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8/1950, Mafia Kims, Google Earth

오늘은 “구이 팔”, 9.28, 9/28/1950: 서울수복 60주년 기념일이다. 60년의 강산이 변했고 “역사수정주의자” 들이 판을 치는 고국은 아마도 대부분이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모를 것이다. 예외는 물론 우리같이 조금은 알고, 기억하는 세대들일 것이다. Mafia 집단으로 변한 김씨 일당들은 “미제의 앞잡이”들이 퍼다 준 밥으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이제는 그것도 모자라 김씨 세습을 강행하려 한다고.. 참, 이건 완전히 희극중의 희극이다.

LA area, 그러니까 캘리포니아, 로스엔젤레스 지역이다. 기온이 120도가, 물론 화씨로, 넘었다고 한다. 올해는 참 기후에 관한 얘기가 끝이 없더니 이것도 한 몫을 한다. 올해는 동부,남부가 완전히 더위로 거의 “익어가는” 과정을 겪었다.  Weather Channel 에서는 올해 “최악의 여름” 상은 Washington DC로 정했다. 여러 가지 최고 기록이 있었겠지만 최고,최장의 무더위와 더불어 폭풍 같은 것도 곁들어서 그런 “불명예’를 차지한 모양이다. 하지만 내가 사는 이지역도 내 기억에 정말 오랫동안 “쉬지 않고” 더웠다. 하지만 오늘은 6월 이후 처음으로  “긴팔, 긴바지” 에다 양말 까지 신고 Tobey와 집 주변을 산책을 했다. 그러니까 가을이 마침내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이제부터는 급속도로 단풍이 들 것이고, 첫 얼음이 얼고, 시베리아의 바람이 부는 날이 올 것이다. 특히 을씨년스러운 가을비가 기다려진다.

아주 오랜만에 서울의 처남형님(연숙의 큰오빠)과 email로 연락이 되었다. 2002년에 이곳에서 만나고 그 후에도 조금씩 연락은 하며 살았지만 언젠가부터 거의 연락두절로 살았다. 이건 100% 우리부부의 책임이다. 마음만 먹으면 거의 “공짜”로 연락을 할 수 있었는데.. Skype은 물론이고 Google Voice같은 것을 쓰면 일반전화로도 분당 2 cent 정도로 전화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 동안 조카들은 무럭무럭 장성을 해서 둘 다 결혼을 하고 이제는 손주들까지.. 형님말씀대로,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은 오래 전 전화요금이 비싸던 때의 말이었던 것 있음을 실감한다.

To be or not to be, that’s the question: 연숙이 이곳의 한인천주교회에서 활동하는 것 중에 레지오(마리애:Legio Marie, 마리아의 군단)가 있다. 성모님을 통한 봉사,기도단체다. 우리가 오랜 전에 영세를 받은 후에 이 단체의 이름이 제일 먼저 들어왔고, 다음이 꾸르실료..하는 “해괴” 한 이름이었다. 오랜 기간 그런 단체에 무관심으로 지냈다. 하지만 현재 연숙은 이것 두 신심단체에서 활동을 한다. 그렇게 된 것이 이제는 몇 년이 되어서 나에게도 그 단체들의 활동에 조금 익숙해진 것이다. 이것이 이제 나에게도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결국은 “결정”을 할 단계가 되었다. 나는 무언가 “큰” 변화가 필요함을 느낀다. 그것을 도와주는 것이 아마도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할 것이냐, 말 것이냐.. 그것이 문제다. 일단 가입을 하게 되면 3개월의 “대기 기간”이 주어진다. 그 기간이 무사히 끝나면 정식으로 단원이 되는 것이다.

오랜만에 google earth에 몸을 싣고 “무전여행”을 해 보았다. 우선 우리 집 주변을 선회하며 그 동안 얼마나 변했나 보았다. 내가 만든 green roof shed와 Tobey fence가 뚜렷이 보이고 정문 앞으로 진달래가 만발한 것이 보인다. 그러니까 아마도 2009년 아니면 올해 봄의 모습이다. 그리고 parking garage 앞에는 나라니가 타는 Hyundai Elantra가 보인다. 그런데 그 차의 위치가 조금 이상하다. 이것은 나라니가 이사를 나간 후에 집에 잠깐 들렸을 때의 위치인 듯하다. 그러면 이것은 작년이 아니고 올해인 듯하다. 한마디로 거의 최근의 항공사진인 것이다. 조금만 더 가까이 찍었으면 roof에 무슨 damage같은 것도 보일 지경이다. 참 좋은 건지, 으시시한 건지.. 그런 세상이 되어간다. 이제는 personal privacy란 말은 의미가 없어지는 것일까.

Ohio Stadium near Dreese Lab
Ohio Stadium near Dreese Lab

내친김에 mouse cursor를 Columbus, Ohio로 흘려보았다. 너무나 오랜만이라 많이 잊었다. 목적지는 Ohio State University campus주변이다. 처음 Columbus downtown에서 출발을 하여  I-71를 따라서 올라갔다. 그저 Ohio Stadium만 찾으면 되니까.. 역시 왼쪽 편으로 말굽모양의 football stadium이 보인다. 처음에는campus  바른 쪽의 High Street를 찾았다. Long’s Bookstore와  McDonalds를 찾는다. 그리고.. 잠깐 살았던 “rooming house” Frambes Avenue, Harrison House, Jones Tower.. 제일 마지막에 나의 Department (of Electrical Engineering)가 있던 Dreese Lab, Caldwell Lab을 찾았다. 그런 건물들이 쉽게 변할 리는 없다. 100% virtual bird’s eye tour였지만 그와 함께 time machine을 타고 30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가을비 우산 속에..

오늘은 몇 개월 만에 처음으로 하루 종일 에어컨이 한번도 들어오지 않은 그런 날이 되었다. 결국은 가을이 온 것이었다. 기온도 거의 화씨 15도나 떨어지고, 하루 종일 가을비가 주룩주룩 내린 그런 날이었다. 1970 년대의 가수 최헌이 부른  “가을비 우산 속에” 를 생각하고, 부르고 싶은 그런 날이었다. 지나간 해들을 기억해 보면 아마도 2주 내에 central heating이 가동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본격적으로 “여름의 것”들을 치워야 하고 winterizing을 하여야 한다. 아~~ 세월의 흐름이여~~

오늘은 매월마다 돌아오는 이곳 한국천주교회의 “마리에타 2구역” 구역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돌아가며 각 구역 신자들의 가정에서 저녁을 같이 먹으며 친교를 하는 날인 것이다. 우리 부부는 비록 주일미사를 한국천주교회에서 하지는 않지만 이 구역모임에는 거의 정기적으로 참여를 하고 있다. 참여를 한지 아마도 벌써 5년 정도 되지 않았을까? 아주 큰 그룹이 아니지만 활동적인 비교적 착실한 구역에 속한다. 성서공부를 한지도 꽤 오래되었다. 나 개인으로 보면 이 구역모임에 나가면서 더 신앙적으로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최근 몇 번을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이런 이유, 저런 이유로 못나가게 되었지만, 역시 사람이 모인 곳이라 전혀 문제가 없다고 볼 수는 없다. “사랑”의 마음으로 극복을 해야겠지만 항상 쉬운 것은 아니다.

home office at the latest
home office at the latest

이제 드디어 나의 home office가 최소한 제 자리들을 잡았다. 역시 main desk는 다른 것들과 평행으로 놓아야 심리적으로 편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정말 해야 할 것은 다 끝나지 않았다. 서류와 computer 같은 hardware part를 정리하는 일이 남았다. 사실 이것이 골치 아픈 일이라, 계속 미루고 있지만 이제는 핑계가 없다. 하지만 일단 시작을 하면 생각보다는 쉬울지도 모른다. 모든 일들이 대개 이런 식이니까..

9월의 한여름, 동창친구들, Eddie Fisher

6월초 나의 blog entry중에6월 달의 한여름” 란 것이 있었다. 보통 때에 비해서 몇 주일이나 빨리 온 무더위에 관한 것이었다. 아마도 거의 3주간 계속된 더위였다. 그래서 아하.. 올 여름의 무더위는 다 갔구나..하고 생각을 했는데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온통 최고기록을 경신한 올 여름의 무더위였다. 그런데 9월의 공식적인 가을, 추분이 시작된 지금도 사실 한여름이다. 올해의 기후 pattern은 하나로 요약할 수 있다. 한번 기상 system이 하늘에 자리를 잡으면 여간 해서는 “요지부동” 움직이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보통은 며칠마다 변화무쌍 변화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도 조금은 “으시시”한 앞으로의 기후가 아닐까. 혹시 이것도 global warming의 한 경고가 아닐까 생각하니 조금은 우울해진다. 하지만 모래부터는 완전한 가을날씨가 온다고 한다. 기온이 거의 15F나 곤두박질을 친다고 하니까. 다시 가을/겨울의 준비를 할 때가 오는 것인가…

고국의 중앙고 동창 친구 유정원, 양건주가 email 회신을 보내왔다. 45년 만에 연락이 된 동창 유정원, 조금은 꿈같은 기분으로 이 친구와의 “만남” 을 음미해보곤 한다. 어머님을 얼마 전에 보내드리고 처음 맞는 추석은 어떠했을까? 이렇게 email 로 나마 “대화” 가 가능하니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 건주는 항상 자상하게 자기의 근황을 알려준다. 이 친구, 그런 것은 정말 변하지 않았다. 성실하고, 자상한 것.. 얼마 전에 회사생활을 끝냈다고 들었는데 요새는 어떻게 지내는가? 오늘 처음 안 사실은, 건주가 6남매의 맏이였다는 것이다. 그것도 정확히 3남3녀 중의.. 아버님이 3대 독자라고 하시니까 조금은 이해가 간다. 그래도 우리 때의 기준으로 보아도 조금 많은 식구였다. 그 많은 식구 다 뒷바라지 하셨으리라 생각하니 참 대단하시다. 이렇게 소가족 추세인 세상에서 그들은 얼마나 외롭지 않을까.. 참 부럽다. 정말 부럽다. 역시 식구는 행복이다. 그 말이 맞다.

 

지난 7월에 우리 집 dining roomlaminate floor 로 바꾸는 일이 있었다. 난생 처음 해본 것이라 고생도 했고 시간도 걸렸지만 그런대로 잘 되었다. 덥고, 힘도 들고, 재료도 떨어지고 이런 저런 핑계로 일을 쉬어버렸다. 원래 계획은 living room, hall way, kitchen을 포함한 일층 전체를 다 laminate floor로 바꿀 예정이었다. 문제는 flooring을 아무리 간단한 것으로 바꾸려고 해도 마루 밑바닥의 상태가 좋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subfloor (마루밑의 마루)의 상태를 말한다. 역시 이곳 저곳 문제가 있었는데, 어떤 곳은 마루 밑이 썩은 곳도 있었고, 어떤 곳은 오래되어서 밑으로 축 쳐진 곳도 있었다. 그런 것을 그 동안 다 손을 보았던 것이다. 주로 joist re-framing과 additional support같은 것을 할 수밖에 없었다. 거의 $$은 들지 않았지만 나의 muscle과 power tool들이 절대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IKEA Tundra라는 비교적 가격이 저렴한 laminate floor  15 package를 이미 구입해 놓아서 곧바로 living room과 hallway를 시작하려고 한다. Good luck to me on this job!

 

re-framed damaged floor joists

정문 현관의 마루밑은 아주 오래전에 termite damage가 있었다. 별로 더 이상 진행되는 피해가 없어서 잊고 살다가 이번에 마루를 갈게 되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joist 몇개가 완전히 삮아 있었다.

 

3 new posts under floor

그 바로 밑에다 아주 튼튼한 기둥 3개를 설치하였다. 이정도면 현관에 heavyweight 급의 장정들이 여러명 서 있어도 끄떡이 없을 듯하다.

 

오늘 뉴스를 잠깐 보니 오래 전의 미국가수 Eddie Fisher가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솔직히 말해서 하도 오래 전의 유명인이라서 나이가 최소한 90세 이상은 되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겨우” 82세? 알고 보니 우리가 알던 때의 그의 나이가 아주 아주 젊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흔히들 말하는 “십대의 우상 (teenage idol) 이었던 것이다. 노래도 물론 잘 불렀겠지만 대부분 그가 더 유명해진 이유는 그 당시 최정상 급의 배우,가수들과 이혼과 결혼을 줄기차게 감행했던 사실이다. 내가 아는 사람만 해도 그 유명한 Elizabeth Taylor, Debbie Reynolds, Connie Stevens 등등이 있다. 이 남자, 어떤 마력과 매력이 있길래 그 유명한 여자들과 그렇게 결혼과 이혼을 할 수 있었을까? 나중에 그의 인터뷰를 보면 역시 그는 “예쁜 여자를 보면 참을 수가 없다” 고 말할 정도로 그는 유명하고 예쁜 여자를 좋아했던 것 같다 (그렇지 않은 남자가 이세상에 어디에 있을까?) 그의 hit song중에는 역시 많이 들었던 1954년의 Oh My Papa를 빼 놓을 수 없다.

 

Oh My Papa – Eddie Fisher – 1954

 

백두대간의 안명성

어제 오랜만에 죽마고우 안명성이 추석안부의 너무나 짧게 쓴 나의 email에 대한 회신을 보내왔다. 이 친구는 내가 이름만 들어도 이제는 조금 찡~~한 느낌을 주는 그런 “진짜” 죽마고우다. 자기가 만든 섬유관련사업체를 오랫동안 열심히 경영을 해 오더니 이제는 아주 retire를 한 모양이다. 자기는 백수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백수치고는 그 이전보다 더 활기차고 즐거운 느낌.. 부럽다, 명성아!
“죽마고우”란 말의 어원을 내가 잘 기억은 못하지만 한자를 생각해 보면, 대나무로 만든 말을 같이 타고 놀던 오랜 친구.. 같은 것이 아닐까? 우리는 비록 그런 말을 타고 놀지는 않았어도 “고우”란 말은 맞는다. 정말 오래되었으니까. 원서동시절을 온통 같이 보낸 친구.. 국민학교 3~4학년 때부터 알게 된 친구.. 자주 보았다가, 오랫동안 못 보았다가 를 반복한 인생, 결국은 나의 미국 행으로 인생의 황금기 우정을 끝없이 미루어야 했던 친구.. 이제 우리에게 그 우정의 공백을 채워 줄 시간은 그렇게 많은 것 같지 않다. 그래서 이런 헤어진 죽마고우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련하게, 찡~~ 해 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간 백두 대간 종주를 마치고, 영월서부터 춘천까지 가는 영춘 지맥을 끝내고, 금강 북쪽 논산북쪽에서 금강 하구까지 가는 금북 정맥을 마치고, 금강 남쪽을 달리는 금남 정맥을 하고 있다. 앞으로 얼마나 더 할지는 모르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천천히 하려고 한다.

 

명성이의 이 말이 나를 또 역사,지리학도로 만든다. 백두 대간은 지리적인 명칭이겠지만 역시 한민족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영월부터 춘천까지의 “영춘 지맥”, 논산에서 금강하구까지의  “금북 정맥”, 금강 남쪽의 “금남 정맥”.. 와~~ 이런 말은 솔직히 처음 들어보았다. 하지만 그 곳을 달리는 듯한 한반도 산맥의 “정기”가 화악~~하며 나를 덮는다.

