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y Men Came here..

The Longest Day, 1945

 

6월 6일, 달력이 빨갛다. 바보 같은 본당(that is,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달력이 ‘고국에서 주문을 받아와서’, 친애하는 고국의 국경일이 모두 빨갛게 표시되어 있다. 그러니까 올해 (최소한) 한해는 고국의 국경일을 ‘느끼며’ 살게 되었다. 고국에 달력을 주문해서 얼마나 돈을 절약했는지는 몰라도, 참 해도 너무했다. 그곳의 국경일들을 빨갛게 ‘강조’ 했으면, ‘고객이 거의 일년 열두 달 사는’ 현지의 국경일, 기념일도 그랬으면 누가 때리냐? 6월 6일 현충일에 동작동 국군묘지라도 참배해야 한단 말인가?

6월 6일을 왜 이승만 대통령께서 현충일로 정했는지 유래는 확실치 않아도, 이곳에서 6월 6일은 1944년 6월 6일을 기념하는 날이고, 그날은 2차 대전시 3백만의 연합군이 프랑스의Normandy 해안으로 육,해,공의 ‘사상 최대의 작전‘이 시작된 날이다. 바로 D-Day인 것이다. 그 날이 없었으면 간접적으로라도 우리의 광복절도 연기가 될 수도 있었던 그렇게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날인 것이다. 그것도 본당 달력에 ‘정확히’ 빠져있었다.

2004년에 이미 반세기, 50주년이 지났고 이제는 사실 60주년에 가까워지고 있는 지금 특별히 이날을 생각하는 것은 역시 개인적인 추억과 그것과 관련된 영화, The Longest Day에 대한 향수 때문이다. 1948년 생인 내가 그날을 어찌 기억하랴마는, 사실처럼 그려낸 영화의 역할이 내가 직접 그때를 겪은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는데 한 몫을 했다는 데도 있다.

여기서 말하는 영화, The Longest Day는 컴퓨터로 특수효과를 ‘조작’ 한 만화 같은 요새 영화들이 아니고, ‘정직하고, 우직하게’ 만든 1962년 미국 ‘흑백’ 영화 ‘The Longest Day‘ 인 것이다. 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영화를 나는 1963년도 중앙고 1학년 때, 남산 밑, 퇴계로에 있던 ‘개봉관’ 대한극장에서, 학교에서 단체로 가서 보았다. 정확하게 언제였는지 궁금해서, 그 당시의 일간지를 찾아보았지만, 그 영화의 광고를 찾을 수가 없었다. 1962년의 영화이기 때문에 일본을 거쳐서 들어오려면 빨라도 1년 이상이 걸리기 때문이고, 고1때 본 기억이 분명해서, 1963년일 것인데.. 왜 그 영화의 광고는 신문에 없었는지, 아직도 궁금하다.

 

 

The Longest Day, the theme song – Paul Anka – 1962

 

그 당시에 이 영화의 ‘역사적 의미’를 다 알지는 못했지만, 그저 ‘우리의 멋진 친구인 미국이 주도한’ 연합군이 ‘나쁜 놈들, 나치 독일’을 패배시키는 기분 좋은 스토리라는 정도는 알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당시에 우리들은’그 영화를 참 재미없게 보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그 영화는 재미있게 만들어진 얘기 같은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정직하게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기록영화처럼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흔히 있는 climax같은 것도 그 영화에는 없었고,특히 끝나는 장면은 덜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보완이라도 해 주듯이, 엄청나게 많은 당대의 최고 배우들이 동원되었고, Paul Anka의 영화 주제곡은 영화의 심각성을 잘 나타낼 수 있어서, 조금은 덜 지루할 수 있었다. 이 주제곡은 다른 영화 ‘콰이강의 다리’ 와 같은 정도로 우리들이 두고두고 휘파람으로 따라 부르기에 좋았다. 특히 기억에, 우리 반에 ‘조광순‘이라는 친구, 원래 노래를 잘 부르는데, 이 영화를 보고 학교로 돌아와서부터 복도건 교실이건 가리지 않고 따라 부르곤 했다.

다른 기억으로는, 우리 학교에서 단체로 대한극장에 들어갔을 때, 이미 전회의 상영이 끝나고 있었는데 보니까 앉았던 사람들이 모두 우리또래의 여학생들이었다. 과연 그 ‘여학생’들이 이 영화를 ‘졸지 않고’ 보았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또한, 다른 생각에 이 영화는 최소한 대한민국에서는 크기 돈을 못 벌었을 것이라는 사실.. 그것이 아마도 신문광고를 찾기가 힘들었던 이유가 아닐까..

 

이 영화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아보면, 그 동안 모르고 있었던 흥미로운 사실들이 많이 있다. 그것 중에는:

  1. The Longest Day는 1959년 저자 Cornelius Ryan이 저술한 1944년 6월 6일 ‘하루 동안’ 일어난 연합군의 Normandy 상륙작전에 관한 역사책의 제목이다. 그러니까 non-fiction, fiction도 아닌 historybook인 것이다. 그러니까 역사적 사실과 아주 가까운 실화들인데, 이것이 영화화 되면서 판권이 당시의 금액 $175,000 (십칠만 오천 불)에 달했다.
  2. 영화에 사용된 언어들은 모두 각국의 언어를 쓰고 있고, 모두 영어로 자막을 넣었다. 하지만 배우들이 모두 영어를 쓰는 다른 것도 동시에 찍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영화의 두 가지 version이 존재하는 셈이다.
  3. 당시의 인기인 중에 주제곡을 부른 Paul Anka는 예상 외로 그는 멋지게 army ranger역할을 해 냈다.

     

    Paul Anka & Robert Wager in the Longest Day

    Paul Anka

  4. 실제 인물인 Benjamin Vanderboort (중령, 82nd Airborne, 공정단)로 연기를 한 당대의 인기배우 John Wayne, 원래 이 역할은 Charlton Heston이 원하던 역이었지만 John Wayne에게 넘겨진 것이다. 대부분의 주역 배우들이 25,000불의 연기료를 받았지만 John Wayne만은 그것의 열 배인 250,000불을 요구하고 받았다고 한다.

    John Wayne as Lt. Col. Vanderboort

    밴더브루트 중령 역의 존 웨인, 공수부대장

  5.  82nd 낙하산 공정대가 투하되었던 프랑스의 마을 (Sainte-Mere-Eglise)의 교회당 꼭대기로 ‘잘 못’ 투하되었던 사병(Red Button의 역할)을 기념하는 실제 인형이 아직도 그곳에 걸려있다고 한다.
  6.  연합군 최고사령관 (Allied Supreme Commander) 였던 General Eisenhower의 역할은 처음에 실제 인물인 미국 전 대통령의 역임했던 President Eisenhower를 고려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그는 D-Day로부터 거의 20년이나 지나서 비교적 젊었던 그 당시의 역을 맡기에 적합하지 않았고, 연기 경력이 전혀 없었지만 그와 비슷하게 생겼던 decorator Henry Grace를 기용했다. 그의 연기를 영화에서 보면 꽤 성공했다는 생각이 든다.

    연기경력 제로의 아이젠하워 역의 Henry Grace

    연기경력 제로의 아이젠하워 역의 Henry Grace

  7. 공포영화, 드라큘라(Count Dracula)로 잘 알려진 경력 영국배우였던 Christopher Lee는 영국군으로 등장을 하려 연기심사를 받았지만, ‘군인처럼 생기지 않았다’고 낙방을 했다고 한다. 사실 그는 2차대전시 영국 공군 정보장교로 복무를 했다고 한다.
  8.  영국 사병 Private Flanagan으로 등장을 하는 Sean Connery(숀 코네리), 특별한 연기는 아니었지만, 이 영화가 그에게는 007 James Bond로 가는 마지막 출연이 되었고, 그 이후 그는 100% James Bond가 되어 버렸다.

    영국측 군인 Sean Connery 숀 코네리

    영국측 군인 Sean Connery 숀 코네리

  9. Normandy의 상륙 해변 중의 하나인 Omaha Beach 상륙을 촬영할 때, 미군들 역할을 하던 extra(엑스트라)들이 시퍼런 물에 질려서 물 속으로 뛰어들지를 않았고, 이에 질려버린 Robert Mitchum (로버트 밋첨, Army General Norman Cota역)이 먼저 뛰어들고, 엑스트라들이 서서히 뛰어들었다고 한다.
  10. 총 제작비, $10,000,000(천만 불)은 1993년 이전(Steven SpielbergShindler’s List가 나올 때까지)의 흑백 영화로써는 제일 비싼 제작비였다. 그 동안의 inflation을 감안한다면 천만 불은 그 당시로써는 큰 돈이었다.
  11. 낙하산 특공대, paratrooper들이 낙하하던 때 숲과 습지에서 요란히 들리던 개구리 소리는 사실 프랑스에는 없는 개구리의 소리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이미 녹음이 된 ‘미국 개구리’ 소리였던 것이다. 이런 것들은 사실 쪼잔한 것 들이지만 나중에 이렇게 이야기 거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12. 미국 해군당국이 이 영화를 만드는데 전함과 상륙정 등으로 지원을 해 주었지만, 그 당시 ‘빌려준’ 함정들은 이미 1960년 이후의 것으로 1944년 당시의 함정들에 비하면 훨씬 현대적인 함정들이고, 자세히 관찰을 하면 쉽게 식별할 수 있다고 한다.

‘매듭 푸시는 성모님’의 기도

Painting 'Mary, Undoer of Knots' since 1700
1700년경 독일에서 그려진 매듭의 성모님 상

지난 2012년 2월 사순절(Lent)부터 우리부부는 ‘시험적인 기분’ 으로 집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있는 우리가 15년간 소속되어 있던 미국본당 Holy Family Catholic Church매일 미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우선 목표는 사순절 시기에만 빠짐없이 매일 미사를 보는 것이었다.

이런 ‘어려운 목표’를 이루려면 사실 미사참석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게 life style을 바꾸어야 가능하다. 예를 들면 어떤 날 저녁 ‘술좌석’에 끼어서 밤 늦게라도 들어오는 것이 있다. 술에 덜 깬 기분으로 다음 날 아침 9시에 맞추어 미사에 가는 것은 사실 힘들다. 이런 것 등을 조금 ‘정신적으로 무장’을 하면 이것이 ‘듣기보다, 보기보다’ 훨씬 쉬워짐을 이번에 크게 깨닫게 되었다.

성당으로 가는 15분의 drive는 사실, 무슨 별장에 가는 것 같은 멋진 풍경들과, 골프장, 산장과 같이 생긴 예쁜 동네들을 거치게 되어서 30분여의 짧은 미사와 더불어 하루를 시작하는 것으로 아주 근사한 일과로 느껴지기 시작했고, 그야말로 하늘이 도와서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지금 같아서는 아마도 ‘무한정’ 계속되지 않을까 서로 기대를 할 정도까지 되었다.

매일 미사에 관한 우리의 ‘통속적인 인상과 기대’ 중에는 틀린 것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우선 성전이 텅텅 빌 정도로 극소수의 신자들이 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은 우리의 기우였다. 비록 넓은 성전이 듬성듬성 채워지긴 했지만, 거의 다 채워지는 꽤 많은 숫자였다.

다음은 신자들의 연령대..인데, 역시 ‘할일 없는 고령자’들일 것이라 추측했지만, 이것도 틀렸다. 꽤 적지 않은 젊은이를 포함해서 직장인들, 우리 같은 중년들도 꽤 있었다는 사실이 우리를 놀라게 했다. 물론 그보다 더 나이든 Irish 파란 눈의 ‘아줌마, 할머니’들은 빼놓을 수 없다.

매듭 푸시는 성모님의 9일 기도 소책자
매듭 푸시는 성모님의 9일 기도 소책자

이곳, 매일 미사에서 보는 신자들이 주일미사와 근본적으로 다른 느낌은 역시, ‘주일미사, 성탄절 미사 신자’들과는 그 신앙심에서 차이가 난다고 할까.. 이것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매일 미사에 나온다는 그 자체가 차원이 다른 신앙심일 테니까. 그 중에 한 그룹의 신자들은 미사시작 20~30분 전쯤에 일찍 나와서 같이 묵주기도를 바치는데, 우리는 항상 그것이 시작된 조금 뒤에 도착을 해 그들과 같이 앉곤 해서 아주 친숙하게 되었다.

물론 그들은 영어로 묵주기도를 하므로 우리는 사실 듣기만 하지만 계속 듣게 되면서 이제는 거의 저절로 외우게 될 지경이 되었다. 묵주기도는 반복적으로는 길게 느껴지지만 사실은 비교적 짧은 기도가 반복되기에 금새 외울 수가 있다. 한마디로 ‘시간문제’인 것이고, 그것이 묵주기도의 매력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 그들 중에 한 멋지고, 예쁘게 생긴 ‘아줌마’가 우리보고 ‘독실하게’ 보인다고 과분한 칭찬을 하더니, 조그만 책자를 주며 너무나 좋은 기도이므로 해보기를 권한다고 친절하게 말했다. 그것은 제목이 ‘Mary, Undoer of Knots’ 라는 소책자였다. 아마도 ‘매듭을 푸시는 성모님’ 이란 뜻일까? 이것도 역시 ‘성모신심 (Marian Devotion)’ 을 위한 또 다른 기도일 것이라 짐작이 되었는데, 책자는 이 기도의 역사적 배경을 자세히 설명하고 비교적 간단한 매듭 푸시는 성모님께 바치는 기도와, 이 기도로 하는 9일기도를 설명을 하고 있다.

한 마디로 ‘매듭처럼 얽힌 인생의 고통과 고민거리’ 를 성모님께 호소하며 도움을 청하는 ‘직설적’인 청원기도인 것이다. 그 기도의 원문은 아래와 같은데, 이것이 한글로 옮겨진 것을 찾으려 goolging을 했지만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다른 언어로 옮겨지면 아마도 해당 지역 교구의 인가(NIHIL OBSTAT, IMPRIMATUR)를 얻어야 할 것이다.

 

Prayer to
Mary the Undoer of Knots!

 

Virgin Mary, Mother of fair love, Mother who never refuses to come to the aid of a child in need, Mother whose hands never cease to serve your beloved children because they are moved by the divine love and immense mercy that exists in your heart, cast your compassionate eyes upon me and see the snarl of knots that exist in my life.

