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년 선종 善終, 돼지띠 자매

¶  다른젊은엄마의 장례미사: 오늘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는 ‘뜻밖의, 급작스러운’ 연도와 장례미사가 있었다. 모든 죽음이 어떤 면에서는 뜻밖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번의 죽음은 내 주위의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젊은 느낌’을 주는 Camilla 자매님의 죽음이었다. 지난 3월 사순절 막바지에 오랜 투병을 끝내고 선종을 한 다른 ‘젊은 엄마’ 보나 자매님의 기억이 생생한 이 마당에 또 한 명 자매님의 선종은 예기치 않았던 글자 그대로 ‘급작스런’ 죽음인 것 같아서 가족들에게는 큰 고통이었을 것 같았다.

한창나이 쉰 을 갓 넘은 ‘젊은 엄마’의 죽음.. 불과 3일 전, Mother’s Day 하루 전에 급작스러운 엄마의 타계.. 그 가족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나로써는 도저히 가늠을 할 수가 없었다. 특히 학생나이의 두 따님의 심정은..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사연은 알 수가 없지만 그래도 ‘고향’같을 수도 있는(견진성사를 이곳에서 받았다기 에) 순교자 성당에서, ‘해맑은’ 한 토마스 신부님의 ‘젊지 않게 깊이 있고, 자상한’ 고별강론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유족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었으리라..

비교적 앞 자리에 앉아서 고별미사 내내 나는 고인의 사진을 응시하며 생각을 한다. 60/70년대 통기타 folk singer였던 박인희씨를 연상시키는 그런 ‘청초’한 모습, 저렇게 ‘예고 없이’ 급작스럽게 떠나는 것.. 본인은 알지도 모르겠지만 가족들과 지인들의 놀라움과 슬픔을 한동안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우리 부부가 그런 처지를 당하면.. 상상을 한다. 그런 제로가 아닌 가능성을 매 순간 생각하며 살면 비록 피곤은 하겠지만 조금이라도 ‘사랑스런 말이나 표정’으로 서로를 대할 것 같지 않을까?

고인의 큰 따님(순교자 성당 종교학교 교사였다고 함)이 사실 불과 일 주일 전 마지막 고인을 보았을 때 별로 좋은 않은 감정으로 헤어졌다고 후회를 했다는 신부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어찌 안 그렇겠는가, 아마도 두고두고 후회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떠난 날 다음날이 Mother’s Day임을 생각할 때, 이건 너무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그래서, 매일 매일이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으로 살라는 말이 바로 그런 뜻이 아니겠는가? 비록 평소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교우 자매의 고별식이었지만 뜻 밖에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된 ‘레지오 화요일’ 오후가 되었고 차를 타고 집에 돌아오며 가족들끼리 틈이 날 때마다 ‘We love you라는 message를 교환하자고 하기도 하였다.

 

¶  돼지띠 프란체스카: 장례미사가 끝나고 ‘실로’ 오랜만에 가보는 ‘본가 설렁탕’이란 순교자 성당에서 아주 가까운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뜻 밖에도 20년 지기 知己, 최형 (a.k.a.진희 아빠)의 누님인 프란체스카 자매님를 만나게 되어서 합석을 하게 되었다. 참 이곳에 오래 살다 보니 이런 때도 오는가.. 최형은 비록 ‘전통적’인 가톨릭 교우이지만 Sunday Catholic 정도라고 할 수 있는데 비해 누님인 프란체스카 자매는 매주 화요일 레지오 주회합 우리 바로 옆 방에서 모이는 다른 레지오의 부단장을 하는 비교적 활동적인 교우라고 할 수 있다.

예전에는 최형의 집에서 모임이 있을 때 가끔 볼 정도로 잘 알지 못했는데,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주일 마다 얼굴을 보게 되기도 하고 꾸리아 월례회의에서도 우리의 바로 옆자리에 앉는 등 가까워진 느낌까지 들게 되었다. 그래서 알게 된 사실은.. 이 자매님, 비록 ‘누님’ 격으로 통했지만 나와 띠가 같은 ‘돼지띠’였다. 최소한 나와 동갑인 셈이 아닌가? 깎듯이 누님으로 대하던 것이 조금은 어색해지기도 하고, 이렇게 가까이 앉아서 식사까지 하게 되니 이제는 동갑친구 같은 생각까지 드는 것이다.

돼지띠를 만나거나 보게 되면 나는 이상할 정도로 정이 가는 것은 왜 그럴까? 2년 전까지만 해도 ‘전요셉’ 형제가 돼지띠 동갑으로 사귀게 되어서 나를 기쁘게 했지만 사귀자 마자 ‘영구귀국’을 해 버려서 얼마나 섭섭했는지 모른다. 그러던 차에 돼지띠 ‘누님’이 나의 앞에 등장한 것이다. 친구누님으로 대할 것인가 돼지띠 동갑친구로 대할 것인가.. 조금은 혼란스럽기까지 하지만 이날 동석으로 식사를 하면서 ‘말이 통하고, 재미있는 자매’임을 느끼고 안심을 하였다. 동생 최형과 같이 서울 덕수국민학교 출신 임도 알게 되었는데, 나와 정확히 같은 해에 같은 서울 하늘아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사실만도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으니..

이날 같이 합석을 한 ‘자매님’들은 같은 레지오 단원들인데 우연히 이들 group이 몇 년 전 최형과 같이 기타 강습을 받았던 것을 알았는데, 다시 기타를 배우고 싶다고 하더니 나보고 가르쳐달라는 요청까지 받았다. 글쎄.. 내가 얼마나 할 수 있는지 잘 모를 텐데, 꼭 배우고 싶은 열망이 있다는 것으로 짐작을 하였다. 우선 생각을 해 보자고 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의 guitar솜씨로 남을 가르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나의 기타 솜씨는 완전히 ‘등 넘어 배운’ 정도인데 어떻게 남을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렇게 무언가 배우며 살고 싶은 건강하고 멋진 자매님들이 레지오에 있다는 사실이 신선하고 기쁘기까지 했던 명랑했던 장례미사 후의 식사시간이 되었다.

 

성모성월, 성모의 밤, 그리고 어머니..

 
교황님 2016년 5월 지향기도

¶  성모성월:   Vatican Youtube에는 이제 매달마다 교황님의 ‘매달 지향기도 monthly prayer intention‘ video가 실린다. 보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개월 밖에 안 되었지만 이제는 은근히 기다려지기도 한다. 짧지만 아주 심도 있고 호소력이 있는 교황님의 ‘구수한’ Italian comment는 영어자막이 곁들여져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지난 달에는 ‘제대로 대우를 못 받는 농부들’ 에 관한 것이고 이달은 ‘별로 인정 못 받고 고생하는 세계의 여성들’에 대한 기도이다. 참 계절적으로 알 맞는 기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5월과 여성, 특히 성모님은 어쩌면 그렇게 느낌이 일치하는 것일까? 그래서 Mother’s Day, 가톨릭 전례력으로 성모성월, 성모의 밤.. 등등이 모두 5월에 함께 모여있는 것일까?우리 어머님의 기일도 5월에 있음이 한동안 나를 슬프게 했지만 다른 편으로 생각하니 이런 포근한 기분의 5월에 있음이 조금은 나를 위로하는 셈이 되었다. 어디 그 뿐인가? 사람을 노곤하게 만드는 첫 한가로운 느낌의 더위가 여름의 시작을 알리고, 재수가 좋으면 (나쁘면?) space heater를 켜야 할 정도의 싸늘한 아침도 이때에 꼭 있다. 지난 주말 경에 사실 아침에 central heating 이 요란하게 나온 적이 있었으니까.. 아마도 그것이 올 여름 전에 ‘마지막’ 난방의 소음소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첫 A/C (air conditioner)의 소음 소리를 들을 때가 가까워졌을지도 모른다. 이미 나의 office에는 ‘돗자리’가 자리를 잡았고 80도 이상을 웃도는 늦은 오후에는 pet dog, Tobey 와 함께 ‘오수 午睡’를 즐길 때가 되었다. 이런 5월의 모습들이 나를 즐겁게 한다.

 

 

¶  성모의 밤:  올해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성모의 밤 행사는 우리에게는 조금 느낌이 다른 경험이 되었다. 내가 우리가 몇 년 동안 보았던 성모의 밤은 대개 5월 말 쯤에 있어서  거의 여름 기분으로 바뀐 시점으로 조금은 싱그러운 5월의 향기가 희미해진 느낌이었고, 본당 대성전 안에서 ‘경직된 행사’를 하는 느낌으로 했었는데, 올해는 ‘정식으로’ 본당 성모 동산 앞, 그러니까 야외, outdoor에서 ‘진짜 성모의 밤’을 보게 된 것이다. 커다란 가정집 mansion 뒤뜰에서 결혼식을 하는 느낌까지 들었다. 거기다 시간적으로 어두움이 잔잔히 가라앉기 시작하고, 향기로운 5월의 공기까지 성모동산을 신비롭게 감싸는 것, 정말 느낌이 새로웠다.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자랑스런 유산, 성모동산이 촛불 행렬을 기다리며..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자랑스런 유산, 성모동산이 촛불 행렬을 기다리며..

어두움이 깔린 성모동산, 인자로운 눈이 어둠을 밝힌다

어두움이 깔린 성모동산, 인자로운 눈이 어둠을 밝힌다

열을 지어서 행진하는 장미꽃, 촛불들의 행렬의 위에 인자로운 미소로 내려다 보시는 성모님.. 머리 속으로 ‘분명히’ 성모님께서 지금 이 시간 시공간을 초월해서 우리 앞에 계신다는 것을 그리며 그린다. 비록 본당주최라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성모신심의 본향인 레지오 단원들의 정다운 모습들을 많이 보게 되고, 특히 예년에 비해서 더 레지오에 관심을 보이시는 본당신부님들의 모습도 다정한 어머님의 눈길과 더불어 더 5월 초의 향기로운 저녁 하늘을 포근하게 느끼게 했다. Never too late라고 이제나마 ‘진짜 성모의 밤‘을 보게 해 주신 성모님께 다시 한번…

 

¶  나의 어머니 날:  2016년 5월 8일, Mother’s Day, 어떻게 올해는 오래~전 어머니 날과 날짜가 같을까? 5월 8일.. 나의 시절에는 어머니 날이었지 어버이 날은 기억에 없었다. 이날은 여러 가지가 겹친 날이기도 했다. 2번째 일요일, 레지오 꾸리아 월례회의 날이라 오랜만에 주일미사를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하게 되어서 비록 몇 주만이지만 새로운 기분으로 본당을 둘러보고 성물방의 도서실도 기웃거리고, 이제는 낯익은 담당 자매님에게 레지오 행동단원 입단도 권유해 보는 등, 기분을 새로이 하는 날이 되었다. 이제는 예의 낯익은 얼굴이 분명히 몇 분이 꼭 있어서 예전에 비해서 마음이 덜 불편하게도 되었다.옆 동네, 마리에타 1구역 담당의 $3 점심도 비록 한 그릇이었지만 맛은 아주 감칠맛나게 좋았다.

