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은 푸르고나~

¶  어린이날 유감   달려라, 냇물아~ 오월은 푸르고나~ 반세기전 어린이날이면 목청이 터져라 신나게 부르던 어린이날 노래, 참으로 (19)50년대의 어린이날은 신바람 나던 하루였다. 실제로 그날 집안에서도 학교에서도 ‘물질적인 대우’를 받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날을 만든 방정환 선생님께 마음 속으로 감사하고 감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어린이날이란 것도 역시 ‘표절’ 이었다. 일본 아해들 것을 그대로 날짜도 똑같이… . 서슬이 푸르게 벤또, 구루마, 도라무 깡 같은 일본 말을 금시 시키고, 화강암 중앙청(일제 강점 때의 조선총독부 건물)을 헐어버리면서, 어떻게 날짜도 똑같은 일본의 어린이날은 그대로 두었을까? 혹시 아니면 방정환 선생의 5월 5일 어린이날을 우리가 먼저 만들고, 일본 아해들이 나중에 표절을 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동양에서 제일먼저 개화를 한 그들이 먼저 만들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하지만 일년에 하루를 ‘어린이 전용’의 날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지 않을지.

 

¶  푸르고, 따뜻한 어머님 같은 5월 인가, 온통 포근한 어머님의 손끝과 숨결을 느끼고 싶은 그런 달이 바로 5월이다. 날씨 또한 가족과 가정이란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하기에 어울리는 화창하고, 포근하고, 때로는 비에 젖는 잔잔함과 외로움까지 멋지게 조화를 이루어준다.

가톨릭의 삶을 다시 살게 되면서 5월은 또한 예수님의 어머니 성모님(마리아)의 달, 그러니까 ‘성모성월’ 임을 느낀다. 또한 나의 그립고 사랑하는 어머님의 기일도 5월이어서 불효자로서 감정적으로 거의 주체하기 힘들 때도 있다. 나는 ‘가장’ 아버지의 기억이 전혀 없고 (6.25때 납북) 따라서 어머니란 존재는 나의 생명, 가족의 생명이나 다름이 없었다. 전쟁 후의 험난한 세상에서 만약에 어머님께 무슨 일이 생기면 친척이 거의 없었던 우리 집 남매는 하루아침에 길거리의 고아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육이오 전쟁 후에 가장, 아버지를 잃은 집이 부지기수로 많았고, 그래서 아버지가 있던 집은 우선 행복한 가정이었다지만 그에 못지않게 절대다수 홀 어머니들의 가족에 대한 희생과 헌신은 지금 생각하면 상상을 초월한, 전설적이고 초인적인 것이었다. 최소한 우리 세대는 ‘절대로’ 그 고귀한 사랑, 헌신, 희생의 역사를 잊지 못하고 또한 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조금 접으면 갑자기 싸늘한 현세의 현실로 돌아온다. 요새의 부모님들, 특히 ‘엄마’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또한 그들의 자식들은 어떤 인간들인가.. 부모들은 자식들을 예전처럼 별로 보살피는 것 같지도 않고, 자식들 역시 부모 세대를 우습게 보는 것이 거의 전염병같이 cool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도대체 요새의 이상적인 부모와 자식의 모습은 무엇인가? 돈 많은 부모, 돈 잘 버는 자식인가?

 

 
1950년대 ‘국민학교’시절의 동요, 어머님 은혜 

 

터키 멘데레스 수상 서울방문 추억

멘데레스 수상 환영
멘데레스 수상을 기다리며, 1958년 4월 25일

멘데레스 수상.. 엄청 지난 세월에도 그 이름만은 기억을 한다. 멘데레스, 정확히 말하면 1958년 당시 터키 수상 멘데레스, 그가 아시아 순방길에 서울에 들린 것이다. 그 당시에 외국의 수상급이 한국에 온다는 것은 사실 큰 뉴스거리였다. 그만큼 외국에서 올 만한 거물급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창 전쟁을 겪은 거의 폐허로 변한 찌들게 가난한 나라에 무슨 일이 있어서 온단 말인가? 설령 누가 꼭 방문을 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어도 곤란한 것이, 그렇게 높으신 분이 묶을 변변한 숙소, 그러니까 호텔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유일한 호텔은 시청 근처에 있던 반도호텔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추억에, 나는 서울 재동국민학교 5학년이 갓 되었을 때였다. 하루는 담임 선생님 (이원의 선생님) 께서 외국에서 ‘대통령’이 오신다고 하시며 그 나라의 국기를 다같이 그리자고 하셨다. 나라의 이름은 ‘털기‘ 라고 했다. 이것이 조금 웃기는 추억이었다. 도대체 ‘털기’가 무엇인가.. 우리는 한바탕 웃고 그저 ‘먼지 털기‘ 로 연상을 해 버렸다. 국기는 초생 달이 있는 것이었다. 그 당시 우리의 유일한 뉴스의 원천은 이런 식으로 학교에서 듣는 것인데, 신문은 한자가 너무나 많아서 읽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고, 우리들도 그 나이에 그런 ‘정치뉴스’에 별로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나중에 털기라는 나라는 정확하게 ‘터키’였고, 신문에서는 한자로 ‘토이기(土耳基)‘라고 쓰기도 한, 육이오 동란 때 유엔군 16개국의 일원으로 전투사단을 보내어 이미 우리땅에서 피를 흘렸던 나라임을 알게 되었다. 또한 당시의 세계정세로 미국, 소련의 냉전 하에서 공산진영과 민주진영으로 ‘완전히’ 갈린 상태에서 터키는 우리나라와 같은 쪽에서 빨갱이와 대적한 입장이고 보니, 이승만 대통령과 터키 수상 멘데레스는 자연스레 가까운 사이가 된 것이다. 그 당시, 미국이 소련 공산주의의 확대를 막기 위한 전략으로 아시아에서는 서쪽 끝으로는 나토, 터키 를 출발로 해서 월남, 자유중국(대만), 한국(과 일본)를 동쪽 끝으로 거대한 방어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 나이에 외국의 ‘우두머리’가 온다는 것과, 그 분을 환영하러 우리들이 거리로 나간다는 사실은 사실 신나는 소식이었다. 우선 거리로 나가려면 학교 공부를 빼먹어야 한다는 것이 제일 신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거리로 나가서 거물급들이 탄 차들을 보는 것도 신났다. 하지만 일단 거리로 나가서 환영을 하려면 그들의 차들이 지나가는 몇 시간 전에 나가서 기다려야 하는 고역을 겪어야 했다. 또한 목이 빠지게 기다리다가도 차들이 지나가는 시간은 불과 몇 초도 걸리지 않았으니, 참 허무하기도 했다. 그 몇 초를 위해서 몇 시간을 목이 빠지기 기다렸으니.. 그 다음날 가도에서 멘데레스 수상을 기다리던 우리들의 사진이 신문에 나왔다고 집에서는 난리가 났었다. 심지어는 내가 사진에 나왔다고까지 했다. 그것이 조금은 우리 집의 ‘역사’가 되어서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다. 나는 그 신문을 본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무언가 비슷한 것이 실렸었을 것이라고 짐작은 하면서 54년이 흐른 것이다. 그것을 지금 그 당시의 신문을 다시 보게 되면서 확인을 할 수 있었다. 분명히 우리들이 사진이 나왔고, 그것은 1958년 4월 26일자 동아일보 (나는 경향신문으로 알았다) 였다.

문제는 그 사진을 암만 보아도 나의 존재를 확인 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신문의 사진은 원래 바로 찍은 것을 보아도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아주 해상도가 ‘저질’에 속하는데 그렇게 오래 전의 것은 더 나쁠 것이니 말이다. 또한 그 때의 경향신문을 지금은 볼 수가 없는데, 아마도 그곳에 내가 있는 사진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그때의 생생한 기록과 사진을 찾은 것만 해도 큰 수확인 것이고, 이 사진을 보면서 그 당시 우리들의 ‘꾀 죄죄’한 모습들이 너무나 반가운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그 당시의 그 두 거물 이승만 대통령과 터키의 멘데레스 수상 모두 몇 년 후에 정권에서 쫓겨났다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960년 4.19 학생 혁명으로 물러났고, 멘데레스 수상은 같은 해, 군사 쿠데타로 실각, 체포, 나중에는 사형까지 당했다. 참 역사는 이런 것인가.

 

Stars of 64

Star of 64

1964년 한국 최고의 여배우: 전계현, 엄앵란, 김혜정, 태현실, 방성자

 

이들이 누군가? 한눈에 알아보았다. 반세기 전에 보았던 신문 속의 흑백사진, 아직도 나의 뇌리에 남아있었다. 1964년 1월 1일 동아일보에 실렸던 설날 특집기사 중의 하나, ‘새해의 꿈’ 에서 그 당시 ‘최고의 여배우 5명‘ 들이 1964년에 바라는 꿈을 짧게 적어놓았다. 글 보다는 역시 이 사진이 이 기사의 주역이었다.

기억한다. 그 당시 동아일보는 ‘매년’ 1월 1일에 그 당시 최고 인기 여자배우들 5명을 뽑아서 큼직하게 사진과 함께 그들의 이야기를 싣곤 했다. 그런데 내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것이 바로 이사진이었다. 다시 보고 놀란 것이, 내가 기억한 것이 ‘거의’ 정확했다는 사실.. 이것이 star power일까.. 그리고 50년이나 지난 현재의 미(美)의 기준으로 보아도 이들은 아직도 멋진, 미인들이라는 사실이다.  

왼쪽부터, 전계현, 엄앵란, 김혜정, 태현실, 그리고 방성자.. 정말 그들은 그 당시 어린이, 어른 상관없이 사랑을 받던 우리들의 ‘멋지고 예쁜’ 누나들이었다. 그들은 과연 어떠한 인생들을 살았을까?

 

Young LoversPaul and Paula – 1963
젊은 연인들‘ – 당시를 풍미하던 ‘old fashioned love’  oldie

 

John Glenn, the Right Stuff

John-Glenn-1962

1962년 2월 22일자 동아일보의 1면 기사, 존 글렌의 미국 첫 지구궤도비행 성공뉴스

 

The Right Stuff.. 책과 영화의 제목.. 미국의 우주개발 초창기 때에 관한 얘기들, 특히 첫 프로그램이었던 머큐리의 7인 우주비행사 (우주비행사를 미국에서는 astronaut, 당시의 소련에서는 cosmonaut라고 했다) 들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바로 50년 전, 그러니까 반세기 전, 오늘이 이 프로그램의 절정에 해당하는 기념일이라고 할 수 있다.

1962년 2월 20일은 소련에게 완전히 선두를 빼앗겼던 미국의 첫 완전 지구궤도 비행이 성공한 날이다. 그 우주인이 아직도 90세로 건재한 한국전에도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했던, 해병대 중령출신인 존 글렌, John Glenn, 그는 1969년에 달에 사상 최초로 착륙한 Neil Armstrong과 같이 Ohio주 사람으로, 나중에는 오랫동안 연방 상원의원으로 정치를 했고, 한때는 미국 대통령으로 출마를 하기도 했다.

The Right Stuff의 영화를 보면 짐작이 가듯이 그는 7인의 astronaut중에서도 유별나게 ‘도덕적, 신앙적’인 사람이었고, 그런 곧디 곧은 성품으로 전 인생을 보낸 셈이고 90세인 지금의 나이에도 전혀 나이에 의한 장애를 느끼지 않는 듯한 그야말로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보인다. 나는 이 미국의 첫 지구 궤도비행 성공 소식을 서울에서 중앙중학교 3학년이 시작되기 전 2월에 신문과 라디오 방송으로 들었다.

미국, 소련의 심각한 냉전의 공포 속에서 두 초강국은 우주경쟁을 전쟁의 연장으로 보았다. 하지만 초창기부터 이것은 미국의 절대 열세였다. 1957년의 Sputnik 소련 인공위성을 필두로 Yuri Gargarin의 사상 첫 소련 우주인 탄생 등등 계속 소련의 연전 연승이었다. 그럴 때, 미국은 로켓을 쏘아 올릴 때마다, 거대한 화염에 싸여 곧 추락을 하곤 했다. 한마디로 미국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젊고도 젊었던 40대의 케네디가 대통령이 되고, NASA가 본격적으로 가동을 하면서, 이렇게 John Glenn의 성공적인 첫 궤도비행이 탄생한 것이다.

소련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 이것은 별 것이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미국과 미국인들에게 끼친 심리적인 효과는 정말 상상을 초월한 것으로 보인다. 조금 자신감이 생긴 것이고, 케네디 대통령의 “1970년 전까지 인간의 달 착륙과 귀환” 공약까지 나오게 되고, 결국은 이것을 출발점 으로 1969년 여름에 달에 착륙을 함으로써 미국의 승리로 끝나게 된 것이다.

1962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space program은 정말 흥미진진한 것이었다. 나는 곧이어 중앙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 같은 반에 있던 윤태석이 수시로 가져다가 교실 뒤의 벽에 붙여놓은 우주 프로그램의 총천연색 화보 (아마도 미국 공보관을 통해서 나온 것)를 보면서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게 되기도 했다.

그 당시의 신문을 다시 보게 되면서, 그때의 우리들을 생각한다. 그전 해(1961년)에 5.16군사혁명으로 박정희 의장시절이었다. 그러니까 민정으로 이양이 되기 전, 군사혁명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해서 모든 것이 통치되던 시절이었다. 경제는 말도 아니었고, 미국 원조 수준은 떨어지고, 휴전선 너머에는 살이 더 찐 김일성 개XX가 침을 질질 흘리고 있고.. 철전지 원수 일본은 우리 동족간의 전쟁 덕분으로 날로 부강해지고, 급기야 올림픽을 눈앞에 두었고, 우리는 구차스럽지만, 일본에게 돈을 꾸어달라는 외교를 해야만 했던 그런 시절.. 하지만 박정희는 ‘한가지를 향해서’ 뒤도 안 보고 달리기 시작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럴 때, 우리에게는 ‘평화의 십자군’ 으로 보이던 미국에서 이런 신나는 소식이 온 것이고, 따라서 우리는 박수 갈채를 보내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리고 우리도, 무언가 앞으로 ‘잘 풀릴’ 것이라는 그런 희망들이 조금씩 싹트기 시작한 시절이기도 했다.

 

 Bert Kaempfert – “Wonderland By Night”
‘밤하늘의 트럼펫’, 그 당시의 hit instrumental melody  

 

김두철, Ash Wednesday

¶  우등 한번 못해본 서울대 수석합격: 김두철을 다시 찾았다. 나의 재동국민학교 동창, 3학년과 6학년 때 같은 반이었고 특히 6학년 때는 나와 같은 ‘1 분단’에 있기도 했던 ‘머리 좋은’ 동창이다. 나의 재동국민학교 추억에 관한 blog에서 잠깐 언급을 했었는데, 그 당시에는 100% 나의 머리 속에 남아있던 기억력으로 쓴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의외의 도움(Internet, what else?)으로 그의 이름을 다시 보게 되었다.

1966년 2월 중순경의 일간지는 서울 주요 대학입시 합격자 명단이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 조그만 기사 중에 김두철의 사진과 이름이 보였다. 그 것이 동아일보였는데, 지금 생각을 해 보니 아주 어렴풋이 그 기사를 그 당시 나도 본 것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반세기가 가까이 되는 엄청난 과거였으니.. 역시 확실하지는 않다. 그 기사는 김두철이 서울대학 ‘전체 수석’ 합격자 였다는 기사였다.

김두철 서울대 입시 전체수석, 1966그는 서울공대 전자공학과를 지망했는데, 거의 만 명이 넘는 지원자중의 수석 합격자였던 것이다. 국민학교 시절, 김두철은 ‘항상 일등, 우등생’이었는데, 아마도 경기중,고에 진학하면서 1등은 별로 못했던 듯, 우등을 못해본 수석합격이라고 기사는 강조를 했다. 본인이 ‘점수벌레’를 싫어 한다고 했지만, ‘의외로 수석’이 되었다고.. 참 이렇게 부러운 친구가 있을까? 그러니까, 별로 ‘노력을 안 했어도’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 아닌가?

이런 심리는 아마도 ‘일류 심리’에서 비롯 되었을 듯 하다. ‘거의 항상 top’으로 일관을 했으니, 크게 자랑스러운 것도 없다는 뜻일까? 평소의 실력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 조금은 거슬리기도 하지만, 어찌하랴.. 그렇게 태어났으니. 이 기사로 나는 그가 나와 같이 ‘납북자’ 가정, 편모슬하의 외아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지만 우리 집과 다르게 그의 어머니는 이화여대 교수(金蓮玉, 당시 41세)였다. 그의 아버님은 서울 공대교수로 재직 중 육이오 동란 시 납북이 되셨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과 참 비슷한 환경이었다.

국민학교 시절에는 그런 것을 전혀 모르고 지냈다. 게다가 기사는 김두철이 절대로 ‘공부벌레’가 아니라는 것으로, ‘산 사나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의 장기는 rock climbing이라고.. 기자조차 부러운 듯이 “힘껏 공부하고 맘껏 노는 화려한 대학생활”을 예상했는데, 과연 그는 어떻게 대학생활을 했을까? 그는 지금 어떤 ‘업적’으로 이름을 ‘크게’ 남겼을까 궁금하다.

 

¶  뼈 속으로 스며드는 듯한 차가운 안개 비가 하루 종일 나리는 2월, 중순이 완전히 접히고 하순으로 접어드는 일요일, 무슨 꿈에서 깨어나는 듯이 놀란다. 어느새 2월의 삼분의 2가 없어졌나? Groundhog Day, Lincoln’s Birthday, Valentine’s Day.. 모두 지나갔다. 내일은 President’s Day,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화요일은 Legio (Mariae) Tuesday인 동시에 Mardi Gras, 그러니까 그 다음날 수요일이 중요한 날인 것이다. Ash Wednesday(재의 수요일)인 것이다.

작년에 비해서 올해는 새해부터 거의 예외 없이 high note로 지내왔다. 그러니까, euphoric하다고나 할까? 이 나이에 ‘신난다’는 표현은 어불성설이고, 아마도 ‘잔잔히 들뜨는’ 그런 기분이라고나 할까? 지난 10년간 항상 나는 depression속에서 살았다고 ‘나의 역사’를 만들었지만 지난 한 달여를 보면서 아마도 나는 서서히 그런 길었던 ‘동면’의 기간에서 나오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몇 가지의 ‘단순한 계기나, 이유’로 그렇게 어두운 터널에서 나왔다고는 절대 생각 치 않는다. 그 이상의 무엇이 작용을 했을 것이다. 이것은 나뿐이 아니고 나의 반려자도 같이 느끼는 듯 하니까, 아마도 맞을 듯 하다. 그 이상의 것은 과연 무얼까?

ash-wednesdayAsh Wednesday, 재의 수요일, 2월 22일은 2012년 부활절 (Easter) 전까지 교회력으로 40일간 계속되는 Lent (사순절)의 시작이다. 예수님의 Passion (수난)을 거치며 부활의 절정에 이르는 기독교신앙의 절정기에 속하는 정말 중요한 40일이 수요일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개신교는 어떨지 몰라도, 천주교는 아주 ‘겸손, 절제, 회개’로 이 시기를 보내게 되는데, 이제는 나도 조금 익숙해져서 미리 생각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재의 수요일 바로 전날은 Mardi Gras (Fat Tuesday)는 ‘고난의 40일’ 전에 마음껏 ‘세속의 맛’을 느끼자는 축제의 절정인데, 이곳에서는 New Orleans (Louisiana주) 의 Mardi Gras 축제가 유명하다. 재의 수요일 미사에서는 작년의 Palm Sunday에 썼던 palm tree leaves(종려나무 잎)을 태운 것을 기름이나 물에 섞어서 신부님께서 신자들의 이마에 십자가를 그려주신다. 대부분 저절로 없어질 때까지 이마에 그것이 보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 재는 아마도 이런 뜻이 있을 것이다. 창세기 3장 19절(Genesis 3:19)의 “Remember that thou art dust, and to dust thou shalt return“.. 그러니까 사람은 먼지에서 왔다가 먼지로 돌아 간다는 뜻이 아닐까?

이날로 시작되는 사순절, 40일을 올해는 어떻게 보낼까? 회개와 절제와 고행.. 말은 간단하지만 실제로 하려면 복잡해진다. 회개는 물론 고백성사를 통해서 공식적으로 할 수 있지만, 다른 것들은 개개인마다 천차만별일 것이다. 어느 해에는 좋아하는 커피를 완전히 끊기도 했고, ‘절대로’ TV를 안 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의 요점은 역시 왜 그렇게 하는가를 묵상하며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역시 성경을 중심으로 한 ‘영적인 공부’가 중요할 것이다. 또한 나는 레지오 단원이라서 이것 외에도 하려면 할 것이 너무도 많다. 얼마나 의지력을 가지고 실행을 하는 가 그것이 문제일 것이다.

 

유지호, 나의 원서동 竹馬故友

Number 1 죽마고우, 유지호
죽마고우 제1번, 유지호 1980

유지호, 나의 원서동(苑西洞) 죽마고우(竹馬故友)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친구, 별로 잊고 산 적이 없는듯한 착각도 든다. 헤어져서 못 보고 산 세월이 꽤 오래되었지만 그런 사실과 상관없이 아직도 가슴 아련히 찐~하게 느껴지니 참 어릴 적 친구는 별수가 없다. 그 녀석을 정말 오랜만에 얼마 전 꿈에서 생생히 보았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그 녀석, 유지호와의 어린 추억을 회상한다.

사실 나의 블로그 에서 옛 친구들을 그리며 쓴 글이 꽤 많이 있었지만, 몇몇 친구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쓸 엄두를 내지 못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너무나 감정이 복받친다고 나 할까, 심지어 괴로울 것 같아서 미루어 온 것이다. 친구 유지호가 바로 그런 친구 중에 하나라고나 할까.. 그런데 정말 오랜만에 그를 꿈에서 보게 되었고, 잘못하면 못 보고 죽을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과 함께, 이제는 더 미룰 수 없는 생각이 들었다.

 지호, 유지호(柳池昊).. 구수한 얼굴만 생각해도 정겹게 느껴지는 친구, 이 친구와 이렇게 일생을 떨어져 살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이 1980년1월 나의 결혼식 때였을까.. 마지막 소식은 우리 어머님께서 그 해 5월쯤 그 녀석의 딸이 태어났을 때 병원으로 찾아가셔서 본 때였고 그 이후 우리는 소식이 끊어졌다.

그 이후 우리 어머님은 항상 지호의 안부를 걱정하셨다. 심지어는 혹시 죽은 것이 아닐까 하시기도 했다. 그리고 인생이라는 커다란 수레바퀴에 치어서 정신 없이 살아온 것이다. 한동안 여러 군데로 수소문을 해 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이 지호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지호는 친구 중에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친구다. 물론 우리들은 너무 어려서 기억이 안 나지만, 어머님으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숨은 사연이 있었다. 원래 육이오 동란 전에 지호의 아버님과 우리 아버님은 친구였던 것 같고 (우리 아버지는 지호 아버님을 ‘원동 친구’라고 불렀다고 함, 원동은 지금의 원서동), 전쟁 발발 후에 두분 다 납북행렬에 끼어서 북으로 끌려갈 때, 지호 아버님은 구사일생으로 탈출을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아버님이 납북되신 것을 우리 어머님께 알리셨던 것이다. 그러다가 1.4 후퇴(1951년 1월 4일) 당시 지호네 식구는 모두 피난을 가게 되었고, 우리 집은 그대로 원서동에 남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 지호의 나이가 (나와 동갑인) 두 살밖에 되지 않아서 그랬는지 우리 어머님께 임시로 맡기고 전라도 지방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아버지가 납북되신 후 거처가 마땅치 않았던 어머님께서는 우리 집 남매, 그리고 지호를 데리고 원서동 비원 담 옆 텅 빈 지호네의 커다란 한옥의 사랑채에서 머물며 우리들을 돌보셨는데, 나중에 지호는 전라도로 피난 간 가족의 품으로 갔다가, 휴전 후에 다시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원서동에서 살게 되었다.

지호와는 이런 우리가 기억할 수 없는 묘한 인연이 있었다. 어머님의 추억에, 그 길게만 느껴졌던 지호네 사랑채에서의 생활이 참 무서웠다고 한다. 젊은 여자 혼자서 어린 애들 세 명을 데리고 텅 빈집에서 전쟁을 겪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아슬아슬하고, 무섭게 느껴지곤 했다. 그래서 어떨 때는 지호가 우리 집 식구처럼 느껴지곤 할 때도 있었다. 나의 가장 오래된 지호에 대한 기억은 역시 원서동의 개천을 사이에 두고 살던 국민학교 1학년 시절이 아닐까..

우리는 승철이네 집에서 세 들어 살고, 지호네는 비원 담을 끼고 있던 커다란 한옥에 살았다. 그때의 지호는, 우리와 별로 다른 것이 없었다. 구제품 옷을 입고 신나게 개천을 중심으로 뛰어 놀았다. 지호와 우리가 뚜렷이 달랐던 것은, 그의 말투였다. 분명히 우리와 다른 말투.. 알고 보니 그것은 바로 전라도 사투리였다. 전라도에 잠깐 피난 생활을 하면서 배운 것이다. 우리들은 그것을 가지고 신나게 놀리곤 했다.

 비원에서 흘러나오는 비교적 맑은 원서동 개천은 그 당시 우리들 꿈의 놀이터였다. 여름이면 시원한 물장난, 종이배 띄우기, 목욕을 할 수 있었고, 겨울에는 더 신나는 썰매타기, 빙판에서 팽이 돌리기를 하며 놀았다. 하지만 지호는 그런 것 이외에도 개천을 좋아하는 이유가 더 있었다. 바로 “폐품수집” 이었다. 개천가에는 군데군데 폐품, 심지어 쓰레기까지 버린 곳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더럽다고 피하는데 지호는 그곳을 열심히 뒤지면서 ‘보물’을 찾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런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었지만 어른들은 더럽고, ‘거지같다’ 고 핀잔을 주곤 했다.

 원서동에서 가까운 국민학교는 옆 동네에 있는 재동(齋洞)국민학교였고, 대부분이 그곳을 다녔지만, 이상하게도 지호는 낙원동 덕성여대 옆에 있던 교동(喬桐)국민학교를 다녔고, 우리 집에 같이 살던 승철이네 누나 시자 누나도 교동국민학교엘 다녔고, 졸업을 했다. 사실 왜 그곳을 다녔는지 그 이유를 모르지만, 학군에 관한 정확한 법적 제한이 없던 시절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건재한 재동국민학교와 달리 교동국민학교는 비교적 일찍 폐교가 되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중고등학교는 지호 아버님이 서무부장으로 근무하시던 계동(桂洞) 입구의 휘문(徽文) 중 고교를 다녔는데, 중학교 시절에 철봉을 하다가 잘못 떨어져서, 팔이 골절되는 바람에 일년을 휴학을 해서 나보다 1년 늦게 (1967년) 졸업을 하였다.

내가 원서동에서 가회동으로 국민학교 4학년 때 이사를 가는 바람에 헤어지고 말았지만 그래도 연락은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었다. 한가지 특기사항은 나에게 그 당시 친구들이 많았지만 그들 서로가 다 친구는 물론 아니었다. 심지어는 지호와 다른 친구들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을 때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나의 다른 절친한 죽마고우인 안명성과 지호의 아주 설명할 수 없는 관계였는데, 간단히 말해서 그들 서로가 좋아하지 않는 그런 사이였다.

그 가운데 내가 있어서 가끔 모두 만날 때에도 느껴지는 분위기기 별로 좋지 않았다. 그래서 나중에 나는 이들과 별도의 관계를 유지하기에 이르렀다. 지금도 생각을 한다. 왜 그들은 그렇게 서로 좋아하지 않았을까? 뚜렷한 이유가 없었는데..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지호보다 명성이와 더 가깝게 중 고교 시절을 보내게 되었지만, 육이오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역사 때문일까, 무언중에 서로의 우정에는 추호의 변함도 없음을 서로 느끼며 살았다.

 중 고교 시절, 지호네는 육이오 때부터 살던 오래된 원서동 집을 새로 아주 깨끗하고 중후한 느낌의 한옥으로 개축을 하였다. 그 당시 동네에서 아마도 가장 멋진 한옥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식구 수에 비해 방이 많아서, 항상 직장인 하숙생을 두고 있었는데, 언젠가는 방송국의 기술자 (아마도 엔지니어)가 하숙을 들어 살았는데, 가끔 그의 빈방을 우리는 몰래 들어가 보기도 했다. 그 당시, 아마도 고교 1년 때, 나는 한창 라디오를 중심으로 전기,전자 쪽에 관심이 많을 때여서 각종 전기,전자 부품으로 가득 찬 그 방의 책상설합을 보는 것은 즐거움이었다. 게다가 TV가 귀하던 그 시절, 그 하숙생 아저씨는 아주 옛날 것으로 보이는 동그란 스크린을 가진 흑백 TV 수상기가 있어서 비록 화면은 엉망이지만 그것으로 권투 중계 같은 것도 보곤 했다.

그 ‘악동’의 시절, 더욱 흥미로웠던 기억은 지호와 광순 형(지호의 형)으로 부터 들었던 ‘이웃집 여자 담 넘어보기‘ 이야기였다. 바로 이웃집에는 ‘화류계’ 여자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마당에 나와서 목욕하는 것을 본 것이다. 그 당시는 개인 집에 목욕탕이 거의 없어서 공중 목욕탕을 쓰는데, 더운 여름에는 어두운 밤에 마당에서 목욕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숫제 대낮에 나와서 목욕을 한 모양으로, 지호와 광순형이 손에 땀을 쥐고 담을 넘어 엿본 것은 완전히 김홍도의 그림같은 이야기가 된 것이고, 아직도 생생한 지호의 손에 땀을 쥐게 하던 이야기가 귀에 쟁쟁하다.

상도동 우리집에서, 1968
상도동 우리집에서, 1968

1966년 봄이 되면서 지호와 ‘지리적’으로 가까워지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우리 집이 연세대 1학년 초, 용산구 남영동에서 영등포구 상도동으로 이사를 갔는데. 그 당시 이미 지호네는 원서동에서 상도동 김영삼의 집 근처의 멋진 양옥으로 이사를 가 있었던 것이다. 지호 아버님이 이전에 무진회사(당시의 금융회사) 출신으로 수완이 좋으셔서 그랬는지, 큰 수입이 없으신 것처럼 보였는데도 아주 크고 멋진 집을 잘도 구하셨다.

나의 집은 비록 전세였지만 완전히 단독주택으로 그 당시 상도동 숭실대학 앞, 버스 종점 옆에 있어서 지호네 집은 걸어가도 될 정도로 가까웠고, 방 두 개의 작은 우리 집에서 그 녀석의 ‘파란 잔디에 별채까지 딸린 커다란 저택’에 가서 노는 것은 아주 즐거운 일이었다.

 지호는 휘문고를 졸업하고 일차대학에서 낙방을 했는지, 한전(한국전력 주식회사) 산하의 수도공대에 입학을 하였는데, 서로 학교가 다르고, 학교 환경에 의한 관심사와 대학 친구들이 달라서 생각만큼 자주 만나지는 못했어도, 한번도 연락이 끊기거나 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생각이, 이 녀석은 친구라기 보다는 나의 친척 같은 느낌을 줄 때가 많았다. 친척이야, 자주 못 보거나, 잠시 헤어져도 그 기본적인 관계는 없어지지 않기에 바로 우리들의 관계가 그것과 비슷했던 것이다.

 지호는 그 당시 나이에 비해서 조금 느린 듯 하지만, 대신 여유 있고 폭 넓은 행동과 인간 관계를 유지하는 느낌을 주었다. 느린듯한 인상은 그 나이에 맞는 유행이나 멋 같은 것에 남보다 둔감한 편이고 그것은 옷이나 유행 같은 것에서 그가 좋아하는 것들을 보면 쉽게 짐작이 되었다.

그가 알고 지내는 사람들을 보면, 나 같은 비슷한 나이가 비슷한 사람들 이외, 나이와 배경 같은 것이 다른 사람들과도 잘 어울렸다. 대학시절부터 지호는 CCC (Campus Crusade for Christ) 라는 김준곤 목사가 이끄는 개신교 대학생 선교단체에 관련이 되어서, 나도 끌리다시피 그곳에 몇 번 가보기도 했다. 나는 아직도 지호가 그때 그렇게 신앙심이 깊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 당시 그는 아주 진지하게 활동을 하곤 했고, 흔히 생각하듯이 여학생을 만나기 위해서 그곳에 들어갔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 당시 CCC는 명동입구 부근에 어떤 빌딩의 옥상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나도 지호와 몇 번을 가보았다. 지호는 이미 AS (Athletic Society, 체육부)라는 부서의 멤버로 활약을 하고 있었고 그곳에서는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 당시 신앙적으로 너무나 유치해서 그곳에서 하는 신앙적인 활동에는 큰 관심을 없었고, 그저 대학생들, 그것도 꽤 많은 여대생이 있는 것만 관심이 있었다. 이곳에서도 역시 지호는 ‘인심 좋은 아저씨’ 같은 인상이었다. 이사람, 저 사람 할 것 없이 편하게 사람들과 사귀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 나이에 비해서 성숙한, 하지만 부정적으로 표현하면, 조금 ‘영감’ 같은 그런 지호의 모습이었다.

 

‘I Am a Rock’Simon & Garfunkel – 1966 – Live
그 당시 둘이서 즐겨 ‘따라’ 부르던 smash hit oldie 

 

이때에 일어난 잊지 못하는 일이 하나 있었다. 내가 가끔 발동하는 ‘악동기질’을 발휘해 지호에게 부탁을 해서 CCC소속 여대생들의 주소를 얻어낸 것이었다. 그때가 아마 1968-1969에 걸친 겨울 방학이었을 것인데, 그때는 거의 매일 광화문 근처에 있던 교육회관 지하다방2에서 살다시피 할 때였는데, 장난기가 발동해서 주소록에 있는 몇몇 여대생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그 다방으로 불러낸 것이었다. 편지는 ‘연세춘추3에서 보낸 것처럼 하고, 무슨 설문조사(대학생의 팝송취향)를 한다고 꾸며 댄 것이었다. 내가 아이디어를 내고 내가 편지를 쓰고 보내고 했지만 내가 보아도 거의 ‘완벽’한 각본이었다. 그때 다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나와, 양건주, 이윤기 등이었는데, 물론 이들은 ‘주저하는 공범’이 되고 말았다.

솔직히 나는 그 당시 너무나 심심해서 한 장난이었고, 그들이 나오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들이 모두 나왔다는 사실이었고, 물론 그들과 ‘설문조사’까지 해야만 했다. 이구동성으로 그 여대생들은, 혹시 속는 것이 아닐까 하고 나왔다고 했고, 우리들의 ‘진지한 모습’에 안심을 했다고 했다. 그제야 나는 무언가 우리들 너무 장난이 심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모두 나의 ‘잘못’이었다.

 이 ‘연극사건‘은 사실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때 내가 편지를 보낸 여대생 중에는 CCC와 상관이 없었던 전에 잠깐 알았던 윤여숙(창덕여고, 이대 생물과) 이라는 여대생도 끼어있었는데 나의 최대의 관심사는 사실 그녀가 나올까 하는 것이었다. 사실 전혀 기대를 안 했던 것인데, 놀랍게도 그녀가 ‘편지를 들고 출현‘을 한 것이었다.

우리와 만나서 ‘설문조사’를 했던 여대생들에게는 편지로 우리가 기다리는 위치를 미리 알려주었지만, 윤여숙씨 에게는 카운터(계산)로 와서 찾으라고만 해 두었는데, 역시 그곳에 편지를 들고 나타났던 것이다. 나는 너무나 놀라서 얼굴도 못 들고 옆에 앉아있던 이윤기에게 그녀가 어떻게 하고 있느냐고 묻기만 한 것이 고작이었다. 카운터에서 편지를 들고 그녀가 화를 내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제서야 내가 너무 지나친 장난을 했구나 하고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아버지가 경찰관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때의 이 ‘지나친 장난’은 두고두고 잊지 못하는 추억이 되었고, 후회를 하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을 하니 그 나이에 그런 악의 없는 장난은 조금 애교 있게 보아도 되지 않을까?

