을 가져올 것입니다. 고갈된 상상력 대신 하느님의 자유 그 자체에 참여하게 되는 까닭입니다.

“늙은이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리라.” (요엘 3, 1)

 

 

노년의 죄

 

늙음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에 좋은 뜻보다는 나쁜 뜻 쪽이 더 많은 것은 어째서일까요? 그것은 노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도 까닭이 되지만, 노인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노령 때문에 그렇게 되어 버리는 것으로 눈감아 주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늙음이 은총이라면 그럴수록 은총을 악용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은총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그 점을 잘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노년의 죄란 도대체 어떤 점에 있을 수 있을까요? 은혜를 베풀어 주신 분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놓지 않고 자신의 욕구 때문에만 그 은총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은총을 베풀어 주신 분의 소원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은총을 자신의 이익에만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늙음의 은총이란 지혜와 자유와 사랑 같은 은총입니다. 노년에 따르는 육체적인 노약함 같은 일에 마음을 빼앗겨 이러한 은총이 주어져 있는 것을 놓쳐 버려서는 안됩니다.

늙음의 은총의 훌륭함에 깊이 감동하는 사람은 그것을 자기 중심적인 이익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길 것입니다. 늙음의 은총을 베푸시는 분의 바람은 그 은총으로 말미암아 늙음과 죽음을 새로운 생명에로 옮아가는 기회로 삼도록 하는 점에 있지 않을까요?

노년은 그런 의미에서 정체 停滯나 끝남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되살아나는 시점이라고 생각하여 게을리해서는 안됩니다. 그렇지 않고 오만한 생각이나 체념에 빠질 때에 은혜를 악용하여 죄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예컨대 지혜도 자유도 사랑도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하는 고루한 생활 태도만을 고수하게 되면 노인은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비록 아무리 스스로 노력한다 해도 스스로 자신의 노후의 이상을 고집하고 마음을 넓게 터놓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늙음의 은총을 악용할 뿐입니다.

성바오로 사도는 60세경에 쓴 것으로 짐작되는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희망을 이미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 또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달음질칠 뿐입니다.” (필립 3, 12)

이와 같은 각오로 늙음의 은총을 한없이 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노년은 결코 소극적인 생활태도 가운데 평화를 찾을 시기가 아닙니다. 노년의 죄는 정신적인 노력에 있어서 정체하거나 후퇴하는 데에 있습니다.

따라서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그것을 이미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고 앞에 있는 것만 바라보면서 목표를 향하여 달려갈 뿐입니다.” (필립 3, 13) 뒤의 것은 잊고 앞의 것에만 몸과 마음 전부를 기울이는 일이 중요합니다.

 

 

죄에 대한 회한 悔恨

 

늙음이 은총이라는 것은 여러 면으로 봉서 명백해지리라고 짐작되지만, 그 가운데서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은 우리들의 죄에 대한 반성이 은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젊은이들은 순수하기 때문에 죄의 추악함에 좌절합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정신적인 추함에 마음이 어둡고 우울해집니다. 그러나 사회에서 살다 보면, 죄악감 따위를 송두리째 내동댕이치지 않고서는 인생이란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중년 선배들한테 단단히 교육을 받게 됩니다. 중년을 덮치는, 대낮의 악마의 계절에는 인간의 삶이 성숙함에 따라 얼마나 악과의 싸움에서 항상 무방비 상태로 시달림을 받는가를 알게 합니다.

그 무렵부터 선악의 피안에서 살아 보려는 심정으로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정색하고 나선 기분도 듭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들이 하느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떠나고자 할 때에도 결코 우리들을 저버리는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노년에 이르면 알게 되는 듯 합니다.

요한 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간음한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에 대하여 율법학자들이, 이런 여자는 돌로 쳐죽이라고 모세법에 있는 것을 예수님께 상기시키고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계속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무시하고 계셨지만 하도 끈덕지게 대답을 재촉하므로, “‘너의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하시고…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셨습니다. 그랬더니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하나 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요한 3, 3-9 참조).

노년에는 인간이 얼마나 죄 많은 존재인가를 객관적으로 알 수 있는 경험에 입각한 인식이 있는 모양입니다. 오직 그것을 기틀로 삼아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느냐 않느냐는 각자의 자유입니다.

노년에 이르러서 죄에 대한 인식이 깊어진다는 것은 기나긴 인생의 체험으로 보아서 자연적인 현상처럼 생각되지만, 그것이 단순한 객관적인 지식으로서 머무르지 않고 자기 자신의 문제로 절실히 반성할 수 있는 것은 은총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를 범한다는 것이 보편적인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을 반성한다든가 통회한다는 것은 불필요할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피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의 삶의 태도 그 자체에 내포되어 있는 방향표지와 같은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것이 양심의 소리라는 것입니다.

노년에 이르면 이 양심의 소리가 젊었을 때와는 달리 전 인생을 반성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젊었을 때에 저지른 나쁜 짓이라든가, 중년 때의 무법 상태 같은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눈에 내다보며 인생 그 자체에 대하여 종합적인 평가를 내려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노년의 은총입니다. 그래서 양심을 하느님의 목소리로 받아들이고 좋은 일이든 궂은 일이든 자신의 인생을 하느님께 의탁하고 싶다는 심경은 어떤 노인의 마음에도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화해 和解 의 은총

 

인생을 돌이켜볼 여유가 생길 무렵부터 인간은 죄 많음을 인정하는 일이 잦아집니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별 도리가 없었다고 판단하고 저지른 일도 잘 반성해 보면 나쁜 짓이었으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마음도 더럽혀진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젊었을 때에는 인생을 이상적으로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세상이 죄악에 물들어 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면서, 인간은 죄 많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인간은 생을 살아가는 한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고민을 계속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 매듭을 지으려고 합니다. 성악설 性惡說 같은 사고로 인간의 죄 많음을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여기고 고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서는 너무나도 선악에 대하여 무관심해짐으로, 진실로 철저한 것이 못됩니다. 아무래도 인간의 죄 많음은 어느 정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나이를 먹으면 젊었을 때와는 달리, 인간의 죄 많음에 대하여 실망하지 않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게도 될 것입니다.

그것이 겸허한 심정으로 인정하는 것이라면 확실히 그것은 늙음의 은총입니다. 그와 더불어 젊은 날에 참다 못해 절교해 버렸던 것 같은 남의 악한 행실도 용서할 수 있는 화해의 은총도 곁들여 받게 되는 듯합니다. 타인과의 화해는 동시에 자신의 죄도 인정하는 것이 되므로 자신과의 화해도 가져오게 됩니다.

그것은 은총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일종의 노화 현상이라고 하는 의견도 있을 수 있겠지만, 노년의 화해를 심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하더라도 원인 모두 해명되었다고는 잘라 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죄 많음에 대한 인식은 단순한 죄악감의 문제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삶의 태도의 객관적인 반성을 절대적인 선의 이상 理想 아래에서도 행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은 의식하지 않으면서도 죄 많음에 대한 반성을 하느님 앞에서 실제로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화해를 체험하는 경우 하느님 앞에서 함께 죄인임을 인정하고 있음이 전제로 되어 있는 듯합니다. 남을 용서함으로써 자신도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는다는 기대가 은연 중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진정한 화해일수록 그것은 인간 상호간의 용서함에 앞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화해의 은총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오만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할지도 모르지만, 하느님의 은총은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화해는 인간의 노력보다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잘 생각해 보면 인간은 서로 타협은 할 수 있어도 진정으로 서로 용서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간이 모든 죄를 스스로 인정하는 인간에게는 무상으로 화해의 은총을 내려 주신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인간은 오만한 존재임으로 죄를 범하고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죄 위에 또 죄를 쌓아 올려가며, 결코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에서 쉽게 해방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편에서 인간을 향하여 화해를 신청해 오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은 바로 죄 없으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의 속죄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어떠한 죄인에게도 용서의 은총을 내려 주신다는 것을 나타내십니다.

늙음의 은총은 어떤 사람이라도 하느님의 이 화해의 은총에 참여하게 하시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교회나 성서를 모르는 노인도 깊은 감사 속에 평화로운 나날을 보낼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는 이런 은총을 내려 주십니다.

 

 

수모 당하는 노인과 그리스도

 

노인들 중에는 비굴해진 사람이 의외로 많음에 놀라게 됩니다. 그 까닭은 이 사회가 노인의 노약함이나 추함, 완고함 등을 이해하기보다는 쉽게 경멸하기 때문입니다. 나이를 먹으면 누구든지 똑같은 노약함을 짊어질 텐데 당장은 노인을 경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혀 부당한 처사입니다.

노인은 노약하거나 추하다 하더라도, 그것과는 견줄 수 없는 깊은 인생의 지혜가 있으며 폭넓은 경험이 있습니다. 그것을 무시하고 그들을 경멸하는 것은 전혀 부당합니다.

노인들 중에는 그러한 경멸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리하게 젊게 보이려고 무척 애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게든지 젊은이에게 좋게 보이려고 빈틈없이 신경을 쓰는 사이에 스스로를 낮추어 보게도 됩니다. 그 때문에 되도록이면 함부로 참견하지 않으려고 모든 일에 있어서 매우 소극적이 됩니다.

노인은 여러 형태로 치욕을 당하는데 그것은 전혀 부당한 일입니다. 어떻게 이 치욕에 대응해야 할까요? 그것으로 노년이 행복한 시기가 되느냐 아니면 죽음만을 기다리는 시기가 되느냐가 결정됩니다.

늙음이 은총인 것을 굳게 확신한다면 노약함이나 추함, 결점 등이나 또한 죄가 있었다 하더라도 실망하거나 비굴해지는 일은 없습니다. 늙음의 은총을 올바로 확신하고, 또한 주장해야 할 것입니다. 치매증은 질병이므로 걸리지 않도록 노력하고, 만일 그 병에 걸린다면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을 부끄러워한다든가 부당하게 느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노인에게 치욕을 준다거나 노인을 멸시하는 풍조는 문화의 중심부까지 침투되어 있으므로 이러한 악습이 하루아침에 제거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거의 불가피한 치욕과 더불어 살지 않으면 안 되는 노년을 왜 무엇 때문에 은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리스도를 알 때 거기에도 깊은 가치가 잠재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올바른 분이셨음에도 온갖 멸시 가운데 죽음을 맞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리스도야말로 노인이 부당한 대우를 참아 받지 않으면 안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온갖 치욕에 대하여 깊은 동정을 보이실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그리스도께서 혼자서 참아 받지 않으면 안되었던 경멸에 대하여 아무런 동정도 나타낼 수가 없었지만, 그리스도 자신은 그리스도를 박해한 사람에게도 모두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에게 평안함을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마태, 11, 28 참조).

온갖 치욕 속에서도 우리들은 늙음이 은총인 것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굴욕과 비애 가운데, 참으로 사람이 되신 천주 성자와의 깊은 만남은 은총이 주어질 가능성을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죽음

 

늙음 다음에 오는 것은 죽음뿐이라는 사고 방식은 늙음에 항상 붙어 다닙니다. 아무리 노년의 높은 가치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죽음이 이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린다는 사고에서 빠져 나오기 전에는 늙음이 결코 은총이라고 단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늙음의 은총을 결정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죽음에 대한 사고 방식이 완전히 바뀔 때입니다. 인간은 노년에 이르러 죽음을 가장 절실히 생각할 수가 있기 때문에 어려 가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아무도 그것으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는 것, 인류 공통의 숙명이라고 깨닫고 체념하게 될 것입니다.

죽음을 숙명으로서 터득하기 위하여 이른바 죽음을 관념화 한다고 말하듯이 지적인 조정을 여러모로 시도합니다. 애당초 인생은 한가닥 꿈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며, 인생을 연극에 비유하여 마지막 막은 당연히 닥쳐오는 것이라고 이해시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자기뿐 아니라 남들도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는 연대감 등을 불러일으키는 사고 방식도 있습니다. 수명이라든가 극락 왕생이라든가 하는 종교적인 개념도 상당 부분 유용할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죽음과 죽음의 고통을 구별하여, 죽음 그 자체는 괴로운 것이 아니라고 타이를 수도 있습니다. 쉽게 체념하기 위하여 지나온 생애를 되도록이면 행복했었다고 미화 美化 하여 평가시켜 주는 방법은 일반적으로 행해집니다. 그러나 젊은이의 죽음처럼 도저히 체념할 수 없는 죽음도 있으며 병사 病死 이든 사고사 事故死 이든 죽은 그 자체가 격심한 고통을 수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인간 이외의 생물에 대해서는 초목이나 동물 등이 일단 한정된 세월이 경과하여 말라 죽는다든가 노화하여 죽음을 맞이할 때에는 자연 현상으로 받아들입니다. 인간의 경우에도 생물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자연 현상으로서 과학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데, 인간만은 심신이 모두 건강한 한 몇 살이 되더라도 죽음을 바라는 일은 없으므로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 듯합니다.

이처럼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모로 생각할 수가 있지만 죽음 그 자체를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죽어야 할 인간으로서는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교의 죽음에 대한 독특한 판단, 긍정적인 판단을 새로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죽음은 인간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강림하셔서, 인간의 죽음의 운명을 하느님께서 몸소 떠맡아 주신다면 죽음의 의미는 달라질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전혀 새로운 생명을 인간에게 내려주실 수 있습니다. 만일 그런 일이 단순한 이론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일어난 현실이라면, 확실히 인간은 죽음의 숙명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성서는 그러한 현실을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체험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서의 말씀을 믿을 수 있게 되면, 죽음에 대한 획기적인 해결이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현실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다음과 같은 말씀은, 죽음을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현실에 의하여 해결하고 있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 가운데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도 없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죽더라도 주님을 위해서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의 주님도 되시고 산 자의 주님도 되시기 위해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로마 14, 7-9)

삶과 죽음을 주님과 함께함으로써만 늙음이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이 말 이상으로 늙음을 좋게 평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부활이란?

 

늙음 다음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견해로 본다면, 그리스도교적 생사관의 큰 차이는 늙음 다음에는 죽음만이 아니라 부활이 있다는 점입니다.

