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최소한 한여름의 냄새가 완연히 가신, 하지만 가을의 맛은 아직 덜 익은 듯한 그런 시점이고, 느낌조차 많이 다른 9월과 10월의 사이까지 왔다. 이제는 세월이 빠르다는 둥, 느리다는 둥 하는 말이 지겹게 들려서 그런 것 많이 느끼지 않으려 노력을 한다. 올해 여름은 근래에 드물게 ‘땀을 흘리는’ 육체노동을 안 했다. 그 대신 밀려있는 책들을 비록 해변에서는 아니지만 집에서 실컷 읽어서 큰 후회는 없다. 그러다 보니, 거의 무의식 중에 생각을 해오던 1950년, 구일오 인천상륙, 구이팔 서울 수복 기념일들도 다 지나갔다.
만약 그 때의 역사를 계속 따라간다면 조금 있으면 UN군이 한 맺힌 삼팔선을 지나 노도와 같이 북진을 하게 될 것이다. 올해는 어쩐지 그 때의 <1급 전범, 민족반역자, 김일성 개XX>를 ‘죽이거나, 사로 잡거나, 만주로 쫓아내려는 국군과 유엔군을 계속 따라가며 그 당시의 역사를 더 생각을 해 보고 싶다. 여기에는 그 유명한 미 해병대의 장진(Chosin Resevior) 저수지 사투와 흥남 철수, 일월 사일 서울 철수(일사후퇴) 등이 포함될 것이다.
며칠 전, 인터넷을 통해서 중앙고 동창 이성복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다시 한번 ‘비대칭적 추억‘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 비대칭적 추억이란 간단히 말하면 사람에 따라서 같은 추억을 서로 아주 다른 정도로 간직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첫 경험한 것이, 10여 년 전, 고교, 대학시절의 친구 이윤기와 연락이 되었을 때였다. 분명히 나의 이윤기에 대한 추억과 그가 간직하고 있던 추억에는 상당히 차이가 있었다. 나는 이런 경험을 그 전에는 별로 못 했기 때문에 사실 무척 당황하고, 심지어는 불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두고 두고 생각을 해 보게 되었는데, 결론적으로 그것은 나로써는 어쩔 수 없는 ‘세월의 부작용’ 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그보다 더 그 당시의 추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더 뚜렷하게 기억을 한 것이 사실은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우습지만 이것은 ‘나의 문제’일 지도 모른다. 내가 이것을 ‘대칭적인 추억’으로 만들기 위해서 나의 기억과 추억을 조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이번에 이성복을 통해서 조금은 느끼게 되었는데, 이미 경험을 한 바가 있어서 놀랄 일은 아니다. 이런 것의 극단적인 case는 한번 알던 사람이 나를 완전히 잊은 경우다. 1974년 경에 시카고에서 잠깐 만났던 연세대(철학과) 동문 신경시 씨 부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가까이 알고 지냈는데, 나중에 연락을 해 보니, 나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사진까지 보여 주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것은 조금 심한 case라서 나는 물론 당황을 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의 기억력의 문제인가, 아니면 잠깐의 인연을 완전히 무시하며 살아서 그랬을까.. 이것은 사실 조그만 비극이다.
빛의 속도에 대한 논란: 이 우주에서 제일 빠른 속도는 ‘이론적’으로 정해져 있다. 바로 빛의 속도인 것이고 변치 않는 상수(常數) c 로 표시된다. 이것은 고등학교 물리시간에서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이론’ 을 통해서 배운다. 이것을 배울 때, 대부분은 담담히 받아 들인다. 어찌 의문을 제기할 수가? 상대는 ‘상대성 원리의 천재, 아인슈타인’ 인데.. 말 잘못 했다가는 물리 선생으로부터 면박이나 당할 것이다. 이 우주에서, 어떤 물체가 아무리 빨라도 빛을 따를 수가 없다고 하고 그의 상대성 이론은 이것을 ‘기초’로 해서 성립이 되었다. 그리고 100여 년 동안 그의 이론은 실제와 거의 맞아 떨어지기도 했다.
문제는 ‘거의’라는 단서인데, 100% 증명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빛의 속도도 마찬 가지다. 만의 일이라도 어떤 것이 빛 보다 빠르다고 판정이 되면: 그것은 판정이 잘 못 되었거나, 상대성 이론이 ‘허구’일 수도 있다는 둘 중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프랑스의 과학자들이 6개월 이상 실험 끝에 어떤 ‘입자,neutrino‘가 빛 보다 60 ns(nano-second, 1/1000,000,000초) 빠른 것을 발견한 것이다. 대부분은 ‘우선’ 이 실험에 결함이 있다고 할 것이다. 실험자들은 최선을 다했다고 할 것이다. 누구를 믿을 것인가? 문제는 60ns이면 실험 오차치고는 상당한 오차인 것이고, 그들의 실험이 그렇게 허술했나 하는 것이다. 100여 년 동안 우리의 ‘삶의 철학’ 까지 바꾸어 놓았던 ‘상대성 이론’ 도 조금씩 무너지나.. 그 다음은 어떤 것이 나오려나.. 100년 마다 이렇게 큰 이론의 변화가 나오면 1000,000년 뒤에는 어떨까? 이래서 인간이다. 인간은 역시 신이 아닌 것이다.
이성복을 찾았다! 일년도 넘는 비교적 오래된 나의 blog <누가 이성복을 보았는가?> 라는 나의 외침에 대한 답이 온 것이다. 나는 다시 한번 Google’s indexing power의 위력을 실감한다. 비약적인 생각으로, 우리가 보는 우주 전체를 포함한 하느님의 성역 전부를 indexing할 날도 시간 문제가 아닐까? 어느 것이 이길까? 하느님, 아니면 Google’s Datacenter? 좌우지간.. 나의 ‘도박’은 일단 성공한 것이다. 이성복의 comment에 의하면, 성복이의 아우가 이 blog을 보게 되어서 나를 찾았다고 했다. 그리고 성복이가 만든 navor blog 을 보게 되었다. 나의 예상을 뒤엎고, 완전히 ‘국어학 박사’ 급의 글들로 가득.. 거기다 저서가 다섯 권씩이나.. 이게 어찌된 일인가? 제목을 보니: <한국어: 맛이 나는 쉬운 문장>, <논리적인 글의 요건>, <논문 맵시 내기>, <마침한 말 바른 표기>, <틀리기 쉬운 맞춤법> 등등..
이 녀석, 분명히 고대 농대에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한)국어학 박사가 되었단 말인가?이 녀석, 요새 흔치 않은 호까지 있다. “조탁(彫琢) 이성복”, 와~~ 근사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 ‘조탁’이란 호는 어떤 뜻인가? 새길 조에, 쫄 탁? 암만 생각해도 그림이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큰 문제인가? 이렇게 ‘살아 있는 이성복’을 ‘만나게’ 되었는데.. 현재 나의 의문, 어떻게 농대출신이 국어학박사, 저자가 되었나? 곧 의문은 풀릴 것이지만,그래도 궁금하다. 50년 동안 어떻게 살아왔을까? 왜 동창회 연락처에 이 친구가 빠져 있었을까? 이런 의문도 곧 풀릴 것이다.
지금 한창 계속되고 있는 미국의 ‘지독한’ 불경기는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만들어 내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젊은 세대,특히 25세부터 34세 사이의 세대의 높은 실업률이 우리 세대에 미치는 ‘예상치 않은’ 파급효과가 그 중의 하나다.
예전, 그러니까 최소한 1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이의 세대면 거의 공식적인 retiring formula가 이미 있었다. 이 나이가 되면 겪은 두 가지 즐거움: 자녀들이 거의 직장을 가지고 집을 떠나게 되고, 집을 살 때 얻었던 loan을 다 갚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사실 크게 돈을 쓸 일이 없어지게 되는 즐거움이다. 그렇게 되면 젊었을 때 꼬박꼬박 돈을 부어놓았던 은퇴자금을 서서히 쓰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나? 우선, 자녀들이 변변한 직업을 갖지 못하게 되어서, 그들이 집으로 돌아오거나, 아예 나가서 살 엄두를 못 내게 된 것이다. 이들이 주는 경제적 부담은 미지수지만, 아무래도 부모에게 부담을 줄 것이다. 그리고, 부동산 거품이 최고조에 달 했을 때 (8년 전), 많은 사람들이 겁도 없이 집을 저당으로 해서 은행에서 마구 돈을 빌려다 쓰곤 했다. 아예, 빚을 얻어서 투자를 하기도 했다. 부동산 거품이 완전히 빠지고, 그들이 집은 아직도 저당금 빚이 남아 있게 되었으니..
그들은 (우리세대) 이제 완전히 샌드위치처럼, 아래로는 자식들이, 위로는 집 저당금(mortgage)이.. 누르게 되었다. 예전처럼, 멋지게 은퇴를 해서, 골프를 치고, 크루즈 여행을 가고.. 하는 꿈들이 서서히 깨지고 있는 현실이 된 것이다. 그것이 현재 baby boomer세대의 슬픈 현실이다.
과연,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이런 것을 미리 방지할 수 없었을까? 이런 것들은 근래, 그러니까 1990년대 초에 일본에서 이미 겪은 것이고, 얼마든지 예상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1990년 초부터 시작된 일본인들의 부동산 거품과 그에 따른 경기침체.. 아직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왜 그렇게 머리가 좋은 경제학자들이 이런 것들을 무시하고 과소평가 했던 것일까? 나는 경제학을 잘 모르니까 할 말은 없지만, 직감적으로 느끼는 것은 얼마든지 있다.
