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rly July, muggy but under 90

 

¶  2017년 (처음에는 천구백..으로 쓰기 시작을 했는데, 역시 나는 아직도 나의 잠재의식은 20세기에 머물고 있는지..) 7월 상순 上旬이 지나가는 시점에 다시 올해 아틀란타지역의 날씨에 감사를 드리고 싶은 심정이다. 한마디로 끈끈하지만 시원한.. 그러니까 muggy but cool.. 바로 그런 날씨인데 신기하게 magic number 90도를 넘은 적이 거의 없다. 요새 이 지역에서 90도 이하로 머물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평균 이하인 것이 거의 분명하다. 특히 오후면 어김없이 쏟아지는 소낙비의 매력은 표현하기가 힘들 정도다.

우리 집에 ‘하숙’하고 있는 ‘불청객’ 3마리 너무나 귀여운 2달 된 kitten들 때문에 thermostat를 1도나 내린 덕분에 우리도 시원하게 지내지만, 이렇게 은혜로운 mother nature덕에 생각만큼 a/c 가 힘들게 돌아가지는 않고 있다.

내일이 ‘초복’이니까.. 분명히 muggy & hot으로 바뀔 수도 있지만 상관없다.. 지금까지는 받은 ‘인자한 날씨’만도 감사하기에 충분한 것이기 때문이다.

 

¶  어제는 2주일 만에 아틀란타 한국 순교자 ‘본당’엘 갔었다. 꾸리아 월례회의가 있기에 간 것이지만 2017년도 예비신자 교리반이 시작되는 날이기도 해서 나에게는 다른 choice가 없었다. 집 근처 동네 미국본당과, 20마일 떨어진 한국본당을 번갈아 가며 가는 것, 이제는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조금은 부자연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흡사 2중 생활, 2중 국적, 겹치기 출연.. 그런 말들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레지오 이외에도 이제는 낯익은 얼굴들이 이곳 저곳에 보여서 이곳 본당도 정이 든 기분이다. 7년 전쯤 다시 이곳에 나오기 시작했을 때는 정말이지 연숙을 빼고는 ‘하나도’ 아는 얼굴이 보이지 않았던 것에 비하면 참 많은 발전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의 시발점은 역시 성모님의 군대, 레지오 마리애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이곳에 적을 두기 시작한 것, 내 인생 후반기에 대 전환점이었다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이날 꾸리아 월례회의에서는 예고한 대로, 꾸리아 회계선거가 있었다. 회계라는 직함이 별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이번 선거는 나의 촉각이 곤두서는 그런 것이었다. ‘절대로 뽑혀서는 안 되는 인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은 처음인가..

부정적인 상황을 안고 임한 투표는 ‘하늘이 도와서’, 전혀 이름도 들어보지도 못한 ‘새 얼굴, 새 피’가 선출이 되었다. 희망은 ‘현재보다 더 나쁠 수는 없다’라는 논리인데.. 이것은 절대로 바람직한 꾸리아 간부들의 상황.. 절망적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희망은,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는 ‘총사령관 commander-in-chief’ 성모님의 손길이 있다는 사실이다.

현재의 우리 레지오의 ‘실질적’ 최상급 평의회는 꾸리아 이기에 이것의 중요성은 강조를 아무리 해도 모자랄 지경이다. 여기에 ‘문제’가 생기면 실제로 레지오의 기능은 저하될 수밖에 없다. 내가 진단한 현재의 상황은: uninspiring, stagnant… 더 no-nonsensical, proactive한 꾸리아 간부들과, 평의회 의원들(쁘레시디움 간부들)이 나오기만 기대하고 있다. 다음 달에는 꾸리아 부단장 선거가 예정이 되어 있어서 당분간은 조금 신경이 쓰일 듯 하지만 이것도 역시 ‘초자연적인 손길’ 성모님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  꾸리아 월례회의에 ‘희귀동물’, 중장년 남성단원이 하나 더 늘었다. 한 때 우리의 미국본당 Holy Family Catholic Church의 daily mass regular 였던 P 카타리나 자매님 부부가 평의회 단원으로 참석한 것이다. 이 남편 형제님은 레지오에 입단한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했지만 벌써 서기로 활동을 하고 있는데, 우리 부부와 똑 같은 상황이어서 조금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단장인 wife ‘밑’에서 서기를 맡고 있는 것, 나는 벌써 5년째로 접어들고 있지만 이들은 이제 시작인 것이다. 우리의 경험에 의하면 부부가 같이 단원, 간부 등을 맡으면 이점이 상당한 것이었다. 제일 자명한 사실은 우선 ‘부부간의 대화’에 많은, 상상을 못할 정도로, 도움을 준다는 사실이고, 이것의 추론은: 부부 관계, 가족 관계에도 큰 도움을 준다는 놀라운 사실. 또 한번 진부한 표현을 빌리면: ‘아~ 내가 이 사실을 10년 전에만 알았더라면..’

본당에서 오랫동안 음양으로 봉사를 해 왔던 고대출신 남편 형제님, 건장한 체격과 인상 등으로 나보다 젊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거의 2살 선배 격이었다. 3년 전 ‘구수한 인상의 돼지띠 형제님’ 전요셉 형제 이후, 오랜만에 우리 또래를 만난 것이 너무나 반가웠다. 아직도 business에 시간을 쓰고 있지만 곧 retire를 생각하는 모양으로 그 후에 할 것들을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성당근처 ‘널찍한’ bakery shop Mozart에서 부부가 오랜 시간 이야기를 했는데,  알고 보니 전공이 기계공학이었고 관심이 나와 아주 비슷하였다. 쉽게 말하면.. Science & Religion 분야라고 할까.. 이 ‘상극으로 보이는’ 두 분야가 서서히 최근 30년 동안 접근을 하는 것에 ‘환호’를 하였다. 무섭게 변하고 있는 물리적 접근방식을 주목하며 역시 ‘절대적인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등 정말 흥미 있는 시간이었다.

 

¶  팔순 八旬: 예전에 팔순이라면 사실 제대로 실감을 못하기도 했다. 그저 아~ 오래 사셨구나.. 하는 가벼운 탄성 같은 것 정도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내가 칠순과 연관이 되려는 이 시점에서 팔순의 느낌은 그렇게 ‘오랜 인생’ 같지는 않다. 환갑이 한 물 간 이후 칠순조차 별 큰 뜻을 느끼지 못함은 역시 나이에 비해서 모두가 건강해지고 있다는 뜻일까?

우리 레지오 단원 중에 팔순 생일을 맞이하는 단원이 있었고 이번에는 그냥 단순한 생일회식에서 벗어나 생일카드와 birthday cake을 준비한 팔순 기념회식을 치렀다. 본인은 물론 기쁜 마음으로 회식에 참여했고 단원들도 축하하는 분위기를 마음껏 즐겼다. 하지만 나이가 제일 많은 이 팔순의 자매님이 다른 단원들에 비해서 훨씬 건강한 편에 속한 것, 물론 좋은 일이지만 건강은 나이와 반드시 반비례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느낀다.

 

sleepwalking on the 4th..

Sleepwalking? 몽유병? 허..  난생 처음으로 이것을 몇 시간 전에 경험을 하고 아침을 맞이했다. 몽롱한 머리 속을 청소하고 오늘이 무슨 날이며, 오늘 아침의 일과는 어떤 것인가.. 정리를 하는데.. 그렇다, 오늘은 ‘미국이 사랑하는’ 요란한 holiday, the Fourth of July.. 아직도 나는 이 난생처음의 경험을 분석하며 정리 중이다.

오늘 새벽 나의 모습이..

우선, 생각에 아~ 나도 오래 살긴 했구나.. 하는 생각이다. 이런 ‘현상’ 만은 이제까지 이해하기조차 힘이 들었던 것인데 나에게까지 찾아 왔다는 사실이 그렇게 신기하기도 한 것이다.

과학적으로 본 몽유병은 사실 별 것이 아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복잡한 것이 아니니까. 수면상태가 깊지 않을 때 생긴다고 하는데, 일리는 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난 나의 경험은 이렇다.

어느 집.. 혹시 vacation home이 아니었던가.. 그곳에 놀러 갔던 느낌도 든다. 우리 집이 아닌 곳, 2층 같은 곳의 bedroom에서 화장실을 가고 싶었다. 이것은 꿈 속도 그렇고 실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침대에서 일어나니 사방이 칠흑같이 깜깜해서 손으로 더듬으며 걷기 시작했다. 우리 집이 아닌 ‘놀러 온 집’의 방이니 화장실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무작정 비틀거리며 낮은 쪽, 구석 진 쪽으로 걸었는데… 너무나 앞 뒤를 알 수가 없어서 포기하고 침대로 오려고 했지만 화장실이 너무나 급해져서 그대로 전진을 했는데.. 이곳은 어떻게 무언가 잡동사니가 많은지.. 게다가 계단까지 있어서 내려가느라 비틀거리고, 도대체 이 집에 화장실이 어디에 있나 고민까지 하는데 갑자기 환하게 불이 켜진다.

