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청년대회, WYD 2011 Madrid, Spain

World Youth Day 2011 Madrid, Spain
World Youth Day 2011 Madrid, Spain

WYD: World Youth Day .. 이것이 한국어로 “세계 청년 대회” 라는 것을 오늘에야 알았다. 조금은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1984년에 시작된 이 세계적인 가톨릭 행사를 이제야 이제야 관심을 가지고 ‘보고 듣게’ 된 것이 나로써는 조금 늦은 감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라도 이렇게 관심이 가고 알게 된 것도 다행이라고 위안을 한다.

올해 이것에 관심을 가지고 ‘기다린’ 것은 사실 여러 가지의 원인이 함께 도움이 되었다. 이 행사가 시작된 것은 다름이 아닌 내가 제일 신앙적으로, 인간적으로 존경하는 전 교황,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이시다. 그는 어떻게 이런 행사를 생각을 하고 실행을 했을까? 희망은 역시 젊은이들에게 있다는 ‘절박한 진리’ 때문이었을까? 믿음 하나로 공산주의를 꺾고, 인류의 꺼지지 않는 희망의 등대였던 그.. 진정한 범 세계적인 세계인, 지도자.. 그가 남긴 유산 중에 가장 오래 갈 것은 바로 젊은이의 등대인 이 행사가 아니었을까? 희망은 역시, 역시, 젊은이들에게 있다는 것이 바로 진리이다.

지독한 피상적인 물질주의와 인기, 인본주의에 찌들은 요새의 유행문화를 어찌 그들, 젊은이들이 피해갈 것인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nano-second, 찰나의 기쁨을 추구하려는 그들에게 어떻게 누가 무엇이 장차 그들 앞에 다가올 현실일까를 가르쳐 줄 것인가? 허무.. 허무 뿐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이 행사의 전개되는 것을 보니 조금은 요새 보기 드문 희망이 보이기도 한다.

 세계적으로 오십만 명 이상이 온다는 것은 장난이 아니다. 정말 그들이 어떤 것을 느끼고 보고 갈 것은 크게 추측을 할 필요도 없다. 그들의 인생을 바꾸기도 할 것이다.그들이 어떻게 이 세상에 ‘이바지’ 할 지는 크게 의심할 필요도 없다. 잠깐 잠깐, 상상과 꿈의 나래를 피어본다. 내가 20대 초반의 옛날로 돌아가서, ‘반종교적’ 이던 나의 그때와는 달리, 가톨릭 신자로써 이곳에 참가를 한 그런 꿈이다. 수십만  명의 ‘동료’, ‘친구’, 젊은이들을 보며 그들과 그곳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서 존경하는 교황을 직접 듣고 본다는 꿈.. 그때 느낀 것들을 두고 두고 생각하며 나의 젊은 인생을 시작한다면.. 나의 인생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물론 어려운 위기도 많이 겪었겠지만.. 분명히 내가 가는 길에 대해서는 필요이상 방황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조금은 덜 외로웠을 것이고, 최소한 ‘인생의 (최후의) 목적’ 만은 알고 살았을 것이다. 나아가서 내가 추구했던 이상, 전문적인 일들, 가족들과의 관계도 조금은 덜 후회를 남게 하지 않았을까?

 이런 꿈에서 깨면 을씨년스러운 현실로 돌아온다. 나를 성당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려고 십 년이 넘도록 기도하며 도와 주었던 우리 식구들, 연숙과 두 딸들.. 그런 10년이 넘는 기다림 끝에 나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두 딸들이 떠났다. 이번에는 나와 연숙이 그들을 기다리며 기도를 하게 되었다. 이것이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왜 우리 두 딸들은 그렇게 ‘야멸차게’ 성당을 떠나야만 했을까. 그런 나이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를 하지만 이렇게 WYD같은 세계적인 행사를 보면서 참 안타까운 것이다. 왜 우리 두 딸들이 그 속에 있지 못한 것일까? 왜 그렇게 쉽게 세속문화,찰나 문화에 빠져야만 할까? 기다려 본다. 나 같이 남을 그렇게 오래 기다리게 한 case도 있지 않은가?

 이번 미국에서 가는 청년의 수는 무려 2만 여명으로 사상 최대이고 한국에서도 천 여명 이상이 참가한다. 내가 사는 이곳 아틀란타 대교구에서도 백여 명 이상이 참가를 한다고 이곳 가톨릭 신문에서 보았고 그 중에는 우리 한국본당,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여대생도 있었는데, 예쁜 얼굴의 Georgia State University 학생이라고 했다. 성당을 떠난 우리 두 딸만 보다가 이런 ‘다른’ 젊은이들을 보는 것이 요새는 나의 ‘낙’이 되었다. 거의 흡사 무슨 ‘젊은 성인들’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인 것이다. 지난 6월 달, 이곳 아틀란타 한국본당의 레지오 피정에서 그런 젊은 성인’들을 나는 room-mate로 직접 가까이 보기도 했다. 그들의 부모들은 우리와 다르게, 어떻게 ‘신앙교육’을 시켰던 것일까? 그들 부모들이 그 들에게 어떤 role-model로 비쳤기에 그렇게 ‘모범적’이었을까?

한국 주교회의 웹사이트에 따르면, ‘세계청년대회, WYD: World Youth Day‘는 다음과 같이 요약이 된다.

세계 각지에 있는 가톨릭 젊은이들이 2년 또는 3년에 한번 개최 교구(도시)에 모여 그리스도교의 가치를 확인하면서 함께 축제를 지내는 모임이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젊은이들을 격려하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 속에 살게 하고자 개최한 젊은이들의 축제이다. 1984년과 1985년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로마의 성 베드로 광장으로 세계의 젊은이들을 초대하였다. 그 뒤 1985년 12월 20일, WYD 협회를 구성, 1986년에 처음으로 공식 WYD가 열리게 되었고 1987년에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두 번째 WYD가 개최되었는데 이로써 2년 또는 3년 만에 개최하는 정기적인 국제 대회가 되었다.
세계 곳곳의 많은 나라에서 모여 온 젊은이들은 가톨릭교회의 가치인 보편성과 다양성을 확인하며 함께 어우러진다. 젊은이들은 그들의 신앙과 경험을 나누고, 자기들의 고국에 그리스도의 가치인 사랑과 평화를 전파할 수 있는 활기를 얻는다.
또한 서로 자기 나라의 문화를 소개하고 다른 문화를 이해하게 되는 기회를 자연스럽게 갖는다. WYD는 세계 도처에 평화와 상호 이해의 정신을 표현하는 대회이다. 젊은이들은 자기들의 나라와 지역의 깃발을 흔들 때, 깊은 공감을 맛보며 이 체험 속에서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한다.

 

 

Bozos from Marietta Power

It was so amazing, hilarious, then frustrating and finally angry. Yesterday, while driving home with Yonsook from Tuesday regular Legio meeting at the church, Janet called the power went out at home around 2 pm. Probably another Rosewell road widening construction disrupted neighborhood power, we guessed it would last a hour again. My concern was more with home-servers than usual inconvenience. Thanks to the a bit cooler weather, a/c was not the primary concern this time.

Arriving at near our garage drive way, though, we found a few Marietta Power crew were working at the ‘box’ (transformer). That’s was the reason! They apparently did bother to give us any advance notice, which is probably ok if they figured, or estimated the outage would be reasonably short. One of the crew even let us know it would be around 20~25 minute thing. I thanked them for letting us know even now.

Now, hot afternoon made us very uncomfortable inside the house, but their 20 minute thingy becomes almost 4 hours now.. hmmm.. What’s going on? Looking outside.. well.. it’s quiet.. they’re gone! The day’s work apparently was done. Checking my next neighbor’s a/c units.. they’re humming very nicely! What’s happened? Only my house was without power still yet! Now, I am almost certain those bozos were so eager to call it day, headed home for dinner without turning power switch back on only for our house! This was almost like another small Kafka moment for the day (among others). Called ‘amazing’ Marietta Power, only recorded message welcome their ‘frustrated’ customer after hour. Luckily Janet managed to connect to a ‘real human’, got assured ’emergency crew’ is on the way in 45 minutes. A monster truck rolled in, the crew initially couldn’t believe the story we told them.. why not? It was so unbelievable, even hilarious! They did not turn the power switch back before closing the transformer box. Thanks, for nothing, Marietta Power!

 

‘알피 램’ 생애를 읽으며..

알피 램 생애, 전설적인 레지오 선교사
알피 램 생애, 전설적인 레지오 선교사

지난 6월 28일부터 읽기 시작한 <알피 램 생애> 란 소책자 (136쪽)를 이제 거의 다 읽어 간다. 마지막 20쪽이 남았다. 이것도 RbT: Reading by Typing 의 방법으로 읽고 있어서 사실 눈으로만 읽는 것에 비해 시간이 더 걸리는 셈이지만 대신 아주 자세히 읽게 되는 이점이 있다.

이 책은 연숙이 2009년 12월 6일, 아틀란타 본당소속 꾸리아 연말 모임에서 꾸리아로부터 선물로 받았다고 한다. 물론 그 당시는 나의 관심 밖이어서 이런 책이 있었는지도 몰랐지만, 알았다고 해도 큰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운명의 장난으로’ 지난해 말에 내가 레지오에 입단을 하면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이렇게 꼼꼼히 읽을 정도로 관심이 생긴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알피 램이란 사람이고, 알피 램(Alfie Lambe) 의 알피(alfie)는 알퐁소(Alfonsus) 의 애칭(nickname) 이다. 알피 램은 간단히 말해서 레지오에서는 거의 신화적인 존재라고 한다.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로 라틴 아메리카에 레지오의 ‘돌풍’을 일으킨 사람인 것이다. 다른 말로 그는 더블린에 있는 세계 레지오 본부에서 파견된 레지오 선교사라고 하면 쉽게 이해가 갈 듯하다. 특히 6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영웅적’으로 활동을 하다가 역시 젊은 26세의 나이에 선종을 해서 레지오에서는 거의 ‘어린 성인’ 같은 존재로 남은 것이고, 이로 인해서 성인으로 가는 ‘복자 추대’ 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알피 램이 활동한 시기가 1953년부터 선종한 때인 1958년까지였다. 그러니까 내가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해 부터 국민학교 5학년 때까지가 된다. 그렇게 오랜 전의 이야기인 것이다. 이 책이 나온 배경은 아직 자세히 ‘연구’를 못해서 잘 모르지만 원래 ‘힐데 퍼텔’이란 저자가 영어로 쓴 것을 북미주 레지오 교육협의회장 ‘조, 율리오’ 란 사람이 한글로 번역을 해서 대한민국 광주에 있는 ‘새날출판사’란 곳에서 간행을 한 136쪽의 소책자인데, 내용은 그런대로 ‘이해’를 했지만 거의 다 읽고 난 감상은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니었다.

