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늘한 5월의 어느 날에..

¶  와~~ 싸늘한 아침.. 부엌의 창문 밖에 있는 온도계를 보니 40도(화씨)도 되지를 않는다. 이 정도면 아마 겨울에나 볼 수 있는 그런 기온이 아닌가? 문제는 지난 1주일 넘게 계속된 80도(화씨)를 훨씬 넘는 ‘초여름’ 같은 날씨에 거의 적응이 되어가고, 서서히 ‘겨울 장비’를 거의 완전히 ‘철거’하고 있어서 어제, 오늘의 ‘추위’는 더 차갑게 느껴진다.

 

여름같은 5월초를 보여 주는 tower fan 옆에는 추위에 떠는 Tobey가..

여름같은 5월초를 보여주는 대나무 돗자리 위의 tower fan 옆에는 추위에 떠는 Tobey가..

결국은 참지 못하고 radiant space heater가 closet속 에서 끌려 나왔다

결국은 참지 못하고 radiant space heater가 closet속 에서 끌려 나왔다

 

물론 이것이 ‘또’ global warming의 여파라고 속단하지는 않는다. 경험적으로 나는 5월 달의 깜짝 추위를 많이 기억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의 ‘한파’는 1주일의 ‘열파, heat wave’에 바로 이어졌기 때문에 조그만 뉴스 감이 된 것이다. 느끼는, 체감적인 온도는 확실히 5월의 40도와 1월의 40도와 확연히 다른 것이다. 더 춥게 느껴지는 것이다. 게다가 제대로 입을 옷도 없었고, 거의 철거되기 직전의 space heater를 다시 가동을 하고, gas 낭비를 없애기 위해서 central heating을 완전히 끄려는 timing등.. 조금은 웃기는 노릇이 아닌가? 아침에는 잠잠하던 central heating이 다시 가동을 하기도 했다. 참.. 재미있는 5월 중순이다. 아마도 이것이 이번 season의 ‘마지막 겨울’이 될 것이고 본격적인 여름 준비를 할 시기가 온 것 같다.

 

¶  올해의 Mother’s Day미리 얘기가된 것처럼 집에서 식사를 하기로했고, 나라니가 사는 apartment에서 ‘아이들’이 준비한 늦은 점심으로 시간을 보냈다. 이곳의 ‘전통, 풍습’대로우리는 대부분 밖에 나가서 식사(外食)을하곤했는데 얼마 전부터는조금은검소하고조촐하게 보내기로 합의를 보게 되어서편안하게 집에서식사를 하게된 것이다. 매년 이날, Mother’s Day(5월두째일요일)가 오면 나의머리는 찐~한 생각으로 더 복잡해진다. 우리집 두딸들엄마의 의미와 더불어, Mother란 ‘영어’ 단어가 ‘어머니, 엄마’란 한글말과 거의 같은정도로 가깝게 들리는 ‘비선택적인’ 삶을 살게 된 ‘운명’을 생각하며, 그 운명의 그늘에서 나의엄마, 어머니와의 추억을 더욱 뼈저리게 느낀다. 분명히 인간에게는 운명이란 것이 있다는 생각, “인생은선택” 이란말의 허구성도 더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KENT STATE

 
‘OHIO’, Crosby Stills Nash & Young 1970

 

KENT STATE.. 1970년 5월 4일, Kent State (University)에서 일어난 ‘비극적 사건’을 기억한다. 이 학교는 오하이오 주 동북지역에 있는 비교적 작은, 알려지지 않던 학교였지만 1970년 5월 4일에 일어난 이 ‘비극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으로 ‘거의 며칠 만에’ 세계적으로 알려졌고, 그날 이후 역사적인 파장과 의미도 상당하였다. 그날이 바로 1970년 5월 4일 이었다.

1970년 5월.. 기억을 더듬는다. 나의 기억력이 제일 활발하던 22세 시절 그 시절은 어떤 시절이었을까.. 나의 연세대 졸업반 시절, 바로 몇 주전에는 그 유명한 APOLLO 13의 극적인 귀환 뉴스가 있었다. 또한 ‘불도저, 건설 붐’의 서울의 실패작 ‘와우 아파트’ 가 ‘와우~~’ 하며 붕괴를 했었고, 나는 당시 연세대 전기과의 제주도 졸업여행을 ‘반납’하고 창희 용현이와 지리산 장기등반의 희열을 맛 보던 그런 때이기도 했다.

졸업 후의 걱정은 비록 서서히 나의 머리를 누르긴 했지만.. 22세의 나이에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나의 모든 관심은 가능성이 100% 같이 보이는 ‘멋진 인생’에 있었고, 나를 둘러싼 사정들: 정치, 경제, 사회..등등 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먼 걱정’은 당장이라도 탱크로 밀고 내려올 듯한 휴전선 너머의 빨갱이들과, 다른 빨갱이 월남의 베트콩에 ‘밀려서 고전하는’ 우리의 ‘보호자’ 미국의 어려운 사정이었다.

당시 우리와 같은 대학생들은 기본적으로 빨갱이를 증오하는 기본자세는 갖추고 있었고, 그 전해에 있었던 박정희 3선 개헌도 데모를 통한 반대를 하긴 했지만 ‘박정희의 명분’은 거스를 수가 없었다. 그 이후에 나온 대학생 ‘군사훈련: 교련’도 반대 데모를 했지만 이미 국민정서는 ‘무조건 안정’으로 흐르고 있었다. 낭만적인 대학 캠퍼스 내에서 장난감 총으로 받던 ‘어린애 장난’ 같던 교련을 우리는 별 수 없이 받기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솔직히 그런 식의 ‘교련’이 빨갱이를 막는데 얼마나 효과가 있을 지는 우리들도 웃을 정도였다.

