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ony's Friends

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  YMCA, YMCA!  오늘 오랜만에 YMCA gym엘 갔다. 무언가 생활이 정상 routine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느낀다. 꽤 오랜만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정확하게 얼마만인지는 전혀 idea가 없다. 달력을 보니 (요새는 달력을 안 보면 전혀 알 수가..) 지난 달 23일이 마지막이었다. 그러니까 2주가 넘게 우리는 운동을 못한 것이다.

보통 일주일에 평균 2~3 번 정도는 가는데 꽤 오래 쉰 것이다. 매년 여름이면 사실 가끔 ‘우리도 쉬자, 방학이다’ 라는 기분으로 쉬기도 하고 YMCA swimming pool을 deep cleaning한다고 해서 쉬기도 했지만 2주 이상 쉰 기억이 없어서 이번은 예외적이다. 이유는 두 가지: (1) 너무나 바빠서, (2) 너무나 피곤해서..  하기야 바쁘니까 피곤한 것이지만 이번은 조금 그 정도가 심했다.

장례식, 레지오 점심봉사 이틀 중노동, car maintenance service trip, 이목사님 부부 외식, 거기다 3일간 레지오피정, 1,000차 레지오 주회합 기념 주회.. 와~~ 이 정도면 우리 나이에서는 피곤한 일정이었다. 하지만 운동을 너무 오래 쉬는 것은 피로가 풀리는 것이 아니라,  더 쌓이게 한다는 것도 이번에 깨달았다.

 

¶  자비의 모후 1,000차 주 회합: 이번 주 우리 성모님의 군대,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자비의 모후가 드디어 1,000차 주 회합을 맞았다. 일주일씩 모이는 주회합 1,000차.. 일년이 52주니까, 거의 20년의 세월이 아닌가? 내가 입단한 것이 8년 전쯤이니까 그 이전에도 12년 여의 역사가 있었다니 참  장구한 세월을 ‘견디어’ 온 것이다.

이 레지오의 운명은 사실 보장된 것이 없다. 언제고 문제가 있으면 하루 아침에 사라질 수도 있다. 비록 성모 마리아를 ‘총사령관’으로 삼고 있지만 일시적 인간의 방해공작으로 깨질 수 있다. 지나간 8년 동안 내가 겪었던 ‘해체 위기’는 3번 있었지만 작년 8월 말의 ‘더러운 사건, 일명 레지오 미친년 난동사건 이 가장 치명적이었다. 그때 나는 정말 자비의 모후가 사라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자비의 모후 가장 빛나는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몰랐다. ‘악’의 치명타를 견뎌내고 일어섰고 감격적인 1,000 차 주 회합을 맞은 것이다.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처음에는 간단하게 미사예물 정도 봉헌하는 것으로 끝낼까 했지만 생각을 바꾸어 ‘의도적 과시 誇示‘를 위해서 ‘외부인사’를 초청하고 그들과 함께 기념 주 회합을 하고, 미사가 끝나고 근처 화식집 ‘만천홍’에 가서 푸짐하게 회식하며 기념 주회를 끝냈다.  이날 초청된 ‘인사’는 자비의 모후 창단 간부단원, 내가 입단 할 때의 단장, 부단장님 등이었는데, 이때 창단 시절의 얘기들도 듣기도 했다. 꾸리아에서도 각별히 신경을 써서 축하 떡도 보내주고 1,000차 기념 banner도 제공하였다. 아마도 ‘너무나 어려운 위기를 넘긴’ 사실을 감안했던 것은 아닐까 추측을 한다.  하지만 작년에 당한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았고, 최소한 나는 절대로 그 사건을 잊지 않을 것이다.

 

¶  Waning Summer, already? 오늘 이른 아침 일년 365일 매일 하는 대로 바로 전에 켜진 전깃불 (6시 30분에 켜진다)을 의식하며 아래층 내 서재로 내려오는데 기억에도 조금 희미한 ‘싸늘함’을 느꼈다. 서재로 가니 써늘함을 더한 듯 느껴지고.. 아마도 올 여름 시작되고 처음 맛보는 싸늘함이었던가? 긴 바지가 어디에 있더라는 생각도 스쳤다.

그리고 달력을 보니 8월 3일.. 어찌된 일인가? 8월 초밖에 안 되었는데. 그리고 생각하니 며칠 전에 노오란 school bus가 아침에 동네를 오가는 것을 보았는데… 아이들이 집에 없어서, 학교들이 개학을 하는 것도 잊었나? 그렇구나.. 올해의 여름도 서서히 물러가는구나.. 한 계절이 서서히 또 물러가는데, 나는 무엇을 하고 살았나? 아마도 비가 며칠 동안 계속 내려서 태양의 열기가 땅에서 거의 사라진 결과로 이렇게 싸늘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다시 열기는 돌아오겠지만 며칠 뒤는 입추, 그 뒤로 말복이 가까워오고.. 한마디  올 여름도 서서히 늙어가고 있는 것이다. 가을의 그림을 상상하는 것, 이 시점에서 그렇게 조급하고 이상한 것이 아니다.

 

 

¶  장마 단상 斷想:  비가 억수로 쏟아진다. 가끔은 폭포수 같이 퍼붓는다. 비를 워낙 좋아하는 나지만 어떤 순간에는 조금 겁이 난다. 혹시 우리 집에 홍수가 나는 것은 아닌가? 물론 우리 집은 우리 동네에서 낮지만 언덕 비슷한 곳에 있기에 심각하게 걱정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이런 억수, 장대배가 며칠 째 내린다는 사실이다. 오늘도 예외 없이 꽤 내리고 있다. 가끔 보슬비로 변하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줄기차게 내린다.

반세기전 나를 낳아준 어머니 대한민국에서 경험했던 장마라는 단어가 머리에 떠오른다. 요새도 그곳에 장마라는 것이 있을까? 50년이면 기후 system도 변할 수 있는 것일까? 들리는 얘기로 예전보다 조금은 더워졌다고 한다. 거의 ‘아열대성 subtropical’ 이라던가… 속으로 ‘설마’ 하는 생각도 든다. 기억에 7월 초부터 시작되었던 기억, 폭우가 쏟아지는 것보다는 그저 ‘구질구질’ ‘오락가락’하는 것만 두뇌 기억세포에 남아있다.

요새 이곳의 ‘장마’, 이것이 진짜 장마가 아닐까? 그 옛날 ‘장마의 기억’에 ‘남태평양의 열대성 저기압’ 어쩌구 했는데 이곳은 ‘멕시코 만의 열대성 저기압’으로 바뀐 것 뿐이다. 그 옛날의 장마는 젊었던 20대 초 혈기에 답답한 나날들이었다. 유일한 ‘밖의 휴식처, 다방’ 이라도 가려고 밖으로 나가려면 ‘구질구질’한 시내버스에 시달려야 하고, 조금 더 신나는 도봉산 등산도 비 속에선 너무나 처량맞은 것이다. 조그만 나의 온돌 방에 누워서 무언가 하려면 없는 것 투성이.. PC, 인터넷, smart-phone, cable TV.. 비슷한 것은 고사하고 cassette recorder도 희귀하던 시절, 그저 유일한 것은 흑백TV와 radio, Stereo recorder player정도로 정말 만사가 simple했던 시절. 하지만 나이 탓에 모든 것들이 신기하고 즐거웠던 시절이기도 했다. 이렇게 반세기를 뛰어넘는 두 종류의 장마를 비교할 수 있는 것, 역시 반세기를 뚜렷하게 비교할 수 있는 나이와 능력을 가진 사람만의 특권이다. 이렇게 세상은 공평한 것이다.

 

¶  Depression? 며칠간 우울한 느낌의 횟수가 부쩍 늘어간다. 느낌뿐이 아니고 육체적으로도 피곤함의 횟수가 잦아지고.. 결과적으로 매사의 능률은 떨어지고 기쁨도 횟수도 같이 떨어진다. 왜 그럴까?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코앞에 다가온 것들을 처리하는데 문제가 있었나?

예를 들면 지난 주말 이틀 연속으로 레지오 점심봉사에 매달렸던 것은 피곤했지만 보람을 느꼈지만,  ‘아마도’ 70의 나이에 조금은 무리였을지도 모르고 7월 중에 있었던 구역미사 준비 차 육체적으로 힘든 일을 했던 것 등으로 피로가 쌓인 것은 아닐까?  혹시 골머리를 썩힌 것이 있었나? 7월 초부터 맡고 있는 구역장의 임무에 너무 신경을 쓰는 것은 아닌가?

사실 처음으로 경험하는 group leadership은 보람 반, 고민,실망 반 정도로 진행 중이지만, 어느 정도 self-control에 단련이 된 내가 조그만, 사소한 걱정거리로 휘청거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다른 걱정, 고민거리가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던 것인가? 있었다.

잊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것… 나의 친구, 영혼의 짝.. Tobey가 내 옆에서 영원히 떠난 것..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이 나의 잠재의식 깊은 속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던 것, 이제야 인정을 한다. 충분히 나는 울지도 슬퍼하지도 못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문득 문득 내 옆에 없다는 것을 의식하면 미칠 듯하지만 곧바로 감정을 덮어버리곤 했으니까.. 결론은 한가지.. 세월과 시간 바로 그것이고 슬픔과 눈물을 감추지 않는 그것이 올바른 처방약이라는 사실.

 

¶  Sushi Yoko: 스시 요꼬, 스시 전문집 이름이 요꼬라는 뜻일까? 알고 보니 일본인이 경영하는 일본식당이었다. 요새 일본식당은 거의 비일본인들이 경영을 하는데 이런 집은 희귀한 case가 아닐까?  오래 전부터 Peachtree Industrial Blvd를 North로 drive하다 보면 바른 쪽으로 그 간판을 본 적은 있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거의 정기적으로 만나게 되는 이(동수)목사 부부, 이번에는 목사님의 제안으로 그곳에서 만나 점심식사를 했다.

지난 3월 초 이후 처음이니 거의 5개월 만난 목사님 부부, 무언가 더 밝아진 느낌을 받았다. 이날의 대화는 조금 더 일반적인 신앙적, 사회적이 화제로 소화하기에 큰 무리도 없었다. 비록 개신교와 천주교의 대화지만 전혀 문제가 없다. 이목사님은 이날도 ‘귀향’에 대한 희망을 피력하였다. 귀향이란 말, 참 매력적이고 감상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실제로 생각처럼 쉬운 것일까. 하지만 희망은 언제나 좋은 것, 꿈일 수도 있지만 없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이날 경험한 스시요꼬의 맛은 만족스런 것이었다. 스시도  ‘진짜’ 스시처럼 느껴지고 내가 처음 먹어본 나가사끼 짬뽕 (Nagasaki Chanpon)은 한마디로 색다른 부드러운 그런 맛으로 중국식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하나도 맵지 않은 그야말로 일본냄새가 나는 것이었다.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과 비교적 가까워서 ‘값이 엄청 오른1‘ 한국식당대신 앞으로 이곳을 찾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 후 역시 가까운 곳에 있고, 실내가 운동장처럼 넓은 Bakery Mozart에 가서 못다한 이야기와 ‘붕어빵‘ coffee로 이날 즐거운 만남을 끝냈다. 다음 만나는 시기는 언제인가.. 아마도 하얀 눈이 연상되는 대림절 12월 쯤이 아닐까?

 

¶  Car Connex Time: 거의 한 달을 미루어오던 2009 Hyundai Sonata 100,000 mile checkup을 이제야 하게 되었다. 오래 전의 기억에 차가  100,000 mile이 넘으면 수명이 거의 다 되었다고들 했지만 차 만드는 기술이 발전해서 요새는 그것보다 훨씬 오래 탄다고 들었다. ‘멋진 차, 고급 차’에 별로 관심이 없지만 나이에 걸맞고, 안전한 그런 차에는 관심이 있다. 물론 우리의 $$수준에 맞아야 한다.

현재의 차 Hyundai Sonata는 지난 9년 동안 우리 부부에게 별로 고장 없는 거의 완벽한 (transportation) service를 해주었다. 우리는 ‘효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Mr. Won (owner, master mechanic)은 우리 차가 비교적 ‘얌전하게’ 유지되었기에, 앞으로 몇 년간 큰 문제가 없을 거라고 한다. 생각에 2~3년 정도 뒤 쯤에 새 차를 살까 하지만 요새의 새 차 값을 보니 장난이 아니어서 심각한 budgeting을 하여야 할 듯하다.

 

  1. 또라이 트럼프 무역관세 덕분에 엄청 오른 중국산 때문인가..

¶  서서히 길어지는 밤:   7월, 그것도 30일.. 허~~ 벌써 7월이 다 갔다는 말인가? 언제나 세월의 ‘가속도’에 놀라지만 이번은 그 중에서도 제일 빠른 느낌이다. 한 달이 거의 일주일도 안 된 느낌이 드는 것이다. 하기야 이번 7월은 나의 기억에서 정말 제일 바쁜 그런 나날들이었으니까 빠른 느낌일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무언가 머릿속도 정리가 잘 되지 않은 채 지나간 느낌,  점점 한가해져야 하는 이 나이에 나도 조금 이해하기가 힘 든다.

이른 아침에 밖을 쳐다보니 조금 느낌이 다르다. 확실히 아침이 전보다 조금 어두워졌다. 낮 길이가 점점 짧아지고 있음을 느낀다. 이렇게 밤과 낮이 같아지면 또 가을이 시작되는가? 또한, 그림자들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인데 오랜 만에 보는 시야였던가.. 아하! 날씨가 흐렸구나. 작열하는 햇빛이 없으니 당연히 서늘한 느낌도 들었다.

그러고 보니 한 동안 거의 매일 code Orange같은 경고가 나올 정도로 공기가 메말랐던 나날을 보낸 것이다. 한차례 시원한 소나기가 조금 그리워지는 7월말 중복이 지나가고 말복을 향한 본격적인 늙은 여름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면 다시 계절은 바뀔 것이고..

올 여름은 비교적 시원한 편이다. 비가 자주 와서도 그렇지만 심리적으로 ‘새로 설치한’ 2대의 에어컨, 이제는 하루 아침에 고장 나는 일이 없으리라는 생각에, 두 다리 쭉 뻗고 찬 공기를 만끽하니 더욱 시원한 느낌이다.

 

¶  레지오 점심봉사:  지나간 주말(어제, 그제)은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점심봉사로, 피곤하지만 보람 있는 이틀을 보냈다. 일년에 한번씩 레지오가 하는 점심식사 봉사팀에 우리가 포함되었는데 3년에 한번씩 돌아오게 되는 것이라 사실 큰 부담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의 봉사팀의 구성은 인원수가 워낙 적어서 (참가 3 쁘레시디움이 모두 최소한의 적은 단원을 가졌음) 신경이 쓰였는데 다행히 꾸리아에서 ‘전폭 지원‘을 해 주어서 무사히 성공리에 끝을 냈다. 또한 대부분이 자매님들인 레지오에서 이번의 봉사팀에는 의외로 형제님들이 그런대로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

 

 

이날 점심은 지난 6월 우리 구역 점심봉사 때 했던 ‘모밀국수’를 했는데 그때의 경험을 100% 활용을 하였다. 물론 대부분의 모밀국수 menu idea는 연숙으로부터 나온 것이지만 모두들 열심히 협조해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을 생각하기도 했다.

솔직히 이번의 일, 우리는 2일 거의 full-time으로 일을 한 셈인데, 역시 조금 무리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우선 우리들의 나이도 그렇고, 해야 할 다른 일들이 끊임없이 기다리고 있어서 이런 식으로 언제까지 버틸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Moderation, moderation을 motto로 살아왔던 우리들, 이런 것들이 시험 case인가.. 한마디로 take it to the limit이란 Eagles의 노래가 생각날 정도였다. 이날 모든 일들을 마치고 귀가해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아픈 후유증을 달랬지만 역시 나이 탓인가… 쉽게 풀리지를 않는다.

 

¶  1년이 가까워 오는 목요회:  7월의 마지막 목요일 밤 8시 반에 어김없이 우리 목요회 멤버들이 ‘궁상맞게’ 모였다. 다 늙은 남자 3명이 목요일 그것도 밤 8시 넘어서 외식을 한다는 것은 암만 그림을 예쁘게 그려보아도 예쁠 수가 없다. 하지만 모임은 계절을 몇 번 거듭하면서 조금씩 덜 궁상맞게, 더 예쁘게 탈바꿈을 하고 있다. 그것을 모두 같이 느끼는 것 또한 경이로운 사실이다.

작년 9월 마지막 목요일에 모였던 것이 시작이었고 언제까지 계속될 지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았지만 무언 無言 속의 표정들은 ‘아마도’ 오래 가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3명 모두 너무나 다른 사연과 생활방식을 가지고 있고 풀어나가야 할 도전이 만만치 않다. 이런 모임에서 그런 문제들을 정면으로 풀어나가는 것,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가벼운 화제, 논쟁의 여지가 없는 이야기로 2시간 정도를 보낸다.

살기가 너무 힘든 때에는 아무 말 못하고 듣기만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거의 일년이 가까워 오는 지금 시점에서 우리는 서로를 많이 알게 되어가고 이 모임은 확실히 우리에게 어떤 삶의 희망을 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디 그 뿐인가? 얼마 전부터 오랜 냉담을 풀고 귀향을 한 형제가 있었으니.. 그래서 그런지 이번에 모였을 때는 이제까지 중에서 가장 즐겁고 유쾌한 그런 모임이 되었고, 1년이 되는 9월에는 모두들 ‘무언가 기념식’이라도 하자고 의견을 모으며 늦은 밤 헤어졌다. “친구들이여 우리 그날까지 열심히 삽시다!

 

¶  장례 예배:  장례, 연도 같은 연령행사가 뜸했던 요즈음 뜻하지 않은 곳에서 부음 訃音 을 듣게 되었다. 연숙의 이대 梨大 선배 김경자씨의 남편이 타계한 것이다. 이분은 1990년대 아틀란타 부동산업계의 선두주자로 잘 알려지신 분이었는데 언젠가부터 소식이 뜸해지고 우리도 거의 잊고 살게 되었다. 지금 사는 마리에타 우리 집은 1992년 초에 이분의 소개로 사게 되었던 사연도 가지고 있다.  그 당시 집 구경을 처음 할 때 서로 만났던 McDonald’s, 우리가 자주 가는 곳인데 갈 때마다 가끔 이분의 기억을 떠올리곤 했다.

이분들은 개신교 배경의 집안이라서 교회에서 장례식을 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장의사 chapel에서 해서 그곳에 다녀온 것이다. 천주교 장례미사와 너무나 차원이 다른 ‘간단한 예식’이었다. 그곳에서 알게 된 사실은 고인의 막내 동생이 성당에 다닌다는 사실, 전에 교리반 교사로 연숙과 같이 일했었다는 원선시오 형제였다는 사실, 이날 얼굴을 보니 사실 고인과 얼굴이 닮긴 닮았다. 나는 이 형제님을 잘 모르지만 ‘접근하기가 어려운’ 그런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Take it to the limitThe Eagles

 

2018년의 6개월, 그러니까 정확히 절반을 벗어난 7월의 첫 주가 또 서서히 지나가고 있다. 어쩌면 시간과 세월은 그렇게도 정직한 것일까? 어김이 없다. 절대로.. 절대로 시간과 세월을 가지고 ‘놀면’ 안 된다는 교훈을 다시금 일깨우는 요즈음, 나는 경미 輕微한 우울감 憂鬱感을 떨치지 못하며 살고 있다. 그와 비례해서 마음속 깊은 곳 평화의 깊이도 함께 얕아진 것을 느낀다. 주원인은 물론 나의 분신 Tobey1가 거의 ‘갑자기’ 나에게서 영원히 떠나간 것, ‘실존적 부재 不在’가 주는 공허, 고통이 어쩌면 그렇게도 괴로운 것인지.. 이렇게 세월은 공평한 것, 사람의 삶의 나날은 높을 때도 있고 낮을 때도 있다.

그제부터 새로니의 pet dog Ozzie가 우리와 일주일간 머물게 되었다. 물론 새로니가 vacation차2 집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었지만, 갑자기 조용해진 우리 집에 다시 개의 소리가 들리게 된 것, timing이 나쁘지 않았다. Tobey와 너무나 personality가 다른 Ozzie, 같이 머무는 것 나의 생각을 한 곳만 머물지 못하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를 바라지만 어떨까? 오늘도 한여름다운 여름 날씨에 그 녀석을 데리고 동네를 걸었다. 거의 10여 년간 Tobey와 같이 걷던 이 course를 이 녀석과 둘이 만 걸으니 다시 ‘없는’ Tobey가 그리워진다. 한 여름 날씨를 가슴으로 느끼며 불현듯, 갑자기.. 거의 20년 전 쯤 온 가족이 여름마다 갔었던 Florida Gulf coast,  Panama City Beach의 백사장이 떠오르고 며칠 동안 그곳이나 다녀올까…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역시 ‘귀찮다’는 생각이 모든 것을 덮쳐버린다.