어떤 종교도 사후의 복락을 보증하려고 합니다. 그리스도교의 부활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부활은 사후에만 일어나는 인간의 변화는 아닙니다. 늙음도 죽음도 그리스도와 일체를 이루어 받아들인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부활하여 계시기 때문에 그것을 믿는 사람들의 늙음도 죽음도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에 의한 새로운 삶의 태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우리들의 늙음에도 죽음에 대해서도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늙음은 부활이며 죽음도 또한 부활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성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2고린 4, 10)

50대의 바오로 사도는 육체적으로도 괴로운 노년을 보냈습니다. 그 노년에 예수님의 부활하신 생명이 나타나실 것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도 마찬가지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죽음, 그 자체이기 때문에 보통 죽음과는 전혀 다른 부활을 위한 죽음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상식적으로는 죽음과 부활을 시간적인 차이로 생각합니다. 부활은 죽음 다음에 온다는 식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죽음과 하나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죽음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생각하고 부활하시어 나타나 보이신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저 십자가상에서 죽음을 마치신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마주쳤던 것입니다.

늙음도, 죽음도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하여 인생 종말의 사건이면서도, 인생을 초월한 하느님 생명의 시작이기도 하다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늙음도, 죽음도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내려 주시는 전혀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라고 다시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자연적으로 노년은 이성 理性의 반성을 통하여 노년은 죽음과 함께 영원하고 초자연적인 현실을 향하여 살아갈 시기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그리스도 부활의 복음은 그 영원함과 초자연함이 인간 존재의 진정한 목적인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부활이 죽음을 통한 인간 정신성의 재생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부활이란 새로운 인간의 창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인간만의 창조가 아니라 전 우주의 새로운 창조에도 관계되는 사건이기 때문에 종말론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늙음의 은총은 단순히 노후 인생에 있어서 평화에의 은총이 아니라 우리들이 새로운 전 우주적인 창조의 은총에로 마음의 문을 열어 놓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우리들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한량없는 희망이 늙음의 은총에 주어졌다는 것을 드디어 알게 됩니다.

 

 

늙음은 부활의 은총

 

노년이 아무리 풍요로운 인생으로서 칭송 받아도,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나는 한 덧없는 것일 뿐입니다. 유종의 미 美로서 체념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렇다면 역시 노년은 젊음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늙음을 기리면 기릴수록 마지막에는 허무만이 되돌아온다고들 말합니다.

늙음은 은총이라고 하더라도 상대적인 가치로서 받아들여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아무리 늙음에 가치가 있어도 죽음으로서 모든 것을 잃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죽음을 통하여 부활하는 것이라면 어떨까요? 노년의 가치는 상실되지 않는 영원한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사람에게는 노년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통로가 되므로, 늙음은 결정적인 하느님의 은총으로서 받아들일 수가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굳게 믿고 있었던 바오로 사도는 50세가 넘었을 때 다음과 같은 확신을 전했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낡아지지만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2고린 4, 16)

낡아져 가는 노년의 모습에서 이미 ‘나날이’ 새로워지는 생명이 나타나고 있음에 바오로 사도는 노년의 참 가치를 보았습니다. 노년을 낡아져 가는 인간의 모습으로 인정하면서도, 그것과는 전혀 이질적인 새로운 생명이 태동하기 시작함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60세에 달할 무렵 옥중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써 보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필립 3, 10-11)

바오로 사도에게 있어서 노년은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밖에는 없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다름아닌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생활 태도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늙음의 은총의 궁극적인 근거가 있는 까닭입니다.

노년의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시켜 주실’ 주 예수를 믿고 있었기에,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라고 필립비 교회의 신자들에게 권고할 수가 있었습니다.

부활의 신앙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의 죽으심에 의하여 우리들 모든 인간을 위하여 쟁취해 주신 은총이므로 모든 이에게 내려 주십니다. 성서나 교회를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미 노년의 의미를 찾으려고 할 때부터 내려 주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노년과 영성

 

노인들 중에는 이 세상에서 바라던 것은 하루하루 상실되어 간다면서 한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축한 돈은 날로 줄어들고, 건강은 시간이 갈수록 쇠퇴함을 느끼며 친지들은 한 사람 또 한 사람 씩 죽어가기 때문에, 고독함 속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할 슬픔과 외로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승에 오래 살고 있는 한 모든 것은 잃어 간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고 말합니다.

내세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사람은 행운이겠지만, 그것은 믿을 수밖에 없는 일이므로 현실적으로는 역시 모든 것을 상실하는 슬픔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에는 전혀 독특한 신관 神觀 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세 위격 位格이 있으며,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천지 창조 때에는 전혀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 새롭게 만물을 창조하시는 데에 참여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기운처럼 이 세상을 초월 한데서부터 그 힘이 휘돌고 계셨습니다 (창세 1, 1-2 참조).

그러므로 새롭게 한다는 것은 없는 가운데서 존재를 이끌어 낼 만큼 전혀 새롭게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제키엘이라는 예언자는 다음과 같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뼈들에게 주 야훼가 말한다. 내가 너희 속에 숨을 불어넣어 너희를 살리리라. 너희에게 힘줄을 이어놓고 살을 붙이고 가죽을 씌우고 숨을 불어넣어 너희를 살리면, 그제야 너희는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  (에제 37, 5-6)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은 내세에서만 활동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 세상도 하느님이 모두 창조한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결과 하느님을 떠나서 불행과 악으로 꽉 차 있지만, 성령께서는 이 세상 그 자체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들이 늙어서 말라버린 뼈처럼 된 그때야말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께서 우리들의 전 존재, 곧 마음도 몸도 새롭게 해 주시는 분 이시라는 것을 믿을 수가 있습니다.  그 새로움은 하느님의 역사 役事 하심에 의한 완벽한 새로움이므로 인간에게는 그 전모를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의 신체가 쇠약해지고 죽음을 맞이하고 뼈나 재로 변할 때에야말로, 드디어 성령께서 우리들을 완전히 새롭게 해 주시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믿어지며 인간적으로는 상상도 못할 희망이 샘솟아 오릅니다. 그리스도교의 장례의 밝음은 이 모든 것을 새롭게 해 주시는 하느님께의 신뢰로써 생겨나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인간으로서는 볼 수도 없는 우주 완성의 꿈을 보여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이야말로 전 인류의 구원이며, 사랑의 하느님에 의한 완성이라는 꿈을 보여 주십니다. 예언자 요엘은 “늙은이들은 들어라.” 라고 말하고 있으므로 노인들의 희망의 예언자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너희의 아들과 딸은 예언을 하리라. 늙은이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리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요엘 3장 참조).

 

 

특별한 빛으로 산다

 

나이를 먹은 분들의 얼굴을 가만히 살펴보면, 눈이 특별한 빛으로 밝혀져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나이를 먹으면 표정은 희미하게 무디어지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눈이 보여 주는 반응도 젊은이들이 생각하고 기대하는 것과 다른 경우와는 틀리는 수가 많은 듯합니다. 그러나 노년은 내적인 특별한 빛으로 밝혀지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눈은 외적인 빛에 반응할 뿐 아니라, 인간의 내적인 마음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요? 인간은 빛이 없다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태양의 빛이라는 인간 신체의 외부를 비추는 빛에 민감할 뿐 아니라, 인간의 마음도 몸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 있으므로 마음속을 비추는 빛도 있을 것입니다.

노년은 특별한 빛에 밝혀지는 시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노인의 얼굴의 아름다움을 깨달은 사람은, 그 빛의 반영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젊은이에 비하면 추해 보이는 노인의 얼굴에도 고유한 개성적인 아름다움이 있는 것을 간파하지 못하는 사람은 무엇인가에 억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고락을 초월한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은, 그 세계를 밝히는 빛의 반영을 주름살 잡힌 얼굴에 눈부시게 빛내는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눈에서 가장 잘 반영됩니다. 노년에도 희로애락의 정은 아직 세차게 유지되어 있지만 그것을 억제하는 지혜가 있으며, 그 지혜는 특별한 빛으로부터 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또는 희로애락의 감정 자체가 젊었을 때에는 볼 수 없었던 빛을 띄고 있는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빛에 의하여 산다는 것은 요한 복음서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상기하게 합니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요한 1, 3-4)

‘말씀’이란 통틀어 모두를 존재하게 하는 자의 원리입니다. 인간이 살고 있는 한 인간 존재의 궁극적인 원리가 인간을 밝혀 줄 것입니다. 이 원리는 그리스도로 하여금 인간이 되시고,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특별한 빛이 되시어 지금 우리들을 비추어 밝혀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노년을 환히 밝혀주는 이 특별한 빛은 이렇게 태양이나 인간의 지혜에서 발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의 존재의 시초부터 계속 밝혀 주시며, 세상 종말에는 이 세상 전체까지도 비추어 밝혀서 주님의 재림을 알릴 빛입니다. 요한 묵시록에 있는 다음 말씀도 의미 심장한 말씀입니다.

“그 도성에는 태양이나 달이 비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 도성을 밝혀 주며 어린 양이 그 도성의 등불이기 때문입니다.” (묵시록 21, 23)

내가 일찍이 강렬하게 끌렸던 어떤 노인의 맑은 눈에는 이런 빛의 반영을 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너무나도 맑아서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인생의 고락을 넘어서 하느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늙음의 은총의 무한함입니다. 이것은 저녁놀이 아니라 어떤 새로운 빛입니다. 새로운 생명이 싹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무한하신 하느님 사랑에 눈뜨다

 

나이가 들면 “때로는 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며 오랜 세월 동안의 경험을 되돌아보면서 반문하는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부부간의 사랑, 또한 부모 자식 간의 사랑, 이 모든 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이었던가?

사랑의 이상은 알고 있는 셈이었지만 현실로서는 이것이 과연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를 의심하게 되는 일도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중, 정이라는 둥 하면서도 그것은 말치레일 뿐, 오로지 의무감만 내세울 따름이라고 회상하는 경우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단순한 의무감뿐이었다면, 남에게는 말할 수도 없는 어려움을 견디어 가며 부부, 부모 자식으로서 살아올 수 없었을 것이 확실합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모두 거짓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사랑이란 인간이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것 같은 달콤한 것은 아니며, 괴로움도 함께 따르는 것이라 짐작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반드시 바랐던 만큼은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감출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이 전혀 무의미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권리라든가 의무로서 결부되어 있는 인간 관계 만으로서는 인간은 살아가지 못합니다.

사랑이 아무리 어렵고, 아무리 거짓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사랑 없이는 행복해질 수 없는 듯합니다. 사랑은 인간의 생명처럼 신비한 것이란 기분이 듭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을 주시고, 하느님께서 그 사랑을 사는 방법을 밝혀 주시는 것이 아닐까요?

늙음의 은총은 삶에 눈뜸과 함께 사랑의 신비에도 마음을 새로이 여는 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젊은이들의 사랑에는 다만 황홀한 사랑에 도취도어서 그 심오한 의미에까지 생각이 미칠 여유가 없는 듯합니다. 생명에도, 사랑에도 거리를 두고 새로이 치우치지 않는 마음으로 다시 생각해 본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멋진 일일까요?

그러므로 이제야말로 하느님 사랑에 마음을 터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 그토록 그리워했고, 또한 그토록 무력함을 느꼈던 사랑은 하느님께서 인간에 대한 사랑에 마음을 활짝 터놓을 때에만 비로소 하느님의 은총으로서 실재화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까닭은 하느님이야말로 인간인 우리들을 사랑하기 위하여 괴로워하셨으며 최후에는 오직 하느님께서만이 가능하신 엄청난 일, 자신을 희생제물로서 인간에게 내어 주시기까지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느님과 일치함으로써 서로 사랑하는 은총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에 사랑의 신비가 있습니다.

구약 성서 중에는 야훼 하느님께서 얼마나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으며, 이스라엘의 온갖 배은망덕과 반항에도 불구하고, 야훼 하느님만이 마음에 품을 수 있는 깊은 사랑으로 계속 사랑하실 것을 다짐하고 계시는가를 잘 나타내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 아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너무 사랑스러워, 나는 이집트에서 불러 내었다….

걸음마를 그르쳐 주고

팔에 안아 키워 주고

죽을 것을 살려 주었지만

에브라임은 나를 몰라 본다.

인정으로 매어 끌어 주고

사랑으로 묶어 이끌고….

허리를 굽혀 입에 먹을 것을 넣어 주었지만….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남에게 내어 주겠느냐…

네가 너무 불쌍해서 간장이 녹는구나.

아무리 노여운들 내가 다시 분을 터뜨리겠느냐…

나는 사람이 아니고 신이다.

나는 거룩한 신에서 너희 가운데 와 있지만,

너희를 멸하러 온 것은 아니다.” (호세 11, 1-9)

 

우리들이 하느님께 바쳐야 할 사랑이 무시되고 배은망덕이 얼마나 하느님의 사랑을 괴롭혔는가 하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무리 노여운들 내가 다시 분을 터뜨리겠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들이 느끼고 있는 사랑의 메마름이나 무의미함이 모두는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만 가능한 사랑이 우리들을 감싸고 맑고 깨끗한 자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나는 사람이 아니고 신이다.”라는 말씀으로 그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을 상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죽음으로써만이 지금 우리들에게 하느님께서만 행하실 수 잇는 그 하느님이 현시되어 있습니다. 그 사랑이 있음에, 아무리 불순하고 무능한 우리들의 사랑일지라도 전혀 헛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것으로 하느님의 사랑에 마음을 돌리게 하실 것입니다. 노년에 이르러서야 말로 냉정히 객관적으로 이러한 하느님 사랑에 서서히 눈떠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하느님으로부터 좀 멀리 떨어져 있는 인생도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에 감싸여서 세상을 마칠 가능성이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제3부 늙음을 어떻게 사는가

 

사고의 방향

 

‘늙음은 은총’이라고 믿음으로써 노년의 새로운 생활 태도가 밝게 떠오릅니다. 노년은 신변 정리를 할 때도 아니며 죽음의 준비를 할 때도 아닙니다. 보다 적극적인 생활 태도로 알차게 생활하여야 할 때입니다. 성바오로 사도가 말하듯이 ‘나날이 새로워진다’는 생활 태도가 노년에는 있습니다. 제1부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노년의 지금까지의 생활 태도와 사회가 이것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비판하면서, ‘늙음은 은총’이라는 원리를 기초로 하여 새로운 생활 태도를 탐구하고 개척해 나갑니다. 노년의 심각한 시련마저도 그 곳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단순한 영적 유토피아로 끝내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앞으로의 사회 개혁까지도 목표로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노년에게 인생의 참된 가치를 인정한다면 인간 사회의 중심에 노년의 가치가 우뚝 살려져야 할 것입니다. 노년의 위치를 인생의 변두리에 자리잡게 하는 한, 항상 노년에 대한 편협 된 가치를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심어주는 것이 됩니다.

노년을 좀더 사회 문제의 중심에서 새롭게 포착하여 올바른 평가를 확립시키는 사색은 이 책에서 지금 다루고자 하는 바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그리스도교적 영성의 시도에 불과합니다.

