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틀란타 지역에 올 들어 첫 영하의 날씨가 들이 닥쳤다. 평년보다 일주일이 빠르다고 한다. 하도 ‘요상’한 기후가 올해를 기록으로 올려 놓더니 이것 조차 그 중의 하나가 되려나. 오늘 낮에는 잠깐 눈 싸라기까지 내려서 계절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었다. 단풍도 깊이 들지 않았는데 이렇게 겨울의 맛을 보여 주는 것이다. 밖에서 한여름을 지낸 화분의 화초들을 부리나케 집안으로 옮겨 놓았다. 분명히 날씨는 다시 따듯해 질 것이지만 언제 다시 추워질지 모르는 계절이 아닌가? 작년의 겨울은 정말 추웠는데 올 겨울은 어떨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어제는 연숙이와 같이 하루 종일 우울한 날을 지냈다. 연숙과 가까이 지내던 성당 교우 최희상씨의 대학생 작은 아들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청천벽력이라고 하던가? 사고가 난 것이 아니고, 급성 뇌막염이었다. 이병은 가끔 대학교 기숙사의 학생들에게 걸리는 고약한 것이고, 치사율이 정말 믿지 못할 정도로 높다. 거의 아주 급성으로 손을 쓰기도 전에 이런 날벼락을 맞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너무나 우리에게 가까운 곳까지 온 것이다. 아들을 잃은 부모의 심정은 어떨까.. 우리는 그저 기도로 고인의 명복을 빌고 성모님과 함께 슬픔에 잠겨있는 부모님을 위로해 주시라고 하느님께 기도를 할 수 밖에.. 인간은 이렇게 나약한 것일까..
우연히 Costco에서501 MUST-READ BOOKS란 discount book을 하나 샀다. 나에겐 거의 보물같이 느껴지는 횡재였다. 이런 류의 책이 한국에서 나온 것은 그런대로 많이 기억이 나고, 아직도 몇 권은 아직도 가지고 있다. 이제는 거의 “고서”가 되어가고 있을 정도로 오래 된 것이지만.. 예를 들면 “역사를 움직인 100권의 철학책”, “오늘의 사상: 100인의 100권”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이번의 책은 영어권에서 500권이 넘게 각 분야별로 뽑은 것인데, 영국에서 출간된 책이라는 것이 독특하다. 그러니까 조금은 “미국의 입장과 영향”에서 벗어난 것이다. 나의 희망은 이 책의 목록에서 내가 얼마나 ‘무식’하게 살았나 하는 것을 빨리 발견하고, 조금이나마 더 유식하게 살다 갔으면 하는 것이다.
어제 아침에는 이미 몇 주일 전에 이미 예고가 되어 있었던 Atlanta History Center의 Breakfast with Condoleezza Rice 란 프로그램에 연숙이와 다녀왔다. 바로 전에 출간된 그녀의 성장기 중심의 자서전 Extraordinary, Ordinary People: A Memoir of Family 의 사인 회를 겸한 프로그램이었다. 전 국무장관을 역임했던 화려한 경력과 눈부신 학력 등으로 이미 그녀는 스타 급의 인기가 있다. 흑인을 제도적으로 차별을 하던 남부, 알라바마주 출신의 흑인 여성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녀의 의미는 정말 상상하기 조차 힘들 지경이다. 현재는 다시 대학으로 돌아와서 그녀의 모교인 Stanford University의 Provost로 일을 하고 있다.
아침 8시부터는 buffet style breakfast가 있고 곧 이어서 9시부터 Condi Rice와의 대담 프로가 시작이 되었는데 우리는 나라니의 “경고”를 무시하고 시간에 맞추어 갔는데 시작 시간인 9시 10분전에 도착을 해서 아침을 놓치게 되었다. 그곳으로 가는 길의 아침 rush hour traffic이 그렇게 많다는 것을 우리 둘이 다 잊고 있었던 것이다. 제일 마지막으로 그런 곳에 들어가는 것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인데 이번에는 그런 꼴이 되고 말았다. 어떻게 그 이른 아침에 그 큰 grand ball room이 꽉 차게 많은 사람들이 이미 와 있었다는 사실이 한마디로 이 흑인여성의 인기 도를 한마디로 대변해 주고 있었다.
이곳 아틀란타에 있는 역사 깊은 흑인대학교 Spelman College의 총장 (역시 흑인여성)이 대담 상대역을 맡았다. 대부분 그곳에 모인 청중은 거의 백인들이고 드문드문 흑인과 우리 같은 아시안들이 조금 보였는데 이 두 ‘머리 좋고, 성공한’ 흑인여성들이 대다수였던 백인들과 그렇게 대조적일 수가 없었다. 참, 미국도 많이 많이 변했구나 하는 한마디로 “격세지감” 이랄까..
이번에 나온 그녀의 첫 책은 사실 어린 시절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대담의 내용도 거의 다 오늘의 그녀를 있게 한 성장기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제일 중요한 여건은 역시 그녀의 ‘든든한’ 부모의 존재였던 듯 싶다. 철저하게 그녀를 ‘차별대우’에서 보호를 하고, 이상적인 교육여건을 마련해준 그녀의 부모가 모든 것을 가능케 하지 않았을까? 흔히 대도시 흑인가정들과는 전혀 다르게, 거의 유대인가정과 같은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그런 여건들이 그녀의 미래를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물론 아니다. 그녀의 명석함, 용감성, 그리고 심지어는 행운도 무시 못하는 것들이다. 그 행운 중에는 그녀도 인정을 하듯이 제도적인 Affirmative Action이란 ‘소수민족(주로 흑인) 우대’ 정책도 한 몫을 했다. 이 정책이 지금은 거의 퇴색이 되었지만, 그 때에는 많은 불리한 조건에 있었던 흑인학생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거꾸로 말하면 이런 것의 혜택을 받은 것 자체가 ‘자존심’이 상하게 할 수도 있어서 역시 double-edged sword 라고 할 수도 있다. 인상에 남는 말 중에는 인종이란 것을 birth defect라고 표현을 한 것이 있다. 그 말의 의도는 “복합인종,민족의 사회에서 인종, 민족이란 것을 절대로 숨길 수 없다”는 것이다. 철저히 인정을 하고 거기서 출발을 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어제 밤에는 사실 아침에 일찍 나가는 것이 귀찮아서 이곳에 가는 것을 빠지려고 하였다. 모처럼 나라니가 어렵게 ticket을 구해 준 것이데 미안 하지만, 나중에 깜빡 잊었다고 둘러대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나라니(우리 집 작은딸)로부터 확인 전화가 왔다.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라고.. 그런데 아침에 나가려고 하니 올 들어 처음, “으스스하게 싸늘한 가을비”가 내리고 있어서 더 한번 안 가려는 유혹을 받았지만 역시 우리를 생각해 준 나라니 한테 미안해서 빠질 수가 없었고, 갔다 온 다음, 역시 잘 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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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이곳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는 제1차 동남부 성령대회가 열렸다. 연숙이 이곳엘 다녀왔기에 알게 되었다. 보통 때 같았으면 사실 그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느낌이 달랐다. 3주전부터 나가기 시작한 레지오 마리애 때문에 한국성당에 더 관심이 간 것이다. 이전에도 가끔 성령집회가 있다는 것을 기억은 하지만 이번 것은 조금 달랐다. 이곳 동남부 (Southeast, 그러니까 남동부가 더 맞는 말인데..) 의 한인천주교회 전부가 참가한 커다란 행사였던 것이다.
연숙이도 자세한 것을 모르고 갔다가 조금은 놀란 인상을 받았던 듯 하다. 사람이 너무나 많이 모여서 그랬고, 인도하시는 지도신부가 “김웅열” 신부라는데 사실 우리는 잘 모르는 신부였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가 한국에서는 아주 유명한 ‘치유은사’의 소유자라고 했단다.들은 말에 의하면 김(웅열)신부는 유명했던 노래그룹 “해바라기“의 전신 멤버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신부 되기 전에 “딴따라” 경력이 있다는 말인가? 그 당시에 우리는 고국에 없어서 사실 잘 모른다. 하지만 전형적인 사제가 아니라는 느낌을 주어서 신선한 느낌도 든다. 거의 20여 년 전, 1979년에 Indiana 주에 있는 Notre Dame University에서 있었던 미국인 중심의 Charismatic Renewal Convention (성령쇄신대회)에 우리가족이 참가를 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그런 종류의 대회였을 것이다. 지금은 그때의 느낌을 많이 잊었지만 그래도 그때의 ‘성령의 열기’는 아직도 잊지를 않는다. 그 이후 거의 다 잊고 살았다. 그런 것이 요새 조금씩 다시 마음이 열리는 느낌을 받는다. 더 이상 내일, 내일 하면서 모든 것을 미루며 사는 것이 조금은 무서워 진다. 나에게 내일이 없을 지도.. 오늘이 마지막 날일지도.. 하는 그런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이다.
거기서 연숙이 책을 하나 사가지고 왔다. 아주 반가운 저자의 책이었다. 우리에게 영세를 주셨던 왕영수 신부님의 “신앙의 신비여:사제 생활 50년의 단상” 이란 책이 아닌가? 우리 부부는 1982년에 오하이오주의 콜럼버스에서 왕 신부님으로부터 영세를 받았다. 길고 우여곡절이 많았던 우리부부의 긴 신앙여정의 출발을 왕신부님과 함께 한 것이다.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 하시고 계속 옮겨 다니시던 신부님이 칠순을 훨씬 넘어서 지금은 울진근처에 “새 예루살렘 공동체”란 집을 지으셔서 그곳에 사신다고 한다.
사진을 보니 나이는 드셨지만 아주 건강한 웃음을 보이신다. 영세의 인연도 있지만 왕 신부님은 사실 미국에서 “잔뼈가 굵은” 성령운동의 대가 라고 할 수 있다. 위에 말한 김웅열 신부가 한국을 배경으로 했다면 왕 신부님은 이곳에서 커지신 케이스다.
무엇이든지 성공하거나 유명하거나 커지면 꼭 ‘사탄’이 따른다. 이것은 예외 없는 철칙이다. 왕 신부님도 예외가 아니다. 없다고는 할 수 없는 파문과 의혹, 추문 등이 가끔 따르곤 했다. 우리는 우리는 사실 그 자세한 내막은 알 수가 없고 믿지도 않는다. 그저 들은 소문인 것이다.
Home Office를 바꾸는 것이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미처 몰랐다. 더위가 닥치기 시작하긴 바로 전 6월초에 이동이 시작이 되었지만 그것은 사실 일의 시작에 불과했다. 거의 10년 이상인 방치 되었던 것들을 이번에도 외면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대부분 버리는 것이 일이었다. 문제는 어떤 것을 버리는가 하는 것이다. 제일 쉬운 것이 책 종류였다. 골동품이나 고서의 가치가 없는 것은 무조건 쓰레기 통으로 보냈다. 다음이 서류 종류인데 이것도 옛 직장에서 쓰던 것들은 이번엔 용감히 버리기로 하였다. 남겨야 하는 것이 조금은 있지만 그건 아주 예외에 속한다.