날씨도 기가 막히게 화창한 날 예전 같으면 ‘아이들의 강요’에 못 이겨 ‘끌려서라도’ 주인공인 ‘돼지 엄마’를 ‘모시고’ classy한 곳에서 외식을 하기도 했겠지만.. 글쎄.. 이제 모두들 ‘늙었나..’ 움직이는 것 귀찮다는데 거의 동의한 단계가 되었다. 올해는 idea가 바닥이 난 아이들을 ‘구제’하려 내가 volunteer를 해서 집에서 나의 ‘특기 요리’로 이날 오후를 보내게 되었다. 나의 특기요리는 평소에 ‘돼지 엄마’가 좋아하는 ‘lots of, lots of vegetable & ground beef stir fry‘ 라고 내가 이름을 붙인 이제는 거의 classic이 된 나만의 요리이다. 그저 ‘재료만 많으면’ 눈을 감고도 만들 수 있는 요리.. 오늘의 main dish가 되었다. 아이들은 red wine, 손수 만든 chicken wing을 밖에서 grill하고, Doraville H-mart에 있는 ‘빵집’에서 사온 ‘덜 달고, 덜 큰, 알맞은’ cake등으로, 그런대로 ‘초 간단 超 簡單, 초 저가 超 低價’ 였지만 만족스런, 즐거운 Mother’s Day late luncheon이 되었다. 주인공은 아이들의 엄마인 ‘돼지 엄마’겠지만 나의 머리 깊숙한 곳에는 나의 heroine, 나의 어머니가 더 크게 자리를 잡고 있는 화창한 5월 8일 어머니 날이 되었다.

 

back-breaking time..redecking

우리 집 뒤쪽에는 ‘손바닥 만한’ open deck (no roof)이 하나 붙어 있다. 처음에 이사를 올 당시 이것을 보고 머릿속으로는 멋진 outdoor chair같은 것을 놓고 시원한 beer나 향기 나는 wine을 만지작거리는 상상을 하기도 했지만, 위치가 거의 북동쪽을 향하고 있어서 아침에 해가 잠시 들고나면 나머지 시간은 분위기가 어두운 곳으로 변하는 흠이 있었다. 가끔 gutter라도 넘치는 폭우가 쏟아지면 그 빗물들이 완전히 마를 시간이 부족해서 제일 deck이 필요한 여름철에 바닥이 새파랗게 이끼까지 끼는 등.. 한마디로 눈의 가시가 되고 식구들의 냉대를 받으며 거의 방치까지 되기도 했다.

이런 것을 감안하면 이 위치에 deck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원래 주인이 그저 ‘생각 없이’ 만들어 놓은 것인지.. 알 수가 없지만.. 우리가 이 집의 원래 주인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이 위치에는 open deck은 맞지 않고 지붕이 있는 porch 형태가 맞는다. 물기가 문제가 되니까. 하지만 그래도 open deck이 필요한 이유는, open fire grill같은 것을 쓰려면 open space가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오랜 기간 빗물을 제대로 처리 못한 이유로 deck은 차츰차츰 그 윤기를 잃기 시작하고 파랗게 색갈이 변하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조금씩 썩는 것도 보였다. 항상 물기를 머금고 있는 표면은 흡사 skate 장 같이 미끄러워서 위험하기도 하고.. 모양새는 그야말로 목불인견 目不忍見..  4월이 지나가고, 날씨가 풀리면서 ‘운동 삼아’ deck floor board(마루조각) 하나를 뜯어보니..놀라운 사실,  아래쪽 면은 아주 ‘말짱’한 것이 아닌가?  거의 ‘새것’ 처럼 보이고 느껴진 것이다. 그러면.. 다시 모두 뜯어서 뒤집으면 ‘새 것’이 되는 것.. 와~~ 대 발견! ‘공짜’로 새로운 deck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공짜가 세상에 어디 있나? 이것을 모두 뜯어서 뒤집어 다시 만드는 것.. 모두 100% back-breaking hard-labor 임을 누가 모르랴? 하지만 free new deck이라는 꿈을 꾸며 대 장정의 첫 걸음을 내 디디었다. 계획으로는 ‘천천히, 나의 pace’로 하면 일 주일이면 끝 날듯 보였지만 그것은 조금 순진한 희망이었고 실제로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으로 남았다. 각가지 hidden surprise를 누가 예상을 못 했으랴?

제일 힘들었던 step은 예상치도 못하게, deck board의 fastener들, 모두 deck screws들을,  remove하는 job.. 모두 deck screw로 만들어졌지만, 그 ‘놈’들이 요지부동 unscrew 가 쉽게 될 리가 없다. 세월의 풍상으로 모두 head들이 반들반들 달아서 screw driver가 물리지를 않는 것이다. common nail이면 이럴 때 간단하게 빠질 수 있지만 screw는 요지부동인 것이 태반이다. 결국 deck board들을 pry bar로 강제로 들어올리는 수 밖에 없고.. screw만 남으면 그것을 ‘강제로’ pliers 를 써서 거의 손가락의 힘으로 뽑아낸다. 이 과정에서 나는 ‘처참하게’, 완전히 뻗게 되었다.

결국 다 deck board들은 모두 빠졌지만 그것들은 rough sander로 손을 모두 보아야 하고 좋은 ‘제 자리’를 잡아서 고정을 시켜야 하는데 이 과정 역시 surprise 투성이다. 현재까지 거의 제 자리를 잡고 있지만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 이 일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은 deck board 들의 ‘간격 spacing’이 충분해야 빗물이 제대로 빠진다는 ‘자명한’ 사실을 나는 전번에 decking을 할 때 잊고 모두 너무 ‘가까이 붙여서’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가뜩이나 덜 마르는 위치에다 물이 더 빠지기 어렵게 내가 만든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주 충분한 여유를 두고 충분히 빗물이 빠지게 만들게 되었다. 이것의 ‘교훈’은, 실수를 하더라도, ‘spacing이  넓은 것이 좁은 것 보다 훨씬 낫다’ 라는 사실이다.

이 일을 하면서 이것이야말로 back-breaking job임을 절감하게 되었고 ‘고령의 나이’를 무시하고 너무 빨리 강행한 나의 실수도 인정하게 되었다.  하지만 ‘공짜’로 새 deck를 만들게 되었다는 사실 하나로 모든 피로와 고통은 싹 사라진다. 이것도 요새 읽는 ‘안젤름 그륀 의 다시 찾은 기쁨’ 중에 하나가 될 듯하다. 이것도, 시간과 돈을 완전히 바꿔 치기 하는  요새 내가 사는 전형적인 방식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Kittens under shed

4마리 kittens과 mother가 이 shed 밑에..
4마리 kittens과 mother가 이 shed 밑에..

일주일쯤 되었나.. 근래 가끔 우리 집 앞에 지나가는 것을 보았고 최근에는 backyard에서도 보였던 가늘고 까만 색갈의 양양이(고양이)를 다시 보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backyard 이웃 David 집과 경계 fence에 붙어 있는 2010년경 ‘내가 만든’ shed 뒤 쪽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 이후 shed에 쌓여있는 ‘공구’ 잡동사니 중에서 무언가 찾으려고 그곳에 가서 혹시나 해서 (직감적인가..) 뒤쪽을 보게 되었는데.. 아니~ 귀여운 kitten 한 마리가 나를 못보고 하품을 하고 있지 않았던가? 놀라게 하지 않으려 부지런히 우선 그 자리를 피하고, 이 일을 어쩌나.. 혹시 우리 집에서 kitten을 낳은 것은 아니었던가, 생각하기 시작했다.

몇 달 전이었던가.. stray pet animal에 관심이 지대한 나라니(둘째 딸)가 새로 난 kitten몇 마리(4마리, nicknames: A,B,C,D)를 일주일 동안 맡아 달라고 해서 빈 방에서 돌보아 주었던 적이 있었다. kitten들이 얼굴과 색깔에 상관없이 얼마나 귀여운가는 말할 필요도 없다. 특히 나의 나이 탓인지, 어찌나 ‘귀엽고, 슬프게’ 보이는지 말로 표현을 할 수가 없었다. 귀엽고, 슬프고.. 라는 상반된 감정, 기분이 특히 이상한 것이었다. 엄마와 떨어진 것, 이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 남을까.. 하는 우려가 더 나를 생각하게 한 것이다. 나라니의 말이: 너무나 많이 태어나는 양양이들이 우려할 만한 것이라고 ‘경고’를 하며 우리들은 어떡해서든지 그들을 ‘길거리’에서 구해서 더 이상 kitten들이 ‘안락사’를 당하지 않게 해야 한다고 역설을 한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pro-choice 어쩌구 하며 ‘길길이 날뛰는’ feminist들의 이기적인 궤변과는 대조적인 진정 ‘every life is precious‘, humane advocates의 정신을 느낄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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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우리 집 방에서 뛰어 놀았던 그 몇 마리의 ‘아주 작은 양양이’들.. 예상은 했지만 정이 무섭게 들었고 보낼 때 기분은 너무나 쳐지는 것.. 연숙은 더 해서 하루라도 빨리 보내자고 한다. 동감이었다. 더 정이 들면 들수록 이별은 따라서 고통이 될 것이다. 그 후에 adopt가 되었는지 잘 모르지만 그저 부디 행복하게 건강하게 수명을 다 살게 되기를 기도하는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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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이번에는 우리 차례가 된 것이다. 우리 집 property 안 에서 kitten들이 나온 것이다. 처음에는 귀찮은 생각에 안 본 것으로 하며  연숙에게 이야기도 하지 않았고 그저 kitten을 낳은 어미가 잠시 우리 집에서 쉬는 것으로 ‘희망적인’ 상상을 하려고 했지만.. 역시 그것이 아니고 사실은.. shed의 밑 바닥 crawlspace에서 출산을 한 모양이었다. 그곳은 사실 양양이가 머물기에 안전하고 널찍한 곳이라서 우선은 안심이 되었지만.. 집 안에서 사는 양양이에 비해서.. 축축하고 어둡고.. 불쌍한 마음이 들었지만 사실 원래 그런 환경이 그들에게는 자연적인, 정상이 아니던가?

내가 본 kitten은 분명히 한 마리였는데, 그들이 한번 출산에 몇 마리를 낳는다는 것을 알기에 문제는 과연 몇 마리? 그들을 놀라게 하지 않으려고 집 안에 들어와서 멀리서 shed 주변을 지켜보았더니.. 와~ 아주 귀여운 세(3) 마리가 옹기종기.. 뒹굴며 어미 앞에서 놀고 있지 않았던가? 그러면 세 마리를 낳았던가? 암만 보아도 세 마리였다. 색깔이 모두 다르지만 같은 검정색 계통이었다. 너무 어려서 사람을 안 무서워 하는 듯하였지만 소리에는 민감했다. 그러면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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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숙에게 고백을 하고 대책을 의논하기 시작했는데.. 우선은 ‘먹이, dry food & water 를 주는 것’ 이외에는 뾰족한 장기적인 해결책은 떠오르지를 않는다. ‘산모’의 젖이 가장 중요하니까, 우선은 잘 먹어야 할 것이니까 집안에서 사는 우리 집 양양이 Izzie가 먹는 것을 아주 많이 주기 시작했는데, 내 놓자 마자 금새 밥이 없어졌고 자세히 보니까, kitten들도 같이 먹는 듯 했다. 그것은 ‘어른 밥’인데 어떻게 먹을까 했지만 아마도 먹을 수 있는 이빨들이 나온 모양이었다. 정말 다행이 아닌가?