 You know very well how desperate I am, my pain and how I am bound by these knots.

 Mary, Mother to whom God entrusted the undoing of the knots in the lives of his children, I entrust into your hands the ribbon of my life.

 No one, not even the Evil One himself, can take it away from your precious care. In your hands there is no knot that cannot be undone.

 Powerful Mother, by your grace and intercessory power with Your Son and My Liberator, Jesus, take into your hands today this knot… I beg you to undo it for the glory of God, once for all. You are my hope.

 O my Lady, you are the only consolation God gives me, the fortification of my feeble strength, the enrichment of my destitution and with Christ the freedom from my chain.

 Hear my plea.

 Keep me, guide me, protect me, o safe refuse!

 Mary, Undoer of Knots, pray for me.

 

 

이 기도문을 한글로 옮긴다면 어떤 모양일까? 아마도 서강대 예수회 류해욱 신부님이 옮기면 금상첨화일 것이라 생각되지만, 그것이 가능할지, 아니면 이미 옮겨져서 기도문으로 쓰이고 있는지도 모를지도. 의미는 모두 금방 들어오지만 정확한 ‘한국어 어휘’를 구사할 자신은 없다.

내가 구사할 수 있는 한글어휘 실력은 1970년대 초에 머물고 있고, 그 이후의 ‘생기 넘치는’ 21세기 말투들도 자신이 없다. 그만큼 초보적인 한글실력으로 어찌 이런 초월된 의미의 기도문을 옮길 수 있을까? 하지만, 하지만, 초보적 수준으로 기도문의 ‘의미’는 전할 수 있을지도.. 다음과 같이.. (더 낫게 옮길 수 있는 분은 고치셔서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매듭 푸시는 성모님께 드리는 기도

 

동정녀 마리아, 지극히 크신 사랑의 어머니, 도움을 청하는 자녀들을 항상 도우시는 어머니, 당신 가슴의 성스러운 사랑과 바다같이 넓으신 자비로 언제나 자녀를 끊임없이 보호하시는 어머니, 인자로운 눈으로 저희를 굽어보시고, 저의 인생에 얽혀있는 고통의 매듭을 풀어주소서.

당신은 제가 얼마나 이 얽혀있는 인생의 매듭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지 아십니다.

마리아,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들의 고통의 매듭을 풀어 주시도록 의탁하신 어머니의 손에 저의 인생을 의탁합니다.

아무도, 악마까지도 당신의 보호 하심을 빼앗지 못합니다. 당신 손으로 풀지 못할 매듭은 하나도 없습니다.

강한 어머니, 우리들을 구원하시는 당신의 아들 예수님의 전구자시여, 오늘 이 매듭을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당신 손으로 풀어주소서. 당신은 저의 희망이옵니다.

저의 성모님, 당신은 주님께서 주신 유일한 위안이고, 허약한 저를 강하게 하시고, 가난한 저를 풍요롭게 하시고, 예수님과 함께 저의 사슬을 풀어 주시는 분입니다.

저의 간청을 들어주소서.

계속 저를 인도해 주시고, 안전한 피난처에서 보호해 주시옵소서!

매듭을 푸시는 성모님이시여, 저를 위해 빌어주소서!

 

 

이 기도의 역사적 배경, 신학적인 정당성, 9일 기도의 형식과 내용 등은 다음에 계속 research를 해서(그런 자료가 있다면) 그것을 blogging 할 예정인데, 그것을 기다리느니 우선 급한 것, 매일 매일 우리를 ‘죽이도록 괴롭히는’ 매듭을 풀어달라고 어머님께 간청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듯 하다.

 

白手와 digital technology

나는 白手란 말을 참으로 싫어했다. 누가 좋아하겠는가? 놀고 먹는다는 뜻일 것이고, 대부분 이런 부류 중에는 ‘여자에게 빌붙어 사는’ 남자들도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자는 白手란 말 조차 해당되지 않는다. 놀고 먹는 여자들은 무엇이라고 부르는지, 그런 것은 듣지 못했다. 전통적인 의미의 白手는 그렇게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자의건 타의건 간에 조직적인 곳에서 정해진 시간에 경제활동 하는 것을 떠난 남자들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전통적으로 밖에서 일을 했던 것이 남자들이고, 그들이 그런 일을 안 하고 산다면 그날로 白手가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언젠가부터 白手가 된 것이다. 그런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만 할 수 없이 나는 역시 白手인 것이다. 아마도 집에서 ‘작은’ 경제적인 활동을 계속해 왔다고 해도 역시 그는 白手라고 불릴 것이다. 집에서 무엇을 어떻게 한 것은 크게 상관이 없다. 간단히 말해서 남자가 ‘낮에 집에 있을 수 있으면’ 우선 그는 白手인 것이다.

 과연 요새 白手들은 무엇을 하며 하루를 소일할까? 이것 또한 사람들의 성격만큼 다양할 것 같다. 서울에 계신 처남을 보면, 직장에서 일할 때보다 더 바쁘다고 한다. 거의 주일마다 정기적으로 산엘 가고, 집에 돌아올 때 술을 마신다. 직장 다닐 때도 술을 마시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지금은 일이 끝나고 올 때가 아니고 ‘놀다가’ 올 때 마시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고, 각종 ‘회포를 푸는’ 모임에는 다 나간다. 어떻게 보면 부럽게 들리기도 한다. 하기야 이런 것들은 직장시절 그렇게도 기대하고 기다리던 이상적, 환상적인 생활 들이 아니었을까? 문제는, 이것이 거의 변함없이 매일 계속될 때도 그렇게 즐거울까? 아마도, 아닐 것 같다.

내가 사는 이곳 아틀란타 지역의, 내가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 중에는 白手가 의외로 드물다. 가깝게 지내는 친지 중에는 현재 한 사람 정도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대부분의 교민들이 자기가 가지고 있던 사업이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것은 정말 체력과 의지만 허락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이럴 때, 그들이 참 부럽다.

비록 그들은 육체적으로 고달플 때도 많고, 많은 시간 동안 일을 하지만, 우선 돈, 그러니까 현금의 자유가 내가 상상하는 것 보다 훨씬 많고, 이렇게 ‘정년퇴직’ 이나, ‘명퇴’같은 음산한 과정을 겪지 않아도 되지 않는가? 그리고 하루아침에 직장이 없어지거나 하는 traumatic한 것도 없고.. 그저 단점은 사업에는 항상 기복이 있으니까, 그것이 조금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그렇게 여유 있게 돈을 번 후에 白手가 된 사람들은 위에 말한 것처럼 정말 바쁘게 산다. 그들은 무엇을 하는가?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교회에 나가서 그곳의 사람들과 어울린다. 선교여행(성지순례), cruise여행, 골프, 각종 악기 배우기 요리 배우기, .. 열거하려면 한도 없다. 이런 것들은 대부분 시간과 건강, 돈이 없으면 곤란한 것들이다. 어떤 것이 바람직한 것들인가? 이것에 정답이 있을 수 없다. 개개인마다 여건들이 조금씩 다를 것이니까.

개인적으로 나에게 매력적인 일거리를 고르라면 글쎄, 신앙적인 것과 지적인 것들이 balance를 이루는 그런 것들이다. 예를 들면,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을 돕는 자원봉사, 컴퓨터를 위시한 매초 변하는 digital technology 그리고 자기를 포함한 ‘개개인들의 역사’ 탐구 등등이 있다. 하지만 白手들이 할 수 있는 것들도 시대에 따라서 무슨 흐름과 변천이 있었을까?

우리 부모님들의 세대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세대마다 겪었던 시대적 문화가 있고, 경제적인 제약, 여유 같은 것들이 있다. 우리 부모 세대는 전쟁을 몸으로 겪었고, 비록 민주적이지만, 보수적이고, 경제적으로는 항상 모자란, 그런 시대에서 사셨다. 그들에게는 白手가 될 여유조차 없었다. 그러니 대부분 혼신의 힘으로 키웠던 자식세대에 ‘모든 것을’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자존심을 접는’ 조용한 여생을 보낸다.

손주로부터 위안을 얻고, 경로당에서 친지들과 어울릴 수 밖에 없는 것이 거의 남은 삶을 사는 방식이었다. 지금에 비해서 평균수명이 그렇게 길지 않았던 시절이고 보니, 白手로 산 기간도 길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적, 국가적으로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계속 길어지는 평균수명이다. 白手가 되는 절정기인 60대가 이제는 길어진 평균 수명에 덕분에 비교적 ‘젊어’ 진 것이다. 번듯하고 의미 있는 ‘경제적인 일’을 할 수 있으면 제일 바람 직 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악의 세계적 불경기가 기약도 없이 계속된다. 지금 나의 세대, 60대가 그런 변화의 최전방으로 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제일 바람 직할까?

이때 나는 고국의 친지들을 부러워 하게 된다. 비록 세대는 많이 흘렀어도 이곳 미국에 비해서 그곳은 아직도 끈끈한 정으로 모두들 얽히어 산다. 학연, 혈연, 지연..등등 오래 동안 형성되어온 ‘인연’이 이 나이에는 완숙이 되어서 사는데 큰 활력소가 될 듯하다. ‘철저한 개인’의 나라 미국에 사는 한 그런 것은 완전한 희망적인 것일 뿐이다. 비교적 교민들끼리 모여 산다는 이곳에서도 큰 차이는 없다. 완전히 ‘99.9% 한국식’으로 사는 사람들은 조금 다르겠지만 대부분 그렇게 살 수는 없다. 그렇게 살려면, 아예 고국에 가서 사람들에 둘러싸여 사는 것이 나을 테니까.

이런 때에, 최근 20년간 급성장한 인터넷의 보급은 이렇게 ‘고립되어’ 사는 우리들에게 조금 희망적인 발전일 수 있다. 지독히도 개인적 자유와 간섭 받기 싫어하는 미국인들이 Facebook, Twitter같은 social networking에 열광하는 것도 인간의 사회적 본성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상적 공간, virtual space‘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만큼, face-to-face: 얼굴을 마주보며 만나는 것과는 비교할 수는 없지만 이 인터넷에 의한 매체의 역할은 독특한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시간, 공간을 손쉽게 뛰어넘어, 사회생활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인터넷은 사람을 차별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얼마나 자유롭게 쓸 수 있는가 하는 ‘기술의 정도’는 우리세대를 무참히 도 차별한다. 이것이 현실이다. 현재 인터넷의 발전 정도로는 아직까지도 사용자는 기본적으로 컴퓨터를 쓸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제일 큰 장애물이다. 그래도 지금은 10년 전이나 그 이전보다 훨씬 쓰기가 수월해졌다. 컴퓨터처럼 보이지 않는 기기들 (embedded devices)이 인터넷으로 연결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mobile devices, GPS, smart phone, HD-TV, car, audio system 등등인데, 이런 추세는 가속되고 있다. 본인도 모르게 인터넷을 쓰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기들은 특별한 목적에 맞춘 것이고, desktop pc의 ‘널찍하고, 화려한 화면’ 에 나타나는 ‘화려한’ 인터넷의 효과에는 아직도 미칠 수가 없다.

 인터넷 이전에는 컴퓨터 없이 살아도 조금 자존심은 상해도 그런대로 살 수 있었다. 멋지게 프린트 해낸 편지 같은 문서들, 재미있게 ‘조작’한 사진 만들기, cd-rom등으로 백과사전 보기.. 계산을 다 해주는 가계부, 이런 것들은 생활하는데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컴퓨터를 살 필요까지는 없었다. 하지만 인터넷은 다르다. 인터넷을 못쓰거나 안 쓰면 이제는 생활하는데 불편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컴퓨터를 쓰기 위해서 이것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을 쓰기 위해서 사서 써야 하는 실정이 된 것이다.

주변의 아는 사람들을 보면 이런 추세를 실감한다. 그들도 ‘싫지만’ 이것을 써야 하게 되었고, 결국은 이제는 편리할 정도로 컴퓨터를 쓸 수 있게 되었다. 값싼 물건을 찾아내고, 이메일을 쓰고, 옛날에 헤어진 사람들을 찾아내고, 집에 앉아서 고국에 있는 ‘고수’들과 바둑을 두게 되고, ‘공짜’로 영화, 드라마 같은 것을 보게 되고.. 이런 것들을 어떻게 마다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그런대로 인터넷을 쓰는 우리 동료세대들의 특징은, 이들 대부분은 인터넷의 ‘소비자’ (net consumers) 들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일방적으로 ‘보거나, 받거나’ 하는 ‘수동적‘인 입장에 있다는 뜻이다. 소비자에서 ‘생산자‘ 적인 (net producer) 입장으로 능동적으로 쓰는 사람은 아직도 미미한 정도에 불과하다.

대표적인 예는 이메일을 보면 알 수 있다. 의외로 직접 ‘쓰는’ 사람이 많지 않다. 영어로 편지를 쓰는 것은 우리세대에선 말도 안 되고, 어차피 감정이 통하는 한글로 써야 하는데, 오랜만에 ‘한글문장’을 만드는 것도 그렇지만 우선 키보드에 글자를 넣는 데서 부터 고전을 면치 못한다. 이것이 현재 ‘능동적’으로 인터넷을 쓰는데 최대의 장애물인 것이다. 물론 ‘말하는 것’ 보다 ‘글을 쓰는 것’이 훨씬 힘 들기도 하다.

 내가 아는 우리 또래들도 ‘대부분’이 인터넷 소비자에 속하는, Internet radar 아래에 ‘숨어있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진정한 인터넷 세대는 생산과 소비의 균형이 맞는 그런 부류들일 것이다. 이곳에서 오랜 동안 살며 보아왔지만, 우리 세대(boomer)의 미국인들은 느릿느릿하지만 꾸준히 인터넷 문화에 동화하는 노력으로 이제는 ‘대부분’이 큰 문제없이 인터넷을 ‘능동적’으로 쓰게 되었다.

