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holic Sunday

오늘은 다시 일요일, 나의 정신적인 피난처, 휴식처, 성체와 성혈을 영할 수 있는 곳, 우리가 사는 지역의 (미국)본당인 Holy Family Catholic Church에 다녀온 날이다. 우리가 가는 오전 8시 반의 미사는 우리에게 조금은 이른 시간이지만 거의 일년이 넘게 우리의 일요일 미사가 되었다. 그 이전에는 거의 10시 미사에 갔었다. 그 시간 미사의 신자수가 아마도 제일 많고 따라서 조금만 늦게 가면 익숙한 자리를 놓치게 된다. 그래서 조금만 더 일찍 일어나면 8시 반의 미사에서 조금 더 마음의 여유를 갖고 미사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제는 8시 반 미사의 regular (매주 보는 교우들) 들도 낯이 익숙해 졌고 혹시라도 못 보게 되면 조금 신경이 쓰이곤 한다. 특히 regular 교우들은 가급적 자리를 바꾸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친근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비록 매주일 미사는 Holy Family 미국본당에서 하지만 역시 “정신적”인 본당은 이 곳에 있는 유일한 한인성당인 “아틀란타 한인 순교자 성당” 임을 부인을 할 수 없다. 이곳은 우리가 1989년 이곳에 왔을 때 이미 있었다. 당연히 우리는 그곳에 나갔다. 그 당시 신자 수는 지금에 비하면 작았지만 우리는 그 보다 훨씬 작은 공동체 (Madison, WI & Columbus, OH)에 익숙해 있어서 처음으로 “진짜” 공동체 같은 느낌으로 미사를 보게 되었다. 그런대로 비슷한 나이 또래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기도 하고 성가대에도 참가하는 전형적인 “일요일 신자”의 생활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하고 위기를 맞게 되었다. 1990년대 초에 주임신부님이셨던 현유복 신부님 “사건”,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그 당시 한창 문제가 되기 시작한 사제들의 추문과 그에 따른 과잉반응, 오해.. 등등으로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신부님은 갑자기 귀국을 하시게 되었다. 사실과 헛소문,그것을 개인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 한마디로 종교의 어두운 곳을 들어내는 사건이었다. 아틀란타 대교구청의 처사도 그렇게 친절한 것은 아니었고 한창 커지던 공동체도 “본당”에서 “공소”로 추락을 하고 말았다. 나는 자세한 경위는 모르지만 정말 실망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공동체의 이미 곪았던 인간적인 치부들이 들어나게 되었고 심지어는 신부 파, 수녀 파 등의 이름이 생기고 성전 안에서 물리적인 실력행사까지 보이게 되었다. 끝에는 결국 법적인 소송으로까지 악화를 하게 되었고 그때 우리는 자발적으로 공동체를 떠나게 되었다. “일요일의 평화”가 깨어진 곳에 더 가기가 싫었다. 사랑의 계명을 철저히 잃어버린 형제자매들도 대하기가 두려웠다. 그 이후로 우리는 성당을 “완전히” 떠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교회를 떠난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인간들의 교회면 당연히 문제가 없을 리가 없는데 그것을 깊게 생각을 못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우리, 특히 나는 많은 것을 잃게 되었다. 그 당시는 물론 그런 것을 크게 생각을 못했다. 지금 생각하니까 그런 것이다.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감히 인간들이 어찌 다 알겠는가. 결과적으로 한인성당은 큰 타격을 받고 많은 신자들이 떠났지만, 아주 버려지진 않았다. 아주 영성 적인 “강 팀”인 한국 예수회(Society of Jesus: Jesuit)에서 직접 예수회 신부님들을 파견하시기 시작한 것이다. 철저한 spiritual discipline으로 무장한 그들이 다시 공동체를 부활하기 시작하고 서서히 떠났던 신자들이 돌아오게 되었다.그 이후 한인공동체는 하느님의 축복으로 질적, 양적인 성장을 계속하고 몇 년 전에는 드디어 숙원이었던 “본당”의 지위를 되찾게 되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곳이 미국에서 유일한 한국파견 예수회 성직자들의 “본거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축복이 어디에 있을까. 아냐시오 로욜라(Ignatius of Loyola) 영성으로 무장된 신부님들의 목회를 받고 있는 이곳의 본당은 거의 20년 전의 “추문”을 다 씻어버리고 다음세대의 이민본당으로 발 돋움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새로운 성전을 구입하고 크게 불어난 신자 인구를 대비하게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나에게 큰 과제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미국본당을 떠나서 한국본당으로 갈 것인가.. 하는 문제다. 물론 주일미사를 어디로 가느냐 하는 문제일 수도 있지만 사실 그보다도 더 큰 의미를 갖는다. 나 혼자서 결정을 하는 것이 지금은 생각보다 힘이 든다. 하지만 이건 시간문제가 되고 있다.

