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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육이오 &#8211; Serony&#039;s Friends</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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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38; place, autobio in progress..</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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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육이오 &#8211; Serony&#039;s Friends</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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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 6.25 육이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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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Ken]]></dc:creator>
		<pubDate>Wed, 26 Jun 2024 00:35:40 +0000</pubDate>
				<category><![CDATA[Daybook]]></category>
		<category><![CDATA[雜記]]></category>
		<category><![CDATA[역사]]></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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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  이제야, 늦게야.. 오늘이 6월 25일이었음을 실감을 한다. 어떻게 내가 이렇게 되었는가? 다른 날도 아니고&#8230; 나는 그래도 잊지 말고 어제부터 이날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느껴야 했었을 것인데, 장구한 세월이 이런 식으로 흐른 것인가? 육이오(박정희 대통령의 발음 &#8216;융요&#8217;를 즐겁게 추억하며) 를 완전히 잊고 하루를 보냈다니&#8230; 아~ 빨갱이, 빨갱이들이여~ 역사이래 인류가 고안한 가장 교묘하게 악질적이고 잔인한 &#8216;사상, 그것을 [&#8230;]]]></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span style="font-size: 14pt;">¶  이제야, 늦게야.. 오늘이</span> 6월 25일이었음을 실감을 한다. 어떻게 내가 이렇게 되었는가? 다른 날도 아니고&#8230; 나는 그래도 잊지 말고 어제부터 이날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느껴야 했었을 것인데, 장구한 세월이 이런 식으로 흐른 것인가? 육이오(박정희 대통령의 발음 &#8216;융요&#8217;를 즐겁게 추억하며) 를 완전히 잊고 하루를 보냈다니&#8230; 아~ 빨갱이, 빨갱이들이여~ 역사이래 인류가 고안한 가장 교묘하게 악질적이고 잔인한 &#8216;사상, 그것을 믿는 집단&#8217;들&#8230;<br />
푸틴 개XX와 &#8216;젖먹이 돼지XX&#8217; 김정은이란 X이 만나서 함께 차를 타고 가는 모습을 <em>YouTube</em> video에서 흘깃 보며 어휴 저 놈들~ 하며  저주를 하기도 했는데, 참 세상이 어떻게 이런 식으로 변하고 있는가? 한때 지구상에서 퇴화, 멸종이 되었다고 생각했던 이 &#8216;저주의 사상&#8217;이 어떻게 다시 이렇게 고개를 들게 되었는지.. 빨갱이, 빨갱이, 레닌,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김씨 세습 왕조, 나중에는 &#8216;친애하는 우리들의 운동권 출신&#8217; 빨갱이들까지.. 이들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사람들을, 그것도 대부분 동족들을 대량으로 죽이면서까지 &#8216;공산주의 사회&#8217;를 꿈꾸었을까? 다른 한편 이들의 유물론이 얼마나 무서운 &#8216;또 다른&#8217; 사교집단신앙인지 그들은 정말 몰랐을까?</p>
<p><img fetchpriority="high" decoding="async" class="aligncenter size-full wp-image-24124" src="https://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24/10/Vigano-SOB.jpg" alt="" width="650" height="397" /></p>
<p><span style="font-size: 14pt;">¶  VIGANO, VIGANO&#8230;. </span> 이 사진, 언뜻 보기에 양순하고 착하게 보이는 &#8216;양의 탈을 쓴~~&#8217;, 이 인간, 멀쩡한 이력을 지녔는데, 최근에 갑자기 양의 탈을 벗고  또 다른 <em>Trump</em> 개XX 흉내 내는 亞流, 인간, 명색이 대주교, 한 때 바티칸의 미국 교황대사라는 인간 <em>Vigano</em>인가 뭔가 하는 놈, 그렇게 바티칸 교황, 교황을 온갖 중상모략하며 설치던 이 인간, 결국은 파문소송에 걸렸다는 소식.. 어떻게 그런 놈이 대주교였는지.. 교황과 교회를 완전히 매도하고 교회를 분열하려는 그런 놈, 거의 몇 년 동안 할말 못할 말 다 했던 놈, 그 얼굴이 거의 &#8216;웃는 악&#8217;처럼 나에게 보이는데&#8230; 2020년 이전까지는 비교적 양순한 모습으로 교회내의 부패, 사제 성추행 사건들을 파헤치던 것은 그런대로 이해를 하지만 이후 그는 완전히 악마의 하수인으로 돌변했으니..<br />
교회를 분열하는 것까지는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가 트럼프 집단의 conspiracy 집단을 아예 부축이고, 그것도 모자라 COVID vaccine 을 &#8216;검은 집단&#8217;의 음모라고 거짓말까지 하고, 나중에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8216;정당한 것&#8217;이라고까지.. 하니 이것만은 절대로 용서할 수가 없다. 왜 세상이 이렇게까지 돌아가고 있는가? 가톨릭 교회가 싫고 교황이 싫다면 네 자신이 떠나면 될 것 아닌가? 왜 분열을 시키며 거짓말이나 유포시키고, 그것도 교회 밖에서 떠들어 대는가? 정말 근래에 이렇게 보기 싫은 인간들이 [이 인간, 트럼프 집단, 한국에서는 이재명인가 뭔가 하는 인간] 왜 이렇게 자기 마음대로 세상을 휘젓는 것들이 용납이 되는 세상으로 변하고 있는 것인가?</p>
<p><span style="font-size: 14pt;">¶  WORD POWER:</span> Bishop <em>Barron</em>, <em>CAVE</em> or <em>SPELUNKER</em>?<br />
WORD POWER라는 말이 자꾸만 추억과 함께 머리 속에 떠오른다. 소싯적 영어 공부할 때 열심히 끼고 다니던 책이 <em>WORD POWER MADE EASY</em>란 것이 있었는데, 오늘 Bishop <em>Barron</em>의 주일강론 중에 나오는 단어 spelunker 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다. 알고 보니 이것은 cave와 동의어였다. 이 신부님의 말씀에는 거의 예외 없이 처음 나오는 잘 모르는 어휘, 단어들이 한두 가지가 있는데, 오늘도 예외가 아닌 것이다. 나의 영어 어휘력도 긴 세월의 덕분으로 만만치 않은데, 이 신부님은 그것을 거의 항상 초월하는 듯하다.<br />
이것으로 나는 이 분의 기본적 학문적 지성을 짐작할 수 있고, 비약적으로 유추를 해서 신학적인 신비성까지 엿볼 수 있으니&#8230; 이것이야말로 이 신부님의 탁월한 WORD POWER의 힘이 아닌가?<br />
Cave 대신에 spelunker라고 쓰면 조금 더 유식하게 들리는 것, 이것이 인간 속성인가? 이 주교님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무언가 더 큰 뜻이 있는 착각에 빠지기도 하니까.. 이것이 WORD POWER의 위력&#8230;</p>
<p><span style="font-size: 14pt;">¶  DARKER SIDE OF&#8230; </span> 요새 거의 매일 보게 되는 나의 favorite &#8216;personalized&#8217; <em>YouTube</em>, 3군데, 모두 나의 개성과 흥미를 반영하는 video들이 집결된 곳들이어서 &#8216;안심하고&#8217; 나의 구미에 맞는 것들을 보는 것은 좋았는데, 가끔 난데 없이 &#8216;해괴한&#8217; 놀라운 쓰레기들이 끼어드는 경험도 없지 않고, 어제가 그런 예가 되었다. 이것은 100%  <em>YouTube</em>의 실수일 것으로, 내가<i> film noir</i> fan이라는 것 때문인 듯 하다. 1950년 대 초의 영화로 B movie에도 못 미치는 한마디로 쓰레기 급이었는데, 아~ 내용이.. burlesque 어쩌구~  [당시에는 rating이니 X 같은 것이 없었으니] 약간 조심은 했지만 설마 정도로 조금 보았다가 함정에 빠진 듯한 후회로 곧 성모님의 얼굴이 뒤에 보이는 착란~. 너무나 실망한 것은 나의 약점 중의 최악을 떠올리게 하는 그런 영상의 위력에 나는 아직도 아직도 속수무책임을 실감한 사실&#8230; 이런 것 나이와 절대로 상관이 없다는 것, 재삼 확인을 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저 한 가지, 어깨 너머로 성모님의 꾸짖는 듯한 자상한 얼굴을 보면 된다. 그것이 유일한 위로요 해결책인 것이다. 요새 <em>YouTube</em>는 피하고 싶은 정치광고(<em>Trump</em> 개XX의 징그러운 얼굴)로 흡사 지뢰밭을 지나는 긴장 속에서 보는데, 이런 &#8216;야한 것&#8217;들까지 합세해서 놀라게 하니..</p>
<p><img decoding="async" class="aligncenter size-full wp-image-24125" src="https://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24/10/2024-06-25-07.39.16-1.jpg" alt="" width="650" height="315" /></p>
<p><span style="font-size: 14pt;">¶  경운혼성합창단</span> 연습 모임이 일주일도 채 남지 않은 오늘, 처음으로 내가 담당한 tenor part를 조심스럽게 악보로 자세히 보게 되었다. 지난 번 연습 모임에서 반주자가 피아노로 내 part를 친절하게 치며 녹음을 했던 것을 다시 들으니 생각보다 쉬운 것이었다. 이 정도면 며칠만 연습하면 다음 모임에는 자신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을 듯하다. 오늘 악보를 찬찬히 보면서 나의 궁금했던 것들, 높은, 낮은 음자리표의 관계를 처음으로 피아노 건반에 비교하여 알게 되었다.  내가 부를 tenor part가 거의 모두 &#8220;낮은 음자리&#8221;로 되어 있었기에 오늘은 이런 것들에 상당히 자신을 갖게 되었다.</p>
<p><img decoding="async" class="aligncenter size-full wp-image-24126" src="https://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24/10/2024-06-25-08.33.09-1.jpg" alt="" width="650" height="315" /></p>
<p><span style="font-size: 14pt;">¶  나의 여생, 남은 인생</span>의 대부분을 보내고 있는 나만의 공간, 서재 오늘 유심히 본다. 이 방으로 이사온 것이 작년 여름 직전이었으니 이제 일년이 되어가고 그 동안 많이 적응도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무언가 불편한 것이 적지 않다는 편치 못한 생각이 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겉으로 보이는 것 보다는 나의 마음이 정리가 안 된 탓은 아닐지.</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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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Father &#038; Esperanto Friends</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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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Ken]]></dc:creator>
		<pubDate>Thu, 09 Jul 2020 16:35:12 +0000</pubDate>
				<category><![CDATA[Daybook]]></category>
		<category><![CDATA[가족]]></category>
		<category><![CDATA[에스페란토]]></category>
		<category><![CDATA[육이오]]></category>
		<category><![CDATA[추억]]></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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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50년만에 다시 보는 아버지, 평창이씨 이정모. 제일 아랫줄 오른 쪽 끝에서 세 번째의 &#8216;작은 체구&#8217; &#160; 아버님, 아버지, 아빠 그리고 대한민국 에스페란토 친구들,   Esperanto Esperanto Esperanto friends..  감사합니다! 아마도 50년도 넘었을까, 마지막으로  내가 이 사진, 우리 아버님의 모습을 이 사진에서 보았을  때가&#8230;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집에서 보던 &#8216;조선 에스페란토 학회 단체사진&#8217;  한 장이 digital format으로 [&#8230;]]]></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center wp-image-17605"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20/07/dad-esperanto-1-1.jpg" alt="" width="540" height="450" srcset="https://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20/07/dad-esperanto-1-1.jpg 887w, https://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20/07/dad-esperanto-1-1-300x250.jpg 300w, https://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20/07/dad-esperanto-1-1-768x640.jpg 768w" sizes="auto, (max-width: 540px) 100vw, 540px" /></p>
<p style="text-align: center;">50년만에 다시 보는 아버지, 평창이씨 이정모. 제일 아랫줄 오른 쪽 끝에서 세 번째의 &#8216;작은 체구&#8217;</p>
<p>&nbsp;</p>
<p><span style="font-size: 14pt;">아버님, 아버지, 아빠 그리고</span> 대한민국 에스페란토 친구들,   <em><a href="https://en.wikipedia.org/wiki/Esperanto">Esperanto Esperanto Esperanto</a></em> friends..  감사합니다!</p>
