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물이 있다.

천주교 예비자 교리교과서 여기에 물이 있다
천주교 예비자 교리교과서
여기에 물이 있다

‘여기에 물이 있다’.. 표지가 노~란 촉감이 아주 부드러운 책의 제목인데, 이 책은 천주교 영세를 원하는 ‘예비자’들을 위한 교리 반 학생용 ‘교과서’이고 내가 가진 것은 ‘교사용’이란 말이 더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학생용 책에다가 교사에게 도움이 되는 것(cheat sheet,해답) 덧붙인 책이다. 잠깐 훑어보면 교과서치고는 정말 부드럽고 읽기 쉽고, 읽고 싶어지는 그런 느낌을 준다.

이것을 어제 연숙과 같이 성당에서 받아가지고 왔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교리교사의 역할을 ‘조금’ 맡게 된 것이다. 정식으로 는 예비자 교리반의 ‘교리반 봉사자’ 가 되는 것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교리반은 교리교사 여럿이서 책임지고 가르쳤지만 올해부터는 ‘완전히’ 체제가 바뀌어서 새로 부임하신 수녀님이 교리반의 ‘유일한 책임 교사’가 되고 나머지는 모두 ‘봉사자’의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우리 부부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교리반 봉사자가 되었는지 아직도 우리는 모른다. 아니 확실치 않다. 어느 날 본당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신부님(하태수 미카엘)께서 연숙에게 ‘제안’을 했다고만 들었고, 기왕이면 부부가 같이 ‘봉사’를 하라고 하셨다고 들었다. 처음에는 사실 ‘청천벽력’ 같이 느끼기도 했지만, 우리가 속한 레지오(마리애)의 으뜸 사명인 봉사(service), 순명(obedience)을 염두에 두고 생각을 곰곰이 해보니 거절할 명분도 느낌도 없음을 알고 비교적 쉽게 OK를 하였다. 드디어 예비자 교리반이 8월 초에 시작하게 되어서 어제 수녀님을 중심으로 봉사자 모임에 참석하여, 이 책을 받아오게 된 것이다.

우리는 어제 수녀님께 분명히 ‘우리는 왕초보’라고 말씀을 드렸다. 하지만 왕초보라는 말에는 별로 신경을 크게 쓰지는 않으심을 알았고 ‘교리 실력’ 이 전부가 아니라는 느낌도 받았다. 보살핌과 가르치는 방법, 그리고 ‘간단한 정통교리’가 더 중요한 것을 알았고, 자칫하면 쉽게 범할 수 있는 ‘은밀한 개인적 밀착’의 위험성을 수없이 강조함을 듣기도 했다. 모두 이해가 가고, 수긍이 가는 말씀들이었다.

비록 봉사, 순명의 정신으로 (봉사자 역할을) OK를 했고, 이 ‘교리반 봉사’의 과제와 책임이 우리 둘의 신앙생활, 여정에 어떤 의미와 결과를 남길지는 미지수 이지만, 신부님께서 친히 부탁(지시)을 하신 것을 보면 조금은 자신감을 가지고 노력을 해야 하고,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20 years ago, Storm of the Century

Storm of the Century최근에 ‘요상한 기후’에   대해서 연숙과 얘기를 하다가 문득 storm of the century란 것을 기억했다. 일명 super storm이라고도 했다. 문제는 그것이 언제였나 하는 것이었다. 일종의 ‘치매 예방’ 기억력 test였다. 나에게 제일 알쏭달쏭한 것이 지나간 10년에서 20년 전 일들의 기억이다. 각가지 연상technique를 동원해서 아마도 1992년에서 1994년 사이일 것이라고 일단 결말을 지었다. 그 super storm이 온 것이 3월 이때 쯤인 것도 기억했다.

문제는 100% 자세한 것이 어떤 것일까.. 1992년은 우리가 현재의 집으로 이사 온 해였고, 장모님과 나의 절친한 친구, 지금은 타계해서 없는 김호룡 식구가 거의 같은 때에 우리 집에 온 해이기도 했다. 1992년 3월 1일에 이사를 왔는데, 곧 이어서 이 super storm이 온 것 같지는 않았다. 1994년을 생각해보니 여름에 누님의 아들, 준형이가 다녀갔던 것 이외에 별로 특별한 것이 없었다. 결국은 1993년임을 알았다.

나의 제일 큰 문제는 이 1990년대의 기억이 제일 희미하다는 것이다. 아마도 기억해내기 싫었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아닐까도 생각을 했다. 그만큼 큰 기쁨이나 즐거움, 그렇다고 특별한 괴로움도 없는 그런 세월을 보낸 것이 아니었을까.. 한마디로 ‘세파’속에 휩쓸려 간 듯한 그런 10년간인 듯한 느낌인 것이다.

고국이나 이곳이나 그 나이쯤이면 ‘샐라리맨’의 다람쥐 쳇바퀴 도는 그런 생활을 많이 보내니까 사실 이상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런 커다란 기후에 관한 사건들은 기억이 난다. 게다가 그때에는 VCR, video (cassette) recorder가 한창 유행할 때여서 그런 것들의 기록도 남아있어서 기억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조금 더 알아보니 그것은 1993년 3월 13일, 토요일의 일이었다. 사실 그 당시의 일기예보는 그렇게 ‘자신 있던’ 것이 아니었던 것이, 미리 커다란 ‘경고, 경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의 생각도 없이 아침 10시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얼어붙는 눈보라’ 에 그냥 당한 것이다. 다행히 토요일 아침이라 교통에 관한 문제는 별로 없었다. 그냥 퍼 붙는 눈보라를 집에 틀어 박혀서 ‘즐긴’ 것이다. 그 전날만 해도 봄 같은 포근한 날이 어떻게 그렇게 하루아침에 변할 수 있을까? 예보, 경보도 그렇게 없이..

하루 종일 강풍과 함께 쏟아진 얼어붙는 눈에 나무들이 하나 둘씩 쓰러지기 시작했고 전기도 나가기 시작하고.. 길은 완전히 얼어붙고.. 이곳 지역은 완전한 시베리아를 연상하는 광경으로 변했다. 다행히 우리 집의 전기는 나가지 않아서 하루 종일 TV앞에 앉아서 뉴스를 보게 되었다 덩치가 큰 소나무가 쓰러지면서 우리 집 drive-way를 가로막았다. 그러니까 나중에 차가 나갈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오후가 되면서 무슨 요란한 소리가 나서 밖을 보니 남자 몇 명이 power chainsaw로 우리 집의 쓰러진 소나무를 잘라서 치워주고 있었다. 동네에 사는 ‘마음 좋은 아저씨’들이었다. 동네를 돌면서 우선 급한 것들을 치워주고 있었던 것이다.

TV 뉴스에서는 이번의 snow storm은 ‘아마도’ super storm, storm of the century정도로 monster 급이라고 했다. 멕시코 만에서 시작된 사상 최저기록의 저기압과 북쪽에서 하강한 cold front가 ‘완전히’ 결합이 된 그야말로 perfect storm이었다. 결국은 이 system은 우리가 사는 Georgia를 거쳐서 northeast의 덩치 큰 도시들로 갔고 그곳의 피해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그것은 엄청난 것으로 느껴졌지만, 2000년대가 지나가면서 그때의 것은 별로 큰 것이 아니었다. 점점 더 큰 monster storm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때 찍어둔 video tape을 본다. 그러니까 정확히 20년 전 우리 집 주변이 남아있고, 그 눈 속에서 ‘신나게’ 놀던 우리 집 두 아이들.. Wisconsin에서 이사온 것이 불과 몇 년 전이라 그 추운 곳에서 타던 ‘썰매’와 겨울 옷들을 다시 꺼내어서 아주 요긴하게 쓰기도 했다.

큰 애 새로니는 Ohio와 Wisconsin에 살 때 경험했던 눈과 얼음으로 그다지 생소하지는 않았겠지만 작은 애 나라니는 거의 기억이 나지를 않는지 신기하게 눈과 얼음을 바라보며 썰매를 탔다.

그 당시 나는 비교적 젊었던 45세.. 와.. 정말 젊었다.. 피곤을 모르며 직장생활(‘embedded software’ engineer at Automated Logic Co)을 했고, 연숙은 home-based business, housewife, mom, PTA등으로 시간을 보낼 때였다. 신앙적으로는, 유일했던 한국본당에 ‘대 파란’이 나던 때여서 아마도 그 근처에 가지도 않던 ‘신앙적으로 암울한 시기’였다.

당시는 Internet이란 것이 아주 미미하게 보급이 되고는 있었지만 지금 보는 것 같은 graphical web browser가 없어서 일반인에게는 그런 것은 ‘학교에서만 쓰는’ 그림의 떡이었다. Email은 직장이나 학교 내에서만 쓸 정도고, PC 는 Microsoft Windows 95 전의, 조금은 원시적이었던 Windows 3.x이 전부였고, 지금 쓰는 cellular mobile phone도 없었던 그런 시절이었다.

아틀란타 올림픽이 열리기 3년 전이었던 그 당시 이곳에 한인의 인구는 현재에 비하면 아주 미미한 편이었다. 생각해보니 그 동안 참 변한 것이 많았지만 제일 ‘충격적인’ 것이 내가 40대에서 60대가 되었다는 ‘자명한’ 사실.. 어떻게 그런 ‘자연스러운 변화’가 충격으로 느껴지는가.. 그것은 생생하게 뇌리에 남은 20년 전 1993년 3월 13일을 회상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Lemon Grass day

Thai Restaurant, Lemon Grass
Thai Restaurant, Lemon Grass

완전히 한 겨울 날씨가 된 3월 1일, 쉽게 말해서 지나간 1월은 거의 늦은 가을이나 이른 봄 날씨였고, 2월 한달 동안은 완전한 겨울인 듯 을씨년스러운 날씨의 연속이다. 올해 Groundhog의 예측대로 봄이 일찍 온다는 것은 완전히 엉터리였음이 들어난 것이다.

2월의 마지막 날인 어제는 오랜만에 집 근처에 있는 타이 식당 Lemon Grass에서 연숙과 식사를 하였다. 집에서 밥을 해 먹기 귀찮아서가 아니고 무언가 ‘기념’을 하려고 일부러 간 것이었다. 오늘 3월 1일은 우리가 ‘매일 미사’를 시작한지 만 1년이 되는 날인 것이다. 그러니까, daily Mass 1 year Anniversary정도라고나 할까.. 하도 축하할 것이 없는 요새지만 이런 것도 자축을 하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우리 둘에게는 무엇 보다 귀중한 의미를 가지기에 매년 3.1절과 함께 기념하기로 한 것이다.

2010년 가을 내가 레지오 마리애 행동단원 생활을 시작한 것도 큰 의미가 있었지만, 2012년 3월 1일에 시작한 매일미사 참례 결정은 더 큰 의미를 갖는다. 우선 일주일에 한번 참석하는 레지오 마리애와, 매일 아침 9시까지 비록 집 근처지만 성당에 가서 아침 1시간을 지낸다는 것은 생각하면 보기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비록 눈은 별로 없는 이곳이지만 흔한 말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성당엘 다닌 것이다. 처음에 시작할 때는 솔직히 얼마나 갈까 둘 다 자신이 없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한마디로 기우였다. 우리가 의지로 나가는 것 이외에 무언가 우리를 도와주는 느낌도 떨칠 수 없는 것이다.

작년 3월 매일 미사를 하면서 가끔, 지금은 작고하시고 없지만, 레지오 동료단원 요안나 자매가 같이 와서 미사를 보곤 우리 집에도 들려서 식사도 하기도 했다. 그 자매님의 말씀으로, 미사와 영성체가 얼마나 신심생활에 도움이 되는 가를 배우기도 했다. 신심생활에 주는 의미를 떠나서, 이렇게 둘이서 매일 집밖으로 ‘나간다는 사실’, 사람들을 만난다는 ‘사회적’ 의미도 생각해 보니 참으로 중요한 것이었다. 과거 오랜 시간 집에 틀어 박혀서 백일몽을 꾸던 때를 생각하면 그것은 참 위험한 생활 방식이었음도 알게 되었다.

타이 식당인 Lemon Grass, 연숙은 항상 ‘팟타이‘, 나는 100% ‘Broccoli Tofu‘를 먹는데, 정말 주방장의 조화인지 언제나 ‘똑같이’ 맛이 있다. 이것은 chef가 변함없이 그곳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라서 그런지 신문에 아주 좋은 review까지 났다. 꽤 많은, 이름있는 식당들의 수명이 그렇게 길지 못한 때에 이곳은 1994년에 open한 이래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앞으로도 계속 그 자리에 있어서, 다른 일로 ‘자축’을 할 일이 있을 때 우리에게 service를 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65세 만세론과 결혼 33년

1월에는 우리 집 큰 딸 새로니의 생일, 나의 생일, 그리고 우리부부의 결혼 기념일이 모조리 몰려있다. 그래서 사실 성탄과 새해를 지내자 마자 마음이 조금은 바빠짐을 느낀다. 사실, 나는 이런 ‘명절’들을 조용하게, 소리소문 없이 보내고 싶은데 그것이 쉽지 않았다. 우선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절대로 불가능했고, 근래에도, 이런 날들을 조용히 보내는 것이 거의 ‘죄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압력을 느끼기도 했다.