 

관악산에서, 1968
관악산에서, 1968

연세대 2학년 시절, 나는 연호회라는 남녀 대학생 클럽에서 활동을 했다. 말이 활동이지.. 그저 남녀 대학생들끼리 만나는 것이 주목적인 조금은 맥 빠진 듯한 클럽이었지만, 그 나이에 젊음을 발산하는 알맞은 역할을 하기도 했다. 활동이란 것에는, 정기적으로 다방에서 만나는 것, 야외로 놀라가는 것 등, 주로 ‘노는 것’ 이외에도, 조금은 심각한, 말도 그럴듯한 ‘견학’이란 것도 있었다. 그러니까 조금 공부하는 활동인데, 우리들이 유일하게 성사시킨 것이 ‘동양방송국 견학‘ 이었다. 그 당시 동양 방송국, TBS는 삼성재벌 산하의 아주 큰 언론기관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우리가 간 곳은 서소문에 있던 동양 텔레비전 방송국이었는데, 그것을 성사시킨 것이 바로 지호였다. 지호가 알고 있던 어떤 ‘아저씨’가 그곳에서 엔지니어로 일을 하고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다. 그 아저씨는 역시 지호네 집에서 하숙을 하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지호는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사람들을 많이도 알고 있었다.

 대학 3학년 (1969년) 때 즈음, 지호 아버님의 환갑잔치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시골은 물론이지만 서울에서도 환갑이란 것은 집안, 친척의 경사요, 동네의 경사이기도 할 정도로 나이 60세를 장수한 것으로 여길 때였다. 그때가 1969년 경이었으니까, 지호 아버님은 아마도 1909년 생이셨을 것인데, 우리 아버님이 1911년 생이셨으니까, 우리 아버님보다 나이가 위셨다. 나는 그 잔치에 특별히 관심은 없었지만 지호가 스냅사진 좀 찍어달라고 해서 갔고, 우리 어머님도 잠깐 들리셔서 돈 봉투를 놓고 가셨다. 나는 사실 처음 환갑잔치에 갔던 것인데, 신발 표까지 나누어 줄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도 왔다. 그때 지호네 친척들이 또한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가족들 마다 모여서 합동으로 절을 하였고, 그런 것들을 그 당시에 고가였던 플래시를 써서 모두 찍었는데, 상당히 많은 양의 사진을 찍고 다녔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아마추어’ 자격으로 찍은 것이고, 프로 사진기사가 와서 정식으로 사진을 다 찍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프로 사진기사가 찍은 사진이 무언가 크게 잘못되어서 모두 못쓰게 되었다고 해서, 결과적으로 내가 찍은 사진이 ‘완전히’ 환갑기념 공식사진으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 그 사진들이 내가 보아도 괜찮게 나왔던 것이다. 만약 이날 내가 사진을 찍지 않았더라면 그 큰 환갑잔치의 모습들은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계기로 사진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게 되기도 했고, 두고두고 그 지호 아버님의 환갑잔치는 머리에 사진처럼 남게 되었다. 특히 지호 아버님, 기분이 좋으셔서 커다란 안방에 사람들에 둘러싸여 덩실덩실 춤을 추시던 모습, 지호의 형 광순형 또한 완전히 만취가 되어서 나를 붙잡고 ‘기분 좋게’ 술주정을 하던 모습 등등.. 참 기억하고 싶은 잔치였다.

 1970년 (대학 4학년) 쯤에는, 항상 폭넓은 친구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지호를 통해서 나는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원서동) 친구들과도 다시 만나게 되기도 했다. 그 중에는 국민학교 친구, 김천일과 또 다른 죽마고우였던 손용현이 있었고, 그렇게 친하지는 않았지만 역시 원서동 개천친구, 한성우(한성택 형의 사촌) 도 다시 보게 되기도 했는데, 이것은 지호가 그들과 끊어지지 않는 원만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천일은 원서동의 토박이로 재동국민학교 동기동창이었는데, 중학교 1학년 때 사소한 나의 철없던 실수로 헤어지게 되었는데 지호를 통해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나이는 조금 밑이었지만 박창희와 같이 국민학교 4학년 때까지 개천을 사이에 두고 살았던 손용현.. 이들은 나중에 내가 미국으로 떠날 때까지 나와 아주 가까이 지낸 친구들이 되었다.

지호는 언뜻 보기에 그다지 노래 같은 것을 잘 부르지는 않았어도 아주 좋아하여서, 그런 기회가 있으면 빠지지 않았다. 그 예로 어느새 ‘서울합창단’이란 곳에 가입을 해서 활동을 하였던 것을 나중에 알게 된 것이고, 우리들은 사실 장난끼 섞인 말로 ‘비웃기’도 했다. 지호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주 꾸준히 그 ‘서울합창단’이란 곳에 나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아주 ‘공식적이고, 역사 있던’ 단체여서 나도 놀랐다. 그곳은 장상덕이란 분이 지휘자로 있었고, 그분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도 자주 볼 수 있던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지호가 나보고도 가입하라고 했는데, 회원이 부족하다고 하던가.. 했는데, 사실은 그 때, 10월 유신이 나고 박정희가 통일주체국민회의란 것을 만들어서 종신 대통령으로 선출이 되는 시기였는데, 그 취임식이 열리는 장충체육관에서 ‘공화당 찬가’를 이 서울합창단이 맡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사실 정치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공화당찬가를 부른다는 것이 별로였지만 이미 청탁을 받고 연습을 시작한 모양이어서 나도 ‘끌려 가다시피 해서’ 합창 연습을 하곤 했다. 실제로 나는 장충체육관에 가지는 않았지만, 두고두고 이것은 별로 좋지 않은 찜찜한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그 이후 지호는 군대로, 나는 미국으로 가서, 헤어졌다가 1975년 여름에 지호를 서울에서 다시 잠깐 만났는데, 어엿한 대기업의 자재과 샐러리맨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5년 뒤, 1980년에는 나의 결혼식에 왔고, 그 후 소식이 끊어졌는데, 주위를 암만 찾아도 그 녀석은 없었다.과연 지호는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동국대 사학과를 나온 지호의 형, 광순형 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거의 포기하는 심정으로 이렇게 회고담 속에서나 듣고, 보고, 느낄 수 밖에 없는가?

 

1. 17세기 조선,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단오
2. 위치가 좋아서 1960년대 말 대학생, 직장인 할 것 없이 ‘잘나가던’ 다방
3. 연세대학교 발행, 학교신문 

postscript: 오랫동안 기억해낸 추억을 글로 옮기는 것, 몇 시간이면 될 줄 알았지만, 결과적으로 일주일 이상이 걸렸다. 한 가지를 쓰고 나서 다음 날, 다른 추억이 되 살아나고, 그런 것이 며칠이나 걸렸다. 이제 내 기억력의 한계를 분명히 느낀다.

 

용기 형!

김용기, 형.. 형은 내가 서울 재동국민학교 6학년, 형이 경기고 2학년 때, 그러니까 1959년 봄, 우리 집에서 처음 만났다. 참 오래 전이었다. 6학년 학기가 시작된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가 용기형을 집으로 데려 온 것이고, 그날부터 나는 용기형과 함께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용기형은 그날부터 매일 우리 집에 와서 나의 학교 공부를 도와주는 나의 방문 가정교사가 된 셈이다. 그런 단순한 인연으로 만났던 용기형은 사실 그 후로 우리 가족에게도 거의 친척이상으로 가끔씩 왕래를 하며 지냈다. 우리들이 용기형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1966년 내가 연세대에 입학한 해였다. 그 후로는 완전히 소식이 끊어져서 우리 집에는 거의 ‘전설적’ 인물로 인상이 남게 되었다.

 그 당시 고등학교 2학년생으로 가정교사를 한다는 것은 그리 흔치 않았다. 대부분 방문, 입주 가정교사들은 대학생들의 몫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용기형은 불과 고등학교 2학년 생이었지만, 우선 내가 국민학생이기 때문에 큰 무리가 없었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대한민국의 제일 명문고교인 경기고등학교엘 다니고 있었기에 큰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용기형에게도 일을 해야 하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형의 가정형편 때문이었다. 고학생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경제사정이 그렇게 이상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왜 어머님이 그렇게까지 나에게 가정교사를 붙여 주셨는지는, 사실 그 당시 나의 학교 성적이 중하위에서 맴돌고 있었던 것이 제일 큰 이유였다. 5학년까지는 그런대로 나를 지켜보다가 6학년이 되고, 중학교 입시를 치러야 할 운명이 되었던 것이다. 그 후로는 점점 더 심해졌지만, 사실은 그때부터 이미 ‘입시지옥’이 시작이 되었던 것이다. 한창 놀기에 바쁜 그 시절이었지만 어찌 우리들이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할까? 하지만 어머님이 나의 공부를 돌보아 주기에는 너무나 바쁘시고, 누나도 사실 공부에 큰 관심이 없어서 우리 집은 나에게 공부를 분위기를 주질 못했다. 그러니까, 내가 혼자 열심히 한다고 해도, 주위의 ‘놀고 싶은’ 유혹에서 항상 벗어나질 못했고, 그것이 ‘시험위주’의 성적제도에서 항상 중 하위에 머물게 한 것이다. 용기형이 매일 방문 가정교사로 오면서 부터, 바로 옆에 ‘어린 선생님’이 붙어 있으니, 밖으로 뛰어나가 놀고 싶은 유혹에서 비교적 쉽게 벗어날 수 있었고, 곧바로 ‘공부의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때 처음, ‘노력을 한 만큼 결과가 온다’ 라는 간단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공부한 만큼 성적이 오르는 것이었다. 거의 매일, 하루에 몇 시간은 꼭 용기형과 같이 앉아서 공부를 하니 결과가 안 보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전쟁의 흔적이 조금씩 사라지고 나라가 조금씩 안정되던 그 당시부터 과외공부라는 것이 서서히 유행하기 시작했지만, 조직적이고 상업적인 학원 같은 것은 거의 없던 시절.. 하지만 나같이 개인적인 과외공부보다는 과외선생님 댁에 단체로 모여서 공부를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어떻게 보면 나는 예외적으로 행운아였을지도 모른다. 방과 후에 골목에서 뛰어 놀던 즐거움은 조금 없어졌지만, 용기형과 둘이서 그날 학교공부를 복습하며, 다음날 공부를 예습하는 것은 점점 즐거움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노력한 결과가 거의 그 다음날 시험에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6학년, 특히 우리 ‘박양신 사단’ 1반은 가히 시험 전쟁터의 현장을 방불케 해서, 다른 반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하루 ‘종일’ 시험의 연속이었는데, 아침 첫 시간부터 시험을 보곤 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 시험에 의해서 곧 좌석의 배치가 바뀌는, 가히 시험 지옥이었던 것인데, 이것은 우리 반 담임 ‘박양신’ 선생님만의 방식이었고 다른 반에서는 이런 방식을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니까 박양신 선생님의 ‘수험의 신’, 에 가까운 선생님이었고, 그렇게 일년 내내 우리는 단련을 받았다.

그 당시 이미 대한민국의 학교들은 대강 일류,이류, 삼류 등으로 ‘일본식’ 등급 (지금에야 깨달은 것이지만)이 형성되고 있었다. 예를 들면 대학교에서는 서울대, 연세대, 이화여대, 숙명여대, 고려대 등이고, 고등학교는 경기고,경기여고, 서울고, 이화여고,숙명여고, 경복고,용산고 같이 거의 서울에 있는 학교들이고, 지방에서도 경북, 경남, 대전, 광주일고 등과 같은 일류들도 있었다. 어떻게 이 같은 학교들이 일류로 평가가 되었는지는 대강 짐작이 간다. 고교는 일류대학에 입학하는 정도를 보면 될 것이고, 대학교는 취직시험에 합격하는 것을 보면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국민학교도 분명히 이런 등급이 있었을 것이다. 일류 중 고교에 합격하는 것을 보면 된다. 하지만 국민학교는 아직까지 별로 등급이 형성되지 않았다. 예외는 덕수 국민학교와 수송, 혜화국민학교였다. 어떻게 이 학교가 그 시기에 이미 일류로 되었는지 과정은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지리적인 여건으로 보아서 ‘부자 집’ 자녀들이 많이 이곳을 다니고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돈을 따라서 ‘좋은 선생님들, 수험의 신’ 들이 그곳에서 가르쳤을 것이다. 좌우지간 이들이 일류 중 고교에 입학하는 것을 보면 가히 입이 벌어질 정도였다. 이런 배경에서 내가 다니던 재동국민학교는 어땠는가? 일류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바로 밑을 맴돌고 있었고, 수험의 신 박양신 선생님이 우리 반을 맡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일류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박양신 선생님이 재동국민학교를 1류로 바꾸게 되는 것이다. 결국, 내가 졸업하고 몇 년 뒤에는 정말로 일류로 바뀌게 되었다.

 나는 학기 초에 성적이 딱 중간 밑을 맴돌았는데, 용기형과 같이 공부하면서 서서히 오르기 시작해서 나중에는 거의 10등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반에서 자리를 분단 별로 앉게 되는데 이것이 완전히 성적에 의한 배치였다. 1분단은 거의 10등까지 앉고, 다음의 20등까지는 2분단에 앉는 그런 ‘잔인’한 배치였다. 게다가 1분은 딱 가운데 앉혀서 남들이 ‘우러러’ 보게 만들어 놓았다. 이것의 잠재적인 심리적 효과를 누가 알겠는가?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자리의 변동이 그다지 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는데, 시험에 의한 성적이 그렇게 자주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용기형은 나와 ‘궁합’ 이 잘 맞아서, 제일 큰 목적이었던 나의 학교 성적이 오르고 해서, 우리 집에서는 아주 후한 대접을 받게 되었고,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형을 아주 친척같이 따뜻하게 대하곤 했다. 용기형은 절대로 얌전한 학생은 아니었다. 깡패와 같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그 정도의 ‘깡’은 가진 학생이었다. 용기형이 학교에서 공부를 얼마나 잘하는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그것은 문제가 아닌 것이 ‘대’ 경기고 학생이니까 그것 만으로 문제가 없었던 것이고, 이때 내가 배운 것은 공부뿐이 아니고, 사실은 조그만 교훈, 모든 일의 결과는 운이나 배경만큼, 노력에도 많이 좌우된다는 간단한 진리였고, 이것은 나중에 내가 사는데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같이 공부하면서 아직도 잊지 못하는 기억에는, ‘선거권, 피선거권 논쟁‘, 그것이 있었다. 학교에서 배운 것을 복습하며 이런 한자로 된 어려운 정치용어로 용기형과 싸운 것이다. 나는 분명히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것을 말했는데, 용기형은 그것이 아니라고 하는 논쟁이었는데, 누가 보아도 이것은 내가 학교에서 배운 것을 잘못 기억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논쟁’ 자체가 재미 있어서 내 고집대로 밀어 붙였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용기형의 ‘깡’을 몰랐기에 계속 ‘똥’ 고집을 부렸다. 결국에는 용기형이 완전히 이성을 잃고 말았다. 그러니까 자기를 무시 본다는 것이었고, 나에게 따귀를 계속 올려 붙였다. 그 당시는 학교에서도 잘못하면 따귀를 맞는 것은 흔했지만, 가정교사에게 따귀를 맞는 것은 절대적으로 이상한 노릇이었다. 내가 자기의 ‘고객, 학생’이라는 사실을 잠깐 잊었던 것 같았다. 나도 기가 막혔지만 이것을 집에다 ‘일러’ 바칠 수도 없었다. 그랬으면 그날로 용기형과의 공부는 끝장이 났을 것이고, 사실 관계도 끊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 그냥 조용히 잊고 지나서 말썽은 없었지만 나에게는 아직도 잊지 못하는 상처로 남게 되었다. 세월이 지났어도 용기형은 미안하다는 말을 한번도 하지 않아서 더욱 아쉬운 기억이다.

 나의 성적은 계속 1분단의 ‘제일그룹’ 을 유지했지만, 사실 나의 성적은 기복이 심한 편이었다. 거의 1~2등까지도 하는가 하면 갑자기 10위로 밀려나는 등 그런 식이었다. 이런 상태로 중학입시를 치르게 되었는데, 용기형은 경복이나 서울 중학교에 응시하라고 했지만 담임 선생님은 아주 불안한 표정이었다. 나도 사실 ‘모험’을 하는 것이 싫었다. 안전한 것이 좋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가까운 곳에 있는 사립 중앙중학교에서 무시험으로 들어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서 그리로 가버리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정원의 반 정도를 졸업성적만으로 뽑던 제도가 있었다. 시험 지옥에서 쉽게 벗어난 것만 해도 나는 너무 기뻤다. 하지만 역시 용기형이나, 어머니는 두고두고 불만이었다. 어찌 안 그렇겠는가? 내가 속했던 1분단의 다른 녀석들이 대거로 경기, 서울,경복중학교에 합격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나 자신은 후회가 없었다. 재수를 할 가능성보다는 조금은 안전한 것이 편했던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중학교 입시에 재수생은 거의 없었던 시절이었다.

용기형과 가회동 집에서, 중학교 1학년때 1960년 쯤
용기형과 가회동 집에서, 중학교 1학년때 1960년 쯤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용기형은 가끔 놀러 왔고 고궁 같은 곳에도 같이 가족과 놀러 가기도 했다. 중학교에서 나의 성적이 좋아서 용기형도 안심하는 듯 했다. 어떨 때는 어머니가 용기형에게 나를 데리고 영화를 보게도 했는데, 그런 시간들이 나는 너무도 즐거웠다. 나에게 형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용기형과 대한극장에서 ‘백사의 결별‘ 이라는 요란한 제목의 미국 영화를 보았는데, 로버트 밋첨(Robert Mitchum)과 데보라 카(Deborah Kerr)주연의 2차 대전 영화였는데,그 것을 보면서 내가 하도 형에게 질문을 해서 조용 하라고 핀잔을 받기도 했다. 한번은 용기형을 따라서 경기고교 강당에서 프랑스의 영화,”장 가방(Jean Gavin)” 주연의 ‘잔발잔(Jean Valjean)’을 같이 보았는데, 그 당시 경기고등학교는 정말 부자여서 없는 것이 없었고, 심지어 극장수준의 영사기까지 갖추고, 가끔 영화, 그것도 외화를 학생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용기형은 내가 중학교 2학년(1961년) 때, 경기고를 졸업하고 대학엘 갔는데, 예상을 뒤엎고 서울대가 아닌 고려대엘 갔다. 왜냐하면 경기고생은 거의 서울대를 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더니 그 이듬해 연세대 정외과로 편입을 했는데, 사실 편입이었는지 아니면 새로 신입생으로 입학을 했는지 확실치 않다. 그러는 과정에서 나는 어렴풋이 형이 대입준비를 하는 과정을 옆에서 보게 되어서, 두고두고 나중에 내가 대입 준비할 때 도움이 되었다. 그 당시의 입시 문화는 거의 100% 일본식이었을 것이다. 입시준비 잡지도 있었는데, 용기형 시절에는 ‘향학‘ 이란 국내 유일의 입시준비 잡지가 있어서 나도 옆에서 훔쳐보기도 했다. 그때 느낀 것이 대학입시라는 것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 정말 ‘전쟁’이었다. 몇 년 뒤에 그 잡지는 없어지고, 새로 ‘진학‘이라는 제목으로 내가 고3때 나왔다.

 그러다가 내가 중앙중학교 3학년(1962년)이 되고, 고교 입시가 다가 왔을 때, 어머니는 다시 용기형을 부르셨다. 나의 학교 성적이 문제가 아니라, 이번에야 말로 ‘일류’ 고등학교로 가기를 원하신 것이다. 나는 그럴 마음이 없었지만, 다시 같이 공부를 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3년 전과는 아주 달랐다. 용기형은 이미 대학생(연세대 정외과)이 되었고, 나도 이미 꼬마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전과 같은 열기는 사라진 것 같고 공부에 불이 붙지를 않았다. 결과적으로 나는 ‘안전’하게 본교로 진학하기로 결정을 해 버렸다. 이런 나의 결정은 후에도 별로 후회를 하지 않았다. 이미 나는 사학의 명문 중앙에 정이 흠뻑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에도 용기형과 의 왕래는 가끔이지만 끊어지지 않았다. 용기형은 언제나 자신의 포부를 숨기지 않았다. 외교관의 꿈인 프랑스 파리에 가는 것이었다. 그 당시만해도 외교 계는 프랑스의 전통적인 입김이 강했다. 꿈이 있고 계속 좇으면 언젠가는 이루어 진다고 믿었다. 우리는 모두 믿었다.언젠가는 유명한 국제적인 외교관이 될 것이라고 (요새로 말하면 반기문 같은)..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잠시나마 용기형이 우리 집에 입주해서 나를 가르치던 시기가 있었다. 기억에 아주 짧았던 기간이었지만, 나와 같이 자면서 공부한다는 것은 참, 흥미로운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도 용기형은 ‘가르치는’ 데는 이미 김이 빠져있었다. 별로 열기가 없었던 것이다. 학교공부보다는 인생공부를 많이 한 셈이었다. 나는 몰랐지만 그 당시 용기형은 연세대에서 데모를 주동하는 ‘정치 학생’으로 변하고 있었다.

 내가 연세대에 입학을 하면서 이제는 학교에서 만나겠구나 생각을 했지만 용기형은 그곳에서 만날 수 없었다. 그리고 소식이 완전히 끊겼다. 용기형은 우리 집에 연락을 하지 않았다. 어머님은 그 이후 항상 ‘얘, 혹시 용기가 죽은 것 아닐까?’ 하시곤 했다. 왜 그렇게 생각을 하셨는지는 이유를 모른다. 그리고 세월은 아주 길게도 흘렀고, 1999년 초쯤에 인터넷의 Yahoo! 같은 search engine과 학교 동창회의 website등을 통해서 별로 기대를 하지 않고 용기형을 찾아 보게 되었다. 운이 좋게 연세대 동창회에서 용기형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고, 전호번호까지 얻을 수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개인정보’에 대한 보안이 심하지 않아서 가능했던 것이다. 곧바로 어머님께서 그 전화번호로 용기형과 이야기까지 하셨다. 전화번호는 한국산업정보센터 라는 곳이고 용기형은 그곳에서 고문으로 일을 하셨다. 나와는 곧 바로 email로 소식을 주고받았다. 사실, 나도 어머님과 같이 용기형이 ‘죽지나’ 않았을까 걱정을 하던 참에 소식을 들은 것은 너무도 반가운 일이고, 옛날의 추억들이 밀물처럼 나를 덮쳤다.

 email에 있는 사연은 간략하지만 그것으로 대강 용기형의 ‘일생’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역시 60년대 중반에 데모주동으로 몰려서, 군대로 ‘끌려’ 갔고, 복학 후에는 그런대로 ‘조용히’ 직장생활을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프랑스, 파리의 외교관이 되는 꿈은 접은 듯 했다. 용기형 말씀이, 그런 꿈들을 이루지 못해서 연락을 계속 미루었다고, 참 순진한 말을 곁들였다. 고시공부, 동아일보 입사, 국세청 장기 근무, 대경기계 창업, 한국산업정보센터 고문 등으로 이어지고 결혼을 해서 딸, 아들을 두었는데, 따님은 결혼을 해서 미국 LA에 살고, 작은 아들은 그 당시 (1999년)에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용기형의 부인과도 잠깐 전화로 인사를 드렸는데, 까마득한 옛날에 ‘가르쳤던 제자’라고 알고 계셨다.

 하지만 세월의 횡포는 그렇게 그립던 생각을 곱게 보지 않았다. 너무나 긴 세월이 흐른 것이다. 어머님께 인사를 드리러 온다고 약속을 한 모양이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나에게도 다시 연락을 주지 않았다. 우리가 용기형을 생각하고 안부를 걱정한 것과 같은 정도의 생각을 우리는 용기형으로부터 느낄 기회조차 없었다. 이것은 한마디로 세월의 장난일 것이고, 누구를 탓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아름답게 추억으로 남겨놓을 것이 있으니 큰 문제는 없다. 연락이 된 후 10여 년이 또 흘렀으니, 용기형도 나이가 거의 70세로 육박을 하지 않았을까? 부디 건강한 후년을 즐기는 용기형의 모습을 간직하고 싶다.

 

가회동의 추억

가회동.. 이 이름만 들어도 나는 너무나 진한 추억의 감정에 눌려버린다. 나의 어린 시절 추억의 대부분을 가회동이 만들어 주었다. 나의 개인 역사에서, 유치하지만 순진하고 희망과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찾던 시절.. 전쟁의 고통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던 조국의 현실도 가식 없는 눈으로 지켜 보았던 시절들이었다.

서울 재동국민학교, 1959년

서울 재동국민학교, 1959년: 나는 정면의 본관 건물의 바로 뒷쪽에서 살았다

 

나는 1956년 가을부터 1963년 봄까지 가회동, 재동국민학교 뒷문 쪽에서 살았다. 학년으로 치면 재동국민학교 4학년 2학기부터 중앙고등학교 1학년 초에 해당된다. 그러니까 그곳은 재동과 가회동의 경계선 쯤이었을 것이다. 재동과 가회동은 남북 신작로로 연결이 되어있어서 그 길을 따라 올라가면 지금의 가회동 ‘한옥 촌’이라는 곳이 나오고, 내려 가게 되면 재동으로 이어지면서 창덕여학교를 만나고 다시 가로지르는 더 큰 길을 만난다. 그 당시에는 그 길의 이름들이 없었고, 그저 모두 ‘행길, 한길, 신작로’ 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아마도 율곡로 라고 부르는 모양인데 자신은 없다.

 우리 집의 본적이 종로구 재동 80번지라서 나는 그곳에 산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본적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몰랐지만 우리의 ‘선조’들이 살았던 곳이라고 짐작을 하긴 했다. 그 전에 우리는 원서동에서 살았는데 사실 그곳이 내가 기억하는 제일 오래된 동네다. 아버지가 육이오 동란 초에 납북이 되시고 누나, 어머니와 정말 험난한 전후 시절을 원서동에서 시작을 한 것이다. 이북(원산) 여자였던 어머니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강인한 생활력을 발휘하셔서 원서동에 아주 작은 집까지도 사셨는데, 그것이 도시계획으로 철거를 당하게 되어서 가회동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고, 결국 후에 원서동의 “우리 집”은 정말로 철거되고 그 위에는 대로가 생겨서 작았지만 추억이 아롱졌던 집은, 그전까지 원서동을 따라 흐르던 개천이 전부 자취를 감추고 덩그러니 길로 변해버렸다.

놀러온 원서동 친구들 안명성, 김천일과 1962년 2월
놀러온 원서동 친구들 안명성, 김천일과 1962년 2월

원서동 죽마고우들:  새로 이사를 오니까 원서동에서 잔뼈가 같이 굵었던 코흘리개 친구들과 떨어지게 되었지만 생각보다 새로운 곳에 금새 적응이 되었다. 나는 일반적으로 내성적인 성격이었지만 동네친구들을 사귀는 데는 그런 성격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원서동의 친구들은 시간만 나면 ‘장거리 원정’을 오듯이 놀러 오곤 했는데, 그 당시 원서동의 ‘죽마고우’ 친구들; 유지호, 손용현, 박창희, 안명성, 김동만, 최승철, 김천일.. 그 외에도 참 많았다. 우리가 이사온 집은 골목 깊숙이 위치한 아담한 2층 양옥이었는데, 말이 양옥이지 사실은 전통적인 한옥이 아니라는 뜻이고, 지금 생각해 보면 거의 일본식 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 정도로 ‘기둥들이 약하게’ 보이던 집이었다. 2층집과 1층집이 같이 직각으로 붙어 있어서 두 집에 살기에는 아주 좋았고, 화단이 있는 그런대로 커다란(그 당시 나의 눈에는) 마당까지 있었다. 우리는 1층의 방 두 개에 부엌이 딸린 ‘사랑채’에 살게 되었다.

 

원서동 죽마고우 최승철과, 가회동 1960
원서동 죽마고우 최승철과, 가회동 1960

재동학교:집에서는 재동국민학교 4층 건물의 뒷면 거대한 모습으로 보였고, 집 골목이 재동학교 강당을 끼고 있었다.. 그 정도로 가까웠다. 그러니까, 이사오면서 제일 신났던 것은 학교 가는 시간이 5분도 걸리지 않았던 사실이다. 전에 살던 원서동에서 등교할 때는 그때 어린 나이의 걸음으로 30분은 넘어 걸렸을 것에 비교하면 이건 정말 ‘천국’에 사는 기분이었다. 나는 꿈도 못 꿨지만, 그 동네에 사는 어떤 ‘잘살던’ 아이들은 숫제 점심시간에 집에서 식모들에 의해서 학교 교실까지 배달된 따끈따끈한 도시락을 즐길 정도였다.

 

함경도 출신 주인집 염씨 가족:  이사온 집의 주인은 함경도 출신, 그러니까 아마도 육이오 동란 때 피난을 온 집일지도 모르는 나이가 있으신 부모님과 시집간 딸, 고등학생 딸,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아들이 있는 지극히 정상적인 가족이었다. 주인 어르신의 성함은 아직도 기억을 한다. 염영혁 선생님, 그 당시는 ‘거의’ 할아버지라고 생각했으나, 지금 생각해 보면 환갑 정도를 갓 넘기셨을 정도였지 않았을까? 외 아드님은 훤칠한 키의 호남형, 염철호 형이었다. 중앙대를 졸업했다고 들었고, 아이들과 잘 놀아줄 수 있는 그런 쾌활한 미혼 청년이었는데, 대학시절 농구선수였다고 했다. 염철호 형은 나중에 결국은 농구 계로 투신을 해서 방송국에서 농구경기 해설자로 활약을 함을 알게 되었다. 얼마 전 인터넷으로 형의 소식을 아주 짧게 들었는데, 나이도 많이 드시고, 부인이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는, 정말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해 주는 소식이었다.
작은 따님, 염경자 누나는 그 당시 거의 졸업반의 여고생이었는데 공부도 잘하고, 아주 얼굴이 예뻤다. 얼마 뒤에 이화여대를 갔는데, 그 당시 최고로 경쟁이 높았던 영문과에 지망을 했는데, 애석하게 제2지망이었던 사회사업학과에 합격을 했다. 하지만 영어를 아주 잘했고, 한때는 어떤 미군을 집으로 데려와서 영어강습을 받기도 했는데, 영어실력과 뛰어난 미모로 역시 나중에, 그 당시 최고 선망의 대상이었던 항공사 스튜어디스가 되었다.
큰 따님은 그 당시 이미 갓난 딸 둘 (주경아주동원)이 있었는데 남편은 그 당시 육군 대위였다. 가끔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놀러 오면 갑자기 집이 떠들썩 해지곤 했다. 나는 특히 그 대위 아저씨를 좋아했는데, 아주 서글서글하고 친절한 ‘군인 장교’ 아저씨였기 때문이다. 이 주인집은 함경도에서 오셨는데, 친척들이 근처에 계셨고, 그 중에는 나와 재동국민학교 동창인 ‘황석기’도 그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그 당시 조금 이상했던 것은 이 주인집이 어떻게 돈을 벌었을까 하는 사실이다. 아무도 바깥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가지고 있던 돈이 상당히 많았던 것일까?

중앙중학교 뒷산 멀리에 보이는 말바위
중앙중학교 뒷산 멀리에 보이는 말바위

 삼청공원 말바위: 이 집이 있던 골목이 그때부터 나의 천국이 되었고, 꿈 많던 소년시절의 주옥 같은 많은 추억이 이곳에서 형성이 되어 이제까지도 내 추억의 바탕이 되었다. 시대적으로 보아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사일구를 거쳐 오일육으로 박정희 대통령까지 이어졌고,학교 학년으로는 재동국민학교 4학년으로부터 중앙고등학교 1학년 초까지였다. 거리적으로 이 학교들은 정말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조금만 북쪽으로 올라가면 삼청공원북악산이 있었는데, 이곳들은 어린 시절 친구들과 사시사철 자주 놀러 가던 곳들이었고, 그 중에서도 ‘말바위‘라는 곳은 북악산 중턱에 위치한 곳으로 우리들이 좋아하던 곳이었고, 우리들이 발견한 아주 작았던 비밀의 바위, ‘늑대바위‘도 우리들이 전쟁놀이 할 때마다 찾던 꿈의 거처였다..

가회동 성당: 가회동 큰 길에 나가면 재동학교 주변으로 많은 만화가게들이 즐비했고 그 곳들은 우리들의 꿈의 보금자리 역할을 했다. 삼청동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가회동 파출소가 있었고, 그 옆에는 가회동 성당이 있었다. 나는 지금 천주교 신자가 되었지만 그 어린 시절에 내가 본 성당의 인상은 그리 편한 곳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문 입구부터 ‘무섭게 보이는 외국인 성인’들 석고상들의 모습이 으스스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동네마다 많이 있던 개신교 ‘예배당’은 친근한 인상이었고, 분명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알았는데, 천주교는 도대체 ‘무엇’을 믿는지 확실치 않았다. 그 정도로 대부분 사람들이 천주교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

가회동 부자들: 그곳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그때부터 으리으리하게 우람한 기둥을 자랑하는 깨끗하고 커다란 한옥들이 즐비하게 나타난다. 중앙 중고를 다닐 때면 그곳을 지나서 가곤 했는데, 얼마 전에 ‘겨울연가’를 보면서 다시 한번 그곳 들을 보게 되어서 감개가 무량했다. 그 당시 가회동에는 알려진 부자들도 살았는데, 그 중에 화신 백화점 주인이었던 ‘친일파’ 박흥식씨의 집도 그 중에 하나였는데 정말 집이 으리으리하게 컸다. 우리가 살던 집의 뒤에도 아주 커다란 집이 있었는데, 아직도 거기 누가 살았는지 확실치 않다. 가회동에서 재동 쪽으로 내려가면 물론 재동국민학교가 있었고, 조금 더 내려가면 공립 여자학교, 창덕 여중고가 있었다. 이곳은 여자학교라서 보통 때는 못 들어갔지만 무슨 행사가 있으면 그 강당엔 들어갈 수 있었다. 기억나는 것이 사일구 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 전 겨울에 동네 사람들을 이곳 강당에 불러놓고 영화를 보여준 일이었다. 나는 국민학생이었지만 따라 갔는데, 가서 보니 영화는 영화인데, 선전용 기록영화를 보여주었다. 드리마 같은 것은 아니었어도 나는 너무나 재미있게 본 기억이다.

박달근:  그 당시 동네 골목은 우리 나이또래들의 천국이었다. 나이에 거의 상관없이 어울릴 수 있던 곳.. 우리 골목도 그랬다. 코흘리개 꼬마부터 중학생들 까지 모두 어울렸다. 많은 애 들이 얼굴은 기억이 나는데 이름을 다 잊어버렸다. 하지만 그래도 이름까지 기억이 나는 애들.. 골목 바로 건너 집에 살던 박달근, 이름이 독특해서 기억을 한다. 나보다 한두 살 밑이었고, 공부도 잘했던 애, 나중에 일류 중학교에 들어갔는데, 가슴이 좀 아픈 추억을 남긴 애였다. 나와 보통 애들이 하던 싸움을 했는데, 이 녀석은 나에게 아직도 가슴에 남는 욕을 했다. 그 녀석 왈, “우리 아버지가 (너같이) 아버지 없는 애와는 놀지 말랬어!” 라는 말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나에게는 참으로 슬픈 욕이었다. 그 말로 사실 그 애와는 헤어지게 된 셈이다. 나도 그 녀석과 그 아버지가 보기 싫었던 것이다. 사실 그 당시 나와 같이 아버지가 없는 집이 꽤 많았지만 그 골목에는 하나도 없었다. 모두 다 ‘정상적’인 가정이었던 것이다.

