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심초 同心草, 표류도 漂流島

영화 동심초 신문광고, 1959년 7월 22일자 동아일보

영화 동심초 신문광고, 1959년 7월 22일자 동아일보

 

며칠 전 오랜만에 열어본  KoreanFilm@youtube 에서 머리를 띵~ 하게 만든 영화 제목을 보게 되었다. 다름이 아닌 1959년 멜로드라마 최은희, 김진규 주연 신상옥 감독 영화 ‘동심초 同心草’ 였다. 이 동심초 영화는 당시 대한민국의 유일한 ‘라디오’ 방송 KBS의 ‘초 인기’ 일요 드라마 (당시에는 ‘방송극’이라고 했던) 를 영화화한 것이고, 당시에 어린 나도 ‘누나, 아줌마들’ 옆에 끼어서 같이 들을 정도로 대단한 인기 방송으로 기억을 한다.

그 당시 국민학교(서울 재동 齋洞) 6학년이었던 내가 그런 ‘어른들’ 순정드라마를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 당시 자세한 내용은 잘 몰랐지만 항상 흘러나오던 주제곡만은 녹음기처럼 기억을 한다. 당시 최고 인기가수 권혜경씨가 불렀던 그 주제곡이 나는  원로 김성태씨의 가곡인 것을 잘 몰랐다. 아니.. 지금까지도 그 곡이 오래 전부터  있었던 가곡인 것을 몰랐던 것이다. 그러니까.. 가곡이 먼저인가, 주제곡이 먼저인가.. 나의 무식의 소치였던 것이다.

이 영화를 거의 surreal한 기분으로 보는 느낌은.. 1959년 당시의 대한민국, 특히 서울을 감싸고 있던 ‘공기, 분위기’ 같은 것이 ‘어른들의 사랑’보다 더 관심이 갔다. 그 당시의 분위기, 공기는.. 어떤 것들일까?

 

당시에 TV가 없었던 때, 유일한 것이 그저 ‘듣기만 하는 라디오’.. 가 전부였다. ‘책보다 읽기 쉬운’ 라디오는 서울에서는 거의 모든 가정이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그곳에서 ‘정기적’으로 듣게 되는 ‘드라마’는 참 매력적인 연예 프로그램이었기에 어린 우리들까지 ‘꼽사리’를 끼어서 듣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대부분 여자들 (누나들, 식모 누나들, 아줌마들이 거의 전부) 틈에 끼어서 들었던 기억이 너무나 즐겁기만 했다. 기억나는 것들.. ‘산 너머 바다 건너’, ‘청실 홍실’, ‘동심초’, ‘현해탄은 알고 있다’,  기독교 방송국의 ‘수정탑’, 그 후에 ‘현해탄은 알고 있다’, ‘장희빈’ 등등.. 이 당시의 성우들은 당시 영화배우에 버금가는 최고의 연예인, idol, celebrity에 속했다.

나의 1950년대 향수 nostalgia를 너무나도 자극하는 이런 오래 된 영화들을 다시 보게 된다는 사실 자체에 나는 전율을 할 정도다. 비록 동심초 영화는 처음 보는 것이고, 그 내용의 ‘순진함, 단순함’에 코웃음이 나오지만.. 그것은 내가 인생을 그만큼 오래 살아서 그럴 것이다. 1959년, 내가 재동국민학교 6학년 시절.. 박양신 담임선생의 ‘입시지옥’ 열차를 한창 타며 고생하던 시절이다. 4.19혁명을 향한 이승만 대통령의 최후의 정권유지 안간 힘을 쓰던 시절이었다.

 

이 영화와 비슷한 시대적 배경을 가진 다른 영화 ‘표류도’, 이 영화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근래에 인터넷으로 여러 번 본 기억으로 이제는 친숙하게 느껴진다. 당시의 신문을 보면 역시 1960년 12월 25일 성탄절 때 을지로 국도극장에서 개봉된 영화광고를 볼 수 있었다. 시대적으로 ‘표류도’는 4.19학생 혁명 후, 5.16 군사혁명 전 장면 내각시절인 1960년 말에 나온 것으로 동심초와 거의 비슷한 때에 나온 것이지만 동심초 처럼 라디오 방송 드라마에 근거한 것이 아닌 ‘박경리’ 여사의 소설을 영화화 한 것이 다르다고 할까.. 아니면 이것도 방송극으로 먼저 소개가 된 것이었을까.. 확실할 것은 나도 모른다.

 

영화 표류도 신문광고, 1960년 12월 25일자 동아일보

영화 표류도 신문광고, 1960년 12월 25일자 동아일보

나에게 이 두 영화가 일깨워 준 사실은, 그 동안 잊고 살아온 자질구레한 시대적 역사보다 더 의미가 있었던 것도 있었다. 당시, 육이오 전쟁이 휴전으로 끝났던 사회적인 배경으로 이 두 영화의 ‘주인공’들, 특히 여성 protagonist들의 모습들이다. 동심초의 최은희, 표류도의 문정숙 씨들이 연기한 그 주인공들의 처지나 배경들은 모두 대학출신의 고등교육을 받은 인텔리 여성들로서, 거의 완전히 나의 어머니의 것,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이 두 영화를 나는 더 자세히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쟁 미망인.. 당시 전쟁으로 남편을 잃었던 여인들이 불리던 이름이었다. 대부분 군인으로 전사를 했던 case였지만 그 이외의 case도 부지기수.. 우리 어머님의 case는 남편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그러니까 납북(당시에는 납치라고 했다) 된 어처구니 없는 시대였다. 대부분 어린 아이들이 있었던 그 여인들.. 전쟁으로 황폐된 땅에서 어떤 도움을 정부로부터 기대를 하겠는가? 친척들의 도움이 아니면 길거리로 나가서 돈을 벌어야 했을 것이다. 영화 동심초에서 최은희, 표류도의 문정숙 모두 그래도 버젓이 자기집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가정을 떠나 살벌한 사회에 뛰어들었던 것인데.. 우리 집의 경우, 그것은 사치였다고 할까.. 자기 집이 없었기에 어린 남매를 데리고 셋집을 전전해야 했던 어머니.. 얼마나 고난의 세월을 보내셨을까?

거의 모든 것을 가장, 남편에게 의지했던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다 전쟁 후의 파탄 직전의 경제 상황.. 그런 것들을 느끼기에 너무나 어렸던 나는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피부로 조금 실감하게 되었다. 지금은 ‘상상’으로나마 나의 것으로 실감할 수 있다. 동심초의 주인공 최은희는 경제적 해결을 위하여 양장점을 경영하다가 실패로 빚을 지고 결국은 집까지 팔고 시골의 집으로 내려간다. 그 과정에서 경제적인 도움을 주는 김진규와 사랑을 하는 사이가 되지만 그것조차 미망인과 총각 사이가 주는 사회적인 파장 때문에 실패를 한다. 영화 표류도에서는, 법적인 결혼 전에 아기를 낳고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후, ‘용감하게’ 생활전선으로 뛰어들어 다방을 경영하는 고급 인텔리 여성 문정숙의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사생아라는 낙인이 찍힌 딸 전영선을 데리고 ‘철 없는’ 어머니를 모신 ‘가장’이 된 문정숙, 물장수를 한다고 멸시를 주는 대학동창생들.. 그녀를 동정하다가 사랑하게 되는 동창생 남편 김진규, 당시의 사회적 윤리 도덕을 느끼며 망설이다가 우발적으로 살인을 해서 감옥엘 가고, 병보석으로 출감 후에 기적적으로 김진규와 결혼, 낙도에서 일생처음으로 행복을 맛 보지만.. 병의 악화로 세상을 떠난다.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이야기.. 나에게는 하나도 낯 설지 않게 느껴지는 이야기들이다.

 

이 두 영화의 공통점 중에 하나는, 자식이 있는 여자가 혼자 살기가 쉽지 않고, 가장 家長 그러니까 남자주인인 남편이 가정에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경제적인 이유가 제일 크지만 그것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회적인 여건도 남자 주인이 필요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혼자 된 여자가 다시 남편을 만다 산다는 것은 힘들고 모험이기도 했다. 우리 집의 경우, 어머니가 경제활동을 하셔서 우리 가정을 지켰지만 그 30대 초의 꽃다운 나이에 ‘청혼’이 없었을까? 우리들이 너무 어려서 실감은 못했지만, 재혼의 유혹은 항상 있었을 것이고, 그 중에 한 가지의 ‘일’은 내가 어른이 된 나중에야 다시 깨달은 것도 있었다. 영달이 아저씨.. 경주출신으로 학교 선생님이었던,  잘 생겼던 아저씨였는데, 몇 번인가 우리 집에 그 아저씨의 친구와 같이 ‘초대’된 것을 기억한다. 어떻게 알게 된 아저씨인지 밝힐 수는 없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아마도 재혼까지 생각이 된 관계는 아니었을까.. 훗날 어머니는 ‘우리남매를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했다고 하신 말씀을 남기셨다. 당시의 사회적, 윤리적인 상황이 그랬다. 아마도 그때 다른 쪽으로 ‘재가’를 하셨다면 나와 우리 누나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곡선을 탔을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 이후 반세기가 훨씬 넘어가는 지금은 어떤가? 가련한 남편들이 늘어가는 요즈음, 가련한 여인들이 등장하는 이런 이야기는 분명히 ‘고전 중의 고전’으로 그야말로 ‘옛 이야기’일 것이고 나 자신도 그 중에 하나.. 도대체 이 세상은 어떻게, 어데 까지 변할 것인가?

 


영화 동심초, 1959년  

6ㆍ25때 남편을 여읜지 8년. 이숙희(최은희)는 양장점을 하다가 빚을 지고, 출판사 전무 김상규(김진규)가 빚 청산을 도와주면서 둘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상규는 사장 딸 옥주(도금봉)과 약혼한 사이고 누이(주증녀)는 그의 출세를 위해 이 결혼을 서두른다. 숙희의 장성한 딸 경희(엄앵란)는 어머니의 행복을 위해 상규와의 재가를 권유하지만, 숙희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관습과 윤리적 도덕관 때문에 갈등한다. 숙희와 상규는 진실로 사랑하지만, 숙희는 헤어지는 길을 택하고 서울 집을 팔아 고향으로 떠난다. 몸 져 누워있던 상규는 이 소식을 듣고 서울역으로 나가 이 여사가 탄 기차를 바라보며 괴로워한다. 

 


영화 표류도 1960년  

사생아인 딸(전영선)과 어머니(황정순)를 부양하며 살고 있는 여인 강현희(문정숙)는 `마돈나’라는 다방을 운영하면서 생계를 유지한다. 현희는 생활고에 시달리지만 자존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그녀가 사생아를 낳고 다방을 경영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은 그녀를 무시하려 한다. 강현희는 손님 중의 한 명인 신문사 논설위원 이상현(김진규)과 사랑에 빠지지만 그는 그녀의 대학동창과 결혼한 몸이다. 한편 `마돈나’의 단골손님인 젊은 시인 민우(최무룡)는 현희를 좋아하지만 현희가 받아주지 않자 술을 먹고 행패를 부린다. 민우를 좋아하는 다방종업원 광희(엄앵란)는 민우와 하룻밤을 지내고 민우가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자 절망하여 현희의 도움도 거절하며 거리에서 몸을 팔다가 정신을 잃고 자살한다.

현희는 사랑과 윤리 사이에서 고민하면서도 상현과의 사랑을 키워나간다. 그러나 상현이 출장 차 미국으로 떠난 어느 날, 손님 중의 한 명인 통역자 최영철(허장강)이 외국인에게 자신을 팔아 넘기는 대화를 듣고 분노하여 우발적으로 화병을 던져 영철을 죽인다. 감옥에 수감되어 병을 앓던 현희는 병 보석으로 풀려나 상현과 함께 외딴 섬으로 내려가 살게 되지만 행복한 시간도 잠시, 병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주여, ‘이 자매에게’ 임하소서..

Nearer, My God, to Thee

Sharon Singers of the Sharon Mennonite Bible Institute  

 

우리들이 거의 3년이 넘게 간절하게 기도해 오던 윤 막달레나 자매님이 오늘 오랜 암 투병을 마치고, 선종을 하셨다. 개인적인 연분이 거의 제로에 가까웠던 영혼이지만 나의 가족같이 생각하며 기도해온 것, 전혀 ‘효과’가 없었을까? 누가 알랴.. 어떠한 사연을 가지고 그 영혼이 하늘로 가게 되었을 지를. 몇 달 전까지도 성당에서 가끔 뒷모습을 보는 것,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어서 그때마다 안심을 하곤 했지만 기어코 그 극성스러운 ‘암 투병’에 육체는 더 견딜 수 없었나 보다.

