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가을, retarded Donald, Korean

¶  갑자기 여름에서 늦가을 같은, 아침 저녁이 시원한 것을 넘어서 아예 추울 정도의 진정으로 멋진 가을이 접어든 10월 초, 한마디로 glorious, cool days가 연일 이어졌다. 한낮은 알맞게 따뜻한, 믿을 수가 없는 ‘은혜로운’ 자연의 조화가 아닌가? 이런 날씨는 아마도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지만 일 주일을 넘게 변치 않게 써늘한 한 가을 같은 이 느낌이 ‘아마도’ 가을이 그냥 자리를 잡은 것은 아닌지 조심스런 낙관을 해 본다.

그렇다면.. 거의 4개월 동안 우리 집 backyard에서 완전히 방치 되었던 것들을 슬슬 찾아내어서 비지땀 걱정을 하지 않고 ‘고치고 정돈하고’, ‘월동준비’를 하는 즐거운 순간이 온 것인가.. 믿을 수가 없다.

우선 우리 집에 정차하고 있는 두 마리의 아기 고양이들의 shelter를 만드는 것이 급선무, 아무리 outdoor에서 태어나고 자란 애들이지만 우리의 느낌은 다르다. 우리가 춥고 축축하면 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추측이 앞으로 10일 이내에 반드시 찾아올 central heating moment, 위층은 electronic system이라 상관이 없지만 아래 층의 ‘고물’ 은 전통을 자랑하는 pilot light 를 다시 켜 주어야 한다. 예년에는 그냥 켜두고 여름을 보냈지만 올 여름부터는 gas energy 도 절약하고 thermocouple도 보호할 겸 꺼 두었기에 귀찮지만 ‘기어들어가서’ 다시 그 pilot light를 켜 두어야 한다. 귀찮지만.. 할 수 없지 않은가? 올 겨울은 어떨까.. 여름이 ‘잔인’했으니.. 이것도 아마 다르게(추운 쪽으로) 잔인한 것은 아닐까.. 봐 주세요..

 

¶  Retarded Korean: 오랜 이국생활에서 고국에서 오는 소식들,  예전에는 그런대로 관심이 있었던 시절도 있었다. 아주 옛날에는 가끔 날라오는 신문들, 세월이 지나면서 거의 모든 것이 Internet으로 직접 볼 수도 있게 되었다. 편한 것은 사실이지만 희귀함과 호기심 같은 것은 거의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정보라는 것은 어렵게 구하는 것이 가치가 높다는 것, 자명한 진리다.

이제는 과거에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던 옛날의 영화나 드라마도 무료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1980년대부터  ‘한반도의 느낌’을 완전히 잊으려는 노력을 하게 되면서 한국말 TV program은 따라서 완전히 잊고 살게 되었지만 연숙은 간간히 한국 grocery에서 빌려주는VHS tape를 통해서 고국의 인기 프로그램은 본 모양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지난 2개월 동안 YouTube를 통해서 1980년대 장수 농촌드라마였다는 ‘전원일기 田園日記’ drama를 간간히 보게 되었는데.. 이것을 보면서 고국의 1980년대의 분위기, 특히 농촌의 ‘발전상’을 보게 되었다.  나의 시대  TV talent는 딱 두 명, 최불암김혜자.. 나머지는 그저 얼굴만 본 정도의 ‘후세’ 사람들이다.

James Dean
James Dean

사실 이런 배경이 본론이 아니고.. 나를 ‘한 시간’ 동안 배를 잡고 웃기던 ‘장면’, 그것이 본론이다. 처음에는 이것이 무엇인가.. 했는데, 그것은, 이 ‘전원일기’ 화면에 조그만 ‘뿌연’ 점 같은 것이 계속 움직이는 것이 보이며 눈을 거슬렸는데.. 자세히 보니.. 최불암이 담배를 필 때마다 그 담배를 쫓아가며 그 것을 ‘감추려고’ 춤을 추는 것이었다.

하도 믿을 수 없고 어처구니없는 이것을 보며.. 처음에는 이 video를 ‘올려 놓은 upload 사람’의 일시적인 장난으로 생각을 했는데.. 그런 ‘screen doctoring‘은 다른 한국 비디오에도 보였다. 이것은 무엇일까? 담배를 증오하는 미친놈의 장난일까.. 아니면 ‘혹시’ 대한민국 판 political correctness 중에 하나일까, 벼라 별 생각이 다 든다.

고국을 방문하는 우리 같은 ‘담배세대’는 한결같이 ‘지나친, 불쾌한’ 담배에 대한 경험을 들려준다. 한국과 일본이 어쩌면 그렇게 다른 ‘담배 정책’을 가지고 있는가도 알려준다. 그렇다면.. 혹시 이것도 무슨 ‘빨갱이 담배 법‘ 같은 것 때문은 아니었을까?  한마디로 이것은 political 한 것인 모양이다. 나의 결론은 some retarded Korean policy  로 끝났다. 정말 정말 이것도 오래 살다 보니 목격하게 된 세기적 희극에 속한다. 수 십 년 전 drama video의 ‘담배 모습’을 열심히 쫓아다니며 policing을 하는 그 예산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면 어떨까? 정말 그들은 retarded Korean 이다.

 

¶  “오래 살다 보니” department:  내가 오래 살았다고 느끼게 하는 ‘것’들, 주로 뉴스에서 찾는데 요새는 이것을 찾을 필요가 없이 살고 있다. 바로 그’놈’ 때문이다. 아니 심하게, 그 ‘새끼’라고 말하자. 양아치중의 양아치, 망종 중의 망종.. 말세 중의 말세.. ugly 중의 ugly.. (I truly love to hate this ‘thing’) 이름을 쓰기도 싫고 말하기도 싫고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의 ‘말세적 인간 retarded Donald Duck‘.. 어떻게 제 정신을 가진 이성적이어야 하는 ‘대국의 대 정당 republican‘이 이런 역사적 과오를 범하게 된 것인지..

이 인간을 따라다니는 인간들은 한마디로 ‘쓰레기 중의 쓰레기’일 것이다. 교훈 중의 교훈은 많지만 나의 등골을 계속 서늘하게 하는 것 중에는 1930년대의 ‘불만의 독일 정국’이다. 민중, 민의가 민주주의의 근간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만약에 ‘틀린 것’이라고 하면 Hitler같은 monster는 언제고 부활할 수 있는 것, 지난 일년간 실감을 하면 산다. 한심한 ‘우매한 white trash’ 들, 그들이 바로 1930년대 독일에서 Jewish business들을 몰아내던 바로 그 ‘우매한 민의’인 것, 역사는 돌고 돈다.

내가 이곳에서 살며 느끼며 보아온 미국, 지난 40년 간 많이 변한 것, 부정할 수가 없다. 자연법을 거스르는 지나치게 ‘개인적 자유’를 요구하는 progressive들, 장기적으로 그것은 절대적으로 progressive가 아니고 degenerative한 것, 역사를 보면 잘 안다. 이렇게 북극성이 안 보이는 ‘난세’에는 어떤 ‘망종’도 쉽게 출현할 수 있는 것, 어찌 잊겠는가.. 이쪽이나 저쪽이나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다. 역사는 변하지만 안 변하는 것, ‘불변의 진리’를 기대고 사는 것이 이런 난세의 지혜중의 지혜다.

 

Big dip, 9월이여 안녕..

¶   드디어 ‘아기다리 고기다리 던 (‘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오래~ 전의 유행어) 그 첫 big ‘sudden’ dip이 거의 도둑처럼 밤새 찾아왔다. 거의 20도가 하루아침에 떨어진 것이고, 그것이 거의 3일째 계속되어서, 아침에 거의 3개월 만에 ‘긴 팔’ shirts를  입게 되니 그렇게 기분이 날라갈 것만 같다. ‘긴 팔’ shirts를 가 딱 좋아서가 아니라 그 지긋지긋하던 2016년 여름이 결국은 물러갔다는 그것이 그렇게 기쁜 것이다. ‘긴 팔’을 입으면서 문득 태고 적, 중고등학교 다닐 때, 10월 1일에 하복에서 동복으로 ‘일제히’ 바뀌던 그 때가 생각이 난다. 그러면 당시의 서울의 사계가 이곳 지역과 비슷한 것일까.. 물론 이곳의 평균기온이 높지만 사계가 뚜렷한 것은 거의 비슷하다.

아침 9시 Holy Family CC 평일 미사엘 가니 우리보다 나이가 더 드신 ‘어르신들, 특히 할머님들’은 숫제 ‘오바 overcoat’를 입고 목도리로 단단히 무장을 한 것이 보인다. 체감온도에 따라 각양각색의  이곳의 ‘주위를 의식하지 않는 의복문화’가 더 뚜렷이 느껴지는 계절이 온 것이다.

Full time으로 돌아가던 에어컨이 갑자기 ‘조용~’ 해 지니 조금은 섭섭하기도 하지만 그럴 새가 없다. 분명히 10일~20일 사이에 첫 central heating이 ‘점화’될 것이기에.. 또 crawl-space로 ‘기어들어가’, 거미줄을 헤치고 gas heater pilot- thermocouple을 ‘점화’하는 고역을 치러야 한다. 문제는 이때 문제가 발견되면.. 또 하루 이틀 고생을 할 것이다. 에어컨은 올해의 oppressive, brutal Summer heat를 잘 견디어 내었지만 올 겨울 central heating 특히 아래층 것이 항상 마음이 조린다. 위 층의 heater는 우리가 이사 온 후에 바꾼 것이라 아마도 ok일 것이다. 올해의 더위로 electric bill은 보기가 무섭지만 그것에 비해서 natural gas는 훨씬 ‘저렴’해서 겨울 몇 개월 동안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 그저 적당히 춥기만, 적당히.. 적당히..

 

¶  2 feral Kittens: 지난 5월 쯤 우리 집 backyard shed에서 태어난 kittens들, 4마리였다. 그 동안 우리 집을 ‘거점’으로 들락날락하더니 결국은 모두 떠나고 kitten 두 마리가 우리 집 뒷마당에 정착을 하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엄마와 다른 2마리는 완전히 떠난 셈이다. 하지만 가끔 엄마는 찾아와서 밥만 먹고 떠나곤 한다. 우리가 control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저 그들의 ‘행태’를 관망하며 먹이만 잘 챙기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조그맣던 것들이 잘 먹어서 그런지 꽤 크게 건강하게 잘 자라는 것을 보며 이제는 우리 집도 그들에게 정이 들고 있다. 그들과 가까워지기 위해서 먹이를 우리 집 뒤 deck에 놓아주고 하루 두 번씩 먹이를 주며 서로 얼굴을 익히며 사귀고 있는데 지금은 우리를 하나도 겁내지 않고 먹이를 가지고 나가면 발 밑에서 맴돌 정도까지 되었다.

집안에 이미 개 Tobey와 고양이 Izzie가 있지만 이 두 마리는 행동이 100% 자유스러운 feral cats들로써 앞으로 ‘불임수술’을 해야 하는 부담이 기다리고 있다. 그들이 원하면 언제라도 우리 집을 떠날 수도 있기에 이것은 반드시 우리가 service해야 할 부담이 되었다. 작은 딸 ‘나라니’가 county humane society에서 ‘거의’ 무료로 수술을 해 주는 방법을 찾고 있는데 아직도 소식이 없다.

건강하게 자라나는 '아롱이'와 '다롱이'

건강하게 자라나는 ‘아롱이’와 ‘다롱이’

 

현재까지 이 두 마리를 보면서 생각한다. 이들도 하느님의 생명들이라는 것, 사람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생명들이 아닌가? 최대한 그들도 태어난 의미를 찾아 주어야 하는 것, 우리가 할 수 잇는 것은 무엇인가? 우선 이름이 필요했는데 마땅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던 차에 연숙이 ‘아롱, 다롱‘은 어떠냐고 해서 그렇게 불리고 있다. 분명히 순 한글이름이지만 만약 영어로 쓰면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니 오래 전 고국에서 보았던 불란서 영화의 간판 배우 아랑 드롱 이름이 떠오른다. 우리 집 backyard가 그런대로 넓은 편이니까 아마도 그들은 우리 집만 떠나지 않는다면 Born Free의 사자 lion, Elsa처럼 자유스럽고 먹이 걱정하지 않고 ‘일생’을 사는 그런 삶으로 만들고 싶다. 당장 해야 할 일은 갑자기 떨어진 날씨를 상기하며 겨울을 날 조그만 shelter를 만들어 주는 일이다.