<p>아마도 50년도 넘었을까, 마지막으로  내가 이 사진, 우리 아버님의 모습을 이 사진에서 보았을  때가&#8230;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집에서 보던 &#8216;조선 에스페란토 학회 단체사진&#8217;  한 장이 <em>digital</em> format으로 오늘 나의 Email <em>InBox</em>에 들어와 있었다. 그 한 장의 사진에 분명히,  나의 뇌리 속에서 &#8216;우리 아버지&#8217;라고 알고 살았던,  &#8216;앞 줄에 앉는 사람 중 제일 작은 남자&#8217; 가 있었다.</p>
<p>이 사진은 연락이 두절된 우리 누님 집에는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었지만 세월이 이렇게 깊어지면서 아마도 나는 생전에 다시는 아버지 사진을 못 볼 듯이 살아왔다.  하지만 에스페란토가 인연이 되어서 이렇게 다시 &#8216;죽기 전에&#8217; 볼 수 있게 되었다. 감사합니다, 하느님, 대한민국 에스페란토 친구들&#8230;</p>
<p>올해 2020년은 대한민국 에스페란토 창립 100주년이 되어서 대대적으로 기념행사를 준비한다고 작년부터 관계자 분들이 연락을 주셨었다. 6.25 전까지 에스페란토 운동에 깊이 관여했던 아버지, 내가 알고, 기억하고 있는 나의 아버지 &#8216;이정모&#8217; 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사연이었다.</p>
<p>나와 개인적으로 연락이 된 것은 <a href="http://serony.com/ken/2011/08/13/%ec%95%84%eb%b2%84%ec%a7%80%ec%99%80-%ec%97%90%ec%8a%a4%ed%8e%98%eb%9e%80%ed%86%a0/">나의 2011년 8월,  &#8216;회상&#8217; 블로그 &#8216;아버지와 에스페란토&#8217;</a>가 계기가 되었다. 그 블로그는 생전 한 번도 못 보았던 아버님의 그림자를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나의 사그라져가는 기억력과 싸우며 개인, 가족, 특히 아버지의 역사를 남기고 싶었지만 6.25 발발 후에 홀연히 납북이 되신 아버님은 어디까지나 나에게는 가상적인 존재였다.</p>
<p>그러다가 어렸을 적부터 많이 들어오던,  &#8216;에스페란토&#8217;라는 이름이 떠오르고, 그 당시 집에서 보았던 각종 자료 (주로 학회지)등과 어머님의 말씀 등을 시작으로 인터넷을 뒤지고 해서 아주 기본적인 사실들을 찾을 수 있었다. 최소한 아버지의 이름이 이기 저기서 보인 것이다. 그곳에서 6.25때 납북 되신 분들의 이름들이 보였지만 아버지의 이름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것을 나는 에스페란토 역사에 남기고 싶었지만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 지가 막막했는데, 하늘이 도와서 나의 블로그 가 인연이 되어서 연락이 되어 이렇게 아버님의 사진을 다시 &#8216;찾게&#8217; 되는 행운을 얻은 것이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p>
<p>이 사진에 앉아 계신 아버지, 그 당시는 서울 경기고등학교 영어 교사였을 것이다. 이 사진은 에스페란토 정사에도  있듯이 &#8216;<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8월에 KEI 제5회 강습회가 개최되었는데 약 30명이 참가하고 <strong>서병택</strong>, <strong>석주명</strong>, <strong>이정모</strong>가 지도하였다</span>&#8216; 라는 구절의 바로 그 역사적 사진이었다. 1949년 8월이니까 일년 뒤에는 민족반역자 김일성 무리들에게 납북되실 운명을 짐작이나 했을 수가 있을까? 한 개인과 가족의 역사는 이렇게 산산이 조각이 났는데, 아직도 그 반역자 세습무리 들이 북녘에서 설쳐대고 있으니 이것이야 말로 &#8216;부조리의 극치&#8217; 가 아닌가?</p>
<p>100주년 기념을 준비했던 관계자 분들, 역시 다른 &#8216;부조리&#8217;인 코로나바이러스로 실제적 기념대회는 무산이 되고 10월에 Online Conference로 대치하는 모양이다.  세계 전체가 불안하게 보이는 이 때에, 세계 평화를 갈망하던 에스페란토 창시자의 꿈의 실현은 아직도 요원한가&#8230;</p>
]]></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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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REVOLT IN KOREA</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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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Ken]]></dc:creator>
		<pubDate>Fri, 18 Oct 2019 02:56:15 +0000</pubDate>
				<category><![CDATA[Daybook]]></category>
		<category><![CDATA[역사]]></category>
		<category><![CDATA[육이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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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요즈음 &#8216;심심하면&#8217; 들추어 보는 미국의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화보 주간지 LIFE magazine, 그 중에서 내가 태어날 즈음의 것을 보다가 1948년 10월에 일어난 여수 순천 반란사건에 관한 기사를 읽게 되었다. 2년 뒤에 일어난 6.25 동란부터는 거의 정기적으로 한국에 관한 기사가 실렸지만 그 이전에는 사실 이 반란사건이 처음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전에 이런 기사를 보게 되면 그저 &#8216;분단 [&#8230;]]]></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span style="font-size: 14pt;">요즈음 &#8216;심심하면&#8217;</span> 들추어 보는 미국의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화보 주간지 <a href="https://en.wikipedia.org/wiki/Life_(magazine)"><em>LIFE</em> magazine</a>, 그 중에서 내가 태어날 즈음의 것을 보다가 1948년 10월에 일어난 여수 순천 반란사건에 관한 기사를 읽게 되었다. 2년 뒤에 일어난 6.25 동란부터는 거의 정기적으로 한국에 관한 기사가 실렸지만 그 이전에는 사실 이 반란사건이 처음이 아닌가 생각된다.</p>
<p>이전에 이런 기사를 보게 되면 그저 &#8216;분단 역사&#8217;의 비극의 하나로 생각하기도 했겠지만 현재의 나의 조국 &#8216;대한민국&#8217;의 돌아가는 꼴을 생각하면 아주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가 없다.</p>
<p>이 기사가 실렸을 때까지의 <em>LIFE</em> 지를 살펴보면 미국의 여론은 압도적으로 &#8216;반공 중의 반공&#8217;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미국이 거의 갑자기 &#8216;소련과 공산주의&#8217;에 대한 공포와 혐오감 속에서 고민하기 시작했던 것이고 세계 도처에서 공산주의의 확장, 특히 철의 장막에 대한 경계심을 날로 고조되고 있었다.</p>
<p>미국인들, 특히 &#8216;진보적 성향&#8217;의 LIFE 지 조차도 공산주의의 실체를 알리기 시작하고 나치 독일의 뒤를 이어 나타난 소련의 공포 (특히 스탈린)를 미리 파악하지 못한 미국 행정부의 정책 실패를 비난하고 있다. 중국 국민당 정부가 모택동의 공산정권에게 거의 패배하던 마당에 이번에는 한반도에서 이런 사건이 난 것을 LIFE 지는 중요하게 화보로 다룬 것이다.</p>
<p>이 기사를 읽으면 2년 뒤에 일어날 CIVIL WAR, 한국전쟁도 예견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승만 정권이나 미국의 2차 대전을 전후로 한 루즈벨트 정권이나 모두 공산주의의 실체를 일시적이나마 무시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뒤돌아 본다면 쉽게 말해서 기회가 있을 때 이들의 &#8216;악의 뿌리&#8217;를 제때에 청소를 했었더라면 현재 한반도의 사정은 많이 달라졌을지 않았을까?</p>
<p>&nbsp;</p>
<p>&nbsp;</p>
<p><span style="font-size: 24pt;">REVOLT IN KOREA</span></p>
<p>&nbsp;</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center wp-image-16321 size-full"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9/12/yosu-1.jpg" alt="" width="530" height="428" srcset="https://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9/12/yosu-1.jpg 530w, https://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9/12/yosu-1-300x242.jpg 300w" sizes="auto, (max-width: 530px) 100vw, 530px" /></p>
<p style="text-align: center;">AT YOSU IN THE U.S. ZONE, WHERE KOREA&#8217;S REBELLION BEGAN<br />
ON OCT 19, LOYAL TROOPS FLUSH OUT COMMUNISTS FOR TRIAL<br />
AFTER RETAKING THE CITY</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center wp-image-16323 size-full"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9/12/yosu-5.jpg" alt="" width="530" height="347" srcset="https://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9/12/yosu-5.jpg 530w, https://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9/12/yosu-5-300x196.jpg 300w" sizes="auto, (max-width: 530px) 100vw, 530px" /></p>
<p style="text-align: center;">YOSU&#8217;S RECAPTURE was achieved on Oct. 27 by loyal troops. Only their<br />
white helmet bands differentiated them from the rebels, who also used<br />
new American equipment.</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center wp-image-16324 size-full"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9/12/yosu-4.jpg" alt="" width="530" height="329" srcset="https://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9/12/yosu-4.jpg 530w, https://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9/12/yosu-4-300x186.jpg 300w" sizes="auto, (max-width: 530px) 100vw, 530px" /></p>
<p style="text-align: center;">TWO OF SUNCHON&#8217;S BEREAVED WOMEN MOURN A LOYAL KOREAN WHO FELL BEFORE A REBELE SLAUGHTER SQUAD AS THE REBELLION BEGAN. AN AMERICAN ADVISER, LIEUT. RALPH BLISS LOOKS ON SILENTLY WHERE NO ADVICE WILL HELP</p>
<p>&nbsp;</p>
<p>&nbsp;</p>
<p><span style="font-size: 18pt;">A NEW COMMUNIST UPRISING TURNS MEN INTO BUTCHERS</span></p>
<p>Sooner or later the cold war in Korea was sure to turn hot, and so it did in late October on a signal from Soviets. The reason were well known: Korea had been split between U.S. and Soviet control at Yalta, and the Soviets obstructed all later efforts to unite it, preferring to establish a Communist &#8220;people&#8217;s republic&#8221; in North Korea and equip it for civil war which would make all Korea Red. The urgency increased in August when the U.S. gave South Korea a government under President Syngman Rhee. When the Red rebellion came, it splattered blood across the new southern nation. It began on the cool night Oct. 19 while the Moscow radio trumped the news that Soviet troops were leaving Korea. Simultaneously a Red cell of 40 soldiers in a regiment of the American-trained Korean national army at the southern port of Yosu killed the regimental officers, gathered the entire regiment in revolt, murdered the local police and quickly captured both Yosu and the city of Sunchon 25 miles to the north. There the rebels, still in American Army uniforms, and followers raised the flag of the North Korean People&#8217;s Republic, and for a few bloody days ruled a small chunk of Rhee&#8217;s south. Before they melted into the hills, at least temporarily repulsed by loyal troops, LIFE&#8217;s Carl Mydans was on the scene with a camera to record the brutal consequences.</p>
<p>&nbsp;</p>
<p><span style="font-size: 18pt;">HOW DEATH CAME TWICE TO &#8220;PEACEFUL HEAVEN&#8221;</span></p>
<p>At Sunchon, which means &#8220;Peaceful Heaven,&#8221; the rebellion&#8217;s Red leaders opened the city jail and let political prisoners lead them through the city from house to house pointing out enemies for revenge. With this help the rebels had slaughtered about 500 civilians and 100 police before the Korean national army retook Sunchon (pop. 60,000) on Oct. 23. Then it was the government&#8217;s turn, and LIFE&#8217;s Carl Mydans watched with horror as the process of retribution began again. He cabled:</p>