불과 며칠밖에 되지 않았지만, 아침 저녁 밥을 주러 갈 때나, 멀리서 shed 앞에서 엄마가 지켜보는 앞에서 ‘뒹굴고, 엉키고, 매달리며’ 노는 baby 들, 너무나 귀여운 모습들이었다. 문제는 이제부터가 아닌가.. 더 정이 들면 어쩌나, 그러면 보내거나 없어지는 것이 너무나 괴로운 일이 아닌가?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이런 ‘사사로운’ 정에 약해졌나? website를 뒤져보니 우리 같은 situation너무나 많고 그들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조직적’으로 veterinarian 들과 이들이 더 이상 baby를 낳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며 animal shelter에서 ‘안락사’를 못 하도록 최선을 다하는 등, 정말 humane human들의 모습을 보고 코가 찡해지는 것, 어쩔 수가 없다.

문제는 앞으로 몇 주가 중요하다고 하는데.. 어쩔 것인가. Mother’s Day에 애들이 오면 분명히 무슨 좋은 idea를 줄 것으로 기대를 하지만.. 우선 website에서 본 idea, 장기적인 ‘숙박시설’, outdoor shelter를 만들기로 했다. 다행이 요사이 tool들과 아주 익숙해진 관계로 아주 크게 힘들 것 같이 않고, 나중에 얘 (kittens+mother) 들이 갑자기 이사를 가거나 아니면 adopt가 될 때까지는 우리의 책임이라는 ‘사명감’을 느끼기 때문에 시간과 노력을 들여보기로 각오를 한다.

 

5월 5일에..

Morning routine gone: 4월보다 더 싸늘한 5월의 어떤 날들을 기억한다. 오늘 2016년 5월 5일이 바로 그런 ‘싸늘한 날’ 이 되었다. 그런 싸늘한 아침에 ‘비상용’ 이불을 더 덮어서 잠은 포근했지만 온 몸은 완전히 권투시합 15 round에서 얻어맞은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눈을 떤다. 아프지 않는 부분이 거의 없을 정도였지만 특히 손, 팔, 허리, 이빨 등등이 더 아픈 듯 느껴졌다. 어제 갑자기 ‘남용’한1 나의 근육들이 치열하게 데모를 하는 것인가? 곧바로.. 아하~ 나의 몸이 나에게 ‘오늘 아침 morning routine은 없는 것으로’ 하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그대로 누워버렸다. 아~ 미안합니다..

오늘 아침의 ‘regular routine’은 9 AM daily mass와 breakfast@SonataCafe, 이후 곧바로 YMCA workout 바로 그것들인데 이 세가지가 순식간에 없어진 것이다. 이런 routine들, 특히 ‘영육간’에 중요한 routine들, 전부터 둘이서 묵시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있다. 얼마 더 남은 인생일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절대로 sprinter가 아니고 marathoner라는 생각으로 살자는 것이다.  serious Moderation, compromise..하는 기분이 아니면 절대로 한 달도 못 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고, 그런 덕분에 ‘좋은 routine’들은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서 최소한 5년 이상 꾸준히 지켜지는 routine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서 지금은 생활, 몸의 일부가 되었다.

하지만 daily mass를 빠진 것은 아무래도 미안합니다… 라는 말이 귀속에서 맴돈다. ‘성체,성혈’을 놓친다는 것, 생각하기에 따라서 생사 生死같은 큰 차이가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인자하신 우리 천상의 어머니께서.. 그래 무리하지 마라.. 오래 오래 뛰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 하고 많지 않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실 것 같다.  OK, 간바로, 성모님!

 

¶ 어린이 날: 5월 5일하니까, 직감적으로 친근한 5/5의 연속.. 아하.. 어린 시절에 제일 좋았던 일년의 하루, 우리들의 날 어린이날이구나! 하지만 지금도 대한민국에 5월 5일이 어린이 날인지는 잘 모른다. 이것도, 아마도 political correctness의 유행으로, ‘일본강점기의 잔재’라고 하루아침에 없애 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도 의문이 남는다. ‘조선 어린이를 사랑했다던’ 방정환 선생님, 이 날을 제정하면서 왜 왜 하필 보기 싫은 일본의 어린이 날인 5월 5일을 그대로 답습을 했을까? 다른 의문점은 해방 이후에 일본이라는 생각만 해도 잠을 못 잘 정도로 반일 증오의 표본이었던 이승만 대통령, 이 날을 그대로 놔 두었을까?

상관없다. 우리들 이 어린이날 덕분에 멀쩡하게 한창 화창했던 봄날에 학교공부 완전히 쉬고 하루 종일 선생님들로부터 환대를 받으며 놀았으니까. 어린이는 나라의 보배, 물에 빠지면 우리들부터 먼저 구해준다는 등등 참 기분 좋았던 하루를 보냈다. 당시에 불렀던 ‘어린이날의 노래’, 아직도 귓가에 생생히 들려오고 가사도 100% 완전히 외운다.

시대적으로 찌들고, 세계에서 모든 ‘좋은 통계’ 에서 거의 바닥에 머물던 조국이었지만, 우리들 눈에 그런 것 크게 상관이 없이 그날 하루는 ‘하루 종일’ 학교에서 골목에서 만세를 부르며 달리고 숨고 웃고 떠들어댔다. 그렇다.. 바로 그 때의 우리 나이가 그런 나이었다. 다른 것 없었다. 그 동안 강산이 다섯 번 이상이나 변했어도 그 당시의 추억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Battle of Puebla
Battle of Puebla, 1862년 5월 5일

Cinco de Mayo: 싱코-드-마요, 이곳에 오래 살면서 주변국들에 대한 것들 듣고 배우고 알게 된 지도 꽤 세월이 지났다. 특히 남쪽에 사는 멕시코는 사실 북쪽의 캐나다 보다 더 정이 가고 친근한 느낌으로 관심도 많이 가는 편이다. 우선 역사가 그렇고 종교가 그렇다. Guadalupe 성모님은 물론이고 다수가 가톨릭인 순진한 사람들, 비록 잔인하고 부패한 인간들도 ‘닥상’으로 널린 나라지만 그래도 정이 간다.

오늘은 5월 5일, 바로 멕시코 독립기념일(9월 16일) 다음으로 중요한 명절인 Cinco de Mayo,  글자 그대로 ‘5월5일’이다. 혹시 여기도, 어린이날? 물론 아니고.. 이날은 역사적인 날로 1862년 5월 5일,  멕시코 군대가 프랑스 ‘침략군’을 ‘프에블라 전투, the Battle of Puebla‘ 에서 최악의 여건에도 불구하고 역전승을 한 ‘전승기념일 戰勝紀念日’이다. 우리로 말하면 일제 강점기 시절 만주에서 김좌진 장군의 독립군이 ‘막강, 기계화 된’ 일본군대를 섬멸한 정도가 될까?

이 전투에서 만약 프랑스군이 승리했다면 미국 역사도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었던 의미가 있었던 전투여서 아주 흥미롭다. 간단히 말하면, 침공을 했던 프랑스군 (나폴레옹 3세의 군대)이 멕시코를 제압했었다면 그들의 다음 목표 중에는 미국의 ‘남부 정권 Confederates’를 돕는 일이었고, 그 남북전쟁의 결과는 다르게 나타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날 승리의 의미는 미래적, 국제적인 것이었다. 독립국가로서의 멕시코는 더욱 확고해졌고, 링컨이 승리한 미국은 초강대국가 superpower로 운명적인 발걸음을 하는 그런 것을 생각하면 역사는 재미있고도 심각하다.

 

  1. popup project, 보기흉한 outdoor deck을 고치는 일, 보기보다 힘든 일이었다.

돼지띠 자매님, 벌써 일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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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일년이 되었나.. 작년 5월 2일 아침에 세상을 떠나신 배 베로니카 ‘돼지띠’ 자매님.. 두 장성한 아드님을 남겨두고, 2년 전 먼저가신 남편 형제님의 옆에 나란히 누우신 자매님 부부의 묘소를 오늘 레지오 회합 후에 잠깐 들렸다. 성당에서 가까운 Peachtree 공원묘지, 일년 전 이맘때를 회상한다.

두 아들에게 연락을 해서 같이 묘소에 가자고 하려던 것이 그만 기회를 놓치고 우리 둘만이 가게 되었다.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가까운 오빠, 동생들은 큰 관심이 없어 보이기도 했지만 우리들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별로 즐겁게 살지 못하고 떠나신 돼지띠 자매님, 알게 된지 짧은 기간 동안 나와 비록 개인적인 정을 나누지는 못했어도 나는 돼지띠라는 것만으로 충분히 가깝게 느끼고 있었던 어떻게 보면 ‘불쌍한’ 생의 말년을 보내셨던 배 베로니카 자매님.. 인연은 인연이기에 오늘도 우리 부부는 화창한 5월의 공원묘지를 찾게 되었다.

무심하게만 느껴지는 남아있는 두 아들들.. 모두 30대의 장년에 접어드는 성인이기에 이제는 걱정을 안 하셔도 될 듯 하다.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내가 보기에는 더 훌륭한 인생을 보낼 수 있는 잠재력이 충분이 있기에 안타깝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기할 수 있는 것이 여기까지가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드는 하루가 되었다. 돼지띠 자매님, 부디 빨리 연옥에서 벗어나시어 완전한 자유를 느끼는 영혼이 되소서…

 

First of May, 2016

5월 1일의 친구들이여 용현아, 창희야.. 잘들 있었는가? 다시 5월 1일이 일년을 지나서 우리를 이렇게 ‘허공’에서 만나게 하는가? 허공에서라도 큰 문제는 없지 않는가? 생각과 의식적 역학으로 우리는 일년 동안 계속 만날 수 있으니까. 이래서 일년의 흐름을 가늠하며.. 자네들의 지난 지난 일년, 옛 친구의 정을 이런 찬란한 어머님의 계절에 다시 한번 추억하는 것.. 나쁘지 않네..

코흘리개 원서동 개천시절부터 연인들까지 합세한 대학시절들까지.. 우리의 시대, 역사 속으로 빠르게 사라지고 있지만.. 사진 같은 그런 추억들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믿고 싶다. 이제는 다시 이 세상의 친구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지나가는 생각이 들 때는 하찮은 ‘느끼고 보여야만 하는’ 이 세상이 지나면 다른 그림들이 보이지 않을까 생각을 한다.

지난 일년 어디서라도 가족들 모두 건강하게 잘 지냈으리라 믿고 싶고, 우리 집도 하느님의 보호로 비교적 건강한 세월을 보냈다고 말 하고 싶다. 너희들은 분명히 출가한 자식들이 있으리라 추측을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모두 single을 고수하는 이상한 풍조에 휩쓸려 편안한 ‘혼자의 인생’을 고집하고 있으니.. 하지만 나는 이것만은 조금 progressive한 쪽인가..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자기들의 인생은 이미 우리에게서 떠난 것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것인지 그것은 공식이 없지 않은가?

70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자네들은 나머지 세월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생각을 하며 사는가? 나는 아직도 뚜렷한 계획이 없지만 조만간 어떤 ‘계시’를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은 버리지 않는다. 예전에 그렸던 노후인생의 모습들은 이제 완전히 사라지고 전혀 예상치 않았던 다른 세계관에 의한 것들이 우리의 앞에 나타나는구나. 아마도 그것이 진정한 평화로 가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도,

아무리 ‘나의’ 세계관이 엄청 변했어도 절대로 변할 수 없는 것은 역시 ‘우리들의 시대’에 대한 아련한 추억들일 것이다. 내년 2017년 5월 1일에 다시 만나자! Adios Amigo!