전통적 ‘가장’의 위상이 거의 무너져 내려앉은 요새, 어찌 안 그렇겠는가? 세월을 탓 해야 하나. 특히 ‘자기 생일’도 자기 마음대로 보낼 수가 없음이 제일 우습기만 한 것이다. 내가 원치 않더라도, 그것은 상관이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의 위치와 가치가 뒤바뀌고 있는 이 세상, 어디까지 가나.

올해 나는 ‘결국’ 65세의 산을 넘고 말았다. 왜 65란 숫자가 나의 눈에 들어온 것일까? 아마도 70세를 향한 내리막 길이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오랜 전 애독하던 이진섭씨에 대한 책, ‘하늘이 우리를 갈라 놓을 지라도‘ (박기원 여사 지음), 에서 보았던 65세 만세론 구절이 더 생각난 것이다. 그것은 이진섭씨의 지론 중에 하나로써, ‘사람은 65세를 살면 충분히 살았다‘는 것으로 그 이상 사는 것은 어떻게 보면 ‘덤’으로 사는 것이라고 했다. 나아가서, 사람은 나이답게 사는 것이 보기 좋다고 했는데, 너무나 무리하는 것이 꼴불견이라고도 했다.

예를 들면 늙은이가 무리하게 운동을 하거나 무엇을 지나치게 즐기는 그런 것들이다. 조용히, 잠잠하게, 생각하며, 낙조를 바라보는 듯한 심정으로 지내는 것을 바람직한 것으로 보았다. 그것이 거의 50년 전의 이야기라서 아마도 그 당시 65세는 요새 기준으로 보면 턱없이 적은 나이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까? 그 당시의 65년은 사실 요새도 65년일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을 한다. 65년을 살고 보니 ‘참 많이 살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것이다.

이제는 사실 쉬고 싶다는 생각도 드는데.. 그 쉰다는 것은 사실 이세상을 떠난 다는 것인데, 전 같았으면 아마도 그런 생각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펄쩍 뛰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제 나는 죽음이 다음 세상으로 가는 과정일 뿐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나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얼마를 살았는가 가 아니고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것이다.

1980년 1월 25일에 결혼을 한 우리 부부는 올해로 33년째를 맞게 되었다. 잔잔한 감회를 느끼며 맞이한 올해는 정말로 조용히 보내게 되었다. 아이들의 ‘극성과 압력’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33년간의 결혼관계는 사실 과소평가할 것은 아니다. 어떻게 생면부지의 이성과 같이 33년을 같이 산다는 것이 작은 과업’일까? 결혼을 안하고 아이를 안 낳고, 편하게 혼자 사는 것이 cool하게 보이는 이 세상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런대로 not bad임도 안다. 이날 우리는 정말로 ‘조용하게’ 집 근처에 있는 Thai restaurant, Lemon Grass에 가서 평소 즐겨 먹던 것으로 점심을 하였다.

눈이라도 당장 쏟아질 것 같은 그런 회색 하늘아래서 우리는 33년 전을 회상하며, 도대체 그때에 우리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가장 멋지게 보았고, 무슨 희망을 가졌는지 생각을 해 보았지만, 한마디로 까마득히 멀게만 느껴지던 때였다는 것과, 그 때는 정말 ‘기쁜 우리 젊은 날’ 이었다는 것에 동감을 하였다. 또한 앞으로 얼마나 ‘이렇게’ 같이 살게 될 것인가 하는 ‘말없는’ 의문도 나누었다. 그것이 인생일까. 인생은 사실 그렇게 특별 난 것이 아닌 듯 싶다.

 

 

 1980s.. 기쁜 우리 젊은 날들..

Goodbye, Panera Bread

Panera bagels
Panera bagels

오늘 우리는 주일 미사 후Panera bakery에서 ‘마지막’ 아침 식사를 하였다. 아침 식사 라기에는 부끄러운 Asiago-Cheese, Cinnamon-crunch bagel과 Hazelnut coffee정도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마지막’란 것이 문제였다. 이틀 뒤에 우리에게 너무나 정이 들었던 이곳이 ‘이사’를 가게 되어서 문을 닫는 것이다.

한마디로 일요일 아침 미사 후에 우리가 갈 곳이 없어진 것이다. 일요일 아침에 거의 예외 없이 꼭 들려서 ‘똑같은’ bagel을 먹곤 해서 그곳 남자처럼 생긴 여자 manager와는 아주 친숙한 사이가 되었고, 우리가 가면 아예 menu를 묻지도 않고 갖다 주곤 했다.

정말 비교적 싼 값에 분위기 있고, 냄새 그윽한 coffee를 즐기며 연숙과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그런 곳을 다시 찾기는 어려울 듯 해서 더욱 아쉽기만 하다. 이사를 가는 이유가 더욱 안타까웠다. 매상도 비교적 오락가락 하는데, 건물주가 rent를 너무나 올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customer traffic도 많고 rent도 싼 곳, 어떤 shopping mall (Towne Center)근처로 간다고 했다. 우리 보고 그곳에 오면 꼭 들르라고 했지만 과연 언제 그곳에 찾아 가게 될지는 미지수이다.

그곳에 단골손님이 된 것은 아마도 5년 정도가 아닐까.. 그 전에는 Atlanta Bread Company라는 같은 류의 Bistro style bakery로 가곤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문을 닫고 말았고, 다시 찾은 곳이 지금의 Panera 였던 것이다. 그 두 곳의 분위기는 아주 달랐다. Atlanta Bread Company(ABC)는 널찍한 마루 바닥에 아주 밝고 넓은 분위기였고, Panera는 분위기 있게 어둡고 아늑한 곳이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coffee를 마시는 분위기는 Panera가 훨씬 더 좋았다는 것이다.

집에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것이 조금 거북하게 느껴지던 나와 연숙은 이곳에서는 분위기 덕분인지 아주 편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하게 되어서, ‘분위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을 하기도 했다. 5년 이상 그런 분위기가 우리 부부에게 미친 ‘좋은 영향’은 상당할 것 같다. 지금은 다시 생각한다. 그곳을 찾고, 그곳에서 보낸 5년, 정말 100% 우연한 일이었을까.. 아니면?

12/12/79, 눈발 날리는 백양로, 1968

2012년 12월 12일도 어제로 지나갔다. 12/12/12로 ‘난리’를 치는 사람들.. 참 부럽다. 단순한 부류의 사람들일까, 아니면 참 한가한 사람들일까 생각도 나지만, 12가 세 번씩이나 겹치는 것보다는 각자의 일생에서 드물게, 아니면 다시는 못 볼 숫자이기에 그럴 것 같다. 우선 13/13/13은 아예 불가능 할 것이고, month의 숫자와 맞는 햇수라면.. 2101년이 되어야 01/01/01 라는 숫자 놀음이 가능한 것이다.그러니까 간단히 말하면 2012년에서 2101년까지의 공백이 생기고.. 앞으로 89년을 더 살아야 그것을 보는 것이다. 현재의 ‘피상적인 의학’의 발달을 감안 한다면 아마도 지금의 20대나 30대 정도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나로써는 정말 오랜만에 ‘백일몽’같은 생각과 망상을 해 보았지만, 역시 이것도 인간이 겪는 유한성, 잠깐 왔다가 가는 어찌 보면 슬프기도 한 ‘피조물’의 신세를 실감케 한다. 하지만, 요새 내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느끼는 것은, 모든 것이 생각하기에 달렸고, 인간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선물’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발전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이 아닐까?

매년 12월 12일이 되면 연숙과 빠짐없이 한가지 얘기를 나누며 웃는다. 1979년 서울의 12월 12일을 서로 회상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그날 밤에 박대통령 시해사건을 빌미로 전두환이 무혈 쿠데타를 하던 날이었다. 그들이 한강 다리를 건너오기 바로 전에 우리 둘은 김포공항에서 연숙의 지도교수 김숙희 교수를 만나 인사를 하고 밖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도 모른 채, 유유히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다음날 그 쿠데타 소식을 알게 된 것이다.

기억을 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날 저녁 김포공항으로 둘이 걸어 들어가는데, 처음으로 연숙의 손을 잡은, 그것을 회상하고 싶은 것이다. 비록 결혼 약속은 얼마 전에 했지만 손을 잡는 것은 ‘큰 사건’이었다. 더욱 재미있었던 사실은 그날 날씨가 매섭게 추웠고 바람이 심하게 불던 날이라서 손목을 잡힌 연숙은 너무나 ‘고생’을 했다고 한 사실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해맑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그날 12/12가 남았다.

 

요사이 나의 workstation  pc desktop의 모습

요사이 나의 workstation pc desktop screen, New York Central Park

오늘 아침에 나의 workstation kvm virtual pc의 desktop background art를 보니, 이것은 거의 흑백으로 눈에 덮인 뉴욕 city, Central Park 의 모습이었다. 이것으로 바뀐 것이 한 달도 채 안되지만, 이것을 보면서 계속 머리에 떠오르는 ‘영상’이 있었다. 물론 아름답게 기억되는 광경이고, 그것도 역시 흑백의 영상이었다. 그곳은 바로 연세대의 상징인 백양로.. 그곳이 완전히 눈 속에 쌓이고 있던 그 광경이었다. 나의 기억력을 시험하려 나는 그때가 구체적으로 언제인가 계속 생각해 본다.

1967년 겨울 아니면 1968년 겨울이었다. 그때는 겨울 방학 때였고, 성탄이 훨씬 지난 때였다. 그러니까 1월 쯤이었을 것이다. 한낮에 함박눈이 그야말로 ‘펄~펄’ 내리던 날, 시커먼 공해로 그다지 깨끗하지 않았던 그 당시의 서울거리가 순식간에 깨끗해지는 그런 날, 어찌 나와 같이 한가한 사람들이 집의 안방에 앉아있겠는가? 지독히도 한가했던 대학시절의 겨울방학의 ‘누에고치’ 속에서 나는 눈 덮인 거리로 뛰쳐나갔다.

그때 상도동 버스 종점에 살던 나는 ‘portable’ FM radio를 들고 나갔고 시내 버스 <상도동-모래내 >를 타고 연세대로 갔다. 왜 그곳에 갔는지.. 하기야 그 당시 잠깐 갈 곳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연대 앞 굴다리 앞에서 내려서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을 맞으며 백양로를 따라 걸어 들어갔다. 손에는 작지도 않았던 ‘소형’ 금성 FM radio를 들고, 신나게 pop song을 들으면서.. 눈 속에서 기가 막히게 조용하고 아름답게 보이던 연세대 백양로.. 이제 시간적인 단서가 잡힌다. 그것은 1968년 한겨울 방학 중, 1월 쯤이었을 것이다.

나의 서재에 보이는 금성 FM radio, 신탄진 담배와 SPAM can 재털이
나의 서재, 금성 FM radio, 신탄진 담배, SPAM can 재털이 1968

그 당시의 timeline을 확실히 잡아주는 유일한 것이 바로 사진인데, 바로 여기에 보이는 사진, 나의 책상에 놓여있는 새로 산 금성 FM radio, 이것을 찍었던 때가 1968년 3월 경. 1967년 성탄 때에 어머니께서 선물로 사주신 그 당시에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나왔던 FM radio였다.

그 당시에 들을 수 있었던 FM 방송은 딱 한군데였지만 물론 미8군의 FM 방송은 그 훨씬 전부터 있었다. 잡음이 많았던 AM 방송에 비해서 FM방송은 정말 음이 깨끗해서 대부분 classical 쪽의 음악을 방송하곤 했다. 이후에 이 radio는 장기간 등산을 갈 때마다 가지고 가서 사진에도 몇 군데 남아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1969년 여름에 요델 산악회 친구 박창희와 갔던 소백산, 그때의 사진에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당시의 대한민국의 수준은 그렇게 간단하게 보였던 FM radio를 ‘간신히’ 만들고, 커다란 업적을 이룬 ‘금자탑’으로 소개하던 때였다. 일제를 배척하던 것이 애국이었던 당시에 그나마 ‘국산’으로 그렇게 깨끗한 음악을 들을 수 있었던 때, 그것을 들고 함박눈을 맞으며 연세대 백양로를 따라 걸으며 ‘백일몽’을 꾸던 그 죄 없던 시절이 왜 이다지도 그리울까.. 육신적으로 다시는 못 겪을 일이지만, 기억이라는 선물이 있는 한 그런대로 괜찮지 않을까?

 

금성 FM radio를 듣고 있는 박창희, 1969년 소백산

금성 FM radio를 듣고 있는 박창희, 1969년 소백산

내가 친구들과 마지막으로 본 백양로, 1973년 6월

내가 친구들과 마지막으로 본 백양로, 1973년 6월
이종원, 이경우, 이경증, 윤인송, 이진섭, 김호룡, 신창근

 

Postscript: 나의 머릿속의 기억을 뛰어 넘어서 그 당시의 서울 일간지를 인터넷으로 찾으면 아마도 그 함박눈이 내렸던 날짜까지 확실히 알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도 한가함을 달래주는 좋은 project가 아닐까.

 

 
그 당시에 듣던 golden oldie, Ruby Tuesday by the Rolling Stones, 1967

 

레지오 입단 2주년

우리(나와 연숙)의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소속, 성모님 군단의 최전방 소대, “자비의 모후 쁘레시디움”.. 지난 몇 개월 동안 많이 변했고, 현재도 변하고 있다. 많이 변했다고 했지만.. 이것이야 말로 sea-change라고 부를 수 있고, 그것은 바로 perfect storm을 뚫고 나온 느낌이었다. 그중에 제일 큰 변화, 그것도 충격적인 것은 역시 우리의 사랑하는 단원, 친구, 영적 선배.. 은효순 요안나 자매님.. 영웅적인 암 투병을 하시던 용감하고 멋진 여성, 결과적으로 성모님은 그녀를 더 심한 고통에서 구해 주셨을까, 한창 더울 때였던, 7월 26일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다.

