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upid (YouTube) ‘copyright police’ bot

얼마 전에 정말 오래된  vinyl LP record 중에서 통기타 시절 김세환 album을 digital format (mp3)으로 바꾸었다. 과정이 아주 힘든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은 귀찮은 job에 속한다. 이 특별한 LP record는 1975년경에 Chicago에서 산 것으로 아마 1974년경에 발표된 것으로, 김세환 특유의 ‘감미로운‘ 곡들이 실려있었다. 1970년대 후반에 자주 들었지만 Cassette tape, CD등이 나오면서 눈앞에서 거의 사라졌다가, 1990년 초에 새로 audio system을 장만하면서 큰 마음 먹고 ‘한동안 없어졌던’ LP disc turntable을 다시 사게 되었고, 그 이후로는 가끔 이LP를 듣게 되었다. 문제는 그 turntable이 좋은 것이 아니어서 (너무나 fragile, 장난감 수준의 제품) LP disc를 걸 때마다 손이 떨릴 정도로 조심을 해야 했다는 것이었다.

세월이 지나가고, 음악 듣는 방식도 많이 바뀌어서 ‘거창한’ audio system앞에서 듣는 것도 사치로 보이게 되었다. 거의 주로 desktop pc아니면 mp3 player, smartphone으로 듣게 된 것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보물처럼 간직했던 그 많은 LP record들을 digital format으로 바꾸어야 했는데, 나 같은 older generation을 의식했는지 이제는 시장에 LP record를 ‘직통으로’ mp3로 바꾸어주는 ‘smart-turntable’이 등장을 하고, high school student들이 이것으로 돈까지 벌기도 한다.

내가 택한 방식은 의외로 간단했다. 지금은 값이 많이 떨어진 personal voice recorder를 쓰는 것이다. 요새 것들은 audio recording을 곧바로 mp3 format으로 flash card에 save를 해 주기 때문에 이 방식은 거의 ‘직통’ 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오래된 analog audio, music (on cassette tape, LP record, VHS tape etc)들이 하나 둘씩 mp3 audio로 바뀌면서 제 1호가 ‘오래 된’ 조동진 album audio tape, 제 2호가 위에 언급된 김세환의 LP album 인데, 요새의 standard video cloud 의 대명사가 된 YouTube에 이것들을 upload해서 Internet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도 의외로운 복병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저작권(copyright)문제인데, 40년 전의 analog music을 digitize한 것이 저작권 침해라고 생각해 본적은 한번도 없었다. 문화적 유산을 보존한 것으로 상을 받아야 할 지경이 아닐까? 제일 웃기는 것은 이것이다. 김세환 앨범에 Bee Gees의 word란 곡을 한국어로 바꾸어 부른 것이 있었다. 그 위력을 자랑하는 Google의 database 속에서 그 곡이 ‘걸려들고’ 말았다.

저작권이 ‘영국’의 어느 단체에 있다는 것이다. Bee Gees의 word를 digital format으로 그냥 올려 놓았으면 할 말이 없겠지만 그 당시(1974) 국제문화계에서 거의 ‘거지취급’을 받던(dollar 보유고가 없어서) 한국의 ‘학생가수’가 부른 곡을 40년 뒤에 mp3로 바꾸어서 인터넷에서 다시 듣겠다는데 ‘저작권 침해’라고? 웃기지 마라.. 이것은 물론 ‘사람이’ 개입이 된 것이 아니고 monster같은 YouTube의 ‘감시경찰 bot’ 이란 software가 ‘실수’를 한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이 system은 보통의 사법system처럼 ‘Innocent until proven guilty’ 가 아니고 ‘Guilty until proven innocent‘ 인 것이다. 우선 ‘죄인’으로 취급하고, 억울하면 무죄를 밝히라는 것.. 참.. 웃기는 세상이다.

 

 
김세환 Gold, 1974

 

 
조동진 47 minute classics

‘용가리 통뼈’의 추억

대괴수 용가리, 1967
영화 <대괴수 용가리>, 1967

얼마 전에   ‘옛 한국고전영화’ (redundant , 옛 과 고전은 거의 같으니까)를 접하게 되면서, 그런 것들이 어느새 ‘옛, 고전’이 되었을까 하는 세월의 횡포를 생각하게 되었다. 분명히 현재 살아서 숨쉬는 우리들의 것들이 ‘화석, 고생대, 공룡‘등과 연관이 되어가고 있는가? 이것이야말로 내가 말하는 ‘세월의 횡포’ 란 것이다.

그 중에서도 ‘대괴수 용가리‘란 ‘우리의 영화’를 보면서 더욱 그런 느낌을 받았다. 이 용가리란 단어를 보면서 희미한 느낌에 ‘분명히 이것은 나의 대학시절’의 것이라는 생각이 났다. 하지만 100% 자신은 없었다. 그 영화를 잘 알고 있었지만, 나는 본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함께 떠오른 ‘강한 단어’가 있었다. 바로 ‘통뼈’ 였다. 그러니까 ‘용가리 통뼈‘ 인 것이다. 그것이 언제였던가?

와~ 맞다 용가리 통뼈.. 그것이 처음 유행하던 당시, 참 많이 그 말을 썼다. 내가 그 말을 좋아하며 쓴 기억은 없지만 분명한 것은 나의 친구 중에 한 명이 유난히도 그 말을 좋아하며, 잘도 썼다. 그 친구는 바로 나의 죽마고우, 중앙중,고교, 연세 대학, 전기과 동창, 요델 산악회 산악인 박창희 였다.

사실 나는 ‘영화 용가리’보다는 박창희가 ‘가르쳐’ 준, ‘용가리 통뼈’를 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셈이다. 그 뜻은 물론 그 어감이 나타내듯이, 바보스럽게 겁이 없는 그런 사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당시에 그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꽤 많던 시절이었으니, 그 말은 참 잘도 쓰였고, 들을 수 있었다. 물론 나나 우리들은 그런 류의 ‘통뼈 류 인간’들과는 거리가 먼 쪽에 속했다.

기억이 그 정도에서 멈추고, 확실히 그 영화가 나온 것이 언제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이럴 때, Googling은 역시 powerful한 것이지만, 이 정도로 ‘오래된’ 것은 역시 무리인가.. 예상을 비껴가서, 딱 한가지 자료만 찾았고, 그것도 그 당시를 ‘전혀 모르는 듯’한 사람의 ‘해괴한 변증’ 속에 파묻혀 있었다. 부산영화제 site에 실렸던 한가지 글, 그것이 바로 박성찬이란 ‘시민평론가’가 쓴 ‘<대괴수 용가리>: 한국괴수 영화의 고생대지층‘ 이란 요란한 제목의 글이다.

주증녀, 젊었던 시절의 이순재
주증녀, 젊었던 시절의 이순재

시민평론가치고는 꽤 이론적임을 보이려는 노력이 뚜렷한 이 글에서, 내가 필요한 것을 찾았다. 우선 이 영화는 1967년에 방영이 된 것이고, 감독 ‘김기덕‘, 주연 진에는 당시 간판 여배우 남정임, TV 쪽에 더 알려진 이순재, 조연 쪽으로는 약방의 감초, 원로격 김동원, 주증녀, 정민.. 그런데 이순재의 신혼부인으로 등장하는 여자배우.. 그녀는 누구일까, 낯이 그렇게 설지 않지만 그렇다고 ‘유명한’ 정도는 아니었다.

1967년이면, 사실 우리 영화는 신영균, 신성일, 엄앵란, 문희 등의 고정된 ‘간판급’ 얼굴의 시대였고, 거의 모두 ‘순정 멜러 드라마’ 였던 시대였는데, 이런 ‘과학공상, SF’ 영화는 아마도 처음이 아니었을까? 내가 그 당시 국민학교, 중학교 정도의 나이였으면 물론 100% 열광을 하면서 보았을 것이지만 이마 그 당신에 나는 조금은 ‘탈 공상’ 적인 대학생이었다.

현해탄을 건너오는 소식에서 일본에서는 이런 류의 영화가 열광적으로 성공하고 있다고 듣긴 들었다. <고지라> 같은 영화가 그런 것인데, 이런 류의 ‘일본 공룡’ 영화는 유치하면서도 재미가 있어서 미국에서도 이것에 완전히 빠진 사람들이 꽤 많고, 이제는 이것으로 돈을 버는 business도 있다고 들었다.

간신히 찾은 이 영화를 보니 모두 말이 영어로 되어있다. 그러니까 English dubbing이 된 것이다. 사연인즉, 역시 ‘원판’이 없어지고 ‘수출용’이 살아 남은 요새 흔히 듣는 case 중에 하나다. 1967년이 이제는 정말 ‘고생대’ 층이 된 씁쓸한 느낌을 받는다. 배우들의 연기는 사실, 지금 보아도 그렇게 어색하지 않다. 그 만큼 연기를 잘 했다는 뜻일지도.. 문제는 역시 그 당시 ‘기술적인 수준’인데, 이것은 어쩔 수 없지 않을까? 암만 ‘장난감 set’를 해도 그 당시의 수준은 어쩔 수 없었지 않을까? 일본 영화 고지라를 지금 보면 그 들도 역시 그 한계에서 맴돌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제 그 ‘시민 평론가’ 의 말을 조금 들어보면, 알게 모르게 이 평론가는 ‘영화 이론 평론가답게‘ 쓰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지만, 어떤 것들은 too much stretching, overreaching 한 것들도 있다. 영화의 original이 없어진 것이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의 식민지와 미국 문화의 침투 속에 우리 것을 다 잃어버린 우리의 자화상과 너무나 닮아..‘ 와 같은 논리로 비약을 한다. 하지만, ‘우주, 과학, 과학도’ 적인 자세가 당시에 우리나라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암시적인 영화의 효과는 그 당시를 겪어본 나에게는 충분히 공감이 가는 분석이다.

하지만, 3대의 ‘정상적인 부부‘의 등장을 분석하며, 이런 것들은 ‘기득층: 가부장적 부르주아의 과잉억압에서 억눌린 부류: 여성, 동성애, 신체기형자 등등이 종종 괴물로 등장하고, ‘정상 부류’가 ‘비정상 부류’를 물리친다‘는 ‘영화학자 로빈 우드’의 말을 인용한 것은 조금 ‘웃기는 비약‘인 듯하다. 이런 표현은 어떨까.. “여보세요, 지금 용가리 통뼈가 한강 다리를 들어내고 있는데.. 기득층, 피해층이 어디에 있단 말이요?” 이런 것은 정말 ‘이론을 위한 이론의 전개’의 대표적인 case일 듯하다.

더욱 웃기는 것은, 용가리와 어린이 ‘영이 (남자 아이)’ 가 아리랑 트위스트를 추는 장면에서 ‘남북의 이상한 평화’가 찾아오고, 더 나아가서 이런 ‘전통’은 나중에 <남부군>에서 적군과 같이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부르는 것, <공동 경비 구역: JSA>에서 남북한 두 병사들이 얼싸안고 김광석의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과장중의 과장은 정말 ‘압권 중의 압권‘ 일 듯. 이런 ‘이론’을 다 잊고 나는 나의 황금기 전야였던 1967년으로 돌아가서 박창희의 ‘용가리 통뼈’ 론.. 확전(escalation)으로 치닫던 월남전, 뿌연 공해먼지 속에도 힘찬 대도시로 탈바꿈하던 ‘강북’ 서울의 모습들, 미니 스커트의 여대생으로 가득 찼던 우리들의 보금 자리 다방 구석에서 꽁초까지 빨아대며 들여 마셨던 신탄지 담배 연기를 생각하고 싶다.

 

12/12/79, 눈발 날리는 백양로, 1968

2012년 12월 12일도 어제로 지나갔다. 12/12/12로 ‘난리’를 치는 사람들.. 참 부럽다. 단순한 부류의 사람들일까, 아니면 참 한가한 사람들일까 생각도 나지만, 12가 세 번씩이나 겹치는 것보다는 각자의 일생에서 드물게, 아니면 다시는 못 볼 숫자이기에 그럴 것 같다. 우선 13/13/13은 아예 불가능 할 것이고, month의 숫자와 맞는 햇수라면.. 2101년이 되어야 01/01/01 라는 숫자 놀음이 가능한 것이다.그러니까 간단히 말하면 2012년에서 2101년까지의 공백이 생기고.. 앞으로 89년을 더 살아야 그것을 보는 것이다. 현재의 ‘피상적인 의학’의 발달을 감안 한다면 아마도 지금의 20대나 30대 정도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나로써는 정말 오랜만에 ‘백일몽’같은 생각과 망상을 해 보았지만, 역시 이것도 인간이 겪는 유한성, 잠깐 왔다가 가는 어찌 보면 슬프기도 한 ‘피조물’의 신세를 실감케 한다. 하지만, 요새 내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느끼는 것은, 모든 것이 생각하기에 달렸고, 인간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선물’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발전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이 아닐까?

매년 12월 12일이 되면 연숙과 빠짐없이 한가지 얘기를 나누며 웃는다. 1979년 서울의 12월 12일을 서로 회상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그날 밤에 박대통령 시해사건을 빌미로 전두환이 무혈 쿠데타를 하던 날이었다. 그들이 한강 다리를 건너오기 바로 전에 우리 둘은 김포공항에서 연숙의 지도교수 김숙희 교수를 만나 인사를 하고 밖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도 모른 채, 유유히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다음날 그 쿠데타 소식을 알게 된 것이다.

기억을 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날 저녁 김포공항으로 둘이 걸어 들어가는데, 처음으로 연숙의 손을 잡은, 그것을 회상하고 싶은 것이다. 비록 결혼 약속은 얼마 전에 했지만 손을 잡는 것은 ‘큰 사건’이었다. 더욱 재미있었던 사실은 그날 날씨가 매섭게 추웠고 바람이 심하게 불던 날이라서 손목을 잡힌 연숙은 너무나 ‘고생’을 했다고 한 사실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해맑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그날 12/12가 남았다.

 

요사이 나의 workstation  pc desktop의 모습

요사이 나의 workstation pc desktop screen, New York Central Park

오늘 아침에 나의 workstation kvm virtual pc의 desktop background art를 보니, 이것은 거의 흑백으로 눈에 덮인 뉴욕 city, Central Park 의 모습이었다. 이것으로 바뀐 것이 한 달도 채 안되지만, 이것을 보면서 계속 머리에 떠오르는 ‘영상’이 있었다. 물론 아름답게 기억되는 광경이고, 그것도 역시 흑백의 영상이었다. 그곳은 바로 연세대의 상징인 백양로.. 그곳이 완전히 눈 속에 쌓이고 있던 그 광경이었다. 나의 기억력을 시험하려 나는 그때가 구체적으로 언제인가 계속 생각해 본다.

1967년 겨울 아니면 1968년 겨울이었다. 그때는 겨울 방학 때였고, 성탄이 훨씬 지난 때였다. 그러니까 1월 쯤이었을 것이다. 한낮에 함박눈이 그야말로 ‘펄~펄’ 내리던 날, 시커먼 공해로 그다지 깨끗하지 않았던 그 당시의 서울거리가 순식간에 깨끗해지는 그런 날, 어찌 나와 같이 한가한 사람들이 집의 안방에 앉아있겠는가? 지독히도 한가했던 대학시절의 겨울방학의 ‘누에고치’ 속에서 나는 눈 덮인 거리로 뛰쳐나갔다.

그때 상도동 버스 종점에 살던 나는 ‘portable’ FM radio를 들고 나갔고 시내 버스 <상도동-모래내 >를 타고 연세대로 갔다. 왜 그곳에 갔는지.. 하기야 그 당시 잠깐 갈 곳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연대 앞 굴다리 앞에서 내려서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을 맞으며 백양로를 따라 걸어 들어갔다. 손에는 작지도 않았던 ‘소형’ 금성 FM radio를 들고, 신나게 pop song을 들으면서.. 눈 속에서 기가 막히게 조용하고 아름답게 보이던 연세대 백양로.. 이제 시간적인 단서가 잡힌다. 그것은 1968년 한겨울 방학 중, 1월 쯤이었을 것이다.

나의 서재에 보이는 금성 FM radio, 신탄진 담배와 SPAM can 재털이
나의 서재, 금성 FM radio, 신탄진 담배, SPAM can 재털이 1968

그 당시의 timeline을 확실히 잡아주는 유일한 것이 바로 사진인데, 바로 여기에 보이는 사진, 나의 책상에 놓여있는 새로 산 금성 FM radio, 이것을 찍었던 때가 1968년 3월 경. 1967년 성탄 때에 어머니께서 선물로 사주신 그 당시에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나왔던 FM radio였다.

그 당시에 들을 수 있었던 FM 방송은 딱 한군데였지만 물론 미8군의 FM 방송은 그 훨씬 전부터 있었다. 잡음이 많았던 AM 방송에 비해서 FM방송은 정말 음이 깨끗해서 대부분 classical 쪽의 음악을 방송하곤 했다. 이후에 이 radio는 장기간 등산을 갈 때마다 가지고 가서 사진에도 몇 군데 남아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1969년 여름에 요델 산악회 친구 박창희와 갔던 소백산, 그때의 사진에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당시의 대한민국의 수준은 그렇게 간단하게 보였던 FM radio를 ‘간신히’ 만들고, 커다란 업적을 이룬 ‘금자탑’으로 소개하던 때였다. 일제를 배척하던 것이 애국이었던 당시에 그나마 ‘국산’으로 그렇게 깨끗한 음악을 들을 수 있었던 때, 그것을 들고 함박눈을 맞으며 연세대 백양로를 따라 걸으며 ‘백일몽’을 꾸던 그 죄 없던 시절이 왜 이다지도 그리울까.. 육신적으로 다시는 못 겪을 일이지만, 기억이라는 선물이 있는 한 그런대로 괜찮지 않을까?

 

금성 FM radio를 듣고 있는 박창희, 1969년 소백산

금성 FM radio를 듣고 있는 박창희, 1969년 소백산

내가 친구들과 마지막으로 본 백양로, 1973년 6월

내가 친구들과 마지막으로 본 백양로, 1973년 6월
이종원, 이경우, 이경증, 윤인송, 이진섭, 김호룡, 신창근

 

Postscript: 나의 머릿속의 기억을 뛰어 넘어서 그 당시의 서울 일간지를 인터넷으로 찾으면 아마도 그 함박눈이 내렸던 날짜까지 확실히 알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도 한가함을 달래주는 좋은 project가 아닐까.

 

 
그 당시에 듣던 golden oldie, Ruby Tuesday by the Rolling Stones, 1967

 

인생은 Given Way (?)

서서히 물러가는 2012년, 올해에 기억에 남는 큰 일은 무엇이 있을까? 아마도 1965년 초에 나를 가르쳤던 ‘아르바이트’ 대학생 김인호 형의 소식을 알게 된 것이 그중에 하나가 아닐까?

다시 연락이 된 경위는 의외로 간단했다. 내가 먼저 1960년 중반 때의 서울 일간지를 훑어 보다가 (물론 인터넷으로) 영화 광고를 보게 되었는데 그 영화의 제목이 <젊음이 밤을 지날 때>, 거기서 ‘박계형’ 이란 이름을 보게 되었다. 불현듯 스치는 것이.. 나를 가르쳤던 아르바이트 대학생의 ‘애인’이 바로 그 당시 베스트셀러 소설의 ‘대학생 저자’ 박계형 이었던 것이 기억이 난 것이었다. 그 때까지 나는 그 ‘박계형’이란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의 blog에 내가 기억하던 아르바이트 “서울고, 서울상대” 대학생 김인호 형을 회상하게 된 것인데 그것을 정말 정말 ‘우연히’ 인호형이 보게 된 것이다. 정말 모든 것들이 우연의 연속이었다. 이것까지 필연 이라고 우기고 싶지는 않지만, 누가 알랴. 이 세상 삼라만상의 모든 것들은 어딘가 서로 연관이 되어 있다고 하지 않는가?

서로 email을 교환 하면서 형이 보내 준 이미 공개된 ‘글’이 하나 있었다. 아마도 서울 상대 동창회지에 실렸던 글 같았다. 서울 상대에 입학하게 된 동기나 경위도 있었지만 그 이후로 인생의 여정이 정말로 ‘웅장하게’ 압축 된 글이었다.

이미 공개된 글이라서 다시 공개하는 것은 큰 문제가 없겠지만, 혹시 해서 나의 blog에 전재를 해도 좋겠냐고 물어 보았는데.. 답을 얻지 못하고 말았다. 하지만 글이 너무 솔직한 인생의 고백록 같아서 나는 ‘무엄 하게도’ 이렇게 공개하기로 했다.

 

 

+ Deo Gratias

 

인생은 Given Way (?)

 

 

김 인 호 (서울상대 상학과 19회)
한양대 명예교수 (경영학)

입학 50주년이라니 문득 서울상대를 지원하게 된 연유가 새삼 닥아 온다. 고3 내내 이과(理科)반을 듣고서 느닷없이 문과인 상대로 왔기에 말이다. 원래 성품이 온순했던 탓(?)에 여름방학 하던 날 (당시엔 실제로 이날부터 고3생의 대입특강이 본격화되는 첫날이었음) 무기정학을 당해 50일을 열외가 되다보니 대입지원서 작성 시 가장 중시되는 고3 2학기성적이 엉망일 수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대 의예과 아니면 서울공대 화공과나 기계과를 써달라는 나의 막무가내와 이 점수로는 서울대 어떤 과에도 못 간다는 담임선생님과의 승강이 끝에 ‘자네 상대가면 어때?’ 하는 급작스런 제의에 선택과목이 완전히 다른데 어떻게 문과인 상대를 갈 수 있느냐고 항변하자 나의선택과목인 화학과 생물을 가지고도 서울상대에 응시가 가능하다며 지원서를 써주셨던 선생님. 전형조건이 그 전해의 것과 같을 것으로 알고 있던 나는 상대지원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으므로 상대는 애초부터 전혀 고려조차 않고 있었던 터였다. 기실 그 전해뿐만 아니라 그 다음해부터도 또다시 안 되게끔 다시 바뀐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해엔 어쩐 일로 가능했었는지 지금 생각해봐도 분명 어떤 손길이 아니었나, 쉽다.