이메일은 그들에게도 거의 ‘필수’가 되었고, social networking에도 적극적으로 참여를 하고, 인터넷 shopping도 다른 세대에 비해 큰 차이가 없다. 그에 대응한 한인들은 비록 느낌이지만, 훨씬 뒤 떨어진다. ‘쓰면서’ 경험하는 것은 고사하고 우선 pc조차도 쓰는 것이 불편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인 것이다. 이것은 참, 안타까운 현실이고 너무나 바쁘게 사는 현실을 감안하면 아마도 하루 아침에 해결될 문제는 아닐 듯 싶다. 조금 더 빠른, 그러니까 현재의 3G, 4G정도보다 훨씬 빠른 mobile-based Internet으로 발전을 하면 아마도 mobile device들이 desktop PC보다 더 쉽게 쓸 수 있게 (예를 들면, keyboarding대신 voice recording, recognition, dictation같은) 될 것이다.

하지만 단점은 역시 우리 세대의 특징인 ‘떨어지는 시력‘ 이다. Mobile device들은 글자 그대로 ‘가볍고, 작은’ 것이라서 젊을 때보다 훨씬 ‘조작’하기도 불편하고, ‘보기도’ 불편한 것이기 때문이다. 유일한 희망은 ‘보는 것’ 대신에 말하고, 듣게 하면 될 것인데 그쪽의 발전 속도는 생각보다 느려서, 과연 우리 세대들이 그것의 혜택을 본격적으로 받게 될지는 아직도 미지수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 우리세대는 과장된 표현으로 ‘문화적 격변기’를 때 늦게 맞고 있다. 역사상 이렇게 빠른 속도로 기술에 의해 사회, 문화적 기반이 영향을 받은 적은 18세기 이후의 산업혁명 이후 처음일 것이고 질적, 양적으로 그때와는 비교를 할 수가 없다. 모든 것들이 어중간한 우리 boomer세대들, 특히 白手들, 과연 어떻게 이 격변기를 ‘안전하게’ 보낼 것인가?

Wolfram Alpha

Stephen_Wolfram
Stephen Wolfram

Wolfram Alpha? 이것은 한글로 어떻게 쓸까? 아마도 월프램 알파? 상관없지 않을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것이 ‘무엇’인가가 더 중요하니까. Wolfram은 ‘머리가 기가 막히게 좋은 예외적인 천재 과학자’, software designer, entrepreneur..(소프트웨어 디자이너, 기업,창업가)의 수식어가 붙는 유대 계 영국인이다. Full name은 Stephen Wolfram(another Steve, oh no!).

머리가 좋은 것은 그의 이력으로 충분히 짐작이 간다. 영국에서 배경 좋고 머리 좋은 유대인가정에서 태어나 그곳 유명한 Eton school에서 아인슈타인을 능가할 정도의 두뇌로 학교와 선생님들을 ‘괴롭히며’, 어린 15세 때 이미 ‘물리 논문’을 발표했고, 곧이어 Oxford로 진학해서 particle physics (입자물리학)을 공부했는데, 그 학교 교수들의 가르침이 ‘지루하고, 재미가 없어서’, 결국 미국으로 와서 남들이 대학 3학년일 나이에 그 유명한 Caltech(California Institute of Technology )에서 Ph.D.(박사학위)를 받고, 그 3년 후에는 역시 유명한 MacArthur Prize(맥아더 賞)를 수상했다.

1959년생으로 나이 ‘겨우’ 50세 갓 넘은 그는 , 이 정도면 우선 천재 중에서도 예외적인 천재일 것이다. 수학, 물리학이 주 전공분야였지만, 나중에 그의 주관심사는 computer, computing분야가 되었다. Wikipedia로 그의 약력을 보면 전형적인 천재지만, 그는 조금은 겸손치 못한 천재인 듯 싶었다. 그 정도로 자가의 머리에 자신이 있는 모양이다. 머리 좋은 유대인 가정이 그러하듯이 그도 ‘머리 좋은’ 수학자와 결혼을 해서 4명의 자녀를 두었다. 생각에, 머리 좋은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그 자녀들의 IQ가 과연 어느 정도가 될까, 의문이 생긴다.

이 사람이 원래는 수학, 물리학으로 시작을 했지만, 점점 이론적인 computing system쪽으로 관심이 바뀌어서, Cellular Automata 분야를 그 유명한 Richard Feynman의 옆에서 연구하기도 했다. 1987년 Wolfram Research를 세우고 부터는 Mathematica 라는 symbolic mathematics (대수학)를 다루는 computer software를 개발, 판매하는 등 그만의 독특한 분야를 개척해 왔다.

1992년부터 2002년까지 그는 일생일대의 최대 과업을 수행했는데, 그것이 바로 그의 독특하고, 심지어는 논란의 여지를 낳은 저서 ‘A New Kind of Science, NKS’ 의 출판이었다. 1000 페이지가 훨씬 넘는 이 방대한 연구의 결과는 사실 그 여파를 가늠하기도 벅찰 정도다. 우주는 analog가 아니고 digital이라는 조금은 ‘유행적’으로 보이는 결론, 암만 복잡한 system도 비교적 간단한 computer software로 설명할 수 있다는 등등.. 논란의 여지가 없을 수 없는 논조일 것이다. 

그의 computer중심의 물질,우주관: universe is computer라는 말은 예전에 Sun Computer, Scott McNealynetwork is computer라는 말을 연상시킨다. 다른 말로, 이들은 모든 것들을 너무 자기중심의 ‘사상’적인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 정도다. 이 책이 출판된 뒤 몇 개월 뒤에(2002년)Charlie Rose와 interview한 것(아래에 보이는 비디오)을 보는 것이 이 책의 골자를 빨리 이해하는 첩경인데, 물리학자가 아닌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Charlie Rose Show에서 그 방대한 분량의 책을 쉽게 설명하려는 Walfram의 노력은 정말 가상할 정도다.Charlie Rose 인터뷰 video가 그 동안 server에서 사라진 관계로 대신 더 최근 video, 야심작 Wolfram Alpha를 소개하는 하바드 대학 강의를 아래에 실었다.

 

Stephen Wolfram introducing Wolfram Alpha at Harvard University

 

최근에는 그의 정열을 조금 다른 각도로 Google의 성역으로 도전을 하는 것인지, Wolfram Alpha라는 거대한 작품을 선 보였고, 결국은 다른 Steve(a.k.a., Rotten Apple)가 곧바로 이것을 Siri라는 것에서 쓰기 시작하면서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것은 Google의 search engine과 비슷하게 보이지만 목적과 결과가 사뭇 다르며 다른 말로 answer-knowledge engine에 가깝다.

Google은 keyword로, 찾으려는 ‘모든 관련된’ website의 location, link (address)를 알려준다. 알려준 곳을 찾아가서 ‘네가 찾는 것을 더 찾으라’는 것이다. 일단 출처를 알려주고 나면 Google의 목적은 달성되는 것이다. 찾으려는 그때부터는 정보를 찾으려는 사람이 역량에 달려있는 것이다. 하지만 Wolfram Alpha는 한 단계 이상 더 나아가서 그 결과를 찾아내어, 자기 나름대로 ‘정리’를 해서 report형식으로 건네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하려면 ‘방대한 super computer network’이 뒤에서 찾아내서 정리를 해야 하지만, 찾는 사람 입장에서는 대부분 거의 ‘자동적으로 불과 몇 초 만에’ 결과를 얻게 된다. 그것이 바로 rottenApple iPhoneSiri 가 ‘신기하게 답을 제공하는’ 원리인 것이다.

나는, 생각하기에 따라서 21세기의 최고의 과학자가 될 잠재력’ 을 지닌 그를 이제까지 별로 잘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그것이 불과 몇 달 전에 내가 home office에서 즐겨 이용하는 IP PBX (software-based PBX)인 PIAF (Pbx-in-a-Flash) 이라는 것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rottenApple iPhone의 Siri(이것의 발음은 일본에선 ‘엉덩이’라는 뜻이다) 처럼,이 PIAF software에서도 Wolfram Alpha에서 제공하는 service를 쓰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PIAF에 연결된 전화기에서 4747(Iris, Siri를 거꾸로 쓴것)를 누르면, ‘질문’을 말하라는 prompt가 나오고, ‘영어’로 문제나 keyword를 말하면, 그것을 copy해서 반복을 하고, 확인을 하면 곧바로 그 ‘음성질문’을 Google의 speech-to-text service로 보내어(이것은 아직까지 무료) text로 바꾸어 다시 그 text를 Wolfram Alpha로 forward를 하면 그에 대한 ‘해답’이 text로 PIAF로 return이 된다.  

그 시간이 불과 몇 초밖에 걸리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Siri와 거의 같은 PIAF만의 App인 것이다. 현재는 익숙지를 못해서, 아주 초보적인 질문 (weather, today’s history 같은) 밖에 못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일상적으로 유익한, 학문적으로도 도움이 되는 정보를 computer가 아닌 ‘전화’로 얻게 되지 않을까.. 희망을 해 본다. 참, 흥미진진한 세상을 살고 있다.

 

재조명: 내성적인 사람

내성적인 사람들의 시대.. What? ‘오래 살다 보니 이런 별일이..’ 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는데, 이것도 그런 부류에 속한다. 기억에, 제일 ‘큰 별일’ 에는 20년 전쯤, ‘공산당 종주국’ 소련(Soviet Union)이 해체 된 ‘역사적 사건’ 이 있었다. 나의 살아생전에 그런 일을 볼 수 있을까 하는 그런 그런 것.. 또한, 다른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도 있었다. 고국 한국이 경제적으로 일본을 따라갈 수 있을까.. 하는 것. 그것이 이제는 예전처럼 아주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오랜 conventional wisdom이 ‘하루아침에’ 바뀌거나 생각보다 빨리 무너지는 그런 것이다.

 그러다가 지난 주의 Time magazine에는 급기야 ‘내성적인 사람의 시대'(Health Special: an article by Bryan Walsh, The Power of Introverts) 라는 특집기사가 실렸다. 내가 내성적인 인간이다 보니 이것은 아주 흥미로운 기사가 아닌가? 내성적(being introvert)인 것과 수줍어(shyness)하는 것을 연관시켜서 다루었는데, 결론적으로 말해서, 시대(문화)가 변하고 있어서 이제는 과거처럼 외향적인 사람이 더 쉽게 유명하게 되고, 성공하는 시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이 두 가지 (내성적, 수줍음)에 다 해당을 해서, 이런 시대가 왜 더 빨리 오지 않았을까, 하는 불만도 생긴다.

 사람의 성격이란 것이 어찌 그렇게 2가지만 있으랴마는 많은 사람들은 그 중간에 속할 것이다. 나는 99% 내성적인 부류고, 아내 연숙은 분명히 외향적인 쪽에 치우치는 중간일 듯 싶다. 이런 것은 역시 유전적인 것으로 본인의 의지와 상관이 별로 없다는 것도 밝혀졌다. 나의 아버님도 내성적이었다고 들었고, 어머님도 외향적은 아니었다. 본인의 의지로 바꾼다고 해도 성격을 바꾸는 것이 아니고, 겉으로 바뀐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아마도 ‘연극’에 가깝다고 한다. 내가 생각해도, 그것이 맞는 것 같다. 사회생활이란 자체가 개인, 단체들이 교류를 하는 ‘외향적’인 활동인데 그곳에서 생존하는 방법은 역시 필요에 의해서 외향적인 것처럼 행동을 하는 수 밖에 없으니까..그래도 내성적인 사람들은 그런 ‘교류 활동’을 마음속 깊이 편하게 느끼지는 않는다.

 여기서 내성적인 것이 재평가를 받게 된 것은, 오랜 동안 ‘단점만 크게 부각되는’, 과소평가를 받았기 때문인 것이고, 이것도 시대와 사회문화적 변화에 따라 이렇게 재조명을 받는 것 같다. 두 가자 부류(내성적, 외향적)가 모두 거의 같은 정도로 장, 단점이 있는데 한쪽만 지나치게 평가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서, 나의 지나간 ‘인생’을 생각한다. 어릴 적 지독히도 사람들 앞에서 수줍어 하는 나를 어머니는 정말로 걱정하셨다. 이 ‘험한 남자들의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그런 생각이셨을 것이다. 줄을 서도 밀려 밀려 제일 뒤로 밀리고, 수업 중에 바보같이 보일까 봐 질문도 잘 못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면 겉으론 멀쩡해도 속으로는 계속 불안했다. 나를 포함해서 누구나, 이런 내성적인 성격으로 많이 ‘손해’를 봤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생각을 남보다 많이 하는 편이고, 남보다 더 조심하며 일을 하니까, 남보다 큰 실수는 적었을 것이고, 사람들 사이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 만큼 내 안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도 별로 큰 차이가 없었으니까.

 이 기사를 통해서, 새로 알게 된 사실 중에는 정치가들 중에 많은 사람이 내성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이고, 대표적인 예로 ‘그렇게 말을 잘하는’ 현직 ‘미국’ 대통령인 President Obama(오바마)가 그 중에 한 사람이고, 현 국무장관 (Hillary Clinton)힐러리 클린턴도 그쪽에 속한다. 현재 공화당 대통령 후보 중에는 Mitt Romney, Ron Paul이 내성적 인물이다. 그런 조명으로 이들을 보면, 대강 이해가 간다. 남들보다 그들은 조금은 주저하는 듯 하지만 대신 아주 신중하고, 치밀하다. 그러니까 아주 치명적인 실수는 피하는 것이다. 정반대 쪽에는 전직 대통령 빌 클린턴과 전 국회의장, 현 공화당 후보중의 한 사람인 Newt Gingrich가 있는데, 이들이 외향성의 위험한 면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케이스다. 빌 클린턴은 ‘아주 위험한 여자관계’로 탄핵의 고초를 겪었고, Newt Gingrich는 ‘과대망상적인 큰소리, 복잡한 여자관계’로 아직까지 피해를 겪는 셈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하느님은 인간은 ‘그런대로’ 공평하게 설계한 것일까?

 시대가 지식, 정보사회로 점점 접어들면서 아무래도 직접적인 인간관계보다는 자세하게, 치밀하게 생각하고 분석하는 쪽의 중요성이 아무래도 부각이 될 것이다. 대강 30% 정도가 내성적이라고 분류가 되는 것을 보면 대부분은 이 밖의 ‘비 내성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대다수는 외향성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 동안 내성적인 ‘소수파’가 이들에 ‘눌려서’ 살았지만, 세대와 시대는 변하고 흘러서 어느덧 이들이 ‘동등한 위치’를 찾게 되었는지.. 참 인생 후반에 찾아온 반가운 소식이라고나 할까..

