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ony's Friends

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슬그머니 6월을 맞는다. 어제로 가버린 2019년 5월은 사실 온통 ‘어머니’의 모습으로 가득한 ‘제일 좋은 시절’ 이었지만 5월의 마지막 2주간의 ‘한여름 더위’는 기억에 남을 듯하다. 6월의 싱그러움은 뒷마당의 초록색의 향연으로 익히 즐기고 있지만 사실 나에게 이달은 우울한 추억이 있기에 조금은 슬퍼지기도 한다. 작년 6월에 영원히 우리 곁에서 떠나간 ‘나의 아들’ Tobey, 일년의 세월이 조금은 슬픈 기억을 무디게 한 듯 하지만 사실은 아직도 나는 ‘작은 고통’을 느낀다.

안톤 슈낙의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의 6월은 역시 그의 특유의 ‘푸른 여름,  자연의 찬가’를 들려준다. 그는 자연주의자인가, 어떻게 그렇게 주변의 소소한 것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우리와 함께 진화하며 살아가는 친구들임을 나이가 들어가며 더욱 실감한다. 특히 birch tree, 버치, 어릴 때 따먹던 ‘뻐찌’열매로 알고 있던 것들과 함께 역시 6월, 초록색의 싱그러움을 예민하게 관찰한 이 6월의 찬가를 안톤 슈낙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 들 중에 하나로 꼽았다.

이미 여름 같은 더위에 익숙해졌기에 더위는 그리 두렵지 않지만, 6월의 하루, 6월 25일을 다시 맞으며 나는 6.25 동란을 피해갈 수가 없다. 어떻게 나는 이런 ‘전쟁’의 피해자가 되었는가… 왜 김일성이란 괴물이 나의 시절에 존재했던가… 역사는 역사지만 인과응보적인 종말론으로 나는 조금 위안을 삼는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안톤 슈낙의 6월은..

풋풋한 사랑 체험으로 특허를 내어보라

 

스스로 잊어 버리도록 하라

 

시냇가에 앉아 보자. 될 수 있으면 너도밤나무 숲 가까이에 앉아 보도록 하자.

한 쪽 귀로는 여행길 떠나는 시냇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다른 쪽 귀로는 나무 우듬지의 잎사귀 살랑거리는 소리를 들어보자

그리고는 모든 걸 잊어보도록 해 보자. 우리 인간의 어리석음, 질투, 탐욕, 자만심 결국에는 우리 자신마저도, 사랑과 죽음조차도….

 

조금 있다가 프랑크푸르트 시의 포도농장에서 만든 1953년도 내지는 1954년도 호흐아이머 돔데샤나이 포도주를 차가운 물에서 끄집어내 마셔 보자.

첫 한 모금을 마시기 전에 사랑스런 여름 구름, 시냇물, 숲과 언덕을 둘러보며 우리들의 건강을 축복하며 건배하자.

가까운 시야에 원을 기르며 날아다니는 나비떼, 둥글게 줄지어 피어 있는 꽃들과 골짜기의 풀밭에서 부지런히 건초더미를 뒤집고 있는 자그만 여인네들도 바라보면서…

 

 

버찌씨로 유리창을 깨뜨려 보라

 

텃밭에 있는 따리 모판을 들여다 보자.

거기엔 탐스러운 딸기가 빨갛게 타오르는 숯불처럼 잘 익어가고 있다.

그 자리에서 즉각 딸기로 볼주를 만들어 보라.

우리들에게 기쁨을 선사하는 모판에 대한 고마움의 뜻으로 포도주를 약간 뿌려보자.

근처에 있는 곤충들이 애타게 볼주를 마시고 싶어 갑자기 몰려오면 가느다란 콩넝쿨대로 쫓아버리면 된다.

 

버찌나무 회초리로는 개구쟁이 사내 아이들이나 개똥지빠귀, 찌르레기들을 쫓아내면 된다.

만일 개구쟁이 사내 아이들이 버찌나무 가까이 접근해 오면 번갯불에 콩 볶듯이 뛰쳐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틀림없이 달아날 거다. 그래도 정말 소용이 없을 수가 있다.

저만치 떨어져 있는 곳에서는 개똥지빠귀 암수가 적이 불쾌한 표정을 지은 채 계속 이쪽을 기웃거리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가마우지새를 미끼로 고기를 낚는 중국 어부를 흉내내어 몰래 버찌를 따먹는 찌르레기를 괴롭히는 시도를 해 보자.

버찌 나무 가까이에 있는 커다란 전신기둥으로 가 보면, 숱하게 버찌씨가 떨어져 있다.

찌르레기가 주로 모여 있는 버찌나무 아래는 버찌씨로 꽉 덮여 있다. 그 수를 헤아려 본다면 수백 개도 더 될 거다. 그러나 실제로 그 씨의 오분의 일 정도만 다시 열매를 맺게 된다.

그러니 화를 내지 말고 비를 들고 떨어진 씨들을 쓸어 모아서 자루에 넣어 겨울까지 보관해 두었다가, 버찌씨를 먹는 겁많고 부리가 딱딱한 새들의 겨울 먹이용으로 정원길에 뿌려 두면 어떨까.

 

찌르레기들이 과일 서리 수업을 받고 있는 버찌나무에 계속해서 돌을 던져 보자.

정확히 잘 맞는다고 잘난 체 으스대지 말고 차라리 나무 뒤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 작은 집의 알록달록한 유리창을 돌을 던져 깨뜨려 보자.

중요한 건 산산이 부서진 유리 조각들 때문에 끊임없이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난다는 건데, 찌르레기들은 이런 소음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싫어한다.

다만 자기 자신들이 내는 소음만은 별반 시끄럽게 여기지 않으면서 말이다.

 

 

새들이 읽을 수 있는 글자로 푯말을 세워라

 

만일 정원에 뽕나무가 있으면 인간의 탐욕에 버금갈 정도로 버찌를 먹고 싶어 안달하는 새들을 그런대로 괜찮은 과일 매장으로 유혹해 보자.

그러니까 새들의 나라 말로 작은 푯말에 ‘하늘에 계신 존경하는 새님들에게 전혀 방해 받지 않는 먹이터를 보장해 드립니다!’라고 써서 갖자 붙여 보라.

지빠귀, 녹색 방울새, 도요새들은 종종 이런 꼬임에 쉽사리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찌르레기들은 이런 걸 재빨리 눈치채고 마구 삐삐거린다.

정말로 무언가 항의할 듯이 부리와 꼬리를 흔들면서 요란스레 삐삐거린다.

 

 

개똥벌레로 여자 친구를 사귀어 보라

 

밤에 갑자기 몸이 후텁지근해지면 개똥벌레를 잡아서 여자 친구들에게 선물로 주어 보라.

그리고는 개똥벌레가 요즘 유행하는 장신구 중에서도 ‘최신의 유행’이라고 설득을 해 보라.

다이아몬드보다 더 잘 어울린다고 말이다.

만일 당신의 여자 친구들 중에 단 한 명이라도 그걸 믿는다면, 당신은 남은 여름을 함께 지내게 될 기가 막히게 멋진 벗을 찾은 셈이다.

 

그녀와 같이 옛 성터나 유적지를 찾아 다니거나 진한 자줏빛 나무딸기를 따서 손으로 콕 찔러 터뜨려보기도 하고, 고색창연한 물레방아 바퀴가 돌 때 끊임없이 새어 나오는 한숨 소리를 들어보기도 하고, 금잔화로 뒤덮인 언덕에 함께 앉아 있어 보면 어떨까.

물이 맑고 차가운 강의 상류 움푹 들어간 웅덩이에서 송어를 살짝 잡아보기도 하고 나무 위에 올라가 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면서 당신은 발이 예쁜 소녀에게 자전거 타는 모습이 정말 잘 어울릴 거라며 은근히 칭찬을 해 볼 수도 있지 않은가.

 

 

풀벌레 오페라에 귀를 기울여라

 

꽃피는 보리수 나무 아래로 가서 풀벌레 오페라단인 ‘찌르르단’과 ‘쓰르람단’의 공연을 들어보자.

먼저 관객이 쇄도해서 놀랄 거고 그 소리의 다양성과 위력에 또 한 번 놀라게 될 거다.

높은 음에서 가장 묵직한 저음에 이르기까지…

연한 자줏빛의 사프란 색 먼지가 머리와 피부에 살그머니 내려 앉는다고 해서 불쾌하게 여기지는 마라.

그건 유황가루도 아니고 원자탄의 먼지도 아니며 다만 꽃가루일 뿐이다.

황홀한 기분으로 보리수향을 맡아 보라. 그리고는 왜 이런 대단한 향이 아직도 향수의 재료로 사용되지 않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라.

이런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면 특허를 내어 보자.

 

전문 음악지에 이 두 풀벌레 오페라단들에 대한 상세한 기사를 쓰려는 헛된 생각은 하지 마라.

이런 오페라의 형식과 내용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지 못하며, 그야말로 현대의 음악 발전에 아무런 보탬도 되지 않는다.

이 밖에도 풀벌레들은 날아다니기만 할 뿐 하나같이 글을 읽을 줄도 모르며, 기사가 나오기 전에 이미 생명이 다했거나 새들의 부리에 찍혀서 일용한 양식이 돼 버렸을지도 모른다.

 

 

풋풋한 사랑 체험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라

 

보리수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나이가 지긋이 들어보이는 여성들에게 친절하게 인사를 해보라.

그녀들은 짤막한 인상이나 달콤한 향기를 모으는 게 아니라, 손에 닿을 수 있는 꽃들을 모두 따버리거나, 11월에 내릴 비와 안개, 겨울에 대해 생각하거나 기관지에 담이 차지나 않을지 독감에 걸리지나 않을지 염려한다.

깜짝 놀랄 일이 있었으면 곧바로 휴가를 내어라. 가능하다면 연장을 해서 초가을까지 휴식을 취해 보는 게 어떨까.

휴가일이 서서히 끝나가고 있다고 해서 신경을 쓸 필요는 없다.

다만 은은한 차의 향, 찻물 끓일 때 나는 증기, 소금 결정체, 알프스의 들장미, 춤 출 때의 즐거운 기분, 풋풋한 사랑 체험을 하고서 집으로 돌아가 내면 깊숙이 추억을 간직해 두는 게 좋지 않을까.

 

2019년, 연 年 피정 避靜, annual ‘spiritual’ retreat… 이것이 우리에게 몇 년만인가 며칠 전부터 생각해본다. 마지막으로 간 것이 2014년, Coyners Monastery 였고 그 전해인 2013년엔 Carmel Retreat Center였다. 그러니까 지나간 5년간 우리는 ‘집을 떠난 피정’엔 못간 것이다. 거의 매년 한번 정도는 경험해야 할 이 ‘영신적 휴가’를 왜 못했던 것일까?

우리의 연례 피정은 100% ‘레지오’ 주관일 수밖에 없는데, 한마디로 우리의 레지오 (그러니까 꾸리아)에서 그 동안 주선을 못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Leadership, leadership & leadership의 부재라고만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요새 대통령 같이 않은 인간들처럼 사람 잘못 뽑으면 어떤 결과, 특히 장기적인 여파가 생기는지..  두고두고 후세가 짊어질 폐해들, 무능력한 것뿐만 아니라, 숫제 퇴보하는 leadership, 요새 뉴스를 보아도 이제는 우리 눈에 익숙한 것이 아닐까?

그래도 다행인 것은 현 leadership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느낌이고 결과적으로 이번에는 ‘심각한 피정’을 주선한 듯하다. 더욱 반가운 사실은 이번에 가는 곳이 6년 전에 갔었던 곳,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고 아직도 신선한 느낌이다. 솔직히 나는 참 많이 듣고 배운 곳이었다. 아직도 ‘하태수 미카엘’ 신부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은 것은 나만이 아닐 듯하다.

이제 몇 시간, 3시간 있으면 ‘짐을 싸 들고’ 60여 마일 떨어진 곳으로 출발을 하는데, 이번 피정은 현 주임신부님이신 ‘이재욱 요한’ 신부님 주관이라서 미리부터 기대가 적지 않다. 이 신부님의 영성적, 신학적 깊이에 대해서 익히 들어서 알지만 이번에 그것을 내가 경험하게 된 것이다.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이 신부님의 마지막 피정지도가 되지 않을까…

Soggy backyard, Mother’s Day

 

2019년 5월 12일 오월의 둘째 일요일, 어머니 날의 ‘원조’격인 미국의 Mother’s Day를 맞는다. 2010년대 마지막 5월의 이날은 정확한 일기예보대로 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올 봄은 자연의 어머니 손길인가.. 그렇게 때에 맞게 비가 내리곤 했다. 그 덕분에 주변은 눈이 따가울 정도로 온통 초록색으로 덥혔다. 사방이 온통 초록색..  정녕 은혜롭게 느껴진다.

 

대한민국의  ‘어버이날’이란 것이 생기기 전에 그곳을 떠났기에 나의 기억은 어린 시절의 5월 5일 ‘어린이 날’과 5월 8일의 ‘어머니 날’ 밖에 남지 않았다.  어머니 날은 우선 나에게 이 인생을 갖게 해 준 나의 어머니를 생각한다. 어머님과의 영원한 이별을, 이제는 슬프고 아련한 감정을 뒤로하고 어머니의 인생을 ‘기리는’ 쪽으로 살려고 한다.

어머니가 어찌 나를 낳아준 어머님 뿐이랴… 우리 아이들의 어머니를 비롯, ‘법적으로 이어진’ 어머니, 신앙적인 어머님인 성모 마리아.. 모두들 생각만 해도 포근하고 편안하고, 가슴 속 깊이 기쁨이 스며든다.

 

아틀란타 도라빌 순교자 성당의 주보편집 15년, 예비신자 교리반 director 직 5년을 ‘미련 없이’ 뒤로하고  완전은퇴를 선언, 그것을 감행한 연숙, 올 봄은 완전한 자유인으로써 ‘뒤뜰 농원’을 편하게 가꾸는 꿈으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아직도 레지오 서기, 매일복음묵상글 e-newsletter를 하긴 하지만 전에 비하면 그것은 시간적으로 자유인을 뜻하기에 지긋지긋한 기억밖에 남지 않는 나의 6여 개월 ‘구역장직’ 경험을 완전히 뒤로한 나도 100% 공감을 하며 조금은 편해진 둘만의 세월을 기다린다.

 

계속되는 비로 grill은 back porch로 옮겨야 했다

 

오늘은 원래 도라빌 한국 순교자 성당이 야외미사를 할 예정이어서 가까운 모처럼 동네본당 Holy Family 성당엘 가려고 했는데, 우천관계로 야외미사가 취소된 것을 핑계로 오랜만에 아예 주일 미사를 쉬기로 했다. 덕분에 진짜 안식일을 맞이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조금은 께름칙한 기분은 떨칠 수가 없었다. 올해의 Mother’s Day는 예년과 완전히 반대로 ‘기운과 신이 난’ 엄마가 손수 가족들을 대접한다고 해서 4명의  ‘식구와 친구들’ 을 집으로 불러서 grill dinner를 나누었다. 모두들 조금은 이상한 느낌은 들었지만 사연을 알고 나서는 고맙게 저녁식사를 즐겼다.

 

나라니가 가지고 온 Mother’s Day bouquet

얼마 전에 아틀란타 순교자성당의 도서실에서 대출한 책, ‘종교철학’1을  읽다 말다 하며 처음으로 ‘번역서가 주는 고통’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 한 마디로 읽는 그 자체가 고통인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나? 손 쉽게 떠오르는 이유는:

 

  1. 책이 다루는 주제, 내용 그 자체가 원래부터 고통스럽게 난해한 것이다.
  2. 그 난해한 주제를 원 저자가 횡설수설, 일부러 난해한 표현으로 독자를 혼동 시켰다.
  3. 역자는 충실히 번역을 했지만 난해한 내용을 거의 ‘직역’수준으로 다루었다.
  4. 역자가 제대로 원 주제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거의 ‘1:1″의 직역의 결과를 낳았다.

 

과연 어떤 것인가? 물론 1~4 가 모두 상호관계가 적은 별개의 것이 아니어서 서로 혼합된 이유가 ‘읽는 고통’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만 집어 내라면 어떤 것을 고를까 하는 과제에 접했다. 정말 ‘머리에 쥐가 나게 하는’ 난해 함의 고통은 아마도 이유 No. 1 이나 2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 것은, 책의 후미에 있는 ‘역자 후기’를 읽으며 내린 결론이다. 이 책에서 유일하게 ‘읽는 즐거움’을 준 부분은 바로 이 ‘역자 후기’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원저자는 내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거의 미지의 인물이지만 역자는 손쉽게 이해 할 수 있는 배경을 가진 사람이었다. 나이가 나와 거의 같고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등에서 철학전공, 후에 가톨릭 대학교 총장 역임.. 여기서 생각난 것이 ‘아마도’ 나의 국민학교 동창생 ‘김정훈’ 부제와 같은 시기에 유학을 했을 가능성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정훈이가 그 당시 김수환 추기경의 기대를 받았던 ‘장래의 거목’으로 촉망을 받았고 불의의 사고로 요절한 것, 이 ‘오창선 신부’의 미래와 비교하니 다시 한번 김정훈 부제의 부재가 안타깝기만 하다.