아무튼 일순간에 이과에서 문과로 나의 행로가 180도 바뀌었고, 이후 상대생활은 우리 모두가 그러했듯이 당시의 혼란한 사회분위기 덕에 ‘노나 공부하나 마찬가지’인 4년을 얼렁뚱땅 마치게 되었다. 나는 곧장 국방의무를 보다 충실하게(?) 다하고자 공군장교 코스를 택했다. 소위로 임관된 지 4개월여쯤 되던 어느 날 국군의 날 행사일환으로 당시 서울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삼군사관학교 종합체육대회응원단으로 차출되어 응원을 마치고 공군장교버스를 타고 오산으로 귀대하던 중 수원 세류동 건널목에서 내가 타고 있던 공군장교버스가 서울발 하행열차에 박치기 당해 즉석에서 3명의 장교가 죽고 약 5-60여명의 중상자가 발생한 대형 사고가 일어났다. 사고 직후 난 얼굴과 몸이 묵사발이었는데도 피가 안 나는 바람에 경상자축에도 끼이지 않을 만큼 운이 좋았던 몇몇 장교 중 하나였다. 몇 십 미터 열차에 끌려가며 구겨지는 버스 안에서 순간 ‘야, 여기서 이렇게 죽는구나,’ 하는 생각과 더불어 어릴 적서부터 그때까지 내가 살아 온 긴대목이 일순간에 쫙 주마등처럼 지나가던 묘한 체험을 잊을 수가 없으며 이는 나로 하여금 그 후 지금까지도 우리 삶과 또 우리의 기억이란 게 과연 무엇인가를 되새기게끔 해 준다.

아무튼 그때 그 사고는 당시 무신론자를 자처하던 나에게 삶과 죽음과 인생의 목적에 대하여 많은 사유의 계기를 던져주었다. 그때 그 충돌사고는 과연 필연이었을까, 우연이었을까? 물론 사고가 난 다음에 생각이 미친 것이긴 하지만 우리가 탄 장교버스와 그 기차는 노량진역을 지날 때에도 나란히 같이 가고 있었고 또 안양으로 진입하는 구름다리 위에서도 같이 마주쳤던 것이 아무래도 우연 같아 보이질 않았었다. 우리 눈에 우연처럼 보일지라도 만사가 필연 아닐까, 그리고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이며 또 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등등. 어느 문학도의 여유로운 넋두리가 아니라 당시 나에겐 대단히 심각한 현안이었다. 요컨대 당시의 그 사고는 나에게 삶과 죽음과 인생의 목적에 대해 아주 심각하게 생각하게 하는 큰 계기가 되었다.

사고 후 몇 달이 지나 사고후유증이 거의 가시어 갈 무렵 6.25 피난시절 대전에서 같이 초등학교 다녔던 한 여학생과의 상봉에서 그녀가 제일 먼저 던진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느냐?’는 물음은 이런 나의 사유를 더 깊이 뿌리내리게 했다.삶과 죽음의 견지에서 볼 때 내생명이 내의지로 또는 내 부모의 뜻에 따라서 생성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내가 원하는 때 또 내 맘대로 죽을 수도 있는 존재가 아닌 한 적어도 생명을 주관하는 존재가 계시다는 사실을 내가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하는 추론을 당시 난 쉽게 받아들이고 있던 터이었으므로.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합의가 이루어진 두 젊은 남녀는 그래서 자연스레 아무 장애 없이 그이후의 만남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난 공군제대를 2, 3개월을 앞둔 어느 날 내 근무지였던 공군본부로 찾아온 어느 선배의 스카웃 아닌 스카웃으로 KIST에서 첫 작장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과를 듣고도 상대를 다녔던 내가 첫 직장을 이과의 본산인 KIST에서 시작하게 된 것도 과연 우연이었을까, 난 지금도 가끔 생각해 보곤 한다.

KIST에 입소한 그해 늦가을 난 아무것도 모르면서 단지 결혼하기 위해 가톨릭집안인 처갓집의 요구대로 성당에서 관면혼배라는 것을 했고 또 일반예식장에서도 결혼식을 올리는 등 두 번의 행사를 거쳐 드디어 원하던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뒤이어 제왕절개로 힘들게 얻은 첫아들은 나에게 또 한번 생명의 신비와 생명의 주관자에 대한 인식을 더욱 새롭게 해 주었다. 양수과다증이라는 특이한 상황에서 태어난 첫아들은 식도가 위가 아닌 기관지와 연결되어 있는 태중에서부터 기형이었던 것이다. 기형이란 사실을 처음 알려주는 의사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까무라쳤고 잠시 후 깨어났는데 깨어나는 바로 그 순간 느닷없이 ‘내 죄 때문에 저애가 내벌을 받고 저렇게 태어났구나, 라는 죄의식이 내 인생 안에서 최초로 강력하게 밀려왔다, 사실 난 그 전까지만 해도 단 한 번도 죄라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이 없는 천방지축의 생활을 해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수술시키겠다며 울부짖는 나를 진정시킨 병원 측의 말은 수술성공률은 제로이며 애를 수술시킨다는 것은 자기네에게 애를 실험용 재료로 내주는 일일뿐 아니라 수술비용도 퍽 많이 들므로 신중하게 판단하라는 충고였다. 우리는 가족회의를 열고 의논한 끝에 결국 병원의 충고를 따르기로 했다. 며칠 후 졸지에 배를 가르고 첫아들을 낳았다는 기쁨에 차있던 산모의 충격을 달래며 빠른 퇴원수속을 밟던 중 이미 세상을 떴을 것으로 생각했던 아이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접한 그 순간 어디선가 들려오는 ’네가 뭔데 감히 한 생명에 대해서 결정을 내리느냐? 는 음성에 난 성공가능성이 제로일지라도 수술시키기로 결정했다.

수술을 서두르는 나에게 그날이 토요일이었는데 아무리 서둘러도 월요일이라야 수술이 가능하다며 집도의사가 던진 또 한마디 말, ’수술은 내가 하지만 애가 살고 안 살고는 나의 영역이 아닙니다,‘ 란 당시엔 퍽 이해하기 어려웠던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수술은 잘되었다고 했다. 그간 동일한 수술에서 제일 오래 산 아이의 기록이 2주일이었는데 2주일이 지나자 국내기록을 깼다는 것이다. 약 40여일이 지나자 이 수술은 국내 최초의 성공이라며 퇴원시켜도 좋다는 집도의사의 말에 따라 집으로 데려 온 아이는 아주 강건하진 않았지만 보통아이처럼 잘 먹고 잘 자는 아이로 정상아와 별 차이가 없었다. 다만 mental 면에서 또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하는 불안감이 내 맘을 무겁게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꼭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불안감을 달랠 겸 또 생명의 주관자(사실 난 그때 소위 때의 교통사고와 첫애의 탄생과정을 통해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을 존재케 하는 주관자가 존재한다는 명제를 스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도 인정할 겸 해서 난 집근처의 성당신부를 찾아갔다. 왜 왔느냐는 신부님의 물음에 ’생명을 주관하는 존재‘를 인정하고 싶어왔다는 나의 답변에 앉기를 권한 후 양주 한잔을 건네며 느닷없이 엄숙한 어조로 ’예수님은 역사적 인물입니까?‘ 라고 묻는 것이었다. 느닷없는 질문에 머뭇거리는 나에게 재차 묻자 ’약 2천 년 전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태어났던 한 청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자 ‘그러면 그분이 우리와 다른 게 뭐라고 생각하시오?’ 하며 연이은 질문에 ‘그분은 우리와 똑같이 인성(humanity)을 지닌 인간인 동시에 또한 신으로서 신성(divinity)도 지닌 분으로 듣고 있습니다.’ 란 나의 답에 ‘내일 모레 오시오 내가 영세를 주겠소. 올 때 본명(세례명)이라는 걸 하나 지어갖고 오시오.’ 하며 가도 좋다고 했다.

물론 당시엔 몰랐지만 그 분은 벨기에에서 신학을 공부한 좀 트인(?) 분이었던 것을 후에 알게 되었다. 내가 그 옛날 서울고를 다닐 때 광화문 코너에서 언젠가 보았던 국제극장의 영화간판에서 ‘스테파노의 세레나데, 란 뮤지컬 영화제목이 퍼뜩 떠 오르길레 본명을 스테파노로 정하고 영세를 받게 되었다. 이는 최소 6개월 이상 교리공부를 거치지 않으면 영세를 주지 않던 당시의 관례로 본다면 난 분명히 엉터리로 영세를 받은 것이고 또 그 신부님은 엉터리로 영세를 주신 것임에 틀림없는 일이었다.

결국 나는 공군소위 시절 당한 교통사고와 제대 후 결혼과 첫애의 태어남과 포기 그리고 그 다음 수술성공으로 인한 재탄생의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무신론자임을 자처하던 젊은 날의 나와는 달리 생명의 원천이 어디이며 생명을 주관하시는 존재가 누구이신가의 관점에서 만물을 만드신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분의 뜻을 우리가 자유의지로 어기는 것이 죄며 죄를 지으면 반드시 죄 지은 만큼 벌을 받는 정의의 질서가 온 우주 안에 꽉 차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 것이다. 따라서 정의의 견지에서 우리가 지은 죄가 사(赦)하여지려면 반드시 죄 없는 존재가 내 죄를 대신하여 벌을 받아야만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명제도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죄가 없으신 하느님께서 바로 육화(incarnation)되어 오시어 우리 죄의 대속(代贖)제물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이시며 그래서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세상의 어떤 죄도 결코 해결될 수 없다는 명쾌한 논리도 쉽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하느님을 알고 그분을 두려워하는 것이 모든 지혜, 지식의 원천임을 알게 된 나에게 그분은 커다란 은총으로 내가 단 한 번도 생각조차 해 본적이 없었던 교직을 천직으로 주셨다. 그리고 1960년대 중반 당시 보이는 세계의 중심이었던 미국이 수정헌법을 통해 도덕 다원주의를 그리고 영적세계의 중심인 로마가톨릭교회가 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종교다원주의를 수용하자 더욱 기승을 부리며 판을 치는 대 혼란의 격랑 속에서 미국사회와 로마가톨릭교회야말로 다원주의와 상대주의의 최대 피해자임을 교직기간동안 확인할 수 있는 눈도 주셨다. 그래서 난 내 전공영역인 경영전략과 기업윤리에서 ‘뿌린 대로 거두는 정의의 질서가 온 우주 안에 엄존’함을 근거로 상대적 가치판단기준이 아닌 절대적 기준에 입각한 ‘Dynamic Management‘라는 새로운 경영패러다임을 정립할 수 있었고 이를 amazon.com과 해외학회에서의 발표, 세미나, 특강 등을 통해 국내?외 학계와 산업계에 보급 확산시킬 수 있는 토양도 갖추게끔 해주셨다.

상대입학 후 어느새 훌쩍 지나버린 50년 세월은, 인간은 자기의지로 뜻을 세우지만 그 뜻이 이루어지고 않고는 온전히 하느님 의지에 따라 정해진다는 사실을 터득케 한 귀중한 시간이었다. 특히 첫애가 잘못 태어났을 때 내 죄 탓임을 인정하고 통회하던 마음을 보시고 아들을 살려주셨음같이 낮 추인 마음을 그분은 아니 낮추어보신다는 성경의 경구도 참임을 굳게 받아들이게끔 한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난 오늘도 누구든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낮출 때라야 하느님께서 천상은총을 듬뿍 부어주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며, 매 순간순간 죄를 성찰하며 만물을 만드시고 보전하시며 다스리고 계시는 하느님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미워도 다시 한번

미원도 다시 한번, 1968
미원도 다시 한번, 1968

42년 만에 다시 생각해 보는 유치하기도 하고, 진부하기도 한 이 구절은 물론 1968년에 대한민국에서 나온 영화의 제목이요, 주제곡의 이름이기도 하다. 우연히 Internet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는데, 참 감회가 깊었다. 어찌 안 그렇겠는가? 42년이면 강산이 최소한 4번 변할 정도라고 하지만 요새의 강산은 아마도 그보다 더 변했으리라..

나는 이 영화를 아마도 개봉관이었던 을지로 4가쯤이 있었던 국도극장에서 당시 같이 모이곤 했던 혼성그룹의 여대생들과 같이 보았을 것이다. 당시는 사실 외국, 특히 미국문화가 판을 치던 당시라서 국내의 영화는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따라서 대학생이 되면 사실 국산영화는 피하는 것이 ‘멋’이었다. 국내 영화를 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 영화만은 예외였다. 그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몰고 온 ‘수준 작’이라고 평가를 했었던 것이다.

최고의 배우였던 신영균, 문희, 전계현, 박암.. 우선 cast가 화려했고, 비록 ‘신파조’의 진부한 story였지만, 사람들의 깊은 공감을 자아낸 영화였었던 것 같았다. 우리의 나이에서 그 영화를 보면, 그저.. 와 저 남자 참 복도 많구나.. 하는 정도였지만 남녀관계, 특히 결혼과 가정과의 역학관계를 어렴풋이 짐작하게도 되었다.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느끼는 것 중에는 신영균, 생각보다 세련되었고, 연기도 무리가 없어 보이지만 상대적으로 문희의 연기는 기억보다 실망적이었다. 그 당시 영화기술의 수준으로 자기의 목소리를 넣을 수 없었으므로(동시 녹음) 성우가 대신 대사를 했는데.. 그것이 문희에게는 너무나 어울리지를 않았다. 당시에 나는 문희가 ‘최고의 미인’으로 기억에 남았는데, 지금 다시 보니 사실은 ‘별로’ 였는데.. 이것은 아마도 내가 보는 ‘미인’의 눈이 바뀌어서 그런 것 같다.

영화의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나는 영화에서 보이는 그 당시의 배경 물들 (길거리, 버스, 택시, 집안 풍경)이 더 흥미로웠다. 내가 기억하는 것과 그다지 큰 차이가 없음을 보고 나의 기억은 퇴색되거나 왜곡되지는 않았다는 안도감도 있었다. 이 영화의 주제곡도 영화와 같이 크게 인기가 있었는데, 당시의 역시 최고로 잘 나가던 ‘이미자’, ‘남진’이 같이 불렀고, 나는 영화보다 주제곡이 더 좋았던 기억이다.

멜러드라마의 특징은 모조리 갖춘, ‘눈물을 찔찔 짜게’ 만들기는 했지만 역시 그 목적은 달성한 영화였고, 4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봐도 느낌이 비슷하니 이것이야 말로 한국의 movie classic이 아닐까?

이 movie classic미워도 다시 한번‘은 이곳에 가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다시 찾은 인호 형

인호 형, 김인호 형을 다시 인터넷을 통해서 다시 찾게 되었다. 실마리는 나의 blog 을 정말 ‘하느님의 뜻’으로 인호 형이 보게 된데 있었다. 시간적으로도 사실 아주 빨랐다. 요새는 가끔 이렇게 surreal한 일들이 종종 일어나긴 하지만 이것도 점점 빨라지고 거대해지는 global information network를 감안하면 이런 추세는 가속화 될 듯 싶다. 비록 전화를 통한 음성은 못 들어도, 가깝게 느껴지는 문자 소식으로 50년이 가까워오는 거대한 세월의 징검다리를 넘는 듯 느꼈고, 가벼운 흥분 감을 억제할 길이 없었다. 더욱이 인호 형이 나를 ‘분명히’ 기억하는 사실에 더욱 반가웠다.

유명인이었던 박계형 여류 작가의 조그만 신문광고가 이렇게 나를 50년 전 나를 잠깐 가르쳤던 ‘가정교사 김인호’ 형을 찾게 되어서 형의 부인이신 박계형 여사에게도 특별한 감사의 심정을 전하고 싶지만.. 조금 시기상조가 아닐지 모르겠다. 그 옛날, 나는 여사의 ‘청춘 물’ 책을 ‘하나도’ 읽었던 적이 없지만 근래에 들어서 쓰신 책들은 무척 많은 관심이 간다. 특히 이번에 알게 된 여사의 심혈작인 ‘환희’는 더욱 더 관심을 갖게 된다.

대학생과 고교생으로 만났던 때를 50년 훌쩍 뛰어넘어서면 ‘호칭’부터 문제가 될 것이다. 나는 비교적 쉽게 그때와 같이 ‘인호 형’으로 부르는 것이 자연스러웠지만, 인호 형은 그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난데 없이 나타난 환갑을 훌쩍 넘긴 ‘동생, 제자’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는 곤혹스러웠을까.. 이해가 간다. 활달한 성격이었던 것을 기억하면 그저 나보고 ‘경우 야..’ 하고 불러주면 너무나 반가울 터인데..

친절하게도 두 번째 편지에서 형의 ‘과거와 종교관’ 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글을 보내주셨는데, 아마도 형의 출신고교인 서울고교 동창회지에 투고된 글인 듯 싶었다. “인생은 Given Way“라는 제목의 일종의 ‘고백록’은 형의 고통과 영광스러움이 조화된 아주 멋진 신앙여정을 그리고 있었다. 이것으로 대강 나의 ‘형이 긴 인생여정에 대한 호기심’ 은 충족이 되었다. 대강 추측을 해 보면 우선 박계형 여사는 천주교 집안 출신이었고, 형은 관면혼배로 결혼을 했던 것 같아서, 그때까지만 해도 교인은 아니었던 듯.. 이 글로 나의 궁금증이 풀린 것은 다음과 같다.

  1.  나를 가르칠 때 상대생(인문계)으로 왜 그렇게 과학이론을 여담으로 가르쳐주었나 하는 것은, 형이 원래는 서울고교 재학 당시 이과에 속했고, 이공대를 지망했었다는 글에서 그 의문이 풀렸다. 하지만 ‘갑자기’ 공대 지망에서 상대로 바꾸어서 진학을 한 것이다. (이것도 단순한 우연이 아닐지도..)
  2.  박계형 여사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게 된 것은, 원래 형이 6.25 피난시절 대전에서 국민학교 다닐 때 박여사를 알고 지냈던 사이라고 했고, 대학졸업 후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나와 같이 공부를 하던 1965년 형이 서울상대에 다닌 그때에는 사실 박계형 여사와 다시 만나기 이전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분명히 ‘나중에’ 형의 친구였던 건우형을 통해서 우리 집에 전해졌을 것이다.
  3.  인호 형이 직접적으로 하느님을 알게 된 것은 역시 공군 장교 근무 중에 당한 ‘대형사고’ 의 후유증과, 이미 하느님을 알고 있던 문학소녀 박계형 씨와의 ‘운명적인 만남’ 때문이 아니었을까?
  4.  그러한 ‘부부결합’ 된 신앙가족이 꾸준히 신앙을 지키게 되었던 것은 다음에 일어난 첫 아기(아들)의 ‘생명을 건 수술’ 이 도움이 되었을까.. 그리고 거의 ‘공짜’로 받게 된 형의 영세도 ‘생각하며 서서히 진행된’ 긴 신앙여정에 커다란 활력소가 되었을 듯하다.
  5.  제일 궁금한 것은 역시 형이 ‘만들어 놓은’ 새로운 경영학 이론, dynamic management theory인데.. 단순히 요새의 networked economy를 의식하고 가볍게 만든 것이 아니고, 형의 인생관, 종교관, 세계관 나아가 우주관이 총 집결된 그런 조금은 ‘높은 곳’의 이론이 아닐까.. 특히 엉망진창인 세계경제, 특히 미국의 문제들을 생각하면 이제는 새로운 ‘절대적 기준’의 이론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렇게 해서 다신 ‘만난’ 형은 나에게 부인인 박여사의 심혈작 ‘환희 1.2부‘를 보내 주시겠다고 했고, 나는 정말 그 책을 읽어보고 싶다. 이것도 형의 인생 반려자였던 여사의 인생,종교관을 보여 줄 것으로 기대가 되기 때문이다. 인호 형을 처음 우리 집에 소개시켜 주었던 건우 형, 내가 ‘이건우‘ 가 아닌 ‘박건우’로 성을 잘못 알고 있어서 정말 당황하기도 했다. 그저 ‘건우 형’으로만 알고 있어서 성까지는 기억이 나질 않았지만 정말 ‘창피’한 노릇이었다. 나의 어머님이 아직도 살아계셔서 이 사실(인호 형을 찾은)을 알았으면 얼마나 반가워 하셨을까..

book, dynamic-management

 인터넷 경제에 부응하는 새로운 경영학 이론, 김인호 교수와  북경대 교수들 공저

 

 

대구의 불볕 더위

heat wave, 2012
6월 마지막 날의 대구같은 더위

“대구 같은 더위”가 최근 이 지역에 들이닥쳤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3자리 숫자의 더위, 그러니까 화씨 100도, 섭씨로 36도 쯤 되나.. 심리적으로 이 세자리 숫자는 꽤 으스스한 효과가 있다. 시원하게 올해 초여름을 즐겼지만, 이제는 그것도 끝이 난 듯하다. 다행히도 이번의 불볕은 습기가 별로 없는 듯해서 견딜 만한데, 이것은 아마도 미국 Southwest, 그러니까 미 남서부 ‘아리조나’ 주 지역 같은 더위일 것이다.

