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 65년 전.. 눈 깜짝할 사이에 인간들이 ‘증발, 소각’ 되고 날라가 버렸다. 현재의 기준으로는 거의 장난감같이 작은 것이었지만 그 심리적 효과는 아직까지도 다른 핵무기 사용을 저지해 오고 있다. 불쌍한 것은 아무 죄 없이 증발해 버린 ‘재수없이 그곳에 살던’ 민간인 들이다. 물론 그 당시 군사시설에 관련된 민간인도 많았지만 그것이 그들의 자발적인 선택이었던가?
며칠 전에 오랫동안 우리와 같이 산 어항속의 물고기가 죽었다. 두 마리 중의 한 마리였다. 나라니가 학교기숙사에서 기르던 것이니까 최소한 3년은 되었을 것이다. 다른 것들은 훨씬 오래 전에 사라졌는데 이 두 마리는 나와 같이 몇 년을 산 것이다. 그래서 더 정이 갔다. 나머지 한 마리를 가만히 보니 그 녀석도 조금 움직임이 느려졌다. 혹시 이 녀석도 곧 따라서? 새로니가 부리나케 같은 종류의 것으로 팔팔한 2마리를 사 왔다. 아.. 그 젊음이여.. 젊은이 둘과 할아버지를 보는 것 같다. 이것은 얼마나 ‘자연스러운’ 것인가..태어나고, 사라지고.. 젊음이 늙음으로..그게 자연과 신의 섭리일 것이다.
연숙의 대학시절 buddy가이화여대 총장으로 선출이 되었다. 아.. 세월이여.. 어느새 그런 나이들이 되었는가. 연숙은 총학생회에 단과대학회장이고 그 김선욱 총장 선출자는 총 학생 회장이었다고 한다. 우리 결혼식에도 왔었다. 나도 그 당시 조금은 기억을 하고 있다. 결혼식에 온 그녀 친구들 중에 한 팀이 총학생회 임원그룹이라고 들었던 기억, 와~~ 그것이 1980년.. 이었다.
미국에서 태어난 한인 2세들.. 이질적인 두 문화의 틈바구니에서 필요이상의 고민 거리를 짊어지고 stress받는 어깨들을 보며 미안하고 불쌍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솔직히 우리자식들을 포함해서 ‘마음에 드는’ 녀석들을 이제까지 살면서 거의 본 기억이 없다. 아마도 대부분 공개적으로 말은 못하지만 가슴 속 깊이 나의 말에 동감을 할 것이다. 최소한 우리세대는 그렇다는 말이다. 반대로 그들도 마찬가지로 마음에 드는 부모를 많이 못 보았을 듯 하다. 구체적으로 열거를 하기 시작하면 뜨거운 화제가 될 가능성이 많다. 언젠가는..
러시아의 heat wave 를 보면서 조금 우려가 생긴다. 다른 곳이 더운 것은 조금 이해를 할 수 있는데, 그곳은.. 러시아.. 이건 조금 생각을 하게 된다. 지독하게 stupid 한 conspiracy, contrarian buffs들과 그와 버금가는 republican gang들, 조금은 과학을 정치에서 떼어놓고 생각하는 최소한의 양심이 없는가. 너희들의 다음 세대를 위해서도 더 그렇다. 그렇게 pro-life라면 더 그렇게 노력을 할 이유가 있고 장기적으로도 너희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또 한 명의 U.S. supreme justice가 탄생을 했다. ‘역시’ 또, 여자다. 크게 놀랄 것도 없다. 이제 여성의 관심을 대변할 최고의 법관이 한 명 더 늘어난 것이다. 우리 식구들은 기뻐할 것이다. 모두 여자들이니까. 나는 어떠한가. 이제는 거의 중립적인 입장이 되어버렸다. 언젠가는 아마도 여자의 세상이 오지 않을까..
A Day in the life – The Beatles
대학시절 한때 Beatles의 이 노래.. 참 많이도 들었다. 꼭 좋아했었다고 말을 할 수는 없는 곡이었다. 그 당시의 짧은 영어실력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워서 그랬을까? 그 보다는 이 노래가사의 배경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문제랴? 그 당시에는 가사보다는 ‘겉 멋’이 더 중요하니까.. 이 곡에서 John Lennon특유의 목소리를 맛볼 수 있었다.
미치 밀러.. 어렸을 적에 많이도 들었던 이름이다. 그 당시 그의 합창단 (Mitch Miller & Gang)이 부른 영화 주제곡이 있었다. 아마도 중학교 3학년 때(1962년) 쯤이었을까. 그 유명한 “콰이강의 다리” 라는 영화의 주제곡 콰이강의 행진, The River Kwai March. 가사가 있는 노래가 아니고 완전히 남자들의 휘파람 합창이었다. 그들이 바로 Mitch Miller 합창단이었다.
그 당시 그의 합창곡들은 거의 유행가처럼 불려졌었다. 그들의 영향이었을까.. 곧 이어서 한국에도 Sing Along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아마도 전석환씨가 이끌던 Sing Along Y (YMCA)도 그들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을까 생각을 한다. 한결같이 노래들은 밝고, 복고적이고, 심지어 가정적이었다. 한마디로 나중에 classic으로 남을 만한 그런 곡들이었다.
99세로 세상을 떠난 Mitch Miller, 많은 사람들에게 추억 어린 주옥 같은 미국적인 노래를 남겨 주었다. 그 많은 곡 중에서 아직도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몇 곡만 고르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고르라면 아마도 다음이 아닐까. RIP.. Mr. Miller….
콰이강의 행진, 영화 “콰이강의 다리” 주제곡영화속의 거의 비참한 행진과는 달리 아주 경쾌한 곡이다. 그 당시 아주 유행을 한 멜러디, 내가 다니던 중앙중고교에서는 그 당시 이곡을 등교시간에 맞추어 계동골목을 향해서 아주 우렁차게 들려주었다. 그 긴 계동골목을 걸어서 등교하던 우리들은 이것을 들으며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져을 것이다.
The Yellow Rose of Texas, 전통 미국민요: 텍사스의 전통민요인데, 전설에 의하면 텍사스가 멕시코에서 독립할 당시 텍사스 leader였던 Sam Houston이 전쟁 상대였던 멕시코의 General & President Santa Ana에게 비밀리에 보냈던 (spy?) 텍사스의 여자가 바로 Yellow Rose of Texas였다.
1966년 불란서 칸느 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불란서 영화 “남과 여” 를 42년 만에 다시 보았다. 처음 그 영화를 나는 1968년 봄에 죽마고우 친구 안명성과, 그 당시 바로 얼마 전에 알게 된 어떤 여대생 2명과 같이 개봉관인 서울 중앙극장에서 보았다. 그러니까 이름 그대로 double date를 하면서 그 영화를 본 것이었다. Francis Lai의 영화 주제곡이 먼저 히트를 해서 더 인기를 끌었던 영화였다. 불란서 영화 특유의 ‘아름다운 흑백의 영상’을 마음껏 보여주는 그런 영화였다. full color와 black & white가 교차하는 것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 당시 우리는 사실 “남과 여”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에는 턱없이 덜 성숙된 ‘아이’들에 불과 했다. 그저 멋진 Monte Carlo와 race car driver 가 더 머리 속에 더 남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영화 속의 남과 여는 사회적인 angle 은 거의 없었다. 그저 남녀의 사랑과 그들의 심리적인 차이를 보여 주었다고나 할까. 그 때, 영화를 본 다음 바로 옆에 있던 빵집에 모여서 이야기를 하던 중 2명의 여대생 중의 한 명이 영화제목이 왜 “여와 남” 이 아닐까..하고 의문을 제기한 것이 생각난다. 그러니까 “남과 북, 북과 남”, “한일관계, 일한관계” 같이 조금은 유치한 우열의 순위를 가리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는 그런 나이었다. 영화 원래의 제목은 분명히 “한 남자와 한 여자” (Un Homme et Une Femme)”였다.
그런 순진한 남녀관계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사회적인 angle로 본 남녀의 관계는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심지어는 내가 여자로 태어났으면 어떻게 다른 인생을 보냈을까 하는 아주 비약적인 상상도 해 본적이 있었다 . 분명한 것은 그 당시에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절대로 다행이었다는 결론이었다. 분명히 종속적인 남녀의 관계가 거의 법적으로 인정이 되던 그런 시절에서 나는 자랐다. 점차 법적인 남녀평등이 자리를 잡긴 했지만 그것은 오랜 세월이었다. 절대로 남자들이 자기들이 즐겨온 위치를 곱게 넘겨줄 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요새는 어떠한가? 근래에 들어서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젊은이, 늙은이 할 것 없이 요새 남자들.. 참 불쌍하게 되었다는 한숨이 나온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여자들이 ‘덜’ 불쌍하게 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누가 더 불쌍할까. 아주 해괴한 문제일까? 하지만 그렇게 해괴하지도 않다. 그런 추세는 꽤 오래 전부터 느리지만 확실하게 꾸준히 진행되어 왔으니까.
그러니까 나도 남자의 한 사람으로 조금 더 불쌍해 졌다고 할 수도 있다. 현재 우리 가족은 4명인데, 그 중에 여자가 무려 3명이나 된다. 비록 나는 불쌍한 한 남자지만 나머지 가족 3명은 상대적으로 덜 불쌍한 사람이 되니 그것으로 조금 위안을 삼을지.나의 전 세대에서 이런 구성(딸만 둘)이었으면 아마도 조금은 동정 어린 시선을 받고 살았을 것이다. 현재 미국의 대학생은 압도적으로 여자가 많다고 하고, 직장에서도 드디어 남자보다 숫자가 많아졌다. 여성학이란 조금 생소한 단어를 듣게 된 것도 거의 한 세대가 지나가고, 지금은 아주 단단한 기반 위에 자리를 잡은 듯 하지만 남성학이란 것이 없듯이 이제는 여성학의 의미도 필요하지 않게 되지는 않을까? 그 만큼 전반적으로 남녀의 차이가 없어졌다는 뜻일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똑 같이 먹고 살아야 한다는 공산주의는 나의 눈 앞에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 마디로 인간의 기본권인 ‘자유’를 뺏는 것으로 시작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강제로 인간평등을 실현할 수는 없다는 뜻이 아닐까? 남녀평등은 어떠한가? 물론 일단은 정치,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니까 문제의 본질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그럴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왜 이렇게 여자들이 거의 일방적으로 차별을 받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그 당시에는 아주 간혹 여장부 스타일의 여자들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야기 속의 주인공에 불과했다. 일반적으로 여자는 우선 경제적으로 남자의 밑에 있어서. 사회적인 역할도 거의 태어나면서 정해 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으면 결혼으로 이어지고 그게 사실은 사회적인 활동의 전부였다. 그러니까, 극단적으로 말해서 교육을 잘 받는 목적 중에서 제일가는 것이 좋은 결혼상대자를 만나는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상적인 여성의role model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힘들게 얻은 고등교육이 거의 확실하게 결혼 후에는 쓸모가 없어지곤 했다.
오랜 역사를 굳이 따질 것도 없이 사실 남녀의 차이는 성경부터 확실히 밝히고 있다. 아담과 하와(이브)의 role model이 그것이 아닐까? 성경의 영향을 받지 않은 다른 문화와 문명은 어떠한가? 한결같이 남녀의 차별은 분명히 있었다. 그래서 Amazon같은 신화적인 이야기가 나온 것이 아닐까.. 그곳에서는 여자들이 남자들 위에 군림을 했었다. 어디까지나 이야기에 불과하다. 자연과 싸우면서 이어지는 농경사회에서 힘에 필요한 근육이 모든 가치가 되면서 더욱 남자의 가치가 올라간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 남녀차별의 근원은 분명 물리적인 생존경쟁을 배경에 두고 생물학적인 차이에서 출발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곳 미국에 와서 지금도 인상적인 것이 역시 미국여성의 눈부신 사회진출이었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정도의 직업 구석구석에 진출해 있는 것이다. 그 좋은 예로써 Janet Guthrie라는 여자 race car driver가 있었다. 남자의 영역에 당당히 도전한 그녀를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거의 한 세대가 지난 지금은 또 거기에 비해서 말도 못할 정도로 눈부시게 나아졌고 현재도 무서운 속도로 진행 중이다.그만큼 남자들의 상대적인 위치와 권위는 떨어 졌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급기야는 근래 몇 년의 지독한 경제불황의 여파로 직장여성의 숫자가 남자를 역사상 처음으로 능가를 하게 되었다. 여대생의 숫자가 남자를 능가한 지는 그 훨씬 이전이다. 이것이 앞으로의 추세를 반영해 주고 있기도 하다. 바보 남자의 숫자가 바보 여자의 숫자를 능가하고 있는 것이다.