<p>&#8220;Now the national army, aided by a few police who had fled to the hills and come back, repaid brutality with brutality. We watched from the sidelines of a huge playground with the women and children of Sunchon while all of their men and boys were screened for loyalty. Four young men stripped to their shorts were on their knees begging. One had his hands up in a symbol of prayer. Suddenly these suppliant hands were crushed into his mouth and nose as a rifle smashed out his teeth.</p>
<p>&#8220;Behind them stood two men with clubs. They beat the kneeling group over heads and backs until the beaters, grinning, had to pause for breath. A policeman wearing black glasses and Japanese helmet danced madly before the victims. Uttering staccato barks, he alternately spun his carbine butt forward and smashed a kneeling man in the face, then twirled the gun muzzle downward and feigned shooting. Finally, without missing a stroke, he charged like a goat, helmet lowered, and smashed the steel hat into the begging victim&#8217;s head.</p>
<p>&#8220;We drove through the city &#8211; empty except for bodies &#8211; and here we saw the reason for brutal retaliation. Bodies lay just as they had been slain by the rebels &#8211; in heaps with hands tied behind backs. In the police compound there were two heaps: 85 corpses, some of them civilian, some police. We found others near the river, tumbled grotesquely down an embankment and on the edges of paddy fields. Some were burned in charred masses on the streets, or lay alone where they had fallen beside looted shops and homes.</p>
<p>&#8220;During the first terrible days of Sunchon&#8217;s blood bath, no relative dated claim a body for fear that doing so would identify the living with the dead and thus bring quick retaliation from either the Communists or the government. Later, when it was safe, women streamed away from the big playground to poke among the heaps of bloated dead &#8211; a scene not easy to watch. When they found theirs, they were stoical at first. Then tears came and they were hysterical.&#8221;</p>
<p>&nbsp;</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center wp-image-16325 size-full"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9/12/yosu-2.jpg" alt="" width="484" height="695" srcset="https://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9/12/yosu-2.jpg 484w, https://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9/12/yosu-2-209x300.jpg 209w" sizes="auto, (max-width: 484px) 100vw, 484px" /></p>
<p style="text-align: center;">DEAD REBELS, their bodies dotted with bullet holes, lie beside a school ground at Sunchon. Other rebels in army uniform (below) are hauled away tightly trussed in army trucks, after their capture by loyal army forces, for trial by a Korean military tribunal.</p>
<p style="margin: 0in; font-family: Calibri; font-size: 10.0pt;"> </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center wp-image-16326 size-full"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9/12/yosu-3.jpg" alt="" width="486" height="607" srcset="https://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9/12/yosu-3.jpg 486w, https://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9/12/yosu-3-240x300.jpg 240w" sizes="auto, (max-width: 486px) 100vw, 486px" /></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center wp-image-16327 size-full"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9/12/yosu-6.jpg" alt="" width="530" height="597" srcset="https://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9/12/yosu-6.jpg 530w, https://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9/12/yosu-6-266x300.jpg 266w" sizes="auto, (max-width: 530px) 100vw, 530px" /></p>
<p style="text-align: center;">A CIVILIAN REBEL holds his bloody head after &#8220;questioning&#8221; by loyal<br />
soldiers who took Sunchon back from the revolting troops. He may<br />
get death sentence. Many Koreans, who traditionally jump at a chance<br />
to attack their police and officials, joined the rebels believing<br />
Red propaganda that all Korea had fallen to the Communists.</p>
]]></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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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고(종옥) 마태오 신부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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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Ken]]></dc:creator>
		<pubDate>Mon, 11 Sep 2017 01:39:44 +0000</pubDate>
				<category><![CDATA[Daybook]]></category>
		<category><![CDATA[연숙]]></category>
		<category><![CDATA[육이오]]></category>
		<category><![CDATA[종교]]></category>
		<category><![CDATA[책]]></category>
		<category><![CDATA[추억]]></category>
		<category><![CDATA[한국전쟁]]></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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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또 우연히 (사실 근래 들어서 우연이란 말을 피하려고 하지만)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주일미사에 갔다가 성물방/도서실 (성물 판매와 도서를 같은 방에서 service하는) 을 기웃거렸다.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그곳에 있는 &#8216;고서&#8217; 같은 냄새를 풍기는 진열된 책들의 제목들.. 또 우연인가.. 몇 년 전에 &#8216;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8216;  서울 재동학교 동창, 김정훈 부제의 유고집을 찾았을 때처럼 이번에는 &#8216;사랑의 [&#8230;]]]></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figure id="attachment_12130" aria-describedby="caption-attachment-12130" style="width: 244px" class="wp-caption alignleft"><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wp-image-12130 size-full"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7/09/Scan10040-1.jpg" alt="" width="244" height="365" srcset="https://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7/09/Scan10040-1.jpg 244w, https://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7/09/Scan10040-1-201x300.jpg 201w" sizes="auto, (max-width: 244px) 100vw, 244px" /><figcaption id="caption-attachment-12130" class="wp-caption-text">책, 사랑의 지도 &#8211; 고 마태오</figcaption></figure>
<p><span style="font-size: 14pt;"><strong>또 우연히</strong></span> (사실 근래 들어서 우연이란 말을 피하려고 하지만)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아틀란타 순교자 성당</span> 주일미사에 갔다가 성물방/도서실 (성물 판매와 도서를 같은 방에서 service하는) 을 기웃거렸다.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그곳에 있는 &#8216;고서&#8217; 같은 냄새를 풍기는 진열된 책들의 제목들.. 또 우연인가.. 몇 년 전에 &#8216;<strong>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strong>&#8216;  서울 재동학교 동창, 김정훈 부제의 유고집을 찾았을 때처럼 이번에는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8216;<strong>사랑의 地圖</strong> <strong>&#8211; 고 마태오</strong>&#8216;</span> 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우연인지 아닌지는 현 시점에서 알 길이 없다.</p>
<p><strong>고 마태오</strong>, 실제 이름은 <strong>고종옥</strong> 신부님.. 오래 전의 가물거리는 기억이 조금씩 되살아난다. 오래 전, 그러니까 1982년 경이었던가.. 우리 부부가 콜럼버스(오하이오) 한인성당(공동체)에서 <strong>왕영수(프란치스코) 신부님</strong>으로부터 세례를 받던 해, 그 무렵이다. 그 해 부활절에 세례(그 당시는 <strong>영세</strong>라고 했다)를 받았는데 그 한달 전쯤인가, 세례를 받기도 전에 연숙 홀로 &#8216;용감하게도&#8217; <strong>신시내티</strong> 에서 열리는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성령세미나</span>엘 갔었는데 그 때 왕 신부님은 물론이고 캐나다에서 내려오셨다는 고 마태오 라는 &#8216;건강하고 풍채가 좋았던&#8217; 신부님도 하셨다. 물론 나는 나중에 연숙을 통해서 들은 이야기지만 단체사진에서 그 분의 모습을 보았다.</p>
<p>&nbsp;</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center wp-image-12131 size-full"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7/09/Scan10039-2.jpg" alt="" width="515" height="538" srcset="https://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7/09/Scan10039-2.jpg 515w, https://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7/09/Scan10039-2-287x300.jpg 287w" sizes="auto, (max-width: 515px) 100vw, 515px" /></p>
<p style="text-align: center;">서부 전선 &#8216;사천강 전투&#8217; 때, 신부 되기를 결정한 직후, 1952</p>
<p>그러면서 이 &#8216;<strong>전설적인 신부님</strong>&#8216;에 대한 이야기를 책을 돌려보며 듣게 되었다. 아마도 그때 돌려서 본 책이 바로 오늘 내가 찾고 빌려온 &#8216;사랑의 지도&#8217;가 아니었을까.. 100% 확신은 없지만 거의 분명하게 나는 책 뒤 표지의 사진, &#8216;<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멋진 sunglass를 끼고 호탕한 미소를 짓는 군인</span>&#8216;의 모습을 기억한다. 당시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지만 연숙으로부터 들었던 것들, &#8216;6.25 동란을 겪는 영화 같이 파란만장한 과거, 사랑하던 여성,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기적같이</span> 신부가 되었던 이야기&#8217; 모든 것들이 그야말로 어떤 영화를 보는 느낌을 받았던 기억들.. 그러고 나서 이 고 마태오란 이름은 30여 년의 긴 인생역마차 바퀴에 치어 나의 관심권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잊혀졌다가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홀연히 나의 눈앞에 나타났다</span>.</p>
