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속도, 조탁 이성복

Albert Einstein
Albert Einstein

빛의 속도에 대한 논란: 이 우주에서 제일 빠른 속도는 ‘이론적’으로 정해져 있다. 바로 빛의 속도인 것이고 변치 않는 상수(常數) c 로 표시된다. 이것은 고등학교 물리시간에서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이론’ 을 통해서 배운다. 이것을 배울 때, 대부분은 담담히 받아 들인다. 어찌 의문을 제기할 수가? 상대는 ‘상대성 원리의 천재, 아인슈타인’ 인데.. 말 잘못 했다가는 물리 선생으로부터 면박이나 당할 것이다. 이 우주에서, 어떤 물체가 아무리 빨라도 빛을 따를 수가 없다고 하고 그의 상대성 이론은 이것을 ‘기초’로 해서 성립이 되었다. 그리고 100여 년 동안 그의 이론은 실제와 거의 맞아 떨어지기도 했다.

문제는 ‘거의’라는 단서인데, 100% 증명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빛의 속도도 마찬 가지다. 만의 일이라도 어떤 것이 빛 보다 빠르다고 판정이 되면: 그것은 판정이 잘 못 되었거나, 상대성 이론이 ‘허구’일 수도 있다는 둘 중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프랑스의 과학자들이 6개월 이상 실험 끝에 어떤 ‘입자,neutrino‘가 빛 보다 60 ns(nano-second, 1/1000,000,000초) 빠른 것을 발견한 것이다. 대부분은 ‘우선’ 이 실험에 결함이 있다고 할 것이다. 실험자들은 최선을 다했다고 할 것이다. 누구를 믿을 것인가? 문제는 60ns이면 실험 오차치고는 상당한 오차인 것이고, 그들의 실험이 그렇게 허술했나 하는 것이다. 100여 년 동안 우리의 ‘삶의 철학’ 까지 바꾸어 놓았던 ‘상대성 이론’ 도 조금씩 무너지나.. 그 다음은 어떤 것이 나오려나.. 100년 마다 이렇게 큰 이론의 변화가 나오면 1000,000년 뒤에는 어떨까? 이래서 인간이다. 인간은 역시 신이 아닌 것이다.

 

이성복을 찾았다! 일년도 넘는 비교적 오래된 나의 blog <누가 이성복을 보았는가?> 라는 나의 외침에 대한 답이 온 것이다. 나는 다시 한번 Google’s indexing power의 위력을 실감한다. 비약적인 생각으로, 우리가 보는 우주 전체를 포함한 하느님의 성역 전부를 indexing할 날도 시간 문제가 아닐까? 어느 것이 이길까? 하느님, 아니면 Google’s Datacenter? 좌우지간.. 나의 ‘도박’은 일단 성공한 것이다. 이성복의 comment에 의하면, 성복이의 아우가 이 blog을 보게 되어서 나를 찾았다고 했다. 그리고 성복이가 만든 navor blog 을 보게 되었다. 나의 예상을 뒤엎고, 완전히 ‘국어학 박사’ 급의 글들로 가득.. 거기다 저서가 다섯 권씩이나.. 이게 어찌된 일인가? 제목을 보니: <한국어: 맛이 나는 쉬운 문장>, <논리적인 글의 요건>, <논문 맵시 내기>, <마침한 말 바른 표기>, <틀리기 쉬운 맞춤법> 등등.. 

이 녀석, 분명히 고대 농대에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한)국어학 박사가 되었단 말인가?이 녀석, 요새 흔치 않은 호까지 있다. “조탁(彫琢) 이성복”, 와~~ 근사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 ‘조탁’이란 호는 어떤 뜻인가? 새길 조에, 쫄 탁? 암만 생각해도 그림이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큰 문제인가? 이렇게 ‘살아 있는 이성복’을 ‘만나게’ 되었는데.. 현재 나의 의문, 어떻게 농대출신이 국어학박사, 저자가 되었나? 곧 의문은 풀릴 것이지만,그래도 궁금하다. 50년 동안 어떻게 살아왔을까? 왜 동창회 연락처에 이 친구가 빠져 있었을까? 이런 의문도 곧 풀릴 것이다.

 

천천히 바뀌는 천주교 영어미사

Holy Family's Fr. Stewart's guide to 'changing Mass'
Holy Family CC Fr. Stewart’s guide to ‘changing Mass’

8월의 마지막 일요일을 맞는다. 다른 쪽에서는 허리케인 아이린 으로 떠들썩 하지만 이곳은 거짓말처럼 파~란 하늘에 가을기분의 따가운 햇볕이 작열을 하는 한가한 느낌의 일요일.. 우리 집의 ‘숙명의 적’ pet duo 토우비(Tobey, dog)와 이지(Izzie, 고양이) 를 보아도 한가한 느낌을 받는 것이, 둘 다 완전히, 절대적으로 ‘평화롭게’ 낮잠에 떨어진 모습이 정말로 한가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나에게는 이런 한가한 순간들도 ‘좋아하는 시간’에 속한다.

오늘 일요일의 미국본당 미사에서는 올해의 대림절 (교회력 신년의 시작, 올해는 11월 27일)부터 부분적으로 바뀌게 되는 영어 미사의식에 대한 설명이 시작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미사의식이 바뀌는 것이 아니고 미사의식에서 하는 문구(text) 들이 바뀌는 것이다. 현재 영어 미사는 1975년부터 사용된 것이라고 하니까, 상당한 기간 신자들이 쓰던 것이라 이것이 조금이라도 바뀌게 되면 아무래도 처음에는 불편할 것이다. 문제는 “왜” 바꾸어야 하는가에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것은 바티칸 교황청에서 지시를 한 것이 아니고, 그 동안 쓰던 영어미사의 ‘결점’을 보완하려고 문구를 원래 ‘라틴어 미사의 정신’에 더 가깝게 번역을 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원래의 ‘영어번역’에 문제가 있다고 본 것이고, 그것을 늦었지만 바꾼 것이다. 나의 의문은 그러면 다른 언어, 예를 들면 한국어 미사는 어떻게 된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곳이 영어로부터 번역을 한 것이었다면 그쪽도 바꾸어야 할 것인데, 들은 바에 의하면 아마도 한국말 미사는 이미 바뀌었다고 들은 것 같다. 현재 이곳의 한국본당,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는 이미 바뀐 것을 쓰고 있을 듯한데, 현재 우리가 주일미사를 그곳으로 가지를 않아서 100% 확실치는 않다.

라틴어 미사는 1970년에(그 훨씬 전에 있었던 바티칸 2차 공의회(the Second Vatican Council, 1963)의 정신에 의해서) 바뀐 이후 한번도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놀라운 사실은, 1970년 이전에는 세계적으로 모두가 라틴어로 미사를 드렸다고 한다. 어떻게 그 어려운 라틴어로 미사를 보았는지 상상하기는 힘들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한국에서도 그때는 라틴어를 쓴 것이다. 영어와 라틴어는 그 근원이나 비슷하지만 한국과 같이 ‘전혀 다른 계통의 언어권’ 에서는 어떠했을까? 하지만 역시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현지 언어’가 원래 라틴어의 ‘정신’을 충실하게 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인데, 참 어려운 작업이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천천히, 재미있게’ 하려는 미국 천주교인들, 이것도 ‘응석을 부리면서’ 9월부터 조금씩 ‘연습’을 하면서 목표인 대림절까지 갈 모양이다. 9월 초부터 일주일에 ‘한가지 씩’ 을 ‘연습’해 보는 것이다. 자세히 보면 크게 바뀐 것도 아니던데 이렇게까지 하는 것을 보면 참 본 받을 만하다.

 

 

Changes in the People’s Parts    
PART OF MASS OLD TEXT NEW TEXT
Greeting  Priest: The Lord be with you.
People: And also with you.
Priest: The Lord be with you.
People: And with your spirit.
Penitential Act,Form A (Confiteor)   I confess to almighty God,and to you, my brothers and sisters, that I have sinned through my own fault in my thoughts and in my words, in what I have done, and in what I have failed to do;        
and I ask blessed Mary, ever virgin, all the angels and saints, and you, my brothers and sisters, to pray for me to the Lord our God.
I confess to almighty Godand to you, my brothers and sisters, that I have greatly sinned  
in my thoughts and in my words, in what I have done and in what I have failed to do,
through my fault,
through my fault,
through my most grievous fault; therefore I ask blessed Mary ever-Virgin,
all the Angels and Saints, and you, my brothers and sisters, to pray for me to the Lord our God.
Penitential Act,Form B Priest: Lord, we have sinned against you: Lord, have mercy.
People: Lord, have mercy.
Priest: Lord, show us your mercy and love. People: And grant us your salvation.
Priest: Have mercy on us, O Lord.
People: For we have sinned against you.
Priest: Show us, O Lord, your mercy.
People: And grant us your salvation.
Gloria  Glory to God in the highest,and peace to his people on earth.  
Lord God, heavenly King, almighty God and Father, we worship you, we give you thanks, we praise you for your glory.    
Lord Jesus Christ, only Son of the Father, Lord God, Lamb of God,  
you take away the sin of the world: have mercy on us;      
you are seated at the right hand of the Father: receive our prayer.  
For you alone are the Holy One, you alone are the Lord, you alone are the Most High, Jesus Christ, with the Holy Spirit, in the glory of God the Father. Amen.
Glory to God in the highest,and on earth peace to people of good will.  
We praise you, we bless you, we adore you, we glorify you, we give you thanks for your great glory, Lord God, heavenly King, O God, almighty Father.  
Lord Jesus Christ, Only Begotten Son, Lord God, Lamb of God, Son of the Father,
you take away the sins of the world, have mercy on us;
you take away the sins of the world, receive our prayer;  
you are seated at the right hand of the Father, have mercy on us.    
For you alone are the Holy One, you alone are the Lord, you alone are the Most High, Jesus Christ, with the Holy Spirit, in the glory of God the Father. Amen.
At the Gospel Deacon (or Priest): A reading from the holy Gospel according to N.People: Glory to you, Lord. Deacon (or Priest): A reading from the holy Gospel according to N.People: Glory to you, O Lord.
Nicene Creed  We believe in one God,the Father, the Almighty, maker of heaven and earth, of all that is seen and unseen.    
We believe in one Lord, Jesus Christ, the only Son of God, eternally begotten of the Father,    
God from God, Light from Light,
true God from true God, begotten, not made, one in Being with the Father.
Through him all things were made.
For us men and for our salvation he came down from heaven:
by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he was born of the Virgin Mary, and became man.
For our sake he was crucified under Pontius Pilate;
he suffered, died, and was buried.
On the third day he rose again in fulfillment of the Scriptures;
he ascended into heaven and is seated at the right hand of the Father. He will come again in glory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and his kingdom will have no end.    
We believe in the Holy Spirit, the Lord, the giver of life, who proceeds from the Father and the Son.
With the Father and the Son he is worshiped and glorified.
He has spoken through the Prophets.  
We believe in one holy catholic and apostolic Church.
We acknowledge one baptism for the forgiveness of sins.
We look for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and the life of the world to come. Amen.
I believe in one God,the Father almighty,
maker of heaven and earth, of all things visible and invisible.  
I believe in one Lord Jesus Christ, the Only Begotten Son of God,
born of the Father before all ages.  
God from God, Light from Light, true God from true God, begotten, not made,
consubstantial with the Father; through him all things were made.
For us men and for our salvation he came down from heaven, and by the Holy Spirit was incarnate of the Virgin Mary,
and became man. For our sake he was crucified under Pontius Pilate,
he suffered death and was buried, and rose again on the third day in accordance with the Scriptures.
He ascended into heaven and is seated at the right hand of the Father. He will come again in glory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and his kingdom will have no end.  
I believe in the Holy Spirit, the Lord, the giver of life, who proceeds from the Father and the Son,
who with the Father and the Son is adored and glorified,
who has spoken through the prophets.  
I believe in one, holy, catholic and apostolic Church.
I confess one baptism for the forgiveness of sins
and I look forward to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and the life of the world to come. Amen.
Apostles’ Creed I believe in God,the Father almighty, creator of heaven and earth.  
I believe in Jesus Christ, his only Son, our Lord.
He was conceived by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and born of the Virgin Mary.
He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ied, and was buried.
He descended to the dead. On the third day he rose again.  
He ascended into heaven, and is seated at the right hand of the Father.
He will come again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I believe in the Holy Spirit, the holy catholic Church,
the communion of saints, the forgiveness of sins,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and the life everlasting. Amen.
I believe in God, the Father almighty,
Creator of heaven and earth,  
and in Jesus Christ, his only Son, our Lord,
who was conceived by the Holy Spirit,
born of the Virgin Mary,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ied and was buried; he descended into hell;
on the third day he rose again from the dead;  
he ascended into heaven, and is seated at the right hand of God the Father almighty;
from there he will come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I believe in the Holy Spirit, the holy catholic Church,
the communion of saints, the forgiveness of sins,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and life everlasting. Amen.
Invitation to Prayer  May the Lord accept the sacrifice at your hands
for the praise and glory of his name, for our good,
and the good of all his Church.
May the Lord accept the sacrificeat your hands
for the praise and glory of his name,
for our good and the good of all his holy Church.
Preface Dialogue  Priest: The Lord be with you.
People: And also with you.
Priest: Lift up your hearts.
People: We lift them up to the Lord.
Priest: Let us give thanks to the Lord our God.
People: It is right to give him thanks and praise.
Priest: The Lord be with you.
People: And with your spirit.
Priest: Lift up your hearts.
People: We lift them up to the Lord.
Priest: Let us give thanks to the Lord our God.
People: It is right and just.
Sanctus  Holy, holy, holy Lord, God of power and might.
Heaven and earth are full of your glory.
Hosanna in the highest.
Blessed is he who comes in the name of the Lord.
Hosanna in the highest.
Holy, Holy, Holy Lord God of hosts.
Heaven and earth are full of your glory.
Hosanna in the highest.
Blessed is he who comes in the name of the Lord.
Hosanna in the highest.
Mystery of Faith(formerly the Memorial Acclamation)  Priest: Let us proclaimthe mystery of faith:  
People: A – Christ has died, Christ is risen, Christ will come again.    
or B – Dying you destroyed our death, rising you restored our life. Lord Jesus, come in glory.    
or C – When we eat this bread and drink this cup, we proclaim your death, Lord Jesus, until you come in glory.    
or D – Lord, by your cross and resurrection, you have set us free. You are the Savior of the World.
Priest: The mystery of faith.   
People: A – We proclaim your death, O Lord, and profess your Resurrection until you come again.  
or B – When we eat this Bread and drink this Cup, we proclaim your death, O Lord, until you come again.  
or C – Save us, Savior of the world, for by your Cross and Resurrection, you have set us free.
Sign of Peace Priest: The peace of the Lordbe with you always.
People: And also with you.
Priest: The peace of the Lordbe with you always.
People: And with your spirit.
Invitation to Communion  Priest: This is the Lamb of Godwho takes away the sins of the world. Happy are those who are called to his supper.
All: Lord, I am not worthy to receive you,   but only say the word and shall be healed.
Priest: Behold the Lamb of God,behold him who takes away the sins of the world. Blessed are those called to the supper of the Lamb.
All: Lord, I am not worthy that you should enter under my roof, but only say the word and my soul shall be healed.
Concluding Rites  Priest: The Lord be with you.
People: And also with you.
Priest: The Lord be with you.
People: And with your spirit.

