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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국전쟁 &#8211; Serony&#039;s Friends</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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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38; place, autobio in progress..</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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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국전쟁 &#8211; Serony&#039;s Friends</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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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思母曲</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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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Ken]]></dc:creator>
		<pubDate>Wed, 23 May 2018 16:08:00 +0000</pubDate>
				<category><![CDATA[Daybook]]></category>
		<category><![CDATA[가족]]></category>
		<category><![CDATA[추억]]></category>
		<category><![CDATA[한국전쟁]]></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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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1960년 5월, 서울 비원에서.. &#160; 어머님, 어머니, 엄니, 엄마~~~  어머니의 내음새가 하늘에 가득한 오월 하순을 지난다. 정확하게 15년 전 이즈음의 괴롭고 그리운 기억을 떠올린다. 2003년 5월 23일, 사랑하는 어머님이 하늘나라로 가신 날, 파란만장했던 84년 간의 이세상 삶을 마치셨던 날, 5월의 내음새를 기억한다. 아무리 오랜 세월 떨어져 살았어도 그 어머니의 존재를 일 초도 잊을 수는 없다. [&#8230;]]]></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img fetchpriority="high" decoding="async" class="aligncenter wp-image-13453 size-full"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8/05/Scan10138-1.jpg" alt="" width="650" height="240" /></p>
<p style="text-align: center;">1960년 5월, 서울 비원에서..</p>
<p>&nbsp;</p>
<p><span style="font-size: 14pt;">어머님, 어머니, 엄니, 엄마~~~</span>  어머니의 내음새가 하늘에 가득한 오월 하순을 지난다. 정확하게 15년 전 이즈음의 괴롭고 그리운 기억을 떠올린다. 2003년 5월 23일, 사랑하는 어머님이 하늘나라로 가신 날, 파란만장했던 84년 간의 이세상 삶을 마치셨던 날, 5월의 내음새를 기억한다.</p>
<p>아무리 오랜 세월 떨어져 살았어도 그 어머니의 존재를 일 초도 잊을 수는 없다. 가급적 불필요한 부담을 주위에 안 주시려는 안간힘,  함경도 또순이 원산출신의 인텔리 여성, 6.25라는 &#8216;사변&#8217;은 어떻게 한 여성의 인생의 행로를 그렇게 하루 아침에 바꾸어 놓았을까?</p>
<p>사모곡<sup class='footnote'><a href='#fn-13451-1' id='fnref-13451-1' onclick='return fdfootnote_show(13451)'>1</a></sup>, 어미를 그리는 노래.. 5월 23일은 그렇게 나의 어머니의 기일 忌日이 되었다. 2003년 5월 23일 외아들이 없는 쓸쓸한 임종을 맞으신 우리의 어머니였다. 어떻게 &#8216;상스러운 일&#8217;을 내가 초래했을까? 죽어도 나는 설명할 도리가 없다. 잊고 싶지만 절대로 잊을 자격이 없는 인생을 나는 살고 있다.</p>
<p>전쟁 미망인, 아비 없는 &#8216;후래 자식&#8217;, 편할 수도 있었던 삶과 올바른 삶의 선택을 하셨어야만 했던 그 시절들.. 본능적, 모성적 보호본능을 유감없이 받으며 자랐던 우리 남매의 어린 시절들, 냉혹한 사회의 많은 것들을 우리는 모르고 자랐던 것, 비록 생존경쟁의 의지력은 부족했어도 &#8216;조건 없는 사랑&#8217;은 당연한 것으로 배웠다.</p>
<p>삶과 죽음의 진정한 의미를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일깨워 준 어머님의 떠남은 나에게 한마디로 &#8216;인간 존재의 놀라움&#8217;을 다른 각도로 보게 해 준 대사건이었다. 이 &#8216;사건&#8217;은 그 뒤로 나를 조금은 더 영원한 의미를 갖는 것을 찾게 해 주고 결국 하느님의 존재를 다시 찾게 해준 계기가 되기도 했다. 생각한다.. 어머님은 떠나면서까지 나에게 이런 영원한 선물을 주셨구나.. 어미의 의미는 바로 &#8216;무조건적인 사랑&#8217;, 바로 그것이었다.</p>
<div class='footnotes' id='footnotes-13451'>
<div class='footnotedivider'></div>
<ol>
<li id='fn-13451-1'> 고유명사로는 고려가요의 하나 <span class='footnotereverse'><a href='#fnref-13451-1'>&#8617;</a></span></li>
</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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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Deep November, &#8216;예수 없는 십자가&#8217;</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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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Ken]]></dc:creator>
		<pubDate>Sun, 26 Nov 2017 01:28:26 +0000</pubDate>
				<category><![CDATA[Daybook]]></category>
		<category><![CDATA[가족]]></category>
		<category><![CDATA[날씨]]></category>
		<category><![CDATA[책]]></category>
		<category><![CDATA[추억]]></category>
		<category><![CDATA[한국전쟁]]></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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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  그야말로 11월 말, deeper &#38; deeper November를 달리고 있다. 주위의 올 가을의 낙엽들이 무섭게 떨어진 후 이제는 O Henry의 `&#8217;마지막 잎새&#8217;를 연상시키듯 처량하게 남은 잎새들이 떨어지기만 기다리게 되었다. 11월의 처량함이라고 할까.. 성탄을 기다리는 가톨릭 대림절 Advent, 11월은 또한 바로 그날을 기다리는 나날들이기도 하기에 나는 근래에 11월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160;   Sandy Denny [&#8230;]]]></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span style="font-size: 14pt;"><strong>¶  그야말로 11월 말</strong></span>, deeper &amp; deeper November를 달리고 있다. 주위의 올 가을의 낙엽들이 무섭게 떨어진 후 이제는 O Henry의 `&#8217;마지막 잎새&#8217;를 연상시키듯 처량하게 남은 잎새들이 떨어지기만 기다리게 되었다. 11월의 처량함이라고 할까.. 성탄을 기다리는 가톨릭 대림절 Advent, 11월은 또한 바로 그날을 기다리는 나날들이기도 하기에 나는 근래에 11월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frame src="https://www.youtube.com/embed/PQiWL0HfIJs?rel=0" width="650" height="288" frameborder="0" allowfullscreen="allowfullscreen"></iframe></p>
<p style="text-align: center;">Sandy Denny &#8211; <em>Late November</em> &#8211; 1971</p>
<p>&nbsp;</p>
<p><span style="font-size: 14pt;"><strong>¶  단출한 가족인데</strong></span> 그것도 한 사람이 빠진 올해의 <em>Thanksgiving</em> Day, 하지만 &#8216;무사히&#8217; 지나갔다. 작은 딸의 초대로 올해 그들의 1st Home 이 있는 Tucker로 가서 몇 시간을 즐겼다. 오랜 세월 엄마의 전통을 배운 듯 아주 맵시 있게 traditional turkey meal을 준비한 나라니, 정성을 다 한 것이 보여서 고마운 마음으로 배불리 먹고 마셨다.</p>
<p><img decoding="async" class="aligncenter size-full wp-image-12589"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7/11/KakaoTalk_20171124_091505434-1.jpg" alt="" width="518" height="389" srcset="https://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7/11/KakaoTalk_20171124_091505434-1.jpg 518w, https://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7/11/KakaoTalk_20171124_091505434-1-300x225.jpg 300w" sizes="(max-width: 518px) 100vw, 518px" /></p>
<p>&nbsp;</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center size-full wp-image-12590"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7/11/2017-11-23-13.13.40-1.jpg" alt="" width="650" height="384" /></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size-full wp-image-12591 alignleft"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7/11/KakaoTalk_20171124_204629647.jpg" alt="" width="274" height="365" srcset="https://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7/11/KakaoTalk_20171124_204629647.jpg 274w, https://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7/11/KakaoTalk_20171124_204629647-225x300.jpg 225w" sizes="auto, (max-width: 274px) 100vw, 274px" />날씨가 너무나 화창해서 사실은 holiday 기분이 좀 덜 나지만 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좋았으리라. 새로니는 친구들과 Nevada로 rock climbing trip을 갔는데 보내온 사진을 보니 생각보다 심각한 climbing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오래 전 &#8216;바위를 타던&#8217;, 서울에 있는 <strong>도봉산 선인봉</strong>의 바위와는 아주 느낌과 종류가 다른 것처럼 보였다.</p>
<p>&nbsp;</p>
<p><span style="font-size: 14pt;"><strong>¶  지난 주 부터</strong></span> 약간씩 느껴지던 &#8216;감기 기운&#8217;이 일주일째 가고 있는데, 이제는 기분이 쳐지는 느낌이다. 올해 처음 맞았던 flu shot 덕분인지 모든 감기, 독감의 증상이 아주 mild한 듯한데 문제는 이렇게 질질 시간을 끌며 나의 신경을 건드린다는 사실이다. 미열도, 살살 흐르는 콧물 등은 큰 문제가 아닌데 목이 간질간질하게 느껴지는 잔기침, 이것이 사람을 괴롭히고, 놀리는 것이다. 제발 빨리 이런 것에서 벗어나고 싶다.</p>
<p>&nbsp;</p>
<p><span style="font-size: 14pt;"><strong>¶  예수 없는 십자가:</strong><span style="font-size: 12pt;"> 밤에 밖을 보니</span></span> 멀리서 휘황찬란한 빛이 퍼진다. 자세히 보니 &#8216;크리스마스 light&#8217; 가 아닌가? 아~ 그렇구나&#8230; 올해 &#8216;첫 Holiday&#8217; 기분이 잔잔히 주변에 가라앉는 이즈음 나는 의미 있는 &#8216;시간,공간&#8217; 여행을 하고 있다. 그것도 &#8216;책&#8217;으로&#8230;  <strong>고 마태오</strong> 신부님의 trilogy중에서 2편 &#8216;<strong>예수 없는 십자가</strong>&#8216;, 바로 그것이다. 1편인 &#8216;<strong>사랑의 지도</strong>&#8216;를 얼마 전에 &#8216;필사&#8217;로 읽은 후 곧바로 2편의 &#8216;필사 독서&#8217;가 시작되었다. 하도 typing을 많이 해서 그런지 손가락 끝의 감각이 무디어진 듯하다. 이제는 아주 익숙해져서 typing하면서 reading하는 것 전혀 문제가 없다.</p>
<p>고 마태오 신부님을 &#8216;재발견&#8217;하게 된 이번의 &#8216;책 여행&#8217;은 놀랍게도 나에게 너무나 많은 &#8216;생각거리&#8217;를 폭포처럼 쏟아내고 있다. 이런 속도로 typing &amp; reading을 하면 2편 &#8216;예수 없는 십자가&#8217;는 2~3일 내로 끝이 날 듯하고 곧바로 3편 &#8216;<strong>이세상의 이방인</strong>&#8216;을 읽기 시작할 예정이다. 12월 중에 이것을 완독하면 나는 2+ 개월 사이에 고 마태오 신부님의 true <em>classic</em> trilogy를 모두 읽게 되는 것이고 부수입으로 soft copy가 남게 된다.</p>
<p>이 책으로 나는 고 마태오 신부님을 정확히 이해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 그가 살아온 민족의 비극을 같이 걷게 된다. 3.8선부터 시작하여 원산, 함흥, 제주도, 최전방 고지 전투를 하느님을 믿는 젊은 눈으로 본 기록영화, 참회록, 사랑의 드라마.. 이 세 권의 기록소설은 한 마디로 대 서사시 라고 부르고 싶다. 이것을 읽으면서 나는 &#8216;처음으로&#8217;,  6.25를 전후로 왜 그렇게 &#8216;무자비하게&#8217; 싸웠는지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아니 아직까지도..  한반도에는 하느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던가..</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center size-full wp-image-12593"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7/11/2017-11-19-10.13.30-1.jpg" alt="" width="650" height="384" /></p>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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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고(종옥) 마태오 신부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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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Ken]]></dc:creator>