이원영:  우리 집에서 두 집 아래에 이원영 이라는 나보다 아마도 한두 살 정도 아래인 애가 있었다. 그 아버지가 어느 중학교 수학선생인가 그랬는데, 정말로 고약한 성격의 남자였다. 항상 아이들을 보면 험악한 얼굴, 짜증난 얼굴이어서 속으로 저런 아빠라면 그렇게 부럽지 않겠다고 생각도 했다. 이원영의 엄마는 정반대로 항상 친절하게 웃는 안경을 낀 지적으로 생긴 다소곳한 엄마였는데.. 나중에 원영이는 경복중학교에 들어갔는데, 왜 그렇게 생각이 나는가 생각을 해 보니, 이유가 있었다. 어떤 명절날 원영이의 친척들이 놀러 온 모양인데, 그 중에 국민학교 나이의 소녀가 있었는데, 그 애가 너무나 예뻐서 그 나이에 처음으로 ‘연정’ 같은 것을 느낀 것이다. 그때 느낀 것이 아하.. 이것이 어른들이 말하는 ‘연애감정’이란 것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아직도 그 ‘예쁜 얼굴’의 그 애를 생각하면 생생하게 나의 감정이 기억된다. 이원영은 헤어진 것이 너무나 오래 되어서 별로 그의 생각을 못하고 살았지만, 그는 어떻게 ‘인생’을 살았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최씨 삼형제:  그 아래 한집건너 어느 날, 갑자기 아들 삼형제 집이 이사를 왔다. 최씨 삼형제 집.. “최희천, 최희춘, 최희승“.. 어떻게 내가 그들의 이름을 아직도 기억하는지 나도 놀란다. 그것은 어린 나이의 추억들이 그 정도로 뚜렷하다는 뜻이 아닐까? 그리고 이렇게 오래 살면서도 그 추억들을 소중하게 기억에서 놓치지 싫었다는 뜻일 것이다. 제일 큰 형이 최희천, 나보다 한두 살 밑, 그 아래가 최희춘, 막내 최희승은 한참 아래인 꼬마였다. 그들에게는 누나가 있었는데, 나보다 나이가 한두 살 위였고, 우리또래 아이들이 그녀를 ‘선망’의 눈으로 쳐다 보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 집의 ‘주인’으로 이사를 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주인이 바뀌고 그 집은 그 많은 식구들이 방하나 문간방으로 옮겼는데, 아마도 사업이 실패를 했을 것이다. 그 아버지는 ‘집 장사’ 라고 들었다. 요새말로 하면 ‘부동산 업자’ 정도가 아니었을까?

큰형 최희천은 과묵하고, 성실한 타입이었고, 그 동생 최희춘은 장난꾸러기였지만 그래서 성실한 애였다. 특히 나를 많이 따랐다. 동네의 애들이 모이게 되면 이들이 항상 끼어서 나를 도와주곤 했다. 특히 생각나는 것은 이 형제들을 포함한 동네 꼬마 일당을 데리고 삼청공원 위에 있는 ‘말바위’에 놀러 갔던 추억이었다. 나는 이 꼬마 ‘소대’를 데리고 흡사 소대장이라도 된 듯이 그들과 이곳 저곳을 놀러 다녔다. 그 중에 말바위를 포함한 북악산 일대를 누빈 추억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아찔하다. 왜냐하면 무슨 사고라도 나면 내가 ‘소대장’이기 때문에 몽땅 책임을 져야 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시절 그런 것에 크게 관심을 가질 집은 거의 없었다. 사는 것이 더 급한 세상에 귀찮은 꼬마들을 집에서 끌어내어서 놀아 준 것이 더 고마웠을 것이니까..

말바위의 종이비행기:  말바위는 북악산 중턱에 있는 완전히 바위로 된 언덕이고 그곳에서는 서울시내가 거의 다 보였다. 정남쪽으로 남산이 나지막하게 보이고, 그 뒤로 한강, 관악산이 멀리 보이던 우리에게는 거의 환상적인 곳이었다. 아찔한 낭떠러지가 있어서 위험한 곳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그 나이 우리에게는 더 재미를 주었다. 한번은 못쓰게 된 책을 한 권 들고 아이들을 몰고 가서 종이비행기를 만들어 날렸는데, 골목에서 날리다가 이곳, 거의 완벽에 가까운 ‘비행장’에서 날렸을 때 아이들의 환성을 잊지 못한다. 한번 비행기를 날리면 떨어지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낭떠러지가 있어서 더운 기류를 타게 되면 공중에 오래 머물곤 했다. 그때 한 종이비행기가 완전히 뜨거운 기류를 타고 하늘 위로 올랐다. 그것은 전혀 떨어지지 않고 계속 오르며 북쪽으로 날기 시작했다. 우리들이 그것을 보며 탄성을 지르기 시작했는데.. 결국 그 비행기는 안 보일 정도로 높이 떠서 북으로 사라졌다. 그때 그것을 본 꼬마들.. 아마도 잊지 못할 정말 아름다운 광경이었을 것이다.

 

박달근의 집 앞에서 꼬마친구와, 1962년
박달근의 집 앞에서 꼬마친구와, 1962년

동네 야구:  이 골목에서 나는 야구를 배우게 되었다. 국민학교 때는 공을 가지고 노는 것은 주로 “찐뽕” 이란 것과, “왔다리 갔다리” 란 것을 했고, 그 때만해도 야구를 하려면 글로브와 ‘진짜 야구공’ 같은 것이 비싸서 아무나 못 하던 시절이었지만, 찐뽕이란 것은 거의 야구와 비슷하지만 모두 맨손으로 받는 것이라 그것을 많이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들의 야구’ 가 바로 찐뽕이었다. 이것은 배트도 필요 없이 주먹이나 손바닥으로 공을 치는 것이었다. 그런데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어느 날 어머니가 미8군 암시장에서 ‘미제’ 야구 배트와 공을 사오셨는데, 배트는 진짜 “Louisville”이란 상표가 보이는 것으로 신나게 했지만, 공은 조금 이상하게 생겼다. 보통의 공보다 큰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소프트볼 이었다. 소프트볼이라고 하지만 공 자체는 더 단단했고, 배트로 쳐도 그다지 빨리도, 멀리도 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안전’한 야구 용이었던 것이다. 물론 우리들이 그것을 좋아할 리가 없었고, 진짜 야구공을 구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 일본에서 쓰이던 ‘중경식‘ 야구공이란 것을 써서 ‘진짜 야구’를 하게 된 것이다.

 야구를 할 때 문제는 동네 골목이었다. 그 좁은 골목에서 야구를 하게 되면 언젠가는 ‘사고’가 생기게 마련이었다. 이 사고는 대부분 골목에 있는 집들의 유리창이 깨지는 것들이었고, 가끔가다 공이 사람을 치는 일도 있었다. 또한 가끔이지만 그 골목에 차라도 지나가면 게임은 완전히 올 스톱이 되곤 했다. 그래도 우리들은 악다구니처럼 지치지 않고 즐겼다. 그러다가 바로 코 옆에 있는 우리의 자랑스런 모교 재동국민학교로 야구장소를 옮기게 되었다. 이것은 완전한 야구의 천국이었다. 비록 야구장은 아니더라도 그렇게 널찍한 공간이 그 당시 어디에 또 있었겠는가? 문제는 그곳을 아무 때난 쓸 수 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는데, 학교의 모든 일정이 끝나게 되면 문을 완전히 닫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 학생들이 학교를 다 떠나기 전에나 운동장을 쓸 수 있었고, 일요일은 전혀 쓸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나마 우리는 그곳에서 야구 연습을 열심히 하고, 실력도 상당히 발전하였다. 그러면서 다른 팀(동네)들과 시합을 하기 시작했고, 어떨 때는 다른 동네까지 ‘원정’ 경기까지 하게 되었다. 지금도 생각나는 곳은 삼청 국민학교까지 원정을 간 것이었는데, 그 당시 조건은 진 팀이 이긴 팀에게 야구공을 주는 것이 관례였다. 그 자리에서 줄 수는 없지만 언젠가는 빚처럼 남게 되어서 꼭 갚아야 했다.

 그 당시에 야구는 상당히 인기가 있었는데, 주로 고교야구가 꽃이었고, 실업야구도 못지않게 인기가 있었다. 내가 다니던 중앙중고등학교는 야구부가 상당히 활동적이었고, 대회에서 가끔 우승권까지 가기도 했다. 그 당시 유명했던 투수 김옥수, Short Stop 하갑득 선배들이 고등학교에서 활동을 했는데, 오후에 학교가 끝나서 운동장을 거쳐서 걸어나올 때면 꼭 그들이 연습을 했는데, 나는 빠지지 않고 그것을 구경하곤 했다. 동네야구만 하다가 그들을 보면 정말 ‘신의 경지’로 까지 보였다. 김옥수 투수의 던진 공을 옆에서 보면 정말 총알같이 느껴지고, 하갑득 선배가 육탄 돌격대처럼 쓰러지며 공을 잡을 때면 그것도 역시 ‘야구의 신’처럼 보였다. 꿈에서도 내가 투수가 되어서 총알 같은 직구와, 기묘한 커브 볼을 던지는 꾸곤 했다. 그 당시 입학시험에는 체력장 같은 시험이 끼어있었는데, 그 중에는 공 던지기가 있어서 이렇게 야구를 했던 것이 나중에 고등학교 시험을 치를 때 큰 도움도 되었는데, 그 당시 나의 공 던지는 실력은 내가 생각해도 기가 막히기 멀리 나가곤 했다. 그만큼 던지는 어깨가 발달이 되었던 것이다.

 오자룡:  이 동네야구를 회상하면서 꼭 생각나는 것, 우리 앞집에 살던 ‘오자룡‘ 이란 아이.. 삼국지의 상산 조자룡의 이름을 따라 지었다고 했나… 나보다 아마 4~5살 쯤 어렸을, 아주 꼬마였다. 야구는 그 나이에 비해서 잘 한 편이었지만 역시 나이가 어려서 실수가 많았다. 어떨 때는 1루에 주자로 나갔다가 홈으로 뛰어 들어오기도 했다. 그래도 우리 팀에 꼭 끼게 된 이유는 그 녀석의 아버지 (그 당신에는 아빠란 말을 쓰지 못하고 꼭 아버지란 말을 써야 했는데, 아빠란 말은 그 후에나 쓰이기 시작했다.) 때문이었다. 비록 대머리 였지만 비교적 젊은 아저씨였는데, 그 아저씨가 야구광이었다. 그래서 자기 아들 ‘오자룡’을 그렇게 참가시킨 것이었다. 우리들은 그것이 너무나도 힘이 되었고, 자랑스러웠다. 다른 아버지들은 전혀 관심도 없었는데, 그 오자룡의 아버지는 시간만 나면 옆에 와서 코치까지 해 주시곤 했던 것이다. 나는 물론 아버지가 없어서 꿈도 못 꾸었지만,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의 진가도 느낄 수 있게 되기도 했다. 어떤 때는 재동국민학교 운동장이 일요일이라 문을 닫았지만 그 아저씨가 학교 ‘소사’ 아저씨를 구어 삶아서 우리들이 정식 게임을 할 수 있게도 해 주셨고, 게임의 심판까지도 자청하셔서 보아 주셨다. 얼마나 즐거운 광경이고, 추억이 되었던지.. 오자룡, 그 녀석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Oh, Carol by Neil Sedaka

1959년 닐 세다카의 오 캐롤, 이곡은 우리에게는 1960년에 알려지고 따라부르던 노래가 되었다. 하도 따라 불러서, 뜻도 모르고 영어 가사를 모두 외울 정도였다. 가사를 엉터리로 들어서, I’m but a fool이 아앰 빠다빵으로, You hurt me는 유어 할머니로 둔갑 하기도 해서 아주 재미있는 추억이 되었다.

 

미국의 시대: 나는 가회동 시절, 정치적으로는 ‘우리들의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 삼일오 부정선거, 학생들이 피를 흘렸던 사일구, 장면 내각 (윤보선 대통령)의 짧았던 1년, 그리고 오일육 군사 쿠데타 (혁명)으로 이어지던 비교적 숨가쁜 변화 속에서 살았다. 비록 육이오 동란은 이미 끝나서 전쟁의 잔혹함은 간신히 비켜 지나게 되었지만, 우리 집처럼 아버지가 전쟁으로 없어진 집도 많았고, 길거리에는 전쟁고아, 거지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는 사실 육이오 전쟁 후의 정말 살기 힘겨운 시절이었다. 철저한 반일, 반공 교육 속에서 위와 아래가 모조리 적국으로 둘러싸인 시절, 그저 믿을 곳이라고는 ‘정의의 십자군’ 미군과 그들의 나라 미국, 그리고 조그만 섬 으로 쫓겨난 장개석 총통의 국민당 정부, 대만 밖에 없었다. 거의 모든 것이 미국의 원조에 의해서 유지되던 그 시절, 내가 다니던 재동국민학교도 전쟁 때 반 이상이 불타버려서, 미군들이 와서 새로 지어주고, 고쳐주었다.

이승만과 멘데레스: 이승만 대통령 재임 시에 나는 국민학생이었는데, 경무대(청와대의 전 이름)와 비교적 가까워서 그랬는지, 가끔 새벽같이 단체로 대통령을 마중하러 나가기도 했다. 제일 기억에 나는 것이 1958년, 5학년 때, 터키의 멘데레스 수상이 왔을 때 환영을 나간 것과, 터키를 방문하고 도착해서 일행이 경무대로 돌아온 때였다. 졸린 눈을 비비며 깜깜한 새벽에 동원되어 나가서 한참 기다리다가, 몇 초 만에 쏜살같이 지나가는 차들을 향해서 태극기를 흔들면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그때 모습의 사진이 경향신문 조간에 나왔는데, 기적적으로 내가 거기에 찍혔다. 그때의 신문을 다시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조금 묘한 사실은 그때의 그 두 나라의 원수 급, 이승만 대통령과 터키의 멘데레스 수상, 비슷한 때에 대중 혁명으로 실각을 한, 조금은 운명의 장난이라고나 할까..

Soviet's Sputnik-1, Oct 1957
사상 첫 인공위성 소련의 스프트닉 Oct. 1957

소련의 스프트닉:  가회동으로 처음 이사를 가자마자 전세계적인 큰 뉴스가 터졌다. 그때가 1957년 가을이었다. 공산당 소련이 역사상 최초로 ‘인공위성’, 그러니까 사람이 만든 위성을 쏘아 올린 것이다. 그것이 그 유명한 스프트닉, Sputnik 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사실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 이었다. 비록 지구에서 제일 가까운 우주 궤도였지만 그곳은 분명히 ‘새카만’ 우주 공간이었던 것이고 그곳에 농구공 만한 ‘사람이 만든’ 위성을 쏘아서 지구를 돌게 만든 것이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코웃음을 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미국도 못하던 쾌거였고, 이때 소련이 이룬 폭발적인 ‘선전효과’는 정말 대단했다. 그들은 분명히 ‘공산주의의 우월성’을 과시하고자 했을 것이니까.. 상대적으로 미국이 당한 ‘수모’도 대단했다. 하지만, 이때의 그런 수치가 미국을 13년 뒤에 소련을 제치고 달에 첫 우주인을 보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가회동은 바로 아래쪽에 붙어있던 재동과 더불어, 전에 살던 원서동에 비해서 깨끗한 동네에 속했다. 큰 차이는 원서동에는 그때까지도 초가집들이 즐비했었던 것에 비해 이곳에 초가집은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서울에 웬 초가집? 하지만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하지만 조금 나은 가회동, 재동의 행길(맞는 철자는 한길, 부를 때는 행길이라고 불렀는데, 골목을 제외한 길을 그 당시는 그렇게 불렀고, 종로와 같은 큰길을 제외하고는 길 이름이 전혀 없었다. ) 조차도 지금에 비하면 아마도 ‘난민 촌’을 연상할 정도였을 것이다. 상상할 수 있는 수많은 ‘잡상인’들이 거리를 완전히 덮고 지나가는 사람을 상대했다. 특히 국민학교 앞에서 코흘리개들을 손님으로 하는 가게는 정말 다양하고, 조밀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던 곳은 역시 만화가게, 빙수,국화빵 가게 같은 것이었는데, 텔레비전이 없었던 그 시절에 그곳은 우리들 꿈의 전당이었다. 재동학교 앞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렇게 좋던 싫던 나의 어린 시절 6년의 추억을 만들어 준 가회동 시절.. 어찌 잊으랴.. 그때 알고 지냈던 코흘리개 친구들.. 다들 어떻게 인생을 살아왔을까 궁금해진다.

 

 

인천, 61년 전

9월 15일, 1950년 9월 15일에 있었던 역사적인 육이오 당시,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된 날이다. 거의 ‘비상식적’으로 적의 후방을 찌르는 거대한 맥아더 장군의 작품이 현실화 되던 날이었다. 그 후방이란 곳이 인천인 것이 그 당시는 상당한 모험이었을 것이라서 비상식적인 발상이었고, 그런 것이 맥아더장군 특유의 발상이기도 했고, 그것은 사실 아슬아슬한 모험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인천에 건 도박은 예상을 훨씬 웃도는 성공담이 되었다. 그러니까 가끔 계산이 깔린 도박은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도박이라는 것은 그 뒤에 같은 운들이 따라주지를 않았기 때문에 분명히 들어난다. 그 이후 맥아더의 운은 사라지고, ‘악운’이 따르게 된 것이다. 그 당시 맥아더가 조금만 속도를 늦추고, 적군에 대한 정보에 신경을 더 썼더라면 사태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제일 큰 도박이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을 ‘억지로’ 무시했다는 실수였다. 수많은 정보들이 그것을 말해주었지만, 그에게는 듣기 싫었던 정보였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런 정보들의 신빙성이었을 것인데, 아마도 정보수집에 더 신경을 썼어야 했지 않았을까?

Book, Operation Broken Reed
Book, Operation Broken Reed

며칠 전에 Reading-by-Tying으로 읽고 있었던 한국전쟁(육이오 동란)에 관한 책, Operation Broken Reed (꺾인 갈대 작전)을 간신히 다 읽게 되었다. 이 책도 산지 몇 년째 된 것인데 올 여름, “육체적인 노동 대신 여름독서를”, 이란 목표로 골랐던 도서목록중의 하나였다. 이 책을 읽은 때가 육이오(6.25: 동란 발발)와 구이팔(9.28: 서울 수복) 을 사이에 둔 계절이어서 더 61년 전을 상상하게 되며 읽으니 실감이 더 했다. 이 책은 시간이 나면 자세히 나의 blog에서 소개할 예정인데, 한마디로 이 책의 내용이 ‘진실, 사실’ 이라면 이 ‘믿기 힘든’ 작전은 육이오 동란 중, 가장 비밀에 쌓인 역사였을 것이다. 이 책을 읽었던 사람들 중에는 이것이 거의 ‘허구’라고 단정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믿는 쪽에 가깝다. 나도 읽고 나서 생각이, 이것은 사실 일 것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이 작전은 육이오 동란이 휴전회담과 격전을 거듭하기 시작하던 1952년 1월 초에 38선 북쪽, ‘적진’ 속에서 일어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1주일에 걸친 미군, 자유중국 군의 합동작전이었고, 비록 결과는 성공이었지만 그에 따른 희생은 실로 충격적이고 슬픈 것이었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휴전회담은 가속화 되었고, 확전, 3차 세계대전(심지어, 핵전쟁)은 방지가 되었다.

 오늘 내가 생각하는 것은 구이팔을 가능케 한 구일오 인천상륙작전이다. 너무나 많이 알려져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이번에는 예전과는 조금 다른 각도로 이 역사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2007년, New York Times best seller였던 David Halberstram의 책, The Coldest Winter, The America and The Korean War라는 책 덕분이었다. 700 페이지가 넘는 이 책은 육이오 동란을 미국과, 한국 주변국과의 정치적인 각도로 다룬 것이어서 이제까지의 군사적인 각도로만 다룬 책과 다른 맛을 보여준다. 역사를 다룬 책이지만 역시 저자의 정치적 색깔도 여기저기 보여주고 있어서 흠이라기 보다는 조금 더 인간적인 역사철학도 보여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맥아더 장군에 대한 저자의 거의 ‘혐오’ 적인 인상이다. 물론 충분한 역사적 자료에 의한 저자의 의견이겠지만, 조금은 정도가 지나치다고나 할까? 맥아더를 영웅시하는 사람들은 이 책의 이 부분들을 읽는 것이 괴로울 것이다. 나는 솔직히 중립적인 입장일 수 밖에 없다. 내가 맥아더를 옆에서 본 것도 아니고, 이 저자와 같이 충분히 사료를 공부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어떠한 영웅도 보여주기 싫은 면이 충분히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진리’는 안다.

David Halberstam's Korean War book
David Halberstam’s Korean War book

 이 책의 저자는 책 전체를 통해서 맥아더를 일방적으로 몰아 부치기는 했지만 솔직하게 맥아더의 천재적인 ‘용기와, 지혜’를 인정한 유일한 부분이 바로 인천상륙작전이었다. 거의 부산 교두보 (Pusan Perimeter)에서 바다로 밀려날 뻔 했던 시기에 이 작전이 성공을 한 것이고 보면 그 절묘한 timing의 진가도 역사적인 것이 아니었을까? 사실, 이 작전이 조금만 더 늦게 있었다면 김일성 개XX의 호언장담대로 부산은 괴뢰군 수중에 들어갔을지도 모르고, 대한민국은 역사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아찔해진다.

 맥아더의 인천 상륙작전의 구상은 이미 지상전에서 유엔군의 압도적인 열세를 만회하는 방법으로 시작이 되었다. 유엔군의 해군, 공군을 포함한 기술적인 면의 압도적인 우세함을 활용하는 방법은 해상으로 적진 깊숙이 대거 병력을 빨리 상륙시키는 방법임은 사실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맥아더는 그의 과거 전투경험으로도 생명을 아끼지 않는 무자비한 적군과의 정면 대결보다는 우회 작전을 더 좋아했다. 이러한 적진 뒤의 상륙작전의 구상은 서울함락 직후 공산군이 노도와 같이 남진하기 시작하던 7월 초에 이미 결정이 되었다.

 맨 처음 이 작전은 Operation Blueheart 라고 이름이 되었고, 예정 날짜는 7월 22일이었지만 지상전에서 너무나 일방적으로 밀리는 바람에 이 예정은 무기로 연기가 되고 말았다. 그러는 중 맥아더는 그 동안 별로 작전이 없었던 해병대에 이 작전을 맡아주도록 주선을 하며, 본격적으로 목표를 인천으로 굳히기 시작했다. 문제는 목표가 인천이라는 사실이었는데, 사실 표면적으로 인천은 작전하기에 ‘최악’의 자연적 조건만 갖추고 있었다. 조수 간만의 차이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심한 곳이었다. 이 조수 시간을 잘못 맞추는 날이면 해병대가 기나긴 개펄에서 허우적거리는 최악의 상태도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상륙하기에 알맞은 ‘해변’ 이 없고 모두 방파제 같은 시설물로 그득하고, 수뢰와 같은 방어시설이 있으면 더욱 힘들 것이다. 항구에 거의 붙어있는 월미도는 공산군 수비대에게 부두를 방비하는데 좋은 시설을 줄 수도 있다.

 이런 불리한 조건들은 물론 해병대를 전함으로 운반해 줄 해군 측에서 강조가 되었다. 해군 함정들이 인천 해안에 충분히 접근할 수 있는 날짜는 밀물의 주기에 따라 거의 제한이 되었는데, 빠른 날이 밀물의 깊이가 31 feet인 9월 15일 이고 그 다음이 10월 11일이었다. 9월 15일의 아침 밀물의 시간은 오전 6시 59분, 저녁 밀물은 오후 7시 19분이었다. 이래서, 맥아더는 상륙시기를 아침밀물에 맞추는 작전으로 결정을 한다. 이런 결정은 그에게는 사실 간단했지만 해군에게는 상당히 힘들고 복잡한 요구였을 것이다. 이런 결정들은 거의 한결같은 반대에 부딪쳤지만 이것은 맥아더가 충분히 예상한 바여서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인천상륙작전이 도박을 할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본 것이다. 전략적인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것은 거의 모두 인정을 했지만 문제는 상륙 지점이었다. 왜~~ 그렇게 불리한 조건만 갖춘 인천인가? 그보다 훨씬 남쪽에 있었던 군산이 훨씬 (해군에게, 해병대가 상륙하기에) 안전한 곳이 아닌가? 그런 것들은 사실 맥아더가 설득하는데 거꾸로 이용이 되었다. 그렇게 어려운 곳이라 적들도 그곳을 충분히 방어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인천의 가치는 사실 지리적으로 서울과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에도 있었다. 서울을 점령하면 그 상징적인 효과는 대단할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동쪽으로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르면 낙동강 쪽에 몰려있는 공산군들을 완전히 포위 섬멸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맥아더의 뚜렷한 구상은 예상보다 쉽게 반대자들을 설득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인천 D-day는 이렇게 공식적으로 정해졌고, 공격준비가 시작이 되었다. 맥아더의 짐작대로, 김일성은 인천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모택동은 달랐다. 맥아더를 알았고, 일본에 깔려있던 공산스파이들이 이미 이상한 낌새를 보고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후방 깊숙한 곳으로 대거 병력이 쳐들어 올 가능성에 대해서 중공과 소련은 김일성에게 경고를 했지만, 역시 맥아더에게 운이 좋았는지 그는 듣지 않았다. 그 정도로 김일성은 빠른 승리를 장담했던 모양이다. 이런 사실로 보면 김일성은 소련이나 중공의 지시에 의해서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니고 순전히 그의 독자적인 결정으로 밀어부친 것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를 보면 이런 미친 정도로 ‘낙관적’인 사고방식이 이해가 간다. 그는 사실 거의 ‘깡패 개XX’ 의 수준이었던 것이다.

 상륙작전은 예상대로 공산군의 저항이 미미한 상태로 진행되었다. 13,000명의 해병대가 투입이 되어서 첫날의 전사자는 20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리고 드디어 서울을 향한 진격이 시작되었고, 결국 그것은 9월 28일까지 계속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서울까지 30마일 정도 진격하는데 무려 13일이 걸린 것이다. 이것은 9월 15일 이후 놀란 김일성이 대거 병력, 2만 이상을 이 지역으로 투입한 까닭이었다. 문제는 사실 서울을 그렇게 빨리 점령할 이유에 있었다. 군사적으로 보면 저항이 치열한 서울을 우회해서 빨리 낙동강으로부터 후퇴하는 공산군을 포위 섬멸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것은 후에 ‘맥아더 개인의 영광’을 위한 작전이 아니었던가 하는 비난을 받게 되기도 한다. 서울 탈환의 정치적인 중요성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서울 탈환에 소모된 귀중한 시간에, 후퇴하는 공산군이 북으로 탈출할 여유를 준 셈이고, 그것은 두고두고 전쟁을 길게 끈 원인도 되었다. 원래의 계획은 6.25 남침의 3개월이 되던 9월 25일 이전에 서울을 탈환할 예정이었는데, 그 날에는 서울 근교까지 진격을 한 상태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시가전이 거의 3일 걸린 셈이다. 이렇게 해서 맥아더가 거의 혼자 밀어부친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한 셈이고, 이로 인해서 파죽지세로 부산을 포위했던 공산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후퇴를 시작하게 되고, 전쟁은 완전히 양상이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이 작전 성공 이후로 ‘기세가 등등’ 해진 그의 독자적이고, 독재적인 작전은 실패의 연속이 된다.

 시기적으로 61년 전에 일어났던 일을 생각해 보았다. 나는 이 당시 2살 정도여서 직접 보고 들은 적이 없지만 그래도 이것들은 나의 생전에 일어났던 살아있는 역사였다. 이 당시에 나는 어디에 있었을까?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이 당시 이미 아버지가 끌려 가신 이후였고, 원서동의 어떤 무당집에 숨어 살았다고 했다. 그 동네는 비원 바로 옆에 있었는데, 미군의 비행기가 폭격하는 것도 다 보셨다고 들었다. 그러면 비록 기억은 안 나지만 나도 그런 장면을 다 보고 들었을 것 같다. 다만 기억을 못하는 것 뿐이다. 생각을 한다. 과연 민족 반역자, 역적, 김일성 개XX는 어떤 생각으로 전쟁을 일으켰나? 이 미친놈을 어떻게 역사는 능지처참을 할 것인가? 괴롭다. 괴롭다.

 

아버지와 에스페란토

지난번에 우연히 빌려온 Esperanto 에 대한 책을 보고, 어릴 적에 본 아버지의 책들과 문서들을 떠올렸다. 사실 에스페란토가 아직도 ‘쓰이고’ 있다는 사실에 은근히 놀랐지만, 그 보다도 우리 아버지가 육이오 동란 때 납북되시기 전까지 이것에 깊이 관련되었었다는 사실을 너무나 오래 잊고 살았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무언가 큰 가족 역사를 다시 발견한 기분이었다. 에스페란토 그 자체보다 그것에 얽인 아버지의 활동에 더 관심이 간 것이다. 어렸을 때 본 몇 장 되지 않은 아버지 사진 중에 에스페란토 기념사진이 있었다. 무슨 건물 앞 중앙 현관 계단에 모두들 모여서 찍은 단체사진이었는데, 거기에 에스페란토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아버지는 제일 앞줄에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계셨다. 무슨 에스페란토 연수회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1980년대 에스페란토 교본에 실린 한국 에스페란토 인들
1980년대 에스페란토 교본에 실린 한국 에스페란토 인들

그래서 세월의 curse가 아닌 그로 인한 technology의 도움으로, 이번에도 역시, googling 으로 한국 에스페란토 역사의 ‘여명기’에 관해서 ‘과거’를 뒤지기 시작했는데.. 나의 ‘희망적 짐작’은 어김없이 맞았을 뿐만 아니라 상상 이상의 수확이었다. 한번도 보지도, 듣지도, 느껴보지도 못했던 나의 아버지(의 흔적)를 거기서 찾은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육성’ 까지 ‘들을 수’ 있었다. 어머니가 살아계셨으면 나와 같은, 아니 훨씬 더 했을 감동을 나누셨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내가 너무나 늦었다는 후회가 밀려온다.

어렸을 때, 아버지와 에스페란토의 관계를 나는 느끼며 살았는데, 관련 사진과, 책, 서류들 때문이었지만 어머니도 가끔 에스페란토에 대해서 언급을 하신 것을 기억한다. 위에 말한 아버지의 책들과 ‘회보’ 같은 것들은 분명히 ‘영어’가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러다가 중, 고등학교 세계(역)사 시간에서 드디어 에스페란토 란 말을 듣게 되었다. 비록 간단히 언급을 했지만 나에게는 남들보다 더 의미 있는 것들이었다. 폴란드 출신의 의사, 자멘호프 란 사람이 ‘세계평화‘를 염두에 두고 고안한 사상 처음으로 ‘인공 언어’ 인 ‘에스페란토’ 어를 만들었다는 간단한 구절이었다. 사실 그것이 전부였다. 그것 말고는 더 자세한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그 당시에 그런 것을 더 알려면 국내 유일의 국립중앙도서관에나 가야만 알 수가 있었고, 백과사전은 너무나 비싼 ‘귀중, 사치품’에 속했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런대로 오래 산 보람을 느끼게 하는 “무한정의 정보망”, 인터넷은 이렇게 해서 우리 가족역사를 조금은 더 정확하게 잡아 놓았다. 첫 번째로 우리 (아버지 쪽) 집의 뿌리가 평창이씨, 익평공파, 아버지는 27세 손이고, 전설적으로만 남아 있던 작은 삼촌의 존재, 그들의 정확한 나이까지 알게 되었다. 현재는 이것으로 나는 안도의 숨을 쉬게 되었다. 내가 세상을 떠나더라도 나의 자식들이 그들의 뿌리에 대해서 좀더 알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거기다가 이번에는 아버지의 ‘업적’까지 덧붙이게 되었으니, 나의 기쁨은 글만으로 표현하기가 힘들게 되었다.

아버지의 이름이 연대적으로 제일 먼저 언급된 것은 “한국문학과 에스페란토” 라는 글이다. 이 글은 인하대학교 조성호 교수라는 사람의 학교 웹사이트에 실려 있는데, 이 글의 저자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고 있지만 아마도 조성호 교수라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Google의 indexing을 통하지 않고는 찾기가 힘들게 만들어 놓은 ‘semi-private’한 인상을 준다. 이 저자의 전공이 molecular biology인 것 같아서 조금 의아했지만 사실 생각해 보니 에스페란토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한 예가 아닌가 싶다. 문학적인 각도에서 본 에스페란토 어의 유용함을 ‘과시’하듯 한국문학작품의 번역(에스페란토 어로)에 대한 역사적인 고찰이다.

인하대학 조성호 교수의 "한국문학과 에스페란토"
인하대학 조성호 교수의 “한국문학과 에스페란토”

 이 글 에서 아버지의 성함이 두 번 언급된다. 첫 번째를 보면 다음과 같다. 

홍형의 는 「삼천리」사 편집국에 근무하다 사퇴하고 1937년에 「Korea Esperantisto」지를 창간하였다. 비록 일제에 의해 곧 폐간되어 창간호 밖에는 발행되지 못하였으나 이 잡지는 표지 포함 24쪽 전문이 에스페란토로 되어 있어 우리 운동사에 있어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창간호에는 월북작가인 이태준(李泰俊)의 장편(掌篇) 소설 「천사(天使)의 분노(憤怒)」(1932)가 이정모(李正模)의 번역(「La Indigno de l’Anĝelo」)에 의해 실려 있다

 

그러니까, 1937년에 창간호로 폐간이 된 언급된 잡지에 아버지(이정모)가, 1932년에 발표된 이태준의 꽁뜨, <천사의 분노>를 번역해서 실었다는 내용이다. 이것으로 나는 아버지가 이시기에 이미 에스페란토 어를 거의 통달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한국어로 된 문학작품을 에스페란토 어로 번역했다는 사실이 그것을 분명히 말해준다. 1937년이면 아버지의 연세가 26세에 불과한데..그렇다면 아버지는 이미 대학(보성전문: 고려대학의 전신)시절에 이미 에스페란토에 심취 하였을 것이다. 아버지의 평소 직업은 영어 선생님(선린, 경기고)이었으니까, 어학 쪽에 관심이 많았을 것이지만 어떻게 에스페란토에 접하게 되었는지는 현재까지 알 길이 막막하다.

 이 기사에 의하면 1999년경에 그 동안 에스페란토 어로 번역된 한국문학 작품을 총 망라한 anthology, <Korea Antologio>가 출간이 되었는데 이 글의 저자도 이 작업에 관여가 된 모양이다. 그 책에도 역시 아버지, 이정모의 번역작품이 실린 모양인데 그것이 위에 언급된 <천사의 분노>를 말하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오래 전부터 한국에스페란토 협회를 중심으로 이종영, 이낙기, 정원조 등 뜻 있는 분들에 의해 우리나라에서도 Antologio 발간의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하였으며, 수년 전 드디어 구체적으로 그 뜻을 모으게 되었다. 필자도 이를 염두에 두고 1970년대 말부터 틈틈이 단편소설의 번역 작업을 해 오던 터이라 김우선과 함께 그 편집의 역할을 수락하게 되었다. 그리고 안송산, 허성, 방명현, 권혜영 등과 함께 편집진을 구성하여 기 발표된 작품을 모으고 정리하는 작업에 착수한 지 약 2년만인 1999년 말에 드디어 「Korea Antologio de Noveloj」 (이하 「Korea Antologio」라 함)가 발간되었다.
Korea Antologio」에는 339쪽에 걸쳐 모두 26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김억의 번역 소설 중 3편, 안우생 번역의 1편, 이정모 번역의 1편, 이재현 번역의 5편, 기타 「La Espero」에 수록된 11편, 「La Lanterno Azia」 수록의 3편과 필자가 번역하여 발표하지 않았던 황석영 원작(1973)의 「삼포(三浦)가는 길(La Vojo al Sampo)」 등 25편의 소설 번역 작품과 부록으로 「La Pioniroj en Vilaĝo」가 포함되었다. 편집 과정 중 가능한 한 원래의 번역 문체를 살리기 위하여 문법적인 오류를 제외하고는 수정을 가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 다음으로 인터넷에서 찾아 낸 것이 <제3장 혼란 속의 재건과 성장(1945~75)> 란 제목으로 시작되는 한국 에스페란토 운동의 역사의 일부분이다. 누가 저자인지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에스페란토의 ‘정사(正史)’ 정도 수준의 글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 글의 바로 제일 첫 부분에 아버지의 이름과 ‘육성’을 보고 “들을” 수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이 패하고, 조선반도가 일본의 통치로부터 해방되자 새로운 나라를 수립하기 위한 건국준비가 활발하게 추진되었고, 동시에 에스페란토운동에 대한 탄압도 사라졌다. 이 때 주로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 전신) 출신의 젊은 지성인을 총망라한 [건국추진대 본부]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우선 [평화의 사도] 연합군(미국, 소련)의 서울 진주를 환영하기 위하여 영어와 러시아로 된 환영휘장을 붙이기로 하였다. 이 때 이정모(李正模)가 “전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위하여 창조된 국제공통어 에스페란토를 사용하자”고 제의하여 젊은 지성인들은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 이들은 즉석에서 주머니를 털어 1천원을 모았다. 이 돈으로 1945년 8월 하순, 서울 종로에 있는 영보빌딩 정면에 에스페란토로 서울에서 가장 큰 연합군 환영휘장을 붙이고, 가두방송용 확성기를 통하여 에스페란토에 관한 선전을 하였다.