 

WYD 2011, 레지오의 전산화

World Youth Day 2011 Madrid, Spain
World Youth Day 2011 Madrid, Spain

2011년 마드리드, 스페인에서 열린 세계청년대회 가 ‘무사히’ 막을 내렸다. 전야 미사 중의 날씨가 나빠져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 사고는 없었던 모양이다. 오늘 CatholicTV.com을 보니 드디어 어제 일요일의 “폐막 미사”의 비디오가 올라와 있었다. 이 행사를 며칠 유심히 보면서 나는 거의 내가 ‘가톨릭 청년’ 이 된 기분이 되어서 참 기분이 좋았다. 폐막미사의 광경은 참 ‘장엄’하면서도 100만의 젊음의 활기가 완전히 ‘공항’을 휩싸는 그런 것이었는데..이것은 실제로 그 현장에 있지 않으면 ‘절대로’ 전부를 느낄 수 없는 것들이다. 지난 6월 이곳 아틀란타에서 열린 연례 대교구 주최의 ‘성체대회’에 참가하면서 이런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다. 수만 명의 형제,자매 신자들과 같이 함께 모여서 미사를 본다는 사실은 글로 그 느낌을 다 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스페인, 마드리드 외곽에 있는 한 비행장 전체가 ‘완전히’ humanity로 채워진 모습은 비록 작은 화면으로 보더라도 실감이 되었다. 그 광활한 평지를 완전히 메웠던 백만 명의 ‘멋진’ 젊은이들.. 잘못 보면 무슨 rock concert에 온 젊은이들 같이도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분명히 그들은 다르다. 1960년대 말, 미국 Woodstock Rock Concert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그 광경이 겹치는 것을 느낀다. 완전히 drug, sex & rock music이 주제가 되었던 그 시절, 그 세대.. 사실은 나도 그것들을 보면서, ‘인간의 완전한 자유에 열광’을 하던 오래 전의 추억이 있다. 하지만 ‘다른 모습의 완전한 자유를 보여주는’ 이런 전혀 다른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역시, 이래서 항상 ‘희망’이란 것이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그 ‘멋진’ 젊은이들이 얻었던 며칠간의 체험은 그들, 그들 주변, 그가 속한 사회, 나라에 예측할 수 없는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사실, 의심하지 않는다. 작은 호기심 하나는, 어떻게 100만 여명에게 성체를 분배할까..하는 별로 의미 없는 것이다.

 

레지오 마리애의 전산화: 이것도 잘못 들으면 oxymoronic한 구절이 아닐까. 절대적인 성모마리아께 대한 순명의 정신으로 무장한 이 거룩한 평신도 단체는 언제까지 ‘낭비적인 시간’을 허용할 것인가? 로마군단의 효율적인 체제를 본 받으려면 현재에 가능한 온갖 ‘도구’를 다 써야 할 것이 아닐까? 여기서 ‘도구’란 물론 digital tool을 말한다. 물론 computer가 그것이다. 예전에는 computer하면 막연히 desktop system을 뜻했지만 지금은 아주 다양해졌다. 여기에는 물론 Internet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모든 것들이 ‘연결’이 되었고, 무서운 기세로 연결이 되어 가고 있으니까. 이제 이 ‘도구’는 누가 어떻게 먼저 자기 목적에 맞게 쓰는가가 관건이 되었다.

얼마 전에 나의 예상을 뒤엎고, 연숙이 본당소속 꾸리아의 부회장에 피선이 되고 말았다. 전부터 나는 레지오 평의회에서 봉사하는 것을 극구 말리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평화로운 시간’을 가지고 싶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해야 하는 ‘봉사적’인 직책이지만, 우리에게는 아직도 덜 바쁜 시간이 필요함을 잘 알기에 나는 반대를 한 것이다. 또한 직책의 ‘과정’도 중요하지만 ‘결과’도 중요함을 나날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어떤 직책의 ‘일’이란 것이 사실은 ‘타협, 양보, 조절’의 기술이 나머지 것들 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나이가 들어가면서’ 알게 되는 것이다. 헌신적으로 일을 할 자격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극구 말렸지만, 본인의 의사는 별로 반영이 되지 않게 피선이 되었으니.. 이제는 현실로 받아야 할 듯하다. 한마디로 나에게도 영향이 있다는 뜻이다. 나는 비록 평 단원이지만 부부로써 옆에서 가만히 보고 있을 수도 없지 않는가? 그래서 첫 번째로 연숙이 가지고 온 ‘일’ 중의 하나가, “레지오 멤버들의 관리” 에 제일 중요한 레지오 <행동단원 복무기록부> 를 정리하는 일이 되었다. 아주 두터운 3-ring binder에 꾸리아소속의 거의 모든 단원의 신상기록이 있는데, 물론 이것을 ‘전산화’ 하려는 것이고, 그것을 첫 과정이 data entry가 아닌가? 가장 쉬운 Excel-format으로 시작을 하는데, 역시 문제는 한글, 영어가 섞어야 하는 조금은 복잡한 데이터 들에 있고, 불완전한 record, 고유한 개개인의 아이디(id)등인데 이것은 아마도 본당의 교적부의 database를 참고로 하면 좋을 듯하다.

이것이 시작이지만, 그 이외에 예상할 수 있는 ‘과제’는 적지 않다. 제일 내가 눈독을 들이는 것은 모든 서류양식을 writable-pdf 화 하여 computer screen에서 직접 입력을 하게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런 것들이 역사 깊은 레지오에서 이미 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온통 인터넷을 뒤져 보았지만 심지어 Ireland(아일랜드)의 레지오 세계 총본부에서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format file을 download-print해서 손으로 쓰는 것이다. 그러니까 ‘종이’는 아직도 계속 써야 하는 실정인 것이다. 아직도 나는 이해를 할 수가 없다. 그렇게 digital gadget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고국의 레지오도 마찬가지로 이곳은 거의 아래아 한글(hwp format)로 된 것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이것이 현재의 레지오 단원 평균 연령층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활발한 레지오 연령대는 어느 곳에서나 시간이 조금은 여유가 있는 세대일 것이다. 그들은 거의 장년층일 것이고 아무래도 그들은 젊은 세대보다는 technology에는 덜 익숙하지 않을까? 꾸리아 레벨에서 산하 쁘레시디움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려면 ‘정보적인 도움’이 아주 중요할 것이다. 기계적인 일들은 모두 computer에 맡기고 그 시간에 더 생산적인, 창조적인 일을 하는 것이 더 유익하지 않을까?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이 cloud-model로 가는 마당에, 이것을 database application으로 바꾸고, 그것을 webify(web application으로 바꿈) 해서 모든 ‘단원, 임원’ 들이 “위치에 상관없이” 볼 수 있고, 쓸 수있게 하는 것이 제일 좋을 듯하다.

 

 

Catholic Sunday, etc..

WYD: Word Youth Day 2011, Madrid, Spain, 일요일 아침, 근처에 있는 ‘미국 본당(Holy Family CC)’ 주일미사를 가기 전에 잠깐 뉴스를 봤더니, WYD(World Youth Day: 세계청년대회, 스페인 마드리드)의 토요일 밤 vigil mass중에 찌는 듯이 더운 날씨가 돌변을 해서 천둥과 벼락, 폭우가 쏟아 졌다고.. 며칠 전에 미국 Indianapolis, Indiana에서 열린 커다란 야외 집회 중에 갑자기 몰아친 돌풍으로, 높이 세운 구조물(scaffoldings)이 쓰러져서 다수의 사망자 까지 나왔던 일이 생각이 났다. 미사 후에 집에 돌아와 자세히 읽어보니 다행히 큰 사고는 나지를 않았던 모양이다. 이것이야 말로 Thank God..이라고 해야 할까.