안명성과 설악산 울산암에서, 1968년
안명성과 설악산 울산암에서, 1968년

이곳에도 산이 많이 있다. 하지만 고국의 산과 같을 수는 없다. 백두 대간의 “줄기”를 따진다면 이곳의 Appalachian Trail과 그 의미가 비슷하지 않을까? 이 Trail은 미국에서 제일 긴 것으로 아팔라치아 산맥의 시작과 끝을 종주하는 길고도 긴 등산로다. 남쪽의 시작은 이곳 조지아 주에서 시작이 되어 북쪽은 뉴욕을 훨씬 지나서 Maine 주에서 끝이 난다.
명성이와 나는 사실 학생시절 산에 얽힌 이야기기 꽤 많은 편이다. 둘 다 그 당시 산을 좋아했으니까. 하기야 그 당시 일반적인 수준으로 보아서 산 만큼 “값 싸게” 즐길 수 있는 곳도 드물었다. 군용장비와 최소한의 식량, 그리고 시간만 있으면 갈 수 있는 곳이 국토의 거의 전부를 차지한 주변의 산들이었으니까. 명성이와 같이 “등산”을 처음 한 것이 국민학교시절 “남산”이었다. 또 다른 죽마고우 “동만이”와 셋이서 서울 시내를 가로질러 남산을 보면서 그대로 걸어간 것이다. 물론 가는 길을 알 턱이 없었다. 하지만 그 산은 계속 우리에게 보였기 때문에 헤맬 필요가 없었다. 그때 동만이의 괴성은 “오~~ 감격!” 이란 말이었다. 우리가 수시로 오르던 삼청동 뒷산에서 본 서울의 모습과 남산에서 본 것은 물론 달랐다. 뿐만 아니라 남쪽으로는 한강과 관악산이 보였기 때문이다.
다음에 기억이 나는 때는 고1이 끝날 때 쯤, 진짜 등산이었다. 나의 오래된 가정교사였던 김용기 형이 나와 명성이 둘을 데리고 아주 추운 겨울에 백운대로 간 것이었다. 그 때 등산의 어려움을 처음 체험 하였다. 숨이 목까지 차는 괴로움을 겪은 것이다. 하지만 첫 진짜 산의 위용과 느낌을 두고 두고 느끼게 한 산행이었다. 그 때도 명성이가 산을 좋아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우리는 (최소한 나는) 처음으로 야외에서 밥을 해 먹는 경험을 하였다. 내려 올 때는 올라간 길의 반대쪽으로 내려와서 더 첫 등산의 추억을 멋있게 장식하였다.

제일 추억에 남는 명성이와 의 등산은 역시 1968년 여름방학 때 내가 대학 2학년 때 둘이서 갔던 설악산 등산이었다.  둘 다 처음 가는 설악산이었고 이렇게 먼 곳을 둘이서 간 것도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 둘이서 간 등산의 마지막도 되었다. 그때는 비교적 초보적인 수준이어서 내설악이 아니고 외설악으로 갔다. 이것이 추억에 남는 이유는 그곳에서 내가 사고로 화상을 입고 일찍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때 혼자서 남게 된 명성이는 꽤 고생을 했다고 들었다. 물론 발에 심하게 화상을 입은 내가 고생은 더 했겠지만 나중에 생각을 하니 명성이도 꽤 고생을 한 것을 알고 내가 너무나 무심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이후로 나는 어쩐지 명성이와 어울릴 기회가 별로 없었다. 서로 다른 대학을 다니고 연락도 별로 안 되고 거의 잊고 살게 되었다. 무언가 그때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달랐나.. 기억이 잘 나지를 않는다. 그는 그의 대학친구들과 어울리고 나는 나대로 나의 그룹과 어울리는 그런 식이었다. 그것이 지금 생각해도 조금 아쉬운 것이다. 더 죽마고우의 정을 살릴 수도 있었을 터인데.. 하지만 내가 결혼을 할 때 그는 옛정을 발휘해서 결혼식 사회를 보아주었다. 그리고 어릴 때 별로 보이지 않던 기업가적 자질을 발휘해서 멋있게 자기의 사업을 키워나갔고 모범적인 가정을 이끌며 현재까지 왔다. 비록 오랫동안 떨어져 살아는 왔지만 그게 그렇게 느껴지지를 않는 것은 역시 “죽마고우” 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 본다. 이 나이에 백두 대간을 종주하는 명성아… (한마디로)부럽다!

 

 

The Tremeloes – Silence Is Golden
1967-1968

돋보기 시대, 차정호 개인 사진전

나도 이제 본격적인 돋보기 시대로 접어들었다. 일년 도 넘게 아주 조잡한 돋보기 안경 하나를 가지고  곡예를 하다시피 살았다. 그것들도 내에게 맞추어서 산 안경이 아니고 연숙의 것을 빌리기도 하고 어떤 것은 심지어 hardware store에서 산 것도 있었다. 그저 가까운 곳이 보이면 쓰고 그렇지 않으면 벗고.. 마음 한편에서는 신경질과 함께, 나는 절대로 이런 것들이 필요 없을 것이라고 나를 위로하면서..

그것이 이제는 불편한 정도를 넘어서게 되었다. 성당에서 성가의 가사가 보이지를 않는 것이다. 하지만 절대로 항상 쓰고 살기는 싫으니까, 그것을 가지고 다녀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를 않다. 주머니에 넣었다가 잘못하면 잃어버리거나 망가트릴 가능성이 많으니까. 그래서 어제는 용단을 내려서 reading glass 3 pack 이란 것을 Costco에서 $18에 샀다. 이제는 이곳 저곳에 두고 다녀도 문제가 없게 되었다. 아.. 나이 먹음의 설움이여..

 

중앙고 57회 동기회 총무 신동훈이 또 동기회 소식을 전해왔다. 3/4분기 모임의 소식과 함께 놀랍게도 교우 차정호의 개인 사진전 소식이었다. 고국의 교우들은 다들 그 동안 알고 있었겠지만 나는 전혀 모르는 사실이..차정호가 사진전을 할 정도의 사진예술가란 것을.. 미안하구나, 차정호. 너무나 모르고 살았다. 차정호는 중앙중학교 1학년 때, 중앙고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너무나 친숙한 이름과 얼굴이다. 중앙고 졸업 후에 한번도 그와 개인적으로 연락이 된 적이 없어서 어느 대학엘 간 것도 모를 정도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교우친구 목창수가 57회 동기회 회장을 할 당시 그의 이름이 총무로 나와있었다. 너무나 반가웠다. 그가 건강히 살아 있었구나. 그런 그가 이번에는 개인 사진전이라니 너무 축하할 일이 아닌가? 웹사이트를 통해서라도 한번 어떤 것인가 볼 수 없을까..

 

Catholic Sunday

오늘은 다시 일요일, 나의 정신적인 피난처, 휴식처, 성체와 성혈을 영할 수 있는 곳, 우리가 사는 지역의 (미국)본당인 Holy Family Catholic Church에 다녀온 날이다. 우리가 가는 오전 8시 반의 미사는 우리에게 조금은 이른 시간이지만 거의 일년이 넘게 우리의 일요일 미사가 되었다. 그 이전에는 거의 10시 미사에 갔었다. 그 시간 미사의 신자수가 아마도 제일 많고 따라서 조금만 늦게 가면 익숙한 자리를 놓치게 된다. 그래서 조금만 더 일찍 일어나면 8시 반의 미사에서 조금 더 마음의 여유를 갖고 미사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제는 8시 반 미사의 regular (매주 보는 교우들) 들도 낯이 익숙해 졌고 혹시라도 못 보게 되면 조금 신경이 쓰이곤 한다. 특히 regular 교우들은 가급적 자리를 바꾸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친근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비록 매주일 미사는 Holy Family 미국본당에서 하지만 역시 “정신적”인 본당은 이 곳에 있는 유일한 한인성당인 “아틀란타 한인 순교자 성당” 임을 부인을 할 수 없다. 이곳은 우리가 1989년 이곳에 왔을 때 이미 있었다. 당연히 우리는 그곳에 나갔다. 그 당시 신자 수는 지금에 비하면 작았지만 우리는 그 보다 훨씬 작은 공동체 (Madison, WI & Columbus, OH)에 익숙해 있어서 처음으로 “진짜” 공동체 같은 느낌으로 미사를 보게 되었다. 그런대로 비슷한 나이 또래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기도 하고 성가대에도 참가하는 전형적인 “일요일 신자”의 생활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하고 위기를 맞게 되었다. 1990년대 초에 주임신부님이셨던 현유복 신부님 “사건”,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그 당시 한창 문제가 되기 시작한 사제들의 추문과 그에 따른 과잉반응, 오해.. 등등으로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신부님은 갑자기 귀국을 하시게 되었다. 사실과 헛소문,그것을 개인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 한마디로 종교의 어두운 곳을 들어내는 사건이었다. 아틀란타 대교구청의 처사도 그렇게 친절한 것은 아니었고 한창 커지던 공동체도 “본당”에서 “공소”로 추락을 하고 말았다. 나는 자세한 경위는 모르지만 정말 실망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공동체의 이미 곪았던 인간적인 치부들이 들어나게 되었고 심지어는 신부 파, 수녀 파 등의 이름이 생기고 성전 안에서 물리적인 실력행사까지 보이게 되었다. 끝에는 결국 법적인 소송으로까지 악화를 하게 되었고 그때 우리는 자발적으로 공동체를 떠나게 되었다. “일요일의 평화”가 깨어진 곳에 더 가기가 싫었다. 사랑의 계명을 철저히 잃어버린 형제자매들도 대하기가 두려웠다. 그 이후로 우리는 성당을 “완전히” 떠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교회를 떠난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인간들의 교회면 당연히 문제가 없을 리가 없는데 그것을 깊게 생각을 못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우리, 특히 나는 많은 것을 잃게 되었다. 그 당시는 물론 그런 것을 크게 생각을 못했다. 지금 생각하니까 그런 것이다.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감히 인간들이 어찌 다 알겠는가. 결과적으로 한인성당은 큰 타격을 받고 많은 신자들이 떠났지만, 아주 버려지진 않았다. 아주 영성 적인 “강 팀”인 한국 예수회(Society of Jesus: Jesuit)에서 직접 예수회 신부님들을 파견하시기 시작한 것이다. 철저한 spiritual discipline으로 무장한 그들이 다시 공동체를 부활하기 시작하고 서서히 떠났던 신자들이 돌아오게 되었다.그 이후 한인공동체는 하느님의 축복으로 질적, 양적인 성장을 계속하고 몇 년 전에는 드디어 숙원이었던 “본당”의 지위를 되찾게 되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곳이 미국에서 유일한 한국파견 예수회 성직자들의 “본거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축복이 어디에 있을까. 아냐시오 로욜라(Ignatius of Loyola) 영성으로 무장된 신부님들의 목회를 받고 있는 이곳의 본당은 거의 20년 전의 “추문”을 다 씻어버리고 다음세대의 이민본당으로 발 돋움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새로운 성전을 구입하고 크게 불어난 신자 인구를 대비하게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나에게 큰 과제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미국본당을 떠나서 한국본당으로 갈 것인가.. 하는 문제다. 물론 주일미사를 어디로 가느냐 하는 문제일 수도 있지만 사실 그보다도 더 큰 의미를 갖는다. 나 혼자서 결정을 하는 것이 지금은 생각보다 힘이 든다. 하지만 이건 시간문제가 되고 있다.

 

9월 하순, 추석, 큰집 작은집

9월도 거의 하순으로 접어든다. 세월의 흐름과 빠름은 이제 아주 익숙해져서 놀랄 것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며칠 안으로 분명히 “가을”이 시작이 되는데.. 이게 어찌된 모양인가. 아침 저녁은 분명히 시원해 졌는데 낮의 기온이.. 내가 잘못 보았나.. 아니다.. 분명히 화씨 95도? 좌우지간 올해 기후는 정말 끝내준다. 겨울은 거의 시베리아였고, 여름은 거의 열대지방.. 거의 극과 극이다. 기상과학자들은 분명히 말한다. “지구온난화”의 특징이 바로 이런 “극과 극”의 패턴이라고. 나치 독일의 유태인 학살을 “허구”라고 말하는 바보들이나, 온난화는 정치적인 음모라고 믿는 바보들이나 하나도 다른 것이 없다. 참, 한심한 인간들이 많이도 있다.

한국식품점에서 준 달력을 보니, 다음주중이 빨갛게 표시되어있다. 자세히 보니 “추석” 이었다. 또 그 때가 왔구나. 이곳에서 오래 산 관계로 사실 그때의 생동감을 많이 잊어버렸다. 아니면 나이 탓도 있을지 모른다. 이곳의 추수감사절이 아마도 고국의 추석과 제일 비슷할 듯하다. 결국은 가족이 모이는 것이니까. 어렸을 때의 추석이나 설날을 생각하면 된다. 기억에, 그 전날 밤에 잠이 오지를 않았으니까.. 그 정도면 어느 정도인가 알만하다. 모든 것이 부족한 때여서 명절의 “혜택”은 더 기억에 남고 즐거웠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실 고국의 명절이 되면 더 외로움을 느끼곤 한다. 많은 것을 잊고 살았다는 생각도 들고.. 고향이란 것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느껴지나 하며 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늘 배달된 Georgia Bulletin (아틀란타 대교구청 발행 주간지) 을 잠깐 보니 흥미 있는 글이 있었다. 요새 조그만 불씨처럼 퍼지는 “작은 집에서 살기 운동”.. 나도 전에 PBS방송에서 잠깐 본 적이 있었다. 100 square feet (입방 피트)의 좁은 집에서 “즐겁게”사는 사람의 이야기였다. 100 sf (square feet)면 어느 정도일까? 가로세로 4미터 정도의 크기다. 머리를 짜내서 그만한 크기에 각종 시설을 모조리 넣고 설계한 특별한 집일 것이다. 우리 집이 3000 sf정도 되니까 얼마나 작은지 상상이 가기도 하고, 사실 믿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서 법정스님의 “무소유” 을 실천하는 그런 집인 것이다. 화제가 된 것은 그런 곳에서 편하고 행복하게 산다는 얘기다. 그런가 하면 10,000 sf가 넘는 초대형 호화주택에서 사는 사람도 생각보다 많다. 나의 아는 사람도 그런 곳으로 이사를 갔는데 그곳에 가보고 사실 조금 “불편한” 심정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큰 집에서 살 수가 있을까.. 인간의 욕망이 이렇게 끝이 없을까..하는 조금 복잡한 심정이었다.

 

1985년 9월 17일은…

오늘, 9월 17일은 우리 집 둘째 딸 나라니의 25번째 생일이다. 벌써 그렇게 되었구나.. 얼마 전부터는 사실 아이들도 나이를 셀 때 조금 시간이 걸렸다. 앞으로 점점 더 그렇게 될 것이다. 25세면 내가 미국에 처음 올 때 정도의 나이가 아니던가? 흔한 말로 25년이면 강산이 두 번 반이 변할 정도의 세월일 것이다. 특히 근래의 강산이 변한 정도는 옛날이 것과 비교가 되지를 않을 듯 하다. 나는 딸만 둘을 두어서 아주 가끔 아.. 나도 아들이 하나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까지는 못 미치는 그런 생각을 할 때도 있다. 자식 둘이면 만족하던 세대였고, 남녀구별을 싫어하던 우리 부부였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남자가 필요한 일들을 만나거나 남자들만이 좋아하는 그런 취미들을 생각하면 조금 아쉬워지기도 하긴 했다. 왜냐하면 어떤 것들은 절대로 남자와 여자가 서로 이해를 못하는 그런 것들도 있으니까.

큰애와 다르게 나라니는 무척 감성적이다.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생각하는 그런 타입이다. 책보다는 사람을 더 좋아하고, 하나에 “미치면” 빠져 나오기가 무척이나 힘들다. 한때는 Backstreet Boys의 semi-groupie가 될 정도가 되어서 우리를 애타게 했다. 그러면서 생각을 해 보니 나도 그 나이에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어도 지독히pop culture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해를 하려고 노력을 하곤 했다. 어렸을 때에 나는 아이들과 재미있게 지냈지만 가장 중요한 10대 후반에 그 애들을 완전히 놓치고 말았다.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아니면 그렇게 어려워야만 했을까?

나라니가 태어날 때 너무 난산이어서 더 이상 고생을 원치 않았지만 그 이후 가끔 하나 더 둘까..하는 “부질없는 상상”도 해 보긴 했다. 하지만, 역시.. 더 이상 “고생”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근래에 이곳에서 여자로 태어나는 것은 시간이 가면 갈 수록 모든 여건들이 나아지고 있는 추세이고 아마도 고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흑인대통령에 이어 여자대통령도 “절대로” 가능한 세월이 되고 있으니까, 참, 좋은 세상이 되었다. 비록 상대적으로 남자들이 조금 불쌍해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것이 더 공평한 것이 아닐까?