이 책의 내용은 나중에 간추려서 blog으로 소개하겠지만, 여기서 감상이 좋지 않다는 것은 내용이 아니라 이 책의 기본적인 ‘자격’에 관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번역자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독자를 거의 우롱하는 듯’한 인상을 받을 정도로 ‘조잡한 번역‘으로 일관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출판사의 실수, 잘못인지 번역자의 잘못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아예 이 상태로서 출판이 되어서는 안 될 정도인 것이다.

그래서 조금 생각한 것이, 머리말에 ‘번역 봉사’란 말이 나오는데.. 이것이 무슨 뜻인가.. 번역자가 번역을 한 것이 아니고 이 봉사자들 여러 명이 함께 했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조금은 이해가 간다. 수준 이하의 ‘직역 체’ 번역에다가 각 단원의 문체, 용어, 문단의 구성도 다른 것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발행 년도가 2003년이면 초고, 원고를 분명히 computer의 word processor로 편집을 했을 것이고, 그러면 거의 자동적으로 spelling checker가 틀린 것을 지적했을 터인데 아예 그런 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인쇄소로 넘긴 듯하다.

읽는데 하도 신경이 쓰이고 해서, 아예 모두 ‘내가 고친’ 것으로 다시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어떻게 이런 글이 ‘출판사’의 ‘검열’을 통과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레지오에 ‘누’를 끼치는 것 밖에 되지 않을까? 위에 언급한 조잡한 번역, 일관성 없는 구성, 오자 등등 것들의 예를 나는 나중에 모두 열거를 해서 ‘발표’를 할 예정이다.

 

아틀란타 성체대회(Eucharistic Congress)

The harvest is abundant but the laborers are few..(Luke 10:2)

 

2011년 아틀란타 성체대회
2011년 아틀란타 성체대회

2011년 아틀란타 성체대회가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고국의 육이오 동란 기념일인 6월 25일 토요일에 아틀란타 국제공항 바로 옆에 있는 거대한 Georgia International Convention Center(GICC)에서 유엔총회를 방불케 하는 다양한 문화와 배경을 가진 3만 여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운집을 하여, 하루 종일을 ‘성체’에 대한 대 주제를 놓고 유명한 연사들의 강연, 음악, 간증과 ‘엄청나게’ 많은 사제들의 보조를 받는 그레고리 대주교님 (Archbishop Gregory ) 집전의 특전 미사로 성체대회의 마무리를 지었다.

비록 성체, 그러니까 body of Christ가 이 대회의 변함없는 주제이지만 매년 조금씩 주제의 각도는 변한다. 올해는 루까복음 10장 2절의 말씀에서 나왔다. 쉽게 말해서 추수를 한 후 일꾼을 찾는 것이다. 이것은 간단히 말해서 성소, vocation을 뜻한다. 언젠가부터 이 성소를 위한 기도문도 아틀란타 대교구에서 각 본당으로 전달이 되어서 우리와 같은 레지오 단원들은 이것을 거의 정기적으로 한다. 사실 그만큼 성소에 대한 중요성이 높아졌다고 할까.

수많은 종파를 가진 개신교는 몰라도 단 하나밖에 없는 천주교는 독특한 자격을 가진 사제들이 이끌고 있는 교회이다. 특별한 자격과 각오를 가진 이 ‘심각한 목자’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데 그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지역적인 차이는 있지만 이곳 북미주는 심각하다고 할 것이다. 특히 근래에 들어 극소수의 ‘배반자, 범죄자’들의 소행인 ‘성추행’ 같은 것은 정말 교회자체를 흔드는 치명적인 사건들이었고, 그것이 직접 간접으로 미치는 악영향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대대적인 홍보를 통해서 성소를 가진 젊은 사제,수녀 후보들을 찾는 것이다.

이렇게 거대한 ‘동료,친구’ 신자들이 한 곳에 모인 것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아마도 1989년 6월 초 South bend, Indiana에 있는 Notre Dame University(노틀담 대학)에서 열린 미국 성령대회였다.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비록 인종, 나이, 언어는 달라도, 한데 어울려 나오는 그 열기는 그곳에 가있어 보기 전에는 간단한 말로 표현하기 쉽지 않다. 이번, 성체대회의 경우, 월남(Vietnam) 출신의 신자들이 인상적이었다. 그 숫자가 막강한데다가 어린이들을 첫 영성체를 하게 예쁜 옷들로 정장을 시키고 입장을 하는 모습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아마도 이 지역에서 이 월남 민족 그룹은 앞으로 단단한 신앙의 뿌리를 내릴 것이다. 물론 전통적인 히스패닉 그룹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의 열기와 숫자는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결국, 전통적인 ‘백인’ 신자그룹이 열세로 보일 지경이었다. 한국 community는 이 행사에 전통적으로 아주 소극적이었다고 말을 들어서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다른 그룹에 비하면 숫자로 완전히 열세였다. 하지만 숫자에 비해서 본당 level의 협조와 조직은 상당히 열심히 준비하고 실행 된 것으로 보였다. 문제는 앞으로 어떻게 홍보를 더 잘해서 숫자를 늘리는 가 하는 것이다.

Sister Olga from Iraq with Boston U. students

이번 성체대회에서 인상적인 사람들이 있었는데 Iraqi Nun, Olga라는 이라크 출신 ‘올가’ 수녀가 있었고, Ireland(아일랜드) 출신의 Dana, ‘대나’ 라는 여성이 그들이다. 한마디로 두 사람, 다 가톨릭, 맹렬 여성이라고나 할까.. 참 대단한 여성들이었다. 올가 수녀님은 46세의 정말 조그만 체구를 가졌는데 비해 말과 노래는 정말 우렁찬 것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심금을 울리는 말을 잘도 하던지.. 영어를 배운지 10년밖에 되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녀는 완전한 영어로 말을 했다. 어떤 사람은 이분을 이락의 마더 데레사라고도 불렀다. 어렸을 때 성소를 느끼고 완고한 집안의 반대를 물리치고 수녀가 되었고 바그다드에서 집 없는 사람들을 돌보다가 ‘하느님의 인도’로 미국 보스톤 대학으로 유학을 오게 되고 그 대학의 Newman Center(대학내의 공소)를 통해서 학생들을 인도하였다. 그 작은 몸 (4피트 9인치 정도?)으로 어떻게 그 덩치가 커다란 학생들과 어울렸는지.. 인터넷으로 그녀를 찾아보니 역시 대단한 수녀였다. 장래에 무언가 남길 만한 능력이 있는 ‘작은 거인’이라고나 할까.

아주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이번 대회를 ‘레지오의 정신‘으로 참가는 했지만 놀랍게도 나에게 수확이 컸다고 할까.. 물론 가능하면 내년에도 참가하고 싶고, 더 가능하면 이곳에서 volunteer가 필요하다고 하니까 한번 그것도 생각해 보고 싶다. 또한, 은근히, 그것도 즐겁게 놀랐던 사실 중에는 우리 본당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교육분과의 청년 임원님들의 잘 들어내 보이지 않았던 노고였다. 청년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들에 비해서 그렇다는 뜻이다. 그 바쁜 한참의 나이에 ‘진지하고 짜증 없는 모습으로’ 점심준비와 교통편을 헌신적으로 제공한 그들의 얼굴은 ‘진정한 젊은 목자‘를 연상시킬 정도였다. 그래서 자꾸만 연로해가는 본당의 미래가 조금은 밝게 보일 정도였다. 다시 한번 그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6월의 절반을 보내며..

6월도 어느덧 절반이 훌쩍 지나가고 2011년 하지가 며칠 앞으로 다가오고 있다. 하지는 공식적인 여름의 시작이라고 하지만 이건 허울좋은 말로 변하고 있는 것이, 이미 5월 중순부터 에어컨을 써야 하는 무더위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세상의 기후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조금은 신경이 쓰인다. 극단적으로 변하고 있다. 강추위, 찜통더위.. 그 이외의 것은 점점 기간이 짧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거야 말로 good ole days라고 하더니.. 옛날이 그립다.

우리의 한국본당인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 새로 주임신부, 하태수, 미카엘 신부님이 부임을 하셨다. 올 때, 비자문제로 예정보다 훨씬 늦게 부임을 하게 되셨는데, 약력을 잠깐 보니 신학박사에다 서강대에서 강의를 한 사목경험 제로의 신부님이시다. 조금 우려를 금할 수 없다. 50대가 훌쩍 넘은 학자 타입 신부가 과연 이 교포사목의 전초지인 우리 본당에서 어떻게 효과적인 사목을 하실지 자못 궁금해진다. 노동자사목을 몸으로 하셨던 전 pastor, 안정호 신부님과 대조적인 약력이라서 이런 우려가 생기는 것도 무리는 아닐 듯… 오시자 마자, 주일미사에서 전통적으로 찍어서 본당 웹사이트에 공개를 하던, 강론 동영상 비디오를 없애고 음성만 녹음하라고 하셨다고 해서 조금 나의 우려가 사실화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도 들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이런 것은 조금 시간을 두고 신자들의 의견을 들어 본 후에 바꾸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나로써는 주임 신부로써 얼굴을 보이는 것이 불편하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일단 full benefit of doubt를 주어보자. 시간이 말을 해 줄 것이다.

거의 5년을 써왔던 digital camera가 드디어 말썽을 부린다. 5년을 썼으니까 설사 버리게 된다고 해도 크게 걱정은 안 하지만, 이제 손에 아주 익숙해 진 것이라 조금 섭섭한 것도 사실이다. 역시 고장 난 곳은 mechanical인 것인데, lens가 focusing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electronic과 mechanical의 수명의 차이가 선명히 들어난다. 문제는 이것을 내가 고치기가 아주 힘들다는 것인데.. googling 을 해 보면 어떤 사람은 재수 좋게 고쳤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것은 아주 극소수일 것이다. 갑자기 point-and-shoot camera가 없으니까 불편한 것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사진 찍어서 그대로 그 앞에서 보고 print를 하는 것에 완전히 우리들은 spoil이 된 것이다. 그 언젠가는 한번 찍으면 일주일 이상이나 지나야 볼 수 있지 않았던가?

2011 Eucharistic Congress
2011 Eucharistic Congress

아틀란타 대교구 연례 성체대회를 올해는 처음으로 연숙과, 레지오 단원 몇 분과 같이 가기로 하고 bus 편을 신청해 놓았다. 6월 25일 (육이오) 토요일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수만 명이 참가하는 아주 커다란 아틀란타 대교구의 연례 행사인 데 올해로 거의 15년이 넘어간다. 그 동안 몇 번 가볼까 생각도 했지만 차로 혼자서 가는 것이 불편하고 해서 계속 미루어 오다가, 올해는 다행히 우리 레지오 단원 중의 한 분이 매년 가셨다고 해서 용기를 얻고 같이 가기로 한 것이다. 이런 행사는 절대로 신앙생활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특히 ‘미국식 축제분위기‘의 이런 행사는 아주 색다른 느낌을 주기도 하는 것이다.