우선, ‘부-동-산’.. 에 관한 것은 다 싫다! 이것에 관련된 인간들도 하나도 멋진 인간들이 아니다. 대부분, ‘공짜’ 를 좋아하는 싫은 인간 군상들이다. 이렇게 손쉽게 먹으려는 심리의 표현이 바로 ‘거품’이 된다. 이것을 기생충처럼 파고들며 같이 쉽게 먹으려는 인간들, 은행, 융자 인간들.. 이들 부-동-산 인간들과, 은-행-융-자 인간들이 최악의 역할을 잘도 해냈다. 쉽게, 쉽게 벌려는 많은 불쌍한 인간들이 이 두 부류에 완전히 놀아나고, ‘공짜’ 표를 얻으려는 정치인들이 잘도 보호를 해 주었다. 이것이 현재 경제파탄의 실체인 것이다.
쉽게 말하면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돈을 만들어서 한참 동안 흥청망청 쓴 것의 결과가 현재인 것이다. 이것이 경제구조의 결함일까, 인간의 근본적인 결함일까. 아니 둘 다일 것이다. 한마디로 경제적으로 약삭바른 부류들이 너무 심하게 탐욕을 부린 결과인 것이다. 그 정도로 원인은 사실 간단했다. 지독한 탐욕.. 어찌 인간들이 그렇게나 욕심들이 많은 것일까? ‘정도껏’ 살 수는 없는 것일까? 어떻게 불과 2~3식구가 10명이 살아도 방이 남는 고래등 같은 백만 불짜리 집에서 살 용기가 나는 것일까? 뉴욕 Wall Street에서 잘나가는 곳에서 investment banker로 아들, 딸이 스카웃 되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 나는 정말 정말 하나도 부럽지 않다. 그런 곳에서 과연 그들은 무엇을 배울까? 아직도 이해를 못 하는 것은, 20년 전에 이미 일어난 ‘거품경기’에 대한 교훈을 어쩌면 그렇게 잊고 살았을 까 하는 것이다.
9월 21일, 구월의 하순으로 접어들었다. 날씨는, 지난 2 주 동안 가을의 맛을 느끼게 해주는 ‘첫’ 싸늘함으로 우리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다만 매일 기대했던 비가 내릴 듯 말듯 하며 내리지를 않아서 그것이 조금 신경이 쓰인다. 지독히도 가물고 더웠던 여름 동안 앞 쪽의 잔디는 색이 바래고, 숨을 죽이고 죽은 듯이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파랗게 살아날 것이다. 올해 이곳의 날씨는 다행히 ‘뉴스’가 없이 지나갔다. 다른 곳에 비하면 그런대로 준수하다고나 할까. 과연 이번 겨울 날씨는 어떨지 자못 기대가 된다. 작년에는 정말 춥고, 많은 눈이 내렸기 때문이다.
오늘 며칠 전에 Amazon.com에 order했던 GrandstreamGXP-285 (SIP) VOIP phone이 도착했다. 미리 review도 보았고, USERS MANUAL도 이미 download해서 보았기 때문에 생소할 리가 없다. 사실 몇 년 전에 이미 GRANDSTREAM의 VOIP phone adapter를 써본 적이 있어서 눈에 익은 제품이긴 하다. 하지만 진짜 phone은 이번이 처음이다. 몇 달 전에 ebay에서 LINKSYS (Cisco)의 SPA-841 2-line VOIP phone, 쓰던 것을 산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나에게 SIP VOIP phone은 그것이 처음이었던 셈이다. 그 동안 이 전화기를 많이 쓰지는 않았지만, 얼마 전에 Google Voice로 한국에 전화를 했을 때, 너무나 음질이 좋았다. 그러니까 Internet phone의 수준이 완전히 PSTN (analog) phone의 수준에 도달한 것이다. 문제는 아직도 VOIP 의 대부분이 softphone (on PC)을 쓰는 사람들이 많고, SKYPE 같은 조금 non-standard technology를 쓰기 때문에 전통적인 Bell phone같은 ‘쓰기 쉬운’ 맛이 덜 하다는데 있다. 하지만 이제 VOIP (특히 SIP compatible) phone도보기와 느낌이 거의 똑 같이 analog phone과 비슷해서, ‘전통적인 전화기’의 남은 수명도 그렇게 긴 것 같지 않아 보인다. 나의 home-office에는 이미 Asterisk-based IP-PBX (PBX-IN-A-FLASH: PIAF)가 있어서 (running on Proxmox Virtual Server), 미국과 캐나다는 Google Voice로 무료로 통화를 할 수 있고, 국제전화도 정말 싸게 사용할 수 있다. 이번에 산 전화기는 비록 값이 저렴한 것이지만 (under $50) Home-Office에는 적당해서, 연숙의 office에서 쓰게 할 예정인데, 가끔 ‘음질이 형편없는’ cell-phone에서 벗어나서 이렇게 ‘안정되고 깨끗한’ 음성을 즐길 수 있는 것도 좋을 듯 하다.
몇 년 전에 크리스마스 때 연숙에게 선물로 준 GPS가 별로 쓰지도 않았는데 charge가 되지를 않는다. 그러니까 power cord (usb or adapter)를 써야만 이것을 쓸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GPS를 별로 쓸 필요가 없지만, 그래도 가끔 쓰려고 하면 이런 것이 짜증이 나는 것이다. 고급 차를 타는 사람들은 요새 아예 GPS가 dashboard console에 있어서 쓰기가 참 편한 것 같았다. 그렇다고 다른 것을 살 필요까지는 못 느끼고.. 이럴 때는 역시 ‘공돌이 정신 (hacker mentality)’이 발동을 하게 된다. 그래서 ‘열어보게’ 되었다. charge가 안 되니까 이것은 rechargeable battery가 ‘죽은’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죽었는지, 역시 이 battery도 Made in China였다. ‘조잡한’ 것을 썼을 것이다. 이것은 portable device에서 많이 쓰는 3..7V의 Polymer type인데, 암만 Internet을 뒤져 보아도 이것과 같은 것은 찾을 수가 없었다. 비슷한 것을 찾아도, 값이 ‘장난’이 아니게 비쌌다. 그렇게까지 해서 고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GPS를 버리기도 그렇고.. 그러다가 얼마 전에 거의 못쓰게 된 Canon digital camera의 Battery가 생각이 나서 보니 거의 power spec이 비슷했다. 3.7V 1200mAh! 모르긴 몰라도 이것을 쓸 수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 문제는 battery terminal을 다시 연결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는 사실이다. Soldering 을 해야 하는데, 워낙 terminal이 작아서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계속 궁리를 하면 무슨 idea가 생길지도 모른다.
오늘, 요새 거의 자취를 감춘 ‘엽서’ 한 장이 배달되었다. 보낸 사람은 Law Office of Se Ho Moon, PC (Suwanee, GA)라고 인쇄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스와니 (아틀란타 동북단의 suburb)에 있는 ‘문세호 변호사‘ 가 보낸 것이다. 요새 변호사 개업을 했나.. 하며 읽어보니 “친애하는 연세대학교 동문 여러분,”으로 시작이 된다. 아하! 연세대 동문회에서 보낸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아, 이맘때면 연례 연고전이 있던 때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9월 25일에는 골프대회, 10월 2일에는 구기대회. 나는 골프를 치지 않으니까 그날은 관심이 없지만, 구기대회에는 조금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연고전 참가를 한 것이 1997년 쯤이었다. 그러니까, 15년 전이 되었다. 그 때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연말 연대 송년회까지 참석을 했는데,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완전히 잊고 살게 되었던 것이다.
이곳에 이사온 후 나는 사실 동창회에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그 당시에는 가까이 알고 지내던 연대 이원선 동문이 그 해 동문회 회장이 된 바람에 조금은 손 쉽게 참가를 하게 된 것이었다. 사실, 처음 나갈 때 모르는 동문을 만나는 것이 물론 반갑기는 하지만 서먹서먹하고 어색한 것도 사실이라서 그렇게 참가를 안 한 것도 이유가 된다. 이원선 동문은 68학번 연대 기계공학과 출신인데, 내 친구였던 (타계) 같은 연대 기계과 김호룡을 알고 있었고, 우리와 같이 아틀란타 천주교회에도 같이 나갔던 동문이었다. 아쉽게 그 이후 서로 소식이 거의 끊어지게 되고 같은 지역에 살면서도 거의 잊고 살게 되었던 것이다. 요새는 내가 레지오에 입단하면서 성당에 갈 수가 있어서, 가끔 이원선씨의 부인을 뵙곤 하였지만 끝내 이원선씨는 볼 수가 없었다. 올해 이 연고전 엽서를 받고 조금은 생각을 하게 된다. 거의 숨어서 살다가 조금씩 밖으로 나간 김에 올해는 한번 연고전 ‘소프트 볼’ 대회에 참가하거나 구경을 가 볼까 하는 생각이다. 그곳에서 운동과 놀기를 좋아하는 이원선 동문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가회동.. 이 이름만 들어도 나는 너무나 진한 추억의 감정에 눌려버린다. 나의 어린 시절 추억의 대부분을 가회동이 만들어 주었다. 나의 개인 역사에서, 유치하지만 순진하고 희망과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찾던 시절.. 전쟁의 고통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던 조국의 현실도 가식 없는 눈으로 지켜 보았던 시절들이었다.