산업의 구조가 산업혁명의 기간산업에서 거의 완전히 지적인 산업으로, 그것도 컴퓨터,인터넷의 도움으로 무섭게 바뀌고 있고 더 이상 근육이 절대적인 역할을 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추세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남자들의 비애를 느끼고 공감할 수 있다. 나의 어머니, 아내, 딸들이 다 여자이니까 그들의 지위가 높아짐은 환영하나 나 자신을 생각 할 때 과거의 영화를 그리워하게 됨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특히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우리 같은 어정쩡한 세대인 것이다. 남녀차별을 뼈저리게 보고 자란 세대, 하지만 자식세대에서는 그것을 없애려고 노력 했던 세대, 그 사이에 sandwich가 된 우리세대, 이제 우리가 남길 legacy는 과연 무엇인가?
이상적인 사회적 남녀관계는 무엇일까? 이제는 이런 문제에서 남녀만 따지는 것도 유행에서 지나가고 있는가. different life style? 남자끼리, 여자끼리 결혼하겠다고 하는 것이 different lifestyle? 정말 웃기는 세상이 된 지금 남녀의 차별을 따지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학교에서는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자체가 그른 것이 되어가는 묘한 세상이다. 정답이 없다는 것이 유행이 되어버린 이 세상, 선택의 많음이 최선이 된 이세상, 결국은 자신의 저 깊은 속에서부터 울어나 오는 ‘믿음’ 밖에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 닳는다.
I have a version of Asterisk pbx running on vmware virtual machine on a Windows host. This configuration (pbx-in-a-flash) is extremely stable running more than 6 months without interruption. Also, this serves my needs of home office more than enough.
Now, bad news part.. Not being a physical machine has tremendous advantage (like easy backup, easy creation, easy porting etc), but its virtual disk is not as easy to maintain as with physical disk. My configuration is dynamic virtual disk mode in which it allocates storage space as needed. But when you delete some files, it just marks them as deleted without actually shrinking it.
The pbx virtual disk keeps growing along with constant addition of audio recording files (like phone recordings, voice mail etc). Only solution to this is to manually shrink the virtual disk offline. In case of windows guest virtual machine, you just log into the guest system, then runs WMware tool on task bar. In a linux guest like Asterisk, it is done from Windows host using WMware tools “vmware-vdiskmanager.exe”.
I’ve followed an instruction from a site found with Google, but strange.. it simply didn’t work. I have deleted almost 1GB out of 5GB total. After shriking done, no error message.. it just displayed like “shrinking succeeded”. But, the virtual disk size remains 99.9% identical! What did I do wrong, here?
와.. 이게 장난이 아니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글거리는 아침 해를 보며 오늘은 heat index(불괘지수)가 얼마나 될까..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지난 겨울이 그렇게 춥더니 여름은 그것을 복수라도 하듯이 무척 덥다. 올 여름의 전기료는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대개는 1층의 에어컨은 사용할 필요가 없는데 올해는 절대로 필요하다. 그러니까 거의 보통 여름의 2배의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이다. 이렇게 에너지를 더 쓰면 그만큼 CO2가 더 유출될 것이고, 그것은 더 지구를 덥게 한다.. 아~~ 안 좋다, 역시 안 좋아..
왜 더울까 암만 생각해도 이건 바보 같은 질문이고 불평이다. 그저 Mother Nature가 가끔 하는 경고이거나 장난하는 그런 것일 것일지도 모르니까. Weather person들도 해답이 없는 모양이다. 예보는 하고 있어도 왜 올해는 이럴까 하는 해답은 ‘절대로’ 안 한다. 모르니까. 과학이 설명을 못하는 것이다.
올해의 특징은 온도, 습도가 같이 기승을 부린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심하면 밤에도 별로 시원하지를 않다. 결국은 그때에 에어컨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 집의 에어컨은 사실 무척 고물에 속해서 사실 언제 고장이 날지 모르는 상황에 있다. 별로 신경을 쓰지를 않았는데 요새는 조금 걱정도 된다. 제일 더운 날 이것들이 stop working을 한다면 그야말로 ‘비상’ 일 것이다. $$이 많으면 이럴 때 brand new energy efficient model로 바꾸면 전기료도 덜 들고 더 시원할 것이지만..아~~ 안 좋다, 역시 안 좋아..
추억에 남을만한 더위가 몇 번 있었다. 아마도 1972년 쯤이 아니었을까? 그 해 서울의 여름은 정말 지독하였다. 1973년에 고국을 떠났으니까 그 후에도 그런 더위가 또 있었을 듯 하다. 그때가 특별히 왜 기억에 남는가 하면 밤에 잠을 전혀 못 잤기 때문이었다. 그때 서울의 민가나 아파트에는 에어컨이 거의 없었다. 사실 필요가 없었다. 필요한 날이 일년에 며칠 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최소한 보통 밤에 잠은 잘 수 있었는데 그 해는 예외였다. 그때 조금 겁이 났다. 밤에 잠을 못 자게 되면 이건 큰일이 아닌가?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경증이와 새벽같이 연세대로 테니스를 치러갔던 확실한 기억이다. 그 다음은 1975년 초여름 (6월 초였나?), 시카고에 열대야가 갑자기 들이닥쳤다. 그때 알고 지내던 일본인의 집에서 자고 있었는데.. 역시 밤을 거의 꼬박 새웠다. 아마도 그때의 밤 기온이 80도(화씨)가 넘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미 잠은 설쳤으니까..하고 Lake Michigan으로 갔는데.. 그렇게 차게 느껴지던 곳이 그때는 별로 도움이 되지를 않았다. 그 정도였다. 그때 시카고의 많은 집에 에어컨이 없었고, 사실 필요한 곳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런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면 꼼짝없이 당하는 수 밖에 없었다. 확실한 것은 이러한 지독한 더위가 여기 저기서 더 자주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래서 global warming의 경고가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특별히 이런 ‘설’을 액면 그대로 믿지는 않지만 극단적인 기후(extreme high & low)가 자주 나타남은 믿는다. 올해가 바로 그런 해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불쾌지수가 높다 함은 기습적인 폭우의 가능성이 많다는 뜻도 된다. 오늘, 아니 지금이 바로 그런 때다. 하루 종일 찌더니 급기야 오후 늦게 터지고야 말았다. 우박과 더불어 폭우가 쏟아진다 이것이 바로 한여름의 즐거움이다. 이런 더위에 이렇게 폭풍과 같은 빗소리를 듣는 즐거움은 상당하다. 나는 원래 비를 좋아하지만 그것은 특별히 싸늘한 가을 비였다. 하지만 이곳에 오면서 부터는 이런 열대성 여름 비도 많이 좋아하게 되었다. 이럴 때, 태고적 시절 (고2) 여름방학 때 서울 남영동시원한 마루바닥에 누워 ‘삼국지’를 읽던 것을 회상하면 더욱더 시원해짐을 느낀다.
Whooooa… it’s hot, hot and very hot & humid even from Atlanta’s standard. Is it the infamouse Bermuda High again? This year’s hot weather really is testing the stress limits of everything, A/C for one thing. So far our two trusty electric fans got broken (from contant running).. what’s next victim(s)
Even moreannoying is the WordPress’ trouble with uploading meager 16M pdf file (via PHP of course). Our home has 64M allowance which I have set myself (being located at home), but not with hosted, shared production servers (at GoDaddy). Currently it boasts 8M upload size limit. How can I make it larger from web host console (at GoDaddy)? Is it even possible? Another dog day annoyance. By the way, being desperate, I bypassed php upload limit by ftp’ing the file, but strange enough, the WordPress’ media window even didn’t recognize it. A perfect dog day afternoon, bravo!
Contacting godaddy for help brings this concise response:
Thank you for contacting online support. By default, PHP limits scripts uploading files to 8 MB. To change the limitation, edit the following values in your /php.ini file for PHP4 or /php5.ini file for PHP5:
The above settings change your PHP upload limit, allowing you to upload files up to 10MB in size.
The maximum upload value that you can specify for upload_max_size and post_max_size is 192M.
If you are running Hosting Configuration 2.0, you can create custom .ini files for both PHP 4 (php.ini) and PHP 5 (php5.ini) in the root directory of your site. Please note that php.ini and php5.ini files must be in the root directory to function properly. These files will not work if placed in subdirectories, whether or not they are aliased to the root directory. Unfortunately, we cannot help create a php.ini file. we do not provide technical support with third-party scripting issues. We regret we can not assist you further with this issue and thank you for your understanding in this matter.
Which ‘root’ folder are they talking about? Hosting Configuration 2.0 allows you to modify the root foler’s php.ini file? Never knew about it. Are there someone who tried this?
I’ve beeing using Chrome for 2 weeks now without any major hiccups.. until now. It consistently fails to render pdf file (only 2 pages out of 99 displayed).. Firefox & IEx had no problems with this particular pdf file. Someone out there had some experience like this? Dog day afternoon continues..
얼마 전에 YouTube에서 60년대 Instrumental group, The Ventures를 video clip으로 다시 보게 되었다. 정말 감회가 깊다고 할까. 나의 60/70 moment인 것이다. 특히 Ventures가 일본에서 맹활약을 하던 60년대를 생생히 기억한다. 그 당시 (rock) guitar를 배운다고 하면 사실 거의 이들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도 물론 그 중의 하나였다. 그 당시 Ventures는 한국에 한번도 오질 않았다. 그 정도로 우리는 $$$가 없었다고나 할까, 아니면 그들이 그렇게 비쌌던가. 그러니 다 해적판 (그때는 우리나라에 license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LP 로 그들의 연주를 즐기는 정도였다. 그때 나의 주위에는 아주 상당한 수준으로 그들의 연주를 흉내 내는 친구들도 꽤 있었다.
요즈음 일본의 TV drama를 가끔 보면 그 당시 그들의 대중문화를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우리들은 정책적인 반일교육의 영향으로 그런 것들을 거의 모르고 지냈지만 그것은 사실 눈 가리고 아웅.. 식 이었다. 어떠한 식으로든 간접적인 영향은 상당히 받았던 것을 지금에야 실감을 한다. 한국이나 일본에 모두 상당한 미군이 주둔을 하고 이어서 그들로부터 직접 받는 것 이외에 우리는 일본을 통한 여과된 미국문화가 또 유입되고 있었던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그들은 그 당시 이미 경제발전이 상당히 진행이 되고 있어서 그들이 좋아하는 구미의 연예인들을 마음 놓고 불러다 공연을 시킬 수 있었다.
일제강점의 심리적 영향과 그들의 일방적인 경제부흥은 사실 그들의 ‘왜색문화’를 우위에 있다고 단정을 하고 완전히 차단을 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일까? 사실은 그 당시 일본문화라는 것은 거의 구미의 것을 흉내 내는 것 정도가 아니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의 소위 대중음악, 혹은 전통가요라고 하는 트로트풍의 노래들은 사실 일본의 엔카와 같은 것이다. 그 이외에 미국 folk song의 영향을 받은 젊은 층의 노래들 (통기타 그룹이라는) 조차도 일본이나 한국이 거의 같았다. 그러니까 정책적으로 막았다 해도 실제로는 거의 같은 것들을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한국의 경제수준이 상당히 나아진 지금에서 조금씩 일본문화가 유입되고 있으나 이제는 사실 그렇게 새로운 것이 들어올 것도 없을 듯 하다. 왜냐하면 원래부터 그렇게 이질적인 것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일본과 한국의 ‘숙명적’인 관계라고나 할까. 그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The Ventures의 Forever (and ever) with You를 들으니 기분이 조금 새로워 진다. 60/70의 nostalgic한 기분도 나고 또 다른 미래의 양국관계의 한 chapter가 보이기도 하기 때문일까.