이 자매님의 선종 소식에 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외롭게 가는 것과 사랑했던 사람들 옆에서 가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하는 것이었다.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은 마찬가지니까 무슨 차이가 날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것은 본인의 생각이 아닐까? 옆에서 ‘봐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쓸쓸한 선종은 역시 쓸쓸한 기분을 주기 때문이다. 막달레나 자매님의 선종이 그런 case가 아닐까.. 모든 ‘사랑하던 사람’을 멀리 떠나서 ‘조용히’ 가겠다는 의지는 과연 어떤 것일까? 이 자매님의 가족들은 어떻게 생각을 할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저려온다.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가심을 알기에 그래도 그렇지 못한 영혼들 보다는 보내는 것이 덜 슬프긴 하지만.. 어찌 이런 과정이 담담할 수 있을까.. 결국은 슬프고 슬픈 것이다. 인간의, 아니 모든 피조물 creatures들의 ‘원죄’의 슬픔이여.. 자매님, 잠깐씩 가끔 본 인연이지만.. 부디 빛나고 편한 하느님의 세상에서 육체의 고통을 잊고 나비처럼 훨훨 나르며 그렇게 그리고 그리던 성모님, 예수님, 하느님을 보게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Updated on July 20, 2015

윤 막달레나 자매님: 지나간 주 초 初 에는 그 바로 며칠 전 선종 禪宗 하신 막달레나 자매님의 연도와 장례미사가 있었다. 불과 며칠 전에 병상에 누워서 이야기를 하던 모습을 본 것이 거짓말같이 선명하게 머리에 남는다. 그야말로 삶과 죽음의 갈래 길을 걸으며 며칠을 보낸 듯하다. 산 것이 무엇이고 죽은 것이 무엇일까.. 하는 원초적, 실존적인 물음만 계속 귀에서 울린다. 이 고독하지만, 고고 呱呱한 자매님, 고국에 가족 들이 있다는데 어떻게 해서 장례미사 안내서의 ‘유가족’란 이 완전히 비어있을까? ‘유가족 없음’.. 완전히 비어있는 것이 너무나 충격적이고, 나를 슬프게 만든다. 인간이 어찌 세상을 살다가 떠나면서 하나도 ‘인연’이 없단 말인가.. 행복하고 추억에 남기고 떠날 인연이 없음 때문일까.. 

나보다 더 불쌍한 사람을 위한 마음이었는지 자신의 시신을 병원에 의학연구를 위해 기증했다고 한다. 나의 몸 나 자신이야 떠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과연 그럴까? 어떠한 인생 역정이 이 자매님을 그렇게 고독하게 가족마저 잊고 떠나게 했을까.. 나의 넓지 않은 머리로 이해를 하려 애를 쓰지만 쉽지 않은 문제다. 시신 없는 장례미사이라 조금 쓸쓸할 것 같았지만, 새로 부임하신 이재욱 (세례자) 요한 신부님, 적절한 절차와 인정의 균형 balance을 잘 맞추시며 몇 번 병자성사를 통해서 보았던 짧은 인연을 상기시키셔서 적지 않은 조문객들을 위로하셨다. 저희들의 연도를 통해서 자매님 하루속히 연옥의 고통을 마치시고…

Trifexis, Benadryl wonders

Licking and scratching away.. until..
Tobey, Licking and scratching away.. until..

Drug company, Eli Lily and CompanyTrifexis, 트라이훽시스.. 조금은 요란한 이름의 이것은 ‘먹는 약 oral’, 그것도 개들이 먹는 약의 이름이다. 언제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몇 년을 넘지 않았을 것 같고, 이 약의 정확한 역사와 유래는 googling을 하면 홍수같이 잡스러운 (대부분 허위를 포함한) 사실들은 알 수 있겠지만, 필요 이상의 ‘정보 홍수’를  원치 않기에 모르고 지나기로 했다. 불과 한두 달 전쯤에 이 약에 대한 것을 새로니를 통해서 듣긴 했었다. 새로니의 pet dog, Ozzie는 flea 문제가 없다고 자랑을 하기에 물어보니, 흔히 알고 있는 flea collar나 spray, three-drops같은 것이 아니고 ‘먹이는 약’이라기에, 너무나 우리는 놀랐던 기억이 있었다. 그러다가 flea season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우리 집 Tobey에게는 괴로운 계절이 되었기에 annual shots (rabies shots etc) 수의사에게 ‘먹는 약’에 대해서 물어 보았었다. 그의 대답이 의외로.. ‘그 약 아주 잘 듣는다..’ 이었고, 큰 부작용이 없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새로니의 말로도 그랬지만 이제 pro의 말을 듣고 보니 심각하게 이것을 써보기로 결정하고 더 research를 해 보았다.

미국의 pet population이 장난이 아니었기에 Eli Lily and Company 같은 거대 제약회사에서 이런 쪽에 관심을 기울였을까? 그저 밖에서 바르는 약, 모두 poisonous 한 chemical approach를 넘어서 이제는 ‘간단히 먹는’ 약이 나올 정도가 되었는가.. 참 $$이 좋구나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이번에 알게 된 이 약은 flea뿐이 아니고 heart worm까지 ‘처방’ 한다고 하니.. 입이 벌어질 정도다. 문제는 과연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역사가 짧은 듯 하니.. 분명히 예기치 못한 문제가 있을 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too good to be true.. 란 표현이 이런 때 맞는지…

약 값이 만만치 않음은 알지만, 반드시 유난히 비싼 것이 아님은 우리 Tobey를 보면 알 수 있다. Flea bite로 여름 내내 고생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2차적인 문제가 더 심각함을 이번에 알게 된 것이다. 너무나 flea bite가 가려워서 무차별하게 긁어대는 바람에 skit infection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번에는 귀에까지 감염 되어서 무려 $200의 치료비가 들었던 것을 생각하니.. 조금 비싸도 이런 편리하고 확실한 oral medicine은 너무나 매력적인 것이다. 수많은 flea product가 있지만 그 무엇이나 시간과 노력이 드는 것들이다. 귀찮으니까 (사람이) 더 이상의 노력을 포기하고 만다. 한 달에 한번 ‘먹이면’ 되는 이 wonder drug..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기대를 가지고 지켜 보기로 했다.

이런 flea drug것과 더불어 유난히 가려움증으로 고생하는 우리 Tobey같은 개에게 사람이 먹는 allergy drug을 먹여도 좋다는 사실도 우연히 알게 되었다. 물론 체중에 따라서 양을 조절하여야 하지만.. point는 그 약이 사람처럼 잘 듣는다는 사실.. 위에서 말한 대로 가려우니까.. 우선 2차적인 피부감염이 일어나는 것에는 이런 ‘가려움 증’을 control하는 방법이 얼마나 효과적인가? Doctor의 prescription이 필요한 Trifexis과는 달리, Benadryl (non-prescription 비 처방) 같은 allergy drug은 의사 처방 없이 살 수 있으니 이것 또한 너무나 편리했다. 이런 과정으로 Tobey는 한꺼번에 2가지 약을 먹기 시작하고.. 결과는 너무나 happy한 것이었다. 최소한 현재까지는.. 긁느라고 얼이 빠진 듯한 얼굴에서 이제는 제 정신을 차린 듯한 모습이다. 하지만 우리의 주 관심사는 역시 앞으로 어떻게 flea가 control되는가 하는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flea들이 ‘알을 낳지’ 못하게 된다고 했으니까.. 그야말로 control이 되는 것이지만.. 과연 원칙대로 될 것인가?

Rosary Relay, FS woe, another ‘Nearer my..’, Ozzie

Thebible33-1
Permission: GNU Free License

Rosary Relay..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레지오 꾸리아 (Curia)에서 드디어 ‘묵주고리기도’ 의 ‘지령’이 하달 되었다. 자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에 ‘끊임 없이’ 5분 간격으로 묵주기도rosary가 계속 바쳐지는 recite 것이다. 물론 이런 기도는 확실한 ‘지향 intention‘ 을 가진다. 2년 전쯤인가.. 본당 주임 하태수 미카엘 신부님을 위한 ‘고리기도’를 경험했었다. 나에게는 처음이라서 너무나 ‘신기하게’ 느껴진 경험이었다. 생각만 해도.. 멋진 idea가 아닌가? 한 영혼을 위해서 쉬지 않고 끊임없이 어디선가 기도가 바쳐진다는 사실이..

이번에는 주임신부님 (이재욱 요한 신부님)은 물론이고 보좌신부님 (한민 토마스 신부님)까지 포함되어서 그분들의 ‘영유간의 건강’을 위한 묵주고리기도가 바쳐지게 되었다. 그러니까 우리 (특히 레지오)에게 가장 중요한 영혼들인 것이다. 6월 24일부터 12월 24일까지 계속되는 이번의 rosary relay, 우리 부부는 오후 9시를 넘은 slot인데.. 너무 편리한 시간을 차지했나 하는 미안한 심정도 든다. 이런 rosary relay같은 것이야 말로 우리 가톨릭만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빛나는 유산이요 영적인 무기임을 개신교 신자들은 알기나 할까..  

 

Near-death File Server.. 우리 집 computer system (networked) 에서 file server pc가 결국 하루 아침에 quit (a.k.a. dead) 하고 말았다. 이름도 역시 ‘FS’ (file server)인 10년이 넘은 ‘고물 clunker’ Windows PC가 4~5 hard drive로 우리 집 home network에 24시간 file을 serve하고 있는데.. 물론, 거의 99% 내가 쓰는 file들이지만 가끔 연숙과도 share하는 것들이 있어서 이것은 편리하기도 하지만 꼭 필요한 ‘물건’ 이었다. 거의 5 TB의 ‘역사적’인 data들이 많고, 그 대부분은 video file들이 차지한다. 물론 local (pc) drive를 쓰면 이런 거추장스러운 것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지만..  이런 home ‘cloud’ system의 매력은 무시할 수 없다. 보이지 않는 곳 (안전함)에서 ‘항상’ data를 필요할 때마다 받아 쓸 수 있음은 역시 편리하고 안전하고 ‘멋진’ idea인 것이다. 이런 server system은 virtual machine을 remote desktop으로 desktop pc로 쓰게 되면 필수적이다. 

나는 현재 Proxmox VE (virtual environment)란 virtual server를 쓰고 있는데, 한때는 10 virtual machines (대부분 test machine, sandbox platform, internet PBX등으로) 까지 쓰기도 했지만 이제는 조금 김이 빠진 상태로 현재는 4개의 virtual machines (Windows, Ubuntu, Asterisk pbx etc.)만 유지하고 있다. 이런 ‘headless‘ virtual machine들은 필수적으로 file server가 필요하기에 이번에 ‘죽은’ file server ‘FS’ 는 결사적으로 되 살려놓아야 할 입장이었다. ‘죽은 시체’를 열어 보니 10년이 넘은 motherboard가 제일 의심스러워서 완전 폐기하려는 순간.. not so fast moment인가.. 실제로 죽은 것은 motherboard가 아니었고 power supply (PS)였음을 알게 되었다. 버리기 직전에 발견한 것이다. 다른 것으로 교체를 하여서 결국은 FS는 다시 작동을 하게 되었다. 우리 집의 computer (network) system은 거의 25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이런 것들과 ‘장난하는 것’이 나의 시간을 죽이는 최고의 취미였지만.. 솔직히 이제는 조금 피곤한 기분이 든다. 멋진 system을 꿈꾸며 살기도 했지만.. 이제는.. 간단한 것, 단순한 것을 찾게 되니.. 역시 나이는 무시할 수 없는 모양이다.

 

 Nearer My God..  5월 초에 P 베로니카 자매님과, 개신교 신자였던 K 자매님을 연속으로 하늘나라로 보낸 지 불과 2개월도 지나지 않았지만 사람의 운명이란 것이 편리하게 예측을 할 수가 있을까? 지난 2개월 그런대로 편히 쉬는 기분이었지만 우리에게는 다른 ‘사신 死神’들이 가까이에서 움직이는 것을 느낀다. 제일 급한 것은, 몇 년 전부터 열심히 기도하던 Y 막달레나 자매님.. 이 자매님, 참 외롭게 투병을 하시던 교우였지만 최근에 아주 상태가 악화되는 소식을 들었다. 특히 내가 개인기도를 많이 바치던 자매님인데.. 성모님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지경으로.. 더욱 안타까운 소식은 ‘혼자’인 몸으로 투병을 하는 것으로.. 가족들과는 어떤 관계인지 전혀 알 길이 없다는 사실이다. 나도 외롭지만 나보다 더 외로운 영혼들도 있다는 사실에 나는 은근히 놀란다. 비록 하느님께 간다고 하지만 인간적인 마음으로 어찌 가족을 생각 안 할 수가 있을까?

설상가상으로 우리 레지오 단원 자매님의 부군께서 ‘중병’으로 고생을 하시게 되었고 결국 그 자매님은 간병을 위해 레지오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연세로 보아서 힘든 투병을 하시는 이 형제님.. 하느님께 더욱 의지하기를 희망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은 모양이라 더욱 안타깝기만 하다. Y 막달레나 자매님의 선종기도를 하고 있는 상태고 형제님은 환자기도를 하고 있지만.. 인간능력의 한계는 너무나 분명하기에 더 높은 곳의 ‘능력’을 믿어야 하는 시간들이 온 듯하다. 