솔직히 우리들은 ‘흔치 않은’ 기적을 바라고 있어서 그랬을까.. 끝까지 더 오랜 동안 우리와 함께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어서 조금은 충격적인 떠남이었다. 그 자매님은 우리, 특히 우리에게 잠시 살다가는 이 세상을 어떻게 작별을 하는 가 하는 특별한 모범을 보여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도 그렇게 이 세상을 떠나야지’ 하는 말을 하였다. 그 짧은 말이 이 자매님이 마지막 순간들을 살아간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일 아닐까?

나로써는, 2년 전 레지오에 입단을 안하고 살았으면 이런 ‘귀중한 체험’들은 사실 상상도 못했을 것이라서, 생각하면 할 수록 나를 이, ‘진리와 행동’의 집인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자비의 모후 쁘레시디움으로 이끌어 주신 모든 사람들에게(특히 연숙) 머리가 숙여지는 감사가 이어진다.

요안나 자매님의 선종과 거의 같은 시기에 다른 단원 자매님의 (미국인) 남편께서 선종을 하셨다. 비록 지난 몇 달간 예상을 못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timing이 참 놀라웠다. 그렇게 갑자기 가실 줄 몰랐던 것이다. 미국인 남편이어서 장례미사, 연도의 절차가 우리들과 달라서 조금 더 신경이 쓰였겠지만, 모든 것들이 비교적 잘 마무리를 지었고, 특히 그 무더운 날씨에도 우리 레지오 단원들은 정성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완전한 폭풍’ 같은 일들이 끝나자 마자 우리 단원들은 다시 단장, 부단장이 떠나야 하는 시련을 겪게 되었다. 이것도 사실은 몇 개월 전부터 알고, 예상하던 일이었지만, 그 과정이 사실 생각만큼 부드럽지 못했다. 간부진들이 조금 더 신경을 써서 조금 더 매끄럽게 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간부들, 그것도 제일 핵심인 단장 부단장이 떠난다면 그 뒤에 제일 큰 문제가 무엇인가? 당연히 새 간부진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그것, 그런 변화의 준비가 비록 위에 말한 폭풍과도 같은 시련들이 있었다고 해도 별로 되고 있지 않았다. 만사가 바쁘기만 한 단장님의 사정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정들었던 곳에 조금 더 세세한 신경을 썼으면.. 하는 아쉬움은 지금까지도 남는다.

그런 과정에서 연숙이 단장, 내가 서기로 ‘어쩔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승진’ 했던 것은 충분히 예견이 되었고 큰 무리는 없다고 하지만 나머지 부단장, 회계 직을 채우는 과정이 참.. 기가 막히게 어렵고, 심지어 놀라움과 실망의 연속이었다. 우리 부부는 최소한 ‘순명과 사명’의 의식은 잃지 않았다.

하지만 제일 놀라웠던 사실은 가깝게 느껴지기도 했던 단원이었던 분들의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예상도 못했던 언행과 반응이었는데 나는 이것을 한마디로 small Kafka moment로 이름을 지었다. 그만큼 우리 부부는 놀랐던 것이다. 레지오 선서, 순명의 정신 같은 것들을 벌써 잊어버렸나 할 정도의 언행에 놀라기도 했지만, 다음은 ‘차가운 현실’을 느끼게 하는 실망으로 이어지고, 곧바로 damage control 로 이어졌다.

12명까지 불어나 ‘승승장구’하던 우리 레지오가 거의 몇 주일 만에 6명 이하로 떨어지는 쓸쓸한 공기로 휩싸이고, 심지어 적막감까지 느낄 정도였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의 bible, 레지오 교본들에 언급된 ‘경고’ 들을 실감하게 되었다. 조그만 시련기인 것이다. 군대와 같은 조직인 레지오에서 leadership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가 절감하게 되는 첫 시련기라고 할 수 있을까?

다른 조직과 다르게 우리는 ‘사령관’인 성모님이 계시고 보호한다고 늘 생각은 하지만 우선 매주간 동안 살아 남아야 하는, survive하는 급박한 문제는 우리들이 풀어야 하는 것들이 아닌가? 군대에서 군인의 숫자에 문제가 생기면 그것은 거의 치명적인 것이다. 하지만 성모님께서는 새로운, 그것도 에너지가 충만한 젊은(상대적으로) 여성 단원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고, 그 단원이 씨앗이 되어서 다른 예비단원들의 입단도 어렵지 않게 꿈꾸게도 되었다.

그런 와중에 나는 레지오 입단, 역사적인 2주년을 맞게 되었고, 지난 2년간 나의 ‘변화’를 조금씩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암만 생각해도 나는 참 많이 변했고, 변해가고 있다. 세속적인 자질구레한 습관들의 변화는 어렵지 않게 식구들에 의해서 발견되고 심지어 놀라워한다. 특히 연숙은 크게 나타내지는 않지만 (거의 의도적으로) 간접적으로 나의 변화를 ‘즐기고’ 있는 듯하다.

쉽게 말해서 out of closet같은 느낌.. 이제와 다른 세상을 보고 느끼는 2년 간이었다. 그전에는 내가 어떻게 살았을까 할 정도였다. 급기야 그런 나의 변화를 연숙은 공개적으로 평신도 주일 강론에서 밝히기도 했다. 물론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는 의도였을 것이다.

물론 2년은 어떻게 보면 아주 짧은 기간일 수도 있지만, 나의 레지오와 연관된 세월들은 참으로 귀중하고 길었던 경험의 연속이었다. 단적인 예로 새로 알게 된 성모님과 성모신심(Marian Devotion)은 나에게 새롭고 귀중한 보물이었다. 궁극적인 진리인 성삼위로 향하는 지름길, 안전한 길을 제공하는 우리의 어머님, 보호자를 찾게 된 것이다.

그곳으로 향하는 비교적 안전한 것, 묵주기도.. 그것의 진실과 참 뜻도 깨닫게 되었다. 비록 레지오 2년 생의 초보자이지만 남은 여생의 한계를 생각하면 남보다 10배의 노력이 필요함을 절감하며 ‘월반’을 꿈꾸지만, 그것이 그렇게 쉬울까?

지난 8월 15일에 끝이 난 “33일 봉헌” 과정 이후에 나의 우주,세계관은 아주 폭풍과도 같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이제야 무엇이 이 세상을 움직이는 지도 짐작하게 되었고, 아.. 이것이 바로 진리, 진실이었구나 하는 생각, 왜 이런 사실들을 1982년 영세 후 30년이 지난 지금에게 알게 되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많았지만, 지금이라도 ‘알게’ 된 것을 감사하는 것이 더 옳을 듯하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이제는 최소한 뒤로 물러설 것 같지는 않다” 는 사실이다.

평신도 전연숙 베로니카

 

 

결국은 끝이 났다. 지난 일요일은 ‘아마도’ 대한민국 전례력에 의하면 평신도 주일이었던 모양이다. 분명히 이곳 나의 교민본당,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은 아틀란타 대교구 소속이라서 머나먼 대한민국의 전례력에 좌지우지 되지 않아도 될 것이지만, 그런 것들은 흑백을 가리듯 분명한 것이 절대로 아니다. 한마디로 grey area인 것이다. 따라서 이곳 순교자 성당도 그때 그때 ‘편리한 전례’의 관습을 따르는 모양이다.

그래서 지난 일요일은 대한민국 식으로 ‘완전한’ 평신도 주일의 전례를 따랐고, 신부님의 강론도 평신도가 대신 맡아서 하게 된 것이다. 나의 추측이지만 이것은 아마도 작년부터 실시가 된 듯한데, 작년 6월에 부임하신 서강대 예수회 소속 하태수 미카엘 신부님께서 지시하신 것이 아닐까.. 그리고 작년의 평신도 주일에도 평신도였던 서재욱 사목회장이 강론을 했던 것을 video를 보고 알았다.

1960년대에 있었던 바티칸 2차 공의회 (Vatican II) 이후 평신도의 역할은 그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이상으로 눈부시고 확장되어가고 있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쉽게 말하면 지독하게 보수적인 천주교회가 민주화가 되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르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문제는 그 정도일 것이다. 이것은 고도의 ‘정치적’ 기술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갈릴레오를 처단했던 커다란 오류도 문제지만, 진짜 문제는 ‘완전한 방종적 자유’를 갈구하는 불완전한 인간들의 요구에 쉽게 부응하는 그것일 것이다. ‘완전한 평등’의 환상아래 너무도 많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들을 정치인들은 ‘표를 얻기 위해’ 자행하고 있는 사실은 어떤가?

하지만 바티칸 2차 공의회의 덕분에 교회 내에서 여성들의 지위는 눈부시게 향상한 것은 사실이고 이제는 여성들이 없으면 몇 시간도 교회가 움직일 수 없게 된 듯하게 되었다. 그런 시대의 흐름 때문일까.. 올해 평신도 주일의 신부님 대신하는 강론이 연숙에게 돌아온 것이다. 이런 것들은 ‘나서기 좋아하는 남자’들 몫일 텐데 겨우 레지오 꾸리아의 부단장 정도의 명함으로 선택이 된 것을 보니 역시 시대가 변하고 있음을 느낀다.

사람들 앞에 서본 경험이 ‘소싯적’에 그렇게 많았던 연숙도 이번에 이런 ‘요청’을 받고는 완전히 긴장을 했던 것 같았다. 강론 대에 서서 신부님 강론 대신 한다는 것은 조금 stressful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완강히 거절을 했지만 하태수 신부님도 만만치 않았던지, 굴복하고 말았고 그것을 지난 일요일에 하게 된 것이다.

나는 옆에서 보는 입장이었지만 수수방관할 입장만은 아니었던 것이, 그 강론의 주제가 바로 나였던 까닭이었다. 그저 ‘돌아온 탕자’ 에 비유하면 딱 맞는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나’ 였다. 나의 ‘과거’가 적나라 하게 들어나게 되는 것에 거부감을 처음에 느끼긴 했지만, 그런 이야기가 다른 사람들에 줄 수도 있는 잠재력을 생각하고 가만히 있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그 평신도 강론은 반응도 좋았고, 본인도 앓던 이를 뺀 것 같은 들뜬 기분으로 다음날을 보내게 되었으니, 이것으로 하태수 신부님이 밀어부친 평신도 주일의 성과를 느끼게도 된 것이다.

 

아틀란타, ‘혼또니 입빠이’ 변했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 아틀란타 metro지역의 한인사회도 그 동안 참 많이 변했다. 물론 이런 말 자체가 참 진부한 표현일지는 모르지만 (세월이 지나면 변하는 것이 정상이니까), 문제는 별로 좋지 않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표현도 조금은 과장된 것일까? 어떤 사회가 좋지 않게 변한다는 것,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 모일수록 ‘평균화’ 되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르니까.

여기서의 사람들이란 이곳 아틀란타 메트로 지역에 사는 한국인들(얼굴과 언어에 의한)을 말한다. 어느덧 이곳에 산 것이 내 나이의 거의 삼분의 일에 가까워 오니 주제넘은 소리지만 조금은 잡다하고 소란스러운 일상생활의 잡음을 초월한 높이에서 이곳을 생각하고 볼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지난 세월의 꿈이 담겨있는 이 blog에서 내가 사는 곳에 대한 부정적인 현재에 대해서 쓰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제 알게 된 충격적인 뉴스로 조금 생각을 바꾸었다. 그 뉴스는 이곳에서 sauna spa(한국식 찜질 방?)를 경영하고 있는어떤 다섯 명 한인가족의 집단 총기 살인과 범인의 자살에 관한 것이었다. 너무나 끔찍한 것이라서 national news (msnbc)로까지 알려지고 이곳에선 떠들썩하다. 이곳도 위성채널에 이 지역전용 한국방송이 매일 나올 정도가 되어서, (우리만 빼고) 거의 대부분이 그것을 보고 알았을 듯하다.

요즈음에는 미국에선 이런 종류의 뉴스(집단 총격사건)에 많이 익숙해져 있지만, 문제는 별로 ‘총기 문화(gun culture)에 생소한’ 한인사회에 까지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데 있다. 게다가 사망한 가족 중에는 우리 (정확하게는 연숙)에게 잘 알려진 사람도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고 심지어는 겁까지 나기도 했다. 어제는 사실 2012년 사순절(Lent)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어서 조금 더 삶과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고 다가오는 40일(사순)을 준비하는 날인데 이런 충격적인 일이 일어난 것이다.

사건의 내막은 대강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쉽게 말해서 ‘시한폭탄(time bomb)’ 터졌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올 것이 결국은 온 것이었다. 전혀 희망이 없는, 이미 전에 총기 집단 살인, 자살기도 경력을 소유한 인생패배자, 인간이기를 이미 오래 전에 거부한 패륜아인 그런 시한폭탄과 같이 살아야만 했던 가족들의 고통은 짐작이 가지만, 그래도 조금은 다른 방법으로 살 방도는 없었을까?