서울 재동국민학교, 1959년: 나는 정면의 본관 건물의 바로 뒷쪽에서 살았다
나는 1956년 가을부터 1963년 봄까지 가회동, 재동국민학교 뒷문 쪽에서 살았다. 학년으로 치면 재동국민학교 4학년 2학기부터 중앙고등학교 1학년 초에 해당된다. 그러니까 그곳은 재동과 가회동의 경계선 쯤이었을 것이다. 재동과 가회동은 남북 신작로로 연결이 되어있어서 그 길을 따라 올라가면 지금의 가회동 ‘한옥 촌’이라는 곳이 나오고, 내려 가게 되면 재동으로 이어지면서 창덕여학교를 만나고 다시 가로지르는 더 큰 길을 만난다. 그 당시에는 그 길의 이름들이 없었고, 그저 모두 ‘행길, 한길, 신작로’ 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아마도 율곡로 라고 부르는 모양인데 자신은 없다.
우리 집의 본적이 종로구 재동 80번지라서 나는 그곳에 산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본적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몰랐지만 우리의 ‘선조’들이 살았던 곳이라고 짐작을 하긴 했다. 그 전에 우리는 원서동에서 살았는데 사실 그곳이 내가 기억하는 제일 오래된 동네다. 아버지가 육이오 동란 초에 납북이 되시고 누나, 어머니와 정말 험난한 전후 시절을 원서동에서 시작을 한 것이다. 이북(원산) 여자였던 어머니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강인한 생활력을 발휘하셔서 원서동에 아주 작은 집까지도 사셨는데, 그것이 도시계획으로 철거를 당하게 되어서 가회동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고, 결국 후에 원서동의 “우리 집”은 정말로 철거되고 그 위에는 대로가 생겨서 작았지만 추억이 아롱졌던 집은, 그전까지 원서동을 따라 흐르던 개천이 전부 자취를 감추고 덩그러니 길로 변해버렸다.
원서동 죽마고우들: 새로 이사를 오니까 원서동에서 잔뼈가 같이 굵었던 코흘리개 친구들과 떨어지게 되었지만 생각보다 새로운 곳에 금새 적응이 되었다. 나는 일반적으로 내성적인 성격이었지만 동네친구들을 사귀는 데는 그런 성격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원서동의 친구들은 시간만 나면 ‘장거리 원정’을 오듯이 놀러 오곤 했는데, 그 당시 원서동의 ‘죽마고우’ 친구들; 유지호, 손용현, 박창희, 안명성, 김동만, 최승철, 김천일.. 그 외에도 참 많았다. 우리가 이사온 집은 골목 깊숙이 위치한 아담한 2층 양옥이었는데, 말이 양옥이지 사실은 전통적인 한옥이 아니라는 뜻이고, 지금 생각해 보면 거의 일본식 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 정도로 ‘기둥들이 약하게’ 보이던 집이었다. 2층집과 1층집이 같이 직각으로 붙어 있어서 두 집에 살기에는 아주 좋았고, 화단이 있는 그런대로 커다란(그 당시 나의 눈에는) 마당까지 있었다. 우리는 1층의 방 두 개에 부엌이 딸린 ‘사랑채’에 살게 되었다.
재동학교:집에서는 재동국민학교 4층 건물의 뒷면 거대한 모습으로 보였고, 집 골목이 재동학교 강당을 끼고 있었다.. 그 정도로 가까웠다. 그러니까, 이사오면서 제일 신났던 것은 학교 가는 시간이 5분도 걸리지 않았던 사실이다. 전에 살던 원서동에서 등교할 때는 그때 어린 나이의 걸음으로 30분은 넘어 걸렸을 것에 비교하면 이건 정말 ‘천국’에 사는 기분이었다. 나는 꿈도 못 꿨지만, 그 동네에 사는 어떤 ‘잘살던’ 아이들은 숫제 점심시간에 집에서 식모들에 의해서 학교 교실까지 배달된 따끈따끈한 도시락을 즐길 정도였다.
함경도 출신 주인집 염씨 가족: 이사온 집의 주인은 함경도 출신, 그러니까 아마도 육이오 동란 때 피난을 온 집일지도 모르는 나이가 있으신 부모님과 시집간 딸, 고등학생 딸,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아들이 있는 지극히 정상적인 가족이었다. 주인 어르신의 성함은 아직도 기억을 한다. 염영혁 선생님, 그 당시는 ‘거의’ 할아버지라고 생각했으나, 지금 생각해 보면 환갑 정도를 갓 넘기셨을 정도였지 않았을까? 외 아드님은 훤칠한 키의 호남형, 염철호 형이었다. 중앙대를 졸업했다고 들었고, 아이들과 잘 놀아줄 수 있는 그런 쾌활한 미혼 청년이었는데, 대학시절 농구선수였다고 했다. 염철호 형은 나중에 결국은 농구 계로 투신을 해서 방송국에서 농구경기 해설자로 활약을 함을 알게 되었다. 얼마 전 인터넷으로 형의 소식을 아주 짧게 들었는데, 나이도 많이 드시고, 부인이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는, 정말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해 주는 소식이었다.
작은 따님, 염경자 누나는 그 당시 거의 졸업반의 여고생이었는데 공부도 잘하고, 아주 얼굴이 예뻤다. 얼마 뒤에 이화여대를 갔는데, 그 당시 최고로 경쟁이 높았던 영문과에 지망을 했는데, 애석하게 제2지망이었던 사회사업학과에 합격을 했다. 하지만 영어를 아주 잘했고, 한때는 어떤 미군을 집으로 데려와서 영어강습을 받기도 했는데, 영어실력과 뛰어난 미모로 역시 나중에, 그 당시 최고 선망의 대상이었던 항공사 스튜어디스가 되었다.
큰 따님은 그 당시 이미 갓난 딸 둘 (주경아 와 주동원)이 있었는데 남편은 그 당시 육군 대위였다. 가끔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놀러 오면 갑자기 집이 떠들썩 해지곤 했다. 나는 특히 그 대위 아저씨를 좋아했는데, 아주 서글서글하고 친절한 ‘군인 장교’ 아저씨였기 때문이다. 이 주인집은 함경도에서 오셨는데, 친척들이 근처에 계셨고, 그 중에는 나와 재동국민학교 동창인 ‘황석기’도 그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그 당시 조금 이상했던 것은 이 주인집이 어떻게 돈을 벌었을까 하는 사실이다. 아무도 바깥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가지고 있던 돈이 상당히 많았던 것일까?
삼청공원 말바위: 이 집이 있던 골목이 그때부터 나의 천국이 되었고, 꿈 많던 소년시절의 주옥 같은 많은 추억이 이곳에서 형성이 되어 이제까지도 내 추억의 바탕이 되었다. 시대적으로 보아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사일구를 거쳐 오일육으로 박정희 대통령까지 이어졌고,학교 학년으로는 재동국민학교 4학년으로부터 중앙고등학교 1학년 초까지였다. 거리적으로 이 학교들은 정말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조금만 북쪽으로 올라가면 삼청공원과 북악산이 있었는데, 이곳들은 어린 시절 친구들과 사시사철 자주 놀러 가던 곳들이었고, 그 중에서도 ‘말바위‘라는 곳은 북악산 중턱에 위치한 곳으로 우리들이 좋아하던 곳이었고, 우리들이 발견한 아주 작았던 비밀의 바위, ‘늑대바위‘도 우리들이 전쟁놀이 할 때마다 찾던 꿈의 거처였다..
가회동 성당: 가회동 큰 길에 나가면 재동학교 주변으로 많은 만화가게들이 즐비했고 그 곳들은 우리들의 꿈의 보금자리 역할을 했다. 삼청동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가회동 파출소가 있었고, 그 옆에는 가회동 성당이 있었다. 나는 지금 천주교 신자가 되었지만 그 어린 시절에 내가 본 성당의 인상은 그리 편한 곳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문 입구부터 ‘무섭게 보이는 외국인 성인’들 석고상들의 모습이 으스스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동네마다 많이 있던 개신교 ‘예배당’은 친근한 인상이었고, 분명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알았는데, 천주교는 도대체 ‘무엇’을 믿는지 확실치 않았다. 그 정도로 대부분 사람들이 천주교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
가회동 부자들: 그곳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그때부터 으리으리하게 우람한 기둥을 자랑하는 깨끗하고 커다란 한옥들이 즐비하게 나타난다. 중앙 중고를 다닐 때면 그곳을 지나서 가곤 했는데, 얼마 전에 ‘겨울연가’를 보면서 다시 한번 그곳 들을 보게 되어서 감개가 무량했다. 그 당시 가회동에는 알려진 부자들도 살았는데, 그 중에 화신 백화점 주인이었던 ‘친일파’ 박흥식씨의 집도 그 중에 하나였는데 정말 집이 으리으리하게 컸다. 우리가 살던 집의 뒤에도 아주 커다란 집이 있었는데, 아직도 거기 누가 살았는지 확실치 않다. 가회동에서 재동 쪽으로 내려가면 물론 재동국민학교가 있었고, 조금 더 내려가면 공립 여자학교, 창덕 여중고가 있었다. 이곳은 여자학교라서 보통 때는 못 들어갔지만 무슨 행사가 있으면 그 강당엔 들어갈 수 있었다. 기억나는 것이 사일구 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 전 겨울에 동네 사람들을 이곳 강당에 불러놓고 영화를 보여준 일이었다. 나는 국민학생이었지만 따라 갔는데, 가서 보니 영화는 영화인데, 선전용 기록영화를 보여주었다. 드리마 같은 것은 아니었어도 나는 너무나 재미있게 본 기억이다.