 

 

Davos WEF, Global Agenda 2012

지난 1월 25일부터 개막이 되었던 Davos WEF (World Economic Forum) 2012가 어제로 막을 내렸다. 무언가 세계가 심각하게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다른 해에 비해서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지켜 보았지만, 기껏해야 뉴스 채널 그것도 인터넷을 통해서 볼 수 있었던 것이 고작이다. 인터넷 speed가 빨라지면서 이제는 video의 화질도 놀랍게 나아져서 그런대로 Davos에 모인 ‘부러운 인간’들의 열기를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었다.

현재의 미국식(시장경제) 자본주의의 한계성과 대체 자본주의의 가능성 등에 관한 토론이 아주 흥미로웠는데, 해답보다는 의문점을 더 제기한 아주 복잡한 주제였다. 자본주의를 대체할만한 특효약은 없는 듯하고, 계속 보완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으로 결론이 모아지는 듯 했다. 과연 그럴까? 하기야 모든 것을 빨리 해결하려는 공산주의 실험은 완전히 파탄과 실패로 끝나갔고, 그것 보다 조금은 온건한 사회주의도 큰 희망을 주지 못하고, 끈질기게 남아서 버티는 것이 그저 자본주의일 듯 하다. 게다가 아직까지는 유일한 super power인 미국이 그 종주국으로 있는 한 누가 대체 주의를 밀겠는가?

유일한 변수는 역시 짱께, 쭝국의 기발한 변종 ‘국가’ 자본주의 일까.. 내가 생각하는 현재의 자본주의에 대한 해답은 그렇게 복잡하지도 않다. 그저, 그저, 돈을 ‘자유롭게’ 벌더라도 정직하게, 남도 좀 생각하며, 자기 분수에 맞게 벌라는 소리다. 그렇게 간단한 해법이 어디 있을까?

 아래에 있는 WEF video는 The Global Agenda라는 주제를 가지고 세계적 기업을 대표하는 사람들의 열띤 토론을 보여주는데, 눈을 끄는 것 중에는 Facebook를 대표하는 COO(Chief Operating Officer) 여성(Cheryl Sandberg) 의 등장이다. 주식공개가 임박한 Facebook.. 어떻게 그들은 그렇게 빨리 성장을 했을까.. 기술적인 입장에서 보면 사실 Facebook같은 사업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심하게 말해서 조금 머리 좋은 고등학생도)’ 그런 사업모델이었는데, 그들에게는 어떤 ‘운’이 있었을까?

암만 요새의 ‘미친 인터넷 경제’를 고려한다 해도 나는 이렇게 거의 ‘임의적인 superstar’의 돌연한 출현은 정말 마음에 들지를 않는다. 아마도 우리세대의 prime time은 이제 멀리 지나갔는지도 모른다는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지독한 부자(富者)들과 지나친 자본주의

¶  현재 진행되고 있는 11월 미국의 대통령 선거를 향한 치열한 공화당 후보들의 debate와 이틀 전부터 시작된 2012년 스위스 다보스(Davos, Switzerland)의 World Economic Forum(WEF)을 주의 깊게 지켜보면서 조금씩 복잡한 나의 심경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선 강하게 느끼는 ‘감정’은 바로 이것이다. ‘지독한 부자’에 대한 혐오감이다. 여기서 지독한 부자는 ‘돈 장난’을 해서 ‘지독히도’ 많이 번 부자들을 말한다. 자칫하면 ‘질투’로 부터 나온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정도로 그들이 ‘부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front-runner인 Mitt Romney의 ‘거대한 재산’은 아주 눈에 가시처럼 보인다. 과연 그가 99%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이해를 할 수 있을까? 본인은 분명히 머리가 좋으니까 그렇다고 생각하겠지만, 현실적으로 참 힘들 것이다.

Warren Buffet같이 부자들이 더 세금을 내야 한다고 하는 양심들도 있지만, 이들은 절대로 자기들이 ‘법적’으로 하자가 없다고 우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절대로 법적인 것 만이 아니다. 인간과 사회는 법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 쟁점이 되는 것이 법 자체를 바꾸자는 의견이다.

그런데 이 법은 단순한 법의 차원을 넘어서, 숫제 자본주의 자체를 수정하자는 정도까지로 나갔다. 문제는, 그 것이 예전 같았으면 ‘배가 나온, 지독한 부자’ 들이 총 동원해서 반격을 할 텐데.. 이번에는 Occupy Wall Street 때문일까.. 비겁하게 눈을 깔고 관망만 하는 듯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Davos에도 그들 특히 banker, investment fund manager같은 부류들이 대거 불참을 했는데, 내 생각에 그들은 ‘무서워서’ 못 온 것 같다. 나도 그런 ‘대중’의 의견에 100% 동감이 간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  I TOLD YOU SO department:  이 분명한 사실이 믿기는가? 바보 같은 iPxx customers & Apple Lover 들이여, 그대들이 꾸뻑~하고 흠뻑 빠져버린 iPxx (iPod, iPad, iPhone, iWhatnext?)$Apple company에 갖다 바친 돈이 얼마나 되는가? 46 BILLIONS! 이것이 얼마나 큰 돈인지 아시는가?

거기에 비해서 지난 10년 이상 그렇게 억수로 돈을 벌던 $Microsoft조차도 년 수입이 $20 BILLIONS이고, 고철 컴퓨터의 대부, computer science를 독자적으로 창시한 IBM 조차 $25 BILLIONS에 지나지 않는다. 나에게 애플이 그렇게 억수로 돈을 번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벌고 있고, 그렇게 번 $$$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 같은 것들이 어떨까가 더 회의적이고 문제라는 것이다.

그 들은 현재의 상태를 결사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특허재판 전쟁으로 엄청난 돈을 뿌리고 있다. 말도 안 되는 것들을 모조리 특허로 만들었다. $Apple company가 앞으로도 그들의 ‘대부’ S. Jobs의 그늘에서 계속 머문다면 역시 그들의 운명도 분명히 시간문제일 것이다. Jobs는 죽어가는 마당에서도 그의 국가 대통령인 Obama에게 ‘죽어도 iPxx 는 미국땅에서 만들지 않을 것(결국은 중국에서만)’ 이라고 단언을 했다는 말을 듣고 정말 그가 그런 생각으로 죽고 싶었을까 하는 측은지심을 버릴 수가 없었다. 절대적인 이익을 위해서 모든 것을 경쟁국이며 잠재적인 군사적국인 ‘공산당 중국’의 착취적인 노동력을 이용해서 사상 초유의 이익을 추구하는 Jobs 의 집단, 완전히’무엇인가에 미친 영혼’을 보는 것 같아서 긴 시간을 두고 생각하게 되었다. 비슷한 배경의 억수 부자라도 MicrosoftBill Gates는 완전히 스펙트럼의 반대쪽에서 전 세계인들의 존경을 받는다. 과연 누가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일까?

 

Number 1 죽마고우, 유지호¶  나의 친척 같이 느껴지는 죽마고우 친구, 유지호를 생각하며 쓰기 시작한 글, 시작한지 이제 보름도 넘었다. 거의 끝났다고 생각하면 다음날 아침에 꿈결에 새로 기억이 되살아 나는 것이 있어서 보충을 하고, 다음 날 또 새로운 것이 되 살아나고.. 그런 식으로 보름이 지난 것이다. 왜 이리 기를 쓰고 있는 것 없는 것 다 기억하고 기록을 남기려 할까.. 생각해 보니 나도 조금 웃음이 난다.

혹시 내가 치매예방을 염두에 두고 두뇌운동을 하는 것일까.. 아니,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하기야 그렇게 두뇌 운동을 하면 조금 치매방지에 도움이 되기도 하겠지만.. 그 동안 오랜 동안 잊고 산 것이 죄스럽기도 하고, 시간이 갈 수록 기억이 새로워질 리는 만무하고, 지금이라도 기록을 어디엔가 남겨두면, 그 친구를 ‘죽기 전에’ 다시 소식을 들을 chance가 조금은 올라갈 것이라는 그저 희망에서 쓰기 시작한 것이고, 다시 들을 수 없다면 그저 그가 어디에선가 건강하게 살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

 

GD SOB, Vista Security 2012

Vista Security 2012

The rogue malware “Vista Security 2012” looks like this

You God Damn, Son of Bitch coward, losers whom I hate most in universe, they are the people who intentionally infects people’s computer with this rogue malware called Vista Security 2012. When my daughter called home scared complaining about her infected Vista laptop, I knew it was one of those fairly easy infections. But it was wrong when I actually saw it myself. In a word, the Windows becomes virtually useless, only thing you can do was clicking OK to purchase their ‘anti-malware’ problem! Probably some eastern European mafia hired some third-rate malware writer cheap, wants free money. Knowing the infected Vista laptop is almost impossible to use for finding some help on Internet, I found how other people handle this trash, and some removal tips from my own PC. To be honest, even those sites looks like eastern European mafia showing so many misleading ads. With desperation, I actually tried following their tips, but again it looks like either long process or eventually futile attempt. Then, I came to think of it.. SYSTEM RESTORE built in feature on Vista. This, from my experience, would almost always works, nixing any worst infection by going back to previous PC snapshot mode. But again, I could not ‘execute’ the SYSTEM RESTORE on fully running Windows screen simply because the rogue malware blocks every attempt to do that. Only possible method in this case is to log into SAFE PROMPT mode (hitting F8 key while boot). When you’re on DOS PROMPT screen, run the system restore program by typing “RSTRUI.EXE” (without quotation marks). Then the PC may look ‘dead’ but after some time, it will run the SYSTEM RESTORE. This is what I did, still believe the best, cleanest, and easiest method.

 

 

What’s wrong with the newly released PIAF2 with CentOS6.2?

Nerd Vittle's PIAF2 on CentOS6.2

Nerd Vittle’s PIAF2 on CentOS6.2

Question: Am I the only one in the world whose installation of newly released PIAF2 (PBX-in-a- Flash 2)on PVE (Proxmox virtual machines) miserably keeps failing?

This feels so strange because I can not remember if it ever failed to install before. The problem is that after the first phase of installation, it just goes the infamous #bash prompt meaning the following phases simply refuse to begin. I first suspected the problem with network connection (ethernet, IP etc), but when I do ‘ifconfig’, it correctly displays dhcp‘ed IP address and ethernet connection information. I have repeated this process at least 4 times before declaring something is gravely wrong with this latest release. It looks to me not even ready for the usual internal alpha-release stage, how they dared?

 


HAPPY NOTE: I’m sorry, PIAF2! Again, it’s not your fault but my own ‘not-so-perfect’ installation setup. I, somehow, suspected this for some time, but not was so sure. As it turns out, my network’s dhcp server didn’t provide DNS server info correctly, rather it did not supply one! Later PIAF2 installation scripts also was at fault in that it simply gave up trying to connect PIAF server too early without giving any hints what’s wrong! Just one lousy error message would have saved a lot of my wasted time. After I replaced current dhcp server (which is a simple DSL router) with a dedicated DD-WRT router which has more robust dhcp server in it. Now, this latest, greatest release installed without any glitch, I am now eager to find out what’s in there.

 

 

Yes Vonnie, you can walk Roo the cat!

 

매일 우리 집의 ‘깡패’ 강아지 Tobey와 동네를 산책하면서 조금 의아했던 사실은 왜 고양이와 산책하는 사람은 하나도 볼 수가 없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런 것을 조금 안다는 사람에게 물어볼라치면 곧바로 조소의 눈길을 느끼게 된다. 한마디로 ‘말도 안 된다’ 라는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올해 이곳에 엄청난 눈이 왔을 때, 어떤 사진에 ‘고양이와 걷는’ 것을 보게 되었고, 어제는 드디어 prestigious online New York Times의 video를 보고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재확인 하였다. 문제는 어떻게 training을 시키느냐는 것인데..

 

아이 트리플 이, 스펙트럼

¶  아이-트리플-이 스펙트럼.. 이것은 IEEE Spectrum의 한글 표기이다. 여기의 IEEE는 미국에 본부를 둔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전기,전자공학도 학회를 뜻하는, Institute of Electrical and Electronics Engineers의 약자이고 읽을 때는 대부분이 I triple-Eee로 말한다. 이곳에는 아주 많은 세분된 학회들이 모여있는데, 물론 전기,전자공학에 관련된 것 들이다. 이 학회의 ‘간판’ 격 회지의 이름이 바로 Spectrum magazine이다.

이 학회에 가입을 하면 (년 회비를 내면), 이 ‘잡지’는 무조건 받게 되고 분과 학회에 가입된 곳의 회보(주로 논문집)를 따로 받는다. 나는 이곳에서 학교에 다닐 때 거의 ‘자동적’으로 학생회원으로 가입을 했다가 졸업을 하면서 일반회원으로 남게 되었는데, 거의 10+년 전부터 이곳에서 나오게 되었다. 상당히 비싼 연회비로 그렇고, 내가 직장에서 하는 일 (embedded systems)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나오게 되면서 그리 아쉬운 것을 못 느꼈지만, 단 한가지.. 이 간판 격 월간지 Spectrum magazine만은 조금 아쉽게 느껴졌다. 이 월보는 상당히 그때그때의 인기를 끄는 기사들을 아주 ‘쉽게’ (일부러 ‘수학’ 공식을 피한 듯한) 계제하곤 해서 ‘누워서 편하게’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오랜 세월을 잊고 살다가, 며칠 전 정말 우연히 이곳을 website에서 보게 되었고, 정말 고향을 찾은 기분을 만끽하게 된 것이다.

다행인 것은 다시 회원으로 가입을 하지 않고, 아주 질 높은 technology, 특히 consumer electronics에 관련된 기사를 보게 된 것이다. 언제까지 이곳이 ‘무료’일지는 모르겠지만 (New York Times처럼), Google처럼 우리 같은 99%를 조금 더 생각해 주는 그런 ‘자선’적인 자세로 일관하지 않을까.. 희망해 본다.

ieee-spectrum

IEEE Spectrum mag site

¶  20년 전통의 Nativity scene:  우리가 사는 subdivision에 이사온 지도 내년 3월이면 벌써 20년이 되어간다. 이곳에서 우리 아이들도 거의 다 자란 셈이고 우리도 늙은 청춘을 다 보낸 느낌이다. 별로 크지 않은 곳이라 사실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대개 알 정도가 되었고, 우리는 이제 ‘고참’ 축에 속하는 집이 되었다.