<p><em>Googling</em>으로 본 고 마태오 신부님, 이미 돌아가신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확실하게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2004년 12월 31일에 선종</span>하셨음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8216;풍채 좋았던 몸집&#8217;에 걸맞게 역시 고혈압과 당뇨병으로 고생하시고 75세란 &#8216;길지 않은&#8217; 생을 마치신 것, 타국 땅 캐나다의 어떤 양로원에서 가셨다는 사실이 그렇게 가슴을 아프게 한다. 유명인사 라고 해도 생각보다는 쓸쓸히 가신 것 같아 더욱 가슴이 저려온다. 은퇴사제들의 은퇴 후의 option이란 사실 거의 이런 것인가? 그래도 긴 세월 불치병으로 고생하신 것이 아닌 것 같아 그나마 위안이라고 할까?</p>
<p>고 신부님의 저서를 &#8216;한 번&#8217;도 제대로 본 적이 없기에 나는 조금 가슴이 설렌다. 하나, 하나, 하나.. 내가 겪지 못했던 조국의 근대사를 신부님의 눈으로 다시 겪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평화통일을 원하셨다는 것은 이미 가끔 짧은 소식을 통해서 들을 기억이 있다. 그런 노력과 현재 모국의 돌아가는 &#8216;꼴&#8217;을 비교해서 생각하면 정말 한숨만 나온다.고 마태오 신부님의 하느님은 도대체 현재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 것인가?</p>
<p>이제 이 책을 typing (keyboarding)으로 읽기 시작하며, 일제시대와 6.25동란에 얽혔던 생생한 증언을 소설 같은 이야기로 내가 상상하던 당시의 상황과 비교할 것이다. 그러면서, 나의 1950년대 조국의 모습과, 1980년 초 우리가 세례를 받으며 하느님을 찾고 있었던 시절을 회상할 것이다. Reading by Typing 은 난독, 정독, 완독에 비해서도 훨씬 시간이 더 든다. 그래도 나의 정신건강 상태에 따라 2달 정도 걸릴 것으로 희망을 한다. 이 &#8216;고생&#8217;이 끝나면 그래도<a href="http://serony.com/ken/books-papers/%ec%82%ac%eb%9e%91%ec%9d%98-%e5%9c%b0%e5%9c%96-%ea%b3%a0-%eb%a7%88%ed%83%9c%ec%98%a4/"> online, softcopy가 &#8216;영구히&#8217; 남기에</a> 더욱 분발할 것이다.</p>
<p>&nbsp;</p>
<figure id="attachment_12215" aria-describedby="caption-attachment-12215" style="width: 650px" class="wp-caption aligncenter"><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wp-image-12215 size-full"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7/09/Scan10042-1.jpg" alt="" width="650" height="337" /><figcaption id="caption-attachment-12215" class="wp-caption-text">.</figcaption></figure>
<p style="text-align: center;">1982년 3월경 신시내티에서 열린 성령세미나, 고마태오, 왕영수 신부님 그리고 최옥진 데레사 모두 한 자리에.. 왼쪽 제일 뒷쪽에 연숙, 고완석씨 등의 얼굴도 반갑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center wp-image-12216 size-full"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7/09/Scan10043-1.jpg" alt="" width="650" height="343" /></p>
<p style="text-align: center;">수녀님 옆에 있는 연숙, 이 수녀님은 양수녀로 나중에 아틀란타 성당에서 신부파, 수녀파로 싸우던 그 장본인이다.</p>
<p>&nbsp;</p>
]]></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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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그렇구나, 또 육이오가..</title>
		<link>https://serony.com/ken/2017/06/24/%ea%b7%b8%eb%a0%87%ea%b5%ac%eb%82%98-%eb%98%90-%ec%9c%a1%ec%9d%b4%ec%98%a4%ea%b0%80/</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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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Ken]]></dc:creator>
		<pubDate>Sat, 24 Jun 2017 13:04:34 +0000</pubDate>
				<category><![CDATA[Daybook]]></category>
		<category><![CDATA[Politics]]></category>
		<category><![CDATA[역사]]></category>
		<category><![CDATA[육이오]]></category>
		<category><![CDATA[한국전쟁]]></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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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전쟁 발발 직후 피난민들이 남하를 시작, 수원 근교를 지나가고 있다 &#8211; 1950년 7월 11자 Life magazine &#160; 육이오, 융요..유기오.. 6.25.. 1950년,  도대체 몇 년 전인가? 이것도 이제는 쉽지 않구나. 반세기도 모자라서 67년 전이란 말인가? 나에게 이 날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 집, 가족의 형체를 철저히 망가뜨린 동족상잔의 시작인 날은 분명하고, 나의 인생에 미친 영향은 [&#8230;]]]></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center wp-image-12011"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7/06/refugee-near-suwon-1950-6.jpg" alt="" width="650" height="283" /></p>
<p style="text-align: center;">전쟁 발발 직후 피난민들이 남하를 시작, 수원 근교를 지나가고 있다 &#8211; 1950년 7월 11자 <em>Life</em> magazine</p>
<p>&nbsp;</p>
<p><span style="font-size: 14pt;"><strong>육이오, 융요..유기오.. 6.25.. 1950년</strong></span>,  도대체 몇 년 전인가? 이것도 이제는 쉽지 않구나. 반세기도 모자라서 67년 전이란 말인가? 나에게 이 날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 집, 가족의 형체를 철저히 망가뜨린 동족상잔의 시작인 날은 분명하고, 나의 인생에 미친 영향은 과연 어떤 것인가? 머리 속의 깊은 속에서는 분명히&#8230; &#8220;김일성 이 X새끼야, 내가 지옥까지 너를 찾아내서 다시 한번 더 확실히 죽여 버릴 거다!!!!&#8221;라는 절규가 울리고 있다. 100% 동감하는 나의 심정이다. 67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저주의 정도가 전혀 변하지 않고 있다. 빨갱이들과 민족화해라고.. 허.. 정말 죽여주는 말이다.</p>
<p>&nbsp;</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center wp-image-12000"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7/06/pig-1950-1-e1640712236881.jpg" alt="" width="650" height="372" /></p>
<p style="text-align: center;">아.. 압록강으로 올라가던 <em>MacArthur</em>가 이 개새끼를 잡았더라면, 역사는..</p>
<p>&nbsp;</p>
<p>6.25 사변이 정전armistice 으로 끝났던 어렸을 적에는 물론 &#8216;반공, 멸공, 북진통일&#8217;을 외치던 &#8216;이승만, 우리 할아버지&#8217;를 따라서 무조건, 무의식적으로 반공, 역적 개새끼 김일성을 외쳤지만 같은 구호를 외치며 경제개발을 시작했던 &#8216;박정희 대통령&#8217; 시절,  &#8216;독재&#8217; 덕분에 한때는 반공보다는 반독재의 고함소리에 솔깃했고, 거리로 뛰쳐나오기도 했다. 젊은 피가 인생, 삶의 피로 바뀌기 시작한 그 이후의 오랜 인생여정, 내가 살던 지리적 여건으로 &#8216;탈 脫 사상 思想&#8217; 의 변화의 시기들도 있었다. &#8216;잊자, 조국&#8217;, 대한민국 무관심의 세월이었나? 그 후에는 조국도 변하고 나의 나이도 진전을 해서 세상이 변했던가.. 하지만, 시간의 irony는.. 결국은 &#8216;박정희 향수&#8217;에 젖은 기분도 느낀 것이다.</p>
<p>이런 &#8216;복잡한&#8217; 나의 조국관 祖國觀 을 정리해서 나의 정체성을 찾으려면 아마도 많은 노력일 필요할 듯 하다. &#8216;국가&#8217;란 것이 과연 인간에게 무엇인가, 하는 단계까지 내려간다. 이런 &#8216;정치적 인간, 인생&#8217;의 차원은 어느 정도 &#8216;높은&#8217; 것인가? 그 다음 단계로 올라가면 어떤 세상이 보이는 것인가? 그런 것이 있기는 한 것인가?</p>
<p>나의 고뇌는 이것이다. 최근에 벌어진 해괴하기까지 느껴지는 대한민국의 정국, 멀쩡하던 여자 대통령이 갑자기 수의를 입고 나타나고, 그것을 보며 박수를 치며 환호하던 &#8216;멀쩡한 군중들&#8217;.. 이것이 어떤 나라인가? 아마도 현재 조국에서 제일 좋아하는 민주주의의 이상형이 바로 &#8216;대통령을 감옥으로 보내며 박수를 치는&#8217; 그런 것인가? 세상에 유례가 없는 선진형 민주주의라고? 유례가 없기는 하지만 과연 이것이 <em>advanced, vibrant</em> democracy인지는.. 글쎄올시다.</p>
<p>하지만 나의 문제는, 이런 분석이 모두 내가 피부로 느끼는 &#8216;추측&#8217;이라는 사실이다. 오랜 세월 동안 무관심으로 바라보았던 그쪽의 정확한 사정을 나는 알지 못하기에 이런 논평 자체가 &#8216;실격&#8217;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상황이나 &#8216;빨갱이&#8217;란 말이 연계가 되면 나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6.25 를 연상할 수 밖에 없고, 그것에 조금이라도 관련이 된 소위 말하는 &#8216;<em>progressive</em> 한 정권&#8217;은 절대로 믿을 수가 없다.</p>
<p>6.25를 맞으며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속에는 이런 것도 있다. 이것도 물론 나의 제한된 지식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현재 대한민국은  <em>extreme, mass</em> narcissism에 빠진  &#8216;집단적 자기 도취&#8217;에 빠진, 그런 모습을 보인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물론 나의 &#8216;코끼리 만지는 장님&#8217; 식의 느낌일 수도 있지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1980년대의 일본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원화 평가절상 후 세계를 돈으로 석권하며 자기도취에 빠진, 이제는 지구상 다른  어느 곳에서도 더 배울 것이 없어진 것을 애석해 하던 그들. 그 이후 30년 어떻게 그들은 변했던가? 이제는 당시의 &#8216;일류 日流&#8217;가 &#8216;한류&#8217;로 바뀐 것 뿐.. 그것에 환호하며 &#8216;자기들이 뽑아놓은&#8217; 현 대통령을 감방으로 보내는 것에 &#8216;아이들까지 환호&#8217;하는 그런 나라.. 가.. 나는 정말 싫다.</p>
<p>통일, 그러면 통일은?  나를 포함한 민족의 염원인 통일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김일성 X새끼가 소련제 tank로 &#8216;쉽게&#8217; 통일을 하려던 바로 그것, 어떨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나는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듯 보인다. 아주 고차원적인 초월적인 도움, 아주 먼 옛날로 갈 필요가 없다. 소련이 붕괴되고 동구권이 &#8216;민주화&#8217;되고 독일이 통일되었던, 그것도 1980년대 이후를 공부해 보면 무언가 짐작을 할 수가 있다. 이것이야 말로, 초자연적인 도움<sup class='footnote'><a href='#fn-11998-1' id='fnref-11998-1' onclick='return fdfootnote_show(11998)'>1</a></sup> 이 필요한 바로 그런 것이다.</p>
<p>&nbsp;</p>
<div class='footnotes' id='footnotes-11998'>
<div class='footnotedivider'></div>
<ol>
<li id='fn-11998-1'> <em>Fatima</em>의 성모님이 예견하고, <em>Saint John Paul Second, Ronald Regan, Gorvachev</em> 등이 주도 했던 소련 붕괴 <span class='footnotereverse'><a href='#fnref-11998-1'>&#8617;</a></span></li>
</ol>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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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원서동,  苑西洞.. 1954</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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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Ken]]></dc:creator>
		<pubDate>Sat, 25 Jun 2016 11:58:17 +0000</pubDate>
				<category><![CDATA[Daybook]]></category>
		<category><![CDATA[Memoir]]></category>
		<category><![CDATA[50/60]]></category>
		<category><![CDATA[원서동]]></category>
		<category><![CDATA[육이오]]></category>
		<category><![CDATA[추억]]></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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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서울 특별시 종로구 鍾路區 원서동 苑西洞 비원 秘苑의 서쪽 담장을 따라 맑은 시냇물 (당시에는 개천 이라고 불린)을 따라 아늑하게 남북으로 펼쳐진 그 옛날 1950년대의 종로구 원서동, 전설의 고향 같은 느낌으로 나의 기억 제일 깊숙한 곳에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는 그곳.. 특히 1954년 경 그 동네의 모습은 아마도 내가 죽는 순간까지도 기억하며 그릴지도 모른다. 육이오 6.25란 글자가 [&#8230;]]]></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span style="font-size: 14pt;"><strong>서울 특별시 종로구 鍾路區 원서동 苑西洞</strong></span> 비원 秘苑의 서쪽 담장을 따라 맑은 시냇물 (당시에는 개천 이라고 불린)을 따라 아늑하게 남북으로 펼쳐진 그 옛날 1950년대의 종로구 원서동, 전설의 고향 같은 느낌으로 나의 기억 제일 깊숙한 곳에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는 그곳.. 특히 1954년 경 그 동네의 모습은 아마도 내가 죽는 순간까지도 기억하며 그릴지도 모른다.</p>