 

이 ‘어려운 책’ 중에서 ‘머리에 쥐를 나게 하는 글 중의 압권 壓卷’을 고르라면 다음 글을 뽑을 수 있다.

 

 

‘침묵의 부정적 특성’

침묵의 기도는 일상적 활동과 입에 오르내리는 말들의 관점에서 보면 우선 부정적인 것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획책하지 않음이며 어떤 것에 의해서도 책동되지 않음이다. 그것은 어떤 것에 관해서도 말하지 않음이며 더 이상 말함의 운동에로 몰아넣어지지 않음이다. 그것은 정신의 고요함이요, 전체 인간의 침묵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침묵하면서 일체의 “어떤 것”, 즉 세계의 모든 사물들과 이름들과 관심사를 파악함 내지 파악하고자 함의 개념으로부터, 말로 나타냄 또는 말하고자 함으로부터 풀어놓을 것이다. 그는 세계를 소유함과 세계에 의해 점령당해 있음을 무너뜨릴 것이다. 그는 욕구들과 그 호기심들이 진정되도록 할 것이다. 그는 아주 평온하고 태연자약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인간이 무 無와 같이 되어야만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위의 글은 내가 추측하기에 거의 100% 직역일 듯하다. 어떨까.. 역자가 조금이라도 풀어서 설명을 할 수 없었을까? 조금 쉬운 말, 부드러운 말로… 더 많은 독자들이 ‘쉽고 빠르게’ 이해를 돕게 노력을 했으면 어땠을까? 아쉽기만 하다.

 

 

‘역자후기’ 중에서

다른 언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데에 따른 어려움이란 새삼스러운 사실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소개되는 작품과 관련하여 옮긴이는 이러한 사실을 개인적으로 깊이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깊은 생각이 독자 여러분에게 조금이나마 전달될 수 있기를 옮긴이는 기대해 본다.

소개되는 작품의 주제는 종교철학이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종교는 어떤 위상을 갖고 있는가? 점차 과학화되고 합리화되어 가는 현대세계 안에서 종교는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이성의 광장” 앞에서 종교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이 역자후기의 서문은 역시 ‘번역의 어려움’으로 시작하고 있다. 왜 그럴까? 원저가 워낙 어려운 것이라? 아니면 적당한 우리 말 용어가 없어서?  쉬운 말로 설명을 하기가 힘들어서?  구체적인 이유는 생략되었지만 나는 솔직히 무엇인지 짐작은 한다. 하기야 쉽지 않은 분야, 신학과 철학이 함께 엮인 것이니.. 쉽지 않은 것은 100% 자명한 사실일 것이다.  특히 ‘공돌이’로 굳어진 머리로 이것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 함은 거의 허무한 명제일 듯 하다. 하지만 노력은 한다. 조금씩 조금씩… 그날까지..

  1. 종교철학, 베른하르트 벨터 적, 오창선 옮김, 1998년 분도출판사

오랜 만에 ‘초록색 책’을 나의 눈과 손에 가까운 곳에 두었다. 빌려온 지 꽤 시간이 지난 책, 이거 혹시 너무나 오래된 것이 아닌가.. 우려가 되었다. ‘대출기간 초과 과태료’가 붙지는 않을까.. 하지만 ‘나이든 어르신’을 상식적으로 ‘봐 주는’ 우리 고마운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도서실 관리자 자매 형제님들의 얼굴을 생각하며 ‘그래 더 가지고 보자’, 걱정을 접는다.

‘山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 초록색의 표지는 고 김정훈 부제의 그림에서 온 것이라 더 친근감이 간다.  1978년 유학 중 오스트리아의 어떤 산에서 실족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던 나의 재동국민학교 동기’반’ 동창, 김정훈 부제의 유고집, 몇 년 전에 빌려와서 ‘독후감’ [첫 편]을 남긴 적도 있었고 이후 계속 읽으며 후편을 쓰려고 했지만 ‘세월의 마술’로 성사가 되지 못했다. 대신 이런 식으로 눈에 띌 때마다 가끔 읽기를 계속한 지 몇 년이나 되었나?

오늘 우연히 펼친 1975년 마지막 부분의 일기가 나의 눈길을 끌었다. 한마디로 정훈이의 ‘행복한 고민’이라고 할까… 이 일기를 통해서 얼마나 정훈이가 한국천주교회의 기대와 희망이었는지 어렴풋이 짐작을 하게 되었다. 본인이 그것을 절감하고 있는 것이고 그것이 이렇게 부담으로 느껴졌던 것.. 나는 ‘행복한 고민’이라고 했지만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하기야 항상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이었기에 칭찬도 그렇게 기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정훈이가 사고로 그렇게 일찍 타계를 안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분명히 그는 한국천주교회의 ‘거목’ 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이 책의 서문에 실린  김수환 추기경의 ‘추도사’를 보아도 그가 얼마나 한국교회의 촉망과 기대를 받았었는지 이해가 간다. 애석하기 그지없다. 어떻게 하느님은 그를 그렇게 일찍 데려가셨을까… 분명히 무슨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12월 2일 (1975년)

 

나는 별제(別製)된 인간이고 싶지 않다.

그냥 가만히 놔둔 그런 완전히 보통 사람이고 싶다. 모든 이들의 감시 속에서 – 자신은 엉망으로 감당 못 하면서 – 별나게 고고해야 하고, 상냥한 행동거지, 우아한 품위를 지닌…

모든 이들이 저 아래에서 쳐다보면서 저희들끼리 냉소하며 비웃음과 욕설로 나를 샅샅이 훑어내어 분해하려 한다.

아! 나는 그런 별제된 인간이고 싶지 않다. 무조건, 그렇게 되고 싶지 않다.

엄청난 철학의 이론 – 신학의 체계 – 학문의 상아탑, 한국 교회의 기둥, 서울 교구의 인재,

“장래를 걸고 우리 모두에게 줄 복음을 연구하러 유학갔대. 훌륭히 되어 돌아와서 우리에게 굉장한 걸 줄 거야.”

아! 당장 앞에 다가온 세미나, 그게 도대체 뭐냐?

나는 미사 드리는 사람보다 미사에 참여하는 사람이고 싶다. 내가 하느님을 모르겠다는 것은 아니다. 절대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다. 한 톨 밀알을 조심스레 뿌리고, 조그만 의미를 그냥 혼자서 체득하고 싶은 거다. 가만히 혼자서 하느님을 기리고 싶다는 거다. 아! 나는 조용히 모르면 모른다고, 좋은 건 좋다고, 재미있는 건 재미있다고 하고 싶은데… 왜 모르는 것도 아는 것같이 해야 하고, 좋은 것도 내색을 해서는 안 되고, 재미있을 때도 웃으면 안 된다는 건가?

은하수 길가에 졸고 있는 칠현금 별자리를 보라

 

 

ANTON SCHNACK

ANWEISUNGEN ZUM GLUCKLICHSEIN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

 

 

딸기에 술을 부어 5월을 마시게 하라

 

조금씩 커져가며 서서히 붉어지고 있는 어린 딸기에 이제 물을 충분히 부어 주어라.

하지만 물뿌리개나 분무 호스로 물을 주는 게 아니라, 술통이나 술병에서 빼낸 우아한 ‘라인 포도주’를 부어라.

이런 식으로 하면 딸기가 점점 5월에 마시는 볼주와 비슷하게 되고, 동시에 딸기로 포도송이를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저녁 이슬의 언덕’이라 말해보라

 

화단이나 집 가까이 있는 들판에 가 보라. 지난 밤에 누군가 파 뒤집어놓은 흙무더기를 보게 된다. 그러나 화단이나 들판을 파 뒤집어 놓은 두더지를 때려 잡겠다고 끝이 뾰족한 갈퀴나 괭이를 들고 가거나 끔찍한 흉기를 들고 가지는 마라.

차라리 두더지가 파 뒤집어 놓은 흙무더기마다 각기 독특한 명칭과 높이, 그 모양새에 대한 느낌을 글로 적어 놓은 카드를 가져다 놓아 보자.

제일 예쁜 언덕에는 ‘꽃요정의 쿠션’이라고 이름 짓고, 두 번째로 예쁜 언덕에는 ‘저녁 이슬의 언덕’이나 ‘우울한 사람들을 위한 휴식처’로 해 두고, 제 번째나 네 번째 언덕에는 ‘마거리트의 무도장 舞蹈場’이라는 카드를 놓아 보라.

 

두더지가 파놓은 그 자그만 언덕과 협곡 사이에는 어린이처럼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볼 수 있는 무언가가 살고 있다.

땅 속의 보배를 지키는 정령, 달빛 요정, 꽃의 요정, 비의 여신, 물의 요정 등이 살고 있는데 그것들이 조용히 열중하고 있는 신비에 가득 찬 일들을 살펴보라.

 

두려워하거나 불안에 떨지 말고 발 앞에 놓여 있는 동화집을 집어 보라.

그 속에 아주 자그만 황금잔이 들어 있거나 콩알 만한 진주나 이슬방울 크기에 다이아몬드가 들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 않는가.

그러나 먼 훗날 우리들 주머니 속에 숨겨 두었던 보석이나 보물들은 어쨌든 이 우주의 먼지나 무 無 로 완전히 분해돼 흩어져 버릴 것이다.

 

 

밤꽃을 촛불 대신 밝혀 보아라

 

밤나무에 꽃 촛불마냥 피어 있는 꽃 가지를 꺾어 집으로 가져와서 조명기구로 써 보아라. 하얀꽃은 거실에 두고, 불고 노란색이 섞여서 핀 꽃은 어린 소녀의 방에다, 빨간꽃은 침실에 두어 보자.

이런 꽃들을 조명으로 쓰면 황혼이 질 무렵이나 고독과 사색의 시간, 정겨운 대화를 나눌 때나 더듬거리며 사랑을 고백할 때, 연인들이 황홀하게 밀어를 속삭일 때에 온화하고 사랑스런 분위기를 만들어 줄 것이다.

 

밤꽃을 촛불로 쓰면 환하게 비치지도 않고, 불을 켤 필요도 없으며 그렇다고 불이 꺼질 일도 없다. 그리고 촛농이 떨어질 일도 없고 불이 금방 꺼지거나 뜨겁게 달아 올라 위험할 일도 없으며, 고장이 나서 수선할 필요도 없고, 으스러지지도 않으며, 탄 자국이나 깨진 유리조각을 남기지도 않는다.

다만 약간 퀴퀴한 향이나 생기 없이 쭈글쭈글해진 꽃과 시들어버린 줄기, 가끔씩은 뻣뻣하게 말라버린 뒝벌 한 마리가 꽃 속이나 꽃 받침 속에 아무도 모르게 죽어서 잠들어 있을 때가 있을 뿐이다.

 

이제 새들이 많이 돌아왔으니 새를 잡으러 가보는 게 어떨까. 그러나 진짜 새를 잡으러 가는 게 아니라, 사실은 새 모양으로 된 연한 송아지 고기 요리 (Kalbsv gerl)나 참새처럼 짤막하게 생긴 국수(Sp tzle)를 먹으로 가자는 뜻이다.

이 송아지 고기 요리는 고기를 자그맣게 잘라서 얇게 말은 것을 말하는데 대체로 남부 독일 식당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손가락 크기만한 송아지 고기 토막에 베이컨과 계란, 다진 고기를 얹은 다음 말아서 구운 뒤에 식탁에 내놓게 된다.

이 송아지 요리는 실로 묶어서 만들기 때문에 식사 중에 이상한 실이 있더라도 불쾌하게 여기지는 말라. 다만 이 실을 먹지 않도록 주의하라.

 

‘참새 모양의 국수’와 송아지 고기로 만든 이 독특한 ‘참새’는 남부 독일 지역 중에서도 특히 바덴 지역이나 뷰어텐베르크 지역에서 잡을 수 있다.

특히 점심 시간에 새 모양의 송아지 고기 요리를 먹기 위해 이 식당 저 식당을 다녀 보라.

이 ‘참새 모양의 국수요리’를 밀가루, 계란, 소금을 물로 반죽해 만든다는 걸 듣고 놀라지는 마라. 제일 맛있는 ‘새떼’와 참새 모양의 ‘국수떼’를 골라라.

만일 ‘새떼’의 빛깔이 회색이고 끈적끈적하게 보이거든 퇴짜를 놓아 무시를 해 보리고, 자갈처럼 딱딱한 국수는 접시 위에 내동댕이쳐 버려라.

이따위 저질의 새 사냥터는 얼른 떠나는 게 좋다.

 

 

5월의 무당벌레를 회의에 초대하라

 

먼저 무당벌레 회의를 개최해 보자.

숫자를 정확하게 헤아리는 게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두 번 세거나 혼란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만년필이나 사인펜으로 무당벌레의 등에 각각 점을 찍어 보자.

점을 다 찍은 후에, 찌르레기와 참새용 고급 식품 시장에 공급 부족이 일어나지 않도록 무당벌레를 다시 놓아주어 보자.

 

곧 이어서 무당벌레 앙케이트를 실시해 보라.

왜 무당벌레가 아직도 보기 싫은 갈색 옷을 입고 있는지 확인해 보자.

그리고 이 갈색이 무당벌레 나라에서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도 알아보자.

혹시 무당벌레의 아랫부분 색깔이 지하 저항 운동 단체의 표시를 뜻하는 건 아닌지도 말아보고, 또 무당벌레가 어떤 정당에 소속되어 있는지, 혹은 그들이 세습적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는 건 아닌지, 등판이 붉은 무당벌레는 모조리 왕실 가족이 아닌지, 아니면 좌익 국회의원이 아닌지 알아보는 건 어떨까.

 

지성적인 무당벌레는 위로 곱게 뻗은 촉수로 모든 걸 인식한다.

무당벌레 극장, 무당벌레 서정시 모임, 무당벌레 출생제한 등에 관한 회의에 이들을 초대해 보자.

이 백인종으로부터 추방당한 갈색 피부를 지닌 민족의 노래와 시문학을 테이프나 CD에 녹음을 해 보자.

가을 저녁이나 겨울 저녁, 노을이 질 때, 이 묵직하고도 한량없이 깊은 저음을 들으면서 그렇게도 멋졌던 지난 시절 혹은 청소년기를 떠올려 보면 어떨까?

 

 

피리새의 지저귐을 조심하라

 

민들레가 지천으로 피어 있는 들판이나 언덕에 가까이 가지 마라.

구두창이나 옷에 불이 붙지 않도록 말이다. 그리고 절대로 풀밭에 눕지를 마라. 민들레에게 괴로움을 당하게 된다.

물론 피리새가 지저귈 때도 조심을 해야 한다! 만일 너도밤나무나 밤나무, 사과나무 가지들이 늘어져 있다가 부러져 아래로 떨어지면 귀를 다쳐 청각에 손상을 입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런 나무 아래 있으려면 탈지면으로 귀를 틀어 막는 것이 좋다.

 

아름다운 오월과 더불어 은밀하게 멋진 사랑을 시작하도록 갈망해 보라.

포도밭 가의 언덕에 모닥불을 지피거나, 사랑을 고백하거나, 담배를 피워 연기를 내뿜거나 땔나무를 지펴 연기를 피워서 그 동안 몹시 얼어 붙은 가슴과 차디찬 피부에 있었던 냉기를 몰아내고, 따뜻한 온기를 불어 넣어 보자.

젊은 아가씨와 춤을 추러 바에 가거나 디스코 장에 가든가 혹은 독한 그로크주를 마시러 가거나 갖가지 뜨거운 펀치주를 마시러 가보라.

 

그러면서 검은 대륙 아프리카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든지, 아탈리아의 리도에서 혹은 청보라빛 리비에라 해안에서 해수욕을 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라. 칸느나 모나코로 여행을 가서 영화 계약을 체결할 수도 있을 거고 노르웨이의 작곡가 신딩의 ‘봄의 도취’를 들으면서 얼음같이 차가운 마음을 녹일 수도 있을 거다.

담비나 밍크 재킷을 꽁꽁 얼어붙은 어깨에 걸치고, 뻣뻣해진 손가락에는 스웨덴 제 양모 장갑을 끼고, 굳어 버린 발에는 양털이 들어있는 부츠를 신어 보자.

그러데 이런 행위들은 아직 나이 어린 소녀가 꽃이 만발하고 나뭇잎이 온통 초록으로 물든 자연으로 오월의 산책을 가고 싶어 안달을 부릴 때, 그 싱숭생숭하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나 혹은 갑자기 끔찍한 추위가 몰아 닥쳐 피해를 입을 수 있다고 여겨질 때에 필요한 생각들이다.

 

 

은하수를 향해 떠나가라

 

북동쪽 하늘에 펼쳐진, 음악 연주회를 개최할 ‘칠현금 별자리’에 참가 지원서를 바람에 실려 띄워 보내 보라.

손풍금을 연주해보는 건 어떨까.

천상의 악기를 켜기 위해 은하수 길가에 있는 칠현금 별자리를 바라보며 떠나보자.