이곳에서 크리스마스를 지낸 지도 그렇게 오래되었는데, 그때마다 20년 동안 변함없이 앞 뜰에다가 아기예수님 태어나신 모습으로 장식을 한 집이 있었다. 물론 독실한 크리스천 일 것이고, 걷다가 인사도 자주하는데, 내가 놀라는 것은 어쩌면 20년을 한해도 거르지 않고 ‘똑같은’ 장식을 똑같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없어지는 날은 우리 동네의 큰 뉴스거리가 될 것이다.

20 years of Nativity

2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예수탄생 전시

 

¶  Wordle: 워들?  아마도 word riddle을 줄인 말이 아닐까? 이 site에 가보면 금방 알 수 있겠지만, 이것은 blog site에서 많이 쓰이는 에 많이 쓰이는 computer software인데, 쓰이는 빈도에 비례해서 글자, 단어를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보여준다. 이것을 보면 어떤 단어가 가장 많이 쓰이고 있는지 한눈에 들어오는데, 문제는 아직까지 한글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이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은 IBM에 근무를 하며, 여가시간에 이것을 만든 모양인데, 아깝게도 이것은 open source  software가 아니고 IBM에 그 copyright가 있어서, 한글용으로 바꾸거나, 한글 기능을 첨가하는 것이 쉽지 않을 듯하다.

My current interests in Wordle

My current interests in Wordle

 

200번째 블로그를 맞으며..

200번째 블로그, 지금 쓰고 있는 blog이 200번째 post가 되었다. 작년 말쯤에 100번째를 지났는데 일년이 되기 전에 다시 다음의 이백이란 숫자를 지나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 이것을 시작할 무렵에는 일주일은커녕 한 달에 한번 쓰기도 힘들었다. 거의 수십 년 동안 쉬어온 ‘한글쓰기’가 그렇게 쉬울 리가 없다. 특히 인터넷 출현 전에는 한글로 쓴 글을 보는 것도 쉽지 않았다. 가끔 보는 신문이 전부랄까..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인터넷의 출현이 나에게는 그렇게 늦은 것은 아니다. 다시 한글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이제는 쓰게도 되었으니까. 사실 이 blog으로 나는 다시금 한글을 배우고 있는 셈이다. 정말 많은 ‘섬세하고, 아름다운’ 수식어들을 잊어 버렸다. 어쩔 수가 없다. 그런 것은 문화적이기 때문에 한글의 중심지에서 살지 않으면 아무리 잘 쓰려고 해도 어색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00% 영어권 직장생활을 오래 한 여파로 솔직히 영어를 쓰는 것이 편하고 쉬울 때가 참 많았다. 그런 배경에서 다시 한글과 한국말을 쓰려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치 않아서 나도 적지 않게 놀랐다. 세월의 횡포여..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쓰는 한국말은 아무래도 너무나 직선적이고 직설적이다. 그러니 그것을 한글로 쓰게 되면 정말 다시 읽기도 싫을 정도로 메마른 느낌인 것이다. 나의 blog은 그런 배경에서 쓰여진 것이지만, 나로써는 정말 기를 쓰고 최선을 다한 것이다. 다음의 단계인 300번째 쯤 되면 조금은 더 ‘세련’된 문장이 되지 않을까..하는 희망을 해본다.

 

Hillary Clinton on TIME
Hillary Clinton on TIME cover

힐러리 클린턴, 이번 주 타임 매거진의 표지 기사가 힐러리 클린턴에 관한 것이다. 아마도 이번에 리비아의 내전이 카다피의 피살로 끝나게 되면서 미국이 취한 신중한 개입의 성공이 힐러리 클린턴의 ‘빛나는’ 외교에 의한 것으로 보는 듯하다. 이번 리비아의 쾌거는 사실 유럽연합(EU), NATO와 미국의 신중하지만 무서운 파괴력을 가진 개입의 성과인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지상군이 전혀 개입을 하지 않고 ‘기술적’인 지원으로 일관을 한 것이고 그것이 완전히 성공을 했다. 어떻게 힐러리는 어려울 수도 있는 이런 공동전선을 구축했을까? 첨단기술을 완전히 이해를 하는 대표적인 신여성인 그녀는 그런 능력이 충분히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첨단기술이란 대부분 social networking tools들, 대표적인 것이 twitter, facebook같은 것 들이다. 어떻게 보면 별것 아닌 듯 하지만, ‘고리 타분할’ 수도 있는 덩치 큰 국무성의 최고 관리가 그런 것을 자유자재로 쓴다는 것은 별것이 아닌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서 해외의 모든 미국대사관들에게 그런 social networking tools을 적극적으로 쓰게 했다는 것은 사실 놀라운 성과일 것이다. 예를 들어 국무성에는 현재 192 Twitter feeds, 288 Facebookaccounts가 쉴새 없이 쓰이고 있다는 것인데, 옛날 생각에 ‘늙게만’ 보이던 ‘할아버지’ 국무장관들이 그런 것들을 쓴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나와 나이가 거의 비슷해서 항상 관심 있게 주시하고 있는 그녀, 참 매력적일 수도 있다. 이렇게 ‘머리 좋은 여자’ 힐러리, 과연 그녀는 장차 대통령이 되려는 생각을 어떻게 머리 속으로 조정하고 있을까 궁금하다.

 

Dennis Ritchie, 1999
Dennis Ritchie, 1999

지난 10월에 C Programming Language의 ‘창시자’ 인 Dennis Ritchie가 타계를 하였다. 그리고 그는 computer operating system의 할아버지 격인 Unix를 Ken Thompson과 같이 ‘발명’을 한 장본인 이기도 하다. 그것들이 만들어질 당시는 personal computer란 것은 아예 이름조차 없었고 대부분 IBM mainframe아니면 PDP minicomputer가 전부였던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었다. 나도 그 시대를 모두 거치며 컴퓨터를 배워서 그들을 생생히 기억한다. FortranCobol, Assembler 등이 programmer들의 전부였던 그 시절에 ‘대담하게도’ 거의 혼자서 C language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후에 완전히 컴퓨터의 ‘표준 언어’가 될 줄은 그들은 상상을 못했을 것이다. 나는 software engineer로 일 하던 내내 이것 한 가지로 ‘밥을’ 먹은 셈이 되었다. 거의 만능적인 ‘간결함’과 ‘적응성’을 가진 언어여서 business application서 부터 embedded system에 이르기까지 이것이 안 쓰인 곳이 거의 없었다. 그뿐이랴.. Unix는 어떠한가? 이것은 C language보다 더 큰 파급효과를 남겼다. 지금의 Linux완전히 이것을 ‘베낀’ 것이고, Apple/Mac/OS도 이것을 조금 바꾼 것이다. 심지어 Microsoft쪽의 MS-DOS, Windows 같은 것도 기본적인 idea는 모두 이곳에서 나왔다. 이렇게 보면 이것을 ‘만든’ Dennis Ritchie의 업적을 조금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올해의 Japan Award를 받아서 뒤 늦게 그들을 인정했지만, 아깝게도 ‘겨우’ 70세에 타계를 한 것이다. 내가 존경할 만한 한 computer pioneer가 사라진 것이다.

 

지난 주말에 보스턴에서 열렸던 이화여대 북미주 총동창회, 연숙이 그곳에 다녀와서 날씨와 연관된 일화를 듣게 되었다. 거의 기록적인 10월의 폭설로 인해서 동창회가 열렸던 호텔이 정전이 되었다고 한다. 그것도 동창회의 주 행사가 시작될 무렵에 정전이 되어서 끝날 무렵에 다시 복구가 되었다니.. 조금 타이밍이 기묘하지 않았을까? 완전히 비상등만 켜진 상태에서 그 커다란 행사를 한다고 상상을 해 보라.. 특히 식사준비도 완전히 혼란에 빠져서 많은 참가자는 main dish를 못 먹었다고 한다. 하기야 어찌하랴.. 이것은 완전히 Mother Nature의 자연적인 act of God인데..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너무나 추억에 남는 행사가 되었다고.. 한 사람도 빠짐이 없이 ‘즐기고’, 사회를 보는 동창은 너무나 감정과 감격에 겨워서 ‘울었다’ 고.. 내가 들어도 가슴이 뭉클하였다. 특히 연숙은 너무나 오랜만에 총장 친구, 김선욱씨와 해후를 해서 사적인 시간을 즐겼다고 해서 나도 기분이 흐뭇했다.

 

인천, 61년 전

9월 15일, 1950년 9월 15일에 있었던 역사적인 육이오 당시,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된 날이다. 거의 ‘비상식적’으로 적의 후방을 찌르는 거대한 맥아더 장군의 작품이 현실화 되던 날이었다. 그 후방이란 곳이 인천인 것이 그 당시는 상당한 모험이었을 것이라서 비상식적인 발상이었고, 그런 것이 맥아더장군 특유의 발상이기도 했고, 그것은 사실 아슬아슬한 모험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인천에 건 도박은 예상을 훨씬 웃도는 성공담이 되었다. 그러니까 가끔 계산이 깔린 도박은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도박이라는 것은 그 뒤에 같은 운들이 따라주지를 않았기 때문에 분명히 들어난다. 그 이후 맥아더의 운은 사라지고, ‘악운’이 따르게 된 것이다. 그 당시 맥아더가 조금만 속도를 늦추고, 적군에 대한 정보에 신경을 더 썼더라면 사태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제일 큰 도박이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을 ‘억지로’ 무시했다는 실수였다. 수많은 정보들이 그것을 말해주었지만, 그에게는 듣기 싫었던 정보였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런 정보들의 신빙성이었을 것인데, 아마도 정보수집에 더 신경을 썼어야 했지 않았을까?

Book, Operation Broken Reed
Book, Operation Broken Reed

며칠 전에 Reading-by-Tying으로 읽고 있었던 한국전쟁(육이오 동란)에 관한 책, Operation Broken Reed (꺾인 갈대 작전)을 간신히 다 읽게 되었다. 이 책도 산지 몇 년째 된 것인데 올 여름, “육체적인 노동 대신 여름독서를”, 이란 목표로 골랐던 도서목록중의 하나였다. 이 책을 읽은 때가 육이오(6.25: 동란 발발)와 구이팔(9.28: 서울 수복) 을 사이에 둔 계절이어서 더 61년 전을 상상하게 되며 읽으니 실감이 더 했다. 이 책은 시간이 나면 자세히 나의 blog에서 소개할 예정인데, 한마디로 이 책의 내용이 ‘진실, 사실’ 이라면 이 ‘믿기 힘든’ 작전은 육이오 동란 중, 가장 비밀에 쌓인 역사였을 것이다. 이 책을 읽었던 사람들 중에는 이것이 거의 ‘허구’라고 단정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믿는 쪽에 가깝다. 나도 읽고 나서 생각이, 이것은 사실 일 것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이 작전은 육이오 동란이 휴전회담과 격전을 거듭하기 시작하던 1952년 1월 초에 38선 북쪽, ‘적진’ 속에서 일어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1주일에 걸친 미군, 자유중국 군의 합동작전이었고, 비록 결과는 성공이었지만 그에 따른 희생은 실로 충격적이고 슬픈 것이었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휴전회담은 가속화 되었고, 확전, 3차 세계대전(심지어, 핵전쟁)은 방지가 되었다.

 오늘 내가 생각하는 것은 구이팔을 가능케 한 구일오 인천상륙작전이다. 너무나 많이 알려져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이번에는 예전과는 조금 다른 각도로 이 역사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2007년, New York Times best seller였던 David Halberstram의 책, The Coldest Winter, The America and The Korean War라는 책 덕분이었다. 700 페이지가 넘는 이 책은 육이오 동란을 미국과, 한국 주변국과의 정치적인 각도로 다룬 것이어서 이제까지의 군사적인 각도로만 다룬 책과 다른 맛을 보여준다. 역사를 다룬 책이지만 역시 저자의 정치적 색깔도 여기저기 보여주고 있어서 흠이라기 보다는 조금 더 인간적인 역사철학도 보여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맥아더 장군에 대한 저자의 거의 ‘혐오’ 적인 인상이다. 물론 충분한 역사적 자료에 의한 저자의 의견이겠지만, 조금은 정도가 지나치다고나 할까? 맥아더를 영웅시하는 사람들은 이 책의 이 부분들을 읽는 것이 괴로울 것이다. 나는 솔직히 중립적인 입장일 수 밖에 없다. 내가 맥아더를 옆에서 본 것도 아니고, 이 저자와 같이 충분히 사료를 공부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어떠한 영웅도 보여주기 싫은 면이 충분히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진리’는 안다.

David Halberstam's Korean War book
David Halberstam’s Korean War book

 이 책의 저자는 책 전체를 통해서 맥아더를 일방적으로 몰아 부치기는 했지만 솔직하게 맥아더의 천재적인 ‘용기와, 지혜’를 인정한 유일한 부분이 바로 인천상륙작전이었다. 거의 부산 교두보 (Pusan Perimeter)에서 바다로 밀려날 뻔 했던 시기에 이 작전이 성공을 한 것이고 보면 그 절묘한 timing의 진가도 역사적인 것이 아니었을까? 사실, 이 작전이 조금만 더 늦게 있었다면 김일성 개XX의 호언장담대로 부산은 괴뢰군 수중에 들어갔을지도 모르고, 대한민국은 역사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아찔해진다.

 맥아더의 인천 상륙작전의 구상은 이미 지상전에서 유엔군의 압도적인 열세를 만회하는 방법으로 시작이 되었다. 유엔군의 해군, 공군을 포함한 기술적인 면의 압도적인 우세함을 활용하는 방법은 해상으로 적진 깊숙이 대거 병력을 빨리 상륙시키는 방법임은 사실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맥아더는 그의 과거 전투경험으로도 생명을 아끼지 않는 무자비한 적군과의 정면 대결보다는 우회 작전을 더 좋아했다. 이러한 적진 뒤의 상륙작전의 구상은 서울함락 직후 공산군이 노도와 같이 남진하기 시작하던 7월 초에 이미 결정이 되었다.