 

나의 study에 언제나 앉아 있던 Tobey가 없어진 자리에 Ozzie가 졸고..

Tobey 없는 dog walk, 대신 Ozzie와 같이 걷고 playground에 눕기도..

 

어제는 Fourth of July, Independence Day holiday.. just another holiday일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지냈다. 과연 미국이란 어떤 나라일까 새삼스러운 것은 무슨 조화일까? 거의 45년 가까운 동안 살면서 별로 그런 생각을 못하고 살았는지도 모른다는 자책감이 없지 않다. 그저 하늘아래 그것도 대한민국과 반대편 쪽 바다에 걸친 거대한 대륙에 250년에 가까운 ‘자유 민주주의’ 전통.. 과연 이런 역사 기록을 가진 나라가 다른 곳에 있을까 하는 의문도 가진다. 각종 문제와 싸우고는 있지만 그래도 이곳은 이들이 금과옥조 金科玉條로 여기는 ‘헌법 constitution’에 목숨을 건, 용맹스러운 나라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이날 동네 본당인 Holy Family 성당 아침 미사에서는 Father Dan (Ketter)은 평상적인 homily대신 Declaration of Independence 전문 全文 을 읽었는데, 250년 전의 그 문장은 그리 옛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특히 첫 부분의 두 번째 문장은 정말 인상적이 아닐 수 없다. truth, equal, endowed, Creator, Rights, Life, Liberty, Happiness… 그 중에서도 Creator란 단어는 그저 장식용으로 쓴 것은 절대로 아닐 듯하다.

We hold these truths to be self-evident,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that they are endowed by their Creator with certain unalienable Rights, that among these are Life, Liberty and the pursuit of Happiness.

 

 

무언가 허전한 기분을 달래려 계획에 없는 barbecue 생각이 났고 거의 일년 만에 charcoal grille의 cover를 꺼내고 마지막으로 남은 wood charcoal에 불을 부쳐서 barbecue보다 더 맛있는 ‘불고기’를 구웠다. 그래도 이렇게 7월 4일의 오후를 연숙, Ozzie와 같이 맥주, grille 로 보낸 것, 조금은 추억에 남지 않을까..

 

 

 

이날 밤은 다행히 비가 올 chance가 많지 않아서 불꽃놀이의 소음을 예상하고 있었다. 우리 동네 subdivision는 ‘전통적’으로 불꽃놀이 firework이 없었고 먼 곳에서 하는 것들의 소리만 듣곤 했지만 이번에는 우리 앞집의 비교적 젊은 Josh가 주동해서 우리 집 바로 앞의 cul-de-sac 에서 firework을 했는데 비록 개인적으로 한 것이지만 어찌나 요란스럽던지 우리 집의 개와 고양이들이 모두 겁에 질려 숨을 곳을 찾기도 했다. 매년 별 감흥 없이 이런 소리를 듣고 했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의미가 실린 ‘자유의 외침’ 같은 것으로 들린 것이, 나 역시 나이가 깊이 들었구나 실감을 한다. 앞으로 이런 ‘자유의 소음’을 몇 번이나 듣게 될까..

 지나간 주일(일요일)날은 예전 같았으면 한국성당에 아무 business가 없었기에 조금은 편한 일요일이었지만 이번부터는 사정이 달라졌다. 7월부터 2년간 아틀란타 한국 순교자 성당의 (마리에타 사랑)구역장을 맡게 되었고 첫 주일날에는 구역장회의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 직책이 별것 아닐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나에게 맡겨진 직분, 최선을 다하자는 각오는 변함이 없다. 아마도 내가 ‘봉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려는 노력을 하면 된다. 내 인생의 후반에 더욱 깨닫는 것 중에 ‘결과보다는 과정’에 더 의미가 있다는 것이 있는데, 젊었을 때와는 사실 완전히 반대인 것이 재미있다. 2년 뒤 나의 임기가 무사히 끝나게 되면 나는 어떤 구역장으로 기록이나 기억에 남게 될 것이지 궁금하다. 

 

The United States Declaration of Independence

  1. 우리와 14년 평생을 살아온 pet dog
  2. 이번에는 Mexico로 deep sea diving이라고… 허.. 듣기만 해도 으스스..

우리 집에서 우리와 함께 거의 평생을 우리 가족으로 살아온 13살이 넘은 mixed Dachshund, Tobey가 하느님의 섭리로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지난 몇 주간에 걸쳐서 서서히 몸이 약해지더니 급기야 지난 며칠 사이에는 눈이 안 보이더니, 거의 걷지도 서지도 먹지도 못하며 고생을 하였다.  이대로 병원엘 가면 거의 분명히 ‘안락사’를 권할 것이 분명한 시점에서 우리는 고민을 하였지만 결국 오늘 낮 12시 15분에 나의 손에 안겨 마지막 숨을 쉬었다. 영원히 잠든 것이다.

최악의 경우를 예상을 못한 것은 아니지만, 나의 충격은 상상을 넘는 것으로 이 사실이 나를 더 놀라게 했다. 오랜 세월 나의 옆에서 자나깨나 나를 따라다니고 기다리고 살았던 이 녀석, 이렇게 ‘자연스럽게’ 보낸 것이 잘한 것인지, 죄책감을 억누르려 안간힘을 썼지만, 어쩔 수가 없다. 내가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위로는, 고생을 며칠 했어도 ‘안락사’를 피한 것은 잘 되었다는 사실, 그것만은 확신한다.

나의 모든 일상 생활 routine이 완전히 정지된 이 상태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잘 모르지만 비교적 빨리 ‘애도기간’이 끝났으면 하는 바램뿐이다. 슬프고 힘든 몸을 움직여 알맞은 size의 관을 만들어 뒤뜰 양지바른 곳에 묻었다. 그 녀석 매일 돌아다니던 익숙한 곳에 묻힌 것, 당분간 찾아 볼 수 있어서 큰 위안이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 녀석과의 오랜 기억들을 다시 떠올리는 것은 괴롭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자연스러운 grieving process 일 것이다. Tobey야, 편히 쉬어라… 매일 그곳에서 너를 보아줄게.. 편히, 편히..

¶  Roller coaster week:  지금 지나가고 있는 하루하루는 글자 그대로 roller coaster week 라고 할 수 있다. 희비가 교차하는, 오르락 내리락 하는 느낌이 거의 주기적으로 반복되었던 주일,  때로는 정말 괴로운 순간들도 있었던 6월 초순을  보내고 있다.  주 원인은 우리 집 열네 살이 넘은 ‘나보다 늙은’  정든 개 Tobey의 건강문제 때문이었지만 우리가 바보같이 만든 ‘인재 人災’도 이럴 때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결과만 만들었다. 왜 이렇게 ‘어려운 일’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것일까? 그것이 인생이다.. 라면 더 이상 할 말이 없고 그것이 또한 사실이다.

갑자기 구토, 설사로 시작된 것, 왜 그랬는지 이유는 알 길이 없지만 문제는 먹지를 못하니 평소에 ‘관절염’으로 먹는 약까지 끊게 되어 사태는 악화일로 였다. Good Old veterinarian (수의사) 에게 데려가는 것은 원칙적으로 꺼린다. 각종, ‘불필요할지도 모르는’ test로 시간을 다 보낼 것이 분명한 것이고 그러면 더 악화가 될지도..

이 녀석 기운이 빠지고 아파하는 모습에서는 ‘죽음의 그림자’까지 느껴지고, 우리는 절망의 기분까지 들었다. 급할 때는 묵주를 무의식적으로 굴리고 있을 정도였지만, 성모님의 도움인지, 정성스런 간호 덕인지 다행히 설사도 멎고 서서히 먹기 시작하면서 죽음의 그림자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회복이 예전에 비해서 너무나 느린 것을 보면서 다시 생각한다. 나이 탓인가.. 아니면 무슨 큰 병이 있는 것인가? 얼마 있으면 annual medical checkup이 있어서 (동물)병원엘 가니까 그때면 더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moaning & limping.. sick Tobey

 

Pet 을 집에서 키우는 사람들은 이런 것 한두 번씩은 경험을 했을 것이지만 이렇게 거의 집안 식구가 된 pet animal을 영원히 보낸다는 생각을 하면 사람이나 동물이나 큰 차이가 없음을 다시 한번 절감을 한다.  이런 것들 사실 자연의 법이기에 겸허하게 받아드리는 것이 옳은 일일 것 같다. 세상에서 변치 않는, 영원한 것은 하느님 밖에 없다는 사실만 잊지 말자.

 

Climbing in Canada:  새로니가 (여름)방학이 되자마자 떠난 2주간의 Canada trip을 마치고 돌아왔다. 학교 teacher가 되면서 2개월에 가까운 ‘긴’ 여름방학을  손꼽아 기다린다. 우리 시절에는 꿈도 못 꾸던 모험적인 취미여행을 떠나곤 한다. 요새 ‘아이’들, 경제적 여유만 있으면 이런 즐거운 30대를 보낸다. 결혼과 가정을 만드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할 나이에 이렇게 놀러 다니는 것을 보며 세대가 참 많이 변했음을 실감한다.

새로니 친구들과 모두 3명이 갔던 Canada(Rockies, Vancouver)  여행 사진을 보며 나는 다른 생각에 빠진다. 나나 연숙, 이제 그런 여행들, 귀찮다는 인상을 받는다. 편한 집에 눌러 앉아 있는 것이 우리에게는 훨씬 유익하고 건강한  ‘휴가여행’인 것이다. 솔직히 돈을 주고 갔다 오라고 해도 별로 구미가 안 당기는 것이다. 단 한가지, 이번 여행 중에 찍은 사진 중에 rock-climbing하는 것, 나의 오래된 추억이 샘물처럼 흘러 나왔다. 한때 나도 저런 것에 ‘미친 때’가 있었지.. 하는 감상적인 느낌들은 즐기고 싶었다. 그때가 1970년 경, 거의 일 년을 ‘바위 타기’에 많은 시간을 ‘허송’했던 대학 4학년 시절. 비록 ‘공부’는 손해를 보았을지라도 아직까지 나에게는 이렇게 신명 나는 추억거리를 제공했으니 그깟 공부가 그렇게 대수인가.. 그것에 지금 나의 딸이 푹 빠져있으니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2주 동안 우리 집에서 다른 의미의  vacation을 가져야만 했던 새로니의 pet dog Ozzie가 새로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간 우리 집은 갑자기 고요 속을 빠진 듯한 느낌. 우리 집의 Tobey가 아직도 완쾌가 되지 않은 상태라서 더욱 고요하고 우리의 느낌은 쳐진다.

 

Curia Monthly Sunday: 머리 속이 안정이 되지 않은 채로 ‘꾸리아 월례회의’가 열리는 매달 2번째 주일을 맞아 ‘조심스럽게’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을 갔다. 조심스럽게 간 이유는 꾸리아 월례회의 때문이기 보다는 주일미사를 누가 집전을 할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만약 둘루스 성당 (윗동네) 신부가 집전하는 것을 미리 알 수 있다면 미국성당으로 향하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로 나의 ‘그 신부’에 대한 ‘반감, 혐오감, 앨러지’가 특이하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별 수가 없어서 포기한 상태이기도 하다. 다행히 우리 본당 신부님 집전이 밝혀져서 ‘안심하고’ 그곳엘 가게 되었다.

이날은 오랜만에 등대회 형제님들, 특히 요한 형제와 점심을 같이할 수 있었고, 꾸리아 월례회의도 그런대로 흡족한 느낌으로 마칠 수가 있었다. 생각한다. 전에 있던 간부진들에 비해서 아주 신선한 스타일로 회의를 진행하며 ‘약해질 대로 약해진’ 레지오 조직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가 있었다. 

불과 몇 달전 前의 꾸리아  leadership을 싫지만 기억한다. 그 중에서 2명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toxic, terrible, horrible한 기억으로,  앞으로 ‘연구 대상’이 될 정도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처럼 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주는 case study로 삼을 정도란 뜻이다. 그 결과 현재 이 조직은 거의 limping하는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별것 아닌 듯 보이는 꾸리아 평의원들, leadership을  잘못 뽑으면(Trump처럼) 이런 disaster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생각하면 다음부터는 공과 사를 전혀 구별 못하는 ‘아줌마 tribalism‘ 에서 벗어나는 노력을 조금이라도 하면 어떨까?

이렇게 결과적으로 밝은 기분으로 ‘주일 의무’가 끝났는데, 이날은 bonus까지 주어졌다. 정말 오랜만에 스테파노 형제 부부와 같이 성당근처에 있는 Mozart Bakery에 모여서 ‘수다’를 떠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작년 8월의 ‘레지오 괴물, 미친년 사건’ 덕분에 가까워진 이 부부, 나이가 비슷하고,  ‘사귈만한 부부’라는 인상을 받아서 가급적 관계를 ‘가꾸어 나가고’ 싶기도 하다. 오랜만에 ‘대한민국 style 빙수와 붕어빵’을 즐긴 이날 주일은 그야말로 ‘주님의 날’이 되었다.

40년 만에 다시 읽는 명 논설, ‘민족과 문화’. 내가 이 논설을 읽었던 때가 1978-9 년 경이었을 듯하다. 당시 ‘월간중앙’ 창간 10주년 기념호의 별책부록으로 ’10년간 게재 월간중앙 명논설집’이란 것이 나의 손에 들어왔다. 1978년 4월호의 부록이었다. 그 중에 인상 깊게 읽고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을 하는 논설이 바로 이것이었다.

당시 나이 30세에 읽었고 40년 후에 다시 읽은 것인데, 아직도 나는 ‘내가 그 동안 얼마나 변했나’ 하는 것에 주 관심을 가지고 있다. 당시의 느낌과 지금의 느낌을 비교하는 것이다.

고유한 문화와 그릇된 애국심의 허구성을 무자비하게 비판하는 글, 그것이 인상적이었다. 이 논설이 원래 발표된 것이 1974년이고 당시의 국내정세는 추측하기 힘들지 않다. 유신독재의 서슬이 시퍼럴 때, 이 저자는 왜 고유문화, 국수주의적 애국심을 비판했을까? 그것이 유신체제를 간접적으로 공격한 것이라면 어떻게 이 글이 무사히 게재가 되었을까?

이 글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런 ‘제약’을 멋지게 우회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문화의 개방, 인류의 공통적 재산임을 주장하는 이 글은 결국 40년 뒤의 현 대한민국의 일반적 실상을 예언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100년 동안이나 서구문명을 수용했던 일본의 성장을 부러워하던 저자의 글대로 대한민국도 이제는 그에 못지 않은 개방적 문화를 자랑하지 않는가? 이런 문화적 발전이 정치적 발전의 도움을 받았는지는 나는 아직도 단언은 못하지만, 아마도 방해는 안 되었을 것이다.

 

民族과 文化

길현모 吉玄謨 서강대교수 서양사

 

약력

1923년 평북 희천 熙川 生

1949년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 졸업

1963년 서강대 교수

 

文化方向의 倒錯

근래 강화되고 있는 문화의 국수주의적 경향을 경계해야 하며 민족정신론에 대한 비판을 서둘러야 한다.

모든 정책이 그러하듯이 문화정책이란 문화라는 것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토대로 해서만 올바르게 수립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란 결코 용이하게 이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여기서 오늘날의 우리의 문화방향이 올바른 방향을 지향해 나가고 있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물론 표제가 이미 말해주고 있듯이 필자의 문제에 대한 견해는 대단히 비판적이다. 필자는 자신의 비판적인 견해가 감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 까닭에 다만 결론뿐만이 아니라 지면이 허용하는 한 자신의 논거를 윤곽이나마 제시해 보려고 노력하였다.

 

문화란 원래 인류의 공동의 재산이다. 거기에는 국적이 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국적을 붙일 수도 없다. 설사 국적을 붙여 본다 한들, 기득권이 행사될 수도 없고 특허나 독점 등의 권리가 설정될 수도 없는 문화에 대해서는 그것은 완전히 무의미한 일이다. 다시 말해 문화는 군사력이나 정치권력에 의하여 一國民의 독점물이 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그 기원이나 출처 여하를 막론하고 오직 그 힘을 필요로 하고 그 가치를 이해할 줄 아는 자들만이 주인이 될 수 있는 개방된 寶庫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들은 문화국민이라는 것을 말할 때에 그들이 향유하고 있는 문화의 국적이나 계보나 고유성을 기준으로 삼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국민복지에 이바지할 수 있는 문화적 총역량만이 유일한 기준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명백한 사리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전시대의 신화처럼 퇴색해 버린 문화의 고유성과 문화의 순수성에 대한 숭상이 새로운 활기를 얻어 팽배하고 있으며 외래문화를 국적 없는 문화로서 배척하는 국수주의적 경향이 급격히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문화의 배타성과 폐쇄성은 언제나 문화의 불모, 문화의 자살을 향한 첩경임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들은 근래에 와서 더욱 강화되고 있는 국수주의적 경향을 크게 경계해야 할 것이며 이와 같은 도착된 문화방향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민족정신론과 고유문화론의 핵심에 대하여 검토와 비판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문화인들이 당면하고 있는 가장 시급한 과제이며 또한 그것은 때늦기 전에 이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이미 그것은 하나의 ‘터부’로 化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民族 文化論의 系譜

요즈음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표현을 빌린다면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국민의 도의는 땅에 떨어졌고 국적 없는 문화가 잡초처럼 무성한 가운데서 소비성 문화가 범람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의 문화 현황에 대한 이와 같은 진단은 우선 그 비관적인 색채에 있어서 안정과 번영을 구가해온 정치나 경제계의 진단과는 극히 대조적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한 이와 유사한 암담한 문화 진단은 수십 년을 두고 되풀이 되어왔을 뿐 그간에 아무런 進境을 보인 일이 없었던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이 핵심도 없고 두서도 없는 피상적인 문화 진단이 문화적 소양을 기본자질로 삼지 않는 일반 정치인이나 지적으로 미숙한 대학초년생 정도가 내려본 것이라면 구태여 문제 삼을 일은 못 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수준의 문화 진단이 우리나라의 문화계의 제일선에서 지도적 지위를 독점해온 사람들의 입에서 수없이 되풀이 되어 왔다는 점에 있다. 그들은 오늘날까지 문화위기에 대한 감상적인 개탄만을 토로해 왔을 뿐, 최소한도의 진지한 문화 분석의 결과를 제시한 일이 없으며 더구나 이에 대한 납득할 만한 원인 규명의 노력을 제시해 본 일도 없다.

말하자면 이 땅에서는 이직도 초보적인 문화론조차도 없이 문화위기의 단정만이 되풀이 되어온 셈이다. 물론 이러한 가운데서도 그들이 일치하여 내세운 한가지 논점은 있다. 즉 그것은 문화적 위기의 유일한 원인은 민족정신이 땅에 떨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며 따라서 지극히 당연하게도 이에 대한 유일한 대책은 민족정신을 진흥 고양하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필자로서는 오늘날의 우리의 문화 상황이 민족정신의 저하 내지는 추락을 반영하는 것인지, 그 서서한 혹은 급격한 상승을 나타내는 것인지에 대해서 판별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그보다도 앞서서 필자에게 있어 우선 문제되는 것은 그들이 항상 자명한 것처럼 내세우는 민족정신이란 그 명확한 내용과 속성이 무엇인가 라는 점이다. 이 문제를 해명한다는 일은 필자에게는 오랜 숙제의 하나이었던 것이다.

사실 오늘날 4,50대 이상의 기성세대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민족정신이란 말은 이미 오랜 세월을 두고 낯익어온 말임에 틀림없다. 뿐만 아니라 요즈음 우리 주위에서 보급되는 민족정신론의 발상과 표현 상태와 선전 방식의 어느 것에 대해서나 거의 생소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일제치하의 10대, 20대의 어린 시절부터 민족정신에 대한 무수한 강론을 들어왔고 이를 고취하기 위한 허다한 운동을 체험해 왔기 때문이다.