이 뉴스는 사실 ‘세속적’인 뉴스 채널을 통해서 보았다. 이런 곳에서는 어떻게 이번 행사를 보며, 느낄까 궁금하기도 해서다. 분명한 사실은 이것이다: ‘교황이 가는 곳은 이들 세속적인 뉴스 매체가 꼭 관심을 갖고 따라다닌다’ 라는 사실이다. 역시 바티칸은 ‘정치적’인 위치도 잃지 않고 있다. 그만큼 교황의 ‘말씀’은 아직도 ‘세계적’으로 영향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또한 알게 된 것은 ‘보수적인 추측’ 으로 예상했던 참가한 젊은이들의 숫자가 50만 명이었는데, 결과적으로 거의 100만 명이라는 사실이다. 암만 생각해도 이것은 대단한 숫자가 아닐까? 정말 정말 대단하다. 이들은 역시 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영향을 듬뿍 받은 젊은 세대인 것이고, 다시 한번 그분의 ‘선견지명’에 놀랄 뿐이다. 이 백만 여명의 젊은 ‘세대’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그 주변을 바꾸어 놓을 가능성을 생각하면 아직도 이 세상에는 ‘희망’이 있어 보인다. 다음의 이 대회는 2년 후인 2013년 Rio de Janeiro, Brazil에서 열린다고 발표가 되었다. 3년 후인 2014년에 열릴 예정이었지만 그 해에 그 곳에서는 4년 마다 열리는 세계인의 대 축제, World Cup Soccer가 열려서 부득이 일년을 앞 당긴 모양이다. 다시 ‘흑자, 호경기 재정’으로 돌아선 브라질은 이래 저래 좋은 소식만 가득하게 되었다… 부럽다.. 그들이..

 

 

맥시밀리안 콜베 성인
맥시밀리안 콜베 성인

성인: 맥시밀리안 콜베 (Maximilian Kolbe),  오늘 주일 미사는 대학의 catholic center(보통은 Newman Center:대학 내 가톨릭 공소, 라고 함)의 신부님께서 방문자의 자격으로 집전을 하셨다. 갑자기 ‘젊은’ 공기가 성전을 가득 찬 기분이었다. 우선 말씀의 ‘속도’가 엄청나게 젊었다. 그만큼 빨랐던 것이다. 다음 젊은 목소리, 그것도 에너지가 충만하고, 한 단어 단어가 뚜렷이 구별되는 확실한 영어.. 이것도 새로웠다. 아마도 모두들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우리 본당 주임신부님은 이맘때면 ‘휴가 차’ 그의 고향인 Dublin, Ireland에 가신다. 가셔서 ‘공개적’인 안부 엽서까지 주보에 실렸다.

오늘 방문 신부님은 맥시밀리안 콜베 성인의 축일이 지난 8월 14일이었음을 상기하고, 그 성인의 ‘유적지’를 찾아 본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그 유적지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2차 대전 당시 그’죽음 공장’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나치 집단수용소. 어찌 이 이름을 잊으랴. 나는 중학교 1학년 때 ‘멋도 모르고’ 그 당시 나왔던 기록 영화 ‘(히틀러의) 나의 투쟁‘ 을 보고 처음 그곳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어떻게 그런 영화가 ‘학생입장 대환영’ 이었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 역사, 교훈적일지는 몰라도 준비가 덜 된 ‘아이들’에게 그런 ‘시각적으로 끔찍한’ 것은 너무나 너무나 ‘충격적’인 것이다. 모든 것을 알게 된 이 나이에서 그것을 다시 보라고 해도 망설여질 정도인데.. 어떻게 어린 중학생들에게 그것을 보게 했을까? 공상영화였다고 해도 충격적인데 그것이 실제로 이 지구상에서 ‘얼마 전에 벌어진 전쟁 범죄’였다는 사실.. 그 당시에도 믿어지질 않았다. 그 희생자 중에 오늘의 주인공인 ‘신부’ 맥시밀리안 콜베 성인도 있었다.

아우슈비츠에 기차로 도착을 하면서, 그 옆 철길에는 아직도 집단 학살될 유대인 가족들이 도착하는 ‘짐짝 기차’가 그대로 ‘전시’ 되어 있음을 보고 생각하셨단다.. 화장실, 좌석, 아무것도 없는 화물열차로 도착하던 그 불쌍한 가족집단들.. 어린이들의 울음소리..그것도 역시 another Kafka moment 였을 것이다. 역사가 어떻게 비틀어지면 그런 상상을 초월하는 현실들이 일어났을까? 천 년 전의 ‘우매, 잔인한’ 몽골전쟁이 아닌 바로 70년 전의 ‘생생한,역사의 잉크도 채 마르지 않은’ 전쟁 중에..

맥시밀리안 성인의 이야기는 얼마 전 우연히 역시 연숙의 책 중에서 잠깐 본 것이었다. Boniface Hanley 저, Ten Christians이라는 책이었다. 이 10명의 그리스도 인들은 예수의 삶을 살려고 발버둥쳤고, 결국은 우리들에게 어떻게 현재를 살아야 하는지를 몸으로 보여준 그런 분들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분도 있고, 그 반대로 전혀 알려지지 못한 분들도 있지만, 공통적으로 우리 인생의 선생님’으로 사신 분들인 것이다. 그 중에 맥시밀리안 콜베 ‘성인’은 ‘현대적 순교’를 하심으로써 기독교 사랑의 극치를 가르치신 case다.

프란치스코회의 신부였던 그는 수용소에서 짐승 같이 날뛰던 SS들 (비밀경찰)에 의해서 약물로 죽임을 당했다. 그의 죄는 탈출한 동료들 대신 보복적으로 뽑혀서 죽게 될 사람 중의 한 사람을 살리고 대신 그 자리를 맡아서 ‘굶어 죽는 형벌’을 자청한 것이다. 대부분 일 주일 후에 굶어 죽었지만 그는 3주를 더 버티었는데 그것도 모자라 나치SS는 약물로 그를 죽인 것이다. 그 때문에 살아나게 된 운 좋은 ‘죄수’는 그의 남은 여생을 끝까지 살게 되었다. 나치즘과 공산주의를 끝까지 비판하며 천국으로 가신 이 성인은 정말 지금에도 거룩한 인생의 선생님이시다.

 

아틀란타 한국성당, 완전히 분가, 그 동안 아틀란타 한인 천주교 공동체의 숙원이었던 ‘또 하나의 다른 성전’의 꿈이 이제 완전히 이루어졌다. 이것은 그 동안 여러 차례의 노력 끝에 이번에 임기를 마치고 떠나신 안정호 이시도리 신부님의 ‘단행’으로 결말을 본 것이다. 시기적으로 좀 늦은 감도 없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늘어나는 천주교 신자, 예비자들을 적절히 수용할 기회를 놓쳤다는 평도 있었다. 기존의 한인타운의 한 중심에서 그 역할을 100% 수행했던 구 성전이 이제는 조금씩 불편하게 느껴졌던 차에 조금은 활짝 넓은 공간에 새로운 성전이 마련 된 것이다.

새 성전은 사실 제2의 한인타운이 되어가는 동북부 교외지역(Duluth, Suwanee)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그쪽으로 새로 유입하는 ‘은퇴세대’ (주로 뉴욕지역으로부터) 를 중심으로 ‘졸부 급’의 신흥 ‘벼락부자’들이 진을 치고 있어서, 경제적, 연령적으로 보아도 아주 안정된 여건을 갖추고 있다. 물론 그런 여건이 ‘신심적’으로 활발할 지는 확실치 않지만..

덕분에 기존 성전은 조금 여건이 나아질 것으로 짐작이 된다. 신자수가 그 만큼 (약 200~300명?) 정도 여유가 생기니까, service나 사목 활동에도 조금 기를 펴고 여유가 생길 것이다. 한가지 문제점은 여러 가지 신심단체들이 거의 ‘강제적’으로 분할이 되어야 하는 것인데 이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지혜를 가지고 해결을 할 문제이다. 내가 속한 레지오 도 2명 정도가 (그것도, 단장, 부단장) 그쪽 지역에 속해 있어서 조금은 염려가 되기도 한다.물론 주일 미사는 새 성전으로 가고 신심단체는 바꾸지 않아도 되긴 하겠지만, 그것은 장기적으로는 문제가 없지 않을 것이다.

 

세계청년대회, WYD 2011 Madrid, Spain

World Youth Day 2011 Madrid, Spain
World Youth Day 2011 Madrid, Spain

WYD: World Youth Day .. 이것이 한국어로 “세계 청년 대회” 라는 것을 오늘에야 알았다. 조금은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1984년에 시작된 이 세계적인 가톨릭 행사를 이제야 이제야 관심을 가지고 ‘보고 듣게’ 된 것이 나로써는 조금 늦은 감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라도 이렇게 관심이 가고 알게 된 것도 다행이라고 위안을 한다.

올해 이것에 관심을 가지고 ‘기다린’ 것은 사실 여러 가지의 원인이 함께 도움이 되었다. 이 행사가 시작된 것은 다름이 아닌 내가 제일 신앙적으로, 인간적으로 존경하는 전 교황,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이시다. 그는 어떻게 이런 행사를 생각을 하고 실행을 했을까? 희망은 역시 젊은이들에게 있다는 ‘절박한 진리’ 때문이었을까? 믿음 하나로 공산주의를 꺾고, 인류의 꺼지지 않는 희망의 등대였던 그.. 진정한 범 세계적인 세계인, 지도자.. 그가 남긴 유산 중에 가장 오래 갈 것은 바로 젊은이의 등대인 이 행사가 아니었을까? 희망은 역시, 역시, 젊은이들에게 있다는 것이 바로 진리이다.

지독한 피상적인 물질주의와 인기, 인본주의에 찌들은 요새의 유행문화를 어찌 그들, 젊은이들이 피해갈 것인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nano-second, 찰나의 기쁨을 추구하려는 그들에게 어떻게 누가 무엇이 장차 그들 앞에 다가올 현실일까를 가르쳐 줄 것인가? 허무.. 허무 뿐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이 행사의 전개되는 것을 보니 조금은 요새 보기 드문 희망이 보이기도 한다.

 세계적으로 오십만 명 이상이 온다는 것은 장난이 아니다. 정말 그들이 어떤 것을 느끼고 보고 갈 것은 크게 추측을 할 필요도 없다. 그들의 인생을 바꾸기도 할 것이다.그들이 어떻게 이 세상에 ‘이바지’ 할 지는 크게 의심할 필요도 없다. 잠깐 잠깐, 상상과 꿈의 나래를 피어본다. 내가 20대 초반의 옛날로 돌아가서, ‘반종교적’ 이던 나의 그때와는 달리, 가톨릭 신자로써 이곳에 참가를 한 그런 꿈이다. 수십만  명의 ‘동료’, ‘친구’, 젊은이들을 보며 그들과 그곳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서 존경하는 교황을 직접 듣고 본다는 꿈.. 그때 느낀 것들을 두고 두고 생각하며 나의 젊은 인생을 시작한다면.. 나의 인생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물론 어려운 위기도 많이 겪었겠지만.. 분명히 내가 가는 길에 대해서는 필요이상 방황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조금은 덜 외로웠을 것이고, 최소한 ‘인생의 (최후의) 목적’ 만은 알고 살았을 것이다. 나아가서 내가 추구했던 이상, 전문적인 일들, 가족들과의 관계도 조금은 덜 후회를 남게 하지 않았을까?

 이런 꿈에서 깨면 을씨년스러운 현실로 돌아온다. 나를 성당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려고 십 년이 넘도록 기도하며 도와 주었던 우리 식구들, 연숙과 두 딸들.. 그런 10년이 넘는 기다림 끝에 나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두 딸들이 떠났다. 이번에는 나와 연숙이 그들을 기다리며 기도를 하게 되었다. 이것이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왜 우리 두 딸들은 그렇게 ‘야멸차게’ 성당을 떠나야만 했을까. 그런 나이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를 하지만 이렇게 WYD같은 세계적인 행사를 보면서 참 안타까운 것이다. 왜 우리 두 딸들이 그 속에 있지 못한 것일까? 왜 그렇게 쉽게 세속문화,찰나 문화에 빠져야만 할까? 기다려 본다. 나 같이 남을 그렇게 오래 기다리게 한 case도 있지 않은가?

