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다는 것..

죽음.. 죽음이란.. 사람의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 오늘 하루 종일, 생각의 주제는 죽음이었다. 사실은 근래(10여 년?)에 들어서 평소 때에도 죽음을 잊고 산 적은 거의 없었다. 그것이 특히 나이 60이 넘어서면서 더 잦아졌다.이것이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조금 흥미로운 것은, 죽음을 항상 생각하며 사는 것이 그렇지 않은 때보다 훨씬 덜 죽음에 대한 걱정을 하다는 사실이다.

오늘 나에게 특별히 하루 종일 죽음을 생각하게 만든 이유는 갑자기 계획에도 없이 참석하게 된 장례미사 때문이었다. 오늘의 장례미사는 정 요한씨를 위해서 바쳐졌는데, 이분은 지난 주 내내 우리 레지오 단원들이 ‘선종기도’를 바치던 그 분이었다. 이 분이 어제 선종을 하셔서, 어제 저녁 곧바로 연도가 바쳐졌고 오늘 오전에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안정호 신부님의 집전으로 장례미사를 드리게 된 것이다.

몇 개월 전, 레지오(마리애)에 들어오면서 내가 달라진 것 중에 제일 큰 것이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시는 사람들에 대한 나의 태도였다. 전에는 가급적 장례식 같은 것을 모른 척하려 했고, 피했고, 잊고자 했었다. 그것이 지금과 같이 비교적 ‘고립된’ 삶이 가능한 이곳 미국에서의 생활에서는 크게 힘들지 않다. 고국에서 살았으면 그렇게 살다가는 아마도 사람취급도 못 받을 듯하다. 이제는 아니다. 적극적으로 ‘망자의 행사’에 빠지지 않으려 노력을 한다. 그만큼 예전과 같이 무섭지 않은 것이다.

특히 가톨릭적인 ‘연도’는 나를 아주 평화스럽게 만든다. 레지오 회합 참석 후에 자주 연도가 있는데, 처음에는 그렇게 생소하던 것이 이제는 아주 익숙해져서, 조금 더 고인에 대해 생각을 할 여유도 생기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장례식에서 가끔 하는 viewing(시신을 직접 보는 것)같은 것은 너무나 visual해서 더 신경을 쓰게 된다.

오늘 장례미사는 비교적 조문객이 많지는 않았다. 사실 오늘 우리가 그곳에 가게 된 큰 이유중의 하나가, 미리 조문객이 많지 않으리라는 귀 띰 때문이었다. 조금 이해가 가는 것은 이 고인의 가족이 현재 아무런 신앙적인 곳에 소속이 되어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민사회에서 신앙단체의 제일 큰 역할중의 하나가, 그들에게 교민간의 친교나 사회생활의 촉매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 나머지는 동창회나 사업에 관련된 단체들 밖에는 없다.

장례미사 안내문을 보고 이분이 1948년생이라는 것을 알고 반가웠다. 그래서 더 친근감이 들었는지 모른다. 우리 동갑이 먼저 나보다 저 세상으로 간다는 생각을 하니 참 심정이 착잡하였다. 63세라면 지금 세상에서는 ‘젊다고’도 말할 정도다. 신부님도 그 점을 상기시키셨다. 하지만 언제 죽는다는 것을 어느 누가 알랴? 우리도 모르게 하느님이 주신 생명을 하느님께 돌려 드린다는 신앙의 신비를 인정하면 조금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을까?

장지까지 가게 될 줄도 몰랐지만, 무언가에 끌려서 그곳까지 갔다. 그런데 가기를 참 잘한 것 같다. 유족들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그들은 한 사람이라도 더 위로를 해주기를 바랄 것이다. 그래서 모든 행사가 끝난 후에 점심을 같이 하는 곳까지 가게 되었다. Buford Hwy의 한인타운의 중심에 있는 ‘한일관’에서 모였는데.. 이곳에서 조그만 해프닝이 벌어졌다. 식당엘 들어가려는데 아주 오랜만에 중앙고 새카만 후배 ‘선우인호’가 보여서 이 친구도 우리 장례에 관련되어 왔으리라 생각하고 무심코 그들 일행과 합석을 하게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은 선우인호 후배가 속한 개신교회의 다른 장례식의 뒤풀이를 하려고 모인 것이었다. 잘못했으면 다른 고인을 위한 자리에서 식사를 할 뻔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뜻하지 않게 거의 하루 반나절을 동갑내기 고인과 그 가족들을 위해서 보내고 나니 참 기분이 가벼웠다. 나도 이렇게 슬픔을 같이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생각하니 나 자신이 조금 대견스럽게 느껴지기도 한 것이다. 가톨릭 신앙적으로도 고인은 많은 기도를 필요로 한다. 그들이 저 세상에서 더 편히 쉬기를 바라는 까닭이다. 비록 고인은 선종 얼마 전에 가톨릭으로 입교를 했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남아있는 사랑하는 가족에게 ‘하느님을 알게’하는 커다란 선물이 될지 누가 알랴?

 

매디슨의 추억 (1), 1988~89

매디슨의 첫 아파트에서, 1988년 가을
매디슨의 첫 아파트에서, 1988년 가을

Madison, Wisconsin.. 매디슨 위스컨신. 위스컨신주의 수도, 위스컨신대학교 매디슨 캠퍼스가 있는 곳. 거의 찰나의 시간처럼 느껴지고 심지어는 전설적으로도 느껴지는 위스컨신 주의 수도에 우리식구는 1988년과 1989년 사이에 1년이 채 안 되게 살았다. 전에 살았던 오하이오 주의 콜럼버스에 비해서 워낙 짧은 기간 살았던 이유인지 그곳이 지금 무섭게도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다. 이런 추세로 나가면 거의 다 잊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나는 조금씩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우리가 매디슨으로 이사를 간 직접적인 이유는 나의 새 직장 때문이었다. 그 당시 콜럼버스의 나의 회사, Toledo Scales Co. (주로 weighing scale을 만들던 곳)에서 나는 layoff가 되어서 열심히 새 직장을 찾고 있었고 이곳 저곳으로 job interview를 하며 . 나는 그때 새로운 직장으로 두 곳을 두고 고민을 하고 있었다. 하나는 Oklahoma City에 있는 hard disk maker SEAGATE였고, 다른 곳이 Madison에 있던 Nicolet Instruments였다. 그러니까 두 군데서 job offer를 받은 것이다.

Oklahoma City는 예전에 가본 적이 있는 조금 익숙한 곳이고 기후도 훨씬 따뜻한 곳이고 Madison은 정 반대로 아주 추운 곳이었고, 오래 전 Chicago에 있을 때 한번 가본 적이 있었다. 주위의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어보면 99%는 모두 다 Madison으로 갈 것을 권했다. 왜 그러냐고 하면 확실한 이유가 없었다. 그저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는 것 뿐이었다. SEAGATE는 99% computer hardware company라서 어떤 것인지 확실히 알 수가 있었지만 MadisonNicolet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내가 갈 곳은 생긴지 얼마 되지 않는 audio diagnostic division이었다. 쉽게 말하면 최첨단 보청기를 만드는 곳이었다.

매디슨 위스컨신 주립대 중앙고 동창 후배들과, 1988년 가을
매디슨 위스컨신 주립대 중앙고 동창 후배들과, 1988년 가을, 뒷줄 왼쪽의 전기석 후배는 곧 그곳을 떠났다

결국은 Madison으로 가기로 정했는데 제일 중요한 이유는 새로운 것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Nicolet Instrument는 원래는 digital storage oscilloscope를 만드는 회사인데 이 audio diagnostic쪽은 biomedical분야라서 그 회사로써도 조금 모험을 하는 셈이었다. 이 회사는 위치가 바로 위스컨신대학 매디슨 캠퍼스의 바로 옆에 있어서 그쪽 연구단체들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다. 이 새로운audio diagnostic venture도 이곳 의과대학 교수들이 모여서 만든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것이 조금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직업의 안정보다는 나이가 더 들기 전에 조금 더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것에 더 마음이 끌린 것이다.

결혼 후 그것도 조그만 아이 둘을 데리고 가족이 이사를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때의 나이가 40정도였으니 사실 힘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기분에 처음으로 미국에서 ‘혼자가’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미지의 서부를 개척하는 조금은 불안한 심정이었다. 그때 조금이나마 나를 위로하는 것이 있었다면 조금은 불이 붙었던 나의 가톨릭 신앙심과, 모교의 동창들이었다. 한마디로 처음 가는 매디슨이지만 그곳에 한인천주교 공동체가 있으리라는 희망과, 혹시 큰 학교가 있으니까 중앙이나 연세대 동문들도 있을 것 같았다.

나의 추측은 맞았다. 둘 다 있었다. 지금 같았으면 Internet으로 googling을 10분만 하면 다 찾을 수 있을 정보들.. 그 당시는 물론 다 수소문을 해서 찾아야 했다. 그래서 둘 다 연락처를 찾았다. 먼저 중앙고 동창회를 찾으니 65회 전기석 후배의 이름이 나왔다. 물론 유학생이었다. 역시 동창은 좋은 것인가.. 그를 통해서 그곳의 여러 가지의 정보를 다 얻을 수 있었다. 중앙고 후배들이 몇 명 있다고 했다. 그리고 한인 천주교회 공동체도 역시 유학생이었던 유왕식 씨를 통해서 연락이 되었다. 그곳 공동체는 대부분 학생이 주축이 되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특이한 사실은 매디슨에 있던 세계신용조합(Credit Union)의 총본부에서 일을 하시던 강정열 박사님께서 그곳 한인 천주교 공동체의 정신적인 지주로 계시다는 사실이다. 그곳은 밀워키(Milwaukee, WI) 본당의 공소였는데 본당의 김정웅 주임신부께서 정기적으로 오셔서 학생신자를 중심으로 목회를 하고 계셨다.

이렇게 해서 사실 그곳으로 이사를 가서도 우리가족은 큰 어려움 없이 정착을 할 수 있었다. 이런 한국인들의 끈끈한 학교와 신앙의 ‘인연’들은 지금 생각해도 자랑할만한 것이었다. 그런 것들이 없었으면 참 힘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선 나는 마음 놓고 먼저 새로운 직장에 적응하는 것에 온 신경을 쓸 수가 있었다.

매디슨은 크고 작은 호수가 많았다. 아파트 근처의 호수를 보는 새로니와 나라니
매디슨은 크고 작은 호수가 많았다. 아파트 근처의 호수를 보는 새로니와 나라니, 새로니는 아직도 그 곳을 기억한다.

매디슨은 여러모로 내가 살던 콜럼버스와 비슷했지만 도시의 규모는 콜럼버스보다는 작았다. 둘 다 주의 수도였고, Big Ten 계열의 큼직한 주립대학이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것.. 비교적 깨끗하고 교육도시였던 점, 아주 유명한 기업이 없었다는 것도 비슷했다. 심지어는 Mid West의 냄새까지, 날씨까지 비슷했다. 차이는 매디슨은 콜럼버스보다 훨씬 혹독하게 추운 곳이라는 것과 매디슨이 훨씬 더 정치적, 사회적으로 liberal, progressive한 색갈이 있었다. 쉽게 말하면 매디슨은 콜럼버스 보다 훨씬 ‘좌익’적인 곳이다. 농담으로 옛날 소련수상 후르시쵸프가 그곳에 왔다가 “소련보다 더한 빨갱이” 라서 울고 갔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매디슨 시내에서는 불법마약이 허용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겠지만 그 정도로 진보적인 곳이라는 뜻일 것이다.

이곳으로 이사를 가는 것은 시간이 좀 걸렸다. 간단히 말하면 내가 혼자서 먼저 ‘기러기 아빠’노릇을 몇 주간 한 셈이다. 나 혼자 먼저 와서 아파트에서 혼자 살면서 출근을 하였다. 지리적으로 매디슨은 콜럼버스보다 아주 작았다. 중심부에는 웬만한 작은 마을 크기의 호수가 몇 개나 있었다. 큰 도로로는 동서로 달리는 간선도로 (Beltline Highway) 하나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Interstate Highway가 이 도시에는 없는 것이다. 지형은 조금 낮은 언덕이 조금 있을 뿐 그런대로 평지에 가까웠지만 도로는 그렇지 않았다. 바둑판형의 규칙적인 도로에 익숙한 나에게 이곳은 서울의 구불거리는 도로가 연상이 되었다. 주소만 가지고 위치를 찾는 것이 더 힘든 것이다. 특히 밤에 주소만 가지고 집을 찾는 것은 조금 모험에 가까울 정도였다.

아파트 근처의 호수가에서 새로니, 나라니와 함께..
아파트 근처의 호수가에서 새로니, 나라니와 함께..

약 보름간 혼자 살다가 다시 콜럼버스로 돌아와 대형 트럭으로 짐을 다 부쳤다. 그리고 완전히 온 가족이 다 매디슨으로 이사를 했다. 그때가 1988년 8월 하순 경이었다. 나는 혼자 살던 보름 동안에 이미 중앙동창 후배들과 만나서 저녁을 했었다. 특히 65회 후배 전기석의 도움을 받았고, 후배 강태중은 University of Wisconsin의 campus를 친절하게 안내를 해 주기도 했다. 곧바로 우리는 매디슨의 한인천주교 공동체에서 미사를 드릴 수도 있었다. 교민이 거의 없고 거의 다 유학생인 관계로 따로 교회가 없었고 위스컨신대학 내에 있는 Newman Center에서 미사를 드리는 형편이었다. 신부님은 근처에 있는 밀워키 한인천주교회의 예수회 김정웅 신부님이셨는데 그 분은 밀워키에 있는 위스컨신대학에서 Computer Science를 공부하시는 분이었다. 신부님이 어떻게 그런 공부를 하시는지는 아직도 이유를 모른다. 신학과 과학을 같이 한다는 것이 그때는 조금 이해가 잘 되지를 않았다.

그 해 가을에는 서울올림픽이 열려서 그것을 보며 향수를 달래기도 했다. 열심히 TV 녹화도 하곤 했다. 가을은 짧았고 곧 겨울이 왔다. 완전히 모든 것이 얼어붙는 시베리아를 연상시키는 그런 겨울이었다. 모든 것들이 실내로 활동이 옮겨지는데 이곳은 아주 모든 것들이 철저히 월동 준비가 되어 있었다. 특이한 것이 위스컨신대학 캠퍼스에 있는 실내 테니스 코트였다. 얼마나 그 시설이 거대한 지 모른다. 겨울이 워낙 춥고 길다 보니까 이 정도의 시설 투자는 이해가 갔다. 그곳에서 중앙 후배들과 주말이면 그 추운 겨울에 테니스를 치곤 했다.

그 당시 우리부부는 아주 신앙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을 하던 때였다. 그래서 그곳에 가자마자 교회공동체에 적극 참여를 했고, 그 결과 정기적인 성경공부에도 나가게 되었다. 이곳도 역시 유학생중심의 모임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유일한 비유학생은 나와 강정열 박사님 댁 식구가 전부였으니까. (계속)

 

Catholic Sunday

Advent 2010 (2010년 대림절)…  오늘은 천주교 달력으로 새해가 되고 예수님 탄생인 12월 25일 성탄절까지의 대림절이 시작되는 첫 날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시기인 것이다. 개신교회에도 이러한 시기에 대한 이름이 따로 있는지 궁금하다. 기억에 들어본 적이 없다.예수님 활동 당시 12 사도들의 시대로부터 계속 이어져온 이 Roman Catholic, 천주교의 다양하고 복잡한 역사, 전통들은 알면 알수록 , 더 알고 싶은 것 투성이다. 이날부터 제대 옆에는 대림을 상징하는 4개의 촛불이 세워지고 한 주일마다 초가 하나씩 켜진다. 이것도 천주교의 특징인 ‘상징’적인 의식일 것이다.

2010 대림절 시작, 본당 주보에서
2010 대림절 시작, 본당 주보에서

우리는 주일미사를 집 근처에 있는 미국인 본당, Holy Family Catholic Church에서 본다. 이곳도 거의 10년 넘게 다녀서 정이 들었다. 아침 8시 반의 미사에 가면 거의 앉는 자리가 정해질 정도로 익숙한 신자들이 많다. 혹시나 낯익은 얼굴이 안 보이면 신경이 쓰인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제는 사실 주임신부님 보다는 부제님 중에 있다. Deacon John이라고 불리는 부제님, full name은 Deacon John Duffield인데 건장한 체구에 단정한 흰머리, 항상 진실된 웃음을 띈, 순진하게도 보이는 얼굴, 그 보다 제일 인상적인 것은 그 ‘경건’한 태도이다. 주임신부님보다 더 경건하게 미사를 돕는다. 이분이 부제가 된 것도 5년 정도 되어간다. 나이도 나와 같고 직업은 사실 nuclear engineer, U.S. navy officer로 nuclear submarine (핵 잠수함)이 전공이다. 그가 이렇게 공학도라는 사실이 나를 참 기쁘게 한다. 가끔 하는 설교도 어찌나 그렇게 틀에 박히지 않았는지.. 진실로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그분의 모든 말과 행동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것들.. 흔치 않은 일이다. 사실 속으로 나도 여생을 그분과 같이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내일은 이 미국본당에서 penance service(판공성사)가 있는 날이다. 해가 가기 전에 이렇게 한번 하고 부활절 전에 또 있다. 쉽게 말해서 천주교 특유의 ‘고백(고해)성사’인 것이다. 이것의 중요성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지만 그만큼 이 성사를 지키는 것 또한 쉽지 않다. 이것을 하려면 정말 심각하게 자기를 되돌아 보는 ‘양심성찰’을 해야 하니까. 자기의 죄를 찾아 내는 것은 말처럼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거의 2년간 이 성사를 못 보고 있고, 이것이 항상 나를 찜찜하게 한다. 사실 이것을 하려면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영어로 하는 고백성사는 아무래도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하니까..

 

I Understand, by G-Clefs…  며칠 전부터 정말 이상하게도 oldies중의 I Understand란 곡이 자꾸만 생각이 났다.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이런 발전이 아닐까.. 년 말이 되어가고, 그러면 분명히 Auld Lang Sine이 불릴 것이다. 그 곡이 background 로 흘러나오는 곡이 바로 G-Clefs가 불렀던 60년대 초의 hit, I Understand (just how you feel) 인 것이다. 그 당시 우리는 이 곡을 부른 group G-Clefs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그 이후도 마찬가지.. 이번에 알고 보니 이들은 내가 잘 못 추측한 대로 영국계통의 그룹이 전혀 아니고, 미국의 ‘흑인’그룹이었다. 사실, 적지 않게 놀란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잘못된 사실을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조금 부끄럽기까지 하였다.

이 곡은 미국에서 1961년에 나온 것이지만 우리 때는 거의 1964년경에 많이 알려진 곡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중앙고2 때였다. 년 말에 많이 불렸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확실한 것은 고2때가 끝날 무렵, 그러니까 역시 1964년이 저물 무렵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학급회의, 그러니까 home room이라고 불렀던 그 시간에 모두들 앞에 나가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을 했다. 분위기는 완전히 고2때 특유의 감상에 젖은 그런 분위기.. 고3이 되기 전 무슨 전쟁이라도 나가는 듯한 심정으로 이별을 서러워하는 기분에 모두들 휩싸인 것이다. 바로 그때다.. 제일 키가 컷 던 김용만이 G-ClefsI Understand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 광경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렇다.. 이별을 서러워하던 순진했던 가슴들의 표현이었다. 그 당시 고교2학년은 정말 모두들 문학소년,소녀들이었다. 지독히도 순진하고, 이상적이었던 그 일년.. 그때에 생각하고 꿈을 꾸었던 장차 다가올 인생들.. 과연 어떠한 인생들이었을까? 얼마나 많은 기쁨, 행복, 괴로움, 후회를 만들며 살았을까? 갑자기 지독한 감상에 젖는다.