먼저 일제는 일본민족의 민족정신이 세계에 유례없는 가장 우수한 정신이라고 강조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따라서 우리들은 그들의 지배하에 동화되어야 한다고 설득하였다. 이에 대하여 우리의 지도자들은 한 민족에게는 오히려 일본의 민족정신보다도 더욱 우수한 고유의 민족정신이 있으니 일제의 지배를 벗어나서 독립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고 응수했다. 말하자면 우리들은 한국의 민족정신과 일본의 민족정신과의 싸움 속에서 자라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 민족정신론의 모방성

이상과 같은 틈바구니 속에서 우리들은 얼마 안 가서 자기 나름대로 이 문제를 졸업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그렇게도 많은 노력과 설득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이 내세우는 대화혼 大和魂 즉 일본의 민족정신이라는 것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없었고 따라서 무엇이 고유하고 무엇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정신인지를 전연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일에 이르러서 필자는 다시 자신이 이 문제의 이해에 심히 미흡하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그 이유는 민족정신론의 기수로서 자처한 일본인들의 배후에는 이 분야의 대선배가 있었다는 사실, 다시 말해서 민족정신론의 계보에서의 시조로서 독일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줄리앙 방다’의 말에 의하면 국가간의 정치적인 싸움을 민족문화의 싸움으로 확대하고 민족정신론이라는 새로운 무기를 창안해 쓰기 시작한 것은 독일인들이며 그 정확한 시점은 1813년이라는 것이다. 또한 문화인들이 자기들의 문화활동의 소산을 민족정신의 발현이라고 의식적으로 말하기 시작한 것도 역시 독일의 ‘레싱’과 ‘쉴레겔’ 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발상의 사상적 배경이 개성숭배를 모태로 한 독일 낭만주의였다는 사실은 지적할 필요조차 없다.

이리하여 민족정신론의 조국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에서는 이를 숭상, 고취한 수많은 문화인들을 배출하였는데 마침내 그 최고의 완성은 ‘프러시아’ 군국주의의 어용사가로서 유명한 ‘트라이츠케’에 이르러서 이루어졌다. 필자는 근래에 독일인들의 민족문화론 내지는 민족정신론과 일본인들의 그것과는 대비해 보기 위해서 일제 후기의 일본 문화계의 대표적 저작들을 읽어 보고 그들의 민족정신론이 독일의 선배들을 모방, 표절한 아류임을 다시 확인하면서 일종의 감회를 금할 수가 없었다.

필자는 오늘의 우리나라의 민족문화론자들의 선의 善意를 의심하고 싶지 않다. 그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소박한 심정의 소유자일 것이며 애국의 충정에 차 있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기필코 다짐해 두어야 할 일은, 만일 그들이 우리나라의 문화건설의 핵심적 토대를 민족정신론에 두고자 한다면 자신들의 논의 의 발상과 표현 방식을, 선전과 운동의 전개 형식을, 표어와 선언문과 내용 및 어조를 이상과 같은 민족정신론의 역사적 계보에 비추어서 대비 검토해 달라는 일이다.

만일 그들이 의식 못하는 가운데서 현대사상 전율할 만한 문화적 파괴와 민족적 죄악을 남긴 불길한 사상적 계보와 너무나도 놀라운 친연성 親緣性 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때에는 하루 속히 이를 청산해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맹목적인 復古

문화 내용의 분석-검토를 위해서나 문화 건설의 효과 있는 계획을 위해서나 이에 앞서 이룩되어야 할 여건은 문화 형성의 기본원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역사가들의 일반적인 견해에 의하면 고등한 문화는 반드시 고등한 종교를 토대로 해서만 이룩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를 보완해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고등한 문화는 하나의 고등종교 내지는 신앙의 경지로까지 숭앙될 수 있는 하나의 이념 체계를 핵심으로 해서만 형성될 수 있는 것이라고.  다시 말해서 문화란 이상과 같은 핵심 이념을 향해 바쳐진 사회 구성원들의 헌신의 소산인 것이며, 그들의 순교적 신앙과 희열에 따라 찬란한 광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은 우리의 과거 역사 속에 나타난 불교문화나 유교문화의 문화 소산을 통해서 이상과 같은 이치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이상과 같은 문화이념은 구체적으로는 해당 사회의 원대한 목표 즉 이상으로서 구현되며 이로부터 반드시 황금시대를 동경하는 지향성을 수반하게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하나의 문화가 이상사회를 실현할 황금시대를 미래 속에 설정하게 될 때에는 미래지향적인 자세를 지니게 되고, 과거역사의 특정시대 속에서 그 모형을 발견하게 될 때에는 復古의 자세를 취하게 된다.

이상과 같이 복고란 그것이 정당한 것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불가피한 이유가 전제되어야만 하는 것이며 또한 거기에는 일정한 질서 즉 특정의 대상과 시기가 설정되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들이 현재에 지향할 이상적인 문화이념이 불교적인 것이어야만 한다면 우리의 역사 속에서 불교문화의 최고의 황금시대가 복고 대상이 될 것이며 이 때에는 천여 년 전의 불교문화의 모든 유산들이 성스러운 후광을 지니고 우리들의 새로운 숭앙의 대상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또한 만일 우리가 추구할 문화이념이 유교이념이어야만 한다면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숭앙은 유교문화의 황금시대로 되돌아 갈 것이며 이때에는 유교문화가 남긴 단편적 유산조차도 우리들의 무한한 감동의 대상이 될 것이다. 복고시대의 문화창조의 정신적 ‘에너지’는 바로 이러한 성질의 것이다. 그런 까닭에 ‘크로체’의 이른바 ‘노스탤지어’의 역사서술도 그것에 수반되는 커다란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이런 경우에 한해서는 정당성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의 경우와 같은 무질서, 무한정한 ‘노스탤지어’는 도대체 어떠한 정당한 근거를 가진, 무엇을 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왜 우리들은 지난 시대의 모든 유물, 풍습의 보잘 것 없는 흔적에 까지도 그다지도 깊은 감동을 느껴야만 하는 것인가.

구석기시대로부터 현대에까지 이르는 조상들의 모든 행적과 유물에 무조건의 숭상과 애착을 강요하는 이와 같은 복고란 정신분열적인 지력과 감정의 낭비 이외의 것이 아니며 필경은 그릇된 복고, 맹목적인 복고의 통탄스러운 예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의 사이비 似而非 문화인들은 정책적인 노선에 부화뇌동하면서 복고의 환상을 끈임 없이 확산하여 국민들의 맹목적인 好古 性向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기원보다 중요한 변화와 발전

아마도 그들은 복고의 이념을 우리의 민족정신 그것이라고 말할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까지 일부 학자들이 주장해온 것처럼 우리의 민족정신의 고유성은 예의와 정결성의 존중, 그리고 평화애호의 미덕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말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상과 같은 인류의 보편적인 이상과 미덕들이 어찌하여 우리 민족만의 고유한 것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을 들어 본 적이 없다. 예의의 근본은 인가니 개개인의 인격과 인권에 대한 존중을 토대로 해서만 성립될 수 있다.

또한 정결의 근본은 비단 심미적 성향 뿐만 아니라 위생과 사회기풍의 정결성을 토대로 해서만 성립될 수 있다. 만일 오늘날 이러한 점에서 우리를 앞지른 국민들이 있다면 그들은 우리 민족의 고유정신을 앞질러 모방했다는 논리가 성립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와 같은 결론을 도출한 학문적 근거 자체가 모호한 것이다. 그들에게는 천 수백 년 전의 중국의 사적史籍 중의 몇 구절, 논거가 극히 의심스러운 가설 수준의 몇 편의 신화해석 등이 모두 의심할 수 없는 확증적인 자료처럼 다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자료의 타당성에 대한 올바른 비판도 없이 역사적 방법도 아니요 언어학적 방법도 아닌 애매모호한 방법을 통하여 계시적 啓示的 인 결론만이 도출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러한 근거 위에 민족의 제단 祭壇 을 설치할 수는 없다. 만일 그들이 내세우는 정신적 대상에 대한 민족의 귀의 歸依를 요구하려 한다면 이를 위한 하나의 신학 神學 내지는 철학 체계를 제시해야만 할 것이다.

이리하여 민족정신이 딸에 떨어졌다, 이를 진흥하기 위해서는 자각을 해야 한다라는 식의 상투적인 사고방식부터가 청산되어야 한다. 도대체 민족정신이 영원히 우리 역사를 관철하는 지고 至高의 정신이라면, 왜 그렇게도 쉽사리 땅에 떨어질 수가 있단 말인가. 그것은 자기모순 내지는 자기모독적인 표현이 아니겠는가. 만일 우리의 민족정신이 땅에 떨어졌다면 그것은 어떤 원인으로 어떤 시기부터 그리 되었다는 것인가. 여러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것이 일제의 침략의 결과라고 한다면 우리의 민족정신은 그들에게도 대항할 수 없으리만큼 그렇게도 무력한 정신일 수 있단 말인가.

또한 그것이 우리들의 무자각의 결과이었다고 한다면 우리들은 왜 자각을 못하게 되었다는 것인가. ‘게르만’의 자연신이 전투에 효험이 없다고 해서 ‘그리스도’교에 개종했다고 하는 ‘클로비스’의 지력에도 못 미칠 이런 수준의 논리가 왜 우리들에게는 오늘날까지 방치되어만 왔단 말인가

민족정신론자들이 상용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해당 민족이 이룩한 역사상의 두드러진 업적과 인물들을 모두 민족정신의 구현이라고 주장하는 방법이다. 이런 경우에는 민족정신의 내용은 더욱 모호한 것이 될 수 밖에 없으며, 마침내는 각 국민 간의 민족정신의 경쟁적인 전시가 현출될 수 밖에 없다. 소련인들은 1930년대에 이런 경쟁에 비상한 열의를 발휘하여 근대과학의 주요 발명과 창안들은 물론, 심지어는 ‘스포츠’의 주요 종목도 모두 자 국민의 창안이라고 발설하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결과가 세계의 냉소를 초래했을 뿐이었음은 우리들의 기억에도 생생한바 있다.

가령 ‘플라톤’ 과 ‘아리스토텔레스’ 가 ‘그리스’인이었다고 해서 오늘날의 ‘그리스’인들의 철학적 자질이 특출하다고 보아주는 사람은 없는 것이며, ‘코페르니쿠스’가 ‘폴란드’ 인이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서 ‘폴란드’인의 탁월한 천문학적 자질이 증명되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인류문명의 토대 자체를 타민족들에 앞서서 형성했던 ‘이집트’ 인조차도 오늘날에 와서는 문화민족의 대열에서 탈락된 지 이미 오래다. 역사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기원이 아니라 변화와 발전의 과정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역사가 ‘마르크 불록’은 기원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역사가들의 병폐의 하나라고 지적한 바 있다.

 

고유문화의 환상

위에서 우리들은 그릇된 민족정신론의 모순의 일단을 살펴본 바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릇된 민족문화론이 낳아 놓은 쌍생아 雙生兒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우리는 다시 그들의 또 하나의 거점인 고유문화론에 대하여 검토해 봐야 할 것이다.

원래 고유의 숭배는 개성적인 것에 대한 예술적인 영탄 映嘆 에서 비롯된다. 그런 까닭에 “개성적인 것은 형용을 초월한다”라는 유서 깊은 어구가 되풀이 인용되고 있다. 만일 그것이 개성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에 대한 예술적인 감흥으로만 시종되는 것이라면 거기에 하등의 문제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개성적인 것같이 보이는 것을 고유의 것이라고 단정하고 나아가서는 그것을 가장 우수한 것이라고 단정하는 데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것은 고유성의 기원을 판별하는 역사의 기능과 가치의 판별이라는 철학의 기능과 를 불가피하게 개입시키게 되기 때문이다.

우선 하나의 문화가 가장 우수하다, 따라서 가장 가치가 있다는 단정은 타 문화와의 비교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고유문화론자들이란 이성과 논리에 대한 기피성향을 본색으로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결국 그들이 찾을 수 있는 귀착점은 논리를 포기한 무조건-절대절대라는 영역이다. 이로부터 그들이 신봉하는 표어로서 “내 것이기 때문에 무조건 절대 우수하다”라는 말이 탄생된다. 이것이 바로 문화적 이기주의의 대표적인 예인 것이다.

다음으로 고유성의 단정이라는 문제에 있어서도 그들이 찾을 수 있는 길은 학문으로부터의 도피 이외에는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은 역사적인 추적이 불가능한 환상의 세계나 신화의 세계, 혹은 이론적인 분석이 지난 至難 한 예술의 세계로의 도피습성을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여기서 ‘나치’ 독일의 민족이론의 귀착점이 ‘고대 게르만 영웅족’이라는 환상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일본의 고유문화론자들의 중심 거점이 신화의 세계이었다는 사실만을 상기함으로써 족할 것이다.

원래 역사상 이름 붙일 수 있는 고급한 문화란 예외 없이 왕성한 문화교류의 소산인 것이며 반드시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만일 그 기원에 있어서 고유한 것을 찾으려고 한다면 사회생활의 완전한 폐쇄성을 상정할 수 있는 원시시대로까지 소급할 수 밖에는 없다. 문화의 고유성내지는 순수성이란 설사 그러한 것을 인정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해당 문화의 저급성을 말하는 것일 뿐 결코 명예로운 표지가 될 수는 없다.

 

‘애국’이라는 이름의 문화적 폭력

물론 문화의 영역 내에는 지역적인 혹은 지리, 풍토적인 특성을 반영하는 요소들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요인들은 고급한 문화에 있어서는 그 핵심 부분이 아닌, 다만 거기에 첨가되고 가미된 부분일 따름이며 전형적으로는 문화의 외곽산물일 따름이다. 즉 축제의 형식, 복장, 음식 등의 민속적 부분이 모두 그러한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축제 형식의 특수성이나 복장, 음식 등을 가지고 문화의 우열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여기서 우리들의 보다 신중한 검토를 요구할 만한 대상은 언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언어가 민족문화론에서 항상 큰 비중을 차지해 온 첫째의 이유는 그것이 민족을 구분하는 가장 유용한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과거에 흔히 사용되어 온 혈통이라든가 국토경계선 등의 기준에 비하여 민족의 구분기준으로서 언어가 지니는 개연적 蓋然的인 효용성이 매우 크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는 고유한 언어이기 때문에 우수하다든가 언어의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든가 하는 문제와 혼동될 수는 없다. 언어도 그 밖의 문화분야와 마찬가지로 교류와 상호 영향하에서만 풍부해질 수도 있고 발달할 수도 있다. 만일 우리 언어의 고유한 순수상태를 되찾는다고 말하면 과연 어느 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필경 그것은 언어의 원시화를 제창함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누구나 자기 언어의 우수성을 자랑하고 싶어하고 자랑하기도 한다. ‘이탈리아’ 의 한 작가는 ‘이탈리아’어를 자랑하면서 그 이유를 그것이 자기들만이 사용하는 언어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일이 있다. 이에 비하여 불어는 세계적으로 사용되는 언어이기 때문에 저급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난날의 어리석은 웃음거리의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경우에 있어서는 반드시 하나의 웃음거리만은 아닌 것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도 같이 고유문화론 이란 문화와 역사의 본성을 무시한 하나의 허구에 불과하고 고유성의 숭상 崇尙 이란 하나의  역리 逆理 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문적인 정확성을 숭상함에 있어서 그렇게도 지극한 이 나라의 일류학자들이 어찌하여 고유문화론 앞에서는 한결 같이 학문을 포기하고 공순 恭順 의 뜻만을 표시해 왔던 것일까. 이에 대하여 필자는 하나의 중대한 이유를 제시할 수 있다.

즉 그것은 이들 고유문화론자들이 ‘애국’이라는 고지 고지를 이미 점령하고 그들에게 추종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비애국자’ 내지는 ‘반역자’ 의 낙인을 찍을 위협적인 태세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이 안출 案出 한 성공적인 음모의 하나이었으며 그들은 이를 통하여 사실상 이 나라의 문화계를 위압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이러한 문화적 폭력을 이 이상 좌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권력층에 독점될 수 없는 애국심

이들은 진정한 애국심은 고유문화와 고유정신에 대한 확고한 이해와 신념을 토대로 해서만 비로소 발휘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원래 애국심이란 고유문화 의식과는 무관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심정인 것이다. 그것은 향토와 동포에 대한 사랑의 자기 희생적인 발로 이외의 것이 아니다. 인간의 존립은 원시시대로부터 기본집단의 존립에 좌우되었기 때문에 집단의 존립과 방어를 위한 희생적인 헌신은 인간의 가장 본원적인 속성의 하나인 것이다.

우리들은 부모형제가 문학적으로 우수해야만 비로소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동포가 아무리 무식해도 우리의 국토가 아무리 빈약해도 그 수호를 위하여 우리의 애국심은 발동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애국심이란 소박한 부족애의 국민적 발현 이외의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 발현은 자연적인 것이며 문화적 가치나 고유의식 등이 그 필수적 전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들은 이러한 사리를  허다한 역사적 사례를 통해서 충분히 설명할 수가 있다. 우리 조상들은 중국문화에 대한 지극한 존숭감 尊崇感 을 지니면서도 그들의 침략에 대해서는 항상 열렬한 애국심을 발휘하여 국토를 방어해 왔다. 우리들의 오늘날 있음은 민족정신이 무엇인지 고유문화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이름없는 조상들의 거룩한 애국심의 결과인 것이다.

고대 ‘로마’인들은 ‘그리스’문화를 높이 숭상하는 가운데서도 ‘그리스’인들을 능가하는 애국심을 발휘하여 그들을 정복하였다. 또한 영국인들의 문화를 이어받은 미국인들은 열렬한 애국심을 발휘하여 그들과 싸워 독립하였다. 아니 그보다도 ‘아메리카 인디언’ 의 부족애가 미국인들의 애국심에 비해 참되지 못하다거나 강하지 못하다고 누가 감히 단정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애국심을 고유문화론과 결부시킴으로써 이를 권력층들과 더불어 독점하려고 하는 일부 문화인들의 독선적, 배타적인 기도 企圖 는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들은 지금 우리의 문화관을 보편적인 이성의 토대 위에 수립할 것인가 혹은 이기적인 감정의 토대 위에 수립할 것인가를 결정할 시점에 위치해 있다. 역사가 ‘크레블리언’은 ‘영국사’의 첫 대목에서 영국인들은 역사과정을 통해서 여러 민족들의 피를 섞어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우수한 자질을 지니게 되었다고 자랑하고 있다. 또한 개성숭배의 사상적 계보를 계승한 ‘마이네케’ 조차도 ‘민족정신의 우수성을 나타내려는 공허한 의도’를 비판하면서 이러한 의도는 ‘타민족들의 냉소’를 초래할 뿐이라고 말하였다. 민족의 자주성과 자긍은 문화의 고유성이라는 근원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다 확고한 기반, 즉 인류가 분유 分有 하는 존엄한 평등성 위에 확고히 수립하여야만 할 것이다.

 

‘호이징하’의 말 – 선택에 대한 책무

해방 후 수십 년간에 걸쳐서 우리들은 이 나라의 문화인임을 자처해 왔고 또한 학자임을 자처해 오기도 했다. 그러나 회고해 보건대 그 동안 우리들은 하나의 뚜렷한 문화적 경륜조차도 제시해 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과거의 우리의 족적은 지식의 빈곤, 철학의 빈곤, 역사적 안목의 빈곤을 나타내는 것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이 땅의 일부 기성 문화인들은 지칠 줄도 모르고 단체를 결성하고 새로운 간판을 내걸고 당파싸움과 자리다툼에 몰두하고, 정치권력과 금력에 아부하는데 여념이 없다.

그들의 근래의 기치는 민족적인 것 다시 말해서 한국적인 것을 고취한다는 점에서 더욱 뚜렷해졌다. 그리하여 ‘한국적 민주주의’ ‘한국적 문화’ ‘한국적 사고방식’ 등이 그들의 열렬한 숭상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이러한 한국적인 것을 가지고 국민학교로부터 대학과정에까지 이르는 교과서의 내용을 채워야만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말하자면 이들은 국민문화와 국민교육 전반에 걸친 일대 변혁운동에 착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은 현하의 모든 부조리의 근원을 한국적 특수성을 가지고 합리화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은 끝내 개별적인 가치가 보편적인 가치에 우선하고 개별적인 판단이 보편적인 판단에 우선한다고 설득할 수 있을 것인가.

1935년에 ‘네델란드’의 사가 史家 ‘호이징하’는 목전에 다가오고 있는 암담한 역사적인 파국을 내다보면서 자신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우리들이 체험하고 있는 무거운 정신적 압박의 시대는 젊은이들보다도 노인들에게 있어 견디어내기가 보다 쉽다. 노인들은 시대의 중압을 조금만 더 끌고 나가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의 공포와 근심은 죽음의 접근으로 해서 경감된다. 그들의 희망과 신뢰, 그들의 행동에의 의욕과 용기는 앞으로 더 살아나가야 할 젊은이들의 손에 넘겨진다. 판다, 선택, 노력, 활동에 대한 중대한 책무를 맡게 되는 것은 이들 젊은이들이다.”

