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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Ohio State &#8211; Serony&#039;s Friends</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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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38; place, autobio in progress..</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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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Ohio State &#8211; Serony&#039;s Friends</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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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Devil&#8217;s Masterpiece Redux&#8230;</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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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18 Aug 2023 00:12:55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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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조심스럽기만 한 &#8216;세상의 소식&#8217;, 오늘은 나에게 안전한 모습으로 다가오기에 기분까지 산뜻하고 유쾌하기까지&#8230; 무엇 때문인가? 물론 제일 큰 요인은 GEORGIA INDICTMENTS  [숫제 공개적으로 나에게 몇 표만 만들어 주라고 협박 전화질하는 현직 대통령, 세계사적 코믹의 극치] 에 관한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특히 상상만 하던 AL CAPONE, ATLANTA JAIL,  ALCATRAZ 등등의 그림들이 깊은 속의 체증까지 가볍게 해 [&#8230;]]]></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span style="font-size: 14pt;">조심스럽기만 한 &#8216;세상의 소식&#8217;</span>, 오늘은 나에게 안전한 모습으로 다가오기에 기분까지 산뜻하고 유쾌하기까지&#8230; 무엇 때문인가? 물론 제일 큰 요인은 GEORGIA INDICTMENTS  [숫제 공개적으로 나에게 몇 표만 만들어 주라고 협박 전화질하는 현직 대통령, 세계사적 코믹의 극치] 에 관한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특히 상상만 하던 AL CAPONE, ATLANTA JAIL,  ALCATRAZ 등등의 그림들이 깊은 속의 체증까지 가볍게 해 주는 듯.. </p>
<p><img fetchpriority="high" decoding="async" class="aligncenter size-full wp-image-22798"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23/08/devils-masterpiece-1.jpg" alt="" width="650" height="356" /></p>
<p>NYT 에서 보는 이 코믹의 극치, 이 개XX, &#8216;목의 힘줄,을 보라. Devil&#8217;s Masterpiece, 나에게 이XX의 가치는 minus Infinite지만 이XX를 따르는 XX들에게는 무한한 동정과 분노를 금할 수가 없다. 왜 또 나는 이런 함정에 빠졌는가, 잊자, 잊어&#8230; 성모님 도대체 2016년 이후 세상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p>
<p>&nbsp;</p>
<p><img decoding="async" class="aligncenter size-full wp-image-22797"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23/08/2023-08-17-08.35.19-1.jpg" alt="" width="650" height="315" /></p>
<p><span style="font-size: 14pt;">어제 먹다 남은</span> 하아얀 쌀밥, 분량도 딱 2인분&#8230; 갑자기 시원한 물에 말아먹는 쌀밥, 감칠맛 나는 &#8216;먹다 남은&#8217; 생선전, 달걀 후라이, 마늘 조림, 그리고 사과 쪽&#8230; 더운 여름의 아침 식단으로, 노력도 거의 없는 편안함과 함께 오늘 아침을 때운다.  지속되는 육체적인 근육의 스트레스로 드물게 밥맛이 저하되는 올해 여름에 바로 이것이 나를 살려주는 보물이 되었다.</p>
<p>유난히 산뜻한 몸과 마음을 느끼며 일어난 6시 30분,  &#8216;아침등불&#8217;을 향해서 걷는 복도에서 느끼는 공기는&#8230; 아하~  어제와 비슷한 것, 시원한 정도를 넘어서 싸늘함까지.. 광복절, 성모승천, 말복 등이 살짝 지나간 이 즈음의 모습들, 비록 매년 반복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계절의 행군은 매일 똑같은 세월의 느낌을 초월하는 것이어서 은근히 반갑다&#8230;</p>
<p>&nbsp;</p>
<p><img decoding="async" class="aligncenter size-full wp-image-22799"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23/08/2023-08-17-16.43.38-1.jpg" alt="" width="650" height="315" /></p>
<p><span style="font-size: 14pt;">오늘 드디어 1987년 경</span> 콜럼버스 Ohio State 시절 중앙고 &#8216;새카만&#8217; 후배 김종수가 만들어준 어린이  &#8216;2단 침대&#8217;의 마지막 유물을 찾아서 무슨 골동품, 유물을 다루듯이 사진까지 찍어 두었다. 이 부분은 침대의 옆 부분 판자인데, 다른 부분은 이미 사라진 후.. 이것으로 추억을 다시 찾을 수 있는 &#8216;증거물&#8217;을 기회가 되었다. Morse Road  Kings Hill apartment 지하실에서 둘이서 만들었던 이것, 이곳으로 이사올 때도 가져와서 아이들이 한동안 쓰던 것인데&#8230;  참 세월은 많이 흘렀구나~~</p>
<p>이것과 연관된 그 당시의 추억은 비교적 생생하다. 목공 carpentry에 지대한 관심과 재능이 있었던 후배 김종수의 &#8216;권유, 아니 거의 pushing&#8217; 로 난데없이 집 근처에 새로 생긴 home center [아마도 <em>Hechinger</em> 현재의 <em>Home Depot</em>가 나오기 훨씬 전] 로 나를 &#8216;끌고 가서&#8217; 필수 power tool과 lumber를 사다가 그야말로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빨리 2단계 침대를 만든 것이다. 이 손끝 좋은 후배, 정말 그는 목공의 신, 귀재라고나 할까&#8230; 그의 <em>Buckeye Village</em> dorm에 가보니 그곳에는 거의 완전한 침대와 각종 가구들이 모두 그가 손수 만든 것이었다. 이 &#8216;사건&#8217;의 덕분에 이후 나도 power tool를 가지고 아주 초보적인 일들을 시작할 수 있었고, 이후 살고 있는 집을 고치며 사는데 지대한 자신감까지 주었으니&#8230; 종수야~ 고맙다! 그 당시 샀던 power tool [주로 <em>Black &amp; Decker</em>]들 중에 2개는 아직도 &#8216;생생하게&#8217; 동작을 하고 있어서 사실 더욱 그 당시의 추억을 잊을 도리가 없구나&#8230;</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center size-full wp-image-22800"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23/08/2023-08-17-16.24.14-1.jpg" alt="" width="650" height="315" /></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center size-full wp-image-22801"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23/08/2023-08-17-20.09.53-1.jpg" alt="" width="650" height="315" /></p>
<p><span style="font-size: 14pt;">처리 곤란했던</span> particle board들이 빠져나간 덕분에 우리 집 뒷마당의 모습은 서서히 옛모습을 찾기 시작하고 있다. 갑자기 넓어진 &#8216;그곳&#8217;은 이제 연숙의 화단이 옛모습으로 돌아올 것인데, 이제 남은 문제는 engine oil을 폐기하는 것, 목재 이외의 잡동사니들이 갈 곳을 찾는 것 등등&#8230;</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center size-full wp-image-22802"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23/08/2023-08-17-13.07.23-1.jpg" alt="" width="650" height="315" /></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center size-full wp-image-22803"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23/08/2023-08-17-13.07.00-1.jpg" alt="" width="650" height="315" /></p>
<p>물기에 젖은 후 더 무거워진 듯한 각종 particle board들이 드디어 우리 집 전 용 private dump로 하나 둘씩 들어가기 시작한다. 이 작업은 도끼로 각종 크기의 board들을 작게 부수고 wheel barrow로 일일이 나르는 중노동, 그것도 작열하는 햇볕을 무차별로 받아가면서&#8230; 아~ 이 불쌍한 칠십 대 노인에게 아직도 이런 힘이 남아있었던가&#8230;</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center size-full wp-image-22804"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23/08/2023-08-17-13.38.52-1.jpg" alt="" width="650" height="315" /></p>
<p><span style="font-size: 14pt;">연숙이 나라니 집에</span> &#8216;산모&#8217; 음식을 해서 배달하러 가는 바람에 나는 오랜만에 혼자서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이제는 이런 점심 준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반갑기까지 하다. 내가 평소에 먹을 수 없었던 것을 맛볼 수 있으니까&#8230; 그 중에서 내 방식의 &#8216;너구리 라면&#8217;은 이럴 때 적격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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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Ah&#8230; Ohio State, Columbus Ohio 1985&#8230;</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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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24 Jan 2023 03:11:31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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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어제 저녁 나의 블로그 site에 놀랍고, 반갑게도 1980년대 Ohio State U.시절, 서울 중앙고 67회 10년 후배동창  &#8216;안동규&#8217;의 comment가 보였다. 짧은 글을 남겼지만, 어떻게 우연히도 이곳을 찾은 모양이었다. 일단 생각과 추억은 그때, 그곳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오늘 아침에 보니 또 다른 comment, 이것은 66회 하재주 가 쓴 것이었다. 조금 놀란 사실은 당시의 핵심멤버들 모두가 가입한 단톡방을 만들어 [&#8230;]]]></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center size-full wp-image-21374"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23/01/Scan11037-1.jpg" alt="" width="650" height="370" /></p>
<p><span style="font-size: 14pt;">어제 저녁 나의</span> 블로그 site에 놀랍고, 반갑게도 1980년대 <em>Ohio State U</em>.시절, 서울 중앙고 67회 10년 후배동창  &#8216;안동규&#8217;의 comment가 보였다. 짧은 글을 남겼지만, 어떻게 우연히도 이곳을 찾은 모양이었다. 일단 생각과 추억은 그때, 그곳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오늘 아침에 보니 또 다른 comment, 이것은 66회 하재주 가 쓴 것이었다. 조금 놀란 사실은 당시의 핵심멤버들 모두가 가입한 단톡방을 만들어 서로 연락을 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 단톡방에는 정말 반가운 이름들이 줄줄.. &#8217;62회 여운광, 64회 이명성, 이성철, 이춘환,  66회 김종수, 하재주, 67회 채인돈, 안동규,  68회 장경호&#8217; 등이 있다고&#8230; 9명 씩이나&#8230; 그 당시로 추억의 여행을 하려니 확실히 전보다 기억이 잘 안 되는 것 같다. 하지만 무엇을 얼마나 잊었는지&#8230; 그것이 궁금하기만 하다.</p>
<p>이번에도 하재주가 주도를 한 것인가? 하재주.. 그래 이 친구에 대한 갖가지 추억들이 적지 않구나&#8230; 즐거운 것, 아쉬운 것, 섭섭한 것 등등.. 하지만 이 긴 세월 뒤에 무엇이 상관이랴? 결국 이번에도 이 친구가 나를 카톡방으로 인도를 하는구나. 들어가보니,  이들도 모두 60대에 진입한 젊음이랄까&#8230; 느껴지기도 하고 나와는 다른 세대 차이도 새삼 떠오르고&#8230;</p>
<p>단톡방에 가보니 남자 것과 부부 것이 따로 있으니, 왜 그랬을까?  당시 우리들 모일 때는 100% 부부, 가족들만 모였는데&#8230; 이제는 남자만 따로 모이는 이유가 있을지.  너무나 이 재회의 소식을 반가워하는 연숙이를 부부 단톡방으로 초대를 했다. 그곳의 멤버가 20명이나 되는데.. 과연 이곳에 누구누구가 있는지 아직은 살펴보지를 못했다. 하지만 분명히 빠진 후배들이 있다. 김문경, 이승명 등을 비롯해서&#8230; 아~ 참 오래 된 추억들이구나. </p>
<p>이것을 계기로 나와 우리 가족의 1980년대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그 당시의 각종 사진들, 근래에는 거의 안 보고 살았고, 다시 보려니 이상하게 피하게 되는데, 왜 그럴까? 그 당시 우리, 나의 삶이 행복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럴 수가, 그럴 리가 없는데&#8230; 처음 미국직장에서 일을 시작할 수 있었고, 아이들 둘을 보았고, 성당이나 동창들과도 잘 어울리며 살았지 않았는가? 그래, 그때는 행복했던 시기에 속한다.  제일 달콤한 추억의 시기였던 1960/70년대에서 이제는 조금씩 벗어나 <em>Columbus , Ohio</em> 시절의 1980년대로 나의 행복한 추억의 관심을 넓히는 것은 어떨지&#8230;</p>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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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Miss you Tobey, Marathon Man</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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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Ken]]></dc:creator>
		<pubDate>Fri, 19 Jun 2020 16:10:29 +0000</pubDate>
				<category><![CDATA[Daybook]]></category>
		<category><![CDATA[Ohio State]]></category>
		<category><![CDATA[Technology]]></category>
		<category><![CDATA[가족]]></category>
		<category><![CDATA[날씨]]></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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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계속되는 60도 이하, 싸늘한 아침들,  거의 가을 같은 느낌인가&#8230; 며칠 만에 다시 산책길을 걷는다. 싸늘해진 날씨 덕분에 오랜만에 모두 긴 팔/바지로 입고 걸었는데 하나도 덥지를 않았다. 그래 6월 중에 이렇게 가을 같은 날씨가 꼭 있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 된다. &#160; 주마등 같이 지나가는 Tobey의 모습들&#8230; &#160; Tobey&#8217;s Memorial Day,  6월 19일. 2018년 6월 19일 [&#8230;]]]></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span style="font-size: 14pt;">계속되는 60도 이하</span>, 싸늘한 아침들,  거의 가을 같은 느낌인가&#8230;</p>
<p>며칠 만에 다시 산책길을 걷는다. 싸늘해진 날씨 덕분에 오랜만에 모두 긴 팔/바지로 입고 걸었는데 하나도 덥지를 않았다. 그래 6월 중에 이렇게 가을 같은 날씨가 꼭 있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 된다.</p>
<p>&nbsp;</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center wp-image-17565 size-full"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20/06/miss-you-tobey-1.jpg" alt="" width="540" height="360" srcset="https://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20/06/miss-you-tobey-1.jpg 540w, https://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20/06/miss-you-tobey-1-300x200.jpg 300w" sizes="auto, (max-width: 540px) 100vw, 540px" /></p>