그때 나는 완전히 ‘몽유병’에서 벗어났다. 그곳은 우리 집이었다. 우리 집 침실에서 garage로 나가는 조그만 계단 아래 laundry  machine이 있는 조그만 통로의 automatic ceiling light가 켜진 것이다. 그때야.. 아하~ 우리 집이었구나.. 그리고 나는 꿈을 꾼 것이구나.. 하며 부지런히 근처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이것이 나의 난생 처음 sleepwalking의 경험이 되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수면, 잠에 대해서만은 100% 건강하다고 자부하던 나도 결국은 이런 disorder를 경험하게 되니.. 모든 것이 시간문제라는 자괴감도 들지만, 다른 쪽으로는 너무나 오감(five senses) 적인 인생을 살았던 나에게도 이런 예외적인 경험은 색다르고 신기하고, 심지어 다시 ‘위험하지 않을 정도’로 경험하고 싶으니..

 

끝내주는 초여름, 2017

¶  Green backyard: 와~~ 내가 꿈을 꾸고 있는가? 멋지게 상상하던 모습들이 100% 아니 200% 그대로 눈과 코로, 피부로 그대로 느껴지는 2017년 초여름.. 재빠르게 지나가며 dog day가 멀지 않았지만 상관없다. 이제까지 받았던 날씨, Mother Nature의 은총은 두고두고 음미하며 나를 즐겁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지나간 2017년 6월 달은 나의 기억에 아마도 wettest June 이 아니었을까? 폭우로부터 시작해서 해가 전혀 안 보이며 24시간 내리는 줄기찬 비, 가랑비, 보슬비.. 흡사 Seattle, Washington을 연상케 하는 그런 ‘멋진 나날’들이었다. 끈끈해도 시원한, 구차스럽게 a/c 소음을 듣지 않아도 시원한 그런 밤과 낮을 누가 예상이나 했으랴?  90도를 넘어본 적이 없었던 global cooling 의 초여름..  앞으로 2개월 정도 찌는 듯이 더워도 이제는 불평을 할 용기가 전혀 없다.

 

 

¶  Independence Day가 내일로 다가왔다. 올해는 화요일, 조금 특이하게 우리 부부에게 제일 중요한 레지오 주 회합이 있는 날이 아닌가? 이해할 수는 없지만, 문제는 아틀란타 순교자성당이 이날 아예 문을 닫는단다. 아니 왜 성당이 세속적인 휴일에 문을 닫는가? Universal Church의 미사가 휴일로 문을 닫는 것은 아무래도 수긍이 안 가는 것이다. 원래 성당이 월요일 날 문을 닫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화요일까지.. 본당은 비록 주임신부의 재량이겠지만 최소한의 guideline은 교구청의 것을 따라야 하는 것 아닌가?

 

America, still the beacon, hope..

 

다행히도 우리의 정든 ‘동네본당’ Holy Family Church는 변함없이 미사로 모이고 분명히 America, the BeautifulGod Bless America를 부르지 않을까.. 하지만 주일미사에는 성가대 service가 없으니까 그것은 무리일 듯 하다. 작년에 비해 한 살 더 먹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내가 속한, 나의 나라라는 것,  과연 한 인간, 피조물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더 생각을 한다. 정답은 없는 듯 하고.. 내가 현재 살고 있는 곳에서, 주어진 일을 충실히 하루하루 최선을 다 하면 된다는 소박한 답은 가지고 있다.

올해 Independence Day, 우리 핵가족은 모이지 못하게 되었다. 새로니는 해외휴가여행, 나라니는 Luke네 lake house에서의 그들 가족모임과 매년 참가하는 Atlanta 4K marathon엘 가니까.. 결국은 우리는 역시 2명의 우리밖에 없다. 1명과 2명의 차이는 우주처럼 크지만 2명과 그 이상의 차이는 거의 없다는 명언을 실감하니까.. 그래 우리 둘 만이라도 무언가 ‘굽고’, Heineken beer로 기분을 내어보자.

 

¶  3 MORE Kittens adopted out: 이틀 전, 지난 토요일.. 슬픈 날이 되었다. 비록 예정되었던 것이지만 미리 알고 있어도 사람의 감정이란 예측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애지중지 키워오던 2개월이 넘어가는 8마리의 kitten들 중에 2차로 무려 3 녀석이 adopt되어 나간 것이다. 1차는 이미 6월 20일경 sweet Velvet가 어떤 young couple에게 adopt되어서 떠났는데.. 그때도 이상야릇한 감정을 누를 수가 없었다. 갓 태어나서부터 젖을 먹여 키웠던 ‘애’들이라서 완전히 사람 같은 느낌으로 우리의 분신처럼 느껴지기도 했던 것이다.

8마리에서 7마리가 되었을 때 그 느낌도 조금은 조용해 진 듯한 것이었지만 이번에 3마리가 빠진 4마리의 방은 그야말로 처음으로 정적이 휩싸이는 것이었는데.. 이번에 adopt된 3마리: ‘BB: 왕방울’, ‘Jack’, ‘Pink’ 는 사실 그 중에서 제일 애교들이 많았던 애들이어서.. 연숙은 눈물을 참느라고 애를 썼는데 사실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한다는 말이: ‘이제 다시는 이런 ‘짓’ 하지 않겠다고..’ 나라니가 동부서주하며 찾아 준 adopt family들이 모두 마음에 들어서 안심이 되었고 가끔 Internet으로 근황을 전해 주는 등.. 모두들 행복한 삶을 살리라 기도를 한다. 나머지 4마리는 언제 adopt가 될 지는 미지수이지만 계속 노력 중이다.

 

Velvet renamed to Dax

Jack & Pink

BB – 일명, 왕방울

 

 

싸늘한 6월 26일 아침에..

어제는 a/c (에어컨)의 소음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던 정말 믿기 힘든 시원한 가을 같은 평화스러운 일요일이었다. 시원한 자연의 공기를 만끽하려고 밤에 잘 때 창문을 모두 활짝 열어놓았는데 아침에 어둠 속의 공기는.. 그야말로 싸늘한 50도 대의 기온이 아닌가? 어제 일기예보를 안 보았기에 놀란 것이지만 이것은 나에게는 자연의 은총 중에 으뜸가는 은총에 속한다.

오늘의 예보를 보니.. 이제는 ‘물기’는 하늘에서 완전히 사라진 모양으로 UV 치수가 아주 높은, 그러니까 건조한 공기를 예고하고 있다. 최고가 82도, 건조한 날씨.. 나는 자동적으로 창문을 닫고 a/c  switch를 킬 것인가, 그대로 창문을 열어놓고 오후를 맞이할 것이나 계산하기에 바쁘다. 이것은 이제 습관이 되어서 그렇게 힘든 작업은 아니다. 이제는 ‘감’으로 우리 집안의 공기를 control할 수가 있는 것인데..  예전에 비하면 이것도 ‘나이 듦’에서 나오는 자연적 지혜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우리 집 small animal kingdom에는 10 마리의 ‘동물’들이 머물고 있기에 아침에 일어나면 챙길 것 투성이다. 지난 4월 성목요일에 뒤뜰에서 ‘아슬아슬’하게 태어난 8마리 baby kittens들 중에서 한 마리 Velvet은 좋은 주인을 만나서 얼마 전에 adopt가 되어 이별을 했고, 현재 7마리의  2개월을 훨씬 넘은 건강한 kitten들은 비록 foster-care지만 이제는 정이 들어서 완전히 우리의 ‘자식’ 처럼 되어서 가능하면 adopt 되기를 기다리고 있고, 오래 된(10+ 년) 우리의 고양이 Izzie, 개 Tobey가 있고 새로니가 해외 휴가여행을 가면서 2주 이상 머물기 시작한 개, Ozzie.. 그러니까 이건 완전히 우리 집은 summer animal kingdom이 된 것이 틀림이 없다. 이것들을  care하는 것은 이제 익숙하게 되어서 크게 힘이 들지는 않지만 솔직히 이것..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연숙과 함께 실감을 한다. 덕분에 ‘절대로 지루한’ 그런 시간은 ‘절대로’ 없다는 것.. 역시 좋은 것이다.

 

그렇구나, 또 육이오가..

전쟁 발발 직후 피난민들이 남하를 시작, 수원 근교를 지나가고 있다 – 1950년 7월 11자 Life magazine

 

육이오, 융요..유기오.. 6.25.. 1950년,  도대체 몇 년 전인가? 이것도 이제는 쉽지 않구나. 반세기도 모자라서 67년 전이란 말인가? 나에게 이 날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 집, 가족의 형체를 철저히 망가뜨린 동족상잔의 시작인 날은 분명하고, 나의 인생에 미친 영향은 과연 어떤 것인가? 머리 속의 깊은 속에서는 분명히… “김일성 이 X새끼야, 내가 지옥까지 너를 찾아내서 다시 한번 더 확실히 죽여 버릴 거다!!!!”라는 절규가 울리고 있다. 100% 동감하는 나의 심정이다. 67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저주의 정도가 전혀 변하지 않고 있다. 빨갱이들과 민족화해라고.. 허.. 정말 죽여주는 말이다.

 

아.. 압록강으로 올라가던 MacArthur가 이 개새끼를 잡았더라면, 역사는..