 

창희야, 용현아 그립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이름 없는 항구에서..

4월의 마지막 주에 접어들고, 작년 4월 ‘배 베로니카’ 자매님을 마지막으로 떠나 보내며 겪었던 바쁜 4월에 비해서, 올해 ‘우리의 4월’은 너무나 조용하고 평화스럽다고 서로의 의견을 모은다. 또한, 올 3월 말 보나 자매님과 영원한 작별을 한 후, 슬프고 바쁘고 정신이 없었던 느낌의 3월에 비해서 갑자기 무슨 휴가여행이라도 온 것 같은 아주 한가한 그런 4월이 거의 가고 있다.

목련 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의 전원 목가적인 박목월 시인의, 낮고 파아란 하늘과 수줍은 꽃들이 핀 파~란 청라 언덕과 이름 없는 항구 같은 것을 생각하곤 했지만 실제로 그런 아련~한 꿈같은 모습은 나에게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 ‘4월의 노래’를 회상하며 이제는 타계하신 가톨릭 음악가, 나의 중앙고 1년 담임 김대붕 선생님을 떠올리곤 했다. 그래서 그 김순애 교수 작곡의 4월의 노래가 그렇게 맴돌았을 것이다.

올해의 point는 가사 중에 나오는 ‘이름 없는 항구’.. 어찌 그렇게 그 구절이 나를 헤매게 하는가? 암만 생각해도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도, 아마도,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은’ 그런 마음이 깊숙한 곳에 있는 것은 아닐까?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분명히 계획 없이 훌쩍 떠난 나그네의 넋두리였을 것이다. 나도 그런 ‘부러운’ 나그네가 되고 싶다면.. 그렇다. 이제 그런 나이도 아니고, 그런 처지도 아니다. 꿈을 깨고 잠을 깨자.. 다시 ‘나를 필요로 하는 항구’로 배를 저어가자. 그렇게 생각하며 4월을 보낸다.

 
박목월 작사, 김순애 작곡 4월의 노래

 

Dream lover

몇 년 전 나는 꿈에 대한 추억을 회고한 적이 있었다. 기억에 남는 한 거의 모든 꿈, 특히 악몽에 관한 것들을 남겨 놓았다. 근래에 특별한 악몽 같은 것은 없는 듯 하지만,  얼마 전에 문득 생각을 했다. 아~~ 요새 나는 꿈을 안 꾸고 사는구나.. 하는 생각. 그렇다. 별로 꿈을 꾸었던 기억이 나지를 않는 것이고 사실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저 빠른 세월이라는 생각만 하고 산 듯한 것이다. 왜 그럴까?

그 전에는, 거의 정기적으로 꿈을 꾸며  살았고 가끔은 ‘기가 막히게 기억에 남는 꿈’을 자랑하기도 했었는데.. 혹시 이것도 나이 탓? 나이를 먹는다는 의식이 이미 잠재의식이 아닌 뒤로는 모든 것을 이렇게 나이 탓을 하는가? 그야말로 ‘내 나이가 어때서’ 라는 노래 제목 생각이 난다.

꿈을 ‘사랑’하는 나는 침대에 들어갈 때 꼭 ‘화살 기도’를 한다. 오늘 밤에 ‘근사한 꿈을 제게 주세요..’ 라는 애 같은 바람이다. 물론 그런 기도가 들어질 수는 없겠지만 그 정도로 나는 아침에 일어났을 때, 그 ‘기가 막힌 꿈’의 잔영 殘影 과 느낌을 사랑한다. 어느 누가 그렇지 않겠는가? 가끔 ‘우연히’ 정말 멋들어진 ‘그림들’을 간직하고 깨어나면 하루 종일 그것을 요리하기도 한다. 그 꿈에 어떤 의미라도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요새 별로 꿈을 못 꾸다가 며칠 전부터 빚이라도 갚을 양, 생생하게 펄펄 끓는 물처럼 가슴에 남는 꿈을 꾸게 되었다. 며칠 간이지만 나도 놀랄 지경.. 혹시 이렇게 변한 꿈의 pattern에도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느님이 나에게 무엇을 암시하시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라는 비약적인 생각도 들 지경이다.

특히 지난 3일 간의 꿈의 천사의 활동은 대단한 것이었다. 생애.. 처음으로 너무나 생생한 것들..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꿈에서 깨었을 때 부터가 꿈의 시작이고 꿈의 상태가 현실 같이 느껴지는 완전히 꿈과 현실이 바뀔 정도로 느껴지는 너무나 너무나 생생하고 기억에 99.9% 오랫동안 남는 그런 것들.. 3일 연속으로 ‘즐긴’ 이런 꿈 뒤에 조금 걱정까지 들게 되었다. 기억에 이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본 것들의 대부분은 거의 ‘사람들’에 관련 된 것들이다. 무슨 멋진 절경을 본 것도 아니고, 하느님이나 성모님을 본 것도 아닌 그저 mere mortal 들이다. 물론 그들은 내가 어디서 본 사람들, 내가 아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특이한 것이 ‘절대로 보기 싫은 사람’도 포함이 되어있었다. 그들이 바로 나의 주변에 모두 보이고 말들을 하며 ‘살고’ 있었다.

이중에 제일 웃기는 것은 이것이다. Donald Trump를 꿈에 본 것이다. 이 인간의 ‘쌍판’을 안 보려고 TV나 Internet news까지 ‘완전히’ 끊고 산 지가 몇 개월이 지났는데, 어떻게 이 인간이 꿈에 ‘생생하게’ 보인단 말인가? 웃기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내가 그 인간과 ‘어울려 재미있게’ 시간을 보낸 것이다. 꿈 속에서 나의 느낌이 ‘이 인간 내가 본 것 과는 조금 다른 인간이네.. ‘ 하는 것인데.. 내가 하도 이 인간을 love to hate 를 해서 성모님께서 조금 ‘자비심’을 가지라고 이렇게 나의 꿈에 보내주신 것인가 하는 생각까지 하며 한참을 웃기도 했다.

개꿈인가? 아니다. 아 나이에 어떻게 애같이 개꿈을 꾼단 말인가? 내가 ‘좋게든 싫게든’ 생각을 조금이라도 했던 영혼들이 나에게 어떤 암시나 의미를 주려고 나타난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너무나 선명한 꿈들을 꾸고 나서 나의 두뇌세포가 그렇게 노화가 된 것은 아니라는 안도감도 들 정도로 선명한 것들.. 이런 것들을 통해서 본 사람들.. 과 나의 관계를 재 점검해 볼 수 있는 우연히 좋은 기회가 되었다. 나는 그 ‘영혼들’과 어떤 관계가 있으며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가.. 싫은 영혼들과의 관계는 고쳐질 수 있는 여지는 없을까.. 벼라 별 생각이 다 드는 며칠을 지내며.. 참.. 내가 바로 dream lover가 아닌가.. (1960년대 Bobby Darin의 oldie, Dream Lover란 것이 생각 나지만 이것은 꿈에서나 보고 사귀는 연인에 관한 것이다. 나의 dream lover는 내가 꿈을 사랑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Dream Lover – Bobby Darin – 1958

 

Fixed air compressor, joy of scope

fully-repaired 4-gallon 'pancake' air compressor
fully-repaired 4-gallon ‘pancake’ air compressor

¶  날씨가 풀리면서 우리 ‘낡은 집’의 이곳 저곳을 손을 보려고 몸을 움직여보니.. 제일 중요한 tool 중에 하나인 air compressor (4-gallon pancake style) 가 고장 난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에 대한 것은 지난 blog에 나의 ‘각오’와 함께 밝힌 바가 있었다. 각오라 함은 물론 ‘내가 고치겠다’ 라는 각오다. 하지만 고치는 값이 사는 값보다 더 비싸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최악의 경우 이것을 버려야 하는 사태가 오는 것이 나의 ‘악몽’중에 하나다. 보기에 너무나 멀쩡한 것이고, 이것을 버리면 어디로 갈 것인가.. landfill.. landfill, 비싸게 만들어낸 쇳덩어리, 아직도 정상일 수도 있는 electric motor, pump등등.. 한 마디로 너무나 아까운 노릇이었다. 가진 것은 시간밖에 없다는 각오로 시간을 들여서 ‘공부’하기 시작을 해 보니..  

이미 밝혀진 사실은, (1) electric motor runs ok, (2) air pump makes air out fine, (3) no visible air leaks outside tank. 이 사실들은 air leak 자체가 밖에 있는 air plumbing의 어디에선가 hole이 생겼다는 뜻이다.  공기가 새는 소리가 들리는 곳은 air pressure switch부근이지만 정확한 곳은 pinpoint를 할 수가 없다.

가급적 disassemble을 피하려고 했지만,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Wrench들을 동원해서 plumbing pipe를 해체하고 자세히 보았지만 공기가 새는 곳이 없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뜯기 귀찮기만 한 air pressure switch그 자체이다. 이것에서 발견을 못하면 거의 이것을 내가 고칠 가망은 없고 ‘버려야’하는 신세가 된다.

비장한 각오로 air pressure switch를 뜯어내지만 그곳에도 별로 문제가 없어 보였다. 이것 자체도 더 분해가 가능하긴 했다. screw로 조립이 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곳에서 중단을 하고 최후의 보루인 googling을 하니.. 역시 air leak의 가능성은 이 switch 자체에 가장 많이 있었다. 내가 이것을 고칠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 다음은 이 ‘부품’을 교체하면 될 듯 보였다. 문제는.. price price.. 만약 $20~30 이상이 되면 포기할 단계다. 하지만 여기에 big surprise가 있었는데 이 부품은 처음부터 made in china이기에 거짓말처럼 싼 $7 정도가 아닌가? 이런 복잡한 것을 어떻게 $7 에 파는지 알 수는 없지만, 상관이 없지 않은가? 더욱 놀란 사실은.. China에서 직접 delivery가 되면 shipping 도 ‘공짜’… 참 요상한 세상이다.

 

fully disassembled air pressure switch

fully disassembled air pressure switch

Disassembled pressure switch exposed ugly 'teared' diaphragm

Disassembled pressure switch exposed ugly ‘teared’ diaphragm

결과적으로 나는 $7 gambling을 하는 셈이라서, 마음도 가벼웠다. 느낌에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날 듯 했고, 결과도 마찬가지.. 이 ‘놈’이 바로 범인으로 들어났고 10년이 넘은 4-gallon pancake air compressor는 ‘완전히’ 고쳐졌다. 내친김에 문제의 air pressure switch를 완전히 해체를 해 보니… 역시 깊숙한 속에 있었던 rubber air diaphragm에 큼직한 구멍이 나 있었다. 10년을 써서 그랬을까, 아니면 불량품이었을까.. 상관없다. 지금은 그것이 새것이 되었으니까.. 이래서 최소한 몇 년간은 거의 새것이 된 air compressor를 쓸 수가 있게 되었다. Landfill 로 갈 뻔했던 tool, 환경보호도 돕고, 나의 주머니 사정도 돕고, 기분도 좋고.. 이것이야말로 win win win, triple win 이 아닐까?