<p style="text-align: center;">주마등 같이 지나가는 <em>Tobey</em>의 모습들&#8230;</p>
<p>&nbsp;</p>
<p><span style="font-size: 14pt;">Tobey&#8217;s <em>Memorial</em> Day</span>,  6월 19일. 2018년 6월 19일 나의 사랑하는 &#8216;아들, 개&#8217; <em>Tobey</em>가 나의 손에 안겨서 마지막 숨을 쉬던 그때,  그래 나의 사랑하는 <em>Tobey</em>가 昇天한 날이다.  <em>Tobey</em>야 그립고, 그립고 사랑한다. 너와 같이 살았던 14년, 우리도 즐거웠고, 너도 그 동안 행복하게 살았지?  특히 우리 둘은 너무 가까워서 탈이었던, 명 &#8216;콤비&#8217;  였지?  뒤뜰  우리 집에서 제일 아담하고, 양지바른 곳에서 잠드는 너의 안식처에는 요새 한 여름의 각종 꽃들이 시원하고 넉넉한 덕분에 더욱 만발하고 있구나. 그곳에서 너를 매일 지켜 본단다. 다음 세상에서 다시 만나자, <em>Tobey</em>야!</p>
<p>&nbsp;</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center wp-image-17568 size-full"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20/06/2020-06-30-11.32.04-1.jpg" alt="" width="540" height="241" srcset="https://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20/06/2020-06-30-11.32.04-1.jpg 540w, https://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20/06/2020-06-30-11.32.04-1-300x134.jpg 300w" sizes="auto, (max-width: 540px) 100vw, 540px" /></p>
<p style="text-align: center;"><em>Tobey</em> 동산에 핀 올여름의 꽃은&#8230;</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center wp-image-17562 size-full"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20/06/2020-07-08-11.52.38-1.jpg" alt="" width="540" height="304" srcset="https://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20/06/2020-07-08-11.52.38-1.jpg 540w, https://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20/06/2020-07-08-11.52.38-1-300x169.jpg 300w" sizes="auto, (max-width: 540px) 100vw, 540px" /></p>
<p style="text-align: center;"><em>thermostat</em> controlled &#8216;box fan&#8217; at <em>hot</em> garage</p>
<p><span style="font-size: 14pt;">Air Condition이 안 된 곳</span>, 우리 집 two-car garage, 여름에는 무섭게 뜨거워질 때가 있다. 커다란 냉장고 refrigerator 와 냉동고 freezer 는 물론,  유서, 역사 깊은 각종 책들이 무수히 쌓여 있는데, 너무 습하고 더우면 분명히 그들도 stress를 받을 것이다. 궁여지책으로 &#8216;지독히도 싼&#8217; box fan을 창문에 달아서 환기를 시키니까 훨씬 나아졌다. 문제는 이것을 여름 내내 24시간 가동하는 것, 조금은 에너지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생각한 것이 &#8216;남아도는&#8217; room thermostat (pre-smart one) 으로 이것을 control하자는 것이었다. 우선은 air conditioner처럼 on/off control로 시작해서 궁극적으로는 speed control까지 겸하는 linear control을 구상하였다.</p>
<p>첫 단계인 on/off control은 기존의 thermostat로 비교적 간단하게 design을 하였다. 하지만 speed control은 microcontroller가 필요한 것이고, 따라서 software가 필요한 것, 시간이 조금 걸릴 듯하다.</p>
<p>&#8216;Box Fan&#8217; speed control, 의외로 쉬운 곳에 해답이 있었다. 바로 light/heat dimmer였다. 어제 잠깐 soldering iron heat controller 로 시험을 해 보니 큰 문제가 없었다. Triac-based light dimmer도 비슷하지 않을까? 관건은 이 potentiometer를 digital format으로 바꾸는 것이고 그것은 이미 product로 Amazon에도 있었다.</p>
<p>&nbsp;</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center wp-image-17563 size-full"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20/06/2020-07-08-10.41.39-1.jpg" alt="" width="540" height="304" srcset="https://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20/06/2020-07-08-10.41.39-1.jpg 540w, https://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20/06/2020-07-08-10.41.39-1-300x169.jpg 300w" sizes="auto, (max-width: 540px) 100vw, 540px" /></p>
<p style="text-align: center;"><em>Agony &amp; Ecstasy</em>, electronics project</p>
<p>&nbsp;</p>
<p><span style="font-size: 14pt;">Rotting Deck</span>, 이것들 에서 이미 썩어 들어간 부분은 띄어내고 비교적 새것으로 갈았다. 훨씬 보기가 좋다. 이제는 pressure wash를 한 후, sanding/grinding을 한 후에 전에 사온 exterior &#8216;dark&#8217; brown paint를 칠 할까&#8230; 쉽지는 않을 듯 한데&#8230; 그래도 해야겠지? 한 김에 screened porch도 pressure wash를 하면 더욱 나을 듯&#8230;  정말 왜 이렇게 &#8216;남자&#8217;들은 할 일이 많은 것일까?</p>
<p>&nbsp;</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center wp-image-17564 size-full"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20/06/deck-repair-2020-1.jpg" alt="" width="540" height="361" srcset="https://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20/06/deck-repair-2020-1.jpg 540w, https://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20/06/deck-repair-2020-1-300x201.jpg 300w" sizes="auto, (max-width: 540px) 100vw, 540px" /></p>
<p style="text-align: center;">불쌍한 우리집의 <em>neglected</em> deck&#8230; I&#8217;m <em>so</em> sorry&#8230;</p>
<p>&nbsp;</p>
<p><span style="font-size: 14pt;">Marathon Man, <span style="font-size: 12pt;">어제 아틀란타 지역에서</span></span> 유서가 깊은, 역사를 자랑하는 토니 김 치과 <em>Tony Kim Dentistry</em>를 찾았다. 아이들 어렸을 때부터 다니던 곳, 토니 치과의사는 오래 전, <em>Ohio State</em> [University]를 다닌 인연이 있어서 그렇게 생소한 느낌이 들지 않던 곳이다. 물론 나이도 훨씬 밑이고 학교 다니던 때도 달랐지만 생소한 이곳에서 그곳은 반가운 치과였다. 당시에는 교민인구가 정말 적을 때여서 아마도 치과가 요새처럼 &#8216;지천으로 늘어진&#8217; 때와는 다른 때여서 &#8216;모국어가 통하는&#8217;  토니 치과는 정감적으로도 편한 곳이었다.</p>
<p>치과를 본능적, 체질적, 역사적, 생애적으로 유별나게 무서워 하던 내가 결국은 어쩔 수 없이 그곳을 &#8216;끌려가게&#8217; 되었다. 코로나 사태로 계속 미루어오던 것이지만 가급적 안 가려고 발버둥을 치고 살았다. 하지만 참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이번은 &#8216;나이가 원인일 수 있는&#8217; 탓으로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아주 대 작업이 필요한 case였고, 나도 이제는 별 수 없이 완전히 백기를 들고 치과를 찾은 셈이다.</p>
<p>나는 대학시절부터 시작된 치과와의 악연으로 &#8216;치과&#8217;라는 말만 들으면 몸이 움츠려 들고 가급적 안 가려고 노력하며 살았다. 특히 1976년경의 <em>Dustin Hoffman, Laurence Olivier</em> 주연의 <em>Marathon Man</em> 이란 영화를 본 후에는 나의 생각은 더욱 완고해졌다.  고문 중에 생 이빨을 drilling하는 장면&#8230; 하지만 언제나 이런 유별난 치과공포증의 결과는 나의 &#8216;우둔한 패배&#8217;로 끝이 나곤 했었다. 이번에도 나이에 의한 &#8216;잇몸&#8217;의 퇴화는 나도 어쩔 수가 없는 상황. 결국은 100% 백기를 들고 만 것이다.</p>
<p>&nbsp;</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center wp-image-17561 size-full"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20/06/marathon-man.jpg" alt="" width="540" height="225" srcset="https://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20/06/marathon-man.jpg 540w, https://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20/06/marathon-man-300x125.jpg 300w" sizes="auto, (max-width: 540px) 100vw, 540px" /></p>
<p style="text-align: center;">Dustin Hoffman, <em>Marathon Man</em>, 1976<br />
<em>Olivier</em> torturing <em>Hoffman</em>, drilling a &#8216;good&#8217; tooth <em>without</em> anesthesia!</p>
<p>&nbsp;</p>
<p>거의 15년 만에 &#8216;돌아온&#8217; 그곳, 토니 치과,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는 &#8216;냉소적인 눈길&#8217;을 따갑게 느끼기도 했다.  한마디로 가족들에게도 &#8216;내 탓이오, 내 탓이오&#8230;&#8217; 만 중얼거릴 수 밖에..  나의 변명은 간단하게 이것도 일종의 불치의 <em>phobia</em>라고 단정을 짓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런 내가 좀 이상하다고 보는 듯했다.</p>
<p>정말 오랜만에 나를 끈질기게  괴롭히던 괴물들이 입 속에서 사라진 후 나는 정말 천상의 자유를 느꼈다. 코 밑에서의 야릇한 고통으로부터 자유&#8230; 나는 분명히 그 동안 그런 고통에 &#8216;편하게&#8217;  적응이 되어 살려고 했지만 그것의 부작용은 얼마나 컸나? 나도 고통, 주변도 고통&#8230; 하지만 역시 그런 나의 본성은 자진해서 변할 수가 없음도 안다. 이제는 새로운 장이 펼쳐졌고 비록 거의 한달 정도는 이곳을 드나들어야 하지만, 코로나 사태로 모든 것이 변한 세상에 이런 변화는  결국 모두에게 좋은 것이라고 위로를 한다.</p>
<p>&nbsp;</p>
]]></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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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광주의거의 성서적 조명 &#8211; 김찬국</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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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Ken]]></dc:creator>
		<pubDate>Fri, 18 May 2018 21:59:29 +0000</pubDate>
				<category><![CDATA[Daybook]]></category>
		<category><![CDATA[Ohio State]]></category>
		<category><![CDATA[Politics]]></category>
		<category><![CDATA[역사]]></category>
		<category><![CDATA[종교]]></category>
		<category><![CDATA[책]]></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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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올해 5월은 조금 특이하다. 왜 &#8216;갑자기&#8217; 1980년의 5월이 자꾸만 생각이 났을까? 이제까지 나에게 추억의 5월은 주로 꿈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어린 시절, 철없던 젊은 시절들의 그것이었다. 그때의 5월들은 언제나 나에게 아련하고 짜릿한 기쁨을 주는 그런 시절들이었다. 하지만 올해의 5월은 5월 18일의 그 &#8216;비극적 사건&#8217; 으로 거의 고정이 되었다. 5.18 광주사태, 나의 기억에 남았던 단어, [&#8230;]]]></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span style="font-size: 14pt;">올해 5월은 조금 특이</span>하다. 왜 &#8216;갑자기&#8217; 1980년의 5월이 자꾸만 생각이 났을까? 이제까지 나에게 추억의 5월은 주로 꿈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어린 시절, 철없던 젊은 시절들의 그것이었다. 그때의 5월들은 언제나 나에게 아련하고 짜릿한 기쁨을 주는 그런 시절들이었다. 하지만 올해의 5월은 5월 18일의 그 &#8216;비극적 사건&#8217; 으로 거의 고정이 되었다. 5.18 광주사태, 나의 기억에 남았던 단어, 광주사태였다. 나의 나이를 감안해서도 더 이상 외면, 미룰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머리를 모래 속에 파묻고 외면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p>
<p>그래, 조금 더 알아보자.. 내가 외면하고 살았던 그것을 하나 하나씩 다시 뒤져보자.. 나의 눈에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1989년 5월호  천주교 잡지 &#8216;생활성서&#8217;</span>가 눈에 들어왔다. 정치적인 시각이 아닌 신앙적, 교리적인 눈으로 본 광주는 과연 어떤 것인가? 최소한 그들은 양심적 진실을 말하고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그것을 &#8216;전재&#8217;하기로 하며, 내가 잊은 역사를 다시 들쳐내 보기로 한다. 첫 번째 기사가 당시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연세대 부총장 김찬국 교수</span>의 &#8216;광주의거의 성서적 조명&#8217;, 여기에 전재를 한다.</p>
<p>&nbsp;</p>
<p>&nbsp;</p>
<hr />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strong>5월이 오면, 우리의 분노와 미움과 원망을 승화시켜 하느님의 심판에 맡기고 그의 구원을 확신하는 신앙의 길을 따라 삶의 새로운 포용력을 키워 나가야 할 것이다.</strong></p>
<p style="text-align: center;"><strong>김찬국</strong></p>
<p>&nbsp;</p>
<p>&nbsp;</p>
<p><span style="font-size: 14pt;"><strong>민족적 수치이자 비극인 광주학살</strong></span></p>
<p>&nbsp;</p>
<p>9년 전인 1980년 5월 18일 비상계엄령 전국확대조치에 항거한 광주 학생들의 평화적 시위가 도화선이 되어 피비린내 나는 광주시민 학살사건이 일어난 민족적 수치이자 비극인 당시를 기억할 때 우리 모두 무어라고 해야 할지 할 말을 잃고 만다.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으로 무죄한 학생과 시민들이 비참하게 죽어갔던 것이다. 실로 천인공노할 민족적 대참사였지만 한편 한국인의 민중항쟁역사에 뿌려진 거룩한 의거의 희생이었던 것이다.</p>
<p>이 광주의거로 인한 민족전체의 분노와 탄식의 소리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었지만 군사독재정치를 자행하던 집권자들은 폭동진압이란 명목으로 학살사건을 정당화했고, 시민들의 무죄한 희생에 대한 보상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광주시민들의 명예회복을 해주지 않고 지내온 지 9년이 된 것이다. 더욱이나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사건진상을 밝히는 국회청문회가 열렸었지만 비무장의 학생과 시민에게 발포하여 끔찍스런 사상자를 내게 한 군 작전 책임을 가리는 데 있어서 책임을 회피하고 은폐하고 있는 부끄러운 오늘의 역사의 현장에서 국민들은 또다시 분노와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p>
<p>&nbsp;</p>
<p style="padding-left: 30px;">&#8220;광주에 5월이 오면</p>
<p style="padding-left: 30px;">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묻습니다.</p>
<p style="padding-left: 30px;">우리가 영원히 살 것을 갈망한다면</p>
<p style="padding-left: 30px;">왜 우리는 죽는가?</p>
<p style="padding-left: 30px;">정의를 위해 싸우다가 쓰러지는 자들의</p>
<p style="padding-left: 30px;">죽음에 무슨 남는 게 있는가?</p>
<p style="padding-left: 30px;">자신의 권리를 지키려고 일어섰다가</p>
<p style="padding-left: 30px;">권력자에게 살해당하고 만 자들,</p>
<p style="padding-left: 30px;">이들 이름 없는 자들이 흘린 피에</p>