<p>육이오 6.25란 글자가 보이면 원서동에 연관된 추억들이 왜 그렇게 지워지지 않고 생생하게 나를 깨우는가. 이런 이유로 나의 blog 특히 memoir 에는 이곳의 추억이 이곳 저곳 산재해 있다. 그만큼 이곳은 나의 추억에서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곳이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 된 것들이 이곳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p>
<p><strong>오늘  6.25 동란, 66주년 아침</strong>에, 남기려는 것들, 6.25 동란 기록영화의 추억,  &#8216;<strong>더 늦기 전에</strong>&#8216;라는 말을 되뇌며 생각하고 기억력을  총동원한 것이다. &#8216;원서동 극장, 한성택, 조흔파&#8217; 정도가 keywords가 될 듯한 오늘의 추억은 정말로 아련한 추억들이다. 뒤 늦게 연대를 찾아보니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분명히 1954년 에서 1955년 사이 정도</span>가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6.25 동란이 일단 끝난 휴전 바로 다음해 쯤이었다.</p>
<p>내가 너무 어려서 기억할 수 없었던 때, 전쟁 이후 휴전이 될 무렵까지 우리는 원서동의 아래쪽, 휘문중고교 바로 옆, 동섭이네 집이라고 불리던 집에서 살았는데, 그 집의 주인이 휴전 이후에 피난에서 돌아왔기에 우리 3식구 (아버지는 전쟁 초에 납북)는 가까운 곳, 아주 작은 &#8216;무당집&#8217; 단칸 방으로 이사를 갔는데 이때의 기억들은 <a href="http://wp.me/p4QWOn-cN">나의 오래 전 blog</a><sup class='footnote'><a href='#fn-11415-1' id='fnref-11415-1' onclick='return fdfootnote_show(11415)'>1</a></sup>에서 이미 회상을 하였다. 그 이후, 우리 세식구는 1954년 초에 이곳, 승철이네 집의 건넌방으로 이사를 왔고 본격적인 &#8216;재동국민학교 1~2학년&#8217; 시절의 &#8216;평생 기억&#8217;을 만든다.</p>
<p>&nbsp;</p>
<p><span style="font-size: 14pt;"><strong>승철이네 집</strong></span>.. 최승철.. 어찌 잊으랴.. 나보다 2살 밑이었지만 그 나이에 나의 제일 친한 &#8216;한 집&#8217; 친구가 되었다. 안 방 주인집은 양 부모가 있는 &#8216;정상적&#8217;인 주인이었지만 나는 우리 아버지가 없는 것이 그렇게 부끄럽거나 그 집이 부럽지는 않았다. 그저 다른 집이라고만 생각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비록 큰 집은 아니었어도 승철이네 집에서 보낸 2년 정도는 한마디로 즐겁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 집의 위치도 원서동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북쪽과 서쪽은 비원의 담으로 완전히 가로막힌 아늑한 곳, 여름에는 비원에서 들려오는 매미소리로 잠을 설칠 정도였고, 겨울에는 가운데로 흐르는 개천 (청계천으로 흐르는) 에서 썰매를 타는 그곳은 어린이들의 천국이었다.</p>
<p><strong>승철이네 엄마</strong>는 우리 엄마와 나이도 비슷하고 친절한 분이셨다. 큰 딸 시자누나는 나의 누나와 동갑이었는데, 어머님이 재혼을 하셨는지 성이 &#8216;주&#8217;씨여서 원래는 주시자 누나로 통했는데 나중에는 성을 최씨로 바꾸었다. 그러니까 두 남동생인 승철이와 승관이는 현재 아버지와의 자식인 것이다. 당시에 그런 것이 그렇게 관심은 없었지만 기억에 뚜렷이 남은 것은 왜 그런 것일까?</p>
<p>비슷한 또래의 아이들 5명 그것도 두 누나들까지 포함 된.. 그런 승철이네 집은 어떻게 보면 재미있는 추억이 많은 곳이었다. 승철이 아버지는 경찰출신으로 (해방 전에도 그랬는지는 몰라도) 훤칠한 키의 호남형, 하지만 사나운 사나이 기절도 있었다. 일정한 직장이 없으셔서 거의 집에 계신 것이 특이한 점이었지만 그래도 부지런하셔서 놀지는 않으셨다. 항상 무언가 하신 것 같았다. 기계 쪽에 관심과 특기가 있으셨는지, 엔진 같은 것을 집에다가 갖다가 놓으시기도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얼음을 만드는 냉동기였다. 그것을 가지고 후에는 경기도 연천 인가 하는 곳으로 가셔서 가게를 차리셨다. 물론 아이들은 집에다 두고 부부만 가신 것이다. 물론 그것은 내가 그 집에서 이사 나온 후의 일이었지만.</p>
<p><strong>구파발의 추억:</strong> 가끔 승철이 아빠는 우리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고향인 경기도 구파발로 놀러 가시기도 했다. 여름 겨울 모두 갔었는데, 나에게는 그것이 너무도 즐겁고 신기한 추억이 되었다. 구파발.. 어찌 잊으랴.. 그것이 그러니까 1954, 5년 경이었을 것이다. 서울역 염천교 옆에서 시외 버스를 타고 &#8216;한없이&#8217; 달려서 간 곳.. 구파발, 구파발.. 그곳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 가보게 된 &#8216;시골&#8217;이었다. 시골, 시골,.. 처음으로 &#8216;쌀나무, 벼&#8217;를 보았고, 논을 보았고 &#8216;진짜 초가집&#8217; 안에 들어가서 자 보았다. 처음으로 알았다.. 그곳은 아름답기 전에 너무도 가난한 곳이었음을.. 서울에 비해서 그런 것이지만, 어떻게 그렇게 &#8216;원시적&#8217;인 것인지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아름다운 곳, 진짜 시냇물에서 수영, 미역을 감고, 미꾸라지를 잡고, 차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깜깜한 밤에 술래잡기를 하고, 한없이 많았던 메뚜기를 잡으려 이리 뛰고 저리 뛰고..</p>
<p>우리가 가서 자던 초가집이 승철이 아빠와 어떤 친척인지는 아직도 확실하지 않지만 아주 가까운 사이였을 것이다. 그 집에 &#8216;희덕이&#8217;라는 우리보다 조금 나이가 많은 남자아이도 있었는데.. 이제는 기억이 희미해져서 그것이 전부다. 겨울에 놀러 갔을 때는 얼어 붙은 논에서 &#8216;한 없이 하루 종일&#8217; 썰매를 타는 황홀에 빠지기도 했다. 승철이 아버지, 감사 드립니다. 셋방에 사는 아이까지 데리고 가신 것.. 아직도 이렇게 생생한 황홀경의 추억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당시 기억에 뚜렷한 것 중에, 그곳 (구파발)에서 나올 때 어떤 초가집을 지나가는데, 비명소리 울음소리가 나고 어떤 사람이 승철이 아빠에게 도와달라고 애원하던 것, 그러니까 그 집 남편이 아내를 구타하던 것, 그 아내가 살려달라고 울며불며 승철이 아빠에게 매달리던 것, 잊을 수가 없다. 어느 정도 해결이 된 후 그 집을 떠나는데 또다시 그 집 아내는 비명을 지르며 우리를 쫓아오던 모습.. 어린 나이에도 그것은 한마디로 공포의 장면이었다. 그것을 만류하고 해결해 주었던 승철이 아빠.. 존경을 받을 만 했다.</p>
<p>하지만, 사람은 언제나 어두운 쪽도 있다. 다른 기억에, 한 때 어떤 &#8216;장판지 외판원&#8217;을 구타했던 사건이 있었다. 나는 분명히 기억을 하는데, 한번 장판을 파는 젊은 청년이 왔었는데, 무언가 잘 못 되어서 승철이 아빠가 그 청년을 거의 구타하다시피 해서 쫓아 낸 것이다. 나는 너무나 혼동스러웠던 것이 어떻게 그렇게 사람이 변할 수 있는가, 그리고 사람을 어떻게 그렇게 심하게 대할 수 있는가 하는 것. 어린 나이에 그것은 나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아버지의 상에 흠이 간 것이다. 그런 아버지는 없는 것이 낫다 라는 생각까지도 한 것이다. </p>
<p>&nbsp;</p>
<p><span style="font-size: 14pt;"><strong>작가 조흔파: </strong></span> 집에서 북쪽으로 50m 정도 올라가면 조금 더 좋은 집들이 나오는데, 그 중에 바로 &#8216;작가 조흔파&#8217; 선생의 집이 있었다. 당시에 솔직히 조흔파가 누구인지 잘 몰랐지만 그 집의 둘째 아들 &#8216;조영환&#8217;과 같이 놀았기에 그 집엘 놀러 가며 그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소설가라는 것, 학생잡지를 보면 그의 이름이 눈에 뜨일 정도였지만 그런 것을 읽기에는 너무나 어렸다. 그 집의 큰 아들이 이름, 그러니까 조영환의 형의 이름이 조영수였다. 나중에 휘문중학교에 들어간 것도 기억이 난다. 조영환은 장난이 조금 심한 애였고 우리들을 조금 괴롭힌 기억도 나는데.. 의문은.. 분명히 나와 같이 재동국민학교에 다녔을 텐데.. 졸업 앨범에 그의 모습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마도 졸업하기 전에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을 것이다.</p>
<p>그 집에 몇 번 놀러 갔을 때 느낌은..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어린 나이에도 무언가 다른 집이다</span>.. 그러니까.. &#8216;작가, 문필가 소설가&#8217;의 집이란 느낌을 받은 것이다. 물론 그 아빠 조흔파 씨는 집에 없어서 못 보았다. 그리고 그 엄마도 못 보았는데.. 그 집 툇마루에서 이상한 것을 본 기억, 바로 수영복이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남자 수영복을 보았다. 그리고 들었던 소문이 있었다. 그 집 엄마는 진짜 엄마가 아니고, 후처였다는 사실.. 어린 나이에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몰랐다. 게다가 그 후처는 당시에 숙명여대 학생이었고 조영환이 엄마는 &#8216;쫓겨 났다&#8217;는  이야기도 듣고 자랐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아하~ 그 새 엄마는 조흔파씨가 아마도 숙명여대에서 가르친 학생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 아마도 맞지 않았을까? 그 이후 &#8216;사라진&#8217; 조영환이네 기억은 서서히 사라졌지만 TV가 나오면서 가끔 조흔파씨가 출연하는 game show 같은 것을 보게 되면 그 집 생각이 나곤 했다. 또한 알게 된 것은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조흔파씨의 이름은 생각보다 훨씬 유명한 이름</span>이었다는 사실이었다.</p>
<p>&nbsp;</p>
<p><span style="font-size: 14pt;"><strong>김관형, 종맹이 형들</strong></span>:  집 바로 앞, 골목길 건너에 붙어있는 두 집이 있었다. 한 집에는 어머니와 아들, (김) 관형이 형 살고 있었고 (나머지 가족은 기억이 안 남) 또 한 집은 &#8216;원서동 극장&#8217; 이라고 내가 기억하는 집, 종맹이 형이 사는 곳이었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관형이형, 종맹이 형으로 기억이 나는 두 집이다. 관형이 형, 어린 눈에도 그 형은 여자처럼 예쁘게 생긴 형이었다. 말도 부드럽고 우리들, 나와 같은 동생뻘 아이들을 잘 돌보아 준 형.. 가끔, 옆집인 종맹이 형네 집에서는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극장처럼 영화를 상영하였다</span>. 아마도 종맹이 형의 아버지가 기록영화에 관련된 사람이 아니었을까? 심심하면 여름 밤에 우리를 포함한 동네 사람들 몇 집을 불러다가 대청 마루에서 영사기를 돌렸다. 극장가는 것 당시에 그렇게 쉽지 않았는데 &#8216;활동사진&#8217;을 집에서 본다는 것은 참 희귀한 일이었다. 문제는 그 &#8216;영화&#8217;라는 것이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모조리 6.25 전쟁 기록영화</span>였다는 사실.. 대부분 모인 사람들이 동네 아낙네들인데 그들이 그것에 열광할 리는 없었다.</p>
<p>하지만 우리 같은 아이들은 아주 달랐다. 만화를 보아도 전쟁, 군인들에 관한 것만 보는데.. 실제 전쟁 기록 영화를 집에서 생생하게 본다는 것은 완전히 꿈같은 일이었다. 심심치 않게 많이 보았던 6.25 기록영화들.. 군대 사열식하는 것부터 실제 대포를 쏘는 것, 군인들이 쓰러지는 것.. 그것은 당시 여름 밤을 다시 회상할 수 있는 멋진 추억으로 남았다.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종맹이 형은 그 이후 다시 볼 수 없었지만 관형이 형은 나중에 중학교까지 가서도 멀리서 가끔 본 기억이 난다</span>. 나를 특별히 잘 돌보아 주었다는 나만의 상상인가..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은 이름이 되었다.</p>
<p>&nbsp;</p>
<p><span style="font-size: 14pt;"><strong>한성택 형</strong></span>.. 집 옆에 흐르는 개천 건너 쪽에 있는 나즈막 한 집들에 &#8216;한씨 일가&#8217;가 살고 있었는데, 그 집에 나의 다른 기억을 만들어준 성택이 형이 있었다. 그 나이가 얼마 정도 였을까? 아마도 중학생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 집에는 사촌으로 알려진 한성우도 있었는데 그는 나와 동갑으로 재동국민학교도 같이 다니고 졸업도 같은 때 하였다.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성택이 형, 전형적인 &#8216;형 type&#8217; 이라면 어떨까</span>.. 동생뻘 아이들을 아주 능숙하게 다루고 &#8216;조종&#8217;을 하는 type, 나와 승철이는 그를 &#8216;하느님&#8217;처럼 따르기도 했지만 내가 훨씬 더 &#8216;보살핌&#8217;을 받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돈을 갖다 바쳤기 때문이었다</span>. 지금도 생각하면 웃긴다.. 그 나이에 어떻게 야쿠자도 아니고, 그런 &#8216;돈 관계&#8217;가 있을 수 있었을까? 나의 사고방식은 간단했다. 그 형에게 더 보호를 받고 싶다는 일념으로 내가 받는 용돈을 그에게 바치곤 한 것이다.</p>
<p>덕분에 동네에서 나는 주먹 같은 아이들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를 받고 어린 나이에도 &#8216;돈의 위력&#8217;을 실감하게도 되었다. 우리 어머니는 그런 것도 모르고 그 형만 보면 고맙다고 칭찬을 하곤 했다. 그 성택이 형의 심정은 어땠을까? 돈을 받으니 좋았을 것이고, 졸졸 따라다니며 &#8216;숭배&#8217;를 하는 꼬마가 있었으니 좋았을지 모른다. 한번은 한 겨울에 눈이 왔을 때, 그 형을 따라서 &#8216;<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한없이 걸어서&#8217; 썰매를 사러 간 적</span>이 있었다. 그 위치는 나중에 생각해 보니 아마도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삼선교 부근</span>이 아니었나.. 돈화문, 창경원 앞 전차 길을 따라 걸어 간 곳, 눈부신 쌓인 눈을 밟으며 걸었던 그 추억.. 결국 간 곳에서는 썰매를 살 수가 없었다. </p>