어제는 새로니가 Nashville로 떠났다. 차로 이곳에서 4시간 정도의 거리여서 전에 있던 Washington DC 보다 너무 편하게 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무리하지 않고 하루에 다녀올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것이다. 내일은 새로니 이사 짐의 대부분을 우리의 mini-van에 싣고 우리가 다녀 올 차례가 되었다. 계획은 그곳에서 자지 않고 밤에 돌아올 생각이다. 우선 집에 있는 Tobey와 Izzie (dog & cat)가 조금 마음에 걸리고, 새로니가 살 곳이 studio apartment라서 분명히 방이 좁아서 자는 것이 조금 불편할 거 같아서이다. Google Map을 보니까 direction이 아주 간단했다. I-75 North로 90 마일 가면 Chattanooga, TN가 나오고 거기서 I-24W를 타고 135 마일 정도 가서 Nashville metro가 나오면 I-440 (toward Memphis) 로 갈아타고 6 마일 정도 가면 Vanderbilt University가 나온다. 새로니가 살 곳은 학교에 바로 옆에 있었다. 아마도 걸어서 다녀도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새로니가 갈 곳은 Peabody College of Education인데 사립학교라 학비가 무척 비싸다. 하지만 1/3 정도는 각종 장학금으로 충당이 될 듯하고, 나머지는 거의 loan으로 될 듯. 이래서 요새 대학 졸업생들은 소수의 부유층을 제외하고는 거의 빚쟁이 신세가 되고 있다. 거의 그게 정상일 정도로. 우선 2년 course에 도전을 하고 여력이 있으면 더 공부할 생각도 있다고 하지만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 본인 조차도.
Vanderbilt University..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김수근 교수(님).. 대구 계명대학출신으로 그곳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아마도 지금은 한국의 어느 학교에서 가르치고 계시리라 생각한다. 내가 미국에 처음 온 1973년 여름에 Sherman, Texas에 사시던 김교수 가족을 그곳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Oklahoma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그곳이 Texas와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어서 Dallas에 가끔 놀러 나가곤 했다. 그 가는 길 (US-75) 에 Sherman 이라는 조그만 town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Austin College라는 조그만 사립대학이 있었고 그곳에서 김교수는 강사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 당시, 김교수의 박사학위과정이 아직 덜 끝난 상태였고. 다니던 학교가 바로 이 Vanderbilt University였다. 나는 사실 한국에서 그 대학의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이곳에 와서야 사립명문대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 김교수님 댁에 놀러 가면 우선 그 귀한 한국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김교수님 부인의 음식솜씨가 상당하였지만 그것 보다도 한국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 당시 어린 딸 두 명이 있었고 한국에서 아버님이 방문 중이셨다. 나는 미국에 온지 얼마 되지를 않아서 모든 것이 불편한 때에 내가 차를 사는 것을 도와 주셨다. 그래서 김교수님의 도움으로 그 당시에 산 차가 69년 형 Volkswagon Beetle이었다. Semi-automatic의 그 차는 사실 그 당시 나에게 과분한 차였다.
Nashville하면 미국 country music의 수도나 다름이 없다. Grand Ole Opry 란 country music전당이 그곳에 있다. 일주일에 한번 country music stage concert가 그곳에서 열린다. 가장 기억이 나는 것 중에 하나가 The Carpenters가 그곳에 왔을 때다. 아마도 1973년 정도였을까.. 갑자기 인기절정에 오르면서 (Top of the world) 이곳으로 날라와서 공연을 했고 완전한 top country pop stardom에 오르게 되었다. 언젠가 시간이 허락하면 한번 그 유명한 Grand Ole Opry공연을 보고 싶은 희망을 가지고 있다.
꽤 오랜만에 추억해 보는 이 세 이름들: 안낙영, 오성준, 최종인. 우선 이 세 사람은 나의 중앙고교 선배들이다. 안 선배는 53회, 오,최 선배는 모두 54회 졸업생. 내가 57회,그러니까 나의 3년, 4년 선배들이다. 그리고, 모두 연세대 전기공학과에서 같이 공부한 선배들이라는 것이다. 1968년부터 1971년 졸업할 때까지 같은 학년, 같은 과에서 공부를 한 것이다. 이 중에서도 나는 오성준 선배와는 다른 선배에 비해서 더 많은 추억이 있다. 그것을 소중하게 추억하고 싶다.
연세대학 2학년이 시작되던 1968년.. 나는 1966년에 입학했지만 1학년 중간에 1년 휴학을 해서 1967년 가을에 복학을 했었다. 입학 때와 달리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재미있는 것이 공부란 것도 그때 알았다. 1학년 1학기 때의 below average를 한 학기 만에 완전히 만회를 해서 이곳의 표현으로 dean’s list를 넘어서게 되었고 심지어(?)는 쥐꼬리만한 장학금까지 받게 되었다. 이때의 느낌은.. 아.. 열심히 하면 꼭 무슨 좋은 결과와 보답이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1968년 초, 나의 생일날 북괴의 김신조 일당이 박정희 “목 따러” 온 후에, 2학년이 되면서 대거 복학생들이 들어오게 되었다. 대부분 군대를 마치고 온 3년 정도 선배들이었다. 그 중에 중앙고 출신이 3명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이 세 선배들이었다. 그때 재학생으로 중앙고 출신이 나까지 5명이 이미 있었다. 나(이경우), 이윤기, 박창희, 김태일, 이상일 등등이었다. 이중 나와 이윤기는 중앙 57회였고, 나머지는 모두 58회 출신이었다. 그래서 중앙고 출신이 8명이나 된 것이다. 이 정도면 과에서 단일 고교로써는 굉장한 숫자였다. 과대표를 뽑는 선거 같은 것이 있으면 그 이(利)점은 상당할 정도였다.
이 세 명의 선배들은 참 쾌활하고, 농담 잘하고, 다정한 선배들이었다. 그 전까지는 나는 선배라고 하면 우선 겁을 내곤 했다. 고등학교 때 사실 그렇게 교육을 받아서 그런가.. 거의 군대식으로.. 일년 선배라도 길에서 보면 경례를 하곤 했으니까. 잘못해서 반말이라도 하는 날이면 그때는 세상의 끝이라고나 할까.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런 환경들이 다 일제시대의 학교전통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하지만 이때는 처음으로 선배들의 ‘포근함’을 만끽하게 된 것이다. 물론 반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로 농담을 할 정도가 된 것이다.
안낙영 선배.. 노란 반팔 셔츠를 좋아한 사나이.. 짓궂고, 야한 농담을 신선하게 하고, 누나 있으면 소개하라는 농담을 즐기는 여유에 반해서 공부는 정말 심각하게 하는 학구파다. 강사나 교수에게 아주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날리는 자랑스러운 선배였다. 최종인 선배.. 정말 구수하고 다정한 얼굴의 선배다. 말도 그렇다. 그런 것에 비해서 말 수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사진이 취미라는 것도 알았다. 연영회라는 연대 사진 서클에서 새 회원을 모집해서 양건주(화공과)와 갔는데 거기서 만났다. 그때 각자 돌아가며 자기를 소개 하는데 최 선배는 군대에서 사진에 대한 경험이 많다고 말을 했었다. 그 당시 연영회의 모임은 갈월동에 있는 연영회 간부학생의 집에서 있었는데, 그때 한창 인기가 있던 그룹사운드 까지 출연을 할 정도로 대 성황인 모임이었다.
그리고, 오성준 선배.. 다른 선배에 비해서 더 많은 추억을 가지고 있다. 별명도 있었다. 오박사..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만물박사처럼 참 여러 가지를 많이도 알고 있었으니까. 봄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안 되어서 나는 몇 명의 고정적인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는데, 양건주, 이윤기, 김진환, 김태일, 박창희, 그리고 김철수 등등 이었다. 이중에 양건주만 화공과였고, 나머지는 모두 우리 과였다. 출신도 다양한데, 양건주, 이윤기는 나의 중앙고 동기이고, 김태일, 박창희는 중앙고 1년 후배, 김진환은 전라도에서 온 유학생, 김철수는 강원도에서 온 유학생이었다. 어쩌다 이들과 어울리게 되었는데 지금도 생각나는 즐거운 기억 중에는 수업이 끝나면 연대입구에 있던 빵집에서 가위바위보를 해서 빵 값을 지불하곤 하던 것이었다. 대부분 다방에서 죽치곤 하던 시절, 고교생처럼 웬 빵집.. 그래서 더 재미가 있었나 보다. 그러다가 날씨가 좋은 봄에 관악산으로 등산을 가기도 했다. 그때 찍은 사진 뒤에는 날짜와 함께 Amigo라는 이름이 있었다. 그것이 Spanish로 friend(남성)란 뜻인데 그 당시 모임의 이름이 없어서 우선 그렇게 붙인 것 같았다. Club Amigo..
하지만 이 클럽엔 “치명적”, 결정적인 단점이 있었다. 멤버가 모조리 “우중충하고 쾌쾌한” 냄새 나는 남자들 뿐인 것이다. 조금은 하얗고 부드러운 듯한 여자들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는 꿈같은 이야기였다. 하나같이 여자친구 하나 없는 그야말로 숫총각 뿐이었으니까. 어떤 친구들은 숫제 여자에게 관심도 없었다. 아직도 미성년인 것처럼.. 그러다가 오 선배에게 하소연을 하게 되었는데, 뜻밖에도 쾌히 승낙을 하는 것이 아닌가? 오 선배는 그 정도로 다정하였다. 그러더니 나와 이윤기를 데리고 연세대 뒤쪽으로 버스를 타고 가서 어느 아담한 양옥집으로 갔다. 알고 보니 오 선배의 공군복무시절 친구라는 사람의 집이었다. 그 집에 이화여대생 딸이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 여대생을 소개시켜주러 간 것이다. 성격이 이랬다. 아주 화끈하게 일을 즉시로 해 치우는 그런..
그날 그 집에 그 여대생은 없었다. 그래서 나중에 연락처를 받아서 연락을 하게 되었는데, 그 여대생의 이름은 “김갑귀” 씨였다. 이름이 하도 요상해서 물어보니 갑오년에 귀하게 났다고 해서 그렇게 했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우리는 김갑귀씨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 그런 인연으로 오성준 선배는 우리들 클럽의 활동에 ‘고문’격으로 가끔 조언을 하곤 했다. 선배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여대생회원 아이디어는 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김갑귀 씨가 열심히 자기의 classmates들을 소개 시켜주긴 했지만 글쎄.. 어딘가 우리들하고 맞지를 않았다. 키가 너무 크지 않으면 얼굴이 그렇다던가.. 그런 것이었다. 한마디로 우리들이 더 어려 보일 정도였다. 이것을 김갑귀 씨가 알고 아주 섭섭해 했다. 김갑귀 씨는 조금 어리광 끼가 섞인듯한 표정과 다정함이 있었다. 나는 그녀의 그런 면이 참 좋았다.
그녀는 역시 정이 있었다. 어쩌면 우리 그룹에 대한 인상이 좋았는지도.. 곧 바로 자기의 제일 친한 친구를 소개시켜 주었다. 그 친구가 바로 이선화 씨였다. 선화공주를 연상시키는 그런 간호사 지망생이었다. 그녀는 사실 김갑귀 씨와 창덕여고 동창이었다. 김갑귀 씨의 개인적인 친구였던 것이다. 그래서 곧바로 선화씨의 classmates로 대상이 바뀌었고, 지난번의 실패를 거듭하지 않으려고 이번에는 조금 계획적으로 일을 진행하였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뒤에 “연호회”라고 하는 남녀 대학생 클럽이었다. 목적은 단 한가지: 친목도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인연으로 오 선배는 우리와 아주 친한 선후배관계를 유지하였다.