 

Ozzie, I Love You.. 지난 며칠간 우리 집에 어떤 guest가 며칠 묵고 갔다. 오래 전, 거의 6년 전에도 이맘때에도 (헉헉거리는 무더웠던 여름) 어떤 guest가 와서 몇 주일을 묵고 간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guest가 사람이었고 (오랜 전에 알았던 집의 젊은 아들) 이번에는 2발이 아닌 4발 달린 pet dog 이었다. 그 오래 전의, 사람이 손님이었을 때, 한마디로 짜증나는 더위 속에서  ‘서로’ 고생을 했던 기억만 남은 듯 했지만 이번의 4발 달린 ‘동물’ 손님은 비록 며칠 간이었지만 너무나 즐거운 기억을 남겼다.

이 ‘4발’ 손님은 다름이 아닌 새로니의 ‘adopted’ pet dog, Ozzie였다. 3살이 조금 넘었지만 덩치가, 10살이 넘은 우리 집의 Tobey보다 훨씬 큰 편이다. 동생 나라니와 같이 거의 2년 전쯤 어떤 animal shelter에 같이 가서 데려 왔다고 했는데, 마지막으로 고른 사람이 나라니였다고 했다. 그 이후 가끔 우리 집에 데려온 적이 몇 번 있었고 이미 주인인 Tobey와도 구면인 셈이다. Ozzie는 한 마디로 nice dog이라고 할까.. 어쩌면 그렇게 순~ 한지.. Tobey에 비해서 너무도 착한 아들 같다고 할까. Breed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긴 다리를 가지고 splinter같이 뛰는 모습을 보면 입이 벌어질 정도다. Tennis ball로 fetch를 하면 어떨 때는 ball보다 더 빨리 뛰어가 기다릴 때도 있으니까..

새로니가 출장을 갈 때 이 Ozzie를 pet motel에 맡기고 갔었던 모양인데, 아무래도 Ozzie에게 미안 했던지 우리에게 ‘살살’ 부탁을 해서 이렇게 우리 집이 pet motel역할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조금 귀찮은 생각도 들었지만.. 가족이 이럴 때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순순히 3일 간의 pet sitting을 해 보았는데, 결과는 대 성공이었다. 의외로 Ozzie가 잘 적응을 하며 아주 happy하게 보여서 우리도 기쁜 마음으로 돌보아 주게 되었다. 남자만 보면 짖어대던 그 녀석이 (전에 남자에 대한 trauma가 있었지 않았을까..) 이제는 나에게도 정답게 접근하고 심지어는 만져달라고 머리를 들이대곤 해서 아주 정이 흠뻑 들게 되었다. 다른 편으로는 이렇게 정이 들면… 곤란한데.. 하는 우려 아닌 우려까지 들었다. 그 만큼 정을 준다는 것.. 나중에 정을 거두어들일 때도 생각을 안 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만날 때가 있으면 헤어질 때도 있으니까 너무 정을 주지 말자고 다짐을 하지만..

 

Father’s day 斷想 2015

Father's day smoke from
Father’s day smoke from …

오늘은 2015년 여름의 시작하지 summer solstice 와 아버지 날 Father’s Day가 겹친 날이었다. 일주일 전부터 시작된 여름의 위용을 과시하려는 듯 찌는듯한 습기와 열기가 함께한 전형적인 lazy but comforting Summer day였다. 이 ‘아버지 날’이라는 것, 수십 년 전 미국에 처음 오며 느낀 것 아직도 기억한다. ‘어머니 날’을 제외한 364일이 아버지 날이었던, 당시의 대한민국의 정서를 생각하니 왜 이런 날이 필요한 것일까 했던 것.. 하지만 역시 ‘드센 여자들이 많은 미국’  사람들 선견지명이 있었나 보다. 세월이 갈수록 여자들, 특히  ‘엄마’들의 power가 하늘로 치솟게 되며, 이 Father’s Day의 중요함이 더 돋보이고 필요하게 된 것을 실감하게 된 것이다.

성당이건 교회건, 학교건 어디건 간에.. 상대적으로 늘어진 ‘주문진 오징어’ 같이 쳐지고, 피곤한 아빠들을 위로하는 ‘미사여구 美辭麗句’를 듣느라 바쁘다. 이런 ‘세속적인 흐름’에 겹쳐서 수세에 몰리는 듯한 종교계 특히 천주교의 사제, 그들도 Father, 영적인 아버지인데 이 Father’s Day에 그들도 같이 축하를 받게 되었다. 역시 선견지명 先見之明 있는 미국인들이었다.

2015-06-21 17.50.28-1이날이 되면 물론 나도 아버지이니까 나를 아버지로 부르는 ‘아이들’ 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 점검해 보는 기회도 되지만 나는 사실 나의 아버지를 더 생각하는 편이다. 문제는.. 나는 아버지를 본 ‘기억’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내가 2살 때 6.25 사변이 시작되면서 납북, 행방불명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식인이었던 관계로 살아서 북으로 갔을 확률이 거의 제로에 가까워서 우리는 ‘돌아가신 아버지’로 생각하며 자랐다. 아버지 없는 설움은 피부로 못 느끼며 자랐지만 남들의 눈에 그렇게 보였을까. 우리 아버지는 2살짜리 아들을 두고 어떻게 가셨을까? 3살 위였던 누나는 아버지를 어렴풋이 기억한다고 하지만 나에게는 거의 nobody가 되었다. 아버지.. 어떻게 그런 불운한 세월을 사셨습니까? 누구의 책임입니까? 나는 딱 한 인간.. 김일성 개XX (그리고 그 자식XX들)를 증오한다.

올해의 Father’s Day, 그래도 아이들이 나를 잊지 않고 찾아주어서 단출한 우리 4식구 집에서 grilled hamburger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아이들, 같은 town에서 살기에 이런 ‘행운’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멋진 casual shoes와 gym bag을 선물로 받기도 했는데, 특히 신발이 나의 발 size에 기가 막히게도 잘 맞아서 다행이었고, 15년 가까이 써서 거의 ‘가루가 묻어 나오는’ old YMCA gym bag를 대신 할 것이 생겨서 아주 practical 한 선물이 되었다.

 2015-06-27 16.14.14-1

 

나는 어떤 아버지일까.. 가끔 생각한다. 십대가 지나가며 완전히 놓친듯한 두 딸들.. 아직도 그 후유증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30살이 넘어가는 완전히 커 버린 ‘애 들’.. 10대처럼 아직도 나는 거북스럽기만 하다. 그런 아빠는 그 애들에게 어떻게 비쳐지는 것일까? 얼마 남지 않은 인생, 어떠한 아버지 legacy를 남기고 갈 것인가.. 아버지를 겪어 보지 못한 나로써는 그렇게 쉬운 일처럼 보이지 않는다.

Mother’s Day at the Garden

어제는 모처럼 우리 4식구가 함께 일주일 늦은 Mother’s Day를 조금은 특별한 곳에서 보냈다. 이제는 머리들이 다 커 질대로 커진 두 딸, 생각보다 바쁜 생활 일정에 정신 없이 ‘삶’을 사는 그 애들.. 어릴 때 퇴근 후에 집에 오면 그 애들을 침대 위에서 번쩍 들어서 ‘flying!’을 외치며 내 던지던 때가 조금 과장해서 엊그제 같은데.. 어릴 때부터 holiday나 Mother, Father day를 귀찮을 정도로 챙기던 애들.. 이제는 그런 good ole days 순진하고 포근했던 시절은 다 간 모양이다. 그런 애들.. 너무나 바빠서 올해는 제대로 제 날짜에 Mother’s Day 를 못 챙기고 지냈지만 그래도 일주일 연기해서 모인 것이다.

pretty but moderate home-made lunch
pretty but moderate home-made lunch

몇 년 전부터는 집에 모여서 특별한 음식을 자기들끼리 준비, 요리해서 먹곤 feast 했는데, 올해는 먹는 것만은 재미가 없다고 해서 나라니의 idea로 Atlanta Botanical Garden: the Garden 을 구경하고 Garden근처에 있는 새로니 midtown condo에 가서 음식을 준비해서 먹게 되었다. 2009년 경에 우리는 그곳 the Garden 에 갈 기회가 있어서 사실 그곳은 생소한 곳은 아니었지만 그 때는 저녁때 잠깐 본 정도라 기억할 만한 것이 별로 없었지만 이번에는 낮에 제대로 보게 되었고 시간이 충분해서 아주 찬찬히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볼 것은 많지만 제일 기억에 남는 것 중에는: Canopy Walk, Earth Goddess statue, Fuqua Conservatory & Orchid Center, 그리고 특별 전시 중인 Bruce Munro의 cool light show 가 있다. Canopy Walk, 이것은 Garden forest의 skywalk 라고나 할까.. 숲 위의 고가 보행로인데 이곳을 걸으며 Garden 숲 전체를 ‘하늘에서’ 감상할 수 있다. 이 Canopy Walk는 몇 년 전 공사 중에 대형사고(structure collapsing)가 나서 수 명이 사망했던 뉴스로 본 기억이 있었다. 그만큼 이것은 Garden전체에서 중요한 attraction이 되었는데, 사실 느낌은 전체 거리가 짧다는 것이고 ‘고가 도로’라고 하지만 그렇게 ‘고가’의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것.. 그것에 비해서 structure 자체는 아주 정교하고 세련된 것이었다

비록 일주일 늦은 것이었지만 그래도 바쁜 와중에 이렇게 저희들끼리 경제적으로 기억에 남는 날을 만들어 준 것 우리는 감사하게 느꼈고, 이런 날들이 앞으로 얼마나 우리들에게 남았을까를 생각하니 한시 한시가 귀중하고 기억과 추억에 남기고 싶은 순간들임을 절감하게 되기도 한 멋진 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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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uce Munro light art

5월 16일, 2015년..

무언가 쓰고 싶고, 남기고 싶은 조금은 우울한 듯한 마음을 달래려 pen을 다시 잡는다. 잔잔한 강박감에 밀려 쓰는 것이긴 하지만 이렇게 쓰고 나면 조금은 기분이 솟는 듯 하다. 오일육, 5월 16일, 2015년.. 박정희의 얼굴이 보이고 당시의 서울 장안 냄새와 모습이 느껴지고 보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나는 과연 무엇일까? 나는 누구일까?

나의 정체성, identity는 과연 무엇인가? 이경우란 인간은 어디에 소속이 된 생명체일까? 왜 나는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일까?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 아닌 듯 한 심정은 왜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나를 당혹하게 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들이 나를 지독히도 우울하게 한다.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것 중에는 ‘서울, 대한민국, 우리 누나네 식구들, 나의 죽마고우’들과 다시 맞대면 하는 것이다. 성모님이 나를 진흙탕 골에서 이끌어 주시는 모습을 나는 자주 그려왔다. 나의 손목을 잡으시고 구덩이 속에서 이끄시는 성모님의 옷이 진흙탕에 묻어서 더러워졌음도 나는 그린다. 조금은 서광이 비치는 듯한 나의 머리 위에는 다른 ‘고통’이 보인다.. 그것이 바로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바위인 것이다. 진흙탕 구렁텅이가 아니고 거대한 높은 바위.. 언젠가는 그곳을 넘어야 한다는 압력.. 거의 일생의 전부를 피하며 살아왔던 그곳..이 바로 나의 조국 대한민국인 것이다. 모순중의 모순.. 그렇게 몽매 그리워하는 곳을 나는 피하고 무서워하는 것이다.

내가 아는 고향이 ‘아주’ 없어졌을 것이라는 확신이 나를 정말 우울하게 한다. 통근하듯 고국 행 비행기를 자주 타는 주위의 인간들.. 모두 부럽다 못해 밉기까지 한 사람들이다. 꿈속에서 가끔 보는 ‘상상의 나라’ 나의 없어진 고향을 나는 어떻게 찾아야 하는 것일까? 나의 ‘위치’를 과연 어디에 맞추어야 하는 것일까? 나는 어떻게 나의 ‘정체성’을 정리해야 하는가? 나의 어머니를 어찌 다시 뵐 것인가? 멀어지기만 한 누나의 가족들은.. 나를 완전히 잊었을 듯한 친구들은.. 그들이 ‘잘 사는’ 모습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것이 나를 기다리는 다음의 monster일까? 성모님이 어떻게 나로 하여금 그 ‘거대한 바위’를 넘게 하실 것인가? 성모님이시여.. 저를 위해 빌어주소서..

양양이의 승리 勝利

Tobey의 보금자리 앞에서 시위하는 Izzie, 옆에서 보고만 있는 불쌍한..

Tobey의 보금자리 앞에서 시위하는 Izzie, 옆에서 보고만 있는 불쌍한..

결국은 보금자리를 완전히 빼앗기고.. 그나마도 이불에 누운 것만도 다행..

결국은 보금자리를 완전히 빼앗기고.. 그나마도 이불에 누운 것만도 다행..

