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조금 낳아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머리 속에는 온통 추운 겨울, 아~ 고뇌..의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1월 28일인가..의 최악, 고통스러웠던 19시간 차 속에 갇혀서 떨던 일과 바로 지나가고 있는 주의 얼음대란 들.. 지나가는 주의 3일간 집에 있어야 했던 시간들은 비교적 덜 불쾌한 것일까.. 우선 밖에 나가지를 않았기 때문일까. 최악의 경우 전기가 나가는 것인데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2주 전의 snow jam은 정말 최악이었다.
까마득한 옛날, 시카고 시절 고대생 윤근흠이 갑자기 쏟아진 시카고 폭설로 12시간인가 걸려서 집에 왔다고 하는 추억이 생각은 나지만 내가 연숙과 같이 차 속에서 19시간 만에 집에 왔다는 사실은 지금도 믿어지지 않고 빨리 잊어버리고 싶은 악몽이다. 그때 나는 정말 ‘심신’ 모두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다.오랜 세월을 살면서 그렇게 ‘육체적, 물리적’인 위협을 느낀 적이 없었다. 혼자도 아니고 우리 부부가 같이.. 상상으로 가끔 그런 위협을 공포로 느끼곤 하지만 이것은 100% 실화인 것이다.
최악의 경우는 무엇일까? 아마도 죽는 것 아닐까? 나는 죽는 것을 지금은 어떻게 받아드리고 있는 것일까? 믿음을 무기로 자신을 가지고 대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과연 그럴까? 언제 죽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만 진리로 알고 살자.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죽을 준비는 항상 하고 살자. 그것이 전부다.
날씨 이외에는 어떤 것들이 나의 머리 속에 있을까? 아하! 1월 중에 용감하게 실행한 나의 ‘약속’.. 도레미 가라오께에 가족들이 갔던 일.. 이것은 정말 나에게는, 아니 가족들에게는 놀라운 일일 것 같다. 어찌 아니 그렇겠는가? 우리 가족, 정말 같이 이렇게 ‘나가서’ 논 적이 있었던가? 아니 집에서도 그런 적은 없었을 것이다. 그저 조용히 우리는 살았다. 지금 생각하니 정말 가족들에게 미안하고 나는 몸 둘 바를 잊는다. 어떻게 그렇게 살았을까? 나는 내가 가정적이라고 항상 자부했지만 그와 못지않게 나는 재미 지독히도 없이 가족들을 대했다. 그것은 사실이다. 아마 우리가족들은 그것에 적응이 되었을 것이고 운명이라고 받아 들였을 것이고 체념을 하며 살았을 것이다. 나도 변명의 여지는 없지 않지만 이렇게 가족이 ‘나가서 노래를’ 부르고 보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정말 없다.
이런 나의 ‘심경의 변화’는 아마도 최근 3년간 나의 out-of-closet 덕분일지도 모른다. 그 전에는 꿈도 못 꾸었다. 새 세상을 보는 듯하고.. 어떨까.. 언제까지 그런 새 세상을 알고 즐기며 살 수 있을까? 나는 분명히 새로운 세상을 새로운 정신과 믿음으로 살고 있다. 그런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아마도 묵주기도와 레지오, 최근에는 순교자 성당에 조금씩 관여하는 것.. 이런 것들 때문일 것이다.
항상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그대로 있고 나를 괴롭히지만 그래도 잘 꾸려나가는 내가 어떻게 보면 대견하기도 하다.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다. 이것이 나의 99% 노력이라고 볼 수도 있다. 나는 젖 먹던 힘을 내고 있다. 혼자만의 노력은 비록 아니지만 분명히 나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이것을 하느님은 아실 것이다. 그러면 됐다. 그러면 됐다.
얼마 전 역시 우연히.. stumbled upon.. ‘재수 좋게’ 이 영화를 정확히 거의 50년 만에 다시 보게 되었다. 이 영화는 1964년 봄에 개봉된 신상옥 감독, 신필름 제작의 전쟁영화로 당시에 장안의 화제를 상당히 끌었고, 흥행도 대 성공이었던 것도 기억을 한다. cast도 당시 최고의 인기 배우들이 등장을 했지만 그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전투기, 거의 모두 F-86 Sabre jetfighter 가 대거 등장을 했고 지금 다시 보아도 ‘우습지 않게 보이는’ 정도로 당시로서는 상당한 촬영 기술을 보여 주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혹시 이것도 ‘한국 영상원’ 어쩌구 하는 곳에서 ‘올려 놓은’ 것인가 했지만 정말 다행히도 ‘표준 youtube video protocol’ video여서 부지런히 ‘download’ 를 해 두었다. 이제는 ‘안심하고’ 언제든지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는 good news였는데 bad news는.. 막상 보게 되니.. video quality가 ‘엉망’이었다. 그러니까 VHS video tape보다도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영화 첫 부분에 그 이유에 대한 ‘양해’ 메시지가 나온다. 이것도 역시 빨갱이 탓이었던가.. 신상옥씨가 강제 납북되면서 자신 소장의 original들이 모두 없어졌다는 말이 나온다. 여기에 의문은.. 신씨가 납북되면서 왜 그가 만든 영화들을 가지고 갔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발적으로 북을 간 것인가? 좌우지간 여기에 보이는 영화의 video는 영화를 상영하면서 video camera로 찍은 것이 분명했다.
이런 사연을 알고 보니 더욱 이 video가 값지게 느껴졌다. 아차..하면 이것도 못 보고 죽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가끔 이 영화가 생각나곤 하고.. 그 당시 보았던 영화의 장면, 줄거리 등을 머리를 짜내며 생각하기도 했다. 몇 장면과 대사는 아직도 기억을 한다. 또한 당시 인기 4중창단 불루벨즈 가 불렀던 주제곡은 이 영화의 전체적 분위기와 참 잘 어울렸고 또 영화와 별도로 인기곡으로 남게 되었는데.. 사실 그것이 전부였다.
이 영화는 1964년 봄에 개봉이 되었고 상당한 인기였지만 당시 중앙 고교 2학년 생이었던 나는 그렇게 관심이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그 나이에는 ‘외국영화, 미국영화’가 아니면 모두 ‘촌스럽게’ 느껴지고, 사실이 그랬다. 그 정도로 국산영화의 질은 한마디로 저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 ‘빨간 마후라‘ (당시 마후라 란 말은 가벼운 느낌의 목도리란 뜻으로 거의 표준어처럼 쓰였는데 알고 보니 muffler의 순 일본식 발음이었다) 는 조금 달랐다. 우선 당시 우리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있었던 박택규 화학 선생님이 이것을 보고 와서 아주 인상적으로 ‘선전’을 하셨던 것이다. 그것이 이 영화를 보게 된 이유가 됐다.
그 박택규 선생님은 화학을 ‘대학 교수’ 스타일로 ‘강의’하시던 독특한 선생님으로 역시 수년 후에 대학교로 ‘영전’이 되시어 가시기도 했다. 그 선생님은 우리들을 마치 친구처럼 생각할 정도로 화학 과목 이외의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시고 자신이 본 영화 같은 것도 감상을 나누곤 했다. 당시 입시위주의 분위기에서 그런 선생님은 참 드문 case였다. 그 선생님이 알려 준 이 영화 장면들 중에서 ‘최무룡’ 이 수송기에 의해서 ‘기적적으로’ 구출 되는 것.. 그것은 아직도 나의 머리 속에 남아있다.
나중에 직접 이 영화를 보고 느낀 것 중에는 한마디로 모조리 멋진 사나이들.. jetfighter pilot들의 ‘여성 편력’이 대단하다는 사실이었는데.. 이런 사실은 아마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마찬 가지인 모양으로 1980년대 미국 영화 Top Gun을 보아도 거의 비슷한 것이다. 여자들이 그 조종사들을 그렇게 멋지게 본다는 사실이 미국 영화보다 우리가 훨씬 앞서 이 빨간 마후라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신영균, 최은희, 최무룡.. 이 세 최고 배우가 주름잡는 이 영화는 6.25 전쟁 당시 강릉 공군기지를 무대로 펼쳐지는데 나도 당시의 느낌을 고스란히 간직한다. 강릉 공군기지는 나에게도 친숙한 이름이었고 그곳에서 ‘뜨는’ 공군 조종사들을 내가 9살 쯤인가 원서동 살 당시에 가까이 보기도 했다. 물론 그 조종사도 ‘여자’와의 관계로 더욱 우리에게 알려진 case라서 내가 갖는 이들의 playboy인상은 이 영화에서 재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100% 확실한 기억 속의 장면 중에는 최은희가 고급 술집에서 hostess로 아주 취한 상태로 ‘쉬~ 하러 간다’는 말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당시 고2의 나이에 이것은 아직도 기억에 남을 정도로 erotic하게 들렸다. 또한 크리스마스 파티가 끝나고 그룹의 조종사들과 여자들이 모조리 good night ladies’ kiss를 같이 하다가 비행단 최고 상관인 ‘박암’이 자동차 headlight를 키며 노려 보자, 신영균이 그가 누군지도 모르고 ‘이노무 새끼..’ 하며 다가가는 장면.. 50년이 되었지만 생생한 기억들이다.
당시 F-86 조종사들은 아마도 군인들 중에서 최고 ‘엘리트’ 급에 속했을 듯 하다. 왜냐하면 영어에 능통을 해야 미군들에 의해서 훈련을 받는데다가 비행기를 이해할 정도면 rocket scientist는 아니더라도 대학졸업 정도는 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군인들 중에서는 최고의 선망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물론 신영균, 최무룡 급의 미남들을 아니었어도 그것이 큰 문제가 되겠는가.. 하늘을 나르며 조국의 지킨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멋진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을 것 같다. 최소한 그 당시 이 영화를 본 나의 나이 또래는 그렇게 느꼈을 것 같다.
이 영화를 다시 본 느낌은.. 다 좋은데.. 끝 부분이 전체적인 ‘멋진 인상’을 구겨놓았다는 아쉬움이랄까.. 멋진 외국영화를 보다가 불현듯 ‘촌스러운’ 국산영화의 느낌으로 끝을 낸 것이다. 그 장면은 ‘한국적 정서’를 나타내려고 한 듯이 ‘죽은 신영균의 어머니, 한은진’ 이 조금은 부자연스럽게 불현듯 나타난 것인데.. 글쎄, 각본 때문에겠지만 이 장면으로 완전히 ‘멋진 꿈에서’ 깨어난 듯 느껴진다.
올해 겨울은 정말 춥다. 아~~ 고뇌.. 이 지독히도 오래된, 아득히 먼 옛날에 내가 자주 되뇌던 표현이 문득 되살아난다. 이유는 간단히 말해서.. 아주 쓸쓸하고 황량한 시베리아 같은 그 때와 같은 느낌의, 뼈 속 깊숙이 스며드는 추위를 느꼈기 때문이다.
정말 이런 느낌은 그 ‘때’ 이후 처음으로 느낀 것이다. 그것이 반갑기도 하고 춥고 쓸쓸하기도 하다. 여기서 말하는 ‘그때’는 거의 45년 전인 1960년대 후반이었고 그 ‘시베리아’는 연세대 재학 시 살았던 상도동 종점 부근이었다.
지금 내가 아틀란타 지역에서 느끼는 ‘연일 계속되는 지독한’ 추위는1 뉴스가 될 정도로 의외적인 기후현상이고 거의 25년간 이곳의 ‘전형적’인 ‘더운 겨울’에 적응이 된 탓에 지금의 지독히 추운 겨울은 바로 ‘그때’ 느꼈던 ‘고뇌’와 비슷한 느낌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지난 해에 발표되었던 북미주 장기 일기 예보가 정말 ‘까무라칠’ 정도로 적중한 것에 나는 놀라기만 한다. 일기예보과학이 참으로 발전을 한 모양이다. 그 예보에 의하면 서부를 제외한 전체 북미주 전체가 ‘더 춥고, 더 습한’ 그런 것이었는데 현재까지 거의 모두 맞고 있다. 이것으로 global warming 같은 ‘정치적’인 것과 연관을 시키는 것은 무리겠지만.. 과연 어떨까?
옛날 ‘그때’는 20세 전후의 팔팔한 젊음을 자랑하던 때였지만 우리세대들.. 6.25이후 잘 못 먹고 자랐는지 신체적으로 별로 건강한 편은 아니었고, 박정희 정부의 요란한 경제발전 소음은 요란했지만 그것에 비해서 ‘따뜻하고 편한’ 환경은 절대로 아니어서 지독한 서울의 매서운 바람은 정말 ‘고뇌’로 느껴질 수 밖에 없었다. 요새 그 흔한 storm parka같은 것도 없었고 overcoat도 너무나 비싸던 시절..시베리아 성 서울의 1월 맹 추위는 정말 겨울중의 겨울이었다.
특히 데이트 같은 것이 늦어져서 시내버스 막차로 상도동 종점 (숭실대학 입구) 에 내려서 집까지 가는 골목의 맞바람 추위는 정말 대단해서.. ‘그때’ 내가 ‘즐겨 되뇌던’ 말이 바로 ‘아~ 고뇌’였다. 이 말을 ‘계속’ 해서 내 뱉으며 어둠 속의 골목길을 걸으며 집으로 향했던 ‘그때’였다. 그 집이란 것도 당시에는 중류층 수준이었겠지만.. 글쎄.. 연탄이 거의 전부였던 시절, 온돌방과 연탄난로의 난방은 사람을 거의 꼼짝 못하게 만들고, 따라서 이불을 깔고 백일몽을 즐기며 아름다움 추억의 씨를 뿌린 기억들 뿐이다. 하지만 그 느낌들은 지금 ‘절대로’ 재현할 수 없는 정말 아름다운 그런 것들이었다.
같은 추위에도 같은 느낌이 꼭 들까? 아닌 것 같다. 이곳 아틀란타 지역으로 이사오기 전까지 나는 거의 Midwest 지방2에서 살았기에 그곳의 진짜 무서운 눈과 추위를 고스란히 경험하였지만 그곳 추위의 느낌은 ‘절대로’ 서울 1월의 느낌과 달랐고, 지금 느끼는 아틀란타 지역의 느낌과도 다르다.
그 ‘북쪽’의 추위는 심리적으로 너무나 추운 겨울을 예상해서 그런지 느낌이 ‘고뇌’성 같이 괴롭지 않았다. 그런 추위에서 거의 ‘걷는’ 일이 거의 없고 지독히 절연된 난방 된 집과 차에 의지하며 겨울을 나면 별로 추운 느낌을 기억하지 못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현재 이곳의 ‘겨울 환경’이 아마도 1960년대 말 서울과 거의 비슷한 것은 아닐까..하는 재미있는 추리를 해 본다.
Bridge over Troubled Water – Simon & Garfunkel, 1970
이 classic oldie가 나의 당시 고뇌를 말해 주기도 했다.