오래 전부터 이 3자리 숫자의 더위는 까마득히 오래 전 대한민국 대구를 생각하게 한다. 좀더 자세히 기억하면 1972년 쯤이었나.. 그 해 여름은 한반도가 전체적으로 무척 더웠다. 에어컨이 나오기 시작할 무렵이었고, 서울의 기온도 34~5도까지 올라갔는데, 그 해 처음으로 ‘습기’를 동반한 ‘찜통’ 더위가 며칠 계속되었고, ‘난생 처음’으로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었던 기억이다.

당시에는 사실 조금 ‘겁’을 먹기도 했는데, 그것은 잠을 잘 수가 없었고, 어디 도망을 갈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추우면 무언가 덮고, 입고 하면 될 터인데, 이렇게 견딜 수 없는 더위에는 어찌할 것인가? 해답은 물론 ‘신비의 이기’, 에어컨에 있었지만, 실제적으로 그것은 당시의 경제수준에는 그림의 떡이었다. 그 1972년 이후로 나는 사실 지독한 더위를 ‘무서워’하게 되었다. 쉽게 말하면 추운 것이 더운 것 보다 낫다는 결론이 머리 속에 새겨진 것이다.

그 당시 대구의 더위는 어떠했을까? 당연히 그곳의 기온은 한반도에서 제일 높았다. 지형적으로 어쩔 수가 없다고 했다. 그 때, 대구에 잠깐 가게 되어서 처음으로 ‘대구 더위’를 맛볼 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세자리 숫자의 더위였다. 섭씨로 36도 훨씬 이상이었을 것이지만 습도는 그리 높은 것이 아니었다.

그때 대구에서 느꼈던 ‘화덕’ 같은 공기를 오늘 처음으로 이곳에서 맛을 보게 되었다. 거의 똑같은 기분이었다. 절대로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지만, 습도가 없는 이 불 같은 공기는 사실은 생각보다 기분이 불쾌하지는 않았다. 요새 대구의 더위는 어떠할까? 서울보다 아직도 더 높을까? 1972년의 한반도 불볕 더위와 그 당시 대구에 살았던 ‘그 아가씨’도 오랜만에 기억한다.

Annie Laurie, 애니 로리

 

Maxwelton’s braes are bonnie,

Where early fa’s the dew,

And ’twas there that Annie Laurie..

Gi’ed me her promise true,

Gi’ed me her promise true,

Which ne’er forgot will be,

And for bonnie Annie laurie,

I’d lay me doon and dee.

 

Maxwellton’s Braes 로 시작되는  이 감정 짙은 스코틀랜드 시와 노래를 언제 처음 듣고, 따라 부르고 했는지 확실한 때가 생각이 나지를 않는다. 분명한 것은, 대학 시절 전前은 아니라는 사실 뿐이다. 이런 ‘외국의 명곡’들은 대부분 중학교에 들어 가면서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배웠지만, 이 곡을 우리는 그때 배우지 않았다. 그것만은 분명하다.

대학시절, 언제 듣고 배웠을까..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분명히’ 기타를 배운답시고 이곳 저곳에서 ‘쉬운 기타 코드’로 부를 수 있는 곡들을 찾고, 배울 당시에 이것이 있었다. 우선 멜로디의 정서가 비록 장조이지만 슬픔이 깔린 은은함으로 그 당시의 감수성 많던 나이에 좋았고, 또한 기타의 코드가 우스울 정도로 초보 단계의 것이었다. 유일한 문제는 영어 가사였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무슨 사연이 있음직한 역사적인 시 라는 사실조차 몰랐고, ‘괴상한 스코틀랜드 식 영어‘에만 신경이 쓰였다. 게다가 많은 유명한 외국 곡을 한글로 번역하여 sing-along style로 노래를 지도하던 전석환 선생도 이 노래는 몰랐는지, 그런 것도 없었다. 당시에, 그렇게 해서 나는 이 향수에 어린 노래를 알게 되었고, 그것이 홀연히 요새 다시 나의 눈앞에 다가왔다.

이번에는 옛날같이 그냥 기타를 치며 노래만 부를 것이 아니고 이 노래의 배경을 알고 싶어서, 알아보니 (주로 Wiki에서) 생각보다 많은 사연을 가진 노래였고, 그래서 더 좋아하게 되었다. 얼마 전 다시 보게 된 오래된 1940년 명화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를 연상케 하는 18세기 즈음 영국의 시대적 배경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그 옛날에는 남자들이 여자를 그리며 쓴 시와 민요들이 꽤 있는데, 이것도 그런 ‘애가’ 중의 하나일 것이다.

Wiki로 이 노래를 찾아보면 영어판과 한국어 판이 거의 다르다. 그만큼 두 언어권의 문화와 관심사가 다르다는 뜻일 것이다. 이 노래의 역사는 양쪽이 비슷하지만 각 문화권에 소개되고 평가되는 것은 다르다. 역사적인 것은 Wiki를 보면 자세히 나와있지만, 나의 관심사는 내가 어떤 경로로 이것을 접했는가 하는 것인데, 한국어 Wiki에 그것에 대한 hint가 보인다.

이 명곡이 한국어로 번안이 되었고 학교 음악교과서에 실렸다고 하는데, 이것은 아마도 최소한 1970년대 이후일 것이다. 내가 전혀 기억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가 이것을 접하게 된 과정은 다른 기록에서 밝혀진다. 아마도, 이 노래를 ‘유행곡’으로 만든 스코틀랜드의 folk (song) group이었던 The Corries에 의해서 한국에도 그들이 record가 들어왔을 것이고, 우리들은 그것을 들었을 듯 하다. 그것이 1970년이었으니까, 거의 확실한 것 같다.

내가 이 노래를 듣고, 배울 당시를 회상하면서 music video를 만들어 보았다. 너무나 높은 음정 때문에 vocal은 엉망이지만 그런대로 나의 사랑하는, 30년 역사를 자랑하는 YAMAHA guitar가 잘 cover를 해 주었다. Audacity software로 ‘음향효과’를 낸 것을 들어보니 조금은 pro맛이 나긴 했지만 아무래도 듣는 이에게는 솔직하지 못한 것 같아서 naked vocal version을 사용했다.

 

 

Annie Laurie, my own rendition

Annie Laurie, GVerb’ed by Audacity 

혼배성사, 삼위일체, 6.3 사태

¶  완전히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계절의 시계는 예측할 수도 없이 별로 쓸모가 없어지고 하루 하루의 날씨가 그날에 맞는 기후라고 생각하는 것이 편하게 되었다. 3월 중순에 섭씨 30도의 날씨가 일주일 계속되고, 4월 말에 거의 빙점의 날씨, 찌는 듯이 덥던 5월이 이제는 가을처럼 시원한 6월로 접어 들었으니.. 기상전문가들은 할 말이 있을까? 하지만 특별한 energy를 쓰지 않는 날씨는 언제든지 환영이다. 요새 며칠 같이..

 

¶  어제는 아주 오랜만에 결혼식에 둘이서 갔었다. 한인 순교자 성당 마리에타 1구역의 문요한 형제님, 지난번 레지오 마리애 꾸리아 단장을 역임하셨고, line dance mania group을 이끌고 있는 나이에 비해 정열적인 분.. 그분의 ‘장성한’ 아들이 성당에서 ‘혼배성사‘를 한 것이다.

우리 집 두 딸이 ‘요새의 이상한 문화’에 젖어서 결혼하는 것이 cool하지 않다고 생각하는지, 사실 결혼에 대한 말조차 꺼내지 못하는 마당에 이런 결혼식은 우리에게 참 신선하고, 참석하는 것이 즐겁게 느껴진다. 그곳에서 30여 년 전 우리의 결혼과 그때 만남의 의미를 생각할 기회가 되기도 했다. 특히 가족, 가정, ‘정상적인 결혼’ 등의 정의와 의미가 심각하게 도전을 받는 요새, 그런 ‘정상적인 결혼’을 보는 것도 큰 ‘은총’이 아닐까? 

결혼식에 간 ‘부수입’으로 정말 오랜만에(1992년 이후 처음으로) 역사 깊은 본당 성가대의 솜씨를 느끼게 되었다. 나는 사실 새 성전이 지어진 후 처음으로 성전 앞쪽에 있는 성가대를 보게 된 것이다. (예전에는 성전 뒤쪽에 있었다) 그 동안 우리세대는 완전히 뒤로 물러나고 더 젊은 세대가 들어왔지만, 그래도 약간은 아직도 우리들 세대인 듯 보였고, 특히 우리 자비의 모후 레지오 형제, 자매인 우요셉, 마리아 부부의 반가운 모습도보였다.

우리가 있을 때의 성가대와 다른 것은 중에는, 거의 ‘프로’에 가까운 audio system에 둘러 쌓여 있다는 것도 있었다. 우리가 주일 미사를 한국본당으로 ‘옮기게’되면 성가대에 ‘돌아와도 좋다’는 묵약은 있고, 이런 활동은 언제나 좋은 것이라 솔깃하긴 한데, 역시 오래 습관이 된 주일미사 의 고향을 바꾸는 것은 생각보다 정말 힘들다.

 

¶  오늘은 6월 3일, 일요일이다. 천주교 전례력으로는 삼위일체 대 축일로서 신학적으로도 신비로 여겨지는 Holy Trinity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날이기도 하다. 오래 전에 삼위일체 하면 고등학교 다닐 때, 영어 참고서로 ‘삼위일체 영어(문법, 해석, 작문)’ 라는 것이 생각나기도 하지만 신학에서는, 성부,성자, 성령(예전에는 성신이라고 했다).. 사실 아직도 깊은 의미는 오리무중이다. 절대, 전능, 영원, 무한..의 절대자가 3위를 가졌다는 것은 성경에 ‘분명히’ 나온다. 성경을 믿으면 사실 그것도 믿어야 하니까 큰 문제는 없다.

사실 요새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은 ‘성령’이다. 하느님인 성부, 예수님인 성자.. 그리고 ‘보이지 않는’ 성령, 그래서 Holy Spirit인가.. 신부님들의 강론을 잘 들어보면 성령에게 도움을 청하라는 말씀이 많이 나온다. 그것이 무슨 뜻인가? 성령께 기도를 하란 말인가? 우리 순교자 본당 주임 하태수 신부님은, 기도할 때 성령의 도움을 받으라고 누누이 강조를 하신다. 그것도 알듯 모를 듯한 얘기지만, 전 보다는 훨씬 받아들임에 크게 문제가 없는 나를 발견한다. 성령만을 크게 강조하는 성령 세미나 같은 것도 있으니까, 그것의 중요함은 강조할 필요가 없을 듯 하다.

 

 ¶  6월 3일.. 육 삼.. 하며 생각난 것6.3 사태란 것이 있었다. 4.19 같이 날짜에서 나온 무슨 큰 사건이 일어난 날을 말한다. 나는 오랫동안 이 6.3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확실히 어떤 해였는지 확실치 않았다. 1964년 아니면 1965년으로 기억은 했었다. 그날은 1960년 4.19 학생혁명 이후 가장 심각한 학생데모가 난 날이었다. 그것도 5.16 군사혁명 이후, 박정희의 ‘민간’ 정부가 출범한 이후, 처음으로 겪는 ‘비상사태’였다.

그 데모가 난 이후 계엄령이 선포되고 모든 학교가 휴교를 하게 되었는데, 나는 그 해를 1965년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1965년 내가 중앙고 3학년 여름방학 전에 학생데모로 인한 비상사태로 휴교를 했던 기억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기억으로 오랜 세월을 살다가, 이번에는 확실히 ‘정답’을 찾으려고 그 당시의 일간지로 확인을 하게 되었다. 정답은 1965년이 아닌 1964년 6월 3일이었다. 1965년에 휴교를 한 것은 1964년 때와 다른 한일조약(국교 정상화) 반대 데모의 여파였던 것이다.

6.3 데모 주동자 김중태약간은 희미해진 1964년의 기억을 거스르며, 그 당시 신문을 보면서 (대) 학생데모로 이어지는 과정들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이번도 역시 대학생들이 주축이 된 것이고, 그것도 4.19와는 다르게 서울 문리대 학생들이 중심에 있었다. 군사정권에서 박정희 민간정권으로 이어지면서, 서서히 쌓여가는 국민의 불만들을 대학생들이 다시 행동으로 보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 당시 나는 고교 2학년이어서 사실 그 심각성이나, 의미를 잘 실감을 못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 개발’ 그것도 일본 자본에 크게 의지하려는 것, 그것에 따른 한일회담 등이 굴욕적으로 보인 것, 일을 빨리 진행하려 중앙정보부를 섣불리 학원으로 투입하는 등, 사실 정책적인 실수가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박정권의 의도는 의외로 간단했을 것이다. ‘경제 자립’ 이었던 것이다. 그 괴로운 과도기를 혈기왕성했던 ‘서울 문리대’ 생들이 고분고분 참을 수 있었을까? 그들이 부르짖던 것은 ‘민족적 민주주의‘ 였고, 그것이 죽었다고 성토를 했다. 고려대학이 주축이 되어서 시작 되었던 4.19때와 달리 1964년에는 서울 문리대가 완전히 중심에 있었다 . 그래서 서울 문리대의 ‘용공성’ 물의까지 생겼을 것이다.

문리대 데모 주동자중의 하나인 ‘김중태‘ 는 사실 유명한 인물이었는데, 당시에 김중태를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였다. 이렇게 가열된 서울 문리대 주동의 데모가 6.3일에 서울 지역 대부분 대학으로 퍼지면 절정에 달하고, 그날 오후에 급기야, ‘비상계엄령’ 선포로 이르게 한 것이다. 하지만 일반 시민의 적극적인 참여가 없었던 대학생들의 데모는 계엄령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비상계엄으로 치닫게 한 또 하나의 이유 중에는 대학생들의 구호가 심상치 않게 격해지고, ‘박정권 하야’ 까지 간 사실도 있었다. 민간정부 6개월 만에 당한 ‘정권위기’를 맞아, 박정희 정권은 다른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정권은 이런 격한 대학생들의 반대에도 개의치 않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일본의 도움을’ 받아가며, 굴욕 외교의 모욕을 참아가며 밀어 부쳤다. 그리고 이후 그것은 하나의 중요한 역사가 되었다.

 

6.3 사태로 치닫는 대학생 데모

 당시의 신문보도, 6.3 사태로 치닫는 대학생 데모, 1964년

 

4.19이후 최대의 대학생 데모, 1964년 5월 말

서울 문리대 생들의 치열한 데모, 6.3 사태 1964년

 

6.3 사태 서울지역 비상계엄 선포

박정권은 별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5.16 이후 처음 맞는 비상계엄령, 1964년 6월 3일

 

 

오월이여, 안녕!

¶  오월이여 안녕!   한 달이 온통 ‘가정, 가족, 졸업식, 어린이, 어머니, 성모님‘ 같은 정말 듣기만 해도 포근한 것으로 가득 찬 느낌이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의 어머님께서 9년 전에 선종하셨던 달이기도 해서 가족과 삶 그리고 인생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던 그런 한 달이기도 했다.

비록 거의 기정사실화 된 기후변동(a.k.a global warming)으로 예전의 6월 같은 날씨들이었지만, 그것이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특히 요새는 ‘날씨’에 둔감해 지려고 거의 ‘일부러’ 날씨에 관한 작은 뉴스는 피하고 있고, 그것이 ‘확실히’ 심리적으로 나를 편안하게 함을 느낀다. 더우면 어떻게 추우면 어떠랴.. 참거나, 잊고 살면 되는 것을.. 또한 작년에 비하면 날씨에 관한 big news는 ‘거의’ 없을 정도로 조용하긴 했다. 작년의 그 ‘monster‘ tornado등을 아직도 기억하기에 더욱 그렇다.

 

¶   Robin Gibb  5월 20일에, 오래 전 60/70시절 우리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Bee Gees [BGs: Brothers of Gibbs] 형제의 중간인, Robin Gibb이 암 투병 중 합병증으로 결국은 62세란 요새 기준으로 보면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망을 한 것이다. 그 그룹의 세 형제 말고도 아주 오래 전에 네 번째, ‘막내 동생’ Andy는 이미 (여자문제로)사망을 했고, 2000년대 초에는 세 번째 Maurice도 병으로 사망.. 이제 맏형 Barry만 남은 것이다.

운명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심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들과 같은 ‘예술인’들은 영원히 뒤에 남기고 떠나는 것들이 있어서 부럽기도 하다. 나에게 그들이 남긴 것 중에는 60년대의 것이 ‘진짜’의 걸작이라고 생각하고, 70년대의 ‘disco 외도’는 잊고 싶은 것들 뿐이다. 최근 몇 주간 지저분한 소식들 투성이였던 모든 news (Internet, TV etc)를 피하며 지내는 바람이 그가 운명한 소식을 이제야 알게 되어서,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또한 우리 세대의 인물들이 이렇게 하나 둘씩 가고 있음을 어찌 모르랴.

 

 
Run To MeBee Gees – 1972

 

1984 model Kenmore washer¶  공돌이의 오기惡氣  얼마 전에 우리 집의 오랜 전통을 자랑하던 세탁기(electric washer)가 말썽을 부렸다. 빨래를 할 때마다 ‘지독히도’ 요동을 치면서 그동안 아주 조금씩 새던 물이 이제는 ‘콸콸’ 샌 것이다. 공구들을 손에서 놓고 산 것이 꽤 오래 되어서 (거의 1년) 사실 이런 ‘사고’는 너무나 귀찮게 느껴졌다. 이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세 가지 뿐이다. (1) 나보다 ‘더 바보 같은’ handyman을 불러서 고치게 하던가, (2)고칠 수 없으면 새것을 사던가, 아니면 (3) 내가 팔을 걷어 붙이던가. 1번 선택은 나에게는 거의 절대로 no no인 것이다. 대부분이 ‘엉터리, 사기꾼’ 같은 놈들 뿐이고, 그렇지 않으면 무언가 잘 모르는 바보들 뿐이기 때문이다. 2번의 선택도 가급적 끝까지 피하고 싶은 것이다. 돈을 쓰는 것 이외에, 멀쩡할 수도 있는 세탁기를 분명히 내다 버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에게 choice는 역시 내가 팔을 걷고 muscle과 brain을 써야 하는 수 밖에 없다.

Washer power-train still in good orders우리의 washer는 1984년에 Columbus, Ohio에서 학생시절에 Sears에서 산 Kenmore classic model인데, 한마디로 완전한 ‘탱크’와 같이 우직하게도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절대로 고장이 날 것처럼 보이지 않는’ 그런 모양이고, 사실 거의 30년 가깝게 딱 한번 timer/controller 만 교체를 한 것으로 나머지 기계적으로는 거의 완벽한 것이었다. 그러니 이것은 이제 정까지 들게 된 우리 집의 ‘값싼 가보’가 된 존재인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나는 비장한 각오로 이것을 살려 보기로 하고 ‘공돌이의 오기’로 분해를 해서 살펴 보았다. 결과적으로 나의 추측이 맞았다. 크게 ‘망가진 것’이 하나도 없고, 모든 나사 같은 것이 모조리 풀어져서 물이 샌 것이다. 이것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Washing cycle중에서 가끔 balance가 맞지 않으면 격하게 요동을 하기 때문이고 그렇게 아주 오랜 세월을 보냈으니, 그 fastener들이 모조리 풀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을까?

이렇게 해서 30년에 가까운 이 세탁기는 안락사 직전에 다시 한번 생명을 연장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딱 한가지다. 이것이 심하게 vibration을 못하게 ‘꼭 잡아주는’ 장치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만 되면 앞으로 최소한 몇 년은 쓸 수 있지 않을까? 참, Sears Kenmore people들, 어쩌면 그 당시 이렇게 잘 만들었을까? 이것이야말로 Made in U.S.A의 표본이다.

 

¶   Vice Presidency  미국의 부통령 직, 어떤 자리일까? 이것의 정의와 의미를 따지자면 책 몇 권 가지고도 부족할 것이다. 그만큼 독특한 위치이기 때문일까? 역사적으로도 그것이 증명이 된다.

Robert Caro
Robert Caro

얼마 전에 Time 잡지에 Robert Caro라는 LBJ(Lyndon B Johnson) biographer(전기작가)의 말이 등장했다. 그는 일생을 1960년대 미국 정계를 주름잡았던 부통령, 대통령 Lyndon B. Johnson의 연구로 보낸 인물이다.  ‘사고’1로 부통령에서 대통령이 되고, 다시 한번 선거로 한번 대통령을 하고 스스로 물러나 난 전설적인 Johnson 대통령, 비록 월남전에서 고전했지만, 국내 정치는 빛나는 업적이 수도 없이 많은 인물이다.

1965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그를 기억한다. 수많은 ‘오해’를 받았지만 묵묵하게 하나하나 성과에 성과를 쌓고 조용히 물러난 것, 참 멋지다. 그 인간상을 연구했던 Robert Caro의 한마디가 참 인상적이다. 지난번 선거 당시 공화당 대통령 후보John McCain이 그의 running mate로 완전한 ‘들러리 간판’격이었던 Sarah Palin이란 ‘바보 같은 여자’를 선택한 것에 대한 것이다.

