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mer Time

¶  Daylight Saving Time  이곳에 살면 일년이 두 번씩 조금 귀찮은 날을 거쳐야 한다. 봄과 가을에 한번씩, 시계를 바꾸어 주어야 하는 날이다. 내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이승만 대통령시절에 한국에도 그것이 있었고, 그때의 이름은 Summer Time이라고 했다. 간단히 말해서 봄,여름,가을에 아침보다 저녁시간을 조금이라도 햇빛으로 밝게 쓰자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전기 에너지’ 비용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정설이 없는 것이다. 한국에선 오래 전 그것이 없어졌지만 미국과 유럽은 줄기차게 이것을 계속하고 있는데, 사실 귀찮기 말할 수가 없다.

집안에 시계가 이제는 10개1가 넘고 어떤 것들은 digital이라 바꾸는 방법도 다양하다. 다행히 Internet과 연결된 computer나 phone network에 연결된 cellular phone같은 것은 시간이 자동으로 바뀌어서 다행이다. 이것에 얽힌 추억이 하나 있는데, 내가 이곳에서 학교를 다닐 때, 한번 시계 바꾸는 것을 잊고 (이것을 잊기가 참 힘들지만) 아침 강의를 갔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한 시간 늦게 강의실에 간 것이었다.

시간이 바뀐 것을 전혀 눈치도 못 채고 강의실을 들어가려니, 낯익은 얼굴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는 것이 아닌가? 당황한 것도 잠깐이었지만 이유를 알고 나서 더 당황을 했다. 비록 예정된 시험은 없었지만, 누가 알겠는가.. 가끔 pop quiz라고 해서 예정에 없던 시험도 보곤 했으니까, 그것을 놓쳤으면 낭패가 아닌가? 그 당시 나는 미친 듯 ‘공부에 몰두2를 하던 시절이어서 뉴스 매체 (radio, TV etc)와 완전히 인연을 끊고 살던 때여서 summer time이 시작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이것이 기억에 ‘판각’이 되어서 그 이후에는 봄에 한 시간을 앞으로 바꾸냐, 뒤로 바꾸냐 하는 아리송한 의문은 완전히 없어지게 되었다. 그때가 봄이었고, 9시 강의시간이 10시가 되었으니까 한 시간이 빨라진 것이다. (9시가 10시가 된 것이 빨라졌다고 하는 이것부터 황당한 것이 아닐까?)

 

미움이 그친 바로 그 순간, 책¶  미움이 그친 바로 그 순간3  몇 주전에 연숙이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소속 레지오 마리애 꾸리아 에서 책 한 권을 빌려왔다. 저자는 예수회 신부이며 서강대 신학 대 교수(신약)인 송봉모 신부님이고 그 책의 제목이 ‘미움이 그친 바로 그 순간’ 이다.

이 송신부님은 신부로서는 아주 많은 책을 저술한 것과, 활발한 강론으로 유명하다. 몇 년 전에 나도 이분의 강론을 audio tape으로 들은 적이 있었는데, 박학다식한 것은 전적으로 인정을 했지만, 무언가 나하고는 ‘주파수나 파장(chemistry4)’이 맞지 않는 것을 느끼고 그 이후로 더 이상 듣거나 읽지 않았다. 그 때 나의 피상적인 느낌이 ‘너무도 잘난 체‘ (김용옥5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죄송합니다) 한다는 조금은 나의 과격한 반응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 당시만 해도 나는 신앙적으로 유치하고, 가슴을 넓게 열고 있지 않았을 때였다.

지난 성탄 season에 송 신부님이 이곳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 오셔서 며칠간 강론을 하셨는데, 남들은 거의 ‘열광적’으로 가서 들었지만, 나는 예전에 느낀, 그 ‘별로 였던 첫 인상’ 때문이었을까, 기회를 흘려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그분의 비교적 신간 (2010년 판) 저서가 가까이 온 것이었다. 송신부님의 저서라고 해서 우선은 읽지 않다가 우연히 화장실에서 잠깐 보게 되었는데, 그 것이 시작이었다. 읽기 쉬운 글자체와 문단 배치 같은 책의 외관상 구성 같은 것이 도움이 되었고, 내용도 나에게 비교적 거부감 느끼지 않는 것들이어서 이번에 처음으로 송신부님의 책한 권을 전부(cover-to-cover) 읽게 되는 첫 case가 된 것이다.

책 한 권을 정독하는 제일 확실한 방법이 manual typing임을 안 이상, 이것도 예외일 수 없다. 그러니까, Reading-by-Typing인 것이다. 이것을 읽는 며칠 동안에 나는 꿈을 하나 꾸었다. 미움과 용서가 주제인 만큼, 나의 잠재의식 밑바닥에 있던 어떤 ‘원수’를 꿈에서 만난 것이다. 이곳의 한 직장 (Scientific-Atlanta6, a Cisco company)의 나의 악질 boss, Blake Causey7란 놈이었다.

별다른 이유 없이 일방적으로 고통을 당한 것이 두고두고 용서 못할 놈 제일인자가 되었는데, 그 놈이 꿈속에서 ‘너무나 친절하고, 인정 있는 따뜻한 인간으로’ 나를 반긴 것이다. 이게 어찌된 일일까? 잊고 싶은 놈이었는데, 어쩌자고 다시 나타난 것일까? 하지만 역시 이 인간도 송 신부님의 책이 말하듯이 ‘나를 위해서 용서’를 해야 할 인간임을 느낀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1. 벽시계, 손목시계, 전화시계, cooking ware etc
  2. 거의 도서관에서 살았다.
  3. 2010년 서울 바오로딸 발행 송봉모 지음, 1판 6쇄
  4. 영어권에서는 무언가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 것을 ‘화학적’으로 생각한다.
  5. 도올, 내가 이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중의 하나
  6. 아틀란타에 있는, cable TV set-top box 만드는 큰 회사
  7. 악명 높은 South Carolina의 사립 사관학교 출신 엔지니어, 덜 성숙한 외골수 공명심의 화신

사순 제1주일, 장례미사

¶  2월 26일, 재의 수요일 이후의 첫 일요일이다. 그러니까 2012년 사순절(Lent) 첫 주일인 것이다. 비록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 미사에서 이마에 ‘재의 십자가’를 받고, ‘고난의 40일 여정’ 은 시작 되었건만, 별로 크게 한 것도 없이 순식간에 사순 첫 주일을 맞았다.

가톨릭 신자들은 이 사순(40일)의 시기를 다음의 세 가지를 염두에 두고 지내게 된다. 즉, (1) 기도, (2) 자선,선행, (3) 절제, 단식과 금육 등이 그것이다. 이중에서 ‘절제, 단식, 금육’ 란 것 중에 절제는, 각자의 방식에 따라 다르겠지만, 오랜 역사를 통해서 흔히들 하는 것들은 거의 정해져 있다. 가장 흔한 것이 평소 ‘즐겨서 탐닉’하던 것(도박, 술, 담배 같은)으로부터 멀어지거나, 아주 끊어 버리는 것이다.

단식(fast), 금육(abstinence)은 글자 그대로 끼니를 거르고, 먹더라도 고기 (생선은 제외) 류를 안 먹는 것이다. 단식은 재의 수요일과 성 금요일(부활 전 금요일) 에 적용이 되고 그것도 하루 한끼만 거르면 된다. 금육은 재의 수요일과 사순절 매 금요일에 적용이 된다.

하지만, 이것도 꽤가 많은 이곳 사람들, 여러 가지의 예외를 만들어 두었다. 그 중에 있는 것이 14세 미만의 아이들과, 60+세 이상의 ‘노약자’에 대한 배려인데, 이것이 조금은 웃긴다. 여기서 60+세의 기준은 분명히 수십 년 전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어디를 보아도 요새 나이 60+세는 대부분 건강하지, ‘노약자’로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들이 조금 덜 먹거나, 한두 끼 굶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무리가 없는 것이다.

사실 예외조항은 나이보다 각자가 처한 건강상태에 두어야 할 듯하다. 우리 부부는 원래 ‘소식(小食)’ 이라서 사실 완전히 몇 끼 굶지 않으면 큰 의미가 없고, 금육도 그리 자주 고기를 먹지를 않아서 큰 문제가 없다. 절제에 대해서, 나에게 유일한 즐거움은 gourmet coffee 인데, 이것을 완전히 끊는 것을 예전에 내가 즐겨 사용하던 방법이었다. 이것은 실행하기 전, 처음 느끼는 고통이 ‘장난’이 아니었다.

특히 아침에 커피의 카페인에 의한 자극이 없어지면서 무언가 불안하고, 정신의 집중이 잘 되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적응이 되었다. 그러면서, 조금은 ‘맑아지는’ 머릿속을 느끼곤 했다. 그것이 바로 ‘절제’의 매력이었다. 그러다가 몇 년 전부터 커피는 절제대상에서 제외를 했는데, 조금 꽤가 났던 것일까.. 그것 보다는 사순절을 그렇게만 보내는 것이 너무 소극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고, 레지오에 입단하면서 생각도 조금 달라지게 되었다.

봉사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 효과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레지오는 ‘절제’같은 것 보다는 적극적으로 밖으로 나아가 사람 속에서 활동하는 것을 더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그런 활동은 사실 ‘무언가를 안 하거나 끊는 것’ 보다 더 어려울 수 있다. 특히 나 같이 원래 소극적이고 내향적인 사람에게는 더욱 그러하고, 그래서 더 보람이 있을 것 같다. 올해는 과연 그런 지향으로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하다.

 

¶  지나가는 주에는 정말 오랜만에 장례에 관한 뉴스가 두 건이나 있었다. 사실 그 동안은 연도나 장례행사가 뜸했었다. 그것(뜸한 것)은 정말 좋은 것이지만, 레지오 행동단원에게는 그만큼 한가한 시간을 주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의사들이 병자가 줄어드는 것을 보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두 가지의 장례에서 하나는 이번에 이곳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일가족 5명이 살해된 끔찍한 사건에 관한 것이고, 다른 것은 조금은 평범할 수도 있는 어떤 60대 남자교우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서 사실은 이 60대의 평범한 분에 관한 것이 결과적으로 나에게는 더 충격적인 이야기가 되었다. 이 ‘평범한’ 교우님은 해방둥이 남자로, 김태균 요한 교우이신데, 심근경색증으로 며칠 전 갑자기 돌아가셔서 23일에 연도가 있었고, 24일에는 장례미사가 있었다. 우리부부는 장례미사엘 갔었고, 예와 같이 고인의 명복을 빌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아주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인의 가족들을 보게 되었는데, 그 중에 고인의 형님이 바로 내가 한때 알았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거의 40년 전에 알았던 분이었다.

물론 모습으로 알 수는 없을 정도로 세월이 지났다. 하지만 장례미사 안내서에서 그 분 따님의 이름을 내가 알아본 것이다. 지금도 나는 어떻게 아직까지 그분 따님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아마도 나의 전 ‘서울식당’ blog에서 그 당시를 회상하며 쓴 것이 있었는데 그때 기억을 해 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 분의 이름을 모르고 지냈으니, 사실 그분을 알아 볼 수가 없었던 일이었다.

비록 70대의 나이였지만, 자세히 보니 역시 그분이었다. 훤칠한 키에 멋쟁이 스타일 (옷), 그대로였다. 그 부인, 그러니까 세란이 엄마는 한 눈에 알아 볼 수가 없었다. 너무나 나이보다 젊어 보여서 그랬는지도. 가서 인사를 드릴 까 생각을 했지만, 역시 주저하고 말았다. 옛 사람을 찾는 것과 서로 다시 알고 지내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임을 나는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역시 나만의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일까.. 하지만 지난 40년간 어떻게 지내셨는지 궁금하기는 하다.

김두철, Ash Wednesday

¶  우등 한번 못해본 서울대 수석합격: 김두철을 다시 찾았다. 나의 재동국민학교 동창, 3학년과 6학년 때 같은 반이었고 특히 6학년 때는 나와 같은 ‘1 분단’에 있기도 했던 ‘머리 좋은’ 동창이다. 나의 재동국민학교 추억에 관한 blog에서 잠깐 언급을 했었는데, 그 당시에는 100% 나의 머리 속에 남아있던 기억력으로 쓴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의외의 도움(Internet, what else?)으로 그의 이름을 다시 보게 되었다.

1966년 2월 중순경의 일간지는 서울 주요 대학입시 합격자 명단이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 조그만 기사 중에 김두철의 사진과 이름이 보였다. 그 것이 동아일보였는데, 지금 생각을 해 보니 아주 어렴풋이 그 기사를 그 당시 나도 본 것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반세기가 가까이 되는 엄청난 과거였으니.. 역시 확실하지는 않다. 그 기사는 김두철이 서울대학 ‘전체 수석’ 합격자 였다는 기사였다.

김두철 서울대 입시 전체수석, 1966그는 서울공대 전자공학과를 지망했는데, 거의 만 명이 넘는 지원자중의 수석 합격자였던 것이다. 국민학교 시절, 김두철은 ‘항상 일등, 우등생’이었는데, 아마도 경기중,고에 진학하면서 1등은 별로 못했던 듯, 우등을 못해본 수석합격이라고 기사는 강조를 했다. 본인이 ‘점수벌레’를 싫어 한다고 했지만, ‘의외로 수석’이 되었다고.. 참 이렇게 부러운 친구가 있을까? 그러니까, 별로 ‘노력을 안 했어도’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 아닌가?

이런 심리는 아마도 ‘일류 심리’에서 비롯 되었을 듯 하다. ‘거의 항상 top’으로 일관을 했으니, 크게 자랑스러운 것도 없다는 뜻일까? 평소의 실력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 조금은 거슬리기도 하지만, 어찌하랴.. 그렇게 태어났으니. 이 기사로 나는 그가 나와 같이 ‘납북자’ 가정, 편모슬하의 외아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지만 우리 집과 다르게 그의 어머니는 이화여대 교수(金蓮玉, 당시 41세)였다. 그의 아버님은 서울 공대교수로 재직 중 육이오 동란 시 납북이 되셨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과 참 비슷한 환경이었다.

국민학교 시절에는 그런 것을 전혀 모르고 지냈다. 게다가 기사는 김두철이 절대로 ‘공부벌레’가 아니라는 것으로, ‘산 사나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의 장기는 rock climbing이라고.. 기자조차 부러운 듯이 “힘껏 공부하고 맘껏 노는 화려한 대학생활”을 예상했는데, 과연 그는 어떻게 대학생활을 했을까? 그는 지금 어떤 ‘업적’으로 이름을 ‘크게’ 남겼을까 궁금하다.

 

¶  뼈 속으로 스며드는 듯한 차가운 안개 비가 하루 종일 나리는 2월, 중순이 완전히 접히고 하순으로 접어드는 일요일, 무슨 꿈에서 깨어나는 듯이 놀란다. 어느새 2월의 삼분의 2가 없어졌나? Groundhog Day, Lincoln’s Birthday, Valentine’s Day.. 모두 지나갔다. 내일은 President’s Day,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화요일은 Legio (Mariae) Tuesday인 동시에 Mardi Gras, 그러니까 그 다음날 수요일이 중요한 날인 것이다. Ash Wednesday(재의 수요일)인 것이다.