졸업 후에 오 선배는 곧바로 대학원 진학을 했다. 나머지 선배들은 연락이 끊기고, 나는 미국으로 오게 되어서 이 선배들과는 사실상 관계가 끊어진 셈이다. 아주 나중에 오성준 선배의 소식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듣게 되었다. 역시 예상한 대로 직장에서 맹활약을 한다는 것이었다. 안낙영 선배도 거의 우연히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그때는 내가 Ohio State University에 다닐 당시, 어떤 한국유학생하나가 Old Dominion University에서 transfer한 사람이었다. 서로 우연히 얘기 하던 중에 안낙영 선배가 그곳에서 공부를 하고 이어 직장생활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 바로 전화를 해서 서로 소식을 나누었다. 간호사인 아내가 있다고 들었다. 아마도 그쪽에서 계속 살고 계시리라 믿는다. 최종인 선배는 완전한 연락 두절.. 다른 선배를 만나기 전에는 알 길이 없을 듯 하다. 그래서 이 최종인 선배는 조금은 전설적인 이미지로 나의 머리에 남는다. 언젠가 한번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작은 딸, 나라니가 이사를 나가면서 방이 비게 되었다. 그 방은 동북쪽으로 창이 있는, 여름에는 비교적 시원한 방이고 나의 전 office 보다 조금 더 넓다. 단점은 조금 어둡고 겨울에는 조금 더 춥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은 두 딸들이 얼마 동안(mostly during elementary school years) bunk bed를 놓고 같이 자던 bedroom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지난 6월초부터 방을 옮기기 시작해서 거의 한 달을 걸려서 끝이 났다. 이렇게 오랫동안 방을 옮겨 본 적이 없었다. 이유는, 나이에 의해서 느려진 동작, 짐을 정리하는 데 걸린 시간 (이럴 때 많이 버려야 한다),6월 달의 ‘살인적’인 더위.. 등등으로 나름대로 핑계가 있다.
짐을 정리한 것은 단순히 책이나 서류 같은 것들을 내다 버린 것 이외에도 등치가 아주 큰 computer work desk 두 대를 해체하는 작업도 있었다. 이것은 particle board로 만든 정말 신경질 나게 무거운 monster급인데 disassemble자체는 비교적 간단하나 그것들을 garage로 옮기는 것은 그렇지 않았다. 평소에 weightlifting이라도 가끔 해둔 것이 이럴 때 톡톡히 도움이 되었다. 그것 두 대가 빠져나가니까 방들이 비교적 크게 보였다.
이래서 나의 new office는 정말 무슨 lawyer office같이 단정한 desk하나만 중앙에 놓인 그런 아담한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monster tube(glass) monitor가 flat screen monitor로 바뀌어서 더 그런 것이 가능했다고나 할까. 3 unit book shelves, drawer chest, file drawer 그것이 전부가 되었다. desk를 벽에 붙이지 않으니까 computer wiring이 조금 문제가 되었다. 절대로 pc box를 desk 옆에 놓기 싫었기 때문이다. 보기에도 그렇고, fan의 소음도 그렇고, desk를 조금씩 옮길 때도 지장이 있다.
Desk 가 과히 넓지를 않아서 가급적 pc peripherals의 크기가 작으면 좋다. pc monitor는 이미 17″로 고정적이고 mouse도 마찬가지다. PS/2 connection도 거의 모두 usb로 대체가 되어서 과제는 조금 간단해 졌다. usb hub을 monitor뒤나 옆까지 끌어오면 된다. 그래서 이제까지 쓰던 ps/2 keyboard를 정말 small footprint usb keyboard로 바꾸었다. 이것은 정말 작아서 보통의 laptop keyboard보다 작다. 나머지 할 일은 video(VGA) 와 usb cabling을 해결하면 되는 것이다. pc box에서 desk/monitor까지는 비교적 가깝지만 만일을 위해서 12′ 정도는 필요하다. usb의 경우는 이미 16′ active extension cable이 있어서 해결이 되었고, 문제는 long VGA cable인데.. 이번에 googling을 해보니 classic한 thick vga cable 외에도 impedance matching vga-to-CAT5 converter가 보였다. idea가 좋았다.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vga cable 대신에 Ethernet cable을 쓰는 것이다. pricing이 눈을 끌었다. $20~$30 range였다. high quality vga cable과 큰 차이가 없었고 cabling range도 보통 20’가 넘는다. Too good to be true.. 임에 분명 하지만 모험을 하는 셈 치고 order를 하고.. 써 보았는데, 역시 too good to be true ..였다. 문제는 connector가 너무나 motion sensitive한 것이다. 조금만 건드려도 video가 흔들렸다. 웬만하면 ..하고 생각했지만 역시 안되겠다 싶었다. 결국은 12′ classic thick vga cable을 쓰게 되었다. 이것은 예상대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직 분명하지 않은 것은 혹시 그 converter가 1280×1080이하의 resolution에서는 ok일까..하는 것이다. return하기 전에 한번 test를 해 보아야겠다.
이런 작업이 끝나고 새office에 앉아 보니 경치가 훨씬 좋았고, 조금은 덜 더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미 더워진 날씨에는 새 office도 마찬가지.. 2층 이라 더위를 피할 도리는 없다. 6월 달 거의 3주간 계속 최고온도가 95도(~35C?)였다. 이것은 조금 예상을 했던 것이다. 지난 겨울이 유난히 추웠기 때문이다. 평균온도를 유지하려면 이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피난을 간 곳이 역시 아래층의 kitchen이다. 그곳에는 먹을 것이 옆이 있고,밝고, pc/tv monitor가있다. 그러니까 TV도 볼 수 있고, home server에 있는 video를 볼 수도 있다.
현재 나의 laptop pc는 사실 prime time이 훨씬 지난, 그러니까 ‘고물’에 속한다. 나라니가 쓰던 것을 물려 받았기 때문이다. 겨우 1.5GHz/768MB 정도.. 겨우 mid-size video를 간신히 볼 수 있을 정도다. 그러니까 desktop replacement로는 사실 horsepower 가 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good news는 이 정도면 소위 말하는network thin client로는 적격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client-server/remote desktop mode를 쓰는 것이다. 물론 network speed가 관건이지만 이미 우리 집은 이미 gigabit Ethernet network이 깔려 있어서 전혀 문제가 없었다.
현재 우리 집에는 physical pc (laptop포함) 7대가 gigabit network에 연결되어서 돌고 있다. 그 중에 3대는 server closet에 있고 하나가 연숙의 office, 또 하나가 나의 office, 그리고 kitchen에 하나, 그리고 나의 mobile laptop이다. Server closet(at garage)에 있는 3대 pc server는 모두 VMware server 가 각종 virtual machine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핵심은 이곳 virtual machine에 있다. 나는 99.9% 이 virtual pc를 main desktop pc로 쓰고 있는 것이다. 현재 도합 8대의 virtual machine이 항상 running하고 있는데, 이 중에는 Asterisk pbx도 포함되어있다. 이 Asterisk pbx는 우리 집의 phone (including VOIP phones) 전체를 control하고 있다. 나머지는 대부분 Microsoft Windows XP, English & Korean 이고, Ubuntu Linux도 있다. 그리고 각각 virtual pc는 나름대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어떤 것은 email 전용이고, 어떤 것은 web browsing, 어떤 것은 download전용, media server, Photoshop editing 이런 식이다. 이런 approach의 특징은 무슨 문제가 생기면 (like malware, spam, worm, virus infection etc) 그 특정한 virtual pc를 지우고 다시 만들면 된다. 이것은 사실 요새 많이들 말하는 cloud computing과 다름이 없다. 다만 public이 아니고 private, home cloud인 것이다. 이 home cloud 덕분에 out-of-office에서도 별 문제없이 ‘같은’ computer를 쓸 수가 있게 되었다.
제목을 달아놓고 보니 오래 전의 미국소설과 영화: “Goodbye, Columbus” 와 비슷해졌다. 사실 우리 집도 Goodbye Columbus의 경험이 1988년에 있었다. 그러니까 영화와 똑같은 Goodbye Columbus, Ohio였다. 그때 우리가족이 나의 새 직장을 찾아서 Madison, Wisconsin으로 이사를 갔다. 그게 1988년 여름, 서울올림픽이 있었던 해.. 와.. 벌써 22년이 되어가나.. 그 일년 뒤에 Goodbye Madison을 이어서 단행했고, 앞으로는 아마도 Goodbye Marietta정도가 기다리고 있을까? 가능성은 많지 않지만 물론 제로는 아니다. 시간이 갈수록 높아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완전한 이사’가 아니면 더 이상 Goodbye Someplace..는 피하자고 결심을 했다. 너무나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완전한 이사”란 어릴 때의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번의 Goodbye Washington, DC는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집 큰딸 새로니의 이야기다. 새로니는 2006년에 용감하게 ‘분가’를 단행, 집을 떠나서 그곳으로 갔다. 나는 천성적으로 ‘이별’이란 걸 지독히 싫어한다. 가능하면 가족은 모여서 사는 걸 원한다. 나의 인생이 그런 것과 반대로 엮어졌기 때문일지도. 하지만 ‘큰 곳’을 찾아가는 것을 막을 용기는 없었다. 처음에는 federal government의 job이 되어서 집을 떠날 구실을 주었다.
내가 보기에 그 position은 절대로 glamorous한 것은 아니었다. 그 젊은 나이에 말이다. long term job security가 가장 좋은 곳이니까, 반대로 말하면 그렇게 젊은 나이에 맞는 곳은 아니란 뜻이다. 예상대로 얼마 못 가서 not-for-profit position을 찾아서 옮겼다. 물론 같은 town에서. 이곳보다 훨씬 liberal,, progressive하고 trendy한 그곳은 그 나이에 잘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career에는 불안정한 시기가 계속되고.. 그러니까 무엇이 새로니에게 perfect (or near perfect) career job인가 하는 그런 문제는 풀리지 않고 있었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세대에서도 이런 문제는 적지 않았다. 대학교를 갈 때부터 고민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럴 경우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솔직한 바램보다는 장래성(돈과 지위)과 부모,선배의 의견을 따르는 것을 보았다. 이때 만약 잘못 고르면 여러 가지 문제가 그때부터 시작된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집사람 연숙의 case가 그렇다. 부모님의 의견과 적성검사를 자기의 솔직한 바램보다 더 따른 것이다. 분명 연숙은 인문,사회 쪽이지 절대로 자연과학이 아니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무엇을 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100% 가깝게 뚜렷했다. everything Electrical..(like Thomas Edison)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이런 고민들이 나에게는 쉽게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새로니도 이런 문제를 가지고 대학엘 갔는데.. 조금은 심한 편이 아닐까? 사실 아직도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가..에 자신이 없는 듯하다. 나는 이해하기가 조금 힘들지만.. 들리는 말에 요사이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듣기는 했다. 이제는 그런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런 예를 많이 보았으니까. 지금은 자신의 passion이 teaching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듯하고.. 결국은 다시 시도를, 그러니까 teaching degree에 도전을 하게 된 듯하다.
그래서 이 불경기에 그런대로 안정된 직장을 떠나서 학교에 간다는 것이 처음에는 그렇게 이해하기 힘 들었다. 하지만, 요새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는가. 결국은 이번 가을부터 Nashville, Tennessee에 있는 Vanderbilt University 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2 year Master’s course인데 우리는 잘 하리라 믿는다. 졸업 후의 진로는 아직 모른다. 현장에서 teaching을 할지 아니면 higher degree를 따라갈지.. 한가지 좋은 것은 우리가 사는 곳에서 5시간 미만 drive거리에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주말에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 갈 수가 있게 되었다.
아.. 나의 모교, 서울 계동1번지중앙중고등학교.. 너를 어찌 꿈엔들 잊으랴. 죽을 때까지 못 잊을 것이고, 아마도 죽어서도 (영생을 믿는다면) 못 잊을 것이다. 이상하게도 그때의 추억들은 나이가 들면서 더욱 선명 하게 되었다.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이것이 인간들이 인생을 정리하면서 하게 되는 자연스러운 것들일까.