 

¶  오늘은 일주일 전에 계획했던 것, 우리 집에서 거의 30 마일 떨어져 있는 Duluth, GA 에 있는 St. Monica성당을 방문하는 날이 되었다. 얼마 전 부터 아틀란타 대교구 본당들에는 최근에 성녀 품에 오르신 마더 데레사 성녀 (St. Mother Teresa)를 기념하는 조그만 순회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전시는 거의 대부분 데레사 성녀의 일대기가 실려있는 기록사진 panels 들이라 다른 source에서 (Internet같은 곳) 찾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본론이 아니고 성녀의 relic (유물)이 함께 전시된다는 사실이 우리의 관심을 끌었다. 성인들의 relic은 신체의 부분을 포함해서 개인 용품들도 있는데 오늘 이곳에서 우리가 본 것은 성녀 데레사가 입고 있던 sari (파란 색의 사리 옷)의 일부분이었다. 그 색깔은 분명히 사랑의 선교회 수녀들이 입고 있던 연한 파란 색, 바로 그 옷의 일부였었다. 한가한 시간이라 사람이 없어서 그랬는지 처음에는 그 relic이 치워져 있어서 사무실에 문의를 해서 특별히 조그만 방에 임시로 보관 된 그 relic을 볼 수가 있었다. 이미 사진전시로 성녀의 일대기를 다 본 이후에 그것을 다시 보니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Media를 통해서 이미 잘 알려진 수녀님의 모습과 그 파란 색의 옷, 바로 그것이 수녀님 것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날 30여 마일을 온 보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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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의 1st class relic이 전시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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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ll color panels: 성녀의 일대기가 이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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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Monica 성당 내부

 

Catechetical Sunday, pl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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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 주일 2016

¶  오늘은 Catechism, 천주교 교리교육, 교리반, 교리교사 등에 관련이 된 Catechetical Sunday, 한국어로는 교리주일 정도가 될 듯하다. 오늘 주보를 보고 오늘이 바로 교리주일임을 알았다. 2주 만에 우리의 ‘동네 본당’ Holy Family에서 주일 미사 참례를 하였다. 10시 미사에서 낯익은 반가운 얼굴들이 이곳 저곳에 보이고 인사를 나눈다. 세월이 무언지.. 이들 전혀 얼굴, 문화, 나이 다른 교우들, 특히 Irish쪽의 푸른 눈의 수려한 모습의 ‘아줌마, 아저씨, 할머님’들, 어쩌면 그렇게 정이 들었을까? 이름도 성도 잘 모르지만 이웃 친척처럼 느껴질 정도가 되었다. 잠시 안 보이면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근래 평일미사에서 너무나 자주 만나는 Father Joseph Morris, 예의 극적인 언어로 마이크 필요 없는 우렁찬 목소리가 일요일 아침을 압도한다. 이 신부님은 모습 자체가 liberal 한 분이지만 60을 훨씬 넘는 나이에 그런 성향은 드물지 않을까? 모습자체가 나이에 비해서 훨씬 젊은 이 신부님, 아마도 ’60년대의 아이들 baby boomer‘ 일지도 모른다. 오늘 강론은 생각할 기회를 많이 준 주제다. ‘하느님을 사기 칠 수 있는가?’ 하기야 오늘의 복음말씀(Luke 16:1-13, 루까복음)은 처음에 이해가 전혀 되지를 않았다. ‘사기치는’ 시종이 주인으로부터 ‘사기 쳤다고’ 칭찬을 받는 모습… 신부님 말씀이 이 대목은 성서학자들도 골머리를 썩는다고 했다. 예의 예수님의 가르침과 정 반대가 되는 이 색다른 논리를 어떻게? 이 liberal한 사제 Joseph의 해석이 뒤따랐는데, 나는 그 뜻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오늘의 제1독서는 Amos예언자가 ‘사기꾼’들을 질타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복음말씀에서는 사기꾼 시종이 칭찬을 받는 내용이 나왔을까? 이것이 신비가 아닐까? 인간의 논리와 하느님의 논리는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 것인가? Joseph신부는 여기 나오는 시종이 예수님이고 주인이 하느님이라고 하는 묵상주제를 제시하였다. 처음에는 너무나 혼란스러웠지만 조금씩 정리가 되는 듯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대조적으로 매일 인터넷으로 받아보는 복음 묵상 글에서 신부 기경호 프란치스코 라는 분은 아예 이 사기치는 행위를 평하기를  ‘하느님의 빚을 받는 이들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의 일에 슬기롭게 대처하듯이 슬기롭고 민첩하며 능동적으로 주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고 해석을 하고 있다. 분명히 ‘사기치는 것’이 ‘치열하게 세상을 열심히 사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동감이 안 간다. 글쎄요.. 더욱 혼란스럽습니다.

미사가 끝날 무렵 본당의 모든 교리반 staff들(주로 catechist 교사들)이 불려나가서 신부님의 강복을 받았다. 연숙은 현재 한국본당 순교자 성당 교리반 director를 맡고 있어서 느낌이 아주 달랐을 것이다. 어째서 같은 대교구 소속인 이곳에서는 교리반 교사들이 공적으로 강복을 받고 한국 순교자 성당에서는 아예 교리반 주일이란 말조차 없으니.. 일을 맡은 이상 헌신적으로 일하는 그녀지만 가끔 맥 빠지게 하는 일들이 있는 모양이다.  이곳 미사가 끝나자마자 그곳 본당 교리반 때문에 부리나케 혼자 순교자 성당으로 떠난 연숙의 뒷모습이 조금은 쳐져 보인다.

 

¶  오랜 만에 guitar를 손에 잡았다. 아니 3주 만에 case에서 꺼내본 셈이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이렇게 몇 주 동안이나 기타 코드를 안 잡았던 것이 처음이었나.. 손가락 끝의 굳은 살이 벌써 얇아졌나.. 어찌나 손가락이 아프던지 불편하고 불쾌하기까지 하다. 그러니까.. 3주 정도면 암만 굳었던 손끝 살갗도 다시 원상복구가 되어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것으로 나는 최근 몇 년 동안 3주 이상 기타 치는 것을 쉰 적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기억에 이 정도로 손가락이 아팠던 기억이 없으니까..  요새 느낌으로 3주란 것은 시간이란 축에도 끼지 못하는 찰라 같은 것인데 어떻게 이렇게 나의 육신의 일부인 왼손가락 끝은 짧지 않은 시간을 느낀 것인가?

이 시점에서 지난 3개월 정도 group coaching을 하며 관계를 맺게 된 Six String Friends 기타 동호회를 다시 생각한다. 내가 guitar coaching을 한다는 사실은 나에게 신선한 즐거움을 주었고, 덕분에 오랜 역사를 가진 내 ‘알량한’ guitar ‘실력’을 재점검하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했다. 7번 정도 lesson과 coaching을 하면서 느낀 것은 ‘아는 것과 가르치는 것의 커다란 차이’ 였다. 나의 현재 기타실력은 솔직히 나도 잘 모른다. 남과 비교를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엄청난 세월 동안 그런대로 꾸준히 기타가 나의 옆에 있었다는 사실, 때에 따라 꾸준히 즐겼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 시도한 것이다.

처음에는 내가 아는 것 가르친다는 것이 그렇게 어렵게 보이지 않았지만 시간이 갈 수록 ‘어휴~’ 소리만 나온다. 우선 배우는 사람들의 실력이 각양각색으로 3/4, 4/4 조차 구별할 수가 없는가 하면 4/4 는 숫제 5/4, 6/4로 리듬 감각, tempo감각이 예외적으로 둔한 사람도 있었다. 또한 절대적으로 필요한 ‘소리 노래’ 실력들에도 각양각색이고.. 50~60대이므로 70/80 style의 곡들에는 큰 무리가 없었지만 문제는 어린 학생들이 아니어서 배우는 과정이 느리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몇 주나 몇 달을 예정하고 시작한 것이 아니고 open end로 ‘무작정’ 진행된다는 사실도 문제로, 그렇게 조급하게 배우려는 자세도 결여가 된 듯 보였다. 그래서 일단 지금이 중간 정도의 단계 mid-term정도로 보고 지금까지의 정도를 더 coaching을 하고 일단 phase out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래야 조금은 조급하게 열심히 노력을 할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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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ain Shower, rare sight: 이것이 무엇이냐?: 오늘 아침에 새벽에 일어나서 backyard의 deck로 어둠을 헤치고 맨발로 걸어나가 보니 느낌이 이상했다. 그 동안 완전히 잊고 살았던 그 느낌.. deck 바닥이 질척거리는 것.. 그것은 ‘물’이었다. 마르고 말라 수축을 거듭하던 deck floor가 아마도 놀랐을 것이다. 그것은 ‘잔잔히 내리는’ 이슬비였다. 한마디로 ‘이것이 웬 떡이냐!’ moment가 되었지만 오후에는 숫제 정말 오랜만에 보고 듣게 된 ‘소나기’가 쏟아졌다. 올 여름의 그 모든 더위가 한 순간에 싹~ 사라지는 순간이 되었다.

살인적인 맹더위도 놀랍지만 올해의 여름은 그야말로 double whammy였다. 맹더위에 겹친 가뭄, 아마도 기록을 깼을지도 모를 일이다. 9월 중순이 지나가는 이 시점의 느낌이 ‘이것은 가을이 아니다’ 라는 것.. 올해 이 지역 농작물들 모르긴 몰라도 피해가 컸을 듯 하고 우리 집도 마찬가지.. 연숙의 희망에 찼던 edible garden (victory garden), 정말 수확이 초라하기만 했고 나중에는 거의 포기한 상태.. 지나간 몇 해는 참 Mother Nature가 그렇게 인자롭기만 했는데 어찌 올해는 그렇게 심술궂은 모양을 했을까? Mother (Nature)를 인간들이 너무나 괴롭힌 것에 대한 보복이었을까?

우선 소음덩어리 에어컨 소리가 안 나는 것만도 날라갈 듯한 기분이다. 올해 에어컨 compressor fan을 교체하면서 소음의 강도가 높아져서 언제라도 에어컨이 꺼지는 아침에 손을 보려고 벼르던 것이 이제는 여름이 완전히 가고 있다. 그렇게 잔인하던 올 여름, 혹시 ‘평균기온을 채우려’ 올 겨울은 또 다른 살인적인 추위가 오는 것은 아닐지.. 올 여름의 electric bill은 보기도 무섭지만 그래도 이제는 ‘거의’ 끝이 나고 있음을 느끼기에 오늘 아침의 가랑비는 나에게는 너무나 달콤한 자연의 선물이 되었다.

 

¶  동갑내기, 동갑님네: 말만 들어도 가슴이 찌릿해온다. 최근 몇 주일 동안  YouTube로 간간히 즐겨 보아왔던 고국의 80년대 장수 長壽 농촌드라마였던 ‘전원일기 田園日記’의 한 episode에 ‘동갑님네’란 것이 나왔다. 어떨까.. 왜 나의 가슴이 찌릿한 것이었나? 동갑, 동갑이란 말, 요새도 쓰기나 하나.. 우리 때는 참 정겹던 말이었다. 특히 음력으로 계산한 띠 동갑은 더 정이 가는 말이었고 나와 같은 ‘돼지띠 동갑‘은 그 중에서 제일 나를 즐겁게 한다. 나를 이렇게까지 제일 반갑고 즐겁게 하던 이 말 동갑, 이국생활에서 이것은 사치중의 사치스런 말이 되었다. 이것을 별로 크게 신경 안 쓰고 모르는 척하며 하도 오래 살아서 그렇지.. 조그만 이렇게 생각을 하면 너무나 쓸쓸하고 심지어 괴롭기까지 하다.

고국에서 살았으면 동갑내기가 동창을 비롯해서 부지기수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곳에서는 그렇게까지 동갑내기의 값어치가 높지 않을지도 모른다. 동갑이란 것, 무엇인가.. 같은 해 태어나서 같은 때 학교를 다니고 거의 같은 역사를 산 동류가 아닌가? 그러니까 거의 같은 시대관을 가진 값진 ‘친구’들이 아닐까? 특히 이곳에서는 동갑을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 같이 어려워서 아주 가끔 돼지띠 동갑을 찾으면 그렇게 뛸 듯이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것도 근래에 나는 2명을 찾은 경험이 있었고 한 명인 현재도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는 행운을 맛보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돼지띠는 여성이라서 조금 거리감이 있다. 다른 남자 돼지띠는 나와 큰 인연이 없는지 몇 년 전에 영구 귀국을 해버려서 그 쓸쓸함은 생각보다 컸다. 70을 곧 바라보는 돼지띠 동갑들.. 6.25 민족비극은 직접 겪지 못했지만 그 여파의 피해를 톡톡히 보며 앞만 보고 달렸던 세대… 참 파란만장한 ‘인생 십자가’를 진 세대였다.