 

1980년대 콜럼버스 한인성당의 추억들

유근호형과 이재현씨, 1979년 Ohio State University
같은과의 이재현씨와 유근호형이 나의 office로 놀러왔다, 1979년 8월, Ohio State University

30년 전, Ohio State University의 한인천주교회 교우들, 오랜 세월의 여파로 참 많이도 잊어버렸다. 하지만 그때의 기억을 도와줄 사진들은 몇 장이 남아있다. 그것을 보면 물론 와~우리들이 이렇게 젊었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이 형제자매님들은 그 동안 어떻게 살았으며 지금도 건강하게 지내고 있는가 하는 궁금증도 생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에 그 형제자매님들을 만난 것이 우연은 아닌 듯 싶다. 이 형제자매들, 비록 잠깐 만나고 헤어졌지만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시작을 멋있게 인도해 주었다. 이들과 만나면서 우리는 “뜻밖”의 천주교 영세도 받을 수 있었다. 유아영세가 아니고 우리 둘 모두 30대가 되어서 받는 것이라 이것은 100% 자발적이었던 것이다.

왕영수 신부님 송별 야유회, 1981년 Columbus, Ohio
긴 여정의 첫날: 왕영수 신부님 송별 야유회, 1981년 Columbus, Ohio

모든 것의 시작은 우리 과(Dept of Electrical Engineering)에 있던 육사출신 유근호형(대한민국 현역 소령)과 알게 되면서였다. 1977년 겨울부터 같이 공부를 했지만 그 당시 그 형은 전혀 나에게 천주교신자 티를 낸 적이 없었다.그러다가 나는 1980년 초에 결혼을 하게 되었고, 유근호형의 학위과정이 서서히 끝이 날 무렵, 그 형이 한번 콜럼버스 한인성당에 가자고 제안을 한 적이 있었지만 가지를 않았다.그 이후, 나는 서서히 결혼에 의한 경제적인 책임감과 장래의 목표(학위, 직장)에 대한 회의로 정신적인 방황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Turkey출신 교수의 밑으로 자리를 옮기고 그가 새로 구상한 digital control laboratory를 만드는 project에 참여를 해서 우선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을 했지만 그만큼 학위를 위한 과정은 더 길어지게 되었고 난생 처음 ‘깊은 고민’ 을 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서서히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었고 바로 옆에서 충고를 해 줄만한 ‘친구’가 없는 것을 느꼈다. 정말 외로웠다. spouse가 이럴 때 친구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 상황에서 어느 날 유근호 형이 softball game을 하는 picnic이 있는데 같이 가자고 했고 우리 부부는 스스럼 없이 그곳엘 따라 갔다. 나는 어디로든 간에 탈출을 하고 싶었다. 그곳은 사실 콜럼버스 한인천주교회의 왕영수 신부님 송별 야유회였다. 그때가 아마도 1981년 여름이었을까?