어떤 비평가도 비난하지 못하는, 이 우주 공간에 있는 하늘의 음악을 파이프 오르간으로 연주해 보는 건 어떨까.

천상 오페라단의 전주곡, 별들의 교향곡, 달빛 소나타, 태양 찬가, 나그네 행진곡, 밀려가는 뭉게 구름의 축세 노래, 추방당한 천사와 가련한 영혼의 슬픈 멜로디, 구름배와 우박이 내리는 민요조의 멜로디, 비너스 소녀의 사랑이 담긴 대중가요 등을 연주해 보자.

 

연주회를 마친 후, 모자를 손에 들고 별마을 주민과 은하수 마을 주민이 살고 있는 뒤뜰에 모여보자.

사례금으로 한 줄기 햇빛이나, 무지개  빛 대리석, 달빛 금화나 혜성의 반짝임, 운석 조각, 유성을 받을지도 모른다.

딱 한 번만이라도 누군가가 이런 공상가나 선의의 거짓말쟁이에게 제대로 대가를 치러 줄 수 있다면…

 

창희야, 용현아 또 일 년이 흘렀구나..

 

‘말대가리’ 용현아, ‘박하사탕’ 창희야.. 또 일년이 흘렀구나. 먼지가 뽀얗게 거리를 덮었던 그 시절 무언가 건설의 굉음 속에서 하루가 모르게 변하던 우리의 거리, 서울거리를 누비던 시절.. 그것도 5월의 서울 퇴계로 거리와 칠흑같이 어둡던 지하다방에서 듣던 불후의 명곡들, classic pop 그 중에서도 어떻게 Bee Geesfirst of may를 잊을 수 가 있으랴… 이제는 절대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런 곳이 되었지만, 그래도 뇌 세포가 아직도 그 당시로 꿈속에서나마 보고 느끼게 해 준다.

지난 일년은 어떻게 보냈는지 궁금하구나. 창희야 LA에서 잘 살고 있으리라 상상은 간다만 용현아, 너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 길이 없구나. 재동학교, 휘문중고교, 건국대 를 통해서 찾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이제는 늦어가고 있다는 생각뿐이다. 그래 늦었어… 상상과 추억 속의 너희들 모습이 나는 사실 더 매력적이니까..

나의 지난 일년이 이곳에 ‘적나라’하게 남아 있지만 그래도 나는 ‘진화’하고 있다는 자부감으로 산다. 나의 북극성은 분명히 같은 곳에 있고 나는 그것을 한번도 놓치지 않고, 잊지 않고 방향을 잃지 않으며 산다. 그것이 나의 나머지 인생의 목표가 되었다. 그래.. 그것이 바로 ‘희망’이란 것.. 그것만 놓치지 않으면 내가 태어난 생의 의미는 확실히 구현된다고 믿는다.

그래.. 우리의 50년 전의 아름다운 추억이 머리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한.. 희망은 항상 있는 거야.. 나는 믿는다. 모두들 건강하게 살기를…

Fort Yargo State Park picnic area

 

¶  지난 주일에는 전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우리 60~70대 성당모임인 등대회의 야유회 picnic 엘 갔었다. 2017년 가을에 입회한 이후 몇 번 이런 행사엘 갔기에 이제는 조금 익숙한 편이지만 나로써는 감회가 새로운 것이, 이런 ‘사람들 모임’ 그것도 ‘놀러 가는’ 것에 나는 거의 가질 않고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나도 많이 변했구나 하는 ‘흐뭇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이런 삶이 ‘정상적인 삶이 아닐까..

이번의 야유회가 조금 더 색다른 것은 우리 부부가 같이 참가했기 때문이었다. 이제까지는 각종 임무로 너무나 바쁜 스케쥴에 얽매인 연숙이 마음 놓고 참여하기가 힘들었었는데 최근에 하나 둘 씩 ‘책임’을 내려 놓기 시작해서 가능하게 된 것이다. 나도 지난 해에 맡았던 구역장 임무를 내려놓고 얼마나 홀가분한 기분이었는지 모른다.

이번에 간 곳은 나도 한번 간 적이 있었던 Fort Yargo State Park으로 작년에 구역장 연수회를 그곳에서 한 관계로 나는 한번 간 적이 있는 곳이었다. 그 당시는 cottage에서 하루를 묵었지만 이번에는 picnic area로 가서 몇 시간을 먹고 즐기다 돌아왔는데, 여행을 별로 즐기지 않는 우리들에게는 적당한 하루의 휴식, 여행을 한 셈이 되었다.

이 등대회의 특징 중에 하나는 우리와 나이가 아주 엇비슷한 사람들이 꽤 있고, 그 중에서도 나와 동갑인 형제, 자매들도 꽤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에 오랜 세월을 살면서 이렇게 ‘동류의식’을 느껴본 적은 아마도 없었을 듯 하다.  나이가 비슷한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어떤 사람들은 상관을 안 하는 모양이지만 나는 정 반대다.  그들이 거의 친구처럼 느끼며 ‘좋아하는 것’을 연숙은 조금 이상하다고 보는 모양이지만 나는 사실 그렇다. 같은 시대를 살아왔다는 사실이 어찌 큰 의미가 없겠는가? 이 그룹은 한마디로 ‘자연스럽게 편한’ 느낌을 주기에 ‘큰 사고’가 없는 한 열심히 참여하고 싶다.

 

¶  오늘 우리는 레지오 주회합 후에 배해숙 (베로니카) 자매님 선종 4주기 (5월 2일)를 맞아 성당 근처에 있는 Winters Chapel  memorial park 엘  갔었다. 돌아 가신지 벌써 4년이 되었나.. 2014년 가을에 말기암 환자로 처음 만났고 2015년 5월 2일에 선종한 어떻게 보면 참 ‘불쌍한’, 나와 동갑내기 자매님이었다. 남편 형제님은 그 전해에 먼저 타계를 하고 ‘철없이 보이는’  장성한 두 아들을 댕 그러니 남겨놓고 간 자매님이었다.  다행히 친 오빠, 친 여동생이 있어서 장례식 이후 가끔 소식을 주고 받지만, 이제는 4년의 세월 탓인지 당시의 강렬했던 느낌들도 조금씩 빛을 잃어가는 듯 하다.

당시, 우리 둘은 ‘레지오 활동’을 염두에 두고 열심히 배 자매님을 천주교인으로 입교시키는 데 혼신의 힘을 쏟았고 성공을 한 셈이지만, 과연 자매님 우리가 배운 대로, 희망하는 대로 ‘좋은 곳’에 가셔서 평화로운 다른 삶을 ‘남편 형제님’과 같이 사시는 지는 확신이 없다. 하지만 믿는다. 그것이 신앙이고 희망이니까.. 자매님, 짧은 기간이었지만 보람 있는 시간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편히 쉬시고 남아있는 두 사랑하는 아들들 그곳에서 잘 보호해 주소서…

 

Anton Schnack 안톤 슈낙 (슈나크)1 , 독일의 서정시인, 짧은 산문의 대가. 이름은 희미해졌어도 그의 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반세기기 훨씬 지난 지금도 비교적 분명하게 기억한다.  국어 ‘국정’교과서의 위력인가, 감수성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던 고등학교 2학년생의 특권, 혜택이었나.

비록 ‘입시 준비의 각도’로 국어교과서를 대했지만 그래도 그 ‘슬프게..’ 하는 짧은 글은 남녀, 인문,자연, 이공계를 불문하고 모두의 가슴 깊은 속을 자극했었다.  아마도 ‘첫 허무감’을 맛보게 하는 계기를 주었는지도 모른다. 그 글이 어떻게 국어교과서에 실렸는지, 누구의 글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독일을 신처럼 숭배하던 일본아해들이 ‘원조’가 아니었을까? 혹시 일본교과서를 그대로 ‘베낀 것’은 아니었을까?

 

 최근에 이 독일 ‘슬픈 서정 시인’의 글을 책으로 다시 보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슬픈 것이 아닌 기쁜, 행복한 것들에 대한 감성적 산문집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 에서다.  50여 년 전의 기억을 배경으로 이 저자를 찾아보고, 역시… 우리가 너무나 ‘신화적’으로 이 글을 배웠구나 하는 자괴감이 든다. 이 ‘감성적 시인’도 역시 시대를 피할 수 없는 한 인간이었고, 나아가서 꿈에서 벗어나게 할 만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한 마디로… 전범은 아니더라도, ‘부역자’ 급이라고 할까?  암만 잘 봐준다고 해도.. 역시 ‘양심상 허점이 가득했던’ 인물일 수 도 있지 않을까? 어떻게 히틀러에게 ‘가장 높은 충성의 맹세, Vow of Most Faithful Allegiance‘ 에 서명을 했던 것일까? 1, 2차 대전에 골고루 참전을 했던 것도 마찬가지다.  그 당시 비정치적, 평범한 독일남자인 것으로 봐줄 수도 있지만 ‘서정적’인 그의 모습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과거가 아닐까? 그래서 그의 명망이 후년에 서서히 빛을 잃어갔던 것을 나는 그렇게 애석하게 생각지 않는다. 아직도 우리의 기억에는 ‘미친 독일인’들의 생생했던 죄악상을 생생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에서도 나는 4월에 관한 모든 것, 놓칠 수가 없다. 4월의 느낌은 너무나 좋은 것이고 안톤 슈낙도 멋있게 그가 경험했던, 상상했던 4월을 예찬했고 글로 남겼다. 싸늘한 4월의 가랑비와 싸늘하고 찬란한 햇볕의 어루만짐..  하루 모르게 새로 얼굴을 내미는 각종 꽃들의 율동… 그러한 4월이 ‘부활의 기쁨’과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다.

 

 

ANTON SCHNACK

ANWEISUNGEN ZUM GLUCKLICHSEIN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

 

 

4월에는 …

수선화에 수줍은 채 인사를 해보라….

 

 

튤립에 기침용 시럽을 똑똑 떨어뜨려 보라

 

온상에 채소잎이 이미 돋아 나왔으면 조심스럽게 잡초를 제거해 주어라.

참빗을 써 보는 것도 괜찮다. 참빗은 진딧물이 잎사귀에 무더기로 나타날 때에 써도 되는제, 그렇다고 잎이 빗질에 떨어져 나가지는 않는다.

양파 냄새를 줄이려면 어린 양파의 새순이 약간 솟아 올라올 때, 세발용 향수를 거기에 부어 보라.

 

앵초꽃, 제비꽃, 튤립 같은 꽃들이 감기에 걸리지 않고 콧물을 흘리지 않게 하려면 나일론 속옷을 준비해 두는 게 좋다. 만일을 생각해서 기침 시럽을 꽃받침 안에 똑똑 떨어뜨려 보라.

그러면 정말 개미떼가 몰려오기 전에 미리 보호 조치를 취하게 되는 거다. 만일 개미들이 관청의 허가도 없이 밤을 틈타 길을 만들고, 담을 세우고, 터널의 구멍을 뚫어버렸다는 걸 알게 되어 화가 나고 기분이 나빠지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는가.

이 모든 것이 사전에 비용 측정도 하지 않고, 지방의회의 토의와 위원회의 협의도 거치지 않고, 트랙터와 굴착기도 사용하지 않고, 관련 담당자에게 뇌물도 바치지 않고 이루어졌으니 말이다.

 

개미들은 모든 소지품을 휴대하고 이동을 한다. 그것도 유독 남의 나라 땅이나 남의 지역으로만 이동을 한다.

개미가 가는 곳의 평화를 깨뜨리고 물건을 손상시켜 규정을 준수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음 지역 경찰청에 고발을 해야 한다. 고발을 할 경우 관계 공무원이 이맛살을 찌푸리더라도 개의치 않으면 그만이다.

집에서 취미 삼아 열심히 정원을 가꾸는 공무원을 한 사람 고를 필요가 있다. 그러면 그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개미를 싫어한다면서 길게 이야기를 늘어놓을 테니까 말이다.

 

개미들은 머리 부분이 아스파라거스처럼 툭 튀어나와 있고, 이제 막 쏘아 올리려는 로켓 모양이므로 급할 때에는 재빨리 덤불이나 헛간 속으로 숨어서 자신을 엄호한다.

개미는 자신의 신변이 계속 위태로울 경우에는 참호나 땅굴을 파고 그 곳에 몸을 구부리고 꼼짝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변의 위험이 그리 크지 않으면 세게 3차 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마냥 그 속에 틀어박혀 있지는 않는다.

 

땅속에서 갖가지 씨앗들이 자라면서 내는 소리를 들어 보아라. 밤은 둔탁하고 묵직한 소리를 내고, 오이씨는 트림하듯이 소리를 내고, 콩꼬투리는 천천히 묵직하게, 완두콩은 돌돌돌 물이 흘러가듯이 꾸르륵 소리를 내는 것 같다.

해바라기씨는 그리움을 담은 하프음과 같다. 사과씨는 즐겁게 ‘아하’ 하는 듯하고, 개암나무 열매의 요들송 소리, 호두나무의 빠르게 연타되는 북소리, 호박씨는 불꽃놀이 할 때의 폭죽 터지는 소리를 낸다.

 

여러 가지 다양한 생명의 소리를 들어보려면 귀를 지표면에 아주 가까이 갖다 대어 보라.

애벌레의 소근거림, 딱정벌레 유충의 속삭임, 두더지의 고통스런 사랑의 하소연, 들쥐들이 먹이를 먹으면서 내는 발라드, 땅벌들의 사프란 꿀과 히아신스 포도주를 만들려고 윙윙거리며 즐거워하는 소리, 초록빛 나무들이 있는 낙원과 기가 막히게 맛있는 나뭇잎의 즙을 생각하며, 한편으로는 청정한 공기와 따뜻한 일광욕을 생각하는 딱정벌레 유충들의 그리움에 가득 찬 소리……

 

 

무욕을 배워라

 

한 쌍의 박새가 둥지를 짖는 걸 보라. 그저 초록으로 칠해진 채 위쪽을 향해 서있는 철로 된 관이나, 빨래 너는 표백장의 기둥 같은 곳에 보금자리를 지으려고 하는, 저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점이 부럽다.

집세도 내지 않고, 주택국의 허가를 받을 필요도 없고, 빨래 너는 표백장의 주인과 상의를 하지 않아도 되지 않는가. 새들의 무욕을 삶의 본보기로 삼으면 어떨까. 그 소박한 방의 배치나, 아주 초라하다 할 수 있는 신방을….

몇 개의 바싹 마른 이파리들과 마른 풀 줄기와 깨끗이 털어낸 카펫에서 나온 솜털 부스러기나 농가의 우리에 있는 양들의 털 부스러기, 그리고 자기 자신의 가슴에서 뽑은 깃털 몇 개나 지붕 위에서 그르르 거리는 비둘기의 가슴에서 뽑은 깃털 몇 개나 지붕 위에서 그르르 거리는 비둘기의 가슴에서 뽑은 깃털로 만든 방이 아닌가…. 게다가 새들의 넘쳐나는 행복과 기쁨을 함께 넣어서 말이다.

 

수줍게 무릎을 꿇으며 공손한 자세로 수선화에게 인사를 해 보라.

그리스의 신화에 따르면 수선화는 어느 소년의 때이른 죽음에 대한 상징이기 때문이다. 마치 그 꽃의 뒤에서는 병적으로 자기애에 빠져 있는 소년의 반짝이는 눈망울을 보는 듯하다.

하지만 요정 에코는 그 소년에 대한 사랑에 응답이 없자 병이 들어버렸고 그로 인해 오직 그 목소리, 에코(산울림)만 남아 있게 되었다.

히아신스 꽃은 히아킨투스 혹은 히아신스라고 하는 용모가 잘 생긴 신의 아들이었는데 아폴로 신과 바람의 신 보레아, 두 신으로부터 동시에 사랑을 받게 되어서 모습이 바뀌어진 향기가 짙은 꽃이다. 이 꽃에도 한 번 조심스럽게 가까이 다가가 보아라.

 

그리고 히아신스 주변에서 일어난 비극적 사건을 생각해 보면 어떨까. 차가운 북풍의 화신인 보레아 신의 질투로 인해, 아폴로 신이 던진 투척용 원반이 바람에 날려가 이걸 바라보고 있던 소년 히아신스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아폴로의 총애를 받던 소년 히아신스는 치명적으로 상처를 입고 땅바닥에 쓰러진다. 그러자 아폴로가 그 수려한 용모를 지닌 소년의 피로 한 송이 꽃을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히아신스다. 오늘날 우리는 그 히아신스 꽃을 세상에 보내준 아폴로에게 감사를 드리고 있다.

 

 

비를 성장 촉진제로 이용해 보라

 

하늘에 떠 있는 황소별자라 자매들인 히아든을 면밀히 관찰해 보라.

히아든은 붉게 빛나는 알파성인 알데바란 주위에 있는 황소의 뿔과 머리 위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사냥 중에 죽은 동생 히아스에 대한 슬픔과 괴로움을 잊게 하려고 제우스신이 그쪽 별이 되게 했다는 신화가 전해진다.

황소궁에서 꽃피는 지구 위로 보슬보슬 내리는 미지근한 빗방울을 이 사랑스런 자매들이 흘리는 눈물이라 상상해보면 어떨까.

