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전 사일구, 4.19를 생각한다

1960년 4월 19일을 생각한다. 오늘 아침 문득 오늘이 4월 19일임을 느꼈고, 아마도 조금은 더 의미가 있는 해가 아닐까.. 생각을 하면서 아.. 1960~2010.. 정확하게 50년이 되었음을 알았다. 조금 부끄럽기도 한 것이 오늘에서야 50주년이란 것을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Axis of power, 이기붕,이강석,이승만,프란체스카,박마리아
Axis of power, 이기붕,이강석,이승만,프란체스카,박마리아

1960년 4월 19일 나는 서울 종로구 계동 1번지 중앙중학교 1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그때, 초봄이었던 4월은 그 나이엔 참 즐거운 계절이었다. 우선 밖에서 full-time으로 뛰어 놀 수가 있기 때문이다.

No TV, No telephone, No game machine, No computer, No nothing, Yes only AM radio.. 유일한 오락은 만화책과 누나들(식모누나까지) 속에서 끼어서 순정 멜로드라마(예를 들면 청실홍실, 장희빈 같은)를 AM radio 에서 듣는 것 밖에 없었던 시절, 집 밖의 골목은 나에게나 동네 꼬마들에겐 거의 천국이나 다름이 없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 조금은 덜 뛰어 놀 것 같았지만, 거의 반대였다.사실은 더 나가서 놀았다. 우선 입시공부가 당분간(최소한 3년간)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종로 화신 백화점 옆 골목에 있었던 우리의 ‘등대’ 우미관에서 로버트 밋첨(Robert Mitchum) 주연의 2차 대전 잠수함과 구축함 영화, 상과 하(Enemy Below), Pat Boone주연의 과학공상영화 “지저탐험(Journey to the center of the Earth), 등 그 당시 미국영화에 열광하던 시절.. 그 때였다. 사일구 혁명이 일어난 것이.

3.15 대선 선거운동, 1960년
3.15 대선 선거운동, 1960년

그 당시 나는 가회동, 재동국민학교 뒷문 쪽, 에 살았다. 모두가 지금에 비하면 꾀죄죄하게, 가난하게 살았지만 모두들 생활수준이 비슷해서 사실 우리들 그렇게 가난한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모르는 게 약이라고나 할까.

길에 나가면 사람들로 항상 북적거렸는데, 그 이유는 간단했다. 집에 앉아서 할 것이 별로 없었고 생활공간이 좁았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나는 기적적으로 침묵이 흐르는 거리를 목격할 수 있었다. 그것은 서울에서 처음 맞고 보는 “계엄령” 때문이었다. 골목까지 사람이 사라진 것은 사실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그 해 1960년 3월에 3.15 부정선거가 있었다. 이것은 지금 생각해도 역사상 유례없는 부정선거의 교과서적인 극치였다. 어린 우리가 듣고 보아도 그런 것 같았다. 재동국민학교 6학년, 그러니까 1959년, 담임선생님이셨던 박양신 선생님.. 그 선생님까지 우리 코흘리개 학생을 놓고 선거유세를 하다시피 하셨다. 이기붕이 조볌옥(야당 후보) 보다 훨씬 낫다고.. 분명히 문교부의 지시에 의해서 그랬을 것이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 선생님.. 너무 하셨다.

김주열군의 죽음에 항의 데모하는 마산여고생들, 1960년
김주열군의 죽음에 항의 데모하는 마산여고생들, 1960년

그리고 기억나는 비극적인 사건, 마산 부두에서 김주열이란 고등학생의 시체가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떠오른.. 물론 신문에 그런 것들이 요란히 실렸다. 최소한 이승만 정권은 언론통제나 탄압은 안 한 듯하다. 그 당시 우리는 경향신문을 보았다. 특별히 야당 성이 강했던 것도 아니었는데 요란히 정부를 탄핵하곤 했다. 그 때는 각 신문마다 간판 격인 만화가 매일 실렸는데, 그게 어린 나이에 보아도 무슨 정치적 배경이 깔린 무슨 의미가 있었다. 나는 그때 경향신문의 두꺼비 (김경언 화백)를 즐겨 보았다. 물론 제일가는 인기는 역시 동이일보의 고바우영감(김성환 화백) 이었지만.

결국 부정선거는 짜여진 각본대로 이승만, 이기붕을 대통령, 부통령 으로 만들어 놓았다. 보통 4,5월에 선거가 있었지만 다급해진 자유당은 강제로 3월 15일로 앞 당겨 선거를 치렀는데 이유가 좋았다. 4,5월 달은 농번기라는 것이고 농민들을 돕겠다는 갸륵한 이유.. 그 당시 자유당은 그 정도로 유치하기도 하였다. 기억나는 것이, 이기붕과 박마리아.. 이기붕은 거의 허수아비고 모든 것은 그의 부인인 박마리아가 움직인다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알 수 없지만 나중에 여러 가지를 종합해 보면 거의 사실인 듯 싶다. 그 단적인 예로 이기붕의 장남이었던 이강석을 박마리아가 이승만의 양자로 들여보낸 것인데, 정말로 비극적인 종말을 초래하고 말았다. 이강석이 가족을 모두 쏘아 죽이고 자기도 죽은 것이다. 대부분, 이강석의 용기를 칭찬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4.18 고려대생들의 데모, 이날 밤 돌아갈 때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았다.
4.18 고려대생들의 데모, 이날 밤 돌아갈 때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았다.

4.19는 시실 급박히 우리에게 다가왔다. 각종 데모가 점점 서서히 커져나간 것이다. 4월 18일에는 서울고려대 학생들이 데모 후에 자유당 ‘소속’ 깡패들의 습격을 받았다. 그 때는 자유당 소속의 정치깡패들이 자주 등장을 하였는데, 제일 유명한 것이 이정재, 임화수의 일본 야쿠자 같은 조직이었다. 이들은 조무래기 동네 깡패가 아니고 거의 법적인 ‘회사’를 가진 조직 폭력배였다. 이들에 관한 일화는 오래 전의 TV 드라마 ‘무풍지대‘에 아주 자세히 나온다. 그 당시 일화로, 코미디언합죽이 김희갑씨가 임화수에게 폭력을 당한 것은 신문에 보도 되기도 했다. 소문에 의하면 임화수가 “야 합죽이, 요새 잘 있냐?” 하고 인사를 한 것으로 시작이 되었다는데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모른다.

4월 19일 (무슨 요일이었을까, 맞다..월요일이었다) 아침에 학교엘 가니.. 수업도 시작하기 전에 (확실치 않지만) 퇴교를 당했다. 우선은 신이 났지만 (그 나이에 학교보다 동네골목이 더 좋았음), 조금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거리의 공기가 조금 이상 했음을 ‘감’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우선 ‘신나는’ 마음으로 만화가게로 향했고, 미친 듯이 애독하던 만화 김산호의 ‘라이파이‘를 즐겼다. 그러면서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때 이미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근처까지 데모대가 갔었던 모양이고, 경찰들이 발포를 시작한 것이다. 나는 그때 총소리를 처음 듣게 되었다 (라디오의 드라마를 제외하고) 아마도 그 소리는 그 당시 경찰들의 표준무기 카빈소총이었을 것이다.

국회의사당 앞의 데모, 한 여대생이 무등을 타고 구호문을 치켜 들었다.1960년 4월 19일
국회의사당 앞의 데모, 한 여대생이 무등을 타고 구호문을 치켜 들었다. 이 여대생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4월 19일

그러면서 사람들이 우왕좌왕 하는 것이 느껴지고 총소리는 더욱 잦아지고.. 그러면서 저녁이 되었다. 재동 신작로엘 나가니 (지금 돈화문에서 종로경찰서로 이어지는 거리) 완전히 사람들로 들끓고 군용트럭, 화물트럭이 학생들을 가득 태우고 질주를 하고 있었다. 물론 격한 구호를 외치면서. .그들은 모두 대학생들이었다. 그러니까 4.19는 사실 대학생들의 데모였다. 희생자들도 거의 그들 이었을 것이다. 거리엔 발을 동동 구르며 귀가를 안 한 자녀를 기다리는 부모들로 가득하고.. 그때 같은 동네에 사는 국민학교동창 한윤석의 어머니가 큰 딸을 부여 앉고 무사히 귀가한 것이 너무 기뻐서 뛰시던 모습이 선하다.