 

엊그제 찍은 몇 장의 snap 사진을 보고 한참 웃었다. 꽁꽁 얼어붙는 듯한 추위에 이렇게 웃기는 광경은 나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이 모습은 ‘고양이 Izzie가 강아지 Tobey의 보금자리를 멀쩡하게 차지한 것’이다. 우리 집 ‘터줏대감’ 10살이 넘은 강아지 Tobey와 지독히도 lucky한 ‘집 앞에서 데려온’ 고양이 Izzie 가 추운 겨울을 보내는 이 광경에는 많은 뒤 이야기들이 있기에 내가 만에 일이라도 이들 보다 먼저 세상을 뜬다면 인간 가족 못지않게 이들에게도 반드시 의미 있는 작별인사를 할 것 같다.

가끔 사람을 bite하는 고약한 성미를 가진 Tobey는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런 ‘사고’는 더 이상 없지만 ‘전과’의 기억으로 인해서 나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에게는 아직도 ‘찬밥’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Tobey는 나에게 거의 ‘맹목적’으로 의지하는데, 나는 그것이 참 훈훈한 느낌이라서 하나도 귀찮지 않다. 솔직히 말하면 찬밥 취급하는 나머지 가족들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사랑이 결여’된 것 같은 싸늘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그런 중에 갑자기 2006년 경에 우리 집에 고양이가 나타났고 어찌어찌 해서 2009년 부터 우리 집 고정 식구가 되었다. 2006년 6월 경.. 잊지도 못한다. 6월 가랑비가 내리던 날 집 앞에서 아기 고양이 소리가 구성지게 들렸고.. 그런 것은 귀신처럼 신경을 쓰는 연숙이 배고픈 애기 고양이를 집 안으로 불려 들여서 먹을 것을 준 것이 인연의 시작.. 보통 집 고양이인 그 baby는 분명히 누가 버린 듯 했다. 너무나 가슴이 쓰린 것을 어찌할까.. 그래도 혹시나 해서 사진을 찍어 동네에 붙여 놓았지만 아무도 claim을 하지 않았다. 고양이 기를 생각은 전혀 못했지만 이제는 choice가 없어서 기르기로 했는데, 때마침 큰 딸 새로니가 Washington DC job 으로 그곳으로 데리고 가서 살았는데 이곳으로 다시 이사를 오면서 우리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런 ‘비 오는 날의 구출’ 특별한 인연이 있어서 기르게 되었지만 제일 골치 아픈 것이 개와 같이 살아야 하는 기구한 운명이었다. 개와 고양이는 옛부터 유명한 관계가 아닌가? 무척 신경이 쓰였고 accidental bite 전과가 있는 Tobey가 제일 문제로 여겨져서 촉각을 세우고 감시를 하기도 했다. 결국은 몇 번 대형사고 직전까지 갔고 우리는 당연히 ‘전과범’ Tobey만 벌을 주곤 했다. 상대적으로 고양이 Izzie는 더욱 보호와 대접을 받기도 했다.

시간이 가며 Tobey의 attack 회수는 줄어들고 서로의 turf만 침범하지 않으며 ‘평화공존’의 상태를 유지하는데 큰 문제가 없게 되었다. 그러면서 서서히 ‘사태의 진실’이 밝혀지게 되었는데.. 모든 accident 의 원인은 Tobey가 아니고 Izzie 였다는 사실. 그러니까 고양이가 강아지를 ‘먼저’ 괴롭히고 심지어는 attack한다는 놀라운 사실.. 그것을 참다 참다 강아지가 defensive하게 된 것을 우리는 반대로 본 것이다.

다른 집에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우리 집은 이런 상태에 있다. 한마디로 고양이의 승리인 것이다. 참.. 우리 집에서는 오랜 전부터 고양이란 말을 쓰지 않고 ‘양양이’라는 말을 쓰는데.. 이것이 연구 대상이다. 어떻게 해서 (누가 먼저) 이런 말을 쓰게 되었는가.. 양양이.. 참 재미 있지 않은가?

이것이 진정 성탄절의 평화..

2014년 성탄절이 3일 남았다. 올해의 성탄과 새해는 무언가 확실히 다르고.. 아니 달라야 한다. 그 다른 것은 바로 수 십 년 만에 처음 느낀다고 확신하는 진정한 평화일까? 평화, 진정한 평화가 바로 이것인가? 비록 근래 특히 2010년 이후는 그 전보다 더 평화를 느꼈다고 할 수 있지만 올해는 그 차원이 다르다. 바로 성모님께서 나를 개인적으로 밀어주신다는 확신이 섰기 때문일 것이다. 나를 벼랑으로 밀어주시긴 했지만.. 죽이시지는 않고 비교적 안전한 곳으로 밀어 주셨다. 하늘에 계신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와 성모님께서 나를 친히 돌보아 주신다는 ‘기발한 생각’이 언제부터 들었을까? 처음에는 그렇다고 우격다짐으로 믿으려 노력을 했지만 현재는 비교적 자연스럽게 믿어진다. 아마도 이런 나의 변화가 올해 내가 받은 최고의 천상의 선물일 것이다. 성모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어머니!

가정의 평화는 나의 머릿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보인다. TobeyIzzie가 뛰고 달리고 자는 모습들.. 최고의 평화스런 선물이다. 연숙과 ‘매일’ 가까운 본당에서 미사에 참가하는 것 어떻게 표현을 하랴? 그렇게 으르렁대던 새로니 나라니도 이제는 여엿한 숙녀처럼 행동을 하고 가족을 돌본다. 이것이 올해 현재 우리가 받고 있는 은총의 선물 들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생각하고, 뛰고 미사를 갈 수 있는 건강을 가지고 있다. 이것보다 낳은 선물이 어디에 있을까?

비록 우리는 불안한 심정을 떨칠 수 없는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이것도 솔직히 성모님의 보살핌을 느끼고, 기대하며 산다. 그런 평화를 느끼는 것이다. 비록 고향의 가족들과의 관계를 해결 해야 하는 거대한 숙제가 있지만 그것도 크게 걱정을 하고 싶지 않다. 노력을 하면 될 것이다.

비록 나의 신앙적인 ‘본부’인 레지오에서 많은 문제점을 보고 있지만 이것도 역시 천상적인 도움을 기대하고 싶다. 인간적인 노력으로 안 되는 것들 투성이인 이곳.. 어떻게 문제들을 헤쳐나갈까? 하지만 최소한 현재 우리들은 그곳에서 벗어나 평화를 즐기고 싶다. 특히 이런 성탄과 새해를 맞이하며 우리는 더욱 평화를 느끼고 싶다.

Thanksgiving 2014

¶  Give Thanks,  Count my blessings..

이제야 이런 속어, 숙어들의 의미를 새로 생각하게 되는가..  올해는 역사적이고 종교적인 것에서 완전히 세속화 되었고 되고 있는 Thanksgiving Day 2014를 진정한 고마움을 느끼며 맞는다. 일에서 쉬고, 푸짐히 먹는 그런 날만이 아니고 피부로 느끼는 ‘고마움’의 기분이 가득한 그런 날이 되고 싶은 것이다. 왜 다른 해보다 더 감사를 드려야 하는가.. 올해는 이것이 그렇게 어려운 질문이 아닌 듯하다.

 예년에 비해 너무나 추운, 한겨울 같은 11월은 더욱 holiday의 분위기를 주어서 큰 불만은 없지만 다른 편으로 holiday blues의 가능성을 전혀 떨칠 수는 없다. Holiday = Family라는 등식의 의미를 생각하면 다른 차원의 기쁨과 슬픔이 교차됨을 느낀다.  대가족에 대한 부러움이 더욱 커지는 이런 season에 이제는 우리보다 더 쓸쓸한 가족의 외로움에 동참하고 싶다.

 

Thanksgiving SongMary Chapin Carpenter

 

올해는 가족 역사상 ‘처음으로’ Thanksgiving Day Mass에 가 보았다. 이런 날 미사를 거르는 우리 가족의 전통이 근래 들어서 조금씩 부끄러웠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런 가족전통을 깨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것이 올해는 얼음이 녹듯이 해결되었다. 전통적인 ‘장시간 터키 요리 준비’를 올해는 ‘단시간 Spanish seafood roasting’으로 바꾸어서 아침부터 음식준비를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처음 간 Holy Family Church 미사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왔다. 아마도 그들은 매년 왔던 ‘고정적’인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하기야, Thanksgiving을 하는 제일 좋은 방법이 ‘성찬의 전례, Eucharist‘가 있는 가톨릭 미사일 것이다. 진정으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시작하는 ‘추수감사절’은 예년에 비해서 훨씬 마음이 가벼웠다.

Spanish seafood feast
Spanish seafood feast

올해의 feast menu는 ‘완전히’ 바뀐 것으로 ‘아이들 (두 딸)’이 합작으로 생각한 것으로 전통적인 turkey에서 seafood으로 바뀌고 준비시간도 크게 단축이 되고 따라서 energy소비도 격감이 되었다. 결과는 ‘먹어 보아야’ 알겠지만.. 우선 ‘맛 없을 수 있는’ turkey가 없는 것이 left-over를 먹어야 하는 부담을 덜 수 있어서 마음도 가벼웠다. 올해는 ‘정신적 여유’가 조금 있으면 guest를 한 명 정도 부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역시 ‘여유가 없는 세월’에 채여서 실현을 할 수 없었다.

지나간 해, 세월에서 감사를 드릴 것은 가지 수로 따지면 많지 않지만 그 몇 가지에 대한 감사의 정도와 농도는 아마도 쉽게 글로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다. 진정으로 가슴으로 높은 저곳의 ‘누군가’에게 감사를 드려야 하고 드리고 싶다. 나를 개인적으로 ‘사사건건’ 인도해 주신 ‘하느님의 어머니’.. 2007년부터 나를 보이게 안 보이게 인도해 주신 ‘그 어머니‘ 그리고 나를 항상 안쓰럽게만 바라보시는 어머님.. 나를 우리를 인도해 주신 것.. 첫 번째의 감사 대상이 아닐까. 특히 ‘하느님의 어머님’은 조금이라도 빗나가기만 하면 바른길로 잡아 주셨다. Holy Family CC에서 soul friend가 된 ‘한국말을 쓰는 자매님‘들.. 진정한 친구로서 서로를 격려하며 살았다. 오랜 가족의 숙원, 숙제를 큰 어려움 없이 풀어갈 수 있게 도와준 가족들, 높은 곳의 어머님들.. 감사합니다. 이제는 ‘오늘 죽어도’ 큰 고통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일년 열두 달.. 매일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  Eat Turkey, Become American..

Author, Marie Myung Ok Lee
Author, Marie Myung Ok Lee

어제 날자 New York Times PRIVATE LIVES Opinion Page에 조금은 익숙한 이름 Marie MYUNG-OK LEE라는 ‘한국 이름’의 저자가 쓴 글이 실렸는데 그 제목이 바로 Eat Turkey, Become American이었다. Thanksgiving Day 에 맞추어 어떤 Korean-American author가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쓴 것인데, 생각보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시절의 얘기라 나의 관심을 끌었다.

글을 보니 ‘매끄러운 문제’여서 혹시 professional writer 가 아닐까 했더니 나의 짐작이 맞았다. ‘잘 나가는’ 저자였던 것이다. 저자는 한국인 부모를 둔 여성으로 어린 시절 집에서 Thanksgiving Day와 다른 ‘미국 명절’을 지내며 한국, 미국의 두 문화권을 살았던 이야기를 재치 있게 그렸는데, 그 시절은 한국전쟁 이후에서 시작되는 ‘오래 전’의 역사였다.

그녀, 저자의 아버님은 원래 의사였는데 한국전쟁 때 미군 장성의 통역관으로 일을 해서 미국에 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때가 1953년 경이니.. 휴전 할 당시일 것이다. 당시에는 아시아 이민의 길이 ‘전혀’ 없어서 올 수 있는 길은 모두 ‘임시 비자’에 의한, 그러니까 유학생 같은 것 뿐이었을 것이다. 임시 정착한 곳이 춥기로 유명한 미네소타 북부지역의 조그만 ‘의사가 거의 없는’ town이었고 그곳에서 자녀들이 태어났고 Thanksgiving Day같은 holiday를 turkey를 먹으며 ‘ 미국인처럼’ 살았다. 임시비자가 만료되어 이민국에서 출국명령을 받고 ‘위기’를 맞았지만 현지 congressman의 도움으로 영주권을 받고 1965년 아시아계 이민이 개방되는 법으로 시민권을 받았다고 한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시대를 알면 왜 그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한국에 대한 것을 잊게’ 하려는 노력을 했는지 대강 짐작이 간다. 1970년대 유학생들도 그런 것은 마찬가지였다. 한국말을 ‘못 쓰게’한 가정도 많이 보았고 그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이 글의 저자가 겪는 문화갈등은 더 했을지도 모른다. 오죽하면 어린 시절 자기들이 ‘우주선을 타고 미국에’ 내렸다는 기분이었다고 했을까? 자기들의 ‘근본’을 모르고 자란 것이다. 가난하고 찌든 조국을 잊게 하려는 ‘의사 부모님’의 심정을 지금 이해하려면 조금 힘들지만 그런 시절을 나는 반 정도는 겪었기에 조금 쉽게 이해한다.