 

6.25 사변이 정전armistice 으로 끝났던 어렸을 적에는 물론 ‘반공, 멸공, 북진통일’을 외치던 ‘이승만, 우리 할아버지’를 따라서 무조건, 무의식적으로 반공, 역적 개새끼 김일성을 외쳤지만 같은 구호를 외치며 경제개발을 시작했던 ‘박정희 대통령’ 시절,  ‘독재’ 덕분에 한때는 반공보다는 반독재의 고함소리에 솔깃했고, 거리로 뛰쳐나오기도 했다. 젊은 피가 인생, 삶의 피로 바뀌기 시작한 그 이후의 오랜 인생여정, 내가 살던 지리적 여건으로 ‘탈 脫 사상 思想’ 의 변화의 시기들도 있었다. ‘잊자, 조국’, 대한민국 무관심의 세월이었나? 그 후에는 조국도 변하고 나의 나이도 진전을 해서 세상이 변했던가.. 하지만, 시간의 irony는.. 결국은 ‘박정희 향수’에 젖은 기분도 느낀 것이다.

이런 ‘복잡한’ 나의 조국관 祖國觀 을 정리해서 나의 정체성을 찾으려면 아마도 많은 노력일 필요할 듯 하다. ‘국가’란 것이 과연 인간에게 무엇인가, 하는 단계까지 내려간다. 이런 ‘정치적 인간, 인생’의 차원은 어느 정도 ‘높은’ 것인가? 그 다음 단계로 올라가면 어떤 세상이 보이는 것인가? 그런 것이 있기는 한 것인가?

나의 고뇌는 이것이다. 최근에 벌어진 해괴하기까지 느껴지는 대한민국의 정국, 멀쩡하던 여자 대통령이 갑자기 수의를 입고 나타나고, 그것을 보며 박수를 치며 환호하던 ‘멀쩡한 군중들’.. 이것이 어떤 나라인가? 아마도 현재 조국에서 제일 좋아하는 민주주의의 이상형이 바로 ‘대통령을 감옥으로 보내며 박수를 치는’ 그런 것인가? 세상에 유례가 없는 선진형 민주주의라고? 유례가 없기는 하지만 과연 이것이 advanced, vibrant democracy인지는.. 글쎄올시다.

하지만 나의 문제는, 이런 분석이 모두 내가 피부로 느끼는 ‘추측’이라는 사실이다. 오랜 세월 동안 무관심으로 바라보았던 그쪽의 정확한 사정을 나는 알지 못하기에 이런 논평 자체가 ‘실격’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상황이나 ‘빨갱이’란 말이 연계가 되면 나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6.25 를 연상할 수 밖에 없고, 그것에 조금이라도 관련이 된 소위 말하는 ‘progressive 한 정권’은 절대로 믿을 수가 없다.

6.25를 맞으며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속에는 이런 것도 있다. 이것도 물론 나의 제한된 지식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현재 대한민국은  extreme, mass narcissism에 빠진  ‘집단적 자기 도취’에 빠진, 그런 모습을 보인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물론 나의 ‘코끼리 만지는 장님’ 식의 느낌일 수도 있지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1980년대의 일본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원화 평가절상 후 세계를 돈으로 석권하며 자기도취에 빠진, 이제는 지구상 다른  어느 곳에서도 더 배울 것이 없어진 것을 애석해 하던 그들. 그 이후 30년 어떻게 그들은 변했던가? 이제는 당시의 ‘일류 日流’가 ‘한류’로 바뀐 것 뿐.. 그것에 환호하며 ‘자기들이 뽑아놓은’ 현 대통령을 감방으로 보내는 것에 ‘아이들까지 환호’하는 그런 나라.. 가.. 나는 정말 싫다.

통일, 그러면 통일은?  나를 포함한 민족의 염원인 통일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김일성 X새끼가 소련제 tank로 ‘쉽게’ 통일을 하려던 바로 그것, 어떨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나는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듯 보인다. 아주 고차원적인 초월적인 도움, 아주 먼 옛날로 갈 필요가 없다. 소련이 붕괴되고 동구권이 ‘민주화’되고 독일이 통일되었던, 그것도 1980년대 이후를 공부해 보면 무언가 짐작을 할 수가 있다. 이것이야 말로, 초자연적인 도움1 이 필요한 바로 그런 것이다.

 

  1. Fatima의 성모님이 예견하고, Saint John Paul Second, Ronald Regan, Gorvachev 등이 주도 했던 소련 붕괴

Mothers.. I’ve sinned..

Mothers (my own mother & the virgin mother)..  I’ve sinned especially today on Mother’s Day…  2017년의 Mother’s Day 오늘 나는 뜻 밖의 고뇌와 함께 내가 큰 죄를 지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의 오늘의 큰 죄는 ‘고의적, 아니 죄를 안 지으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은  죄’ 였기에 더 나를 괴롭힌다.  누군가를 ‘절대적으로 싫어하게 되는 죄’, 바로 오늘 ‘사랑의 본질인 어머니 날 의 정신’을 정면으로 거역한 죄를 지은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아직도’ 나는 내가 지은 죄에 대한 후회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기가 막힌 사실이다. 어떤 교활한 악마가 나를 휘어 잡았는가?  꾸리아 월례회의 때문에 ‘어쩔 수 없이가야만 했던’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주일미사, 무심코 들어가 앉은 그곳에서 나는 ‘그 사제’를 또 봐야 했다. 몇 번째 이던가?  ‘피할 수도 뛰어 나올 수도  없는’ 난처한 상황…  근래 더욱 자주 보게 되는 방문 신부, 무엇이 나에게 문제인가?

메주고리예 Medjugorje  에서, visionary중의 하나인 미르야나 Mirjana 에게 개인적으로 발현하신 동정 성모님, 분명히 천명을 하셨다. 사제를 단죄하거나 비방하는 것은 ‘큰 죄’라고.. 사제들은 하느님께서 직접 심판을 하신다는 뜻인 모양이다. 우리 같은 일반신자들의 사제(단) clergy 에 대한 ‘비판, 비방, 심판’은 아마도 아주 아주 나쁜 죄에 속하는 모양인데.. 문제는 사제도 한 인간이고 일반 신자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라면 어쩔 것인가?

나를 괴롭히는 것은: 이 사제의 지나친 showmanship한 행동과, 내가 생각하는 사제의 ‘일반적인’ 관행에서 훨씬 벗어나는 ‘파격적’인 언사, 언행(특히 offensive comments) 이다. 보기에 따라서 ‘격식을 따지지 않는 친근한’ 것으로도 보일 수는 있지만 암만 내가 생각하고 생각해도 이 사제는 전형적인 ‘How did he become a priest?’ 중에 하나다. 하지만 역시 문제는 나 자신이다. 이런 ‘싸움’에서 나의 말에 쉽게 동조하는 사람이 없거나 극히 소수일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아마도 해결책은 없을 듯하다.

 

뜻 밖의 이틀간..

불편할 정도로 끈끈하던 지난 밤은 전형적인 여름의 그것이었는데 기분에 분명히 하늘에 주체할 수 없는 energy가 모이고 있음을 느꼈는데 결국은 이렇게 늦은 오후에 thunderstorm 과 heavy rain을 편한 기분으로 만끽하게 되었다. 

이번 주 초에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이틀간의 mourning 이 몇 시간 전에 모두 끝이 났다. 이것이 인생이다. 예정된 것 사이사이에 이렇게 전혀 예상 밖의 일들이 일어나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이제는 느낀다. 이것이 ‘정상적인 인생’의 하루하루인 것이다.

아틀란타 지역에서 긴 역사를 자랑하는, 최동명 종합보험 대표, 최동명 James (야고보) 형제, 3일 전인 5월 9일 오후에 선종하였다. 심장에 관계 된 병의 결과는 예측을 할 수가 없기에 모두들 그저 결과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었음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어제의 장의사 연도와 오늘의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장례미사 그리고 ‘funeral lunch‘ at 한일관’으로 모든 공식 절차는 끝을 맺었다. 하지만 짧았던 충격은 이제부터 서서히 여운을 남기며 소화가 될 수 밖에 없다. 우선 viewing을 할 수가 없어서 실감이 아직도 가질 않는다. ‘이제까지 웃던 얼굴, full of life‘의 60대 중반의 가장이 조그만 urn속의 한 줌의 재가 되어서 우리 앞에 나타났으니 말이다. 이번처럼 실감이 가지 않았던 경험도 없을 것이다.

가족장을 원한다던 직계유족의 바람이 아닌 완전히 공적인 장례식이었다. 연도와 장례미사로 이어진, 다만 viewing과 coffin이 없었던 것이 색다른 것이었다. 직계가족, 특히 아들 딸의 ‘오열’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siblings 과 연로하신 어머님은 부러울 정도로 침착한 표정들이었는데.. 나는 그것이 부럽기도 하고 심지어는 이해가 안 될 정도다. 어떻게 그렇게 침착할 수가 있었을까? 대가족의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몇 년 전까지 보험 사무실에서 만났던 Charlie P도 오랜 만에 식사 때 만났다. 전보다 살이 빠져서 보기가 좋았던 그, 내가 방문할 때마다 James ‘사장님’과 나를 포함해서 같이 담배를 피었는데 들으니 ‘사장님’이 자기와 같이 금연에 성공을 했는데, 1년 뒤부터 다시 피기 시작했다고 들려 주었다. 심장병의 원인 중에 흡연도 있었기에.. 그 때 완전히 담배를 끊었었다면 어땠을까 아쉽기만 하다.