나라니에게 주는 노래선물을 고르는 것,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1985년 태어난 해의 80s song은 역시 We Are the World가 제일 적격이고, 나라니가 제일 좋아하던 Backstreet Boys의 hit songs중에서는 나도 좋아하던 Show Me the Meaning of being Lonely가 좋을 듯 하다. 나라니,  Happy Birthday!

 

 

We Are the World – 1985 Usa For Africa

 

 

Show Me The Meaning Of Being Lonely– Backstreet Boys

육이오, 원서동, 동섭이네 집, 영구차 귀신

이 오랜 된 이야기는 사실 아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족도 예전에는 나의 이 이상한 귀신 이야기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니까 남들에게 말을 해도 반응이 그저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을 기억하고 싶고 더 나아가서 이렇게 “개인 역사적인 기록”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제목이 사실은 잘 연결이 되지 않을지도…. 육이오, 원서동, 동섭이네 집, 영구차, 귀신.. 등등이 말이다. 우선 배경이 되는 시기는 나중에 생각을 해 보니 1953년 경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재동국민학교에 들어가기 1년 전 쯤, 내가 5살 정도나 되었을까? 그때의 기억은 사실 아주 또렷하다. 한국전쟁 휴전이 되기 일년 전부터 기억이 나는 것이다. 하지만 아주 가끔 정말 꿈에서나 볼 정도로 가끔 그 이전도 기억을 한다. 그러니까 1952-3년 정도쯤일까?

6.25전쟁이 터질 당시 우리 집은 4가족의 행복한 가정이었다고 들었다. 나보다 세 살 정도 위인 누나와 같이 우리는 평범한 가정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 당시 경기고등학교의 영어선생님으로 계셨고(그 전에는 선린상고에 재직, 심리학교수가 되신 장병림씨와 같이 근무) 어머님은 이화여전 가사과 출신의 가정주부. 언제인지 모른다. 아버님이 납북이 되신 것이.. 그 때의 자세한 상황을 나는 어머님으로부터 자세히 듣지를 못했다. 아마도 인민군(괴뢰군이라고 불렀다)들이 후퇴를 할 때쯤이 아니었을까? 나의 모교인 재동국민학교에 젊은 남자들을 모두 집합시켜서 미아리고개를 넘어 북으로 끌고 갔다고만 들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단장의 미아리고개” 노래의 불씨가 아니었을까? 나의 죽마고우 유지호의 아버님도 그때 같이 끌려가시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을 하셨다고 들었다. 지호 아버님으로 부터 왜 그때의 이야기를 더 자세히 들어보지 않았는지 정말 후회막급이다. 나중에 이곳의 천주교 교우 한 분께서 말씀이 아마도 나의 아버님이 영어선생이라서 끌고 갔을 것이라고 귀 띰을 해 주셨다. 조금 동감이 가는 말씀이었다. 그 이후 우리는 아버님의 생사를 전혀 모른다. 전혀..

어머님은 생활력이 세다는 이북여자였다. 외가댁은 “버들 양씨”로써 모두 함경도 원산의 대 지주였고 어머님을 서울의 이화여전으로 보내셨다. 다른 고모, 삼촌들도 모두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신 그런 개화된 집안이었다고 들었다. 어머님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시고 서울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하셨는데 해방이 되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남북이 갈리고 외가 쪽은 대지주로써 “악질 반동”으로 재산을 다 몰수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가 쪽은 워낙 식구가 많아서 그랬는지 삼팔선을 넘지 않으셨다. 그때의 애기로, 내가 태어났을 때 외 할머님께서 혼자 삼팔선을 넘어서 왔다 가셨다고 들었다. 그리고 김일성(개새끼)의 육이오..

아버님이 납북이 되시고 완전히 혼자 서울에 우리 두 남매를 데리고 남게 되신 어머님의 심정을 누가 알 수 있을까? 나도 사실 요새 그런 상황을 상상하며 눈시울을 적시니까. 그때 우리는 집이 없었다. 남의 집에서 산 것이다. 전쟁 중에 집 걱정보다는 우선 밥을 먹어야 하는 게 급선무가 아닐까? 이남에 일가친척의 수는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완전히 혼자였다. 그때 아버님의 친구이자 나의 친구 유지호의 아버님이 사시던 곳, 원서동에 한옥이 있었다. 1.4 후퇴 때 임시로 그 집으로 가셨다. 어쩐 일인지 지호네 집은 지호만 우리 어머님께 남겨두고 (갓난아기) 전부 전라도로 피난을 간 것이다. 서울이 다시 유엔군에 수복이 되고 지호네 집은 돌아왔고, 우리식구는 같은 원서동에 있던 어느 무당집에서 살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집 무당 아줌마네는 우리같이 남매가 있었는데 남자애(김병세)는 나와 동갑으로 나중에 재동국민학교를 같이 다니고 그 누나(양님이 누나라고 불렀다)는 나의 누나와 동갑, 같이 재동학교를 다닌 인연이 있었다. 그 집에 살던 기억이 나는 그런대로 난다. 무당이 무엇인지는 잘 몰랐어도 대청 마루에 무서운 ‘귀신’ 같은 것이 앉아있었다는 기억이 뚜렷이 난다. 그 때가 아마도 1952년경 쯤이 아니었을까?

그 병세네 집에 살면서 어머니는 원서동 조금 아래쪽, 그러니까 돈화문 근처 (비원 정문)의 어떤 골목에 있던 한옥에 가서 밥과 빨래 등을 하는 일을 하셨다. 그 집을 어머님은 동섭이네 집이라고 부르셨다. 우리도 심심하면 누나와 같이 손을 잡고 그 집에 놀러 가곤 했다. 그 집이 무슨 집인지는 잘 몰랐고 동섭이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그저 동섭이네 집이라고만 알았다. 그러다가 얼마 후에 우리는 그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왜 가야만 했는지는 모른다. 그 집은 무당집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우선 밝고, 아주 마당도 크고 사랑채가 여럿이 있는 제법 큰 집이었다. 거기서 살던 기억이 나는 거의 고스란히 남아있다. 아마도 1952년에서 1953년 사이였을 것이다.

그 집은 골목(끝에는 휘문학교가 있었다)의 중간쯤에 위치해서 아이들이 나와서 놀기에는 안성맞춤인 그런 골목이었다. 그 골목을 빠져나오면 원서동을 관통하는 큰 도로가 나오고 그곳은 그런대로 차들이 지나다녀서 아이들에게는 조금 위험한 곳이었다. 골목에서 놀다가 아주 심심해지면 그곳으로 잠깐 나와서 놀곤 했다. 원서동 입구, 돈화문 옆쪽으로는 헌병부대, 미군부대들이 있었고 항상 커다란 트럭들이 드나들곤 해서 가끔 아이들이 차에 치어서 죽는 사고도 나곤 했다. 한번은 그 길에 나가보니 어떤 엄마가 길바닥에 깔린 거적 앞에서 땅을 치며 통곡을 하는 것을 보았다. 그 엄마의 아이가 차에 치어서 죽은 것이다. 전쟁 중에 있었던 또 다른 비극이었다. 하지만 미군들은 가끔 먹을 것과 우유 같은 것을 배급으로 나누어 주곤 했고 재수 좋으면 정말 정말 맛있는 쵸코렛도 주었다. 나도 누나와 같이 우유배급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어떤 날, 나는 아주 무서운 것을 보았다. 다른 날과 같이 골목을 오르내리며 놀다가 심심해져서 원서동 대로로 나갔는데, 그날은 이상한 차 한대가 와서 서있었다. 그 당시 차들은 거의가 군용차라서 그런 차가 아니면 다 이상하게 보이긴 했다. 하지만 그 차는 정말로 요상하게 생겼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영구차였다. 기분 나쁠 정도로 요란하게 모서리를 장식한 것이 그 나이에 보아도 으시시했던 것이다. 아주 자세한 상황은 물론 다 잊어버렸지만 그 때 내가 경험한 것 한가지는 아직도 뚜렷하다. 그 영구차의 뒷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안에는 사람들이 앉아서 울고 있었다. 그것 까지는 정상일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바닥이었다. 그 바닥에 “죽은” 사람들이 여럿이서(아주 많았다) 서로 엉켜서 누워있었던 것이다. 나의 어린 눈에는 그 숫자가 그저 많았다. 그 많은 시체들이 서로 엉켜서 누워있었던 것을 나는 “분명히” 보았던 것이다!

너무나 놀라서 나는 곧바로 집으로 뛰어서 엄마를 찾았다. 나는 너무나 놀라면 절대로 울거나 하지 않는다. 그저 얼굴이 굳어지고 더 정신을 바짝 차리는 그런 타입이다. 본대로 그대로 나는 엄마에게 말하면서 몸서리를 쳤다. 물론 엄마는 전혀 믿지를 않으셨다. 암만 이야기를 해도 전혀 믿지를 않으시는 것이었다. 나는 그 당시 귀신이란 것을 잘 믿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이것은 내 눈으로 분명히 본 것이 아닌가? 그 이후 나이가 들면서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하면 그저 상상력이 많았던 정도로 이야기가 끝이 나곤 했다. 과연 그때 내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주 가끔 그때 생각을 떠 올리면서 이성적인 노력을 해 본다. 과연 무엇이었을까? 혹시 장례식에 가는 가족들이 너무 슬퍼서 엎드려서 울던 것이 아니었을까? 가능하다. 하지만 내가 본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분명히 ‘죽은 사람’들이 엉켜있었던 것이다. 그것만은 나는 절대로 확신을 한다.

조동주, 재동국민학교 6학년, 1959년
조동주, 재동국민학교 6학년, 1959년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나지만 사실 결론이 없다. 하지만 나는 지금은 믿는다. 절대로 ‘초자연적인’ 것은 있다고.. 이렇게 신앙을 가지게 되면서 그런 생각이 더 굳어져간다. 절대로 귀신이나 영을 보는 것은 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러면 그때 내가 본 것들은 정말 정말 죽은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른다. 믿기 힘든 경험이 이렇게 나에게도 있다는 것이 조금은 “대견” 스럽다. 그리고 동섭이네 집의 동섭이가 누구인가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남자의 이름이었고, 이름은 “조동섭”, 그 집 주인의 큰 아들이었을 것이다. 나보다 3살 정도 위였던 듯 하고 역시 재동국민학교를 다녔다. 그 집도 역시 6.25때 임시로 집을 비우고 피난을 갔던 것 같았다. 내가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에 그 집은 다시 돌아왔고 우리는 다시 이사를 가야 했다. 또 나중에 알고 보니 조동섭의 동생이 나와 동갑인 조동주였다. 국민학교를 나와 같이 다니고 그것도 모자라서 중앙 중, 고등학교도 같이 다녔다. 그러고 보니 그 동섭이 형도 중앙중고를 다녔었다. 이것은 참 기묘한 인연이 아닌가? 나의 가장 오래 전의 기억을 온통 차지한 “동섭이네 집”, 요사이 Google Satellite사진으로 보니 그 근처는 완전히 없어진 듯 보였다. 무슨 원서동 공원 비슷한 것으로 “상전벽해“가 되어있었다. 그것이 거의 60년 전이었다.

 

Pet flap done, finally.., Inchon 60 years ago..

Pet flap (aka: pet door): 쉽게 말하면 “개구멍” 이라고나 할까. 이것을Home Depot에서 산지는 일년이 훨씬 넘었다. 우리 집의 개 5살 백이 Tobey녀석, 수시로 backyard로 나갈 때마다 뒷문을 열어 주어야 하는 게 조금 귀찮을 때가 많았다. 특히 오밤중에 뒷마당으로 급하게 볼일을 보려고 나가고자 한다면 더 귀찮아진다. 이럴 때 이 pet door, flap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pet door in place, finally
pet door in place, finally

내가 산 것은 standard door 용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집에는 사실 맞지를 않았다. 우리 집의 뒷문은 french door라서 유리를 떼어내야 하고 그렇게 되면 멀쩡한 문이 사실 그 품위를 잃게 되니까. 그래서 벽에다 달아야 하는데.. 이렇게 하려면 drywall을 뚫고 속에 있는 wall frame을 새로 design을 해야 한다.  못할 것은 없지만 정말 귀찮지 않은가? 그래서 계속 미루다가 이번에 새로니가 데리고 있던 고양이 Izzie가 우리와 같이 살게 되어서 그 녀석 때문에 더 미룰 수가 없게 되었다. 고양이는 자기의 전용 litter box(변기)가 집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집안에 놓아도 큰 상관은 없지만 back porch에 놓으면 공기도 맑고 냄새도  덜 나고 여러 가지 장점이 있었다. 그래서 이제 더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하니 일이 그런대로 급속도로 진척이 되어서 어제 끝이 났다.

이와 같은 일들이 그렇지만 일단 끝나고 보면, 그렇게 간단했던 것을.. 하는 후회 투성이가 된다. 만드는 과정보다 design하는 과정이 사실 그렇게 힘들었던 것이다. 만들어 놓고 보니 이제는 이 녀석, 특히 고양이 Izzie가 이것을 쓰게 만들어야 하는 “골치 아픈” 일이 남았다. 어떻게 이 문을 쓰게 할 수 있을까? 거의 12시간이 지났는데도 저 혼자서 그 문으로는 절대로 가지를 않으니..

 

오늘은 9월 15일, 그러니까 “구일오” 로구나. 내가 말하는 구일오는 1950년 9월 15일을 말한다. 그러니까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된 날이다. 6.25와 같이 정확히 60년이 되었다. 내가 2살 때니까 기억이 날 리가 만무하다. 하지만 다른 식으로 기억이 난다. 어릴 때 그날을 기억하던 그런 기억들 말이다. 그 때는 하도 라디오 드라마나 만화, 교과서, 등등으로 많이 보고 들어서 정말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지곤 했다. 특히 6월 25일이 되면 나는 공포에 떨기도 했다. 그날 새빨간 저녁놀을 보면 마치 공산당이 탱크를 몰고 미아리고개를 넘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으니까.

MacArthur in Inchon, 9/15, 1950
MacArthur in Inchon, 9/15, 1950

그와 마찬가지로 9월 15일이나 9월 28일이 되면 괜히 신바람이 나곤 했다. 그날은 우리 용감한 국군과 유엔군이 악당 공산괴뢰군들을 소탕하던 때였으니까,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다. 맥아더가 이끈 인천상륙작전은 우리에게는 정말 멋진 무용담이었다. 멋있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끼고 flagship 군함의 전망대에 앉아서 지휘를 하던 그런 사진들을 보면 정말 산호의 만화 “정의의 사자 라이파이“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1958년 인천만국공원에서, 5학년때
1958년 인천만국공원에서, 5학년때

이승만 대통령과 더불어 맥아더장군에 대한 인상도 나이가 들면서 계속 “진화” 되기도 했고 역시 영웅이란 어두운 이면들이 다 있다는 “진리”도 터득하게 되었다. 하지만 역사가들의 의견이 일치하는 부분은 역시 한국전쟁에 끼친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의 커다란 전환적인 영향이었다. 대다수가 반대하던 “생각하기에도 어려운” 그 작전을 그는 거의 혼자서 달성하지 않았던가?
결국 후에 인천에는 맥아더 장군을 기념하는 “만국공원”이 세워지고,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인천 앞바다를 보는 멋진 포즈를 취하고.. 재동국민학교 5학년 때(1958년)에는 그곳으로 단체 당일치기 수학여행까지 가기도 했다. 그때 만국공원에서 맥아더장군의 동상을 보았고 그 옆에서 단체사진도 찍었다. 그곳에서는 인천항의 전부가 아주 잘 보인다.

오늘 듣고 싶은 추억의 노래들은…

 

Sad Movies – Sue Thompson (1961)

우리에게는 1962년도에 더 유행했었다. 그러니까 내가 중앙 중학교 3학년 때 쯤이었나.. 그 당시 한때는 라디오를 틀기만 하면 이 노래가 흘러 나왔다. 그러니 아직도 기억이 날 수 밖에..