작년에 비해서 올해는 새해부터 거의 예외 없이 high note로 지내왔다. 그러니까, euphoric하다고나 할까? 이 나이에 ‘신난다’는 표현은 어불성설이고, 아마도 ‘잔잔히 들뜨는’ 그런 기분이라고나 할까? 지난 10년간 항상 나는 depression속에서 살았다고 ‘나의 역사’를 만들었지만 지난 한 달여를 보면서 아마도 나는 서서히 그런 길었던 ‘동면’의 기간에서 나오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몇 가지의 ‘단순한 계기나, 이유’로 그렇게 어두운 터널에서 나왔다고는 절대 생각 치 않는다. 그 이상의 무엇이 작용을 했을 것이다. 이것은 나뿐이 아니고 나의 반려자도 같이 느끼는 듯 하니까, 아마도 맞을 듯 하다. 그 이상의 것은 과연 무얼까?

ash-wednesdayAsh Wednesday, 재의 수요일, 2월 22일은 2012년 부활절 (Easter) 전까지 교회력으로 40일간 계속되는 Lent (사순절)의 시작이다. 예수님의 Passion (수난)을 거치며 부활의 절정에 이르는 기독교신앙의 절정기에 속하는 정말 중요한 40일이 수요일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개신교는 어떨지 몰라도, 천주교는 아주 ‘겸손, 절제, 회개’로 이 시기를 보내게 되는데, 이제는 나도 조금 익숙해져서 미리 생각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재의 수요일 바로 전날은 Mardi Gras (Fat Tuesday)는 ‘고난의 40일’ 전에 마음껏 ‘세속의 맛’을 느끼자는 축제의 절정인데, 이곳에서는 New Orleans (Louisiana주) 의 Mardi Gras 축제가 유명하다. 재의 수요일 미사에서는 작년의 Palm Sunday에 썼던 palm tree leaves(종려나무 잎)을 태운 것을 기름이나 물에 섞어서 신부님께서 신자들의 이마에 십자가를 그려주신다. 대부분 저절로 없어질 때까지 이마에 그것이 보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 재는 아마도 이런 뜻이 있을 것이다. 창세기 3장 19절(Genesis 3:19)의 “Remember that thou art dust, and to dust thou shalt return“.. 그러니까 사람은 먼지에서 왔다가 먼지로 돌아 간다는 뜻이 아닐까?

이날로 시작되는 사순절, 40일을 올해는 어떻게 보낼까? 회개와 절제와 고행.. 말은 간단하지만 실제로 하려면 복잡해진다. 회개는 물론 고백성사를 통해서 공식적으로 할 수 있지만, 다른 것들은 개개인마다 천차만별일 것이다. 어느 해에는 좋아하는 커피를 완전히 끊기도 했고, ‘절대로’ TV를 안 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의 요점은 역시 왜 그렇게 하는가를 묵상하며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역시 성경을 중심으로 한 ‘영적인 공부’가 중요할 것이다. 또한 나는 레지오 단원이라서 이것 외에도 하려면 할 것이 너무도 많다. 얼마나 의지력을 가지고 실행을 하는 가 그것이 문제일 것이다.

 

레지오 연차 총 친목회와 연도

레지오 마리애 연차 총 친목회
2011년 아틀란타 꾸리아 연차 총 친목회

어제 12월의 첫 일요일은 거의 하루 종일을 진정한 ‘일을 떠난 안식일’로 지냈다. 글자 그대로 안식일이면 일을 쉬는 날이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그와 반대로 하루 종일 일을 한 셈이 되었다.물론 여기서의 일은 성당과 관련이 된 것들이다. 물론 집 근처의 미국본당에서의 주일 미사는 물론이고 이번에는 한국 본당까지도 ‘나들이’를 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2011년 아틀란타 순교자성당 소속의 ‘천상 은총의 모후’ 꾸리아 주최 연차 총 친목회에 갔는데, 이번에는 평 단원으로 그냥 즐기러만 간 것 이외에도 연숙이 꾸리아 부회장을 맡은 관계로 봉사까지 하게 된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연숙은 총 친목회의 EmCee(사회)까지 맡게 되어 있었고, 나는 우리 쁘레시디움에서 발표하게 되어있는 ‘(거지)타령’ 에 끼어 있어서 둘 다 심리적으로 은근히 stress까지도 받은 것이 사실이었다. 다행히 연숙의 사회 진행은 큰 ‘사고’없이 잘 진행이 되어서 결과가 좋았는데, 우리 쁘레시디움의 타령 공연은 그렇게 만족할 만한 것이 못 되어서 조금 실망은 했지만, 그래도 어려운 여건에서 참가를 한 것만으로 위로를 받기로 했다.

오랜 만에 스트레스 성 일들이 이렇게 겹쳐서 그런지 모든 행사가 무사히 끝나고 나서 아주 안도감과 피곤함이 함께 몰려 들어서 그저 TobeyIzzie가 목매도록 기다리는 집으로 가고 싶었는데, 우리 둘은 갑자기 예정이 된 어느 자매님(베로니카)의 장의사 연도에 참석을 하러 가게 되었다. 우리 성당과 직접 연관이 없는 듯 보이는 자매님이라고 들어서 가는 것이 잠깐 조금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연고자들이 별로 없다는 말에 정신이 버쩍 들었다. 그런 것이야 말로 우리 레지오가 필요로 하는 곳이 아니던가? 역시 갔다 와서 가길 너무 잘했다는 생각을 계속하게 되었다. 아주 단출한 가족이 전부인 곳, 예쁜 할머님 자매님이 그곳에 잠자듯 누워계셨다. 문득 꿈에 본 어머님 얼굴이 잠깐 어른거렸다.

어느 funeral home (장의사)의 조그만 chapel에서 조금밖에 모이지 않은 우리 레지오 단원들, 열심히 연도를 바치고, 고인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viewing을 하고, 유족을 위로했는데, 따님이 너무나도 서럽게 울며 서투른 한국말로 “레지오 마리애, 너무 감사합니다” 를 연발해서 우리들 모두 눈물을 감추기에 바빴다. 아마도 돌아가신 어머님과 따님은 무척 사이가 좋았던 듯 싶었다. 이런 광경들은 거기 모인 모두들, 자기 나름대로의 처지에 비추어서 생각하며 속으로 울었을 것이다. 나도 예외가 아니라서 눈물을 감추는 것 자체가 너무나 힘이 들었다. 이 돌아가신 베로니카 자매님은 어떤 인생여정을 보내시고 여기까지 오셨을까.. 하는 생각도 하며 한정된 인간 수명의 의미를 생각하기도 했다.

 

Advent 2011, 대림절

2011년 대림절
Advent 대림절 2011

¶  오늘은 가톨릭 달력으로 새해의 시작이 된다. 비록 세속적 새해는 아니지만 천주교 전례력은 오늘이 4개의 촛불로 상징되는 대림절의 시작, 그러니까 예수님의 탄생일이고 이곳 최대의 명절인 성탄까지 4주를 기다리는 대림절 첫 주일이 되고 성탄 이후부터는 다시 예수 부활을 기다리는 시기가 시작이 되고.. 이런 식으로 사실 성경의 말씀대로 ‘계속 기다리는’ 기간의 연속이 된다.

이런 것들이 이곳 미국에서는 거의 200여 년 동안 생활화가 되어있어서 크리스천이면 이런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명절, 휴일들에 별로 큰 무리가 없지만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조금 눈에 거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랴.. 그것이 역사적 현실이고 문화의 일부가 되어 버렸으니.. 그래서 대림절이 시작되는 첫 주일은 의미가 큰 것인데 불행히도 우리는 미사를 거르게 되었다. 핑계는 꼭 있지만, 게으름이라는 핑계가 더 맞을 듯해서 사실 기분이 찜찜하다.

아침에 새로니가 Thanksgiving holiday를 집에서 보내고 오늘 아침에 Nashville로 떠나는 날이라서 시간이 조금 그랬지만, 역시 핑계일 것이다. 올해의 Thanksgiving은 큰 ‘문제’ 없이 지났고, 아주 적당하게 구워진 turkey가 인상적이었지만, 내가 조금 배탈이 나서 그것이 흠이 되었다. 다름 사람들은 멀쩡한데 왜 나만 그랬을까.. 암만 생각해도 그렇지만 혹시 stress성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문제는 왜 내가 stress를 느꼈을까 하는 것인데..

 

Thanksgiving feast 2011

Thanksgiving feast 2011

Rock group Iron Butterfly
Iron Butterfly circa 1970

¶  오늘 우연히 npr.org (National Public Radio)에서 (via Tweet) 1960년대 말의 LA출신 rock group Iron Butterfly에 관한 글을 읽게 되었다. 그들의 big hit In-A-Gadda-Da-Vida를 제외하고는 사실 이 그룹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저 heavy-metal rock group 정도라는 것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가지 더.. 이 big hit oldie 이외에는 다른 것을 더 들을 수 없었다는 사실도 있었다.

이 글에서 나의 짐작이 맞았는데, 역시 이 유명한 한 곡을 빼면 그들의 이름은 유명무실할 정도였다. 그룹 멤버들의 관계가 안 좋았던지, 다른 문제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이 유명한 classic 이후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래서 더 legendary하다고 할까..

이 곡의 특징은 무슨 classic의 symphony정도로 연주시간이 엄청 길었다는 것, 그러니까 17분 정도 되었나.. guitar로 내는 background noise같은 것, dramatic 하게 들리는 drum solo, guitar solo등등이 아주 다채롭고.. 듣고 있으면 무슨 환각에 빠지는 기분, 등등이 있어서 1970년 초에 들을 당시를 회상하곤 한다.

이 것을 친구 손용현과 같이 동네(상도동)에서 이 노래를 따라 부르며 걷는데, 앞서 가던 (못생긴) 아줌마가 갑자기 돌아서더니 화를 내며 ‘히야까시‘ 하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만 알고 보니 우리 둘이서 그 아줌마를 쫓아가며 ‘성 희롱’하는 것으로 오해를 했었던 것이어서 두고두고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이제 다시 이 곡을 17분 동안 들어도 그때의 ‘젊은 감정’이 거의 변함없이 솟는 것을 느끼며 헤어진 휘문고 출신 친구 손용현을 생각한다.

 

IRON BUTTERFLY – IN A GADDA DA VIDA – 1968 (ORIGINAL FULL VERSION)

 

지나가는 일년을 감사하며..

Thanksgiving, 2011 Huffington Post version

Thanksgiving, 2011 Huffington Post version

 

¶  감사하며 “지나가는” 일년,  숨차게 지나가는 일년을 생각하며 모든 것들, 지극히 한정된 나와 나의 주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는 무한한 존재 하느님께 감사한다. 흔히 년 말에 이런 생각을 더 하겠지만, 오늘이 마침 ‘[추수]감사절’이니까 조금 더 일찍 생각하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을 듯하다.

우리의 작기만 한 가족들 건강한 것과 생전 처음 경험하는 불경기에서도 정신적 건강을 유지하는 것도, 항상 무언가 불안한 여건하에서 무언가 최선을 다하려는 우리들.. 이것 이외는 사실 큰 상관이 없고, 문제도 없다. 무엇이 올바른 길인가 항상 찾고, 바르게 고치며, 그것에서 큰 무리 없이 최선을 다한 지난 일년이었을까?

겸손, 순명, 사랑, 절제.. 다 어렵기만 한 먼 곳에 있는 이상 같지만, 의외로 가까이서 우리를 이끌었던 지나가는 일년이었다. 그것만으로 사실 우리는 ‘가난한 부자‘라고 생각한다.

 

¶  어제 저녁에는 갑작스러운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연도에 연숙과 같이 다녀왔다. 불과 며칠 전까지 성당의 청소 봉사를 하시던 교우형제님께서 조그만 사고로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나와 개인적인 친분이 없으신 어르신이었지만 알고 보니 우리 구역에 있는 안금환 형제와 거의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다. 안 형제 남동생의 장인이셨던 것이다.

이런 일을 당하면 요새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되는데, 급서로 인한 놀라움은 크지만, 오랜 고통 속에서 타계하는 사람에 비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나에게 선택을 하라면 짧은 과정을 택할 것 같다. 이곳의 biggest holiday를 앞둔 날이었지만 연도와 viewing (시신을 보는 것)에 정말 많은 사람들이 와서, 열기 찬 연도가 되어서 고인도 조금은 더 따뜻한 마음으로 하느님 품에 가게 되지 않았을까?

장례 미사가 오늘 바로 추수감사절에 있어서, 오늘 그곳에 가는 것은 아무래도 어렵다는 판단인데, 어떨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올 수 있을까.. 고인에 연관된 가족은 평균보다 훨씬 많으니까, 큰 걱정은 안 한다. 어제도 “내가 오늘 죽으면 몇 명이나 나를 보러 올까” 하는 생각이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  지난 몇 주일 동안 오래된 VHS video cassette 들을 ‘무섭게’ computer로 옮기는 작업을 해 왔는데, 이제 조금 끝이 보이는 듯하다. 이것을 ‘자동’으로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 하므로 꼬박 과정을 지키고 앉아서 해야 하는 ‘고역’을 치러야 한다. 지루하긴 하지만 덕분에 오랜 만에 20년까지 된 오래된 ‘가족이 보던 영화‘들을 다시 보게 되어서 생각만큼 고역은 아니었다.

지금 보니 그것들의 크기가 만만치 않았다. 거의 100+여 개가 되는 비디오 테이프들.. 90년대에 그렇게 안방 사랑을 받던 그 당시의 최첨단 기술, VHS video.. 그것이 지금은 DVD/BlueRay의 얇기만 한 optical disc들.. 참 세월의 흐름을 실감한다.

대부분 내가 어렸을 때 고국의 극장에서 보았던 추억의 할리우드 명화들이라서 아이들이 어렸을 때 보여주기에 안성맞춤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두 ‘옛 것’들이라서 아이들에게 조금은 미안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들이 큰 후에, 옛날 영화가 더 좋았다고 말할 때도 있어서 조금은 위안이 되기도 한다.

 

¶  지난 며칠 동안 오랜만에 바람을 동반한 폭우가 쏟아지며 예년에 비해서 별로 볼품이 없이 힘겹게 달려있던 불쌍한 단풍잎들이 거의 모조리 떨어져서 완전한 겨울의 풍경을 나타냈다. 이런 상태로 내년 3월까지 버티게 되고 가끔 완전히 하얀 눈까지 덮일 아주 높은 가능성도 있어서 귀추가 주목이 되지만 제발 큰 피해 없이 멋진 풍경만 보여주기를 바라고 있다.

 

full Autumn leaves 2011

full Autumn leaves 2011

our backyard under fallen leaves

집 뒤뜰이 완전히 낙엽으로 덥혔다

 

Sunday before Thanksgiving

¶  와~~ 벌써 11월 20일 일요일.. 2011년 추수감사절이 4일 밖에 남지 않고, 가톨릭 달력으로는 2011년의 마지막 일요일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다음 주 일요일부터 새 전례력이 시작 되고, 성탄까지는 대림절 (Advent)의 4주가 또한 시작되는 등, 세속적인 제일 큰 두 명절(추수감사절, 성탄절)로 겹쳐서 조금은 휴일 스트레스가 쌓이기 시작하는 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쓸데없는 스트레스를 감당하는 지혜도 함께 쌓여서 조금은 나은 편이다. 각종 휴일의 유래와 전통, 목적, 뜻을 음미하면 훨씬 도움이 된다. 비 직계가족 식구가 아무도 없는 우리 집은 이럴 때 잘못하면 외로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래도 모이면 네 명은 되지 않는가? 혼자서 휴일의 외로움을 달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하면서 위로를 한다.  

 

Archbishop Emeritus John Francis Donoghue
아틀란타 전 대주교님 John Francis Donoghue

¶  지난 11월 11일 (이곳은 Veteran’s Day, 유럽에서는 Armistice Day?), 전 아틀란타 대교구의 John Francis Donoghue 대주교님께서 향년 83세로 선종하셨다. 그 동안 별로 주교님의 건강에 대한 뉴스가 없어서, 이런 갑작스러운 뉴스에 놀라게 되었다. 특히 나는 이 뉴스를 4일이나 지난 11월 15일 레지오 회합에서 듣게 되어서 아주 부끄럽기까지 했다.

한 지역소속 종교지도자의 선종은 사실 큰 뉴스는 아닐지라도 내가 어떻게 4일씩이나 늦게 알게 되었을까? Local TV뉴스를 자주 보면 아마도 알았을 것이지만 제일 큰 이유는 11월 13일의 주일 미사를 못 간 것이 치명적인 원인이 되었다. 신자들 대부분은 그 때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 도노휴(도나휴, Donahue와 스펠링이 조금 다른 common Irish name) 대 주교님은 1993년에 아틀란타 대주교가 되시어 2004년 12월에 은퇴하실 때까지 참 많은 일을 하셨다. 그 전 오랫동안 침체 속에 있던 이 아틀란타 대교구를 눈부시게 활성화 시키신 것이다.