살인,자살극(murder-suicide)’의 주범인 남자동생은, 이번에 우발, 충동적인 요소도 다분히 있었지만, 유서까지 남길 정도로 계획을 한 ‘전과자’로 이것은 누가 보아도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절대로,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비겁한’ 살인범죄행위였다. 우리가 믿는 천주교의 교리에 의하면 그의 영혼은 연옥의 근처도 못 가고 지옥으로 직행하는 케이스인 것이다. 영혼조차 회개의 가능성이 제로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서, 역시 먼 곳과 높은 곳에서 삶과 죽음, 그것들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루하면서도 바쁘고 피곤하고 정신 없이, 로보트처럼 살아가는 대부분의 ‘생활인’들, 예전에 나도 그 중의 하나였다. 가끔 느끼는 작은 기쁨은 있었을지 몰라도, 인생이란 것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모르며 살았다. 한 마디로 인생의 보편적, 절대적인 나침반(羅針盤)에 의지하지 않고 나만의 생각으로 산 것이다. 그런 ‘생활인’들이 대거로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이곳도 많이 달라졌다. 좋게 말하면 한인사회의 평준화가 되어가고 있다고나 할까.. 아니면 ‘하향 평준화’가 더 정확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사실 ‘상상도 못할 life style‘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음을 안다. 이번에 일어난 위의 끔찍한 사건도 그런 논리의 연장으로 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 기회와 부(富)를 찾아서 온 평범한 사람들이 대부분이겠지만, 숫자가 많다 보니 극히 예외적인 인간군상도 없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래서 1996년 전의 시대가 지금은 그립다. 그때, 아틀란타 올림픽 전의 ‘촌스럽지만’ 평화로웠던 시대 말이다. 최근의 지독한 불경기로 한인사회도 팽창의 추세가 주춤하고 있고, 심지어는 떠나는 사람도 있다고 하지만, 절대로 절대로 옛날의 소박한 평화의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십이 십이의 추억

잿빛 하늘이 완전히 holiday기분을 유발하게끔 하는 12월 12일.. 그러니까.. 십이십이 로구나. 연관이 되어서 십이십이 사태.. 아니 전두환의 쿠데타. 그때가 1979년 12월 12일이었던가? 이날이 되면 나는 잊지 않고 그때를 생각하게 되고, 그것이 벌써 와~~ 32년 전이 되었다. 그 해 가을, 10월 26일에 유신정권의 총수 박정희 대통령이 심복부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서 피살이 되었고, 그를 수사하던 또 하나의 박정희 심복이었던 전두환이 그날, 12월 12일에 무혈 쿠데타로 흔들리던 정권의 권력을 잡은 것이다.

 

 

당시 추억의 oldie, Heart of GlassBlondie – 1979

 

그 해, 1979년 초가을에 나는 일시 귀국을 하고 서울에 머물고 있어서 이 격변하던 역사의 소용돌이를 몸소 다 겪은 셈이 되었다. 지금은 완전히 없어진 우리 집 세운상가 아파트에 머물면서 그 당시 나는 가끔씩 맞선을 보기도 했는데 이런 ‘대형 사고’가 터지면서 완전히 모든 관심은 사실 10.26 사태에 쏠리고 있었다.

박정희가 아무리 독재자라고는 하지만 국민정서는 그것보다는 그가 불쌍하다는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영부인 육영수 여사도 오래 전(1974년)총격으로 사고를 당해서 더 그런 생각이 우세했을 것이다.

 

 

Sultans of SwingDire Straight – 1979

 

이런 상황에서 맞선을 계속 보는 것도 쉽지를 않아서 포기를 하려는 때에 우연히 누나가 인연이 되어서 지금의 연숙과 만나게 되었는데 그때가 11월 말쯤이었을 것이다. 그때의 일련의 일들은 사실상 우리 가족의 역사가 되었고, 그 역사의 일부로 십이십이사태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무섭게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던 우리부부의 인연은 가족 상견례로 이어지고, 12월 12일전에 결혼에 대한 결정이 서로 이루어졌다. 이런 것이 바로 인연이라고 할 것이다. 날씨가 매섭던 12월 12일, 그날 우리는 결혼 결정 후 처음으로 데이트 겸 해서 김포공항으로 나갔는데, 왜 하필 김포공항?

그날 연숙의 이대 박사과정 지도교수였던 김숙희 교수가 미국으로 떠나던 날이어서 나간 것인데, 사실은 나를 인사시키려는 것도 이유 중에 하나였다. 몇몇 학생들과 함께 우리도 인사를 한 셈이 되었는데, 김교수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게 느껴졌던 것은 아마도 우리의 선입견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분명히 우리의 결혼을 탐탐치 않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의 ‘사랑하던’ 제자를 하루아침에 잃게 된 입장이었으니까..

그날, 김포공항에 도착을 해서 걸어 들어갈 때 매섭게 추운 날씨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손을 잡게 되었는데, 순순히 손을 잡아 주어서 나는 기분이 좋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너무나 손이 시려서 불편했지만, 내가 미안할 까봐 말을 못했다고 실토를 했고, 이 ‘일화’는 두고두고 잊지 않고 아직까지 ‘재미있는’ 일화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날 밤에 일어난 전두환의 무혈 쿠데타 12.12사태가 더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김포공항에서 돌아 온 후에 바로 전두환이 한강다리를 건너온 것이었고, 조금만 늦었어도 우리는 집에 못 돌아올 신세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두고 두고 이날이 기억에 남게 된 것이다.

 

 

It’s a heartacheBonnie Tyler (Live in Paris, France)

당시에 유행하던 탁한 저음의 블론드, 영국가수 Bonnie Tyler의 hit oldie

 

시월 말의 잡상(雜想)들

2011년 제2차 아틀란타 묵향회 회원전
2011년 제2차 아틀란타 묵향회 회원전

제2회 아틀란타 묵향회 회원전(회원 전시회) 1차 전시가 2011년 10월 22일, 토요일에 아틀란타 순교자 천주교회에서 있었다. 2차 전시는 일주일 뒤인 10월 29일부터 다른 아틀란타 성당인 김대건 천주교회에서 있었다. 아틀란타 묵향회 주최로 열린 이번 전시회는 이곳의 한국 성당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던 묵향회 회원들이 그 동안 쌓은 노력의 결과를 일반 대중에게 보이는 기회가 되었다. 나는 사실 묵향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 수준으로 대강은 짐작을 하고 있었는데, 얼마 전부터 연숙이 이것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곁다리, 등 넘어’로 보고 느끼게 되었다. 일반적인 동양화의 산수화를 연상했지만 그것보다 더 다양한 듯 했다.

회원들의 대부분이 여자들이었지만 예외적으로 ‘젊은’ 남자회원도 있어서, 사실은 그 분의 작품의 양과 질이 아주 뛰어난 것이었다. 흔히 생각하듯, 시간이 남아서 한다는 상투적인 인상이 전혀 없이 정말 좋아서 하는 듯 했다. 그날은 오랜만에 우리 식구가 다 모일 기회가 되어서 우리에게는 정말 드문 가족행사까지 되었다. 전시회는 작품자체를 떠나서, 조금 더 ‘멋지게’ 했었을 수 있는 여지도 있었다. 작품들이 단상(성당의 제단)위에 함께 몰려있는 듯한 배치는 조금 자세히 보려는 사람에게는 아주 불편한 것이었다. 일반 전시화랑같이는 할 수 없다지만, 성당에서 정성껏 조금 더 신경을 써 주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는 것이다.

2011년 아틀란타 묵향회 회원전 개막
2011년 아틀란타 묵향회 회원전 개막

연숙의 작품은 아무리 겸손해도, 아주 잘 그렸다는 생각이다. 어떻게 ‘난생 처음’ 하는 것을 그렇게 잘 했을까? 뭐든지 열심히 하는 것은 알지만, 이런 것은 ‘열심’ 만 가지고는 힘들기 때문에, 무언가 오래 숨어 있었던 ‘소질’이 조금은 있는 것이 아닐까? 내도 한번.. 하는 생각도 한 적이 있지만, 사실 어림도 없다. 어렸을 때 그렇게 즐기고 잘 그리던 나의 만화 솜씨를 기억하고 나보고 만화를 그려보라고 식구 모두 이구동성으로 말하지만, 힘들 것 같다. 글씨를 쓰는 것이 이렇게 힘든데.. 무언가 그린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리고 나는 ‘기초’가 제로다. 만화는 내 나름대로 ‘기가 막히게’ 잘 그렸는지는 몰라도 미술의 기초인 ‘뎃상’ 같은 것은 거의 낙제인 수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가 단언을 하랴.. 어떻게 나에게도 ‘숨어있던’ 실력이 있을지..

 

2011년 연례 이화여대 총동창회
2011년 연례 이화여대 총동창회

이화여대 총동창회 북미주지회연합회.. 휴~~ 이름이 길기도 해라.. 주최의 annual conventionBoston (Harvard, MIT..)에서 지난 며칠간 열려서, 연숙도 그곳에 가 있는데, 날씨가 갑자기 돌변을 해서 Nor’easter라는 악명 높은 눈보라 치는 날씨가 예상이 되었었는데, 다행히 Boston은 큰 문제가 없었던 듯하다. 어떻게 가을이 한창이 지금 그런 한겨울 것이 왔을까.. 역시 이것도 그것 때문인가? 꽤 오래 전에는 동창회에 많은 관심을 갖고 일도 하더니 언젠가 한번 고약한 동창에게 혼이 나서 완전히 관심을 잃었었는데, 이번에는 오래 전 친구였던 총장 김선욱씨가 온다고 해서 가게 되었다. 우리 결혼식에서 잠깐 본 후에 처음으로 보게 되는 것이라, 감회가 참 깊으리라 생각을 한다. 김총장은 독일에서 공부를 해서 미국에는 별로 연고가 없었던 듯해서 더욱 못보고 살게 되었나 보다. 요새 가끔 받아보는 이화여대의 소식지를 보면, 참.. 세월이 많이 흘렀구나 하는 생각뿐이다. 연세대 다닐 때 버스에서 꼭 보게 되던 이대 생들.. 그런 소박하고 순진한 대학이 아니고 ‘완전히’ 국제화된 무슨 레바논의 국제형 대학같은 느낌까지 들었을 정도니까.. 세계 유일의 여자공과대학.. 허.. 분명히 세계 유일일 것이다. 그런 것은 들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의 ‘늙은’ 생각에는 그렇게 확장만 할 것이 아니고 몇 개의 정말 ‘여성에게 중요한’ 분야를 개발, 정착해서 그 분야의 세계최고를 지향했으면 어떨까 하지만, 역시 늙은 생각일 뿐이다.

 

Waste King hot water dispenser
Waste King hot water dispenser

hot water dispenser.. 거의 펄펄 끓는 마시는 물을 ‘항상’ 제공하는 이것이 얼마 전에 조금씩 새기 시작해서, 결국은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7월초에는 집 전체의 더운물을 공급하는 온수기가 새서 갈았는데, 이번에는 이것이 또 문제였다. 이것은 3년 반전에 내가 직접 설치한 것이고, 조금 실망이었던 것은 아주 유명한 회사의 제품(ISE: InSinkErator, Inc.)이라는 사실에 비해 수명이 짧았다는 사실이다. 그 이전의 같은 것은 거의 10년 이상을 썼기 때문이다. 어떻게 유명한 InSinkErator, Made In USA의 품질이 이렇게 떨어졌을까? 미제의 신뢰도도 요새의 경제하락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쩔 수 없이 이번에 새로 산 것은 일부러 ‘잘 모르는’ 것으로 샀다. 모험인줄 알지만 그만큼 전번 상표의 신뢰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어제 새로 설치를 했는데, 예상이 되는 ‘설치할 때의 문제’가 하나도 없었다 (주로 plumbing에 관련된). 이런 것은 전기나 수도와 마찬가지로 문제가 없을 때는 별로 고마움을 못 느끼지만, 고장 나거나 해서 없을 때 그 귀중함을 느끼는 그런 것이다. 며칠, instant coffee를 마실 때, 불편을 겪어서 다시 한번 필요성을 절감한다.

 

시월의 반

시월의 반이 되어간다. 어릴 적 국민학생일 적, 10월은 십 월이 아니고 시월이라고 귀따갑게 배운 기억의 시월.. 이제는 추운 가을의 맛도 이미 느꼈고, 조금은 월동준비도 생각하게 해 주었다. 최근 아주 정상기온을 유지하며 며칠 동안은 땅속으로 포근히 스며드는 비까지 뿌려준 올 가을, 자연의 하느님께 감사를 안 할 수가 없다. 시월에 있는 눈에 띄는 날은 역시 시월 마지막 날, 할로윈 (Halloween)일 것이다. 일년의 수확을 상징하는 호박의 황금색이 온통 동네를 장식하는 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초자연적 존재인 ‘귀신’을 즐기는 날.. 비록 종교적으로는 ‘악마,귀신 숭배’를 우려해, 권장하는 날은 아니지만, 분명히 종교적 의미의 ‘초자연적인 귀신’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 이런 날을 재미없어 하는 축은 아마도 ‘무신론자’들 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은 ‘귀신 조차’ 믿지 않을 테니까..