오늘은 고등학교 2학년 때를 생각해 보고 싶다. 그러니까 1964년인가. 그때의 신문들을 다시 볼 수 있다면, 그때의 한국의 정치,사회 등등을 같이 엮을 수 있으련만.. 그때는 박정희 시대였다. 100% 말이다. 그가 하고자 하는 일, 하고 싶은 일들은 사실 $$만 있다면 할 수 있는 시대였다. 그가 제일 목말라 했던 것은 역시, 경제개발.. 그가 제일 주목한 것은 역시 일본.. 그가 기댈 수 있는, 그런대로 편했던 나라다. 폐허에서 경제대국으로 발돋움을 하려는 그런 시대였다. 그런 배경에서 한일회담이 거듭되고, 야당은 그것을 반대하고.. 데모로 이어지게 되는 그런 시기. 중화학 산업으로 시작이 되어서 정부는 그것을 제일 큰 업적으로 홍보를 하던 때. 1964년.. 김승옥의 “서울, 1964년“이란 단편이 월간잡지 신동아新東亞에 실리던 그런 배경이었다.
나는 1년도 못되게 짧게 살았던 서울도심지 회현동에서 그런대로 조금 조용하지만 교통이 편리한 위치에 있었던 용산구 남영동으로 이사를 갔다. 금성극장에서 50m 도 안 되는 거리, 뒤쪽으론 미8군 사령부가 담 넘어 있었고 남산이 그 뒤로 가까이 보이던 곳. 2층집인데 일층은 주인의 가게가 있었고 2층은 우리가 모두 차지했다. 옥상도 있어서 나는 밤만 되면 이곳에 올라와 내가 만든 망원경으로 남산 팔각정을 보기도 했다. 너무나 나에겐 좋은 주거환경이었다. 거기서 나는 중앙고 2,3학년을 보냈다. 집에서 바로 코앞, 금성극장 앞에서 버스를 타면 재동 신작로까지 갈 수 있었다. 그리고 계동골목을 통해서, 휘문, 대동중고등학교를 지나서 숨이 목까지 차오르면 막다른 골목에 majestic 한 모습의 웅장한 석조전 모교가 우리를 맞는다. 그 당시 나는 지각은 한번도 한 적이 없었다. 반대로 거의 매일 첫 번째로 가곤 했다. 늘 지각하는 애들의 얘기를 들으면 매일 그 긴 계동골목을 뛴다고 들었다. 그래서 휘문 애들이 부러웠다고.. 바로 골목의 입구에 있었으니까.
고2가 되면서 반은 본관 뒤 왼쪽 벽돌건물로 옮겨졌다. 2학년 6반이었다. 담임은 기하를 가르치는 새로 부임한 박영세 선생님. 고려대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중앙출신인지 아닌지는 아직도 모른다. 나의 고2시절은 조금 특징이 있다. 제일 과외활동적인, 기억에 남아야 될 일이 많았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맞지 않게 기억이 제일 희미하게 된 학년이었다. 왜 그런지 나도 의아스럽다. 사진이 별로 없어서 그런가, 아니면 무엇인가?
먼저 추억으로 남기고 싶은 것이 있다. 좋은 추억이 아니다. 나의 친구였던 이경증에 관한 것이다. 이름도 비슷하고 중2때부터 친했던 다정스런 친구. 그가 중3때부터 조금 사춘기적 반항을 시작한 듯 했는데 그것이 결국 새로 온 담임 박영세 선생님으로 끝이 나 버렸다. 확실히 무슨 사건이 발단이 되었는지는 모른다. 결국 박선생님이 ‘퇴학’을 시킨 결과가 되어 버렸다. 나중에 경증이와 대학 이후에 재회하면서 그때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것 조차 지금 기억에서 희미해져 버렸다. 경증아, 이 글을 읽으면 다시 한번 들을 수 있게 해다오. 그 이후 나는 박선생에 대한 인상이 별로 좋지 않게 되었다.
First thing, first.. SECC 이것을 빼 놓고는 고2에 대한 추억을 말할 수가 없다. 우리들은 그저 에쓰이씨씨 라고 불렀다. Student English Conversation Club의 약자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이 안 난다. 하지만 고2때의 일이었다. 중3때 알던 김호룡이 와서 영어회화클럽이 있으니 같이 하자고 제의를 해 왔다. 나는 그 당시 고1때의 외로움을 만회하려고 무엇인가 과외활동을 해야겠다고 ‘결심’을 했던 때였다. 타이밍이 아주 잘 맞았다. 그래서 따라가 보니 이건 무슨 인연이란 말인가. 그 club이 모이는 곳이 바로 우리 집에서 아주 가까운 가정집이었다. 우리 집 옥상에서 거의 보일 듯 말듯한 위치가 아닌가?
그곳에 가 보니 이미 학생 몇 명이 모여서 영어회화를 배우고 있었다. 그리고 웬 ‘어른’들 몇 명 있었고, 회원으로는 김호룡, 이종원, 우진규, 이상기, 한형업.. 등등이 우선 생각이 난다. 그러니까 그때는club이 크려고 하던 그런 초창기에 속했다. 어른들은 조금 나이가 들어 보였던 ‘신광수’선생, 그리고 대학생처럼 젊어 보이는 영어의 귀재, 이름이 생각이 안 난다. 그리고 잡일을 도와 준다는 신선생의 동생이라는 남자. 이렇게 어른 세 명이 이 클럽을 이끌고 있었다. 물론 회비는 걷었지만 얼마 되지를 않았다. 그에 비해서 ‘서비스’는 거기에 맞지 않게 좋은 편이었다. 우리가 내는 회비는 턱도 없이 모자란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농담으로 이 사람들, 혹시 북괴 간첩이 아니냐는 말도 하곤 했다. 몇 명 되지 않았지만 가끔 극장도 데리고 갔다고 했다 (나는 못 가봤지만) 일주일에 몇 번이나 모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정기적으로 모였다. 그리고 영어회화를 배웠다. 그 신선생이란 분은 미국과 영어문화의 신봉자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미국 것은 무조건 좋다는 식이었고, 그러니까 영어를 절대적으로 잘 해야 한다는 식이었다. 그의 영어회화 실력은 사실 대단하질 못했지만. 다른 선생 (대학생 같은) 은 달랐다. 완전히 미국방송 AFKN에 심취해서 라디오를 귀에 대고 살았다. 그만큼 그의 영어 회화실력은 대단했다. 사실 나는 영어회화에 대한 관심보다는 새 친구들을 사귄다는데 더 관심을 두었다. 그래서 후일에 계속 친구로 남게 되는 김호룡, 우진규, 이종원, 등등과 그곳에서 어울리게 되었고 고1때와 같은 ‘외로움’을 어느 정도 없앨 수 있었다.
하지만 이 클럽은 나중에 목적이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마구잡이로 회원을 늘리려고 했고 결과적으로 다른 학교 학생들 까지 가입하기에 이르렀다. 알고 보니 그 신선생이란 사람은 아마도 이곳을 통해서 돈을 많이 벌려고 한 모양이었다. 결국 근처의 빌딩으로 이사를 가서 거기서는 일반인들에게 영어회화를 가르치기에 이르렀다. 아직도 기억이 잘 안 나는 것은 그 모임이 어떻게 끝이 났나 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고3이 되기 전에 그곳에서 우리들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때 우리들은 USIS(미국공보원)에서 모이는 대학생들 영어회화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 당시 영어회화를 얼마나 배웠는지는 사실 미지수지만 나에게는 보람 있던 과외활동이었다. SECC에서 조금은 더 알게 된 사람들, 한형업, 주응권, 김희태, 호봉일 등등이 생각난다.
고2 시절에서 꼭 생각나는 행사가 중앙고의 특별한 행사인 ‘토요코스‘라는 것이다. 왜 이름을 토요코스라고 했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토요일에 열리니까 그런 것인가. 그러면, 코스라는 이름은? 먼 후일 Ohio State University에서 중앙후배들로 부터 그 행사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고 듣고 너무나 반가웠다. 이 토요코스는 간단히 말해서 지금의 summer camp같은 것을 학기 중 토요일 저녁부터 일요일 오전까지 학교에서 하는 고등학교 2학년 전체가 참가하는 캠프 행사였다. 그 당시도 참 신선하고, 재미있었지만 이렇게 까지 머릿속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줄은 미쳐 몰랐다. 그렇게 대학진학 6개년 계획까지 세워서 입시공부를 강조하던 최복현 교장선생님께서 이렇게 교육의 여러 가지 면을 다 생각하신 것을 보면 지금도 머리가 숙여진다.
그 당시의 경제여건으로 봐서 지금은 흔한 단체 camping같은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 것을 하려면 각자가 알아서 친구들과 해야 하고 캠핑장비가 없어서 거의 모두 암시장에서 군화, 군용장비를 사야만 했다. 그런 것들은 남자들만이 그런대로 할 수 있는 취미였다. 그런 것을 학교단위로 한 것은 지금 생각하면 역시.. 하고 감탄을 하게 된다. 토요일 방과 후, 오후부터 우리 2학년 6반 학생들은 다시 학교로 간단한 야영장비를 가지고 모였다. 거의 모두 군용장비였다. 밥을 해 먹는 ‘항고’가 필수였다. 중앙고 캠퍼스는 그때나 지금이나 너무나 아름다웠다. 비원의 담을 끼고 밖에서 밥을 해 먹었다. 물론 코스담당교사인 나까무라 주길준 선생님의 지도하게 질서 정연하게 진행이 된다. 등산, 캠핑을 해본 사람들은 큰 문제가 없었지만 그렇지 않은 학생들은 아마도 신기한 경험을 했으리라. 나도 못해본 축에 속해서 아주 재미있었다.
어둠이 깔린 교정.. 어둠 속에 보이는 캠퍼스는 다소 신비스럽게도 보였다. 처음 그런 광경을 접한 것이다. 교련조회 비슷한 열병식도 했고, 본관 앞 잔디에 모두 모여서 열 띈 토론을 하기도 했다. 그런 것을 주길준 선생님께서 능숙하게 지도하셨다. 그렇게 짧은 시간들이 그때는 참 오랜 시간으로 느껴진 것은 지루해서가 아니라 모두 생소한 경험을 축적하느라 body clock이 천천히 간 것일 것이다. 교정에서 camping을 하면 이상적이겠지만 실제적인 (안전)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본관 다락방 (도서관 자리) 에서 군용침대를 놓고 잠을 잤다. 물론 개구쟁이 친구들은 잠을 제대로 잘 리가 없었지만 그런 소란스러움은 잠시 후 주길준선생님의 군대스타일 취침 checkup으로 끝이 났다. 자기 전에 모두 침대 옆에 서서 취침 전 점검을 받는 것이다. 그것도 참 재미있던 추억이었다.
저녁때 잠깐 보니 1층 숙직실의 노~오란 장판 위에서 주길준 선생님과 우리 반 담임 박영세 선생님이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그 광경이 너무나 정겨워 보였다. 다음날 아침에는 특별한 행사는 없었고 오전 중에 집으로 돌아왔다. 이 행사는 이렇게 간단하고 짧았지만 그렇게 신선하고 ‘탈’ 입시적인 기억은 절대로 나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을 듯 하다. 이것과 연관해서 생각나는 사람은: 이종진 (별세), 김진수. 이종진은 밤에 잠을 제대로 안 자고 소란스럽게 해서 기억이 나고, 김진수는 항상 나의 옆에 있던 친구라 생각이 난다.
고2때의 다른 추억은 역시 그 흔한 수학여행이다. 이것은 물론 다른 학교들도 다 하는 것이라 특별한 것은 없다. 하지만 역시 이런 것은 빠지면 후회하게 되는 그런 행사일 것이다. 지금도 추억을 하면 아름다우니까. 그 당시의 표준코스는 역시 그런대로 시설이 되어있던 신라의 고도 경주였다. 교과서에서 귀가 따갑게 듣고 들었던 곳이라 사실 호기심도 많이 있었다. 특히 석굴암과 불국사.. 얼마나 많이 국어와 국사시간에 들었던가. 기억에 아마도 2박 3일의 여행이 아니었을까? 그 당시 학급일지를 보면 확실하겠지만.. 기억이 나는 동창들은 없을까? 구체적으로 언제였는지? 아마도 10월 정도였지 않을까?