‘불크할트’를 이은 20세기 최대의 문화사가라고 불리어지는 ‘호이징하’의 이상과 같은 겸허한 자세에서 오늘날의 한국의 기성 문화세대들은 많은 것을 배워야만 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자신들의 희망을 최소한도로 정리하여 앞날의 문화건설의 고귀한 책무를 다음 세대에 맡겨야 할 시점에 도달한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자신의 지적인 빈곤과 무기력을 넘겨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앞길을 더 이상 흐려 놓아서는 안 될 것이며 오직 그들을 위한 한 주먹의 거름이 되고자 노력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 민족이 계속해서 지향해야 할 이상은 보다 많은 자유, 보다 많은 평등, 보다 많은 부 富의 실현이기 때문에 이러한 복지를 보다 앞서 실현한 선진 국민들의 문화이념을 겸허하게 배워야 한다고 당부해야만 할 것이다.

아마도 일부 인사들은 필자의 이러한 심경을 국적 없는 사이비 문화인의 비애국적인 감상이라고 비난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들에게 오늘날 이미 세계적 강대국으로 성장한 일본의 경우를 허심탄회하게 관찰할 것을 권고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오늘날 지니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역량은 일본민족의 고유문화의 힘이 아니라 그들이 백 년간을 숭상하며 섭취한 서구문명의 힘 이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백 년이 꼭 우리의 백 년이 되라는 법은 없다. 또한 백 년이라 한들 필경은 역사의 일순간에 불과하다. 우리들은 오늘날의 선진국민들이 당면하고 있는 문화적 제諸문제를 우리의 문제로서 앞질러 근심할 필요도 없다.

역사는 각시기에 따라 그에 해당한 과제들을 인류에 부과해 왔으며, 인류는 그들 나름대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해 나왔기 때문이다.

 

 

– 월간중앙 1974년 1월호 게재

예기치 않은 작은 일 하나로 어제 오후의 기분은 평상적인 평화로운 화요일의 그것과 다른 것이었다. 오랜 만에 마음의 평정이 공략을 받는 듯한 위기감까지 느낀 고요한 화요일 오후, 오랜 만에 openculture website를 들렸다. 이곳이 언제부터 나의 favorite site list에 있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최소한 3년 이상은 되었을 것이다. 이곳은 주로 ‘인류 문화적 유산’에 큰 가치를 두고 그 가치를 유지 발전 보급하기 위해서 노력하는데 그 일환으로 무료나 저렴한 비용으로 online course를 제공하는 information을 싣곤 한다. 이곳의 소개로 내가 ‘들었던’ course도 이제는 몇 개가 된다.

오늘 쳐지는 기분 속에 나의 눈에 들어온 글자가 바로 Kierkegaard란 이름이었다. 한글로는 ‘키에르케고르’ 로 번역되는 이 19세기 덴마크의 국보급 철학자에 관한 course가 그곳에 소개되고 있었다. 게다가 course가 어제인 6월 4일에 시작이 되니, 알맞은 timing이 아닌가?

오늘 쳐지는 기분 속에 나의 눈에 들어온 글자가 바로 Kierkegaard란 이름이었다. 한글로는 ‘키에르케고르’ 로 번역되는 이 19세기 덴마크의 국보급 철학자에 관한 course “Søren Kierkegaard – Subjectivity, Irony and the Crisis of Modernity”가 그곳에 소개되고 있었다. 게다가 course가 어제인 6월 4일에 시작이 되니, timing이 예사롭지 않은 것이 아닌가? 8주간 계속되는 이 course는 19세기 덴마크 실존주의 신학,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의 성장 배경과 그의 주 관심인 그리스도교적 실존철학, 주관론, 소크라테스의 Irony개념, 그리고 급변하는 세상에서 느끼는 ‘절망감’ 같은 것들을 공부한다.

 

 

 

문제는 왜 내가 이 course에 관심이 가는가 하는 것이다. 오래 전부터 보아온 이름 ‘키에르케고르’, 그는 과연 누구인가, 왜 많은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이 사람에 관심을 두는가.. 알고 싶다. 피상적으로 이 철학자의 profile을 보면, 우선 그의 철학은 완전히 그리스도교에 바탕을 두고 있다. 바로 이것이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특히 ‘죽음에 이르는 병, The Sickness Unto Death‘이라는 후기작의 제목은 바로 ‘요한복음 11장 4절1‘ 에서 나온 것을 알고 나서 나는 이번 여름 8주를 coursera 제공, ‘open & free2‘ course를 통해서 이 덴마크 신학철학자에 대해 알아 보기로 결심했다.  

이런 과정에서 기억 속을 헤치고 나온 것이 하나 있다. 1984년 신동아 잡지의 별책 부록, ‘역사를 움직인 100권의 철학책’이란 것, 분명히 ‘키에르케고르’는 그 곳에 소개 되고 있었다. 특히 위에 소개한 ‘죽음에 이르는 병’에 관한 저자의 소개가 그곳에 있었다. 그것을 이곳에 전재를 하여 기억력을 살린다.

이러다 보니.. 온종일 쳐지고 우울한 머리가 한결 가벼워짐을 느끼며,  한결 살맛이 난다. 이래서, 우울할 때 그대로 쳐지고 있으면 하나도 해결되는 것이 없다는 나의 경험철학을 다시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키에르케고르(덴마크 Sø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

죽음에 이르는 病 (1849)

 

표재명 表在明 (고려대 문과대학교수 서양철학)

역사를 움직인 100권의 철학책3

 

 

<1>

‘쇠얀 키에르케고르’는 1813년 5월 5일 북 유럽의 작은 나라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부유하고 경건한 모직상의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부친에게서 풍부한 상상력과 날카로운 변증력을 훈련 받았고 깊은 시름을 물려 받았다. 코펜하겐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배우고 부친의 뜻에 따라 신학 국가시험에 합격, 왕립전도학교에서 목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한편, ‘소크라테스’를 언제나 염두에 두고 쓴 ‘아이러니의 개념’으로 철학 학위를 받았다. 한때 베를린대학에 가서 ‘헤겔’의 뒤를 이은 만년의 ‘셸링’의 강의를 듣기도 했다.

1838~39년에 그는 부친의 소년시절에 관련된 비밀을 알게 되어 ‘큰 지진’을 체험하고 죄의식에 눈을 떴다. 이 때문에 사랑하는 여인 ‘레기네 올센’과의 결혼도 포기하고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지냈다.

1846년 진보적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악덕 풍자신문 ‘코르사르'(해적)와 충돌하면서 그는 사회와 대중이란 것을 알게 되었고, 종교적 저작가로서의 사명에 살 것을 결심했다. 1854년부터는 팜플렛으로 된 ‘순간’으로 덴마크국교회와의 싸움에 나서 순교자의 길을 택했는데, 1855년 가을에 길에서 쓰러져 병원에 옮겨졌으나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11월 11일 42세의 한창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현대실존사상의 선구적 사상가 철학자라고 한다. 그러나 그 자신은 ‘종교적 저작가’ 또는 ‘그리스도교적 저작가’로 자처했다. 그의 저작활동의 목적은 ‘사람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가’라는 것을 기술하는 것이며, 낱낱의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있는 곳에서 그 자신의 책임으로 이 문제와 씨름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각 사람에게 ‘단독자 單獨者’의 범주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는 것이었다. 단독자의 범주는 그의 모든 저작활동이 그것을 축으로 전개된 그의 모든 저작활동이 그것을 축으로 전개된 근본 이념이며, 그리스도교의 결정적 범주였다. 그에게 있어 단독자는 하느님 앞에서 자기 자신에게 무한한 관심을 가지는 믿음으로 홀로 서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 모두가 나면서부터 그리스도인인 그리스도교 국가에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에 이토록 힘을 써야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 물음의 뜻은 ‘그리스도교 세계는 터무니없는 착각이다’, ‘그리스도교 세계는 저도 모르게 그리스도교를 말살시켜 버렸다’는 그의 놀라운 단언에서 밝혀진다.

그가 볼 때 당시의 그리스도교 세계는 ‘데카르트’ 이래의 근대적 합리주의사상이라든가 낭만주의 사상, 특히 그리스도교와 국가를 합리화하고 종교와 국가를 융합시킨 헤겔철학의 영향 아래 그리스도교 본래의 신앙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이미 신앙이 아니라 한갓된 교리와 사상으로 변질된 겉치레만의 것이었다. 그리하여 “신약성서’의 그리스도교, 사도 使徒 들의 그리스도교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 행복을 좇아 ‘미적인 것’의 범주에서 사는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 행세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착각이요 기만이었다. 여기에 ‘그리스도교 세계에 그리스도교를 이끌어 들이는 일’을 위한 그의 저작활동의 의의와 저작가로서의 사명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그의 정치-사회적 인식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가 자기의 사명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던 1848년에 ‘마르크스’는 <공산당선언>을 냈고 파리혁명을 기폭제로 유럽 전역에서는 혁명의 폭풍이 회오리치고 있었다. 덴마크에도 혁명의 여파가 밀려와 절대군주제가 폐지되고 입헌군주제로 바뀌면서 시민의 자유와 평등이 널리 보장받는 사회가 되었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시대의 유행이 된 사회주의의 이념이나 국민 사회운동이 시대의 구원이 되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그 같은 것은 낱낱의 단독자를 대중이라든가 그 밖의 유개념의 추상물 속에 묻어버리는 대중화, 평균화의 위험을 촉구하는 것일 뿐이었다.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은 민중을 집단의 힘 에로 결속시키는 일이 아니라 거꾸로 그것을 붕괴의 시대의 유일한 고정점으로서 하느님 앞의 단독자로 해체시키는 일이었다. 곧 이 시대의 구원은 각 사람이 ‘자기의 원시성 原始性’에 눈뜨고 ‘1800년을 그것이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뛰어 넘어’ 예수와 함께 하는 삶, 곧 신약성서의 그리스도교로 돌아가는 데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각 사람에게 ‘감히 자기 자신이 될 것’ 곧 ‘감히 하느님 앞에서 오직 홀로서는 단독자가 될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거대한 노력과 이 엄청난 책임을 지고 오직 홀로 서는 특정한 단독자’가 스스로 되려고 했으며 또 다른 사람도 그러기를 원했다. 그는 이것을 ‘그리스도교적인 영웅주의’라고 불렀으며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영웅주의를 위해 ‘교화와 각성을 위한 그리스도교적이고 심리학적 論述’로서 <죽음에 이르는 병>(1849)을 썼던 것이다.

 

<2>

<죽음에 이르는 병>의 본문은 ‘인간은 정신이다. 그러나 정신은 무엇인가? 정신은 자기다’ 라고 하는 유명한 말로 시작한다. 인간은 ‘정신’으로, 그리고 이 정신을 ‘자기’로 파악한 데 ‘키에르케고르’의 독특한 인간이해가 있다.

‘헤겔’은 정신의 본질을 주관과 객관, 사고와 존재, 이성과 감성, 논리와 자연을 의식적으로 종합하는 ‘절대정신’으로 파악했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서는 이 같은 절대정신은 유한한 인간에게는 당치도 않은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유한한 인간의 실존재하는 정신은 영원자의 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현실로는 그렇지 못한 자기이며, 영원자가 되는 일을 과제로 안고 있는 자였다. 본래 그렇게 되어야 할 자기가 되려는 자기생성의 무한한 노력 중에 있는 것이 인간 실존의 진실이요, 인간으로서 실존재하는 정신이란 이러한 과제를 자신의 과제로 자각하는 자기, 이 과제를 지금을 사는 이 단독의 자기의 삶을 통해서 실현하려는 자기였다. 자기가 이러한 의미에서의 실존이 되어 있지 못한 상태, 자기의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상실의 상태에 있는 것, 이것이 곧 절망인 것이다.

이러한 절망이 바로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 곧 구제를 위한 첫째 계기가 된다는 변증법적인 성질의 것이다.

인간적으로 말해서 죽음은 일체의 것의 마지막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적으로는 죽음조차도 일체의 것의 마지막이 아니다. 죽음이 최대의 위험일 때, 인간은 삶을 희망한다. 그러나 죽기를 바랄 만큼 위험이 클 때, 그리고 죽음조차도 희망이 될 수 없을 때 이것이 절망이다.

절망의 진행과정은 절망의 현상학이 된다. 절망의 강도는 인간의 자기의식의 도 度 에 따라서 높아진다. 곧 ‘자기가 절망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절망’ (영원한 자기를 가지는 일에 대한 무지)에서 ‘자기가 절망하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는 절망'(어떤 영원한 것을 가진 자기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것)에로 높아진다. 이것은 인생행로의 여러 단계에 있어서 정신성의 미적 실존의 단계에 해당되는 ‘재미’를 찾아 헤매는 직접적인 대상의식의 절망에서 윤리적-종교적 실존의 단계까지 이르는 자기의식의 절망이 된다.

윤리적 실존에 눈을 뜬 인간의 절망은 ‘절망하여 자기자신 이려고 하지 않는’ 약한 여성적 절망이 되든지 ‘절망하여 자기자신 이려고 하는’ 반항적인 남성적 절망이 된다. 이 반항적 절망은 자기의식의 강도에 따라 악마적인 반항, 절망적 광포에까지 이른다.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이 현대의 윤리적 상황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은 소크라테스 적인 윤리적 교정이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주지주의적 윤리는 시대의 구원이 되지 못한다. 인간은 알면서 선을 행하지 않고 부정을 행하기 때문이다. 이 반항하는 인간의지가 죄를 자각하고 그 마음을 돌이킬 때 구제의 길이 있다. 여기에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의 계시와 원죄의 가르침의 의미가 있다.

그리하여 <죽음에 이르는 병>의 제2부에서 절망은 ‘하느님 앞에서의 절망’ 곧 죄로 규정되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들어서는 일, 곧 믿음에 의한 절망의 근절을 말하고 있다.

이 <죽음에 이르는 병>은 그 다음해에 나온 <그리스도교 안에서의 훈련>과 함께 ‘파스칼’의 <팡세>에 비겨지는 그리스도교 변증론의 명저가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구명된 그의 인간이해는 그 후의 수많은 사상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 현대의 실존주의 현상학 해석학 변증법적 신학은 물론 교육학 심리학 문학예술사상의 형성과 전개에 크게 이바지했다.             

 

주요저서

  • Either-Or <이것이냐, 저것이냐>, 1843.
  • Fear and Trembling <공포와 전율>, 1843.
  • Repetition <반복>, 1843.
  • Philosophical Fragments <철학적 단편>, 1844.
  • The Concept of Dread <불안의 개념>, 1844.
  • Stages on Life’s Way <인생행로의 여러 단계>, 1845.
  • Concluding Unscientific Postscript <철학적 단편에 대한 後書>, 1846.
  • The Present Age <현대비판>, 1846.
  • Work of Love <사랑의 역사 役事>, 1847.
  • Christian Discourse <그리스도교 講話>, 1848.
  • Training in Christianity <그리스도교 안에서의 훈련>, 1850.
  • Attack upon Christendom <순간>, 1855.
  • The Point of View for my Work as an Author <관점>, 1848.
  1.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2. 이 course는 100% 무료로 audit 청강이 가능하다.
  3. 신동아 1984년 1월호 별책부록

¶  Muggy & Wet, then: 지나간 5월 중순부터 이곳은 Tropical Storm Alberto의 영향인지 완전한 ‘우기(雨期)’, 그것도 ‘열대성 熱帶性’ 대기가 완전히 이곳을 뒤덮어서 수시로 내래는 폭우, 폭풍은 이제 아주 익숙해졌고 며칠 전부터는 드디어 ‘끈끈한 밤’ pattern이 시작되었다. 한마디로 이것은 air conditioner가 없으면 밤잠이 괴롭다는 뜻이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니 느낌이 아주 달랐다. 공기 속에 물기가 하나도 없는 그런 것, 피부가 빠삭빠삭하게 느낌이 산뜻했다. 아침 6시 반 쯤 backyard엘 나가니 이건 다리가 추울 지경이 아닌가? 그렇구나, weather pattern이 결국 바뀌었구나… 하는 반가운 느낌으로 조금은 머리가 가벼운 새벽을 맞았다.

지난 2~3일 간 우리 집 Tobey가 토하고 설사를 하는 등 아주 아파서 나의 기분도 축~ 쳐지는 그런 날들이 되었다. 말 못하는 동물의 아픔은 그저 짐작으로 알 뿐이다. 하지만 병원엘 갈까 말까 하는 것은 고민 중의 고민이다. 최대한 머리를 써서 자가치료를 하지만 나이가 있어서 언제나 신경이 쓰인다. 이 녀석 간호하며 희비쌍곡선이란 말이 어쩌면 그렇게 맞는 말인지..

피곤한 김에 어제 일요일, 예수성체성혈 대축일, 을 skip할까 하는 유혹이 강했지만 다른 이유로라도 가야 했다. 본당 구역장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신구임 구역장은 필수로 참석하라는 ‘지시’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비록 7월에 나의 임기가 시작되지만 이렇게 해서 나도 서서히 ‘구역 business’ 에 가까워지기 시작하는 모양이다. 별로 크게 생각할 것 없다. 순명의 정신으로 최선을 다하면 되지 않겠는가?

오늘은 2명의 ‘만장일치’ forced holiday를 맞기로 했다. 마라톤을 하려면 이런 조치도 필요하다. Daily Mass, YMCA workout, eatout lunch모든 것에서 오늘 하루는 ‘해방’되고 나니 또 다른 느낌의 세상이 느껴진다. Tobey의 설사도 멎고 solid food를 조금씩 먹기 시작하고.. 감사합니다. 그렇다. This shall also pass… 이 모든 것 다 지나가리라..

이런 것들로써 올해의 ‘여름’은 시작되고, 나의 몸과 마음도 이런 기후 [끈끈함, a/c noise, 폭우]에 거의 적응을 하였다. 그 다음은 무엇인가… 물론 ‘낙엽’을 떨어지는 사색의 가을도 그다지 멀지 않았다는 뜻, 이것도 희망이라면 희망이다. 자연이 변하는 것은 언제나 희망인 것이다.

 

¶  문인화 입선 자축@Miss Gogi: 다솔(연숙의 문인화 예명)이 몇 달 전에 ‘끙끙거리며’ 열심히 그려 출전했던 문인화 두 점이 입선이 되었다. 대한민국 전라북도 서도대전 이란 곳에서 입선통지가 왔고 며칠 전에는 그 작품들이 이곳에 무사히 도착을 해서 우리 집 ‘meeting room’에 걸어 놓았다. 다솔이 이 ‘것’을 시작한지 얼마나 되었나… 최소한 7년은 되었을 것이다. 그 동안 오름과 내림새를 거치며 그려왔고 취미의 level을 고수해 왔는데 문인화 친구 ‘예랑’씨를 만나며 ‘대전 大展’ 을 꿈꾸게 되었다. 그 ‘예랑’씨는 거의 pro의 정신으로 그림을 그렸고 결국 대한민국 대전에서 특선을 받기도 했다. 그런 ‘친구’의 영향을 받아 다솔도 결국 작년에 한국미술협회 대전주최 미술대전에 1점, 올해는 서도대전에서 2점이 ‘입선’되는 기쁨을 얻게 된 것이다. 별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대한민국의 문인화 문화권의 변방에 있는 이곳에서 이것은 뜻 깊은 일이 아닐 수가 없고, 앞으로 골치 아픈 일들을 내려놓은 후에 전념을 할 것을 찾은 보람도 있을 듯 하다.

이런 것은 가족적으로 반드시 자축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지나간 Memorial Day저녁에 온 가족 (나라니의 Lucas 포함) 이 도라빌 H-mart 옆에 있는 고기전문집 Korean BBQ Miss Gogi 란 곳에서 푸짐하게 오랜만에 고기요리를 즐겼다. 이런 식의 ‘신개념의 Korean BBQ steak house’는 아마도 재미 신세대 한국인들의 머리에서 나온 듯 싶은데 거의 fusion style, 그러니까 Americanized 된 ‘신세대 한국음식점’으로 보인다. Mom & Pop 의 구태의연한 수많은 한국인 상대의 전통 한국음식점도 우리 같은 세대에게 필요하겠지만 이런 새로운 idea는 역시 ‘우리의 세대는 이제 다~~ 갔구나’ 하는 자조감 自嘲感을 느끼게 한다.

Korean BBQ, Miss Gogi

 

¶  아틀란타 성체대회: 2018년 6월 2일 Atlanta Eucharistic Congress, 아틀란타 성체대회, 23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제는 전국적으로 많이 알려진 전통적이고 유서 깊은 가톨릭 연례행사가 되었다. 2011년부터 우리는 참가했지만 2년 전 행사는 예외적으로 불참을 한 적도 있다. 그때 불참한 이유는 기대했던 어떤 speaker가 갑자기 못 오게 되었음을 마지막에 알고 너무나 실망을 해서 protest한다고 불참한 실수를 한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주최측의 scheduling 실수가 아니고 그 speaker가 갑자기 ‘맹장수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너무나 미안하기도 했다.