에스페란토 회보
미국 에스페란토 회보

에스페란토, 2개월마다 간행되는 회지, American Esperantist가 어제 배달되었다. 지난 번 아버지가 관련된 에스페란토 역사를 추적하며, 미국 에스페란토 협회에 문의를 한 적이 있어서 이렇게 ‘무료’로 보내주었나 보다. 이 회보를 받아보고 느낀 것은, 생각보다 ‘초라’하다는 것이었다. 각종 회원들의 연회비 (정회원은 $40/year!)로 운영이 되는데 어떻게 이렇게나 빈약한 느낌일까? 물론 인터넷의 영향으로 인쇄 간행물이 대폭적으로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이다. 그렇다 해도 조금은 더 ‘화려하게’ 만들 수 없었을까? 역사 깊은 대한민국 천주교 잡지 경향잡지, 1950년대의 느낌을 줄 정도로 보는 느낌이 ‘차분’하다. 그에 비해서 내용은 훨씬 다양하고 깊이가 있는 ‘것’ 같은데.. 에스페란토를 읽을 수 없기 때문에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이 느끼며, 과연 에스페란토가 얼마나 더 ‘지탱’을 할까 하는 모양인데, 나는 오래 오래 ‘살게’ 되기를 바라는 입장이다. 내가 이것을 배워서 쓰고 안 쓰고 하는 문제보다는 이런 ‘인류 평등,평화‘의 정신이 계속 발전하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아틀란타 천상의 모후 꾸리아 간부교육피정, 드디어 내일로 다가왔다. 이것에 조금 의미가 있다면, 연숙이 꾸리아 부단장에 피선된 후 처음의 행사가 되었고, 나는 곁다리로 단원의 자격으로 봉사를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부단장이 식구에 있으니 나에게도 이렇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사실은 별로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거절할 명분이 뚜렷하지도 않았다. 레지오의 철칙인 ‘순명’을 어기는 것도 되니 할말도 별로 없었다. 단장이란 사람은 나머지 임원을 완전히 믿는지 한달 동안이나 자리를 비우고 행사 하루 전에 나타나셨다. 결국은 자리를 지키는 ‘일벌’들이 실질적인 일은 다한 셈이고.. 이 동네의 거의 모든 일들이 이렇게 카프카 식으로 진행된다. 내가 맡은 일은 일일 사진기자의 역할인데, 어떻게 보면 아주 단순한 일이다. 하지만 꼬박 전체 행사를 돌아다녀야 하는 것이라 조금 신경이 안 쓰일 수 없고, 나의 camera가 아주 ‘시로도’ 급이라, 과연 사진이 잘 나올지도 걱정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역시 이것도 레지오의 중요한 봉사이기 때문에 기꺼이 하면 될 것이고, 나머지는 다 ‘위에서’ 보살펴 주실 것이다.

 

사랑과 죽음을 응시하며..

사랑과 결혼, 그리고 죽음… 어제는 인생에서 아마도 가장 중요한 시점의 이 두 가지를 같이 생각하는 날이 되었다. 물론 결혼을 안 하거나 못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은 아직까지는 예외에 속하니까, 이렇게 결혼과 죽음을 같은 위치에 놓는 것에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세상이 하도 변해서, 남자끼리, 여자끼리 ‘결혼을 했다고’ 우기고, 할 것 다하며 같이 살면서 죽어도 결혼 안 했다고 우기고, 자식 팽개치고 이혼한 것이 무슨 ‘벼슬’을 한 듯, “괜찮다 괜찮아” 하며 행세하는 묘한 세상에, 이렇게 결혼과 죽음을 같은 위치에 놓아 보는 것은 사실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이 된다. 그만큼 결혼과 죽음은 인간이기 때문에 확실히 거쳐야 하는 중대사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심정이기 때문이다.

 

You Don’t Bring Me Flowers
Neil Diamond, Barbara Streisand
데레사에게 주는 선물, 오랫동안 변치 않을 사랑을.. 

 

어제는 우리 집과 안면이 있는, 김찬웅(베드로)씨 딸 데레사의 결혼 피로연, 초대를 받고 갔었다. 이미 나의 오래 전 blog에서 언급이 되었던 베드로씨네, 부인인 안젤라씨는 내가 속해있는 레지오의 단장님이기도 하다. 거의 20+년 전, 우리의 두 딸들과 어울려 놀았던 데레사가 결혼을 해서 친지들이 모여서 멋진 파티를 한 것이었다. 어렸을 때는 우리부부가 선생님을 하던 아틀란타 한국학교에도 다니던 아이들이.. 이렇게 커서 한 가정을 이루게 된 것을 보며, 또 세월의 흐름을 실감한다.

 이런 자리에 가게 되면 신경을 안 쓸 수 없는 것은 과연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모일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 집을 안 역사는 오랜 되었지만 그것에 비해서 자세히 아는 바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저 짐작으로, 우리의 문화적 배경인 동창회, 종교 단체 등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곳은 이민 1세의 특성상, 거의가 자영업을 가지고 있어서 직장,조직에 의한 연고는 그렇게 많지 않다. 경기, 서울대를 거치는 동창회는 그런대로 아틀란타 지역에 ‘막강’한 세력이 있는 것 같고, 베드로씨는 아마도 활동적인 멤버인 것 같아서 그곳을 통한 사람들이 많이 온 것은 짐작한 대로였다. 거기다 베드로씨는 긴 세월은 아니었지만 삼성 아틀란타 지사에서 근무를 했으니까 그곳에도 ‘동창’들이 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짐작보다 사람들이 많이 참가를 한 ‘성공적’인 피로연이 되었다.

그곳에서 ‘의외’로 만나거나 본 사람 중에는: 오래 전 아틀란타 한국학교 교장 김경숙씨, 그의 남편(경기고 출신)이 있었다. 뜻밖의 마음과,보기 싫은 마음이 싸우며 결과적으로 인사를 못했다. 아니 안 했다. 살면서 끝맺음이 잘 못되면 이런 꼴이 된다는 것, 참 불쾌한 기억이요 잊고 싶은 추억이다. 연세대 2년 선배, 장학근 선배(건축과)를 거의 5년도 넘게 만나서 인사를 했는데..글쎄.. 나를 기억을 하는지 알쏭달쏭한 표정이었다. 그의 부인이 나와 연세대 66학번(가정대) 동문이기도 했는데 어제는 인사를 못했다. 한때 잘 나가던 부동산인 김경자씨..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만났는데..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그 관계를 모르겠다. 우리가 현재 사는 집은 1992년에 이분이 소개를 해 주어서 사게 된 것이라 잊을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반가운 집 연세대 후배 Mr. 고, 그의 부인..이 집은 2005년 초에 우리 집 ‘깡패,귀염둥이 강아지’ Tobey를 준 집이다. 반가운 인사 전에 Tobey의 안부를 먼저 물을 정도였다. 이 집 부부도 사실 안지가 꽤 오랜 되었지만, 특별한 관계가 별로 없었다. 이 Mr.고, 김찬웅, 베드로씨와 삼성지사에서 같이 근무를 해서 아는 사이라 온 것이다. 그때 같이 근무하던 사람들은 가끔 ‘동창회’처럼 모인다고 했는데, 이런 것도 미국인들이 이해를 잘 못하는 한국문화 중에 하나일 것이다. 연숙은 금새 잘 알아 보았는데, 나를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 할 듯.. 그만큼 내가 변했다는 표정으로 보였다. 그것도 세월의 진리일 것이다. 예전보다 많이 이런 반응에 익숙해 졌고, 익숙해 지려고 기를 쓴다.

 

Perhaps Love
John Denver & Placido Domingo

 

조금은 예상했던 집들, 설재규씨 가족도 보았다. 아직도 어떻게 설재규씨 집안이 베드로씨 네 집과 연관이 되었는지 그 사연을 모른다. 이런 ‘인연’을 추리해 보는 것도 재미가 있다. 연숙의 이대 선배 박교수님 댁도 보았지만 인사를 못 했다. 이분들이 올 것은 쉽게 예상이 된 것이, 남편끼리는 경기고,서울대 동창이며, 부인들은 숙명여고 동창인 것이다. 이것 보다 더 연관이 된 것이 있겠는가? 하지만 그것 이외의 ‘개인적’인 친분의 정도는 정말 미지수일 수밖에 없다. 베드로씨와 ‘불알’ 친구라고 공개적으로 선포를 했던 EmCee 김용주씨, 역시 오래 전에 알게 되었지만 나이와 학벌 같은 이유로 공감대가 별로 없었다. 한때 아틀란타 본당의 ‘사목회장’까지 역임을 했었지만 요새는 조용한 듯 하다. 우리의 마리에타 2구역, 구역회장으로 ‘맹활약’하고 있는 ‘조덕성, 바오로’ 씨를 이곳에서 볼 것이라는 것은 100% 확실했다. 며칠 전 구역미사에서 이미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토요회’라는 것을 만들어서 모여서 술과 노래를 즐긴다고 했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도 Three Tenors를 모방한 연기도 있었는데, 조금은 어려운 노래, “Perhaps Love“를 고른 것이 조금은 무리였나.. 가사를 잊고 중단도 되었지만 신부 데레사가 재치 있게 이어받아 불러 주었다. 이때 데레사가 노래를 잘 부른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반가운 사람들이 더 많았다. 물론 우리 막강한 레지오 단원들이 전원 참석해 주었기 때문이다. 단장님 딸의 경사라서 사실 ‘피할’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은근히 놀란 것이, 그런 자리는 사실 조금은 ‘젊은’ 취향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그것에 구애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덕분에 단원 자매님들의 ‘형제님(aka 남편)’들을 뵙게 되었다. ‘생각보다’ 첫 인상들이 참 좋았다. 그리고 얼마 전에 입단한 나의 거의 동년배인 우동춘 형제 부부가 ‘용감하게’ 참석을 하였다. 나이가 너무나 나와 비슷해서 시간만 나면 조금 가까이서 얘기를 해 보려던 참에, 이 자리는 아주 좋은 기회를 제공했고, 길지 않았던 시간이었지만 인사치레를 넘어선 진지한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한 세대가 바뀌는 과정을,그것도 결혼을 통해서 한 가정이 태어나는 것을 보여 주었지만 다른 곳에서는 한 사람의 삶이 마감되는 과정을 겪고 있었다. 이날 아침에는 말기 간암 판정을 받은 지 불과 한달 만에 불과 61세로 세상을 떠난 형제님이 있었다. 그는 다름이 아닌 우리 레지오 쁘레시디움의 부단장 자매님의 작은 시동생이었다. 얼마 전에 우리들이 병자기도를 하다가 며칠 전부터는 선종기도로 바뀐, 너무나 빨리 진행된 죽음의 과정을 목격한 것이다. 비록 짧은 고통을 겪게 되고, 주위 가족에게 오랜 고통을 주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그렇게 짧았던 이별의 시간은 어떠한가? 예전 같으면 60세가 넘었으니 우선은 살만큼 살았다고나 하겠지만 요새는 사실 빠른 죽음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중요할까? 얼마큼 보람 있는 생을 살았는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예전에는 깊이 하지 못하며 살았다. 내가 오늘 죽으면 어떠할까? 보람이 있었을까? 알 수가 없지만 살아있는 만큼 동안은 ‘결사적’으로 ‘보람’을 만들며 살고 싶다.

 

A Glorious Autumn day

2011년 10월 8일, 아침에 바깥을 보니 한마디로 ‘기가 막히게 영광스러운‘ 가을 하늘이었다. 어렸을 적 많이 보았던 북악산 쪽의 드높은 ‘시퍼런’ 하늘이었다. 오늘은 그것에 덧붙여서 산들바람이 조금은 더 세게 분다. 아마도 이것이 ‘완전한 가을’ 날씨가 아닐까? 하지만 기후에 비해서 풍경은 아직도 푸른 색이 가을 색보다 훨씬 더 많은 ‘초가을’ 이다. 아마도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색깔들이 변하게 될 단풍의 나날들로 변하게 될 것이다.

연숙의 묵향화 작품 1호, 2011
연숙의 묵향화 작품 1호, 2011

얼마 전부터 연숙이 ‘묵향’ 이라는 동양화의 일종을 배우게 되었다. 일주일에 한번 정도 아틀란타 본당에서 배우는 모양인데, 내가 동양화란 것이 거의 문외한인 탓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고, 화구(묵, 붓, 한지 같은)를 챙길 때도 성의 없이 대하곤 했다. 그 수려하고 잔잔한 그림을 보는 것은 몰라도 내가 그린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오래 전부터 붓글씨 같은 것을 해 보고 싶다고 하더니 선생님을 못 찾아서 애를 태우더니 이번에는 ‘아다리’ 가 맞아서 묵향 선생을 찾은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는 아주 심각해 졌는데, 이유는 얼마 후에 ‘전시회’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준비하느라고 심각해 진 것이다. 본인이 아직도 초보의 수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더니 드디어 얼마 전에 그림을 완성을 해서 표구까지 해서 집에 들고 왔는데.. 솔직히 나도 놀랐다. 한마디로 ‘괜찮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분의 말씀에 연숙은 옛날에 서양화를 그렸기 때문에 이것도 남들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데, 나는 그것이 일리가 있는지도 사실 확실치 않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번에 그린 것과 비슷하게 다시 그리려 했는데, 그것이 정말 어려워서 포기 했다고.. 그러니까 이런 그림은 그릴 때의 마음가짐, 자세가 중요한 것을 알게 되었다. 포인트는 이런 ‘보이는 그림’이라는 ‘결과’가 아니고, 그것을 그리는 그 자체가 그렇게 ‘즐겁다’ 고 한다. 아마도 그것이 제일 중요한 포인트일 것이다

 

 

Catholic Sunday

오늘 아침은 3주 만에 미국본당 Holy Family CC(Catholic Church) 에서 8시반 주일미사를 보았다. 그러니까 2주 계속 주일미사를 거른 셈이다. 레지오 화요일 주중 미사는 절대로 거르지 않아서 조금은 변명 감 있긴 해도 역시 주중의 ‘약식’ 미사와 주일의 ‘정식’ 미사는 느낌이 많이 다른 것이라서 역시 ‘손해’를 본 것은 우리들이다. 10월 초에 걸맞은 계절의 맛을 마음껏 내듯 아침 바깥 기온이 45도(섭씨 7도) 로 떨어져서 이건 완전히 춘추복의 날씨로 오랜만에 “넥타이만 없는 정장”으로 갈아 입었다.