키가 작은 사람들은 이 미지근한 비가 내릴 때 우산을 쓰지 말고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말고 마음껏 돌아다녀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따뜻한 빗방울에는 사람의 몸을 성장시키는 힘이 내재해 있다고 하니까.

 

 

백설공주를 산지기 딸로 생각해 보라

 

숲 속에서 야생 비둘기의 매혹적인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라.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듯한 낯선 ‘르루쿠…. 쿠쿠르…. 르르쿠…. 쿠쿠르… ‘ 소리는 깊은 곳에서 솟아나오는 샘물소리처럼 들린다. 그러나 사실은 그 가장자리가 뾰족하고 끝이 금빛으로 어른어른 반짝이는 수비둘기와 빨간 부리에서 나오는 소리이다.

비둘기 소리에는 신비스런 마력이 들어 있다고 믿어 보라.

비둘기가 그런 소리를 낼 때 귀엽게 생긴 불쌍한 소녀가 햇빛 바른 숲길을 따라 총총 사라진다거나, 파스텔 조의 초록빛 금팔찌로 장식한 멜루지네 소녀가 사라진다든지, 때묻지 않은 아름다운 백설공주가 사라진다고 생각해 보라….

혹은 피부가 밤색인 18세 산지기 딸이 날쌔게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바람을 타고 아프리카로 여행하라

 

극지방의 기압과 열대지방의 기압이 부딪치거나, 냉기와 열기가 충돌하거나, 그린랜드 저기압권과 아조랜 고기압권이 부딪치는 곳을 방안에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관찰해 보라.

산을 넘어서 불어 내리는 건조한 열풍 때문에 머리가 아프고 자극을 받더라도 오히려 애착심이 깃든 큰 소리로 ‘브라보’라고 외쳐 보아라.

아예 열대 지방 기압이 머무는 곳으로 아주 기꺼이 즐기면서 여행을 한다고 상상을 해보면 어떨까. 그러면 바로 아프리카 깊숙한 곳으로 가게 된다.

카포 베르데 군도의 봉우리나 서부 아프리카 엘 추프 사막의 지옥처럼 작열하는 더위 한가운데로 들어가기도 하고 리비아 쿠프라의 야자수가 자라는 오아시스에 가보게도 된다.

또는 서북부 아프리카의 커다란 나일 강가에 있는 팀부크투에 까지 가보게 된다. 그곳에서라면 남쪽의 미풍을 타고 미모사숲에서 나오는 향기를 맡을 수 있을 것이고, 원숭이와 하이애나들이 외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큰 불꽃이 타오르듯 쏴쏴 소리를 내는 사막의 모래 회오리 소리와 코끼리가 내는 트럼펫 소리도 더불어 듣게 된다.

 

편안한 욕조 속에 들어 있는 것처럼 누워서 따뜻한 바람을 맞으며 꿈을 꾸어 보라.

머리가 흑단처럼 까만 어린 새를 꿈꾸어 보면 어떨까. 그 새는 ‘마하바박 아쉬라’라고 지저귀는데, 그건 오아시스 샘 옆에서 꿈을 꾸는 사람에게 ‘어서 오세요’ 라고 열 번씩 환영의 인사를 한다고 말이다.

 

북유럽 전선이 짙게 깔릴 때라든지, 사월 소나기가 갑자기 쏟아질 때, 혹은 오월의 돌개바람이 몰아칠 때는 방안에 틀어박혀 뜨거운 그로크 주나 몸에 좋은 따끈한 적포도주를 마시고 있으면 좋을 거다.

한파가 내습한다고 어떻게 미리 보도할 수 있겠는가? 그린랜드는 여전히 아주 두꺼운 얼음 층으로 덮여 있으며, 빙하가 여전히 둔탁하게 쿵쾅거리며 부서져 내리고 있지 않은가.

북쪽의 끝과 북구의 항구 도시 함메르페스트에는 아직도 눈보라가 마치 사자의 포효 같은 소리를 내며 보트니아 만으로 밀어닥치고 있지 않은가.

습기 찬 한파가 몰려간 후, 편도선염이나 독감, 콧물감기에 걸린 사람들, 통풍, 류머티스, 좌골신경통에 걸려 뜨끔뜨끔한 통증을 느낀 사람들을 한 번 찾아보라.

하지만 이런 고통을 받고 있는 희생자들의 수를 꼭 헤아리려고 하지 말고 북쪽에서 불어오는 나쁜 바람이 끝내 골골거리며 사라질 때가지 인내하면서 기다리는 게 좋지 않을까.

 

 

한 그루 나무를 심어라

 

사람은 인생에서 한 그루의 나무를 심어야 한다는 말을 되새겨 보라.  이제 그 시기가 되었다고 자신을 설득하라. 그리고 어떤 나무를 심을 수 있을지 신중하게 숙고해 보자.

사과나무를 한 그루 심을까? 사람들이 이미 죽고 이 땅에 묻혀버렸다 하더라도 사과나무는 초봄마다 되풀이해서 빨갛고 하얗게 화사한 빛깔로 꽃을 피울 수 있을까? 또는 사과나무를 뿌리째 뽑아 대양을 건너 멀리에까지 옮기더라도 계속 자살 수 있을까?

아니면 보리수나무를 한 그루 심을까? 여름밤에 보리수나무에서는 얼마나 매혹적인 향기가 날까. 연인들의 나지막한 속삭임은 그전보다 얼마나 달콤할까!

참나무 한 그루를 심을까? 참나무는 청딱따구리의 휴식처가 될 거라고 생각해 보자.

호두나무를 심으면 어떨까? 그러나 나중에 소년들이 돌팔매질을 해서 나무를 아프게 해서는 안될 텐데!

너도밤나무새나 피리새가 둥지를 짓도록 나무를 심어볼까? 혹은 아치형 나무 그늘 아래서 눈을 반쯤 감고는 아무런 욕심도 없이 그저 행복에 젖은 채, 작열하는 태양이 내리쬐는 땅을 눈을 깜박이며 바라보는 한 남자를 위해 나무를 심을까?

그렇지 않으면 수년 전 제때에 맞추어, 어린 나뭇가지를 땅에 심었던,얼굴도 잘 모르는 사람을 칭찬해 마지않는 의미에서 한 그루 나무를 심을까?

 

  1. 안톤 슈나크(Anton Schnack, 1892년 7월 21일 ~ 1973년 9월 26일)는 독일의 시인으로 프레드리히 슈나크의 동생이다. 시대의 조류에 초연하여 고아한 정적의 경지를 지켰다. 1919년 〈욕망의 노래〉로 문단에 데뷔했고,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1936년 〈조우자로부터의 소식〉에서 새로운 낭만풍의 시경을 개척하였다. 그 밖에 소설로는 장편 《사랑의 후조》가 있다. – 한글 위키피디아

올 들어 처음으로 느껴본 ‘후덕지근’ 한 어제 밤을 보낸 후 결국은 자연의 섭리는 다시 ‘통계적 평균’을 찾아 제자리로 돌아오긴 했지만 조금 심했나… 극과 극의 맛을 자랑이라도 하듯 오늘 새벽은 완전한 겨울 같은 느낌이다. 3월 31일은 역시 이른 봄이라기 보다는 늦은 겨울이기도 한 것이다. 차가운 비와 더불어 시베리아 같은 느낌의 세찬 바람소리가 들리는 뒤 뜰에 잠깐 나가보니 어제 입던 옷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그런 날씨로 변해 있었다. 지나간 해 이맘때쯤 남긴 ‘세찬바람 불어오면…’ 을 읊조린 글과 그림이 생각이 나는 아침이 되었다.

이런 날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른 광경은 역시 ‘포근하고 따뜻한 늦잠’을 즐기는 나의 모습이지만 오늘은 그런 가능성이 제로이기에 아쉽기만 하다.  오늘은 ‘주일’이기도 하고, 한가하게 쉴 수 있는 여건도 아닌 것이 아쉽기만 하다. ‘주일은 쉬어라’.. 십계명.. 흠…. ‘노동’은 쉬겠지만 나의 七十 老軀 를 끌고 밖으로 차를 몰고 나가야 하는데..

주일 아침의 ‘십계명의 부담’ 넋두리의 유혹을 제치고 나머지 일요일 하루를 보낸 후에 느낌은 역시.. 이것이다. ‘할 것은 해야 하고, 뛸 데가 있으면 끝까지 뛰는..’ 바오로 성인의 가르침, 아니면 레지오 교본이 강조하는 ‘부지런함과 절제되고, 훈련된 삶 disciplined life’가 주는 기쁨,  기본적으로 ‘게으름의 죄악’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도 죄악임을 가끔 완전히 잊고 살 때가 얼마나 많은가? ‘무상으로 받은’ 자유의 시간들, 정말 공짜가 아님을 잊으며 ‘나는 절대로 죄가 없다’고 코웃음을 치는 사람들.. 가끔 나도 그 중에 하나다. 오늘도 그런 유혹을 받았고 결과적으로 완전히 그것을 물리친 안식일이 되었다.

 

3월의 마지막 주일날 (다섯째)에는 21차 레지오 아치에스 Acies1 행사가 열렸고 우리 ‘자비의 모후’, 연숙이 사회를 진행하게 되어서 한 명이 빠진 상태였지만, 다행스럽게 협조단원 2명, 그것도 모두 ‘형제님들’ 이 참석을 해서 ‘기본적인 체면’을 유지할 수 있었다. 2년 전 ‘레지오 미친년들 사건‘ 이후부터 이런 행사가 오면 단원의 숫자에 무척 신경이 쓰였다.  워낙 신입단원 모집이 어려운 요새의 실정에서 기도 이외에는 크게  상황이 호전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독을 뿜는 독사들’ 한두 명만 있어도 이렇게 오랫동안 여운을 남기는 피해를 보며… 역시 ‘뱀의 머리를 바수는 어머니’의 역할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 군대 같은 질서로 우리들 모두 성모님께 충성을 서약하며 의미 있고 보람된 ‘안식일’ 인 3월 마지막 날이 되었다.

  1. 총사령관이신 성모님께 대한 개인 및 단체 봉헌식, 3월 25일을 전후로 개최한다. 아치에스는 라틴어로 전투대형을 갖춘 군대’라는 뜻이다.

 

Roswell Nursing center, 비록 review는 별로지만 나름대로,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의 service를 주는 곳

 

Roswell Nursing (& Rehabilitation Center), 우리는 줄여서 Roswell nursing home, 아니면 그저 Roswell 양로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제 레지오 주회합 후,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곳에 들렸다. 이것은 이번 주에 우리 ‘조’ 에게 배당된 최소한 2 시간의 레지오 활동이기도 했다. 몇 년째 되는 이곳에서의  우리의 레지오 ‘봉사’ 활동은, 보통 몇 분의 ‘장기 체류, 중증 치매 환자’인  형제 자매님들을 뵙고, 의사 소통이 가능한 분과는 얘기를 나누고, 그렇지 않은 분들과는 그저 무언의 대화를 하다가 돌아오는 정도다.

처음 이곳을 방문하기 시작했을 때 ‘아래층’ 에 있는 ‘치매환자 병동’을 보고 적지 않은 충격을 느꼈던 것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적은 숫자의 치매증 환자를 이제까지 못 본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많은 환자들을 한꺼번에 목격한 것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환경적으로 이곳은 큰 병원 같은 ‘시설’의 느낌으로 긴 복도에 무질서하게 방황하거나 심지어 엎드려서 기어 다니는 광경은 비록 ‘봉사’하는 마음을 갖고 갔지만 충격적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이들의 비교적 어두운 ‘아래 층, 거의 지하’에 집단적으로 모여있는 것은 분명히 ‘안전’을 위한 것이지만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방문회수가 늘어나면서 물론 이런 광경들은 차츰 익숙해지긴 했고, 어떤 때의 광경은 비교적 안정되고 깨끗하게 보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느낌을 떠나서 일단 치매환자들을 개인적으로 만나게 되면 각종 혼란한 생각이 나의 머리를 스친다. 가벼운 망각증부터 심한 중증 치매환자들, 그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어떤  ‘봉사’한단 말인가?

 

 

완전히 자기를 잊고 산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내가 아무리 상상력을 동원해 보아도 ‘실감’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어떤 것들을 보고,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인가? 조금이라도 실감이 되면 무슨 가능한 시늉과 통화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치매의 ‘진행 정도’에 따라서 어떤 분은 우선 대화가 가능하고, 심한 분들은 전혀 통하지 않는다.

내가 이런 분들의 머리 속으로 들어가면 어떤 것들이 보일까, 각종 추측을 해 보지만 사실 아무도 모른다. 오직 그 고통중의 환자만 아는 것이다. 가족들도 전혀 모른다고 하니 그 가족들의 심정은 어떨까?  가끔 가족들이 온다고 하지만 그들도 우리와 별 차이 없을 것 같다. 저 분들이 나의 어머니, 삼촌 같은 분들이었다면… 솔직히 이런 ‘시설’에 놓아두고 싶지 않을 것 같은 ‘사치스런’ 생각까지 든다. 그들도 오죽하면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런 곳에 맡기셨을까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다.

 

 이런 치매 환자들과 다른 분들 즉, 거동이 불편한 분들은 그래도 대화가 되기에 좀 낫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거동의 불편함도 정도가 있어서 ‘말기성 치료 terminal care’ 환자처럼,  나을 가능성이 거의 없는 분들은 정말 이곳이 지옥같이 느껴질 듯하다.  정신은 말짱한데  불편한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하거나, 다시 퇴원할 가능성이 없음을 알고 이곳에 머무는 것, 그것은 다른 종류의 고통이요 형벌이 아닌가? 게다가 말도 거의 통하지 않는 환경에서 어떻게 오랜 세월을 보낼 수 있을까? 가족들도 그런 사정을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방문하는 한 ‘개신교 자매님’도 그런 분이다. 처음 이곳에서 알게 된지 1년도 훨씬 넘는 이 자매님, Parkinson’s 병 환자라 거동이 아주 불편하다. 문제는 이 병이 ‘퇴행성 degenerative’이라 점점 나빠지는 것이고 치료방법이 현재로는 없다고 한다. 그 동안은 그런대로 움직이며 단체활동 (bingo나 auction game같은) 도 언어소통에 상관없이 열심히 하셨는데 이날 보니 아주 상태가 좋지 않았다. 병세 (근육마비)가 점점 중요 장기들에 영향을 미치는 듯 싶었다.  불길한 느낌에 오래 가실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시설을 나왔다.

이곳에 왔다가 집으로 돌아갈 때는 반드시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우리가 더 나이가 들거나 건강이 나빠지면 어떤 모습으로 살 것인가.. 하는 ‘당연하지만 방정맞은’ 그런 생각, 안 할 수가 없다. 우리의 나이를 의식하고, 세월의 빠름을 감안하면 거의 실감이 안 날 수가 없다. 하지만, 재빨리 ‘내일 일은 내일이 알아서 한다’라는 말씀을 상기하며 부지런히 차를 Roswell 에서 Marietta쪽으로, 집으로 집으로..

¶  물 건너 간 것, ‘첫눈’: 2019년 2월이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28일 밖에 되지 않아서 더 빨리 지나가는 듯 하다. 목을 빼고 애처럼 기다리던 올 겨울  ‘첫, 하얀 시루떡, 눈 雪’,  은 결국 물 건너가는 듯 느껴진다.  왜 올해 내가 그렇게 ‘첫 눈’을 기다렸는지는 사실 나도 잘 모른다. 지나간 몇 년간 매년 보고 즐기기도 했던 것이라 습관이 되었는가, 아니면 그저 나이답지 않게 ‘감상적 感傷的’ 인 기분에 빠졌는가.  비록 눈 구경은 못 했지만 대신 비 구경은 실컷 즐기며 살았던 주일을 보냈으니 그렇게까지 실망할 것은 아니다. 대신 YouTube의 video를 통해서 눈보라 치는 모습과 곁들인 멋진 영상음악은 Google ChromeCast의 도움으로 big screen TV를 통해서 실컷 보고 들었다. 하지만 이것은 역시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뒤뜰로 흩날리는 몇 송이의 눈발과 어떻게 비교를 할 수가 있겠는가?

 

¶  규칙적인 대장 운동:  지난 주에는 뜻하지 않게 regularity 문제로 며칠간 고생을 했다.  평소에 큰 신경을 안 쓰고 살았는데 가끔은 이것이 찾아온다. ‘변비, constipation’이라고 하면 당장 ‘냄새’가 나는 듯해서 조금 부드러운 표현이 ‘규칙적인 대장 大腸 운동, regularity’ 지만 이것 역시 기분은 마찬가지다.  왜 이런 ‘불규칙 증상’이 찾아왔나 생각해 보니 주범은 역시 ‘달콤하고 편리한 stick instant coffee 중독’인 듯하다. 그것 말고는 혐의를 둘 것이 별로 없으니 말이다.  예방은 물론 이런 ‘편리,달콤함’에서 벗어나면 되는데 ‘처방, 치료’가 문제다.