박달근: 그 당시 동네 골목은 우리 나이또래들의 천국이었다. 나이에 거의 상관없이 어울릴 수 있던 곳.. 우리 골목도 그랬다. 코흘리개 꼬마부터 중학생들 까지 모두 어울렸다. 많은 애 들이 얼굴은 기억이 나는데 이름을 다 잊어버렸다. 하지만 그래도 이름까지 기억이 나는 애들.. 골목 바로 건너 집에 살던 박달근, 이름이 독특해서 기억을 한다. 나보다 한두 살 밑이었고, 공부도 잘했던 애, 나중에 일류 중학교에 들어갔는데, 가슴이 좀 아픈 추억을 남긴 애였다. 나와 보통 애들이 하던 싸움을 했는데, 이 녀석은 나에게 아직도 가슴에 남는 욕을 했다. 그 녀석 왈, “우리 아버지가 (너같이) 아버지 없는 애와는 놀지 말랬어!” 라는 말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나에게는 참으로 슬픈 욕이었다. 그 말로 사실 그 애와는 헤어지게 된 셈이다. 나도 그 녀석과 그 아버지가 보기 싫었던 것이다. 사실 그 당시 나와 같이 아버지가 없는 집이 꽤 많았지만 그 골목에는 하나도 없었다. 모두 다 ‘정상적’인 가정이었던 것이다.
이원영: 우리 집에서 두 집 아래에 이원영 이라는 나보다 아마도 한두 살 정도 아래인 애가 있었다. 그 아버지가 어느 중학교 수학선생인가 그랬는데, 정말로 고약한 성격의 남자였다. 항상 아이들을 보면 험악한 얼굴, 짜증난 얼굴이어서 속으로 저런 아빠라면 그렇게 부럽지 않겠다고 생각도 했다. 이원영의 엄마는 정반대로 항상 친절하게 웃는 안경을 낀 지적으로 생긴 다소곳한 엄마였는데.. 나중에 원영이는 경복중학교에 들어갔는데, 왜 그렇게 생각이 나는가 생각을 해 보니, 이유가 있었다. 어떤 명절날 원영이의 친척들이 놀러 온 모양인데, 그 중에 국민학교 나이의 소녀가 있었는데, 그 애가 너무나 예뻐서 그 나이에 처음으로 ‘연정’ 같은 것을 느낀 것이다. 그때 느낀 것이 아하.. 이것이 어른들이 말하는 ‘연애감정’이란 것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아직도 그 ‘예쁜 얼굴’의 그 애를 생각하면 생생하게 나의 감정이 기억된다. 이원영은 헤어진 것이 너무나 오래 되어서 별로 그의 생각을 못하고 살았지만, 그는 어떻게 ‘인생’을 살았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최씨 삼형제: 그 아래 한집건너 어느 날, 갑자기 아들 삼형제 집이 이사를 왔다. 최씨 삼형제 집.. “최희천, 최희춘, 최희승“.. 어떻게 내가 그들의 이름을 아직도 기억하는지 나도 놀란다. 그것은 어린 나이의 추억들이 그 정도로 뚜렷하다는 뜻이 아닐까? 그리고 이렇게 오래 살면서도 그 추억들을 소중하게 기억에서 놓치지 싫었다는 뜻일 것이다. 제일 큰 형이 최희천, 나보다 한두 살 밑, 그 아래가 최희춘, 막내 최희승은 한참 아래인 꼬마였다. 그들에게는 누나가 있었는데, 나보다 나이가 한두 살 위였고, 우리또래 아이들이 그녀를 ‘선망’의 눈으로 쳐다 보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 집의 ‘주인’으로 이사를 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주인이 바뀌고 그 집은 그 많은 식구들이 방하나 문간방으로 옮겼는데, 아마도 사업이 실패를 했을 것이다. 그 아버지는 ‘집 장사’ 라고 들었다. 요새말로 하면 ‘부동산 업자’ 정도가 아니었을까?
큰형 최희천은 과묵하고, 성실한 타입이었고, 그 동생 최희춘은 장난꾸러기였지만 그래서 성실한 애였다. 특히 나를 많이 따랐다. 동네의 애들이 모이게 되면 이들이 항상 끼어서 나를 도와주곤 했다. 특히 생각나는 것은 이 형제들을 포함한 동네 꼬마 일당을 데리고 삼청공원 위에 있는 ‘말바위’에 놀러 갔던 추억이었다. 나는 이 꼬마 ‘소대’를 데리고 흡사 소대장이라도 된 듯이 그들과 이곳 저곳을 놀러 다녔다. 그 중에 말바위를 포함한 북악산 일대를 누빈 추억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아찔하다. 왜냐하면 무슨 사고라도 나면 내가 ‘소대장’이기 때문에 몽땅 책임을 져야 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시절 그런 것에 크게 관심을 가질 집은 거의 없었다. 사는 것이 더 급한 세상에 귀찮은 꼬마들을 집에서 끌어내어서 놀아 준 것이 더 고마웠을 것이니까..
말바위의 종이비행기: 말바위는 북악산 중턱에 있는 완전히 바위로 된 언덕이고 그곳에서는 서울시내가 거의 다 보였다. 정남쪽으로 남산이 나지막하게 보이고, 그 뒤로 한강, 관악산이 멀리 보이던 우리에게는 거의 환상적인 곳이었다. 아찔한 낭떠러지가 있어서 위험한 곳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그 나이 우리에게는 더 재미를 주었다. 한번은 못쓰게 된 책을 한 권 들고 아이들을 몰고 가서 종이비행기를 만들어 날렸는데, 골목에서 날리다가 이곳, 거의 완벽에 가까운 ‘비행장’에서 날렸을 때 아이들의 환성을 잊지 못한다. 한번 비행기를 날리면 떨어지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낭떠러지가 있어서 더운 기류를 타게 되면 공중에 오래 머물곤 했다. 그때 한 종이비행기가 완전히 뜨거운 기류를 타고 하늘 위로 올랐다. 그것은 전혀 떨어지지 않고 계속 오르며 북쪽으로 날기 시작했다. 우리들이 그것을 보며 탄성을 지르기 시작했는데.. 결국 그 비행기는 안 보일 정도로 높이 떠서 북으로 사라졌다. 그때 그것을 본 꼬마들.. 아마도 잊지 못할 정말 아름다운 광경이었을 것이다.
동네 야구: 이 골목에서 나는 야구를 배우게 되었다. 국민학교 때는 공을 가지고 노는 것은 주로 “찐뽕” 이란 것과, “왔다리 갔다리” 란 것을 했고, 그 때만해도 야구를 하려면 글로브와 ‘진짜 야구공’ 같은 것이 비싸서 아무나 못 하던 시절이었지만, 찐뽕이란 것은 거의 야구와 비슷하지만 모두 맨손으로 받는 것이라 그것을 많이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들의 야구’ 가 바로 찐뽕이었다. 이것은 배트도 필요 없이 주먹이나 손바닥으로 공을 치는 것이었다. 그런데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어느 날 어머니가 미8군 암시장에서 ‘미제’ 야구 배트와 공을 사오셨는데, 배트는 진짜 “Louisville”이란 상표가 보이는 것으로 신나게 했지만, 공은 조금 이상하게 생겼다. 보통의 공보다 큰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소프트볼 이었다. 소프트볼이라고 하지만 공 자체는 더 단단했고, 배트로 쳐도 그다지 빨리도, 멀리도 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안전’한 야구 용이었던 것이다. 물론 우리들이 그것을 좋아할 리가 없었고, 진짜 야구공을 구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 일본에서 쓰이던 ‘중경식‘ 야구공이란 것을 써서 ‘진짜 야구’를 하게 된 것이다.
야구를 할 때 문제는 동네 골목이었다. 그 좁은 골목에서 야구를 하게 되면 언젠가는 ‘사고’가 생기게 마련이었다. 이 사고는 대부분 골목에 있는 집들의 유리창이 깨지는 것들이었고, 가끔가다 공이 사람을 치는 일도 있었다. 또한 가끔이지만 그 골목에 차라도 지나가면 게임은 완전히 올 스톱이 되곤 했다. 그래도 우리들은 악다구니처럼 지치지 않고 즐겼다. 그러다가 바로 코 옆에 있는 우리의 자랑스런 모교 재동국민학교로 야구장소를 옮기게 되었다. 이것은 완전한 야구의 천국이었다. 비록 야구장은 아니더라도 그렇게 널찍한 공간이 그 당시 어디에 또 있었겠는가? 문제는 그곳을 아무 때난 쓸 수 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는데, 학교의 모든 일정이 끝나게 되면 문을 완전히 닫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 학생들이 학교를 다 떠나기 전에나 운동장을 쓸 수 있었고, 일요일은 전혀 쓸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나마 우리는 그곳에서 야구 연습을 열심히 하고, 실력도 상당히 발전하였다. 그러면서 다른 팀(동네)들과 시합을 하기 시작했고, 어떨 때는 다른 동네까지 ‘원정’ 경기까지 하게 되었다. 지금도 생각나는 곳은 삼청 국민학교까지 원정을 간 것이었는데, 그 당시 조건은 진 팀이 이긴 팀에게 야구공을 주는 것이 관례였다. 그 자리에서 줄 수는 없지만 언젠가는 빚처럼 남게 되어서 꼭 갚아야 했다.