한마디로, ‘미국 역사상 가장 무책임한 선택‘이었다고 했다. 나도 절대로 동감이다. 그런데 더욱 웃기는 것은 McCain자신은 ‘아직도’ 그 선택이 자기 일생에서 가장 ‘멋지고, 신중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 나의 radar에서 McCain이란 인물은 완전히 사라졌다.

  1. 1962년 달라스에서의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

First of May

5월 1일을 향한 달, 4월, 그것도 특별히 오래 전 1970년의 4월을 더 기억한다. 연세대 4학년이 되던 그 해의 4월, 지나간 3년간 나와 형제처럼 가깝게 지내던 중앙고 동창들, 특히 양건주와 이윤기가 모두 군대로 갔고, 사실 조금 외로움을 느끼기 시작하던 때였고, 비록 다른 동창, 죽마고우 박창희가 있긴 했지만, 그것은 조금 다른 위안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그 해 초에 친구 유지호의 도움으로 박창희와 같이 원서동에 살았던 다른 죽마고우 손용현과 거의 극적인 재회를 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거의 10여 년 만에 ‘불알친구’ 삼총사가 다시 모인 것이다. 당시 용현이는 건국대학교 영문과에 다니고 있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미국과 영어를 그렇게 좋아했던 그에게 영문과는 아주 자연스럽게 보였다.

그 이후 우리는 뒤를 돌아볼 틈도 없이 오랫동안 헤어졌던 시간을 만회 하려는 듯,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했다. 그 당시 그 나이또래가 갈 곳이 어디겠는가.. 거의 다 다방, 아니면 술집이었는데, 모두 담배연기가 자욱한, 건강한 곳들은 아니었다.

그것 대신, 값싸고 건강하게 모여 즐기는 방법이 있었다. 바로 산, 그러니까, 등산이었다. 특히 박창희는 거의 프로 급에 가까운 산 사나이였고, 요델 산악회의 멤버이기도 해서, 우리들에게는 조금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고, 그런 이유로 우리 셋은 같이 등산을 즐기기 시작했는데, 사실 그 당시 그것은 대학생들에게 유행이기도 했다.

그래서 셋이서 서울 근교의 산들(특히 도봉산)을 다시기 시작하다가 그 해, 4월 초에 장거리 산행을 하게 되었다. 육이오 때 김일성 공산당의 공비, 빨찌산들의 오랜 거점으로 유명하던 지리산엘 가게 된 것이다. 나는 그 전해(1969년)에 박창희와 같이 여름방학때 소백산 등산의 경험이 있었지만 용현이는 이런 산행이 처음이었다.

나와 박창희는 비록 연대 전기과 졸업 수학여행을 빼먹고 간 것이었지만,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그 산행은 일생을 통해 길이 남을 추억거리가 되었다. 당시는 color film이 나오기 시작할 무렵이라서 거의가 흑백의 사진으로 그 추억이 담겼다. 그 당시 우리들이 좋아했던 Bee GeesFirst of May, 지리산 등반, 그리고 그 속의 세 죽마고우들.. 비록 모두 헤어져 살았지만, 항상 꿈속에서라도 보고 싶은 친구들… 건강하기를 빈다.

 

 

First of May, friends forever day 

 

Bye, Daydream Believer..

davy-jones-314
Davy Jones with Union Jack, 1967

오늘 잠깐 뉴스를 보니 낯익은 얼굴이 보이고,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하였다고 했다. 지난주에도 심근경색증으로 ‘갑자기’ 사망한 교우님의 장례미사에 다녀왔는데 또 심장마비.. 누군가 했더니 반가운 얼굴, 60년대의 유명한 rock group, The Monkees의 ‘꼬마’ Davy Jones였다.

나이는 나보다 두 살 위인 66세였다. 언젠가 TV에서 보았을 때 모습이 참 건강해 보였는데, 살도 별로 안 찌고 심장마비의 체질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 나이가 되니까, 이렇게 하나 둘씩 같은 세대의 사람들, 그것도 이렇게 유명했던 인물이 사라짐은 역시 을씨년스럽게 느껴진다.

1968년 즈음에 정말 정말 The Monkees를 좋아했었다. 그들의 TV show를 당시의 미8군 방송이었던 AFKN에서 빠지지 않고 보았고, 유엔군 방송이었던 VUNC에서 그의 열렬한 fan이었던 여성 disc jockey (이름을 잊었다) 덕분에 그들의 hit songs들에 깊이 빠지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바로 오늘 세상을 떠난 Davy JonesDaydream Believer, 어찌 잊으랴.. 그들의 hit 중에서도 제일 멋진 곡이었다.

작년 봄 나의 blog, The Best 5 of ’68’s 에서 나는 바로 그 곡을 제1위로 올려 놓았다. 오늘 뉴스의 기사에서, 그는 자기의 심장이 25세 정도의 심장처럼 건강하다고 의사들이 말을 했다고..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이 정도의 나이가 되면 ‘누구라도 내일을 못 볼 수 있다’는 그런 의미심장한 경고가 아닐까.. 다시 한번 우리 세대의 idol이었던 그의 명복을 빌며.. RIP..

 

Daydream BelieverThe Monkees – 1968

 

김두철, Ash Wednesday

¶  우등 한번 못해본 서울대 수석합격: 김두철을 다시 찾았다. 나의 재동국민학교 동창, 3학년과 6학년 때 같은 반이었고 특히 6학년 때는 나와 같은 ‘1 분단’에 있기도 했던 ‘머리 좋은’ 동창이다. 나의 재동국민학교 추억에 관한 blog에서 잠깐 언급을 했었는데, 그 당시에는 100% 나의 머리 속에 남아있던 기억력으로 쓴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의외의 도움(Internet, what else?)으로 그의 이름을 다시 보게 되었다.

1966년 2월 중순경의 일간지는 서울 주요 대학입시 합격자 명단이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 조그만 기사 중에 김두철의 사진과 이름이 보였다. 그 것이 동아일보였는데, 지금 생각을 해 보니 아주 어렴풋이 그 기사를 그 당시 나도 본 것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반세기가 가까이 되는 엄청난 과거였으니.. 역시 확실하지는 않다. 그 기사는 김두철이 서울대학 ‘전체 수석’ 합격자 였다는 기사였다.

김두철 서울대 입시 전체수석, 1966그는 서울공대 전자공학과를 지망했는데, 거의 만 명이 넘는 지원자중의 수석 합격자였던 것이다. 국민학교 시절, 김두철은 ‘항상 일등, 우등생’이었는데, 아마도 경기중,고에 진학하면서 1등은 별로 못했던 듯, 우등을 못해본 수석합격이라고 기사는 강조를 했다. 본인이 ‘점수벌레’를 싫어 한다고 했지만, ‘의외로 수석’이 되었다고.. 참 이렇게 부러운 친구가 있을까? 그러니까, 별로 ‘노력을 안 했어도’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 아닌가?

이런 심리는 아마도 ‘일류 심리’에서 비롯 되었을 듯 하다. ‘거의 항상 top’으로 일관을 했으니, 크게 자랑스러운 것도 없다는 뜻일까? 평소의 실력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 조금은 거슬리기도 하지만, 어찌하랴.. 그렇게 태어났으니. 이 기사로 나는 그가 나와 같이 ‘납북자’ 가정, 편모슬하의 외아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지만 우리 집과 다르게 그의 어머니는 이화여대 교수(金蓮玉, 당시 41세)였다. 그의 아버님은 서울 공대교수로 재직 중 육이오 동란 시 납북이 되셨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과 참 비슷한 환경이었다.

국민학교 시절에는 그런 것을 전혀 모르고 지냈다. 게다가 기사는 김두철이 절대로 ‘공부벌레’가 아니라는 것으로, ‘산 사나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의 장기는 rock climbing이라고.. 기자조차 부러운 듯이 “힘껏 공부하고 맘껏 노는 화려한 대학생활”을 예상했는데, 과연 그는 어떻게 대학생활을 했을까? 그는 지금 어떤 ‘업적’으로 이름을 ‘크게’ 남겼을까 궁금하다.

 

¶  뼈 속으로 스며드는 듯한 차가운 안개 비가 하루 종일 나리는 2월, 중순이 완전히 접히고 하순으로 접어드는 일요일, 무슨 꿈에서 깨어나는 듯이 놀란다. 어느새 2월의 삼분의 2가 없어졌나? Groundhog Day, Lincoln’s Birthday, Valentine’s Day.. 모두 지나갔다. 내일은 President’s Day,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화요일은 Legio (Mariae) Tuesday인 동시에 Mardi Gras, 그러니까 그 다음날 수요일이 중요한 날인 것이다. Ash Wednesday(재의 수요일)인 것이다.

작년에 비해서 올해는 새해부터 거의 예외 없이 high note로 지내왔다. 그러니까, euphoric하다고나 할까? 이 나이에 ‘신난다’는 표현은 어불성설이고, 아마도 ‘잔잔히 들뜨는’ 그런 기분이라고나 할까? 지난 10년간 항상 나는 depression속에서 살았다고 ‘나의 역사’를 만들었지만 지난 한 달여를 보면서 아마도 나는 서서히 그런 길었던 ‘동면’의 기간에서 나오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몇 가지의 ‘단순한 계기나, 이유’로 그렇게 어두운 터널에서 나왔다고는 절대 생각 치 않는다. 그 이상의 무엇이 작용을 했을 것이다. 이것은 나뿐이 아니고 나의 반려자도 같이 느끼는 듯 하니까, 아마도 맞을 듯 하다. 그 이상의 것은 과연 무얼까?

ash-wednesdayAsh Wednesday, 재의 수요일, 2월 22일은 2012년 부활절 (Easter) 전까지 교회력으로 40일간 계속되는 Lent (사순절)의 시작이다. 예수님의 Passion (수난)을 거치며 부활의 절정에 이르는 기독교신앙의 절정기에 속하는 정말 중요한 40일이 수요일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개신교는 어떨지 몰라도, 천주교는 아주 ‘겸손, 절제, 회개’로 이 시기를 보내게 되는데, 이제는 나도 조금 익숙해져서 미리 생각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재의 수요일 바로 전날은 Mardi Gras (Fat Tuesday)는 ‘고난의 40일’ 전에 마음껏 ‘세속의 맛’을 느끼자는 축제의 절정인데, 이곳에서는 New Orleans (Louisiana주) 의 Mardi Gras 축제가 유명하다. 재의 수요일 미사에서는 작년의 Palm Sunday에 썼던 palm tree leaves(종려나무 잎)을 태운 것을 기름이나 물에 섞어서 신부님께서 신자들의 이마에 십자가를 그려주신다. 대부분 저절로 없어질 때까지 이마에 그것이 보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 재는 아마도 이런 뜻이 있을 것이다. 창세기 3장 19절(Genesis 3:19)의 “Remember that thou art dust, and to dust thou shalt return“.. 그러니까 사람은 먼지에서 왔다가 먼지로 돌아 간다는 뜻이 아닐까?

이날로 시작되는 사순절, 40일을 올해는 어떻게 보낼까? 회개와 절제와 고행.. 말은 간단하지만 실제로 하려면 복잡해진다. 회개는 물론 고백성사를 통해서 공식적으로 할 수 있지만, 다른 것들은 개개인마다 천차만별일 것이다. 어느 해에는 좋아하는 커피를 완전히 끊기도 했고, ‘절대로’ TV를 안 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의 요점은 역시 왜 그렇게 하는가를 묵상하며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역시 성경을 중심으로 한 ‘영적인 공부’가 중요할 것이다. 또한 나는 레지오 단원이라서 이것 외에도 하려면 할 것이 너무도 많다. 얼마나 의지력을 가지고 실행을 하는 가 그것이 문제일 것이다.

 

유지호, 나의 원서동 竹馬故友

Number 1 죽마고우, 유지호
죽마고우 제1번, 유지호 1980

유지호, 나의 원서동(苑西洞) 죽마고우(竹馬故友)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친구, 별로 잊고 산 적이 없는듯한 착각도 든다. 헤어져서 못 보고 산 세월이 꽤 오래되었지만 그런 사실과 상관없이 아직도 가슴 아련히 찐~하게 느껴지니 참 어릴 적 친구는 별수가 없다. 그 녀석을 정말 오랜만에 얼마 전 꿈에서 생생히 보았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그 녀석, 유지호와의 어린 추억을 회상한다.

사실 나의 블로그 에서 옛 친구들을 그리며 쓴 글이 꽤 많이 있었지만, 몇몇 친구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쓸 엄두를 내지 못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너무나 감정이 복받친다고 나 할까, 심지어 괴로울 것 같아서 미루어 온 것이다. 친구 유지호가 바로 그런 친구 중에 하나라고나 할까.. 그런데 정말 오랜만에 그를 꿈에서 보게 되었고, 잘못하면 못 보고 죽을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과 함께, 이제는 더 미룰 수 없는 생각이 들었다.

 지호, 유지호(柳池昊).. 구수한 얼굴만 생각해도 정겹게 느껴지는 친구, 이 친구와 이렇게 일생을 떨어져 살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이 1980년1월 나의 결혼식 때였을까.. 마지막 소식은 우리 어머님께서 그 해 5월쯤 그 녀석의 딸이 태어났을 때 병원으로 찾아가셔서 본 때였고 그 이후 우리는 소식이 끊어졌다.

그 이후 우리 어머님은 항상 지호의 안부를 걱정하셨다. 심지어는 혹시 죽은 것이 아닐까 하시기도 했다. 그리고 인생이라는 커다란 수레바퀴에 치어서 정신 없이 살아온 것이다. 한동안 여러 군데로 수소문을 해 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이 지호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지호는 친구 중에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친구다. 물론 우리들은 너무 어려서 기억이 안 나지만, 어머님으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숨은 사연이 있었다. 원래 육이오 동란 전에 지호의 아버님과 우리 아버님은 친구였던 것 같고 (우리 아버지는 지호 아버님을 ‘원동 친구’라고 불렀다고 함, 원동은 지금의 원서동), 전쟁 발발 후에 두분 다 납북행렬에 끼어서 북으로 끌려갈 때, 지호 아버님은 구사일생으로 탈출을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아버님이 납북되신 것을 우리 어머님께 알리셨던 것이다. 그러다가 1.4 후퇴(1951년 1월 4일) 당시 지호네 식구는 모두 피난을 가게 되었고, 우리 집은 그대로 원서동에 남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 지호의 나이가 (나와 동갑인) 두 살밖에 되지 않아서 그랬는지 우리 어머님께 임시로 맡기고 전라도 지방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아버지가 납북되신 후 거처가 마땅치 않았던 어머님께서는 우리 집 남매, 그리고 지호를 데리고 원서동 비원 담 옆 텅 빈 지호네의 커다란 한옥의 사랑채에서 머물며 우리들을 돌보셨는데, 나중에 지호는 전라도로 피난 간 가족의 품으로 갔다가, 휴전 후에 다시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원서동에서 살게 되었다.

지호와는 이런 우리가 기억할 수 없는 묘한 인연이 있었다. 어머님의 추억에, 그 길게만 느껴졌던 지호네 사랑채에서의 생활이 참 무서웠다고 한다. 젊은 여자 혼자서 어린 애들 세 명을 데리고 텅 빈집에서 전쟁을 겪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아슬아슬하고, 무섭게 느껴지곤 했다. 그래서 어떨 때는 지호가 우리 집 식구처럼 느껴지곤 할 때도 있었다. 나의 가장 오래된 지호에 대한 기억은 역시 원서동의 개천을 사이에 두고 살던 국민학교 1학년 시절이 아닐까..

우리는 승철이네 집에서 세 들어 살고, 지호네는 비원 담을 끼고 있던 커다란 한옥에 살았다. 그때의 지호는, 우리와 별로 다른 것이 없었다. 구제품 옷을 입고 신나게 개천을 중심으로 뛰어 놀았다. 지호와 우리가 뚜렷이 달랐던 것은, 그의 말투였다. 분명히 우리와 다른 말투.. 알고 보니 그것은 바로 전라도 사투리였다. 전라도에 잠깐 피난 생활을 하면서 배운 것이다. 우리들은 그것을 가지고 신나게 놀리곤 했다.

 비원에서 흘러나오는 비교적 맑은 원서동 개천은 그 당시 우리들 꿈의 놀이터였다. 여름이면 시원한 물장난, 종이배 띄우기, 목욕을 할 수 있었고, 겨울에는 더 신나는 썰매타기, 빙판에서 팽이 돌리기를 하며 놀았다. 하지만 지호는 그런 것 이외에도 개천을 좋아하는 이유가 더 있었다. 바로 “폐품수집” 이었다. 개천가에는 군데군데 폐품, 심지어 쓰레기까지 버린 곳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더럽다고 피하는데 지호는 그곳을 열심히 뒤지면서 ‘보물’을 찾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런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었지만 어른들은 더럽고, ‘거지같다’ 고 핀잔을 주곤 했다.

 원서동에서 가까운 국민학교는 옆 동네에 있는 재동(齋洞)국민학교였고, 대부분이 그곳을 다녔지만, 이상하게도 지호는 낙원동 덕성여대 옆에 있던 교동(喬桐)국민학교를 다녔고, 우리 집에 같이 살던 승철이네 누나 시자 누나도 교동국민학교엘 다녔고, 졸업을 했다. 사실 왜 그곳을 다녔는지 그 이유를 모르지만, 학군에 관한 정확한 법적 제한이 없던 시절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건재한 재동국민학교와 달리 교동국민학교는 비교적 일찍 폐교가 되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중고등학교는 지호 아버님이 서무부장으로 근무하시던 계동(桂洞) 입구의 휘문(徽文) 중 고교를 다녔는데, 중학교 시절에 철봉을 하다가 잘못 떨어져서, 팔이 골절되는 바람에 일년을 휴학을 해서 나보다 1년 늦게 (1967년) 졸업을 하였다.

내가 원서동에서 가회동으로 국민학교 4학년 때 이사를 가는 바람에 헤어지고 말았지만 그래도 연락은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었다. 한가지 특기사항은 나에게 그 당시 친구들이 많았지만 그들 서로가 다 친구는 물론 아니었다. 심지어는 지호와 다른 친구들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을 때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나의 다른 절친한 죽마고우인 안명성과 지호의 아주 설명할 수 없는 관계였는데, 간단히 말해서 그들 서로가 좋아하지 않는 그런 사이였다.

그 가운데 내가 있어서 가끔 모두 만날 때에도 느껴지는 분위기기 별로 좋지 않았다. 그래서 나중에 나는 이들과 별도의 관계를 유지하기에 이르렀다. 지금도 생각을 한다. 왜 그들은 그렇게 서로 좋아하지 않았을까? 뚜렷한 이유가 없었는데..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지호보다 명성이와 더 가깝게 중 고교 시절을 보내게 되었지만, 육이오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역사 때문일까, 무언중에 서로의 우정에는 추호의 변함도 없음을 서로 느끼며 살았다.

 중 고교 시절, 지호네는 육이오 때부터 살던 오래된 원서동 집을 새로 아주 깨끗하고 중후한 느낌의 한옥으로 개축을 하였다. 그 당시 동네에서 아마도 가장 멋진 한옥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식구 수에 비해 방이 많아서, 항상 직장인 하숙생을 두고 있었는데, 언젠가는 방송국의 기술자 (아마도 엔지니어)가 하숙을 들어 살았는데, 가끔 그의 빈방을 우리는 몰래 들어가 보기도 했다. 그 당시, 아마도 고교 1년 때, 나는 한창 라디오를 중심으로 전기,전자 쪽에 관심이 많을 때여서 각종 전기,전자 부품으로 가득 찬 그 방의 책상설합을 보는 것은 즐거움이었다. 게다가 TV가 귀하던 그 시절, 그 하숙생 아저씨는 아주 옛날 것으로 보이는 동그란 스크린을 가진 흑백 TV 수상기가 있어서 비록 화면은 엉망이지만 그것으로 권투 중계 같은 것도 보곤 했다.

그 ‘악동’의 시절, 더욱 흥미로웠던 기억은 지호와 광순 형(지호의 형)으로 부터 들었던 ‘이웃집 여자 담 넘어보기‘ 이야기였다. 바로 이웃집에는 ‘화류계’ 여자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마당에 나와서 목욕하는 것을 본 것이다. 그 당시는 개인 집에 목욕탕이 거의 없어서 공중 목욕탕을 쓰는데, 더운 여름에는 어두운 밤에 마당에서 목욕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숫제 대낮에 나와서 목욕을 한 모양으로, 지호와 광순형이 손에 땀을 쥐고 담을 넘어 엿본 것은 완전히 김홍도의 그림같은 이야기가 된 것이고, 아직도 생생한 지호의 손에 땀을 쥐게 하던 이야기가 귀에 쟁쟁하다.

상도동 우리집에서, 1968
상도동 우리집에서, 1968

1966년 봄이 되면서 지호와 ‘지리적’으로 가까워지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우리 집이 연세대 1학년 초, 용산구 남영동에서 영등포구 상도동으로 이사를 갔는데. 그 당시 이미 지호네는 원서동에서 상도동 김영삼의 집 근처의 멋진 양옥으로 이사를 가 있었던 것이다. 지호 아버님이 이전에 무진회사(당시의 금융회사) 출신으로 수완이 좋으셔서 그랬는지, 큰 수입이 없으신 것처럼 보였는데도 아주 크고 멋진 집을 잘도 구하셨다.

나의 집은 비록 전세였지만 완전히 단독주택으로 그 당시 상도동 숭실대학 앞, 버스 종점 옆에 있어서 지호네 집은 걸어가도 될 정도로 가까웠고, 방 두 개의 작은 우리 집에서 그 녀석의 ‘파란 잔디에 별채까지 딸린 커다란 저택’에 가서 노는 것은 아주 즐거운 일이었다.