Toilet에 오래 앉아 있어야 하는 불편함은 경험이 없는 사람은 모를 것이다. 나도 잘 몰랐으니까..  이 regularity문제 자체보다 더 심각한 것은 이로 인해서 ‘Prep-H, hemorrhoid’ moment 까지 나가면 정말 골치를 썩게 된다.  나도 경미하게 Prep-H 증상을 몇 번 겪었지만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것만은 피하고 싶지만 항상 운이 좋은 것은 아니다.

이번에도 이틀 정도 이것으로 고생을 했지만, 증상자체도 신경을 심하게 건들이지만 그것보다 이것으로 기분이 축 쳐지고 우울감까지 느끼게 되는 것도 만만치 않은 도전이다. 이런 며칠 간 고생의 경험으로 이제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들’을 조심하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Kroger drug counter에서 찾은 ‘stool softener’ 란 pill을 정기적으로 복용하기 시작했고, 최악의 경우에도 대비를 하기로 했다. 이것도 ‘앞서가는 나이’와 상관이 있는 불편함인가…

 

¶  2월 마지막 주일:  거의 매일 비가 온 듯한 느낌을 주는 2월, 마지막 주일 미사는 도라빌 순교자 성당으로 가게 되었다. ‘절대적인 이유’가 아니면 앞으로 주일미사는 동네 미국본당으로 가기로 달 전에 결심을 했지만 예외는 항상 예상 해야 한다.  이날이 바로 그런 날이 되었다. 이유는 도라빌 성당 60~70대 친교모임인 등대회 회식 때문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찬란하게 떠오른 태양으로,  미사 시작을 ‘쨍~하고 해 뜰 날’ 이란 말로 시작한 주임신부님도 주일에 보게 된 것도 반가웠고, 한달 만에 다시 만난 등대회원들도 새롭고 즐겁게 느껴진 것을 느끼고, 이곳도 조금은 정이 들었나..하는 포근함까지 느끼는 등, 이날, ‘주일’은 그야말로 ‘주님이 주신 안식일’이 되었다.

오늘 ‘레지오 화요일’,  오늘도 우리 집 뒤뜰에서 계속 초봄의 소식을 전해주는 수선화를 꺾어가지고 가서 레지오 성모상 옆에 꽂았다.  성모님 (상)을 보면서, 현재 조금씩 안정되어가고 있는 우리의 ‘자비의 모후’를 쉽게 포기하지 않으시는 듯한 모습을 그린다. 몇 주 전부터 ‘방문자’로 참관을 하는 ‘예비신자’ 자매를 보며 나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어쩌면 이 자매도 ‘성모님 job’이었나 할 정도다. 또한 얼마 전 퇴단한 실망스런 자매들과 이 예비신자 자매와 비교를 하며, 어떻게 세상에 이렇게 사람들이 다를 수가 있는가.. 나는 입을 다물지 못한다.

대체적으로 올해 2월은 우리로 하여금 지나간 6개월 여 ‘구역모임’으로 인한 ‘고통의 기억’들로부터 더욱 멀게 해 주는 그런 시기가 되었다. 이제는 우리는 다시 제 정신을 차린 듯한 산뜻한 기분을 느끼며 ‘우리들의 3.1절’을 기다리게 되었다.  ‘우리들의 3.1절’, 1919년의 기미년이 아니고, 우리 둘에게 3월 1일을 즈음해서 일어났던 각종 ‘좋은 추억’들, 예를 들면: ‘1992년 현재의 집으로 이사 왔던 날’, 부터 시작해서 2012년의 ‘매일 미사’ 전통의 시작까지 3.1절은 우리에게 소중한 날이 되었고 올해도 예외 없이 이날이 되면 추억과 더불어 ‘때려 먹는’ 즐거움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예수회 창시자 성 이냐시오

예수회, S.J.  성 로욜라의 이냐시오,  S.J…. Society of Jesus. 우리에게 비교적 친근한 느낌을 주는 이 ‘가톨릭’ 단체는 과연 무엇을 지향하는가? 이것이야 말로 우문현답 愚問賢答 을 연상하게 하는 질문이지만 실제로 어떤 때는 나도 확실하지 않다. ‘예수회’니까 물론 절대적, 궁극적인 목표는 ‘역사적, 현존’ 예수님일 것이지만 과연 그것을 지향하는 신학적인 철학, 방법은 무엇인가? Wikipedia같은 곳을 보면 ‘공식적인 사실’들이 수 없이 많이 열거되어 있고, 모두 사실적, 객관적, 역사적인 것들이라 왈가왈부를 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내가, 우리가’ 머리로, 가슴으로, 피부로’ 받는 그 느낌은 어떤 것인가?  이것은 어쩔 수 없이 내가 직접 가까이에서 보고 듣는 ‘객체’들에 의해서 좌우 될 것이다. 그 객체는 어떤 것이며 누구인가? 가장 확실한 것은 바로 ‘예수회 사제, 신부, 수도자, 학교’ 같은 것이 아닌가?  내가 학교 같은 단체는 접할 기회는 없지만 사제들은 바로 앞에서 경험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이 나에게는 예수회의 전부인 것이다.

나의 두 본당 중 영어권 본당의 사제는 오래 전에 결혼을 한 ‘동방교회’ 출신으로 로마교회로 온 신부로 그야말로 ‘교구신부’다. 예수회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하지만 모국어 ‘도라빌’ 본당의 사제는 언제부터인가 교구사제에서 예수회 사제로 바뀌어서 이제는 예수회란 말이 빠지는 것이 이상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니 우리는 정말 가까운 곳에서 ‘예수회’를 느끼며 사는 것이다.

우리들, 평신도들에게 이런 것이 무슨 큰 차이가 있을까?  멀리서 보면 큰 차이는 없겠지만 잘 생각해보면 분명히 차이를 느낀다. 예수회 사제, 특히 본당신부는 전통적으로 ‘교구 사목’이 그들의 특기는 아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큰 차이가 없이 느껴지니까 별 문제는 없다. 오히려 영성적인 측면으로 보면 더 이점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특히 이냐시오의 영성을 사목에 주안점으로 삼으면 평신도들은 독특한 혜택을 받지 않을까.  그래서 교구 사목상에도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문제가 있다면 다른 곳에 있는 듯하다. 나는 절대적으로 신학전문가가 아니기에 섣불리 단언은 못하지만 내가 접하는 ‘미디어’ (fake가 아닌 전통적 미디어)를 통한 예수회, 그것도 특히 미국(북미주) 예수회는 더욱 그렇다. 이것이야말로 ‘야당과 여당’을 이루는 정치구도와 흡사한가. 한마디로 예수회는 미국의 liberal, democratic, progressive한 것이라면 거의 틀림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것은 미국만의 현상은 아닐 듯하다. 모국도 아마 마찬가지가 아닐까?

미국의 가톨릭 매체들을 살펴보면 이 ‘양극화’가 뚜렷하다. 특히 ‘또라이’ 트럼프가 들어오며 이 현상은 숨길 수가 없는 듯하다.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이 ‘예수회 프란치스코교황’의 ‘자비’ 선포로 인한 ‘전통 교리의 후퇴’를 우려하는 ‘극단적인 비난’인데, 양쪽의 주장을 들어보면 모두가 일리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아무리 교리, 교의 해도 세상과 세속의 ‘진화’는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 아마도 예수회의 주장일 듯하다.

쉽게 말해서 ‘자비와 정의, 원칙’의 대결인 셈인데, 이들 신앙인들에게는 ‘중도’라는 ‘타협’은 없는 것인가?  제일 심각한 것이 Homosexual 들을 ‘자비’로 받아들이자는 문제다.  또한 Abortion(낙태)에 대한 자세도 그 중에 하나다. 이것도 타협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인가?

그 중에서도 가장 신경을 건드리는 것은 다름이 아닌 대한민국만이 가질 수 있는 ‘사상논쟁’을 빼놓을 수 없다. 예수회 신부들은 여론적으로 보아도 ‘진보적’임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빨갱이’라는 평을 쉽게 받는다. ‘정구사’라는 독특한 약어의 느낌도 다를 것 없이 ‘빨갱이’라고 매도된다. 이것도 타협점이 없는 것일까? 한마디로 주위를 살펴보면 ‘또라이 트럼프’처럼 서로 잇빨을 드러내며 으르렁 거리기만 했지 절대로 대화할 생각이 없는 듯하다.

나의 생각은 어떤가? 아무래도 나이 탓, 나의 가족적 역사로 보아서 예수회 같이 무조건 자비는 말하고 싶지 않다. 이유 있고, 정의가 밑받침이 되는 자비와 사랑.. 물론 이것은 쉽지 않은 것이지만 이것 말고는 방법은 없는 것 아닐까?

올들어 처음 피어나는 수선화 꽃망울

 

¶  돌아온 수선화여, 주일 전부터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모습, 올해 처음으로 피기 시작한 수선화,  일주일 동안 거의 매일 아침미사 15분 drive하는 동안 우리는 오늘은 어떤 모습의 봄 소식을 찾을 수 있나 차창밖에 온통 신경을 쓴다. 이것은 우리 같은 ‘젊은 노인’ 부부에게는 논쟁의 여지를 줄 수 없는 거의 완벽한 대화 소재가 아닌가 생각한다.

꽃 망울이 겨우 눈을 뜨기 시작한 수선화가 작년에 하늘로 간 Tobey1의 무덤 주위에서 그 녀석의 영혼을 감싸듯이 정렬을 하고 있음을 매일 본다.  추위를 견디는 수선화의 안쓰러운 모습과 나의 손에 머리를 안겨 마지막 숨을 쉬던 그 녀석의 얼굴이 겹치며 나를 순간적으로 우울하게 한다. 역시 봄과는 거리가 있는 싸늘함은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올해의 겨울과 봄의 사이는 유난스럽게 이상한 것이, 겨울이 정말 춥지를 않았다. 영하로 내려갔던 날이 며칠이나 될까? 덕분에 에너지는 많이 절약했겠지만 이런 상태로는 올 겨울 ‘눈 구경’은 물 건너 가고 있다.  대신 장마철을 연상하게 하는 ‘싸늘한 비’의 연속을 겪고 있다. 아마도 봄을 준비하는 초목들은 땅 속에서 잔치를 벌리고 있을 듯 하다.

 

기다리던 눈 대신 싸늘하게 내리는 줄기찬 비

 

거의 ‘악몽’ 처럼 느껴졌던 작년 후반기 6개월의, ‘구역’에 대한 기억, 이제는 그런 것들을 뒤로하고  2019년의 봄은 우리에게 조금 더 다른 의미를 주는 기회를 주기를 진정으로 바라고 있다. 청순한 수선화여, 피어있는 동안 우리에게 모든 괴로웠던 기억들을 말끔히 씻어 가게 해주길..

 

¶  수선화의 성모님:  모처럼, 나와 우리의 ‘등대’, ‘자비의 모후’  주회합 성모님 제대의 주위가 ‘꽉 찬듯한 느낌’을 주었다. 지난 몇 개월간 생존의 위기를 거듭했던 ‘자비의 모후’,  몇 주 전에는 결국  ‘파산선고’ 까지 우려했지만 역시 성모님의 도움이신가.. 최소한의 간부구성이 갑자기 이루어졌다.

 

수선화의 성모님, ‘자비의 모후’를 도와주소서,,

 

게다가 신단원 모집에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예비신자 자매님이 부활 세례직후에 입단이 거의 확실하게 되는 듯하니, 어찌 수선화의 축복을 받는 성모님이 더욱 더 아름답게 보이지 않겠는가? 지나치게 큰 기대는 안 하지만, ‘독물 毒物 이 전부 빠져나간 듯한 ‘ 우리 ‘자비의 모후’가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새 모습으로 탈바꿈하는 것, 올 봄에 기대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다.

 

  1. 작년 6월에 14살 천수를 다하고 떠난 나의 ‘영혼의 벗’ 개 Dachshund 의 이름

2년 전 아래층으로 ‘이사’를 내려온 나의 office에 있는 bookshelf 에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책들을 섞는 중에 눈에 띈 책이 있었다. 오래 전에 읽다 말다 하다가 놓은 책, 동아일보사 간행, <인촌 김성수’> 란 책이었다.  김성수, 동아일보사 모두 나와는 자연스레 친근한 이름들이다.

1960년대 나의 모교였던 서울 중앙학교(중-고등)를 ‘인수, 경영’했던 ‘만석군 부호의 아들’이었던 인촌 김성수, 귀공자 답지 않게  Bill Gates같이 ‘돈을 현명하게 쓸 줄’  알았고, 당시로서는 선지자적인 삶을 살았다. 특히 말년에 정치계에서는 ‘이승만의 독재’를 정말 싫어했고, 아마도 그로 인해 화병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오늘 읽은 부분에서 희미한 기억을 되살리는 것, 계동 1번지에 중앙학교가 위치한 사연을 읽게 되었다.  1960년 중앙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코흘리개 우리들에게 학교는 ‘민족학교의 역사’를 정식으로 가르쳤었다. 무언가 민족적 사립학교의 전통을 남기려는 것을 우리들도 숙연하게 받아들였던 기억이 남는다.

 

 

책,  “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 중에서

 

중앙학교 교장 재직 당시의 인촌 김성수

 

새 요람, 계동 1번지 중앙학교

 

 

조선의 새 인맥(人脈)

새로운 교사가 들어설 땅을 백방으로 물색하던 인촌 仁村 은 1917년 6월, 계동 1번지인 지금의 중앙중고등학교 자리를 터로 정하고 4천 3백 평을 사들였다. 당시 이곳은 북악산 줄기를 뒤로 한 계곡으로 울창한 송림만 들어찬 산골짜기였다.  민가도 없었고, 다만 학교 터 뒤편 숲 속에 당시 육군연성학교(陸軍硏成學校; 훈련소) 교장이었던 노백린(盧伯麟; 후에 上海 臨政 軍務總長 역임)  참령(參領)의 집이 있을 뿐이었다. 인촌이 이 땅을 사들이려 하자  고하 古下 (송진우) 는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숯막 짓고 참숯 구워 팔려나? 이런 깊은 산골짜기에 학교를 지어 어떡하겠다는 거여?”

“어째 그렇게 자넨 발등만 보고 사는가?. 자, 보라고! 앞으로는 서울 장안이 한 눈에 굽어 보이고 뒤에는 북악의 줄기가 아닌가! 그 정기를 받아 청년의 이상을 꽃피우기 위한 배움의 터로서는 이만한 명당이 없네. 얼마나 시원한가, 젊은이들이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울 만 허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먼? 이 보게, 큰 길에서 너무나 들어온 골짜기야, 학생들 통학도 생각해야지?”

“지금은 좀 불편하겠지만 앞으로 십 년만 지나보게. 서울은 지금 새 시대를 맞이하여 커지고 있어. 모르기는 해도 십 년 뒤면 학교 주변이 주택들로 차게 될걸?”

멀리 앞을 내다보는 인촌의 안목은 정확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과연 십 년이 채 안되어 개발이 되고 주택이 들어서기 시작했던 것이다. 훗날 고하는 인촌의 선견지명에 혀를 찼다고 한다. 땅을 사들이자 즉시 새 교사를 짓기 위해 터를 닦기 시작했다. 인촌은 공사장에 나가 감독 뿐만 아니라 일꾼들과 함께 흙을 고르며 땀을 흘렸다. 교장이 솔선수범하니 고하를 비롯한 교사들까지 수업이 끝나면 함께 땀을 흘렸다. 스승들이 일을 하자 학생들도 부지런히 삽질을 하고 돌을 나르며 일을 도왔다.

그 보람이 있어 나무만 울창하던 산골짜기에 건평 2백여 평의 붉은 2층 건물이 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서울 장안(長安)의 이목이 쏠리고 김성수라는 이름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붉은 벽돌 2층의 이런 신식 건물은 그때까지만 해도 장안에서는 볼 수 없는 멋진 신식 교사인 데다가 그것을 짓고 있는 인물이 같은 동포인 김성수라는데 화제가 됐던 것이다.

뒷날 동아일보 사옥을 신축할 때나 보성전문 교사를 신축할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인촌은 틈만 나면 공사장에 나가 일꾼과 함께 살았다. 자재에서부터 설계, 혹은 대목(大木) 등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게 없었다.   건축을 공부해서가 아니고 공사장에 가서 몇 번만 보면 다 터득하여 현장 감리(監理)들이나 목수들의 탄복했다고 한다.

어쨌든 장안의 화제였던 계동의 중앙학교 신교사는 5개월만에 그 웅자를 드러내게 되었다. 그 해 11월에 준공을 끝내고 12월 1일에  화동(花洞) 구교사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계동 1번지에 세워진 중앙학교 새 교사 낙성식, 1917년

 

폐교 직전의 중앙학교를 인촌이 인수하자 비상한 관심을 가진 것은 당시의 조선인 사회 뿐이 아니었다. 총독부 관리들이 주시하고 있었다. 돈 있으면 금광이나 하라며 백산학교(白山學校) 설립계획을 까뭉개고 돌려보낸 학무국장 <세끼야> (關屋)는 조선인의 실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던 터라 무명청년 김성수가 말썽 많고 경영난으로 쓰러져 가던 중앙학교를 인수했지만 결과는 뻔한 것으로 추측했다.  시골 부자 아들이라니 돈이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지만 깨진 독에 물 붓기로 얼마 안 가서 재산 다 날리고 주저 앉으리라고 보았다. 그러나 결과는 전연 예상 밖이었다. 붉은 2층 벽돌의 신식 교사가 모습을 드러냈을 뿐 아니라 80여명 정도였던 학생이 이제는 3백여 명으로 불어나고 교사들 역시 대학을 나온 조선인들이 거의 전부 일 만큼 탄탄하게 성장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11월 하순, 어느 날 <세끼야>는 비서가 전해준 초청장을 받아 들고 얼굴이 이지러졌다.