Holy Family Fall Festival 2011
Holy Family Fall Festival 2011

2주 동안 못 본 낯익은 얼굴들, 비록 이름도 모르고, 본당 밖에서 따로 만난 적이 없어도,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의 얼굴이 안 보이면 조금은 신경이 쓰이기도 하니까. 오늘의 주보를 보니, 역시 10월의 상징인 (Halloween) pumpkin의 색깔로 가득하고 돌아오는 토요일 예정인 본당주최 Fall Festival 내용으로 그득하다 . 오늘은 주임신부님, Fr. Darragh (대라, common Irish name), 오늘 복음 말씀(마태오: 21:33-43)에서, “stewardship”을 주제로 삼아, 미사 이외의 본당활동에 더 적극 참여하라고 강조하시고, 숫제 volunteer form까지 모든 좌석이 비치해 놓으셨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talent를 썩히지 말라고.. 그런 각자의 ‘재능’을 좋은데 쓰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도로 가져간다고 거듭 강조하신다. 이런 말씀 많이 들었고, 나는 안다.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보면 이 정든 ‘동네’ 본당에 내가 봉사를 할 것은 적지 않다. 하지만 현재 하나도 하는 것이 없고, 이것은 항상 갈등을 느끼게 한다. 이것은 오랜 동안의 영어문화권 직장을 떠난 후에 나타난 현상 중의 하나다. 역시 우리 같은 사람은 잔뼈가 굵은 곳의 언어문화권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 본능일까? 이곳에 살면서 계속 겪던 문화적 혼동과 갈등이 결국 나중에는 이런 곳에서도 나타나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조금 더 민감하게 느끼는 것일까.. 참 어려운 것이다. 아틀란타 한인 순교자 본당소속, 레지오에 입단한 이후, 조금씩 모국 문화권에 더 익숙해 지면서 이런 문화적, 언어적 갈등을 생각하게 된다. 문제는, 어떻게 나의 나머지 인생을 보내야 할까.. 너무나 멀어진 고국문화를 다시 배우며 살까, 아니면 더 영어권으로 들어가서 적극적으로 그들과 어울릴까.. 정답은 없다. 절대로 선택문제인 것이다. 어느 것이 더 나에게 보람을 느끼게 할까 에 달려있다. 

 

올 들어 처음으로 central heating system을 시험하는 날이 왔다. 아래층의 kitchen area에 앉아 있으려니 추울 정도라서 thermostat를 보니 67도.. heater로 스위치를 켰는데.. 잠잠.. 분명히 68도로 맞추었으니까 더운 바람이 잔잔하게 나와야 하는데, 아주 조용한 것이다. 직감적으로 아하! 아래층 furnace의 thermocouple을 새것으로 갈 때가 되었구나. 그러니까 thermocouple이 수명이 다 되면 pilot lamp가 꺼지고, fire(점화)가 안 되는 것이다. 요새의 furnace는 물론 거의 다 automatic firing mechanism을 가지고 있어서 이런 골치를 썩지 않아도 되지만 우리 것은 거의 20년 전의 것이라 이런 불편이 있다. 문제는 이 thermocouple이 생각보다 자주 교체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비싼 것은 아니지만, 이것을 새것으로 바꾸려면… 조금은 ‘기계적’인 머리도 필요하고, 그 우중충한 ‘지하’ 공간으로 기어 들어가다시피 해야 하는 그런 ‘남자의 일’인 것이다. 그래서 여자만 사는 집이라면 99% handyman을 $$을 주고 불러야 할 듯 한데 나의 우려는, 내가 먼저 죽으면 연숙이는 어떻게 이런 것들을 ‘고치며’ 살까.. 조금은 우습지만, 사실은 실제적인 문제다. 이런 것은 기계적인 것에 한하지 않고 우리 집에 거미줄처럼 깔려있는 computer network같은 것들.. 거의 자동적으로 돌아가지만, 문제가 생기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며칠 전, 빛의 속도보다 빠른 물체를 실험으로 관측1을 했다는 기사를 보면서, 정말 오랜만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추억과 함께 생각을 하게 되었다. 추억이란 물론 내가 처음 이 ‘기가 막히게 멋진 과학 이야기’ 들을 때의 기억이다. 우리 또래들은 이런 것들을 거의 대부분 책을 통해서, 그것도 ‘만화’를 통해서 접하고 배우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교과서가 거의 유일한 지식의 원천이었다. 백과사전은 나오지도 않았고, 나왔을 때는 너무 비싸서 ‘월부’로 사기도 힘든 때였다. 라디오에서 이런 것을 가르쳐 줄 리는 만무하고, TV는 없었을 때였다. 나도 역시 만화에서, 그것도 ‘공상과학’ 만화에서 처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라고 해서 듣고 배우게 되었다. 그때 내가 느낀 것은 과장되게 표현해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 만화에서 상대성원리의 결과로 보여 준 것이 이런 것이었다. 두 형제가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빛의 속도로 나르는 로켓을 타고 여행을 떠난다. 몇 년 뒤에 그는 지구로 돌아왔는데, 그 때는 이미 지구시간은 수만 년이 지난 후여서 그의 가족 뿐만 아니라 지구 전체가 완전히 바뀐 뒤였다. 이것은 광속도에 접근하는 로켓(과 그 안의 사람)에서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흐른다는 사실에 근거를 한 것으로, 이론상으로는 문제가 없는 공상이었다.

이런 식의 이야기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는데, 중학교 2학년 가회동에 살 당시, 같은 집에서 자취를 하던 경기고교 생 양병환 형으로부터 이런 류의 이야기로 밤을 새우기도 했다. 그 중에 하나가, 우리의 과거를 볼 수 있다는 역시 조금은 소름 끼치는 이야기도 있었다. 도저히 이해는 안 갔지만 이론적으로는 역시 큰 문제가 없었다. 이 이야기의 함정은, 우리가 우리의 과거를 본다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나의 과거를 본다는데 있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지구에서 10광년 떨어진 별에서 거대한 망원경으로 지구를 보면 10년 전의 지구가 보일 것이고, 10년 전의 우리들을 볼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며 대학 1학년 때, 드디어 흥분의 순간이 왔다. 대학 물리시간에 특수 상대성 이론이 나온 것이다. 이것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그대로 다룬 것인데, 조금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 이론은 전혀 ‘어렵지’ 않아 보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 이론에서 쓴 수학들이 정말 그다지 어려운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심지어 너무나 ‘간단’ 했던 것이다. 그곳에 상대성원리의 매력이 있었을 것이다. 우주의 법칙은 절대로 ‘복잡’하면 안 된다는 아인슈타인의 지론이 그것이다. ‘하느님의 법칙’ 은 의외로 간단한 것이다. 예를 들어서 에너지의 공식을 보라. E=mc2 이렇게 간단한 공식이 어디 있는가? 이런 이론들을 과학적 증명이 거의 없이 ‘발명’한 그는 한마디로 천재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 후 100년 동안 그의 이론은 거의 실험으로 하나하나 ‘직접, 간접적’으로 증명이 되고 있다. Gutenberg.org의 도움으로 아인슈타인의 원래 저서 ‘상대성 원리’를 download해서 보았다. 역시 비교적 내용이 길지 않은 책이었다. 위대한 저서는 이런 식으로 의외로 간단해 보이는가? 비록 독일어를 영어로 번역을 한 것이지만 아인슈타인의 ‘냄새’가 여기저기서 나는 위대한 책이다. 시간이 나면 한번 녹슨 머리를 굴려가며 다시 한번 읽어 보리라. 어렸을 때와 다른 것은 이제는 ‘하느님의 작품인 거대한 우주’ 라는 framework을 염두에 두고 있기에 그 때와 같이 방황하지는 않으리라.

 

  1. 아마도 이것은 quantum entanglement 실험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Come September

중학교 (서울 중앙중학교) 때 나온 미국영화, Come September의 주제곡을 수십 년 만에 들었다. 거의 분명히 타향살이를 시작하면서 처음 들었을 것이다. 중학교 때의 영화니까 분명히 ‘학생입장불가’로 볼 수 없는 그림의 떡이었을 것이고, 영화자체도 그 나이에 보기에는 너무나 ‘지겨운’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주연배우는 Rock Hudson(록 허드슨)과 이태리의 Gina Lollobrigida(지나 롤로브리지다) 등의 그 당시 최고 정상급 국제 스타들이었다. 그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은 영화가 아니라 그 영화의 주제곡 때문이다. 영화 내용은 모르지만 그 주제곡은 그야말로 ‘경음악’의 진수를 보여주는 정말 경쾌한 것이었다. 그것이 왜 9월과 연관이 있는지, 그러니까 그 영화의 제목이 왜 ‘9월이 오면‘ 이었는지는 아직도 이유를 모르지만, 그것은 절대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9월이 오면 생각나는 ‘음악’ 중의 하나라는 , 그것이 더 중요하니까.

 

 

Come September: 9월이 오면, 1961

어제, 9월 1일은 30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나의 인생 반려자로 살아온 아내 연숙의 생일이었다. 원래 내가 우리 둘의 아침식사를 준비한 것이 이제 몇 년째가 되어서, 이것으로 생일의 “깜짝 서비스” 를 할 수도 없고, $$$도 그렇고, 너무나 흔한 ‘생일 축하 메시지’ 를 만들기도 낯 가렵고.. 그래서 요새는 생일이 맞거나 축하해주는 것도 부담스럽지 않은 부담이 되어간다. 그저 한마디로 XX 년 전에 ‘인간으로 세상에 나온 신비’ 를 서로가 생각하면 어떨까? 그렇게 요란하게 노래를 부르며, 먹으며, 선물포장을 뜯어야만 할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이고, 올해는 작은 딸 나라니 가 ‘먹는 생일’을 마련해 주었다. Cumberland Mall에 있는 커다란 Italian restaurant, Maggiano’s (Little Italy) 에서 오랜만에 ‘밀가루 음식’ 과 bottle of wine으로 포식을 시켜주었다. 이태리 사람들이 ‘많이’ 먹는다는 것은 알았지만 엄청나게 많은 음식의 크기 (flat dish가 아니고 bowl)에 먹기도 전에 질려버렸다. 우리는 원래 저녁식사를 거의 안 하고 살아서 아마도 위장이 꽤 놀랐을 것이다. 거기다가 음식값에 carry-out 메뉴가 덤으로 포함되어 있어서 그것까지 하면 그리 비싼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박봉’에 시달리는 작은 딸의 저금 통장에 큰 변화가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이래서, 우리도 이제 오래~~ 살았구나.. 실감을 했다.

 

Try to RememberThe Lettermen

9월과 12월 사이의 감정을 보여주는 멋진 시

오래된 추억의 9월은 어떤 것들일까? 그 중에서 추석이 으뜸일까? 타향살이에서 제일 그리운 것이 ‘추석의 느낌’ 이다. 이것은 타향에서는 ‘절대적으로 느끼기 불가능’ 한 것 중에 하나다. 그러니까 추억이던가. 실제로 그 추억이 현실적인 추석보다 더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모든 것들이 ‘느리기만 하던’ 시절.. 시간도 느리고, 버스도 느리고, 비행기, 기차도 느리고, 전화도 느리던 그 시절.. 그런 명절은 정말 천천히 즐기는 느린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설날과 달리 날씨가 알맞게 따뜻해서 얼마든지 밖에서 ‘딱총과 칼’로 무장을 해서 전쟁놀이로 뛰어 놀고, 뛰어 들어와서 송편, 고기 등 으로 배를 채우고 다시 골목으로 뛰어나가던 그런 추석.. 그날 밤에 재수가 좋으면 어둡기만 하던 동네를 완전히 대낮으로 바꾸어 놓았던 보름달 아래서 골목 이웃들이 몰려나와 수다를 떨던 아저씨, 아줌마들.. 세월을 따라 모든 것들이 빨리 움직이면서 그런 순진함 즐거움은 하나 둘씩 사라져갔다.

 대학 다닐 때, 갈비씨(skinny people, 이런 말을 요새도 쓰나?) 인 신세로 주눅이 들었던 시절, 9월은 희망의 계절이었다. 모든 신체 부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짧은 팔에서 조금은 가려주는 긴 팔의 옷으로 천천히 바뀌던 첫 달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우습지만, 그 당시는 상당히 심각했다. 아마도 뚱뚱한 것이 마른 것보다 ‘가치가 떨어진’ 요새 사람들은 절대로 상상을 못할 듯 하다. 분명히 그 당시는 ‘살이 찐 것’이 마른 것 보다 더 멋있게 보였다. 아마도 마른 사람의 대부분이 가난했던 사람들이라 그랬나? 이래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건가? 가난하게 보이게 노력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가족이 생기고, 대부분 가장이 겪게 되는 세파에 시달리기 시작하면서 9월과 가을을 거의 잊고 살게 되었고, 그에 따르는 추억도 메말라 가게 되었다.그러다가 50대에 접어 들면서 우연히 나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시(詩)에 눈을 뜨게 되었다. 거의 완전히 메말랐던 감정들이 이 신기한 것을 통해서 조금씩 스며 나옴을 느끼게 되어서, 나이와 감정, 감상이 꼭 반비례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9월은 그런 찐한 감정의 보물창고인 가을과 겨울의 입구와 같은 때인 것을 매년 조금씩 실감해 가게 되었다. 올해는 과연 어떻게 그런 감정의 보고(寶庫)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가을 그림자

 

가을은 깨어질까 두려운 유리창.

