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가 어때서..

¶  내 나이가 어때서..

조금은 ‘늙은이의 하소연, 푸념’같이 들리는 이 말은 근래 대한민국에서 나온 유행가의 제목이다. 물론 나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노래였지만 요새  갑작스레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다가온 것 뿐만 아니라 이제는 ‘달달 노래 연습’을 할 처지까지 되었다. 또 그 season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라는 긴 이름, 아마도 요새는 ‘연총’이라고 부르는 이것이 12월 7일에 열리는데 이때 각 쁘레시디움 별 talent show(장기자랑)에서 우리와 다른 team이 합작으로 이 곡을 ‘합창’으로 하게 되었다.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의 원래 의도는 member reunion인데 이제는 완전히 모여 노는 것, talent show로 인식이 되어가는 모양이다. 올해로 나는 4년째 이것을 맞게 되었는데 해마다 조금씩 무언가 달랐다. 그 중에서 지난 2년은 추억으로 남겨도 될 것 같은 기분이 좋은 것이었다. 그야말로 reunion의 정신을 100% 살렸기 때문이다. 간혹 얼굴만 보던, 아니 전혀 생소한 단원들을 ‘그런대로’ 알게 된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마도 ‘연총의 정신’이 아니었을까? 특히 작년에는 생소하기만 하던 ‘희귀동물’, 남성단원들이 ‘노래 연습’차 같은 방에 모일 기회도 만들어 주었기에 더욱 기억이 새롭다.

그에 비해서 올해는 조금 분위기가 을씨년스럽게 느껴졌지만 이렇게 다른 방식으로 두 쁘레시디움을 만나게 하는 계기가 되어서 멀리서만 보던 ‘모르는 단원’들과 가까이 할 기회가 되었다. 최 장년 축에 속하는 두 그룹이 모여서 이 ‘내 나이가 어때서’를 부르기로 한 것인데.. 조금은 self-pity 하는 기분이 들어서 나는 이 노래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중론이 모두 좋아한다고 하니 어찌할 수가 없다. 우리가 택한 version은 오승근이라는 ‘장년 세대’의 것인데.. 알고 보니 이 오승근이라는 사람은 우리세대에 그러니까 70/80에 속한 그야말로 senior그룹의 오래된 가수였다.

더욱 알고 보니.. 소싯적에 내가 좋아하던 Two Aces, ‘금과 은‘ Duet 중의 한 사람이 아닌가? 아직도 기억한다.. Two Aces시절 그들이 TV show에서 부른 Everly BrothersDream Dream (All I have to do is). 나중에 바뀐 이름인 ‘금과 은’ 처럼 너무나 청순한 목소리로 잘 불렀었다. 그 듀엣, 둘중의 하나가 ‘오승근’이었단 말인가? 너무도 잊고 살았다. 더욱 놀란 것이 그가 ‘트롯트‘ style의 ‘전통가요’를 부른다고? 믿어지질 않는다. 너무나 큰 변신으로 느껴질 정도로 세상이 그렇게 변했구나. 이래서 Two Aces의 추억을 더듬고 그의 ‘내 나이가 어때서’를 부르게 되니.. 감회가 깊다. 그가 이 노래를 하는 모습을 보니 ‘만든 모습’인지 ‘자연스런 모습’인지 혼동이 올 정도로 ‘젊게’ 보인다. 하기야 요새 나이든 가수들을 보면 이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니까..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다.

며칠 전, 우리 두 ‘장년층’ 쁘레시디움이 처음 모여서 연습을 하였는데 ‘가라오케’ 반주의 막강한 보호와 도움으로 그런대로 무난히 소화를 하게 되었다. 문제는 높은 음정의 이 곡을 과연 몇 명이나 smooth하게 넘길 것인가와, 비교적 짧은 이 곡을 어떻게 짧지도 않고 지루하지도 않게 re-arrange해서 무대에 설 것인가 하는 것인데.. 글쎄.. 나는 전혀 이런 것에는 문외한이라서…

 

 
Karaoke – 내 나이가 어때서 – 오승근 version

 

 
Karaoke – 내 나이가 어때서ballad version

 

¶  Very Early, November ‘Polar Vortexpolar-vortex-1Polar vortex.. 근래 특히 겨울에 많이도 듣던 말이다. 비교적 근래에 쓰이는 ‘기상용어’ 라고나 할까, 아니면 mass media의 유행어라고나 할까? 작년에 특히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유난히 추웠을 적의 기억이다. Wikipedia에 의하면 북극과 남극에 ‘상주’하는 지독히 찬 공기덩어리가 있는데 이것의 이름이 바로 Polar Vortex라고 한다. 계절에 따라 커지고(겨울) 줄어들고(여름) 하는데 가끔 이것이 ‘암세포’처럼 커져서 퍼지면 지금처럼 되는 모양이다. 북극으로부터  몰아치는  ‘지독히 추운 공기의 바람’ 이 연상이 되고 한때는 Arctic Blast, Alberta Clipper란 말도 들었는데 이런 현상이 이제 유행이 아닌가? 좌우지간 이런 말들은 한 겨울에나 듣던 말인데.. 올해는 thanksgiving holiday도 2주나 남은 한창 가을에 이런 말을 듣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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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강추위로 고드름이…

한반도에는 아마도 ‘시베리아의 강풍’이라고 연상하면 알맞은 어감이라고 할까? 혹시 이것도 global warming의 한 징조일까… 그래서 모든 것이 extreme쪽을 치닫는 것인가. 지금 현재 Canada 와 인접한 upper Midwest 쪽에는 거의 한겨울 같은 눈이 쏟아지고 기온도 급강하.. 며칠 후에는 낮의 최고가 freezing point까지 내려 간다고 한다. 문제는 이것이 우리가 사는 ‘따뜻한 Southeast’ 쪽으로 밀려 왔다는 사실이다. 오늘 아침에는 드디어 hard freeze가 되었고, 올 들어 처음으로 ‘고드름’을 목격하게 되었다.일기예보는 우리가 사는 지역도 이번 주말이 지나면 최저 18도까지 떨어진다고 한다. 이런 기온은 1월 말 정도에나 ‘가끔’ 겪는 것인데..

더욱 ‘괴상한 것’은 보통 같으면 blip같은 ‘짧은’ 현상이 이번에는 거의 일주일 이상 계속된다고 하니.. 어찌된 일인가? 평년의 11월 이맘때면 그야말로 ‘찬란한 황금색의 낙엽’을 자랑하는 비교적 따뜻한 모습이었는데, 올해는 어떻게 된 일인가? 한창 가을색을 자랑하려던 ‘낙엽’들은 아마도 이번에 모조리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가뜩이나 을씨년스러운 기분이 더욱 춥게만 느껴지고 한참 남은 끝을 못보고 있는 outdoor work들도 더 연기를 해야 하는 것인가.. 하지만 그런대로 문제없는 고물 ‘clunker‘ central heating이 버티고 있으니까.. 큰 걱정은 안 한다. 전혀 plus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런 날씨에는 진하고 뜨거운 black coffee 맛의 ‘정수精髓’를 즐길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  THANKSGIVING BLEND  올해는 비교적 coffee를 많이 마시게 되었다. 한때 물을 많이 마시려고 일부러 줄인 적도 있었지만 나의 lifestyle은 아무래도 plastic water bottle보다는 coffee cup이 더 맞는 것을 느낀다. 특히 오랜 직장생활에서 morning ritual은 구수한 ground coffee의 냄새로 시작된다는 것도 어쩔 수없이 몸에 배인 모양이다. wine의 미묘한 맛의 차이는 잘 몰라도 이제는 coffee의 향과 맛의 차이는 잘 알게 되었다. 건강을 이유로 지나친 coffee를 자제하려는 자책감이 항상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런 정도는 아닌 듯 싶다.

Ah... Starbucks..
Ah… Starbucks..

현재는 주로 새벽과 아침 식사 때, ‘정식, 공개적’으로 마시고 가끔 (요새는 더욱 자주) 늦은 오후에 ‘혼자서’ 마신다. 연숙은 지독하게 caffeine 에 민감해서 점심이 지나서 마시면 잠을 못 자기에 아침식사 때만 나와 같이 마신다. 나는 물론 ‘전혀’ 그런 것이 ‘아직’은 없지만 인생 선배님들은 ‘언젠간’ 나도 그렇게 변할 것이라 경고를 해서 이것도 시간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때까지 즐기는 것이 현명할 듯.. 며칠 전에 작은 딸 ‘나라니’가 집에 들렸을 때 coffee bag을 들고 왔는데 그것이 THANKSGIVING BLEND STARBUCKS  whole bean 커피였다. 이런 때가 나에게는 정말 즐거운 순간이다. Starbucks coffee를 마셔 본지도 꽤 된듯한 기분이라서 그 독특한 맛도 거의 잊어가는 때 이렇게 기회가 온 것이다. 이것을 마셔보니, 그 동안 마시던 것과는 물론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래서 우리는 아무래도 ‘경제적으로’ STARBUCKS class가 되는 것이 불편한 모양이다.

몇 년 전에 새로니 나라니가 번갈아 가면서 STARBUCKS 에서 part-time으로 일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공짜로 주는’ coffee를 ‘무진장’ 즐겼던 경험이 있었는데 그 이후에 그것을 사서 마시기에는 아무래도 그랬다. 그래서 생각이 우리는 경제적으로 STARBUCKS class가 못 되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저 그것을 ‘사 먹는’ 것이 불편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것이 불편하지 않을 정도가 된다면 어떨까.. 글쎄 그래도 불편할 듯 하다.

 

¶  Relevancy of Legion of Mary

Is the Legion of Mary[Legio Mariae] still relevant today?  레지오 마리애 지금도 큰 의미가 있는가? 이런 ‘끔찍한’ 생각이 요사이 들어서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대답은 불행하게도 almost No! 인 듯해서 어깨가 더 쳐지는 듯 느껴진다. 4년여의 ‘Never look back’의 각오로 노력한 경험으로  이런 결론을 내린다는 자체는 가소롭지만 나에게는 정말 심각한 것이다. 아직도 ‘레지오’ 하면, 20세기 초에 머문듯한 ‘구닥다리’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은 왜 그럴까? ‘영웅적’인 레지오 창시자 Frank Duff같은 ‘준 성인’이 다시 필요한 때가 된 것일까? 레지오 마리애가 ‘영적인 군대’이며 군대와 같은 조직을 유지하고 있으면 이런 군대도 ‘현대화’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고대 로마 군단의 조직을 유지하고 그 충성심과 용맹 성을 본 받는다고 하는 것은 분명히 레지오 만의 특징이고 자랑일 수 있지만, 초 현대 세속사회를 살아가는 영혼들에게 그런 것만으로 충분할까? 아마도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레지오 마리애가 교회에 끼친 공헌 중에 제일 큰 것은 아마도 ‘평신도의 활성화’ 가 아닐까? 1960년대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과 완전히 맞아 떨어졌다. 레지오의 위상도 역대 교황들의 ‘묵인과 승인’의 혜택을 충분히 받았고 각 본당에서도 ‘필수적’인 평신도 단체로 대우를 받아서 꾸준히 영향력을 늘려갈 수 있었다. 하지만 거의 신화적인 존재, 창시자 Frank Duff의 퇴진(1980년 11월 7일 선종, 91세) 이후.. 아마도 momentum이 서서히 줄어들고 지금은 거의 정지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떻게 ‘한 사람’의 부재가 이런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가? 아마도 현재 Dublin, Ireland 세계 본부(꼰칠리움)가 제 역할을 다하고 있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mindset가 아직도 20세기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으로 우리 주변의 상황을 보면 크게 다를 것도 없다. 모든 것이 그저 status quo, status quo.. 현상유지에 급급한 모습들. 세상이 급속히 ‘진화’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가만히 있으면, 즉 ‘status quo’ 그것은 다름이 아닌 ‘후퇴‘인 것이다. 큰 의미가 없는 사소한 것들 가지고 모든 ‘바쁘기만 한 단원들’의 귀중한 시간을 허비, 낭비하는 평의회 모임들, 왜 우리들이 레지오 활동을 하는지 그 큰 목적은 완전히 잊은 듯 하고 우선순위에서 제일 밑에나 있을 듯한 것들 가지고 열을 올린다. 이런 것들을 계속 목격하면 이런 생각도 든다. 그런 ‘사소한 규칙을 지키려고 레지오 활동을 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사소한 시행규칙들이 우리 레지오의 ‘제일 큰 목표’가 되어버린 것이다. 어딘가 이상하지 않은가?

모든 ‘진짜’ 군대들이 ‘완전히 전산화’가 되어서 모든 행정,사무가 이루어지는 이때에 군대의 효율성을 본받았다는 레지오의 현재 ‘서류 흐름’을 한번 보라. 이곳에 쓰는 시간 자체가 레지오 활동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조직의 관리에 드는 시간을 효율성을 극대화하여 최소한으로 줄이고 나머지 모든 시간을 ‘영혼을 위한 활동‘에 나서야 하는데 내가 본 실정은 거의 반대쪽으로 흐르는 듯한 느낌인 것이다. 레지오 단원 생활 4년 쯤 되면 모두들 이런 ‘권태기‘를 가지는 것인지 잘 모르지만 이런 때를 어떻게 잘 극복하는 가.. 역시 우리 어머니 성모님에게 의지하는 수 밖에 없다.

이것이 평화인가..아니면?

지나가는 달들, 나날들에서 가끔 분명히 느끼는 것.. 이것이 혹시 그렇게 흔한 단어인.. ‘평화’인가? 너무나 조심스럽지만 아마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럴 때 나는 곧바로 이런 말을 붙인다. 내일 아침까지 만불 빚쟁이들이 들이 닥쳐도 같은 심정일까.. 바로 이것이 신앙적인 평화의 뜻이 아닐까? 이것 저것 나를 잡는 괴로움이 산재하고 남아있고 계속 생겨도 그래도 평화로운 시간의 흐름을 느낀다면 이상한 것인가? 아하! 바로 이것이 미사 때 마다 귀 딱지 앉도록 듣는 peace be with you.. 가 아닐까? 이제야 나는 이것을 알아 차리고 있는 것일까? 이것도 나의 ‘신앙, 믿음’의 진화의 과정인가? 어떨 때는 이것도 ‘무서울 정도로 느껴지는 잔잔한 평화’ 로 받아 들여진다. 하지만 현재 연숙과 나는 그런 ‘놀라운 평화’를 느끼며 한 여름을 보내고 있다.

4년이 다가오는 레지오.. 현재 나는 이곳이 거의 피난처 구실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 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살아오지나 않았을까? 할 것이 없으니까.. 아니면? 아니다.. 이런 기회가 나의 세계관을 얼마나 많이 바꾸어 놓았는지 잊었는가? 나는 분명히 변했고, 변하고 있고 계속 변하고 싶다. 과거의 ‘고립된’ 세계관에서 벗어나야 나는 산다. 진리를 향해서 나는 계속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최선일까? 요새 들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면 거의 99% 현재와 미래를 망침을 알기에 그런 것이지만 이제는 4년의 ‘실적과 전적’을 조금은 분석하고 비평하는 것은 어떨까? 요새 레지오 간부 선출 문제로 신경이 쓰여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고, 조금은 ‘레지오 fatigue‘란 것을 느끼게 되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에게 남은 인생에서 ‘레지오’를 빼놓음은 아직 ‘상상’을 못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성모님께 깊이 의탁하고 있고 그렇게 살고 싶다. 개인적으로도 나는 성모님과의 관계를 느끼고 싶고, 아니 관계를 쌓아간다고 조심스러운 희망도 하고 있으니까.. 어떨까? 죽기 전에 나는 과연 ‘레지오 마리애’와 나의 관계를 어떻게 회상하게 될 것인가?