 

 

Corina, Corina – Ray Peterson (1962)
역시 우리들은 일년 더 늦게 1963년, 고1때 많이 듣게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확실치 않다. 정확한 시기는.. Ray Peterson은 사실 목소리로만 알았는데 video를 보니까 더 실감이 간다. 그는 Texas의 Denton출생이라고 한다. 그곳은 나도 한번 가 본 곳이라 반가웠다.

 

r.i.p. 길정일 후배, fried thermostat

매디슨을 떠나던 날, 바른쪽이 길정일 후배, 1989년 여름
매디슨을 떠나던 날, 바른쪽이 길정일 후배, 1989년 여름

오늘 아침에 연숙으로  부터 슬픈 소식을 하나 듣게 되었다. 오래 전에 잠깐 알고 지내던 길정일씨가 작년에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꽤 오래 전에 알았던 관계로 거의 잊고 살았던 것이다.  길정일씨는 연대후배로써 Madison (Wisconsin)에서 알고 지낸 사이였다. 1988년~1989년에 우리는 1년 정도 그곳에서 살았는데 그곳은 University of Wisconsin system중에 제일 크던 Madison campus가 있었고 그곳에는 상당히 큰 규모의 한국유학생들이 있었다. 게다가 규모에 비해서 활발하던 한인천주교  공동체가 이 campus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언젠가 이곳의 추억을 글에 담아 보리라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조금 언급을 하게 될 줄이야. 유능한 정치학도, 탁월한 지도력, 등으로 기억이 되는 그.. 학위를 받고 어떻게 인생을 살았을까. 갑자기 궁금해 진다. 부디 우리가 믿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편히 쉬기를..

 

new a/c transformer
new a/c transformer

지난 주일 고장 났던 위층의 a/c (air conditioner) 24V transformer의 Made in China (where else?) replacement transformer가 어제 배달이 되었다. 생김새는 그런대로 ‘진짜’ 에 가까우니까 중국제건 아니건 크게 문제가 없을 듯하다(너무 희망적인가). 하기야 이런 것들이 중국제가 아닌 것을 찾는 것은 아마도 거의 불가능 할지도 모른다.

급하게 내가 만들어서 썼던 2 series-connected transformers의 자리에 새것을 넣어서 다시 a/c를 test해 보았다. 문제가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내가 만들어 쓰던 것은 사실 완벽했던 것은 아니었다. Voltage가 24V가 아니고 26V 정도여서 조금 신경은 쓰였다. 하지만 그 정도의 tolerance는 대부분 문제가 되지를 않는다. 하지만 예외도 있었다. 바로 programmable thermostat였다. 보기에도 “애처로울” 정도도 “가볍게”만 들어진 (under engineered) 것인데 역시 2V over voltage stress를 견디지를 못했다. printed circuit board design이 over current 로 인한 heat를 견디지 못하고 녹아버린 것이다.

fried thermostat
fried thermostat

결과적으로 멀쩡하던 thermostat 하나를 잡아먹은 셈은 되었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런 bad & sloppy design을 한 engineer들을 탓 할 수 밖에 없다. 다행히 오래 전에 쓰던 programmable thermostat가 하나 있어서 그것을 쓰게 되었다. 이래저래 올해 여름의 무더위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남기며 물러가는 듯 싶다. 여름이여.. 안녕!

Sunday at Panera with Yonsook

어제는 파란 하늘의 아침으로 시작되었지만 오후부터는 갑자기 습해지고 찌는 듯이 더워졌다. 남쪽으로부터 열대성 구름이 갑자기 몰려 온 것이었다. Airport쪽은 결국 이날의 최고기온 기록을 세우고 (96F), 우리가 사는 쪽은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풍우가 몰려왔다. 우선은 시원해서 아주 반가웠으나 강풍과 번개가 조금 신경이 쓰였다. 쓰러질 만한 키가 큰 나무들은 몇 년 전에 다 잘라서 그 걱정은 이제 없으나 번개는 별 수가 없다. 전기가 나가면 조금 골치가 아프니까. 그런데 어제는 결국 조그마한 번개의 피해를 입고 말았다.

나의 kitchen office에 있는 pc의 network connection이 번개로 인해서 spark를 보이더니 network이 완전히 끊어져 버렸다. Home server로부터 받아보는 video가 끊어지고 물론 Internet도 끊어지고.. 처음에는 pc의 Ethernet card만 zap이 된 것으로 희망을 하고 그것부터 바꾸었지만 역시 no network, Internet. 다음은 server까지 연결된 모든 wiring을 check, OK. 그 connection에는 두 대의 network switches가 연결되어 있는데 알고 보니 모두 zap이 된 것이었다. 나의 추측에, pc쪽에 있는 network switch의 power adapter (small wall transformer)로 big spike가 들어온 듯 하였다. 거기는 사실 surge protected power strip이 있었지만 그것이 제대로 보호를 못 해준 모양이었다. 이것을 다시 바로 잡는데 오늘 성당에 다녀와서부터 거의 2시간이나 걸렸다. 벼락의 직접적인 피해는 이번이 사실 처음이었다. 이 정도인 것 만도 다행으로 생각해야겠다.

오늘 주일도 큰 일이 없이 연숙이와 둘이서 근처에 있는 우리의 미국 본당 Holy Family Catholic Church의 8시반 미사를 다녀왔다. 예외가 없는 한 우리는 미사 후에 Panera Bread에 들려서 Bagel과 coffee로 아침을 때운다. 요새는 이것이 우리부부의 유일한 social outing역할을 하고 있다. 본당에서 받아 온 주보를 보니, 표제에 Grandparents Day란 글이 들어왔다. 별로 ‘유명한’ 기념일이 아니지만 본 기억은 있다. 이게 나이가 이정도 되니까 들어왔는지도 모른다. 알고 보니 바로 오늘이 그 날이었다. 부리나케, googling 을 해보니 아래와 같은 구절로 설명이 되어있었다.

 

National Grandparents Day originated in the United States in 1978. President Jimmy Carter signed the proclamation on August 3, 1978 after Congress passed the legislation proclaiming the first Sunday after Labor Day as National Grandparents Day.

The official statute cites the day’s purpose of Grandparents Day as: “…to honor grandparents, to give grandparents an opportunity to show love for their children’s children, and to help children become aware of strength, information, and guidance older people can offer”.

 

아하, 역사가 그런대로 된 기념일이었구나.. 우리는 아직도 grandparents가 덜 된 상태고 우리의 grandparents는 전혀 안 계시고 하다 보니 이지경이 되었구나. 우리 아이들에게는 우리 부모님들이 grandparents일 텐데.. 하며 생각하니 갑자기 슬퍼진다. 손녀들의 재롱도 거의 못 받아보신 것을 생각하면 더욱 우울해진다.

 

Barack Obama, 지독히도 재수가 없는 미국 대통령중의 하나가 되고 있다. 정말 놀랍기만 하다. 물론 그에 대한 기대가 너무도 컸다. 거의 실현 불가능한 그런 기대들 말이다. 꿈과 현실은 그 골이 너무나 깊었던 것일까. 그의 능력도 생각보다 일반적인 기대치를 밑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의 2년에 가깝게 유심히 관찰하면서 느낀 것은 그는 절대적으로 ‘성공’을 할 수가 없는 조건이 너무나 많았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야당이 되어버린 Republican(공화당)의 ‘작태’는 정말 역사적인 최저, 최악이었다.
옛날, 고국에서 ‘반대를 위한 반대’의 야당은 비교도 되지를 않는다. 이것은 정말 이조 시대 장 희빈이 중전마마를 해하기 위해서 구중궁궐의 뒤에 숨어서 저주의 화살을 쏘는 정도였다. 한 마디로 Obama가 ‘절대로 성공하는 것을 막는다’ 라는 것을 비공식 당 정책으로 쓴 셈이다. 이것은 정말 이곳에 오래 살면서 처음 보는 거의 추태에 가까웠다. 한마디로 이곳, 이 나라, 이상과 희망이 조금씩 사라지는 듯한 기분이다.

 

산호의 라이파이 2003년 복간본
산호의 라이파이 2003년 복간본

6월초에 home office를 옮기면서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것들을 거의 3 개월 넘어서 조금씩 보고 있는데,대부분이 책이나 서류 같은 ‘종이’ 류이다. 그러다가 ‘정의의 사자 라이파이’ 복간 본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운 동창 친구 양건주가 2003년에 김산호 화백의 친필 사인까지 받아서 보내준 것이었다. 그때 어머님을 잃고 정신적으로 심한 우울증으로 방황을 하던 나를 구해준 건주의 우정에 정말 깊은 감동을 받았고,사실 어떻게 갚아야 할지 난감한 심정이었다.
우리또래 남자들이라면 사실 라이파이를 모른다면 아마도 깊은 산골에서 살았던 친구들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유명했던 대작, 걸작, 산호의 라이파이..를 살아 생전에 다시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질 않았다. 그 지옥 같았던 국민학교 6 학년, 입시공부의 고통에서 조금이나마 웃고, 기뻐했던 순간들은 아마도 ‘산호의 라이파이의 다음 편 들이 나오던 날들’ 이 아니었을까? 너무 감동적이라 산호선생께(나중에 알고 보니 대학생 정도의 나이) 편지까지 보내고 했었다. 그것이 정확히 반세기 전이었다.

세상은 조금 더 오래 살고 볼 것이다. 최고의 악당 소련이 없어지고, 공산당도 크게 무서울 것이 없게 된 세상을 우리는 어렸을 때 ‘절대로’ 기대를 못하던 것이 아니었는가? 그런 류의 작은 사건들 다른 것들도 참 많아서, 빨리 죽는 것이 조금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예외는 진빨갱이,마피아괴수, 김일성일가..겠지만. 하지만 Cuba의 카스트로(Fidel Castro)의 말을 들어보자. 이란의 ‘과대망상증’ 대통령, Ahmadinejad의 계속된 반 유태계 (anti-Semitic) 적인 태도와 정책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을 했는가? “유태인들은 우리들 보다 훨씬 어려운 존재위협 속에서 살았다. 2 차대전 때 독일의 유태인 학살 (Holocaust)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참, 세상 많이 변했다. 조금이라도 오래 살고 볼 것이다.

 

오늘 같은 날, 갑자기 듣고 싶은 노래는.. 역시 oldies.. 아마도 1975년 경이 아니었을까? 멋있게 생긴 Barry Manilow가 멋있게 불렀던 “I Write the Songs”, 밝았던 그 시절을 추억하고 싶어진다.

 

유학국사 장철환 선생님

아직도 잊을 수 없는 ‘학원’ 선생이 있다. 한국의 학원에선 선생은 필경 선생님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강사라도 불렀다. 일반적인 학교와 차이를 생각해서 그랬을 것이고 상대적인 지위와 존경도 그런 것들이 작용을 했을 것이다. 물론 학원의 강사님들도 질도 우수하고 존경의 대상이 될 만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지만 그것은 결국 예외적인 케이스에 속했다.

우리가 입시경쟁체제에서 학교를 다닌 한 학원은 존재했던 기억이다. 하지만 그것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아마도 내가 중앙고등학교 1학년을 다닐 때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학원은 안국동에 위치한 “실력센터 , 소규모의 조잡하고, 불결하고, 영세한 학원과 다르게 우선 아주 깨끗하고, 위치가 좋고 (안국동), 규모가 그 당시 기준으로는 큰 편이었다. 그런 것이 좋아서 나는 큰 필요성은 못 느꼈지만 그곳을 한번 다니게 되었다. 영어과목에 등록을 하고 다녔는데, 강사가 아주 수준급이었다. 절대로 지루하지를 않았고 정말 영어실력이 대단한 분이었다. 그러니까 강사 급이 아니고 선생 급이었다. 성함이 100% 확실치 않지만 아마도 김광순 선생님이 아니었을까.

이분은 나중에 정말 우연으로 내가 다니던 중앙고등학교로 오시게 되고 다시 만났다. 그런데 분명히 실력이 대단했던 그 분이 정식 선생님으로 오신 것 같지를 않았고, 역시 ‘강사’로 오신 것을 알았다. 남들은 잘 몰랐겠지만 나는 이미 그분께 배운 적이 있어서 참 반가웠다. 하지만 한 학기가 끝나고 소리도 없이 사라지시고 말았다. 다른 선생님께 물어 보아도 전혀 어떻게 된 것이지 사정을 모르시는 눈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나는 학원에 익숙해 졌는데 내가 부족한 것을 느끼면 그 과목만 가서 공부하는 그런 정도였다. 그러니까 소위 말하는 ‘종합반‘ 같은 것은 한번도 해 본적이 없었다. 제일 성과를 보았던 것은 화학 과목이었다. 정말 나는 그 과목에서 엉기고 있었다. 학교 선생님들께 문제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아마도 나의 기본실력에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을 계속 만회를 못하고 해 메는 식 이었다. 그것을 학원에서 한 학기 배우면서완전히 기초를 잡았고 결과적으로 학교에서도 아주 순조로이 화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중앙고교에는 최 정상급의 화학 선생님 두 분이 계셨는데, 김후택, 박택규 두 선생님들.. 개성과 스타일이 전혀 다르지만 화학 하나만큼은 정말 끝내주었던 “박사” 급들이었다. 인상적인 것은 별명 “깡패” 김후택 선생님.. 수업에 들어오실 때 백묵만 들고 들어오신다.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안 보시고 일사천리로 가르치신다. 그 반대로 박택규 선생님은 마치 대학교수가 되시듯 조직적으로 가르치신다. 특히 영어를 많이도 사용하셨다. 박선생님은 가끔 요새 본 영화 얘기를 곁들이며 수업을 기가 막히게도 이끄신다. 그때 “미리” 들었던 영화들: 신영균 주연의 “빨간 마후라“,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맨발의 청춘” 같은 영화들.. 학생입장불가라서 우리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던 영화들을 그 선생님이 ‘평’ 까지 곁들이시면서 재미있게도 이야기 해 주셨다.

결과적으로 나는 대학입시 때 화학시험을 거의 만점을 맞아서 합격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학원은 비록 영리적인 교육이었지만 필요할 때 잘 쓰면 크게 도움이 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대부분 강사와 학생들 사이의 관계는 그렇게 교육적으로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고, 그것에 대해서 크게 추억이나 존경심 같은 것을 가질 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학원의 필요성이 나의 코앞에 다가왔다. 이번에 문교부 유학시험이라는 ‘괴물’ 때문이었다.

그때가 1972년 쯤이었을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곧 바로 유학준비에 들어간 나는 미국유학의 어려움을 전혀 짐작도 못한 상태였다. $$이 제일 큰 문제였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때는 우선 BI (Before Internet) 25년 정도이니까 ‘정보’ 자체가 큰 걸림돌이었다. 그렇게 정보라는 것이 비쌌던 것이다.아마도 지금 그런 것들은 googling 만 잘하면 한 시간도 안 걸릴 것이다. 일일이 관계자, 선배들을 통한 귀동냥으로 들은 ‘도시 전설적인 이야기’ 들이 아주 많았다. 그 중에서도 여권을 받는데 100% 거쳐야 하는 조건 중에 버티고 있던 것이 이것, 문교부 유학시험이었다. 3과목의 시험인데 영어, 국사, 시사 등이 있었다.