<p style="padding-left: 30px;">누가 있어 과연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8221;</p>
<p style="padding-left: 30px;">&#8211; 빛고을출판사가 펴낸 &lt;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gt; (1988)에 실린 &#8216;오월의 묵상&#8217;에서 인용</p>
<p>&nbsp;</p>
<p>이런 기도는 한국인의 탄원시이다. 5월이 오면 김준태의 시 &#8216;아아,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여&#8217;란 탄원시로 한 맺힌 분노를 삭이면서 절망 속에서도 피어나는 새 희망과 새 힘을 키우는 다짐을 하게 된다.</p>
<p>&nbsp;</p>
<p style="padding-left: 30px;">&#8220;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p>
<p style="padding-left: 30px;">죽음과 죽음 사이에</p>
<p style="padding-left: 30px;">피 눈물을 흘리는</p>
<p style="padding-left: 30px;">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p>
<p style="padding-left: 30px;">&#8230;..</p>
<p style="padding-left: 30px;">아아, 광주여 광주여</p>
<p style="padding-left: 30px;">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p>
<p style="padding-left: 30px;">무등산을 넘어</p>
<p style="padding-left: 30px;">골고타 언덕을 넘어가는</p>
<p style="padding-left: 30px;">아아, 온몸에 상처뿐인</p>
<p style="padding-left: 30px;">죽음뿐인 하느님의 아들이여&#8230;&#8221;</p>
<p>&nbsp;</p>
<p>구약성서의 시편에는 탄식시 또는 탄원시들이 많이 있다. 민족적 수난과 역경에서 하느님께 한을 풀면서 도와달라고 부르짖는 신앙의 시편들이다.</p>
<p>&nbsp;</p>
<p style="padding-left: 30px;">&#8220;야훼여! 언제까지 나를 잊으시렵니까?</p>
<p style="padding-left: 30px;">영영 잊으시렵니까?</p>
<p style="padding-left: 30px;">언제까지 나를 외면하시렵니까?</p>
<p style="padding-left: 30px;">밤낮없이 쓰라린 이 마음, 이 아픔을,</p>
<p style="padding-left: 30px;">언제까지 견뎌야 합니까?</p>
<p style="padding-left: 30px;">언제까지 원수들의 우쭐대는 꼴을 봐야 합니까?&#8221;</p>
<p style="padding-left: 30px;">&#8211; 시편 13편</p>
<p>&nbsp;</p>
<p>원수로 인해서 박해와 피해를 입고 있는 탄식자의 한풀이 시다. 이 시인은 &#8216;언제까지&#8217; 란 표현을 네 번이나 쓰면서 하느님의 구원을 호소하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신앙의 힘을 키워가고 있다. 이런 탄원시들은 개인작품이지만, 이스라엘인들에게는 민족의 탄원을 대변하면서 신앙의 힘을 키워나가는 기도문이 되고 있다.</p>
<p>오월 그날이 오면 우리 광주시민 뿐만 아니라 온 국민들이 다 이런 시로써 한을 풀면서 새로운 다짐을 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p>
<p>예언자들도 시적인 표현으로 자기들 당대 국민의 소리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대변하였다.</p>
<p>정의의 예언자 아모스는 심판예언자였다. 권력형 구조악으로 피해를 입은 약자들의 인권을 대변할 때 분노를 터뜨리며 욕하는 저주의 말로 시작하였다.</p>
<p>&nbsp;</p>
<p style="padding-left: 30px;">&#8220;저주 받아라!</p>
<p style="padding-left: 30px;">너희 공평을 뒤덮어 소태같이 쓰게 만들고 정의를 땅에 떨어뜨리는 자들아,</p>
<p style="padding-left: 30px;">성문 앞에서 시비를 올바로 가리는 사람을 미워하고 바른 말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자들아 너희가 힘없는 자를 마구 짓밟으며 그들이 지은 곡식을 거둬 가는구나</p>
<p style="padding-left: 30px;">&#8211; 아모 5,7-11</p>
<p>&nbsp;</p>
<p>아모스는 하느님의 심판을 우선으로 하는 사회정의를 강조하였다. (아모 5,18-20).</p>
<p>&nbsp;</p>
<p>폭군으로서 11년간 남쪽 유다를 통치한 여호야킴(609-598) 왕 때 하바꾹 이란 예언자가 등장하여</p>
<p>&nbsp;</p>
<p style="padding-left: 30px;">&#8220;야훼여,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이 소리</p>
<p style="padding-left: 30px;">언제 들어 주시렵니까?</p>
<p style="padding-left: 30px;">호소하는 이 억울한 일,</p>
<p style="padding-left: 30px;">언제 풀어주시렵니까?</p>
<p style="padding-left: 30px;">&#8230;&#8230;</p>
<p style="padding-left: 30px;">보이느니 약탈과 억압뿐이요,</p>
<p style="padding-left: 30px;">터지느니 시비와 말다툼뿐입니다.</p>
<p style="padding-left: 30px;">법은 땅에 떨어지고</p>
<p style="padding-left: 30px;">정의는 끝내 무너졌습니다.</p>
<p style="padding-left: 30px;">못된 자들이 착한 사람을 등쳐 먹는 세상,</p>
<p style="padding-left: 30px;">정의가 짓밟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8221;</p>
<p style="padding-left: 30px;">&#8211; 하바 1,2-4</p>
<p>&nbsp;</p>
<p>이런 탄원의 말로 당시 시대상을 대변하면서 &#8220;화를 입으리라&#8221;라는 저주의 심판선언을 하고 있다. (2,12-20).</p>
<p>&nbsp;</p>
<p>&nbsp;</p>
<p><span style="font-size: 14pt;"><strong>최고 책임자까지도 마땅히 심판 받아야 한다</strong></span></p>
<p>&nbsp;</p>
<p>이스라엘 왕정역사에서 제일가는 폭군으로 유다 왕 므나쎄(687-642)가 있었다. 12살 때 왕위에 올라 예루살렘에서 45년간 다스렸는데 우상을 만들어 야훼 하느님께 불충성한 신앙적 배신과 폭력정치를 저질렀는데 후세 역사가인 신명기적 편집자는 므나<br />
쎄 왕을 고발하고 &#8220;그가 저지른 죄는 유다 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8221;(2 열왕 21,17)고 적어 놓았다.</p>
<p>&nbsp;</p>
<p style="padding-left: 30px;">&#8220;그는 우상을 만들어 유다를 죄에 빠뜨렸다&#8230; 므나쎄는 나의 눈에 거슬리는 그 못할 짓을 하도록 이끌어 유다 백성을 죄에 빠뜨린 데다가 무죄한 사람의 피마저 흘려 예루살렘을 피바다로 만들었다.&#8221;</p>
<p style="padding-left: 30px;">&#8211; 2 열왕 21,11-16</p>
<p>&nbsp;</p>
<p>이 말을 예언자의 말이라고 하면서 쓴 글이지만 후대 역사비평가인 신명기적 편집자의 정확한 역사서술과 평가가 담겨져 있음을 본다. 므나쎄 왕의 폭력정치시대에는 백성들이 입을 다물어버렸기 때문에 반체제인사로서 저항한 예언자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p>
<p>솔로몬 왕도 실은 자기가 왕이 될 때에 찬성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왕이 된 다음에 피의 숙청을 하고 궁전과 성전을 짓는 데에 강제로 국민노동력을 동원하고 세금을 강제로 징수한 죄와 또 이방종교의 신을 예루살렘에 허용한 죄 때문에 후세사가에 의해서 고발이 되었었다. 솔로몬이 죽은 다음 나라가 남북으로 분열이 되어 (기원전 922) 남 유다의 왕으로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922-915)이 왕위에 올랐다. 르호보암은 원로정치인들의 충고를 듣지 않고 젊은 후견자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8220;선왕께서 너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웠다. 그렇지만 나는 그보다 더 무거운 멍에를 메우리라. 선왕께서는 너희를 가죽채찍으로 치셨으나 나는 쇠채찍으로 다스리리라&#8221;(1 열왕 12,12-15)라고 했다는 것이다.</p>
<p>후세사가는 르호보암 왕이 끝내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12,15)고 지적하고 있다. 선조들보다도 더 큰 죄를 범하여 &#8216;야훼께 미움을 샀다&#8217; (1열왕 14,22)고 평가되어 있다.</p>
<p>구약 역사에서 왕정정치가 시작되고 남북분열이 된 다음 북왕국 이스라엘에는 군사 쿠데타가 수없이 일어나 선왕을 죽이고 정권을 잡는 일이 일곱 차례나 있었다. 이런 혼돈이 200년이나 계속되다가 북 이스라엘은 강대국인 아시리아에게 멸망 당하고 말았다. 신명기사가는 왕들의 업적을 평가할 때마다 북 이스라엘의 최초의 왕인 여로보암 왕(922-901)이 저지른 종교죄 (우상신을 섬긴 죄)의 전철을 밟아 죄를 지었다고 명기하고 있다. 폭력정치죄나 우상종교를 허용한 죄는 역사적으로 두고두고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되어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한다는 역사적 교훈과 자료로 알려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p>
<p>남 유다의 여호야킴 왕 (기원전 609-598)과 예언자 예레미야와의 관계가 예레미야 서에 가끔 나온다. 즉 폭군과 대결한 예언자의 모습을 보게 된다. 예레미야는 성전설교에서 당시 사회상을 고발하였다.</p>
<p>&nbsp;</p>
<p style="padding-left: 30px;">&#8220;너희의 생활태도를 깨끗이 고쳐라. 너희 사이에 억울한 일이 없도록 하여라. 유랑인과 고아와 과부를 억누르지 말라. 이곳에서 죄 없는 사람을 죽여 피를 흘리지 말라&#8230;. 너희는 훔치고 죽이고 간음하고 위증하고 바알에게 분향하고 있다&#8230;. 이 땅 위에 나의 맹렬한 진노를 쏟으리라, 아무도 나의 타오르는 분노를 끄지 못하리라&#8221; (예레 7,.5-20).</p>
<p>&nbsp;</p>
<p>하느님은 분노하시는 분으로서 여호야킴 왕의 폭력적 탄압정치와 우상숭배를 심판하신다는 점을 예언자 예레미야 가 대변하고 있다.</p>
<p>&nbsp;</p>
<p style="padding-left: 30px;">&#8220;그날이 오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야훼의 손에 죽은 시체들이 너저분하게 굴러 다니리라&#8230;. 백성의 목자, 민중의 우두머리들아, 너희가 도망쳐도 난을 피하지 못하리라&#8230;&#8221;</p>
<p style="padding-left: 30px;">&#8211; 예레 25,33-38</p>
<p>&nbsp;</p>
<p><span style="font-size: 12pt;">혹독한 심판의 예언이다.</span></p>
<p>&nbsp;</p>
<p>폭군인 여호야킴 이 새로운 강대국인 바빌론의 침략을 받아 굴복했었다가 3년 후에 바빌론에게 반기를 들자 다시 침략을 받아 유다 전국이 침략군에게 짓밟히고 말았다.(기원전 598). 신명기적 역사가는 이런 평가를 남겼다.</p>
<p>&nbsp;</p>
<p style="padding-left: 30px;">&#8220;이런 일이 유다에서 일어난 것은 므나쎄가 온갖 못할 짓을 하는 것을 보시고 야훼께서 유다 백성을 내쫓으시겠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이 이루어진 것일 따름이다. 그런데다가 그는 무죄한 피마저 흘려 예루살렘을 피바다로 만들었으므로 야훼께서는 용서하실 마음이 없으셨던 것이다&#8221;</p>
<p style="padding-left: 30px;">&#8211; 2 열왕 24,3-4</p>
<p>&nbsp;</p>
<p>우리가 이런 성서적인 조명으로 광주 민중항쟁을 보면 참으로 하느님은, 무죄한 사람들의 피를 흘려 도시를 피바다로 만든 폭력적 진압을 한 군관계 책임자 뿐만 아니라 이에 관련한 최고 책임자까지도 국민과 역사 앞에서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며 마땅히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보시는 것이다. 그 해 5월 광주에서 무참히 희생당한 사람들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대열에 나섰다가 총칼로 인한 폭력으로 생명을 잃거나 부상을 당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들 가족들의 한을 풀어주고 그들의 정당한 인권이 회복되어 역사에서 그들의 희생 정신이 바르게 평가를 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p>
<p>&nbsp;</p>
<p>&nbsp;</p>
<p><span style="font-size: 14pt;"><strong>광주시민의 희생은 민주화운동의 길잡이</strong></span></p>
<p>&nbsp;</p>
<p style="padding-left: 30px;">&#8220;광주에 5월이 찾아오면 들려오는 이 회피할 수 없는 질문에 대답해주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p>
<p style="padding-left: 30px;">&#8230;.</p>
<p style="padding-left: 30px;">새 생명의 눈부신 빛 줄기가 이제 세상 구석구석을 비춥니다.</p>
<p style="padding-left: 30px;">우리는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의 동이 트는 첫 창조를 봅니다. 아멘&#8221;</p>
<p style="padding-left: 30px;">&#8211; &#8216;5월의 묵상&#8217; 중에서</p>
<p>&nbsp;</p>
<p>&nbsp;</p>
<p>인간의 비극은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비극자체는 비참한 종말이지만 비극을 극복하고 넘어서는 새로운 삶의 약동과 희망을 만들어 나가야 할 책임이 살아남은 우리 사람뿐만 아니라 온 겨레에게 지워져 있다고 생각한다.</p>
<p>예수를 따랐던 제자들이 예수께서 기득권을 가진 종교인들이 힘을 가진 로마 총독 빌라도를 업고 무죄한 예수를 잡아갔을 때 도피하거나 모른다고 했었고 십자가에 달렸을 때에도 멀리 피해 있었었다. 그러나 예수가 부활하신 다음에 흩어졌던 제자들이 예수의 수난과 부활의 의미를 새롭게 받아들여 예수의 교훈과 복음을 널리 펼치는 데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순교까지 하면서 예수의 삶과 그의 교훈을 따라 실천하는 데에 자신들의 삶을 투신했던 것이다.</p>
<p>김준태 시인은 &#8216;아아,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여&#8217; 란 시를 이렇게 끝맺고 있다.</p>
<p>&nbsp;</p>
<p style="padding-left: 30px;">&#8220;광주여, 무등산이여</p>
<p style="padding-left: 30px;">아아, 우리들의 영원한 깃발이여</p>
<p style="padding-left: 30px;">꿈이여 십자가여</p>
<p style="padding-left: 30px;">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p>
<p style="padding-left: 30px;">더욱 젊어져 가는 청춘의 도시여</p>
<p style="padding-left: 30px;">지금 우리들은 확실히</p>
<p style="padding-left: 30px;">굳게 뭉쳐있다 확실히</p>
<p style="padding-left: 30px;">굳게 손잡고 일어선다.&#8221;</p>
<p>&nbsp;</p>
<p>&nbsp;</p>
<p>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자기 희생이며 그의 부활사건은 그의 삶만 아니라 그 자신인 진리의 부활과 희생을 보여주는 것이다.</p>
<p>그래서 5월이 다시 오면 우리는 광주의 희생과 새로운 약동을 불러 일으키고 그 수난과 희생을 새롭게 의미화하여 한국 민주주의의 부활과 정의사회의 건설을 위한 기회로 키워나가야 하는 것이다.</p>
<p>구약의 시편 작가들도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는 신앙에 의한 삶의 길을 보여 주고 있다.</p>
<p>&nbsp;</p>
<p style="padding-left: 30px;">&#8220;악한 자가 잘 된다고 불평하지 말며 불의한 자가 잘 산다고 부러워 말아라. 풀처럼 삽시간에 그들은 시들고 푸성귀처럼 금방 스러지리니 야훼만 믿고 살아라.&#8221;</p>
<p style="padding-left: 30px;">&#8211; 시편 37,1-2</p>
<p>&nbsp;</p>
<p style="padding-left: 30px;">&#8220;야훼께서는 정의를 사랑하시고 당신께 충성하는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신다. 그러나 악하게 사는 자는 영원히 멸망하며 악인들은 그 자손이 끊기리라.&#8221;</p>
<p style="padding-left: 30px;">&#8211; 시편 37,27-28</p>
<p>&nbsp;</p>
<p>&nbsp;</p>
<p>탄원시들은 억울한 일들을 고발하면서 하느님께 분노를 터드리고 구원을 호소하고 마지막에는 하느님께 감사찬송을 드리는 내용으로 끝나고 있다. 시편 13편을 보면 원망하는 소리로 원수를 고발하다가 (1-2절), 다음에는 구원을 호소한다.</p>
<p>&nbsp;</p>
<p style="padding-left: 30px;">&#8220;야훼 나의 하느님</p>
<p style="padding-left: 30px;">굽어 살피시고 대답해주소서.</p>
<p style="padding-left: 30px;">죽음의 잠 자지 않도록</p>
<p style="padding-left: 30px;">이 눈에 빛을 주소서.</p>
<p style="padding-left: 30px;">&#8230;&#8230;&#8230;.</p>
<p style="padding-left: 30px;">이 몸은 주의 사랑만을 믿사옵니다.</p>
<p style="padding-left: 30px;">이 몸 건져주실 줄 믿고 기뻐합니다.</p>
<p style="padding-left: 30px;">온갖 은혜 베푸셨으니</p>
<p style="padding-left: 30px;">야훼께 찬미드리리이다&#8221;</p>
<p style="padding-left: 30px;">&#8211; 시편 13,3-6</p>
<p>&nbsp;</p>