흘러온 시간들 말갛게 비치는

갠 날의 연못.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는 아이들 찾으러

집 나서는

황혼은

물빠진 감잎에 근심들이네.

가을날 수상한 나를 엿보는

그림자는 순간접착제.

빛 속으로 나서는 여윈 추억들 들춰내는

가을은

여름이 버린 구겨진 시간표.

 

김재진

 

 

9월의 노래

누가 처음 발표를 했는지는 몰라도 9월의 classic은 바로 곡이 아닐까? 패티킴의 version이 바로 그것인데 아깝게도 그것은 이마 유튜브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에 버금가는 ‘연숙’을 닮았던 “혜은이”의 것이 건재하니까..라고 했지만 다시 찾게 되었다. 멋진 패티김의 pose와 함께… 감사합니다~~

 

dream dream

 
Dream Dream – Everly Brothers – 1960

반가운 꿈, 어제 밤에는 오랜 만에 조금은 뚜렷한 꿈에서 깨어났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꿈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전에도 가끔 ‘좋은 꿈’은 다시 꾸고 싶기도 했지만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하지는 않고 살았다. 하지만 꿈이란 것, 지금은 과학적인 것만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99.9% 예상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렇게 ‘엉뚱하고, 말도 안 되고, 엉터리’ 같은 주제의 꿈을 예상할 수 있단 말인가?

정말 오래 된 것이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는 classic한 것들도 몇 가지가 있고, 나는 그것을 계속 소중하게 기억하며 살고 있다. 대부분 ‘좋은 꿈’ 에 속하는 것들이지만, 어떤 것은 정말 ‘이상한’ 것도 있다. 남들도 그렇겠지만, 좋은 꿈은 대부분 깨고 나면 너무나 깬 것이 아쉬워서 섭섭하고, 나쁜 꿈은 반대로,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되어서 반갑다. 이렇게 꿈도 참 공평한 것이다.

한창 자랄 적에는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을 많이 꾸었는데, 그것은 키가 자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들어서 좋아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나의 키에 별로 도움이 되지를 않았다. 물론 떨어지는 그 자체는 대부분 ‘날라서 사뿐하게’ 떨어지는 것들이었다. 어떤 것은 아직도 생생한 상상할 수 없이 색깔이 ‘진했던’ 그런 ‘초원과 하늘’ 을 본 것인데 어찌나 그 색깔들이 그렇게 ‘찐~’ 하던지.. 지금도 머리에 남아서 다시 한번 보고 싶은 것 중에 하나가 되었다.

 공상과학 만화, 특히 어릴 적에 완전히 심취했던 ‘라이파이, ‘철인 28호‘, 왕현의 ‘저 별을 쏘라‘ 등의 만화를 볼 당시의 꿈도 기억에 남는다. 그 중에 제일 재미있던 것은 ‘잠자리 채’ 로 ‘잠자리 비행기’를 잡던 꿈이었다. 그러니까 ‘방충망’으로 ‘헬리콥터’를 잡아 채는 꿈이었다. 그 당시 제일 신기하게 느껴졌던 것이 ‘잠자리 비행기’ 였는데, 그것을 잠자리채로 결국은 하나를 ‘잡았다’. 잠자리채 속을 가까이서 보니 그것은 아주 ‘작은’ 장난감 같은 것이었고 손으로 꺼내려고 하는 순간에 잠에서 깨었다. 그때 처음, 이런 멋진 꿈에서 잠을 깨는 것은 너무나 아쉬운 것을 느꼈다. 이런 것이 ‘좋은 꿈’ 중에 하나였다.

 청춘의 절정기에는 ‘성장, 남성 male’ 호르몬(hormone)의 영향으로 많이 ‘이성을 그리는 환상’에 가까운 꿈을 많이 꾸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에로틱 fantasy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남자형제가 없던 나는 이런 것을 그저 속으로만 넣어두고 부끄럽게 생각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이제 생각하면 ‘건강’한 방법은 아니었다. 가능한 한 남자 친구들과도 그런 경험을 나누었던 것이 더 좋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끔 내가 ‘변태’가 아닐까 하는’틀린’ 걱정도 했기 때문이다.

10대에서 20대로 인생의 초기에 해당하던 그 시기다. 그때의 ‘최고’의 꿈은 역시 ‘지적이고, 멋진 여자’가 나에게 은근한 미소를 보내준 그런 류인데, 불행하게도 바로 그 기쁨의 ‘순간’에 깨곤 하였다. 좋은 꿈은 항상 그렇게 깨지곤 했다. 이런 꿈은 결혼 훨씬 후에도 가끔 꾸었고, 결혼 전과 달리 깨고 나면 약간의 ‘죄의식’을 느끼게 되어서 전과같이 기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꿈 자체는 정말 신선하고, 가벼운 흥분을 주는 그런 것이었다.

 20대에 나를 괴롭힌 꿈은 다른 것이 아닌 ‘가위 눌림‘ 이었다. 이것은 실제적으로 꿈과는 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꿈을 꾸면서 이것으로 이어지곤 했다. 그 당시 시카고에서 알고 지내던 어떤 형 뻘이 되는 일본사람 (히다카 켄조 상)이 듣더니 자기도 똑같은 경험을 한다고 해서 얼마나 ‘안심’을 했는지 모른다. 역시 ‘고민’은 나누어야 가벼워 지는가.. 이 꿈은 무엇인가 악몽에 시달리다가, 목이 조이는 느낌이 들다가 나중에는 몸 전체가 ‘천천히, 완전히’ 굳어져 가는 것이다. 이것이 이미 시작되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소용이 없었다. 그 일본인 켄조 형은 이럴 때, 절대적으로 남에게 알리거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깨어나야 한다고 경고를 하였다.

이런 꿈은 정말 괴로운 것이었지만 나 혼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부터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해서, 30대에 들어오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은 ‘의학적인 현상’에 불과하고, 몸이 허약할 때 생긴다고 했지만, 나는 전적으로 다 믿지는 않는다. 과학적인 것 이외에 어떤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꿈이 시작되기 얼마 전에 The Exorcist란 무서운 영화를 보고 일주일 동안 밤에 불을 켠 채로 잔 괴로운 경험이 있어서 혹시 그것도 한 몫을 했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나에게는 특기할 만한 몇 가지 ‘악몽’이 있다. 지난 10년 동안 가끔 괴롭힌 것은 갑자기 머리카락이 모두 벗겨지는,그러니까 하루 아침에 ‘대머리’가 되는 꿈이었다. 물론 50대에 들어오면서 빠른 속도로 빠지는 머리카락에 겉으로는 나타내고 싶지 않지만 암암리에 신경이 쓰인 것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완전한 대머리가 된 꿈은 꿈 속에서도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깨고 나면 꼭 식은 땀을 흘리곤 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대머리가 되지 않고, 점차 ‘서서히’ 빠진다는 사실만은 이런 꿈에서 깨어나면 나를 조금 위로하곤 하였다.

하지만 진짜 악몽은 이것이 아니다. 이 악몽은 이제 나의 ‘친구’가 된 정도로 역사와 ‘실감’을 자랑한다. 이것은 학교에 대한 것, 그것도 ‘공부, 성적’에 관한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서 아마도 대부분 사람들에게 학교 ‘공부,성적’이 얼마나 필요이상의 스트레스를 주었는지를 알게 하는 것이다. 특히 이것은 지난 20년 동안 거의 정기적으로 겪는 악몽인데, 악몽의 특징인 “깨어 났을 때의 안도감” 은 이것이 최고다. 1980년 부터 PBS TV에서 재방영이 되었던 The Paper Chase..란 TV시리즈 (드라마)가 있었다. 이것은 원래 1970년대 초에 소설로 나왔고, 곧 영화화가 되고, 1978년부터 CBS TV가 드라마화 한 것인데 한국에서도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이란 제목으로 소개가 된 것이다. 이제는 추억의 ‘고전’이 되었고, 특히 1980년, 신혼 초에 콜럼버스(오하이오 주)의 학교근처 1 bedroom Riverview Apartment에서 연숙과 같이 일요일 아침마다 침대에 누워서 빠짐없이 PBS TV로 이것을 보던 것도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Prof. Kingsfield & Hart in The Paper Chase, 1978
Prof. Kingsfield & Hart in The Paper Chase, 1978

이 드라마 첫 회의 에피소드와 내가 겪었던 ‘진짜’ 경험이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큰 차이가 있지만 ‘본질적’인 것은 거의 같다고 볼 수 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Hart)이 하버드 법대(Harvard Law School)에 ‘간신히’ 들어가서 그 첫 강의에서 겪는 ‘고통’은 가히 dramatic한 것이다. 호랑이 같은, 킹스필드 교수(Prof. Kingsfield)가 모든 것이 준비가 덜 된 신입생(하트, Hart)을 심리적으로 거의 ‘죽이는’ 것이다. 급기야 주인공의 꿈에서 교수가 나타나 ‘진짜로 무덤 속으로 넣는’ 것 까지 경험하는 것인데, 그 정도면 시험과 그에 따른 성적(표)으로 인한 학교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가히 극치의 수준이 아닐까? 문제는 내가 그와 거의 비슷한 꿈을 ‘아직까지’ 거의 정기적으로 지난 30년 이상 꾼다는 사실이다. 예전에는 정말 괴로웠는데, 지금은 사실 ‘완전히’ 익숙해져서 견딜 만 하고, 심지어는 꿈에서 깰 당시의 ‘안도감과 기쁨’ 때문에 기다릴 때도 있다. 아~ 내가 지금 학교를 안 가도 된다는 그 사실 하나로 그렇게 기쁘고, 무슨 구원을 받은 것 같은 기쁨까지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나만 가지고 있는 특별한 꿈일 것이라, 체념하면서 오래 살았는데 우연하게도, 가깝게 지내던 서울고, 서강대 출신 최동환 씨가 나와 비슷한 꿈을 꾼다고 들은 후부터 조금은 안심까지 하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나의 꿈은 위에 말한 드라마와는 다르게 특별한 교수와의 문제에 대한 것은 아니고, 내가 과목을 듣는데 전혀 공부와 시험준비가 안 되거나, 덜 되었을 때의 그 불안과 고통에 대한 것이다. 연세대 시절에 그런 경험을 몇 번이나 했고, 그 후 미국에서 다니던 학교에서 거의 주기적으로 그런 ‘실화’를 겪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잠재의식에 완전히 뿌리를 잡은 것이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잠자고 있는 이 괴로운 잠재의식을 어떻게 없애 버릴 것인가? 나는 모른다.

겉으로만 돌면서 나를 피해가던 종교, 신앙에 기대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그래서 초자연적임을 이제는 믿게 되었고, 그 중에는 꿈도 포함이 되었다. 인생, 역사, 자연, 거기에다 꿈 등이 전혀 ‘우연’일 수도 있지만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요새는 꿈을 사실 기다리며 즐긴다. 또 하나, 덤으로 나와 같이 나란히 살아가는 나의 인생과 ‘역사’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립지만 절대로 볼 수 없는 사람들을 꿈에서 기다린다. 그 중에는 나를 거의 잊고 사는 나의 사랑하는 누님과, 천국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나는 오늘, 내일 의 꿈속에서 다시 기다린다.

 

WYD 2011, 레지오의 전산화

World Youth Day 2011 Madrid, Spain
World Youth Day 2011 Madrid, Spain

2011년 마드리드, 스페인에서 열린 세계청년대회 가 ‘무사히’ 막을 내렸다. 전야 미사 중의 날씨가 나빠져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 사고는 없었던 모양이다. 오늘 CatholicTV.com을 보니 드디어 어제 일요일의 “폐막 미사”의 비디오가 올라와 있었다. 이 행사를 며칠 유심히 보면서 나는 거의 내가 ‘가톨릭 청년’ 이 된 기분이 되어서 참 기분이 좋았다. 폐막미사의 광경은 참 ‘장엄’하면서도 100만의 젊음의 활기가 완전히 ‘공항’을 휩싸는 그런 것이었는데..이것은 실제로 그 현장에 있지 않으면 ‘절대로’ 전부를 느낄 수 없는 것들이다. 지난 6월 이곳 아틀란타에서 열린 연례 대교구 주최의 ‘성체대회’에 참가하면서 이런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다. 수만 명의 형제,자매 신자들과 같이 함께 모여서 미사를 본다는 사실은 글로 그 느낌을 다 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스페인, 마드리드 외곽에 있는 한 비행장 전체가 ‘완전히’ humanity로 채워진 모습은 비록 작은 화면으로 보더라도 실감이 되었다. 그 광활한 평지를 완전히 메웠던 백만 명의 ‘멋진’ 젊은이들.. 잘못 보면 무슨 rock concert에 온 젊은이들 같이도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분명히 그들은 다르다. 1960년대 말, 미국 Woodstock Rock Concert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그 광경이 겹치는 것을 느낀다. 완전히 drug, sex & rock music이 주제가 되었던 그 시절, 그 세대.. 사실은 나도 그것들을 보면서, ‘인간의 완전한 자유에 열광’을 하던 오래 전의 추억이 있다. 하지만 ‘다른 모습의 완전한 자유를 보여주는’ 이런 전혀 다른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역시, 이래서 항상 ‘희망’이란 것이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그 ‘멋진’ 젊은이들이 얻었던 며칠간의 체험은 그들, 그들 주변, 그가 속한 사회, 나라에 예측할 수 없는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사실, 의심하지 않는다. 작은 호기심 하나는, 어떻게 100만 여명에게 성체를 분배할까..하는 별로 의미 없는 것이다.