나의 필적, 사인 같은 것이 있는 것들은 그렇게 많지 않아서 보관하기로 했다. 나머지는 사진인데.. 어떤 사람들은 가차없이 버린다는 얘기도 들었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신발상자에 모조리 보관을 하기로 했다. 이것은 개인의 역사가 아닌가? 누가 보건 안 보건 그것이 문제는 아닌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paper print된 사진이라 수명이 있을 것이고, 앨범에 넣지 않은 것들은 보기도 어렵다. 그렇게 되어서 숨어있던 사진들을 이번에 정말 오랜만에 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거의 잊어버리고 살았던 매디슨의 중앙고 후배들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1989년, 아주 오래 전이고, 같이했던 기간도 짧았지만 그 동안 사진조차 못보고 살아서 기억이 더욱 많이 희미해졌다. 얼마 전에 중앙고 후배 강태중의 생각이 났는데 이번에 그 사진을 찾은 것이다. 그 젊었던 모습들을 다시 보니 이 많은 후배들 이제 다 생각이 난다.
우리가 아파트를 조금 큰 곳으로 옮기고 나서 집들이를 한 모양이다. 바로 전에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간 전기석 후배만 제외하고 모두 모였다. 정태춘의 “시인의 마을”을 정태춘보다 더 잘 불렀던 이주호 후배, (wife는 미스 코리아처럼 예뻤다) 쌍둥이 딸을 두었던 수재 형의 윤정로 후배, (wife도 같이 공부를 했었다) 나와 같이 천주교회에 다니면서 가까이 지냈던 강태중 후배, 씩씩하고 활달하던 강상봉 후배, 통계학과의 이제준 후배.. 문제는 그 나머지 후배들의 이름이 가물거린다는 슬픈 사실이다. 얼마나 미안한 일인가? 하지만 노력을 하면 생각이 날지도.. 이 머리 좋던 중앙고 후배들, 다들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돌아오는 일요일은 이곳의 전통적인 ‘웃기고, 무서운’ Halloween이다. 이 날은 오래 전 내가 처음 보았던 그런 것들 보다 너무나 많이 ‘상업화’가 되어가고 있다. 처음에는 그런대로 간소하고 소박한 것이 이제는 아주 복잡해졌다. 주로 아이들이 즐기던 날이 어찌된 것인지 어른들이 더 난리를 친다. 조금은 천박하고 시끄럽고, 심지어는 지나치게 장난을 치는 느낌이다.
나는 원래부터 귀신이야기 같은 것을 좋아해서 이 즈음이면 그런 영화도 나오고 TV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런 분위기를 띄우고 해서 보곤 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우리 집의 아이들이 한창 이런 날을 즐기던 그런 시절에나 재미있는 법이다. 아이들이 다 크고 나니 이제는 분위기가 아주 썰렁해졌다. 작년까지만 해도 pumpkin carving도 하고 candy같은 것도 사고 했지만 올해는 “처음”으로 모든 것을 중단하기로 했다.
조금은 기분이 썰렁함을 느끼긴 하지만, 이것도 세월 흐름의 한 표시가 아닐까. 이날의 저녁때 trick or treating하는 아이들이 오면 우리 집의 ‘불’을 모두 끄고 지내기로 했다. 그러면 우리 집은 아이들이 그냥 지나 갈 것이다. 옆집에 사는 오래된 이웃 David이 조금은 의아하게 생각하리라.. 이제까지 그런 적이 없었으니까. 아~~ 이제 우리 집도 ‘늙어’가는 구나..
10월도 3일밖에 남지 않았다. 10월을 되돌아 보니, 갑자기 다가온 진짜 가을날씨로 시작된 10월초에 다시 시작된 laminate flooring job은 며칠도 못 가서 보기 좋게 중단이 되고 말았던 것이 제일 쓰라린 기억이 되고 말았다. 새 마루의 모양새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이럴 때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가 나는 것일까? 프로였으면 밤을 새고라도 무슨 해결책을 찾았을 것이지만 나는 그럴 의지와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그대로 중단을 한 것이다. 하지만 다음달에는 Thanksgiving Holiday가 있어서 무슨 일이 있어도 그때까지는 끝을 내야 한다.지금 마루를 깔고 있는 방에는 덩치가 커다란 가구, 심지어는 피아노까지 있어서 사실 근육이 많이 쓰이는 곳이라 더 힘든 곳이다. 이럴 때마다 간절히 생각나는 것이 있다면.. 아.. 등치가 좋은 아들녀석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다. 그렇지 않으면 바로 옆집에 마음에 맞고 힘을 쓰는 “남자 친구”녀석이라도 살고 있다면..하는 정말 꿈같은 상상이다. 대가족이 다 모여 살았던 그 옛날이었으면 그런 것이 가능했으리라. 고국도 이제는 핵가족, 소가족, 떨어져 살기..등등으로 많이 변해서 이곳이나 진배없으리라 생각을 하지만 그래도 이곳보다는 낫지 않을까.
며칠 전에 고국의 평창이씨 종친회에서 우편물이 도착했다. 종친회 website에 나의 종파에 관해서 문의를 했더니 친절하게도 종친회 간행물과 편지를 종친회장이신 “이건모” 회장께서 보내주신 것이다. 간행물은 두 권의 소 책자인데 하나는 “백오세록(白烏世錄)” 이란 것이고 다른 것은 비해당소상팔경시첩(匪懈堂瀟湘八景詩帖) 이란 긴 이름의 소책자이다. 백오세록의 백오는 하얀 까마귀란 뜻인데 여기서는 고유명사로써 통일신라시대의 지금의 강원도 평창의 지명이름이다. 이 책은 평창이씨 족보를 전반에 걸쳐서 요약을 한 것이다. 완전히 고어로 되어있는 정식 족보를 이렇게 한글화하고 뜻을 풀어서 쓰려는 노력은 정말 칭찬할만한 노력이 아닐까.
우리세대만 해도 학교에서 기초한자를 배웠다지만 요새 세대는 정말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지만, 우리의 전통이 이렇게 한자로 남아 있는 한 아예 이 한자를 배우는 것이 현명할 듯하다. 나와 같이 족보를 “전혀” 모르고 살고 그것도 영어권 문화에서 오래 산 사람에게 이 족보문화는 정말 culture shock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고 비교적 빠르게 족보의 기초를 받아드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제서야 역사 속에 있는 나와 우리가족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족보가 의미하는 진정한 뜻이 아닐까? 아주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부지런히 그런 역사의식을 느끼며 가고 싶은 것이다.
MICROCENTER… 어제는 오랜만에 근처에 있는 MicroCenter 에 다녀왔다. 나의 home office를 지난 6월초에 옮기면서 computer desk를 없애고 (방을 조금 더 넓게 쓰고 싶어서) lawyer style의 main desk하나만 쓰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렇게 넓은 곳이 아니라서 아주 작은 computer keyboard를 사서 쓰고 있었다. 보통의 laptop pc보다도 작은 것은 좋았는데 문제가 있었다. 거의 모든 key들의 ‘촉감’이 정말 엉망이었다. 어떤 key들은 누르는데 힘이 너무나 들고 어떨 때는 숫제 접촉이 되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불량품’이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자꾸 쓰면 길이 들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견뎠지만 나아지지를 않았다. 그래서 조금 비싼 것을 사려고 MicroCenter엘 간 것이다
MicroCenter는 나에게는 남다른 추억이 있는 곳이다. 그만큼 역사가 깊다는 말도 된다. Computer retail store로 이만큼 역사가 있는 곳이 사실 없다. 거의 30년이 가까워 오니까. 내가 오랜 전에 살았던 Columbus, Ohio에서 시작된 곳이 그 오랜 세월을 견디고 아주 건실하게 성장을 해 온 것이다. Ohio State University campus의 바로 옆에 첫 store가 있었고 주요 고객이 그때 시작된 microcomputer의 customer들이었는데 주로 교수, 학생들이 많았고, IBM PC가 자리잡기 전이라서 주로 Apple II가 주 판매 종목이었다. 이 store의 특징은 computer book store를 포함하고 있었다는 것을 비롯해서 computer hardware, software, 그리고 service, 심지어는 training까지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당시 시간만 나면 이곳에 가서 그냥 구경만 하곤 하기도 했다.
이때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retail store가 우후죽순처럼 솟아 났지만 몇 해를 가지를 못했다. 너무 성급히 확장을 하려다 못 견딘 것이다. 하지만 MicroCenter는 10년 가까이 거의 같은 종목만 고집하며 확장을 하지 않고 내실을 기하더니 우리가 Atlanta로 이사 올 즈음에 이곳에 처음으로 분점을 낸 것이다. 나에게는 참 묘한 인연이 되었다. 물론 그 이후로 다른 곳으로 많이 분점이 퍼져 나갔다. 유행과 불경기를 아주 잘 견디고 현재도 착실하게 business를 하고 있다. 이런 류의 technology retail store의 역사가 거의 30년에 가깝다면 사실 요새로써는 믿기가 힘든 업적이 아닐까?
NAKED DSL… 우리 집의 Internet access는 현재 AT&T (formerly Bellsouth), 그러니까 phone company의 aDSL 을 1999년부터 쓰고 있다. 우리 집은 원래부터 cable TV service가 없어서 (의도적으로) cable modem을 쓰는 DOCSIS based Internet은 쓸 수가 없다. 그것은 사실 큰 문제가 아니다. DSL based Internet service가 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몇 년 동안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Cellular mobile phone service 의 사용료가 많이 떨어지고 질도 많이 나아졌다는 사실이다. 쉽게 말하면 이제까지 쓰던 landline based phone service가 없어도 될 지경이 되었다는 뜻이다. 물론 음질과 재해 발생시에 cell phone service는 아직도 문제가 있긴 하지만 예전과는 많이 다르다.
이런 추세와 최근의 나빠진 경제사정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전통적인 전화 서비스를 중단하고 cell phone에 의지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전화회사에서 그것을 잠자코 보고만 있을까? 별로 큰 투자 안 하고 앉아서 돈을 벌고, 세는 곳이 이런 전화회사인 것이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DSL 인터넷과 음성 전화 서비스를 묶어 놓고, 만약 전화를 끊으면 DSL Internet도 끊어 버리는 식이었다. 한마디로 “나쁜 놈“들이었던 것이다.
