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ony's Friends

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예수회 창시자 성 이냐시오

예수회, S.J.  성 로욜라의 이냐시오,  S.J…. Society of Jesus. 우리에게 비교적 친근한 느낌을 주는 이 ‘가톨릭’ 단체는 과연 무엇을 지향하는가? 이것이야 말로 우문현답 愚問賢答 을 연상하게 하는 질문이지만 실제로 어떤 때는 나도 확실하지 않다. ‘예수회’니까 물론 절대적, 궁극적인 목표는 ‘역사적, 현존’ 예수님일 것이지만 과연 그것을 지향하는 신학적인 철학, 방법은 무엇인가? Wikipedia같은 곳을 보면 ‘공식적인 사실’들이 수 없이 많이 열거되어 있고, 모두 사실적, 객관적, 역사적인 것들이라 왈가왈부를 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내가, 우리가’ 머리로, 가슴으로, 피부로’ 받는 그 느낌은 어떤 것인가?  이것은 어쩔 수 없이 내가 직접 가까이에서 보고 듣는 ‘객체’들에 의해서 좌우 될 것이다. 그 객체는 어떤 것이며 누구인가? 가장 확실한 것은 바로 ‘예수회 사제, 신부, 수도자, 학교’ 같은 것이 아닌가?  내가 학교 같은 단체는 접할 기회는 없지만 사제들은 바로 앞에서 경험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이 나에게는 예수회의 전부인 것이다.

나의 두 본당 중 영어권 본당의 사제는 오래 전에 결혼을 한 ‘동방교회’ 출신으로 로마교회로 온 신부로 그야말로 ‘교구신부’다. 예수회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하지만 모국어 ‘도라빌’ 본당의 사제는 언제부터인가 교구사제에서 예수회 사제로 바뀌어서 이제는 예수회란 말이 빠지는 것이 이상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니 우리는 정말 가까운 곳에서 ‘예수회’를 느끼며 사는 것이다.

우리들, 평신도들에게 이런 것이 무슨 큰 차이가 있을까?  멀리서 보면 큰 차이는 없겠지만 잘 생각해보면 분명히 차이를 느낀다. 예수회 사제, 특히 본당신부는 전통적으로 ‘교구 사목’이 그들의 특기는 아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큰 차이가 없이 느껴지니까 별 문제는 없다. 오히려 영성적인 측면으로 보면 더 이점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특히 이냐시오의 영성을 사목에 주안점으로 삼으면 평신도들은 독특한 혜택을 받지 않을까.  그래서 교구 사목상에도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문제가 있다면 다른 곳에 있는 듯하다. 나는 절대적으로 신학전문가가 아니기에 섣불리 단언은 못하지만 내가 접하는 ‘미디어’ (fake가 아닌 전통적 미디어)를 통한 예수회, 그것도 특히 미국(북미주) 예수회는 더욱 그렇다. 이것이야말로 ‘야당과 여당’을 이루는 정치구도와 흡사한가. 한마디로 예수회는 미국의 liberal, democratic, progressive한 것이라면 거의 틀림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것은 미국만의 현상은 아닐 듯하다. 모국도 아마 마찬가지가 아닐까?

미국의 가톨릭 매체들을 살펴보면 이 ‘양극화’가 뚜렷하다. 특히 ‘또라이’ 트럼프가 들어오며 이 현상은 숨길 수가 없는 듯하다.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이 ‘예수회 프란치스코교황’의 ‘자비’ 선포로 인한 ‘전통 교리의 후퇴’를 우려하는 ‘극단적인 비난’인데, 양쪽의 주장을 들어보면 모두가 일리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아무리 교리, 교의 해도 세상과 세속의 ‘진화’는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 아마도 예수회의 주장일 듯하다.

쉽게 말해서 ‘자비와 정의, 원칙’의 대결인 셈인데, 이들 신앙인들에게는 ‘중도’라는 ‘타협’은 없는 것인가?  제일 심각한 것이 Homosexual 들을 ‘자비’로 받아들이자는 문제다.  또한 Abortion(낙태)에 대한 자세도 그 중에 하나다. 이것도 타협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인가?

그 중에서도 가장 신경을 건드리는 것은 다름이 아닌 대한민국만이 가질 수 있는 ‘사상논쟁’을 빼놓을 수 없다. 예수회 신부들은 여론적으로 보아도 ‘진보적’임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빨갱이’라는 평을 쉽게 받는다. ‘정구사’라는 독특한 약어의 느낌도 다를 것 없이 ‘빨갱이’라고 매도된다. 이것도 타협점이 없는 것일까? 한마디로 주위를 살펴보면 ‘또라이 트럼프’처럼 서로 잇빨을 드러내며 으르렁 거리기만 했지 절대로 대화할 생각이 없는 듯하다.

나의 생각은 어떤가? 아무래도 나이 탓, 나의 가족적 역사로 보아서 예수회 같이 무조건 자비는 말하고 싶지 않다. 이유 있고, 정의가 밑받침이 되는 자비와 사랑.. 물론 이것은 쉽지 않은 것이지만 이것 말고는 방법은 없는 것 아닐까?

올들어 처음 피어나는 수선화 꽃망울

 

¶  돌아온 수선화여, 주일 전부터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모습, 올해 처음으로 피기 시작한 수선화,  일주일 동안 거의 매일 아침미사 15분 drive하는 동안 우리는 오늘은 어떤 모습의 봄 소식을 찾을 수 있나 차창밖에 온통 신경을 쓴다. 이것은 우리 같은 ‘젊은 노인’ 부부에게는 논쟁의 여지를 줄 수 없는 거의 완벽한 대화 소재가 아닌가 생각한다.

꽃 망울이 겨우 눈을 뜨기 시작한 수선화가 작년에 하늘로 간 Tobey1의 무덤 주위에서 그 녀석의 영혼을 감싸듯이 정렬을 하고 있음을 매일 본다.  추위를 견디는 수선화의 안쓰러운 모습과 나의 손에 머리를 안겨 마지막 숨을 쉬던 그 녀석의 얼굴이 겹치며 나를 순간적으로 우울하게 한다. 역시 봄과는 거리가 있는 싸늘함은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올해의 겨울과 봄의 사이는 유난스럽게 이상한 것이, 겨울이 정말 춥지를 않았다. 영하로 내려갔던 날이 며칠이나 될까? 덕분에 에너지는 많이 절약했겠지만 이런 상태로는 올 겨울 ‘눈 구경’은 물 건너 가고 있다.  대신 장마철을 연상하게 하는 ‘싸늘한 비’의 연속을 겪고 있다. 아마도 봄을 준비하는 초목들은 땅 속에서 잔치를 벌리고 있을 듯 하다.

 

기다리던 눈 대신 싸늘하게 내리는 줄기찬 비

 

거의 ‘악몽’ 처럼 느껴졌던 작년 후반기 6개월의, ‘구역’에 대한 기억, 이제는 그런 것들을 뒤로하고  2019년의 봄은 우리에게 조금 더 다른 의미를 주는 기회를 주기를 진정으로 바라고 있다. 청순한 수선화여, 피어있는 동안 우리에게 모든 괴로웠던 기억들을 말끔히 씻어 가게 해주길..

 

¶  수선화의 성모님:  모처럼, 나와 우리의 ‘등대’, ‘자비의 모후’  주회합 성모님 제대의 주위가 ‘꽉 찬듯한 느낌’을 주었다. 지난 몇 개월간 생존의 위기를 거듭했던 ‘자비의 모후’,  몇 주 전에는 결국  ‘파산선고’ 까지 우려했지만 역시 성모님의 도움이신가.. 최소한의 간부구성이 갑자기 이루어졌다.

 

수선화의 성모님, ‘자비의 모후’를 도와주소서,,

 

게다가 신단원 모집에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예비신자 자매님이 부활 세례직후에 입단이 거의 확실하게 되는 듯하니, 어찌 수선화의 축복을 받는 성모님이 더욱 더 아름답게 보이지 않겠는가? 지나치게 큰 기대는 안 하지만, ‘독물 毒物 이 전부 빠져나간 듯한 ‘ 우리 ‘자비의 모후’가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새 모습으로 탈바꿈하는 것, 올 봄에 기대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다.

 

  1. 작년 6월에 14살 천수를 다하고 떠난 나의 ‘영혼의 벗’ 개 Dachshund 의 이름

2년 전 아래층으로 ‘이사’를 내려온 나의 office에 있는 bookshelf 에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책들을 섞는 중에 눈에 띈 책이 있었다. 오래 전에 읽다 말다 하다가 놓은 책, 동아일보사 간행, <인촌 김성수’> 란 책이었다.  김성수, 동아일보사 모두 나와는 자연스레 친근한 이름들이다.

1960년대 나의 모교였던 서울 중앙학교(중-고등)를 ‘인수, 경영’했던 ‘만석군 부호의 아들’이었던 인촌 김성수, 귀공자 답지 않게  Bill Gates같이 ‘돈을 현명하게 쓸 줄’  알았고, 당시로서는 선지자적인 삶을 살았다. 특히 말년에 정치계에서는 ‘이승만의 독재’를 정말 싫어했고, 아마도 그로 인해 화병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오늘 읽은 부분에서 희미한 기억을 되살리는 것, 계동 1번지에 중앙학교가 위치한 사연을 읽게 되었다.  1960년 중앙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코흘리개 우리들에게 학교는 ‘민족학교의 역사’를 정식으로 가르쳤었다. 무언가 민족적 사립학교의 전통을 남기려는 것을 우리들도 숙연하게 받아들였던 기억이 남는다.

 

 

책,  “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 중에서

 

중앙학교 교장 재직 당시의 인촌 김성수

 

새 요람, 계동 1번지 중앙학교

 

 

조선의 새 인맥(人脈)

새로운 교사가 들어설 땅을 백방으로 물색하던 인촌 仁村 은 1917년 6월, 계동 1번지인 지금의 중앙중고등학교 자리를 터로 정하고 4천 3백 평을 사들였다. 당시 이곳은 북악산 줄기를 뒤로 한 계곡으로 울창한 송림만 들어찬 산골짜기였다.  민가도 없었고, 다만 학교 터 뒤편 숲 속에 당시 육군연성학교(陸軍硏成學校; 훈련소) 교장이었던 노백린(盧伯麟; 후에 上海 臨政 軍務總長 역임)  참령(參領)의 집이 있을 뿐이었다. 인촌이 이 땅을 사들이려 하자  고하 古下 (송진우) 는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숯막 짓고 참숯 구워 팔려나? 이런 깊은 산골짜기에 학교를 지어 어떡하겠다는 거여?”

“어째 그렇게 자넨 발등만 보고 사는가?. 자, 보라고! 앞으로는 서울 장안이 한 눈에 굽어 보이고 뒤에는 북악의 줄기가 아닌가! 그 정기를 받아 청년의 이상을 꽃피우기 위한 배움의 터로서는 이만한 명당이 없네. 얼마나 시원한가, 젊은이들이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울 만 허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먼? 이 보게, 큰 길에서 너무나 들어온 골짜기야, 학생들 통학도 생각해야지?”

“지금은 좀 불편하겠지만 앞으로 십 년만 지나보게. 서울은 지금 새 시대를 맞이하여 커지고 있어. 모르기는 해도 십 년 뒤면 학교 주변이 주택들로 차게 될걸?”

멀리 앞을 내다보는 인촌의 안목은 정확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과연 십 년이 채 안되어 개발이 되고 주택이 들어서기 시작했던 것이다. 훗날 고하는 인촌의 선견지명에 혀를 찼다고 한다. 땅을 사들이자 즉시 새 교사를 짓기 위해 터를 닦기 시작했다. 인촌은 공사장에 나가 감독 뿐만 아니라 일꾼들과 함께 흙을 고르며 땀을 흘렸다. 교장이 솔선수범하니 고하를 비롯한 교사들까지 수업이 끝나면 함께 땀을 흘렸다. 스승들이 일을 하자 학생들도 부지런히 삽질을 하고 돌을 나르며 일을 도왔다.

그 보람이 있어 나무만 울창하던 산골짜기에 건평 2백여 평의 붉은 2층 건물이 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서울 장안(長安)의 이목이 쏠리고 김성수라는 이름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붉은 벽돌 2층의 이런 신식 건물은 그때까지만 해도 장안에서는 볼 수 없는 멋진 신식 교사인 데다가 그것을 짓고 있는 인물이 같은 동포인 김성수라는데 화제가 됐던 것이다.

뒷날 동아일보 사옥을 신축할 때나 보성전문 교사를 신축할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인촌은 틈만 나면 공사장에 나가 일꾼과 함께 살았다. 자재에서부터 설계, 혹은 대목(大木) 등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게 없었다.   건축을 공부해서가 아니고 공사장에 가서 몇 번만 보면 다 터득하여 현장 감리(監理)들이나 목수들의 탄복했다고 한다.

어쨌든 장안의 화제였던 계동의 중앙학교 신교사는 5개월만에 그 웅자를 드러내게 되었다. 그 해 11월에 준공을 끝내고 12월 1일에  화동(花洞) 구교사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계동 1번지에 세워진 중앙학교 새 교사 낙성식, 1917년

 

폐교 직전의 중앙학교를 인촌이 인수하자 비상한 관심을 가진 것은 당시의 조선인 사회 뿐이 아니었다. 총독부 관리들이 주시하고 있었다. 돈 있으면 금광이나 하라며 백산학교(白山學校) 설립계획을 까뭉개고 돌려보낸 학무국장 <세끼야> (關屋)는 조선인의 실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던 터라 무명청년 김성수가 말썽 많고 경영난으로 쓰러져 가던 중앙학교를 인수했지만 결과는 뻔한 것으로 추측했다.  시골 부자 아들이라니 돈이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지만 깨진 독에 물 붓기로 얼마 안 가서 재산 다 날리고 주저 앉으리라고 보았다. 그러나 결과는 전연 예상 밖이었다. 붉은 2층 벽돌의 신식 교사가 모습을 드러냈을 뿐 아니라 80여명 정도였던 학생이 이제는 3백여 명으로 불어나고 교사들 역시 대학을 나온 조선인들이 거의 전부 일 만큼 탄탄하게 성장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11월 하순, 어느 날 <세끼야>는 비서가 전해준 초청장을 받아 들고 얼굴이 이지러졌다.

“뭐라구? 중앙학교 신교사 낙성식? 그 낙성식에 오라구? 으음”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게 무시했던 무명청년은 새 교사를 당당하게 지어 놓고 그 잔치마당에 자신을 초청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인촌을 김군(金君)이라고 불렀고, 심지어 학교설립을 신청했을 때는 부모의 승낙을 얻었느냐며 어린애 취급을 하고 얕보던 <세끼야>도 낙성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원파공과 지산공을 상석에 모시고 낙성식은 성대하게 열렸다. 조선인의 힘으로 만들어진 학교였기 때문에 장안의 시민들도 구름처럼 모였다. 학무국장 <세끼야>는 금줄이 번쩍이는 제복에 긴 칼을 늘어뜨리고 식장에 나타나 지금까지의 태도를 바꿔 <긴센세이> (김선생)라 존대하며 몇 번이나 장한 일을 했다고 치켜 세우고, 조선인의 힘으로 이렇게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있게 된 것은 일시동인(一視同仁)하시는 천황폐하의 홍은(鴻恩) 때문이라며 판에 박은 공치사를 하고 돌아갔다. 그로부터 총독부 관리들이 인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조선의 젊은 민족지도자로 지목하고 경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촌은 어진 성품과 큰 도량을 지녔기 때문이었는지 젊어서부터 그의 주위에는 수많은 인재들이 모여 떠날 줄을 몰랐다.

인덕(인덕)을 타고남도 하늘의 도움이다. 인촌은 늘 인덕이 있었다. 당시 그의 주위에도 제제다사(濟濟多士), 많은 인재들이 그를 돕고 있었다.  중앙학교와 인연이 깊었던 최규동, 이중화, 이광종, 이규영, 권덕규 등 대가 이외에도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송진우, 최두선, 현상윤, 이강현 등과 국내에서 명성이 높던 변영태, 유경상, 유태노, 조철호, 고희동, 나원정, 박해돈 등 신진기예들이 차례로 교편을 잡게 된 것이다. 총독부로 볼 때 인촌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학교의 인맥과 존재는 조선 사회에서 무시 못할 민족 지도자 그룹으로 비치게 되었다.

 

 

무명 교복과 교지(敎旨)

‘웅원(雄遠), 용견(勇堅), 성신(誠信)’ 의 3대 교훈은 인촌 스스로 정한 것이며 인촌 스스로 정성스럽게 써서 남긴 진적(眞迹)이다.

 

아직도 기억하는 세 가지 중앙의 정신: 웅원, 용견, 성신

 

이 중앙학교의 교지는 인촌의 교육이념을 집약하는 동시에 그의 가치관을 나타낸 것이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70여 년 동안 1자의 수정도 없이 지켜지고 있는 것을 보면 인촌의 교육관은 백년대계의 큰 안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앙학교를 인수한 후 인촌은 특히 학생들의 옷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 하찮은 걸 뭘 그렇게 골똘하게 생각하시오? 다른 학교와 학숙의 학생들처럼 그냥 입히면 되는 거지?”

보다 못한 안재홍이 그렇게 말하자 인촌은 고개를 흔드는 것이었다.

“결코 하찮은 문제가 아니오, 학교 모자와 학교 옷은 바로 그 학교의 얼굴이며 상징입니다. 관립 일반학교마냥 일제(日製) 광목으로 된 옷을 입히고 그들의 씌운 모자를 그대로 씌울 수는 없는 일이요. 조선학생은 조선학생 티가 나야지요.”

고심하던 인촌은 검은 천을 댄 교모(校帽)에 무명으로 지은 교복을 입히기로 했다.  일부에서는 질 좋고 맵시 나는 일제 광목을 두고 왜 하필이면 손으로 짠 그 투박한 무명베로 교복을 하느냐며 못 마땅해 했다. 광목(廣木)은 개화 이후 일본 상인들이 들고 들어와 가장 재미를 본 생필품이었고 널리 판을 치고 있었다.

“값 싸고 질긴 우리 전래의 무명베가 있는데 왜 비싼 일제 광목을 쓴단 말이오? 우리가 우리 것을 쓰지 않으면 누가 쓴단 말이오?”