그러다가 계엄령 이란 것이 선포되고 군인들이 거리에 깔리기 시작하며 통행금지가 실시되고.. (이런 광경은 사실 그 이후 몇 십 년 동안 흔히 보게 되는 그런 것이 되었다).. 동네 골목까지 쥐 죽은 듯 조용해지고.. 그러면서 라디오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구성진 ‘하야 성명’이 나오기 시작했다. 유명해진 말 ‘국민이 원한다면‘.. 이란 말.. 그 당시 아주 유행어가 되었다. 거의 친 아버지 이상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존경하게 교육을 받았던 우리들은 솔직히 동정 어린 심정이 되었다. 그러니까 “이기붕 개새끼”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을 하기도 했다. 물론 모든 잘못은 거의 이승만에 있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경무대로 향하던 데모대가 효자동 전차 종점에서 총격을 받고 쓰러졌다, 4.19 낮
경무대로 향하던 데모대가 효자동 전차 종점에서 총격을 받고 쓰러졌다, 4.19 낮

그 때, 학생이란 위치가 사실 한국역사상 최고의 경지까지 올랐음을 의심할 수가 없다. 일반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대우를 하곤 했다. 특히 대학생들.. 수없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갔던 그 용감했던 대학생 형님들.. 지금 생각해도 존경스럽고, 자랑스럽고, 흐뭇해지는 심정 누를 길이 없다. 그렇게 나라에 희망이 없고 경제적으로 쪼들리던 시절, 작업복 염색해 입고, 암시장에서 산 군화를 신고 대학캠퍼스를 누비던 그 멋지던 형님들 (누님들도 있었겠지만).. 지금 다 어떻게 4.19를 기억하고들 계실까.. 궁금하기도 하다.

짧았던 학생혁명 시절, 결국 미성숙하고 이기적이던 야당 정치인들이 거의 망쳐놓다시피 해서 결국은 다음해 1961년 5월 16일에 박정희의 탱크에 의해 끝이 나고, 사일구의 의미는 희망했던 것처럼 피어 오르질 못했다.(군사정권은 사일구의 의미를 격하하진 않았다. 하지만 5.16의 의미를 올리다 보니 상대적으로 눌렸을 뿐이다) 피지도 못하고 어린 나이에 숨져간 영혼들에게 존경의 마음으로 명복을 빌고 싶다. 고이 잠드시기를..

 

 

당시의 신문으로 본 사일구 혁명 

 

대한민국의 신문들이 거의 모두 digital archive로 Internet으로 볼 수 있게 되면서, 그 동안은 거의 불가능하거나 아니면 불가능할 정도로 비싼 보물과 같은 역사적 정보들이 거의 기적적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사실 이것을 보는 것은 최고의 time-killer가 될 수가 있고, 이것으로 다시 자기만의 역사를 쓰며, 바로 잡을 수도 있게 되었다.

그 예로 아래에 보이는 사일구 혁명 당시의 신문을 보면서 희미하거나 숫제 틀린 기억들을 바로 잡게도 되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그 당시 12살 정도의 ‘한자 문맹‘에 가까운 나이어서 이런 신문들을 읽지도 못했을 것이라서, 그렇게 큰 잘못 된 기억은 없을 듯하다. 그 당시 나는 분명히 ‘그림, 사진’들만 즐겼을 것이다. 이것들을 보면서 역시 사일구는 아주 오래 전 ‘사건’이라는, 그것도 너무도 오랜 전이라는 가벼운 충격을 받고, 내가 그만큼 오래 살았고, 그 역사의 현장을 피부로 느꼈다는 것에 약간의 자부심도 가지게 되었다.

50년이 지난 신문 속의 글과 사진은 거의 ‘전근대적 문화’의 냄새를 진하게 풍겼는데, 변해버린 한글 맞춤법과 당시의 경제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꾀 죄죄’한 모습들, 당시의 ‘조잡한’ 흑백 신문사진 기술.. 너무나 나의 역사, 시대관을 시험하는 것들이었다.

 

 

419의 전주곡, 4월 18일 고려대생들의 데모

4.19의 전주곡, 4월 18일의 그 유명하고 ‘영웅적’인 고려대 3천명 학생들의 4.18데모에 관한 전면기사들.. 이 고려대의 국회의사당 앞에서의 대규모 데모는 그 날 밤에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이정재 휘하의 임화수, 유지광 깡패부대의 대규모 습격을 받고, 그것이 사일구 혁명의 최후 기폭제가 된다.

 

 

정치깡패단 고대생 습격

이정재 사단 정치깡패의 첫 출동, 시민들과 합류해서 4.18 저녁 서울 중심가를 누비며 행진하며 학교로 돌아가던 중 종로4가  천일백화점 근처에서 100여명 깡패의 살인적인 공격을 받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용감했고 치열했던 4월 18일 저녁의 고려대 생들

이 사진들이 4월 18일 혁명전야의 생생한 열기를 적나라 하게 보여준다. 의사당 앞에서 끝까지 버티던 용감했던 고대생 형님들.. 그 무서운 힘들이 어디서 나왔을까?

 

 

전국으로 확대된 4월 19일의 데모

폭발된 전국적인 4.19혁명.. 서서히 전면 기사, 정치면으로 등장.. 이때는 이미 수많은 사상자가 나온 이후였고, 비상 계엄령이 서울 전역에 선포된 후였다. 하지만 기사를 읽으면 처참한 사상자들의 실체는 아직도 파악이 덜 된 상태임을 알 수 있다. 다만 경무대 앞에서 장갑차로 데모 군중을 향해 일제 사격을 했음은 밝힌다.

그런대로 점잖은 사진, 경무대 진입로 전에 있는 효자동 전차 종점에서 무장경찰과 대치한 것만 front page에 실었다. 이 효자동 종점에는 나의 외 이모님 댁의 조그만 가게가 있었는데, 그 당시 어떠한 광경을 목격했는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서울 전역의 거리를 휩쓴 노도와 같은 데모

1960년 4월 19일 저녁 6시까지의 ‘사회면’ 뉴스는 조금 더 생생한 데모의 격렬함을 보여준다. 수도지역 (그 당시에는 수도권이란 말도 없었다), 그러니까 서울에 있는 대학생 전체와 수 없이 많은 고교생들, 심지어 중학생들 (그 이하 아이들도) 까지 합세한 그야말로 혁명적인 봉기의 조짐을 여지없이 보여준 날.. 사월 십구일 낮의 일이었다.

내가 오후 한시경부터 들었던 총소리.. 경무대 쪽이었고 역시 그때부터 대학생 형님들이 총에 맞아 쓰러지기 시작한 때였다. 만화 속에서만 보던 진짜 총 소리를 듣는 기분이 처음에는 신기하고 흥분되기도 했지만 곧바로 ‘공포’적인 기분으로 변했다.

 

 

전국 주요도시 비상계엄 선포 

처음에 서울에 내려졌던 경비계엄령이 전국적인 ‘비상’계엄으로 바뀌어 선포가 되고 경찰을 대신 군인들이 치안의 주역을 맡기 시작하고, 신문 같은 언론매체(그 당시 몇 가지 신문과 국영방송밖에 없었다)에 대한 군 검열이 시작되어서 ‘불온한’ 것들은 무자비하게 조판과정에서 삭제 당했다.

 

 

4월 19일 밤, 계엄군 진주 시작

치열한 시가전을 방불케 하던 4월 19일이 저물어가면서 계엄령에 의한 중무장 군인들이 거리 곳곳에 배치되기 시작하며 데모대도 서서히 물러가기 시작하지만, 군검열로 생생한 사진보도는 아직 없었다. 글로 쓰여진 기사만으로는 그날의 엄청난 일들을 묘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데모대들이 ‘탈취’한 각종차량에 올라 타고 거리(원남동~안국동)를 질주하던 대학생들의 격렬한 구호, 그 모습들이 아직도 기억에 남고, 온통 골목길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하던 부모님들의 모습들.. 역시 생생하다.

 

 

서서히 밝혀지는 데모의 현장

비교적 민중 편에 서있었던 계엄군의 느슨한 검열을 통과하기 시작한 4월 19일의 생생한 사진들이 신문으로 알려지기 시작한다. 김영삼(a.k.a., 빠가)이 ‘뭉개버린’ 식민통치의 상징 ‘중앙청(이것을 없애버리면 후세에 누가 그 비극적인 역사를 느낄 수 있냐?)’ 옆에 널려진 서류들, 불에 타던 반공회관, 서울신문사, 서울 의대생들이 숫제 하얀 가운을 입고 데모에 참가, 이기붕 국회의장 집의 물건들이 불에 타던 생생한 기록들이다.