<p>이런 하느님께 의지하는 신앙을 가지게 되면 우리의 기도를 하느님이 들어주셨음을 확신하고 끝에 가서는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감사찬송을 하게 된다. 미움과 원망에서부터 시작했다가 정의의 하느님의 심판과 구원을 믿고 신뢰할 때 그 원망이 희생으로 바뀌어져서 찬양으로 끝나는 그런 전환을 보게 된다.</p>
<p>5월이 오면, 우리의 분노와 미움과 원망을 승화시켜 하느님의 심판에 맡기고 그의 구원을 확신하는 신앙의 길을 따라 삶의 새로운 포용력을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p>
<p>&nbsp;</p>
<blockquote>
<p>광주에서 무참히 희생당한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들 가족들의 한을 풀어주고 그들의 정당한 인권이 회복되어 역사에 길이 남아 그들의 희생정신이 바르게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p>
</blockquote>
<p>&nbsp;</p>
<p>&nbsp;</p>
<p>찬양 시편에서 우리가 배우는 바가 또 있다. 시편 33편을 요약해본다.</p>
<p>&nbsp;</p>
<p style="padding-left: 30px;">&#8220;의인들아 야훼께 감사하며 기뻐 뛰어라.</p>
<p style="padding-left: 30px;">&#8230;&#8230;&#8230;&#8230;.</p>
<p style="padding-left: 30px;">옳은 사람들의 찬양이라야 기뻐 받으신다.</p>
<p style="padding-left: 30px;">&#8230;&#8230;&#8230;&#8230;.</p>
<p style="padding-left: 30px;">야훼의 말씀은 언제나 옳은 말씀.</p>
<p style="padding-left: 30px;">그 하시는 일 모두 다 진실이다.</p>
<p style="padding-left: 30px;">&#8230;&#8230;&#8230;&#8230;.</p>
<p style="padding-left: 30px;">왕들아 너희가 대군을 거느렸다고 이길 성 싶으냐?</p>
<p style="padding-left: 30px;">힘 좀 있다 해서 궁지에서 살아날 성싶으냐?</p>
<p style="padding-left: 30px;">군마만 믿다가는 살아나기 어렵고 대군을 거느렸다 해서 사지에서 벗어나지는 못 하리라.</p>
<p style="padding-left: 30px;">야훼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은, 그 사랑을 바라는 자들을 자켜보시며&#8230;&#8230;&#8230;&#8230;</p>
<p style="padding-left: 30px;">우리가 이렇게 당신만을 기다리오니 야훼여, 한결같은 당신 사랑 베푸소서.&#8221;</p>
<p>&nbsp;</p>
<p>여기에서 의인들이 하느님을 찬양하고 하느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힘을 키워나가야 함을 교훈하고 있다. 의인들이 자기교만에 빠져서 하느님의 역사의 심판과 구원을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하게 자기의 의견을 주장하고 남을 정죄만 하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 성경은 우리에게 &#8216;하느님의 오심&#8217;을 기다리게 하는 신앙을 키워주려 하고 있다. 하느님의 오심을 이 5월의 광주와 함께 생각해 볼 때 하느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기초로 하느님의 승리를 의심치 않고 믿고 기다리는 확신을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p>
<p>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바빌론 군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기 직전인 위기상황 속에서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될 유다 나라의 최후를 앞에 두고서도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은 약속을 하여주었다.</p>
<p>&nbsp;</p>
<p style="padding-left: 30px;">&#8220;나 야훼가 선언한다. 나 비록 이 백성에게 이토록 큰 재앙을 내린다 마는 그만큼 약속한 행복도 모두 베풀 것이다&#8230;&#8230;.. 이 땅에서 다시 밭을 사고 팔게 되리라&#8230;&#8230;&#8230;.. 이렇게 나는 이 백성의 운명을 회복시켜주리라. 이는 내 말이다. 어김이 없다.&#8221;</p>
<p style="padding-left: 30px;">&#8211; 예레 32,42-44</p>
<p>&nbsp;</p>
<p>&nbsp;</p>
<p>멸망 후의 회복을 예언한 것이고 약속한 것이다. 예언자의 이런 꿈이 그냥 꿈으로서가 아니라 실현될 약속으로서 이스라엘의 회복과 해방과 재출발을 전망한 것이다.</p>
<p>1989년 5월이 다시 온다. 광주의 5월은 우리 온 국민이 겸허한 마음으로 희생의 피를 기억해야 한다. 군부 독재가 몰고 온 광주시민의 희생은 우리의 의로운 민주화로의 길을 바르게 보여주는 역사의식의 기초가 되고 민주화 운동의 길잡이가 되는 것이다. 광주의거를 이렇게 성서적으로 조명해볼 때 하느님께서 정의와 자비로써 희생당한 광주시민의 명예의 회복만 아니라 한국 국민 전체의 자유와 정의의 회복을 보여주시리라고 믿는다.</p>
<p>&nbsp;</p>
<p><span style="font-size: 8pt;">김찬국 씨는 연희대 신학대학과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유니온 신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연세대학교 부총장으로 있다.</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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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Typewriter.. 그리고 추억..</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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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Ken]]></dc:creator>
		<pubDate>Thu, 11 Aug 2016 00:57:39 +0000</pubDate>
				<category><![CDATA[Memoir]]></category>
		<category><![CDATA[Ohio State]]></category>
		<category><![CDATA[서울]]></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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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추억]]></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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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1960년 대 Hermes typewriter &#160; Georgia 10, 굴림 10:  얼마나 멋진 type shape인가? 하지만 그것보다 더 멋진 것은.. 아~~ 그립다, 태곳적 太古的 둔탁하지만 경쾌한 typewriter의 잔잔한 소음들.. 지금은 원시적인 얼굴의 mono type Pica, 그들은 이제 모두 어디로 갔는가? 아~~ 그 예전에 &#8216;학문적, 지적 정보&#8217;의 총아 寵兒 였던 mechanical typewriter 의 멋진 추억들이여! 나와 typewriter의 첫 [&#8230;]]]></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center wp-image-11691 size-full"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6/09/hermes-1-e1474505251211.png" alt="1960년 대 Hermes typewriter" width="650" height="333" /></p>
<p style="text-align: center;">1960년 대 <em><strong>Hermes</strong> </em>typewriter</p>
<p>&nbsp;</p>
<p><span style="font-size: 14pt;"><strong><em>Georgia</em> 10</strong></span>, <strong>굴림</strong> 10:  얼마나 멋진 type shape인가? 하지만 그것보다 더 멋진 것은.. 아~~ 그립다, 태곳적 太古的 둔탁하지만 경쾌한 typewriter의 잔잔한 소음들.. 지금은 원시적인 얼굴의 mono type <strong>Pica</strong>, 그들은 이제 모두 어디로 갔는가? 아~~ 그 예전에 &#8216;학문적, 지적 정보&#8217;의 총아 寵兒 였던 <em>mechanical</em> typewriter 의 멋진 추억들이여!</p>
<p>나와 typewriter의 첫 만남은 1960년대 초쯤이었다. 서울 중앙중학교 1, 2학년 쯤이었나.. 나의 경기고교생 가정교사였던 김용기 형, 나이에 비해서 조숙했던 그 형이 나의 typewriter에 대한 꿈을 며칠 동안 이루어 주었다. 나의 꿈은 그 것을 직접 만져보고 쳐보는 것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괴물처럼 무겁게 보였던 <em>Underwood</em> typewriter를 들고 나타난 것이다. 내가 하도 그것에 대한 호기심을 보였기에 그 형이 어디선가  며칠간 &#8216;빌려온&#8217; 것이었다.</p>
<p>지금 생각해 보아도 그것, <em>Underwood</em> typewriter는  &#8216;고철&#8217;이었다. 크고, 무거운 쇠 덩어리로 보였던 것이다. 어린 애는 들기도 힘들 정도였다. 당시 중학교부터 영어를 배우기 시작해서 영어에 대한 관심이 많을 때였고 학생전용 영어 신문도 학교에서 가끔 볼 수도 있었는데 typewriter는 집에서 활자체로 인쇄물을 찍어 낼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완전히 그것의 위력에 매료되기도 했다. 영자신문 비슷한 것을 찍어보기도 하며 즐거워한 기억이 생생하다.</p>
<p>당시의 typewriter는 물론 거의 모두 &#8216;중고&#8217;, 아마도 미8군 부대를 통해서 흘러나왔을 것이고 그 값은 만만치 않은 것이고.. 보통 사람들은 그것은 가질 수 없는 물건이었다.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니며 그것을 집에 가진 사람은 거의 못 보았다. 당시에 이미 한글타자기(<strong>공병우 3벌식</strong>)도 나와 있었지만 아마도 대부분 기업체에서나 쓸 정도고 학생들은 그것을 쓸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언제 그랬나 할 정도로 당시는 거의 모든 학교 공부, 강의 시간에 손으로 받아 쓰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p>
<p>Typewriter가 나에게 가까이 온 것은 대학교 4학년 당시의 겨울방학 때였다. &#8216;무위도식의 극치&#8217;를 실행하던 당시 나는 한강 남쪽 &#8216;변두리&#8217;에 속했던 숭실대학이 있었던 상도동 종점 부근에 살았는데 무슨 구실로든가 시내 그러니까 종로, 명동 등지로 나와야 했다. 그래서 찾은 것이 타자학원이었다. 왜 타자학원을 골랐는지 지금은 기억이 희미하다. 좌우지간, 졸업 후에 공부를 더 하거나 유학 같은 것을 가려면 타자기를 칠 수 있는 것이 유리하다는 단순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루에 한번 씩 종로거리로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주목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일단 배우려고 한 것이라 열심히 배우긴 했다.</p>
<p>타자학원에 가서 놀란 것은 이것이다. 학생들이 &#8216;모조리&#8217; 여자, 그것도 아주 젊은 여자들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들은 그 &#8216;기술&#8217;로 취직을 하려 했기에 나와는 목적이 전혀 달랐다. 그들은 심각한 자세였고 청일점인 나에게는 관심조차 없었다. 학원 강사는 남자였는데, 나의 출현에 꽤 놀란 눈치였고 아주 반가운 모습이었다. 강의가 끝나면 그는 나와 사무실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우리들이 그곳에서 유일한 남자들이었다.</p>
<p>집에 타자기가 없었던 관계로 학원에서 배우는 것은 비교적 값싼 방법이었고, 종로2가에 학원이 있어서 나는 매일 종로거리로 나올 수 있었기에 그것은 지루한 겨울방학을 보내는데 안성맞춤이었다. 나의 타자 실력이 얼마였는지 생각이 안 나지만 그것은 나에게 큰 관심사는 아니었다. 최소한 <em>touch</em> typing만 알면 나의 목적은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니까..</p>
<p>그 이후 미국유학을 준비할 때 나는 &#8216;중고&#8217; 아주 portable 한 typewriter, swiss 제 <strong><em>Hermes</em></strong>란 것을 살 수 있었다. 싼 것은 아니었어도 미국에 가면 필요할 것 같아 미리 투자를 한 것이다. 유학을 떠날 때까지 나는 이것으로 심심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왜 그렇게 그 타자 소리가 나에게는 멋지게 들렸는지 아직도 이유를 모른다. 당시 그것을 치는 사람들은 주로 여성들, 그것도 회사의 비서급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간혹 남편이 논문 같은 것을 쓰게 되면 그의 아내들이 그것을 돕느라 타자를 치곤 했다. 남자가 손수 타자를 치는 것은 정말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결국 남자들은 나중에 쓰지 못할지도 모를 기술 <em>touch</em> typing을 미리 배운 셈이 된 것이다.</p>
<p>미국에 와서 사실 내가 직접 typewriter를 쳐야 할 기회는 별로 찾아오지 않았는데, 당시만 해도 학교에서 꼭 typewriter로 쳐서 내는 숙제는 별로 없었다. 쓰려면 도서관에 가면 되기에 꼭 나의 것을 사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나의 눈을 끈 것이 있었다. 바로 <em>electric</em> typewriter, 바로 그것이었다. electric! 보통 typewriter는 완전히 수동, manual, 온 손끝의 힘으로 치는 것이지만 electric은 조금만 touch를 하면 electric <em>striker</em>가 이어받은 치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것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결국은 나는 그것을 사고 말았다. 비록 큰 돈이었어도 당시만 해도 100% 자유스러운 &#8216;총각&#8217;시절.. 마음만 먹으면 아무 것이나 가능하던 그 자유스러운 시절..</p>
<p>비록 멋으로 샀지만 실제로는 방 구석에서 놀고 있었는데, 결국은 시간은 찾아왔다. 70년대 중반 쯤 나는 <em>West Virginia</em>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당시 course들 중에 typewriter를 써야 하는 것들이 꽤 있었다. 남들은 잘 모르지만 나는 이제 그 옛날 &#8216;타자학원&#8217;에서 배웠던 기술, 철저히 쓸 기회가 온 것이다. 그 때 보니까 나의 typing 속도는 꽤 빨랐고 제출해야 할 것들은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그 소문을 듣고 나에게 typing을 부탁하는 classmate들도 등장했다. 여자들 같으면 돈을 받고 쳐 주곤 했지만 나는 &#8216;취미&#8217;로 생각했기에 모두 무료로 service해 주곤 했다.</p>
<p><em>Electric</em> typewriter의 위력은 나중에 <em>Ohio State University</em>에서 논문을 쓸 때 절정을 이루었다. 남들은 모두 <em>professional</em> typist를 찾는 고역을 치렀지만 나는 조금 더 시간을 내서 내가 모두 치곤 했다. 그 때 나는 상당한 분량의 논문을 typing했는데, 나중에 &#8216;책&#8217;으로 나온 그 논문집을 도서관에서 찾아보니.. 역시.. professional이 typing한 것과 비교하니.. 완전히 아마츄어 냄새가 났다. 조금은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내가 손수 만든 것이라고 나를 위로하기도 했다.</p>
<p>그 이후 typing의 필요는 사라지는 듯 했다. 가끔 영어로 쓰는 서류, 편지들 이외에는 그것이 공부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누가 예상을 했으랴.. digital computer의 출현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처음에는 &#8216;집채만한&#8217; mainframe &#8216;monster&#8217; (e.g., <em>IBM S/360</em>), 다음에는 minicomputer (e.g., <em>PDP11</em>) 이것들은 거의 모두 keypunch input으로 결국은 typing기술이 필요한 것, 나중에 나온 personal (micro)computer들 (e.g., <em>Apple II, IBM PC</em>) 모조리 앞 모양은 거의 typewriter의 모습을 갖춘 것이었다. 본격적으로 touch typing 의 위력이 돋보이는 세월이 도래한 것이다. Touch typing에 전혀 문제가 없었던 나는 그때 비로소 느꼈다.. 무언가 배워서 절대로 손해를 볼 수가 없다는 사실..</p>
<p><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alignleft size-full wp-image-11693"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6/09/typesets-e1474505794358.png" alt="typesets" width="280" height="155" />Engineer들의 필수 portable &#8216;analog calculator&#8217; 였던 slide rule (계산척)은 1970년대 초에 &#8216;갑자기&#8217; 등장한 &#8216;digital&#8217; calculator로 &#8216;하루아침&#8217;에 사라지고, 향수에 젖은 &#8216;mechanical&#8217; typewriter는 personal computer/printer의 등장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갔다. 하지만 그리운 향수를 느끼게 하는 그것들, 가끔 그리울 때가 있다. 갑자기 무언가 쓰고 간단히 &#8216;하~얀&#8217; 종이 한 장에 까~만 typeset의 짧은 문장을 쓰고 싶을 때&#8230; 그것이 그립다. computer로 쓰면 고치는 것 떡 먹기지만 한 장 정도 print 할 때 얼마나 overhead가 많은가.. 귀찮고.. 그립다.. 그립다.</p>