아쉬운 것은 사실 그것이 아니고, 내가 알기로 이 James 형제가 신앙생활로 부터 떨어져서 살아온 것이다. 항상, ‘옛날에 열심히 했다’고 하는 것이 변명이었다. 그것은 사실 그의 형도 마찬가지다. 옛날에 했던 것이 그렇게 지금 큰 상관이 있을까? 아무리 바빠도 신앙생활을 더 열심히 했었으면 결과는 아주 다른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평소에 stress를 많이 받으며 사는 그의 life style에, 마음의 평화가 주는 ‘stress의 해독제’ 역할을 그는 몰랐을지도 모른다. 덤덤하게 받아들였던 그의 타계, 이제는 조금씩 그의 삶과 죽음이 나 자신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천천히 음미할 차례다.

 

연도 煉禱, 뜻밖의 부음 訃音

¶  이제 나에게 연도는 생소한 것이 절대로 아니다. 아니, 익숙해졌다고 생각을 한다. 하면 할 수록 그렇게 마음의 평화를 주는 ‘곡 哭’ 도 연도 말고 어디 있을까? 너무나 한국적인 정서가 배어있는 연도. 연옥의 영혼을 위한 기도, 가톨릭의 장례 형식이지만, 연옥을 믿지 않는 개신교에서도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들었다.

오늘, 우리에게 조금은 생소한 이름의 어떤 자매님의 연도가 오늘 정오 미사 후에 있었다. 고인의 향년 91세가 그렇게 특별할 것은 없지만 다른 때보다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연도를 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오래 전부터 들었던 ‘소문’, 성령운동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어떤  사제가 옷을 벗고 결혼을 한 case 였다. 그 ‘환속’의 과정과 이유는 잘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하느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는 생각만 자꾸 들었다. 오늘 연도 고인의 사위가 바로 그 ‘전 前’ 사제라고 하는데 소문에서만 듣다가 오늘 처음으로 가까이서 보게 된 것이다. 그것이 전부인데.. 지나고 보니 왜 ‘내가’ 그렇게 관심을 갖고 연도에 참석했을까 나 자신이 조금은 당황하게 되었다.

 

¶  너무나 놀라운 부음 訃音을 오늘 늦게 접하고 머리가 띵~ 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보험 전문인인 James형제, 서울 외대출신, 오랜 친분을 가진 ‘최형’의 바로 밑 동생, James (Choi) 로 알게 되었고 2004년 경부터 한 동안 그의 insurance agency의  computer system을 보아 주면서 자주 만나기도 했던 그가 오늘 ‘갑자기, 예고도 없이’ 심장마비로 타계를 한 것.. 칠순도 되지 않는 나이에 예고 없이 찾아온 죽음.

근래에는 통 만날 기회가 없어서 거의 잊고 지냈던 것도 사실이지만 간접적으로 최형을 통해서 어쩌다 소식을 듣기도 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오래 전에 심장 검사에서 담배를 줄이라는 의사의 충고를 받았다고 듣기도 했지만 아마도 철저한 금연을 못 한 모양이다. 하기야 내가 그의 사무실에 찾아가면 ‘꼭’ 담배를 피러 사무실 밖으로 나오곤 했고 나도 오랜 만이라고 같이 피웠던 기억도 있으니.. 흡연으로 인해 혈관이 막혀서 생긴 불운의 결과가 아닌가 짐작을 한다.

짧지 않은 세월 동안, 한 분밖에 없는 형님네와 관계가 그렇게 원만하지 못했던 것을 우리도 알기에 이렇게 갑자기 떠난 것이 가슴이 아프다. 그런 것 다 아시는 그의 어머님의 심정을 생각하니 더욱 그렇고, 최근에 가까이 알고 지냈던 누님과는 각별한 사이였다는데 얼마나 애석할까. 어머니도 없고 형제도 없는 나로써는 최형네의 대가족이 항상 부러웠지만 그만큼 어려움도 있는 모양이다. 이제는 연도나 장례미사에서나 다시 만나게 될 것 같은 James 형제, 부디 편안히 쉬기를..

 

¶  오늘은 레지오 주 회합에 절반의 단원들이 결석을 하였다. 10명에서 5명이 되니 조금 생소한 느낌을 들었지만 다른 쪽으로 조금은 한가하고 편한 느낌도 있었다. 레지오 단원의 의무 중에 제일 으뜸이 주 회합에 출석을 하는 것이라고 모두들 알고 있지만, 완벽하게 이것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다. 문제는 이것이 습관성인가 아닌가 하는 것인데, 나는 이제 이 결석하는 pattern을 보고 거의 그 사람의 character를 짐작할 수도 있게 되었고 그 사람의 ‘다른 면에서의 성공여부’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우리 단원들의 결석 이유를 보면: 어쩔 수 없는 것, 시간 관리를 철저히 못 한 것, 단순히 심각한 생각이 없는 것 등으로 구분이 되는데 나의 옛 모습을 생각하면서 조금 더 분발을 못하는 단원들을 보면 조금 안타까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그저 뒤에서 기도나 응원을 할 정도 밖에..

 

¶  문재인, 어떤 인간인가? 거의 40년간 ‘조국의 정치’를 외면하고 살았던 내가 이번에는 왜 이것이 그렇게 신경이 쓰였는지 나도 잘 모른다. 젊은 시절 나의 정치무관심은 이해가 가지만 50-60대에 들어와서도 변치 않았던 것은 나도 놀란다. 하지만 정치와 나이는 조금 비례 관계가 있는가? 이제 조금씩 ‘ political actor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을 하는 느낌이 든다.  특히 작년 말의 미국 Trump disaster이후에 더 그런데 왜 그런가? 결론은 근래 미국과 유럽의 추세가 extreme and populism 의 전성기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우리는 이미 9/11  이후 미국 정치철학의 극단화가 시작되었음을 보아 왔고 그 결과가 monster Trump를 탄생시킨 것. 

‘우리세대의 대통령’ 박정희. 그의 딸 박근혜가 그런 모습으로 사라진 것으로 이제는 ‘우리 세대의 모든 것이 사라졌구나’ 하는 아쉬움을 남겨주었다. 요새 그곳 정치인들을 나는 전혀 모르기에 왈가왈부할 수 있는 자격이 없지만 ‘세대적인 세계관’ 을 따라 그들을 평가하는 정도. 모두들 ‘문재인이 되면 큰일’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왔다. 뭐가 큰일인지는 간단하다. 그가 빨갱이라는 것, 그것 하나였다. 빨갱이라는 말만 들어도 잠에서 깨는 나에게 그 말은 ‘올바른 판단’ 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나의 선택은 ‘정당한 선거에 의해서 뽑힌’ 그를 인정하는 수 밖에 더 있겠는가? 제발, 제발.. 북쪽에 일방적으로 ‘퍼다 주는 인상’만 주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 뿐이다.

 

싸~늘~ 한 5월 초, 성모의 밤

¶  싸늘한, 아니 아예, 이른 봄의 꽃 시샘 추위를 연상하게 하는 싱그러운 5월 달 첫 토요일 아침. 지난 밤에는 급히 ‘강제로’ 70도에 hold했던 2층 thermostat로 말미암아 central heating 이 밤새도록 ‘겨울의 소음’을 내며 돌아갔다. 웬만하면 bed blanket warmer로 견디면 되겠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2층 small bedroom 구석에서 3주 째 젖을 먹으며 자라고 있는 5마리의 kittens들이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분명히 이런 ‘추위’는 처음일 것이라는 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지나간 주일들, 초여름의 끈끈함을 느끼게 하는 ‘무더위’의 맛을 보여 주더니 역시 자연은 공평한 것인가.. 기억 속의 5월, 언젠가는 이렇게 unseasonable 한 음산한 추위를 꼭 보여 주었다. 역시 한치도 어김없이 싱그러운 성모성월의 벽두에 이렇게 끊임없이 쏟아지는 폭우가 하루 종일 내리며 ‘5월의 추위’ 까지 찾아온 것이다.

지난 주에 그렇게도 덥게 느껴지던 날 올 처음으로 아래층 마루 아래  crawlspace에 들어갔다가 central furnace의 pilot light를  아예 꺼버리고 나온 것이 조금은 후회가 되었다. 이제는 아래층의 central heating이 필요 없을 것이라고 속단을 한 것이다. 당시에는 ‘설마 다시 추위 질까?’ 하며 그렇게 한 것인데 오늘 아래층에 내려가니 이건 완전히 냉장고로 변해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kitchen에 남겨둔 toy같은 space heater 덕분에 ‘동사’는 면했다.  그러면서 생각에.. 아마도 이번의 싸늘함이 올 여름 전 느낄 수 있는 마지막 ‘추위’가 아닐까.. 이제부터는 cooling system에 온통 신경이 쓰일 계절이 아닌가? 아~ 이제는 우리의 ‘고철’ a/c (air conditioner)가 올해는 무사히 견디어 줄까.. 하는,  혹시 무슨 일이.. 하는 자괴감에 젖는다.

 

¶  레지오 피정, 성모의 밤: 2017년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레지오 주관  2일간의 ‘연’ 피정이 숨가쁘게 바쁜 스케줄로 피곤한 우리를 맞이했다. 한 동안(1~2 년간?) 피정이란 곳에 못 가보아서 생소하게까지 느껴지기도 했지만 반갑기도 했다. 지난 4~5년 동안의 내가 가보았던 레지오 피정의 느낌들이 만족스럽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가본 것들은 대부분 ‘집을 떠난, 진짜 피정’ 들이었지만 이번은 본당에서 하는 ‘편하지만.. 느낌이 덜 한’ 그런 것이고 이틀 째 날의 스케줄은 조금은 아찔한 것. 아침부터 밤 9시를 넘어가는 숨이 찬 하루였다.