 이번 미국에서 가는 청년의 수는 무려 2만 여명으로 사상 최대이고 한국에서도 천 여명 이상이 참가한다. 내가 사는 이곳 아틀란타 대교구에서도 백여 명 이상이 참가를 한다고 이곳 가톨릭 신문에서 보았고 그 중에는 우리 한국본당,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여대생도 있었는데, 예쁜 얼굴의 Georgia State University 학생이라고 했다. 성당을 떠난 우리 두 딸만 보다가 이런 ‘다른’ 젊은이들을 보는 것이 요새는 나의 ‘낙’이 되었다. 거의 흡사 무슨 ‘젊은 성인들’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인 것이다. 지난 6월 달, 이곳 아틀란타 한국본당의 레지오 피정에서 그런 젊은 성인’들을 나는 room-mate로 직접 가까이 보기도 했다. 그들의 부모들은 우리와 다르게, 어떻게 ‘신앙교육’을 시켰던 것일까? 그들 부모들이 그 들에게 어떤 role-model로 비쳤기에 그렇게 ‘모범적’이었을까?

한국 주교회의 웹사이트에 따르면, ‘세계청년대회, WYD: World Youth Day‘는 다음과 같이 요약이 된다.

세계 각지에 있는 가톨릭 젊은이들이 2년 또는 3년에 한번 개최 교구(도시)에 모여 그리스도교의 가치를 확인하면서 함께 축제를 지내는 모임이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젊은이들을 격려하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 속에 살게 하고자 개최한 젊은이들의 축제이다. 1984년과 1985년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로마의 성 베드로 광장으로 세계의 젊은이들을 초대하였다. 그 뒤 1985년 12월 20일, WYD 협회를 구성, 1986년에 처음으로 공식 WYD가 열리게 되었고 1987년에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두 번째 WYD가 개최되었는데 이로써 2년 또는 3년 만에 개최하는 정기적인 국제 대회가 되었다.
세계 곳곳의 많은 나라에서 모여 온 젊은이들은 가톨릭교회의 가치인 보편성과 다양성을 확인하며 함께 어우러진다. 젊은이들은 그들의 신앙과 경험을 나누고, 자기들의 고국에 그리스도의 가치인 사랑과 평화를 전파할 수 있는 활기를 얻는다.
또한 서로 자기 나라의 문화를 소개하고 다른 문화를 이해하게 되는 기회를 자연스럽게 갖는다. WYD는 세계 도처에 평화와 상호 이해의 정신을 표현하는 대회이다. 젊은이들은 자기들의 나라와 지역의 깃발을 흔들 때, 깊은 공감을 맛보며 이 체험 속에서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한다.

 

 

한여름 ‘게으른 독서’의 즐거움

한 여름의 무더위가 한창이다. 고국은 아마도 이맘때 쯤이면 장마가 한창이지 않을까.. 하지만 전혀 감이 없다. 그저 수십 년 전의 서울의 모습을 회상을 하면서 떠 오른 이맘때면 아마도 매일 ‘구질구질’하게 내렸던 비, 그것이 장마가 아니었을까 하는 정도다. 이제는 해변가의 하~얀 모래 백사장을 본 것도 아주 오래되어간다. 그 찬란한 여름의 햇살아래 펼쳐진 푸른 파도와 하얀 백사장.. 그것이 여름의 맛일 것이다. 그곳에 못 갈 것도 없건만 다른 한편, 그렇게까지 가고 싶지도 않다. 한마디로 귀찮은 것이다. 이럴 때, 최고의 낙은 역시 게으르게 뒹굴며 읽는 책들이 아닐까?

이것은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summer reading이란 말 조차 있지 않던가? 오래 오래 전, 서울 용산구 남영동에 살던 중앙고 2학년 시절이 그랬다. 입시준비의 압력이 오기 전해 여름방학 때, 그야말로 시원한 마루바닥에서 누워서 읽던 책들.. 이것이 바로 ‘독서의 즐거움’의 진수일 것이다. 무언가에 쫓기지 않고 그야말로 ‘재미로서의 독서’, 그것이다. 그때 제일 재미있게 보았던 것은 그 흔하던 ‘삼국지‘였다. 그래서 이제는 아예 삼국지..하면 1964년 여름의 남영동 집 마루가 생각나는 것이다.

올해 나는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몇 권의 책을 준비하고 읽고 있는데, 현재까지 거의 2권을 읽었다. ‘피서의 효과’가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 옛날에 느꼈던 ‘게으름’은 조금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영어 판 Dan Brown의 <The Da Vinci Code>와 시오노 나나미(塩野七生)의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의 한역 본이 그것인데, 두 권 다 ‘재미’ 있기는 하였으나, 끝 맛은 개운치를 않았다.

우선 2003년에 나와서 “시끌벅쩍” 하게 화제를 뿌리고 그에 따라 돈을 ‘억수’로 벌었던 다빈치 코드.. 몇 년 후에는 영화까지 나왔던 그 책이다. 왜 시끄러웠냐 하는 것은 나도 안다. 문제는 그 당시에 나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아주 마음이 상한 것이다. 재미있는 소설을 쓰는 것은 좋은데, 그 것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을 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았을까?

거의 사실을 가장해서 쓴 ‘허구’ 이지만, 자칫하면 소설이라는 것을 잊을 수 있을 정도이다. 이것이 만약 이슬람교회를 주제로 했다면, 그들의 이제까지의 경험을 보아서 아마도 암살단이 곧바로 이 저자의 저택으로 쳐들어 갔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이 가톨릭을 이렇게 비하한 것은 기독교의 기본 사상인 ‘원수를 사랑하라’ 라는 사상을 역 이용했을 지도 모르겠다. 피해를 보았자 그저 흔한 ‘법정소송’ 정도였을 것이다. 이래서 나는 이 저자를 개인적으로 ‘증오’ 하기로 했다. 아무로 $$$가 좋기로 서니.. 이렇게 악랄할 수가 있을까?

시오노 나나미,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

70대의 일본인 여성 시오노 나나미(塩野七生)의 한역 본은 우선 번역이 아주 산뜻하게 잘 되어있어서 읽는데 쾌적하였다. 아마도 일본 글과 한글의 유사성이 번역이란 거창한 과정을 아주 쉽게 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글이라도 원저자의 ‘문필 체’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저자의 배경을 잘 알지 못한 상태에서 나는 우선 저자가 역사학자인줄로 잘 못 알았다. 그런 시각에서 보니 아주 부자연스러운 점이 너무도 많았다. 암만 ‘이야기 체’로 썼다고 하지만 ‘객관적’인 역사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저자의 정치,역사 철학이 많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야기 체로 그 긴 역사를 풀어 쓴 ‘솜씨’는 가상하지만 거의 맹목적일 정도로 ‘로마인을 찬양’ 하는 것은 조금 다시 저자의 의도를 생각하게 하였다. 역사와 문학을 거의 의도적으로 접목을 시키고 상업적인 흥미를 유발하는 듯한 냄새, 거기다 저자의 은근한 feminism까지 곁들여, ‘매력적인 로마의 남자’들을 부각시킨 것들을 보면서 참, 너무나 상업화된 출판계 현실도 거슬린다. 얼마나 많은 부분에서 저자는 ‘이 남자, 저 남자’를 거론했는가. 왜 그들이 남자임을 그렇게 밝혀야만 하는가? 그것은 심지어 번역자까지도 합세해서 ‘멋진 남자’들을 강조한다. 저자가 결론으로 내놓은 것에 나는 아연실색을 하게 되었는데.. 골자는 이것이다. 현재까지의 로마 역사가 기독교의 영향으로 필요이상으로 ‘악하게’ 그려졌다는 것이다. 이것도 역시 공산주의적 유물론적 탈 신앙적인 저자의 발상인 듯 싶다. 그것과 더불어 로마사의 대가들을 ‘비판, 의심’하는 것은 아무리 저자가 1970년부터 이탈리아에 살면서 로마를 느꼈다고 하지만 너무한 것이 아닐까.. 저자는 역사’과학’자가 아님을 자꾸 잊는 것이 아닐까?

 

육이오를 다시 생각하며..

육이오, 6.25, 한국전쟁, 조선전쟁, 해방전쟁, 육이오 동란, Korean War, Korean Conflicts, 심지어 박정희를 위시한 꽤 많은 사람들이 “융뇨” 라는 괴상한 발음으로도 불렸다. 이중에 조선전쟁은 아마도 일본 “아해” 들이 쓴 말이고, <해방전쟁>이란 말은 분명히 전쟁을 도발한 1급 전범, 김일성 빨갱이 개XX이 부른 이름이다. 우리는 자랄 때, 그저 <육이오 동란>이라고 불렀다. 그것이 언제 어느덧 61년이나 흘렀을까..

Murder Kim Il-sung with stupid cap
살인자, 민족반역자, 1급전범 김일성 개XX, 전쟁 중의 영양상태가 좋았는지 휴전 후, 병신XX 같은 모자를 쓰고 살이 더 찐 모습으로 ‘승전대회’에 나왔다.

육이오 동란에 대한 나의 어린, 가장 오래된 기억의 대부분이 1952년부터 1953년 7월 휴전 이후에 해당을 하고 그 때를 어떤 것들은 꿈같이, 어떤 것들은 사진같이 기억을 한다. 하지만 절대로 나는 ‘전쟁이나 전투의 공포’에 관한 것은 눈으로 본 적이 없었다. 이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어떨 때는 한번 쯤 보았었으면 하는 아쉬움 같은 것도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 조국의 엄청난 격동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제일 많은 피해자는 역시 전투를 해야 하는 군인들일 것이다. 죽거나 다치고 다친 군인들 중, 불구자가 된 사람들은 대부분 비참한 일생을 보내야 한다. 그들을 상이군인이라고 불렀다. 어렸을 적에 참 많이 보았다.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인 그들이 거의 거지처럼 구걸을 하는 것을 보았다. 국가는 그들까지 돌 볼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그 다음, 민간인들도 ‘곁다리’로 피해를 보게 마련이다. 특히 육이오 같은 사상전쟁은 민간인들의 피해가 다른 전쟁에 비해서 더 심하다. 사상전쟁은 사실 그 옛날의 종교전쟁과 비슷할 것이다. 무언가 믿고, 홀려서 싸우게 되니 얼마나 더 치열하고 처참할 것인가? 한마디로 증오로 똘똘 뭉친 전쟁인 것이다.

 

도대체 이 전쟁을 일으킨 사상이란 것이 무엇이길래 평화를 사랑하던 우리 같은 민족끼리 그렇게 저주와 증오로 서로 죽여야 했던가? 전쟁이 없이 해결 할 수 있었던 것일까? 역사는 분명히 말을 해 준다. 전쟁의 원인을.. 하지만 그렇게까지 서로 죽여야 했었을까 하는 것에는 역시 대답이 없다. 모든 전쟁이란 것이 정당성과 비정당성을 다 내포하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무력으로 짧은 시간에 자기의 체제로 바꾸려고 했다는 것은 한마디로 공산주의의 잔인성과 비인간성을 100% 적나라 하게 노출시킬 뿐이다.

