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est Blog: 김인호의 경영·경제 산책 15

자유와 평등과 정의를 생각해 본다

피의 혁명이 준 교훈

2013.05.08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필자가 40대 중반 때, 미술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도 불란서로 출장 갈 때마다 몇 차례 베르사유 궁전에 갈 기회가 있었다. 한번은 그곳 파리에 살고 있는 지인 가족들과 함께 베르사유 궁전 뒤 넓은 정원을 가로지르고 있는 십자형 인공호수의 어느 한편 잔디 위에서 바비큐를 즐긴 다음 궁전 전시관으로 들어가 이리저리 여기저기 역사미술관을 둘러보다가 어느 전시실 입구에서 주춤 놀란 적이 있었다. 그때까지 몇 번을 갔어도 그 전에는 한 번도 본바 없는 전시실에 온통 피를 뿌려놓은 듯한 그림들로만 꽉차있었던 때문이었다.

 특히 콩코드 광장에 설치해 놓은 기요틴(단두대)에 목이 잘리는 장면과 목이 잘리려고 쭉 줄지어 서 있는 풀죽은 사람들의 행렬과 잘린 목들에서 쏟아져 나오는 피가 콩코드 광장을 지나 세느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장면을 생생하게 그린 그림이 제일 소름끼쳤고 또 너무나 사실처럼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 방의 전시물이 전하는 시기가 도대체 언제 것들이기에, 온통 핏빛으로 장식되다시피 한 것일까? 도대체 그 시기의 상황이 피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궁금하여 설명을 읽어보니 바로 루이 왕조가 무너진 1789년 불란서 혁명 발발 때부터 나폴레옹이 등장하기까지 10여 년 간의 것이란다.

불란서는 18세기 루이 14세 때 유럽에서 최강의 국가였으나 루이 16세 치하 때인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시작된 불란서 혁명으로 왕정을 포함한 구체제(앙시앙레짐 Ancient Regime)가 무너지고, 민간 혁명정부가 들어섰으며 동년 10월 5일 ‘자유 평등 박애’를 기치로 하는 ‘인권시민장정(The Declaration of the Rights of Man and the Citizen)’이 선포되었단다. 그러나 얼마 뒤 민간 혁명정부에 의한 교회재산의 몰수, 뒤이은 중과소득세의 징수, 곡물가의 동결, 정부 가격제 불이행에 대한 극형실시, 개인 신분증 소지의 의무화, 이웃상호간의 감시제도 실시, 중상주의에 의한 경제정책의 실패와 지나친 지폐의 남발로 인한 재정혼란 등이 가중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1792년에 제1차 공공안전위원회가 발족되자마자 반역자 처단명분으로 피의 학살이 파리 시가를 휩쓸게 되었고 뒤이어 정권이 여러 번 교체되면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기요틴의 이슬로 사라져갔는데 불란서 대혁명 후 4만 명 이상을 죽인 이 피의 잔치는 1799년 나폴레옹의 독재정치가 등장할 때까지 10년간 지속되었다는 설명이었다. 필자는 바로 그 시기의 미술품들을 전시한 방을 본 것이었다.

 불란서가 220여 년 전 불란서 혁명을 통해 왕정에서 민정으로 또 다른 민정으로 바뀌는 와중에서 무정부 상태와 국가주의를 경험한 후 결국 전체주의의 독재로 옮겨가는 약 10년간 흘린 그 엄청난 피범벅과 살육으로 과연 무엇을 얻었단 말인가? 결국 나폴레옹 독재체제를 얻기 위해 그 많은 피를 흘렸단 말인가?

 그리고 가깝게는 1969년부터 1975년 사이에 캄보디아 폴포트(Pol Pot)가 자행한 인종말살(genocide)획책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해골더미가 보여주듯 그 잔학상이 끔직한데 그들은 이를 통해 또 무엇을 얻었단 말인가? 해골더미가 현재는 관광자원역할(?)을 하고 있는데 과연 지금의 관광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그토록 그 많은 살육을 자행했단 말인가?