Mother Olga

그 speaker의 이름은 요새 미국 가톨릭의 ‘떠오르는 별’ Bishop Robert Barron이고 그 유명한 주교님이 이번에 결국은 연사로 왔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기를 쓰고’ 참가를 해야 했다. 사실 이번에 오는 speaker들은 하나같이 쟁쟁한 분들이었다. 또한 7년 전에 우리가 처음 참가했을 때 왔던 ‘아주 조그만 키’가 인상적인 Boston (Mass.) 에서 오신 Mother Olga를 또 볼 수 있어서 너무나 반가웠다. 우렁찬 노래의 기도로 시작하는 그 수녀님, 체구에 비해서 어쩌면 강론이 그렇게 힘있고 심금을 울릴까…

하지만 역시 이번 성체대회의 꽃은 역시 Bishop Robert Barron 이었다.  제일 마지막 차례로 그분이 등단했을 때 반응이 무슨 rock star라도 온 듯한 그런 열기였지만, 사실은 그분의 ‘지식적, 이론적’이지만 ‘신심이 담긴’ 강론은 정말 더 인상적이었다. Youtube로 보던, 매일 받아보는 daily reflection과 하나도 한치도 다름이 없는 일관된  message 바로 그것 이었다. 얼마 전에 끝낸 DVD ‘Mass‘를 의식하며 이날의 주제는 ‘천주교에서 제일 boring하게 느껴지는 미사’에 대한 것,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나는 100% 200% 공감, 동감하는 주제요 강론이었다.

왜 이분이 그렇게 남녀노소를 막론한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일까?  나의 추측이 맞는다면, ‘신세대가 수긍할 수 있는 이론적 강론’ 바로 그것이 아닐까? 특히 무신론자들과 ‘신사적 논쟁’하는 그의 이론은 정말 인상적인 것이다. 해박한 그의 디지탈 시대에 맞는 apologetic 은 아마도 현재 가톨릭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일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올해 성체대회는 이분을 직접 본 것으로 참가한 보람을 느낀 그런 기회가 되었다.

rising star, Robert Barron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전례부장, 교육부장 그리고 주임 이재욱 신부님 모두 morning procession에 참가 하였다

연인원 30,000명이 참가한 Georgia International Convention Center

 

¶  5월 목요회: 매달 마지막 목요일 밤에 모여서 하루의 영업을 서서히 닫기 시작하는 시간에 식당을 찾아 3명의 오래된 지기의 남자들이 모여서 지나간 달의 이야기를 나눈다. 일명 목요회, 이것이야 말로 odd group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런 점이 독특하고 신선하기도 하다. 전혀 다른 세 사람… 정말로 전혀 닮은 것이 거의 없다.

이번 달에는 Pleasant Hill Road 한인 town 입구에 있는 깨끗한 느낌의  ‘명가원’에서 모였다. 막내격인 S 형제, 누가 모른다고 지난 달에 이어 얼굴이 펴질 줄을 모른다. 아마도 지난 몇 달을 그렇게 우울한 나날들을 보낸 듯 보인다. 그와 반대로 나의 동년배 연대동창 이 형제는 의외로 얼굴이 밝을 대로 밝다. 무슨 좋은 일들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덕분에 대화가 활기에 찬 것으로 기회는 이때다 싶어서 ‘coming home’ 의 hint를 비추었는데 의외로 전과 다르게 open 된 모습을 보인다.

장구한 신앙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 동문형제, 어쩌다 그렇게 고향을 떠나 살고 있는지.. 올해 9월이 목요회 ‘연륜’ 1년이 되는데 그때까지 더 좋은 결과를 얻으면 얼마나 좋을까? 문제는 ‘어린  S 형제’, 60대가 넘었으니 과히 어린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아직도 ‘세월의 교훈’을 느끼지 못하는지 답답하기만 하다. 이제 커다란 희망은 접었지만 이것만은 말하고 싶다. ‘하느님에게 불가능이란 없다.’


 

 

지난 5월 달에 들어서 부쩍 역사적 5월의 사건들 (5.16, 5.18 같은)에 추억을 더듬어 관심을 거의 반강제적으로 쏟았다. 내가 만일 내일 아침에 못 일어난다면..  나를 낳아준 조국 역사의 일부분, 그것도 아주 의미가 큰 것을 모른다면 조금 억울할 것 같았다. 게다가 요사이 나의 주변에는 ‘조국의 빨갱이화’를 염려하는 ‘생각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들 앞에서는 나는 거의 ‘완전한 외계인’이 된다. 어떻게 그렇게 모르고, 관심 없이 살았을까?

그 잃어버린 1980년대 이후의 대한민국 역사가 ‘이념 논쟁’과 마주 어울려서 정체를 알 수가 없게 되었다. 한마디로 누구의 말이 더 신빙성이 있는지 알기 어렵게 된 것이다. Internet의 덕분으로 Fake news까지 등장하고, Youtube란 것은 자칫하면 우리들 거의 몇 시간 만에 brainwash를 시켜 버린다.

오늘 나의 생각은 ‘천주교와 빨갱이’란 거북한 화제에 머물러 있었다. 오늘 읽은 1990년 5월호 천주교 잡지 ‘생활성서’의 ‘4.3 항쟁, 인간해방의 토대’란 ‘특별기고’를 읽은 후, 나는 나의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간단히 말해서, 1990년의 천주교 잡지의 글이 이 정도라면, 지금은 과연 어느 정도일 것인가?

이 특별기고의 저자 ‘김명식 시인’이란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Googling하려는 유혹을 참았다. 더 자세히 알아보면 나는 이 저자에 대한 ‘증오의 유혹’을 뿌리쳐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실은 ‘생활성서’는 분명히 (천주교)교회인가를 받은 출판물인데, 어떻게 이렇게 편파적, 아니 ‘빨갱이’의 mouthpiece역할을 했던 것일까? 이 글을 읽은 후 나는 ‘광주사태에 대한 생활성서의 기사들’은 철저한 검증이 필요함을 느꼈고, 거의 무의식적으로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되었다. 만약 광주’항쟁’이 이 ‘시인’의 4.3 ‘항쟁’과 같은 맥락이라면 나는 색안경이 아니고 ‘증오의 눈’으로 그들을 볼 것이다.

이 글을 전재하는 것, 읽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지만 이런 것 감수하기로 결심을 했기에 강행을 하였다. 문제는 ‘천주교’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글’을 어떻게 허용을 했는가 하는 것이다. ‘사필귀정 事必歸正’의 맥락에서 ‘혁신정당 남로당과 함께 민족해방의 대열에 합류’ 한 4.3 항쟁이라면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이 ‘시인’이란 분, 과연 어떤 인간인가? 어떻게 천주교를 말살했고, 하려던 빨갱이들이 이렇게 천주교의 이름을 팔아가며, 합류할 수 있었는지.. 역사를 배워라, 역사를.. 이 ‘事必歸正’의 인간들아…  당신은 당신이 숭배해온 주사파, 김씨 세습왕조의 최후 발악적 말로와, 그 밑에서 인류역사 유래 없는 카프카도 웃지도 못할 어이없는 고통을 받고 있는 동족들을 한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전재 全載: 생활성서 1990년 5월호에서

 

제주 4.3 항쟁 42주년 특별기고 (2)

 

4.3 항쟁, 인간해방의 토대

 

김명식 시인,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연구원 원장1

 

 

이승만 정권을 앞세우려고

2차대전 이후 미국은 국제관계에 있어서 패권 팽창주의의 야심을 노골화 해 나갔다. 그들은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도 대소련정책에 우위를 차지하려고 했으며 소련과의 협상을 계속하면서도 모스크바 3국(미, 영, 소) 외상 협의 사항조차 지키지 않았다. 3상 협의사항은 다음과 같다.

“조선에 주재한 미,소 양국군 사령관은 2주 이내에 회담을 개최하고, 양국의 공동위원회를 설치하며, 조선임시민주정부 수립을 원조한다. 또 미, 영, 소, 중 4국에 의한 신탁통치제를 실시하는 동시에 조선임시정부를 수립하도록 하여 조선의 장래 독립을 고려하여 신탁통치기간은 최고 5년으로 한다” (1945. 12. 17)

그리스, 터키, 중국 등지에서의 사회주의 확대경향과 소련의 세력확대에 위협을 느낀 미국은 다음의 여러 이론과 주장을 통하여 국제적 입지를 구축하려 했고 한반도 문제도 같은 방식을 사용하였다.

  • 케난의 주전론; 소련과의 협력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으며 미국은 이제 소련과의 상호적대적이고 상호불신하는 관계를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1946년 초)
  • 처칠의 철의 장막론; 소련의 도전에 대처하기 위하여 영어권 국민이 단결하자 (1946.3)
  • 이승만의 분단고착 발언; 우리는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1946.6)
  • 트루만 톡트린: 공산주의 침략으로부터 자유주의를 보호하기 위하여 그리스, 터키에 4억 달러 원조요청(1947.3)
  • 마샬 플랜; 자유주의를 유지한다는 조건으로 유럽 여러 나라에 경제원조(1947.6)

 

미국은 ‘1948년 3월 31일 이전에 한국에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UNTCOK)의 감시하에 인구비례에 따라 보통선거 원칙과 비밀투표에 의한 총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는 자기들의 안을 유엔 총회에 전격적으로 통과 시켰다(1947.11.14). 결국 UNTCOK 제1차 회의 (서울 1948.1.12)->소련측 반대->유엔 소총회 결론(1948.2.26 접근 가능한 한국의 지역에서 선거 실시)->UNTCOK 결의(한국의 일부지역에서 선거실시를 감시하며 동 선거는 늦어도 1948년 5월 10일 이전에 시시되어야 한다)라는 형식적 과정을 밟고 대리점령통치기구 구축음모를 착실히 굳혀나갔다.

미국은 당시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을 지지하는 한민당과 북한 피난민 대표로 이루어진 조선민족당을 내세워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라도 자기들의 전략이 실현될 수 있도록 유도했다. 그들은 한반도 전역을 전초기지화하기 위해서 전략상 제주도에 반공기지를 구축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였고, 그러기 위해서는 제주도를 완벽하게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삼무도(三無島)는 처형도로 바뀌어

명분상으로는 선거전략을, 작전상으로는 초토화작전을, 토벌대에는 용병인 반공우익집단, 친일경찰, 친미경비대 등을 이용하려는 미국의 음모는 1948년 벽두부터 시작되었다. 5.10 선거운동은 리, 동 단위의 18~55세 청장년으로 구성된 향보단을 이용하였고 그 필요경비는 해당 지방민의 기부금으로 충당되었다.

그리고 빨갱이를 잡는다는 구실로 계엄령 선포, 통행제 실시, 해상교통차단, 무차별 총살, 마을 가옥 소각, 주민 소개, 주민 격리작전(해안으로부터 4 km 내에 있는 중산간부락과 산간부락을 격리, 후에 9 km로 바뀜) 등으로 이루어진 초토화 작전이 자행되었다. 이러한 초토화작전 앞에서 제주도민은 혼연일체가 되어 미국의 지배전략에 전면 거부, 항거의 기치를 들고 단선단정을 타도하기 위해 일어섰다. 이는 유엔 조선위원단 입국거부로 시작하여 2.7 구국투쟁, 자위무장투쟁, 전선합류투쟁으로 이어졌다.

1947년부터 본격적으로 고양되어가는 제주도민의 항전 기세에 대하여 미군은 제주지방 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여 1천 7백여 명의 경찰토벌대를 증원했다 (1948.4.5) 그리고 1948년 5월 6일 점령군 전세력을 망라한 긴급대책회의 – 군정장관 딘 (Dean)도 참가 – 를 열고 구체적인 제주도 초토화 작전을 모의했다. 제주도 인민의거자 김달삼과 제9연대장 김익력 간의 협상을 유도하는 선무공작, 첩보활동, 합동토벌작전, 제11연대 창설, 수도청 형사대파견(1948.5.18) 등을 이유로 5.10 선거를 전후해서 기존병력의 50 퍼센트 이상이 증원되었다. 그들은 확보된 지상, 해상, 공군 화력으로 집단 대량학살, 집단 방화, 주민 추방, 전략촌 건성 (3광 3진 작전)을 자행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1948년 4월부터 1949년 4월 사이에 제주도의 4백여 부락 중에서 295부락의 1만여 호를 불태웠고 무려 5~8만의 무고한 제주도 양민을 살해했다. 산 좋고 인심 좋은 제주도는, 이국인의 총탄에 쓰러진 시체더미로 인해 거지 없고, 도둑 없고, 대문 없는 삼무도(三無島)에서 ‘처형도’로 바뀌어 버렸다. 미국은 한반도 전역을 지배하기 위해서 제주도를 초토화했던 방식 그대로 이승만 정권을 앞세우고 초토화작전을 확대해 나가려 했던 것이다.

 

한 목숨 떳떳하게 살고자 한라산으로

1947년 11월 14일 유엔 총회에서 유엔 감시하에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결정을 내리도록 유도한 미국은 사실상 전후 조정문제를 금한 유엔 헌장 제 107호 및 내정간섭을 금한 동 헌장 2조 7항을 위배한 것이었다. 결국 대리점령통치기구를 세우려는 미국의 음모 앞에서 제주도민들은 하나 둘 한라산을 향해 떠나기 시작했다. 제주도민의 유일한 꿈이었던 민족의 통일과 자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미국에 의한 민족의 분열과 38선 이남에서의 대리점령통치기구(이승만 정권) 설치음모를 분쇄하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제주도민의 저항은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워온 정신 그대로였다.

민족해방지도자들은 감옥에 갇혀 있었고, 미국의 체포명령에 쫓기는 민주인사들은 지하로 들어가 활동하게 되었고, 용병이 되라는 미국의 책략에 결코 부응할 수 없었던 제주도민들은 한 목숨 떳떳하게 살기 위하여 한라산으로 발길을 옮겼던 것이다. 그리하여 강압적인 미국의 선거전략에 맞서서 제주도민들은 단선, 단정저지투쟁에 몸과 마음을 다 쏟아 넣게 되었다. 그들은 실력저지만이 민족통일과 자주정부수립이 가능하다는 판단 아래 경찰의 탄압에 무력항쟁으로, 그 외 지서공격, 용병경찰처단 등으로 맞섰다. 동시에 제주도민들은 다음과 같은 요구를 했다. “유엔 조선위원단은 물러가라” “망국 단선 단정결사 반대” “미소양군은 즉시 철수하라” “토벌대를 즉시 해체하라” “반미구국통일전선에 총 집결하라”. 민중의 생존권과 자유활동을 쟁취하기 위하여…

1948년 2월부터 3월까지 한라산으로 들어간 제주도민들은 스스로를 지키고 민족통일과 자주정부수립을 위해서 자위적 무장을 갖추게 되었다. 이 자위적 무장조직은 초기에는 한라산으로 들어간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대정지역, 중문지역, 애월-한림지역, 제주, 조천지역, 남원지역, 성산-표선지역으로 뭉쳐 이루어졌다. 이렇게 구성된 자위무장대의 활동사항을 보면 그 성격이 뚜렷해진다.

“조선인민이라면 조국과 인민을 압박하는 외적을 몰아내는 폭넓은 투쟁에 서야 함이 명백하지 않은가? 단독선거를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과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미국과 그 앞잡이의 학살만행을 제거하기 위하여… 우리들과 함께 조국과 인민이 이끄는 길로 결연히 떨쳐 일어서 행진합시다”(1948.4.3 인민무장대).

5.10 선거전략을 원만히 수행하기 위해 자행된 ‘미국식 빨갱이 토벌전(W. L. 로버트)’에 맞서 경비대(문상길 중위와 함께 백 여명, 1948.4.27), 혁신정당 (남로당 1948.6.3), 사회단체 (단선단정 반대투쟁 총파업 위원회, 1948.5.5.) 및 학생, 지식인, 종교인들은 제주도민 무장대와 함께 민족해방의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선거전략의 실패는 잔악한 초토화작전으로

결국 이렇게 합류한 제주도 민주세력에 의해 미국의 선거전략, 즉 대리점령 통치기구 설치음모는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다. 제주도 감과 을 두 선거구에는 투표에 참가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5.10 선거 반대투쟁은 미국의 극동전략을 분쇄한 민족해방투쟁의 첫 번째 승리로 기록되었다.

선거전략에 실패한 미국은 앞잡이들을 내세워 제주도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려고 획책하였다. “한라산 일대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지른 다음 항공기로 소이탄을 퍼부으면 제주도 빨갱이들을 몰살할 수 있다”. 이것은 11연대장 박진경의 말이었다(1948.6.17). 미국은 제주도를 시발로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려고 6.25를 거쳐 오늘날까지 그 지배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한 항쟁은 계속되리라

미국의 초토화작전에 묵묵히 맞서 싸우다 죽어간 5~8만의 목숨들, 이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었던가? 당시 제주도민들은 무엇을 바랐고 어떻게 활동했는가? 최근 모슬포 송악산에 미 공군기지 건설계획에 대해 제주도민 전체는 왜 반대하고 일어섰는가? 4.3항쟁은 이상과 같은 소박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4.3 항쟁의 주체는 분명 제주도민 전체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민족의 하나됨과 통일된 정부수립을 갈구했고 민족의 통일과 통일된 자주정부수립을 방해하는 미점령정책에 반대하여 싸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4.3 항쟁은 외세의 침략을 막으려고 궐기한 민족해방전쟁이었다. 수만의 제주도민이 바로 이 싸움에서 전사한 것이다. 물론 이 싸움에는 제주도민의 생존권 투쟁도 포함된다.

4.3 항쟁은 역사적으로 볼 때 침략세력, 즉 여몽연합군 -> 조일 연합군 -> 한미연합군에 대항하여 싸운 민중해방투쟁사와 그 궤(軌)를 같이 한다. 그러기에 4.3 항쟁은 각 시대, 각 지역에서 해방을 위해 싸워왔던 민중해방투쟁의 보편성을 지니게 된다. 도식적인 민족주의, 인종주의, 종파주의, 이념주의를 훨씬 넘어선 인간해방이라는 지상과제를 안고 4.3 항쟁은 민족적 힘과 민중적 힘의 합류에 의하여 결행되었던 것이다.

이 합류된 힘은 바로 작은 규모였지만 외세의 침략을 막을 수 있었다. 오늘도 이 작은 힘들이 모여 역사를 정 방향으로 인도하고 사회를 민주화로 이끌며 인간다운 세상, 평화스런 사회를 창조해 나가고 있다. 4.3 항쟁은 모름지기 인간해방의 토대이다. 누구든지, 어느 것이든지 역사의 올바른 흐름을 거스르는 한 이 4.3 항쟁은 계속될 것이다.

“너희들은 누구를 위해 싸우는가? 무엇 때문에 미제 살인귀들의 총마개가 되려는가? 오늘 네놈들은 우리의 생명을 빼앗을 수는 있겠지만 밝아오는 조국의 아침햇살을 쇠사슬로 묶어 둘 수는 없다”(문상길 중위의 최후진술).

 


  1. 아주 제3세계만 골고루 섞어 놓으셨군요… 소련은 빼고, 미제를 혐오하는 이유를 짐작하겠습니다.

¶ 5월의 어머님과 수국 水菊:  2018년 어머니의 선물, 성모성월 5월이 서서히 우리로부터 떠나고 있다. 올해, Mother Nature는 자상하게도 하늘에서 단비를 지나칠 정도로, 땅이 거의 마를 새 없이 충분히 주시어, 온갖 초록색 생명들, 꽃과 나무들은 호사를 하고 있는 5월이었다.

작년 5월을 돌아보면 그때는 거의 ‘초록색의 향연’을 잊고 살았었다. 우리 집 뒤뜰에서 태어난 8마리의 kitten들 살려내어 입양시키려고 동분서주하였던 때, 봄의 싱그러움은 거의 놓쳤지만 잊을 수 없는 그 귀중한 생명들, 귀여운 아기 고양이들 얼굴은 영원히 우리의 뇌리에 각인 刻印 이 되었고, 두고 두고 맛난 술을 조금씩 마시듯 아직도 기쁨을 느낀다. 그런 생명의 5월이었다.

올해의 5월은 조금이나마 ‘역사의 짐1‘을 덜어보려고 1980년대의 5월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고 지냈다. 1980년 5월의 ‘광주사태’가 나와 어느 정도 관계가 되었을까 물으면 사실 많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그런 것, 없던 것처럼 수십 년을 살아왔다는 것은 절대로 자랑스러운 것이 아님을 절감하게 되었고, 나에게 과연 Motherland란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더 생각하며 살기로 했다.