 

I Understand by G-Clefs, 1961

I understand just how you feel

Your love for me, why not be mine?

It’s over now but it was grand

I understand, I understand

If you ever change your mind

Come back to me and you will find

Me waiting there, at your command

I understand, I understand

I miss you so, please believe me when I tell you

I just can’t stand to see you go

You know

If you ever change your mind

Come back to me and you will find

Me waiting there at your command

I understand, I understand

SPOKEN: “I understand just how you feel. Let bygones be bygones. But always

remember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

(We’ll sip a cup of wine, my dear, for Auld Lang Syne )

I understand

실비아 심인섭, 익평공파 29세

심인섭, 1965년
심인섭, 1965년

중앙고 57회 동기회에서 또 결혼식 소식이 날라왔다. 세월이 갈수록 점점 그 횟수가 늘어나는 것 같이 느껴진다. 확실한 통계는 물론 없다. 그저 느낌일 뿐이다. 아마도 동기녀석들의 반수 이상이 이미 할아버지가 되지 않았을까. 아~~ 세월이여. 이번의 결혼식 소식은 조금 나에게 의외의 느낌을 주었다. 주인공이 심인섭인데.. 심인섭의 차녀가 결혼을 한다는 소식이었다. 왜 의외의 느낌을 주었느냐 하면, 이 친구의 소식을 1965년 졸업 이후 처음 듣게 되어서 그렇다.

물론 친구가 사라진 것은 아닐 것이다. 동창회에도 나왔을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친구들과 연락을 하며 지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나에게는 이제 처음 그 이름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혹시 ‘사망’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도 해 보았다. 도대체, 어디에 갔다가 이제야 나타났을까? 그의 이름은 연락처, 주소록 등등에 전혀 없었다. 고2때 같은 반이었다. 경주 수학여행 때 같이 사진도 찍었다. 그것보다도 이 친구가 더 기억에 남는 것은 고2때 교지에 실렸던 그의 시 때문이었다. 시의 제목이 <실비아>였다. 제목도 독특하고 이국적이고..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천주교신자의 세례명일 수도 있을 그런 이름의 시.. 하지만 그 시의 내용은 기억을 할 수 없다. 언제부터인가 그 시를 다시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히 들었다. 그 “사라진” 친구가 홀연히 딸의 결혼식 소식과 같이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조금 이상한 것은, 결혼식 장소만 있지, 연락처가 없다는 것.. 왜 그럴까. 왜 이렇게 이 친구는 ‘신비’적인 인상을 주는 것일까. 정말 나도 모르겠다. 그 긴 세월, 어떻게 살았을까, 참 궁금하다. 그 친구는 아직도 시, <실비아> 를 기억하고 있을까? 좌우지간, 딸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며칠 전에는 또 한번 googling의 덕을 보았다. 이건 내가 googling을 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googling을 해서 나의 site를 찾은 것이다. 너무나 반가운 발견이었다. 고국 과천시에 사시는 이종환씨, 평창이씨 익핑공파 29세 되시는 분이니까 나의 족보가 맞는다면 항열로 내가 이분의 아버지벌이 되는 셈이다. 게다가 나와 같이 가족이 모두 천주교 신자였다. 사실 나는 이 소식을 듣고 뛸 듯이 기뻤던 것이 사실이다. 나의 뿌리 찾기 노력에 대한 성모님께 드린 기도에 답을 받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조금은 비약적인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이분의 할아버지가 ‘모’자 돌림이라고 하셨고, 나의 아버님이 이정모, 모자 돌림.. 너무나 반가웠다. 더구나 현재 익평공파 최근의 족보를 소장하고 계신다고 한다. 그러면 혹시 나의 직계 조부님들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꿈과 상상의 나래를 다시 편다.

 

매디슨의 중앙고 후배들

Home Office를 바꾸는 것이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미처 몰랐다. 더위가 닥치기 시작하긴 바로 전 6월초에 이동이 시작이 되었지만 그것은 사실 일의 시작에 불과했다. 거의 10년 이상인 방치 되었던 것들을 이번에도 외면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대부분 버리는 것이 일이었다. 문제는 어떤 것을 버리는가 하는 것이다. 제일 쉬운 것이 책 종류였다. 골동품이나 고서의 가치가 없는 것은 무조건 쓰레기 통으로 보냈다. 다음이 서류 종류인데 이것도 옛 직장에서 쓰던 것들은 이번엔 용감히 버리기로 하였다. 남겨야 하는 것이 조금은 있지만 그건 아주 예외에 속한다.

나의 필적, 사인 같은 것이 있는 것들은 그렇게 많지 않아서 보관하기로 했다. 나머지는 사진인데.. 어떤 사람들은 가차없이 버린다는 얘기도 들었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신발상자에 모조리 보관을 하기로 했다. 이것은 개인의 역사가 아닌가? 누가 보건 안 보건 그것이 문제는 아닌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paper print된 사진이라 수명이 있을 것이고, 앨범에 넣지 않은 것들은 보기도 어렵다. 그렇게 되어서 숨어있던 사진들을 이번에 정말 오랜만에 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거의 잊어버리고 살았던 매디슨의 중앙고 후배들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1989년, 아주 오래 전이고, 같이했던 기간도 짧았지만 그 동안 사진조차 못보고 살아서 기억이 더욱 많이 희미해졌다. 얼마 전에 중앙고 후배 강태중의 생각이 났는데 이번에 그 사진을 찾은 것이다. 그 젊었던 모습들을 다시 보니 이 많은 후배들 이제 다 생각이 난다.

우리가 아파트를 조금 큰 곳으로 옮기고 나서 집들이를 한 모양이다. 바로 전에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간 전기석 후배만 제외하고 모두 모였다. 정태춘의 “시인의 마을”을 정태춘보다 더 잘 불렀던 이주호 후배, (wife는 미스 코리아처럼 예뻤다) 쌍둥이 딸을 두었던 수재 형의 윤정로 후배, (wife도 같이 공부를 했었다) 나와 같이 천주교회에 다니면서 가까이 지냈던 강태중 후배, 씩씩하고 활달하던 강상봉 후배, 통계학과의 이제준 후배.. 문제는 그 나머지 후배들의 이름이 가물거린다는 슬픈 사실이다. 얼마나 미안한 일인가? 하지만 노력을 하면 생각이 날지도.. 이 머리 좋던 중앙고 후배들, 다들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매디슨의 중앙고 후배들

매디슨의 중앙고 후배들, 1989년 Madison, WI

 

그리운 친구 정교성

어제는 정말 오랜만에 캐나다에 살고 있는 동창친구 정교성과 통화를 할 수 있었다. 그 전날 “Google Voice@Asterisk PBX” 를 시험하면서 갑자기 교성이 생각이 났다. 물론 그 동안도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나 우리 집의 long distance service를 몇 년 전에 끊어버린 관계로 phone card를 쓰지 않으면 장거리 전화를 하기가 조금 불편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다가 구세주같이 Google Voice가 나타난 것이다. 미국과 캐나다는 무료이고 한국도 대부분이 분당 2센트면 ok인 것이다.(mobile phone은 5c/min) 이것을 계기로 교성이와 더 많이 전화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앙고3 반장나리들, 1965년
중앙고3 반장나리들, 정교성 뒷줄 바른쪽, 1965년

정교성은 이승만 정권 당시 부통령이었고 4.19 학생혁명 이후 5.16 군사혁명 전 까지 국무총리를 역임했던 장면박사의 조카다. 그러니까 교성이 어머님이 장면박사의 여동생인 것이다. 집안은 전통적인 천주교도 집안이었고, 교성이는 분명히 태어날 때 유아영세를 받았을 것으로 생각을 한다. 중앙고 졸업 앨범을 보면 교성이는 천주교 반에 있었다. 그것은 공식적인 학교내의 서클중의 하나였다.

사실 나는 중앙고 재학 당시에 교성이와 개인적인 친구가 아니었다. 하지만 교성이는 나를 몰랐어도 나는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어찌 안 그렇겠는가.. 그는 목소리가 삼국지의 장비같이 천둥벼락과 같았고 통솔력이 뛰어나 중앙 중, 고등학교 6년간 반장을 하는 신기록을 깬 나에겐 참 부러운 존재였다. 왜냐하면 나는 그런 것은 사실 꿈에도 상상을 못하던 ‘업적’ 이었으니까. 그런 그가 그 당시 나와 개인적인 친구가 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대학 3학년 쯤에 다른 친구, 김호룡을 통해서 교성이와 바로 “눈 앞에서” 만나게 된다.

우리들 또래 보다 도 훨씬 믿음직하고 성숙한 그는 참 어울리기 편한 친구가 되었다. 어떨 때는 그가 나의 형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집안, 가문 같은 것을 풍기지 않던 그런 모습도 보기에 참 편하였다. 서울 외대 독문과에 다니던 그는 재학 시 공군에 입대를 해서 나와 처음 만날 당시에 공군에 복무 중이었다. 내가 여자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그는 형같이 나를 도와주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나는 항상 도움을 받기만 했다. 그는 그 70년대 격동기 세대의 일원으로 열심히 정석대로 산 모범적인 친구다. 그런 그가 언젠가 캐나다로 아주 이주를 해 왔다. 그리고 오랫동안 투병을 하던 부인의 타계를 겪었다. 두 딸을 훌륭히 거의 혼자서 키워냈다.

교성이네 집에서, 1970년
교성이네 집에서, 1970년

몇 년 전에 거의 우연히 한국에서 나오는 천주교 잡지 “생활성서” 1992년 호를 보다가 어떤 글을 읽었다. 아무래도 누군가를 연상시키는 그런 글이었다. 저자는 “정광숙” 씨.. 글을 읽고 더 심증이 굳어졌다. 바로 교성이의 누나인 것이다. 우리가 처음 만날 당시 그 누나는 미국유학 중이었다. 나는 그때 그 누나가 쓰던 책을 빌려보기도 했다. 그래서 교성이에게 확인을 해 보니 99% 맞는 것 같아서 그 기사의  copy를 보내기로 약속을 했는데 이행을 못하고 서로가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 기사를 보내려 하니 문제가 있었다. 생활성서에서 그 기사를 다시 찾으려고 하니 무려 6년치의 생활성서가 책장에서 먼지를 쓰고 있었다. 6년치면 거의 72권이나 되는 것이다. 한참 씨름을 하다가 결국은 그 기사에 book mark가 붙어 있어서 생각보다 빨리 찾아서 부지런히 scan을 했다. 문제는 거의 컴맹인 그가 이것을 어떻게 쉽게 보게 할까 하는 것이다. 그 동안 한번도 그를 코앞에서 본 적은 없었지만 그를 잊은 적은 한번도 없다. 나의 형같이 나의 식구같이 느낀 친구였으니까. 지금은 새로이 부인을 맞고, coffee shop을 운영하며 잘 살고 있다. 언젠가는 볼 날이 있겠지만 그 전이라도 더 자주 연락을 하면서 지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을 해 본다.

 

Apple, 채인돈 후배, Tony Curtis

9월도 30일.. 9월의 마지막 날이다. 완전히 여름이었던 9월도 며칠 전부터 완전한 가을로 돌변을 하였다. 모든 것이 요새는 이렇게 extreme, extreme 이다. 올해는  매년 9월 중순 가족행사로 나서던 apple orchard drive 도 완전히 잊어버렸다. 한여름 같은 날씨에 사과 과수원은 생각만 해도 뜨겁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사과도 다 수확이 되었을 것이고 한마디로 김이 다 샌 것이다. 이곳에서 약 한 시간 반 정도 북쪽으로 drive를 하면 Ellijay라는 apple town이 나온다. 그곳은 완전히 사과 과수원이 밀집해 있는 산자락이고 경치도 아주 좋다. 이곳에 이사온 이후 한해도 빠짐 없이 그곳을 가곤 했는데 올해는 정말 예외가 되었다.

채인돈가족과 함께 Columbus, Ohio 1987
채인돈가족과 함께 Columbus, Ohio 1987

오늘 뜻밖의 손님이 나의 blog에 찾아왔다. 오랜 전에 쓴 나의 blog entry: “1980년대 Ohio State의 중앙동창들” 에 중앙고 67회 후배 채인돈의 아들인 채경덕군이 comment를 한 것이었다. 인물검색을 하다가 실린 사진에서 자기나이또래의 아빠를 찾았다고, 감회가 깊었다고 했다. 그 사진은 1987년경 콜럼버스의 교민회주최 소프트 볼 대회에 중앙고 동창 팀에서 참가를 하고, 첫 회전에서 탈락을 한 후에 찍은 사진이었다. 얼굴들이 모두 비록 웃기는 했지만 맥이 빠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완전히 한 세대가 흐른 것을 느낀다. 채인돈 후배는 비록 나의 새까만 후배였지만 같은 천주교 신자였고, 전공도 비슷하고 (EE, CIS), 한 때는 Ohio State campus중심의  PC Users Group에서 같이 공부를 하기도 했다. 항상 웃는 얼굴이고 wife는 미스 코리아처럼 예쁘게 생겼었다. 집안이 상당한 power class인 것에 비하면 채인돈 후배는 상당히 검소하고 겸손했다. 마지막으로 연락이 되었을 때 그는 한국에서 computer 관련 venture project에 관련이 되어서 아주 바쁜 것 같았다. 경덕이 밑으로 동생을 두었는지도 소식이 끊겨서 잘 모르고 지낸다.

The Vikings, 1958
The Vikings, 1958

미국의 원로배우 Tony Curtis가 오늘 세상을 떠났다. 85세였으니까 사실 평균수명은 채웠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오랫동안 알고 있던 유명인들이 하나 하나씩 세상을 떠나면 느끼는 것은 역시 나이가 들면 들수록 외롭게 느껴지리라는 사실이다. 나에게 이제는 이런 것들이 남의 문제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유괘하게 잘생긴 그는 역시 영화 The Vikings에서의 연기가 제일 기억에 남고 또 Spartacus도 기억에 생생하다. 둘 다 Kirk Douglas와 공연을 했는데 그렇게 조화가 잘 맞을 수가 없었다. 그가 이름과는 달리 항가리계의 유태인(Hungarian Jew)임을 오늘에서야 알았다. Kirk Douglas도 역시 유태인이다. 이 글을 쓰다 보니 다시 바이킹을 보고 싶어진다. 이 영화에서는 wife인 Janet Leigh와 같이 나온다.  이미 download한 것이 있어서 아무 때나 볼 수 있으니 참 편한 세상이 되었다.

9월의 한여름, 동창친구들, Eddie Fisher

6월초 나의 blog entry중에6월 달의 한여름” 란 것이 있었다. 보통 때에 비해서 몇 주일이나 빨리 온 무더위에 관한 것이었다. 아마도 거의 3주간 계속된 더위였다. 그래서 아하.. 올 여름의 무더위는 다 갔구나..하고 생각을 했는데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온통 최고기록을 경신한 올 여름의 무더위였다. 그런데 9월의 공식적인 가을, 추분이 시작된 지금도 사실 한여름이다. 올해의 기후 pattern은 하나로 요약할 수 있다. 한번 기상 system이 하늘에 자리를 잡으면 여간 해서는 “요지부동” 움직이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보통은 며칠마다 변화무쌍 변화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도 조금은 “으시시”한 앞으로의 기후가 아닐까. 혹시 이것도 global warming의 한 경고가 아닐까 생각하니 조금은 우울해진다. 하지만 모래부터는 완전한 가을날씨가 온다고 한다. 기온이 거의 15F나 곤두박질을 친다고 하니까. 다시 가을/겨울의 준비를 할 때가 오는 것인가…

고국의 중앙고 동창 친구 유정원, 양건주가 email 회신을 보내왔다. 45년 만에 연락이 된 동창 유정원, 조금은 꿈같은 기분으로 이 친구와의 “만남” 을 음미해보곤 한다. 어머님을 얼마 전에 보내드리고 처음 맞는 추석은 어떠했을까? 이렇게 email 로 나마 “대화” 가 가능하니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 건주는 항상 자상하게 자기의 근황을 알려준다. 이 친구, 그런 것은 정말 변하지 않았다. 성실하고, 자상한 것.. 얼마 전에 회사생활을 끝냈다고 들었는데 요새는 어떻게 지내는가? 오늘 처음 안 사실은, 건주가 6남매의 맏이였다는 것이다. 그것도 정확히 3남3녀 중의.. 아버님이 3대 독자라고 하시니까 조금은 이해가 간다. 그래도 우리 때의 기준으로 보아도 조금 많은 식구였다. 그 많은 식구 다 뒷바라지 하셨으리라 생각하니 참 대단하시다. 이렇게 소가족 추세인 세상에서 그들은 얼마나 외롭지 않을까.. 참 부럽다. 정말 부럽다. 역시 식구는 행복이다. 그 말이 맞다.

 

지난 7월에 우리 집 dining roomlaminate floor 로 바꾸는 일이 있었다. 난생 처음 해본 것이라 고생도 했고 시간도 걸렸지만 그런대로 잘 되었다. 덥고, 힘도 들고, 재료도 떨어지고 이런 저런 핑계로 일을 쉬어버렸다. 원래 계획은 living room, hall way, kitchen을 포함한 일층 전체를 다 laminate floor로 바꿀 예정이었다. 문제는 flooring을 아무리 간단한 것으로 바꾸려고 해도 마루 밑바닥의 상태가 좋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subfloor (마루밑의 마루)의 상태를 말한다. 역시 이곳 저곳 문제가 있었는데, 어떤 곳은 마루 밑이 썩은 곳도 있었고, 어떤 곳은 오래되어서 밑으로 축 쳐진 곳도 있었다. 그런 것을 그 동안 다 손을 보았던 것이다. 주로 joist re-framing과 additional support같은 것을 할 수밖에 없었다. 거의 $$은 들지 않았지만 나의 muscle과 power tool들이 절대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IKEA Tundra라는 비교적 가격이 저렴한 laminate floor  15 package를 이미 구입해 놓아서 곧바로 living room과 hallway를 시작하려고 한다. Good luck to me on this job!

 

re-framed damaged floor joists

정문 현관의 마루밑은 아주 오래전에 termite damage가 있었다. 별로 더 이상 진행되는 피해가 없어서 잊고 살다가 이번에 마루를 갈게 되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joist 몇개가 완전히 삮아 있었다.

 

3 new posts under floor

그 바로 밑에다 아주 튼튼한 기둥 3개를 설치하였다. 이정도면 현관에 heavyweight 급의 장정들이 여러명 서 있어도 끄떡이 없을 듯하다.