 

이 글을 찾고 읽었을 때 나는 피가 멈추는 듯한 충격과 감격을 느꼈다. 전설적으로만 느껴지던 나의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이 글로 나는 간접적으로 추측의 나래를 한껏 펴보는 기쁨을 즐겼다. 해방되는 해면 아버지는 첫 딸을 5월쯤에 보았을 젊은 아빠였을 것이다. 그 당시 아버지는 선린고등학교에 재직하고 있었을 것인데 어떻게 이런<건국추진대> 라는 ‘운동권’에 관계가 되었을까? 전혀 어머니로부터 들은 바는 없던 사실이다. 하지만 이 글로 분명한 사실은 아버지는 에스페란토의 정신을 ‘믿는’ 사람이었으니까 분명히 ‘인류평등’, ‘인류평화’를 신봉하던 거의 ‘이상주의자’가 아니었을까.. 짐작을 해 본다.

 해방 후에 재건된 에스페란토 학회의 창설과정과 후학 연수에도 아버지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러니까 이때가 아버지의 에스페란토 운동의 절정기가 아니었을까. 이때는 사실 나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였다.

 

서울 중심의 전국적 조직은 흩어진 동지의 규합에 시간이 필요하고, 또 서울에서 사회적, 정치적 혼미상태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에스페란토운동의 부활이 늦어졌다. 그러나 개혁적인 에스페란티스토와 에스페란토 사상에 동조하는 인사들이 모여 “약소민족어의 해방 및 에스페란토운동의 재건”을 축하하는 [에스페란토 정치선언]을 채택하고, 이것을 잡지 「혁명」(발행인 김 근)에 게재하여 독자들의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이어서 1945년 12월 15일 자멘호프 탄신을 계기로 [조선에스페란토학회](Korea Esperanto-Instituto) 창립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창립총회에서 홍명희(洪明憙)를 초대 회장으로 선출하고,2) 홍형의(洪亨義)를 서기장에 임명하였다. 동시에 조선에스페란토학회의 사업계획을 채택하였는데 1) 재정 확립, 2) 기관지 발행, 3) 사전 편찬, 4) 학습 교재 발행 등을 하기로 하였다. KEI창립을 위하여 김억(金億), 백남규(白南圭), 석주명(石宙明), 유기동(柳基東), 이균(李鈞), 이종률(李鍾律), 김교영(金敎瑛), 신봉조(辛鳳祚), 이정모(李正模), 장석태(張錫台), 나원화(羅元和), 송창용(宋昶用), 서병택(徐丙澤), 홍형의(洪亨義) 등 서울에 있던 에스페란티스토들이 발기하고, 그 외 창립총회에는 홍명희(洪命憙), 이기린(李基麟), 유림(柳林), 곽경(郭敬), 김계림(金桂林), 김명진(金明鎭), 이동각(李東珏), 李正馥(이정복), 박명줄(朴明茁), 이동석(李東錫), 문홍주(文弘周), 한일(韓一), 윤봉헌(尹鳳憲), 홍숙희(洪淑熹), 이기인(李基寅), 이극로(李克魯) 및 당시 아직도 중국에서 귀국하지 아니한 안우생(安偶生), 이재현(李在賢) 등이 참가 또는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대회가 끝나자 홍형의, 이정모의 지도로 [조선에스페란토학회] 주최 첫 강습회가 시작되었다. 이리하여 해방 후 처음으로 전국적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어서 다음해인 1946년 2월 16일 서울대 대강당에서 [대학생 에스페란토 강습회]가 개최되었는데 100여 명의 수강자에게 석주명, 홍형의, 안우생의 강연에 이어, 석주명, 홍형의 지도로 에스페란토 강습을 하였다. <중략>
1946년 8월 제2회 공개강연회 및 강습회가 홍형의, 이정모의 지도로 개최되었고, 이 때 이극로(李克魯)가 제2대 회장으로 취임하고,3) 서울 을지로2가에 있는 청목빌딩에 KEI 사무실을 두게 되었다. <중략>
    1949년 5월 서울 국학대학 강당에서 약 6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제3차 한국에스페란토대회 및 KEI 정기총회가 개최되었다.  이 총회에서 KEI 제4대 회장으로 유기동(柳基東, Saliko, 사업가), 부회장으로 백남규가 선출되었다. 그리고 8월에 KEI 제5회 강습회가 개최되었는데 약 30명이 참가하고 서병택, 석주명, 이정모가 지도하였다.

 

위의 글에서 아버지는 해방 후에 에스페란토 운동의 중심부에서 학회 발기인, 후배 양성에 전력을 쓴 것이 역력히 들어난다. 특히 아버지의 이름이 한국 에스페란토 운동의 대부 격인 ‘김억, 석주명,’등과 나란히 나오는 것을 보면 나이로나 정열, 열의, 경력 등으로 보아 중심적인 인물이었을 것이다. 특히 계속된 에스페란토 강습회에서 강의를 한 것을 보면 아버지의 직업인 ‘학교 선생님’의 면모를 짐작하게 한다.

이상주의적인 에스페란토 운동은 사실 사상적으로 조금은 위험한 것일 수도 있었다. 완전 중립적인 위치를 고수하니까, 사실 빨갱이건, 아니건 모두가 참여할 여지가 있었고, 해방 후의 사상대립에서 이것은 정말로 아슬아슬한 운동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김구의 남북합작과 같은 정도의 남쪽에서 보면 불온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거꾸로 빨갱이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악질반동들이 섞여있는 이런 단체를 곱게 보았을까? 그러니까 양쪽에서 모두 ‘노리는’ 그런 ‘동네 북’과 같은 ‘중립’이었던 것이다. 아마 이런 이유로 에스페란토의 중추적이었던 몇 사람이 납북과, 처형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 아버지도 그 중의 하나였을 것이고..

 해방 후 혼란 속에서 차츰 정리, 활성화되어 가던 한국 에스페란토운동도 갑작스런 6.25사변으로 또다시 커다란 시련을 겪게 되었다.

   KEI는 1949년 5월 서울에서의 제3차 한국에스페란토대회를 마치고 제4차 한국에스페란토대회를 1950년 6월 28일 서울 과학박물관에서 개최하기로 하고 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6.25동란으로 서울은 일대 혼란에 빠지고 따라서 제4차 대회는 개최되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석주명은 살해되고, 김억과 KEI 회장 유기동 등 핵심인물들이 동란 중에 납북되었다.  국내에 머물 수 있었던 안우생, 이균, 김교영, 이계순(여자) 등 인사들도 전란으로 뿔뿔이 분산되었다. 그 와중에 한국에스페란토학회(KEI)의 기능이 계속 될 수 없었다.

 

위의 글에서 왜 아버지의 납북에 관한 언급이 없었을까? 육이오 동란 이후, 국내 에스페란토 관련 인물들이 아버지의 납북사실을 이렇게 전혀 몰랐을까? 나중에 역사를 정리하면서 분명히 ‘이정모’의 실종 사실을 발견하였을 터인데 어찌하여 이렇게 ‘에스페란토 정사(正史)’에서 아버지 이름이 슬그머니 사라졌을까? 나는 그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 가족의 역사는 이곳에서도 ‘찾기 어려운’ 그런 사실이 나의 마음을 너무나 무겁게 하고, 내가 어떻게 이런 것들을 바로 잡아야 할지 모르겠다.

이렇게 아버지의 희미한 자취를 찾으면서 에스페란토에 대해서 그런대로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그 전에는 그저 막연하게 인공적인 국제 공용어 정도로만 알았을 뿐이다. 언어를 천재적인 용기로 혼자서 150년 전에 만들었다는 것도 놀랍지만, 안타깝게도 이 언어는 창시자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많겠지만, 역시 새로 등장한 영어의 위력 때문이 아닐까? 비록 배우기가 자연언어보다 쉽다고는 하지만 역시 이것을 배우는 것도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도 전형적인 chicken-and-egg or Catch-22 problem일 것이다. 어느 정도 쓰이고 있어야 사람들이 더 관심을 가질 터인데 그 단계에 도달하지를 못한 것이다. 150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절대 질량 (critical mass)’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휴~ 덥다, 더워..

올 여름 들어서 첫, ‘강더위’가 시작되었다. ‘강추위’와 비슷한 말 ‘강더위’란 말은 들어본 기억이 없지만 할 수 없이 쓰게 되었다. ‘무더위’ 보다 더 더운 말을 찾기 쉽지 않았다. 지난번 나의 blog에서 요새는 날씨에 대한 뉴스가 조금 주춤 해 졌다고 쓰더라니.. 그새를 못 참고 이렇게 되었다. 지난 4월 달의 날씨에 관한 메가 급 뉴스는 비록 아닐 지라도 이런 찜통더위는 조금 신경이 쓰인다. 바람이 전혀 없이 지독한 습도가 가세한 더위에서 사실 ‘도망’ 갈 곳이 없다. 그늘도 소용이 없으니까.. 유일한 방법은 ‘에너지’를 써서 더위를 ‘뽑아내어야’ 하는 수 밖에 없다. 나는 이렇게 에너지를 써서라도 편하게 살아야 하는 현대문명이 별로 맘에 들지 않지만.. 어찌하랴.. 인간은 이렇게 자꾸만 ‘약해’져 가는 것을..

오래 전 고국에서 살 때, 도망갈 수 없는 더위를 겪었던 기억이 별로 없었다. 그런대로 ‘즐길만한’ 더위였다. 딱 한번 예외는 있었다. 1972년 여름..서울 세운아파트..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잠을 못 잤다. 밤에 기온이 거의 떨어지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나중에 ‘열대야’ 라고 부르게 된 것을 알았지만 그 당시는 처음 겪는 현상이라 적절한 ‘용어’도 없었던 것이다. 확실히 무언가 기후의 거대한 변화의 흐름이 있긴 한 것이다.

그 당시 서울에는 아주 고급 사무실과 건물이 아니면 ‘에어컨’ 이란 것이 없었다. 하물며 일반 주택에선 그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전기선풍기만 있으면 대 만족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보다 훨씬 윤택하게 살았던 일본도 별 차이가 없었다. 그들도 역시 전기선풍기로 견딜 만 했다. 그러다가 이곳 미국에 와 보니 이건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실내 여름이 우리나라 겨울 실외보다 더 추운 듯 느껴졌으니까.. 일단 그것에 적응되고 나니까.. 이제는 전으로 돌아가기가 참 힘들어졌다. 그것이 인간인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아닌 게 아니라 조금은 걱정이 되기도 한다. 분명히 지구는 더워지는 것 같고, 인간은 자꾸 그것을 ‘강제’로 식힌 곳에서 ‘안주’하려고 하고.. 이것도 ‘진화’과정을 통해서 ‘인간 진화가 아닌 퇴화’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조금은 근거가 약한 걱정 같지만.. 하지만 우선 걱정을 놓자.. 길어야 2개월만 견디면 되니까..

Dan Brown's the Da Vinci Code 2003
Dan Brown’s the Da Vinci Code 2003

THE DA VINCI CODE, 올 여름 들어서 나도 그 ‘흔한’ summer reading을 생각하게 되었다. 왜 여름만 되면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일까? 이것도 혹시 ‘책 장사’들이 꾸며낸 ‘음모’일까? 좌우지간 여름 전부터 요란하게 이번 여름에 읽어야 할 책들이 요란하게 등장한다. 하기야 영화도 마찬가지다. 이때 ‘수입’을 잡아야 타산이 맞게 되어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수시로 책을 읽고 있어서 여름의 독서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 하지만 올해는 조금 이색적으로 이것 한 권만은 꼭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3년에 나온 책, Dan Brown의 “The Da Vinci Code. 거의 8년이 지나서 읽게 되었다. 이것은 그 후에 Tom Hanks주연의 영화까지 나온 것이다. 이 책은 내가 산 것이 아니고 큰 딸 새로니가 책이 처음 나올 당시에 hard-cover로 산 것이고 작은 딸 나라니까지 읽은 후에 나에게 넘어온 것을 아직껏 읽지를 못한 것이다. 사실은 첫 2페이지를 읽고, 그만 손을 놓았다. 너무나 사람들이 이야기를 많이 해서 사실 흥미가 조금 떨어진 탓도 있었고.. 역시 흥미 위주로 천주교회, 로마 바티칸을 무슨 ‘비밀과 음모의 집단’처럼 매도한 느낌도 받아서 더 그랬는지 모른다. 저자의 이러한 식의 사실처럼 느끼게 하려는 ‘소설’의 테크닉이 워낙 정교해서 재미가 없을 수가 없을 것이다. 특히 천주교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좋은 ‘비방의 재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계속 읽기를 미루는 나를 아이들은 재미있는 듯이 놀려댔다. 한마디로 내가 게으르다는 식이었다. 나중에 아이들이 영화를 보더니 그런 이야기가 없어졌는데, 이유는 영화가 그 소설을 다 망쳐 놓았다는 말투였다. 이것은 이해가 간다. 소설의 그 깊은 뉴앙스(nuance) 가 영화에서 다시 고스란히 재현되기는 쉽지 않을 듯 하다. 애들은 한결같이 Tom Hanks가 그 주인공인 Robert Langdon의 역할에 잘 맞지 않는다고 우겨댔다. 나는 책도, 영화도 안 보았으니.. 할말이 없었지만 그런대로 짐작은 하겠다. 어떻게 보면 Indiana Jones같은 역할인데.. 그것은 Harrison Ford가 더 적격이 아닐까? 문제는 Ford는 이제 너무 나이가 들었다는 ‘슬픈’ 사실.. 어찌하랴..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문제는 또다시 ‘재미없으면’ 아주 이 책에서 손을 놓을까 하는 것이었다. 다른 ‘더 재미있는’ 잡스러운 일도 많은데 이 책을 끝까지 읽으려면 무언가 ‘동기 제공’ 이 중요한 것이다. 재미 없을 때 손을 놓아버리면 이제는 다시 읽게 되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해결책이 생각보다 쉽게 찾아졌다. RbT, Reading by Typing.. 내가 만든 조잡한 말이다. “맹송맹송”하게 눈으로만 읽는 것이 아니다. Computer에서 typing을 하면서 읽는 방식이다. 이런 idea는 사실 성당에서 자주 보는 성서필사에서 찾았다. 성서를 그냥 읽는 것이 아니라 펜으로 종이에다 쓰면서 읽는 것이다. 눈으로만 읽는 것보다 훨씬 집중이 되고 기억에도 더 남는다고 한다.

그런데 요새 손으로 장문의 글을 종이에 쓰는 것은 거의 ‘고문’에 가깝지 않은가?세상이 그렇게 변하고 있다.

그리고 RbT 에는 다른 이점도 있다. 끝이 나면 .’나만의 책’이 하나 남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을 무슨 연구재료로 쓰거나 할 때 인용하기도 너무 쉽고, 나만의 ‘근사한’ 책으로 만들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역시 나의 예감은 맞았다. 그냥 눈으로 읽을 때 비해서 속도는 떨어졌지만, 중단되는 ‘사고’는 없었고, 앞으로 없을 듯 하다. 한달 만에 거의 책의 반 정도를 읽게 되었다. 여기에 힘을 얻어 다른 ‘끝까지 읽기 고약한’ 책들도 함께 읽기 시작했다. 역시 속도는 늦어도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계속 읽게 되니까..

현재까지 읽은 이 책, The Da Vinci Code는 비록 가톨릭 신자의 입장에서 염려스럽긴 하지만 소설로써는 최상급이었다. 우선 ‘재미’가 있는 것이다. 읽으며 무궁무진한 상상의 나래를 펼 여지와, 절대로 책 읽기를 중단하지 못하게 하는 절묘한 수법을 쓴 저자를 다시 한번 보게 되었다. 그 ‘사실처럼 느끼게 한 거짓말들’를 어떻게 이 저자는 생각해 내었을까? 정말 할 말을 잊는다. 이 책을 읽을 때 성가신 것 중의 하나는 ‘불어’ 사용이었다. 배경이 프랑스에 많이 있기 때문이고 여자 주인공인 Sophie Neveu가 프랑스 사람이라서 더욱 그런데 문제는 나는 불어를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다. 쓰는 것도 힘들고, 발음에서는 완전히 걸린다. 이것은 거의 나의 complex가 되었다. 우선 제대로 발음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지독히 불편하고 창피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라도 한번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재동학교 졸업 앨범, 내가 1954년4월부터 1960년 2월까지 다니던 정든 서울 재동국민학교의 졸업 앨범이 드디어 ‘해체,스캔’이 되어 computer에서 편하게 볼 수 있는 PDF format으로 바뀌어서 ISSUU server에 upload가 되었다. 일반적인 browser의 pdf-reader plugin으로 보는 것 보다 훨씬 느낌이 빠르고, 실제로 ‘책’을 읽는 기분을 느끼게 해 준다. 과연 몇 명이나 자기의 얼굴을 이곳에서 보게 될지는 미지수이지만 그래도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한다.

 

시리즈, 내가 읽은 책: 박기원씨의 이진섭(2)

턱걸이 제네레이션

박기원 씨는 사랑하는 남편 이진섭씨를 통해서 그 당시를 “살아 가야만” 했던 대한민국 남자들, 가장들의 한(恨) 같은 것을 몸으로 느꼈다. 평범하게 매일 매일을 생활하는 엄마, 주부로서만이 아니고 한 지식인, 문인으로서 남보다 더 깊이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남편의 입장을 비록 다 이해는 못하더라도, 더 이해하려 노력을 하며 살았을 것이다. 이진섭씨는 1922년 생이고 박기원씨는 1929년 생, 모두 왜정(주: 그때는 ‘일제강점기’라는 고급스러운 말을 이렇게 불렀다)때 태어나셨다. 특히 이진섭씨는 청년기까지를 모두 왜정에서 교육을 받은 셈이다. 일본식 교육과 충성을 강요 받고 잘못하면 ‘남의 나라’ 전쟁터로 끌려갔을 그런 ‘기가 막힌’ 시대를 사셨던 것이고 우리의 부모님 세대들도 거의 다 그랬을 것이다.

… 어쩐지 한국 남자의 한(恨)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뒤늦게 얻은 이해심도 아량도 아니다. 술을 마셔야만 살았을 것 같은 그 시대에 살았던 남자들!

그 안에서 제일 다치기 쉽고 멍들기 쉽고 상처 받았을 그이의 외로웠던 가슴을 뒤늦게나마 아내인 나는 조금씩 알 것만 같았다. …………

그이는 생전 이런 말을 가끔 했다.

“우리 시대는 턱걸이 제네레이션이야. 무언가 해 보려고 안간 힘을 썼다가는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

그것은 아마 불안정했던 한국의 역사와 격동기를 겪고 살아야만 했던 고뇌에 찬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이의 진정, 깊은 남자의 마음을 나는 그가 살았을 때보다 그가 간 지금 되새겨 보고 있다. 그러나 한편 그것은 진정 그의 아픔이었지 아내인 나에게도 나누어 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한 남자만의 고독이었다. (본문 97쪽)

그이는 살아 있는 동안 가끔 이런 말을 했다.

“어떤 좋지 않은 결과가 생겼을 때, 그것을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원인을 타인에게 미루는 것처럼 비겁한 것은 없다. 모든 결과는 먼저 자시에게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 세대만은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 원인을 시대에 밀어붙일 수밖에 없는 비극을 지니고 있다.

‘턱걸이 제네레이션’이라고 할까? 즉, 철봉 틀에 매달려 혼신의 힘을 다해 기어오르려 하면 철권으로 내리쳐 주저앉게 만든다. 한 번도 그 푸른 하늘을 못 보고 사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시대의 생각 있는 남자의 몰골은 마치 주문진 해변가에 널려 있는 오징어의 모습 같다. 축 늘어져 말라 가는 오징어들 그것일 것이다.” (본문 169쪽)

 

“최후의 낭만인 이 진섭”

1983년 3월 이진섭씨의 장례 시, 동창, “많이 통하며 많이 비슷하고, 멀리 있어도 가슴 한구석으로 걱정을 해주며 살던 친구” 한운사(韓雲史)씨의 비문(碑文)이 명필 송지영(宋志英)씨의 글로 세워졌다.

 

비문

무엇인가를 쓰고

예술을 논하고

노래를 짓고, 노래 부르고

인생의 멋과 맛을 찾아 다니며

소유의 노예가 되어 가는 것들에게

욕설을 퍼붓던 우리 세대

최후의 낭만인 이 진섭(李眞燮)이

그 뜻을 다 펴지 못하고

한 잔 술, 두 잔 술로 외로움을

달래다가 마침내 여기 영원히

잠들었다.

새야, 바람아, 교교한 달아

찬란한 태양아

이 사람과 더불어 놀아 주라.

1983년 3월 10일

 

이 글에서 “우리 세대 최후의 낭만인” 이란 말이 이채롭다. 영어로 하면 “last Romanist among our generation“정도나 될까. 이분의 일생을 알고 나면 이 표현은 정말 설득력이 있다. 또한, 멋과 맛을 찾아 다닌다고 했지만 그 정도와 걸 맞는 철저한 책임 있는 한 가장이기도 했다. 문제는 “한 잔 술, 두 잔 술로 외로움을 달래다가” 건강을 해친 사실이다. 나의 기억에 그 당시를 살았던 아버지 세대 중에는 이런 분들이 꽤 있었다. 지나친 자학과 불만을 거의 모두 ‘술’로 달래다가 일찍 운명을 하신 불쌍한 세대였다. 우리 세대도 이런 것들을 보고 자라서 그런지 많이 술 문화에 영향을 받긴 했어도, 그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100% 그런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다 이진섭씨는 아마도 최후의 “자유인” 이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 이진섭씨는 비록 말년에 세례 기독교 신자가 되었지만, 흔히 말하는 독실한 신자 처럼 같이는 보이지 않는다. 최소한 부인의 눈으로 보아서도 그런 것이다. 종교도 ‘자유’스럽게 받아들이고 싶었을까? 틀에 얽매는 것이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을까?

 

그이는 감히 남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자기만의 세계를 고집했고, 그 속에서 헤엄치듯 살았다.

술잔을 들면서 혼자 기도도 하고 묵상도 하고 그랬다. 나는 그런 그이 모습이 우스워,

“여보, 술잔 들고 기도하는 사람이 어디 있우? 그건 하나님에게 대한 모독 예요. 하나님을 접할 때는 몸도 마음도 정결하게 해서 경건한 마음으로 임해야죠”

그러면 그이는 너무도 당당하게

“모르는 소리. 술 안 먹은 맑은 정신 속에서도 음모, 살의, 도둑 심보 등 갖은 잡스런 생각을 지닌 채 기도하는 놈들도 있을 거야. 나는 술은 먹어도 마음만은 맑은 거울같이 깨끗해. 성경 말씀에도 있지. 착하고 순진한 어린애 같아야 하나님과 가까이 할 수 있다고 말야. 나는 술잔을 들고 있지만 그런 뜻에서 하나님은 나를 미워하실 수 없을 거야”

나는 이론이 정연한 그의 말에 말을 잃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이는 하나님을 믿는 것도 누구에게 구애 받거나 간섭 안 받고 자기 식대로 자기 마음대로 믿었다.

그러고 보니, 그이같이 모든 것을 철저하게 자기 마음대로 산 사람도 드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본문 110쪽)

 

위의 글을 보면 이진섭씨는 위선자 부류를 아주 싫어한 것 같다. 올바른 소리에 비해 행동이 다른 사람들, 이진섭씨도 올바르고 이론 정연한 이론을 펼쳤어도 행동이 그것과 그렇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고 나면 그의 ‘자유론’도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특히 율법에 얽매여서 ‘법의 기본 정신’을 모두 잃어버린 ‘바리사이파’ 같이 예수를 팔아 넘길만한 사람들이 ‘수두룩 닥상’인 이 세상을 살면서 어찌 이런 자유인의 행동을 마다할 수가 있을까?

 

시발택시 위의 해프닝

자유와 멋을 제대로 승화시킨 ‘사건’은 아마도 시발택시 위에서 샹송을 부른 일이었을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얼마나 이진섭씨가 술과 자유와 샹송을 사랑했는지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 해 겨울이었나 보다. 눈이 많이 쏟아지는 밤이었다. 낮에 나간 그이가 통행금지 시간(필자 주: 어린이 들, 그때는 midnight curfew란 것이 있었음)이 다가오는데도 들어오지 않았다. 애들을 재우고 온 정신이 문 밖에 쏠리고 있었다.

그때, 문 밖에서 다급히 울리는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나는 육감적으로 뛰어나갔다. 당시엔 시발택시가 한창인 때였다. 시발택시 지붕은 널찍하고 편편했다.

그이는 흰 눈이 덮인 시발택시 지붕 위에 누워서 늘어지게 샹송을 부르고 있었다.

눈 덮인 길은 달빛이 은색으로 빛나고, 이 진섭씨는 하늘을 향해 황홀경에 젖어 있었다.

“운전 20년에 저런 양반은 처음 예요. 아주머니 빨리 요금 주시고, 같이 끌어 내려요”

어린애 달래듯이 겨우 택시 지붕에서 끌어 내렸다.

그랬더니 이 진섭씨 왈,

“자네는 차만 끌 줄 알았지 이런 멋진 밤을 모르는 불쌍한 놈야. 자 요금”

그이는 호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지폐를 꺼내 한줌 집어 준다.

그 돈이 타고 온 요금의 몇 배가 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제서야 운전수는 갑작스런 횡재에 입이 벌어지며,

“아저씨 감사합니다. 어서 들어가 주무십시오”

하며, 깍듯이 정중한 인사를 하고 가버린다. (본문 159쪽)

 

국산차 1호, 시발 승용차
국산차 1호, 시발 승용차

물론 이때 이진섭씨는 한잔을 거나하게 걸친 취중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런 행동을 보면 이상하기 보다는 멋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누구라도 마음 속 깊이 이렇게 한번 ‘멋지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있을 것이니까.

 

여기 나오는 시발택시가 무엇인지 상상이 전혀 안 가는 “어린애”들이 많을 듯 하다. 이승만 정권 때 나온 ‘국산 차’의 이름이었다. 군용 Jeep을 완전히 승용차로 개조한 것이다. 그러니까 body(차체)만 군용drum통을 사용해서 우리 디자인으로 씌운 것이다. 대강 찝 차와 비슷하게 생겼다. 대부분의 택시들이 이차였다. 이것이 없어지기 시작한 것은 오일육 군사혁명 뒤부터 일제 차, “blue bird”가 들어오면서 부터 였다.

 

65세 만세론(萬歲論)

내가 이 책을 처음 읽게 된 때는 30대 중반이었다. 그 뒤로 계속 읽고 읽고 하다가 이 대목에 이르면 넘어가곤 했다. 아직도 나에게 멀었다는 막연한 생각과 죽음이나 수명 같은 화제는 가급적 피하고 싶었던 것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나이나, 세대가 바뀌면서 생각하며 읽게 되었다. 영어에도 여기의 화제와 비슷한 말이 하나 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 중의 하나.. “dirty old man” 이란 말이다. 이진섭씨도 이런 ‘어감’을 제일 싫어하지 않았을까?

 

그 이는 가끔 65세 만세론(萬歲論)이란 말을 했다. 즉, 65세까지만 살면 인생은 그만이라는 뜻이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그 이상은 ‘덤’으로 사는 거지, 그것은 사는 게 아니라 그저 생명의 연장일 뿐이라고도 했다. 그것은 곧 사실상 죽은 인생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이는 가까운 친구분이던 윤 현배 선생님과 몇 분이 서 항상 65세 만세론을 강조해 왔다. 그런데 그이는 그 소원이던 65세도 채우지 못하고 가 버렸다.

어떤 때 외출을 같이 나갔다가 길에서 나이 많은 노인이 조깅하는 것을 보고,

“늙은이는 늙은이다워야지, 저렇게 무리한 운동을 하면서까지 오래 살려고 안간 힘을 쓰는 것은 좋게 안 보이는군” 하던 말이 기억난다.

더구나 모든 면에서 노욕(老慾) 같이 추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늙어갈수록 저물어 가는 낙조(落照)를 보듯 담담해야 된다고도 말했다. 또 인간은 어머니 뱃속에서 누구나 두 주먹을 쥐고 나오지만 세상을 떠날 때는 누구나 두 손을 편안하게 펴고 죽은 것처럼, 그 동안 두 손 안에 담았던 천태만상(千態萬象)의 욕심을 미련 없이 버리고 가야만 된다고도 말했다.

그러니까 자식 덕을 보겠다는, 그러기 위해서 오래 살아야겠다는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러고 보면, 자기 몸 움직여 60 평생까지 살고, 그 이상 못 움직이게 되니까 ‘이만하면 너희끼리 살 수 있겠지’ 하고, 미련도 아쉬움도 없이 훨훨 가 버린 것 같다. 그것도 아주 몸 져 눕기 두 달에서 이틀 모자라는 날만 채우고…

어떻게 생각하면 매몰차고, 너무나 명확하게 자기 인생 몫을 살고 간 것 같다. (본문 311쪽)

 

이진섭씨 세대에선 분명히 60세, 즉 환갑이란 나이는 커다란 개인적 업적에 속했다. 평균수명을 생각해도 그렇지만 전통적인 유교질서에서 장유유서(長幼有序)의 개념을 생각해도 그렇다. 나이가 듦은 ‘무조건’ 가치가 있던 시절이었으니까. 요새는 사실상 완전히 거꾸로 되었다. 젊은 것이 ‘무조건’ 좋게 보이는 세상인 것이다. 강제로 늙어감을 늦추는 것.. 정도의 문제다. 지나치면 ‘노욕’이 되는 것이 아닐까? 자연스러운 것보다 더 추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나이가 자꾸 들어가는 연예인들을 보면서 어떨 때는 깜짝 놀랄 때도 있으니까.. 10년 전 보다 더 젊게 보인다면 이건 좀 이상하다. 그런 배경에서 나는 이 책을 오랫동안 읽으면서 가급적 자연스럽게 늙는 것을 바라게 되었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계속)

 

시리즈, 내가 읽은 책: 박기원씨의 이진섭(1)

이진섭, 아내가 남편에게 바치는 책, 1983
이진섭, 아내가 남편에게 바치는 책, 1983

나에게는 1983년 서울 학원사(學園社) 발행 넌 픽션, 여류 소설가 박기원씨가 쓴 <하늘이 우리를 갈라 놓을지라도> 라는 긴 제목의 책이 하나 있다. 사실은 나의 책이 아니고 아내 (전연숙)의 책이지만 실제적으로 이제 거의 나의 책이 되었다. 이 책은 1984년 초 연숙이 서울에 갔다 올 때 그녀의 학교선배가 사준 것이었다.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이제 거의 30년이 되어오는 준 고서(準 古書)에 가까운 책인 것이다.

나에게는 이 정도의 역사를 자랑하는 책들이 그런대로 있지만 이 책은 좀 특이하다. 우선 내가 산 책이 아니고, 다른 오래된 책들과 다르게 거의 끊임 없이 자주 읽어 온 책이기 때문이다. 같은 책을 이렇게 읽고 또 읽고 한 것은 이 책이 거의 유일할 case가 된다. 왜 그랬을까 생각을 하지만 아주 특별한 것은 없다. 그저 이 책이 화장실에 항상 있어서 더 도움이 되었다면 조금 우습기도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거의 수십 년 동안 반복적으로 읽는 새로운 즐거움을 배우게 되었다.

이 책의 주인공은 우리가 젊었던 시절 널리 알려진, “직함도 많았던 팔방미인”, 이진섭씨다. 이진섭씨는 아주 유명한 신문인, 칼럼니스트, 방송작가, 시나리오작가로 나이에 상관없이 잘 알려진 분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이진섭씨의 부인이자 여류문인 박기원씨로, 그녀가 남편의 타계 직후에 이진섭씨와의 삶에 대해서 평범하고, 진솔하게 쓴 책이다.

책의 뒷 표지, 포즈를 취한 듯한 표정들..
책의 뒷 표지, 포즈를 취한 듯한 표정들..

보통 부부들이 살다가 배우자가 먼저 타계를 했을 때, 누가 먼저 간 배우자를 그리며 책을 쓸 수 있겠는가? 요새라면 책을 쓰는 것이 비교적 쉬워졌지만 그 당시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아주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진섭씨의 경우는 다행히, 그의 부인도 역시 문단에 잘 알려진 문학가였기에 그렇게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에 문인부부는 뉴스 감도 되고 흔히 말하는 ‘인기, 연예인’ 그룹에 속하기도 해서 신문, 방송 같은 것에서 어렵지 않게 듣고 볼 수 있어서, 나에게도 이진섭씨의 타계(60세를 못 채우시고 비교적 일찍)는 아주 애석한 소식이어서 관심을 가지고 이 책을 대하기 시작했다.

신문, 방송을 통해서 내가 아는 이진섭씨는 ‘불란서 샹송’을 좋아하는 박학다식, 재능이 많고 양심적인 언론인, 문인.. 정도일까? 그런 것들은 이 책을 통해서 다 사실임이 밝혀지지만, 가장 가까운 아내의 입장에서 본 것은 어찌 보면 평범한 남편, 아빠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또한 이진섭씨가 그렇게 교과서적인 평범한 인생을 살지 못했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서 밝혀진다.

 

운명적인 만남

조금 놀란 사실은, 저자 박기원여사와의 결혼이 그에게 초혼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또한 육이오 동란이 남긴 한 부부의 파경임을 알 때, 역시 사상적인 전쟁의 파괴력을 실감한다. 한마디로 공산주의자(일명,빨갱이 개xx) 가족 출신인 부인이 육이오 이후 가족을 따라 월북을 했다는 비극적인 이야기다.

6.25 전쟁! 그 전쟁으로 사실상 우리들의 만남의 운명이 결정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의 첫 결혼은 결국 결혼한지 1년도 못되어 전쟁으로 파경에 이르렀다. 그의 첫 번 아내는 폭격이 한창이던 7월에 첫아들을 낳고, 그리고 1.4 후퇴 때 친정을 따라 월북한 것이다. (그녀의 친정 아버지가 공산주의자였고 고향이 이북이었다)

그러나 그 이유만으로 결혼을 파기하고 남편을 떠나 친정을 따라서 월북해 버린 그 여자만이 아는 비애와 깊은 아픔을 알 길은 없지만 이해는 할 것 같았다. (25쪽, 본문 중에서)

새로 알게 된 사실 중에는 육이오 동란 때 잠깐 부역 죄로 인천에서 복역한 것이 조금 특이하다. 그러니까 한 때 사상적인 ‘외도’를 잠깐 한 것이다. 경위는 이해가 간다. 서울대 사회학과 출신인 그의 많은 친구들이 공산주의자로 많이 월북을 했었는데, 전쟁 때 대거 남하를 해서 이진섭씨를 포섭을 했는데, 잠깐 협조를 한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사상적이 아니고 실제적인 이유로 이진섭씨의 친형님의 소식을 알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그의 형님은 그 당시 외교관이었는데 잠깐 귀국을 했다가 6.25 동란을 맞고 곧 바로 납북이 되셨다고 한다. 여기서 나는 100% 이해를 하게 된다. 나의 아버님도 외교관은 아니셨지만 그 당시 ‘지식인’이라는 죄목으로 납북이 되셨으니까..

“그러니까 결국 이유는 어떻든 간에 부역은 한 걸로 됐죠. 그래서 인천서 재판을 받고 1년 집행유예로 풀려 나온 셈이죠.”

다음해 우리가 결혼하기 한 달 전, 수복 후 서울에서 그이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그이는 그때 일로 정신적으로 많은 피해를 입어 결혼 후에도 그 후유증은 오래 갔었다. (31쪽, 본문 중에서)

나는 어떤 부부들을 만나거나 알게 되면 제일 궁금한 것이 어떻게 만나서 가정을 이루게 되었나 하는 것이다. 가끔 내가 집요하게 그것을 알려고 해서 핀잔을 받을 때도 있지만 별 수가 없다. 그저 궁금한 것을 어찌하랴.. 여기서도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더 궁금할 수 밖에. 그 만남의 역사를 감싸고 있는 여러 가지 시대적 배경이 나는 그렇게 흥미롭다. 이진섭, 박기원 부부의 역사는 민족의 비극, 육이오 동란 때의 피난지 부산이다. 그때 그곳에서 박기원씨의 심정이 이렇게 한 마디로 묘사가 되어있다.