이 글을 읽으며 곁들여 생각나는 것 중에는 1970년대 유학생들이 ‘선배 유학생’들에게 들었던 ‘미국 개척사’들.. 50/60년대 유학생들의 이야기들.. 특히 이 글의 배경이 된 미네소타 북쪽의 맹 추위와 돈이 없어서 pet food를 먹었다는 이야기.. 김치와 쌀을 완전히 잊고 살았던 시절..나의 시절은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짐작은 할 수 있었다. 특히 처음 보는 Thanksgiving Day culture는 당시에는 ‘100% 미국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러기에 저자의 부모들이 그렇게 turkey 요리 준비에 신경을 썼던 것이 아닐까.. 참 오래 전의 ‘흘러간’ 이야기들이다.

날씨가 화제였던 세월들..

지금은 조금 낳아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머리 속에는 온통 추운 겨울, 아~ 고뇌..의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1월 28일인가..의 최악, 고통스러웠던 19시간 차 속에 갇혀서 떨던 일과 바로 지나가고 있는 주의 얼음대란 들.. 지나가는 주의 3일간 집에 있어야 했던 시간들은 비교적 덜 불쾌한 것일까.. 우선 밖에 나가지를 않았기 때문일까. 최악의 경우 전기가 나가는 것인데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2주 전의 snow jam은 정말 최악이었다.

까마득한 옛날, 시카고 시절 고대생 윤근흠이 갑자기 쏟아진 시카고 폭설로 12시간인가 걸려서 집에 왔다고 하는 추억이 생각은 나지만 내가 연숙과 같이 차 속에서 19시간 만에 집에 왔다는 사실은 지금도 믿어지지 않고 빨리 잊어버리고 싶은 악몽이다. 그때 나는 정말 ‘심신’ 모두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다.오랜 세월을 살면서 그렇게 ‘육체적, 물리적’인 위협을 느낀 적이 없었다. 혼자도 아니고 우리 부부가 같이.. 상상으로 가끔 그런 위협을 공포로 느끼곤 하지만 이것은 100% 실화인 것이다. 

최악의 경우는 무엇일까? 아마도 죽는 것 아닐까? 나는 죽는 것을 지금은 어떻게 받아드리고 있는 것일까? 믿음을 무기로 자신을 가지고 대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과연 그럴까? 언제 죽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만 진리로 알고 살자.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죽을 준비는 항상 하고 살자. 그것이 전부다.

날씨 이외에는 어떤 것들이 나의 머리 속에 있을까? 아하! 1월 중에 용감하게 실행한 나의 ‘약속’.. 도레미 가라오께에 가족들이 갔던 일.. 이것은 정말 나에게는, 아니 가족들에게는 놀라운 일일 것 같다. 어찌 아니 그렇겠는가? 우리 가족, 정말 같이 이렇게 ‘나가서’ 논 적이 있었던가? 아니 집에서도 그런 적은 없었을 것이다. 그저 조용히 우리는 살았다. 지금 생각하니 정말 가족들에게 미안하고 나는 몸 둘 바를 잊는다. 어떻게 그렇게 살았을까? 나는 내가 가정적이라고 항상 자부했지만 그와 못지않게 나는 재미 지독히도 없이 가족들을 대했다. 그것은 사실이다. 아마 우리가족들은 그것에 적응이 되었을 것이고 운명이라고 받아 들였을 것이고 체념을 하며 살았을 것이다. 나도 변명의 여지는 없지 않지만 이렇게 가족이 ‘나가서 노래를’ 부르고 보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정말 없다.

이런 나의 ‘심경의 변화’는 아마도 최근 3년간 나의 out-of-closet 덕분일지도 모른다. 그 전에는 꿈도 못 꾸었다. 새 세상을 보는 듯하고.. 어떨까.. 언제까지 그런 새 세상을 알고 즐기며 살 수 있을까? 나는 분명히 새로운 세상을 새로운 정신과 믿음으로 살고 있다. 그런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아마도 묵주기도와 레지오, 최근에는 순교자 성당에 조금씩 관여하는 것.. 이런 것들 때문일 것이다.

항상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그대로 있고 나를 괴롭히지만 그래도 잘 꾸려나가는 내가 어떻게 보면 대견하기도 하다.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다. 이것이 나의 99% 노력이라고 볼 수도 있다. 나는 젖 먹던 힘을 내고 있다. 혼자만의 노력은 비록 아니지만 분명히 나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이것을 하느님은 아실 것이다. 그러면 됐다. 그러면 됐다.

Thanksgiving prayers, 2013

best ever.. roasted, 2013
best ever.. roasted, 2013

Thanksgiving prayer.. 추수감사절 기도.. 수십 년 동안 미국에서 이날을 맞곤 했지만 만찬 식사 table에서 가족 ‘기도’에 관한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명색이 가톨릭 크리스천이었지만 나는 가족들과 함께 앉아 turkey를 앞에 놓고 한 마디도 못하곤 했다. 언젠가 ‘가장’으로 기도를 하라는 연숙의 말에 깜짝 놀라 한마디 했지만 그것은 지금 생각해도 전혀 준비가 되지 않았던 ‘어불성설’ 같은 넋두리였고, 아이들도 속으로 웃는 것처럼 들렸다.

가톨릭 신앙인으로 내가 가톨릭을 좋아하는 이유 중에는 ‘자유 기도를 잘 못해도 괜찮은’ 묘한 전통에 있었다. 최소한 개신교인 들에 비해서 그렇다. 그들, 개신교인들은 정말 ‘기가 막히게도’ 잘하고 길게도 한다. 몇 년 전 동창회 모임에서 어떤 개신교 자매님의 식사 전 기도가 거의 30분을 끈 것을 보고 나는 그런 확신이 생겼다. 개신교인들은 자유 기도의 귀재 라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님, 주님’ 하며 남들이 보이게 지나치게 긴 통성기도를 하는 그들을 보면 성경에서 그런 모습의 바리사이 Pharisees 를 질타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기도 한다. 물론 모든 개신교인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닐 것이지만 비과학적인 통계에 의하면 천주교인들은 개신교인들의 기도 ‘실력’의 1%도 미치지 못할 듯 하다.

 나 개인적으로는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기도를 말로 하건 속으로 마음으로 하건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남에게 들리는 기도를 해야 할 때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또다시 강조하지만, 개신교 형제, 자매들은 ‘기도와 성경’의 실력에서 99% ‘본 고향’인 천주교를 완전히 앞지른다. 의식과 전통을 경시하는 그들에게 남은 것은 사실 성경과 기도일 것이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들은 정말 기가 막히게 잘 한다.

올해, 오늘 추수감사절 식사는 단촐 하기만 한 우리 식구만 모여서 지난 일년의 ‘은총과 은혜’를 감사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모이기 전에 연숙이 나보고 꼭 식사 전 ‘가장’ 기도를 하라고 귀 띰을 한다. 또 우물거리며 넘기려던 나의 희망은 사라졌지만 올해는 조금 예년과 다르게.. 이것 이것.. 한번 도전해 보자 라는 오기가 조금 생겼다. 이것도 근래 3년간 겪고 있는 나의 faith renaissance 중에 하나인지는 모르지만 작년과 다르게 나의 머리가 굴러가고 있었다. 시간은 2시간.. 어떻게 ‘작문’을 할 것인가.. 차츰 머리가 굳어짐을 느꼈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러다가 머리가 번쩍! 하였다. 아하! 우리 천주교에는 주옥과도 같은 ‘염경念經’ 기도문들이 즐비하지 않은가?

 예전 같으면 이런 ‘알려진 기도문’은 책에서 찾아야겠지만 요새는 internet이 있어서 쉽게 ‘감사기도문’을 찾을 수 있었다. 항상 감사하며 살라는 성경의 말씀은 사도 바오로의 서간에서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1테살 5, 18) 로 잘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자유기도에서 성경을 인용하기는 조금 무리였다. Thanksgiving Day 에 하기 알맞은 것을 찾아내었다.

 

Thank you Father, for having created us and given us in all our joys and sorrows, for your comfort in our sadness, your companionship in our loneliness.

Thank you for yesterday, today, tomorrow and for the whole of our lives.

Thank you for friends, for health and for grace.

May we live this and every day conscious of all that has been given to us.

We pray through Christ our Lord, Amen. +

 

하지만 우리 가족은 절대로 bilingual은 아니기에 우리들이 태어났을 때 얻었던 우리 말로 하는 기도도 필요하였다. 짧고 단순하고 유치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순전히 내가 ‘만든’ 것이다.

 

주님, 올해도 저희 가족들에게 건강과 평화를 주심에 저희 모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고, 우리 옆에 없는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 친지들에게도 같은 은총을 주신 것, 감사 드립니다.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

Deep November

¶  11월 26일, 이천 십 삼 년.. 이천, 이천, 2000 을 연상하며 문득 아~~ 지금은 2000년 대였지.. 하는 자괴감이 젖어 든다. 왜 천 구백.. 1900 이 아니고 2000인가.. 그러니까 나는 역시 어쩔 수 없이 천 구백이 고향처럼 따뜻하게 느껴지는 충분히 오래 산 ‘늙은’ 인간이다.

그것도 11월이 주는 을씨년스런 느낌 또한 나를 움츠려 들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것도 아주 깊은 11월, 깊도록 깊은 가을의 느낌, 나는 이런 진한 색깔의 나날을 어떻게 감당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작년과 비교하고 5년 전과도 비교하고 심지어 20년 전도 돌아본다. 작년과는 거의 비슷할 듯하지만, 5년 전과는 ‘하늘과 땅’ 같은 차이일 듯 하다. 그 때는 전혀 앞도 방향도 잃고 살았고, 지금은 최소한 앞도 보이고 방향도 제대로 잡은 것이다. 물질적으로 변한 것은 거의 없어도 그것이 전부가 아닌 것을 이제는 믿고, 믿고 싶은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올해 한 달.. 계속 그런 희망의 심정으로 살고 싶기만 하다.

 

¶  겨울 같은 느낌의 올해 가을, 이곳 지방 deep south의 첫 눈발이 예보가 되었다. ‘아주’ 추울 것이라는 북 미주 동부지방 장기예보에 눈에 대한 것은 기억이 없는데 어떻게 이렇게 일찍 snow flurries란 말이 나온 것일까? 그것은 역시 하늘에 지천으로 깔린 습기 때문이 아닐까? 기온만 떨어지면 언제든지 가능성이 있는 그 ‘물’이 하늘에 항상 떠 있는 상태가 올해 이곳 기상의 특징이었으니까.. Thanksgiving Day가 이틀이 남은 지금, 차갑게 내리는 비가 오늘 밤, 내일 아침 사이에 ‘분명히’ 눈발이 날리는 날씨로 바뀐다는 것이다. 물론 내려도 곧 녹겠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하늘에서 하얀 ‘떡 가루’ 들이 내려 온다는 사실이 문제인 것이다. 교통상 지장은 제로 일 것이지만 ‘포근한 느낌’을 주는 심리적은 효과는 대단할 듯 하고 벌써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요란하게 선을 보이기 시작해서 나도 어쩔 수 없이 그런 ‘공동체적 심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듯 하다.

올해 우리 집의 Thanksgiving Day는 어떨까 했지만.. 역시 조금 게으르기로 작정하고 우리 식구, 작기만 한 네 명만 모이기로 했다. 한 때는 손님들과 어울려 볼까도 생각했지만 무언중에 ‘피곤할 듯’한 예감이 들었는지 그렇게 되고 말았다. 한 때는 손님들과 어울린 적도 없지 않았지만 이제는 손 꼽을 정도로 기억으로만 남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기회가 된다면 조금 더 노력을 해면.. 식구가 너무나 적은 우리는 될 수 있으면 누군가와 같이 있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그래도 우리 식구는 최소한 ‘비행기가 필요 없는’ 곳들에 살고 있어서 궂은 날씨도 큰 상관이 없어서 더 포근하게 느껴진다.

작년부터는 엄마가 주 요리인 turkey와 stuffing같은 것을 준비하고 아이들은 나머지 side dish들을 모조리 준비한다고 해서 나는 크게 할 일이 없다. 유일한 것이 mashed potatoes 정도일까. 그저 먹어주기만 하면 되니, 조금은 편한 하루가 될 것이다. 물론 조금 힘이 들어가는 dish wash는 주로 나의 담당이지만 그것은 이제 나의 몫이 되었으니 별 다를 것은 없다. 그저 그저, 평화스럽게 올해의 100% 일어난 일들에 감사한 마음을 나누는 시간이 되기만 빌고 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다행이 아닌가 하는 심정 바로 그것이다.