미국에서 제일 큰 <아틀란타 성체대회, Eucharistic Congress>를 크고, 단단히 성장시키고, 대교구에 <성체조배, Eucharistic Adoration> 신심행사를 강력히 권고하셔서 우리 ‘미국성당’ 에도 계속되고 있다. 전형적인 ‘사제 같은 인자한 품성’을 보이시고, 대교구내 수많은 크고 작은 본당의 견진성사를 주관하셔서 우리 아이들도 가까이서 뵙고, 사진도 찍기도 해서 대주교라는 직함에 어울리지 않게 친근한 할아버지 같은 추억을 갖게 되었다. 은퇴 후에는 ‘명예’ 대주교라는 직함으로 사실 전과 같은 정열로 그 모습을 보이셔서, 이번의 ‘뜻밖의’ 선종은 너무나 아쉽고, 슬프기만 하다. RIP, Rest In Peace.. Archbishop John Francis Donoghue..

 

¶  YouTube에 조금씩 나의 조잡한 video를 올리면서, 조금씩 이곳을 더 자세히 보게 되고, 가끔은 그 동안 못 찾던 것을 찾게 되기도 하는데.. 이번이 바로 그런 때가 되었다. 작년에 나의 중앙고교 3학년을 추억하는 블로그를 쓸 때, 이 추억의 노래를 찾고 찾았지만 소용이 없었는데, 이번에 찾은 것이다. 아마도 그 동안 어떤 분이 만들어 올려놓았던 것 같다. 그것을 찾을 당시, 노래의 제목을 잊은 상태여서 더 찾지 못했을까?

 

행복의 샘터 , 박재란 이양일 1965년

 

알고 보니.. 그것은 <박재란, 이양일> 두 분의 <행복의 샘터> 였다. 이제 생각을 하니 제목이 어렴풋이 기억이 되는 것 같았다. 이것은 1965년 초에 나온 거의 ‘가곡 풍’의 유행가였다. 한참 유행하던 시절이 바로 내가 중앙고 3학년 초였던 것이고, 그 때부터 고3 하면 두 분이 연관이 되어 기억이 된 것이다. 그러다가 정말로 46년 만에 다시 듣게 되었다. 그 당시 최고의 인기가수 박재란씨와 이양일씨는 그 동안 어떻게 살아 오셨는지..

 

Draganflyer X8
카메라가 달린 Draganflyer X8

  DraganFly?  <dragonfly, 잠자리> 의 misspelling일까? 내가 만일 내일 아침을 못 보는 신세가 된다면, 이것도 중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인터넷 파급효과의 하나를 건진 것이다. 거의 10년이 넘는 역사의 이 흥미로운 UAV (Unmanned Aerial Vehicle) technology를 그 동안 나는 모르고 살았던 것이다.

한 마디로 이름에서 연상이 되고, 어렸을 때 꿈도 많이 꾸었던, ‘잠자리 비행기’와 비슷한 이것의 특징은 회전날개가 1개나 2개인 기존의 헬리콥터와 달리 최소한 4개의 회전날개를 가지고 remote control로 조종이 되는 ‘취미용 비행기’인 것이다. 장난감 헬리콥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취미의 수준과 ‘상업용’ 수준의 구분이 잘 안 될 정도로 ‘심각한 기술’이라는 점이다.

Canada에 본사를 둔 이 DraganFly Innovation이라는 회사는 Zenon & Christine Dragan이라는 발명가에 의해서 무선조종 풍선, 비행접시 등의 취미로 시작을 해서 근래에는 완전히 심각한 상업용 UAV technology회사로 성장을 해서 지금은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곳의 demo video를 보면 따로 이것의 잠재성에 대해서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정부의 차원에서 쓰는 UAV는 크고, 비싼 것들이지만 이것들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저렴한 것들이다. 현재는 주로 공중 비디오 촬영으로 쓰이고 있지만 이것의 쓰임은 상상력에 달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빛의 신비

레지오 단원 제일의 무기, 묵주
나를 ‘살려 준’ 이 묵주는 연숙이 San Antonio (Texas)에 갔을 때 사 준 선물이었다

빛의 신비, Luminous Mysteries, Mysteries of Light..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과학적인 빛의 성분이나 빛의 속도에 따른 상대성 이론, 빛의 구성에 대한 양자역학.. 등등에 대한 것이 아니고, 신학적인 빛의 신비인 것이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 천주교의 ‘복되신 성모 마리아'(Blessed Virgin Mary: BVM) 묵주기도(Rosary)의 2번째 신비를 말한다.

묵주기도에는 4가지 신비가 있고 이것을 반복하며 읽고, 묵상을 하는데, 첫 번째 신비: 환희의 신비(Joyful Mysteries), 두 번째 신비: 빛의 신비(Luminous Mysteries), 세 번째 신비: 고통의 신비 (Sorrowful Mysteries), 네 번째 신비: 영광의 신비 (Glorious Mysteries) 가 그것이다. 이 중에서 이상하게도 내가 유별나게 더 많이, 깊이 생각하고 묵상하고, 심지어는 좋아하게 된 신비가 바로 ‘빛의 신비’ 인 것이다.

나는 그 이유를 확실하게 글로 표현할 자신이 없다. 하지만, 조금 간단하게 말 하자면 나머지 3가지 신비는 사실 너무나 ‘유명’하다고나 할까.. 환희의 신비는 예수님 탄생, 고통의 신비는 예수님의 수난, 영광의 신비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잘 알려진 기독교의 핵심부분에 해당한다. 하지만 빛의 신비는 조금은 ‘평범할 수도 있는 예수님의 공(公)생활’에 해당하는 것이다.

Fatima(파티마) 목동들에게 나타나신 성모님
Fatima(Portugal) 목동들에게 나타나신 성모님은 이미 묵주를 가지고 계셨다

어느덧 내가 묵주기도를 시작한지 4년이 훨씬 지나고, 내년 3월이면 만 5년 ‘기념일’이 다가온다. 세월이 빠른 것은 물론 잘 알지만, 내가 사고 없이 이것을 5년 계속해 왔다는 사실로는 5년이 그렇게 빠른 것도 아닌 듯 싶다. 그만큼 나의 묵주기도 5년은 나에게 풍부한 개인적 경험을 체험케 했고, 나아가서 전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나를 계속 끌고 갔기에 이제는 전부터 들어왔던 묵주기도의 신비를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묵주기도를 ‘시작해 본’ 자체도 나에게는 신비에 가까웠지만, 그것을 지금까지 4년이 훨씬 넘도록 계속해온 자체는 그 이전의 나 자신을 생각해 보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사실이었다. 처음 이것을 시작할 당시는 기도문을 외우지 못해서 불편했지만, 그것은 시간이 자연히 해결해 주었다. 완전히 외우고 나면서, 조금씩 생각, 묵상 등을 할 여유가 생기고, 그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자유기도에 대한 지독한 거부감 (대부분 개신교 신자들의 통성기도 스타일 때문에)으로 나는 기도란 것을 못 했는데 이 묵주기도가 아주 자연스레 나를 구해 주었다.

빛의 신비에 대해서 조금 조사를 해 보니, 의외로 이 신비는 아주 역사가 짧았던 것이었는데, 2002년에 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Pope John Paul II) 께서 기존의 3단에 덧붙인 것이었다. 묵주기도의 오랜 역사를 감안한다면 2002년에 더해진 빛의 신비는 사실 바로 불과 몇 분 전에 더해진 것 처럼 느껴지는 ‘새 것’ 인 것이다. 흔히 ‘레지오 박사’로 알려진 최경용 베드로 신부님의 저서 <레지오 마리애 영성> 을 보면 묵주기도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는데: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묵주기도는 ‘로사리오의 첫 교황’ 이라고 불렸던 비오 5세가 1569년에 만들었는데, 그 2년 후인 1571년 10월 7일의 레판토(Lepanto) 해전에서 유럽이 회교국의 손아귀에 들어갈 위기에 봉착하자 신자들이 전승을 위한 지향으로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친 결과 마침내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이를 기념하여 비오 5세의 후임자인 그레고리오 13세는 1573년에 매년 10월 첫 주일을 ‘로사리오의 성모 축일’로 정하였다. 그 후 레오 13세 교황(재위: 1878~1903)이 10월을 ‘로사리오 성월’로 정하고 성모 호칭 기도에 ‘지극히 거룩한 로사리오의 모후’라는 칭호를 추가함으로써 묵주기도를 통한 성모신심을 장려하였다.

Five Luminous Mysteries, 빛의 신비 5단
빛의 신비 5단, St. Joseph Sunday Missal 에서

전 교황 복자이신 요한 바오로 2세의 성모신심은 너무나 잘 알려진 최근 역사의 일 부분이다. 개인적으로나 교회 역사적이거나 나는 이 복자를 존경하게 되었는데, 아마도 이것도 나의 ‘자유의지’와는 크게 상관이 없이 ‘알게 되고 좋아하게’ 되었다는 생각도 든다. 특히 2005년 선종을 하실 때부터가 아니었을까?

근대사 인물 중에 내가 확실하게 존경하고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이 복자, 요한 바오로 2세가 아닐까.. 왜 이 신비가 ‘빛’의 신비로 이름이 되었을까? 그것은 요한복음 9장 5절의: “While I am in the world, I am the light of the world”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내가 세상의 빛이다: 공동번역에서) 에서 나온 것이다. 그 분이 첨가한 묵주기도 두 번째 신비 ‘빛의 신비’는 그렇게 나에게 다가왔고, 나를 움직였을 것이다. 결국, 요새는 참 신앙이라는 것이 오묘하다는 생각 뿐이다

 

 

 

복자 요한 바오로 2세의 빛의 신비:

  1.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심을 묵상합시다 (The Baptism of Jesus in the Jordan)
  2. 예수님께서 가나에서 첫 기적을 행하심을 묵상합시다. (Christ’s Self-Manifestation at the Wedding in Cana)
  3. 예수님께서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심을 묵상합시다. (Christ’s Proclamation of the Kingdom of God)
  4.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심을 묵상합시다. (The Transfiguration of Our Lord)
  5.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심을 묵상합시다. (Christ’s Institution of the Eucharist)

 

Triple Lows: 축~ 쳐지는 그런 날

오늘은 가을 날씨로는 조금 싸늘한 편이었지만 밝은 햇살 덕분에 ‘느낌’은 그리 춥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기분은 완전히 tail spinning 하는 듯 새카만 심연 속으로 빠지는 듯한 하루였다. 이것이 오래 전 유행하던 biorhythmtriple lows에 해당하는 그런 때가 아닐까? 며칠 전 돌아가신 분들의 연도와 장례식 등으로 인한 심적인 stress로 사실 몸과 마음이 축 쳐지기 시작했고, 오늘은 또 다른 종류의 스트레스가 나를 완전히 knockout을 시킨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일찌감치 항복을 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시간만 지나가기를 기다린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이유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가? 영어로 말하면 unreasonable한 사람들이다. 특히 이런 ‘막무가내’한 사람이 만약 ‘중요한 일’을 하는데 연관이 되어 있다고 하면 어쩔 것인가? 예를 들어 직장 같은 곳에서 이런 사람을 상대해야 한다면 정말 곤란할 것이다. 문제는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노력을 해도 안 되면 결국은 그 관계는 완전히 실패를 하고 일도 실패를 한다. 제일 좋은 방법은 그런 사람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해야’ 한다. 그것이 항상 가능하지는 않지만..

 나도 직장생활을 오래 하면서 이런 상황을 많이 당해 보았다. 대부분 피할 수 없는 case여서 정면으로 맞상대로 ‘싸우거나’, 그대로 ‘당하면서’ 고민하고 속을 끓는 수 밖에 없었는데, 나중에 곰곰이 생각을 해 보니 그래도 그런 사람을 피하도록 노력을 하는 것이 더 나았을 것 같았다. 그런 사람과의 관계는 전혀 가망이 없어서 노력자체가 시간 낭비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사람을 만약 직장이 아닌 예를 들어 종교단체 같은 곳에서 만나서 같이 ‘봉사적인’ 일을 한다고 하면 어떨까? 내가 당한 case가 바로 이런 것이다. 아내 연숙은 오랫동안 이런 것으로 속을 끓고, 고민하곤 하는 것을 보아왔는데, 이번에 내가 처음으로 ‘당하게’ 된 것이다.

 

 

Gunatanamera – Sandpipers

내가 조금 관계된 아틀란타 한국성당의 전산 팀에 그런 unreasonable한 사람이 도사리고 있는데, 모처럼 마음먹고 ‘봉사’하려는 사람들을 의도적이건 아니건 간에 쫓아내고 있는 셈이 된 것이다. 정면으로 대결을 해서 문제를 풀 것인가, 피할 것인가? 하지만 대결을 하려면 평균적 reasoning 하는 능력은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 마디로 이야기가 ‘전혀’ 통하지 않는 것이다. 이 사람을 대하는 자체가 시간 낭비인 것이라서, 결국은 ‘피하는’ 방법 밖에 없는데.. 이것이 과연 그리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결국 이 방법을 택하기로 오늘 마음 먹으면서, 나의 기분이 훨씬 나아지게 되었다. 이것도 오래 살면서 터득한 인생의 지혜 중의 하나다. 참, 세상 살기 힘들다. 이럴 때 특효약 중의 하나는 역시 추억의 oldies가 아닐까? 그 아득한 시절 즐겨 듣던 SandpipersGuantanamera…는 메마르고 갈라진 가슴에 촉촉이 쿠바의 야자유 향기를 뿌려 줄 듯하다.

 

 

망자(亡者)의 날

포근한 가을에서 주룩 거리는 비와 함께 싸늘한 가을날씨가 되돌아온다. 밤새 뒤척거리며 불편한 잠으로부터 싸늘하고 꾸준한 빗소리와 함께 새벽 4시에 결국 일어나고 말았다. 비는 싸늘하게, 꾸준하게, 가끔 세차게, 열어놓고 잔 창문 속으로 소리를 밀어 넣는다. 정말 오랜만에 새벽 4시에 깨서 일어나 보았다. 아무리 내가 ‘아침 사람’ 이라고 하지만 사실 이런 이른 새벽에 일어난 적은 거의 없었다. 아마도 고등학교 3학년 대학 입시준비 때가 아니었으면..

어제는 생각해 보니 완전히 하루가 망자의 날이었다. 망자, 망인.. 이럴 때, 한자의 도움과 고마움을 느낀다. ‘죽은 이’ 보다 훨씬 느낌이 고상하고 존경스럽게 느껴지니까.. 두 사람의 고인(故人), ‘아들’ 들, 그 중 한 사람은 남편, 아버지.. 나이 61세와 48세의 남자들.. 어찌 느낌이 없겠는가? 두분 모두 나보다 늦게 태어나고 일찍 돌아가시는 형제님들이다. 한 분은 지난 주에 장례식이 있었고 어제는 연도만 드렸지만 다른 분은 연도와 장례미사가 어제 함께 치러졌다.

 두 사람 모두, ‘말기 암’ 선고 받은 지 한 달도 못 돼서 돌아가셨다. 요새는 ‘암’ 이란 것이 너무나 친숙해 진 느낌이고 감정에도 조금은 무디어지고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갑작스레 암의 공격에 항복을 하는 것은 그리 흔치 않을까? 그래서 가족과 주위의 사람들을 조금은 더 놀라게 하고 슬프게 하는 것이다. 이 분들은 나의 가족도 아니고 친지도 아니지만, 느낌은 마찬가지일 수 밖에 없다. 이럴 때마다 우리 모두는 사실 하루하루가 시한부 인생을 산 다는 것을 뼈저리게 절감을 하는 것이다.