		<pubDate>Mon, 11 Sep 2017 01:39:44 +0000</pubDate>
				<category><![CDATA[Daybook]]></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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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종교]]></category>
		<category><![CDATA[책]]></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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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또 우연히 (사실 근래 들어서 우연이란 말을 피하려고 하지만)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주일미사에 갔다가 성물방/도서실 (성물 판매와 도서를 같은 방에서 service하는) 을 기웃거렸다.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그곳에 있는 &#8216;고서&#8217; 같은 냄새를 풍기는 진열된 책들의 제목들.. 또 우연인가.. 몇 년 전에 &#8216;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8216;  서울 재동학교 동창, 김정훈 부제의 유고집을 찾았을 때처럼 이번에는 &#8216;사랑의 [&#8230;]]]></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figure id="attachment_12130" aria-describedby="caption-attachment-12130" style="width: 244px" class="wp-caption alignleft"><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wp-image-12130 size-full"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7/09/Scan10040-1.jpg" alt="" width="244" height="365" srcset="https://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7/09/Scan10040-1.jpg 244w, https://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7/09/Scan10040-1-201x300.jpg 201w" sizes="auto, (max-width: 244px) 100vw, 244px" /><figcaption id="caption-attachment-12130" class="wp-caption-text">책, 사랑의 지도 &#8211; 고 마태오</figcaption></figure>
<p><span style="font-size: 14pt;"><strong>또 우연히</strong></span> (사실 근래 들어서 우연이란 말을 피하려고 하지만)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아틀란타 순교자 성당</span> 주일미사에 갔다가 성물방/도서실 (성물 판매와 도서를 같은 방에서 service하는) 을 기웃거렸다.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그곳에 있는 &#8216;고서&#8217; 같은 냄새를 풍기는 진열된 책들의 제목들.. 또 우연인가.. 몇 년 전에 &#8216;<strong>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strong>&#8216;  서울 재동학교 동창, 김정훈 부제의 유고집을 찾았을 때처럼 이번에는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8216;<strong>사랑의 地圖</strong> <strong>&#8211; 고 마태오</strong>&#8216;</span> 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우연인지 아닌지는 현 시점에서 알 길이 없다.</p>
<p><strong>고 마태오</strong>, 실제 이름은 <strong>고종옥</strong> 신부님.. 오래 전의 가물거리는 기억이 조금씩 되살아난다. 오래 전, 그러니까 1982년 경이었던가.. 우리 부부가 콜럼버스(오하이오) 한인성당(공동체)에서 <strong>왕영수(프란치스코) 신부님</strong>으로부터 세례를 받던 해, 그 무렵이다. 그 해 부활절에 세례(그 당시는 <strong>영세</strong>라고 했다)를 받았는데 그 한달 전쯤인가, 세례를 받기도 전에 연숙 홀로 &#8216;용감하게도&#8217; <strong>신시내티</strong> 에서 열리는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성령세미나</span>엘 갔었는데 그 때 왕 신부님은 물론이고 캐나다에서 내려오셨다는 고 마태오 라는 &#8216;건강하고 풍채가 좋았던&#8217; 신부님도 하셨다. 물론 나는 나중에 연숙을 통해서 들은 이야기지만 단체사진에서 그 분의 모습을 보았다.</p>
<p>&nbsp;</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center wp-image-12131 size-full"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7/09/Scan10039-2.jpg" alt="" width="515" height="538" srcset="https://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7/09/Scan10039-2.jpg 515w, https://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7/09/Scan10039-2-287x300.jpg 287w" sizes="auto, (max-width: 515px) 100vw, 515px" /></p>
<p style="text-align: center;">서부 전선 &#8216;사천강 전투&#8217; 때, 신부 되기를 결정한 직후, 1952</p>
<p>그러면서 이 &#8216;<strong>전설적인 신부님</strong>&#8216;에 대한 이야기를 책을 돌려보며 듣게 되었다. 아마도 그때 돌려서 본 책이 바로 오늘 내가 찾고 빌려온 &#8216;사랑의 지도&#8217;가 아니었을까.. 100% 확신은 없지만 거의 분명하게 나는 책 뒤 표지의 사진, &#8216;<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멋진 sunglass를 끼고 호탕한 미소를 짓는 군인</span>&#8216;의 모습을 기억한다. 당시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지만 연숙으로부터 들었던 것들, &#8216;6.25 동란을 겪는 영화 같이 파란만장한 과거, 사랑하던 여성,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기적같이</span> 신부가 되었던 이야기&#8217; 모든 것들이 그야말로 어떤 영화를 보는 느낌을 받았던 기억들.. 그러고 나서 이 고 마태오란 이름은 30여 년의 긴 인생역마차 바퀴에 치어 나의 관심권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잊혀졌다가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홀연히 나의 눈앞에 나타났다</span>.</p>
<p><em>Googling</em>으로 본 고 마태오 신부님, 이미 돌아가신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확실하게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2004년 12월 31일에 선종</span>하셨음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8216;풍채 좋았던 몸집&#8217;에 걸맞게 역시 고혈압과 당뇨병으로 고생하시고 75세란 &#8216;길지 않은&#8217; 생을 마치신 것, 타국 땅 캐나다의 어떤 양로원에서 가셨다는 사실이 그렇게 가슴을 아프게 한다. 유명인사 라고 해도 생각보다는 쓸쓸히 가신 것 같아 더욱 가슴이 저려온다. 은퇴사제들의 은퇴 후의 option이란 사실 거의 이런 것인가? 그래도 긴 세월 불치병으로 고생하신 것이 아닌 것 같아 그나마 위안이라고 할까?</p>
<p>고 신부님의 저서를 &#8216;한 번&#8217;도 제대로 본 적이 없기에 나는 조금 가슴이 설렌다. 하나, 하나, 하나.. 내가 겪지 못했던 조국의 근대사를 신부님의 눈으로 다시 겪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평화통일을 원하셨다는 것은 이미 가끔 짧은 소식을 통해서 들을 기억이 있다. 그런 노력과 현재 모국의 돌아가는 &#8216;꼴&#8217;을 비교해서 생각하면 정말 한숨만 나온다.고 마태오 신부님의 하느님은 도대체 현재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 것인가?</p>
<p>이제 이 책을 typing (keyboarding)으로 읽기 시작하며, 일제시대와 6.25동란에 얽혔던 생생한 증언을 소설 같은 이야기로 내가 상상하던 당시의 상황과 비교할 것이다. 그러면서, 나의 1950년대 조국의 모습과, 1980년 초 우리가 세례를 받으며 하느님을 찾고 있었던 시절을 회상할 것이다. Reading by Typing 은 난독, 정독, 완독에 비해서도 훨씬 시간이 더 든다. 그래도 나의 정신건강 상태에 따라 2달 정도 걸릴 것으로 희망을 한다. 이 &#8216;고생&#8217;이 끝나면 그래도<a href="http://serony.com/ken/books-papers/%ec%82%ac%eb%9e%91%ec%9d%98-%e5%9c%b0%e5%9c%96-%ea%b3%a0-%eb%a7%88%ed%83%9c%ec%98%a4/"> online, softcopy가 &#8216;영구히&#8217; 남기에</a> 더욱 분발할 것이다.</p>
<p>&nbsp;</p>
<figure id="attachment_12215" aria-describedby="caption-attachment-12215" style="width: 650px" class="wp-caption aligncenter"><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wp-image-12215 size-full"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7/09/Scan10042-1.jpg" alt="" width="650" height="337" /><figcaption id="caption-attachment-12215" class="wp-caption-text">.</figcaption></figure>
<p style="text-align: center;">1982년 3월경 신시내티에서 열린 성령세미나, 고마태오, 왕영수 신부님 그리고 최옥진 데레사 모두 한 자리에.. 왼쪽 제일 뒷쪽에 연숙, 고완석씨 등의 얼굴도 반갑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center wp-image-12216 size-full"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7/09/Scan10043-1.jpg" alt="" width="650" height="343" /></p>
<p style="text-align: center;">수녀님 옆에 있는 연숙, 이 수녀님은 양수녀로 나중에 아틀란타 성당에서 신부파, 수녀파로 싸우던 그 장본인이다.</p>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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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그렇구나, 또 육이오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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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Ken]]></dc:creator>
		<pubDate>Sat, 24 Jun 2017 13:04:34 +0000</pubDate>
				<category><![CDATA[Daybook]]></category>
		<category><![CDATA[Politics]]></category>
		<category><![CDATA[역사]]></category>
		<category><![CDATA[육이오]]></category>
		<category><![CDATA[한국전쟁]]></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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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전쟁 발발 직후 피난민들이 남하를 시작, 수원 근교를 지나가고 있다 &#8211; 1950년 7월 11자 Life magazine &#160; 육이오, 융요..유기오.. 6.25.. 1950년,  도대체 몇 년 전인가? 이것도 이제는 쉽지 않구나. 반세기도 모자라서 67년 전이란 말인가? 나에게 이 날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 집, 가족의 형체를 철저히 망가뜨린 동족상잔의 시작인 날은 분명하고, 나의 인생에 미친 영향은 [&#8230;]]]></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center wp-image-12011"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7/06/refugee-near-suwon-1950-6.jpg" alt="" width="650" height="283" /></p>
<p style="text-align: center;">전쟁 발발 직후 피난민들이 남하를 시작, 수원 근교를 지나가고 있다 &#8211; 1950년 7월 11자 <em>Life</em> magazine</p>
<p>&nbsp;</p>
<p><span style="font-size: 14pt;"><strong>육이오, 융요..유기오.. 6.25.. 1950년</strong></span>,  도대체 몇 년 전인가? 이것도 이제는 쉽지 않구나. 반세기도 모자라서 67년 전이란 말인가? 나에게 이 날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 집, 가족의 형체를 철저히 망가뜨린 동족상잔의 시작인 날은 분명하고, 나의 인생에 미친 영향은 과연 어떤 것인가? 머리 속의 깊은 속에서는 분명히&#8230; &#8220;김일성 이 X새끼야, 내가 지옥까지 너를 찾아내서 다시 한번 더 확실히 죽여 버릴 거다!!!!&#8221;라는 절규가 울리고 있다. 100% 동감하는 나의 심정이다. 67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저주의 정도가 전혀 변하지 않고 있다. 빨갱이들과 민족화해라고.. 허.. 정말 죽여주는 말이다.</p>
<p>&nbsp;</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center wp-image-12000"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7/06/pig-1950-1-e1640712236881.jpg" alt="" width="650" height="372" /></p>
<p style="text-align: center;">아.. 압록강으로 올라가던 <em>MacArthur</em>가 이 개새끼를 잡았더라면, 역사는..</p>
<p>&nbsp;</p>