 

¶  First white stuffs & ‘Kenny G‘ time again.. 하루 종일 세차게 뿌리던 비가 오늘 아침에 드디어 하얀 물체로 변해서 풀밭이나 deck, 차의 유리창에 얹혔다. 아주 이른 아침 세찬 바람소리에 깨어서 어두운 밖을 살펴보니 무언가 하얀 것들이 보였고 곧바로 아하~ 올해 첫 white stuff임을 알았다. 바뀌어가는 계절의 상징들.. 어찌 이 나이에 조금은 철학적, 더 조금은 신앙적으로 안 볼 수 있겠는가? 더구나 무섭게 몰아치는 차가운 바람소리는 6.25 직후의 서울의 ‘덜 난방 된’ 온돌 방에서 화로 불에 이불을 쓰고 모여 앉았던 어린 가족들의 걱정 없었던 천진난만한 모습들을 연상 시키기에 너무나 충분한 것이었다. 작년 보다 더 빨라진 holiday in the air.. 일 주일 안으로 다가온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 준비 연습의 바쁜 움직임에서 느끼는 이른 12월의 느낌을 떨칠 수 없다. 결국은 또 Kenny G season이 온 것이다. 올해 들어 처음 듣는 Kenny G의 saxo.. 너무나 너무나 잘 어울리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Winter classic, Kenny G

My Winter classic, Kenny G

What A Wonderful WorldKenny G

 

 

6.25,사필귀정(事必歸正)

올해도 어김없이 6월 25일, 6.25가 찾아왔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었던 시절, 주로 재동국민학교 다닐 당시, 어렸을 적에는 신나는 전쟁놀이, 서울 하늘 가로지르며 북으로 날던 ‘쌕쌕이‘ 미군의 젯트 전투기들(F-80, F-86), 만화책을 장식하던 ‘용감한 국군’의 무용담으로 정신을 빼앗기던 날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제2의 6.25가 그날에 또 일어날까 봐 어린 마음에 ‘전전긍긍’하던 날이었다.

그런 걱정이 심한 때에는 6월 25일이 오면 그날 저녁의 붉은 저녁노을조차 다시 미아리고개를 넘어오는 ‘괴뢰군의 탱크’의 포화로 착각하기도 했다. 꿈을 꾸면 남산위로 갑자기 나타난 김일성의 대포들을 보기도 했다. 한마디로 어릴 적, 우리는 ‘공산당, 괴뢰군, 김일성, 소련의 후르시초프, 중공의 모택동’의 공포 속에서 숨을 죽이며 살았다.

 

F-80-Korean-War

6.25 발발 직후부터 일본으로부터 나르기 시작한 미국의 F-80, Shooting Star Jet 전투기들.. 북괴의 Yak 전투기를 격추시키고 소련제 탱크를 공격하였다. 전쟁 직후에도 서울의 상공을 가로지르며 나르던 날개 끝에 달린 연료탱크가 독특하던 이 전투기..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을 한다

 

올해는 한 살을 더 먹어서 그런지 조금은 다른 각도로 6.25가 나의 인생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사실 우리 가정은 6.25로 인해서 ‘처참하게’ 망가진 case다. 한 가정의 주인인 아버지가 갑자기 없어졌다면.. 그것도 생사를 모르게 완전히 없어졌다면 그 가정은 어찌되겠는가. 군인으로 나가서 수많은 사망자, 불구자가 나왔지만, 우리도 그에 못지않은 불구 가정이 되었다.

어렸을 때 그것이 사실 크게 생각할 것은 못된 것이, 어쩔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어머니가 재혼을 했으면 또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았을 수 있기에 나와 우리누나는 항상 고마워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을 해 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우리 어머니는 어린 남매를 위해서 ‘완전히’ 인생을 바친 것이다. 젊은 30대초에 남편을 잃은 어머님, 경제적으로 여유도 없었던 때, 원산에 대가족을 남겨두고 서울 색시가 된 어머님, 그야말로 혈혈단신으로 이제는 김일성이 덕분에 남편까지 잃었으니..

일방적 통일을 빙자해서 쌍방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전범 김일성이 처단도 못 받은 채 줄줄이 2대의 자식들을 다른 ‘잠재적 전범’으로 만들고 죽었으니, 이제는 사실 원수도 갚을 수 없는 지경이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란 고사성어가 어찌 이렇게 잘도 맞는가? 한 정권을 거의 마피아 스타일 범죄조직처럼 공포의 정치로 움직이더니 결과가 과연 어떠한가? ‘인민’들을 굶겨 죽이고, 탈출하는 사람을 죽음의 수용소로 몰아놓고, 최후의 수단으로 동족을 ‘불바다’ 로 말살하겠다고 장난감 원자탄을 만들고.. 과연 이들은 어떤 인간들인가?

그리고 이들을 옹호하는 ‘똥포’ 집단은 어떤 인간들인가? 또 다른 거대한 범죄조직이었던 소련연방이 거의 순식간에 넘어간 것을 보고 나는 조금은 위안을 받는다. 숨막히는 지정학적 조건에서 굴복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고수하던 조국 대한민국은 아시아에서 most vibrant democracy로 성장했다. 정의는 결국에 승리를 하고, 역시 사필귀정인 것이다. 역사의 뒤에서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 그들은 절대로 모를 것이지만 나는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Easter 2013, Proof of Heaven

¶  2013년 3월 31일 일요일, 예수님의 부활 대축일.. 첫 부활로부터 2000년 이상 계속 되풀이 되고 있는 예수를 믿는 기독교의 최고의 축일이다. 재의 수요일부터 40일간 계속된 사순절도 오늘로서 끝이 난다. 지난 목요일부터 시작된 ‘피곤하기도 한’ 각종 의미를 갖는 ‘무거운’ 날들, 특히 토요일 밤의 Easter Vigil 은 영세,견진의식까지 있어서 부활 일요일 아침에는 피곤하기까지 하다. 불과 7~8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식구들이 나를 ‘끌고’ 부활절 미사에 가곤 했는데 그것이 이제는 완전히 반대가 되어서 우리부부가 두 ‘아이’들을 ‘끌고’ 가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 전에는 내가 C&E Christian (크리스마스와 부활 때만 성당엘 가는 신자) 였는데 지금은 우리 두 아이들이 그렇게 되었다.

그래도 오늘 아침에 제 시간에 같이 집에 온 ‘아이’들.. 기꺼이 미사에 참석을 하였다.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그 정도인 것이 조금은 안타깝지만.. 언젠가는 ‘집’으로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고 싶다. 모든 식당들이 문을 닫기에, 언젠가부터 이날도 다른 holiday같이 ‘잘 먹기로’ 하고 fillet minion steak 와 wine으로 이른 점심을 하고 아이들은 집을 떠났다. 엄마의 제의로 매달 넷째 일요일에 집에서 ‘이렇게’ 먹자고 했는데, 의외로 ‘아이’들이 기꺼이 동의를 해서 조금 마음이 가벼워지기도 했다. 아무래도 이제는 ‘아이’들이 아닌가.. 그렇게 커버렸나.. 생각하며 세월의 횡포를 생각하기도 했다.

 

뇌전문 외과의가 본 천국
뇌전문 외과의가 본 천국

¶  얼마 전 ‘갑자기’ Costco에서 갔을 때, 우연히 보게 된 책 proof of heaven, 진부하기도 한 제목이었지만 조금 독특하게 기분이 좋은 표지에 끌려서 읽고, 결국은 사게 되었다. 읽기에 부담이 없는 200 page가 안 되는 것도 그렇고, 저자의 경력이 더욱 독특했다. Neurosurgeon, 그러니까 신경외과의 정도가 될까.. 한마디로 뇌수술 전문의인 것이다. 그가 정말로 희귀한 ‘감염’으로 일주일간 사경, coma 끝이 역시 ‘기적적’으로 ‘완전 회생’, 그때 그가 ‘보았던 것’을 적은 것이다.

작년에 나온 책으로 New York Times Best Seller #1, 그러고 보니까 언젠가 뉴스에서 본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이런 ‘현상’을 NDE, Near Death Experience라고 부르는데,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수 없이 이런 사례가 보고가 되고 있고, 일부에서는 본격적으로 ‘과학적’으로 연구까지 한다고 한다. 이 책이 특출한 것은 그것을 겪은 사람 자체가 뇌외과 전문의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그 분야의 과학자중의 과학자인 것이다. 그가 비과학적인 것을 겪었으니, 그의 고뇌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과학과, 비과학적 경험을 그는 어떻게 ‘절충, 타협’을 했을까.. 하는 것이 이 책의 주요 내용이다.

지난 금요일 새벽에 예수성체를 지키며 하던 성당 새벽 성체조배를 앞뒤로 나는 이 책을 읽게 되었는데.. 이때의 나의 느낌과 경험은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전율과 감동의 연속이었다. 한마디로.. 절대적 하느님의 존재는 이제는 거역할 수 없는 ‘진리’임을 겸허하게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이번 부활에 나에게 주어준 은총임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다. 이것이 65년 만에 알게 된 진리였던가?

‘ 후리타, 집을 사다’, 떠나는 새로니

Cornerstone Village Condo

돌아온 새로니.. 제목이 그럴 듯하다. 영화제목 ‘돌아온 장고‘ 처럼.. 우리 집의 큰딸, 새로니가 거의 6년 만에 ‘일단’ 정든 집으로 돌아와 우리와 같이 살게 되었다. 물론 그 전에 잠깐 머문 적은 많았지만 자기의 살림살이 짐을 ‘완전히’ 우리 집으로 옮기고 들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근래 지독한 경제불황의 여파로 Y 세대는 물론이고 심지어 비교적 젊은 축 X 세대들까지 자기가 자라던 집, 그러니까 부모의 집으로 ‘퇴각하는 것’이 요새 많이 보이는 현상중의 하나라는 보도도 심심치 않은 이때, 큰딸 새로니가 집으로 들어온 것은 그런 보도와 전혀 무관하지 않은 듯 느껴진다.

젊은 ‘애’들이 ‘지독한 불경기’를 못 견디고 집으로 ‘퇴각’하는 것과 새로니는 조금 사정이 다르지만 ‘무섭게 예리한 경제감각을 가진 요새 애들, 특히 여자애들’ 중의 하나인 새로니에게도 경제적인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니에게는 그다지 신나는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새로 career의 방향이 바뀐 후 처음으로 맞는 불경기 하의 job market에 대한 불안 감도 많이 작용했을 것이다. 일단 우리의 혈육이 자기가 자란 집으로 돌아온 것은 반가운 일이다. 조금은 경제적으로도 새로니에게 도움이 될 것이고, 오랜만에 다시 이사를 가야 하는 압박감 없이 자유스럽게 ‘옛날 같은’ 기분을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이것은 조금 비약적인 희망일 것이지만.

 

위의 메모는 작년, 그러니까 2012년 4월경에 남겨둔 것이고 ‘미완성’의 글로 남았었다. 그것을 오늘 다시 본다. 집을 떠난 지 6년 만에 같이 산 것이 이제 거의 1년이 되어간다. 6년 떨어져 산 돌아온 ‘아이’를 옆에서 보며 참 많은 것을 느꼈다. 우리가 난 ‘아이’가 돌아온 것은 물론 포근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긴 하지만, 당혹한 순간들도 한 두 번이 아니었고, 괴로운 시간도 적지 않았다. 그와 더불어 과연 ‘혈육, 가족’이란 것이 어떤 것인가 새삼스레, 아주 다른 각도로 생각해 보기도 했다. 가장 놀란 것이 있다면 그 동안 내가 심각하게 가족관계에 대한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다는 것, 아니 할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행복어 사전>으로 번역이 된 일본에서 나온 수필집을 보면 역시 ‘머리가 큰’ 자식과 한 지붕 밑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가를 보여준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제일 좋은 방법은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며 ‘다른 지붕’ 아래서 사는 것이라고 한다. 그것을 읽을 당시에는 정말 실감을 못했지만 요새는 그 책 저자의 의도와 생각에 150% 동감을 하게 되었다.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왜 그럴까? 지난 일년 새로니와 같이 살면서 나는 그런 질문만 계속하며 살았다. 왜 그렇게 어려울까? 왜 어렸을 때와 같이 살 수는 없는 것일까?

답은 간단할 지도 모른다. 어느 누구의 특별한 문제가 아니고 모두 그 동안 ‘변한’ 것이다. 부모인 우리도 ‘나이에 따른’ 고집과 경륜이 쌓였고, 성장한 아이도 혼자 살아도 되는 독립된 어엿한 사회인으로 그 애 만의 독특한 경험과 주관이 생긴 것이다. 예전 같으면 특별한 ‘배려 없이’ 의견이 모아지던 것이 이제는 ‘협상’이 필요한 때도 많이 생기는 것이다. 그것을 옛날의 ‘즐거운’ 때만 생각하며 ‘쉽게’ 생각하는 그 자체에 문제가 있었지 않았을까? 집을 떠난 6년 동안 그 애만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배운 습관들.. 역시 옛날의 것에 비교하면 무리가 있다. 나는 그저 그런 모든 ‘조그만 문제’들은 가족의 사랑으로 아무 문제가 안 될 것으로 ‘확신’을 하며 살았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역시 모자랐다.

하느님은 공평하신가.. 괴로운 때와 즐거운 때의 비율이 반반 정도라고 하면 조금 과장 된 것일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즐거운 순간들이 기가 막히게도 괴로운 순간들을 ‘중화’시키며 살아가게 해 준다. 하지만 역시 결론은 각각 독립적으로 살려면 물리적 환경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 불경기 속에서 job을 용케 찾았고, 안정된 재정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되자마자 새로니는 ‘결사적‘으로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게 되었다.