50년 뒤에 그들의 체제와 이념은 거의 지구상에서 사라져가고 그들의 주장은 다 허구인 것도 들어났다. 하지만 우리가족과 수많은 동포를 유린했던 제일 범죄자 집단은 아직도 이북에 도사리며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고, 바보 같이 순진한 ‘남조선’의 일부 인사들은 허황된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고.. 참 이날만 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전쟁 발발 초에 납북되셔서 행방불명이 되신 당시 경기고교 영어선생님, 평창이씨 익평공파 27세, 이정모, 우리 아버지를 꿈속에 다시 그린다. 답답하셨던 어머니, 점쟁이를 통해서 아버지께서 끌려가시다 운명하신 것으로 들었다고, 그것이 전부다. 그 이후 나는 아버지 없는 후레자식이 되었고 그렇게 살아왔다.

고생에 찌들은 피난민들..이들은 지금?
고생에 찌들은 피난민들..이들은 지금?

어릴 때, 육이오 날이 다가오면 나는 사실 공포에 떨었다. 그때의 반공교육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고, 공산당이 다시 쳐들어 오는 가능성은 항상 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을 모르는 어린 우리들은 그저 공산당이 또 6월 25일 날 쳐들어 온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특히 6월 25일 저녁 때 쯤이 제일 무서웠는데, 그 이유는 그때 만약 저녁 노을이 ‘빨갛게’ 져서 서쪽 하늘이 빨갛게 물들면 그것이 바로 공산당의 포격으로 착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로 우리들은 순진했다. 설마 설마 하지만 그 때 제 2차의 육이오 전쟁의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무서운 꿈도 많이 꾸었다. 한번은 꿈속에 남산을 바라보니 그들의 대포가 일렬로 정열을 하고 우리를 향해서 포격 준비하는 것을 보기도 했다.

전쟁의 결말이 휴전으로 끝이 나면 역사적인 판정을 누가 내려줄 것인가? 왜 휴전으로 끝을 내어야 했을까? 이것은 암만 역사가들이 머리를 굴려도 명확한 해답을 구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거의 종교적인 눈으로 볼 수 밖에 없지 않을까? 나의 종교관의 변화로 이제는 한 단계 높여서 해석을 하고 싶다. 하느님의 한반도에 대한 원대한 계획이 있을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그것을 바꾸려고 해도 할 수 없을 것이고, 그것을 따르는 것이 ‘순리’가 아닐까.

 

 

 

레지오 피정에 다녀와서..

Simpsonwood Retreat Center
Simpsonwood Retreat Center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꾸리아 주최 연차 봉쇄피정이 지난 3일간 Norcross에 위치한 Simpsonwood Convention & Retreat Center에서 있었다. 나도 연숙과 같이 참가를 해서 오랜만에 집을 떠나보게 되었다. 비록 같은 지역에 있다고는 하지만 집을 떠나는 것은 먼 곳에 가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처음 가보는 피정센터는 정말로 큰 도시에 있는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주변의 경관이 아름다웠다. Chattahoochee river를 옆으로 끼고 광활한 숲 속에 위치한 이곳은 피정을 하기에 정말 좋은 곳이었다.

몇 달 전부터 예정이 되어 있던 것이기는 하지만 시간이 다가오면서 부담이 많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을 바꿀 그런 생각은 한번도 해 보지 않았다. 그 만큼 이번에 나의 마음가짐은 단단하였다. 어떠한 것들이 나를 기다릴까 하는 불안감만큼 어떤 것을 내가 얻고 갈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던 것이다.

갈 때는 우리 자비의 모후 쁘레시디움의 회계, 요안나 자매님이 같이 가자고 해서 그녀의 Lexus를 내가 운전을 해서 같이 갔다. 이번에 우리 쁘레시디움의 단원 전원이 참가를 하게 되어서 별로 외롭거나 하는 걱정은 전혀 없었다. 그 정도로 이번에 모든 여건이 좋았던 것이다. 이제는 이런 것들이 그저 우연이라고만은 생각하지 않는다. Norcoss,GA 에 있는 피정센터는 도시 속의 시골이라고 하기에 딱 맞는 그런 곳이었다. 식사는 전형적인 미국식 카페테리아 음식인데 재미있는 사실은 대부분 자매님들이 밥과 김치를 그리워 할 줄 알았는데 정 반대였다는 사실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저 집에서 밥을 안 해도 된다는 해방감에 그런 것은 크게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어서 조금은 이해가 간다.

처음 전부 모여서 일정에 대한 소개를 듣고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우리는 부부라서 단장께서 이런 사실을 상기시키기도 했는데.. 이유는 부부가 참가한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역시 우리 쁘레시디움 단원들이, 전원 참가한 것도 특이한 것으로 소개가 되었다. 다른 곳, 콜럼버스(Columbus, GA), 헌츠빌(Huntsville, AL) 등에서 온 열성적인 단원들도 소개 되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더운 날씨에 main conference room의 에어컨이 고장이 났는데, 이런 이상고온인 날씨에 이건 좀 문제였다. 신부님께서 그 미사복을 입고 계신데 얼마나 더우실까. 결국은 임시로 장소를 옮겨서 lobby area로 모두 후퇴를 해서 강의를 들었다. 이번 피정 기간은 ‘성령강림’ 주일과 겹치게 되어서 그것에 대한 강론으로 시작이 되었지만 사실 피정의 큰 주제는 (인간의) 죽음에 관한 것이었다.

첫날은 그렇게 저녁일정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관심사는 나의 room mate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었다. 3명이 한방을 쓰게 되었는데 물론 남녀가 같이 쓸 수가 없어서 우리 부부도 따로 방을 쓰게 되었다. 밤에 내가 자는 방에 roommate로 아주 젊은 두 사람이 들어왔다. 아주 건실해 보였는데, 한 사람은 본당 청년회장이어서 연숙과 주보관계로 전화로 알던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도 청년회에 관여된 사람이었고, 특히 Peter Park이란 청년은 Virginia Tech출신, computer engineer로 내가 사는 Marietta에 있는 Lockheed Co. (aerospace contractor)에서 일을 하고 있어서 참 반가웠다.

피정 교본과 일정
피정 교본과 일정

알고 보니 둘 다 나이 서른이 채 안 된 ‘모범적인’ 청년들이었는데, 사실 나는 속으로 많이(즐겁게) 놀랐다. 요새 세상에 이런 젊은이가 있었던가 할 정도였다. 그 나이에 종교와 신앙에서 떠나는 것이 무슨 ‘벼슬’인 양 행세하는 그 많은 젊은이 (우리 집 딸들이나, 나의 옛날과 같이)들이 비교가 되어서 심정이 착잡하였다. 우리집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런 것이다.

 

숙소는 거의 일류 hotel급 정도로 편했지만 역시 크리스천의 배경이 흐르는 곳이라 조금은 단정하고, TV가 없었다. 다음 날 아침 6시 30분에 피정의 일정이 시작되어서 정말 짧은 잠을 자고 강행군의 토요일 일정이 시작되었다. 레지오의 일상 기도와 더불어 레지오 쁘레또리움 단원들이 하는 ‘성무일도’가 곁들여 졌는데, 나는 생전 처음 해 보는 것들이라 상당히 힘들었지만 열심히 따라 했다. 조금 더 이것에 대한 orientation같은 것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도 있었다. 식사 전에 미사가 있었고, 식사 후에는 산책시간까지 주어졌다. 이 피정 센터에는 산책로(trail)가 울창한 숲 속에 있는데 아주 긴 편이었다. 연숙과 가벼운 마음으로 걷다가 시간이 너무 걸리고 길을 잃을 것 같아서 중간에서 돌아와야 했다 .

곧 이어서 점심식사 전까지는 ‘시범 주회’란 것이 열렸다. 그러니까 “모의(simulation)” 주 회합인 것이다. 추첨으로 뽑힌 자매님들이 (남자, 형제님들은 하나도 뽑히지 않았음) 공개적으로 주 회합을 하고 나중에 평을 듣는 것인데 나에게는 참 흥미로웠다. 다른 쁘레시디움 주회에 가서 주 회합 광경을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이것은 나와 비슷한 입장이었을 것이다. 꾸리아 간부가 아니면 남의 주회에 들어 갈 일이 없을 테니까. 그리고 이어서 ‘품평회’ 비슷한 질의응답시간이 있었는데, 대부분 조금은 ‘사소한’ 것들이었다. 너무나 지나치게 레지오의 세세한 법칙에 얽매이는 느낌이었다. 대부분 ‘상식’적인 해답이 제시되고 동의를 얻었다. 하지만 레지오는 거의 군대식이어서 이런 세세한 규칙들은 사실은 중요한 것들이다. 문제는 명문화 되지 않은 것 들을 어떻게 지혜롭게 주 회합에 적용하는가 하는 것이다.

점심 후에는 연차 아치에스 행사 때 하던 봉헌식을 다시 했다. 공개적으로 레지오의 상징인 벡실리움에 손을 얹고 짧은 선서를 읽는 것이다. 3월 달에 한번 해 본적이 있어서 이번에는 조금 나도 익숙하게 이것을 할 수 있었다. 이 시간에는 요한 바오로2세의 유언장이 낭독되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작성, 수정이 된 이 유언장은 하나의 작은 역사적 문서가 되었다. 교황즉위 후부터 암살기도, 소련(연방)의 붕괴에 이르는 역사가 이곳에 영성적인 조명을 받으며 기술이 되어서, 조금 길기는 하지만 지루하지는 않았다.

이날은 두 차례 안정호 신부님의 강의가 있었는데, 오후에 있던 첫 강의는 그 다음날 ‘성령강림‘을 염두에 두고 하신 것이고, 저녁 식사 후에 있었던 것은 이번 피정의 ‘대 주제’인 ‘죽음’에 관한 것으로 아주 심각한 것이었다. 이 강의는 곧 이어서 있을 ‘죽음의 연습’을 염두에 두고 하신 것이라 더 뜻이 깊었다. 중요한 것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 죽음을 생각하면 대부분의 것들은 상대적으로 사소한 것으로 보인다.
  • 죽음이란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 인간이 만든 죄에 의한 것이다.
  • 예수님과 같은 고통이 죽음의 단계에서 따를 수도 있지만 이것은 다음 단계로 가는 과정일 뿐이다.
  • 지상의 삶은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영원한 것을 향한다.
  • 죽음은 부활을 전제로 한다.
  •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죽음은 계속 성찰을 하면서 살아야 할 과제이다” 라고 선언했다.

 

이어서 열린 ‘죽음의 연습’은 이번 레지오 봉쇄피정의 절정(climax)에 속한다. 물리적이고, 시각적, 심리적으로 죽음을 경험하게 하는데 사실은 의외로 간단한 것이다. 관(棺) 속으로 직접 들어가 보는 것이다. 장례식에 있던 그런 장면이 자연스럽게 ‘연출’이 되는데 천주교 식의 ‘연도’라는 것이 행해지는 것이다. 이 절정에서 나는 실패를 하고 말았다. 거의 99.9%가 ‘주저 없이’ 관 속으로 들어갔는데.. 나는 못했다. 생각해 보니 못할 이유가 없었는데.. 그저 싫었을 뿐이다. 이것이 후회로 남게 되었다. 하기야 후회가 있어야 다음에 더 잘 할 명분도 생기니까.. 대부분 사람들 생각보다 마음이 평화스러웠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연숙도 들어갔고 우리 단원들 모두 들어갔다. 나만 못 들어갔다.