 

 

신문 언론 검열, 통제 시작

4월 20일 석간신문, 드디어 본격적인 군검열을 거친 신문들.. 조판 후 에 군 검열관이 아마도 ‘송곳’ 같은 것으로 긁은 모양.. 계엄령이 해제될 때까지 이 신문의 모습은 그 당시 나에게 참으로 신기하게 보였다. 이때의 계엄군 사령관, 송요찬 중장..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그가 한 일련의 명령들은 후세에 길이 남을 ‘정당’한 것들 뿐이었다. 특히 민중의 원흉으로 낙인 찍힌 경찰들을 철저히 단속, 통제하는데 성공했다. 당시의 많은 경찰은 실제로 일제 고등계 출신 악질들이 많아서 수시로 미성년자들까지 ‘공산당’으로 몰아 고문을 자행했다.

 

 

조금씩 후퇴하는 이승만 정권

이승만 대통령의 4.19 ‘사태’에 대한 정치적 포석과 견해는 역시 정치적이지만, 그래도 조금은 ‘진정한 대화’를 원하는 듯한 느낌을 떨칠 수 없는 그러한 담화문이다. 하지만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그 때까지도 이대통령은 사태의 진상 (원인을 포함한)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 같다. 비서실을 비롯한 ‘인의 장막’에 가리워져 있었고, 고령의 나이가 별로 사태파악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오후 7시 통금제한 시작

비상계엄령의 여파, 4월 20일부터 저녁 7시 통행금지 시작.. 그렇게 복잡하던 세종로 네거리가 7시 전에 이미 완전히 비었다. 이 ‘낮’의 통행금지는 사실상 골목 골목까지 적용이 되어서 집밖으로 나오는 것도 아주 조심스러웠고, 꼬마들이 나가서 노는 것도 힘들었다.

 

 

엄청난 인명 상실, 피해가 밝혀진다

처음으로 ‘공식’ 피해 진상이 나오기 시작한다. ‘출발점’이 이곳에 보이는 대로 111명이다. 물론 나중에 이것은 큰 폭으로 올라간다. 역시 대부분의 사망자들은 ‘어린 학생’들이어서 국민에게 느껴지는 심리적인 효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어떻게 이들이 발포를 할 정도로 폭도이며 위협적이란 말인가?

이러한 민심에 부응하듯 송요찬 계엄사령관은 경찰을 철저히 질책하며 ‘보복 금지’에 대한 엄단을 경고한다. 신문검열로 삭제된 사진들은 지금 보아도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못다 피고 먼저 간 생명들을 가족에게

계엄 사령부는 민심을 잘 파악하고, 각 병원에 안치된 데모 사망자, 거의가 학생들, 을 유족들에게 돌려 주었다. 이때 민간정부에 대한 증오심이 상당했고, 관(서울시) 주도하의 합동영결식도 유족들이 거부했다.

 

 

4월 23일자 호외!

4월 23일자 호외(extra), 그 당시는 참 호외란 것이 많았다. 요새 같이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이 없어서 빠른 뉴스는 라디오나 이런 신문의 호외 같은 것이 의지했다. 정국 파탄의 원인의 중심인물, 부정선거의 주역 부통령에 당선된 이기붕 국회의장, 드디어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모양이다. 불똥이 튈 것에 대비해서 현 부통령 장면박사는 다음의 정치포석을 한다.

 

 

가난 했지만 인정 많던 그 시절

당시는 찌들 리게 대부분 가난했지만 빈부의 차이가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 생존경쟁에 발버둥은 쳤지만 기본적인 인간애와 동족애는 어느 때 보다 높고, 없는 것을 나누는 인정도 참 많고 흔했다. 위의 사진들은 절대로 pose한 사진들이 아닌 snap이었을 것이다. 연고도 없는 어린 부상자를 돌아보는 한 가족들, ‘용감한 형님’을 자랑스레 찾아간 국민학생, 사망자 가족의 장례비용을 걱정하는 어떤 착한 엄마와 아들의 모습.. 참으로 눈물겹고 그립던 시절이었다.

 

 

고대생 습격 주범, 정치깡패 소탕

무풍지대, 드디어 부상.. 자유당 정권과 손을 잡은 야쿠자 스타일의 이정재 휘하의 정치깡패의 부관들 드디어 여론과 군의 압력으로 얼굴이 들어나고 구속까지 된다. 이들과 동대문 경찰서는 숫제 서로 직통전화까지 가설하고 고대생 습격사건을 주도했다.

3.15 부정선거도 이들의 도움이 없이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들 중, 평화극장 사장 임화수와 두목격인 이정재는 1년 뒤의 5.16 혁명 뒤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비운을 겪지만, 운이 좋았던 유지광은 살아 남는다.

 

 

불란서 혁명같던 거리의 전쟁

불란서 혁명을 방불케 하는 이 사진은 4.19가 절정에 이르던 때, 권력의 심장부 이승만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로 향하는 제일 용감하고 희생자가 많았던 때의 현장 사진이고, 계엄군 검열이 완화된 상태에서 신문에 실렸다. 이 당시 데모대의 유일한 방어무기는 탈취한 소방차 뿐이었다.

 

 

오열하던 어린 희생자들의 가족들

한민족에게 낯설지 않은 광경, 억울하게 어린 나이에 먼저 보낸 귀여운 자식들을 어찌 그냥 보내랴.. 이때의 슬픔은 전체 국민들의 슬픔이었고, 꼬마였던 우리들에게도 커다란 슬픔이었다.

 

 

기타를 치며 부상자를 위로하던 이대부속병원 의사

슬픔과 고통 속에서도 이런 장면은 우리의 마음을 훈훈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자상한 의사가 요새도 과연 몇이나 있을까? 지금 이 의사 분은 잘 살아 계실까? 그 당시 기타를 치는 의사는 그렇게 많지 않았을 텐데..

 

 

계속 밝혀지는 사일구 의거의 진상들

점차 자세한 4.19 때의 현장사진들이 신문에 실리기 시작한다. 데모의 정점은 역시 권력 심장부 경무대를 향한 길이었다. 대부분 효자동 종점을 통한 길이 바로 그 길이었다. 후퇴를 하며 총을 쏘는 경관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생각을 한다. 발포 명령을 받은 그들에게 과연 어떤 죄가 있었을까?

 

 

비상계엄 속에 재개된 격렬한 데모

4.19 학생데모 가 일주일째로 접어 들면서, 자유당 정권의 미온적이고 느린 반응에 결국 학생뿐 아닌 대학교수, 일반군중들이 못 참고 일어났다. 이번의 소요는 비상계엄 하에서 일어난 것이라 그 심각성은 더 큰 것이었다. 모든 치안의 책임은 계엄군에 있는데, 그들에게 모든 앞날의 열쇠가 쥐어져 있었던 것이다. 결국, 계엄군은 ‘절대로’ 동포에 대한 발포명령을 받지 않았다.

 

 

민중과 학생 데모대 편에 선 계엄군

계엄령 하에서 벌어진 새로운 데모는 사실상 계엄군의 ‘보호’하에 벌어진 셈이 되었고, 이것은 현 정권의 심장을 겨누는 또 다른 총부리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계엄군의 ‘결단’이 4.19 를 진정한 혁명으로 만든 것이다. 이것은 대한민국 국군 창군이래 최고의 순간이라고 할 것이다.

민간인들이 계엄군의 탱크에 올라 타고 얼싸안고 있던 사진들을 생생히 기억한다. 정말 멋진 군인아저씨 들이었다. 용기를 얻은 군중들은 서서히 ‘원흉’으로 지목된 이기붕 국회의장의 저택으로 몰려가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겼다. 대한민국 만세!대한민국 만세! 결국은 올 것이 왔다. 계엄군의 멋진 결심에 굴복한 듯, 국민의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의 구성진 육성 방송과 성명이 라디오와 신문 호외로 나오고. 나도 이 방송을 들었다, 그 유명한 말.. “국민이 원한다면”.. 나도 생각했다. “맞습니다. 그것이 국민이 원하던 것이었습니다. ” 이 방송과 성명으로 4.19는 100% 완전한 학생들의 승리가 되었고, 4.19는 ‘유혈’ 혁명으로 승격한다.

 

 

대통령 하야 성명, 정의의 승리

이승만 정권 궤멸.. 이것이 이제는 공식, 사실화가 되어서 4월 27일자 신문의 전면에 나온다. 3.15 부정선거는 완전히 무효가 되었다. 이 역사적 결정에 이르기까지 학생대표들과 이승만 대통령은 ‘울음’으로 대화를 했다고 한다. 분명히 노 혁명가 이승만 박사도 그들의 눈물을 진정으로, 가슴으로 느꼈던 것 같다.

이제는 승리의 축제가 세종로 네거리를 완전히 덮는다. 총알이 난무하고 핏방울이 튀던 같은 거리가 기쁨과 감격의 거리로 변한 것이다. 역시 계엄군 탱크가 이번 의거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까.. 역시 국민의 군대였다.