가톨릭 교회의 매력 중에는 아주 풍부한 alphabet soup 같은 각종 용어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 이 alphabet soup은 라틴어에 근거를 두고 있어서 라틴어를 조금 이해하거나 좋아하면 이것도 매력 중에 하나다. 다만 조금 다른 종교보다 더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 문제일 수는 있다. 이 라틴어는 영어권에서 보면 동양권에서 한자를 쓰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그 용어나 단어들은 조금 괴상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모두 긴 역사를 자랑하는 그득한 내용이 담긴 단어들이라 그 옛날 한국에서 영어공부를 할 때, WORD POWER를 공부하던 때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영어의 어원인 라틴어와 그리스어들이 그 책에 그득했고 그것으로 단어를 배운 것이 ‘영원히’ 나의 머리에 남았고, 모르는 영어 단어를 보면 곧 바로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천주교 ‘영어’를 만나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모조리 라틴어였다. 그것들이 이곳의 성당에서 영어처럼 쓰이는 것이다.
오늘은 Catechetical Sunday였다. 이 단어도 처음에 정말 괴상하게 느껴졌다. 발음도 그렇지만, 그것과 비슷한, 파생어는 수 없이 많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단 한가지 의미 ‘영세예비자 교리공부’ 에 대한 단어들이란 것만 알면 끝난다. 교리공부라고 했지만 이것은 ‘교실에서 말로 가르치는’ 것을 뜻한다. 매년 이 ‘교리반 주일’이 있었지만 별로 관심이 없이 지났는데 올해는 조금 달랐다. 우리가 한국본당에서 교리반 봉사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미국 본당은 거의 ‘봉사자’들이 교리반을 나누어 가르치는데 한국본당은 올해부터는 수녀님이 가르치신다. 그러니까 올해의 영세예비자들은 ‘행운아’들인 것이다. 열명 안팎의 알맞은 인원이라서 토론하기도 좋고, 모두들 진지한 태도와 열의를 보인다. 이들이 내년 부활절에는 ‘모두’ 영세식을 통해 하느님의 새 자녀들이 되기만 손꼽아 기다려 본다.
¶ 아.. 인천..1950
오늘은 9월 15일 일요일, 하지만 1950년 9월 15일 금요일은 그 유명한 육이오 동란 (일명 한국전쟁)의 커다란 전환점이었던 유엔군 총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Gen. Douglas MacArthur] 장군의 걸작품인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된 날이기도 하다. 그때는 63년 전.. 내가 2살 8개월 되던 때였다.
그 당시 우리식구는 아버지가 납북이 되시고 어머니가 누나와 나, 남매를 데리고 비원 옆 원서동에서 숨을 죽이고 사셨다. 물론 나는 전혀 기억할 수 없는 나이였지만 2년 정도 뒤부터는 그 원서동의 분위기를 또렷이 기억한다. 인천.. 쌍고동이 울어대는 이별의 인천항구.. 박경원씨의 구수하고도 경쾌한 노래를 들으면 인천의 냄새가 그대로 나는 듯하다. 서울 재동학교 5학년 때, 그러니까 1958년에는 5학년 전체가 인천으로 수학여행을 가기도 했다. 인천 부두와 월미도가 내려다 보이는 만국공원, 그곳에 인천상륙작전 맥아더 장군의 동상 아래서 단체 사진도 찍었다. 1950년대의 인천은 참으로 멀었다. ‘증기, 화통’ 기차를 타고 ‘반나절’을 갔을까..
그래서 그랬을까? 인천을 번개와 같이 점령한 유엔군(사실은 미군과 국군)은 예상을 뒤엎고 서울을 탈환하는데 무려 2주가 결렸다. 그렇게 멀었을까? 빨갱이들이 6.25 발발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한 후 지나치게 서울에서 꾸물대다가 ‘부산 해방’을 놓쳤다는 해석이 있는데, 이것과 맞먹는 유엔군의 실수는 그렇게 느린 서울 탈환이 아니었을까? 서울탈환, 그러니까 구이팔, 9.28 수복이 되던 때까지 낙동강 전선에서 독 안의 쥐가 된 빨갱이들은 여유 있게 ‘양민학살과 38선 이북으로 도주’를 했을 것이다.
순전히 결과론이지만 맥아더 장군의 ‘오만과 아집’이 조금 덜 했더라면, 남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었더라면, 중공군의 개입을 미리 알아차리고 대비했을 것이고 흥남철수나 1.4 후퇴 같은 것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 후에도 미국이 조금 더 ‘모험’을 했더라면 어떠했을까? 만주를 폭격하거나 원자탄으로 위협을 하는 맥아더의 구상이 그렇게 무모했을까?
그때 통일이 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만고 한민족 만고의 1급 역적, 원흉 김일성 일당을 처단 못한 그것이 이후 한반도, 한민족 비극의 씨앗임을 어찌 부정할 수 있는가? 악의 씨는 그대로 남아 민족반역자 3대, 그 중에 마지막 인간은 새끼돼지 같은 젖먹이, 현대 역사 박물관 전시물 제1호가 될 만한 ‘북조선 김씨 왕조‘를 유지하며 장난감 핵무기로 장난을 하고 있으니..
드디어 올 것이 왔다. 그리고 갈 것이 갔다. 영원히.. 1977년 9월 5일 발사 된 미국의 무인 우주 탐색선 Voyager 1.. 작년부터 이 ‘자동차 크기의 물체’에 대한 뉴스가 가끔 나오곤 했지만 나의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오늘 뉴스는 조금 다르다. 그 전까지의 뉴스는 ‘서서히’ 태양계를 떠나는 과정과 예측이었지만 오늘 것은 ‘공식적’으로 완전히 떠난’ 것이기 때문이다. 36년이 걸렸다. 36년 만에 ‘우리 태양의 영향권, 태양이 숨을 쉬는 heliosphere라고 불리는 태양권’을 떠나, 사고만 없다면 무한의 시간과 공간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이 ‘역사적 사건’을 보며, 그 모든 ‘과학적, 기술적 잔소리, 자세함’을 떠나서 나에게 다가오는 느낌 중의 압권壓卷은 두 개로 볼 수 있다. 36년 전, 그러니까 조지아 출신 Jimmy Carter와 박정희가 대통령1이었던 천-구백-칠십-칠년, 1977년의 추억이 그 하나고 조금은 비약적이지만 허공과도 같은 망망대해 무한한 우주 자체인 하느님이 그것 이다. 분명히 인간이 만든 물체가 태양계를 ‘거의’2 완전히 떠나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이 ‘인간이 만든 물체’는 과연 어떤 것인가? 무게가 1600 파운드, 아마도 작은 차 정도의 무게가 아닐까? 크기는 7.5 ft x 12 ft x 66 ft 정도이다. 그 속에는 1977년 당시 최첨단의 기술로 만든 기재들(거의가 sensors들)로 가득 찼고 비록 요새 기준으로 보면 ‘거북이’속도3지만 지구와 통신을 유지한다.
이 물체의 속도는 시속 3만 8천 마일, 현재의 지구로부터의 거리는 120억 마일 정도다. 이런 시속 수만 마일이나 거리 백억 마일 같은 것은 사실 우리에게 실감을 주기에 부족하지만, 우주의 ‘미친 듯이 거대함‘을 조금이라도 시사하기에는 족하다. 현재의 이 물체의 지구로부터의 거리는 빛이나 전파가 도달하는 데에도 거의 16시간이 걸리고, 현재의 속도로 계속 ‘허공’을 뚫고 나르면 4만 년 뒤에나 1.6광년 거리의 ‘첫 별4 ‘을 만난다고 한다.
1977년 9월 출발 후 몇 년 후인 1979년에는 첫 번째 목표 목성(Jupiter)를 근접 탐색을 했고, 1980년 11월에는 다음 목표 토성(Saturn)을 근접 탐색을 해서 아주 커다란 수확을 얻었다. 이때 얻었던 근접 촬영 사진들은 정말 감동적인 것이었다. 10년 뒤인 1990년에는 ‘태양계 가족사진’을 찍어서 보냈는데, 여기에는 그 유명한 ‘희미한 푸른 깨알 점, Pale Blue Dot‘ 그러니까 우리의 파란 지구가 그곳에 있었는데, 이 푸른 깨알 같은 작은 점은 천문학자 칼 세이건, Carl Sagan이 ‘정치적’인 각도에서 ‘인류의 영구한 평화’를 호소하는 매체가 되기도 했다. 사실 이 작은 푸른 점을 보면, 누구나 마음이 겸허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작은 점 ‘표면’ 에서 수십억의 인류가 때로는 ‘아귀다툼’을 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이 쉽게 그려지지 않는 것이다.
Carl Sagan – The Pale Blue Dot
그 동안은 주로 태양권 내의 solar wind에 관련된 자료를 탐색해 왔고, 출발 후 몇 년 후 1979년에는 첫 번째 목표 목성(Jupiter)를 근접 탐색을 했고, 1980년 11월에는 다음 목표 토성(Saturn)을 근접 탐색을 해서 아주 커다란 수확을 얻었다. 이때 얻었던 근접 촬영 사진들은 정말 감동적인 것이었다. 10년 뒤인 1990년에는 ‘태양계 가족사진‘을 찍어서 보냈는데, 여기에는 그 유명한 ‘희미한 푸른 깨알 점, Pale Blue Dot‘ 그러니까 우리의 파란 지구가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지금부터는 태양의 영향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어서 무엇을 감지할지는 미지수이다. 또한 36년의 세월 뒤에 기기들이 하나 둘씩 기능을 정지하고 있어서 언제까지 탐색 자료가 송신될 지도 의문이고 2015년 경에는 data recorder기능이 정지가 되고, 궁극적으로 2025년 이후에는 전력이 소진되어서 탐색기능과 조종기능이 없어지고 완전히 ‘죽은 채 나르는’ 상태가 될 것이다.
태양계의 끝을 통과하는 Voyager 1
Voyager 1이 발사된 때는 정확하게 1977년 9월 5일이었다. 36년 전이다. 그때 나는 West Virginia에서 학교를 마치고 다음 학교인 Ohio State (University)에서 1978년 1월에 시작되는 graduate program 을 앞두고 ‘여름방학의 고향’인 시카고 서(충일)형의 아파트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70년대의 추억이 아롱진 시카고, 그것도 서충일 형의 Broadway에 있던 그 아파트.. 그곳은 즐거움도 있었지만 1977년 9월의 시카고 가을은 나에게 ‘어두운 밤‘이었던 시간이 많았다. 어두운 밤이라면, 실로 외롭고, 괴로운 시간들, 희망이 안 보이는 그런 시간이고, 나는 실로 그 모든 것을 그곳에서 경험하였다.
하지만 그 때는 30살도 채 되지 않았던 ‘자유로운’ 총각시절.. 상상할 여유도 있었던 시절이기도 했다. Voyager 1이 어두운 밤의 허공을 나르는 동안 나의 반생이 지나갔다. 사랑하던 어머님도 가고, 대신 반려자를 만나고, 자식들도 세상에 나왔고, Voyager 1이 태양계와 작별을 할 즈음, 나는 인생과 삶의 목적이나 의미도 조금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이 ‘물체’는 어두운 허공으로 사라지고, 나는 ‘저 세상의 허공’을 향하여 진군을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갈 허공은 ‘깜깜한 밤’의 허공이 아니고 ‘사랑의 숨결이 전 공간에 꽉 찬 하느님의 공간5‘이 될 것이다.
My 3 favorite oldies of ’77
1977 oldies, Torn Between Two Lovers – Mary MacGregor
I’d Really Love to See You Tonight – England Dan & John Ford Coley
Year of the Cat – Al Stewart
이 두 대통령은 악연이 있었는지 상당히 사이가 좋지 않았다. 조지아 ‘무지랭이’, 바보스러울 정도로 순진했던 카터가 서울을 방문 했을 때 ‘노전역장’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정치학 101 기초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
Acker Bilk, 에이커 빌크.. Stranger on the Shore, 그때 이 연주곡을 ‘해변가의 나그네‘ 라고 불렀는지, 원어인 영어이름으로 불렀는지, 확실한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 ‘쓸쓸한 느낌’의 연주곡을 들으면 생각, 기억, 연상, 회상되는 것은 (서울 중앙)고등학교 2학년 때쯤 일까.. 이런 류의 ‘외국 곡’에 심취하던 그 나이의 우리들은 거의 오밤중에 시작되는 ‘한밤의 음악편지’ 같은 라디오 생방송 프로그램을 생명수처럼 기다리고 즐겼다. 진행자 DJ는 음악편지라는 ‘엽서’사연을 줄기차게 접수하고 읽으며 그 사연이 ‘요구’하는 해외 pop song를 방송했다.
대학시절에 한때 나는 ‘본격적’으로 미국 rock/folk/pop 류를 ‘공부’하며 빠졌었지만, 고등학교 시절에는 그저 ‘아마추어’수준에서 듣고 좋으면 즐기는 그런 식이었다. 그 때 상당히 좋아했던 것 중에 바로 이 ‘잔잔하고, 쓸쓸하고, 감상적’인 연주 곡 stranger on the shore가 있었다. 가끔 죽음을 곁들인 철학적 감상에 빠지던 본격적인 입시공부 직전의 소년의 황금기 고2 시절이었다.
그때 나는 일기를 본격적으로 즐기며 쓰기시작을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참 유치한 글들을 쓰던 때였다. 문학이나 시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도 없고 문외한이었지만 나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남기려 애를 쓰긴 했다. 바로 그 당시에 듣던 곡 중에 나는 이 ‘쓸쓸한’ 느낌의 연주 곡을 너무나 좋아했었다. 이 곳의 배경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이제야 이 연주곡 Stranger on the Shore와 연주가 장본인 영국인 Acker Bilk란 사람의 ‘정체’를 자세히 알게 되었지만, 나의 주 관심사는 이 곡이 나오게 된 배경이었다.
이 곡의 원 제목은 사실 Jenney, 그의 갓난 딸의 이름이었고 1962년 그의 딸이 태어난 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작곡한 곡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영국의 TV program에서 쓰려고 제목을 Stranger on the shore로 바꾼 것이 대 히트를 한 것이다. 얼마 후에 이 곡은 미국에서도 top chart에 올라 백만 장 이상이 팔렸다. 내가 자주 듣던 것이 1964년 이었으니 참 오랜 동안 인기가 있었던 곡이었음이 틀림이 없었다. Acker Bilk의 독특한 저음의 클라리넷은 정말 이 곡이 주는 느낌을 확실히 전달해 주고 있다. 이제 80이 훨씬 넘은 그는 아직도 ‘왕성한’ 연주 활동을 하고 있는데, 아직도 이 곡은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따라다니고 있다.
¶ BC, AD, BCD, CE… OH MY!내가 감사하며 애용하는 Wikipedia 류의 web service는 물론 가끔 donation을 할 정도로 우리들에게 유익한 것이다. 그 옛날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생각하면 얼마나 고마운 것인가? 항상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필수의 서비스인 것이다. 비록 최고의 전문가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대신 충분히 많은 일반인에게 ‘검증’을 받고 있는 지식들이라 생각하는 것 보다 질이 좋음을 알 수 있다. 그 수많은 기사들의 폭과 깊이, 신속한 update등등.. 책으로 된 백과사전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실 여기만의 문제가 아니고 모든 soft information에 해당되는 것인데, 지나친 PC (Political Correctness) effect가 여기에도 적용이 되는 듯 하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 ‘좋은 정보’로 취급되는 성향을 이곳에서 이곳 저곳에서 볼 수 있다. 심지어는 지나친 세속적 편향도 덩달아 춤을 추며 이곳으로 잠입하는 느낌도 든다.