 

레지오 마리애의 전산화: 이것도 잘못 들으면 oxymoronic한 구절이 아닐까. 절대적인 성모마리아께 대한 순명의 정신으로 무장한 이 거룩한 평신도 단체는 언제까지 ‘낭비적인 시간’을 허용할 것인가? 로마군단의 효율적인 체제를 본 받으려면 현재에 가능한 온갖 ‘도구’를 다 써야 할 것이 아닐까? 여기서 ‘도구’란 물론 digital tool을 말한다. 물론 computer가 그것이다. 예전에는 computer하면 막연히 desktop system을 뜻했지만 지금은 아주 다양해졌다. 여기에는 물론 Internet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모든 것들이 ‘연결’이 되었고, 무서운 기세로 연결이 되어 가고 있으니까. 이제 이 ‘도구’는 누가 어떻게 먼저 자기 목적에 맞게 쓰는가가 관건이 되었다.

얼마 전에 나의 예상을 뒤엎고, 연숙이 본당소속 꾸리아의 부회장에 피선이 되고 말았다. 전부터 나는 레지오 평의회에서 봉사하는 것을 극구 말리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평화로운 시간’을 가지고 싶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해야 하는 ‘봉사적’인 직책이지만, 우리에게는 아직도 덜 바쁜 시간이 필요함을 잘 알기에 나는 반대를 한 것이다. 또한 직책의 ‘과정’도 중요하지만 ‘결과’도 중요함을 나날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어떤 직책의 ‘일’이란 것이 사실은 ‘타협, 양보, 조절’의 기술이 나머지 것들 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나이가 들어가면서’ 알게 되는 것이다. 헌신적으로 일을 할 자격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극구 말렸지만, 본인의 의사는 별로 반영이 되지 않게 피선이 되었으니.. 이제는 현실로 받아야 할 듯하다. 한마디로 나에게도 영향이 있다는 뜻이다. 나는 비록 평 단원이지만 부부로써 옆에서 가만히 보고 있을 수도 없지 않는가? 그래서 첫 번째로 연숙이 가지고 온 ‘일’ 중의 하나가, “레지오 멤버들의 관리” 에 제일 중요한 레지오 <행동단원 복무기록부> 를 정리하는 일이 되었다. 아주 두터운 3-ring binder에 꾸리아소속의 거의 모든 단원의 신상기록이 있는데, 물론 이것을 ‘전산화’ 하려는 것이고, 그것을 첫 과정이 data entry가 아닌가? 가장 쉬운 Excel-format으로 시작을 하는데, 역시 문제는 한글, 영어가 섞어야 하는 조금은 복잡한 데이터 들에 있고, 불완전한 record, 고유한 개개인의 아이디(id)등인데 이것은 아마도 본당의 교적부의 database를 참고로 하면 좋을 듯하다.

이것이 시작이지만, 그 이외에 예상할 수 있는 ‘과제’는 적지 않다. 제일 내가 눈독을 들이는 것은 모든 서류양식을 writable-pdf 화 하여 computer screen에서 직접 입력을 하게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런 것들이 역사 깊은 레지오에서 이미 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온통 인터넷을 뒤져 보았지만 심지어 Ireland(아일랜드)의 레지오 세계 총본부에서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format file을 download-print해서 손으로 쓰는 것이다. 그러니까 ‘종이’는 아직도 계속 써야 하는 실정인 것이다. 아직도 나는 이해를 할 수가 없다. 그렇게 digital gadget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고국의 레지오도 마찬가지로 이곳은 거의 아래아 한글(hwp format)로 된 것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이것이 현재의 레지오 단원 평균 연령층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활발한 레지오 연령대는 어느 곳에서나 시간이 조금은 여유가 있는 세대일 것이다. 그들은 거의 장년층일 것이고 아무래도 그들은 젊은 세대보다는 technology에는 덜 익숙하지 않을까? 꾸리아 레벨에서 산하 쁘레시디움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려면 ‘정보적인 도움’이 아주 중요할 것이다. 기계적인 일들은 모두 computer에 맡기고 그 시간에 더 생산적인, 창조적인 일을 하는 것이 더 유익하지 않을까?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이 cloud-model로 가는 마당에, 이것을 database application으로 바꾸고, 그것을 webify(web application으로 바꿈) 해서 모든 ‘단원, 임원’ 들이 “위치에 상관없이” 볼 수 있고, 쓸 수있게 하는 것이 제일 좋을 듯하다.

 

 

‘알피 램’ 생애를 읽으며..

알피 램 생애, 전설적인 레지오 선교사
알피 램 생애, 전설적인 레지오 선교사

지난 6월 28일부터 읽기 시작한 <알피 램 생애> 란 소책자 (136쪽)를 이제 거의 다 읽어 간다. 마지막 20쪽이 남았다. 이것도 RbT: Reading by Typing 의 방법으로 읽고 있어서 사실 눈으로만 읽는 것에 비해 시간이 더 걸리는 셈이지만 대신 아주 자세히 읽게 되는 이점이 있다.

이 책은 연숙이 2009년 12월 6일, 아틀란타 본당소속 꾸리아 연말 모임에서 꾸리아로부터 선물로 받았다고 한다. 물론 그 당시는 나의 관심 밖이어서 이런 책이 있었는지도 몰랐지만, 알았다고 해도 큰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운명의 장난으로’ 지난해 말에 내가 레지오에 입단을 하면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이렇게 꼼꼼히 읽을 정도로 관심이 생긴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알피 램이란 사람이고, 알피 램(Alfie Lambe) 의 알피(alfie)는 알퐁소(Alfonsus) 의 애칭(nickname) 이다. 알피 램은 간단히 말해서 레지오에서는 거의 신화적인 존재라고 한다.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로 라틴 아메리카에 레지오의 ‘돌풍’을 일으킨 사람인 것이다. 다른 말로 그는 더블린에 있는 세계 레지오 본부에서 파견된 레지오 선교사라고 하면 쉽게 이해가 갈 듯하다. 특히 6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영웅적’으로 활동을 하다가 역시 젊은 26세의 나이에 선종을 해서 레지오에서는 거의 ‘어린 성인’ 같은 존재로 남은 것이고, 이로 인해서 성인으로 가는 ‘복자 추대’ 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알피 램이 활동한 시기가 1953년부터 선종한 때인 1958년까지였다. 그러니까 내가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해 부터 국민학교 5학년 때까지가 된다. 그렇게 오랜 전의 이야기인 것이다. 이 책이 나온 배경은 아직 자세히 ‘연구’를 못해서 잘 모르지만 원래 ‘힐데 퍼텔’이란 저자가 영어로 쓴 것을 북미주 레지오 교육협의회장 ‘조, 율리오’ 란 사람이 한글로 번역을 해서 대한민국 광주에 있는 ‘새날출판사’란 곳에서 간행을 한 136쪽의 소책자인데, 내용은 그런대로 ‘이해’를 했지만 거의 다 읽고 난 감상은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니었다.

이 책의 내용은 나중에 간추려서 blog으로 소개하겠지만, 여기서 감상이 좋지 않다는 것은 내용이 아니라 이 책의 기본적인 ‘자격’에 관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번역자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독자를 거의 우롱하는 듯’한 인상을 받을 정도로 ‘조잡한 번역‘으로 일관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출판사의 실수, 잘못인지 번역자의 잘못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아예 이 상태로서 출판이 되어서는 안 될 정도인 것이다.

그래서 조금 생각한 것이, 머리말에 ‘번역 봉사’란 말이 나오는데.. 이것이 무슨 뜻인가.. 번역자가 번역을 한 것이 아니고 이 봉사자들 여러 명이 함께 했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조금은 이해가 간다. 수준 이하의 ‘직역 체’ 번역에다가 각 단원의 문체, 용어, 문단의 구성도 다른 것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발행 년도가 2003년이면 초고, 원고를 분명히 computer의 word processor로 편집을 했을 것이고, 그러면 거의 자동적으로 spelling checker가 틀린 것을 지적했을 터인데 아예 그런 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인쇄소로 넘긴 듯하다.

읽는데 하도 신경이 쓰이고 해서, 아예 모두 ‘내가 고친’ 것으로 다시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어떻게 이런 글이 ‘출판사’의 ‘검열’을 통과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레지오에 ‘누’를 끼치는 것 밖에 되지 않을까? 위에 언급한 조잡한 번역, 일관성 없는 구성, 오자 등등 것들의 예를 나는 나중에 모두 열거를 해서 ‘발표’를 할 예정이다.

 

레지오 피정에 들어가며..

이번 주말에는 아틀란타 본당 레지오 주최 연례 3일간 봉쇄피정이 있어서 연숙과 같이 들어간다. 둘이서 집을 같이 떠나는 것도 오랜만이지만 나에게는 생전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는 피정(retreat)이라서 아무래도 신경이 쓰임은 어쩔 수가 없다. 일년에도 몇 차례씩 이런 곳에 가는 사람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칠 노릇이겠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이름이 아주 거창하다. 봉쇄피정이라.. 한자로 읽으면 아마도 완전히 3일 동안 외부와 연락이 차단이 된다는 뜻일까? 아니면 세상만사를 다 잊으라는 뜻일까? 아직 누구에게도 물어본 적이 없다. 들은 이야기로 이런 곳에 가려면 정신적으로 신앙적으로 준비가 잘 안되어 있으면 가기 전에 꼭 무슨 유혹이 생긴다고 들었다. 나는 ‘치명적’인 유혹은 없었지만 비슷한 것은 벌써 경험을 하고 있어서 이런 말들이 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고 다 타당성이 있다고 믿게 된다.

나의 집을 ‘물리적’ 으로 떠나는 것이 거의 일년이 되어온다. 작년 여름 새로니가 살고 있던 Nashville, TN에 한번 놀러 갔던 것이 전부다. 비록 피정은 Atlanta Metro에서 열리지만 좌우지간 집을 떠나는 것은 사실이다. 이번 피정은 조금 있으면 주임신부에서 물러나시는 안정호 이시도리 신부님이 지도를 해 주신다고 한다. 비록 새 신부님이 곧 오시게 되어서 주임신부직은 물러나지만 아직도 우리들은 그 들이 우리의 ‘영원한’ 주임신부처럼 느껴진다. 그만큼 그분에게서 나 개인적으로 받은 은총이 많음을 느낀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웹싸이트를 보면 그곳 발행,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경향잡지가 1900년 초 부터 연도별로 거의 모두 수록이 되어있다. digital scanning을 한 것인데 원래 책의 상태가 안 좋은 것도 있어서 읽기 힘든 부분도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힘든 것은 특히 해방 전 것들인데 잘 보여도 읽기가 쉽지 않다. 지금의 ‘국어’에 비하면 거의 훈민정음 스타일의 ‘고어’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때는 사실 한글 맞춤법도 없었을 것이고 한자를 많이 쓰고 해서 더 그렇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이 고색창연한 천주교 월간잡지의 가치를 높여주고 있는 것이다.

살 찌는 약!
살 찌는 약!

내가 우선 관심이 갔던 때는 해방 후와 육이오 동란 전후, 그리고 1960년대이다. 내가 태어나기 전 것들은 그 당시의 역사를 천주교의 입장에서 본 것을 알게 되어서 그렇고, 육이오 이후는 내가 어렴풋이 기억이 나던 때를 다시 간접적으로 보게 되어서 관심이 간다. 1960년대는 조금 다르지만 약간 ‘근대화’한 한국의 사회상을 간접적으로 보여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다. 너무나 방대한 분량이라 우선은 주마간산 식으로 보았지만 시간이 나는 대로 조금은 정독을 하려는 희망도 있다.

우선 반가운 그림들을 몇 개 보았다. 광고인 것이다. 천주교 잡지에 광고가 있었다는 사실도 새롭지만 반세기 넘게 잊고 살던 ‘인기 있던’ 상품을 다시 보게 된 것이 더 반가웠다. 이것은 그 당시의 사회상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던 것이기도 하다. 우선 조금 웃음이 났던 것은 “살이 찌는 약”에 대한 것이다. 요새의 기준으로 보면 과연 얼마나 이해를 할까? 나도 살찌는 약에 대한 광고를 많이 보고 자랐다. 나도 갈비씨였지만 그 당시는 갈비씨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리고 독일회사 훽스트.. 거기서 나온 ‘고기 먹으면 필요했던’ 훼스탈.. 고기를 많이 못 먹었던 시절 그것을 소화할 효소가 제대로 안 나와서 그랬던 것일까? 기본적인 위생시설이 부족했던 그 때는 피부염, 종기가 참 많아서 그랬던지 ‘이명래 고약’은 정말 그때의 구세주 였다. 어찌 잊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