<p>그 지겹게 공해로 찌들었던 서울의 겨울 하늘아래서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꽤죄죄한 타자학원</span>을 다녔던, 비록 동기는 뚜렷하지 않았더라도, 나는 꽤 쓸만한 겨울방학을 보냈던 것이다. 그 touch typing 기술은 현재까지도 두고 두고 나를 도왔다. 특히 빠른 typing이 필요했던 때, 나는 1960년대 말 서울 종로에 있었던 &#8216;xx 타자학원&#8217;을 떠올리곤 하며 빙그레 웃곤 한다.</p>
<p>&nbsp;</p>
]]></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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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양지혜씨 어머님 &#8211; 홍윤숙 여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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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Ken]]></dc:creator>
		<pubDate>Thu, 05 Apr 2012 00:26:44 +0000</pubDate>
				<category><![CDATA[Daybook]]></category>
		<category><![CDATA[Memoir]]></category>
		<category><![CDATA[Ohio State]]></category>
		<category><![CDATA[추억]]></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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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양지혜씨, 오랜 만에 생각난 이름이다. 1970년대 말에 Ohio State (University) 총각 시절 보았던 화학전공의 여자 유학생이었고, 80년대 초에는 결혼 이후 다른 인연으로 만났다. 알고 보니 연숙의 고등학교 후배였고, 그녀의 돌 지난 아들을 연숙이 babysit해 준 것이 다른 인연이었다. 그 당시, 1970년대는 미혼 여자 유학생들이 아주 귀한 시절이었고, 그녀는 상당히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8230;]]]></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양지혜씨, 오랜 만에 생각난 이름이다. 1970년대 말에 <strong><em>Ohio State</em></strong> (University) 총각 시절 보았던 화학전공의 여자 유학생이었고, 80년대 초에는 결혼 이후 다른 인연으로 만났다. 알고 보니 연숙의 고등학교 후배였고, 그녀의 돌 지난 아들을 연숙이 babysit해 준 것이 다른 인연이었다. 그 당시, 1970년대는 미혼 여자 유학생들이 아주 귀한 시절이었고, 그녀는 상당히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그녀는 모든 사람의 예상을 뒤엎고, 연하의 어떤 교민1.5세 건축학 전공 한국학생, 김두순 (<em>Albert Kim</em>)씨와 결혼을 했고 아들까지 두었다. 그(김두순씨)는 나이보다 애 띠게 보였지만 그에 못지않게 양지혜씨도 나이만큼 보이지 않았으니 둘이 잘 어울려 보였다. 그녀는 학위가 끝나고 <em>post doc</em>으로 학교에서 계속 일을 했는데, 그들의 아들 &#8216;진&#8217;을 연숙이 우리가 살던 곳에서 babysit한 것이다. 그 당시에 우리는 대학원생(graduate student)아파트였던 <strong><em>Buckeye Village</em></strong>에 살았고, 우리의 큰 딸 새로니도 첫 돌을 넘기고, &#8216;진&#8217;이와 잘 놀아서 babysit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p>
<p>그 무렵에 양지혜씨의 어머님께서 딸인 양지혜씨를 보러 <em>Columbus</em> (Ohio) 를 방문하셨고, 우리부부도 초대를 받아서<sup class='footnote'><a href='#fn-3741-1' id='fnref-3741-1' onclick='return fdfootnote_show(3741)'>1</a></sup> 양지혜씨 아파트에서 같이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알고 보니 그 어머님은 잘 알려진 &#8216;여류 문인&#8217;이 셨지만 아깝게도 나는 문학 쪽에는 거의 관심이 없던 시절이어서 그 어머님의 문학계에서의 위치 같은 것은 잘 몰랐다. 그저,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 바로 &#8216;홍윤숙&#8217; 여사였던 것이다. 그런 것은 문학과 그렇게 가깝지 않았던 아내 연숙도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그런 우리들이 어떻게 홍윤숙 여사와 같이 저녁 식사를 하며 &#8216;문학적 담소&#8217;를 했는지 지금도 확실치 않으나, 홍 여사님은 참, 겸손하시고 기품이 있으셨다. 그런 인연으로 나는 &#8216;문인 홍윤숙&#8217; 여사의 &#8216;존재&#8217;를 알게 되었고, 일부러 산 &#8216;홍윤숙&#8217; 책은 없었지만 혹시라도 보게 되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일년 정도 뒤에 양지혜씨 가족은 <em>San Francisco</em>로 직장이 되어서 이사를 갔고, 그 이후로 소식이 끊어지고 말았다. 남편 김두순씨는 건축가였는데, 참 사람이 건실하고 침착한 청년이어서 나이차이는 있어도 사귈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헤어지게 된 것이 못내 섭섭하기도 하였다. 이사를 갈 당시 그는 자기가 쓰던 &#8216;건축가 작업용 desk로 쓰던 문짝&#8217;을 나에게 주고 가기도 했고, 아직도 그것은 &#8216;기념&#8217;으로 남아있다.</p>
<p>Peer-to-peer file-sharing 이 한창이던 때, <em>ClubBox</em> (download website) 란 곳에서 &#8216;책&#8217; file이란 것을 보고 혹시나 싶어서 모두 download를 해 두고는 그 이후로 한참을 잊고 살았다. 그러다 그것 중에 홍윤숙이란 이름이 보여서 자세히 보니 여사의 수필-산문집 &lt;모든 날에 저녁이 오듯이&gt; 을 typing한 text file이었다. 어느 누가 그런 수고를 했는지는 몰라도 내가 요새 하는 readying-by-typing을 연상케 하는 노력이었다. 나는 그 출판된 &#8216;종이 책&#8217;을 본 적이 없지만, 조금씩 그 글이 나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문제는 text format에 hard-return (carriage-return)을 사용한, 그러니까 computer wordprocessor에는 잘 맞지 않는 &#8216;고약한&#8217; format으로 typing이 되었다는 사실로서, 이것은 전부 나의 손으로 고쳐져야만 했다. 그것은 비록 고생이긴 했지만, 끝나고 나니 책 거의 전부를 &#8216;읽은&#8217; 셈이 되었다. 그러면서 양지혜씨 가족에 대한 추억도 생각나고, 홍윤숙 여사에 대해서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Copyright문제를 떠나서 이미 오래 전에 &#8216;공개&#8217;된 이 글의 <a href="http://wp.me/P1wuZV-XD">발췌 본을 이곳에</a> 올려 놓았다.</p>
<figure id="attachment_3742" aria-describedby="caption-attachment-3742" style="width: 146px" class="wp-caption alignleft"><a href="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2/04/IMG-3.jpg"><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 wp-image-3742  " title="하루 한 순간을 - 홍윤숙"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2/04/IMG-3-208x300.jpg" alt="하루 한 순간을 - 홍윤숙" width="146" height="210" /></a><figcaption id="caption-attachment-3742" class="wp-caption-text">70년대 수필 하루 한 순간을</figcaption></figure>
<p>그리고 우연히 위의 책 &lt;모든 날에..&gt; 보다 훨씬 전에 출판된 여사의 다른 책 &lt;<strong>하루 한 순간을</strong>&gt;이란 &#8216;진짜 책&#8217; 을 집의 책장에서 찾았는데, 아마도 이것은 오래 전에 영구 귀국을 하는 어떤 아는 사람이 주고 간 책이었을 것이다. 1975년경의 책이라서 그 당시 여사의 생각과 감정을 알게 해 주어서 아주 도움이 되었다. 나에게 제일 큰 여사의 수필 산문의 매력은 신앙, 그것도, 가톨릭적인데 있고, 다음은 이 글들이 쓰여진 때가 여사의 나이 60대가 넘었을 때였다는 사실에 있다. 사실 비록 여사는 비록 달필의 여성이지만, 요새 내가 느끼는 진솔한 감정 같은 것이 어쩌면 그렇게 공감이 갈까.. 놀라웠다. 특히 &#8216;<strong>나이 먹음에 따른&#8217; 인생관, 세계관의 변화</strong> 같은 것도 그러했다. 그래서 이 글들은 한번 읽고 끝나는 것들이 아니고, &#8216;<strong>죽을 때까지&#8217; 계속 읽어도</strong>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번 기회에 여사를 찾아보니, 작년에 여사의 책 한 권이 출판된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책은 여사의 어머님을 생각하는 &#8216;<strong>참회록</strong>&#8216;에 가까운 책이라고 했다. 전에 출판된 많은 저서에서 여사의 어머님이 이곳 저곳에 언급은 되었으나, 사실 피상적인 것임을 느낄 수 있었는데, 아마도 고령의 연세를 의식하셨는지, 본격적으로 어머님을 그리신 것 같았다. 세월은 흘러서 이제는 85세를 훌쩍 넘기신 여사님.. 근황은 어떠신지 궁금하기만 하다.</p>
<p>&nbsp;</p>
<div class='footnotes' id='footnotes-3741'>
<div class='footnotedivider'></div>
<ol>
<li id='fn-3741-1'> 이것은 정말로 희미한 기억이어서 연숙은 숫제 완전히 잊고 있었다. <span class='footnotereverse'><a href='#fnref-3741-1'>&#8617;</a></span></li>
</ol>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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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새로니가 세상에 왔을 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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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Ken]]></dc:creator>
		<pubDate>Fri, 20 Jan 2012 23:07:44 +0000</pubDate>
				<category><![CDATA[Memoir]]></category>
		<category><![CDATA[Ohio State]]></category>
		<category><![CDATA[Oldies]]></category>
		<category><![CDATA[가족]]></category>
		<category><![CDATA[새로니]]></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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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추억]]></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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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1월 5일은 우리 집 큰딸 새로니의 생일이다. 1983년 1월 5일, 큰딸 새로니가 태어난 것은 남들도 그렇겠지만 우리 가정에 첫 생명이 태어난 날이라 나이가 들어가면서 조금은 더 생각을 하며 지내게 되었다. 지금에서야 그렇게 의미를 주어가며 생각을 하지만 그 당시는 사실 무언가 &#8216;인간이면 거쳐야 하는&#8217; 인생사의 하나 정도로 생각한 정도였다. 결혼을 했으면 가정을 가져야 하고, 그러려면 자식이 [&#8230;]]]></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figure id="attachment_3291" aria-describedby="caption-attachment-3291" style="width: 225px" class="wp-caption alignleft"><a href="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2/01/Scan10746-1.jpg"><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size-medium wp-image-3291  " title="새로니의 첫 나들이, 1983년 2월말"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2/01/Scan10746-1-225x300.jpg" alt="새로니의 첫 나들이, 1983년 2월말" width="225" height="300" /></a><figcaption id="caption-attachment-3291" class="wp-caption-text">김원백씨 wife 매듭전시회장으로 난생 처음 엄마와 나들이 간 새로니, 1983년 2월 말쯤</figcaption></figure>
<p><strong><span style="font-size: 14pt;">1월 5일은 우리 집 큰딸</span> 새로니의 생일</strong>이다. <strong>1983년 1월 5일</strong>, 큰딸 새로니가 태어난 것은 남들도 그렇겠지만 우리 가정에 첫 생명이 태어난 날이라 나이가 들어가면서 조금은 더 생각을 하며 지내게 되었다. 지금에서야 그렇게 의미를 주어가며 생각을 하지만 그 당시는 사실 무언가 &#8216;인간이면 거쳐야 하는&#8217; 인생사의 하나 정도로 생각한 정도였다. 결혼을 했으면 가정을 가져야 하고, 그러려면 자식이 있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였으니까..</p>
<p><strong>문제는 몇 명을 언제 낳을까 하는 것</strong>인데 사실 우리는 그런 구체적인 계획 같은 것은 없었다. 둘 다 나이가 있으니까 빨리 낳을수록 여러 가지로 유익할 텐데, 그러기에는 신혼의 즐거움이 너무나 짧아질 것이다.</p>
<p>그런 의미에서 첫딸 새로니는 아주 적당한 때에 태어난 것 같다. <strong>신혼생활을 거의 3년</strong>이나 즐겼으니까.. 그 3년 중에 사실 임신기간을 빼면 2년이 좀 넘을까.. 내가 독자라서 사실 어머님께서 은근히 압박을 넣을 줄 알았는데, 그 정도로 유치하지는 않으셔서 전혀 그런 것이 없었고, 그런 것을 연숙도 은근히 고마워하는 눈치였다.</p>
<p> 그 당시 우리는 둘 다 <strong>오하이오주의 콜럼버스</strong>에 있는 <strong>OSU </strong>(<em>Ohio State University</em> main campus)에 재학 중이었고, 그렇게 &#8216;모든 것이 불안정한 학생 신분&#8217;에서 첫 아기를 낳는다는 사실을 나는 조금 불안하기도 하고,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것들이 어찌 치밀한 계획대로 될까. 게다가 그 당시 나는 학교 공부와 학비를 버는 교수 돕는 일로 한마디로 &#8216;<strong>어디론가 (잠깐) 도망가고 싶은 심정</strong>&#8216; 이 들 때가 있었던 시절이었고, 난생 처음으로 자식을 두게 될 한 가장으로써의 책임감에 짓눌리는 괴로움도 느낄 때였다.</p>
<p>경제적인 이유로 그 당시 나는 새로 부임한 (그러니까.. 끝 발이 없는) <em>Turkey</em>출신 교수 밑으로 들어가서 그가 새로 계획한 <em>Digital Control Laboratory</em>(DCL)를 현실화 시키는데 거의 모든 시간(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을 쓰고 있는데 결국은 어느 날 학과장(<em>Dr Ko</em>, a <em>Chinese</em>)이 와서, 계속 학위를 위한 공부를 계속 할 것이냐, 그곳(DCL)에서 일을 할 것이냐 결정하라고 엄포를 놓고 갔다. 한 마디로 더 이상 그곳에서 일을 하며 시간을 지체하려면 <strong>학위를 포기하라는 뜻</strong>이었다. 이런 골치 아픈 와중에서 연숙이 임신을 한 것이다.</p>
<figure id="attachment_3293" aria-describedby="caption-attachment-3293" style="width: 300px" class="wp-caption alignleft"><a href="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2/01/Scan10727-1.jpg"><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size-medium wp-image-3293" title="이후종씨 wife가 열어준 baby shower"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2/01/Scan10727-1-300x206.jpg" alt="이후종씨 wife가 열어준 baby shower" width="300" height="206" /></a><figcaption id="caption-attachment-3293" class="wp-caption-text">이후종씨 wife가 연숙을 위해서 baby shower를 열어주었다</figcaption></figure>
<p>한마디로 1982년은 나에게 학교에서는 어려운 한 해였음이 분명했지만, 다른 쪽으로 우리는 그 해에 천주교를 알게 돼서, 그 해 부활절 때는 <strong>우리 부부가 같이 영세</strong>를 받는 (축복 받을) 일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임신이 된 것은 절대로 우연만이 아니었다.</p>
<p>주변의 유학생 부인들 중에서 임신하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되면서 (예를 들면 성당교우 유학생 <strong>남백희</strong>씨) 조금씩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부부유학생들의 기숙사인 <em>Buckeye Village</em> 우리 바로 옆에 살던 물리학과 유학생 배재고 출신 <strong>이후종</strong>씨 집 &#8216;마저&#8217; 임신한 것을 알고 우리도 용기를 갖고 결정을 내린 것이다. 우리의 여러 가지 사정이 불안정적이었지만, 모든 것을 무언가에 내 맡긴 기분이었다.</p>
<figure id="attachment_3296" aria-describedby="caption-attachment-3296" style="width: 300px" class="wp-caption alignright"><a href="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2/01/Scan10737-1.jpg"><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size-medium wp-image-3296" title="엄마와 첫 생명과의 첫 만남"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2/01/Scan10737-1-300x201.jpg" alt="엄마와 첫 생명과의 첫 만남" width="300" height="201" /></a><figcaption id="caption-attachment-3296" class="wp-caption-text">새로 태어난 생명과 모성의 신비, 1983년 1월</figcaption></figure>