 

¶  Scope, 사실은 Oscilloscope의 준말로 electrical engineer에게 가장 사랑을 받는 instrument중에 하나다. 쉽게 말해서 이것은 electrical signal 중에서 가장 original, physical한 analog voltage를 real-time으로 보여주는 측정기기 測定器機 이다. 온 세상이 온통 digital로 변한 현재에 analog의 밑 바닥을 보여주는 이것이 아직도 필요할까? 물론, 물론이다. 그 ‘깨끗하게 보이는’ digital이란 것도 알고 보며 ‘모조리’ analog에서 출발한 것이니까. 요새 사람들 거의 analog system을 당연히 ‘안 보이는 것’으로 취급하지만, 그것은 큰 오산이 것이다.

Arduino generated square wave on 25 year old 20MHz Tenma oscilloscope

Arduino generated square wave on 25 year old 20MHz Tenma oscilloscope

Arduino setup for generating a square wave

Arduino setup for generating a square wave

 

직장을 떠난 지 꽤 오래 되어서 electronics lab environment도 이제는 생소한 느낌이 들지만 가끔 향수도 달랠 겸 오래 전에 쓰던 ‘고물’ 20MHz ‘analog’ oscilloscope를 먼지를 털어버리고 workbench의 중심으로 옮겨놓았다. 향수, 향수, 옛 생각이 그렇게 날 수가.. 어렸을 때부터 ‘장난’하던 electromagnets부터 시작 vacuum tube radio, stereo amplifier로 시작해서, 8-bit microcomputer를 거쳐서 32-bit microcontroller까지.. 이제는 ArduinoRaspberry Pi같은 것이 일반화 되어서 ‘어린 여자 애’들까지 이것을 가지고 장난을 하게 되었다. 과연 그 애들이 Oscilloscope가 무엇인지 알까, 관심이나 있을까? 오랜 만에 Scope에 나타난 깨끗한 초록색 square wave 를 보며 생각한다.. 아~~ 정녕 나의 세대, 세월은 이제 완전히 지나가는구나..

또 하나의 성체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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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7일, 폴란드 Poland 에서 2년 전에 발생한 성체기적 Eucharistic Miracle 이 공식적인 교회(현지 교구, bishop Zbigniew Kiernikowski 주교) 의 승인을 받았다는 뉴스가 catholic blogger, Philip Koloski 의 보도로 알려지게 되었다. 내가 이 소식을 접한 것은 National Catholic Register newsletter 를 통해서였고, 따라서 그것의 source인 website를 통해서 뉴스의 전부를 읽게 된 것이다.

이 성체기적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이 비교적 간단히 보도되었다.

2년 전, Poland의 Legnica 교구 본당에서의 일이다. 성체 분배과정에서 축성된 성체가 실수로 바닥에 떨어졌고, 곧바로 다시 집어 올려서 물이 들어있는 그릇에 다시 담겨졌다. 곧바로 성체에서 빨간 흔적들이 나타났다. 법의학 전문가들이 이 성체를 과학적으로 분석을 하니: 그 성체 부스러기 fragments 들은 사람 심장 근육의 조직과 비슷한 것 cross striated muscle로 판명이 되었다. 이 분석은 또한 이 조직, 조각은 사람, 인간의 것이고, 아주 고통을 느낀 그런 것이었다.

 Philip Koloski의 성체기적에 대한 논평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번의 ‘기적’이 예전의 것과 다른 것은 예전 것들 (예를 들면 Miracle of Lanciano)은 성체가 축성이 되는 과정에서 피로 변하거나, 축성을 하는 신부사제의 믿음이 부족할 때 변하는 것 들이었다. 이번의 case는 성체가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생긴 것이니.. 이것은 ‘취급 부주의’에 의한 것이다. 이번의 기적은 우리가 성체를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정말로 성체가 예수님의 몸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하며, 그에 맞게 조심해서 모셔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교훈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성체가 예수님의 ‘고통 받았던 몸’이라는 사실을 잊거나 과소평가하는 것에 의한 예수님의 message는 아니었을까?

나는 이 news를 접하며 또 생각하게 된다. 물론 ‘교리적’으로 분명히 성체는 성체, 그러니까 예수님의 몸과 피라는 것을 안다. 최소한 머리로는 배웠고 인정하고 믿고 안다. 하지만 가슴으로는 자신이 없는 것이다. 고해성사와 더불어 이 가톨릭 전통 교리는 나를 항상 더 고민하게 하고 더 생각하게 한다. 영성체를 할 때마다 겪는 고민과 갈등을 나는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주 가끔 집중적인 묵상을 하며 준비한 영성체에는 어렴풋이 강한 느낌이 온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은총인가? 일단 믿는다고 ‘선택’을 한 이상 믿고 싶고, 일단 믿음의 문지방을 넘으니 이런 ‘성체기적’을 믿고 싶고 믿는 것이다. 그것이 근래에 나에게는 작은 기적이다.

The Student Phenomenon

4.19 에 대한 것, 물론 나의 기억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상당한 부분은 news media에 의한 것들이다. 현장에서 목격한 당시 서울의 일간지가 제일 그렇고 나머지 것 중에는 미국의 LIFE magazine도 한 몫 낀다. 특히 당시의 ‘최첨단’ 사진기자, 기술을 자랑하던 잡지라서 그 역사적 가치는 상당할 것이다. 하지만 사진, 화보 이외에도 사설, 논설 등도 수준급이었는데, 다만 지금 기준으로 보면 조금은 left-leaning (좌향적)  한 쪽이 아니었을까는 생각도 든다. 4.19 학생 혁명이 난 후 처음으로 기사와 화보를 다룬 것이 5월 9일자였고 거기에는 아주 비중 있는 ‘논설, editorial’이 실렸다. 제목이 바로 The Student Phenomenon, 학생현상(?).. 그 전문을 여기에 발췌하였다.

논설의 주제는 바로 ‘학생’들이다. 한국의 학생을 중심으로 세계도처의 학생들, 그들의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을 분석하였다. 이 논설을 쓰게 된 동기는 ‘분명히’ 한국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4.19 혁명이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곧바로 터키에서 4.19 와 비슷한 혁명이 일어났고 ‘이승만의 친구’ 멘데레스 수상이 실각을 하였는데,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조금 난처한 사태가 아닐 수가 없었다. 두 나라가 거의 같은 미국의 ‘맹방’, 제1의 적인 소련의 공산당과 총칼로 맞선 나라가 아닌가? 이 나라의 지도자들을 돕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고 보니 나라 안에 조금 잡음이 있어도 외교적으로 무마할 정도였다. 4.19 혁명 당시도 미국은 한국 학생의 ‘유혈사태 희생자’정도에만 관심을 두었다. 만에 일이라도 이 사태를 이용해서 김일성 개xx가  제2의 6.25 라도 꿈을 꾼다면 그것이 진짜 미국의 악몽이 아니었을까?

아무리 그래도 자기 국민의 지지를 못 받는 맹방의 지도자, 사실 또한 골칫거리였을 것이다. 터키 또한 비슷한 상황이고 보니 한쪽은 ‘한미 상호 방위조약’, 다른 쪽은 나토 NATO로 묶여 있는 상황의 미국, 참 입장이 어려웠을 듯 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각자 국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태는 흘러갔고 미국의 입장 또한 큰 문제없이 해결 된 셈이다.

LIFE magazine의 논설은 다음 사실을 주목하였다.

이 두 나라의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은 역시 “immeasurable stresses of the cold war” 지독하게 심각한 미국 소련간의 냉전상태 라는 사실. 이 편이 아니면 저 편, 중간이 없었던 그런 심각한 냉전 상태에서 ‘약소국’들은 어쩔 것인가? 그러다 보니 지도자들에게 너무나 많은 권력 남용이 허용되었고, 그들이 독재자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런 어려운 여건을 견디지 못한 첫 그룹이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학생들이었다.

미국의 경우, 학생들의 정치에 대한 ‘운동권’ 형성이 이제까지 거의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미국이 독립하는 과정의 혁명이 ‘완전한’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국의 문제는 아마도 ‘노예제도의 전통’을 고수하는 주들과 연방정부간의 마찰, 충돌이다.

이어서 논설은 유럽의 사례를 들며, 1848년 Hungary 의 학생을 중심으로 한  ‘무정부주의, 허무주의, 사회주의’ 운동을 예로 든다. 근래의 예로써 1956년 역시 Hungary의 소련침공을 유발시킨 ‘자유운동’을 들었다. 대부분의 학생운동들은 결과적으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갔지만, 극단적인 예외는 세계 제1차 대전을 유발시킨 ‘사라예보사건’ 이었다.

논설은 다시 LIFE magazine의 progressive value를 다음과 같은 ‘미국 흑인차별’의 사건들에서 나타내고 있다.

미국의 South (남북전쟁의 남쪽 측)에서 흑인 학생들이 제도적인 흑백차별에 항의해서 식당 같은 곳에서 백인들 옆에 앉아서 식사를 하는 ‘데모’를 벌리고 있고 미국 전역에서 지지를 얻고 있다. 이런 ‘남측의 웃기는 전통’에 대항하는 이런 운동이 가능하게 된 것은 아마도 신세대들이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덕이 아닐까.

동정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보는 논설은, 학생들이 정부의 극단적인 탄압적인 정책에 반발을 한 것으로 보았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3.15 부정선거를 비롯해서, 정치깡패, 정치경찰들이 얼마나 웃길 정도로 비행을 저질렀던가? 그저 휴전선 넘어 김일성 개xx가 ‘무서워서’ 침묵만 지키던 일반 국민들과 달리 대학생들은 그런 목불인견 적인 꼴들을 못 참았을 것이다. 그런 백주대로 강도 같은 정책을 싫어한 것은 한국 대학생만이 아니었음을 주지하는 논설은 당시의 국무장관 ‘허터 Herter‘와 아이젠하워 Eisenhower 대통령을 예로 들었다.

아무리 맹방이고 소련에 대항하는 동맹국이라고 해도 미국의 기본적인 자유의 가치를 저버리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다. 탄압적인 정책이 안보를 위한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영구적인 정책’이어서는 안 된다. 국무장관 허터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생각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남미에서 일어난 학생운동에 대한 것도 거의 같은 ‘미소 냉전’의 산물이었다. 공산당을 잡으려는 부패정권에 대항한 학생들의 데모와 항의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워도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다는 미국의 기본 자세는 이곳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남미의 좌익을 지지하는 학생들이 쿠바 카스트로 를 왜 미국에 반대하는가 항의를 했을 때,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대답은 간단했다. 카스트로 Fidel Castro 가 ‘공약’을 어기고 ‘자유를 억압’ 했기 때문이라고 한 것이다. 바로 기본적인 ‘자유’가 모든 것의 밑에서 흐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논설은 한국과 터키의 학생들을 지지하는 결론을 내린다.

학생들이 생각하는 불만사항을 들어주는 것이 옳은 것이다. 이것은 미국만이 아니고 전 세계가 기대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미국의 credo가  Don’t tread on me! (밟지 마!)라는 사실임을 주지해야 한다.

논설을 4.19혁명이 난지 66년이 지난 뒤에 읽으니 격세지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그 때나 지금이나 상황적으로 가치적으로 변한 것은 거의 없다는 느낌이니까. 기본적인 ‘사회적, 정치적’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으면 역사의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을 것이고.