그런 “개 같은” 관행(business practice)이 2년 전부터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많이 알려져서 많은 사람들이 전화’선’을 “끊어” 버리고 있다. 한마디로 전화서비스가 없어도 DSL 인터넷이 가능해 진 것이다. 이것을 “Naked DSL” 이라고 부른다.다른 말로: dry loop, stand-alone DSL이란 말도 있다. 보통, 전화와 인터넷을 같이 쓰면 한달 사용료가 거의 $80에 가까운데 이것을 “naked DSL” 로 바꾸면 거의 반으로 줄어든다. 참 매력적인 선택인 것이다.이렇게 바꾸기 전에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우선 오래~~~ 쓰던 그 귀에 익은 자기의 전화번호를 잊어버려야 한다. 아주 없어지니까. 그리고 fax를 쓰려면 조금 골치가 아파진다. 물론 Internet fax를 써야 한다.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래도 한 달에 $40이상 save한다면 한번 심각하게 고려해 볼만 하지 않을까?
거북이 마라톤… 어제도 참 날씨가 좋았다. perfect Ten 이라고나 할까. 하기야 요새의 날씨는 매일 매일이 거의 perfect Ten이긴 하지만.. 지독한 지난 여름의 ‘괴로움’을 만회하기라도 하듯이 Mother Nature는 참 자비하시다. 그런 와중에 Buford Highway 한인 타운에서는 아주 조용히 흐뭇한 행사가 열렸다. 이름이 아주 재미있었다. 거북이 마라톤.. 얼마나 이름이 재미있는가? 다른 말로, 빠르게 걷는 마라톤..그것도 5 마일 정도의 거리를 자선의 이름으로.. 얼마나 좋은가?
이곳의 Asian community의 봉사단체, 그것도 “여성의 쉼터”라는 단체를 도와주려는 목적으로 열린 행사다. 순교자 천주교회와 이곳의 제일 큰 개신교회 “한인교회”의 공동주최로 열렸는데, 이것은 의미가 더한 것이다. 구교와 신교가 같이 뭉친 것이니까. 원래 천주교는 교황청의 정책으로 다른 종파의 개신교, 심지어는 비 기독교파까지 포용하는 추세다. 하지만 개신교는 아직도 천주교는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경향이 많이 남아있고 극단적으로 천주교는 ‘사교’라는 망언을 서슴지 않는 한인교회 목사도 있는 지경이다. 어떻게 이런 ‘무식한‘ 목회자가 아직도 있는지 참 한심한 노릇이다.천주교회의 안정호 신부님과 한인교회의 김정호 목사님.. 참 진정한 종교 목회자의 밝은 미래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런 분들이 뭉쳐서 이런 ‘거북이 마라톤’ 을 성사시키신 것이다. 이런 배경을 알고 나니 나도 그곳에서 거북이 처럼 걸어볼걸.. 하는 후회가 생긴다. 이번에는 그 바쁜 연숙이 용감히 참가를 해서 이런 배경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깊은 가을
가장 아름다운 빛깔로 멈추어 있는 가을을 한 잎 두 잎 뽑아내며
저도 고요히 떨고 있는 바람의 손길을 보았어요
생명이 있는 것들은 꼭 한 번 이렇게 아름답게 불타는 날이
있다는 걸 알려 주며 천천히 고로쇠나무 사이를 지나가는
만추의 불꽃을 보았어요
억새의 머릿결에 볼을 부비다 강물로 내려와 몸을 담그고는
무엇이 그리 좋은 지 깔깔댈 때마다 튀어 오르는 햇살의
비늘을 만져 보았어요
알곡을 다 내주고 편안히 서로 몸을 베고 누운 볏짚과
그루터기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향기로운 목소리를 들었어요
가장 많은 것들과 헤어지면서 헤어질 때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살며시 돌아눕는 산의 쿨럭이는 구릿빛 등을 보았어요
어쩌면 이런 가을 날 다시 오지 않으리란 예감에 까치발을 띠며
종종대는 저녁노을의 복숭아빛 볼을 보았어요
깊은 가을,
마애불의 흔적을 좇아 휘어져 내려가다 바위 속으로
스미는 가을 햇살을 따라가며 그대는 어느 산기슭
어느 벼랑에서 또 혼자 깊어가고 있는지요
- 도 종 환 -
늦가을
가을엔 모두들 제 빛깔로 깊어갑니다
가을엔 모두들 제 빛깔로 아름답습니다
지금 푸른 나무들은 겨울 지나 봄 여름 사철 푸르고
가장 짙은 빛깔로 자기 자리 지키고 선 나무들도
모두들 당당한 모습으로 산을 이루며 있습니다
목숨을 풀어 빛을 밝히는 억새풀 있어
들판도 비로소 가을입니다
피고 지고 피고 져도 또다시 태어날 살아야 할 이 땅
이토록 아름다운 강산 차마 이대로 두고 갈 수 없어
갈라진 이대로 둔 채 낙엽 한 장의 모습으로 사라져 갈 순 없어
몸이 타는 늦가을입니다.
- 도 종 환 -
도종환의 가을 시는 어찌 이리 아름다울까? 나의 가슴을 아련하게 가을의 추억과 전설로 물들이는 이 시들은 어쩌면 내가 감당하기 힘든 것들이다. 올해의 가을은 너무도 늦게 도착하고 느릿느릿하게 가고 있지만 그 빛깔들은 정말 한 해를 마음껏 정리라도 하듯 몸부림 치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나의 집에서 나가는 길목에 있는 나무 하나는 밤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거의 야광에 가까운 색깔로 어두움을 밝힌다. 아~~ 전설과 추억의 가을이여.. 한껏 나에게 그 이야기를 남기고 가라. 영원히 사라질 2010년의 한가을이여..
1 TB Hard Disk at $54 (with free shipping) from newegg.com…. 오늘 아침, newegg.com의 promotional email에 완전히 걸려들었다. 10% discount에다 free shipping! 얼마나 달콤한 말인가? Order를 하고 나서 생각을 해 보니 나는 이제까지 1TB 를 넘는 hard disk를 산 적이 없었다. 사실 TB (Tera bytes = 1024 Giga bytes) 란 ‘글자’가 언급되기 시작한 건 몇 년이나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magic number가 된 것은 지금이 아닐까. 거의 $50대로 떨어졌으니..
아직도 기억에, 처음 내가 거금을 들이고 산 hard disk는 1985년의 20 MB (Mega bytes!) 였다. 25년 만에 사실 엄청난 변화였다. 하지만 그때 처음 경험한 hard disk의 편리함과 위력(속도)은 요새는 절대로 느끼지 못하던 그야말로 ‘사치’에 가까웠다. 그 전까지는 8″, 5.25″ 크기의 floppy disk가 전부였다. 일일이 넣었다, 뺐다 해야 했고 그 용량이 정말 장난이었다. 물론 거기에 맞는 software을 썼기에 크게 불편한 것을 못 느꼈다.
한때 hard disk industry의 존폐론 까지 나왔었다. 무한정 용량이 커지지 못할 것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그 말도 일리는 있다. 같은 disk의 표면에 들어가는 data의 양은 제한이 있기 때문이다. 이건 물리적인 제한조건이다. 그런 암울한 예보가 있고 거의 10년이 흘렀다. 하지만 hard disk의 capacity, density는 계속 늘어만 간다. 각종 기술을 다 동원한 결과다. 이것은 data중에 video가 Internet download의 큰 인기 물이 되면서 더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비록 compression를 한다고 해도 video file은 다른 data에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크기니까.
Solid state disk가 다음 주자이건만 아직도 hard disk의 price/performance ratio의 근처에도 못 가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런 때가 올 것이다. Hard disk처럼 rotating motor같은 것이 없어서 훨씬 더 견고한 다른 장점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더 기다려야 한다.
What THE HELL is this? 도대체 이 괴물들이 누구냐? 완전히 Nazi Storm Trooper의 거위새끼 행진 같은 이들이 과연 북녘의 동족의 딸들인가 말이다. 동족을 통일의 명분으로 수백만 이나 살상을 감행하고 그것도 모자라 계속 동족을 장난감 핵무기로 위협을 하고, 자기네들의 “인민”들을 굶겨 죽이고, 마지막에 30살도 안 된 젖먹이 새끼에게 별을 4개씩이나 달아주고.. 끝이 없다, 없어.
이런 마당에 아직도 남녘의 어떤 바보집단들은 주체사상을 그리워 하는가? 이 병신들아.. 제발 좀 꿈에서 깨어나라. 틀린 것은 틀린 것이라고 말할 그 최소한의 용기도 없단 말이냐? 제발 한 나라의 역사를 다시 쓰지 말란 말씀이다!
Condoleezza Rice! 얼마 전에 Atlanta History Center에서 일을 하는 작은 딸 나라니가 전 국무장관을 역임했던 콘돌리자 라이스의 자서전 출판기념 강연회의 입장권 2장을 구해 놓았다고 연락을 해왔다. History Center에서 11월 3일 아침 9시에 시작되는 강연이다. 정식 강연은 아니고 아마도 자기 책의 발표에 맞추어 사인을 해주는 그런 것일 듯하다.
Obama와 더불어 미국 흑인의 power를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한 사람이다. 흑인, 그것도 여자.. 다른 그룹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많이 그 지위가 올라간 그룹이다. 한마디로 어떤 (사회적)그룹이던 간에 각자의 노력의 여하에 따라서 성공의 정도가 비례한다는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하지만 그녀에게는 남달리 그녀를 전적으로 믿고 밀어준 아주 건실한 부모가 뒤에 있었다. 한 가정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아닐까?
조금 아까운 것은 그녀의 정열과 재능이 거의 구 소련연방 (Soviet)에 관한 것 이었다는 사실이다. 소련이 ‘망한’ 후에 그녀는 세계도처의 다른 곳에서 그 재능을 어떻게 쓸 것인가? 이락 침공에 관해서 그녀는 아직도 후회가 없다. 그만큼 그 당시 부시 행정부는 사담 후세인을 무서워하고 증오했던 모양이다.
동창회 가입을 하는데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라고? Hell, NO! 참 망할 놈의 세상이 되었다. 동문 친구의 연락처를 알아보려고 연세대 총 동문회 (http://www.yonsein.net) 를 반갑게 찾아서 회원등록을 하려다 아주 씁쓸한 심정으로 포기하고 말았다. 이게 무슨 개 같은 case란 말인가? 이곳의 social security number같은 것을 왜 동창회에서 물어 봐야 하는가 말이다. 도대체가 이해가 가지를 않는다. 이제는 가입해 준다고 해도 할 마음이 없다.
자비의 모후… 오늘은 드디어 이곳 아틀란타 순교자성당 소속의 “자비의 모후” 프레시디움 (레지오 마리애의 제일 작은 모임의 단위: 로마군단의 명칭에서 유래) 정기회합에 참가를 했다. 이것은 나로서는 참 힘든 일을 한 셈이다. 3년간의 연숙과 같이 집에서 한 묵주기도의 결실일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하는 묵주기도와 이렇게 공동체에서 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를 것 같다.