당시 미국이 고전하던 월남은 한마디로 완전 교착상태였고 미국의 여론도 서서히 ‘철군’ 쪽으로, ‘협상’ 쪽으로 흐르던 때였다. 미국은 비록 기술적, 화력 등으로 버티고 있었지만 월맹(북 월남)과 베트콩(게릴라)는 ‘민족적 이념’으로 똘똘 뭉친 만만치 않은 적으로 사실은 장기적으로 그들에게 승산이 있었다. 또한 그들은 지리적으로 인접한 지역, 특히 캄보디아가 바로 옆에서 피신처를 제공하고 있었다. 이런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서 닉슨은 그 때 캄보디아 ‘침투’를 선언하게 되었다. 일방적인 선전포고였다.

전쟁이 끝나가나 희망을 했던 미국 여론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고, 특히 군대로 나갈 확률이 더 커진 미국 대학생들이 열을 올리며 데모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 전에도 간간히 반전 운동이 있었지만 이번은 달랐고, 특히 KENT STATE 캠퍼스에서 일어난 ‘비극’이 그 도화선이 된 것이다.

우리들도 대학교 주변에서 데모를 한 경험, 특히 3선 개헌 반대 (1969), 교련반대 데모 등을 한 경험이 있었지만 데모저지를 하는 군경찰 들은 4.19때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서 총기는 ‘절대로’ 보여주지 않았다. 그저 그저 최루탄과 투석..그것이었다. 물론 그것도 10월 유신 이후에는 조금 달라졌겠지만.. 그런데 인권, 인명을 최 우선시 한다는 현대 민주주의의 보루인 미국, 그것도 대학교 안에서 군인들이 총을 ‘난사’ 해서 사상자가 나왔다는 사실은 우리도 사실 놀랄 일이었다.

비록 4명이 죽고 많은 부상자가 나온 비교적 작은 비극이었지만 그 뉴스의 파장은 엄청난 것이었다. 이들이 총을 쏜 거리는 거의 100m를 넘어서 사실 ‘대치’ 상태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였고 엄밀히 말해서 ‘실탄’으로 발포할 이유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날의 상황을 wikipedia에서 보면 이것은 거의 ‘순간적인 사고’로 보인다. 대치 상태에서 서로의 의도를 오해한 결과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2차적인 문제였고 결과적으로 이것이 여론과 정치에 미친 영향은 엄청난 것이었다. 반전 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고 미국의 ‘모든 학교’가 데모에 가담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월남전은 점점 증오의 대상이 되어갔고 징집자들은 하나 둘씩 도피하고.. 하지만 이 여파로 ‘데모 진압’의 기술이 연구가 되고 실탄 사용이 억제되는 등..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iconic, Pulitzer-prize winning picture
iconic, Pulitzer-prize winning picture

당시의 현장 사진 중에 하나는 ‘역사 박물관 용’이 될 정도로 유명한 것이 있었다. 입에 M1 소총을 맞고 ‘즉사’한 학생 Jeffrey Miller, 그 옆에서 고함을 지르는 14살의 ‘가출 소녀’ Mary Ann Vecchio의 사진.. 그것은 나중에 Pulitzer상을 받았다. 한 마디로, wikipedia에 따르면 “most enduring image of the events, and one of the most enduring images of the anti-Vietnam War movement” 이 된 것이다. 사진화보 주간지 LIFE는 완전히 cover story로 그것을 다루었고 ‘재수 없이’ 사망한 학생들, 특히 ‘반전’과는 무관한 ROTC 학생, William Schroeder는 데모와 상관없이 강의실로 걸어가다가 ‘횡사’를 한 case를 다루었다.

이 사건 이후 반전운동, 문화가 확산되고 ‘주옥 같은’ 반전 음악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이 사건을 다룬 hit song도 있었는데 바로 Crosby, Stills, Nash & Young이 부른 ‘OHIO‘ 란 노래였다. 당시에 꽤 hit를 한 것이고 이런 영향의 도움으로 여론은 점점 반전으로 기울게 되었다. 당시 우리 입장에서 조금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것이 왜 ‘빨갱이’한테 그렇게 고전을 하고 있는가.. 왜 국민전체가 더 단결을 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월남에서 ‘후퇴를 하거나 만에 일 지기라고’ 하는 날에는 김일성 빨갱이들도 ‘한번 더 해보자’ 하는 엉뚱한 꿈을 꿀 것이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도 박정희의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미국은 향 후 월남에서 ‘패 한’ 결과를 초래했지만 다행히 그 여파가 한반도로 옮겨오지는 않았다. 이미 빨갱이들의 ‘전쟁 능력’에 한계가 들어나기 시작했고 반대로 박정희의 원대한 국력개발의 꿈은 조금씩 눈에 보이기 시작했기에 이때 벌써 ‘대세’는 정해지지 않았을까.. 이데올로기와 냉전의 그늘에서 한 세대를 보낸 나로써는 사실 월남전이 어떤 ‘의미’를 주는지 확실하지가 않다. 현재로써는 ‘가끔 감상에 젖고 싶은’ 추억의 일부일 따름이다.

 

kent-21970년5월 15일자 LIFE magazine cover

 

kent-7Kent State campus, 최루탄으로 해산을 시도하는 Ohio National Guard

 

kent-3권총과 M1 소총을 ‘일제히’ 발사하는 주 방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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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nt-6사망한 Jeffrey Miller 옆에서 비명을 지르는 ’14세 소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