 

오늘 뉴스를 잠깐 보니 오래 전의 미국가수 Eddie Fisher가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솔직히 말해서 하도 오래 전의 유명인이라서 나이가 최소한 90세 이상은 되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겨우” 82세? 알고 보니 우리가 알던 때의 그의 나이가 아주 아주 젊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흔히들 말하는 “십대의 우상 (teenage idol) 이었던 것이다. 노래도 물론 잘 불렀겠지만 대부분 그가 더 유명해진 이유는 그 당시 최정상 급의 배우,가수들과 이혼과 결혼을 줄기차게 감행했던 사실이다. 내가 아는 사람만 해도 그 유명한 Elizabeth Taylor, Debbie Reynolds, Connie Stevens 등등이 있다. 이 남자, 어떤 마력과 매력이 있길래 그 유명한 여자들과 그렇게 결혼과 이혼을 할 수 있었을까? 나중에 그의 인터뷰를 보면 역시 그는 “예쁜 여자를 보면 참을 수가 없다” 고 말할 정도로 그는 유명하고 예쁜 여자를 좋아했던 것 같다 (그렇지 않은 남자가 이세상에 어디에 있을까?) 그의 hit song중에는 역시 많이 들었던 1954년의 Oh My Papa를 빼 놓을 수 없다.

 

Oh My Papa – Eddie Fisher – 1954

 

8월이 간다

지긋지긋한 8월이 드디어 간다. 벌써 어제 아침부터 시원한 바람이 산들거리는 듯 느껴지고 실제로 아침의 바깥 기온도 화씨 70도 밑으로 떨어졌다. 지난 세달 동안 계속 70도를 넘었으니까 이것도 조그만 뉴스 꺼리다. 그러니까 지구는 변함없이 태양을 돌고 있다는 것이 간접적으로 증명도 되는 것이 아닐까?

얼마 전에 중앙 57회 동기 회에서 교우 유정원의 모친상 소식이 왔다. 이제는 세월이 그렇게 된 모양인지 부모님 타계 소식 아니면 자녀들의 결혼식 소식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모친상의 소식은 나에게 더 진한 슬픔을 준다. 내가 7년 전에 이미 겪었기 때문일까. 그래서 불현듯 email로 나마 위로를 하고 싶어서 보냈다. 답장은 기대하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누구라는 것을 모를 수도 있을 것 같고, 또 애도기간이라 바빠서 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정원이는 곧바로 회신을 주었는데, 내가 놀란 것은 내 이름(이경우)의 “경”자가 한자로 “빛날 炅”이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유정원의 “밝을 晶” 자를 기억하고 있다. 아득하게 무슨 time machine를 탄 기분이었다. 45년 이상 완전한 연락의 단절이 이렇게 쉽게 연결이 되는 것은 참 경험하기 힘든 일이 아닐까. 참 좋은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나의 중앙고교 추억 시리즈 마지막 편인 고3 편을 오늘 천신만고 끝에 ‘탈고’를 해서 올려 놓았다. 이미 예상은 한 것이었다. 기억력을 더듬는 것이 이번에는 그렇게 힘이 들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노력을 하니까, 그 동안 잊고 살았던 것들이 하나 둘씩 살아 나왔다는 사실이었다. 다시 잊을세라 부리나케 쓴 것이다. 나의 가장 큰 희망은 우리 교우 친구들이 이것을 보고 그들의 기억도 같이 합세를 했으면 하는 것이다. 물론 큰 기대는 못 한다. 우리세대는 알려진 대로 digital generation은 절대로 아니니까.

Hurricane Katrina: 허리케인 카트리나..5주년이 되었다. 정말 지독한 것이었다. 아마도 카테고리 3급 이었을 것이다. 5년 전 그날(2005년 8월 29일), 미국의 큰 도시 하나가 자연재해로 완전히 물에 잠겼다. 공상과학 영화 같은 데나 나올듯한 각본이 현실화 된 것이다. 예측하기에는 너무나 커다란 재해라서 사실 대비하기는 불가능 했을 듯 하다. 1800여명이 죽고, 많은 사람들과 동물들이 행방불명이 되었다. 문제는 그곳의 피해자들이 대부분 흑인들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사망률은 이런 것에서도 다른 집단과 비교가 되지를 않는다. 흑인 대통령은 나왔지만 아직도 그들이 갈 길은 먼 것인가.

8월 달, 지독한 더위였지만 그런대로 집 일을 한 결과도 있었다. 나는 현재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것을 전적으로 맡고 있고, 나머지 식사의 dish wash또한 나의 담당이다. 처음에는 시간도 걸리고 기분도 찜찜한 것도 있었지만 습관이 되고 나니 사실 기분이 좋을 때도 있다. 나도 무언가 도움이 되었다는 만족감일지도 모른다. 집안 일이란 주로 handyman(일당목수일) 들이 하는 일들이다. 나의 carpentry실력은 조금 초보를 면할 정도다. 하지만 시간에 별로 쫓기지 않고 일을 할 수 있는 큰 이점도 있다. 올 여름의 major project는 역시 아래층에 laminate floor를 까는 일이다. 보기에 그렇게 쉬운 것이 손을 대고 보니 완전한 monster였다. 8월 중순까지 dining room이 끝이 났다. 그 다음을 계속해야 했는데 floor자체에 문제가 있어서 손을 보아야만 했다. 결국 subfloor를 뚫고 들어가는 대공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며칠 전에 끝이 나고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마루공사를 계속하게 되었다. 사실 언제 끝이 날지는 모른다.

오늘 아침 New York Times에 기고된 한 논평을 보았다. 저자의 이름이 곧바로 눈에 들어왔다. Paul Wolfowitz 였다. 그는 소위 말하는 neo conservative그룹에 속하는 ‘매파‘ 라고 할 수 있다. 이 논평은 이락 전쟁이 일단 끝나면서 한국전쟁과 비교를 한 것이다. 결론 부터 말하면 철수를 하되 상당수의 전투병력을 남기라는 것이고, 한국전쟁이 휴전이 되면서 미군이 상당히 남아서 전쟁의 재발을 막고 결과적으로 현재 한국의 정치, 경제 발전을 가능케 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말은 되는 이야기다. 문제는 60년 전의 전쟁이란 것과, 전혀 다른 지정학적, 문화적인 조건 등을 어떻게 감안할 것인가.

 

중앙고교의 추억(3)

중앙고 3학년 8반, 1965년
중앙고 3학년 8반, 1965년

중앙고교 추억 시리즈마지막 편이 그렇게 쓰기가 힘 들었다. 시작이 반이라고 계속 나를 push하곤 했지만 그 시작이 그렇게도 힘이 들었다. 왜 그럴까? 추억거리가 별로 없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너무나 많아서 그랬을까? 기억을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을까? 이것들 중의 어느 것도 아닌 것 같다. 굳이 따지자면 내가 가장 보물처럼 간직하고 싶었던 그 시절 이야기들의 끝을 맺는 것이 섭섭해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추억할 수 있는 능력에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최복현 교장 선생님, 1965년
최복현 교장 선생님, 1965년

1965년은 지난해의 6.3사태 같은 정치적인 불안을 그대로 안고 있었지만 박정희 정부는 최소한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경제발전에 모든 운명을 걸고 있었고, 한일외교정상화가 그것의 전제조건이 되었다. 해방 된지 겨우 20년 만에 국민감정이 그렇게 쉽사리 변할 리가 없었다.  지난해의 도쿄올림픽으로 일본은 튼튼한 경제기반으로 경제대국으로의 첫걸음을 걷고 있었고 그것에 걸 맞게 ‘고자세’로 한국을 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독한’ 냉전체제의 국제정세가 우리의 국민감정 같은 것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반공’에서 출발을 했으니까.

그 해 가을에 박정희 정부는 완전히 미국과 보조를 맞추려, 본격적인 전투부대인 청룡부대월남으로 보냈다. 그 전해에는 이미 비전투 부대인 비둘기부대를 보냈다. 서서히 월남전이 국내의 뉴스에 정기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때였다. 반공의 이념을 실력으로 보이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경제적인 측면도 무시할 수 없었다. 숙적인 일본이 우리의 6.25전쟁 중에 엄청난 경제적 이득을 챙긴 것을 보면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것 들이었다.

짱구, 정운택 선생님, 1965년
짱구, 정운택 선생님, 1965년

그런 배경에서 고교3학년을 맞은 우리들은 간접적으로나마 나라가 처해있는 사정을 모를 리가 없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공부 잘해서 나라에 충성’하는 그것이었다. 그것의 첫 조건이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이었다. 특히 1965년에 우리 중앙고교는 벌써 최복현 교장선생님의 원대한 ‘6개년 계획’의 3년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우리학년이 이루어야 할 목표 (서울대 몇 명, 연고대 몇 명 같은)는 사실 아주 어려운 듯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정확한 목표는 사실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목표가 주는 심리적인 효과였다. 그것은 참으로 효과적인 campaign이었고, 심지어는 ‘재미’로 느껴지기도 했으니까.

나의 짝꿍, 원병태
나의 짝꿍, 원병태

고교 3학년이 되면서 시작된 수업에서 느끼는 그 신선한 긴장감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을 한다. 무슨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떠나는 가미가제 특공대원 같은 그런 심정이었다. 그런 마음 가짐은 사실 대학입시까지 신기하게 이어졌다. 이것에 대해 나는 아직도 우리 최복현 교장선생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 비록 최교장 선생님은 2학기가 되면서 서울시 교육감이 되셔서 모교를 떠나셨지만 그 분이 남긴 것은 참 큰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큰 계획의 뒤에는 후유증도 있었다. 불과 몇 번의 시험과 지난 해 학기성적으로 3학년 학급배정을 한 것이 그 중에 속한다. 쉽게 말하면 성적 순위로 분반을 한 것이다. 그런 반 배정에 개의치 않고 열심히 공부를 할 수도 있겠지만 감수성이 예민한 친구들은 실망과 좌절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화학반, 목창수
화학반, 목창수
유학준비, 윤중희
유학준비, 윤중희

그때 분반은 문과와 이과로 나누어 졌는데 이과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나의 8반은 이과에 속했다. 나는 원래부터 전기,전자공학 쪽으로 방향을 정했기 때문에 당연히 이과를 선택한 것이다. 다행인 것은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정책이 압도적으로 이공계 쪽은 선호한다는 사실이었고, 각 대학도 그것을 반영하듯 최우수 학생들이 가는 곳은 예외 없이 이공계, 특히 공대 (화공과, 전기과, 기계과 같은) 쪽이었다.  최고의 커트라인은 몇 년 째 서울공대 화공과가 독차지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문제점은 공부만 잘하면 거의 무조건 공대로 보내는 ‘어처구니 없는’ 풍토였다. 공대 쪽에 적성이 맞고 안 맞고가 크게 문제가 되지를 않았다. 심한 경우에는 전기, 기계 같은 것을 싫어해도 수학만 잘하면 그곳으로 간 것이다.

나의 앞자리에는 고2때부터 옆에 있었던 김진수가 앉았고, 뒤에도 오래된 친구인 이종원이 앉았다. 바른쪽 옆에는 원병태가 앉았는데 모두 나에게 좋은 친구들이었다. 하지만 대학에 갈 때는 모두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김진수는 해군, 이종원은 외대, 원병태는 고대로 가버렸다. 원병태는 사실 키가 상당히 큰데 어떻게 나의 옆에 앉게 되었는지 모른다. 담임선생님은 별명이 짱구정운택 선생님이셨는데, 조금 흥분을 잘 하시지만 속 마음은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다. 이런 모든 것들이 그 긴장되는 고3시절을 조금이나마 편하게 해 주었는지 모른다.

007, 고석찬
007, 고석찬
Love Potion, 이영윤
Love Potion, 이영윤

왼쪽 옆으로는 목창수, 문영직, 허영식, 차정호, 윤중희 등등이 앉았다. 바로 뒤 이종원의 뒤에는 고석찬, 이영윤이 앉았는데 이 두 친구들은 대학시절 종로2가에서 우연히 만났다. 고석찬의 유머러스 한 표정도 여전했고 이영윤의 멋진 미소도 여전했다. 어떻게 그 둘이 같이 있었는지 모른다. 아마도 그들은 졸업 후에도 계속 만났던 모양이다.고석찬, 그 당시 피카디리 극장에서 개봉된James Bond  “007 위기일발 (From Russia with Love)” 영화를 가지고 신나게 이야기를 하곤 했다. 사실 처음 개봉되었을 때 미성년자는 볼 수가 없었고 나중에 그것이 풀어져서 가서 보았다.  물론 검열과정에서 많이 손을 보았을 것이다. 그 당시 나는 그것을 모르고 그 영화를 보기도 전에 보았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장난으로) 고석찬이 비웃으면서 미성년자가 어떻게 그것을 보았냐고 꼬집었다. 금새 거짓말이 들통이 나고 나는 조금 창피했다. 나는 분풀이라도 하듯이 나중에 가서 본 것이다.

이영윤은 미국 pop song을 비롯해서 노래를 좋아한 듯하다. 그가 잘 따라서 부른 노래는 “Love Potion No. 9” 이란 그 당시 유행하던  팝송이었다.  그리고 고2때 정귀영 Al MartinoI love you more..를 너무 좋아해서 따라 불렀다면 이때는 정귀영이 황석환으로 바뀌었다. 노래는 Matt MonroWalk Away로 바뀌고..  나도 그 당시 그 노래를 무척 좋아했지만 황석환은 더 좋아했나 보다. 교실에서 크게 부르며 다녔으니까. 나는 그 때 Matt Monro가 영국가수라는 것을 몰랐다. 지금 다시 45년 만에 찾아서 들어보니 역시 기가 막힌 노래와 목소리였다. 여자로 치면 아마도 미국의 Karen Carpenter에 버금가는 그렇게 티없이 맑은 목소리였다. 나중에 그의 노래, Born Free, Wednesday Child, Portrait of My Love같은 것도 무척 좋아했는데 다만 미국에서 오래 살다 보니 이곳의 풍조에 따라 다른 나라의 노래들을 거의 잊고 살았을 뿐이다.


 

From Russia With Love – Matt Monro
1965 봄 쯤에서 그 소문이 자자하던 James Bond 007 시리즈의 “007 위기일발” 이 피카디리 극장에서 개봉이 되었다. 반드시 일본을 통해서 들어오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니까 아마도 1964년 쯤 나온 영화가 아닐까. Sean Connery도 멋이 있었지만 Matt Monro의 영화 주제곡 또한 못지 않게 멋이 있다.

 

 

Love Potion No. 9 – The Searchers
이영윤이 잘 따라 불렀던 이 노래, 사랑의 향수 9번, 그 당시에 라디오에서 잘도 흘러 나왔다. 비디오를 함께 보니 The Beatles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나, 차림새가 아주 비슷하다.

 

 

Walk Away – Matt Monro
황석환이 좋아하던 거의 명곡에 가까운 노래, 가사를 들어보면 더욱 가슴이 찌릿해진다. 숙명적으로 맺지 못할 사랑을 떠나 보내는 남자의 절규.. 참, 슬프다.

 


"관조", 백정기 선생님
“관조”, 백정기 선생님
고문, 주왕산 선생님
고문, 주왕산 선생님
국문학사, 김창현 선생님
국문학사, 김창현 선생님

그 당시 중앙고 3학년 교사 진은 상당한 수준에 있었다. 아마도 최교장선생님의 배려였을 지도 모른다. 국어의 백정기 선생님, 정열적으로 가르치시고 입시국어에는 외부에도 잘 알려지신 분이다. 입시전문지인 월간 진학 지에 글도 실으셨는데 그 글을 안 읽은 학생들을 나무라기도 하셨다.  백선생님의 정열적인 강의 중에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은 “관조“에 대한 것이었다. 특히 인상적인 수업은 역시 주왕산 선생님의 고문(古文)시간이었다. 확실히 는 모르지만 주 선생님은 주시경님의 자제분이셨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그 고문강의는 더 무게가 있었다. 특히 “훈민정음, 용비어천가” 의 강의는 재미와 더불어서 이런 것을 평생 공부해도 재미있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김창현 선생님의 국문학사도 아직도 기억에 남을 만큼 명 강의였다. 특히 김선생님은 개인적으로도 향토역사 같은 것에 관심이 많으셨던 것 같은데 그런 해박한 지식이 강의 때마다 우리에게 전해져 왔다.

숯장사, 원성욱 선생님
숯장사, 원성욱 선생님
대추방망이, 박시희 선생님
대추방망이, 박시희 선생님
썩은 살, 손영섭 선생님
썩은 살, 손영섭 선생님

담임 정운택 선생님, 숫제 일본 수학참고서를 그대로 들고 문제를 내시고 가르치셨다. 왜 그런지 그 당시는 일본의 입시풍조가 그대로 시험에 반영이 되곤 해서 그런 모양이었다. 특히 미적분을 다루는 해석시간은 숯 장사 원성욱 선생님의 독무대였다. 얼굴이 까매서 그런지 숯 장사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는데 그것은 명 강의였다. 기하 (geometry)는 “썩은 살, 깨막이“, 손영섭 선생님이 담당하셨는데 얼굴에 걸맞지 않게 항상 멋지게, 맞춘 듯한 옷을 입으시고 가르치셨다. 영어(문법)는 옆 반인 7반의 담임 “대추방망이“, 박시희 선생님이 작은 키에 맞지 않게 폭 넓고, 크게 잘 가르치셨다. 항상 산더미 같이 print물을 들고 들어오셨는데,  ‘마누라가 밤새고 typing‘한 것’ 이라는  말씀을 빼놓지 않으셨다. 특히 이 선생님은 독자적으로 개발한 입시용 영어비결이 있었다. 특히 문법을 외우는 방법을 ‘한시’ 나 시조같이 음률을 넣어서 외우도록 했다.

나는 3학년이 시작되고 서울고 출신으로 그 당시 서울공대 섬유공학과에 다니 던 송부호 형의 지도를 몇 달간 받았다. 솔직히 수학을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어쩔 수 없이 과외지도를 받게 된 것이다. 어머님 친구의 아들이 서울고 출신이라 그쪽으로 부탁을 했더니 송부호형이 걸린 것이다.  조금은 수줍은 듯한 형인데 참 자상하고 때로는 재미도 있었다. 그때 그 형에게 참 많이 배웠다. 수학 자체보다도 입시 체험담 같은 것이 더 재미있고 도움이 되었다. “James Bond: 007 위기일발” 영화도 사실 그 형과 같이 피카디리 극장에서 본 것이었다.