 

작년 정도는 아직 아니지만 그런대로 ‘보통 여름’같은 올해.. 참 이것이 자연의 조화일까.. 모든 것이 ‘평균치’를 유지하는 자연계.. 얼마나 이것이 ‘기적’처럼 느껴지는지.. 모든 것들이 extreme으로 치닫고 유행이 되어가는 요즈음 ‘평균’이란 말만 들어도 신선한 것이다. 이제 푸근하게만 느껴지는 여름에도 적응이 되어가고, 그렇게 손에 안 잡히던 ‘일손’에 조금 힘이 생겼다. 몇 년간 방치되었던 집안의 크고 작은 ‘고치는 일’들이 이제는 자신이 생겨가고, 최근 다시 힘이 생긴 YMCA에서의 bench press로 어깨와 허리에 힘도 느끼고.. 이때가 그야말로 chance가 아닌가.. 올 여름에는 무언가 우리집도 변한 모습을 모여 주어야 할 때가 아닐까? 벼랑 끝에서 창으로 무장한  monster들이 나를 기다려도 나는 평화를 ‘죽기 전까지’ 느끼고 살고 싶다. 아니 그렇게 될 것이다. 성모님이 바로 나의 어깨를 잡아주고 계시지 않은가? 그렇지요.. 어머니? 

Do you know where..

Do you know where you’re going to.. 오래 오래 태고적의 미국 pop song, 아마도 Diana Ross의 hit song 제목이었을 것이다. 그 노래는 나도 좋아 했던 기억이다. 멜로디보다도 그 제목이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고 현재도 그렇다. 내가 조금만 방황하는 기분이 들면 이 ‘누가’ 이 제목의 말로 나에게 속삭이는 느낌을 받곤 한다. 요사이.. 몇 달간은 더욱 이 속삭임이 나의 귀를 잔잔히 감싼다. ‘경우야.. 너 지금 어디로 가고 있니?’ 엄마의 자상한 목소리로 들릴 때도 있다. 이 세상에서 나를 ‘완전히’ 알고 있는 우리 엄마가 답답하게 느끼셨는가.. 경우야, 너 지금 어디로 가고 있니..

그렇다. 비록 최근에 나는 ‘이상하게 으시시한 평화’를 가끔 느끼곤 하지만 그 뒤쪽에는 항상 이 말이 숨겨져 있다. 너무 자만하지 말라는 경고일까? 하지만 가끔 만끽하는 ‘평화’는 정말 의외의 것이다. 한달 여 나를 괴롭히던 치통의 고통도 조금 완만해졌고, 익숙해져서 그런가? 아닐 것이다. 지난 3년 넘게 ‘노력’을 한 보람일까? 그것에 대한 하느님의 선물, 성령님의 선물일까? 내일 벼락이 떨어져도 느낄 수 있는 나만의 평화.. 그것의 맛을 조금 보여주시는 것일까?

 

지난 5월 말의 레지오 피정.. 지나간 해 보다 조금은 ‘들뜬’ 기분으로 맞았지만, 역시 old wisdom은 맞는가.. 예상보다 양과 질에서 비교가 안 되는 기대 이하의 것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문제는 안 된다. 내가 그곳에 갔다는 사실이 훨씬 더 중요하지 않을까? 이제 모두 익숙해진 ‘자매님’들을 대하는 것도 조금은 즐거운 일이 되고 있음에 나는 실소를 금할 길이 없다. 어떨 때는 청춘의 한창 시절 명동의 어떤 곳에서 ‘멋진 아가씨’들을 보고 우리들 끼리 즐거운 상상을 하던 때를 떠올리기도 해서.. 이런 현상이 과연 바람직한 것이지 혼동을 받는다. 나와 하신부님을 제외한 모두가 여성들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가벼운 즐거움이요, 놀람으로 느껴지는 것.. 어떨까..신경을 쓸 것은 많다지만 반드시 나는 솔직한 심정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들을 ‘이성’으로 느낀다는 사실은 과연 ‘억제’해야만 하는 ‘죄’일까.. 아니기를 바라지만 이것은 100% 나의 ‘속마음’의 영역이다. 하느님만 아실 것이다.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닌 순간순간의 감정들인 것이다.

두 장례미사, ‘세월호’ 분향

¶  작은 기적을 낳은 죽음

4월 들어 두 번의 장례미사와 생전 처음으로 해보는듯한 분향이란 것.. 우울하게만 느껴지는 이 ‘장례와 분향’이란 말들이 4월의 찬란한 태양과 어찌 그리 대조적 느낌을 주는가? 장례식이나 장례미사는 이제 나에게는 그리 서먹한 것이 아니지만 분향은 사실 느낌이 아주 달랐다.

4월이 시작되자마자 오랜 병고 끝에 선종하신 데레사 자매님, 병고에서 벗어나 홀가분하게 그 자매님이 사랑하셨던 성모님 곁으로 가셨다는 안도감과 그래도.. 여기서 더 보고 싶었을 단출한 유가족 생각이 교차 되는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가 없다.
오랜 병고를 치르면 사실 마음의 준비는 다 되었을 것 같지만 어찌 그런 감정이 다 똑같을 수가 있을까? 살아온 세월, 사랑했던 가족들의 사연은 하나같이 다를 것이다. 흔히 볼 수 있는 인생여정이 아니었던 조금은 독특한 인생여정을 살았던 데레사 자매님, 얼마나 사연이 많았을까? 끝까지 옆에서 묵묵히 그 자매님을 지켰던 독일인 남편과 외동 따님, 예상은 했겠지만 슬픔 감정은 억제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 데레사 자매님은 1950년대 초 숙명여고, 이화여대를 나오시고 60년대에 혈혈단신 미국에 오신 용감함이 있었고 남과 같은 평탄한 인생을 고집하지는 않으셨던 듯하다. 뉴욕에 사시며 현재의 독일 출신의 남편을 만났고 딸을 하나 두셨다. 가톨릭 신심, 그것도 성모님을 통한 신심으로 일생을 보내셨고 성지순례를 많이 하고 자서전 신앙고백인 책도 남기셨는데, 한가지 특이한 것은 그 옆에서 같이 일생을 보낸 남편은 ‘요지부동’으로 신앙을 가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충분히 이해는 가지만 ‘고집이 센’ wife의 등살을 어떻게 견디었는지..착한 심성으로 아내를 보살피긴 했지만 아마도 신앙적인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연숙을 통해서 어렴풋이 이 자매님과 남편을 알게 되었지만 가끔 ‘봉성체’ 를 통해서 근황을 알게 된 정도였다. 한번은 그 독일남편과 가까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고 2차 대전 종전 전후 독일의 사정을 ‘실감’나게 들을 수 있었다. 당시 소년이었던 그는 미군 점령지역에 있어서 소련군 지역의 수많은 ‘참상’을 피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 당시 미군이 보여준 ‘인간애’에 감동을 했고 결국은 미국으로 오게 되었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아마도 점령군이 아닌 구세군 격인 미국을 동경하며 왔을 듯하고 정착지였던 뉴욕에서 다른 꿈을 가지고 가난한 나라 한국에서 온 데레사 자매와 만났을 것이다. 독일과 한국은 사실 판이하게 다른 역사, 문화를 가졌겠지만 둘 다 비참한 전쟁의 후유증을 겪은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조금은 동병상련 의 감정을 가지게 되지는 않았을까?
데레사 자매님의 임종 즈음에 병자성사가 있었지만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그렇게 괴로운 모습이었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홀로 남는 사랑하는 남편과 사후에 완전히 이별을 할 것 같은 걱정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것을 간파한 그 남편은 아내와 이별하기 전에 ‘세례를 받겠다고’ 일생일대의 결정을 하고 초 특급의 세례식이 병상 옆에서 이루어졌다. 그것이 끝난 후에 편안하게 선종을 했다.. 고 들었다. 얼마나 감동적인 일화가 되었는지 모른다. 그 데레사 자매님은 분명히 죽어서 남편과 ‘재회’를 못할지 모른다고 확신을 했던 것이다.

그 남편이 아내가 쉽게 세상을 떠나지 못하는 것 만으로 세례를 받았을까? 50년 이상을 버티어 왔는데 말이다. 여기에는 더 한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따님과 같이 마지막 병상을 지키던 중에 그 부녀는 데레사 자매님의 병상주변에서 ‘초자연적인’ 에너지를 느꼈다고 했다. 그러니까 어떤 ‘에너지’가 병상에 온 것을 느꼈던 것이다. 나중에 그들은 ‘아마도’ 그 에너지가 그 자매님이 그렇게 사랑하던 성모 마리아가 아니었을까 추측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세례를 받게 된 제일 큰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병원 환경에서는 이런 ‘초자연적인 에너지’를 아주 흔한 이야기라고 한다. 세상을 떠나는 그런 자리에 무언가 느껴진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독일인 남편은 마이클(미카엘)이라는 세례명을 받고 신자가 되었다. 장례식을 거치며 그는 정말 바뀐 듯 했다. 이제야 50년 이상 자기 wife가 무엇을 믿으며 살았는지 늦게나마 알아 차리는 듯했다. 가까운 가족이 거의 없는 상태여서 장례절차가 조금 쓸쓸할 것으로 우려 되기도 했지만 예상을 뒤엎고 그 자매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가는 길이 너무나 훈훈하기만 했다. 이화여대 동창회에서는 막강한 합창단이 와서 멋지게 조가를 불러 주었다. 한마디로 아주 멋진 장례미사가 된 것이고 유가족들에게도 잊을 수 없는 경험과 위로를 남기는 그런 시간들이 되었다. 곧 이어서 부활절을 맞이하게 된 그 유족들.. 비록 한인 사회에서 조금은 멀어지겠지만.. 새로 찾게 된 ‘아내의 선물, 하느님’과는 더욱 가까워 지리라..

 

¶  레지오와 신부님, 그리고 작은 장례미사

또 다른 장례미사는 너무나 느낌이 달랐다. 성삼일, 부활절의 연속으로 쌓인 피로도 아랑곳하지 않는 듯, 우리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은 89세 할머님의 선종으로, 또 다른 장례미사 소식이 들려왔다. 이럴 때 우리는 선택의 고통을 겪기도 한다. 장례미사나 연도의 소식이 전해지만 우선 물어보는 것이.. 이분이 누구일까.. 가족들은.. 경제사정은.. 실제적인 물음이지만 유족들을 잘 알 수 없기에 한번 더 생각해 보는 것이다. 문제는 레지오 단원인 우리는 의심 없이 ‘무조건’ 장례절차에는 신경을 쓰며 참석하려 노력을 한다는 사실이다. 교회, 성당 공동체에 비교적 잘 알려진 가정이면 별로 문제가 없지만 이번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들려오는 소식에 유족의 ‘경제적’인 문제와 친숙한 교우가 아니라는 사실과 조금은 피로했던 때 (부활절 직 후).. 모든 것이 조건이 좋지 않았다. 아마도 장례식이 또 쓸쓸할 것 같은 예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갈 ‘기운’이 나지를 않았다. 혹시 ‘숨었던 유족 친지’들이 의외로 많이 참석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위로를 하기도 했다. 결국은 우리는 못 갈 것 같은 예감이 지배를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우리 주임신부님이 팔을 걷고 나서서 레지오 단원들을 ‘밀어’ 부치는 ‘의외적인 일’이 벌어졌다. 레지오는 별로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지난 시절에 비하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은 4명의 유족들이 홀로 치르게 되었을 뻔했던 쓸쓸한 장례식이 레지오 단원들이 많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미사’로 승격되어 진행이 되었고 유족들도 많은 위안을 받았으리라 생각이 되었다. 이번에도 역시 군대같은 조직을 가진 레지오의 기동력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번 ‘사건’은 사실 주임신부님의 ‘독자적 결단’으로 성사가 된 것으로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는 평소에 잘 알려지지 않은 신부님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아마도 오랜 전 또 다른 주임신부 같았으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명품과 부자와 명예’를 사랑했고 곤경에 처한 사람은 냉대했던 그 다른 신부의 행적을 상기하면 현 신부님은 하늘과 땅의 차이를 보일 정도가 아닐까?

 

¶  머나먼 세월호 분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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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들같이 어린 영혼들..어떻게..

이번의 ‘레지오 주동’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나오니 장의사 바로 옆에 위치한 한인회관에 한 장의 공고가 붙어있음을 보니.. ‘분향소’라는 글자였다. 자세히 보니 ‘세월호 영혼을 위한’ 분향 공고였다. 그것도 우연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신부님이 ‘쏘신’ 점심 회식 후에 잠깐 들려서 분향을 하였다. 한마디로 안 할 수가 없었다. 아틀란타와 진도는 물리적, 심리적으로 엄청난 거리였고 느낌도 멀 수 밖에 없었지만 속 마음들은 그것이 아니었다. 할 말을 잊는 우리 심정을 조금이라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바로 이 ‘분향’이었다. ‘추악하고 인간답지 못한 어른들‘의 ‘도움’으로 채 피지 못하고 하늘로 일찍 가버린 어린 꽃다운 영혼 뿐만이 아니었다. 나머지 크고 작은 사연을 안고 이 세상을 떠나야만 했을 숨겨진 영혼들.. 육체적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생각하자고 위로는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간단할까? 하지만 ‘정의’는 끝까지 찾아야 하고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날 수가 없는 그런 살기 좋은 조국이 되기를 기도해 본다. 또한 날벼락을 맞은 박근혜 정부도 필요이상의 큰 타격이 없기를 바란다.

 

나를 정말로 슬프게 했던 절망적인 장면.. 할 말을 잊는다

나를 정말로 슬프게 했던 절망적인 장면.. 할 말을 잊는다

이 덩치가 큰 배가 그렇게 순식간에 death trap이 되었을까.. 역시 말을 잊는다.

12월 중순이 넘어가는 날

¶  12월의 중순이 완전히 넘어가는 날, 12월이 기울어가고 성탄을 코앞에서 기다리며 역사 속으로 사라지질 2013년,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었던 세월이었는지 조금씩 정리해야 한다는 심정이 나의 목덜미를 잡는다. 오래 전의 표현을 기억하면 ‘세모歲暮’라고 했던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한 해가 저물어가는 것을 표현한 그 말.. 참 느낌이 좋았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것이 과히 반갑지 않다고 느끼며 산 세월도 짧지 않았다. 숫제 그 ‘세모’란 것이 지나가지 못하게 붙잡고 싶은 간절한 심정도 많았다.

하지만 최근부터는 ‘의지적, 나아가 신앙적’으로 담담하게 느끼려고 안간힘을 쓰며 산다. 그러니까 조금은 편해진 기분도 느낀다. 어떤 현상이 자연적인 것이면 그것을 자연의 주인에게 맡기자.. 그것이 내가 보는 세상의 순리인 것이다. 순리에 너무나 도전하는 것.. 문제를 푸는 것보다 더 문제를 만드는 case가 얼마나 많았던가? 오너라, 세월아.. 지나가라 세월아.. 그것이 진리요 순리라면 얼마든지 편하게 받도록 노력을 하리라!