 

레지오 피정에 다녀와서..

Simpsonwood Retreat Center
Simpsonwood Retreat Center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꾸리아 주최 연차 봉쇄피정이 지난 3일간 Norcross에 위치한 Simpsonwood Convention & Retreat Center에서 있었다. 나도 연숙과 같이 참가를 해서 오랜만에 집을 떠나보게 되었다. 비록 같은 지역에 있다고는 하지만 집을 떠나는 것은 먼 곳에 가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처음 가보는 피정센터는 정말로 큰 도시에 있는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주변의 경관이 아름다웠다. Chattahoochee river를 옆으로 끼고 광활한 숲 속에 위치한 이곳은 피정을 하기에 정말 좋은 곳이었다.

몇 달 전부터 예정이 되어 있던 것이기는 하지만 시간이 다가오면서 부담이 많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을 바꿀 그런 생각은 한번도 해 보지 않았다. 그 만큼 이번에 나의 마음가짐은 단단하였다. 어떠한 것들이 나를 기다릴까 하는 불안감만큼 어떤 것을 내가 얻고 갈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던 것이다.

갈 때는 우리 자비의 모후 쁘레시디움의 회계, 요안나 자매님이 같이 가자고 해서 그녀의 Lexus를 내가 운전을 해서 같이 갔다. 이번에 우리 쁘레시디움의 단원 전원이 참가를 하게 되어서 별로 외롭거나 하는 걱정은 전혀 없었다. 그 정도로 이번에 모든 여건이 좋았던 것이다. 이제는 이런 것들이 그저 우연이라고만은 생각하지 않는다. Norcoss,GA 에 있는 피정센터는 도시 속의 시골이라고 하기에 딱 맞는 그런 곳이었다. 식사는 전형적인 미국식 카페테리아 음식인데 재미있는 사실은 대부분 자매님들이 밥과 김치를 그리워 할 줄 알았는데 정 반대였다는 사실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저 집에서 밥을 안 해도 된다는 해방감에 그런 것은 크게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어서 조금은 이해가 간다.

처음 전부 모여서 일정에 대한 소개를 듣고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우리는 부부라서 단장께서 이런 사실을 상기시키기도 했는데.. 이유는 부부가 참가한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역시 우리 쁘레시디움 단원들이, 전원 참가한 것도 특이한 것으로 소개가 되었다. 다른 곳, 콜럼버스(Columbus, GA), 헌츠빌(Huntsville, AL) 등에서 온 열성적인 단원들도 소개 되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더운 날씨에 main conference room의 에어컨이 고장이 났는데, 이런 이상고온인 날씨에 이건 좀 문제였다. 신부님께서 그 미사복을 입고 계신데 얼마나 더우실까. 결국은 임시로 장소를 옮겨서 lobby area로 모두 후퇴를 해서 강의를 들었다. 이번 피정 기간은 ‘성령강림’ 주일과 겹치게 되어서 그것에 대한 강론으로 시작이 되었지만 사실 피정의 큰 주제는 (인간의) 죽음에 관한 것이었다.

첫날은 그렇게 저녁일정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관심사는 나의 room mate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었다. 3명이 한방을 쓰게 되었는데 물론 남녀가 같이 쓸 수가 없어서 우리 부부도 따로 방을 쓰게 되었다. 밤에 내가 자는 방에 roommate로 아주 젊은 두 사람이 들어왔다. 아주 건실해 보였는데, 한 사람은 본당 청년회장이어서 연숙과 주보관계로 전화로 알던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도 청년회에 관여된 사람이었고, 특히 Peter Park이란 청년은 Virginia Tech출신, computer engineer로 내가 사는 Marietta에 있는 Lockheed Co. (aerospace contractor)에서 일을 하고 있어서 참 반가웠다.

피정 교본과 일정
피정 교본과 일정

알고 보니 둘 다 나이 서른이 채 안 된 ‘모범적인’ 청년들이었는데, 사실 나는 속으로 많이(즐겁게) 놀랐다. 요새 세상에 이런 젊은이가 있었던가 할 정도였다. 그 나이에 종교와 신앙에서 떠나는 것이 무슨 ‘벼슬’인 양 행세하는 그 많은 젊은이 (우리 집 딸들이나, 나의 옛날과 같이)들이 비교가 되어서 심정이 착잡하였다. 우리집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런 것이다.

 

숙소는 거의 일류 hotel급 정도로 편했지만 역시 크리스천의 배경이 흐르는 곳이라 조금은 단정하고, TV가 없었다. 다음 날 아침 6시 30분에 피정의 일정이 시작되어서 정말 짧은 잠을 자고 강행군의 토요일 일정이 시작되었다. 레지오의 일상 기도와 더불어 레지오 쁘레또리움 단원들이 하는 ‘성무일도’가 곁들여 졌는데, 나는 생전 처음 해 보는 것들이라 상당히 힘들었지만 열심히 따라 했다. 조금 더 이것에 대한 orientation같은 것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도 있었다. 식사 전에 미사가 있었고, 식사 후에는 산책시간까지 주어졌다. 이 피정 센터에는 산책로(trail)가 울창한 숲 속에 있는데 아주 긴 편이었다. 연숙과 가벼운 마음으로 걷다가 시간이 너무 걸리고 길을 잃을 것 같아서 중간에서 돌아와야 했다 .

곧 이어서 점심식사 전까지는 ‘시범 주회’란 것이 열렸다. 그러니까 “모의(simulation)” 주 회합인 것이다. 추첨으로 뽑힌 자매님들이 (남자, 형제님들은 하나도 뽑히지 않았음) 공개적으로 주 회합을 하고 나중에 평을 듣는 것인데 나에게는 참 흥미로웠다. 다른 쁘레시디움 주회에 가서 주 회합 광경을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이것은 나와 비슷한 입장이었을 것이다. 꾸리아 간부가 아니면 남의 주회에 들어 갈 일이 없을 테니까. 그리고 이어서 ‘품평회’ 비슷한 질의응답시간이 있었는데, 대부분 조금은 ‘사소한’ 것들이었다. 너무나 지나치게 레지오의 세세한 법칙에 얽매이는 느낌이었다. 대부분 ‘상식’적인 해답이 제시되고 동의를 얻었다. 하지만 레지오는 거의 군대식이어서 이런 세세한 규칙들은 사실은 중요한 것들이다. 문제는 명문화 되지 않은 것 들을 어떻게 지혜롭게 주 회합에 적용하는가 하는 것이다.

점심 후에는 연차 아치에스 행사 때 하던 봉헌식을 다시 했다. 공개적으로 레지오의 상징인 벡실리움에 손을 얹고 짧은 선서를 읽는 것이다. 3월 달에 한번 해 본적이 있어서 이번에는 조금 나도 익숙하게 이것을 할 수 있었다. 이 시간에는 요한 바오로2세의 유언장이 낭독되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작성, 수정이 된 이 유언장은 하나의 작은 역사적 문서가 되었다. 교황즉위 후부터 암살기도, 소련(연방)의 붕괴에 이르는 역사가 이곳에 영성적인 조명을 받으며 기술이 되어서, 조금 길기는 하지만 지루하지는 않았다.

이날은 두 차례 안정호 신부님의 강의가 있었는데, 오후에 있던 첫 강의는 그 다음날 ‘성령강림‘을 염두에 두고 하신 것이고, 저녁 식사 후에 있었던 것은 이번 피정의 ‘대 주제’인 ‘죽음’에 관한 것으로 아주 심각한 것이었다. 이 강의는 곧 이어서 있을 ‘죽음의 연습’을 염두에 두고 하신 것이라 더 뜻이 깊었다. 중요한 것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 죽음을 생각하면 대부분의 것들은 상대적으로 사소한 것으로 보인다.
  • 죽음이란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 인간이 만든 죄에 의한 것이다.
  • 예수님과 같은 고통이 죽음의 단계에서 따를 수도 있지만 이것은 다음 단계로 가는 과정일 뿐이다.
  • 지상의 삶은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영원한 것을 향한다.
  • 죽음은 부활을 전제로 한다.
  •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죽음은 계속 성찰을 하면서 살아야 할 과제이다” 라고 선언했다.

 

이어서 열린 ‘죽음의 연습’은 이번 레지오 봉쇄피정의 절정(climax)에 속한다. 물리적이고, 시각적, 심리적으로 죽음을 경험하게 하는데 사실은 의외로 간단한 것이다. 관(棺) 속으로 직접 들어가 보는 것이다. 장례식에 있던 그런 장면이 자연스럽게 ‘연출’이 되는데 천주교 식의 ‘연도’라는 것이 행해지는 것이다. 이 절정에서 나는 실패를 하고 말았다. 거의 99.9%가 ‘주저 없이’ 관 속으로 들어갔는데.. 나는 못했다. 생각해 보니 못할 이유가 없었는데.. 그저 싫었을 뿐이다. 이것이 후회로 남게 되었다. 하기야 후회가 있어야 다음에 더 잘 할 명분도 생기니까.. 대부분 사람들 생각보다 마음이 평화스러웠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연숙도 들어갔고 우리 단원들 모두 들어갔다. 나만 못 들어갔다.

이상이 이번 피정의 제일 중요한 행사들이었다. 밤 늦게, 헤어지기가 아쉬운지 가벼운 여흥시간이 있었는데.. 꾸리아 단장, 부단장님들의 프로에 가까운 노래와 춤 솜씨에는 나는 죽어도 저렇게 못하겠다는 한숨만 나올 정도였다. 이래서 토요일 main event는 아침 6시 반에서 시작이 되어서 밤 11시까지의 기나긴 여정이었지만 사실 정신적으로는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마지막 날, 일요일의 일정은 신부님의 스케줄 변동의 관계로(공항에 도착하시는 새 본당 신부님 때문이었을까?), 완전히 바뀌어서 아침 6시 30분에 미사를 하게 되었고 곧 바로 강의로 이어져서, 조금은 피곤 했지만, 역시 이것도 신선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니 하나도 문제가 되지를 않았다. 마지막 강의는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로 시작이 되고, 성모님의 레지오에서의 위치로 귀결이 되었다. 성모님과 같이 노력을 하는 레지오의 성격을 잘 이해하게 해 주는 강의였다.