"똥자루", 정경섭 선생님
똥자루“, 정경섭 선생님
PSSC, 이지홍 선생님
PSSC, 이지홍 선생님

빼놓을 수 없는 선생님들 중에 체육선생님 “똥자루정경섭 선생님이 계셨다. 오신지 얼마 되지 않은 선생님이셨는데, 고3때 체육시간은 완전히 서자취급을 면치 못하는 시간이고, 심지어 어떤 때는 체육시간에 골치 아픈 머리를 식힐 겸,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시기도  하셨다. 나는 그 시간이 그래서 좋았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시간만 되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기대하곤 했으니까. 이 정선생님의 얘기는 정말 실감나게 재미있었다. 그 화제가 대부분 깡패들의 싸움이야기, 무협적인 이야기.. 등등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선생님의 경험을 듣는 것 같아서 더 재미가 있었는지 모른다. 시간 내내 웃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비록 키가 조금 작아서 “똥자루” 라는 별명은 있었지만 나는 아직도 유쾌한 기억을 간직하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아주 다른 기억으로 남는 선생님, 물리담당 이지홍 선생님이다. 물리는 사실 이공계의 꽃인데 입시에서는 “국(어),영(어),수(학)”에 밀려서 어디까지나 ‘선택’ 과목이 되어버렸다. 그 선택과목의 시간은 대부분의  필수과목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훨씬 지난 뒤에 있게 마련이다. 오전에 이미 머리의 에너지를 다 써버리고 점심까지 먹은 뒤에는 사실 잠이 기가 막히게 잘도 온다. 그 때에 이 물리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이 시간은 달랐다. 이지홍 선생님의 노력과 실력 때문이랄까?  이 선생님은 얼마 전에 PSSC라는 미국에서 하는 물리교사를 위한 과정을 미국 하와이에서 이수를 하고 오신 아주 상당한 실력 파 셨다. 그 프로그램은 미국이 space program에서 소련에 뒤지기 시작하자 뒤 늦게 과학교육을 개혁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었다. 대부분 ‘실습’을 위주로 하는 ‘산 교육’이었다. 물리시간 중에는 꼭 미국에서 연수를 받으실 때 쓰신 듯한 실험기재들을 가지고 들어 오셔서 정말 ‘실감나게’ 보여 주셨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 내 눈으로 ‘목격’한 물리 실험들은 대학에 가서도 한번 못 보았다. 특히 음극관에서 음극선이 자석에 의해서 굴절하는 것, 고압에서 공기가 방전을 하는 것..등등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아직도 나는 이지홍 선생님께 머리 숙여서 감사를 드리고 싶은 심정이다.

1965년 6월 중순경 방학을 몇 주일 앞두고 한일기본협정이 체결되면서 아예 학교에 미리 휴교령을 내려 버렸다. 반대 데모를 방지하려는 심산이었고 물론 그 효과를 톡톡히 보았을 것이다. 우리들은 사실 나쁠 것 하나도 없었다. 몸과 마음이 사실 지쳐있던 상태에 방학을 몇 주 앞 당긴다는데 누가 반대를 할 것인가. 휴교령이 내려지면서 담임인 정운택 선생님 들어오셔서 침통하신 표정으로 이런 것들을 이해 못하신다는 말씀을 하시고 흑판에 커다란 글씨로 “절호의 기회” 라고 한자로 쓰셨다. 그 뜻은 모두다 알았다. 밀린 공부를 이때에 만회를 하라는 뜻이셨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한일기본조약의 의미를 생각하고, 다른 편으로는 bonus로 생긴 몇 주일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 길어진 여름방학 중에 “우리의 아버지”,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하와이에서 고국을 그리며 돌아가셨다. 우리들은 국민학교 6년을 우리의 아버지로 여기며 존경하던 대통령이었다. 독재자로 낙인이 찍히고, 군사정부는 국민감정을 이유로 귀국도 못하게 하였다. 장례식만은 그리던 서울에서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그 때의 비 오던 날, 길고 긴 운구행렬을 아직도 기억한다.   방학 중에도 데모가 계속 되곤 했다. 하지만 개학이 되면서 어느 정도 가라 앉게 되고 우리들은 다시 입시공부에 돌입을 하였다.

그 당시 입시준비 풍경은 학교 밖으로 입시전문 학원과 입시전문 도서실이 있었다. 도서실이란 것은 책을 빌려보는 곳이 아니고 그저 조용한 방에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곳이었다. 그 중에 나는 동아 학원이란 곳에 잠시 다녔다. 그곳은 입시용 참고서를 제일 많이 출판하는 동아 출판사에서 직영을 하던 새로 생긴 학원이었다. 그 곳이 다른 곳과 다르게 기억이 나는 것은 돈만 내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고 ‘입학시험’을 보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새로운 개념의 학원이 그때까지 없었다. 그래서 나도 한번 해 보자 하는 심정으로 시험을 보았는데, 합격이었다. 사실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것이 상업적이건 아니건 상관이 없었다. 무슨 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한 기분이었으니까.

누가 생각을 한 것인지 몰라도 별로 생각이 없이 만든 학원임이 곧 들어났다. 그 정도 학원이면 다른 학원과는 다른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어떤 과목은 다른 곳에 비해 더 나쁜 곳도 있었다. 그곳에서 친구 장맹열을 만났는데 그도 나의 생각과 마찬가지였다. 얼마 못 가서 다 그만두고 말았다. 한 때는 도서실에 다니기도 했다. 서대문 로터리로 가는 곳에 서강 도서실이었는데 그곳에서는 같은 반 친구 차정호를 만났다.

2학기가 되자마자 (아니면 바로 전) 6개년 계획의 주역 최복현 교장선생님이 서울시 교육감으로 뽑히셔서 학교를 떠나셨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아마도 교장선생님께서는 학교를 떠나기 싫으셨던 듯 한 것이 발령을 받고 한때 행방불명이 되셨다고 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후임으로 최형련 선생님이 부임하셨는데 너무나 우리들과는 짧은 기간이어서 별로 특별한 기억이 남지 않았다. 다른 교우들도 마찬가지라 짐작을 한다. 그리고 고교 본관과 학교 운동장 사이에 3층짜리 석조 과학관을 시공하였고 졸업 즈음에는 골격이 그 모습을 나타내었다.

3학년 때도 역시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었다. 사건이라 함은 별로 좋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백정기 선생님, 평소에는 침착하시고 공정하신 선생님이시다. 하지만 그 날은 달랐다. 문제의 발단은 국어 모의고사에 관한 것이었다. 평소에는 사실 모의고사가 끝나면 꼭 수업시간 중에 문제를 같이 풀어 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날은 어쩐 일인지 모의고사에 관한 것은 완전히 무시하시고 정상적인 수업을 시작하신 것이다. 궁금하긴 마찬가지지만 어쩔 수가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차정호가 끈질기게 문제를 풀어 달라고 요청을 하였고 백 선생님은 막무가내로 거부를 하시고.. 그러다가 아마도 차정호가 “선생님이 모르니까” 라는 말을 한 모양이었다.  그 뒤는 조금은 충격적이었다. 백선생님, 완전히 이성을 잃으셨다. 완전히.. 차정호의 뺨을 치시는데 거의 제 정신이 아니신 듯 했는데, 아무도 말릴 용기가 없었다. 그 시간도 꽤 길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참 씁쓸한 추억이었지만, 선생님도 인간이고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계기였다. 나중에 백선생님께서 차정호를 불러서 ‘사과’ 비슷한 것을 하셨을까.. 아니라고 추측을 한다. 그때의 학교의 풍토는 체벌을 교육의 일부로 여겼을 시기였으니까. 그와 비슷한 사건은 바로 옆 반인 3학년 7반에서 났는데, 역시 지나친 체벌에 관한 것이다. 이번에는 7반의 담임 영어 박시희 선생님과 그 반의 이수열이었다. 왜 그것을 알게 되었는가는 간단하다. 옆 반에서 때리는 소리가 우리 반에 고스란히 다 들렸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때 우리 반에는 우리담임 선생님이 계실 때였다. 선생님도 그 때리는 소리에 조금은 거북스러운 표정을 보이셨다. 아마도 몽둥이로 큰 소리로 오랫동안 때렸던 모양이다. 나중에 그 반에 있던 김호룡에게 물어보니 바로 이수열이 그렇게 맞았던 것이다. 왜 맞았는지는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이 사건도 역시 선생님도 우리와 같은 감정을 가지신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아닐까?

"아우성", 반장 이유성
“아우성”, 반장 이유성
수학귀재, 박상돈
수학귀재, 박상돈

우리반의 반장은 멋있게 키가 컸던 이유성이었다. 나와 이종원은 그를 아우성‘이라고 불렀다. 이유는 그 당시 국어시간에 배웠던 유치환의 시에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이란 구절에서 나왔다. 아마도 제목이 ‘깃발’이 아니었을까. 우리 반에는 키가 아주 훤칠한 친구들이 많이 있었다. 그 중에는 이유성, 김용만, 안승원, 김명전, 고송무, 김영철한정환, 박상돈, 김연응, 조남재, 황석환, 신창근, 김종호..등등 “쭉쭉 잘 빠진” 친구들이었다. 그 당시 나이에서는 학교 내에서 키가 주는 영향이 상당했다. 쉽게 말하면 대부분 비슷한 키의 친구들과 어울리게 된다는 뜻이다. 번호를 키의 순서로 정하고, 그 순서에 따라 자리를 잡으니까 더 그런 경향이 많았다. 그리고 간혹 예외는 있지만 키가 크면 힘도 세고, 외향적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키가 컸던 친구들을 기억하면 무언가 조금은 서먹서먹 할 때가 있다.

박상돈은 키고 크고 공부도  그것도 수학을 기가 막히게 잘했다. 역시 그는 서울공대 전기공학과에 합격을 하였다. 나에게는 거의 ‘이상형’이라고나 할까. 김연응, 김영철, 조남재, 신창근, 이윤기 등은 나와 같이 연세대로 갔는데 김연응과 김영철은 기계공학과, 나머지는 모두 전기공학과였다. 신창근은 대학시절 일찍 군대를 가서 헤어졌는데, 나중에 1973년과 1975년 두 번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 당시 그는 호남정유에 근무를 했는데 그 이후로 완전히 소식이 끊어지고 말았다.  해사에 간 최민은 연세대학 졸업식 때 우연히 만났는데, 7반의 송영근, 강교철, 이수열과 같이 사진도 찍었다. 고송무도 1975년에 정교성과 같이 만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그는 북구라파에서 활동한다고 들었는데, 나중에 타계 소식을 듣고 너무나 놀랐다.  조금 섭섭한 것은 송희성배희수, 둘 다 나의 재동국민학교 동창 들인데 그들과 별로 가까이 지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배희수는 연세대에서 본 적이 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송희성은 국민학교 6학년 때에도 같은 반이었는데, 고교 졸업 후에는 정말 한번도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동기회 총무, 신동훈
동기회 총무, 신동훈

신동훈은 요새 57 동기교우회의 총무로 맹활약을 해서 email로 나마 만나게 되었다. 정말 오랜 만이랄까. 또한 천주교신자임도 알게 되어 더욱 반가웠다. 이 친구는 그 이외에도 잊을 수가 없는 것이 이름이 그 당시 제일 잘 나가던 학원 영어 강사에 신동운 이라고 있어서 더 연관이 되어 기억이 되곤 한다. 이 친구 역시 pop song과 연관이 되는 것이 있다. Eddie ArnoldsSunrise Sunset과  I really don’t want you to know란 노래였는데 왜 이 노래와 신동훈이 같이 생각나게 되는 것일까? 그것이 확실하지 않다.

제일 꼬마인 김윤필은 대학졸업 후에 한번 김진수, 정양조 그룹과 같이 만난 적이 있었다. 비록 신사복차림이었지만 그 때도 어린애 같은 모습이었다. 나중에 목창수를 통해서 해병대 입대를 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놀라운 소식도 들었다. 정말 슬픈 소식이었다. 장난꾸러기 오수만은 역시 그가 장담한대로 서울치대, 치과의사,그리고  ‘중앙치과’. 윤중희는 대학 졸업 후에 가끔 만났는데 그때 그는 미국유학을 계획하고 있었다. 하지만 듣기에 그대로 국내에 남았다고 들었다. 목창수는 화학을 좋아했던 친구인데 서로 잊고 살다가 1987년경에 정말 우연히 Columbus, Ohio에서 만나게 되었다. 나는 그때 그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창수는 Ohio State University로 과학 교사단을 인솔하고 연수를 받으러 온 것이었다.  물론 내가 그곳에 살고 있는 것을 모르고 온 것인데 정말 우연히 나를 찾게 된 것이다. 그런 인연으로 목창수와는 가끔 연락이 되었고, 몇 년 전에 둘째 딸이 서울에 갔을 때 정말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았다. 그 신세를 갚을 길이 난감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남가주 동창회장, 권명국
남가주 동창회장, 권명국
이희진
이희진

권명국은 57회 동창회의 소식을 통해서 미국  LA지역(남가주)의 동창회 지부장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의 이름은 정말 오랜만에 듣게 된 것이다. 또 얼마 전에는 동기 회에서 명국의 딸이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늦게나마 email로 연락이 되었고, 또한  알고 보니 나와 같은 천주교 신자였다. 이종원은 1980년 초 나의 결혼식에도 왔었는데, 그 이후로 직접 연락이 되지를 않았다. 그런데 우연히 우진규를 통해서 월남의 싸이곤 (호지민 씨티)에 정착을 해서 산다고 들었다. 나의 옆자리에 앉았던 “키가 큰” 원병태는 고교 졸업직후 한번 편지를 받았는데, 고대 화학과에 “꽁지” 로 합격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대학졸업 후에 그를 다시 만났는데 그는 미국에 가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친척집에서 하는 주유소를 도와주러 간다고 했다.  그 당시 그를 따라 고려대학에 자주 가서 테니스를 치곤 했다. 그 이후로 연락이 완전히 끊어졌고 그를 알던 친구들도 그의 행방을 모르고 있었다. 차형순은 연세대에서 가끔 보곤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LA 지역으로 이민을 와 있었다. 아직도 business를 잘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희진정교성을 통해서 현재 캐나다의Calgary에 거주하면서  geological engineer로 일을 하는 것을 알았다. 가끔 정교성이 살고 있는 Toronto에 놀러 온다고 들었다.  나머지 반창(3학년 8반) 들은 애석하게 개인적으로 소식을 모르며, 궁금하기가 말할 수 없다. 혹시 타계라도 한 친구가 있는 것이나 아닐까?

신축중인 과학관, 1965년
신축중인 과학관, 1965년

이상 대강 기억에 나는 것을 적어 보았는데 이외에도 사실 더 있을 것이다. 아니면 이것이 현재 내 기억력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그 기억력이 더 앞으로 나아질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면 조금 슬퍼지기도 한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 긴장되고 살벌한 고교3학년의 생활이었지만 졸업 후에 대학으로 간다는 가벼운 흥분, 그러니까 성인이 되어 간다는 그런 기대감이 일년 내내 있었다. 담배를 마음대로 피울 수 있고, 다방, 술집, 연애,당구장, 영화..등등 우리를 기다리는 것들이 너무도 많아 보였다. 일본처럼 공식적인 성인식은 없다지만 우리에게는 고교 졸업이 바로 성인이 되는 시기였다. 그것들을 기대하며 열심히 공부를 한 때가 바로 고교 3학년 때였다. 특히 중앙고교가 우리에게 준 그 알찬 교육의 결실을 맺게 한 그때를 어찌 잊으랴. 우렁차게 중앙, 미래의 상징 과학관이 신축되는 것을 보며 졸업반을 보낸 우리들, 45년 동안 모두들 얼마나 민족교육의 요람인 중앙의 꿈을 실현하며 살았을까? 이미 타계한 친구들의 명복을 빌고, 남은 우리들 모두 건강하고 보람된 후년을 보내기를 기원해 본다.

 

중앙고등학교 졸업 앨범, 1966

안낙영, 오성준, 최종인 선배..

꽤 오랜만에 추억해 보는 이 세 이름들: 안낙영, 오성준, 최종인. 우선 이 세 사람은 나의 중앙고교 선배들이다. 안 선배는 53회, 오,최 선배는 모두 54회 졸업생. 내가 57회,그러니까 나의 3년, 4년 선배들이다. 그리고, 모두 연세대 전기공학과에서 같이 공부한 선배들이라는 것이다. 1968년부터 1971년 졸업할 때까지 같은 학년, 같은 과에서 공부를 한 것이다. 이 중에서도 나는 오성준 선배와는 다른 선배에 비해서 더 많은 추억이 있다. 그것을 소중하게 추억하고 싶다.

연세대학 2학년이 시작되던 1968년.. 나는 1966년에 입학했지만 1학년 중간에 1년 휴학을 해서 1967년 가을에 복학을 했었다. 입학 때와 달리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재미있는 것이 공부란 것도 그때 알았다. 1학년 1학기 때의 below average를 한 학기 만에 완전히 만회를 해서 이곳의 표현으로 dean’s list를 넘어서게 되었고 심지어(?)는 쥐꼬리만한 장학금까지 받게 되었다. 이때의 느낌은.. 아.. 열심히 하면 꼭 무슨 좋은 결과와 보답이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1968년 초, 나의 생일날 북괴의 김신조 일당이 박정희 “목 따러” 온 후에, 2학년이 되면서 대거 복학생들이 들어오게 되었다. 대부분 군대를 마치고 온 3년 정도 선배들이었다. 그 중에 중앙고 출신이 3명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이 세 선배들이었다. 그때 재학생으로 중앙고 출신이 나까지 5명이 이미 있었다. 나(이경우), 이윤기, 박창희, 김태일, 이상일 등등이었다. 이중 나와 이윤기는 중앙 57회였고, 나머지는 모두 58회 출신이었다. 그래서 중앙고 출신이 8명이나 된 것이다. 이 정도면 과에서 단일 고교로써는 굉장한 숫자였다. 과대표를 뽑는 선거 같은 것이 있으면 그 이(利)점은 상당할 정도였다.

안낙영, 오성준, 최종인 선배들, 서울 비원에서 1969년
1969년 비원에서, 왼쪽부터 안낙영, 최종인, 박창희, 김진환, 오성준

이 세 명의 선배들은 참 쾌활하고, 농담 잘하고, 다정한 선배들이었다. 그 전까지는 나는 선배라고 하면 우선 겁을 내곤 했다. 고등학교 때 사실 그렇게 교육을 받아서 그런가.. 거의 군대식으로.. 일년 선배라도 길에서 보면 경례를 하곤 했으니까. 잘못해서 반말이라도 하는 날이면 그때는 세상의 끝이라고나 할까.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런 환경들이 다 일제시대의 학교전통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하지만 이때는 처음으로 선배들의 ‘포근함’을 만끽하게 된 것이다. 물론 반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로 농담을 할 정도가 된 것이다.

안낙영 선배.. 노란 반팔 셔츠를 좋아한 사나이.. 짓궂고, 야한 농담을 신선하게 하고, 누나 있으면 소개하라는 농담을 즐기는 여유에 반해서 공부는 정말 심각하게 하는 학구파다. 강사나 교수에게 아주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날리는 자랑스러운 선배였다. 최종인 선배.. 정말 구수하고 다정한 얼굴의 선배다. 말도 그렇다. 그런 것에 비해서 말 수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사진이 취미라는 것도 알았다. 연영회라는 연대 사진 서클에서 새 회원을 모집해서 양건주(화공과)와 갔는데 거기서 만났다. 그때 각자 돌아가며 자기를 소개 하는데 최 선배는 군대에서 사진에 대한 경험이 많다고 말을 했었다. 그 당시 연영회의 모임은 갈월동에 있는 연영회 간부학생의 집에서 있었는데, 그때 한창 인기가 있던 그룹사운드 까지 출연을 할 정도로 대 성황인 모임이었다.