 

¶  올해의 초겨울 날씨 – 아직 공식적인 겨울의 시작, 동지가 이틀 남았지만 현재까지 보아서 올해의 winter season은 지극히 지극히 ‘고전적인 겨울’의 모습들이다. 체감으로 느끼는 추위의 느낌이 오래 전에 느꼈던 그런 겨울의 느낌인 것이다. 아틀란타 지역에 한정된 것인지도 모르지만 올해의 장기예보가 맞아가는 듯 하다. 평년보다 ‘조금 낮은’ 기온일 것이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지난 11월 중순부터 예년에 자주 입지 않았던 비교적 따뜻한 옷들을 입게 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비록 눈 같은 포근한 것은 없었어도 ‘겨울다운 겨울’ 은 너무나 신선하고 편안함을 주는 것이다. 이 지역의 추위는 사실 1월부터 3월까지가 진짜인데 이미 이렇게 싸늘했으니 그때는 과연 어떨까.. 지나간 여름이 너무나 시원해서 그에 맞는 따뜻한 겨울을 예상했는데 어찌된 일인가?

 

¶  레지오 남자들.. 레지오 마리애 남성 단원을 간단히 레지오 남자라고 부른다.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 올해는 이 단어가 자주 쓰이고 해서 조금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톨릭 교회 안에서 가장 막강한 조직력을 자랑했다던 레지오 마리애, 기도와 봉사를 목표로 군대처럼 모인 곳이다. 진짜 군대의 근처도 못 가보았던 내가 인생이 저물어가는 이때에 규율과 조직의 힘을 신선하게 느껴보며 살아간다. 이런 조직의 힘이 나에게는 생수와 피처럼 필요하다고 느낀다. 레지오 마리애가 나를 필요로 한 것 보다는 내가 ‘살아 가기’ 위해 더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교회내의 어느 신심단체, 조직들 정작 일이 필요한 곳은 거의 전부가 ‘여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니까 ‘자매님’들이 궂은일, 시간 걸리는 일을 떠맡고 있는 셈이다. 도대체 남자들은 어디에 숨어있는 것일까? 남자들 중에서도 제일 활동적일 수 있는 40~50대들.. 분명히 ‘먹고 살기 위해서’ 신심활동,봉사 등은 엄두도 못 내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60대는 어떤가? 그들도 먹고 살기 위해서 그런 것일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아마도 ‘즐기는데’ 너무나 바빠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하지만 내가 때늦게 절감, 통감한 교훈적 사실은.. 이러한 ‘높은 수준의’ 활동이 그들이 그렇게 시간을 쏟고 있는 경제,사회활동에서 시간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덤의 시간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진리’를 조금이라도 일찍 깨닫는 ‘형제님’들은 일단 ‘성공’한 삶을 살며 마칠 수 있다고 나는 진정으로 믿는다.

 

¶  의미 있는 Blogging의 절묘한 힘을 며칠 전에 ‘또’ 깨닫게 되었다. 가끔 찾아오는 이런 ‘절묘한 순간’들 때문에 귀찮더라도 계속 ‘쓰게’ 되나 보다. 간단히 얘기해서 내가 2년 전 여름에 불평의 마음으로 쓴 blog, ‘알피 램 생애를 읽으며’ 란 것이 인연이 되어서 연세대 전기과 동문을 알게 되었고 그 내가 불평했던 책의 새 번역본이 나오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레지오 마리애에서 신화적, 전설적인 인물인 ‘알피 램’의 전기에 해당하는 그 책의 첫 번역본은 너무나 실망적인 것이었고, 은근히 다시 써주기를 바라며 쓴 것인데 그것이 이렇게 기적奇蹟적으로 해결이 된 것이다.

게다가 새 번역을 한 사람이 바로 나의 연세대 전기과 ‘거의 동기’인 ‘김형기 스테파노’ 동문이어서 더욱 이채로웠다. 알고 보니 스테파노 동문은 1967년 가을학기를 나와 같이 공부한 것으로 밝혀져서 한참 반세기전으로 시간여행을 하며 그 당시를 추억하게도 되었다. 김 동문이 어떻게 레지오 마리애에 관한 책을 번역하는 입장이 되었는지 궁금하기만 하고 만약에 레지오 활동에 깊숙이 관여가 되었다면 서로 좋은 의견을 교환할 수도 있겠다는 상상적인 희망의 나래를 펴 본다.

 

친구 정교성의 성탄카드, 너무나 멋지다.¶ 일주일 전쯤.. 캐나다에 거주하는 오랜 친구, 중앙중고 동창 정교성으로부터 성탄 카드가 도착하였다. 이 친구는 내가 기억하는 한 거의 매년 이맘때쯤 카드를 보낸다. 비교적 일찍 보내는 것이다. 얼굴을 맞대고 본지가 수십 년이 되었지만 그저 늙어가는 모습은 쉽게 상상할 수가 있어서 큰 문제는 없다. 보고 싶다.. 보고 싶어.. 할 정도지만 일부러 그를 찾아 갈 여력을 찾지 못한다. 인연이 있으면 ‘죽기 전에’는 만날 수 있겠지 하는 정도다. 요새는 인간관계가 그렇게 정착이 되어간다.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친척, 친지.. 어찔할 것인가.. 나는 떨어져 있어도 마음만은.. 하며 생각하며 살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마음도 멀어져 감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는가? 어떻게 그렇게 되어갈까? 최소한 나는 가까운 마음을 간직하는데 상대방이 꼭 그렇지 않은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솔직히 말해서 슬프고 무섭기조차 하다. 고국에 있는 그렇게 다정했지만 긴 세월 떨어져 살았던 인생들.. 아예 나만의 상상으로 다정했던 세월들만 간직하며 나의 인생을 보낼까..

 

¶  갑자기 장례미사, 연도 소식이 잇달아 들어왔다. 작년 여름에 하루가 멀다하고 겪었던 장례, 연도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지만 올해는 비교적 조용한 편이어서 이대로 ‘무사히’ 올해를 보내나 보다 했지만 결국은 올해의 마지막 달, 어제와 오늘 연세대 이원선 도밍고 동문의 93세 어머님의 선종으로 연도와 장례미사가 잇달아 있었다. 이 동문의 어머님이 돌아가신 사실은 93세라는 나이도 있고 어느 정도 예측이 된 것이라 크게 놀랄 사실을 아니었지만 이 동문의 나와 비슷한 환경: 홀 어머님, 외아들 등등으로 나의 경험을 되새기며 하느님 품으로 가신 영혼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 동문의 어머님은 우리 어머님보다 2살이 아래였는데 육이오 전쟁에서 군인이던 남편을 잃으셨다고 했고, ‘강철같은 의지’로 4남매를 모두 대학엘 보내셨다고 고인에 대한 추억담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 당시에 그런 여건 (아버지를 잃은) 의 가정이 수도 없이 많았고 대부분 어머니들은 ‘뒤를 봄이 없이’ 자식들을 키워냈다. 그러니까 어찌보면 흔할 수도 있는 이야기들인 것이다. 하지만 하나 하나를 자세히 알고 보면 모두 다 다른 눈물겨운 이야기들이다. 그런 환경에서는 생존이 제일 우선이고, 나머지 것들은 사실 희생이 되어야 했다. 우리들은 가끔 그런 사실을 깜빡잊고 겉으로 보이는 모습(완고한, 고집불통) 만으로 불평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앞뒤를 잘 못보는 불공평한 논리인 것이다. 이원선 동문도 이제는 한 세대가 완전히 지나간 사실을 이번 어머님의 타계로 실감을 할 것이고 ‘자식의 입장에서 완전한 부모’의 입장으로 세상을 보게 될 것을 예상해 본다. 한 세대가 완전히 흘렀다. 다음은 우리들이 갈 차례인 것이다.

레지오 총 친목회가 끝나고..

¶  12Scan10035월 1일, 2013년도 레지오 총 친목회 (Legion of Mary, Reunion)가 2013년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절(Advent)의 시작과 함께 멋지게 어울리며 결과적으로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본당 내에서 2013년 12월 크리스마스 season의 막을 제일 먼저 올리는 역할을 해냈다. 12월 1일에 성탄의 공기를 느끼기에는 조금 이른 듯도 하지만 요새의 ‘세속적 secular, 상업적 commercial’인 흐름을 보면 그렇게 빠른 것도 아닌 듯 싶다. 이미 지난 주부터 크리스마스 carol이 흘러 나왔기 때문이고 Thanksgiving 날 부터 아예 shopping season이 ‘요란하게’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친목회 프로그램의 하나인 합창 공연에서 참가자 모두가 빨간 산타크로스 모자를 써서 더 그러한 성탄절의 기분을 풍긴 듯 싶다.

 우선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레지오 총 친목회는 결과부터 보면 예상보다 잘 치러 진 느낌을 받았다. 꾸리아에서 공식적이고 전체적인 review를 해 보면 더 자세한 것을 알겠지만 친목회의 진행이 비교적 매끄러웠고, 지루한 느낌도 거의 없었다. 참가자나 연기하는 단원들의 움직임이나 표정을 보며 그런 것을 나는 느꼈다. 아틀란타 지역 한인 성당이 2개로 나누어지며 필연적으로 꾸리아 소속 단원 수가 줄어든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서 참가자의 수는 아마도 예년에 비해서 ‘많이’ 줄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지역 쁘레시디움 (Columbus, Augusta 같은)에서 장거리의 불편을 무릅쓰고 참가한 것은 보기가 좋았고, 참가 단원들의 참여 태도는 ‘수우미양가’ 에서 아마 ‘우’에 속하지 않았을까?

나와 연숙1은 올해 꾸리아 level에서 이 행사를 직접 간접으로 관여하며 한가지 각오를 하고 임했다. 그것은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이 더 중요하고 의미가 있다” 라는 조금은 진부한 표현의 각오였다. 물론 결과는 충실하고 진지한 과정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너무나 결과에 집착하며 아무래도 모든 것들이 즐겁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친목회의 제일 큰 목적이 잘 모르는 단원들과의 친교 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친목회 자체는 불과 1~2시간 정도의 친교시간을 주기에, 도저히 그 자리에서 의미 있는 친교는 힘들다. 게다가 친목회 자리에서조차 평소에 모이고 있는 단원들끼리 모이게 된다는 현실을 알면 더욱 친교는 힘들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해결하는 좋은 방법은 친목회에서 열리는 각종 프로그램에 서로 소속이 다른 단원들이 적극적으로 연습, 참여를 하며 그곳에서 시간을 두고 친교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해결책이었다. 실제로 각종 프로그램에서 평소에 겨우 얼굴 정도나 알던 단원들과 어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올해 나에게 이 친목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도 조금 생각을 하며 이날을 맞게 되었는데, 아마도 나의 ‘깊어가는’ 나이를 더 의식하지 않았을까? 이런 것도 세월이 깊어 갈 수록 ‘하고 싶어도 못하게 되는’ 그런 것 중에 하나일 것이다. 몸과 마음이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한 ‘최선’을 다해서 참여를 하자는 각오를 가지고 임했다. 특히 대다수가 여성 단원들인 우리 레지오에서 나 같은 남자단원들이 가질 수 있는 외로움, 소외감, 위축감 등등을 어떻게 이런 기회를 적절히 이용할 수 있는가도 생각을 했다.

사실 이러한 ‘요새 남자들의 문제’는 이곳만이 아닐 것이고 전반적인 사회적 현상이기도 하다. 어디를 가나, TV를 보나, 영화를 보나.. 요새는 여자들만 보이는 것 같고, 남자들의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드는 느낌을 떨칠 수 없는 것이다. 레지오는 그런 의미에서 이런 사회적, 문화적 흐름을 극단적으로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특히 나이 먹은 남자들에게는 더욱 뚜렷하다.

 이런 우울한 남자들을 생각해서 작년 총 친목회 때 의도적으로 남자들만의 시간을 만들려고 한 것이 결과적으로 두 남자가 sing-along 을 lead 한 것인데, 결과는 별로였을까.. 올해는 아예 다시 해달라는 요청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친목회 2주를 남겨두고 연습 진행상태가 별로였는지 급작스럽게 sing-along team을 다시 만들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작년의 2명 남자는 다시 목소리를 맞추게 되었는데 올해는 조금 욕심을 부려서 ‘숨어있는 남자 인재’를 찾아 보려고 하다가 결국 예상을 뒤엎고 3명의 남자를 ‘발굴’ 해 내었다.

이 남자들은 몇 년 동안 그저 얼굴만 간신히 아는 정도였는데 운 좋게 ‘의기투합’이 된 것이고, 이중에 2명은 끝 무렵에 연숙에게 ‘걸려서 등을 떠밀려’ 온 case였다. 그래도 그들도 정말 오랜만에 ‘목청’을 쓰는 듯 신기해하며 동참을 했고 우리의 의도인 ‘친목도모와 즐기자’ 라는 것을 잊지 않고 결국 친목회에서 남자 5명의 sing-along team이 debut를 한 것이다. 이것이 내가 ‘두고 두고 기억하고 싶은’ 올해 총 친목회의 추억이 될 것이다.

올해도 여흥순서의 사회를 연숙이 맡았는데, 조금은 피곤해 보였다. 나이도 그렇고, 3년째 계속하고 있는데 어찌 안 그렇겠는가? 다른 사람을 계속 찾아보라고 하는 모양이지만 쉽지 않은 모양이다. 그저 ‘인재’가 없다고 푸념들만 하는 모양인데, 참 알 맞는 사람이 없기는 해 보인다. 연숙의 부단장 직이 내년 중에 끝이 나기에 그때만 기다리는 모양이지만, 그것이 끝 나도 글쎄.. 작년에는 청년 단원들이 중심으로 강남스타일을 요란하게 멋지게 보여주었는데, 올해는 완전히 스타일이 바뀌어서 엄숙하고 느린 모습의 body worship이란 것을 보여주었다.

많은 단원이 참가한 합창은 기대 이상으로 멋진 화음을 연출하였고, 참가 인원이 적어 고민하던 ‘춤’ team 도 아주 귀엽고 신선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제일 시끄럽고 신명 나고 신났던 것은 역시 우리부부가 다 참가했던 난타가 아니었을까? 이 프로그램은 연습기간과 참여도가 제일 우수했던 것이어서 결과에 상관없이 대 성공을 이룬 case가 되었다. 국악을 전공한 자매님이 열성적으로 2달에 걸쳐서 지도한 열매였다.

 이 행사로써 올해 레지오의 주요 행사는 다 끝났고, 이제는 조용히 대림절 4개의 초가 하나씩 켜지는 것을 지켜보며 우리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리고, 그 후에는 또 한 해를 다 보낸다. 비록 구세주 탄생은 기쁜 것이나 이제는 솔직히 이 나이가 되니 내년 이맘때 다시 한번 친목회에 참가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곁들여서 그런지, 한 해가 가는 이 시점이 꼭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즐거움과 아쉬움이 교묘하게 교차되는 그야말로 미묘한 기분의 12월인 것이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 레지오 합창 team

 


베토벤 바이러스, 윤도현 아리랑 – 난타 team

 


Group Game – 참가자 모두

 


사랑으로‘ , 고 김수환 추기경 애창곡 – finale, 모두가

 

  1. 나는 현재 자비의 모후 쁘레시디움 서기로 있고 연숙은 같은 쁘레시디움의 단장인 동시에 천상은총의 모후 꾸리아의 부단장으로 모두 꾸리아에는 직접 간접으로 깊이 관련이 되어있다.

소까나.. 12월인가..