피정 둘째 날의 그 바쁜 스케줄은 사실 피정과 상관없이 본당의 다른 행사인 ‘성모의 밤’ 이 저녁 늦게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사실 그것은 꼭 참가하고 싶은 것이어서 비교적 긴 시간을 성당에서 보내야 했다.

대한민국 안동교구 정희욱 ‘원로사제’ 신부님이 주도한 피정 자체는 첫날밤의 slow start로 조금 실망감을 떨칠 수가 없었지만, 끝 마무리가 활기에 찬 것이어서 결과적으로 grade B+ 정도는 될 것이다. 내가 본 이번 피정 강론의 문제는 이것이다. 성모신심을 ‘체험’으로 강조한 것은 만족이었지만 전체적으로 너무나 일반적이고 깊이가 결여 되었다는 사실 이것은 성모신심이 생소하거나 거부감이 있는 일반 가톨릭 신자나 개신교인들에게는 잘 맞는 정도의 message였다. 하지만, 우리 같은 레지오 단원들은 이미 이런 정도의 신심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떨칠 수가 없다.

피곤한 긴 하루를 마감했던 ‘성모의 밤’.. 이것 때문에 하루의 피로가 싹 가시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올해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성모의 밤.. 작년 같이 성모동산 앞 주차장에서 ‘어두운 밤을 밝히는’ 멋진 모습을 상상했지만 예상을 뒤엎고 실내인 대 성당에서 행사가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다행이었다. 그렇게 화창하던 날씨가 일기예보가 정확히 예고한 대로 부슬비가 뿌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날 오랜 만에 들어보는 ‘생음악’, GounodAve Maria, violin 연주(piano와 duet) 는 성모님의 청순함을 아낌없이 느끼게 하는 그런 연주였는데 그 violin 자매님, violin연주의 ‘백미 白眉’를 들려준 것 같아서 고맙기까지 했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신 이재욱 요한 본당신부님의 모습도 좋았고, 성모님께 바치는 ‘시적인 글’도 너무나 좋았다. 남녀노소가 골고루 참여하여 우렁차게 바친 묵주기도 ‘환희의 신비’는 평소에 하던 때의 느낌을 훨씬 넘는 그런 장엄했던 것. 레지오 연피정 주제인 ‘성모신심’의 절정을 보여주는 듯한 성모의 밤, 나에게 있어서 ‘특별한 피조물, 성모 마리아’는 과연 지난 7년 동안 어떤 의미였을까.. 죽을 때까지 음미하여야 할 과제가 되고 있다.

 

 

베로니카, 2주기

2014년 온 세상이 찬란한 amber color로 변해가던 깊은 늦가을 우리와 첫 인연을 맺었던 베로니카 자매님이 하늘로 떠난 지 꼭 2년이 되는 날이 바로 오늘 5월 2일이었다. 첫 해는 그런대로 길기 느껴진 세월이었지만 이제부터는 무섭게 빠른 세월을 맞을 것이다. 그러면 기억도 서서히 사라지겠지만.. 슬프지만 아름다운 추억을 남기고 떠나신 돼지띠 동갑 배 베로니카 자매님..  만난 지 비록 반 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주 진한 만남들을 경험하였다.

오빠와 동생들의 염원을 따라 베로니카라는 세례명으로 병상에서 세례까지 받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향한 자매님, 올해도 우리는 자매님의 공원묘지를 찾았는데 아쉽게도 두 아들이 함께하지 못 하였다. 양친을 2년 만에 모두 잃은 외로운 형제 아드님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프다. 우리의 희망은 언젠가 어머니처럼 하느님을 찾아 성당에 나오게 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현 시점에서는 tall order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기다리고 있다.

 

 

1st of May, 2017

2017년 ‘우리들의 5월 1일’이 되었다. 친구들이여, 지난 한해 잘 살았던가? 아니.. 큰 변화는 없었던가? 창희는 물론 교회를 맴돌며 보람 있는 나날을 보냈을 것 같고, 용현이는 어떤 세월을 보냈는지 전혀 idea가 없구나. 나와 나의 가까운 사람들은 비교적 잘 살았던 듯하다.

우리들의 5월 1일은 어제였던가? 아마도 1970년부터 1973년 사이가 아니었을까?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적 경제발전의 서막이 시작되던 때에 우리들 모두 생의 진로를 놓고 방황하며 불투명한 미래를 잊고자 발버둥 치지 않았던가?

당시에 느꼈던 우리들의 세상은 아무리 아무리 하늘이 어두웠어도 그 저쪽에는 밝은 태양이 맴돌고 있었지 않았던가? 젊음의 선물인 ‘이유 없는 희망’, 바로 그것을 우리들은 만끽하며 길게만 느껴지던 몇 해를 보냈지.

그 ‘어린’ 나이에 세계관이 변할만한 신앙을 찾았던 창희, 당시에 ‘우리 들’은 이해를 못할 수 밖에 없었다. ‘신나고 멋지게 오래 오래 살자’ 가 전부였던 나이였기에 ‘죽음’의 세계는 우주의 저~ 편으로 느끼던 20대 초.. 그런 느낌의 세월들이 우리들의 5월 1일,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거의’ 사라져 가고 있구나.

비록 3총사가 뿔뿔이 흩어져서 소식도 모르며 숨어 살고 있지만 이런 추억으로 인한 꿈속의 세계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함이 없구나. 이런 pace로 세월이 흐른다면 이제는 서로 죽는 날도 모르고 뜨겠다는 자괴감에 젖지만, 그래도 그래도 나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언제나 작은 기적이 있다는 경험을 가지며 살고 있으니까.. 내년 5월 1일, 다시 보자.. 멋진 친구들이여!

 

창희야, 용현아 그립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Mass, romantic..

몇 년 전부터인가.. 내가 YouTubeVatican programming을 보기 시작한 것이.. 최소한 2~3년 정도는 되었지 않았나? 처음에는 중요한 행사, 그러니까 시복, 시성식 같은 것 아니면 가톨릭 전례력으로 아주 중요한 날들, 크리스마스, 부활절 같은 것을 high definition video로 볼 수 있었던 것이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다. 해외여행을 밥 먹듯이 ‘자랑 삼아(주로 Facebook-type people)’ 하는 부류들은 분명히 그런 때마다 Vatican city로 날라가서 현장의 분위기를 만끽할 것이지만 나에게는 그런 ‘$재력$’이 없기에 YouTubeVatican streaming video를 감지덕지 感之德之 하며 머리 숙여 감사할 따름이다.

Italy 동북부의 소도시, Carpi 본당 앞 piazza 에서 거행된 교황집전 미사

 

그렇게 멀게만 느껴지고 생소하기도 했던 교황님 집전의 Latin Mass들이 이제는 거짓말처럼 친근하게 느껴진다. 무슨 말인지 처음에는 ‘하나도’ 짐작조차 못했지만 지금은 그냥 몇 년을 ‘계속’ 본 탓인지는 몰라도 짐작으로 ‘거의 다’ 이해를 하게 되기도 했다. 반세기 전에 그 잘 나가고, 알량한 WordPower라는 책으로 영어단어들의 역사와 어원을 따지며 공부했던 그 말들, ‘배움의 위력’을 유감없이 증명하고 있다. 배워두어서 손해 볼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현대 영어는 물론 Latin어에서 나온 다른(나라) 말들, 짐작으로 거의 때려 맞추게 되었으니 말이다.

‘거의 매일’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교황 Francesco

 

대부분의 Vatican video programming들 중에서 가끔 ‘생소’한 것들이 보이기도 하는데 오늘의 주제인 romantic mass가 그 중에 하나다. 교황님, 가끔 (아니면 자주?) Italy 국내의 성당들을 방문하곤 하시는데 그 중에 조그만 본당들도 있다. 2017년, 4월 2일에 방문한 곳 Carpi 라는 도시의 본당이다. 이 ‘사목적 방문’의 이유는 지진에 의한 고통을 위로하시러 가신 듯하다. 지진으로 무너진 본당의 건물이 다시 세워진 것에 맞추신 듯 한데 확실한 것은 모른다.

 

 

그 때 찍은 ‘공식’ video, 누가 찍었는지 ‘참으로 멋진 coverage’라고 감탄을 했다. 처음에는 무심코 생소한 것을 본 듯이 보았지만 두 번째 보게 되었을 때는 더 자세히 그곳의 풍경,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조그만 도시라서 그런지 그곳의 사람들, 신자들 보통 생각하는 ‘멋진 이탈리아 fashion‘ 같은 것은 거의 보이지 않았던, 평범한 소도시의 simple 가톨릭 신자들.. 어쩌면 그렇게 소박, 경건하고도 생동감 있는 미사를 드리던지.. 위로와 사랑으로 가득 찬 모습의 교황님을 중심으로 그 많은 사람들 혼연일체가 된 모습들.. 인상적이었다.