 

 

대통령 하야성명에 열광하는 민중과 학생들

4.26 대통령 하야 결심소식을 듣고 계엄군 탱크 위에서 환호하는 군중들.. 이것은 세종로 네거리에서 남쪽을 향해 찍은 사진인 듯, 멀리 중부 소방서의 소방탑이 보인다. 기껏해야 4층 정도의 높이에서 불이 난 곳을 볼 정도로 그 당시에 고층빌딩이 없었다.

아래의 사진은 계엄군의 ‘안전함’을 느낀 후 계속된 대모 군중, 가운데를 보라.. 국민학교 학생들이다! 멀리 “빠가”김영삼이 없애버린 일제의 상징 중앙청과 북악산이 보인다.

 

 

4월 26일, 대한민국 제2의 광복절!

대통령 하야 성명이 나온 4월 26일은 제2의 8.15 라고 환호를 했다. 해방, 부정,부패, 깡패, 경찰 정권에서 해방.. 이날 기뻐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분명히, 고문경찰과 자유당의원, 그 소속 깡패들 뿐이었을 것이다. 그 중에 이기붕 이란 이름은 특별히 증오의 대상이 되었고 군중들은 서대문근처 그의 저택으로 쳐들어가 집안 가재들을 모두 끌어내서 불태웠다. 나의 동네 친구들 중에는 그곳의 물건들 중에서 ‘최고급 야구 glove’를 “전리품”으로 가져오기도 했다.

 

 

군인 아저씨, 저희를 쏘지 마세요!

눈물과 웃음을 함께 자아내는 사진들.. 특히 왼쪽의 국민학생 코흘리개 악동들의 데모가 그렇다. “군인 아저씨들,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마세요!” 란 플래카드.. 어찌 이들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있을까? 이들은 분명히 용감하게 피 흘리며 쓰러진 대학생 형님,오빠들을 생각했을 것이다. 100% 자유를 쟁취한 군중들, 탱크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올라타서 환호를 한다.

 

 

4월 26일에 보인 민중의 분노

4.26 승리의 모습들.. 이기붕 저택 습격한 데모대 들은 사실상 ‘절도’도 서슴지 않았지만 그것이 큰 문제가 될 그런 날이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 충격적인 모습은 ‘우리들의 아버지’ 이승만 박사의 동상이 종로 파고다 공원 (탑골공원)에서 끌려 내려져서 차에 끌리어 가는 곤욕을 치른 것이다. 우리들이 보기에 그것은 조금 심한 것이었다. 특히 그 동상을 끌고 다닌 차가 ‘분뇨 차(일명, 똥차)’ 였다는 사실이 두고두고 께름칙하게 느껴졌다.

 

 

대한민국 대학생들 시싱 최고의 순간들

빛났던 대학생 형님,누님들과 용감하게 민중을 보호했던 우리의 국군 계엄군 아저씨들.. 정말 멋진 순간들을 맞았다. 총탄에 쓰러지며 나라를 구했던 대학생 형님들이 이번에는 뒤처리를 과감히 맡았다. 계엄군이 관리하던 경찰서, 파출소 조차 대학생들을 임시 ‘고용’하기에 이른 것이다. 특히 왼쪽 위의 기사를 보면 그 당시 최고의 맛을 자랑하던 뉴욕제과점과 고려당 제과점의 최량의 빵들을 계엄군 ‘아저씨’들에게 선사를 하는데, 그 당시는 살 맛이 나던 때였다.

 

 

급속히 정상화되는 서울거리

급속히 정상화되는 서울거리 2

 급속히 정리되는 용맹과 피의 거리들.. 역시 피를 흘렸던 대학생 형님들이 팔뚝을 걷고 나섰다. 경찰이 종적을 감춘 곳에 대학생들이 교통정리를 하고, 쓰레기 청소까지 했다.

 

 

이기붕 일가 자살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이기붕씨 일가 자살.. 이것은 그 당시에도 끔찍한 뉴스였다. 그렇게 많은 죄 없는 어린 학생들이 죽었지만, 이것은 그것과 근본적으로 성격이 달랐다. 법의 심판을 받기에도 합당치 않다고 결론을 내린 장남 이강석의 결단이었다. 그가 부모와 남동생을 권총으로 사살하고 자신을 쏜 것이다. 100% 확실한 정황을 알 길은 없지만 그것이 공식적인 결론이었다. 누구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잊고 싶은 끔찍한 비극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이기붕씨의 출신 과정을 보면 그도 양심적인 기독교인이었고, 나름대로 올바른 정치를 하려고 했음도 부정할 수 없지만 문제는 장기집권으로 나온 ‘악마’였던 것이다. 이 사건은 국민의 ‘보복’감정을 조금 누그러뜨리는 역할도 했을 것이다.

 

 

 

미국 주간 시사화보 LIFE 가 본 4.19 혁명

 

4.19를 보도한 1960년 5월 9일자 LIFE
4.19를 보도한 1960년 5월 9일자 LIFE

4.19 당시, 그러니까 1960년에 대한민국에는 신문을 제외한 변변한 ‘커다란 사진이 가득한’ 매체, 그러니까 ‘화보지’가 거의 없었다. 사진 처리를 위한 제작 비용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거의 모든 것이 읽거나 듣는 것이고 눈으로 보는 생생한 뉴스는 드물었던 것이다. 워낙 ‘못 살았던’ 때여서 TV 방송이 있었어도 TV자체가 너무나 드물어서 못 보던 시절, 미군을 통해서 흘러나온 TV로 간혹 미군 방송AFKN을 보거나 부산 같은 곳에서 일본 TV방송을 보는 것이 전부였던 찢어지게 가난하던 그 시절이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남은 4.19의 모습들은 위의 사진들을 보면 잘 알 수 있듯이 역시 ‘찌들리게 조잡한’ 신문의 조판사진이 전부였다.

하지만, 4.19의 생생한 모습들이 camera로 찍히고, movie film으로 기록들이 다행히 일본이나 미국으로 간 것들은 비교적 ‘고화질’로 남아 있었다. 그 중에서도 원래부터 ‘질이 좋은 사진’을 위한 시사화보로 유명했던 미국의 주간지 LIFE가 4.19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 4.19는 비록 세계 뉴스의 레이다 밑에 있었던 대한민국이었지만 비교적 자세히 보도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사논평의 주제로 올라가기도 했다. 그것을 여기에서 독자들에게 보이고 역사에 남긴다.

 

 

LIFE-05091960-18

당시 대한민국 최고의 권력자 가족들: 이승만, 프란체스카, 이강석, 이기붕, 박마리아… 이기붕 국회의장의 장남 이강석이 이승만의 양자가 되고, 이기붕은 부통령으로 당선.. 고령의 이승만의 유고 시에 그의 대통령직은 자명한 사실이 되었다.

 

 LIFE-05091960-19

 4월 18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 농성 중인 용감한 고려대 형님들.. 이들의 에너지가 그 다음 날 4.19의 원동력이 되었다.

 

LIFE-05091960-20-1

데모대를 진압하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경찰들.. 그때는 데모 진압 ‘전용’ 전투 경찰이란 것이 없었다. 그저 일반 경찰들이 모든 것을 담당해서 후의 전문 전투경찰 같은 테크닉은 없었다. 흥분을 가라앉힐 기술 없이 그저 두드려 패는 것이 전부였다. 또한 그들은 민주경찰이기 이전에 ‘반공 경찰’이어서, 빨갱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진압을 하면 살인적인 결과를 내곤 했다.

 

LIFE-05091960-22-1

이렇게 부상을 입고 부축을 받으며 가는 사람은 학생인지, 민간인인지 확실치 않지만, 머리에 아주 큰 부상을 입은 듯.. 아마도 총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표정을 가지고 걸어가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일까..

 

LIFE-05091960-23-1

이 불쌍한 어머님은 얼마나 어린 아들을 잃었을까? 이런 광경은 4.19 직후 이곳 저곳에서 많이 보고 들을 수 있는 정말 슬픈 모습들이었다. 특히 아들을 중요시했던 당시의 사회 관습이나 풍조를 감안한다면 희생자 가족, 부모들의 고통과 슬픔은 상상을 하기 힘들었다.

 

LIFE-05091960-02-1

‘살인 경찰들’이 계엄령 선포로 뒷전으로 사라지고 대한민국의 유일한 양심, 희망이었던 송요찬 장군의 계엄군 헌병이, 흥분한 어린 학생을 ‘정답게’ 제지하는 장면.. 이 학생들은 원흉으로 지목 되었던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의 저택을 습격하려는 중이었다. 이 헌병의 모습으로 보아서 군대는 완전히 민중의 편에 섰음을 짐작할 수 있다.