인촌은 국산품을 애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일찍부터 ‘산업장려’나 ‘국산품 애용’을 구국운동의 하나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하찮은 교복에까지 신경을 쓴 것은 바로 자기학교 학생들 한테 만이라도 그러한 민족의 얼을 심어주겠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참성단(塹星壇) 수학여행

 

당시 인촌 밑에서 중앙학교를 거쳐 나온 인사들의 회고만 보더라도 인촌이 평소 얼마만큼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민족사상을 불어 넣었는지를 알 수 있다.

 

 

유홍 柳鸿  회고

나는 1916년 그러니까 인촌 선생께서 학교를 인수하신 그 다음 해에 중앙학교에 입학했다. 입학한 후 첫 소풍을 강화도로 갔었는데 그때의 일은 오래도록 나에게 어떤 충격처럼 남아 있었다. 전교생이 함께 갔었던 것 같다.

유근 교장 선생님을 비롯한 선생님들 중에는 물론 인촌 선생님도 포함되어 있었다.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에 올라갔다. 교장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이 단군 성터에서 단군설화를 얘기하면서 목이 메었으며, 인촌 선생님께서도 소리 없이 눈물을 짓고 있었다. 학생들도 그제서야 나룻배까지 빌어 타고 강화도에 소풍을 온 까닭을 깨닫고는 모두 함께 울었다. 그때 교장 선생님 바로 옆에서 단정한 자세로 눈물 지그시 감은 채 눈물을 흘리시던 인촌 선생님의 모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신도성 愼道晟 회고

중학교 입학 당시(1930년) 나는 제일고보(第一高普)와 중앙학교 두 군데 시험을 쳤는데 두 군데 다 합격을 하게 되었다. 그때의 상식은 당연히 제일고보로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학교를 가느냐의 선택에 있어 어리고 철이 없으므로 선친께 의논을 드렸더니 중앙학교를 택하라 하셨다. 경남 거창에서는 우리 집이 대지주에 속했으므로 인촌의 경방, 동아일보 설립할 때 주식투자 권유를 받아 우리 선친과 인촌은 교분이 있었다. 투자는 안 하신 것 같지만 마음 속으로 인촌을 퍽 존경하셨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중앙학교를 들어 가게 되었다. 그런데 학교를 들어가 보니까 역시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특한 민족주의적인 분위기가 살아 있었고, 김성수 선생께서 교장을 하시며 수업에 들어 오시기도 했다. 그것도 좋았지만 조철호, 박용희 선생 등으로부터 훈련을 단단히 받았던 것도 인상적이었다. 권덕규(역사), 문일평(한국사; 동양사), 이윤제(한글) 선생 등 좋은 선생님들이 많았다. 일제하에서 배우기 힘든 보통의 교양교육을 다 배웠다. 학교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 인촌 선생은 수신시간에 교재를 뒤로 제쳐놓고 자신의 얘기를 많이 해 주셨는데 은근히 민족정신을 불어 넣어주곤 했다. 예를 들면 영국에 가서 하숙을 하는데 한국에서 하던 버릇대로 화장실을 갔다 오면서 불을 안 끄고 나왔더니 주인이 잔소리를 하더라. 전력을 낭비하지 않고 물자를 절약하며 잘 살면서도 검약하더라. 우리는 전등불도 안 끄고 잠을 자고 그러는데 그래서는 안 되다고 충고를 하시기도 했다. 한번은 외국을 가시는데 여권에 적어야 하는 국적이 남의 나라 이름으로 되어 나라 없는 백성의 서러움을 실감했었다. 배 안에서 식사를 할 때 식탁에 승객들의 국기를 꽂는데 그 국기 가운데 태극기가 없었다는 울분을 얘기하셨다.

 

3.1운동의 실제적 모의 장소: 중앙학교 숙직실

 

그리고 3.1운동 때의 말씀도 하셨는데 중앙학교에서 모의하던 얘기를 하셨다. “3.1운동이 파고다 공원에서 일어난 줄만 알고 있지? 사실은 중앙학교에서 시작된 거야. 계획도 세우고 유인물도 만들고 그랬는데 바로 그거 한 집이 바로 저 집이야!” 하고 우리학교 숙직실을 가리켜 주셨다. 중앙학교가 민족주의 본거지임을 일깨워 주셨고 우리는 자부심을 상당히 가지고 있었다. 그때 받은 느낌이 그 후에도 남아서 일제 말기에 학생의 몸으로 항일투쟁은 못 했지만 은근히 ‘일제에 협력해서는 안 된다’ , ‘지원병이니 학병이니 그런데 끌려가서는 절대 안 된다’ 는 것은 확고했다. 해방될 때가지 일제가 강요하던 국민복은 한번도 입지 않았고 ‘전투모’와 ‘각반’도 한 번도 매보지 않았는데, 그것은 인촌 선생의 교육 영향이었다.

 

 

김승태 金昇泰 회고

그때 중앙학교는 마치 기사(기사)를 양성하는 도장(도장)과 같은 분위기였다. 또한 그 학교는 3.1운동의 발상지가 되었고, 6.10만세 사건의 중추적 역할도 담당했다. 이것이 모두가 선생께서 웅원(雄遠)한 포부와 용견(勇堅)한 의지, 성실(誠實)한 행동을 가르치신 정신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래서 마치 학교는 도장과 같았고, 배우는 우리는 기사와 같은 흥분 속에서 지냈다. 예를 들면 동지섣달 눈이 쌓였어도 팬츠 하나만 입고 운동장을 달리게 했다. 그것은 독립정신을 갖게 하기 위한 단면이었으며, 정신과 육체의 극기(극기) 훈련이기도 했다.

 

 

채문식 蔡汶植 회고

나의 인생은 중앙학교 5년 동안 교육을 받을 때 인촌의 정신, 인촌의 손길에 의해서 키워졌고 해방 후 지금까지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된다. 일제시대 문경(聞慶)의 산골에서 태어나 중앙고보에서 공부하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1930년대 말 일제는 국어상용 이라 하여 학교에서는 일본 말만 쓰게 했다. 중앙학교에서 가까운 어떤 학교가 있었는데 그 학교에서 한국인 교사가 학생 하나를 정학 시켰다. 그래서 부모가 찾아 왔는데 그 아버지는 일본 말을 모르는 시골 노인이었다. 한국인 담임선생은 우리말을 쓰지 않기 위해 통역을 하게 했다. 그런데 그 학생이 처벌을 받게 된 것은 점심으로 빵을 하나씩 나눠 주었는데 ‘아, 빵이다!’ 하고 외쳤는데 그 말이 한국말이라 해서 정학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오직 한 곳, 중앙고보만은 일본어를 쓰지 않았다. 그 시절에 일본어를 쓰지 않고 공부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대게 중앙학교 선생은 1년은 학교에 계시고 1년은 감옥에 가 계시는 게 보통이었다. 중앙학교에 입학하면서 매를 많이 맞았다. 입학 첫 날부터 영어시간에는 회초리 하나씩을 집에서 준비해 가지고 오라는데 집에 갈 때는 그게 다 꺾여질 지경이었다. 출석을 부르는데 선생님은 우리 말로 ‘채문식!’ 하고 부른다. 그때 국민학교에서는 일본어만 배웠으므로 부지불식간에 ‘하이!’ 하고 대답한다. 그러면 무조건 앞으로 나오라 해서는 회초리로 때렸는데 왜 맞는지 몰랐다. 선생님이 매를 들고 또 ‘채문식!’ 하면 ‘하이!’ 하게 되고 ‘하이!’ 하면 도 맞는 것이었다.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았다. 자기가 가져간 회초리가 다 부러질 때 쯤 되면 뭔가 가슴에 뿌듯한 게 있어서 ‘예’ 하고 우리말로 대답하게 되는 것이었다. 인촌 선생이 아니면 못할 것이었다. 인촌을 보고 더러 총을 들고 독립운동도 안 했고, 외국에 가서 항일운동도 안 하지 않았느냐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시대의 한국 땅에서 인촌이 아니고 누가 그같이 민족의식이 맥박 치는 그런 학교를 경영했던가를 생각한다면 그런 말은 못할 것이다. 선생은 완전한 한국 사람이었고 그 같은 한국 사람을 기르려고 무척도 애를 썼다. 그 회초리를 맞아 가면서 1학년에서 5학년이 될 때는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이 뭔가 쯤은 깨닫게 되었으니 참으로 위대한 애국자라 아니할 수 없다.

 

 

퇴교생(退校生)이 모이는 곳

 

 인촌은 제자들에게 민족혼을 심는데 심혈을 기울였을 뿐 아니라 그것을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 일인교사(일인교사)의 배척운동이나 저항운동을 하기 위해 스트라익을 벌이다가 퇴학을 당한 학생들에게 항상 중앙학교는 문을 열고 너그럽게 받아 들였던 것이다. 당시 인촌이 중앙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 보성학교와 경신학교에서 일인교사 배척운동이 일어난 일이 있었다. 인촌은 이때 처벌 받은 학생들을 모두 받아 들였다.

 

서항석 徐恒錫 회고

나는 1918년에 중앙학교를 졸업했는데 따지고 보면 1년도 못 다니고 졸업한 셈이다. 나는 보성학교를 다니다가 퇴학을 당하여 중앙학교로 편입학하게 됐던 것이다. 인촌 선생의 항일적이며 애국적인 용단을 잊을 수가 없다. 보성학교 2학년에서 문제가 생겼다. 초조시간이 되어 모두 웃옷을 벗고 나가게 되었다. 물론 교실에는 당번이 지키게 돼 있었다. 그런데 벗어 두었던 옷 속에서 시계가 없어졌던 것이다. 담임선생이 여러 방법으로 시계를 찾았지만 나오지 않았다. 마침 보성학교에는 <고마쯔자끼>라고 하는 일본인 교사가 있었는데 그 일본선생이 종로 경찰서에 연락을 했다. 그래서 형사가 와가지고는 학생들을 죄인 다루듯 했다. 우리는 4학년으로 최고 학년이었는데 이 같은 사태에 크게 분개했다. 학교에서 도난사고가 생겼다면 선생들이 자기네 잘못을 느끼고 쉬쉬하며 잡을 일이지 그것을 경찰을 불러 몸수색을 했으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분개하여 일어섰던 것이다. 2, 3, 4학년의 전 학생이 들고 일어났다. 교장은 최린 선생이었는데 전교가 벌집 쑤셔 놓은 것처럼 소란해 졌다. 더 이상 사태가 키질 것 같아 2, 3 학년들을 누르고 우리 4학년 학생 8명이 모든 책임을 지기로 하고 교장선생께 자퇴서를 냈다. 교장선생은 제발 이러지 말라달라고 하셨지만 우리의 기세는 당당했다. 학교측에서는 퇴학을 명함 이라 내붙이게 되었다. 최린 선생은 안 되겠던지 인촌 선생에게 전화를 거셨다.

“요새 우리학교 사건 생긴거 하시지요? 정말 진퇴유곡입니다. 총독부에서 퇴학을 시키라 하니 그럴 수 밖에 없어 퇴학을 시켰소만 정말 우수한 애들인데 버리자니 가슴이 아프오. 앞길이 구만 리 같은 젊은 애들의 장래를 막아 놓을 수는 없지 않소?”

“좋습니다. 그럴 수는 없지요. 싹을 자를 수는 없습니다. 퇴교생 전원을 저희 학교로 보내 주십시오. 소생이 맡아 가르치겠습니다.”

그래서 중앙학교로 가게 된 것이다. 바로 이것이 후에 생각하니 인촌 선생의 애국자로서의 일면을 보여 준 것이라 생각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총독부의 학무국장 세끼야 는 화가 나서 인촌을 소환했다.

“김선생, 이번 일은 좀 경솔했던 거 아니오? 여러 말 하고 싶지 않소. 불온 학생 여덟 명은 받아 들이지 말구 당장 내쫓으시오!”

“무슨 말씀인지 알겠소만 가령 일본인 학교에서 그런 일이 생겼다고 하면 경찰이 학교 구내에 들어가사 학생들을 죄인 다루듯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스승을 배척했다면 당연히 교칙에 따라 퇴학을 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학생은 그것으로 벌은 충분히 받은 거 아닙니까? 배우는 학생에게 퇴학 이상의 중벌은 없으니까요. 그런데 벌을 받은 학생이 다른 학교에 가는 것까지 총독부가 나서서 못하게 한다면 그것은 교육적 견지에서 하는 처벌이 아니라 어떤 민족적 견지에서 하는 보복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인촌의 말을 들은 세끼야 는 말문이 막혔다. 지금까지 자기 앞에 와서 그렇게 당당하게 자기 할 소리를 하는 조선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비록 총독부 관리라 하지만 그 역시 이런 사리를 모른다 할 수는 없었다.

“김선생의 체면을 봐서 이번 일은 불문에 붙이지만 앞으로 그런 일이 있을 때는 우리 학무국 과 상의해서 처리하시오.”

그것은 은근한 협박이기도 했다. 총독 정치하에 있어서 그들의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있어 사학(私學)의 문을 닫게 하는 것쯤은 간단했다. 인촌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민족교육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 뻔해 보이지만 트집을 잡으려 해도 구실을 주지 않는 인촌이야 말로 다루기 어려운 상대였다. 친일인사(親日人士)로 만들려고 유혹도 해 보고 구실을 붙여 위협도 해 보았지만 언제나 그는 정정당당했다. 그러한 편입학 사건은 그것으로 끝나게 아니고 또 있었다.

 

 

정문기 鄭文基 회고

고향인 전남 순천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인성학교에 들어갔다. 그 학교를 나와 서울로 올라왔다. 경신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공부를 하게 되었다. 경신학교는 미국 선교사였던 언더우드 가 세운 기독교계 학교였다. 4학년에 진급하자 학교에서 스트라익이 일어났다. 나는 주동 학생으로 몰려 퇴학을 당했고 중앙학교로 가게 되었다. 그 전부터 사실은 인촌선생 밑에서 공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경신학교에서 처벌을 받고 쫓겨난 학생은 1, 2, 3, 4 학년 합쳐서 수십 명에 이르렀다. 중앙학교에서는 그들을 모두 받아 주었던 것이다. 이젠 끝장이구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인촌 선생이 용단을 내려 받아 주시니 우리들의 사기는 충천할 뿐이었다. 당시 경신학교 교장은 미국인 선교사였는데 화가 났던지 전화로 인촌 선생께 따졌다고 한다.

“이거 보시오, 김성수 선생! 선생께서 그렇게 분별 없으신 교장이신 줄 몰랐습니다.”

“무슨 말씀이오?”

“같은 교육자끼리 그럴 수 있습니까? 우리 학교에서 처벌한 학생들입니다. 잘못해서 처벌한 학생들이라 그겁니다. 그런데 그 학생들을 중앙학교에서 그냥 받아주면 우린 뭐가 되지요? 학생들에게 반성의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본의 아니게 심려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처벌된 학생 전원을 저희 학교로 오라고 한 일 없습니다. 학생들 스스로 찾아와서 저희 학교에서 공부하게 해 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물론 잘못 해서 벌을 받은 것이니 반성을 하고 다시 돌아가 공부하라고 엄하게 꾸짖었소만 돌아가지를 않습니다.  그 중에서 1, 2, 3학년 학생들은 나의 설득대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학생들이 있었으나 4학년들은 누구도 못 돌아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4학년들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어찌 하시겠습니까?”

“다른 방법으로 가르쳐 사람을 만들어 볼 테니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인촌 선생은 결국 4학년 학생만 중앙학교에 남게 하고 그 이하 하급생들은 모두 돌아가게 하셨다. 나는 공부는 좀 소홀히 한 편이지만 야구나 축구 등 스포츠를 좋아했다. 동급생 중 일석(일석: 이희승)은 모범적인 노력가였고 보성학교에서 퇴학을 당해 중앙학교로 온 서항석은 머리가 우수하고 작문을 잘 했다. 둘이서 늘 1, 2등을 다투었다. 인촌 선생은 은근히 경쟁심을 고취했는데 학생들을 친자식처럼 대하셨다.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든다시며 늘 체력단련을 권하셨다. 일본인과 겨루려면 머리도 우수해야지만 몸도 건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스포츠를 좋아했기 때문에 선생님은 건강을 겸했다고 늘 사랑해 주셨다. 한번은 계동 신교사로 이사한 지 얼마 안 되어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는 걸 들었다.

“공부를 한다는 것도 경쟁이니 두각을 내려는 것은 인지본능이며 두각을 쉽게 내는 방법을 알켜 줄까? 남들이 모두 몰리는 유행학과를 전공허지 말아야 돼. 진리탐구를 하는 학문은 어떤 학문이든 똑 같은 벱이여. 지금의 유행 학과가 후엔 무실해지고 지금 유행하지 않는 학과가 인기를 얻을 지 모르는 일이거든? 학문에는 우열이 없느니께 남이 않는 것을 해보라 이말이여”

나는 그 말씀을 명심하고 일본 유학을 가서 <송산고>(松山高)를 졸업하고는 곧바로 동경제대 수산과에 시험을 치뤄 합격을 했다. 그때 수산과를 택한 것은 인촌 선생의 영향이었다. 그때는 문과를 해야 대학생인 줄 알았지 수산학을 한다는 것은 좀 엉뚱한 것이었다.

 

 

韓紙 한지에 싸 준 인절미

중앙학교 교장 당시의 인촌이 우리 민족정신과 기상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는지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증명해 준다. 일제는 한반도 강점 후 구정(舊正)인 <설>을 쇠지 못하게 하고 저희들의 명절인 신정(新正)설을 쇠게 했다. 이른바 <양력설> <일본설>을 쇠게 한 것이다.

해마다 정월 초하루가 되면 총독부에서는 신년 하례식을 하고 천황의 하사품이라 하여 일본 왕실의 문장(紋章)인 국화꽃 무늬가 든 이른바 ‘모찌’ (흰 찹쌀떡)를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곤 했다. 아직 소년들이라 그 떡 받아 먹는 것을 모두 좋아했다.