 

Adieu, August 2016

서기 2016년 8월이 역사의 한 chapter로 사라지는 날이 되었다. 올해 8월을 어떻게 보냈고 나중에 어떻게 기억하게 될 것인가? 날씨로 말하면.. oppressive month라고 할까.. 정말 잔인하게 땅을 말리는 더위도 그렇지만.. 나를 괴롭힌 것은 그것보다는 ‘매일 매일이 거의 carbon copy 같은’ 그런 정말 세월이 정지된 듯한 모습의 날씨가 거의 30일간 계속된 것.. 이것도 아마 기록에 남을 듯 하다.

날씨 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도 수확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수확은커녕 기대를 한 것이 유산이 되는 실망도 있었다. ‘거창하게’ 출범을 했던 ‘봉헌을 위한 33일’이 골인 3일을 남겨두고 무릎을 꿇은 것이다. 비록 앞으로 기회가 또 있다고 하지만 나의 ‘자존감’에는 분명히 피해를 주었을 듯 하다. 교훈은 무엇인가.. control your temper..가 될 듯하다.

지난 수년간 바쁘기만 했던 한 여름의 ‘레지오 활동’들.. 올해는 거짓말처럼 조용해진 것.. 솔직히 불안하다. 활동거리가 없다는 사실 자체는 축하할 일일 수도 있지만 새로운 활동거리를 찾는 활동이 약해졌음을 어찌 모르랴.. 활동거리를 proactive하게 찾는 활동.. 바로 그것이 최근 들어서 slow down된 것은 분명한 현실인 것이다.

그런 것에 비해서 나, 아니 우리의 ‘세속적’인 활동이 시간적으로 늘어난 것도 관심의 대상이 된다. 오랜 동안 잊고 살았던 social activities에 서서히 조금씩 관련이 되는 것, 어떻게 봐야 할지 솔직히 지금은 잘 모른다. 시간이 조금 지나가 봐야 제대로 판단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 그 중에 시간적으로 제일 ‘부담’이 된 것이 guitar coaching 인데, 이 새로운 활동을 조금 더 비판적으로 봐야겠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을 보면 조만간 scale down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조금은 바깥일을 할 수 있는 ‘멋진 가을 하늘’, 그것이 9월인데.. 집안에 갇혀 지내니 ugly backyard stuffs들이 나의 손길을 기다린다. 그러고 보니 정말 우리 집은 손을 볼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고, 모조리 모조리 나의 muscle과 money를 요구하는 것들이다. 이럴 때 근육이 적당한 ‘동갑내기 죽마고우  竹馬故友’가 나의 옆집에 살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갑자기 평화스러운 낮잠에서 꾸는 나의 이루어질 수 없는 꿈.. 바로 그것이었다.

 

'날이 좋아'..허.. 이런 것이 요새의 소주인가? 하지만 평화스런 오후의 기분과 너무나 잘 맞아 떨어진다.. 연숙의 깜짝 선물 (from H-mart)

‘날이 좋아’..허.. 이런 것이 요새의 소주인가? 하지만 평화스런 오후의 기분과 너무나 잘 맞아 떨어진다.. 연숙의 깜짝 선물 (from H-mart)

5마리 식구가 2마리로.. 엄마를 포함한 3식구가 떠난 나머지 2마리가 똘똘 뭉쳐서 우리집 뒷뜰에 안주하기 시작하나..

5마리 식구가 2마리로.. 엄마를 포함한 3식구가 떠난 나머지 2마리가 똘똘 뭉쳐서 우리집 뒷뜰에 안주하기 시작하나..

 

처서 處暑… waning Summer

올 여름들어 두번째 쏟아진 오후 소나기

올 여름 들어 두 번째 쏟아진 오후 소나기

 

올해는 유별나게 절기의 이름이 눈에 잘 들어온다. 이것도 나이 탓인지.. 지난 번에는 말복이란 것으로 계절의 변화를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처서.. 란 것. 거의 칠십에 가까운 장구한 세월을 살면서 올해처럼 이런 절기의 이름이 눈과 머리에 들어오는 적은 처음일 것이다.

처서.. 유난히 지겹게도 덥게 느껴지던 올해의 여름 내내 꿈 속에도 보였던 말이 ‘써늘한 아침바람’ 이었다. 거의 3개월 동안 내내 내가 느꼈던 새벽 6시 경의 느낌은 끈끈함 그 자체였었다. 간혹 바람이란 것이 있었어도 그것은 물기가 잔뜩 섞여있는 거의 ‘열대성’ 그 것이었다.

지난 3년 간 여름철에 그렇게도 자주 내려주던 오후의 소낙비, 올해는 거의 없었고 그 느낌조차 잊을 정도였다. 7월 초에 딱 한번 내렸던 것은 반가운 기록으로 나의 blog에 남을 정도의 역사가 되었다. 그리고 며칠 전에 그 반가운 오후의 소나기가 사정없이 쏟아졌다. 올 여름의 2번째 귀중한 소나기가 된 것이다.

처서.. 왜 이름이 처서 處暑일까? ‘곳’ 處, ‘더울’ 暑.. 이것이 무슨 뜻인가? 물론 전체의 뜻 자체는 ‘여름이 지나 더위가 한풀 꺾이고 신선한 가을을 맞이 한다고’ 하는 뜻이다. 그렇다. 이제는 더워도 그 더위가 별볼일 없다는 뜻일 것이다. 수그러드는 더위, 그러니까.. 아마 waning Summer 정도가 될 듯하다.

아침부터 해가 안 보이는 구름들, 그렇게 해가 안 보이는 것이 반가울 수가 없다. 올해처럼 아침에 뜨는 시뻘건 태양의 느낌이 싫었던 때도 없었던 만큼 잔뜩 흐린 아침이 그렇게 반가웠다. 바로 오늘이 그런 날이 되었다. 기분이 갑자기 홀가분해지고 날라갈 듯하다. 아~~ 가을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올해 구경도 못 했던 쓸쓸한 해변가.. 파도소리 들리는..

올해 구경도 못 했던 쓸쓸한 해변가.. 파도소리 들리는..

올 가을은 또다시 쓸쓸한 해변가로 오려는가..

올 가을은 또다시 쓸쓸한 해변가로 오려는가..

 

지나간 몇 해의 여름에 비해서 올해는 참 한가한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지나간 해, 유난히도 병고로 고생하던 분들이 많았고 그 중에는 세상을 떠난 영혼들도 있었다. 그 영혼들과 보낸 세월도 짧지 않았고, 덕분에 날씨의 느낌에도 둔하게 될 수도 있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가, 올해는 그렇게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지만 따라서 우리들이 할 ‘일’이 줄어든 것도 사실이었다. 여가 시간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이제는 이 ‘귀중한 남는 시간‘을 어떻게 ‘멋지고 뜻 깊게’ 쓸 것인가.. 그것이 이 시원한 늦여름의 작은 즐거운 과제가 되었다.

 

말복 末伏 … 2016

2016년 8월 16일, 레지오 수첩을 보니 ‘말복’이라고 쓰여있다. 결국은 그날이 지나가는구나..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왜 그럴까.. 지독히도 끈적거리게 덥던 올해의 여름이 그렇게 고맙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말복은 복날 중 마지막으로 삼복 더위가 일단 끝나는 때인데, 이 초복, 중복, 말복의 삼복은 절기에 속하지 않는다고 한글 Wikipedia에 나와있다.  이것은 나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다른 것들은 내가 잘 못 알고 있었던 것도 있었다. 복 날의 복 자가 나는 이제까지 개 와 연관이 된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알고 보니 이것은 실제로 직접 상관이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복 더위하고 개 하고는 원래 상관이 없었던 것. 미국에서 제일 더운 때 여름철을 Dog Days 라고 부르는 것에서 생긴 나의 오해였는지도..

말복이 지나감에도 더위는 조금도 수그러지지 않지만 그래도 이날을 나는 기쁘게 맞이하는 것은, 이제 여름의 무더위는 ‘시간문제’임을 오래 산 경험을 통해서 알기 때문이다. 작년에는 말복이 지나고 열흘 뒤쯤에 비로소 아침 기온이 떨어지고 첫 시원한 공기를 느낀 것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야말로 이제는 ‘시간 문제’인 것인가..

그러면 이 복, 삼복이란 것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절기에 속하지도 않는 그저 일년 중 제일 더운 때의 3일, 삼복날.. 이것도 Wikipedia에서 ‘사실 여부에 상관없이’ 알게 되었다. 역시 짱 깨 들의 유산인가.. 중국 사기에 의하면 진 나라의 ‘덕공(德公) 2년’ (연호인가?) 에 시작되었다고 나와있다. 무척 역사가 깊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더위를 이기느라 ‘고기류’를 먹는 관습이 생겼다고 한다. 이것으로부터 대한민국의 자랑인 ‘개고기’ 먹는 해괴한 전통도 생겼나.. 

집을 완전히 떠나는 휴가가 없었던 올해의 무척 더운 여름, 비교적 건강하고 차분하고 규칙적인 나날을 만들려 안간 힘을 썼다. 하지만 2년 전의 경험했던 것 처럼 나는 올해도 mild burnout 이후 3일간의 big reset의 풍랑을 겪어야 했다. 그것으로 인해 야심 차게 시작하고 열심히 해 왔던 ‘성모님께 대한 33일 봉헌’ 과정의 끝을 맺지 못하는 불상사를 남기게 되었다. 모두들 아깝다고 comment를 했지만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보였던 disaster였다.  지금도 big reset의 과정이 다 지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훨씬 맑은 정신으로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나의 불찰이었다. 내가 나를 너무나 push했던 탓도 있었다. 인간의 기본적인 physical-mental-spiritual  balance가 완전히 깨진 것을, 나는 거의 무시하며 강행군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지겹게 덥기만 하던 올 여름에 얻은 귀중한 교훈.. 이것도 남은 생을 통해 두고두고 기억할 만한 귀중한 것이 되었다.

 

納凉: Spitzer, 歷史 Specials, 三國志

초복, 대서 가 멀찌감치 지나가고 드디어 중복을 갓 넘어간다.  이렇게 고국적인 냄새가 흠뻑 묻은 절기의 이름들: 소서, 초복, 중복, 대서, 입추 같은 것들.. 언제나 들어도 부드럽던 고국의 계절, 절기의 느낌이 그렇게 살아날까?  정작 옛날에는 ‘비과학적’이라고 거들떠도 안 보던 그 이름들을 지금은 아련한 기억의 선물로 즐긴다.

이런 이름들이 그런대로 나에게 다가오는 것은 우연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달력들에는 그런 것들이 거의 안 나오기에 완전히 잊을 수 있지만 다행히도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의 필수적인 지참 ‘활동수첩’에 그것이 고스란히 나오는 것이다. 하기야 레지오 마리애의 초 강대국인 대한민국의 단원수첩을 거의 그대로 베꼈으니.. 빠질 수도 없긴 하다. 처음에는 안 보이던 그런 절기 이름들이 이제는 나의 눈이 들어오니.. 무언가 나의 ‘가슴’이 많이 열린 모양이다.

중복이 지나가면 한국형 dog days들이 한창 지나가는 때이다. 그래서 보신탕을 이때 먹는지도 모르지만.. 지금 생각하니 참 ‘야만적’인 전통이 남았고, 먹을 것이 지천으로 쌓인 땅에서 아직도 이것을 먹는 것은 그것을 100% 증명하는 셈이다. 문화적이 차이라고 위선을 떨지만 그것이 그렇게 설득력이 있을까?

중복이 지나고 마지막 말복이 2주 쯤 남은 이 시점, 무척 덥다. 처음보다는 덜 덥지만 그것은 우리의 몸이 적당히 적응이 된 덕분이고 ‘과학적인 더위’는 거의 같은 정도로 매일 덥다. 이때를 어떻게 더위를 잊으며 빨리 보내나..  올해 피서 여행은 일찌감치 포기를 했기에 죽어도 집에서 이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문득 생각나는 아련~한 단어: 납량.. 이란 말.. 한자로 쓰면 納凉 이다.