이상이 이번 피정의 제일 중요한 행사들이었다. 밤 늦게, 헤어지기가 아쉬운지 가벼운 여흥시간이 있었는데.. 꾸리아 단장, 부단장님들의 프로에 가까운 노래와 춤 솜씨에는 나는 죽어도 저렇게 못하겠다는 한숨만 나올 정도였다. 이래서 토요일 main event는 아침 6시 반에서 시작이 되어서 밤 11시까지의 기나긴 여정이었지만 사실 정신적으로는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마지막 날, 일요일의 일정은 신부님의 스케줄 변동의 관계로(공항에 도착하시는 새 본당 신부님 때문이었을까?), 완전히 바뀌어서 아침 6시 30분에 미사를 하게 되었고 곧 바로 강의로 이어져서, 조금은 피곤 했지만, 역시 이것도 신선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니 하나도 문제가 되지를 않았다. 마지막 강의는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로 시작이 되고, 성모님의 레지오에서의 위치로 귀결이 되었다. 성모님과 같이 노력을 하는 레지오의 성격을 잘 이해하게 해 주는 강의였다.

이렇게 해서 대단원의 막이 서서히 내렸고, 마지막 시간에 서로의 간단한 느낌, 소감을 나누었는데, 처음에는 역시 조용하더니.. 웬걸.. ‘마이크 스타일’의 형제,자매들이 줄줄이 나와서 솔직한 소감들을 나누어 주었다. 내년에는 나도 한번 저렇게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기도 했다. 좋은 것은 사실 나누어 주는 것이 더 좋다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나서 서로에게 작별의 인사를 악수나 hug으로 ‘모두가’ 나누었는데.. 이것도 무슨 인연이라고 가슴이 뭉클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해서 2박3일의 일정이 끝났는데.. 한마디로 ‘참, 좋았다‘.

 

레지오 피정에 들어가며..

이번 주말에는 아틀란타 본당 레지오 주최 연례 3일간 봉쇄피정이 있어서 연숙과 같이 들어간다. 둘이서 집을 같이 떠나는 것도 오랜만이지만 나에게는 생전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는 피정(retreat)이라서 아무래도 신경이 쓰임은 어쩔 수가 없다. 일년에도 몇 차례씩 이런 곳에 가는 사람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칠 노릇이겠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이름이 아주 거창하다. 봉쇄피정이라.. 한자로 읽으면 아마도 완전히 3일 동안 외부와 연락이 차단이 된다는 뜻일까? 아니면 세상만사를 다 잊으라는 뜻일까? 아직 누구에게도 물어본 적이 없다. 들은 이야기로 이런 곳에 가려면 정신적으로 신앙적으로 준비가 잘 안되어 있으면 가기 전에 꼭 무슨 유혹이 생긴다고 들었다. 나는 ‘치명적’인 유혹은 없었지만 비슷한 것은 벌써 경험을 하고 있어서 이런 말들이 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고 다 타당성이 있다고 믿게 된다.

나의 집을 ‘물리적’ 으로 떠나는 것이 거의 일년이 되어온다. 작년 여름 새로니가 살고 있던 Nashville, TN에 한번 놀러 갔던 것이 전부다. 비록 피정은 Atlanta Metro에서 열리지만 좌우지간 집을 떠나는 것은 사실이다. 이번 피정은 조금 있으면 주임신부에서 물러나시는 안정호 이시도리 신부님이 지도를 해 주신다고 한다. 비록 새 신부님이 곧 오시게 되어서 주임신부직은 물러나지만 아직도 우리들은 그 들이 우리의 ‘영원한’ 주임신부처럼 느껴진다. 그만큼 그분에게서 나 개인적으로 받은 은총이 많음을 느낀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웹싸이트를 보면 그곳 발행,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경향잡지가 1900년 초 부터 연도별로 거의 모두 수록이 되어있다. digital scanning을 한 것인데 원래 책의 상태가 안 좋은 것도 있어서 읽기 힘든 부분도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힘든 것은 특히 해방 전 것들인데 잘 보여도 읽기가 쉽지 않다. 지금의 ‘국어’에 비하면 거의 훈민정음 스타일의 ‘고어’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때는 사실 한글 맞춤법도 없었을 것이고 한자를 많이 쓰고 해서 더 그렇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이 고색창연한 천주교 월간잡지의 가치를 높여주고 있는 것이다.

살 찌는 약!
살 찌는 약!

내가 우선 관심이 갔던 때는 해방 후와 육이오 동란 전후, 그리고 1960년대이다. 내가 태어나기 전 것들은 그 당시의 역사를 천주교의 입장에서 본 것을 알게 되어서 그렇고, 육이오 이후는 내가 어렴풋이 기억이 나던 때를 다시 간접적으로 보게 되어서 관심이 간다. 1960년대는 조금 다르지만 약간 ‘근대화’한 한국의 사회상을 간접적으로 보여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다. 너무나 방대한 분량이라 우선은 주마간산 식으로 보았지만 시간이 나는 대로 조금은 정독을 하려는 희망도 있다.

우선 반가운 그림들을 몇 개 보았다. 광고인 것이다. 천주교 잡지에 광고가 있었다는 사실도 새롭지만 반세기 넘게 잊고 살던 ‘인기 있던’ 상품을 다시 보게 된 것이 더 반가웠다. 이것은 그 당시의 사회상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던 것이기도 하다. 우선 조금 웃음이 났던 것은 “살이 찌는 약”에 대한 것이다. 요새의 기준으로 보면 과연 얼마나 이해를 할까? 나도 살찌는 약에 대한 광고를 많이 보고 자랐다. 나도 갈비씨였지만 그 당시는 갈비씨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리고 독일회사 훽스트.. 거기서 나온 ‘고기 먹으면 필요했던’ 훼스탈.. 고기를 많이 못 먹었던 시절 그것을 소화할 효소가 제대로 안 나와서 그랬던 것일까? 기본적인 위생시설이 부족했던 그 때는 피부염, 종기가 참 많아서 그랬던지 ‘이명래 고약’은 정말 그때의 구세주 였다. 어찌 잊으랴?

 

시리즈, 내가 읽은 책: 박기원씨의 이진섭(3,끝)

이진섭씨와 일본

박기원씨는 조금 그렇다 치더라도 이진섭씨는 시대적으로 보아서는 완전히 일본식의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이다. 그만큼 그들이 속했던 문화는 조금은 생각해 보아야 할 만큼 복합적일 것이다. 우리들의 부모님 세대가 바로 그 세대여서 사실 우리도 조금은 친숙하다. 일본..하면 우선 정치적으로 ‘죽일 놈의 나라’에 속했지만 확실히 앞서간 근대문명을 악착같이 따라가던 그들을 보고 다르게 봐야 하는, 말하기 싫은 시각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 뒤의 우리세대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1971년 국제회의 참석차 이들 부부는 쉽지 않았던 해외여행을 하게 되고, 일본을 경유해서 귀국을 하게 된다. 그때 느낀 일본에 대한 복잡한 심정이 이렇게 그려진다.

나는 교오토(京都) 등을 관광하고 싶었지만 결국 하지 못했다. 도쿄 시내는 택시로 한 바퀴 돌아 보았고, 식사할 때만 호텔 근처에 나가 사먹었다. 그래도 긴자(銀座)니 록봉기(六本木)니 하는, 옛날 소녀 때 일본 소설에서 읽었던 귀에 익은 거리 이름을 보니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이나 나나 왠지 일본에 대해서는 마음 깊이 아직도 용서 못할 풀리지 않는 감정의 찌꺼기가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이는 공항에서도 절대로 일본 말을 안 쓰고 영어만 쓰는 고집을 부렸다. 우리는 일본에서 아무도 찾지 않고 만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무조건 느낌이 좋은 것을 나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나 보다. 아주 이성적인 감정이라고나 할까. 1968년 이력서에서 ‘요주의 인물’의 딱지가 떨어지고 첫 일본여행 당시 느낌이 대표적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퍽 자유로운 곳이야. 그리고 먼지가 없어. Y셔츠, 신발 닦을 필요가 없으니 잔손이 안 가 참 좋군. 언젠가 가까운 날 당신하고 같이 오고 싶은 곳이야.

위의 글은 1968년 당시니까, 그 당시 서울의 풍경과 비교해 보면 짐작이 간다. 완전히 공해에 찌들었던 서울하늘이 완전히 먼지 범벅이던 그런 시절, 손수건이 없으면 100m도 못 걷던 시절을 생각하면 이미 올림픽 4년 후였던 그곳과 비교가 될 듯하다.

 

샹송과 이진섭

나의 기억에 이진섭씨는 불란서 풍의 문화를 좋아한 듯 하다. 특히 샹송 풍의 노래에 조예가 깊었고, 한때 샹송가수 <이벳드 지로, Yvette Giraud>가 서울에서 공연을 했을 때 공연무대에서 사회를 보았고 그 기사를 어느 잡지에서 사진과 함께 본 기억도 난다. 그렇다면 이진섭씨는 영어, 일어는 물론이고 불어도 잘 했을까? 그렇다면 과연 그가 팔방미인, 박학다식 하다는 말이 맞는 것이다. 그 당시 어렵게 살던 때 어떻게 세계적인 가수 <이벳드 지로>가 서울에 왔을까.. 생각해보니 이것도 역시 일본 때문이었다. 이 샹송가수는 그 당시 일본에서 활약을 하며 일본어로 샹송을 취입하기도 했던 것이다. 아주 후에 영국가수 Cliff Richard가 왔을 때도 비슷한 경우다. 어떻게 그는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음악에 관심이 있었을까..아마도 좋던 싫던 간에 일본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그이는 음악가는 아니었지만 음악을 좋아했고, 음악에 조예가 깊었으며, 그리고 음악 속에 살다 갔다.

그이는 젊어서 KBS 아나운서를 하던 시절, 한국 최초로 ‘라틴 뮤직’과 ‘샹송’ 음악을 소개하고 해설해서 그 당시 많은 젊은 음악 팬들에게 인기가 대단했었다.

그 후에도 프랑스 샹송 가수 ‘이벳드 지로’가 한국에 와서 공연했을 때 그 사회를 맡아 보기도 했다.

그이는 평상시에 가끔 이런 말을 했다.

“나의 소원은 지휘자가 되는 것이었어. 그래서 형님께 일본에 있는 우에노(上野)음악학교를 가고 싶다고 했더니 정신 없는 소리를 한다고 한 마디로 거절 당했지. 어쨌든 나는 그때 지휘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 꿈이고 소원이었어”

그는 음악을 듣는 귀가 예민하고 정확했다. 음악회에 가서 오케스트라를 들을 때도 어느 파트의 어느 악기가 지금 어떻게 잘못 연주하는지 잡아낼 정도로 그이는 음감(音感)이 예민했다. 악전(樂典)도 혼자 공부했고, 서양 음악사도 독학으로 공부했다고 한다.

 

 

Yvette Giraud, 이벳트 지로

 

파리의 연인

유럽에서 만난 연인 부부, 1971
유럽에서 다시 만난 연인 부부, 1971

이진섭씨 부부는 어떻게 보면 정말 행복한 부부였을 것이다. 1971년 그 당시 부부동반 파리여행을 한 다는 것은 이미 평범한 부부의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니까. 지극히 낭만적인 이진섭씨는 거의 의도적으로 이런 영화 같은 ‘파리의 연인’의 모습을 연출한 것이다. 낭만인 이진섭씨가 세계적인 낭만의 도시에서 부인과 만나게 여행계획을 짰다는 것은 정말로 부러운 일이다. 이런 기회가 일생에서 한번 올까 말까 한다는 사실은 박기원씨가 느낌으로 알아차리고 100만원 짜리 적금을 이 “일생의 여행”에 투자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9월 27일, 1971년

파리 거리의 가운데를 세느 강이 흐르고 있다. 그 세느 강에는 20개 이상의 크고 작은 다리가 있다.

그 다리에서 파리를 바라보는 경치는 유별난 게 있었다. 세느 강변에는 탐스런 푸른 허리띠 같은 나무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北回歸線)>이라는 소설 속에 이 경치가 묘사돼 있는데, 이 소설에서 제일 아름다웠던 것이 생각 난다.