 

LIFE-05091960-06-1

4.19 ‘참사’의 제1 원흉으로 지목되었던 이기붕 국회의장, 부통령 당선자의 저택이 격노한 데모대, 대부분 학생들에 의해서 습격을 당하고 완전히 파괴되었다. 나중에는 절도까지도 용납이 될 정도로 분위기는 험악하였다.

 

LIFE-05091960-07-1

군인 아저씨들.. 우리 부모 형제들에게 총 뿌리를 대지 말라.. 고 외치는 초, 중,고교 학생들.. 특히 앞장을 서서 가며 힘차게 외쳐대는 국민학교 코흘리개 아이들의 모습, 특히 남루한 ‘구제품’ 옷들을 입은 모습들이 가슴을 찡~ 하게 만든다. 그들은 사실 나와 거의 같은 또래의 악동들이었다. 골목에서 뛰놀던 그들이 총탄으로 쓰러진 형님, 누나들을 보고 계엄군을 향해서 호소하는 모습이었다.

 

LIFE-05091960-09-1

평온이 서서히 깃드는 거리, 당시의 시내 거리에는 차량의 숫자가 적었고, 특히 신호등의 숫자도 많지 않았다. 그런 곳은 교통경찰이 손수 교통정리를 했다. 그 경찰들이 사라진 거리에는 역시 학생, 민간인들이 자원해서 이렇게 힘차게 차량들을 정리했다. 이 형님, 아저씨는 지금 어떻게 살고 계실까?

 

 LIFE-05091960-11-1

한국전쟁, 인천 상륙작전의 유엔군 총사령관이었던 미국의 맥아더 장군의 동사에 데모대들의 화환이 걸렸다. 우리는 절대로 빨갱이, 공산당이 아니라는 뜻과, 거의 중립적, 아니면 침묵으로 이승만 정권을 혐오하던 미국의 태도를 학생들과 일반인들도 느꼈을 것이다. 반공 하나로 버티던 이승만도 독재가 아닌 민주주의가 반공이상으로 중요함을 몰랐던 것일까?

 

LIFE-05091960-12-1

거의 폭도로 변한 철모르는 어린 학생들과 데모 군중은 어제까지 ‘우리들의 아버지’였던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을 쓰러뜨렸고, 그것도 모자라 목에다 밧줄을 걸어서 ‘분뇨차’에 끌고 다녔다. 이것은 당시의 정서로도 너무 심한 행동이었는데, 결국은 치욕을 당했던 동상은 다시 태극기에 덮여서 정중히 안치가 되었다.

 

LIFE-05091960-14-1

 절대권력의 ‘우리들의 아버지’ 이승만 ‘전’ 대통령, ‘국민이 원한다면..’의 구성진 대통령직 사퇴, 하야 성명 방송 후 그는 돈암동에 마련된 ‘이화장’ 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가 차를 타고 경무대를 나와서 이화장으로 갈 때, 사실 국민들은 박수로 그를 환송했다. 그것이 당시의 국민 정서였다. 비록 살인 경찰의 우두머리였지만 ‘우리의 아버지’임도 잊지를 못한 것이다.

 

 LIFE-05091960-13-1

4.19 혁명이 이승만 정권의 사실상 총 사퇴로 이어지고 과도정부가 서서히 자리를 잡게 되었다. 제1인자로 허정 씨가 두각을 나타내고 제2 공화국으로 가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아.. 재동학교..

재동국민학교, 1959년 경

재동”초등”학교가 아니고 나에겐 분명히 재동”국민”학교다. 이름에도 정치, 역사가 있지만 나에겐 100% “초등”학교가 아니었고 분명히 “국민”학교였다. 서기 1954년부터 1960년 초까지 나는 이곳에서 대한민국 어린이의 꿈을 키웠다. 서기 1954년이라고 하지만 이것도 그때는 “단기” 4287년이었다. 그러니까 단기 4287년부터 4293년 초까지다.  참 오래전. 일이다.

온통 나의 어린 시절은 이곳을 중심으로 이야기들이 만들어 졌다. 서울의 심장부에 속하던 종로구에서 가회동과 계동의 옆과 위에 접한 꿈의 운동장. 이곳에서 얼마나 많이 순진한 꿈을 꾸며 뛰어 놀았던가? 여기서는 누구나 감상적이 되지 않을 수 가 없을 것이다.

 

취운정 활터에서 힘을 기르고

엣궁의 거문고로 마음을 닦던

빛나는 화랑정신 이어 나가자

우리는 재동학교 나라의 새싹

 

재동학교 교가  아마도 1~2학년 때 부터 이 ‘새’교가를 불렀지 않았을까? 누가 이 사실을 기억을 할까? 그 당시 이 ‘취운정’이란 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열심히 불렀다. 최근에서야 인터넷의 힘으로 옛날 옛적에, 언제인지는 잘 모르지만, 재동학교 근처에 있었던 고적지란 것을 알게 되었다.  재동학교 졸업 앨범을 보면 ‘윤성종’작사라고 보인다. 작곡은 ‘김성태’로 되어있다.  김성태라고 하면 물론 귀에 아주 익은 이름인데 윤성종은 전혀 무언가 떠오르지를 않는구나. 이 교가는 물론 아직도 100% 가사를 안 보고 부를 수 있다. 이것이 그 나이 또래의 기억력이다. 무서울 정도이지 않을까?

입학하기 전부터 생각이 나는 게, 그러니까 아마도 6.25동란이 끝나기 전인 듯싶다. 그때 나는 돈화문 (비원정문)근처의 원서동에서 아버지가 납북되시고 어머니, 누나와 같이 살았는데 재동학교에서 화재가 나서 전체 건물의 반이 불에 타 버린 것을 생생히 기억을 한다. 그 나이에는 불이 나면 우선 ‘경사’라도 난 듯이 그곳으로 뛰어 가지 않았던가? 그때 재동학교는 아마도 군인병원으로 임시로 씌어졌던 모양인데, 왜 불이 났는지는 확실치 않다. 혹시나 폭격이라도 당하지 않았을까?  그때 타버린 건물은 몇 년 뒤에 미군들의 도움으로 새 건물로 태어났고 동시에 나머지 건물들도 한층 씩 더 올려지게 되었다.  5학년 때 갑자기 모두 운동장에 나가서 ‘즐겁게 뛰어놀라’ 는 지시에 전 학년 생과 선생님들 모두 나와 그야 말로 뛰어놀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미군들이 와서 사진(그리고 아마도 영화도)을 찍고 있었다. 그때는 미군을 보는 게 참 즐거운 일 이었는데 (우리를 공산당으로 부터 구해준 십자군?) 그들이 사진을 찍으니 우리들은 더 신들린 듯이 뛰어 놀았다.

은사님들을 생각해 본다. 교장 선생님. 심원구 선생님이 거의 5년 동안 나의 교장선생님이셨다. 6학년 때에 지금 졸업앨범에 찍히신 윤형모교장 선생님께서 오셨다. 아마도 5학년 중에 부임을 하셨던 게 아닌가. 누군가 이것을 기억할 수 있다면. 5학년 때 인천으로 당일치기 수학여행을 갔을 때 사진에 심원구 선생님이 보이시니까 분명히 5학년 까지는 계셨던 것이다.  선생님들. 지금 모두 어떻게 지내실까. 혹시나 연로하셔서 타계나 인하셨을까? 이걸 어떻게 알아 볼 수 없을까?

1학년 때의 담임선생님 윤원범 (여자)선생님. 졸업앨범에 없다. 졸업 전에 떠나신 것이다. 그 옛날. 1학년 때.. 그때 나는 학교 가는 게 아주 싫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모두들 엄마의 손을 잡고 학교엘 오곤 했는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 그때 어머니는 이미 생활전선에 뛰어든 뒤였다. 옆집 친구 할머니의 손을 잡고 가곤 했다. 그 친구는 ‘안윤희’였다. 그런 중에 드디어 대형 사고를 쳤는데. 그만 학교를 안 간 것이다. 원서동에서 재동학교를 가려면 계동을 지나는데 거기에 대동상고가 있었다. 거기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다 집에 가곤 했다. 내가 “깡”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만큼 학교가 싫었던 게 아니었을까. 얼마나 그랬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우리 집의 주인아저씨가 (그때 우리는 세를 들어서 살았다) 나를 보았다고 했다. 들통이 나고 어머니는 장장문의 편지를 써서 나를 학교로 데리고 갔다. 그때 윤원범 선생님이 담임이었다.