 

 

노년의 건강 관리

 

병원에 가면 노인들이 많은 것에 놀라게 된다고들 합니다. 노인은 병에 걸리기 쉽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나이를 먹었다는 것만으로 질병에 걸린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노화 老化 그 자체가 질병이라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나이를 먹으면 신체가 쇠약해진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따라서 질병에 걸리기 전에 건강을 잘 관리하자는 것이 현대인의 사고 방식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건강을 관리하면 좋으냐 하면, 육체적인 건강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우리들의 현상입니다. 장수의 비결은 채식하는 것이라고 하기도하고 꿀을 날마다 조금씩 먹는 것이 좋다고도 합니다. 규칙적인 생활도 중요하지만 이것은 육체적인 건강 관리 이상의 것을 찾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조절이 필요해지기 때문입니다.

노년에 있어서의 건강 관리가 의학이나 심리학의 지식에만 의존하고 있다면 이것은 한쪽으로 치우친 것입니다. 인간이 살고 있는 것은 마음과 몸에 의한 것이므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정신적인 것이 무시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현대의 노인 의료 등은 한결같이 의학과 심리학에 맡기고 있는 형편이므로 한편으로 치우칩니다. 노년은 육체적 건강에만 유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노인의 인간성을 경시하는 것이며 노인을 늙은 육체로서만 간주하는 것이 됩니다.

노년의 건강 관리야말로 마음과 몸의 훌륭한 균형이 잡히도록 명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노약해지는 신체는 거기에 어울리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결코 육체를 무시한 정신주의적인 건강 관리 등에 빠져들어서는 안되지만, 오늘날처럼 마음을 무시해서도 안됩니다. 이렇게 된 까닭은 노년의 건강 관리를 과학의 힘에만 맡기는 과학주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시 노년은 몸과 마음의 관계를 깊이 결부시킬 수 있는 시기입니다. 젊은이들과는 달라서 노인은 몸 때문에 마음을 조절하는 일이 훨씬 수월해지며, 주체적으로 그러한 생활 태도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몸을 가장 깊이 마음과 결부시키는 신체의 인격화의 은총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는 노년의 건강은 전적으로 육체의 노화 방지에만 치우치는 일이 드물지 않습니다. 더구나 노화를 염려하여 기분을 젊게 가지려고 애씁니다. 이상적인 건강 관리법 치고는 이만큼 균형을 잃은 방법도 없을 것입니다. 노화를 막기 위해서는 젊은 기분을 갖는 것이 아니라 관대하고 여유로운 마음이 필요합니다. 늙은 신체에는 늙음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노년에 있어서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노년에 있어서의 건강 관리는 늙은 신체를 가장 인간답게 살리는 늙은 마음, 즉 늙음을 은총으로서 받아들이는 마음을 올바르게 키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일들은 어디까지나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을 것입니다.

 

 

질병도 살붙이

 

암으로 돌아가신 어떤 노인이 암도 살붙이로 여기고 암을 치료하기보다는 암과 더불어 살려고 애썼다는 이야기를 읽은 일이 있습니다. 실로 사려 깊은 생각이었으며 노인의 지혜의 뛰어남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병은 확실히 치유할 수 있겠지만, 인간에게 있어서의 질병은 기계가 고장 난 경우와는 대단히 다릅니다. 앓으면서도 인간은 살아 있습니다. 따라서 신체의 앓고 있는 부분만을 제거하면 된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질병을 제거하기보다는 병든 몸을 자신의 몸으로서 받아들이는 편이 인간의 생활 태도로서는 근본적으로 요청되는 일입니다. 만일 병에 걸렸을 때에, 단순히 신체의 일부가 고장났다는 해석아래 그 부분에만 정신을 집중시킨다면 자기 자신은 소외당합니다. 장기 이식 등에 의한 치료는 질병도 일개의 부품 교환으로 제거된다는 인상을 줄지도 모릅니다.

애당초 인간에게 있어서의 신체는 단순한 육체가 아니라 내 몸이라는, 인격화된 육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질병도 살붙이라는 말의 살이란 바로 그러한 인격과 떼어 놓을 수 없는 육체에 대한 의식일 것입니다. 의사가 우리들의 육체를 생물한적인 생각 하에 처리하면 된다고 판단한다면, 인간의 신체를 인격과 분리시켜 기계처럼 생각하기 쉽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현재의 의료가 인간의 신체를 소회시키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 뜻에서는 병을 치료하기보다는 병든 몸을 자신의 것으로 하는 편이 근본적으로 가치가 있습니다. 병을 고친다는 것은 인간을 고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있는 병을 낫게 하신 기적은 치료 행위보다는 인간 회복, 즉 구원입니다.

암과 같은 불치의 병이라면, 육체를 치료하려고 하기보다 그 암을 내 신체의 한 부분처럼 소중히 할 일입니다. 사실 많은 말기의 암환자들이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자신의 질병을 자신의 운명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노년에 있어서의 병과 치료는 우선 인간으로서의 신체의 회복을 우선으로 삼아야겠습니다. 체력만 있으면 불문곡절하고 수술로 병을 제거하려고 할 때 노년의 삶이 상처받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대수술을 받고 2, 3년을 더 연명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기보다는, 살아 숨쉬는 기간은 비록 짧아진다 하더라도 몸을 자신의 것으로서 병과 더불어 사는 편이 더 소중하지 않을까요? 병을 통하여 인간의 사람의 깊은 뜻을 배워 증명할 수가 있게 된다면, 생명의 장단 長短은 2차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젊은이와 비교하는가

 

나이가 들면 아무래도 육체의 쇠퇴가 마음에 걸려서 젊은이들에게 관심이 갑니다. 육신의 늙음은 피할 수 없다 하더라도 마음만이라도 젊음을 되찾고 싶어하는 일이 흔히 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지고 있지만, 글쎄 과연 그럴까요? 인간에게 있어서 육신은 소중하지만 육체적으로 젊기만 하면 좋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육신과 마음은 따로 떼어놓을 수는 없지만, 육신보다는 마음이 더 소중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육체적인 쇠퇴에만 마음을 빼앗길까요? 마음만이라도 젊음을 되찾고 싶어하지만, 젊은이들의 기분이 그토록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젊음에는 미숙함이 있게 마련인데, 나이든 보람도 없이 젊음에 그렇게 그리움을 느끼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그것은 노년에는 육체의 쇠퇴 이상으로 정신의 쇠퇴가 잠재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유물론자는 정신도 물질에서 생겨난다고 믿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는 물질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어떤 정신적인 것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맹목적 신앙이나 지나친 광신도 아닙니다. 이성적 판단에 따라 그렇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노년의 위기가 결코 육체적인 쇠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적 위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만일 인간 정신의 가치를 믿고 있다면, 노인의 육체의 쇠퇴를 한탄할 것이 아니라 노년에 있어서의 정신 생활의 풍요로움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노년에는 인생의 어느 시기에서도 구사할 수 없었던 정신 활동이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죽음이 가까웠음을 느낄 때, 그냥 육체의 쇠퇴에 허덕일 것이 아니라, 인생의 어떤 시기보다도 나와 내 몸을 깊이 반성함으로써 풍요로운 정신의 활동이 가능한 때라고 생각할 일입니다. 노년에는 노년 특유의 풍요로운 정신세계가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자신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면 수비게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뒤돌아보면 20세 안팎 때에도 인생을 논한 일이 있었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40대에 들어와서도 자기 나름으로는 인생살이를 다 깨우친듯한 얼굴로 걷어붙이고 닥치는 대로 일해 왔지만, 지금 와서 조용히 생각해보면 역시 아무것도 몰랐었다는 것을 느끼는 때가 있습니다. 인생을 오랜 세월 동안 살아왔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반성하는 것이므로 노년에는 정신적인 풍요로움이 있다고 하겠지요. 다사다난 多事多難 한 인생을 걸어온 사람일수록 특히 그렇게 느낍니다.

그래서 새삼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을 수가 있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누구든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깊이 고민한 경험이 있습니다. 인생을 이상적으로 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중년쯤 되면 이제는 이상 따위는 찾지 않고 오직 현실적으로 살아가는 어려움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고민합니다.

죽음이 현실적인 문제로 성큼 다가옴을 느끼기 시작할 때부터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새삼스럽게 다시 묻게 됩니다. 그것은 한정된 인생을 어떻게 계획적으로 살면 좋은가의 구체적인 문제로서 정리해 버리는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야 말로 진정으로 삶의 의미를 묻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남아 있는 한정된 인생의 삶의 태도가 아니라 당초에 인생이란 것은 어떠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현대인은 생활할 수 있으면 인간이 살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활에는 무엇 하나 부자유함이 없더라도 살아 있다는 실감이 나지 않아서 번민하고 있는 사람이 있음을 잊기 쉽습니다. 그것은 먹고 살기에 어려움이 없는 인간의 사치스러운 감정이라고 단정해 버릴 테니까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도 있지만, 생활의 고민을 계기로 인간이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끝까지 탐구해 낸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생활이 어렵더라도 밑바닥까지는 몸을 타락시키고 싶지 않다는 의지로써, 인간다운 삶의 태도를 정신적인 면에서 찾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강한 자아 의식으로 으스대며 산다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어떤 생활 태도를 취하더라도 항상 살아 있음을 의식하면서 살고 있으므로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 그 의식은 깊이를 더합니다.

인생을 무엇인가 그가 행한 업적의 가치만으로 가늠하려 한다면 지금까지의 생활이 쌓아 올린 산다는 것의 의식 가운데 함축되어 있는 이러한 귀중한 체험의 가치를 상실할 것입니다. 아무리 평범한 인생이라도 오랜 세월을 살아 왔다는 사실, 그 자체에는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개인적인 가치가 있습니다. 그 자체에는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개인적인 가치가 있습니다. 인격의 존엄이라는 것은 이러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이 그 사람에게만 느껴지는 의식으로서 인생을 살고 있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사람에게는 남에게 정확히 전달할 수도 없고 스스로도 헤아릴 수 없는 삶에 대한 의식이 있는데, 산다는 것은 그것을 소중히 하면서 산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거기에 어떠한 가치가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본인으로서는 소중히 간직하고 싶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별로 좋은 일도 없는데 왜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오직 죽는다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살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말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죽는 것이 두렵다는 이유만으로 산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적절하게 표현할 수 없는 살아있다는 사실의 소중함 때문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소중함은 우리들이 느끼고 있는 살아 있다는 의식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도 내려 주시고, 그 존귀함은 헤아릴 수 없으므로 은총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종말을 향하다

 

노년 다음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늙음은 그저 종말을 향하여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죽음이 인생의 종말이라는 데에도 단순한 종말이 아닌 깊은 뜻이 있습니다. 도대체 인생의 종말이란 무엇인지 묻는다면 그렇게 쉽게 매듭지어지는 문제는 아닙니다.

노년을 밖에서 보는 사람에게는 문제의 해답이 간단하게 보이겠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인생의 종말이라든가 죽음은 각자 자기 자신에 직결되는 문제이므로 그리 단순하게 닥 잘라 결론지을 수는 없습니다.

노년을 남의 일처럼 생각하거나 죽음을 의학처럼 육체적인 현상만으로 취급하는 데에도 일면의 진리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리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래서 노년을 살아가는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현실로서 생각해 보면, 노년은 인간에게 완전히 얽매인다고는 할 수 없는 인생의 신비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신이 느끼는 것을 소중히 간직하여 그 의미를 나날이 찾아 나가야 할 것입니다. 노년은 흔히 말하는 것처럼 모두 다 알고 있는 종말인 죽음을 향하여 줄달음쳐 가는 인생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신비에 마음을 터놓을 나이입니다. 노년의 은총을 살기 위해서는 그러한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확실히 노년에는 몸도 마음도 쇠약해져 간다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쇠약함을 어떻게 살아 갈 것인가는 한 사람 한 사람 각자가 마음의 자유에 의하여 결정할 일이고, 결정한 것에 대해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일 수 있습니다. 쇠약함을 인생의 종말을 뜻한다고 인정하든 그 외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든 그것은 자유입니다.

노년을 인생의 종말을 향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완성을 향한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기준으로 완성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하는 데에 이르면 문제의 해답은 좀 어렵습니다. 흔히 말하기로는 생을 완수한다는 것인데 그 생이란 지상에 있어서의 육체적 생에 관한 일뿐일까요? 인간이 이 세상에서 꿋꿋하게 산다는 것은 확실히 하나의 완성입니다.

그 까닭은 이 세상에 있어서의 생은 그 나름으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있어서의 육체적인 생명을 특히 경시하는 사람에게는 완전히 이해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노년을 정신적인 완성을 향해 산다는 사고 방식은, 노년을 그 자체로서 높이 평가하는 것이 되므로 소중히 해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사후의 생을 어떠한 의미로든 좀 믿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그 나름대로 이해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세에 대한 동경이 없이 노년 그 자체에 이미 실현되는 행운이 확실히 있다고 한다면, 노년이 인생의 완성이라는 것에 대하 기쁨도 그만큼 클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젊었을 때보다는 노년의 쇠약함 가운데서야말로 십자가상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진정으로 마주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노년은 인생의 완성도 되는 것입니다.

 

 

노인의 시중을 들면서

 

‘노인의 집’을 방문한 많은 사람들은 거의가 비참하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노인의 집’에서 일하는 여러분들의 열심한 봉사에도 불구하고 노인은 되고 싶지 않다, 노인이 되더라도 이 지경까지 비참한 생활은 하고 싶지 않다는 사람이 많은 듯합니다.

그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노인이 존경 받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병을 앓고 있더라도 노인이 되면 인격이 무시당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린아이처럼 취급 당하는 노인을 보면 비참한 기분이 듭니다. 치매증 노인이니까 별도리가 없다고 자신에게 타일러 보아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앙금처럼 남습니다.