Amigos 1968년 봄, 관악산에서
1968년 봄 Amigos 가 관악산으로 놀러갔다

그리고, 오성준 선배.. 다른 선배에 비해서 더 많은 추억을 가지고 있다. 별명도 있었다. 오박사..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만물박사처럼 참 여러 가지를 많이도 알고 있었으니까. 봄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안 되어서 나는 몇 명의 고정적인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는데, 양건주, 이윤기, 김진환, 김태일, 박창희, 그리고 김철수 등등 이었다. 이중에 양건주만 화공과였고, 나머지는 모두 우리 과였다. 출신도 다양한데, 양건주, 이윤기는 나의 중앙고 동기이고, 김태일, 박창희는 중앙고 1년 후배, 김진환은 전라도에서 온 유학생, 김철수는 강원도에서 온 유학생이었다. 어쩌다 이들과 어울리게 되었는데 지금도 생각나는 즐거운 기억 중에는 수업이 끝나면 연대입구에 있던 빵집에서 가위바위보를 해서 빵 값을 지불하곤 하던 것이었다. 대부분 다방에서 죽치곤 하던 시절, 고교생처럼 웬 빵집.. 그래서 더 재미가 있었나 보다. 그러다가 날씨가 좋은 봄에 관악산으로 등산을 가기도 했다. 그때 찍은 사진 뒤에는 날짜와 함께 Amigo라는 이름이 있었다. 그것이 Spanish로 friend(남성)란 뜻인데 그 당시 모임의 이름이 없어서 우선 그렇게 붙인 것 같았다. Club Amigo..

오성준 선배와 양건주의 약식 씨름, 1969년 비원에서
오성준 선배와 양건주의 약식 씨름: 오선배가 이겼다, 1969년 비원에서

하지만 이 클럽엔 “치명적”, 결정적인 단점이 있었다. 멤버가 모조리 “우중충하고 쾌쾌한” 냄새 나는 남자들 뿐인 것이다. 조금은 하얗고 부드러운 듯한 여자들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는 꿈같은 이야기였다. 하나같이 여자친구 하나 없는 그야말로 숫총각 뿐이었으니까. 어떤 친구들은 숫제 여자에게 관심도 없었다. 아직도 미성년인 것처럼.. 그러다가 오 선배에게 하소연을 하게 되었는데, 뜻밖에도 쾌히 승낙을 하는 것이 아닌가? 오 선배는 그 정도로 다정하였다. 그러더니 나와 이윤기를 데리고 연세대 뒤쪽으로 버스를 타고 가서 어느 아담한 양옥집으로 갔다. 알고 보니 오 선배의 공군복무시절 친구라는 사람의 집이었다. 그 집에 이화여대생 딸이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 여대생을 소개시켜주러 간 것이다. 성격이 이랬다. 아주 화끈하게 일을 즉시로 해 치우는 그런..

그날 그 집에 그 여대생은 없었다. 그래서 나중에 연락처를 받아서 연락을 하게 되었는데, 그 여대생의 이름은 “김갑귀” 씨였다. 이름이 하도 요상해서 물어보니 갑오년에 귀하게 났다고 해서 그렇게 했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우리는 김갑귀씨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 그런 인연으로 오성준 선배는 우리들 클럽의 활동에 ‘고문’격으로 가끔 조언을 하곤 했다. 선배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여대생회원 아이디어는 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김갑귀 씨가 열심히 자기의 classmates들을 소개 시켜주긴 했지만 글쎄.. 어딘가 우리들하고 맞지를 않았다. 키가 너무 크지 않으면 얼굴이 그렇다던가.. 그런 것이었다. 한마디로 우리들이 더 어려 보일 정도였다. 이것을 김갑귀 씨가 알고 아주 섭섭해 했다. 김갑귀 씨는 조금 어리광 끼가 섞인듯한 표정과 다정함이 있었다. 나는 그녀의 그런 면이 참 좋았다.

그녀는 역시 정이 있었다. 어쩌면 우리 그룹에 대한 인상이 좋았는지도.. 곧 바로 자기의 제일 친한 친구를 소개시켜 주었다. 그 친구가 바로 이선화 씨였다. 선화공주를 연상시키는 그런 간호사 지망생이었다. 그녀는 사실 김갑귀 씨와 창덕여고 동창이었다. 김갑귀 씨의 개인적인 친구였던 것이다. 그래서 곧바로 선화씨의 classmates로 대상이 바뀌었고, 지난번의 실패를 거듭하지 않으려고 이번에는 조금 계획적으로 일을 진행하였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뒤에 “연호회”라고 하는 남녀 대학생 클럽이었다. 목적은 단 한가지: 친목도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인연으로 오 선배는 우리와 아주 친한 선후배관계를 유지하였다.

졸업 후에 오 선배는 곧바로 대학원 진학을 했다. 나머지 선배들은 연락이 끊기고, 나는 미국으로 오게 되어서 이 선배들과는 사실상 관계가 끊어진 셈이다. 아주 나중에 오성준 선배의 소식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듣게 되었다. 역시 예상한 대로 직장에서 맹활약을 한다는 것이었다. 안낙영 선배도 거의 우연히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그때는 내가 Ohio State University에 다닐 당시, 어떤 한국유학생하나가 Old Dominion University에서 transfer한 사람이었다. 서로 우연히 얘기 하던 중에 안낙영 선배가 그곳에서 공부를 하고 이어 직장생활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 바로 전화를 해서 서로 소식을 나누었다. 간호사인 아내가 있다고 들었다. 아마도 그쪽에서 계속 살고 계시리라 믿는다. 최종인 선배는 완전한 연락 두절.. 다른 선배를 만나기 전에는 알 길이 없을 듯 하다. 그래서 이 최종인 선배는 조금은 전설적인 이미지로 나의 머리에 남는다. 언젠가 한번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중앙고교의 추억(2)

아.. 나의 모교, 서울 계동1번지 중앙중고등학교.. 너를 어찌 꿈엔들 잊으랴. 죽을 때까지 못 잊을 것이고, 아마도 죽어서도 (영생을 믿는다면) 못 잊을 것이다. 이상하게도 그때의 추억들은 나이가 들면서 더욱 선명 하게 되었다.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이것이 인간들이 인생을 정리하면서 하게 되는 자연스러운 것들일까.

오늘은 고등학교 2학년 때를 생각해 보고 싶다. 그러니까 1964년인가. 그때의 신문들을 다시 볼 수 있다면, 그때의 한국의 정치,사회 등등을 같이 엮을 수 있으련만.. 그때는 박정희 시대였다. 100% 말이다. 그가 하고자 하는 일, 하고 싶은 일들은 사실 $$만 있다면 할 수 있는 시대였다. 그가 제일 목말라 했던 것은 역시, 경제개발.. 그가 제일 주목한 것은 역시 일본.. 그가 기댈 수 있는, 그런대로 편했던 나라다. 폐허에서 경제대국으로 발돋움을 하려는 그런 시대였다. 그런 배경에서 한일회담이 거듭되고, 야당은 그것을 반대하고.. 데모로 이어지게 되는 그런 시기. 중화학 산업으로 시작이 되어서 정부는 그것을 제일 큰 업적으로 홍보를 하던 때. 1964년.. 김승옥의 “서울, 1964년“이란 단편이 월간잡지 신동아 新東亞에 실리던 그런 배경이었다.

남영동에서 본 남산
남영동에서 본 남산

나는 1년도 못되게 짧게 살았던 서울도심지 회현동에서 그런대로 조금 조용하지만 교통이 편리한 위치에 있었던 용산구 남영동으로 이사를 갔다. 금성극장에서 50m 도 안 되는 거리, 뒤쪽으론 미8군 사령부가 담 넘어 있었고 남산이 그 뒤로 가까이 보이던 곳. 2층집인데 일층은 주인의 가게가 있었고 2층은 우리가 모두 차지했다. 옥상도 있어서 나는 밤만 되면 이곳에 올라와 내가 만든 망원경으로 남산 팔각정을 보기도 했다. 너무나 나에겐 좋은 주거환경이었다. 거기서 나는 중앙고 2,3학년을 보냈다. 집에서 바로 코앞, 금성극장 앞에서 버스를 타면 재동 신작로까지 갈 수 있었다. 그리고 계동골목을 통해서, 휘문, 대동중고등학교를 지나서 숨이 목까지 차오르면 막다른 골목에 majestic 한 모습의 웅장한 석조전 모교가 우리를 맞는다. 그 당시 나는 지각은 한번도 한 적이 없었다. 반대로 거의 매일 첫 번째로 가곤 했다. 늘 지각하는 애들의 얘기를 들으면 매일 그 긴 계동골목을 뛴다고 들었다. 그래서 휘문 애들이 부러웠다고.. 바로 골목의 입구에 있었으니까.

박영세 선생님
박영세 선생님

고2가 되면서 반은 본관 뒤 왼쪽 벽돌건물로 옮겨졌다. 2학년 6반이었다. 담임은 기하를 가르치는 새로 부임한 박영세 선생님. 고려대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중앙출신인지 아닌지는 아직도 모른다. 나의 고2시절은 조금 특징이 있다. 제일 과외활동적인, 기억에 남아야 될 일이 많았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맞지 않게 기억이 제일 희미하게 된 학년이었다. 왜 그런지 나도 의아스럽다. 사진이 별로 없어서 그런가, 아니면 무엇인가?

먼저 추억으로 남기고 싶은 것이 있다. 좋은 추억이 아니다. 나의 친구였던 이경증에 관한 것이다. 이름도 비슷하고 중2때부터 친했던 다정스런 친구. 그가 중3때부터 조금 사춘기적 반항을 시작한 듯 했는데 그것이 결국 새로 온 담임 박영세 선생님으로 끝이 나 버렸다. 확실히 무슨 사건이 발단이 되었는지는 모른다. 결국 박선생님이 ‘퇴학’을 시킨 결과가 되어 버렸다. 나중에 경증이와 대학 이후에 재회하면서 그때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것 조차 지금 기억에서 희미해져 버렸다. 경증아, 이 글을 읽으면 다시 한번 들을 수 있게 해다오. 그 이후 나는 박선생에 대한 인상이 별로 좋지 않게 되었다.

친구 김호룡
친구 김호룡

First thing, first.. SECC 이것을 빼 놓고는 고2에 대한 추억을 말할 수가 없다. 우리들은 그저 에쓰이씨씨 라고 불렀다. Student English Conversation Club의 약자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이 안 난다. 하지만 고2때의 일이었다. 중3때 알던 김호룡이 와서 영어회화클럽이 있으니 같이 하자고 제의를 해 왔다. 나는 그 당시 고1때의 외로움을 만회하려고 무엇인가 과외활동을 해야겠다고 ‘결심’을 했던 때였다. 타이밍이 아주 잘 맞았다. 그래서 따라가 보니 이건 무슨 인연이란 말인가. 그 club이 모이는 곳이 바로 우리 집에서 아주 가까운 가정집이었다. 우리 집 옥상에서 거의 보일 듯 말듯한 위치가 아닌가?

그곳에 가 보니 이미 학생 몇 명이 모여서 영어회화를 배우고 있었다. 그리고 웬 ‘어른’들 몇 명 있었고, 회원으로는 김호룡, 이종원, 우진규, 이상기, 한형업.. 등등이 우선 생각이 난다. 그러니까 그때는club이 크려고 하던 그런 초창기에 속했다. 어른들은 조금 나이가 들어 보였던 ‘신광수’선생, 그리고 대학생처럼 젊어 보이는 영어의 귀재, 이름이 생각이 안 난다. 그리고 잡일을 도와 준다는 신선생의 동생이라는 남자. 이렇게 어른 세 명이 이 클럽을 이끌고 있었다. 물론 회비는 걷었지만 얼마 되지를 않았다. 그에 비해서 ‘서비스’는 거기에 맞지 않게 좋은 편이었다. 우리가 내는 회비는 턱도 없이 모자란 듯한 기분이었다.

친구 이종원
친구 이종원

그래서 농담으로 이 사람들, 혹시 북괴 간첩이 아니냐는 말도 하곤 했다. 몇 명 되지 않았지만 가끔 극장도 데리고 갔다고 했다 (나는 못 가봤지만) 일주일에 몇 번이나 모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정기적으로 모였다. 그리고 영어회화를 배웠다. 그 신선생이란 분은 미국과 영어문화의 신봉자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미국 것은 무조건 좋다는 식이었고, 그러니까 영어를 절대적으로 잘 해야 한다는 식이었다. 그의 영어회화 실력은 사실 대단하질 못했지만. 다른 선생 (대학생 같은) 은 달랐다. 완전히 미국방송 AFKN에 심취해서 라디오를 귀에 대고 살았다. 그만큼 그의 영어 회화실력은 대단했다. 사실 나는 영어회화에 대한 관심보다는 새 친구들을 사귄다는데 더 관심을 두었다. 그래서 후일에 계속 친구로 남게 되는 김호룡, 우진규, 이종원, 등등과 그곳에서 어울리게 되었고 고1때와 같은 ‘외로움’을 어느 정도 없앨 수 있었다.

하지만 이 클럽은 나중에 목적이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마구잡이로 회원을 늘리려고 했고 결과적으로 다른 학교 학생들 까지 가입하기에 이르렀다. 알고 보니 그 신선생이란 사람은 아마도 이곳을 통해서 돈을 많이 벌려고 한 모양이었다. 결국 근처의 빌딩으로 이사를 가서 거기서는 일반인들에게 영어회화를 가르치기에 이르렀다. 아직도 기억이 잘 안 나는 것은 그 모임이 어떻게 끝이 났나 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고3이 되기 전에 그곳에서 우리들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때 우리들은 USIS(미국공보원)에서 모이는 대학생들 영어회화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 당시 영어회화를 얼마나 배웠는지는 사실 미지수지만 나에게는 보람 있던 과외활동이었다. SECC에서 조금은 더 알게 된 사람들, 한형업, 주응권, 김희태, 호봉일 등등이 생각난다.

고2 시절에서 꼭 생각나는 행사가 중앙고의 특별한 행사인 ‘토요코스‘라는 것이다. 왜 이름을 토요코스라고 했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토요일에 열리니까 그런 것인가. 그러면, 코스라는 이름은? 먼 후일 Ohio State University에서 중앙후배들로 부터 그 행사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고 듣고 너무나 반가웠다. 이 토요코스는 간단히 말해서 지금의 summer camp같은 것을 학기 중 토요일 저녁부터 일요일 오전까지 학교에서 하는 고등학교 2학년 전체가 참가하는 캠프 행사였다. 그 당시도 참 신선하고, 재미있었지만 이렇게 까지 머릿속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줄은 미쳐 몰랐다. 그렇게 대학진학 6개년 계획까지 세워서 입시공부를 강조하던 최복현 교장선생님께서 이렇게 교육의 여러 가지 면을 다 생각하신 것을 보면 지금도 머리가 숙여진다.

그 당시의 경제여건으로 봐서 지금은 흔한 단체 camping같은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 것을 하려면 각자가 알아서 친구들과 해야 하고 캠핑장비가 없어서 거의 모두 암시장에서 군화, 군용장비를 사야만 했다. 그런 것들은 남자들만이 그런대로 할 수 있는 취미였다. 그런 것을 학교단위로 한 것은 지금 생각하면 역시.. 하고 감탄을 하게 된다. 토요일 방과 후, 오후부터 우리 2학년 6반 학생들은 다시 학교로 간단한 야영장비를 가지고 모였다. 거의 모두 군용장비였다. 밥을 해 먹는 ‘항고’가 필수였다. 중앙고 캠퍼스는 그때나 지금이나 너무나 아름다웠다. 비원의 담을 끼고 밖에서 밥을 해 먹었다. 물론 코스담당교사인 나까무라 주길준 선생님의 지도하게 질서 정연하게 진행이 된다. 등산, 캠핑을 해본 사람들은 큰 문제가 없었지만 그렇지 않은 학생들은 아마도 신기한 경험을 했으리라. 나도 못해본 축에 속해서 아주 재미있었다.

주길준 교련 선생님
주길준 교련 선생님

어둠이 깔린 교정.. 어둠 속에 보이는 캠퍼스는 다소 신비스럽게도 보였다. 처음 그런 광경을 접한 것이다. 교련조회 비슷한 열병식도 했고, 본관 앞 잔디에 모두 모여서 열 띈 토론을 하기도 했다. 그런 것을 주길준 선생님께서 능숙하게 지도하셨다. 그렇게 짧은 시간들이 그때는 참 오랜 시간으로 느껴진 것은 지루해서가 아니라 모두 생소한 경험을 축적하느라 body clock이 천천히 간 것일 것이다. 교정에서 camping을 하면 이상적이겠지만 실제적인 (안전)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본관 다락방 (도서관 자리) 에서 군용침대를 놓고 잠을 잤다. 물론 개구쟁이 친구들은 잠을 제대로 잘 리가 없었지만 그런 소란스러움은 잠시 후 주길준선생님의 군대스타일 취침 checkup으로 끝이 났다. 자기 전에 모두 침대 옆에 서서 취침 전 점검을 받는 것이다. 그것도 참 재미있던 추억이었다.

저녁때 잠깐 보니 1층 숙직실의 노~오란 장판 위에서 주길준 선생님과 우리 반 담임 박영세 선생님이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그 광경이 너무나 정겨워 보였다. 다음날 아침에는 특별한 행사는 없었고 오전 중에 집으로 돌아왔다. 이 행사는 이렇게 간단하고 짧았지만 그렇게 신선하고 ‘탈’ 입시적인 기억은 절대로 나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을 듯 하다. 이것과 연관해서 생각나는 사람은: 이종진 (별세), 김진수. 이종진은 밤에 잠을 제대로 안 자고 소란스럽게 해서 기억이 나고, 김진수는 항상 나의 옆에 있던 친구라 생각이 난다.

수학여행차 서울역에서 모였다, 1964년 가을
수학여행차 서울역에서 모였다, 1964년 가을

고2때의 다른 추억은 역시 그 흔한 수학여행이다. 이것은 물론 다른 학교들도 다 하는 것이라 특별한 것은 없다. 하지만 역시 이런 것은 빠지면 후회하게 되는 그런 행사일 것이다. 지금도 추억을 하면 아름다우니까. 그 당시의 표준코스는 역시 그런대로 시설이 되어있던 신라의 고도 경주였다. 교과서에서 귀가 따갑게 듣고 들었던 곳이라 사실 호기심도 많이 있었다. 특히 석굴암과 불국사.. 얼마나 많이 국어와 국사시간에 들었던가. 기억에 아마도 2박 3일의 여행이 아니었을까? 그 당시 학급일지를 보면 확실하겠지만.. 기억이 나는 동창들은 없을까? 구체적으로 언제였는지? 아마도 10월 정도였지 않을까?

그 당시는 고속도로가 생기기 전이라 모두 서울역에서 시커먼 기차를 탔다. 그 때의 사진이 졸업앨범에 남아있다. 아마도 하루 종일 걸려서 경주에 갔을 것이다. 여관에서 식사도 하고 잠을 잤는데, 역시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학교에서 매일 만나던 친구들이었지만 학교 밖에서 며칠 같이 잠도 자고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역시 신선하다고 할까?

증기엔진 기차로 경주까지..1964년
증기엔진 기차로 경주까지..1964년

나의 추억은 서울역에서 Steam Engine, (화통)기차를 타면서 시작되어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여행까지 하나도 빠지는 것이 없다. 갈 때는 기대감으로 들떠서 유행가를 불렀는데, 웅변반의 최고변사 김흥국의 선창으로 맨발의 청춘을 악을 쓰며 불렀다. 그 당시는 신성일과 엄앵란의 콤비가 나오는 영화가 제일 인기였고 이 맨발의 청춘 도 그 중의 하나였다. 최희준씨가 부른 주제곡은 어른이나 아이들 모두 따라 불렀다.