 

특히 48세에 운명을 하신 윤(尹) 형제님의 생각이 하루 종일 머리 속에서 맴돌았다. 한창 일을 할 나이.. 여느 48세였으면, 한 가족의 가장이요, 대학에 다닐만한 듬직한 아들 딸이 있었을지도 모를 나이, 은퇴하셔서 아들과 같이 살지도 모를 부모님.. 등등이 상상이 되는 그런 나이가 아닐까.. 하지만 그런 것은 ‘통계’에서 나온 흔한 상상에 불과하다. 모든 인생은 다 다른 것이다. 이분의 경우가 그렇다. 우선 미혼이다. 결혼을 한 적도 없고, 자식도 없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게 느껴졌을지도.. 또한 경제적으로 왕성하게 일을 해서 얻은 ‘부의 결과’도 거의 없다. 사실은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보였다. 유일한 보람은 서로 뭉쳐서 사는 단출한 가족이 전부였을 것이다. 짧은 시간에 듣고, 본 것이라 이런 ‘느낌’들이 다 맞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이럴 때의 느낌은 대부분 맞는 것을 안다.

 61세에 운명하신 안(安) 형제님은 내가 속해있는 레지오와 조금은 관계가 있지만, 갑자기 운명하신 것과 집안 식구와의 종교적인 차이로 장례절차에 조금 잡음이 있었다. 내가 이해를 할 수 없는 것은, 고인에게 종교의 차이가 그렇게 중요할까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웃기는’ 발상이다. 그것을 고인이 보고 있다면 얼마나 답답할까. 그래도 이분은 주위에 대가족의 ‘정신적 후원’이 있으니 어떻게 보면 참 행복한 이별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주위의 연고가 별로, 아니 거의 없던 윤 형제님을 보내는 것은 우리 ‘레지오가 해야 할 역할을 한마디로 보여준 케이스가 되었다. 그들은 우리 레지오의 정신적 후원과 지지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연도와 장례미사, 장지(葬地)동행까지 거의 ‘완벽하게’ 레지오는 사명을 완수했다. 나도 ‘남자’라는 이유로 생애 처음 운구(運軀)의 역할도 했기에 더욱 고인을 생각하게 되었고, 쓸쓸히 보낼 뻔했던 고인도 조금은 편안하셨으리라 굳게 믿는다.

생각한다. 우리 집은 어떤가.. 가족적으로 외롭기는 아마도 위의 윤 형제님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내가 오늘 이 세상과 영원한 작별을 한다면 과연 몇 명의 지인(知人)이나 올까? 범인凡人)으로써는 지나치게 화려한 장례의식도 보았고, 다른 쪽으로는, 고인에게 미안할 정도로 지나치게 쓸쓸한 의식 얘기도 들어서 안다. 그러니까, 이것도 ‘정도껏’ 이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나치게 많지도, 그렇다고 너무나 쓸쓸치도.. 않은.. 그런 것은 없을까? 이래저래, 어제는 삶을 통한 죽음, 죽음을 통한 삶에 대해 하루 종일 생각하는 날이 되었다.

 

 

인생은 미완성 – 김진관

 

시월의 반

시월의 반이 되어간다. 어릴 적 국민학생일 적, 10월은 십 월이 아니고 시월이라고 귀따갑게 배운 기억의 시월.. 이제는 추운 가을의 맛도 이미 느꼈고, 조금은 월동준비도 생각하게 해 주었다. 최근 아주 정상기온을 유지하며 며칠 동안은 땅속으로 포근히 스며드는 비까지 뿌려준 올 가을, 자연의 하느님께 감사를 안 할 수가 없다. 시월에 있는 눈에 띄는 날은 역시 시월 마지막 날, 할로윈 (Halloween)일 것이다. 일년의 수확을 상징하는 호박의 황금색이 온통 동네를 장식하는 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초자연적 존재인 ‘귀신’을 즐기는 날.. 비록 종교적으로는 ‘악마,귀신 숭배’를 우려해, 권장하는 날은 아니지만, 분명히 종교적 의미의 ‘초자연적인 귀신’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 이런 날을 재미없어 하는 축은 아마도 ‘무신론자’들 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은 ‘귀신 조차’ 믿지 않을 테니까..

에스페란토 회보
미국 에스페란토 회보

에스페란토, 2개월마다 간행되는 회지, American Esperantist가 어제 배달되었다. 지난 번 아버지가 관련된 에스페란토 역사를 추적하며, 미국 에스페란토 협회에 문의를 한 적이 있어서 이렇게 ‘무료’로 보내주었나 보다. 이 회보를 받아보고 느낀 것은, 생각보다 ‘초라’하다는 것이었다. 각종 회원들의 연회비 (정회원은 $40/year!)로 운영이 되는데 어떻게 이렇게나 빈약한 느낌일까? 물론 인터넷의 영향으로 인쇄 간행물이 대폭적으로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이다. 그렇다 해도 조금은 더 ‘화려하게’ 만들 수 없었을까? 역사 깊은 대한민국 천주교 잡지 경향잡지, 1950년대의 느낌을 줄 정도로 보는 느낌이 ‘차분’하다. 그에 비해서 내용은 훨씬 다양하고 깊이가 있는 ‘것’ 같은데.. 에스페란토를 읽을 수 없기 때문에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이 느끼며, 과연 에스페란토가 얼마나 더 ‘지탱’을 할까 하는 모양인데, 나는 오래 오래 ‘살게’ 되기를 바라는 입장이다. 내가 이것을 배워서 쓰고 안 쓰고 하는 문제보다는 이런 ‘인류 평등,평화‘의 정신이 계속 발전하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아틀란타 천상의 모후 꾸리아 간부교육피정, 드디어 내일로 다가왔다. 이것에 조금 의미가 있다면, 연숙이 꾸리아 부단장에 피선된 후 처음의 행사가 되었고, 나는 곁다리로 단원의 자격으로 봉사를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부단장이 식구에 있으니 나에게도 이렇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사실은 별로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거절할 명분이 뚜렷하지도 않았다. 레지오의 철칙인 ‘순명’을 어기는 것도 되니 할말도 별로 없었다. 단장이란 사람은 나머지 임원을 완전히 믿는지 한달 동안이나 자리를 비우고 행사 하루 전에 나타나셨다. 결국은 자리를 지키는 ‘일벌’들이 실질적인 일은 다한 셈이고.. 이 동네의 거의 모든 일들이 이렇게 카프카 식으로 진행된다. 내가 맡은 일은 일일 사진기자의 역할인데, 어떻게 보면 아주 단순한 일이다. 하지만 꼬박 전체 행사를 돌아다녀야 하는 것이라 조금 신경이 안 쓰일 수 없고, 나의 camera가 아주 ‘시로도’ 급이라, 과연 사진이 잘 나올지도 걱정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역시 이것도 레지오의 중요한 봉사이기 때문에 기꺼이 하면 될 것이고, 나머지는 다 ‘위에서’ 보살펴 주실 것이다.

 

사랑과 죽음을 응시하며..

사랑과 결혼, 그리고 죽음… 어제는 인생에서 아마도 가장 중요한 시점의 이 두 가지를 같이 생각하는 날이 되었다. 물론 결혼을 안 하거나 못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은 아직까지는 예외에 속하니까, 이렇게 결혼과 죽음을 같은 위치에 놓는 것에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세상이 하도 변해서, 남자끼리, 여자끼리 ‘결혼을 했다고’ 우기고, 할 것 다하며 같이 살면서 죽어도 결혼 안 했다고 우기고, 자식 팽개치고 이혼한 것이 무슨 ‘벼슬’을 한 듯, “괜찮다 괜찮아” 하며 행세하는 묘한 세상에, 이렇게 결혼과 죽음을 같은 위치에 놓아 보는 것은 사실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이 된다. 그만큼 결혼과 죽음은 인간이기 때문에 확실히 거쳐야 하는 중대사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심정이기 때문이다.

 

You Don’t Bring Me Flowers
Neil Diamond, Barbara Streisand
데레사에게 주는 선물, 오랫동안 변치 않을 사랑을.. 

 

어제는 우리 집과 안면이 있는, 김찬웅(베드로)씨 딸 데레사의 결혼 피로연, 초대를 받고 갔었다. 이미 나의 오래 전 blog에서 언급이 되었던 베드로씨네, 부인인 안젤라씨는 내가 속해있는 레지오의 단장님이기도 하다. 거의 20+년 전, 우리의 두 딸들과 어울려 놀았던 데레사가 결혼을 해서 친지들이 모여서 멋진 파티를 한 것이었다. 어렸을 때는 우리부부가 선생님을 하던 아틀란타 한국학교에도 다니던 아이들이.. 이렇게 커서 한 가정을 이루게 된 것을 보며, 또 세월의 흐름을 실감한다.

 이런 자리에 가게 되면 신경을 안 쓸 수 없는 것은 과연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모일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 집을 안 역사는 오랜 되었지만 그것에 비해서 자세히 아는 바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저 짐작으로, 우리의 문화적 배경인 동창회, 종교 단체 등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곳은 이민 1세의 특성상, 거의가 자영업을 가지고 있어서 직장,조직에 의한 연고는 그렇게 많지 않다. 경기, 서울대를 거치는 동창회는 그런대로 아틀란타 지역에 ‘막강’한 세력이 있는 것 같고, 베드로씨는 아마도 활동적인 멤버인 것 같아서 그곳을 통한 사람들이 많이 온 것은 짐작한 대로였다. 거기다 베드로씨는 긴 세월은 아니었지만 삼성 아틀란타 지사에서 근무를 했으니까 그곳에도 ‘동창’들이 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짐작보다 사람들이 많이 참가를 한 ‘성공적’인 피로연이 되었다.

그곳에서 ‘의외’로 만나거나 본 사람 중에는: 오래 전 아틀란타 한국학교 교장 김경숙씨, 그의 남편(경기고 출신)이 있었다. 뜻밖의 마음과,보기 싫은 마음이 싸우며 결과적으로 인사를 못했다. 아니 안 했다. 살면서 끝맺음이 잘 못되면 이런 꼴이 된다는 것, 참 불쾌한 기억이요 잊고 싶은 추억이다. 연세대 2년 선배, 장학근 선배(건축과)를 거의 5년도 넘게 만나서 인사를 했는데..글쎄.. 나를 기억을 하는지 알쏭달쏭한 표정이었다. 그의 부인이 나와 연세대 66학번(가정대) 동문이기도 했는데 어제는 인사를 못했다. 한때 잘 나가던 부동산인 김경자씨..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만났는데..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그 관계를 모르겠다. 우리가 현재 사는 집은 1992년에 이분이 소개를 해 주어서 사게 된 것이라 잊을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반가운 집 연세대 후배 Mr. 고, 그의 부인..이 집은 2005년 초에 우리 집 ‘깡패,귀염둥이 강아지’ Tobey를 준 집이다. 반가운 인사 전에 Tobey의 안부를 먼저 물을 정도였다. 이 집 부부도 사실 안지가 꽤 오랜 되었지만, 특별한 관계가 별로 없었다. 이 Mr.고, 김찬웅, 베드로씨와 삼성지사에서 같이 근무를 해서 아는 사이라 온 것이다. 그때 같이 근무하던 사람들은 가끔 ‘동창회’처럼 모인다고 했는데, 이런 것도 미국인들이 이해를 잘 못하는 한국문화 중에 하나일 것이다. 연숙은 금새 잘 알아 보았는데, 나를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 할 듯.. 그만큼 내가 변했다는 표정으로 보였다. 그것도 세월의 진리일 것이다. 예전보다 많이 이런 반응에 익숙해 졌고, 익숙해 지려고 기를 쓴다.

 

Perhaps Love
John Denver & Placido Domingo

 

조금은 예상했던 집들, 설재규씨 가족도 보았다. 아직도 어떻게 설재규씨 집안이 베드로씨 네 집과 연관이 되었는지 그 사연을 모른다. 이런 ‘인연’을 추리해 보는 것도 재미가 있다. 연숙의 이대 선배 박교수님 댁도 보았지만 인사를 못 했다. 이분들이 올 것은 쉽게 예상이 된 것이, 남편끼리는 경기고,서울대 동창이며, 부인들은 숙명여고 동창인 것이다. 이것 보다 더 연관이 된 것이 있겠는가? 하지만 그것 이외의 ‘개인적’인 친분의 정도는 정말 미지수일 수밖에 없다. 베드로씨와 ‘불알’ 친구라고 공개적으로 선포를 했던 EmCee 김용주씨, 역시 오래 전에 알게 되었지만 나이와 학벌 같은 이유로 공감대가 별로 없었다. 한때 아틀란타 본당의 ‘사목회장’까지 역임을 했었지만 요새는 조용한 듯 하다. 우리의 마리에타 2구역, 구역회장으로 ‘맹활약’하고 있는 ‘조덕성, 바오로’ 씨를 이곳에서 볼 것이라는 것은 100% 확실했다. 며칠 전 구역미사에서 이미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토요회’라는 것을 만들어서 모여서 술과 노래를 즐긴다고 했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도 Three Tenors를 모방한 연기도 있었는데, 조금은 어려운 노래, “Perhaps Love“를 고른 것이 조금은 무리였나.. 가사를 잊고 중단도 되었지만 신부 데레사가 재치 있게 이어받아 불러 주었다. 이때 데레사가 노래를 잘 부른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반가운 사람들이 더 많았다. 물론 우리 막강한 레지오 단원들이 전원 참석해 주었기 때문이다. 단장님 딸의 경사라서 사실 ‘피할’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은근히 놀란 것이, 그런 자리는 사실 조금은 ‘젊은’ 취향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그것에 구애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덕분에 단원 자매님들의 ‘형제님(aka 남편)’들을 뵙게 되었다. ‘생각보다’ 첫 인상들이 참 좋았다. 그리고 얼마 전에 입단한 나의 거의 동년배인 우동춘 형제 부부가 ‘용감하게’ 참석을 하였다. 나이가 너무나 나와 비슷해서 시간만 나면 조금 가까이서 얘기를 해 보려던 참에, 이 자리는 아주 좋은 기회를 제공했고, 길지 않았던 시간이었지만 인사치레를 넘어선 진지한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한 세대가 바뀌는 과정을,그것도 결혼을 통해서 한 가정이 태어나는 것을 보여 주었지만 다른 곳에서는 한 사람의 삶이 마감되는 과정을 겪고 있었다. 이날 아침에는 말기 간암 판정을 받은 지 불과 한달 만에 불과 61세로 세상을 떠난 형제님이 있었다. 그는 다름이 아닌 우리 레지오 쁘레시디움의 부단장 자매님의 작은 시동생이었다. 얼마 전에 우리들이 병자기도를 하다가 며칠 전부터는 선종기도로 바뀐, 너무나 빨리 진행된 죽음의 과정을 목격한 것이다. 비록 짧은 고통을 겪게 되고, 주위 가족에게 오랜 고통을 주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그렇게 짧았던 이별의 시간은 어떠한가? 예전 같으면 60세가 넘었으니 우선은 살만큼 살았다고나 하겠지만 요새는 사실 빠른 죽음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중요할까? 얼마큼 보람 있는 생을 살았는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예전에는 깊이 하지 못하며 살았다. 내가 오늘 죽으면 어떠할까? 보람이 있었을까? 알 수가 없지만 살아있는 만큼 동안은 ‘결사적’으로 ‘보람’을 만들며 살고 싶다.

 

스티브, 2구역

Steve Jobs의 죽음으로 온통 media들이 떠들썩하다. 절대적으로 예상했던 현상이다. 나와 같은 computer engineer의 배경을 뛰어넘어, 새로운 시장을 거의 혼자서 개척한 그는 다른 종류의 visionary 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남보다 조금은 잘 사는’ 대중, 특히 journalist, artist, technology-challenged 들을 휘어잡았고, 그들은 완전히 그에게 팔렸다. 절대적인 100%의 자기만의 제품, 시장의 control을 고집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완전히 ‘닫힌’ 제품, 완전히 소비자를 control할 수 있는 제품, 그 결과로 완전히 ‘이득’을 control할 수 있는 제품.. 조금만 흉내를 내도 소송 협박을 일삼는.. 나의 Open System철학과 지구 반대 쪽에 위치한 지독히 이기적인 철학의 화신.. 하지만 같은 computer engineer, 그것도 70년대의 microprocessor revolution의 시작을 같이 경험한 ‘한 인간’ 으로서, 60세도 못 채우고 타계한 그를 마음 속 깊이 애도하고 싶다. RIP:  Rest In Peace, Steve Jobs

 

가까이서 본 본당신부님, 하태수 예수회 신부님: 어제 밤에는 오랜 만에 우리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마리에타 2구역 미사가 있었다. 꽤 오래 되어서 지난 번에는 어디서 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다. 처음으로, 새로 부임하신 본당 주임신부 하태수 미카엘 예수회 신부님을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가까이 뵐 기회가 되었다. 그것도 술과 음식을 나누면서.. 한마디로, 멀리서 엄숙한 분위기에서 본 것과 꽤 다른 느낌을 받음을 느낀다. 그러니까 첫 인상은 별로인데 점점 알게 되면서 좋아지는,그런 타입이라고나 할까. 권위적인 냄새가 별로 없고, 술도 적당히, 말씀도 적당히, 무리가 별로 없다. 이것보다 더 나은 것이 있을까? 남의 말을 잘 들으시고, 그에 대해 맞는 말씀을 하시고.. 그것으로 나는 우선 만족이다. 모였던 다른 형제,자매들도 나와 비슷한 인상을 받은 것 같았다.