경로사상 敬老思想 이라는 도덕은 옛날부터 있었지만, 그저 관념으로서 남아 있을 뿐입니다. 좀더 현대의 노인과의 친교를 통하여 경로사상의 현실적인 동기를 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자신으로서는 할 수 없는, 다만 목숨만 붙어있을 뿐인 노인을 어떻게 생각하면 공경할 수가 있을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할 수 잇는 능력이 있다는 것만으로 인간을 평가하는 사고방식을 지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노년 고유의 생활태도는 살아 있다는 사실을 가장 깊이 의식하면서 산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젊은이들은 미래의 꿈을 동경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장년들은 사업에 몰두하여 모든 것을 사업에 집중시키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래에 아무런 꿈이나 애틋한 그리움도 없고, 특히 자신의 정력을 쏟아 부을 만한 일도 없어지는 노년에는, 인간은 다만 살아있다는 사실에 의식을 집중시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의 한 순간 한 순간을 누군가에 의하여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한 생활태도를 가질수록 인간은 자신의 힘에 의지하는 고집을 철저히 버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젊었을 때에도 중년 때에도 오직 자신의 능력만을 의지하며 살아온 인간이 노년이 되면 결정적으로 자신을 버리고, 이웃을 통하여 자신을 살려 주시는 하느님을 향하여 드디어 자신을 완전히 바칠 때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큰 희생을 동반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의 은총을 찾는 길밖에 없음을 알게 됩니다.

자신으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모든 것을 남의 신세만 지면서, 자신의 생의 의식을 더욱더 깊이 있게 하는 노인의 심중에서는 인가의 가장 존귀한 행위가 행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노인을 보살펴주고 시중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어떤 노인은 이 가장 존귀한 생의 의식을 병으로 말미암아 빼앗게 버리는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노인이 시중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그러한 사람 대신에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또한 노년기에 병 때문에 인간다운 가장 귀중한 의식을 잃고 오직 식물처럼 계속 목숨만 붙어 있는 사람들을 통하여, 그 가장 물질적이고 생물적인 면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들 자신에게 인간 생명의 존엄함을 철저하게 인정하도록 요구하고 계시는 것이 아닐까요?

 

 

은밀한 교만 驕慢

 

노년은 인생의 경험 면에서 풍족한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지식에 있어서도 여유 있고 풍족한 축적이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행하고 있는 행동들을 바라보면 그 무지함과 미숙함이 마음에 걸려서 어쩔 수 없다고 하는 데에는 확실히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모든 것을 모두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자기가 일생 동안 해 온 일이라 할지라도 아직 모르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해 온 일의 회상이었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늙음을 은총으로 받아들이고 풍족하게 살기 위해서 치명적인 장애가 되는 것은 은밀한 교만입니다. 불행한 노년이란 늙음을 은총으로 살 수 없는 데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은총은 교만 가운데에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늙음의 은총을 목전에 두고 불행한 만년으로 일생을 끝마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교만에 대한 경계를 늦춰서는 안됩니다.

힘에 겨운 것은 은밀한 교만입니다. 자칫 고립하기 쉬운 노년에게 있어서 모르는 사이에 은밀한 교만에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은밀한 교만은 고립의 골을 더욱 깊이 파이게 해 남과의 교제를 어색하게 합니다. 은밀한 자신의 교만을 겸손으로 착각하여 자기의 허상에 더욱더 틀어박혀 고고한 자세를 유지하게 됩니다.

왜 은밀히 교만해질까요? 우선 객관적으로 말하면 노년은 정신적으로 확실히 축복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랜 인생을 통하여 경험이나 노력에 의하여 쌓아 올린 풍족함은 젊은이에게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거기에서 다음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될 것은 그 풍족함은 자신의 노력만으로 쌓아 올려진 것이 아니라, 행운에 의한 것도 많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행운 같은 것을 망각하거나 무시해 버리고, 자신의 노력만을 높이 평가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에 빠져듭니다.

행운이라면 전혀 노력하지 않고 저절로 얻어진 것처럼 생각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계속 그런 노력을 했던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될 때, 애당초 노력할 수 있었던 그 자체가 다름아닌 행운이었던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도 우리들의 노력만이 아니라, 우리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원인으로 말미암아 살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노력의 결과로써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것은 확실히 인정하겠지만 그것 때문에 교만을 부릴 필요는 없습니다. 하물며 왜 은밀하게 교만을 부리지 않으면 안될까요? 마음으로부터 늙음을 은총으로 살기 위해서는 은밀한 교만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누구에게나 마음을 활짝 열어 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뜻에서 늙음의 은총을 서로 나눌 수 있도록 명심하면서 친교를 위한 노력을 위하여 여러모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늙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늙음이 은총인 것을 믿을 수가 있게 되면 우선 늙음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은총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늙음에 대한 고정 관념을 버리고, 되도록이면 객관적으로 가치 있게 늙음을 다시 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오랜 세월 동안 늙음에 대하여 소극적인 평가나 부정적인 견해가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나이를 먹으면 좋은 일이라고는 없다는 등의 고정 관념에 대하여 늙음은 은총, 즉 좋은 것으로 주어졌다는 견해를 강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늙음에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그것을 자랑으로 삼겠지만, 진실로 노년을 풍요로운 나이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사고는 차라리 부끄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육체의 쇠퇴에서만 노년을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의 변화를 근거로 늙음을 찾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60세가 되어도 신체의 쇠퇴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50세 무렵의 자신과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인생이나 세상에 대한 사고방식, 미래에 대해 희망을 갖는 태도 등에 대하여 돌이켜 보면 좋을 것입니다.

그 결과 기억력이 약해졌다든가 장래에 대한 불안이 증가되었다든가 하는 따위의 나쁜 점을 재빨리 찾아냈다 하더라도 그런 것에만 구애될 것이 아니라, 10년 전보다는 세상을 보는 안목이 넓어졌다든가, 사람의 마음의 깊이를 알게 되었다든가, 자신의 마음가짐이 견고해졌다든가 하는 식으로 사고의 방향을 바꾼다면 비약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의 큰 변화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둘도 없는 풍요로움입니다. 만일 자기의 인생이 10년 전에 끝났다고 한다면 얼마나 자신이 인간으로서 덜된 체로였을까 함을 깨닫는 것으로서 잘 이해가 가리라 생각합니다. 늙어 가면서 산다는 것은 멋진 일입니다.

따라서 늙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육체적인 쇠퇴만을 체념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이 아닙니다. 좀더 적극적인 인생의 가치를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늙음의 가치를 발견하면 발견할수록 기쁨으로 늙음을 받아들여 노년의 인생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늙음을 적극적으로 평가하기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 그것은 늙음에 대한 지금까지의 편견과 오해를 객관적이며 공평한 견해를 기초로 하여 제거한다든가 정정해가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때마다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됩니다. 객관적이고 공평한 견해는 과학적인 지신의 수용으로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단순히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차라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한 이성적인 자기 반성 등을 출발점으로 할 것입니다.

 

 

노쇠함과 함께 산다

 

늙음이 은총이라는 견해는 노약함이나 노쇠함을 그저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게 하지 않습니다. 노약함이나 노쇠함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인정하면서도 그 때문에 늙음의 다시없는 가치를 과소 평가하는 것 같은 일은 피합니다. 노약함은 오히려 늙음의 풍요함을 높여 주는 기회를 제공하는 점이 있다는 견지에서 체력의 감퇴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체력의 감퇴 그 자체를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노년을 살고 있는 인간이 받고 있는 풍요로운 인간적 가치가 노쇠함이라는 무가치함과 함께 존재한다는 이 기묘한 배합은 전혀 이해하기 힘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인간의 늙음의 풍요로움은 신비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늙음이 은총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노년의 약함을 신비로서 받아들일 때에 가장 큰 의미를 가집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을 가지고 노년의 약함을 지켜보면 그렇게 됩니다. 성 바오로 사도가 말하듯이 이 노약함은 그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의 힘이 활동하시는 마당이 되기 때문입니다.

노년의 육체적인 약함은 하느님의 은총에 의하여 우리들에게 새로운 육체적 가치를 받을 수 있으리라는 소망을 갖게 할 것입니다. 늙음의 은총이 육체적인 노쇠함이나 노약함을 새로운 육체 안에서 말끔히 제거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것이라면 노쇠함이나 노약함은 그저 체력의 감퇴라는 현실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디딤돌로 하여 육체 소생의 복음을 알리는 조짐이 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노년에 느끼는 체력의 감퇴는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때에도 의미가 있지만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이야말로 가장 깊은 의미로 받아들여지게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노쇠함은 죽을 인간의 숙명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노쇠함의 수용 태도의 차이가 생겨납니다. 죽음이 부활에의 길이라고 믿어진다면 육체적인 노약함도 부활에의 길로서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전혀 예상하지 못할 일이지만 노약함 그 자체가 새로운 생명에 의하여 대체되게 됩니다.

노쇠함은 그러한 신앙에 의하면, 늙음의 은총 가운데서도 가장 상징적으로 그의 은총을 두드러지게 나타내 보이는 것이 됩니다. 노쇠함 그 자체까지도 감사히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한 신앙을 아직 가질 수 없는 사람도 노쇠함을 좀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노력을 합리적인 노쇠함에 대한 인식을 발판으로 하여 받아들이고, 거기에 대한 가장 인간다운 수용 방법으로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육체적 고통 가운데서도 말 한마디 없이 그 상태를 그대로 받아들여서 죽음을 맞이하려고 애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인간의 약함이 얼마나 품위 있는 존귀한 존재로 다시 보게 되는가를 알게 되며,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죽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을 때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든가, 죽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담을 때는 어떤 때일까요? 진정으로 죽고 싶은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오히려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때의 경우가 더 많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죽고 싶은 마음이 든다든가 그런 말을 할까요?

그것은 삶에 대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피곤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죽고 싶다는 말을 할 뿐입니다. 그런 경우 사람은 죽음 그 자체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사는 일도 진지하게 생각한 후에 이행할 것입니다.

발작적인 자살은 다만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 뿐으로 죽음 그 자체는 깊이 고려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계획적으로 자살하는 사람이라도 죽음 그 자체보다도 생명을 어떻게 끊을 것인가에 생각을 집중시킬 것입니다.

죽고 싶다고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삶의 괴로움 때문에 죽음 그 자체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다만 지금 같은 삶은 이제 도저히 견뎌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러데 그저 죽음은 지금의 참기 어려운 삶을 끝내는 것뿐일까요? 삶 그 자체를 끝내는 것이므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 남몰래 은밀히 바라는 괴로움 없는 조용함 그 자체의 삶도 잃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죽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죽음이란, 지금과 같이 견디기 힘든 괴로움이 없는 삶, 그런 삶에 대한 상상에 불과합니다. 죽음은 자신의 입장에서 본 남의 죽음에 대한 인상에 의한 것입니다. 어느 누구나 다 그렇게 상상합니다. 죽은 사람은 잠자코 있는 것 같다, 죽은 사람은 얼마나 편안해 보이는가, 그래서 자신도 죽고 싶다고 상상하는 것입니다.

우리들로서는 죽음이란 그 자체를 상상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 자신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생명의 시작일지도 모릅니다. 남아 있는 우리들만 그 사람 생전의 생명이 끝났다고 단정할 뿐입니다. 죽음의 신비는 우리들의 생에 있어서 무엇인가에 애착을 갖게 하는 곳을 남기는 일일 것입니다.

아무리 죽고 싶도록 견디기 어려운 생활일지라도, 인간답게 살려는 노력이 무 無 일뿐인 죽음을 바라기보다는 평화롭고 편안한 생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공상적인 죽음을 바라기보다는 배은망덕한 자신이나 오만 불손한 자신을 버림으로써 주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멋대로이고 자기 중심적인 사람일수록 죽고 싶다고 함부로 푸념하는 경우가 많을지도 모릅니다.

 

 

사후 死後를 생각한다면

 

늙음의 은총 중의 하나는 자신의 죽음을 생각할 때에 나타납니다. 나이와 더불어 자신의 죽음에 대한 불안이나 두려움이 줄어듭니다. 젊었을 때에는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여 끊임없는 불안에 얽매였던 것입니다.

젊은이는 죽음에 대한 불안을 진정시키기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죽음 따위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죽는다는 진리가 아무리 해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결국 ‘금방 죽을 것도 아니니 근심할 필요가 없다’고 마음을 달래서 사그라뜨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노년이 되더라도 죽음의 불안으로 괴로움을 당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보편적인 사실을 체험으로 알고 있으므로, 죽음에 대한 마음의 준비도 어느 정도는 되어 있는 듯합니다. 적어도 옛날처럼 무턱대고 불안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냉정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경험이라든가 노력으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체력이 쇠약해졌으므로 살 의욕도 점차로 줄어들어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된다는 사람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노년에는 인생의 종말에 대한 의식이 강해지므로 오히려 생에 집착한다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역시 늙음의 은총은 서서히 죽음을 객관적으로 받아내도록 노력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은총으로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은총을 어떻게 받아내고 있을까요?

죽음에 의하여 우리들 자신이 어떻게 도리 것인가 하는 당연한 의문이 있습니다. 죽음을 냉정하게 판단하는 은혜는 사후의 진리를 되도록이면 인간적으로 판단하기 위하여 주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위하여 어떤 사람에게도 인간의 가장 숭고한 본성인 하느님을 찾는 경향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인은 좁은 과학적 지식만을 믿는 경향에 따라 여유를 가지고 깊이 종교적 진리를 탐구하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은총을 그저 합리적인 사후의 정리에 써 버릴 뿐입니다.

혹은 참된 종교심을 키우는 대신 신화적인 사후의 운명에 관한 가르침에 집착해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은 사후를 현재 생활의 단순한 연장처럼 생각하여 그들에게는 사후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사후에는 천국이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도 이상하게 천국으로 초대해 주시는 하느님께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생전부터 하느님을 그리워하지 않는 사람이 천국에서 하느님과의 친교에 어느 만큼의 기쁨을 느낄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교에서는 노년의 죽음을 생각하는 은총과 함께 노년의 괴로움과 죽음의 괴로움 모두를 하느님께 바쳐,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은총을 바라면서 노년을 인생의 가장 충실한 나이로 삼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의 부활에 참여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집에서의 무한한 행복 된 생명에 대비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생각하고 사후를 생각하는 것을 큰 은총으로 소중히 받아들이고 더욱더 하느님만을 의지하고 살 때, 이 세상에 있으면서도 이미 영원한 생명을 사기 시작하게도 되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을 소중히

 

젊었을 때에는 그저 미래를 향해서만 늘 생각이 줄달음칩니다. 미래야말로 젊은이의 재산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재라는 시간이 빨리 과거가 되어 지나쳐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젊은이일지도 모릅니다. 오래되지도 않은 과거에 집착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노인에게 있어서는 지금이라는 시간을 아끼면서 사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과거의 추억에 빠지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수록 지금이라는 시간을 소중히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불확실한 내일의 일을 생각하며 오늘 할 수 있는 일은 오늘 중으로 해치우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서 노인 특유의 초조함이 생기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누구라도 지금을 어떻게 살 것인가가 중요해집니다.