“뭐라구? 중앙학교 신교사 낙성식? 그 낙성식에 오라구? 으음”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게 무시했던 무명청년은 새 교사를 당당하게 지어 놓고 그 잔치마당에 자신을 초청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인촌을 김군(金君)이라고 불렀고, 심지어 학교설립을 신청했을 때는 부모의 승낙을 얻었느냐며 어린애 취급을 하고 얕보던 <세끼야>도 낙성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원파공과 지산공을 상석에 모시고 낙성식은 성대하게 열렸다. 조선인의 힘으로 만들어진 학교였기 때문에 장안의 시민들도 구름처럼 모였다. 학무국장 <세끼야>는 금줄이 번쩍이는 제복에 긴 칼을 늘어뜨리고 식장에 나타나 지금까지의 태도를 바꿔 <긴센세이> (김선생)라 존대하며 몇 번이나 장한 일을 했다고 치켜 세우고, 조선인의 힘으로 이렇게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있게 된 것은 일시동인(一視同仁)하시는 천황폐하의 홍은(鴻恩) 때문이라며 판에 박은 공치사를 하고 돌아갔다. 그로부터 총독부 관리들이 인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조선의 젊은 민족지도자로 지목하고 경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촌은 어진 성품과 큰 도량을 지녔기 때문이었는지 젊어서부터 그의 주위에는 수많은 인재들이 모여 떠날 줄을 몰랐다.

인덕(인덕)을 타고남도 하늘의 도움이다. 인촌은 늘 인덕이 있었다. 당시 그의 주위에도 제제다사(濟濟多士), 많은 인재들이 그를 돕고 있었다.  중앙학교와 인연이 깊었던 최규동, 이중화, 이광종, 이규영, 권덕규 등 대가 이외에도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송진우, 최두선, 현상윤, 이강현 등과 국내에서 명성이 높던 변영태, 유경상, 유태노, 조철호, 고희동, 나원정, 박해돈 등 신진기예들이 차례로 교편을 잡게 된 것이다. 총독부로 볼 때 인촌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학교의 인맥과 존재는 조선 사회에서 무시 못할 민족 지도자 그룹으로 비치게 되었다.

 

 

무명 교복과 교지(敎旨)

‘웅원(雄遠), 용견(勇堅), 성신(誠信)’ 의 3대 교훈은 인촌 스스로 정한 것이며 인촌 스스로 정성스럽게 써서 남긴 진적(眞迹)이다.

 

아직도 기억하는 세 가지 중앙의 정신: 웅원, 용견, 성신

 

이 중앙학교의 교지는 인촌의 교육이념을 집약하는 동시에 그의 가치관을 나타낸 것이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70여 년 동안 1자의 수정도 없이 지켜지고 있는 것을 보면 인촌의 교육관은 백년대계의 큰 안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앙학교를 인수한 후 인촌은 특히 학생들의 옷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 하찮은 걸 뭘 그렇게 골똘하게 생각하시오? 다른 학교와 학숙의 학생들처럼 그냥 입히면 되는 거지?”

보다 못한 안재홍이 그렇게 말하자 인촌은 고개를 흔드는 것이었다.

“결코 하찮은 문제가 아니오, 학교 모자와 학교 옷은 바로 그 학교의 얼굴이며 상징입니다. 관립 일반학교마냥 일제(日製) 광목으로 된 옷을 입히고 그들의 씌운 모자를 그대로 씌울 수는 없는 일이요. 조선학생은 조선학생 티가 나야지요.”

고심하던 인촌은 검은 천을 댄 교모(校帽)에 무명으로 지은 교복을 입히기로 했다.  일부에서는 질 좋고 맵시 나는 일제 광목을 두고 왜 하필이면 손으로 짠 그 투박한 무명베로 교복을 하느냐며 못 마땅해 했다. 광목(廣木)은 개화 이후 일본 상인들이 들고 들어와 가장 재미를 본 생필품이었고 널리 판을 치고 있었다.

“값 싸고 질긴 우리 전래의 무명베가 있는데 왜 비싼 일제 광목을 쓴단 말이오? 우리가 우리 것을 쓰지 않으면 누가 쓴단 말이오?”

인촌은 국산품을 애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일찍부터 ‘산업장려’나 ‘국산품 애용’을 구국운동의 하나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하찮은 교복에까지 신경을 쓴 것은 바로 자기학교 학생들 한테 만이라도 그러한 민족의 얼을 심어주겠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참성단(塹星壇) 수학여행

 

당시 인촌 밑에서 중앙학교를 거쳐 나온 인사들의 회고만 보더라도 인촌이 평소 얼마만큼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민족사상을 불어 넣었는지를 알 수 있다.

 

 

유홍 柳鸿  회고

나는 1916년 그러니까 인촌 선생께서 학교를 인수하신 그 다음 해에 중앙학교에 입학했다. 입학한 후 첫 소풍을 강화도로 갔었는데 그때의 일은 오래도록 나에게 어떤 충격처럼 남아 있었다. 전교생이 함께 갔었던 것 같다.

유근 교장 선생님을 비롯한 선생님들 중에는 물론 인촌 선생님도 포함되어 있었다.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에 올라갔다. 교장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이 단군 성터에서 단군설화를 얘기하면서 목이 메었으며, 인촌 선생님께서도 소리 없이 눈물을 짓고 있었다. 학생들도 그제서야 나룻배까지 빌어 타고 강화도에 소풍을 온 까닭을 깨닫고는 모두 함께 울었다. 그때 교장 선생님 바로 옆에서 단정한 자세로 눈물 지그시 감은 채 눈물을 흘리시던 인촌 선생님의 모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신도성 愼道晟 회고

중학교 입학 당시(1930년) 나는 제일고보(第一高普)와 중앙학교 두 군데 시험을 쳤는데 두 군데 다 합격을 하게 되었다. 그때의 상식은 당연히 제일고보로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학교를 가느냐의 선택에 있어 어리고 철이 없으므로 선친께 의논을 드렸더니 중앙학교를 택하라 하셨다. 경남 거창에서는 우리 집이 대지주에 속했으므로 인촌의 경방, 동아일보 설립할 때 주식투자 권유를 받아 우리 선친과 인촌은 교분이 있었다. 투자는 안 하신 것 같지만 마음 속으로 인촌을 퍽 존경하셨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중앙학교를 들어 가게 되었다. 그런데 학교를 들어가 보니까 역시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특한 민족주의적인 분위기가 살아 있었고, 김성수 선생께서 교장을 하시며 수업에 들어 오시기도 했다. 그것도 좋았지만 조철호, 박용희 선생 등으로부터 훈련을 단단히 받았던 것도 인상적이었다. 권덕규(역사), 문일평(한국사; 동양사), 이윤제(한글) 선생 등 좋은 선생님들이 많았다. 일제하에서 배우기 힘든 보통의 교양교육을 다 배웠다. 학교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 인촌 선생은 수신시간에 교재를 뒤로 제쳐놓고 자신의 얘기를 많이 해 주셨는데 은근히 민족정신을 불어 넣어주곤 했다. 예를 들면 영국에 가서 하숙을 하는데 한국에서 하던 버릇대로 화장실을 갔다 오면서 불을 안 끄고 나왔더니 주인이 잔소리를 하더라. 전력을 낭비하지 않고 물자를 절약하며 잘 살면서도 검약하더라. 우리는 전등불도 안 끄고 잠을 자고 그러는데 그래서는 안 되다고 충고를 하시기도 했다. 한번은 외국을 가시는데 여권에 적어야 하는 국적이 남의 나라 이름으로 되어 나라 없는 백성의 서러움을 실감했었다. 배 안에서 식사를 할 때 식탁에 승객들의 국기를 꽂는데 그 국기 가운데 태극기가 없었다는 울분을 얘기하셨다.

 

3.1운동의 실제적 모의 장소: 중앙학교 숙직실

 

그리고 3.1운동 때의 말씀도 하셨는데 중앙학교에서 모의하던 얘기를 하셨다. “3.1운동이 파고다 공원에서 일어난 줄만 알고 있지? 사실은 중앙학교에서 시작된 거야. 계획도 세우고 유인물도 만들고 그랬는데 바로 그거 한 집이 바로 저 집이야!” 하고 우리학교 숙직실을 가리켜 주셨다. 중앙학교가 민족주의 본거지임을 일깨워 주셨고 우리는 자부심을 상당히 가지고 있었다. 그때 받은 느낌이 그 후에도 남아서 일제 말기에 학생의 몸으로 항일투쟁은 못 했지만 은근히 ‘일제에 협력해서는 안 된다’ , ‘지원병이니 학병이니 그런데 끌려가서는 절대 안 된다’ 는 것은 확고했다. 해방될 때가지 일제가 강요하던 국민복은 한번도 입지 않았고 ‘전투모’와 ‘각반’도 한 번도 매보지 않았는데, 그것은 인촌 선생의 교육 영향이었다.

 

 

김승태 金昇泰 회고

그때 중앙학교는 마치 기사(기사)를 양성하는 도장(도장)과 같은 분위기였다. 또한 그 학교는 3.1운동의 발상지가 되었고, 6.10만세 사건의 중추적 역할도 담당했다. 이것이 모두가 선생께서 웅원(雄遠)한 포부와 용견(勇堅)한 의지, 성실(誠實)한 행동을 가르치신 정신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래서 마치 학교는 도장과 같았고, 배우는 우리는 기사와 같은 흥분 속에서 지냈다. 예를 들면 동지섣달 눈이 쌓였어도 팬츠 하나만 입고 운동장을 달리게 했다. 그것은 독립정신을 갖게 하기 위한 단면이었으며, 정신과 육체의 극기(극기) 훈련이기도 했다.

 

 

채문식 蔡汶植 회고

나의 인생은 중앙학교 5년 동안 교육을 받을 때 인촌의 정신, 인촌의 손길에 의해서 키워졌고 해방 후 지금까지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된다. 일제시대 문경(聞慶)의 산골에서 태어나 중앙고보에서 공부하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1930년대 말 일제는 국어상용 이라 하여 학교에서는 일본 말만 쓰게 했다. 중앙학교에서 가까운 어떤 학교가 있었는데 그 학교에서 한국인 교사가 학생 하나를 정학 시켰다. 그래서 부모가 찾아 왔는데 그 아버지는 일본 말을 모르는 시골 노인이었다. 한국인 담임선생은 우리말을 쓰지 않기 위해 통역을 하게 했다. 그런데 그 학생이 처벌을 받게 된 것은 점심으로 빵을 하나씩 나눠 주었는데 ‘아, 빵이다!’ 하고 외쳤는데 그 말이 한국말이라 해서 정학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오직 한 곳, 중앙고보만은 일본어를 쓰지 않았다. 그 시절에 일본어를 쓰지 않고 공부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대게 중앙학교 선생은 1년은 학교에 계시고 1년은 감옥에 가 계시는 게 보통이었다. 중앙학교에 입학하면서 매를 많이 맞았다. 입학 첫 날부터 영어시간에는 회초리 하나씩을 집에서 준비해 가지고 오라는데 집에 갈 때는 그게 다 꺾여질 지경이었다. 출석을 부르는데 선생님은 우리 말로 ‘채문식!’ 하고 부른다. 그때 국민학교에서는 일본어만 배웠으므로 부지불식간에 ‘하이!’ 하고 대답한다. 그러면 무조건 앞으로 나오라 해서는 회초리로 때렸는데 왜 맞는지 몰랐다. 선생님이 매를 들고 또 ‘채문식!’ 하면 ‘하이!’ 하게 되고 ‘하이!’ 하면 도 맞는 것이었다.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았다. 자기가 가져간 회초리가 다 부러질 때 쯤 되면 뭔가 가슴에 뿌듯한 게 있어서 ‘예’ 하고 우리말로 대답하게 되는 것이었다. 인촌 선생이 아니면 못할 것이었다. 인촌을 보고 더러 총을 들고 독립운동도 안 했고, 외국에 가서 항일운동도 안 하지 않았느냐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시대의 한국 땅에서 인촌이 아니고 누가 그같이 민족의식이 맥박 치는 그런 학교를 경영했던가를 생각한다면 그런 말은 못할 것이다. 선생은 완전한 한국 사람이었고 그 같은 한국 사람을 기르려고 무척도 애를 썼다. 그 회초리를 맞아 가면서 1학년에서 5학년이 될 때는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이 뭔가 쯤은 깨닫게 되었으니 참으로 위대한 애국자라 아니할 수 없다.

 

 

퇴교생(退校生)이 모이는 곳

 

 인촌은 제자들에게 민족혼을 심는데 심혈을 기울였을 뿐 아니라 그것을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 일인교사(일인교사)의 배척운동이나 저항운동을 하기 위해 스트라익을 벌이다가 퇴학을 당한 학생들에게 항상 중앙학교는 문을 열고 너그럽게 받아 들였던 것이다. 당시 인촌이 중앙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 보성학교와 경신학교에서 일인교사 배척운동이 일어난 일이 있었다. 인촌은 이때 처벌 받은 학생들을 모두 받아 들였다.

 

서항석 徐恒錫 회고

나는 1918년에 중앙학교를 졸업했는데 따지고 보면 1년도 못 다니고 졸업한 셈이다. 나는 보성학교를 다니다가 퇴학을 당하여 중앙학교로 편입학하게 됐던 것이다. 인촌 선생의 항일적이며 애국적인 용단을 잊을 수가 없다. 보성학교 2학년에서 문제가 생겼다. 초조시간이 되어 모두 웃옷을 벗고 나가게 되었다. 물론 교실에는 당번이 지키게 돼 있었다. 그런데 벗어 두었던 옷 속에서 시계가 없어졌던 것이다. 담임선생이 여러 방법으로 시계를 찾았지만 나오지 않았다. 마침 보성학교에는 <고마쯔자끼>라고 하는 일본인 교사가 있었는데 그 일본선생이 종로 경찰서에 연락을 했다. 그래서 형사가 와가지고는 학생들을 죄인 다루듯 했다. 우리는 4학년으로 최고 학년이었는데 이 같은 사태에 크게 분개했다. 학교에서 도난사고가 생겼다면 선생들이 자기네 잘못을 느끼고 쉬쉬하며 잡을 일이지 그것을 경찰을 불러 몸수색을 했으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분개하여 일어섰던 것이다. 2, 3, 4학년의 전 학생이 들고 일어났다. 교장은 최린 선생이었는데 전교가 벌집 쑤셔 놓은 것처럼 소란해 졌다. 더 이상 사태가 키질 것 같아 2, 3 학년들을 누르고 우리 4학년 학생 8명이 모든 책임을 지기로 하고 교장선생께 자퇴서를 냈다. 교장선생은 제발 이러지 말라달라고 하셨지만 우리의 기세는 당당했다. 학교측에서는 퇴학을 명함 이라 내붙이게 되었다. 최린 선생은 안 되겠던지 인촌 선생에게 전화를 거셨다.

“요새 우리학교 사건 생긴거 하시지요? 정말 진퇴유곡입니다. 총독부에서 퇴학을 시키라 하니 그럴 수 밖에 없어 퇴학을 시켰소만 정말 우수한 애들인데 버리자니 가슴이 아프오. 앞길이 구만 리 같은 젊은 애들의 장래를 막아 놓을 수는 없지 않소?”

“좋습니다. 그럴 수는 없지요. 싹을 자를 수는 없습니다. 퇴교생 전원을 저희 학교로 보내 주십시오. 소생이 맡아 가르치겠습니다.”

그래서 중앙학교로 가게 된 것이다. 바로 이것이 후에 생각하니 인촌 선생의 애국자로서의 일면을 보여 준 것이라 생각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총독부의 학무국장 세끼야 는 화가 나서 인촌을 소환했다.

“김선생, 이번 일은 좀 경솔했던 거 아니오? 여러 말 하고 싶지 않소. 불온 학생 여덟 명은 받아 들이지 말구 당장 내쫓으시오!”

“무슨 말씀인지 알겠소만 가령 일본인 학교에서 그런 일이 생겼다고 하면 경찰이 학교 구내에 들어가사 학생들을 죄인 다루듯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스승을 배척했다면 당연히 교칙에 따라 퇴학을 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학생은 그것으로 벌은 충분히 받은 거 아닙니까? 배우는 학생에게 퇴학 이상의 중벌은 없으니까요. 그런데 벌을 받은 학생이 다른 학교에 가는 것까지 총독부가 나서서 못하게 한다면 그것은 교육적 견지에서 하는 처벌이 아니라 어떤 민족적 견지에서 하는 보복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인촌의 말을 들은 세끼야 는 말문이 막혔다. 지금까지 자기 앞에 와서 그렇게 당당하게 자기 할 소리를 하는 조선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비록 총독부 관리라 하지만 그 역시 이런 사리를 모른다 할 수는 없었다.