소까나~ 소까 소까 そうかそうか.. 참 이렇게 일본말이 다정하게 느껴지니.. 이럴 때, 그래, 그래 보다 소까 소까도 잘 어울린다. 2007년부터 시작된 ‘일본을 조금이라도 알고 죽자’ 라는 이상한 느낌에 끌려서 이제까지 거의 7년이 지나고 있다. 비록 몇 년 전부터 조금씩 slow-down이 되고 있고 새로 나오는 드라마 video가 없기도 하지만 지금은 그 동안 쌓였던 그 수많은 어떤 것은 classic이 되어가고 있을 정도의 좋은 이야기들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짧은 단어 정도는 알아 듣지만 그 이상은 아마도 무리 무리.. 조직적으로 배울 의욕과 생각도 사실은 없다. 이 정도면 나의 욕구를 채웠다고 생각하니까.. 최소한 이질감과 거부감 없이 그들의 ‘언동과 역사’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대 이상의 성과라고 생각한다.

그래.. 그래.. 12월이 벌써 6일로 접어든다. 이제는 놀라지 않는다. 다음에 눈을 깜빡 뜨고 달력을 보면 분명히 중순을 지나가고 있을 것이다. 정말 정말 어떨 때는 한 달이 오래 전의 하루와 같은 느낌이 든다니까.. 60대에서 60마일로 달린다는 ‘병신 같은 표현’이 그렇게 적절한 듯 느껴진다니까.. 조금은 슬프다. 내가 70대를 산다면 10마일이 더 빨리.. 그러니까 한 달이 아마도 8시간 정도의 느낌으로? 와.. 싫다.. 하지만 이것이 ‘정상’이고 자연적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잊고 있다. 순리와 진리를..

조그만 폭풍이 지난 듯한 느낌으로 며칠째 시간을 보낸다. 그 폭풍이란 물론 우리 부부가 ‘거세게 개입된’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였다. 성탄의 기분을 내기에는 너무나 빠른 12월 1일에 우리가 제일 먼저 성탄기분의 선두주자인 듯 tape을 끊은 것이다. 올해는 예년과 다르게 정말 이를 악물고 악물고 ‘즐겁게 준비하고 즐겁게 치르자’ 라는 결심을 하고 지냈다. 그것이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비교적 stress를 잘 조종하며 보냈다. 덕분에 얼굴로만 알던 단원들과 지척에서 어울릴 수도 있었고 특히 남자 단원들이 더 값지게 다가왔다. 전 요셉, 김 빠찌피코, 한 그레고리오 형제 같은 사람들은 처음으로 ‘편하게’ 어울릴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거기다 작년부터 알게 된 박 대건 안드레아 형제까지 5명이 친목회 lower stage에 서게 된 ‘큰 일’을 한 것이다. 나도 노력했지만 연숙의 pushy함이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우리가 얼마나 sing-along을 잘 주도했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선례를 남겼고, 새롭게 서로들이 만났으니 말이다. 난타 program도 마찬가지.. 우리부부 정말 열심히 참가하고 즐겼다. 거의 2달 한번도 빠지지 않고 연습했으니 최선을 다 했다고 자부해도..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 2013

한글로 된 레지오 공인 교본을 보면 ‘연차 총 친목회‘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꾸리아는 가능한 한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 축일‘(12월 8일)에 가까운 날에 모든 단원들이 자리를 함께 하는 연차 총 친목회를 열어야 한다. 이 행사는 필요에 따라 성당 안에서의 의식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이 행사에는 친교의 시간이 마련되어야 한다. 만일 성당 내 의식 때에 레지오의 기도문을 바치지 않았을 경우에는 뗏세라의 기도문을 보통 회합 때처럼 세 부분으로 나누어 바쳐야 한다.

연차 총 친목회의 참가 범위는 레지오 단원으로 한정시키는 것이 좋다. 여흥 순서에 곁들여 레지오와 관련된 이야기나 글을 발표하는 순서가 있어야 한다.

이 자리에서 단원들이 너무 격식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특히 많은 단원들이 참석하고 있을 때 더욱 그러하다. 이 행사의 취지는 참석한 단원들이 모두 서로 낯을 읽히고 친숙해지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원들이 돌아다니며 이 사람 저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순서를 짜야 한다. 진행을 맡은 사람들은 단원들이 끼리끼리 무리를 이루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미 잘 알고 있는 단원들이 자기들끼리 무리를 지어 있게 되면 레지오 가족의 단결과 우애의 정신을 북돋우려는 이 행사의 취지를 살릴 수 없게 된다.

 

‘연차 총 친목회’라는 레지오 용어의 ‘원어’는 사실 The Annual General Reunion 이다. Reunion을 ‘친목회’로 번역한 것은 의역(의미를 옮긴 것)이고 그런대로 의미가 잘 전달 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reunion이라는 단어의 맛은 역시 ‘오랜 동안 떨어져 있던 친구,동창을 일년에 한번 다시 만나는 행사’ 라는 것이 아닐까? 레지오 활동의 중심점에 있는 꾸리아 산하에는 사실 지역적으로 떨어진 쁘레시디움들도 있을 것이니까 서로 얼굴도 모르기에 일년에 한번 이렇게 ‘모두’ 모여서 ‘친교’를 이루자는 뜻의 행사일 것이다.

우리가 속한 꾸리아1의 사정은 비교적 대다수의 쁘레시디움이 같은 본당 소속이어서 그런대로 얼굴 정도는 조금 아는 정도이지만 그것이 전부다. 오히려 다른 지역에서 온 단원들은 더 눈에 잘 띄어서 더 익숙하기도 하다. 2년 전까지만 해도 이 행사의 거의 모든 프로그램은 각 쁘레시디움 단위로 이루어져서 이것을 통한 통 넓은 친교를 이루기는 무리였다. 그러니까 일년 내내 같은 방에서 보는 사람들과 ‘더 친하게 되는’ 기회만 제공한 셈이었던 것이다. 그런 단점을 알고 작년부터는 쁘레시디움 단위의 프로그램을 완전히 없애고 몇 가지 프로그램을 정하고 그곳에 가급적 모든 쁘레시디움이 참여하도록 하였다. 예를 들면, 합창, 춤 같은 프로그램에 모두가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서로 모르던 다른 쁘레시디움의 단원들도 조금은 알게 되는 기회를 얻는 것이고, 사실 효과적이어서 나 자신도 ‘잘 모르고 지내던’ 단원 몇몇을 사귀는 기회도 얻을 수 있었다.

작년 12월 초 총 친목회의 추억이 마치 한달 전 같이 느껴지는 가운데 ‘벌써’ 2013년 ‘연말’ 총 친목회를 준비하는 모임이 시작되었다. 현재까지 합창, 춤 그리고 난타의 세가지가 계획되고 희망하는 단원들이 연습을 시작하게 되었다. 작년에 나는 특별한 프로그램으로 다른 남자 단원과 함께 듀엣으로 3곡의 노래를 불렀고 올해도 ‘요청’만 들어오면 다시 한번 할까 하는 기대도 했지만, 아직까지 그런 것이 없는 것을 보니.. 아마도 작년에 우리가 한 것이 별로였는지..하는 실망감도 없지 않다. 올해 나는 연숙과 같이 난타 라는 ‘두드리는’ 프로그램에 들어가서 현재까지 4번 연습을 하였다. 알고 보니, 이 ‘난타’라는 것은 부엌에서 시작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도마’를 두드리는 모양이다. 다른 것으로는 ‘통, bucket’ 을 뒤 엎어놓고 치는 것과, 국악에서 쓰는 ‘북’이 있는데 대부분 여성들은 도마와 ‘통’을 치고 나는 북을 치는 그룹에서 북을 치게 되었다. 배경 음악은 ‘베토벤 바이러스‘라는 경쾌한 것과 우리 민요를 바꾼 ‘윤도현의 아리랑‘인데 박자감각만 있으면 우선은 견딜 수 있는 것이고, 연습하고 나면 기분도 좋았다.게다가 잘 모르는 다른 쁘레시디움들의 단원들과 함께 웃고 즐기는 시간도 되어서 레지오 교본에 나오는 행사의 의미도 되새기게 되었다.

 

UPDATE, UPDATE!
12월 1일에 열린 총 친목회에 대한 자세한 것은 이곳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12/9/2013

 

베토벤 바이러스

 

윤도현의 아리랑

 난타 연습용 북과 북채집에는 큰 북이 없어서 이렇게 ‘장난감’ 북과 북채로 연습을 한다

 

  1.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천상은총의 모후 꾸리아

主後(주후) 2013년, 8월 22일

¶  BC, AD, BCD, CE… OH MY!  내가 감사하며 애용하는 Wikipedia 류의 web service는 물론 가끔 donation을 할 정도로 우리들에게 유익한 것이다. 그 옛날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생각하면 얼마나 고마운 것인가? 항상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필수의 서비스인 것이다. 비록 최고의 전문가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대신 충분히 많은 일반인에게 ‘검증’을 받고 있는 지식들이라 생각하는 것 보다 질이 좋음을 알 수 있다. 그 수많은 기사들의 폭과 깊이, 신속한 update등등.. 책으로 된 백과사전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실 여기만의 문제가 아니고 모든 soft information에 해당되는 것인데, 지나친 PC (Political Correctness) effect가 여기에도 적용이 되는 듯 하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 ‘좋은 정보’로 취급되는 성향을 이곳에서 이곳 저곳에서 볼 수 있다. 심지어는 지나친 세속적 편향도 덩달아 춤을 추며 이곳으로 잠입하는 느낌도 든다.

예를 들면 CE 와 BCE의 연대 표기 방식이다. 그러니까 전통적인 AD (Anno Domini)와 BC (Before Christ) 대신 CE(Common Era) 와 BCE(Before Comment Era)로 표기하는 것이다. 해당 기사를 쓴 ‘봉사자’들에 의한 것이 아니고 아예 Wikipedia 자체에서 ‘권장, 심지어 강요’하는 듯한 느낌도 든다. 이것이 쉽게 말하면 PC, politically correct한 것이다. 왜 전통적인 것보다 이런 방향으로 나간 것일까? 이렇게 하면 fund raising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것일 지도 모른다. ‘비신자, 비기독교인, 무신론자’의 숫자가 엄청 많고, 늘어난다고 생각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참 옹졸하기 짝이 없는 ‘새 대가리’ 적 발상이다. 기원 후, 기원 전을 쓰면서 ‘예수님 후’, ‘예수님 전’이라고 생각하며 서기 1968년..을 쓰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는가?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한번 어깨를 펴고 당당히 써 보자.. “오늘은.. 주후, AD: ANNO DOMINI, 기원 후 2013년 8월 22일!” 참.. 이래서 political correctness가 필요이상으로 욕을 먹나 보다. 

 

¶  GET A LIFE! FACEBOOKERS..: 아주 오랜만에 들려본 the economist 웹사이트 에서 흥미롭고, ‘나의 느낌이 역시 맞았구나..’ ‘I told you so’ 하는 나의 내면의 소리를 확인하는 기사를 보았다. 한마디로 “Facebook에 목매는 인간들아, (진짜) 삶을 살아라!” 인 것이다. 인터넷을 이용해서 ‘대화’를 하는 것과 ‘그 속에서 삶을 사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내가 보기에, 느끼기에도 나는 처음부터 이런 류의 ‘거대한 가짜 삶의 광장’을 제공하는 Facebook에 관심이 별로 없었지만 “기본을 무시한, 잔머리만 굴리는 요새 ‘아이들”의 장난이 거대한 돈과 증권시장을 좌지우지하는 것만으로도 그런 ‘쓰레기’에 관한 뉴스는 피할 도리가 없었다. 난데없이 전혀 모르는 인간들이 ‘친구 합시다’ 하고 오는 추태에는 진저리가 칠 정도였다. 우리 두 딸들도 peer pressure에 약한지 한 때 빠지더니 요새는 많이 벗어난 듯 하다.

심각한 문제는 아예 그 속에서 완전한 ‘다른 삶’을 사는 인간들인 것이다.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의 실체를 제대로 구별을 못하며 사는 거대한 ‘광고의 밥’ 인 이런 부류의 사람들.. 그야말로 Get a Life! 라고 충고하고 싶은 것이다. 워낙 덩치가 커진 이 Facebook은 드디어 실험용 연구대상까지 된 것까지는 좋았는데, 결국은 실상이 들어나게 되고, 결과는 그들(ZukerXX & kids)에게 별로 좋지 않은 듯하다.

이 economist의 기사를 읽어보면 아주 조직적인 실험,연구를 한 것인데 결과는 그 곳에서 사는 삶은 한마디로 miserable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곳에 있는 거짓으로 도배가 된 허구의 삶들과 자기 것을 비교하는 자체가 불행인 것이다. 실상과 거리가 먼 자기의 공상을 쫓으며 살려니 결과는 뻔 한 것이다. 설상 가상으로 이제는 NSA의 철저한 감시대상의 제1위에 있는 그들의 privacy는 거의 제로에 가까워지고 있어서 솔직히 말하면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다. 

 

¶  바울라 표 커피: 얼마 전 우리부부의 레지오 마리애 본가인 자비의 모후 단원님 이 바울라 자매님이 조그만 상자를 건네 주셨다. 차량봉사 관계로 자매님을 레지오 주 회합 뒤에 모셔다 드리면 가끔 뒤뜰에서 정성껏 키운 야채나 꽃나무를 즐겁게 나누어 주셨는데, 이번에는 색다른 느낌의 조그만 상자였다. 혹시나 해서 미리 무엇이냐고 여쭈어 보았더니 ‘커피’라고 하셨다.

이것은 정말로 뜻밖의 느낌이었는데, 물론 내가 워낙 커피를 즐기다 보니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지만, 조금은 미안하기도 하였다. 자매님 식구가 드셔도 됨 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자매님 식구는 별로 커피를 ‘잠’ 때문에 드시지 않는다고 하셨다. 집에 와서 상자를 열어보니 그것은 우리와 친숙했던 Caribou ground coffee pack이었다.

물론 우리가 사서 먹어도 되지만 이런 ‘공짜’ 는 참 즐거운데.. 공짜라서 라기 보다는 그렇게 주신 자매님의 마음이 고마워서 그런 것이다. 매일 아침 나는 칠흑이 간신히 걷힌 이른 아침에 이 커피의 맛을 ‘혼자서’ 음미하며 잠을 깨고 ‘신나게 돌아가는 머리’의 힘을 빌려 나의 생각과 일을 시작한다. 우리는 고마운 자매님의 마음을 생각하기에 그 Caribou Coffee를 ‘바울라 표 커피‘라고 이름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바울라 자매님! 

 

¶  CRAZY NEW NORMAL: BRADLEY MANNING 이 알고 보니.. CHELSEA MANNING? 하도 ‘미친’ 뉴스들이 요새는 ‘대부분 정상’이 되었다고 하지만 이 희한(稀罕)한 기사에 나는 완전히 오금을 펼 수가 없게 되었다. 그 정도로 희한한 CRAZY NEW NORMAL인 것이다. 별로 거대한 정치적인 안목이나 생각 없이 그저 ‘자신의 불만’만 생각하며 1급 국가기밀 수천 페이지를 양심의 가책 없이 여파나 파장에 상관없이 폭로하며 자신의 자격지심을 위로했던 ‘병신중의 병신’처럼 보이던 그 ‘남자’가 갑자기 ‘여자’로 성전환을 한다?