 지호는 휘문고를 졸업하고 일차대학에서 낙방을 했는지, 한전(한국전력 주식회사) 산하의 수도공대에 입학을 하였는데, 서로 학교가 다르고, 학교 환경에 의한 관심사와 대학 친구들이 달라서 생각만큼 자주 만나지는 못했어도, 한번도 연락이 끊기거나 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생각이, 이 녀석은 친구라기 보다는 나의 친척 같은 느낌을 줄 때가 많았다. 친척이야, 자주 못 보거나, 잠시 헤어져도 그 기본적인 관계는 없어지지 않기에 바로 우리들의 관계가 그것과 비슷했던 것이다.

 지호는 그 당시 나이에 비해서 조금 느린 듯 하지만, 대신 여유 있고 폭 넓은 행동과 인간 관계를 유지하는 느낌을 주었다. 느린듯한 인상은 그 나이에 맞는 유행이나 멋 같은 것에 남보다 둔감한 편이고 그것은 옷이나 유행 같은 것에서 그가 좋아하는 것들을 보면 쉽게 짐작이 되었다.

그가 알고 지내는 사람들을 보면, 나 같은 비슷한 나이가 비슷한 사람들 이외, 나이와 배경 같은 것이 다른 사람들과도 잘 어울렸다. 대학시절부터 지호는 CCC (Campus Crusade for Christ) 라는 김준곤 목사가 이끄는 개신교 대학생 선교단체에 관련이 되어서, 나도 끌리다시피 그곳에 몇 번 가보기도 했다. 나는 아직도 지호가 그때 그렇게 신앙심이 깊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 당시 그는 아주 진지하게 활동을 하곤 했고, 흔히 생각하듯이 여학생을 만나기 위해서 그곳에 들어갔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 당시 CCC는 명동입구 부근에 어떤 빌딩의 옥상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나도 지호와 몇 번을 가보았다. 지호는 이미 AS (Athletic Society, 체육부)라는 부서의 멤버로 활약을 하고 있었고 그곳에서는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 당시 신앙적으로 너무나 유치해서 그곳에서 하는 신앙적인 활동에는 큰 관심을 없었고, 그저 대학생들, 그것도 꽤 많은 여대생이 있는 것만 관심이 있었다. 이곳에서도 역시 지호는 ‘인심 좋은 아저씨’ 같은 인상이었다. 이사람, 저 사람 할 것 없이 편하게 사람들과 사귀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 나이에 비해서 성숙한, 하지만 부정적으로 표현하면, 조금 ‘영감’ 같은 그런 지호의 모습이었다.

 

‘I Am a Rock’Simon & Garfunkel – 1966 – Live
그 당시 둘이서 즐겨 ‘따라’ 부르던 smash hit oldie 

 

이때에 일어난 잊지 못하는 일이 하나 있었다. 내가 가끔 발동하는 ‘악동기질’을 발휘해 지호에게 부탁을 해서 CCC소속 여대생들의 주소를 얻어낸 것이었다. 그때가 아마 1968-1969에 걸친 겨울 방학이었을 것인데, 그때는 거의 매일 광화문 근처에 있던 교육회관 지하다방2에서 살다시피 할 때였는데, 장난기가 발동해서 주소록에 있는 몇몇 여대생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그 다방으로 불러낸 것이었다. 편지는 ‘연세춘추3에서 보낸 것처럼 하고, 무슨 설문조사(대학생의 팝송취향)를 한다고 꾸며 댄 것이었다. 내가 아이디어를 내고 내가 편지를 쓰고 보내고 했지만 내가 보아도 거의 ‘완벽’한 각본이었다. 그때 다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나와, 양건주, 이윤기 등이었는데, 물론 이들은 ‘주저하는 공범’이 되고 말았다.

솔직히 나는 그 당시 너무나 심심해서 한 장난이었고, 그들이 나오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들이 모두 나왔다는 사실이었고, 물론 그들과 ‘설문조사’까지 해야만 했다. 이구동성으로 그 여대생들은, 혹시 속는 것이 아닐까 하고 나왔다고 했고, 우리들의 ‘진지한 모습’에 안심을 했다고 했다. 그제야 나는 무언가 우리들 너무 장난이 심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모두 나의 ‘잘못’이었다.

 이 ‘연극사건‘은 사실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때 내가 편지를 보낸 여대생 중에는 CCC와 상관이 없었던 전에 잠깐 알았던 윤여숙(창덕여고, 이대 생물과) 이라는 여대생도 끼어있었는데 나의 최대의 관심사는 사실 그녀가 나올까 하는 것이었다. 사실 전혀 기대를 안 했던 것인데, 놀랍게도 그녀가 ‘편지를 들고 출현‘을 한 것이었다.

우리와 만나서 ‘설문조사’를 했던 여대생들에게는 편지로 우리가 기다리는 위치를 미리 알려주었지만, 윤여숙씨 에게는 카운터(계산)로 와서 찾으라고만 해 두었는데, 역시 그곳에 편지를 들고 나타났던 것이다. 나는 너무나 놀라서 얼굴도 못 들고 옆에 앉아있던 이윤기에게 그녀가 어떻게 하고 있느냐고 묻기만 한 것이 고작이었다. 카운터에서 편지를 들고 그녀가 화를 내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제서야 내가 너무 지나친 장난을 했구나 하고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아버지가 경찰관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때의 이 ‘지나친 장난’은 두고두고 잊지 못하는 추억이 되었고, 후회를 하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을 하니 그 나이에 그런 악의 없는 장난은 조금 애교 있게 보아도 되지 않을까?

 

관악산에서, 1968
관악산에서, 1968

연세대 2학년 시절, 나는 연호회라는 남녀 대학생 클럽에서 활동을 했다. 말이 활동이지.. 그저 남녀 대학생들끼리 만나는 것이 주목적인 조금은 맥 빠진 듯한 클럽이었지만, 그 나이에 젊음을 발산하는 알맞은 역할을 하기도 했다. 활동이란 것에는, 정기적으로 다방에서 만나는 것, 야외로 놀라가는 것 등, 주로 ‘노는 것’ 이외에도, 조금은 심각한, 말도 그럴듯한 ‘견학’이란 것도 있었다. 그러니까 조금 공부하는 활동인데, 우리들이 유일하게 성사시킨 것이 ‘동양방송국 견학‘ 이었다. 그 당시 동양 방송국, TBS는 삼성재벌 산하의 아주 큰 언론기관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우리가 간 곳은 서소문에 있던 동양 텔레비전 방송국이었는데, 그것을 성사시킨 것이 바로 지호였다. 지호가 알고 있던 어떤 ‘아저씨’가 그곳에서 엔지니어로 일을 하고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다. 그 아저씨는 역시 지호네 집에서 하숙을 하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지호는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사람들을 많이도 알고 있었다.

 대학 3학년 (1969년) 때 즈음, 지호 아버님의 환갑잔치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시골은 물론이지만 서울에서도 환갑이란 것은 집안, 친척의 경사요, 동네의 경사이기도 할 정도로 나이 60세를 장수한 것으로 여길 때였다. 그때가 1969년 경이었으니까, 지호 아버님은 아마도 1909년 생이셨을 것인데, 우리 아버님이 1911년 생이셨으니까, 우리 아버님보다 나이가 위셨다. 나는 그 잔치에 특별히 관심은 없었지만 지호가 스냅사진 좀 찍어달라고 해서 갔고, 우리 어머님도 잠깐 들리셔서 돈 봉투를 놓고 가셨다. 나는 사실 처음 환갑잔치에 갔던 것인데, 신발 표까지 나누어 줄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도 왔다. 그때 지호네 친척들이 또한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가족들 마다 모여서 합동으로 절을 하였고, 그런 것들을 그 당시에 고가였던 플래시를 써서 모두 찍었는데, 상당히 많은 양의 사진을 찍고 다녔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아마추어’ 자격으로 찍은 것이고, 프로 사진기사가 와서 정식으로 사진을 다 찍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프로 사진기사가 찍은 사진이 무언가 크게 잘못되어서 모두 못쓰게 되었다고 해서, 결과적으로 내가 찍은 사진이 ‘완전히’ 환갑기념 공식사진으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 그 사진들이 내가 보아도 괜찮게 나왔던 것이다. 만약 이날 내가 사진을 찍지 않았더라면 그 큰 환갑잔치의 모습들은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계기로 사진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게 되기도 했고, 두고두고 그 지호 아버님의 환갑잔치는 머리에 사진처럼 남게 되었다. 특히 지호 아버님, 기분이 좋으셔서 커다란 안방에 사람들에 둘러싸여 덩실덩실 춤을 추시던 모습, 지호의 형 광순형 또한 완전히 만취가 되어서 나를 붙잡고 ‘기분 좋게’ 술주정을 하던 모습 등등.. 참 기억하고 싶은 잔치였다.

 1970년 (대학 4학년) 쯤에는, 항상 폭넓은 친구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지호를 통해서 나는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원서동) 친구들과도 다시 만나게 되기도 했다. 그 중에는 국민학교 친구, 김천일과 또 다른 죽마고우였던 손용현이 있었고, 그렇게 친하지는 않았지만 역시 원서동 개천친구, 한성우(한성택 형의 사촌) 도 다시 보게 되기도 했는데, 이것은 지호가 그들과 끊어지지 않는 원만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천일은 원서동의 토박이로 재동국민학교 동기동창이었는데, 중학교 1학년 때 사소한 나의 철없던 실수로 헤어지게 되었는데 지호를 통해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나이는 조금 밑이었지만 박창희와 같이 국민학교 4학년 때까지 개천을 사이에 두고 살았던 손용현.. 이들은 나중에 내가 미국으로 떠날 때까지 나와 아주 가까이 지낸 친구들이 되었다.

지호는 언뜻 보기에 그다지 노래 같은 것을 잘 부르지는 않았어도 아주 좋아하여서, 그런 기회가 있으면 빠지지 않았다. 그 예로 어느새 ‘서울합창단’이란 곳에 가입을 해서 활동을 하였던 것을 나중에 알게 된 것이고, 우리들은 사실 장난끼 섞인 말로 ‘비웃기’도 했다. 지호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주 꾸준히 그 ‘서울합창단’이란 곳에 나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아주 ‘공식적이고, 역사 있던’ 단체여서 나도 놀랐다. 그곳은 장상덕이란 분이 지휘자로 있었고, 그분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도 자주 볼 수 있던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지호가 나보고도 가입하라고 했는데, 회원이 부족하다고 하던가.. 했는데, 사실은 그 때, 10월 유신이 나고 박정희가 통일주체국민회의란 것을 만들어서 종신 대통령으로 선출이 되는 시기였는데, 그 취임식이 열리는 장충체육관에서 ‘공화당 찬가’를 이 서울합창단이 맡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사실 정치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공화당찬가를 부른다는 것이 별로였지만 이미 청탁을 받고 연습을 시작한 모양이어서 나도 ‘끌려 가다시피 해서’ 합창 연습을 하곤 했다. 실제로 나는 장충체육관에 가지는 않았지만, 두고두고 이것은 별로 좋지 않은 찜찜한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그 이후 지호는 군대로, 나는 미국으로 가서, 헤어졌다가 1975년 여름에 지호를 서울에서 다시 잠깐 만났는데, 어엿한 대기업의 자재과 샐러리맨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5년 뒤, 1980년에는 나의 결혼식에 왔고, 그 후 소식이 끊어졌는데, 주위를 암만 찾아도 그 녀석은 없었다.과연 지호는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동국대 사학과를 나온 지호의 형, 광순형 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거의 포기하는 심정으로 이렇게 회고담 속에서나 듣고, 보고, 느낄 수 밖에 없는가?

 

1. 17세기 조선,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단오
2. 위치가 좋아서 1960년대 말 대학생, 직장인 할 것 없이 ‘잘나가던’ 다방
3. 연세대학교 발행, 학교신문 

postscript: 오랫동안 기억해낸 추억을 글로 옮기는 것, 몇 시간이면 될 줄 알았지만, 결과적으로 일주일 이상이 걸렸다. 한 가지를 쓰고 나서 다음 날, 다른 추억이 되 살아나고, 그런 것이 며칠이나 걸렸다. 이제 내 기억력의 한계를 분명히 느낀다.

 

Groundhog Day, 2012

Movie Groundhog day
Movie, Groundhog Day, 1993

¶  거의 이른 봄 같은 온화한 날씨 속에 2월로 접어들었다. 무언가 신경 쓸 것들이 많았던 1월을 벗어나니 조금 어깨가 가벼워짐을 느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의외로 즐거운 기억을 심어주었던 한 달이 지난 것이 아쉽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게 즐거웠던 사실이 이번 달에도 계속되리라고는 기대는 안 한다. 지난 달은 여러모로 ‘예외’적인 시간들이었지, 그것이 절대로 new normal은 아니라고 내가 나를 달래고 있다.

내일은 2월 2일.. 아하! 바로 Groundhog Day로구나. 이곳에 오랜 살다 보니 이날도 아주 친숙하게 느껴진다. groundhog은 한국어로 뭐라고 할까? 아마도 두더지 정도가 아닐까? 이것이 ‘봄’을 알리는 첫 동물로써, 이날 땅 위로 기어 나와서 자기의 그림자를 볼 수 있으면 겨울이 6주간 더 계속된다는 재미있는 날이다.

이것만으로는 별 것이 아니지만, 숫제 이것에 대한 행사를 하며, 뉴스중계까지 한다. 각 지방마다 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공식적’인 것은 역시 펜실베니아 주 피츠버그 근처의 Punxsutawney(펑스토니?)라는 곳에서 열리는 것이 그것이다. 그곳에 Phil이라는 groundhog을 아침 7시경에 꺼내가지고 그림자 ‘실험’을 한 후, 결과를 발표하는데.. 겨울이 6주간 더 계속 될지.. 물론 그곳은 관광지가 되어서 많은 외부인들이 방문을 한다.

이것에 대한 얘기는 이것만이 아니다. 1993년 이맘때 나온 영화제목이 또한 Groundhog Day인데, Saturday Nigh Live, Ghost BusterBill Murray가 주연을 한 comedy, fantasy, romance류의 영화로써, 처음, ‘그저 그런 영화’라는 평으로 시작을 했지만, 이제는 거의 ‘최고의 Classic’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그렇게 오랜 동안 인기를 누린 영화인 것이고, 특히 이맘때면 꼭 봐야 하는 (크리스마스 영화처럼) 것으로 되었다.

나도 이것을 꽤 많이 보았는데, 처음에는 별로였다가 보면 볼수록 빠지는 그런 것이었다. ‘반복되는 듯한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는 무언가 교훈을 주는 그런 내용이어서, 이것을 자기의 삶과 비교해서 생각하는 것, 참 재미있고, 유익하지 않을까? 꼭 한번 보기를 권하고 싶다(이 영화는 이곳에서 무료로 볼 수 있음). 이것에 대한 자세한 것이 Wikipedia에 나와 있는데 이 영화를 만든 location (로케장소)이 사실은 Punxsutawney가 아니고 일리노이 주와 위스컨신 주의 접경에 있는 Woodstock, Illinois라는 사실도 그렇고, 그것으로 그곳 역시 ‘관광 명소’가 되었고, 이제는 그 곳에서도 매년 Groundhog Day행사를 열고 있다는 사실 등등.. 참 재미있지 않은가? 영화의 위력을 새삼 실감하는 예가 되었다.

 

¶  지난 달 27일에는 우리 집에서 친지들이 모여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원래는 매년 1월 21일을 전후해서 우리 집에서 모이는데 올해는 차질이 생겨서 거의 일주일 뒤에 모인 것이다. 1월 21일은 우연히도 나와 최동환씨(최형) wife(진희엄마)의 생일이라서, 그것을 기념(?)해서 매년 모이는 것인데 세월이 흘러 흘러 이제는 January Classic이 되었다.

예전에는 주로 식사로 시간이 갔지만 얼만 전부터 최형이 기타를 배우고 있어서 ‘통기타 노래잔치‘를 하곤 한다. 한마디로 아주 ‘건전’해진 모임이 된 것이다. 하기야, 술만 마시고, 종교 정치얘기로 열을 올리는 것 보다 이렇게 노는 것이 훨씬 뒤끝 맛이 좋은 것이 사실이다. 음악전공 wife가 두 명이나 되고, 윤재만씨도 색소폰을 배운지 얼마 되었고, 이태리가구 전성준 사장은 피아노, 기타로 하는 노래 솜씨가 거의 프로에 가깝다. 약간 아쉬운 것은 부인님들이 별로 노래를 안 부른다는 것인데,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흥미를 갖고 참여를 할지도 모를 일이다.

무려 $2000짜리 Martin guitar를 장만한 최형은 생각한 것 보다 자세가 심각하다. 그 동안은 그룹으로 배우더니 이제는 개인 레슨까지 받는 모양이고, 지난 번보다 솜씨가 더 늘었다. 우리야 모여서 부르는 노래가 60/70년대 노래가 주종이고 가끔 그 이후의 노래도 배우고 부른다.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은 역시 그때의 노래가 ‘진짜’ 노래라는 것이다. 그 이후의 노래는 세월이 암만 지나도 classic이 될 수가 없다는데 모두 의견을 같이 하였다.

 

Advent 2011, 대림절

2011년 대림절
Advent 대림절 2011

¶  오늘은 가톨릭 달력으로 새해의 시작이 된다. 비록 세속적 새해는 아니지만 천주교 전례력은 오늘이 4개의 촛불로 상징되는 대림절의 시작, 그러니까 예수님의 탄생일이고 이곳 최대의 명절인 성탄까지 4주를 기다리는 대림절 첫 주일이 되고 성탄 이후부터는 다시 예수 부활을 기다리는 시기가 시작이 되고.. 이런 식으로 사실 성경의 말씀대로 ‘계속 기다리는’ 기간의 연속이 된다.

이런 것들이 이곳 미국에서는 거의 200여 년 동안 생활화가 되어있어서 크리스천이면 이런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명절, 휴일들에 별로 큰 무리가 없지만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조금 눈에 거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랴.. 그것이 역사적 현실이고 문화의 일부가 되어 버렸으니.. 그래서 대림절이 시작되는 첫 주일은 의미가 큰 것인데 불행히도 우리는 미사를 거르게 되었다. 핑계는 꼭 있지만, 게으름이라는 핑계가 더 맞을 듯해서 사실 기분이 찜찜하다.

아침에 새로니가 Thanksgiving holiday를 집에서 보내고 오늘 아침에 Nashville로 떠나는 날이라서 시간이 조금 그랬지만, 역시 핑계일 것이다. 올해의 Thanksgiving은 큰 ‘문제’ 없이 지났고, 아주 적당하게 구워진 turkey가 인상적이었지만, 내가 조금 배탈이 나서 그것이 흠이 되었다. 다름 사람들은 멀쩡한데 왜 나만 그랬을까.. 암만 생각해도 그렇지만 혹시 stress성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문제는 왜 내가 stress를 느꼈을까 하는 것인데..

 

Thanksgiving feast 2011

Thanksgiving feast 2011

Rock group Iron Butterfly
Iron Butterfly circa 1970

¶  오늘 우연히 npr.org (National Public Radio)에서 (via Tweet) 1960년대 말의 LA출신 rock group Iron Butterfly에 관한 글을 읽게 되었다. 그들의 big hit In-A-Gadda-Da-Vida를 제외하고는 사실 이 그룹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저 heavy-metal rock group 정도라는 것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가지 더.. 이 big hit oldie 이외에는 다른 것을 더 들을 수 없었다는 사실도 있었다.

이 글에서 나의 짐작이 맞았는데, 역시 이 유명한 한 곡을 빼면 그들의 이름은 유명무실할 정도였다. 그룹 멤버들의 관계가 안 좋았던지, 다른 문제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이 유명한 classic 이후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래서 더 legendary하다고 할까..

이 곡의 특징은 무슨 classic의 symphony정도로 연주시간이 엄청 길었다는 것, 그러니까 17분 정도 되었나.. guitar로 내는 background noise같은 것, dramatic 하게 들리는 drum solo, guitar solo등등이 아주 다채롭고.. 듣고 있으면 무슨 환각에 빠지는 기분, 등등이 있어서 1970년 초에 들을 당시를 회상하곤 한다.

이 것을 친구 손용현과 같이 동네(상도동)에서 이 노래를 따라 부르며 걷는데, 앞서 가던 (못생긴) 아줌마가 갑자기 돌아서더니 화를 내며 ‘히야까시‘ 하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만 알고 보니 우리 둘이서 그 아줌마를 쫓아가며 ‘성 희롱’하는 것으로 오해를 했었던 것이어서 두고두고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이제 다시 이 곡을 17분 동안 들어도 그때의 ‘젊은 감정’이 거의 변함없이 솟는 것을 느끼며 헤어진 휘문고 출신 친구 손용현을 생각한다.