그러나 중앙학교만은 그와 같은 ‘모찌’를 주지 않고 해마다 신년 초하루가 되면 콩가루 고물 묻힌 인절미를 주는 것이었다. 그것도 인촌 댁에서 직접 떡을 하여 그것을 한지(한지)에 싸서 나눠주는 것이었다. 조선학생이 정월 초하룻날부터 나라 잃은 것만도 서러운 데 일본 떡을, 더구나 일본 왕실의 문장이 찍힌 ‘모찌’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치욕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철 없는 학생들은 집에서 먹어보지 않은 그 일본 떡이 먹고 싶어 불평하는 측이 있었지만 인촌은 씁쓸하게 웃기만 하는 것이었다.

“명절이면 집에서 먹는 그 흔한 인절미, 잔치 때면 흔하게 먹는 인절미라고 그러는 지는 모르겄다만 너희들도 학교를 나가 앞으로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내가 왜 우리 한지에 인절미를 싸서 주는지 그 뜻을 알게 될 날이 있을 것이다.”

연중 시기에서 사순 시기로 가는 길목에서

 

Ordinary Time, 올해 연중시기도 벌써 6주째를 맞는 오늘로서  Extraordinary season, Lent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도 반달 정도 남았다. 싸늘한 비가 간간히 뿌리는 평화로운 일요일 오전..  이런 ‘평화로운 일요일 아침’을 맞아 본 것이 얼마만인가 생각한다.  오늘이 더욱 새로운 것은 우리 마음의 고향처럼 느껴지는 ‘동네본당, Holy Family Catholic Church‘에서 둘이 미사를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렇게 오래 된 것도 아닌데 느낌에는 몇 년이라도 흐른 것 같다. 그 정도로 나는 이런 때를 무의식 중에 기다리고 살았던 모양이다.

나는 미사 후에 곧바로 집으로 가서 편하게 late morning coffee의 향기를 즐길 수 있지만 연숙은 다시 곧바로 ‘도라빌 본당’으로 가서 새로 시작되는 견진 교리반 director 일로 땀을 흘려야 한다. 미국본당에 가는 날의 일요일 일정은 이렇게 조금 복잡한 편이다.

두 본당을 가진 우리의 신앙생활은 조금 지혜로운 생각이 필요하다. 언제 도라빌 한국본당을 가며, 언제 동네 미국본당을 가느냐.. 이것을 결정하는 것, 몇 가지 이유는 분명하지만 아주 분명하지 않을 때는 더욱 심사숙고를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사실 어디를 가나 ‘성체성사’를 하는 것이기에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우리의 신잉생활에 도움을 ‘더’ 줄 수 있는 쪽을 택하는 것이다.

영어권과 모국어 권, 언어 차이를 떠나서 문화권의 다름은 이제 오랜 이곳의 생활에서 익숙하게 아는 것이지만, 그래도 항상 새롭기만 하다. 아마도 이곳에서 죽는다고 해도 그때까지 이 ‘피할 수 없는 문화의 차이’는 계속 새삼스럽게 느낄 것이다. 문제는 이 두 색다른  교회공동체를 통한 신앙생활이 우리의 개인적, 가족적 영성생활에 어떻게 도움을 줄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한때 깊숙이 관여했던 도라빌 ‘모국어 본당’에서 서서히 우리 둘은 물러나고 있다. 의도적인 면도 없지 않고,  피하고 싶은 ‘사람들’과 계속 어울리는 것, 장기적으로 ‘영육간의 건강’에 전혀 도움이 될 수가 없다는 ‘경험적 진리’에 우리는 의견을 모았다.  특히 지난 주일에 ‘견진교리반’ 시간에 일어났던 또 다른 ‘trumpian, kafkaesque incident’ 1  해괴한 사건은 연숙으로 하여금 ‘완전히, 깨끗하게’ 교리반 director 임무를 떠나게 하는 마지막 ‘관 coffin 의 못 nail’ 역할을 했다.

연숙도 나와 발을 맞추어 하나, 둘 짐들을 거의 계획적으로 놓기 시작했는데, 제일 큰 것은 ’15년 간의 주보 편집’이 그것이고 지난 몇 년간의 ‘예비신자 교리반 director’가 그것으로,  그녀에게는 거의 ‘은퇴’와 같은 중대한 결정이 되었다.  이제부터는 남는 시간, 여유를 어떻게 더 ‘지혜롭게, 생산적으로’ 쓸 까 하는 것인데 그것을 나는 절대 걱정 안 한다. 벌써 앞으로 ‘신나게’ 할 것들의 ‘줄을 서’ 있기 때문이다.

 

  1.   견진교리반에 들어온 한 ‘젊은’ 여자의 상식을 벗어나는 무례함으로 깊은 상처를 받았던 사건, 도대체 요새 젊은 아이들은 어떻게 가정교육을 받았고, 그런 ‘애’가 ‘견진’을 받는다는 사실의 모순은.. 

지난 달 말에  ‘프카’ 자매님1 과 카톡 대화를 하던 중에 아틀란타 ‘도라빌’ 순교자 성당 내  ‘영적독서클럽’에 대한 소식을 물었는데 반응이 아주 ‘부정적’인 것이었다. 최근에 느낌도 그랬지만 역시 이 자매님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으로 아예 ‘탈회 脫會’를 하였고 성당을 떠난 별도의 클럽을 만들어서 ‘영적독서’를 계속하고 있다고 했다. 개인적인 사정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그 동안 성당내의 영적독서클럽은 아무래도 무언가 ‘구심점’  결여로  ‘흥미’를 유발하는 클럽의 운영상황이 아닌 듯 싶었다.  흔히 말하는 leadership의 부재 不在, 바로 그것은 아니었을까?

근래에 읽었던 책을 소개하면서 나보고도 읽어보지 않겠냐고 해서 ‘물론 ok’라고 해서 그 다음 주에 그 ‘프카’ 자매님2  손수 책을 갖다 주셨다. 이 동갑내기 자매님, 참 볼수록 정이 많은 분임을 알게 되기도 했다. 그 책의 제목이 바로 ‘아주 특별한 순간’ 이었는데, 영성적 번역서로 많은 친근감을 주는 ‘류해욱 요셉’ 신부님이 엮은 책이었다.

 

책의 내용은 류신부님의 글이 아니고 ‘안토니오 사지’ 라는 ‘유명한’ 인도출신 신부님이 한국에서 지도한 ‘치유피정’의 강의부분을 아주 매끈하고 유려한 한글로 정리한 것이다.  또한 인상적인 것은 2013년에 첫 출판 후 2017년까지 18 쇄의 중판을 거듭한 것을 보면 아마도 ‘베스트셀러’ 급의 ‘좋은 책’이 아닐까 추측도 해 본다.

모두 25회의 강의로 이루어진 이 책을 접하며 문득 생각이 들었다. 25번의 피정 강의를 한꺼번에 읽는 대신 하루에 하나의 강의를 편안하게 소화를 하면 어떨까? 더 나아가서 2019년 사순절이 시작되는 3월 6일 (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까지 모두 (쓰고) 읽으며 올해의 사순절을 더 특별하게 준비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월 5일까지 25회의 강의를 ‘들으려면’ 2월 9일부터 시작을 하면 될 것이고, 그것을 이곳 개인blog에 시한적으로 남겨두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류해욱 요셉 신부님은 물론 오래 전 (거의 20년 전?) 이곳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주임신부로 계셨던 분이라서 익숙하지만 사실 나 개인적으로는 당시에 성당엘 안 나갔기에 개인적인 느낌은 거의 없다. 애기로만 듣던 분이었지만 몇 년 전에 이곳을 방문했을 당시에 직접 강론을 들었다. 그 후 이분이 저서나 번역서를 읽기도 했는데 그 읽은 경험들이 아주 인상적이고 기억에 남는다. 한때 stroke로 쓰러지셨다고 해서 모두 걱정을 하고 기도를 했는데 그때 직접 보았을 때는 거의 완치가 된 듯 보였다.

이 책의 원저자격인 안토니오 사지 라는 분은 전혀 생소한 이름이지만 강의 내용을 읽고, 약력을 자세히 보니 류신부님의 말씀대로 ‘성령이 충만한’ 분인 듯싶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그런 피정을 지도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특히 피정강의를 ‘강의록’ 에 전혀 의존하지 않고 성경만 가지고 한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이 책의 권두언들, 추천의 글과 옮긴이의 글은 다음과 같다.

 

추천의 글

하느님은 당신을 드러내 보이시는 방법으로 말씀을 선택하였습니다. 그 말씀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온전히 전해진 것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성경이라는 활자로 접하게 되었으며, 그 말씀이 살아 움직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야 합니다. 여기 하느님의 말씀을 성령 안에서 뜨겁게, 그리고 생생하게 전해 주는 한 사제의 가르침이 있기에 감히 기쁜 마음으로 이 책을 추천해 드립니다.

‘성모님과 함께하는 6일간의 침묵피정’은 고인이 되신 요셉 빌 신부 (인도 성 빈첸시오 회)에게서 맨 처음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그 후임인 안토니오 신부가 맡아 전 세계적으로 1년 내내 복음의 선포자로, 말씀의 치유자로 하느님의 뜻을 이루며 피정을 이끌어 나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하느님께서는 그를 이 암울한 시대에 새로운 빛의 예언자적 소명을 주고 계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는 매번 그 피정에 참여하면서 확신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살아 있는 생명의 말씀! 그것은 바로 성령과 온전히 일치하는 사람만이 실천할 수 있는 일임을 알기 때문에, 저는 그분이야말로 이 시대에 성령 안에서 활동하는 참 말씀의 치유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해를 맞이한 지금, 그분의 은혜로운 말씀들이 새로이 여기 글자로 담겨 있으니 이 또한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은혜로 운 말씀을 류해욱 신부님의 혜안으로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담아 여기에 펼쳐놓았으니 이 시대에 또 다른 복음화의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말씀은 전달자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그 말씀을 읽는 사람들의 마음 상태도 참으로 중요하지 않을까요? 신부님이 매년 한국에 오실 때마다 그분의 말씀을 피정 안에서 직접 듣고 체험하며 깨닫는 것이 얼마나 크나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이 피정의 중재기도 모임에서 영적 지도를 담당하고 있는 한 사제로서, 침묵피정 중에 체험한 말씀의 은혜로움을 이 책의 독자들도 함께 맛보고 경험함으로써 생활 속에서 신앙의 열매를 맺어 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화식 베드로 신부 (춘천교구 총대리)

 

 

옮긴이의 글

<아주 특별한 순간: 안토니오 신부의 치유피정>의 출간 소식에 저는 마치 오랫동안 간절히 바라던 귀한 옥동자를 얻은 아기 엄마의 심정처럼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이 책은 인도 빈첸시오회 소속 안토니오 신부의 피정지도 내용을 엮은 것입니다. 하지만 저자 안토니오 신부에 앞서 요셉 빌 신부를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안토니오 신부 자신은 요셉 빌 신부의 후계자로서 피정지도를 하는 것임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요셉 빌 신부는 인도 케랄라와 아프리카의 빈첸시오회 소속 사제로서 아주 헌신적이고 탁월한 피정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들에게 치유미사와 대중설교를 통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빌 신부를 통해 주신 치유의 은사로 수많은 사람이 영적, 정신적, 육체적 질병을 치유 받았습니다.

요셉 빌 신부는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치유를 직접 체험하고 나서 치유자가 되신 분입니다. 그는 1958년 사제로 서품 된 후, 고향 케랄라 교구에서 오랫동안 교회의 고위 행정직을 맡아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러다 48세 때 두 번의 심각한 심근경색을 앓게 되어 두 달 가까이 병상에 누워있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케랄라의 성령쇄신봉사회가 주관하는 사제들을 위한 피정에 초대되었습니다. 피정이 끝날 무렵 한 주교가 빌 신부에게 손을 얹고 치유기도를 했는데, 그때 빌 신부는 2,000년 전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며 치유하신 그 예수님이 자신에게 손을 얹고 계신 것으로 느꼈습니다. 그 순간 내면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고 그의 믿음도 강해졌습니다. 의사들이 여러 가지로 검사를 해본 결과 그의 병은 완전히 치유되었습니다.

그 후 빌 신부는 장상에게 청하여 행정소임을 그만두고 믿음에 의한 치유를 공부하려고 미국의 피츠버그로 갔습니다. 그가 공부를 마칠 무렵, 어느 성당에서 휠체어에 앉아 있던 전신마비 환자가 그의 기도를 자리에서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되는 첫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예수님이 자신을 도구로 쓰고자 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인도 전역을 다니며 가르침과 치유은사를 나누었습니다.

빌 신부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6일간의 침묵치유피정과 함께 치유미사와 대중설교를 했습니다. 10년 전부터는 우리나라에서도 6일간의 피정을 지도했습니다. 자신의 피정은 성령쇄신피정이 아니라 우리가 성령께 마음을 열고 인간의 영혼과 정신, 육체를 모두 치유 받도록 도움을 주는 피정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안토니오 신부는 고 故 요셉 빌 신부의 마지막 몇 주간을 함께 지내며 임종을 지킨 분으로, 요셉 빌 신부의 침묵치유피정 사목을 이어 받을 후임자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셉 빌 신부의 소임이던 피정 프로그램을 이어받아 세계를 돌며 피정지도를 하고 있습니다. 벌써 우리나라에서도 4년째 피정지도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2년 전 우연히 안토니오 신부의 피정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안토니오 신부의 피정 내용은 놀랄 만큼 은총이 넘쳤고, 성령께서 안토니오 신부와 함께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더구나 아무런 강의 준비 원고도 없이 성경 하나만을 들고서 강의하는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아무리 명석하고 기억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성령의 영감을 받지 않고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의 피정에 참석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분에게서 성령의 은총이 넘치는 것을 체험한다고 증언합니다.

저자 안토니오 신부는 피정자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만나는 체험으로 이끌어 주는 탁월한 능력이 있습니다. 피정자도 하여금 주님과의 관계를 통해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새롭게 성찰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저는 피정자로서 안토니오 신부를 통해 성령께서 일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그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서 그의 피정강의 내용을 옮기고 정리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특별한 순간: 안토니오 신부의 치유피정>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성경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정통 가톨릭 교리에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아주 역동적이며 영감을 불러일으켜 줍니다. 깊은 묵상과 관상을 통해 나온 내용이기 때문에 단순히 책을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독자 스스로 깊이 성경 안으로 들어가서 묵상이나 관상을 하도록 이끌어 줄 것입니다. 이 책은 일상 삶에서 피정을 하기 위한 안내서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달려갑니다. 마을 사람들을 피해 뜨거운 정오에 물을 길으러 나왔지만 예수님을 만난 그녀는 이제 예수님을 전하러 마을로 달려갑니다. 이것은 엄청난 변화입니다. 이런 변화는 사마리아 여인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묵상이나 관상을 통해 예수님을 깊이 만나는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아주 특별한 순간: 안토니오 신부의 치유피정>은 사마리아 여인처럼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달려가도록 우리를 이끌어 줄 것입니다.

류해욱 요셉 신부 (예수회, 영혼의 쉼터)

 

 

피정 강의 차례

 

1

씨앗과 농부,

2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3

믿음은 성경에 바탕을 둔다

4

믿는 자는 혼자가 아니다

5

물동이를 버려두고

6

야곱과 에사우축복

7

교회가 우리 영혼의 정비소다

8

하느님을 위한 아름다운 어떤

9

믿음은 경험이 아니다

10

겨자씨와 누룩

11

죄의 특징

12

십계명영혼의 길잡이

13

용서

14

저는 당신 손에 들린 연필입니다

15

착한 목자와 생명의

16

내적 치유

17

고해성사

18

엠마오로 가는

19

욥기

20

성령 1

21

성령 2

22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23

가정 성소

24

카나의 혼인 잔치

25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마을 사람들의 험담을 피해 뜨거운 정오에 물을 길으러 나왔던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난 후 그분을 전하러 마을로 달려갑니다. 이 엄청난 변화는 예수님을 깊이 만나는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이 책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달려간 사마리아 여인의 변화된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 줄 것입니다.”

– 류해욱 요셉 신부(예수회, 영혼의 쉼터)

 

“안토니오 신부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도록 이끄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현존 안에서 나를 돌아보고 내면을 살펴보았기에 기쁘게 약점과 죄를 반성하며 치유와 용서를 받았습니다. 생활의 변화와 사명에 확신과 지혜를 준 이 강의를 몇 번이고 반복해 들어서 나의 지식과 체험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 허동선 마태오 신부(춘천교구 원로사제로 현대 다문화 가정 사목 중)

 


책에 소개된 website를 가보니 그곳에 궁금했던 ‘모습’들이 나와 있었고 책보다 더 자세한 안토니오 신부님의 배경도 실려 있어서 이곳에 발췌 전재를 해 본다.

 

강단에 선 안토니오 사지 신부님

안토니오 신부와, 옮긴이 류해욱 요셉 신부님

 

Fr. Anthony Vadakkemury, V.C.

안토니오 신부는 1977년 5월1일 2남2녀 중 맏이로 인도에서 출생했다. 양친은 현재 인도의 케랄라에 살며, 그가 기억하는 가장 어렸을 때부터 그의 꿈은 사제가 되는 것이었다. 마침내 그는 신학교 과정을 인도와 동 아프리카의 케냐에서 수료했으며, 2006년 12월 29일 인도 케랄라에서 빈첸시오회 수도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리고 2007년 1월 6일 첫 미사를 거행하였다.

인도의 방갈로에서 신학교 철학 과정을 마친 뒤, 1년간의 사목 수련을 위해 그는 2002년 케냐의 나이로비로 보내졌다. 이후에 그는 신학 과정을 마치기 위해 아프리카의 가장 유명한 대학 중 하나인 ”탄가자 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77개의 서로 다른 국적의 학생들과 지내며, 서로다른 여러 나라의 문화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2006년 5월 14일 그는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부제품을 받았고, 이후 케냐의 사목 수련시기 동안 케냐, 탄자니아, 우간다에서 동료 사제들과 함께 중등부 학생들을 위한 3일간의 피정을 (예수선교피정) 지도하였다. 그리고 매주 일요일마다 나이로비의 서로 다른 본당들에서 본당신부를 도와 강론을 하였으며,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많은 본당들에서 청소년 그룹을 지도하였다. 특히 그는 청소년들이 영적인 측면에서 충분한 보살핌을 받고 있는지에 유의하였다. 또한 부제 생활 중에 수감자들을 위한 피정, 선교 등을 비롯한 많은 피정 프로그램을 지도하였다. 나이로비의 5년간 체류하면서 안토니오 신부는 동 아프리카의 빈첸시오 피정센터 중 하나인 빈첸시오 기도의 집에서도 봉사하였다.