<p>6.25의 기억을 다시 생각하면 100% 생각나는 원서동 어린 시절, 그 중에서도 1954년 무렵의 승철이네 집 주변의 추억들은 나의 6.25에 대한 심각한 역사를 조금은 부드럽게, 포근하게 만든다. 절대로 잊을 수가 없는 너무나 아름다운 추억, 인물들.. 지금 다 어떻게 살고들 계신지..</p>
<p>&nbsp;</p>
<div class='footnotes' id='footnotes-11415'>
<div class='footnotedivider'></div>
<ol>
<li id='fn-11415-1'> 육이오, 원서동, 동섭이네집, 영구차 귀신 <span class='footnotereverse'><a href='#fnref-11415-1'>&#8617;</a></span></li>
</ol>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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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휴우~ 덥다 더위.. 6월 24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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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Ken]]></dc:creator>
		<pubDate>Fri, 24 Jun 2016 21:27:48 +0000</pubDate>
				<category><![CDATA[Daybook]]></category>
		<category><![CDATA[Politics]]></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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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레지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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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  휴우~ 덥다 더워.. 6월 24일!  이렇게 쓰고 보니 조금은 웃긴다.. 임마 (이런 말 아직도 쓰나?) 6월도 24일이면 한창 여름이 무르익어가는데 그것이 정상이지, &#8216;빠가야로&#8216;! 하는 등뒤의 속삭임에 내가 웃는다. 그렇지, 지금은 더운 것이 정상이지.. 그런데.. 92도 라면.. 어떨까? 아마도 옛날 옛적의 대구더위에 비길 수 있겠지. 며칠 계속된 더위지만 극적으로 때맞추어 &#8216;내가 고친&#8217; 에어컨 바람이 더 [&#8230;]]]></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span style="font-size: 14pt;"><strong>¶  휴우~ 덥다 더워.. 6월 24일!</strong></span>  이렇게 쓰고 보니 조금은 웃긴다.. <strong>임마</strong> (이런 말 아직도 쓰나?) 6월도 24일이면 한창 여름이 무르익어가는데 그것이 정상이지, &#8216;<strong>빠가야로</strong>&#8216;! 하는 등뒤의 속삭임에 내가 웃는다. 그렇지, 지금은 더운 것이 정상이지.. 그런데.. 92도 라면.. 어떨까? 아마도 옛날 옛적의 <strong>대구더위</strong>에 비길 수 있겠지. 며칠 계속된 더위지만 극적으로 때맞추어 &#8216;내가 고친&#8217; 에어컨 바람이 더 나에게는 시원하게 느껴진다. 이럴 때는 물론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오후에 때맞추어 쏟아지는 시원한 소낙비</span>.. 하지만 느낌에 그런 chance는 거의 zero 인가 보다. 아니면 <em>Johnny Rivers</em> 의 60&#8217;s <em>classic</em> oldie, <em>Summer Rain</em>을 연상케 하는 그런 추억의 비는.. 어떨까.. 하지만 이것은 거의 꿈같은 이야기다.</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frame loading="lazy" src="https://www.youtube-nocookie.com/embed/y6ifoJ2Pb9A?rel=0&amp;showinfo=0" width="650" height="384" frameborder="0" allowfullscreen="allowfullscreen"></iframe>  </p>
<p style="text-align: center;"><strong>1968년 여름의 추억</strong>, <em>Summer Rain</em> &#8211; Johnny Rivers </p>
<p style="text-align: center;"> </p>
<p>오랜만에 그 동안 바깥 구경을 못하고 살았던 우리 집 두 마리의 &#8216;재미있는 개&#8217; <em>Tobey &amp; Ozzie</em>, 오늘은 내가 더 쳐지기 전에 용감하게 끌고 동네를 돌았다. 거의 할아버지 나이가 된 우리의 개 <em>Tobey</em>가 언덕을 &#8216;새로니의 개&#8217; <em>Ozzie</em>를 앞지르며 나를 끌고 올라간다. 얘는 아마도 어렸을 때부터 이 동네 언덕을 나와 걸었기에 단련이 되어서 그런지 모른다. 공을 던지면 총알처럼 뛰어가는 다리가 긴 &#8216;젊은&#8217; <em>Ozzie</em>, 2주째 우리 집에 머물며 자기 엄마 &#8216;<strong>새로니</strong>&#8216;를 거의 잊은 듯 잘 지내고 있지만 그래도 밤에 &#8216;혼자&#8217; 자야만 하는 그 녀석을 보면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p>
<p>얼마 전에 이곳을 걸었을 때 내가 열을 받았던 것, <em>TRUMP FOR PRESIDENT, MAKE AMERICA GREAT AGAIN..</em>이란 SIGN이 두 곳에서 나를 자극했던 것.. 오늘도 어김없이 그곳에서 &#8216;빠가&#8217; 트럼프의 &#8216;쌍통&#8217;을 연상시킨다. 이 두 집이 바로 우리동네의 idiots, <em>white</em> trash인 셈이다. 이곳 <em>East Cobb</em> county는 물론 very conservative한 지역이고 전통적으로 &#8216;인정머리라고는 하나도 없는&#8217; 그런 &#8216;잘 사는 <em>Republican</em> white trash&#8217;들이 많은 곳이다. 그래서 이런 쓰레기 같은 SIGN을 본 것이 당연한 일이건만.. 나는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정도니.. 이건 분명히 내가 over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야말로.. I CANNOT HELP IT.. 어쩔 수가 없다. 도대체 이 덩치 큰, &#8216;젊은&#8217; 나라는 어떤 쪽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는 것인가? 덥기만 한 날씨에 더 열을 받고 있는 내가 한심하기도 하지만.. 그래.. 이래 저래해도.. 모든 것들은 다~~~ 지나가리라..</p>
<p>&nbsp;</p>
<p><span style="font-size: 14pt;"><strong>¶  6월 24일 세례자 성 요한 탄생 대축일:</strong></span>  오늘 평일미사를 가면서 6월 24일이 세례자 성 요한 탄생 대축일 (<em>Solemnity of the Nativity of Saint John the Baptist</em>) 임을 매일 복음묵상 &#8216;newsletter&#8217;에서 보고 알았지만, 사실 그 전에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 <strong>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strong> &#8216;사건&#8217;으로부터 였다. 바로 이날 6월 24일에 발현을 하신 메주고리예 성모님을 이 &#8216;대축일&#8217; 때문에 집에서 쉬던 (놀던) 그 &#8216;애&#8217;들이 본 것이다. 그 당시 이 발현 과정에서 이날이 &#8216;세례자 성 요한 탄생 대축일&#8217;임을 누누이 밝히고 있었지만 그 때 나는 그 말의 의미조차 잘 몰랐다. 이런 생각을 하니, 금요일 평일 미사엘 가면 분명히 세례자 성 요한과 예수님을 비교하는 짧은 강론을 듣지 않을까 기대를 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요새 거의 본당신부님 역할을 하시는 방문 신부님 <em>Fr. Joseph</em>, 뜻 밖에도 새로 부임하실 본당 신부님에 관한 얘기를 하며.. 우리의 &#8216;이해&#8217;를 구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사연은 물론 본당 <em>Holy Family</em> 성당에 7월 초에 새로 부임할 주임신부님이, &#8216;부인이 있고 가정이 있는 남자&#8217; 라는 우리에게는 &#8216;폭탄&#8217; 같이 느껴지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p>
<p>오늘 방문 신부님의 설명과 &#8216;양해&#8217;는 나도 아는 사실이다. 바티칸에 소속된 모든 가톨릭 &#8216;종파&#8217;들이 모두 다른 Rite를 가지고 있는데 현재 우리의 &#8216;보편 된&#8217; 것이 <em>Latin</em> Rite, 이곳에서는 신부님들이 결혼을 안 하지만 다른 극소수의 종파에서는 성공회같이 결혼을 한다고.. 듣던 얘기다. 이번의 새로 부임할 신부님은 <em>Melkite</em> 에 속한 신부님이라서 신부님들이 결혼을 한다고.. 하지만 우리들의 느낌은.. 그래도.. 하필이면.. 왜 그런 &#8216;소수 종파&#8217;의 신부님을 &#8216;주임신부&#8217;로 보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 본당 <em>Holy Family</em>는 지역적으로도 보수적이고 <em>Irish</em> Catholic의 전통이 농후한 곳인데.. 아마도 그들 대부분은 불만이 적지 않을 듯하다. 그 중에는 우리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상상을 하니 아찔하다.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가족을 주렁주렁 데리고 사제관에서 생활</span>을 하며 가족들과 같이 미사에 들어 온다는 광경은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도라빌 순교자 성당에서는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구역문제로 우리는 고민에 빠지고</span> 있는 마당에 이번에는 우리의 피난처 같은 미국본당에 부인, 가족을 동반한 주임신부가 온다는 사실.. 참.. 오래 살다 보니..</p>
<p>&nbsp;</p>
<p><span style="font-size: 14pt;"><strong>¶  성모님, 좀 봐주세요..</strong> </span> 근래 우리부부와 자주 보게 되고, 예전 보다 조금 더 가깝게 지내는 C 자매님,  순교자 성당에 레지오 member를 중심으로 새로 생긴 <em>Guitar Friends</em> 그룹에도 참여 열심히 guitar도 연습하고, <em>Holy Family</em> 미국본당에서는 거의 매일 미사에 보게 된 멀게도 느껴지고 가깝게도 느껴지는 자매님, stress받는 것이 제일 싫어서 많은 사람과 가까이 지내는 것을 피하며 조용히 살지만 할 것은 다 하며 열심히 사는 자매님.. 왜 하느님은 어떻게 그런 병고를 주셨을까. 병고라면 이미 오래 전에 가족을 통해서 겪을 만큼 겪지 않았을까, 공평하지 않은가? 모든 아픔이 아물어가며 어떻게 다시 이런 고통을 보냈을까? 오늘 아침 미사가 끝나며 어제 doctor visit의 결과가 조금 짐작이 되었다. 우리 부부, 너무나 안쓰럽고, 미안하며, 어쩔 수가 없어진다. 그저 할 수 있는 말은 &#8216;기도를 더 열심해 해야겠군요&#8217; 정도였다. 이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 이외에 무엇일까.. 늦은 아침을 먹으며 우리는 생각하고 생각한다. 성모님, 좀 봐주세요&#8230;</p>
<p>&nbsp;</p>
<p><span style="font-size: 14pt;"><strong>¶  육이오 6.25, 66년:</strong></span>  66년, 허~ 66년이라.. 여기다 6 하나를 덧붙이면 666가 되는구나. &#8216;악+악+악&#8217;, triple &#8216;악&#8217; 인가? 그래 잊고 싶어도 잊지 못하는 단어가 육이오, 유기오, <strong>융요</strong>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박정희 대통령의 발음</span>).. 그래, 의식이 살아있는 한 이 단어는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나를 &#8216;움찔&#8217;하게 만들 것이다</span>. &#8220;<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8230;</span>&#8221; 이제는 &#8216;사학자&#8217;들도 총대를 멜 때가 되지 않았나? 미국의 역사 교과서는 현직 대통령도 역사의 심판대에 올려 놓는데.. 우리나라의 &#8216;병신 사학자님&#8217;들은 어떠신가? 아직도, 아직도 빨갱이 운동권의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가?</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frame loading="lazy" src="https://www.youtube-nocookie.com/embed/6tryQ1fnuxg?rel=0&amp;showinfo=0" width="650" height="384" frameborder="0" allowfullscreen="allowfullscreen"></iframe> </p>
<p style="text-align: center;">아직도 귀에 생생한, <strong>육이오의 노래</strong></p>
<p>&nbsp;</p>
<p>요사이 <strong>재동 동창 김정훈 부제</strong>의 유고집 &#8216;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8217; 를 읽고 읽고 읽으며.. 다시 느끼는 것, 나도 나도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아니 육이오가 없었으면, 아니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김일성 개XX가 태어나지 않았으면</span>.. 나의 인생은 아마도 김정훈 부제의 &#8216;<strong>사직동 김판사댁</strong>&#8216;  못지않게 &#8216;<strong>원서동 이정모 교수댁</strong>&#8216; 이란 &#8216;선망의 눈초리&#8217;를 받으며 컸을 지 누가 알랴? 어떻게 육이오의 몇 개월 사이에 한 가정, 한 가족의 운명이 그렇게 뒤집어 질 수가 있을까? 물론 우리보다 더 &#8216;처참한&#8217; 인생의 역전을 겪었던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죄 없는 동포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아니고 우리가 아니다. 우리 집은.. 우리 집을 말하는 것이다.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이 세상이 끝나고 저 세상에 가면 나는 반드시 &#8216;김일성&#8217;을 찾아내리라</span>.. 그 개XX를 찾아 내리라.. 아마도 그 아들 김정일 개XX도 같이 있을 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을 찾기가 힘들 것이 분명히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그들은 지옥에 있기 때문이다</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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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1년 9월이여, 사요나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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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Ken]]></dc:creator>