<p>6.25 사변이 정전armistice 으로 끝났던 어렸을 적에는 물론 &#8216;반공, 멸공, 북진통일&#8217;을 외치던 &#8216;이승만, 우리 할아버지&#8217;를 따라서 무조건, 무의식적으로 반공, 역적 개새끼 김일성을 외쳤지만 같은 구호를 외치며 경제개발을 시작했던 &#8216;박정희 대통령&#8217; 시절,  &#8216;독재&#8217; 덕분에 한때는 반공보다는 반독재의 고함소리에 솔깃했고, 거리로 뛰쳐나오기도 했다. 젊은 피가 인생, 삶의 피로 바뀌기 시작한 그 이후의 오랜 인생여정, 내가 살던 지리적 여건으로 &#8216;탈 脫 사상 思想&#8217; 의 변화의 시기들도 있었다. &#8216;잊자, 조국&#8217;, 대한민국 무관심의 세월이었나? 그 후에는 조국도 변하고 나의 나이도 진전을 해서 세상이 변했던가.. 하지만, 시간의 irony는.. 결국은 &#8216;박정희 향수&#8217;에 젖은 기분도 느낀 것이다.</p>
<p>이런 &#8216;복잡한&#8217; 나의 조국관 祖國觀 을 정리해서 나의 정체성을 찾으려면 아마도 많은 노력일 필요할 듯 하다. &#8216;국가&#8217;란 것이 과연 인간에게 무엇인가, 하는 단계까지 내려간다. 이런 &#8216;정치적 인간, 인생&#8217;의 차원은 어느 정도 &#8216;높은&#8217; 것인가? 그 다음 단계로 올라가면 어떤 세상이 보이는 것인가? 그런 것이 있기는 한 것인가?</p>
<p>나의 고뇌는 이것이다. 최근에 벌어진 해괴하기까지 느껴지는 대한민국의 정국, 멀쩡하던 여자 대통령이 갑자기 수의를 입고 나타나고, 그것을 보며 박수를 치며 환호하던 &#8216;멀쩡한 군중들&#8217;.. 이것이 어떤 나라인가? 아마도 현재 조국에서 제일 좋아하는 민주주의의 이상형이 바로 &#8216;대통령을 감옥으로 보내며 박수를 치는&#8217; 그런 것인가? 세상에 유례가 없는 선진형 민주주의라고? 유례가 없기는 하지만 과연 이것이 <em>advanced, vibrant</em> democracy인지는.. 글쎄올시다.</p>
<p>하지만 나의 문제는, 이런 분석이 모두 내가 피부로 느끼는 &#8216;추측&#8217;이라는 사실이다. 오랜 세월 동안 무관심으로 바라보았던 그쪽의 정확한 사정을 나는 알지 못하기에 이런 논평 자체가 &#8216;실격&#8217;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상황이나 &#8216;빨갱이&#8217;란 말이 연계가 되면 나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6.25 를 연상할 수 밖에 없고, 그것에 조금이라도 관련이 된 소위 말하는 &#8216;<em>progressive</em> 한 정권&#8217;은 절대로 믿을 수가 없다.</p>
<p>6.25를 맞으며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속에는 이런 것도 있다. 이것도 물론 나의 제한된 지식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현재 대한민국은  <em>extreme, mass</em> narcissism에 빠진  &#8216;집단적 자기 도취&#8217;에 빠진, 그런 모습을 보인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물론 나의 &#8216;코끼리 만지는 장님&#8217; 식의 느낌일 수도 있지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1980년대의 일본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원화 평가절상 후 세계를 돈으로 석권하며 자기도취에 빠진, 이제는 지구상 다른  어느 곳에서도 더 배울 것이 없어진 것을 애석해 하던 그들. 그 이후 30년 어떻게 그들은 변했던가? 이제는 당시의 &#8216;일류 日流&#8217;가 &#8216;한류&#8217;로 바뀐 것 뿐.. 그것에 환호하며 &#8216;자기들이 뽑아놓은&#8217; 현 대통령을 감방으로 보내는 것에 &#8216;아이들까지 환호&#8217;하는 그런 나라.. 가.. 나는 정말 싫다.</p>
<p>통일, 그러면 통일은?  나를 포함한 민족의 염원인 통일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김일성 X새끼가 소련제 tank로 &#8216;쉽게&#8217; 통일을 하려던 바로 그것, 어떨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나는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듯 보인다. 아주 고차원적인 초월적인 도움, 아주 먼 옛날로 갈 필요가 없다. 소련이 붕괴되고 동구권이 &#8216;민주화&#8217;되고 독일이 통일되었던, 그것도 1980년대 이후를 공부해 보면 무언가 짐작을 할 수가 있다. 이것이야 말로, 초자연적인 도움<sup class='footnote'><a href='#fn-11998-1' id='fnref-11998-1' onclick='return fdfootnote_show(11998)'>1</a></sup> 이 필요한 바로 그런 것이다.</p>
<p>&nbsp;</p>
<div class='footnotes' id='footnotes-11998'>
<div class='footnotedivider'></div>
<ol>
<li id='fn-11998-1'> <em>Fatima</em>의 성모님이 예견하고, <em>Saint John Paul Second, Ronald Regan, Gorvachev</em> 등이 주도 했던 소련 붕괴 <span class='footnotereverse'><a href='#fnref-11998-1'>&#8617;</a></span></li>
</ol>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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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휴우~ 덥다 더위.. 6월 24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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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Ken]]></dc:creator>
		<pubDate>Fri, 24 Jun 2016 21:27:48 +0000</pubDate>
				<category><![CDATA[Daybook]]></category>
		<category><![CDATA[Politics]]></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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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한국전쟁]]></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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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  휴우~ 덥다 더워.. 6월 24일!  이렇게 쓰고 보니 조금은 웃긴다.. 임마 (이런 말 아직도 쓰나?) 6월도 24일이면 한창 여름이 무르익어가는데 그것이 정상이지, &#8216;빠가야로&#8216;! 하는 등뒤의 속삭임에 내가 웃는다. 그렇지, 지금은 더운 것이 정상이지.. 그런데.. 92도 라면.. 어떨까? 아마도 옛날 옛적의 대구더위에 비길 수 있겠지. 며칠 계속된 더위지만 극적으로 때맞추어 &#8216;내가 고친&#8217; 에어컨 바람이 더 [&#8230;]]]></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span style="font-size: 14pt;"><strong>¶  휴우~ 덥다 더워.. 6월 24일!</strong></span>  이렇게 쓰고 보니 조금은 웃긴다.. <strong>임마</strong> (이런 말 아직도 쓰나?) 6월도 24일이면 한창 여름이 무르익어가는데 그것이 정상이지, &#8216;<strong>빠가야로</strong>&#8216;! 하는 등뒤의 속삭임에 내가 웃는다. 그렇지, 지금은 더운 것이 정상이지.. 그런데.. 92도 라면.. 어떨까? 아마도 옛날 옛적의 <strong>대구더위</strong>에 비길 수 있겠지. 며칠 계속된 더위지만 극적으로 때맞추어 &#8216;내가 고친&#8217; 에어컨 바람이 더 나에게는 시원하게 느껴진다. 이럴 때는 물론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오후에 때맞추어 쏟아지는 시원한 소낙비</span>.. 하지만 느낌에 그런 chance는 거의 zero 인가 보다. 아니면 <em>Johnny Rivers</em> 의 60&#8217;s <em>classic</em> oldie, <em>Summer Rain</em>을 연상케 하는 그런 추억의 비는.. 어떨까.. 하지만 이것은 거의 꿈같은 이야기다.</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frame loading="lazy" src="https://www.youtube-nocookie.com/embed/y6ifoJ2Pb9A?rel=0&amp;showinfo=0" width="650" height="384" frameborder="0" allowfullscreen="allowfullscreen"></iframe>  </p>
<p style="text-align: center;"><strong>1968년 여름의 추억</strong>, <em>Summer Rain</em> &#8211; Johnny Rivers </p>
<p style="text-align: center;"> </p>
<p>오랜만에 그 동안 바깥 구경을 못하고 살았던 우리 집 두 마리의 &#8216;재미있는 개&#8217; <em>Tobey &amp; Ozzie</em>, 오늘은 내가 더 쳐지기 전에 용감하게 끌고 동네를 돌았다. 거의 할아버지 나이가 된 우리의 개 <em>Tobey</em>가 언덕을 &#8216;새로니의 개&#8217; <em>Ozzie</em>를 앞지르며 나를 끌고 올라간다. 얘는 아마도 어렸을 때부터 이 동네 언덕을 나와 걸었기에 단련이 되어서 그런지 모른다. 공을 던지면 총알처럼 뛰어가는 다리가 긴 &#8216;젊은&#8217; <em>Ozzie</em>, 2주째 우리 집에 머물며 자기 엄마 &#8216;<strong>새로니</strong>&#8216;를 거의 잊은 듯 잘 지내고 있지만 그래도 밤에 &#8216;혼자&#8217; 자야만 하는 그 녀석을 보면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p>
<p>얼마 전에 이곳을 걸었을 때 내가 열을 받았던 것, <em>TRUMP FOR PRESIDENT, MAKE AMERICA GREAT AGAIN..</em>이란 SIGN이 두 곳에서 나를 자극했던 것.. 오늘도 어김없이 그곳에서 &#8216;빠가&#8217; 트럼프의 &#8216;쌍통&#8217;을 연상시킨다. 이 두 집이 바로 우리동네의 idiots, <em>white</em> trash인 셈이다. 이곳 <em>East Cobb</em> county는 물론 very conservative한 지역이고 전통적으로 &#8216;인정머리라고는 하나도 없는&#8217; 그런 &#8216;잘 사는 <em>Republican</em> white trash&#8217;들이 많은 곳이다. 그래서 이런 쓰레기 같은 SIGN을 본 것이 당연한 일이건만.. 나는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정도니.. 이건 분명히 내가 over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야말로.. I CANNOT HELP IT.. 어쩔 수가 없다. 도대체 이 덩치 큰, &#8216;젊은&#8217; 나라는 어떤 쪽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는 것인가? 덥기만 한 날씨에 더 열을 받고 있는 내가 한심하기도 하지만.. 그래.. 이래 저래해도.. 모든 것들은 다~~~ 지나가리라..</p>
<p>&nbsp;</p>
<p><span style="font-size: 14pt;"><strong>¶  6월 24일 세례자 성 요한 탄생 대축일:</strong></span>  오늘 평일미사를 가면서 6월 24일이 세례자 성 요한 탄생 대축일 (<em>Solemnity of the Nativity of Saint John the Baptist</em>) 임을 매일 복음묵상 &#8216;newsletter&#8217;에서 보고 알았지만, 사실 그 전에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 <strong>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strong> &#8216;사건&#8217;으로부터 였다. 바로 이날 6월 24일에 발현을 하신 메주고리예 성모님을 이 &#8216;대축일&#8217; 때문에 집에서 쉬던 (놀던) 그 &#8216;애&#8217;들이 본 것이다. 그 당시 이 발현 과정에서 이날이 &#8216;세례자 성 요한 탄생 대축일&#8217;임을 누누이 밝히고 있었지만 그 때 나는 그 말의 의미조차 잘 몰랐다. 이런 생각을 하니, 금요일 평일 미사엘 가면 분명히 세례자 성 요한과 예수님을 비교하는 짧은 강론을 듣지 않을까 기대를 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요새 거의 본당신부님 역할을 하시는 방문 신부님 <em>Fr. Joseph</em>, 뜻 밖에도 새로 부임하실 본당 신부님에 관한 얘기를 하며.. 우리의 &#8216;이해&#8217;를 구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사연은 물론 본당 <em>Holy Family</em> 성당에 7월 초에 새로 부임할 주임신부님이, &#8216;부인이 있고 가정이 있는 남자&#8217; 라는 우리에게는 &#8216;폭탄&#8217; 같이 느껴지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p>
<p>오늘 방문 신부님의 설명과 &#8216;양해&#8217;는 나도 아는 사실이다. 바티칸에 소속된 모든 가톨릭 &#8216;종파&#8217;들이 모두 다른 Rite를 가지고 있는데 현재 우리의 &#8216;보편 된&#8217; 것이 <em>Latin</em> Rite, 이곳에서는 신부님들이 결혼을 안 하지만 다른 극소수의 종파에서는 성공회같이 결혼을 한다고.. 듣던 얘기다. 이번의 새로 부임할 신부님은 <em>Melkite</em> 에 속한 신부님이라서 신부님들이 결혼을 한다고.. 하지만 우리들의 느낌은.. 그래도.. 하필이면.. 왜 그런 &#8216;소수 종파&#8217;의 신부님을 &#8216;주임신부&#8217;로 보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 본당 <em>Holy Family</em>는 지역적으로도 보수적이고 <em>Irish</em> Catholic의 전통이 농후한 곳인데.. 아마도 그들 대부분은 불만이 적지 않을 듯하다. 그 중에는 우리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상상을 하니 아찔하다.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가족을 주렁주렁 데리고 사제관에서 생활</span>을 하며 가족들과 같이 미사에 들어 온다는 광경은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도라빌 순교자 성당에서는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구역문제로 우리는 고민에 빠지고</span> 있는 마당에 이번에는 우리의 피난처 같은 미국본당에 부인, 가족을 동반한 주임신부가 온다는 사실.. 참.. 오래 살다 보니..</p>
<p>&nbsp;</p>
<p><span style="font-size: 14pt;"><strong>¶  성모님, 좀 봐주세요..</strong> </span> 근래 우리부부와 자주 보게 되고, 예전 보다 조금 더 가깝게 지내는 C 자매님,  순교자 성당에 레지오 member를 중심으로 새로 생긴 <em>Guitar Friends</em> 그룹에도 참여 열심히 guitar도 연습하고, <em>Holy Family</em> 미국본당에서는 거의 매일 미사에 보게 된 멀게도 느껴지고 가깝게도 느껴지는 자매님, stress받는 것이 제일 싫어서 많은 사람과 가까이 지내는 것을 피하며 조용히 살지만 할 것은 다 하며 열심히 사는 자매님.. 왜 하느님은 어떻게 그런 병고를 주셨을까. 병고라면 이미 오래 전에 가족을 통해서 겪을 만큼 겪지 않았을까, 공평하지 않은가? 모든 아픔이 아물어가며 어떻게 다시 이런 고통을 보냈을까? 오늘 아침 미사가 끝나며 어제 doctor visit의 결과가 조금 짐작이 되었다. 우리 부부, 너무나 안쓰럽고, 미안하며, 어쩔 수가 없어진다. 그저 할 수 있는 말은 &#8216;기도를 더 열심해 해야겠군요&#8217; 정도였다. 이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 이외에 무엇일까.. 늦은 아침을 먹으며 우리는 생각하고 생각한다. 성모님, 좀 봐주세요&#8230;</p>