오랜만에 보는 구역 자매, 형제들 반갑다. 특히 ‘젊고 예쁜’ 자매님들, 보기만 해도 즐겁다. 그렇지만, 이유야 어찌되었든 지난 몇 개월 동안 나는 우리 구역모임 때, 꽤 자주 듣게 되는 ‘과학적’ 호교론(apologetics) 같은, 해괴한 얘기가 듣기 싫어서 빠지곤 했다. 내 머리로는 왜 그런 ‘상황에 맞지 않는’ 얘기’를 그곳에서 장시간 들어야 하는지를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안 가는 것이 결과적으로 나의 신앙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 빠지고 보니 역시 다른 이웃들과의 친교를 하는데 어려움도 없지 않았는데 이것은 가까운 곳에서 ‘전교’를 해야 하는 레지오의 목표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앞으로 이것은 나와 연숙이 풀어야 할 과제가 되었다.

 

Catholic Sunday

오늘 아침은 3주 만에 미국본당 Holy Family CC(Catholic Church) 에서 8시반 주일미사를 보았다. 그러니까 2주 계속 주일미사를 거른 셈이다. 레지오 화요일 주중 미사는 절대로 거르지 않아서 조금은 변명 감 있긴 해도 역시 주중의 ‘약식’ 미사와 주일의 ‘정식’ 미사는 느낌이 많이 다른 것이라서 역시 ‘손해’를 본 것은 우리들이다. 10월 초에 걸맞은 계절의 맛을 마음껏 내듯 아침 바깥 기온이 45도(섭씨 7도) 로 떨어져서 이건 완전히 춘추복의 날씨로 오랜만에 “넥타이만 없는 정장”으로 갈아 입었다.

Holy Family Fall Festival 2011
Holy Family Fall Festival 2011

2주 동안 못 본 낯익은 얼굴들, 비록 이름도 모르고, 본당 밖에서 따로 만난 적이 없어도,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의 얼굴이 안 보이면 조금은 신경이 쓰이기도 하니까. 오늘의 주보를 보니, 역시 10월의 상징인 (Halloween) pumpkin의 색깔로 가득하고 돌아오는 토요일 예정인 본당주최 Fall Festival 내용으로 그득하다 . 오늘은 주임신부님, Fr. Darragh (대라, common Irish name), 오늘 복음 말씀(마태오: 21:33-43)에서, “stewardship”을 주제로 삼아, 미사 이외의 본당활동에 더 적극 참여하라고 강조하시고, 숫제 volunteer form까지 모든 좌석이 비치해 놓으셨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talent를 썩히지 말라고.. 그런 각자의 ‘재능’을 좋은데 쓰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도로 가져간다고 거듭 강조하신다. 이런 말씀 많이 들었고, 나는 안다.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보면 이 정든 ‘동네’ 본당에 내가 봉사를 할 것은 적지 않다. 하지만 현재 하나도 하는 것이 없고, 이것은 항상 갈등을 느끼게 한다. 이것은 오랜 동안의 영어문화권 직장을 떠난 후에 나타난 현상 중의 하나다. 역시 우리 같은 사람은 잔뼈가 굵은 곳의 언어문화권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 본능일까? 이곳에 살면서 계속 겪던 문화적 혼동과 갈등이 결국 나중에는 이런 곳에서도 나타나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조금 더 민감하게 느끼는 것일까.. 참 어려운 것이다. 아틀란타 한인 순교자 본당소속, 레지오에 입단한 이후, 조금씩 모국 문화권에 더 익숙해 지면서 이런 문화적, 언어적 갈등을 생각하게 된다. 문제는, 어떻게 나의 나머지 인생을 보내야 할까.. 너무나 멀어진 고국문화를 다시 배우며 살까, 아니면 더 영어권으로 들어가서 적극적으로 그들과 어울릴까.. 정답은 없다. 절대로 선택문제인 것이다. 어느 것이 더 나에게 보람을 느끼게 할까 에 달려있다. 

 

올 들어 처음으로 central heating system을 시험하는 날이 왔다. 아래층의 kitchen area에 앉아 있으려니 추울 정도라서 thermostat를 보니 67도.. heater로 스위치를 켰는데.. 잠잠.. 분명히 68도로 맞추었으니까 더운 바람이 잔잔하게 나와야 하는데, 아주 조용한 것이다. 직감적으로 아하! 아래층 furnace의 thermocouple을 새것으로 갈 때가 되었구나. 그러니까 thermocouple이 수명이 다 되면 pilot lamp가 꺼지고, fire(점화)가 안 되는 것이다. 요새의 furnace는 물론 거의 다 automatic firing mechanism을 가지고 있어서 이런 골치를 썩지 않아도 되지만 우리 것은 거의 20년 전의 것이라 이런 불편이 있다. 문제는 이 thermocouple이 생각보다 자주 교체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비싼 것은 아니지만, 이것을 새것으로 바꾸려면… 조금은 ‘기계적’인 머리도 필요하고, 그 우중충한 ‘지하’ 공간으로 기어 들어가다시피 해야 하는 그런 ‘남자의 일’인 것이다. 그래서 여자만 사는 집이라면 99% handyman을 $$을 주고 불러야 할 듯 한데 나의 우려는, 내가 먼저 죽으면 연숙이는 어떻게 이런 것들을 ‘고치며’ 살까.. 조금은 우습지만, 사실은 실제적인 문제다. 이런 것은 기계적인 것에 한하지 않고 우리 집에 거미줄처럼 깔려있는 computer network같은 것들.. 거의 자동적으로 돌아가지만, 문제가 생기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며칠 전, 빛의 속도보다 빠른 물체를 실험으로 관측1을 했다는 기사를 보면서, 정말 오랜만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추억과 함께 생각을 하게 되었다. 추억이란 물론 내가 처음 이 ‘기가 막히게 멋진 과학 이야기’ 들을 때의 기억이다. 우리 또래들은 이런 것들을 거의 대부분 책을 통해서, 그것도 ‘만화’를 통해서 접하고 배우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교과서가 거의 유일한 지식의 원천이었다. 백과사전은 나오지도 않았고, 나왔을 때는 너무 비싸서 ‘월부’로 사기도 힘든 때였다. 라디오에서 이런 것을 가르쳐 줄 리는 만무하고, TV는 없었을 때였다. 나도 역시 만화에서, 그것도 ‘공상과학’ 만화에서 처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라고 해서 듣고 배우게 되었다. 그때 내가 느낀 것은 과장되게 표현해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 만화에서 상대성원리의 결과로 보여 준 것이 이런 것이었다. 두 형제가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빛의 속도로 나르는 로켓을 타고 여행을 떠난다. 몇 년 뒤에 그는 지구로 돌아왔는데, 그 때는 이미 지구시간은 수만 년이 지난 후여서 그의 가족 뿐만 아니라 지구 전체가 완전히 바뀐 뒤였다. 이것은 광속도에 접근하는 로켓(과 그 안의 사람)에서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흐른다는 사실에 근거를 한 것으로, 이론상으로는 문제가 없는 공상이었다.

이런 식의 이야기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는데, 중학교 2학년 가회동에 살 당시, 같은 집에서 자취를 하던 경기고교 생 양병환 형으로부터 이런 류의 이야기로 밤을 새우기도 했다. 그 중에 하나가, 우리의 과거를 볼 수 있다는 역시 조금은 소름 끼치는 이야기도 있었다. 도저히 이해는 안 갔지만 이론적으로는 역시 큰 문제가 없었다. 이 이야기의 함정은, 우리가 우리의 과거를 본다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나의 과거를 본다는데 있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지구에서 10광년 떨어진 별에서 거대한 망원경으로 지구를 보면 10년 전의 지구가 보일 것이고, 10년 전의 우리들을 볼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며 대학 1학년 때, 드디어 흥분의 순간이 왔다. 대학 물리시간에 특수 상대성 이론이 나온 것이다. 이것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그대로 다룬 것인데, 조금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 이론은 전혀 ‘어렵지’ 않아 보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 이론에서 쓴 수학들이 정말 그다지 어려운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심지어 너무나 ‘간단’ 했던 것이다. 그곳에 상대성원리의 매력이 있었을 것이다. 우주의 법칙은 절대로 ‘복잡’하면 안 된다는 아인슈타인의 지론이 그것이다. ‘하느님의 법칙’ 은 의외로 간단한 것이다. 예를 들어서 에너지의 공식을 보라. E=mc2 이렇게 간단한 공식이 어디 있는가? 이런 이론들을 과학적 증명이 거의 없이 ‘발명’한 그는 한마디로 천재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 후 100년 동안 그의 이론은 거의 실험으로 하나하나 ‘직접, 간접적’으로 증명이 되고 있다. Gutenberg.org의 도움으로 아인슈타인의 원래 저서 ‘상대성 원리’를 download해서 보았다. 역시 비교적 내용이 길지 않은 책이었다. 위대한 저서는 이런 식으로 의외로 간단해 보이는가? 비록 독일어를 영어로 번역을 한 것이지만 아인슈타인의 ‘냄새’가 여기저기서 나는 위대한 책이다. 시간이 나면 한번 녹슨 머리를 굴려가며 다시 한번 읽어 보리라. 어렸을 때와 다른 것은 이제는 ‘하느님의 작품인 거대한 우주’ 라는 framework을 염두에 두고 있기에 그 때와 같이 방황하지는 않으리라.

 

  1. 아마도 이것은 quantum entanglement 실험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천천히 바뀌는 천주교 영어미사

Holy Family's Fr. Stewart's guide to 'changing Mass'
Holy Family CC Fr. Stewart’s guide to ‘changing Mass’

8월의 마지막 일요일을 맞는다. 다른 쪽에서는 허리케인 아이린 으로 떠들썩 하지만 이곳은 거짓말처럼 파~란 하늘에 가을기분의 따가운 햇볕이 작열을 하는 한가한 느낌의 일요일.. 우리 집의 ‘숙명의 적’ pet duo 토우비(Tobey, dog)와 이지(Izzie, 고양이) 를 보아도 한가한 느낌을 받는 것이, 둘 다 완전히, 절대적으로 ‘평화롭게’ 낮잠에 떨어진 모습이 정말로 한가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나에게는 이런 한가한 순간들도 ‘좋아하는 시간’에 속한다.

오늘 일요일의 미국본당 미사에서는 올해의 대림절 (교회력 신년의 시작, 올해는 11월 27일)부터 부분적으로 바뀌게 되는 영어 미사의식에 대한 설명이 시작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미사의식이 바뀌는 것이 아니고 미사의식에서 하는 문구(text) 들이 바뀌는 것이다. 현재 영어 미사는 1975년부터 사용된 것이라고 하니까, 상당한 기간 신자들이 쓰던 것이라 이것이 조금이라도 바뀌게 되면 아무래도 처음에는 불편할 것이다. 문제는 “왜” 바꾸어야 하는가에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것은 바티칸 교황청에서 지시를 한 것이 아니고, 그 동안 쓰던 영어미사의 ‘결점’을 보완하려고 문구를 원래 ‘라틴어 미사의 정신’에 더 가깝게 번역을 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원래의 ‘영어번역’에 문제가 있다고 본 것이고, 그것을 늦었지만 바꾼 것이다. 나의 의문은 그러면 다른 언어, 예를 들면 한국어 미사는 어떻게 된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곳이 영어로부터 번역을 한 것이었다면 그쪽도 바꾸어야 할 것인데, 들은 바에 의하면 아마도 한국말 미사는 이미 바뀌었다고 들은 것 같다. 현재 이곳의 한국본당,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는 이미 바뀐 것을 쓰고 있을 듯한데, 현재 우리가 주일미사를 그곳으로 가지를 않아서 100% 확실치는 않다.

라틴어 미사는 1970년에(그 훨씬 전에 있었던 바티칸 2차 공의회(the Second Vatican Council, 1963)의 정신에 의해서) 바뀐 이후 한번도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놀라운 사실은, 1970년 이전에는 세계적으로 모두가 라틴어로 미사를 드렸다고 한다. 어떻게 그 어려운 라틴어로 미사를 보았는지 상상하기는 힘들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한국에서도 그때는 라틴어를 쓴 것이다. 영어와 라틴어는 그 근원이나 비슷하지만 한국과 같이 ‘전혀 다른 계통의 언어권’ 에서는 어떠했을까? 하지만 역시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현지 언어’가 원래 라틴어의 ‘정신’을 충실하게 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인데, 참 어려운 작업이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천천히, 재미있게’ 하려는 미국 천주교인들, 이것도 ‘응석을 부리면서’ 9월부터 조금씩 ‘연습’을 하면서 목표인 대림절까지 갈 모양이다. 9월 초부터 일주일에 ‘한가지 씩’ 을 ‘연습’해 보는 것이다. 자세히 보면 크게 바뀐 것도 아니던데 이렇게까지 하는 것을 보면 참 본 받을 만하다.