내가 가입한 “자비의 모후” 에는 현재 모두 자매님들 뿐이다. 그리고 거의 나의 인생선배들이시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모처럼 푸근한 기분을 느꼈다. 누님들을 한꺼번에 많이 만난 기분이라고나 할까. 이분들로부터 나는 신앙적으로 인생의 선배로 많이 배우고 싶다. 3개월의 “대기기간”을 마치면 정식단원이 되는 것을 결정한다고 한다. 이제 나에게 하느님을 보는 또 다른 “길”이 생긴 것이다.
드디어 결정의 순간이 왔다. 어제 연숙에게 돌아오는 주부터 아틀란타 한인성당의 레지오 마리애의 회합에 참석을 하겠다고 “통고”를 하였다. 내가 나의 등을 “칼”로 떠 민 것이다. 이번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간단히 때가 온 것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거의 3년이 넘게 뜸을 들인 결과인가.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그 동안 협조단원이었고 거기서 더 적극적으로 정식단원이 될 마음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상태로 3년이 지났다. 그 동안은 연숙과 같이 거의 매일 밤 묵주기도를 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아주 간단한 사실이지만 결과는 나도 예상을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묵주기도의 묘미를 1%나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무언가 나는 믿게 되었고 좋아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협조단원과 정식단원은 아주 다를 것이다. 우선 매주 한번씩 회합에 나가야 하니까. 우선은 그것이 제일 큰 변화일 것이다. 내가 가입하는 쁘레시디움은 현재 모두 자매님들 뿐이다. 아마도 다른 곳도 별로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선 내가 망설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역시 핑계였다. 자매님들만 있으면 어떻고 형제님들만 있으면 어떨까, 그것이 사실 무슨 문제인가? 3개월의 대기기간이 있다고 한다. 그것이 끝나면 정식으로 단원이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모양이다. 한번 해 보자.. 못 할 것이 무엇이냐.
Googling의 위력… 오늘은 아주 우연히 한국에 있는 먼 친척의 이름으로 googling을 해 보았다. 이건 전혀 우연이었다. 나의 먼 친척 동생(1살차), 유명근을 넣었다.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이름이 나왔다. 동명이인도 많았지만 “서울농대” 까지 넣으니까 완전히 찾아 내었다. 이것이 Google의 위력이다. 인터넷에 노출된 것은 거의 모두 그 monster server에 다 index가 된 것이다. 나의 어머님 쪽의 가계를 찾는 것은 지금 거의 불가능하다. 모두 이북 원산에 사실 것이니까. 아주 일부만 남쪽으로 내려왔다. 아버님 쪽의 족보를 찾는 것과 병행을 해서 어머님 쪽도 알아보려는 것이다.
다행히 어머님의 사촌 언니일가가 서울에 사셨다. 혈육이 거의 없어서 그런대로 서로 가까이 다닌 것이다. 그 이모님의 자녀 중에 유명근을 Google에서 찾은 것이다. 아주 성공적인 경력이 보였다. 삼성그룹 방계회사의 사장을 역임한 것으로 나왔다. 문제는 어떻게 연락처를 찾느냐 하는 것이다.
마찬 가지로 재동국민학교 시절의 친구 정문신도 이곳에 금새 보였다. 그 동안의 의문들이 모조리 풀렸다. 성동중고를 졸업하고 한양대를 나왔다. 금새 성동고 동기회로 연결이 되어서 거의 순식간에 그가 하나모듈의 사장이란 것, 큰 아들이 얼마 전에 결혼을 했다는 것.. 모두 나왔다. 거의 꿈처럼 느껴졌다. 이런 세상이 된 것이다. 한마디로 조금 무서워진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Madison, Wisconsin에서 만난 중앙고 후배 강태중도 이곳에서 찾은 것이다. 교육학 전공이던 그는 비교적 공적인 삶으로 나온다. 신문의 인터뷰기사에서는 웃음을 띤 그의 얼굴도 보인다. 착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그는 성실한 아빠고 남편이었다. 아들 “참”이의 이름이 생각이 난다. 우리 큰딸과 비슷한 나이였으니 혹시나 결혼이라도 한 것이 아닐까? 인연이 되면 알 수도 있겠지. 그는 중앙대학교의 교수로 재직을 하고 있었다. 너무나 반가웠다.
하지만 충격적인 슬픈 소식도 있었다. 중앙고 은사님, 음악선생님, 고1때의 담임 선생님 김대붕 선생님께서 2003년에 타계하신 것을 역시 이곳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자세한 것은 물론 모른다. 최소한 그때쯤 돌아가신 것이다.이럴 수가 있나? 그런 것도 모르고 나는 이곳에서 그 선생님을 추억하는 글도 썼으니.. 내가 한심하기만 하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인터넷의 점진적이고 철저한 확산으로 세상은 많이, 그리고 확실히 바뀌고 있다. 좋건 나쁘건 이제는 피할 수 없는 것들, 어떻게 이것을 유용하게 쓰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더 현명할 듯 하다.
어제는 정말 오랜만에 캐나다에 살고 있는 동창친구 정교성과 통화를 할 수 있었다. 그 전날 “Google Voice@Asterisk PBX” 를 시험하면서 갑자기 교성이 생각이 났다. 물론 그 동안도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나 우리 집의 long distance service를 몇 년 전에 끊어버린 관계로 phone card를 쓰지 않으면 장거리 전화를 하기가 조금 불편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다가 구세주같이 Google Voice가 나타난 것이다. 미국과 캐나다는 무료이고 한국도 대부분이 분당 2센트면 ok인 것이다.(mobile phone은 5c/min) 이것을 계기로 교성이와 더 많이 전화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교성은 이승만 정권 당시 부통령이었고 4.19 학생혁명 이후 5.16 군사혁명 전 까지 국무총리를 역임했던 장면박사의 조카다. 그러니까 교성이 어머님이 장면박사의 여동생인 것이다. 집안은 전통적인 천주교도 집안이었고, 교성이는 분명히 태어날 때 유아영세를 받았을 것으로 생각을 한다. 중앙고 졸업 앨범을 보면 교성이는 천주교 반에 있었다. 그것은 공식적인 학교내의 서클중의 하나였다.
사실 나는 중앙고 재학 당시에 교성이와 개인적인 친구가 아니었다. 하지만 교성이는 나를 몰랐어도 나는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어찌 안 그렇겠는가.. 그는 목소리가 삼국지의 장비같이 천둥벼락과 같았고 통솔력이 뛰어나 중앙 중, 고등학교 6년간 반장을 하는 신기록을 깬 나에겐 참 부러운 존재였다. 왜냐하면 나는 그런 것은 사실 꿈에도 상상을 못하던 ‘업적’ 이었으니까. 그런 그가 그 당시 나와 개인적인 친구가 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대학 3학년 쯤에 다른 친구, 김호룡을 통해서 교성이와 바로 “눈 앞에서” 만나게 된다.
우리들 또래 보다 도 훨씬 믿음직하고 성숙한 그는 참 어울리기 편한 친구가 되었다. 어떨 때는 그가 나의 형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집안, 가문 같은 것을 풍기지 않던 그런 모습도 보기에 참 편하였다. 서울 외대 독문과에 다니던 그는 재학 시 공군에 입대를 해서 나와 처음 만날 당시에 공군에 복무 중이었다. 내가 여자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그는 형같이 나를 도와주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나는 항상 도움을 받기만 했다. 그는 그 70년대 격동기 세대의 일원으로 열심히 정석대로 산 모범적인 친구다. 그런 그가 언젠가 캐나다로 아주 이주를 해 왔다. 그리고 오랫동안 투병을 하던 부인의 타계를 겪었다. 두 딸을 훌륭히 거의 혼자서 키워냈다.
몇 년 전에 거의 우연히 한국에서 나오는 천주교 잡지 “생활성서” 1992년 호를 보다가 어떤 글을 읽었다. 아무래도 누군가를 연상시키는 그런 글이었다. 저자는 “정광숙” 씨.. 글을 읽고 더 심증이 굳어졌다. 바로 교성이의 누나인 것이다. 우리가 처음 만날 당시 그 누나는 미국유학 중이었다. 나는 그때 그 누나가 쓰던 책을 빌려보기도 했다. 그래서 교성이에게 확인을 해 보니 99% 맞는 것 같아서 그 기사의 copy를 보내기로 약속을 했는데 이행을 못하고 서로가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 기사를 보내려 하니 문제가 있었다. 생활성서에서 그 기사를 다시 찾으려고 하니 무려 6년치의 생활성서가 책장에서 먼지를 쓰고 있었다. 6년치면 거의 72권이나 되는 것이다. 한참 씨름을 하다가 결국은 그 기사에 book mark가 붙어 있어서 생각보다 빨리 찾아서 부지런히 scan을 했다. 문제는 거의 컴맹인 그가 이것을 어떻게 쉽게 보게 할까 하는 것이다. 그 동안 한번도 그를 코앞에서 본 적은 없었지만 그를 잊은 적은 한번도 없다. 나의 형같이 나의 식구같이 느낀 친구였으니까. 지금은 새로이 부인을 맞고, coffee shop을 운영하며 잘 살고 있다. 언젠가는 볼 날이 있겠지만 그 전이라도 더 자주 연락을 하면서 지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을 해 본다.
I have 2 Google Voice accounts set up, integrated into my home Asterisk PBX (a PIAF aggregation) which runs on a Linux virtual machine. It provides us free US and Canada calls and very low price International calls (comparable to Skype). Making and receiving call via GV (Google Voice) are nearly transparent thanks to Asterisk integration (it simply means the users can hardly notice they are using GV).
This may not sound significant but with this ‘GV trunk‘ setup, virtually all long distance calls are now free. With that in mind, I cancelled my long distance account saving at least $10 a month. I know the proven reliability of existing long distance carrier from my long experience, but how about this free one? For the test, I have used this GV for the last 6 months almost every day while walking my dog around my neighborhood. The call from my cell phone goes to my local GV number (DID) which in turn transfers the call to my other receive-only DID (another free account). This then directly calls my Asterisk PBX. In spite of its complexity, user hardly notice any delay or interruption. This of course only test voice part of calls, but how about notorious fax calls?
I just assumed analog fax would be very hard to go through this ‘unknown’ water. Until now, I just direct my fax calls to my existing local carrier, PSTN. That’s fine with any local faxing, but how about long distance fax? Never tested before. VoIP trunk is notorious dealing with analog fax, they would say, like ‘fax & pray for the best’. Now, time has come to fax to Korea. Is it possible to use GV trunk for this?