<p>&nbsp;</p>
<p><span style="font-size: 14pt;"><strong>¶  육이오 6.25, 66년:</strong></span>  66년, 허~ 66년이라.. 여기다 6 하나를 덧붙이면 666가 되는구나. &#8216;악+악+악&#8217;, triple &#8216;악&#8217; 인가? 그래 잊고 싶어도 잊지 못하는 단어가 육이오, 유기오, <strong>융요</strong>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박정희 대통령의 발음</span>).. 그래, 의식이 살아있는 한 이 단어는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나를 &#8216;움찔&#8217;하게 만들 것이다</span>. &#8220;<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8230;</span>&#8221; 이제는 &#8216;사학자&#8217;들도 총대를 멜 때가 되지 않았나? 미국의 역사 교과서는 현직 대통령도 역사의 심판대에 올려 놓는데.. 우리나라의 &#8216;병신 사학자님&#8217;들은 어떠신가? 아직도, 아직도 빨갱이 운동권의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가?</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frame loading="lazy" src="https://www.youtube-nocookie.com/embed/6tryQ1fnuxg?rel=0&amp;showinfo=0" width="650" height="384" frameborder="0" allowfullscreen="allowfullscreen"></iframe> </p>
<p style="text-align: center;">아직도 귀에 생생한, <strong>육이오의 노래</strong></p>
<p>&nbsp;</p>
<p>요사이 <strong>재동 동창 김정훈 부제</strong>의 유고집 &#8216;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8217; 를 읽고 읽고 읽으며.. 다시 느끼는 것, 나도 나도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아니 육이오가 없었으면, 아니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김일성 개XX가 태어나지 않았으면</span>.. 나의 인생은 아마도 김정훈 부제의 &#8216;<strong>사직동 김판사댁</strong>&#8216;  못지않게 &#8216;<strong>원서동 이정모 교수댁</strong>&#8216; 이란 &#8216;선망의 눈초리&#8217;를 받으며 컸을 지 누가 알랴? 어떻게 육이오의 몇 개월 사이에 한 가정, 한 가족의 운명이 그렇게 뒤집어 질 수가 있을까? 물론 우리보다 더 &#8216;처참한&#8217; 인생의 역전을 겪었던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죄 없는 동포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아니고 우리가 아니다. 우리 집은.. 우리 집을 말하는 것이다.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이 세상이 끝나고 저 세상에 가면 나는 반드시 &#8216;김일성&#8217;을 찾아내리라</span>.. 그 개XX를 찾아 내리라.. 아마도 그 아들 김정일 개XX도 같이 있을 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을 찾기가 힘들 것이 분명히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그들은 지옥에 있기 때문이다</span>.</p>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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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6.25,사필귀정(事必歸正)</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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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Ken]]></dc:creator>
		<pubDate>Mon, 24 Jun 2013 23:00:56 +0000</pubDate>
				<category><![CDATA[Daybook]]></category>
		<category><![CDATA[가족]]></category>
		<category><![CDATA[서울]]></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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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올해도 어김없이 6월 25일, 6.25가 찾아왔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었던 시절, 주로 재동국민학교 다닐 당시, 어렸을 적에는 신나는 전쟁놀이, 서울 하늘 가로지르며 북으로 날던 &#8216;쌕쌕이&#8216; 미군의 젯트 전투기들(F-80, F-86), 만화책을 장식하던 &#8216;용감한 국군&#8217;의 무용담으로 정신을 빼앗기던 날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제2의 6.25가 그날에 또 일어날까 봐 어린 마음에 &#8216;전전긍긍&#8217;하던 날이었다. 그런 걱정이 심한 때에는 [&#8230;]]]></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span style="font-size: 14pt;"><strong>올해도 어김없이 6월 25일</strong></span>, 6.25가 찾아왔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었던 시절, 주로 재동국민학교 다닐 당시, 어렸을 적에는 신나는 전쟁놀이, 서울 하늘 가로지르며 북으로 날던 &#8216;<strong>쌕쌕이</strong>&#8216; 미군의 젯트 전투기들(<strong>F-80</strong>, F-86), 만화책을 장식하던 &#8216;용감한 국군&#8217;의 무용담으로 정신을 빼앗기던 날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제2의 6.25가 그날에 또 일어날까 봐 어린 마음에 &#8216;전전긍긍&#8217;하던 날이었다.</p>
<p>그런 걱정이 심한 때에는 6월 25일이 오면 그날 저녁의 붉은 저녁노을조차 다시 미아리고개를 넘어오는 &#8216;괴뢰군의 탱크&#8217;의 포화로 착각하기도 했다. 꿈을 꾸면 남산위로 갑자기 나타난 김일성의 대포들을 보기도 했다. 한마디로 어릴 적, 우리는 &#8216;공산당, 괴뢰군, 김일성, 소련의 후르시초프, 중공의 모택동&#8217;의 공포 속에서 숨을 죽이며 살았다.</p>
<p>&nbsp;</p>
<p><a href="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3/06/F-80-Korean-War.png"><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center wp-image-4831 size-full"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3/06/F-80-Korean-War.png" alt="F-80-Korean-War" width="520" height="327" /></a></p>
<p style="text-align: center;">6.25 발발 직후부터 일본으로부터 나르기 시작한 미국의 F-80, Shooting Star Jet 전투기들.. 북괴의 Yak 전투기를 격추시키고 소련제 탱크를 공격하였다. 전쟁 직후에도 서울의 상공을 가로지르며 나르던 날개 끝에 달린 연료탱크가 독특하던 이 전투기..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을 한다</p>
<p>&nbsp;</p>
<p style="text-align: left;">올해는 한 살을 더 먹어서 그런지 조금은 다른 각도로 6.25가 나의 인생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사실 우리 가정은 6.25로 인해서 &#8216;처참하게&#8217; 망가진 case다. 한 가정의 주인인 아버지가 갑자기 없어졌다면.. 그것도 생사를 모르게 완전히 없어졌다면 그 가정은 어찌되겠는가. 군인으로 나가서 수많은 사망자, 불구자가 나왔지만, 우리도 그에 못지않은 불구 가정이 되었다.</p>
<p style="text-align: left;">어렸을 때 그것이 사실 크게 생각할 것은 못된 것이, 어쩔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어머니가 재혼을 했으면 또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았을 수 있기에 나와 우리누나는 항상 고마워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을 해 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우리 어머니는 어린 남매를 위해서 &#8216;완전히&#8217; 인생을 바친 것이다. 젊은 30대초에 남편을 잃은 어머님, 경제적으로 여유도 없었던 때, 원산에 대가족을 남겨두고 서울 색시가 된 어머님, 그야말로 혈혈단신으로 이제는 김일성이 덕분에 남편까지 잃었으니..</p>
<p>일방적 통일을 빙자해서 쌍방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전범 김일성이 처단도 못 받은 채 줄줄이 2대의 자식들을 다른 &#8216;잠재적 전범&#8217;으로 만들고 죽었으니, 이제는 사실 원수도 갚을 수 없는 지경이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란 고사성어가 어찌 이렇게 잘도 맞는가? 한 정권을 거의 마피아 스타일 범죄조직처럼 공포의 정치로 움직이더니 결과가 과연 어떠한가? &#8216;인민&#8217;들을 굶겨 죽이고, 탈출하는 사람을 죽음의 수용소로 몰아놓고, 최후의 수단으로 동족을 &#8216;불바다&#8217; 로 말살하겠다고 장난감 원자탄을 만들고.. 과연 이들은 어떤 인간들인가?</p>
<p>그리고 이들을 옹호하는 &#8216;똥포&#8217; 집단은 어떤 인간들인가? 또 다른 거대한 범죄조직이었던 소련연방이 거의 순식간에 넘어간 것을 보고 나는 조금은 위안을 받는다. 숨막히는 지정학적 조건에서 굴복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고수하던 조국 대한민국은 아시아에서 <em>most vibrant democracy</em>로 성장했다. 정의는 결국에 승리를 하고, 역시 사필귀정인 것이다. 역사의 뒤에서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 그들은 절대로 모를 것이지만 나는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p>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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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오월은 푸르고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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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Ken]]></dc:creator>
		<pubDate>Sat, 05 May 2012 22:12:49 +0000</pubDate>
				<category><![CDATA[Daybook]]></category>
		<category><![CDATA[50/60]]></category>
		<category><![CDATA[가족]]></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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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  어린이날 유감   달려라, 냇물아~ 오월은 푸르고나~ 반세기전 어린이날이면 목청이 터져라 신나게 부르던 어린이날 노래, 참으로 (19)50년대의 어린이날은 신바람 나던 하루였다. 실제로 그날 집안에서도 학교에서도 &#8216;물질적인 대우&#8217;를 받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날을 만든 방정환 선생님께 마음 속으로 감사하고 감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어린이날이란 것도 역시 &#8216;표절&#8217; 이었다. 일본 아해들 것을 그대로 날짜도 [&#8230;]]]></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span style="font-size: 14pt;"><strong>¶  어린이날 유감  </strong></span>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달려라, 냇물아~ 오월은 푸르고나~</span> 반세기전 어린이날이면 목청이 터져라 신나게 부르던 어린이날 노래, 참으로 (19)50년대의 어린이날은 신바람 나던 하루였다. 실제로 그날 집안에서도 학교에서도 &#8216;물질적인 대우&#8217;를 받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날을 만든 방정환 선생님께 마음 속으로 감사하고 감사하기도 했다.</p>
<p>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어린이날이란 것도 역시 &#8216;표절&#8217; 이었다. 일본 아해들 것을 그대로 날짜도 똑같이&#8230; . 서슬이 푸르게 벤또, 구루마, 도라무 깡 같은 일본 말을 금시 시키고, 화강암 중앙청(일제 강점 때의 조선총독부 건물)을 헐어버리면서, 어떻게 날짜도 똑같은 일본의 어린이날은 그대로 두었을까? 혹시 아니면 방정환 선생의 5월 5일 어린이날을 우리가 먼저 만들고, 일본 아해들이 나중에 표절을 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동양에서 제일먼저 개화를 한 그들이 먼저 만들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하지만 일년에 하루를 &#8216;어린이 전용&#8217;의 날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지 않을지.</p>
<p>&nbsp;</p>
<p><span style="font-size: 14pt;"><strong>¶  푸르고, 따뜻한 어머님 같은</strong></span> 5월 인가, 온통 포근한 어머님의 손끝과 숨결을 느끼고 싶은 그런 달이 바로 5월이다. 날씨 또한 가족과 가정이란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하기에 어울리는 화창하고, 포근하고, 때로는 비에 젖는 잔잔함과 외로움까지 멋지게 조화를 이루어준다.</p>
<p>가톨릭의 삶을 다시 살게 되면서 5월은 또한 예수님의 어머니 성모님(마리아)의 달, 그러니까 &#8216;성모성월&#8217; 임을 느낀다. 또한 나의 그립고 사랑하는 어머님의 기일도 5월이어서 불효자로서 감정적으로 거의 주체하기 힘들 때도 있다. 나는 &#8216;가장&#8217; 아버지의 기억이 전혀 없고 (6.25때 납북) 따라서 어머니란 존재는 나의 생명, 가족의 생명이나 다름이 없었다. 전쟁 후의 험난한 세상에서 만약에 어머님께 무슨 일이 생기면 친척이 거의 없었던 우리 집 남매는 하루아침에 길거리의 고아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p>
<p>육이오 전쟁 후에 가장, 아버지를 잃은 집이 부지기수로 많았고, 그래서 아버지가 있던 집은 우선 행복한 가정이었다지만 그에 못지않게 절대다수 홀 어머니들의 가족에 대한 희생과 헌신은 지금 생각하면 상상을 초월한, 전설적이고 초인적인 것이었다. 최소한 우리 세대는 &#8216;절대로&#8217; 그 고귀한 사랑, 헌신, 희생의 역사를 잊지 못하고 또한 잊으면 안될 것이다.</p>