 

IRON BUTTERFLY – IN A GADDA DA VIDA – 1968 (ORIGINAL FULL VERSION)

 

연세대학의 추억(2): 길었던 1학년 시절

연세대학교 독수리상

연세대학교 상징 독수리상, 1970년 5월 무악축제때 제막식이 있었다

 

내가 연세대를 지망하게 된 것은 복잡한 이유가 필요치 않았다. 철학적인 이유보다, 실제적인 이유가 있었다. 한마디로 서울공대 전기, 전자공학과는 나에게 조금 ‘위험한’ 선택이었고, 그 다음은 무엇인가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이외에도, 무언가 부드럽고 ‘낭만적인 인상’을 주던 신촌 독수리의 요람, 반짝이는 구두, 바로 옆에 ‘기다리고’ 있던 이화여대생들.. 등등이 자연히 나를 그곳으로 끌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의 관심은 100% 전기,전자 ‘과학’ 쪽이어서 전공을 선택할 때에 한번도 다른 생각도 한 적이 없었다. 그 당시만 해도, 대학의 학과를 지망할 때, 본인의 취향이나, 포부보다는 성적 순위로 정하는 것이 통례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이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사고방식 이었다. 성적순위로 경쟁 학과를 지망하는 것이었다. 단적인 예로, 그 당시 서울공대 화공과나 전기,전자과의 커트라인이 제일 높았고, 그런 분야를 자기가 좋아하건 안 하건 상관없이 학교 성적만 좋으면 지망을 하곤 했던 것이다. 그저 그런 과를 졸업하면 보장된 취직의 문이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분야에 얼마나 관심이나 있었을까?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불행한 친구들, 많이 있었을 것이고, 그 분야에 진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기회가 줄어들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로 내가 연세대 전기공학과에 입학한 것은 아주 적절한 선택이었고 결과였다.

 

Petri camera로 찍은 자화상, 1966
Petri camera로 찍은 자화상, 1966

연세대학 전기공학과의 경쟁률은 상당히 높아서 시험을 치르고 나서 상당히 스트레스를 느끼긴 했지만, 사실은 끝났다는 안도감과 편안함도 잔잔하게 느끼며 발표를 기다렸는데, 그만큼 입학시험이란 것이 괴로운 것이었다. 그 당시, 입학시험 발표는 대부분 라디오에서 제일 먼저 발표를 했고, 나도 그것을 통해서 합격 발표 결과를 들었다. 입시 전에 합격하면 ‘진짜’ 카메라를 사주시겠다는 어머님의 약속을 기억하며 나는 정말 합격발표를 기뻐했는데, 진짜로 며칠 후에 나는 일제 페트리(Petri) 란 카메라를 선물로 받게 되었다. 나중에 가까웠던 친구들의 대학입시 결과가 속속 알려졌는데, 김호룡은 연대 기계공학과에 합격을 했는데, 나머지 이종원, 우진규 등은 모두 떨어졌다. 이들에게는 2차 대학을 응시하거나 재수를 하는 두 가지 길이 있었고, 종원이는 2차였던 외국어대에 갔는데, 우진규는 재수를 하게 되었다.

 

남영동에서 본 남산 야경, 1966년 3월
남영동에서 본 남산 야경, 1966년 3월

비록 추운 겨울 날씨였어도 입학식 전까지의 시간은 정말 ‘천국’에 있는 기분이었다. ‘악몽’ 같던 시절이 끝나고, ‘완전 자유’의 대학시절이 눈 앞에 보이니 어찌 안 그렇겠는가? 새로 산 카메라를 들고 이곳 저곳을 다니며 사진을 찍으며 자유로운 시간을 즐기고, 드디어 ‘학생입장불가’ 라는 영화도 당당히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에 나는 용산구 남영동, 금성극장 바로 앞에 살았고, 그곳에서 연세대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사실 고등학교에 다니던 것과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약간 달라진 것은 까만 교복대신에 곤색 대학제복을 입었던 것, walker(군화) 대신에 진짜 신사화 (단화)를 신었고, 머리는 조금 자라서 스포츠형 정도가 된 것, 그것이 전부였다. 어떤 애들은 완전히 기름까지 바르며 머리를 기르고, 신사복까지 입었지만, 나는 그렇게까지는 못했다.

 

그 때 연세대 캠퍼스에서 제일 인상적인 것이 여기저기 보이던 “멋진” 여대생들이었다. 나는 그것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비록 내가 속한 과에는 여학생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것은 상관이 없었다. 여기저기 강의실 이곳 저곳에 여대생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입학 오리엔테이션도 아주 인상적이었는데, 그곳에서 소개된 도서관, 학생보건소, 채플시간 등등은 나중에 연세대만의 특징을 보여 주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입학을 한 후 얼마 안 있어 우리 집은 용산구 남영동에서 영등포구 상도동 (숭실대학 앞 버스 종점)의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갔는데, 비록 멀어지긴 했지만, 다행히 버스노선이 있어서 사실은 더 편했다. 종점에서 종점까지 매일 왔다 갔다 한 것이다. 이곳에서 대학졸업 때까지 살았기 때문에 나의 대학시절의 추억은 이곳과 항상 연관이 되어있었다.

 

연세대 입학 직전, 죽마고우 안명성과, 1966년
연세대 입학 직전, 죽마고우 안명성과, 1966년 봄

연대 전기과, 우리는 그저 그렇게 불렀다. 내가 1966년 입학할 당시 연세대학교는 공과대학이 아닌 이공대학이 공학부를 포함하고 있었고, 전기공학과와 비슷한 전자공학과란 것이 생기기 전이었다. 아마도 몇 년 후에 전자공학과가 분리되었을 것이다. 내가 다닐 당시에는 3학년이 되면서 강전, 약전 이란 이름으로 갈라졌다. 그러니까 강전(强電)이란 것은 전통적인 전기공학이었고, 약전(弱電)이란 것은 새로 유행하기 시작한 전자공학인 셈이었다. 이것은 글자 그대로 강전은 (electric) power system, 그러니까 전력의 발전,송전 같은 ‘강한, 높은 전압’의 것을 다루고 약전은 그 이외의 것, 특히 electro-magnetic, radio, amplifier, control systems 같은 것을 다루었던 것이고, 이 약전이 바로 전자공학(電子工學)인 것이다. 나는 약전, 전자공학에 관심을 두고 입학을 했기 때문에 3학년 때 약전 반으로 가서 공부하게 되었다. 물론 각자의 지망대로 배치를 하지만 워낙 약전, 전자공학에 지망생이 많아서 교수님들도 조금 골치를 썩힌 듯 했다. 하지만 큰 문제는 없었던 것으로 보였다.

이런 환경에서 재학생, 복학생으로 갈라지는 판에 3학년부터는 약전,강전으로 거의 반반으로 갈라게 되어서, 심하면 서로 모르는 학생도 생길 정도였다. 지금 졸업 앨범을 보니 그것을 느끼게 된다. 얼굴만 조금 익혔을 뿐 이름 이외에는 전혀 기억이 안 나는 것이다. 이것이 대학 이전의 동창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설상 가상으로 나는 1학년 가을학기부터 1년 휴학을 했기 때문에 입학동기들은 거의 놓치게 되었다. 이런 조금은 복잡한 이유로 나의 연세대 4년은 조금 비정상 적인 것이 되었다.

1학년 1학기 때, 그러니까 1966년 봄 학기, 그야말로 freshman의 기분으로 인생에서 조금은 새로운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지금의 고등학생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대학생이 되어야 비로소 ‘성인’, 그러니까 사람 취급을 받았다. 머리도 기르고, 신사복도 입고, ‘단화’ 구두도 신을 수 있고, 극장도 마음 놓고 들어가고, 다방, 술집.. 이런 것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또한 마음 놓고 남들이 보이게 ‘연애’도 할 수 있었다. 이런 사회적인 환경 때문에 대학에 들어와서, 아차..하고 한눈을 팔면 완전히 자제력을 잃기가 아주 쉬웠다. 내가 바로 그런 대표적인 케이스라고나 할까.. 조금 부끄럽지만..

나는 이런 갑작스런 개인적 자유를 슬기롭게 감당할 준비가 덜 되었던가.. 자유의 전당에서 나는 첫 학기를 혼돈과 방황으로 보냈다. 대학 강의란 것도 실망스러운 것이, 사실 고3때의 스파르타 식, 우스꽝스럽게 어려웠지만, 멋지던 수학, 화학 같은 것이 대학에선 수준이 ‘낮아진 듯’이 느껴졌다. 1학년의 교양학부 과정 전체가 고등학교와 수준이 비슷한 듯했다. 한가지 다른 것은 강의를 ‘땡땡이’를 쳐도 당장 아무런 ‘처벌이나 문제’가 없는 듯이 보였던 것이었는데, 그런 ‘안심’에는 무서운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나중에 뼈저리게 체험하게 되었다.

 그런 새로운 환경에서 전기공학과 1학년에는 중앙고 동기동창 2명, 그것도 3학년 8반 때의 ‘반창’이었던 신창근조남재가 있었다. 중앙고의 같은 반에 있었어도 개인적으로 별로 가깝지 않았지만, 이제는 조금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었다. 그것 뿐이 아니었다. 중앙고 1년 선배인 구장서, 더 위의 선배인 (2~3년?) 차재열 형.. 등등, 그러니까 중앙고 출신이 전기과 1학년에 나까지 5명이나 있었던 것이다. 이 정도면 은근한 ‘힘’을 가진 집단이어서, 무슨 투표,선거 같은 것이 있으면 절대로 무시 볼 수 없는 숫자였고, 과 대표를 뽑는데도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였다.

 


 

보슬비 오는 거리 – 성재희

1965년 말에 발표된 성재희씨의 데뷔 힛트, 입학시험 즈음에 거의 매일 듣었던 곡으로, 그 당시를 추억하게 하는 대표적인 가요가 되었다. 레코드가 크게 힛트한 후에 시민회관에서 공연을 했는데 많은 관중의 사랑을 받았던 기억도 난다.

 

 

I Could Easily Fall in Love with YouCliff Richard

 연세대 입학 후에 참 많이 듣고 좋아했던 곡, 전 해에 Cliff Richard는 이미 The Young Ones라는 영화로 일본과 한국에 많은 fan을 가지고 있었다.

 


같은 해 연세대에 입학한 중앙고 동창 중에는 기계과에 나의 절친했던 친구, 김호룡을 비롯해서 김연응이 있었고, 다른 과에도 상당히 많이 있었다. 이런 사실은 나중에 총학생회장을 뽑을 때에 은근한 세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 당시는 별로 그런 것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생각하니 그것은 작은 규모의 정치적 발상이고 행동들이었다. 그런 것들은 나의 체질에 별로 맞지 않았지만 기성 정치인을 흉내 낼 정도로 선거운동에 열을 올리는 사람이 꽤 있었다. 투표에서 표 하나가 사실은 땀과, 그리고 돈이 필요하다는 조금은 실망스러운 사실도 그때 보게 되었다.

 그 당시 전기과 3학년에 어머님의 절친한 원산 루씨여고 동창 친구분의 아드님이 있었는데, 이름은 위재성 형, 보성고교 출신으로, 학훈단(ROTC) 생도였고, 성적도 뛰어나고, 지도력까지 있는 그야말로 모범적인 형이었다. 그 형의 여동생인 위희숙씨는 1967년에 연세대 영문과에 입학을 해서 나와 같이 1971년에 졸업을 한 졸업동기생이 되었다. 어느 날 그 형이 나를 보자고 불러서 갔더니, 그곳은 전기과 학생회 선거본부였다. 알고 보니 그 형이 학생회장(이공대 회장)으로 출마를 해서 겸사겸사 나를 보자고 한 것 같았다. 반가운 마음도 들었지만, 사실 곤란한 것도 없지 않았다. 이미 나는 다른 과에서 중앙고 출신의 선배가 출마를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대학 학생회 선거는 일반 선거의 풍토와 별반 다름이 없고, 완전히 ‘출신지’에 좌우되는 판이었다. 출마 후보의 경력, 자질, 포부 같은 것은 사실 뒷전에 있었다. 그때 나는 대한민국 선거풍토를 그대로 보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출신고의 압력에 굴복한 셈이 되었는데, 이것은 두고두고 나를 괴롭혔고,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 1학년 1학기의 시작 무렵에 나는 ‘사진 찍기‘에 완전히 빠졌고 그것이 조금 수그러질 무렵에는, 나의 다른 blog에서 다루었던 ‘모형 비행기‘ 로 시간을 다 보냈다. 온통 정신이 그곳에 가 있어서 학교 공부를 제대로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고교시절의 학과목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역시 공부를 제대로 안 하니 시험도, 출석도 문제가 없을 수가 없었다. 특히 체육 같은 것은 출석미달로 시험도 치르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나와 반대로 ‘성공’을 하겠다고 정신무장을 하고 들어온 학생들도 있었는데, 그가 군대(공군)를 마치고 입학한 사람, 이름이 강성모 였다. 나이나 성품, 성숙함 등으로 전기과 1학년 과대표로도 뽑히고, ‘공부도, 활동’ 도 잘해서, 결국 강성모씨는 나중에 대학 졸업하기도 전에 학과장의 추천으로 미국유학(Fairleigh Dickenson College, NJ)을 갔고, 그 이후 미국에서 아주 유명한 대학교수가 되었다. 이 강성모씨는 내가 한창 ‘놀던’ 그 학기에 거의 매일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서, 절대로 재수가 좋아서 성공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1967년 가을학기, 이윤기와 함께
이윤기와 찍은 사진, 중앙동창 김복희가 찍음, 1967년 가을학기

학기가 끝나면서 나는 정신적으로 완전히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휴학계를 제출했는데, 그 당시에는 그것이 나에게 최적의 선택이었다. 1966년 입학 동기들은 사실 이때부터 1년 휴학을 하면서 완전히 ‘놓치게’ 되었고, 1967년 가을 2학기에 복교를 하고 보니, 전기과의 학생들은 사실상 1년 뒤에 입학했지만 나와 나이는 거의 비슷했다. 거의 모두 생소한 얼굴로 가득 찬, 완전히 다른 환경이 되었지만, 그래도 하늘이 도와서 나의 중앙고 반창인 이윤기와 나의 죽마고우 박창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윤기는 3학년 때 그런대로 친하게 지낸 친구였는데, 재수를 해서 들어왔고, 박창희는 나의 중앙고 1년 후배여서 제대로 입학을 한 것이었다. 같은 고등학교엘 다니면 1학년의 차이에도 존댓말을 써야 했지만, 나와 창희가 죽마고우의 친구여서 그럴 수는 없었고, 이것 때문에 창희와 윤기도 서로 말을 놓게 되었다. 그 외에도 중앙 1년 후배인 김태일, 이상일 등도 있어서 더욱 마음이 든든하게 느껴졌다.

 

이외에도 전기과에는 조금 낯이 익은 얼굴 두 명이 보였는데, 그 들은 이헌제, 김현식.. 이름보다는 얼굴이 낯이 익어서 생각해보니 작년, 나의 입학동기생이었다. 그들을 어떻게 일년 뒤에 다시 보게 되었을까? 나와 같이 휴학을 하지 않았으면, 유급일 것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이헌제는 유급이 분명했는데, 김현식은 그 당시 이유를 분명치 않았다. 그래도 이헌제는 나를 알아보아서 나도 아주 반가웠는데.. 그 해(1967년) 겨울이 지나면서 자살을 하고 말았다. 겨울방학 중이었는데 갑자기 같은 과의 한창만으로부터 연락을 받아서 한강 파출소로 가보니, 이헌제 가 한강 철교다리 위에서 투신자살을 했다고.. 충격적이고 어이가 없었다. 이헌제.. 얼굴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참 외향적 성격의 소유자였는데, 어떻게 그가 자살을.. 나중에 들어보니 열렬히 연애하던 여대생(이대 음대생)과 결별을 하면서 비관 자살인 것 같다고 했다. 연기를 깊숙이 빨아들이며 담배 피던 모습이 흡사 외국 영화배우 같았고, 삶을 마음껏 즐기는 것처럼 보이던 그가 얼마나 충격과 절망이었으면, 그 나이에 자살을 했을까.. 아직도 그의 얼굴을 생각하며 채 피지 못한 그 영혼의 명복을 빈다.

 이윤기, 박창희 같은 뜻밖의 ‘친구’들 때문에 나의 대학 1학년 2학기의 시작이 아주 순조롭게 시작 될 수 있었고, 1년 전의 ‘악몽’을 되씹으며, 단단히 결전의 자세로 학교생활에 임하게 되었다. 이래서 사람은 가끔 실수도 해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제 학교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학교의 강의,과목을 충실히 공부하고 좋은 결과를 내는 것이 되었다. 사실 이것이 정상적인 대학생활이었고, 나는 처음 그런 대학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새로 만나게 된 과 친구들과도 큰 무리 없이 어울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이윤기와 박창희가 있어서 가능했다고 아직도 믿고 있다. 이미 이윤기와 친하게 지내던 그룹이 있었는데, 흔히 그들을 ‘식당파‘라고 불렀다. 그들이 모이는 장소가 그 당시의 학생식당이어서 그런 것 같았다. 모두 쾌활하고, 다양한 남자들.. 그 중에는 과 대표였던 고종태, 기타를 귀신처럼 잘 치던 보성고 출신 심재흥, 항상 옷을 멋있게 입던 문욱연, 그리고 몇 명이 더 있었는데, 그들은 나중에 일찍 군에 입대하고 나의 졸업앨범에 남지를 않아서 이름을 기억할 수가 없다. 그 중의 한 명, 이름은 비록 잊었지만 그 당시 가요 히트곡 최희준의  “이별의 플랫트 홈” 을 좋아했던 친구, 그 노래는 나도 좋아하던 것이라 더 그를 기억한다.

 

최희준의 이별의 플랫트홈 

 

이윤기, 박창희와 더불어 그 당시 어울리게 된 사람들 중에는 화공과의 중앙고 동창 양건주, 전기과의 강원도 출신 김철수, 중앙고 후배 김태일, 그리고 지방(전라도) 출신의 김진환 등이 있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그룹이 형성이 된 것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연세대 굴다리 바로 앞에 있던 다과점(빵집)에 둘러 앉아 얘기를 하고 했는데, 그 때의 추억이 참 아름답게 느껴지곤 한다. 어떻게 그런 ‘순진’한 순간들이 있었을까 할 정도로 우리들은 어린이처럼 모이곤 했는데, 재미로 가위, 바위, 보를 해서 그날 돈을 낼 사람을 뽑기도 했다. 이렇게 다양하게 모인 우리 그룹은 다음해에는 완전한 남녀 혼성 클럽으로 발전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1967년 1학년 2학기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좋은 친구들도 사귀게 되고 해서 사실 나에게는 보기 드문 완벽한 학기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 꼭 좋은 일에는 악재가 낀다고, 작은 사고 하나로 나는 조금은 우울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강의실에서 어린애들처럼 분필 던지는 놀이를 하다가 내가 앞 이빨을 부러뜨리는 조그만 사고가 났던 것이다. 이것 때문에 치과를 계속 다니게 되었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줄어들게 되면서 더욱 학교공부에 전력을 다하게 되었다. 1학년 1학기에 겪었던 학교공부의 어려움을 1년 뒤의 2학기에 완전히 만회를 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는 다시금 대학생활에 자신감을 되찾기 시작하게 되었고, 학기가 끝나면서 대망의 장학금까지 받게 되었다. (계속)

 

연세대학의 추억(1): 졸업 앨범

 

연고전 Classic

연고전 Classic

 

관악산 바라보며 무악에 둘려 유유히 굽이치는
한강을 안고 푸르고 맑은 정기 하늘까지 뻗치는
연세 숲에 우뚝 솟은 학문의 전당. 아~ 우리들 불멸의
우리들 영원한 진리의 궁전이다 자유의 봉화대다.
다함 없는 진리의 샘 여기서 솟고 불멸의 자유의 불
여기서 탄다.

우리들은 자랑에 찬 연세 아들딸. 슬기 덕성
억센 몸과 의지로 열성 진실 몸과 맘을 기울여
연세에 맡기어진 하늘의 사명 승리와 영광으로
길이 다한다. 찬란한 우리 이상 밝은 누~릴 이룬다.

 

연세대 졸업 앨범, 1971년 2월 졸업
연세대 졸업 앨범, 1971년 2월 졸업

너무 너무 오랜 만에 연세대학교 졸업 앨범을 보며 교가 연세의 노래를 듣는다. 얼마나 오랜 만인지는 정확히 그 햇수를 모른다. 다만 1971년 2월 졸업 후에 처음으로 보는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다. 물론 그 오랜 세월 동안 조금은 보았을 것이지만 느낌 상 그렇다는 것이다. 그나마 지난 10여 년 동안 가끔이라도 즐겨 본 졸업 앨범은 거의 국민학교, 중고등학교의 것이었고 이상하게도 대학 졸업 앨범에는 손이 가지를 않았다.

어떻게 나는 이렇게 대학시절의 추억과 그 이전의 추억에 대한 그리움이 이렇게도 다를까? 그 이유에 대해서 먼저 생각나는 것은, 역시 그 나이의 추억은 그 이전의 추억과 근본적으로 깊이가 다를 것이라는 사실이다. 심하게 말하면 조금은 유치하지만 순진한 추억과 더 성숙하지만 조금은 덜 순진했던 시절의 추억, 그런 차이가 아닐까? 그래서 조금은 더 복잡해진 대학시절의 추억을 글로 간단히 표현하기도 그 이전에 비해서 더 힘들었고, 조금이나마 정신적인 준비도 필요하다고 느껴서 이렇게 계속 미루고 있었다.