I’ve setup a test to send test fax to HP fax-test number (a toll-free number:8884732963). This HP fax-test number is really convenient for quick fax setup test. Upon receiving any fax, it faxes back to the caller. I used WinFAX software via home PBX GV trunk to HP test number. Would it work? Well, it works without any problem! Now, I can send faxes to anywhere at near-free cost..thanks GV!
지난 10월 3일은 고국의 개천절이었을 것이다. 아니.. 혹시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한국달력을 보니 분명히 개천절이라고 표시가 되어있다. 다만 일요일이라 빨간 숫자인지 아니면 아직도 국경일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국경일이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이다. 그것은 국경일이던 한글날이 평일로 추락을 한 사실을 오래 전에 보았기 때문이다.
그날을 전후로 거의 우연히 10년 전의 KBS 인기 프로그램 “역사스페셜”을 다시 보게 되었다. 나는 약 5년 전 고국의 clubbox라는 download site에서 150 편 모두 download를 해서 DVD disc에 copy를 해두었는데, 다시 보려면 그 많은 disc를 찾아서 DVD drive에 넣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그것을 모조리 home server에 copy를 해서 아무 때나 볼 수 있게 하였다. 요새의 hard disk가 커지고, 싸지고..해서 이제는 video file을 번거롭게 optical disc (like DVD)에 “구울(burn)”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 중에서 “환단고기에 대한 열풍”을 다시 보게 되었고 마침 개천절을 맞은 것이다. 요새는 그 당시의 “열풍”이 어떻게 “진화”가 되었는지 궁금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1992년에 정말 우연히 임승국씨의 “한단고기”란 책을 사게 되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열풍”의 훨씬 이전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책을 보고 적지 않게 놀란 것은 사실이었다.
“환”자를 “한”자로 읽은 것부터 그렇고 또한 그 상고사의 기술자체가 그렇게 자세할 수가 없었다. 흡사 그리스 신화를 읽는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다시 KBS 프로그램을 보게 된 것이다. 왜 그 당시에 그 책이 인기를 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조금씩 거북하게 느껴지던 중국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나는 전문적인 역사학도는 절대로 아니지만 아주 심각한 아마추어 역사 mania 정도는 된다. 작은 딸애가 대학에서 역사전공인 것도 도움이 되었고, 나의 나이도 절대로 도움이 되었다. 나는 확실히 이제 진정한 역사의 의미를 느끼는 것이다.
그런 배경에서 나의 환단고기에 대한 입장은 어떤 웹사이트에서 읽었던 저자가 알려지지 않은 “한단고기의 가치성” 이란 글의 저자 입장과 거의 비슷하다. 간단히 말해서 이 책의 알려진 여러 가지 “결함” 때문에 일괄적으로 무시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중도적인 입장인 것이다. 아주 조심스럽게 연구를 하자는 것이다. 역사도 과학적인 고증 기술의 발달로 어떤 새로운 발굴과 그에 따라서 현재의 정설이 하루 아침에 바뀌는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니까. 완전히 위서라는 것을 증명치도 못하고 그의 반대도 증명을 못하는 마당에 조금 열린 마음으로 연구를 해 봄이 옳지 않을까?
평창이씨…. 몇 년 동안 정리를 못하던 서류들을 정리하던 중에 2004년의 것들을 다시 정리하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나의 본관 평창이씨에 관해서 알아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고 고국의 관계 웹사이트에서 결국 평창이씨의 족보의 일부를 copy할 수 있었다. 그때의 감격은 사실 대단했다. 나는 난생 처음 보는 것이었으니까.
나는 어릴 때부터 평창이씨라는 것을 잘 듣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6.25때 납북이 되신 후에 족보를 거의 잊고 살았다. 그리고 평창이씨가 다른 이씨에 비해서 조금은 희귀하다는 것도 알았다. 그저 강원도 평창에 시조가 있으려니 하는 정도로만 알 정도였다. 아버님은 두 누이동생 (나의 고모님)이 계셨지만 거의 왕래가 없이 살았다. 나도 나의 조상에 거의 관심이 없이 산 셈이었다. 족보를 따지는 시대가 이미 아니었기에 그것이 쉬웠는지도 모른다. 결혼을 할 당시에도 본관, 족보를 따지지 않는 그런 집안과 인연이 되었다.
대학시절, 연호회라는 남녀클럽에서 정말 우연히 평창이씨 여대생(이인자씨, 일명 이재임씨)을 만나게 되었다. 그 당시 별로 많지 않은 종친을 만난 것이다. 그때 우스개 소리로 우리는 인연이 없다.. 결혼을 할 수 없으니까..하면서 웃었다. 그 당시만 해도 동성동본끼리의 결혼은 위법이었다.
우리의 아이들이 태어날 때도 우리의 본관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 이 복합문화, 다민족의 미국에서 너희는 평창이씨의 후손이라도 말을 해 보았자 거의 의미가 없었으니까. 한 마디로 우리 집은, 아니 나는 족보가 없었다. 그러다가 1988년 Madison, Wisconsin에 잠깐 살 때 그곳에서 정말 우연히 평창이씨를 만났다. 이번에도 역시 남자가 아니고 여자였다. 그곳의 유지 격인 지금은 고인이 되신 강정렬 박사님의 부인이 되시는 분이 바로 평창이씨였다. 그 때 비록 나이차이는 많이 있었어도 친척을 만난 듯 서로 너무나 반가웠다. 그때 처음으로 본관, 동성동본이 아주 먼 친척이라는 것을 느낀 것이었다.
그 뒤, 일년 후에 아틀란타로 직장이 옮겨져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인연이 이어져서 강박사님 부인의 남동생이 아틀란타에 사신다고 소개를 해 주셨다. 그래서 이곳 아틀란타에서도 평창이씨 가문을 만나게 되었다. 이주황 선생님.. 맙소사.. 이분도 고인이 되셨다. 그 집에 아들 둘(이만수, 이동수)과 따님이 하나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들이 모두 평창이씨의 후계가 되는 것이다.
그 이후로 또 이런 것들을 잊고 살았다. 세파라는 것이 그런 모양이다. 사실 족보가 밥을 먹여주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절대로 생각은 변하는 모양이다. 시간과 역사라는 것이 얽히고 나도 조금씩 역사 속으로 빨려 들어감을 느끼게 되었고, 나의 뿌리는 과연 어떤 것인가 정말 자연스러운 의문이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결정타는 어머님의 타계였다. 건강이 좋지 않은 누님을 생각하면 정말 나는 혼자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님이 알고 계시는 평창이씨의 지식은 거의 전무했다. 거의 일생을 남편 없이 살아오셔서 더 그랬을 것이다. 이제는 내가 조금은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그러다 2004년에 처음 나의 족보를 볼 기회가 온 것이었다. 아마도 울진이씨종친회라는 곳에서 만든 excel-format file이었을 것이다. 족보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던 나에게 그것은 조금 생소했지만 항열 같은 것은 조금 들어서 곧바로 아버님과 같은 항열 대를 찾았고 동명을 찾게 되었다. 분명히 이정모 라는 성함이 있었다.
파는 익평공파(翼平公派) 였다. 27세(世)의 항열이 바로 “모” 자였다. 그곳에 정모, 준모 라는 형제가 있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나는 우리 아버지에게 형제가 있다는 말을 못 들었기 때문이었다. 고모님은 있었어도. 그래서 동명이인이 아닌가..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잊었다. 그것을 며칠 전에 다시 서류정리 끝에 찾은 것이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나에게 친삼촌이 있었을까.. 그런데 희미한 기억이 되살아 났다. 있었다. 물론 호적엔 없었다. 아버님도 호적에는 사망으로 되어있으니까. 그렇다. 민족분단의 비극이었다. 삼촌은 사실 “월북”을 하신 것이다. 6.25때가 아니었을까. 지식층 중에 많은 사람들이 “이론적인 공산주의”에 빠져서 인생을 망친 사람들이 많았다. 삼촌은 바로 그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반공이 국시였고, 연좌제의 서슬이 퍼~렀던 그 시절에 우리의 삼촌은 서류에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아마도 삼촌이 호적에 있었으면 나는 여권 같은 것은 꿈도 못 꾸었을 것이다. 그런 말씀을 어머님께서 돌아가시기 일년 전쯤 나에게 들려주신 기억이 되살아 난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본 족보의 “정모, 준모” 형제는 99% 나의 아버지와 삼촌일 것이다. 그 위로 그러니까 나의 친할아버지는 “경호” 로 나와있고 그 할아버지에게 “철호”, “창호”, “천호” 라는 형제가 있었다. 경호 할아버지는 4형제 중에 세 번째였다.
족보에 의하면 아버님은 6명의 사촌들이 계셨다. 모두 “모” 자 돌림이고. 그렇다면 그 분들은 그 동안 어디에 사셨을까. 그 후손들은 또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문다. 6명의 사촌들이 계셨으니 분명히 그 후손이 꽤 많을 것 같다. 그렇다면 나도 그렇게 외로운 존재가 아닌 것이다. 그들만 찾을 수 있다면..
현재 평창이씨는 본관의 시조를 고려왕건을 도와 개국공신이 된 이윤장(李潤張) 어른으로 하는 파와 그의 8세손인 이광(李匡) 어른을 시조로 모시는 파로 갈려있는 상태이다. 이윤장 어른이 시조라면 평창이씨는 경주이씨의 분파가 된다. 물론 나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공부를 더 하기 전에는 할 말이 없다. 다만 내가 속한 (내가 본 족보가 맞는다면) 익평공파(翼平公派)의 종친회는 이광(李匡) 어른 을 모시는 파로 되어있었다.
우리가 속한 익평공파는 파의 시조이신 이계남(李季男) 이신데, 연산조때 이조판서였고, 중종반정의 공신으로 익평공의 시호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후대에는 조선최초의 천주교 세례신자인 베드로 이승훈이 계시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승훈 “할아버지”가 더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그 분의 앞 뒤로 4대가 모조리 신앙을 지키다 참수를 당한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몇 번 배교를 선언한 탓에 성인 품열에 못 들어간 사실이다. 정말 안타깝다.
이상이 간략한 최근 며칠 동안의 평창이씨 족보여행의 결과지만 문제는 이제 부터가 아닌가 한다. 어떻게 나의 뿌리를 찾을 것인가….나의 족보를 과연 어떻게 구할 것인가? 그리고 나의 먼 친척들을 어떻게 찾아 볼 것인가? 쉽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노력을 해 볼 것이다.