<p>임신 중에 입덧(<em>morning sickness</em>)이 너무나 심해서 연숙은 한 때 고생을 많이 한 편이었지만, 그 당시 새로 얻은 신앙이 그런 어려움에 많은 도움이 되기도 했다. 한 예로, 아플 때마다 <strong>축성된 성유를 바르고 기도</strong>를 하면 신통하게도 낫기도 했던 것인데, 이것도 우리의 영세동기이고, 역시 임신 중이었던 상대 <strong>고완석</strong>씨의 부인의 도움을 받은 것이었다.</p>
<p>한편, 신기하고 신났던 때는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였다. 이것도 부모만이 줄 수 있는 큰 선물이라고 생각이 돼서 신중하게 의논한 끝에 &#8216;순 한글&#8217; 식으로 짓기로 하고 어머님께 허락을 받는데, 정말 다행으로 어머님도 대 찬성이셨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한글이름 지어주기가 유행으로 서서히 퍼지기 시작할 때였다.</p>
<p><strong>배우리</strong> 씨라는 분께서 그런 운동을 펼치고 계셨는데 어머님께서 극성맞게 그 선생님으로 부터 &#8216;<strong>새로니</strong>&#8216; (새로운+이)란 예쁜 이름을 받아오신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strong>한자이름의 오랜 전통과 호적, 족보 등을 고려하면 조금 미안한 일</strong>이었지만, 그 당시는 그렇게까지 느끼지 않았다. 또한 다행히 <strong>호적에도 순 한글이 허용</strong>이 되어서 큰 문제가 없었다.</p>
<figure id="attachment_3300" aria-describedby="caption-attachment-3300" style="width: 300px" class="wp-caption alignleft"><a href="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2/01/Scan10715-1.jpg"><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size-medium wp-image-3300" title="Niagara Falls, Thanksgiving Day, 1982"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2/01/Scan10715-1-300x220.jpg" alt="Niagara Falls, Thanksgiving Day, 1982" width="300" height="220" /></a><figcaption id="caption-attachment-3300" class="wp-caption-text">만삭의 몸으로 추수감사절 때, 나이아가라 에서</figcaption></figure>
<p>연숙의 산부인과는 학교에서 비교적 가까운 <strong><em>Riverside Hospital</em></strong>에 있었고 의사는 <em><strong>Dr Baird</strong></em>, 비교적 잘 한다는 사람이었고, 다른 유학생들도 이 의사에 대한 경험들이 있어서 조금 마음도 놓였다. 비록 임신 초기에 심한 입덧으로 한때 고생은 했지만 나중에는 별로 큰 문제가 없었다.</p>
<p>남편이 출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도와주는 <strong><em>Lamaze</em></strong> (<strong>라마즈</strong>) class에 같이 가서 출산준비 교육도 열심히 받기도 했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연숙은 <strong>제왕절개 출산</strong>을 하게 되어서 자연분만을 못한 아쉬움도 남게 되었다.</p>
<p>첫 아이라서 그런가.. 연숙은 혼신의 힘으로 임신기간을 절제하는 평화스러운 분위기를 만들려고 노력을 했고, 뱃속에서 움직이는 생명에 대해서 너무나 신기해 하며, 이런 것을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strong>남자들이 불쌍하다</strong>고 &#8216;자랑&#8217;까지 하곤 했다. 하지만 &#8220;정말 그럴까.. 고생하는 여자들이 너무 불쌍한데..&#8221; 라는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었지만 그렇게까지 말을 할 수가 없었다.</p>
<p>그때만 해도 연숙은 <strong>남자들 사이에 끼어서 함께 소프트볼을 할 정도</strong>로 기본적인 체력이 아주 건강해서 제왕절개출산만 빼놓고 모든 과정이 아주 순조로웠다. 하지만 새로니가 태어났을 때 <strong>가장 큰 놀라움은 새로니가 여자아이</strong> 였다는 사실이다. 연숙은 물론이고 주변에서 모두 남자아기일 것이라고 결론을 낸 상태였기 때문이었다.</p>
<p>물론 그 이유는 모르지만, 그저 그렇게들 추측을 했는데, 여자아이가 나온 것이다. 그때만 해도 남자아이를 바라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사실 우리는 그런 것은 전혀 없었다. 연숙의 친정은 &#8216;관례&#8217;대로 &#8216;미안한 마음&#8217;을 피력하셨고 우리 어머님은 &#8216;첫딸의 축복&#8217;을 강조하시긴 했지만 <strong>속마음은 짐작이 되었다</strong>. 내가 독자였으니..</p>
<p>29년 전 1월 초, <em>Columbus, Ohio</em>는 예외적으로 유난히 포근함 속에 가랑비가 내리던 날 갓난 새로니를 안고 <strong><em>Buckeye Village</em></strong> <em>Mahoning Court</em>의 &#8216;우리 집&#8217;에 돌아왔을 때, 그 당시 친하게 지내던 연세대 후배 금속공학과 유학생 <strong>김원백</strong> 씨의 부인(도성 엄마)가 우리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기다려 주었는데 그제서야 모든 긴장이 풀어지면서, 아~~우리가 이제 엄마,아빠가 되었구나, 실감을 했다.</p>
<p>이와 같이 그 당시에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보이는 인간사가 지금 생각하니 왜 이리도 거창하게 무슨 &#8216;<strong>인간의 성스러운 의무</strong>&#8216;를 한 기분이 드는 것일까? 결혼을 안 하거나, 자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조금은 미안하지만, 신앙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인간은 역시 이렇게<strong> &#8216;유별나지 않고, 자연스럽게&#8217; 사는 것이 순리</strong>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frame loading="lazy" src="https://www.youtube.com/embed/qQmkoMZyvOQ?rel=0" width="650" height="288" frameborder="0" allowfullscreen="allowfullscreen"></iframe> </p>
<p style="text-align: center;"><strong><em>Leader of the Band</em> &#8211; Dan Fogelberg &#8211; 1982</strong></p>
<p>&nbsp;</p>
]]></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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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고석태 나혜성씨 부부의 추억</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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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Ken]]></dc:creator>
		<pubDate>Thu, 13 Oct 2011 04:10:39 +0000</pubDate>
				<category><![CDATA[Memoir]]></category>
		<category><![CDATA[70/80]]></category>
		<category><![CDATA[Ohio State]]></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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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1980년 가을, Columbus, Ohio.. Ohio State University campus.. 그러니까 31년 전 이맘 때쯤인가, 그들을 처음 만났다. 이 오랜 세월에 비하면 거의 찰나에 가까울지 모를, 기껏해야 3~4개월 정도나 알고 지냈을까? 그 당시 신혼이었던 우리 부부보다 나이가 한두 살 정도 적었던, 젊었던 부부, 남편 고석태씨, 부인 나혜성씨, 가끔 추억하고, 생각한다. 남편 고석태씨, 콧수염의 미술전공 유학생 (홍대 출신이었던가?)으로 [&#8230;]]]></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span style="font-size: 14pt;">1980년 가을, </span><span style="font-size: 14pt;">Columbus, Ohio</span><em>.. Ohio State University</em> campus.. 그러니까 31년 전 이맘 때쯤인가, 그들을 처음 만났다. 이 오랜 세월에 비하면 거의 찰나에 가까울지 모를, 기껏해야 3~4개월 정도나 알고 지냈을까? 그 당시 신혼이었던 우리 부부보다 나이가 한두 살 정도 적었던, 젊었던 부부, 남편 고석태씨, 부인 나혜성씨, 가끔 추억하고, 생각한다. 남편 고석태씨, 콧수염의 미술전공 유학생 (홍대 출신이었던가?)으로 그 해 가을학기에 <em>OSU</em>로 왔고, 아내인 나혜성씨는 남편을 따라서 온 것이었다.</p>
<figure id="attachment_2709" aria-describedby="caption-attachment-2709" style="width: 300px" class="wp-caption alignleft"><a href="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1/10/Scan10878-1.jpg"><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size-medium wp-image-2709 " title="Scan10878-1"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1/10/Scan10878-1-300x240.jpg" alt="바른 쪽에고석태, 나혜성씨 부부와 연숙 OSU Buckeye Village, 1980년" width="300" height="240" /></a><figcaption id="caption-attachment-2709" class="wp-caption-text">바른 쪽에고석태, 나혜성씨 부부와 연숙 OSU <em>Buckeye Village</em>, graduate student Apt. 1980년</figcaption></figure>
<p><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1980년, 여러 가지로 의미 있던 해였다</span>. 그 해 1월 25일에 나는 서울에서 연숙과 결혼을 했고, 그 해 6월에 연숙이 이곳에 와서, 본격적인 우리의 신혼&#8217;유학&#8217; 생활이 시작 되었다. 그 해는 또 대한민국에서 &#8216;해외 유학자유화&#8217;가 시작이 되어서, 가을 학기에 맞추어 &#8216;대거&#8217; 유학생들이 <em>OSU</em> 에 도착했다. 유학자유화란 것이 자세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모르지만 우선 의례 치르던 문교부 유학시험이 면제된 듯 했다. 그러니까 지망학교의 admission만 받으면 여권을 받을 수가 있게 된 것이다.</p>
<p> 이렇게 큰 학교(50,000+)인 <em>OSU</em>에도 그 전까지는 한 학기에 몇 명 정도 유학생들이 오곤 했는데, 이번은 완전히 공식이 바뀌어서 수십 명이 넘게 &#8216;몰려&#8217; 온 것이다. 전공 학과도 다양해 져서 전에는 못 들어보던 학과에도 유학생들이 왔는데, 그 중에 고석태씨 부부가 끼어있었다.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그의 미술전공은 그 전에는 사실 보기 힘들었다</span>. 대부분 이공계 아니면 경제학 등이 주류였었으니까.. 이때를 계기로 유학생 문화가 일시에 바뀌게 되었다. 이제까지는 사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얼굴과 이름 정도는 알고 지냈는데, 일 순간에 그것이 불가능해 진 것이다. 그와 때를 맞춰 &#8216;중공&#8217; 에서도 &#8216;짱꼴라&#8217; 유학생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중국유학생이면 100% 대만 출신이었는데, 그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8216;머리 좋은&#8217; 중공 학생들이 오기 시작한 것이다.</p>
<p>그러던 중에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새로 이곳에 유학생으로 도착한 고석태, 나혜성씨</span>를 만나게 되었다. 만나게 된 인연이란 다름이 아니고, 아내 연숙과 나혜성씨가 이미 알고 있던 사이였던 것이다. 연숙은 이대 학생회의 임원이고, 나혜성씨는 <strong>이대 학보사</strong>(학교신문)의 학생 기자였다고 했다. 그 당시 과외 활동으로 &#8216;<strong>중간 집단 교육</strong>&#8216;이란 것을 같이 받을 때 만났다는데, 나는 아직도 이 중간집단교육 이란 &#8216;해괴한&#8217; 이름이 무엇을 뜻 하는지 모르지만, 좌우지간 &#8216;친목도모&#8217;를 위한 것이 아닌 조금 더 &#8216;고상한&#8217; 이념을 위한 교육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교육의 지도교수가 아틀란타의 <em>Emory University</em> 출신인 <strong>한완상 교수</strong>였다고 했다. 나의 대학시절 활동이 모두 &#8216;남녀 친목도모&#8217;인 것에 비해서 연숙은 거의 이렇게 조금은 &#8216;심각한 정치적&#8217;인 색깔이 있었다. 나혜성씨는 이런 활동에서 만난 &#8216;동무&#8217;라서, 그 들은 보통의미의 친구는 아니었던 것 같았다.</p>
<p>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처음으로 자기만이 알던 사람을 이곳에서 만나게 되어서</span> 연숙은 미국에 온 후 3개월 동안 느끼던 약간의 &#8216;미국적&#8217;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우리는 이들 부부와 자연스레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남편 고석태씨는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콧수염을 기르는</span>, 역시 미술학도의 개성을 들어내고, 아주 명랑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미술전공 남자 유학생을 나는 본 적이 없어서 사실 공부하는 얘기는 미리부터 기대를 할 수가 없었다. 주로, 젊은 부부가 사는 얘기를 하곤 했지만, 가끔 여자 둘이 모두 &#8216;사회 문제 의식&#8217;에 경험들이 있어서 그랬는지 그런 쪽 이야기도 하곤 했다. 그 해 1980년 겨울에 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우리들은 어린 아이들처럼 밖으로 나가 마구 뛰어 놀았다. 나를 제외한 이 세 명은 모두 미국에서 처음 맞는 눈이어서 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는데, 나는 이미 오래 전 경험을 한 바가 있어서 그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p>
<p>&nbsp;</p>
<p><span style="font-size: 14pt;">고석태씨보다 나혜성씨의 기억이 더 나는 것</span>은, 나와 조그만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해 1979년에 내가 서울에 갔을 때, 결혼을 염두에 두고 신부 감 소개를 조금 받았던 사람 중에 나혜성씨의 친구가 있었던 것이다. 세상이 좁다고나 할까.. 조금 놀랐던 것도 사실이다. 그 때 만났던 그 여자는 한마디로 좋은 집안을 가졌고, 그들도 역시 비슷한 조건의 사람을 찾던 참이었으니.. 나는 사실 &#8216;면접시험&#8217;에서 낙방을 한 셈이 되었다. 그때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그 집의 아버지 되는 사람은 정말 &#8216;무례한&#8217;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고</span>, 그때 사실 &#8216;아버지 없는 설움&#8217; 을 처음 느꼈다. 여자 본인은 그 아버지 보다는 조금 나은 편이었지만 역시 &#8216;<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본인의 사람됨 이전에 집안</span>&#8216; 이라는 생각은 마찬가지였다. 나혜성씨의 얘기가, 나중에 그들이 바라던 대로 &#8216;근사한 결혼&#8217;을 했다고 했다. 이렇게 알게 된 것도 조그만 우연이었다.</p>
<p> 이렇게 알고 지내던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고석태씨 부부가 겨울이 지나고 &#8216;갑자기&#8217; 없어졌다</span>. 사실, 아직도 어떻게 없어졌는지 그 자세한 과정은 우리부부 모두 기억을 할 수가 없지만, 그들은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간 것이다. 생각에 <em>OSU</em>에서 별로 좋은 전망을 기대 못해서 그랬을 것이다. 대부분 학교를 옮기는 case는 이렇게 더 좋은 조건을 찾아 떠나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서로 인사도 못하고 헤어진 것이고, 또한 확실히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나중에 듣기에 <em>Oregon State</em>로 갔다는 소문도 듣긴 했지만 확실치 않다. 그것이 전부다. 그래서 더 궁금한 마음이 이렇게 오랫동안 남아 있는 것이다. 나혜성씨가 이대출신이라 연고를 통하면 알 수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역시 거대한 세월의 바퀴에 치어서 할 수가 없었다. 이들은 어떤 모습으로 지금 살고 있을까?</p>