5월의 찬란하게 화사하고 청초한 꽃들을 매주 성모님께 ‘계속’ 바칠 수 있었던 것, 두고 두고 2018년 5월의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주 회합 때마다  $4짜리 ‘상품화 된’ 꽃을 Kroger에서 사다가 성모님께 바치는 것, 돈도 돈이지만 미안하게 느껴진 것이, 화창한 5월에 우리 집에서 가꾸었던 꽃들을 바치는 것은 너무도 은총을 받는 듯한 느낌이었다. 특히 한창 멋을 내는 수국과 옥잠화를 곁들인 homemade bouquet, 5월의 어머님 성모님, 너무도 좋아하실 것 같았다. 특히 왜 매년 피었을 수국의 싱그러움이 올해 특별히 나에게 그렇게 멋지게 다가 왔을까.. 생각한다. 아마 나이 탓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나이 먹음의 멋일까?

 

성모님, 레지오, 수국, 옥잠화… 그리고 5월

 

¶  선생님의 방학:  ‘teacher 새로니’의 pet dog Ozzie가 2주 정도 우리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 애들처럼 여름 방학을 그렇게 목이 매이도록 기다리더니 며칠 전 Memorial Day 저녁에 식구들과 외식을 하고 그 다음날 아침에 Canada로 여행을 떠나며 Ozzie는 우리의 식구가 된 것이다. 이때마다 선생님이란 직업, 괜찮은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 긴 여름, 다 큰 사람이 아이들처럼 ‘놀고 먹는다’는 것, 나는 아직도 실감을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 나이에 그런 입장이었으면 아마도 지루하기도 할 것 같고 집구석에서 독서 정도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지금은 나도 조금은 자신이 있다. 더 멋지게 보낼 자신.. 근래 들어서 outdoor sports: deep sea diving, hiking, climbing 같은 데 푹 빠져 있는 새로니, 지금은 공기 좋을 듯한 Canada의 wilderness를 누비고 있을 것이지만 글쎄.. 요새 ‘아이들’ 참 어리게 산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우리가 그렇게 여행을 안 하고 사니 나는 나는 2주 동안 대리 만족이나 즐길까..

 

Ah, Canada.. I wish I..

 

¶  레지오 활동 재개:  최근에 들어서 우리 레지오 Pr.2 ‘자비의 모후’, 1조 (나와 연숙)는 오랫동안 침체했던3 때를 뒤로하고 본격적인 레지오 활동을 재개하게 되었다.

그 동안은 소극적으로 기도에만 치중하는 ‘활동’이었지만 그것은 균형을 잃은,  바람직한 방법은 절대로 아니었다. 이상적으로는 신심활동(기도를 중심으로)과 corporal work (육체적 활동)의 비율이 적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 동안의 경험에 의해서도 ‘밖으로 나가 뛰는’ 활동처럼 나에게 돌아오는 보람과 활력소가 되는 것은 없었다.

나보다 덜 건강하신 ‘어르신’들을 찾아 조금이라도 사소한 도움이라도 주는 것, 그 정도도 못할까? 이분들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 자체만도 그분들에게 큰 도움을 준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언젠가는 우리가 이런 도움의 수혜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도 명심하며 더욱 더 뛸 수 있는 육신의 건강을 주시라고 기도한다.

 

¶  Unofficial Summer: 어제 Tobey와 Ozzie를 데리고 동네를 걸었다. 몇 년 전만해도 거의 매일 Tobey를 데리고 걸었지만 언제부터인지 거의 산책을 못하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나이가 많아진 Tobey를 너무 걱정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것은 좋지 않다. 모든 ‘운동’ 중에서 나의 나이에 가장 효과적인 것이 ‘빠르게 걷는’ 것이다. YMCA에서 나는 30분 정도 빠르게 indoor track을 걷기에 날씨의 영향을 받는 동네걷기에 등한했는지도 모른다. 좌우지간 오랜 만에 걷다 보니 우리 subdivision의 ‘자산’인 swimming pool과 tennis court를 지나게 되었고, swimming pool이 ‘파~란’ 색으로 변한 것을 보았다. 그렇다.. Memorial Day부터 모든 Summer facility가 open 하는 것, 잊고 살았다.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 자주 가던 ‘수영장’… 아~~ 세월이 정말 많이 흘렀다. 그 수영장 아이들이 이제 30대가 되었으니.. 그렇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여름이다. 기껏해야 3~4개월 정도일까… 땀 흘리는 여름은 반갑지 않지만 이제는 드디어 갈색 낙엽의 가을도 그렇게 멀지 않았다는 ‘희망’이 보인다. 그러면… 작년에 재 발견한 classic oldie, ‘The Last Leaf‘를 다시 들고 부르게 될 것이다.

 

Swimming pool’s open for Summer!

  1. 거의 40년 동안 조국 대한민국의 역사를 잊어버리고 살았던 것에 대한 후회
  2. 쁘레시디움 Praesidium의 약자로 레지오 마리애 조직의 최전방 분대로 실제적인 선교, 봉사 활동은 이곳에서 한다.
  3. 특히 지난해 ‘레지오 미친년 난동 사건’ 이후부터

Freedom, Never Free

 

¶  현충 顯忠 단상 斷想:  며칠 전 Gulf coast로부터 북상하는 Tropical storm Alberto 의 영향인지 시원한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고요한 휴일 아침이다. 대기는 이제 완전히 여름의 냄새가 가득한 그런 것으로 바뀌었지만 대신 기온만은 늦봄의 그것, 이런 모습의 Memorial Day 를 우리는 ‘이곳’에 살면서 얼마나 오랫동안 맞았던가…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사람들, 대부분 군인들, 이들을 추모하는 날답게 고요한 느낌을 주어야 하는 날이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교과적인 삶을 사는가.. 그 많은 사람들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반세기 전, ‘부선망 父先亡 단대독자 單代獨子’1라는 구세대적 병역조항으로 군대의 의무를 적극적으로 수행하지 못한 나로서는 더욱 그렇다. 당시에는 날듯이 기뻤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하나의 작은 trauma로 변하고 있음을 느낀다.  과거지사 過去之事로 잊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특히 요즈음 빈번히 주위에 등장하는 ‘월남전 veteran’ 들을 마주하면 사실 할말이 하나도 없다. 솔직히 말해서 ‘미안하다’라는 심정 바로 그것이다.

자유, 인간의 자유를 유지, 보전하기 위한 악 惡 과의 투쟁, 공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자유, 이런 것들이 무료로 주어진 것인가? 우리 신앙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환경, 상황도 마찬가지다. 당장 김일성 세습왕조의 역사상 유례없는 잔학성과 현재 서서히 몰락하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며, 사필귀정 事必歸正 이란 말을 새삼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들, 절대로 공짜로 얻은 것이 아니다. Freedom is NOT free 인 것이다.

한 나라의 모든 것, 그들만의 문화, 삶의 방식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군대조직의 역할을 너무도 간과하며 살았던 것도 깊숙이 진행되는 나이의 혜택으로 하나 하나씩 그 의미를 깨닫게 되며 놀랄 정도로 후회도 한다. 전쟁에 관한 책이나 영화들, 그 모든 것의 배경에는 ‘정말로 잔인하게 희생된 살과 피가 실제로 있었다’는 간단한 사실들이 ‘재미에 의해서 간과’가 되고 있었다는 것… 이것이 오늘 내가 느끼는 역사의 관성적 慣性的 교훈이다.

 

¶  Double Whammy! 구역모임:  2018년 비공식적 여름철의 시작을 알리는 Memorial Day weekend 우리는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 조용히 단출한 식구들 오랜만에 모여서 barbecue 와 beer로 저녁 시간을 보내는 것이 연상되는 때이지만 올해는 완전히 storyline이 바뀌어 버렸다. 거의 10년 만에 우리 집에서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구역 마리에타 사랑반의 월례모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의 10년 이상.. 그러니까 그 동안 우리는 너무도 소극적인 구역활동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성당공동체가 덩치가 커지면 사실 구역의 역할을 그와 비례해서 중요해진다. 한 곳에서 모두 친교를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 동안 우리는 두 곳에 본당을2  가진, 사실상 ‘두 집 살림’을 이유로 소극적일 수 밖에 없었다.

 비록 꽤 오랫동안 비교적 소극적인 태도로 구역을 대했지만 나 자신으로써는 ‘내 신앙 reversion 의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외골수적인 생각으로 일부러 피한 것도 있었다. 경험적으로 보기에 즐겁지 않은 사람을 피하는 과정에서 많은 ‘냉담자’가 생기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한 것은 사실이지만 최소한의 관계를 위한 노력은 했다고 본다.

하지만 이런 방관적 작은 역사도 나의 큰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갑자기, 청천벽력의 느낌’으로 내가 이 작은 구역의 ‘장 長’이 되어야 하는 운명이 온 것이다. 자발적으로 이 자리를 맡는 어려움 때문인지 거의 ‘강제적, 임명하는 방식’으로 나에게 이 의무가 맡겨진 것이다. 이때 생각에, ‘결국 올 것이 왔구나’ 하는 느낌뿐이었고, 본능적으로 ‘도망가자’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번에는 ‘반사적 반응’이 아닌 진지한 묵상을 하게 되었다.

우선 현실적으로 ‘이제는 할 사람이 없다’라는 체념적인 것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이야 말로 다른 선택은 없는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도망가면 해결되는’ 경험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정말 도망가는 것 만은 피하고 싶었다.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편할 것도 아니고 도리도 아님을 절감을 하게 되었다.

이 ‘임명 소식’을 들었을 때 나도 얼마 전에 ‘완독 完讀’ 한 책,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의 저자 안득수 형제님이 생각났다. 그는 개인적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마다 그날의 ‘성경말씀’을 보곤 했는데 그것이 결정에 많은 도움을 준 것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 온 말씀 그 날의 제1독서는 ‘배반한 유다의 자리에 마티아 사도가 뽑힌‘ 것에 관한 것 (사도행전 1, 25-26) 이었다. 우연의 일치인가… 아니면.. 무엇인가? 나의 사정과 비슷한 것인가.. 

이러한 배경에 이번 달의 구역모임까지 우리 집에서 있었으니.. 무언가 double whammy 라고 할까.. 최선을 다하자 라는 motto로 오랜 동안 손님이 별로 없었던 우리 집, 덕분에 며칠 동안 ‘중노동’의 결과로 무사히 많지는 않지만 ‘손님들’을 맞을 수가 있었다. 맞기에 편한 정도의 사람들이 왔기에 ‘작은 우리 집’도 앞으로 ‘작은 모임’ 을 하기에 크게 불편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까지 생겼던 Memorial weekend.. ‘근육통이 만발하는 즐거운 고통과 기쁨’이 교차되는 순간들이었다.

 

  1. 외아들이 아닌 아버지가 사망한 집안의 외아들에게 주어지는 제한적 병역면제 규정.
  2. 집 근처의 미국본당 Holy Family Catholic Church와 20+ mile 떨어진 도라빌 Doraville 소재 한국본당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1960년 5월, 서울 비원에서..

 

어머님, 어머니, 엄니, 엄마~~~  어머니의 내음새가 하늘에 가득한 오월 하순을 지난다. 정확하게 15년 전 이즈음의 괴롭고 그리운 기억을 떠올린다. 2003년 5월 23일, 사랑하는 어머님이 하늘나라로 가신 날, 파란만장했던 84년 간의 이세상 삶을 마치셨던 날, 5월의 내음새를 기억한다.

아무리 오랜 세월 떨어져 살았어도 그 어머니의 존재를 일 초도 잊을 수는 없다. 가급적 불필요한 부담을 주위에 안 주시려는 안간힘,  함경도 또순이 원산출신의 인텔리 여성, 6.25라는 ‘사변’은 어떻게 한 여성의 인생의 행로를 그렇게 하루 아침에 바꾸어 놓았을까?

사모곡1, 어미를 그리는 노래.. 5월 23일은 그렇게 나의 어머니의 기일 忌日이 되었다. 2003년 5월 23일 외아들이 없는 쓸쓸한 임종을 맞으신 우리의 어머니였다. 어떻게 ‘상스러운 일’을 내가 초래했을까? 죽어도 나는 설명할 도리가 없다. 잊고 싶지만 절대로 잊을 자격이 없는 인생을 나는 살고 있다.

전쟁 미망인, 아비 없는 ‘후래 자식’, 편할 수도 있었던 삶과 올바른 삶의 선택을 하셨어야만 했던 그 시절들.. 본능적, 모성적 보호본능을 유감없이 받으며 자랐던 우리 남매의 어린 시절들, 냉혹한 사회의 많은 것들을 우리는 모르고 자랐던 것, 비록 생존경쟁의 의지력은 부족했어도 ‘조건 없는 사랑’은 당연한 것으로 배웠다.

삶과 죽음의 진정한 의미를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일깨워 준 어머님의 떠남은 나에게 한마디로 ‘인간 존재의 놀라움’을 다른 각도로 보게 해 준 대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그 뒤로 나를 조금은 더 영원한 의미를 갖는 것을 찾게 해 주고 결국 하느님의 존재를 다시 찾게 해준 계기가 되기도 했다. 생각한다.. 어머님은 떠나면서까지 나에게 이런 영원한 선물을 주셨구나.. 어미의 의미는 바로 ‘무조건적인 사랑’, 바로 그것이었다.

  1. 고유명사로는 고려가요의 하나

올해 5월은 조금 특이하다. 왜 ‘갑자기’ 1980년의 5월이 자꾸만 생각이 났을까? 이제까지 나에게 추억의 5월은 주로 꿈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어린 시절, 철없던 젊은 시절들의 그것이었다. 그때의 5월들은 언제나 나에게 아련하고 짜릿한 기쁨을 주는 그런 시절들이었다. 하지만 올해의 5월은 5월 18일의 그 ‘비극적 사건’ 으로 거의 고정이 되었다. 5.18 광주사태, 나의 기억에 남았던 단어, 광주사태였다. 나의 나이를 감안해서도 더 이상 외면, 미룰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머리를 모래 속에 파묻고 외면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 조금 더 알아보자.. 내가 외면하고 살았던 그것을 하나 하나씩 다시 뒤져보자.. 나의 눈에 1989년 5월호  천주교 잡지 ‘생활성서’가 눈에 들어왔다. 정치적인 시각이 아닌 신앙적, 교리적인 눈으로 본 광주는 과연 어떤 것인가? 최소한 그들은 양심적 진실을 말하고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그것을 ‘전재’하기로 하며, 내가 잊은 역사를 다시 들쳐내 보기로 한다. 첫 번째 기사가 당시 연세대 부총장 김찬국 교수의 ‘광주의거의 성서적 조명’, 여기에 전재를 한다.

 

 


 

5월이 오면, 우리의 분노와 미움과 원망을 승화시켜 하느님의 심판에 맡기고 그의 구원을 확신하는 신앙의 길을 따라 삶의 새로운 포용력을 키워 나가야 할 것이다.

김찬국

 

 

민족적 수치이자 비극인 광주학살

 

9년 전인 1980년 5월 18일 비상계엄령 전국확대조치에 항거한 광주 학생들의 평화적 시위가 도화선이 되어 피비린내 나는 광주시민 학살사건이 일어난 민족적 수치이자 비극인 당시를 기억할 때 우리 모두 무어라고 해야 할지 할 말을 잃고 만다.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으로 무죄한 학생과 시민들이 비참하게 죽어갔던 것이다. 실로 천인공노할 민족적 대참사였지만 한편 한국인의 민중항쟁역사에 뿌려진 거룩한 의거의 희생이었던 것이다.

이 광주의거로 인한 민족전체의 분노와 탄식의 소리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었지만 군사독재정치를 자행하던 집권자들은 폭동진압이란 명목으로 학살사건을 정당화했고, 시민들의 무죄한 희생에 대한 보상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광주시민들의 명예회복을 해주지 않고 지내온 지 9년이 된 것이다. 더욱이나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사건진상을 밝히는 국회청문회가 열렸었지만 비무장의 학생과 시민에게 발포하여 끔찍스런 사상자를 내게 한 군 작전 책임을 가리는 데 있어서 책임을 회피하고 은폐하고 있는 부끄러운 오늘의 역사의 현장에서 국민들은 또다시 분노와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광주에 5월이 오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묻습니다.

우리가 영원히 살 것을 갈망한다면

왜 우리는 죽는가?

정의를 위해 싸우다가 쓰러지는 자들의

죽음에 무슨 남는 게 있는가?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고 일어섰다가

권력자에게 살해당하고 만 자들,

이들 이름 없는 자들이 흘린 피에

누가 있어 과연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 빛고을출판사가 펴낸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1988)에 실린 ‘오월의 묵상’에서 인용

 

이런 기도는 한국인의 탄원시이다. 5월이 오면 김준태의 시 ‘아아,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여’란 탄원시로 한 맺힌 분노를 삭이면서 절망 속에서도 피어나는 새 희망과 새 힘을 키우는 다짐을 하게 된다.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 눈물을 흘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

아아, 광주여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무등산을 넘어

골고타 언덕을 넘어가는

아아, 온몸에 상처뿐인

죽음뿐인 하느님의 아들이여…”

 

구약성서의 시편에는 탄식시 또는 탄원시들이 많이 있다. 민족적 수난과 역경에서 하느님께 한을 풀면서 도와달라고 부르짖는 신앙의 시편들이다.

 

“야훼여! 언제까지 나를 잊으시렵니까?

영영 잊으시렵니까?

언제까지 나를 외면하시렵니까?

밤낮없이 쓰라린 이 마음, 이 아픔을,

언제까지 견뎌야 합니까?

언제까지 원수들의 우쭐대는 꼴을 봐야 합니까?”

– 시편 13편

 

원수로 인해서 박해와 피해를 입고 있는 탄식자의 한풀이 시다. 이 시인은 ‘언제까지’ 란 표현을 네 번이나 쓰면서 하느님의 구원을 호소하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신앙의 힘을 키워가고 있다. 이런 탄원시들은 개인작품이지만, 이스라엘인들에게는 민족의 탄원을 대변하면서 신앙의 힘을 키워나가는 기도문이 되고 있다.

오월 그날이 오면 우리 광주시민 뿐만 아니라 온 국민들이 다 이런 시로써 한을 풀면서 새로운 다짐을 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예언자들도 시적인 표현으로 자기들 당대 국민의 소리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대변하였다.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는 심판예언자였다. 권력형 구조악으로 피해를 입은 약자들의 인권을 대변할 때 분노를 터뜨리며 욕하는 저주의 말로 시작하였다.

 

“저주 받아라!

너희 공평을 뒤덮어 소태같이 쓰게 만들고 정의를 땅에 떨어뜨리는 자들아,

성문 앞에서 시비를 올바로 가리는 사람을 미워하고 바른 말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자들아 너희가 힘없는 자를 마구 짓밟으며 그들이 지은 곡식을 거둬 가는구나

– 아모 5,7-11

 

아모스는 하느님의 심판을 우선으로 하는 사회정의를 강조하였다. (아모 5,18-20).

 

폭군으로서 11년간 남쪽 유다를 통치한 여호야킴(609-598) 왕 때 하바꾹 이란 예언자가 등장하여

 

“야훼여,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이 소리

언제 들어 주시렵니까?

호소하는 이 억울한 일,

언제 풀어주시렵니까?

……

보이느니 약탈과 억압뿐이요,

터지느니 시비와 말다툼뿐입니다.

법은 땅에 떨어지고

정의는 끝내 무너졌습니다.

못된 자들이 착한 사람을 등쳐 먹는 세상,

정의가 짓밟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 하바 1,2-4

 

이런 탄원의 말로 당시 시대상을 대변하면서 “화를 입으리라”라는 저주의 심판선언을 하고 있다. (2,12-20).

 

 

최고 책임자까지도 마땅히 심판 받아야 한다

 

이스라엘 왕정역사에서 제일가는 폭군으로 유다 왕 므나쎄(687-642)가 있었다. 12살 때 왕위에 올라 예루살렘에서 45년간 다스렸는데 우상을 만들어 야훼 하느님께 불충성한 신앙적 배신과 폭력정치를 저질렀는데 후세 역사가인 신명기적 편집자는 므나
쎄 왕을 고발하고 “그가 저지른 죄는 유다 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2 열왕 21,17)고 적어 놓았다.

 

“그는 우상을 만들어 유다를 죄에 빠뜨렸다… 므나쎄는 나의 눈에 거슬리는 그 못할 짓을 하도록 이끌어 유다 백성을 죄에 빠뜨린 데다가 무죄한 사람의 피마저 흘려 예루살렘을 피바다로 만들었다.”