그 고속도로 이전시대에는 완행열차가 제일 손쉬운 교통수단이었는데, 글자 그대로 느렸다. 급행이 있다고 하지만 열차 자체가 느렸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늦게 가는 기차에서 보이는 농촌의 풍경이 너무 정겨웠다. 경주에서는 아주 깨끗한 여관에서 짐을 풀었는데, 그 당시는 그것이 최고의 숙박시설이었다. 경주에 호텔이란 것이 없었을 것이고 있다고 해도 그림의 떡이었을 것이다.

이번의 여행에서는 고1때와 같은 외로움은 없었다. 이종원, 김호룡 같은 친구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우진규도 있었는데 이번에는 다른 애들과 어울리는 바람에 우리와 같이 사진도 못 찍었다. 그때 나는 사진기가 없었지만 다행히 그곳에는 사진사들이 많았다. 비록 돈을 주고 찍어준다고 하지만 참 고마운 일이었다. 그것조차 없었으면 그때의 기억은 완전히 머릿속에만 있었을 것이다. 그때의 사진을 보니 이종원, 김호룡은 물론 같이 찍었고 다른 친구들도 그 속에 있었다.

석가탑 앞에서 찍은 사진은 사진사가 찍은 것이 아니었다. 우리들 중에서 누가 찍었다.물론 이 사진 속에 그는 없었겠지만. 이 속에는 왼쪽부터: 김선일, 장맹열, 심인섭, 필자 이경우, 그리고 이종원이 다보탑 앞에서 포즈를 하고 있다. 그때 우리들은 그룹을 지어서 행동을 했는데 이들은 분명히 우리그룹에 있었다. 이중에 궁금한 것은 김선일과 심인섭이다. 장맹열은 나중에 교수가 되었다고 들었는데, 이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특히 심인섭, 나처럼 항상 말이 없으나 친절한 사람, 학교잡지(계우)에 ‘실비야’라는 멋진 시도 실었다. 사진사가 찍은 사진에는 김호룡이 있다.그는 1995년경에 타계를 했다. 나와 참 친한 친구였는데 너무도 일찍 하늘나라로 간 것이다. 그 사실을 나는 5년이나 지나서 알게 되었고 그때의 충격과 허탈감, 그리고 외로움은 지금도 여전하다.

경주 불국사 다보탑에서 호룡이, 종원이와..
경주 불국사 다보탑에서 호룡이, 종원이와..

수학여행의 모습들은 역시 졸업앨범을 봐야 했는데 불행히도 우리 반을 비롯한 많은 반 단체사진이 얼굴을 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으로 인쇄가 되었다(사진 탓인지, 아니면 인쇄 탓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내가 관심이 가는 사진은 역시 우리가 타고 갔을 그 증기엔진기차(그때는 화통기차라고 불렀다) 기관차, 서울역 앞에 집합한 우리들의 뒷모습.. 등등이었다. 그때 카메라를 가지고 있었던 더 잘살던 동창들이 있으면 그때의 사진을 모두에게 공개를 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새벽같이 일어나 단체로 토함산을 올라 동해로 떠오르는 해를 보고 (날씨가 조금 흐렸지 않았나?) 석굴암을 보았다. 그때 나는 화장실이 급해서 발을 동동 굴렀던 기억이 난다. 그러니까 관광개발이 거의 안 되었던 시절이라 화장실이 쉽게 띌 리가 없었던 것이다. 밤에는 한방에 모두 모여서 카드놀이도 하면서 학급친구들의 다른 면을 볼 수 있어서 모든 것이 신기롭기까지 했다. 다른 방에서는 베게 싸움도 했다고 들었다.

일정을 모두 마치고 귀향열차를 타고 또 모두들 미친 듯이 목청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고 어떤 그룹은 춤을 추며 열차는 밤을 달렸다. 그때 놀란 것은 대구역의 거대함.. 서울역보다 더 큰 것처럼 느껴졌다. 깜깜한 시골을 달리던 기차가 세상에서 제일 밝게 느껴지는 끝없는 불빛 속을 뚫고 달렸는데 그곳이 바로 대구였다. 물론 서울보다야 작았겠지만 나에게는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정말 찬란하게 빛나던 대구시, 대구역.. 그 인상이 아직도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대구에서 잠깐 내려서 그룹별로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식사를 같이 하고 뿔뿔이 헤어져서 대구 도심지를 해 메었다. 나는 이종원과 같이 다니다가 어느 가게에 들어가서 온도계를 사가지고 나왔다. 왜 온도계를 그곳에서 샀을까? 참, 우습기도 하다. 대구의 기념품이 온도계가 된 것이다. 기차 속의 광경은 볼만 했는데, 한쪽에서 미친 듯이 밤새 춤을 추고 있고, 기차 천정에 붙어있는 짐을 싣는 곳은 간이 침대로 둔갑이 되기도 했다. 기차는 달리고 달려 아침에 서울역에 도착했다. 우리들은 자기도 하고 놀기도 하며 왔지만 완전히 파김치가 되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은 물론 학교수업이 없었고.. 하루 집에서 논 셈이 되었다. 이 여행은 지금 생각해도 안 갔으면 일생 후회를 할 만한 그런 유익하고 추억에 남는 여행이 되었다.

불국사 석가탑에서 김선일,장맹열,심인섭,이종원과 1964년
불국사 석가탑에서 김선일,장맹열,심인섭,이종원과 1964년

잊을 수 없는 것이 또 있다. 고2때의 소풍이다. 보통 소풍..하면 대개 경치가 그런대로 좋은 곳이나 유적지 같은 데로 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때의 소풍은 달랐다. 김포 근처에 있는(맞나?) 대한민국 공군 제11전투비행단.. 아마도 이런 곳으로 소풍을 간 학교는 없을 듯하다. 그런데 이건 누구의 idea였던가? 그게 조금 궁금하다. 아마도 역시 우리의 자랑인 “수위모자” 최복현 교장선생님이 아닐까? 그때 비행단에서는 우리들을 트럭으로 싣고 그곳으로 안내를 했다. 물론 경치 좋은 곳에 모여 앉아서 소풍점심은 못 먹었어도 우리들은 모두 기쁜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곳의 시설을 완전히 우리들에게 공개를 한 것이다. 전투기의 조종석에도 앉아보게도 했다. 전투기는.. 그 유명한 F-86 Saber였다. 그것들이 우리의 앞에 있었고, 우리들 앞에서 뜨고, 착륙하고.. 정말 멋이 있었다. 요새 같았으면 기념 사진들이 요란하게 남아있으련만 아깝게도 그때의 사진이 한 장도 없다. 어떤 동창 중에는 아마도 남아있는 것이 있을지도. 그때 돌아오는 트럭 위에서 OB 맥주를 병 채로 신나게 마셔대던 아이들도 있었다. 아~~ 추억이여.

박영세 담임 선생님, 세월이 이렇게 흘렀어도 정이 별로 안 가는 것은 내가 좀 심했을까? 왜 그럴까? 물론 친구 이경증을 퇴학시킨 것도 이유가 될 듯하다. 2학기 중에 내가 조금 방심하면서 나의 시험성적이 떨어졌는데, 그것 때문에 나는 교무실로 불려 갔다. 나는 질책과 더불어 성적을 올릴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했는데, 그런 것은 전혀 없고, 기가 막힌 표정으로 시간을 보낸 뒤, 가정방문을 꼭 할 것이라고 ‘으름장’ 비슷한 말을 했다. 그저 내가 불쌍하다는 표정만 보았는데 나는 기분이 아주 나빴다. 그것과 더불어 나는 박선생님의 ‘폭력성’에 놀랐다. 물론 그 당시 선생님들은 학생을 자주 때리는 편이었다. 하지만 정도가 있었다. 사랑의 매를 들었는지, 증오심으로 개 패듯 하는 우리들이 보면 알 수 있었다. 그 ‘사건’은 하루 공부가 다 끝나고 홈룸 시간이 있었다. 그때 아마 반장이 정귀영이었는데, 홈룸 시간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박선생님이 들어오더니 다짜고짜로 정귀영을 패기 시작하였다. 나는 선생님이 학생을 그렇게 경고도 없이, 설명도 없이 모든 학생 앞에서 개 패듯이 때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때의 기준으로 보아도 그것은 완전히 일방적인 폭력이었다. 그 이유도 잘 모른다. 그런 선생님이었다. 박영세 담임선생님은.. 절대로 은사님으로 존경을 할 수가 없다.

정귀영, I love you more.. 1964년
정귀영, I love you more.. 1964년

정귀영은 그렇게 해서 기억에 남았지만, 기억을 할 이유가 한가지 더 있었다. 그때 그 나이 정도면 대부분 미국(간혹 영국, Beatles, Cliff Richard같은)의 pop song에 심취하기 마련이다. 우리들도 예외 없이 마찬가지로 그랬다. 그때 Top Tune Show라고 하는 동아방송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었다. 최동욱씨가 disc jockey로 미국 pop song을 소개하면서 맹활약을 할 때였다. 프로그램 이름이 아마도 <> 이었던가? 그리고 그때 히트 곡 중에는 Al MartinoI love you more (and more everyday)란 것이 있었다. 나도 정말 좋아하는 곡이었다. 하루는 정귀영이 그 노래에 거의 미쳤는지, 수업시간 사이에 교실 뒤편 구석에 벽을 향해 서서 완전히 성악가처럼 열창을 하고 있었다. 한번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계속 부르는 것이었다. 아주 멋있게 잘도 불렀다. 그 광경이 거의 45년이 지난 지금도 눈에 아주 선~하다. 정귀영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I Love You More and More Everyday – Al Martino

교실 안에서 일어난 조금 심한 싸움을 기억한다. 쉬는 시간에 갑자기 최상철과 송관헌이 싸움을 했는데, 이건 흔히 보는 주먹싸움이 아니었다. 송관헌이 “이노무새끼 주겨버린다!” 하면서 칼(jackknife)을 들고 최상철에게 다가간 것이다. 아마도 최상철이 송관헌을 괴롭혔던 모양이다. 그런대로 조용하게 행동을 하던 그가 칼을 들었던 것은 보통 사건이 아닌 것이다. 주먹깨나 쓰던 최상철도 조금 얼어붙은 표정이었지만 체면이 있는지 곧바로 펜촉을 들고 맞섰다. 곧바로 선생님이 오시고 해서 무마가 되었다. 그 장면이 아직도 눈에 생생하다. 무엇이 송관헌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조용하게 지내던 사람이 갑자기 독기가 나면 더 무섭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최상철은 자타가 공인하는 ‘주먹’이었지만 송관헌은 그런 면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고2때 나의 주변에 앉았던 친구들을 생각한다. 김진수, 박필상, 김태영, 장맹열, 우근영..등등이 떠오른다. 김진수는 고3때에도 내 앞에 앉았다. 대학 졸업 후에 한번 만난 적이 있었다. 그가 해군에 있을 때였다. 그때 아마도 정양조, 김윤필 등도 같이 만났던 기억이다. 김태영은 1973년경 중앙청으로 여권을 신청하러 갔을 때 그곳에서 잠깐 만났다. 박필상, 졸업 후에 한번도 못 보았다. 오래 전 동창 박우윤이 보내준 1989년 57회 연말모임의 사진을 보니 그가 보였다. 반가웠다. 장맹열.. 중3때 같은 반을 했다. 항상 1등이었던 진짜 모범적인 학생이었다. 그는 지휘, 통솔력도 뛰어났다. 홈룸 시간이면 앞에 나가서 말을 조목조목 잘도 했다. 나는 그것이 정말 부러웠다. 그는 주소록을 보니 현재 경남대 경제과 교수로 있다. 그곳은 역시 그에게 적합한 곳이 아닌가?

중앙고2 시절은 나에겐 황금기였다. 분에 넘치는 과외활동으로 학교성적에는 많은 스트레스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electronics에 대한 것에 눈을 뜨고 그것을 나의 전공으로 굳히는 계기를 만들었다. 영어회화클럽으로 필수적인 영어회화를 배울 수도 있었고, 여름방학에는 시원한 마루바닥에 누워서 삼국지를 즐기는 여유도 있었고, 문화방송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에 심취하면서 팝송에 눈을 뜨고, 새로 복간된 월간지 신동아 를 과감히 구독하며 사회적인 문제에 눈을 뜨기도 했다. 일기를 계속 쓰면서 문득, 처음으로 이대로 일기가 계속되면서 나는 언젠가 죽는다..하는 인간수명의 한계도 그때 느꼈다. 이러한 모든 사치스러운 것들은 고3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입시준비로 뒤로 밀리고 만다. 선배들이 항상 그렇게 말했다.. 고2때가 가장 기억에 남을 것이라고.. 과연 그렇다.

 

중앙고등학교 졸업 앨범, 1966

중앙고교의 추억(1)

한참 오래 전부터 내가 다닌 서울중앙고등학교에 대한 추억을 글로 쓰고 싶었다. 중앙중학교의 추억은 전에 조금 언급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느낀 것 중의 하나는 생각과 글의 차이였다. 생각을 글로 적는 것이 대개 어렵다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라는 것, 하지만 일단 생각이 글로 남게 되면 그것이 또 생각 자체에 영향을 준다는 것 등이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이 글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사실적인 것에 있다. 물론 느낌이나 100% 주관적인 평이 곁들임은 할 수가 없겠지만.

나는 서울계동1번지에 위치한 역사 깊은 사립명문학교인 중앙학교(중,고등)를 1960년부터 1966년까지 다니고 졸업을 하였다. 그러니까 나의 인생의 바탕을 형성한 사춘기를 대부분 이곳에서 보냈던 것이다. 이것은 지금 생각하면 참 의미가 있는 사실이다. 그곳의 지리적 환경, 은사님들의 성품, 주변 친구나 동창생들의 영향.. 같은 것을 생각하면 참 그곳이 그렇게 의미 있고 중요할 수가 없다.

오늘은 고등학교 1학년을 추억할까..1963년.. 5.16 군사혁명 2년 후 모든 것들은 국가재건의 슬로건으로 행해졌다. 그 나이에 우리들은 정말 국가재건을 믿었다. 벌써 무언가 달라지고 좋아짐을 조금씩 느꼈으니까. 그런 시대에 고등학생이 되었다는 것 자체에 보람과 가슴 설렘이 있었다.

김대붕 선생님
김대붕 담임 선생님, 1962년 중학교 앨범에서

나는 1학년 2반에 속했고, 담임은 음악선생님이신 김대붕 선생님이셨다. 김선생님은 이미 중학교에서 음악수업으로 알고 있던 선생님이셨다. 그러니까 선생님도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옮기신 것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김선생님은 5.16혁명 뒤에 군대미필로 학교를 잠시 떠나셨던 듯 하다. 그런 선생님이 중학교 때 몇 분 계셨는데 기억나는 분이 미술을 가르치시던 박기만 선생님. 그러니까 예능분야의 선생님들이 군대를 미필하고 학교에 재직을 하신 셈이었다.

김대붕 선생님은 조금 예술인답게 내성적인 듯 보였지만 나는 수업 중에 한번 따귀를 맞은 경험이 있어서 조금 감정도 있고 조금 무섭기도 했다. 중학교 2학년 때였나.. 음악숙제로 ‘노래작곡’ 이 있었는데, 사실 나는 전혀 어떻게 할 줄을 몰라서 5선지의 기본 룰을 완전히 무시한 채 ‘콩나물 대가리’를 잔뜩 그려서 갔다. 그것을 본 선생님은 이건 완전히 자기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라고 오해를 하고 나의 따귀를 올려 부쳤다. 물론 나는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는데.

교실은 고교 본관 바로 뒤에 있는 붉은 벽돌교사.. 앞에서 보면 바른쪽에 있던 것이었다. 일층에 두 번째 일학년 2반이 있었다. 그 옆에는 1학년 1반, 담임은 이대호선생님(별명: 망치).. 나머지 반들은 거의 기억이 없고.. 1학년에 들어오면서 나는 아주 외로움을 느꼈는데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하나도 같은 반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참 의외였다. 한두 명은 있게 마련인데. 이것으로써 나의 1학년은 외롭게 지낼 것 같은 기분으로 시작이 되었다.

나는 키가 작아서 10번도 채 안된 1분단에 있었는데, 그 주변에는 지금도 기억이 나는 사람들: 이강호, 신명현, 김근주, 정양조, 이종식, 김대철, 김용우, 한중희, 박태동.. 과연 이들 전부가 1분단인지는 100%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때의 사진 한 장이 기적적으로 남아서 아마도 맞을 것 같다. 그때의 사진은 1학년 겨울쯤, 미술시간인가 에서 사진 찍기 실습이 있었는데 그때 서울시장 윤치영씨의 아들 윤인선이 우리분단을 찍었던 듯 하다. 왜 그가 우리 분단을 찍었는지 확실한 정황은 기억에 없다. 하지만 사진은 기적적으로 이렇게 남았다. 이들 중에는 이미 타계한 친구도 있었는데, 김대철.. 연세대에서 잠깐 보았는데 아마도 대학재학시절에 정말 젊은 나이에 타계를 한 것이다.

중앙고 1학년때 1분단사진
중앙고 1학년때 사진실습 시간에 1분단친구들과

그 당시 이 같은 분단친구들은 나의 마음의 친구들은아니었다. 무언가 나하고 맞지를 않았고 심지어 나는 이들과 더 가깝게 지내지 못한다는 스트레스까지 받기도 했다. 기억에 김근주는 정양조, 신명현 등등과 아주 가깝게 지냈다. 그들이 김근주의 집으로 놀러 간다는 것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김용우는 아주 활발하고 특히 수업 중에 멋진 질문들을 많이 하기도 해서 나는 그것이 정말 부러웠다. 김대철은 수학을 잘했고, 특히 동아출판사 해석정설 같은 책을 수업시간 사이에 풀기도 했다. 박태동은 별명이 모택동이었다. 키가 우리보다 훨씬 컸는데 어째서 1분단이었는지.. 아니면 1분단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때 한 분단이 10명이 아니고 8명 정도였는지도.. 정양조는 양조장으로 통했고, 키에 비해서 아주 매서운 친구였다. 신명현은 아마도 소위 말하는 타교출신.. 그러니까 중앙중학교 출신이 아니고 전라도 광주인가에서 왔던 듯 하다. 기억에 광주일고를 못 가서 이곳에 왔다고 했다. 이강호도 마찬가지로 타교출신..

그때 우리 집은 부득이한 이유로 거의 6년을 살았던 정든 가회동 집에서 도심한복판의 남대문시장 옆 회현동으로 이사를 했다. 불과 1년밖에 못살았지만 사람의 주거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한 때였다. 그곳은 절대로 학생들이 살만한 좋은 주거환경은 아니었다. 어머니가 생활하시는데 조금 편해서 잠시 간 곳이었다. 그 여파로 나는 난생 처음으로 통학이란 걸 시작했다. 그 콩나물 시루 같은 버스.. 그립기도 하다. 퇴계로에서 타면 재동 앞가지 왔고, 거기서 계동골목으로 해서 학교엘 갔다. 그곳에서 나는 고1을 보냈다. 옛 동네친구들은 여전히 집에 놀러 오곤 했지만 학교에선 외톨이 같이 지냈다.

