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ple, 채인돈 후배, Tony Curtis

9월도 30일.. 9월의 마지막 날이다. 완전히 여름이었던 9월도 며칠 전부터 완전한 가을로 돌변을 하였다. 모든 것이 요새는 이렇게 extreme, extreme 이다. 올해는  매년 9월 중순 가족행사로 나서던 apple orchard drive 도 완전히 잊어버렸다. 한여름 같은 날씨에 사과 과수원은 생각만 해도 뜨겁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사과도 다 수확이 되었을 것이고 한마디로 김이 다 샌 것이다. 이곳에서 약 한 시간 반 정도 북쪽으로 drive를 하면 Ellijay라는 apple town이 나온다. 그곳은 완전히 사과 과수원이 밀집해 있는 산자락이고 경치도 아주 좋다. 이곳에 이사온 이후 한해도 빠짐 없이 그곳을 가곤 했는데 올해는 정말 예외가 되었다.

채인돈가족과 함께 Columbus, Ohio 1987
채인돈가족과 함께 Columbus, Ohio 1987

오늘 뜻밖의 손님이 나의 blog에 찾아왔다. 오랜 전에 쓴 나의 blog entry: “1980년대 Ohio State의 중앙동창들” 에 중앙고 67회 후배 채인돈의 아들인 채경덕군이 comment를 한 것이었다. 인물검색을 하다가 실린 사진에서 자기나이또래의 아빠를 찾았다고, 감회가 깊었다고 했다. 그 사진은 1987년경 콜럼버스의 교민회주최 소프트 볼 대회에 중앙고 동창 팀에서 참가를 하고, 첫 회전에서 탈락을 한 후에 찍은 사진이었다. 얼굴들이 모두 비록 웃기는 했지만 맥이 빠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완전히 한 세대가 흐른 것을 느낀다. 채인돈 후배는 비록 나의 새까만 후배였지만 같은 천주교 신자였고, 전공도 비슷하고 (EE, CIS), 한 때는 Ohio State campus중심의  PC Users Group에서 같이 공부를 하기도 했다. 항상 웃는 얼굴이고 wife는 미스 코리아처럼 예쁘게 생겼었다. 집안이 상당한 power class인 것에 비하면 채인돈 후배는 상당히 검소하고 겸손했다. 마지막으로 연락이 되었을 때 그는 한국에서 computer 관련 venture project에 관련이 되어서 아주 바쁜 것 같았다. 경덕이 밑으로 동생을 두었는지도 소식이 끊겨서 잘 모르고 지낸다.

The Vikings, 1958
The Vikings, 1958

미국의 원로배우 Tony Curtis가 오늘 세상을 떠났다. 85세였으니까 사실 평균수명은 채웠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오랫동안 알고 있던 유명인들이 하나 하나씩 세상을 떠나면 느끼는 것은 역시 나이가 들면 들수록 외롭게 느껴지리라는 사실이다. 나에게 이제는 이런 것들이 남의 문제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유괘하게 잘생긴 그는 역시 영화 The Vikings에서의 연기가 제일 기억에 남고 또 Spartacus도 기억에 생생하다. 둘 다 Kirk Douglas와 공연을 했는데 그렇게 조화가 잘 맞을 수가 없었다. 그가 이름과는 달리 항가리계의 유태인(Hungarian Jew)임을 오늘에서야 알았다. Kirk Douglas도 역시 유태인이다. 이 글을 쓰다 보니 다시 바이킹을 보고 싶어진다. 이 영화에서는 wife인 Janet Leigh와 같이 나온다.  이미 download한 것이 있어서 아무 때나 볼 수 있으니 참 편한 세상이 되었다.

1980년대, Ohio State 중앙고 동창생들..

1980년대, Ohio State (University, OSU)를 회상하며 특히 중앙고등학교 동문들을 생각한다. 어느덧 세월이 이렇게 흘렀나? 나는 1977년 겨울부터 1983년까지 그곳에서 공부를 하였고 Columbus, Ohio에서 직장생활을 1988년까지 했기 때문에 사실 한때는 고향처럼 느끼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중앙고등학교 동창생들과의 추억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처음에 그곳에 갔을 때는 중앙동창이 하나도 없었다. 한국의 유학생의 숫자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물론 다른 학교에 비해서 많았다. 하지만 그것은 이 학교가 미국에서 단일 캠퍼스로는 제일 큰 학교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55,000명 정도였을 것이다.