<p>그런 생각을 조금 접으면 갑자기 싸늘한 현세의 현실로 돌아온다. 요새의 부모님들, 특히 &#8216;엄마&#8217;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또한 그들의 자식들은 어떤 인간들인가.. 부모들은 자식들을 예전처럼 별로 보살피는 것 같지도 않고, 자식들 역시 부모 세대를 우습게 보는 것이 거의 전염병같이 cool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도대체 요새의 이상적인 부모와 자식의 모습은 무엇인가? 돈 많은 부모, 돈 잘 버는 자식인가?</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frame loading="lazy" title="YouTube video player" src="https://www.youtube.com/embed/vhGESxSbzZ8" width="650" height="288" frameborder="0" allowfullscreen="allowfullscreen"></iframe> <br />
1950년대 &#8216;국민학교&#8217;시절의 동요, <strong>어머님 은혜</strong> </p>
<p>&nbsp;</p>
]]></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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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1년 9월이여, 사요나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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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Ken]]></dc:creator>
		<pubDate>Sat, 01 Oct 2011 00:22:12 +0000</pubDate>
				<category><![CDATA[Daybook]]></category>
		<category><![CDATA[연세대]]></category>
		<category><![CDATA[육이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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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이제는 최소한 한여름의 냄새가 완연히 가신, 하지만 가을의 맛은 아직 덜 익은 듯한 그런 시점이고, 느낌조차 많이 다른 9월과 10월의 사이까지 왔다. 이제는 세월이 빠르다는 둥, 느리다는 둥 하는 말이 지겹게 들려서 그런 것 많이 느끼지 않으려 노력을 한다. 올해 여름은 근래에 드물게 &#8216;땀을 흘리는&#8217; 육체노동을 안 했다. 그 대신 밀려있는 책들을 비록 해변에서는 아니지만 [&#8230;]]]></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span style="font-size: 14pt;">이제는 최소한 한여름의 냄새가</span> 완연히 가신, 하지만 가을의 맛은 아직 덜 익은 듯한 그런 시점이고, 느낌조차 많이 다른 9월과 10월의 사이까지 왔다. 이제는 세월이 빠르다는 둥, 느리다는 둥 하는 말이 지겹게 들려서 그런 것 많이 느끼지 않으려 노력을 한다. 올해 여름은 근래에 드물게 &#8216;땀을 흘리는&#8217; 육체노동을 안 했다. 그 대신 밀려있는 책들을 비록 해변에서는 아니지만 집에서 실컷 읽어서 큰 후회는 없다. 그러다 보니, 거의 무의식 중에 생각을 해오던 1950년, 구일오 인천상륙, 구이팔 서울 수복 기념일들도 다 지나갔다.<br />
만약 그 때의 역사를 계속 따라간다면 조금 있으면 UN군이 한 맺힌 삼팔선을 지나 노도와 같이 북진을 하게 될 것이다. 올해는 어쩐지 그 때의 &lt;<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1급 전범, 민족반역자, 김일성 개XX</span>&gt;를 &#8216;죽이거나, 사로 잡거나, 만주로 쫓아내려는 국군과 유엔군을 계속 따라가며 그 당시의 역사를 더 생각을 해 보고 싶다. 여기에는 그 유명한 미 해병대의 장진(<em><strong>Chosin</strong> Resevior</em>) 저수지 사투와 흥남 철수, 일월 사일 서울 철수(일사후퇴) 등이 포함될 것이다.</p>
<p><span style="font-size: 14pt;">며칠 전, 인터넷을 통해서</span> 중앙고 동창 이성복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다시 한번 &#8216;<strong>비대칭적 추억</strong>&#8216;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 비대칭적 추억이란 간단히 말하면 사람에 따라서 같은 추억을 서로 아주 다른 정도로 간직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첫 경험한 것이, 10여 년 전, 고교, 대학시절의 친구 이윤기와 연락이 되었을 때였다. 분명히 나의 이윤기에 대한 추억과 그가 간직하고 있던 추억에는 상당히 차이가 있었다. 나는 이런 경험을 그 전에는 별로 못 했기 때문에 사실 무척 당황하고, 심지어는 불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두고 두고 생각을 해 보게 되었는데, 결론적으로 그것은 나로써는 어쩔 수 없는 &#8216;세월의 부작용&#8217; 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그보다 더 그 당시의 추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더 뚜렷하게 기억을 한 것이 사실은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우습지만 이것은 &#8216;나의 문제&#8217;일 지도 모른다. 내가 이것을 &#8216;대칭적인 추억&#8217;으로 만들기 위해서 나의 기억과 추억을 조정해야 하는 것이다.</p>
<p>이런 것을 이번에 이성복을 통해서 조금은 느끼게 되었는데, 이미 경험을 한 바가 있어서 놀랄 일은 아니다. 이런 것의 극단적인 case는 한번 알던 사람이 나를 완전히 잊은 경우다. 1974년 경에 시카고에서 잠깐 만났던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연세대(철학과) 동문 신경시 씨 부부</span>,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가까이 알고 지냈는데, 나중에 연락을 해 보니, 나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사진까지 보여 주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것은 조금 심한 case라서 나는 물론 당황을 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의 기억력의 문제인가, 아니면 잠깐의 인연을 완전히 무시하며 살아서 그랬을까.. 이것은 사실 조그만 비극이다.</p>
<p>&nbsp;</p>
]]></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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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가회동의 추억</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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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Ken]]></dc:creator>
		<pubDate>Wed, 21 Sep 2011 02:55:40 +0000</pubDate>
				<category><![CDATA[Memoir]]></category>
		<category><![CDATA[50/60]]></category>
		<category><![CDATA[Oldies]]></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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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서울]]></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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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추억]]></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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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가회동.. 이 이름만 들어도 나는 너무나 진한 추억의 감정에 눌려버린다. 나의 어린 시절 추억의 대부분을 가회동이 만들어 주었다. 나의 개인 역사에서, 유치하지만 순진하고 희망과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찾던 시절.. 전쟁의 고통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던 조국의 현실도 가식 없는 눈으로 지켜 보았던 시절들이었다. 서울 재동국민학교, 1959년: 나는 정면의 본관 건물의 바로 뒷쪽에서 살았다 &#160; 나는 1956년 [&#8230;]]]></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span style="font-size: 14pt;">가회동.. 이 이름만 들어도</span> 나는 너무나 진한 추억의 감정에 눌려버린다. 나의 어린 시절 추억의 대부분을 가회동이 만들어 주었다. 나의 개인 역사에서, 유치하지만 순진하고 희망과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찾던 시절.. 전쟁의 고통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던 조국의 현실도 가식 없는 눈으로 지켜 보았던 시절들이었다.</p>
<p><a href="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1/09/Scan11205-1.jpg"><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center wp-image-2969 size-full" title="Scan11205-1"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1/09/Scan11205-1.jpg" alt="서울 재동국민학교, 1959년" width="650" height="343" /></a></p>
<p style="text-align: center;">서울 재동국민학교, 1959년: 나는 정면의 본관 건물의 바로 뒷쪽에서 살았다</p>
<p>&nbsp;</p>
<p>나는 1956년 가을부터 1963년 봄까지 가회동, <strong>재동국민학교</strong> 뒷문 쪽에서 살았다. 학년으로 치면 재동국민학교 4학년 2학기부터 중앙고등학교 1학년 초에 해당된다. 그러니까 그곳은 재동과 가회동의 경계선 쯤이었을 것이다. 재동과 가회동은 남북 신작로로 연결이 되어있어서 그 길을 따라 올라가면 지금의 가회동 &#8216;한옥 촌&#8217;이라는 곳이 나오고, 내려 가게 되면 재동으로 이어지면서 창덕여학교를 만나고 다시 가로지르는 더 큰 길을 만난다. 그 당시에는 그 길의 이름들이 없었고, 그저 모두 &#8216;행길, 한길, 신작로&#8217; 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아마도 율곡로 라고 부르는 모양인데 자신은 없다.</p>
<p> 우리 집의 본적이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종로구 재동 80번지</span>라서 나는 그곳에 산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본적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몰랐지만 우리의 &#8216;선조&#8217;들이 살았던 곳이라고 짐작을 하긴 했다. 그 전에 우리는 <strong>원서동</strong>에서 살았는데 사실 그곳이 내가 기억하는 제일 오래된 동네다. 아버지가 육이오 동란 초에 납북이 되시고 누나, 어머니와 정말 험난한 전후 시절을 원서동에서 시작을 한 것이다. 이북(원산) 여자였던 어머니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강인한 생활력을 발휘하셔서 원서동에 아주 작은 집까지도 사셨는데, 그것이 도시계획으로 철거를 당하게 되어서 가회동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고, 결국 후에 원서동의 &#8220;우리 집&#8221;은 정말로 철거되고 그 위에는 대로가 생겨서 작았지만 추억이 아롱졌던 집은, 그전까지 원서동을 따라 흐르던 개천이 전부 자취를 감추고 덩그러니 길로 변해버렸다.</p>
<figure id="attachment_2971" aria-describedby="caption-attachment-2971" style="width: 300px" class="wp-caption alignleft"><a href="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1/09/Scan10136-1.jpg"><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size-medium wp-image-2971" title="Scan10136-1"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1/09/Scan10136-1-300x218.jpg" alt="놀러온 원서동 친구들 안명성, 김천일과 1962년 2월" width="300" height="218" /></a><figcaption id="caption-attachment-2971" class="wp-caption-text">놀러온 원서동 친구들 안명성, 김천일과 1962년 2월</figcaption></figure>
<p><span style="font-size: 14pt;">원서동 죽마고우들</span><strong>:</strong>  새로 이사를 오니까 원서동에서 잔뼈가 같이 굵었던 코흘리개 친구들과 떨어지게 되었지만 생각보다 새로운 곳에 금새 적응이 되었다. 나는 일반적으로 내성적인 성격이었지만 동네친구들을 사귀는 데는 그런 성격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원서동의 친구들은 시간만 나면 &#8216;장거리 원정&#8217;을 오듯이 놀러 오곤 했는데, 그 당시 원서동의 &#8216;죽마고우&#8217; 친구들;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유지호, 손용현, 박창희, 안명성, 김동만, 최승철, 김천일</span>.. 그 외에도 참 많았다. 우리가 이사온 집은 골목 깊숙이 위치한 아담한 2층 양옥이었는데, 말이 양옥이지 사실은 전통적인 한옥이 아니라는 뜻이고, 지금 생각해 보면 거의 일본식 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 정도로 &#8216;기둥들이 약하게&#8217; 보이던 집이었다. 2층집과 1층집이 같이 직각으로 붙어 있어서 두 집에 살기에는 아주 좋았고, 화단이 있는 그런대로 커다란(그 당시 나의 눈에는) 마당까지 있었다. 우리는 1층의 방 두 개에 부엌이 딸린 &#8216;사랑채&#8217;에 살게 되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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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id="attachment_2974" aria-describedby="caption-attachment-2974" style="width: 209px" class="wp-caption alignright"><a href="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1/09/Scan10462-1.jpg"><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size-medium wp-image-2974 " title="Scan10462-1"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1/09/Scan10462-1-209x300.jpg" alt="원서동 죽마고우 최승철과, 가회동 1960" width="209" height="300" /></a><figcaption id="caption-attachment-2974" class="wp-caption-text">원서동 죽마고우 최승철과, 가회동 1960</figcaption></figure>