영어는 물론 기대를 했던 것이고 나머지는 전혀 idea가 없었다. 세 과목을 모두 통과를 해야 했다. 제일 난감했던 것이 국사였다. 대학입시 때 조금 공부했던 것을 다시 해야 한다니.. 이때 선배들이 말하는 것이 있었다. 이 과목을 집에서 혼자 공부하면 99.9% 떨어진다고.. 이게 무슨 말인가? 그 이유는 물론 나중에 밝혀진다. 문교부 유학시험의 내막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반대로 99.9% 합격을 기대하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그것이 바로 “유학국사 장철환” 이었다. 요새 일본 드라마의 제목을 빌려서 유학국사의 “수험의 신” 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부랴부랴 이 유학국사 장철환 선생님의 학원을 찾아서 등록을 하고 강의를 듣게 되었다. 맙소사.. 완전히 강의실이 초만원 상태였다. 그것도 그럴 것이 결과적으로 “미국 유학을 가려면 이곳에 와야 한다” 라는 것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곳은 해외 유학희망 생들의 비공식적 집합 소가 된 장소였다. 강의를 들어 보면서 왜 이곳을 거치지 않으면 시험을 pass하기 힘든가 하는 이유도 짐작이 갔다. 이 장철환선생은 그 시험에 대해서는 수험의 신격 이었고 우선 무슨 문제가 날지, 그 답을 어떻게 써야 채점 관들의 ‘비위’을 맞출 수 있는지 그런 것을 오랜 경험을 통해서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더 놀란 것은 비록 유학국사시험에 맞추어 공부하는 것이었지만 이 장선생의 국사 실력은 정말 놀라울 정도였다. 그리고 강의스타일이 정말 정열적이었다. 에너지가 어찌나 뜨겁던지 꼭 목욕탕에서나 쓰는 제일 큰 towel을 허리에 감고 들어 오셔서 계속 땀을 닦으시곤 했다. 수준도 높아서 흡사 대학교의 사학과에서 강의를 듣고 있는 기분도 많이 들 때가 있었다. 그 분도 자기의 ‘실력’에 굉장한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 것들이 간접적으로 나타나는 때가 있었는데 그것은 강의 도중에 학생들의 출입을 거의 신경질적으로 막을 때였다. 보통 학원에서는 그런 것은 별로 문제가 안 되는데 이분만은 거의 이상할 정도로 반응을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심지어 화장실 가는 것까지 신경을 쓴 상태였다. 그것이 그분의 자존심이었을까.. 내가 열심히 가르치는데 어딜 나가냐..어떻게 늦게 들어올 수가 있느냐..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덕분에 때 늦게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서 외우는 수준을 훨씬 넘는, 격이 높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또한 이곳은 비공식적인 해외유학지망생들의 집합 소 역할도 했기 때문에 얽힌 이야기도 많았다. 우선 유학에 대한 정보를 많이 듣고 교환을 할 수가 있었다. 때때로 미국의 같은 대학에 갈 사람들도 이곳에서 미리 만날 수 있었다. 심지어는 미래 배우자까지 이곳에서 만나게 되는 수도 있었다.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개중에는 이런 목적을 가지도 온 사람들도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나도 이곳에서 만난 ‘남자’를 미국에서 다시 만나게 된 case도 있었으니까.

이런 인연으로 처음 유학시험에서 영어는 떨어졌어도 국사만큼은 합격을 할 수 있었다. 다음에 나머지도 합격은 했지만 이때 비로소 유학국사 장철환 선생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나중에 미국에서 만나게 된 유학생들도 농담으로 유학국사 장철환 선생님을 모르면 아마도 문교부 유학시험을 친 경력이 없었을 것이라고 말을 할 정도였다. 그들 중에 들은 얘기로, 하도 미국유학생들을 많이 접하다 보니 그들 중에 나중에 ‘대성공’을 해서 귀국을 한 ‘제자’들이 많아서 혹시 무언가 바라는 것이 없으신가 하고 물으면 “조그만 문방구 하나만 차려달라” 고 농담을 하신다고 들었다.

1970년대 말에 이 문교부유학시험은 없어졌다고 했지만 (해외유학자유화), 한때 이 제도는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외화를 그런대로 조절할 수 있는 손쉬운 도구로 쓰여졌을 것이다. 그리고 김포공항을 빠져 나오기 그렇게도 어렵던 시절에 이런 추억에 어린 뒷 이야기도 있었던 것이다. 유학국사 장철환 선생님도 이제는 연세가 꽤 들으셨을 듯 하다. 비록 정규학교의 은사님은 아닐지라도 그에 못지 않은 선생님이시지 않겠는가?

 

 

“Heart of Gold” by Neil Young – 1971

Nine Eleven, Lunatic Pastor, 가회동, R.I.P., Lucky

Nine Eleven, 9주년이 되었다. 그날은 싸늘할 정도의 아주 파아란 하늘의 밝고 밝던 가을 아침이었다. 보통 때와 같이 출근했지만, Rockwell Automation office에 들어 서자마자 모든 것이 이상했다. 이곳 저곳의 cubicle이 거의 비어있었고 몇 군데의 TV앞에 동료engineer들이 모두 모여서 그 화면에 완전히 얼굴들이 고정되어 있었다. 공기가 이상했다. 화면을 보니 무언가 움직이지 않고 고정된 모습만 보인다. WTC (World Trade Center)의 모습이고, 그 위에서는 시커먼 연기가 오르고 있는 화면이었다.

아하.. 경비행기가 잘못해서 부딪친 모양이구나..하고 물어보니 그것이 아닌 듯 하다는 대답들이었다. 조금 후에 다른 tower에 연기가 나기 시작하고, 모두들 얼굴들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게 만화영화가 아닌가? 침묵만 흐르고, 말들을 할 용기가 나질 않는 모양이었다. 나도 마찬가지.. 모두 일을 할 마음이 전혀 나질 않았다. Internet으로 화면이 옮겨지고.. 결국은 two towers모두 무너지는 climax가 보였다. 완전한 침묵..
National Emergency, All Airports Closed 라는 sign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모두들 침통한 모습으로 어슬렁 어슬렁 직장을 빠져 나왔다. 왜 그렇게 하늘은 파랗던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모두들 생각에, 세상이 한 순간에 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Highway는 거의 텅텅 비어가고 National Emergency sign은 계속 되었다. 거의 비틀거리며 집으로 들어왔다. 이 terrorist들이 앞으로 과연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 작정인가.. 짐작하기에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Pearl Harbor와 일본인들, 그 후의 강제수용소로 보내진 일본인들도 떠올랐다.

이슬람교도의 경전 코란을 불 태우자던 “미친” 목사 (이런 친구가 어떻게 ‘개신교’ 목사가 되었나?) 가 서서히 물러나고 있는 비겁한 얼굴을 보니 정말 밥맛이 없어질 지경이다. 거의 정신병자에 가까운 이런 놈을 따르는 ‘개신교’ 교인들의 정신상태도 사실 의심스럽다. 독일에 사는 이 목사라는 사람의 딸도 ‘아버지는 정신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 이라는 힌트까지 했다는데. 이것을 보니까 이곳에서 가장 빨리 유명해지는 방법중의 하나는 ‘코란을 불태우자는 계획’ 을 언론에 공표를 하는 것이다. 대통령을 비롯해서 국방장관까지 이 미친놈에 놀아난 것을 보니 참 어처구니가 없어진다. 정말, 정말, 이놈이야 말로 9/11 terrorists와 같은 급의 ‘사탄’이 아니던가?

3일전에는 결국 우리 fishlucky‘가 세상을 떠났다. 몇 달 전에 이미 그의 partner가 먼저 갔고 그 이후부터 lucky도 움직임이 아주 느려지기 시작해서 이미 나는 가족들에게 경고를 한 바가 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훨씬 오랫동안 거의 잠을 자듯이 살아온 셈이다. 아주 가던 날은 머리를 계속 모래에 묻으려고 하는 것을 보았다. 기분이 조금 이상하더니, 그 다음날 아침에 보니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작은 생물에 이렇게 감정적으로 진하게 연결이 된 것은 나로서는 처음 경험한 것이었다. 내가 이렇게 ‘약’해 졌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것은 상관이 없다. 생명의 유한성을 다시 한번 그 작은 생물체를 보며 느낀 것이다.

박민우 저, “가까운 행복” 이란 책을 조금 훑어 보았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단어가 있었다. “가회동” 이란 세 글자.. 소제목 “가회동 거닐며 도넛 먹기“에 있는 단어였다. 이게 무언가, 가회동에서 도넛을 먹다니.. 하루가 너무나 힘 들었던 샐러리맨의 휴식처로 찾은 곳이 그곳이었다. 나의 어린 시절의 꿈이 아롱거리는 나의 고향, 가회동이 건재하다 못해서 이제는 휴식처가 되었구나. 그 부분을 인용을 해 보면 다음과 같다.

안국역 2번 출구, 아무 생각 없이 올라가 보았다. 주택가인데도 도로는 넓고 인적은 드물었다. 평화로웠다. 대로변을 따라가다가 가회동 한옥 마을이라는 표지가 보이자 지체 없이 골목으로 들어섰다. 찬란하게 이어지는 한옥들. 드문드문 공사를 하고 있었고, 가끔씩 관광객들과 마추쳤지만 그들 역시 나처럼 나직한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반가운 동지들.

흥미로운 말이 ‘안국역 2번 출구’.. 아니 그곳에 안국역이 있었구나. 그러니까 안국동에 연결이 되어서 그랬을까. 아하.. 이곳에도 지하철이 생겼구나.. 아니 가회동 한옥마을은 또 무엇이냐? 동네 이름을 그렇게 바꾸었나? 의문은 그 다음의 ‘관광객’ 에서 풀렸다. 아하.. 민속촌처럼 이곳도 문화재로 지정이 되었구나.. 그러니까 관광객이 오겠지. 나의 생각은 온통 50년 전으로 날라간다. 최소한 나의 자라던 곳이 상전벽해가 되지는 않았다는 안도감도 생겼다. 하지만 그곳이 거의 ‘화석’같은 역사물이 되어간다는 사실에 이 오랜 세월의 장난과 횡포에 소름이 돋는다.

 

a/c woes, books, on death, 57 friends etc.

아침이 갑자기 깜깜해 졌다. 6시 반에 일어나려면 너무나 어두워서 조금 귀찮게 느껴지기도 한다. 해가 그 동안 그렇게 짧아졌나. 지난 며칠은 평균 이하의 기온과 아주 건조한 날씨로 아침에는 추위를 느낄 지경이었다. 이렇게 앞으로 오는 것의 맛을 조금 보여주는 것이지만 다시 rebound할 것이고 사실 그렇게 되었다.
이번 여름에는 a/c (에어컨)들이 하도 stress를 많이 받아서 그것을 service하는 business는 아주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라서 아래층 unit에 문제가 생겨서 한번 service를 받은 적이 있었다. 일단 truck이 오면 문제가 없더라도 최소한 $100은 각오를 해야 한다. 다행히 큰 고장이 아니고 over current로 인해서 wire가 타버린 정도였다. 조금 아까운 것이, 그 정도였으면 내가 고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professional tool을 쓰니까 나와는 근본적으로 수준이 다를 것이다. 그 service guy가 나온 김에 우리 집의 2 a/c unit의 checkup을 부탁했더니 의외로 결과가 좋았다. 거의 15년이 된 것인데 조금 이해는 안 가지만 그것이 사실인 모양이다. 대신 energy efficiency가 형편 없는 건 사실이다. 생각에 내년에도 올해처럼 덥다면 newer model로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된다.
이틀 전 낮부터 기온이 올라서 2층의 a/c가 낮부터 가동이 되었는데, 갑자기 조용해졌다. 암만 해 보아도 모든 것이 조용하다. system이 아주 죽은 것이다. 우와.. 여름이 거의 다 간 다음이라 조금 덜 걱정은 되지만 9월 달도 더위가 만만치 않은데.. 각가지 근심스러운 생각이 들었고.. 혹시 system이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부리나케 thermostat를 열어서 voltage checkup을 해 보니 전혀 voltage가 없다. 이번에는 전번의 경험도 있고 해서 내가 공구를 들고 attic으로 올라가서 잘 살펴보았다. 우여곡절 끝에 결론을 내렸다. Integrated Control Unit에 붙어 있는 24V transformer가 24V를 공급하지 못하는 것이다.

Temporary a/c transformers
Temporary a/c transformers

우선 조금 안심을 했다. 이 정도면 그렇게 큰 비용이 들지는 않을 듯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pro들에게 맡기면 최소한 몇 백$은 우습게 들것이다. 최소한 transformer만이 문제라면 내가 고칠 수도 있지 않은가? Internet에서 White-Rogers Control Unit의 circuit diagram을 download해서 보았더니 역시 이것은 computer controlled system이었다. 이것이라면 식은 죽 먹기라는 자신이 생겼다. Online으로 replacement transformer를 $40정도에 order를 하고, 이것이 도착할 때까지 어떻게 더위를 견디나 하는 생각을 했다. 침실과 얼마 전부터 쓰기 시작한 home office등이 다 그곳에 있어서 조금 신경이 쓰였다.
혹시 집에 24V transformer가 있을까 했지만 없었다. Door bell 에는 20V transformer를 쓰고 있어서 쓸 수가 없었고, 아래층의 a/c unit에서 쓰는 24V transformer를 며칠 동안 빌려서 쓸까 하고 내려가 보니 이것은 완전히 a/c unit에 고정이 되어있어서 쉽게 떼어낼 수가 없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하더니.. 결국은 security camera에 쓰려고 오래 전에 사 놓았던 12V transformer 2개를 찾아 내었다. 이것을 series(직렬)로 연결하면 24V가 되는 것이다. 부지런히 wood block에 두 개를 고정시키고 wiring을 해서 a/c unit에 연결을 하였다. 만약에 다른 것이 문제라면 이것은 모두 허사가 되는 것이라서 손에 땀을 쥐고 에어컨을 틀어 보았다. 와~~~ 만세! 역시 문제는 transformer였다. 나의 추리가 맞았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order했던 ‘진짜’ transformer가 도착할 때 까지만 쓸 예정이다. 덕분에 이제부터는 에어컨의 control system은 언제라도 자신 있게 손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중앙고교 동창 유정원 email을 주었다. 이 친구의 편지tone은 나이에 맞지 않게 활발하고 장난스럽다. 45년 전의 얼굴로 그것을 상상하려니 조금은 comic하기도 하다. 어머님 장례는 순조로이 끝이 났는지.. 나의 blog이 너무나 과거에 얽매어있는 것이 아니냐는 comment는 사실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해 주었다. 고맙다, 정원아. 과거가 없는 현재는 없고, 미래도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는데 문제는 그런 것들을 얼마나 많이 생각하느냐 하는 것에 있겠지. 기본적으로 요새의 일들은 ‘이야기’ 거리로는 조금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하지만 정원이 말 대로 요새도 자세히 보면 얼마나 깊은 이야기가 많이 있겠니? 그저 습관화되고, 타성에 젖어서 못 보는 것일 수도..
중앙고 3학년 때의 반창(같은 반 동창, 요새 새로 배운 용어) 권명국도 return email을 보내주었다. 명국이는 정원이와 다르게 경사인, 결혼식으로 인해서 소식을 받았다. 갑자기 옛 동창들이 주변에 나타나는 것 같아서 정말 반갑다. 이 Atlanta지역에는 사실 내가 유일한 중앙57회라서 더욱 그렇다. 명국이는 아직도 ‘신나게’ 일을 하는 모양이다. 정말 부럽다. 그 친구의 듬직하고 남성스러운 얼굴이 머리에 선~~ 하다. 1987년에 미국에 왔다고.. 이 친구도 “판에 박힌 표준” 적인 인생을 보낸 것이 아니었구나. 고대 토목과를 다닌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어제는 꽤 오랜만에 Cobb Library 찾았다. 일부러 간 것이 아니고 그 근처에 가는 김에 들린 것이다. 전에 빌렸던 실화적인 소설 “이민자(Immigrants)”를 다 보기도 전에 return을 했는데, 혹시 다시 빌릴 수 있나 했는데.. 이미 대출이 된 상태였다. 그 책이 1980년대 큰 인기 있었던 소설이라고 하던데 나는 전혀 깜깜하였다. 그런 쪽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니까. 독일태생의 저자가 영국에 ‘이민’을 해서 쓴 소설이라 아주 관심이 간 책이었다. 대신 다른 Korean titles 4권을 빌려왔다. 그 중에 한 권은 전에 한번 빌린 것인데 또 한번 보고 싶었던 책이다. 문요한이란 사람이 쓴 “굿바이, 게으름 이란 책이다. 이런 류의 책들은 이곳에 정말 많이 있다. 하지만 한글로 읽은 것은 조금 기분이 다르다고 할까.
같은 류 (self-help)의 책으로 Brenda ShoshannaThe Anger Diet, 번역제목: “마음의 불을 꺼라” 가 있다. 이것은 번역서이다. 요새는 하도 화를 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어서 이것도 사회적인 문제일지도 모른다. 나도 그 중에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정신세계사라는 출판사의 번역서인데 단기 4339년 발행이란 것이 아주 흥미롭다. 정말 오랜만에 단기 연호를 본다. 우리 국민학교 6학년 때까지 단기를 써서 익숙한 연호가 아닌가. 나의 국민학교 2학년이 4288년 이었다. 분명히 그때를 기억한다.
다음 책은 박민우의 “가까운 행복 Tea Bag 이라는 제목의 수필, 산문집이다. 나는 이 저자를 전혀 모른다. 1973년 생이라니까 내가 미국에 오던 해구나. 나의 조카보다 한살이 많은 저자.. 이 저자가 어떠한 인생의 경륜으로 행복을 논 하려나 기대를 하며 빌려왔다.
마지막 책은 Pauline Chen이란 중국계 미국인 여자 외과의사의 죽음에 대한 심각한 수필집이다. 원제는 “Final Exam“이고 번역제목은 “나도 이별이 서툴다“였다. 이 나이에 죽음에 관심이 없다면 조금 문제가 있을 것이다. 나는 종교적인 각도의 죽음 이외에도 다른 각도의 죽음도 무척 많이 관심이 간다. 추상적인 죽음이 아니고 구체적이고 바로 코 앞에 보이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그런 것은 아마도 죽음을 구체적으로 매일 다루어야 하는 의사들에게 더 많은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머리말에도 나온다.. 인간적인 존엄성을 잃지 않고, 가급적 평화롭게 마지막을 맞도록 하자고.. 나도 동감이다. 기계적인 수명의 연장은 그런 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Lincoln Exhibit
Lincoln Exhibit