한마디로 정말 이것이야말로 희한 중의 희한.. 희한 올림픽의 다이아몬드 메달 감이다. 하지만 이것이 소위 말하는 ‘이세상의 누가나 평등하다, 절대로 남을 판단할 권리가 없다’ 는 ‘기분 좋은 슬로건’에 목을 맨 신 현세의 일 면이 되어가고 있다. 비겁 자 중의 비겁 자 처럼 보이는 그가 감방에서 여자 대우를 받고 싶은 것일까.. 참 모골이 송연 해 지는 느낌을 감출 수가 없다. 

 

¶  RETRO-BLOG, TAKE ME TO 1968!:  근래 들어서 blogging하는 것이 그런대로 자연스레 습관이 되면서 나만의 retro-blogging이란 말이 생겼다. 그러니까 어떤 날, 문득 생각난 것을 쓰다가 다 못쓰고 내버려 둔 것을 ‘후일’에 이어서 쓰게 된 case 가 바로 이것이다. 쓰기 시작했을 때의 생각이 시간이 지나서 조금은 바뀌거나 했어도 생각의 출발점은 간직하고 나중에 읽었을 때 ‘역사적’ 가치가 더 있는 것이다.

특히 바쁠 때, 그런 ‘지나간 블로그’를 더 많이 처리해야 할 때가 많다. 미완성 된 블로그를 나중에 ‘완성’을 시키는 것이다. 현재도 나는 자그마치 5개 이상의 retro-blog과 씨름을 하고 있다. 제일 오래 된 것은 거의 6개월 전의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는 ‘대작’도 있다. 그러니까 나의 ‘역사적 기록’인 memoir인 것이고 그 중에서 연세대 2학년 시절에 관한 회고록이 있다. 대학시절은 누구에게나 그에게 ‘황금기’애 속하기에 이야기도 많고 생각도 많았던 시절이다.

나의 그 때는 20세였던 1968년.. 기억력과 최후의 사투를 벌리며 회고해 내고 있는 이야기들.. 나에게만 의미가 있던 사담들이지만.. 누가 아리오, 그 이외의 관련된 사람들이 보게 될지도. 몇 년 전 일본의 인기 ‘테레비’ 드라마였던 ‘무리한 연애‘ 라는 미니 시리즈를 보면 왕년의 십대의 우상이었던 지금은 환갑이 된 주인공이 택시를 탈 때, 택시 기사가 ‘어디로 모실 깝쇼?’ 하고 물으니 주인공 왈, 무심결에 ‘1968년으로 갑시다!‘ 했는데.. 내가 바로 그 주인공과 100% 같은 심정이다. 비록 북괴 김신조 무장공비 일당이 청와대 근처에서 설쳐댔어도, 정말 걱정, 근심.. 있어도 그 때는 행복하던 시절이었다. 

Me, catechist? not exactly..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2014년 부활절 영세 목표’ 예비 천주교 신자들의 교리교육이 2013년 8월 8일에 시작이 되었다. 최소한 미국 내의 본당들은 거의 이즈음부터 예비자 교리과정이 시작되어 내년 부활절 즈음까지 계속된다. 천주교의 전통일까, 개신교에서는 어떻게 예비자의 교육을 시키는지 그 옛날에 본 기억이 있지만 하도 오래 전이라 기억이 나질 않는다. 분명한 것은 개신교의 전통은 ‘쉽게 쉽게’ 하는 것이라는 것과, 교육과정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총각 시절 잠깐 나간 적이 있었던 어떤 교회에서는 나보고 ‘거저’ 세례를 주겠다고 했던 적도 있었으니까.

나와 연숙은 1981년 가을부터 아주 특수한 상황하에서 예비자 교리공부를 시작해서 다음 해 1982년 부활절 때 영세를 받았다. 당시의 우리 본당이었던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의 한인천주교회에는 규모가 하도 작아서 정식 교리반 코스가 없었지만 그 무렵 신시내티 로 옮겨가셨던 전 주임신부 왕영수 신부님으로부터 직접 교리교육을 받은 것이다. 남들이 들으면 정말 우리보고 ‘행운’이라고 했다. 10명도 안 되는 소 그룹이 신부님과 마주하고 공부를 했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도 조금은 ‘행운’이었다. 왕영수 신부님의 절대적인 헌신적 노력이었다. 신시내티로 부터 콜럼버스까지 2시간 거리를 마다하고 일주일 마다 오셔서 가르쳐 주신 것이다.

 30 something의 그 나이에 신앙적 교육을 받는 것은 조금 힘든 상태였다. 머리는 굳을 대로 굳어지고 특히 나 자신은 더욱 천주교 교리가 쉽게 이해되거나 받아들여지지를 않았다. 최대한의 노력을 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른 예비자들에 비해 그렇게 뒤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머리 속에서 돌며 가슴으로 깊이 들어오지 못했다. 그런 때의 비결이 ‘무조건 믿어라’ 였는데, 그 말조차 믿을 수가 없었다. 연숙은 나와는 전혀 달랐다. 무언가 각오를 하고 노력하는 것이 느껴졌고, 결과는 나와 전혀 달랐다. 신부님 말씀대로 ‘정확히, 깊이’ 잘 받아 들였다고 했다. 우리의 신앙여정은 그때부터 사실 정도와 방향이 갈라지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이 교리공부는 내 가슴에 와 닿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30여 년 전, 그 때 ‘들었던’ 왕영수 신부님의 교리 가르침을 가지고 30여 년을 버틴 셈이다. 머리로 공부한 것, 거의 다 잊어버려도 하나도 신경을 쓰지 않고, 거의 냉담 상태로 오랜 세월 ‘허송’하다고 최근에 조금씩 고향으로 돌아오는 기분으로 교리란 것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 모든 신앙적 여건과 조건이 ‘급속히’ 호전되면서 이제는 교리과정이 ‘소로소로’ 나의 가슴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이제야 이해가 가는 것들이 참 많았다. 그것도 ‘완전히’ 이해가 가는 기분이었다.

 3년 전 레지오 마리애 에 입단을 하면서, 다시 교리교육에 관심을 두게 되었는데, 이유인즉 레지오 단원의 활동사항 중에 ‘교리반 지도’란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가두 선교는 나에게 맞지 않을 것이고 요사이는 그것이 그렇게 효과적이 아닐 수 있기에 더욱 교리반 활동은 나에게 appeal을 하였다. 연숙에게 물어보니..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라는 대답이었다. 교리교사는 아무나 하나.. 하는 식의 반응이었다. 그렇게 오랜 신앙생활을 한 연숙도 그것은 할 수가 없었는지..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 완전히 잊고 대신 나는 정식 교리과정은 아니지만 ‘좌우지간 천주교에 대해서 알아보자’ 하는 식으로 공부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 과정이 절대로 어렵지 않았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나의 ‘가슴이 활짝’ 열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길지 않은 ‘귀향’ 과정 끝에 결국 때가 슬그머니 찾아왔다. 우리들의 보호자 성모님께서 나의 사정을 보셨는지, 신부님 1 께서 조용히 부르셔서 우리부부에게 새로 시작하는 교리과정의 봉사자로 수녀님께 추천을 했다고 하셨다. 올해 들어서 새로 오신 수녀님께 완전히 교리반을 일임하신 듯 하고, 예전의 ‘체제’를 완전히 바꾸신다고 했다.

예전의 교리반 director라는 자매님만 남고 종전의 교리교사 제도를 완전히 없앤 것이다. 대신에 수녀님을 돕는 형식으로 ‘봉사자 제도’를 만든 것이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바꾸어야만 했는지 자세한 이유는 잘 모른다. 좌우지간 내가 레지오를 시작하면서 바라던 것이 이루어진 셈이고, 나는 정말로 성모님의 ‘전구’를 더욱 믿고, 감사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예전에 우리부부는 아틀란타 한국학교에서 ‘아이들을’ 오랫동안 가르쳐본 경험이 있어서 ‘가르치는 것’ 자체는 좋아하고 일반적인 technique도 생소하지 않지만 이곳은 다양한 연령층으로 이루어진 ‘성인 교육’이라서 지난 경험에 의존하는 것은 무리일 듯 싶다.

올해 등록된 예비자 숫자는 기대보다 훨씬 떨어져서 시작 단계에서 10명 내외였는데, 사실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다행이었다. 조그맣게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 ‘봉사자’의 역할은 수녀님의 ‘강의’ 뒤에 있는 나눔의 시간을 이끌어가는 것인데,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아직도 그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전혀 idea가 없지만 그저 모든 것을 맡기고 기다리고 있다. 만약 우리들의 경험담이 필요하거나 교리에 관한 질문이 있으면 그것에 성의 있게 도움을 주려는 각오를 하고 있을 따름이다.

첫날 모인 예비자들은 대부분 30대에서 60대까지 남자들이었고, 부부를 포함한 가족도 있어서 이채로웠다. 대부분이 가족이 신자였고,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나왔다고 해서, 그들의 가족에 대한 정성과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현재 나의 신앙여정을 생각하고, 레지오 단원임을 생각하며 우리는 이들과 같이 기필코 안전하게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도록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고 싶다.

  1. 하태수 미카엘 본당 주임 신부님

7월 넷째 주, 줄줄이 사탕..

World Youth Day 2013이 표현을 쓰며, 혹시 spelling checker가 불평을 하지 않을까 잠깐 생각하기도 했지만 의외로 깨끗한 ‘하얀’ 반응 (빨간 줄이 없는)을 보였다. 최소한 내가 매일 쓰는 Microsoft Notes가 쓰고 있는 spell-checker engine은 이 표현이 괜찮은 모양인가.. 나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한글사전은 아직도 한반도를 떠난 1973년에 고정이 되어있기에 한글은 항상 나의 관심사일 수 밖에 없다. 줄줄이 사탕은 나와 연숙이 쓰는 우리들의 ‘속어’로써, 무언가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을 말한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새겨서 들어 짐작을 하곤 할 것 같다.

 2013년 7월 21일로 시작되는 주일.. 무언가 줄줄이 사탕처럼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서, 조금은 미리 숨이 찬 느낌일까, 반은 기대, 반은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그런 심정이다. 23일 화요일은 평상적으로 우리의 자비의 모후 레지오 주회가 있는 날이지만 덤으로 그날에는 우리단원 실비아 자매님의 부군 Billie Neal 베드로 형제의 1주기 연도가 있다. 그러니까 미사 후에 연도를 하고, 의례적으로 상주가 준비한 점심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작년 7월처럼 올해의 7월도 세상을 떠나는 영혼들을 보내는 시간을 적지 않게 보내고 있다. 관혼상제 중에서 이 ‘상喪’ 은 우리 레지오 단원들에게 아주 중요한 것이라 나는 가급적 적극 참여하고 있다. 이런 곳을 찾고, 슬픔을 나누는 것은 물론 떠난 영혼과 가족들을 위한 것이지만 다른 쪽으로 나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되기도 했다.

이틀 후 7월 25일, 목요일은 ‘우리들이 1년 동안 기다리던’ 우리 레지오 단원이었던 고故 은요안나 자매님의 연도가 저녁에 예정이 되어있다. 암으로 오랜 투병을 했던 이 자매님은 운명 직전까지도 레지오 행동단원이었다. 작년 7월 26일 아침에 긴 투병생활을 마감하고 하느님의 품으로 갔고, 몇 년간의 투병생활에서 보여준 ‘믿음과 활동’의 생활은 우리들과 특히 나에게는 귀중한 교훈이 되었다.

그래서 그 자매님의 영혼을 기리는 연도가 더 빠른 시기에 있기를 기다렸지만 결국은 1년 주기가 되어서 열리게 되었다. 각각 다른 사연과 교훈을 주는 연도들이 많이 있었지만 나에게 가장 ‘가까운’ 연도는 아마도 이 은요안나 자매의 연도일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 다음날 7월 26일 금요일은 우리가 속한 천상은총의 모후 꾸리아 주관 2013년 레지오 피정이 시작되는 날이다.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2박3일 예정의, 집을 떠나는 진정한 피정(retreat)이고, 우리 부부도 올해 처음으로 육체적으로 집을 떠나는 다른 의미의 휴가, vacation가 된다. 집을 밥 먹듯이 떠나며 휴가를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이런 2박3일의 피정이 별 것이 아니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조금 사정이 다르다.

연숙은 꾸리아 간부이므로 준비와 진행과정을 꿈속에서 볼 정도로 일이 많아서 stress까지 느끼고, 나는 비록 수동적으로 참가하는 단원이지만 ‘간부의 spouse’ 이기에 나에게도 무언가 일의 불똥이 튀는 것은 피할 도리가 없다. 하태수 주임신부님이 같이 retreat center에 기거하며 우리를 지도해 주시게 되어있는데, 이 하태수 신부님의 주일 강론을 가끔 들어보면 우리와 무언가 잘 맞는 느낌이 많이 들고 ‘학구적’인 각도가 많아서, 최소한 지루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부터 1주일간은 사실 몇 년 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따르는’ World Youth Day 2013 행사가 브라질 항구도시 Rio de Janeiro의 유명한 코파카바나 Copacabana 해변에서 남미 아르헨티나 출신(브라질의 바로 옆 나라) 출신 새 교황님 프란치스코 교황이 참가한 가운데 펼쳐진다. 조금 있으면 성인이 되실 내가 진정으로 존경하는 요한 바오로 2세, John Paul II, 가 젊은이들에게 ‘다른 희망’을 주고자 1985년경에 시작한 이 ‘멋진 행사’는 이제 관록이 대단하고, 이곳에 참가한 많은 청년들이 나중에는 성소를 받고(하느님의 부르심), 다름 세대의 universal church를 이끌기 시작하고 있다.

역시 요한 바오로 2세의 선견지명이 그 동안 뿌린 씨앗들의 수확을 거두고 있고, 이런 ‘세계적 행사’를 통해서 계속 씨를 뿌리고 있다. 이제는 인터넷 같은 신세대 매체의 도움으로 이들은 아주 효과적인 선교를 하고 있는데, ‘한 물이 간’ 우리 세대에 까지 이렇게 ‘도움’을 주고 있음에 그저 ‘성인이 되실’ 요한 바오로 2세에게 감사를 드린다. 2년 전 스페인 마드리드의 대회도 관심을 가지고 나는 이 의미 있는 행사를 ‘따르며’ 보았는데, 올해는 과연 얼마나 가까이 따르게 될는지는 미지수이다.

무언가 많은 이번 주 일주일이 지나면 7월도 거의 끝나게 된다. 이 아틀란타 지역의 올해 기후가 완전 ‘이상, 이상, 이상’ 해서 한 여름 같은 느낌을 잊을 정도지만 절대로 불평은 없다. 8월이 시작되면 역시 기울어지는 여름이 될 것이고 찬 바람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8월부터는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2014년 부활절 목표로 신 영세자 교리반이 시작되는데 올해부터는 format이 완전히 바뀌어서 새로 부임해 오신 ‘진짜 국산 수녀님’의 주도로 진행이 되고, ‘어쩌다’ 우리 부부도 ‘봉사자’로 ‘곁다리’를 들게 되어있어서 우리부부의 ‘교리실력’에도 많은 보탬이 될 것을 기대하고 있는데.. 누가 알 것인가.. 어떻게 될는지.. 하지만 우리들의 ‘중재자’, 어머님께 모든 것들이 잘 되도록 부탁해 본다.

17세의 생애, viewing과 연도

김민호 프란치스코, 17세의 소년.. 어떻게 그런 100% 희망의 나이에 우리들의 곁을 떠날 수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우리의 머리 속을 완전히 지배하던 어제였다. 3일 전, 요사이 뜸하던 ‘위중한 환자기도’의 소식에 우리들은 ‘서서히’ 환자기도를 시작했지만 너무나 빠른 ‘병의 진행’으로 그제에는 신부님의 병자성사가 필요할 정도로 위독한 상태가 되었고 어제 아침에 그 17세의 소년은 고요히 눈을 감았다. 병명은 역시 ‘암’의 일종인 ‘투명세포육종’이라는 희귀한 것이었다.