 

 

더 나아가 이 미사의 video를 계속 반복해서 보게 된 이유는 조금 우스운 것인데.. 성가대의 어떤 젊은 여성 lead singer의 모습 때문이었다. ‘서양여자’의 나이는 조금 짐작하기 쉽지 않지만 이 여성은 쉬운 case로서,  아마도 upper teen 아니면 early 20s  나 되는지.. 나이보다 더 관심을 끈 것은 요즈음 정말 오랜만에 성형왕국 대한민국의 수 많은 똑같은 복제품 같은 여성들에 비해서, ‘칼을 대지’ 않은 ‘처녀성 얼굴’이었고, K-pop 가수들처럼 100% artificial 한 화장기가 전혀 없었던 바로 그 얼굴..  거기다가.. 그 청순하고 단순한, black gospel song 냄새가 전혀 안 나는 전통 가톨릭적 음성의 정수 精粹 를 보여주었다. Romantic한 감정까지 느끼며, 이런 저런 생각의 끝에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내가 손녀 같은 나이의 이 여성에 맞는 나이였다면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이런 ‘찬사’가 그대로였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것이 나이 듦의 비밀일 것이다.

 

 

심지어 ‘야릇한, romantic’한 감정을 갖고 교황님 미사를 ‘경청’하면서 이 programming을 찾고, 보고, 느끼게 되는 것, 전혀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잠긴다. 요새는 모두 그런 식이다. 세상에 우연이란 없지 않을까… 필연적인 것은 아닐까? 그러면 그 필연의 first mover는 과연 누구일까? 이래서 인생의 황혼기도 그렇게 지루하고 심심한 것이 아님을 실감하고, 또한 그저 감사, 감사한다.

 

 

바람 부는 날 redux

오늘은 드물게도, 거센 바람이 분다..  지나간 겨울은 정말로 조용한 하늘이었다. 바람도, 눈도, 큰 비도 없었던 정말 얌전한 날씨로 일관했던 2017년 첫 3개월을 보낸 지금 4월초가 되면서 빚이라고 갚으려는 듯, 어젯밤부터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기온까지 급강하, 아침에 외출 할 때는 거의 사라졌던 두꺼운 스웨터까지 입어야 했다.

얌전하게 지나간 겨울, 비록 재미는 없었지만 덕분에 heating $$$는 분명히 많이 절약이 되었을 것이다. 이럴 때 $$$를 언급하는 나를 나는 경멸한다. 그것이 나이 탓인가 세월 탓인가 시대 탓인가…

 

Surge

우울한 기분을 조금이라도 달래주는 것 중에 이것이 있다. 나의 blog counts.. 왜 그런가? 하루 평균 30~40 를 수년 동안 보아왔다. 하지만 아주 가끔 놀라운 burp가 있긴 했다고는 하지만 한 달 평균 1,200 정도로 만족을 해왔다. 그러니까 하루 40 hit count정도인 것이다. 한 시간에 1~2 정도의 visitor가 있었다고 할까? 짐작하건대, 거의 모두 search engine애 의해서 찾아 온 것일 것이다.

나의 blog은 내가 생각해 보아도 조금은 strange, unique한 것이.. 상식적으로 조금 이해하기가 힘들게 public보다는 private에 더 신경을 쓰는 그런 것.. serony.com은 분명히 DNS 에 등록이 된, wide-open된 public한 것이지만 실제로 나는 의도적으로 가급적 널리 알려지지 않게 노력을 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간단하다. 그렇게 많지 않았던 나의 life-long friends 들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만이라도 찾아와서 내가 ‘건강하게’ 살아있다는 것만 알아주면 이 blog의 목적은 달성되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아마도 한 달 정도 되었나.. hit count가 ‘갑자기’ 뛰었다. Daily average가 50에 육박한 것이다. 지난 달에는 한 달에 2,000이 훨씬 넘어서 (2,260!)  하루 평균 70에 육박했는데 물론 나는 이것이 sustainable한 것이 ‘절대로’ 아님을 안다. 하지만 그 다음 달인 지금 생각보다 그렇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면 하루 평균 50이 이제부터는 new normal이 된 것인가? 모른다.. 모른다.. 이 blog count는 절대로 예측할 수가 없는 dynamic한 것이고 왜 하루 평균 50인지 이유를 분석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누가 나의 blog을 찾아 왔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떤 특정된 post를 찾아왔는지는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러니까.. 나의 post에도 popular한 것이 있는 것이다. 나의 일상 생활보다는 신앙적, 영성적, 교회적인 것에 대한 나의 생각, 반성, 묵상 등을 찾는 사람들.. 분명히 현재 나의 같은 길을 걷고 있거나 그런 시도를 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나는 만족함을 느낀다. 70이라는 인생 여정을 뒤돌아 보며 나의 ‘이상한’ 8년 역사의 개인 blog은 어떤 길을 언제까지 가야 하는가..

 

bizarre & kafkaesque..

2017년 3월의 hump day로 힘겹게 넘어가려는 날 3월 14일, 오늘이 내가 꼽는 올해의 첫 그날, truly  bizarre kafkaesque day가 아닌가 싶다. 아주 가끔(십 년쯤에 한번 정도) 경험하는 이런 ‘괴상하고 이상한 날 Franz Kafka도 놀랄만한’, 이날은 간단히 말하면 memorably truly BAD day가 되고 말았다. 바라건대 이와 같은 날은 가능하다면 다시는 맛 보지 않기를 바라지만, 아니면 10년 이후에나 다시 경험하게 되기를 바라게 된다.

이날의 ‘괴상한 사건’은 timeline으로 펼치면 길지도 복잡하지도 않은 간단한 것이다. 한마디로: 레지오 주회합 시간에 방문을 온 어떤 꾸리아 간부의 ‘해괴망측한 행동’ 바로 그것이다. 이것이야말로 bizarre, bizarre 그리고 또 bizarre 그것도 부족해서 이거야 말로 kafkaesque란 괴상한 단어가 100% 딱 들어 맞을 것이다. Franz Kafka의 classic ‘The Trial‘의 불행한 주인공 K의 심정을 느낀다. 도대체 이 해괴한 행동에서, 나는 (아니 우리 모든 단원들은) 무엇이 문제였는지도 모르고 순식간에 attack을 당한 것인데.. 솔직히 말해서 이사건 주인공의 정신상태까지 생각해볼 정도였고, 하도 밥맛이 떨어져서 입을 딱 씻고 6개월 장기유고를 선언할 태세까지 갖추고 있는데, 참 어쩌다 우리 레지오가 이 지경까지 흘러온 것인지..

 

큰 눈이 안 오는 1월은..

¶  마지막으로 (blog) posting을 했던 때가… 와~~ 믿어지지 않는 ‘작년’ 2016년 11월 Thanksgiving Day 때가 아닌가? 그러니까 크리스마스가 있던 12월과 가족적으로 너무나 바쁘기만 한 1월 이 온통 다 posting 없이 지나간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지난 2개월 동안 비록 posting을 없었지만 간간이, 틈틈이 남겨 둔 calendar journals, sticky note들이 이곳 저곳에 남아있고 ‘digital traces [emails, voice recording, snap photo 같은]’의 도움으로 지난 2개월의 blog post (retro-blogs)들도  ‘곧’ 채워질 것으로 희망을 하며 이렇게 1월을 보내게 되었다.

 

¶  지난 26일에 2016년도 Federal Income Tax Return을 2시간 만에 끝을 내어 버렸다. 미리 생각하고 시작한 것이 아니고 ‘충동적’으로 한 것인데 그것이 나의 습성이기에 크게 놀라진 않는다. 올해의 tax return은 약간 의외적이었는데 tax refund가 아니고 오랜만에 tax를 내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것은 지난 해 ObamaCare coverage때문이어서 우리 집의 financial fundamental과는 큰 상관이 없는 것이어서 크게 문제 삼지 않기로 했다.

 

¶  올해의 겨울날씨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었던가? 1월의 마지막에 들어서 돌아보니 분명히 heating bill이 작년보다 가벼워진 것 같다. 올해 겨울 long-term forecast는 못 보았지만 분명히 ‘이상난동’에 가까운 것으로 보도했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아틀란타 지역의 뚜렷한 4계절이 이제는 ‘아열대성 subtropical’형으로 바뀌는 것이 아닐까.. 이제는 4계절 보다는 ‘우기와 건기’인 듯이 느껴진다. 그러니까 예전의 한 겨울이 ‘차가운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그런 것으로 변한 것이다. 1월 초 한때 잠깐 강추위와 눈이 조금 뿌렸지만 그 정도는 경미한 것으로 끝나고 앞으로도 ‘큰 뉴스 예보’는 보이지 않는다. 가끔은 그래도 ‘천지개벽’할 정도의 일기뉴스가 그리워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불편을 겪을 정도만은 피해갈 수 있기를 바라기도 한다. 2014년의 그런 ‘교통대란’은 다시 겪고 싶지 않기에 그런 것이다. 그래도… 그래도… 솔직히.. 소리 없이 고요히 밤의 적막을 헤치고 펑펑 내리는 함박눈의 환상은 지울 수가 없다.

1월초 섭씨 영하 10도의 강추위와 약간의 눈발이 내렸던 기억..