그 당시에 야구는 상당히 인기가 있었는데, 주로 고교야구가 꽃이었고, 실업야구도 못지않게 인기가 있었다. 내가 다니던 중앙중고등학교는 야구부가 상당히 활동적이었고, 대회에서 가끔 우승권까지 가기도 했다. 그 당시 유명했던 투수 김옥수, Short Stop 하갑득 선배들이 고등학교에서 활동을 했는데, 오후에 학교가 끝나서 운동장을 거쳐서 걸어나올 때면 꼭 그들이 연습을 했는데, 나는 빠지지 않고 그것을 구경하곤 했다. 동네야구만 하다가 그들을 보면 정말 ‘신의 경지’로 까지 보였다. 김옥수 투수의 던진 공을 옆에서 보면 정말 총알같이 느껴지고, 하갑득 선배가 육탄 돌격대처럼 쓰러지며 공을 잡을 때면 그것도 역시 ‘야구의 신’처럼 보였다. 꿈에서도 내가 투수가 되어서 총알 같은 직구와, 기묘한 커브 볼을 던지는 꾸곤 했다. 그 당시 입학시험에는 체력장 같은 시험이 끼어있었는데, 그 중에는 공 던지기가 있어서 이렇게 야구를 했던 것이 나중에 고등학교 시험을 치를 때 큰 도움도 되었는데, 그 당시 나의 공 던지는 실력은 내가 생각해도 기가 막히기 멀리 나가곤 했다. 그만큼 던지는 어깨가 발달이 되었던 것이다.
오자룡: 이 동네야구를 회상하면서 꼭 생각나는 것, 우리 앞집에 살던 ‘오자룡‘ 이란 아이.. 삼국지의 상산 조자룡의 이름을 따라 지었다고 했나… 나보다 아마 4~5살 쯤 어렸을, 아주 꼬마였다. 야구는 그 나이에 비해서 잘 한 편이었지만 역시 나이가 어려서 실수가 많았다. 어떨 때는 1루에 주자로 나갔다가 홈으로 뛰어 들어오기도 했다. 그래도 우리 팀에 꼭 끼게 된 이유는 그 녀석의 아버지 (그 당신에는 아빠란 말을 쓰지 못하고 꼭 아버지란 말을 써야 했는데, 아빠란 말은 그 후에나 쓰이기 시작했다.) 때문이었다. 비록 대머리 였지만 비교적 젊은 아저씨였는데, 그 아저씨가 야구광이었다. 그래서 자기 아들 ‘오자룡’을 그렇게 참가시킨 것이었다. 우리들은 그것이 너무나도 힘이 되었고, 자랑스러웠다. 다른 아버지들은 전혀 관심도 없었는데, 그 오자룡의 아버지는 시간만 나면 옆에 와서 코치까지 해 주시곤 했던 것이다. 나는 물론 아버지가 없어서 꿈도 못 꾸었지만,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의 진가도 느낄 수 있게 되기도 했다. 어떤 때는 재동국민학교 운동장이 일요일이라 문을 닫았지만 그 아저씨가 학교 ‘소사’ 아저씨를 구어 삶아서 우리들이 정식 게임을 할 수 있게도 해 주셨고, 게임의 심판까지도 자청하셔서 보아 주셨다. 얼마나 즐거운 광경이고, 추억이 되었던지.. 오자룡, 그 녀석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Oh, Carol by Neil Sedaka
1959년 닐 세다카의 오 캐롤, 이곡은 우리에게는 1960년에 알려지고 따라부르던 노래가 되었다. 하도 따라 불러서, 뜻도 모르고 영어 가사를 모두 외울 정도였다. 가사를 엉터리로 들어서, I’m but a fool이 아앰 빠다빵으로, You hurt me는 유어 할머니로 둔갑 하기도 해서 아주 재미있는 추억이 되었다.
미국의 시대: 나는 가회동 시절, 정치적으로는 ‘우리들의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 삼일오 부정선거, 학생들이 피를 흘렸던 사일구, 장면 내각 (윤보선 대통령)의 짧았던 1년, 그리고 오일육 군사 쿠데타 (혁명)으로 이어지던 비교적 숨가쁜 변화 속에서 살았다. 비록 육이오 동란은 이미 끝나서 전쟁의 잔혹함은 간신히 비켜 지나게 되었지만, 우리 집처럼 아버지가 전쟁으로 없어진 집도 많았고, 길거리에는 전쟁고아, 거지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는 사실 육이오 전쟁 후의 정말 살기 힘겨운 시절이었다. 철저한 반일, 반공 교육 속에서 위와 아래가 모조리 적국으로 둘러싸인 시절, 그저 믿을 곳이라고는 ‘정의의 십자군’ 미군과 그들의 나라 미국, 그리고 조그만 섬 으로 쫓겨난 장개석 총통의 국민당 정부, 대만 밖에 없었다. 거의 모든 것이 미국의 원조에 의해서 유지되던 그 시절, 내가 다니던 재동국민학교도 전쟁 때 반 이상이 불타버려서, 미군들이 와서 새로 지어주고, 고쳐주었다.
이승만과 멘데레스: 이승만 대통령 재임 시에 나는 국민학생이었는데, 경무대(청와대의 전 이름)와 비교적 가까워서 그랬는지, 가끔 새벽같이 단체로 대통령을 마중하러 나가기도 했다. 제일 기억에 나는 것이 1958년, 5학년 때, 터키의 멘데레스 수상이 왔을 때 환영을 나간 것과, 터키를 방문하고 도착해서 일행이 경무대로 돌아온 때였다. 졸린 눈을 비비며 깜깜한 새벽에 동원되어 나가서 한참 기다리다가, 몇 초 만에 쏜살같이 지나가는 차들을 향해서 태극기를 흔들면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그때 모습의 사진이 경향신문 조간에 나왔는데, 기적적으로 내가 거기에 찍혔다. 그때의 신문을 다시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조금 묘한 사실은 그때의 그 두 나라의 원수 급, 이승만 대통령과 터키의 멘데레스 수상, 비슷한 때에 대중 혁명으로 실각을 한, 조금은 운명의 장난이라고나 할까..
소련의 스프트닉: 가회동으로 처음 이사를 가자마자 전세계적인 큰 뉴스가 터졌다. 그때가 1957년 가을이었다. 공산당 소련이 역사상 최초로 ‘인공위성’, 그러니까 사람이 만든 위성을 쏘아 올린 것이다. 그것이 그 유명한 스프트닉, Sputnik 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사실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 이었다. 비록 지구에서 제일 가까운 우주 궤도였지만 그곳은 분명히 ‘새카만’ 우주 공간이었던 것이고 그곳에 농구공 만한 ‘사람이 만든’ 위성을 쏘아서 지구를 돌게 만든 것이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코웃음을 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미국도 못하던 쾌거였고, 이때 소련이 이룬 폭발적인 ‘선전효과’는 정말 대단했다. 그들은 분명히 ‘공산주의의 우월성’을 과시하고자 했을 것이니까.. 상대적으로 미국이 당한 ‘수모’도 대단했다. 하지만, 이때의 그런 수치가 미국을 13년 뒤에 소련을 제치고 달에 첫 우주인을 보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가회동은 바로 아래쪽에 붙어있던 재동과 더불어, 전에 살던 원서동에 비해서 깨끗한 동네에 속했다. 큰 차이는 원서동에는 그때까지도 초가집들이 즐비했었던 것에 비해 이곳에 초가집은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서울에 웬 초가집? 하지만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하지만 조금 나은 가회동, 재동의 행길(맞는 철자는 한길, 부를 때는 행길이라고 불렀는데, 골목을 제외한 길을 그 당시는 그렇게 불렀고, 종로와 같은 큰길을 제외하고는 길 이름이 전혀 없었다. ) 조차도 지금에 비하면 아마도 ‘난민 촌’을 연상할 정도였을 것이다. 상상할 수 있는 수많은 ‘잡상인’들이 거리를 완전히 덮고 지나가는 사람을 상대했다. 특히 국민학교 앞에서 코흘리개들을 손님으로 하는 가게는 정말 다양하고, 조밀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던 곳은 역시 만화가게, 빙수,국화빵 가게 같은 것이었는데, 텔레비전이 없었던 그 시절에 그곳은 우리들 꿈의 전당이었다. 재동학교 앞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렇게 좋던 싫던 나의 어린 시절 6년의 추억을 만들어 준 가회동 시절.. 어찌 잊으랴.. 그때 알고 지냈던 코흘리개 친구들.. 다들 어떻게 인생을 살아왔을까 궁금해진다.