아마도 윤 선생님이 나를 조금 더 자상하게 대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조금은 무뚝뚝한 여선생님. 한번은 연필을 가지고 가지 않았다고 나를 그냥 (다른 아이와 같이) 돌려보낸 적도 있었다. 그때는 담담히 받아 들였다. 나중에 생각하면 조금 내 자신이 불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머니가 그만큼 바쁜 탓도 있지만 우선은 나의 잘못이었다.  몇 년 후에 우리 집에서 일하던 아줌마(그때는 모두 식모라고 불렀다)가 알고 보니 그 윤원범 선생님의 집에서 머물며 밥을 해 주었다고 들었다. 참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 선생님은 그때 결혼 전이셨는데 그 후에 결혼을 하셨는지 알 길이 없다. 마지막을 뵌 건 2학년이 되자마자 교과서를 받으러 선생님을 교무실로 찾아간 때였다. 그때는 밝게 웃으시며 공부 잘하라고 격려를 해 주신 기억이다.

2학년으로 올라가며 선생님도 바뀌고 물론 친구들도 모두 바뀌었는데 나는 그때 너무도 놀라고 슬퍼서 집으로 걸어오는 길 내내 울었던 기억이다. 그 이후로 나는 학년이 바뀔 때쯤이면 필요이상의 stress를 느끼곤 했다. 나의 성격이 아마도 수줍고, 조용해서 남들보다 더 예민하게 받아 들였는지 모른다.  2학년 때 선생님의 이름을 기억을 못하는데 이것이 내가 유일하게 기억 못하는 선생님이 되었다. 얼굴은 생각이 난다. 유별나게 신경질 적인 여자 선생님.. 대나무로 만든 자로 손바닥을 아프게 맞았던 것도 쓰라린 기억이어서 아주 나쁜 기억이 되었다. 1,2학년 때는 사진도 없었다. 그때는 사진기도 흔치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씩 남는 법인데 그때는 아주 암흑의 학년이 된 것이다.

 

재동국민학교 3학년 학급사진, 1956년

3학년 때는 학급단체 사진이 아주 잘 남아 있다. 3학년의 담임 배은식 선생님. 앨범에도 남아있다. 참 다정스런 아줌마 타입의 선생님.. 학년이 올라 갈수록 사진은 많아 졌다. 하지만 불행히도 4학년 때는 없다. 왜 그랬을까?  4학년 담임 김경구 선생님. 미술이 전공인 담임. 항상 수염자국이 뚜렷한 남자 처음 남자 선생님. 물론 4학년부터 남자, 여자 반이 갈리었다. 모든 게. 우락부락하게만 느껴져서 나도 그곳에 적응을 할 수 밖에. 그때 처음 죽마고우중의 하나 안명성을 만났다. 같은 원서동에 살아서 죽마고우가 된 친구다.

4학년의 기억은 조금 고통스럽다고나 할까. 이 김경구 선생님은 좀 독특한 스타일로 가르치셨는데. 그중에 하나가 ‘공부한 시간표’라는 유별난 system을 고집하면서 1년 동안 우리를 괴롭혔다. 한 마디로 하루에 최소한 4시간 이상 집에서 공부 했다는 것을 증거로 부모님의 도장을 받아오는 것이었다. 그 나이에 하루에 집에서 4시간을 꼬박 공부를 할 수 있을까?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잘 이해가 안 가지만 모두들 ‘거짓도장’을 잘도 받아서 제출을 하였다. 항상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어머니 도장을 몰래 찍는다는 것은 그 나이에도 괴로운 일이었다. 그래도 어떤 아이들은 3시간 30분이라고 적어 오기도 했는데. 그게 정말로 3시간 30분을 공부 했는지. 아니면 양심의 가책으로 30분을 일부러 뺏는지. 아직도 불가사의다.  결과적으로 김경구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사회에 나가서 survive하는 예비 훈련을 시키신 셈이다.

 

5학년때, 인천 만국공원, 1일 수학여행, 1958년

5학년의 추억은 참 밝기만 하다. 담임은 이원의 선생님..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선생님은 ‘반 입시형’인 ‘미국식’ 선생님이라고나 할까? 교과서를 줄줄 외우는 스타일이 전혀 아니고 실습과 생활. 탈교과서적인 그런 쪽을 강조하신 선생님.. 그 당시는 아마도 학부형들에게 별로 호응을 못 얻으셨을 지도 모른다.  자연공부도 실습으로 하시고, 음악은 전공 선생님을 불러 오셨다. 여름방학 일기는 ‘일일 일선 (하루에 한 가지 좋은 일 하기)’ 을 주제로 삼으셨다. 그래서인지 외우는 것 같은 것은 거의 배운 기억이 없지만. 아직도 그 선생님의 스타일이 멋지기 느껴지는 것은 왜 그럴까? 그렇다. 그렇게 계속 가르치시면 절대로 우리들을 ‘좋은 학교’로 진학시키기 어렵다. 그래서 모든 게 균형이 맞아야 하는 것일까?

 

5학년말 교생실습후 단체사진

6학년은 5학년 때와 정 반대의 담임선생님이 오셨다. 학부모들은 아마도 ‘구세주’가 오셨다고 했을 듯하다.  새 6학년 담임은 박양신 선생님인데 바로 서울 안산국민학교에서 전근을 오셨다. 무언가 다르다고 모두들 짐작은 했는데 정말 공부시간이 되어보니 정말 완전히 이건 입시준비학원 style로 분위기가 변한 것이다.  학부형들은 완전히 무언가를 느꼈는지 치맛바람의 극치를 이루며 교실을 들락거렸다. 아주 학교에서 살다시피 하는 엄마들도 있었고, 공부시간에도 쉬는 시간만 되면 재빨리 들어와 선생님의 책상을 청소하거나 무언가 놓고 가거나 할 정도였다.

5학년 담임선생님 이원의 선생님도 6학년 다른 반의 담임이 되셨는데, 나의 짐작대로 절대로 입시준비를 하는 그런 style이 아니셨고 결과적으로 예상대로 아주 결과는 참담한 듯 했다. 결과란 것은 물론 일류 중학교 합격률을 뜻하는 것이다. 친구 안명성이 그 선생님의 반에 있었는데 항상 부정적으로 선생님을 평하였다. 과장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시간 ‘양호실’에 누워 계셨다고 했다. 그게 게으르다는 뜻인지 정말로 몸이 편찮으셨는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6학년의 추억은 아주 또렷하고 생생하다. 처음 겪는 ‘입시’공부였고 이 박양신 선생님은 요샛말로 ‘수험의 신‘ 이셨다. 좋게 말하면 많은 입시용 지식을 그 어린 머릿속에 아주 효과적으로 주입 시키셨다. 나쁘게 말하면 어린이의 꿈의 시간, 공간을 많이 빼앗아 갔다고나 할까. 사실을 말하면 그 중간 정도일 것이다. 한 가지 아주 인상적인 것은 가끔 수업을 ‘정규’시간에서 벗어나 저녁때 까지 연장을 해서 한 것이다. 그야말로 어두워서 책이 안보일 때 까지 하는 것이다. 전등을 킬 수가 없으니까 그런 것인데.. 사실 힘은 들었지만 무슨 캠핑을 간 듯한 기분도 들어서 한편으론 재미있기까지 하였다. 이런 모든 것들은 분명히 학부모들을 아주 만족시켰으리라 짐작을 해도 무리는 아닐 듯하다. 또한 다른 6학년 담임들의 선망과 질시를 받았다고 생각해도 무방할 듯.

그때 우연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우리 반에 정말 공부를 잘하는 녀석들이 많이도 모여 있었다. 하기야 반을 가를 때 완전히 random하게 할 터인데 우연이라고 봐야 할 듯 하지만, 우연치고는 참 선생님의 운도 좋았다.  지금도 생각나는 애들.. 이만재, 김두철, 정세종, 조성태, 이정택, 장정석, 전경훈, 이규재, 한윤석, 심동섭, 김정훈, 임한길, 신문영, 유성희, 김승종.. 사실 앨범을 보면서 이름을 떠올리지만.. 이들이 소위 말해서 1분단의 member들인데.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제일 공부를 잘하는 애들 그룹이다. 나도 나중에는 그 그룹에 들어가는 ‘영광’을 누리긴 했다.

이들은 입시에서 거의 경기, 서울, 경복, 용산으로 이루어지는 1류 공립중학에 들어갔다. 하지만 자세히 누가 어디에 갔는지는 아직도 확실치 않다. 분명한 것은. 이만재, 김두철, 김정훈은 경기였고, 심동섭은 경복이라는 사실뿐이다. 아직도 궁금한 것은 신문영[나중에 경복중에 간 것을 알았다]과 이규재.. 인데. 알 길이 없다. 이규재는 나의 짝이었고.. 신문영은 내가 혼자 그냥 좋아하던 애였다. 이만재는 나중에 Internet을 통해서 숙명여대 교수인 것과 전자/컴퓨터전공이란 것을 알았다. 신문영은 내가 연세대학에 다닐 때 잠깐 본 듯한데 말을 걸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김두철은 서울공대 입학시험을 볼 때 멀리서 보았는데 아마도 그의 경기고 후배 응원 차 나온듯한 모습이었다.