진짜 가을이 되었다. 그리고 10월 3일 개천절이 왔다. 반갑다. 개천절.. 나를 낳게 해준 나의 어머님의 땅, 대한민국의 원류가 시작되던 4000여 년 전의 고조선을 생각하게 하는 그런 날이다. 나의 뿌리를 다시 생각하게 하기도 하는 날, 나는 거의 매년 이날을 나 나름대로 기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동안 글은 많이 쓴 것 같은데 정작 나의 제일 비밀스러운 일기는 거의 반달이나 공백을 남겼다. 그렇게 바쁘던 때도 아니었는데.. 하지만 대담하게도 나는 그 동안 100% 개방된, 그러니까 이 지구의 누구라도 볼 수 있는 그런 글들을 썼던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런 내가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나의 나이또래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을 듯 하니까.
지난 달 눈에 뜨이게 한 일은 별로 없다. 하지만 며칠 전부터는 일단 나의 ‘모든 짐’을 정리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주로 몇 년 동안 방치해 두었던 책,서류 등등이 대부분이다. 물론 그 중에는 나의 monster ‘vital documents’ 도 포함되어있다. 조금 양이 많지만 일단 시작을 하고 나니 조금은 자신이 생기기도 한다. 책들도 정말 정말 많이 ‘정리해고’ 하기로 했다. 내가 몇 년 동안 안본 책들은 과감히 차고로 일단 ‘퇴출’ 시키기로 했다. 그런 과감한 일들은 사실 몇 년 전에 다름 자질구레한 물건들에 적용시킨 경험이 있다. 주로 picture frame, souvenir같은 것들이었지만. 이층 계단으로 올라가는 곳에 ‘전시’ 되었던 사진틀도 그때 ‘퇴출’ 되었었다. 요새는 사실 다시 한번 그것을 보기 싶기도 하다.
시간이 가면 갈 수록 나의 영역을 줄여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마디로 간단히 살자 라는 것이다. 법정스님의 무소유까지는 안 가더라도 말이다. 그렇게 일단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가라앉고 차분해진다. 그 중에는 필요 없는 책들과 서류들, 그 많은 computer, electronic hardware가 포함이 된다. 이번에 방을 옮기면서 그런대로 많이 정리는 되고 있지만 아직도 끝이 보이지를 않고 있다 하지만 할 것이다.
진짜 가을임을 며칠 동안 진하게 느낀다. 거의 흑과 백처럼 하루아침에 여름에서 가을이 된 것이다. 사실 서서히 기온이 내려가야 나무들도 겨울준비를 하여야 하는데 이렇게 급작스러우면 그들도 적응하기 쉽지 않으리라. 그래서 올해는 단풍도 예년처럼 예쁘지 않으리라는 우려다. 거기다 부족했던 비까지 평균치를 채우려고 한다면 완전히 망치는 것이다.
오늘 아침에 하늘을 보니 옛날 옛적 고국의 국화가 만발할 때 국전이 열리던 가을의 하늘이 생각났다. 바로 그런 때의 날씨인 것이다. 특별히 그때는 남녀가 같이 어울려서 국전엘 갔었다. 1968년 가을이었다 그 당시 잠깐 있었던 연호회라는 조그만 그룹이 단체로 국전엘 갔던 것이다. 하지만 사진이 없다. 그러니까 완전히 나의 머리에만 사진이 조금 남아있는 것이다.
너무도 많은 가을을 보냈지만 그때, 1968년의 가을이 또 가보고 싶은 것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 당시의 인물들.. 연호회 남녀회원들, 어떻게 살았고 지금은 어떠한가. 다행인 것은 그 중의 중심적 인물인 양건주가 서울에 건재하다는 사실이고, 그의 부인이 멤버중의 하나인 황인희씨라는 사실이다. 이것보다 더 든든한 사실은 더 없을 것이다.
나머지 인물들 중에 윤인송, 김태일 등이 다시 보고 싶은 친구들이다. 멤버의 한 사람, 김진환은 슬프게도 너무나 일찍 하늘나라로 갔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 슬프다. 한없이 다정하던 멤버 친구였다. 사실은 남자들 보다 도 여자회원들이 더 궁금하다. 이선화씨는 아직도 Iowa City에 살고 있는지 궁금하고, 신언경씨, 이인자(aka 이재임)씨, 조인선씨.. 다 잘들 살고 있을까? 어쩌면 벌써 손주들을 보았을지도 모르고 그러면 다들 명실공히 “할머니”들이 되었을 것이다. 가을이 이렇게 오는 것처럼 너무나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일 것이다.
그때 우리들은 pop/rock등에 많이도 심취해 있었다. 비록 김신조의 무장공비가 그 해 내 생일날 박정희 “목을 따러” 내려와서 학원은 다시 “교련” 이라는 것이 자유를 얽매이기 시작하려던 그런 시절이었지만 젊음이란 것이 모든 것을 자유스럽게 해 주었다. 그 해 가을에는 국전관람과 더불어 그 밝던 가을하늘을 만끽하며 우리 그룹의 회지도 만들고, 박창희네 집에 모여서 pop/rock 음악감상회도 가졌다. 처음에는 연세대 뒷산에 있던 청송대에서 하려고 했는데 음악감상 장비를 그곳으로 옮기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를 않아서 그냥 창희네 집에서 한 것이다.
그리고 같은 가을에 우리들은 서울 중앙방송(테레비)을 견학 가기도 했다. 나의 죽마고우 유지호가 잘 알던 아저씨가 중앙방송의 엔지니어로 일을 해서 그분이 주선을 해 준 것이었다. 덕분에 난생 처음으로 TV 방송국의 내부를 볼 수 있었다. 그때 본 것이 Pearl Sisters(펄 시스터즈)가 신나게 soul music에 맞추어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 것과, 김용기 논설위원이 시사논설을 하며 녹화를 하던 모습, 바로 앞에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더 관심이 있었던 것은 어떻게 그 방송 TV program이 전파로 각 가정의 TV로 전파가 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건물의 옥상에 올라가서 의문이 풀렸다. 거대한 dish antenna가 남산을 향해 서 있었던 것이었다. 남산의 높은 tower에서 받아서 서울 전역으로 방송을 하는 것이었다. 그 dish antenna앞쪽으로는 접근을 못하게 되어있었는데 radiated power가 위험 수준을 넘기 때문이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피부에 화상을 입을 수도 있다고 했다.
1968년의 그렇게 밝고, 아름답고, 멋있던 가을은 이렇게 많은 추억을 남기며 나의 뇌리에 남아있다. 비록 그 해 말과 후년부터 남자들이 군대로 속속 가면서 우리 그룹은 자연스럽게 해산이 되었지만 그것 역시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너무나 짧았던 시간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아주 오랜 동안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밝고, 멋있던 가을을 남겼으니까.
Turn Around Look at Me – The Vogues 1968
The Lettermen과 비슷한 스타일의 남성 화음은 정말 매혹적이었다. 특히 이 노래는 더욱 그랬다. 특히 이곡과 연관되어 생각나는 것이 라디오 프로그램 “나건석의 영어회화” 였다. 한때 이곡의 가사를 주제로 공부를 했던 것이다.
Honey – Bobby Goldsboro 1968
Bobby Goldsboro의 노래는 거의 이곡과 같은 느낌이다. 특히 이곡은 서정적 노래로 일관을 해온 그의 대표적인 것이다. The Beatles의 Hey Jude에 이어 1968년 제2위의 인기곡이기도 했다.
Love is Blue – Paul Mauriat & his Orchestra 1968
이 연주곡은 France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미국에서도 1968년 제 3위로 많이 팔린 곡이었다. Paul Mauriat의 연주곡들은 대부분 티없이 맑은 느낌을 준다.
9월도 30일.. 9월의 마지막 날이다. 완전히 여름이었던 9월도 며칠 전부터 완전한 가을로 돌변을 하였다. 모든 것이 요새는 이렇게 extreme, extreme 이다. 올해는 매년 9월 중순 가족행사로 나서던 apple orchard drive 도 완전히 잊어버렸다. 한여름 같은 날씨에 사과 과수원은 생각만 해도 뜨겁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사과도 다 수확이 되었을 것이고 한마디로 김이 다 샌 것이다. 이곳에서 약 한 시간 반 정도 북쪽으로 drive를 하면 Ellijay라는 apple town이 나온다. 그곳은 완전히 사과 과수원이 밀집해 있는 산자락이고 경치도 아주 좋다. 이곳에 이사온 이후 한해도 빠짐 없이 그곳을 가곤 했는데 올해는 정말 예외가 되었다.
오늘 뜻밖의 손님이 나의 blog에 찾아왔다. 오랜 전에 쓴 나의 blog entry: “1980년대 Ohio State의 중앙동창들” 에 중앙고 67회 후배 채인돈의 아들인 채경덕군이 comment를 한 것이었다. 인물검색을 하다가 실린 사진에서 자기나이또래의 아빠를 찾았다고, 감회가 깊었다고 했다. 그 사진은 1987년경 콜럼버스의 교민회주최 소프트 볼 대회에 중앙고 동창 팀에서 참가를 하고, 첫 회전에서 탈락을 한 후에 찍은 사진이었다. 얼굴들이 모두 비록 웃기는 했지만 맥이 빠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완전히 한 세대가 흐른 것을 느낀다. 채인돈 후배는 비록 나의 새까만 후배였지만 같은 천주교 신자였고, 전공도 비슷하고 (EE, CIS), 한 때는 Ohio State campus중심의 PC Users Group에서 같이 공부를 하기도 했다. 항상 웃는 얼굴이고 wife는 미스 코리아처럼 예쁘게 생겼었다. 집안이 상당한 power class인 것에 비하면 채인돈 후배는 상당히 검소하고 겸손했다. 마지막으로 연락이 되었을 때 그는 한국에서 computer 관련 venture project에 관련이 되어서 아주 바쁜 것 같았다. 경덕이 밑으로 동생을 두었는지도 소식이 끊겨서 잘 모르고 지낸다.
미국의 원로배우 Tony Curtis가 오늘 세상을 떠났다. 85세였으니까 사실 평균수명은 채웠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오랫동안 알고 있던 유명인들이 하나 하나씩 세상을 떠나면 느끼는 것은 역시 나이가 들면 들수록 외롭게 느껴지리라는 사실이다. 나에게 이제는 이런 것들이 남의 문제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유괘하게 잘생긴 그는 역시 영화 The Vikings에서의 연기가 제일 기억에 남고 또 Spartacus도 기억에 생생하다. 둘 다 Kirk Douglas와 공연을 했는데 그렇게 조화가 잘 맞을 수가 없었다. 그가 이름과는 달리 항가리계의 유태인(Hungarian Jew)임을 오늘에서야 알았다. Kirk Douglas도 역시 유태인이다. 이 글을 쓰다 보니 다시 바이킹을 보고 싶어진다. 이 영화에서는 wife인 Janet Leigh와 같이 나온다. 이미 download한 것이 있어서 아무 때나 볼 수 있으니 참 편한 세상이 되었다.