지금이란 무엇일까요? 시간을 다만 흘러 사라지는 시간의 연속이라고 생각한다면, 지금이란 순간순간 지나가 버리고 마는 시간이라는 밀이 됩니다. 인간은 아무도 시간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으므로, 시간 가운데 머물러 서서 지금이라는 시간을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의미로서의 지금이라는 시간 같은 것은 없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시간의 흐름이라는 의식이 지금이라는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기나긴 인생을 살면 살수록 시간의 흐름에는 민감해지게 됩니다. 그런 뜻에서 노년은 진정한 현재에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노인에게는 앞날이 별로 없으므로 쫓기는 마음에 바삐 산다는 식으로서는 참되게 시간을 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시간의 흐름을 어떻게 의식하는가에 따라 지금을 참되게 살고 있는지 결정됩니다.

시간의 흐름에 떠내려가지 않고 그것을 깊이 의식한다는 것이 지금이라는 시간의 참되 생활 태도일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시간을 초월하여 그 흐름을 관망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원에서 지금 시간의 흐름을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눈으로 시간을 바라본다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인간이 생각하는 관념으로서 구체적인 시간의 흐름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인간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현재를 사는 은총을 선물로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와 같이 시간을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올바른 견해를 어떻게 자신의 것으로 말들 수 있는가 하는 큰 문제가 남습니다.

그것은 성서의 하느님께서 시간을 보시는 각도를 상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서의 하느님은 자연 가운데서 당신을 나타내시는 하느님이라기보다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서 당신을 나타내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성서를 읽으면 역사의 한가운데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느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죄 많은 인간의 때를 바라보고 계시는가 하는 것을 앎에 따라서, 지금이라는 시간을 진실되게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인내하심을 알아차리고 구원의 때임을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지금이라는 시간을 가장 소중히 하는 사람입니다.

 

 

하루의 노고는 하루로써 족하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앞으로 닥쳐올 일들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합니다. 걱정한다고 해서 해결되지도 않는 일들을 번거롭게 되풀이 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늙음의 은총을 사는 가장 중요한 생활태도는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내일 일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생활태도란 무책임하고 사려 깊지 못한 생활태도가 아닐까 하는 의문도 생깁니다. 인생의 지혜의 풍족함을 받고 있는 노년이 경박한 하루살이 인생을 옳다고 긍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일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 함은 내일을 마치 자신의 힘으로 가져올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이나 인간의 힘이란 것에 과신을 갖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에서 진정한 노년의 지혜는 내일이라는 날은 인간은 자신의 힘 만으로서는 도저히 가져올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시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일을 어떻게 살면 좋은가 하는 것을 여러 가지로 고민해 보았자, 인간의 지혜로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께 마음을 돌리지 않는다면 오만한 허무주의에 빠져들어서 하루살이 인생을 방자하고 뽐내며 살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내일 일을 혼자서 걱정하지 말고, 그 대신 오늘이라는 날에 주어진 일에서 하느님 앞에 마음을 열고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란 천상에 있는 영 靈의 나라도 아니며, 사후의 영계 靈界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하느님이 참되게 다스리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심”이라 함은, 하느님께서 우리들을 올바르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을 받아들여 올바른 인간이 되기를 희망하시는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금 이 세상을 하느님께서 정말로 다스리시고 계시다고는 믿어지지 않으며, 그렇게 믿고 싶지도 않다고 할 정도로 우리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죄를 용서해주시고 하느님 품 안에 맞아 주신다는 것을 믿는 일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곧 우리들이 하느님의 의를 찾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하여 만일 우리들이 지금 이미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세상에 살고 있다면, 더 이상 내일 일을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대신에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고, 내일이라는 날이 또 주어지면 또한 그 하루를 힘껏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 때에 그 하루하루는 영원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 까닭은 지금 또는 오늘을 하느님의 다스리심에 의하여 살 때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이므로 이미 영원에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은총은 노년이기에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매일매일을 하느님과 그 영원에 애착을 가지며 산다면 내일 일을 골똘히 걱정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과거를 회고하는 방법

 

노인은 과거에 산다고 할 정도로 나이를 먹으면 옛 추억에 대한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습니다. 지난날의 좋았던 추억 속에 산다는 것은 좋은 일일 것입니다. 지금의 생활이 어렵다든가 쓸쓸하다든가 하면 자연히 과거의 추억으로 돌아갑니다. 그것으로써 지금의 생활을 견뎌 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래에 대해서는 불안밖에 느끼지 못한다, 과거가 좋았던 만큼 미래에는 보다 좋은 일 따위는 이제 바라지 못한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미래의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과거로 되돌아가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현재는 진지하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바로 현재와 미래에 사는 것입니다. 현재를 사는 인간에게 있어서 지난날의 추억은 현재와 미래에 사는 의욕을 북돋우고 회고하는 방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서의 백성은 거듭 되풀이하여 애굽 탈출이라는 과거의 사건을 상기하면서 미래로 눈을 돌려 구원을 바랐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출애굽이라는 사건 한가운데에서 하느님의 역사 役事하심을 강렬하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과거를 회상하는 방법을 반성해 보면 어떨까요? 자신의 입장에서 보아 즐거웠던 일이라든가 좋았던 일들이 우선 머리에 떠오릅니다. 이렇게 지금의 괴로운 상태에서 과거의 즐거웠던 일만을 회상하는 것으로서는 객관적인 회고가 되지 못합니다. 또 인간의 안목을 보아서는 불행했던 과거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행복했었는지 불행했었는지 분간할 수 없다는 쪽이 많지 않을까요?

지난날을 회상하노라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인가, 이것이 인생의 전부인가 하는 덧없는 기분이 드는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부귀 공명을 이룬 사람일지라도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은 인류의 숙명으로서 체념해 버리고 헛됨을 철저하게 살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는 과거도 미래도 없고, 시간을 초월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은 시간을 사는 것이 본성적인 특징이므로 여간 철저하게 인생을 관념화하지 않는 한, 그렇게 쉽사리 체념해 버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과거에 공통되어 있는 근원적인 허무를 기반으로 하여 철저하게 미래에 도박을 거는 것입니다.

현재의 삶을 기반으로 하여 추측할 수 있는 그런 미래가 아니라 현재와는 단절되어 있는 순수한 미래라는 것을 믿어본다면 어떨까요? 과거의 어떤 회상도 궁극적으로는 인간에 어울리는 생활 태도는 아니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좀더 결정적인 행복한 삶이 없어서는 안되겠다라는 순수한 미래를 향해 우리들의 마음을 열어 놓는 것 같은, 그런 과거의 회고 방법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한 순수한 미래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으로서 인간이 예측한다든가 계획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노인과 인생의 시련

 

고령자의 자살 소식이 자주 들려옵니다. 이것은 현대 사회에 그 원인이 있다고들 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말해서 노년은 결코 평온한 나이가 아니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평화로운 노후를 원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노년은 시련에 휩쓸립니다. 그것도 냉엄한 시련입니다. 예를 들면, 친한 사람과의 사별의 괴로움 등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랜 세월 동안 곁에서 시중들던 배우자와의 사별 死別이든가, 자기의 목숨과도 같은 자식과의 사별에 즈음해서는 살아 있다는 의미가 완전히 상실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노년을 과연 은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러한 시련을 당할 때마다 산다는 의미 그 자체를 문제 삼게 됩니다. 사람은 가장 사랑하는 아내 때문에 산다는 의미를 잃게 됩니다. 또한 가장 사랑하는 자식 때문에 산다는 의미도 잃게 됩니다. 사업이나 연구를 인생의 의미라고 고집하여 앞세워 보더라도, 잃어버린 의미와 맞바꿀 만한 것은 못됩니다.

그럴 때 어떤 노인은 오랜 비탄에 잠긴 끝에, 이제까지 자기 자식이라고 생각했던 가장 사랑했던 자식이 실은 하느님께로 맡겨졌던 자식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자신의 인생의 가장 심오한 의미가 하느님을 위해 사는 데 있다는 것을 찾아내고, 목숨이 붙어 있는 한은 열심히 살아가지 않으면 하느님 앞에 면목이 없다고 생각하여 새롭게 인생을 살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자신의 인생이 자신을 위해서만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자기가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만 있는 것이라고도 생각하기 쉽습니다. 비록 자기가 살아갈 노력을 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생명은 주어진 것이라는 것을 잊고 말입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졌다는 것을 까마득히 잊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들이 자신의 생명을 자신에게 내려주신 분을 위해서 살 수 있게 된다면 가장 잘 어울리는 생활 태도, 가장 알찬 생활 태도를 지닐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들은 거기까지 심오한 의미를 생각하면서 살기는 어렵습니다. 사별의 시련을 겪음으로써만 그러한 인생의 가장 심오한 의미를 맛보면서 살 수 있게 될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렇다면 노년의 냉엄한 시련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늙음은 은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시련이 냉엄할 때일수록 은총도 풍성하게 주어지는 것 같습니다. 현대와 같이 생활의 불안을 견뎌내지 못하여 죽음을 택하는 노인이 끊이지 않을 때에도, 젊은이들마저 절망적인 상황으로 느끼는 가운데서도 끝내 꿋꿋하게 살아가는 노인이 결코 적지 않다는 사실이 그것을 입증합니다.

노년이 은총의 나이인 것을 알면 알수록 어떤 시련에 대해서도 하느님의 은총만을 기대하고 살 수가 있으므로, 불안을 극복해 내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노약함 가운데서도 시련을 겸허하게 참아 받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언제까지 살면 좋은가?

 

앞으로는 의학의 발전으로 인간은 모두 오래 살 수 있게 됩니다. 죽음도 더 이상 두려운 것이 아니며, 살아있는 상태 그대로 죽은 것 같은 편안한 죽음을 선택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자신이 살아야 할 시간을 스스로 결정해야 됩니다. 이미 안락사 安樂死를 인정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러한 결단이 준비되어 있을 것입니다.

옛날 사람들처럼 사람에게는 하늘이 정해놓은 인생의 수명이 있는 것이라고 믿는 대신, 인간 이성만으로 인간다운 생명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를 결정지어 놓고 언제까지 사는가도 스스로 결정하고자 하는 것이 앞으로의 인간일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인간다운 생명이라는 사고 방식 가운데는 현대인의 사고방식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과학밖에 믿지 않는 사람에게 인간다움이 과연 어떤 것인가라는 판단을 하게 내버려 두어도 좋을까요? 쾌락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현대인의 행복관만으로 인간다운 생명이 어떤 것인가를 결정해도 좋을까요?

과학의 발전에 따라 명백해진 인간 생명이라는 것은 그 신비를 처음부터 부정하고 있는 일이 많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했다 하더라도 인간 생명의 신비에 대한 실감은,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자취를 감추는 것이 아닙니다.

과학이란 우리들에게 있어서 대단히 소중한 이성의 활동 방법입니다. 그 방법만을 엄밀히 본다면, 한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인간 생명에 관한 진리를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이성은 과학적인 테두리 밖에서도 얼마든지 활동할 수가 있습니다. 특히 인간의 생명이라는 점에 이르러서는 모든 사고 방식을 동원하여 쓰지 않으면 진리에는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철학이라든가 종교에 의한 사고방식이 소중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언제까지 살면 좋은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우리들의 이성만으로 대답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의문입니다. 그 까닭은 인간의 생명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인간의 생명이 왜 주어졌는지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단순히 육체적인 생명으로 끝나지 않고, 영원한 생명으로 완성되도록 우리들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단순한 죽음을 찾아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인간의 엄숙한 죽음은, 인간에게 죽음을 초월하는 영원한 가치를 상정 想定 하지 않는 한, 상대적인 견해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은 언제까지 살면 좋은가? 라는 것을 결정짓지 않으면 안 된다면, 그런 일은 인간으로서는 결정지을 수 없을 것입니다. 노년도 인간의 생명에 영원한 가치를 찾지 않는 하, 그 참가치를 발견해 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 목숨을 부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노년은 인생에 있어서의 신비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또는 노년에야말로 인생의 신비가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인생에는 신비 같은 것은 없다, 인생은 합리적으로 살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참된 노년을 사는 것이 못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경로 잔칫날을 앞두고 노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 거의 매년 전해집니다.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게 되고 정신이 희미해지기만 하는 노인에게 있어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어떤 의미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은 진정 합리적인 생각일지도 모릅니다.

자기도 용기만 있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인생을 마치고 싶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민일 그것이 본심에서 우러나온 말이라면, 그 사람은 노년을 낮추어 보면서 살아 온 것이 틀림없습니다. 말로는 숙년이다 실년이다 하며 떠들어대면서도 본심은 오래도록 살아 남는 것을 치욕으로 여기고 자조 自嘲의 웃음이 새어나오는 것을 억제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노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간은 어떤 시절이건 간에 온전히 합리적으로만 산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자기로서는 자신의 이성을 의지로 삼아 살아 온 것 같지만, 인생살이에는 계획대로 되지 않았던 일들이 너무나도 많았다고 회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던 일 가운데서 얼마만큼 실현된 일이 있었던가, 자신의 계산에는 차질이 있었던 것은 아닌데 생각대로는 되지 않았다, 요행히 일이 계획대로 잘 진행된 것은 다만 행운이었다고 할 수 밖에 없다고 하는 편이 현실일 것입니다.

사람은 노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지금까지는 자신의 능력으로서 살아 온 셈이었지만, 실은 누군가에 의하여 살아 왔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이가 들어서 아무런 산 보람도 찾을 수 없게 되었을 때야말로, 지금까지 자신을 살려주신 분에게 자신을 맡긴다는 생활태도로 인생을 진실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젊었을 때, 자신으로서는 깨닫지 못했었지만 사실은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살아왔던 것인 만큼, 노년에 이르러서는 모두 자신의 힘만으로 합리적으로 살겠다고 안달할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 앞에 마음의 문을 활짝 터놓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들을 살려주는 많은 이웃들과 함께 맨 처음부터 인간을 살리시고 계시는 궁극적인 존재자에 대하여 눈뜰 가능성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자신이 살도록 배려해 주는 많은 이웃들 때문입니다. 특히 인생을 주시고 지금까지 떠받쳐 주시며 살려 주신 하느님을 위하여 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노년의 생의 신비는 그러한 심오한 심경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곳에 있습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노년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시작되지 않는 참된 인생입니다.