지난 일요일에는 예정대로 Atlanta History Center에서 방금 시작한 Lincoln Exhibit에 단출한 우리식구가 다녀왔다. 정식 명칭은 “WITH MILICE TOWARD NONE THE ABRAHAM LINCOLN BICENTENNIAL EXHIBITION LIBRARY OF CONGRESS” 라는 아주 긴 제목이었다. 처음 전시되는 유품도 많고, 이렇게 많은 것이 한 곳에 모인 것도 처음이라고 해서 흥미로웠다. $16 admission ticket이 말 하듯이 아주 비싼 것은 아니지만 아주 싼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작은딸 나라니가 그곳에서 근무 하는 덕분에 무료로 구경을 할 수 있었다. 현재의 미국이 있게 한 장본인이 바로 Lincoln대통령이라는 것을 알면 더욱 큰 감동을 가지고 구경을 하게 된다. 그 반면에 너무나 인간적인 Lincoln 또한 하나도 미화됨이 없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수준급의 전시였다. 내가 제일 감정을 억누를 수 없던 것은 역시 암살 후에 사체에서 나온 소지품들.. 현재 기준으로 보면 조잡하기 이를 데 없는 안경이 더욱 그랬다. 그 암살 당시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또한 ‘마누라 복’도 없던 그가 불쌍하기도 했다. 또한 그 유명한 Gettysburg의 연설, 271 단어의 짧은 연설문, 2분 15초 동안 연설을 했다는 그 연설문의 필사본도 거기 있었다. 그 잉크들이 어떻게 아직도 그렇게 생생할까. 마지막 부분의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of the people의 글씨 또한 금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 그가 General Sherman을 시켜 초토화 시켰던 적군의 요충지 Atlanta에서 열린 것은 역사의 irony가 아닐까.

내가 제일 혐오하는 것들이 extremism, extremist 같은 류의 것 들이다. 최근 10여 년에 걸쳐서 이런 것들이 아주 유행을 하고 있고 어는 곳에서나 판을 친다. 우선 뉴스에 굶주린 대중을 흥미롭게 해서 그런지, 그것이 $$으로 연결이 되어서 그런지, 아니면 무엇인가? 정치인들도 그렇지만 더 가증스러운 것이 허울좋은 신앙인들이다. Christian중에 더욱 그렇다. 하기야 Hitler도 그 예수님을 팔아가며 유태인들을 죽였지만 그것이 바로 extremism의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요새는 Koran을 불태우자며 거품을 풀고 있는 거의 ‘미친듯한’ 목사가 미국 Florida에 건재하고 있다. 남의 종교를 그렇게 증오하면서 어찌 ‘사랑의 종교’의 목사 짓거리를 하려는가?

 

대학시절, 그것도 초창기에 많이 듣던 추억의 두 ‘명곡’을 다시 들었다. 이것에 더 설명이 필요할 수가 없다.

 

 

Summer Wine – Nancy Sinatra & Lee Hazlewood:

Lee Hazlewood는 몰라도 Nancy Sinatra는 누구인지 잘 안다. 그녀의 husky voice는 그녀의 아버지와 다르게 독특한 매력이 있다. 날씬한 몸매와 맞지 않게 거의 ‘여성운동의 선구자’같은 노래들이 많았다

 

 

The Rain, The Park and other Things – The Cowsils:

노래의 제목이 그 당시에 아주 시적인 인상을 주었다. 그 당시 이들 그룹은 미국은 몰라도 한국에서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Hair같은 것은 크게 유행을 했다. 그들의 노래중에 나는 이곡을 제일 좋아했다. 제목처럼..

 

Labor Day, de facto birthday, Lincoln Exhibit

오늘은 Labor Day 공휴일을 앞둔 토요일이라 기분부터 느긋해지고 마음도 편함을 느낀다. 게다가 날씨가 예보대로 거의 완전한 가을날씨로 변했다. 3개월 만에 보는 청명하고 드높은 파~란 하늘, 햇살은 거의 여과됨이 없이 내려 쪼이는 기가 막히는 날씨다. 그 옛날 고국의 공해 없던 하늘을 연상시킨다. 아이들이 일방적으로 엄마의 생일을 오늘로 옮겨 놓았는데 결과적으로 잘도 잡았다. 그러니까 오늘은 엄마의 de facto birthday가 된 것이다. 늦은 점심을 준비 했는데 말에 의하면 Southern style cooking 이라고 했는데 아주 맛이 있었다. 나라니는 집에서 나가서 사는 것이 즐거운 것 같이 보인다. 얼굴이 벌써 활기에 차있다. 요새의 경제사정은 사실 나가서 살던 아이들이 부모 집으로 들어오는 추세라고 들었는데, 우리 작은 딸은 반대의 케이스가 되었다. 큰딸 새로니는 얼마 전에 VanderbiltPeabody College에서 대학원 course를 시작하였는데, 생각보다 학생생활에 다시 잘 적응하는 것 같이 보인다.

내일 일요일은 성당에서 온 후에 Atlanta History Center에서 시작하는 Lincoln Exhibit에 가기로 했다. 나라니가 그곳에서 일을 해서 그런 행사들의 정보를 빠짐없이 알려주는데 그 덕분에 작년에는 Andy Williams의 행사에도 갈 수 있었다. 내일 하는 것은 Southern states에서는 유일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Lincoln의 유물들을 직접 본다는 것은 사실 쉽지 않아서 기대가 된다.

 

9월의 첫날에..

휴~~~ 지난 밤에 예기치 않게 전기가 나가버렸다. 맑고 써늘한 밤에 전기가 나간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그것도 거의 2시간이 지난 다음에 돌아왔다. 날씨에 의해서 벼락같은 것이 치면 사실 몇 초 동안 깜빡 거리는 것이 보통이니까, 이것은 분명히 그런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99% 짐작에 바로 옆의 Roswell Road 확장 공사에 의한 것일 것이다. 4차선을 거의 8차선으로 확장하는 소위 말하는 Obama’s Economic Stimulus Project의 하나다. 그러니까 ‘공짜’로 연방정부에서 받아서 하는 것이니까 우리의 local tax 는 거의 쓰이지 않는 것이다. 그 정도의 큰 공사라서 분명히 지하로 뻗어있는 고압선을 옮겨야 하고.. 그러다가 앗차! 했을 것이다. 우리 집의 computer network system은 매우 ‘약한’ battery backup (UPS)으로 단전으로부터 보호되어 있다. 주로 잠깐 동안만(최대 10분 정도) 정전을 막아주는 것인데 2시간은 무리, 무리다. 아침에 보니까 network system이 엉망이 되어 있었고 복구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난 몇 달처럼 무더위였으면 아마도 초저녁 잠을 설쳤을 것이지만 다행히 시원한 밤이었다.

9월 1일은 나의 아내 연숙의 생일이다. 나이를 세기는 이제 조금 재미가 없고 그저 우리 집 식구 4명 중 2명은 모두 1월 달에, 나머지 2명은 9월 달에 생일이 있다는 정도지만, 조금 재미있는 사실은 그 같은 달의 두 사람 생일의 날자 사이가 정확히 16일 이라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정말 우연이었다. 아이들이 모두 집에 있었을 때는 조금 시끄럽게 보내야 했다. 아이들이 그렇게 생일이란 것을 즐기는 줄 몰랐다. 너희도 나이가 조금 들어 봐라.. 하면서 세월이 흐르고 지금은 전에 비해서 조금 조용해진 편이고, 사실 조금 편한 기분이다. 그래도 서울에 계시는 처형께서는 꼭 전화를 주신다. 처형 댁도 모두 건강한 나날을 보내시기를 기도해 본다.

얼마 전에 IKEA 에 가서 Tundra Laminate floor package 15개를 사왔다. 일층의 나머지를 모두 나무 마루로 끝내려는 계획이다. 물론 dining room으로 경험이 생겨서 조금 자신은 있지만 반대로 어떤 surprise가 나를 기다리는지 그것도 조금 걱정이 된다. 이런 일들은 언제나 꼭 예상치 않은 ‘복병’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제일 걱정이 되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방과 방으로 연결되는 부분이다. 그러니까 transition handling인데, 내가 pro가 아닌 이상 언제고 나를 괴롭힐 듯 하다.

 

9월은 식구 두 명의 생일도 있지만, 그 악몽의 9/11 terrorist attack 기념일이 버티고 있다. 정말 괴로운 기념일이다. 그렇다고 피하거나 생각을 안 할 수도 없고,사실 그래서는 안될 것이다. 세월이 아직도 그것을 잊을 만큼 흐르지 않았다. 그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의 영혼들을 기억한다. 그 surreal한 느낌을 어떻게 말로 표현을 할 수 있을까? 또한 회교도들을 어떻게 보고 생각할 것인가.. 참, 정말 괴롭고 어려운 문제다.

9월 하면 생각나는 노래는 역시 Come September란 노래가 있다. 하지만 가슴에 더 와서 닿는 듯한 9월의 기분은 역시 패티 김의 “구월의 노래” 가 아닐까. 같은 노래를 혜은이도 불렀는데 역시 참 듣기 좋다. 아내 연숙이 대학시절 대학교 정문의 수위아저씨가 당신은 꼭 혜은이를 닮았다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나와 직접적으로 노래에 대한 추억은 없지만 간접적인 인연으로 들어 보았다.

8월이 간다

지긋지긋한 8월이 드디어 간다. 벌써 어제 아침부터 시원한 바람이 산들거리는 듯 느껴지고 실제로 아침의 바깥 기온도 화씨 70도 밑으로 떨어졌다. 지난 세달 동안 계속 70도를 넘었으니까 이것도 조그만 뉴스 꺼리다. 그러니까 지구는 변함없이 태양을 돌고 있다는 것이 간접적으로 증명도 되는 것이 아닐까?

얼마 전에 중앙 57회 동기 회에서 교우 유정원의 모친상 소식이 왔다. 이제는 세월이 그렇게 된 모양인지 부모님 타계 소식 아니면 자녀들의 결혼식 소식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모친상의 소식은 나에게 더 진한 슬픔을 준다. 내가 7년 전에 이미 겪었기 때문일까. 그래서 불현듯 email로 나마 위로를 하고 싶어서 보냈다. 답장은 기대하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누구라는 것을 모를 수도 있을 것 같고, 또 애도기간이라 바빠서 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정원이는 곧바로 회신을 주었는데, 내가 놀란 것은 내 이름(이경우)의 “경”자가 한자로 “빛날 炅”이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유정원의 “밝을 晶” 자를 기억하고 있다. 아득하게 무슨 time machine를 탄 기분이었다. 45년 이상 완전한 연락의 단절이 이렇게 쉽게 연결이 되는 것은 참 경험하기 힘든 일이 아닐까. 참 좋은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나의 중앙고교 추억 시리즈 마지막 편인 고3 편을 오늘 천신만고 끝에 ‘탈고’를 해서 올려 놓았다. 이미 예상은 한 것이었다. 기억력을 더듬는 것이 이번에는 그렇게 힘이 들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노력을 하니까, 그 동안 잊고 살았던 것들이 하나 둘씩 살아 나왔다는 사실이었다. 다시 잊을세라 부리나케 쓴 것이다. 나의 가장 큰 희망은 우리 교우 친구들이 이것을 보고 그들의 기억도 같이 합세를 했으면 하는 것이다. 물론 큰 기대는 못 한다. 우리세대는 알려진 대로 digital generation은 절대로 아니니까.

Hurricane Katrina: 허리케인 카트리나..5주년이 되었다. 정말 지독한 것이었다. 아마도 카테고리 3급 이었을 것이다. 5년 전 그날(2005년 8월 29일), 미국의 큰 도시 하나가 자연재해로 완전히 물에 잠겼다. 공상과학 영화 같은 데나 나올듯한 각본이 현실화 된 것이다. 예측하기에는 너무나 커다란 재해라서 사실 대비하기는 불가능 했을 듯 하다. 1800여명이 죽고, 많은 사람들과 동물들이 행방불명이 되었다. 문제는 그곳의 피해자들이 대부분 흑인들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사망률은 이런 것에서도 다른 집단과 비교가 되지를 않는다. 흑인 대통령은 나왔지만 아직도 그들이 갈 길은 먼 것인가.

8월 달, 지독한 더위였지만 그런대로 집 일을 한 결과도 있었다. 나는 현재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것을 전적으로 맡고 있고, 나머지 식사의 dish wash또한 나의 담당이다. 처음에는 시간도 걸리고 기분도 찜찜한 것도 있었지만 습관이 되고 나니 사실 기분이 좋을 때도 있다. 나도 무언가 도움이 되었다는 만족감일지도 모른다. 집안 일이란 주로 handyman(일당목수일) 들이 하는 일들이다. 나의 carpentry실력은 조금 초보를 면할 정도다. 하지만 시간에 별로 쫓기지 않고 일을 할 수 있는 큰 이점도 있다. 올 여름의 major project는 역시 아래층에 laminate floor를 까는 일이다. 보기에 그렇게 쉬운 것이 손을 대고 보니 완전한 monster였다. 8월 중순까지 dining room이 끝이 났다. 그 다음을 계속해야 했는데 floor자체에 문제가 있어서 손을 보아야만 했다. 결국 subfloor를 뚫고 들어가는 대공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며칠 전에 끝이 나고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마루공사를 계속하게 되었다. 사실 언제 끝이 날지는 모른다.

오늘 아침 New York Times에 기고된 한 논평을 보았다. 저자의 이름이 곧바로 눈에 들어왔다. Paul Wolfowitz 였다. 그는 소위 말하는 neo conservative그룹에 속하는 ‘매파‘ 라고 할 수 있다. 이 논평은 이락 전쟁이 일단 끝나면서 한국전쟁과 비교를 한 것이다. 결론 부터 말하면 철수를 하되 상당수의 전투병력을 남기라는 것이고, 한국전쟁이 휴전이 되면서 미군이 상당히 남아서 전쟁의 재발을 막고 결과적으로 현재 한국의 정치, 경제 발전을 가능케 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말은 되는 이야기다. 문제는 60년 전의 전쟁이란 것과, 전혀 다른 지정학적, 문화적인 조건 등을 어떻게 감안할 것인가.