예를 들면 CE 와 BCE의 연대 표기 방식이다. 그러니까 전통적인 AD (Anno Domini)와 BC (Before Christ) 대신 CE(Common Era) 와 BCE(Before Comment Era)로 표기하는 것이다. 해당 기사를 쓴 ‘봉사자’들에 의한 것이 아니고 아예 Wikipedia 자체에서 ‘권장, 심지어 강요’하는 듯한 느낌도 든다. 이것이 쉽게 말하면 PC, politically correct한 것이다. 왜 전통적인 것보다 이런 방향으로 나간 것일까? 이렇게 하면 fund raising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것일 지도 모른다. ‘비신자, 비기독교인, 무신론자’의 숫자가 엄청 많고, 늘어난다고 생각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참 옹졸하기 짝이 없는 ‘새 대가리’ 적 발상이다. 기원 후, 기원 전을 쓰면서 ‘예수님 후’, ‘예수님 전’이라고 생각하며 서기 1968년..을 쓰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는가?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한번 어깨를 펴고 당당히 써 보자.. “오늘은.. 주후, AD: ANNO DOMINI, 기원 후 2013년 8월 22일!” 참.. 이래서 political correctness가 필요이상으로 욕을 먹나 보다.
¶ GET A LIFE! FACEBOOKERS..: 아주 오랜만에 들려본 the economist 웹사이트 에서 흥미롭고, ‘나의 느낌이 역시 맞았구나..’ ‘I told you so’ 하는 나의 내면의 소리를 확인하는 기사를 보았다. 한마디로 “Facebook에 목매는 인간들아, (진짜) 삶을 살아라!” 인 것이다. 인터넷을 이용해서 ‘대화’를 하는 것과 ‘그 속에서 삶을 사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내가 보기에, 느끼기에도 나는 처음부터 이런 류의 ‘거대한 가짜 삶의 광장’을 제공하는 Facebook에 관심이 별로 없었지만 “기본을 무시한, 잔머리만 굴리는 요새 ‘아이들”의 장난이 거대한 돈과 증권시장을 좌지우지하는 것만으로도 그런 ‘쓰레기’에 관한 뉴스는 피할 도리가 없었다. 난데없이 전혀 모르는 인간들이 ‘친구 합시다’ 하고 오는 추태에는 진저리가 칠 정도였다. 우리 두 딸들도 peer pressure에 약한지 한 때 빠지더니 요새는 많이 벗어난 듯 하다.
심각한 문제는 아예 그 속에서 완전한 ‘다른 삶’을 사는 인간들인 것이다.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의 실체를 제대로 구별을 못하며 사는 거대한 ‘광고의 밥’ 인 이런 부류의 사람들.. 그야말로 Get a Life! 라고 충고하고 싶은 것이다. 워낙 덩치가 커진 이 Facebook은 드디어 실험용 연구대상까지 된 것까지는 좋았는데, 결국은 실상이 들어나게 되고, 결과는 그들(ZukerXX & kids)에게 별로 좋지 않은 듯하다.
이 economist의 기사를 읽어보면 아주 조직적인 실험,연구를 한 것인데 결과는 그 곳에서 사는 삶은 한마디로 miserable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곳에 있는 거짓으로 도배가 된 허구의 삶들과 자기 것을 비교하는 자체가 불행인 것이다. 실상과 거리가 먼 자기의 공상을 쫓으며 살려니 결과는 뻔 한 것이다. 설상 가상으로 이제는 NSA의 철저한 감시대상의 제1위에 있는 그들의 privacy는 거의 제로에 가까워지고 있어서 솔직히 말하면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다.
¶ 바울라 표 커피: 얼마 전 우리부부의 레지오 마리애 본가인 자비의 모후 단원님 이 바울라 자매님이 조그만 상자를 건네 주셨다. 차량봉사 관계로 자매님을 레지오 주 회합 뒤에 모셔다 드리면 가끔 뒤뜰에서 정성껏 키운 야채나 꽃나무를 즐겁게 나누어 주셨는데, 이번에는 색다른 느낌의 조그만 상자였다. 혹시나 해서 미리 무엇이냐고 여쭈어 보았더니 ‘커피’라고 하셨다.
이것은 정말로 뜻밖의 느낌이었는데, 물론 내가 워낙 커피를 즐기다 보니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지만, 조금은 미안하기도 하였다. 자매님 식구가 드셔도 됨 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자매님 식구는 별로 커피를 ‘잠’ 때문에 드시지 않는다고 하셨다. 집에 와서 상자를 열어보니 그것은 우리와 친숙했던 Caribou ground coffee pack이었다.
물론 우리가 사서 먹어도 되지만 이런 ‘공짜’ 는 참 즐거운데.. 공짜라서 라기 보다는 그렇게 주신 자매님의 마음이 고마워서 그런 것이다. 매일 아침 나는 칠흑이 간신히 걷힌 이른 아침에 이 커피의 맛을 ‘혼자서’ 음미하며 잠을 깨고 ‘신나게 돌아가는 머리’의 힘을 빌려 나의 생각과 일을 시작한다. 우리는 고마운 자매님의 마음을 생각하기에 그 Caribou Coffee를 ‘바울라 표 커피‘라고 이름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바울라 자매님!
¶ CRAZY NEW NORMAL: BRADLEY MANNING 이 알고 보니.. CHELSEA MANNING? 하도 ‘미친’ 뉴스들이 요새는 ‘대부분 정상’이 되었다고 하지만 이 희한(稀罕)한 기사에 나는 완전히 오금을 펼 수가 없게 되었다. 그 정도로 희한한 CRAZY NEW NORMAL인 것이다. 별로 거대한 정치적인 안목이나 생각 없이 그저 ‘자신의 불만’만 생각하며 1급 국가기밀 수천 페이지를 양심의 가책 없이 여파나 파장에 상관없이 폭로하며 자신의 자격지심을 위로했던 ‘병신중의 병신’처럼 보이던 그 ‘남자’가 갑자기 ‘여자’로 성전환을 한다?
한마디로 정말 이것이야말로 희한 중의 희한.. 희한 올림픽의 다이아몬드 메달 감이다. 하지만 이것이 소위 말하는 ‘이세상의 누가나 평등하다, 절대로 남을 판단할 권리가 없다’ 는 ‘기분 좋은 슬로건’에 목을 맨 신 현세의 일 면이 되어가고 있다. 비겁 자 중의 비겁 자 처럼 보이는 그가 감방에서 여자 대우를 받고 싶은 것일까.. 참 모골이 송연 해 지는 느낌을 감출 수가 없다.
¶ RETRO-BLOG, TAKE ME TO 1968!: 근래 들어서 blogging하는 것이 그런대로 자연스레 습관이 되면서 나만의 retro-blogging이란 말이 생겼다. 그러니까 어떤 날, 문득 생각난 것을 쓰다가 다 못쓰고 내버려 둔 것을 ‘후일’에 이어서 쓰게 된 case 가 바로 이것이다. 쓰기 시작했을 때의 생각이 시간이 지나서 조금은 바뀌거나 했어도 생각의 출발점은 간직하고 나중에 읽었을 때 ‘역사적’ 가치가 더 있는 것이다.
특히 바쁠 때, 그런 ‘지나간 블로그’를 더 많이 처리해야 할 때가 많다. 미완성 된 블로그를 나중에 ‘완성’을 시키는 것이다. 현재도 나는 자그마치 5개 이상의 retro-blog과 씨름을 하고 있다. 제일 오래 된 것은 거의 6개월 전의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는 ‘대작’도 있다. 그러니까 나의 ‘역사적 기록’인 memoir인 것이고 그 중에서 연세대 2학년 시절에 관한 회고록이 있다. 대학시절은 누구에게나 그에게 ‘황금기’애 속하기에 이야기도 많고 생각도 많았던 시절이다.
나의 그 때는 20세였던 1968년.. 기억력과 최후의 사투를 벌리며 회고해 내고 있는 이야기들.. 나에게만 의미가 있던 사담들이지만.. 누가 아리오, 그 이외의 관련된 사람들이 보게 될지도. 몇 년 전 일본의 인기 ‘테레비’ 드라마였던 ‘무리한 연애‘ 라는 미니 시리즈를 보면 왕년의 십대의 우상이었던 지금은 환갑이 된 주인공이 택시를 탈 때, 택시 기사가 ‘어디로 모실 깝쇼?’ 하고 물으니 주인공 왈, 무심결에 ‘1968년으로 갑시다!‘ 했는데.. 내가 바로 그 주인공과 100% 같은 심정이다. 비록 북괴 김신조 무장공비 일당이 청와대 근처에서 설쳐댔어도, 정말 걱정, 근심.. 있어도 그 때는 행복하던 시절이었다.
¶ 7월도tipping point를 지나간다. 이제는 서서히 8월을 향해서 ‘쓰러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요새의 한 달의 느낌은 예전의 일 주일 정도라고나 할까.. 어찌 그렇게 세월의 느낌은 나이의 느낌과 비슷할까.. Mother Nature의 축복을 흠뻑 받으며 올해의 여름은 기가 막히게도 시원하고 시원하다. 몇 년간의 갈증을 완전히 복수라도 하듯이 엄청 많은 ‘물’을 쏟아 주셨고,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다.
나머지 여름, 기껏해야 한달 반.. 암만 더워도 달게 받으리라. 그러다 생각하니 그렇게 많이들 가는 여름휴가.. 이제는 ‘휴가’라는 말 조차 잊은 것일까. 연숙도 다 잊은 모양으로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우리 집 자체가 summer house같이 느끼는 것일까? 집에 있는 자체가 summer vacation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편하게 느끼면 되지 않을까?
올해는 잠시 잠시, 미국의 ‘최남단’ Florida Key West와, Hemingway의 소설이야기를 향해서 아무 준비도 하지 않고 그대로 차를 몰고 집을 떠날까 하는 충동을 느낄 때도 있었다. 그의 대표작, 중학교 때 영화로 보았던 ‘무기여 잘 있거라 (A Farewell To Arms)’ 그리고 킬리만자로의 눈 (The Snows of Kilimanjaro)등을 최근에 다시 보게 되면서 더 그곳을 생각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시 그것은 어디까지나 머리 속에서만 머문 것이 되나 보다.. 그렇게 올해의 여름도 끝날 것인가?
¶ 이동수 목사.. 이동수 선생, 어떨 때는 형제와 같이도 느껴지는 사람.. 하지만 꿈속에서나 보는 느낌으로 오랜 세월을 못 보고 지낸 그런 사람, 어제는 우리 부부가 정말 오랜만에 꿈에서 깨듯이 그 집을 방문해서 부인, 이미섭 선생이 정성스레 마련한 ‘일식’ 점심을 같이 하며 해후를 풀었다. 한마디로 ‘은혜로운’ 몇 시간을 우리들은 만끽하였다.
골방에서 거미줄을 치우며 조금씩 빛을 향해 개미행진을 시작한 지 2년여가 되어가지만 아직도 나는 그 개미행군을 계속하는 느낌이다. 1990년 초, 우리가 아틀란타에 이사온 후 시작한 아틀란타 한국학교에서 우리부부와 그 집 부부는 같은 선생님으로 만났고 그것이 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져서 우리들은 ‘인연’이 생기게 되었는데 교장문제 같은 하찮은 ‘정치싸움’에 우리는 본의 아니게 휘말리고 결과적으로 다 그곳을 떠났는데, 그 이후로 사실 우리 들은 헤어지게 되었다.
그 이후로는 그야말로 생사 여부나 간신히 알 정도로 지내게 되었는데 얼마 전 연숙이 정말 우연히 이동수 목사를 보게 되었고 어제는 집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1990년대의 ‘지인’에 속하는 이동수 목사.. 이렇게 다시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은 이제는 절대로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세상에는 100% 우연이란 없다는 것을..
¶ 몇 년 전 우리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얻어온 선교용 CD를 조심스레 rip해서 youtube에 올려 놓았다. youtube 를 배우려 한 목적도 있었지만 내가 들어 본 그 CD는 한국 천주교회에서 공식적으로 만든 것이라 아주 professional한 것이라 나도 다시 들은 것도 많은 수준 급이어서 혹시 천주교를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큰 무리가 없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것이 ‘인기’가 있을 것은 절대로 기대하지 않았고, 사실 그랬다. 불과 200 views도 채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찌 문제가 되는가.. 단 한 명이라도 ‘무언가’ 느끼면 되지 않겠는가?
문제는 toxic comments에 있음을 오늘까지 몰랐다.. stupid, toxic, absurd, destructive comments.. 내가 제일 싫어하는 부류의 ‘시간을 죽이는 한가한 인간들’의 넋두리를 그대로 방치한 것이다. comment review & approval을 해야 하는데..하는 후회가 있었지만 늦었다. 어떤 ‘불쌍한 자매님’이 불쌍한 comment를 달아놓았다.
‘교황은 지옥에 있다’라고 시작된 이 Kafka-ish한 느낌은 정말 어찌 처리하는가.. 속으로는 ‘지옥은 당신들… 당신이나 잘하시오..’ 하는 감정도 잠시 치솟지만 그래도 나는 레지오(마리애)의 정신에 조금은 익숙해졌는지 곧바로 평정을 가다듬고 이 불쌍한 영혼을 위한 기도가 생각나면서 ‘아하.. 이래서 우리 레지오가 세상에 필요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아.. 세상에는 참으로 불쌍하고 무식한 영혼들이 많이 있구나.. 하지만 무식해도 바르고 깨끗한 영혼들도 많이 있는데..
¶ Coursera: 약 6주전에 성당교우 설재규씨가 이곳, online university course website, coursera.org를 소개해 주었다. 이곳은 전 세계(주로 미국)의 여러 대학 online course들을 online student에게 ‘무료’로 제공하는 비교적 새로운 academic course provider이다. 인터넷을 이용해서 computer로 강의를 듣게 하는 idea는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이렇게 다양하고 세계 굴지의 교육기관 (주로 미국의 대학들)의 course들을 ‘한 곳’에서 제공하는 것은 새로운 것이다.
각 대학들은 이미 자체 방식대로 그 동안 credit course들을 ‘유료’로 제공을 해 왔지만 이 coursera.org는 ‘기본적으로’ ‘무료’인 것이다. course를 제공하는 학교들과 이것을 한 곳에서 제공하는 coursera 는 어떻게 무료를 가능케 한 것일까? 특별한 ‘광고’들이 보이지 않기에 광고수입은 관계가 되지 않는데,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 이 course들의 학생 숫자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고, 이것 자체가 각 대학들을 ‘선전’하는 금전적 효과를 노린 것이 아닐까? Open & Free가 새로운 문화로 정착하는 이즈음, 이것도 그런 맥락에서 절대로 이해가 가는 시대를 앞서가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6주간 나는 University of Rochester에서 제공하는 Fundamentals of Audio & Music Engineering : Part 1 Musical Sound & Electronics란 ‘거창한’ 제목의 course를 ‘경청’하려고 노력을 해 보았다. 학교 강의실이 아니고 편한 집의 cushy한 환경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사실 oxymoronic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나에게 큰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이 course로 나의 성적표 기록이 남는 것도 아니고 남에게 잘 보이려는 것도, 이제 취직을 하려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재미와 보람’만 있으면 되지 않겠는가?