받을 納, 서늘한 凉. 입시지옥 속에서 달달 외웠던 한자 1000자 덕분에 아직도 기억이 난다. 글자 그대로 시원함을 주는(or 받는) 것들을 뜻 한다. 하지만 납량이란 말은 학교에서 배운 것이 아니고 당시의 여름철 Radio, TV program에서 배운 것이다. 여름 이 맘 때쯤 되면 예외 없이 納凉物 이란 것을 내 보낸다. 그 시절엔 그 말의 뜻을 몰랐다. 하필이면 지독한 여름에 쓰는 말이 ‘별로 시원한 느낌이 없는’  납량일까.. 한 정도다. 납 이면 금속의 납 lead을 먼저 생각했으니까… 이제 알고 보면 이 걸맞지 않은 단어도 분명히 일제의 유물일 것이다.  일본 TV 프로그램 중에 이런 말이 자주 나온 것을 보았으니까…

방송계에서 납량물 이라는 것은 물론 ‘보고 들으면 몸이 서늘해 지는’, 그런 것들.. 거의 귀신에 관한 drama가 아닐까? 무서운 것을 듣거나 보면 상식적으로 더위를 잊을 수 있을까? 심리적으로 가능할 것이다.  이곳에 살면서 그 일본, 한국의 전통적인 귀신 납량물은 찾을 도리가 없지만 실제로 그런 것들을 보아도 이제는 하나도 무섭지 않으니 크게 시원함을 느낄 수도 없다. 나이 탓도 있겠지만 솔직이 이제는 귀신이나 ‘보이는’ 영혼들, 하나도 안 무섭다. 그들의 ‘정체’를 이제는 대강 알게 되었고 한 방에 그들을 물리칠 계책도 가지고 있으니까.

몇 년 전부터 나의 납량물은 역시 ‘시원한’ 책이나 귀신이 안 나오는 무섭지 않은 비 전통적인 납량물이다. 책들은 물론 읽어서 시원해야 하는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마음의 평정감과 만족감을 주어야 한다. 시끄러운 피서지가 아니고 사람들을 피해서 찾아간 심심산중의 느낌을 주어야 한다. 올해 나의 여름 납량물은 2권의 책과 home server archive에 거의 십 년 이상 건재 해온, 두 가지 video 다. video는 오랜 전에 보았고, 불현듯 가끔 보기도 하는 대한민국 KBS의 걸작 documentary ‘역사 歷史 스페셜‘ series, 그리고 고전중의 고전, 중국의 대하 역사 drama ‘삼국지 三國志’. 그러니까 video는 모두 역사에 관한 것이다. 2권의 책은 몇 주전에 산, 과학자출신 신부 Fr. Robert Spitzer의 저서로 제목은: (1) New Proofs for the Existence of God, (2) God so Loved the world.  이 것들은, 조금씩 더위의 한 풀이 꺾이는 이 시점에서 시작해서 이번 여름이 다 가기 전까지 나에게 ‘시원함을 보내주는’ 즐거움 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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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산 두 권의 책, 참 마음에 드는 cover design과 종이의 촉감 등도 그렇지만, 사실은 내용들이 너무나 기대가 된다. 근래에 나의 모든 관심을 끄는 분야가 바로 science & religion 인데 이 저자 신부님, 완전히 이 분야의 ‘뜨는 별’이라고 할까.. 물론 충분한 자격을 갖춘 ‘박학다식’하고 영성적인 사제(예수회)라 benefit of the doubt는 충분히 줄만 하다.

The New Proofs for the Existence of God  제목이 거창하지만 사실은 이 분야 apologetics의 전통적인 것에다가 최근 25년 사이에 밝혀진 (우주) 물리학, 철학 적 ‘발견’을 덧붙인 것이다. 특히 물리학 쪽인 Cosmology분야에는 원래의 Big Bang theory의 최 현대판인 contemporary Big Bang Cosmology를 비교적 기술적으로 다루었다. 예를 들면 bouncing universe, space-time geometry, quantum cosmology, The Borde-Vilenkin-Guth Theorem’s boundary to Past Time, Inflationary Cosmology, String Multiverse 같은 것이 포함되어 있다.

또 다른 책, The God so Loved the World 이 책은 물론 이 신부님의 전공인 Science와는 큰 상관이 없는 영성적인 책이다.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해도 왜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서 나타나셨나.. 하는 문제를 다룬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하느님이요 인간이신 예수, 특히 그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다룬 책이다. 그러니까.. 이 책의 주제는 ‘사랑’이다. 왜 하느님이 사랑이신가 하는 것을 참으로 조직적으로 파 헤친 것이다. 무조건 믿을 것인가, 아니면 심각하게,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고 믿을 것인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무조건 믿는 것보다 생각해 보고 믿는 것이 건강한 믿음이라고 생각하지만..

 

summer retreat, one third..

나만의 올해 summer retreat 하계피정의 3분의 1일 지나가고 있다. 말이 좋아서 하계피정이지.. 하얀 모래사장, 시원한 바람과 바닷물이 보이는 어느 East Coasta summer place하고는 너무나 거리가 먼 곳에서 보내는 하계피정은  별로 시원하지 않은 나의 this old house 지붕 아래에서..  그것이 벌써 3분의 1일,  11일째 날을 맞는다.

1장: 세속 정신을 끊음, 제11일: 삶에 대한 불안과 근심..  33일 봉헌준비기간 중 11일 째, 첫째 편인 ‘세속정신을 끊음‘  12일 중에서 11일 째, 그 동안 세속 정신에 대한 인식과 결단에 대한 ‘공부, 묵상’ 한 셈이다. 과연 얼마나 ‘피정 retreat’ 을 한 것일까?

Daily routine이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지만 시원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하루 중 머리가 그런대로 깨끗한 시간 아침 6시~6시 30분경에 모든 창문을 열고 환기를 하며 그날의 ‘과제, 주제’를 생각하며 묵상하는 것, 처음에는 거북한 느낌도 들고 ‘잡 것들 distraction, 주로 Internet’ 같은 것과 씨름을 하기도 했지만 며칠 만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는 ‘좋은 습관’을 만드는 비결을 터득했다고 자부하기에 이것도 그 중에 하나가 되었다. 비결은 간단한:  ‘just do it‘와 몇 가지 화살기도가 전부지만..

내일까지 과제는 ‘세속정신과의 싸움‘ 에 대한 것이다. 그 중에 오늘 것은 ‘(삶에 대한) 불안과 근심‘ 이다. 이것은 다른 것과 다르게 그렇게 형이상학적인 것이 절대 아니라서 조금 친근감을 느낀다. 삶에 대한 불안과 근심.. 왜 그렇게 익숙한 말이 되었나? 그렇다.. 그만큼 오래 살았다는 증거인 것이다.

오늘 주제의 서문은 다음과 같은데, 공감이 가는 글이다.

 

사람들은 겉으로는 지극히 태연자약해 보이지만 삶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갖은 수단을 다해 갖가지 고난과 위험으로부터 자신과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들을 보호하려 안간힘을 다하고 무엇보다도 돈과 재물을 모으기 위해 애쓴다. 그러한 것들로 행복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에 안정과 평화를 구한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그분의 뜻을 청하며 그리하여 평화와 기쁨 중에 살아간다. 하느님 안에 참 된 안전이 있기 때문이다.

 

지나간 세월을 돌아보면.. 삶이란 과연.. 어떻게 보면 ‘삶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발버둥의 자취‘ 가 아니었을까? 그 불안은 사실 육감적인 피부로 느끼던 불안이 아니라 나 자신의 가장 밑 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원초적인 불안’이다. 대부분 너무 깊숙한 곳에 도사리고 있어서 자주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없앨 수도 없는 것.. “나이에 따른  죽음과 점점 가까워지는 내가 사는 의미” 바로 “내가 왜 태어났고, 어디로 가는가?” 삶의 목적과 의미다. 이것을 잊고 살려고 하던 노력들은 사람에 따라 다 다르겠지만 대부분 ‘물질적 육감적 보호‘에 치중하다 보면 반드시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으로 이런 불안에 궁극적인 해답이 안 된다.

이것에 대한 삶의 예는 얼마든지 있고, 비교적 가까운 주변에도 있다. 삶에 대한 걱정과 불안으로 ‘아무것도 못하며 가족을 괴롭히는‘ 그런 형제님.. 너무나 그런 생각에 빠져서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 이것은 거의 depression에 가깝지만 알고 보면 그것도 아니다. 결국은 ‘나는 나, 너는 너, 나는 나의 소리만 듣겠다’라는 심하게 꼬인 이기심의 소산이라고 나는 본다. 어떻게 그런 늪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결국은 ‘초자연적’인 힘을 빌릴 수 밖에 없음을 나는 경험으로 잘 안다. 초자연적인 것.. 나만의 육감에만 의존하던 과거의 경험으로 해답은 바로 이것이다.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

 

Good Ole Days 의 시원한 여름에 대한 추억은 역시 어린 시절 poster로만 보았던 Troy Donahue, Sandra Dee 주연의 영화 A Summer Place 보다 더 멋진 것은 없었다. 학생입장불가 급의 poster도 화려했지만 몇 년 뒤에 취입된 Percy Faith 악단의 영화주제곡이 또한 ‘불후의 명곡’으로 남았고 아직도 그 당시 평화스러웠던 여름을 연상하게끔 한다.

 

 

Theme – A Summer Place – Percy Faith – 1960

 

Thundering afternoon..

 

problem-of-pain-1

¶  전깃불이 안 나가게 하는 ‘얌전한’ 천둥, 번개는 언제나 반갑다. 오늘 오후가 바로 그런 얌전한 날이 되었다. 암만 요란스럽게 으르렁거려도 나에게는 자장가처럼 포근하게 들리니.. 게다가 태양예찬론자들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지겹게 밝고 뜨거운’ 올해 여름의 하늘에서 나는 포근하건 무섭건 상관없이 어두운 구름이 깔린 모습이 그렇게 반갑다. 오늘 오후가 그런 반가운 토요일 우후가 되었다. 낙엽이 떨어지는 깊은 가을이나 삭풍이 부는 초 겨울 창문을 바라보며 마시는 구수하고 진한 커피의 느낌과는 사뭇 다르지만 이것은 그것 못지않게 멋진 여름의 선물이다.

나는 이런 포근함과 동떨어진 고통, 특히 ‘육체적’ 고통이란 무엇인가 다시 생각한다. 이것은 최근에 나 자신도 조금은 해당이 되지만 그것 보다는 우리 식구가 된 미운 정 고운 정이 엮일 대로 엮인 우리 집의 개에 불현듯 찾아온 ‘육체적’ 고통을 지척에서 보며 느끼게 된 것을 말한다. 6일 전에 찾아온 Tobey의 ‘움직이지 못하는 고통’을 보며 사람이나 동물이나 옆에서 느끼는 것은 하나도 차이가 없음을 절감했다. 아니.. 말을 못하는 탓에 사람보다 더 측은하다고 할까?

인간이나 동물 등은 분명히 구조상 고통을 안 느낄 수가 없게 태어났지만.. 근본적인 의문은 ‘왜’ 라는 것, ‘어떻게’가 아니고 왜..이다. 물론 이것은 하느님이라는 절대적인 존재를 전제조건으로 한다. 하느님 존재의 정의는 무엇인가? 전능하신, 우주의 어느 곳에나 계신, 한없이 좋으신.. omnipotent, omnipresent, benevolent.. 이것으로부터 problem of pain 이 나온다. 그런 전지, 전능, 한없이 좋으신 하느님이 피조물을 만들었다면 왜 왜 피조물들이 고통과 불행을 겪어야 하는 것인가.. 이것이 바로 ‘고통의 문제’ 인 것이다.

C. S. Lewis의 ‘고전 classic’ The Problem of Pain이라는 소고(小考)는 바로 그런 문제를 신앙의 변호자 입장으로 생각을 한다. 문제는 그 고통이란 것이 100% ‘나쁜 것’이냐 하는 것이다. 특히 신약성경을 보면 그 반대의 case가 부지기수가 아닌가? 자기의 십자가, 고통을 통한 영광, 깨우침을 주는 고통.. 구약에서도 욥기를 보면 ‘편안한, 행복함’과는 거리가 먼 느낌의 고통 투성이가 아닌가?

황혼기에 접어든 사랑하는 식구 같은 개의 고통을 하루 24시간 보면서 밝음과 어두움의 양쪽을 오가며 나만의 ‘고통의 문제’를 다시 음미한다. 그렇다, 고통의 뒤에는 반드시 그것의 뜻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것, 아니.. 나아가서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 

 

 Honeymoon’s Over? 최근에 와서 머릿속에서 이 구절이 자꾸만 떠오른다. 왜 그럴까? 어떤 특정한 사람에 관한 것이기에 조심스럽긴 하지만 그렇다고 1급 비밀에 속하는 것도 아닐진대.. 그것도 사제에 관한 것이라면 언제나 조심스럽긴 하다. 이런 사제의 부임 1년이 지나면서 이런 표현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표현은 사실 negative한 쪽을 항상 쓰인다고 하지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처음에 너무나 후한 점수를 주었기 때문에 ‘정상치’ 로 안정이 되었다는 표현은 어떨까? 그러니까.. 처음 1년 정도는 ‘무조건’ benefit of the doubt의 기간인 것이다. 이 부임 1년이 지나가는 사제가 전형적인 이런 case가 되고 있다. 나 개인적으로 느낌은 한마디로 실망적인 것이다. 이제까지 너무나 후한 점수를 주었나.. 지금이 정상인가.. 그래서 honeymoon’s over란 표현이 이 case에 딱 들어 맞는다. 희망사항은 더 이상 정상치에서 떨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것, 사제의 기도를 통해서 간구하고 싶다.