오늘은 “구이 팔”, 9.28, 9/28/1950: 서울수복 60주년 기념일이다. 60년의 강산이 변했고 “역사수정주의자” 들이 판을 치는 고국은 아마도 대부분이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모를 것이다. 예외는 물론 우리같이 조금은 알고, 기억하는 세대들일 것이다. Mafia 집단으로 변한 김씨 일당들은 “미제의 앞잡이”들이 퍼다 준 밥으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이제는 그것도 모자라 김씨 세습을 강행하려 한다고.. 참, 이건 완전히 희극중의 희극이다.
LA area, 그러니까 캘리포니아, 로스엔젤레스 지역이다. 기온이 120도가, 물론 화씨로, 넘었다고 한다. 올해는 참 기후에 관한 얘기가 끝이 없더니 이것도 한 몫을 한다. 올해는 동부,남부가 완전히 더위로 거의 “익어가는” 과정을 겪었다. Weather Channel 에서는 올해 “최악의 여름” 상은 Washington DC로 정했다. 여러 가지 최고 기록이 있었겠지만 최고,최장의 무더위와 더불어 폭풍 같은 것도 곁들어서 그런 “불명예’를 차지한 모양이다. 하지만 내가 사는 이지역도 내 기억에 정말 오랫동안 “쉬지 않고” 더웠다. 하지만 오늘은 6월 이후 처음으로 “긴팔, 긴바지” 에다 양말 까지 신고 Tobey와 집 주변을 산책을 했다. 그러니까 가을이 마침내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이제부터는 급속도로 단풍이 들 것이고, 첫 얼음이 얼고, 시베리아의 바람이 부는 날이 올 것이다. 특히 을씨년스러운 가을비가 기다려진다.
아주 오랜만에 서울의 처남형님(연숙의 큰오빠)과 email로 연락이 되었다. 2002년에 이곳에서 만나고 그 후에도 조금씩 연락은 하며 살았지만 언젠가부터 거의 연락두절로 살았다. 이건 100% 우리부부의 책임이다. 마음만 먹으면 거의 “공짜”로 연락을 할 수 있었는데.. Skype은 물론이고 Google Voice같은 것을 쓰면 일반전화로도 분당 2 cent 정도로 전화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 동안 조카들은 무럭무럭 장성을 해서 둘 다 결혼을 하고 이제는 손주들까지.. 형님말씀대로,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은 오래 전 전화요금이 비싸던 때의 말이었던 것 있음을 실감한다.
To be or not to be, that’s the question: 연숙이 이곳의 한인천주교회에서 활동하는 것 중에 레지오(마리애:Legio Marie, 마리아의 군단)가 있다. 성모님을 통한 봉사,기도단체다. 우리가 오랜 전에 영세를 받은 후에 이 단체의 이름이 제일 먼저 들어왔고, 다음이 꾸르실료..하는 “해괴” 한 이름이었다. 오랜 기간 그런 단체에 무관심으로 지냈다. 하지만 현재 연숙은 이것 두 신심단체에서 활동을 한다. 그렇게 된 것이 이제는 몇 년이 되어서 나에게도 그 단체들의 활동에 조금 익숙해진 것이다. 이것이 이제 나에게도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결국은 “결정”을 할 단계가 되었다. 나는 무언가 “큰” 변화가 필요함을 느낀다. 그것을 도와주는 것이 아마도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할 것이냐, 말 것이냐.. 그것이 문제다. 일단 가입을 하게 되면 3개월의 “대기 기간”이 주어진다. 그 기간이 무사히 끝나면 정식으로 단원이 되는 것이다.
오랜만에 google earth에 몸을 싣고 “무전여행”을 해 보았다. 우선 우리 집 주변을 선회하며 그 동안 얼마나 변했나 보았다. 내가 만든 green roof shed와 Tobey fence가 뚜렷이 보이고 정문 앞으로 진달래가 만발한 것이 보인다. 그러니까 아마도 2009년 아니면 올해 봄의 모습이다. 그리고 parking garage 앞에는 나라니가 타는 Hyundai Elantra가 보인다. 그런데 그 차의 위치가 조금 이상하다. 이것은 나라니가 이사를 나간 후에 집에 잠깐 들렸을 때의 위치인 듯하다. 그러면 이것은 작년이 아니고 올해인 듯하다. 한마디로 거의 최근의 항공사진인 것이다. 조금만 더 가까이 찍었으면 roof에 무슨 damage같은 것도 보일 지경이다. 참 좋은 건지, 으시시한 건지.. 그런 세상이 되어간다. 이제는 personal privacy란 말은 의미가 없어지는 것일까.
내친김에 mouse cursor를 Columbus, Ohio로 흘려보았다. 너무나 오랜만이라 많이 잊었다. 목적지는 Ohio State University campus주변이다. 처음 Columbus downtown에서 출발을 하여 I-71를 따라서 올라갔다. 그저 Ohio Stadium만 찾으면 되니까.. 역시 왼쪽 편으로 말굽모양의 football stadium이 보인다. 처음에는campus 바른 쪽의 High Street를 찾았다. Long’s Bookstore와 McDonalds를 찾는다. 그리고.. 잠깐 살았던 “rooming house” Frambes Avenue, Harrison House, Jones Tower.. 제일 마지막에 나의 Department (of Electrical Engineering)가 있던 Dreese Lab, Caldwell Lab을 찾았다. 그런 건물들이 쉽게 변할 리는 없다. 100% virtual bird’s eye tour였지만 그와 함께 time machine을 타고 30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오늘은 몇 개월 만에 처음으로 하루 종일 에어컨이 한번도 들어오지 않은 그런 날이 되었다. 결국은 가을이 온 것이었다. 기온도 거의 화씨 15도나 떨어지고, 하루 종일 가을비가 주룩주룩 내린 그런 날이었다. 1970 년대의 가수 최헌이 부른 “가을비 우산 속에” 를 생각하고, 부르고 싶은 그런 날이었다. 지나간 해들을 기억해 보면 아마도 2주 내에 central heating이 가동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본격적으로 “여름의 것”들을 치워야 하고 winterizing을 하여야 한다. 아~~ 세월의 흐름이여~~
오늘은 매월마다 돌아오는 이곳 한국천주교회의 “마리에타 2구역” 구역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돌아가며 각 구역 신자들의 가정에서 저녁을 같이 먹으며 친교를 하는 날인 것이다. 우리 부부는 비록 주일미사를 한국천주교회에서 하지는 않지만 이 구역모임에는 거의 정기적으로 참여를 하고 있다. 참여를 한지 아마도 벌써 5년 정도 되지 않았을까? 아주 큰 그룹이 아니지만 활동적인 비교적 착실한 구역에 속한다. 성서공부를 한지도 꽤 오래되었다. 나 개인으로 보면 이 구역모임에 나가면서 더 신앙적으로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최근 몇 번을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이런 이유, 저런 이유로 못나가게 되었지만, 역시 사람이 모인 곳이라 전혀 문제가 없다고 볼 수는 없다. “사랑”의 마음으로 극복을 해야겠지만 항상 쉬운 것은 아니다.
이제 드디어 나의 home office가 최소한 제 자리들을 잡았다. 역시 main desk는 다른 것들과 평행으로 놓아야 심리적으로 편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정말 해야 할 것은 다 끝나지 않았다. 서류와 computer 같은 hardware part를 정리하는 일이 남았다. 사실 이것이 골치 아픈 일이라, 계속 미루고 있지만 이제는 핑계가 없다. 하지만 일단 시작을 하면 생각보다는 쉬울지도 모른다. 모든 일들이 대개 이런 식이니까..
6월초 나의 blog entry중에 “6월 달의 한여름” 란 것이 있었다. 보통 때에 비해서 몇 주일이나 빨리 온 무더위에 관한 것이었다. 아마도 거의 3주간 계속된 더위였다. 그래서 아하.. 올 여름의 무더위는 다 갔구나..하고 생각을 했는데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온통 최고기록을 경신한 올 여름의 무더위였다. 그런데 9월의 공식적인 가을, 추분이 시작된 지금도 사실 한여름이다. 올해의 기후 pattern은 하나로 요약할 수 있다. 한번 기상 system이 하늘에 자리를 잡으면 여간 해서는 “요지부동” 움직이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보통은 며칠마다 변화무쌍 변화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도 조금은 “으시시”한 앞으로의 기후가 아닐까. 혹시 이것도 global warming의 한 경고가 아닐까 생각하니 조금은 우울해진다. 하지만 모래부터는 완전한 가을날씨가 온다고 한다. 기온이 거의 15F나 곤두박질을 친다고 하니까. 다시 가을/겨울의 준비를 할 때가 오는 것인가…
고국의 중앙고 동창 친구 유정원, 양건주가 email 회신을 보내왔다. 45년 만에 연락이 된 동창 유정원, 조금은 꿈같은 기분으로 이 친구와의 “만남” 을 음미해보곤 한다. 어머님을 얼마 전에 보내드리고 처음 맞는 추석은 어떠했을까? 이렇게 email 로 나마 “대화” 가 가능하니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 건주는 항상 자상하게 자기의 근황을 알려준다. 이 친구, 그런 것은 정말 변하지 않았다. 성실하고, 자상한 것.. 얼마 전에 회사생활을 끝냈다고 들었는데 요새는 어떻게 지내는가? 오늘 처음 안 사실은, 건주가 6남매의 맏이였다는 것이다. 그것도 정확히 3남3녀 중의.. 아버님이 3대 독자라고 하시니까 조금은 이해가 간다. 그래도 우리 때의 기준으로 보아도 조금 많은 식구였다. 그 많은 식구 다 뒷바라지 하셨으리라 생각하니 참 대단하시다. 이렇게 소가족 추세인 세상에서 그들은 얼마나 외롭지 않을까.. 참 부럽다. 정말 부럽다. 역시 식구는 행복이다. 그 말이 맞다.
지난 7월에 우리 집 dining room을 laminate floor 로 바꾸는 일이 있었다. 난생 처음 해본 것이라 고생도 했고 시간도 걸렸지만 그런대로 잘 되었다. 덥고, 힘도 들고, 재료도 떨어지고 이런 저런 핑계로 일을 쉬어버렸다. 원래 계획은 living room, hall way, kitchen을 포함한 일층 전체를 다 laminate floor로 바꿀 예정이었다. 문제는 flooring을 아무리 간단한 것으로 바꾸려고 해도 마루 밑바닥의 상태가 좋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subfloor (마루밑의 마루)의 상태를 말한다. 역시 이곳 저곳 문제가 있었는데, 어떤 곳은 마루 밑이 썩은 곳도 있었고, 어떤 곳은 오래되어서 밑으로 축 쳐진 곳도 있었다. 그런 것을 그 동안 다 손을 보았던 것이다. 주로 joist re-framing과 additional support같은 것을 할 수밖에 없었다. 거의 $$은 들지 않았지만 나의 muscle과 power tool들이 절대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IKEA Tundra라는 비교적 가격이 저렴한 laminate floor 15 package를 이미 구입해 놓아서 곧바로 living room과 hallway를 시작하려고 한다. Good luck to me on this job!
re-framed damaged floor joists
정문 현관의 마루밑은 아주 오래전에 termite damage가 있었다. 별로 더 이상 진행되는 피해가 없어서 잊고 살다가 이번에 마루를 갈게 되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joist 몇개가 완전히 삮아 있었다.