 

중앙고교의 추억(3)

중앙고 3학년 8반, 1965년
중앙고 3학년 8반, 1965년

중앙고교 추억 시리즈마지막 편이 그렇게 쓰기가 힘 들었다. 시작이 반이라고 계속 나를 push하곤 했지만 그 시작이 그렇게도 힘이 들었다. 왜 그럴까? 추억거리가 별로 없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너무나 많아서 그랬을까? 기억을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을까? 이것들 중의 어느 것도 아닌 것 같다. 굳이 따지자면 내가 가장 보물처럼 간직하고 싶었던 그 시절 이야기들의 끝을 맺는 것이 섭섭해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추억할 수 있는 능력에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최복현 교장 선생님, 1965년
최복현 교장 선생님, 1965년

1965년은 지난해의 6.3사태 같은 정치적인 불안을 그대로 안고 있었지만 박정희 정부는 최소한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경제발전에 모든 운명을 걸고 있었고, 한일외교정상화가 그것의 전제조건이 되었다. 해방 된지 겨우 20년 만에 국민감정이 그렇게 쉽사리 변할 리가 없었다.  지난해의 도쿄올림픽으로 일본은 튼튼한 경제기반으로 경제대국으로의 첫걸음을 걷고 있었고 그것에 걸 맞게 ‘고자세’로 한국을 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독한’ 냉전체제의 국제정세가 우리의 국민감정 같은 것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반공’에서 출발을 했으니까.

그 해 가을에 박정희 정부는 완전히 미국과 보조를 맞추려, 본격적인 전투부대인 청룡부대월남으로 보냈다. 그 전해에는 이미 비전투 부대인 비둘기부대를 보냈다. 서서히 월남전이 국내의 뉴스에 정기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때였다. 반공의 이념을 실력으로 보이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경제적인 측면도 무시할 수 없었다. 숙적인 일본이 우리의 6.25전쟁 중에 엄청난 경제적 이득을 챙긴 것을 보면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것 들이었다.

짱구, 정운택 선생님, 1965년
짱구, 정운택 선생님, 1965년

그런 배경에서 고교3학년을 맞은 우리들은 간접적으로나마 나라가 처해있는 사정을 모를 리가 없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공부 잘해서 나라에 충성’하는 그것이었다. 그것의 첫 조건이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이었다. 특히 1965년에 우리 중앙고교는 벌써 최복현 교장선생님의 원대한 ‘6개년 계획’의 3년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우리학년이 이루어야 할 목표 (서울대 몇 명, 연고대 몇 명 같은)는 사실 아주 어려운 듯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정확한 목표는 사실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목표가 주는 심리적인 효과였다. 그것은 참으로 효과적인 campaign이었고, 심지어는 ‘재미’로 느껴지기도 했으니까.

나의 짝꿍, 원병태
나의 짝꿍, 원병태

고교 3학년이 되면서 시작된 수업에서 느끼는 그 신선한 긴장감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을 한다. 무슨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떠나는 가미가제 특공대원 같은 그런 심정이었다. 그런 마음 가짐은 사실 대학입시까지 신기하게 이어졌다. 이것에 대해 나는 아직도 우리 최복현 교장선생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 비록 최교장 선생님은 2학기가 되면서 서울시 교육감이 되셔서 모교를 떠나셨지만 그 분이 남긴 것은 참 큰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큰 계획의 뒤에는 후유증도 있었다. 불과 몇 번의 시험과 지난 해 학기성적으로 3학년 학급배정을 한 것이 그 중에 속한다. 쉽게 말하면 성적 순위로 분반을 한 것이다. 그런 반 배정에 개의치 않고 열심히 공부를 할 수도 있겠지만 감수성이 예민한 친구들은 실망과 좌절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화학반, 목창수
화학반, 목창수
유학준비, 윤중희
유학준비, 윤중희

그때 분반은 문과와 이과로 나누어 졌는데 이과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나의 8반은 이과에 속했다. 나는 원래부터 전기,전자공학 쪽으로 방향을 정했기 때문에 당연히 이과를 선택한 것이다. 다행인 것은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정책이 압도적으로 이공계 쪽은 선호한다는 사실이었고, 각 대학도 그것을 반영하듯 최우수 학생들이 가는 곳은 예외 없이 이공계, 특히 공대 (화공과, 전기과, 기계과 같은) 쪽이었다.  최고의 커트라인은 몇 년 째 서울공대 화공과가 독차지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문제점은 공부만 잘하면 거의 무조건 공대로 보내는 ‘어처구니 없는’ 풍토였다. 공대 쪽에 적성이 맞고 안 맞고가 크게 문제가 되지를 않았다. 심한 경우에는 전기, 기계 같은 것을 싫어해도 수학만 잘하면 그곳으로 간 것이다.

나의 앞자리에는 고2때부터 옆에 있었던 김진수가 앉았고, 뒤에도 오래된 친구인 이종원이 앉았다. 바른쪽 옆에는 원병태가 앉았는데 모두 나에게 좋은 친구들이었다. 하지만 대학에 갈 때는 모두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김진수는 해군, 이종원은 외대, 원병태는 고대로 가버렸다. 원병태는 사실 키가 상당히 큰데 어떻게 나의 옆에 앉게 되었는지 모른다. 담임선생님은 별명이 짱구정운택 선생님이셨는데, 조금 흥분을 잘 하시지만 속 마음은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다. 이런 모든 것들이 그 긴장되는 고3시절을 조금이나마 편하게 해 주었는지 모른다.

007, 고석찬
007, 고석찬
Love Potion, 이영윤
Love Potion, 이영윤

왼쪽 옆으로는 목창수, 문영직, 허영식, 차정호, 윤중희 등등이 앉았다. 바로 뒤 이종원의 뒤에는 고석찬, 이영윤이 앉았는데 이 두 친구들은 대학시절 종로2가에서 우연히 만났다. 고석찬의 유머러스 한 표정도 여전했고 이영윤의 멋진 미소도 여전했다. 어떻게 그 둘이 같이 있었는지 모른다. 아마도 그들은 졸업 후에도 계속 만났던 모양이다.고석찬, 그 당시 피카디리 극장에서 개봉된James Bond  “007 위기일발 (From Russia with Love)” 영화를 가지고 신나게 이야기를 하곤 했다. 사실 처음 개봉되었을 때 미성년자는 볼 수가 없었고 나중에 그것이 풀어져서 가서 보았다.  물론 검열과정에서 많이 손을 보았을 것이다. 그 당시 나는 그것을 모르고 그 영화를 보기도 전에 보았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장난으로) 고석찬이 비웃으면서 미성년자가 어떻게 그것을 보았냐고 꼬집었다. 금새 거짓말이 들통이 나고 나는 조금 창피했다. 나는 분풀이라도 하듯이 나중에 가서 본 것이다.

이영윤은 미국 pop song을 비롯해서 노래를 좋아한 듯하다. 그가 잘 따라서 부른 노래는 “Love Potion No. 9” 이란 그 당시 유행하던  팝송이었다.  그리고 고2때 정귀영 Al MartinoI love you more..를 너무 좋아해서 따라 불렀다면 이때는 정귀영이 황석환으로 바뀌었다. 노래는 Matt MonroWalk Away로 바뀌고..  나도 그 당시 그 노래를 무척 좋아했지만 황석환은 더 좋아했나 보다. 교실에서 크게 부르며 다녔으니까. 나는 그 때 Matt Monro가 영국가수라는 것을 몰랐다. 지금 다시 45년 만에 찾아서 들어보니 역시 기가 막힌 노래와 목소리였다. 여자로 치면 아마도 미국의 Karen Carpenter에 버금가는 그렇게 티없이 맑은 목소리였다. 나중에 그의 노래, Born Free, Wednesday Child, Portrait of My Love같은 것도 무척 좋아했는데 다만 미국에서 오래 살다 보니 이곳의 풍조에 따라 다른 나라의 노래들을 거의 잊고 살았을 뿐이다.


 

From Russia With Love – Matt Monro
1965 봄 쯤에서 그 소문이 자자하던 James Bond 007 시리즈의 “007 위기일발” 이 피카디리 극장에서 개봉이 되었다. 반드시 일본을 통해서 들어오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니까 아마도 1964년 쯤 나온 영화가 아닐까. Sean Connery도 멋이 있었지만 Matt Monro의 영화 주제곡 또한 못지 않게 멋이 있다.

 

 

Love Potion No. 9 – The Searchers
이영윤이 잘 따라 불렀던 이 노래, 사랑의 향수 9번, 그 당시에 라디오에서 잘도 흘러 나왔다. 비디오를 함께 보니 The Beatles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나, 차림새가 아주 비슷하다.

 

 

Walk Away – Matt Monro
황석환이 좋아하던 거의 명곡에 가까운 노래, 가사를 들어보면 더욱 가슴이 찌릿해진다. 숙명적으로 맺지 못할 사랑을 떠나 보내는 남자의 절규.. 참, 슬프다.

 


"관조", 백정기 선생님
“관조”, 백정기 선생님
고문, 주왕산 선생님
고문, 주왕산 선생님
국문학사, 김창현 선생님
국문학사, 김창현 선생님

그 당시 중앙고 3학년 교사 진은 상당한 수준에 있었다. 아마도 최교장선생님의 배려였을 지도 모른다. 국어의 백정기 선생님, 정열적으로 가르치시고 입시국어에는 외부에도 잘 알려지신 분이다. 입시전문지인 월간 진학 지에 글도 실으셨는데 그 글을 안 읽은 학생들을 나무라기도 하셨다.  백선생님의 정열적인 강의 중에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은 “관조“에 대한 것이었다. 특히 인상적인 수업은 역시 주왕산 선생님의 고문(古文)시간이었다. 확실히 는 모르지만 주 선생님은 주시경님의 자제분이셨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그 고문강의는 더 무게가 있었다. 특히 “훈민정음, 용비어천가” 의 강의는 재미와 더불어서 이런 것을 평생 공부해도 재미있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김창현 선생님의 국문학사도 아직도 기억에 남을 만큼 명 강의였다. 특히 김선생님은 개인적으로도 향토역사 같은 것에 관심이 많으셨던 것 같은데 그런 해박한 지식이 강의 때마다 우리에게 전해져 왔다.

숯장사, 원성욱 선생님
숯장사, 원성욱 선생님
대추방망이, 박시희 선생님
대추방망이, 박시희 선생님
썩은 살, 손영섭 선생님
썩은 살, 손영섭 선생님

담임 정운택 선생님, 숫제 일본 수학참고서를 그대로 들고 문제를 내시고 가르치셨다. 왜 그런지 그 당시는 일본의 입시풍조가 그대로 시험에 반영이 되곤 해서 그런 모양이었다. 특히 미적분을 다루는 해석시간은 숯 장사 원성욱 선생님의 독무대였다. 얼굴이 까매서 그런지 숯 장사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는데 그것은 명 강의였다. 기하 (geometry)는 “썩은 살, 깨막이“, 손영섭 선생님이 담당하셨는데 얼굴에 걸맞지 않게 항상 멋지게, 맞춘 듯한 옷을 입으시고 가르치셨다. 영어(문법)는 옆 반인 7반의 담임 “대추방망이“, 박시희 선생님이 작은 키에 맞지 않게 폭 넓고, 크게 잘 가르치셨다. 항상 산더미 같이 print물을 들고 들어오셨는데,  ‘마누라가 밤새고 typing‘한 것’ 이라는  말씀을 빼놓지 않으셨다. 특히 이 선생님은 독자적으로 개발한 입시용 영어비결이 있었다. 특히 문법을 외우는 방법을 ‘한시’ 나 시조같이 음률을 넣어서 외우도록 했다.

나는 3학년이 시작되고 서울고 출신으로 그 당시 서울공대 섬유공학과에 다니 던 송부호 형의 지도를 몇 달간 받았다. 솔직히 수학을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어쩔 수 없이 과외지도를 받게 된 것이다. 어머님 친구의 아들이 서울고 출신이라 그쪽으로 부탁을 했더니 송부호형이 걸린 것이다.  조금은 수줍은 듯한 형인데 참 자상하고 때로는 재미도 있었다. 그때 그 형에게 참 많이 배웠다. 수학 자체보다도 입시 체험담 같은 것이 더 재미있고 도움이 되었다. “James Bond: 007 위기일발” 영화도 사실 그 형과 같이 피카디리 극장에서 본 것이었다.

"똥자루", 정경섭 선생님
똥자루“, 정경섭 선생님
PSSC, 이지홍 선생님
PSSC, 이지홍 선생님

빼놓을 수 없는 선생님들 중에 체육선생님 “똥자루정경섭 선생님이 계셨다. 오신지 얼마 되지 않은 선생님이셨는데, 고3때 체육시간은 완전히 서자취급을 면치 못하는 시간이고, 심지어 어떤 때는 체육시간에 골치 아픈 머리를 식힐 겸,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시기도  하셨다. 나는 그 시간이 그래서 좋았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시간만 되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기대하곤 했으니까. 이 정선생님의 얘기는 정말 실감나게 재미있었다. 그 화제가 대부분 깡패들의 싸움이야기, 무협적인 이야기.. 등등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선생님의 경험을 듣는 것 같아서 더 재미가 있었는지 모른다. 시간 내내 웃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비록 키가 조금 작아서 “똥자루” 라는 별명은 있었지만 나는 아직도 유쾌한 기억을 간직하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아주 다른 기억으로 남는 선생님, 물리담당 이지홍 선생님이다. 물리는 사실 이공계의 꽃인데 입시에서는 “국(어),영(어),수(학)”에 밀려서 어디까지나 ‘선택’ 과목이 되어버렸다. 그 선택과목의 시간은 대부분의  필수과목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훨씬 지난 뒤에 있게 마련이다. 오전에 이미 머리의 에너지를 다 써버리고 점심까지 먹은 뒤에는 사실 잠이 기가 막히게 잘도 온다. 그 때에 이 물리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이 시간은 달랐다. 이지홍 선생님의 노력과 실력 때문이랄까?  이 선생님은 얼마 전에 PSSC라는 미국에서 하는 물리교사를 위한 과정을 미국 하와이에서 이수를 하고 오신 아주 상당한 실력 파 셨다. 그 프로그램은 미국이 space program에서 소련에 뒤지기 시작하자 뒤 늦게 과학교육을 개혁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었다. 대부분 ‘실습’을 위주로 하는 ‘산 교육’이었다. 물리시간 중에는 꼭 미국에서 연수를 받으실 때 쓰신 듯한 실험기재들을 가지고 들어 오셔서 정말 ‘실감나게’ 보여 주셨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 내 눈으로 ‘목격’한 물리 실험들은 대학에 가서도 한번 못 보았다. 특히 음극관에서 음극선이 자석에 의해서 굴절하는 것, 고압에서 공기가 방전을 하는 것..등등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아직도 나는 이지홍 선생님께 머리 숙여서 감사를 드리고 싶은 심정이다.

1965년 6월 중순경 방학을 몇 주일 앞두고 한일기본협정이 체결되면서 아예 학교에 미리 휴교령을 내려 버렸다. 반대 데모를 방지하려는 심산이었고 물론 그 효과를 톡톡히 보았을 것이다. 우리들은 사실 나쁠 것 하나도 없었다. 몸과 마음이 사실 지쳐있던 상태에 방학을 몇 주 앞 당긴다는데 누가 반대를 할 것인가. 휴교령이 내려지면서 담임인 정운택 선생님 들어오셔서 침통하신 표정으로 이런 것들을 이해 못하신다는 말씀을 하시고 흑판에 커다란 글씨로 “절호의 기회” 라고 한자로 쓰셨다. 그 뜻은 모두다 알았다. 밀린 공부를 이때에 만회를 하라는 뜻이셨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한일기본조약의 의미를 생각하고, 다른 편으로는 bonus로 생긴 몇 주일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 길어진 여름방학 중에 “우리의 아버지”,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하와이에서 고국을 그리며 돌아가셨다. 우리들은 국민학교 6년을 우리의 아버지로 여기며 존경하던 대통령이었다. 독재자로 낙인이 찍히고, 군사정부는 국민감정을 이유로 귀국도 못하게 하였다. 장례식만은 그리던 서울에서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그 때의 비 오던 날, 길고 긴 운구행렬을 아직도 기억한다.   방학 중에도 데모가 계속 되곤 했다. 하지만 개학이 되면서 어느 정도 가라 앉게 되고 우리들은 다시 입시공부에 돌입을 하였다.