 

 

Changes in the People’s Parts    
PART OF MASS OLD TEXT NEW TEXT
Greeting  Priest: The Lord be with you.
People: And also with you.
Priest: The Lord be with you.
People: And with your spirit.
Penitential Act,Form A (Confiteor)   I confess to almighty God,and to you, my brothers and sisters, that I have sinned through my own fault in my thoughts and in my words, in what I have done, and in what I have failed to do;        
and I ask blessed Mary, ever virgin, all the angels and saints, and you, my brothers and sisters, to pray for me to the Lord our God.
I confess to almighty Godand to you, my brothers and sisters, that I have greatly sinned  
in my thoughts and in my words, in what I have done and in what I have failed to do,
through my fault,
through my fault,
through my most grievous fault; therefore I ask blessed Mary ever-Virgin,
all the Angels and Saints, and you, my brothers and sisters, to pray for me to the Lord our God.
Penitential Act,Form B Priest: Lord, we have sinned against you: Lord, have mercy.
People: Lord, have mercy.
Priest: Lord, show us your mercy and love. People: And grant us your salvation.
Priest: Have mercy on us, O Lord.
People: For we have sinned against you.
Priest: Show us, O Lord, your mercy.
People: And grant us your salvation.
Gloria  Glory to God in the highest,and peace to his people on earth.  
Lord God, heavenly King, almighty God and Father, we worship you, we give you thanks, we praise you for your glory.    
Lord Jesus Christ, only Son of the Father, Lord God, Lamb of God,  
you take away the sin of the world: have mercy on us;      
you are seated at the right hand of the Father: receive our prayer.  
For you alone are the Holy One, you alone are the Lord, you alone are the Most High, Jesus Christ, with the Holy Spirit, in the glory of God the Father. Amen.
Glory to God in the highest,and on earth peace to people of good will.  
We praise you, we bless you, we adore you, we glorify you, we give you thanks for your great glory, Lord God, heavenly King, O God, almighty Father.  
Lord Jesus Christ, Only Begotten Son, Lord God, Lamb of God, Son of the Father,
you take away the sins of the world, have mercy on us;
you take away the sins of the world, receive our prayer;  
you are seated at the right hand of the Father, have mercy on us.    
For you alone are the Holy One, you alone are the Lord, you alone are the Most High, Jesus Christ, with the Holy Spirit, in the glory of God the Father. Amen.
At the Gospel Deacon (or Priest): A reading from the holy Gospel according to N.People: Glory to you, Lord. Deacon (or Priest): A reading from the holy Gospel according to N.People: Glory to you, O Lord.
Nicene Creed  We believe in one God,the Father, the Almighty, maker of heaven and earth, of all that is seen and unseen.    
We believe in one Lord, Jesus Christ, the only Son of God, eternally begotten of the Father,    
God from God, Light from Light,
true God from true God, begotten, not made, one in Being with the Father.
Through him all things were made.
For us men and for our salvation he came down from heaven:
by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he was born of the Virgin Mary, and became man.
For our sake he was crucified under Pontius Pilate;
he suffered, died, and was buried.
On the third day he rose again in fulfillment of the Scriptures;
he ascended into heaven and is seated at the right hand of the Father. He will come again in glory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and his kingdom will have no end.    
We believe in the Holy Spirit, the Lord, the giver of life, who proceeds from the Father and the Son.
With the Father and the Son he is worshiped and glorified.
He has spoken through the Prophets.  
We believe in one holy catholic and apostolic Church.
We acknowledge one baptism for the forgiveness of sins.
We look for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and the life of the world to come. Amen.
I believe in one God,the Father almighty,
maker of heaven and earth, of all things visible and invisible.  
I believe in one Lord Jesus Christ, the Only Begotten Son of God,
born of the Father before all ages.  
God from God, Light from Light, true God from true God, begotten, not made,
consubstantial with the Father; through him all things were made.
For us men and for our salvation he came down from heaven, and by the Holy Spirit was incarnate of the Virgin Mary,
and became man. For our sake he was crucified under Pontius Pilate,
he suffered death and was buried, and rose again on the third day in accordance with the Scriptures.
He ascended into heaven and is seated at the right hand of the Father. He will come again in glory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and his kingdom will have no end.  
I believe in the Holy Spirit, the Lord, the giver of life, who proceeds from the Father and the Son,
who with the Father and the Son is adored and glorified,
who has spoken through the prophets.  
I believe in one, holy, catholic and apostolic Church.
I confess one baptism for the forgiveness of sins
and I look forward to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and the life of the world to come. Amen.
Apostles’ Creed I believe in God,the Father almighty, creator of heaven and earth.  
I believe in Jesus Christ, his only Son, our Lord.
He was conceived by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and born of the Virgin Mary.
He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ied, and was buried.
He descended to the dead. On the third day he rose again.  
He ascended into heaven, and is seated at the right hand of the Father.
He will come again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I believe in the Holy Spirit, the holy catholic Church,
the communion of saints, the forgiveness of sins,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and the life everlasting. Amen.
I believe in God, the Father almighty,
Creator of heaven and earth,  
and in Jesus Christ, his only Son, our Lord,
who was conceived by the Holy Spirit,
born of the Virgin Mary,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ied and was buried; he descended into hell;
on the third day he rose again from the dead;  
he ascended into heaven, and is seated at the right hand of God the Father almighty;
from there he will come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I believe in the Holy Spirit, the holy catholic Church,
the communion of saints, the forgiveness of sins,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and life everlasting. Amen.
Invitation to Prayer  May the Lord accept the sacrifice at your hands
for the praise and glory of his name, for our good,
and the good of all his Church.
May the Lord accept the sacrificeat your hands
for the praise and glory of his name,
for our good and the good of all his holy Church.
Preface Dialogue  Priest: The Lord be with you.
People: And also with you.
Priest: Lift up your hearts.
People: We lift them up to the Lord.
Priest: Let us give thanks to the Lord our God.
People: It is right to give him thanks and praise.
Priest: The Lord be with you.
People: And with your spirit.
Priest: Lift up your hearts.
People: We lift them up to the Lord.
Priest: Let us give thanks to the Lord our God.
People: It is right and just.
Sanctus  Holy, holy, holy Lord, God of power and might.
Heaven and earth are full of your glory.
Hosanna in the highest.
Blessed is he who comes in the name of the Lord.
Hosanna in the highest.
Holy, Holy, Holy Lord God of hosts.
Heaven and earth are full of your glory.
Hosanna in the highest.
Blessed is he who comes in the name of the Lord.
Hosanna in the highest.
Mystery of Faith(formerly the Memorial Acclamation)  Priest: Let us proclaimthe mystery of faith:  
People: A – Christ has died, Christ is risen, Christ will come again.    
or B – Dying you destroyed our death, rising you restored our life. Lord Jesus, come in glory.    
or C – When we eat this bread and drink this cup, we proclaim your death, Lord Jesus, until you come in glory.    
or D – Lord, by your cross and resurrection, you have set us free. You are the Savior of the World.
Priest: The mystery of faith.   
People: A – We proclaim your death, O Lord, and profess your Resurrection until you come again.  
or B – When we eat this Bread and drink this Cup, we proclaim your death, O Lord, until you come again.  
or C – Save us, Savior of the world, for by your Cross and Resurrection, you have set us free.
Sign of Peace Priest: The peace of the Lordbe with you always.
People: And also with you.
Priest: The peace of the Lordbe with you always.
People: And with your spirit.
Invitation to Communion  Priest: This is the Lamb of Godwho takes away the sins of the world. Happy are those who are called to his supper.
All: Lord, I am not worthy to receive you,   but only say the word and shall be healed.
Priest: Behold the Lamb of God,behold him who takes away the sins of the world. Blessed are those called to the supper of the Lamb.
All: Lord, I am not worthy that you should enter under my roof, but only say the word and my soul shall be healed.
Concluding Rites  Priest: The Lord be with you.
People: And also with you.
Priest: The Lord be with you.
People: And with your spirit.

 

WYD 2011, 레지오의 전산화

World Youth Day 2011 Madrid, Spain
World Youth Day 2011 Madrid, Spain

2011년 마드리드, 스페인에서 열린 세계청년대회 가 ‘무사히’ 막을 내렸다. 전야 미사 중의 날씨가 나빠져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 사고는 없었던 모양이다. 오늘 CatholicTV.com을 보니 드디어 어제 일요일의 “폐막 미사”의 비디오가 올라와 있었다. 이 행사를 며칠 유심히 보면서 나는 거의 내가 ‘가톨릭 청년’ 이 된 기분이 되어서 참 기분이 좋았다. 폐막미사의 광경은 참 ‘장엄’하면서도 100만의 젊음의 활기가 완전히 ‘공항’을 휩싸는 그런 것이었는데..이것은 실제로 그 현장에 있지 않으면 ‘절대로’ 전부를 느낄 수 없는 것들이다. 지난 6월 이곳 아틀란타에서 열린 연례 대교구 주최의 ‘성체대회’에 참가하면서 이런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다. 수만 명의 형제,자매 신자들과 같이 함께 모여서 미사를 본다는 사실은 글로 그 느낌을 다 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스페인, 마드리드 외곽에 있는 한 비행장 전체가 ‘완전히’ humanity로 채워진 모습은 비록 작은 화면으로 보더라도 실감이 되었다. 그 광활한 평지를 완전히 메웠던 백만 명의 ‘멋진’ 젊은이들.. 잘못 보면 무슨 rock concert에 온 젊은이들 같이도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분명히 그들은 다르다. 1960년대 말, 미국 Woodstock Rock Concert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그 광경이 겹치는 것을 느낀다. 완전히 drug, sex & rock music이 주제가 되었던 그 시절, 그 세대.. 사실은 나도 그것들을 보면서, ‘인간의 완전한 자유에 열광’을 하던 오래 전의 추억이 있다. 하지만 ‘다른 모습의 완전한 자유를 보여주는’ 이런 전혀 다른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역시, 이래서 항상 ‘희망’이란 것이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그 ‘멋진’ 젊은이들이 얻었던 며칠간의 체험은 그들, 그들 주변, 그가 속한 사회, 나라에 예측할 수 없는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사실, 의심하지 않는다. 작은 호기심 하나는, 어떻게 100만 여명에게 성체를 분배할까..하는 별로 의미 없는 것이다.

 

레지오 마리애의 전산화: 이것도 잘못 들으면 oxymoronic한 구절이 아닐까. 절대적인 성모마리아께 대한 순명의 정신으로 무장한 이 거룩한 평신도 단체는 언제까지 ‘낭비적인 시간’을 허용할 것인가? 로마군단의 효율적인 체제를 본 받으려면 현재에 가능한 온갖 ‘도구’를 다 써야 할 것이 아닐까? 여기서 ‘도구’란 물론 digital tool을 말한다. 물론 computer가 그것이다. 예전에는 computer하면 막연히 desktop system을 뜻했지만 지금은 아주 다양해졌다. 여기에는 물론 Internet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모든 것들이 ‘연결’이 되었고, 무서운 기세로 연결이 되어 가고 있으니까. 이제 이 ‘도구’는 누가 어떻게 먼저 자기 목적에 맞게 쓰는가가 관건이 되었다.

얼마 전에 나의 예상을 뒤엎고, 연숙이 본당소속 꾸리아의 부회장에 피선이 되고 말았다. 전부터 나는 레지오 평의회에서 봉사하는 것을 극구 말리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평화로운 시간’을 가지고 싶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해야 하는 ‘봉사적’인 직책이지만, 우리에게는 아직도 덜 바쁜 시간이 필요함을 잘 알기에 나는 반대를 한 것이다. 또한 직책의 ‘과정’도 중요하지만 ‘결과’도 중요함을 나날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어떤 직책의 ‘일’이란 것이 사실은 ‘타협, 양보, 조절’의 기술이 나머지 것들 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나이가 들어가면서’ 알게 되는 것이다. 헌신적으로 일을 할 자격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극구 말렸지만, 본인의 의사는 별로 반영이 되지 않게 피선이 되었으니.. 이제는 현실로 받아야 할 듯하다. 한마디로 나에게도 영향이 있다는 뜻이다. 나는 비록 평 단원이지만 부부로써 옆에서 가만히 보고 있을 수도 없지 않는가? 그래서 첫 번째로 연숙이 가지고 온 ‘일’ 중의 하나가, “레지오 멤버들의 관리” 에 제일 중요한 레지오 <행동단원 복무기록부> 를 정리하는 일이 되었다. 아주 두터운 3-ring binder에 꾸리아소속의 거의 모든 단원의 신상기록이 있는데, 물론 이것을 ‘전산화’ 하려는 것이고, 그것을 첫 과정이 data entry가 아닌가? 가장 쉬운 Excel-format으로 시작을 하는데, 역시 문제는 한글, 영어가 섞어야 하는 조금은 복잡한 데이터 들에 있고, 불완전한 record, 고유한 개개인의 아이디(id)등인데 이것은 아마도 본당의 교적부의 database를 참고로 하면 좋을 듯하다.

이것이 시작이지만, 그 이외에 예상할 수 있는 ‘과제’는 적지 않다. 제일 내가 눈독을 들이는 것은 모든 서류양식을 writable-pdf 화 하여 computer screen에서 직접 입력을 하게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런 것들이 역사 깊은 레지오에서 이미 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온통 인터넷을 뒤져 보았지만 심지어 Ireland(아일랜드)의 레지오 세계 총본부에서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format file을 download-print해서 손으로 쓰는 것이다. 그러니까 ‘종이’는 아직도 계속 써야 하는 실정인 것이다. 아직도 나는 이해를 할 수가 없다. 그렇게 digital gadget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고국의 레지오도 마찬가지로 이곳은 거의 아래아 한글(hwp format)로 된 것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이것이 현재의 레지오 단원 평균 연령층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활발한 레지오 연령대는 어느 곳에서나 시간이 조금은 여유가 있는 세대일 것이다. 그들은 거의 장년층일 것이고 아무래도 그들은 젊은 세대보다는 technology에는 덜 익숙하지 않을까? 꾸리아 레벨에서 산하 쁘레시디움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려면 ‘정보적인 도움’이 아주 중요할 것이다. 기계적인 일들은 모두 computer에 맡기고 그 시간에 더 생산적인, 창조적인 일을 하는 것이 더 유익하지 않을까?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이 cloud-model로 가는 마당에, 이것을 database application으로 바꾸고, 그것을 webify(web application으로 바꿈) 해서 모든 ‘단원, 임원’ 들이 “위치에 상관없이” 볼 수 있고, 쓸 수있게 하는 것이 제일 좋을 듯하다.

 

 

Catholic Sunday, etc..

WYD: Word Youth Day 2011, Madrid, Spain, 일요일 아침, 근처에 있는 ‘미국 본당(Holy Family CC)’ 주일미사를 가기 전에 잠깐 뉴스를 봤더니, WYD(World Youth Day: 세계청년대회, 스페인 마드리드)의 토요일 밤 vigil mass중에 찌는 듯이 더운 날씨가 돌변을 해서 천둥과 벼락, 폭우가 쏟아 졌다고.. 며칠 전에 미국 Indianapolis, Indiana에서 열린 커다란 야외 집회 중에 갑자기 몰아친 돌풍으로, 높이 세운 구조물(scaffoldings)이 쓰러져서 다수의 사망자 까지 나왔던 일이 생각이 났다. 미사 후에 집에 돌아와 자세히 읽어보니 다행히 큰 사고는 나지를 않았던 모양이다. 이것이야 말로 Thank God..이라고 해야 할까.

이 뉴스는 사실 ‘세속적’인 뉴스 채널을 통해서 보았다. 이런 곳에서는 어떻게 이번 행사를 보며, 느낄까 궁금하기도 해서다. 분명한 사실은 이것이다: ‘교황이 가는 곳은 이들 세속적인 뉴스 매체가 꼭 관심을 갖고 따라다닌다’ 라는 사실이다. 역시 바티칸은 ‘정치적’인 위치도 잃지 않고 있다. 그만큼 교황의 ‘말씀’은 아직도 ‘세계적’으로 영향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또한 알게 된 것은 ‘보수적인 추측’ 으로 예상했던 참가한 젊은이들의 숫자가 50만 명이었는데, 결과적으로 거의 100만 명이라는 사실이다. 암만 생각해도 이것은 대단한 숫자가 아닐까? 정말 정말 대단하다. 이들은 역시 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영향을 듬뿍 받은 젊은 세대인 것이고, 다시 한번 그분의 ‘선견지명’에 놀랄 뿐이다. 이 백만 여명의 젊은 ‘세대’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그 주변을 바꾸어 놓을 가능성을 생각하면 아직도 이 세상에는 ‘희망’이 있어 보인다. 다음의 이 대회는 2년 후인 2013년 Rio de Janeiro, Brazil에서 열린다고 발표가 되었다. 3년 후인 2014년에 열릴 예정이었지만 그 해에 그 곳에서는 4년 마다 열리는 세계인의 대 축제, World Cup Soccer가 열려서 부득이 일년을 앞 당긴 모양이다. 다시 ‘흑자, 호경기 재정’으로 돌아선 브라질은 이래 저래 좋은 소식만 가득하게 되었다… 부럽다.. 그들이..

 

 

맥시밀리안 콜베 성인
맥시밀리안 콜베 성인

성인: 맥시밀리안 콜베 (Maximilian Kolbe),  오늘 주일 미사는 대학의 catholic center(보통은 Newman Center:대학 내 가톨릭 공소, 라고 함)의 신부님께서 방문자의 자격으로 집전을 하셨다. 갑자기 ‘젊은’ 공기가 성전을 가득 찬 기분이었다. 우선 말씀의 ‘속도’가 엄청나게 젊었다. 그만큼 빨랐던 것이다. 다음 젊은 목소리, 그것도 에너지가 충만하고, 한 단어 단어가 뚜렷이 구별되는 확실한 영어.. 이것도 새로웠다. 아마도 모두들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우리 본당 주임신부님은 이맘때면 ‘휴가 차’ 그의 고향인 Dublin, Ireland에 가신다. 가셔서 ‘공개적’인 안부 엽서까지 주보에 실렸다.