직접 눈으로 목격했던 6.25의 공포, 그리고 아직도 전쟁의 판가름이 안 나 생(生)과 사(死)의 확증이 없는 나날은 슬프고도 우울했다. 이대로는 죽을 수 없을 것 같은 내 25세 청춘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은 나를 고독하게도 했다. (28쪽, 본문 중에서)

 

운명의 재회

그곳에서 그들은 ‘운명의 재회’를 하게 된다. 이미 서울에서 거의 타인으로 만났었지만 거의 우연히 피난지 부산에서 재회를 하게 된 것이다. 전쟁으로 사랑하는 부인과 자식을 잃은 젊은 유부남과 젊디 젊은 신참내기 미혼의 여기자는 여기서 서로 상대의 필요성을 서서히 느끼게 된다. 문학이라는 공통 관심사와 기혼자였다는 미안함은 있지만 그래도 적극적인 이진섭씨의 구애, 전쟁의 공포 등등이 그런 것들을 더 부축이지 않았을까? 특히 박기원씨는 그 당시의 이진섭씨에 대해서 깊은 연민의 정을 가지고 있었다.

왜 나는 그 남자만 보면 비길 데 없는 쓰라림이 오는 것일까? 나는 항상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 모든 일은 나하고 만나기 그 이전의 그의 인생이었고, 나는 상관도 동정도 하기 싫은 모두 그의 것인데…

나는 왜 그이만 보면 가슴앓이 같은 아픔이 오는 것일까? 그이는 너무나 지쳐 있었고, 그리고 너무나 외로워 보였다. 그것은 그대로 그의 분위기, 그의 체취였는지도 모른다. (35쪽 본문 중에서)

나는 비록 남자이지만 남녀에 상관이 없이 ‘연민의 정’ 같은 것이 이해가 간다. 비록 연민이지만 그것은 사실 사랑의 다른 형태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심정의 박기원씨는 그때 이미 이진섭씨에 대한 사랑이 싹트고 있다고 생각이 된다.

 

소설 같은 논픽션

이렇게 아득한 옛날의 아름다운 첫사랑의 추억에 대한 글은 갑자기 죽음의 그림자가 넘나드는 급박한 현실에 대한 이야기로 돌변을 하기도 한다. 이런 서술방식은 자칫하면 평범한 전기(傳記)같은 인상을 덜 주고 흥미로운 소설적인 맛을 주어서 이 책의 가치를 높여주고 있고, 내가 20년이 넘게 오랫동안 애독을 할 수 있게 해주었는지도 모른다.

저자인 박기원여사는 문인인데다가 매일 일기를 쓰고 있어서 모든 지나간 사실들을 비교적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이진섭씨의 말투, 본인의 말투 같은 것들이 그런 것들이다. 이런 것들도 정기적인 일기를 씀으로 가능하지 않았을까? 이런 것들을 오래 동안 읽으면서 무의식 중에 내가 배우고 나의 것으로 만든 것 중에 이렇게 매일 삶의 생각을 글로 남기는 것도 포함이 되었다. 꼭 거창하게 ‘일기’까지 안 가더라도 무언가 내 삶의 행적을 짧은 글로 남기는 그런 것이다.

 

술의 낭만, 갈등과 문화

아깝지만 이진섭씨는 오랜 동안의 과음으로 인한 간경화로 돌아가셨다. 그 당시의 풍토는 사실 술과 담배를 못하면 남자로서 제대로 대접을 못 받는 그런 시대였다. 문제는 그러니까 그 정도에 달렸는데, 아마도 이진섭씨는 괴로움과 즐거움을 모두 술로 달랜 듯 하다. 그 괴롭던 시대를 사는 예술인들이 어찌 이런 생명수 같은 술을 피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 나는 여자한테서 질투를 느껴 본 적은 없지만 젊어서 술에 대해서는 질투를 했다. 술은 어떤 마력, 어떤 괴력이 있길래 저이를 저토록 사로잡고, 나에게 있어야 할 시간과 정신을 저토록 앗아 가는 것일까?

박기원여사는 아마도 술을 전혀 못하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술의 맛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이진섭씨는 그것이 조금은 섭섭하고, 심지어는 못 마땅했는지 모른다.

한가지, 가가 나에게 유감스러워했던 것은 그렇게 좋아하는 술을 나는 전연 못했던 사실이다.
그럴 때 나는”하나님이 잘 조화를 이루어 주셨지, 나까지 술꾼이 돼서 부부가 같이 노상 술판을 벌이고 앉았으면 이 집은 어떻게 되겠우?”
“허허, 그렇게까지는 안되겠지만 적어도 글도 쓰고 술꾼 남편하고 살려면 술 맛 정도는 알아야 할 텐데…”
“걱정 말아요. 나는 마시지 않아도 당신 술 냄새만 맡고도 취한 것 같이 살아 왔으니까요. 술 안 마셔도 마신 것 같은 기분 속에 젖어 산다는 내 고역을 당신은 알아야 해요.”
“알구말구. 그러니까 내 마누라지”

위의 대화를 보면 두 분의 부부금슬은 정말 좋으신 듯하다 비록 술에 대한 불만은 있어도 몸을 생각해서 적당히 드시라는 부부사랑의 다른 표현일지도.. 그리고 핀잔을 받는 이진섭씨의 반응도 어찌 보면 참 유머러스 하지 않은가? 나는 그런 여유를 이 분들께서 배우고 싶었는데.. 그게 생각보다 어려웠다. 하지만 술에 대해서 아주 심각한 때도 있었다.

내 남편 되는 사람이 술에 취해 들어온다는 이 현실에 당혹감과 실망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그 로맨틱하고 다정한 눈이 뜨물처럼 흐려지고, 정신 없이 쓰러져 잠이 들었을 때, 나는 두렵고도 서러운 마음에 울기도 많이 했다. 그래도 술 마신 다음날 아침에는 북어 국이 좋다는 말을 듣고, 어머님께 그 국 끓이는 법을 배워 아침상에 놓기도 했다. …. 남자하고 산다는 현실감에서 오는 놀라움, 그리고 술에 취해 들어오는 그이….. 그 모든 것이 놀랍고 나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십시일반(十匙一飯)

가슴에 남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결혼식장보다는 초상집에” 라는 소제목의 대목을 보면,

그이는 생전에도 남의 죽음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지론이 있어, 결혼식장에는 잘 안 가도 초상집에는 빠지지 않고 가서 뒷일을 돌봐 주었다.

그것은 죽음같이 절대적이고도 엄격한 긍정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산 사람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정성과 예우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60세를 못 채우고 이진섭씨는 타계했지만 그런 비교적 ‘젊은’ 나이에도 죽음에 대한 생각은 담 달리 더 생각을 하며 사신 모양이다. 이런 대목을 사실 나는 오랫동안 이 책을 통해서 읽어와서 내가 죽음을 그때 그때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점검을 하는 좋은 기회도 되었다. 특히 요즈음 들어 나의 “망자의 가시는 길”에 대한 생각도 이런 글들이 음양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다.

 

카사블랑카

피난지 부산에서 둘만이 결혼의 약속을 한 후 박기원씨 가족은 먼저 서울로 올라오게 되어서 잠시 헤어지게 된다. 그 당시의 부산역에서 헤어지는 광경은 흡사 영화 카사블랑카를 연상시킨다.

그때였다. 역사(驛舍) 기둥 한 모퉁이에서 담배를 피워 물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길고 큰 형체가 보였다. 그는 나와 있었다. 어제의 이별이 아쉬워 그이는 약속도 없이 나와 있는 것이었다.

나는 고함이라도 치며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창 밖을 향해 손을 미친 듯이 흔들었다.

그러나 그이는 창가까지 다가오지 않고 그 자리에 선 채 웃으며 손을 크게 한 번 흔들었다. 그이는 하얀 이를 드러내어 웃고 있었다. 그러다가 기차가 떠나기 직전에 그이는 역사 밖으로 천천히 걸어나갔다.

허락 받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 가족의 눈에 띄기 싫어한 그의 섬세하고도 단정한 마음이 나를 소리 없이 울게 했다.

 

육이오 동란 직후의 기억

이 부산역 이별의 광경은 그 당시, 그러니까 육이오 동란의 휴전이 되는 그런 시기를 기억하면서 더 실감이 난다. 비록 그때 나의 나이가 불과 5살도 채 안 되었지만 서울 원서동에서 뛰놀던 생각과 휴전 전후 서울의 풍경들이 아주 선명하기 때문이다. 그때 들은 이야기에 부산은 비도 많이 오고 불도 하루 건너 났다고 들었다. 그리고 우리 먼 친척도 그 당시 그 절망적인 시기에 결혼식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어서 나는 더 실감나게 이진섭, 박기원 부부의 연애, 결혼을 그려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나는 언제나 책에 묘사된 그 당시 정경을 통해서 나의 ‘어린’ 생각과 기억을 같이 투시하곤 했다.

 

아버지중의 아버지

이 책을 통해서 이진섭씨의 흔히 알려진 불란서 풍의 섬세함과 학자 풍의 다재 다능한 면이 많이 들어난다. 그 당시 문인들의 풍조였는지도 모르지만 역시 이진섭씨는 이진섭씨만의 자란 배경과 전통적인 집안 내력을 풍기며 그 시대를 살았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양반집안, 족벌의 의미가 거의 퇴색되어버린 일제시대.. 거기서 믿을 것이라곤 아마도 ‘우수한 머리’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이진섭씨는 아주 앞서가는 ‘모범적인 아버지 상’을 남기며 사신 것 같다. 그렇게 어려운 역사적 격동기를 비록 술로 삭히기는 했지만 가정을 ‘절대로’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완전히 성공을 했다는 사실.. 두고 두고 나의 가슴에 남아서 내가 배울 것은 무엇일까 생각하곤 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이 책의 제목에는 “이 시대 마지막 로맨티스트 이진섭” 이란 부제가 붙어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100% 수긍이 가는 표현이다. 비록 커다란 식구의 가장으로 경제적인 압박이 그렇게 커도 절대로 돈에 목을 메는 짓은 못하던 그런 면을 생각하면 이해가 간다. 어떻게 그렇게 멋과 돈의 균형을 잘 맞추며 살았을까? 그것은 이진섭 특유의 타고난 재주였는지도 모른다. 아주 잘 알려진 요절한 ‘천재시인’ 박인환님과의 인연도 그렇다. 그것은 이제 일화가 아니라 역사가 되었으니까.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술집 문화에서 출발한 이 박인환님의 즉흥시가, 이진섭씨의 즉흥 샹송에 접목이 되어 결국은 불후의 클래식이 된 것은 역시 길이 남을 한국 전후 문화사의 일부가 된 것이다.

이 책에 인용된 동료 극작가 한운사 씨의 “잊을 수 없는 인물들’을 보면..

빈대떡 집에서 박인환이 즉흥시를 읊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진섭의 머리를 스치는 번개같은 인스프레이션(inspiration, 필자주) 그는 즉석에서 멜러디를 붙여 노래를 불렀다. 우뢰 같은 박수가 빈대떡집 지붕을 뒤흔들었다. 젊음과 낭만과 꿈과 산다는 것의 슬픔을 그가 타고난 재간으로 융합시킨 이 순간은 명동이 기억해둘 영원한 시간이다.

 

 

이 최인환 시, 이진섭 곡의 샹송풍의 노래는 곡이 만들어진 때보다 훨씬 뒤에 리코딩이 되어 일반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내가 알기로는 최양숙씨가 제일 먼저 리코딩을 하지 않았을까? 그녀의 샹송 스타일에 제일 잘 맞는 곳이었다. 하지만 내가 제일 먼저 들었던 것은 역시 박인희씨의 곡이 아니었을까.. 기억이 가물거린다. 

여기서 어떻게 이 클래식이 출발했는지 짐작을 할 수 있다. 이것을 박기원씨의 표현을 통해서 짐작을 하면 이진섭씨가 얼마나 음악을 사랑하고 특별한 재주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술 한 잔 들어가면 악보도 없는 자작곡에 바이브레이션을 넣어 피아노도 잘 쳤다. 애들과 우리만이 아는 ‘이 진섭 자작곡의 밤’이 수시로 열렸던 것이다. 싫어도 들어야 했는데, 애가 탔던 것은 그이는 술이 들어가면 시간을 초월해서 완전히 그 시간 속에 빠져 든다는 점이었다……

그이가, 시인 박 인환(朴寅煥)씨가 생존 시 명동 술집에서 낭만의 명동이 사라져 가는 것을 서러워하며 지은 시 <세월이 가면>에다 그 자리에서 작곡을 한 것은 지금도 아름다운 일화로 남아있다.

지금 생각나는데, 그날 밤 그이는 그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내가 시집 올 때 갖고 온 어린이용 장난감 피아노에 키를 맞추어 노래를 부르며 오선지에 채보까지 했던 것이 기억난다.

샹송 풍의 그 노래는 당시엔 어려워서인지 그리 알려지지 않더니 10여 년이 지난 후에는 서서히 대학생들간에 유행이 되었고 몇몇 가수가 불러 레코드까지 나왔다……..

그의 영결식에서는……. <세월이 가면>이란 노래를 최초로 불렀던 최양숙(崔洋淑)씨가 그 노래를 다시 불러 그의 마지막 길을 장식해 주었다

(계속).

 

오일육(5.16) 군사혁명, 50년 전

5.16 쿠데타 성공 후 서울 시청 정문에 선 장도영(왼쪽), 박정희(오른쪽)

5.16 쿠데타 성공 후 서울 시청 정문에 선 장도영(왼쪽), 박정희(오른쪽)

 

오늘아침, 코앞의 달력을 보니 오늘이 5월 16일이다. 무심코.. 아하.. 박정희의 오일육 군사혁명 기념일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작년 사일구(4.19)가 50년이 되었지..하는 생각이 들면서 곧바로 그러면 올해의 오일육이 50년이 되는구나 하는 조금은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반세기란 기간의 느낌이 그렇지만, 50년이란 것이 사실 그렇게 긴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늙어가면서’ 새롭게 느끼게 되는 사실을 재확인하면서…인간 10진법의 문화에 울고 웃는 사실이 흥미롭기도 하다.

서울시내를 내려다 보며 남산가도를 질주하는 혁명군의 Sherman tank
서울시내를 내려다 보며 남산가도를 질주하는 혁명군의 Sherman tank

작년 4월 19일 나의 blog은 분명히 4.19, 사일구 학생혁명 50주년을 회상하면서 쓴 것이었다. 그때는 내가 중앙중학교 1학년 때였고, 5.16은 그 다음해인 1961년, 내가 중앙중학교 2학년 때였다. 그날은 사일구 때와는 달리 아침부터 학교의 문을 아예 열지도 않았다. 사일구 때 최소한 등교를 한 후에 퇴교를 당했던 것에 비하면 더 심각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사일구 혁명은 4월 19일 낮에 그 열기가 절정에 달 했지만 오일육 혁명은 그날 새벽에 이미 일어난 상태였던 것이다.

그때는 ‘아마도’ KBS가 유일한 라디오 방송이었을 것이고, 그 방송에서는 앵무새처럼 군사혁명 공약이 되풀이 되면서 방송이 되었다. 중학교 2학년의 나이에 모든 것들이 다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기억에 제일 먼저 나온 것이 “반공을 제일의 국시로 삼고” 라는 혁명공약이었다. 물론 “국시”라는 말이 확실히 이해는 안 되었지만 “반공이 제일 중요하다” 라는 말로 들렸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제일의 반공국가였는데, 왜 이런 말을 제1의 혁명공약으로 삼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중학교 2학년 ‘어린아이’가 그것이 그렇게 중요했을까? 역시 사일구 때와 마찬가지로 학교를 ‘못 가는’ 것만도 고맙게 생각하며 우리들의 영웅, 산호의 라이파이를 보러 만화가게로 갈 수 있는 것만 생각해도 마음이 흥분 되었다. 국민감정을 의식해서였을까, 사일구 때의 계엄령과 다르게 비교적 자유로운 계엄령 치하가 시작되었다 (최소한 아이들의 눈에는).

달력을 다시 보니 역시 5.16에는 아무런 ‘표시’가 안 보이고 그 이틀 뒤인 5.18에는 “5.18 민주화 운동 기념일”이란 표시가 보인다. 그러니까 5.16 ‘군사혁명일’이란 것은 아예 기념일에서 조차 떨어진 모양이다. 호기심이 난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 그러니까 언제부터 달력에서 5.16군사혁명 기념일이 없어지고,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이 들어갔을까. 역사는 흐른다. 절대로 멈춘 것이 아닌 것이다.

혁명주체세력 제1인자 박정희 소장, 1961
혁명주체세력 제1인자 박정희 소장, 1961

사일구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좋아하던 “진짜” 탱크가 시내 곳곳에 보였지만 이번에는 아주 평화스럽게 보였다. 처음에는 장도영이란 이름만 요란하게 들렸고 박정희란 이름은 아주 나중에야 들리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우선 달라진 것이 있다면, 사회전체가 아주 ‘질서정연’하게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사일구 이후에 하루가 멀다 하고 거리는 데모대로 조용한 날이 없었기 때문일까. 비상계엄령 속에서 데모를 한 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신선한 기분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나는 느낀다. 사일구 이후에 전체적으로 퍼지던 지나친 자유의 공기를. 심하게 말해서 방종이라고나 할까. 이렇게 해도 법과 질서가 유지가 될까 할 정도였다. 그 예로 내가 다니던 중앙학교에도 지나친 자유의 표현으로 ‘교장선생, 물러가라’ 하는 데모가 있었다. 사일구의 독재정권 타도가 일반적인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변한 것이다. 그 당시 중앙학교(중, 고교)는 심형필 교장선생님이 계실 때였다. 수학자로서 아주 선비 풍의 나이 지긋하신 선생님에게 ‘비리’가 있다고 데모를 하고 물러가라고 학생들이 요구를 한 것이었다.

물론 나의 나이로는 이해가 되지를 않았지만, 모든 것이 그런 식이었다. 이승만 정권 당시에도 일반적인 시민의 자유는 많았다. 그래도 치안에는 별로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사일구 뒤에는 기본적인 치안에 문제가 보일 정도랄까.. 왜 그랬을까? 결국은 이승만 ‘부패정권’ 뒤에, 거의 통치력이 없는 과도정권에 공권력이 너무나 약했던 것이 아닐까?

5.16 혁명 직후 시청 앞 육사생들의 혁명지지 대회, 1961

제일 극에 달한 것은 사회적인 것 보다는 정치적인 것이었다. 그 당시는 자세히 들 알려지지 않았지만 휴전선 너머의 김일성이 이것을 보고 얼마나 침을 흘렸을까 하는 것은 절대로 지나친 걱정이 아니었다는 것은 후세에 다 사실로 들어났다. 과도정권은 분명히 반공정권이었겠지만 극에 달한 자유의 표현은 결국 남북화해, 남북협상이란 말까지 허용하게 되었다. 그것은 분명히 현실적인 반공법 위반이었는데.. 휴전선의 포격사정권에 있던 수도를 가진 정권에게 이것은 정말 위험한 것이었겠지만 일반 시민의 정서는 거꾸로 흐르고 있었고, 결국에는 학생들 조차, “가자 판문점으로!” 라는 꿈을 꾸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이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조용해 졌다. 우리는 며칠 뒤 등교를 한 후에 긴급 혁명공약을 배우게 되었고, 일년 동안 만끽하던 ‘학원의 방종’을 되 돌려 주게 되었다. 한가지 아쉬웠던 것 중에 하나가, 그 동안 “스포츠 가리” 이발에서 완전히 “삭발”형으로 바뀐 것.. 그러니까.. 중학교 1학년에 입학하면서 전통대로 머리를 다 중처럼 깎았다가, 사일구가 나면서 ‘자유’가 주어져서 스포츠머리로 바뀌었는데, 다시 원래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목격한 것이 중앙학교 구내에 하나 둘씩 들어섰던 ‘잡상인’들이 없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예들 들면, 이발소, 식당, 문방구 같은 것들이었다. 상인들에게는 큰 일자리가 없어졌겠지만 사실 이것은 잘 된 것 같았다. 학교 밖이면 몰라도 학원 내에 그런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느슨하던 극장의 학생입장도 아주 까다로워져서 웬만한 영화는 거의 다 ‘학생입장불가’가 되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던 깡패들도 줄줄이 잡혀 들어갔는데.. 조금 심했던 것은 일부  ‘정치깡패’들이 사형에 까지 처해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일련의 정책들은 대부분 사람의 지지를 받았다.

역사적으로 오일육 군사혁명은 정권이 바뀌면서 해석도 달라지고 느낌도 달라짐을 안다. 군사혁명 10년 뒤인 1971년에는 거의 영구집권체제인 유신정권으로 바뀌고, 그 8년 후인 1979년에는 박정희도 부하에 의해서 사망을 한다. 속담에 “때는 때대로 간다” 라는 말로 그의 공과를 한마디로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세상이 그렇게 간단할까? 한때는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는 그가 싫기도 했다. 나는 기껏해야 김신조 사건 이후에 대학에 생긴 교련에 대한 반대데모와 3선개헌 반대데모로 학창생활이 끝났지만 아내 연숙은 70년대의 유신체제를 반대한 거센 ‘운동권’에 끼어들게 되어서 모든 현장을 목격까지 했고, 경찰과 정보부의 감시 속에서 살았던 때도 있었다. 이것 때문에 결혼 후에 나는 사실 고개를 못 들고 살았다. 데모만 나면 나는 ‘신나는’ 등산을 즐겼는데 반해서 연숙은 모든 것 잊고 최루탄 연기를 맞으며 살았던 사실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기도 했다.

그 운동권 출신들이 줄줄이 현재 모든 정권의 요직에 있다. 심지어 일부는 거의 ‘빨갱이’ 흉내를 낼 정도가 되었다. 오일육에 대한 해석도 극과 극을 치닫고 있다. 그들이 항상 거의 의도적으로 언급을 안 하는 것은 그 동안 그들이 그렇게 동정하던 ‘북녘’ 정권이 어떻게 그들의 ‘인민’들을 통치해 왔던가 하는 사실이다. 박정희의 반대파 탄압을 언급하려면 조금은 그것도 언급하면 조금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어느 정도 먹고 입기 전에는 의미 있는 민주주의를 뒤로 미루겠다는 말은, 그 당시를 살아보지 않았던 사람들은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다. 또한 반대로 박정희를 거의 ‘영웅시’하는 극우파들.. 그들이 사실 박정희의 진정한 의도와 업적에 먹칠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시청 앞에서 박정희와 차지철

혁명 성공 후, 시청앞에서 육사생들의 사열을 받는 박정희 소장과 차지철 공수부대장

오일육 혁명 주체, 박정희 소장

이 검은안경 사진은 후세에 남는 오일육 혁명의 상징이 되었다


 당시의 신문으로 보는 오일육 쿠데타 모습들

 

50년 전의 신문으로 그 당시를 회상하는 것, 조금 감당키 어려운 감정의 복받침과 싸우기도 했다. 글과 사진들.. 확실히 이것은 이제 역사가 되었고, 교과서에서 다시 배울 정도로 오래되었다. 이 신문들을 다시 보며 뚜렷하게 느끼는 것, 당시의 신문들.. 정말 중학교 2학년 생의 한자 실력으로는 읽고 이해하기에 역부족, 그러니까 거의 문맹에 가까울 정도라는 사실..을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여기 나온 신문들을 보라.. 얼마나 많은 한자가 섞여 있는가? 또한 한글조차 50년을 거치며 맞춤법이 많이 변했음을 절감하고, 언어의 변천에 50년은 그렇게 짧은 세월이 아니라는 것도 느낀다. 하지만 그것 보다 사진을 보며 더 깊은 생각을 한다. 50년 세월 동안 내가 기억한 모습들은 너무나 현재에 적응이 되었는지, 그 당시의 모습들.. 너무나 꾀죄죄하고, 볼품들이 없다. 물론 그 당시의 유행과 경제수준을 감안하면 조금 이해는 가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 당시 신문의 사진기술에 더 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조잡한 사진 조판에다가, 50년이 지난 신문지.. 그것이 ‘생생하게’ 보일 리가 만무하니까.

 

오일육 당시 경향신문 석간

오일육 석간지는 유동적인 사태로 군 검열을 받지 않았다.

성공적인 무혈 쿠데타

의외로 평온한 전국 주요 도시의 분위기

서울 주요 거점에 진주한 혁명군들

오일육 낮, 어리둥절한 시민들과 군인들, 세종로,시청 근처

생생했던 역사 현장, 희미한 모습으로

그 당시 모습, 사실 이 사진보다 훨씬 더 깨끗했다

육군사관생도 혁명지지 궐기행진

쿠데타 직후 육사생들의 지지 궐기는 혁명성공의 촉진제였다

시청 앞에 집결한 육사생도들과 장도영 중장

시청앞에서 혁명지지 궐기대회, 혁명의 얼굴, 장도영 중장과 육사생들

5월 17일부터 군 검열받던 신문들

계엄령하에서 언론에 대한 군 검열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서서히 등장하는 막후 1인자 박정희 소장

사실상 쿠데타 주역 박정희 소장, 장도영 중장과 기자회견에서

 


그 당시의 사회정서를 한눈에 보려면 영화광고를 보면 간단하다. 유행과 더불어 그 당시 최고 인기배우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서부영화와 대형 종교영화가 판을 치던 그 시절, 한국의 영화풍토는 지금 수준에서 보면 정말 아이들 장난과도 같았다. 한마디로 유치하게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또한 매력이었다. 여기의 영화광고를 보면서 손쉽게, 구봉서, 최은희, 신영균, 김진규, 허장강, 김희갑, 김혜정 등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당시 그들이야말로 국민배우들이었기 때문이다.

 

쿠데타 당시 상영되던 국산영화들

신상옥 감독이 한국 영화를 주름잡던 그 시절의 영화들

 

 

우미관, 문화극장, 아데네 극장..

우미관, 문화극장, 아데네 극장.. 1950년대와 60년대를 걸쳐서 내가 즐겨 다녔던 극장들의 이름이다. 나와 비슷한 나이또래로 서울에서 살았으면 분명히 이 이름들을 기억할 것이다. 정확하게 이 극장들의 역사는 잘 모른다. 그저 나의 기억에 항상 그곳에 있었던 것 뿐이다. 더불어 이 극장들은 소위 말하는 일류 개봉관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입장료가 비교적 싼 편이었다. 종로2가 화신 백화점 바른쪽 옆 골목에 있었던 우미관, 낙원동 북쪽, 덕성여대 바로 앞, 천도교회관 바로 옆에 있었던 문화극장, 퇴계로 대한극장 길 건너 편 골목에 있었던 아데네 극장.. 그 많은 극장 중에서도 이 세 극장이 더 기억에 남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당시 그곳에서 많은, 아직까지도 뇌리에 생생하게 남는 주옥 같은 영화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미관과 아데네 극장은 거의 외국영화만 상영을 했고, 문화극장은 거의 국산영화만 상영을 했다. 다만 문화극장은 아주 가끔 연극도 곁들여 보여주었다. 그리고 우미관은 외화를 좋아하는 일반 대중, 문화극장은 한국영화를 좋아하는 일반인 대상이었는데, 아데네 극장만은 조금 특이하게 중고등 학생들이 주 관객이었다. 그러니까 아데네 극장만은 항상 학생입장이 가능하게 검열이 된 영화만 보여준 셈이다. 그 당시 사회, 경제수준으로 이런 중고등학생을 배려한 사업은 지금 생각해도 참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생각이었다. 다른 극장은 대부분 ‘학생 입장 불가’ 라는 것으로 ‘성인용’ 영화를 구별하였다. 성인용 영화라 해도 요새 말하는 XXX 급을 말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고 그저 조금이라도 사회기준으로 보아서 ‘낯을 붉히게’하는 것이 ‘성인용’ 영화였다.

이 세 극장 중에서 내가 제일 많이 가고 좋아했던 곳이 바로 우미관이었다. 이곳이 그 당시 유행하던 미국, 그러니까 Hollywood급의 ‘멋있던’ 영화만 보여주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일류 개봉관이었던 단성사, 대한극장, 중앙극장 같은 곳에서 이미 보여준 것들이 이곳에서 다시 상영되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처음 본 영화가 국민학교 5학년 때 쯤(1958년 쯤) 본”타잔과 잃어버린 탐험대” 라는 영화였다. 그 당시는 서부영화와 타잔 영화가 유행을 할 때였다. 그 많은 것 중에 이것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그 영화를 보러 갈 때의 과정이 뚜렷이 기억에 남기 때문이다.

그때는 영화가 들어오면 제일 손쉽게 알 수 있는 광고매체가 영화벽보였다. 가게의 벽이나 길거리의 벽에 붙여놓은 poster같은 것이었다. 그때 “타잔과 잃어버린.. 어쩌구” 하는 영화벽보를 보고 그것을 보고 싶었는데.. “타잔과 잃어버린..어쩌구” 하는 제목 중에 “어쩌구” 하는 대목이 한자로 쓰여있었다. 그것이 바로 “탐험대”였는데 그것을 나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집에 와서 극장을 가겠다고 돈을 달라면서 영화 이름을 “타잔과 잃어버린 코끼리“라고 둘러 댔다. 내가 생각해도 조금은 ‘촌스러운’ 영화 제목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보기는 보았다. 그때부터 나는 미국 영화의 마력과 위력에 빨려 들어갔다. 대부분 국산영화는 우리 같은 어린이들이 보아도 유치하기 이를 데 없던 그런 시절이었기에 더 그랬을 것이다.

비록 개봉관보다는 입장료가 쌌겠지만 우리 같은 코흘리개 국민학생에게는 그것도 장난이 아니었다. 그래도 더 싸게 표를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었는데, 바로 가게에 붙여놓은 영화포스터에 따라 나오는 무료입장권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포스터를 붙여놓은 가게에서 아주 헐값으로 사는 것이다. 그런 잔꾀를 동원해서 참 많이 영화를 보았다. TV가 없던 그 당시 만화와 더불어 우리에게 살 맛을 준 것이 이 미국영화들이었던 것이다. 오디 머피, 게리 쿠퍼, 버트 란카스타, 아란 랏드 주연‘베라크루즈’, ‘쉐인’ 같은 서부명화들, 로버트 밋첨 주연의 ‘상과 하’ 같은 2차 대전 전쟁영화들, 그리고 프랑크 시나트라, 케리 그란트 주연의 ‘자랑과 정열’ 같은 유럽풍의 사극영화들..

그때 본 영화들을 미국에 오면서 쥐 잡듯이 찾아서 TV로 다시 보거나, video tape등으로 다시 볼 수 있었는데 그 덕분에 우리 집 식구들, 특히 아이들이 그런 것들을 자연스럽게 보면서 자라게 되었다. 거의 50년대의 영화들이었으니, 아이들에게는 완전히 ‘활동사진’ 류의 화석 같은 느낌이었겠지만 미국의 그 당시를 공부할 수 있게 해준 ‘역사적’인 가치가 없지도 않았다.

아데네 극장 개관 광고, 1961

1961년 12월 초 개관 된 아데네 극장의 광고, 그 당시에는 미국영화 이외에도 가끔 여기에 보이는 유럽쪽의 ‘명화’들도 상영 되곤 했다. 광고를 자세히 보면, 화폐의 단위가 ‘원’이 아니고 ‘환’.. 1962년 화폐개혁 때 ‘원’으로 바뀌었다.

퇴계로에 있었던 아데네 극장은 주로 중,고등학교 다닐 때 많이 갔다. 그곳에서는 주로 외국영화를 많이 했지만 가끔 국내영화도 보여 주곤 했다. 절대로 학교 선생님에게 잡히지 않는 곳이라는 장점이 있어서 아주 어깨를 쭉~~펴고 영화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곳에서 많이 본 영화들은 주로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하는 사극영화들이었다. 아깝게도 그 영화들의 이름이 생각 나지 않는다. 이것들과 대조적인 곳이 바로 낙원동에 있었던 문화극장이었다. 이곳은 정말 ‘서민’의 냄새가 풀풀 나던 곳이었다. 100% 국내 영화만 상영하였고, 가끔 연극도 보여주었다. 나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연극이란 것을 보게 되었다. 주로 국민학교 때 많이 갔는데, 내가 살던 가회동에서 정말 가까운 곳이어서 더욱 편했다.

이곳에는 참 기억에 많이 남는 추억들이 있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그 당시 전쟁 후 가난에 찌들었던 국민들을 즐겁게 해 주었던 코메디 듀오가 있었는데 바로 “뚱뚱이와 홀쭉이“였다. 뚱뚱이는 “양훈”, 홀쭉이는 “양석천” 두 분이었는데 둘 다 우연히 양씨였지만 한자가 같지를 않았다. 이 두 사람이 콤비를 이루어 영화를 많이 만들었는데, 그 중에서 내가 문화극장에서 본 것이 “천지유정“이란 홍콩 현지에서 찍은 코메디 영화였다. 물론 흑백영화였다. 그것을 그때 집에서 밥을 해주며 같이 살던 ‘필동 아줌마’와 누나, 셋이서 아침에 가서 보았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니 또 보고 싶어서 나만 혼자 남아서 또 보게 되었다. 그렇게 보기 시작해서 하루 종일을 보게 되었다. 같은 영화를 계속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해서 더욱 그랬다. 결국은 저녁 무렵에 필동아줌마가 극장으로 들어 와서 나를 데리고 나갔다. 몇 번을 계속 보았는지 기억이 나지를 않을 정도로 하루 종일 본 것이다. 이것이 두고 두고 우리 집의 얘기 거리가 되었다. 덕분에 그 영화는 아직도 눈에 선할 정도로 뚜렷이 머리에 남아있다. 아직도 나는 이 세 극장에 고마움을 느낀다. 그 가난하고 순진하던 시절 이곳들은 사실 나에게 거의 마음의 등대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앙고교의 추억(3)

중앙고 3학년 8반, 1965년
중앙고 3학년 8반, 1965년

중앙고교 추억 시리즈마지막 편이 그렇게 쓰기가 힘 들었다. 시작이 반이라고 계속 나를 push하곤 했지만 그 시작이 그렇게도 힘이 들었다. 왜 그럴까? 추억거리가 별로 없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너무나 많아서 그랬을까? 기억을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을까? 이것들 중의 어느 것도 아닌 것 같다. 굳이 따지자면 내가 가장 보물처럼 간직하고 싶었던 그 시절 이야기들의 끝을 맺는 것이 섭섭해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추억할 수 있는 능력에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최복현 교장 선생님, 1965년
최복현 교장 선생님, 1965년

1965년은 지난해의 6.3사태 같은 정치적인 불안을 그대로 안고 있었지만 박정희 정부는 최소한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경제발전에 모든 운명을 걸고 있었고, 한일외교정상화가 그것의 전제조건이 되었다. 해방 된지 겨우 20년 만에 국민감정이 그렇게 쉽사리 변할 리가 없었다.  지난해의 도쿄올림픽으로 일본은 튼튼한 경제기반으로 경제대국으로의 첫걸음을 걷고 있었고 그것에 걸 맞게 ‘고자세’로 한국을 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독한’ 냉전체제의 국제정세가 우리의 국민감정 같은 것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반공’에서 출발을 했으니까.

그 해 가을에 박정희 정부는 완전히 미국과 보조를 맞추려, 본격적인 전투부대인 청룡부대월남으로 보냈다. 그 전해에는 이미 비전투 부대인 비둘기부대를 보냈다. 서서히 월남전이 국내의 뉴스에 정기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때였다. 반공의 이념을 실력으로 보이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경제적인 측면도 무시할 수 없었다. 숙적인 일본이 우리의 6.25전쟁 중에 엄청난 경제적 이득을 챙긴 것을 보면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것 들이었다.

짱구, 정운택 선생님, 1965년
짱구, 정운택 선생님, 1965년

그런 배경에서 고교3학년을 맞은 우리들은 간접적으로나마 나라가 처해있는 사정을 모를 리가 없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공부 잘해서 나라에 충성’하는 그것이었다. 그것의 첫 조건이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이었다. 특히 1965년에 우리 중앙고교는 벌써 최복현 교장선생님의 원대한 ‘6개년 계획’의 3년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우리학년이 이루어야 할 목표 (서울대 몇 명, 연고대 몇 명 같은)는 사실 아주 어려운 듯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정확한 목표는 사실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목표가 주는 심리적인 효과였다. 그것은 참으로 효과적인 campaign이었고, 심지어는 ‘재미’로 느껴지기도 했으니까.