특별히 이 sound & music course를 택한 것은 내가 이곳을 처음 찾던 날 ‘개강’을 한 것이 제일 큰 이유였지만, course description에 final project로 guitar amplifier를 설계, 조립을 한다는 것이 귀가 솔깃해진 것도 결정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요사이 나는 야마하 ‘통(acoustic)기타’를 guitar pickup과 Beringer amplifier, buzz pedal을 연결해서 쓰는 중이어서 이런 분야에 관심을 둔 것도 또한 이유가 되었다.
이것을 공부하면서 느낀 것 중에는, calculus를 포함한 대학 level 수학을 정말로 많이 잊어 버렸다는 것.. 학교를 떠난 후 이 ‘이론적 수학’을 써볼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라는 변명만 찾기에 나는 급급하고 있을 정도로 사실 당황을 하였다. 세월이 그만큼 흐른 것 때문일 것이다. 전기공학과 2학년 수준의 AC circuit analysis도 많이 잊어버린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생애 전공’이 거의 digital, microcontroller, embedded software였으니, 그 쪽은 정말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 편으로는 너무나 ‘향수’를 느끼게 하는 그리움 같은 것도 느껴서 그렇게까지 괴롭지는 않았다.
My current & upcoming courses from Coursera
3일 뒤에는 다음 course, Introduction to Guitar가 시작이 되는데, 사실 이것을 ‘청강’해 보려는 것은 과연 진짜 pro들은 어떻게 guitar를 치는가 하는 것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course의 설명을 읽어보면 ‘아마도’ 기타를 처음으로 시도해보는 사람들을 위한 것 같아서 시간 낭비가 되지 않을까 우려도 되지만 무슨 상관.. Free & Open이 아닌가? 3주 뒤에는 올해 나의 진짜 관심사, 이스라엘의 대학에서 제공하는 A Brief History of Humankind인데, 소개 video를 보면 정말 어떤 각도로 ‘인간역사’를 조명하는가가 궁금해진다. 나의 다른 희망은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지만 어떨지 모른다.
nostalgia, 노스탤지어1, 향수(鄕愁).. 사전2을 보면 이것의 뜻은 ‘고향을 몹시 그리워하는 마음, 또는 지난 시절에 대한 그리움’ 정도가 된다. 그렇게 힘든 뜻이 절대로 아닌 것이 누구나 이런 감정을 느꼈을 것이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내가 ‘애독’하는 New York Times, the 신문에 ‘향수, nostalgia에도 과연 바람직한 것이 있는가?‘ 란 제목의 기사가 나의 눈을 끌었다. 이 제목을 보면 우선 향수란 것은 원래 ‘바람직하지 않은 것’ 으로 암시가 되어있고 그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향수, nostalgia란 용어는 의학적인 것도 있어서, 이것은 분명히 disorder (장애 障碍) 에 속하고 따라서 그에 따르는 ‘고통’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의 어원은 ‘망향심 望鄕心’의 그리스어 nostos와 고통이라는 뜻의 algos가 합성된 말로서 17세기 어떤 스위스 의사가 ‘전쟁 중에 떠나온 고향을 그리는 군인들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의 병’ 을 뜻하는 말로 시작이 되었다고 했고, 이후로 이 ‘병’은 부정적인 뜻으로 이해되고 쓰이고 있다.
이 기사의 ‘주인공’은 영국에 사는 그리스(희랍)계 (사회)심리학 교수 콘스탄틴 세디키데스 (Constantine Sedikides, University of Southampton, U.K., Ph.D Ohio State University, 1988) 인데, 그리스에서 대학을 졸업, 곧바로 미국 유학으로 사회심리학으로 연구를 계속, 현재는 영국의 University of Southampton에 재직하고 있는 사회심리학계의 권위자이다. 이런 배경이면 젊었던 시절을 포함해서 고향을 두 번씩이나 떠난 셈이고, 고향의 그리움을 분명히 느꼈을 것이고, 그것을 사회심리학적으로 파헤쳐보고 싶었을 것이다. 어느 날 고향 생각에 빠진 그를 보고 주위에서는 ‘우울증’으로 우려를 했지만, 그는 사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었고 그가 느낀 것은 ‘고통적, 병적’인 것이 아닌 ‘포근함, 심지어 즐거움’에 가까운 것들이었고, 과연 고향과 지나온 과거가 앞으로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과 함께, 향수(병)이라 것은 꼭 부정적인 것인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문제의 핵심은 이것이다. 과연 향수(병)이 과거에 짓눌려 살아야 하는 고통인가 아니면 현재와 미래를 사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 주인공 자신의 느낌으로 출발된 이 문제는 본격적으로 ‘학문적, 통계적’으로 10년 이상 연구가 되어서 그 결실을 맺고 있다고 한다. 처음에 그가 이런 향수(병)에 걸렸을 때, 그가 느낀 것은 ‘이런 향수적 감정은 내 존재의 뿌리와 연속성을 느끼게 해 주고, 내 자신과 주변과의 관계도 긍정적으로 보게 해 주었으며 앞으로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된다’ 였는데.. 과연 나만 그런 것일까.. 하는 선에서 출발을 했다고 한다. 연구의 결과는 그가 느낀 그대로였다. 그 골자는:
향수적 감정은 고독과 지루함, 불안함과 맞서 싸우는 힘이 된다는 것이고 나아가서 자신을 더 관대하고, 포용적이고 더욱 참게하며 특히 부부들은 공통된 향수, 기억 감정을 나누며 더욱 가까움을 느끼게 한다. 특히 춥고 을씨년스러운 날, 이 감정은 글자 그대로 우리를 훈훈하게 해 준다. 물론 고통스럽던 기억도 동반하겠지만 전체적으로 봐서 이 향수감정은 우리의 인생을 더 의미 있게 보게 하고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죽음도 덜 무섭게 느끼게 한다.
이 향수(병)이란 것은 지역적, 연령적 차이가 거의 없이 또한 생각보다 더욱 자주 겪게 된다는 사실도 밝혀지고 있다. 예전, 특히 19, 20세기에는 이 감정(‘병’)이 실향민, 이민자들이 특히 많이 겪는 ‘이상 증세’라고 분류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연구결과로는 이것은 ‘누구나’ 겪는 훨씬 보편성을 가진 것으로 나타난다. 친구, 가족, 명절 휴일들, 결혼, 노래, 석양, 호수.. 등등의 추억으로 더욱 나타나고 특히 그것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은 항상 ‘좋은 주인공’의 역할을 했다고 기억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최소한 일주일에 한번 이상 이런 경험을 하고, 거의 반수 이상이 일주일에 3~4번 겪는다고 한다. 특히 고독을 겪는 사람이 더 자주 겪는데, ‘향수 감정’이 그런 고독과 우울의 고통을 덜어 주며 그런 데서 빨리 벗어나는 데 도움을 준다고 한다.
이 연구 결과로 향수가 그렇게 ‘좋은 면’도 있다면, 이것을 의도적으로, 적극적으로 ‘이용’할 수는 없을까? 가장 빠른 방법 중에는 추억의 음악을 듣는 것이 있고 이것이 가장 효과적일 수 있다고 하며 정말로 이 ‘추억의 음악’ 효과는 대단해서 실제로 몸 자체가 따뜻해 진다고 한다. 간혹 지나치게 과거에 집착하게 되면 ‘인생의 연속성’이 끊어지는 위험도 없지 않지만 거의 대부분 오히려 과거와 현재,미래를 더욱 더 연결시켜주는데 도움을 준다고 한다.
연구 팀의 일원인 Dr. Routledge는 “향수 감정은 우리의 ‘실존 감’에 탁월한 도움을 준다. 내가 아끼는 귀중한 추억을 불러 일으키며 그것이 우리가 의미 있는 생을 보내는 값진 한 사람 임도 일깨워 준다. 또한 많은 향수 감정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감정도 잘 처리한다.” 고 보고를 했다.
다른 흥미로운 것은 이 ‘향수 감정’의 빈도나 심도는 젊은이에게 크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떨어지다가 다시 올라간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젊은이들의 경우, 새로운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그 이전의 시절을 회상, 음미하며 건강한 변화를 추구하며, 가족과 보냈던 크리스마스, 애완 동물과 학교 친구들을 그리워한다. 이럴 때 바람직한 것은 좋은 추억거리가 많을 수록 좋고, 이것은 거꾸로 살아가며 좋은 추억거리를 많이 만들려는 노력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런 향수 감정을 잘 ‘이용’하려면, 가급적 기억 속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를 하며, ‘그때가 좋았지.. ‘하는 ‘함정’을 피해야 한다고 한다. 그 대신, ‘존재적인 방법’으로 그 때의 일들이 나의 현재에 어떤 의미를 주었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곳에서도 극단적인 것만 피하면 ‘추억 향수의 감정’을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무슨 병적인 노이로제나 극단적 성향만 없다면 이런 향수적 감정은 ‘적극적’으로 즐기는 것, 일주일에 2~3번 정도 빠지는 것도 좋고, 이것을 우리가 경험으로 번 값진 상품이라는 것도 기억하는 것이 좋다는 결론이다.
이런 기사를 읽으며 나는 또 한번 깊은 생각에 빠지게 된다. 몇 년 전에 이런 ‘we didn’t know then..‘ 류의 ‘연구 보고기사’ 중에 ‘내성적인 사람들의 시대’ 란 조금 걸맞지 않은 제목도 있었고 나는 ‘신나게, 열심히’ 읽었다. 내가 내성적인 사람 중의 ‘대표’이기에 그랬을까? 생각보다 더 많았던 ‘동료 내성적 인간’들을 알고 흐뭇해 하기도 했지만, 진정한 내성의 장점도 확실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사회 심리학’적인 것들은 시대에 따라 변하고 지역간에도 차이는 있겠지만 지금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그런 변화는 큰 것이 못 된다. 한마디로 인간은 대개 ‘공평’하다고 할까.. 그런 보편적 경험적 진리를 확인하는 계기도 되었다.
그러면 지금 이 기사를 읽으며 나는 무엇을 생각할까? 이것도 ‘안도감’이었다. 일방적인 사회적 압박에 못 이겨 ‘나는 향수 감정 같은 것 별로 없다’ 하며 살고 싶지만, 그것은 쉽지 않았다. 과거에 매달리는 ‘현재가 불행한 한심한 인간’이란 딱지를 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솔직이 말하면, 나는 위의 연구 결과에 있듯이 일 주일에 몇 번씩이고 그런 감정을 느끼고, 어떨 때는 즐기고 산다. 그렇다고 나의 현재가 과거에 비해서 덜 행복하거나 심지어 비참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아닌 것 같다. 연구 보고와 같이 나는 조금 우울해지면 ‘일부러, 자연적으로’ 향수 감정을 이용하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나 자신 성격의 일부가 된 것 같다. 그런 ‘추억적 행복’도 없다면 아마도 위의 연구결과에도 있듯이 괴로운 감정을 더 느끼며 살았는지 누가 알랴?
그러면서 나의 blog을 찬찬히 뒤돌아 보면, 역시 나는 ‘과거의 좋은 추억’들을 적극적으로 총동원한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현재를 더 의미 있게 ‘견디는’ 영양제가 된 것일까? 주변의 어떤 ‘골프를 미치도록 좋아하는’ 친지에게 물어보면 대답은 ‘왜 과거에 집착을 하느냐?‘ 라는 간단한 반응이다. 과연 그는 그의 ‘아름다운 추억’을 즐기지 않는 것일까? 그런 맥락에서 보면 나는 조금 평균이상으로 ‘향수 감정’을 겪고 있고, 그것으로 나의 ‘아픔’을 잊으며, 그것이 현재를 더 건강하게 살고 미래를 준비하는 원천이 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 이런 끈적이는 여름이면 ‘철 없던, 무언가 세상을 잘 모르던’ 대학시절의 장마가 한창이던 때, 세월이 무한정 길다고 느끼던 시절, 시원한 장판에 대짜로 누워서 즐겨 듣던 Johnny Rivers의 Summer Rain이 생각나고, Nancy Sinatra, Lee Hazlewood의 classic oldie ‘Summer Wine‘도 함께 그립다.
그 때는 1968~9년 경 여름, 월남전이 한창이었고, 경부고속 도로를 비롯해서 대한민국의 부동산 전체가 파헤쳐지기 시작되던, 박정희 ‘민간’ 정부의 경제부흥의 소음이 요란 한 시절, 삼선개헌 반대 대모를 핑계로 학기말 시험을 피하고 산 속으로 도피하던.. 그런 여름이 생각난다. 나는 역시 지금의 나이대로 new normal 보다는 old normal을 사랑한다. 그러니까 Good ‘Ole‘ Days.. 가 그리운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과연 진화, 진보를 하는 것일까, 아니면 퇴보를 하는 것일까..정말 모르겠다.
Johnny Rivers, Summer Rain 1968
Nancy Sinatra, Lee Hazlewood, Summer Wine, 1968
¶ 어제 밤 잠깐 어떤 email을 잠깐 보니supreme court same-sex 란 단어가 눈에 들어왔고, 불현듯 역시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news blackout을 속으로 선언해 버렸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 ‘실수’로 그것을 더 자세히 읽는 짓을 해 버렸다. 솔직히 나는 이런 류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심지어 배까지 불편하고 더 나아가면 토하고 싶은 심정까지 된다. 그러니까 나는 바로 homophobia인지도 모른다.
나의 물음은 참 간단하다. 어떻게 여자가 여자와 ‘결혼’을 하고, 남자와 남자가 ‘결혼’을 할 수 있을까? 너무나 간단한 질문이다. 어떻게? 어떻게? 그들은 정자와 정자로, 난자와 난자로 아이를 갖는 신출귀몰한 재주를 가진 동물들인가? 하지만 내가 그들에게 느끼는 심정은 조금 더 복잡하다. 숨어살았던 그들.. 이유가 있어서 숨어 살았지만, 그 이유는 이렇게 너무나 간단하다. 한마디로 ‘말로 표현을 할 수 없는 해괴한 변태적 동물집단’이라면 어떨까? 그들이 우리들의 피땀 어린 세금으로 혜택을 받겠다니, 나의 심정은 이제 동정심에서 증오심으로 변하고 있다. 그들은 어느 정도의 낯짝을 가졌기에 그렇게도 철면피 같을까?
이것을 종교로 연관을 시키는 사람들은 아주 중요한 point를 잊고 있다. 이것은 신앙, 종교, 교회와 근본적으로 관계가 없는 것이다. 법 중의 법, 헌법과도 같은 정상적인 인간이면 가지고 태어났을 기본중의 기본적인 도덕률이기에 사실 거론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런 ‘자명한 사실’을 무슨 이유로 헌법 조항에 넣을 필요가 있었을까?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법 조문에 없으면’ 어떤 수단으로라도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로 바꿀 수 있는 최근의 시대 조류.. new normal들이 속출을 하는 초현대 인간들.. 그래서 그래서 절대 불변, 법이 필요 없는 ‘진리 중의 진리’를 찾는 신앙과 종교가 필요한 것일까? 너무나 끈적거리는 6월 말, 아침부터 나의 어깨는 쳐지기만 한다. 이럴 때 시원한, 가슴이 열리고 피부가 뽀송뽀송해지는 마른 바람은 어디에서 불어올까?