그 당시는 고속도로가 생기기 전이라 모두 서울역에서 시커먼 기차를 탔다. 그 때의 사진이 졸업앨범에 남아있다. 아마도 하루 종일 걸려서 경주에 갔을 것이다. 여관에서 식사도 하고 잠을 잤는데, 역시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학교에서 매일 만나던 친구들이었지만 학교 밖에서 며칠 같이 잠도 자고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역시 신선하다고 할까?
나의 추억은 서울역에서 Steam Engine, (화통)기차를 타면서 시작되어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여행까지 하나도 빠지는 것이 없다. 갈 때는 기대감으로 들떠서 유행가를 불렀는데, 웅변반의 최고변사 김흥국의 선창으로 맨발의 청춘을 악을 쓰며 불렀다. 그 당시는 신성일과 엄앵란의 콤비가 나오는 영화가 제일 인기였고 이 맨발의 청춘 도 그 중의 하나였다. 최희준씨가 부른 주제곡은 어른이나 아이들 모두 따라 불렀다.
그 고속도로 이전시대에는 완행열차가 제일 손쉬운 교통수단이었는데, 글자 그대로 느렸다. 급행이 있다고 하지만 열차 자체가 느렸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늦게 가는 기차에서 보이는 농촌의 풍경이 너무 정겨웠다. 경주에서는 아주 깨끗한 여관에서 짐을 풀었는데, 그 당시는 그것이 최고의 숙박시설이었다. 경주에 호텔이란 것이 없었을 것이고 있다고 해도 그림의 떡이었을 것이다.
이번의 여행에서는 고1때와 같은 외로움은 없었다. 이종원, 김호룡 같은 친구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우진규도 있었는데 이번에는 다른 애들과 어울리는 바람에 우리와 같이 사진도 못 찍었다. 그때 나는 사진기가 없었지만 다행히 그곳에는 사진사들이 많았다. 비록 돈을 주고 찍어준다고 하지만 참 고마운 일이었다. 그것조차 없었으면 그때의 기억은 완전히 머릿속에만 있었을 것이다. 그때의 사진을 보니 이종원, 김호룡은 물론 같이 찍었고 다른 친구들도 그 속에 있었다.
석가탑 앞에서 찍은 사진은 사진사가 찍은 것이 아니었다. 우리들 중에서 누가 찍었다.물론 이 사진 속에 그는 없었겠지만. 이 속에는 왼쪽부터: 김선일, 장맹열, 심인섭, 필자 이경우, 그리고 이종원이 다보탑 앞에서 포즈를 하고 있다. 그때 우리들은 그룹을 지어서 행동을 했는데 이들은 분명히 우리그룹에 있었다. 이중에 궁금한 것은 김선일과 심인섭이다. 장맹열은 나중에 교수가 되었다고 들었는데, 이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특히 심인섭, 나처럼 항상 말이 없으나 친절한 사람, 학교잡지(계우)에 ‘실비야’라는 멋진 시도 실었다. 사진사가 찍은 사진에는 김호룡이 있다.그는 1995년경에 타계를 했다. 나와 참 친한 친구였는데 너무도 일찍 하늘나라로 간 것이다. 그 사실을 나는 5년이나 지나서 알게 되었고 그때의 충격과 허탈감, 그리고 외로움은 지금도 여전하다.
수학여행의 모습들은 역시 졸업앨범을 봐야 했는데 불행히도 우리 반을 비롯한 많은 반 단체사진이 얼굴을 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으로 인쇄가 되었다(사진 탓인지, 아니면 인쇄 탓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내가 관심이 가는 사진은 역시 우리가 타고 갔을 그 증기엔진기차(그때는 화통기차라고 불렀다) 기관차, 서울역 앞에 집합한 우리들의 뒷모습.. 등등이었다. 그때 카메라를 가지고 있었던 더 잘살던 동창들이 있으면 그때의 사진을 모두에게 공개를 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새벽같이 일어나 단체로 토함산을 올라 동해로 떠오르는 해를 보고 (날씨가 조금 흐렸지 않았나?) 석굴암을 보았다. 그때 나는 화장실이 급해서 발을 동동 굴렀던 기억이 난다. 그러니까 관광개발이 거의 안 되었던 시절이라 화장실이 쉽게 띌 리가 없었던 것이다. 밤에는 한방에 모두 모여서 카드놀이도 하면서 학급친구들의 다른 면을 볼 수 있어서 모든 것이 신기롭기까지 했다. 다른 방에서는 베게 싸움도 했다고 들었다.
일정을 모두 마치고 귀향열차를 타고 또 모두들 미친 듯이 목청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고 어떤 그룹은 춤을 추며 열차는 밤을 달렸다. 그때 놀란 것은 대구역의 거대함.. 서울역보다 더 큰 것처럼 느껴졌다. 깜깜한 시골을 달리던 기차가 세상에서 제일 밝게 느껴지는 끝없는 불빛 속을 뚫고 달렸는데 그곳이 바로 대구였다. 물론 서울보다야 작았겠지만 나에게는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정말 찬란하게 빛나던 대구시, 대구역.. 그 인상이 아직도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대구에서 잠깐 내려서 그룹별로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식사를 같이 하고 뿔뿔이 헤어져서 대구 도심지를 해 메었다. 나는 이종원과 같이 다니다가 어느 가게에 들어가서 온도계를 사가지고 나왔다. 왜 온도계를 그곳에서 샀을까? 참, 우습기도 하다. 대구의 기념품이 온도계가 된 것이다. 기차 속의 광경은 볼만 했는데, 한쪽에서 미친 듯이 밤새 춤을 추고 있고, 기차 천정에 붙어있는 짐을 싣는 곳은 간이 침대로 둔갑이 되기도 했다. 기차는 달리고 달려 아침에 서울역에 도착했다. 우리들은 자기도 하고 놀기도 하며 왔지만 완전히 파김치가 되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은 물론 학교수업이 없었고.. 하루 집에서 논 셈이 되었다. 이 여행은 지금 생각해도 안 갔으면 일생 후회를 할 만한 그런 유익하고 추억에 남는 여행이 되었다.
잊을 수 없는 것이 또 있다. 고2때의 소풍이다. 보통 소풍..하면 대개 경치가 그런대로 좋은 곳이나 유적지 같은 데로 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때의 소풍은 달랐다. 김포 근처에 있는(맞나?) 대한민국 공군 제11전투비행단.. 아마도 이런 곳으로 소풍을 간 학교는 없을 듯하다. 그런데 이건 누구의 idea였던가? 그게 조금 궁금하다. 아마도 역시 우리의 자랑인 “수위모자” 최복현 교장선생님이 아닐까? 그때 비행단에서는 우리들을 트럭으로 싣고 그곳으로 안내를 했다. 물론 경치 좋은 곳에 모여 앉아서 소풍점심은 못 먹었어도 우리들은 모두 기쁜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곳의 시설을 완전히 우리들에게 공개를 한 것이다. 전투기의 조종석에도 앉아보게도 했다. 전투기는.. 그 유명한 F-86 Saber였다. 그것들이 우리의 앞에 있었고, 우리들 앞에서 뜨고, 착륙하고.. 정말 멋이 있었다. 요새 같았으면 기념 사진들이 요란하게 남아있으련만 아깝게도 그때의 사진이 한 장도 없다. 어떤 동창 중에는 아마도 남아있는 것이 있을지도. 그때 돌아오는 트럭 위에서 OB 맥주를 병 채로 신나게 마셔대던 아이들도 있었다. 아~~ 추억이여.
박영세 담임 선생님, 세월이 이렇게 흘렀어도 정이 별로 안 가는 것은 내가 좀 심했을까? 왜 그럴까? 물론 친구 이경증을 퇴학시킨 것도 이유가 될 듯하다. 2학기 중에 내가 조금 방심하면서 나의 시험성적이 떨어졌는데, 그것 때문에 나는 교무실로 불려 갔다. 나는 질책과 더불어 성적을 올릴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했는데, 그런 것은 전혀 없고, 기가 막힌 표정으로 시간을 보낸 뒤, 가정방문을 꼭 할 것이라고 ‘으름장’ 비슷한 말을 했다. 그저 내가 불쌍하다는 표정만 보았는데 나는 기분이 아주 나빴다. 그것과 더불어 나는 박선생님의 ‘폭력성’에 놀랐다. 물론 그 당시 선생님들은 학생을 자주 때리는 편이었다. 하지만 정도가 있었다. 사랑의 매를 들었는지, 증오심으로 개 패듯 하는 우리들이 보면 알 수 있었다. 그 ‘사건’은 하루 공부가 다 끝나고 홈룸 시간이 있었다. 그때 아마 반장이 정귀영이었는데, 홈룸 시간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박선생님이 들어오더니 다짜고짜로 정귀영을 패기 시작하였다. 나는 선생님이 학생을 그렇게 경고도 없이, 설명도 없이 모든 학생 앞에서 개 패듯이 때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때의 기준으로 보아도 그것은 완전히 일방적인 폭력이었다. 그 이유도 잘 모른다. 그런 선생님이었다. 박영세 담임선생님은.. 절대로 은사님으로 존경을 할 수가 없다.
정귀영은 그렇게 해서 기억에 남았지만, 기억을 할 이유가 한가지 더 있었다. 그때 그 나이 정도면 대부분 미국(간혹 영국, Beatles, Cliff Richard같은)의 pop song에 심취하기 마련이다. 우리들도 예외 없이 마찬가지로 그랬다. 그때 Top Tune Show라고 하는 동아방송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었다. 최동욱씨가 disc jockey로 미국 pop song을 소개하면서 맹활약을 할 때였다. 프로그램 이름이 아마도 <> 이었던가? 그리고 그때 히트 곡 중에는 Al Martino의 I love you more (and more everyday)란 것이 있었다. 나도 정말 좋아하는 곡이었다. 하루는 정귀영이 그 노래에 거의 미쳤는지, 수업시간 사이에 교실 뒤편 구석에 벽을 향해 서서 완전히 성악가처럼 열창을 하고 있었다. 한번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계속 부르는 것이었다. 아주 멋있게 잘도 불렀다. 그 광경이 거의 45년이 지난 지금도 눈에 아주 선~하다. 정귀영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I Love You More and More Everyday – Al Martino
교실 안에서 일어난 조금 심한 싸움을 기억한다. 쉬는 시간에 갑자기 최상철과 송관헌이 싸움을 했는데, 이건 흔히 보는 주먹싸움이 아니었다. 송관헌이 “이노무새끼 주겨버린다!” 하면서 칼(jackknife)을 들고 최상철에게 다가간 것이다. 아마도 최상철이 송관헌을 괴롭혔던 모양이다. 그런대로 조용하게 행동을 하던 그가 칼을 들었던 것은 보통 사건이 아닌 것이다. 주먹깨나 쓰던 최상철도 조금 얼어붙은 표정이었지만 체면이 있는지 곧바로 펜촉을 들고 맞섰다. 곧바로 선생님이 오시고 해서 무마가 되었다. 그 장면이 아직도 눈에 생생하다. 무엇이 송관헌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조용하게 지내던 사람이 갑자기 독기가 나면 더 무섭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최상철은 자타가 공인하는 ‘주먹’이었지만 송관헌은 그런 면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고2때 나의 주변에 앉았던 친구들을 생각한다. 김진수, 박필상, 김태영, 장맹열, 우근영..등등이 떠오른다. 김진수는 고3때에도 내 앞에 앉았다. 대학 졸업 후에 한번 만난 적이 있었다. 그가 해군에 있을 때였다. 그때 아마도 정양조, 김윤필 등도 같이 만났던 기억이다. 김태영은 1973년경 중앙청으로 여권을 신청하러 갔을 때 그곳에서 잠깐 만났다. 박필상, 졸업 후에 한번도 못 보았다. 오래 전 동창 박우윤이 보내준 1989년 57회 연말모임의 사진을 보니 그가 보였다. 반가웠다. 장맹열.. 중3때 같은 반을 했다. 항상 1등이었던 진짜 모범적인 학생이었다. 그는 지휘, 통솔력도 뛰어났다. 홈룸 시간이면 앞에 나가서 말을 조목조목 잘도 했다. 나는 그것이 정말 부러웠다. 그는 주소록을 보니 현재 경남대 경제과 교수로 있다. 그곳은 역시 그에게 적합한 곳이 아닌가?