		<pubDate>Sat, 01 Oct 2011 00:22:12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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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이제는 최소한 한여름의 냄새가 완연히 가신, 하지만 가을의 맛은 아직 덜 익은 듯한 그런 시점이고, 느낌조차 많이 다른 9월과 10월의 사이까지 왔다. 이제는 세월이 빠르다는 둥, 느리다는 둥 하는 말이 지겹게 들려서 그런 것 많이 느끼지 않으려 노력을 한다. 올해 여름은 근래에 드물게 &#8216;땀을 흘리는&#8217; 육체노동을 안 했다. 그 대신 밀려있는 책들을 비록 해변에서는 아니지만 [&#8230;]]]></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span style="font-size: 14pt;">이제는 최소한 한여름의 냄새가</span> 완연히 가신, 하지만 가을의 맛은 아직 덜 익은 듯한 그런 시점이고, 느낌조차 많이 다른 9월과 10월의 사이까지 왔다. 이제는 세월이 빠르다는 둥, 느리다는 둥 하는 말이 지겹게 들려서 그런 것 많이 느끼지 않으려 노력을 한다. 올해 여름은 근래에 드물게 &#8216;땀을 흘리는&#8217; 육체노동을 안 했다. 그 대신 밀려있는 책들을 비록 해변에서는 아니지만 집에서 실컷 읽어서 큰 후회는 없다. 그러다 보니, 거의 무의식 중에 생각을 해오던 1950년, 구일오 인천상륙, 구이팔 서울 수복 기념일들도 다 지나갔다.<br />
만약 그 때의 역사를 계속 따라간다면 조금 있으면 UN군이 한 맺힌 삼팔선을 지나 노도와 같이 북진을 하게 될 것이다. 올해는 어쩐지 그 때의 &lt;<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1급 전범, 민족반역자, 김일성 개XX</span>&gt;를 &#8216;죽이거나, 사로 잡거나, 만주로 쫓아내려는 국군과 유엔군을 계속 따라가며 그 당시의 역사를 더 생각을 해 보고 싶다. 여기에는 그 유명한 미 해병대의 장진(<em><strong>Chosin</strong> Resevior</em>) 저수지 사투와 흥남 철수, 일월 사일 서울 철수(일사후퇴) 등이 포함될 것이다.</p>
<p><span style="font-size: 14pt;">며칠 전, 인터넷을 통해서</span> 중앙고 동창 이성복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다시 한번 &#8216;<strong>비대칭적 추억</strong>&#8216;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 비대칭적 추억이란 간단히 말하면 사람에 따라서 같은 추억을 서로 아주 다른 정도로 간직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첫 경험한 것이, 10여 년 전, 고교, 대학시절의 친구 이윤기와 연락이 되었을 때였다. 분명히 나의 이윤기에 대한 추억과 그가 간직하고 있던 추억에는 상당히 차이가 있었다. 나는 이런 경험을 그 전에는 별로 못 했기 때문에 사실 무척 당황하고, 심지어는 불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두고 두고 생각을 해 보게 되었는데, 결론적으로 그것은 나로써는 어쩔 수 없는 &#8216;세월의 부작용&#8217; 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그보다 더 그 당시의 추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더 뚜렷하게 기억을 한 것이 사실은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우습지만 이것은 &#8216;나의 문제&#8217;일 지도 모른다. 내가 이것을 &#8216;대칭적인 추억&#8217;으로 만들기 위해서 나의 기억과 추억을 조정해야 하는 것이다.</p>
<p>이런 것을 이번에 이성복을 통해서 조금은 느끼게 되었는데, 이미 경험을 한 바가 있어서 놀랄 일은 아니다. 이런 것의 극단적인 case는 한번 알던 사람이 나를 완전히 잊은 경우다. 1974년 경에 시카고에서 잠깐 만났던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연세대(철학과) 동문 신경시 씨 부부</span>,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가까이 알고 지냈는데, 나중에 연락을 해 보니, 나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사진까지 보여 주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것은 조금 심한 case라서 나는 물론 당황을 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의 기억력의 문제인가, 아니면 잠깐의 인연을 완전히 무시하며 살아서 그랬을까.. 이것은 사실 조그만 비극이다.</p>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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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인천, 61년 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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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Ken]]></dc:creator>
		<pubDate>Mon, 19 Sep 2011 03:04:28 +0000</pubDate>
				<category><![CDATA[Daybook]]></category>
		<category><![CDATA[Ideas & Analysis]]></category>
		<category><![CDATA[50/60]]></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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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9월 15일, 1950년 9월 15일에 있었던 역사적인 육이오 당시,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된 날이다. 거의 &#8216;비상식적&#8217;으로 적의 후방을 찌르는 거대한 맥아더 장군의 작품이 현실화 되던 날이었다. 그 후방이란 곳이 인천인 것이 그 당시는 상당한 모험이었을 것이라서 비상식적인 발상이었고, 그런 것이 맥아더장군 특유의 발상이기도 했고, 그것은 사실 아슬아슬한 모험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인천에 건 도박은 예상을 훨씬 [&#8230;]]]></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span style="font-size: 14pt;">9월 15일, 1950년</span> 9월 15일에 있었던 역사적인 육이오 당시,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span>이 시작된 날이다. 거의 &#8216;비상식적&#8217;으로 적의 후방을 찌르는 거대한 맥아더 장군의 작품이 현실화 되던 날이었다. 그 후방이란 곳이 인천인 것이 그 당시는 상당한 모험이었을 것이라서 비상식적인 발상이었고, 그런 것이 맥아더장군 특유의 발상이기도 했고, 그것은 사실 아슬아슬한 모험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인천에 건 도박은 예상을 훨씬 웃도는 성공담이 되었다. 그러니까 가끔 계산이 깔린 도박은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도박이라는 것은 그 뒤에 같은 운들이 따라주지를 않았기 때문에 분명히 들어난다. 그 이후 맥아더의 운은 사라지고, &#8216;악운&#8217;이 따르게 된 것이다. 그 당시 맥아더가 조금만 속도를 늦추고, 적군에 대한 정보에 신경을 더 썼더라면 사태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제일 큰 도박이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을 &#8216;억지로&#8217; 무시했다는 실수였다. 수많은 정보들이 그것을 말해주었지만, 그에게는 듣기 싫었던 정보였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런 정보들의 신빙성이었을 것인데, 아마도 정보수집에 더 신경을 썼어야 했지 않았을까?</p>
<figure id="attachment_2577" aria-describedby="caption-attachment-2577" style="width: 200px" class="wp-caption alignleft"><a href="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1/09/IMG_0004-e1316401183726.jpg"><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size-medium wp-image-2577" title="IMG_0004"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1/09/IMG_0004-200x300.jpg" alt="Book, Operation Broken Reed" width="200" height="300" /></a><figcaption id="caption-attachment-2577" class="wp-caption-text">Book, Operation Broken Reed</figcaption></figure>
<p><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며칠 전에 Reading-by-Tying으로 읽고 있었던</span> 한국전쟁(육이오 동란)에 관한 책, <strong><em>Operation Broken Reed</em></strong> (꺾인 갈대 작전)을 간신히 다 읽게 되었다. 이 책도 산지 몇 년째 된 것인데 올 여름, &#8220;육체적인 노동 대신 여름독서를&#8221;, 이란 목표로 골랐던 도서목록중의 하나였다. 이 책을 읽은 때가 <strong>육이오</strong>(6.25: 동란 발발)와 <strong>구이팔</strong>(9.28: 서울 수복) 을 사이에 둔 계절이어서 더 61년 전을 상상하게 되며 읽으니 실감이 더 했다. 이 책은 시간이 나면 자세히 나의 blog에서 소개할 예정인데, 한마디로 이 책의 내용이 &#8216;진실, 사실&#8217; 이라면 이 &#8216;믿기 힘든&#8217; 작전은 육이오 동란 중, 가장 비밀에 쌓인 역사였을 것이다. 이 책을 읽었던 사람들 중에는 이것이 거의 &#8216;허구&#8217;라고 단정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믿는 쪽에 가깝다. 나도 읽고 나서 생각이, 이것은 사실 일 것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이 작전은 육이오 동란이 휴전회담과 격전을 거듭하기 시작하던 1952년 1월 초에 38선 북쪽, &#8216;적진&#8217; 속에서 일어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1주일에 걸친 미군, 자유중국 군의 합동작전이었고, 비록 결과는 성공이었지만 그에 따른 희생은 실로 충격적이고 슬픈 것이었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휴전회담은 가속화 되었고, 확전, 3차 세계대전(심지어, 핵전쟁)은 방지가 되었다.</p>
<p>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오늘 내가 생각하는 것은 구이팔을 가능케 한 구일오 인천상륙작전</span>이다. 너무나 많이 알려져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이번에는 예전과는 조금 다른 각도로 이 역사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2007년, <em>New York Times</em> best seller였던 <em>David Halberstram</em>의 책,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em>The Coldest Winter, The America and The Korean War</em></span>라는 책 덕분이었다. 700 페이지가 넘는 이 책은 육이오 동란을 미국과, 한국 주변국과의 정치적인 각도로 다룬 것이어서 이제까지의 군사적인 각도로만 다룬 책과 다른 맛을 보여준다. 역사를 다룬 책이지만 역시 저자의 정치적 색깔도 여기저기 보여주고 있어서 흠이라기 보다는 조금 더 인간적인 역사철학도 보여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맥아더 장군에 대한 저자의 거의 &#8216;혐오&#8217; 적인 인상</span>이다. 물론 충분한 역사적 자료에 의한 저자의 의견이겠지만, 조금은 정도가 지나치다고나 할까? 맥아더를 영웅시하는 사람들은 이 책의 이 부분들을 읽는 것이 괴로울 것이다. 나는 솔직히 중립적인 입장일 수 밖에 없다. 내가 맥아더를 옆에서 본 것도 아니고, 이 저자와 같이 충분히 사료를 공부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어떠한 영웅도 보여주기 싫은 면이 충분히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8216;진리&#8217;는 안다.</p>
<figure id="attachment_2579" aria-describedby="caption-attachment-2579" style="width: 198px" class="wp-caption alignright"><a href="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1/09/IMG_0003.jpg"><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size-medium wp-image-2579" title="IMG_0003"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1/09/IMG_0003-198x300.jpg" alt="David Halberstam's Korean War book" width="198" height="300" /></a><figcaption id="caption-attachment-2579" class="wp-caption-text">David Halberstam&#8217;s Korean War book</figcaption></figure>
<p> 이 책의 저자는 책 전체를 통해서 맥아더를 일방적으로 몰아 부치기는 했지만 솔직하게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맥아더의 천재적인 &#8216;용기와, 지혜&#8217;를 인정한 유일한 부분이 바로 인천상륙작전</span>이었다. 거의 부산 교두보 (<em>Pusan Perimeter</em>)에서 바다로 밀려날 뻔 했던 시기에 이 작전이 성공을 한 것이고 보면 그 절묘한 timing의 진가도 역사적인 것이 아니었을까? 사실, 이 작전이 조금만 더 늦게 있었다면 김일성 개XX의 호언장담대로 부산은 괴뢰군 수중에 들어갔을지도 모르고, 대한민국은 역사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아찔해진다.</p>
<p> 맥아더의 인천 상륙작전의 구상은 이미 지상전에서 유엔군의 압도적인 열세를 만회하는 방법으로 시작이 되었다. 유엔군의 해군, 공군을 포함한 기술적인 면의 압도적인 우세함을 활용하는 방법은 해상으로 적진 깊숙이 대거 병력을 빨리 상륙시키는 방법임은 사실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맥아더는 그의 과거 전투경험으로도 생명을 아끼지 않는 무자비한 적군과의 정면 대결보다는 우회 작전을 더 좋아했다. 이러한 적진 뒤의 상륙작전의 구상은 서울함락 직후 공산군이 노도와 같이 남진하기 시작하던 7월 초에 이미 결정이 되었다.</p>