이전의 졸업앨범에 비해서 대학의 것이 아주 생소하게 느껴지는 제일 큰 이유는 대부분 ‘생소한’ 모습들이라 그렇지 않을까? 앨범의 주인공들은 같은 학과가 아니면 사실상 전혀 모르는 ‘동문’ 인 것이다. 같은 학과라도 재학생과 복학생(민바리 vs. 군바리 라고 불렀다) 으로 갈라지고 거기다 나이차이까지 있다. 물론 여학생들은 조금 사정이 다르겠지만.. 그래서 대학 앨범을 자주 안보게 되는지 모르겠다. 특히 학교 내에서 활동을 안 하거나 하면 다른 과의 동문들은 이름도 모르고 졸업하게 된다. 입학 동기들의 얼굴은 교양학부의 과정에서 조금 익히고 나머지들은 채플 시간(연세대는 개신교 재단의 학교), 그리고 과외활동을 통해서 보게 된다.

후회스럽지만 나는 연세대학 시절, 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활동을 하나도 한 적이 없었다. 예를 들면, 학생회나 과외 서클(그때는 동아리라는 말조차 없었다) 같은 것들이다. 한때 전통 있는 교내 사진(동호회) 서클인 연영회 의 가입 모임에 가기도 했지만, 그 이후 전혀 나가지 못했다.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일초도 주저 없이’ 그런 것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하고 싶은 심정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대부분 대학시절의 ‘멋과 보람’을 학교 밖에서 찾으려 했고, 또한 결과적으로 ‘대부분’ 그렇게 되었다. 결혼 후에 ‘아내’ 연숙이 학교 내에서 많은 활동을 했음을 알게 되었고, 그런 교내 활동의 멋과 보람 같은 것도 충분히 실감 하게 되기도 했지만, 재학 당시 나는 그런 교내 활동은 그저 고리타분할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이번에 졸업앨범을 다시 보면서 그 오랜 세월 잊었거나 몰랐던 사실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비록 늦은 감도 없지 않지만, 지금이라도 알게 된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신문영 연세대 졸업사진, 1971년
신문영 연세대 졸업사진, 1971년

신문영, 정말 우연히 이 재동국민학교 동창을 이번 앨범에서 보게 되었다. 일부러 찾으려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어쩌다 보게 된 것이다. 신문영은 나의 지나간 재동국민학교의 추억 blog에서 이미 언급이 되었던 바 있었고, 그 후에 또 우연히 googling으로 다시 이 친구이름이 연세춘추(연세대 교내신문)와 연관됨도 알게 되었다. 아마도 재학 당시 연세춘추 교내 신문에 관련된 과외 활동을 했던 모양이다. 이런 일들은 대부분 문과대학생들이 하는데 어떻게 상과대학 생인 그가 그곳에 관련에 되었을까? 연대 입학 후에 제일 인상적이었던 것이 사실 이 교내 신문인 연세춘추였다. 내용도 그렇지만, 외모가 완전히 ‘현대식’이었다. 가로쓰기와 한글전용을 고수한 것이다. 아마도 최현배 님의 영향을 받아서 그랬지 않았을까? 나는 그렇게 남과 조금 다르고, 앞서가는 연세대의 일반적인 모습이 좋았다. 연세대 다닐 당시 (아마도 도서관이 아니면, 학생회관에서) 잠깐 신문영의 얼굴과 완전히 닮은 사람을 보았었는데, 이제야 100% 그의 존재가 이 졸업앨범을 통해서 확인이 된 것이다. 상경대학의 상학과를 다녔고, 연세춘추에 관련된 사진에도 그의 얼굴이 보였다. 1971년 졸업이었으니까 이 친구도 일년 재수를 했거나 휴학 같은 것을 했던 모양이다. 이제 유일한 의문은, 어떤 중,고등학교를 다녔나 하는 것인데, 그것을 알기는 조금 힘들지 않을까?

 

연세춘추 1970년 12월 7일자 headline

연세춘추 1970년 12월 7일자 headline

 

박종섭 연세대 졸업 사진, 1971년
박종섭 연세대 졸업 사진, 1971년

꽤 많은 중앙고 동창도 이곳에서 처음이나, 다시 보게 되었다. 대부분 재수 입학을 해서 보통보다 1년이 늦게 졸업을 하게 되는 듯 싶었다. 나처럼 1년을 휴학을 한 경우도 있을지 모르지만, 아마도 재수일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그 중에 경영학과의 이수열과 박종섭이 있다. 이수열은 나의 중앙고 3학년에 대한 blog에 이미 회고한 바가 있다. 졸업식 날 이수열과 같이 사진도 찍어서 사진도 남아있다. 이수열은 중앙고 3학년 때, 이과(理科)로 분반이 되어서 대입준비를 했는데, 어떻게 상경대로 가게 되었는지 모른다. 박종섭은 중앙고 3학년 때 우리 반이었다. 그러니까 역시 이과였는데, 어떻게 이 친구도 상경계열로 가게 되었는지? 특히 박종섭은 국민학교 때부터 나와 같은 학교를 다녔다. 재동국민학교, 중앙 중학교, 중앙 고등학교, 연세대학교, 그것도 졸업동기.. 이 정도면 참 우연치고는 대단하지 않을까? 그것에 비해서 우리는 한번도 친구가 된 적이 없었다. 그것도 참 대단한 인연이다. 박종섭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크게 성공한 동창, 동문이 되었다. 나중에 현대 반도체(Hynix) 의 사장이 되었으니 말이다.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났는지.. 확실치 않다. 그 이외에도 상학과 권세용, 정외과 구만환, 지질학과 윤병훈 등이 졸업앨범에서 반갑게 보이는데, 이들 역시 얼굴과 이름만 아는 정도다. 기계과의 김영철.. 중앙고 3학년 ‘반창’인데, 사실 연세대 재학 시 그를 본 기억이 거의 나지를 않는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이 친구도 세속적으로 표현해서 ‘대성공’을 한 친구로, 동국제강의 사장으로 일을 하고 있다. 중앙고 1년 후배들, 내가 1년을 휴학을 한 바람에 ‘동급생’이 된 친구들이다. 전기과 박창희, 김태일, 기계과 양규식 등… 박창희는 나의 죽마고우로써 후배라는 생각보다는 ‘불알친구’ 라는 생각뿐이다. 김태일, 재학 시 같은 클럽도 하며 친하게 지냈다. 양규식, 재동국민학교도 1년 후배인 활발한 친구, 역시 재학 시 학생회에서 맹활약을 했다. 학훈단(ROTC, 일명 바보티씨)을 거친 모범적인 청년이었다. 무슨 인연인지 오래 전 시카고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아마도 1976년 쯤이 아니었을까? 나중에 들으니 LA로 이사를 갔고, 지금도 거기서 ‘매일’ 동창들과 골프를 즐긴다고..

김상우(옛 김시영), 앨범 사진, 1971년
김상우(옛 김시영), 앨범 사진, 1971년

상경대 상학과 김상우.. 전혀 모르는 이름이다. 그런데 사진을 보고 금새 알아 보았다. 이름이 바뀐 것이다. 그는 중앙중학교를 나와 같이 다닌 김시영 이었다. 어떻게 이름이 바뀌었는지는 몰라도 얼굴이 안 바뀌었다. 중앙중학교 3학년 때 나의 다른 친구 이경증과 단짝이던 친구였다. 고등학교를 다른 곳으로 가서 바람과 함께 사라진 친구였다. 그런데 이렇게 졸업앨범에 ‘홀연히’ 나타난 것이다. 연세대 시절 사실 그를 캠퍼스에서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김시영이 김상우로 이름이 바뀌었던 친구다. 왜 이름이 바뀌었을까?

건축과의 장학근씨.. 64학번이라고 하니까 나의 2년 정도 연배인 셈이다. 어느 고등학교를 다녔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곳 아틀란타에 왔을 때, 이곳 연세대 동문회의 회장을 맡고 있었다. 그의 부인 장(피)영자 동문도 66학번 연세대 기정대 출신으로 나와 사실 입학 동기인 셈이었다. 학번이 거의 비슷한 연대 선배가 이곳에 같이 있다는 것이 반가워서 조금 가까이 지내려고 했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았다. 그런데 이 선배의 얼굴을 이번에 졸업앨범 건축과에서 보게 된 것이다. 이 장 선배는 이곳의 ‘유지’ 격에 속해서 신문에도 자주 나오고, 한인사회의 이곳 저곳에 많이 관여가 된 듯 싶었다. 그러니까, 결혼식, 장례식 같은 데서 꼭 이 장 선배를 만날 확률이 높은 것이다. 오래 전, 이곳의 다른 ‘유지’ 격이었던 김예순씨 (치과의사)의 장례식에서는 ‘울면서’ 조사를 하는 것도 보았고, 다른 연세대 동문 (박만용씨)의 장례식에서도 그를 볼 수 있었다. 전공(건축과)도 충실히 살려서 이곳 주택에 관련된 연방정부의 기관에서 일하고 있다고 들었다.

기계과 민옥기.. 이 사람의 이름과 얼굴을 나의 졸업앨범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은 정말 뜻밖이었다. Ohio State 다닐 때 그를 잠깐 보았다. 역시 같은 기계과에 있었다. 학교 기숙사 버스에서 가끔 보기도 하고 같은 공대라서 얼굴이 익었고, 연세대 피크닉에서도 보았다. 그것이 전부다. 동문이라서 웬만하면 조금 친해질 수도 있으련만.. 전혀 mutual chemistry가 없었을까.. 느낌이 그랬다. 나쁘게 말하면 ‘거만한 표정’ 일 수도 있고, 좋게 말하면, 그저 사람을 피하는 듯한 그런 사람이었다. 그 당시 나와 연세대 졸업동기라는 사실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 같은 기계과 출신 나의 친구 김호룡에게 물으니 ‘검정고시 파‘ 라고 기억을 하고 있었고, 그것이 전부였다. 아마도 연세대 재학 당시에도 그렇게 ‘행동’을 했었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김호룡이 간암으로 세상을 떴을 때, 뒤 늦게 그 소식을 확인하려고 이 사람에게 연락을 한번 해 본적이 있었다. 둘 다 연세대 기계과 교수단에 있어서 그리 한 것인데, 나를 전혀 기억조차 못하고 있었다. 나의 그에 대한 인상이 완전히 들어맞았다는 씁쓸한 기분이었다. 어떤 사람인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계속)

 

 

연세대학교 전기공학과 졸업앨범, 1971년

 

Mary Hopkin – Those Were The Days – 1968

그 당시 크게 유행하던 British Oldie, Beatles 의 Paul McCartney가 제작한 이곡은 역시 비틀즈의 Apple Record label 판매로  Mary Hopkin 의 debut곡이 되었고, 영국에서 1위 미국에서 2위까지 올랐다. 그 당시를 생각케하는 추억의 노래가 되었다.

Mary Hopkin – Goodbye – 1969

다음 해, 역시 비틀즈의 Paul McCartney 곡으로 Mary Hopkin의 두 번째 hit song이 되었다. 그 후에 다른 hit song 도 있었으나 우리들에게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1950년 생인 그녀는 그 당시를 풍미하던 세계적 fashion model이었던 영국의 TwiggyBeatles에게 소개 했다고 한다.

 

 

용기 형!

김용기, 형.. 형은 내가 서울 재동국민학교 6학년, 형이 경기고 2학년 때, 그러니까 1959년 봄, 우리 집에서 처음 만났다. 참 오래 전이었다. 6학년 학기가 시작된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가 용기형을 집으로 데려 온 것이고, 그날부터 나는 용기형과 함께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용기형은 그날부터 매일 우리 집에 와서 나의 학교 공부를 도와주는 나의 방문 가정교사가 된 셈이다. 그런 단순한 인연으로 만났던 용기형은 사실 그 후로 우리 가족에게도 거의 친척이상으로 가끔씩 왕래를 하며 지냈다. 우리들이 용기형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1966년 내가 연세대에 입학한 해였다. 그 후로는 완전히 소식이 끊어져서 우리 집에는 거의 ‘전설적’ 인물로 인상이 남게 되었다.

 그 당시 고등학교 2학년생으로 가정교사를 한다는 것은 그리 흔치 않았다. 대부분 방문, 입주 가정교사들은 대학생들의 몫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용기형은 불과 고등학교 2학년 생이었지만, 우선 내가 국민학생이기 때문에 큰 무리가 없었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대한민국의 제일 명문고교인 경기고등학교엘 다니고 있었기에 큰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용기형에게도 일을 해야 하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형의 가정형편 때문이었다. 고학생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경제사정이 그렇게 이상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왜 어머님이 그렇게까지 나에게 가정교사를 붙여 주셨는지는, 사실 그 당시 나의 학교 성적이 중하위에서 맴돌고 있었던 것이 제일 큰 이유였다. 5학년까지는 그런대로 나를 지켜보다가 6학년이 되고, 중학교 입시를 치러야 할 운명이 되었던 것이다. 그 후로는 점점 더 심해졌지만, 사실은 그때부터 이미 ‘입시지옥’이 시작이 되었던 것이다. 한창 놀기에 바쁜 그 시절이었지만 어찌 우리들이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할까? 하지만 어머님이 나의 공부를 돌보아 주기에는 너무나 바쁘시고, 누나도 사실 공부에 큰 관심이 없어서 우리 집은 나에게 공부를 분위기를 주질 못했다. 그러니까, 내가 혼자 열심히 한다고 해도, 주위의 ‘놀고 싶은’ 유혹에서 항상 벗어나질 못했고, 그것이 ‘시험위주’의 성적제도에서 항상 중 하위에 머물게 한 것이다. 용기형이 매일 방문 가정교사로 오면서 부터, 바로 옆에 ‘어린 선생님’이 붙어 있으니, 밖으로 뛰어나가 놀고 싶은 유혹에서 비교적 쉽게 벗어날 수 있었고, 곧바로 ‘공부의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때 처음, ‘노력을 한 만큼 결과가 온다’ 라는 간단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공부한 만큼 성적이 오르는 것이었다. 거의 매일, 하루에 몇 시간은 꼭 용기형과 같이 앉아서 공부를 하니 결과가 안 보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전쟁의 흔적이 조금씩 사라지고 나라가 조금씩 안정되던 그 당시부터 과외공부라는 것이 서서히 유행하기 시작했지만, 조직적이고 상업적인 학원 같은 것은 거의 없던 시절.. 하지만 나같이 개인적인 과외공부보다는 과외선생님 댁에 단체로 모여서 공부를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어떻게 보면 나는 예외적으로 행운아였을지도 모른다. 방과 후에 골목에서 뛰어 놀던 즐거움은 조금 없어졌지만, 용기형과 둘이서 그날 학교공부를 복습하며, 다음날 공부를 예습하는 것은 점점 즐거움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노력한 결과가 거의 그 다음날 시험에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6학년, 특히 우리 ‘박양신 사단’ 1반은 가히 시험 전쟁터의 현장을 방불케 해서, 다른 반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하루 ‘종일’ 시험의 연속이었는데, 아침 첫 시간부터 시험을 보곤 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 시험에 의해서 곧 좌석의 배치가 바뀌는, 가히 시험 지옥이었던 것인데, 이것은 우리 반 담임 ‘박양신’ 선생님만의 방식이었고 다른 반에서는 이런 방식을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니까 박양신 선생님의 ‘수험의 신’, 에 가까운 선생님이었고, 그렇게 일년 내내 우리는 단련을 받았다.

그 당시 이미 대한민국의 학교들은 대강 일류,이류, 삼류 등으로 ‘일본식’ 등급 (지금에야 깨달은 것이지만)이 형성되고 있었다. 예를 들면 대학교에서는 서울대, 연세대, 이화여대, 숙명여대, 고려대 등이고, 고등학교는 경기고,경기여고, 서울고, 이화여고,숙명여고, 경복고,용산고 같이 거의 서울에 있는 학교들이고, 지방에서도 경북, 경남, 대전, 광주일고 등과 같은 일류들도 있었다. 어떻게 이 같은 학교들이 일류로 평가가 되었는지는 대강 짐작이 간다. 고교는 일류대학에 입학하는 정도를 보면 될 것이고, 대학교는 취직시험에 합격하는 것을 보면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국민학교도 분명히 이런 등급이 있었을 것이다. 일류 중 고교에 합격하는 것을 보면 된다. 하지만 국민학교는 아직까지 별로 등급이 형성되지 않았다. 예외는 덕수 국민학교와 수송, 혜화국민학교였다. 어떻게 이 학교가 그 시기에 이미 일류로 되었는지 과정은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지리적인 여건으로 보아서 ‘부자 집’ 자녀들이 많이 이곳을 다니고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돈을 따라서 ‘좋은 선생님들, 수험의 신’ 들이 그곳에서 가르쳤을 것이다. 좌우지간 이들이 일류 중 고교에 입학하는 것을 보면 가히 입이 벌어질 정도였다. 이런 배경에서 내가 다니던 재동국민학교는 어땠는가? 일류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바로 밑을 맴돌고 있었고, 수험의 신 박양신 선생님이 우리 반을 맡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일류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박양신 선생님이 재동국민학교를 1류로 바꾸게 되는 것이다. 결국, 내가 졸업하고 몇 년 뒤에는 정말로 일류로 바뀌게 되었다.

 나는 학기 초에 성적이 딱 중간 밑을 맴돌았는데, 용기형과 같이 공부하면서 서서히 오르기 시작해서 나중에는 거의 10등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반에서 자리를 분단 별로 앉게 되는데 이것이 완전히 성적에 의한 배치였다. 1분단은 거의 10등까지 앉고, 다음의 20등까지는 2분단에 앉는 그런 ‘잔인’한 배치였다. 게다가 1분은 딱 가운데 앉혀서 남들이 ‘우러러’ 보게 만들어 놓았다. 이것의 잠재적인 심리적 효과를 누가 알겠는가?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자리의 변동이 그다지 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는데, 시험에 의한 성적이 그렇게 자주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용기형은 나와 ‘궁합’ 이 잘 맞아서, 제일 큰 목적이었던 나의 학교 성적이 오르고 해서, 우리 집에서는 아주 후한 대접을 받게 되었고,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형을 아주 친척같이 따뜻하게 대하곤 했다. 용기형은 절대로 얌전한 학생은 아니었다. 깡패와 같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그 정도의 ‘깡’은 가진 학생이었다. 용기형이 학교에서 공부를 얼마나 잘하는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그것은 문제가 아닌 것이 ‘대’ 경기고 학생이니까 그것 만으로 문제가 없었던 것이고, 이때 내가 배운 것은 공부뿐이 아니고, 사실은 조그만 교훈, 모든 일의 결과는 운이나 배경만큼, 노력에도 많이 좌우된다는 간단한 진리였고, 이것은 나중에 내가 사는데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같이 공부하면서 아직도 잊지 못하는 기억에는, ‘선거권, 피선거권 논쟁‘, 그것이 있었다. 학교에서 배운 것을 복습하며 이런 한자로 된 어려운 정치용어로 용기형과 싸운 것이다. 나는 분명히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것을 말했는데, 용기형은 그것이 아니라고 하는 논쟁이었는데, 누가 보아도 이것은 내가 학교에서 배운 것을 잘못 기억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논쟁’ 자체가 재미 있어서 내 고집대로 밀어 붙였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용기형의 ‘깡’을 몰랐기에 계속 ‘똥’ 고집을 부렸다. 결국에는 용기형이 완전히 이성을 잃고 말았다. 그러니까 자기를 무시 본다는 것이었고, 나에게 따귀를 계속 올려 붙였다. 그 당시는 학교에서도 잘못하면 따귀를 맞는 것은 흔했지만, 가정교사에게 따귀를 맞는 것은 절대적으로 이상한 노릇이었다. 내가 자기의 ‘고객, 학생’이라는 사실을 잠깐 잊었던 것 같았다. 나도 기가 막혔지만 이것을 집에다 ‘일러’ 바칠 수도 없었다. 그랬으면 그날로 용기형과의 공부는 끝장이 났을 것이고, 사실 관계도 끊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 그냥 조용히 잊고 지나서 말썽은 없었지만 나에게는 아직도 잊지 못하는 상처로 남게 되었다. 세월이 지났어도 용기형은 미안하다는 말을 한번도 하지 않아서 더욱 아쉬운 기억이다.

 나의 성적은 계속 1분단의 ‘제일그룹’ 을 유지했지만, 사실 나의 성적은 기복이 심한 편이었다. 거의 1~2등까지도 하는가 하면 갑자기 10위로 밀려나는 등 그런 식이었다. 이런 상태로 중학입시를 치르게 되었는데, 용기형은 경복이나 서울 중학교에 응시하라고 했지만 담임 선생님은 아주 불안한 표정이었다. 나도 사실 ‘모험’을 하는 것이 싫었다. 안전한 것이 좋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가까운 곳에 있는 사립 중앙중학교에서 무시험으로 들어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서 그리로 가버리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정원의 반 정도를 졸업성적만으로 뽑던 제도가 있었다. 시험 지옥에서 쉽게 벗어난 것만 해도 나는 너무 기뻤다. 하지만 역시 용기형이나, 어머니는 두고두고 불만이었다. 어찌 안 그렇겠는가? 내가 속했던 1분단의 다른 녀석들이 대거로 경기, 서울,경복중학교에 합격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나 자신은 후회가 없었다. 재수를 할 가능성보다는 조금은 안전한 것이 편했던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중학교 입시에 재수생은 거의 없었던 시절이었다.