¶ Jackie, 어떤 handsome한 개, 내가 부르는 이름이다. 얼마 전 우리 동네를 배회하던 이 Jackie는 6월 동안 나의 머리 속에 있었다. 하도 답답해서 주변의 보는 사람에게 이야기도 하며 마음을 달랬지만, 이 개가 혹시 잘못 될까 봐 하는 걱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동네를 걸을 때마다 보게 되어서 어떨 때는 걷는 것도 피하곤 했다. 비가 오면 비 맞는 모습을 그리며 걱정이 되었고 해가 쨍쨍하면 어떤 집 그늘에서 더위를 식힐까 하는 생각에 잠겼다. 그저 어떤 좋은 주인을 만나는 것이 나의 제일 큰 희망이었다. 최후의 사태에는 내가 데려올 생각도 서서히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며칠 전에 다시 Jackie를 보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그 동안 자주 보이던 집의 길 건너편 Johnson부부의 집 앞 잔디에 있었다. 반가워서 눈을 마주치니 Jackie도 그런 표정이었는데, 의외로 모습이 ‘건강’하게 보였다. 그런 모습을 간직하며 그 옆에 있는 playground에서 살펴보니 이번에는 Johnson씨가 나와서 잔디를 깎기 시작했는데, 그때 Jackie와 Johnson씨의 행동이.. 서로 아는 사이처럼 보였다. 이것은 사실 뜻밖의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Jackie가 Johnson씨의 개? 하지만 dog tag, collar같은 것이 없지 않았는가? 그래도 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분명히 Johnson씨가 최소한 돌보아 주고 있음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어제 드디어 ‘진실’을 알게 되었다. 어제 연숙과 집에 들어오다가 혹시나 해서 차로 동네를 돌아보게 되었다. 혹시 Jackie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하지만 Jackie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뜻밖에 같은 동네, 우리 집 뒤쪽에 우리보다 더 오래 사시는 한인교포 방선생님이 산책하는 것을 보고 차를 세우고 염치불구하고 Jackie에 대해서 묻게 되었다. 처음에는 무슨 얘기를 하나.. 하시더니 나중에 혹시 Johnson네 집에서 ‘돌보아 주는 ‘개 아니냐고 묻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추리는 맞았다. 역시 stray dog이었는데, 얼마 전부터 Johnson씨네 집에서 밥을 주고 돌보아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adopt는 안 한 듯 했다. 이것은 정말 정말 반가운 소식이어서 연숙과 나는 너무나 안심을 하게 되었다. 최소한 Jackie는 현재 shelter가 있는 셈이 아닌가? 게다가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adopt할 가능성도 높을 것이라 짐작이 들었다. 그 후 Jackie가 배회하던 Johnson집 주변에서 더 이상 보이질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 완전히 집 속으로 들어간 것일까.. 아니면 혹시 animal shelter로 보내진 것일까? 나의 걱정과 관심은 아직도 끊이질 않는다.
Jackie Update: Happy Note
Jackie에 대한 나의 ‘필요 이상의 걱정’은 전염성이 있었는지 주변에도 알려지고 특히 연숙이 제일 관심을 갖는 듯 했다. 내가 그런 ‘측은지심’이 결여된, 아니면 최소한 그런 마음을 나타내지 않는 부류의 인간이라고 생각을 해 왔기에 그런지도 모른다. 거의 ‘이상할 정도로’ 내가 걱정을 하니까 조금은 재미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급기야 며칠 전에는 big news가 있다고 소란을 떨면서 나에게 전해준 이야기는.. 얼마간 보이지 않았던 Jackie가 Mr. Johnson과 같이 동네를 걷고 있었다는 목격담이었다.
Mr. Johnson은 원래 자기의 개가 있어서 그 개는 leash에 끌고, Jackie는 그 옆을 나란히 걷고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우리는 너무나 기뻐서 어쩔 할 바를 몰랐다. 결국은 Mr. Johnson이 adopt를 한 것일까.. 최소한 그 집에서 키운다고 결론을 내리고.. 긴 한숨을 쉬었다. 혹시나 animal control로 보내는 것이 아닌가 걱정을 하기도 했지만 역시 그 Johnson은 내가 결여되었던 ‘측은지심’이 있었나 보다.
올해도 어김없이 6월 25일, 6.25가 찾아왔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었던 시절, 주로 재동국민학교 다닐 당시, 어렸을 적에는 신나는 전쟁놀이, 서울 하늘 가로지르며 북으로 날던 ‘쌕쌕이‘ 미군의 젯트 전투기들(F-80, F-86), 만화책을 장식하던 ‘용감한 국군’의 무용담으로 정신을 빼앗기던 날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제2의 6.25가 그날에 또 일어날까 봐 어린 마음에 ‘전전긍긍’하던 날이었다.
그런 걱정이 심한 때에는 6월 25일이 오면 그날 저녁의 붉은 저녁노을조차 다시 미아리고개를 넘어오는 ‘괴뢰군의 탱크’의 포화로 착각하기도 했다. 꿈을 꾸면 남산위로 갑자기 나타난 김일성의 대포들을 보기도 했다. 한마디로 어릴 적, 우리는 ‘공산당, 괴뢰군, 김일성, 소련의 후르시초프, 중공의 모택동’의 공포 속에서 숨을 죽이며 살았다.
6.25 발발 직후부터 일본으로부터 나르기 시작한 미국의 F-80, Shooting Star Jet 전투기들.. 북괴의 Yak 전투기를 격추시키고 소련제 탱크를 공격하였다. 전쟁 직후에도 서울의 상공을 가로지르며 나르던 날개 끝에 달린 연료탱크가 독특하던 이 전투기..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을 한다
올해는 한 살을 더 먹어서 그런지 조금은 다른 각도로 6.25가 나의 인생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사실 우리 가정은 6.25로 인해서 ‘처참하게’ 망가진 case다. 한 가정의 주인인 아버지가 갑자기 없어졌다면.. 그것도 생사를 모르게 완전히 없어졌다면 그 가정은 어찌되겠는가. 군인으로 나가서 수많은 사망자, 불구자가 나왔지만, 우리도 그에 못지않은 불구 가정이 되었다.
어렸을 때 그것이 사실 크게 생각할 것은 못된 것이, 어쩔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어머니가 재혼을 했으면 또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았을 수 있기에 나와 우리누나는 항상 고마워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을 해 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우리 어머니는 어린 남매를 위해서 ‘완전히’ 인생을 바친 것이다. 젊은 30대초에 남편을 잃은 어머님, 경제적으로 여유도 없었던 때, 원산에 대가족을 남겨두고 서울 색시가 된 어머님, 그야말로 혈혈단신으로 이제는 김일성이 덕분에 남편까지 잃었으니..
일방적 통일을 빙자해서 쌍방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전범 김일성이 처단도 못 받은 채 줄줄이 2대의 자식들을 다른 ‘잠재적 전범’으로 만들고 죽었으니, 이제는 사실 원수도 갚을 수 없는 지경이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란 고사성어가 어찌 이렇게 잘도 맞는가? 한 정권을 거의 마피아 스타일 범죄조직처럼 공포의 정치로 움직이더니 결과가 과연 어떠한가? ‘인민’들을 굶겨 죽이고, 탈출하는 사람을 죽음의 수용소로 몰아놓고, 최후의 수단으로 동족을 ‘불바다’ 로 말살하겠다고 장난감 원자탄을 만들고.. 과연 이들은 어떤 인간들인가?
그리고 이들을 옹호하는 ‘똥포’ 집단은 어떤 인간들인가? 또 다른 거대한 범죄조직이었던 소련연방이 거의 순식간에 넘어간 것을 보고 나는 조금은 위안을 받는다. 숨막히는 지정학적 조건에서 굴복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고수하던 조국 대한민국은 아시아에서 most vibrant democracy로 성장했다. 정의는 결국에 승리를 하고, 역시 사필귀정인 것이다. 역사의 뒤에서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 그들은 절대로 모를 것이지만 나는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얼마 전에 1960년 내가 서울 중앙중학교 1학년 다닐 때와 그 해 일어난 4.19 학생혁명을 생각하며 그 즈음의 미국 주간화보잡지 LIFE를 뒤져 보다가 뜻밖의 반가운 사진 기사를 보게 되었다. 바로 그 당시 대한민국의 자랑, 김시스터즈에 관한 기사와 사진들을 보게 된 것이다. 그 훨씬 이전에 그 세 자매가 ‘목장의 노래‘를 송민도씨와 같이 부르는 video를 보며 그 당시를 회상하기도 했고, 1950년대 피난도시 부산에서 촬영을 한 국산영화 ‘청춘 쌍곡선‘ 에서 역시 세 자매가 간호원으로 나온 것도 보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목장의 노래, 송민도, 김시스터즈
나는 그 당시 어린 국민학생이었기에 그 영화를 볼 수는 없었고, TV가 없었으니 (아마도 그 당시서울에 TV를 가진 집은 손으로 꼽을 정도..) 그 세 자매의 모습을 볼 수도 없었다. 그저 라디오로 목소리를 들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당시 ‘희망의 상징’이었던 미국으로 간다고 들었을 때, 섭섭하지만 얼마나 모두 자랑스럽게 느꼈는지 모른다. 일종의 ‘특상품 수출‘이었다고 할까..
그녀들은 그렇게 해서 완전히 미국에 정착을 했고, 가끔 귀국을 해서 선을 보이기도 했다. 이번에 LIFE 잡지에 나온 기사를 읽으면서 그 세 자매는 정말 재주가 넘치는 멋진 trio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사진을 보면 아마도 Chicago에서 잠시 공연을 할 당시 취재를 한 것 같고, 김시스터즈의 manager와 사이가 좋았는지, 시카고 근방 그 manager의 어머니 농장에서 머무르며 미국의 일반 가정과, 서민문화를 접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동안 내가 잘못 알았던 사실은, 그녀들이 1950년대 중반에 미국으로 갔다고 생각했는데 이 기사를 보니 그 것은 1959년경이었다. 게다가 그녀들은 놀랍게도 거의 국민학생 때부터 노래를 불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8남매의 대가족이었는데 어떻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지는 나는 아직도 잘 모른다. Googling을 해 보면 순간적으로 알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당분간은 모르고 지내기로 했다.
이 사진 기사에서 새로 알게 된 사실 중에는:
10년 전, 그러니까 6.25 당시부터, 그러니까 아주 어린 시절부터 노래를 했고,
그들의 talent를 본 어떤 전 GI, 가 미국에 가서 활동하도록 주선을 해서 일년 전부터 Las Vegas casino 에서 공연을 했고,
최근에는 Chicago의 Polynesian Village에서 공연을 했고,
이 세 자매는 철저히 한국식 생활방식을 고수하며 상당한 금액의 일주간 공연료 $2500의 거의 전부를 서울의 ‘대가족: 어머니, 5명의 형제, 자매’ 에게 송금을 하며,
남자관계를 철저히 관리해서, 공연이 끝나서 남자에게 초대를 받으면 반드시 세 자매가 ‘단체행동’을 해서 ‘scandal’을 방지했다.
여기의 기사 본문을 읽어보면 그 trio가 어떻게 미국의 문화, 노래들을 배우며 미국에서 적응했는지를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Three Korean Kims and Their Kayagum
When Min Ja, Ai Ja and Sook Ja Kim enter wearing their colorful hangobs and start strumming on their Kayagums, the song they go into is Tom Dooley. For the Korean girls now appearing in the Polynesian Village in Chicago, the old mountain tune is a mass of phonetics that means nothing to them but is a delight to their audiences. Americans find the Oriental touch on U.S. tunes a highly refreshing one, and just one year after leaving Seoul the Kim Sisters are an all-out nightclub hit over here.
The act began 10 years ago when the girls were taught Ole Buttermilk Sky and Candy and Cake by U.S. troops in Korea. Min Ja sang off key and Ai Ja chewed gum while she sang, but to the GIs they were the Oriental’s answer to the Andrews Sisters. Last year an ex-GI named Bob McMackin who had heard them in Seoul brought the Kims over. The girls learn their songs by note since they know little English. They managed to master the phrase “lots of luck” and could enunciate it perfectly as an exit line. But to audiences it lacked Oriental character and the Kims have changed back to “rots of ruck”.
After a year in the U.S. the Kim sisters still keep the custom of Korea. Most of the $2,500 a week they earn by singing here is dutifully sent back to their mother and five brothers and sisters in Seoul. They are faithful to a Korean tradition that a girl should not go out alone until she is 23. Sook Ja, who is the oldest Kim and the trio’s spokesman, solves the stage-door Johnny problem by telling the men who want to take her out after the nightclub show that her younger sisters have to come along. Ai Ja, 20, and Min Ja, 18, do what Sook Ja tells them to. A recent visit to an Illinois farm was a welcome break from their hectic life, which they find involves continual adjustment. In Chicago they miss the noise of Las Vegas where they had to sing a lot louder so they could be heard over the din of the slot machines.
LIFE 기사, “한국의 세 김씨와 와 가야금”
가야금 반주로 Tom Dooley를 부르는 김시스터즈
Show Five Foot Two 를 마치고 무대에서 뛰어나오는 (왼쪽에서) 민자, 숙자, 애자
이 세 자매는 banjo, bass fiddle을 포함, 무려 10가지의 악기를 능란하게 다루었다.
5구球 수퍼.. 5 tube super… huh.. 이것이 무슨 ‘괴상한’ 말인가? 튜브 5개가 super, 최고라고? 여기의 tube는 사실 vacuum tube의 ‘준말’이고 이것은 그 옛날 한때 전자기술의 총아, ‘진공관’인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super는 무슨 말인가? 5개의 진공관이 super, 최고라고.. 이것도 준말이다. super heterodyne(줄여서 superhet)이란 radio기술계통의 전문용어의 준말인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한마디로 라디오, radio란 말이고, 1950~60년대에 널리 보급되었고 쓰이던 가정용 전자기기의 하나였던 radio-receiver 중에서 제일 발전되고 널리 보급된 것 중에 속한다. 1960년대에 집에 ‘잡음 없이 긴 시간 방송을 듣게 해준’ radio가 있었으면 99.9% 그것은 바로 이것이고, 그것을 보통 한글로 ‘5구 수퍼’라고 불렀다. 이것은 AM radio receiver(AM 라디오 수신기)로서 5개의 진공관을 사용하고 super heterodyne 이란 수신 방식으로 AM 전파방송을 받는 방식이었다.
내가 중,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닐 당시 그러니까 1960년대에는 ‘거의’ 진공관을 사용한 전자기술이 ‘판을 칠’ 때였다. 트란지스터(transistor)가 비교적 자리를 잡기 시작은 했지만 상대적으로 비싸고, 성능이 진공관에 비해 큰 차이도 없을 뿐 아니라 진공관에 비해 성능과 출력이 떨어지는 분야 (예를 들면, stereo amplifier, 전축 같은)도 있었다.