우리 6학년 1반, 박양신 “사단”의 system중에 독특한 것은 가차 없는 경쟁유도체제 이었다. 그것은 거의 매일 치르는 모의고사의 성적에 의해서 앉는 자리, 그러니까 분단의 위치가 바뀌는 것이다.  그 당시는 그게 적응이 되어서 몰랐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면 참으로 잔인한 것이었다. 아마도 다른 어느 반에도 그런 것은 없었을 듯하다.  ‘공부 잘하는’ 1 분단으로 올라가려면 죽어라 시험을 잘 보아야 했다. 1분단에 올라갔으면 떨어지지 않으려고 또 죽어라 공부를 해야 했다.  그러데 이상한 것은 그다지 생각만큼 자리가 쉽게 바뀌지를 않았다. 그만큼 성적의 순위가 바뀌기가 어렵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니까 공부 잘하는 애들은 거의 항상 잘했고 못하는 애들은 거의 항상 못한 셈이다.

나는 6학년에 들어오면서 어머니가 신경을 많이 쓰셨다. 이제까지는 그다지 성적에 집착을 안 하셨는데 학기가 조금 지나면서 선생님을 만나고 오시더니 한숨 투성 이었다. 물론 나의 성적이 아주 안 좋다는 얘기였다. 1분단은 꿈에도 못 꾸는 처지였다. 그러더니 어느 날 한 고등학생을 데리고 들어오셨는데. 알고 보니 가정교사인 셈이었다. 그 당시는 대학생보다 고등학생들이 과외선생을 많이 했다. 특히 경기고 같으면 더 많이 했을 것이다. 김용기라는 경기고 2년생이었다.

그러니까 그 때 부터 나는 학교에서도 공부, 집에 와서도 공부하는 신세가 되었는데,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다. 공부도 점점 재미가 있어졌고 따라서 학교성적도 오르기 시작했다. 결국에는 곧 대망의 1분단으로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부터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stress가 나를 괴롭혔다.  그래도 졸업 할 때까지 다행히 1분단을 고수를 할 수는 있었다.

또 한 가지 잊혀 지지 않는 것. 이것도 다른 반에선 없던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1분단의 반대편에 있는 제일 쳐지는 분단 애들이 있다. 성적순으로 제일 밑인 셈이다. 그들의 심정이야 이해를 하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제일 기억에. 그것도 좋은, 즐거운 기억으로 남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애들은 비록 공부는 힘들었어도 유머와 여유가 있었다. 쉬는 시간만 되면 그들은 group으로 앞에 나가서 코미디를 하거나 유행가를 합창으로 부르곤 했다. 거의  pro의 수준이었다. 그게 그당시 그렇게 즐겁고 재미있었다. 그 애들은 입시공부도 거의 포기한 듯한 모습들이었는데도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그들은 지금 다 무엇을 하는고..

보고싶다, 친구야.. 정문신
보고싶다, 친구야.. 정문신

졸업하면서 거의 영원히 소식들이 끊어진 친구들.. 여기서 몇몇을 회상하고 싶다. 정문신. 정문신. 아 잊을 수 없다. 내가 1분단으로 이사하기 전에 짝을 하던 친구다. 짝이라 친했는지는 모르지만 이상하게 그 애가 그렇게 나는 좋았다. 아주 이상할 정도로 좋았다. 그 애가 나를 좋아하는 정도보다 훨씬 내가 더 좋아했다. 여름방학이 되면서 나는 그 애가 그렇게 보고 싶었다. 이건 내가 생각해도 이상할 노릇이었다. 오죽하면 여름방학이 빨리 끝나기를 기다렸을까? 그 나이에 동성애였나? 우습기만 하다. 졸업을 하고서 다른 친구 김천일이 그 애 사는 곳을 안다고 해서 솔깃했는데. 그대로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정문신. 어디선가 살아 있다면 그때 내가 그렇게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아주기 바란다.

그 당시에 이승만 정권에 식상한 국민의 여론이 서서히 야당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리고 정치바람이 학교까지 들이 닥쳤다. 그 당시에 우리들은 별로 잘 이해를 못했지만 무언가 크게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긴 했다. 하긴 우리나이 또래면 북한(그때는 북괴라고 했다)에 못지않게 이승만대통령을 거의 영웅처럼 생각했다. 그렇게 교육을 시켰다. 반공, 반일로 일관된 교육 속에서 우리들은 자랐다.

그런데 아마도 정부에서 우리또래 학생들에게도 선거운동을 시킨 모양이었다. 우리들은 선거권은 비록 없지만 아마도 부모를 설득하도록 한 것이나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선생님들을 시켜서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지금도 나는 실망을 금치 못한다. 우리 입시의 아니 수험의 신이신 박양신 선생님은 자발적으로 우리를 설득했다.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여당은 좋은 사람들이고 야당은 나쁜 사람들이라고.. 비록 선생님은 경기, 서울, 경복에 많이 입학은 시키셨어도 진짜 교육은 못하셨다고 이제껏 확신을 한다.

이렇게 졸업은 해서 재동학교는 떠났지만 그 후 3년 동안 몸은 떠나지 않았다. 집이 바로 재동학교 후문 옆에 있었기 때문에 중학교 3년 다닐 때 까지 옆에서 보며, 야구를 할 때면 운동장을 빌려 놀곤 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온통 재동학교가 꽉 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다행인 것은 그 많은 역사 깊은 국민학교들이 문을 닫거나 이사를 가거나 했다지만 우리 재동학교는 아직도 같은 위치에 건재하다고 들었다. 얼마나 다행인가. 그야말로 모교. 나의 어머니격이다. 그게 아직도 건재하다니.. 부디 오래 오래 더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희망도 해 본다.

 

재동국민학교 졸업앨범 1960

 

이 몸이 새라면…

이 몸이 새라면 이 몸이 새라면 날아가리. 저 멀리 보이는 저 멀리 보이는 작은 섬 까지….

 

아마도 독일의 민요를 일본에서 번역해서 부르고 일제시절 우리에게 남겨지고 나의 어린 시절 그걸 또 배우고 불러서 아직도 가사와 노래가 생각난다. 어린 시절에 부를 적에는 사실 이 가사에서 비행기를 연상하곤 했다. 어린 시절 남자아이들 에게는 비행기처럼 영웅적인 존재는 없었다.  답답한 서울의 좁디좁은 골목에서 비행기를 보는 것은 무척이나 감동적이고 행복했으니까.

그걸 내가 조종을 해서 하늘을 나르고 먼 곳까지 간다는 것을 이 노래에서 생각하곤 했다. 새의 존재는 거의 잊어버리고.  나중에 알고 보니 새란 것이 현재 인간의 최첨단 비행기보다 훨씬 smart하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현대 비행기를 computer로 control을 한다지만 새의 그 작디작은 머리가 아마도 훨씬 더 robust할지도 모른다.

그 주인공인 새를 생각한 것도 나중에는 이 노래에서 느끼게 된 상징적인 의미를 알고 바뀌게 되었다. 아하. 이 새가 날아간다는 것은 바로 거의 완전한 ‘자유’를 뜻 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맥락에서 나는 대학시절 기타를 배울 때 즐겨 부르곤 하던 미국 folk song, ‘도나도나’의 가사가 비슷한 의미를 주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가 듣던 것은 당시 미국 folk song, 특히 Vietnam war protest song을 불렀던 Joan Baez의 곡이었는데 당시는 사실 가사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곡자체가 좋았고, guitar를 배우기에 아주 쉬운 곡이었기 때문에 더 유행을 했을지도 모른다. 나중 나중에 가사를 잘 읽으면 제비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송아지가 주인공임을 알게 되었다.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제비의 거의 무한정 자유와 자기가 왜 죽어야 하는 이유조차 모르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송아지. 이 얼마나 비극적인 대조인가?