이렇게 해서 대단원의 막이 서서히 내렸고, 마지막 시간에 서로의 간단한 느낌, 소감을 나누었는데, 처음에는 역시 조용하더니.. 웬걸.. ‘마이크 스타일’의 형제,자매들이 줄줄이 나와서 솔직한 소감들을 나누어 주었다. 내년에는 나도 한번 저렇게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기도 했다. 좋은 것은 사실 나누어 주는 것이 더 좋다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나서 서로에게 작별의 인사를 악수나 hug으로 ‘모두가’ 나누었는데.. 이것도 무슨 인연이라고 가슴이 뭉클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해서 2박3일의 일정이 끝났는데.. 한마디로 ‘참, 좋았다‘.

 

레지오 피정에 들어가며..

이번 주말에는 아틀란타 본당 레지오 주최 연례 3일간 봉쇄피정이 있어서 연숙과 같이 들어간다. 둘이서 집을 같이 떠나는 것도 오랜만이지만 나에게는 생전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는 피정(retreat)이라서 아무래도 신경이 쓰임은 어쩔 수가 없다. 일년에도 몇 차례씩 이런 곳에 가는 사람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칠 노릇이겠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이름이 아주 거창하다. 봉쇄피정이라.. 한자로 읽으면 아마도 완전히 3일 동안 외부와 연락이 차단이 된다는 뜻일까? 아니면 세상만사를 다 잊으라는 뜻일까? 아직 누구에게도 물어본 적이 없다. 들은 이야기로 이런 곳에 가려면 정신적으로 신앙적으로 준비가 잘 안되어 있으면 가기 전에 꼭 무슨 유혹이 생긴다고 들었다. 나는 ‘치명적’인 유혹은 없었지만 비슷한 것은 벌써 경험을 하고 있어서 이런 말들이 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고 다 타당성이 있다고 믿게 된다.

나의 집을 ‘물리적’ 으로 떠나는 것이 거의 일년이 되어온다. 작년 여름 새로니가 살고 있던 Nashville, TN에 한번 놀러 갔던 것이 전부다. 비록 피정은 Atlanta Metro에서 열리지만 좌우지간 집을 떠나는 것은 사실이다. 이번 피정은 조금 있으면 주임신부에서 물러나시는 안정호 이시도리 신부님이 지도를 해 주신다고 한다. 비록 새 신부님이 곧 오시게 되어서 주임신부직은 물러나지만 아직도 우리들은 그 들이 우리의 ‘영원한’ 주임신부처럼 느껴진다. 그만큼 그분에게서 나 개인적으로 받은 은총이 많음을 느낀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웹싸이트를 보면 그곳 발행,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경향잡지가 1900년 초 부터 연도별로 거의 모두 수록이 되어있다. digital scanning을 한 것인데 원래 책의 상태가 안 좋은 것도 있어서 읽기 힘든 부분도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힘든 것은 특히 해방 전 것들인데 잘 보여도 읽기가 쉽지 않다. 지금의 ‘국어’에 비하면 거의 훈민정음 스타일의 ‘고어’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때는 사실 한글 맞춤법도 없었을 것이고 한자를 많이 쓰고 해서 더 그렇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이 고색창연한 천주교 월간잡지의 가치를 높여주고 있는 것이다.

살 찌는 약!
살 찌는 약!

내가 우선 관심이 갔던 때는 해방 후와 육이오 동란 전후, 그리고 1960년대이다. 내가 태어나기 전 것들은 그 당시의 역사를 천주교의 입장에서 본 것을 알게 되어서 그렇고, 육이오 이후는 내가 어렴풋이 기억이 나던 때를 다시 간접적으로 보게 되어서 관심이 간다. 1960년대는 조금 다르지만 약간 ‘근대화’한 한국의 사회상을 간접적으로 보여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다. 너무나 방대한 분량이라 우선은 주마간산 식으로 보았지만 시간이 나는 대로 조금은 정독을 하려는 희망도 있다.

우선 반가운 그림들을 몇 개 보았다. 광고인 것이다. 천주교 잡지에 광고가 있었다는 사실도 새롭지만 반세기 넘게 잊고 살던 ‘인기 있던’ 상품을 다시 보게 된 것이 더 반가웠다. 이것은 그 당시의 사회상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던 것이기도 하다. 우선 조금 웃음이 났던 것은 “살이 찌는 약”에 대한 것이다. 요새의 기준으로 보면 과연 얼마나 이해를 할까? 나도 살찌는 약에 대한 광고를 많이 보고 자랐다. 나도 갈비씨였지만 그 당시는 갈비씨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리고 독일회사 훽스트.. 거기서 나온 ‘고기 먹으면 필요했던’ 훼스탈.. 고기를 많이 못 먹었던 시절 그것을 소화할 효소가 제대로 안 나와서 그랬던 것일까? 기본적인 위생시설이 부족했던 그 때는 피부염, 종기가 참 많아서 그랬던지 ‘이명래 고약’은 정말 그때의 구세주 였다. 어찌 잊으랴?

 

죽는다는 것..

죽음.. 죽음이란.. 사람의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 오늘 하루 종일, 생각의 주제는 죽음이었다. 사실은 근래(10여 년?)에 들어서 평소 때에도 죽음을 잊고 산 적은 거의 없었다. 그것이 특히 나이 60이 넘어서면서 더 잦아졌다.이것이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조금 흥미로운 것은, 죽음을 항상 생각하며 사는 것이 그렇지 않은 때보다 훨씬 덜 죽음에 대한 걱정을 하다는 사실이다.

오늘 나에게 특별히 하루 종일 죽음을 생각하게 만든 이유는 갑자기 계획에도 없이 참석하게 된 장례미사 때문이었다. 오늘의 장례미사는 정 요한씨를 위해서 바쳐졌는데, 이분은 지난 주 내내 우리 레지오 단원들이 ‘선종기도’를 바치던 그 분이었다. 이 분이 어제 선종을 하셔서, 어제 저녁 곧바로 연도가 바쳐졌고 오늘 오전에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안정호 신부님의 집전으로 장례미사를 드리게 된 것이다.

몇 개월 전, 레지오(마리애)에 들어오면서 내가 달라진 것 중에 제일 큰 것이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시는 사람들에 대한 나의 태도였다. 전에는 가급적 장례식 같은 것을 모른 척하려 했고, 피했고, 잊고자 했었다. 그것이 지금과 같이 비교적 ‘고립된’ 삶이 가능한 이곳 미국에서의 생활에서는 크게 힘들지 않다. 고국에서 살았으면 그렇게 살다가는 아마도 사람취급도 못 받을 듯하다. 이제는 아니다. 적극적으로 ‘망자의 행사’에 빠지지 않으려 노력을 한다. 그만큼 예전과 같이 무섭지 않은 것이다.

특히 가톨릭적인 ‘연도’는 나를 아주 평화스럽게 만든다. 레지오 회합 참석 후에 자주 연도가 있는데, 처음에는 그렇게 생소하던 것이 이제는 아주 익숙해져서, 조금 더 고인에 대해 생각을 할 여유도 생기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장례식에서 가끔 하는 viewing(시신을 직접 보는 것)같은 것은 너무나 visual해서 더 신경을 쓰게 된다.

오늘 장례미사는 비교적 조문객이 많지는 않았다. 사실 오늘 우리가 그곳에 가게 된 큰 이유중의 하나가, 미리 조문객이 많지 않으리라는 귀 띰 때문이었다. 조금 이해가 가는 것은 이 고인의 가족이 현재 아무런 신앙적인 곳에 소속이 되어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민사회에서 신앙단체의 제일 큰 역할중의 하나가, 그들에게 교민간의 친교나 사회생활의 촉매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 나머지는 동창회나 사업에 관련된 단체들 밖에는 없다.

장례미사 안내문을 보고 이분이 1948년생이라는 것을 알고 반가웠다. 그래서 더 친근감이 들었는지 모른다. 우리 동갑이 먼저 나보다 저 세상으로 간다는 생각을 하니 참 심정이 착잡하였다. 63세라면 지금 세상에서는 ‘젊다고’도 말할 정도다. 신부님도 그 점을 상기시키셨다. 하지만 언제 죽는다는 것을 어느 누가 알랴? 우리도 모르게 하느님이 주신 생명을 하느님께 돌려 드린다는 신앙의 신비를 인정하면 조금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을까?

장지까지 가게 될 줄도 몰랐지만, 무언가에 끌려서 그곳까지 갔다. 그런데 가기를 참 잘한 것 같다. 유족들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그들은 한 사람이라도 더 위로를 해주기를 바랄 것이다. 그래서 모든 행사가 끝난 후에 점심을 같이 하는 곳까지 가게 되었다. Buford Hwy의 한인타운의 중심에 있는 ‘한일관’에서 모였는데.. 이곳에서 조그만 해프닝이 벌어졌다. 식당엘 들어가려는데 아주 오랜만에 중앙고 새카만 후배 ‘선우인호’가 보여서 이 친구도 우리 장례에 관련되어 왔으리라 생각하고 무심코 그들 일행과 합석을 하게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은 선우인호 후배가 속한 개신교회의 다른 장례식의 뒤풀이를 하려고 모인 것이었다. 잘못했으면 다른 고인을 위한 자리에서 식사를 할 뻔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뜻하지 않게 거의 하루 반나절을 동갑내기 고인과 그 가족들을 위해서 보내고 나니 참 기분이 가벼웠다. 나도 이렇게 슬픔을 같이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생각하니 나 자신이 조금 대견스럽게 느껴지기도 한 것이다. 가톨릭 신앙적으로도 고인은 많은 기도를 필요로 한다. 그들이 저 세상에서 더 편히 쉬기를 바라는 까닭이다. 비록 고인은 선종 얼마 전에 가톨릭으로 입교를 했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남아있는 사랑하는 가족에게 ‘하느님을 알게’하는 커다란 선물이 될지 누가 알랴?

 

다시 만난, 평창이씨 이만수씨

얼마 전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레지오 회합이 끝난 후에 연도가 있었는데, 그곳 가족의 대표 중에 평창이씨, 이만수씨가 있었다. 2002년 5월 이맘때쯤 마지막으로 보고 처음인 것이다. 그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는 만수씨 아버님, 이주황 선생님께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셔서 장례미사를 했을 때였다. 공교롭게도 이번도 비슷한 연도, 하지만 이번은 만수씨의 장인어른의 연도였다.

이만수씨 가족은 우리가 1989년 아틀란타로 이사를 오면서 만난 첫 ‘가정’중의 하나다. 이것도 인연일까. 지난번에 위스컨신주의 매디슨에 살 당시를 회고하는 글을 썼을 때, 그곳에서 나는 강정열 박사님 댁에 대해서 언급을 하였는데, 이만수씨네 가족은 강정열 박사님의 사모님의 남동생 되시는 이주황 선생님의 가족인 것이다.