1982년 부활절 영세 받던 날, Columbus, Ohio
1982년 부활절 영세 받던 날, Columbus, Ohio

그곳에는 한인성당 주임신부인 왕영수 신부님도 와 계셨다. softball game도 하고 한 나절을 그곳에서 거의 처음 보는 천주교 교우들과 지냈다. 콜럼버스는 일반 교민들이 비교적 적은 도시라 학생교우들이 상대적으로 많아 보였다. 그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지만, 그때는 우리 부부도 몰랐다. 그것이 평생 천주교 신자로 가게 되는 첫날이었다는 사실을..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날의 야유회는 왕영수신부님의 송별회를 겸한 것이었다. 왕영수 주임신부님은 신시내티 한인성당으로 가시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인 신부님이 없어진 콜럼버스 한인성당은 미국신부님이 미사를 집전하시게 되고, 그 때부터 우리는 유근호 형을 따라서 일요일에 성당엘 다니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생소한 천주교 미사였지만 우리는 이상하게도 개신교의 설교중심의 예배보다 신선하게 느꼈다. 그렇게 모르겠고 이상하게만 보이던 성경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신기한 것은 나와 연숙(wife)의 신앙여정의 시작이 거의 비슷했다는 사실이었다. 그 정도도 거의 비슷했다. 천주교에 대해 알고 싶은 의욕도 거의 비슷했다.

영세신자를 대표해서 최옥진씨에게 감사 선물 증정
영세신자를 대표해서 최옥진씨에게 감사 선물 증정

천주교 교리공부의 필요성이 느껴지는 때에 우리와 비슷한 예비학생신자들이 몇이 있었다. 그들과 더불어 정기적으로 왕영수 신부님을 초청해서 교리공부를 받기로 했고 그것은 정기적으로 꾸준히 진행이 되었다. 그때 같이 공부를 한 사람들은 우리부부(이경우, 전연숙), 고완석씨 부부, 김명환 중앙고 후배, 김준성씨(김태성씨 wife), 김원백씨 부인(도성이 엄마), 이화준씨, 석영중씨 등등이 있었다. 결석 한번 없이 꾸준히 1982년 부활절 영세를 목표로 왕영수 신부님을 모시고 성당 사제 관에 모여서 공부를 했고, 낙오자 한 명 없이 전원이 부활절에 모두 영세를 받을 수 있었다.

softball우승후의 주의기도 1982년 Columbus, Ohio
softball우승후의 주의기도 1982년 Columbus, Ohio

우리는 착실히 신자생활을 시작하였다. 특히 연숙은 나보다 더 열심히 성령세미나 같은 곳에도 갔다. 그래서 이미 영세 받기도 전에 “무엇을” 체험한 것 같았다. 더 많은 학생, 교민교우들과도 알게 되고 어울리게 되었다. 특히 softball game은 우리들을 모이게 하는 제일 좋은 기회였다. 틈만 나면 그 넓은 Buckeye Village 잔디에서 game을 하곤 했다. 거의 pro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 남백희씨, 이성철씨,김태성씨, 이동준씨, 김명환 중앙고 후배, 이철의씨..등등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특히 중앙고 후배 김명환은 원래 soccer 선수로 학교 신문인 The Lantern에 크게 사진이 실리기도 했다. 우리 성당의 softball team은 사실 막강한 실력이 있었다. 선수 대부분이 과거에 야구를 좋아하고 잘 했던 그런 사람들이었다. 한번은 softball 대회에서 우승을 한 적도 있었다. 선수 중에는 성당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끼어있었다. 김태성씨와 이동준씨. 김태성씨는 우리와 같이 영세를 받은 김준성씨의 남편인데 야구를 너무 좋아해서 아예 우리들과 항상 어울리고, 이동준씨도 마찬 가지인데 야구실력이 상당하였다. 독신인 그는 비록 신자도 아니고 성당과 관계도 없는데 야구를 좋아해서 우리들과 자주 어울리게 되었다.

softball game우승 후 남백희씨 집에서 뒷풀이
softball game우승 후 남백희씨 집에서 뒷풀이: 박재승,이철의,김원백,남백희,김명환,이화준,김태성 제씨들이 보인다.

위에 언급된 softball대회에서 우승하던 날, 우리들은 너무 기뻐서 모두 남백희씨 집에 모여서 축하를 하며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놀았다. 이때는 남자고 여자고 다 모여서 노래를 불렀다. 특히 그때 최 데레사(옥진)씨의 독창은 참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최옥진씨는 콜럼버스에서 태권도 도장을 오래하고 한인회장을 역임한 최준표씨의 여동생이었고, 그 집 식구들은 또한 모두 성당의 주요 원로 급 교우들이었다.