중앙고2 시절은 나에겐 황금기였다. 분에 넘치는 과외활동으로 학교성적에는 많은 스트레스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electronics에 대한 것에 눈을 뜨고 그것을 나의 전공으로 굳히는 계기를 만들었다. 영어회화클럽으로 필수적인 영어회화를 배울 수도 있었고, 여름방학에는 시원한 마루바닥에 누워서 삼국지를 즐기는 여유도 있었고, 문화방송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에 심취하면서 팝송에 눈을 뜨고, 새로 복간된 월간지 신동아 를 과감히 구독하며 사회적인 문제에 눈을 뜨기도 했다. 일기를 계속 쓰면서 문득, 처음으로 이대로 일기가 계속되면서 나는 언젠가 죽는다..하는 인간수명의 한계도 그때 느꼈다. 이러한 모든 사치스러운 것들은 고3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입시준비로 뒤로 밀리고 만다. 선배들이 항상 그렇게 말했다.. 고2때가 가장 기억에 남을 것이라고.. 과연 그렇다.
As of yesterday, Atlanta’s 3 week long mid 90s heat wave came to end, hopefully.. This morning is more promising, heavy downpour under cooling air over. This force of nature almost instantly cooled down home servers inside a small closet in garage.
Then the heat wave got started 3 weeks ago, I measured the closet temperature at evening, was shocked to see 100 degree mark on the Honeywell’s round thermostat. Brought down small electric desk fan near the servers (4 of them), kept it turned on. But it didn’t seem temperature inside the closet coming down as much as I hoped. Then the fan stop running, apparently the motor got over-heated.
Time to do something more drastic.. open up the garage windows risking the possibility of intruders or robbers, putting electric fan on it, controlled by x10 appliance switch running timer. This made huge difference~ the garage got significantly cooler, then closet followed its cooling nicely. But still the closet temperatures stayed over 90s.. Unless spending $$$, that’s the best I could do for this summer. Amazingly the servers run flawlessly during the time.
No, still my php upload limit is set to 8M (with godaddy shared host), prevents me from uploading bigger sized file. Changing php settings with shared host environment is downright miserable experience, not recommended (probably close to impossible. But a wonderful WordPress plugin 100% solved this annoying headache in a second! With plugin named “Add from server”, I was able to make any ‘media’ files which were ftp’d onto ‘upload’ folder recognized by WordPress’ media manager. This plugin literally instantly solved this stupid php 8M upload size limit. Thanks to the plugin author: Dion Hulse.
Korean War, 1950~1953: the name misleading that just North & South fought each other. Far from it. it was between all the major powers at that period of time. UN lead by US & other major WWII victors and some other smaller powers like Thailand and Philippine.
I was only 2 years old, remembering nothing about invasion on early Sunday morning, June 25th, 1950. We lived a small family, my older sister, my parents in Seoul on the day. Like many other family, we were deeply affected by this murderous crime against their other people by North’s Kim Il Sung (a Soviet puppet and product by Stalin).
Like blitzkrieg of WWII Germany, they took Seoul in 3 days by unmatched firepower and Soviet heavy tanks. Now, we know they could have taken Seoul in much shorter time, but eastern invasion through Choonchun took more time than planned. Our president at the time was Dr Syngman Rhee, stubborn politician but very anti-communist, anti-Japanese which make him very very unique and popular among people. But he and his cabinet almost ran away overnight well before other helpless mass of people.
When they’re gone, also took only bridge on Han river was destroyed, made it more difficult for ordinary citizens to flee from invading “People’s Army”. I still don’t know why our family of 4 didn’t get out of Seoul during the chaos. My mother didn’t tell us about it, but my guess is that would be safer to hide than flee under uncertainty. My father was a high school English teacher, must have feared the communists didn’t like ‘intelligent’ people. Then the occupying forces rounded up all able-bodied male, took them to north. We still don’t know the exact circumstances but my father somehow didn’t hide, maybe naively believe nothing like that would happen.
My earliest war memories are very fuzzy but real, being under 3 years old. Our family of 3 lived (or hided) in a very small room well behind back courtyard of a house north of Seoul. I would guess it was summer of 1951 (well after landing of MacArthur’s Inchon, 2nd fall of Seoul by Chinese’s ‘Volunteer’ army, then pushed back to 38 parallel again by UN), relatively calm, but still hearing distant shell fires from northern Seoul.
Personally, I never seen dead bodies during the time, but remember lots of ruins, Jeeps and 3/4 ton trucks with GI’s, Turkish, British men.. ah, sky over Seoul was literally enveloped with F-86 Saber fighter planes, along with others like with fuel tanks at tip of wings (was it Mustang? no, it was Jet, probably F-9 Navy Jets). The almost stable battle front moved back up to the original 38th parallel, meaning Seoul looks relatively safe.
Without knowing my father’s fate, means for living, my mother struggles to make ends meet everyday for us. She found a work near where we used to live (near Secret Garden palace in the heart of Seoul) preparing foods for some ladies who comfort foreign soldiers mostly GIs and British soldiers stationed nearby high school(Hweemoon). I understand her work sounds embarrassing to her background (truly housewife, post-secondary graduates) but that’s the only work she could find. Now, many hours during her work, I used to play in the ladies’ house, seen many nice-looking soldiers with shiny medals, pistols, binoculars etc. They were very very kind to me (only 4 years old), gave me ‘genuine’ chocolates and candies.
The troop stationed nearby high school also distributed fresh milk, dried milk, dried eggs etc to our neighbors, lots of them. We’re treated fairly and nicely, but sometimes accidents happen like kids run over by 3/4 trucks, so tragic. After all, this is a war.. we all knew bad things bound to happen like that. July, 1953 saw end of war by truce. At least no more killings.. that’s good but the invading criminal Kim Il-sung’s regime stands still occupying northern half of Korean peninsula, no war criminals brought to justice, either.
Like us, so many family got broken up, losing fathers, mothers, grand parents, etc etc. Nobody witnessed the fate of my father. My mother sometimes relied upon fortune-teller about his fate, telling us he’s been killed while taken to north. I never remember him, but my older sister (3 years older) remember him vaguely, not vividly. From pictures, he looks very handsome scholar type. If he had survived to live with us, probably becomes a wonderful professor in college teaching English.
After 60 years, the criminal government still lives, now Kim Il-sung’s lunatic son ruining, starving his own people. History is there vividly, some not-so-smart people still try to rewrite the history to their own ideology. I’m really worried about the near future of Korea, knowing the North’s history, crazy government (more like Mafia than government).
한참 오래 전부터 내가 다닌서울중앙고등학교에 대한 추억을 글로 쓰고 싶었다. 중앙중학교의 추억은 전에 조금 언급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느낀 것 중의 하나는 생각과 글의 차이였다. 생각을 글로 적는 것이 대개 어렵다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라는 것, 하지만 일단 생각이 글로 남게 되면 그것이 또 생각 자체에 영향을 준다는 것 등이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이 글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사실적인 것에 있다. 물론 느낌이나 100% 주관적인 평이 곁들임은 할 수가 없겠지만.
나는 서울계동1번지에 위치한 역사 깊은 사립명문학교인 중앙학교(중,고등)를 1960년부터 1966년까지 다니고 졸업을 하였다. 그러니까 나의 인생의 바탕을 형성한 사춘기를 대부분 이곳에서 보냈던 것이다. 이것은 지금 생각하면 참 의미가 있는 사실이다. 그곳의 지리적 환경, 은사님들의 성품, 주변 친구나 동창생들의 영향.. 같은 것을 생각하면 참 그곳이 그렇게 의미 있고 중요할 수가 없다.
오늘은 고등학교 1학년을 추억할까..1963년.. 5.16 군사혁명 2년 후 모든 것들은 국가재건의 슬로건으로 행해졌다. 그 나이에 우리들은 정말 국가재건을 믿었다. 벌써 무언가 달라지고 좋아짐을 조금씩 느꼈으니까. 그런 시대에 고등학생이 되었다는 것 자체에 보람과 가슴 설렘이 있었다.
나는 1학년 2반에 속했고, 담임은 음악선생님이신 김대붕 선생님이셨다. 김선생님은 이미 중학교에서 음악수업으로 알고 있던 선생님이셨다. 그러니까 선생님도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옮기신 것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김선생님은 5.16혁명 뒤에 군대미필로 학교를 잠시 떠나셨던 듯 하다. 그런 선생님이 중학교 때 몇 분 계셨는데 기억나는 분이 미술을 가르치시던 박기만 선생님. 그러니까 예능분야의 선생님들이 군대를 미필하고 학교에 재직을 하신 셈이었다.
김대붕 선생님은 조금 예술인답게 내성적인 듯 보였지만 나는 수업 중에 한번 따귀를 맞은 경험이 있어서 조금 감정도 있고 조금 무섭기도 했다. 중학교 2학년 때였나.. 음악숙제로 ‘노래작곡’ 이 있었는데, 사실 나는 전혀 어떻게 할 줄을 몰라서 5선지의 기본 룰을 완전히 무시한 채 ‘콩나물 대가리’를 잔뜩 그려서 갔다. 그것을 본 선생님은 이건 완전히 자기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라고 오해를 하고 나의 따귀를 올려 부쳤다. 물론 나는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는데.
교실은 고교 본관 바로 뒤에 있는 붉은 벽돌교사.. 앞에서 보면 바른쪽에 있던 것이었다. 일층에 두 번째 일학년 2반이 있었다. 그 옆에는 1학년 1반, 담임은 이대호선생님(별명: 망치).. 나머지 반들은 거의 기억이 없고.. 1학년에 들어오면서 나는 아주 외로움을 느꼈는데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하나도 같은 반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참 의외였다. 한두 명은 있게 마련인데. 이것으로써 나의 1학년은 외롭게 지낼 것 같은 기분으로 시작이 되었다.
나는 키가 작아서 10번도 채 안된 1분단에 있었는데, 그 주변에는 지금도 기억이 나는 사람들: 이강호, 신명현, 김근주, 정양조, 이종식, 김대철, 김용우, 한중희, 박태동.. 과연 이들 전부가 1분단인지는 100%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때의 사진 한 장이 기적적으로 남아서 아마도 맞을 것 같다. 그때의 사진은 1학년 겨울쯤, 미술시간인가 에서 사진 찍기 실습이 있었는데 그때 서울시장 윤치영씨의 아들 윤인선이 우리분단을 찍었던 듯 하다. 왜 그가 우리 분단을 찍었는지 확실한 정황은 기억에 없다. 하지만 사진은 기적적으로 이렇게 남았다. 이들 중에는 이미 타계한 친구도 있었는데, 김대철.. 연세대에서 잠깐 보았는데 아마도 대학재학시절에 정말 젊은 나이에 타계를 한 것이다.
그 당시 이 같은 분단친구들은 나의 마음의 친구들은아니었다. 무언가 나하고 맞지를 않았고 심지어 나는 이들과 더 가깝게 지내지 못한다는 스트레스까지 받기도 했다. 기억에 김근주는 정양조, 신명현 등등과 아주 가깝게 지냈다. 그들이 김근주의 집으로 놀러 간다는 것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김용우는 아주 활발하고 특히 수업 중에 멋진 질문들을 많이 하기도 해서 나는 그것이 정말 부러웠다. 김대철은 수학을 잘했고, 특히 동아출판사 해석정설 같은 책을 수업시간 사이에 풀기도 했다. 박태동은 별명이 모택동이었다. 키가 우리보다 훨씬 컸는데 어째서 1분단이었는지.. 아니면 1분단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때 한 분단이 10명이 아니고 8명 정도였는지도.. 정양조는 양조장으로 통했고, 키에 비해서 아주 매서운 친구였다. 신명현은 아마도 소위 말하는 타교출신.. 그러니까 중앙중학교 출신이 아니고 전라도 광주인가에서 왔던 듯 하다. 기억에 광주일고를 못 가서 이곳에 왔다고 했다. 이강호도 마찬가지로 타교출신..