오늘 방문 신부님은 맥시밀리안 콜베 성인의 축일이 지난 8월 14일이었음을 상기하고, 그 성인의 ‘유적지’를 찾아 본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그 유적지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2차 대전 당시 그’죽음 공장’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나치 집단수용소. 어찌 이 이름을 잊으랴. 나는 중학교 1학년 때 ‘멋도 모르고’ 그 당시 나왔던 기록 영화 ‘(히틀러의) 나의 투쟁‘ 을 보고 처음 그곳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어떻게 그런 영화가 ‘학생입장 대환영’ 이었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 역사, 교훈적일지는 몰라도 준비가 덜 된 ‘아이들’에게 그런 ‘시각적으로 끔찍한’ 것은 너무나 너무나 ‘충격적’인 것이다. 모든 것을 알게 된 이 나이에서 그것을 다시 보라고 해도 망설여질 정도인데.. 어떻게 어린 중학생들에게 그것을 보게 했을까? 공상영화였다고 해도 충격적인데 그것이 실제로 이 지구상에서 ‘얼마 전에 벌어진 전쟁 범죄’였다는 사실.. 그 당시에도 믿어지질 않았다. 그 희생자 중에 오늘의 주인공인 ‘신부’ 맥시밀리안 콜베 성인도 있었다.

아우슈비츠에 기차로 도착을 하면서, 그 옆 철길에는 아직도 집단 학살될 유대인 가족들이 도착하는 ‘짐짝 기차’가 그대로 ‘전시’ 되어 있음을 보고 생각하셨단다.. 화장실, 좌석, 아무것도 없는 화물열차로 도착하던 그 불쌍한 가족집단들.. 어린이들의 울음소리..그것도 역시 another Kafka moment 였을 것이다. 역사가 어떻게 비틀어지면 그런 상상을 초월하는 현실들이 일어났을까? 천 년 전의 ‘우매, 잔인한’ 몽골전쟁이 아닌 바로 70년 전의 ‘생생한,역사의 잉크도 채 마르지 않은’ 전쟁 중에..

맥시밀리안 성인의 이야기는 얼마 전 우연히 역시 연숙의 책 중에서 잠깐 본 것이었다. Boniface Hanley 저, Ten Christians이라는 책이었다. 이 10명의 그리스도 인들은 예수의 삶을 살려고 발버둥쳤고, 결국은 우리들에게 어떻게 현재를 살아야 하는지를 몸으로 보여준 그런 분들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분도 있고, 그 반대로 전혀 알려지지 못한 분들도 있지만, 공통적으로 우리 인생의 선생님’으로 사신 분들인 것이다. 그 중에 맥시밀리안 콜베 ‘성인’은 ‘현대적 순교’를 하심으로써 기독교 사랑의 극치를 가르치신 case다.

프란치스코회의 신부였던 그는 수용소에서 짐승 같이 날뛰던 SS들 (비밀경찰)에 의해서 약물로 죽임을 당했다. 그의 죄는 탈출한 동료들 대신 보복적으로 뽑혀서 죽게 될 사람 중의 한 사람을 살리고 대신 그 자리를 맡아서 ‘굶어 죽는 형벌’을 자청한 것이다. 대부분 일 주일 후에 굶어 죽었지만 그는 3주를 더 버티었는데 그것도 모자라 나치SS는 약물로 그를 죽인 것이다. 그 때문에 살아나게 된 운 좋은 ‘죄수’는 그의 남은 여생을 끝까지 살게 되었다. 나치즘과 공산주의를 끝까지 비판하며 천국으로 가신 이 성인은 정말 지금에도 거룩한 인생의 선생님이시다.

 

아틀란타 한국성당, 완전히 분가, 그 동안 아틀란타 한인 천주교 공동체의 숙원이었던 ‘또 하나의 다른 성전’의 꿈이 이제 완전히 이루어졌다. 이것은 그 동안 여러 차례의 노력 끝에 이번에 임기를 마치고 떠나신 안정호 이시도리 신부님의 ‘단행’으로 결말을 본 것이다. 시기적으로 좀 늦은 감도 없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늘어나는 천주교 신자, 예비자들을 적절히 수용할 기회를 놓쳤다는 평도 있었다. 기존의 한인타운의 한 중심에서 그 역할을 100% 수행했던 구 성전이 이제는 조금씩 불편하게 느껴졌던 차에 조금은 활짝 넓은 공간에 새로운 성전이 마련 된 것이다.

새 성전은 사실 제2의 한인타운이 되어가는 동북부 교외지역(Duluth, Suwanee)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그쪽으로 새로 유입하는 ‘은퇴세대’ (주로 뉴욕지역으로부터) 를 중심으로 ‘졸부 급’의 신흥 ‘벼락부자’들이 진을 치고 있어서, 경제적, 연령적으로 보아도 아주 안정된 여건을 갖추고 있다. 물론 그런 여건이 ‘신심적’으로 활발할 지는 확실치 않지만..

덕분에 기존 성전은 조금 여건이 나아질 것으로 짐작이 된다. 신자수가 그 만큼 (약 200~300명?) 정도 여유가 생기니까, service나 사목 활동에도 조금 기를 펴고 여유가 생길 것이다. 한가지 문제점은 여러 가지 신심단체들이 거의 ‘강제적’으로 분할이 되어야 하는 것인데 이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지혜를 가지고 해결을 할 문제이다. 내가 속한 레지오 도 2명 정도가 (그것도, 단장, 부단장) 그쪽 지역에 속해 있어서 조금은 염려가 되기도 한다.물론 주일 미사는 새 성전으로 가고 신심단체는 바꾸지 않아도 되긴 하겠지만, 그것은 장기적으로는 문제가 없지 않을 것이다.

 

세계청년대회, WYD 2011 Madrid, Spain

World Youth Day 2011 Madrid, Spain
World Youth Day 2011 Madrid, Spain

WYD: World Youth Day .. 이것이 한국어로 “세계 청년 대회” 라는 것을 오늘에야 알았다. 조금은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1984년에 시작된 이 세계적인 가톨릭 행사를 이제야 이제야 관심을 가지고 ‘보고 듣게’ 된 것이 나로써는 조금 늦은 감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라도 이렇게 관심이 가고 알게 된 것도 다행이라고 위안을 한다.

올해 이것에 관심을 가지고 ‘기다린’ 것은 사실 여러 가지의 원인이 함께 도움이 되었다. 이 행사가 시작된 것은 다름이 아닌 내가 제일 신앙적으로, 인간적으로 존경하는 전 교황,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이시다. 그는 어떻게 이런 행사를 생각을 하고 실행을 했을까? 희망은 역시 젊은이들에게 있다는 ‘절박한 진리’ 때문이었을까? 믿음 하나로 공산주의를 꺾고, 인류의 꺼지지 않는 희망의 등대였던 그.. 진정한 범 세계적인 세계인, 지도자.. 그가 남긴 유산 중에 가장 오래 갈 것은 바로 젊은이의 등대인 이 행사가 아니었을까? 희망은 역시, 역시, 젊은이들에게 있다는 것이 바로 진리이다.

지독한 피상적인 물질주의와 인기, 인본주의에 찌들은 요새의 유행문화를 어찌 그들, 젊은이들이 피해갈 것인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nano-second, 찰나의 기쁨을 추구하려는 그들에게 어떻게 누가 무엇이 장차 그들 앞에 다가올 현실일까를 가르쳐 줄 것인가? 허무.. 허무 뿐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이 행사의 전개되는 것을 보니 조금은 요새 보기 드문 희망이 보이기도 한다.

 세계적으로 오십만 명 이상이 온다는 것은 장난이 아니다. 정말 그들이 어떤 것을 느끼고 보고 갈 것은 크게 추측을 할 필요도 없다. 그들의 인생을 바꾸기도 할 것이다.그들이 어떻게 이 세상에 ‘이바지’ 할 지는 크게 의심할 필요도 없다. 잠깐 잠깐, 상상과 꿈의 나래를 피어본다. 내가 20대 초반의 옛날로 돌아가서, ‘반종교적’ 이던 나의 그때와는 달리, 가톨릭 신자로써 이곳에 참가를 한 그런 꿈이다. 수십만  명의 ‘동료’, ‘친구’, 젊은이들을 보며 그들과 그곳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서 존경하는 교황을 직접 듣고 본다는 꿈.. 그때 느낀 것들을 두고 두고 생각하며 나의 젊은 인생을 시작한다면.. 나의 인생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물론 어려운 위기도 많이 겪었겠지만.. 분명히 내가 가는 길에 대해서는 필요이상 방황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조금은 덜 외로웠을 것이고, 최소한 ‘인생의 (최후의) 목적’ 만은 알고 살았을 것이다. 나아가서 내가 추구했던 이상, 전문적인 일들, 가족들과의 관계도 조금은 덜 후회를 남게 하지 않았을까?

 이런 꿈에서 깨면 을씨년스러운 현실로 돌아온다. 나를 성당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려고 십 년이 넘도록 기도하며 도와 주었던 우리 식구들, 연숙과 두 딸들.. 그런 10년이 넘는 기다림 끝에 나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두 딸들이 떠났다. 이번에는 나와 연숙이 그들을 기다리며 기도를 하게 되었다. 이것이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왜 우리 두 딸들은 그렇게 ‘야멸차게’ 성당을 떠나야만 했을까. 그런 나이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를 하지만 이렇게 WYD같은 세계적인 행사를 보면서 참 안타까운 것이다. 왜 우리 두 딸들이 그 속에 있지 못한 것일까? 왜 그렇게 쉽게 세속문화,찰나 문화에 빠져야만 할까? 기다려 본다. 나 같이 남을 그렇게 오래 기다리게 한 case도 있지 않은가?

 이번 미국에서 가는 청년의 수는 무려 2만 여명으로 사상 최대이고 한국에서도 천 여명 이상이 참가한다. 내가 사는 이곳 아틀란타 대교구에서도 백여 명 이상이 참가를 한다고 이곳 가톨릭 신문에서 보았고 그 중에는 우리 한국본당,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여대생도 있었는데, 예쁜 얼굴의 Georgia State University 학생이라고 했다. 성당을 떠난 우리 두 딸만 보다가 이런 ‘다른’ 젊은이들을 보는 것이 요새는 나의 ‘낙’이 되었다. 거의 흡사 무슨 ‘젊은 성인들’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인 것이다. 지난 6월 달, 이곳 아틀란타 한국본당의 레지오 피정에서 그런 젊은 성인’들을 나는 room-mate로 직접 가까이 보기도 했다. 그들의 부모들은 우리와 다르게, 어떻게 ‘신앙교육’을 시켰던 것일까? 그들 부모들이 그 들에게 어떤 role-model로 비쳤기에 그렇게 ‘모범적’이었을까?

한국 주교회의 웹사이트에 따르면, ‘세계청년대회, WYD: World Youth Day‘는 다음과 같이 요약이 된다.

세계 각지에 있는 가톨릭 젊은이들이 2년 또는 3년에 한번 개최 교구(도시)에 모여 그리스도교의 가치를 확인하면서 함께 축제를 지내는 모임이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젊은이들을 격려하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 속에 살게 하고자 개최한 젊은이들의 축제이다. 1984년과 1985년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로마의 성 베드로 광장으로 세계의 젊은이들을 초대하였다. 그 뒤 1985년 12월 20일, WYD 협회를 구성, 1986년에 처음으로 공식 WYD가 열리게 되었고 1987년에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두 번째 WYD가 개최되었는데 이로써 2년 또는 3년 만에 개최하는 정기적인 국제 대회가 되었다.
세계 곳곳의 많은 나라에서 모여 온 젊은이들은 가톨릭교회의 가치인 보편성과 다양성을 확인하며 함께 어우러진다. 젊은이들은 그들의 신앙과 경험을 나누고, 자기들의 고국에 그리스도의 가치인 사랑과 평화를 전파할 수 있는 활기를 얻는다.
또한 서로 자기 나라의 문화를 소개하고 다른 문화를 이해하게 되는 기회를 자연스럽게 갖는다. WYD는 세계 도처에 평화와 상호 이해의 정신을 표현하는 대회이다. 젊은이들은 자기들의 나라와 지역의 깃발을 흔들 때, 깊은 공감을 맛보며 이 체험 속에서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한다.

 

 

아.. 윤용하(尹龍河) (교우)님이여

1972년 경향잡지, 윤용하 교우님에 대한 기사
1972년 경향잡지, 윤용하 교우님에 대한 기사

아주 우연히 옛날 옛적의 대한민국의 유일무이한 가톨릭 월간 , 1972년 8월호를 인터넷으로 보다가 귀에 익은 노래제목이 눈에 띄었다. “보리밭 사잇길로..” 였다. 물론 이것은 그 당시 대중 유행가로 불렸던 가곡 가사의 첫 부분이었다.

흔히 말하는 유행가가 아니고 오래 전에 작곡이 되었던 가곡을 인기 여가수 문정선씨가 유행가로 편곡이 된 것을 부른 것이 그 당시 크게 인기를 얻었던 것을 생생히 기억한다. 이 경향잡지 기사의 제목은 사실 “복음의 증인들” 이라는 연재 기사로서 제목은 “보리밭 사잇길로: 작곡가 윤용하(요셉) 일대기” 였다. 그러고 보니 작곡가 윤용하(尹龍河) 라는 이름이 조금은 기억이 나는 듯 했다.

우선 이분이 나와 같은 천주교 신자였다는 사실이 뜻밖이었다. 그래서 우선 반가웠던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무엄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 문득, 윤용하 형제, 교우님” 이라고 부르고 싶어졌다. 이 잡지 기사는 그다지 길지 않지만 ‘일대기” 라고 부제를 부칠 정도로 이분의 전체적인 일생을 간략하게 묘사를 해 놓았다. 이 기사는 아주 엄숙하고 심지어 처절하게 시작을 한다.

 

예술가는 가난했다.
찢어지게 가난하면서도 빈이무원(貧而無怨) 가난을 원망하지 않고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그 처참한 곤비(困憊) 속에서도 신앙과 순수와 낭만을 지킨 작곡가 윤용하(尹龍河, 요셉)는 죽어서 이름을 남겼다.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으면 이렇게 일대기가 시작되었을까? 1922년에 태어나고 1965년에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43년을 사신 것이다. 이것은 그 당시 기준으로 보아도 너무 일찍 가신 것이라 우선 가슴이 아프다. 그 당시를 살아본 경험은 그 당시 가난하고 병이라도 있으면 참 불운한 생을 보내야 했을 것이라는 것,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분도 과음으로 인한 간경화로 돌아가신 듯 한데, 왜..라는 것보다는 어찌 그렇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더 들 정도로 이해를 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얼마 전에 나의 blog에 썼던 이진섭씨에 관한 글이 생각났다. 이진섭씨도 술로 인해 명을 다 채우지 못하시고 가신 것이다. 나이도 비슷하니 비슷한 격동기를 사신 분들이어서 자꾸만 여러 가지로 비교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두 분의 인생, 일생은 너무도 달랐다. 그 두 인생은 어디에서 왜, 어떻게 바다와 같이 넓게, 멀어져 갔을까?

 이 기사를 읽으며, 나는 너무도 안타깝고 나중에는 답답한 심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돌아가신 후 세월이 지나면서 더 알려지게 된 것도 그렇다. 사후의 그런 때늦은 ‘예술가로서 인정 받음’을 왜 생전 시에는 못 받았을까? 그랬으면 그렇게 가난과 싸우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더 오래 사시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안타까움이 나를 괴롭혔다. 그래서 더 이 불운의 ‘천재’ 예술가에 대해서 알아보게 되었는데.. 바라는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이규태 조선일보 논설위원은 그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집으로 찾아가서 본 것을 이런 글로 남겼는데 흡사 천재작곡가 모차르트의 죽음을 보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 윤용하가 40대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는 부음에 접했다. 보도의 필요성에 쫓겨 빈소를 찾는 데 신문사의 기동력을 동원했지만 한 번지에 수천 호가 잡거하는 판자촌인지라 이틀을 넘겨서야 찾을 수 있었다. 이 천재가 누워 있는 곳은 판잣집도 못 되는, 종이상자를 뜯어 여민 단칸방의 거적 위였다. 미의 순수한 응어리가 저렇게 이승을 마칠 수 있었던가 가 원망스러웠던 세 번째의 만남이었다.

