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병환 형을 생각하며

반세기만에 써보는 양병환 이란 이름. 그 50년 동안에 비록 머릿속에서 아주 가끔 생각은 했을지 몰라도 이렇게 “써”보기는 처음 인 것 같다. 아마도 손을 쓰는 일기장에도 쓴 기억이 없다. 그만큼 오래전의 일이다. 하지만 일단 생각이 날라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즐거운’ 추억이 샘솟는다.

나이는 아마도 (100% 확실치 않으니까) 나보다 최소한 3살이 위였지 않았을까. 나의 누나보다 한 학년이 위였으니까. 처음 알게 된 것은 내가 중앙중학교 2학년 때, 가회동 재동국민학교 뒤에 살 때였다. 그 형은 우리가 살던 집에 그 형의 누님과 같이 방 하나를 빌려 자취를 하였다. 그 누님은 그때 벌써 숙명여대생 이었다. 남매가 단둘이 자취를 한 이유는 물론 집이 서울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전라도에서 서울로 유학을 왔기 때문이다.

양병환 형은 그 당시 한국의 최고명문(그때는 그저 일류라고 불렀다) 경기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 두 남매는 인물도 훤칠하고 행실도 좋아서 모두가 호감을 가지고 살게 되었다. 나는 아버지도 없고 누나 하나 밖에 없어서 ‘형’이나 ‘선배’란 존재는 대부분 든든하게 느껴지는 ‘좋은’ 존재였다. 아마도 내가 국민학교 6학년 때 나를 가르쳤던 가정교사  ‘김용기’ 형 (그 형도 경기고등학교 생) 이후에 처음으로 알게 되었던 ‘형’이었던 셈이다.

그 당시는 지역편견과 감정이 아주 적나라하게 표현되던 그런 시기였고, 특히 서울에서 전라도사람들에 대한 편견이 그중에 제일 심하였다. 군사혁명의 주체가 아마도 경상도출신이 많아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어린 나이에도 거의 피부로 느낄 정도였다. 그런데 나로서는 ‘드디어’ 전라도 사람을 바로 옆에서 대하게 된 것이었다. 특히 그때의 말들이 “전라도 사람들은 처음 사귈 때는 좋아도 끝날 때는 아주 나쁘다” 그런 식이었다. 물론 그 당시 나의 나이는 그런 편견에 크게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그 나이에 어찌 그런 ‘나쁜’ 생각이 수긍이 되겠는가. 하지만 주위의 어른들은 아마도 지금 표현을 빌리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지는 않았을까.

처음 양병환 형과의 만남은 내가 친구 안명성(100% 확실치는 않지만)과 집 마당에서 장기를 두고 있었는데 그 형이 슬그머니 다가와서 훈수‘를 두기 시작하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 당시는 우리 같은 애들 에게는 주거 여건상 날씨만 허락하면 방보다는 바깥에서 모든 일들이 이루어졌다. 집 마당이나 골목 같은 곳은 그런 ‘사귐’이 이루어지던 최고의 여건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천성적으로 수줍어하는 성격이라서 먼저 다가가서 사람을 사귀는 것은 힘이 들었는데 이때에는 그 형이 먼저 닥아 온 것이었다.  장기 두는데 여러 가지 비결을 가르쳐 주면서 나의 장기 실력도 덕분에 늘어갔다.

방과 후에 그 형이 자취방에 있으면 곧잘 그 형 방에 들어가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때 내가 흥미롭게 느끼곤 하던 것은 그 형의 ‘공부습관’ 이었다. 물론 그 형이 경기고등학교에 다닌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주의 깊게 보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책꽂이에 있는 ‘참고서’를 비롯해서 내가 옆에 있는데도 먼저 공부를 해야 한다며 열심히 공부하던 그 버릇이 나는 그렇게 부러웠다.  물론 ‘무례’하게 나를 장시간 기다리게 하지는 않았다.  반드시 무언가 한 가지를 끝내곤 나와 같이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그때 나는 그 형에게서 참 무언가 많은 것을 듣고 배웠다. 물론 다 생각은 안 나지만 아직도 뚜렷이 남는 것 중의 하나가 “아이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이었다.