Transistor가 제일 각광을 받던 쪽은 역시 portable radio (휴대용 라디오) 쪽이었다. 특히 일본 아이들이 잘도 만들어 내던 ‘정말로 조그만 라디오’는 대중의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아마도 그 분야에 두각을 나타내던 일본의 전자기술은 그때부터 세계적으로 알려지고 그들 ‘기술 번영’ 시대 서막을 알리는 주역 노릇을 했을 것이다.
나의 어린 시절 꿈이었던 전기,전자기술 분야는 사실 일반인들에게 그렇게까지 인기 있고 알려진 분야는 아니었다. 그저 유일하게 알려진 것이 라디오와 전축, 녹음기, 전화 정도였다. 그러니까 그 당시는 전기 에너지를 쓰는 분야, 전기 다리미, 전열기, 형광등, 전등불, 선풍기, 초인종.. 같은 것이 전부였다. 전파를 보내고 받는 쪽인 라디오, TV.. 그리고 녹음된 음성, 음악을 듣게 해주는 전축, 녹음기 가 시대를 앞서가는 주역을 했다. 미국은 이미 그 당시 ‘고철’ 컴퓨터의 최 전성기에 돌입하고 있었지만 우리들에게 그것은 거의 ‘환상적’인 idea에 불과했다.
대학 진학할 때 많이들 전공을 정 하는데 애 먹는 것을 보았지만 나는 ‘전혀’ 걱정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전기, 전자’에 목을 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공을 고르는 것은 문제가 없었지만 대학 자체를 고르는 것은 문제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입학 시험을 보았다가 ‘떨어지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당시의 ‘입시 유행’이 공부를 잘하는 순서로 전공을 고르는 정말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괴상한’ 풍조가 있었다. 예를 들면 전국 고등학교에서 제일 공부를 잘 하면 (남자 중에서) 그건 ‘서울공대 화공과’, 그 다음은 ‘전기공학과’, 이런 식이고 여자라면 제일이 ‘이대 영문과’, 그 다음은 어쩌구.. 하는 식.. 이런 풍토에서 나는 떨어질 확률이 꽤 높은 경기,서울,경복,용산 고교의 독차지 였던 서울공대 전자공학과에 지원할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면 ‘전기, 전자’가 무엇인지 모르거나, 알아도 전혀 정열이 없는 그런 애들, 하지만 수학 모의고사는 top.. 나중에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전기,전자공학을 하려면 수학을 잘 해야 하지만 거꾸로 수학을 잘 한다고 해서 전기,전자를 잘한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1960년대는 (아마 그 이후에도) 그런 풍조가 지배적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연세대 전기공학과엘 가게 되었다.
당시 우리 같은 전기,전자 공학도에게는 전축, 라디오를 직접 만드는 것이 제일의 꿈이었다. 물론 이것을 ‘설계’를 하고 ‘조립’을 하는 것이지만 불행하게도 ‘설계’의 기술은 더 배울 것 투성이여서 ‘조립’ 쪽에 시간을 더 보냈다. 전축은 하도 종류가 다양해서 ‘표준화’ 된 것이 적었지만 위에 말한 AM 라디오 쪽은 거의 ‘완전히’, ‘5구 수퍼’라는 것으로 표준화가 되어있어서 각종 회로와 기술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니까 거의 모두가 이것 하나만은 직접 만들어 보는 경험을 가지게 된 것이다.
비록 이것은 분명히 ‘전자기술’에 속한 것이지만, 대부분의 노력은 ‘기계적 기술’이 필요할 정도로 기계적인 작업이 많았고 전자 쪽이었던 진공관은 100 볼트가 훨씬 넘는 shock energy를 요구하는 등, 조금은 등골이 오싹한 때도 있었다. 제일 ‘무서운’ 것은 제작비를 줄이려고 power transformer(트랜스) 없애고 100 볼트 가정용 전기를 ‘그대로’ 쓰게 하는 방식을 쓰면서(trans-less), 그런 위험이 더 커진 것이다. 이것을 조립하고, 만지고 할 때는 항상 전기 감전의 위험성에 시달리곤 했다.
대학 2학년 때 내가 직접 만들었던 ‘전자기기’들 중에 ‘표준 5구 수퍼’가 제일 기억에 남고 사진도 남아있어서 당시의 ‘흥분감’도 그대로 느끼게 된다. 5구 수퍼 라디오의 회로는 대부분 ‘표준화’ 되었지만, 문제는 그곳에서 쓰이는 부품들은 대부분 ‘조잡한 국산’ 수준이어서 조립 후에 ‘라디오의 수준’은 엉망진창이었다. 비록 진공관 자체는 대부분 일제였지만 나머지가 문제인 것이다.
조립 후에는 사실 ‘고가의 측정기기’가 필요한데 그것이 없으니.. 그저 흘러나오는 ‘저질의 음성’을 듣는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라디오의 ‘수학적 이론’에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결과의 기쁨’은 상상외로 엄청나서 두고두고, 50년 뒤에도 이렇게 느낄 수 있으니.. computer simulation으로 전자 회로를 공부하는 요새 ‘전자공학도 아해들..’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 시절에는 electric guitar의 전성기여서 그것을 hacking하는 것도 매력적인 취미였는데, 전공분야의 이점을 살릴 겸해서 guitar amplifier(기타 앰프)도 만들어 보았다. 지금은 transistor 로 너무나 쉽게 만들 수 있는, $20정도면 살 수 있는 stompbox같은 것이 있지만 그 당시는 적어도 3개 이상의 진공관을 사용해서 같은 distortion effect를 내곤 했다.
50년 이 흐른 지금 시점에서 이런 추억의 의미는 복잡하다. 영리한 인간들의 ‘기술적 진보’의 속도가 소위 말하는 Moore’s Law1를 따르며 현재까지 질주를 했는데, 비록 조금 주춤하는 예측도 있지만, 내가 그 동안 ‘속수무책’의 눈으로 경험한 것은 실로 예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진공관 5개의 ‘두뇌’가 지금은 소금 결정만한 크기에 수백만 개가 넉넉히 자리잡게 되었고, 앞으로 50년 내에 사람 두뇌세포를 닮은 지능까지도 그곳으로 자리잡을 것으로 예측된다. 그 뒤는 어떨까? 누가 알랴..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안에 과연 ‘혼’ 이란 것이 있을까?
일제 산요 Sanyo ‘플라스틱’ 5구 수퍼 라디오 내부 모습 photo credit: 일본 라디오 박물관
1965년 경 우리집에 있었던 일제 Monarch 5구 수퍼 플라스틱 라디오
1968년경 내가 만들었던 5구 수퍼 ‘open frame‘ 중파 라디오
쓰인 진공관: 12BE6, 12BA6, 12AV6, 30A5, 35W4
진공관 plate의 150V ‘고압’이 노출된 라디오의 내부 모습
당시 나의 ‘전자기기 공구’의 일부, 흡사 ‘철공소’를 연상하게 하는..
2~3년 만에 기술의 양과 질이 2배로 불어난다는 법칙, 주로 IC silicon chip에 들어가는 transistor의 숫자로 계산을 함. ↩
요새 가끔 보는 인터넷 Youtube의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60년대의 ‘방화, 국산영화’ 들 중에 예전에는 별로라고 생각되었던 배우들이 이제는 다른 느낌을 주는 예를 즐겁게 발견하기도 하고, 정말 내가 꿈에서라도 다시 보고 싶었던 서울 시내의 정들었던 모습도 다시 보게 되는 즐거움도 느낀다.
예를 들면 나의 대학시절 초기에 없어졌던 그 정든 ‘거북이 전차‘들의 모습들과, 서울 사람이면 예외 없이 정 들었던 일제의 잔재 서울역사와 바로 옆, 염천교 밑으로 검은 연기를 뿜으며 지나가던 ‘화통기차‘, 남산에서 본 반도호텔만 보이던 ‘아담했던’ 서울시내와 멀리 바라보이던 인왕산, 북악산과 그 뒤에 까물거리며 보일 듯 말 듯한, 병풍처럼 둘러선 북한산(백운대, 인수봉, 도봉산 등).. 명동입구에서 보이는 지지리도 못생겼던 시내버스, ‘도라무 깡’을 두들겨 패서 만들었던 국산차 제1호 ‘시발택시‘들.. 이런 것들이 비록 흑백의 배경에서나마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것은 나이가 든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느낄 수 없는 특별한 즐거움이다.
영화배우들은 그 시대의 ‘최첨단’의 유행을 자랑하는 특별 난 직업의 소유자이기에 우리들은 그렇게 돈을 내며 그들을 보고, 관심을 갖는지 모른다. 비록 시나리오와 감독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준準 로봇 일 수도 있지만, 사실 그럴까? 그렇지 않기에 ‘성공한 인기배우’와 나머지로 구분이 되는 것이다.
60년대의 영화를 다시 보며 내가 제일 놀란 것은 신영균과 최무룡 이다. 내가 그 당시 그가 출연했던 영화를 나이제한 때문이 거의 못 보았지만, 그 당시 나는 신영균은 겹치기출연의 명수, 돈에 환장한 배우, 유들유들한 인물로 기억에 남았다. 그런데 요새 다시 여러 편에서 그를 보니, 나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의 연기가 정말 요새의 수준으로 보아도 진실된 ‘수준급’, 아니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최무룡은 김지미와의 간통사건으로 어린 우리들도 잘 알고 있었지만, 어린아이들의 눈으로 보았을 때, 왜 여자들이 그렇게 최무룡이라면 오금을 못 폈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미남’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연기와 함께 그의 연기를 자세히 보니, 역시 매력적인 남성임을 실감하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내가 너무 어려서 잘 못 알았거나, 내가 그를 보는 눈이 ‘성장’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문희 – 영화 초우(草雨), 감독 정진우, 신성일 주연, 1966
그 반대의 case가 바로 당시 (60년대 말)의 잘 나가던 여배우 문희였다. 그녀는 내가 그 당시 실제로 보았던 영화의 주연급이었고, 안 본 영화도 관심을 가지고 그녀를 지켜 보았던 것이다. 당시의 기억에 나는 분명히 ‘멋지고, 귀엽고, 신비롭고, 알고 싶던’ 그런 문희였다. 그녀가 나온 영화를 안 본 것도 분명히 잡지를 통해서 관심 있게 본 것이다. 그런 그녀가 인기의 절정기에서 하루아침에 한국일보 장기영의 부잣집 아들 장강재에게 시집을 가 버리고 완전히 망각의 세계로 가버렸다. 그리고 반세기 뒤에 다시 그녀의 연기를 자세히 보게 된 것이다.
신성일의 연기까지 망치게 한, 그럴싸한 이름의 영화 <초우>, 남궁원과 남진 등 남씨들 조차 살리지 못했던 <벽 속의 여자>, 그리고 신영균과 전계현의 도움으로 간신히 hit를 했던 <미워도 다시 한 번>등을 다시 보고, 최소한 현재까지는 그녀의 신화는 완전히 100% 깨지게 되고 50년 간의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제 자리를 다시 잡게 되었다. 한 마디로 ‘못 봐 주겠다‘.. 인 것이다.
처음에는 혹시 내가 중요하지 않은 그 당시 ‘촬영 기술’ 때문인가 의심을 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그 ‘지겨운, 성우들의 예쁜 목소리 dubbing’ 같은 것이다. 동시녹음이 너무나 비쌌던 당시의 경제사정은 이해하지만 왜 그렇게 ‘인형 같은 목소리‘만 고집을 했을까. 문희의 경우에는 그 수준이 극치에 달했다. 영상의 느낌과 너무나 동떨어진 그 ‘예쁜 성우의 떨리는 목소리’.. 그것과 문희의 연기와 너무도 잘도 어울리는 ‘신파 극’의 모습들이었다.
다른 인기배우 김지미도 같은 운명의 동시녹음 희생자였지만, 그녀의 연기는 그 목소리의 문제를 잘 cover해 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문희는 누가 어떻게 발굴을 했었는지는 몰라도, 완전한 ‘허구, 껍데기’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황급히’ 부자 아들과 결혼을 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50년 만에 나만이 알게 된 ‘진실’인 셈이다.
보리수, 들장미.. 허~ 웬 꽃 나무 이름들.. 그 말이 맞긴 하지만 여기서는 사실 영화의 제목들이다. 머리를 짜내고 내며 희미해져 가는 기억들 들추어서 다시 새 것으로 바꾸려고 노력을 하지만 이 두 영화이름은 사실 그렇게 큰 노력을 할 필요도 없이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거의 50년 이상을 견디어온 그 기억력의 원인은 무엇일까?
이 두 영화는 모두 독일(그 당시는 서독, West Germany)의 영화로써 1950년대 중반에 나왔고 수 년 후에 곧바로 ‘일본을 거쳐’ 대한민국에도 들어와서 특히 ‘재미있는 것이 거의 없던’ 그 당시 어린 학생들에게 대인기를 끌었었다. 나의 기억이 맞는다면 나는 ‘보리수’란 영화를 국민학교 4학년, 그러니까 1957년경, 화신 백화점 옆 골목의 우미관에서 보았었다. 들장미란 영화는 사실 나는 못 보았지만 내가 ‘거의’ 본 것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 우리 누나가 이것을 보고 완전히 ‘빠져’ 버렸기에 사진처럼 그 장면들이 상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서울에 있던 옛 극장 (주로 1950~60년대)을 회상하면서 그 당시 신문에 나오는 영화 광고를 보다가 보리수와 들장미의 광고를 찾아 내었다. 보리수의 광고는 1959년 신문에 ‘문화극장’에서 재개봉되는 것으로 나왔지만 내가 본 것은 아마도 1957~1958년 사이였고 극장은 분명히 우미관이었다.
누나와 우리 집에서 밥을 해주며 같이 살았던 ‘필동 아줌마’와 아침에 갔다가, 아줌마는 한번만 보고 극장을 떠나셨고, 누나와 나는 거의 연속으로 계속 몇 번을 보았다. 그 정도로 재미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때 그것이 ‘독일어 영화’인지도 모르고 그저 ‘외국’ 영화라는 것만 알았다.
‘수많은’ 예쁜 남녀 아이들이 등장하며 노래를 부르고, 장난을 치고.. 우리로써는 그 당시 ‘침만 삼키는’ 부러운 광경들을 몇 시간이고 즐긴 것이다. 영화 제목인 보리수 라는 것은 그 주인공 대가족이 살았던 저택의 앞에 있던 커다란 나무의 이름이었고, 그들은 보리수란 명곡을 불렀던 듯 하다. 그것은 슈베르트(F. Schubert)의 Der Lindenbaum(보리수, 菩提樹) 이란 명곡이었다.
그 이후 나는 미국의 서부영화, 전쟁영화에 완전히 빠져서 이 영화를 거의 잊고 살았다. 그러다가 나중에 이 영화가 미국의 musical, The Sound of Music과 plot이 거의 같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저 짐작만 하고 있었는데, Ohio State (Univ.)에서 만난 중앙고 후배 김종수의 wife(선희 엄마)가 나에게 그것이 맞는다고 확인해 주었다. 그러니까 ‘영화 보리수 = 영화 The Sound of Music‘이었던 것이다.