– 2 열왕 21,11-16

 

이 말을 예언자의 말이라고 하면서 쓴 글이지만 후대 역사비평가인 신명기적 편집자의 정확한 역사서술과 평가가 담겨져 있음을 본다. 므나쎄 왕의 폭력정치시대에는 백성들이 입을 다물어버렸기 때문에 반체제인사로서 저항한 예언자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솔로몬 왕도 실은 자기가 왕이 될 때에 찬성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왕이 된 다음에 피의 숙청을 하고 궁전과 성전을 짓는 데에 강제로 국민노동력을 동원하고 세금을 강제로 징수한 죄와 또 이방종교의 신을 예루살렘에 허용한 죄 때문에 후세사가에 의해서 고발이 되었었다. 솔로몬이 죽은 다음 나라가 남북으로 분열이 되어 (기원전 922) 남 유다의 왕으로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922-915)이 왕위에 올랐다. 르호보암은 원로정치인들의 충고를 듣지 않고 젊은 후견자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선왕께서 너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웠다. 그렇지만 나는 그보다 더 무거운 멍에를 메우리라. 선왕께서는 너희를 가죽채찍으로 치셨으나 나는 쇠채찍으로 다스리리라”(1 열왕 12,12-15)라고 했다는 것이다.

후세사가는 르호보암 왕이 끝내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12,15)고 지적하고 있다. 선조들보다도 더 큰 죄를 범하여 ‘야훼께 미움을 샀다’ (1열왕 14,22)고 평가되어 있다.

구약 역사에서 왕정정치가 시작되고 남북분열이 된 다음 북왕국 이스라엘에는 군사 쿠데타가 수없이 일어나 선왕을 죽이고 정권을 잡는 일이 일곱 차례나 있었다. 이런 혼돈이 200년이나 계속되다가 북 이스라엘은 강대국인 아시리아에게 멸망 당하고 말았다. 신명기사가는 왕들의 업적을 평가할 때마다 북 이스라엘의 최초의 왕인 여로보암 왕(922-901)이 저지른 종교죄 (우상신을 섬긴 죄)의 전철을 밟아 죄를 지었다고 명기하고 있다. 폭력정치죄나 우상종교를 허용한 죄는 역사적으로 두고두고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되어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한다는 역사적 교훈과 자료로 알려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남 유다의 여호야킴 왕 (기원전 609-598)과 예언자 예레미야와의 관계가 예레미야 서에 가끔 나온다. 즉 폭군과 대결한 예언자의 모습을 보게 된다. 예레미야는 성전설교에서 당시 사회상을 고발하였다.

 

“너희의 생활태도를 깨끗이 고쳐라. 너희 사이에 억울한 일이 없도록 하여라. 유랑인과 고아와 과부를 억누르지 말라. 이곳에서 죄 없는 사람을 죽여 피를 흘리지 말라…. 너희는 훔치고 죽이고 간음하고 위증하고 바알에게 분향하고 있다…. 이 땅 위에 나의 맹렬한 진노를 쏟으리라, 아무도 나의 타오르는 분노를 끄지 못하리라” (예레 7,.5-20).

 

하느님은 분노하시는 분으로서 여호야킴 왕의 폭력적 탄압정치와 우상숭배를 심판하신다는 점을 예언자 예레미야 가 대변하고 있다.

 

“그날이 오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야훼의 손에 죽은 시체들이 너저분하게 굴러 다니리라…. 백성의 목자, 민중의 우두머리들아, 너희가 도망쳐도 난을 피하지 못하리라…”

– 예레 25,33-38

 

혹독한 심판의 예언이다.

 

폭군인 여호야킴 이 새로운 강대국인 바빌론의 침략을 받아 굴복했었다가 3년 후에 바빌론에게 반기를 들자 다시 침략을 받아 유다 전국이 침략군에게 짓밟히고 말았다.(기원전 598). 신명기적 역사가는 이런 평가를 남겼다.

 

“이런 일이 유다에서 일어난 것은 므나쎄가 온갖 못할 짓을 하는 것을 보시고 야훼께서 유다 백성을 내쫓으시겠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이 이루어진 것일 따름이다. 그런데다가 그는 무죄한 피마저 흘려 예루살렘을 피바다로 만들었으므로 야훼께서는 용서하실 마음이 없으셨던 것이다”

– 2 열왕 24,3-4

 

우리가 이런 성서적인 조명으로 광주 민중항쟁을 보면 참으로 하느님은, 무죄한 사람들의 피를 흘려 도시를 피바다로 만든 폭력적 진압을 한 군관계 책임자 뿐만 아니라 이에 관련한 최고 책임자까지도 국민과 역사 앞에서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며 마땅히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보시는 것이다. 그 해 5월 광주에서 무참히 희생당한 사람들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대열에 나섰다가 총칼로 인한 폭력으로 생명을 잃거나 부상을 당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들 가족들의 한을 풀어주고 그들의 정당한 인권이 회복되어 역사에서 그들의 희생 정신이 바르게 평가를 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광주시민의 희생은 민주화운동의 길잡이

 

“광주에 5월이 찾아오면 들려오는 이 회피할 수 없는 질문에 대답해주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

새 생명의 눈부신 빛 줄기가 이제 세상 구석구석을 비춥니다.

우리는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의 동이 트는 첫 창조를 봅니다. 아멘”

– ‘5월의 묵상’ 중에서

 

 

인간의 비극은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비극자체는 비참한 종말이지만 비극을 극복하고 넘어서는 새로운 삶의 약동과 희망을 만들어 나가야 할 책임이 살아남은 우리 사람뿐만 아니라 온 겨레에게 지워져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를 따랐던 제자들이 예수께서 기득권을 가진 종교인들이 힘을 가진 로마 총독 빌라도를 업고 무죄한 예수를 잡아갔을 때 도피하거나 모른다고 했었고 십자가에 달렸을 때에도 멀리 피해 있었었다. 그러나 예수가 부활하신 다음에 흩어졌던 제자들이 예수의 수난과 부활의 의미를 새롭게 받아들여 예수의 교훈과 복음을 널리 펼치는 데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순교까지 하면서 예수의 삶과 그의 교훈을 따라 실천하는 데에 자신들의 삶을 투신했던 것이다.

김준태 시인은 ‘아아,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여’ 란 시를 이렇게 끝맺고 있다.

 

“광주여, 무등산이여

아아, 우리들의 영원한 깃발이여

꿈이여 십자가여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젊어져 가는 청춘의 도시여

지금 우리들은 확실히

굳게 뭉쳐있다 확실히

굳게 손잡고 일어선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자기 희생이며 그의 부활사건은 그의 삶만 아니라 그 자신인 진리의 부활과 희생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5월이 다시 오면 우리는 광주의 희생과 새로운 약동을 불러 일으키고 그 수난과 희생을 새롭게 의미화하여 한국 민주주의의 부활과 정의사회의 건설을 위한 기회로 키워나가야 하는 것이다.

구약의 시편 작가들도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는 신앙에 의한 삶의 길을 보여 주고 있다.

 

“악한 자가 잘 된다고 불평하지 말며 불의한 자가 잘 산다고 부러워 말아라. 풀처럼 삽시간에 그들은 시들고 푸성귀처럼 금방 스러지리니 야훼만 믿고 살아라.”

– 시편 37,1-2

 

“야훼께서는 정의를 사랑하시고 당신께 충성하는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신다. 그러나 악하게 사는 자는 영원히 멸망하며 악인들은 그 자손이 끊기리라.”

– 시편 37,27-28

 

 

탄원시들은 억울한 일들을 고발하면서 하느님께 분노를 터드리고 구원을 호소하고 마지막에는 하느님께 감사찬송을 드리는 내용으로 끝나고 있다. 시편 13편을 보면 원망하는 소리로 원수를 고발하다가 (1-2절), 다음에는 구원을 호소한다.

 

“야훼 나의 하느님

굽어 살피시고 대답해주소서.

죽음의 잠 자지 않도록

이 눈에 빛을 주소서.

……….

이 몸은 주의 사랑만을 믿사옵니다.

이 몸 건져주실 줄 믿고 기뻐합니다.

온갖 은혜 베푸셨으니

야훼께 찬미드리리이다”

– 시편 13,3-6

 

이런 하느님께 의지하는 신앙을 가지게 되면 우리의 기도를 하느님이 들어주셨음을 확신하고 끝에 가서는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감사찬송을 하게 된다. 미움과 원망에서부터 시작했다가 정의의 하느님의 심판과 구원을 믿고 신뢰할 때 그 원망이 희생으로 바뀌어져서 찬양으로 끝나는 그런 전환을 보게 된다.

5월이 오면, 우리의 분노와 미움과 원망을 승화시켜 하느님의 심판에 맡기고 그의 구원을 확신하는 신앙의 길을 따라 삶의 새로운 포용력을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광주에서 무참히 희생당한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들 가족들의 한을 풀어주고 그들의 정당한 인권이 회복되어 역사에 길이 남아 그들의 희생정신이 바르게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찬양 시편에서 우리가 배우는 바가 또 있다. 시편 33편을 요약해본다.

 

“의인들아 야훼께 감사하며 기뻐 뛰어라.

………….

옳은 사람들의 찬양이라야 기뻐 받으신다.

………….

야훼의 말씀은 언제나 옳은 말씀.

그 하시는 일 모두 다 진실이다.

………….

왕들아 너희가 대군을 거느렸다고 이길 성 싶으냐?

힘 좀 있다 해서 궁지에서 살아날 성싶으냐?

군마만 믿다가는 살아나기 어렵고 대군을 거느렸다 해서 사지에서 벗어나지는 못 하리라.

야훼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은, 그 사랑을 바라는 자들을 자켜보시며…………

우리가 이렇게 당신만을 기다리오니 야훼여, 한결같은 당신 사랑 베푸소서.”

 

여기에서 의인들이 하느님을 찬양하고 하느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힘을 키워나가야 함을 교훈하고 있다. 의인들이 자기교만에 빠져서 하느님의 역사의 심판과 구원을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하게 자기의 의견을 주장하고 남을 정죄만 하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오심’을 기다리게 하는 신앙을 키워주려 하고 있다. 하느님의 오심을 이 5월의 광주와 함께 생각해 볼 때 하느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기초로 하느님의 승리를 의심치 않고 믿고 기다리는 확신을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바빌론 군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기 직전인 위기상황 속에서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될 유다 나라의 최후를 앞에 두고서도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은 약속을 하여주었다.

 

“나 야훼가 선언한다. 나 비록 이 백성에게 이토록 큰 재앙을 내린다 마는 그만큼 약속한 행복도 모두 베풀 것이다…….. 이 땅에서 다시 밭을 사고 팔게 되리라……….. 이렇게 나는 이 백성의 운명을 회복시켜주리라. 이는 내 말이다. 어김이 없다.”

– 예레 32,42-44

 

 

멸망 후의 회복을 예언한 것이고 약속한 것이다. 예언자의 이런 꿈이 그냥 꿈으로서가 아니라 실현될 약속으로서 이스라엘의 회복과 해방과 재출발을 전망한 것이다.

1989년 5월이 다시 온다. 광주의 5월은 우리 온 국민이 겸허한 마음으로 희생의 피를 기억해야 한다. 군부 독재가 몰고 온 광주시민의 희생은 우리의 의로운 민주화로의 길을 바르게 보여주는 역사의식의 기초가 되고 민주화 운동의 길잡이가 되는 것이다. 광주의거를 이렇게 성서적으로 조명해볼 때 하느님께서 정의와 자비로써 희생당한 광주시민의 명예의 회복만 아니라 한국 국민 전체의 자유와 정의의 회복을 보여주시리라고 믿는다.

 

김찬국 씨는 연희대 신학대학과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유니온 신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연세대학교 부총장으로 있다.

5.16 군사혁명, 1961년 5월

 

박정희와 광주, 5월 16일과 5월 18일.. 이번 주 desktop 달력에서 유난히 나의 눈에 들어오는 이 숫자들을 보며 과연 나에게 이 숫자들은 어떤 것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간단히 결론부터 말하면, 현시점에서 5.16이란 것, 역사 교과서적인 의미가 거의 사라진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나의 개인 역사에서 5.16 ‘군사혁명’ 은 심각한 의미를 갖고 있는데 비해서 5.18이란 숫자는 미안하게도 ‘아직까지’  footnote정도로만 느껴지고 있다.

1960년 4.19 학생혁명에 뒤이어, 1961년 당시 중학교 2학년 생의 눈과 생각으로 보고 겪었던 5.16 군사혁명의 사건은 그런대로 생생히, 뇌리에 정확히 남아 있지만 그것에 대한 나의 생각, 평가는 반세기가 지난 이 시점까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진행형으로 남아있다. 학생시절과 비교적 유치한 청년시절에는 독재적, 군사적인 것들을 싫어했지만 그 이후 나이가 들면서 ‘무조건 싫어하는 것’을 서서히 싫어하게 되었다.

현 시점에서 분명한 것은 5.16은 달력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5.18은 ‘거창한 이름으로’ 보인다는 격세지감 隔世之感 뿐이다. 역사란 것이 ‘승자’의 기록이라면 분명히 5.16은 승자로부터 완전히 탈락하고,  패배한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 국사교과서를 보기 전에는 확신할 수 없지만 이런 나의 판단은 크게 틀린 것이 아닐까?

나는 솔직히 5.18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  나의 젊었던 신혼 시절 30대 초에 일어난 5.18 ‘광주사태’가 ‘민주항쟁’이란 말로 바뀐 것 조차 생소한 느낌이 들 정도로 잊고 살았던 것, 솔직히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광주사태가 일어났던 1980년 5월 18일 이전에 고국을 완전히 떠난 상태로 이 ‘비극적 사태’를 TV 뉴스로 접했던 것이 전부, 그것이 또한 내 변명의  전부다. 그 이후 오랜 세월 동안은 대한민국 정권이 바뀔 때마다 5.18이란 말이 간혹 뉴스로 등장하는 것 정도를 들었을 뿐, 세월은 강물처럼 흘렀다.

 1979년 10월 ‘대통령 유고 有故’ 이후 잠깐 맞았던 1980년 초 ‘서울의 봄’,  나는 그 해 1월에 서울에서 연숙과 결혼을 하고 곧 바로 먼저 미국으로 돌아와서 Ohio State University (Columbus, Ohio)에서 post graduate course 를 계속하고 있던 중,  ‘광주사태’ 뉴스를 듣게 되었다. 이곳 뉴스는 여과, 통제 없이 그대로 보도가 되어서 광주 시민이 죽는 ‘처참한 광경’을 모두 TV에서 보게 되었고 주위의 미국학생들도 ‘광주 광주’하면서 대한민국 정부의 ‘잔혹성’을  비난하는 comment를 하는 것도 들었다.

같은 과에서 친하게 지내던 육사출신 소령 유근호 형은 당시 다른 학생들로부터 군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무조건’ 비난을 받기도 했는데, 사실 그 형도 그 처참한 광경에 당황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역 소령의 입장으로 누구의 편도 들지 못했던 것, 나는 충분히 이해했고 심지어 가볍게 변호까지 하기도 했다. 사태의 ‘진상 眞像’을 자세히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편을 들 수는 없었지만 군사정권이 계속되는 것은 정말 싫었다.

억울하게 죽거나 다친 ‘학생, 시민들’의 목소리는 사실 그 동안 들을 기회가 없었고, 정권이 바뀌어 ‘공정한 신상 파악’을 하기 전까지는 그 ‘사건’은 그저 잊고 싶은 악몽이었다. 역사적 지역감정에 군사정권의 계속 존속은 사실 광주사태의 진상을 정확하게 밝히는 것, 희망적이 아니었고 세월이 흐르며 점차 잊고 살게 되었다.

문민정부의 등장, 특히 김대중, 노무현 등 급진 진보적 정권이 사건진상을 밝히며 역사를 바로 잡는 과정에서 민족여론의 화합 점 和合点 을 완전히 놓쳤고, 세월의 흐름으로 한때 군사정권을 혐오하던 세대들이 보수성향으로 진화를 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역적으로 갈린 데다가 세대적으로 완전히 분열이 된 것은 어떻게 보면 크게 이상할 것은 없다. 어느 나라나 그런 성향은 있기 때문이고, 서로 의견이 다른 것을 인정하면 된다.

오랫동안 나는 광주사태에 김일성 살인 집단이 개입되었다는 ‘뜬 소문’ 을 못 들은 척하며 살았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하는 나의 ‘안이하지만 이성적’ 인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인터넷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듯한 ‘과격파’들, 끊임없이 할 일없는 장,노년층을 가르친다. 세대별로 완전히 갈라진 듯한 국론, 의견, 사상.. 도대체 ‘온건, 중간’이 없다. 그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빨갱이, 주사파, 김일성 이 모든 것, 진절머리가 나도록 증오하지만 그것이 문제의 전부가 아닐진대.. 어찌 그렇게들 열을 올리는가? 조금 ‘높은 곳’에서 보는 눈과 생각은 어디로 갔는가? 이래서 5.16과 5.18 사이에서 나는 아직도 고민을 한다.

주로 1980년대 책들, 그것도 거의 ‘대한민국’에서 출판된 책들만 꽂혀있는 bookshelf 가 우리 집에 하나 있다. 거의 ‘고서’에 가깝게 된 이 책들은 분명히 우리 주위의 어딘가에 항상 있었겠지만 나의 관심과 눈을 끈 것은 그리 오래 전이 아니다.

이 책들을 살펴보면 우리가 살 만한 책들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누구에게서 ‘선물’로 받은 몇 백 권인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책을 받았을까? 추억을 더듬어 보니 1990년 전후로 우리가 아틀란타에서 처음 살았던 Norcross 에 있는 Four Seasons 아파트 이웃에서 살았던 ‘선경 지상사원’의 wife가 영구귀국을 하면서 우리에게 준 것이었다. 그 집 아이들 (경윤이와 동생)과 우리 집 아이들이 어울리고, 그 집 wife는 알고 보니 나의 재동국민학교 동창 후배였고, 나의 서울 중앙고 57회 동창 박우윤의 친 동생 임도 알게 되기도 했다.

한글로 쓰인 책을 거의 잊고 살았던 시절에 이렇게 무더기로 얻은 책들, 나는 거의 못 읽고 살았지만 요새 들어서 하나 둘 씩 눈에 뜨이고 어떤 책은 나의 ‘필사’ 원본이 되기도 했다. 완전히 잊고 살았던 1980년대 이후의 조국과 그 냄새가 훈훈히 풍기는 고국문화의 정수인 책들, 이제 남은 시간에 하나 둘 씩 읽는 것도 좋을 듯하다.

오늘 우연히 발견한 책, 천경자 화백의 수필집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 선명하고 강렬한 색깔의 그림들과 글들, 이제는 이런 ‘여자’의 글들 나도 익숙해 졌다. 그 중에서도 ‘5월’이란 제목의 글을 읽고 ‘나에게도 5월에 얽힌 romance 가 있었지..’ 하는 아련한 추억을 찾기도 했다.

 


 

5월 – 천경자

 

라일락이 향기를 잃어 버린 밤이다. 장미가 부풀었던 가슴을 헤치고 이제 요염한 자세를 일으키는지 화사한 날개로 숨소리를 덮는 듯 짓눌러 오는 밤, 내 심장의 고동이 어둠 속에서 이따금 날개를 터는 십자매(十姉妹)의 동작과 더불어 호수의 파동처럼 주름을 잡는다.

고요하고 화려한 환상도 무너지고 시든 라일락의 영혼마저 증발하는 것 같은 쓸쓸한 5월의 밤이다.

이렇듯 식물성(植物性)의 생명들이 시들어 가고 또 새로운 생명을 노래도 하고…

5월의 생리(生理)는 슬픔과 환희를 한꺼번에 쏟아 놓는다. 이 밤도 가고픈 옛날의 논두렁 길에선 개구리들이 녹색의 소리로 울어대고 있을 것인데 덧없는 인생이 취한 내 가슴엔 이슬 같은 것이 괴고 있다.

5월은 인생에서 어떤 피하지 못할 인과(因果)를 지어 주는 것 같다. 지열(地熱)에 익은 포플라가 상기한 풋냄새를 피우고 태양의 직사(直射)를 받아 떨어뜨린 선명한 그림자에 바람이 깃들면 5월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도 흔들리기 마련이다. 알지 못할 5월의 회화(會話)에 귀를 기울이고 풀지 못할 인과에 마음을 태워야 한다.

나는 5월이 오면 옛날의 추억을 더듬어야 했고, 내일을 위해서 화필(畵筆)을 들어야 했다.

5월을 불러 누구나 다 아름답다고 한다. 꽃들이 그 아름다운 자태를 견주는 것도 5월이요, 신록들이 바람에 하늘거리는 것도 5월이고 보면 5월의 자연은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들은 여인들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 그리고 눈물도 얼마나 괴이게 했는지 모른다.

옛날 젊은 시절 어느 5월에 나는 여인네들끼리 가족적으로 들놀이를 가는데 권함을 받아 바람을 쐬러 따라간 일이 있었다. 지금 같으면 소풍을 갔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무렵 나는 인생의 시련 같은 것을 단단히 믿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떤 인연의 줄기가 나의 운명 앞으로 뻗어왔다는 것도 알 수가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나는 사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인네들 가운데는 인텔리 오뎅집 마담 형제 일행과 인생면에서 나와 비슷한 환경의 직업 여성인 Y양도 나처럼 ‘옵서버’ 격으로 얼굴을 내놓고 있었다.