 

Guest Blog: 김인호의 경영·경제 산책 14

재벌구조의 진화논리와 기업의 지속번영 원리

2013.04.30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필자가 1969년 공군중위 제대 후 첫 직장인 KIST에서 연구를 막 시작할 때 지녔던 사고(思考)의 하나는 사회현상에도 자연 질서가 그대로 적용된다는 인식이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물은 언제 어디서나 높은 곳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것과 같은 보편질서(universal law)와‘물살은 협곡에서는 빨라지고 강폭이 넓어지면 느려진다.’는 식의 상황적응질서(contingency laws)가 사회현상에서도 적용될 것이라는 인식이었다.

 이런 인식을 기초로 1970년대 초반 KIST 경제분석실에서 필자가 실무책임을 맡아 행한 첫 연구 프로젝트가 POSCO 건설타당성 검토연구였다.

당시 국내 철강 시장규모는 왜소하고 철광자원도 희소할 뿐만 아니라 공장을 건설할 돈도 기술도 물론 없고 철강회사 경영경 험은 전무였으며 다만 있는 거라고는 당시 KIST로 영입되어 온 몇 분의 유학파 과학자들과 거의 무경험의 미숙한 국내 금속공학과 출신의 엔지니어들뿐이었는데 과연 이런 상태에서 POSCO 프로젝트가 국책사업으로서 타당성을 지니겠는가를 검토하는 연구였다.

 POSCO 건설 프로젝트는 이미 KISA (포스코 건설을 위한 국제 consortium)에서 2여 년 간 그 타당성을 검토한 바 있는 프로젝트였는데 그들이 포항제철 건설프로젝트는 그 사업타당성이 크게 뚜렷하질 않아서 차관을 못 주겠다는 결론을 내린 1969년 초반에 정부가 KIST로 하여금 독자적으로 검토하라는 배경에서 시작된 프로젝트였다.

 이런 연구 배경에서 필자는 우선 철강공장의 최소 경제적 생산규모가 얼마인가를 기술연구팀으로부터 확인한 후 최소 경제적 생산규모를 갖추려면 어느 정도로 수출되어야 할 것인가에 연구의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그래서 5~60년대에 걸친 세계철강재의 수출입자료를 가지고 소위 철강수출모형을 도출하고자 하였다.

 당시 사업타당성검토와 관련한 기본정보와 아이디어가 전무했던 터라 이리저리 밤낮없이 고민하던 끝에 떠오른 생각이 자연법칙을 원용해 보자는 것이었다.

 수 출은 수입하는 나라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수출하는 나라에서 수입하는 나라로 얼마만큼이 수출될 것이냐에 대한 예측은 마치 물리학에서의 중력법칙(gravity law) 곧 두 물체간의 중력의 크기는 두 물체의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두 물체간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법칙을 근거로 하여 철강수출모델을 도출하고자 했다.

 자연법칙을 논거로 한 연구결과는 생각보다 훨씬 더 유의적인 예측치가 얻어졌는데 이는 필자로 하여금 자신감을 갖고 POSCO 사업타당성 검토 프로젝트를 마무리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데 프로젝트가 거의 마무리될 무렵 어찌 알았는지 POSCO 건설 사업타당성에 대해 미국 USX 철강엔지니어링 회사가 찾아와 득의 찬 자세로 도움을 주겠다며 제안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제안을 다 듣고 난 후 그들에게 우리의 작업결과와 그 방법론을 보여주었더니 ‘too academic’이라는 말 한마디 남기고는 얼굴이 벌게 가지고 도망가듯 가벼렸던 게 아직 기억난다.

 아무튼 KIST의 검토 결과대로 포항철강공장건설이 확정되고 자금 확보와 관련한 일련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순항을 거듭하여 POSCO는 드디어 1973년 첫 출선의 기쁨을 온 국민에게 주었던 것이다.