우리는 그 세느 강변을 걸었다. 강변에는 화상(畵商), 골동품 가게, 그리고 책 가게가 즐비하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여행자의 강변이기도 하다. 우리는 마치 젊은 연인들 같이 어깨를 감싸고 걸었다.

그이는 49세, 내가 42세! 우리는 좀 늙은 연인들인지도 모른다. 세느 강변의 산책은 아마 영원히 우리를 즐겁게 해주리라.

 

죽음과 재회

거의 영혼의 친구같이 살았던 두 분의 관계를 볼 때, 배우자의 타계는 아주 심각한 것이었을 것이다. 평범한 부부보다 더 고통을 느꼈을까? 일생 문필가로서 서서히 꺼져가는 남편 생명의 촛불을 보며 남긴 일기는 참 감동적이다. 그런 와중에서 글을 쓴 것은 보통사람 같았으면 힘들었을 것이다.

그이, 깊은 잠에 빠지는 혼수 상태 계속, 산소 호흡, 주사로만 지탱한다. … 가사상태.. 집에서 하던 몸부림도 없어졌다. 거친 숨소리뿐 – 무슨 꿈이라도 꾸고 있나? 그래도 그의 숨소리가 내 곁에 있고, 눈은 감았지만 살아 있는 몸체가 내 곁에 있는 실재감(實在感)!

….

저토록 잠잠할 수 있을까? 나에게 들려주었던 그 많은 다정했던 말소리. 나를 당황하고 슬프게 했던 그 많은 일들.. 그 모든 것은 모두 어디 두고 저토록 잠잠하단 말인가.

어쩐지 죽음과 같이 있을 이 시간이 점점 두려워진다. 나의 영혼과 육신이 같이 살던 30년. 그 세월이, 그 순간이 순간마다 단절돼 간다.

절대 절명인 이 순간… 도망갈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이 순간….

 

이 부부는 가까운 분의 감화로 자연스럽게 하느님을 믿게 되었다. 이진섭씨는 비록 열정적인, 모범적인 크리스천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분명히 하느님의 존재를 믿고 갔다. 그래서 남아있게 된 ‘연인’은 저 세상에서의 재회를 믿고 싶고 믿으면 살고 싶은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다 읽고 나서…

처음 읽기 시작 할 때, 이진섭씨가 못 채우시고 가셨던 환갑이 멀게만 느껴졌지만 이제 그것을 넘어서, 이렇게 조금 내 나름대로 정리를 해 보니 이 책의 느낌이 새롭다. 이것은 분명히 나의 나이 때문일 것이다. 많은 부분에 나와 감정이 일치하는 부분은 내가 마음속에 새기며 흉내를 내 보기도 하곤 했다. 그리고 반대로 ‘술’의 멋에 대한 나의 생각에 ‘경고’를 보내기도 했다. 멋도 중요하지만 정도껏.. 그러니까 ‘중용’, 알맞은 멋과 건강과의 균형을 생각하기도 했다. 이제는 박기원 여사도 많이 연로하셨으리라 짐작이 된다. 이렇게 솔직한 “일기의 진수”를 남겨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리고 행복하고 건강하신 노후를 하느님께 기도하고 싶다. 다시 한번 팔방미인, 다재다능 님의 명복을 빌며…

 

5월에 시작된 여름에..

¶  이곳의 여름이 올해는 정확히 한달 빨리 도착했다. 과히 반가운 소식이 아니다. 물론 암만 덥다고 해도 한여름의 그것과는 조금 느낌이 다르긴 하다. 늦봄 같은 여름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거의 2주일째 계속되는 ‘무더위’가 조금 신경질이 나려고 한다. 이러다가 계절이 주기가 바뀌는 것인가.. 아니면.. 무엇인가? 가급적 생각 안하고 보내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기록’ 정도는 남겨두기로 했다.

성녀 Faustina 이야기
자비는 나의 사명

¶  요새는 전문서적이 아니면 ‘쓰면서 읽기’를 시도하고 있다. 그러니까 눈으로 읽으면서 손으로 typing을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쓰면서 공부를 한다. 그러니까 ‘필사’인 셈이다. 제일 힘든 케이스다. typewriter나 computer이후에는 이것이 keyboarding으로 바꾸고 있다. 아마도 쓰는 것보다 훨씬 쉬울 것이다.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쓰는 것이 제일 기억에 남게 된다고 한다. 그것이 너무 힘드니까 keyboarding을 하는데 이것도 그냥 눈으로만 읽는 것 보다 훨씬 기억에 남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이 작업이 끝나면 아주 편리한 ‘복사본’ 이 남게 되는 것이다. 특히 이렇게 하는 것이 효과적인 때는, 아주 어려운 책, 그러니까 딩굴딩굴 편하게 읽기에는 조금 힘든 책들을 읽어야 할 때이다. 이렇게 하면 읽는 것이 쉽게 중단하게 되지 않는다.

지난 해 말 레지오에 들어오면서 레지오교본을 이런 식으로 다 읽었다. 읽은 후에는 soft copy가 남게 되었고 이것이 나의 blog site에 올라가서 쉽게 Internet으로 볼 수도 있게 되었다. 요새 읽는 책은 성녀 파우스티나(St. Faustina)의 <자비는 나의 사명> 이란 책이다. reading by typing을 시작한 것이 4월 말 경인데 이제 거의 끝나가고 있다. 처음 시작할 때 참 어렵고 지루하다고 느꼈는데, 시간이 갈 수록 익숙해지고 내용에 깊이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끝이 나면 이것도 나의 blog page에 올라가게 될 것이다.

¶  난생 처음으로 ‘피정'(retreat)이란 것을 가게 되었다. 이번 주말 2박3일간 본당 레지오 주관의 연례 ‘봉쇄피정‘이란 것인데 레지오 단원은 원칙적으로 다 가게 되어있는 것이다. 나는 이것은 말할 것도 없고 1982년 천주교 영세를 받은 이후 한번도 피정이란 것에 가본 적이 없어서 정말 처음인 것이다. 어떤 것인가는 대강 짐작이 가지만 아무래도 처음이라 신경이 많이 쓰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 나에게는 지긋한 나이와 계속 배워가는 레지오 신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 좋을 결과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다. 특히 우리 자비의 모후 단원 전원이 참가를 하게 되어서 정말 흐뭇한 느낌이고 인생,신앙선배님들이 뒤에 있다고 생각하니 힘이 나기도 한다.

우리 레지오, 아틀란타 본당 꾸리아의 자비의 모후 쁘레시디움에는 그 동안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장기유고로 자리를 비웠던 자매님이 반가운 소식으로 다시 돌아 오셨고, 새로 자매님이 들어오셔서 어제는 드디어 입단선서를 하셨다. 하지만 고참 단원 두 자매님이 자리를 비우셨는데, 한 분은 장기유고로 자리를 비우시고, 또 한 분은 완전히 퇴단을 하셨다. 이유는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우리들에게는 조금 충격적인 변화였다. 하지만 변화 없이 발전도 없다고 생각을 하며 위로를 한다. 순리적으로 새로운 ‘피’가 수혈이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하면 참 자연스럽다.

인촌 김성수

¶  우연히, 아주 우연히 오래 전부터 읽었던 책, <인촌 김성수>에서 모르던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의 모교 중앙학교의 창시자 정도만을 알고 있던 민족진영 정치인이라는 것 정도에서 이번에는 이분의 종교에 관한 것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전통적 양반 유교집안에서 자랐지만 임종 시에 천주교 신자이고 주미대사를 역임한 장면 씨의 권유로 천주교로 입교를 한 것이다. 이것은 참 반갑고도 뜻밖의 발견이었다. 바오로의 이름으로 그는 영세를 받고 하느님께 귀의한 것이다.

1955년 2월, 인촌(仁村, 김성수의 아호)은 오후 2시경 장면과 함께 온 가회동 성당의 박병윤(朴炳閏) 신부 앞에서 조상봉사(祖上奉祀)를 해도 좋다는 말을 듣고 영세를 받았다. 영세명은 <바오로>라 했다. 성부, 성자, 성신의 이름으로 원죄와 본죄와 그 벌을 사하는 영세의식을 마친 인촌의 얼굴은 평화스럽게 보였다. “마음이 편하고 고통이 없다. 천주께서 나를 보살펴 주시는 것 같다”

 

시리즈, 내가 읽은 책: 박기원씨의 이진섭(2)

턱걸이 제네레이션

박기원 씨는 사랑하는 남편 이진섭씨를 통해서 그 당시를 “살아 가야만” 했던 대한민국 남자들, 가장들의 한(恨) 같은 것을 몸으로 느꼈다. 평범하게 매일 매일을 생활하는 엄마, 주부로서만이 아니고 한 지식인, 문인으로서 남보다 더 깊이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남편의 입장을 비록 다 이해는 못하더라도, 더 이해하려 노력을 하며 살았을 것이다. 이진섭씨는 1922년 생이고 박기원씨는 1929년 생, 모두 왜정(주: 그때는 ‘일제강점기’라는 고급스러운 말을 이렇게 불렀다)때 태어나셨다. 특히 이진섭씨는 청년기까지를 모두 왜정에서 교육을 받은 셈이다. 일본식 교육과 충성을 강요 받고 잘못하면 ‘남의 나라’ 전쟁터로 끌려갔을 그런 ‘기가 막힌’ 시대를 사셨던 것이고 우리의 부모님 세대들도 거의 다 그랬을 것이다.

… 어쩐지 한국 남자의 한(恨)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뒤늦게 얻은 이해심도 아량도 아니다. 술을 마셔야만 살았을 것 같은 그 시대에 살았던 남자들!

그 안에서 제일 다치기 쉽고 멍들기 쉽고 상처 받았을 그이의 외로웠던 가슴을 뒤늦게나마 아내인 나는 조금씩 알 것만 같았다. …………

그이는 생전 이런 말을 가끔 했다.

“우리 시대는 턱걸이 제네레이션이야. 무언가 해 보려고 안간 힘을 썼다가는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

그것은 아마 불안정했던 한국의 역사와 격동기를 겪고 살아야만 했던 고뇌에 찬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이의 진정, 깊은 남자의 마음을 나는 그가 살았을 때보다 그가 간 지금 되새겨 보고 있다. 그러나 한편 그것은 진정 그의 아픔이었지 아내인 나에게도 나누어 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한 남자만의 고독이었다. (본문 97쪽)

그이는 살아 있는 동안 가끔 이런 말을 했다.

“어떤 좋지 않은 결과가 생겼을 때, 그것을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원인을 타인에게 미루는 것처럼 비겁한 것은 없다. 모든 결과는 먼저 자시에게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 세대만은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 원인을 시대에 밀어붙일 수밖에 없는 비극을 지니고 있다.

‘턱걸이 제네레이션’이라고 할까? 즉, 철봉 틀에 매달려 혼신의 힘을 다해 기어오르려 하면 철권으로 내리쳐 주저앉게 만든다. 한 번도 그 푸른 하늘을 못 보고 사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시대의 생각 있는 남자의 몰골은 마치 주문진 해변가에 널려 있는 오징어의 모습 같다. 축 늘어져 말라 가는 오징어들 그것일 것이다.” (본문 169쪽)

 

“최후의 낭만인 이 진섭”

1983년 3월 이진섭씨의 장례 시, 동창, “많이 통하며 많이 비슷하고, 멀리 있어도 가슴 한구석으로 걱정을 해주며 살던 친구” 한운사(韓雲史)씨의 비문(碑文)이 명필 송지영(宋志英)씨의 글로 세워졌다.