이 논설이 조금 과소평가한 낙관적인 분석은: ‘미국 학생들은 절대적 자유가 보장된 덕분에 조용할 것이다’ 라는 것.. 이 논설이 쓰여진 지 불과 10년도 되지 않아서 미국은 역사상 유례없는 ‘반정부 학생운동’의 전성기를 겪게 되니까.. 월남전의 정당성에 대한 불만에 의한 것, 이것은 반대로 지나치게 자유가 ‘보장, 허용’ 되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역사적인 irony가 아닐 수가 없다.

 

LIFE cover
LIFE cover

There is a fascinating pattern emerging in Latin America, Korea and now Turkey. What is taking place in these widely separated lands is an outburst of resentment by university students against governments which – partly as a result of the immeasurable stresses of the cold war – have become tyrannical. And what the students are proving – which free men must of course welcome – is that young, spirited and determined people can still make tyrants tremble, and even totter.

Political revolt by university students is a well-known story abroad, thought not common to our own land. This may be a reflection on the seriousness and maturity o f U.S. students but, whatever the cause, other students around the world are politically minded by traditional and are accepted as a dynamic political force.

Perhaps the contrast exists because our own revolution was so complete – in establishing the basic freedoms of conscience, press and speech for once and all – that there has been no need to question what it has settled. The greatest challenge was met in our War Between the States which settled forever that no man may be another’s master.

In Europe, where things have been different, it was a young poet, Sándor Petöfi, who in 1848 set off the revolution in Hungary against the tyranny of the Habsburgs, only to be crushed later by the Russian czar. And it was the students of Budapest again in 1956, acting in the name of Petöfi, who overthrew – if only briefly – the czar’s successors. Serious, impassioned Italian students were the backbone of Garibaldi’s Risorgimento. In France, it was students who in 1897 rioted in defense of Captain Dreyfuss. Students were the nihilists, the anarchists, the Marxists of Russia. What all these movements had in common was idealism backed up by willingness to fight. Sometimes this violence was bent to good ends and sometimes ill. It was, we must remember, a Bosnian student named Princip who at Sarajevo lit the fuse which doomed more than eight million men.

Most of these revolts of the young have been beneficial. We are seeing something of that sort now in our own country. By their sit-ins Negro students in the South are demonstrating the silliness of a system which denies the right of humans to eat alongside one another. They are getting an impressive amount of support from which students outside the South. They are getting some, too, from which students in the South, who find they cannot rationalize or defend these paradoxes. The spread of education in the South has produced a force to make men think.

The students who have overthrown the government of Syngman Rhee in Korea have obviously been stirred to the depths by oppressive practices. Rhee’s motives were understandable in a land which has been horribly devastated by Communist incursions and must still live beneath the gun of possible new attacks. This is true in Turkey, which lies immediately beneath the guns of the vast Soviet Union and is subjected to continuous and insidious subversion. Yet, when all is said and one, the fear of losing freedom can never be made an excuse for suppressing freedom – certainly not as a permanent policy.

The demonstrating students who are insisting on freedom have an ally in Secretary of State Herter. In his denunciations of the killings of South Africa and Korea, he has made clear that he will not allow the common interests of defense to put the U.S. in the position of endorsing practices which offend our basic principles. The students have another wise friend in President Eisenhower. On his Latin American visit Chilean students asked him trenchant questions about our alleged hostility to Fidel Castro. The President’s written answer to them left little more to be said: Castro has betrayed “the ideals of freedom of expression, equal protection of the laws, and the right freely to choose a representative government.”

Of course, that is also what Rhee did, and what Menderes is doing in Turkey. Students are letting them know that the time is later than they thought – and are right to do so. And we are right to endorse their legitimate grievances and their right to have them redressed. That is what the world would expect – and is entitled to expect – of a nation born in revolution and whose credo was, “Don’t tread on me!”.

 

아래의 사진을 보라.. LIFE에 실린 내 또래 아이들의 모습들.. 국민학생, 중학생이 섞인 이 데모는 4.19 이후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송요찬 장군휘하의 계엄군이 탱크를 몰고 시내 중심을 장악했을 때 ‘군인 아저씨 우리를 쏘지 마세요’ 라고 다시 학생들이 그것도 어린 아이들이 외쳤다.

당시 계엄군은 ‘정치적 중립’을 고수하며 자기 국민을 ‘보호’하였다. 1년 뒤 5.16으로 ‘그 고마운 군인아저씨’ 들 자신이 정권을 잡았다. 이 사진을 유심히 보며.. 서울 시청을 뒤로하며 남대문 쪽으로 행진하는 아이들.. 바로 나를 보는 듯 했다. 꾀죄죄한 구제품 옷, 신발, 교복을 ‘걸치고’ 골목 뒤에서 놀다가 나온 모습들.. 바로 나의 모습, 이 사진의 ‘아이’들 다 70을 바라보는 할아버지들이 되었을 것인데 그 날 ‘형님 학생’들에게 이끌려 나온 사연이나 기억하고 있을는지..

 

4.19 이후, 서울 중심가 악동들의 절규와 호소..

4.19 이후, 서울 중심가 악동들의 절규와 호소..

 

4월의 촉촉한 단비를..

아~~ 4월도 20일이 되었는가.. 어제가 4.19 사일구 아~~ 내가 너무도 똑똑히 기억하는 그 때.. 가 이제 56년 전이었다니.. 너무하다 너무하다.

요새 습관이 된 듯한 ‘작년의 desk calendar’를 쉽게 보는 것.. Holy Family 성당 에서 준 조금은 ‘조잡하고 간단한’ 달력, 그러나 이곳에서는 이것이 정상적인 달력이고,  한반도에서 나온 달력이 오히려 이상하게 복잡하고 비싼 것이다. 좌우지간 그것을 나의 daily journal로 쓰기 시작한 것이 3년 째.. 몇 년 전에 일어난 중요한 일들은 레지오 수첩과 더불어 이것이 생명선이다.

‘고물’ Android Samsung smartphone의 camera record도 다른 중요한 나의 인생 기록을 남기고 있어서 calendar와 더불어 나는 근래 몇 년간의 삶의 모습은 그런대로 기억을 하며 살게 되었지만.. 과연 이것이 좋은 것인지.. 내가 조금은 ‘작은 것들’에 집착하는 쪼잔한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모른다.

작년의 camera picture에서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은 비가 쏟아지는 날 front door에서 찍은 것.. Tobey가 밖을 보며 평화스럽게 누어있는 그 모습이 어쩌면 나를 그렇게 ‘천국’에 있게 하는 것인가. 4월의 모습이, 이상적인 4월의 모습이 바로 이것이다.. 제발 잔잔한 비여.. 나를 다시금 즐겁게 만들어주라!

찐한 extreme peace를 가끔 경험하는 요새.. 비록 식사시간이 괴롭긴 하지만 (my tooth, my tooth!) 이것도 보속하는 마음으로 받아드리며 살게 되었다. 언제까지 견딜지 모르겠지만.. 그날까지 평화를 지키고 싶다. 왜 평화가 우리 집에 왔을까? 우연일까? 물론 이제 생각에는 ‘아니다!’ 절대로 우연이 아니다. 모든 곳에 내리는 절대자 주님, 하느님의 자비의 비를 나는 조금씩 맞으며 느끼게 된 것이다. 바로 그것이다. 내가 가슴을 열고 마음을 열고 머리를 그곳으로 돌리니까 보이며 그 단비를 맞게 된 것이다.

3월 달의 보나 자매님을 보내던 과정은 참 역사적인 것이다. 주위의 ‘귀여운’ 자매님 천사들과 같이 기도하며 정성을 들여서 보나 자매님을 천국으로 보내는 그 과정.. 당시에는 바쁘고 슬프고 정신이 없었지만 이제 잔잔해진 시간에 생각을 한다. 비록 하느님을 맞는다는 자세로 가진 않았지만 그것이 큰 상관이 있을까? 그 자매님 우리를 고마운 심정으로 받아들였고 우리도 정성을 다 했으니까.. 여한이 없는 것이다

이것과 더불어 작년 이맘때의 ‘사건’들.. 배 자매님을 보내던 과정들이 달력에 생생하게 기록되어있다. 참 슬프고 기가 막힌 사연의 불쌍한 영혼들을 보았지만 그것도 최선을 다했다는 뿌듯한 심정을 억제할 수가 없다. 나와 연숙이는 최선을 다 했다는 것.. 어떨까.. 지나친 자부심일까?

그제, 새로니가 school break에 우리 집에 왔었다. 예상치 못한 일들을 나는 항상 걱정을 하는가.. 조금은 불안한 심정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나가 소심한 탓일 것이다. 어찌 우리 딸이 오는데 신경을 써야 하는가? 조금은 성숙한 새로니.. 아직도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기도를 계속하지만.. 그래도 그날 새로니는 나의 99점을 받는 시간을 보내 주었다. 우리 차도 ‘정성스레’ 닦아 주었고, Einstein Bros의 lunch 와 wine과 함께.. 그것만이 아니었다. 우리의 ‘경제사정’을 신중하게 들어주고 조언을 하려고 하고.. 심지어는 엄마와 같이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이성적이고, 솔직하게’ 했다는 사실이 나는 믿어지질 않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가 .. 아니면.. 성모님.. 우리 어머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4.19 아침인가..

아침에 달력을 보니 4월 19일.. 화요일, 물론 4.19라는 숫자는 56년이나 지났어도 어제처럼 느껴짐을 피할 수가 없다. 그만큼 비록 세월의 깊이에 맞게 뇌의 깊숙한 곳에 잠겨있어도 아주 ‘큰’ 세포에 간직된 것이라 그럴 것이다. 그리고 화요일.. 이었다. 1960년의 4월 19일도.. 99% 화요일이었다는 기억. 56년이란 세월이 지났다는 사실에 조금은 실망을 함은, 그 세월이 그렇게 역사 책에서나 볼 수 있는 긴 세월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어렸을 때 일제 36년, 유럽의 100년 전쟁.. 등에서 느꼈던 그 햇수는 너무도 길었던 것이지만 내가 이런 56년을 어제처럼 기억하게 살면서 느낀 것은 너무나도 짧았다는 사실이 조금은 등골이 오싹한 것이다.

'전투' 대학생, 고대 형님들의 절규의 함성, 국회 의사당 앞에서

‘전투’ 대학생, 고대 형님들의 절규의 함성, 국회 의사당 앞에서

당시의 데모 열기 함성과 카빈 소총 소리, 어는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수 많은 군중들.. 그렇게 찬란한 4월의 계절은 소음과 정적이 교차하는 순간들이었다. 모든 학생들의 새카만 교복의 물결, 심지어 대학생 형님들까지도.. 모두 한 덩어리가 되어서 뛰고, 트럭을 타고, 소방차를 타고 서울의 중심가를 돌고 도망가고 숨고 쓰러지던 그 때.. 모습들.

우리의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이 하루아침에 역적으로 공격을 받던 날 우리 중학교 1년생의 혼란한 심정.. 누가 누구를 쫓아가고 쫓겨가던가.. 누가 우리의 역적이던가? 우리들은 그저 놀란 얼굴로 바라만 보았다. 난생 처음으로 들려오던 요란한 카빈 소총 소리들.. 종로 경찰서 지붕에 설치된 만화에서만 보던 ‘기관총’들.. 곧 이어 아스팔트 길에 우람한 바퀴자국을 내며 웅장하게 들어오던 탱크의 무리들.. 4월 달.. 4월 달 ,1960년의 찬란한 꽃이 만발하던 4월 달이었다.