필자가 POSCO 프로젝트를 끝내자마자 얼마 되지 않아 서울지하철 2호선 노선을 마련하는 새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도 같은 아이디어로 서울시내 교통량을 예측하여 노선확정(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 런데 이번에도 프로젝트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영국의 한 컨설팅회사가 집요하게 제안 설명기회를 달라고 해서 처음에는 거부하다가 우리의 연구가 거의 끝난 상황이라 기회를 주었더니 1시간 이상 득의에 찬 설명을 하면서 우리에게 큰 유익을 줄 수 있을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우리의 연구결과를 보여주자 그들도 역시 얼굴이 벌게져서 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그토록 득의에 차서 설명한 방법론이 바로 우리가 이미 사용한 중력모델이었던 때문이었다.

기업번영, 사업다운 사업과 니즈맞춤혁신..

인호형의 컬럼, <김인호의 경영 경제 산책 13>이 새로 발표 되었다. 나의 경영, 경제에 대한 ‘전문지식’은 거의 제로에 가깝지만, 덤으로 거저 받게 된 ‘나이의 선물’ 덕택으로 ‘저절로 알게 된’ 나 나름대로의 얄팍한 의견은 많이 있다. 오늘의 주제는 ‘성공한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의 차이와 그렇게 된 원인에 대한 것으로, 기업 윤리를 염두에 두고 근대에 개발된 주요한 기업경영모델을 고찰한 것으로 저자의 독특한 ‘원리적’인 각도로 본 듯하지만 다른 글과 다르게 종교, 신앙적인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오늘 내가 알게 된 것 중에는 여기에도 잘 알려진 80/20 Pareto rule이 적용이 되어서, ROI(return on investment)는 대강 환경, 전략, 조직 변수의 80%와 나머지 20%의 관리, 운에 따른 변수에 따른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80%에 속하는 것을 ‘사업다운 사업’으로 정의하고 이런 룰은 단기적인 아닌 중, 장기적으로 적용이 됨을 밝힌다.

그래서 과연 어떤 것이 ‘사업다운 사업’인가를 구체적으로 밝히는데, 비록 전문적인 용어로 풀이는 되었으나 역시 이것도 ‘직감’적으로 공감들이 가는 것들이다. 사업, 그러니까 business의 모델을 세가지로 구분을 하였는데, 사회에 유익을 주는 positive-sum, 유익도 무익도 주지 않는 zero-sum, 그리고 사회에 해를 주는 negative-sum이 그것 들이다. 물론 대부분의 사업들이 사회에 유익을 주는 것들이지만 도박, 마약 퇴페산업 등은 노골적으로 사회에 해를 주는 것들이다. 문제는 가운데 있는 zero-sum 사업들이고 저자는 이것에 초점을 맞추고 근래의 세계경제문제를 설명한다.

역시 덩치가 큰 미국경제에서 ‘고안’이 된 이 ‘신경제 상품’들, 그 중에서 ‘파생금융 상품’이 끼친 ‘악영향’은 뉴스를 본 사람들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파생금융 상품의 규모가 커지면 커 질수록 진짜 경제인 ‘실물 경제’는 그만큼 위축하게 된다고 한다. 기억에도 생생한 2008년부터 시작된 금융위기는 아마도 이 zero-sum 사업들의 과도한 팽창에 의해서 유발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업들은 철저한 정부규제 하에 있는 것이지만 만약에 그 규제에 ‘구멍’이 생기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전문가가 아니라도 쉽게 이해가 간다. 나도 이것은 공감을 한다. 쉽게 말해서 ‘각종 수법, 기교로 돈 자체로 돈을 버는’ 그들이 이 위기의 주범이 아닐까.