9월 15일, 1950년 9월 15일에 있었던 역사적인 육이오 당시,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된 날이다. 거의 ‘비상식적’으로 적의 후방을 찌르는 거대한 맥아더 장군의 작품이 현실화 되던 날이었다. 그 후방이란 곳이 인천인 것이 그 당시는 상당한 모험이었을 것이라서 비상식적인 발상이었고, 그런 것이 맥아더장군 특유의 발상이기도 했고, 그것은 사실 아슬아슬한 모험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인천에 건 도박은 예상을 훨씬 웃도는 성공담이 되었다. 그러니까 가끔 계산이 깔린 도박은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도박이라는 것은 그 뒤에 같은 운들이 따라주지를 않았기 때문에 분명히 들어난다. 그 이후 맥아더의 운은 사라지고, ‘악운’이 따르게 된 것이다. 그 당시 맥아더가 조금만 속도를 늦추고, 적군에 대한 정보에 신경을 더 썼더라면 사태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제일 큰 도박이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을 ‘억지로’ 무시했다는 실수였다. 수많은 정보들이 그것을 말해주었지만, 그에게는 듣기 싫었던 정보였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런 정보들의 신빙성이었을 것인데, 아마도 정보수집에 더 신경을 썼어야 했지 않았을까?
며칠 전에 Reading-by-Tying으로 읽고 있었던 한국전쟁(육이오 동란)에 관한 책, Operation Broken Reed (꺾인 갈대 작전)을 간신히 다 읽게 되었다. 이 책도 산지 몇 년째 된 것인데 올 여름, “육체적인 노동 대신 여름독서를”, 이란 목표로 골랐던 도서목록중의 하나였다. 이 책을 읽은 때가 육이오(6.25: 동란 발발)와 구이팔(9.28: 서울 수복) 을 사이에 둔 계절이어서 더 61년 전을 상상하게 되며 읽으니 실감이 더 했다. 이 책은 시간이 나면 자세히 나의 blog에서 소개할 예정인데, 한마디로 이 책의 내용이 ‘진실, 사실’ 이라면 이 ‘믿기 힘든’ 작전은 육이오 동란 중, 가장 비밀에 쌓인 역사였을 것이다. 이 책을 읽었던 사람들 중에는 이것이 거의 ‘허구’라고 단정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믿는 쪽에 가깝다. 나도 읽고 나서 생각이, 이것은 사실 일 것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이 작전은 육이오 동란이 휴전회담과 격전을 거듭하기 시작하던 1952년 1월 초에 38선 북쪽, ‘적진’ 속에서 일어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1주일에 걸친 미군, 자유중국 군의 합동작전이었고, 비록 결과는 성공이었지만 그에 따른 희생은 실로 충격적이고 슬픈 것이었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휴전회담은 가속화 되었고, 확전, 3차 세계대전(심지어, 핵전쟁)은 방지가 되었다.
오늘 내가 생각하는 것은 구이팔을 가능케 한 구일오 인천상륙작전이다. 너무나 많이 알려져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이번에는 예전과는 조금 다른 각도로 이 역사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2007년, New York Times best seller였던 David Halberstram의 책, The Coldest Winter, The America and The Korean War라는 책 덕분이었다. 700 페이지가 넘는 이 책은 육이오 동란을 미국과, 한국 주변국과의 정치적인 각도로 다룬 것이어서 이제까지의 군사적인 각도로만 다룬 책과 다른 맛을 보여준다. 역사를 다룬 책이지만 역시 저자의 정치적 색깔도 여기저기 보여주고 있어서 흠이라기 보다는 조금 더 인간적인 역사철학도 보여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맥아더 장군에 대한 저자의 거의 ‘혐오’ 적인 인상이다. 물론 충분한 역사적 자료에 의한 저자의 의견이겠지만, 조금은 정도가 지나치다고나 할까? 맥아더를 영웅시하는 사람들은 이 책의 이 부분들을 읽는 것이 괴로울 것이다. 나는 솔직히 중립적인 입장일 수 밖에 없다. 내가 맥아더를 옆에서 본 것도 아니고, 이 저자와 같이 충분히 사료를 공부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어떠한 영웅도 보여주기 싫은 면이 충분히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진리’는 안다.
이 책의 저자는 책 전체를 통해서 맥아더를 일방적으로 몰아 부치기는 했지만 솔직하게 맥아더의 천재적인 ‘용기와, 지혜’를 인정한 유일한 부분이 바로 인천상륙작전이었다. 거의 부산 교두보 (Pusan Perimeter)에서 바다로 밀려날 뻔 했던 시기에 이 작전이 성공을 한 것이고 보면 그 절묘한 timing의 진가도 역사적인 것이 아니었을까? 사실, 이 작전이 조금만 더 늦게 있었다면 김일성 개XX의 호언장담대로 부산은 괴뢰군 수중에 들어갔을지도 모르고, 대한민국은 역사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아찔해진다.
맥아더의 인천 상륙작전의 구상은 이미 지상전에서 유엔군의 압도적인 열세를 만회하는 방법으로 시작이 되었다. 유엔군의 해군, 공군을 포함한 기술적인 면의 압도적인 우세함을 활용하는 방법은 해상으로 적진 깊숙이 대거 병력을 빨리 상륙시키는 방법임은 사실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맥아더는 그의 과거 전투경험으로도 생명을 아끼지 않는 무자비한 적군과의 정면 대결보다는 우회 작전을 더 좋아했다. 이러한 적진 뒤의 상륙작전의 구상은 서울함락 직후 공산군이 노도와 같이 남진하기 시작하던 7월 초에 이미 결정이 되었다.
맨 처음 이 작전은 Operation Blueheart 라고 이름이 되었고, 예정 날짜는 7월 22일이었지만 지상전에서 너무나 일방적으로 밀리는 바람에 이 예정은 무기로 연기가 되고 말았다. 그러는 중 맥아더는 그 동안 별로 작전이 없었던 해병대에 이 작전을 맡아주도록 주선을 하며, 본격적으로 목표를 인천으로 굳히기 시작했다. 문제는 목표가 인천이라는 사실이었는데, 사실 표면적으로 인천은 작전하기에 ‘최악’의 자연적 조건만 갖추고 있었다. 조수 간만의 차이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심한 곳이었다. 이 조수 시간을 잘못 맞추는 날이면 해병대가 기나긴 개펄에서 허우적거리는 최악의 상태도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상륙하기에 알맞은 ‘해변’ 이 없고 모두 방파제 같은 시설물로 그득하고, 수뢰와 같은 방어시설이 있으면 더욱 힘들 것이다. 항구에 거의 붙어있는 월미도는 공산군 수비대에게 부두를 방비하는데 좋은 시설을 줄 수도 있다.
이런 불리한 조건들은 물론 해병대를 전함으로 운반해 줄 해군 측에서 강조가 되었다. 해군 함정들이 인천 해안에 충분히 접근할 수 있는 날짜는 밀물의 주기에 따라 거의 제한이 되었는데, 빠른 날이 밀물의 깊이가 31 feet인 9월 15일 이고 그 다음이 10월 11일이었다. 9월 15일의 아침 밀물의 시간은 오전 6시 59분, 저녁 밀물은 오후 7시 19분이었다. 이래서, 맥아더는 상륙시기를 아침밀물에 맞추는 작전으로 결정을 한다. 이런 결정은 그에게는 사실 간단했지만 해군에게는 상당히 힘들고 복잡한 요구였을 것이다. 이런 결정들은 거의 한결같은 반대에 부딪쳤지만 이것은 맥아더가 충분히 예상한 바여서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인천상륙작전이 도박을 할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본 것이다. 전략적인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것은 거의 모두 인정을 했지만 문제는 상륙 지점이었다. 왜~~ 그렇게 불리한 조건만 갖춘 인천인가? 그보다 훨씬 남쪽에 있었던 군산이 훨씬 (해군에게, 해병대가 상륙하기에) 안전한 곳이 아닌가? 그런 것들은 사실 맥아더가 설득하는데 거꾸로 이용이 되었다. 그렇게 어려운 곳이라 적들도 그곳을 충분히 방어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인천의 가치는 사실 지리적으로 서울과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에도 있었다. 서울을 점령하면 그 상징적인 효과는 대단할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동쪽으로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르면 낙동강 쪽에 몰려있는 공산군들을 완전히 포위 섬멸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맥아더의 뚜렷한 구상은 예상보다 쉽게 반대자들을 설득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인천 D-day는 이렇게 공식적으로 정해졌고, 공격준비가 시작이 되었다. 맥아더의 짐작대로, 김일성은 인천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모택동은 달랐다. 맥아더를 알았고, 일본에 깔려있던 공산스파이들이 이미 이상한 낌새를 보고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후방 깊숙한 곳으로 대거 병력이 쳐들어 올 가능성에 대해서 중공과 소련은 김일성에게 경고를 했지만, 역시 맥아더에게 운이 좋았는지 그는 듣지 않았다. 그 정도로 김일성은 빠른 승리를 장담했던 모양이다. 이런 사실로 보면 김일성은 소련이나 중공의 지시에 의해서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니고 순전히 그의 독자적인 결정으로 밀어부친 것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를 보면 이런 미친 정도로 ‘낙관적’인 사고방식이 이해가 간다. 그는 사실 거의 ‘깡패 개XX’ 의 수준이었던 것이다.