<p><span style="font-size: 14pt;"><span style="font-size: 12pt;">재동학교</span>:</span>집에서는 재동국민학교 4층 건물의 뒷면 거대한 모습으로 보였고, 집 골목이 재동학교 강당을 끼고 있었다.. 그 정도로 가까웠다. 그러니까, 이사오면서 제일 신났던 것은 학교 가는 시간이 5분도 걸리지 않았던 사실이다. 전에 살던 원서동에서 등교할 때는 그때 어린 나이의 걸음으로 30분은 넘어 걸렸을 것에 비교하면 이건 정말 &#8216;천국&#8217;에 사는 기분이었다. 나는 꿈도 못 꿨지만, 그 동네에 사는 어떤 &#8216;잘살던&#8217; 아이들은 숫제 점심시간에 집에서 식모들에 의해서 학교 교실까지 배달된 따끈따끈한 도시락을 즐길 정도였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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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pan style="font-size: 14pt;">함경도 출신 주인집 염씨 가족</span><strong>:</strong>  이사온 집의 주인은 함경도 출신, 그러니까 아마도 육이오 동란 때 피난을 온 집일지도 모르는 나이가 있으신 부모님과 시집간 딸, 고등학생 딸,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아들이 있는 지극히 정상적인 가족이었다. 주인 어르신의 성함은 아직도 기억을 한다. <strong>염영혁</strong> 선생님, 그 당시는 &#8216;거의&#8217; 할아버지라고 생각했으나, 지금 생각해 보면 환갑 정도를 갓 넘기셨을 정도였지 않았을까? 외 아드님은 훤칠한 키의 호남형, <strong>염철호</strong> 형이었다. 중앙대를 졸업했다고 들었고, 아이들과 잘 놀아줄 수 있는 그런 쾌활한 미혼 청년이었는데, 대학시절 농구선수였다고 했다. 염철호 형은 나중에 결국은 농구 계로 투신을 해서 방송국에서 농구경기 해설자로 활약을 함을 알게 되었다. 얼마 전 인터넷으로 형의 소식을 아주 짧게 들었는데, 나이도 많이 드시고, 부인이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는, 정말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해 주는 소식이었다.<br />
작은 따님, <strong>염경자</strong> 누나는 그 당시 거의 졸업반의 여고생이었는데 공부도 잘하고, 아주 얼굴이 예뻤다. 얼마 뒤에 이화여대를 갔는데, 그 당시 최고로 경쟁이 높았던 영문과에 지망을 했는데, 애석하게 제2지망이었던 사회사업학과에 합격을 했다. 하지만 영어를 아주 잘했고, 한때는 어떤 미군을 집으로 데려와서 영어강습을 받기도 했는데, 영어실력과 뛰어난 미모로 역시 나중에, 그 당시 최고 선망의 대상이었던 항공사 스튜어디스가 되었다.<br />
큰 따님은 그 당시 이미 갓난 딸 둘 (<strong>주경아</strong> 와 <strong>주동원</strong>)이 있었는데 남편은 그 당시 육군 대위였다. 가끔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놀러 오면 갑자기 집이 떠들썩 해지곤 했다. 나는 특히 그 대위 아저씨를 좋아했는데, 아주 서글서글하고 친절한 &#8216;군인 장교&#8217; 아저씨였기 때문이다. 이 주인집은 함경도에서 오셨는데, 친척들이 근처에 계셨고, 그 중에는 나와 재동국민학교 동창인 &#8216;황석기&#8217;도 그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그 당시 조금 이상했던 것은 이 주인집이 어떻게 돈을 벌었을까 하는 사실이다. 아무도 바깥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가지고 있던 돈이 상당히 많았던 것일까?</p>
<figure id="attachment_2824" aria-describedby="caption-attachment-2824" style="width: 300px" class="wp-caption alignleft"><a href="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1/09/PA190065.jpg"><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size-medium wp-image-2824" title="중앙중학교 뒷산 멀리에 보이는 말바위"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1/09/PA190065-300x225.jpg" alt="중앙중학교 뒷산 멀리에 보이는 말바위" width="300" height="225" /></a><figcaption id="caption-attachment-2824" class="wp-caption-text">중앙중학교 뒷산 멀리에 보이는 말바위</figcaption></figure>
<p> <span style="font-size: 14pt;">삼청공원 말바위</span>: 이 집이 있던 골목이 그때부터 나의 천국이 되었고, 꿈 많던 소년시절의 주옥 같은 많은 추억이 이곳에서 형성이 되어 이제까지도 내 추억의 바탕이 되었다. 시대적으로 보아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사일구를 거쳐 오일육으로 박정희 대통령까지 이어졌고,학교 학년으로는 재동국민학교 4학년으로부터 중앙고등학교 1학년 초까지였다. 거리적으로 이 학교들은 정말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조금만 북쪽으로 올라가면 <strong>삼청공원</strong>과 <strong>북악산</strong>이 있었는데, 이곳들은 어린 시절 친구들과 사시사철 자주 놀러 가던 곳들이었고, 그 중에서도 &#8216;<strong>말바위</strong>&#8216;라는 곳은 북악산 중턱에 위치한 곳으로 우리들이 좋아하던 곳이었고, 우리들이 발견한 아주 작았던 비밀의 바위, &#8216;<strong>늑대바위</strong>&#8216;도 우리들이 전쟁놀이 할 때마다 찾던 꿈의 거처였다..</p>
<p><span style="font-size: 14pt;">가회동 성당:</span> 가회동 큰 길에 나가면 재동학교 주변으로 많은 만화가게들이 즐비했고 그 곳들은 우리들의 꿈의 보금자리 역할을 했다. 삼청동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가회동 파출소가 있었고, 그 옆에는 <strong>가회동 성당</strong>이 있었다. 나는 지금 천주교 신자가 되었지만 그 어린 시절에 내가 본 성당의 인상은 그리 편한 곳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문 입구부터 &#8216;무섭게 보이는 외국인 성인&#8217;들 석고상들의 모습이 으스스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동네마다 많이 있던 개신교 &#8216;예배당&#8217;은 친근한 인상이었고, 분명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알았는데, 천주교는 도대체 &#8216;무엇&#8217;을 믿는지 확실치 않았다. 그 정도로 대부분 사람들이 천주교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p>
<p><span style="font-size: 14pt;">가회동 부자들:</span> 그곳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그때부터 으리으리하게 우람한 기둥을 자랑하는 깨끗하고 커다란 한옥들이 즐비하게 나타난다. 중앙 중고를 다닐 때면 그곳을 지나서 가곤 했는데, 얼마 전에 &#8216;겨울연가&#8217;를 보면서 다시 한번 그곳 들을 보게 되어서 감개가 무량했다. 그 당시 가회동에는 알려진 부자들도 살았는데, 그 중에 화신 백화점 주인이었던 &#8216;친일파&#8217; <strong>박흥식</strong>씨의 집도 그 중에 하나였는데 정말 집이 으리으리하게 컸다. 우리가 살던 집의 뒤에도 아주 커다란 집이 있었는데, 아직도 거기 누가 살았는지 확실치 않다. 가회동에서 재동 쪽으로 내려가면 물론 재동국민학교가 있었고, 조금 더 내려가면 공립 여자학교, <strong>창덕 여중고</strong>가 있었다. 이곳은 여자학교라서 보통 때는 못 들어갔지만 무슨 행사가 있으면 그 강당엔 들어갈 수 있었다. 기억나는 것이 사일구 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 전 겨울에 동네 사람들을 이곳 강당에 불러놓고 영화를 보여준 일이었다. 나는 국민학생이었지만 따라 갔는데, 가서 보니 영화는 영화인데, 선전용 기록영화를 보여주었다. 드리마 같은 것은 아니었어도 나는 너무나 재미있게 본 기억이다.</p>
<p><span style="font-size: 14pt;">박달근</span>:  그 당시 동네 골목은 우리 나이또래들의 천국이었다. 나이에 거의 상관없이 어울릴 수 있던 곳.. 우리 골목도 그랬다. 코흘리개 꼬마부터 중학생들 까지 모두 어울렸다. 많은 애 들이 얼굴은 기억이 나는데 이름을 다 잊어버렸다. 하지만 그래도 이름까지 기억이 나는 애들.. 골목 바로 건너 집에 살던 <strong>박달근</strong>, 이름이 독특해서 기억을 한다. 나보다 한두 살 밑이었고, 공부도 잘했던 애, 나중에 일류 중학교에 들어갔는데, 가슴이 좀 아픈 추억을 남긴 애였다. 나와 보통 애들이 하던 싸움을 했는데, 이 녀석은 나에게 아직도 가슴에 남는 욕을 했다. 그 녀석 왈, &#8220;우리 아버지가 (너같이) 아버지 없는 애와는 놀지 말랬어!&#8221; 라는 말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나에게는 참으로 슬픈 욕이었다. 그 말로 사실 그 애와는 헤어지게 된 셈이다. 나도 그 녀석과 그 아버지가 보기 싫었던 것이다. 사실 그 당시 나와 같이 아버지가 없는 집이 꽤 많았지만 그 골목에는 하나도 없었다. 모두 다 &#8216;정상적&#8217;인 가정이었던 것이다.</p>
<p><span style="font-size: 14pt;">이원영</span>:  우리 집에서 두 집 아래에 <strong>이원영</strong> 이라는 나보다 아마도 한두 살 정도 아래인 애가 있었다. 그 아버지가 어느 중학교 수학선생인가 그랬는데, 정말로 고약한 성격의 남자였다. 항상 아이들을 보면 험악한 얼굴, 짜증난 얼굴이어서 속으로 저런 아빠라면 그렇게 부럽지 않겠다고 생각도 했다. 이원영의 엄마는 정반대로 항상 친절하게 웃는 안경을 낀 지적으로 생긴 다소곳한 엄마였는데.. 나중에 원영이는 <strong>경복중학교</strong>에 들어갔는데, 왜 그렇게 생각이 나는가 생각을 해 보니, 이유가 있었다. 어떤 명절날 원영이의 친척들이 놀러 온 모양인데, 그 중에 국민학교 나이의 소녀가 있었는데, 그 애가 너무나 예뻐서 그 나이에 처음으로 &#8216;연정&#8217; 같은 것을 느낀 것이다. 그때 느낀 것이 아하.. 이것이 어른들이 말하는 &#8216;연애감정&#8217;이란 것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아직도 그 &#8216;예쁜 얼굴&#8217;의 그 애를 생각하면 생생하게 나의 감정이 기억된다. 이원영은 헤어진 것이 너무나 오래 되어서 별로 그의 생각을 못하고 살았지만, 그는 어떻게 &#8216;인생&#8217;을 살았을까.. 궁금하기도 하다.</p>
<p><span style="font-size: 14pt;">최씨 삼형제</span>:  그 아래 한집건너 어느 날, 갑자기 아들 삼형제 집이 이사를 왔다. 최씨 삼형제 집.. &#8220;<strong>최희천, 최희춘, 최희승</strong>&#8220;.. 어떻게 내가 그들의 이름을 아직도 기억하는지 나도 놀란다. 그것은 어린 나이의 추억들이 그 정도로 뚜렷하다는 뜻이 아닐까? 그리고 이렇게 오래 살면서도 그 추억들을 소중하게 기억에서 놓치지 싫었다는 뜻일 것이다. 제일 큰 형이 최희천, 나보다 한두 살 밑, 그 아래가 최희춘, 막내 최희승은 한참 아래인 꼬마였다. 그들에게는 누나가 있었는데, 나보다 나이가 한두 살 위였고, 우리또래 아이들이 그녀를 &#8216;선망&#8217;의 눈으로 쳐다 보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 집의 &#8216;주인&#8217;으로 이사를 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주인이 바뀌고 그 집은 그 많은 식구들이 방하나 문간방으로 옮겼는데, 아마도 사업이 실패를 했을 것이다. 그 아버지는 &#8216;집 장사&#8217; 라고 들었다. 요새말로 하면 &#8216;부동산 업자&#8217; 정도가 아니었을까?</p>
<p>큰형<strong> 최희천</strong>은 과묵하고, 성실한 타입이었고, 그 동생 <strong>최희춘</strong>은 장난꾸러기였지만 그래서 성실한 애였다. 특히 나를 많이 따랐다. 동네의 애들이 모이게 되면 이들이 항상 끼어서 나를 도와주곤 했다. 특히 생각나는 것은 이 형제들을 포함한 동네 꼬마 일당을 데리고 삼청공원 위에 있는 &#8216;말바위&#8217;에 놀러 갔던 추억이었다. 나는 이 꼬마 &#8216;소대&#8217;를 데리고 흡사 소대장이라도 된 듯이 그들과 이곳 저곳을 놀러 다녔다. 그 중에 말바위를 포함한 북악산 일대를 누빈 추억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아찔하다. 왜냐하면 무슨 사고라도 나면 내가 &#8216;소대장&#8217;이기 때문에 몽땅 책임을 져야 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시절 그런 것에 크게 관심을 가질 집은 거의 없었다. 사는 것이 더 급한 세상에 귀찮은 꼬마들을 집에서 끌어내어서 놀아 준 것이 더 고마웠을 것이니까..</p>
<p><span style="font-size: 14pt;">말바위의 종이비행기</span>:  말바위는 북악산 중턱에 있는 완전히 바위로 된 언덕이고 그곳에서는 서울시내가 거의 다 보였다. 정남쪽으로 남산이 나지막하게 보이고, 그 뒤로 한강, <strong>관악산</strong>이 멀리 보이던 우리에게는 거의 환상적인 곳이었다. 아찔한 낭떠러지가 있어서 위험한 곳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그 나이 우리에게는 더 재미를 주었다. 한번은 못쓰게 된 책을 한 권 들고 아이들을 몰고 가서 종이비행기를 만들어 날렸는데, 골목에서 날리다가 이곳, 거의 완벽에 가까운 &#8216;비행장&#8217;에서 날렸을 때 아이들의 환성을 잊지 못한다. 한번 비행기를 날리면 떨어지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낭떠러지가 있어서 더운 기류를 타게 되면 공중에 오래 머물곤 했다. 그때 한 종이비행기가 완전히 뜨거운 기류를 타고 하늘 위로 올랐다. 그것은 전혀 떨어지지 않고 계속 오르며 북쪽으로 날기 시작했다. 우리들이 그것을 보며 탄성을 지르기 시작했는데.. 결국 그 비행기는 안 보일 정도로 높이 떠서 북으로 사라졌다. 그때 그것을 본 꼬마들.. 아마도 잊지 못할 정말 아름다운 광경이었을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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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id="attachment_2976" aria-describedby="caption-attachment-2976" style="width: 300px" class="wp-caption alignleft"><a href="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1/09/Scan10319-1.jpg"><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size-medium wp-image-2976" title="Scan10319-1"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1/09/Scan10319-1-300x222.jpg" alt="박달근의 집 앞에서 꼬마친구와, 1962년" width="300" height="222" /></a><figcaption id="caption-attachment-2976" class="wp-caption-text">박달근의 집 앞에서 꼬마친구와, 1962년</figcaption></figure>