 

¶  Crash Courses: ROK (South Korea), DPRK (North Korea) 101:  오래 살다 보면 ‘이유 없이, 우연히, 저절로’ 생기는 일들이 있는데 이것들이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물론 이것이 더 가능했던 것은 ubiquitous Google 의 power일 수도 있다. 불과 20여 년 전에는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닌 것이 요새는 수시로 일어난다. 좋은 예로, YouTube에서 우연히 보게 된 것들 중에 [탈북자] 가 있었다. 이런 ‘탈북’이란 유행어, 말을 듣기는 했지만 나의 코 앞에 다가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KOREA에 대한 관심 전혀 없이 살아온 수십 년 덕택에 완전히 고향감각을 잃어버린 시점에서 이런 것들은 완전히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남쪽은 남쪽대로 ‘빨갱이 정치인’들이 득실거리고 (정말 밥맛 떨어지는 종북좌파 정치인 개XX들은 내가 이 우주에서 제일 증오하는 쓰레기 중의 쓰레기들이다.) 북쪽은 북쪽대로 ‘해괴한 모습의 지도자 동지들’ 치하에서 ‘인민’들을 굶겨 죽이며 ‘장난감’ 무기로 불장난을 하니.. 그래서 제일 피하고 싶던 뉴스는 거의 모두 KOREA에 관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던가.. 이제는 그 말이 역시 명언 중에 명언임을 실감하는 나날과 앞날을 마주 보게 되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나의 고향, 나의 조국을 ‘심각하게’ 공부하는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Eve, Christmas 2016

Uh oh.. 와~ 오늘이 며칠인가.. 2016년 12월 24일, 사실 이날의 느낌이 12월 25일 보다 훨씬 더 설레고 진하던 시절을 오래 전에 보냈던가? 이제는 그런 설렘은 기억 뿐이지만 그래도 잔잔한 설렘은 어쩔 수가 없다. 요새 비교적 평화로움을 유지하며 여기까지 온 것만도 나에게는 더 큰 성탄 선물일 것이다.

오래 오래 오래 전 우리 둘 모두 교회, 성당을 모르던 시절 신혼 초, 정말 고요한 밤을 보냈다. 아니 너무 고요해서 심심하고 쓸쓸한 밤이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Eve 밤 늦게 차를 몰고 downtown (당시는 Columbus, Ohio)을 배회하는 것이었는데.. 왜 그런 해괴한 idea가 우리 둘의 머리에서 나왔는지.. 아마도 찬란한 holiday decoration, tree light같은 것을 보려고 했을 것이지만 집에 들어오면 이상하게 더 쓸쓸해지는 것을 알았다. 외롭기도 하고.. 별로 좋지 않았다. 그런 것이 크리스마스의 진짜 이유를 찾고 알게 되면서 모든 것이 변했다. 그 이후는 우리 가족의 역사가 되었다.

최근에 들어서는 최소한 우리 직계가족 전부 (4명)이 모여서 우리 집 근처 Holy Family성당에서 합창단과 더불어 함께 노래를 부른 후, 자정미사를 보는 것이 정상이 되었다. 오늘 밤도 같은 routine을 거칠 것이다.

 

+ 강 마리아 자매님..

오늘 저녁에 우리부부는 개인연도를 하고 있었다. 이틀 전에 ‘갑자기’ 타계하신 강 마리아 자매님, 향년 90세로 하늘로 떠나셨다. 인생 90년은 비록 짧지는 않게 느껴지지만 우리에게는 결코 더 오래 사실 것, 100세는 사실 것으로 안심을 하며 지내던 터에 더욱 슬프고, 당황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복잡한 심정으로 고인의 영결행사 대신 이렇게 집에서 연도를 한 것이다. 부디 연옥의 고통에서 빨리 벗어나시도록 간절히 빌었다.

강 마리아 자매님, 우리와 처음 만난 것 레지오 수첩을 찾아보니 아마도 2013년 11월 경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모습들을 비교적 자세히 기억한다.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 준비로 난타 연습이 진행 중이었고 지금은 귀국하고 없는 전요셉 형제와 친해지려고 하던 그 때, 레지오의 다른 단원과 친분이 있었던 ‘할머니 교우’ 였던 강 마리아 자매님이 senior home에 사시는데 ‘치매기’가 있고 성당엘 나올 수 없으니 봉성체를 부탁한다고 알려 왔다. 나는 ‘봉성체 자격증’ 이 없지만 다행히 연숙은 그것이 가능해서 나는 봉성체 동행으로 따라가기 시작한 것이 인연이 되었다.

알고 보니 강마리아 자매님은 전요셉 형제와도 이미 친분이 있었다. 몸이 성할 당시 성당 미사시간에 옆 자리에 앉으시곤 했다고 했다. 그래서 한번은 전요셉 형제도 함께 봉성체를 가기도 했다. 사시는 곳은 ‘비싼’축에 속하는 senior home이었는데 비록 환경은 좋다지만 외롭게 사시는 것은 별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조그만 방에서 시간을 보내시는 것.. 보기에도 쓸쓸하게 보였다. 하지만 강 마리아 자매님은 활달한 성격이고 항상 웃으시는 것이 우리 어머님 같은 느낌까지 들 정도 친하게 되었다. 비록 경미한 기억상실증dementia 같은 것은 있었어도 우리가 방문 당시에는 거의 정상인 같이 보였다. 이래서 거의 2년 여의 봉성체 인연을 맺기 시작하게 되었다.

치매, 그러니까 망각증상은 분명히 있었으나 특별한 질환이나 쇠약함이 별로 없는 자매님, ‘약 하나도 안 먹는다’ 고 자랑을 하시기도 하고 일제시대 부산에서 미래의 남편 되시는 분이 지나가는 자기를 ‘꼬시려고’ 할 때의 ‘기꾸꼬 짱!’ 하며 불렀던 기억, 일본 군가 같은 노래를 가사를 똑똑히 팔을 흔들며 부르시던 모습 또한 새롭다.

‘잘 나가는 가족들’을 두신 자매님, 어쩌다 이렇게 미국 아틀란타의 어느 조용한 양로원에 오시게 되었는가? 절대로 남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자랑스러운 아드님 부부도 가까이 살고 있지만 같이 살지는 않았다. 경험 있는 관록이 붙은 회계사였던 아드님, 경제적으로 부유했지만 어머님을 모시기에는 너무나 바빴던 모양이지만, 우리 어머님을 내가 모시지 못하고 보낸 나의 처지에서 그런 것을 comment하는 것조차 죄스럽게 느껴진다.

한 번은 자매님이 가출했다고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양로원 근처를 방황하다가 발견되어 큰 문제가 없었지만, 그것으로 우리는 분명히 망각증이 더 진행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24시간 주위의 보호를 받고는 있지만 그런 사고는 날 수가 있는 모양.  한번은 가보니 무거운 장거리 여행용 가방을 챙겨두고 계셔서 어디 가시냐고 여쭈었더니 ‘나도 여행을 가야겠다’고 말씀하셔서 깜짝 놀랐지만 양로원 측의 말이 자주 저러신다고 했다. 짐작에 아들네 부부가 ‘세계일주’를 갔는데 따라가시려고 한 모양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지난 몇 개월 봉성체를 거르게 되었는데, 이유는 간단하지 않았다. 우리도 바빴고 ‘치매 환자의 봉성체에 대한 이견’ 때문이었다. 신부님께서 가급적 치매환자 봉성체를 자제하라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강마리아 자매님을 찾지 못하고 지나다가 이번에 정말 놀랍게도 타계하신 소식을 접했는데, 솔직히 머리가 땅! 하고 얻어 맞은 느낌이 들었다. 죄송, 죄송..죄송합니다.. 라는 말 밖에 할 말을 잊었다. 봉성체를 못해드려도 찾아라도 뵐 걸.. 하는 자괴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사실 몸이 성한 우리 같은 신자로서 봉성체 봉사는 그 분들에게 드리는 도움보다도 그로 인해 내가 받는 은혜와 은총이 더 많음을 항상 절감하곤 한다. 대부분 인생 선배님들은 그들에게서 나는 산 역사 공부를 하고, 신앙공부도 하게 되며 앞으로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지도 배우는 등.. 참 알고 보면 내가 더 도움을 받으러 그 분들을 찾아 뵙는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아직도 환~하게 웃으시는 강마리아 자매님의 얼굴.. 나에게는 항상 살아서 ‘찾아 주어서 고맙데이…’ 하시면 양로원 문까지 배웅해 주시던 조그만 체구의 마리아 자매님.. 영원히 살아 계실 것이다.  성모 마리아와 모든 성인들이여, 이 자매님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시기를 빌어 주소서…

 

중앙고 독일어, 강성위

책, 二十世紀 哲學 역자, 강성위.. 1978년 대한민국 왜관 분도출판사에서 발행된 철학 번역서. 강성위 는 번역한 사람의 이름이다. 지난 주일날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 레지오 꾸리아 월례회의에도 참석할 겸해서 그곳에서 주일미사엘 갔는데, 근래에 자주했던 것처럼 ‘성물방, 도서실’ 엘 들렸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의 제목이었다.

갑자기 철학에 눈이 뜬 것이라기 보다는 번역자의 이름이 나의 눈을 끌었고 곧바로 2주 대출을 하게 되었다. 강성위.. 강성위.. 1963~4년, 무려 반세기가 지난 때의 기억 속에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이름이었다. 서울 중앙고등학교 독일어 선생님의 이름.. 바로 그 강성위 선생님이 분명했다.

지난 해에도 이 ‘조그마한’ 도서실에서 재동국민학교 동창 김정훈 부제의 유고집 [산 바람 그리고 나]을 발견한 바가 있었는데 그런 추억이 담긴 발견의 두 번째가 된 것이다. 오래 살다 보니까 이런 식의 ‘역사 속 발견의 즐거움’을 종종 대하게 된다. 세월의 즐거움 중에 하나일 것이고 ,길지 않은 삶의 세계에서는 상상도 못할 것이다.