“김선생의 체면을 봐서 이번 일은 불문에 붙이지만 앞으로 그런 일이 있을 때는 우리 학무국 과 상의해서 처리하시오.”

그것은 은근한 협박이기도 했다. 총독 정치하에 있어서 그들의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있어 사학(私學)의 문을 닫게 하는 것쯤은 간단했다. 인촌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민족교육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 뻔해 보이지만 트집을 잡으려 해도 구실을 주지 않는 인촌이야 말로 다루기 어려운 상대였다. 친일인사(親日人士)로 만들려고 유혹도 해 보고 구실을 붙여 위협도 해 보았지만 언제나 그는 정정당당했다. 그러한 편입학 사건은 그것으로 끝나게 아니고 또 있었다.

 

 

정문기 鄭文基 회고

고향인 전남 순천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인성학교에 들어갔다. 그 학교를 나와 서울로 올라왔다. 경신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공부를 하게 되었다. 경신학교는 미국 선교사였던 언더우드 가 세운 기독교계 학교였다. 4학년에 진급하자 학교에서 스트라익이 일어났다. 나는 주동 학생으로 몰려 퇴학을 당했고 중앙학교로 가게 되었다. 그 전부터 사실은 인촌선생 밑에서 공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경신학교에서 처벌을 받고 쫓겨난 학생은 1, 2, 3, 4 학년 합쳐서 수십 명에 이르렀다. 중앙학교에서는 그들을 모두 받아 주었던 것이다. 이젠 끝장이구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인촌 선생이 용단을 내려 받아 주시니 우리들의 사기는 충천할 뿐이었다. 당시 경신학교 교장은 미국인 선교사였는데 화가 났던지 전화로 인촌 선생께 따졌다고 한다.

“이거 보시오, 김성수 선생! 선생께서 그렇게 분별 없으신 교장이신 줄 몰랐습니다.”

“무슨 말씀이오?”

“같은 교육자끼리 그럴 수 있습니까? 우리 학교에서 처벌한 학생들입니다. 잘못해서 처벌한 학생들이라 그겁니다. 그런데 그 학생들을 중앙학교에서 그냥 받아주면 우린 뭐가 되지요? 학생들에게 반성의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본의 아니게 심려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처벌된 학생 전원을 저희 학교로 오라고 한 일 없습니다. 학생들 스스로 찾아와서 저희 학교에서 공부하게 해 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물론 잘못 해서 벌을 받은 것이니 반성을 하고 다시 돌아가 공부하라고 엄하게 꾸짖었소만 돌아가지를 않습니다.  그 중에서 1, 2, 3학년 학생들은 나의 설득대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학생들이 있었으나 4학년들은 누구도 못 돌아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4학년들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어찌 하시겠습니까?”

“다른 방법으로 가르쳐 사람을 만들어 볼 테니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인촌 선생은 결국 4학년 학생만 중앙학교에 남게 하고 그 이하 하급생들은 모두 돌아가게 하셨다. 나는 공부는 좀 소홀히 한 편이지만 야구나 축구 등 스포츠를 좋아했다. 동급생 중 일석(일석: 이희승)은 모범적인 노력가였고 보성학교에서 퇴학을 당해 중앙학교로 온 서항석은 머리가 우수하고 작문을 잘 했다. 둘이서 늘 1, 2등을 다투었다. 인촌 선생은 은근히 경쟁심을 고취했는데 학생들을 친자식처럼 대하셨다.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든다시며 늘 체력단련을 권하셨다. 일본인과 겨루려면 머리도 우수해야지만 몸도 건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스포츠를 좋아했기 때문에 선생님은 건강을 겸했다고 늘 사랑해 주셨다. 한번은 계동 신교사로 이사한 지 얼마 안 되어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는 걸 들었다.

“공부를 한다는 것도 경쟁이니 두각을 내려는 것은 인지본능이며 두각을 쉽게 내는 방법을 알켜 줄까? 남들이 모두 몰리는 유행학과를 전공허지 말아야 돼. 진리탐구를 하는 학문은 어떤 학문이든 똑 같은 벱이여. 지금의 유행 학과가 후엔 무실해지고 지금 유행하지 않는 학과가 인기를 얻을 지 모르는 일이거든? 학문에는 우열이 없느니께 남이 않는 것을 해보라 이말이여”

나는 그 말씀을 명심하고 일본 유학을 가서 <송산고>(松山高)를 졸업하고는 곧바로 동경제대 수산과에 시험을 치뤄 합격을 했다. 그때 수산과를 택한 것은 인촌 선생의 영향이었다. 그때는 문과를 해야 대학생인 줄 알았지 수산학을 한다는 것은 좀 엉뚱한 것이었다.

 

 

韓紙 한지에 싸 준 인절미

중앙학교 교장 당시의 인촌이 우리 민족정신과 기상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는지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증명해 준다. 일제는 한반도 강점 후 구정(舊正)인 <설>을 쇠지 못하게 하고 저희들의 명절인 신정(新正)설을 쇠게 했다. 이른바 <양력설> <일본설>을 쇠게 한 것이다.

해마다 정월 초하루가 되면 총독부에서는 신년 하례식을 하고 천황의 하사품이라 하여 일본 왕실의 문장(紋章)인 국화꽃 무늬가 든 이른바 ‘모찌’ (흰 찹쌀떡)를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곤 했다. 아직 소년들이라 그 떡 받아 먹는 것을 모두 좋아했다.

그러나 중앙학교만은 그와 같은 ‘모찌’를 주지 않고 해마다 신년 초하루가 되면 콩가루 고물 묻힌 인절미를 주는 것이었다. 그것도 인촌 댁에서 직접 떡을 하여 그것을 한지(한지)에 싸서 나눠주는 것이었다. 조선학생이 정월 초하룻날부터 나라 잃은 것만도 서러운 데 일본 떡을, 더구나 일본 왕실의 문장이 찍힌 ‘모찌’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치욕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철 없는 학생들은 집에서 먹어보지 않은 그 일본 떡이 먹고 싶어 불평하는 측이 있었지만 인촌은 씁쓸하게 웃기만 하는 것이었다.

“명절이면 집에서 먹는 그 흔한 인절미, 잔치 때면 흔하게 먹는 인절미라고 그러는 지는 모르겄다만 너희들도 학교를 나가 앞으로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내가 왜 우리 한지에 인절미를 싸서 주는지 그 뜻을 알게 될 날이 있을 것이다.”

연중 시기에서 사순 시기로 가는 길목에서

 

Ordinary Time, 올해 연중시기도 벌써 6주째를 맞는 오늘로서  Extraordinary season, Lent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도 반달 정도 남았다. 싸늘한 비가 간간히 뿌리는 평화로운 일요일 오전..  이런 ‘평화로운 일요일 아침’을 맞아 본 것이 얼마만인가 생각한다.  오늘이 더욱 새로운 것은 우리 마음의 고향처럼 느껴지는 ‘동네본당, Holy Family Catholic Church‘에서 둘이 미사를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렇게 오래 된 것도 아닌데 느낌에는 몇 년이라도 흐른 것 같다. 그 정도로 나는 이런 때를 무의식 중에 기다리고 살았던 모양이다.

나는 미사 후에 곧바로 집으로 가서 편하게 late morning coffee의 향기를 즐길 수 있지만 연숙은 다시 곧바로 ‘도라빌 본당’으로 가서 새로 시작되는 견진 교리반 director 일로 땀을 흘려야 한다. 미국본당에 가는 날의 일요일 일정은 이렇게 조금 복잡한 편이다.

두 본당을 가진 우리의 신앙생활은 조금 지혜로운 생각이 필요하다. 언제 도라빌 한국본당을 가며, 언제 동네 미국본당을 가느냐.. 이것을 결정하는 것, 몇 가지 이유는 분명하지만 아주 분명하지 않을 때는 더욱 심사숙고를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사실 어디를 가나 ‘성체성사’를 하는 것이기에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우리의 신잉생활에 도움을 ‘더’ 줄 수 있는 쪽을 택하는 것이다.

영어권과 모국어 권, 언어 차이를 떠나서 문화권의 다름은 이제 오랜 이곳의 생활에서 익숙하게 아는 것이지만, 그래도 항상 새롭기만 하다. 아마도 이곳에서 죽는다고 해도 그때까지 이 ‘피할 수 없는 문화의 차이’는 계속 새삼스럽게 느낄 것이다. 문제는 이 두 색다른  교회공동체를 통한 신앙생활이 우리의 개인적, 가족적 영성생활에 어떻게 도움을 줄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한때 깊숙이 관여했던 도라빌 ‘모국어 본당’에서 서서히 우리 둘은 물러나고 있다. 의도적인 면도 없지 않고,  피하고 싶은 ‘사람들’과 계속 어울리는 것, 장기적으로 ‘영육간의 건강’에 전혀 도움이 될 수가 없다는 ‘경험적 진리’에 우리는 의견을 모았다.  특히 지난 주일에 ‘견진교리반’ 시간에 일어났던 또 다른 ‘trumpian, kafkaesque incident’ 1  해괴한 사건은 연숙으로 하여금 ‘완전히, 깨끗하게’ 교리반 director 임무를 떠나게 하는 마지막 ‘관 coffin 의 못 nail’ 역할을 했다.

연숙도 나와 발을 맞추어 하나, 둘 짐들을 거의 계획적으로 놓기 시작했는데, 제일 큰 것은 ’15년 간의 주보 편집’이 그것이고 지난 몇 년간의 ‘예비신자 교리반 director’가 그것으로,  그녀에게는 거의 ‘은퇴’와 같은 중대한 결정이 되었다.  이제부터는 남는 시간, 여유를 어떻게 더 ‘지혜롭게, 생산적으로’ 쓸 까 하는 것인데 그것을 나는 절대 걱정 안 한다. 벌써 앞으로 ‘신나게’ 할 것들의 ‘줄을 서’ 있기 때문이다.

 

  1.   견진교리반에 들어온 한 ‘젊은’ 여자의 상식을 벗어나는 무례함으로 깊은 상처를 받았던 사건, 도대체 요새 젊은 아이들은 어떻게 가정교육을 받았고, 그런 ‘애’가 ‘견진’을 받는다는 사실의 모순은.. 

지난 달 말에  ‘프카’ 자매님1 과 카톡 대화를 하던 중에 아틀란타 ‘도라빌’ 순교자 성당 내  ‘영적독서클럽’에 대한 소식을 물었는데 반응이 아주 ‘부정적’인 것이었다. 최근에 느낌도 그랬지만 역시 이 자매님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으로 아예 ‘탈회 脫會’를 하였고 성당을 떠난 별도의 클럽을 만들어서 ‘영적독서’를 계속하고 있다고 했다. 개인적인 사정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그 동안 성당내의 영적독서클럽은 아무래도 무언가 ‘구심점’  결여로  ‘흥미’를 유발하는 클럽의 운영상황이 아닌 듯 싶었다.  흔히 말하는 leadership의 부재 不在, 바로 그것은 아니었을까?

근래에 읽었던 책을 소개하면서 나보고도 읽어보지 않겠냐고 해서 ‘물론 ok’라고 해서 그 다음 주에 그 ‘프카’ 자매님2  손수 책을 갖다 주셨다. 이 동갑내기 자매님, 참 볼수록 정이 많은 분임을 알게 되기도 했다. 그 책의 제목이 바로 ‘아주 특별한 순간‘ 이었는데, 영성적 번역서로 많은 친근감을 주는 ‘류해욱 요셉’ 신부님이 엮은 책이었다.

 

책의 내용은 류신부님의 글이 아니고 ‘안토니오 사지’ 라는 ‘유명한’ 인도출신 신부님이 한국에서 지도한 ‘치유피정’의 강의부분을 아주 매끈하고 유려한 한글로 정리한 것이다.  또한 인상적인 것은 2013년에 첫 출판 후 2017년까지 18 쇄의 중판을 거듭한 것을 보면 아마도 ‘베스트셀러’ 급의 ‘좋은 책’이 아닐까 추측도 해 본다.

모두 25회의 강의로 이루어진 이 책을 접하며 문득 생각이 들었다. 25번의 피정 강의를 한꺼번에 읽는 대신 하루에 하나의 강의를 편안하게 소화를 하면 어떨까? 더 나아가서 2019년 사순절이 시작되는 3월 6일 (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까지 모두 (쓰고) 읽으며 올해의 사순절을 더 특별하게 준비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월 5일까지 25회의 강의를 ‘들으려면’ 2월 9일부터 시작을 하면 될 것이고, 그것을 이곳 개인blog에 시한적으로 남겨두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류해욱 요셉 신부님은 물론 오래 전 (거의 20년 전?) 이곳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주임신부로 계셨던 분이라서 익숙하지만 사실 나 개인적으로는 당시에 성당엘 안 나갔기에 개인적인 느낌은 거의 없다. 애기로만 듣던 분이었지만 몇 년 전에 이곳을 방문했을 당시에 직접 강론을 들었다. 그 후 이분이 저서나 번역서를 읽기도 했는데 그 읽은 경험들이 아주 인상적이고 기억에 남는다. 한때 stroke로 쓰러지셨다고 해서 모두 걱정을 하고 기도를 했는데 그때 직접 보았을 때는 거의 완치가 된 듯 보였다.

이 책의 원저자격인 안토니오 사지 라는 분은 전혀 생소한 이름이지만 강의 내용을 읽고, 약력을 자세히 보니 류신부님의 말씀대로 ‘성령이 충만한’ 분인 듯싶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그런 피정을 지도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특히 피정강의를 ‘강의록’ 에 전혀 의존하지 않고 성경만 가지고 한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책에 소개된 website를 가보니 그곳에 궁금했던 ‘모습’들이 나와 있었고 책보다 더 자세한 안토니오 신부님의 배경도 실려 있어서 이곳에 발췌 전재를 해 본다.

 

강단에 선 안토니오 사지 신부님

안토니오 신부와, 옮긴이 류해욱 요셉 신부님

 

Fr. Anthony Vadakkemury, V.C.

안토니오 신부는 1977년 5월1일 2남2녀 중 맏이로 인도에서 출생했다. 양친은 현재 인도의 케랄라에 살며, 그가 기억하는 가장 어렸을 때부터 그의 꿈은 사제가 되는 것이었다. 마침내 그는 신학교 과정을 인도와 동 아프리카의 케냐에서 수료했으며, 2006년 12월 29일 인도 케랄라에서 빈첸시오회 수도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리고 2007년 1월 6일 첫 미사를 거행하였다.

인도의 방갈로에서 신학교 철학 과정을 마친 뒤, 1년간의 사목 수련을 위해 그는 2002년 케냐의 나이로비로 보내졌다. 이후에 그는 신학 과정을 마치기 위해 아프리카의 가장 유명한 대학 중 하나인 ”탄가자 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77개의 서로 다른 국적의 학생들과 지내며, 서로다른 여러 나라의 문화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2006년 5월 14일 그는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부제품을 받았고, 이후 케냐의 사목 수련시기 동안 케냐, 탄자니아, 우간다에서 동료 사제들과 함께 중등부 학생들을 위한 3일간의 피정을 (예수선교피정) 지도하였다. 그리고 매주 일요일마다 나이로비의 서로 다른 본당들에서 본당신부를 도와 강론을 하였으며,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많은 본당들에서 청소년 그룹을 지도하였다. 특히 그는 청소년들이 영적인 측면에서 충분한 보살핌을 받고 있는지에 유의하였다. 또한 부제 생활 중에 수감자들을 위한 피정, 선교 등을 비롯한 많은 피정 프로그램을 지도하였다. 나이로비의 5년간 체류하면서 안토니오 신부는 동 아프리카의 빈첸시오 피정센터 중 하나인 빈첸시오 기도의 집에서도 봉사하였다.

안토니오 신부가 사제 서품 받은 직후, 그의 관구장으로부터 타자니아의 유빈자로 발령받아, 그곳에서 그는 두 달 간의 성공적인 사목 임기를 마치고 우간다의 엔테베로 가서 두 가지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엔테베의 빈첸시오 피정의 집에서 1일 피정을 지도하며 재정을 관리하였는데, 故 요셉 빌 신부가 그가 속한 분원의 장상이었다. 또 하나의 임무는 우간다의 마사카에서 새로운 피정센터를 건립하는 것있었다. 그리하여 엔테베에서 180km 떨어진 마사카를 매일같이 오가며 사제들을 위한 피정센터 건립을 추진하였다. 이 건물은 2008년 2월 23일 故 요셉 빌 신부의 80세 생일에 완공식을 거행하였다.

안토니오 신부는 故 요셉 빌 신부의 마지막 몇 주간을 함께하며 임종을 지키신 분으로, 그의 관구장은 故 요셉 빌 신부의 침묵 치유 피정 사업을 이어받을 후임자로 안토니오 신부를 임명하였다.