 

downpour, 갑자기..

지난 2주 동안 계속되던 폭염, 95도 (섭씨 36도쯤 되나..)의 나날들.. 가뭄까지 겹친 매일매일은 서서히 피곤하게만 느껴지기 시작.. 거의 매일이 그야말로 dog days of summer. Backyard의 찬란하던greenery 들이 서서히 시들 거리는 모습은 절대로 올해 여름에 기대한 것이 아니었다.

자연과 싸우려는 city water 의 무력함을 거의 매일 느끼는 것도 고통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낮에 일 순간에 쏟아진 ‘멋진’ 폭우는 일 순간에 이런 고통을 편안 함으로 순식간에 바꾸어 주었다. 이럴 때 Mother Nature의 여성형은 오늘 오후에 더욱 편안하고 포근한 느낌은 준다. 역시 Nature는 fair한 것이다. 감사, 감사..

 

2016-07-06 12.27.19

 

2016-07-06 12.27.01

 

dog days afternoon..

¶  Dog Days afternoon, daydreaming:  와~ 7월도 되기 전에 언제 여름이 이렇게 무르익었나? 그야말로 relentless heat (stress) days after days..  머리가 조금은 몽~롱~ 해진 상태에서 아하.. 요새가 바로 dog days.. 라는 탄식이 나온다. hot & sultry.. days.. 이것이 바로 dog days가 아니고 무엇인가? 거기에다가 Dog Day Afternoon같은 Al Pacino 1975년 영화까지 머리에 겹치니까 아주 더 머리가 혼란하기까지 하다. 더운 것은 여름이니까 그런대로 참는다고 하지만 문제는 ‘물’이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공짜 물’, 그러니까 비가 안 오는 것이다. 예년의 기억을 떠올리며 backyard의 green field를 상상한 것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고 있다. Hose water.. 의 무력함을 이렇게 실감하는 나날도 없는가? 암만 암만 홍수가 날 정도로 뿌려도 몇 분이면 땅이 완전히 다시 굳는다. 아.. Mother Nature여.. 오후에 딱 5분만 폭우를 보내 주어도 모든 문제가 일순간에 사라지는데.. 기우제라도 드려야 하는 것인가?

오래~전 오래~ 전.. 직장생활을 할 때를 가끔 기억에 떠올린다. 그때의 여름도 사실 요새와 그렇게 다를 것 없이 무더웠을 터이지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정 반대였다. 당시 corporate life (a.k.a salaried man)의 혜택.. ‘빵빵’ 사정없이 냉동이 된 건물 안에서 Nine to Five 를 견디고 집에 오면 몸이 녹는데 몇 시간이 걸린다. 한마디로 ‘푸근~’한 집이 그렇게 덥게 느껴진 적이 없었던 것이다. 훗날.. 연숙과 이야기를 하며 느낀 것은, 하루 종일 집에 있었던 사람은 내가 요새 느끼는 것과 같이 항상 더웠던 것.. 가정 집에서 암만 에어컨이 나와 보았자 그것은 사실 별 것이 아니었던 것.. 그제야 나는 실감을 한 것이다. 아무리 여름에 78도 에 맞추어진 집이어도 그것은 그렇게 시원한 느낌이 아니었을 것이고 그것을 안 후에는 조금 미안한 심정도 들었다.

 

¶  Greenfields are gone now, parched by the sun..  Yonsook Trail이라고 이름이 된 backyard의 깊숙한 곳 오솔길.. 초 여름까지 푸른 화초들이 길을 따라 ‘파~랗게’ 도열을 하며 맞아 주었지만 하늘에서 물기가 사라지고 대신 인정사정 없이 작열하는 태양열에 하나 하나씩 마르기 시작하며.. 이 1960년 초 folk classic Greenfields 의 가사 중 Greenfields are gone now parched by the sun.. 이란 구절이 떠오른다. Greenfields.. 어쩌면 그렇게 신선한 느낌을 주는 것일까? 대학생 출신 quartet The Brothers Four의 이 노래는 중학생 때 귀따갑게 듣던 명곡인데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인기 quarter이었던 불루벨즈가 멋지게 ‘모창’을 한 기억도 난다. 나중에 가사를 음미해 보니 역시 이것도 ‘가버린 연인’을 그리는 노래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을 때의 Greenfields가 가버린 연인을 따라 모두 황폐해진 것.. 잔잔하지만 격조 있게 은은하게 불린 멋진 4중창의 화음.. 역시 60년대 초만이 가질 수 있었던 멋진 추억이었다.

 

dried up, Yonsook Trail

parched, dried up, Yonsook Trail

 

Greenfields란 말은 그 이후에도 유행어가 되었는데 기억에 남는 것은: 하숙생들이 고기와 계란이 없는 순전히 야채 중심의 밥상을 꼬집을 때 하던 말.. 그것도 Greenfields였다. 세상이 많이도 변해서 당시에 야채중심의 식사는 ‘가난한’ 것이었다. 요새는 어떤가.. 돈이 없으면 야채를 많이 먹지 못하는 희한한 세상이 아닌가? 참 세상은 오래 살고 볼 것인가..

 

 

GreenfieldsThe Brothers Four – 1961

 

 

휴우~ 덥다 더위.. 6월 24일!

¶  휴우~ 덥다 더워.. 6월 24일!  이렇게 쓰고 보니 조금은 웃긴다.. 임마 (이런 말 아직도 쓰나?) 6월도 24일이면 한창 여름이 무르익어가는데 그것이 정상이지, ‘빠가야로‘! 하는 등뒤의 속삭임에 내가 웃는다. 그렇지, 지금은 더운 것이 정상이지.. 그런데.. 92도 라면.. 어떨까? 아마도 옛날 옛적의 대구더위에 비길 수 있겠지. 며칠 계속된 더위지만 극적으로 때맞추어 ‘내가 고친’ 에어컨 바람이 더 나에게는 시원하게 느껴진다. 이럴 때는 물론 오후에 때맞추어 쏟아지는 시원한 소낙비.. 하지만 느낌에 그런 chance는 거의 zero 인가 보다. 아니면 Johnny Rivers 의 60’s classic oldie, Summer Rain을 연상케 하는 그런 추억의 비는.. 어떨까.. 하지만 이것은 거의 꿈같은 이야기다.

 

 

1968년 여름의 추억, Summer Rain – Johnny Rivers 

 

오랜만에 그 동안 바깥 구경을 못하고 살았던 우리 집 두 마리의 ‘재미있는 개’ Tobey & Ozzie, 오늘은 내가 더 쳐지기 전에 용감하게 끌고 동네를 돌았다. 거의 할아버지 나이가 된 우리의 개 Tobey가 언덕을 ‘새로니의 개’ Ozzie를 앞지르며 나를 끌고 올라간다. 얘는 아마도 어렸을 때부터 이 동네 언덕을 나와 걸었기에 단련이 되어서 그런지 모른다. 공을 던지면 총알처럼 뛰어가는 다리가 긴 ‘젊은’ Ozzie, 2주째 우리 집에 머물며 자기 엄마 ‘새로니‘를 거의 잊은 듯 잘 지내고 있지만 그래도 밤에 ‘혼자’ 자야만 하는 그 녀석을 보면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얼마 전에 이곳을 걸었을 때 내가 열을 받았던 것, TRUMP FOR PRESIDENT, MAKE AMERICA GREAT AGAIN..이란 SIGN이 두 곳에서 나를 자극했던 것.. 오늘도 어김없이 그곳에서 ‘빠가’ 트럼프의 ‘쌍통’을 연상시킨다. 이 두 집이 바로 우리동네의 idiots, white trash인 셈이다. 이곳 East Cobb county는 물론 very conservative한 지역이고 전통적으로 ‘인정머리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런 ‘잘 사는 Republican white trash’들이 많은 곳이다. 그래서 이런 쓰레기 같은 SIGN을 본 것이 당연한 일이건만.. 나는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정도니.. 이건 분명히 내가 over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야말로.. I CANNOT HELP IT.. 어쩔 수가 없다. 도대체 이 덩치 큰, ‘젊은’ 나라는 어떤 쪽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는 것인가? 덥기만 한 날씨에 더 열을 받고 있는 내가 한심하기도 하지만.. 그래.. 이래 저래해도.. 모든 것들은 다~~~ 지나가리라..

 

¶  6월 24일 세례자 성 요한 탄생 대축일:  오늘 평일미사를 가면서 6월 24일이 세례자 성 요한 탄생 대축일 (Solemnity of the Nativity of Saint John the Baptist) 임을 매일 복음묵상 ‘newsletter’에서 보고 알았지만, 사실 그 전에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 ‘사건’으로부터 였다. 바로 이날 6월 24일에 발현을 하신 메주고리예 성모님을 이 ‘대축일’ 때문에 집에서 쉬던 (놀던) 그 ‘애’들이 본 것이다. 그 당시 이 발현 과정에서 이날이 ‘세례자 성 요한 탄생 대축일’임을 누누이 밝히고 있었지만 그 때 나는 그 말의 의미조차 잘 몰랐다. 이런 생각을 하니, 금요일 평일 미사엘 가면 분명히 세례자 성 요한과 예수님을 비교하는 짧은 강론을 듣지 않을까 기대를 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요새 거의 본당신부님 역할을 하시는 방문 신부님 Fr. Joseph, 뜻 밖에도 새로 부임하실 본당 신부님에 관한 얘기를 하며.. 우리의 ‘이해’를 구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사연은 물론 본당 Holy Family 성당에 7월 초에 새로 부임할 주임신부님이, ‘부인이 있고 가정이 있는 남자’ 라는 우리에게는 ‘폭탄’ 같이 느껴지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늘 방문 신부님의 설명과 ‘양해’는 나도 아는 사실이다. 바티칸에 소속된 모든 가톨릭 ‘종파’들이 모두 다른 Rite를 가지고 있는데 현재 우리의 ‘보편 된’ 것이 Latin Rite, 이곳에서는 신부님들이 결혼을 안 하지만 다른 극소수의 종파에서는 성공회같이 결혼을 한다고.. 듣던 얘기다. 이번의 새로 부임할 신부님은 Melkite 에 속한 신부님이라서 신부님들이 결혼을 한다고.. 하지만 우리들의 느낌은.. 그래도.. 하필이면.. 왜 그런 ‘소수 종파’의 신부님을 ‘주임신부’로 보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 본당 Holy Family는 지역적으로도 보수적이고 Irish Catholic의 전통이 농후한 곳인데.. 아마도 그들 대부분은 불만이 적지 않을 듯하다. 그 중에는 우리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상상을 하니 아찔하다. 가족을 주렁주렁 데리고 사제관에서 생활을 하며 가족들과 같이 미사에 들어 온다는 광경은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도라빌 순교자 성당에서는 구역문제로 우리는 고민에 빠지고 있는 마당에 이번에는 우리의 피난처 같은 미국본당에 부인, 가족을 동반한 주임신부가 온다는 사실.. 참.. 오래 살다 보니..

 

¶  성모님, 좀 봐주세요..  근래 우리부부와 자주 보게 되고, 예전 보다 조금 더 가깝게 지내는 C 자매님,  순교자 성당에 레지오 member를 중심으로 새로 생긴 Guitar Friends 그룹에도 참여 열심히 guitar도 연습하고, Holy Family 미국본당에서는 거의 매일 미사에 보게 된 멀게도 느껴지고 가깝게도 느껴지는 자매님, stress받는 것이 제일 싫어서 많은 사람과 가까이 지내는 것을 피하며 조용히 살지만 할 것은 다 하며 열심히 사는 자매님.. 왜 하느님은 어떻게 그런 병고를 주셨을까. 병고라면 이미 오래 전에 가족을 통해서 겪을 만큼 겪지 않았을까, 공평하지 않은가? 모든 아픔이 아물어가며 어떻게 다시 이런 고통을 보냈을까? 오늘 아침 미사가 끝나며 어제 doctor visit의 결과가 조금 짐작이 되었다. 우리 부부, 너무나 안쓰럽고, 미안하며, 어쩔 수가 없어진다. 그저 할 수 있는 말은 ‘기도를 더 열심해 해야겠군요’ 정도였다. 이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 이외에 무엇일까.. 늦은 아침을 먹으며 우리는 생각하고 생각한다. 성모님, 좀 봐주세요…

 

¶  육이오 6.25, 66년:  66년, 허~ 66년이라.. 여기다 6 하나를 덧붙이면 666가 되는구나. ‘악+악+악’, triple ‘악’ 인가? 그래 잊고 싶어도 잊지 못하는 단어가 육이오, 유기오, 융요 (박정희 대통령의 발음).. 그래, 의식이 살아있는 한 이 단어는 나를 ‘움찔’하게 만들 것이다.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이제는 ‘사학자’들도 총대를 멜 때가 되지 않았나? 미국의 역사 교과서는 현직 대통령도 역사의 심판대에 올려 놓는데.. 우리나라의 ‘병신 사학자님’들은 어떠신가? 아직도, 아직도 빨갱이 운동권의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가?