한국유학생들은 거의가 서울대와 경기,경복,서울고등학교 같은 소위 말하는 일류학교 출신이 대부분이었던 듯 하다. 정확한 것은 아니고 나의 느낌이 그러하였다. 하지만 내가 있던 전기 과(EE)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그 당시 3명이 있었는데 (나를 빼고) 한 명은 육사출신이었고 또 한 명은 Rutgers출신, 그리고 나머지는 서울대 출신이었다..

Ohio State University 중앙고 동창생들
Ohio State 중앙고 동창생들, 1985년경 여름 Columbus, Ohio

그러던 것이 1980년이 되면서 해외유학 자유화가 되면서(그러니까, 문교부 해외유학시험이 없어진) 대거의 한국유학생들이 도착했다. 너무나 많아서 이제는 누가 누구인지 전혀 모를 지경이 되었다. 그러니까 그 전에는 서로가 조금씩은 이름이나 얼굴을 알고 지냈고, cafeteria에서 식사를 할 때면 거의 dining table의 한곳에 같이 모일 수 있었다.

그러면서 드디어 중앙고 출신들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물론 모두 후배들이었다. 제일 먼저 온 후배가 여운광이다. 아마도 62회 정도가 아니었나. 토목과 전공이다. 그리고 김문경, 63회, 정치과, 이춘환, 64회, Biophysics , 조광동, 64회,  김종수, 기계과, 하재주, 원자력 65회, 안동규, 강행봉, 채인돈, CIS, 67회, 장경호, 68회 아.. 이제 생각이 가물거린다.

그리고 유학생이 아닌 동창들도 있었다. 정근화, 56회, 주유소경영, 손영찬, 59회, small business, 이명성, 63회, Bell Lab research scientist 등등이 있었다. 이 정도의 머리숫자를 자랑하는 동창회는 이 캠퍼스에서 그리 많지 않았다. 같이 모이면 언제나 장소가 꽉 차는 느낌이었다. 모이게 되면 거의 빠짐없이 참석을 하였다. 그리고 spouse들과 family가 열심히 참석을 해서 더 모임의 재미가 있었다. 이 모임에서는 특히 spouse들의 사이가 아주 부드러워서 더 잘 모일 수 있었지 않았을까 지금도 생각을 한다.

1988년 여름에 Columbus, Ohio를 떠났는데 그때까지 참 추억에 남을 정도로 동창의 정을 유지하였다. 나는 거의 제일 맞선배격이었지만 워낙 나는 선배 노릇에 익숙지를 않아서 어떨 때는 조금 불편한 적도 없지 않았다. 중앙고 시절을 이야기 하면 역시 사립고답게 선생님들의 변동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 이야기가 잘 이어졌다.

특히 선생님들의 별명을 기억할 때가 제일 즐거울 때였다. 깨막이, 나까무라, 썪은살, 짱구, 숫장사.. 등등 추억에 어린 선생님들의 별명들.. 특히 중앙만의 전통이던 교련조회토요코스(토요일에 잠을 자며 학교에서 하던 camping) 등등은 후에도 이어졌음을 알고 참 반가웠다.

특이한 사실은, 김문경(연세대)만 제외하고 모조리 서울대 출신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내가 졸업하고 중앙고가 2차로 바뀌어서 그야말로 머리 좋은 재수생들이 대거 중앙고로 왔던 까닭이다. 내가 다닐 때는 최복현교장의 6년 계획으로 서울대 합격자가 꾸준히 늘긴 했지만 그 숫자는 사실 비교적 미미하였다. 그것이 2차로 바뀌면서 완전히 바뀐 것이다. 여운광의 이야기로, 서울공대에는 숫제 계공회라는 중앙출신모임이 있다고 했다.

Ohio State 중앙고 동창들, 1987년경 softball game 뒤에
Ohio State 중앙고 동창들이 softball game을 끝내고, 1987년경

나중에 공부가 끝나고 대거 귀국을 해서 그곳에서 다시 거의 모였다고 연락도 받았다. 정말 반가웠다. 대부분 대학으로 갔는데 여운광은 Ohio State로 다시 교환교수로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일부러 우리가 사는 아틀란타까지 drive를 해서 오기도 했다. 아마도 그것이.. 1993년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 이후로 세월이 질주하다시피 흘러버렸다. 거의 소식이 끊어지고.. 나는 Internet이 등장하면서 다시 virtual reunion도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는데.. 삶의 거센 파도를 거슬러 갈 여력이 없었다.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