  1. ‘프란체스카’ 란 세례명을 우리들이 줄여 부르는 말
  2. 오랜 세월 동안 알고 지내던 친지의 누님이 되시며,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매주 레지오 화요일에 보기도 하는 동갑내기 전 음악대학 교수님.  2년 전에는 기타동호회에서 몇 개월 동안 보기도 했던.

2014 Atlanta Snowjam on I-285 North

드디어 올 겨울 첫 white stuffs, snow 가 오늘 낮에 ‘잠깐’ 올 것이라고 어제 ‘경고성’ 예보가 계속 흘러 나오고 있었다. 이번 겨울 내내 은근히 어린아이처럼 이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사실은 나 자신도 조금 유치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머리가 나이에 비해서 그렇게 삭막하게  무감하게 굳은 것이 아님을 알기도 했다. 사실 이런 나의 심정을 연숙에게 비치기도 했는데. ‘첫눈 올 때 집 근처에 위치한 Starbucks Coffee 에 가서 coffee를 같이 마시자’ 고 몇 번 말하기도 했었다. 물론 이곳은 눈이  조금만 내려도 차를 타고 가는 것이 힘들기에 그럴 경우에는 걸어서 가자고 즐거운 상상의 나래도 한껏 피기도 했다. 그것이 드디어 실현이 되는 가, 가능성이 제로가 아님이 더 확실해지면 올 겨울 들어 첫 snowday dreaming을 하게 되었다. 사실 이 시기, 날자는 ‘괴로운 추억’이 얽힌 날이기도 하다. 2014년 1월 28일이 그 유명한 아틀란타 교통대란, snow jam이 있었던 날이어서 먼저 ‘악몽’이 떠오른다. Doraville 도라빌의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레지오 주회합 등을 마치고 집에 오려고 차가  I-285 로 들어서면서부터 퍼붓기 시작한 freezing rain 그리고 함박눈에 모두 일찍 귀가하려던 차들이 꼼짝 못하고 차 속에서 밤을 지새웠던, 그런 악몽이었다.  그때부터 우리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눈에 대한 피해망상증으로, 이맘때가 되면 신경을 곤두세우며 일기예보를 주시한다.  결국 오늘도 레지오 주회합이 있는 날이었지만 성당이 문을 닫게 되어서 ‘공짜’로 하루 푹 쉬게 되었다.

기다리던 올 겨울 첫 눈의 꿈은 사라지고..

하지만 이번의 ‘눈 예보’는 불발탄으로 끝나고 말았다.  아침에 잠깐 내린 비 뒤에 약간의 눈발이 흩날렸지만 곧바로 하늘은 개었다. 대신 무섭게 기온은 떨어지고 바람이 분다. 이 추위는 북극으로부터 내려 온 것으로 polar vortex라는 이름으로 북미주 전역이 강추위와 바람으로 꽁꽁 얼어붙는다. 이곳도 오늘 밤 10도(섭씨 영하 10도 정도) 대로 떨어진다고.. 집에 사는 사람들이야 난방으로 큰 문제는 없지만 homeless들과 밖에 사는 고양이들이 걱정이 된다.  그 동안 비교적 따뜻한 날씨로 한참 올라오던 뒷마당의 수선화들 위에 비닐 봉지를 덮어 두었는데 1~2월의 추위에 익숙한 이 지역의 수선화들, 이 겨울을 살아 남으리라 믿는다.

 

 

 

오늘 YouTube에서 뜻밖의 email message 받았다.  7년 전쯤에 내가 만들어 ‘올려놓은, upload’ music video 성재희씨가 1965년에 취입한 노래 ‘보슬비 오는 거리‘ 가 1 million hits (백만 번 보았다는 뜻)를 했다는 사실과 함께 ‘축하’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이것이 무슨 말인가 의아했는데, 꽤 오래 전의 일이라 그런 것이다. 한창 youtube 에서 지나간 추억의 노래들을 듣던 것이 유행이었던 시절에 나도 한번 무언가 남겨보자는 생각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요새는 웬만한 video들,  viral 하다고 불리는 것들 며칠 사이에 백만 번 hit는 아무것도 아닌 세상이 되었기에 7년 만에 백만 번이라고 하면 우습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 보면 솔직히 놀랍기만 한데 왜 그럴까? 백만이란 숫자에 무슨 magic 이라도 있나 아니면 그저 꽤 많은 중년, 노년의 대한민국 출신의 사람들이 당시를 추억하며 보았다는 사실이 의아한 것인지.. 솔직히 덤덤한 심정이다. 하지만 ‘추억의 마술’을 어쩔 수 없다는 사실 그것은 분명한 것이다.

이 ‘보슬비 오는 거리’를 내가 개인적으로 왜 그렇게 소중하게 느낄 정도로 좋아하는 지 생각을 해 보면 크게 특기할만한 것이 없다. 그저 그 당시, 1965년 말 서울 남영동에서 살던 때의 순진했던 기억들과 함께 중앙고 3학년으로 막바지 대학 입시공부에 열중하면 들었던 그 추억이 전부다. 그것이 왜 그렇게 소중하게 느껴지며, 은은한 저음과 매력적인 자태로 보슬비의 추억을 달랬던 성재희씨의 모습이 반세기가 넘는 지금까지 생생하게 느껴지는지… 나도 모른다.

Pierre Teihard de Chardin

 

人間이란 現像 (1955), The Phenomenon of Man

떼이야르 드 샤르댕 (Pierre Teihard de Chardin, 1881~1955) 著

 

역사를 움직인 100권의 철학책‘ (신동아 1984년 1월 별책) 중에서

김태관 金泰寬  (예수회 신부, 서강대 문과대교수, 서양철학, 1919~1990) , 小論考

 

 

1.

북경원인의 발견자의 한 사람이며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의 주창자인 ‘떼이야르’ 신부의 생애는 고생물, 지질학자로서 문자 그대로 지구의 표면을 종횡무진 왕래하며 지층을 파헤치면서 우주와 신의 통합적 비전을 찾기에 바쳐졌다.

‘삐에르 떼이야르’는 1881년 5월 1일 프랑스 중부 오베르뉴 지방 끌레르몽페랑 근교 사르스나 에서 한 귀족가문의 11형제 중 네 번째로 태어났다. 농장경영의 여가에 박물학과 고문서 연구를 하는 부친으로부터 어린 시절 자연관찰과 곤충 식물 암석 등 채집의 기쁨을 배웠다. ‘물질, 더 정확히 물질의 핵심에 반짝이는 어떤 것에 마음이 끌린 것이 6, 7세 적이었다’고 그는 회상한다.

16세에 리용 근처 몽그레 예수회계 고등중학교를 졸업, 18세에 예수회에 입회, 그 후 사제가 되는 모든 교육코스를 밟으며, 지질학과 고생물학에도 전문적 연구를 했다. 특히 카이로 예수회 고등학교에서 자연과학 교사로서 체류할 때 수억 년의 지층이 노출된 이집트의 광막한 대지에서 그의 미래는 더욱 뚜렷하게 되었다.

1911년 빠리박물관에서 고생물학자인 ‘마르슬렝 불’ (Marcellin Boule, 네안데르탈 인 연구로 유명)의 지도 아래 인류 고생물학의 전문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다. 장기간에 걸친 공동연구, 그리고 깊은 우정으로 발전한 이 만남은 ‘떼이야르’의 일생을 결정하였다.

1914년 세계대전의 발발로 위생병으로 격전지에서 참전했다. 포성과 죽음과의 부단한 대결 틈틈에 비참한 참호 속에서의 그의 명상은 인간세계를 새로운 운명에 이끄는 우주적 규모의 독창적 세계관을 싹트게 하고 윤곽을 잡아 주었다.

1922년 소르본느 에서 자연학의 박사학위를 받고 그 논문으로 프랑스의 제1급 고생물학자로서 인정을 받았다. 1923년 황하유역 조사단원으로 중국으로 파견된다. 이래 20수년 동안 중국은 그의 제2의 고향이 된다. 쉴새 없는 지질조사와 연구와 보고서 작성 학회 탐험여행 틈틈이 ‘신 神 의 영역'(Le Milieu divin)이란 저서를 집필, 그리스도인의 태도와 과학자의 태도를 양립시킬 수 있는 종합적 세계관과 특히 진화론과 인간과 자연 사이에 새로운 연결을 시도했다.

1927~1928년 프랑스 체류 후 이디오피아 소말리랜드 지질조사, 주구점의 북경원인 발굴에서 지질학과 고생물학 부문을 지휘, 연구보고 발표 등의 일로 빠리와 천진 사시를 정기적으로 왕복, 1930년 뉴욕박물관의 중앙아시아 탐험, 31~32년 시트로엥 아시아대륙 자동차 횡단탐험에 참가, 1935년 예일-케임브리지 中北 인도탐험,  1937~38년 하버드 – 카네기 버마탐험참가, 39년까지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인류기원에 관한 심포지움에서 북경원인연구발표, 미국과 프랑스에 체류, 중국으로 귀환, 중일전쟁으로 북경에 6년 동안 유폐됨, 1940년 북경지질생물학연구소를 만들었다.

여기서 그는 그의 필생의 테마인 지구상의 진화와 인간미래에 관한 사색과 탐구의 총결산인 주저 ‘인간이란 現像’을 집필하며 추고 推稿추고 에 전념한다. 1946년 프랑스에 귀국, 국립과학연구소 연구주임 꼴레쥬 드 프랑스 교수로 초빙받았으나 여생을 뉴욕 웬너그렌 재단 인류학 종신연구원으로 보낸다.

1951년과 1953년 2차에 걸쳐 동 재단후원으로 남아프리카 조사연구여행, 선사시대의 고고학과 고생물학의 연구를 자극하고 공동연구계획을 조정했다. 1955년 4월 10일 뉴욕서 부활축일에 심장마비로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끝난다.

그 당시 소수의 전문가 서클과 친구들 외에서 그 이름도 사상도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다. 진화와 인류미래에 관한 그의 과학적 사상으로 해서 교회당국과 그의 소속인 예수회의 반대로 그는 교단과 조국에서 멀리 되었고, 순수전공 외의 저술은 출판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유고는 사후 즉시 각계의 세계적 저명인사들로 구성된 간행위원회가 조직되어 그 해 10월 제1권 ‘인간이란 현상’ 이 출간되자, 자연과학 철학 신학 등 광범한 분야에 격렬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2.

‘인간이란 현상’에는 우주의 생성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의 진화의 주요한 과정이 일관된 명쾌한 전망 속에 묘사되어 있다. ‘떼이야르’는 과학적 성과에서 출발하여 그리스도교인든 아니든 공정한 관찰자이면 누구든 받아들일 수 있는 세계관과 인간관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는 과거의 진화의 발걸음으로 인류의 미래를 예측하고 그 발전을 투시하며 이러한 시야 속에서 자리잡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위치를 확인한다.

이 책은 ‘현상으로서’ 만의 인간을 취급하며 세계의 탐구해명이 아니고 그것을 위한 서론으로서 보아주기를 요구한다. 또 동시에 현상의 모든 것에까지 펼쳐진다.

“동물의 완성, 사고력을 가진 존재의 우위는 그 시선의 통찰력과 종합력으로 측정된다”. ‘본다’는 것은 생의 본질이다. 이것이 이 저서의 개요이고 결론이며 또 그의 사상의 핵심이다. ‘떼이야르’는 철두철미 과학자의 자격으로 과학의 성과로써 그 사상을 전개한다고 강조한다.

그의 우주관의 특징은 지구의 과거의 걸음걸이를 배경으로 하고 그 진화의 속도를 미래에고 연장 추정함으로써 인류의 미래상을 추론하는 데에 있다. 우주는 크나큰 극히 완만한 소용돌이와 같이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정향적 운동 중에 있다. 우주 와동 渦動 은 구심적 흐름이며 이 움직임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느리므로 우리는 포착하기가 힘든다. 그래서 ‘본다’는 것이 요구된다.

‘떼이야르’는 우주의 소재인 물질의 진화 속에 이미 정신적 에너지를 본다. 본질에서부터 정신에 이르기까지의 우주진화의 유일한 완전한 기준은 인간이다. 이 진화는 단순한 것에서 복잡화 – 의식의 무한대에의 증가로 일정방향으로 전진한다.

‘떼이야르’ 신부는 인간의 우주적 배경으로서 소위 무한대의 세계(상대성이론이 적용되는 현상세계)와 무한소의 세계(하이젠베르그의 부적확성 이론이 지배하는 현상세계)에 다시 복잡화 – 의식이란 제3의 무한을 추가한다. 복잡성- 의식화는 우주의 근본운동이다.

저자는 이 세계를 입자로 보고 우주에는 이 입자를 복잡화에로 좇는 보편적 힘이 일종의 ‘부하 負荷’로서 에너지원을 이룬다고 한다. 부하된 입자가 한 단계에 복잡성에 도달하면 종래의 차원과는 다른 출력을 가진 복잡성에 진화한다. 물질에서 생명의 발생 생명 속의 사고의 발생이 이에 해당한다.

생명의 출현에서 미생물과 분자, 세포 등이 서로 독립해서 출현하지만 사고력의 발생에로 진화의 흐름은 향하고 있다. 정신권의 전개에서 인류는 선사인류의 여러 서로 무관한 화석인류들의 분지 分枝  가 어떤 축을 중심으로 꽃봉오리모양 사회화를 이루며 진화한다. 원시사회에서는 방산 放散 팽창하던 것이 현대에 이르러 그것은 수축, 압축되어가는 단계에 있다. 미래의 세계종말에서는 인격사회의 인류의 일체화가 오메가 점, 수렴(convergence)의 극점인 그리스도 안에 만물이 일치하는 데에 이루어진다.

진화에 있는 우주는 마치 그물같이 위로 갈수록 그물의 눈은 압축되고 밀접 되어 주름이 더 잡히며, 끝으로 일 점에 집중되어 세계는 수렴되고 인류는 혼합이 아닌 합치를 이룩한다. 이 일치는 현대정보수단의 진보로 말미암아 인류전체가 하나의 의식으로 서서히 형성되어 가는 데서 예견된다.

‘떼이야르’는 이미 현대 컴퓨터 정보시대를 예견하고 사이버네틱스를 인간의 집단적 사고능력으로서 신 뇌수의 형성으로 보았다. 사회화의 상한적 종합작용으로 일대 다수의 인간의 합류점에 중복 일치 한다는 대 완결을 상정한다. 도식화 하면 다음과 같다.

우주의 생성 -> 생명권의 전개 -> 유인류의 불리 -> 인간의 출현, 즉 사고력의 제일보 -> 정신권의 성립, 즉 팽창의 단계에서 문명과 개체화 -> 정신권의 서욱, 즉 압축의 단계에서 인격화 적 일체화. 세계종말에서 인류는 인격공동체의 건설을 신인 神人 인 그리스도의 포괄적 신비체 안에서 성취를 보게 된다.

이것이 ‘떼이야르’ 신부가 자연과학과 사회학 심리학 등의 전 영역과 인간학의 전 범위를 종합함으로써 과학과 신앙, 우주와 신의 화해를 계기로 웅대한 우주관을 소묘한 것이다. 그의 관심은 그리스도교의 축원이기도 한 “때가 이르면 신은 그 계획을 시행하며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재결합(reunion)하리라” (바오로 에페소서 1,10)는 것을 인간을 현상으로서 과학적으로 다루면서 지시하려고 했다.

 

3.

 ‘떼이야르’의 명성과 평가는 사후 30년 가까이 되어가는 데도 더욱 고조되어 간다. 그 저작은 각국어로 번역되고 그 연구는 개신교나 공산권 내에서도 활발하다. ‘다윈’이나 ‘아이슈타인’이 일으킨 돌풍보다 더 큰 충격과 격론을 불러일으켰다. 아직도 그 연구와 촉매작용은 꾸준히 지속되고 있다. 1981년은 그의 탄생 1백 주년이어서 세계 각지의 떼이야르 협회는 기념행사를 가졌다. 특히 유네스코는 빠리에서 그 해 9월 16~18일 3일 동안 기념 심포지엄을 성대하게 치렀다. 1983년 뉴욕에서는 UN 38차 전체회의 벽두에 학술적 의견교환의 테마로 ‘떼이야르 드 샤르댕 의 저작과 인물’이 채택되었으며, 이 심포지엄은 평화촉진을 위한 ‘교육적 과정’을 진작하는 것이 의도였다.

찬반의 평가가 어떻든 ‘떼이야르’ 신부가 그 자신 안에서 인류의 기원을 캐내고 진화의 비밀에 육박하는 탐험, 우주 속에서 인류의 운명을 묻고 세계진화에서 신의 존재를 찾고 하나의 통합적 비전을 전달하려는 성자다운 기백과 준엄한 학자의 탐구의 생애는 그를 세기적 예언자적 사상가로 부각시키는데 별 이론이 없을 것이다.

 

 

주요저서

La place de l’homme dans la nature ‘자연 속의 인간의 위치’, 1965.

Science et Christ ‘과학과 그리스도’, 1965.

Comment je crois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1969.

Les directions de l’avenir ‘미래의 지향’,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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