 

 

아직도 귀에 생생한, 육이오의 노래

 

요사이 재동 동창 김정훈 부제의 유고집 ‘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 를 읽고 읽고 읽으며.. 다시 느끼는 것, 나도 나도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아니 육이오가 없었으면, 아니 김일성 개XX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나의 인생은 아마도 김정훈 부제의 ‘사직동 김판사댁‘  못지않게 ‘원서동 이정모 교수댁‘ 이란 ‘선망의 눈초리’를 받으며 컸을 지 누가 알랴? 어떻게 육이오의 몇 개월 사이에 한 가정, 한 가족의 운명이 그렇게 뒤집어 질 수가 있을까? 물론 우리보다 더 ‘처참한’ 인생의 역전을 겪었던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죄 없는 동포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아니고 우리가 아니다. 우리 집은.. 우리 집을 말하는 것이다. 이 세상이 끝나고 저 세상에 가면 나는 반드시 ‘김일성’을 찾아내리라.. 그 개XX를 찾아 내리라.. 아마도 그 아들 김정일 개XX도 같이 있을 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을 찾기가 힘들 것이 분명히 그들은 지옥에 있기 때문이다.

 

Cool Morning, 3rd Saturday

¶ 아~~ 시원하다 언제부터 시작된 ‘여름 전의 한여름 더위’ 였던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만큼 갑자기 ‘당한’ 열대성 무더위에 머리조차 멍~ 해진 기분이다. 특히 새벽에 느끼던 찜찜하고 끈적거리는 듯한 머리 속.. 그것이 더욱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마도 열흘 이상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된’ 그런 것.. 하지를 며칠 안 남겨두고 한차례 한여름을 치른 것이다. 그러던 것이 오늘 아침에 일어나니 조금 느낌이 달랐다. 시계를 보니 6시가 조금 넘었다. 부리나케 창문을 열고 공기를 마셔보니.. 와~~ 이것이 웬 떡이냐.. 습기가 완전히 빠지고 산들바람까지 불어대는 초가을의 아침이 아닌가? 이것이야 말로 웬 떡이냐..란 탄성이 나온다. 띵~~ 하던 머리가 갑자기 맑아지는 듯한 날라가는 느낌.. 아~~ Mother Nature여.. 이래서 살게 되어 있나 보다.

지겨운 일기예보를 안 보고 산 것이 몇 주가 되었나? “Donald  Duck쌍통”을 비롯한 또 다른 해괴한 뉴스들, 같은 식으로 이런 것도 안 보는 이상한 세월을 보낸다. News TV, outlet을 거의 피하며 나의 sanity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몇 개월째 그런대로 효과를 보고 있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살다가는 나야 말로 cavemen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든다. 하지만 결론은, 요새 세상은 cavemen 쪽이 더 낫다는 것이라.. 문제가 없다.

6월도 훌쩍 반을 넘어간다. 새로니는 오랜만에 지루한 학교생활을 떠나  유럽여행으로 집을 완전히 잊은듯한 기분으로 3주 여행 중 2주째를 맞고 있다. 우리는 언제 온 가족이 여행을 같이 가보나.. 하는 바램이 항상 머리를 떠나지 않지만.. 그래.. 다 때가 있는 거다.. 지긋이 기다리면 된다. 특히 ‘조직신앙’을 떠난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돌아오는 그날을 기다리며, 그 때가 우리가족 여행의 적기 適期 라는 생각도 한다. 과연 그날이 올까? 기다리자.. 기다리자..

 

Vatican St. Peter's Square 에서

Vatican St. Peter’s Square 에서

 

¶ Ozzie Grounded 새로니의 ‘아들’ Ozzie, 3주간 여행 중 우리가 맡고 있다. Midtown condo에서 살던 기운이 왕성한 덩치가 큰 강아지, 다리가 유난히도 길어서 우리 집의 3′ 짜리 Tobey fence를 임시로 3′ 높여서 6′ Ozzie fence ‘사고로 뛰어 나가는 것’에 대비하는 등 신경을 곤두세우기도 했다. Condo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mansion처럼 크게 느껴지는 우리 집에서 얼마나 뛰고 싶을까.. 오는 날부터 지겹게도 더운 바깥으로 나가자고 하루 종일 졸라대며 우리를 괴롭히더니.. 결국은 사고를 냈다. 우리가 없는 동안, Publix fried chicken, 먹고 버린 것, 쓰레기 통을 열고 모조리 먹은 것이다. 뼈 투성이의 그것을 흔적도 없이 다 먹은 것이다. 작은 뼈들을 잘못 먹으면 큰일이 난다고 들었기에 우리는 혼비백산, 걱정을 했지만..  큰 문제가 없는 듯 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결국은 strict하게 하는 것으로 정하고 완전히 하루 종일 ground를 시켜 버렸는데 이것이 아주 큰 효과를 내서 이제는 아주 얌전하게 우리 집 분위기에 적응을 하고 있다. 하기야 그 동안은 가끔 우리 집에 놀러 왔기에 너무나 ‘풀어 주었던’ 것이 문제였다. 그런 것 말고는 2주를 우리 집 개처럼 Tobey와도 잘 지내고 고양이 Izzie의 territory도 잘 지켜주고.. 문제가 거의 없다. 날씨가 시원해져서 이제는 grooming도 해 줄 수 있게 되었다. 새로니가 돌아오면 이 녀석이 자기 엄마도 몰라보고, 혹시 누군가.. 하는 것이 아닐까, 재미있는 상상도 해 본다.

guest인 Ozzie와 나란히 누워 있는 Tobey.. 모습이 너무 좋다

guest인 Ozzie와 나란히 누워 있는 Tobey.. 모습이 너무 좋다

 

Happy Note, Central A/C humming again! 올 들어서 제일 더운 거의 5일간 아래층 에어컨이 없이 살았다. 아래층은 낮에 잠깐 에어컨이 나올 정도지만 그래도 음식을 하거나 하면 83F 까지 올라가고 그 여파로 위층의 에어컨이 overworking 을 하게 된다. 그런 식으로 며칠을 살고 보니 예상보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급하게 order했던 condenser fan motor, run capacitors, 그리고 제일 필수적인 tool, Fan Blade Puller가 하나하나 씩 도착을 했고 나는 만사를 제쳐놓고 땀을 폭포처럼 쏟으며 repair mode로 돌입, 천신 만고 끝에 결국은 다시 에어컨이 돌아가게 되었다.

이것은 사실 ‘이론적인 것이 거의 없는’ 거의 mechanical work에 불과했지만 그 과정에는 정말 surprise 가 도처에 도사리고 있어서 성공여부를 장담할 수 없는 처지였기에 나는 더욱 stress를 받았다. 제일 나를 괴롭혔던 것은 망가진 fan motor에 완전히 녹으로 붙어버렸던 fan blade를 빼 내는 일이었다. 그것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그 fan blade가 망가질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만 ‘전문적’으로 빼 내는 tool이 ‘발명’이 되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써야 했는데.. 그것 역시 automatic이 아니고 완전히 ‘완력 腕力’이 필요한 것, 평소에 운동을 안 했으면 아마도 거의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천신만고 끝에 결국 그것이 빠져 나오고 새 motor에 끼운  후에는 간단하지 않은 electrical wiring까지.. 휴~~~ Power Switch를 킨 후, 다시 에어컨이 돌아가는 소리와 찬 바람이 느껴질 무렵에는 나는 거의 완전히 쓰러지는 느낌이었는데, 피곤함 보다는 안도감 때문일 것이다.

이번에 만약 pro service를 받았으면 얼마나 charge를 했을까? 아마도 최소$700~$800 정도였을 것이다. 나의 이 job의 total expense는 $100 정도였으니까.. 최소한 $600 정도는 save한 셈이다.  비록 두 식구가 사는 집의 가장이지만, 집안의 환경에 대한 책임감은 정말 무거운 것이었고 그것이 주는 stress역시 상당한 것.. 하지만 기대했던 결과는 언제나 모든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는 것.. 그것을 바라며 땀을 흘렸던 지난 주의 한가지 happy note가 되었다.

 

Brand new condenser fan motor

Brand new condenser fan motor

Magic tool, blade puller: 드디어 fan blade가 빠졌다

Magic tool, blade puller: 드디어 fan blade가 빠졌다

 

HV’A/C’ emergency

Clunking OLD a/c condensers

Clunking OLD a/c condensers

 

HVAC Heating, Ventilation, Air Conditioning 일주일 이상 90도를 넘게 괴롭히던 올해 무더위의 첫 희생자가 나왔다. 희생자가 아니라 희생물이라고 해야 하나? 결과적으로, 우리 집 2층의 air conditioner (a/c)가 ‘찬바람’을 내 보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럴 때면 나는 항상 묻는다.. 왜 하필 이때에.. 그러니까 why now?인 것이다. 조금 선선할 때 고장이 나지 왜 제일 필요할 때인가 말이다. 제일 무덥던 토요일 오후, 오랜만에 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 같이 ‘조심스럽게 평화로운 시간’이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나의 머리는 거의 순간적으로 emergency mode로 바뀌며 비지땀을 흘리기 시작하게 되었다.

이럴 때마다 또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왜 남들은 이럴 때, 그저 간단하게 ‘업자, hvac contractor, repairmen’에게 전화 한 통으로 다 끝날 것들을.. 나는 이렇게 비지땀을 흘려야 하는 것일까? 물론 이유는 간단하다.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우선 ‘내가 고쳐야’ 한다는 오기와 그에 따른 ‘낭비, 폭리를 일삼는 repair shot’들’을 가능한 한 피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하지만 a/c에 관한 것은 최근까지 나에게 ‘금기사항’이었다.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전화를 한 것이 2~3년 전쯤인가.. 아래층 a/c에 문제가 생겼을 때, Coolray truck이 집으로 온 것.. 그 때 비록 그들은 문제를 해결하긴 했지만 옆에서 지켜보던 나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고친 것은 outside condenser unit 속에 있는 ‘타버린 wiring’ 몇 개를 바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독히도 간단한’ 것, 하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일단 truck-rolling (repair truck이 찾아온 것)되면 그것에 대한 기본 charge를 내야 한다. 그 이후부터는 아예 여름이 되기 전에 색깔이 변하는 듯한 wiring은 내가 바꾸어 버렸다.

 

Dead blow fan motor

Dead blow fan motor

 

하지만 이번 것은.. 사태가 심각한 것, condenser unit의 blow fan을 돌려주는 motor가 죽은 듯.. fan이 돌지를 않았다. 결과적으로 overheating이 되고 system이 shut-down된 것이다. fan motor를 보니..  고장이 나게도 생겼다. motor label이 삭아버릴 정도로 ‘오랜 된 것’, 이런 것은 하루아침에 고장 나기 보다는 서서히.. 기증이 저하하는 것인데, 밖에 있는 것이라.. 알 수가 없었다. 이것이 ‘천천히 돌면’ 아마도 cooling function이 크게 저하했을 것이지만 그것을 내가 알 도리가 없다. 그저 여름만 되면 ‘올 여름에는 이것들이 잘 견딜까..’ 하는 불안감하고 싸우기도 한다.

이런 문제가 생겼을 때 ‘인간의 머리’는 완전히 ‘비상 mode‘로 바뀌는 것이고 머리는 보통 때의 10배 정도로 잘 돌아간다. 위층에 문제가 생기면 보통 문제가 아닌 것이 그곳은 우리의 저녁 생활 공간이고, 잠을 자야 하는 곳, 그곳이 너무 더우면 아무 것도 못한다. 아래 층은 구조상 그렇게 더운 곳이 아니기에 여차하면 그곳으로 내려 오면 되지만, 귀찮은 노릇.. 그러니까 어떡하든지.. 고쳐야 한다. Replacement fan motor를 어떻게 당장 구하나.. ‘무리, 무리’.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순간적으로.. 아하~ 아래 층 a/c fan motor를 ‘빌려 쓰면’ 되지 않을까?