<p> 맨 처음 이 작전은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em>Operation Blueheart</em></span> 라고 이름이 되었고, 예정 날짜는 7월 22일이었지만 지상전에서 너무나 일방적으로 밀리는 바람에 이 예정은 무기로 연기가 되고 말았다. 그러는 중 맥아더는 그 동안 별로 작전이 없었던 해병대에 이 작전을 맡아주도록 주선을 하며, 본격적으로 목표를 인천으로 굳히기 시작했다. 문제는 목표가 인천이라는 사실이었는데, 사실 표면적으로 인천은 작전하기에 &#8216;최악&#8217;의 자연적 조건만 갖추고 있었다. 조수 간만의 차이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심한 곳이었다. 이 조수 시간을 잘못 맞추는 날이면 해병대가 기나긴 개펄에서 허우적거리는 최악의 상태도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상륙하기에 알맞은 &#8216;해변&#8217; 이 없고 모두 방파제 같은 시설물로 그득하고, 수뢰와 같은 방어시설이 있으면 더욱 힘들 것이다. 항구에 거의 붙어있는 월미도는 공산군 수비대에게 부두를 방비하는데 좋은 시설을 줄 수도 있다.</p>
<p> 이런 불리한 조건들은 물론 해병대를 전함으로 운반해 줄 해군 측에서 강조가 되었다. 해군 함정들이 인천 해안에 충분히 접근할 수 있는 날짜는 밀물의 주기에 따라 거의 제한이 되었는데, 빠른 날이 밀물의 깊이가 31 feet인 9월 15일 이고 그 다음이 10월 11일이었다. 9월 15일의 아침 밀물의 시간은 오전 6시 59분, 저녁 밀물은 오후 7시 19분이었다. 이래서, 맥아더는 상륙시기를 아침밀물에 맞추는 작전으로 결정을 한다. 이런 결정은 그에게는 사실 간단했지만 해군에게는 상당히 힘들고 복잡한 요구였을 것이다. 이런 결정들은 거의 한결같은 반대에 부딪쳤지만 이것은 맥아더가 충분히 예상한 바여서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인천상륙작전이 도박을 할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본 것이다. 전략적인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것은 거의 모두 인정을 했지만 문제는 상륙 지점이었다. 왜~~ 그렇게 불리한 조건만 갖춘 인천인가? 그보다 훨씬 남쪽에 있었던 군산이 훨씬 (해군에게, 해병대가 상륙하기에) 안전한 곳이 아닌가?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그런 것들은 사실 맥아더가 설득하는데 거꾸로 이용</span>이 되었다. 그렇게 어려운 곳이라 적들도 그곳을 충분히 방어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p>
<p> 인천의 가치는 사실 지리적으로 서울과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에도 있었다. 서울을 점령하면 그 상징적인 효과는 대단할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동쪽으로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르면 낙동강 쪽에 몰려있는 공산군들을 완전히 포위 섬멸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맥아더의 뚜렷한 구상은 예상보다 쉽게 반대자들을 설득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인천 D-day는 이렇게 공식적으로 정해졌고, 공격준비가 시작이 되었다.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맥아더의 짐작대로, 김일성은 인천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span>. 하지만 모택동은 달랐다. 맥아더를 알았고, 일본에 깔려있던 공산스파이들이 이미 이상한 낌새를 보고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후방 깊숙한 곳으로 대거 병력이 쳐들어 올 가능성에 대해서 중공과 소련은 김일성에게 경고를 했지만, 역시 맥아더에게 운이 좋았는지 그는 듣지 않았다. 그 정도로 김일성은 빠른 승리를 장담했던 모양이다. 이런 사실로 보면 김일성은 소련이나 중공의 지시에 의해서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니고 순전히 그의 독자적인 결정으로 밀어부친 것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를 보면 이런 미친 정도로 &#8216;낙관적&#8217;인 사고방식이 이해가 간다.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그는 사실 거의 &#8216;깡패 개XX&#8217; 의 수준</span>이었던 것이다.</p>
<p> 상륙작전은 예상대로 공산군의 저항이 미미한 상태로 진행되었다. 13,000명의 해병대가 투입이 되어서 첫날의 전사자는 20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리고 드디어 서울을 향한 진격이 시작되었고, 결국 그것은 9월 28일까지 계속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서울까지 30마일 정도 진격하는데 무려 13일이 걸린 것이다. 이것은 9월 15일 이후 놀란 김일성이 대거 병력, 2만 이상을 이 지역으로 투입한 까닭이었다. 문제는 사실 서울을 그렇게 빨리 점령할 이유에 있었다. 군사적으로 보면 저항이 치열한 서울을 우회해서 빨리 낙동강으로부터 후퇴하는 공산군을 포위 섬멸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것은 후에 &#8216;맥아더 개인의 영광&#8217;을 위한 작전이 아니었던가 하는 비난을 받게 되기도 한다. 서울 탈환의 정치적인 중요성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서울 탈환에 소모된 귀중한 시간에, 후퇴하는 공산군이 북으로 탈출할 여유를 준 셈이고, 그것은 두고두고 전쟁을 길게 끈 원인도 되었다. 원래의 계획은 6.25 남침의 3개월이 되던 9월 25일 이전에 서울을 탈환할 예정이었는데, 그 날에는 서울 근교까지 진격을 한 상태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시가전이 거의 3일 걸린 셈이다. 이렇게 해서 맥아더가 거의 혼자 밀어부친 인천상륙작전은 &#8216;성공&#8217;한 셈이고, 이로 인해서 파죽지세로 부산을 포위했던 공산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후퇴를 시작하게 되고, 전쟁은 완전히 양상이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이 작전 성공 이후로 &#8216;기세가 등등&#8217; 해진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그의 독자적이고, 독재적인 작전은 실패의 연속</span>이 된다.</p>
<p> 시기적으로 61년 전에 일어났던 일을 생각해 보았다. 나는 이 당시 2살 정도여서 직접 보고 들은 적이 없지만 그래도 이것들은 나의 생전에 일어났던 살아있는 역사였다.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이 당시에 나는 어디에 있었을까?</span>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이 당시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이미 아버지가 끌려 가신 이후</span>였고,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원서동의 어떤 무당집에 숨어 살았다</span>고 했다. 그 동네는 비원 바로 옆에 있었는데, 미군의 비행기가 폭격하는 것도 다 보셨다고 들었다. 그러면 비록 기억은 안 나지만 나도 그런 장면을 다 보고 들었을 것 같다. 다만 기억을 못하는 것 뿐이다. 생각을 한다. 과연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민족 반역자, 역적, 김일성 개XX는 어떤 생각으로 전쟁을 일으켰나</span>? 이 미친놈을 어떻게 역사는 <strong>능지처참</strong>을 할 것인가? 괴롭다. 괴롭다.</p>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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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레지오 피정에 들어가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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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11 Jun 2011 05:00:27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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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이번 주말에는 아틀란타 본당 레지오 주최 연례 3일간 봉쇄피정이 있어서 연숙과 같이 들어간다. 둘이서 집을 같이 떠나는 것도 오랜만이지만 나에게는 생전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는 피정(retreat)이라서 아무래도 신경이 쓰임은 어쩔 수가 없다. 일년에도 몇 차례씩 이런 곳에 가는 사람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칠 노릇이겠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이름이 아주 거창하다. 봉쇄피정이라.. 한자로 읽으면 아마도 완전히 3일 동안 [&#8230;]]]></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span style="font-size: 14pt;">이번 주말에는 아틀란타 본당</span> 레지오 주최 연례 3일간 봉쇄피정이 있어서 연숙과 같이 들어간다. 둘이서 집을 같이 떠나는 것도 오랜만이지만 나에게는 생전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는 피정(retreat)이라서 아무래도 신경이 쓰임은 어쩔 수가 없다. 일년에도 몇 차례씩 이런 곳에 가는 사람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칠 노릇이겠지만, 어쩔 수가 없다.</p>
<p>이름이 아주 거창하다. 봉쇄피정이라.. 한자로 읽으면 아마도 완전히 3일 동안 외부와 연락이 차단이 된다는 뜻일까? 아니면 세상만사를 다 잊으라는 뜻일까? 아직 누구에게도 물어본 적이 없다. 들은 이야기로 이런 곳에 가려면 정신적으로 신앙적으로 준비가 잘 안되어 있으면 가기 전에 꼭 무슨 유혹이 생긴다고 들었다. 나는 &#8216;치명적&#8217;인 유혹은 없었지만 비슷한 것은 벌써 경험을 하고 있어서 이런 말들이 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고 다 타당성이 있다고 믿게 된다.</p>
<p>나의 집을 &#8216;물리적&#8217; 으로 떠나는 것이 거의 일년이 되어온다. 작년 여름 새로니가 살고 있던 <em>Nashville</em>, TN에 한번 놀러 갔던 것이 전부다. 비록 피정은 <em>Atlanta</em> Metro에서 열리지만 좌우지간 집을 떠나는 것은 사실이다. 이번 피정은 조금 있으면 주임신부에서 물러나시는 안정호 이시도리 신부님이 지도를 해 주신다고 한다. 비록 새 신부님이 곧 오시게 되어서 주임신부직은 물러나지만 아직도 우리들은 그 들이 우리의 &#8216;영원한&#8217; 주임신부처럼 느껴진다. 그만큼 그분에게서 나 개인적으로 받은 은총이 많음을 느낀다.</p>
<p>&nbsp;</p>
<p><span style="font-size: 14pt;">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웹싸이트</span>를 보면 그곳 발행,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경향잡지가 1900년 초 부터 연도별로 거의 모두 수록이 되어있다. digital scanning을 한 것인데 원래 책의 상태가 안 좋은 것도 있어서 읽기 힘든 부분도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힘든 것은 특히 해방 전 것들인데 잘 보여도 읽기가 쉽지 않다.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지금의 &#8216;국어&#8217;에 비하면 거의 훈민정음 스타일의 &#8216;고어&#8217;로 느껴지기 때문이다</span>. 그때는 사실 한글 맞춤법도 없었을 것이고 한자를 많이 쓰고 해서 더 그렇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이 고색창연한 천주교 월간잡지의 가치를 높여주고 있는 것이다.</p>
<figure id="attachment_2115" aria-describedby="caption-attachment-2115" style="width: 178px" class="wp-caption alignleft"><a href="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1/06/old-ad-1-e1307719523608.png"><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size-medium wp-image-2115" title="old-ad-1"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1/06/old-ad-1-178x300.png" alt="살 찌는 약!" width="178" height="300" /></a><figcaption id="caption-attachment-2115" class="wp-caption-text">살 찌는 약!</figcaption></figure>
<p>내가 우선 관심이 갔던 때는 해방 후와 육이오 동란 전후, 그리고 1960년대이다. 내가 태어나기 전 것들은 그 당시의 역사를 천주교의 입장에서 본 것을 알게 되어서 그렇고, 육이오 이후는 내가 어렴풋이 기억이 나던 때를 다시 간접적으로 보게 되어서 관심이 간다. 1960년대는 조금 다르지만 약간 &#8216;근대화&#8217;한 한국의 사회상을 간접적으로 보여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다. 너무나 방대한 분량이라 우선은 주마간산 식으로 보았지만 시간이 나는 대로 조금은 정독을 하려는 희망도 있다.</p>
<p>우선 반가운 그림들을 몇 개 보았다. 광고인 것이다. 천주교 잡지에 광고가 있었다는 사실도 새롭지만 반세기 넘게 잊고 살던 &#8216;인기 있던&#8217; 상품을 다시 보게 된 것이 더 반가웠다. 이것은 그 당시의 사회상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던 것이기도 하다.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우선 조금 웃음이 났던 것은 &#8220;살이 찌는 약&#8221;에 대한 것이다</span>. 요새의 기준으로 보면 과연 얼마나 이해를 할까?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나도 살찌는 약에 대한 광고를 많이 보고 자랐다. 나도 갈비씨였지만 그 당시는 갈비씨들이 너무나 많았다</span>. 그리고 독일회사 훽스트.. 거기서 나온 &#8216;고기 먹으면 필요했던&#8217;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훼스탈.. 고기를 많이 못 먹었던 시절 그것을 소화할 효소가 제대로 안 나와서 그랬던 것일까?</span> 기본적인 위생시설이 부족했던 그 때는 피부염, 종기가 참 많아서 그랬던지 &#8216;이명래 고약&#8217;은 정말 그때의 구세주 였다. 어찌 잊으랴?</p>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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