 

비문

무엇인가를 쓰고

예술을 논하고

노래를 짓고, 노래 부르고

인생의 멋과 맛을 찾아 다니며

소유의 노예가 되어 가는 것들에게

욕설을 퍼붓던 우리 세대

최후의 낭만인 이 진섭(李眞燮)이

그 뜻을 다 펴지 못하고

한 잔 술, 두 잔 술로 외로움을

달래다가 마침내 여기 영원히

잠들었다.

새야, 바람아, 교교한 달아

찬란한 태양아

이 사람과 더불어 놀아 주라.

1983년 3월 10일

 

이 글에서 “우리 세대 최후의 낭만인” 이란 말이 이채롭다. 영어로 하면 “last Romanist among our generation“정도나 될까. 이분의 일생을 알고 나면 이 표현은 정말 설득력이 있다. 또한, 멋과 맛을 찾아 다닌다고 했지만 그 정도와 걸 맞는 철저한 책임 있는 한 가장이기도 했다. 문제는 “한 잔 술, 두 잔 술로 외로움을 달래다가” 건강을 해친 사실이다. 나의 기억에 그 당시를 살았던 아버지 세대 중에는 이런 분들이 꽤 있었다. 지나친 자학과 불만을 거의 모두 ‘술’로 달래다가 일찍 운명을 하신 불쌍한 세대였다. 우리 세대도 이런 것들을 보고 자라서 그런지 많이 술 문화에 영향을 받긴 했어도, 그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100% 그런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다 이진섭씨는 아마도 최후의 “자유인” 이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 이진섭씨는 비록 말년에 세례 기독교 신자가 되었지만, 흔히 말하는 독실한 신자 처럼 같이는 보이지 않는다. 최소한 부인의 눈으로 보아서도 그런 것이다. 종교도 ‘자유’스럽게 받아들이고 싶었을까? 틀에 얽매는 것이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을까?

 

그이는 감히 남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자기만의 세계를 고집했고, 그 속에서 헤엄치듯 살았다.

술잔을 들면서 혼자 기도도 하고 묵상도 하고 그랬다. 나는 그런 그이 모습이 우스워,

“여보, 술잔 들고 기도하는 사람이 어디 있우? 그건 하나님에게 대한 모독 예요. 하나님을 접할 때는 몸도 마음도 정결하게 해서 경건한 마음으로 임해야죠”

그러면 그이는 너무도 당당하게

“모르는 소리. 술 안 먹은 맑은 정신 속에서도 음모, 살의, 도둑 심보 등 갖은 잡스런 생각을 지닌 채 기도하는 놈들도 있을 거야. 나는 술은 먹어도 마음만은 맑은 거울같이 깨끗해. 성경 말씀에도 있지. 착하고 순진한 어린애 같아야 하나님과 가까이 할 수 있다고 말야. 나는 술잔을 들고 있지만 그런 뜻에서 하나님은 나를 미워하실 수 없을 거야”

나는 이론이 정연한 그의 말에 말을 잃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이는 하나님을 믿는 것도 누구에게 구애 받거나 간섭 안 받고 자기 식대로 자기 마음대로 믿었다.

그러고 보니, 그이같이 모든 것을 철저하게 자기 마음대로 산 사람도 드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본문 110쪽)

 

위의 글을 보면 이진섭씨는 위선자 부류를 아주 싫어한 것 같다. 올바른 소리에 비해 행동이 다른 사람들, 이진섭씨도 올바르고 이론 정연한 이론을 펼쳤어도 행동이 그것과 그렇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고 나면 그의 ‘자유론’도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특히 율법에 얽매여서 ‘법의 기본 정신’을 모두 잃어버린 ‘바리사이파’ 같이 예수를 팔아 넘길만한 사람들이 ‘수두룩 닥상’인 이 세상을 살면서 어찌 이런 자유인의 행동을 마다할 수가 있을까?

 

시발택시 위의 해프닝

자유와 멋을 제대로 승화시킨 ‘사건’은 아마도 시발택시 위에서 샹송을 부른 일이었을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얼마나 이진섭씨가 술과 자유와 샹송을 사랑했는지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 해 겨울이었나 보다. 눈이 많이 쏟아지는 밤이었다. 낮에 나간 그이가 통행금지 시간(필자 주: 어린이 들, 그때는 midnight curfew란 것이 있었음)이 다가오는데도 들어오지 않았다. 애들을 재우고 온 정신이 문 밖에 쏠리고 있었다.

그때, 문 밖에서 다급히 울리는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나는 육감적으로 뛰어나갔다. 당시엔 시발택시가 한창인 때였다. 시발택시 지붕은 널찍하고 편편했다.

그이는 흰 눈이 덮인 시발택시 지붕 위에 누워서 늘어지게 샹송을 부르고 있었다.

눈 덮인 길은 달빛이 은색으로 빛나고, 이 진섭씨는 하늘을 향해 황홀경에 젖어 있었다.

“운전 20년에 저런 양반은 처음 예요. 아주머니 빨리 요금 주시고, 같이 끌어 내려요”

어린애 달래듯이 겨우 택시 지붕에서 끌어 내렸다.

그랬더니 이 진섭씨 왈,

“자네는 차만 끌 줄 알았지 이런 멋진 밤을 모르는 불쌍한 놈야. 자 요금”

그이는 호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지폐를 꺼내 한줌 집어 준다.

그 돈이 타고 온 요금의 몇 배가 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제서야 운전수는 갑작스런 횡재에 입이 벌어지며,

“아저씨 감사합니다. 어서 들어가 주무십시오”

하며, 깍듯이 정중한 인사를 하고 가버린다. (본문 159쪽)

 

국산차 1호, 시발 승용차
국산차 1호, 시발 승용차

물론 이때 이진섭씨는 한잔을 거나하게 걸친 취중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런 행동을 보면 이상하기 보다는 멋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누구라도 마음 속 깊이 이렇게 한번 ‘멋지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있을 것이니까.

 

여기 나오는 시발택시가 무엇인지 상상이 전혀 안 가는 “어린애”들이 많을 듯 하다. 이승만 정권 때 나온 ‘국산 차’의 이름이었다. 군용 Jeep을 완전히 승용차로 개조한 것이다. 그러니까 body(차체)만 군용drum통을 사용해서 우리 디자인으로 씌운 것이다. 대강 찝 차와 비슷하게 생겼다. 대부분의 택시들이 이차였다. 이것이 없어지기 시작한 것은 오일육 군사혁명 뒤부터 일제 차, “blue bird”가 들어오면서 부터 였다.

 

65세 만세론(萬歲論)

내가 이 책을 처음 읽게 된 때는 30대 중반이었다. 그 뒤로 계속 읽고 읽고 하다가 이 대목에 이르면 넘어가곤 했다. 아직도 나에게 멀었다는 막연한 생각과 죽음이나 수명 같은 화제는 가급적 피하고 싶었던 것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나이나, 세대가 바뀌면서 생각하며 읽게 되었다. 영어에도 여기의 화제와 비슷한 말이 하나 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 중의 하나.. “dirty old man” 이란 말이다. 이진섭씨도 이런 ‘어감’을 제일 싫어하지 않았을까?

 

그 이는 가끔 65세 만세론(萬歲論)이란 말을 했다. 즉, 65세까지만 살면 인생은 그만이라는 뜻이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그 이상은 ‘덤’으로 사는 거지, 그것은 사는 게 아니라 그저 생명의 연장일 뿐이라고도 했다. 그것은 곧 사실상 죽은 인생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이는 가까운 친구분이던 윤 현배 선생님과 몇 분이 서 항상 65세 만세론을 강조해 왔다. 그런데 그이는 그 소원이던 65세도 채우지 못하고 가 버렸다.

어떤 때 외출을 같이 나갔다가 길에서 나이 많은 노인이 조깅하는 것을 보고,

“늙은이는 늙은이다워야지, 저렇게 무리한 운동을 하면서까지 오래 살려고 안간 힘을 쓰는 것은 좋게 안 보이는군” 하던 말이 기억난다.

더구나 모든 면에서 노욕(老慾) 같이 추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늙어갈수록 저물어 가는 낙조(落照)를 보듯 담담해야 된다고도 말했다. 또 인간은 어머니 뱃속에서 누구나 두 주먹을 쥐고 나오지만 세상을 떠날 때는 누구나 두 손을 편안하게 펴고 죽은 것처럼, 그 동안 두 손 안에 담았던 천태만상(千態萬象)의 욕심을 미련 없이 버리고 가야만 된다고도 말했다.

그러니까 자식 덕을 보겠다는, 그러기 위해서 오래 살아야겠다는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러고 보면, 자기 몸 움직여 60 평생까지 살고, 그 이상 못 움직이게 되니까 ‘이만하면 너희끼리 살 수 있겠지’ 하고, 미련도 아쉬움도 없이 훨훨 가 버린 것 같다. 그것도 아주 몸 져 눕기 두 달에서 이틀 모자라는 날만 채우고…

어떻게 생각하면 매몰차고, 너무나 명확하게 자기 인생 몫을 살고 간 것 같다. (본문 311쪽)

 

이진섭씨 세대에선 분명히 60세, 즉 환갑이란 나이는 커다란 개인적 업적에 속했다. 평균수명을 생각해도 그렇지만 전통적인 유교질서에서 장유유서(長幼有序)의 개념을 생각해도 그렇다. 나이가 듦은 ‘무조건’ 가치가 있던 시절이었으니까. 요새는 사실상 완전히 거꾸로 되었다. 젊은 것이 ‘무조건’ 좋게 보이는 세상인 것이다. 강제로 늙어감을 늦추는 것.. 정도의 문제다. 지나치면 ‘노욕’이 되는 것이 아닐까? 자연스러운 것보다 더 추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나이가 자꾸 들어가는 연예인들을 보면서 어떨 때는 깜짝 놀랄 때도 있으니까.. 10년 전 보다 더 젊게 보인다면 이건 좀 이상하다. 그런 배경에서 나는 이 책을 오랫동안 읽으면서 가급적 자연스럽게 늙는 것을 바라게 되었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계속)

 

Were you there..

오늘은 이곳에서는 Good Friday, 그러니까 주님 수난 성금요일이다. 어제부터 시작된 예수님 부활절로 향하는 성3일 중 가장 절정을 이루는 날일 것이다. 가장 어두운 날이라고 할까.. 하지만 이날이 있기에 부활이 있고, 따라서 기독교가 있는 것이므로 그 어둡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한다. 어제는 예수님의 제자들과의 만찬이 주제를 이루고, 미사에서는 신부님들이 12명의 신자들의 발을 씻는 의식을 한다. 오늘은 모든 신자들이 십자가 경배 (주로 십자가에 손을 대거나 입을 맞추는)가 주요 의식이다.

이렇게 우리가 성3일 미사를 가게 된 것이 몇 년이나 되었을까.. 사실, 불과 몇 년밖에 안 된다. 예전에는 부활절 미사만 갔었다. 이것은 사실 큰 ‘발전’이다. 부활절을 이렇게 ‘준비’하는 것은 정말 많은 이 날에 많은 의미를 주는 것이니까. 특히 얼마 전에 시작된 레지오 활동으로 나에게 부활절의 의미는 더 커지게 되었다. 이제는 조금 더 예수님의 passion(수난)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고 할까.. 예전에는 사실 먼 옛날의 ‘사건’ 정도, 아니면 나와는 너무나 먼 ‘끔찍한’ 이야기 정도로 느끼고 살았다. 이제는 조금 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온 느낌이 든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꼭 부르는 성가 “Were you there( when they crucified my Lord)” 란 곡.. 오늘 밤, 십자가 경배 중에 기타에 맞추어 불리던 그 곡, 어쩌면 그렇게 예수의 수난을 잘 그려냈을까..

 

Were You T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