 맨 처음 이 작전은 Operation Blueheart 라고 이름이 되었고, 예정 날짜는 7월 22일이었지만 지상전에서 너무나 일방적으로 밀리는 바람에 이 예정은 무기로 연기가 되고 말았다. 그러는 중 맥아더는 그 동안 별로 작전이 없었던 해병대에 이 작전을 맡아주도록 주선을 하며, 본격적으로 목표를 인천으로 굳히기 시작했다. 문제는 목표가 인천이라는 사실이었는데, 사실 표면적으로 인천은 작전하기에 ‘최악’의 자연적 조건만 갖추고 있었다. 조수 간만의 차이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심한 곳이었다. 이 조수 시간을 잘못 맞추는 날이면 해병대가 기나긴 개펄에서 허우적거리는 최악의 상태도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상륙하기에 알맞은 ‘해변’ 이 없고 모두 방파제 같은 시설물로 그득하고, 수뢰와 같은 방어시설이 있으면 더욱 힘들 것이다. 항구에 거의 붙어있는 월미도는 공산군 수비대에게 부두를 방비하는데 좋은 시설을 줄 수도 있다.

 이런 불리한 조건들은 물론 해병대를 전함으로 운반해 줄 해군 측에서 강조가 되었다. 해군 함정들이 인천 해안에 충분히 접근할 수 있는 날짜는 밀물의 주기에 따라 거의 제한이 되었는데, 빠른 날이 밀물의 깊이가 31 feet인 9월 15일 이고 그 다음이 10월 11일이었다. 9월 15일의 아침 밀물의 시간은 오전 6시 59분, 저녁 밀물은 오후 7시 19분이었다. 이래서, 맥아더는 상륙시기를 아침밀물에 맞추는 작전으로 결정을 한다. 이런 결정은 그에게는 사실 간단했지만 해군에게는 상당히 힘들고 복잡한 요구였을 것이다. 이런 결정들은 거의 한결같은 반대에 부딪쳤지만 이것은 맥아더가 충분히 예상한 바여서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인천상륙작전이 도박을 할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본 것이다. 전략적인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것은 거의 모두 인정을 했지만 문제는 상륙 지점이었다. 왜~~ 그렇게 불리한 조건만 갖춘 인천인가? 그보다 훨씬 남쪽에 있었던 군산이 훨씬 (해군에게, 해병대가 상륙하기에) 안전한 곳이 아닌가? 그런 것들은 사실 맥아더가 설득하는데 거꾸로 이용이 되었다. 그렇게 어려운 곳이라 적들도 그곳을 충분히 방어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인천의 가치는 사실 지리적으로 서울과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에도 있었다. 서울을 점령하면 그 상징적인 효과는 대단할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동쪽으로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르면 낙동강 쪽에 몰려있는 공산군들을 완전히 포위 섬멸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맥아더의 뚜렷한 구상은 예상보다 쉽게 반대자들을 설득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인천 D-day는 이렇게 공식적으로 정해졌고, 공격준비가 시작이 되었다. 맥아더의 짐작대로, 김일성은 인천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모택동은 달랐다. 맥아더를 알았고, 일본에 깔려있던 공산스파이들이 이미 이상한 낌새를 보고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후방 깊숙한 곳으로 대거 병력이 쳐들어 올 가능성에 대해서 중공과 소련은 김일성에게 경고를 했지만, 역시 맥아더에게 운이 좋았는지 그는 듣지 않았다. 그 정도로 김일성은 빠른 승리를 장담했던 모양이다. 이런 사실로 보면 김일성은 소련이나 중공의 지시에 의해서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니고 순전히 그의 독자적인 결정으로 밀어부친 것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를 보면 이런 미친 정도로 ‘낙관적’인 사고방식이 이해가 간다. 그는 사실 거의 ‘깡패 개XX’ 의 수준이었던 것이다.

 상륙작전은 예상대로 공산군의 저항이 미미한 상태로 진행되었다. 13,000명의 해병대가 투입이 되어서 첫날의 전사자는 20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리고 드디어 서울을 향한 진격이 시작되었고, 결국 그것은 9월 28일까지 계속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서울까지 30마일 정도 진격하는데 무려 13일이 걸린 것이다. 이것은 9월 15일 이후 놀란 김일성이 대거 병력, 2만 이상을 이 지역으로 투입한 까닭이었다. 문제는 사실 서울을 그렇게 빨리 점령할 이유에 있었다. 군사적으로 보면 저항이 치열한 서울을 우회해서 빨리 낙동강으로부터 후퇴하는 공산군을 포위 섬멸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것은 후에 ‘맥아더 개인의 영광’을 위한 작전이 아니었던가 하는 비난을 받게 되기도 한다. 서울 탈환의 정치적인 중요성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서울 탈환에 소모된 귀중한 시간에, 후퇴하는 공산군이 북으로 탈출할 여유를 준 셈이고, 그것은 두고두고 전쟁을 길게 끈 원인도 되었다. 원래의 계획은 6.25 남침의 3개월이 되던 9월 25일 이전에 서울을 탈환할 예정이었는데, 그 날에는 서울 근교까지 진격을 한 상태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시가전이 거의 3일 걸린 셈이다. 이렇게 해서 맥아더가 거의 혼자 밀어부친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한 셈이고, 이로 인해서 파죽지세로 부산을 포위했던 공산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후퇴를 시작하게 되고, 전쟁은 완전히 양상이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이 작전 성공 이후로 ‘기세가 등등’ 해진 그의 독자적이고, 독재적인 작전은 실패의 연속이 된다.

 시기적으로 61년 전에 일어났던 일을 생각해 보았다. 나는 이 당시 2살 정도여서 직접 보고 들은 적이 없지만 그래도 이것들은 나의 생전에 일어났던 살아있는 역사였다. 이 당시에 나는 어디에 있었을까?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이 당시 이미 아버지가 끌려 가신 이후였고, 원서동의 어떤 무당집에 숨어 살았다고 했다. 그 동네는 비원 바로 옆에 있었는데, 미군의 비행기가 폭격하는 것도 다 보셨다고 들었다. 그러면 비록 기억은 안 나지만 나도 그런 장면을 다 보고 들었을 것 같다. 다만 기억을 못하는 것 뿐이다. 생각을 한다. 과연 민족 반역자, 역적, 김일성 개XX는 어떤 생각으로 전쟁을 일으켰나? 이 미친놈을 어떻게 역사는 능지처참을 할 것인가? 괴롭다. 괴롭다.

 

analog gurus, ISSUU

Analog guru, Jim Williams
Analog guru, Jim Williams

두 명의 세계적인 analog guru (analog electronics engineers) 가 불과 며칠 간격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중의 한 명이 떠났어도 큰 뉴스거리이자 학계, 업계의 큰 손실일 터인데, 이렇게 heavy급 두 명이 거의 함께 사라졌다는 것은 사실 할 말을 잃어버릴 정도다. 처음에 6월 19일에는 나와 동갑인 Jim Williams 뇌일혈로 급서를 하였다. 사진으로 보기에 그렇게 보이지 않았지만 이런 것을 누가 예측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건강하게 보여도 60세가 넘으면 ‘통계적으로도’ 다음날을 못 볼 수도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케 한다. 다음 사람은 Bob Pease, 이 사람은 70세가 넘었고 도사 풍의 긴 수염이 특징이다. 위에 말한 Jim Williams의 장례식에 ‘늦게’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차가 절벽으로 구른 모양인데 아마도 운전 실수가 아니고 심장에 갑자기 이상이 생겼던 것으로 추측을 하고 있다. 이렇게 세계 정상급의 analog engineer둘이 기이한 인연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Analog guru, Bob Pease
Analog guru, Bob Pease

나이로 보아서 나와 비슷한 electronics경험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transistor이전의 vacuum tube(진공관)으로 시작한 세대인 것이다. 진공관, 트랜지스터, IC (Integrated Circuit)를 모두 경험한 electronics에서 great generation에 속한다 고나 할까.. 특히 Jim Williams는 ‘경력’이 이채롭다. 그 흔한 학위가 없는 것이다. 대학교라고는 디트로이트의 Wayne State University에서 한 학기 공부한 것 밖에 없는 것이다. 거의 완전히 ‘실무와 독학’으로 세계의 ‘정상’급에 도달한 것이다. 나는 충분히 이해를 하고도 남는다. 그 분야에 대한 강렬한 집착과 노력이 ‘그저 수학 같은 공부만 잘하는’ 엔지니어보다 나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세상이 물론 많이 바뀌어서 ‘납땜’질 한번 안 해보고 그저 computer simulation으로 살아가는 새 세대의 engineer들 천지인 요새 세상, 그렇게 design된 것들이 많은 경우에 의도한 대로 ‘작동’을 못한 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고, 수학적인 것과 땀과 먼지 가득한 실제의 현장과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과연 어디서 누구로 부터 배울 것인가?

 

한국의 천주교회, 특히 주교회 발행 경향잡지 site를 보면서, 자주 보는 잡지나 책 같은 것을 online으로 보는 web applications (web apps)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었다. 특히 ‘글자’들과 멋진 page format등이 많은 페이지를 , 그것도 많은 분량을 읽는 것은 그렇게 편하거나 즐거운 경험은 아닌 듯 싶다. WWW의 역사가 종이로 만든 책의 역사에 비하면 거의 제로에 가까운 만큼, 우리는 아무래도 책을 읽을 때, 책장을 넘기는 기분 정도는 잘 알고 있다. 현재 수준의 웹 페이지는 그것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비록 비디오는 비교적 잘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책 종류는 그것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YouTube style영향으로 바뀌고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이 괴상한 이름의 ISSUU인 것이다. Denmark의 venture인 듯 한데, 비슷한 종류의 service중에서 제일 세련되었고, 우선 느껴지는 맛이 그 중에서 제일 매끄러운 것이다. 이것을 test하려고 내가 손수 scan해서 만든 중앙고 57회 졸업앨범pdf 를 이곳에 올려 놓아 보았다. 과연 소문대로 모든 것이 ‘선전’한 그대로이다. 앞으로는 조금이라도 ‘책’이나 ‘서류’의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들은 이 service를 이용하면 좋을 듯 싶다.

 

ISSUU-hosted 중앙고 57회 졸업 앨범

 

 

Building Wireless Sensor Networks

A Good Introduction to ZigBee & Arduino
A Good Introduction to ZigBee & Arduino

얼마 전에 비교적 최근 (2010년 12월) O’REILLY에서 출판된 ZigBee network에 대한 이 책을 샀다. 저자는 이 방면에서 요새 많이 알려진 New York UniversityRobert Faludi 교수인데, 제목을 보면 분명히 embedded systems에 대한 것이고 조금 더 살펴보면 embedded systems engineer보다는 hobbyist를 독자로 겨냥을 한 듯하다.

내가 마지막으로 serious하게 embedded system을 ‘만진’ 것은 거의 10년이 넘었다. 나는 거의 한평생을 computer engineer로 일을 했지만 여기서의 computer란 것이 사실은 embedded system이 거의 전부였다. 첫 직장이 Columbus, Ohio에서 Dynamic Telecom Systems(DTS) 이란 start-up company였는데 그곳은 그 당시 AT&T의 시장독점이 끝이 나면서 새로 생긴 경쟁업체, MCI란 회사에 납품을 하던 automatic telephone dialer를 만들던 회사였다. 나는 그때부터 직장생활이 끝나는 날 까지 micro-controller based ’embedded systems’을 design, 처음에는 거의 hardware에서 나중에는 거의 software를 design하며 세월을 보냈다.

하지만 business software나 Internet programming과는 달리 이런 것들은 집에서 혼자 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를 않았다. 우선 최소한의 systems laboratory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상당하니 투자가 필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자연히 embedded system을 떠나게 되었고 거의 모든 일들이 Internet, network PC쪽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나의 마지막 직장이었던 Rockwell Automaton에서 industrial PC를 design했던 것으로, 비교적 standard, generic system에 대한 경험을 얻게 된 사실이었다.

Open design, Arduino

그러다가 얼마 전에 open hardware platform인 Arduino란 tiny system에 대해서 알게 되었는데 가격이 아주 좋아서 구입을 하게 되었다. 참, 세상이 많이 좋아진 것이 거의 모든 것이 open system쪽으로 (Linux 덕분에) 변해서 정말 모든 것들이 거의 free가 되었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정말 구세주 같은 세상이 된 것이다. 거기에 wireless까지 합세를 해서 정말 smart, remote, connected system을 아주 저렴한 값에 design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여기서 wireless쪽은 ZigBee란 것이 아주 promising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consumer에게 잘 알려진 WiFi와는 비교를 할 수 있지만 그 용도가 아주 다르다. 주로 physical, environmental sensors와 controller를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이다.

ZigBee2, XBee radio
ZigBee2, XBee radio

그러니까 WiFi같은 Internet을 위한 것이 절대로 아닌 것이다. 그래서 더 재미가 있지 않은가? 한번 ‘속는 셈’치고 오늘 이 책에서 언급된 hardware parts들을 order하였다. 처음 사는 것들이라 조금 투자를 하는 기분이었다. 내가 현재 구상하고 있는 것은 현재 집에 설치된 power-line based X-10 network을 모두 ZigBee-based network으로 바꾸려는 것인데.. 아마도 시간이 꽤 걸릴 듯 하지만, 이 과정에서 ZigBeeArduino system의 확실한 경험이 생길 것이라는 희망을 해 본다.

 

올해 우리 집, 지구 온난화의 첫 희생양들..

지난 3월 26일 토요일 밤에 완전히 ‘열대성’ 폭풍우가 밤새 쏟아졌다. 이제는 이런 흔히 말하는 ‘이상(異常)기후’에 별로 놀라지는 않는다. 이런 ‘이상기후’가 이제는 거의 ‘정상기후’가 되어가고 있으니까.. 기상과학자들이 이야기하는 global warming의 한 증상일 것이다. 근년에 들어서 3월 중에 거의 이런 것들이 온 것을 기억을 한다. 하지만 이번 것은 그 정도가 심해서.. 천둥과 벼락이 밤새 시끄러웠다. 다행히 바람은 상대적으로 덜 해서 겉보기에 피해는 별것들이 아니었다. 문제는 천둥과, 벼락과.. 우리 집에 있는 super network system lab이었다. 이제까지는 기껏해야 정전으로 인한 불편함 정도로 그쳤었는데 이번에는 power system에 아주 커다란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집 근처 Roswell Road 확장 공사로 electrical power system도 큰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결과적으로 우리 집의 자랑인 super computer network lab의 모든 ethernet ports들이 직격탄을 맞은 셈이 되었다.