<p><span style="font-size: 14pt;">동네 야구</span>:  이 골목에서 나는 야구를 배우게 되었다. 국민학교 때는 공을 가지고 노는 것은 주로 &#8220;<strong>찐뽕</strong>&#8221; 이란 것과, &#8220;<strong>왔다리 갔다리</strong>&#8221; 란 것을 했고, 그 때만해도 야구를 하려면 글로브와 &#8216;진짜 야구공&#8217; 같은 것이 비싸서 아무나 못 하던 시절이었지만, 찐뽕이란 것은 거의 야구와 비슷하지만 모두 맨손으로 받는 것이라 그것을 많이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8216;가난한 사람들의 야구&#8217; 가 바로 찐뽕이었다. 이것은 배트도 필요 없이 주먹이나 손바닥으로 공을 치는 것이었다. 그런데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어느 날 어머니가 미8군 암시장에서 &#8216;미제&#8217; 야구 배트와 공을 사오셨는데, 배트는 진짜 &#8220;Louisville&#8221;이란 상표가 보이는 것으로 신나게 했지만, 공은 조금 이상하게 생겼다. 보통의 공보다 큰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소프트볼 이었다. 소프트볼이라고 하지만 공 자체는 더 단단했고, 배트로 쳐도 그다지 빨리도, 멀리도 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8216;안전&#8217;한 야구 용이었던 것이다. 물론 우리들이 그것을 좋아할 리가 없었고, 진짜 야구공을 구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 일본에서 쓰이던 &#8216;<strong>중경식</strong>&#8216; 야구공이란 것을 써서 &#8216;진짜 야구&#8217;를 하게 된 것이다.</p>
<p> 야구를 할 때 문제는 동네 골목이었다. 그 좁은 골목에서 야구를 하게 되면 언젠가는 &#8216;사고&#8217;가 생기게 마련이었다. 이 사고는 대부분 골목에 있는 집들의 유리창이 깨지는 것들이었고, 가끔가다 공이 사람을 치는 일도 있었다. 또한 가끔이지만 그 골목에 차라도 지나가면 게임은 완전히 올 스톱이 되곤 했다. 그래도 우리들은 악다구니처럼 지치지 않고 즐겼다. 그러다가 바로 코 옆에 있는 우리의 자랑스런 모교 재동국민학교로 야구장소를 옮기게 되었다. 이것은 완전한 야구의 천국이었다. 비록 야구장은 아니더라도 그렇게 널찍한 공간이 그 당시 어디에 또 있었겠는가? 문제는 그곳을 아무 때난 쓸 수 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는데, 학교의 모든 일정이 끝나게 되면 문을 완전히 닫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 학생들이 학교를 다 떠나기 전에나 운동장을 쓸 수 있었고, 일요일은 전혀 쓸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나마 우리는 그곳에서 야구 연습을 열심히 하고, 실력도 상당히 발전하였다. 그러면서 다른 팀(동네)들과 시합을 하기 시작했고, 어떨 때는 다른 동네까지 &#8216;원정&#8217; 경기까지 하게 되었다. 지금도 생각나는 곳은 삼청 국민학교까지 원정을 간 것이었는데, 그 당시 조건은 진 팀이 이긴 팀에게 야구공을 주는 것이 관례였다. 그 자리에서 줄 수는 없지만 언젠가는 빚처럼 남게 되어서 꼭 갚아야 했다.</p>
<p> 그 당시에 야구는 상당히 인기가 있었는데, 주로 고교야구가 꽃이었고, 실업야구도 못지않게 인기가 있었다. 내가 다니던 중앙중고등학교는 야구부가 상당히 활동적이었고, 대회에서 가끔 우승권까지 가기도 했다. 그 당시 유명했던 투수 <strong>김옥수</strong>, Short Stop <strong>하갑득</strong> 선배들이 고등학교에서 활동을 했는데, 오후에 학교가 끝나서 운동장을 거쳐서 걸어나올 때면 꼭 그들이 연습을 했는데, 나는 빠지지 않고 그것을 구경하곤 했다. 동네야구만 하다가 그들을 보면 정말 &#8216;신의 경지&#8217;로 까지 보였다. 김옥수 투수의 던진 공을 옆에서 보면 정말 총알같이 느껴지고, 하갑득 선배가 육탄 돌격대처럼 쓰러지며 공을 잡을 때면 그것도 역시 &#8216;야구의 신&#8217;처럼 보였다. 꿈에서도 내가 투수가 되어서 총알 같은 직구와, 기묘한 커브 볼을 던지는 꾸곤 했다. 그 당시 입학시험에는 체력장 같은 시험이 끼어있었는데, 그 중에는 공 던지기가 있어서 이렇게 야구를 했던 것이 나중에 고등학교 시험을 치를 때 큰 도움도 되었는데, 그 당시 나의 공 던지는 실력은 내가 생각해도 기가 막히기 멀리 나가곤 했다. 그만큼 던지는 어깨가 발달이 되었던 것이다.</p>
<p> <span style="font-size: 14pt;">오자룡</span>:  이 동네야구를 회상하면서 꼭 생각나는 것, 우리 앞집에 살던 &#8216;<strong>오자룡</strong>&#8216; 이란 아이.. 삼국지의 상산 조자룡의 이름을 따라 지었다고 했나&#8230; 나보다 아마 4~5살 쯤 어렸을, 아주 꼬마였다. 야구는 그 나이에 비해서 잘 한 편이었지만 역시 나이가 어려서 실수가 많았다. 어떨 때는 1루에 주자로 나갔다가 홈으로 뛰어 들어오기도 했다. 그래도 우리 팀에 꼭 끼게 된 이유는 그 녀석의 아버지 (그 당신에는 아빠란 말을 쓰지 못하고 꼭 아버지란 말을 써야 했는데, 아빠란 말은 그 후에나 쓰이기 시작했다.) 때문이었다. 비록 대머리 였지만 비교적 젊은 아저씨였는데, 그 아저씨가 야구광이었다. 그래서 자기 아들 &#8216;오자룡&#8217;을 그렇게 참가시킨 것이었다. 우리들은 그것이 너무나도 힘이 되었고, 자랑스러웠다. 다른 아버지들은 전혀 관심도 없었는데, 그 오자룡의 아버지는 시간만 나면 옆에 와서 코치까지 해 주시곤 했던 것이다. 나는 물론 아버지가 없어서 꿈도 못 꾸었지만,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의 진가도 느낄 수 있게 되기도 했다. 어떤 때는 재동국민학교 운동장이 일요일이라 문을 닫았지만 그 아저씨가 학교 &#8216;소사&#8217; 아저씨를 구어 삶아서 우리들이 정식 게임을 할 수 있게도 해 주셨고, 게임의 심판까지도 자청하셔서 보아 주셨다. 얼마나 즐거운 광경이고, 추억이 되었던지.. 오자룡, 그 녀석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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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center;"><iframe loading="lazy" title="YouTube video player" src="https://www.youtube.com/embed/e72tG80LmsU" width="540" height="308" frameborder="0" allowfullscreen="allowfullscreen"></iframe> </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em><strong>Oh, Carol</strong></em> by <strong><em>Neil Sedaka</em></strong></span></p>
<p>1959년 닐 세다카의 오 캐롤, 이곡은 우리에게는 1960년에 알려지고 따라부르던 노래가 되었다. 하도 따라 불러서, 뜻도 모르고 영어 가사를 모두 외울 정도였다. 가사를 엉터리로 들어서, I&#8217;m but a fool이 <strong>아앰 빠다빵</strong>으로, You hurt me는 <strong>유어 할머니</strong>로 둔갑 하기도 해서 아주 재미있는 추억이 되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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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pan style="font-size: 14pt;">미국의 시대</span>: 나는 가회동 시절, 정치적으로는 &#8216;우리들의 아버지&#8217; 이승만 대통령, 삼일오 부정선거, 학생들이 피를 흘렸던 사일구, 장면 내각 (윤보선 대통령)의 짧았던 1년, 그리고 오일육 군사 쿠데타 (혁명)으로 이어지던 비교적 숨가쁜 변화 속에서 살았다. 비록 육이오 동란은 이미 끝나서 전쟁의 잔혹함은 간신히 비켜 지나게 되었지만, 우리 집처럼 아버지가 전쟁으로 없어진 집도 많았고, 길거리에는 전쟁고아, 거지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는 사실 육이오 전쟁 후의 정말 살기 힘겨운 시절이었다. 철저한 반일, 반공 교육 속에서 위와 아래가 모조리 적국으로 둘러싸인 시절, 그저 믿을 곳이라고는 &#8216;정의의 십자군&#8217; 미군과 그들의 나라 미국, 그리고 조그만 섬 으로 쫓겨난 장개석 총통의 국민당 정부, 대만 밖에 없었다. 거의 모든 것이 미국의 원조에 의해서 유지되던 그 시절, 내가 다니던 재동국민학교도 전쟁 때 반 이상이 불타버려서, 미군들이 와서 새로 지어주고, 고쳐주었다.</p>
<p><span style="font-size: 14pt;">이승만과 멘데레스</span>: 이승만 대통령 재임 시에 나는 국민학생이었는데, 경무대(청와대의 전 이름)와 비교적 가까워서 그랬는지, 가끔 새벽같이 단체로 대통령을 마중하러 나가기도 했다. 제일 기억에 나는 것이 1958년, 5학년 때, 터키의 <strong>멘데레스</strong> 수상이 왔을 때 환영을 나간 것과, 터키를 방문하고 도착해서 일행이 경무대로 돌아온 때였다. 졸린 눈을 비비며 깜깜한 새벽에 동원되어 나가서 한참 기다리다가, 몇 초 만에 쏜살같이 지나가는 차들을 향해서 태극기를 흔들면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그때 모습의 사진이 경향신문 조간에 나왔는데, 기적적으로 내가 거기에 찍혔다. 그때의 신문을 다시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조금 묘한 사실은 그때의 그 두 나라의 원수 급, 이승만 대통령과 터키의 멘데레스 수상, 비슷한 때에 대중 혁명으로 실각을 한, 조금은 운명의 장난이라고나 할까..</p>
<figure id="attachment_2585" aria-describedby="caption-attachment-2585" style="width: 219px" class="wp-caption alignleft"><a href="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1/09/sputnik-1.jpg"><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size-full wp-image-2585" title="sputnik-1"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1/09/sputnik-1.jpg" alt="Soviet's Sputnik-1, Oct 1957" width="219" height="230" /></a><figcaption id="caption-attachment-2585" class="wp-caption-text">사상 첫 인공위성 소련의 스프트닉 Oct. 1957</figcaption></figure>
<p><span style="font-size: 14pt;">소련의 스프트닉</span>:  가회동으로 처음 이사를 가자마자 전세계적인 큰 뉴스가 터졌다. 그때가 1957년 가을이었다. 공산당 소련이 역사상 최초로 &#8216;인공위성&#8217;, 그러니까 사람이 만든 위성을 쏘아 올린 것이다. 그것이 그 유명한<strong> 스프트닉</strong>, <strong><em>Sputnik</em></strong> 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사실 너무나 충격적인 &#8216;사건&#8217; 이었다. 비록 지구에서 제일 가까운 우주 궤도였지만 그곳은 분명히 &#8216;새카만&#8217; 우주 공간이었던 것이고 그곳에 농구공 만한 &#8216;사람이 만든&#8217; 위성을 쏘아서 지구를 돌게 만든 것이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코웃음을 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미국도 못하던 쾌거였고, 이때 소련이 이룬 폭발적인 &#8216;선전효과&#8217;는 정말 대단했다. 그들은 분명히 &#8216;공산주의의 우월성&#8217;을 과시하고자 했을 것이니까.. 상대적으로 미국이 당한 &#8216;수모&#8217;도 대단했다. 하지만, 이때의 그런 수치가 미국을 13년 뒤에 소련을 제치고 달에 첫 우주인을 보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p>
<p><span style="font-size: 14pt;">가회동은 바로 아래쪽에 붙어있던 재동</span>과 더불어, 전에 살던 원서동에 비해서 깨끗한 동네에 속했다. 큰 차이는 원서동에는 그때까지도 초가집들이 즐비했었던 것에 비해 이곳에 초가집은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서울에 웬 초가집? 하지만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하지만 조금 나은 가회동, 재동의 행길(맞는 철자는 한길, 부를 때는 행길이라고 불렀는데, 골목을 제외한 길을 그 당시는 그렇게 불렀고, 종로와 같은 큰길을 제외하고는 길 이름이 전혀 없었다. ) 조차도 지금에 비하면 아마도 &#8216;난민 촌&#8217;을 연상할 정도였을 것이다. 상상할 수 있는 수많은 &#8216;잡상인&#8217;들이 거리를 완전히 덮고 지나가는 사람을 상대했다. 특히 국민학교 앞에서 코흘리개들을 손님으로 하는 가게는 정말 다양하고, 조밀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던 곳은 역시 만화가게, 빙수,국화빵 가게 같은 것이었는데, 텔레비전이 없었던 그 시절에 그곳은 우리들 꿈의 전당이었다. 재동학교 앞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렇게 좋던 싫던 나의 어린 시절 6년의 추억을 만들어 준 가회동 시절.. 어찌 잊으랴.. 그때 알고 지냈던 코흘리개 친구들.. 다들 어떻게 인생을 살아왔을까 궁금해진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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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인천, 61년 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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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Ken]]></dc:creator>
		<pubDate>Mon, 19 Sep 2011 03:04:28 +0000</pubDate>
				<category><![CDATA[Daybook]]></category>
		<category><![CDATA[Ideas & Analysis]]></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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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9월 15일, 1950년 9월 15일에 있었던 역사적인 육이오 당시,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된 날이다. 거의 &#8216;비상식적&#8217;으로 적의 후방을 찌르는 거대한 맥아더 장군의 작품이 현실화 되던 날이었다. 그 후방이란 곳이 인천인 것이 그 당시는 상당한 모험이었을 것이라서 비상식적인 발상이었고, 그런 것이 맥아더장군 특유의 발상이기도 했고, 그것은 사실 아슬아슬한 모험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인천에 건 도박은 예상을 훨씬 [&#8230;]]]></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span style="font-size: 14pt;">9월 15일, 1950년</span> 9월 15일에 있었던 역사적인 육이오 당시,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span>이 시작된 날이다. 거의 &#8216;비상식적&#8217;으로 적의 후방을 찌르는 거대한 맥아더 장군의 작품이 현실화 되던 날이었다. 그 후방이란 곳이 인천인 것이 그 당시는 상당한 모험이었을 것이라서 비상식적인 발상이었고, 그런 것이 맥아더장군 특유의 발상이기도 했고, 그것은 사실 아슬아슬한 모험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인천에 건 도박은 예상을 훨씬 웃도는 성공담이 되었다. 그러니까 가끔 계산이 깔린 도박은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도박이라는 것은 그 뒤에 같은 운들이 따라주지를 않았기 때문에 분명히 들어난다. 그 이후 맥아더의 운은 사라지고, &#8216;악운&#8217;이 따르게 된 것이다. 그 당시 맥아더가 조금만 속도를 늦추고, 적군에 대한 정보에 신경을 더 썼더라면 사태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제일 큰 도박이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을 &#8216;억지로&#8217; 무시했다는 실수였다. 수많은 정보들이 그것을 말해주었지만, 그에게는 듣기 싫었던 정보였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런 정보들의 신빙성이었을 것인데, 아마도 정보수집에 더 신경을 썼어야 했지 않았을까?</p>