안토니오 신부가 사제 서품 받은 직후, 그의 관구장으로부터 타자니아의 유빈자로 발령받아, 그곳에서 그는 두 달 간의 성공적인 사목 임기를 마치고 우간다의 엔테베로 가서 두 가지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엔테베의 빈첸시오 피정의 집에서 1일 피정을 지도하며 재정을 관리하였는데, 故 요셉 빌 신부가 그가 속한 분원의 장상이었다. 또 하나의 임무는 우간다의 마사카에서 새로운 피정센터를 건립하는 것있었다. 그리하여 엔테베에서 180km 떨어진 마사카를 매일같이 오가며 사제들을 위한 피정센터 건립을 추진하였다. 이 건물은 2008년 2월 23일 故 요셉 빌 신부의 80세 생일에 완공식을 거행하였다.

안토니오 신부는 故 요셉 빌 신부의 마지막 몇 주간을 함께하며 임종을 지키신 분으로, 그의 관구장은 故 요셉 빌 신부의 침묵 치유 피정 사업을 이어받을 후임자로 안토니오 신부를 임명하였다.

  1. ‘프란체스카’ 란 세례명을 우리들이 줄여 부르는 말
  2. 오랜 세월 동안 알고 지내던 친지의 누님이 되시며,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매주 레지오 화요일에 보기도 하는 동갑내기 전 음악대학 교수님.  2년 전에는 기타동호회에서 몇 개월 동안 보기도 했던.

2014 Atlanta Snowjam on I-285 North

드디어 올 겨울 첫 white stuffs, snow 가 오늘 낮에 ‘잠깐’ 올 것이라고 어제 ‘경고성’ 예보가 계속 흘러 나오고 있었다. 이번 겨울 내내 은근히 어린아이처럼 이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사실은 나 자신도 조금 유치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머리가 나이에 비해서 그렇게 삭막하게  무감하게 굳은 것이 아님을 알기도 했다. 사실 이런 나의 심정을 연숙에게 비치기도 했는데. ‘첫눈 올 때 집 근처에 위치한 Starbucks Coffee 에 가서 coffee를 같이 마시자’ 고 몇 번 말하기도 했었다. 물론 이곳은 눈이  조금만 내려도 차를 타고 가는 것이 힘들기에 그럴 경우에는 걸어서 가자고 즐거운 상상의 나래도 한껏 피기도 했다. 그것이 드디어 실현이 되는 가, 가능성이 제로가 아님이 더 확실해지면 올 겨울 들어 첫 snowday dreaming을 하게 되었다. 사실 이 시기, 날자는 ‘괴로운 추억’이 얽힌 날이기도 하다. 2014년 1월 28일이 그 유명한 아틀란타 교통대란, snow jam이 있었던 날이어서 먼저 ‘악몽’이 떠오른다. Doraville 도라빌의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레지오 주회합 등을 마치고 집에 오려고 차가  I-285 로 들어서면서부터 퍼붓기 시작한 freezing rain 그리고 함박눈에 모두 일찍 귀가하려던 차들이 꼼짝 못하고 차 속에서 밤을 지새웠던, 그런 악몽이었다.  그때부터 우리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눈에 대한 피해망상증으로, 이맘때가 되면 신경을 곤두세우며 일기예보를 주시한다.  결국 오늘도 레지오 주회합이 있는 날이었지만 성당이 문을 닫게 되어서 ‘공짜’로 하루 푹 쉬게 되었다.

기다리던 올 겨울 첫 눈의 꿈은 사라지고..

하지만 이번의 ‘눈 예보’는 불발탄으로 끝나고 말았다.  아침에 잠깐 내린 비 뒤에 약간의 눈발이 흩날렸지만 곧바로 하늘은 개었다. 대신 무섭게 기온은 떨어지고 바람이 분다. 이 추위는 북극으로부터 내려 온 것으로 polar vortex라는 이름으로 북미주 전역이 강추위와 바람으로 꽁꽁 얼어붙는다. 이곳도 오늘 밤 10도(섭씨 영하 10도 정도) 대로 떨어진다고.. 집에 사는 사람들이야 난방으로 큰 문제는 없지만 homeless들과 밖에 사는 고양이들이 걱정이 된다.  그 동안 비교적 따뜻한 날씨로 한참 올라오던 뒷마당의 수선화들 위에 비닐 봉지를 덮어 두었는데 1~2월의 추위에 익숙한 이 지역의 수선화들, 이 겨울을 살아 남으리라 믿는다.

 

 

 

오늘 YouTube에서 뜻밖의 email message 받았다.  7년 전쯤에 내가 만들어 ‘올려놓은, upload’ music video 성재희씨가 1965년에 취입한 노래 ‘보슬비 오는 거리‘ 가 1 million hits (백만 번 보았다는 뜻)를 했다는 사실과 함께 ‘축하’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이것이 무슨 말인가 의아했는데, 꽤 오래 전의 일이라 그런 것이다. 한창 youtube 에서 지나간 추억의 노래들을 듣던 것이 유행이었던 시절에 나도 한번 무언가 남겨보자는 생각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요새는 웬만한 video들,  viral 하다고 불리는 것들 며칠 사이에 백만 번 hit는 아무것도 아닌 세상이 되었기에 7년 만에 백만 번이라고 하면 우습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 보면 솔직히 놀랍기만 한데 왜 그럴까? 백만이란 숫자에 무슨 magic 이라도 있나 아니면 그저 꽤 많은 중년, 노년의 대한민국 출신의 사람들이 당시를 추억하며 보았다는 사실이 의아한 것인지.. 솔직히 덤덤한 심정이다. 하지만 ‘추억의 마술’을 어쩔 수 없다는 사실 그것은 분명한 것이다.

이 ‘보슬비 오는 거리’를 내가 개인적으로 왜 그렇게 소중하게 느낄 정도로 좋아하는 지 생각을 해 보면 크게 특기할만한 것이 없다. 그저 그 당시, 1965년 말 서울 남영동에서 살던 때의 순진했던 기억들과 함께 중앙고 3학년으로 막바지 대학 입시공부에 열중하면 들었던 그 추억이 전부다. 그것이 왜 그렇게 소중하게 느껴지며, 은은한 저음과 매력적인 자태로 보슬비의 추억을 달랬던 성재희씨의 모습이 반세기가 넘는 지금까지 생생하게 느껴지는지… 나도 모른다.

Pierre Teihard de Chardin

 

人間이란 現像 (1955), The Phenomenon of Man

떼이야르 드 샤르댕 (Pierre Teihard de Chardin, 1881~1955) 著

 

역사를 움직인 100권의 철학책‘ (신동아 1984년 1월 별책) 중에서

김태관 金泰寬  (예수회 신부, 서강대 문과대교수, 서양철학, 1919~1990) , 小論考

 

 

1.

북경원인의 발견자의 한 사람이며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의 주창자인 ‘떼이야르’ 신부의 생애는 고생물, 지질학자로서 문자 그대로 지구의 표면을 종횡무진 왕래하며 지층을 파헤치면서 우주와 신의 통합적 비전을 찾기에 바쳐졌다.

‘삐에르 떼이야르’는 1881년 5월 1일 프랑스 중부 오베르뉴 지방 끌레르몽페랑 근교 사르스나 에서 한 귀족가문의 11형제 중 네 번째로 태어났다. 농장경영의 여가에 박물학과 고문서 연구를 하는 부친으로부터 어린 시절 자연관찰과 곤충 식물 암석 등 채집의 기쁨을 배웠다. ‘물질, 더 정확히 물질의 핵심에 반짝이는 어떤 것에 마음이 끌린 것이 6, 7세 적이었다’고 그는 회상한다.

16세에 리용 근처 몽그레 예수회계 고등중학교를 졸업, 18세에 예수회에 입회, 그 후 사제가 되는 모든 교육코스를 밟으며, 지질학과 고생물학에도 전문적 연구를 했다. 특히 카이로 예수회 고등학교에서 자연과학 교사로서 체류할 때 수억 년의 지층이 노출된 이집트의 광막한 대지에서 그의 미래는 더욱 뚜렷하게 되었다.

1911년 빠리박물관에서 고생물학자인 ‘마르슬렝 불’ (Marcellin Boule, 네안데르탈 인 연구로 유명)의 지도 아래 인류 고생물학의 전문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다. 장기간에 걸친 공동연구, 그리고 깊은 우정으로 발전한 이 만남은 ‘떼이야르’의 일생을 결정하였다.

1914년 세계대전의 발발로 위생병으로 격전지에서 참전했다. 포성과 죽음과의 부단한 대결 틈틈에 비참한 참호 속에서의 그의 명상은 인간세계를 새로운 운명에 이끄는 우주적 규모의 독창적 세계관을 싹트게 하고 윤곽을 잡아 주었다.

1922년 소르본느 에서 자연학의 박사학위를 받고 그 논문으로 프랑스의 제1급 고생물학자로서 인정을 받았다. 1923년 황하유역 조사단원으로 중국으로 파견된다. 이래 20수년 동안 중국은 그의 제2의 고향이 된다. 쉴새 없는 지질조사와 연구와 보고서 작성 학회 탐험여행 틈틈이 ‘신 神 의 영역'(Le Milieu divin)이란 저서를 집필, 그리스도인의 태도와 과학자의 태도를 양립시킬 수 있는 종합적 세계관과 특히 진화론과 인간과 자연 사이에 새로운 연결을 시도했다.

1927~1928년 프랑스 체류 후 이디오피아 소말리랜드 지질조사, 주구점의 북경원인 발굴에서 지질학과 고생물학 부문을 지휘, 연구보고 발표 등의 일로 빠리와 천진 사시를 정기적으로 왕복, 1930년 뉴욕박물관의 중앙아시아 탐험, 31~32년 시트로엥 아시아대륙 자동차 횡단탐험에 참가, 1935년 예일-케임브리지 中北 인도탐험,  1937~38년 하버드 – 카네기 버마탐험참가, 39년까지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인류기원에 관한 심포지움에서 북경원인연구발표, 미국과 프랑스에 체류, 중국으로 귀환, 중일전쟁으로 북경에 6년 동안 유폐됨, 1940년 북경지질생물학연구소를 만들었다.

여기서 그는 그의 필생의 테마인 지구상의 진화와 인간미래에 관한 사색과 탐구의 총결산인 주저 ‘인간이란 現像’을 집필하며 추고 推稿추고 에 전념한다. 1946년 프랑스에 귀국, 국립과학연구소 연구주임 꼴레쥬 드 프랑스 교수로 초빙받았으나 여생을 뉴욕 웬너그렌 재단 인류학 종신연구원으로 보낸다.

1951년과 1953년 2차에 걸쳐 동 재단후원으로 남아프리카 조사연구여행, 선사시대의 고고학과 고생물학의 연구를 자극하고 공동연구계획을 조정했다. 1955년 4월 10일 뉴욕서 부활축일에 심장마비로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끝난다.

그 당시 소수의 전문가 서클과 친구들 외에서 그 이름도 사상도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다. 진화와 인류미래에 관한 그의 과학적 사상으로 해서 교회당국과 그의 소속인 예수회의 반대로 그는 교단과 조국에서 멀리 되었고, 순수전공 외의 저술은 출판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유고는 사후 즉시 각계의 세계적 저명인사들로 구성된 간행위원회가 조직되어 그 해 10월 제1권 ‘인간이란 현상’ 이 출간되자, 자연과학 철학 신학 등 광범한 분야에 격렬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2.

‘인간이란 현상’에는 우주의 생성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의 진화의 주요한 과정이 일관된 명쾌한 전망 속에 묘사되어 있다. ‘떼이야르’는 과학적 성과에서 출발하여 그리스도교인든 아니든 공정한 관찰자이면 누구든 받아들일 수 있는 세계관과 인간관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는 과거의 진화의 발걸음으로 인류의 미래를 예측하고 그 발전을 투시하며 이러한 시야 속에서 자리잡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위치를 확인한다.

이 책은 ‘현상으로서’ 만의 인간을 취급하며 세계의 탐구해명이 아니고 그것을 위한 서론으로서 보아주기를 요구한다. 또 동시에 현상의 모든 것에까지 펼쳐진다.

“동물의 완성, 사고력을 가진 존재의 우위는 그 시선의 통찰력과 종합력으로 측정된다”. ‘본다’는 것은 생의 본질이다. 이것이 이 저서의 개요이고 결론이며 또 그의 사상의 핵심이다. ‘떼이야르’는 철두철미 과학자의 자격으로 과학의 성과로써 그 사상을 전개한다고 강조한다.

그의 우주관의 특징은 지구의 과거의 걸음걸이를 배경으로 하고 그 진화의 속도를 미래에고 연장 추정함으로써 인류의 미래상을 추론하는 데에 있다. 우주는 크나큰 극히 완만한 소용돌이와 같이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정향적 운동 중에 있다. 우주 와동 渦動 은 구심적 흐름이며 이 움직임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느리므로 우리는 포착하기가 힘든다. 그래서 ‘본다’는 것이 요구된다.

‘떼이야르’는 우주의 소재인 물질의 진화 속에 이미 정신적 에너지를 본다. 본질에서부터 정신에 이르기까지의 우주진화의 유일한 완전한 기준은 인간이다. 이 진화는 단순한 것에서 복잡화 – 의식의 무한대에의 증가로 일정방향으로 전진한다.

‘떼이야르’ 신부는 인간의 우주적 배경으로서 소위 무한대의 세계(상대성이론이 적용되는 현상세계)와 무한소의 세계(하이젠베르그의 부적확성 이론이 지배하는 현상세계)에 다시 복잡화 – 의식이란 제3의 무한을 추가한다. 복잡성- 의식화는 우주의 근본운동이다.

저자는 이 세계를 입자로 보고 우주에는 이 입자를 복잡화에로 좇는 보편적 힘이 일종의 ‘부하 負荷’로서 에너지원을 이룬다고 한다. 부하된 입자가 한 단계에 복잡성에 도달하면 종래의 차원과는 다른 출력을 가진 복잡성에 진화한다. 물질에서 생명의 발생 생명 속의 사고의 발생이 이에 해당한다.

생명의 출현에서 미생물과 분자, 세포 등이 서로 독립해서 출현하지만 사고력의 발생에로 진화의 흐름은 향하고 있다. 정신권의 전개에서 인류는 선사인류의 여러 서로 무관한 화석인류들의 분지 分枝  가 어떤 축을 중심으로 꽃봉오리모양 사회화를 이루며 진화한다. 원시사회에서는 방산 放散 팽창하던 것이 현대에 이르러 그것은 수축, 압축되어가는 단계에 있다. 미래의 세계종말에서는 인격사회의 인류의 일체화가 오메가 점, 수렴(convergence)의 극점인 그리스도 안에 만물이 일치하는 데에 이루어진다.

진화에 있는 우주는 마치 그물같이 위로 갈수록 그물의 눈은 압축되고 밀접 되어 주름이 더 잡히며, 끝으로 일 점에 집중되어 세계는 수렴되고 인류는 혼합이 아닌 합치를 이룩한다. 이 일치는 현대정보수단의 진보로 말미암아 인류전체가 하나의 의식으로 서서히 형성되어 가는 데서 예견된다.

‘떼이야르’는 이미 현대 컴퓨터 정보시대를 예견하고 사이버네틱스를 인간의 집단적 사고능력으로서 신 뇌수의 형성으로 보았다. 사회화의 상한적 종합작용으로 일대 다수의 인간의 합류점에 중복 일치 한다는 대 완결을 상정한다. 도식화 하면 다음과 같다.

우주의 생성 -> 생명권의 전개 -> 유인류의 불리 -> 인간의 출현, 즉 사고력의 제일보 -> 정신권의 성립, 즉 팽창의 단계에서 문명과 개체화 -> 정신권의 서욱, 즉 압축의 단계에서 인격화 적 일체화. 세계종말에서 인류는 인격공동체의 건설을 신인 神人 인 그리스도의 포괄적 신비체 안에서 성취를 보게 된다.

이것이 ‘떼이야르’ 신부가 자연과학과 사회학 심리학 등의 전 영역과 인간학의 전 범위를 종합함으로써 과학과 신앙, 우주와 신의 화해를 계기로 웅대한 우주관을 소묘한 것이다. 그의 관심은 그리스도교의 축원이기도 한 “때가 이르면 신은 그 계획을 시행하며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재결합(reunion)하리라” (바오로 에페소서 1,10)는 것을 인간을 현상으로서 과학적으로 다루면서 지시하려고 했다.

 

3.

 ‘떼이야르’의 명성과 평가는 사후 30년 가까이 되어가는 데도 더욱 고조되어 간다. 그 저작은 각국어로 번역되고 그 연구는 개신교나 공산권 내에서도 활발하다. ‘다윈’이나 ‘아이슈타인’이 일으킨 돌풍보다 더 큰 충격과 격론을 불러일으켰다. 아직도 그 연구와 촉매작용은 꾸준히 지속되고 있다. 1981년은 그의 탄생 1백 주년이어서 세계 각지의 떼이야르 협회는 기념행사를 가졌다. 특히 유네스코는 빠리에서 그 해 9월 16~18일 3일 동안 기념 심포지엄을 성대하게 치렀다. 1983년 뉴욕에서는 UN 38차 전체회의 벽두에 학술적 의견교환의 테마로 ‘떼이야르 드 샤르댕 의 저작과 인물’이 채택되었으며, 이 심포지엄은 평화촉진을 위한 ‘교육적 과정’을 진작하는 것이 의도였다.

찬반의 평가가 어떻든 ‘떼이야르’ 신부가 그 자신 안에서 인류의 기원을 캐내고 진화의 비밀에 육박하는 탐험, 우주 속에서 인류의 운명을 묻고 세계진화에서 신의 존재를 찾고 하나의 통합적 비전을 전달하려는 성자다운 기백과 준엄한 학자의 탐구의 생애는 그를 세기적 예언자적 사상가로 부각시키는데 별 이론이 없을 것이다.