물론 그 나이에 그 어려운 이론을 이해 한다는 것은 힘들지만 그런대로 그 형은 그것을 이해한 듯이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뫼비우스 띠를 종이로 접어서 나에게 보여주던 그 진지했던 모습. 이런 것들은 그 당시 학교에서 배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형의 진지함과 거의 매료 된 듯 한 인상. 나에게는 참 신선하고도 충격적이었다. 그 이후 상대성원리만 접하게 되면 그때 소년기에 마음 설레며 감동을 받았던 추억을 떠 올리게 되었다.

그 때 그 형이 방과 후에 꼭 공부하던 책이 있었는데 그 당시부터 인기 있던 책 “삼위일체 영어” 이었다. 꼭 사전처럼 작고 두껍고 단단하게 생겼던 그 책은 그 이후로 수험생들에게는 거의 classic이 되었다. 그 당시에는 삼위일체란 게 단순히 문법, 해석, 작문의 세 가지를 뜻하는 줄로만 알았다. 나중에 그게 기독교의 교리 (성부, 성자, 성령)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고 웃기도 했다. 아마도 첫 과가 이렇게 시작 되었지. A Newton cannot be a Shakespeare (Newton과 같은 과학자는 Shakespeare와 같은 작가가 될수 없다) 나중에 내가 중 3이 되었을 때 나는 감히 ‘무례’하게도 그 책을 공부하려고 하였다. 물론 결과는 거의 zero에 가까웠지만 내가 얼마나 그 형의 흉내를 내려고 했나 하는 한 예였다.

또 한 가지 즐거운 추억은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철야(밤을 꼬박 새우는 것)를 했던 것이다. 물론 그 형과 같이 ‘거행‘을 한 것이다. 왜 둘이서 그 형 자취방에서 밤을 새우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희미하다. 아마도 그 형의 누님이 집에 없었던 것이 계기가 되었는지도. 그 형은 예의 바르게도 나의 어머님에게 미리 허락까지 받았다. 그런 행동도 나에게는 그렇게나 어른스럽게 보였다.

그러니까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의 몸이 ‘비정상’적인 routine으로 들어가게 된 것인데.. 신체적인 충격보다는 심리적인 충격이 더 컷다. 그러니 아직도 이 나이가 되도록 그때를 생생하게 기억하지 않는가. 졸림을 참는 것은 비교적 어렵지 않았다. 장기도 두고 책도 읽고 옛날 얘기도 하고 재미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통금시간이 지나면서 (그때는 물론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통행금지가 있었다) 그런대로 훤한 새벽을 가로지르면서 신나게 삼청공원을 지나 말바위까지 hiking을 하였다. 그 형은 커다란 나무칼(검도와 비슷한)을 가지고 갔는데 아마도 나를 보호하려고 했던 것 같다. 새벽의 그 시간에 삼청동 산과 말바위를 간다는 것은 참 그렇게 신선하고, 무슨 아주 큰일을 한 듯한 자신감을 나에게 주었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는 법. 몇 달이 지나지 않아서 그 형네는 근처의 옆 동네로 이사를 갔다.  아마도 자취방을 비워야 했던 것 같다. 새로 이사 간 곳은 다행히 중앙중학교로 통하는 계동골목이었다. 이발소가 붙어있는 곳이라고 들어서 나는 어딘지 알았다. 이사 가기 전에 그 위치를 그 형에게 가르쳐 주었는데 그만 그게 틀린 이발소였다. 나중에 들으니 그 형이 그 틀린 이발소 있는 집에 가서 자취방을 찾았는데 물론 없었겠지. 나중에 알고 보니 조금 더 중앙중학교 쪽에 있는 다른 이발소였다. 

그 형네가 이사를 간 후에는 한번 놀러 갔었다. 내가 조금 더 숫기만 있었다면 더 자주 놀러가면서 더 친해질 수도 있었겠지만 나의 성격이 그렇지 못하였다. 그 후로 소식이 끊어지고 그게 거의 50년이 되어간다. 그 당시 그 형은 서울의대를 지망한다고 들었고 후에 합격을 하였다고 들었다. 아마도 훌륭한 의학인 이 되었는지 모른다. 경기고교 동창회를 통하면 아마도 소식정도는 알 수 있지 않을까. 오래 산 보람중의 하나가 Internet이 아닌가. 값이 싼 search engine의 덕을 보면 그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백일몽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