 이 천재적인 수준일지도 모르는 예술가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그렇게 상세하지를 못하다. 아마도 그를 알고 지냈던 인물들 대부분이 일말의 책임감을 조금이라도 느껴서 밝히기를 꺼려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물론 각자의 운명은 우선 각자 자신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 하지만 환경적인 것도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 예술가가 다 가난했던 것도 아니고, 가난했다고 다 병들어 죽는 것도 아니다. 숙명, 신앙, 순수, 낭만.. 이런 것들 만이 과연 불우한 삶을 마칠 수 밖에 없었던 윤용하씨의 대명사가 될 수 있을까? 다음의 음악 평론가 이상만씨의 글은 나를 다시 더 슬프게 한다.

얼마 전 그의 유족들이 보관하고 있던 그의 비망록을 살핀 일이 있다. 300원 500원,… 거기에는 만년에 그가 폐인 되다시피 하여 이곳 저곳 구걸하러 다닐 때에 추념을 해 주었던 사람들의 이름과 액수가 적혀 있었다. 대부분 동료 음악인들의 이름이 거기에 적혀 있었는데, 어떤 어떤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가 하는 호기심보다도 그 비망록이 그렇게 소중하게 간직된 까닭이 사뭇 나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다. 친구들의 신세를 졌지만 그 신세 갚음을 잊지 못하고 눈을 감은 사람이 윤 용하였다.

 위에 언급한 1972년 가톨릭 경향잡지의 기사를 보면 다른 각도로 본 님의 불우한 생의 마침을 보게 되어서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이 당시 자녀들은 나이가 몇 살이었을까? 아마도 어렸을 듯 한데, 그들을 두고 떠나야 하는 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누가 보아도 용하의 병색은 완연하였다. 용하가 간장질환으로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당시의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가 그를 성모병원에 입원시킬 생각으로 성모병원의 의사를 그의 필동 셋방살이 단칸방에 보내었으나 이미 때가 늦어 치료를 받아도 회복될 가망이 없었다. 용하는 입원되는 줄 알고 좋아했는데 앰블란스가 그냥 돌아가는 것을 보고는 크게 실망하더라고 한다.
병상에 누운 지 3개월, 최 모이세(광연) 신부에게 최후의 성사를 본지 사흘 만에 아내와 어린 남매를 두고 조용히 운명하니 1965년 7월 23일이었다.
26일엔 명동 대성당에서 영결 미사를 지내고 금곡리 천주교 묘지, 먼저 간 그의 부친 무덤이 마주 보이는 곳에 안장되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보면 아무리 님의 음악에 대한 재능과 열정, 공헌을 높이 사고 싶어도 가정적으로 한 가장으로써는 완전한 실패인 인생일 것이다. 다음과 같은 윤용하 평전을 읽으면 한층 그런 나의 생각이 굳어진다. 

윤용하, 그는 태어나서 한번도 그의 소유로 된 집을 가져본 일이 없다. 운명하는 순간에도 남산 중턱 움막판자집 단칸셋방이 이승의 마지막 현주소였다. 그는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을 등진 후 유전만을 거듭했을 뿐, 다시는 한번도 고향 땅을 밟아보지 못한 실향민이었다. 그는 장남으로 태어나 철이 들면서 부터 부모와 다른 오 남매 동생들과 더불어 함께 한 일이라곤 없는, 그가 살다간 시대만큼이나 불행한 유랑인 이었다.
그가 명색이 작곡가라면서 생전에 자신의 작곡 집 한번도 내보지 못한 부실한(?) 예술가였다. 그는 모든 것을 술로 풀어버리려고 술에 함몰 당해 부인마저 집을 나가버릴 정도로 초탈한 생활무능력자였다.

 

 이렇게 아주 듣기에 거북할 정도의 냉정한 글도 모두 사실일 것이다. 본인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을 것이고 그러다 술로 모든 것을 잊고 싶었을 것이다. 이해는 가지만 절대로 찬성을 할 수 없는 생활방식이 아닐까? 그런 환경에서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아야만 했을까? 아닐 것이다. 나의 어머님도 육이오 때, 남편을 잃고 우리 집 두 남매를 여자의 몸으로 다 키우셨다. 그것은 아마도 우선가정을 지켜야겠다는 책임감이 제일 크게 작용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렇게 재능을 가시셨고 음악계에서 활동을 하셨던 분이 그렇게 경제적으로 가정을 지키지 못하고 끝내는 자신까지 희생을 해야만 했던가? 이것은 정말 비극중의 비극이다.

 이렇게 거의 체념과 체질에 밴듯한 ‘가난의 생’은 아마도 님의 선조들로부터 물려 받은 유산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님의 부친 대에 이르러 대원군 당시의 천주교 박해를 피해서 심심유곡(황해도 구월산)에서 옹기를 구워가며 살게 된 것을 보면 짐작이 간다. 신앙을 고수하려는 천주교 신자들의 모습인데 어찌하여 이들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겠는가? 이런 불안한 환경 속에서 자란 님은 사실 이때부터 ‘떠돌이’ 기질이 배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시 이진섭씨와 같이 술을 ‘통제’ 못한 것은 결국 병과 일찍 타계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다음 글을 보면 그의 시대, 울분, 신앙심 등이 조금 짐작이 간다. 

그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가 삶을 회고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그의 ‘신앙’과 ‘작곡’과 ‘술’ 이었다. 그가 살던 시대가 시대인지라 그가 막걸리를 들지 않는 날은 이상한 날로 꼽힐 만큼 현실의 불만이나 불우한 처지를 술로 달래며 기염을 토하곤 하였다. 그는 안주 없이 술을 마시는 걸로 유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술을 아무리 마셔도 주정을 하지 않고, 마실수록 조용해지고 수줍어지는 것이 그의 특징이었다. 하지만 술로 인해 자신의 신앙 생활을 게을리 하지는 않았는데, 사순절 기간인 40일 동안만은 술을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던 사실로 그의 신앙심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천주교 신앙을 죽을 때가지 간직한 윤용하 교우님, 교회 음악에도 관심을 가지시고, ‘조선인’들의 음악 활동을 그 어려운 때 만주에서 조직, 활성화하려고 노력을 하였는데, 이것을 보면 그의 ‘저돌적, 동키호테적’ 인 면모가 엿보인다. 그래서 그는 역시 ‘어쩔 수 없는 ,자유인 예술가’ .. 그것이 아니었을까? 일반적인 ‘사회란 굴레’에서도 못 견디었을 자유인..그런 그가 어떻게 ‘학벌과 연줄’이 판을 치던 곳을 술 없이 견딜 수 있겠는가? 다음의 글을 보면 그 만의 ‘졸업장’에 대한 독특한 고민을 볼 수 있다. 

광복 직후 나라가 새로 세워지면서 모든 분야에 인재들이 필요했다. 인재들을 키워낼 고급 인재들은 더욱 모자랐다. 그래서 중.고등학교 졸업장과 대학 졸업장이 공공연히 돈으로 거래되었다. 많은 동료가 그 길로 갔고 그들은 용하 형에게도 그 길을 권했다. 그는 거부했다. 초등학교 5학년 중퇴가 그의 정규학력의 전부였고 그래도 그는 그의 천부적 재능으로 10대 말의 나이에 이미 어엿한 작곡가이자 방송국 교향악단 지휘자의 경력을 쌓았다. 대학교수가 되어 가르쳐야 할 그에게 세상은 초.중.고등학교와 대학 졸업장을 요구하고 그것도 부정한 방법으로 구해 오도록 강요했다. 예술적 재능과 노력보다는 학력과 졸업장 그리고 연줄이 더욱 위력을 발휘하는 풍토에서 그는 변두리로 변두리로 밀려났다.

휴전 직후 문화예술인단체의 3.1절 기념식장 소동도 상징적 사건이었다. 내로라하는 문화예술계의 거물들이 기념식을 마치고 다과회를 열고 있었다. 하필 그들은 그날 그 자리에서 일본말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떠들었다.

이미 술이 거나해 있던 용하는 “예끼, 이 똥만도 못한…”이라 고함을 지르면서 테이블을 뒤집어엎어 수라장을 만들어 놓고 휑하니 사라졌다. 그러니 그는 발붙일 곳이 없어졌다.

 

윤용하 님께서 젊은 시절 활약할 당시의 ‘조선 음악인’들은 거의 현재 한국의 음악계를 주름잡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님의 재능을 한결같이 인정을 하고 있다. 특히 제일 가까이에서 ‘자랐던’ 오현명씨의 증언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역시 거의 드라마에 가까운 비극적인 이 ‘인생 역마차’ 는 어떻게 생각하여야 할까? 한 사람은 남산 중턱의 번지 없는 판자집에서 치료 제대로 받지 못하며 젊은 나이에 요절을 하고, 다른 사람은 대한민국 음악계의 중심에서 ‘건강’하게 활약을 하는 이런 것이 현실이었다니.. 물론 그이 주변에서 ‘도움’을 주셨을 분이 있었을 것이라고 믿고 싶지만, 그래도 어떻게 이렇게 생을 마치도록 내버려 두었을까?

 

 

노래는 즐겁다 – 윤용하 작곡

 물론 ‘보리밭’이라는 유명한 가곡을 남겼지만, 그것보다 나는 이분이 동요 <노래는 즐겁다>의 작곡자라는 사실을 알고 더욱 더 이분을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들이 국민학교를 다니던 1950년대, 전쟁 후의 황량하던 그 어린 시절, 이런 추억의 동심 어린 아름답고, 주옥 같은 노래를 남겨주신 것이다. 그 당시 우리들, 이 동요를 부르고, 들을 때면 정말 그야말로 즐거운 마음이 되었다. 그리고는 어떠한가? 광복절만 되면 이 노래를 열심히 도 불렀다. 누가 작곡했는지도 모르고.. <나뭇잎 배>란 동요도 기억을 한다. 여자아이들이 즐겨 불렀던 것이라 나는 그다지 부르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아내 연숙에게 물어보니 아주 애창곡이었다고.. 덧붙여 ‘심각한 가곡’ 인 고독’이란 가곡도 들어 보았다. 어떻게 이런 곡이 그 동안 숨어있었을까?

1965년에 돌아가셨는데, 세월은 님을 역시 알아보게 되었고, 2005년에는 ‘윤용하 기념사업회‘ 까지 발족이 되어서 역사에 남게 되어서 그 동안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아가게 되는 모양이다. 가실 때가지 간직하신 신앙이 자랑스럽고, 남겨주신 주옥 같은 동요, 가곡들도 자랑스럽다. 천국에서도 이런 것을 아시고 조금이나마 만족을 하시리라 생각하며 다시 한번 님의 명복을 빈다.

 

한여름 ‘게으른 독서’의 즐거움

한 여름의 무더위가 한창이다. 고국은 아마도 이맘때 쯤이면 장마가 한창이지 않을까.. 하지만 전혀 감이 없다. 그저 수십 년 전의 서울의 모습을 회상을 하면서 떠 오른 이맘때면 아마도 매일 ‘구질구질’하게 내렸던 비, 그것이 장마가 아니었을까 하는 정도다. 이제는 해변가의 하~얀 모래 백사장을 본 것도 아주 오래되어간다. 그 찬란한 여름의 햇살아래 펼쳐진 푸른 파도와 하얀 백사장.. 그것이 여름의 맛일 것이다. 그곳에 못 갈 것도 없건만 다른 한편, 그렇게까지 가고 싶지도 않다. 한마디로 귀찮은 것이다. 이럴 때, 최고의 낙은 역시 게으르게 뒹굴며 읽는 책들이 아닐까?

이것은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summer reading이란 말 조차 있지 않던가? 오래 오래 전, 서울 용산구 남영동에 살던 중앙고 2학년 시절이 그랬다. 입시준비의 압력이 오기 전해 여름방학 때, 그야말로 시원한 마루바닥에서 누워서 읽던 책들.. 이것이 바로 ‘독서의 즐거움’의 진수일 것이다. 무언가에 쫓기지 않고 그야말로 ‘재미로서의 독서’, 그것이다. 그때 제일 재미있게 보았던 것은 그 흔하던 ‘삼국지‘였다. 그래서 이제는 아예 삼국지..하면 1964년 여름의 남영동 집 마루가 생각나는 것이다.

올해 나는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몇 권의 책을 준비하고 읽고 있는데, 현재까지 거의 2권을 읽었다. ‘피서의 효과’가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 옛날에 느꼈던 ‘게으름’은 조금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영어 판 Dan Brown의 <The Da Vinci Code>와 시오노 나나미(塩野七生)의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의 한역 본이 그것인데, 두 권 다 ‘재미’ 있기는 하였으나, 끝 맛은 개운치를 않았다.

우선 2003년에 나와서 “시끌벅쩍” 하게 화제를 뿌리고 그에 따라 돈을 ‘억수’로 벌었던 다빈치 코드.. 몇 년 후에는 영화까지 나왔던 그 책이다. 왜 시끄러웠냐 하는 것은 나도 안다. 문제는 그 당시에 나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아주 마음이 상한 것이다. 재미있는 소설을 쓰는 것은 좋은데, 그 것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을 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았을까?

거의 사실을 가장해서 쓴 ‘허구’ 이지만, 자칫하면 소설이라는 것을 잊을 수 있을 정도이다. 이것이 만약 이슬람교회를 주제로 했다면, 그들의 이제까지의 경험을 보아서 아마도 암살단이 곧바로 이 저자의 저택으로 쳐들어 갔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이 가톨릭을 이렇게 비하한 것은 기독교의 기본 사상인 ‘원수를 사랑하라’ 라는 사상을 역 이용했을 지도 모르겠다. 피해를 보았자 그저 흔한 ‘법정소송’ 정도였을 것이다. 이래서 나는 이 저자를 개인적으로 ‘증오’ 하기로 했다. 아무로 $$$가 좋기로 서니.. 이렇게 악랄할 수가 있을까?

시오노 나나미,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

70대의 일본인 여성 시오노 나나미(塩野七生)의 한역 본은 우선 번역이 아주 산뜻하게 잘 되어있어서 읽는데 쾌적하였다. 아마도 일본 글과 한글의 유사성이 번역이란 거창한 과정을 아주 쉽게 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글이라도 원저자의 ‘문필 체’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저자의 배경을 잘 알지 못한 상태에서 나는 우선 저자가 역사학자인줄로 잘 못 알았다. 그런 시각에서 보니 아주 부자연스러운 점이 너무도 많았다. 암만 ‘이야기 체’로 썼다고 하지만 ‘객관적’인 역사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저자의 정치,역사 철학이 많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야기 체로 그 긴 역사를 풀어 쓴 ‘솜씨’는 가상하지만 거의 맹목적일 정도로 ‘로마인을 찬양’ 하는 것은 조금 다시 저자의 의도를 생각하게 하였다. 역사와 문학을 거의 의도적으로 접목을 시키고 상업적인 흥미를 유발하는 듯한 냄새, 거기다 저자의 은근한 feminism까지 곁들여, ‘매력적인 로마의 남자’들을 부각시킨 것들을 보면서 참, 너무나 상업화된 출판계 현실도 거슬린다. 얼마나 많은 부분에서 저자는 ‘이 남자, 저 남자’를 거론했는가. 왜 그들이 남자임을 그렇게 밝혀야만 하는가? 그것은 심지어 번역자까지도 합세해서 ‘멋진 남자’들을 강조한다. 저자가 결론으로 내놓은 것에 나는 아연실색을 하게 되었는데.. 골자는 이것이다. 현재까지의 로마 역사가 기독교의 영향으로 필요이상으로 ‘악하게’ 그려졌다는 것이다. 이것도 역시 공산주의적 유물론적 탈 신앙적인 저자의 발상인 듯 싶다. 그것과 더불어 로마사의 대가들을 ‘비판, 의심’하는 것은 아무리 저자가 1970년부터 이탈리아에 살면서 로마를 느꼈다고 하지만 너무한 것이 아닐까.. 저자는 역사’과학’자가 아님을 자꾸 잊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