이제 Googling의 힘을 빌려서 찾아보니, 너무나 오래된 것이라.. 별로 나오는 것이 없었지만 ‘간단히’ 한가지만 찾아 내었다. 그 옛날 독일영화 보리수의 원제목은 역시 보리수가 아니고 The Trapp Family( Die Trapp Familie) 였는데, 이것은 이 영화에 나오는 가족의 이름이 Von Trapp 이었으니 말이 된다. 서양식은 이렇게 ‘구체적’인 영화이름을 쓰지만, 동양식으로는 조금 곤란했을 것이다. ‘트랩 가족’.. 이런 영화제목을 하면 아마도 사람들이 많이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을까? 그래서.. 보리수.. 아마도 99% 이것은 ‘일본아이’들의 발상일 것이다.
독일영화 보리수, Die Trapp Familie 1956
독일어로 나오지만 줄거리는 미국영화 The Sound of Music과 거의 비슷하다
영화 들장미 광고, 1959
들장미.. 이것도 천신만고 끝에 딱 한가지 가느다란 단서만 찾아내었다. Keyword는 역시 내가 찾아낸 신문광고에 가느다랗게 나오는 ‘원제목’.. ‘Der schoenste Tag meines Lebens‘ .. 와~~ 이것이 ‘들장미’란 말인가.. 아닌 듯 하다. 이것도 역시 서양식 영화이름과 동양식은 차이가 있기에 들장미 조차 일본아이들의 발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원제목의 ‘뜻’은 무엇인가? 비록 고등학교 1,2학년 때 독일어를 배웠건만 나는 지지리도 그것을 못했다. Der Des Dem Den Die, Der, Der, Die.. 같은 정관사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모조리’ 잊어버렸다. 그러니까 Der 만 아는 것이다. 그것은 영어의 The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조차 Googling이 도와준다. 독일어로 찾으니 단서가 드러난다.
역시 1957년 독일영화, 우리 말고도 나이 지긋한 사람들 이것을 그 옛날에 많이 보았던 모양, 특히 일본사람들.. 그들의 제목은 Heidenröslein, 野ばら, 한글로 역시 ‘들장미’였다. 이것은 아마도 대만에서도 상영이 되었던 듯, 순 짱께 표현도 있는데, 그것은 野玫瑰, 한글로 읽으면 ‘야매괴‘ 이 듣기 거북한 말이 바로 ‘장미’의 순 한자어인 것이다. 이제 ‘매괴의 여왕’이 왜 성모님인가 이해가 간니, 장미의 여왕인 것이다.
이 영화 들장미에 나오는 비엔나 소년 합창단과 주인공이 바로 이 영화의 매력인 듯 싶다. 특히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Michael Ande 는 정말 귀엽게 생겼다. 그는 1944년 생으로 그 당시 나이가 13세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누나가 이 영화에 ‘홀딱 반했던’ 것은 바로 이 Michael Ande 때문이 아니었을까?
내가 국민학교 6학년 때 누나가 이 영화를 보고 와서 (누나는 중학생, 나는 못 보았다) 아마 한 동안 정신이 멍~ 한 상태로 있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그런 긴 ‘잠’에서 깨어나더니 하는 소리가 걸작이었다. 비엔나 소년합창단에 ‘식모’로 가겠다는 것이었다. 우리(식구)들은 하도 기가 막혔지만 덕분에 실컷 웃기는 했다.
그런 추억의 영화를 신문에서 광고로 다시 보니 감개무량하긴 하지만, 누나를 생각하니 참 옛날이 그립고 이렇게 운명적으로 오랫동안 떨어져 사는 것이 슬퍼지기만 한다. 이런 어릴 적의 ‘보물’들을 기억이나 할지..
최근에 ‘요상한 기후’에 대해서 연숙과 얘기를 하다가 문득 storm of the century란 것을 기억했다. 일명 super storm이라고도 했다. 문제는 그것이 언제였나 하는 것이었다. 일종의 ‘치매 예방’ 기억력 test였다. 나에게 제일 알쏭달쏭한 것이 지나간 10년에서 20년 전 일들의 기억이다. 각가지 연상technique를 동원해서 아마도 1992년에서 1994년 사이일 것이라고 일단 결말을 지었다. 그 super storm이 온 것이 3월 이때 쯤인 것도 기억했다.
문제는 100% 자세한 것이 어떤 것일까.. 1992년은 우리가 현재의 집으로 이사 온 해였고, 장모님과 나의 절친한 친구, 지금은 타계해서 없는 김호룡 식구가 거의 같은 때에 우리 집에 온 해이기도 했다. 1992년 3월 1일에 이사를 왔는데, 곧 이어서 이 super storm이 온 것 같지는 않았다. 1994년을 생각해보니 여름에 누님의 아들, 준형이가 다녀갔던 것 이외에 별로 특별한 것이 없었다. 결국은 1993년임을 알았다.
나의 제일 큰 문제는 이 1990년대의 기억이 제일 희미하다는 것이다. 아마도 기억해내기 싫었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아닐까도 생각을 했다. 그만큼 큰 기쁨이나 즐거움, 그렇다고 특별한 괴로움도 없는 그런 세월을 보낸 것이 아니었을까.. 한마디로 ‘세파’속에 휩쓸려 간 듯한 그런 10년간인 듯한 느낌인 것이다.
고국이나 이곳이나 그 나이쯤이면 ‘샐라리맨’의 다람쥐 쳇바퀴 도는 그런 생활을 많이 보내니까 사실 이상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런 커다란 기후에 관한 사건들은 기억이 난다. 게다가 그때에는 VCR, video (cassette) recorder가 한창 유행할 때여서 그런 것들의 기록도 남아있어서 기억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조금 더 알아보니 그것은 1993년 3월 13일, 토요일의 일이었다. 사실 그 당시의 일기예보는 그렇게 ‘자신 있던’ 것이 아니었던 것이, 미리 커다란 ‘경고, 경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의 생각도 없이 아침 10시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얼어붙는 눈보라’ 에 그냥 당한 것이다. 다행히 토요일 아침이라 교통에 관한 문제는 별로 없었다. 그냥 퍼 붙는 눈보라를 집에 틀어 박혀서 ‘즐긴’ 것이다. 그 전날만 해도 봄 같은 포근한 날이 어떻게 그렇게 하루아침에 변할 수 있을까? 예보, 경보도 그렇게 없이..
하루 종일 강풍과 함께 쏟아진 얼어붙는 눈에 나무들이 하나 둘씩 쓰러지기 시작했고 전기도 나가기 시작하고.. 길은 완전히 얼어붙고.. 이곳 지역은 완전한 시베리아를 연상하는 광경으로 변했다. 다행히 우리 집의 전기는 나가지 않아서 하루 종일 TV앞에 앉아서 뉴스를 보게 되었다 덩치가 큰 소나무가 쓰러지면서 우리 집 drive-way를 가로막았다. 그러니까 나중에 차가 나갈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오후가 되면서 무슨 요란한 소리가 나서 밖을 보니 남자 몇 명이 power chainsaw로 우리 집의 쓰러진 소나무를 잘라서 치워주고 있었다. 동네에 사는 ‘마음 좋은 아저씨’들이었다. 동네를 돌면서 우선 급한 것들을 치워주고 있었던 것이다.
TV 뉴스에서는 이번의 snow storm은 ‘아마도’ super storm, storm of the century정도로 monster 급이라고 했다. 멕시코 만에서 시작된 사상 최저기록의 저기압과 북쪽에서 하강한 cold front가 ‘완전히’ 결합이 된 그야말로 perfect storm이었다. 결국은 이 system은 우리가 사는 Georgia를 거쳐서 northeast의 덩치 큰 도시들로 갔고 그곳의 피해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그것은 엄청난 것으로 느껴졌지만, 2000년대가 지나가면서 그때의 것은 별로 큰 것이 아니었다. 점점 더 큰 monster storm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때 찍어둔 video tape을 본다. 그러니까 정확히 20년 전 우리 집 주변이 남아있고, 그 눈 속에서 ‘신나게’ 놀던 우리 집 두 아이들.. Wisconsin에서 이사온 것이 불과 몇 년 전이라 그 추운 곳에서 타던 ‘썰매’와 겨울 옷들을 다시 꺼내어서 아주 요긴하게 쓰기도 했다.
큰 애 새로니는 Ohio와 Wisconsin에 살 때 경험했던 눈과 얼음으로 그다지 생소하지는 않았겠지만 작은 애 나라니는 거의 기억이 나지를 않는지 신기하게 눈과 얼음을 바라보며 썰매를 탔다.
그 당시 나는 비교적 젊었던 45세.. 와.. 정말 젊었다.. 피곤을 모르며 직장생활(‘embedded software’ engineer at Automated Logic Co)을 했고, 연숙은 home-based business, housewife, mom, PTA등으로 시간을 보낼 때였다. 신앙적으로는, 유일했던 한국본당에 ‘대 파란’이 나던 때여서 아마도 그 근처에 가지도 않던 ‘신앙적으로 암울한 시기’였다.
당시는 Internet이란 것이 아주 미미하게 보급이 되고는 있었지만 지금 보는 것 같은 graphical web browser가 없어서 일반인에게는 그런 것은 ‘학교에서만 쓰는’ 그림의 떡이었다. Email은 직장이나 학교 내에서만 쓸 정도고, PC 는 Microsoft Windows 95 전의, 조금은 원시적이었던 Windows 3.x이 전부였고, 지금 쓰는 cellular mobile phone도 없었던 그런 시절이었다.
아틀란타 올림픽이 열리기 3년 전이었던 그 당시 이곳에 한인의 인구는 현재에 비하면 아주 미미한 편이었다. 생각해보니 그 동안 참 변한 것이 많았지만 제일 ‘충격적인’ 것이 내가 40대에서 60대가 되었다는 ‘자명한’ 사실.. 어떻게 그런 ‘자연스러운 변화’가 충격으로 느껴지는가.. 그것은 생생하게 뇌리에 남은 20년 전 1993년 3월 13일을 회상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얼마 전에 정말 오래된vinyl LP record 중에서 통기타 시절 김세환 album을 digital format (mp3)으로 바꾸었다. 과정이 아주 힘든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은 귀찮은 job에 속한다. 이 특별한 LP record는 1975년경에 Chicago에서 산 것으로 아마 1974년경에 발표된 것으로, 김세환 특유의 ‘감미로운‘ 곡들이 실려있었다. 1970년대 후반에 자주 들었지만 Cassette tape, CD등이 나오면서 눈앞에서 거의 사라졌다가, 1990년 초에 새로 audio system을 장만하면서 큰 마음 먹고 ‘한동안 없어졌던’ LP disc turntable을 다시 사게 되었고, 그 이후로는 가끔 이LP를 듣게 되었다. 문제는 그 turntable이 좋은 것이 아니어서 (너무나 fragile, 장난감 수준의 제품) LP disc를 걸 때마다 손이 떨릴 정도로 조심을 해야 했다는 것이었다.
세월이 지나가고, 음악 듣는 방식도 많이 바뀌어서 ‘거창한’ audio system앞에서 듣는 것도 사치로 보이게 되었다. 거의 주로 desktop pc아니면 mp3 player, smartphone으로 듣게 된 것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보물처럼 간직했던 그 많은 LP record들을 digital format으로 바꾸어야 했는데, 나 같은 older generation을 의식했는지 이제는 시장에 LP record를 ‘직통으로’ mp3로 바꾸어주는 ‘smart-turntable’이 등장을 하고, high school student들이 이것으로 돈까지 벌기도 한다.
내가 택한 방식은 의외로 간단했다. 지금은 값이 많이 떨어진 personal voice recorder를 쓰는 것이다. 요새 것들은 audio recording을 곧바로 mp3 format으로 flash card에 save를 해 주기 때문에 이 방식은 거의 ‘직통’ 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오래된 analog audio, music (on cassette tape, LP record, VHS tape etc)들이 하나 둘씩 mp3 audio로 바뀌면서 제 1호가 ‘오래 된’ 조동진 album audio tape, 제 2호가 위에 언급된 김세환의 LP album 인데, 요새의 standard video cloud 의 대명사가 된 YouTube에 이것들을 upload해서 Internet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도 의외로운 복병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저작권(copyright)문제인데, 40년 전의 analog music을 digitize한 것이 저작권 침해라고 생각해 본적은 한번도 없었다. 문화적 유산을 보존한 것으로 상을 받아야 할 지경이 아닐까? 제일 웃기는 것은 이것이다. 김세환 앨범에 Bee Gees의 word란 곡을 한국어로 바꾸어 부른 것이 있었다. 그 위력을 자랑하는 Google의 database 속에서 그 곡이 ‘걸려들고’ 말았다.
저작권이 ‘영국’의 어느 단체에 있다는 것이다. Bee Gees의 word를 digital format으로 그냥 올려 놓았으면 할 말이 없겠지만 그 당시(1974) 국제문화계에서 거의 ‘거지취급’을 받던(dollar 보유고가 없어서) 한국의 ‘학생가수’가 부른 곡을 40년 뒤에 mp3로 바꾸어서 인터넷에서 다시 듣겠다는데 ‘저작권 침해’라고? 웃기지 마라.. 이것은 물론 ‘사람이’ 개입이 된 것이 아니고 monster같은 YouTube의 ‘감시경찰 bot’ 이란 software가 ‘실수’를 한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이 system은 보통의 사법system처럼 ‘Innocent until proven guilty’ 가 아니고 ‘Guilty until proven innocent‘ 인 것이다. 우선 ‘죄인’으로 취급하고, 억울하면 무죄를 밝히라는 것.. 참.. 웃기는 세상이다.
Homecoming, 다른 말로 ‘귀향‘ 정도가 될까? 하지만 영어와 한글의 어감은 분명히 다르다. 아니 달라야 할 것이다. 언어는 그 원산지의 문화를 나타내는 것이고, 영어의 homecoming은 아무래도 서구문화적인 것, 한글의 귀향은 한반도의 배경을 흠뻑 가지고 있는 그런 것이다. 귀향은 늙어가시는 어머님을 만나러 오는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어도 어머니, 그리고 고향이 그리워 시골길을 걷는 나그네가 연상이 되고, homecoming.. 하면 어떨까.. 폭풍설이 쏟아지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산속에 있는 자기가 자랐던 통나무 집, 그곳에는 사랑하는 어머님이 계신 그런 집으로 기를 쓰고 찾아가는 다른 나그네, 그런 것이다.
사실 오늘 나와 연숙은 서양적인 homecoming에서 한국적인, 김치냄새기 풍기는 듯한 우리의 고향 집으로 ‘귀향한 온 기분이었다. 1994년 이후 ‘처음’으로 일요일 주일 미사를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 와서 본 것이다. 거의 20년 만인가.. 물론 2010년 가을부터 이곳에 레지오 단원으로 화요일 마다 들락거리고, 일요일에도 ‘과외 행사’에 참여를 하긴 했지만 “진짜” 미사를 이곳에서 본 것은 아주 우리에게는 커다란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한마디로 ‘고향’에 온 것이다. 1994년 즈음 이곳을 ‘완전히’ 떠날 때, 언제 다시 올지는 전혀 idea가 없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우리, ‘최소한 나’는 완전히 하느님을 떠나게 된 것이다.