레지오 입단 3년이 다가오는 나는 그 동안 많은 죽음을 보았고 연도, 장례미사를 하였지만, 이렇게 ‘누구나’ 100% ‘언젠가’ 거쳐야 하는 ‘과정’은 정말 100% 모두 다른 사연과 과정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평균’ 수명을 다 채우시고 떠나는 분들은 비록 다행인 case라고 할 수도 있지만 다른 편으로는 그 수명 동안 겪은 수많은 사람들, 경험들과 이별을 하는 고통이 따르고, 반대로 이번의 17세 소년의 case는 평균적인 인연과 경험을 못 보고 떠나 보내야 하는 슬픔의 고통이 따른다. 역시 이것도 공평하다고 할까.

이럴 때는 어떤 말로 유족들을 위로해야 할까.. 그저 간단하게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는 너무나 형식적인 것일까? ‘더 좋은 곳으로 갔을 겁니다.’ 는 사실 맞는 말인지도 모르지만 조금 오해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그래도 나는 그 애가 내 옆에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하는 반응이 나온다면 분명히 그 말은 그 부모를 더 슬프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조용히 hug이나 눈의 맞춤으로 슬픔을 같이 나누는 것이 제일 ‘안전’하고 좋지 않을까. 또한 이럴 때 조금이라도 ‘희망’을 주는 것이 바로 우리 가톨릭 장례의식 중, ‘연도’임을 어제 또 절감하게 되었다. 우리들 전에 이미 떠난 그 수많은 성인의 이름을 열창하며 17세 소년을 받아 주시라는 기도는 듣거나 참가해본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그 의미나 느낌을 모를 것이다.

 

장례미사를 다녀와서..

모처럼 하늘의 습기가 가신 후, 청명한 날씨가 된 오늘 정오에 고인 김군의 부모가 속한 본당 ‘아틀란타 한국 순교자 성당’ 에서 장례미사가 입추의 여지없이 대성당을 꽉 채운 가운데 치러졌다. 부모님이 성당 공동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상태여서 어떤 조문객이 올지 나에게는 미지수였지만, 어제 viewing에 온 상당한 숫자의 ‘미국 친구’들을 보고 아마도 반 수 이상이 ‘영어권’ 일 것이라 짐작을 하긴 했다. 나의 짐작은 맞았지만 결과적으로 ‘영어권’ 조객이 압도적으로 많이 참석을 했다.

성당 parking lot에 아틀란타의 ABC-TV affiliate(계열방송사)인 Channel-2의 crew van이 있었고 camera까지 준비하는 것을 보고, 대강 이 김민호군의 됨됨이를 짐작하게 되었다. 이태리 계통인 우리 본당 주임신부님은 아직도 영어권 문화가 서먹하신지 전례해설자에게 모든 ‘영어 소통’을 의뢰하신 모양으로 대부분의 ‘영어권 친구 친지’들은 소수의 ‘한국어’ 권 신자들을 따라서 그들에게는 생소할 수도 있는 로마 가톨릭 식의 미사에 참여를 하게 되었다. 이런 조금 다른 식의 미사도 사실 큰 무리가 없음을 이번에 나는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가톨릭 전례는 한마디로 universal한 것으로 같이 동참하여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미사를 통해서 ‘공식적’으로 고인을 하느님께 의탁하는 절차를 거치는 것이지만 우리들은 과연 김민호 프란치스코 군이 어떤 인물인가에 더 관심이 많았다. 성전을 꽉 메운 그들을 보면 그것을 짐작하기는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그의 성품, 추억, 행적을 간접적으로 그들의 얼굴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사(eulogy)가 그것을 직접적으로 알게 해 주었다. 김민호, Nicklaus, Francis군, 그는 한마디로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던 17세였다. 한국적인 예절이 몸에 배인 것도 그렇고, 모든 일을 착실히 최선을 다하던 그였고, 그렇다고 해서 ‘지루한 공부벌레’도 아닌 유머감각이 있던 정말 크게 인생을 살 수 있을, 무언가 큰 업적이라도 낼 듯한 잠재력을 지녔던 고교생 이었던 것을 우리들은 그 조사를 통해서 직감적으로 알게 되었다. 안타까운 심정은, 주위의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줄 수 있는 그가 지금 ‘육체적, 물리적’으로 우리들을 떠났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그는 운명 직전 가족들에게 마지막으로 I love you all..이란 말을 남겼다는 것으로 그는 사랑이 충만한 한 고귀한 젊은 영혼이었음도 알게 해 주었다.

김군을 일찍 하늘나라로 데려가게 한 직접적인 원인, ‘투명세포육종(Clear Cell Sarcoma)’ 이라고 불리는 특이한 암, 이 비교적 희귀한 병은 그렇게 치유 율이 높은 것은 아니었다. 왜 이병에 걸렸으며 왜 그렇게 1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게 했는지 누가 알겠는가? 이것이야 말로 하느님 영역에 속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만 절감하게 된다.

생각한다. 아니 이제는 믿는다. 김민호 군의 ‘불멸의 영혼’은 지금 괴로웠던 육신을 떠나 (미사 후 곧바로 화장이 되었다) ‘훨훨’ 하느님의 영역에 돌아갔거나 돌아가고 있고 아마도 장례미사를 하는 우리들을 미소 머금은 모습과 마음으로 보고 있으며, 괴로워 할 가족들을 보며 위로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 이제는 믿는다.

4월, 그리고 노래들..

Nasty, bone-chilling, dreary, surreal..우아~ 올 봄은 참 유난스럽다. global warming이 무색하게 global chilling이 더 자연스럽게 들릴 정도가 아닐까.. 작년 3월 말을 자꾸 기억함은 그 당시의 ‘찬란했던 꽃나무들의 향연’ 과 지금이 너무나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일주일 전에 ‘이제는 설마..’ 하며 space heater를 부지런히 closet 속으로 퇴각을 시켰고, 침대의 무겁던 이불도 가벼운 것으로 바꾸어 놓고, 조금씩 겨울 옷들도 눈 여겨 보고 있다가 결국은 오늘 bone-chiller를 다시 만난 것이다.

싸늘한 비바람에 채 피지도 못한 배나무 꽃망울들이 처참하게 떨어진다. 게다가 올 2~3월의 평균을 밑도는 기온은 아마도 ‘무지하게 더운’ 봄과 여름을 예상케 한다. Mother Nature의 연 평균기온은 거의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이건 조금 우울한 뉴스가 아닐까?

 

채 못핀 꽃나무들이 숨을 죽이고 있는 2013년 봄

4월은 조금 어깨를 무겁게 누르는 것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tax return chore, home-association due, ‘big’ insurance dues.. 모두 $$을 ‘빼앗아’ 가는 것들 뿐이라 정말 즐겁지 않은 것들이다. 하지만 이것이 ‘인생’이 아닌가.. 내야 할 것은 내야 하는 것이. 4월 7일 일요일은 작년부터 생각하며 지나게 된 ‘자비의 주일’이다. Divine Mercy Sunday.. 폴란드 출신 성녀 Faustina가 예수님께 ‘직접’ 지시를 받았다던 그 자비의 기도를 줄줄이 생각하게 하는 그 날이다. 이 날을 향한 9일 자비기도를 우리는 묵주기도가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하게 되었는데, 거의 일년 만에 하는 것이라 처음에 생소했지만 곧 익숙하게 되었다.

그 다음 주일 4월 14일에는 월례 꾸리아 월례회의가 있어서 몇 달 전부터 시도한 ‘한 달에 한 번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미사참례’ 를 할 예정이다. 아주 조심스레 ‘고향’을 찾는 기분으로 시작을 했지만 아직도 ‘100% 한국식 미사의식’이 ‘신기하고 생소’하게 느껴짐을 부정할 수가 없다. 물론 처음보다는 조금 익숙해졌다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날은 multitasking의 기분으로 ‘오래된 형제’ 설재규씨를 만나기로 해서 더욱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 다음 주일 4월 21일, 우리가 속한 레지오 전체가 가까운 곳에 위치한 park로 ‘야외행사’를 가는 날이다. 말이 야외행사지만 사실은 picnic에 가까운 것이 비록 ‘레지오 의식’으로 시작은 하지만 결국은 친교를 위한 ‘여흥’인 것이다. 작년에 나는 처음으로 참가를 했는데, 청년 단원들이 아주 조직적이고 재미있는 program을 준비해 와서 아주 즐거웠던 기억이다. 날씨도 참 화려했었는데, 올해는 어떨까.. Shelter가 있으니까 최악의 사태에 대한 걱정이 없어서 다행이다.

4월부터 6월 초까지는 사실 부활의 연장에 있는 사실 ‘즐거운’ season이고 특히 5월 한달.. ‘성모성월‘이 도사리고 있어서 이제는 예전처럼 크리스마스가 있는 12월보다 더 나를 포근하게 만든다. 참.. 나도 많이 변했다. 그래서 또 되 뇌 인다.. Never Say Never라고..

4월이면 생각나는 노래가 있다. 매년 듣는 것으로 상고사적 때, 중앙고 음악선생님 김대붕 담임 선생님의 애창곡 ‘이대교수 김순애‘ 작곡, 박목월 시인 작사 ‘4월의 노래‘.. 그리고 그보다 훨씬 전에 기억에 남아있던 Pat BooneApril Love.. 우리 가곡 4월의 노래는 정말로 우리가 느끼는 그 옛날 고국산천의 4월을 연상케 하고, Pat Boone 것은 이곳에 오래 살면서 배어온 이곳의 정취를 느끼게 하고.. 나는 과연 어느 곳에 있는가..

 

 

April LovePat Boone, 1957

 

‘목련꽃 그늘 아래서..’, 4월의 노래

Ash Wednesday 2013, Lenten wishes

 

For you are dust, and to dust you shall return. – Genesis 3:19

 

어느덧 사순절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이 내일, 코앞으로 다가왔다. 2013년 Lenten season이 시작되는 것이다. 오늘은 ‘금욕과 극기’의 40일을 조금이라도 늦추려는 듯 안간힘을 쓰는 ‘살찐 화요일 , Fat Tuesday: Mardi Gras‘, 아마도 New Orleans는 이것으로 오늘 하루 종일 떠들썩 하지 않았을까?

재의 수요일, 2013
재의 수요일, 2013

나의 매년 매년 재의 수요일과, 그에 따르는 사순절은 느낌도 달라지고, 의미도 다르게 느끼며, 무언가 조금씩 ‘발전’하는 듯 느낀다. 이것은 정말 나에게 만족스러운 현상이다. 이 나이에 나에게도 이렇게 ‘발전’하는 것이 있다는 것은 내 자신도 믿어지질 않는다.

작년의 사순절 때와 나는 한 살 더 먹은 것 이외에 무엇이 달라졌을까.. 생각한다. 작년에 비해 올해 나는 더 많은 영혼들과 작별을 했고, 그런 와중에 나는 ‘역사적’인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 마리아 (St. Louis Marie de MontFort)의 ’33일 봉헌’과 그 뒤에 따르는 우주관의 격한 변동을 경험하였다. 이것이 작년에 맞은 사순절과 올해의 차이일 것이다. 이것을 발판으로 올해 40일에 나는 무엇을 ‘바치고 바랄’ 것인가?

예년에 하던 통상적인 아침 커피 피하는 것 같은 것은 이제 조금 그 매력이 떨어졌다. 우리 Holy Family 성당 주임신부님도 ‘하지 않는 것’ 보다 ‘더 하는 것’에 신경을 쓰라고 하신다. 나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짐작이 간다. 더 적극적인 삶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라는 뜻일 것이다. 무엇인가 절약을 했거나 삼가 했으면 그것을 누구에게 준다거나, 레지오의 정신으로 이웃에게 본격적으로 선교를 한다던가 하는 것들이 ‘적극적’인 것 들일 것이다. 구체적으로 나는 어떤 ‘적극적’인 것들을 하여야 할 것인가..

Rediscovering Catholicism작년 7월 중에 했던 위에 말한 ’33일 봉헌’.. 그것을 할 당시에 나는 더위와 싸우며, 계속되는 장례, 연도, 슬픔, 이별 등을 경험할 때였다. 그래서 그 ‘봉헌’이 의미는 더 있었을 것이겠지만 정성을 들여 집중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번 사순절에 다시 그것에 ‘도전’을 할까 생각 중인데, 아마도 하게 되지 않을까? 그것 이후에 내가 ‘받았던’ 것들을 생각하면, 정말로 이것은 우선 순위 중에 으뜸일 것이다.

그 동안 ‘천천히’ 읽어오던 책, Matthew Kelly의 걸작, 책 Rediscover Catholicism을 정독, 완독을 하면 어떨까? 교황 베네딕트 16세의 은퇴 선언으로 다시 교회는 앞으로 갈 길을 찾는 기로에 서있어서 이 책은 정말로 의미가 있을 듯 하다. 이런 것들.. 다 좋지만 역시 레지오 단원으로써 제일 값진 것은 ‘헤매는 영혼을 구하는 것’, 그러니까 새로운 ‘전사, 단원’을 찾아내는 것인데 이것은 현재 나에게는 거의 Mt. Everest처럼 높게만 보인다. 앞으로 가야 할 시간은 많지 않고, 이렇게 할 것은 많은데 어떻게 이런 것들 현명하게 풀어나갈 것인가.. 역시 어머님의 도우심이 필요함을 절감한다.

Our Mid-Winter Classic

지나간 일요일, 1월 27일은 ‘피로하게만 보이는’ 우리 집에 때아닌 대청소 하던 소리가 들렸다. 얼마만인가.. 머리 속의 ego만 커진 아이들이 떠난 우리 집은 고요하기만 하고, 별로 어질러 놀 만한 것도 없지만 보이지 않는 먼지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의 대 청소는 아래층에만 있었다. 위층까지 할 힘도 없고, 절실한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청소를 했던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Guest들이 오기 때문이었다. 얼마 만에 오는 손님들인가..

이번의 모임은 내가 붙인 이름이 ‘mid-winter classic‘ 이다. Mid-Winter는 1월 말에서 2월 초 정도에 있다는 뜻이고, classic은 이 모임이 그만큼 오랜 전통을 자랑한다는 뜻이다. 얼마나 오래 되었을까.. 아마 15년은 되었을 듯 싶다. 이 정도면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닐 것이다.

4집 부부(가족)가 ‘가끔’ 모여서 저녁식사를 같이하는 이 그룹은 시작이 15년 전쯤, 서울고,서강대 출신 최동환 (Phillip Choi), aka, ‘최형’ 과 연관’이 되면서 시작이 되었다. 그 훨씬 전에 우리 부부가 아틀란타 한국학교 에서 가르칠 때, 나의 반에 최형의 외동 딸, 진희(Alicia)가 있었고, 최형은 ‘아빠’로서는 드물게 학교에 얼굴을 보이곤 했었다. 그때 그의 인상이 참 자상한 아빠로 남았고, 항상 웃는 모습도 좋은 인상으로 남았던 기억이다.