용기형과 가회동 집에서, 중학교 1학년때 1960년 쯤
용기형과 가회동 집에서, 중학교 1학년때 1960년 쯤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용기형은 가끔 놀러 왔고 고궁 같은 곳에도 같이 가족과 놀러 가기도 했다. 중학교에서 나의 성적이 좋아서 용기형도 안심하는 듯 했다. 어떨 때는 어머니가 용기형에게 나를 데리고 영화를 보게도 했는데, 그런 시간들이 나는 너무도 즐거웠다. 나에게 형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용기형과 대한극장에서 ‘백사의 결별‘ 이라는 요란한 제목의 미국 영화를 보았는데, 로버트 밋첨(Robert Mitchum)과 데보라 카(Deborah Kerr)주연의 2차 대전 영화였는데,그 것을 보면서 내가 하도 형에게 질문을 해서 조용 하라고 핀잔을 받기도 했다. 한번은 용기형을 따라서 경기고교 강당에서 프랑스의 영화,”장 가방(Jean Gavin)” 주연의 ‘잔발잔(Jean Valjean)’을 같이 보았는데, 그 당시 경기고등학교는 정말 부자여서 없는 것이 없었고, 심지어 극장수준의 영사기까지 갖추고, 가끔 영화, 그것도 외화를 학생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용기형은 내가 중학교 2학년(1961년) 때, 경기고를 졸업하고 대학엘 갔는데, 예상을 뒤엎고 서울대가 아닌 고려대엘 갔다. 왜냐하면 경기고생은 거의 서울대를 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더니 그 이듬해 연세대 정외과로 편입을 했는데, 사실 편입이었는지 아니면 새로 신입생으로 입학을 했는지 확실치 않다. 그러는 과정에서 나는 어렴풋이 형이 대입준비를 하는 과정을 옆에서 보게 되어서, 두고두고 나중에 내가 대입 준비할 때 도움이 되었다. 그 당시의 입시 문화는 거의 100% 일본식이었을 것이다. 입시준비 잡지도 있었는데, 용기형 시절에는 ‘향학‘ 이란 국내 유일의 입시준비 잡지가 있어서 나도 옆에서 훔쳐보기도 했다. 그때 느낀 것이 대학입시라는 것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 정말 ‘전쟁’이었다. 몇 년 뒤에 그 잡지는 없어지고, 새로 ‘진학‘이라는 제목으로 내가 고3때 나왔다.

 그러다가 내가 중앙중학교 3학년(1962년)이 되고, 고교 입시가 다가 왔을 때, 어머니는 다시 용기형을 부르셨다. 나의 학교 성적이 문제가 아니라, 이번에야 말로 ‘일류’ 고등학교로 가기를 원하신 것이다. 나는 그럴 마음이 없었지만, 다시 같이 공부를 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3년 전과는 아주 달랐다. 용기형은 이미 대학생(연세대 정외과)이 되었고, 나도 이미 꼬마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전과 같은 열기는 사라진 것 같고 공부에 불이 붙지를 않았다. 결과적으로 나는 ‘안전’하게 본교로 진학하기로 결정을 해 버렸다. 이런 나의 결정은 후에도 별로 후회를 하지 않았다. 이미 나는 사학의 명문 중앙에 정이 흠뻑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에도 용기형과 의 왕래는 가끔이지만 끊어지지 않았다. 용기형은 언제나 자신의 포부를 숨기지 않았다. 외교관의 꿈인 프랑스 파리에 가는 것이었다. 그 당시만해도 외교 계는 프랑스의 전통적인 입김이 강했다. 꿈이 있고 계속 좇으면 언젠가는 이루어 진다고 믿었다. 우리는 모두 믿었다.언젠가는 유명한 국제적인 외교관이 될 것이라고 (요새로 말하면 반기문 같은)..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잠시나마 용기형이 우리 집에 입주해서 나를 가르치던 시기가 있었다. 기억에 아주 짧았던 기간이었지만, 나와 같이 자면서 공부한다는 것은 참, 흥미로운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도 용기형은 ‘가르치는’ 데는 이미 김이 빠져있었다. 별로 열기가 없었던 것이다. 학교공부보다는 인생공부를 많이 한 셈이었다. 나는 몰랐지만 그 당시 용기형은 연세대에서 데모를 주동하는 ‘정치 학생’으로 변하고 있었다.

 내가 연세대에 입학을 하면서 이제는 학교에서 만나겠구나 생각을 했지만 용기형은 그곳에서 만날 수 없었다. 그리고 소식이 완전히 끊겼다. 용기형은 우리 집에 연락을 하지 않았다. 어머님은 그 이후 항상 ‘얘, 혹시 용기가 죽은 것 아닐까?’ 하시곤 했다. 왜 그렇게 생각을 하셨는지는 이유를 모른다. 그리고 세월은 아주 길게도 흘렀고, 1999년 초쯤에 인터넷의 Yahoo! 같은 search engine과 학교 동창회의 website등을 통해서 별로 기대를 하지 않고 용기형을 찾아 보게 되었다. 운이 좋게 연세대 동창회에서 용기형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고, 전호번호까지 얻을 수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개인정보’에 대한 보안이 심하지 않아서 가능했던 것이다. 곧바로 어머님께서 그 전화번호로 용기형과 이야기까지 하셨다. 전화번호는 한국산업정보센터 라는 곳이고 용기형은 그곳에서 고문으로 일을 하셨다. 나와는 곧 바로 email로 소식을 주고받았다. 사실, 나도 어머님과 같이 용기형이 ‘죽지나’ 않았을까 걱정을 하던 참에 소식을 들은 것은 너무도 반가운 일이고, 옛날의 추억들이 밀물처럼 나를 덮쳤다.

 email에 있는 사연은 간략하지만 그것으로 대강 용기형의 ‘일생’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역시 60년대 중반에 데모주동으로 몰려서, 군대로 ‘끌려’ 갔고, 복학 후에는 그런대로 ‘조용히’ 직장생활을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프랑스, 파리의 외교관이 되는 꿈은 접은 듯 했다. 용기형 말씀이, 그런 꿈들을 이루지 못해서 연락을 계속 미루었다고, 참 순진한 말을 곁들였다. 고시공부, 동아일보 입사, 국세청 장기 근무, 대경기계 창업, 한국산업정보센터 고문 등으로 이어지고 결혼을 해서 딸, 아들을 두었는데, 따님은 결혼을 해서 미국 LA에 살고, 작은 아들은 그 당시 (1999년)에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용기형의 부인과도 잠깐 전화로 인사를 드렸는데, 까마득한 옛날에 ‘가르쳤던 제자’라고 알고 계셨다.

 하지만 세월의 횡포는 그렇게 그립던 생각을 곱게 보지 않았다. 너무나 긴 세월이 흐른 것이다. 어머님께 인사를 드리러 온다고 약속을 한 모양이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나에게도 다시 연락을 주지 않았다. 우리가 용기형을 생각하고 안부를 걱정한 것과 같은 정도의 생각을 우리는 용기형으로부터 느낄 기회조차 없었다. 이것은 한마디로 세월의 장난일 것이고, 누구를 탓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아름답게 추억으로 남겨놓을 것이 있으니 큰 문제는 없다. 연락이 된 후 10여 년이 또 흘렀으니, 용기형도 나이가 거의 70세로 육박을 하지 않았을까? 부디 건강한 후년을 즐기는 용기형의 모습을 간직하고 싶다.

 

아.. 윤용하(尹龍河) (교우)님이여

1972년 경향잡지, 윤용하 교우님에 대한 기사
1972년 경향잡지, 윤용하 교우님에 대한 기사

아주 우연히 옛날 옛적의 대한민국의 유일무이한 가톨릭 월간 , 1972년 8월호를 인터넷으로 보다가 귀에 익은 노래제목이 눈에 띄었다. “보리밭 사잇길로..” 였다. 물론 이것은 그 당시 대중 유행가로 불렸던 가곡 가사의 첫 부분이었다.

흔히 말하는 유행가가 아니고 오래 전에 작곡이 되었던 가곡을 인기 여가수 문정선씨가 유행가로 편곡이 된 것을 부른 것이 그 당시 크게 인기를 얻었던 것을 생생히 기억한다. 이 경향잡지 기사의 제목은 사실 “복음의 증인들” 이라는 연재 기사로서 제목은 “보리밭 사잇길로: 작곡가 윤용하(요셉) 일대기” 였다. 그러고 보니 작곡가 윤용하(尹龍河) 라는 이름이 조금은 기억이 나는 듯 했다.

우선 이분이 나와 같은 천주교 신자였다는 사실이 뜻밖이었다. 그래서 우선 반가웠던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무엄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 문득, 윤용하 형제, 교우님” 이라고 부르고 싶어졌다. 이 잡지 기사는 그다지 길지 않지만 ‘일대기” 라고 부제를 부칠 정도로 이분의 전체적인 일생을 간략하게 묘사를 해 놓았다. 이 기사는 아주 엄숙하고 심지어 처절하게 시작을 한다.

 

예술가는 가난했다.
찢어지게 가난하면서도 빈이무원(貧而無怨) 가난을 원망하지 않고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그 처참한 곤비(困憊) 속에서도 신앙과 순수와 낭만을 지킨 작곡가 윤용하(尹龍河, 요셉)는 죽어서 이름을 남겼다.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으면 이렇게 일대기가 시작되었을까? 1922년에 태어나고 1965년에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43년을 사신 것이다. 이것은 그 당시 기준으로 보아도 너무 일찍 가신 것이라 우선 가슴이 아프다. 그 당시를 살아본 경험은 그 당시 가난하고 병이라도 있으면 참 불운한 생을 보내야 했을 것이라는 것,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분도 과음으로 인한 간경화로 돌아가신 듯 한데, 왜..라는 것보다는 어찌 그렇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더 들 정도로 이해를 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얼마 전에 나의 blog에 썼던 이진섭씨에 관한 글이 생각났다. 이진섭씨도 술로 인해 명을 다 채우지 못하시고 가신 것이다. 나이도 비슷하니 비슷한 격동기를 사신 분들이어서 자꾸만 여러 가지로 비교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두 분의 인생, 일생은 너무도 달랐다. 그 두 인생은 어디에서 왜, 어떻게 바다와 같이 넓게, 멀어져 갔을까?

 이 기사를 읽으며, 나는 너무도 안타깝고 나중에는 답답한 심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돌아가신 후 세월이 지나면서 더 알려지게 된 것도 그렇다. 사후의 그런 때늦은 ‘예술가로서 인정 받음’을 왜 생전 시에는 못 받았을까? 그랬으면 그렇게 가난과 싸우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더 오래 사시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안타까움이 나를 괴롭혔다. 그래서 더 이 불운의 ‘천재’ 예술가에 대해서 알아보게 되었는데.. 바라는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이규태 조선일보 논설위원은 그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집으로 찾아가서 본 것을 이런 글로 남겼는데 흡사 천재작곡가 모차르트의 죽음을 보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 윤용하가 40대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는 부음에 접했다. 보도의 필요성에 쫓겨 빈소를 찾는 데 신문사의 기동력을 동원했지만 한 번지에 수천 호가 잡거하는 판자촌인지라 이틀을 넘겨서야 찾을 수 있었다. 이 천재가 누워 있는 곳은 판잣집도 못 되는, 종이상자를 뜯어 여민 단칸방의 거적 위였다. 미의 순수한 응어리가 저렇게 이승을 마칠 수 있었던가 가 원망스러웠던 세 번째의 만남이었다.

 이 천재적인 수준일지도 모르는 예술가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그렇게 상세하지를 못하다. 아마도 그를 알고 지냈던 인물들 대부분이 일말의 책임감을 조금이라도 느껴서 밝히기를 꺼려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물론 각자의 운명은 우선 각자 자신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 하지만 환경적인 것도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 예술가가 다 가난했던 것도 아니고, 가난했다고 다 병들어 죽는 것도 아니다. 숙명, 신앙, 순수, 낭만.. 이런 것들 만이 과연 불우한 삶을 마칠 수 밖에 없었던 윤용하씨의 대명사가 될 수 있을까? 다음의 음악 평론가 이상만씨의 글은 나를 다시 더 슬프게 한다.

얼마 전 그의 유족들이 보관하고 있던 그의 비망록을 살핀 일이 있다. 300원 500원,… 거기에는 만년에 그가 폐인 되다시피 하여 이곳 저곳 구걸하러 다닐 때에 추념을 해 주었던 사람들의 이름과 액수가 적혀 있었다. 대부분 동료 음악인들의 이름이 거기에 적혀 있었는데, 어떤 어떤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가 하는 호기심보다도 그 비망록이 그렇게 소중하게 간직된 까닭이 사뭇 나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다. 친구들의 신세를 졌지만 그 신세 갚음을 잊지 못하고 눈을 감은 사람이 윤 용하였다.

 위에 언급한 1972년 가톨릭 경향잡지의 기사를 보면 다른 각도로 본 님의 불우한 생의 마침을 보게 되어서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이 당시 자녀들은 나이가 몇 살이었을까? 아마도 어렸을 듯 한데, 그들을 두고 떠나야 하는 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누가 보아도 용하의 병색은 완연하였다. 용하가 간장질환으로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당시의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가 그를 성모병원에 입원시킬 생각으로 성모병원의 의사를 그의 필동 셋방살이 단칸방에 보내었으나 이미 때가 늦어 치료를 받아도 회복될 가망이 없었다. 용하는 입원되는 줄 알고 좋아했는데 앰블란스가 그냥 돌아가는 것을 보고는 크게 실망하더라고 한다.
병상에 누운 지 3개월, 최 모이세(광연) 신부에게 최후의 성사를 본지 사흘 만에 아내와 어린 남매를 두고 조용히 운명하니 1965년 7월 23일이었다.
26일엔 명동 대성당에서 영결 미사를 지내고 금곡리 천주교 묘지, 먼저 간 그의 부친 무덤이 마주 보이는 곳에 안장되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보면 아무리 님의 음악에 대한 재능과 열정, 공헌을 높이 사고 싶어도 가정적으로 한 가장으로써는 완전한 실패인 인생일 것이다. 다음과 같은 윤용하 평전을 읽으면 한층 그런 나의 생각이 굳어진다. 

윤용하, 그는 태어나서 한번도 그의 소유로 된 집을 가져본 일이 없다. 운명하는 순간에도 남산 중턱 움막판자집 단칸셋방이 이승의 마지막 현주소였다. 그는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을 등진 후 유전만을 거듭했을 뿐, 다시는 한번도 고향 땅을 밟아보지 못한 실향민이었다. 그는 장남으로 태어나 철이 들면서 부터 부모와 다른 오 남매 동생들과 더불어 함께 한 일이라곤 없는, 그가 살다간 시대만큼이나 불행한 유랑인 이었다.
그가 명색이 작곡가라면서 생전에 자신의 작곡 집 한번도 내보지 못한 부실한(?) 예술가였다. 그는 모든 것을 술로 풀어버리려고 술에 함몰 당해 부인마저 집을 나가버릴 정도로 초탈한 생활무능력자였다.

 

 이렇게 아주 듣기에 거북할 정도의 냉정한 글도 모두 사실일 것이다. 본인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을 것이고 그러다 술로 모든 것을 잊고 싶었을 것이다. 이해는 가지만 절대로 찬성을 할 수 없는 생활방식이 아닐까? 그런 환경에서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아야만 했을까? 아닐 것이다. 나의 어머님도 육이오 때, 남편을 잃고 우리 집 두 남매를 여자의 몸으로 다 키우셨다. 그것은 아마도 우선가정을 지켜야겠다는 책임감이 제일 크게 작용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렇게 재능을 가시셨고 음악계에서 활동을 하셨던 분이 그렇게 경제적으로 가정을 지키지 못하고 끝내는 자신까지 희생을 해야만 했던가? 이것은 정말 비극중의 비극이다.

 이렇게 거의 체념과 체질에 밴듯한 ‘가난의 생’은 아마도 님의 선조들로부터 물려 받은 유산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님의 부친 대에 이르러 대원군 당시의 천주교 박해를 피해서 심심유곡(황해도 구월산)에서 옹기를 구워가며 살게 된 것을 보면 짐작이 간다. 신앙을 고수하려는 천주교 신자들의 모습인데 어찌하여 이들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겠는가? 이런 불안한 환경 속에서 자란 님은 사실 이때부터 ‘떠돌이’ 기질이 배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시 이진섭씨와 같이 술을 ‘통제’ 못한 것은 결국 병과 일찍 타계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다음 글을 보면 그의 시대, 울분, 신앙심 등이 조금 짐작이 간다. 

그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가 삶을 회고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그의 ‘신앙’과 ‘작곡’과 ‘술’ 이었다. 그가 살던 시대가 시대인지라 그가 막걸리를 들지 않는 날은 이상한 날로 꼽힐 만큼 현실의 불만이나 불우한 처지를 술로 달래며 기염을 토하곤 하였다. 그는 안주 없이 술을 마시는 걸로 유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술을 아무리 마셔도 주정을 하지 않고, 마실수록 조용해지고 수줍어지는 것이 그의 특징이었다. 하지만 술로 인해 자신의 신앙 생활을 게을리 하지는 않았는데, 사순절 기간인 40일 동안만은 술을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던 사실로 그의 신앙심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천주교 신앙을 죽을 때가지 간직한 윤용하 교우님, 교회 음악에도 관심을 가지시고, ‘조선인’들의 음악 활동을 그 어려운 때 만주에서 조직, 활성화하려고 노력을 하였는데, 이것을 보면 그의 ‘저돌적, 동키호테적’ 인 면모가 엿보인다. 그래서 그는 역시 ‘어쩔 수 없는 ,자유인 예술가’ .. 그것이 아니었을까? 일반적인 ‘사회란 굴레’에서도 못 견디었을 자유인..그런 그가 어떻게 ‘학벌과 연줄’이 판을 치던 곳을 술 없이 견딜 수 있겠는가? 다음의 글을 보면 그 만의 ‘졸업장’에 대한 독특한 고민을 볼 수 있다. 

광복 직후 나라가 새로 세워지면서 모든 분야에 인재들이 필요했다. 인재들을 키워낼 고급 인재들은 더욱 모자랐다. 그래서 중.고등학교 졸업장과 대학 졸업장이 공공연히 돈으로 거래되었다. 많은 동료가 그 길로 갔고 그들은 용하 형에게도 그 길을 권했다. 그는 거부했다. 초등학교 5학년 중퇴가 그의 정규학력의 전부였고 그래도 그는 그의 천부적 재능으로 10대 말의 나이에 이미 어엿한 작곡가이자 방송국 교향악단 지휘자의 경력을 쌓았다. 대학교수가 되어 가르쳐야 할 그에게 세상은 초.중.고등학교와 대학 졸업장을 요구하고 그것도 부정한 방법으로 구해 오도록 강요했다. 예술적 재능과 노력보다는 학력과 졸업장 그리고 연줄이 더욱 위력을 발휘하는 풍토에서 그는 변두리로 변두리로 밀려났다.

휴전 직후 문화예술인단체의 3.1절 기념식장 소동도 상징적 사건이었다. 내로라하는 문화예술계의 거물들이 기념식을 마치고 다과회를 열고 있었다. 하필 그들은 그날 그 자리에서 일본말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떠들었다.

이미 술이 거나해 있던 용하는 “예끼, 이 똥만도 못한…”이라 고함을 지르면서 테이블을 뒤집어엎어 수라장을 만들어 놓고 휑하니 사라졌다. 그러니 그는 발붙일 곳이 없어졌다.

 

윤용하 님께서 젊은 시절 활약할 당시의 ‘조선 음악인’들은 거의 현재 한국의 음악계를 주름잡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님의 재능을 한결같이 인정을 하고 있다. 특히 제일 가까이에서 ‘자랐던’ 오현명씨의 증언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역시 거의 드라마에 가까운 비극적인 이 ‘인생 역마차’ 는 어떻게 생각하여야 할까? 한 사람은 남산 중턱의 번지 없는 판자집에서 치료 제대로 받지 못하며 젊은 나이에 요절을 하고, 다른 사람은 대한민국 음악계의 중심에서 ‘건강’하게 활약을 하는 이런 것이 현실이었다니.. 물론 그이 주변에서 ‘도움’을 주셨을 분이 있었을 것이라고 믿고 싶지만, 그래도 어떻게 이렇게 생을 마치도록 내버려 두었을까?

 

 

노래는 즐겁다 – 윤용하 작곡

 물론 ‘보리밭’이라는 유명한 가곡을 남겼지만, 그것보다 나는 이분이 동요 <노래는 즐겁다>의 작곡자라는 사실을 알고 더욱 더 이분을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들이 국민학교를 다니던 1950년대, 전쟁 후의 황량하던 그 어린 시절, 이런 추억의 동심 어린 아름답고, 주옥 같은 노래를 남겨주신 것이다. 그 당시 우리들, 이 동요를 부르고, 들을 때면 정말 그야말로 즐거운 마음이 되었다. 그리고는 어떠한가? 광복절만 되면 이 노래를 열심히 도 불렀다. 누가 작곡했는지도 모르고.. <나뭇잎 배>란 동요도 기억을 한다. 여자아이들이 즐겨 불렀던 것이라 나는 그다지 부르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아내 연숙에게 물어보니 아주 애창곡이었다고.. 덧붙여 ‘심각한 가곡’ 인 고독’이란 가곡도 들어 보았다. 어떻게 이런 곡이 그 동안 숨어있었을까?

1965년에 돌아가셨는데, 세월은 님을 역시 알아보게 되었고, 2005년에는 ‘윤용하 기념사업회‘ 까지 발족이 되어서 역사에 남게 되어서 그 동안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아가게 되는 모양이다. 가실 때가지 간직하신 신앙이 자랑스럽고, 남겨주신 주옥 같은 동요, 가곡들도 자랑스럽다. 천국에서도 이런 것을 아시고 조금이나마 만족을 하시리라 생각하며 다시 한번 님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