대부분의 학생신자들은 성가대의 member이기도 했다. 하기야 그 나이에 음악을 싫어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음악실력이 큰 문제는 아니었다. 얼마나 좋아하느냐.. 그것이 더 중요했다. 처음에는 전통적인 organ을 따라 성가를 부르는 성가대가 있었다. 물론 우리도 멤버였는데, 특히 천주교에서 중요한 날에는 특별히 더 연습을 하기도 했다. 그때 이병남씨와 남백희씨 wife가 성가대를 아주 멋있게 이끌었다. 그녀는 미국에 오기 전까지 명동성당의 아퀴니스 성가대 멤버였고 대학에서는 음악을 전공 했다고 했다. 이병남씨의 성악은 가히 pro급 이었다. 특히 “주 찬미하라 (라우다떼 도미눔)”를 연습하면서 가톨릭성가의 맛을 찐하게 느끼기도 했는데 나는 아직도 그 곡의 화음을 기억할 정도다. 그러던 것이 연대동창(기계과출신) 이성철씨가 미국인 성가그룹과 어울리면서 그들과 같이 ‘앞에서’ guitar를 들고 노래를 하게 되었다. 완전히 고전적 성가대에서 통기타 스타일의 현대판 성가대로 변한 것이다. 그때의 한국팀 멤버는 기억에: 우리부부, 이병남씨, 이성철씨, 남백희씨 부부, 박재승씨, 최옥진씨, 김명환 후배 등등이 있었다. 분명히 더 있었을 것인데, 사진이 남아있지를 않아서 모르겠다.

크리스마스 미사후 성가 대원들과, 1981년
크리스마스 미사후 성가 대원들과, 1981년: 한규일,박재승,이병남,이성철 제씨들이 보인다.

우리와 같이 노래를 한 미국 팀을 우리는 Mary’s Group이라고 불렀다. 멤버 중에 Mary Karen Carey라는 lady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로 부부들이 member였는데 어느 특정한 교회에 소속이 된 것이 아니고 때에 따라서 옮겨 다니던 철저한 volunteer같은 그룹이었다. 이성철씨가 그 그룹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정기적으로 Columbus east side에 있던 그들의 집에 가서 성가연습을 하곤 했다. 그들의 성가 스타일은 ‘화음’ 이었다. 누가 부르는지 모를 정도로 화음을 중요시 했다. 그때 우리 큰딸 새로니가 갓난아기로 그곳에 같이 가곤 했는데 그들이 참 귀여워 했다. 특히 Ms. Mary Carey는 새로니에게 나무팻말에 글까지 써서 선물로 주었는데 아직도 우리는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앞면은 새로니의 신상명세를 적어 놓았고 뒷면에는 종이에 typewriter로 짧은 편지를 써서 붙여놓았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Dear Serony,

This is your American friend Mary Karen! She is being given to you by people who knew you when you were very small. You were so very special, such a pleasant happy baby that it was easy to love you. We know that American must have seemed strange to you and your parents, but we hope that your stay here was a happy one.

We want you to know dear little Serony Lee, that you will always have friends in America, and someday when you come here we hope you will visit.

Also, we want you to know that if ever again your country is having problems, and you need us, that we will be here for your and your family. Or, perhaps it will be us calling on you and yours.

Our address is

Mary and Gene Carey
5239 Brownfield Ct.
Columbus, Ohio 43227 Telephone 614-861-1662
America

May you always be Christs special child!

Love from us all!