3 new posts under floor
그 바로 밑에다 아주 튼튼한 기둥 3개를 설치하였다. 이정도면 현관에 heavyweight 급의 장정들이 여러명 서 있어도 끄떡이 없을 듯하다.
오늘 뉴스를 잠깐 보니오래 전의 미국가수 Eddie Fisher가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솔직히 말해서 하도 오래 전의 유명인이라서 나이가 최소한 90세 이상은 되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겨우” 82세? 알고 보니 우리가 알던 때의 그의 나이가 아주 아주 젊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흔히들 말하는 “십대의 우상 (teenage idol) 이었던 것이다. 노래도 물론 잘 불렀겠지만 대부분 그가 더 유명해진 이유는 그 당시 최정상 급의 배우,가수들과 이혼과 결혼을 줄기차게 감행했던 사실이다. 내가 아는 사람만 해도 그 유명한 Elizabeth Taylor, Debbie Reynolds, Connie Stevens 등등이 있다. 이 남자, 어떤 마력과 매력이 있길래 그 유명한 여자들과 그렇게 결혼과 이혼을 할 수 있었을까? 나중에 그의 인터뷰를 보면 역시 그는 “예쁜 여자를 보면 참을 수가 없다” 고 말할 정도로 그는 유명하고 예쁜 여자를 좋아했던 것 같다 (그렇지 않은 남자가 이세상에 어디에 있을까?) 그의 hit song중에는 역시 많이 들었던 1954년의 Oh My Papa를 빼 놓을 수 없다.
어제 오랜만에 죽마고우 안명성이 추석안부의 너무나 짧게 쓴 나의 email에 대한 회신을 보내왔다. 이 친구는 내가 이름만 들어도 이제는 조금 찡~~한 느낌을 주는 그런 “진짜” 죽마고우다. 자기가 만든 섬유관련사업체를 오랫동안 열심히 경영을 해 오더니 이제는 아주 retire를 한 모양이다. 자기는 백수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백수치고는 그 이전보다 더 활기차고 즐거운 느낌.. 부럽다, 명성아!
“죽마고우”란 말의 어원을 내가 잘 기억은 못하지만 한자를 생각해 보면, 대나무로 만든 말을 같이 타고 놀던 오랜 친구.. 같은 것이 아닐까? 우리는 비록 그런 말을 타고 놀지는 않았어도 “고우”란 말은 맞는다. 정말 오래되었으니까. 원서동시절을 온통 같이 보낸 친구.. 국민학교 3~4학년 때부터 알게 된 친구.. 자주 보았다가, 오랫동안 못 보았다가 를 반복한 인생, 결국은 나의 미국 행으로 인생의 황금기 우정을 끝없이 미루어야 했던 친구.. 이제 우리에게 그 우정의 공백을 채워 줄 시간은 그렇게 많은 것 같지 않다. 그래서 이런 헤어진 죽마고우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련하게, 찡~~ 해 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간 백두 대간 종주를 마치고, 영월서부터 춘천까지 가는 영춘 지맥을 끝내고, 금강 북쪽 논산북쪽에서 금강 하구까지 가는 금북 정맥을 마치고, 금강 남쪽을 달리는 금남 정맥을 하고 있다. 앞으로 얼마나 더 할지는 모르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천천히 하려고 한다.
명성이의 이 말이 나를 또 역사,지리학도로 만든다. 백두 대간은 지리적인 명칭이겠지만 역시 한민족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영월부터 춘천까지의 “영춘 지맥”, 논산에서 금강하구까지의 “금북 정맥”, 금강 남쪽의 “금남 정맥”.. 와~~ 이런 말은 솔직히 처음 들어보았다. 하지만 그 곳을 달리는 듯한 한반도 산맥의 “정기”가 화악~~하며 나를 덮는다.
이곳에도 산이 많이 있다. 하지만 고국의 산과 같을 수는 없다. 백두 대간의 “줄기”를 따진다면 이곳의 Appalachian Trail과 그 의미가 비슷하지 않을까? 이 Trail은 미국에서 제일 긴 것으로 아팔라치아 산맥의 시작과 끝을 종주하는 길고도 긴 등산로다. 남쪽의 시작은 이곳 조지아 주에서 시작이 되어 북쪽은 뉴욕을 훨씬 지나서 Maine 주에서 끝이 난다.
명성이와 나는 사실 학생시절 산에 얽힌 이야기기 꽤 많은 편이다. 둘 다 그 당시 산을 좋아했으니까. 하기야 그 당시 일반적인 수준으로 보아서 산 만큼 “값 싸게” 즐길 수 있는 곳도 드물었다. 군용장비와 최소한의 식량, 그리고 시간만 있으면 갈 수 있는 곳이 국토의 거의 전부를 차지한 주변의 산들이었으니까. 명성이와 같이 “등산”을 처음 한 것이 국민학교시절 “남산”이었다. 또 다른 죽마고우 “동만이”와 셋이서 서울 시내를 가로질러 남산을 보면서 그대로 걸어간 것이다. 물론 가는 길을 알 턱이 없었다. 하지만 그 산은 계속 우리에게 보였기 때문에 헤맬 필요가 없었다. 그때 동만이의 괴성은 “오~~ 감격!” 이란 말이었다. 우리가 수시로 오르던 삼청동 뒷산에서 본 서울의 모습과 남산에서 본 것은 물론 달랐다. 뿐만 아니라 남쪽으로는 한강과 관악산이 보였기 때문이다.
다음에 기억이 나는 때는 고1이 끝날 때 쯤, 진짜 등산이었다. 나의 오래된 가정교사였던 김용기 형이 나와 명성이 둘을 데리고 아주 추운 겨울에 백운대로 간 것이었다. 그 때 등산의 어려움을 처음 체험 하였다. 숨이 목까지 차는 괴로움을 겪은 것이다. 하지만 첫 진짜 산의 위용과 느낌을 두고 두고 느끼게 한 산행이었다. 그 때도 명성이가 산을 좋아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우리는 (최소한 나는) 처음으로 야외에서 밥을 해 먹는 경험을 하였다. 내려 올 때는 올라간 길의 반대쪽으로 내려와서 더 첫 등산의 추억을 멋있게 장식하였다.
제일 추억에 남는 명성이와 의 등산은 역시 1968년 여름방학 때 내가 대학 2학년 때 둘이서 갔던 설악산 등산이었다. 둘 다 처음 가는 설악산이었고 이렇게 먼 곳을 둘이서 간 것도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 둘이서 간 등산의 마지막도 되었다. 그때는 비교적 초보적인 수준이어서 내설악이 아니고 외설악으로 갔다. 이것이 추억에 남는 이유는 그곳에서 내가 사고로 화상을 입고 일찍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때 혼자서 남게 된 명성이는 꽤 고생을 했다고 들었다. 물론 발에 심하게 화상을 입은 내가 고생은 더 했겠지만 나중에 생각을 하니 명성이도 꽤 고생을 한 것을 알고 내가 너무나 무심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이후로 나는 어쩐지 명성이와 어울릴 기회가 별로 없었다. 서로 다른 대학을 다니고 연락도 별로 안 되고 거의 잊고 살게 되었다. 무언가 그때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달랐나.. 기억이 잘 나지를 않는다. 그는 그의 대학친구들과 어울리고 나는 나대로 나의 그룹과 어울리는 그런 식이었다. 그것이 지금 생각해도 조금 아쉬운 것이다. 더 죽마고우의 정을 살릴 수도 있었을 터인데.. 하지만 내가 결혼을 할 때 그는 옛정을 발휘해서 결혼식 사회를 보아주었다. 그리고 어릴 때 별로 보이지 않던 기업가적 자질을 발휘해서 멋있게 자기의 사업을 키워나갔고 모범적인 가정을 이끌며 현재까지 왔다. 비록 오랫동안 떨어져 살아는 왔지만 그게 그렇게 느껴지지를 않는 것은 역시 “죽마고우” 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 본다. 이 나이에 백두 대간을 종주하는 명성아… (한마디로)부럽다!
나도 이제 본격적인 돋보기 시대로 접어들었다. 일년 도 넘게 아주 조잡한 돋보기 안경 하나를 가지고 곡예를 하다시피 살았다. 그것들도 내에게 맞추어서 산 안경이 아니고 연숙의 것을 빌리기도 하고 어떤 것은 심지어 hardware store에서 산 것도 있었다. 그저 가까운 곳이 보이면 쓰고 그렇지 않으면 벗고.. 마음 한편에서는 신경질과 함께, 나는 절대로 이런 것들이 필요 없을 것이라고 나를 위로하면서..
그것이 이제는 불편한 정도를 넘어서게 되었다. 성당에서 성가의 가사가 보이지를 않는 것이다. 하지만 절대로 항상 쓰고 살기는 싫으니까, 그것을 가지고 다녀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를 않다. 주머니에 넣었다가 잘못하면 잃어버리거나 망가트릴 가능성이 많으니까. 그래서 어제는 용단을 내려서 reading glass 3 pack 이란 것을 Costco에서 $18에 샀다. 이제는 이곳 저곳에 두고 다녀도 문제가 없게 되었다. 아.. 나이 먹음의 설움이여..
중앙고 57회 동기회 총무 신동훈이 또 동기회 소식을 전해왔다. 3/4분기 모임의 소식과 함께 놀랍게도 교우 차정호의 개인 사진전 소식이었다. 고국의 교우들은 다들 그 동안 알고 있었겠지만 나는 전혀 모르는 사실이..차정호가 사진전을 할 정도의 사진예술가란 것을.. 미안하구나, 차정호. 너무나 모르고 살았다. 차정호는 중앙중학교 1학년 때, 중앙고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너무나 친숙한 이름과 얼굴이다. 중앙고 졸업 후에 한번도 그와 개인적으로 연락이 된 적이 없어서 어느 대학엘 간 것도 모를 정도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교우친구 목창수가 57회 동기회 회장을 할 당시 그의 이름이 총무로 나와있었다. 너무나 반가웠다. 그가 건강히 살아 있었구나. 그런 그가 이번에는 개인 사진전이라니 너무 축하할 일이 아닌가? 웹사이트를 통해서라도 한번 어떤 것인가 볼 수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