 

 

거칠어지는 노년

 

청년기의 반항에는 부모나 사회에 대한 응석이 있습니다. 장년기의 방탕이나 부도덕에도 인생의 모순을 분명히 호소하며, 그 허무함에 공명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노년에 있어서의 인생의 모순이나 견디기 어려운 시련은 엄살이나 반항에 의하여 기분을 얼버무려 달래는 따위의 짓으로서는 극복이 불가능합니다. 욥의 시련처럼 한 번은 받아들여도, 너무나도 끔찍한 시련에는 하느님과의 대결마저도 불사하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차분한 마음으로 노년을 맞이하고 싶은 소망과는 정반대로 노년이 겪는 현실에는 외견상으로는 어떻든 간에 마음 밑바닥에서는 하느님과라도 맞설 수밖에 없는 인생의 모순을 느끼는 일이 있습니다. 마음의 평화와 인간적 성숙에 축복받은 노년기라는 이미지는 한 토막의 신화일는지도 모릅니다. 현실의 노년이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러한 신화적인 이상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젊었을 때부터 쭉 고민해 온 인생의 모순에 대하여 노년은 결정적인 해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이렇게 진지하게 심사 숙고하면, 결국은 하느님께로 향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 하느님은, 인간 삶의 이상이 창출해 내는 따위의 관념은 아닙니다. 단순한 우주 질서의 궁극적인 소지자 같은 신도 아니며, 인간의 대결을 향하여 마주서며 인간의 심정에 진정으로 관심을 가지고 인간과의 상관 관계에 책임을 지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러한 하느님 앞에서 인생을 결정적으로 다시 반성할 때, 현재의 인생의 모순된 존재에 대하여 하느님의 분노의 조짐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진정으로 우리들 인간과 책임이 있는 상관 관계를 유지하시고자 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하느님을 망각한다든가, 무시한다든가 하는 부당한 행위와 거기에서 비롯되는 죄악에 대하여, 분노를 나타내시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현재의 인간 생활태도는 확실히 하느님의 노여움 아래 있습니다. 인간의 생활태도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시는 하느님이시라면 더욱 그렇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노년에 있어서 하느님과의 참된 만남은, 인간의 심신이 박약함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참된 분노하심 아래에 있는 인간의 삶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때야말로 진리를 살기 시작하는 인간의 사랑과 평화가 있을 것입니다. 시편 90편에는 현대인의 노년 신화 대신, 참된 노년의 현실이 담겨 있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누가 당신 분노의 힘을 알 수 있으며,

당신 노기의 그 두려움을 알겠습니까?

우리에게 날수를 제대로 헤아릴 줄 알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이 지혜에 이르게 하소서.

 

야훼여, 돌이키소서, 언제까지 노하시렵니까?

당신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동틀 녘에 당신의 사랑으로 한껏 배불러

평생토록 기뻐 뛰며 노래하게 하소서.” (시편 90, 11-14)

 

“당신 진노의 열기에 우리의 일생은 사그라지고

우리의 세월은 한숨처럼 스러지고 맙니다.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 년, 근력이 좋아야 팔십 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에 젖은 것.

날아가듯 덧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교회의 기도’)

 

우리들의 거칠고 황폐한 노년에 있어서 하느님의 분노하심에 마음을 열 때 헛되이 지나치려던 인생도 하느님의 사랑에 쌓여, 참된 기쁨과 평화를 느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노년 고독의 의미

 

노년의 생활은 한마디로 고독을 견뎌 내는 노력입니다. 소일거리도 없고 몸도 잘 움직이지 못하게 되면, 친구들과의 만남도 나날이 한정되어 갑니다. 더욱이 해마다 친하던 사람들이 죽어 갑니다. 어떻게 자신의 고독을 감출 것인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리석게 푸념하며 살게 됩니다.

노년이야말로 인생의 보편적인 현실로서의 고독을 마주하여, 그 의미를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될 때입니다. 이제는 다만 도피만을 계속할 수는 없습니다. 막다른 골목까지 바짝 몰리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고독 따위에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친구가 없어 인간적인 친교를 가질 수 없다는 데서 오는 고독은, 그 고독함을 해소하는 방법을 생각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짐작합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스스로 고독을 찾아 나서는 수도 있습니다. 자기 혼자가 되어서 자신의 일을 생각해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수도 있습니다. 자기 혼자가 되어서 사랑하는 사람의 일을 생각해 보고 싶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고독은 인간이 진실 하려고 할 때 절대로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노년이 인간에게 있어서 깊고 충실한 시기라고 한다면, 고독은 독특한 요소로서 노년 안에 존재해야 할 것입니다. 노년이 주어진 은총이라고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고독도 주어진 은총으로서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노년이 풍요로운 인간적 가치에 충만해 있으면 있을수록, 고독에도 깊은 뜻이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노년의 은총 가운데서 가장 심오한 것은 사랑의 은총입니다. 노년에야말로 젊은 사람들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깊은 인간적 사랑의 사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독은 이 사랑으로서 어떤 뜻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예를 들면 젊은 시절에는 사랑에 의하여 고독이 해소된다는 뜻에서, 고독이 사랑을 깊게 해 준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년의 사랑에 있어서는 고독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고독을 동정하면서 그대로 고독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협력해 나가는 것입니다.

노년에 있어서의 사랑의 은총은 고독을, 인간을 초월한 분과의 만남과 친교를 맺기 위해 필요한 그런 고독으로서 발견해 내는 데에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어떤 시절에도,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라도 보다 높은 사랑을 위해서 고독을 느끼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서로 사랑한다는 것이 인간의 사랑의 전부는 아닐 듯합니다. 참 사랑이라면, 사랑이 깊어질수록 참되게 사랑할 수 없는 고독을 느끼는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성 性과 더불어 단순한 생물학이나 심리학으로 설명을 다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사랑하면서, 인간을 초월하여 하느님께로 사랑을 열어가는 노년의 사랑은 깊은 고독 속에서 터득하는 것이 아닐까요?

 

 

고독에서 새로운 생활 태도로

 

노년을 산다는 것은 고독을 사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장수할수록 그러한 사실을 실감할 것입니다. 사별한 부모 형제를 회상한다든지, 또한 가버린 친구를 그리워하더라도 과거의 추억만으로 고독을 견뎌 낼 수 있을까요? 오히려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의미가 모호해질 것입니다.

다행히 나한테는 손자가 있다, 손자의 얼굴을 바라보면 이미 죽은 육친의 정은 잊고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손자에 의하여 자신의 핏줄이 자신의 죽음을 넘어서 면면히 이어진다고 생각하면, 말로서는 표현할 수 없는 편안함을 느낄 것입니다. 확실히 핏줄이란 인간을 단단히 결속시켜서 우리들의 죽음마저도 초월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혈연의 굴레만을 의지하는 사귐은 너무나 협소합니다. 그 협소함을 깨는 것이 결혼입니다. 남녀가 각각 양친을 떠나서 새로운 가정을 만듦으로써, 인간의 사귐은 혈연 관계에서 좀더 넓게 확대되어 갑니다.

고독을 뛰어넘으려면, 지금까지의 혈연 관계 등에 구애 받지 말고 새로운 사귐을 찾아 새로운 생활 태도를 발견해 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한 가지 결심이 필요합니다. 스스로를 자신의 지금까지 생활 태도에 얽매이지 않게 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자신 안에 죽고 다시 소생하는 새로운 생활태도입니다. 대단히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노년은 다만 죽음만 기다리는 고독한 세월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들을 그러한 노년에서 구출해 주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명하셨다고 짐작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마태 10, 37-38)

 

혈연으로 너무나도 단단히 결속되어 있는 유대인들의 가족관계를 비판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은 극단적인 말씀도 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은 아버지와 맞서고 딸은 어머니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다.” (마태 10, 34-36)

 

노년의 고독 가운데에서야 말로 지금까지의 혈연이나 우정 관계에 집착하지 않고, 그것을 뿌리치고라도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생활 태도를 시작하는 은총을 청해야 합니다. 그것은 결코 단순한 혈연으로부터의 이탈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에 눈뜨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과 형제가 되고 새로운 가정,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서 살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원한 생명의 시작입니다.

 

 

노년과 직업

 

노년의 고유한 생활태도와 그 인간적인 가치에 우리들이 눈뜨게 되면,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이 요구되게 됩니다. 오늘날의 고령화 사회라는 견해에는 노년관이 올바로 거론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로지 경제적인 견지에서만 고령자의 생활이 문제되고 있을 뿐입니다. 사회의 고령화와 더불어 노인이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가 잘 분석됩니다.

고령자를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어느 정도 인간적으로 대접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오늘날의 사회 구조에 대단히 큰 변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고령자는 사회의 주변적인 존재이거나 사회의 거추장스러운 짐으로밖에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노인을 무능하게 여기고 차별해 온 이상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오늘날의 사회에서 고령자의 취직이 얼마나 불리한 조건하에 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임금 문제뿐 아니라 직종에서도 분명합니다. 고령자가 그 풍부한 경험을 살릴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경제우선의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일까요?

인간 사회를 경제 가치의 위에 쌓는 대신 인간적 가치에 기초를 둘 수 있게 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이상일까요? 물론 어느 한 지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그런 이상을 확립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오늘날과 같이 다양한 가치관을 무시할 수 없는 시대에는 전혀 터무니없는 과제일는지도 모릅니다.

궁극적으로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가 끝나고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에 의한 새로운 질서가 이 세상에 도래하지 않는 한, 인간으로서는 달성할 수 없는 사회의 이상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기틀로, 참된 인간적 가치 위에 인류 공동체를 이루는 일을 하느님의 은총 아래에서 시도해 왔습니다. 노년의 올바른 수용 태도는 그러한 그리스도교적 이상 아래에서 사회적으로 실현되도록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노년에 어울리는 직업의 종류는 오늘날에 말하는 자유업입니다. 오늘의 사회에서는, 자유업은 무제한으로 늘릴 수도 없으므로 높은 능력이나 자격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오랜 인생의 경험과 풍부한 지식, 뛰어난 판단력을 가진 노인은 상상외로 많을 것입니다. 그러한 분들의 활동이 어느 만큼 사회를 인간적으로 만들고, 풍요롭게 만들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날까지의 노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 대우가 그것을 저해하고 있는 것은 유감입니다.

늙음의 은총을 오늘날의 사회에서 구체적으로 살리려면, 노년과 직업의 문제에 관하여 사회 전체가 어느 정도의 근본적인 변혁의 필요성을 좀더 깨우쳐야 할 것입니다.

 

 

노년의 사랑

 

최근 노인의 성 性문제를 문제 삼고 있는 모양이지만, 애정 문제는 ‘노인의 집’에 있어서의 연애라든가 질투 같은 문제 외에 별로 진지하게 문제 삼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고령자들 사이에서도 이혼이 증가한다고 합니다. 노년에 있어서의 사랑은 굳이 말하면, 부모 자식 간의 사랑, 손자에 대한 사랑 같은 것이 떠오르며, 부부간의 사랑이라든가 넓게는 우정의 중요함 등에 대해서는 별로 고쳐 생각하는 일은 없는 듯합니다.

노년에는 사랑이란 없는 것일까요? 육체적 심리적인 노화가 사랑을 빼앗는다면, 사랑이란 신체나 기분 문제가 그 본질이 되겠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노년의 사랑을 성적인 면에서만 주목하려는 현대인의 편견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젊은이들의 사랑을 모두 성적 욕구라고 해석하여, 정신적 사랑 따위는 없다고 무턱대고 나무라는 것은 젊은이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랑이란 육체, 특히 성과는 밀접히 결부되어 있지만 근본적으로 성욕 性慾만으로는 설명을 다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인간 정신의 심오한 활동을 그 근본에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인간의 사랑은 육체적 교합으로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인품과 사상과 윤리 등 모든 면으로 확산되어, 그 사람 자체를 사랑하게 되는 것으로 완전히 가득 채워집니다.

노약함이나 질병이 노년으로부터 인간다운 사랑을 빼앗아 간다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노년이야말로 인간다운 깊은 사랑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시기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노년에는 누구를 사랑할 것인가, 고독이란 노년 시기의 불가피한 현상이 아닌가, 도대체 어떻게 사랑이 생겨난단 말인가, 등등 여러 가지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그런데 우선 고독은 사랑의 불모지라는 사고는 잘못입니다. 진지한 사랑은 고독을 함께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고독을 완전히 해소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독은 사랑을 순화시키는 것으로서 사랑의 은총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고독하게 사는 일이 허다합니다.

사랑은 고독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고독을 견뎌내며 자신이 찾는 사랑, 지금 자신이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려고 노력합니다.

사랑에는 여러 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높은 가치를 한없이 추구해 보려는 바른 의미로서의 에로스 Eros, 자신을 어떻게든지 바치고 싶어 자신을 온전히 내어 줌으로써만 지금 받고 있는 사랑에 응답할 수가 있으므로 그렇게 하고 싶다는 사랑, 즉 아가페 Agape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노년이 인간에 있어서 지극히 풍요롭고 존엄한 인생의 삶이 표출되는 시기라는 것은, 바로 사랑의 풍요로움과 굳셈에서 나타날 것입니다. 좀 극단적인 이야기지만 인간은 노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사랑할 수가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우리들은 그런 노년을 아직은 잘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노년과 성 性

 

노인에게도 성욕 性慾이 있다는 것을 흥미 본위로 다루고 있는 신문-잡지가 있습니다. ‘노인의 집’에서 있었던 욕정으로 시작된 싸움이 살인 사건으로까지 번졌다는 사건도 있습니다. 추악한 노인에게 성욕까지 살아 있다고 조롱 삼아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의학자 등은 노인들의 성욕의 해소를 합리적으로 행하는 방법을 설명하며, 흥미 본위의 속설로 사람들을 계몽하려고 합니다. 노인이라고 해서 금욕할 필요는 없으며, 성욕이야말로 건강 유지에 필요하다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성은 인간에 있어서는 생식의 기능만이 아니라, 인간을 개성화하고 인격적 사랑에 눈뜨게 하는 것입니다. 성을 생물학적 견지에서만 본다든가 심리학적 설명만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인격으로부터 분리시켜 비개성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흥미 본위의 호기심의 대상이 되어 버립니다.

노년기의 성은 가장 개성적으로 인간 전체를 감싸고 있습니다. 심신이 일체가 되어 노년기의 인간성이 통일되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노년이 되면 성욕이 감퇴된다고들 하지만 성이 전인적으로 꽉 차 있기 때문에, 그것이 반드시 생리 현상으로서 표출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고 일방적으로 그렇게 단언할 수도 없습니다.