거의 40년이 가까운 이 책은 비록 ‘소책자’의 느낌을 주지만 내용은 정 반대로 ‘거대한 주제를 압축적으로 다룬’ 만만치 않은 책이었다. 우리가 살아온 20세기를 풍미하며 우리를 직접 간접으로 지배해 온 사상, 물론 서양적인 관점에서 본 것들을 정리한 것, 지금 읽으니 우리들도 피할 수 없던 이런 ‘사상 들’ 속에서 평생을 살았구나.. 하는 감회도 든다. 때로는 ‘사상이 밥 먹여 주냐?’ 는 때도 있었겠지만 그것은 너무나 피상적인 의견일 것이다.

강선생님 졸업앨범 사진

강성위 독일어 선생님.. 비록 2년 여의 짧은 기억이지만 추억은 아주 너무나 또렷하게 남는다. 1963-64년..  박정희가 5.16 혁명 2년 후 군복을 벗고 대한민국 제3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던 때..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요란하게 선전되던 때 [주로 중화학 산업개발], 강선생님, 중앙고 1학년의 독일어 선생으로 만나게 되었다.

독일어.. 는 분명히 입시중심의 교육과정에서 별로 빛이 없었던 ‘제2외국어’에 불과했다. 하지만 당시 1960년 당시만 해도 2차대전의 강국 독일문화의 후광은 그런대로 남아있어서 대학과정에서 독일어는 거의 필수적 선택이었고 대학원엘 들어가려면 독일어 시험을 치러야 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독일어 같은 제2외국어는 필수과목으로 배워야 했고 그렇게 ‘되길어 [당시 우리들은 풍자적으로 그렇게 불렀다] 강성위’ 선생님을 만난 것이다.

고등학교와 독일어, 영어가 아닌 언어를 배우는 것은 신선하고 어깨를 으쓱하게 하는 자랑할 만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나와 독일어 자체는 악연으로 끝나고 말았다. 한마디로 독일어의 재미를 못 느끼며, 게다가 핵심을 못 배운 것이다. 그저 기억 속에는 정관사 der des 같은 것이 전부다. 이런 탓으로 나는 대학시절에도 이 ‘어려운 말’과 고전을 하게 되었고 대학원 입학에 이 독일어 시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아예 대학원은 꿈도 못 꾸기도 했다. 왜 그랬을까?

나름대로 나는 노력을 했다고 기억을 하는데 결과적으로 ‘완전 실패’였다. 나는 독일어를 잘 못 배운 것이다. 다른 애들은 어땠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열심히 해도 잘 못 배운 것’은 어쩌면 선생님 탓도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당시에는 그런 생각까지 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곰곰이 생각하니 이 ‘강성위 되길어’ 선생님의 독일어 강의는 절대로 흥미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주입식으로 그저 외우는 것 외에는 기억이 전혀 없다.

이 강선생님에 대한 다른 추억은 독일어가 아니고 ‘장난치고 이상하게 때리는’ 당시로써는 ‘전통적 선생님’이 아니었던 것. 독일어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로 아이들과 장난을 치고, 수시로 아이들에게 손찌검을 했는데 그 방식이 독특하게 ‘때리는 것이 아니고 꼬집는 것’ 이었다. 이런 식으로 고교 1, 2년을 보내고 이과를 선택한 나는 독일어와는 상관이 없게 되었고 이 강선생님도 보기가 힘들게 되었다.

졸업 후에 완전히 잊고 살다가 친구 정교성에게 강성위 선생님의 이야기를 잠깐 들었던 기억, 대학교수가 되었다는 것, 독일에 유학을 갔었다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은근히 속으로 놀라긴 했지만[아니.. 그 꼬집던 선생님이 독일유학?] 큰 관심은 없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강선생님의 이름이 들어간 책을 보게 되었고 1978년까지의 ‘약력’을 볼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과연 독일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국내 대학에서 가르치는 약력이 그 책에 적혀있었다. 정교성의 말이 맞은 것이다. 언제 독일유학을 갔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우리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1966년 직후가 아니었을까? 지금이라도 googling을 하면 더 자세한 약력과 근황을 알 수도 있겠지만 이 정도에서 stop을 하기로 하였다.

중앙고교 천주교반 앨범사진, 1965

 

중앙고교 졸업앨범을 보고 다시 당시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고 바로 그 모습을 나는 머리에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사진에서는 새로운 사실을 알 수가 있었는데 바로 ‘천주교 반’ group 사진에 ‘지도 교사 격’으로 찍은 사진이었다. 아하! 강선생님.. 천주교 신자였구나!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게다가 친구 정교성의 모습도 보이고.. 희미하게 기억에 남는 동창들[이태식, 김창호 등등] 의 얼굴도 보인다. 근래 나의 인생의 나침판이 된 천주교를 믿는 영혼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아직도 나의 기억에 남는 ‘꼬집는 강성위 선생님’보다는 더 친근한 천주교 교우인 ‘강성위 박사, 형제님’ 이 친근하게 다가온다. 영세 명은 과연 무엇일까? 궁금해지지만 오늘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언젠가는 알 수가 있을 것이고 어떤 본당에 나가시는지도 알게 될 테니까..

 

레지오 연총, 2016

지나간 거의 반년 이상 줄기차게 레지오 서기록 공지사항에 적혀 있었던 것이 바로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 이것이 드디어 끝이 났다. 대강 이 행사가 끝날 즈음이면 대림절 이후 늘어나는 촛불의 숫자를 필두로, 성탄절과 송년의 기분을 조금 느낄 수 있는 시기가 된다. 올해에도 예외 없이 대림초 2개가 켜지는 날 주일, 12월 4일에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천상은총의 모후 꾸리아 산하의 모든 레지오 단원들이 커다란 친교실에 모두 모여서 일년을 무사히 우리들을 지켜준 ‘총사령관’ 성모님께 감사, 전구기도를 드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나로써는 올해가 벌써 6년째가 되는 이 연말 행사, 처음이 2010년 12월이었지.. 그때는 정말 햇병아리 신참, 정단원 선서를 기다리던 시절에 이 행사를 보며 ‘난생처음’ 이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 ‘동료의식’을 조금은 느끼며 흥분된 기분이기도 했다. 해가 거듭할 수로 익숙해지고 있지만 매년 조금씩 다른 느낌을 받는다. 거의 대부분이 ‘자매님’들인 이 단체, 나 같은 ‘형제님’들은 이 여성들을 따라가야 한다.

이 행사는 비록 Ireland 냄새가 짙게 나는 유럽에서 유래된 Legion of Mary (Legio Mariae)의 연말 행사지만 우리가 치르는 이 행사는 거의 99.9% ‘대한민국화’ 된 것이다. Universal Church를 지향하는 천주교의 전통에 따라 이것도 세계화 되었기에 전세계 곳곳에서 열릴 것이고 ‘막강한’ power를 자랑하는 한반도의 전역 본당에서도 열릴 것이고, 그들의 연총 행사는 위에 말한 것같이 ‘한국화’된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하고 있는 이곳 아틀란타의 그것은 무엇인가? 원칙적으로 우리가 숨쉬고 있는 이곳 미국 땅의 그것의 문화를 따라야 할 것이지만, ‘한국인의 근성’이 어디로 갈까? 더욱이나 ‘막강해진’ Korean Connection은 이곳 아틀란타에서는 피할 수가 없다. 레지오 조직의 법적인 차원을 떠나서 사실 우리는 별 수 없이 대한민국의 그것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나는 대한민국의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를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지만 짐작에 우리가 현재 여기서 하고 있는 그것이 바로 그것이 아닐까? 아마도 똑 같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 크게 상관이 없다. 레지오의 교본에 따라 레지오의 연차 총친목회의 정신을 따르면 문화적인 것은 2차적인 관심이다. 평소 잘 못보고 지내던 ‘레지오 동지’들과 친교를 이루면 그 목적은 달성되는 것이니까…

이 행사는 동료 단원들과 친교를 이루는 한 방법으로 ‘연예 프로그램’을 긴 시간 동안 준비를 한다. 이 긴 시간을 통해서 친교를 하게 되는데 올해 우리는 비교적 잘 알고 지내던 ‘은총의 모후’와 함께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와 ‘개똥벌레’라는 두 곡을 연습하여 당일에 그 솜씨를 발표 하였다. Chorus style이었지만 그래도 조금 색다르게 rearrange를 해서 2번째 부른 ‘개똥벌레’는 자매님들이 귀엽게 율동을 해서 연속된 노래의 지루함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지나간 여름부터 시작된 ‘기타 club’의 학생자매님들이 guitar로 반주를 했고, 나는 전체적인 guitar 반주를 하는 등, 보는 사람들에게도 신선한 performance가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한가지 아쉬움은.. 연총 당일을 위해 지난 몇 개월간 열심히 guitar 반주 연습을 같이 했던 크리스티나 자매님 (나와 guitar duet)이 감기에 걸려 어쩔 수 없이 공연을 포기하게 된 것… 정말 아쉽기만 했다. 그 자매에게 감기는 정상인에 비해서 심각한 것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차가운 비가 하루 종일 뿌리던 12월 4일 일요일 오후의 이 행사,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아니 2016년 레지오 마리애의 굵직한 행사의 마지막이 끝난 것.. 이제부터는 성탄을 향한 본격적인 대림절로 기다리는, 편안한 12월의 휴일 기분을 만끽할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