 

어느 곳에서나 사람이 모이면 ‘정치’란 것이 끼어드는 법인데 그 조그만 한인성당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왕영수 신부님이 콜럼버스 성당을 떠나야 했던 이유도 다분히 그런 것이었다. 학생교우들의 입장과 현지 이민자 교우들의 입장이 다른 것도 알게 되었다. 특히 특정한 원로 교우 분들(선우창원 박사, 임진창 교수)의 입김도 무시 못할 정도였다. 우리부부는 전혀 그런 것들을 모르고 다녔지만 시간이 가면서 모를 수가 없게 되었다. 어떤 학생교우는 우리의 그렇게 수수방관적인 입장을 너무 ‘이기적’이라고 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여기도 역시 세대간의 갈등이 없을 수 없었다. 특히 교민들이 보기에 학생들은 잠깐 있다 떠나는 존재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소리가 아주 큰” 학생이 나타나서 왕영수 신부님을 떠나게 한 것을 성토하면서 문제가 커지게 되었다. 결국은 원로 급 교우가 그 학생을 공개적인 자리에서 아주 원색적인 말로 비난을 하게 되었고 성당은 한때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위기라 함은 학생교우들 전체가 성당을 boycott 하자는 조금은 극단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학생들의 ‘임시적 체제’의 한계 때문에 이런 문제는 오래 가지를 못했다.

나는 1983년 여름 무렵에 Columbus에 첫 직장(DTS: Dynamic Telecom System)이 정해지고 완전히 학교(Buckeye Village graduate residence)에서 나와서 ‘일반인’ 같은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조금 어정쩡한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머릿속은 거의 학생 같고 생활은 현지교민과 같은 그런 것이었다. 직장생활은 사실 학교 다니던 생활의 연장선에 있었다. 다른 정착한 교민과 같이 나의 business가 없기 때문일까. 성경공부도 Buckeye Village 학생들의 그룹에서 하고 있었다. 그때 쯤에는 전에 알고 있던 80년대 초의 학생들이 아니고 80년대 중반에 새로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조금씩 우리들은 성당에서 외로움을 느끼기 시작 하였다. softball game도 없어지고 가끔 모여서 노래를 부르던 즐거운 시간도 거의 없어진 후였다. 그렇게 세월은 흐르고 우리는 1988년 콜럼버스를 떠나게 되었다. 그때 쯤에는 학생들 보다 정착한 교민들과 그런대로 정이 많이 들어 있었다. 특히 이봉모씨 부부, 조동훈씨 가족(특히 씩씩 하셨던 손마리아 할머님), 돌아가신 김상식씨, 태권도 사범 최준표씨 가족, 특히 최 데레사(옥진)씨 등등 잊을 수 없는 교우들이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천주교 신앙생활의 기나 긴 여정을 시작한 셈이다. 즐거웠지만, 꼭 그렇지 만도 않은 기억들을 가지고 그곳을 떠났다. 그 이후로 그곳을 한번도 가보지를 못했다. 조금은 ‘전설적’인 기억이 되어가기도 한다. 언젠가는 한번 가야지..하는 ‘희망’을 남기었다고나 할까. 그런 ‘희망의 곳’이 여기저기 많아졌지만 Columbus, Ohio는 우리 가족이 시작된 요람이나 다름이 없는 곳이다. 그런 곳을 어찌 잊으랴.

 

일찍 온 사순절에..

올해는 최고로 일찍이 사순절이 시작이 되었다.  2월이 가기 전까지  Acts of Apostles, 사도행전을 다 typing을 하였다. 그것도 영어와 한글로 다 같이.  쓰는 것에 비하면 뭐 하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20년 만에 다시 읽는 ‘사도행전’.. 마음을 열고 눈을 뜨는가… 느낌이 그렇게나 달라질까?  정말 놀랐다.  3월부터는 요한복음을 영어로 읽기 시작했다.  정말 처음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항상 공관복음만 들었는데.. 처음으로 읽는 기분이다.  사실 일고 보니.. 그 ‘유명한’ 구절들은 거의 모두 이곳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 John 3:16같은 것..