쓰러진 형님, 누나들.. 그렇게 가난하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싸우던 그들.. 지금은 다 어디에 가셨는가? 그들은 과연 그들이 싸우던 목적을 이루며 살았던가? 혹시 그들도 나중에는 ‘역적’들과 같은 무리를 닮아가지는 않았던가?

 

Axis of Power, 권력의 축: 이승만, 프란체스카, 이강석, 이기붕, 박 마리아

Axis of Power, 권력의 축: 이승만, 프란체스카, 이강석, 이기붕, 박 마리아

이승만, 이기붕, 이강석, 프란체스카, 장면, 윤보선, 허정, 그리고 장도영, 박정희..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기억의 열차에 남았던 역사 속의 그들.. 모두 어디에 있는가? 젊으셨던 우리 어머니, 그래도 이승만의 잘못을 지적하시던 지성을 가지고 침묵으로 우리를 가르치셨고, 우리는 아직도 그 말의 뜻을 새기고 감사하며 산다. 역사는 돌고 돌지만 그것에서 배우고 최소한 되풀이 하지 않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들이기에 희망은 버리지 않는다. 2016년 4월 19일, 싸늘한 아침에 머리를 맴도는 넋두리, 이렇게 정리를 하지만 전혀 정리가 되지 않음을 안다. 그것이 정상이다.

J. Christopher, Curia Monthly

J-Christ-1

 

¶  J. Christopher’s, Expect the unexpected: 2016년 4월 11일 월요일, Monday morning stress (even disease), 이제는 거의 잊고 살게 되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아직 그 ‘싫은 월요일 아침’,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Monday Monday..

허.. 4월도 어느덧 중순으로 돌진? 점점 weekly routine이 고정되는 느낌도 없지 않지만 다른 쪽을 생각하면 안정된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위안감도 없지 않다. 무언가 폭풍우가 지난 후의 평온 감이라고나 할까..

며칠 전부터 몸이 이상하게 피로하고 낮에도 잠이 쏟아지고 몽롱한 느낌이 계속 머리를 맴돌았다. 처음에는 그저 보통 이른 봄에 느끼는 그런 것이겠지 했지만 오늘 확실한 증상을 잡았다. ‘미열’이 느껴지는 것이다. 머리가 아뜩아뜩한 것도 그것이 이유였다. 그러면 왜 ‘미열’이? 99% 이것은 감기나 몸살 나아가서 독감의 초기증상이라는 짐작이 들었다. 과거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는 기억이 나는 것이다.

이 정도면 정상적인 생활의 리듬을 전혀 깨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생각으로 오늘도 월요일 regular workout day 의 routine인 Sonata Cafe snack 준비로 시작해서 아침 미사 (along with the Miraculous Medal novena), 엘 갔었다. 미사가 끝나면 곧바로 Sonata breakfast snack을 먹고, YMCA workout을 하게 되는데.. 오늘은 예외가 생겼다. 같은 구역, 엘리사벳 자매가 자기 남편이 (외국에서) 잠깐 들리러 왔으니까 아침을 같이 먹자는 것.. 근래 morning daily mass regular가 된 크리스티나 자매까지 해서 오랜만에 남자가 하나 더 늘어난, 5명이 우리는 처음 가보는 J. Christopher breakfast & lunch 란 곳에 가서 찐~한 구수한 내음새의 coffee를 ‘무한정’ 즐기며 아침식사를 같이 했다.

우리 집 바로 근처에도 있는 J. Christopher’s, 처음에는 Panera Bread 가 없어진 이후로 우리의 regular place가 될 가능성이 없지 않았던 곳인데 이번에 와 보게 된 것이다. ‘색다른’ 곳으로 연상을 했지만, 물론 McDonald’s 와는 ‘차원’이 다른, 대부분 menu가 under $10 정도로, 얼마 전에 없어진 Einstein Brother’s 와 비슷한 model 인 곳이었다. 이 정도면 McDonald’s를 대신해서 더 자주 들려도 될 듯하다.

여기서 마리에타 2구역의 현황에 대해서 비교적 자세히 듣게 되었다. 결국 공식적으로 구역이 2반으로 나뉘고, 기준은 전에 제안이 되었던 zip code에 의한 것, 처음에는 예외를 둔다는 정도로 우리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특기사항은 과연 어떤 누가 어떤 ‘반’으로 갔느냐는 것이다. 듣고 보니 역시 예상대로였다. 평소에 같이 buddy-buddy 모이던 사람들끼리 같은 ‘반’에 모이게 된 것이고 그것이 사실 대부분이 원하였던 것이다. 이런 사실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제는 그룹의 ‘덩치’가 반으로 줄어들어서 모이는 것이 쉬워지고 food, parking etc, 더 이상 분열되는 동기도 줄어들고, 한마디로 자연적인 해결의 방향으로 가게 된다는 사실이다. 조금 아쉬운 것은 이런 변화가 훨씬 전에 시도가 되었으면 여러 가지 불필요한 소음과 불미스러운 소문들이 훨씬 덜 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Legion-1

 

¶ Curia Monthly Sunday, 꾸리아 월례회의: 어제는 모처럼 (나로서는 3주 만에) 도라빌 순교자 성당 주일미사를 참례하게 되었다. 부활절 미사는 나의 불찰로 빼먹었고 (고해성사 깜이다!), 지난주 주일 미사는 ‘모처럼’ Holy Family 성당으로 갔었다. 그러니까.. 특별한 일 business 이 없으면 ’15분 drive 거리, 정든 동네성당’, Holy Family 로가는 것이 rule이 되었지만 통계적으로 한 달에 2번 정도는 도라빌 순교자 성당 주일 미사엘 가게 되니까 그런대로 우리는 공평하게 반/반으로 미국/한국 성당 주일미사 참례를 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 참 이상적인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어차피 우리는 bi-cultural 환경으로 오래 살았기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이것이 역시 편한 것이다.

어제 도라빌 순교자 성당에 간 것은 물론 레지오 (마리애) 꾸리아 Curia 월례회의가 있다는 것이 이유다. 이 월례회의도 레지오 간부들 의무 중에 으뜸이기에, 잠재적으로도 ‘절대로 가는 것’이 rule이 되었다. 이제는 이 월례회의에 출석하는 것, 익숙해졌고, 나아가 편해지기도 했다. 그만큼 그 동안 (거의 3+ 년?) curia business에 대해 많이 듣고 배웠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 월례회의에 가보면 요새 사회적으로도 ‘남자들의 신세’가 어떤가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기도 하다. 평의원 중에 눈에 뜨이는 ‘형제’님.. 거의 없을 정도다. 역시 이곳에서도 나는 좋건 싫건 간에 ‘꽃 밭’에 앉아 있는 셈이다. 이것도 이제는 익숙해져서 큰 문제는 없지만.. 그래도 외로운 느낌이 없는 것도 아니다. 1년 전만해도 돼지띠 동갑 전요셉 형제가 항상 이곳에 버티고 있어서 반갑고, 덜 외로웠다. 다른 형제님, 한때 노래도 같이하며 알고 지냈지만 이곳에서 다시 보면 그렇게 생소하게 느껴질 수가 없다. 애석하게도 역시 mutual interest 가 별로 없다는 증거일 것이다.

1시간 반 정도의  ‘월례회의’는 사실 우리 본당 레지오에서 가장 실질적이고 눈에 보이는 ‘평의회, council ‘로 사실상 레지오의 ‘정부기관’이라고 볼 수 있다. 그만큼 power와 responsibility가  큰 것이다. Rules & regulations 같은 것보다는(그것도 중요하지만) ‘실질적 활동의 예와 모범case’를 이곳에서 나누며 ‘배우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회의를 끝내고 나오며 이런 아쉬운 감을 떨칠 수 없다.

싸늘한 4월 초에..

glorious April rain showers..

glorious April rain showers..

싸늘한 4월 초순..  재 빠르게 우리를 떠나려고 한다. 계절적인 날씨에 조금은 둔감해지려고 노력을 한 덕분에 요새는 날씨가 주는 감상적 말에도 둔감해진 듯하다. 하지만 다시 절감한다. 날씨가 우리의 ‘많은 것’에 미치는 잠재적 영향력을.. 나의 지나간 blog을 가끔 보면 ‘날씨’라는 tag을 포함한 posting이 꽤 많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3월의 날씨는 한 달이 지나갔어도 머리 속에는 ‘거의 미친 3월’로 남는다. 3월 중순 쯤 일 주일이 훨씬 넘는 끈적거림의 ‘불쾌함’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특히 밤에 잘 때 보이지 않는 ‘여름 잠옷’을 찾는 고역을 겪었던 기억.. 이런 날씨가 3~4일 정도라면 ‘정상’이지만 이건 ‘비정상적’인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머리 속에 기억 된 ‘4월초의 찬란한 싸늘함과, 4월 말의  소리 없는 Spring Rain’을 그리곤 했다. 또한 April Showers Bring May Flowers..라고 종알대던 어렸을 때 우리 딸들도 연상을 하곤 했다. 그러면 99% 나의 불쾌함은 멋지게 사라지곤 했다.

그리곤 영락없이.. 왔다.. 4월 초의 청초한 싸늘함.. 거의 빙점 near-freezing 까지 떨어지는 ‘멋진 4월’을 현재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구석으로 밀려난 space heater가 다시 반갑고, desk 밑에 아직도 있는 electric foot-warmer가 어찌 그렇게 반갑고 따뜻하게 느껴질까?

계절 곳곳마다 흠뻑 젖어있는 각종 좋건 나쁘건 간에 추억들의 각각 페이지들을 ‘원하기만 하면’ 들춰볼 수 있다는 사실..  어쩌면 ‘노년만 가질 수 있는 오랜 세월의 경험으로부터의 즐거움’이 이런 것인가.. 나이가 먹는다는 것.. 절대로 과소평가할 수 없는 것.. 우습기만 하다. 이런 것들이.. 전에는 거의 느낄 수 없었던 ‘황혼기’의 즐거움이다.

 

4-gallon pancake..

4-Gallon, 125 PSI Pancake Compressor, Harbor Freight, Central Pneumatic: Model 38898:

pancake-comp-1내가 가진 tool 공구들 중에 나를 제일 자랑스럽게 느끼게 하는 것이 air compressor다.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각종 air tool들을, air hose로 끌고 다니며 pro같은 소음을 내는 것.. 과히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것이다. 그 중에서도 그 동안 나를 즐겁게 해 준 것은 바로 Harbor Freight (a.k.a., Chinese made)의 4 gallon pancake모양의 아주 귀여운 물건이었다. 50 pound정도의 무게도 편하지만 4-gallon tank size는 내 정도의 수준에는 사실 과분할 정도인 것이다.

제일 큰 job은 framing nail gun을  쓸 때인데 큰 무리 없이 ‘아주 긴’ 못들이 잘도 lumber에 꽂히곤 했다. 간혹 tire에 바람이 빠질 때 이것으로 즉시 해결이 되었고, 가끔 녹슨 bolt/nut도 impact wrench로 쉽게 빠지곤 했다. Flooring을 할 때 base-trim, moulding같은 것 이것을 실내에 놓고 brad-nail-gun을 쓰면 ‘순식간’에 끝난다. 