 

 

기업번영, 사업다운 사업과 니즈맞춤혁신에서만…

2013.04.19

 

김인호 명예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1980년대 후반 당시 한창 잘 나가던 어느 재벌사가 보내준 신년호 사보 첫 장을 여는 순간 거창한 고사(告祀)장면을 담은 몇 컷의 칼라사진이 실려 있었다. 약 40여개 고사용 돼지대가리를 쫙 차려 놓은 거대한 상 맨 앞줄엔 회장이라는 분이 혼자 자리하고 그 바로 뒤에 약 40여분을 헤아리는 그룹사 사장단이 정렬하여 넙죽 절하는 장면이 크게 클로즈업되어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영화‘대부(代父)’와 마피아를 다룬 어느 영화의 한 장면이 동시에 떠올랐는데 왜 그랬는지 그 연유는 잘 모르겠지만 뒤이어 ‘아, 저분들이 불확실한 기업경영환경에서도 운(運)이 따라주어 별 탈 없이 우수한 기업성과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저러는구나.’하는 생각이 일견 들었지만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도저히 수긍되어 오질 않았다.

 다음 해 1학기 필자의 전공영역의 하나인 기업윤리 시간에 학생들에게 고사얘기를 들려주며 이에 대해 약간의 토론을 유도하였다. 그런 후 글로벌 레벨에서 서로 연결되어 상호작용하는 21세기의 격변 환경에서 우수한 사업성 과를 내려면 머리를 짜고 짜내어 고민하고 또 고민해도 어려운데 운(運)이나 요행(僥倖)을 바라는 맘으로 과연 우수한 성과가 얻어질까 하는 의구심을 강조하며, 그 재벌은 분명‘올바르게 일하려 하기보다는 운이 따라 주워 사업이 잘되기를 바라는 기업임에 틀림없다.’며, 그 재벌사가 고사 같은 미신행위를 계속한다면 결국 망하고야 말 것이다, 라고 학생들에게 말해 주었다. 그랬더니 상당수의 학생들이 그게 우리나라에선 관행과 관습 아니냐며 크게 필자에게 반발하던 게 생각난다.

 그로부터 10여 년 지나 1997년에 IMF 외환위기가 터졌고 이때 이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 30대기업(재벌)의 거의 반(半)에 해당하는 13개가 결국 파산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 고사를 지냈던 그룹도 물론 파산했다.

 주변에서 인간사 매사에 운이 따라 주어야 일이 제대로 된다는 말을 자주 듣곤 한다. 그런데 그게 과연 그럴까? 같은 맥락에서 사업경영에서도 과연 운이 중(重)하게 작용하는 걸까?

1981년부터 교직에 동참한 필자는 사업경영에 있어서도 준거해야 할 법칙성이 존재하며 따라서 그 법칙성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 결국 경영학자들의 몫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그 일환으로 경영전략분야에서 1970년대 초반부터 개발 사용되고 있는 PIMS(profit impact of management strategies)모델을 주시하고 있었다.

 예 나 지금이나 경영학과 관련한 대부분의 모델/이론/유형/기법들이 여전히 직관(直觀)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PIMS모델도 마찬가지지만 정성(定性)모델(qualitative model)이 아닌 정량(定量)모델(empirical quantitative model)이란 점에서 필자는 특별히 PIMS모델에 남다른 관심을 두어왔다.

 PIMS모델은 미국 전략계획연구소(Strategic Planning Institute: SPI)가 1970년대 초반부터 사업투자수익률(ROI)이 무엇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는가를 밝히고자 포춘 글로벌 500대기업의 사업경험을 통해 계량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계량모델이다. 지금도 경영전략분야에서 계량모델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지만 1970년대 당시엔 PIMS모델은 거의 유일한 계량모델이었다.

 PIMS모델은 원래 GE가 자사의 다각화(diversification)된 사업들을 종합 관리할 목적으로 내부 프로젝트로서 개발한 모델이었다. 그 개발배경을 잠시 보기로 하자.