그런 쪽을 머리는 돌아가고.. 두 대의 condenser unit 를 자세히 살펴보니.. 거의 비슷하게 생겼다. 차이는 아래 층 것의 radiator 가 위 층 것보다 조금 작을 뿐이다. 그러니까.. fan, fan motor같은 것이 ‘거의 같은’ 것이다. 즉시로 행동개시.. 아래 층의 motor unit (motor+ fan blade)를 빼 내어서 고장 단 위 층 것과 교체를 했다. 물론 이 작전은 motor자체가 고장 났다는 전제에 의한 것이다. 만약 motor가 아닌 다른 것이 원인이었다면 이 작전은 완전히 끝이 나는 것이다. 이 때 내가 하는 것.. 묵주기도 ‘비슷한’ 성모님의 도우심이다. 급하니까, 초자연적인 힘까지 동원하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긴급작전은 100% 성공했다. 문제의 원인은 그러니까 ‘죽어버린 fan motor’에 있었다. 이 이후 아래층의 a/c는 완전히 shutdown이 되고 위층은 원래대로의 ‘시원함’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것으로 시간을 번 것이지만, 아래층의 온도가 83도까지 올라가고 그 결과 위 층의 a/c는 평소보다 ‘더 열심히’ 돌아야 했지만 그래도 편하게 위 층에 머물 수가 있으니 불평은 없다.

이제부터의 문제는, replacement fan motor를 찾고 구해야 하는 것, 역시 Internet의 도움을 받아 under $100 로 order를 할 수가 있었는데, 이것이 끝이 아니다. 고장 난 motor에 붙어서 꼼짝 을 안 하는 fan blade, 오랜 세월을 견디며 motor에 완전히 ‘붙어서’ 빠지지 않는 것이다. hammering을 하며 빼 내려는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거의 포기 단계, 해결책은 똑 같은 것을 구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를 않다. 너무나 오래 된 것이라.. 없는가?

 

stuck & stuck fan blade!

stuck & stuck fan blade!

 

나와 같은 문제를 가진 ‘미국 사람’들이 부지기수인가? Goolging 을 하면 해결책이 나온다. 아예 stuck fan blade를 빼내는 tool까지 ‘발명’ 이 된 것이다. 이것이 fan blade자체보다 더 비싸면 문제지만 의외로 affordable..  under $35, 이것을 쓰면 ‘아마도’ 쓰던 blade를 다시 쓸 수가 있을 것이다. 나의 plan에 의하면 이 모든 문제들은 $100 정도 선에서 해결 될 듯하다. 만약 ‘그들의 truck’이 굴러 나왔으면 얼마나 들까.. 아마도 $500  정도면 재수가 좋지 않을까?

이번에 새로 알게 된 사실은 소위 말하는 run capacitor의 역할이다. Condenser Unit에는 항상 이것이 붙어있고 이것의 기능은 두 대의 ‘중요한’ motors (1. compressor, 2 blow fan)를  smooth하게 start하는 것이다. 이것에 문제가 생기면 motor자체가 돌지 않을 수도 있고 수명이 단축이 될 수도 있다고.. 그러니까.. 이것의 역할은 정말 중요한 것인데 의외로 그것이 싼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두 대의 condenser 모두 새것으로 바꾸기로 하고 order를 했다. 비록 고물 a/c 지만, 이것으로 조금이라도 수명이 연장이 된다면 이 투자는 것의 ‘공짜’인 것이다.

Order한 것들을 기다리며.. 생각한다. 과연 우리 집 ‘고물 a/c들’, 어떻게 할 것인가? 죽을 때까지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proactive하게 고치거나 교체를 할 것인가? 이것은 분명히 budgeting이 절대로 필요한 spending이다. 만약 두 대 다 교체를 한다면 올 겨울 제일 쌀 때가 적기 適期 일 듯 하다. 다른 ‘공상’은 이런 것이다. In-house unit 가 비교적 새것이라서.. Outside unit자체는 내가 ‘혼자서’ 설치할 수는 없을까? 현재 단계에서는 ‘공상’이다. 하지만 현재까지의 research에 의하면 충분히 가능하게도 보인다. 위험부담은 무엇인가? 더 연구하면 분명히 새로운 ‘비밀’들을 알 수 있지 않을까?

 

Cool rain, 4 shed kittens plus

¶ Rainy May Afternoon: Peaceful easy feeling.. cool, rainy waning May days: 이것이 요새 며칠간의 느낌이라면.. 한때 거의 90도까지 치솟았던 5월 초를 생각하면 요새 흐리고 빗발뿌리는 날씨들은 정말 의외라는 신선한 느낌들을 준다. 성모성월, 어머니 날, 어머니 기일, 온통 포근한 느낌의 5월이지만 이렇게 시원하게, 잔잔하게 내리는 물방울들은 정말 peaceful easy feeling, 그 자체다. 다행히 올 들어 한번도 ‘시끄러운’ a/c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문제가 없었다. 고물 중에 고물이 된 이 고철, 올해의 더위에 과연 견딜까.. 지난 몇 년간 이맘때면 항상 ‘점을 치던’ 습관이 올해에도 변함이 없다.

고요히, 잔잔히, 싸늘하게 내리는 5월 비..

고요히, 잔잔히, 싸늘하게 내리는 5월 비..

저물어 가려는 시원하게 비가 나리는 5월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삭신을 쑤시게 하는’ 바깥 일들, 중노동이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지만 그래도 그런 일들, deck finishing, garden structures, siding repair, new flooring, garage overhaul등등..   천천히 계획을 세워서 하면 큰 문제가 없을 듯하지만 문제는 expense.. 이것은 budgeting을 하지 않고서는 무리, 무리..

5월 말에는 우리 집의 다른 senior citizen doggie, Tobey의 annual medical checkup이 있는데, 이것도 비용이 만만치 않다. 분명히 나이 탓으로 여러 가지 test를 하자고 할 것이고.. 항상 surprise가 도사리고 있음도 경험으로 알기에 신경이 쓰인다. 나와 같이 늙어가는 우리 집 ‘깡패’ Tobey.. 가끔 안아주면 서로가 쳐다보며.. 무언의 대화를 한다. 우리 참 정이 많이 들었다.. 누가 먼저 가던지 가는 곳에서 서로 또 만나자.. 라는 듯. 사람보다 나은 개들도 많은 이 세상이 이런 정든 친구가 있다는 사실은 나를 행복하게 만들지만, 언제가 서로 헤어져야 할 것을 생각하면 다시 우울해진다. 하지만 그것이 인생의 법칙이고 순리가 아닐까?

 

¶ Four Shed Kittens, weeks after: 우리 집 backyard에 있는 shed 밑에서 kitten 4마리가 태어나고 자라고 있음을 지난 5월 초에 알게 되었음을 나의 5월 6일자 blog에 썼지만 그 이후의 ‘발전’에 관해서는 잊고 있었다. 그 몇 주(2주가 훨씬 넘은) 동안 우리의 온통 관심은 그 4마리의 ‘귀여운 (이 나이에 귀엽지 않을 리가 없지만)’ kitten에 있었다. 하루에 몇 차례씩 ‘식사공급’을 하면서 그들을 볼 기회가 있지만 아직도 낯을 가리며 숨기 일쑤다. 항상 엄마를 조심하며 접근을 하지만 생각보다 엄마는 최소한 우리가 ‘나쁜 놈들’이 아니란 것은 아는 듯 하였다. 그들에게 겁을 안 주려고 사진조차 찍는 것을 참고 있다.

밥을 어찌나 많이 먹던지.. 아마도 kitten보다는 엄마가 많이 먹을 것이다. Nursing mom cat은 평소보다 3배를 먹는다는 얘기를 들었기에 이해가 간다. 주는 대로 시원스럽게 밥이 없어지는 것이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고, 하루 하루 다르게 커 보이는 kitten 4 sister, brother들 서로 장난을 치고 wrestling을 하고 엄마 품에 앉게 노는 모습들.. 나는 느낀다. 우리 집 아이들 세상에 나왔을 때를 생각하지만 그 때와 또 다른 것이다. 나이 탓인가, 신앙적인 믿음 탓인가.. 다르다. Pope Francis의 제2의 회칙 encyclical,  Laudato Si (On Care for Our Common Home, Earth, 아씨씨의 성 프란치스코 Canticle of the Sun 에서 나온 말)의 영향인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우리들의 가족이다. 생명이 있는 것이면 더욱 그렇다.

현재까지 우리 집 backyard shed의 밑 바닥을 자기 집으로 알고 편하게 nursing을 하는 ‘엄마’, 평소보다 덜 ‘외출’을 한다. 분명히 편하게 잘 먹을 수 있어서 그럴 것이다. 먹이가 이곳에 없었으면 분명히 ‘산모’의 몸으로 먹이를 찾아 모험을 해야 할 것이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온다. 자식들을 챙기는 고양이 엄마의 보호본능.. 그것이 그들의 본능적 사랑일 것이다. 시간이 되면 kitten들을 떠나겠지만 그 때까지는 ‘책임’을 지고 살필 것이다. 이보다 못한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하면 답답해짐을 느낀다. 동물보다 못한 인간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매일 매일 자라나는 아기 고양이들을 보며 많이 배울 것이다. 무엇이 진정한 Laudato Si 의 정신이고 무엇이 자비, 사랑인지를..

 

¶ 나르는 엄마 고양이: 고양이, 양양이의 얼굴들이 눈에서 아롱거리는 이때, 1960년 4.19 혁명 당시 미국 사진 화보잡지 LIFE magazine의 ‘이모저모, miscellany’ 란 에서 재미있는 사진과 짧은 기사를 보았다. 이것도 역시 ‘산모 고양이 엄마’에 대한 사진과 기사다. 동물 모성애를 보여주는 그야말로 극적인 순간을 사진으로 잡았다.

출산 날짜를 ‘잘못 잡아서’ 어느 테네시주 Tennessee 낙스빌 Knoxville 의 교통순경 patrol man 집 낮은 지붕 porch 위에서 kitten을 낳은 엄마 고양이 Puddy, 이들을 땅에서 보살피기 위해서 ‘공수작전’을 하려는 노력으로 지붕 옆에 있는 나무 가지로 3주된 kitten 한 마리씩, 모두 네 마리, 입에 ‘물고’ ‘비행’하는 장면.. 글에 의하면 그 엄마 고양이는 kitten 4마리 ‘모두’를 안전하게 땅으로 ‘안착’시켰다고 한다.  어머니, 엄마의 계절 5월에 보는 이런 모습들은 나의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3주 된 kitten을 물고 나르는 엄마 고양이, Puddy

3주 된 kitten을 물고 나르는 엄마 고양이, Puddy

 

성모성월, 성모의 밤, 그리고 어머니..

 
교황님 2016년 5월 지향기도

¶  성모성월:   Vatican Youtube에는 이제 매달마다 교황님의 ‘매달 지향기도 monthly prayer intention‘ video가 실린다. 보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개월 밖에 안 되었지만 이제는 은근히 기다려지기도 한다. 짧지만 아주 심도 있고 호소력이 있는 교황님의 ‘구수한’ Italian comment는 영어자막이 곁들여져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지난 달에는 ‘제대로 대우를 못 받는 농부들’ 에 관한 것이고 이달은 ‘별로 인정 못 받고 고생하는 세계의 여성들’에 대한 기도이다. 참 계절적으로 알 맞는 기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5월과 여성, 특히 성모님은 어쩌면 그렇게 느낌이 일치하는 것일까? 그래서 Mother’s Day, 가톨릭 전례력으로 성모성월, 성모의 밤.. 등등이 모두 5월에 함께 모여있는 것일까?우리 어머님의 기일도 5월에 있음이 한동안 나를 슬프게 했지만 다른 편으로 생각하니 이런 포근한 기분의 5월에 있음이 조금은 나를 위로하는 셈이 되었다. 어디 그 뿐인가? 사람을 노곤하게 만드는 첫 한가로운 느낌의 더위가 여름의 시작을 알리고, 재수가 좋으면 (나쁘면?) space heater를 켜야 할 정도의 싸늘한 아침도 이때에 꼭 있다. 지난 주말 경에 사실 아침에 central heating 이 요란하게 나온 적이 있었으니까.. 아마도 그것이 올 여름 전에 ‘마지막’ 난방의 소음소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첫 A/C (air conditioner)의 소음 소리를 들을 때가 가까워졌을지도 모른다. 이미 나의 office에는 ‘돗자리’가 자리를 잡았고 80도 이상을 웃도는 늦은 오후에는 pet dog, Tobey 와 함께 ‘오수 午睡’를 즐길 때가 되었다. 이런 5월의 모습들이 나를 즐겁게 한다.