상륙작전은 예상대로 공산군의 저항이 미미한 상태로 진행되었다. 13,000명의 해병대가 투입이 되어서 첫날의 전사자는 20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리고 드디어 서울을 향한 진격이 시작되었고, 결국 그것은 9월 28일까지 계속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서울까지 30마일 정도 진격하는데 무려 13일이 걸린 것이다. 이것은 9월 15일 이후 놀란 김일성이 대거 병력, 2만 이상을 이 지역으로 투입한 까닭이었다. 문제는 사실 서울을 그렇게 빨리 점령할 이유에 있었다. 군사적으로 보면 저항이 치열한 서울을 우회해서 빨리 낙동강으로부터 후퇴하는 공산군을 포위 섬멸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것은 후에 ‘맥아더 개인의 영광’을 위한 작전이 아니었던가 하는 비난을 받게 되기도 한다. 서울 탈환의 정치적인 중요성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서울 탈환에 소모된 귀중한 시간에, 후퇴하는 공산군이 북으로 탈출할 여유를 준 셈이고, 그것은 두고두고 전쟁을 길게 끈 원인도 되었다. 원래의 계획은 6.25 남침의 3개월이 되던 9월 25일 이전에 서울을 탈환할 예정이었는데, 그 날에는 서울 근교까지 진격을 한 상태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시가전이 거의 3일 걸린 셈이다. 이렇게 해서 맥아더가 거의 혼자 밀어부친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한 셈이고, 이로 인해서 파죽지세로 부산을 포위했던 공산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후퇴를 시작하게 되고, 전쟁은 완전히 양상이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이 작전 성공 이후로 ‘기세가 등등’ 해진 그의 독자적이고, 독재적인 작전은 실패의 연속이 된다.
시기적으로 61년 전에 일어났던 일을 생각해 보았다. 나는 이 당시 2살 정도여서 직접 보고 들은 적이 없지만 그래도 이것들은 나의 생전에 일어났던 살아있는 역사였다. 이 당시에 나는 어디에 있었을까?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이 당시 이미 아버지가 끌려 가신 이후였고, 원서동의 어떤 무당집에 숨어 살았다고 했다. 그 동네는 비원 바로 옆에 있었는데, 미군의 비행기가 폭격하는 것도 다 보셨다고 들었다. 그러면 비록 기억은 안 나지만 나도 그런 장면을 다 보고 들었을 것 같다. 다만 기억을 못하는 것 뿐이다. 생각을 한다. 과연 민족 반역자, 역적, 김일성 개XX는 어떤 생각으로 전쟁을 일으켰나? 이 미친놈을 어떻게 역사는 능지처참을 할 것인가? 괴롭다. 괴롭다.
Autumn Leaves: 의외로 갑자기 가을의 맛이 눈앞에 다가왔다. 준비도 못한 채 맞게 된 것이지만, 절대로 가을은 반갑다. 황금색으로 바뀌는 나뭇잎을 보는 것도 즐겁고, 차가운 비를 바라보며 움츠려 드는 몸을 따뜻하게 녹이는 진한 커피향도 그렇고, 이것이 앞으로 몇 개월의 비교적 짧은 기간에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은근히 기대했던 비는 끈질기게도 오지를 않는다. 그래서 모든 것이 확률적인 수치로 나오는 일기예보는 해석을 잘 해야 한다. 그 확률이 맞는 확률도 있을 것이고 그것은 역시 개개인 마다 조금씩 다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요새 일기예보는 거의 일부러 안 보는 편이다. 기대도 하기 싫고, 미리 알아 보았자 그렇게 이득이 될 것도 없고, 만의 일이라도 비상 적인 일기가 오게 되면 그것은 주위를 통해서 자연히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니까 사실 마음이 편하다. 시간적으로 변하는 날씨에 연연하던 때를 생각하면 왜 그렇게 내가 한가했나 하는 후회도 든다.
내가 사는 이곳의 9월은 사과의 계절이다. 그래서 애들이 어렸을 때는 가족적인 연례행사로 과수원을 찾고 했다. 아이들이 다 떠나면서 그런 행사도 시들해지고 작년부터는 가지 않게 되었다. 이곳에 이사올 당시, 그러니까 거의 20년 전만 해도 그렇게 과수원을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인구가 늘면서, 특히 한인들이 늘어나면서 조금은 눈에 거슬릴 정도가 되었다. 특히 단체로 버스까지 타고 오는 것을 보면서 완전히 그곳의 맛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 옛날이 그립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이 자연스러운 세월의 흐름이 아닐까.. 모든 것은 모두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까.
일본 TV 드라마: 2007년부터 보기 시작했던 일본의 텔레비전 프로그램들, 특히 그 중에서도 연속극 드라마들 이제는 이미 방영된 것은 다 보아서 새로 나오는 것을 기다리게까지 되었다. 사실상 그것들을 보기 시작하면서 한국의 프로그램들을 하나도 안보게 되었다. 연숙은 이것을 이해를 못하는 모양이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되었나 하는, 조금은 실망까지 하는 눈치다. 어찌 그것을 이해를 못할까? 같은 드라마를 보아야 그런대로 얘기할 것도 생기고 하니까.. 이곳에서 가끔 모이는 친지들과도 마찬가지다. 모두들 어떤 한국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가지도 신나게 얘기를 나누는데, 나는 완전히 듣고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니까..
일본 프로그램을 보기 전에도 사실 나는 한국에서 나오는 것을 아주 가끔 보는 편이어서, 그 당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것들은 내가 보아도 조금은 이상하긴 하다. 하지만 일본의 드라마를 보는 나는 분명히 목적이 있었다. 그들을 조금이라도 ‘값싸게’ 공부해 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인터넷의 덕분으로 가능해 졌고, 최소한 듣는 일본어는 많이 익숙해 졌다. 비록 드라마지만 그들의 문화, 생각, 풍습, 역사 등등을 간접적으로 많이 배우게 되었다. 너무나 그들을 모르고, 무시하며 산 것이 조금은 후회가 될 정도였다. 그래서 올해 초의 지진, 해일, 원전사고 등 재해 때, 그들을 이제까지와는 아주 다른 눈으로 그들을 보게 되기도 했다. ‘증오’의 역사로 점철이 되었고, 철저한 반일교육으로 자란 나로써는 지난 몇 년 동안 많은 것을 새로 보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다행히 대한민국의 경제성장, 정치적인 완숙함, 한류의 파급 등으로 그들도 이제는 거의 친구와 같은 입장을 취하게 되어서, 참 세상을 오래 산 보람을 느끼기도 한다. 이미 내가 골라놓은 ‘최고의 일본 드라마’ 목록은 계속 불어난다
평창이씨 시조: 얼마 전에 강원도 평창이 동계 올림픽 유치에 성공했다고 들어서, 평창이란 이름이 앞으로 귀에 아주 익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평창 이씨라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평창이 본관인 성씨가 다른 것도 있는지는 모르지만 평창 이씨만은 분명하게 그곳이 고향이다. 하지만 평창이씨를 공부해 보면서 평창에 근거를 한 평창이씨는 한가지 파, ‘정숙공파’ 밖에 없고 나머지는 거의 전국에 흩어져 있다. 내가 속한 ‘익평공파’만 해도 그렇다. 나의 바로 위 조상님들의 세거지는 평창이 아니고 평택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도 평창에 살고 계신 정숙공파 종씨들은 평창이 더욱 알려지게 되면서 조금 더 특별한 대우를 받게 되지 않을까..
현재 평창이씨는 시조 할아버지 문제로 두 개의 파벌로 갈린 상태가 되었다. 서울 흥인동에 위치한 평창이씨 대종회는 시조 휘 ‘광’ 자 할아버지를 시조로 하는데 반해서, 정숙공파는 독자적으로 그 보다 훨씬 위의 조상인 ‘윤장’ 할아버지를 시조로 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 2개의 ‘다른’ 족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대종회에서는 광 할아버지 이전의 역사는 상관이 없다고 보는 것이니까, 최소한 대종회 족보는 전체가 맞는 것이고, 정숙공파 족보는 대종회 족보에 없는 것이 더 들어가 있을 뿐이니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정숙공파의 족보는 시조인 윤장이 경주이씨에서 갈려 나온 것까지 밝히고 있어서, 이것이 문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중요할까? 그리고 그렇게 오래 전의 사실을 어떻게 몇 가지 남은 사료로써 단정을 지을 수 있을까? 대종회는 ‘정사’를 고수하는 입장이어서 원래 족보가 출발된 시점에서 어떠한 다른 것도 넣을 수 없다는 보수적인 입장이고 보면 그것도 이해가 간다. 어떤 분들 말대로 사실 그것이 대종회가 갈라질 정도로 심각한 문제는 아닐 것 같다.
어제는 루이지애나 로 부터 북상한 tropical storm ‘Lee’가 많은 비를 몰고 결국 이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우리가 필요했던 것은 알맞은 비 였으나, 덤으로 토네이도까지 주면서 지나갔다. 비는 예상보다는 적게 왔지만, 몇 주의 가뭄에 비하면 적지 않은 것이었다. 근처에 아주 작은 규모의 토네이도가 집 몇 채에 나무를 쓰러뜨렸지만, 이것은 다른 곳의 ‘대형 사고’에 비하면 아주 경미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오늘은 왔다. 올 것이 온 것이다. 기온이 급강하 하며 아주 음산한 비까지 뿌리는 하루였다. 이것이 바로 가을비의 전형이 아닐까? 몇 달 만에 다 잊어버렸던 ‘써늘함’을 처음으로 느낀 날이었다. 긴 팔, 긴 바지 옷들을 갑자기 찾아서 허둥대던 싸늘한 아침, 이제부터는 조금 ‘가을비 우산 속‘을 기대해도 좋은 계절이 된 것인지.. 기대가 된다.