 

흑백논리와 다원주의

오랜만에 인호형의 글이 발표되었고, 나도 볼 수 있었다. 제목은 ‘옳은 것은 흑백논리와 다원주의 중 어느 편일까?’, 부제 ‘옳고 그른 것에 대한 과학적 판단’ 으로 <김인호의 경영 경제 산책> 컬럼 11번째가 된다. 사순절 훨씬 전에 잠깐 연락이 되었지만 다시 ‘잠잠’ 했는데, ‘불현듯’ 소식이 온 것이다. 얼마나 바쁘게 사시는지 간혹 email 교환의 호흡, 박자가 어긋나기도 하지만, 그것이 50년이 가까워오는 ‘몇 달간의 만남’ (아르바이트 대학생과 까까머리 고3 수험생으로)의 인연에 별로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

비록 경영학 쪽의 전문가로 성공하셨지만, 이공계의 배경은 어찌할 수 없는가 보다. 오늘의 글은 그런 형의 단면을 보여주는 느낌인 것이다. 경제,경영에서 벗어나, 보편적 논리와 열역학적 법칙으로 본 우주의 창조론 같은 것은 기성 전문가들에게 거론하는 것 조차 거의 taboo시 될 수도 있지만, ‘좁은 과학의 눈’ 을 정면으로 도전하듯 바라보는 용기를 느끼게 한다. 1965년 형에게 몇 개월간 받았던 수험과목 이외의 ‘첨단,공상과학 강의’는 나의 머리에 아직도 뚜렷이 남아 있기에 나는 형의 열역학으로 설명이 되는 창조,진화론을 더 흥미 있게 보게 된다.

 

 

옳은 것은 흑백논리와 다원주의 중 어느 편일까?

옳고 그른 것에 대한 과학적 판단

 04.02.2013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세상에는 ‘끝이 좋으면 만사가 좋다’라는 입장에서 어떤 행위의 결과가 좋으면 그 행동은 좋은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결과중시론(consequentialism)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은 그 행위의 결과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고, 행위 자체의 성격과 동기에서 이미 비롯된다는 비결과중시론(non-consequentialism)의 주장도 있다. 또 목적이 좋으면 그 달성을 위한 모든 수단과 방법이 정당화(be justified)된다는 마키아벨리즘(Machiavellism)같은 것도 있다.

 이들 각 의견이나 주장은 다 그 나름대로 그 주장에 대한 근거를 갖고 있다.

 그러면 그들이 모두 옳을 수 있을까? 논리적으로 볼 때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는 모르더라도 어쩌면 그 많은 주장들 중에는 아예 옳은 것이 전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그들 중에 옳은(right) 것이 있다면 나머지 것들은 다 그른(wrong)것이라는 논리적 추론이 가능해 진다. 이는 선다형문제에서 정답은 항상 정답이고 나머지들은 항상 오답인 것과 같다.

 예컨대 (3)번이 정답인 선다형의 경우 다수가 (1)번을 정답으로 답했다 해서 정답이 (3)번에서 (1)번으로 바뀌겠는가? 정답과 오답은 다수냐 소수냐에 관계없이, 정답은 항상 정답이요, 오답은 항상 오답인 것이다. 정답이므로 정답이라고 받아들이고 오답은 정답이 아니기 때문에 오답으로 받아들이는 판단은 옳은 판단이다. 그런데 정답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오답인데도 불구하고 정답이라고 우긴다면 이는 모두 오류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사안에 대한 판단에 있어서 범할 수 있는 오류에는 알파(α)오류와 베타(β)오류의 두 가지가 있다. 만약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사실이 아니라고 판단 한다든가 또 사실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사실이라고 판단한다면 이는 모두 그릇된 판단이며 오류이다. 전자의 오류를 우리는 알파(α)오류, 후자를 베타(β)오류라 하는데, 오류는 반드시 오류로 판명되기 마련이다.

 오류가 있는 곳에서 우리는 옳고 그름을 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오류는 그 자체가 이미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데 있어서 오류를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에 관한 한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그른 것은 그른 것이라는 흑백논리만이 가능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옳고 그름에 관해서도 흑백논리로 얘기하는 것은 잘못이며, 옳고 그름의 판단기준에 대하여 다양한 의견과 주의 주장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더 바람직한 것으로까지 받아들이는 잘못을 범한다.