이만수씨는 이주황 선생님의 장남이었고 그 집은 나와 같은 평창이씨 가족이었다. 매디슨과 평창이씨의 인연으로 사실 우리는 만수씨네를 우리 가족같이 느끼게 되었다. 2남 1녀의 단란한 평창이씨 가정.. 그런데다 우리와 같은 천주교 집안이었다. 비록 가장이신 이주황 선생님은 성당에 가끔 나오셨지만 가족들이 가는 것은 마다 않으셨다. 한양대학교에서 근무를 하시다 이민을 오셨다고 했는데 과거의 이력을 다 잊으시고 세탁소를 열심히 운영하시면서 가정을 이끄셨는데, 2002년 5월에 비교적 젊으신 연세에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장남, 이만수씨, 그 당시는 나와 상당한 나이차이 때문에 반말을 썼지만 이번에 다시 만날 때는 그럴 수는 없었다. 그도 이제는 어엿한 가장이었기 때문이다. 덩치가 상당히 크고 아이스하키를 거의 pro처럼 하던 그가 1994년 그가 갑자기 결혼을 하게 되면서부터 서로 오가는 것이 끊어져 버렸다. 우리도, 그도 서로가 자연스럽게 잊고 살게 된 셈이다.

결혼 전에는 computer분야에 상당히 관심을 보여서 DeVry Tech에서 computer technology로 학위를 받기도 했는데 사실은 생각처럼 적성에 맞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예상에, technology 쪽으로 직장을 잡을 것처럼 생각되었지만 의외로 완전히 retail business쪽을 투신을 한 것이다. 비록 거기서도 computer를 쓰긴 했겠지만 조금은 기대 밖이었다. 나중에 만수씨 어머님을 성당에서 가끔 뵈었는데, 소식에 business가 상당히 큰 규모라 정신이 없다고 했다.

그러다가 이번에 실제로 만나게 된 것이다. 연도 후에 참석한 사람들이 다 모여서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그와 오랜 회포를 풀었다. 서로 무슨 time machine을 탔던 기분까지 들었다. 만수씨는 별로 안 변했지만 나는 그가 보기에 무척 변했으리라.. 나를 알아본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는 20대에서 40대로, 나는 40대에서 60대로 변했으니.. 그 변화는 짐작이 되지 않는가? 그래도 만수씨는 옛날 나를 형님처럼 따르던 그때의 모습을 간직하며 다정하게 나를 대해 주었다.

이제는 서로의 소식을 알았으니 가끔은 연락을 하며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고, 궁금한 것 중의 하나.. 만수씨 가족이 평창이씨 무슨 파인지.. 그것이다. 혹시 나와 같은 익평공파가 아닐까.. 희망이지만 가능성은 있지 않을까? 그 때 들었던 사실 중에 우리 본당의 성가대장이 또 평창이씨 라는 소식도 있었다. 그 후에 조금 알아보니 40대의 남자라고 들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더 알아보고 싶고, 이런 식으로 종친들이 많이 보이면 모임도 가지면 어떨까 하는 상상의 나래도 펴 본다.

 

참된 행복이란..

아틀란타 성당 소책자: 참된 행복으로 초대합니다
아틀란타 성당 소책자: 참된 행복으로 초대합니다

어제는 <<Legio Tuesday>>로 정기 레지오 회합에 참석차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엘 다녀왔는데, 그때 연숙이 조그만, 아주 조그만 pamphlet을 그곳에서 가지고 와서 나에게도 주었다. format이 아마도 선교용으로 만들어진 듯 했다. 우리에게 친근한 모습, 고 김수환 추기경의 짧은 글이 실려있었는데 제목이 ‘행복’이었다.

진정한 행복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그것을 너무나 쉽게 풀어 주셨다. 사랑과 긍정..이것이 잠시의 행복이 아닌 영원한 행복을 향하는 하느님과 예수님의 초대라는 말.. 요새의 세속적인 행복은 주로 건강, 지위, 명예 같은 것이고, 그것은 특히 돈으로 더 가능하게 되어버린 세상에서 “짧아도 짜릿한” 행복을 맛보려는 사람들 투성이다. 생각을 해 보면 그것들은 너무나 짧고, 그 뒤의 허탈감은 사실 불행의 시작일 수 있다는 사실들을 모를까? 나는 그것보다는 지금 앞에 보이지 않아도 먼 후일에 있는 ‘영원한 행복’을 더 기다린다. 오늘부터 예수수난과 부활의 시작인 성삼일, 특히 오늘 저녁은 최후의 만찬, 세족례(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것을 기념하는)로 이루어 지는 성 목요일 미사가 시작이 된다. 부활을 향한 3일간의 첫날인 것이다.

 

행복

 

추기경 김수환

 

행복에 대해 말하기 위해 일상생활부터 생각 해보기로 합시다.

우리는 얼마 전에 신정과 구정을 지내며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인사를 전했습니다.

우리 문화권에 ‘복’은 ‘건강하고 무병장수 하는 것’ 이라는 내용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바라는 모든 것이 성취되길 기원해주고 축복해줍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사람답지 못할 때에도 그것이 참된 의미의 ‘행복’이 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성북동의 한 음식점에 걸려있는 족자에는 아홉 개의 ‘ㅁ’자가 써있었습니다.

‘사람아, 사람아, 사람! 사람이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냐!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다! 라는 의미를 지닌 족자였습니다.

아무리 인물이 잘나고, 건강도 좋으며, 돈이 있고, 높은 직위에 있다 할지라도, 만일 그 사람이 그 삶에 있어서 ‘인간’ 답지 못하다면 우리는 그 삶을 ‘사람답다. 그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비록 좋은 건강, 많은 돈, 높은 직위가 없는 사람일지라도 참으로 인간으로서 인간답다면 ‘참사람이다!’ 라고 볼 것입니다.

 

이달 첫 주에 나온 주간지 뉴스메이커에 ‘행복하게 나이 먹기’ 라는 제목의 보고서가 커버스토리에 실렸습니다.

 

어떻게 하면 늙으면서도 행복할 수 있는가? 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돈이 노후에 행복한 삶의 비결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우리 가운데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버드대학 성인발달 연구소에서 820명의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80년 이상의 발달 과정을 분석한 이 보고서에 따르면 성공적인 노화의 열쇠는 금전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 관리와 사랑하는 것이고, 신체적 요인들보다도 더 건강을 보장하는 것은 성숙한 [방어기제] 였다고 합니다.

[방어기제]란 불쾌한 상황에 부딪혀도 심각한 상황으로 몰아가지 않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화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합니다.

 

지난해 1월, 대구에 있는 성 베네딕트 수녀원에서 6.25 동란 동안 인민군에게 끌려가 많은 고생을 한 후 풀려나 다시 한국에 와 사시는 독일인 수녀님 두 분의 생환 50주년 축하식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분들은 자신들의 전 생애 중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그 당시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모든 것을 잃고도 하느님 말씀대로 서로를 사랑하고, 심지어 자신들을 박해하는 공산당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었기에 그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도대체 무엇인가요? 행복에 대한 예수님의 인식은 인간 세상에서 간주되는 그것과는 다릅니다.

현세는 현세의 잣대로 행복을 말하지만, 예수님은 영원하신 하느님의 관점으로 인간과 인생을 보기에 행복에 대한 관점이 다릅니다.

인간 존엄성과 관련하여 성경말씀을 요약해 본다면 하느님은 우주를 창조하시고 창조의 정점에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도 당신께서 지으신 피조물이 참으로 마음에 드셨다고 합니다.

하느님은 극진한 사랑으로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특히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기까지” (요한 3,16)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영구적이고 절대적이며 극진하십니다.

인생과 그 미래는 하느님으로부터 당신과 함께 사는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를 받고 있기 때문에 위대하며 원대합니다.

바로 여기에 인간 존엄성의 가장 존귀하고 숭고한 이유가 있습니다. 존엄한 인간에게 [참 행복]이란 [영원하신 하느님과 하나]되는 데 있습니다.

결국은 현재 이승에서부터 [그 분 안에 살 때], [그분의 사랑 안에 살 때], 그때 우리는 [참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곳에 우리가 찾는 참된 행복이 있다고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수난,성지주일: Palm Sunday 2011

Palm Sunday of the Lord's Passion 2011
Palm Sunday of the Lord’s Passion 2011

오늘은 미국성당에서는 Palm Sunday of the Lord’s Passion이라고 하고 한국 성당에서는 수난의 성지주일이라고 하는 부활 전 마지막 일요일이다. 올해의 미국본당에서 나누어 준 five minutes with the Word Lent 2011라는 사순절 묵상용 소책자를 보면 오늘은 하느님의 인류를 위한 거대한 계획의 절정으로 향하는 마지막 주일로 묘사가 되어있다. “Today marks the beginning of Holy Week, the most significant week of the year. Everything that Jesus said and did while on earth was leading up to this week, to the moment of the cross, the climax of God’s great plan for humanity.

이제야 조금씩 이 흔히 말하고 들어왔지만 별로 깊이 생각하지 못하던 말들이 귀에 들어오고 의미를 알 것만 같다. 그리스 신화가 아닌, 진정한 역사 속의 예수이기도 한 이 ‘엄청난 사건’을 어찌 그 동안 그렇게 값싸게 쉽게 수동적으로 들어왔을까. 이것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저절로 생기는 지혜일까, 아니면 노력에 의한 보답일까, 아니면 그 것을 훨씬 초월한 높은 곳으로부터의 ‘은총’일까.. 이번 사순절은 이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만족을 해야 할 것만 같다.

크리스마스보다 부활절을 더 기다리게 된 지도 몇 년이 지나간다. 한마디로 군중심리에 쉽게 따르는 세속적 신자에서 그나마 조금은 진솔하게 십자가의 의미를 알려 노력하는 신앙적 신자가 되고 싶은 그런 시간들이 나의 앞에 갑자기 펼쳐진 것이다. 잔머리를 굴리며 의심하는 습관도 많이 누그러지는 느낌이다. 사탄이 얼마나 나의 주변에서 배회하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전 보다는 훨씬 나를 유혹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유난히 싸늘하게 변한 이곳의 4월 중순.. 다시 palm tree잎사귀를 받아 들고 주님 수난 성지주일의 미사를 보면서 나와 우리가족의 부활은 어떤 것일까 생각을 한다. 희망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부활.. 예수님과 같은 기적적인 부활은 너무 나에게는 비약된 것이지만 그 이외의 아주 작은 기적 같은 것은 절대로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 나누어 받은 palm tree이 다시 내년 ash Wednesday에 재로 변해서 나의 이마에 십자가를 만들 때까지 과연 나는 어떤 작은 기적을 기대할 수 있을까.. 예년과는 다르게 오늘은 깊은 생각을 하게 된다.