 

 

주요저서

La place de l’homme dans la nature ‘자연 속의 인간의 위치’, 1965.

Science et Christ ‘과학과 그리스도’, 1965.

Comment je crois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1969.

Les directions de l’avenir ‘미래의 지향’, 1973.

 

 

¶  송년, 새해를 지내며:   성탄, 송년, 새해.. 등등을 이렇게 힘들게 맞이 한 적이 있던가 할 정도로 이상한 나날들을 보냈지만 그래도 그 와중에도 가족들이 모인 기회가 딴 해에 비해서 많아서 약간의 위로는 있다.  그 중에서도 새로니가 Ozzie와 함께 자기가 자란 집에서 이틀 밤을 잤던 것은 우리에게는 추억을 자극하는 시간이 되었다.

New Year’s Eve, 이번에도 우리 3명이 굳세게 뉴욕의 Time Square TV를 지켜보며 정각에 맞추어 champagne 을 터뜨리며 Happy New Year!를 외쳤다. 예년에 비해서 그렇게 흥분되지는 않았어도 ‘할 것을 했다’라는 자위를 하기도 했다.  차가운 비가 내리는 뉴욕의 그곳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 무엇이 그렇게들 즐거울까. 하는 의아함을 떨칠 수가 없다. 한 해가 가고, 새해가 된 것이 그렇게 좋을까? 그렇게 해서 2019년을 맞았지만.. 글쎄.. 나는 아직도 어두운 2018년 말 속에서 헤매는 느낌뿐이었다.

 

¶  2019 라는 숫자로 본 올해는 별로 큰 매력이 없어 보인다. 2019라는 숫자부터 그렇다. 어쩌면 이렇게 마구잡이 같은 숫자일까? 거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는 볼품없는 숫자로 일년을 보내라고.. 하지만 그 다음을 보며 견뎌보자… 2020! 와! 얼마나 멋진 숫자인가? Twenty Twenty 20/20 느낌부터 앞이 선명하게 보이는지 않는가?

그래서 그런가, 2018에서 2019로 넘어오는 성탄, 송년휴일이 걸친 몇 주간은 너무도 깜깜한 느낌뿐이었다. 지난 12월 초 ‘대림절’의 시작 무렵에 나는 이런 ‘영혼의 어두운 밤’을 예상해본 적이 전혀 없었는데, 밀쳐낼 겨를도 없이 어이없이 악마의 교란에 쓰러진 듯하여, 이것이야 말로 sudden death (of peace) 라는 가슴이 철렁한 단어를 연상시키는 그런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으로 사람의 한 달 정도의 짧은 앞날도 사실 그렇게 확실한 것이 없다는 쓰라린 교훈을 실감하는 계기도 되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어떻게 그렇게 어이없이 나는 ‘악의 유혹’에 굴복을 한 것 것인가? 무언가 한꺼번에,  오랜 세월 동안 쌓아 놓았던 ‘승리의 금자탑’이 몇 초 사이에 ‘와르르’ 무너져 내린 것을 본 느낌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몸과 마음이 내려갈 대로 내려감을 경험한 것이다.

이제는 거의 어둠의 터널에서 빠져 나온 듯하고 다시 세상의 땅에 발을 디뎌도 된 듯하다. 문제의 핵심이 무엇이고,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이 무엇이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희미한 길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이것만도 큰 발전이라고 생각하자.

 

¶ 목요회 S형제: 연숙으로부터 너무도 반가운 소식을 전해 듣고 한 동안 말을 잊었다. 작년 대부분 너무도 우울한 세월로 고생을 하던 목요회 S형제가 얼마 전부터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는 소식이었다. 한때는 위기의식까지 느끼게 했고 비상책을 강구할 정도였다. 기도도 많이 필요했지만 주위에서 걱정해주는 가족 친지들의 고민과 고통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는데 어떻게 이런 ‘기적’과 같은 일이 현재 시작되고 있는 것일까? 2017년 가을부터 꾸준히 만나며 도움을 주려고 노력은 했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사실 거의 희망을 놓기 시작하고 있었다. 앞으로 또 다시 예전의 상태로 돌아갈 가능성이 제로가 아니더라도 상관이 없다. 이렇게 다른 가능성이 이번에 보이고 있는 것으로 희망을 갖게 되었으니까..

 

¶ 나와 레지오: 나의 blog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한 Page를 장식하는 것, 너무나 당연하고 중요한 제목인데 최근에 들어서 이것 역시 나의 중대한 결정을 요구하는 것이 되었다.  본당 구역문제와 레지오 문제가 겹치면 아무리 힘이 센 장사라도 견디기 힘든 위험한 ‘폭약’과 같은 것임을 실감하게 되었다.  결국은 모두가 ‘사람문제’로 귀착이 되는데 나에게는 그것을 뛰어넘어 나 자신의 ‘실존문제’로 비약을 하는 듯 하다. 모두 나를 지켜주는 ‘천상의 발판’인데 그것이 깊은 바닥으로부터 흔들리는 느낌인 것이다.  ‘성의 없고 능력 없고, 볼품 없는 인간들’에 대해서 이렇게 실망을 한 적이 있을까? 이런 저런 이유로 나는 현재 무섭게 ‘본당’의 손길에서 도망치고 싶은 유혹을 떨치지 못하며 나날을 보내고 있다. 유일한 탈출구는 역시 ‘어머님’ 의 손길 밖에 없다.

 

¶ 마지막 소식, 사직서:   이틀 전부터 갑자기 진행된 나의 중대한 새해 행로에 대한 결정의 결과가 이제 조금씩 선을 보이게 되었다. 지난해 7월부터 시작한 구역장 직, 완전 사임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런 결정을 해야만 했던 각종 고민들이 그 동안 나를 괴롭혔던 것 중에 하나지만, 그래도 고민과 고통을 이 정도는 견뎌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구역에 보내는 ‘마지막 소식’과 본당에 보내는 ‘사직서’가 작성되어서 제출할 날을 기다리고 있고,  짧지 않은 기간을 ‘기도하며 심사숙고’한 결과이기에 큰 후회는 안 할 것이라 희망하고 있다. 이제 주사위는 이미 던져진 상태인 것이다.

 

새해를 맞이하여 가뜩이나 기분이 쳐진 나를 더 우울하게 하는 것이 있었다. 무언가 허전한 느낌이 드는 것, 그것은 바로 작년 6월에 하늘로 떠난 14살짜리 ‘나의 벗’ Tobey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최근 몇 년간 연말 연시 즈음이면 가족들, 그 중에서도 새로니가 데려오는 6살짜리 개 Ozzie와 같이 동네를 걷고 각종 ‘사고치고 재롱부리는 것’을 즐기곤 했는데 올해는 오직 Ozzie만이 우리와 같이 걷고, 놀곤 했다.

 

작년 정월에는 이렇게 둘이 잘 놀았다, 오른쪽이 Tobey

 

그 녀석 Tobey가 내 손에서 마지막 숨을 쉬며 떠난 지 반년이 지나가고 있어서 이제는 그 섬뜩한 공허감에 조금은 익숙해졌지만 나의 깊은 속 마음은 그것이 아니다. 특히 외출했다가 집에 들어올 때가 너무나 조용한 침묵의 소리를 느낄 때가 제일 괴로운 순간이고 아직도 변함없이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 세월이 약이라지만 그 세월이 얼마나 지나야 하는가?

긴 세월 동안 ‘깡패 두목’ 역할을 했던 Tobey에게 눌려 살았던 거의 같은 나이의 암 고양이 Izzie가 제 세상을 만난 듯 집안 주인 행세를 하게 되었고 그렇게 쌀쌀맞던 그 녀석이 요새는 우리에게 서서히 다가오더니 급기야는 내가 낮잠을 잘 때면 배위로 뛰어 올라와 같이 자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 녀석이 예전의 Tobey처럼 우리에게 정을 붙이고 있으니.. 이 녀석도 수명이 아주 길게 남지 않았는데 또 보내야 한다면…  현재로서는 생각하기도 싫다.

 

Tobey 자리를 대신 해서 나를 즐겁게 하는 암 고양이 Izzie

 

의외로 질긴 동물에 대한 정, 우리도 놀라고 있다. 이별의 괴로움은 사실 안 겪어 본 사람은 잘 모를 것이다. 사람을 떠나 보낸 것과 또 다른 독특한 종류의 고통, 이런 느낌을 나누면서 우리 둘은 ‘앞으로 가능한 한’  pet animal에 정을 주는 기회를 피하자.. 그러니까 adopt 하지 말자..라는 묵계까지 하게 되었다…. Tobey야.. 보고 싶구나!

서기 2018 이천십팔 년이 서서히 저물고 있다. 나의 나이 70세의 거의 전부도 저물어 간다. 얼마 안 있으면 71세가 된다. 그렇게 70이란 숫자의 나이를 들먹이던 것도 이제는 큰 의미가 없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런 2018의 숫자로 가끔 생각했던 것은 10년 전, 20년 전.. 등등으로 나의 옛 시절의 추억들이다.

제일 멋진 숫자가 50이다. 그러니까 50년, 50년 전, 더 멋지게 ‘반세기 전’..  이제는 완전히 나는 반세기인을 20년이나 덤으로 산 것..  그때가 50년 전, 1968년이었다. 이 해는 나의 뇌리에서 가장 많은 추억을 만들었던 때, 나의 blog 에서도 가장 융숭한 대접을 받았던 해로 남는다. 나이 20 이었으니 얼마나 즐거웠던 때였을까?

40년 전, 1978년은 어떠한가?  나이 30,  바로 지나간 20대에 필요이상으로 왕성하던 남성 호르몬도 조용해지고, 본격적으로 인생을 살 채비를 갖추던 시절.. 하지만 당시에 나에게 ‘북극성’은 없었다. 코 앞에 보이는 골목 길만 따라  남들이 하는 대로 걷기만 했다.

이렇게 나이 40, 50, 60을 따라가다가 70에 도달했는데, 솔직히 말해서 세월이 나이에 따라 더 빨리 흐르는 듯 느껴지는 것을 제외하고는 주위의 변화는 없는 듯했다.  물론 60, 70의 전통적 상징성은 무시 못하겠지만 그것조차 빠르게 변하고 있다.

 

2018년을 뒤돌아 보니 다음과 같은 일(나의 10대 뉴스)들이 생각난다.

  1. garage door spring accident
  2. 칠순 생일 맞이
  3. Hyundai Elantra gone
  4. Roswell Nursing Home
  5. Tobey to heaven
  6. furnace, a/c replaced
  7. 구역장 피선, 본격적 본당 활동 시작, 연수회, 본당의 날
  8. 목요회 모임 1년 이후
  9. 레지오 단장 임기시작
  10. Total burnout begins..  totally ruined holidays

 

이런 저런 나의 시대 관을 배경으로, 2018년은 나에게 무엇이며 어떤 때였는가.. 사소한 것부터 지각변동적인 큰 사건들도 있었고, 신변에 아주 위험한 때도 있었다.

  1. 작년 1월 6일, garage door의 ‘위험한’ spring을 교체하다가 사다리에서 떨어지면서 그 육중한 문에 깔렸던 사고.  그 당시에 집에 아무도 없어서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상황이어서 최악의 경우 나는 그 문에 깔려 질식사할 수도 있었으나 큰 상처 없이 빠져 나왔다. 이것은 전적으로 나의 상체근육의 도움에 의한 것이었다.
  2. 나이 칠십세! 우아… 이거 말이 되나.. 내가 70살이라니..
  3. 나의 ‘통근전용 승용차’ 로 정이 많이 들었던 이 고물차가 드디어 donation형식으로 나를 떠났다.
  4. 집과 비교적 가까운 이 ‘양로원’에서 치매 등으로 고생하는 ‘동포’ 형제 자매들을 돌보게 되었다.
  5. 나의 ‘분신’ Tobey가 비교적 큰 고통 없이 세상을 떠났다. Tobey야, 나중에 다시 보는 거다!
  6. 여름만 되면 조마조마 하던 이 ‘고물’이 드디어 수명을 다하고 최신형 model로 교체되어서 이제부터는 다리를 쭉 뻗고 잘 수 있게 되었다.
  7. 나이 70에 ‘마지막 임무’라 생각하며, 그 동안 진 빚을 갚은 자세로 겸허하게 수락한 이 ‘장’자리, 나에게는 생소한 job이지만 열심히 저돌적으로 혼신의 힘을 다 했지만 나의 tactic 은 순진한 것이었다. Marathoner의 자세를 취해야 했지만 바보같이 sprinter 흉내를 낸 탓에 결국은 total burnout의 고배를 마시게 되었다. 그래도 빚을 조금은 갚은 시원한 기분이다.
  8. 매달 마지막 목요일 밤에 모이는 이 ‘이상한’ 그룹, 나름대로 사명감을 가지고 노력을 했지만 성과는 의문 부호일 뿐이다. 하지만 최근에 조금 좋은 결과를 목격하며 ‘어머님’의 신비한 손길을 느끼게 되었다.
  9. 비록 레지오 ‘분대장’일 지라도 ‘장’은 ‘장’이다. 문제는 분대의 규모가 너무나 약하다는 것, 심지어는 분대의 운명이 불분명하다는 것, 나는 이런 것을 극복할 경험과 능력이 아직은 부족하다. 게다가 이 직책을 맡으며 꼭 하고 싶었던 과제 (우리를 괴롭혔던 두 명의 미친 년들의 처벌문제)는 현재 허공에 떠있는 상태다. 아마도 이 문제는 priority가 더 낮아질 듯하다.
  10. 대림절이 시작되면서 나는 결국 모든 문제들이 일시로 뭉치면서 이런 total burnout의 상태로 치닫게 되었고 결과는 이제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어두운 성탄, 연말’을 보내게 되었다.

 

Max Planck, father of Quantum Physics

 

요새 나는 온통 이 흔해빠진 단어, ‘consciousness,  의식 意識’의 홍수에서 헤매며 사는 느낌이다.  어쩌면 이곳, 저곳, 그곳.. 나의 눈이 가는 곳마다 이 consciousness란 말이 보이는 것일까? 하기야 이것은 우문현답 愚問賢答 식으로 말하면 ‘나의 눈이 가는 곳마다 (대부분 책들) 그것이 보이니까, 아니 내가 그런 것을 내가 의식적으로 읽거나, 보거나 생각하고 있으니까’  정도가 아닐까?

무슨 큰 진리나 발견한 듯한 쾌감이 따라오는 이 최근의 개인적 경험을 통해서 나는 ‘절망 뒤에는 반드시 다시 태양이 떠오르는’ 그런 ‘작은 은총’을 느낀다. 죽으란 법은 없는가.. 요사이 나의 ‘독서 관심’을 이쪽으로 이끌어주는 것, 나의 의식적 의지만은 아님을 어찌 내가 모르랴..

과학과 종교, 인간과 하느님, 보이는 현실과 초자연 세계를 연결해 주는 고리, 그것이 바로 consciousness라는 놀랍지만 생소한 idea가 이제는 ‘말이 된다’라는 경지까지 온 것, 그것이 나는 아직도 놀랍기만 하다.

20세기 초의 Quantum theory부터 시작해서 최근에 알려지기 시작한 string theory, multiverse등이나 NDE (Near-Death Experiences)를 통해서 지나간 반세기 동안 그 동안 taboo처럼 취급되던 것들이 ‘공공연히’ 거론되고 있다. 드디어 big convergence (science & religion) 가 시작된 것인지는 몰라도 가히 흥미로운 발전이 아닐 수 없다.

끈질긴 materialistic mindset을 가지고 자란 나에게 종교적 신비적인 경험은 사실 말도 안 되는 영역이었지만 근래에 들어서 ‘가슴을 열고’ 본 ‘새로운 현실’은 아주 다른 것임을 알게 되었다.  온 우주가 의식적, 의식으로 가득 찬, 사랑의 시공간이라는 놀라움. 우리의 두뇌에 갇혀있는 포로로 알던 ‘의식’은 그 자체가 자체라는 사실 등등은 아무리 ‘영혼의 밤’ 속에서도 밝은 빛으로 나를 살려준다.

이런 모든 것들은 가히 ‘복음적’이 아닐 수 없다. 태어나면 죽어서 잊혀져야 하는 존재가 실제로는 ‘영원한 존재’라는 조심스러운 나의 희망적 염원이 서서히 실감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한 예수님의 복음 중 제일 큰 복음이 아닐까?

필사1로 읽는 책 중에 노장여류화가 천경자 화백의 ‘사람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 란 제목의 수필집이 있다.  소싯적에는 이분의 책은 물론이고,  이분 자체도 잘 몰랐고 관심 밖이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림자체는 내가 문외한이니 자신이 없지만 수필체의 글은 정말 마음에 든다. 아마도 내가 지난 10년간 남기고 있는 blog을 통한 ‘글’, 특히 수필체 글에 대한 생각 때문일 것이다. 멋있는 표현보다, ‘감정에 솔직함’이 나에게는 거의 전부다. 여사의 글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닌지..

오늘 필사한 것은 제목이 ‘서울의 엘레지’란 수필인데,  이것을 읽으며 갑자기 ‘나의 서울, 나의 서울 엘레지’란 것은 어떤 것일까 하는 생각에 잠긴다. 이 ‘엘레지’는 1980년대까지의 서울의 모습에 얽힌 ‘단상’들인데 나의 것은 그보다 10여 년 전인 1970년대 초까지일 것이다.  그때까지 나의 모든 존재는 그곳, 조선조, 일정시대, 해방과 6.25  직후의 서울 ‘강북’ 이란 ‘좁은 곳’, 그러니까 북악 남쪽 한강 위쪽에 국한 되었다.

이곳에 얽힌 나의 ‘서울 엘레지’를 쓰라면 비록 ‘엘레지’를 논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어도 그 나이에 걸 맞는 ‘유치한 엘리지’는 수 없이 많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다. 그 엘레지는 이제는 99.9%  변해버린 ‘토지’위의 모습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사실, 다 사라져 버린 그곳은 오로지 꿈 속에만 존재한다. 그것이 나의 ‘서울 엘레지’일 듯…

그래서 그런지, 솔직히 말해서 나는 ‘현재의 서울의 모습’은 100% 매력이 없다. 천경자 화백의 수필도 아마 그런 각도로 본 엘레지가 아니었을까? 과거, 옛날을 그리는 것은 거의 본능에 가까운 인간의 이상향이 아닐까? 아련한 추억을 모조지 쫓아내버린 ‘메트로 서울’의 모습 속에서 나만이 가지고 있는 추억의 서울을 꿈 속에서 찾는 것이 이제는 길지 않은 여생의 ‘취미’가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아마도 ‘저 세상’에 가면, 수정처럼 깨끗한 모습의 ‘작고 소박한 그곳’의 모습을 볼 수 있지는 않을까?