나무 위로 무척이나 왕개미 떼가 올라가는 송림(松林)의 구릉(丘陵)이 목적지었던가 그들과 나는 거기에 올라가서 잡초가 무성한 어느 무덤 위에 앉았었다.

화제는 어느덧 막연한 사랑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나중엔 두 여인이 서로 제각기 자기가 사모한다는 것보다 상대의 이성(異性)이 자기를 사모하여 늘 전화가 걸려온다는 등 아베크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는 등의 이야기에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야기라기보다 자기 자랑을 하는 것으로 그들의 표정은 해당화처럼 활짝 피어 있는 것이었다. 여인들이 이야기에 꽃을 피우고 있던 상대방 주인공은 아마도 동일한 남성인 것 같았고 Y양의 것이 농도가 더 짙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뒤로 구릉을 내려와 논두렁에서 와글거리는 개구리를 수십 마리 잡아서 손수건에 싸 들었다.

그 후 그 개구리들은 나의 화재로서 희생이 되었지만 나는 지금도 그 여인네들의 대화가 잊혀지지 않고, 그때의 감정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 얘기의 주인공은 나의 애인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개구리에 대해서 나의 슬픔을 호소(呼訴)하고 싶지는 아니했지만 개구리들의 녹색의 울음 소리가 나의 심경을 한결 더 구슬프게 울려 주었다. 나는 어쩐지 5월이 오면 개구리의 울음 소리와 함께 마음이 설렌다.

그러나 나는 이 밤에 시든 라일락의 향기를 슬퍼만 할 수는 없다.

내일 아침이면 화사하게 피어났을 장미의 붉은 정열과 견주기 위해서 이 밤이 있게 해야 하는 것이다.

Mother’s Day 2018

¶  Mother’s Day 2018:  미국에서 유래된 오랜 전통의 Mother’s Day, 생명이 약동하는 포근한 5월의 둘째 일요일. 그 옛날에는 나의 조국 대한민국에도 ‘어머니 날’이 분명히 있었다. 그것이 어린이날에서 사흘이 지난 5월 8일이었다. 고국을 떠날 때까지 분명히 있었고 어머니 날의 선물을 나의 어머니께 드렸던 마지막 기억도 있다. 그것이 그 후에 없어졌고 ‘아버지가 꼽사리1 낀, 어버이 날’이라는 거북한 날로 만들어 버렸다. 아직도 나는 이것은 honest mistake라고 믿고 있다.

그렇게 바꾸어버린 ‘이유’는 분명히 있었을 것은 알지만 아직도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는 분명히 다른 존재인데…’ 라는 아쉬움을 버릴 수가 없다. 그런 이유로 나는 미국의 전통적 Mother’s Day와 더불어 따로 6월의 3째 일요일에 Father’s Day를 만든 것 ‘이곳 사람들’의 생각을 좋아한다. Motherhood와 Fatherhood를 구별하는 것은 타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의 연장선에 나는 ‘고유한 의미의 가정’을 ‘지나치게’ 걱정한다. 말도 그럴듯한 LGBT 인간2들이 혹시라도 Mother와 Father라는 말도 없애자고 $$$을 억수로 써서 유명한 lawyer라도 매수하는 것은 아닐까… 와~ 2018년에 생각하는 Mother의 의미는 정말 해괴하게 복잡하기만 하다.

어머니 날은 미국 West Virginia에서 출발했다. 남북전쟁에서 봉사자로 일을 했던 자신의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서 Anna Jarvis가 제안하고 기념을 하기 시작했고 1914년에 미국의 ‘공식 기념일’로 Wilson대통령이 선포를 하고 매년 5월 둘째 일요일을 Mother’s Day로 제정한 것이다.  Anna Jarvis가 밝힌 이유는 간단하게 ‘a mother is the person who has done more for you than anyone in the world‘ 였다. 단순하지만 설득력이 있는 이유였다.

그녀가 밝힌 이름은 Mother’s Day였고 결코 Mothers’ Day가 아닌데 이유는 ‘자기 자신의 어머니’를 기리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오늘 같은 날, 나를 낳아준 어머니를 기리는 것이 타당한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 아이들의 엄마를 생각하기 전에 나의 어머니가 우선적이라는 것.. 조금 까칠한 논리로 들릴지는 모르지만 ‘나를 낳아준 어머니’, 그녀 존재의 이유를 먼저 생각하는 것은 100% 옳다고 본다.

오늘은 공교롭게도 5월 13일, Mother’s Day 일요일인데다 우리의 천상의 어머니 Virgin Mother (성모 마리아)가 1917년 포르투갈 파티마 (Fatima, Portugal) 에서 3명의 ‘아이들’에게 발현한 날이기도 해서 더욱 Universal Motherhood의 의미가 돋보인다. 오늘은 거의 의도적으로 동네성당 Holy Family Catholic Church엘 갔는데, 결과적으로 성모님에게는 조금 송구스럽게 되었다. 레지오 꾸리아 월례회의가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있는 날이라 원래는 그곳엘 갔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유례없는 파격적인 결정에 우리가 무리 없이 공감한 이유는, 그 월례회의에서 ‘성모님의 사랑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것‘ 을 미리 느낄 수 있었고, 오늘 Mother’s Day의 기분을 깨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우리들의 평화가 하수구로 빠져나갈 것 같은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의무는 의무, 불참은 불참, ‘총사령관’ 성모님께 죄송한 마음은 금할 수 없다.

오늘은 작년과 같이 ‘아이들’이 와서 엄마를 데리고 나가 외식을 하고 들어왔다. 오늘 그들이 갔던 식당의 분위기는 안 보아도 그림이 그려진다. 모두들 일년 간 ‘불효’ 했던 것을 만회라도 하듯 경쟁적으로 자식들이 엄마를 ‘끌고’ 나왔을 듯 하다. 그렇게 해서 잠시나마 나만의 안식일을 맞이했던 오늘, 잠깐이나마 나의 하늘에 계신 어머니를 생각할 수 있었다. 효자건 불효자건 상관없이 돌아가신 어머님을 생각하면 후회 안 할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지난 날에 비해서 조금 밝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언젠가, 아니 곧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다. 아니 희망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굳게 믿는 사실이 되었다. 올해 어머니 날에 다시 확인하고 싶은 ‘진리’는 바로 이것이다.

 

  1. 그 당시의 유행어로 슬그머니 모임에 끼어드는 얌체 같은 느낌의 말
  2. 이들은 인간본성을 포기한 subhuman이라고 나는 믿는다.

¶  First Taste of Summer:  사나흘 전부터 갑자기 치솟은 기온으로 오늘은 올해 들어서 처음으로 a/c (air conditioner)의 잔잔한 소음을 듣는 날이 되었다. 5월의 ‘어느 날’에 이런 잔잔한 소리를 처음으로 듣게 되는가,  매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데 평균적으로 Mother’s Day의 전후가 됨이 흥미롭다. 이것은 그러니까 이곳 아틀란타 Atlanta지역 기후의 특성일 것이다.

오늘은 올 들어 처음으로 90도가 넘는 날이 되었다. 아마 섭씨로 31~32도 정도가 되지 않을까? 물론 이것은 평균기온을 ‘훨씬’ 넘는 것이다. 이때쯤의 평균 최고기온은 80도(섭씨 24도) 를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더워도 진짜 한 여름의 느낌과는 조금 다른 것인데 그 이유는 습도가 그렇게 높지 않고 해가 지면서 기온은 비교적 빠르게 내려가기 때문이다. 이런 5월 초의 의식 儀式 May Ritual을 치르면서 다가올 3~4개월간의 여름과 그 이후 낙엽이 쌓일 가을의 이곳 Saybrook Court의 주변과 우리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도 재미있지 않은가?

 

¶  A/C Checkups 2018: 내가 제일 싫어하는 job중에 하나가 우리 집의 ‘고물, 고철’, 여름의 필수품인 에어컨의 condition을 checkup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것이 과연 켜질까..’ 하는 것이다. 이 a/c system을 하나의 기계로써 만지는 것은 나에게는 재미있는 소일 거리가 될 수도 있지만 문제는 만약에 내가 못 고치는 사태가 발생하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아마도 ‘고치는’ 것 보다는 ‘바꾸는’ 것이 현명하기에 $$$이 억수로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완전히 ‘죽기’ 전에는 그냥 쓰기로 했지만 만약에 그 때가 오면 새것으로 바꾸게 될 것인데 물론 $$$은 들지만 energy-efficient한 요새의 system은 사실 장점이 많이 있음도 안다. 내가 손을 볼 수 있는 것은 현재 다한 것 같기에 이제는 ‘심판’만 기다리고 있다. 현재의 상태는 cautiously optimistic한 것인데 곧 그 결과는 알게 될 것이다.

 

PreSummer ritual

 

¶  남자가 만드는 라면:  많은 사람들이 동감하는 것 중에 ‘라면은 남자가 더 맛있게 만든다’, 라는 말이다. 나도 물론 동감이다. 왜 그런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남자들이 배 고프면 만들 수 있는 것이 바로 이것 밖에 없기에 결사적으로 노력을 해서 만든다는 것이 나의 해석이지만 자신은 없다. 여자들은 요리를 원래부터 자신이 있기에 라면 같은 것은 관심이 없고 노력도 안 하는 것은 아닐지.

나는 다른 라면은 모르지만 ‘너구리 라면‘은 확실하게 내가 더 맛있게 끓인다. 이것은 연숙도 인정하는 것이고, 그녀가 끓인 너구리 라면은 사실 내 것과 확연히 다르다. 이것과 더불어 얼마 전에 Youtube 에서 ‘너구리 라면’에 대한 video를 본 적이 있는데, 역시 왜 그 라면이 그 오랜 세월 동안 변함없는 맛으로 인기를 끌었는지 이해를 하게 되었다. 그 회사의  많은 연구, 노력의 결과였음은 말할 나위 없었다.

이 너구리 라면을 끓일 때 내가 신경을 쓰는 것 중에는: 물의 양과 온도, 그리고 불을 끈 후에 얼마 후에 먹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에서 맛의 차이가 나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연숙이 외식하러 나갔기에 오랜만에 너구리 라면을 끓였는데 이번에는 spam, mushroom을 잔뜩 넣고 끓여보았다. 그러니까 ‘spammed & mushroomed Neoguri ramen’ 인데 배가 고파서 그랬는지 기가 막히게 맛이 있었다.

 

 

¶  HP Elite 8000:  며칠 전에 order했던 hp desktop pc, 2012년 vintage Elite 8000 가 오늘 집에 배달이 되었다. 현재 내가 수집하고 쓰고 있는  hp desktop pc가 3대나 있는데 하나를 추가한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직접 조립한 pc를 쓰다가 근래에 들어서 이렇게 ‘old’ business model desktop pc를 사들이는 것, 이제는 하나의 취미로 변하고 있는데,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서 웬 이런 괴상한 수집을 하는지 나도 나에게 묻고 있다.

거의 모든 personal computing 이 smartphone으로 옮아가고 있지만 그것이 desktop pc를 대체할 수는 없다.  특히 많은 시간을 ‘편안하고 널찍한’ desk 에서 보내고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 조립해서 쓰던 나 자신 brand의 desktop pc에 제동이 걸린 것은 Microsoft 의 ‘activation tax’ 때문에 시작이 되었다. Windows XP 시대에는 그런 것이 없어서 ‘마음대로’ copy 해서 쓰는 진정한 자유를 만끽했지만 Windows Vista가 나오면서 그것을 사야 되는 한마디로 unthinkable 한 사태가 발생, 과연 이것을 돈을 주고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 고민하게 되었다.

물론 ‘free & openLinux 를 쓰면 되겠지만 그것과 Windows 는 너무나 다르기에 문제가 있다. 우선 ‘걸리는 것’이 Linux 에는 Microsoft OfficeAdobe Photoshop같은 것에 문제가 있기에, 바람직한 것은 두 system을  다 쓰면 좋은 것이다. 내가 죽을 때까지 고수하는 것 중에는: Blood-sucking Apple system은 절대로 안 쓰는 것, Microsoft Windows같은 Operating system software절대로 ‘안 사는 것’ 이 있다. Apple system (Mac, Iphone같은 것들)을 안 사는 것은 나의 경제력으로는 그림의 떡이니 문제가 없는데, Windows 가 문제였다. 이것은 실제로 매일 매일 써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해결책이 우연히 생겼다. Windows software copy를 안 사고 아예 Windows PC를 사면 되다는 아주 간단한 방법.. 왜 이런 생각이 그 동안 안 들었을까? 그러면 어떤 pc box를 살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이것이다. 5~8년 정도 지난 ‘business class, refurbished or used hp pc’ 가 바로 정답이었다. 그 정도 pc 의 horsepower 면 현재 우리의 computing need를 완전히 만족시키고도 남는다. 물론 hard disk나 RAM 같은 것은 내가 junk box를 뒤져서 upgrade하면 된다. 100% genuine, legal Windows 7 or 10 system이 있으니 거의 모든 desktop software를 문제없이 쓸 수가 있다. 이것이 바로 정답중의 정답이었다.

 

Piece of Paper, Peace in our time!

 

얼마 전에 문재인과 김정은이 판문점에서 만나서 ‘정상 회담’을 한 기사를 Wikipedia의 ‘In the news’ 에서 잠깐 보았다. 요새는 main news outlets을 모두 닫고 살기에 이곳이 나에게는 유일한 news 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 News란 것이 정말 장난이 아닌 것이 오래 전의 ‘검증, 확인’ 된 것보다는 엉터리 기사들이 판을 치고 있고, 그것 일일이 내가 확인할 길도 없고 시간도 없다. 결론적으로 최선의 방법 증에는 ‘모두 안 보고 사는 것’ 도 있고 그렇게 살다 보니, 나의 정신건강에도 그렇게 도움이 됨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우연히’ 나에게 들어온 뉴스는 나름대로 판단하고 생각을 정리하는데, 이 ‘문재인, 김정은’의 회담소식을 보고 생각난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이 blog의 title인 Chamberlain 이란 이름이다.  여기서 Chamberlain 은 2차대전 발발 당시 (1937~1940) 영국의 수상 Prime Minister Neville Chamberlain을 말한다. 이 영국수상의 이름과 얘기는 1960년대 내가 중학교 때 나의 가정교사였던 김용기 형으로부터 들었다.

1960년대 초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순진하게’,  냉전 적국이었던 소련과 공산주의를 대하는 정책을 이 영국수상의 ‘독일 히틀러 회유정책’에 비유하며 비꼬는 얘기였다. 1930년대가 저물어가며 1차 대전의 폐허에서 다시 군사강국으로 등장한 나치 독일의 히틀러를 ‘달래가며’ 유럽의 평화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이 바로 이 영국수상이었다.

문제는 이 운 없는 영국수상이 히틀러의 음모에 완전히 농락을 당했다는 사실이다. 당시의 뉴스를 보면 거의 drama 같은 얘기를 상상할 수 있다. 전쟁준비를 완전히 끝낸 히틀러, 이 ‘평화를 원하는 영국수상’에게 ‘종이조각’을 건네 주고 돌려 보냈다. ‘전쟁할 마음이 없음’ 이라는 요지의 의미 없는 ‘각서’ 정도가 될까.. 이 순진한 수상께서 그 종이를 들고 영국에 도착한 공항에서 ‘평화주의자’들에 둘러싸여  그 종이조각을 흔들며 개선 하는 사진, 역사중의 역사가 되었다.

그로부터 1년도 안 되어 히틀러는 유럽 전체를 전쟁으로 몰아 넣었고 이 운 없는 수상을 이어 Churchill 수상이 ‘힘과 용기’로 전쟁을 치르고 결과적으로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로 역사는 간단하게, ChamberlainChurchill 의 아주 다른 정책을 평하지만 사실 자세히 알고 보면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님도 알게 된다.

문재인과 김정은의 ‘협상’, 이것도 협상일까? 히틀러보다 더 거짓으로 범죄국가를 경영하던 역사상 유례없는 ‘반 인류 범죄자’와 협상을 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거기서 ‘합의’가 된 결과의 ‘종이조각’은 어떠한 무게가 있는 것일까? 1940년과 2018년은 확연한 차이가 있겠지만 역사의 관성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문재인 가톨릭 형제여, N. Chamberlain보다는 W. Churchill이 되십시오.

 

 

¶ 성모성월:  성모성월이요 제일 좋은 시절, 사랑하올 어머니.. 이렇게 시작하는 가톨릭 냄새가 듬뿍 담긴 성가, ‘성모성월의 노래’가 은은히 귀에 들려온다.  그렇다.  지금은 5월의 시작이고, 성모성월이 된 것이다. 그것도 6일이나 지난 오늘 일요일(a.k.a., 주일)은 이 노래 가사 중의 ‘화창한 날에..’ 를 100% 닮은 그런 날이었다. 어쩌면 오늘의 날씨가 이렇게도 화창하고 멋있는 것일까?

5월은 가정적인 달, 옛날 옛적 어린이날부터 시작해서 어머니 날까지 있는 포근한 달이었다. 그런데다가 우리 가톨릭에서는 다른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달이기도 하니, 어찌 포근한 느낌이 들지 않을 수가 있으랴. 나의 사랑하는 어머님의 기일도 5월에 있고, 가톨릭 전례력에서는 부활시기의 절정에 도달하는 그것도 5월에 있어서 한마디로 ‘살 맛’이 다시 돋아나는 때를 맞았다.

오늘은 원래 Holy Family ‘동네’성당 주일미사에 가려고 예정을 했지만, ‘불행히도’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을 갈 수 밖에 없었다. 우리가 속한 레지오 ‘자비의 모후’가 그곳의 ‘주차정리’를 맡았기 때문이었다. 레지오에서 정 情 이 무척이나 떠나버린 이마당에, ‘그런 것’ 무시하고 싶은 유혹이 강하게 발동했지만, ‘총사령관’ 성모님의 얼굴이 다시 떠오르며 유혹을 물리치고 주어진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였다.

이런 이유로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아침 8시 30분 주일미사엘 가게 되었는데, 나로써는 너무나 참신하고 깨끗한 느낌으로 미사를 보고 나서 점심식사까지 했다. 남대문시장처럼 복잡한 10시반 미사에 비해서 사람이 훨씬 적었던 것과 평소에 잘 안보이던 반가운 얼굴들도 보인 것들도 좋았지만, 그보다도 더 좋았던 것은:  ‘보기만 해도 하루 종일 소화가 안 되는, 정말로  싫은 인간들’ 그 중에서도 레지오 미친년의 ‘가오’가 안 보이니 이건 한마디로 천국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너무나 기분이 좋아서 앞으로 이 8시 30분 미사로 바꿀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지만, 이것은 여러가지 이유로 우리에게는 한마디로 ‘백일몽’에 가까운 희망이었다.

 

Big Wedding: 어제 토요일은 장례미사가 아닌 혼인미사엘 갔다. 레지오 활동으로 장례식에 너무나 익숙해진 우리들, 이런 결혼식은 그야말로 생소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결혼과 결혼식에 거의 관심이 없는 두 딸들이 있는 우리들이어서 가끔 이것을 잊고 살고는 있지만, 언젠가는 우리들도 ‘겪어야 할’ 큰 일이라는 사실은 우리들의 잠재의식 속에는 항상 있어왔다.

어제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혼인미사, 나는 조금은 복잡한 심정으로 끝까지 지켜 보았다. 현재의 ‘해괴한 추세’를 정면으로 맞서려는 듯한 한마디로 ‘거대한 행사’였다. 그 큰 대성전이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성황을 이룬 것, 나의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성당 청년부 활동에서 만난 이 행복한 couple들, 부러운 만남으로 보였다. 부모님들이 그런 환경과 분위기를 만들었기에 그런 결과가 나왔으리라 생각하니, 우리는 어떠했는가 하는 자괴감에서 벗어 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 ‘혼인성사’는 부모님들의 정성과 사랑이 결집된 결과라고 나는 보았다.

신부측 가족이 우리 구역의 중요 멤버였기에 참석을 한 것이지만 신랑측은 그보다 더 잘 알려진 현직 사목회장이어서 더욱 관심을 가지고 혼인 미사와 피로연까지 모두 참여를 하였는데, 피로연에서 보니 성당 공동체의 ‘알만한 사람’들의 얼굴은 거의 다 그곳에 모인 듯 했다. 미국식의 ‘조그마한 뒤뜰’에서 하는 결혼식에 익숙한 탓에 이런 ‘초대형 결혼식’은 아마도 당분간 인상적으로 머리에 남아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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