 

4월 초의 잡상(雜想)들

나이에 따른 기후의 변화: 봄이 본격적으로 맛을 보여주던 3월 중순 한때의 따뜻함이 거짓말처럼 거의 빙점으로 떨어지는 꽃 시샘 날씨로 바뀌어서 며칠이 되었다. 이제는 이곳의 날씨에 웬만큼 익숙해져서 그런지 하나도 놀랄 일이 아니다. 이런 것들을 젊었을 때는 그저 무관심하게 보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예전보다 훨씬 더 빨리 가는 시계처럼 변하는 기후의 거대한 pattern을 그야말로 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인생의 연륜이라는 것일까? 60대에 느끼는 기후는 분명히 20대가 느끼는 기후와 다를 것 같다. 똑 같은 기후를 사람마다, 나이마다, 지역마다, 전혀 다르게 느끼는 것은 분명 비과학적인 발상이지만.. 어찌하랴.. 하느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창조하신 것이 아닐까. 요새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날씨는 어떤 것일까?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나는 싸늘하게 비가 내리는 그런 날이 제일 좋다. 나와 TV에 나오는 weatherperson의 의견과는 ‘공식적으로 정 반대’가 된다. 이렇게 사람은 ‘자유로운 의지’를 가진 피조물인 것이다.

 

레지오와 나의 현재: 레지오 (마리애)[Legio Mariae, Legion of Mary] 선서를 한지 2달이 되었다. 3개월 대기단원을 포함하면 레지오 단원이 된 것이 벌써 5개월이 되어간다. 그 동안 내가 얼마나 변했을까? 얼마나 레지오 중심의 생활이 나를 바꾸고 있을까? 매주 화요일 정기회합에 참석하는 것은 군대와 같은 규율에 따른 의무라서 기본중의 기본에 속하지만 나에게는 아주 커다란 의무가 되었다. 별로 정기적인 운전을 하지를 않았던 지난 10년간의 ‘동면’을 깨어버린 것이다. 비록 대다수가 자매님들이지만 많은 ‘사람’을, 그것도 ‘한국인’들을 만나고 살게 되었다. 처음에는 정말 외국에 온 기분까지 느끼며 불편한 적도 많았지만 그 동안 많이 적응이 되어가고 있다.

성모님께 가까이 가는 지름길인 정기적인 묵주기도.. 어떻게 하면 성실하게, 경건하게, 많이 바칠 수 있는가.. 조금씩 방법을 터득해가고 있다. 밤 9시30분에 정기적으로 우리 부부가 하는 것 이외에, YMCA gym에서 운동을 하면서 하는 것, 아침에 Tobey(dog)와 subdivision(우리 동네)을 산책하면서 하는 것, 이제는 드디어 운전을 할 때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잘 하면 일주일에 100단의 ‘기록’을 깨기도 했다. 이런 반복기도가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의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을 했지만.. 보라.. 모두들 다 틀렸다. 그대들은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는 ‘바보’들인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그 동안 나보다 뒤에 입단한 ‘후배 단원’이 들어 오기도 했다. 역시 ‘자매님’이다. 현재 우리 단원들은 내가 더 이상 바랄 것 없이 좋은 분들이라 이런 상태가 계속되기만 바라고 있다.

 

본당협조와 아틀란타 전산팀: 레지오 입단에 따라서 본당협조에도 신경을 더 쓰게 되었다. 비록 주일미사는 우리가 사는 곳 근처의 미국본당(Holy Family Catholic Church)에 나가지만 (거의 10년도 넘게), 역시 본당협조는 레지오가 속하는 아틀란타 순교자성당에서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서 지난 몇 달 동안 속한 곳이 본당 ‘전산관리팀’이었다. 줄여서 전산팀, 아니면 웹팀이라고 불린다. 성당주보에 새 팀 멤버를 찾는다는 글을 보고 자원을 한 것이 벌써 5개월이 되었다.

기대와 현실의 rollercoaster를 타고 갈등을 계속하고 있고, 이곳에서 나의 역할이 조금은 불투명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이 일은 레지오의 사명감을 가지고 시작을 했고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전과는 조금, 아니 많이 다르다. 절대로 감정적인 결단은 최대한 피할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시작을 해서 벌써 몇 명이 도중하차를 했지만 나는 아직도 건재하다. 현재 나에게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나의 정확한 위치를 찾는 일이다. 현재 core member들에게 큰 불만은 없다. 하지만 skill set, technical background, work experience등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고, 기존멤버들을 내가 설득하거나 할 자신이 없으면 결국은 내가 적응을 해야 하는 현실이다. 내가 보기에 현재 성당의 system이 재정상태에 걸 맞는 ‘최적’ 의 IT system과는 거리가 멀다. 나의 역할을 이것을 조금 더 professional level로 올리는 것인데.. 이것은 technical challenge라기 보다는 political challenge에 더 가깝다. 하지만, 나는 현재 그것을 쉽게 풀 자신이 없다. 그래도 레지오의 정신으로 하면 조금은 가능하게 되지 않을까?

 

올해 우리 집, 지구 온난화의 첫 희생양들..

지난 3월 26일 토요일 밤에 완전히 ‘열대성’ 폭풍우가 밤새 쏟아졌다. 이제는 이런 흔히 말하는 ‘이상(異常)기후’에 별로 놀라지는 않는다. 이런 ‘이상기후’가 이제는 거의 ‘정상기후’가 되어가고 있으니까.. 기상과학자들이 이야기하는 global warming의 한 증상일 것이다. 근년에 들어서 3월 중에 거의 이런 것들이 온 것을 기억을 한다. 하지만 이번 것은 그 정도가 심해서.. 천둥과 벼락이 밤새 시끄러웠다. 다행히 바람은 상대적으로 덜 해서 겉보기에 피해는 별것들이 아니었다. 문제는 천둥과, 벼락과.. 우리 집에 있는 super network system lab이었다. 이제까지는 기껏해야 정전으로 인한 불편함 정도로 그쳤었는데 이번에는 power system에 아주 커다란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집 근처 Roswell Road 확장 공사로 electrical power system도 큰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결과적으로 우리 집의 자랑인 super computer network lab의 모든 ethernet ports들이 직격탄을 맞은 셈이 되었다.

처음에는 모든 servers (physical, virtual)/PC들을 reboot하면 (예전과 같이) 해결이 될 줄로 낙관을 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우선, ADSL modem(ActionTec)이 완전히 못쓰게 되었고, 그것에 연결이 된 Linksys DD-WRT router의 WAN port(ethernet)가 못쓰게 되었다. 그러니 Internet이 완전히 shutdown이 된 것이다.

3월 26일 벼락의 희생물들.. aDSL modem, dd-wrt Router, VoIP ATA..
3월 26일 벼락의 희생물들.. aDSL modem, dd-wrt Router, VoIP ATA..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줄줄이 그것과 직접 연결이 된 ethernet port가 있는 것들이 다 문제가 생겼다. 제일 가까이 있었던 network switch 들이 제대로 function을 못하고 심지어는 VOIP phone ATA(analog telephone adaptor)와 이번에 새로 산 KVM virtual server (Proxmox PVE) motherboard의 gigabit ethernet port까지 electrical spike을 맞아서 불능이 되어 버렸다. 이것들을 다시 test하고 repair하는 것이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보다는 시간이 문제였다. garage에 있는 server closet과 attic에 있는 mini distribution box를 수없이 들락거리는 것이 웬만한 운동보다 힘 들었던 것이다. 거의 일주일이 걸려서 이제는 조금 안정이 된 셈이다. 이번 사고의 교훈은 간단했다. ‘simple is beautiful‘.. 이제는 복잡한 것이 자랑이 아니고 ‘사고의 원인’이란 것.. network device를 될 수 있는 대로 간단히 하고, 다음은 더 막강한 방어 수단으로 better surge protector를 생각하기로 했다. 이곳의 기후는 이제 더 ‘지구 온난화‘의 영향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봄이 오면 산에 들에..

드디어..아틀란타에도 봄이..
드디어..아틀란타에도 봄이..

다시 싸늘해진 아틀란타의 3월 말: 일 주일을 넘게 거의 초여름의 맛을 미리 보여주던 날씨가 역시 ‘평균치’를 유지하려는 듯 급강하하여 오늘 아침은 거의 빙점까지 떨어지는 추위가 되었다. 아래층은 결국 central heating이 요란하게 나오고 있었다. 다행히 맑은 날씨에 바람이 없어서 느낌은 역시 봄이다.

오래 전에 고국에서 느끼던 3월의 날씨도 사실 이와 비슷했다. 그래서 이곳 아틀란타는 많은 것이 서울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뚜렷한 4계절, 지형, 나무, 꽃들의 종류 등등이 그렇다. 다만 연 평균기온이 조금 높다는 것인데.. 사실 서울의 평균기온도 그 동안 (30년) 조금은 올랐을 것 같아서 결국은 비슷하지 않을까? 3월 초부터 Bradford pear, 개나리, 진달래, 수선화 등이 이미 다 피고 졌다. 지금은 벗 꽃이 조금씩 선을 보이기 시작한다. 옛날 서울에서 창경원의 벗 꽃놀이가 4월 초에 있었으니까.. 이것도 시기적으로 비슷하구나. 다만 조금 다른 것은 이 아틀란타지역에 너무나 많은 소나무들.. 이것 때문에 이곳의 봄은 꽃가루가 지독하다. 특히 바람이 잘 불지 않으면 완전한 비상사태가 된다. 나는 다행히 꽃가루 앨러지가 별로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거의 한달 동안 고생을 해야 한다. 그것이 5월 중순까지 계속 된다.

하지만 4월과 5월은 역시 찬란한 계절.. 비가 조금씩 오기만 하면 너무나 정서적인, 시적인 계절.. 전 이대음대 교수 김순애씨의 ‘4월의 노래’를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추억이 계절이 된다. 언젠가 부터 나는 4월과 5월을 은근히 기다리게 되었다. 특히 최근에 레지오 마리애의 단원이 되어서 그런지.. 특히 성모성월, 어린이 날 (일본의 5월5일 어린이날을 그대로?) 어머니 날(후에 어버이날로 바뀐 것.. 참 마음에 들지 않음) 의 5월 달이 더욱 기다려진다. 그 중에서, 특히 5월 1일은 ‘friends forever’를 생각하게 하는, First of May.. 물론 이것은 The Bee Gees의 1960년대 pop song에 불과하지만 나와 나의 몇 친구들에게는 거의 암호와도 같은 추억의 노래가 되었다. 그래서 5월은 더욱 나에게는 빛나는 달이 되어간다.