<p style="text-align: center;"><iframe loading="lazy" title="YouTube video player" src="https://www.youtube.com/embed/ZheAS0bSZxw" width="540" height="308" frameborder="0" allowfullscreen="allowfullscreen"><span data-mce-type="bookmark" style="display: inline-block; width: 0px; overflow: hidden; line-height: 0;" class="mce_SELRES_start">﻿</span></iframe> </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em>Longer</em> &#8211; Dan Fogelberg, 1980</strong><br />
그 당시 추억의 oldie, <strong>사랑이 전부였던 시절</strong>..</span></p>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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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dream dream</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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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Ken]]></dc:creator>
		<pubDate>Wed, 24 Aug 2011 17:35:39 +0000</pubDate>
				<category><![CDATA[Daybook]]></category>
		<category><![CDATA[Memoir]]></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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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  Dream Dream &#8211; Everly Brothers &#8211; 1960 반가운 꿈, 어제 밤에는 오랜 만에 조금은 뚜렷한 꿈에서 깨어났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꿈을 &#8216;즐기기&#8217; 시작했다. 그전에도 가끔 &#8216;좋은 꿈&#8217;은 다시 꾸고 싶기도 했지만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하지는 않고 살았다. 하지만 꿈이란 것, 지금은 과학적인 것만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99.9% 예상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렇게 &#8216;엉뚱하고, 말도 [&#8230;]]]></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iframe loading="lazy" src="https://www.youtube-nocookie.com/embed/lTYe9eDqxe8?rel=0&amp;showinfo=0" width="650" height="384" frameborder="0" allowfullscreen="allowfullscreen"></iframe> <br />
<em>Dream Dream</em> &#8211; Everly Brothers &#8211; 1960</p>
<p><span style="font-size: 14pt;">반가운 꿈, 어제 밤에는 오랜 만에</span> 조금은 뚜렷한 꿈에서 깨어났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꿈을 &#8216;즐기기&#8217; 시작했다. 그전에도 가끔 &#8216;좋은 꿈&#8217;은 다시 꾸고 싶기도 했지만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하지는 않고 살았다. 하지만 꿈이란 것, 지금은 과학적인 것만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99.9% 예상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렇게 &#8216;엉뚱하고, 말도 안 되고, 엉터리&#8217; 같은 주제의 꿈을 예상할 수 있단 말인가?</p>
<p>정말 오래 된 것이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는 classic한 것들도 몇 가지가 있고, 나는 그것을 계속 소중하게 기억하며 살고 있다. 대부분 &#8216;좋은 꿈&#8217; 에 속하는 것들이지만, 어떤 것은 정말 &#8216;이상한&#8217; 것도 있다. 남들도 그렇겠지만, 좋은 꿈은 대부분 깨고 나면 너무나 깬 것이 아쉬워서 섭섭하고, 나쁜 꿈은 반대로,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되어서 반갑다. 이렇게 꿈도 참 공평한 것이다.</p>
<p>한창 자랄 적에는 높은 곳에서 &#8216;떨어지는&#8217; 꿈을 많이 꾸었는데, 그것은 키가 자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들어서 좋아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나의 키에 별로 도움이 되지를 않았다. 물론 떨어지는 그 자체는 대부분 &#8216;날라서 사뿐하게&#8217; 떨어지는 것들이었다. 어떤 것은 아직도 생생한 상상할 수 없이 색깔이 &#8216;진했던&#8217; 그런 &#8216;초원과 하늘&#8217; 을 본 것인데 어찌나 그 색깔들이 그렇게 &#8216;찐~&#8217; 하던지.. 지금도 머리에 남아서 다시 한번 보고 싶은 것 중에 하나가 되었다.</p>
<p> 공상과학 만화, 특히 어릴 적에 완전히 심취했던 &#8216;<strong>라이파이</strong>, &#8216;<strong>철인 28호</strong>&#8216;, <strong>왕현</strong>의 &#8216;<strong>저 별을 쏘라</strong>&#8216; 등의 만화를 볼 당시의 꿈도 기억에 남는다. 그 중에 제일 재미있던 것은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8216;잠자리 채&#8217; 로 &#8216;잠자리 비행기&#8217;를 잡던 꿈</span>이었다. 그러니까 &#8216;방충망&#8217;으로 &#8216;헬리콥터&#8217;를 잡아 채는 꿈이었다. 그 당시 제일 신기하게 느껴졌던 것이 &#8216;잠자리 비행기&#8217; 였는데, 그것을 잠자리채로 결국은 하나를 &#8216;잡았다&#8217;. 잠자리채 속을 가까이서 보니 그것은 아주 &#8216;작은&#8217; 장난감 같은 것이었고 손으로 꺼내려고 하는 순간에 잠에서 깨었다. 그때 처음, 이런 멋진 꿈에서 잠을 깨는 것은 너무나 아쉬운 것을 느꼈다. 이런 것이 &#8216;좋은 꿈&#8217; 중에 하나였다.</p>
<p> <span style="font-size: 14pt;">청춘의 절정기에는</span> &#8216;성장, 남성 male&#8217; 호르몬(hormone)의 영향으로 많이 &#8216;이성을 그리는 환상&#8217;에 가까운 꿈을 많이 꾸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에로틱 fantasy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남자형제가 없던 나는 이런 것을 그저 속으로만 넣어두고 부끄럽게 생각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이제 생각하면 &#8216;건강&#8217;한 방법은 아니었다. 가능한 한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남자 친구들과도 그런 경험을 나누었던 것이 더 좋았을 것</span>이다. 왜냐하면 가끔 내가 &#8216;변태&#8217;가 아닐까 하는&#8217;틀린&#8217; 걱정도 했기 때문이다.</p>
<p>10대에서 20대로 인생의 초기에 해당하던 그 시기다. 그때의 &#8216;최고&#8217;의 꿈은 역시 &#8216;지적이고, 멋진 여자&#8217;가 나에게 은근한 미소를 보내준 그런 류인데, 불행하게도 바로 그 기쁨의 &#8216;순간&#8217;에 깨곤 하였다. 좋은 꿈은 항상 그렇게 깨지곤 했다. 이런 꿈은 결혼 훨씬 후에도 가끔 꾸었고, 결혼 전과 달리 깨고 나면 약간의 &#8216;죄의식&#8217;을 느끼게 되어서 전과같이 기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꿈 자체는 정말 신선하고, 가벼운 흥분을 주는 그런 것이었다.</p>
<p> 20대에 나를 괴롭힌 꿈은 다른 것이 아닌 &#8216;<strong>가위 눌림</strong>&#8216; 이었다. 이것은 실제적으로 꿈과는 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꿈을 꾸면서 이것으로 이어지곤 했다. 그 당시 시카고에서 알고 지내던 어떤 형 뻘이 되는 일본사람 (<strong>히다카 켄조</strong> 상)이 듣더니 자기도 똑같은 경험을 한다고 해서 얼마나 &#8216;안심&#8217;을 했는지 모른다. 역시 &#8216;고민&#8217;은 나누어야 가벼워 지는가.. 이 꿈은 무엇인가 악몽에 시달리다가, 목이 조이는 느낌이 들다가 나중에는 몸 전체가 &#8216;천천히, 완전히&#8217; 굳어져 가는 것이다. 이것이 이미 시작되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소용이 없었다. 그 일본인 켄조 형은 이럴 때, 절대적으로 남에게 알리거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깨어나야 한다고 경고를 하였다.</p>
<p>이런 꿈은 정말 괴로운 것이었지만 나 혼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부터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해서, 30대에 들어오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은 &#8216;의학적인 현상&#8217;에 불과하고, 몸이 허약할 때 생긴다고 했지만, 나는 전적으로 다 믿지는 않는다. 과학적인 것 이외에 어떤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꿈이 시작되기 얼마 전에 <strong><em>The Exorcist</em></strong>란 무서운 영화를 보고 일주일 동안 밤에 불을 켠 채로 잔 괴로운 경험이 있어서 혹시 그것도 한 몫을 했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p>
<p> 나에게는 특기할 만한 몇 가지 &#8216;악몽&#8217;이 있다. 지난 10년 동안 가끔 괴롭힌 것은 갑자기 머리카락이 모두 벗겨지는,그러니까 하루 아침에 &#8216;대머리&#8217;가 되는 꿈이었다. 물론 50대에 들어오면서 빠른 속도로 빠지는 머리카락에 겉으로는 나타내고 싶지 않지만 암암리에 신경이 쓰인 것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완전한 대머리가 된 꿈은 꿈 속에서도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깨고 나면 꼭 식은 땀을 흘리곤 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대머리가 되지 않고, 점차 &#8216;서서히&#8217; 빠진다는 사실만은 이런 꿈에서 깨어나면 나를 조금 위로하곤 하였다.</p>
<p>하지만 진짜 악몽은 이것이 아니다. 이 악몽은 이제 나의 &#8216;친구&#8217;가 된 정도로 역사와 &#8216;실감&#8217;을 자랑한다. 이것은 학교에 대한 것, 그것도 &#8216;공부, 성적&#8217;에 관한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서 아마도 대부분 사람들에게 학교 &#8216;공부,성적&#8217;이 얼마나 필요이상의 스트레스를 주었는지를 알게 하는 것이다. 특히 이것은 지난 20년 동안 거의 정기적으로 겪는 악몽인데, 악몽의 특징인 &#8220;깨어 났을 때의 안도감&#8221; 은 이것이 최고다. 1980년 부터 <em>PBS TV</em>에서 재방영이 되었던 <strong><em>The Paper Chase</em></strong>..란 TV시리즈 (드라마)가 있었다. 이것은 원래 1970년대 초에 소설로 나왔고, 곧 영화화가 되고, 1978년부터 <em>CBS TV</em>가 드라마화 한 것인데 한국에서도 &lt;<strong>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strong>&gt;이란 제목으로 소개가 된 것이다. 이제는 추억의 &#8216;고전&#8217;이 되었고, 특히 1980년, 신혼 초에 콜럼버스(오하이오 주)의 학교근처 1 bedroom <em>Riverview Apartment</em>에서 연숙과 같이 일요일 아침마다 침대에 누워서 빠짐없이 <em>PBS TV</em>로 이것을 보던 것도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p>
<figure id="attachment_2483" aria-describedby="caption-attachment-2483" style="width: 147px" class="wp-caption alignleft"><a href="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1/08/paper-chase-1.jpg"><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size-full wp-image-2483" title="paper-chase-1"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1/08/paper-chase-1.jpg" alt="Prof. Kingsfield &amp; Hart in The Paper Chase, 1978" width="147" height="172" /></a><figcaption id="caption-attachment-2483" class="wp-caption-text">Prof. <em>Kingsfield</em> &amp; <em>Hart</em> in <em>The Paper Chase</em>, 1978</figcaption></figure>
<p>이 드라마 첫 회의 에피소드와 내가 겪었던 &#8216;진짜&#8217; 경험이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큰 차이가 있지만 &#8216;본질적&#8217;인 것은 거의 같다고 볼 수 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em>Hart</em>)이 하버드 법대(<em>Harvard Law School</em>)에 &#8216;간신히&#8217; 들어가서 그 첫 강의에서 겪는 &#8216;고통&#8217;은 가히 dramatic한 것이다. 호랑이 같은, 킹스필드 교수(<em>Prof. Kingsfield</em>)가 모든 것이 준비가 덜 된 신입생(하트, <em>Hart</em>)을 심리적으로 거의 &#8216;죽이는&#8217; 것이다. 급기야 주인공의 꿈에서 교수가 나타나 &#8216;진짜로 무덤 속으로 넣는&#8217; 것 까지 경험하는 것인데, 그 정도면 시험과 그에 따른 성적(표)으로 인한 학교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가히 극치의 수준이 아닐까? 문제는 내가 그와 거의 비슷한 꿈을 &#8216;아직까지&#8217; 거의 정기적으로 지난 30년 이상 꾼다는 사실이다. 예전에는 정말 괴로웠는데, 지금은 사실 &#8216;완전히&#8217; 익숙해져서 견딜 만 하고, 심지어는 꿈에서 깰 당시의 &#8216;안도감과 기쁨&#8217; 때문에 기다릴 때도 있다. 아~ 내가 지금 학교를 안 가도 된다는 그 사실 하나로 그렇게 기쁘고, 무슨 구원을 받은 것 같은 기쁨까지 느끼는 것이다.</p>
<p>이것은 나만 가지고 있는 특별한 꿈일 것이라, 체념하면서 오래 살았는데 우연하게도, 가깝게 지내던 서울고, 서강대 출신 최동환 씨가 나와 비슷한 꿈을 꾼다고 들은 후부터 조금은 안심까지 하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나의 꿈은 위에 말한 드라마와는 다르게 특별한 교수와의 문제에 대한 것은 아니고, 내가 과목을 듣는데 전혀 공부와 시험준비가 안 되거나, 덜 되었을 때의 그 불안과 고통에 대한 것이다. 연세대 시절에 그런 경험을 몇 번이나 했고, 그 후 미국에서 다니던 학교에서 <strong>거의 주기적</strong>으로 그런 &#8216;실화&#8217;를 겪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잠재의식에 완전히 뿌리를 잡은 것이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잠자고 있는 이 괴로운 잠재의식을 어떻게 없애 버릴 것인가? 나는 모른다.</p>
<p>겉으로만 돌면서 나를 피해가던 종교, 신앙에 기대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그래서 초자연적임을 이제는 믿게 되었고, 그 중에는 꿈도 포함이 되었다. 인생, 역사, 자연, 거기에다 꿈 등이 전혀 &#8216;우연&#8217;일 수도 있지만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요새는 꿈을 사실 기다리며 즐긴다. 또 하나, 덤으로 나와 같이 나란히 살아가는 나의 인생과 &#8216;역사&#8217;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립지만 절대로 볼 수 없는 사람들을 꿈에서 기다린다. 그 중에는 나를 거의 잊고 사는 나의 사랑하는 누님과, 천국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나는 오늘, 내일 의 꿈속에서 다시 기다린다.</p>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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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Ohio State, First Years (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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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Ken]]></dc:creator>
		<pubDate>Mon, 20 Jun 2011 18:55:11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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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친구]]></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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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고윤석씨는 비록 전기과의 undergraduate에서 공부를 하고 있긴 했지만 사실 그는 나이 때문에 그의 classmate들 보다는 우리들과 더 잘 어울리고 학교의 규칙에 어긋나지만 우리들과 같이 대학원생의 office를 쓰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활발하고 서글서글한 성격의 호남(好男) 이었다. 하지만 공부를 하는 데는 남모르게 힘들어했다. 우선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관계로 상대적으로 수학실력이 같은 학년의 한국학생들보다 떨어졌고, 그 다음은 전공에 [&#8230;]]]></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figure id="attachment_2196" aria-describedby="caption-attachment-2196" style="width: 292px" class="wp-caption alignleft"><a href="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1/06/Scan10085-1-e1308595584529.jpg"><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size-medium wp-image-2196" title="Scan10085-1"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1/06/Scan10085-1-292x300.jpg" alt="고윤석씨 부부, 1979" width="292" height="300" /></a><figcaption id="caption-attachment-2196" class="wp-caption-text">고윤석씨 부부, 1979</figcaption></figure>