처음에는 모든 servers (physical, virtual)/PC들을 reboot하면 (예전과 같이) 해결이 될 줄로 낙관을 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우선, ADSL modem(ActionTec)이 완전히 못쓰게 되었고, 그것에 연결이 된 Linksys DD-WRT router의 WAN port(ethernet)가 못쓰게 되었다. 그러니 Internet이 완전히 shutdown이 된 것이다.

3월 26일 벼락의 희생물들.. aDSL modem, dd-wrt Router, VoIP ATA..
3월 26일 벼락의 희생물들.. aDSL modem, dd-wrt Router, VoIP ATA..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줄줄이 그것과 직접 연결이 된 ethernet port가 있는 것들이 다 문제가 생겼다. 제일 가까이 있었던 network switch 들이 제대로 function을 못하고 심지어는 VOIP phone ATA(analog telephone adaptor)와 이번에 새로 산 KVM virtual server (Proxmox PVE) motherboard의 gigabit ethernet port까지 electrical spike을 맞아서 불능이 되어 버렸다. 이것들을 다시 test하고 repair하는 것이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보다는 시간이 문제였다. garage에 있는 server closet과 attic에 있는 mini distribution box를 수없이 들락거리는 것이 웬만한 운동보다 힘 들었던 것이다. 거의 일주일이 걸려서 이제는 조금 안정이 된 셈이다. 이번 사고의 교훈은 간단했다. ‘simple is beautiful‘.. 이제는 복잡한 것이 자랑이 아니고 ‘사고의 원인’이란 것.. network device를 될 수 있는 대로 간단히 하고, 다음은 더 막강한 방어 수단으로 better surge protector를 생각하기로 했다. 이곳의 기후는 이제 더 ‘지구 온난화‘의 영향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세대: 20 something, 40 years later

20 something, 40 years later.. 40년 전의 20대와 오늘날의 20대는 과연 무엇이 변했나? 특히 나의 20대와 요새의 20대는 어떠한가?  결론부터 말하면 ‘아찔한’ 변화다. 엄청난 변화. 각 세대마다 조금 특징을 지울 수 있는 역사의 흐름이 있을  것이다. 이곳 미국에서 보면,  나의 나이는 baby boomer generation 의 거의 시작에 속한다. 공식적으로는 태어난 해가 1946년부터 1964년까지가 그 세대에 속한다.

Baby boomer뒤는 어떻게 되는가? 별로 큰 특징이 없다. 그저 gen-X, gen-Y 등으로 불린다.  일본에서도 미국에 비슷한 baby boomer 세대가 있었다. 2차대전 패전 후의 시기다. 단까이 세대로 불리는 세대가 거기에 속한다. 하지만, 나와 같이 20 something의 시기가 한국과 미국으로 갈려 있으면 사실 세대의 특징이 더 복잡해 질듯 하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미국의 세대별 이름은 출생 년도에 따라서 다음과 같다.

2000/2001-Present New Silent Generation or Generation Z
1980-2000 Millennials or Generation Y
1965-1979 Generation X
1946-1964 Baby Boom
1925-1945 Silent Generation
1900-1924 G.I. Generation

 

나는 잘 모르지만 한국도 이것과 비슷한 세대별 이름이 있을 듯하다. 나는 그곳에서 어떤 이름의 세대로 불릴까,궁금하기도 하다. 절대로 baby boomer는 아닐 것이다. 해방이 되고 나서 갑자기 출산율이 늘어났다는 얘기는 못 들어 보았으니까. 6.25전쟁을 선두로 가족과 친척을 잃어버리고 전쟁 후의 찌든 가난을 다 겪고, 살인적인 입시, 취직경쟁을 몸의 전체로 경험을 하며, 박정희의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던 어떻게 보면 이곳의 great generation과 비슷하지 않을까? 이렇게 보면 일본의 같은 나이들도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비록 패전 후 또 다른 전쟁은 없었지만 이들도 우리에 비해서 그렇게 잘 산 것은 아니었다. 찌들은 가난, 기아를 보았고 미친 듯이 일을 해서 그들의 경제기적의 주춧돌이 되었던 세대다.

미국의 baby boomer는 전혀 다르다. 아니 극과 극이다. 풍요와 자유, 반항, 반전, 방종..등등으로 이어지는 세대인 것 같다. 미국은 2차 대전 이후 소련과 초강대국이 되었고 경제적으로도 초강대국이 되었다. 자기의 부모세대들이 겪은 실업이나  세계 대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자랐다. 비록 핵전쟁의 공포를 안고 자랐지만 거의 무제한적인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믿었다. 하지만 이들도 월남전을 겪어야만 했다. 물론 부모세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쟁을 치렀다. 반전과 인종간의 평등 같은 차원이 높은 이상이 현실화하는 것을 보며 자랐다.

예전에 don’t trust over 40s..란 말이 유행했었다. 나이가 드는 것 중, 아주 부정적인 면을 부각한 말이다. 연륜과 경험에 반비례해서 늘어나는 권모술수와 거짓말, 능글맞음, 옹고집..등등 수도 없이 많은 ‘꼰대 근성’.. 얼마나 우리들 그런 것들을 경멸했던가? 이제 우리가 그런 것들을 그대로 뒤집어 쓰게 되었다. 하지만 그 반대의 말도 있다. 쉽게 말해서 stupid digital generation이라고나 할까.. 기초, 근본적인 교육의 바탕이 전혀 없이 벼락부자가 되는 Internet generation을 말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전혀 기본이 되지 않은 ‘철없는 애’들이 $$$에 미쳐서 날뛰는 그런 세대를 말한다. 이들의 half-life도 지난 세대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짧다.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과연 이 ‘철없는 세대’가 ‘성장’을 해서 사회의 중견세대가 되었을 때, 그들은 어떻게 세상을 이끌어 나갈까.. 참.. 한숨부터 나온다.

 

 

 

 

Parade of new tech toys..

우리 집은 big screen TV가 “아직도” 없다. $$$도 그렇지만 사실은 우리부부가 거의 모든 시간을 home office desk에서 보내고 있어서 안락한 couch같은 데서 TV를 보는 시간이 거의 없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big screen sports를 별로 즐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football같은 것.. 둘 다 그런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big screen으로 movie같은 것을 보는 것 나쁘진 않지만 ‘우선순위’에서 아주 밑에 있는 셈이다. 하지만 가끔, 필요할 때, broadcast TV를 보고 싶을 때는 우리는 desktop pc로 TV를 보는 셈이다. PC에서 TV를 보는 것은 PC TV tuner adapter를 쓰면 간단하다.

HDHomeRun network TV tuner by SiliconDust
HDHomeRun network TV tuner by SiliconDust

문제는 미국에서 broadcast TV(over the air)가 작년 초부터 100% digital로 바뀌어서 그것들이 하루 아침에 무용지물이 된 것이었다. 물론 analog VCR을 연결하면 전에 녹화가 된 video를 볼 수는 있다. 하지만 방송은 못 보는 것이다. 그래서 ATSC (미국 digital TV standard) tuner adapter를 또 사야 했다. 과도기에는 미국정부에서 거의 공짜로 준 digital converter를 써 보았는데.. 역시 화면의 질이 엉망이었다. 전에 쓰던 analog TV를 계속 쓰게 하려는 것이 이 converter의 주목적이니까 이해는 간다. 하지만 이것을 digital monitor에 연결을 하면 정말 못 보아준다. 그래서 부지런히 digital tuner adapter를 찾았는데.. 이것이 천차만별로 종류가 많았다. 제일 간단한 것이 usb tuner인데, 믿지 못할 정도로 hardware가 작고, 간단하다. 하지만 그만큼 문제도 많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pc의 horsepower가 상당히 높아야 한다는 것이다. usb interface는 거의 pc의 cpu가 모든 video processing을 하기 때문에 너무나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Laptop as a poor man's HDTV, not bad..
Laptop as a poor man’s HDTV, not bad..

다행히 연숙의 pc는 그런대로 이것을 잘 받아주어서 ‘무난히’ tv program을 볼 수가 있었다. 문제는 나의 pc하고는 ‘절대로’ 맞지를 않았다는 사실이다. tv tuner 자체가 거의 software로 drive되기 때문에 각각의 pc마다 ‘절대로’ setup이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거의 일년 동안 desktop에서 tv를 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즐겨보던 PBS program(public TV)들을 자주 못 보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이번에 우연히 newegg.com에서 새로 나오는 network connected TV tuner box를 보게 되었다. 사실 이런 tuner box를 나는 처음부터 찾고 있었다. 하지만 작년에는 그것이 없었고.. 있었다고 해도 아주 비쌌을 것이다. 그것이 결국은 $50정도로 떨어진 것이다. 이름이 별로 sexy하진 않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으랴..”HD HomeRun” 무슨 놈의 이름이 이렇게 재미가 없을까? 하지만 이 box는 사실 전통적인 tv tuner adapter와 다른 것이 IP network에서 video server역할을 한다는 커다란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IP network에 연결된 모든 PC들은 간단한 video client(viewer) 로 digital TV 를 볼 수 있다. (이 특정한 model에서는 동시에는 못 봄) digital video는 상당히 빠른 속도의 IP network이 필요한데 현재 standard인 100 Mbps 면 문제는 없는 듯하다. 우리 집은 재작년에 gigabit fast ethernet wiring이 설치 되어서 이런 때에는 아주 큰 덕을 보는 셈이다.

큰 희망을 가지고 산 이것도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setup은 network connection과 TV antenna cable만 연결이 되어서 정말 편하지만 TV를 보는 모든 PC에서는 TV viewing software (simple video viewer)를 install하는데, 제일 큰 문제는 이것도 역시 각각 pc에 따라 조금씩 ‘경험’이 다르다는 것이다. 주로 network video를 보는 laptop pc는 완벽하게 모든 channel이 보이는데 그 밖의 다른 desktop pc에서는 어떤 channel은 보이고 어떤 것이 전혀 안 보이는 ‘기이한’ 현상이 보인다. 아직까지 왜 그런지 이유를 모른다. 일단 보이는 channel은 programming에 따라서 HD(high definition)의 ‘고화질’ 화면을 즐길 수 있다. 위에 언급한 문제만 해결이 되면 이 box는 거의 ‘이상적’인, 지금 서서히 우리에게 조금씩 다가오는 IP TV (Internet TV)의 early model이 되지 않을까 싶다.

ANY CHARACTER HERE

Telescope..망원경.. 이중에서 아직도 망원경이란 말이 더 친근감을 준다. 어렸을 적 우리또래의 남자 아이들이라면 한번쯤은 이것을 만들어 본 기억이 있었을 것이다. 과학을 좋아하건 안 하건, 그것에 상관이 없이.. 하지만 요새는 그 동안 강산이 몇 번이고 변해서 그런지 여자아이들이 이런 것들을 더 좋아한다는 ‘비과학적인’ 통계도 어디선가 본 것 같다. 아무리 초중고교에서 교과서로 망원경을 배웠어도 이것을 직접 사용해보지 않으면 그저 머리 속의 상상으로 끝난다. 먼 곳의 물체를 가까이로 본다는 것은 너무나 간단한 기능이지만 그 결과는 그렇게 간단치를 않다.

처음 본격적인 망원경을 만들어 본 것이 아마도 서울 남영동 살 당시였으니까.. 중앙고 2학년 때 쯤이었을 것이다. 나와 비슷한 취미를 가졌던 친구 김호룡과 같이 설계를 하고 렌즈를 청계천변 어느 안경점에서 맞추어서 refractor (굴절 식 망원경) telescope를 만들었다. 말이 설계지.. 너무나 간단한 공식에 맞추어서 배율을 계산하고 그것에 맞는 초점거리를 갖는 돋보기를 주문한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수학적 공식과 실제적 engineering개념과의 차이를 전혀 몰랐다. 공식대로만 하면 될 줄 알았다. 야심도 좋게 배율을 x100으로 맞추었으니.. 이 정도 배율의 ‘진짜 망원경’은 엄청나게 비싸다.

Orion SpaceProbe 3 Altaz reflector
Orion SpaceProbe 3 Altaz reflector

그렇게 만들기가 어렵다는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겁도 없이 마분지와 두 개의 돋보기로 만들려고 했으니..결과는 처참한 실패.. 보려던 것은 안 보이고 대신 아물거리는 무지개가 보였다. 그때의 실망이란.. 그 후에 덜 야심적으로 대폭 개량을 해서 (배율을 대폭 줄여서) 성공을 하긴 했다. 공해로 가득 찬 서울 하늘에서 별을 보기는 쉽지 않았지만 대신 집에서 바로 보이는 남산의 팔각정은 아주 가까이 보였고 그것을 들고 팔각정에 올라가서 보니 서울 시내가 아주 잘 보였다. 그리고 망원경에 대해서 거의 잊고 살았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 가끔 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망원경 하나 있으면 어떨까 생각도 했지만 또 잊고 살았다. 10년 전쯤 중앙중고시절의 친구였던 윤태석과 연락이 되었는데 그 친구가 서울 근교에 개인천문대를 만들 구상을 한다고 해서 아주 놀랐다. 이 친구는 학교에 같이 다닐 당시 모형비행기 만드는 것에 심취되어 있었고 한때 나도 함께 만들기도 했던 친구였다. 그러다가 이번에 두 딸들이 크리스마스와 나의 생일의 선물로 ‘진짜’ 망원경을 주어서 나를 놀라게 했다. 물론 amateur entry level인 것이지만 나에게는 과분한 Newtonian Reflector Telescope였다. 이런 것은 사실 취미로 만들기 어려운 것이다. 춥고 흐린 날씨 때문에 아직 밖에서 별을 보지는 못 했다. 우선 제일 보기 쉬운 달을 보는 것부터 시작을 해 볼까..