 

 

¶  성모의 밤:  올해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성모의 밤 행사는 우리에게는 조금 느낌이 다른 경험이 되었다. 내가 우리가 몇 년 동안 보았던 성모의 밤은 대개 5월 말 쯤에 있어서  거의 여름 기분으로 바뀐 시점으로 조금은 싱그러운 5월의 향기가 희미해진 느낌이었고, 본당 대성전 안에서 ‘경직된 행사’를 하는 느낌으로 했었는데, 올해는 ‘정식으로’ 본당 성모 동산 앞, 그러니까 야외, outdoor에서 ‘진짜 성모의 밤’을 보게 된 것이다. 커다란 가정집 mansion 뒤뜰에서 결혼식을 하는 느낌까지 들었다. 거기다 시간적으로 어두움이 잔잔히 가라앉기 시작하고, 향기로운 5월의 공기까지 성모동산을 신비롭게 감싸는 것, 정말 느낌이 새로웠다.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자랑스런 유산, 성모동산이 촛불 행렬을 기다리며..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자랑스런 유산, 성모동산이 촛불 행렬을 기다리며..

어두움이 깔린 성모동산, 인자로운 눈이 어둠을 밝힌다

어두움이 깔린 성모동산, 인자로운 눈이 어둠을 밝힌다

열을 지어서 행진하는 장미꽃, 촛불들의 행렬의 위에 인자로운 미소로 내려다 보시는 성모님.. 머리 속으로 ‘분명히’ 성모님께서 지금 이 시간 시공간을 초월해서 우리 앞에 계신다는 것을 그리며 그린다. 비록 본당주최라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성모신심의 본향인 레지오 단원들의 정다운 모습들을 많이 보게 되고, 특히 예년에 비해서 더 레지오에 관심을 보이시는 본당신부님들의 모습도 다정한 어머님의 눈길과 더불어 더 5월 초의 향기로운 저녁 하늘을 포근하게 느끼게 했다. Never too late라고 이제나마 ‘진짜 성모의 밤‘을 보게 해 주신 성모님께 다시 한번…

 

¶  나의 어머니 날:  2016년 5월 8일, Mother’s Day, 어떻게 올해는 오래~전 어머니 날과 날짜가 같을까? 5월 8일.. 나의 시절에는 어머니 날이었지 어버이 날은 기억에 없었다. 이날은 여러 가지가 겹친 날이기도 했다. 2번째 일요일, 레지오 꾸리아 월례회의 날이라 오랜만에 주일미사를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하게 되어서 비록 몇 주만이지만 새로운 기분으로 본당을 둘러보고 성물방의 도서실도 기웃거리고, 이제는 낯익은 담당 자매님에게 레지오 행동단원 입단도 권유해 보는 등, 기분을 새로이 하는 날이 되었다. 이제는 예의 낯익은 얼굴이 분명히 몇 분이 꼭 있어서 예전에 비해서 마음이 덜 불편하게도 되었다.옆 동네, 마리에타 1구역 담당의 $3 점심도 비록 한 그릇이었지만 맛은 아주 감칠맛나게 좋았다.

날씨도 기가 막히게 화창한 날 예전 같으면 ‘아이들의 강요’에 못 이겨 ‘끌려서라도’ 주인공인 ‘돼지 엄마’를 ‘모시고’ classy한 곳에서 외식을 하기도 했겠지만.. 글쎄.. 이제 모두들 ‘늙었나..’ 움직이는 것 귀찮다는데 거의 동의한 단계가 되었다. 올해는 idea가 바닥이 난 아이들을 ‘구제’하려 내가 volunteer를 해서 집에서 나의 ‘특기 요리’로 이날 오후를 보내게 되었다. 나의 특기요리는 평소에 ‘돼지 엄마’가 좋아하는 ‘lots of, lots of vegetable & ground beef stir fry‘ 라고 내가 이름을 붙인 이제는 거의 classic이 된 나만의 요리이다. 그저 ‘재료만 많으면’ 눈을 감고도 만들 수 있는 요리.. 오늘의 main dish가 되었다. 아이들은 red wine, 손수 만든 chicken wing을 밖에서 grill하고, Doraville H-mart에 있는 ‘빵집’에서 사온 ‘덜 달고, 덜 큰, 알맞은’ cake등으로, 그런대로 ‘초 간단 超 簡單, 초 저가 超 低價’ 였지만 만족스런, 즐거운 Mother’s Day late luncheon이 되었다. 주인공은 아이들의 엄마인 ‘돼지 엄마’겠지만 나의 머리 깊숙한 곳에는 나의 heroine, 나의 어머니가 더 크게 자리를 잡고 있는 화창한 5월 8일 어머니 날이 되었다.

 

싸늘한 4월 초에..

glorious April rain showers..

glorious April rain showers..

싸늘한 4월 초순..  재 빠르게 우리를 떠나려고 한다. 계절적인 날씨에 조금은 둔감해지려고 노력을 한 덕분에 요새는 날씨가 주는 감상적 말에도 둔감해진 듯하다. 하지만 다시 절감한다. 날씨가 우리의 ‘많은 것’에 미치는 잠재적 영향력을.. 나의 지나간 blog을 가끔 보면 ‘날씨’라는 tag을 포함한 posting이 꽤 많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3월의 날씨는 한 달이 지나갔어도 머리 속에는 ‘거의 미친 3월’로 남는다. 3월 중순 쯤 일 주일이 훨씬 넘는 끈적거림의 ‘불쾌함’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특히 밤에 잘 때 보이지 않는 ‘여름 잠옷’을 찾는 고역을 겪었던 기억.. 이런 날씨가 3~4일 정도라면 ‘정상’이지만 이건 ‘비정상적’인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머리 속에 기억 된 ‘4월초의 찬란한 싸늘함과, 4월 말의  소리 없는 Spring Rain’을 그리곤 했다. 또한 April Showers Bring May Flowers..라고 종알대던 어렸을 때 우리 딸들도 연상을 하곤 했다. 그러면 99% 나의 불쾌함은 멋지게 사라지곤 했다.

그리곤 영락없이.. 왔다.. 4월 초의 청초한 싸늘함.. 거의 빙점 near-freezing 까지 떨어지는 ‘멋진 4월’을 현재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구석으로 밀려난 space heater가 다시 반갑고, desk 밑에 아직도 있는 electric foot-warmer가 어찌 그렇게 반갑고 따뜻하게 느껴질까?

계절 곳곳마다 흠뻑 젖어있는 각종 좋건 나쁘건 간에 추억들의 각각 페이지들을 ‘원하기만 하면’ 들춰볼 수 있다는 사실..  어쩌면 ‘노년만 가질 수 있는 오랜 세월의 경험으로부터의 즐거움’이 이런 것인가.. 나이가 먹는다는 것.. 절대로 과소평가할 수 없는 것.. 우습기만 하다. 이런 것들이.. 전에는 거의 느낄 수 없었던 ‘황혼기’의 즐거움이다.

 

Dark Easter

2016년 부활절, Easter day가 어둡게 시작되어서 어둡게 저문다. 요새 매일 틀리는 일기예보, 예보되었던 thundershower와는 대조적으로 아주 조용한 이슬비가 간간이 뿌린다. 기후적인 느낌은 비록 완전한 봄의 것이지만 그 이외의 나의 모든 것들은 모두 아직도 끌려가는 듯한 겨울의 그것이다.

어제 늦은 밤까지 진행된 ‘피곤한’ 부활성야 Easter Vigil mass를 마치고 힘들게 집에 들어오면서.. 아마도 다음 날 아침의 ‘진짜’ Easter ‘main’  mass는 빠질지도, 못 갈지도 모른다는 쳐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런데 그런 기분이 현실이 되었다. 거의 10년도 넘게 처음으로 나는 ‘진짜’ 부활절 미사 참례를 못 한 것이다. 미안합니다.. 성모님, 어떻게 이런 일이? 암만 생각해도 이것은 추악한 것이다. 최고 내가 믿는 신앙의 절정의 시간이 가장 밑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다. 오늘의 날씨와 같이 ‘어두운 부활절’을 남기고 간다.

7 Daffodils, 봄은 어디에..

out backyard daffodil

out backyard daffodil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봉숭아 꽃, 나팔꽃, 분꽃.. 어렸을 적에 나의 방 앞 뜰에 신나게 피어나던 꽃들을 잊고 산 지가 반세기가 훨씬 지나가며 인생의 황혼기에 다시 그런 ‘신비의 모습’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참 신기하다.. 어떻게 ‘그런 것’들이 눈에 다시 보이게 되는 것일까?

기계적, 강제적으로 일년 사시사철 꽃을 보고 과일을 먹는 요상한 세상에 익숙해져서 더욱 봄의 꽃들은 의미가 심장하다. 올해도 어김없이.. 어김없이..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것들, 아침미사 (car) drive길에 연숙의 ‘꽃에 대한 자세한 논평’을 들어야 했다. 특히 2월 달에 ‘처음’으로 선을 보이는 꽃들은 그녀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 넣고 나는 옆에서 안 들을 수도 없지만 과히 나쁘지 않은 자연공부를 하게 되기도 한다.

봄을 알리는 1번 타자가 바로 수선화..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수선화.. 그 이름부터 신비롭다. 수선.. 수선화.. 물에 관련되었나? 그렇다. Narcissus와 나르씨시즘(자기도취)의 유래도 이 꽃이 관련되어 있지 않은가? 1960년대 초, Brothers Four의  folk hit, Seven Daffodils 같은 추억의 folk song도 회상이 되고.. 을씨년스러운 2월의 겨울 날씨에도 봄의 모습을 선을 보이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모습이 그렇게 그렇게.. 이런 삼라만상, 자연의 섭리를 어떻게 받아들이며 겸허하게 보존하고 가꾸어야 하는가는 Pope Francis의 2번째 encyclical 회칙, Laudato Si (부제: On Care For Our Common Home, 자연환경보호)  를 보면 얼마나 커다란 신학적인 명제가 곁들여 있는지.. 알 수 있다. 자연, 환경이..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 다시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이런 생각의 고리를 일깨워준 ‘가냘프지만, 강건하게 보이는’ 수선화.. 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내년에도 나도 너도 같은 모습으로 볼 수 있게 되기를..

 

Vincent Van Gogh's rendition of daffodils

Vincent Van Gogh’s rendition of daffodi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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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thers Four – Seven Daffodils

 

 

Love You, Tobey..

My favorite moment in cold, damp Winter February

My favorite moment in cold, damp Winter February

 

지난 12월 초에 12살이 된 우리 집 강아지, 내 ‘아들’ Tobey녀석.. 이제는 나보다 더 늙은 나이가 되었지만 비교적 건강하고 보기에는 아직도 어렸을 때의 모습.. 강아지, 바둑이 정도로 보인다. 다시 물끄러미 서로를 바라본다.

하루 종일 사사건건 이곳 저곳, 심지어 화장실까지 따라오는 나의 그림자다. 자는 시간을 빼고는 그 녀석의 눈은 나의 눈에 고정이 되어있다. 처음에는 아주 귀찮았고, 성가셨지만 고칠 수 없는 버릇임을 알고 그대로 지낸 지가 몇 년이 되어가나? 생각한다. 만약 이 녀석이 없어진다면.. 생각하기도 싫지만 12살이라는 나이가 그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의 장례식은 이제 익숙해졌다고 볼 수 있지만 나의 분신 같은 ‘말 못하는 동물’과의 영원한 이별의 준비가 덜 된 것을 절감하며, 괴롭기까지 하다. 요새 주위에서 오래 정든 pet animal (주로 개와 고양이들) 들을 떠나 보내며 겪는 stress와 ‘의외적인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 듣고 나는 그들의 심정을 나의 것처럼 실감 한다. 아마도 pet과 인연이 없는 조금은 ‘냉정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은 정말 이런 것들을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 pet들의 인간들에 대한 정과 사랑을 조금이라도 보고 느끼면 조금은 이해할 것인가?

평균 수명의 경고를 생각하며 오늘도 이 ‘귀찮은 녀석’과 우리는 어제까지 눈을 맞출 수 있을까.. 나에게 soul이 있다면 이 녀석의 soul은 어떤가.. 그 soul도 육체를 초월하는 transcendent state가 있을까.. 이 녀석과의 작별은 absolute한 것일까, 아니면.. 춥기만 한 2월의 한 때, 따뜻한 체온을 포근하게 느낄 수 있는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