나의 짝꿍, 원병태
나의 짝꿍, 원병태

고교 3학년이 되면서 시작된 수업에서 느끼는 그 신선한 긴장감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을 한다. 무슨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떠나는 가미가제 특공대원 같은 그런 심정이었다. 그런 마음 가짐은 사실 대학입시까지 신기하게 이어졌다. 이것에 대해 나는 아직도 우리 최복현 교장선생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 비록 최교장 선생님은 2학기가 되면서 서울시 교육감이 되셔서 모교를 떠나셨지만 그 분이 남긴 것은 참 큰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큰 계획의 뒤에는 후유증도 있었다. 불과 몇 번의 시험과 지난 해 학기성적으로 3학년 학급배정을 한 것이 그 중에 속한다. 쉽게 말하면 성적 순위로 분반을 한 것이다. 그런 반 배정에 개의치 않고 열심히 공부를 할 수도 있겠지만 감수성이 예민한 친구들은 실망과 좌절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화학반, 목창수
화학반, 목창수
유학준비, 윤중희
유학준비, 윤중희

그때 분반은 문과와 이과로 나누어 졌는데 이과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나의 8반은 이과에 속했다. 나는 원래부터 전기,전자공학 쪽으로 방향을 정했기 때문에 당연히 이과를 선택한 것이다. 다행인 것은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정책이 압도적으로 이공계 쪽은 선호한다는 사실이었고, 각 대학도 그것을 반영하듯 최우수 학생들이 가는 곳은 예외 없이 이공계, 특히 공대 (화공과, 전기과, 기계과 같은) 쪽이었다.  최고의 커트라인은 몇 년 째 서울공대 화공과가 독차지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문제점은 공부만 잘하면 거의 무조건 공대로 보내는 ‘어처구니 없는’ 풍토였다. 공대 쪽에 적성이 맞고 안 맞고가 크게 문제가 되지를 않았다. 심한 경우에는 전기, 기계 같은 것을 싫어해도 수학만 잘하면 그곳으로 간 것이다.

나의 앞자리에는 고2때부터 옆에 있었던 김진수가 앉았고, 뒤에도 오래된 친구인 이종원이 앉았다. 바른쪽 옆에는 원병태가 앉았는데 모두 나에게 좋은 친구들이었다. 하지만 대학에 갈 때는 모두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김진수는 해군, 이종원은 외대, 원병태는 고대로 가버렸다. 원병태는 사실 키가 상당히 큰데 어떻게 나의 옆에 앉게 되었는지 모른다. 담임선생님은 별명이 짱구정운택 선생님이셨는데, 조금 흥분을 잘 하시지만 속 마음은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다. 이런 모든 것들이 그 긴장되는 고3시절을 조금이나마 편하게 해 주었는지 모른다.

007, 고석찬
007, 고석찬
Love Potion, 이영윤
Love Potion, 이영윤

왼쪽 옆으로는 목창수, 문영직, 허영식, 차정호, 윤중희 등등이 앉았다. 바로 뒤 이종원의 뒤에는 고석찬, 이영윤이 앉았는데 이 두 친구들은 대학시절 종로2가에서 우연히 만났다. 고석찬의 유머러스 한 표정도 여전했고 이영윤의 멋진 미소도 여전했다. 어떻게 그 둘이 같이 있었는지 모른다. 아마도 그들은 졸업 후에도 계속 만났던 모양이다.고석찬, 그 당시 피카디리 극장에서 개봉된James Bond  “007 위기일발 (From Russia with Love)” 영화를 가지고 신나게 이야기를 하곤 했다. 사실 처음 개봉되었을 때 미성년자는 볼 수가 없었고 나중에 그것이 풀어져서 가서 보았다.  물론 검열과정에서 많이 손을 보았을 것이다. 그 당시 나는 그것을 모르고 그 영화를 보기도 전에 보았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장난으로) 고석찬이 비웃으면서 미성년자가 어떻게 그것을 보았냐고 꼬집었다. 금새 거짓말이 들통이 나고 나는 조금 창피했다. 나는 분풀이라도 하듯이 나중에 가서 본 것이다.

이영윤은 미국 pop song을 비롯해서 노래를 좋아한 듯하다. 그가 잘 따라서 부른 노래는 “Love Potion No. 9” 이란 그 당시 유행하던  팝송이었다.  그리고 고2때 정귀영 Al MartinoI love you more..를 너무 좋아해서 따라 불렀다면 이때는 정귀영이 황석환으로 바뀌었다. 노래는 Matt MonroWalk Away로 바뀌고..  나도 그 당시 그 노래를 무척 좋아했지만 황석환은 더 좋아했나 보다. 교실에서 크게 부르며 다녔으니까. 나는 그 때 Matt Monro가 영국가수라는 것을 몰랐다. 지금 다시 45년 만에 찾아서 들어보니 역시 기가 막힌 노래와 목소리였다. 여자로 치면 아마도 미국의 Karen Carpenter에 버금가는 그렇게 티없이 맑은 목소리였다. 나중에 그의 노래, Born Free, Wednesday Child, Portrait of My Love같은 것도 무척 좋아했는데 다만 미국에서 오래 살다 보니 이곳의 풍조에 따라 다른 나라의 노래들을 거의 잊고 살았을 뿐이다.


 

From Russia With Love – Matt Monro
1965 봄 쯤에서 그 소문이 자자하던 James Bond 007 시리즈의 “007 위기일발” 이 피카디리 극장에서 개봉이 되었다. 반드시 일본을 통해서 들어오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니까 아마도 1964년 쯤 나온 영화가 아닐까. Sean Connery도 멋이 있었지만 Matt Monro의 영화 주제곡 또한 못지 않게 멋이 있다.

 

 

Love Potion No. 9 – The Searchers
이영윤이 잘 따라 불렀던 이 노래, 사랑의 향수 9번, 그 당시에 라디오에서 잘도 흘러 나왔다. 비디오를 함께 보니 The Beatles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나, 차림새가 아주 비슷하다.

 

 

Walk Away – Matt Monro
황석환이 좋아하던 거의 명곡에 가까운 노래, 가사를 들어보면 더욱 가슴이 찌릿해진다. 숙명적으로 맺지 못할 사랑을 떠나 보내는 남자의 절규.. 참, 슬프다.

 


"관조", 백정기 선생님
“관조”, 백정기 선생님
고문, 주왕산 선생님
고문, 주왕산 선생님
국문학사, 김창현 선생님
국문학사, 김창현 선생님

그 당시 중앙고 3학년 교사 진은 상당한 수준에 있었다. 아마도 최교장선생님의 배려였을 지도 모른다. 국어의 백정기 선생님, 정열적으로 가르치시고 입시국어에는 외부에도 잘 알려지신 분이다. 입시전문지인 월간 진학 지에 글도 실으셨는데 그 글을 안 읽은 학생들을 나무라기도 하셨다.  백선생님의 정열적인 강의 중에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은 “관조“에 대한 것이었다. 특히 인상적인 수업은 역시 주왕산 선생님의 고문(古文)시간이었다. 확실히 는 모르지만 주 선생님은 주시경님의 자제분이셨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그 고문강의는 더 무게가 있었다. 특히 “훈민정음, 용비어천가” 의 강의는 재미와 더불어서 이런 것을 평생 공부해도 재미있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김창현 선생님의 국문학사도 아직도 기억에 남을 만큼 명 강의였다. 특히 김선생님은 개인적으로도 향토역사 같은 것에 관심이 많으셨던 것 같은데 그런 해박한 지식이 강의 때마다 우리에게 전해져 왔다.

숯장사, 원성욱 선생님
숯장사, 원성욱 선생님
대추방망이, 박시희 선생님
대추방망이, 박시희 선생님
썩은 살, 손영섭 선생님
썩은 살, 손영섭 선생님

담임 정운택 선생님, 숫제 일본 수학참고서를 그대로 들고 문제를 내시고 가르치셨다. 왜 그런지 그 당시는 일본의 입시풍조가 그대로 시험에 반영이 되곤 해서 그런 모양이었다. 특히 미적분을 다루는 해석시간은 숯 장사 원성욱 선생님의 독무대였다. 얼굴이 까매서 그런지 숯 장사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는데 그것은 명 강의였다. 기하 (geometry)는 “썩은 살, 깨막이“, 손영섭 선생님이 담당하셨는데 얼굴에 걸맞지 않게 항상 멋지게, 맞춘 듯한 옷을 입으시고 가르치셨다. 영어(문법)는 옆 반인 7반의 담임 “대추방망이“, 박시희 선생님이 작은 키에 맞지 않게 폭 넓고, 크게 잘 가르치셨다. 항상 산더미 같이 print물을 들고 들어오셨는데,  ‘마누라가 밤새고 typing‘한 것’ 이라는  말씀을 빼놓지 않으셨다. 특히 이 선생님은 독자적으로 개발한 입시용 영어비결이 있었다. 특히 문법을 외우는 방법을 ‘한시’ 나 시조같이 음률을 넣어서 외우도록 했다.

나는 3학년이 시작되고 서울고 출신으로 그 당시 서울공대 섬유공학과에 다니 던 송부호 형의 지도를 몇 달간 받았다. 솔직히 수학을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어쩔 수 없이 과외지도를 받게 된 것이다. 어머님 친구의 아들이 서울고 출신이라 그쪽으로 부탁을 했더니 송부호형이 걸린 것이다.  조금은 수줍은 듯한 형인데 참 자상하고 때로는 재미도 있었다. 그때 그 형에게 참 많이 배웠다. 수학 자체보다도 입시 체험담 같은 것이 더 재미있고 도움이 되었다. “James Bond: 007 위기일발” 영화도 사실 그 형과 같이 피카디리 극장에서 본 것이었다.

"똥자루", 정경섭 선생님
똥자루“, 정경섭 선생님
PSSC, 이지홍 선생님
PSSC, 이지홍 선생님

빼놓을 수 없는 선생님들 중에 체육선생님 “똥자루정경섭 선생님이 계셨다. 오신지 얼마 되지 않은 선생님이셨는데, 고3때 체육시간은 완전히 서자취급을 면치 못하는 시간이고, 심지어 어떤 때는 체육시간에 골치 아픈 머리를 식힐 겸,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시기도  하셨다. 나는 그 시간이 그래서 좋았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시간만 되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기대하곤 했으니까. 이 정선생님의 얘기는 정말 실감나게 재미있었다. 그 화제가 대부분 깡패들의 싸움이야기, 무협적인 이야기.. 등등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선생님의 경험을 듣는 것 같아서 더 재미가 있었는지 모른다. 시간 내내 웃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비록 키가 조금 작아서 “똥자루” 라는 별명은 있었지만 나는 아직도 유쾌한 기억을 간직하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아주 다른 기억으로 남는 선생님, 물리담당 이지홍 선생님이다. 물리는 사실 이공계의 꽃인데 입시에서는 “국(어),영(어),수(학)”에 밀려서 어디까지나 ‘선택’ 과목이 되어버렸다. 그 선택과목의 시간은 대부분의  필수과목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훨씬 지난 뒤에 있게 마련이다. 오전에 이미 머리의 에너지를 다 써버리고 점심까지 먹은 뒤에는 사실 잠이 기가 막히게 잘도 온다. 그 때에 이 물리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이 시간은 달랐다. 이지홍 선생님의 노력과 실력 때문이랄까?  이 선생님은 얼마 전에 PSSC라는 미국에서 하는 물리교사를 위한 과정을 미국 하와이에서 이수를 하고 오신 아주 상당한 실력 파 셨다. 그 프로그램은 미국이 space program에서 소련에 뒤지기 시작하자 뒤 늦게 과학교육을 개혁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었다. 대부분 ‘실습’을 위주로 하는 ‘산 교육’이었다. 물리시간 중에는 꼭 미국에서 연수를 받으실 때 쓰신 듯한 실험기재들을 가지고 들어 오셔서 정말 ‘실감나게’ 보여 주셨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 내 눈으로 ‘목격’한 물리 실험들은 대학에 가서도 한번 못 보았다. 특히 음극관에서 음극선이 자석에 의해서 굴절하는 것, 고압에서 공기가 방전을 하는 것..등등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아직도 나는 이지홍 선생님께 머리 숙여서 감사를 드리고 싶은 심정이다.

1965년 6월 중순경 방학을 몇 주일 앞두고 한일기본협정이 체결되면서 아예 학교에 미리 휴교령을 내려 버렸다. 반대 데모를 방지하려는 심산이었고 물론 그 효과를 톡톡히 보았을 것이다. 우리들은 사실 나쁠 것 하나도 없었다. 몸과 마음이 사실 지쳐있던 상태에 방학을 몇 주 앞 당긴다는데 누가 반대를 할 것인가. 휴교령이 내려지면서 담임인 정운택 선생님 들어오셔서 침통하신 표정으로 이런 것들을 이해 못하신다는 말씀을 하시고 흑판에 커다란 글씨로 “절호의 기회” 라고 한자로 쓰셨다. 그 뜻은 모두다 알았다. 밀린 공부를 이때에 만회를 하라는 뜻이셨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한일기본조약의 의미를 생각하고, 다른 편으로는 bonus로 생긴 몇 주일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 길어진 여름방학 중에 “우리의 아버지”,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하와이에서 고국을 그리며 돌아가셨다. 우리들은 국민학교 6년을 우리의 아버지로 여기며 존경하던 대통령이었다. 독재자로 낙인이 찍히고, 군사정부는 국민감정을 이유로 귀국도 못하게 하였다. 장례식만은 그리던 서울에서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그 때의 비 오던 날, 길고 긴 운구행렬을 아직도 기억한다.   방학 중에도 데모가 계속 되곤 했다. 하지만 개학이 되면서 어느 정도 가라 앉게 되고 우리들은 다시 입시공부에 돌입을 하였다.

그 당시 입시준비 풍경은 학교 밖으로 입시전문 학원과 입시전문 도서실이 있었다. 도서실이란 것은 책을 빌려보는 곳이 아니고 그저 조용한 방에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곳이었다. 그 중에 나는 동아 학원이란 곳에 잠시 다녔다. 그곳은 입시용 참고서를 제일 많이 출판하는 동아 출판사에서 직영을 하던 새로 생긴 학원이었다. 그 곳이 다른 곳과 다르게 기억이 나는 것은 돈만 내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고 ‘입학시험’을 보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새로운 개념의 학원이 그때까지 없었다. 그래서 나도 한번 해 보자 하는 심정으로 시험을 보았는데, 합격이었다. 사실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것이 상업적이건 아니건 상관이 없었다. 무슨 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한 기분이었으니까.

누가 생각을 한 것인지 몰라도 별로 생각이 없이 만든 학원임이 곧 들어났다. 그 정도 학원이면 다른 학원과는 다른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어떤 과목은 다른 곳에 비해 더 나쁜 곳도 있었다. 그곳에서 친구 장맹열을 만났는데 그도 나의 생각과 마찬가지였다. 얼마 못 가서 다 그만두고 말았다. 한 때는 도서실에 다니기도 했다. 서대문 로터리로 가는 곳에 서강 도서실이었는데 그곳에서는 같은 반 친구 차정호를 만났다.

2학기가 되자마자 (아니면 바로 전) 6개년 계획의 주역 최복현 교장선생님이 서울시 교육감으로 뽑히셔서 학교를 떠나셨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아마도 교장선생님께서는 학교를 떠나기 싫으셨던 듯 한 것이 발령을 받고 한때 행방불명이 되셨다고 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후임으로 최형련 선생님이 부임하셨는데 너무나 우리들과는 짧은 기간이어서 별로 특별한 기억이 남지 않았다. 다른 교우들도 마찬가지라 짐작을 한다. 그리고 고교 본관과 학교 운동장 사이에 3층짜리 석조 과학관을 시공하였고 졸업 즈음에는 골격이 그 모습을 나타내었다.

3학년 때도 역시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었다. 사건이라 함은 별로 좋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백정기 선생님, 평소에는 침착하시고 공정하신 선생님이시다. 하지만 그 날은 달랐다. 문제의 발단은 국어 모의고사에 관한 것이었다. 평소에는 사실 모의고사가 끝나면 꼭 수업시간 중에 문제를 같이 풀어 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날은 어쩐 일인지 모의고사에 관한 것은 완전히 무시하시고 정상적인 수업을 시작하신 것이다. 궁금하긴 마찬가지지만 어쩔 수가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차정호가 끈질기게 문제를 풀어 달라고 요청을 하였고 백 선생님은 막무가내로 거부를 하시고.. 그러다가 아마도 차정호가 “선생님이 모르니까” 라는 말을 한 모양이었다.  그 뒤는 조금은 충격적이었다. 백선생님, 완전히 이성을 잃으셨다. 완전히.. 차정호의 뺨을 치시는데 거의 제 정신이 아니신 듯 했는데, 아무도 말릴 용기가 없었다. 그 시간도 꽤 길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참 씁쓸한 추억이었지만, 선생님도 인간이고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계기였다. 나중에 백선생님께서 차정호를 불러서 ‘사과’ 비슷한 것을 하셨을까.. 아니라고 추측을 한다. 그때의 학교의 풍토는 체벌을 교육의 일부로 여겼을 시기였으니까. 그와 비슷한 사건은 바로 옆 반인 3학년 7반에서 났는데, 역시 지나친 체벌에 관한 것이다. 이번에는 7반의 담임 영어 박시희 선생님과 그 반의 이수열이었다. 왜 그것을 알게 되었는가는 간단하다. 옆 반에서 때리는 소리가 우리 반에 고스란히 다 들렸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때 우리 반에는 우리담임 선생님이 계실 때였다. 선생님도 그 때리는 소리에 조금은 거북스러운 표정을 보이셨다. 아마도 몽둥이로 큰 소리로 오랫동안 때렸던 모양이다. 나중에 그 반에 있던 김호룡에게 물어보니 바로 이수열이 그렇게 맞았던 것이다. 왜 맞았는지는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이 사건도 역시 선생님도 우리와 같은 감정을 가지신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아닐까?

"아우성", 반장 이유성
“아우성”, 반장 이유성
수학귀재, 박상돈
수학귀재, 박상돈

우리반의 반장은 멋있게 키가 컸던 이유성이었다. 나와 이종원은 그를 아우성‘이라고 불렀다. 이유는 그 당시 국어시간에 배웠던 유치환의 시에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이란 구절에서 나왔다. 아마도 제목이 ‘깃발’이 아니었을까. 우리 반에는 키가 아주 훤칠한 친구들이 많이 있었다. 그 중에는 이유성, 김용만, 안승원, 김명전, 고송무, 김영철한정환, 박상돈, 김연응, 조남재, 황석환, 신창근, 김종호..등등 “쭉쭉 잘 빠진” 친구들이었다. 그 당시 나이에서는 학교 내에서 키가 주는 영향이 상당했다. 쉽게 말하면 대부분 비슷한 키의 친구들과 어울리게 된다는 뜻이다. 번호를 키의 순서로 정하고, 그 순서에 따라 자리를 잡으니까 더 그런 경향이 많았다. 그리고 간혹 예외는 있지만 키가 크면 힘도 세고, 외향적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키가 컸던 친구들을 기억하면 무언가 조금은 서먹서먹 할 때가 있다.

박상돈은 키고 크고 공부도  그것도 수학을 기가 막히게 잘했다. 역시 그는 서울공대 전기공학과에 합격을 하였다. 나에게는 거의 ‘이상형’이라고나 할까. 김연응, 김영철, 조남재, 신창근, 이윤기 등은 나와 같이 연세대로 갔는데 김연응과 김영철은 기계공학과, 나머지는 모두 전기공학과였다. 신창근은 대학시절 일찍 군대를 가서 헤어졌는데, 나중에 1973년과 1975년 두 번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 당시 그는 호남정유에 근무를 했는데 그 이후로 완전히 소식이 끊어지고 말았다.  해사에 간 최민은 연세대학 졸업식 때 우연히 만났는데, 7반의 송영근, 강교철, 이수열과 같이 사진도 찍었다. 고송무도 1975년에 정교성과 같이 만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그는 북구라파에서 활동한다고 들었는데, 나중에 타계 소식을 듣고 너무나 놀랐다.  조금 섭섭한 것은 송희성배희수, 둘 다 나의 재동국민학교 동창 들인데 그들과 별로 가까이 지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배희수는 연세대에서 본 적이 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송희성은 국민학교 6학년 때에도 같은 반이었는데, 고교 졸업 후에는 정말 한번도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동기회 총무, 신동훈
동기회 총무, 신동훈

신동훈은 요새 57 동기교우회의 총무로 맹활약을 해서 email로 나마 만나게 되었다. 정말 오랜 만이랄까. 또한 천주교신자임도 알게 되어 더욱 반가웠다. 이 친구는 그 이외에도 잊을 수가 없는 것이 이름이 그 당시 제일 잘 나가던 학원 영어 강사에 신동운 이라고 있어서 더 연관이 되어 기억이 되곤 한다. 이 친구 역시 pop song과 연관이 되는 것이 있다. Eddie ArnoldsSunrise Sunset과  I really don’t want you to know란 노래였는데 왜 이 노래와 신동훈이 같이 생각나게 되는 것일까? 그것이 확실하지 않다.

제일 꼬마인 김윤필은 대학졸업 후에 한번 김진수, 정양조 그룹과 같이 만난 적이 있었다. 비록 신사복차림이었지만 그 때도 어린애 같은 모습이었다. 나중에 목창수를 통해서 해병대 입대를 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놀라운 소식도 들었다. 정말 슬픈 소식이었다. 장난꾸러기 오수만은 역시 그가 장담한대로 서울치대, 치과의사,그리고  ‘중앙치과’. 윤중희는 대학 졸업 후에 가끔 만났는데 그때 그는 미국유학을 계획하고 있었다. 하지만 듣기에 그대로 국내에 남았다고 들었다. 목창수는 화학을 좋아했던 친구인데 서로 잊고 살다가 1987년경에 정말 우연히 Columbus, Ohio에서 만나게 되었다. 나는 그때 그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창수는 Ohio State University로 과학 교사단을 인솔하고 연수를 받으러 온 것이었다.  물론 내가 그곳에 살고 있는 것을 모르고 온 것인데 정말 우연히 나를 찾게 된 것이다. 그런 인연으로 목창수와는 가끔 연락이 되었고, 몇 년 전에 둘째 딸이 서울에 갔을 때 정말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았다. 그 신세를 갚을 길이 난감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남가주 동창회장, 권명국
남가주 동창회장, 권명국
이희진
이희진

권명국은 57회 동창회의 소식을 통해서 미국  LA지역(남가주)의 동창회 지부장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의 이름은 정말 오랜만에 듣게 된 것이다. 또 얼마 전에는 동기 회에서 명국의 딸이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늦게나마 email로 연락이 되었고, 또한  알고 보니 나와 같은 천주교 신자였다. 이종원은 1980년 초 나의 결혼식에도 왔었는데, 그 이후로 직접 연락이 되지를 않았다. 그런데 우연히 우진규를 통해서 월남의 싸이곤 (호지민 씨티)에 정착을 해서 산다고 들었다. 나의 옆자리에 앉았던 “키가 큰” 원병태는 고교 졸업직후 한번 편지를 받았는데, 고대 화학과에 “꽁지” 로 합격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대학졸업 후에 그를 다시 만났는데 그는 미국에 가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친척집에서 하는 주유소를 도와주러 간다고 했다.  그 당시 그를 따라 고려대학에 자주 가서 테니스를 치곤 했다. 그 이후로 연락이 완전히 끊어졌고 그를 알던 친구들도 그의 행방을 모르고 있었다. 차형순은 연세대에서 가끔 보곤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LA 지역으로 이민을 와 있었다. 아직도 business를 잘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희진정교성을 통해서 현재 캐나다의Calgary에 거주하면서  geological engineer로 일을 하는 것을 알았다. 가끔 정교성이 살고 있는 Toronto에 놀러 온다고 들었다.  나머지 반창(3학년 8반) 들은 애석하게 개인적으로 소식을 모르며, 궁금하기가 말할 수 없다. 혹시 타계라도 한 친구가 있는 것이나 아닐까?

신축중인 과학관, 1965년
신축중인 과학관, 1965년

이상 대강 기억에 나는 것을 적어 보았는데 이외에도 사실 더 있을 것이다. 아니면 이것이 현재 내 기억력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그 기억력이 더 앞으로 나아질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면 조금 슬퍼지기도 한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 긴장되고 살벌한 고교3학년의 생활이었지만 졸업 후에 대학으로 간다는 가벼운 흥분, 그러니까 성인이 되어 간다는 그런 기대감이 일년 내내 있었다. 담배를 마음대로 피울 수 있고, 다방, 술집, 연애,당구장, 영화..등등 우리를 기다리는 것들이 너무도 많아 보였다. 일본처럼 공식적인 성인식은 없다지만 우리에게는 고교 졸업이 바로 성인이 되는 시기였다. 그것들을 기대하며 열심히 공부를 한 때가 바로 고교 3학년 때였다. 특히 중앙고교가 우리에게 준 그 알찬 교육의 결실을 맺게 한 그때를 어찌 잊으랴. 우렁차게 중앙, 미래의 상징 과학관이 신축되는 것을 보며 졸업반을 보낸 우리들, 45년 동안 모두들 얼마나 민족교육의 요람인 중앙의 꿈을 실현하며 살았을까? 이미 타계한 친구들의 명복을 빌고, 남은 우리들 모두 건강하고 보람된 후년을 보내기를 기원해 본다.

 

중앙고등학교 졸업 앨범, 1966

중앙고교의 추억(1)

한참 오래 전부터 내가 다닌 서울중앙고등학교에 대한 추억을 글로 쓰고 싶었다. 중앙중학교의 추억은 전에 조금 언급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느낀 것 중의 하나는 생각과 글의 차이였다. 생각을 글로 적는 것이 대개 어렵다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라는 것, 하지만 일단 생각이 글로 남게 되면 그것이 또 생각 자체에 영향을 준다는 것 등이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이 글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사실적인 것에 있다. 물론 느낌이나 100% 주관적인 평이 곁들임은 할 수가 없겠지만.

나는 서울계동1번지에 위치한 역사 깊은 사립명문학교인 중앙학교(중,고등)를 1960년부터 1966년까지 다니고 졸업을 하였다. 그러니까 나의 인생의 바탕을 형성한 사춘기를 대부분 이곳에서 보냈던 것이다. 이것은 지금 생각하면 참 의미가 있는 사실이다. 그곳의 지리적 환경, 은사님들의 성품, 주변 친구나 동창생들의 영향.. 같은 것을 생각하면 참 그곳이 그렇게 의미 있고 중요할 수가 없다.

오늘은 고등학교 1학년을 추억할까..1963년.. 5.16 군사혁명 2년 후 모든 것들은 국가재건의 슬로건으로 행해졌다. 그 나이에 우리들은 정말 국가재건을 믿었다. 벌써 무언가 달라지고 좋아짐을 조금씩 느꼈으니까. 그런 시대에 고등학생이 되었다는 것 자체에 보람과 가슴 설렘이 있었다.

김대붕 선생님
김대붕 담임 선생님, 1962년 중학교 앨범에서

나는 1학년 2반에 속했고, 담임은 음악선생님이신 김대붕 선생님이셨다. 김선생님은 이미 중학교에서 음악수업으로 알고 있던 선생님이셨다. 그러니까 선생님도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옮기신 것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김선생님은 5.16혁명 뒤에 군대미필로 학교를 잠시 떠나셨던 듯 하다. 그런 선생님이 중학교 때 몇 분 계셨는데 기억나는 분이 미술을 가르치시던 박기만 선생님. 그러니까 예능분야의 선생님들이 군대를 미필하고 학교에 재직을 하신 셈이었다.

김대붕 선생님은 조금 예술인답게 내성적인 듯 보였지만 나는 수업 중에 한번 따귀를 맞은 경험이 있어서 조금 감정도 있고 조금 무섭기도 했다. 중학교 2학년 때였나.. 음악숙제로 ‘노래작곡’ 이 있었는데, 사실 나는 전혀 어떻게 할 줄을 몰라서 5선지의 기본 룰을 완전히 무시한 채 ‘콩나물 대가리’를 잔뜩 그려서 갔다. 그것을 본 선생님은 이건 완전히 자기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라고 오해를 하고 나의 따귀를 올려 부쳤다. 물론 나는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는데.

교실은 고교 본관 바로 뒤에 있는 붉은 벽돌교사.. 앞에서 보면 바른쪽에 있던 것이었다. 일층에 두 번째 일학년 2반이 있었다. 그 옆에는 1학년 1반, 담임은 이대호선생님(별명: 망치).. 나머지 반들은 거의 기억이 없고.. 1학년에 들어오면서 나는 아주 외로움을 느꼈는데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하나도 같은 반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참 의외였다. 한두 명은 있게 마련인데. 이것으로써 나의 1학년은 외롭게 지낼 것 같은 기분으로 시작이 되었다.

나는 키가 작아서 10번도 채 안된 1분단에 있었는데, 그 주변에는 지금도 기억이 나는 사람들: 이강호, 신명현, 김근주, 정양조, 이종식, 김대철, 김용우, 한중희, 박태동.. 과연 이들 전부가 1분단인지는 100%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때의 사진 한 장이 기적적으로 남아서 아마도 맞을 것 같다. 그때의 사진은 1학년 겨울쯤, 미술시간인가 에서 사진 찍기 실습이 있었는데 그때 서울시장 윤치영씨의 아들 윤인선이 우리분단을 찍었던 듯 하다. 왜 그가 우리 분단을 찍었는지 확실한 정황은 기억에 없다. 하지만 사진은 기적적으로 이렇게 남았다. 이들 중에는 이미 타계한 친구도 있었는데, 김대철.. 연세대에서 잠깐 보았는데 아마도 대학재학시절에 정말 젊은 나이에 타계를 한 것이다.

중앙고 1학년때 1분단사진
중앙고 1학년때 사진실습 시간에 1분단친구들과

그 당시 이 같은 분단친구들은 나의 마음의 친구들은아니었다. 무언가 나하고 맞지를 않았고 심지어 나는 이들과 더 가깝게 지내지 못한다는 스트레스까지 받기도 했다. 기억에 김근주는 정양조, 신명현 등등과 아주 가깝게 지냈다. 그들이 김근주의 집으로 놀러 간다는 것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김용우는 아주 활발하고 특히 수업 중에 멋진 질문들을 많이 하기도 해서 나는 그것이 정말 부러웠다. 김대철은 수학을 잘했고, 특히 동아출판사 해석정설 같은 책을 수업시간 사이에 풀기도 했다. 박태동은 별명이 모택동이었다. 키가 우리보다 훨씬 컸는데 어째서 1분단이었는지.. 아니면 1분단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때 한 분단이 10명이 아니고 8명 정도였는지도.. 정양조는 양조장으로 통했고, 키에 비해서 아주 매서운 친구였다. 신명현은 아마도 소위 말하는 타교출신.. 그러니까 중앙중학교 출신이 아니고 전라도 광주인가에서 왔던 듯 하다. 기억에 광주일고를 못 가서 이곳에 왔다고 했다. 이강호도 마찬가지로 타교출신..

그때 우리 집은 부득이한 이유로 거의 6년을 살았던 정든 가회동 집에서 도심한복판의 남대문시장 옆 회현동으로 이사를 했다. 불과 1년밖에 못살았지만 사람의 주거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한 때였다. 그곳은 절대로 학생들이 살만한 좋은 주거환경은 아니었다. 어머니가 생활하시는데 조금 편해서 잠시 간 곳이었다. 그 여파로 나는 난생 처음으로 통학이란 걸 시작했다. 그 콩나물 시루 같은 버스.. 그립기도 하다. 퇴계로에서 타면 재동 앞가지 왔고, 거기서 계동골목으로 해서 학교엘 갔다. 그곳에서 나는 고1을 보냈다. 옛 동네친구들은 여전히 집에 놀러 오곤 했지만 학교에선 외톨이 같이 지냈다.

그래도 뇌리에 강하게 남았던 기억들은 좋은, 심지어 그리운 추억으로 남는다. 예를 들면, 영어선생님이셨던 양창승선생님, 새해의 노래 Auld Lang Sine을 고어영어로 가르쳐 주셨다. 그때 배웠던 덕분에 두고두고 덕을 보았다. 망치 이대호 선생님의 한문시간, 정말 그때 그렇게 배워서 두고두고 덕을 보았고, 지금도 덕을 보고 있다. 누가 한자가 나중에 영어만큼 중요하게 될 줄을 알았을까? 김대붕 선생님, 그 어려운 시창교본, 코르위붕겐..억지로 배웠지만 그때 조금 악보의 감을 잡았다고나 할까.. 역도선수 출신 체육선생님 김종훈선생님.. 주길준 교련선생님의 기억도 대단하다. 그때 중앙고의 교련조회와 교련수업은 아마도 전국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었을 듯하다. 주길준 선생님, 일명 “나까무라”, 일본군을 연상시켜서 그랬을까? 특히 교련수업에서 도표를 놓고 박격포, 기관총 등등을 배운 것도 인상적이고 밖에서 교련 수업할 때면 꼭 ‘반동’ 체조를 시키곤 했다. 이 반동체조란 체조가 아니고 양손을 허리에 걸치고 박자에 맞추어서 흔드는 것이었다. 나를 그 것이 너무도 어색하고 이상하고, 하지만 재미있었다.

최복현 교장선생님
최복현 교장선생님

1963년은 중앙고교에서 의미 있는 해 이기도 했다. 저돌적인 에너지로 최복현 교장선생님이 중앙(재건) 6개년 계획이란 것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혁명정부에서는 국가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란 것을 한창 선전할 때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중앙고 졸업생들이 서울대학을 비롯한 소위 명문대에 지금 보다 더 많이 합격을 시키겠다는 그런 계획이었다. 그 계획의 자세한 것은 다 잊어버렸지만 목표는 서울의 일류고교인 경기,서울,경복 등을 따라가겠다는 정말 대담한 계획이었다. 그 계획에 따라 우리는 주중고사라는 시험을 매주 정교시가 시작되기 전에 치르곤 했다. 확실히 공부를 더 하게 된 것은 사실이었다.

최복현 교장선생님은 참 독특하고 고집스러운, 그런 면이 있었다. 교련조회 때면 ‘수위모자’를 쓰시고 분열, 열병을 하셨다. 그 없던 시절이 full orchestra를 만들기도 했고, 조회시간에는 외부에서 유명한 분들을 모셔다가 연설, 강의를 듣게도 하셨다. 예를 들면 고2때에는 그 유명했던 “국보” 양주동박사를 초청한 것이다. 그리고 독특한 것은 ‘소년군’이란 걸 만드셨다. 이것은 boy scout 소년단과 아주 다른 것이었다. 모든 재학생이 다 소년군에 가입이 되는 것이었다. 반면 소년단은 그야말로 boy scout으로 그 당시 여건으로 보아서 돈이 꽤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었다. 소년군은 한마디로 모든 학생들에게 더 높은 목표를 주는 그런 것이 목표였다.

최 교장선생님은 또 ‘본토박이’ 영어에 신경을 쓰셨다. 지리학 전공이신 선생님이 영어에 신경을 쓰신 것은 입시공부와는 아주 거리가 먼 것이었고, 정말 미래지향적인 것이었다. 어떻게 구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에서 출판된 ‘원서’, 일명 “프리즈” 영어 책이 주 교재였고 그것을 전교 학생들에게 공부하도록 지시하셨다. 일류대목표 6개년 계획과는 별도로 진행된 아주 신선한 시도였다. 하지만 이것은 높은 목표 (본토영어로 회화하는 것?)에 비해서 시간이 가면서 입시공부에 밀려 소리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미술선생님 또한 잊을 수 없다. 불행히도 존함이 확실치.. 아마도 이두영선생님이 아닐까? 기억나시는 동창들이 있으면 고쳐 주시기 바란다. 그 선생님은 지금 생각하면 완전히 미술 프로였다. 적당히 가르치는 미술선생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입시에서는 비록 인기과목이 아닐지라도 그것에 구애를 받지 않고 정열적으로 미술시간을 이끄셨다. 그만큼 우리들에게 스트레스도 많이 주신 것이다. 숙제를 게을리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들은 선생님을 따르게 되었다. 기름으로 범벅이 된 미술시간에는 신기한 추상화를 그리게 되었고, 학년이 끝날 무렵에는 학생전체가 참여해서 ‘집단화’라는 것을 그리기도 했다. 그것은 결국 고등학교 본관 lobby에 자랑스럽게 걸려서 외부인들에게 오랫동안 전시가 되었다.

1학년 학교단체소풍도 생각이 난다. 소풍을 갔을 때, 김대붕 선생님의 자상함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아주 친한 친구 그룹이 없는 것을 눈치 채셨는지, 점심을 같이 먹을 친구는 있니..하며 물으신 것이다. 조금 창피하기도 하고 했지만 사실 선생님의 그 신경 쓰심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물론 1분단의 친구 아닌 친구들과 같이 점심을 먹었다. 그 소풍에서 선생님들 노래자랑이 있었는데.. 음악선생님이신 김대붕 선생님은 유행가를 부르기가 거북하셨는지 중간까지만 부르셨다. 그 노래가 “인생이란 무엇인지.. 청춘은 즐거워..” 하는 가수 윤일로의 유명한 노래였다. 그때 그 선생님의 계면적은 행동으로 선생님의 내성적인 성격을 알 수 있었다.