미국 대통령, ‘바락 오바마‘.. 미국 역사상 첫 ‘흑인’ 대통령, 조금은 불쌍하다. 재수가 지독히도 없었나. 기대가 너무나도 컸었을 까? 제2의 지미 카터가 되어가는 것이 아닐까?
8년간의 ‘머저리’ 부시(stupid Bush) 밑에서 거덜이 난 미국의 현실에 진절머리가 난 후의 거의 이상적인 대통령 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잘못이었을까? 희망과 현실이 어쩌면 이렇게 처참할 정도로 차이를 보이고 있을까? 결국은 오바마는 지금 미국이 필요로 하는 인물의 자격에 미달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가 제일 큰 ‘실수’를 한 것이 거의 광신적으로 그의 정책이 실패하기를 원했던 반대당을 제압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너무나 ‘착하고, 타협적’으로 그들을 대한 것은 지금 보면 거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 들과 똑 같은 수법으로 ‘무자비하게’ 그 광신도들을 눌렀어야 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런 실수를 회복하기에는 역부족이고, 시간적으로도 늦었다. 이제, 깡패 같은 공화당이 재집권을 하게 되면 그와 대다수 국민들이 원했던 ‘상식적인 정책’은 물 건너 갈 것이 너무나 뻔하다. 참, 암담한 미래가 보인다. 이제 이곳을 떠날 때가 하루 하루 가까이 다가오는 것일까?
돌아오는 일요일은 9월 11일이다. 뉴스에서 그것을 10년 동안 끊임없이 하지만 조금씩 낮아지는 정도로 취급을 했지만 역시 10이라는 숫자에는 약한 모양이다. 10주년이 된 나인-원-원.. 어찌 구급,비상 전화번호, 911과 같은 날이었을까? 이제는 10년 정도는 절대로 긴 세월이 아니다. 어제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으니까. 하지만 10년 동안 참 많은 것이 변함도 느낀다. 나도 변했고, 늙었고, 주위도 꽤 변해 있다. 특히 정치, 사회적으로 미국이 겪었고, 변한 것을 보면 조금은 소름조차 끼칠 정도다. 그것은 미국만이 아닐 것이다. 직접, 간접적으로 미친 여파는 후세에 역사가들이 말을 해 줄 것이지만, 아마추어 역사학도가 되어서 생각을 해도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한마디로 ‘극단주의자들의 일시적 승리’, 그런 것이 아닐까? 이제는 웬만한 ‘끔찍한’ 것에도 그리 놀라지 않게 되었다. 극단주의는 사회, 문화 곳곳에서 활개를 치고 유행처럼 번졌다. 그런 것들이 언제까지 가게 될까? ‘양순하고, 착한’ 다수들은 도대체 어디로들 숨었을까?
중학교 (서울 중앙중학교) 때 나온 미국영화, Come September의 주제곡을 수십 년 만에 들었다. 거의 분명히 타향살이를 시작하면서 처음 들었을 것이다. 중학교 때의 영화니까 분명히 ‘학생입장불가’로 볼 수 없는 그림의 떡이었을 것이고, 영화자체도 그 나이에 보기에는 너무나 ‘지겨운’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주연배우는 Rock Hudson(록 허드슨)과 이태리의 Gina Lollobrigida(지나 롤로브리지다) 등의 그 당시 최고 정상급 국제 스타들이었다. 그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은 영화가 아니라 그 영화의 주제곡 때문이다. 영화 내용은 모르지만 그 주제곡은 그야말로 ‘경음악’의 진수를 보여주는 정말 경쾌한 것이었다. 그것이 왜 9월과 연관이 있는지, 그러니까 그 영화의 제목이 왜 ‘9월이 오면‘ 이었는지는 아직도 이유를 모르지만, 그것은 절대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9월이 오면 생각나는 ‘음악’ 중의 하나라는 , 그것이 더 중요하니까.
Come September: 9월이 오면, 1961
어제, 9월 1일은 30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나의 인생 반려자로 살아온 아내 연숙의 생일이었다. 원래 내가 우리 둘의 아침식사를 준비한 것이 이제 몇 년째가 되어서, 이것으로 생일의 “깜짝 서비스” 를 할 수도 없고, $$$도 그렇고, 너무나 흔한 ‘생일 축하 메시지’ 를 만들기도 낯 가렵고.. 그래서 요새는 생일이 맞거나 축하해주는 것도 부담스럽지 않은 부담이 되어간다. 그저 한마디로 XX 년 전에 ‘인간으로 세상에 나온 신비’ 를 서로가 생각하면 어떨까? 그렇게 요란하게 노래를 부르며, 먹으며, 선물포장을 뜯어야만 할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이고, 올해는 작은 딸 나라니 가 ‘먹는 생일’을 마련해 주었다. Cumberland Mall에 있는 커다란 Italian restaurant, Maggiano’s (Little Italy) 에서 오랜만에 ‘밀가루 음식’ 과 bottle of wine으로 포식을 시켜주었다. 이태리 사람들이 ‘많이’ 먹는다는 것은 알았지만 엄청나게 많은 음식의 크기 (flat dish가 아니고 bowl)에 먹기도 전에 질려버렸다. 우리는 원래 저녁식사를 거의 안 하고 살아서 아마도 위장이 꽤 놀랐을 것이다. 거기다가 음식값에 carry-out 메뉴가 덤으로 포함되어 있어서 그것까지 하면 그리 비싼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박봉’에 시달리는 작은 딸의 저금 통장에 큰 변화가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이래서, 우리도 이제 오래~~ 살았구나.. 실감을 했다.
Try to Remember – The Lettermen
9월과 12월 사이의 감정을 보여주는 멋진 시
오래된 추억의 9월은 어떤 것들일까? 그 중에서 추석이 으뜸일까? 타향살이에서 제일 그리운 것이 ‘추석의 느낌’ 이다. 이것은 타향에서는 ‘절대적으로 느끼기 불가능’ 한 것 중에 하나다. 그러니까 추억이던가. 실제로 그 추억이 현실적인 추석보다 더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모든 것들이 ‘느리기만 하던’ 시절.. 시간도 느리고, 버스도 느리고, 비행기, 기차도 느리고, 전화도 느리던 그 시절.. 그런 명절은 정말 천천히 즐기는 느린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설날과 달리 날씨가 알맞게 따뜻해서 얼마든지 밖에서 ‘딱총과 칼’로 무장을 해서 전쟁놀이로 뛰어 놀고, 뛰어 들어와서 송편, 고기 등 으로 배를 채우고 다시 골목으로 뛰어나가던 그런 추석.. 그날 밤에 재수가 좋으면 어둡기만 하던 동네를 완전히 대낮으로 바꾸어 놓았던 보름달 아래서 골목 이웃들이 몰려나와 수다를 떨던 아저씨, 아줌마들.. 세월을 따라 모든 것들이 빨리 움직이면서 그런 순진함 즐거움은 하나 둘씩 사라져갔다.
대학 다닐 때, 갈비씨(skinny people, 이런 말을 요새도 쓰나?) 인 신세로 주눅이 들었던 시절, 9월은 희망의 계절이었다. 모든 신체 부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짧은 팔에서 조금은 가려주는 긴 팔의 옷으로 천천히 바뀌던 첫 달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우습지만, 그 당시는 상당히 심각했다. 아마도 뚱뚱한 것이 마른 것보다 ‘가치가 떨어진’ 요새 사람들은 절대로 상상을 못할 듯 하다. 분명히 그 당시는 ‘살이 찐 것’이 마른 것 보다 더 멋있게 보였다. 아마도 마른 사람의 대부분이 가난했던 사람들이라 그랬나? 이래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건가? 가난하게 보이게 노력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가족이 생기고, 대부분 가장이 겪게 되는 세파에 시달리기 시작하면서 9월과 가을을 거의 잊고 살게 되었고, 그에 따르는 추억도 메말라 가게 되었다.그러다가 50대에 접어 들면서 우연히 나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시(詩)에 눈을 뜨게 되었다. 거의 완전히 메말랐던 감정들이 이 신기한 것을 통해서 조금씩 스며 나옴을 느끼게 되어서, 나이와 감정, 감상이 꼭 반비례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9월은 그런 찐한 감정의 보물창고인 가을과 겨울의 입구와 같은 때인 것을 매년 조금씩 실감해 가게 되었다. 올해는 과연 어떻게 그런 감정의 보고(寶庫)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가을 그림자
가을은 깨어질까 두려운 유리창.
흘러온 시간들 말갛게 비치는
갠 날의 연못.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는 아이들 찾으러
집 나서는
황혼은
물빠진 감잎에 근심들이네.
가을날 수상한 나를 엿보는
그림자는 순간접착제.
빛 속으로 나서는 여윈 추억들 들춰내는
가을은
여름이 버린 구겨진 시간표.
김재진
9월의 노래
누가 처음 발표를 했는지는 몰라도 9월의 classic은 바로 곡이 아닐까? 패티킴의 version이 바로 그것인데 아깝게도 그것은 이마 유튜브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에 버금가는 ‘연숙’을 닮았던 “혜은이”의 것이 건재하니까..라고 했지만 다시 찾게 되었다. 멋진 패티김의 pose와 함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