 

서울 시청, 국회의사당, 시민회관, 반도호텔.. 서울의 1962경, 아담했던 모습들

꿈 속에서나 볼 수 있는 1962년 경 서울의 모습, ‘중앙청, USOM, 세종로’

 


 

서울의 엘레지 – 천경자

 

거리의 체증을 뚫고 택시가 어렵게 3호 터널을 빠져 나오자 남 서울의 풍경이 환히 펼쳐지기 시작했다. 후유 – 한숨이 터진다. 거대한 라이터가 무수히 치솟은 듯한 고층아파트들의 원경은 흡사 뉴욕의 허드슨 강에서 바라보는 한쪽 도시를 연상시켜 준다. 서울이 이토록 발전한 데에 경탄은 하지만 한편 메마르고 살벌한 시야에서 막연한 불안감마저 느낀다.

창 밖을 스치는 실버들 가로수를 보며 시각을 통해서나마 쩍쩍 금이 간 가슴에다 촉촉한 푸르름을 흡수해 보려고 깊은 호흡을 하는 것도 일상사가 되어 버렸다. 그래도 차가 한강다리를 달릴 때의 기분은 잠시나마 상쾌하다. 그 지점에서 나는 동남쪽 강변에 솟은 반원형의 고층건물을 유심히 바라본다. 우리 가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 가정이라는 따스함도 고령의 노모가 살아 계실 동안만 지속된다는 걸 알고 있고 언젠가는 다가올 엄숙한 붕괴만이 남아 있을 것이다.  차창에서 보이는 그 아파트는 고대 로마시대에 기공되어 지금은 허물어져 동그랗게 반원형만 남아 있는 콜로세오를 방불케 했다.

영화 <쿼바디스>에서 생사를 걸고 장절한 검투를 벌였던 검사(劍士)의 모습들마저 상기되어왔다.  한 인간이 두뇌와 붓을 쥐고 오른팔 하나로 살아가는 생(生) 역시 검사와 다를 것 없이 처절하고 또한 스릴과 쾌락이 있다.

띵똥, 초인종 소리에 문 열어 주는 가족이 있고 비로소 아늑한 우리 집의 작은 세계가 얼어붙은 가슴을 녹여 준다. 미완성 화판에 그려진 사람들과 뭇 생물들, 그 친구들이 나를 외롭지 않게 맞아 주고 어머니의 신음에 가까운 숨소리가 쇤 기침소리까지 고소한 누룽지 같은 정감이 되어 나를 살게 해 주는 값진 생명수가 되어 준다. 그러나 우리 모녀는 사소한 일, 전라도 사투리로 꼬막(고막) 껍질로 하나도 못 되는 일들로 잘 다투며 살아왔고 지금도 여전하다.

어쨌든 추운 겨울날 폭풍우 속을 헤매다가 아늑한 찻집을 발견한다거나 밤중에 타기 힘든 빈 택시를 만난듯한 안도감 같은 것이랄까 촛불 같은 광명과 훈훈한 온기가 있다. 태어나서 오랜 세월을 나는 태반에서 탯줄을 빨듯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묘한 인생이다. 젊은 시절에 해결할 수 없던 인생의 고통이랄 지 일해도 일을 해도 넉넉지 못했던 살림살이가 지겨워 무척이나 더디게 가는 것 같은 시간을 원망할 때도 있었지만 그런데 어느새 세월은 흘러, 지금 이 나이가 되어버린 자신을 돌이켜 볼 때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처음 어머니가 요안나로 세례를 받던 날의 기념사진을 보면 장미꽃 조화뭉치가 달린 면사포를 두른 어머니의 표정은 어색했던 때문인지 수줍은 표정이었지만 참 아름다웠다. 그분의 회갑이나 또 고희(古稀)조차 이런저런 이유로 충분한 잔치를 못해 드렸다. 고인이 된 명창 박초월씨를 초청하여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5월의 창경원의 푸르름, 나뭇잎만 보아도 쪼르륵 엽록소가 오관에 흡수되어와 뭇 작품에의 구상이 떠올랐지만 미숙해서 충분히 소화를 하지 못해 아쉬웠다.

그런데 지금 막 자신이 생길 만 하니까 나는 살아온 과거보다 훨씬 짧은 시간을 상아야 하는 소위 인생을 관조하는 나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나는 옛날과 변함이 없는데 남들이 그렇게들 봐 주고 있는 것 같다.

정말 인생이란 번개같다.

지금 이 시점에서 생각해 볼 때 나의 지나친 생업에의 집념 때문에 역설일는지 모르지만 어떤 때는 차라리 평범한 촌부로 태어났으면 싶은 때도 있다. 어중간히 풍부한 감성의 소용돌이가 거추장스럽게 때문이다.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젊은 시절에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노틀담의 꼽추> 를 읽고 그의 비극적 운명을 테마로 한 사상에 감명을 받았고 지금도 그렇다. 영혼은 반드시 있고 그 어느 영혼이 누구의 모체엔가 들어가 혈육이 되지 않는가 싶다. 결국 윤회전생설(輪廻轉生說)을 긍정하는 뜻이 되겠지만 한 세상 살다 보면 반드시 악연선연(惡緣善緣)이 있고 설령 상대가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연이 없으면 악연이 될 수도 있어 전생래세(前生來世)에까지 어려운 문제로 뻗쳐지게 되지만 살아오다 보니까 인연설에 한해서만은 인생에 절대성을 지니고 있다는 걸 환상이 아닌 실감으로 느끼게 될 때가 많았었다.

나는 둘째 딸을 참 아기자기 예쁘게 길렀다. 지금은 멀리 떨어져 사는 그는 어려서부터 나의 그림 모델이 되어 주기도 했다.

그가 스무 살이 넘고 스물네 살이 되던 해에 나는 공연히 안절부절 불안했고 스물다섯 살이 되자 비로소 마음이 놓이던 이유는 일란성 쌍동녀 같았던 여동생이 그 스물넷에 죽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생전에 다정했던 여동생의 외로운 영혼이 나의 모체에 들려 전생한 것이 아닐까 했던 부질없는 기우 때문이었다.

그 이전 나의 소위 세계일주 스케치 여행 때 나는 마지막으로 이태리의 피렌체에 들려 위지미술관에서 보티첼리의 <뷔너스의 탄생>등 작품을 보고 참 행복했었다.

또 그의 대표작인 <봄의 탄생>은 내가 좋아하는 그림 중의 하나였다. 맨 앞에 현세의 히피같이 꽃에 둘러싸인 모습의 신비로운 미소를 띄운 주인공 같은 여자에게 반했었다. 훗날 책에서 읽고 안 일이지만 그 모델의 주인공은 시모네타라는 이름의 당시 성주의 딸이었다는데 일찍 죽었다고 했다. 나는 또 전생의 여동생 문제가 해결되다 보니까 딸이 시모네타의 전생이 아닌가 하고 막연한 불안을 느끼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나의 지나친 사랑에서 해방된 그녀는 미국에서 잘 살고 있다. 딸과 나와의 인연이 끊기다시피 되어 어떤 동화에 나오는 마술사에게 어린 딸을 빼앗긴 것 같아 시모네타의 환상이 현실화 되었음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죽지 않고 잘 살고 있으니 다행이다.

지금 이 순간 눈을 감지 않는데도 내 방에 있는 뭇 사물과 함께 노오란 기생(妓生) 코스모스라든가 썬세트(노을빛 코스모스), 라이락, 호박잎, 몇 그루의 상록수들 사이로 우리 개 꽃순이가 뛰어 놀던 서교동 집뜰 정경이 오버랩 해와 좁은 시야가 무척 번거롭기만 하다. 우리는 몇 달 전만 해도 그 집에서 살았고 결코 행복했다고 할 수 없는 그 시절이었지만 뜰이 있고 개도 있고 꽃도 피고 가족들도 많았던 그 시절엔 생활의 리듬이 있었다. 그런데 모든 사랑의 대상들이 차례차례 나에게서 떨어져나갔고 나는 노모와 함께 이 아파트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그 후둑후둑 맥박이 뛰듯한 희비극이 소용돌이치던 서교동 생활을 청산하고 보니 이곳은 외부의 냉냉하고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도 너무나도 고요하기만 하다. 또 대인 공포증으로 사람이 싫어진 나로서는 안성맞춤의 환경 속에 들어앉아 버려 다행한 일인지 모르나 한편 서글퍼진다.

강변도로를 연해 솟은 도신의 현대식 건물들, 그리고 멀리 엷은 빛으로 펼쳐진 산들은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듯하다.

 강변로에는 쉴 사이 없이 움직이는 자동차의 행렬이 있다.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로 가는 버스요 승용차들일까. 그 사이에 또 어디서 오고 있는지 하얀 전동차가 평화롭게 지나간다. 유선형으로 된 머리부분과 까만 점 같은 차창들이 꼭 누에같이 생겼다.

윤회 전생한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보이지는 않지만 각기 정해진 칸에 수용되어 저런 열차를 타고 언젠가는 종점에 닿아 일생을 마치는 것이 아닌지.

우등열차에 오른 인생, 그리고 정감서린 좋은 동승자들과 어울려 앉은 요행의 인생은 보다 쾌적한 여행을 할 수 있을 것이고 그 반대의 경우는 신고(辛苦)끝에 좌절되고 더러는 이겨내서 그 체험 때문에 깊고 완숙된 정신적 승리자가 될 것이다.

나는 어떤 열차를 탔을까, 가슴에 손을 얹어 생각해본다. 전자도 후자도 아닌 퍽 어정쩡한 완행열차를 타고 있고 어느덧 종점이 다가오는 시간을 달리고 있는 것만 같다. 그 짧다면 아쉽고 길다면 어차피 지나가 버린 사연들은 다시 붙잡고 싶지도 않는 미련 없는 과거일 뿐 이상하게도 담담한 기분이다.

그러나 ‘나’ 어떡하란 말인가. 무척이나 보고 싶은 얼굴들을 많이 잃었었다. 나는 사람은 죽으면 저승에 머무르는 동안 사랑하는 혈육이나 보고 싶은 얼굴을 만날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느 학자 점술가의 말에 의하면 팔만대장경에 쓰여 있는 구절인데  저승의 시간대가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오백 년이 걸려도 만날까 말까라고 쓰여 있다고 했다. 정말 어떡하란 말인가…

궂은 일, 때로는 좋은 일들로 수다한 사연들을 안고 후려치는 바람막이 하느라 정신 차릴 수 없던 사이에 세월은 흘러갔고 살아 있는 혈육들마저도 뿔뿔이 너무나 먼 곳으로 흩어져 나가 있는 고독을 새삼스럽게 의식하게 된다. 저렇게 바라다 보이는 강 건너 수묵화같이 희미하게 보인 곳으로 말이다.

내가 타고 있는 인생열차의 칸에는 낯 설은 타인들로 꽉 차 있는 것만 같다. 그 속에서 내가 먼저 콜라나 담배를 권하며 친해 보려고 말 붙임 해 보려는 외로움…

그런데 어느 간이역에 열차가 잠시 멈췄을 때, 남자인지 여자인지 아들인지 딸인지 누군가 다른 칸에서 뭣을 들고 나를 향해 다가오더니 ‘엄마, 도시락 먹어. 엄마가 이 기차에 탄줄 몰랐네. 나는 쩌어기 앞칸에 타고 있었는데..’

나는 운명적으로 함께 나란히 앉은 든든한 자식은 없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비록 칸은 달라도 같은 방향을 가고 있는 자식 하나가 꼭 있다고 믿고 있다.

창 밖 저어 아래서 강변의 버들가지가 바람에 하늘거린다.

오늘따라 유난히 친근감이 더 느껴지는 버드나무, 내 친구.

아무튼 종착역까지 가는 시간까지 끈질기게 일하고 먼 후세에까지 평화롭게 누에 같은 자동차가 달리고 있을 수 있는 복된 세상이 무궁하게 지속되길 빈다.

요즈음 와서는 금요일이 기다려진다. 금요일 다음엔 토요일이 오기 때문이다.

금요일엔 장에 가서 이것 저것 골라 찬거리를 사온다. 토요일에는 기다려지는 혈육이 오기 때문이다. 며느리가 손자놈을 데리고 오면 나는 그놈을 안고 강 위를 훨훨 나르는 하얀 물세를 보여 준다.

무척 신난다는 표정의 그를 볼 때마다 ‘대부’의 돈 클레오네가 만년에 뜰에서 손자와 놀고 있는 장면이 떠올라 한없이 애수에 잠기기도 한다.

토요일엔 또 군복무가 얼마 남지 않은 막내가 오는 날이다. 그리고 일요일엔 부대로 돌아가 버린다. 워낙 친구들을 좋아해 불려나가 버리니 무정하게도 나와 대화를 나눌 시간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나는 그를 기다린다.

노모는 아침을 들지 않고 나는 저녁을 먹지 않기 때문에 서로 시간대가 뒤틀려 우리 식구들이 함께 식탁에 앉아 보기는 거의 없는 생활이다. 결국 제각기 혼자서 밥상을 받게 된다. 우리 집의 가정적인 고독은 여기에 그 근원이 있는 것 같다.

일각일각, 목각에다 칼집을 하듯 시간은 깎여 내려가는데 나는 커튼을 걷어 창 밖 경치를 바라본다. 휘황찬란한 강북(江北) 불빛 그림자가 물에 비치지 않는 것은 추위에 한강이 꽁꽁 언 탓인가 보다.

멀리 줄이어 달리는 자동차 불빛은 호박넝쿨 위를 나르는 뽀얀 반딧불같이 아름답다. 나는 이곳에서 사는 동안 무엇이든지 아름답게 나름대로 느끼며 답답하면 춘하추동 변하는 강물, 눈 오고 비 오고 때때로 안개 자욱한 강변풍경을 바라보면서 생업에 미쳐 살  길밖에 없다.

칠흙 같은 하늘에서 눈보라가 휘날리기 시작한다.

나는 갑자기 에밀리 브론테처럼 의젓한 자세로  창 밖을 응시한다.

브론테의 시야엔 공동묘지와 멀리 은백색으로 펼쳐진 폭풍의 언덕이 보였을 것이다.

내 시야엔 역시 어둠과 하얀 눈이 엉켜 은회색 하늘과 닿아 버린듯한 강건너 도시의 뿌우연 불빛 띠가 그지없이 묘하게 보인다. 눈 아래 강변로를 끊임없이 달리는 자동차 불빛 띠 역시 희한하다.

이런 상황은 나를 에밀리 브론테로 만들고 어떤 시대가 돼도 상관없는 어느 성주의 미망인으로도 만들어 버린다.

환상은 꼬리를 물어 먼 태고와 미지의 미래세계에서나 볼 수 있는 꿈같은 풍물이 보이는 듯해 앞으로의 작품을 위해 찰칵찰칵 가슴 속에 든 사진기 셔터를 눌러재킨다.

하염없는 환상을 깨듯, 어머니 방, 텔레비젼에서 흘러간 가수가 부르는 노래 ‘아, 아, 아 황혼의 엘~레~지…. ‘가 새어 나오고 있다.

 

  1. 나의 필사 筆寫는, 손으로 쓰는 것이 아니고 PC keyboardtyping하는 것을 뜻함.

지나간 주, 주일날 대림특강이란 것이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있었다. 대림절 the Advent 이면 거의 예외 없이 있는 이 ‘특강’ 에서는 , 몇 년 전까지 이곳의 보좌신부님으로 수고하시고 귀국한  ‘애 같이 해맑은‘ 한민 토마스 신부님이 강론을 하셨는데 역시 ‘예의’ 강론 내용과 스타일은 전혀 전과 변함이 없었다. 일상에서, 특히 가족관계에서 몸소 겪었던 것들에서 어쩌면 그렇게 주옥 같은 영성 소재들을 찾고, 실감나게 전하는지, 이것은 이 신부님만의 ‘특기’인 듯 싶었다.

재미도 있지만 깊이 있는 강론 끝에 ‘예수회 후원회’ 간담회가 있었는데 어쩌다가 우리도 참석을 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책 한 권을 구입하게 되었다. 그 제목이 너무도 평범한 느낌의 ‘하느님 나라 이야기’였다. 특강을 마치며 이 책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있었는데 물론 ‘저자’에 관한 것이었다. 저자 ‘김우중’ 수사,  이것 또한 너무나 세속적 이름이 아닌가… 큰 관심을 가지기에 역부족인 듯 했지만 저자에 관한 ‘개인적인 사연’을 간단히 들었기에 관심을 갖고 그 책을 사서 읽게 되었다.  대한민국 대학원 출신, 자동차회사 연구원 생활 이후에 길고도 험난한 사제의 길을 택한 수사님이라면 예사롭지 않은 경험의 소유자임은 분명하다.

책, book 이라기 보다는 ‘소책자’, booklet에 가까운 ‘사진과 글’이 적당히 얽힌, 편한 소파 에 누워 읽기에 안성맞춤인 책.. 이 ‘젊은 수사’가 과연 얼마나 오래 살았기에 이런 ‘경험적 영성’을 말할 수 있는지 부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거의 모두 나에게는 친근한 느낌으로 글과 사진들이 다가옴은, 나와 ‘파장, 화학’이 맞는다 고나 할까..  결국, 대림절과 대림 특강과 잘 어울리는 선물이 되었다.

예수회 한민 토마스 신부님, 조금 더 ‘어른이 되어’ 우리 성당의 주임신부님으로 오시길 기도합니다.

 

이 소책자의 많은 글 중에서 다음의 사진과 글이 눈에 들어온다.

 

사진: 김우중

 

빛과 어둠

 

빛이 강하면 어둠 또한 강합니다.