언젠가는 번호순으로 앉던 자리를 아주 거의 ‘혁신적’으로 바꾸었는데 키가 큰 애들과 완전히 섞어서 앉힌 것이다. 이런 적은 학교를 다니면서 한번도 경험을 못한 것이라 처음에는 정말 이상했다. 하지만 그것도 일리가 있었다. 이런 기회가 없으면 키가 큰 친구는 절대로 사귈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알게 된 등치 큰 친구들.. 나의 근처에 나종억 이란 친구가 있었다. 아주 선비처럼 하얀 얼굴에 돗수 높은 안경하며 완전히 학자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성복.. 자리는 확실치 않다.

나종억 졸업앨범 사진
졸업앨범에 있는 나종억의 사진

나종억은 알고 보니 국회의원을 역임하신 나용균의원의 아들이었다. 독립운동지사 같은 경력이 있었고 야당의 원로 급이었는데 나중에 여당으로 변신을 하셨다. 그러니 유명한 집안의 아들이었고 당연히 부자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부유층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 나는 그것을 거의 몰랐다. 이유는 그 친구가 하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그 친구는 정말 나에게 친절하고 자상하게 대해 주었다. 내가 무언가에 쩔쩔 맬라치면 격려를 해 주곤 했다. 한번은 나보고 여자를 소개해 주겠다고 편지를 전해 주었다. 나는 너무나 놀랐고 그 편지는 그 친구가 장난으로 쓴 것으로 단정을 짓고 거절을 하였다. 아마도 그런 나의 행동이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었다. 사람을 못 믿는 것.. 하지만 나는 그렇게 믿었다. 지금도 나는 그것이 정말인지 장난인지 모른다. 그 편지의 구절도 조금 생각이 난다. 참, 순진하던 시절이었다.

인문지리 수업시간을 김기병선생님이 가르치셨다. 반들반들한 포마드로 머리를 올빽으로 빗어 넘기신 선생님은 아주 당찬 모습의 선생님이셨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최복현 교장선생님(지리학전공)의 제자였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분의 지리시간은 참 재미가 있어서 좋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수업 중에 몇 명씩 나와서 문제를 풀고 각자에게 앞에서 설명을 하도록 시키셨다. 나도 ‘걸렸다’.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많은 학생들 앞에 맞대면으로 서서 그것도 혼자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3때 아슬아슬하게 그런 ‘위기’를 넘기 적이 있었다. 그때의 나의 옆에 앉았던 친구 채현관이 재수없게 걸려서 교단에 나갔는데.. 역시 예상대로 완전히 얼어붙어서 한마디도 못하고 들어왔다. 물론 아이들의 비웃음과 차문섭 선생님의 꾸지람을 뒤로 들으면서.. 그때의 아찔한 기억을 어찌 잊으랴. 아주 당황을 했다. 하지만 순간적이지만 나도 채현관처럼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물론 칠판에다 문제는 그런대로 풀었다. 세계지도를 그리는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앞에서 앞쪽을 바라보니 예상대로 앗질 했지만 이를 악물고 설명을 했다. 끝나고 나중의 행동이 기억이 난다. 교실 뒤에서 보시던 선생님을 향해서 무언가 이야기를 했는데 아마도 이대로 됐습니까.. 하는 나의 ‘가청’이었다. 그때 선생님이 껄껄 웃으시며, “그걸 나에게 물으면 어쩌나, 모두들에게 물어야지”.. 하셨다. 그리고 나는 거의 비틀거리며 나의 자리로 ‘기어오다시피’ 했다. 그때 나의 바로 옆자리(앞자리?)에 앉았던 나종억이 나를 위로하였다. 잘했다고. 나종억, 나는 아직도 그 위로의 말을 잊지 못한다. 아니 절대로 잊지 못한다. 그 이후로는 그런 상황이 와도 그렇게 무섭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굳어져갔다.

이성복.. 어떤 계기로 친해 졌는지 모르지만 무언가 말을 하면 재미있었다. 그 친구의 특징은 손이 그야말로 솥뚜껑처럼 컸다는 것이다. 아마도 내 손의 두 배정도가 아니었을까? 여름방학이 다가오면서 나와 그 친구는 공부시간 사이에 밖에서 무전여행의 계획으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 그 당시는 김찬삼씨의 세계무전여행이 큰 뉴스였다. 모두가 그것을 희망과 꿈으로 여겼다. 그래서 우리도 세계는 몰라도 국내 무전여행의 꿈을 꾸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너무나 꿈이 컸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성복은 상급학년으로 올라가면서 헤어졌다. 그러다 졸업 후에 대학입시가 끝나고 가회동에 있는 그의 집에 잠깐 들린 적이 있었다. 이성복은 집에 없었고, 어머님께서 나오셔서 고려대 농과대학에 합격을 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주셨다. 그리고 완전히 소식이 끊겼다. 그 친구, 동창회에는 나오나..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하다.

또한 그 당시에 브라질이민 열풍이 불고 있었다. 김 대붕선생님께서 한번은 서동식의 이름까지 언급하시면서 당장 브라질이민에 대한 것(가려는 것, 말하는 것?)을 중지하라고 까지 하셨다. 아직도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아마도 서동식이 브라질에 가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때의 경제사정을 보면 브라질 이민은 사실 못사는 사람보다는 잘사는 사람들이 더 가기가 쉬었다. 하지만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될 수도 있었다.

인상적인 학급활동 중에 학급대항 농구시합이 있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시합이 있었는데 우리 반이 아마도 우승, 아니면 그 정도로 잘 했다. 그 이유는 우리반의 선수들이 여름방학에 정기적으로 모여서 연습을 했다는 것이다. 어쩐지 그 팀워크가 기가 막혔다. 그때 처음 농구 보는 재미를 알았다. 그 선수 중에는 전오현, 양창걸 등등이 기억이 난다. 나는 키도 그렇거니와 농구와는 인연이 없었다. 대신 아구는 남들보다 잘했지만..

중앙고 1학년 교실이 있던 건물, 동상 바른쪽
1학년 교실이 있던 붉은벽돌 건물, 김기중설립자 동상 바른편

중앙중학교 다닐 당시에 나는 동네야구에 거의 미쳐있었다. 집에 오면 그대로 바로 옆에 있는 재동국민학교 운동장으로 달려갔다. 거기서는 항상 동네야구대회가 있었다. 나는 우리 골목 팀을 이끌고 꼭 나갔다. 그때 배운 야구실력이 내가 보아도 상당한 수준에 있었다. 그런 배경으로 가끔 학교친구들과도 야구를 학교운동장에서 했다. 고1때도 예외가 아니어서 어느 주말, 그러니까 일요일에 중앙학교운동장에 모여서 우리반의 키 작은 팀과 키 큰 팀이 시합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누가 팀 멤버였는지는 다 잊어버렸지만 우리 팀에는 분명히 정양조가 있었고 다른 팀에는 나종억이 있었다. 그것 밖에 생각이 안 난다.

군사혁명의 여파로 학생들에게 근로봉사라는 과외의무가 있었다. 우리학년은 돈암동, 미아리근처의 야산에서 하루 수업을 쉬고 봉사를 했다. 정말 힘든 노동이었다. 확실히 무엇을 했는지 생각이 까물거린다. 아마도 나무를 심었지 않았을까? 하루 종일 일을 했는데 나는 과히 몸집이 세지를 않아서 아주 힘들어 했다. 그런 것을 보고 감독하는 ‘노가다’ 가 내가 농땡이 치는 줄 알고 뭐라고 했다. 그랬더니, 우리반의 ‘강달훈’이 그 아저씨보고 내가 아프다고 말해주었다. 사실 아픈 것은 아니었지만 나를 보호해준 것이었다. 그때 나는 강달훈, 나와 별로 친하지 않았는데도 그런 것을 고맙게 생각을 했다. 그곳은 정신여학교의 옆에 위치해 있어서 그곳 옆을 지날 때 모두들 흥분해서 학교 안쪽을 향해서 소리소리를 지르곤 했다. 참, 순진하지만 조금씩 이성에 눈이 떠지던 그 시절.. 어찌 잊으랴.

아~~ 또 생각나는 사람, 지옥천.. 이름이 독특한 친구, 아마도 지방에서 온 친구였다. 이름에 ‘지옥’이 들어가서 아주 인상적이었다. 시골사람처럼 구수하게 생긴 친구다. 인상적인 것은 학급대항 축구시합에서 지옥천이 선수로 뛰었는데, 그때 offside란 것을 처음 보았다. 하도 뜀박질이 빠르다 보니 공을 몰고 goal로 뛸 때마다 offside였다. 그러니까 골을 향해서 돌진을 하다 보면 공이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 코믹한 장면이었다.

겨울연가에서 보는 고1때의 교사건물, 뒷쪽
겨울연가에서 1학년때의 교사건물이 뒷쪽에 보인다

2003년에 한국의 유명한 TV drama “겨울연가”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Drama에서 춘천의 학교라는 것을 서울의 우리모교 중앙고등학교에서 촬영을 한 것이 아닌가?

담임 선생님 김대붕 선생님은 나의 졸업 앨범에 계시지 않는다. 언제 학교를 떠나셨는지 기억이 안 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성심여대 교수로 가신 듯 했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아마도 음악과 교수가 되셨을 것이다. 아주 아주 이후에 내가 가톨릭 신자가 돼서 가톨릭 성가 책을 보니 김대붕이란 이름이 자주 보였다. 아하.. 우리 고1담임 선생님께서 가톨릭 성가를 작곡 하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어떻게 건강하게 지내시는지 궁금하고, 부디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빈다.

 

중앙고등학교 졸업 앨범, 1966

50년전 사일구, 4.19를 생각한다

1960년 4월 19일을 생각한다. 오늘 아침 문득 오늘이 4월 19일임을 느꼈고, 아마도 조금은 더 의미가 있는 해가 아닐까.. 생각을 하면서 아.. 1960~2010.. 정확하게 50년이 되었음을 알았다. 조금 부끄럽기도 한 것이 오늘에서야 50주년이란 것을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Axis of power, 이기붕,이강석,이승만,프란체스카,박마리아
Axis of power, 이기붕,이강석,이승만,프란체스카,박마리아

1960년 4월 19일 나는 서울 종로구 계동 1번지 중앙중학교 1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그때, 초봄이었던 4월은 그 나이엔 참 즐거운 계절이었다. 우선 밖에서 full-time으로 뛰어 놀 수가 있기 때문이다.

No TV, No telephone, No game machine, No computer, No nothing, Yes only AM radio.. 유일한 오락은 만화책과 누나들(식모누나까지) 속에서 끼어서 순정 멜로드라마(예를 들면 청실홍실, 장희빈 같은)를 AM radio 에서 듣는 것 밖에 없었던 시절, 집 밖의 골목은 나에게나 동네 꼬마들에겐 거의 천국이나 다름이 없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 조금은 덜 뛰어 놀 것 같았지만, 거의 반대였다.사실은 더 나가서 놀았다. 우선 입시공부가 당분간(최소한 3년간)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종로 화신 백화점 옆 골목에 있었던 우리의 ‘등대’ 우미관에서 로버트 밋첨(Robert Mitchum) 주연의 2차 대전 잠수함과 구축함 영화, 상과 하(Enemy Below), Pat Boone주연의 과학공상영화 “지저탐험(Journey to the center of the Earth), 등 그 당시 미국영화에 열광하던 시절.. 그 때였다. 사일구 혁명이 일어난 것이.

3.15 대선 선거운동, 1960년
3.15 대선 선거운동, 1960년

그 당시 나는 가회동, 재동국민학교 뒷문 쪽, 에 살았다. 모두가 지금에 비하면 꾀죄죄하게, 가난하게 살았지만 모두들 생활수준이 비슷해서 사실 우리들 그렇게 가난한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모르는 게 약이라고나 할까.

길에 나가면 사람들로 항상 북적거렸는데, 그 이유는 간단했다. 집에 앉아서 할 것이 별로 없었고 생활공간이 좁았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나는 기적적으로 침묵이 흐르는 거리를 목격할 수 있었다. 그것은 서울에서 처음 맞고 보는 “계엄령” 때문이었다. 골목까지 사람이 사라진 것은 사실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그 해 1960년 3월에 3.15 부정선거가 있었다. 이것은 지금 생각해도 역사상 유례없는 부정선거의 교과서적인 극치였다. 어린 우리가 듣고 보아도 그런 것 같았다. 재동국민학교 6학년, 그러니까 1959년, 담임선생님이셨던 박양신 선생님.. 그 선생님까지 우리 코흘리개 학생을 놓고 선거유세를 하다시피 하셨다. 이기붕이 조볌옥(야당 후보) 보다 훨씬 낫다고.. 분명히 문교부의 지시에 의해서 그랬을 것이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 선생님.. 너무 하셨다.

김주열군의 죽음에 항의 데모하는 마산여고생들, 1960년
김주열군의 죽음에 항의 데모하는 마산여고생들, 1960년

그리고 기억나는 비극적인 사건, 마산 부두에서 김주열이란 고등학생의 시체가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떠오른.. 물론 신문에 그런 것들이 요란히 실렸다. 최소한 이승만 정권은 언론통제나 탄압은 안 한 듯하다. 그 당시 우리는 경향신문을 보았다. 특별히 야당 성이 강했던 것도 아니었는데 요란히 정부를 탄핵하곤 했다. 그 때는 각 신문마다 간판 격인 만화가 매일 실렸는데, 그게 어린 나이에 보아도 무슨 정치적 배경이 깔린 무슨 의미가 있었다. 나는 그때 경향신문의 두꺼비 (김경언 화백)를 즐겨 보았다. 물론 제일가는 인기는 역시 동이일보의 고바우영감(김성환 화백) 이었지만.

결국 부정선거는 짜여진 각본대로 이승만, 이기붕을 대통령, 부통령 으로 만들어 놓았다. 보통 4,5월에 선거가 있었지만 다급해진 자유당은 강제로 3월 15일로 앞 당겨 선거를 치렀는데 이유가 좋았다. 4,5월 달은 농번기라는 것이고 농민들을 돕겠다는 갸륵한 이유.. 그 당시 자유당은 그 정도로 유치하기도 하였다. 기억나는 것이, 이기붕과 박마리아.. 이기붕은 거의 허수아비고 모든 것은 그의 부인인 박마리아가 움직인다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알 수 없지만 나중에 여러 가지를 종합해 보면 거의 사실인 듯 싶다. 그 단적인 예로 이기붕의 장남이었던 이강석을 박마리아가 이승만의 양자로 들여보낸 것인데, 정말로 비극적인 종말을 초래하고 말았다. 이강석이 가족을 모두 쏘아 죽이고 자기도 죽은 것이다. 대부분, 이강석의 용기를 칭찬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4.18 고려대생들의 데모, 이날 밤 돌아갈 때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았다.
4.18 고려대생들의 데모, 이날 밤 돌아갈 때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았다.

4.19는 시실 급박히 우리에게 다가왔다. 각종 데모가 점점 서서히 커져나간 것이다. 4월 18일에는 서울고려대 학생들이 데모 후에 자유당 ‘소속’ 깡패들의 습격을 받았다. 그 때는 자유당 소속의 정치깡패들이 자주 등장을 하였는데, 제일 유명한 것이 이정재, 임화수의 일본 야쿠자 같은 조직이었다. 이들은 조무래기 동네 깡패가 아니고 거의 법적인 ‘회사’를 가진 조직 폭력배였다. 이들에 관한 일화는 오래 전의 TV 드라마 ‘무풍지대‘에 아주 자세히 나온다. 그 당시 일화로, 코미디언합죽이 김희갑씨가 임화수에게 폭력을 당한 것은 신문에 보도 되기도 했다. 소문에 의하면 임화수가 “야 합죽이, 요새 잘 있냐?” 하고 인사를 한 것으로 시작이 되었다는데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모른다.

4월 19일 (무슨 요일이었을까, 맞다..월요일이었다) 아침에 학교엘 가니.. 수업도 시작하기 전에 (확실치 않지만) 퇴교를 당했다. 우선은 신이 났지만 (그 나이에 학교보다 동네골목이 더 좋았음), 조금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거리의 공기가 조금 이상 했음을 ‘감’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우선 ‘신나는’ 마음으로 만화가게로 향했고, 미친 듯이 애독하던 만화 김산호의 ‘라이파이‘를 즐겼다. 그러면서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때 이미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근처까지 데모대가 갔었던 모양이고, 경찰들이 발포를 시작한 것이다. 나는 그때 총소리를 처음 듣게 되었다 (라디오의 드라마를 제외하고) 아마도 그 소리는 그 당시 경찰들의 표준무기 카빈소총이었을 것이다.

국회의사당 앞의 데모, 한 여대생이 무등을 타고 구호문을 치켜 들었다.1960년 4월 19일
국회의사당 앞의 데모, 한 여대생이 무등을 타고 구호문을 치켜 들었다. 이 여대생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4월 19일

그러면서 사람들이 우왕좌왕 하는 것이 느껴지고 총소리는 더욱 잦아지고.. 그러면서 저녁이 되었다. 재동 신작로엘 나가니 (지금 돈화문에서 종로경찰서로 이어지는 거리) 완전히 사람들로 들끓고 군용트럭, 화물트럭이 학생들을 가득 태우고 질주를 하고 있었다. 물론 격한 구호를 외치면서. .그들은 모두 대학생들이었다. 그러니까 4.19는 사실 대학생들의 데모였다. 희생자들도 거의 그들 이었을 것이다. 거리엔 발을 동동 구르며 귀가를 안 한 자녀를 기다리는 부모들로 가득하고.. 그때 같은 동네에 사는 국민학교동창 한윤석의 어머니가 큰 딸을 부여 앉고 무사히 귀가한 것이 너무 기뻐서 뛰시던 모습이 선하다.

그러다가 계엄령 이란 것이 선포되고 군인들이 거리에 깔리기 시작하며 통행금지가 실시되고.. (이런 광경은 사실 그 이후 몇 십 년 동안 흔히 보게 되는 그런 것이 되었다).. 동네 골목까지 쥐 죽은 듯 조용해지고.. 그러면서 라디오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구성진 ‘하야 성명’이 나오기 시작했다. 유명해진 말 ‘국민이 원한다면‘.. 이란 말.. 그 당시 아주 유행어가 되었다. 거의 친 아버지 이상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존경하게 교육을 받았던 우리들은 솔직히 동정 어린 심정이 되었다. 그러니까 “이기붕 개새끼”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을 하기도 했다. 물론 모든 잘못은 거의 이승만에 있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경무대로 향하던 데모대가 효자동 전차 종점에서 총격을 받고 쓰러졌다, 4.19 낮
경무대로 향하던 데모대가 효자동 전차 종점에서 총격을 받고 쓰러졌다, 4.19 낮

그 때, 학생이란 위치가 사실 한국역사상 최고의 경지까지 올랐음을 의심할 수가 없다. 일반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대우를 하곤 했다. 특히 대학생들.. 수없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갔던 그 용감했던 대학생 형님들.. 지금 생각해도 존경스럽고, 자랑스럽고, 흐뭇해지는 심정 누를 길이 없다. 그렇게 나라에 희망이 없고 경제적으로 쪼들리던 시절, 작업복 염색해 입고, 암시장에서 산 군화를 신고 대학캠퍼스를 누비던 그 멋지던 형님들 (누님들도 있었겠지만).. 지금 다 어떻게 4.19를 기억하고들 계실까.. 궁금하기도 하다.

짧았던 학생혁명 시절, 결국 미성숙하고 이기적이던 야당 정치인들이 거의 망쳐놓다시피 해서 결국은 다음해 1961년 5월 16일에 박정희의 탱크에 의해 끝이 나고, 사일구의 의미는 희망했던 것처럼 피어 오르질 못했다.(군사정권은 사일구의 의미를 격하하진 않았다. 하지만 5.16의 의미를 올리다 보니 상대적으로 눌렸을 뿐이다) 피지도 못하고 어린 나이에 숨져간 영혼들에게 존경의 마음으로 명복을 빌고 싶다. 고이 잠드시기를..

 

 

당시의 신문으로 본 사일구 혁명 

 

대한민국의 신문들이 거의 모두 digital archive로 Internet으로 볼 수 있게 되면서, 그 동안은 거의 불가능하거나 아니면 불가능할 정도로 비싼 보물과 같은 역사적 정보들이 거의 기적적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사실 이것을 보는 것은 최고의 time-killer가 될 수가 있고, 이것으로 다시 자기만의 역사를 쓰며, 바로 잡을 수도 있게 되었다.

그 예로 아래에 보이는 사일구 혁명 당시의 신문을 보면서 희미하거나 숫제 틀린 기억들을 바로 잡게도 되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그 당시 12살 정도의 ‘한자 문맹‘에 가까운 나이어서 이런 신문들을 읽지도 못했을 것이라서, 그렇게 큰 잘못 된 기억은 없을 듯하다. 그 당시 나는 분명히 ‘그림, 사진’들만 즐겼을 것이다. 이것들을 보면서 역시 사일구는 아주 오래 전 ‘사건’이라는, 그것도 너무도 오랜 전이라는 가벼운 충격을 받고, 내가 그만큼 오래 살았고, 그 역사의 현장을 피부로 느꼈다는 것에 약간의 자부심도 가지게 되었다.

50년이 지난 신문 속의 글과 사진은 거의 ‘전근대적 문화’의 냄새를 진하게 풍겼는데, 변해버린 한글 맞춤법과 당시의 경제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꾀 죄죄’한 모습들, 당시의 ‘조잡한’ 흑백 신문사진 기술.. 너무나 나의 역사, 시대관을 시험하는 것들이었다.

 

 

419의 전주곡, 4월 18일 고려대생들의 데모

4.19의 전주곡, 4월 18일의 그 유명하고 ‘영웅적’인 고려대 3천명 학생들의 4.18데모에 관한 전면기사들.. 이 고려대의 국회의사당 앞에서의 대규모 데모는 그 날 밤에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이정재 휘하의 임화수, 유지광 깡패부대의 대규모 습격을 받고, 그것이 사일구 혁명의 최후 기폭제가 된다.

 

 

정치깡패단 고대생 습격

이정재 사단 정치깡패의 첫 출동, 시민들과 합류해서 4.18 저녁 서울 중심가를 누비며 행진하며 학교로 돌아가던 중 종로4가  천일백화점 근처에서 100여명 깡패의 살인적인 공격을 받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용감했고 치열했던 4월 18일 저녁의 고려대 생들

이 사진들이 4월 18일 혁명전야의 생생한 열기를 적나라 하게 보여준다. 의사당 앞에서 끝까지 버티던 용감했던 고대생 형님들.. 그 무서운 힘들이 어디서 나왔을까?

 

 

전국으로 확대된 4월 19일의 데모

폭발된 전국적인 4.19혁명.. 서서히 전면 기사, 정치면으로 등장.. 이때는 이미 수많은 사상자가 나온 이후였고, 비상 계엄령이 서울 전역에 선포된 후였다. 하지만 기사를 읽으면 처참한 사상자들의 실체는 아직도 파악이 덜 된 상태임을 알 수 있다. 다만 경무대 앞에서 장갑차로 데모 군중을 향해 일제 사격을 했음은 밝힌다.

그런대로 점잖은 사진, 경무대 진입로 전에 있는 효자동 전차 종점에서 무장경찰과 대치한 것만 front page에 실었다. 이 효자동 종점에는 나의 외 이모님 댁의 조그만 가게가 있었는데, 그 당시 어떠한 광경을 목격했는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서울 전역의 거리를 휩쓴 노도와 같은 데모

1960년 4월 19일 저녁 6시까지의 ‘사회면’ 뉴스는 조금 더 생생한 데모의 격렬함을 보여준다. 수도지역 (그 당시에는 수도권이란 말도 없었다), 그러니까 서울에 있는 대학생 전체와 수 없이 많은 고교생들, 심지어 중학생들 (그 이하 아이들도) 까지 합세한 그야말로 혁명적인 봉기의 조짐을 여지없이 보여준 날.. 사월 십구일 낮의 일이었다.

내가 오후 한시경부터 들었던 총소리.. 경무대 쪽이었고 역시 그때부터 대학생 형님들이 총에 맞아 쓰러지기 시작한 때였다. 만화 속에서만 보던 진짜 총 소리를 듣는 기분이 처음에는 신기하고 흥분되기도 했지만 곧바로 ‘공포’적인 기분으로 변했다.

 

 

전국 주요도시 비상계엄 선포 

처음에 서울에 내려졌던 경비계엄령이 전국적인 ‘비상’계엄으로 바뀌어 선포가 되고 경찰을 대신 군인들이 치안의 주역을 맡기 시작하고, 신문 같은 언론매체(그 당시 몇 가지 신문과 국영방송밖에 없었다)에 대한 군 검열이 시작되어서 ‘불온한’ 것들은 무자비하게 조판과정에서 삭제 당했다.

 

 

4월 19일 밤, 계엄군 진주 시작

치열한 시가전을 방불케 하던 4월 19일이 저물어가면서 계엄령에 의한 중무장 군인들이 거리 곳곳에 배치되기 시작하며 데모대도 서서히 물러가기 시작하지만, 군검열로 생생한 사진보도는 아직 없었다. 글로 쓰여진 기사만으로는 그날의 엄청난 일들을 묘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데모대들이 ‘탈취’한 각종차량에 올라 타고 거리(원남동~안국동)를 질주하던 대학생들의 격렬한 구호, 그 모습들이 아직도 기억에 남고, 온통 골목길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하던 부모님들의 모습들.. 역시 생생하다.

 

 

서서히 밝혀지는 데모의 현장

비교적 민중 편에 서있었던 계엄군의 느슨한 검열을 통과하기 시작한 4월 19일의 생생한 사진들이 신문으로 알려지기 시작한다. 김영삼(a.k.a., 빠가)이 ‘뭉개버린’ 식민통치의 상징 ‘중앙청(이것을 없애버리면 후세에 누가 그 비극적인 역사를 느낄 수 있냐?)’ 옆에 널려진 서류들, 불에 타던 반공회관, 서울신문사, 서울 의대생들이 숫제 하얀 가운을 입고 데모에 참가, 이기붕 국회의장 집의 물건들이 불에 타던 생생한 기록들이다.

 

 

신문 언론 검열, 통제 시작

4월 20일 석간신문, 드디어 본격적인 군검열을 거친 신문들.. 조판 후 에 군 검열관이 아마도 ‘송곳’ 같은 것으로 긁은 모양.. 계엄령이 해제될 때까지 이 신문의 모습은 그 당시 나에게 참으로 신기하게 보였다. 이때의 계엄군 사령관, 송요찬 중장..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그가 한 일련의 명령들은 후세에 길이 남을 ‘정당’한 것들 뿐이었다. 특히 민중의 원흉으로 낙인 찍힌 경찰들을 철저히 단속, 통제하는데 성공했다. 당시의 많은 경찰은 실제로 일제 고등계 출신 악질들이 많아서 수시로 미성년자들까지 ‘공산당’으로 몰아 고문을 자행했다.

 

 

조금씩 후퇴하는 이승만 정권

이승만 대통령의 4.19 ‘사태’에 대한 정치적 포석과 견해는 역시 정치적이지만, 그래도 조금은 ‘진정한 대화’를 원하는 듯한 느낌을 떨칠 수 없는 그러한 담화문이다. 하지만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그 때까지도 이대통령은 사태의 진상 (원인을 포함한)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 같다. 비서실을 비롯한 ‘인의 장막’에 가리워져 있었고, 고령의 나이가 별로 사태파악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오후 7시 통금제한 시작

비상계엄령의 여파, 4월 20일부터 저녁 7시 통행금지 시작.. 그렇게 복잡하던 세종로 네거리가 7시 전에 이미 완전히 비었다. 이 ‘낮’의 통행금지는 사실상 골목 골목까지 적용이 되어서 집밖으로 나오는 것도 아주 조심스러웠고, 꼬마들이 나가서 노는 것도 힘들었다.

 

 

엄청난 인명 상실, 피해가 밝혀진다

처음으로 ‘공식’ 피해 진상이 나오기 시작한다. ‘출발점’이 이곳에 보이는 대로 111명이다. 물론 나중에 이것은 큰 폭으로 올라간다. 역시 대부분의 사망자들은 ‘어린 학생’들이어서 국민에게 느껴지는 심리적인 효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어떻게 이들이 발포를 할 정도로 폭도이며 위협적이란 말인가?

이러한 민심에 부응하듯 송요찬 계엄사령관은 경찰을 철저히 질책하며 ‘보복 금지’에 대한 엄단을 경고한다. 신문검열로 삭제된 사진들은 지금 보아도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못다 피고 먼저 간 생명들을 가족에게

계엄 사령부는 민심을 잘 파악하고, 각 병원에 안치된 데모 사망자, 거의가 학생들, 을 유족들에게 돌려 주었다. 이때 민간정부에 대한 증오심이 상당했고, 관(서울시) 주도하의 합동영결식도 유족들이 거부했다.

 

 

4월 23일자 호외!

4월 23일자 호외(extra), 그 당시는 참 호외란 것이 많았다. 요새 같이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이 없어서 빠른 뉴스는 라디오나 이런 신문의 호외 같은 것이 의지했다. 정국 파탄의 원인의 중심인물, 부정선거의 주역 부통령에 당선된 이기붕 국회의장, 드디어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모양이다. 불똥이 튈 것에 대비해서 현 부통령 장면박사는 다음의 정치포석을 한다.

 

 

가난 했지만 인정 많던 그 시절

당시는 찌들 리게 대부분 가난했지만 빈부의 차이가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 생존경쟁에 발버둥은 쳤지만 기본적인 인간애와 동족애는 어느 때 보다 높고, 없는 것을 나누는 인정도 참 많고 흔했다. 위의 사진들은 절대로 pose한 사진들이 아닌 snap이었을 것이다. 연고도 없는 어린 부상자를 돌아보는 한 가족들, ‘용감한 형님’을 자랑스레 찾아간 국민학생, 사망자 가족의 장례비용을 걱정하는 어떤 착한 엄마와 아들의 모습.. 참으로 눈물겹고 그립던 시절이었다.

 

 

고대생 습격 주범, 정치깡패 소탕

무풍지대, 드디어 부상.. 자유당 정권과 손을 잡은 야쿠자 스타일의 이정재 휘하의 정치깡패의 부관들 드디어 여론과 군의 압력으로 얼굴이 들어나고 구속까지 된다. 이들과 동대문 경찰서는 숫제 서로 직통전화까지 가설하고 고대생 습격사건을 주도했다.

3.15 부정선거도 이들의 도움이 없이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들 중, 평화극장 사장 임화수와 두목격인 이정재는 1년 뒤의 5.16 혁명 뒤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비운을 겪지만, 운이 좋았던 유지광은 살아 남는다.

 

 

불란서 혁명같던 거리의 전쟁

불란서 혁명을 방불케 하는 이 사진은 4.19가 절정에 이르던 때, 권력의 심장부 이승만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로 향하는 제일 용감하고 희생자가 많았던 때의 현장 사진이고, 계엄군 검열이 완화된 상태에서 신문에 실렸다. 이 당시 데모대의 유일한 방어무기는 탈취한 소방차 뿐이었다.

 

 

오열하던 어린 희생자들의 가족들

한민족에게 낯설지 않은 광경, 억울하게 어린 나이에 먼저 보낸 귀여운 자식들을 어찌 그냥 보내랴.. 이때의 슬픔은 전체 국민들의 슬픔이었고, 꼬마였던 우리들에게도 커다란 슬픔이었다.

 

 

기타를 치며 부상자를 위로하던 이대부속병원 의사

슬픔과 고통 속에서도 이런 장면은 우리의 마음을 훈훈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자상한 의사가 요새도 과연 몇이나 있을까? 지금 이 의사 분은 잘 살아 계실까? 그 당시 기타를 치는 의사는 그렇게 많지 않았을 텐데..

 

 

계속 밝혀지는 사일구 의거의 진상들

점차 자세한 4.19 때의 현장사진들이 신문에 실리기 시작한다. 데모의 정점은 역시 권력 심장부 경무대를 향한 길이었다. 대부분 효자동 종점을 통한 길이 바로 그 길이었다. 후퇴를 하며 총을 쏘는 경관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생각을 한다. 발포 명령을 받은 그들에게 과연 어떤 죄가 있었을까?

 

 

비상계엄 속에 재개된 격렬한 데모

4.19 학생데모 가 일주일째로 접어 들면서, 자유당 정권의 미온적이고 느린 반응에 결국 학생뿐 아닌 대학교수, 일반군중들이 못 참고 일어났다. 이번의 소요는 비상계엄 하에서 일어난 것이라 그 심각성은 더 큰 것이었다. 모든 치안의 책임은 계엄군에 있는데, 그들에게 모든 앞날의 열쇠가 쥐어져 있었던 것이다. 결국, 계엄군은 ‘절대로’ 동포에 대한 발포명령을 받지 않았다.

 

 

민중과 학생 데모대 편에 선 계엄군

계엄령 하에서 벌어진 새로운 데모는 사실상 계엄군의 ‘보호’하에 벌어진 셈이 되었고, 이것은 현 정권의 심장을 겨누는 또 다른 총부리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계엄군의 ‘결단’이 4.19 를 진정한 혁명으로 만든 것이다. 이것은 대한민국 국군 창군이래 최고의 순간이라고 할 것이다.

민간인들이 계엄군의 탱크에 올라 타고 얼싸안고 있던 사진들을 생생히 기억한다. 정말 멋진 군인아저씨 들이었다. 용기를 얻은 군중들은 서서히 ‘원흉’으로 지목된 이기붕 국회의장의 저택으로 몰려가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겼다. 대한민국 만세!대한민국 만세! 결국은 올 것이 왔다. 계엄군의 멋진 결심에 굴복한 듯, 국민의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의 구성진 육성 방송과 성명이 라디오와 신문 호외로 나오고. 나도 이 방송을 들었다, 그 유명한 말.. “국민이 원한다면”.. 나도 생각했다. “맞습니다. 그것이 국민이 원하던 것이었습니다. ” 이 방송과 성명으로 4.19는 100% 완전한 학생들의 승리가 되었고, 4.19는 ‘유혈’ 혁명으로 승격한다.

 

 

대통령 하야 성명, 정의의 승리

이승만 정권 궤멸.. 이것이 이제는 공식, 사실화가 되어서 4월 27일자 신문의 전면에 나온다. 3.15 부정선거는 완전히 무효가 되었다. 이 역사적 결정에 이르기까지 학생대표들과 이승만 대통령은 ‘울음’으로 대화를 했다고 한다. 분명히 노 혁명가 이승만 박사도 그들의 눈물을 진정으로, 가슴으로 느꼈던 것 같다.

이제는 승리의 축제가 세종로 네거리를 완전히 덮는다. 총알이 난무하고 핏방울이 튀던 같은 거리가 기쁨과 감격의 거리로 변한 것이다. 역시 계엄군 탱크가 이번 의거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까.. 역시 국민의 군대였다.

 

 

대통령 하야성명에 열광하는 민중과 학생들

4.26 대통령 하야 결심소식을 듣고 계엄군 탱크 위에서 환호하는 군중들.. 이것은 세종로 네거리에서 남쪽을 향해 찍은 사진인 듯, 멀리 중부 소방서의 소방탑이 보인다. 기껏해야 4층 정도의 높이에서 불이 난 곳을 볼 정도로 그 당시에 고층빌딩이 없었다.

아래의 사진은 계엄군의 ‘안전함’을 느낀 후 계속된 대모 군중, 가운데를 보라.. 국민학교 학생들이다! 멀리 “빠가”김영삼이 없애버린 일제의 상징 중앙청과 북악산이 보인다.

 

 

4월 26일, 대한민국 제2의 광복절!

대통령 하야 성명이 나온 4월 26일은 제2의 8.15 라고 환호를 했다. 해방, 부정,부패, 깡패, 경찰 정권에서 해방.. 이날 기뻐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분명히, 고문경찰과 자유당의원, 그 소속 깡패들 뿐이었을 것이다. 그 중에 이기붕 이란 이름은 특별히 증오의 대상이 되었고 군중들은 서대문근처 그의 저택으로 쳐들어가 집안 가재들을 모두 끌어내서 불태웠다. 나의 동네 친구들 중에는 그곳의 물건들 중에서 ‘최고급 야구 glove’를 “전리품”으로 가져오기도 했다.

 

 

군인 아저씨, 저희를 쏘지 마세요!