성을 육체적이라든가 정신적이라는 이원론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 입에서는, 노인은 플라토닉 Platonic한 사랑으로밖에 성을 즐길 수 없다고들 말합니다. 특히 노년에는 성을 순수하게 육체적으로 받아들이려는 데에 무리가 있습니다. 노년의 성을 논하자면 우선 우리들이 갖고 있는 이원론적인 성의 견해 대신, 인격화될 수 있는 성에 대한 견해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노인은 젊은이들처럼 죽음을 공상할 필요는 없습니다. 죽음이 다가오는 현실에 대하여 각자는 자기 자신을 똑바로 파악하는 것이 노인의 삶의 태도입니다. 그럴 경우 성을 단순히 일반적인 성욕으로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여 살려 나가려고 해야 합니다. ‘융’의 말처럼, 노년기의 남성은 약간 여성화되고, 여성은 남성화되면서 인격적으로 자신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인간의 성의 독특하고 이상적인 자세일지도 모릅니다.

노년기의 성을 단순히 생리적으로밖에 파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학문적 편견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성을 정욕 情慾으로밖에 보지 않는 예술가의 편견에도 주의를 기울여야겠습니다. 또한 금욕을 억압으로 자유주의자들은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늙음의 은총은, 인간 성에 있어서는 개인적으로 인간이 성을 살며, 인격으로서의 인간의 훌륭함을 이성 안에서 발견하는 데에 있을 것입니다. 그 때문에 성은 사랑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노년의 큰 지주로 되어 있을 것입니다. 생리적인 견해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성의 인격적 표출에는 눈을 감고, 노인의 성을 전적으로 육체적 현실로서만 포착하려는 경향에 큰 반성을 바라고 싶은 것입니다.

“노년이 되어서도 정력이 매우 좋다”라는 표현은 인간적 가치의 높음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는 일은 없습니다. 인간에 있어서의 성은 노년기에 있어서야 말로 인격적 가치로서 평가되어야 합니다. 성교육을 평생 교육으로서 생각해 볼 때, 노년에 있어서의 성의 이상은 인격적 가치 중에서도 사랑 그 자체로서 요구될 것입니다.

 

 

새로운 신체와 새로운 사랑

 

인간이 성과 사랑을 결코 생식 본능 등으로 간주하여 결말을 낼 수 없다는 것을 가장 잘 깨닫게 되는 것은 노년에 이르러서입니다. 건강의 혜택을 받고 심리적으로 정상이라면,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인간 관계를 성과 사랑으로 깊이 유지하고 싶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성이나 사랑을 다른 생물처럼 생식 본능으로만 딱 잘라 결론지으려는 것은 극히 부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면 인간에게 있어서의 성이나 사랑이 생식과 관계가 없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성이나 사랑은 인간에게 있어서 단순히 자식을 낳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인간을 진정한 인격적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년이 되어서도 인간으로서 자식이나 손자들과의 관계를 진실로 인간적인 관계, 즉 인격적인 관계로서 더욱더 깊이 다지기 위해서 성과 사랑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년이 되면 오랜 인생의 체험으로서, 요즈음의 인간의 신체에 있어서의 성과 사랑은 진정으로 그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괴롭고 슬픈 통찰에 사로잡히는 수가 있습니다. 젊었을 때의 일을 돌이켜보면, 성이나 사랑은 인간에게 몸과 마음에 기쁨을 줄 때에도 거짓이나 잘못에 빠진 일이 있고, 인간끼리 어디까지 진실로 몸과 마음을 서로 사랑할 수 있는지 나이와 더불어 이런 일들이 의문으로 남습니다.

성이나 사랑은 좋은 것이라고는 말하지만 그것을 억압하거나 죄악시할 정도로 우리들의 마음속에서는 굴절되어 있거나 불투명한 것으로 반영됩니다. 성을 자유화한다든가 해방한다고 떠들어대는 이데올로기가 오늘날에도 유행하고 있는 것은, 현대인의 성이나 사랑에 대한 모순된 의식이 받침대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결혼이나 가정 문제의 밑바닥에서는 이 인간의 성과 사랑의 영원적인 모순이 해결을 바라고 있으므로, 현대 사회의 합리적인 해결에 의해서는 완전한 행복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이혼을 해결의 방법으로서 일반화하면 할수록 그것이 참된 해결 방법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해집니다.

성이나 사랑은, 지금 우리들이 알고 있는 한도내의 인간이란 존재에게 있어서는 너무나도 커다란 무거운 짐으로 느껴집니다. 성이나 사랑의 모순, 죄를 통하여 이 훌륭한 인간성의 요소는 현재의 인간을 초월한 새로운 인간의 존재를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지금과 같은 인간 상호간의 관계나 하느님을 전혀 무시한 인간의 자세와는 다른, 전혀 새로운 인간성 가운데서야 말로 성과 사랑은 인간과 하느님을 깊이 연결시켜 주는 궁극적인 역할을 다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노년에 있어서의 성과 사랑의 깊은 통찰은 성서의 구원 사업에 있어서의 성과 사랑의 의미에 마음을 열게 하는 은총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제까지 이상으로 성이라든가 사랑은 증오할 인간의 과욕으로서 인간을 절망할 절망시킬 뿐입니다.

 

 

 

제4부 늙음과 기도

 

사고의 방향

인간에게는 현재를 사는 일이 가장 어렵습니다. 그래서 미래를 꿈꾼다든가 과거로 도망치든가 합니다. 늙음은 순간순간의 지금을 사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느님 앞에서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성서의 말씀, 주로 시편의 기도는 영원한 지금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현재라는 시간이 얼마나 풍요롭고 심오한 것인가에 감동을 받습니다. 기도는 늙음의 은총에 대한 감사임이 틀림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아니 잊으시나이까

 

나이가 들어 인생을 여로 가지로 회상해 보면, 좋은 일이든 궂은 일이든 간에 인간이 무엇인가를 모르게 됩니다. 왜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 어떻게 살면 좋을 것인가? 어떠한 노력을 하더라도 만족할 만한 삶의 태도란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런데도 살고 있다. 도대체 왜 인간 같은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생각할수록 한이 없습니다. 그럴 때, 왜 하느님께서는 인간이란 존재를 창조하셨을까 하고,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이런 질문을 입에 담고 싶어합니다.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시편에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천지와 함께 창조하신 것을 믿으면서도, 왜 하느님께서 인간을 고귀한 존재로서 창조하셨는지를 몰라서 하느님께 묻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하느님의 실존을 믿을 수 없더라도,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 같은 이야기는 과학적인 증명 없이는 믿지 않으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 하더라도 인간이 불가사의한 존재라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기가 살고 싶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살게 했는지는 몰라도 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욕망치고는 너무나도 강렬한 욕망이기에, 과학적인 해명 따위로서는 석연하지 않습니다. 이런 심오한 심경에 다다를 때면 꼭 다음과 같은 말씀에 마음을 모아 보십시오.

 

“우러러 당신 손가락이 만드신 저 하늘하며

굳건히 이룩하신 달과 별들을 보나이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아니 잊으시니이까

그 종락 무엇이기에 따뜻이 돌보시나이까

천사들보다는 못하게 만드셨어도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나이다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삼라만상을 그의 발 아래 두시었으니.”

(시편 8, 4-7 최민순 번역)

 

 

당신의 날개 그늘 아래 나는 마냥 좋으니이다

 

시편 62편에는 다음과 같은 훌륭한 구절이 있습니다. 생명은 확실히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 속에 사는 것, 은총을 생각하고 대화를 나누는 쪽이 생명 그 자체보다도 더 뛰어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늙음의 은총을 기릴 때 이미 새로운 생명, 곧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생명 그 자체 속에 있는 것입니다.

시편 62편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모아서 기도해 봅시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당신의 생각

밤샘을 할 때에도 당신의 생각

내 구원은 바로 당신이시니

당신 날개 그늘 아래 나는 마냥 좋으니이다.

내 영혼아 당신께 의지하올 때,

이 몸을 바른손으로 붙들어 주시나이다.”

(시편 62, 7-9 최민순 번역)

 

 

내 기쁨, 내 즐거움이신 하느님께 나아가리이다

 

시편 42편 4절의 시리아 어 번역은 “나의 젊음을 기뻐하시는 하느님” 께로 되어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예전에, 미사를 시작하기 전에 제단 아래에서 기 구절을 라틴어로 읊었습니다. 이 구절은 미사 복사가 응답하는 부분이었으므로 지금도 다음과 같이 라틴어로 이 성서의 글귀를 기억하고 계시는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앗 데움 퀴 레티휘캇 유벤투 메암 Ad Deum qui leatificat iuvenluum mean”

 

우리들이 하느님 대전에 나아갈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젊음을 기뻐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상기하면서, 밝은 마음으로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늙은 우리들도 그렇게 기도하는 것을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면, 늙음에는 젊음을 유지하는 은총도 주어졌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젊음은 하느님만이 주시며,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젊음이 우리들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젊음이란 무엇인가를 더듬어 찾으면서 마음을 하느님 대전으로 돌립시다. 시편 42편의 2-3절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기쁨이나 젊음이 저절로 솟아나는 것 같은 상황이 아닌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느님 당신은 내 굳센 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는 원수에게 눌려 서럽게 지내야 하오리까.

 

이것으로서는, 이 세상에 하느님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고 싶은 슬픈 상황입니다. 이런 상태로서는 자연히 기쁨이 두드러지게 마음속에 솟아오르는 일 따위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다음과 같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내리신 빛과 진리가 나를 이끌게 하시고

당신의 거룩한 산, 그 장막으로 나를 들게 하소서.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나의 젊음이란 아무런 괴로움도 모르는 젊은이와 같은 그런 젊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하느님의 빛에 밝히어, 찬란히 빛나는 우리들의 마음을 두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젊음은, 늙음의 은총 속에서만 받을 수 있는 것이므로 늙음 가운데서 젊음을 청합시다

 

 

우리가 티끌임을 아시는 탓이로다

 

나이가 들면서 인간은 한층 더 인생의 헛됨을 느낍니다. 그것은 인간의 가장 예민한 자기 의식입니다. 이제는 불안이나 실망을 느낄 일도 없을 만큼 인간의 궁극적인 현실과 부딪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나름으로 은총이므로 기도하는 마음과 아주 비슷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허무함 속에 그만 주저앉아 버리는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현실을 받아들이는 대신, 오히려 그것을 반항하여 맞서는 것입니다. 무 無일 뿐인 자신을 받아주는 것은 하느님의 떠받침에 몸을 맡기고 있기 때문인데, 그것을 뿌리치고 스스로 무로 돌아가려고 하는 일이 있습니다. 여기에 노년의 두려운 유혹이 있는 것입니다.

다음의 시편 102편의 기도는, 그러한 유혹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떠받침을 받으면서 하느님의 사랑에 눈떠 가는 기도입니다. 노년의 허무함 가운데서도 이와 같이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늙음이 진정으로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이런 기도는, 늙음의 무력함 가운데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허무함과 덧없음이 깊은,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털어 놓을 수 없는 어두운 기분일 때, 이러한 기도에 의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기를 기원하고 싶은 것입니다. 시편 102편 중에서 다음의 말씀을 정성을 다하여 읊어 봅시다.

 

아비가 자식을 어여삐 여기듯이,

주는 그 섬기는 자들을 어여삐 여기시나니

당신은 우리의 됨됨이를 알고 계시며,

우리가 티끌임을 아시는 탓이로다.

인생은 풀과 같고, 들꽃 같은 그 영화,

스치는 바람결에도 남아나지 못하고,

다시는 그 자취도 찾아볼 길 없도다.

야훼님 자비만은 언제나 한결같이,

당신을 섬기는 자에게 계시도다.

그 후손의 후손까지 당신의 정의는 계시도다.

(시편 102, 13-17 최민순 번역)

 

 

젊은이와 노인이 함께 즐거워하리라

 

노인이 어두운 얼굴을 짓고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여겨져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은총은 기쁨과 즐거움에 있다는 것이, 예레미아의 다음 예언으로 분명합니다.

 

그렇다. 이 야훼가 야곱을 해방시켰다.

이스라엘보다 센 손아귀에서 그들을 구해 내었다.

….  …..

그렇게 되면 처녀는 기뻐하며 춤추고

젊은이와 노인이 함께 즐거워하리라.

나는 그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고

근심에 찼던 마음을 위로하여 즐겁게 하리라.

(예레 31, 11. 13)

 

인간적으로 보아서 기뻐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찾지 못할 때일수록 진정한 기쁨은, 하느님께서 우리들의 슬픔마저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신다는 것을 생각하여 하느님께 은총으로서 기쁨을 주시도록 간구합시다. 늙음의 은총은 확실히 인간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기쁨을 받은 데에 있습니다.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노년에는 생명의 짧음을 느끼면서도, 생명을 바라는 데에는 소극적이 되어 버립니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일만을 생각하여, 생명 그 자체는 하느님께서 주셨는지, 장수함은 하느님께서 바라시고 계시는지 어떤지를 의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어두운 기분에 빠져들 때, 자기가 다만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하느님께서는 기뻐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감사의 기도를 바칩시다. 기도 전에 다음과 같은 이사야의 예언서의 말씀을 상기합시다.

 

예루살렘은 나의 기쁨이요

그 시민은 나의 즐거움이라

예루살렘 안에서 다시는 울음소리가 나지 않겠고

부르짖는 소리도 들리지 아니하리라.

거기에는 며칠 살지 못하고 죽는 아기가 없을 것이며

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은 노인도 없으리라.

백 세에 죽으면 한창 나이에 죽었다고 하고,

백 세를 채우지 못하고 죽으면

벌을 받은 자라 할 것이다.

(이사 65, 19-20)

 

우리들의 장수를 하느님께서 얼마나 바라시는 것이며, 장수함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이 된다는 것은, “백 세를 채우지 못하고 죽으면 벌을 받은 자라 할 것이다” 라고 까지 하신 말씀으로 분명합니다. 늙음의 은총을 칭송하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하느님의 마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가 하는 것을 반성하게 합니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이것은 60세 가까운 나이에 옥중에 있으면서 내일의 목숨이 어찌 도리지도 모르는 성바오로 사도께서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입니다. 다음과 같은 말씀은 순교를 각오하면서, 스스로도 기뻐하고 필립비 교회의 형제들에게도 기뻐할 것을 바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바치는 믿음의 제사와 제물을 위해서라면 나는 그 위에 내 피라도 쏟아 부을 것이며 그것을 나는 기뻐합니다. 아니 여러분과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기뻐하십시오. 나와 함께 기뻐하십시오.