영화화 된 Anne Frank’s Diary (안네프랑크의 일기)를 보면서 또 다른 새의 상장을 다른 면으로 보게 되었다. 어디까지를 구체적으로 영화화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Annex Attic에 갇힌 유대인 가족의 그룹들, 비록 숨은 쉬며 살고 있었지만 거의 모든 자유를 박탈당한 몇 년의 생활,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살아갔을까. 어른들은 그렇다 치고 막 사춘기에 들어간 어린 소년소녀들의 심정을 어땠을까? 아무도 그들을 구할 수 가 없고 오직 radio에서 나오는 연합군의 Normandy 상륙으로 가상적인 자유를 만끽한다.  그 젊은 아니 어린 Anne Frank뚫어진 지붕으로 보이는 아주 파~~란 하늘을 본다. 그리고 가끔 연합군의 고공으로 나르는 폭격기편대의 하~아~얀 꼬리 연기를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이 제일 동경하며 보던 것은 역시 자유스럽게, 유유하고 천천히 하늘을 나는 새들이었다. 나 에게는 그 장면이 이영화의 climax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이 몸이 새라면 어떻게 할까. 내가 가기 힘든, 아니면 쉽게 갈수 없는 곳, 하지만 꼭 죽기 전에 가보고 싶은 곳으로 나도 날아가고 싶을 것이다. 죽음이 결코 먼 훗날의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 했을 때부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의 기억이 시작된 곳부터 가보련다. 원서동의 아랫자락, 비원입구 돈화문의 근처, 원서동 골목은 나의 모든 기억의 출발이다. 그곳은 어떻게 변했을까. 아니 길 조차 없어 졌을지도. 옛날 휘문학교 뒷문근처, 영국군 부대가 주둔 했던 곳. 조금 더 올라가면 동섭이네 집골목.  어린 시절 나는 이 골목을 오르락내리락 뛰며 달렸다. 이 집은 물론 우리 집에 아니었다. 아버님 친구 분이 피난가편서 빈집을 우리가 잠시 산 것 뿐이었다. 나의 아버님은 납북이후 소식이 끊긴 후였다.  우리 집은 엄마, 누나, 나 이렇게 3식구만 달랑 주인을 잃은 채 아버지 없는 가정의 시작을 맞이하게 되었다.

원서동 비원 담을 따라 끝까지 올라가면 결국 막히게 되는데 그곳에서 우리는 또 살았다. 승철이네 집에서 우리는 세를 들어 살았다. 국민학교 생활도 그곳에서 시작되었다. 승철이네 집은 지금 어찌 되었을까? 조금 내려와서 유일하게 우리 집으로 살았던 곳 그곳은 나의 어린 시절에 도시계획에 의해서 철거되었다. 그 이후 기억에만 남게 되었다.

내가 다니던 재동국민학교, 가보면 크게 변하지 않았을 듯하다. 나의 국민학교 앨범도 있고, 사진에도 있고 해서 아주 친근한 풍경들, 없어지지는 않았겠지. 10년 전쯤 인터넷에서 어떤 사람이 그곳을 지나 출퇴근 하면서 그곳을 매일 본다고 들은 기억이 있어서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궁금한 곳은 그 재동 국민학교 뒷문 쪽에 있던 우리가 살던 2층 집이다. 이 집에서 나의 유년기를 거의 다 보냈다. 사랑채를 빌려서 살아서 우리 집 같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이집을 떠난 후 나는 이집을 꿈처럼 그렸다. 참 순진했던 소년기의 맑고 좋은 추억들이 아롱아롱 매달린 집. 나는 또 그 집의 옛 모습을 보고 싶구나. 집 앞의 골목도 나의 전쟁터였다. 아마도 이곳도 상전벽해로 변했으리라.

이 몸이 새라면 이 몸이 새라면……. 나는 대학시절의 다방들도 다시 가보고 싶구나. 우리 연호회클럽의 추억이 찐하게 배었던 국제극장 옆 골목의 해양다방, 단성사 옆의 백궁다방, 명동에 있는 여대생이 들끓었던 SNOW다방, 미국적 멋이란 멋은 다 부리던 Rock다방, 대학 입학 후 처음으로 간 다방 연대입구 복지다방, Mamas & Papas의 ‘Monday Monday’에 황홀하던 신촌로타리 왕자다방, 거짓말 편지로 어떤 여대생을 불러낸 세종로 교육회관 지하다방,  아~ 누가 그런 아름다운 기억을 잊을 수 있으랴……. 이 몸이 새라면 다시 한 번 그곳으로 날아가 보련만……

 

오누나 오시누나 빗님이 오시누나

나의 time machine은 빠르게 거의 반세기 전으로, 정확하게 1961년으로 되돌아 간다. 그해는 4.19 학생혁명의 다음해, 5.16군사혁명으로 이어지던 암담한 시절, 내가 서울중앙중학교 2년이던 그때로 되돌아 간다. 제목인 ‘오누나 오시누나 빗님이 오시누나’라는 시라기 보다는 시조에 가까운 음율을 가진 이 구절이 반세기 뒤에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데 그 시의 저자는 그때 친하게 지내던 벗 ‘변웅지’였다. 변웅지.. 이름은 거창하지만 사실은 나와 재동국민학교를 같이 졸업한 동창생으로 중학교 2학년때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국민학교 때는 한번도 같은 반을 한 적은 없었지만 6년을 같이 다녔으니 얼굴정도는 알고 있었다.

변웅지, 1962년 중앙중학 졸업앨범에서
변웅지, 1962년 중앙중학 졸업앨범에서

나의 중학교 2학년은 사실 내가 조금 고생을 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학교 공부도 그렇고 깡패 비슷한 녀석들이 나를 괴롭히기도 했던 그런 시절이었는데 그래도 이 변웅지같은 친한 친구가 있어서 아직도 즐거운 추억으로 남는다. 그때 변웅지와 같이 나를 친구로 하던 게 이경증이라는 친구였다. 그러니까 나와 변웅지, 이경증이 거의 3총사 비슷하게 2학년을 보낸 셈이다.

그 당시 국어 선생님은 백정기 선생님이셨다. 백 선생님은 나중에 우리들과 같이 중앙고등학교로 올라가셔서 졸업 때 까지 가르치셨다.  이 국어시간에 국어작문 과제가 있었는데 그때에 나는 작문으로, 변웅지는 ‘시’로 제출을 하였는데 그때의 그 시가 거의 시조의 음률로 “오누나 오시누나 빗님이 오시누나” 였다.  그 후로 비가 올라치면 그녀석의 그 시조 같은 시 생각이 나곤 했다. 이것을 왜 알게 되었나 하면 제출된 작문 중에 뽑혀서 공부시간 중에 선생님이 읽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 변웅지의 시도 뽑혀서 읽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의 글도 뽑혀서 읽혔는데 정말로 나는 당황하였다. 나는 재동국민학교 시절의 추억을 썼는데.. 그런대로 쓰긴 썼다. 하지만 중요한 서론, 본론, 그리고 결론의 구조를 지키지 못하고 그만 결론 비슷한 것이 거의 없이 끝을 내고 말았다.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고.. 어떻게 끝을 내는지 그것이 확실치 않아서 그만 그랬는데.. 선생님께서는 읽으신 후에 글이 잘 씌어졌는데 아마도 시간이 없었나 보다고 평을 하셨다. 나에게는 정말로 다행이었다.

백정기 선생님
백정기 선생님

변웅지와 같이 중랑천으로 낚시도 같이 갔었다. 나에게는 난생 처음으로 해 보는 그런 것이었다. 그당시 도서관이 당시 고등학교 본관건물의 다락방에 있었다. 학교가 끝나면 같이 그곳에 가서 학원사 발행의 ‘전집’ (위인전집, 세계 명장전집)을 빌려 읽고 거의 저녁때가 되어서 집에 돌아오기도 했는데 그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변웅지와는 중학교 2학년이 끝나면서 반이 갈렸는데 고등학교 졸업 때 까지 한번 도 같은 반이 있던 적이 없었다. 가끔 얼굴이야 서로 보며 지나치곤 했지만 그렇게 서먹서먹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 나이에도 왜 그랬을까 생각을 하는데.. 그 녀석이 너무 갑자기 변해서 (성숙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도 하지만 정말 아쉽기만 하였다. 다른 친구 이경증은 여러 가지 인연으로 대학 졸업 후까지 관계가 계속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 앨범을 보면 키가 아주 커 있었다. 그러니 사실 어울리는 그룹이 우리와는 아주 달랐으리라 짐작을 해본다. 어느 대학엘 갔는지도 모른다. 아니 대학엘 갔는지 안 갔는지 조차 모른다. 40대, 50대에 모인 동기 중앙고 57회 단체사진을 아무리 돋보기로 보아도 안보였다. 다만 동창회 주소록에는 주소가 비교적 자세히 기재되어 있었다.  한번은 그 주소로 편지도 보냈는데 무소식이었다. 어떻게 잘 살고 있는지.. 나를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사실 잊을 수 도 있을 것이고 조금은 기억할지도 모른다.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런 오래전의 순진했던 기억이 나에게 있는 한 나는 행복하다는 사실이다. 함께, 부디 건강하게 잘 살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