그 당시 입시준비 풍경은 학교 밖으로 입시전문 학원과 입시전문 도서실이 있었다. 도서실이란 것은 책을 빌려보는 곳이 아니고 그저 조용한 방에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곳이었다. 그 중에 나는 동아 학원이란 곳에 잠시 다녔다. 그곳은 입시용 참고서를 제일 많이 출판하는 동아 출판사에서 직영을 하던 새로 생긴 학원이었다. 그 곳이 다른 곳과 다르게 기억이 나는 것은 돈만 내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고 ‘입학시험’을 보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새로운 개념의 학원이 그때까지 없었다. 그래서 나도 한번 해 보자 하는 심정으로 시험을 보았는데, 합격이었다. 사실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것이 상업적이건 아니건 상관이 없었다. 무슨 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한 기분이었으니까.

누가 생각을 한 것인지 몰라도 별로 생각이 없이 만든 학원임이 곧 들어났다. 그 정도 학원이면 다른 학원과는 다른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어떤 과목은 다른 곳에 비해 더 나쁜 곳도 있었다. 그곳에서 친구 장맹열을 만났는데 그도 나의 생각과 마찬가지였다. 얼마 못 가서 다 그만두고 말았다. 한 때는 도서실에 다니기도 했다. 서대문 로터리로 가는 곳에 서강 도서실이었는데 그곳에서는 같은 반 친구 차정호를 만났다.

2학기가 되자마자 (아니면 바로 전) 6개년 계획의 주역 최복현 교장선생님이 서울시 교육감으로 뽑히셔서 학교를 떠나셨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아마도 교장선생님께서는 학교를 떠나기 싫으셨던 듯 한 것이 발령을 받고 한때 행방불명이 되셨다고 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후임으로 최형련 선생님이 부임하셨는데 너무나 우리들과는 짧은 기간이어서 별로 특별한 기억이 남지 않았다. 다른 교우들도 마찬가지라 짐작을 한다. 그리고 고교 본관과 학교 운동장 사이에 3층짜리 석조 과학관을 시공하였고 졸업 즈음에는 골격이 그 모습을 나타내었다.

3학년 때도 역시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었다. 사건이라 함은 별로 좋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백정기 선생님, 평소에는 침착하시고 공정하신 선생님이시다. 하지만 그 날은 달랐다. 문제의 발단은 국어 모의고사에 관한 것이었다. 평소에는 사실 모의고사가 끝나면 꼭 수업시간 중에 문제를 같이 풀어 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날은 어쩐 일인지 모의고사에 관한 것은 완전히 무시하시고 정상적인 수업을 시작하신 것이다. 궁금하긴 마찬가지지만 어쩔 수가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차정호가 끈질기게 문제를 풀어 달라고 요청을 하였고 백 선생님은 막무가내로 거부를 하시고.. 그러다가 아마도 차정호가 “선생님이 모르니까” 라는 말을 한 모양이었다.  그 뒤는 조금은 충격적이었다. 백선생님, 완전히 이성을 잃으셨다. 완전히.. 차정호의 뺨을 치시는데 거의 제 정신이 아니신 듯 했는데, 아무도 말릴 용기가 없었다. 그 시간도 꽤 길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참 씁쓸한 추억이었지만, 선생님도 인간이고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계기였다. 나중에 백선생님께서 차정호를 불러서 ‘사과’ 비슷한 것을 하셨을까.. 아니라고 추측을 한다. 그때의 학교의 풍토는 체벌을 교육의 일부로 여겼을 시기였으니까. 그와 비슷한 사건은 바로 옆 반인 3학년 7반에서 났는데, 역시 지나친 체벌에 관한 것이다. 이번에는 7반의 담임 영어 박시희 선생님과 그 반의 이수열이었다. 왜 그것을 알게 되었는가는 간단하다. 옆 반에서 때리는 소리가 우리 반에 고스란히 다 들렸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때 우리 반에는 우리담임 선생님이 계실 때였다. 선생님도 그 때리는 소리에 조금은 거북스러운 표정을 보이셨다. 아마도 몽둥이로 큰 소리로 오랫동안 때렸던 모양이다. 나중에 그 반에 있던 김호룡에게 물어보니 바로 이수열이 그렇게 맞았던 것이다. 왜 맞았는지는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이 사건도 역시 선생님도 우리와 같은 감정을 가지신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아닐까?

"아우성", 반장 이유성
“아우성”, 반장 이유성
수학귀재, 박상돈
수학귀재, 박상돈

우리반의 반장은 멋있게 키가 컸던 이유성이었다. 나와 이종원은 그를 아우성‘이라고 불렀다. 이유는 그 당시 국어시간에 배웠던 유치환의 시에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이란 구절에서 나왔다. 아마도 제목이 ‘깃발’이 아니었을까. 우리 반에는 키가 아주 훤칠한 친구들이 많이 있었다. 그 중에는 이유성, 김용만, 안승원, 김명전, 고송무, 김영철한정환, 박상돈, 김연응, 조남재, 황석환, 신창근, 김종호..등등 “쭉쭉 잘 빠진” 친구들이었다. 그 당시 나이에서는 학교 내에서 키가 주는 영향이 상당했다. 쉽게 말하면 대부분 비슷한 키의 친구들과 어울리게 된다는 뜻이다. 번호를 키의 순서로 정하고, 그 순서에 따라 자리를 잡으니까 더 그런 경향이 많았다. 그리고 간혹 예외는 있지만 키가 크면 힘도 세고, 외향적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키가 컸던 친구들을 기억하면 무언가 조금은 서먹서먹 할 때가 있다.

박상돈은 키고 크고 공부도  그것도 수학을 기가 막히게 잘했다. 역시 그는 서울공대 전기공학과에 합격을 하였다. 나에게는 거의 ‘이상형’이라고나 할까. 김연응, 김영철, 조남재, 신창근, 이윤기 등은 나와 같이 연세대로 갔는데 김연응과 김영철은 기계공학과, 나머지는 모두 전기공학과였다. 신창근은 대학시절 일찍 군대를 가서 헤어졌는데, 나중에 1973년과 1975년 두 번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 당시 그는 호남정유에 근무를 했는데 그 이후로 완전히 소식이 끊어지고 말았다.  해사에 간 최민은 연세대학 졸업식 때 우연히 만났는데, 7반의 송영근, 강교철, 이수열과 같이 사진도 찍었다. 고송무도 1975년에 정교성과 같이 만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그는 북구라파에서 활동한다고 들었는데, 나중에 타계 소식을 듣고 너무나 놀랐다.  조금 섭섭한 것은 송희성배희수, 둘 다 나의 재동국민학교 동창 들인데 그들과 별로 가까이 지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배희수는 연세대에서 본 적이 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송희성은 국민학교 6학년 때에도 같은 반이었는데, 고교 졸업 후에는 정말 한번도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동기회 총무, 신동훈
동기회 총무, 신동훈

신동훈은 요새 57 동기교우회의 총무로 맹활약을 해서 email로 나마 만나게 되었다. 정말 오랜 만이랄까. 또한 천주교신자임도 알게 되어 더욱 반가웠다. 이 친구는 그 이외에도 잊을 수가 없는 것이 이름이 그 당시 제일 잘 나가던 학원 영어 강사에 신동운 이라고 있어서 더 연관이 되어 기억이 되곤 한다. 이 친구 역시 pop song과 연관이 되는 것이 있다. Eddie ArnoldsSunrise Sunset과  I really don’t want you to know란 노래였는데 왜 이 노래와 신동훈이 같이 생각나게 되는 것일까? 그것이 확실하지 않다.

제일 꼬마인 김윤필은 대학졸업 후에 한번 김진수, 정양조 그룹과 같이 만난 적이 있었다. 비록 신사복차림이었지만 그 때도 어린애 같은 모습이었다. 나중에 목창수를 통해서 해병대 입대를 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놀라운 소식도 들었다. 정말 슬픈 소식이었다. 장난꾸러기 오수만은 역시 그가 장담한대로 서울치대, 치과의사,그리고  ‘중앙치과’. 윤중희는 대학 졸업 후에 가끔 만났는데 그때 그는 미국유학을 계획하고 있었다. 하지만 듣기에 그대로 국내에 남았다고 들었다. 목창수는 화학을 좋아했던 친구인데 서로 잊고 살다가 1987년경에 정말 우연히 Columbus, Ohio에서 만나게 되었다. 나는 그때 그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창수는 Ohio State University로 과학 교사단을 인솔하고 연수를 받으러 온 것이었다.  물론 내가 그곳에 살고 있는 것을 모르고 온 것인데 정말 우연히 나를 찾게 된 것이다. 그런 인연으로 목창수와는 가끔 연락이 되었고, 몇 년 전에 둘째 딸이 서울에 갔을 때 정말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았다. 그 신세를 갚을 길이 난감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남가주 동창회장, 권명국
남가주 동창회장, 권명국
이희진
이희진

권명국은 57회 동창회의 소식을 통해서 미국  LA지역(남가주)의 동창회 지부장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의 이름은 정말 오랜만에 듣게 된 것이다. 또 얼마 전에는 동기 회에서 명국의 딸이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늦게나마 email로 연락이 되었고, 또한  알고 보니 나와 같은 천주교 신자였다. 이종원은 1980년 초 나의 결혼식에도 왔었는데, 그 이후로 직접 연락이 되지를 않았다. 그런데 우연히 우진규를 통해서 월남의 싸이곤 (호지민 씨티)에 정착을 해서 산다고 들었다. 나의 옆자리에 앉았던 “키가 큰” 원병태는 고교 졸업직후 한번 편지를 받았는데, 고대 화학과에 “꽁지” 로 합격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대학졸업 후에 그를 다시 만났는데 그는 미국에 가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친척집에서 하는 주유소를 도와주러 간다고 했다.  그 당시 그를 따라 고려대학에 자주 가서 테니스를 치곤 했다. 그 이후로 연락이 완전히 끊어졌고 그를 알던 친구들도 그의 행방을 모르고 있었다. 차형순은 연세대에서 가끔 보곤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LA 지역으로 이민을 와 있었다. 아직도 business를 잘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희진정교성을 통해서 현재 캐나다의Calgary에 거주하면서  geological engineer로 일을 하는 것을 알았다. 가끔 정교성이 살고 있는 Toronto에 놀러 온다고 들었다.  나머지 반창(3학년 8반) 들은 애석하게 개인적으로 소식을 모르며, 궁금하기가 말할 수 없다. 혹시 타계라도 한 친구가 있는 것이나 아닐까?

신축중인 과학관, 1965년
신축중인 과학관, 1965년

이상 대강 기억에 나는 것을 적어 보았는데 이외에도 사실 더 있을 것이다. 아니면 이것이 현재 내 기억력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그 기억력이 더 앞으로 나아질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면 조금 슬퍼지기도 한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 긴장되고 살벌한 고교3학년의 생활이었지만 졸업 후에 대학으로 간다는 가벼운 흥분, 그러니까 성인이 되어 간다는 그런 기대감이 일년 내내 있었다. 담배를 마음대로 피울 수 있고, 다방, 술집, 연애,당구장, 영화..등등 우리를 기다리는 것들이 너무도 많아 보였다. 일본처럼 공식적인 성인식은 없다지만 우리에게는 고교 졸업이 바로 성인이 되는 시기였다. 그것들을 기대하며 열심히 공부를 한 때가 바로 고교 3학년 때였다. 특히 중앙고교가 우리에게 준 그 알찬 교육의 결실을 맺게 한 그때를 어찌 잊으랴. 우렁차게 중앙, 미래의 상징 과학관이 신축되는 것을 보며 졸업반을 보낸 우리들, 45년 동안 모두들 얼마나 민족교육의 요람인 중앙의 꿈을 실현하며 살았을까? 이미 타계한 친구들의 명복을 빌고, 남은 우리들 모두 건강하고 보람된 후년을 보내기를 기원해 본다.

 

중앙고등학교 졸업 앨범, 1966

Hyundai Sonata, Yuengling, 김용운 교수, Skeeter Davis

Hyundai SONATA 1 year anniversary:  작년 이맘때 연숙이 현대 Sonata 를 샀다. 그때는 Cash for Clunker program이 거의 끝날 무렵이었고 우리 집의 workhorse Plymouth Voyager를 그 프로그램으로 trade-in을 할까..하면서 dealership에 간 것이 화근이었다. 거기서 Sonata를 타 보게 되었다. 그 salesman은 완전한 Sonata 신봉자 (그의 가족이 모두 Sonata customers) 였고,그것이 곧 바로 우리에게 sales로 연결이 되었다. 바로 옆의 Alabama에서 조립된 차였다. 일년째 타 보면서 연숙은 대만족이었다. 이 정도면 한국 차의 미래는 아주 밝다고 할까. 즐거운 일이다.

올해는 예년에 비해서 맥주를 덜 마신 듯하다. 여름의 즐거움은 사실 일을 끝내고 저녁때 마시는 시원한 맥주가 아닐까? 전에 주로 Samuel Adams의 variety 맥주가 정말 좋았다. Micro brewery로 시작한 brand가 이제는 대량생산이 되고 있어서 조금은 매력이 줄었다.그러다가 나에게 가격과 맛으로 딱 맞는 brand가 나왔다. Yuengling이란 맥주인데 Pennsylvania주에서 나온다고 한다. 처음에는 꼭 중국제 같아서 아하.. 이제는 맥주도 중국제품인가..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3개월 계속된 올해의 무더위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올해 더위의 특징은 거의 하루도 여유를 주지 않는 변치 않는 기상 pattern이었다. 그래서 올해에 제일 보기 싫은 사람들이 TV weather person들이다. 물론 그들이 날씨를 만들지는 않겠지만 조금도 ‘과학적인 설명’을 못하고 있다. 그러니까 왜 올해는 이런 독특한 pattern이었나 하는 분석의 노력 조차 없었다. 그래서 나같이 home office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닌 출근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얼어붙는 듯한 시원한 곳에서 하루 종일 일을 하면 사실 거의 더위를 느낄 수가 없으니까.

 

김용운 교수의 “한국어는 신라어 일본어는 백제어” 라는 책을 읽었다. 일본어를 읽는 것이 익숙지 않아서 정독은 못 했지만 대강 저자의 얘기는 이해할 수 있었다. 김용운 교수의 책은 1970년대에 수학에 관한 여러 가지 책들을 읽은 경험이 있다. 그때 저자 글의 스타일이 참 좋았다. 어려운 문제를 정말 쉽게 설명을 한다. 그것은 저자가 논제나 문제를 확실히 이해를 한다는 쉬운 증거다. 저자의 폭 넓은 해박한 지식은 참 본 받을 만 하다. 특히 일본출생이라 그런지 일본과 한국의 관계를 깊게 그리고 쉽게 설명을 한다. 신라통일로 일본과 한국의 말이 완전히 갈려 나갔다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인 조명은 참 흥미롭다.

  • 백강전투 이후 한국어는 신라어 중심으로, 일본어는 백제어 중심으로 발달해 갔다.
  • 지리적으로 중국으로부터 한반도 보다 더 떨어진 일본열도는 자체적인 언어체계를 발전시킬 수 밖에 없었다.
  • 일본어의 문법과 한국어의 문법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비슷하다.
  • 한반도는 중국,한자음운의 영향을 거의 받아들인 반면 일본은 거의 백제어 수준에 머물렀다.

 

얼마 전 중앙고 2학년 때, 그러니까 1964년경을 회상하면서 그 당시 무슨 노래들이 우리들을 즐겁게 했나 생각을 해 보았다. 거의 pop/rock/country 같은 미국중심의 것들이었다. 그 때는 Beatles가 긴 머리에 uniform을 입고 I Want To Hold You Hand를 부를 때였고, hard-rock, psychedelic같은 것은 나오기 전이었다.  맞다.. 그때 미국의 60’s country란 것이 한창 유행을 하였다. 조금씩 전통적인 country song과 현대판 pop이 섞이면서 나오던 것들은 우리들이 듣기에 무리가 없었다. 그 중에서도 Skeeter Davis의 노래들은 여성 취향이었지만 우리” 싸나이”들도 잘 따라 부르곤 하였다. 주옥 같은 그녀의 hit song 중에서 The End of the WorldHe Says the Same Things to Me 는 아직도 노래의 가사가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He says the same thing to me – Skeeter Davis – 1962

 

The End of the World – Skeeter Davis – 19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