우리의 희망은 결혼을 하면 더 안정될 것 같지만, 세상은 참으로 많이 변했다. 요새 젊은 여성들의 생각은 우리의 희망과는 전혀 무관하게 흐르고 있었다. 인생에서 결혼의 우선순위는 과장된 표현으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낮아지고 있다. 하물며 자식을 낳은 다는 것은 그 보다 더 낮은 곳에 있었다.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다지 급할 것도 없고 중요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다. 남의 간섭을 덜 받고, 편하게 살려는 일종의 ‘쾌락주의‘라고나 할까. 간혹 행운적으로 예외는 있지만 조금 배웠다는 사람들일 수록 더 그런 경향이 심하다. 그런 것을 알면서 push한 다는 것은 더욱 큰 역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우리가 왜 모르겠는가?

결국, 옛날 우리의 즐거움이었던 큰 딸 새로니는 우리의 품을 ‘완전히’ 떠나기로 하고, 불경기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부동산 경기를 의식하며 혼자 몇 년은 살 수 있는 1 bed-room condo를 사게 되었다. 처음에는 거의 혼자서 직장시간을 쪼개어서 집을 찾고 보고 하더니 너무나 피곤한지 realtor를 구하게 되었다. 미국인 realtor만 상대하더니 나중에는 아무나 상관이 없는 듯해서 우리 한인성당에서 알게 된 Emily Kim 자매님을 연숙이 소개해 주었고, 조금 씩 오르기 시작하는 집값을 의식하며 거의 3개월 동안 이곳 저곳을 찾아 다니다가 결국 Atlanta mid-town에 있는 condo를 찾게 되었다.

그 property는 비교적 싸게 나온 것으로 역시 지독한 불경기 속에 foreclosure된 것으로 bank소유였고 소위 말하는 short sale되는 그런 곳이었다. 한창 부동산 거품일 적 그곳은 아마도 $100,000이상에 거래 되던 곳이었을 것이 거품이 빠지면서 거의 $85,000까지 떨어지게 되었다. 원래 주인은 아마도 mortgage를 낼 수가 없어서 그냥 집을 떠났던 그런.. 지난 5년 동안 이런 ‘비극’은 미국 전역에서 수없이 일어났는데, 지금 그런 곳들이 저렴한 가격으로 조금씩 팔리게 된 것이다. 그뿐이랴.. Mortgage interest rate가 옛날 우리가 듣고 보던 것의 반도 채 안 되는 저렴한 것과, 지역마다 부동산 경기를 살리려고 ‘정부 레벨’에서 각가지 혜택을 주는 프로그램까지 생겨서 그런 정보들만 잘 찾아내면 더 싸게 살 수도 있게 되었다.

악착같이 새로니는 그런 것을 찾아내어서 거의 $15,000을 절약하게 되었다. 그것은 아마도 연방정부에서 주정부로 보조해 주는 것인 모양인데, 조건은 집을 처음으로 사는 것과, 그 집에서 5년은 살아야 하는 것, 지역도 Atlanta 시내 인 것 등으로 새로니에게는 아무 하자가 없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최소한의 조건이고 역시 관건은 ‘구비 서류’에 있었는데 그것을 그 애는 정말 꼼꼼히도 챙기며 노력을 해서 결국은 그 혜택을 받아내었다. 그것을 보고 우리부부는 입만 벌리기만 했는데, 우리보고 하라면 ‘절대로’ 못할 서류들이었기 때문이다.

Bank loan을 신청하고 승인을 받는 것이, 우리가 20년 전 집을 살 때와는 정말로 sea change였다. ‘무섭게, 까다롭게, 시간을 질질 끄는’ 그런 식.. 어찌 안 그렇겠는가? 지난 부동산 거품이 그런 것을 너무나 해이하게 하였기에 생겼던 것이 아닌가? 하지만 군소리를 못 할 것이 그렇게 해야 다시는 전과 같은 ‘거품’이 생기지 않기에 말이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2주 전에 드디어 closing이 성사가 되었는데, 그때 새로니의 기쁨은 우리가 옆에서 보아도 큰 듯 했다. 거의 ‘혼자서’ 한 것이다. 아니 100% 혼자서 한 것이다. 우리는 가끔 집을 같이 보았던 것.. 그것 뿐이니까. 그런 날이 우리 집에서는 Lemon Grass moment 라고 불려져서 모처럼 단출한 4식구가 ‘모두’ 모여서 외식을 하고 ‘꼬마’ 집주인이 된 새로니의 ‘독립’을 축하해 주었다.

그저께 드디어 moving truck이 와서 많지 않은 짐을 mid-town으로 날랐다. 동생 나라니 집에서 언니에게 주는 used couch도 날라와서 그런대로 살만한 환경으로 변하고, 새로 페인트를 칠하며 ‘혼자 사는’ 꿈을 꾸는 듯.. 옆에서 보는 우리의 심경은 조금 mixed라고나 할까.. 어찌 안 그렇겠는가.. 우리 가족의 변천사에 큰 획을 긋는 그런 시간들이 아닐까. 막상, 마지막 이삿짐이 나가면서 우리는 정말 착잡한 심경을 맛 보았다. 같이 있을 때, 조금 더 친절하게 해 줄 수는 없었을까.. 역시 우리는 후회를 만들며 살고 있는 것이다. 속으로 계속, “새로니, 서로 섭섭하게 한 것들이 있으면 빨리 잊자, 우리는 가족이니까” 라고 되뇐다.

생각한다. 아주 오래 전, 1960년 영화 ‘로맨스 빠빠‘ 에서 보는 것처럼, 고향 서울 커다란 한옥 줄줄이 이어지는 사랑방에서 각자 기거하며 ‘오순도순’ 살던 대가족들, 비록 가난했지만 절대로 외롭지는 않았다. 이제 우리는 4명 밖에 안 되는 ‘형편’에 그것도 떨어져 살아야 마음이 편하게 느껴진다는 그런 사실이 슬프게 하는 것이다. 시대는 변하고 시간은 흐르고, 사는 방식도 변한다. 이제는 절대로 옛날 식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일까. 역시 슬픈 심정을 떨칠 수 없는 시간들이다.

 

Blind가 아직 없는 창문으로 보이는 mid-town view

Blind가 아직 없는 창문으로 보이는 mid-town view, 정말 오랜만에
urban feeling을 회상하게 하는  광경이었다.

아틀란타 midtown, 기대 보다 훨씬 깨끗하고 젊게 느껴진다

아틀란타 midtown, 기대 보다 훨씬 깨끗하고 젊게 느껴진다

 

얼마 전에 일본 TV 연속 드라마 ‘후리타 집을 사다(フリ-タ-、家を買う)‘라는 것을 본 기억이 난다. 후리타는 freeter의 일본식 표기 발음이고, ‘공짜로 부모 집에’ 얹혀 사는 young adult children을 말한다. 대부분 ‘바이또’ (아르바이트)를 하며 ‘독립할’ 날만 손꼽는 자녀들, 경제적인 이유로 그렇게 사는데, 미국과 마찬가지로 일본도 그런 현상이 있는 모양. 하지만 그 드라마는 아주 ‘착실한 후리타’를 잘도 그려냈다.

열심하고 건실하게 사는 애 띤 청년이 삼류대학 출신이라 대기업 직장을 못 구하고 조그만 토목회사에 ‘아르바이트’ 로 들어가 일을 하지만 우울증에 걸린 엄마를 위해서 좀더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가겠다는 일념으로 각가지 어려움을 겪는 과정을 참 눈물겹게도 그려냈다. 끝이 정말로 흐뭇한 것으로 결국 집을 사게 되는 것이다. 가족관계가 경제성장으로 많이 해이해진 일본, 연로해가는 부모를, 자기 희생까지 하며 돕는 이런 드라마는 아마도 현재 일본의 개인적 사회 현상에 ‘경고, 충고’를 하려는 저의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 본다.

 

후리타 집을사다, 인기 일본 TV 연속 드라마

후리타 집을사다, 인기 일본 TV 연속 드라마

Freeter, 후리타 주연배우 들

후리타 집을사다, 주연배우, 왼쪽

 

Lemon Grass day

Thai Restaurant, Lemon Grass
Thai Restaurant, Lemon Grass

완전히 한 겨울 날씨가 된 3월 1일, 쉽게 말해서 지나간 1월은 거의 늦은 가을이나 이른 봄 날씨였고, 2월 한달 동안은 완전한 겨울인 듯 을씨년스러운 날씨의 연속이다. 올해 Groundhog의 예측대로 봄이 일찍 온다는 것은 완전히 엉터리였음이 들어난 것이다.

2월의 마지막 날인 어제는 오랜만에 집 근처에 있는 타이 식당 Lemon Grass에서 연숙과 식사를 하였다. 집에서 밥을 해 먹기 귀찮아서가 아니고 무언가 ‘기념’을 하려고 일부러 간 것이었다. 오늘 3월 1일은 우리가 ‘매일 미사’를 시작한지 만 1년이 되는 날인 것이다. 그러니까, daily Mass 1 year Anniversary정도라고나 할까.. 하도 축하할 것이 없는 요새지만 이런 것도 자축을 하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우리 둘에게는 무엇 보다 귀중한 의미를 가지기에 매년 3.1절과 함께 기념하기로 한 것이다.

2010년 가을 내가 레지오 마리애 행동단원 생활을 시작한 것도 큰 의미가 있었지만, 2012년 3월 1일에 시작한 매일미사 참례 결정은 더 큰 의미를 갖는다. 우선 일주일에 한번 참석하는 레지오 마리애와, 매일 아침 9시까지 비록 집 근처지만 성당에 가서 아침 1시간을 지낸다는 것은 생각하면 보기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비록 눈은 별로 없는 이곳이지만 흔한 말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성당엘 다닌 것이다. 처음에 시작할 때는 솔직히 얼마나 갈까 둘 다 자신이 없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한마디로 기우였다. 우리가 의지로 나가는 것 이외에 무언가 우리를 도와주는 느낌도 떨칠 수 없는 것이다.

작년 3월 매일 미사를 하면서 가끔, 지금은 작고하시고 없지만, 레지오 동료단원 요안나 자매가 같이 와서 미사를 보곤 우리 집에도 들려서 식사도 하기도 했다. 그 자매님의 말씀으로, 미사와 영성체가 얼마나 신심생활에 도움이 되는 가를 배우기도 했다. 신심생활에 주는 의미를 떠나서, 이렇게 둘이서 매일 집밖으로 ‘나간다는 사실’, 사람들을 만난다는 ‘사회적’ 의미도 생각해 보니 참으로 중요한 것이었다. 과거 오랜 시간 집에 틀어 박혀서 백일몽을 꾸던 때를 생각하면 그것은 참 위험한 생활 방식이었음도 알게 되었다.

타이 식당인 Lemon Grass, 연숙은 항상 ‘팟타이‘, 나는 100% ‘Broccoli Tofu‘를 먹는데, 정말 주방장의 조화인지 언제나 ‘똑같이’ 맛이 있다. 이것은 chef가 변함없이 그곳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라서 그런지 신문에 아주 좋은 review까지 났다. 꽤 많은, 이름있는 식당들의 수명이 그렇게 길지 못한 때에 이곳은 1994년에 open한 이래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앞으로도 계속 그 자리에 있어서, 다른 일로 ‘자축’을 할 일이 있을 때 우리에게 service를 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65세 만세론과 결혼 33년

1월에는 우리 집 큰 딸 새로니의 생일, 나의 생일, 그리고 우리부부의 결혼 기념일이 모조리 몰려있다. 그래서 사실 성탄과 새해를 지내자 마자 마음이 조금은 바빠짐을 느낀다. 사실, 나는 이런 ‘명절’들을 조용하게, 소리소문 없이 보내고 싶은데 그것이 쉽지 않았다. 우선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절대로 불가능했고, 근래에도, 이런 날들을 조용히 보내는 것이 거의 ‘죄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압력을 느끼기도 했다.

전통적 ‘가장’의 위상이 거의 무너져 내려앉은 요새, 어찌 안 그렇겠는가? 세월을 탓 해야 하나. 특히 ‘자기 생일’도 자기 마음대로 보낼 수가 없음이 제일 우습기만 한 것이다. 내가 원치 않더라도, 그것은 상관이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의 위치와 가치가 뒤바뀌고 있는 이 세상, 어디까지 가나.

올해 나는 ‘결국’ 65세의 산을 넘고 말았다. 왜 65란 숫자가 나의 눈에 들어온 것일까? 아마도 70세를 향한 내리막 길이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오랜 전 애독하던 이진섭씨에 대한 책, ‘하늘이 우리를 갈라 놓을 지라도‘ (박기원 여사 지음), 에서 보았던 65세 만세론 구절이 더 생각난 것이다. 그것은 이진섭씨의 지론 중에 하나로써, ‘사람은 65세를 살면 충분히 살았다‘는 것으로 그 이상 사는 것은 어떻게 보면 ‘덤’으로 사는 것이라고 했다. 나아가서, 사람은 나이답게 사는 것이 보기 좋다고 했는데, 너무나 무리하는 것이 꼴불견이라고도 했다.