<figure id="attachment_2577" aria-describedby="caption-attachment-2577" style="width: 200px" class="wp-caption alignleft"><a href="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1/09/IMG_0004-e1316401183726.jpg"><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size-medium wp-image-2577" title="IMG_0004"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1/09/IMG_0004-200x300.jpg" alt="Book, Operation Broken Reed" width="200" height="300" /></a><figcaption id="caption-attachment-2577" class="wp-caption-text">Book, Operation Broken Reed</figcaption></figure>
<p><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며칠 전에 Reading-by-Tying으로 읽고 있었던</span> 한국전쟁(육이오 동란)에 관한 책, <strong><em>Operation Broken Reed</em></strong> (꺾인 갈대 작전)을 간신히 다 읽게 되었다. 이 책도 산지 몇 년째 된 것인데 올 여름, &#8220;육체적인 노동 대신 여름독서를&#8221;, 이란 목표로 골랐던 도서목록중의 하나였다. 이 책을 읽은 때가 <strong>육이오</strong>(6.25: 동란 발발)와 <strong>구이팔</strong>(9.28: 서울 수복) 을 사이에 둔 계절이어서 더 61년 전을 상상하게 되며 읽으니 실감이 더 했다. 이 책은 시간이 나면 자세히 나의 blog에서 소개할 예정인데, 한마디로 이 책의 내용이 &#8216;진실, 사실&#8217; 이라면 이 &#8216;믿기 힘든&#8217; 작전은 육이오 동란 중, 가장 비밀에 쌓인 역사였을 것이다. 이 책을 읽었던 사람들 중에는 이것이 거의 &#8216;허구&#8217;라고 단정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믿는 쪽에 가깝다. 나도 읽고 나서 생각이, 이것은 사실 일 것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이 작전은 육이오 동란이 휴전회담과 격전을 거듭하기 시작하던 1952년 1월 초에 38선 북쪽, &#8216;적진&#8217; 속에서 일어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1주일에 걸친 미군, 자유중국 군의 합동작전이었고, 비록 결과는 성공이었지만 그에 따른 희생은 실로 충격적이고 슬픈 것이었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휴전회담은 가속화 되었고, 확전, 3차 세계대전(심지어, 핵전쟁)은 방지가 되었다.</p>
<p>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오늘 내가 생각하는 것은 구이팔을 가능케 한 구일오 인천상륙작전</span>이다. 너무나 많이 알려져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이번에는 예전과는 조금 다른 각도로 이 역사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2007년, <em>New York Times</em> best seller였던 <em>David Halberstram</em>의 책,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em>The Coldest Winter, The America and The Korean War</em></span>라는 책 덕분이었다. 700 페이지가 넘는 이 책은 육이오 동란을 미국과, 한국 주변국과의 정치적인 각도로 다룬 것이어서 이제까지의 군사적인 각도로만 다룬 책과 다른 맛을 보여준다. 역사를 다룬 책이지만 역시 저자의 정치적 색깔도 여기저기 보여주고 있어서 흠이라기 보다는 조금 더 인간적인 역사철학도 보여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맥아더 장군에 대한 저자의 거의 &#8216;혐오&#8217; 적인 인상</span>이다. 물론 충분한 역사적 자료에 의한 저자의 의견이겠지만, 조금은 정도가 지나치다고나 할까? 맥아더를 영웅시하는 사람들은 이 책의 이 부분들을 읽는 것이 괴로울 것이다. 나는 솔직히 중립적인 입장일 수 밖에 없다. 내가 맥아더를 옆에서 본 것도 아니고, 이 저자와 같이 충분히 사료를 공부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어떠한 영웅도 보여주기 싫은 면이 충분히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8216;진리&#8217;는 안다.</p>
<figure id="attachment_2579" aria-describedby="caption-attachment-2579" style="width: 198px" class="wp-caption alignright"><a href="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1/09/IMG_0003.jpg"><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size-medium wp-image-2579" title="IMG_0003"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1/09/IMG_0003-198x300.jpg" alt="David Halberstam's Korean War book" width="198" height="300" /></a><figcaption id="caption-attachment-2579" class="wp-caption-text">David Halberstam&#8217;s Korean War book</figcaption></figure>
<p> 이 책의 저자는 책 전체를 통해서 맥아더를 일방적으로 몰아 부치기는 했지만 솔직하게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맥아더의 천재적인 &#8216;용기와, 지혜&#8217;를 인정한 유일한 부분이 바로 인천상륙작전</span>이었다. 거의 부산 교두보 (<em>Pusan Perimeter</em>)에서 바다로 밀려날 뻔 했던 시기에 이 작전이 성공을 한 것이고 보면 그 절묘한 timing의 진가도 역사적인 것이 아니었을까? 사실, 이 작전이 조금만 더 늦게 있었다면 김일성 개XX의 호언장담대로 부산은 괴뢰군 수중에 들어갔을지도 모르고, 대한민국은 역사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아찔해진다.</p>
<p> 맥아더의 인천 상륙작전의 구상은 이미 지상전에서 유엔군의 압도적인 열세를 만회하는 방법으로 시작이 되었다. 유엔군의 해군, 공군을 포함한 기술적인 면의 압도적인 우세함을 활용하는 방법은 해상으로 적진 깊숙이 대거 병력을 빨리 상륙시키는 방법임은 사실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맥아더는 그의 과거 전투경험으로도 생명을 아끼지 않는 무자비한 적군과의 정면 대결보다는 우회 작전을 더 좋아했다. 이러한 적진 뒤의 상륙작전의 구상은 서울함락 직후 공산군이 노도와 같이 남진하기 시작하던 7월 초에 이미 결정이 되었다.</p>
<p> 맨 처음 이 작전은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em>Operation Blueheart</em></span> 라고 이름이 되었고, 예정 날짜는 7월 22일이었지만 지상전에서 너무나 일방적으로 밀리는 바람에 이 예정은 무기로 연기가 되고 말았다. 그러는 중 맥아더는 그 동안 별로 작전이 없었던 해병대에 이 작전을 맡아주도록 주선을 하며, 본격적으로 목표를 인천으로 굳히기 시작했다. 문제는 목표가 인천이라는 사실이었는데, 사실 표면적으로 인천은 작전하기에 &#8216;최악&#8217;의 자연적 조건만 갖추고 있었다. 조수 간만의 차이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심한 곳이었다. 이 조수 시간을 잘못 맞추는 날이면 해병대가 기나긴 개펄에서 허우적거리는 최악의 상태도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상륙하기에 알맞은 &#8216;해변&#8217; 이 없고 모두 방파제 같은 시설물로 그득하고, 수뢰와 같은 방어시설이 있으면 더욱 힘들 것이다. 항구에 거의 붙어있는 월미도는 공산군 수비대에게 부두를 방비하는데 좋은 시설을 줄 수도 있다.</p>
<p> 이런 불리한 조건들은 물론 해병대를 전함으로 운반해 줄 해군 측에서 강조가 되었다. 해군 함정들이 인천 해안에 충분히 접근할 수 있는 날짜는 밀물의 주기에 따라 거의 제한이 되었는데, 빠른 날이 밀물의 깊이가 31 feet인 9월 15일 이고 그 다음이 10월 11일이었다. 9월 15일의 아침 밀물의 시간은 오전 6시 59분, 저녁 밀물은 오후 7시 19분이었다. 이래서, 맥아더는 상륙시기를 아침밀물에 맞추는 작전으로 결정을 한다. 이런 결정은 그에게는 사실 간단했지만 해군에게는 상당히 힘들고 복잡한 요구였을 것이다. 이런 결정들은 거의 한결같은 반대에 부딪쳤지만 이것은 맥아더가 충분히 예상한 바여서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인천상륙작전이 도박을 할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본 것이다. 전략적인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것은 거의 모두 인정을 했지만 문제는 상륙 지점이었다. 왜~~ 그렇게 불리한 조건만 갖춘 인천인가? 그보다 훨씬 남쪽에 있었던 군산이 훨씬 (해군에게, 해병대가 상륙하기에) 안전한 곳이 아닌가?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그런 것들은 사실 맥아더가 설득하는데 거꾸로 이용</span>이 되었다. 그렇게 어려운 곳이라 적들도 그곳을 충분히 방어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p>
<p> 인천의 가치는 사실 지리적으로 서울과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에도 있었다. 서울을 점령하면 그 상징적인 효과는 대단할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동쪽으로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르면 낙동강 쪽에 몰려있는 공산군들을 완전히 포위 섬멸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맥아더의 뚜렷한 구상은 예상보다 쉽게 반대자들을 설득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인천 D-day는 이렇게 공식적으로 정해졌고, 공격준비가 시작이 되었다.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맥아더의 짐작대로, 김일성은 인천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span>. 하지만 모택동은 달랐다. 맥아더를 알았고, 일본에 깔려있던 공산스파이들이 이미 이상한 낌새를 보고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후방 깊숙한 곳으로 대거 병력이 쳐들어 올 가능성에 대해서 중공과 소련은 김일성에게 경고를 했지만, 역시 맥아더에게 운이 좋았는지 그는 듣지 않았다. 그 정도로 김일성은 빠른 승리를 장담했던 모양이다. 이런 사실로 보면 김일성은 소련이나 중공의 지시에 의해서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니고 순전히 그의 독자적인 결정으로 밀어부친 것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를 보면 이런 미친 정도로 &#8216;낙관적&#8217;인 사고방식이 이해가 간다.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그는 사실 거의 &#8216;깡패 개XX&#8217; 의 수준</span>이었던 것이다.</p>
<p> 상륙작전은 예상대로 공산군의 저항이 미미한 상태로 진행되었다. 13,000명의 해병대가 투입이 되어서 첫날의 전사자는 20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리고 드디어 서울을 향한 진격이 시작되었고, 결국 그것은 9월 28일까지 계속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서울까지 30마일 정도 진격하는데 무려 13일이 걸린 것이다. 이것은 9월 15일 이후 놀란 김일성이 대거 병력, 2만 이상을 이 지역으로 투입한 까닭이었다. 문제는 사실 서울을 그렇게 빨리 점령할 이유에 있었다. 군사적으로 보면 저항이 치열한 서울을 우회해서 빨리 낙동강으로부터 후퇴하는 공산군을 포위 섬멸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것은 후에 &#8216;맥아더 개인의 영광&#8217;을 위한 작전이 아니었던가 하는 비난을 받게 되기도 한다. 서울 탈환의 정치적인 중요성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서울 탈환에 소모된 귀중한 시간에, 후퇴하는 공산군이 북으로 탈출할 여유를 준 셈이고, 그것은 두고두고 전쟁을 길게 끈 원인도 되었다. 원래의 계획은 6.25 남침의 3개월이 되던 9월 25일 이전에 서울을 탈환할 예정이었는데, 그 날에는 서울 근교까지 진격을 한 상태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시가전이 거의 3일 걸린 셈이다. 이렇게 해서 맥아더가 거의 혼자 밀어부친 인천상륙작전은 &#8216;성공&#8217;한 셈이고, 이로 인해서 파죽지세로 부산을 포위했던 공산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후퇴를 시작하게 되고, 전쟁은 완전히 양상이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이 작전 성공 이후로 &#8216;기세가 등등&#8217; 해진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그의 독자적이고, 독재적인 작전은 실패의 연속</span>이 된다.</p>
<p> 시기적으로 61년 전에 일어났던 일을 생각해 보았다. 나는 이 당시 2살 정도여서 직접 보고 들은 적이 없지만 그래도 이것들은 나의 생전에 일어났던 살아있는 역사였다.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이 당시에 나는 어디에 있었을까?</span>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이 당시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이미 아버지가 끌려 가신 이후</span>였고,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원서동의 어떤 무당집에 숨어 살았다</span>고 했다. 그 동네는 비원 바로 옆에 있었는데, 미군의 비행기가 폭격하는 것도 다 보셨다고 들었다. 그러면 비록 기억은 안 나지만 나도 그런 장면을 다 보고 들었을 것 같다. 다만 기억을 못하는 것 뿐이다. 생각을 한다. 과연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민족 반역자, 역적, 김일성 개XX는 어떤 생각으로 전쟁을 일으켰나</span>? 이 미친놈을 어떻게 역사는 <strong>능지처참</strong>을 할 것인가? 괴롭다. 괴롭다.</p>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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