 각자의 다양한 의견이나 주장을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의 다원주의(多元主義; pluralism)와 각자가 옳다고 생각하면 옳은 것으로 인정해 줘야 한다는 입장의 상대주의(相對主義; relativism)에 익숙해 있는 현대사회에서는 더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현대는 다양한 주의주장들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본질적으로 옳은 것뿐만 아니라 알파오류나 베타오류도 수용할 가능성을 안고 있다. 오류의 견지에서 볼 때, 무신(無信; atheism)은 알파오류이며, 미신(迷信; superstition)은 베타오류이다.

 잠시 다음의 실험결과를 음미해 보자.

 들려주는 음악의 형태를 바로크 음악과 헤비메탈 음악으로 달리하고, 나머지 조건들은 모두 동일하게 한 상황에서 여러 씨앗들의 발아실험을 실시하였다. 일정시간이 경과한 후 조사해보니 바로크 음악을 들려준 쪽의 성장이 헤비메탈음악을 들려준 경우보다 3배나 더 자랐으며, 더 놀라운 사실은 바로크 음악을 들려준 쪽에서는 모든 싹들이 음악이 들려오는 쪽을 향하고 있었는데 반하여 헤비메탈음악을 들려준 경우에는 모두 소리 반대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 실험 결과를 통해서 모든 씨 안에는 절대자의 절대의지가 투영되어 있고, 그 씨들은 철저하게 절대자의 의지만을 따르고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은 모두 그것을 존재케 한 메이커(maker)가 있으며, 거기에는 반드시 메이커(maker)의 의도가 투영되어 있다. 어떤 물건이든 그 만든 메이커(maker)의 의도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면, 그것은 좋은 존재이고, 그렇지 못하면 나쁜 존재이다.

 이 명제를 연장시켜 생각해 보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메이커(maker)가 있듯이, 우주도 존재하는 하나의 실체이므로 그것을 존재케 한 메이커(maker)가 존재한다고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그래서 존재하는 조물주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면 이는 바로 알파(α)오류를 범하는 것이요, 한편 이상한 돌이나 나무 산 태양 별 등 심지어는 영물이라고 섬기는 우상에겐 아무런 영적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에 무엇이 존재한다고 판단한다면 이는 바로 베타(β)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런데 천지 창조 여부와 관련하여 세상에는 여러 주의·주장들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 창조론(creationism)과 진화설(evolutionism)과 윤회설(transmigrationism)을 들 수 있다.

 이제 우주의 에너지는 증감 없이 항상 일정하다는 열역학 제1법칙과 폐쇄시스템(closed system)에서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엔트로피(entropy: capacity to change 의 역수(逆數)로 표현되는 무질서의 정도를 말함)는 항상 증가한다는 열역학 제2법칙에 의하여 그 진위를 분별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열역학 법칙은 이제까지 무수히 많은 도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재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과학법칙이기 때문이다. 일명 엔트로피 법칙이라고도 불리는 열역학 제2법칙은 우주 내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높은 질서(higher order)에서 낮은 질서(lower order)로 비대칭(非對稱)의 일방적 방향으로 바뀌어 간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열역학 법칙의 견지에서 볼 때 낮은 질서에서 높은 질서로 진화한다는 진화설은 열역학 제2법칙에 정면으로 배치될 뿐만 아니라 더 높은 질서가 계속 생기려면 우주에서 에너지가 계속 증가해야 하는데 이는 우주의 에너지는 증감 없이 항상 일정하다는 열역학 제1법칙에도 상치되는 주장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높은 질서에서 낮은 질서로 때로는 낮은 질서에서 높은 질서로 지그재그(zigzag) 왔다 갔다 해야 하는 윤회설도 열역학 법칙의 견지에서 볼 때 자연 질서에 엄청 어긋나는 것임을 또한 알 수 있다.

 

글/김인호 한양대 명예교수·다이나믹 매니지먼트 학회장(ihkim5611@dreamw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