 

First of May – Bee Gees, 1969 

이 Bee Gees의 classic을 처음 들었을 때는 가사보다는 감미롭고 신비스럽게까지 느껴진 melody에 매료가 되었었다. 그런 나이였다. 하지만 그 후 그 가사를 음미하면서 이제는 가사에 깊이 빠져든다. 가사와 곡이 어쩌면 그렇게도 멋지게 조화를 이룰까.. 이런 것이 진정한 classic이 아닐까.. 이 곡 뒤에 항상 보이는 흩어져 인생을 살아온 친구들을 생각한다. 그래서 5월1일은 Friends Forever의 날이 되어간다.

4월의 노래 – 박목월 시, 김순애 작곡 

서울 중앙고 1학년 때(1963년) 담임 김대붕 선생님께서 좋아하시는 곡이라며 가르쳐 주신 또 다른 불후의 명곡.. 어찌 잊으랴. 4월이 되면 어찌나 이 곡을 배울 때가 그립던지.. 또한 타계하신 김대붕 선생님도 함께 그때의 행복하고, 순진 하던 시절의 찬란했던 4월의 봄 동산을 그린다.

 

 

레지오 선서..

어제 드디어 나는 레지오 마리애의 정식 단원이 되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아틀란타 한인 순교자 천주교회 소속, 자비의 모후 쁘레시디움에서 레지오 입단 선서를 한 것이다. 원래는 지난 주에 할 예정이었는데 그날 감기로 인해서 회합(meeting)을 빠진 관계로 어제 한 것이었다.

레지오의 첫 회합에 참가하기 시작한지 3개월이 넘어서, 대기기간이 지나면 예비단원에서 정단원이 되는 레지오 선서(promise)를 할 자격이 생긴다. 나는 그것을 어제 한 것이다. 비록 간단하게 레지오 교본에 있는 선서문을 읽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에게 이것은 아주 심각한 것이었다.

나는 첫 회합 참가 이후 한번도 선서를 일부러 미루거나 안 하겠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랜 경험에 미루어 이것도 생각처럼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항상 있었다. 나의 마음이 갑자기 변한다거나, 무슨 사고가 생긴다거나..하는 조금 극단적인 예외의 가능성..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부정적인 생각들이다.

선서를 하기 바로 전에 지도신부님, 안정호 신부님이 들어오셔서 아주 특별한 timing이 되었다. 신부님 보시는 앞에서 선서를 하고 곧 이어서 강복을 받은 것이다. 그곳에 있던 단원들이 조금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그런 기회가 많지 않았다고 귀 띰 해 주었다. 이래서 나의 레지오 시작은 아주 좋은 기분으로 시작이 된 셈이다. 게다가 끝나고 나서 근처에 있는 식당에 모두 모여서 즐거운 점심도 즐기고.. 참 좋은 날이었다.

 

지나간 3주는..

거의 3주 만에 이곳을 찾았다. 이 3주는 정말 의외로 조금 긴 듯한 느낌이다. 무언가 쫓기는 듯 하면서도 왜 이렇게 시간이 길까..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지난 1월 9일 밤부터 시작된 이곳의 세기적인 폭설과 강추위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거의 1주일 동안 사실 이곳의 모든 것들이 정지된 상태였다. 덕분에 뜻밖의 snow, ice day holiday를 즐기긴 했지만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오랜 만에 찾아온 반갑지 않은 mild depression이 그것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이번 것은 전처럼 그렇게 mild한 것이 아니었다. 조금은 ‘고통적’인 것이었다. 그 동안 위로를 받던 “묵주기도의 보호”도 크게 도움이 되지를 못했다. 하지만 역시 처방은 시간과 세월이 아니던가.. 지금은 그 깊게만 느껴지던 수렁 속에서 밝은 하늘이 보인다.

나의 생일과 결혼 기념일이 줄줄이 이어지며 1월 달을 보냈다. 생일의 의미를 나 나름대로 바꾸어서 보낸 것이 얼마 되었다. 나를 낳아준 부모님을 더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이 나에게 진정한 생일의 의미이다. 일체 선물도 그렇게 반갑지 않게 되었다. 조용히 보내고 싶은 것이다. 딸 둘이 예전과는 많이 덜 하지만, 조용히 넘어갈 리가 없다. 그것까지 거절하는 것은 조금은 무리다. 이번에는 지난 크리스마스에 받기로 했던 telescope가 out-of-stock이 되어서 나의 생일 즈음에서 받게 되어서 그것을 생일 선물로 받게 되었다. 결혼기념일도 마찬가지다. 25주년, 은혼식 때에는 ‘압력’에 굴복을 해서 그렇게 보냈지만 이것도 나의 스타일이 절대로 아니다. 다행히 30주년에는 무슨 ‘이름’이 없었다. 다음의 큰 것은 50주년이 아닐까? 올해는 31주년이 되었고, 정말 조용히 보냈다.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사실 제일 나에게 중요하게 느껴지던 날은 1월 25일이었다. 그날은 내가 레지오 마리애의 정식단원이 되는 “레지오 선서”를 하는 날이었다. 하지만 역시 사탄은 조용히 있지 않았다. 그날 나는 sick day가 되어서 참석을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레지오에 나가기 시작한지 3개월이 넘은 것이다. 참, 이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이렇게 까지 ‘발전’을 하게 될 줄을 몇 개월 전만해도 절대로 예측을 못했으니까. 살면서 가끔 이런 작은 ‘기적’이 있어서 조금은 살맛도 나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안다. 정식 단원이 되면 내가 어떻게 변해야 할지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을..

지난 3주간 그 놈의 mild depression이 나를 괴롭혔지만 아주 무기력하게만 있지는 않았다. 14일에는 처음으로 기후에 의한 화요일이 아닌 다른 날에 모였던 레지오 회합에 참석을 하였다. 그것도 조금은 신선한 느낌이 아닐까? 이래서 군대와 같은 규율이 있는 레지오가 나는 너무나 좋다. 거의 모든 단원(자매님들)이 참석을 하셨다. 15일부터는 뜻하지 않은 home pc accident로 시작된 일련의 major computer work이 시작 되었다. 지금 생각을 하니 이 뜻밖의 일이 나를 mild depression에서 조금 더 빨리 빠져 나오게 하는 힘이 되었던 듯 싶다.

 

아틀란타 Snow day No. 3, 100th blog etc..

frozen Atlanta
frozen Atlanta

아무리 생각해도 snow day가 3일째 계속된 적은 이번 말고 기억에 없다. 1989년 이곳에 이사온 이후에는 없었다. 1993년 3월 달의 storm of the century때도 3일 이상 계속되지는 않았다. 이번은 내일까지 모든 학교들과 대부분 직장이 쉰다고 한다. 그러니 4일 연속의 snow day인 셈이다. 이번에는 눈이 온 이후로 강추위가 계속되어서 길들이 모두 스케이트장으로 변한 탓이다. 제설트럭이 10대밖에 없으니.. 얼음이 저절로 녹기를 기다리는 형편인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이것을 가지고 정치화 하거나 불평을 하는 이곳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는 것 같다. 그것이 사실 더 재미있지 않은가? 나도 사실 큰 문제가 없고, 오히려 뜻밖에 완전한 relax를 하게 되어서 고마울 지경이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쌀만 있으면 몇 주라도 끄떡없이 나가지 않고 살 수 있으니 더 그렇다. 이곳 사람들은 조금 다를 것이다. 빵과 우유, 야채가 꼭 있어야 하니..

오늘의 blog이 100번째를 넘었다. 2009년부터 조금씩 쓰던 것이 지난해 7월부터는 거의 정기적으로 쓰게 되고 이제 100번째가 넘은 것이다. 남들에게는 큰 숫자가 아닐지 몰라도 나로서는 milestone처럼 느껴진다. 처음에는 한글로 쓰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들었다. 영어로 쓰는 것보다 쉽겠지..한 것은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다. 결론적으로 영어로 쓰는 것 만큼 힘이 들었다. 나의 생각이 이미 오랜 세월 동안 영어로 생각하는 습관이 많이 들어있었다. 그런데다 멋진 한글 수식어들을 참 많이도 잊어버렸다. 아마도 내가 한글로 된 책을 별로 안 보고, 2000년이 넘으면서 한글로 된 website도 거의 피한 결과일 것이다. 심하게 말하면 아이들 수준의 단어 밖에 생각이 안 나는 것이었다. 영어도 잘 못하고 한글표현도 잘 못하고.. 이제는 영어보다는 한글에 더 신경을 쓰며 살고 있다. 게다가 얼마 전부터 한인성당의 레지오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한국 문화’를 더 접하게 되어서 다행이다.

제발트 저, 이민자 들
제발트 저, 이민자 들

얼마 전 정말 오랜만에 Cobb Central Library엘 가게 되었다. 친지가 경영하는 Atlanta downtown에 있는 Kristie란 jewelry store에 computer문제가 생겨서 보아주고 오다가 잠깐 들린 것이다. 작년 여름부터, 집안의 마루를 새로 놓는 일을 시작하면서, 그 때까지 거의 정기적으로 가던 것이 중단되어서 이제까지 온 것이다. 그곳에는 한국에서 출판된 책들이 제법 있어서 새로 나온 책이 있나 보았는데.. 거의 없었다. 이곳도 $$$이 경제사정으로 모자란 모양인가? 그래도 몇 권을 빌려왔다.

한번 빌려 보았던 독일작가 제발트(W.G. Sebald) 저 “이민자 들(Die Ausgewanderten)”, 마쓰히사 아쓰시 저 “천국의 책방“, 그리고 이청준 소설집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 등이다. 이 중에 “이민자 들”은 한번 본 것인데 다시 읽고 싶었다. 왜 그럴까? 독일인으로 영국으로 이민을 가서 다른 이민자들을 보면서 쓴 것인데.. 아주 비극적인 이야기들이다. 한마디로”실화보다 더 실화 같은 소설”인데 아주 그 format이 특이하다. 주제는 이민자들이 겪는 ‘고향상실의 고통’이다. 나는 그들이 겪는 고향상실이 어떤 것이지 잘 알고 있다. 어느 민족, 어느 문화권이던 이런 것은 사실 보편적인 것이 아닐까?

Atlanta snow to ice day..

이곳 아틀란타 수도권 지역의 폭설은 완전히 끝나고 지금은 그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2일째 모든 기관,학교가 문을 닫고, business도 거의 문을 닫은 듯 하다. 무슨 민방위 연습을 하는 듯 모든 곳이 정적에 잠겼다. 문제는 눈이 온 이후 영하의 기온이 계속되어서 완전히 두꺼운 얼음이 되어 빨리 녹지를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예년과 아주 다른 점이다. 이것도 혹시 global warming의 한 징조가 아닐까.. 생각을 한다. ‘극단의 기후(extreme weather)’가 온난화의 한 예라고 한 것을 어데선가 들은 듯하기 때문이다.지난 여름이 기록적인 오랜 더위여서 조금은 이러한 춥고 눈 많이 오는 겨울을 예측하긴 했다.