이렇게 나를 잘 serve해 준 이것.. 얼마 전부터 어딘가에서 ‘바람이 새는’소리가 나더니 결국 tank에 air가  남기도 전에 다 빠져버리는 것이 아닌가? 큰 고장인가.. 고칠 수 있는 것인가 하며 이것을 산 날짜를 보고 나는 놀라고 말았다. 2006년 6월이 아닌가? 그러니까.. 거의 10년을 쓴 것이다.

아무런 문제없이.. ‘짱 깨’들의 제품이 그 값에 그 정도면 괜찮다는 생각도 들지만, 내가 재수가 좋았던 것일까? 하긴 버려도 아깝지 않다고 체념을 하는데.. 생각을 해 보니.. 바람이 새는 곳이 ‘속’이 아니고 바깥의 어떤 plastic tube connector쪽이다. 그러니까 제일 중요한 compressor pump자체나 electric motor가 아닌 것이다. 아하~~ 버리기에는 이르다는 판단이 서고.. 즉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결과는 어떨지.. 이것이 성공하면 최소한 $50은 save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Sonata Cafe

소나타 카페, 내가 ‘명명 命名’한 이 말, 단어가 지금 생각하니 아주 멋진 말이 되었다. 여기서 Sonata란 것은 2009년 가을부터 우리의 든든한 발 足이 된 Hyundai Sonata 를 말하고 Cafe는 글자 그대로 ‘간단한 snack 정도를 음료와 함께, 이야기 하는 장소’ 를 뜻한다. 그러니까 우리 차 Sonata에서 무언가 먹고 마시며 이야기를 한다는 뜻이 된다.

2009 Hyundai Sonata, 4 doors sedan

2009 Hyundai Sonata, 4 doors sedan

언제부터 시작이 되었는지.. 우리 둘 다 확실히 기억을 못하지만 ‘아마도’ 2년 정도가 되지 않았을까? 문제는 아침에 운동을 하러 YMCA를 갈 때 아침식사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아침 미사가 9시에 시작이라 미리 먹고 갈 수가 없고, 미사가 끝나고 집에 다시 와서 아침을 먹고 YMCA를 가려면 너무나 늦는다. 제일 좋은 것은 미사 후에 어떻게든 아침을 해결하고 YMCA를 가는 것이다. 오래 전에는 간단히 아침을 먹는 곳이 근처에 있었다. Panera Bread 가 있었을 때 그곳은 단골이었지만 없어진 지도 수 년이 넘는다. 다른 곳, Atlanta Bread Company가 있었지만 그곳은 아예 문을 닫았고, 새로 생긴 J. Christopher’s란 곳이 아침 점심을 전문으로 하는 곳이지만 우리와는 class와 flavor가 다른 느낌을 주는 곳이라 아예 생각도 안 했다.  물론 McDonalds 는 갈 수가 있겠지만.. 글쎄 그런 것을 먹고 바로 운동을 할 수 있을까?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idea, 아예 집에서 먹던 아침 menu를 조금 간단하게 ‘싸 가지고 (도시락처럼)’ 차에서 먹는 것은 어떤가? 내가 우리 집의 아침을 만든 지도 꽤 세월이 흘러서 이제는 ‘눈을 감고도’ standard breakfast를 만들 수 있게 되었기에 도시락 style 아침을 준비하는 것은 더욱 간단하다. 삶은 달걀, 굽지 않은 ‘식빵’에 적당히 creamy butter와 strawberry jam을 바르고, banana, tomatoes같은 fruit을 넣고, drip/pour-over coffee를 보온병에 부으면 끝이 난다.

실제로 미사 후에 우리 차에 앉아서 이 ‘값싼 아침’을 먹는 맛과 멋이 not bad!  이때 듣는 ‘차동엽 신부님‘의 성경강의 같은 것이 더욱 cafe의 분위기를 격조 있게 만든다. 우리의 오랜 ‘동네성당’ Holy Family Catholic ChurchEast Cobb의 노란 자위 넓은 공간에 아주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기에 그 속에서 아침을 먹는 것.. 사계절에 따라 변하는 숲과 꽃, 새들.. 이것보다 더 낳은 아침 식사 환경이 어디에 있을까? 이렇게 시작되고 굳세게 계속되는 Sonata Cafe.. 과연 언제까지 갈지는 잘 모르겠지만 의도적으로 그만 둘 의향도 거의 없다.

Divine Mercy, Harbor Freight

Divine Mercy.. 하느님의 자비.. 작년 말 교황 프란치스코 Pope Francis께서 자비의 희년, Divine Mercy Jubilee year를 선포한 이후 ‘하느님의 자비’라는 말을 참 많이 듣게 되었고, 급기야는 ‘자비의 주일’이 내일로 다가왔다. 사실 자비의 주일 Divine Mercy Sunday는 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 St. John Paul II께서 2000년 부활절에 ‘공식적’으로 선포하신 것이다. 이것은 그 당시 폴란드 출신으로 성인 품에 오른 성녀 파우스티나 께서 생전 1930년대 에 개인적으로 발현하신 예수에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주위의 의심과 질시를 견딘 그녀가 남긴 일기 ‘자비는 나의 사명’에 그 예수발현과 하느님의 자비에 관한 이야기가 자세히 나오지만 그녀 생전에 교회의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진실은 언제고 살아 남는가.. 그녀의 ‘동족’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끈질긴 노력으로 모든 것이 공식적으로 인정이 되었고 세월이 갈 수록 이 ‘자비의 신심’ 열기는 높아만 가고 있고 현 교황은 급기야 ‘자비의 해’까지 선포를 한 것이다.

오늘 Vatican YouTube를 보니 자비주일의 ‘전야’라고 할 수 있는 성대한 기도집회가 베드로 광장에서 열리는 것을 본다. 엄청난 군중이 그곳에서 성녀 파우스티나를 기리며 기도를 하고 있었다. 생각을 한다. 하느님의 자비란 것은 무엇일까? 예수님..하면 ‘사랑’이란 말이 먼저 떠오르고, 그것에 비한 것일까.. 하느님은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낸 자비심을 보여주신 것일까? ‘자비는 나의 사명’이란 성녀 파우스티나의 일기를 보면 하느님의 자비는 원하기만 하면 주신다고 한다. 이것도 은총의 하나일까, 아니면 그것보다 훨씬 더 높은 것일까? 그러면 예수님 부활이란 것도 어떻게 보면 하느님의 자비의 극치일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된다. 구약시대, 유다인들에게 그렇게 무섭던 하느님이 어떻게 예수시대에 와서 자비의 하느님으로 변하셨을까..

 

¶  오늘 아침에 벼르고 벼르던 shopping을 ‘혼자서’ 하였다. 오랜 동안 Internet으로 shopping을 했던 tool retailer, Harbor Freight Tools, 몇 년 전에 서서히 이곳에 하나 둘씩 retail store가 생기더니 요새는 엄청난 기세로 이곳 저곳에 생기고 있는 ridiculously ‘low’ price tool retailer, 이곳은 사실 나를 ‘살려준’ 곳이다. 이곳이 없었으면 나는 pro들이 쓰는 tool들 하나도 못 샀을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짐작에.. 어떤 Asian immigrant가 Chinese source와 ‘결탁’해서 직수입한 junk tool들을 파는 곳으로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물론 99.9999% Made in China는 분명히 맞지만, 우려한 대로 직수입해서 그대로 파는 방식이 아니고 이곳에 따로 Quality control 을 책임지는 lab을 만들어서 나름대로 품질을 보증하고 있는 것이다. Owner도 white 미국인이지만, Home Depot와 같은 전통적인 방식이 아닌 ‘싼 것이 좋은 것‘이란 철학으로 밀어 부치는 경영철학.. 싸지만 그런대로 쓸 만한 것.. good enough.. 철학이다. 사실 Home Depot에가서 쓸만한 tool들을 보면 눈이 나올 정도로 비싸기만 한다. 전통적인 미제 품질을 고수하기에 그럴 것이다.

문제는 그런 것들.. pro들 에게 좋지만 weekend handyman같은 사람에게는 overkill인 것이 태반이다. 그러니까.. 나와 같은 weekender 나 조금 돈이 없는 pro들을 겨냥한 것이다. 얼마 전에 드디어 고장인 난 (바람이 새는) 4-galllon air compressor를 대신한 것을 찾던 차에 오늘 가서 직접 만져 보기도 하니 참 감개무량하기도 했다. Internet으로 order하면 그럴 수가 없지 않은가? 이곳의 위치가 사실은 편한 곳이 아닌 north Cobb, Kennesaw 라서 조금은 불편하지만 오늘 가서 본 인상이 괜찮아서 급하고 덩치가 큰 것들은 이곳에 와서 ‘만져보고’ 살 생각도 했다.

feast of flowers

내가 예전에 알았고 사귀었던 그 모두들 어디로 갔나? 가끔,  이런 생각을 하며 특히 그들이 완전히 나에게서 사라졌다는 사실에  놀란다. ‘모두들 다 어디로 갔나?’ 하는 생각.. 오랜 세월 동안 서서히 나에게 보이지 않게 된 것들, 그 중에서도 특히 사람들.. 그들이 나의 옆에 없음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경험이다. 이것은 Charles Dickens의 holiday classic, A Christmas Carol 에서 Scrooge가 Spirit of Christmas Past를 따라서 자기의 과거로 돌아갔을 때의 경험이라고나 할까? 나 정도의 나이가 되면 사실 모두들 그런 경험을 조금씩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들은 역사 고금을 통해서 짧지 않은 과거를 가지게 된 사람들이라면 다들 겪을 듯 싶지만 나는 더 예민하게 느끼는 모양인데 이런 경험과 생각들이 때로는 아주 괴롭기까지 하다.

이런 생각과 비슷한 ‘내용,가사’를 가진 folk song이 있다. 그것이 바로 Pete Seeger의 1960년대 초 hit song인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 이란 노래다. 처음에 2절이던 곡이 나중에 3절이 더해져서 무려 5절이나 되는 긴 노래이지만 사실은 아주 간단한 ‘구성’이다. 처음에 flowers로 시작되어 마지막도 flowers로 끝난다. 그 동안 이 flowers가 주인을 옮기는 과정이 5절에 걸쳐 나온다. 처음에 flowers가 young girls로, young girls가 husband(man)로, husband(man)이 soldiers로, soldiers가 grave yard로, grave yard가 결국 flower로 돌아온다는.. 불교의 윤회설을 연상시키는, 인생의 여정을 생각하게도 만드는 곡으로 1960년대에는 월남전과 어울려 반전 反戰 곡으로 크게 각광을 받았던 불후의 classic이 되었다.

내가 이 곡을 알게 된 때도 바로 1960년대의 war protest song 시절이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pop chart에 올려놓은 Kingston Trio의 경쾌한 곡으로 들었지만 나중에 이 곡의 원조인 Pete Seeger의 banjo 반주로 된 것을 듣고 역시 그의 것이 이 곡의 진정한 정신을 보여주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 곡은 수 많은 국제적인 가수들이 불렀고 record로 취입을 했다. 그 중에도 Johnny RiversSearchers 것은 완전히 Go go style로서 옆에 있으면 춤이라도 추어야 할 듯하게 경쾌하기만 하다. 나머지 것들은 그 가수 나름대로 ‘해석’을 잘 한 듯해서 모두 천천히 감상을 하면 이 곡의 ‘진수’를 맛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나의 마음에 드는 것을 뽑으라면.. 글쎄 아마도 60년대 대표적 folk, rock stars 였던, Kingston TrioJohnny Rivers 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