그래도 뇌리에 강하게 남았던 기억들은 좋은, 심지어 그리운 추억으로 남는다. 예를 들면, 영어선생님이셨던 양창승선생님, 새해의 노래 Auld Lang Sine을 고어영어로 가르쳐 주셨다. 그때 배웠던 덕분에 두고두고 덕을 보았다. 망치 이대호 선생님의 한문시간, 정말 그때 그렇게 배워서 두고두고 덕을 보았고, 지금도 덕을 보고 있다. 누가 한자가 나중에 영어만큼 중요하게 될 줄을 알았을까? 김대붕 선생님, 그 어려운 시창교본, 코르위붕겐..억지로 배웠지만 그때 조금 악보의 감을 잡았다고나 할까.. 역도선수 출신 체육선생님 김종훈선생님.. 주길준 교련선생님의 기억도 대단하다. 그때 중앙고의 교련조회와 교련수업은 아마도 전국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었을 듯하다. 주길준 선생님, 일명 “나까무라”, 일본군을 연상시켜서 그랬을까? 특히 교련수업에서 도표를 놓고 박격포, 기관총 등등을 배운 것도 인상적이고 밖에서 교련 수업할 때면 꼭 ‘반동’ 체조를 시키곤 했다. 이 반동체조란 체조가 아니고 양손을 허리에 걸치고 박자에 맞추어서 흔드는 것이었다. 나를 그 것이 너무도 어색하고 이상하고, 하지만 재미있었다.

최복현 교장선생님
최복현 교장선생님

1963년은 중앙고교에서 의미 있는 해 이기도 했다. 저돌적인 에너지로 최복현 교장선생님이 중앙(재건) 6개년 계획이란 것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혁명정부에서는 국가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란 것을 한창 선전할 때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중앙고 졸업생들이 서울대학을 비롯한 소위 명문대에 지금 보다 더 많이 합격을 시키겠다는 그런 계획이었다. 그 계획의 자세한 것은 다 잊어버렸지만 목표는 서울의 일류고교인 경기,서울,경복 등을 따라가겠다는 정말 대담한 계획이었다. 그 계획에 따라 우리는 주중고사라는 시험을 매주 정교시가 시작되기 전에 치르곤 했다. 확실히 공부를 더 하게 된 것은 사실이었다.

최복현 교장선생님은 참 독특하고 고집스러운, 그런 면이 있었다. 교련조회 때면 ‘수위모자’를 쓰시고 분열, 열병을 하셨다. 그 없던 시절이 full orchestra를 만들기도 했고, 조회시간에는 외부에서 유명한 분들을 모셔다가 연설, 강의를 듣게도 하셨다. 예를 들면 고2때에는 그 유명했던 “국보” 양주동박사를 초청한 것이다. 그리고 독특한 것은 ‘소년군’이란 걸 만드셨다. 이것은 boy scout 소년단과 아주 다른 것이었다. 모든 재학생이 다 소년군에 가입이 되는 것이었다. 반면 소년단은 그야말로 boy scout으로 그 당시 여건으로 보아서 돈이 꽤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었다. 소년군은 한마디로 모든 학생들에게 더 높은 목표를 주는 그런 것이 목표였다.

최 교장선생님은 또 ‘본토박이’ 영어에 신경을 쓰셨다. 지리학 전공이신 선생님이 영어에 신경을 쓰신 것은 입시공부와는 아주 거리가 먼 것이었고, 정말 미래지향적인 것이었다. 어떻게 구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에서 출판된 ‘원서’, 일명 “프리즈” 영어 책이 주 교재였고 그것을 전교 학생들에게 공부하도록 지시하셨다. 일류대목표 6개년 계획과는 별도로 진행된 아주 신선한 시도였다. 하지만 이것은 높은 목표 (본토영어로 회화하는 것?)에 비해서 시간이 가면서 입시공부에 밀려 소리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미술선생님 또한 잊을 수 없다. 불행히도 존함이 확실치.. 아마도 이두영선생님이 아닐까? 기억나시는 동창들이 있으면 고쳐 주시기 바란다. 그 선생님은 지금 생각하면 완전히 미술 프로였다. 적당히 가르치는 미술선생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입시에서는 비록 인기과목이 아닐지라도 그것에 구애를 받지 않고 정열적으로 미술시간을 이끄셨다. 그만큼 우리들에게 스트레스도 많이 주신 것이다. 숙제를 게을리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들은 선생님을 따르게 되었다. 기름으로 범벅이 된 미술시간에는 신기한 추상화를 그리게 되었고, 학년이 끝날 무렵에는 학생전체가 참여해서 ‘집단화’라는 것을 그리기도 했다. 그것은 결국 고등학교 본관 lobby에 자랑스럽게 걸려서 외부인들에게 오랫동안 전시가 되었다.

1학년 학교단체소풍도 생각이 난다. 소풍을 갔을 때, 김대붕 선생님의 자상함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아주 친한 친구 그룹이 없는 것을 눈치 채셨는지, 점심을 같이 먹을 친구는 있니..하며 물으신 것이다. 조금 창피하기도 하고 했지만 사실 선생님의 그 신경 쓰심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물론 1분단의 친구 아닌 친구들과 같이 점심을 먹었다. 그 소풍에서 선생님들 노래자랑이 있었는데.. 음악선생님이신 김대붕 선생님은 유행가를 부르기가 거북하셨는지 중간까지만 부르셨다. 그 노래가 “인생이란 무엇인지.. 청춘은 즐거워..” 하는 가수 윤일로의 유명한 노래였다. 그때 그 선생님의 계면적은 행동으로 선생님의 내성적인 성격을 알 수 있었다.

언젠가는 번호순으로 앉던 자리를 아주 거의 ‘혁신적’으로 바꾸었는데 키가 큰 애들과 완전히 섞어서 앉힌 것이다. 이런 적은 학교를 다니면서 한번도 경험을 못한 것이라 처음에는 정말 이상했다. 하지만 그것도 일리가 있었다. 이런 기회가 없으면 키가 큰 친구는 절대로 사귈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알게 된 등치 큰 친구들.. 나의 근처에 나종억 이란 친구가 있었다. 아주 선비처럼 하얀 얼굴에 돗수 높은 안경하며 완전히 학자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성복.. 자리는 확실치 않다.

나종억 졸업앨범 사진
졸업앨범에 있는 나종억의 사진

나종억은 알고 보니 국회의원을 역임하신 나용균의원의 아들이었다. 독립운동지사 같은 경력이 있었고 야당의 원로 급이었는데 나중에 여당으로 변신을 하셨다. 그러니 유명한 집안의 아들이었고 당연히 부자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부유층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 나는 그것을 거의 몰랐다. 이유는 그 친구가 하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그 친구는 정말 나에게 친절하고 자상하게 대해 주었다. 내가 무언가에 쩔쩔 맬라치면 격려를 해 주곤 했다. 한번은 나보고 여자를 소개해 주겠다고 편지를 전해 주었다. 나는 너무나 놀랐고 그 편지는 그 친구가 장난으로 쓴 것으로 단정을 짓고 거절을 하였다. 아마도 그런 나의 행동이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었다. 사람을 못 믿는 것.. 하지만 나는 그렇게 믿었다. 지금도 나는 그것이 정말인지 장난인지 모른다. 그 편지의 구절도 조금 생각이 난다. 참, 순진하던 시절이었다.

인문지리 수업시간을 김기병선생님이 가르치셨다. 반들반들한 포마드로 머리를 올빽으로 빗어 넘기신 선생님은 아주 당찬 모습의 선생님이셨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최복현 교장선생님(지리학전공)의 제자였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분의 지리시간은 참 재미가 있어서 좋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수업 중에 몇 명씩 나와서 문제를 풀고 각자에게 앞에서 설명을 하도록 시키셨다. 나도 ‘걸렸다’.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많은 학생들 앞에 맞대면으로 서서 그것도 혼자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3때 아슬아슬하게 그런 ‘위기’를 넘기 적이 있었다. 그때의 나의 옆에 앉았던 친구 채현관이 재수없게 걸려서 교단에 나갔는데.. 역시 예상대로 완전히 얼어붙어서 한마디도 못하고 들어왔다. 물론 아이들의 비웃음과 차문섭 선생님의 꾸지람을 뒤로 들으면서.. 그때의 아찔한 기억을 어찌 잊으랴. 아주 당황을 했다. 하지만 순간적이지만 나도 채현관처럼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물론 칠판에다 문제는 그런대로 풀었다. 세계지도를 그리는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앞에서 앞쪽을 바라보니 예상대로 앗질 했지만 이를 악물고 설명을 했다. 끝나고 나중의 행동이 기억이 난다. 교실 뒤에서 보시던 선생님을 향해서 무언가 이야기를 했는데 아마도 이대로 됐습니까.. 하는 나의 ‘가청’이었다. 그때 선생님이 껄껄 웃으시며, “그걸 나에게 물으면 어쩌나, 모두들에게 물어야지”.. 하셨다. 그리고 나는 거의 비틀거리며 나의 자리로 ‘기어오다시피’ 했다. 그때 나의 바로 옆자리(앞자리?)에 앉았던 나종억이 나를 위로하였다. 잘했다고. 나종억, 나는 아직도 그 위로의 말을 잊지 못한다. 아니 절대로 잊지 못한다. 그 이후로는 그런 상황이 와도 그렇게 무섭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굳어져갔다.

이성복.. 어떤 계기로 친해 졌는지 모르지만 무언가 말을 하면 재미있었다. 그 친구의 특징은 손이 그야말로 솥뚜껑처럼 컸다는 것이다. 아마도 내 손의 두 배정도가 아니었을까? 여름방학이 다가오면서 나와 그 친구는 공부시간 사이에 밖에서 무전여행의 계획으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 그 당시는 김찬삼씨의 세계무전여행이 큰 뉴스였다. 모두가 그것을 희망과 꿈으로 여겼다. 그래서 우리도 세계는 몰라도 국내 무전여행의 꿈을 꾸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너무나 꿈이 컸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성복은 상급학년으로 올라가면서 헤어졌다. 그러다 졸업 후에 대학입시가 끝나고 가회동에 있는 그의 집에 잠깐 들린 적이 있었다. 이성복은 집에 없었고, 어머님께서 나오셔서 고려대 농과대학에 합격을 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주셨다. 그리고 완전히 소식이 끊겼다. 그 친구, 동창회에는 나오나..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하다.

또한 그 당시에 브라질이민 열풍이 불고 있었다. 김 대붕선생님께서 한번은 서동식의 이름까지 언급하시면서 당장 브라질이민에 대한 것(가려는 것, 말하는 것?)을 중지하라고 까지 하셨다. 아직도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아마도 서동식이 브라질에 가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때의 경제사정을 보면 브라질 이민은 사실 못사는 사람보다는 잘사는 사람들이 더 가기가 쉬었다. 하지만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될 수도 있었다.

인상적인 학급활동 중에 학급대항 농구시합이 있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시합이 있었는데 우리 반이 아마도 우승, 아니면 그 정도로 잘 했다. 그 이유는 우리반의 선수들이 여름방학에 정기적으로 모여서 연습을 했다는 것이다. 어쩐지 그 팀워크가 기가 막혔다. 그때 처음 농구 보는 재미를 알았다. 그 선수 중에는 전오현, 양창걸 등등이 기억이 난다. 나는 키도 그렇거니와 농구와는 인연이 없었다. 대신 아구는 남들보다 잘했지만..

중앙고 1학년 교실이 있던 건물, 동상 바른쪽
1학년 교실이 있던 붉은벽돌 건물, 김기중설립자 동상 바른편

중앙중학교 다닐 당시에 나는 동네야구에 거의 미쳐있었다. 집에 오면 그대로 바로 옆에 있는 재동국민학교 운동장으로 달려갔다. 거기서는 항상 동네야구대회가 있었다. 나는 우리 골목 팀을 이끌고 꼭 나갔다. 그때 배운 야구실력이 내가 보아도 상당한 수준에 있었다. 그런 배경으로 가끔 학교친구들과도 야구를 학교운동장에서 했다. 고1때도 예외가 아니어서 어느 주말, 그러니까 일요일에 중앙학교운동장에 모여서 우리반의 키 작은 팀과 키 큰 팀이 시합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누가 팀 멤버였는지는 다 잊어버렸지만 우리 팀에는 분명히 정양조가 있었고 다른 팀에는 나종억이 있었다. 그것 밖에 생각이 안 난다.

군사혁명의 여파로 학생들에게 근로봉사라는 과외의무가 있었다. 우리학년은 돈암동, 미아리근처의 야산에서 하루 수업을 쉬고 봉사를 했다. 정말 힘든 노동이었다. 확실히 무엇을 했는지 생각이 까물거린다. 아마도 나무를 심었지 않았을까? 하루 종일 일을 했는데 나는 과히 몸집이 세지를 않아서 아주 힘들어 했다. 그런 것을 보고 감독하는 ‘노가다’ 가 내가 농땡이 치는 줄 알고 뭐라고 했다. 그랬더니, 우리반의 ‘강달훈’이 그 아저씨보고 내가 아프다고 말해주었다. 사실 아픈 것은 아니었지만 나를 보호해준 것이었다. 그때 나는 강달훈, 나와 별로 친하지 않았는데도 그런 것을 고맙게 생각을 했다. 그곳은 정신여학교의 옆에 위치해 있어서 그곳 옆을 지날 때 모두들 흥분해서 학교 안쪽을 향해서 소리소리를 지르곤 했다. 참, 순진하지만 조금씩 이성에 눈이 떠지던 그 시절.. 어찌 잊으랴.

아~~ 또 생각나는 사람, 지옥천.. 이름이 독특한 친구, 아마도 지방에서 온 친구였다. 이름에 ‘지옥’이 들어가서 아주 인상적이었다. 시골사람처럼 구수하게 생긴 친구다. 인상적인 것은 학급대항 축구시합에서 지옥천이 선수로 뛰었는데, 그때 offside란 것을 처음 보았다. 하도 뜀박질이 빠르다 보니 공을 몰고 goal로 뛸 때마다 offside였다. 그러니까 골을 향해서 돌진을 하다 보면 공이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 코믹한 장면이었다.

겨울연가에서 보는 고1때의 교사건물, 뒷쪽
겨울연가에서 1학년때의 교사건물이 뒷쪽에 보인다

2003년에 한국의 유명한 TV drama “겨울연가”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Drama에서 춘천의 학교라는 것을 서울의 우리모교 중앙고등학교에서 촬영을 한 것이 아닌가?

담임 선생님 김대붕 선생님은 나의 졸업 앨범에 계시지 않는다. 언제 학교를 떠나셨는지 기억이 안 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성심여대 교수로 가신 듯 했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아마도 음악과 교수가 되셨을 것이다. 아주 아주 이후에 내가 가톨릭 신자가 돼서 가톨릭 성가 책을 보니 김대붕이란 이름이 자주 보였다. 아하.. 우리 고1담임 선생님께서 가톨릭 성가를 작곡 하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어떻게 건강하게 지내시는지 궁금하고, 부디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빈다.

 

중앙고등학교 졸업 앨범, 1966

그리운 친구, 양건주..

양건주, 1965년, 졸업앨범에서
양건주, 1965년, 졸업앨범에서

친구야, 친구야.. 그립다. 보고 싶다. 그때로 가고 싶다. 햇수로 세어본다. 손가락으로 하나씩.. 10년, 20년, 30년, 40년.. 10년을 네 번이나 세었다. 그 때에 우리에게 ‘사심’이란 것은 없었다. 그게 진짜 우정이 아닐까. 우정이란 말과 의미와 느낌을 잊고 산지도 손가락으로 세어도 한참 세어야 할 정도로 오래 되었는가.

친구, 건주, 양건주를 생각한다. 우리가 사귄 기간은 이 오랜 세월에서 년 수로 얼마 되지 않을 수 있는 짧은 기간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나는 거의 영원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중앙중고교 동창, 연세대 동창인 양건주. 내가 대학 2학년 때 연세대 캠퍼스 에서 만나서, 같이 연호회란 대학생 클럽활동도 같이 하였다. 1973년 내가 미국에 오면서 헤어졌다. 1979년 결혼 차 귀국했을 때는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1970년대 초의 젊은 모습을 아직도 서로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사실 건주는 중앙고교 2학년 때 SECC란 고등학교 영어회화클럽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별로 친하게 지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연세대에서 다시 만났던 것이다. 나하고 그는 중앙중학교, 고등학교 6년을 같이 다녔건만 때 한번도 같은 반을 한 적이 없었다. 6년 동안 같은 반을 한번도 못한 것은 사실 그렇게 흔치 않은데..

건주는 나이에 비해서 확실히 성숙한 그런 친구다. 항상 공정, 공평하였고, 우선 ‘정’이 많았다. 그것을 요란스럽지 않게 은근히 풍기는 그런 다정다감한 친구.. 그런 친구가 계속 나의 옆에서 같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나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하는 공상도 해 본다.

1969년, 양건주 군대 가기 전에 찍은 기념사진
1969년초 양건주가 군대가기 전에 연대앞의 사진관에서 찍은 기념사진, 앞줄 바른쪽이 양건주

1999년, 20세기가 저물던 때에 다시 online으로 연락이 되었다. 이것도 나는 거의 운명적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이어서 그때 헤어진 연호회 친구들의 소식을 다시 접하게 되었다. 이윤기, 윤인송, 김태일, 박창희, 김진환. 이어서 건주, 윤기, 인송, 태일이 모여서 술잔을 기울이는 사진도 보게 되었다. 김진환의 사망소식도 들었다. 다른 동창 친구 김호룡의 늦은 사망소식에 이어서 나는 한동안 충격 속에서 헤매었다.

1968, 69년, 우리들의 아지트였던 해양다방을 생각한다.국제극장 옆을 끼고 경기여중고로 향하는 좁다란 골목길에 있었다. 어떻게 그 다방에서 우리가 모이게 되었는지는 확실치는 않지만 어두운 구석 자리를 거의 전세를 내다시피, 우리들의 명실상부한 휴식처 노릇을 했다. 그 때의 그 여자회원들을 다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그 중에는 현재의 건주wife도 있었다. 그는 사실 그때 미래의 wife깜을 그곳에서 만났던 것이다.

아직도 그때의 추억은 흑백사진시대로 남아있다. 비교적 잘 남아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억의 영상일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될 수가 없음을 알 때, 조금 서글퍼지는 이 마음, 어쩔 수가 없다. 영원한 친구 건주의 건강과 행복을 다시 한번 기원하면서..

 

마음이 울적할 때

저녁 강물 같은 벗 하나 있었으면

날이 저무는데 마음 산그리메처럼 어두워올 때

내 그림자를 안고 조용히 흐르는 강물 같은 친구 하나 있었으면

울리지 않는 악기처럼 마음이 비어 있을 때

낮은 소리도 내게 오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 노래가 되어 들에 가득 번지는 벗 하나 있었으면

오늘도 어제처럼 고개를 다 못 넘고 지쳐 있는데

달빛으로 다가와 등을 쓰다듬어주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라면 칠흑 속에서도 다시 먼 길 갈 수 있는 벗 하나

있었으면.

— 도종환의 ‘벗 하나 있었으면’

 

1980년대, Ohio State 중앙고 동창생들..

1980년대, Ohio State (University, OSU)를 회상하며 특히 중앙고등학교 동문들을 생각한다. 어느덧 세월이 이렇게 흘렀나? 나는 1977년 겨울부터 1983년까지 그곳에서 공부를 하였고 Columbus, Ohio에서 직장생활을 1988년까지 했기 때문에 사실 한때는 고향처럼 느끼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중앙고등학교 동창생들과의 추억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처음에 그곳에 갔을 때는 중앙동창이 하나도 없었다. 한국의 유학생의 숫자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물론 다른 학교에 비해서 많았다. 하지만 그것은 이 학교가 미국에서 단일 캠퍼스로는 제일 큰 학교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55,000명 정도였을 것이다.