오늘은 우리로서는 한인성당에 레지오 정기 회합이 있던 날인데 성당 자체가 문을 닫아서 가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우선 우리 집 subdivision도 빠져나가기 힘들기 때문에.. 설사 레지오를 한다고 해도 우리는 절대 무리였다. 이럴 때 우리가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었다면..하고 상상도 해 본다. ‘얼마나 즐거울까’.. 하는 생각 뿐이다. 인생에는 가끔 이런 ‘깜짝 즐거움’도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 그들에게 이런 것들은 절대적으로 ‘뜻밖의 즐거움’이리라.

완전히 빙판으로 변한 I-285 near spaghetti junction

완전히 빙판으로 변한 I-285 near spaghetti junction

운전을 포기하고 걸어간 사람들이 남긴 차들 near Pleasantdale Rd@I-85N

운전을 포기하고 걸어간 사람들이 남긴 차들 near Pleasantdale Rd@I-85N

Night before Atlanta snow day 2011

Night before Atlanta snow day 2011

fairly rare sight & treat for this dog in Atlanta

fairly rare sight & treat for this dog in Atlanta

Atlanta snow day fun 2011

Atlanta snow day fun 2011

What's this white stuff under my belly?

What’s this white stuff under my belly?

Never knew you can walk a cat like this

Never knew you can walk a cat like this

 

A longest day, then snow day 2011..

어제는 모처럼 아주 바쁘게 느껴지는 일요일을 보냈다. 평소 때의 일요일은 조금 relax하는 기분으로 보내곤 하는데, 어제 일요일은 조금 달랐다. 최근에 내가 경험하고 있는 out-of-closet의 한 예라고나 할까.. 처음 가보는 집도 두 군데, 처음 만났던 사람들도 꽤 많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아주 유쾌하고 진땀 나는 경험이 되었다. 단 요새 예외 없이 대부분이 즐기는 karaoke를 제외하고.. 나는 이것에 익숙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다.

Almost empty Atlanta's I-285 morning after snow
Almost empty Atlanta’s I-285 morning after snow

이런 것들과 아울러 이곳의 날씨가 어제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한치도 어김없이 일기예보가 들어 맞았다. 9시경부터 snow shower/storm(눈보라?)이 이곳 아틀란타 지역에 들이 닥친 것이다. 이 눈보라 때문에 밤에 집으로 돌아올 때 완전히 눈에 쌓인 고속도로 운전을 해야 하는 모험을 하게 되었다. 시카고, 오하이오, 위스컨신에서 살 때는 이 정도는 큰 문제가 못 되었지만 이곳에선 절대로 장난이 아니다. 제설 대비가 거의 제로에 가까운데다가 지형적으로도 언덕이 많은 탓이다 (아틀란타 메트로는 piedmont, 그러니까 구릉지역에 속함).

어제 낮에는 레지오 덕분에 다시 만나게 된 설재규씨 댁으로 가서 그 집의 home network (주로 adsl modem/wifi router 같은 것들)을 손 보아 주었다. 나는 옛날 생각만 해서 설재규씨가 이런 것들 잘 했으려니 했지만 본인의 말로는 이런 것들을 하지 않은지 아주 오래 되었다고 한다. 이런 류의 일들은 언제나 깜짝 놀라게 하는 복병이 기다리고 있는데, 이번 것도 예외가 아니었다. Earthlink/Netopia combo.. 요새 아직도 이런 구닥다리 broadband supplier를 쓰는 사람도 있다. 그 중에서도 Netopia adsl modem/router가 특이하다. 아주 요상한 setup mode가 있는데.. 이것은 정말 쓰는 사람이 아무리 ‘바보’라도 문제가 없게 만들어 놓았다. 흡사 요새의 Apple computer와도 같다고 할까. 문제는 동시에 두 대 이상의 pc에서 Internet을 쓸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정말, 정말 20세기적 발상이다. 이것을 바꾸려면 dumb mode를 full “bridge mode”로 바꾸면 되는데..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 다음에 하기로 하였다.

그것이 끝나고 몇 주 전에 이미 예정된 아틀란타 한인성당 전산팀의 신년 회의/식사 참석차 Dacula, Georgia에 있는 홍보분과위원장 댁으로 연숙과 합류를 해서 설재규씨와 갔다. 그곳은 I-85 Exit 120 근처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최근 이곳은 한인들이 집단적으로 정착을 하는 곳이다. 밤 9시 이후로 예정된 대설 주의보를 염두에 두면서 전산팀 모임이 진행 되었다. 이날의 hostess인 서 안젤라 자매(본당 사목위원)의 power를 보여 주는 듯, 본당의 세 분 신부님께서 모두 오셨다. 그러니 분위기는 자연히 아주 활발하고 무게가 있었다.

이 댁의 지하에는 완전히 꾸며진 Video/Audio/Karaoke시설이 있었고, 한 쪽에는 아주 잘 꾸며진 ‘기도방’도 있었다. 모두들 기다렸다는 듯이 회의와 식사가 끝나면서 Karaoke방으로 모두들 모이게 되었는데(사실은 우리 신부님들이 이런 것들을 좋아 하신다고 함).. 나와 설재규씨는 눈 때문에 걱정이 되어서 미리 일찍 가자고 합의를 한 상태여서.. 9시 넘어서 조용히 빠져 나왔다. 이때부터 위에 언급한 snow adventure/nightmare 가 시작된 것이다.

20여 년이 넘게 나는 눈이 깊이 쌓인 고속도로를 운전한 경험이 없었다. 어제의 눈발은 흡사 거의 폭우와 같이 쏟아졌는데. 도로는 완전히 눈으로 덥히고, 앞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 중간쯤에 와서는 차기 조금씩 미끄러짐을 느끼게 되었다.다행히 일요일 밤이라서 그런지, 일기예보를 미리 들 보아서 그런지.. traffic은 그리 많지 않았고, 특히 집채만한 대형 트럭들이 거의 보이질 않았다. 시간이 가면서 더 눈보라가 심해지고, 드디어 나는 속으로 묵주기도를 시작했다. 그만큼 다급해 진 것이다. 잘못 하다가는 차를 세울 지경이 된 것이다. 이미 도로변에는 세워진 차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기 시작했고, ramp에서는 이미 충돌사고로 엉킨 차들을 피해가야 했다. 집 근처의 완만한 언덕들을 천신만고 끝에 기어서 거북이처럼 집으로 goal-in을 하였다. 이때는 정말 ‘만세’를 불렀다. 최악의 상태가 오면 차를 버리고 둘이서 집까지 걸어 올 각오를 했을 정도였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나머지 사람들이 걱정이 되어서 연락을 해 보니 아직도 karaoke를 하며 놀고 있어서, 빨리들 출발 하라고 말해 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집으로 돌아 갈 때 몇 명은 아주 고생을 하였다고.. 새벽 3시경에 도착한 형제님도 있었다. 신부님들도 역시 눈 때문에 거북이처럼 운전을 하셨다고 한다. 지금 생각을 해 보니.. 이번 모임은 사실 취소하거나 연기를 했어야 했다. 정말 무모한 모험을 한 결과가 된 것이다. 만약에 더 큰 사고라도 있었으면 어쩔 뻔 했을까? 하지만 다행히 이번의 모임은 추억에 오래 남을만한 것이 되었다.

오늘 아침에 밖을 보니 완전히 모든 곳이 깊은 눈으로 덮여있었다. 성탄절의 눈과 더불어 이번 겨울의 제2탄인 것이다. 조금 용기를 내어서 우리 집 “깡패” Tobey(개)를 데리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았는데.. 다리가 짧은 Tobey가 가슴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느라 고생을 하였다. 결과적으로, 오늘 월요일은 snow day, holiday가 되었다. 대부분 따뜻한 집안에서 맛있는 음식을 즐기며 뜻밖의 ‘휴가’를 즐길 것이다. 이것이 snow day의 즐거움일까. 겨울에만 있는 뜻밖의 즐거움일지도 모른다.

 

지난 밤에 쌓인 6"의 눈

지난 밤에 쌓인 6″의 눈

Walking Tobey on snow day 2011

Walking Tobey on snow day 2011

 

2nd day of Christmas, windy white..

12월 26일 아침, 크리스마스 두 번째 날이다. 이번의 성탄은 의외와 예외가 계속되는 그런 휴일이 되고 있다. 우선 성탄절 당일에 밖으로 나갔다는 사실이 우리 집의 전통을 완전히 무시한 결과가 되었고, 그것이 계속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우리 가족만의 푸근한 그런 날이었는데.. 하지만 이런 것으로 남을 탓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다 내가, 우리가 결정하고 행한 일이 아닌가? 올해의 성탄과 같은 추억이 반복되지 않기만 바랄 정도로 나는 기분이 아주 쳐진 상태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일기예보대로 정확한 시간에 눈도 내려서 온 세상이 하얗게 되었는데도 그것이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못 만든다. 나의 마음을 적당히 자제를 못한 순간의 ‘실수’가 나의 가족을 아주 슬프게 만든 결과가 되었다. 나 나름대로 충분한 이유가 있었겠지만 왜 그것도 성탄 아침에 자제를 못 했을까? 큰딸 새로니에 대한 나의 미안함을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할까? 그저 이유가 없었다. 아니 화를 낼 정도의 심각한 이유는 없었다. 정말 미안하다.. 왜 이 나이가 되도록 절제와 자제를 못했을까?

성탄절에 남의 집에 모여서 식사를 하고 노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침부터 눈이 예보된 상태에서 간 것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내가 바라던 대로 가지를 않았다. 두 가지 마음.. 고래등 같은 ‘사치스러운’ 집에서 white Christmas movie를 연상시키는 광경을 감상하는 것,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type은 절대로 아니었다. 암만 호화스러운 음식이 있어도 오가는 얘기가 그것을 못 따라 가거나, 심지어는 (아니, 거의 매번) 남의 심사를 완전히 뒤틀어 놓을 그런 utterly stupid comment를 들으면서, 내가 왜 이런 곳에 와 있을까 하는 극단적이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나이가 먹을 수록 주로 겉멋에 집착하는 사람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난감하다. 새해에는 이런 자리를 가급적 피하며 살고 싶은 마음도 없는 것은 아니다.

 

Our cul-de-sac under snow

Our cul-de-sac under Christmas day snow

 

White Christmas, 2010

White Christmas,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