우리 집 근처에 있는 미국성당에 꾸준히 다니면서 익숙해지고 친근해지고 해서, 더 ‘귀향’할 구실도 없었지만, 하느님은 오묘하신가.. 아주 작은 발걸음으로 우리를 ‘고향’으로 이끌었다. 2010년 가을 레지오에 입단하기 전과 비슷한 느낌.. 무엇인가 변하게 되리라는 불안하기도 한 심정 속에서 무언가 ‘결단’이 필요함을 느끼며 몇 개월이 지났는데, 우연만은 아니게 오랜 옛 ‘후배, 지인’ 설재규씨와 재회를 하게 되고, 그것의 열매가 오늘, 우리의 ‘귀향’으로 goal-in을 하게 되었다. 이제는 이런 모든 것들이 ‘우연’만은 아님을 느낀다.
20년이 지난 주일미사의 풍경은, 흡사 내가 Rip Van Winkle이라도 된 듯한 느낌을 주는 그런 것이었다. 어제 본 듯한 연대동문 이원선씨를 그곳에서 보았지만, 역시 그와 알았던 것도 20년 훨씬 전이었다. 어쩌면 10년 20년.. 이렇게도 오래된 세월이 지났단 말인가? 모두가 생소한 얼굴들.. 내가 알았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인가? 현재의 목표가 한 달에 한번 이곳에 오려는 것이지만, 그것도 어떤 방향으로 나를 이끌고 가게 될지, 나도 자신이 없다.
Hagood Hardy – The Homecoming
귀향과 homecoming이란 단어를 떠 올리면서 연관되어 생각나는 것, 바로 The Homecoming 이란 제목의 연주 곡(instrumental).. 역시 아련히 떠오르는 이 단어와 그 감미로운 연주 곡.. 이 감미로운 곡은 1970년대 말에 총각으로 Ohio State University에 다닐 때, office (graduate student)에서 자주 듣던 것이고, 그 때마다 세상에서 저렇게 감미로운 것이 있을 까 감탄을 하곤 하던 그런 곡이었다. 한번은 나의 옆자리에 있던 전기과 후배 이재현씨에게, 나는 저 곡을 들을 때마다 ‘쉬 마려울 정도로’ 찌릿하다고 ‘고백’을 해서 모두 한바탕 웃었던 기억도 생생하다. 그 당시에는 그 곡의 title을 몰랐고 아주 후에 그것이 The Homecoming임을 알았다. 이 곡은 캐나다 출신작곡가 (Hugh) Hagood Hardy 의 곡으로, 1975년에 발표된 것으로 ‘일설’에 의하면 TV movie였던 (Canada) drama: Anne of Avonlea/Green Gable에 삽입된 곡이었다고 한다.
고향.. 하면 어렸을 적에 일제시대 때를 연상하곤 했다. 그 어렵던 시절 고향을 ‘강제로’ 떠나 만주 등지로 갔던 동포들.. 그들은 찌들게 가난했던 고향이었지만, 죽을 때까지 그곳을 그리워했다. 세월이 지나고, 6.25 동란 때는 ‘지옥’같던 북한 땅을 떠났던 동포들.. 그래도 죽을 때가지 갈 수 없었던 고향을 그리며 살았다. 그 이후에는 어떠한가? 멀리 갈 필요가 없이 나도 지독하게도 넓은 바다를 건너와 또 ‘죽을 때까지’ 고향을 그리며 산다. 아니 이제는 가 보아도 ‘없어진’ 고향을 꿈 속에서 그리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한글 단어 ‘고향, 귀향’ 이 주는 영원한 느낌이고 의미일 듯 하다.
¶ 2013년 2월도 반을 넘기고 이제 겨울과는 아주 멀어진 듯한 날씨에 익숙해지더니, 역시.. 자연의 ‘엄마’, mother nature는 못 말리나? 예고도 거의 없이 하루아침에 영하..로 그것도 낮 기온이 영상을 간신히 유지하는 싸늘함, 역시 아직도 춘분이 공식적인 봄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듯하다.
모처럼 한가한 날 들을 맞이하고 있지만, 이런 날이 계속되어도 문제다. 사람은 역시 몸이고 마음이고 계속 움직여야 사는 것이니까. 2013년 사순절이 지난 수요일에 Ash Wednesday(재의 수요일)로 시작이 되었지만, 사실 우리의 매일 routine이 크게 바뀐 것이 거의 없다. 지난 일년을 거의 사순절처럼 살려고 해서 그런가.. 이건 너무 자화자찬일 것이지만. 커피도 계속 마셔대고, 즐기던 것을 끊은 것도 별로 없는 것 같다.
올해의 사순절에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성취’할까.. 이것이 계획으로 이루어지기는 쉽지 않을 것이지만, 그래도 성 루도비코 마리아의 33일 봉헌 과정에 다시 한번 도전해 볼 마음은 아직도 있다. 2월 20일부터 시작이 되니 만큼 아직도 생각해볼 여유는 있다. 지난 해 바쁘고 힘들었던 한 여름에 열심히 33일 과정을 거쳤고, 그 후에 내가 느꼈던 것이 생각보다 훨씬 좋았지만, 알았던 것 보다 의문과 생각할 것들이 더욱 많아졌음을 알았고, 역시 다시 한번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기에 또 역시, it’s now or never의 정신으로 도전해 볼까..
¶ 요즈음 내가 즐기며 시간을 죽이는 것이 있다면 역시 computer system hacking정도 밖에 없을 것인데, 그 중에서도 요새 나의 관심은 mobile OS, 그 중에서도 Google의 Android (on Nexus tablets, mobile phones) ecosystem이 제일 관심이 간다. 지난 가을에 연숙 생일 때의 선물이 Google의 Nexus 7 tablet이었고, 올해 들어서 우리 가족이 family plan으로 T-mobile Samsung Galaxy phone으로 바꾼 뒤에 그 쪽으로 관심이 간 것이다. 두 system 모두 Android system이어서 이것 하나만 익히면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을 듯하다.
이런 것들이 요새 들어서 워낙 바쁘게 변하고 있어서 하나를 배우면 2~3년 만에 ‘고물’이 되어 버린다. 이런 것들 모두 한마디로 embedded computing device들이고, 이것을 지난 25년 넘게 ‘직업적으로 만들어’ 온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감회가 깊다.
¶ 정말 오랜만에 김인호 형으로부터 email이 왔다. 지난 연말 연시 때 연락이 되지를 않아서, 혹시 아프신가.. 아니면 세계일주 여행을 가셨나 했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 그 동안에도 계속 ‘연구’만 하신 듯, ‘김인호의 경영, 경제 산책‘이라는 장문의 column을 쓰셨고 그것의 web links(1, 2, 3, 4)도 같이 보내 주셨다. 잠깐 읽어보니 경영, 경제 쪽의 전문용어들이 많이 나와서 그런지 나에게는 모두 생소한 것이 많았다.
나의 ‘경제, 금융’ 등에 대한 일반적인 인상이 대부분 부정적이어서 더 그렇게 느껴졌을 것이다. 전문 용어를 제외하면 이런 평론의 논지는 짐작이 간다. 우리 세대 (인호 형은 나보다 조금 위지만) 입장의 경제, 경영론이겠지만, 그런 매체에 실린다는 사실은 세대에 구별되지 않는 보편성이 있다고 생각이 된다. 형만 동의를 한다면 그 평론들을 나의 blog에 전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 2월 중순에 느끼는 으스스한 추위와 ‘라디오엔 대설주의보, 남쪽엔 꽃 소식, 영동 산간 지방의 때아닌 폭설.. 하나도 아까울 것 없는 세월’을 얘기하는 김재진 시의 구절이 멋지게 어울리는 그런 날이었다.
세월
김재진
그런 잠 있었네. 낮고 흥건한
간다던 이 가고 없는
빈방에 불 켜놓고
후회없이 자리라 저녁 거르고 누운
라디오엔 대설주의보
남쪽엔 꽃소식 분분한데
영동 산간 지방엔 때아닌 폭설
환한 이마 찌푸린 채
가고는 오지 않을
아니면 오고는 가지 않을
그러나 사실은 가든지 말든지
아까울 것 없는 세월
하나도 아까울 것 없는 세월
때로는
잘 나가던 시절의
해 놓고 지키지 않던 맹세 따라
가리라 가리라 노래하다 못간
그런 날 있었네.
품팔던 사람들 돌아오는 길목마다
소리없이 타버린 심지처럼
버려야지 버려야지 마음먹다 울던
그렇고 그런
그래서 그런
낮고 흥건한 세월 있었네.
¶ 40년 전 이 맘 때는 무엇이었을까? 그러니까 1973년.. 그 해 6월에 나는 나를 25년 동안 품에 안아주었던 고향산천을 등지고 미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뒤는 나의 긴 이어지는 역사가 되었다. 돌이켜보는 나의 마음은 어쩐지 슬프기도 하지만, 그 때는 희망과 낭만의 쌍곡선의 연속이었고, 그 당시의 추억은 역시 우리의 등대 pop song에 고스란히 얽혀있다.
그 당시에 어떤 것들이, 그 중에서 Lobo의 노래들은 쓰레기 같은 많은 것들에 눌려서 오랜 동안 숨어있었다. 다시 들어도 그것은 역시 ‘명곡, classic’이라고밖에 볼 수가 없다. Don’t expect me to be your friend, Me and You and a Dog named Boo.. 정말 정말 오랜만이다!
얼마 전에, 어렸을 적에귀따갑게 들었던 1950년대 화제의 영화, 자유부인을 기적적으로 보게 되었다. 기적적이란 표현이 과장이 아닌 것이 이 영화는 1956년에 나온 것으로 그 바로 전에 일간지에 연재되었던 같은 이름의 정비석 원작의 신문소설을 영화화 한 것이고, 그 당시에 불과 국민학교 2~3학년 정도였던 나까지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반세기가 지난 뒤에 실제로 그것을 보게 되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surreal한 기분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화제의 단계를 넘어서 그 소설, 영화는 ‘문제작’의 수준까지도 올랐던 것을 기억한다. 모든 것이 ‘자유’라는 단어가 붙었던 그 당시였다. 당시의 이승만 여당도 자유당이고, 대한민국은 자유란 말만 붙으면 모든 것이 ‘멋지게 보이던’ 시절이었다. 거기다 급기야 ‘자유부인’이란 말까지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까지만 해도 “자유와 부인“은 그렇게 잘 어울리지 않던 비교적 엄격한 ‘남녀 유별’의 전통이 있었다고나 할까.. 지금 보면 간단히 말해서 ‘남녀차별, 남존여비’의 전통이다. 나와 같은 세대는 그런 ‘구식 전통’을 보며, 느끼며 자란 것이다. 그런데, ‘김일성 개XX’의 도움으로 6.25 사변을 거치며 거대한 미국의 ‘신식 문화’가 파도처럼 쏟아져 들어오면서, 이런 것들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일까.. 그것을 timing좋게 당시 유명했던 대중 소설가 정비석 씨가 인기소설로 이끌어내고, ‘폭발적’인 화제가 되자 곧바로 영화가 된 것이었다.
쉽게 말하면 서로 바람 피는 대학교수 부부의 주변을 그린 것이지만, 특히 교수부인, 춤바람 난 아내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고, 결과는 비교적 예상하기 어렵지 않게 끝나고 있다. 어떻게 보면 ‘바람 피는 여자’에 대한 질타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것과 더불어 ‘여자의 권리’ 같은 것도 나란히 잘 그려낸 듯 하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로 긴장을 하곤 했는데, 이 영화에 보이는 location(로케, 촬영 장소)들이 너무도 눈에 익었던 곳이어서 나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우선 시청과 국회 의사당 주변에서 당시의 차들이 오가는 거리 풍경은 정말 내가 보고 기억한 것과 100% 일치하였다. 특히 행인들의 옷차림: 중절모의 남자, 한복의 여자들을 보면서 ‘맞다, 그때는 그랬다’ 하는 탄성이 나오곤 했다.
시발 택시도 나오기 전 차량들은 거의 ‘미제 시보레’ 급의 세단들과, 일본이 남기고 갔거나, 수입했던 ‘동글 동글한’ 시내 버스들.. 물론 그립던 ‘귀여운 에노 전차’들이 명동, 미도파 앞에서 굴러가는 모습들은 사진처럼 나의 뇌리에 남아있는 것들이었다. 동화 백화점, 남대문 시장입구, 미도파.. 심지어는 화신백화점 옆에 있었던 ‘신신백화점’이 깨끗이도 보인다. 이 영화의 보존 상태는 정말 어제 찍었던 흑백 사진과도 같이 좋았다.
이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이민 이란 남자배우를 보게 되었다. 귀에 많이 남았던 배우였는데, 자세히 보니 참 잘생겼다. 왜 그 이후에 큰 스타가 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모든 영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간판배우 박암, 물에 물 탄듯, 술에 술 탄듯한 그의 연기는 다시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특징이 없다. 여자 주연인 ‘김정림‘.. 정말 모르겠다.. 기억이 ‘전혀’ 없으니까.. 어떻게 그녀가 주연이 되었는지, 그 이후로 어떻게 되었는지도 깜깜 이다. 구닥다리 안경과 새카만 콧수염의 ‘주선태‘.. 좋은 역으로 나오긴 힘든 배우고 배역이지만, 그래도 반가운 얼굴 중에 하나다.
문제는 이곳에 나오는 ‘연극배우’ 김동원.. 나는 그가 이런 ‘대중영화’에 그것도 초창기에 출연했는지 몰랐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설마 저 사람이 내가 기억하는 ‘연극배우’ 김동원은 아니겠지 할 정도로 조금 닮았다고는 생각했지만.. 문제는 머리칼 머리 숱.. 내가 아는 김동원씨의 머리는 절대로 ‘대머리, 반대머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의 머리가 빠지다 보니, 더욱 호기심이 나서 자세히 보게 되었는데.. 분명히 이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은 ‘연극배우’ 김동원이 분명했다. 그의 머리 스타일은 반 대머리.. 훨씬 이후에 보이는 김동원씨의 모습은 절대로 대머리가 아니고 숱이 많은 모습들이다. 그러면 둘 중에 하나인 것이다. 원래 대머리였고, 그 이후에는 ‘가발’이었을 가능성과, 영화 자유부인에서 ‘역할에 의한 삭발’의 가능성..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신빙성이 있을까? 물론 100% 확신을 할 수 없지만 나는 전자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자유부인 이후의 김동원씨, 가발 수준은 정말 수준 급이라고 해야 할 듯하고, 많은 fan들에게는 그렇게 상대적으로 ‘젊은’ 모습을 남기려 했던 그 노력은 참 상당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그렇게까지 한 것에 100% 공감을 하지는 않지만, 직업상 어쩔 수 없었을지 않을까.. 그저 benefit of doubt을 주고 싶어진다.
춤추는 유부남과 유부녀
명동입구의 양품점 사장으로 연기하는 김동원
동화백화점 경양식집에서 김동원과 김정림, 자유부인 1956
김동원씨 가족, 1972
동아일보의 약품광고에서 ‘건강과 행복’을 전하는 듯.. 바른쪽 끝에 가수 김세환씨가 보인다
True Love – Bing Crosby & Grace Kelly, 1956
그 당시 유행하던 영화 High Society의 주제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