<p><span style="font-size: 14pt;">고윤석씨는 비록 전기과의</span> undergraduate에서 공부를 하고 있긴 했지만 사실 그는 나이 때문에 그의 classmate들 보다는 우리들과 더 잘 어울리고 학교의 규칙에 어긋나지만 우리들과 같이 대학원생의 office를 쓰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활발하고 서글서글한 성격의 호남(好男)</span> 이었다. 하지만 공부를 하는 데는 남모르게 힘들어했다. 우선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관계로 상대적으로 수학실력이 같은 학년의 한국학생들보다 떨어졌고, 그 다음은 전공에 대한 정열이 그렇게 많지를 않아 보였다. 그러니까 그 당시 전기과의 직업전망 때문에 이 과를 선택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가끔 유근호씨에게 &#8216;전기&#8217;에 대한 정열이 없다고 핀잔을 주곤 했다. 나는 속으로 조금 우스웠다. 내가 보기에는 정 반대로 보였는데..</p>
<p>고윤석씨의 부인은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연대 사학과 출신</span>의 연상이었는데 이것도 역시 고윤석씨의 활발한 성격으로 열렬한 구애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기억에, 유학생들의 파티에 가서 보자마자 춤추기를 청하고, 거의 일방적으로 구애를 한 끝에 결혼을 하였다니.. 나는 조금 상상하기가 힘들지만, 영화 같은 이야기였다. 그리고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그녀는 <em>OSU Admissions Office</em>에서 일을 하고 있는 관계로</span> 누가 다음학기에 이 학교로 오느냐 하는 것 뿐만 아니고 대부분 유학생들의 상세한 학력이나 이력 같은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부부와 나는 가깝게 지낸 편이었지만 전혀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나, 특히 나의 성격 때문이라고 생각해서</span> 아직도 고윤석씨에게 미안한 마음이 많다. 언젠가 편할 때 정식으로 사과를 하려 했지만 그것도 못하고 헤어지고 말았다.</p>
<figure id="attachment_2199" aria-describedby="caption-attachment-2199" style="width: 300px" class="wp-caption alignright"><a href="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1/06/Scan10145-1-e1308595823479.jpg"><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size-medium wp-image-2199" title="Scan10145-1"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1/06/Scan10145-1-300x242.jpg" alt="유근호 형과 박호군씨, 1978" width="300" height="242" /></a><figcaption id="caption-attachment-2199" class="wp-caption-text">유근호 형과 박호군씨, 1978</figcaption></figure>
<p>그리고 생각나는 사람은, 비록 나와 가깝게 지내지는 못했지만 기억에 나는 사람이다.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화학과의 <strong>박호군</strong>씨</span>.. 고등학교는 모르겠지만 서울대 출신으로, 거의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영화배우 같은 느낌을 주는 호남형</span>이고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고.. 그러니까 거의 &#8216;이상적인 남자&#8217; 의 표본이라고나 할까? 이분은 내가 입학하자마자 부터 유근호씨 덕분에 자주 보게 되었다. 내가 유근호씨와 가까이 지낸 때문에 사진에도 남아있다. 기억에 유근호씨가 참 이 분을 좋아했었는데 지금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아마도 둘 다 천주교 신자였던 것 같았다. 그래서 더 가까이 지냈는지도.. 그리고 이분의 부인이 남편과 같은 화학과에서 함께 공부를 하던 유학생이었고, 남편은 유기화학, 아내는 무기화학을 한다고 해서 아주 인상적이었다. 얼마 전에 아주 우연히 인터넷 으로 한국천주교 주교회 발행 월간 <strong>경향잡지</strong>를 보다가 어떤 여자분이 <a href="http://zine.cbck.or.kr/gallery/view.asp?seq=158171&amp;path=110615162708&amp;page=56&amp;flip=0">화학에 대한 수필을 쓴 것</a>을 보았는데 저자의 이름이 조금 귀에 익어서.. 약력을 보니 역시 <em>Ohio State</em> 출신이었고, 이분이 바로 박호군씨의 부인인 황영애 씨 (상명여대교수)였던 것을 알게 되었다.</p>
<p><span style="font-size: 14pt;">나의 첫 학기, <em>Winter quarter</em>는</span> 나의 &#8216;기본실력&#8217;을 테스트하는 좋은 기회였다. 내가 이곳에서 잘 견딜 수 있는가를 시험할 수 있는 때였다. 내가 좋아하던 나의 passion 이던 control system의 여러 과목을 &#8216;대거&#8217; 신청, 수강을 하게 되었다. 이것만은 내가 자신을 하던 것들이라 아주 &#8216;과중&#8217;하게 신청을 하고 단단히 별렀는데,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과정과 결과가 아주 &#8216;참담&#8217;하였다</span>. 수강과목이 너무나 많았고, 대부분 &#8216;어려운&#8217; 것들이어서 겨울을 거의 office에서 먹고 자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한 과목은 결국 withdraw를 하게 되었다. 제일 공을 많이 들인 과목이 digital control system이었는데, 교수가 아주 어려운 사람, <em>Dr. Fenton</em>이어서 사실 A학점 받는 것은 미리 포기할 정도였다. 이것 때문에 나는 사실 classical <em>control system</em>에서 많이 열기가 식었지만, 뜻하지 않게 친하게 된 digital system쪽으로 구미가 당기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p>
<p>이 겨울학기는 유난히도 힘이 들었는데, 공부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나에게는 작은 &#8216;교통&#8217;사고가 있었다. 차 사고가 아니고, 내가 타고 다니던 bike(자전거)사고였다. 이것은 시카고 있을 때부터 타던 그런대로 편리한 12 speed, disc brake이 있었던 것이어서 이렇게 큰 캠퍼스에서는 정말 안성맞춤인 것이었다. 그런데 추운 어느 날 캄캄한 밤에 집으로 돌아갈 때, 학교 내의 어떤 길에서 신나게 달리던 중, 바퀴 밑에 무언가 걸리고, 나는 공중으로 떠서 완전히 얼굴로 아스팔트 도로에 떨어지게 되었다. 너무나 순간적이어서 손을 쓸 수가 없어서 얼굴에 심한 마찰,타박상을 입게 되었다. 정신은 말짱해서 다시 office로 돌아와서 얼굴에 흐르는 피를 씻고 보니, 이것이 &#8216;장난&#8217;이 아니었다. 그 때까지 office에 남아서 공부를 하던 고윤석씨와 이규방씨가 보고 놀라서 학교병원에 전화를 하고 구급차까지 와서 나는 졸지에 응급실로 들어갔는데.. 여자 의사가 다짜고짜로, &#8220;<em>Who is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em>&#8220;하며 물었다. 아마도 나의 머리를 의심한 듯 했다. 그래도 정신은 말짱해서, &#8220;<em>Jimmy Carter</em>&#8220;라고 대답을 하고 얼굴에 상처를 소독을 한 후 나를 내보냈다. 그 상처는 거의 한 달이 갔는데, 붕대를 얼굴에 처매고 매일 학교 식당을 드나드는 것도 웃기고,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그것을 계기로 한 과목을 withdraw까지 하게 된 것</span>이었다.</p>
<p>그 해 봄학기 때는 조금 모든 것이 안정이 되어서 성적이 오르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 <em>Dr. McGhee</em>의 <em>Automata Theory</em>란 과목에서는 100점을 받게 되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Graduate Research Associate (RA) 자리를 소개받게 되기도 했다. 그 자리는 인도 출신의 digital system교수인 <em>Dr. Jagadeesh</em> 가 일하던 <em>OSU</em> 약학대학의 연구실이었다. 그러니까 전기과와 약학대학간의 공동 연구실인 셈인데 그곳엘 가니 전에 말한 김미영씨와 최희경씨가 있었다. 나는 사실 이 연구실에서 석사학위 논문을 쓰게 되는데, 그것이 1979년 여름까지 계속 되었다. <strong>최희경</strong>씨는 경기여고, 서울대 약학과 출신의 전형적인 수재 형이고, 그녀의 남편도 경기고, 서울대 출신의 의사로 조금 있으면 OSU로 올 예정인, 부부 둘이 소위 말하는 KS 마크 부부였다. <strong>김미영</strong>씨는 최희경씨의 선배였는데 이분도 은근히 공부도 잘하고 노는 것도 잘하는 그런 재주 있는 분이었다. 그 당시는 처녀였지만 1년 뒤에 수학과의 <strong>최봉대</strong>씨 와 결혼에 골인을 하게 된다.</p>
<p>가을학기가 되면서 비교적 가족적인 분위기의 우리 전기과에도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조금 찬 공기가 느껴지게</span> 되었다. 새로운 유학생들이 도착한 것이다. 경복고, 서울대 출신의 민위식씨, 용산고, 서울대 출신의 박인규씨..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완전히 분위기가 이상하게 변해버렸다</span>. 이들은 그런대로 reasonable한 사람들임에는 틀림이 없었지만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절대로 <em>chemistry</em>는 맞지를 않았다</span>. 이것은 참 아까운 노릇이었지만 별 수가 없었다.</p>
<table style="margin-right: 1.4em;" align="left">
<tbody>
<tr>
<td style="border: none;"><iframe loading="lazy" src="//www.youtube.com/embed/yBOQgL731Ac?rel=0&amp;showinfo=0" width="320" height="180" frameborder="0" allowfullscreen="allowfullscreen"></iframe></td>
</tr>
<tr>
<td style="text-align: center; border: none;">
<p><strong><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em>Just When I Needed You Most</em></span><br />
Randy VanWarmer</strong><br />
1979년 OSU campus를 생각케 해 주는 classic</p>
</td>
</tr>
</tbody>
</table>
<p>가을학기가 지나면서 나는 완전히 <em>Dr. Jagadeesh</em> 밑으로(RA) 들어가서 그의 약학대 연구실에서 digital speed control of DC motor 란 주제로 논문을 쓰는 준비를 하게 되었고 실제로 전에 이용한씨가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 만들어 놓았던 centrifuge control system을 내가 물려받아 거기에 쓰일 microprocessor-based(<em>Intel-8085</em>) motor speed control system을 design하게 되었다. 이론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이 조화를 잘 이루어야 하는 과제로 논문을 쓰게 되어서 큰 부담이 되었다. 내가 일하던 곳은 약학대학이라는 인상보다 computer lab같은 인상을 줄 정도로 최첨단의 컴퓨터 시설이 되어있었는데, 그 제일 큰 이유는 나의 지도교수의 약대 상대편 교수가 완전히 컴퓨터 &#8216;광&#8217;에 속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는 대부분 mini computer가 단과대학 연구실의 주 기종이었는데 실제로 전기과나 <em>computer science</em> 쪽 보다 더 그런 것들이 많았다. 그 교수는 <em>Dr. Olson</em>이라는 사람인데 어디에서 돈이 그렇게 오는지 계속 새 것만 나오면 사곤 했다. 하기야 이것 때문에 그곳에서 일을 하면서 참 덕을 많이 보긴 했다.</p>
<p>온통 낮과 밤을 그곳에서 보내게 되었는데, 이때 나는 많이 몸을 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론적인 것과 더불어 실제적인 것을 이때 많이 배우게 되어서 나중에 직장에서 일할 때 두고두고 이것들이 도움이 되었다. 나와는 대조적으로 같이 공부하던 이재현씨는 거의 &#8216;이론적&#8217;인 것에 관해서 논문을 쓰게 되었는데, 아마도 computer hardware쪽에 큰 흥미가 없어서 그런 듯 싶었다. 이런 approach는 나중에 대학에 남게 되면 좋겠지만 실제로 사회에 나가서 일을 할 때 제한을 많이 느끼게 된다. Digital hardware와 일을 하는 것은 밤을 새우고도 결과가 별로 없을 수 있는 고된 일이고, 그것에 맞는 software가 성공을 하면 그것의 &#8216;임자&#8217;가 대부분 &#8216;칭찬&#8217;을 받곤 했다. 이런 것들을 이때 뼈저리게 몸으로 경험을 해서 나중에 나는 완전히(more) software (than hardware) 쪽으로 방향을 잡게 되고, 나의 lifelong career가 되었다.</p>
<figure id="attachment_2201" aria-describedby="caption-attachment-2201" style="width: 278px" class="wp-caption alignleft"><a href="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1/06/Scan10538-1-e1308595990537.jpg"><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size-medium wp-image-2201" title="Scan10538-1" src="http://serony.com/ken/wp-content/uploads/2011/06/Scan10538-1-278x300.jpg" alt="김정국 씨, 1979" width="278" height="300" /></a><figcaption id="caption-attachment-2201" class="wp-caption-text">Computer Science, 김정국 씨, 1979</figcaption></figure>
<p>논문의 결과가 서서히 윤곽을 들어낼 쯤, 1979년 <em>Spring quarter</em>쯤에는 <em>computer science</em>쪽으로 새로운 유학생이 도착하였다. 이름은 <strong>김정국</strong>씨&#8230; 나와 비슷한 나이고 유근호씨와 서울공대 전기과에서 같이 공부를 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서울공대 전기과 출신인 것이다. 청주고 출신이었으니 얼마나 그때 공부를 잘 했던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오자마자 우리 그룹과 잘 어울리며 가끔 모여서 술을 마시기도 했다. 김정국씨는 비록 전기과 출신이었지만 졸업 후 은행에서 이미 전산(computer)쪽으로 경험을 쌓은 경력자였다. 그래서 완전히 <em>computer science</em>쪽으로 공부를 하려고 유학을 온 것이고 그것도 은행에서 &#8216;보내준&#8217; case여서 우리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대강 어떤 일을 했었는지는 나의 매부가 그 쪽에서 일을 해서 짐작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김정국씨는 도착 후 일년 뒤쯤에 부인도 뒤따라서 오게 되었고, 나도 그 당시 결혼을 해서 두 couple이 만나서 식사도 했는데, 섭섭하게도 곧 바로 <em>Georgia Tech</em>으로 transfer를 하고 말았다. 우리는 사실 비슷한 나이의 부부여서 기대를 많이 했는데 참 섭섭한 노릇이었다. 하지만 인연이 있었는지 우리는 1989년에 아틀란타에서 정말 오랜만의 해후를 하게 되었다. 서로 사는 것이 바쁘다 보니 만날 기회는 많지 않았지만 김정국씨 부인은 다른 인연으로 아틀란타 한국학교 선생님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우리 부부도 그곳에서 가르쳤기 때문에 한참 연락이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세월의 바퀴 속에서 나중에는 거의 잊고 살 게 되었다. 김정국씨는 안타깝게도 몇 년 전에 비교적 일찍 암으로 운명을 하고 말았다. 비록 가깝게는 못 지냈어도 항상 마음 속에 있었던 김형..이었다. 세월로 보아서도 참 오래 된 &#8216;지인(知人)&#8217; 이었고, 무엇 보다도 &#8220;친하게 지내고 싶었던&#8221; 그런 사람이었다.</p>
<p>이렇게 해서 1979년 여름학기가 지나가면서 <em>Master&#8217;s degree</em> 과정이 다 끝이 나고 나는 곧 귀국을 하게 되었다. 너무나 몸과 마음이 피곤한 상태여서 어딘가 좀 쉴 곳이 그리웠다. 물론 다시 올 것을 예정하고 돌아갔지만 나이 때문에 결혼을 피할 수가 없어서 거의 6개월을 서울에서 보내게 되었다. 다시 <em>Ohio State</em>로 돌아와서 계속 공부를 하게 되지만 전의 2년과는 완전히 다른 마음과 환경이고 주변의 사람들도 거의 &#8216;완전히&#8217; 바뀌게 된다. 특히 1980년 유학자유화가 이루어 지면서 &#8216;대거&#8217;의 유학생들이 이곳으로 &#8216;몰려&#8217;오게 돼서 더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때가 더 좋으냐고 말할 수 없지만, 아무래도 good ole days를 그리게 되고, 마음이 편할 정도의 학생 수가 있었던 1980년 이전이 더 그리워 짐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p>
<p>(끝)</p>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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