한 여름의 강한 태양빛은 더욱 짙은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지난 시간 유난히도 짙은 어둠 속에 사셨다면,

그만큼 강한 빛을 받으며 사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몰랐던 것은

빛을 등지고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빛을 보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다만 빛을 향해 돌아서기만 하면 됩니다.

 

고통과 괴로움에 묶여있던 시선이 빛을 향하는 순간,

하느님의 은총이 매우 강렬한 빛처럼

늘 나에게 쏟아지고 있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새로운 태양은 늘 떠오릅니다.

이제는 빛을 바라보며 한 걸음씩 나아갑시다.

 

빛의 근원에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더욱 강한 빛 안에 살게 될 것입니다.

 

 

이 글과 사진을 읽고 보며 생각에 잠긴다.

시각이 정상인 사람이라면 너무도 당연한 것이 ‘빛’이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당연한 것일까? 빛을 물리적으로 보는 것과 그것을 ‘초월한 것’으로 보면 너무나 느낌이 다르다. 빛이 있음과 없음은 시각이 있으면 쉽게 알 수 있지만 영혼이 느끼는 빛이 없는 것은 눈을 감고 있는 것과 너무나 다르다. 그야말로 ‘지옥’이 바로 그 빛이 없는 곳이 아닐까?

따라서 빛과 ‘절대적 존재, 하느님’과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현대 인간이 그렇게 자랑하는 ‘물질적 과학주의 materialistic scientism‘에 의하면 빛과 ‘에너지’는 같은 종류이다. 한마디로 에너지가 있으면 ‘존재’이고 에너지가 없으면 ‘허공’ 그 자체인 것이다.

개인적 경험에 의하면, 한때 ‘고립감, 허탈함, 고독, 우울증’ 등으로 고생하던 시절에 나는 분명히 ‘빛’을 싫어한 경험을 했다. 보이는 것이 다 싫었기 때문이다. 그런 ‘지옥’에서 서서히 벗어나며 느끼는 것 역시 ‘빛의 존재’ 였다. 나는 분명히 주위를 밝히고 싶었다. 그것이 ‘악으로부터의 탈출’ 의 시작이었다. 밝음, 빛, 그것이 전부였다. 그 빛은 누가 시초에 생기고, 만든 것인가… 이제는 분명히 알게 되었다. 빛을 향해 돌아서는 것, 그것이 시작이었다.

 

¶  동지:  2018년 12월 19일 수요일, 이틀 뒤인 21일이 책상 위의 달력에 ‘Winter begins‘라고 쓰여 있다. 아하.. 바로 Winter Solstice, the Longest Night, Midwinter.. 고추장 냄새가 나는 우리 말 ‘동지 冬至’.. 이제는 동지란 말이 왜 그리 생소하고 심지어 우습게까지 들리는지 조금은 슬퍼진다. 그렇다. 나는 ‘동지’란 말을 들으면 내가 본향 本鄕 으로부터 얼마나 오래, 멀리 떨어져 살아왔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모양이다.

 

긴 밤 지새우고 나면 ‘진짜’ 겨울이 시작되는 날..

 

일년 중 밤이 제일 긴 날, 공식적 겨울이 시작되는 날은 이틀, 성탄은 6일, 2018년의 마지막 날은 열 이틀 정도 앞둔 날..  2018년의 남은 날들을 어떻게 지낼 것인지.. 의무행사는 등대회 망년회,  구역점심봉사, 본당 구역 송년잔치가 있지만 ‘등대회’를 제외하고는 글자 그대로 ‘의무적’인 것으로, 솔직히 ‘할 것을 해야 하는, It’s now or never의 심정’으로 별로 신나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몇 년 전만 해도 이런 것들은 나의 관심 대상이 아닌 것들이고 해야 되었어도 나는 ‘안 했을’ 그런 것들이다. 내가 변신을 한 것인지 누가 나를 그렇게 만든 것인지..

그래도 송년에 포근한 느낌을 주는 것이 있다면 60~70대 성당친교단체인 ‘어둠을 비추는’ 등대회, 같은 세대를 살았다는 인연은 믿음의 색깔도 초월하는, 생각보다 진하고 포근하다는 나의 ‘지론 至論’ 에는 아직도 변화가 없다.

 

¶  망각의 나날들:  거의 한달 만에 내 마음의 위안처, 쉼터 ‘retro‘ blog posting 을 준비한다. Blog draft들은 그 동안 많이 남겨져 있었지만 그것을 posting할 시간과 에너지가 거의 없었다. 무언가 나를 지독하게 피곤하고 심지어 쳐지게 했던 그런 지나간 한 달..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

주로 (Microsoft Office) OneNote에 남겨진 나의 단편적 기억과 사건들을 다시 모으고 엮으며 달 간의 역사를 재구성해는 작업, 쉽지 않지만 해를 보내며 꼭 해야 할 일이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 이제는 기억력이 예전과 조금 다른 것을 희미하게나마 느끼고 있다.

 

¶  Sorry, Holy Family Catholic..  오늘 아침 9시 미사엘 가니 정말 모처럼 Father Dan Ketter 가 오셨다. 도대체 몇 개월만인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오랜 만이다. 재능과 젊은 에너지가 철철 흐르는 이 신부님이 집전하는 미사에 참례를 하면 우리도 젊어지는 느낌이 들 뿐만 아니라 ‘바티칸 신학’ 강의를 듣는 기분까지 든다. 게다가 ‘목소리’가 알아 듣기에 거의 완벽한 정도의 pitch를 가졌기에 강론이 나의 모국어가 아닌 영어지만 99.99%를 알아듣는 행운까지 얻는다.

이렇게 우리는 차로 15분 거리의 이 ‘동네 성당 Holy Family Catholic Church‘와 거의 20여 년의 가족적 인연을 맺고, 6년이 넘는 매일미사의 은총을 주고 있다.  문제는 ‘미사의 꽃’인 주일미사를 이곳으로 못 가게 되어서 주일 헌금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 마디로 ‘나를 구해준 곳’의 은혜를 저버린 듯한 느낌도 드는 것이다.

작년부터 도라빌의 한국 순교자 성당 주일미사로 가는 횟수가 점점 늘어난 것은 나에게 주일날 그곳에 갈 일들이 하나 둘 씩 늘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인데, 급기야는 올 들어서 모든 주일에 무엇인가 할 일들이 나를 기다리게 되었다. 한마디로 안 갈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내가 꼭 이런 것을 바라고 원한 것은 아니었는데…

 

neighborhoods 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을나무’가 찬란한 모습으로..

 

이천 십팔 년 (no pun intended) 십일월 이십일일, 2018년 11월 21일 수요일,  깊어가는 11월에 선뜻 할 정도로 시퍼렇게 깊은 가을 하늘에는 찬란한 해가 떠오르고,  급하게 Ozzie 를 데리고 subdivision을 산책하고픈 충동을 느낀다.  하지만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공기가 너무나 싸늘한 것이 문제다. 하지만 바람이 많이 불지 않으니 집 밖에서 나갈 때의 잠깐의 써늘함만 참으면 금세 모든 것이 따뜻하게 느껴질 것, 경험으로 안다.

오늘은 나의 기분 탓으로 별다른 이유 없이 아침미사를 쉬기로 ‘합의’를 보아 하루를  ‘작은 깜짝 휴일’로 만들어 버렸다. 내일은 이곳의 최대 명절 중의 하나인 ‘고맙고, 감사하는 날’ Thanksgiving Day holiday, 어느새 한 해가 물처럼 흘렀는가? 분명히 지지난 해보다 더 한 해가 빨리 지나 간 것, 겉으로는 ‘괜찮다. 그게 정상적인 거야’ 하며 내숭은 떨지만 속으로는 세월이 역시 조금 더 빨리 흘렀구나 하는 느낌을 떨칠 수는 없다.  종교적, 기독교적 ‘종말론 eschatology‘을 안 생각할 수가 없는 시기가 또 나에게 ‘점점 빨리’  다가옴을 느낀다.

올해의 이 ‘감사절’, 작년보다 더 조용하게 보내게 되었다. 4식구 중에서 막내는 빠지고 큰애는 여행을 갔다가(Northwest region) 저녁 때 집에 온다고 하니 그때 그 애들과(with boyfriend) 같이 조금은 ‘지지고 볶은’ 저녁이나 나눌 듯.  이것은 물론 우리 집의 ‘전통적 감사절의 모습’이 아니다. 아니.. 이 정도의 나이에서는 거의 정상일지도.. 하지만 조금은 왕년의 ‘시끌벅쩍, 지지고 볶고, 떠들고 마시고..’ 하는 모든 것이 지나간 영화처럼 주마등 지나치는 듯 느껴진다. 그래 이것이 인생의 흐림인 거야..

며칠 동안 쉬지 않고 쏟아지던 싸늘~한 가을비가 오늘 이른 아침부터 조금씩 잔잔해지는 느낌이더니 결국은 멈추었다. 하지만 빗물에 완전히 젖은 낙엽들이 내뿜는 냉기는  온통 나의 몸을 움츠려 들게 한다.  작년에 연숙이 Costco 에서 사준 실내용 warm pants 로 하체는 해결이 되었는데 shirt는 고르는데 시간이 한참 걸린다. 

일기예보를 보니 올해 첫 winter storm, Avery 의 소식이 나오고 있다. 첫 눈의 소식, 물론 이 지역이 아니고 Midwest, Northeast 쪽이었지만 ‘눈 소식’을 들으니 벌써 ‘Holidays, the best time of year’ 란 숙어가 떠오른다.

작년 가을에 나의 work/study room을 아래층으로 옮긴 후 첫 겨울은 추위를 느끼며 살아야 했다. 위층에 비해서 훨씬 냉기가 대단한 것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올해 다시 맞는 큰 아래층 공간의  ‘냉기’는 사실 큰 문제가 아니었다. 지난 여름에 우리를 영원히 떠난 나의 Tobey가 없는 이 큰방, 그 사실이 추위의 냉기보다 나를 더 춥고 쓸쓸하게 만든다. Tobey대신 ‘양양이 Izzie‘ 가 나의 주변을 맴돌지만 ‘개와 고양이의 차이’는 그렇게 큰 것인가? 하지만 ‘5개월이란 세월의 약’이 작용을 하며 all shall pass, all shall pass

이른 아침 ritual (stick coffee, today’s scripture, email, New York Times newsletter, blog counts etc)을 끝내고 우연히 (사실은 며칠 전에 잠깐 보았던) 1960년대 말의 미국 TV show였던The Glen Campbell Goodtime Hour (variety show format)을 다시 보게 되었다.  아~~ 감미로운 추억이여! 아무리 잇몸이 쑤셔도 이런 60년대 말의 추억은 모든  불편함을 한때나마 잊게 해 준다. 그의 음악에 심취했던 시절, 60년대 말은 나에게 절대로 잊을 수도 놓칠 수도 없는 보물중의 보물로 남아있다. 서울에 있던 ‘미8군 방송국’이었던 AFKN 에서 이 program을 정기적으로 방영을 했고 나도 기회가 되는 때에 보곤 했었다.  연세대 전기과 기타귀재 심재흥의 영향과 도움으로 한창 기타를 배우던 시절, 이 Glen Campbell의 folk, country, rock style은 거의 교과서적인 도전을 나에게 주곤 했다.

 

 

 

한때 Elvis Presley 의 guitarist였던 그가 어떻게 그런 많은 재능을 가졌는지.. 그의 vocal style은 기타 솜씨와 거의 같은 수준이다. 다만 그도 연약한 인간이었는지 ‘유명세’의 대가를 톡톡히 치른 것으로 그의 말년이 기억되는 것은 정말 안타깝기만 하다. 그 당시에 우리는 그의 노래 A Place in the Sun 을 ‘ 따라 부르며 guitar chord와 rhythm 을 연습했다. 특히 당시 Bobbie Gentry와 duet으로 부른 Let it be me 는 당시의 시내에 음악이 흘러나오는 곳이면 항상 흘러나오던 hit song 이었고, 그 뒤로 듣던 Gentle on My Mind, By the Time I Get to Phoenix, Wichita Lineman, Galveston… 수많은 hit after hit..  훨씬 뒤에 미국에서 TV로 보고 들었던 그의 ‘대작’, big orchestra와 협연으로 부른 MacArthur Park은 정말 그만이 남겨준 영원한 classic이 되었다. 아~ 추억에 젖은 이른 아침이여…

 

 

MacArthur Park – Glen Campbell

 

 

Let it be me – Glen Campbell & Bobbie Gentry – 1969

 

Tobey가 잠자고 있는 낙엽에 덥힌 뒷마당에 늦가을비가 세차게..

 

¶  비 쏟아지는 월요일:  하루 종일 어두운 하늘에서 싸늘한 비가 줄기차게 내린다. 비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물론 반가운 선물같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flood warning이 나올 정도가 되면 선물의 정도를 넘은 것이다. 게다가 가끔 물이 새는 2층 지붕도 신경이 쓰인다. 그래도 조금 불편한 것이 있어도 이것은 역시 ‘가을비’가 아닌가? 각가지 감상적 생각들이 머리를 꽉 채운다. 물론 대부분 추억에 얽힌 생각들이다. 게다가 이런 을씨년스러운 가을비에 나의 영원한 친구 Tobey가 내 옆에 없다는 새로운 사실이 가슴에 걸린다. 이런 때면 나의 무릎에서 편하게, 평화스럽게 코를 골며 자던 그 녀석.. 비록 육신은 뒤뜰 땅속에 묻혔어도 녀석의 느낌은 아마도 내가 죽을 때까지 나를 따라다닐 듯하다.

 

Saybrook Court에 아직도 남은 가을 낙엽들, 과연 언제까지 버틸까..

 

월요일에 내리는 비, 70년대 초 (1971년) The Carpenters의 classic oldie, Rainy Days and Mondays가 문득 떠오른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다시 없는  목소리’ Karen Carpenter의 잔잔하지만 깊은 목소리가 귓전을 맴돈다. 그렇다.. 1970년 초.. 미지의 세계를 향한 꿈을 꾸던 멋진 시절에 들었던 ‘비 오는 월요일’은 큰 의미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노래의 가사처럼 ‘모조리 우울한 것’들이었다. 그런 감정이 반세기 뒤에 완전히 뒤바뀌어 이제는 반대로 즐기는 ‘선물’이 된 것이다. 세월의 조화가 아닐까?

 

이렇게 세차게, 힘차게 쏟아지는 비는 나의 혼탁한 머리 속을 씻어주는데..

이런 때면 문지방에 편하게 엎드려 하염 없이 비를 바라보던 Tobey는 이제..

 

요새 갑자기 ‘기분과 몸’이 훨씬 나아진 연숙 덕분에 다시 규칙적인 정상적 생활을 찾기 시작해서 오늘 아침도 예의 daily morning mass, adoration chapel, Sonata cafe, 그리고 YMCA workout의 routine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역시 예외는 예외다. 갑자기 연숙에게 ‘감기 기운’이 덮친 모양, 열이 나고 목이 잠기고 기운이 빠지고.. 나 같으면 그런 것 참거나 숨기거나 하겠지만 사람은 다 다르니까.. 이럴 때 제일 중요한 것이 Bishop Robert Barron이 즐겨 강조하는 prudence 란 것이다. 나도 그의 말에 동감이다. 때와 장소에 따른 각가지 ‘덕목’들이 항상 같지 않고, 지혜롭게 ‘조절’을 해야 한다는 wisdom. 그저 참고 해야 할 것을 다 끝내느냐, 아니면 내일을 생각해서 할 것을 포기하느냐.. 결국은 내일을 생각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일은 일주일에 제일 중요한 레지오 주회합이 있는 화요일 ‘Legio’ Tuesday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실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날인 것이다.

 

 

Rainy Days and Mondays – The Carpenter – 1971

 

¶  ‘기타귀재’ 심재흥, 50년 전:  어제 중앙고, 연세대, 연호회 친구, 이윤기와 뜻밖으로 KakaoTalk 에 연결이 되어서 감회 깊은 이야기(texting)를 나누었다. 본지가 50년도 넘은 사람과 어제 헤어진 듯한 느낌으로 대화하는 것, 솔직히 이것이 바로 surreal 한 느낌이 아닌지.. surreal, surreal..  한마디로 실감이 안 나는 것이다.

얼마 전 같은 그룹친구 양건주의 주도로 우리들 4명 (나, 양건주, 이윤기, 윤인송)이 기적적으로 단체 카톡방에서 몇 마디나마 서로의 숨결을 느끼게 되었다. 언제고 이 친구들의 최소한의 안부 정도는 알 수 있겠다는 안도감마저 들었다.  모두 친한 친구들이었고 특히 윤기는 헤어진 이후 거의 연락을 못하고 살아서 궁금한 것들이 더 많았지만 ‘거리와 세월의 횡포’ 의 희생자로 일생을 보낸 셈이다.

이 친구가 video하나를 올렸는데.. 1960년대 일본에서 활약했던 그 유명한 The Ventures를 ‘흉내’낸 electric guitar group의 공연이었다.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심재흥‘이란 이름을 떠 올렸다. 50년 전의 그 이름이 이윤기란 친구의 기억과 겹치며 떠오른 것이다. 연세대 전기과 동문들.. 그 중에 ‘기타귀재’라고 불리던 친구, 그가 심재흥이었다. 1969년의 회고담을 쓰려고 하던 참이라서 참 timing이 절묘하다고 할까..

 

그 당시 일제 electric guitar, 심재흥의 도움으로 샀고 역시 그의 도움으로 팔았던 기억..