우리가 한국학교를 떠나면서 헤어지게 되었지만, 또 다른 인연이었을까.. 우리 작은 딸 나라니와 한국학교에서 같은 반에 있었던 인연으로 나라니의 생일에 진희를 부르게 되었고,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런 때에는 대부분 엄마들이 아이를 데리고 오곤 하는데, 그 당시 진희는 꼭 아빠가 데리고 왔기에 나와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사실 이것이 인연이었다. 엄마가 데리고 왔더라면.. 아마도 이런 것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항상 웃고, 얘기를 좋아하는 최형 성격 덕분에 우리는 금새 통성명을 다시 하고 보니 그는 서울 최고 명문인 덕수국민학교, 서울고등학교, 서강대 화학과 출신으로 현재는 ‘사업’을 한다고 했다. 그 후에 우리 집 근처의 어떤 한국식당에서 정말 우연히 최형 가족과 우리 가족이 같이 식사를 하게 되는 다른 ‘우연’을 맞게 되고, 드디어 진희 엄마도 보게 되었다. 둘 다 나이가 우리부부보다 한두 살 정도 아래였던 이곳에서 ‘고르기’ 힘든 부부 ‘친구’를 얻은 기분이었고, 그 이후 우리는 서로의 집을 왕래하며 식사를 나누게 되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친구’를 별로 사귀기 꺼리며 살던 나도 이런 모임은 거부감이 없었다. 정말 오랜만에 ‘친구 수준의 한국말’을 다시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이가 비슷한 것은 참으로 좋은 것인가..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 수도 없이 많기 때문일까.. 추억의 역사를 공유한다는 것은 이렇게도 좋은 것일까.. 만나기만 하면 어렸을 적 서울거리를 회상하며 열변을 토하곤 했으니까..

최형은 역시 성격 ‘탓’인지 사람들을 좋아하며, 잘 사귀었고, 특히 가깝게 지내던 ‘친구’ 가족들이 몇이 있었다. 곧바로 자연스레 우리는 그들과 같이 모이게 되었다. 그 중에는 Ohio State동문인 나이가 한참 밑(10살 이상)인 ‘전 사장’도 있었고, 최형의 서강대 동문인 윤형, 지금은 2005년에 타계해서 없는, 이대부고,경희대 출신 박창우씨가 있었다. 그렇게 모인 사연이 참 다양하고 재미있어서 아주 인상적이었고, 역시 최형의 ‘사람을 끄는 힘’이라는 공통분모가 이모임에 있었다고 느낀다.

직업도 다양해서, 최형네는 jewelry wholesale, 윤형댁은 liquor retail, 전사장네는 Italian Furniture, 박창우씨 댁은 fashion clothing retail.. 그러니까 이들은 모두 전형적인 businessmen들이었다. 나만 예외적으로 비교적 시간의 여유는 있지만 항상 cash가 모자라는 월급쟁이여서, 항상 나는 ‘공통관심사 화제’에서 애를 먹으며 그저 이 ‘이상한 나라의 얘기’를 듣기만 하곤 했다.

이중에서 2005년 여름이 정말 아깝게 타계한 박창우씨, 생김새에 비해서 호탕하고, 잘 놀며, 활달한 사람, 서울 명동을 중심으로 한 젊은이의 중심지에 대한 해박한 경험과 기억력은 우리를 항상 놀라게 했다. 특히 어느 곳에 무슨 술집, 다방이 있다는 것은 정말 ‘사진과도’ 같은 기억력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나는 이 ‘양반’의 얘기가 제일 재미있었고 실감나고, 흡사 time machine을 타고 1960-70년대를 간 것과 같은 기분에 빠지곤 했다. 특히 ‘동네 친구’인 트윈 폴리오 folk duo 중에 윤형주에 대한 이야기, 당시의 명소였던 명동 OB’s Cabin 에서 술김에 노래를 부르던 조영남을 ‘팼던’ 이야기 등등.. 나에게는 주옥과도 같은 이야기들.. 언제까지나 들으려 했지만 하느님도 무심하시게 너무도 일찍 데려 가셨다.

이날 모임에서 나를 놀라게 했던 소식은, 최형의 외동 딸, 진희 (우리 딸 나라니 친구)가 놀랍게도 우리가 활동하고 있는 레지오 마리애의 ‘활동단원’이 되었다는 사실.. 나에게는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진희는 아주 자유분망 (easy going)해서 어떻게 이렇게 ‘조직적인 신심단체’에 가입을 했을 까 상상이 되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세대적인 격차를 초월해서 꾸리아 모임에서 그 ‘애’를 보게 될 생각을 하니..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해야 할까 하는 생각에 사실 당황을 할 정도였다. 이것은 정말 ‘좋은 소식’일 것이다.

2012년 12월 24일

Silent Night.. Holy Night, 2012

Silent Night.. Holy Night, 2012

¶  새벽 잠결에 무언가 세차게 똑똑 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어렴풋이 밝아오는 새벽, 밖을 보며 그 소리가 무엇인가를 알아차렸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주제넘게’ 비가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새빨갛게 떠오르는 태양이 가득한 성탄 전날 보다는 아마도 이렇게 잿빛하늘이 사실은 더 포근한 감을 주어서 좋다.

올해의 성탄은 예년과 조금 다르게 기다린 셈이다. 제일 눈에 뜨이는 것은 이제까지면 12월 초부터 ‘노상’ 즐겨 듣던 주옥 같은 크리스마스 캐럴을 올해는 ‘거의’ 듣지를 않았다는 사실이다. 내가 기억하는 한 이것은 아마도 처음이 아닐까.. 그것과 비슷하게 holiday decoration도 며칠 전까지 피하고 살았다. 물론 나이 탓도 있었겠지만, 사실 올해는 정말로 성탄의 뜻에 더 생각하고 싶었다. 그것이 전부다.

 

¶  12월 24일.. 오늘은 조금 특별한 날이다. 내일 성탄을 하루 남긴 오늘, 우리의 한국본당 주임신부, 하태수 미카엘 신부님의 영육간의 건강을 위한 전 레지오 단원들의 묵주고리기도가 그 대장정의 막을 내리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난 3월 26일 사순 제5주일 시작되던 월요일, 주님탄생예고 대축일 날부터 시작이 되었다.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소속 전 레지오 단원이 하루에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단수의 묵주기도를 하는 것인데, 밤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대에 골고루 나누어져서 끊임 없이 돌아가며 바치는 기도.. 그래서 고리기도였다. 주임 신부님을 위한 것이지만 결국은 우리 레지오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하루에 한번 ‘빠지지 않고’ 정해진 시간에 5단내지 10단을 바치는 것.. 정말 신경이 많이 쓰이는 것이었다. 잊지 않으려고 숫제 cellphone에 alarm을 해 놓아서 사실 잊을 수는 없겠지만, 그 시간에 하던 것을 접어두고 묵주기도를 바치는 것은 실제적으로 거의 불가능할 때도 많았다. 그렇게 해서 몇 번은 한두 시간 지연되기도 했지만, 기적적으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오늘 마지막을 장식했다.

조금 더 의미 있는 기억도 있었는데, 7월 26일 우리 자비의 모후 쁘레시디움 단원 은요안나 자매가 기나긴 암투병 끝에 선종을 하셨고, 나는 곧 이어서 그분이 시작했던 고리기도를 이어 받아서 오늘 끝낸 것이다. 내가 원래 하던 것은 연숙이 덤으로 맡아서 했는데, 이것을 물려받아 할 때마다 저 세상에 가신 요안나 자매를 생각하며 묵주기도를 바치곤 했다. 올해는 참, 이런 뜻 깊은 기억들이 제법 있었다.

 

¶  매년 성탄절이 다가오면 조심스럽게 각오를 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지난 일년 동안 ‘못 보았던’ 친지들에게 성탄 카드를 ‘우체국의 우편’으로 보내는 것이다. 전통적인 종이로 만든 카드와 인터넷으로 보내는 ‘가짜 카드’는 정말 의미와 느낌이 다르다. 편하다는 한가지 이유로 모두들 그것을 보내지만, 받아보는 입장은 그렇게 마음이 편하지 않다.

문제는 그 진짜 카드를 진짜로 써서 진짜로 우체국 편지로 보내는 것이 왜 그렇게 힘이 든단 말인가? 올해는 결국, 보기 좋게 실패를 해서 딱 2통의 진짜 카드를 신부님께 보낸 것이 전부가 되었다. 성탄 전야에 이제는 조금 마음이 편한 것이 이제는 모든 것이 늦었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석연치 않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비록 가짜 카드지만, 조금 더 정성을 들이면 안 될까? 그렇다.. 진짜 카드를 인터넷으로 ‘보여주면’ 되지 않을까? 그래서 부지런히 진짜 카드를 scan을 하고 사연을 이렇게 써 본다.

 

죽마고우 원서동 크리스마스의 환상

죽마고우 원서동 크리스마스의 환상

내가 알았던 모든 친구들.. 그 중에서도 원서동 죽마고우들: 최승철, 김동만, 안명성, 박창희, 손용현, 유지호.. 비록 서로의 늙어가는 모습은 못 보고 살지만 마음 속에 간직된 어린 우정은 하나도 변함이 없다. 성탄과 새해에 어디에 살건, 어떻게 살건 간에 건강하기 바란다!

Servicing ‘Curia-PC’

Curia-PC? Curia, PC.. Curia pc.. 꾸리아 PC.. 3년 전만 해도 이것이 무엇인지 짐작 조차 못했을 것이다. 이제는 99% 무슨 뜻인지 안다. 여기서 curia는 로마군단 내의 조직이 아니고 레지오 마리애 조직 중의 하나일 것이다. 군대로 말하면 여러 소대를 관할하는 중대 급에 속한다고 나 할까. 그러니까 꾸리아 조직에서 쓰는 컴퓨터일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가 속한 레지오(마리애)를 관할하는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소속 ‘천상은총의 모후’ 꾸리아를 말한다.

얼마 전, 자세히 말하면 12월 초, 그 당시에 있었던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를 치르면서 알게 된 것이 꾸리아 간부들이 쓰는 (정확히 말하면 서기가 주로 씀) Windows laptop pc가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이었다. 그 Windows 7 laptop pc를 직접 내가 보게 되면서 자연스레 내가 관여하게 되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레지오 용어로 ‘본당협조 활동’에 속하는 일을 내가 맡게 된 것이다.

나에게, 이런 종류의 일은 사실 ‘일’이라는 생각보다는 ‘시간 보내기 딱 맞는’ 그런 ‘즐거움’에 속한다. 문제가 있다면, 여기에 깊이 빠져들면, ‘실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로 빠져들어서 ‘해야 할 것을’ 미루거나 할 정도로 될 때도 있다는 사실이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것도 잘 절충을 하는 지혜도 생겨서 예전과 같은 큰 문제는 없다. 나는 이것을 쉽게 말해서 ‘공돌이’ 기질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호기심으로 인한 ‘새로운 것을 알 수 있는’ 그런 기회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비교적 복잡하게 발전한 근래의 Windows PC는 깊이 알려고 하면 그 속에 무궁무진한 ‘기술’들이 축적이 되어 있어서 이것과 더불어 보내는 시간이 절대로 낭비가 아닌 것이다.

OLYMPUS DIGITAL CAMERA1~2 년 전에 구입했다는 이 pc는 model이 HP G73-B66US, 2010년 경에 나온 것으로 Microsoft Windows 7 (64bit), 4GB, 2400 MHz Intel Core i3, 500GB HDD.. 등등으로 상당히 빠른 system이었다. 꾸리아 사무실에서 처음 보았을 때 보게 된 문제 중에는, 우선 BSOD(blue screen of death, system crash) 같은 심각한 것을 비롯해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system전체가 느리게 ‘돌고’ 있었고, battery 가 너무나 빠르게 discharge되는 등.. 한마디로 무언가 큰 문제가 있어 보였다. 크리스마스 씨즌으로 접어 들면서 꾸리아의 일도 바쁘지 않아서, 아예 pc를 집으로 가지고 와서 더 자세히 보게 되었다.

Booting을 하면, 5분도 되지 않아 blue screen으로 crash를 한다. Safe mode로 booting을 해 보았다. 5분이 지나도 별 문제가 없었다. 분명히 Windows core system file이 corrupt된 것이다. 최소한 safe mode에 ‘시간을 벌 수’ 있기 때문에, safe mode에서 systems diagnostic을 해 보니, 분명히 두 가지 문제가 발견 되었다. Hard-disk의 SMART built-in testing에서 disk가 error threshold를 넘어 섰는데, 한마디로 disk가 ‘죽어가고’ 있는 과정이었다. 또 다른 problem은 역시 internal battery가 이미 ‘수명’을 넘긴 상태였다.

이제는 뒤를 돌아 볼 시간이 없다. 현재의 disk data를 빨리 ‘살려서’ 옮겨야 하는 것이다. Safe mode에서 file copy는 비교적 간단하고, 더욱이 usb flash drive(thumb drive) 를 쓰면 더욱 간단하다. 또한 현재 이 pc에는 그다지 중요한 data file가 많지 않았고, 대부분이 MS Office file이어서 file의 크기가 문제가 되지를 않았다.

Data를 살려 낸 뒤에는 500GB 2.5″ hard-disk와 battery를 교체하게 되었는데, 이것으로 비용만 $100 이 쓰였다. 그 다음 과정은 사실 시간은 걸려도 비교적 straightforward한 routine으로 생각이 되었지만, 사실은 우여곡절, surprise가 참 많았다. 제일 놀란 것이, Windows 7 system recovery disk가 요새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아예 stock hard-disk의 partition 자체에 그것이 있어서 이론상으로는 다시 recovery가 가능하지만 이것은 정말 귀찮고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다. 거기다가, 만약에 최악의 경우, 그 recovery partition이 corrupt가 되면 그때는 속수무책, HP에 연락을 해서 ‘진짜’ Windows 7 disc를 받아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그런 최악의 사태로 가지는 않았다. 내가 손수 그 recovery disc를 ‘구워’ 냈기 때문이다. 그것만 있으면 앞으로 같은 문제가 생겨도 당황하지 않고 즉시 고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과정이 참으로 시간이 ‘엄청’ 걸렸는데, 어려운 것은 아니더라도 시간으로 치면 참 ‘비싼’ 작업임에 틀림이 없었다. 이렇게 해서 새로 태어난Windows 7 system은 정말 새로 샀을 때와 같이 ‘날라가는’ 기분을 느끼게 할 정도로 모든 program들이 run을 했고, 그 동안 ‘이상하게 돌아가는 컴퓨터’로 고생을 하던 꾸리아 서기님도 마음을 푹 놓고 쓰게 되리라는 생각을 하며, ‘본당협조’의 일을 끝냈다.

전화 유감 電話有感

몇 달 전부터 이것에 대한 것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시각적으로 눈으로 봐야 하는 나의 글이 아니고 눈을 편히 감고, 잘 안 보이는 희미한 글자나 그림 대신에 나의 살아있는 ‘육성’을 나의 그리운 가족과 친구들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 그런 꿈같은 상상을 하다가..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 현재 내가 가장 부끄럽고 창피하고 부족하게 느끼는 것이 바로 육성을 쓰는 ‘진짜 전화’ 대화임을 나는 잘 안다. 가장 싫은 것 중에 하나가 전화로 하는 대화들, 언제부터 그렇게 피하고 싫어했을까? 지금은 거의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수도 없이 걸려오는 telemarketing, anonymous call들, 그런 것들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불편하고 피하고 싶은 ‘인간’들과 말을 나누는 자체를 상상하기 싫었다. 그러다 보니 caller-id 를 보며 귀찮은 사람의 전화는 숫제 받지를 않게 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email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었는데, 상상외로 이런 삶의 방식이 부드러운 것은 아니었다. ‘반 사회적 anti-social’ 으로 가는 느낌까지 들 때도 많았다.