한국유학생들은 거의가 서울대와 경기,경복,서울고등학교 같은 소위 말하는 일류학교 출신이 대부분이었던 듯 하다. 정확한 것은 아니고 나의 느낌이 그러하였다. 하지만 내가 있던 전기 과(EE)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그 당시 3명이 있었는데 (나를 빼고) 한 명은 육사출신이었고 또 한 명은 Rutgers출신, 그리고 나머지는 서울대 출신이었다..

Ohio State University 중앙고 동창생들
Ohio State 중앙고 동창생들, 1985년경 여름 Columbus, Ohio

그러던 것이 1980년이 되면서 해외유학 자유화가 되면서(그러니까, 문교부 해외유학시험이 없어진) 대거의 한국유학생들이 도착했다. 너무나 많아서 이제는 누가 누구인지 전혀 모를 지경이 되었다. 그러니까 그 전에는 서로가 조금씩은 이름이나 얼굴을 알고 지냈고, cafeteria에서 식사를 할 때면 거의 dining table의 한곳에 같이 모일 수 있었다.

그러면서 드디어 중앙고 출신들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물론 모두 후배들이었다. 제일 먼저 온 후배가 여운광이다. 아마도 62회 정도가 아니었나. 토목과 전공이다. 그리고 김문경, 63회, 정치과, 이춘환, 64회, Biophysics , 조광동, 64회,  김종수, 기계과, 하재주, 원자력 65회, 안동규, 강행봉, 채인돈, CIS, 67회, 장경호, 68회 아.. 이제 생각이 가물거린다.

그리고 유학생이 아닌 동창들도 있었다. 정근화, 56회, 주유소경영, 손영찬, 59회, small business, 이명성, 63회, Bell Lab research scientist 등등이 있었다. 이 정도의 머리숫자를 자랑하는 동창회는 이 캠퍼스에서 그리 많지 않았다. 같이 모이면 언제나 장소가 꽉 차는 느낌이었다. 모이게 되면 거의 빠짐없이 참석을 하였다. 그리고 spouse들과 family가 열심히 참석을 해서 더 모임의 재미가 있었다. 이 모임에서는 특히 spouse들의 사이가 아주 부드러워서 더 잘 모일 수 있었지 않았을까 지금도 생각을 한다.

1988년 여름에 Columbus, Ohio를 떠났는데 그때까지 참 추억에 남을 정도로 동창의 정을 유지하였다. 나는 거의 제일 맞선배격이었지만 워낙 나는 선배 노릇에 익숙지를 않아서 어떨 때는 조금 불편한 적도 없지 않았다. 중앙고 시절을 이야기 하면 역시 사립고답게 선생님들의 변동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 이야기가 잘 이어졌다.

특히 선생님들의 별명을 기억할 때가 제일 즐거울 때였다. 깨막이, 나까무라, 썪은살, 짱구, 숫장사.. 등등 추억에 어린 선생님들의 별명들.. 특히 중앙만의 전통이던 교련조회토요코스(토요일에 잠을 자며 학교에서 하던 camping) 등등은 후에도 이어졌음을 알고 참 반가웠다.

특이한 사실은, 김문경(연세대)만 제외하고 모조리 서울대 출신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내가 졸업하고 중앙고가 2차로 바뀌어서 그야말로 머리 좋은 재수생들이 대거 중앙고로 왔던 까닭이다. 내가 다닐 때는 최복현교장의 6년 계획으로 서울대 합격자가 꾸준히 늘긴 했지만 그 숫자는 사실 비교적 미미하였다. 그것이 2차로 바뀌면서 완전히 바뀐 것이다. 여운광의 이야기로, 서울공대에는 숫제 계공회라는 중앙출신모임이 있다고 했다.

Ohio State 중앙고 동창들, 1987년경 softball game 뒤에
Ohio State 중앙고 동창들이 softball game을 끝내고, 1987년경

나중에 공부가 끝나고 대거 귀국을 해서 그곳에서 다시 거의 모였다고 연락도 받았다. 정말 반가웠다. 대부분 대학으로 갔는데 여운광은 Ohio State로 다시 교환교수로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일부러 우리가 사는 아틀란타까지 drive를 해서 오기도 했다. 아마도 그것이.. 1993년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 이후로 세월이 질주하다시피 흘러버렸다. 거의 소식이 끊어지고.. 나는 Internet이 등장하면서 다시 virtual reunion도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는데.. 삶의 거센 파도를 거슬러 갈 여력이 없었다.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을까?

사월의 노래

아.. 아틀란타에 정녕 봄이 오고 있는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고3때 국어책에서 본 시의 제목처럼.. 이번 겨울은 동서남북의 구별 없이 무차별하게 춥고 을씨년스러웠다. 하기야 Florida와 Hawaii를 제외한 전역이 눈이 덮여 있다고 뉴스에도 나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런지 Obama의 global warming agenda도 따라서 조금 잠잠해졌나 할 정도다.

공식적으로 춘분이 거의 열흘이나 지나고 내일은 사월이다. 진짜 봄인 것이다. 새벽에 아직도 central heating이 나오긴 하지만 이제부터는 아주 따뜻한 낮과 아주 싸늘한 밤이 계속되는 건조한 그런 나날이 되지 않을까? 4월.. April shower brings May flower라고 오래 전에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워서 나에게 써 먹었던 것이 생각난다. 그런 만큼 싸늘한 4월의 비도 연상이 된다.

하지만 나에겐 한국가곡 “사월의 노래”가 더 생각나는 계절이기도 하다. 1963년 서울 중앙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자 음악 선생님이셨던 김 대붕 선생님이 좋아 하셨다던 가곡, 사월의 노래.. 우리들에게 정성스레 가르쳐 주셨다. 특히 작곡가이신 김순희교수님을 잊지 않을 정도로 언급을 하셨다. 혹시 그 교수님과 무슨 인연이라도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선생님 생각이 나곤 한다.

 

목련 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에 편지를 읽노라

구름 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 노라

돌아 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없는 무지개 계절아

 

노래와 함께 가사까지 또렷이 기억이 난다. 선생님은 지금 연세가 어느 정도나 되셨을까? 짐작에 아마 여든을 바라보실 연세가 아니실까. 그렇다면 요새 같은 세상에서는 건강만 좋으시면 큰 문제가 없으시리라. 기억에 선생님은 해방 직후에 고등학교 학생이셨다. 어떤 글에서 (아마도 중앙학교 교지에서) “국대안 반대 데모 때 열심히 영어공부를 해서 뒤떨어 졌던 성적을 올렸다” 라고 하셨는데 그때는 내가 태어날 무렵이었다 그때 고등학생이셨으면 최소한 나보다 15살은 많았을 것이다.

내가 천주교 신자가 된 후에 가톨릭 성가 집에서 우연히 선생님의 이름을 보았다. 그래서 선생님이 천주교 신자임을 알았고 성심여대에서 교편을 잡고 계셨음도 알게 되었다. 아마도 중앙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실 당시에도 천주교 신자였을 것 같다. 물론 100% 확실치는 않지만.

 

박현식, 왕진한, 채 영세, 문경삼…

Sawyer Ave 중앙교회 옆 Chicago, 1974
Sawyer Ave 중앙교회 옆 Chicago, 1974

박현식, 왕진한, 채 영세, 문경삼…

정말 오랜만에 써보는 이름들이다. 이들에게 무슨 공통점이 있을까? 모두 한국 남자들이다. 분명히. 그 다음은.. 내가 한때 알았던 사람들, 나와 나이들이 엇비슷한 사람들, 마지막으로 1974년 시카고 중앙(한인)교회의 기숙사에서 잠깐 같이 살았던 분들이다.

박현식 형은 나의 중앙고등학교 1년 선배다. 그러니까 중앙고 56회 졸업생이다. 왕진한씨 (형이라고 하기는 나이차이가 난다)는 출신 학교에 관한 기억은 거의 없다. 다만 Ohio주의 University of Dayton의 graduate school로 한국의 어떤 회사에서 유학을 보낸 정도만 기억이 난다.

채 영세 씨는 어떤가.. 나이가 나보다 아마도 두~세 살 정도 위가 아니었을까? University of Texas, Austin에서 Master’s degree를 받고 시카고로 왔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문경삼씨, 나이가 아마도 채 영세 씨보다 조금 더 위였을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이렇게 지난 다음 생각해 보면 거의 같은 나이였다고 보는데 맞을 것이다.

그 당시 70년대 유학생들은 요새 기준으로 보면 거의가 ‘고학생’ 수준일 것이다. 여름방학 때는 거의 예외 없이 대도시로 나와서 일 (그러니까 아르바이트)을 해야만 했다. 물론 예외도 적지 않았다. 그 당시 한국의 경제수준으로는 $$를 편하게 쓸 처지가 못되었다. 그래서 시카고 같은 대도시로 나오게 되면 거처가 제일 큰 문제였을 것이다.

나는 그 당시 Lincoln AvenueNorth Clark Street(at Montrose St.)에 있었던 서울식당에서 dishwasher를 했다. 거처는 Cornelia Ave에 있었던 조그만 한인교회의 지하실을 이용했다. 그곳은 정말 암굴을 연상시킬 정도로 습하고 어두운 곳이었다. 넓은 지하실을 칸막이를 하고 살았는데 거기에는 유학생은 한 명도 없었고 대부분 혈혈단신 초기이민을 온 청년들과 여자도 한 명이 있었다. 물론 그곳은 어떤 선배들이 가르쳐 주어서 가게 된 것인데 예상외로 마음에 들지를 않았다. 그러다가 서울식당 주인 분이 다니시는 시카고 중앙교회에 비슷한 기숙사가 있다고 소개를 시켜 주셨다.

중앙교회 유학생 기숙사 Chicago, 1974
중앙교회 유학생 기숙사 Chicago, 1974

West side에 Lawrence AvenueSawyer Ave가 만나는 곳에 있었는데 이 교회가 전번 것 보다 우선 밝고 넓었다. 그리고 지하실이 아니고 이층에 위치해 있었다. 아마도 여름방학마다 몰려드는 유학생들을 이곳에서 자취를 시켰던 듯 싶었다.

서울식당 주인 분의 ‘빽’으로 그곳으로 이사를 갔는데 거기에는 작은 규모이지만 resident manager까지 있었다. 알고 보니 중앙고 1년 선배 박현식 형이었다. 그래서 이런 조그만 ‘인복’으로 아주 재미있고 편한 여름을 보낼 수 있었다.

박현식 형은 알고 보니 이영재 목사님과 친척벌이 되었다. 항상 웃고 성실한 타입의 선배였다. 그 형은 그 당시 시카고 downtown 바로 남쪽에 있었던 역사 깊은 Chicago Tech에 다니면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방이 비교적 커서 한방에 여러 명이 살았다. 나의 방에도 여러 명이 살았는데 그 중에 한 분이 바로 왕진한 씨였다. 한국의 회사에서 유학을 보내준 아주 행운아였다. 아마도 그때 공부가 University of Dayton에서 끝이 나서 (학위를 위한 공부는 아니었던 느낌), 일단 시카고로 온 듯 싶었다.

그리고 곧 바로 채 영세 씨와 문경삼 씨를 그곳에서 만났다. 둘 다 아주 clean-cut & smart한 사람들이었다. 채 영세 씨는 University of Texas, Austin에서 Electrical Engineering Master’s degree를 받고 일단 온 것이고 문경삼 씨는 확실 치는 않지만 어디선가 undergraduate course를 마치고 Iowa State University graduate school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문경삼씨의 전공이 무엇인지 잊어 버렸지만 이공계는 아니었던 듯 싶었다. 왜냐하면 Iowa State University에는 최소한 engineering course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 기억이 난다.. 아마도 정치학이 아니었나 싶다. 이 형은 인물이 아 주 좋아서 같은 곳에 살던 여자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1974년 여름은 그곳에서 심심치 않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물론 나는 6일 동안 거의 12시간을 서울식당 부엌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그들과 어울릴만한 시간이 별로 없었다. 밤 11시 경에야 기숙사로 파김치가 돼서 가곤 해서 가끔 맥주를 마시며 잠깐 어울릴 정도였다.

그 해 여름에 아마도 8.15 광복절 날, 육영수여사 저격사건이 있어서 모두 모여서 같이 TV를 보기도 했다. 그 당시 고국의 소식은 이런 식으로 아주 나쁘고 커다란 사건이 터져야 볼 수가 있었다. 그 외에는 한국은 이곳에서 뉴스 감이 되지를 못했다.

채영세씨 with Dodge Duster, Chicago 1974
채영세씨 with Dodge Duster, Chicago 1974

채 영세 씨는 아주 부잣집 아들이라서 사실 일을 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그 당시 유학생으로 ‘새 차’를 몰고 다니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는데 채 영세 씨가 Dodge Duster란 새 차를 몰았다.그런데도 일을 했다. 나는 그게 참 보기가 좋았다. 큰돈은 집에서 받았겠지만 그렇게 푼돈이라도 벌어서 쓰는 것을 보면 그 사람 됨됨이가 짐작이 됐다.

그 이듬해 여름에 잠깐 한국에 갔을 때 다시 만났는데 알고 보니 나의 절친한 친구 박창희와 같은 산악회 (요델 산악회) 회원이었다. 그래서 더 반가웠다. 그 이후론 소식이 끊어졌는데 박사학위를 계속하지 않았던 듯 싶다. 아버님이 커다란 공장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을 이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서 아마도 경영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을 까 하는 생각이다.

박현식 형은 같은 곳에 잠깐 살았던 여성을 만나서 곧바로 결혼을 했다. 참 일찍도 결혼을 한 셈이다. 아이도 낳고 재미있게 사는 사진을 한번 받아 보고는 연락이 끊어졌다. Iowa주로 이사를 갔다고 했다. 나중에 동창회를 통해서 알아 보아도 그 형의 정보는 거의 없었다.

왕진한 씨도 그 후에 한국에 갔을 때 인천에서 어떤 여성과 결혼을 한 것이 마지막 뉴스가 되었다. 문경삼 씨는 그보다 훨씬 전에 소식이 끊어져서 학위를 받았는지, 귀국을 했는지 전혀 idea가 없다. 가끔 1974년의 시카고 Sawyer Avenue를 회상해 본다. 서울식당의 부엌, 그곳에서 하루 종일 이야기 꽃을 피우던 Mrs. 안, 식당주인 아저씨와 무용가 출신의 wife 세란이 엄마, 참.. 잊고 싶지 않은 추억들이다. 이 좋은 InternetGoogle의 시대에 한번 연락 이라도 돼서 어떻게들 살았는지 궁금증을 조금 푸는 것도 좋을 듯 싶다.

 

 

오누나 오시누나 빗님이 오시누나

나의 time machine은 빠르게 거의 반세기 전으로, 정확하게 1961년으로 되돌아 간다. 그해는 4.19 학생혁명의 다음해, 5.16군사혁명으로 이어지던 암담한 시절, 내가 서울중앙중학교 2년이던 그때로 되돌아 간다. 제목인 ‘오누나 오시누나 빗님이 오시누나’라는 시라기 보다는 시조에 가까운 음율을 가진 이 구절이 반세기 뒤에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데 그 시의 저자는 그때 친하게 지내던 벗 ‘변웅지’였다. 변웅지.. 이름은 거창하지만 사실은 나와 재동국민학교를 같이 졸업한 동창생으로 중학교 2학년때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국민학교 때는 한번도 같은 반을 한 적은 없었지만 6년을 같이 다녔으니 얼굴정도는 알고 있었다.

변웅지, 1962년 중앙중학 졸업앨범에서
변웅지, 1962년 중앙중학 졸업앨범에서

나의 중학교 2학년은 사실 내가 조금 고생을 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학교 공부도 그렇고 깡패 비슷한 녀석들이 나를 괴롭히기도 했던 그런 시절이었는데 그래도 이 변웅지같은 친한 친구가 있어서 아직도 즐거운 추억으로 남는다. 그때 변웅지와 같이 나를 친구로 하던 게 이경증이라는 친구였다. 그러니까 나와 변웅지, 이경증이 거의 3총사 비슷하게 2학년을 보낸 셈이다.

그 당시 국어 선생님은 백정기 선생님이셨다. 백 선생님은 나중에 우리들과 같이 중앙고등학교로 올라가셔서 졸업 때 까지 가르치셨다.  이 국어시간에 국어작문 과제가 있었는데 그때에 나는 작문으로, 변웅지는 ‘시’로 제출을 하였는데 그때의 그 시가 거의 시조의 음률로 “오누나 오시누나 빗님이 오시누나” 였다.  그 후로 비가 올라치면 그녀석의 그 시조 같은 시 생각이 나곤 했다. 이것을 왜 알게 되었나 하면 제출된 작문 중에 뽑혀서 공부시간 중에 선생님이 읽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 변웅지의 시도 뽑혀서 읽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의 글도 뽑혀서 읽혔는데 정말로 나는 당황하였다. 나는 재동국민학교 시절의 추억을 썼는데.. 그런대로 쓰긴 썼다. 하지만 중요한 서론, 본론, 그리고 결론의 구조를 지키지 못하고 그만 결론 비슷한 것이 거의 없이 끝을 내고 말았다.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고.. 어떻게 끝을 내는지 그것이 확실치 않아서 그만 그랬는데.. 선생님께서는 읽으신 후에 글이 잘 씌어졌는데 아마도 시간이 없었나 보다고 평을 하셨다. 나에게는 정말로 다행이었다.

백정기 선생님
백정기 선생님

변웅지와 같이 중랑천으로 낚시도 같이 갔었다. 나에게는 난생 처음으로 해 보는 그런 것이었다. 그당시 도서관이 당시 고등학교 본관건물의 다락방에 있었다. 학교가 끝나면 같이 그곳에 가서 학원사 발행의 ‘전집’ (위인전집, 세계 명장전집)을 빌려 읽고 거의 저녁때가 되어서 집에 돌아오기도 했는데 그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변웅지와는 중학교 2학년이 끝나면서 반이 갈렸는데 고등학교 졸업 때 까지 한번 도 같은 반이 있던 적이 없었다. 가끔 얼굴이야 서로 보며 지나치곤 했지만 그렇게 서먹서먹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 나이에도 왜 그랬을까 생각을 하는데.. 그 녀석이 너무 갑자기 변해서 (성숙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도 하지만 정말 아쉽기만 하였다. 다른 친구 이경증은 여러 가지 인연으로 대학 졸업 후까지 관계가 계속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 앨범을 보면 키가 아주 커 있었다. 그러니 사실 어울리는 그룹이 우리와는 아주 달랐으리라 짐작을 해본다. 어느 대학엘 갔는지도 모른다. 아니 대학엘 갔는지 안 갔는지 조차 모른다. 40대, 50대에 모인 동기 중앙고 57회 단체사진을 아무리 돋보기로 보아도 안보였다. 다만 동창회 주소록에는 주소가 비교적 자세히 기재되어 있었다.  한번은 그 주소로 편지도 보냈는데 무소식이었다. 어떻게 잘 살고 있는지.. 나를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사실 잊을 수 도 있을 것이고 조금은 기억할지도 모른다.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런 오래전의 순진했던 기억이 나에게 있는 한 나는 행복하다는 사실이다. 함께, 부디 건강하게 잘 살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