 

그 당시 나는 이 ‘귀재’로부터 기타(특히 electric guitar)의 매력을 배웠다. 자세한 테크닉을 배운 것은 아니었어도 그가 연주하는 것을 보며 넋을 잃고 바라보기도 한 것, 나중에, 아니 지금까지 (통)기타를 손에서 떨어지지 않게 했던, 엄청난 영향을 준 것,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지나가는 말로 ‘심재흥’이란 이름을 언급하니 놀랍게도 이번에 보낸 ‘벤쳐스’ 동영상’이 바로 그 친구가 보낸 것이라는 것이 아닌가? 얼마 후에 연세대 전기과 동문들이 모이는데 그 친구도 만난다는 얘기에 나는 솔직히 꿈을 꾸는 듯한 느낌조차 들었다. ‘세월과 거리의 횡포’.. 도 이렇게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구나…

 

 

The VenturesWipeout live in Japan 1966

 

¶  사랑의 기다림:  지난 토요일 모처럼 우리는 ‘자매 성당’인 둘루스 Duluth, GA  에 있는 김대건 성당엘 갔다. 이날 그곳에서 ‘추계 일일 침묵피정’이 거의 하루 종일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집에서 거의 30마일이나 떨어진 곳을 아침 8시에 집을 떠나야 하는 것 물론 귀찮은 일이었지만, 그래도 나의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가라, 가라, 무조건 참석해라’ 라는 무언가를 거역할 수 없었다. 가만히 보니 근래 나는 이 ‘가슴 속 깊은 곳의 무엇’을 조금씩 느끼며 사는 듯하다. 그것이 거창하게 ‘성령’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유행하는 과학적 표현으로 아마도 quantum message 정도는 아닐까?

4년 전에 이곳으로 같은 피정에 온 기억이 남아있지만 매번 지도신부가 다르니까 피정의 결과는 매번 다를 것이다. 아침 점심 식사를 포함해서 각각 두 번의 신부님 강의와 침묵 묵상이 번갈아 가며 오후까지 계속되고 마지막에 미사로 끝을 맺는다. 이번의 지도 신부님은 우리의 도라빌 본당 보좌신부인 ‘김형철 시메온’ 신부님으로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비교적 젊은 신부다.  ‘사랑의 기다림’이란 포근한 주제로 ‘전혀 지루하지 않고, 졸리지 않는’ presentation을 했다.

요사이 신부님들의 강론을 들으면서 느끼는 것은 이분들 ‘과학적인 용어’를 많이 사용한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요새 신학교가 지나간 반세기 동안 급변하고 있는 과학문명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까? ‘갈릴레오 사건’으로 체면이 완전히 구겨진 가톨릭 전통을 상기하면 격세지감이 든다. 이날 김 시메온 신부님의 강론 서두가 이것을 말해준다. ‘거시적 우주론, Cosmology’ 으로 주제를 이끌었던 것이다. 아마도 더 기다리면 아마도 상대성이론, Quantum MechanicsString Theory 까지도 거론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이런 추세를 절대적으로 환영하는 입장이지만 ‘철학적, 신화적’ 접근을 좋아하는 일반 신자, 대부분 여성들에게 이것이 크게 appeal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  Running ‘C’ wire Smart Home, Smartphone (now one word), Smart TV, 그리고 Smart ‘Stat (thermostat) ..

덧없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나를 스쳐 지나는 이런 단어들,   이것들 중에서 나와 역사적으로 제일 오래된 것이 smart home일 것이고,  다음이 Smartphone, 그리고 지금 나의 코앞에 다가온 것이 바로 Smart Thermostat 이다. 얼마 전에 두 ‘아이’들이 우리에게 준 2대의  ‘dumb’ 40+” TV는 Roku, ChromeCast gadget 덕분에 곧바로 Internet streaming를 하는 smart tv의 기능을 갖추게 되어서 그런대로 우리 집도 ‘현대화’의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 우연히 큰딸 boyfriend Richard가 최신형으로 upgrade 한다고 2개의 smart thermostat를  우리에게 주었다.  그것이 EcoBee 라는 ‘웃기지 않게’ 비싼 사치품 thermostat였다. 집안의 heating & cooling system(HVAC) 을 control 하는 것이 thermostat인데 이것의 내부 구조는 간단한 electrical switch에 불과해서 예전까지 이것은 비쌀 수가 없는 그런 것이었다. 그것이 복잡한, 그러니까 smart하게 보이는 기능을 잔뜩 넣어서 멋진 fashion을 만들어 고가로 파는 것, 나에게는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는 추세다. 수백 년 전통의 coffee를 Starbucks로 비싸게 파는 것이나 맹물을 bottle에 넣어서 파는 것과 다를 것 하나도 없다. 하지만 비싼 것은 비싼 이유가 있을 것이다.

2 ‘given’ Ecobee smart thermostats

 

현재 우리 집에 있는 것은 기본적인 programmable thermostat로서 하루에 네 번 정도 시간에 따라 온도를 조절하는 model로서 사실 그렇게 불편한 것은 없다.  바쁜 생활을 하는 집에서는 더 복잡한 timing이 필요할지 모르지만 retire한 상태에서는 복잡한 것이 더 골치가 아프다.  하지만 이것을 program 하는 것이 그렇게 편하지 않다. 대부분 어두운 복도에 설치된 이것을 서있는 상태에서 그 작은 글씨를 보며 program하는 것 거의 torture에 가깝다. 그래서 한번 program해 놓으면 거의 바꾸지도 않고 그러기도 싫은 것이다.  그런 것이 지금은  Smartphone이나 PC의 보기 좋은 screen을 편한 곳에 누워서 program을 할 수 있다는 사실… 그것 하나만으로 나는 족하다.

이것을 나에게 주면서 Richard는 현재 우리 집 thermostat에  ‘C’ wire가 연결되어 있냐고 물어서..  속으로 이것이 무슨 말인가 궁금했지만 우선 ‘있다’고 대답을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사실 그것이 우리에게는 없는 extra wire, 24V transformer의 ‘common’ (power return) 임을 알게 되었다.

왜 이 ‘놈’이 필요한가 보니, smart ‘stat(thermostat)는 Smartphone과 같이 하나의 독립된 small computer라서 power, 본격적인 전원이 필요해서 그런 것이었다.  작은 computer라고 했지만 기능적으로 보면 웬만한 예전의 desktop PC의 그것이고, 특히 WiFi 가 필요한 것이라 생각보다 energy를 많이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것과 다르게, 오래 전에 쓰던 mechanical ‘stat는 전혀 power가 필요 없었고 요새 많이 쓰고 있는 programmable ‘stat는 거의 모두 battery를 쓰기에 따로 power supply wire가 필요 없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4 wires가 필요한데 (1) 24V hot side, (2) fan on, (3) heat request, (4) cool request 가 그것들이다. 예를 들면 heat가 필요하면 (1)과 (3)을 연결하면 된다.  그러니까 24V hot side가 return되는 ‘common’ 이 사실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새로 나오는 smart ‘stat들을 ‘팔아 먹으려면’ 이 extra wire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인데, 해결책은 이 wire를 furnace control board로부터  thermostat가 있는 곳까지 끌어내야 한다. 이 작업을 과연 몇 명이나 ‘감히’ 할 수 있을까.. 물론 handy한 공돌이를 제외하고. 

다행히도 우리 집의 in-wall wiring은 home pc networking 시절부터 10base2, 그 후의 CAT5 cabling 까지 모두 내가 설치했기에 사실 이번의 ‘C’ wiring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 정도로 쉬운 job이다. 다행히 남아도는 CAT5 cable이 많아서 그것으로 위층은 해결이 되었다. 아래층 것이 끝나면 드디어 EcoBee 를 연결해 볼 수 있을 것이고 요새 아이들 자랑스럽게 말하는 ‘Smartphone으로 언제 어디서나 집의 온도를 맞출 수 있다’ 라는 것, 나도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  토요일을 수도원에서:  싸늘하지만 기가 막히게 화창한 ‘영광스러운’ 가을 하늘아래 일년 만에 다시 한 시간 정도의 drive로 Conyers, GA 의 수도원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곳은 사실 부끄럽지만 ‘자발적’으로 간 적은 없고 무슨 계기가 있으면 가는 그런 곳이다. 위치나 분위기를 보아서 이곳에 갔다 오면 다음에는 반드시 ‘자발적’으로 가보자, 문득 ‘평화로운 곳’ 생각이 들면 그곳을 차를 몰자.. 등등의 상상을 해 보곤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계기’가 생기만 거의 두 번 생각을 안 하고 OK를 하곤 했다. 올해도 그런 식으로 연숙을 포함한 교사들이 인솔하는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의 예비신자 교리반 일행을 따라서 가게 되었다.

 

a spectacular view of the pond at the monastery..

 

5~6년 전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그렇게 생소하던 곳이 이제는 연륜이 쌓여가는지 아주 편안하고 익숙한 느낌이 든다. 제일 기억에 남던 때가 레지오 피정을 이곳에서 했을 때가 아닐까? 밤늦게 어두운 대성전에 홀로 앉아서 묵상하던 경험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아주 강렬한 것이었다. 사람은 역시 ‘주위 환경’에 철저히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오감의 피조물이지만 그것을 초월하는 무엇을 이런 곳에서 느끼고 받을 수 있음을 경험한 곳이기도 하다.

교리반 학생들은 이런 곳에서 무엇을 느끼고 배울까.. 이날도 방문후의 소감들을 나누는 시간에서 간간히 들을 수 있었다. 대부분 너무나 생소한 것을 보았다는 나눔, 이해가 간다. 어찌 안 그렇겠는가? 하지만 생소함과 더불어 ‘신비적 경건함’도 느꼈다는 나눔은 아주 고무적인 것이 아닌가?  이들의 앞으로의 신앙여정은 어떨까..  과연 얼마나 궁극적으로 ‘절대존재’를 알게 될까… 큰 유혹 없이 세례의 은총을 받게 되기를 속으로 기도했다.

이날 오랜 만에 gift shop에서 책을 한 권 샀다. 몇 년 전에 왔을 때 C. S. LewisThe Joyful Christian이란 책을 산 적이 있었고 그때 이곳은 Amazon.com 같은 discount가 없음을 알았다. 그러니까 list price대로 파는 것이다. 이것으로 수도원을 유지해야 함을 누가 모를까? 이날도 그것을 알고 샀는데, 메주고리예 발현에 관한 Janice T. ConnellThe Vision of the Children 이란 책으로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주 뜻밖의 보물을 발견한 느낌이 들었다.  비교적 읽기 쉬운 책으로 오자마자 거의 1/3을 읽었는데 ‘뜻밖의 보물’이란 느낌이 계속 사라지지 않았다.

 

¶  2권의 ‘반갑고 고마운’ 책들:  문밖에서 bell 소리가 들린다. 누가 온 것, 귀찮은 sales, 아니면 delivery? 조용히 밖을 보니 벌써 누가 무엇을 문 앞에 놔두고 가는 모습이 보인다. 아하~ FedEx van이 보이니 무엇이 배달된 것이었다. 익숙한 package이지만 나는 요새 아무것도 산 것이 없는데… 하고 shipping label을 읽으니.. 아니~ 대한민국에서 온 것, 누가?  아하~ ‘도사’ 양건주가 책을 보낸 것이었다.

 

FedEx package from Korea

 

얼마 전 오랜만에 다시 연락이 되어서 너무나 반가웠는데, 이상하게 ‘주소’를 물어보았는데 그것이 바로 책을 보내려고 그랬던 것이다. 다시 눈가가 찡~ 해 짐을 느꼈다. 친구야, 친구야… 고맙다, 친구야.. 어쩌면 너는 그렇게 자상하고 배려심이 깊은가? 나는 아무래도 못 따라가는데.. 이 친구에게 받았던 ‘책 선물’이 꽤 되는데.. 책 값도 그렇지만 이렇게 실제로 행동으로 귀찮을 수 있는 일을 하는 ‘고물 우정’에 어떻게 응답을 한 것인가?  이해인 수녀님의 ‘기다리는 행복’ 이란 수필집과, 얼마 전에 출판된 ‘따끈따끈한’ 책 ‘글배우’라는 독특한 이름의 저자가 쓴 ‘오늘처럼 내가 싫었던 날은 없다’ 라는 제목을 가진 책, 모두 2권이었다. 책 값만큼 우송료가 대단했는데.. 그것도 FedEx로 속달이 된 것이다.

이해인 수녀님은 사실 종파를 떠나서 일반인들에게도 친숙한 분이지만 연숙이 특히 좋아하는 수녀님이다. 그 책은 연숙이 먼저 보기로 하고 나는 현재 ‘글배우’라는 저자가 쓴 ‘오늘처럼…’ 이란 책을 읽고 있는데, 잠깐 훑어 보니 대부분이 ‘상식적 수준의 조언’들이지만 어떤 것들은 나의 생각이 맞는다는 재확인을 하게 하는 것들도 보였다. 책의 부제가 ‘무너진 자존감을 일으켜줄 글배우의 마음 수업’으로 되어있으니 아마도 대부분 ‘무너진 자존감’에 대한 조언들일 것이다. 나의 자존감은 분명히 예전 보다는 많이 오른 상태지만 그래도 이렇게 나를 생각해 주는 ‘벗’이 지구상 어디에 살고 있다는 생각은 나를 ‘하늘로 뜨게’ 만든다. 건주야.. 고맙다, 고마워. 행복하게 살아다오.

 

시월의 마지막 날들이 서서히 저물어가고 결국은 그 바로 마지막 날 31일도 찬란한 석양을 등지고 나를 떠나려 하고 있다. 서재 work desk위에서 24시간 나를 응시하고 있는 life journal, monthly calendar를 본다. 9월에 못지 않게 무언가 많은 깨알 같은 작은 글씨로 가득 차있다. 시월의 31일 동안 과연 나는 무엇을 생각하며 살았는가?

 

 

오늘은 10월 31일, Halloween.. 조금 후 해가 떨어지면 어둠 속에서 동네의 아이들이 하나 둘씩 올 것이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이날은 우리에게도 조금은 의미가 있던 ‘미국의 명절’이었지만 아이들이 머리가 커져서 집을 다 떠난 후 모든 것이 빛을 잃었다. 문 앞에 pumpkin light를 켜 놓고 각종 candy를 준비하는 행사가 사라지고 이제는 불을 다 꺼놓고 ‘숨을 죽이며’ trick or treat 행렬이 사라지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참, 세월이란 이런 것이지.. 조금은 쓸쓸해지는 감정을 누를 수가 없다. 그것이 요새의 10월 31일이다.

 

¶  건주의 ‘잊혀진 계절’:  며칠 전에 정말 예기치도 않게 ‘그리운 벗’ 양건주에게서 email이 날라왔다. 어떻게 나의 email을 기억했는지.. 마지막으로 연락이 된 것이 아마도 10여 년 이상이 되었을 듯하다. 하지만 다른 ‘사라진 친구들’과 달리 이 친구 건주만은 아마도 ‘죽을 때까지’ 연락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이상한 예감은 있었다. 그것이 바로 이 친구의 매력이다. 생일이 불과 나보다 며칠을 앞서고 있지만 건주의 ‘정신연령’은 나의 형 같이 편안하고 성숙하게 느껴진다.

거의 반세기 전 헤어진 이후 아마도 처음으로 ‘음성통화’가 kakaotalk voice call로  너무나 쉽게 해결이 되었다.  글자와 음성의 차이는 무엇인가? 전화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내가 기억하고 있던 건주의 목소리와 아주 다르지 않았다. 목소리의 느낌은 반세기 전의 바로 그것이었다. 나의 목소리는 아마도 건주의 기억과 아주 다른 듯한 반응이어서 조금은 실망했지만 그것이 세월의 횡포가 아니겠는가? online 활동으로 아주 바쁘고 건강하게 사는 듯한 그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 그렇게 어렵지 않다. Internet의 덕분으로 곧바로 우리 클럽, 연호회의 멤버들 중에 윤기와 인송이 곧바로 kakaotalk  으로 연결이 되었다.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상상의 나래를 편다. 건주와 달리 ‘표현력’이 떨어지는 그들과 얘기하는 것 크게 기대는 안 하지만 ‘죽지 않고, 건강하게’ 살고 있음을 계속 알게 된다는 사실은 나를 기쁘게 한다.

어제는 건주가 kakaotalk으로 music video를 하나 보내왔다. 이런 곳으로 날라오는 video를 나는 ‘원칙적으로’ open을 안 한다. 우리 나이에 이런 것들 내용을 짐작하는 것 그렇게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은 무시할 수가 없었다. 보낸 사람이 ‘도사 양건주’ 였으니까.. 설마 또 ‘극우파 선전’ 같은 것은 아닐 듯 하고.. 의외로 잔잔하고 감미로운 노래였다. 물론 내가 알 수 없는 곡이었지만 곡조는 어디선가 들어본 듯 하기도 하였다. 알고 보니 ‘이용’이란 사람이 1980년대에 불렀다는 ‘잊혀진 계절’이란 classic oldie였다.  건주가 이런 노래를 아직도 기억하며 좋아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설마 우리들 30대에 나온 노래를 나에게 보낸 것, 조금 의아하긴 했다. 그 비밀이 오늘 아침에 풀렸다. 연숙에게 지나가는 말로 이 노래에 대해서 물어보니… 그 노래는 10월 31일에 부르는 노래라는 ‘웃기는’ 사연이었다. 왜? 가사에 그런 내용이 나온다는 것이었고… 아하! 그래서 10월 말경에 나에게 이런 노래를 보냈구나.. 역시… ‘도사 건주’로구나 감탄사가 흘러 나왔다. 건주야 고맙다!

 

 

 

The Exorcist: 아 늦은 나이에도 아직도 무서운 것이 나에게 있다. 특히 Halloween이 다가오면 이것이 나를 더 자극하며 신경을 건드리는 것이다. 1973년 12월에 미국을 경악하게 했던 것, 영화 The Exorcist… 이 글자만 봐도 나는 아직도 무서운 것이다. 이것은 내가 이즈음이며 매년 겪는 이상한 현상이다. 올해는 이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아야지… 하지만 매번 이 영화를 20분 정도 보다가 포기하는 것이다. 20분의 대부분은 영화의 첫 부분, Iraq의 유적발굴에 관한 것이고 미국의 Washington D.C.의  Georgetown scene 이 시작될 무렵이다. 그러니까 진짜 무서운 것들이 시작되기 훨씬 전이다.

 

 

물론 강제로 나머지 부분을 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무서운 ‘악의 모습’을 보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 옛날 처음 봤을 때의 기억이 살아나는 바로 그것이다. 그 당시 영화를 보고1 한 동안은 ‘진짜로 무서운’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어두운 곳에서는 괴물로 변한 ‘아이 Regan‘의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한마디로 도망갈 수가 없었다. 그 괴로운 추억이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은 것을 보면 얼마나 그 당시의 충격이 심했던지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이 영화로 부터 ‘가톨릭’ 신앙을 접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음에 감사를 하고 있다.

  1. 나는 이것을 Chicago에서 처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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