눈물과 웃음을 함께 자아내는 사진들.. 특히 왼쪽의 국민학생 코흘리개 악동들의 데모가 그렇다. “군인 아저씨들,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마세요!” 란 플래카드.. 어찌 이들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있을까? 이들은 분명히 용감하게 피 흘리며 쓰러진 대학생 형님,오빠들을 생각했을 것이다. 100% 자유를 쟁취한 군중들, 탱크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올라타서 환호를 한다.

 

 

4월 26일에 보인 민중의 분노

4.26 승리의 모습들.. 이기붕 저택 습격한 데모대 들은 사실상 ‘절도’도 서슴지 않았지만 그것이 큰 문제가 될 그런 날이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 충격적인 모습은 ‘우리들의 아버지’ 이승만 박사의 동상이 종로 파고다 공원 (탑골공원)에서 끌려 내려져서 차에 끌리어 가는 곤욕을 치른 것이다. 우리들이 보기에 그것은 조금 심한 것이었다. 특히 그 동상을 끌고 다닌 차가 ‘분뇨 차(일명, 똥차)’ 였다는 사실이 두고두고 께름칙하게 느껴졌다.

 

 

대한민국 대학생들 시싱 최고의 순간들

빛났던 대학생 형님,누님들과 용감하게 민중을 보호했던 우리의 국군 계엄군 아저씨들.. 정말 멋진 순간들을 맞았다. 총탄에 쓰러지며 나라를 구했던 대학생 형님들이 이번에는 뒤처리를 과감히 맡았다. 계엄군이 관리하던 경찰서, 파출소 조차 대학생들을 임시 ‘고용’하기에 이른 것이다. 특히 왼쪽 위의 기사를 보면 그 당시 최고의 맛을 자랑하던 뉴욕제과점과 고려당 제과점의 최량의 빵들을 계엄군 ‘아저씨’들에게 선사를 하는데, 그 당시는 살 맛이 나던 때였다.

 

 

급속히 정상화되는 서울거리

급속히 정상화되는 서울거리 2

 급속히 정리되는 용맹과 피의 거리들.. 역시 피를 흘렸던 대학생 형님들이 팔뚝을 걷고 나섰다. 경찰이 종적을 감춘 곳에 대학생들이 교통정리를 하고, 쓰레기 청소까지 했다.

 

 

이기붕 일가 자살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이기붕씨 일가 자살.. 이것은 그 당시에도 끔찍한 뉴스였다. 그렇게 많은 죄 없는 어린 학생들이 죽었지만, 이것은 그것과 근본적으로 성격이 달랐다. 법의 심판을 받기에도 합당치 않다고 결론을 내린 장남 이강석의 결단이었다. 그가 부모와 남동생을 권총으로 사살하고 자신을 쏜 것이다. 100% 확실한 정황을 알 길은 없지만 그것이 공식적인 결론이었다. 누구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잊고 싶은 끔찍한 비극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이기붕씨의 출신 과정을 보면 그도 양심적인 기독교인이었고, 나름대로 올바른 정치를 하려고 했음도 부정할 수 없지만 문제는 장기집권으로 나온 ‘악마’였던 것이다. 이 사건은 국민의 ‘보복’감정을 조금 누그러뜨리는 역할도 했을 것이다.

 

 

 

미국 주간 시사화보 LIFE 가 본 4.19 혁명

 

4.19를 보도한 1960년 5월 9일자 LIFE
4.19를 보도한 1960년 5월 9일자 LIFE

4.19 당시, 그러니까 1960년에 대한민국에는 신문을 제외한 변변한 ‘커다란 사진이 가득한’ 매체, 그러니까 ‘화보지’가 거의 없었다. 사진 처리를 위한 제작 비용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거의 모든 것이 읽거나 듣는 것이고 눈으로 보는 생생한 뉴스는 드물었던 것이다. 워낙 ‘못 살았던’ 때여서 TV 방송이 있었어도 TV자체가 너무나 드물어서 못 보던 시절, 미군을 통해서 흘러나온 TV로 간혹 미군 방송AFKN을 보거나 부산 같은 곳에서 일본 TV방송을 보는 것이 전부였던 찢어지게 가난하던 그 시절이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남은 4.19의 모습들은 위의 사진들을 보면 잘 알 수 있듯이 역시 ‘찌들리게 조잡한’ 신문의 조판사진이 전부였다.

하지만, 4.19의 생생한 모습들이 camera로 찍히고, movie film으로 기록들이 다행히 일본이나 미국으로 간 것들은 비교적 ‘고화질’로 남아 있었다. 그 중에서도 원래부터 ‘질이 좋은 사진’을 위한 시사화보로 유명했던 미국의 주간지 LIFE가 4.19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 4.19는 비록 세계 뉴스의 레이다 밑에 있었던 대한민국이었지만 비교적 자세히 보도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사논평의 주제로 올라가기도 했다. 그것을 여기에서 독자들에게 보이고 역사에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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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대한민국 최고의 권력자 가족들: 이승만, 프란체스카, 이강석, 이기붕, 박마리아… 이기붕 국회의장의 장남 이강석이 이승만의 양자가 되고, 이기붕은 부통령으로 당선.. 고령의 이승만의 유고 시에 그의 대통령직은 자명한 사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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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18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 농성 중인 용감한 고려대 형님들.. 이들의 에너지가 그 다음 날 4.19의 원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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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대를 진압하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경찰들.. 그때는 데모 진압 ‘전용’ 전투 경찰이란 것이 없었다. 그저 일반 경찰들이 모든 것을 담당해서 후의 전문 전투경찰 같은 테크닉은 없었다. 흥분을 가라앉힐 기술 없이 그저 두드려 패는 것이 전부였다. 또한 그들은 민주경찰이기 이전에 ‘반공 경찰’이어서, 빨갱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진압을 하면 살인적인 결과를 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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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부상을 입고 부축을 받으며 가는 사람은 학생인지, 민간인인지 확실치 않지만, 머리에 아주 큰 부상을 입은 듯.. 아마도 총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표정을 가지고 걸어가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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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불쌍한 어머님은 얼마나 어린 아들을 잃었을까? 이런 광경은 4.19 직후 이곳 저곳에서 많이 보고 들을 수 있는 정말 슬픈 모습들이었다. 특히 아들을 중요시했던 당시의 사회 관습이나 풍조를 감안한다면 희생자 가족, 부모들의 고통과 슬픔은 상상을 하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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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경찰들’이 계엄령 선포로 뒷전으로 사라지고 대한민국의 유일한 양심, 희망이었던 송요찬 장군의 계엄군 헌병이, 흥분한 어린 학생을 ‘정답게’ 제지하는 장면.. 이 학생들은 원흉으로 지목 되었던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의 저택을 습격하려는 중이었다. 이 헌병의 모습으로 보아서 군대는 완전히 민중의 편에 섰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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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참사’의 제1 원흉으로 지목되었던 이기붕 국회의장, 부통령 당선자의 저택이 격노한 데모대, 대부분 학생들에 의해서 습격을 당하고 완전히 파괴되었다. 나중에는 절도까지도 용납이 될 정도로 분위기는 험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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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아저씨들.. 우리 부모 형제들에게 총 뿌리를 대지 말라.. 고 외치는 초, 중,고교 학생들.. 특히 앞장을 서서 가며 힘차게 외쳐대는 국민학교 코흘리개 아이들의 모습, 특히 남루한 ‘구제품’ 옷들을 입은 모습들이 가슴을 찡~ 하게 만든다. 그들은 사실 나와 거의 같은 또래의 악동들이었다. 골목에서 뛰놀던 그들이 총탄으로 쓰러진 형님, 누나들을 보고 계엄군을 향해서 호소하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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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이 서서히 깃드는 거리, 당시의 시내 거리에는 차량의 숫자가 적었고, 특히 신호등의 숫자도 많지 않았다. 그런 곳은 교통경찰이 손수 교통정리를 했다. 그 경찰들이 사라진 거리에는 역시 학생, 민간인들이 자원해서 이렇게 힘차게 차량들을 정리했다. 이 형님, 아저씨는 지금 어떻게 살고 계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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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인천 상륙작전의 유엔군 총사령관이었던 미국의 맥아더 장군의 동사에 데모대들의 화환이 걸렸다. 우리는 절대로 빨갱이, 공산당이 아니라는 뜻과, 거의 중립적, 아니면 침묵으로 이승만 정권을 혐오하던 미국의 태도를 학생들과 일반인들도 느꼈을 것이다. 반공 하나로 버티던 이승만도 독재가 아닌 민주주의가 반공이상으로 중요함을 몰랐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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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폭도로 변한 철모르는 어린 학생들과 데모 군중은 어제까지 ‘우리들의 아버지’였던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을 쓰러뜨렸고, 그것도 모자라 목에다 밧줄을 걸어서 ‘분뇨차’에 끌고 다녔다. 이것은 당시의 정서로도 너무 심한 행동이었는데, 결국은 치욕을 당했던 동상은 다시 태극기에 덮여서 정중히 안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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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대권력의 ‘우리들의 아버지’ 이승만 ‘전’ 대통령, ‘국민이 원한다면..’의 구성진 대통령직 사퇴, 하야 성명 방송 후 그는 돈암동에 마련된 ‘이화장’ 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가 차를 타고 경무대를 나와서 이화장으로 갈 때, 사실 국민들은 박수로 그를 환송했다. 그것이 당시의 국민 정서였다. 비록 살인 경찰의 우두머리였지만 ‘우리의 아버지’임도 잊지를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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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이 이승만 정권의 사실상 총 사퇴로 이어지고 과도정부가 서서히 자리를 잡게 되었다. 제1인자로 허정 씨가 두각을 나타내고 제2 공화국으로 가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아.. 재동학교..

재동국민학교, 1959년 경

재동”초등”학교가 아니고 나에겐 분명히 재동”국민”학교다. 이름에도 정치, 역사가 있지만 나에겐 100% “초등”학교가 아니었고 분명히 “국민”학교였다. 서기 1954년부터 1960년 초까지 나는 이곳에서 대한민국 어린이의 꿈을 키웠다. 서기 1954년이라고 하지만 이것도 그때는 “단기” 4287년이었다. 그러니까 단기 4287년부터 4293년 초까지다.  참 오래전. 일이다.

온통 나의 어린 시절은 이곳을 중심으로 이야기들이 만들어 졌다. 서울의 심장부에 속하던 종로구에서 가회동과 계동의 옆과 위에 접한 꿈의 운동장. 이곳에서 얼마나 많이 순진한 꿈을 꾸며 뛰어 놀았던가? 여기서는 누구나 감상적이 되지 않을 수 가 없을 것이다.

 

취운정 활터에서 힘을 기르고

엣궁의 거문고로 마음을 닦던

빛나는 화랑정신 이어 나가자

우리는 재동학교 나라의 새싹

 

재동학교 교가  아마도 1~2학년 때 부터 이 ‘새’교가를 불렀지 않았을까? 누가 이 사실을 기억을 할까? 그 당시 이 ‘취운정’이란 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열심히 불렀다. 최근에서야 인터넷의 힘으로 옛날 옛적에, 언제인지는 잘 모르지만, 재동학교 근처에 있었던 고적지란 것을 알게 되었다.  재동학교 졸업 앨범을 보면 ‘윤성종’작사라고 보인다. 작곡은 ‘김성태’로 되어있다.  김성태라고 하면 물론 귀에 아주 익은 이름인데 윤성종은 전혀 무언가 떠오르지를 않는구나. 이 교가는 물론 아직도 100% 가사를 안 보고 부를 수 있다. 이것이 그 나이 또래의 기억력이다. 무서울 정도이지 않을까?

입학하기 전부터 생각이 나는 게, 그러니까 아마도 6.25동란이 끝나기 전인 듯싶다. 그때 나는 돈화문 (비원정문)근처의 원서동에서 아버지가 납북되시고 어머니, 누나와 같이 살았는데 재동학교에서 화재가 나서 전체 건물의 반이 불에 타 버린 것을 생생히 기억을 한다. 그 나이에는 불이 나면 우선 ‘경사’라도 난 듯이 그곳으로 뛰어 가지 않았던가? 그때 재동학교는 아마도 군인병원으로 임시로 씌어졌던 모양인데, 왜 불이 났는지는 확실치 않다. 혹시나 폭격이라도 당하지 않았을까?  그때 타버린 건물은 몇 년 뒤에 미군들의 도움으로 새 건물로 태어났고 동시에 나머지 건물들도 한층 씩 더 올려지게 되었다.  5학년 때 갑자기 모두 운동장에 나가서 ‘즐겁게 뛰어놀라’ 는 지시에 전 학년 생과 선생님들 모두 나와 그야 말로 뛰어놀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미군들이 와서 사진(그리고 아마도 영화도)을 찍고 있었다. 그때는 미군을 보는 게 참 즐거운 일 이었는데 (우리를 공산당으로 부터 구해준 십자군?) 그들이 사진을 찍으니 우리들은 더 신들린 듯이 뛰어 놀았다.

은사님들을 생각해 본다. 교장 선생님. 심원구 선생님이 거의 5년 동안 나의 교장선생님이셨다. 6학년 때에 지금 졸업앨범에 찍히신 윤형모교장 선생님께서 오셨다. 아마도 5학년 중에 부임을 하셨던 게 아닌가. 누군가 이것을 기억할 수 있다면. 5학년 때 인천으로 당일치기 수학여행을 갔을 때 사진에 심원구 선생님이 보이시니까 분명히 5학년 까지는 계셨던 것이다.  선생님들. 지금 모두 어떻게 지내실까. 혹시나 연로하셔서 타계나 인하셨을까? 이걸 어떻게 알아 볼 수 없을까?

1학년 때의 담임선생님 윤원범 (여자)선생님. 졸업앨범에 없다. 졸업 전에 떠나신 것이다. 그 옛날. 1학년 때.. 그때 나는 학교 가는 게 아주 싫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모두들 엄마의 손을 잡고 학교엘 오곤 했는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 그때 어머니는 이미 생활전선에 뛰어든 뒤였다. 옆집 친구 할머니의 손을 잡고 가곤 했다. 그 친구는 ‘안윤희’였다. 그런 중에 드디어 대형 사고를 쳤는데. 그만 학교를 안 간 것이다. 원서동에서 재동학교를 가려면 계동을 지나는데 거기에 대동상고가 있었다. 거기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다 집에 가곤 했다. 내가 “깡”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만큼 학교가 싫었던 게 아니었을까. 얼마나 그랬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우리 집의 주인아저씨가 (그때 우리는 세를 들어서 살았다) 나를 보았다고 했다. 들통이 나고 어머니는 장장문의 편지를 써서 나를 학교로 데리고 갔다. 그때 윤원범 선생님이 담임이었다.

아마도 윤 선생님이 나를 조금 더 자상하게 대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조금은 무뚝뚝한 여선생님. 한번은 연필을 가지고 가지 않았다고 나를 그냥 (다른 아이와 같이) 돌려보낸 적도 있었다. 그때는 담담히 받아 들였다. 나중에 생각하면 조금 내 자신이 불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머니가 그만큼 바쁜 탓도 있지만 우선은 나의 잘못이었다.  몇 년 후에 우리 집에서 일하던 아줌마(그때는 모두 식모라고 불렀다)가 알고 보니 그 윤원범 선생님의 집에서 머물며 밥을 해 주었다고 들었다. 참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 선생님은 그때 결혼 전이셨는데 그 후에 결혼을 하셨는지 알 길이 없다. 마지막을 뵌 건 2학년이 되자마자 교과서를 받으러 선생님을 교무실로 찾아간 때였다. 그때는 밝게 웃으시며 공부 잘하라고 격려를 해 주신 기억이다.

2학년으로 올라가며 선생님도 바뀌고 물론 친구들도 모두 바뀌었는데 나는 그때 너무도 놀라고 슬퍼서 집으로 걸어오는 길 내내 울었던 기억이다. 그 이후로 나는 학년이 바뀔 때쯤이면 필요이상의 stress를 느끼곤 했다. 나의 성격이 아마도 수줍고, 조용해서 남들보다 더 예민하게 받아 들였는지 모른다.  2학년 때 선생님의 이름을 기억을 못하는데 이것이 내가 유일하게 기억 못하는 선생님이 되었다. 얼굴은 생각이 난다. 유별나게 신경질 적인 여자 선생님.. 대나무로 만든 자로 손바닥을 아프게 맞았던 것도 쓰라린 기억이어서 아주 나쁜 기억이 되었다. 1,2학년 때는 사진도 없었다. 그때는 사진기도 흔치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씩 남는 법인데 그때는 아주 암흑의 학년이 된 것이다.

 

재동국민학교 3학년 학급사진, 1956년

3학년 때는 학급단체 사진이 아주 잘 남아 있다. 3학년의 담임 배은식 선생님. 앨범에도 남아있다. 참 다정스런 아줌마 타입의 선생님.. 학년이 올라 갈수록 사진은 많아 졌다. 하지만 불행히도 4학년 때는 없다. 왜 그랬을까?  4학년 담임 김경구 선생님. 미술이 전공인 담임. 항상 수염자국이 뚜렷한 남자 처음 남자 선생님. 물론 4학년부터 남자, 여자 반이 갈리었다. 모든 게. 우락부락하게만 느껴져서 나도 그곳에 적응을 할 수 밖에. 그때 처음 죽마고우중의 하나 안명성을 만났다. 같은 원서동에 살아서 죽마고우가 된 친구다.

4학년의 기억은 조금 고통스럽다고나 할까. 이 김경구 선생님은 좀 독특한 스타일로 가르치셨는데. 그중에 하나가 ‘공부한 시간표’라는 유별난 system을 고집하면서 1년 동안 우리를 괴롭혔다. 한 마디로 하루에 최소한 4시간 이상 집에서 공부 했다는 것을 증거로 부모님의 도장을 받아오는 것이었다. 그 나이에 하루에 집에서 4시간을 꼬박 공부를 할 수 있을까?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잘 이해가 안 가지만 모두들 ‘거짓도장’을 잘도 받아서 제출을 하였다. 항상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어머니 도장을 몰래 찍는다는 것은 그 나이에도 괴로운 일이었다. 그래도 어떤 아이들은 3시간 30분이라고 적어 오기도 했는데. 그게 정말로 3시간 30분을 공부 했는지. 아니면 양심의 가책으로 30분을 일부러 뺏는지. 아직도 불가사의다.  결과적으로 김경구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사회에 나가서 survive하는 예비 훈련을 시키신 셈이다.

 

5학년때, 인천 만국공원, 1일 수학여행, 1958년

5학년의 추억은 참 밝기만 하다. 담임은 이원의 선생님..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선생님은 ‘반 입시형’인 ‘미국식’ 선생님이라고나 할까? 교과서를 줄줄 외우는 스타일이 전혀 아니고 실습과 생활. 탈교과서적인 그런 쪽을 강조하신 선생님.. 그 당시는 아마도 학부형들에게 별로 호응을 못 얻으셨을 지도 모른다.  자연공부도 실습으로 하시고, 음악은 전공 선생님을 불러 오셨다. 여름방학 일기는 ‘일일 일선 (하루에 한 가지 좋은 일 하기)’ 을 주제로 삼으셨다. 그래서인지 외우는 것 같은 것은 거의 배운 기억이 없지만. 아직도 그 선생님의 스타일이 멋지기 느껴지는 것은 왜 그럴까? 그렇다. 그렇게 계속 가르치시면 절대로 우리들을 ‘좋은 학교’로 진학시키기 어렵다. 그래서 모든 게 균형이 맞아야 하는 것일까?

 

5학년말 교생실습후 단체사진

6학년은 5학년 때와 정 반대의 담임선생님이 오셨다. 학부모들은 아마도 ‘구세주’가 오셨다고 했을 듯하다.  새 6학년 담임은 박양신 선생님인데 바로 서울 안산국민학교에서 전근을 오셨다. 무언가 다르다고 모두들 짐작은 했는데 정말 공부시간이 되어보니 정말 완전히 이건 입시준비학원 style로 분위기가 변한 것이다.  학부형들은 완전히 무언가를 느꼈는지 치맛바람의 극치를 이루며 교실을 들락거렸다. 아주 학교에서 살다시피 하는 엄마들도 있었고, 공부시간에도 쉬는 시간만 되면 재빨리 들어와 선생님의 책상을 청소하거나 무언가 놓고 가거나 할 정도였다.

5학년 담임선생님 이원의 선생님도 6학년 다른 반의 담임이 되셨는데, 나의 짐작대로 절대로 입시준비를 하는 그런 style이 아니셨고 결과적으로 예상대로 아주 결과는 참담한 듯 했다. 결과란 것은 물론 일류 중학교 합격률을 뜻하는 것이다. 친구 안명성이 그 선생님의 반에 있었는데 항상 부정적으로 선생님을 평하였다. 과장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시간 ‘양호실’에 누워 계셨다고 했다. 그게 게으르다는 뜻인지 정말로 몸이 편찮으셨는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6학년의 추억은 아주 또렷하고 생생하다. 처음 겪는 ‘입시’공부였고 이 박양신 선생님은 요샛말로 ‘수험의 신‘ 이셨다. 좋게 말하면 많은 입시용 지식을 그 어린 머릿속에 아주 효과적으로 주입 시키셨다. 나쁘게 말하면 어린이의 꿈의 시간, 공간을 많이 빼앗아 갔다고나 할까. 사실을 말하면 그 중간 정도일 것이다. 한 가지 아주 인상적인 것은 가끔 수업을 ‘정규’시간에서 벗어나 저녁때 까지 연장을 해서 한 것이다. 그야말로 어두워서 책이 안보일 때 까지 하는 것이다. 전등을 킬 수가 없으니까 그런 것인데.. 사실 힘은 들었지만 무슨 캠핑을 간 듯한 기분도 들어서 한편으론 재미있기까지 하였다. 이런 모든 것들은 분명히 학부모들을 아주 만족시켰으리라 짐작을 해도 무리는 아닐 듯하다. 또한 다른 6학년 담임들의 선망과 질시를 받았다고 생각해도 무방할 듯.

그때 우연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우리 반에 정말 공부를 잘하는 녀석들이 많이도 모여 있었다. 하기야 반을 가를 때 완전히 random하게 할 터인데 우연이라고 봐야 할 듯 하지만, 우연치고는 참 선생님의 운도 좋았다.  지금도 생각나는 애들.. 이만재, 김두철, 정세종, 조성태, 이정택, 장정석, 전경훈, 이규재, 한윤석, 심동섭, 김정훈, 임한길, 신문영, 유성희, 김승종.. 사실 앨범을 보면서 이름을 떠올리지만.. 이들이 소위 말해서 1분단의 member들인데.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제일 공부를 잘하는 애들 그룹이다. 나도 나중에는 그 그룹에 들어가는 ‘영광’을 누리긴 했다.

이들은 입시에서 거의 경기, 서울, 경복, 용산으로 이루어지는 1류 공립중학에 들어갔다. 하지만 자세히 누가 어디에 갔는지는 아직도 확실치 않다. 분명한 것은. 이만재, 김두철, 김정훈은 경기였고, 심동섭은 경복이라는 사실뿐이다. 아직도 궁금한 것은 신문영[나중에 경복중에 간 것을 알았다]과 이규재.. 인데. 알 길이 없다. 이규재는 나의 짝이었고.. 신문영은 내가 혼자 그냥 좋아하던 애였다. 이만재는 나중에 Internet을 통해서 숙명여대 교수인 것과 전자/컴퓨터전공이란 것을 알았다. 신문영은 내가 연세대학에 다닐 때 잠깐 본 듯한데 말을 걸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김두철은 서울공대 입학시험을 볼 때 멀리서 보았는데 아마도 그의 경기고 후배 응원 차 나온듯한 모습이었다.

우리 6학년 1반, 박양신 “사단”의 system중에 독특한 것은 가차 없는 경쟁유도체제 이었다. 그것은 거의 매일 치르는 모의고사의 성적에 의해서 앉는 자리, 그러니까 분단의 위치가 바뀌는 것이다.  그 당시는 그게 적응이 되어서 몰랐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면 참으로 잔인한 것이었다. 아마도 다른 어느 반에도 그런 것은 없었을 듯하다.  ‘공부 잘하는’ 1 분단으로 올라가려면 죽어라 시험을 잘 보아야 했다. 1분단에 올라갔으면 떨어지지 않으려고 또 죽어라 공부를 해야 했다.  그러데 이상한 것은 그다지 생각만큼 자리가 쉽게 바뀌지를 않았다. 그만큼 성적의 순위가 바뀌기가 어렵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니까 공부 잘하는 애들은 거의 항상 잘했고 못하는 애들은 거의 항상 못한 셈이다.

나는 6학년에 들어오면서 어머니가 신경을 많이 쓰셨다. 이제까지는 그다지 성적에 집착을 안 하셨는데 학기가 조금 지나면서 선생님을 만나고 오시더니 한숨 투성 이었다. 물론 나의 성적이 아주 안 좋다는 얘기였다. 1분단은 꿈에도 못 꾸는 처지였다. 그러더니 어느 날 한 고등학생을 데리고 들어오셨는데. 알고 보니 가정교사인 셈이었다. 그 당시는 대학생보다 고등학생들이 과외선생을 많이 했다. 특히 경기고 같으면 더 많이 했을 것이다. 김용기라는 경기고 2년생이었다.

그러니까 그 때 부터 나는 학교에서도 공부, 집에 와서도 공부하는 신세가 되었는데,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다. 공부도 점점 재미가 있어졌고 따라서 학교성적도 오르기 시작했다. 결국에는 곧 대망의 1분단으로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부터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stress가 나를 괴롭혔다.  그래도 졸업 할 때까지 다행히 1분단을 고수를 할 수는 있었다.

또 한 가지 잊혀 지지 않는 것. 이것도 다른 반에선 없던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1분단의 반대편에 있는 제일 쳐지는 분단 애들이 있다. 성적순으로 제일 밑인 셈이다. 그들의 심정이야 이해를 하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제일 기억에. 그것도 좋은, 즐거운 기억으로 남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애들은 비록 공부는 힘들었어도 유머와 여유가 있었다. 쉬는 시간만 되면 그들은 group으로 앞에 나가서 코미디를 하거나 유행가를 합창으로 부르곤 했다. 거의  pro의 수준이었다. 그게 그당시 그렇게 즐겁고 재미있었다. 그 애들은 입시공부도 거의 포기한 듯한 모습들이었는데도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그들은 지금 다 무엇을 하는고..

보고싶다, 친구야.. 정문신
보고싶다, 친구야.. 정문신

졸업하면서 거의 영원히 소식들이 끊어진 친구들.. 여기서 몇몇을 회상하고 싶다. 정문신. 정문신. 아 잊을 수 없다. 내가 1분단으로 이사하기 전에 짝을 하던 친구다. 짝이라 친했는지는 모르지만 이상하게 그 애가 그렇게 나는 좋았다. 아주 이상할 정도로 좋았다. 그 애가 나를 좋아하는 정도보다 훨씬 내가 더 좋아했다. 여름방학이 되면서 나는 그 애가 그렇게 보고 싶었다. 이건 내가 생각해도 이상할 노릇이었다. 오죽하면 여름방학이 빨리 끝나기를 기다렸을까? 그 나이에 동성애였나? 우습기만 하다. 졸업을 하고서 다른 친구 김천일이 그 애 사는 곳을 안다고 해서 솔깃했는데. 그대로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정문신. 어디선가 살아 있다면 그때 내가 그렇게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아주기 바란다.

그 당시에 이승만 정권에 식상한 국민의 여론이 서서히 야당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리고 정치바람이 학교까지 들이 닥쳤다. 그 당시에 우리들은 별로 잘 이해를 못했지만 무언가 크게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긴 했다. 하긴 우리나이 또래면 북한(그때는 북괴라고 했다)에 못지않게 이승만대통령을 거의 영웅처럼 생각했다. 그렇게 교육을 시켰다. 반공, 반일로 일관된 교육 속에서 우리들은 자랐다.

그런데 아마도 정부에서 우리또래 학생들에게도 선거운동을 시킨 모양이었다. 우리들은 선거권은 비록 없지만 아마도 부모를 설득하도록 한 것이나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선생님들을 시켜서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지금도 나는 실망을 금치 못한다. 우리 입시의 아니 수험의 신이신 박양신 선생님은 자발적으로 우리를 설득했다.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여당은 좋은 사람들이고 야당은 나쁜 사람들이라고.. 비록 선생님은 경기, 서울, 경복에 많이 입학은 시키셨어도 진짜 교육은 못하셨다고 이제껏 확신을 한다.

이렇게 졸업은 해서 재동학교는 떠났지만 그 후 3년 동안 몸은 떠나지 않았다. 집이 바로 재동학교 후문 옆에 있었기 때문에 중학교 3년 다닐 때 까지 옆에서 보며, 야구를 할 때면 운동장을 빌려 놀곤 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온통 재동학교가 꽉 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다행인 것은 그 많은 역사 깊은 국민학교들이 문을 닫거나 이사를 가거나 했다지만 우리 재동학교는 아직도 같은 위치에 건재하다고 들었다. 얼마나 다행인가. 그야말로 모교. 나의 어머니격이다. 그게 아직도 건재하다니.. 부디 오래 오래 더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희망도 해 본다.

 

재동국민학교 졸업앨범 1960

 

만화에 얽힌 추억들…

아! 만화. 내가 기억 하고 싶은 것들은  manga, cartoons, comics가 절대로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 들은 구체적으로 한국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초반에 관한 것 들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 당시 거의 광적인 한국만화의 “소비자” 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만화에 얽힌 추억들은 지금 생각해도 100% 다 즐겁고 유쾌한 그런 것들이다. 이런 추억들은 거의 10년 전만 해도 정확하게 기억을 했는데 최근에 많은 부분들이 희미하게 느껴짐에 더 늦기 전에 기억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만화 기억은 아마도 6.25 휴전 전인, 그러니까 1952~3년경 서울 원서동에 살 때 미군들이 보던 미국 만화들 이다. 그게 Walt Disney의 초창기 작품 일듯 한데, 아마도 Donald Duck인 것 같다. 문제는 어린 나이에 나는 그것을 보고 너무나 무서워해서 꿈에도 나타나고 그런 것 들이었다. 별로 기분 좋은 추억은 아니다.  진짜 좋아 하게 된 만화의 추억은 역시 국민학교에 들어가면서 나오기 시작한 만화잡지 류, 그중에서도 만화세계와 만화학생이라는 월간지였다. 그 나이에 맞는 수준으로 연재만화와 연재소설 등이 재미있게 실렸는데 매월 목이 빠지게 기다린 기억이다.

그 월간지에서 기억이 난다면 “엄마 찾아 삼만 리” 라는 김종래 화백의 작품이 있었다. 어린이에 맞는 대하소설인 셈이다. 아직 이 나이에도 그 줄거리가 생생할 정도로 재미도 있었고 인상적 이었다. 또 다른 classic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김근배 만화가 작품인 “멍청이“였다. 아마도 멍청이란 말이 유행어에서 표준어로 굳은 게 이 만화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까 아마도 6.25가 끝나고 처음은 이렇게 만화잡지로 만화계가 출발을 한 듯싶다. 그 전에 그러니까 6.25전에는 어땠는지 전혀 idea가 없다.  그 만화세계, 만화학생지에서 또 다른 만화가는 “박기당“, “박현석” 선생님이 생각난다. 그러니까 김종래, 박기당, 김근배 박현석 제 화백들 모두 전혀 다른 story line에다가 아주 다른 만화 style을 가지고 있었다.

만화출판계는 서서히 만화 Series로 전환을 하여 지금의 연속극처럼 만화가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위의 만화가 선생님들도 각각 단행본 series를 그리기 시작을 하였다. 이 시기가 나에게 “만화천국”의 시작이었다. 왜냐하면 만화만 볼 수 있는 만화 전용가게(만화방)가 학교 문 근처에 생기기 시작했는데, 이곳에서 많은 여가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  신발을 벗고 방에 들어가 앉아서 보는데 나올 때 보면 신발이 없어지는 때가 종종 있었다. 그때는 TV가 없었던 시절이어서 우리 나이 또래들은 운동 (특히 야구)다음으로 즐거움 이었다.  그 때 이후로 만화계는 서서히 순정물에서 과학물 (Science Fiction: SF)  그리고 역사물로 분야가 넓어져 갔다.

나는 지금 생각해 보면 만화가 어떨 때는 교과서보다 더 좋은 교과서 역할을 한 듯하다. 그 만큼 많이 배웠다. 특히 역사 중에 국사는 만화의 역할이 눈부셨다. 그 딱딱하고 재미없게 씌어진 국사책 보다 만화가 훨씬 도움을 주었다. Timing이 아주 좋아서 국민학교 6학년 때 그러니까 1959년경 중학교입시 공부하는데 아주 많은 만화가 삼국시대를 다룬 게 많이 나왔는데 아주 도움을 많이 받았다. 만화가 선생님들의 이름은 희미하나 너무나도 고마운 분들이었다.  그때 나는 거의 완벽하게 한국사의 흐름을 만화로 정확히 ‘감’을 잡은 셈이다.

세계사에 관하여, 특히 일본침략과 관련된 2차대전에 관한 만화책들도 있었는데 생각나는 것 중에서 왕현 화백의 만화가 단연 으뜸이었다. 그분의 만화에서 처음으로 가미가제특공대 이야기. “야마도”라는 세계제일의 전함, 히로시마원폭. 등등 모든 걸 그림으로 즐길 수 있었다. 그때 일본말도 많이 보게 되었는데 주로 군인들의 용어였으리라. “도쯔께끼”, “우데, 우데”, “칙쇼”, “곤노야로”. 등등 기억이 난다.  그 “왕현”이라는 만화가는 지금도 사실 거의 전설적인 존재로 느껴진다. 몇 편 안 되는 작품인데 정말로 명작 이었다. 그분의 과학공상물로 “저별을 쏘라” 라는 게 있었는데. 이게 정말 얼마나 걸작 이었는지. 그림도 그림이고 그 story 또한 정말 최고였다.

위에 기억한 만화들 모두 아직도 인상적 이었지만 그래도 산호 화백의 “라이파이“는 그 중에서도 제일 기억에 남는 걸작 중 걸작이었다. 국민학교 6학년에 첫 권이 나오기 시작해서 내가 거의 중학교 2학년 때 까지 나왔으니 이거야 말로 대하 중 대하 만화였다.  이분의 만화 스타일은 사실 그때까지의 모든 것들과 조금은 ‘차원’이 달랐다. 거의 몇 단계를 뛰어 넘었다고나 할까.  그 당시 과학, 기술을 꿈꾸던 소년들은 아마도 이곳에서 최고의 기쁨을 맛보았을 것이다. 나도 그 중에 하나였다.  미래지향적인 기술과 함께 과거의 무기들 (칼, 창 같은)이 함께 등장하는 그야 말로 시공을 초월하는 그런 이야기들. 꿈에서도 꿈을 꾸는 그런 정도로 황홀한 이야기들로 그 시절을 보냈다.

몇 년 전에 친구 양건주가 이 라이파이의 저자 “산호”화백을 만나서 다시 발행된 라이파이 복제본에 사인을 직접 받아서 보내 주었다. 그때의 감격은 아직도 못 잊는다. 그 때 신문과 Internet에서 우리 또래들이 다시 라이파이 동호회를 만들어서 모였다는 얘기도 듣게 되었다. 사실 어릴 적 라이파이를 볼 때는 얼마나 많은 독자가 있었는지는 잘 몰랐는데 알고 보니 전국적 이었던 것 같았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공계에 심취된 상태였지만 어떤 라이파이 독자는 이 만화로 이공계에 관심을 갖게 되고 나중에 그길로 가서 크게 성공을 했다고 한다. 이게 만화의 위력이었다.

나는 사실 이 라이파이에 심취가 되어서 한때 산호 선생과 같은 만화가가 되려고 했다. 물론 그 어린 나이의 생각이었지만 그 당시는 사실 심각했고 실제로 모방을 해서 만화를 그리기도 했다. 산호선생에게 편지를 계속 보내서 편지로나마 지도를 받기도 했다. 많이 그렸는데 모두 없어지고 현재 한권이 살아남아있다. 그것은 현재 우리 집의 보물로 취급이 된다. 제목은 ‘민족의 비극’이란 것인데 역시 2차대전에 관한 군인들의 이야기이다. 지금 보아도 거의 산호선생의 만화스타일을 그대로 모방한 것들이었다.

나중에 커서 어떤 분들이 만화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나는 그때는 꼭 반박을 하곤 했다. 내가 산 증인이라고.. 적절히 골라서 보게 되면 교과서 보다 훨씬 낫다고. 나와 같은 경험을 하며 자란 우리 세대들.. 나화 같은 경험을 한 분들이 나 말고 또 있을까. 참으로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