3월 3일에는 그렇게 ‘걸리던’ 고백성사를 보았다. 미국성당이라 거의 형식적인 것이겠지만 나에게는 그런 게 아니다.  마음의 준비가 거의 99%라고 느끼니까.  그래서 너무나 홀가분 하였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매년 하기로 ‘결심’을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시간이 갈수록 나의 하느님으로 향한 ‘마음의 문’이 조금씩 조금씩 열리는 것을 느낀다.  이것도 작년부터 시작한 묵주기도의 ‘은사’일까.. 아니면 은총일까.  모른다.. 모른다.. 하지만 나는 느낀다.. 내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것도 하느님을 향해서 말이다.  그렇게 안 믿어 지던 것들도 이제는 믿어지는 쪽으로 향하는 나를 보고 나도 사실 놀란다.  이 모든 것이 그렇게 듣던 말과 같이 사실이란 말이다.  이게 모두 정말일까.  이게 다 사실이라면 앞으로는 어떨까.  나도 다시 어머니를 볼 수 있을까.  모두가 영생을 누릴 수 있고  육신을 떠난 더 높은 영혼의 세계가 앞으로 있을까.. 모든 게 신비롭게만 느껴 지지만 조금씩 조금씩 나의 마음을 열고 있다.

아주 오랜만에 Stephen CoveyFirst Thing First를 읽기 시작하였다.  아마도 성경 다음으로 이게 나의 ‘다음성경’이 아닐까 생각도 해 보았다. 이 책은 아마도 성경을 배경에 두고 씌어진 기분도 드니까 (이 저자는 사실 유타주 출신의 Mormon교도)  결국은 spiritual direction/goal이 없으면 결국은 ‘허무’하다는 뜻일까.  이제는 그게 이해가 간다.  무한대와 유한공간, 영원과 현세의 찰라.. 영혼과 육신.. 이런 게 이런 게 모두 나의 살에 와서 느껴진다. 아마도 나도 죽음에 대해서 많이 실감을 하며 살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 사람(Covey)말 대로 이제는 Leave a Legacy가 제일 중요한 관심이 되고 있다. 나의 존재의 의미를 느끼며 남겨야 하지 않을까.  이게 거의 본능처럼 느껴진다.  무엇을 남겨야 하나.  어떻게 남겨야 하나.  누구에게 남겨야 하나.

 

Here and Now

Henri Nouwen의  Here and Now 조금씩 읽고 있다.  이 양반의 문체는 정말 한마디로 쉽게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One day at a time의 사고방식임에는 틀림 없지만 매우 공감이 가게 쓰고 있다.  이 책은 2006년 연숙으로부터 Father’s Day 선물로 받은 것인데 그 동안 내내 먼지만 쌓이다가.. 이번에 아주 우연한 기회로 재발견하게 되었다.  하느님께 감사.  매일매일의 일상생활과 성서적인 영성 생활을 어떻게 조화 시키는가는 누구에게나 어려운 문제인데.. 이게 바로 그것을 집중으로 다룬다.  조금씩 읽고 있지만 그래도 만족이다.

지난 일요일 저녁에는 한인천주교회의 구역모임이 있었다.  이번에는 구역 장을 다시 뽑는 문제도 있고 해서 별로 가고 싶지를 않았다.  매번 그랬다.  하지만 갔다 오면 그런대로 좋은 것도 있었다.  이게 아니면 내가 가족 이외에 누굴 본단 말인가.  이렇게 작은 그룹이지만 그것도 쉽지를 않다.  이 나이가 되면 이제 이런 것 다 짐작하고 모든 ‘인간’을 포용해야 하는 것 아닌가.  전 선생님 부부가 미리 ‘경고’한 대로 ‘탈퇴’를 하였다.  이런 것도 이렇게 선언을 하고 나가는 게 이해를 하기 힘들지만.. 그분들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유일한 ‘선배’격의 교우여서 유난히 신경을 쓰며 대했는데.. 이제는 그게 끝이다.  전선생의 지독히 직설적인 ‘용공론’이 계속 걸려 왔지만.. 이것도 끝인가.

나는 아직도 나의 머리를 너무 과신하고 있는가.  며칠 동안 연숙의 pola.mdb를 다시 review하면서 느낀다.  생각 같아서는 그저 몇 시간이면 될 듯한 게.. 벌써 일주일이 되어가나..  잡상과 분심 등으로 시간이 쪼개 지지만 그래도 거의 나의 시간을 다 쓸 수 있는 이런 형편에.. 이게 무슨 추태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번에는 무슨 ‘결론’을 내려고 한다.  성공 아니면 실패.. 중간은 없다.  원죄 없으신 성모마리아 어머니여.. 저를 조금만 밀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