(필립 2, 17-18)

 

성바오로 사도만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진정으로 믿고 있었던 분은 없을 것입니다.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그것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때문이겠지요. 노인 바오로 사도는 나이에도, 죽음에도 패하는 일 없이 생명, 특히 주님과 함께 사는 생명의 기쁨을 노래하고 같은 신앙을 가진 형제에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늙음의 은총은 인생의 어떤 때보다 주님과의 일치에 의하여 인간적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명랑함과 쾌활함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한 명랑함은 영원한 생명의 상징인 듯합니다. 그러한 명랑함이 요즘 젊은이들을 마음으로부터 밝게 해 줄 것입니다. 젊은이들을 위해서야 말로 늙음의 은총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네 청춘 독수리마냥 새로워지도다

 

나이가 들면 조금이라도 젊어지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미용-건강-놀이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씁니다. 시편에서는 젊음을 되찾는 비결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은총에 마음을 새기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태어난 날부터 지금까지 모두가 하느님의 은총임을 인정하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가운데 날마다 마음을 새롭게 한다면, 생명이신 주님께 깊이 일치하는 것이므로 젊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시편의 작가는 다음과 같이 확신을 가지고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야훼님 찬양할, 내 영혼아.

내 안의 온갖 것도, 그 이름 찬양하라.

내 영혼아 야훼님 찬양하라.

당신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네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낫게 하시니

죽음에서 네 생명 구하여 내시고

은총과 자비로 관을 씌워 주시는 분

한평생을 복으로 채워 주시니

네 청춘 독수리마냥 새로워지도다.

(시편 102, 1-5)

 

노년의 온갖 병고와 역경 가운데서도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영원한 젊음을 지니고 있는 사람입니다. 어떠한 늙은 성인에게도 이러한 젊음이 있습니다.

 

 

내 허물을 깨끗이 없애 주소서

 

오랜 인생을 살아 왔기에, 인간이 얼마나 허물이 많은가를 아는 은총도 주어질 것입니다. 죄의 통회가 곧바로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찬미가 되는 것은 노년에 있어서의 일입니다. 시편 50은 죄의 통회를 통한 하느님께 바치는 훌륭한 찬미입니다. 이러한 찬미야말로 우리들을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합니다. “당신 구원, 그 기쁨을 내게 도로 주시고, 정성된 마음을 도로 굳혀 주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보소서, 나는 죄 중에 생겨났고,

내 아미가 죄 중에 나를 배었나이다.

 

이러한 깊은 죄의식은, 우리 인간의 생명 그 자체를 새롭게 해 주시기를 기원하는 기도가 됩니다. 더구나 그것은 단순한 자기 반성에 의하여 얻어진 죄의식 같은 것이 아니라 이미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은총이었습니다. “당신은 마음의 진실을 반기시니, 가슴 깊이 슬기를” 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죄의 통회에 의한 하느님의 찬미는 우리들을 다시 태어나게 하며 새로운 생명의 기쁨으로 충만하게 합니다. “당신 구원, 그 기쁨을 내게 도로 주시고, 정성된 마음을 도로 굳혀 주소서.”라고 기도할 정도입니다.

나이와 더불어 이 기도의 훌륭함, 하느님 사랑을 깊이 느낄 수 있는 기도의 훌륭함을 알게 됩니다. 앞으로도 늙음의 은총을 찬미하는 소중한 기도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 자비하시니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애련함이 크오시니 내 죄를 없이 하소서.

내 잘못을 말씀히 씻어 주시고, 내 허물을 깨끗이 없애 주소서

나는 내 죄를 알고 있사오며, 내 죄 항상 내 앞에 있삽나이다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 죄를 얻었삽고

당신의 휘지 않으심이 드러나리이다

보소서 나는 죄중에 생겨났고, 내 어미가 죄중에 나를 베었나이다

당신은 마음의 진실을 반기시니, 가슴 깊이 슬기를 내게 가르치시나이다

히쏩의 채로서 내게 뿌려 주소서, 나는 곧 깨끗하여지리이다

나를 씻어 주소서, 더 희어지리다

기쁨과 즐거움을 돌려 주시오, 바수어진 뼈들이 춤추게 하소서

내 죄에서 당신 얼굴 돌이키시고, 내 모든 허물을 없애 주소서

하느님, 내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내 안에 굳센 정신을 새로 하소서

당신의 면전에서 날 내치지 마옵시고, 당신의 거룩한 얼을 거두지 마옵소서

당신 구원, 그 기쁨을 내게 도로 주시고 정성된 마음을 도로 굳혀 주소서

악인들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치오리니, 죄인들이 당신께 돌아오리이다

(시편 50, 3-15 최민순 번역)

 

 

가엾던 이 몸을 살려 주셨도다

 

우리들이 쇠약하고 지쳤을 때, 하느님께서 어떻게 기도 드리면 좋을까요? 쇠약함은 피할 길 없는 늙음의 숙명이라고 체념해 버리는 일에 길들여졌을 때, 시편 115편의 4절에서 7절의 기도는 우리들에게 평안함을 줍니다.

 

나는 당신 이름 부르며 빌었었노라

‘주여,  이 목숨 살려 주소서’ 하고

주님은 의로우시고, 다정도 하시어라

우리들의 하느님은 인자도 하시어라

순진한 사람을 주는 지켜 주시니

가엾던 이 몸을 살려 주셨도다

주께서 너를 구하셨으니

고요로 돌아가라 내 영혼아.

(시편 114, 4-7 최민순 번역)

 

우리들은 “우리들의 하느님은 인자도 하신” 분으로서, 느끼고 늙음의 고뇌 가운데서 항상 주님께 마음을 돌리고 싶은 것입니다.

 

 

내 몸소 능욕을 당하여, 부끄러움에 낯을 들 수 없음을 오로지 님 때문이 아니오니까

 

노년에 대하여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 가운데서 살 때, 우리들은 끊임없이 모욕을 당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럴 때에는 늙음이 은총이라고 스스로도 생각하지 않게 되며,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를 낮추어 보게 됩니다. 구약 성서의 시편에는, 늙음이나 병고와 가난 속에서 자신이 당사는 모든 모욕을 하느님께 마음을 돌림으로써 그 쓰라림을 견뎌 내는 사람들의 기도가 있습니다. 그러한 기도 중의 하나인 시편 68편 가운데서 다음의 한 구절을 골라내어 읊조리는 것도 좋을 것이며, 이러한 느낌 가운데서 쓰라림을 버티어 내는 것도 기도입니다.

 

내 몸소 능욕을 당하여 부끄러움에 찾을 들 수 없음은 오로지 님 때문이 아니오니까?

나는 형제들에게도 딴 나라 사람, 내 어미의 소생에게도 남이 되었나이다.

(시편 68, 8-9 최민순 번역)

 

그러나 이 모욕을 참아 받는 우리들의 겸허함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욕보이는 자를 마음속으로부터 비판하고 경멸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그런 태도로서는 하느님을 향하여, “부끄러움에 낯을 들 수 없음은 오로지 님 때문이 아니오니까?” 라고는 기도하지 못하겠지요.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어떠한 죄인이라도 구원해 주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며, 무한한 사랑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같은 시편에 있는 다음 기도도 잊지 말고 덧붙여서 읊어 봅시다.

 

하느님, 당신은 내 어리석음을 아시옵고, 내 죄악을 모르지 않으시나이다.

주여 만군의 주여, 당신을 바라는 이들이 나로 하여금 망신함이 없게 하소서.

(시편 68, 6-7)

 

 

한평생 주님을 찬양하리라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나 또 오늘 하루의 생명을 주신 것을 감사할 때, 다음 시편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기도합시다.

 

알렐루야, 야훼님 찬양하라 내 영혼아

한평생 주님을 찬미하라

이 생명 다하도록 내 하느님 기리리라

대관들을 믿으려 하지들 말라,

인간은 구원을 갖지 못한 것

숨 한번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고

그때에는 모든 생각 없어지고 마는 것.

(시편 145, 1-4)

 

오늘 하루도 어떤 사람과 친교를 나눔에 있어서도 하느님으로부터 마음이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인간은 누구나 다 흙으로 돌아갈 존재임을 잊지 않도록 합시다. 우리들의 생명은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며, 하느님을 향한 사랑에 나날이 깊이 빠져들면서 살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인간이란 하나의 숨결 같은 것

몸이 허약해지고 기억도 희미해져 가는 것을 날이 갈수록 피부로 느끼게 되면, 인간으로서의 실재감도 점차로 줄어들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지 어떤지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게 됩니다. ‘인간이란 하나의 숨결’처럼 떠나 버리는 허무한 존재에 지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럴 때에는 어떤 기도를 바칠 수 있을까요? 가장 근본적으로 인생을 다시 보며, 그 의미를 하느님 안에서 찾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시편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도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부엇이기에, 주여 마음 쓰시옵고

그 종락 무엇이기에 생각해 주시나이까

인간이란 하나의 숨결 같은 것

지나가는 그림자 그의 날들이외다.

(시편 143, 3-4)

 

노년이 설령 사람들의 모습을 희미하게 가진다 하더라도, 이와 같은 기도를 드릴 수 있으므로 노년은 이미 생사를 초월하여, 하느님 대전에 서 있는 가장 확실한 존재임을 드러내어 밝히고 있습니다.

 

 

주님 품에 안겨 있는 어린이인 듯

 

주여, 잘난체 하는 마음 내게 없삽고

눈만 높은 이 몸도 아니오이다

한다한 일들을 좇지도 아니 하고

내게 겨운 일들은 하지도 않나이다

차라리 이 마음은 고스란히 가라앉아

어미 품에 안겨 있는 어린이인 듯

내 영혼은 젖 떨어진 아기와 같나이다

이스라엘아,

이제로부터 영원까지 주님만 바라고 살아가라.

(시편 130, 1-3)

 

이런 기도는 아무나 쉽게 바칠 수 있을까요? 늙음의 은총 속에서만 이런 생활 태도가 있으며 그것이 곧바로 기도가 될 것입니다. 기나긴 인생 여정에 있어서의 온갖 사건과 고민 끝에, 이러한 심경에 마음을 열어 놓을 수 있는 곳에 늙음의 은총의 훌륭함이 있습니다. 이제는 죽음의 사후 死後 도 걱정할 것 없이, 영원하신 하느님 대전에서 어린 아기와도 같이 사는 기쁨에는 한이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통속적인 천국에의 그리움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단순한 유아 취미 乳兒趣味와는 거리가 먼 ‘젖 떨어진 아기와 같은’ 마음 가짐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의 차분함은 하느님의 은총이며, 하느님께서는 우리들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행복을 주시는 분이시므로, “이제로부터 영원까지 주님과 바라고 살아가라.”라고 기도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차분함이 행복의 모두인 것 같은 정숙함 위주의 행복과는 전혀 다릅니다. 노년은 하느님을 향하여 한없이 활짝 열려져 있는 마음의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 가운데의 어린 아기는 순수한 마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희망의 표징을 일컫는 것입니다. 어린 아기가 될 때, 비로소 마음은 영원한 생명의 희망 가운데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희망 안에서의 죽음

 

늙음의 은총은, 우리들의 생명을 희망 가운데서 끝마치는 데에 있을 것입니다. 루카 복음이 전하는 노 예언자 시메온의 다음 말로서 묵상해 봅시다.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루카 2, 29-30)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라는 주님의 구원은 무엇이었을까요? 탄생한 지 얼마 안 되는 아기 예수님밖에 아무도 아닙니다. 시메온이 일생에 걸쳐서 바라고 기다리던 이스라엘의 영광은 말없이 무력한 어린 아기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라고 외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적인 희망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희망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희망 가운데에서의 죽음은 가난하고 수줍고 조심성스러운 죽음입니다. 남의 눈에는 별로 은총같이 생각되지 않는 죽음입니다. 우리들은 구원의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그러한 가난한 죽음 가운데 구원의 희망으로 살기 위해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맺음말

 

이 책은 노년에 관한 수상을 모은 것으로서, 조직적으로 하나의 사고를 전개한 것은 아니므로 어디서부터 읽어도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네 개의 부분으로 나눈 것은 사고의 방향에 따른 것이지만 거기에 구애될 필요는 없습니다.

제1부로서 매듭지은 사고의 방향은, 신앙을 갖고 있지 않는 분들도 동의할 수 있는 점이 많으리라 믿습니다. 제3부도 신앙과는 관계없이 읽으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제4부는 기도하는 습관이 없는 분들도 관심을 기울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 책은 앞으로 노년을 맞이하려는 사람들과의 영적인 대화를 위해 생겨났습니다. 구체적인 노인 문제를 언급하기보다, 근본적인 노년에 관한 사고 방식을 모색한 것입니다. 특히 그리스도교의 영성이 노년의 삶의 태도에 어떤 방향을 제시하는가를 생각해 본 책입니다.

글을 맺고 나서 절실히 느끼는 것은, 노년의 생활 태도를 생각한다는 것은 곧 인생을 생각하는 것이란 점입니다. 지금 까지 노인 복지의 특수한 문제의 해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은 물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노인 문제를 지나치게 특별시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고령자 사회로 바뀌면 바뀔수록 노년은 특수한 인생 문제로서 대두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함축하는 것으로서 다시 보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노인 문제는 점점 이 문제를 규명하고 해결하기 위한 관계 과학에 의한 입체적이고 종합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외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종교나 철학도 현재의 노인에 대한 사고 방식을 고쳐야 할 사명을 집니다. 그런데 종교나 철학 중에는, 지금까지 노인 문제를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비뚤어진 방향에서 다루어 온 것도 있습니다. 특히 종교에는 인생을 비관적으로 보는 경향도 있었을 것입니다. 비관적인 철학도 늙음에 대한 숙명적인 깨달음을 추구하는 데에 그칠 것입니다.

앞으로의 노인 복지에 관계하는 사람들은, 지금보다 더 인생문제로서의 늙음을 깊이 연구하여, 새로운 방향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 있어서의 경로 윤리의 올바른 방향 제시도 이제부터의 문제입니다. 성 性, 결혼, 가정 윤리를 배워 온 필지도 현대 사회에 있어서의 경로 윤리를 다시 보는 바입니다.

 

저자 요시야마 노보루

 

 

1991년 12월 20일 발행

지은이: 요시야마 노보루

옮긴이: 김동섭

펴낸이: 이순규

편낸데: 성바오로 출판사

값 3,500원

이 책은 홍보수단을 통하여 복음을 전하는 성바오로수도회 수도자들에 의해서 제작된 것입니다.

(c) 중앙출판사 1987

(c) SSP St. Paul Editions/Seoul, Korea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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