ANY CHARACTER HERE

아주 오랜만에, 그러니까 보자.. 최소한 2년은 되지 않았을까? 마지막으로 home office pc hardware를 upgrade한 것이.. 나는 이제까지 brand name compatible pc (i.e., IBM pc clones like DELL, HP, Compaq etc)를 사 본적이 한번도 없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유일하게 ‘완성품’ personal computer를 산 것이 아마도 1983년경 Columbus, Ohio에 살 때 MicroCenter에서 산 Apple IIe (two-ee)였을 것이다. 곧바로 IMB PC가 나오고부터 나는 motherboard(Mobo)를 사서 직접 조립을 해서 쓰게 되었다. 우선 그 당시 나의 income으로는 그림의 떡이었고, 만들어 쓰는 것이 훨씬 $$가 덜 들 뿐만 아니라 나의 요구사항에 맞게 살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무섭게 떨어지는 pc hardware의 가격은 항상 나를 즐겁게 했다. 물론 Apple Mac은 이런 것에 상관없이 항상 premium을 자랑하며 ‘독점’적으로 서서히 monster로 변하고 있다. 물론 ‘경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래서Apple Company는 내가 제일 증오하고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되었다.

kvm compatible combo: AMD Athlon II X4 635 & GIGABYTE GA-MA785 MOBO

kvm compatible combo: AMD Athlon II X4 635 & GIGABYTE GA-MA785 MOBO

이번에 다시 home pc hardware 손을 보게 된 이유는 절대로 ‘사고’ 때문이었다. PIAF (전설적인 불란서 샹송 가수 Edith Piaf가 아니다)..PBX-in-a-Flash의 약자이다. 요새의 PBX (Private Branch Exchange)는 무섭게 IP (Internet, VoIP)쪽으로 가고 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전화교환기 자체가 small piece of software로 변한 것이다. 우리 집의 phone system은 작년부터 이 system을 쓰고 있다. 물론 Open Source라 무료일 수 밖에 없는데 더욱 매력적인 것은 virtual machine(pc)에서도 아무 문제없이 작용을 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번에 이것을 test를 하다가 잠깐의 실수로 나의 desktop pc의 hard drive가 모조리 reformat(erased)이 되는 사고가 생겼다. 이런 대형사고는 나의 기억으로는 처음이 아닌가 싶었다. 다행히 나의 home system은 거의 private cloud 로 바뀌어 있어서 당장 큰 문제는 없었다. 나의 진짜 work pc는 cloud server의 virtual machine이기 때문이다. 오랜 만에 다시 pc를 가지고 ‘놀다가’ 지금이 pc hardware를 upgrade할 좋은 기회가 된 것을 느꼈다. 이번의 upgrade는 desktop pc가 아니고 home virtual server를 ‘진짜’ kvm (kernel virtual machine) mode를 support하는 것으로 하기로 하고 가장 경제적인 cpu/mobo combo로 : AMD Athlon II X4 635 CPU와 GIGABYTE GA-MA785 motherboard, 4GB RAM을 $250 정도로 샀다. 여유가 생기면 4GB를 나중에 추가를 할 예정으로 모두 8GB system이 되는 것이다.

이것으로 현재 kvm/OpenVE 를 support하는 ProxMox (essentially Debian linux system)를 install하고 test를 하고 있는데.. 결과는 참 dramatic한 것이었다. 현재까지 4개의 virtual machine이 돌고 있는데.. stand-alone system과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다. 4개의 virtual machine은: Windows XP, Windows 2003 Server, Ubuntu Desktop 10.10, 그리고 PIAF (Asterisk PBX)인데 8GB RAM이 되면 아마도 8개의 virtual machine이 문제없이 running하지 않을까.. 참 좋은 세상이 되었다.

 

지나간 3주는..

거의 3주 만에 이곳을 찾았다. 이 3주는 정말 의외로 조금 긴 듯한 느낌이다. 무언가 쫓기는 듯 하면서도 왜 이렇게 시간이 길까..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지난 1월 9일 밤부터 시작된 이곳의 세기적인 폭설과 강추위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거의 1주일 동안 사실 이곳의 모든 것들이 정지된 상태였다. 덕분에 뜻밖의 snow, ice day holiday를 즐기긴 했지만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오랜 만에 찾아온 반갑지 않은 mild depression이 그것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이번 것은 전처럼 그렇게 mild한 것이 아니었다. 조금은 ‘고통적’인 것이었다. 그 동안 위로를 받던 “묵주기도의 보호”도 크게 도움이 되지를 못했다. 하지만 역시 처방은 시간과 세월이 아니던가.. 지금은 그 깊게만 느껴지던 수렁 속에서 밝은 하늘이 보인다.

나의 생일과 결혼 기념일이 줄줄이 이어지며 1월 달을 보냈다. 생일의 의미를 나 나름대로 바꾸어서 보낸 것이 얼마 되었다. 나를 낳아준 부모님을 더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이 나에게 진정한 생일의 의미이다. 일체 선물도 그렇게 반갑지 않게 되었다. 조용히 보내고 싶은 것이다. 딸 둘이 예전과는 많이 덜 하지만, 조용히 넘어갈 리가 없다. 그것까지 거절하는 것은 조금은 무리다. 이번에는 지난 크리스마스에 받기로 했던 telescope가 out-of-stock이 되어서 나의 생일 즈음에서 받게 되어서 그것을 생일 선물로 받게 되었다. 결혼기념일도 마찬가지다. 25주년, 은혼식 때에는 ‘압력’에 굴복을 해서 그렇게 보냈지만 이것도 나의 스타일이 절대로 아니다. 다행히 30주년에는 무슨 ‘이름’이 없었다. 다음의 큰 것은 50주년이 아닐까? 올해는 31주년이 되었고, 정말 조용히 보냈다.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사실 제일 나에게 중요하게 느껴지던 날은 1월 25일이었다. 그날은 내가 레지오 마리애의 정식단원이 되는 “레지오 선서”를 하는 날이었다. 하지만 역시 사탄은 조용히 있지 않았다. 그날 나는 sick day가 되어서 참석을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레지오에 나가기 시작한지 3개월이 넘은 것이다. 참, 이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이렇게 까지 ‘발전’을 하게 될 줄을 몇 개월 전만해도 절대로 예측을 못했으니까. 살면서 가끔 이런 작은 ‘기적’이 있어서 조금은 살맛도 나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안다. 정식 단원이 되면 내가 어떻게 변해야 할지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을..

지난 3주간 그 놈의 mild depression이 나를 괴롭혔지만 아주 무기력하게만 있지는 않았다. 14일에는 처음으로 기후에 의한 화요일이 아닌 다른 날에 모였던 레지오 회합에 참석을 하였다. 그것도 조금은 신선한 느낌이 아닐까? 이래서 군대와 같은 규율이 있는 레지오가 나는 너무나 좋다. 거의 모든 단원(자매님들)이 참석을 하셨다. 15일부터는 뜻하지 않은 home pc accident로 시작된 일련의 major computer work이 시작 되었다. 지금 생각을 하니 이 뜻밖의 일이 나를 mild depression에서 조금 더 빨리 빠져 나오게 하는 힘이 되었던 듯 싶다.

 

챔피온, 위스컨신 성모님 발현, 그 후..

성모님 발현 당시를 재연한 모습
성모님 발현 당시를 재연한 모습

지난해 (2010년) 12월 초순 경에 New York Times를 통해서 19세기 (1859년)위스컨신의 성모님 발현이 교회의 공식 인정을 받았다는 비교적 짧은 기사를 읽었다. 바로 전에 시작된 2010년 대림절과 더불어 정말 가슴을 따뜻하게 느끼게 해 준 반가운 소식이었다.

성모님의 발현소식은 언제나 추문이 함께 따른다. 그래서 교회(바티칸)는 언제나 극도의 신중성으로 이런 소식을 처리하는 것을 안다. 나는 그래서 천주교를 더 좋아하는지 모른다. 얼마나 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거짓을 선포하고 사람들을 유혹을 하는가? 조금 더 교회로 부터의 자유를 원하며 떨어져 나간 개신교 형제들.. 그 자유에는 아주 무서운 유혹이 더 넘실거린다는 사실을 아는가?

이번에 공식 인정을 받은 것도 그렇다. 첫 발현이 1859년이었다. 그러니까 프랑스의 루르드 발현 다음해이다. 그 당시만해도 미국 위스컨신은 아주 ‘오지, 황무지’에 불과한 미개척지 정도였을 것이고, 그런 성모님의 발현소식은 유럽에서는 뉴스 감도 못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루르드 같은 ‘인파’가 그 황무지 위스컨신 얼어붙은 곳에 몰릴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곳의 성모님 발현은 요새 다른 곳의 ‘거짓’ 발현과 달리 자연히 오랜 시간을 두고 그 진실성을 밝힐 기회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번에 나는 미국이 주요 ‘세속적’ 신문이 아닌 가톨릭 뉴스(Catholic News Agency)의 기사를 다시 보게 되었다. 줄거리는 대강 같으나, 우리 가톨릭의 입장에서 쓴 글이라 조금 새롭다. 그 기사를 나 나름대로 이렇게 정리를 해 보았다.

 

위스컨신 주의 그린베이(Green Bay, Wisconsin) 데이빗 리큰 주교(Bishop David L. Ricken)의 인정으로 이곳, 챔피온마을(town of Champion)의 한 교회가 미국에서 첫 성모님 발현지가 되었다.

2010년 12월 8일 – 원죄 없으신 동정 마리아 대 축일- 에 주교님은 ‘도덕적 확실성’으로, 동정녀 마리아가 정말 1859년 10월, 3번에 걸쳐서 젊은 벨기에 여성 이민자, 어델 브라이스(Adele Brise)에게 발현하셨다고 선포를 하였다.

1861년 발현 이후부터 그곳에는 ‘좋으신 협조자 성모님'(Our Lady of Good Help) 이라는 이름의 성모님을 위한 교회가 있었다. 2년간에 걸친 조사 끝에 리큰 주교님은 이곳은 ‘믿을만한 가치’가 있고, 교구의 공식적인 성지로 선포한다고 하였다.

3번에 걸친 발현 당시, 그 ‘여인’은 밝고, 하얀 옷을 입으셨는데, 세 번째 발현 때에, 그 ‘여인’은 자기가 죄인들의 개종을 위해 기도를 하는 ‘천상의 모후'(the Queen of Heaven)라고 밝히셨다.

“너도 개종을 하기 바란다”, 라고 그 28살이 된 어델 브라이스 여인에게 말씀을 하셨는데, 사실 그 브라이스 여인은 미연방의 주가 된지 11년 밖에 안된 이곳 위스컨신에 가족들과 함께 이민 오기 전, 수녀가 되려는 의향을 가지고 있었다.

동정 마리아는 그녀에게 ‘선교와 교리 가르침’의 사명을 주셨다. “이 황무지에 있는 어린이들을 모아 구원을 위해서 가르쳐라, 내가 너를 도와 줄 터이니 두려워하지 마라” 고 말씀을 하셨다.

어델 브라이스는 이어서 재속프란치스코(Third Order of Penance) 수도회원이 되어서, 미국의 미개척지를 돌아다니며 어린이, 어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며 하늘의 사명을 완수하려 노력을 하였다. 그 당시, 위스컨신에는 사제가 거의 없어서 교회를 다니려면 멀고 힘든 여행을 해야 했다.

세워진 성당근처에 프란치스코 회 여성들은 학교도 세웠다. 1871년경에 큰 불이 이곳에 났는데, 이곳의 거의 모든 곳이 불에 타버렸으나 학교, 성당, 그리고 수녀원 등 성모님께 봉헌 된 곳은 기적적으로 타지를 않았다.

그녀가 죽기 6년 전인 1890년, 그녀가 살던 마을의 이름이었던 로빈슨빌(Robinsonville)이 그녀의 원래 고향이었던 유럽 벨기에의 마을이름 챔피온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그녀가 어렸을 때, 동정 마리아에게 수녀가 되겠다고 약속한 것을 기념한 것이었다.

리큰 주교님은 기자에게 “어델 브라이스 수녀의 일생이야 말로 동정녀 발현을 확실하게 증명해 준다. 자기 자신이나 성모님 발현 자체에 세상의 주목을 받게 하기 보다는 자신의 여생을 조용히, 겸손하게 성모님에게 바친 것이다.” 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말한다. “그녀는 근처지역을 모두 걸어서 돌아다니며 집을 방문하며 프란치스코 회의 단순하고 겸손한 정신으로 며칠 동안 아이들에게 교리공부를 시키거나 그들의 부모들과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녀야 말로 사도정신으로 가득 찬 일생을 살았다. 성모발현 이후만이 아니고 그녀의 일생이 그러하였다. 또한 마리아의 간단 명료한 메시지야 말로 이 발현의 진실성을 말해준다. 마리아가 어델 수녀에게 준 지시는 간단하지만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에 따른 무게 있는 것이었다.”

리큰 주교는 이어서 수없이 많은 기도에 대한 응답을 상기시킨다. 그 중에는 그곳을 찾은 많은 사람들이 경험한 기적에 속하는 것들도 포함이 되어있다고 한다.

이번 주교의 공식 발현 인정은 새로운 사실이지만, 이곳은 150년 동안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이 이미 묵시적으로 알고 있던 이 교구의 성지였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킨 셈이다.

리큰 주교는 수없이 많은 믿기 힘든 기적적 치유와 개종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는데, 1859년 10월 9일 성모님 발현 이후 아직도 많은 신앙인들에게 생을 바꾸는 듯한 그런 큰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한다. 그 유명한 프랑스 루르드 성모발현 때와 마찬가지로 이곳 챔피온의 성지에도 순례객들이 치유를 받고 더 이상 필요가 없어서 버린 지팡이들이 쌓여있다고 한다.

이곳 성지 성당의 존 더플러(Fr. John Doefler) 주임신부님은 이곳에 발현하신 동정 마리아와 루르드 발현 성모님과는 아주 의미심장한 관계가 있다고 하고, 루르드의 벨라뎃따 수베루에게 나타나신 뒤 일년 후에 이곳으로 에이들 브라이스에게 나타나실 때, 성모님께서 이러한 연관성을 암시하셨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주임 신부님은 이어 “루르드에 발현하신 마리아는 자신을 ‘원죄 없이 잉태되심’으로 밝히셨고, 이곳에서는 자신을 ‘천상의 모후’라고 밝히셨다. 이 두 사실은 사실상 마리아의 신비를 전부 간직한다. 즉, 마리아의 생애의 시작으로부터 하늘로 들어올리심과 천상모후의 관을 쓰신 사실이다.”라고 설명한다.

발현지 성지 성당 Champion, WI

발현지 성지 성당 Champion, W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