나의 전화사용이 거의 내가 필요할 때만 (내가 먼저 거는 것만) 하게 되기 시작하면서, 횟수도 점점 떨어지고, 나에게 걸려오는 전화도 따라서 줄어갔다. 잘 받지 않는 전화.. 누가 하겠는가? 내가 생각해도 이것 너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혹시 전화로 이야기를 하게 되어도 그 대화는 내가 바라는 것처럼 편한 것들은 아니었다. 내가 언제 마지막으로 ‘신나는 전화대화’를 ‘즐겼던 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다.

이런 문제들이 2년 전에 레지오 마리애에 입단을 하고 단원활동을 시작하면서 내가 풀어야 할 과제로 간주가 되었고, 약간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레지오의 거의 모든 business가 ‘아직도’ 전화가 제일 효과적이기 (빠르고, 확실하고) 때문인데, 그것은 아직도 email을 안 쓰거나 못쓰는 사람들이 상당수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다시 활발하게 전화 하는 것.. 그것이 생각만큼 쉽지를 않았다. 너무나 ‘조용한’ 나만의 comfort zone 에 나는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10여 년 동안 email을 쓰는 ‘일반’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서 전화로 ‘실시간 real-time’ 대화가 없는 생활이 우려하는 만큼 치명적으로 불편한 것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말을 하지도 않고 듣지도 않고..) 살아가게 되었기 때문이다.그래서 내가 제일 ‘존경’하는 부류의 사람들은 ‘전화 잘 걸고 잘 받고, 잘 하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었다. 나의 인생 반려자인 연숙이 바로 그런 부류에 속한다. 어쩌면 그렇게 전화를 ‘용감하게’ 잘 사용할까.. 그 중에서도 제일 놀라운 것이 바로 이것이다. 전화 벨이 울리면 ‘99.99% 무조건’ 받는 것이다. 육체적으로 불가능한 상태를 제외하고는 식사를 하건, 화장실에 있건 상관이 없다. 전화를 거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정말 ‘고마운’ 일임에 틀림이 없다. 나에게 전화가 오면 99.9% 통화가 안 되고 연숙은 정 반대로 99.9% 받는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아마도 ‘고철’같은 레지오도 초현대 디지탈의 편리함에 서서히 변할 것이지만 그래도 그래도 email이나 instant messaging 같은 것.. 전화의 간단 편리함은 ‘절대로’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내가 레지오 활동을 더 적극적으로 하려면 이 전화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고, 더욱 높은 차원의 협조를 구해야 할 지도 모른다.

Advent 2012, 대림절

거짓말 조금 보태서 바로 엊그제Advent 2011을 지낸 느낌이 들 정도인데.. 이 나이에 너무나 진부한 표현일 것 같다. 60대에서 60마일로 세월이 흐르고 70대에는 70마일로.. 아주 공감이 가는 말이기도 하다. 아마도 그것은 작년 대림절을 비교적 실감 있게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슬그머니 12월 1일, 2012년의 마지막 달로 접어들었다. 무언가 또 거의 뚜렷한 이유 없이 머릿속이 바빠지는 느낌.. 이것이 바로 holiday blues의 시작일 것이다. 이것이 나는 ‘지독히’도 싫은데 빠짐없이 찾아 든다. 특히 12월에..

사실 2012년 holiday는 이미 지난 11월 셋째 목요일 Thanksgiving Day로 시작이 된 상태이다. 올해의 ‘추수감사절 (이 번역된 말이 조금 무리인 듯 느껴짐은?)’ 내가 기억하는 한 우리 가족은 이날에는 꼭 ‘핵가족’이 다 모여서 turkey meal을 즐겼는데, 드디어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하는 예외가 생기고 말았다. 큰 딸 새로니가 Miami, Florida로 친구와 같이 vacation을 가 버렸기 때문이다. 조금 배반당한 느낌이 들 정도로 기분도 그랬지만, 이제 아~~ 우리 가족, 가정도 변화를 겪고 있구나 하는 실감도 들었다.

그래서 전통적인 가족이 만드는 turkey early dinner를 생략하고 대신 크리스마스에 turkey 를 하기로 했다. 조금은 안 되었는지 작은 딸 나라니가 그 다음날 자기 집에서 맛있는 요리를 해 주겠다고 해서 ‘염치불구하고’ 그곳에 갔고, 식사 후에는 Life of Pi 라는 새로 나온 fantasy 영화를 같이 보았다. 거의 일년 만에 가보는 ‘진짜 극장’이었다.

올해의 대림절은 어떨까.. 크게 다를 것은 없을 것이지만 조금 더 ‘성숙된 믿음’으로 대림절을 지내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지난 사순절부터 시작된 ‘평일 마사’ 참례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어서 대림절 동안도 마찬 가지일 것이다. 내가 속하고 활동하고 있는 레지오는 내일 연차 총 친목회를 마지막으로 올해를 마감한다.

올해, 내가 생각해도 참 열심히 레지오를 살았다. 비록 나타난 성과는 많지 않아도 내가 느끼는 나의 변화, 그것은 큰 성과인 것이다. 내년에는 가능하면 눈에 보이는 외적인 성과가 나오기를 기도하고 있다.

15W Behringer Acoustic Amp
15W Behringer ‘personal’ Acoustic Amplifier

내일은 대림절 주일 시작이고 오후에는 우리의 ‘또 하나의 본당’인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가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열린다. 연숙이 꾸리아 부단장인 ‘여파’로 나는 여러 가지 눈에 잘 안 보이는 ‘봉사’를 해야 한다. 주로 여성 단원들이 대부분이라 남자의 역할은 대부분 ‘근육적’인 것 뿐이다.

하지만 올해는 조금 ‘소수 족’인 남자단원의 사기도 살릴 겸 해서 나와 새로 알게 된 다른 ‘남성’ 박 대건 안드레아 형제와 총 친목회에서 노래를 부르기로 했고, 지난 몇 주 몇 번 만나서 노래 연습을 했다. 처음에는 ‘남자 중창단’을 예상하고 사람들을 모으려고 했지만 나로써는 무리였다. 워낙 남자단원의 수가 적고, 있어도 너무나 바쁜 것 같았다. 포기하려 했지만 다행히 이 안드레아 형제와 ‘의기투합’이 되어서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Seymour Duncan acoustic pickup
Seymour Duncan acoustic pickup

덕분에 그 동안 가끔, 조금씩 ‘즐기던’ 나의 야마하 기타.. 얼마 전에 Seymour Duncan ‘Woody SC’ acoustic guitar pickup과 앙증맞게 조그맣고 예쁘게 생긴 Behringer AT-108 15-Watt acoustic mixing amplifier를 구입해서 이번에 쓰게 되었다.

지난 7월 달 허윤석(요한) 신부님이 지도하셨던 레지오 교육피정 때 ‘신나게’ 부르던 ‘개신교 스타일’ 복음 성가 ‘주님이 좋아요’, ‘실로암’과 김수환 추기경의 애창곡이었던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를 골라서 연습을 하고 부르게 된 것이다. 내일singing duet performance의 결과에 상관없이 나는 그 동안의 연습과정을 통해서 얻은 ‘즐거움’ 하나 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덕분에 오랜만에 여자가 아닌 남성을 알게 되었다는 것도 즐거운 일이 아닐까?

Personally amplified YAMAHA guitar
‘Personally amplified’ old YAMAHA guitar

올해의 대림절은 어떻게 보내게 될까? 우리는 그렇게 흔한 holiday travel은 100% 없을 것이고, 아.. 그렇다! 올해는 지난 십 수년 동안 못했던 손으로 쓰는 정성 드린 성탄 카드, 연하장을 ‘우체국을 통해서’ 보내는 것을 해 보련다.

내 인생에서 알고 지냈지만 잊혀진 수많은 사람들, 찾을 수 있는 대로 찾아서 ‘내가 살아있다’ 는 것을 알리련다. 그것만 해도 나는 진정한 ‘구세주를 기다리는’ 대림절의 의미를 조금 알 수 있을지 모른다.

 

레지오 입단 2주년

우리(나와 연숙)의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소속, 성모님 군단의 최전방 소대, “자비의 모후 쁘레시디움”.. 지난 몇 개월 동안 많이 변했고, 현재도 변하고 있다. 많이 변했다고 했지만.. 이것이야 말로 sea-change라고 부를 수 있고, 그것은 바로 perfect storm을 뚫고 나온 느낌이었다. 그중에 제일 큰 변화, 그것도 충격적인 것은 역시 우리의 사랑하는 단원, 친구, 영적 선배.. 은효순 요안나 자매님.. 영웅적인 암 투병을 하시던 용감하고 멋진 여성, 결과적으로 성모님은 그녀를 더 심한 고통에서 구해 주셨을까, 한창 더울 때였던, 7월 26일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다.

솔직히 우리들은 ‘흔치 않은’ 기적을 바라고 있어서 그랬을까.. 끝까지 더 오랜 동안 우리와 함께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어서 조금은 충격적인 떠남이었다. 그 자매님은 우리, 특히 우리에게 잠시 살다가는 이 세상을 어떻게 작별을 하는 가 하는 특별한 모범을 보여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도 그렇게 이 세상을 떠나야지’ 하는 말을 하였다. 그 짧은 말이 이 자매님이 마지막 순간들을 살아간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일 아닐까?

나로써는, 2년 전 레지오에 입단을 안하고 살았으면 이런 ‘귀중한 체험’들은 사실 상상도 못했을 것이라서, 생각하면 할 수록 나를 이, ‘진리와 행동’의 집인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자비의 모후 쁘레시디움으로 이끌어 주신 모든 사람들에게(특히 연숙) 머리가 숙여지는 감사가 이어진다.

요안나 자매님의 선종과 거의 같은 시기에 다른 단원 자매님의 (미국인) 남편께서 선종을 하셨다. 비록 지난 몇 달간 예상을 못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timing이 참 놀라웠다. 그렇게 갑자기 가실 줄 몰랐던 것이다. 미국인 남편이어서 장례미사, 연도의 절차가 우리들과 달라서 조금 더 신경이 쓰였겠지만, 모든 것들이 비교적 잘 마무리를 지었고, 특히 그 무더운 날씨에도 우리 레지오 단원들은 정성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완전한 폭풍’ 같은 일들이 끝나자 마자 우리 단원들은 다시 단장, 부단장이 떠나야 하는 시련을 겪게 되었다. 이것도 사실은 몇 개월 전부터 알고, 예상하던 일이었지만, 그 과정이 사실 생각만큼 부드럽지 못했다. 간부진들이 조금 더 신경을 써서 조금 더 매끄럽게 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간부들, 그것도 제일 핵심인 단장 부단장이 떠난다면 그 뒤에 제일 큰 문제가 무엇인가? 당연히 새 간부진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그것, 그런 변화의 준비가 비록 위에 말한 폭풍과도 같은 시련들이 있었다고 해도 별로 되고 있지 않았다. 만사가 바쁘기만 한 단장님의 사정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정들었던 곳에 조금 더 세세한 신경을 썼으면.. 하는 아쉬움은 지금까지도 남는다.

그런 과정에서 연숙이 단장, 내가 서기로 ‘어쩔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승진’ 했던 것은 충분히 예견이 되었고 큰 무리는 없다고 하지만 나머지 부단장, 회계 직을 채우는 과정이 참.. 기가 막히게 어렵고, 심지어 놀라움과 실망의 연속이었다. 우리 부부는 최소한 ‘순명과 사명’의 의식은 잃지 않았다.

하지만 제일 놀라웠던 사실은 가깝게 느껴지기도 했던 단원이었던 분들의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예상도 못했던 언행과 반응이었는데 나는 이것을 한마디로 small Kafka moment로 이름을 지었다. 그만큼 우리 부부는 놀랐던 것이다. 레지오 선서, 순명의 정신 같은 것들을 벌써 잊어버렸나 할 정도의 언행에 놀라기도 했지만, 다음은 ‘차가운 현실’을 느끼게 하는 실망으로 이어지고, 곧바로 damage control 로 이어졌다.

12명까지 불어나 ‘승승장구’하던 우리 레지오가 거의 몇 주일 만에 6명 이하로 떨어지는 쓸쓸한 공기로 휩싸이고, 심지어 적막감까지 느낄 정도였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의 bible, 레지오 교본들에 언급된 ‘경고’ 들을 실감하게 되었다. 조그만 시련기인 것이다. 군대와 같은 조직인 레지오에서 leadership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가 절감하게 되는 첫 시련기라고 할 수 있을까?

다른 조직과 다르게 우리는 ‘사령관’인 성모님이 계시고 보호한다고 늘 생각은 하지만 우선 매주간 동안 살아 남아야 하는, survive하는 급박한 문제는 우리들이 풀어야 하는 것들이 아닌가? 군대에서 군인의 숫자에 문제가 생기면 그것은 거의 치명적인 것이다. 하지만 성모님께서는 새로운, 그것도 에너지가 충만한 젊은(상대적으로) 여성 단원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고, 그 단원이 씨앗이 되어서 다른 예비단원들의 입단도 어렵지 않게 꿈꾸게도 되었다.

그런 와중에 나는 레지오 입단, 역사적인 2주년을 맞게 되었고, 지난 2년간 나의 ‘변화’를 조금씩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암만 생각해도 나는 참 많이 변했고, 변해가고 있다. 세속적인 자질구레한 습관들의 변화는 어렵지 않게 식구들에 의해서 발견되고 심지어 놀라워한다. 특히 연숙은 크게 나타내지는 않지만 (거의 의도적으로) 간접적으로 나의 변화를 ‘즐기고’ 있는 듯하다.

쉽게 말해서 out of closet같은 느낌.. 이제와 다른 세상을 보고 느끼는 2년 간이었다. 그전에는 내가 어떻게 살았을까 할 정도였다. 급기야 그런 나의 변화를 연숙은 공개적으로 평신도 주일 강론에서 밝히기도 했다. 물론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는 의도였을 것이다.

물론 2년은 어떻게 보면 아주 짧은 기간일 수도 있지만, 나의 레지오와 연관된 세월들은 참으로 귀중하고 길었던 경험의 연속이었다. 단적인 예로 새로 알게 된 성모님과 성모신심(Marian Devotion)은 나에게 새롭고 귀중한 보물이었다. 궁극적인 진리인 성삼위로 향하는 지름길, 안전한 길을 제공하는 우리의 어머님, 보호자를 찾게 된 것이다.

그곳으로 향하는 비교적 안전한 것, 묵주기도.. 그것의 진실과 참 뜻도 깨닫게 되었다. 비록 레지오 2년 생의 초보자이지만 남은 여생의 한계를 생각하면 남보다 10배의 노력이 필요함을 절감하며 ‘월반’을 꿈꾸지만, 그것이 그렇게 쉬울까?

지난 8월 15일에 끝이 난 “33일 봉헌” 과정 이후에 나의 우주,세계관은 아주 폭풍과도 같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이제야 무엇이 이 세상을 움직이는 지도 짐작하게 되었고, 아.. 이것이 바로 진리, 진실이었구나 하는 생각, 왜 이런 사실들을 1982년 영세 후 30년이 지난 지금에게 알게 되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많았지만, 지금이라도 ‘알게’ 된 것을 감사하는 것이 더 옳을 듯하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이제는 최소한 뒤로 물러설 것 같지는 않다” 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