예를 들면 늙은이가 무리하게 운동을 하거나 무엇을 지나치게 즐기는 그런 것들이다. 조용히, 잠잠하게, 생각하며, 낙조를 바라보는 듯한 심정으로 지내는 것을 바람직한 것으로 보았다. 그것이 거의 50년 전의 이야기라서 아마도 그 당시 65세는 요새 기준으로 보면 턱없이 적은 나이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까? 그 당시의 65년은 사실 요새도 65년일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을 한다. 65년을 살고 보니 ‘참 많이 살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것이다.

이제는 사실 쉬고 싶다는 생각도 드는데.. 그 쉰다는 것은 사실 이세상을 떠난 다는 것인데, 전 같았으면 아마도 그런 생각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펄쩍 뛰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제 나는 죽음이 다음 세상으로 가는 과정일 뿐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나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얼마를 살았는가 가 아니고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것이다.

1980년 1월 25일에 결혼을 한 우리 부부는 올해로 33년째를 맞게 되었다. 잔잔한 감회를 느끼며 맞이한 올해는 정말로 조용히 보내게 되었다. 아이들의 ‘극성과 압력’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33년간의 결혼관계는 사실 과소평가할 것은 아니다. 어떻게 생면부지의 이성과 같이 33년을 같이 산다는 것이 작은 과업’일까? 결혼을 안하고 아이를 안 낳고, 편하게 혼자 사는 것이 cool하게 보이는 이 세상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런대로 not bad임도 안다. 이날 우리는 정말로 ‘조용하게’ 집 근처에 있는 Thai restaurant, Lemon Grass에 가서 평소 즐겨 먹던 것으로 점심을 하였다.

눈이라도 당장 쏟아질 것 같은 그런 회색 하늘아래서 우리는 33년 전을 회상하며, 도대체 그때에 우리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가장 멋지게 보았고, 무슨 희망을 가졌는지 생각을 해 보았지만, 한마디로 까마득히 멀게만 느껴지던 때였다는 것과, 그 때는 정말 ‘기쁜 우리 젊은 날’ 이었다는 것에 동감을 하였다. 또한 앞으로 얼마나 ‘이렇게’ 같이 살게 될 것인가 하는 ‘말없는’ 의문도 나누었다. 그것이 인생일까. 인생은 사실 그렇게 특별 난 것이 아닌 듯 싶다.

 

 

 1980s.. 기쁜 우리 젊은 날들..

Christmas 2012, Lincoln

sweaters, Starbucks, DVDs
sweaters, Starbucks, DVDs

2012년 우리들의 크리스마스는 조금 색이 다른 것으로 기억이 남게 되었다. 이것은 사실, 시간문제가 아닐까? 가족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겪게 되는 조그만 growing pain일 지도 모른다. 이런 큰 holiday때면 생각나곤 하던 ‘즐거운’ 추억들은 역시, relax된 기분으로 새벽같이 living room에 모여서 선물을 풀어보던 것, 구수하고 따뜻한 음식을 만들며 holiday classic video나 TV movie를 보던 기억들, 조용하기만 한 길거리의 풍경들.. 그런 것들이 전형적인 모습과 소리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Charles Dickens원작의 classic중의 classic, A Christmas Carol (1951’s movie version)과, 이제는 완전히 Christmas classic이 되어버린 1978년 미국영화, A Christmas Story (Ralphie란 안경 낀 꼬마의 성탄 추억)란 것을 ‘하루 종일’ 보던 때가 이제는 그립기도 하다. 아이들이 집을 떠나고, 머리가 큰 ‘아이’들이 산타클로스의 비밀을 알아 버린 후에는 모든 것이 ‘천천히’ 바뀌었다. 더 이상, 비밀이 없는 것이다.

그런대로 신앙적인 기분을 가지고 있던 그런 날들도 그 애들에게는 이제 완전한 세속적인 ‘즐기는’ 날로 바뀌고.. 그런 배경에서 이제 나는 우리의 전통적인 ‘포근한’ 성탄기분을 ‘절대로’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살아 생전에 언젠가 다시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희망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머리가 커져버린 ‘아이’들.. 정말 재미없고, 실망스럽기만 하다.

골칫거리일 수도 있는 ‘선물’ 사기.. 거의 ‘강제성’을 지니고 있는 미국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이것.. 어떻게 생각하고 처리해야 할 것인가? 오죽하면 크리스마스의 장본인 예수님의 가르침을 2000년간 고수하고 있는 교황청과 교황님.. 제발 크리스마스는 선물을 주는 날이 아니라고 강조하게 되었는가.. 숫제 성탄 1주일 전 이후부터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으라고 충고하게 되었을까? 하지만 가만히 보면 이런 축제 분위기에 사로잡힌 대부분의 인간들은 아마도 대부분 세속적인 인간들일 것이라고 짐작을 한다.

Pancake Handbook
Pancake Handbook

올해 성탄에는 나에게 줄 선물 고르는 것의 수고를 덜어 주려고 Costco에 갔을 때 두 가지를 골라 주었다. 하나는2-disc DVD set 였는데, 내가 좋아하는 ‘옛날’ 전쟁영화들 8개나 실려있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귀엽게 생긴 battery-powered screw driver였다. 이중에 전쟁영화 DVD는 나에게는 정말로 횡재였다. 8개의 보물 같은 영화 중에서 제일 다시 보고 싶었던 것 중에는, Von Ryan’s Express, Twelve O’clock High The Young Lions가 제일 보고 싶었던 것이고 나머지 것들도 모두 수준급 추억의 영화들이었다.

그것 이외에 새로니는 내가 그 동안 ‘싼’ 커피를 마시는 것을 보았는지 여러 뭉치의 Starbuck coffee를 주었고, 나라니는 Pancake 책을 선물했다. 내가 그 동안 아침마다 pancake을 직접 만드는 것을 보고 hint를 얻었을 것인데, 내가 instant pancake mix로 만들었기에, 이 책을 보고 ‘진짜’ 를 만들라는 것이었다. 과연 내가 이 ‘진짜’ pancake recipe를 보고 만들 수 있을 지는 미지수이지만, 나를 생각해 준 나라니의 마음을 볼 수 있어서 고맙기만 했다.

Spielberg's Lincoln
Spielberg’s Lincoln

올해부터 시작된 조금 이상한 holiday tradition에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것이 포함 되었다. 다른 날도 아니고 가족이 집에 모이는 날에 밖으로 나가는 것은 사실 이상적인 idea는 아니었지만, 이것도 ‘머리가 커버린 아이들’의 생각이었고, 우리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억지로’ 나가는 꼴이 되었다. 텅텅 비었을 것으로 상상이 되던 극장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미국도 그 동안 변했나.. 할 정도로 생각이 착잡했다.

전통적인 가정, 고향이라는 향수적인 생각은 이제 정말 골동품이 되어가는 것인가.. 함박눈이 아닌 ‘함박 억수비’가 쏟아지던 성탄절날 우리는 어울리지 않게 ‘밖으로’ 나가서 Lincoln 영화를 보았다. 이것도 전통적인 Lincoln (Abraham)영화가 아니었다. 역시 또 다른 Political Correctness의 냄새가 심하게 풍기던 ‘명화’가 될 가능성이 많은 그런 작품이었다. 그 당시의 역사로 현재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Washington DC의 공기를 바꾸려는 가상한 노력도 짐작이 된다. 아마도 다가올 Oscar상도 그다지 어렵지 않을지도..

Advent 2012, 대림절

거짓말 조금 보태서 바로 엊그제Advent 2011을 지낸 느낌이 들 정도인데.. 이 나이에 너무나 진부한 표현일 것 같다. 60대에서 60마일로 세월이 흐르고 70대에는 70마일로.. 아주 공감이 가는 말이기도 하다. 아마도 그것은 작년 대림절을 비교적 실감 있게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슬그머니 12월 1일, 2012년의 마지막 달로 접어들었다. 무언가 또 거의 뚜렷한 이유 없이 머릿속이 바빠지는 느낌.. 이것이 바로 holiday blues의 시작일 것이다. 이것이 나는 ‘지독히’도 싫은데 빠짐없이 찾아 든다. 특히 12월에..

사실 2012년 holiday는 이미 지난 11월 셋째 목요일 Thanksgiving Day로 시작이 된 상태이다. 올해의 ‘추수감사절 (이 번역된 말이 조금 무리인 듯 느껴짐은?)’ 내가 기억하는 한 우리 가족은 이날에는 꼭 ‘핵가족’이 다 모여서 turkey meal을 즐겼는데, 드디어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하는 예외가 생기고 말았다. 큰 딸 새로니가 Miami, Florida로 친구와 같이 vacation을 가 버렸기 때문이다. 조금 배반당한 느낌이 들 정도로 기분도 그랬지만, 이제 아~~ 우리 가족, 가정도 변화를 겪고 있구나 하는 실감도 들었다.

그래서 전통적인 가족이 만드는 turkey early dinner를 생략하고 대신 크리스마스에 turkey 를 하기로 했다. 조금은 안 되었는지 작은 딸 나라니가 그 다음날 자기 집에서 맛있는 요리를 해 주겠다고 해서 ‘염치불구하고’ 그곳에 갔고, 식사 후에는 Life of Pi 라는 새로 나온 fantasy 영화를 같이 보았다. 거의 일년 만에 가보는 ‘진짜 극장’이었다.

올해의 대림절은 어떨까.. 크게 다를 것은 없을 것이지만 조금 더 ‘성숙된 믿음’으로 대림절을 지내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지난 사순절부터 시작된 ‘평일 마사’ 참례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어서 대림절 동안도 마찬 가지일 것이다. 내가 속하고 활동하고 있는 레지오는 내일 연차 총 친목회를 마지막으로 올해를 마감한다.

올해, 내가 생각해도 참 열심히 레지오를 살았다. 비록 나타난 성과는 많지 않아도 내가 느끼는 나의 변화, 그것은 큰 성과인 것이다. 내년에는 가능하면 눈에 보이는 외적인 성과가 나오기를 기도하고 있다.

15W Behringer Acoustic Amp
15W Behringer ‘personal’ Acoustic Amplifier

내일은 대림절 주일 시작이고 오후에는 우리의 ‘또 하나의 본당’인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가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열린다. 연숙이 꾸리아 부단장인 ‘여파’로 나는 여러 가지 눈에 잘 안 보이는 ‘봉사’를 해야 한다. 주로 여성 단원들이 대부분이라 남자의 역할은 대부분 ‘근육적’인 것 뿐이다.

하지만 올해는 조금 ‘소수 족’인 남자단원의 사기도 살릴 겸 해서 나와 새로 알게 된 다른 ‘남성’ 박 대건 안드레아 형제와 총 친목회에서 노래를 부르기로 했고, 지난 몇 주 몇 번 만나서 노래 연습을 했다. 처음에는 ‘남자 중창단’을 예상하고 사람들을 모으려고 했지만 나로써는 무리였다. 워낙 남자단원의 수가 적고, 있어도 너무나 바쁜 것 같았다. 포기하려 했지만 다행히 이 안드레아 형제와 ‘의기투합’이 되어서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Seymour Duncan acoustic pickup
Seymour Duncan acoustic pickup

덕분에 그 동안 가끔, 조금씩 ‘즐기던’ 나의 야마하 기타.. 얼마 전에 Seymour Duncan ‘Woody SC’ acoustic guitar pickup과 앙증맞게 조그맣고 예쁘게 생긴 Behringer AT-108 15-Watt acoustic mixing amplifier를 구입해서 이번에 쓰게 되었다.

지난 7월 달 허윤석(요한) 신부님이 지도하셨던 레지오 교육피정 때 ‘신나게’ 부르던 ‘개신교 스타일’ 복음 성가 ‘주님이 좋아요’, ‘실로암’과 김수환 추기경의 애창곡이었던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를 골라서 연습을 하고 부르게 된 것이다. 내일singing duet performance의 결과에 상관없이 나는 그 동안의 연습과정을 통해서 얻은 ‘즐거움’ 하나 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덕분에 오랜만에 여자가 아닌 남성을 알게 되었다는 것도 즐거운 일이 아닐까?

Personally amplified YAMAHA guitar
‘Personally amplified’ old YAMAHA guitar

올해의 대림절은 어떻게 보내게 될까? 우리는 그렇게 흔한 holiday travel은 100% 없을 것이고, 아.. 그렇다! 올해는 지난 십 수년 동안 못했던 손으로 쓰는 정성 드린 성탄 카드, 연하장을 ‘우체국을 통해서’ 보내는 것을 해 보련다.

내 인생에서 알고 지냈지만 잊혀진 수많은 사람들, 찾을 수 있는 대로 찾아서 ‘내가 살아있다’ 는 것을 알리련다. 그것만 해도 나는 진정한 ‘구세주를 기다리는’ 대림절의 의미를 조금 알 수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