그때 우리 집은 부득이한 이유로 거의 6년을 살았던 정든 가회동 집에서 도심한복판의 남대문시장 옆 회현동으로 이사를 했다. 불과 1년밖에 못살았지만 사람의 주거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한 때였다. 그곳은 절대로 학생들이 살만한 좋은 주거환경은 아니었다. 어머니가 생활하시는데 조금 편해서 잠시 간 곳이었다. 그 여파로 나는 난생 처음으로 통학이란 걸 시작했다. 그 콩나물 시루 같은 버스.. 그립기도 하다. 퇴계로에서 타면 재동 앞가지 왔고, 거기서 계동골목으로 해서 학교엘 갔다. 그곳에서 나는 고1을 보냈다. 옛 동네친구들은 여전히 집에 놀러 오곤 했지만 학교에선 외톨이 같이 지냈다.
그래도 뇌리에 강하게 남았던 기억들은 좋은, 심지어 그리운 추억으로 남는다. 예를 들면, 영어선생님이셨던 양창승선생님, 새해의 노래 Auld Lang Sine을 고어영어로 가르쳐 주셨다. 그때 배웠던 덕분에 두고두고 덕을 보았다. 망치 이대호 선생님의 한문시간, 정말 그때 그렇게 배워서 두고두고 덕을 보았고, 지금도 덕을 보고 있다. 누가 한자가 나중에 영어만큼 중요하게 될 줄을 알았을까? 김대붕 선생님, 그 어려운 시창교본, 코르위붕겐..억지로 배웠지만 그때 조금 악보의 감을 잡았다고나 할까.. 역도선수 출신 체육선생님 김종훈선생님.. 주길준 교련선생님의 기억도 대단하다. 그때 중앙고의 교련조회와 교련수업은 아마도 전국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었을 듯하다. 주길준 선생님, 일명 “나까무라”, 일본군을 연상시켜서 그랬을까? 특히 교련수업에서 도표를 놓고 박격포, 기관총 등등을 배운 것도 인상적이고 밖에서 교련 수업할 때면 꼭 ‘반동’ 체조를 시키곤 했다. 이 반동체조란 체조가 아니고 양손을 허리에 걸치고 박자에 맞추어서 흔드는 것이었다. 나를 그 것이 너무도 어색하고 이상하고, 하지만 재미있었다.
1963년은 중앙고교에서 의미 있는 해 이기도 했다. 저돌적인 에너지로 최복현 교장선생님이 중앙(재건) 6개년 계획이란 것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혁명정부에서는 국가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란 것을 한창 선전할 때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중앙고 졸업생들이 서울대학을 비롯한 소위 명문대에 지금 보다 더 많이 합격을 시키겠다는 그런 계획이었다. 그 계획의 자세한 것은 다 잊어버렸지만 목표는 서울의 일류고교인 경기,서울,경복 등을 따라가겠다는 정말 대담한 계획이었다. 그 계획에 따라 우리는 주중고사라는 시험을 매주 정교시가 시작되기 전에 치르곤 했다. 확실히 공부를 더 하게 된 것은 사실이었다.
최복현 교장선생님은 참 독특하고 고집스러운, 그런 면이 있었다. 교련조회 때면 ‘수위모자’를 쓰시고 분열, 열병을 하셨다. 그 없던 시절이 full orchestra를 만들기도 했고, 조회시간에는 외부에서 유명한 분들을 모셔다가 연설, 강의를 듣게도 하셨다. 예를 들면 고2때에는 그 유명했던 “국보” 양주동박사를 초청한 것이다. 그리고 독특한 것은 ‘소년군’이란 걸 만드셨다. 이것은 boy scout 소년단과 아주 다른 것이었다. 모든 재학생이 다 소년군에 가입이 되는 것이었다. 반면 소년단은 그야말로 boy scout으로 그 당시 여건으로 보아서 돈이 꽤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었다. 소년군은 한마디로 모든 학생들에게 더 높은 목표를 주는 그런 것이 목표였다.
최 교장선생님은 또 ‘본토박이’ 영어에 신경을 쓰셨다. 지리학 전공이신 선생님이 영어에 신경을 쓰신 것은 입시공부와는 아주 거리가 먼 것이었고, 정말 미래지향적인 것이었다. 어떻게 구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에서 출판된 ‘원서’, 일명 “프리즈” 영어 책이 주 교재였고 그것을 전교 학생들에게 공부하도록 지시하셨다. 일류대목표 6개년 계획과는 별도로 진행된 아주 신선한 시도였다. 하지만 이것은 높은 목표 (본토영어로 회화하는 것?)에 비해서 시간이 가면서 입시공부에 밀려 소리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미술선생님 또한 잊을 수 없다. 불행히도 존함이 확실치.. 아마도 이두영선생님이 아닐까? 기억나시는 동창들이 있으면 고쳐 주시기 바란다. 그 선생님은 지금 생각하면 완전히 미술 프로였다. 적당히 가르치는 미술선생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입시에서는 비록 인기과목이 아닐지라도 그것에 구애를 받지 않고 정열적으로 미술시간을 이끄셨다. 그만큼 우리들에게 스트레스도 많이 주신 것이다. 숙제를 게을리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들은 선생님을 따르게 되었다. 기름으로 범벅이 된 미술시간에는 신기한 추상화를 그리게 되었고, 학년이 끝날 무렵에는 학생전체가 참여해서 ‘집단화’라는 것을 그리기도 했다. 그것은 결국 고등학교 본관 lobby에 자랑스럽게 걸려서 외부인들에게 오랫동안 전시가 되었다.
1학년 학교단체소풍도 생각이 난다. 소풍을 갔을 때, 김대붕 선생님의 자상함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아주 친한 친구 그룹이 없는 것을 눈치 채셨는지, 점심을 같이 먹을 친구는 있니..하며 물으신 것이다. 조금 창피하기도 하고 했지만 사실 선생님의 그 신경 쓰심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물론 1분단의 친구 아닌 친구들과 같이 점심을 먹었다. 그 소풍에서 선생님들 노래자랑이 있었는데.. 음악선생님이신 김대붕 선생님은 유행가를 부르기가 거북하셨는지 중간까지만 부르셨다. 그 노래가 “인생이란 무엇인지.. 청춘은 즐거워..” 하는 가수 윤일로의 유명한 노래였다. 그때 그 선생님의 계면적은 행동으로 선생님의 내성적인 성격을 알 수 있었다.
언젠가는 번호순으로 앉던 자리를 아주 거의 ‘혁신적’으로 바꾸었는데 키가 큰 애들과 완전히 섞어서 앉힌 것이다. 이런 적은 학교를 다니면서 한번도 경험을 못한 것이라 처음에는 정말 이상했다. 하지만 그것도 일리가 있었다. 이런 기회가 없으면 키가 큰 친구는 절대로 사귈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알게 된 등치 큰 친구들.. 나의 근처에 나종억 이란 친구가 있었다. 아주 선비처럼 하얀 얼굴에 돗수 높은 안경하며 완전히 학자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성복.. 자리는 확실치 않다.
나종억은 알고 보니 국회의원을 역임하신 나용균의원의 아들이었다. 독립운동지사 같은 경력이 있었고 야당의 원로 급이었는데 나중에 여당으로 변신을 하셨다. 그러니 유명한 집안의 아들이었고 당연히 부자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부유층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 나는 그것을 거의 몰랐다. 이유는 그 친구가 하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그 친구는 정말 나에게 친절하고 자상하게 대해 주었다. 내가 무언가에 쩔쩔 맬라치면 격려를 해 주곤 했다. 한번은 나보고 여자를 소개해 주겠다고 편지를 전해 주었다. 나는 너무나 놀랐고 그 편지는 그 친구가 장난으로 쓴 것으로 단정을 짓고 거절을 하였다. 아마도 그런 나의 행동이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었다. 사람을 못 믿는 것.. 하지만 나는 그렇게 믿었다. 지금도 나는 그것이 정말인지 장난인지 모른다. 그 편지의 구절도 조금 생각이 난다. 참, 순진하던 시절이었다.
인문지리 수업시간을 김기병선생님이 가르치셨다. 반들반들한 포마드로 머리를 올빽으로 빗어 넘기신 선생님은 아주 당찬 모습의 선생님이셨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최복현 교장선생님(지리학전공)의 제자였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분의 지리시간은 참 재미가 있어서 좋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수업 중에 몇 명씩 나와서 문제를 풀고 각자에게 앞에서 설명을 하도록 시키셨다. 나도 ‘걸렸다’.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많은 학생들 앞에 맞대면으로 서서 그것도 혼자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3때 아슬아슬하게 그런 ‘위기’를 넘기 적이 있었다. 그때의 나의 옆에 앉았던 친구 채현관이 재수없게 걸려서 교단에 나갔는데.. 역시 예상대로 완전히 얼어붙어서 한마디도 못하고 들어왔다. 물론 아이들의 비웃음과 차문섭 선생님의 꾸지람을 뒤로 들으면서.. 그때의 아찔한 기억을 어찌 잊으랴. 아주 당황을 했다. 하지만 순간적이지만 나도 채현관처럼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물론 칠판에다 문제는 그런대로 풀었다. 세계지도를 그리는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앞에서 앞쪽을 바라보니 예상대로 앗질 했지만 이를 악물고 설명을 했다. 끝나고 나중의 행동이 기억이 난다. 교실 뒤에서 보시던 선생님을 향해서 무언가 이야기를 했는데 아마도 이대로 됐습니까.. 하는 나의 ‘가청’이었다. 그때 선생님이 껄껄 웃으시며, “그걸 나에게 물으면 어쩌나, 모두들에게 물어야지”.. 하셨다. 그리고 나는 거의 비틀거리며 나의 자리로 ‘기어오다시피’ 했다. 그때 나의 바로 옆자리(앞자리?)에 앉았던 나종억이 나를 위로하였다. 잘했다고. 나종억, 나는 아직도 그 위로의 말을 잊지 못한다. 아니 절대로 잊지 못한다. 그 이후로는 그런 상황이 와도 그렇게 무섭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굳어져갔다.
이성복.. 어떤 계기로 친해 졌는지 모르지만 무언가 말을 하면 재미있었다. 그 친구의 특징은 손이 그야말로 솥뚜껑처럼 컸다는 것이다. 아마도 내 손의 두 배정도가 아니었을까? 여름방학이 다가오면서 나와 그 친구는 공부시간 사이에 밖에서 무전여행의 계획으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 그 당시는 김찬삼씨의 세계무전여행이 큰 뉴스였다. 모두가 그것을 희망과 꿈으로 여겼다. 그래서 우리도 세계는 몰라도 국내 무전여행의 꿈을 꾸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너무나 꿈이 컸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성복은 상급학년으로 올라가면서 헤어졌다. 그러다 졸업 후에 대학입시가 끝나고 가회동에 있는 그의 집에 잠깐 들린 적이 있었다. 이성복은 집에 없었고, 어머님께서 나오셔서 고려대 농과대학에 합격을 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주셨다. 그리고 완전히 소식이 끊겼다. 그 친구, 동창회에는 나오나..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하다.
또한 그 당시에 브라질이민 열풍이 불고 있었다. 김 대붕선생님께서 한번은 서동식의 이름까지 언급하시면서 당장 브라질이민에 대한 것(가려는 것, 말하는 것?)을 중지하라고 까지 하셨다. 아직도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아마도 서동식이 브라질에 가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때의 경제사정을 보면 브라질 이민은 사실 못사는 사람보다는 잘사는 사람들이 더 가기가 쉬었다. 하지만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될 수도 있었다.
인상적인 학급활동 중에 학급대항 농구시합이 있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시합이 있었는데 우리 반이 아마도 우승, 아니면 그 정도로 잘 했다. 그 이유는 우리반의 선수들이 여름방학에 정기적으로 모여서 연습을 했다는 것이다. 어쩐지 그 팀워크가 기가 막혔다. 그때 처음 농구 보는 재미를 알았다. 그 선수 중에는 전오현, 양창걸 등등이 기억이 난다. 나는 키도 그렇거니와 농구와는 인연이 없었다. 대신 아구는 남들보다 잘했지만..
중앙중학교 다닐 당시에 나는 동네야구에 거의 미쳐있었다. 집에 오면 그대로 바로 옆에 있는 재동국민학교 운동장으로 달려갔다. 거기서는 항상 동네야구대회가 있었다. 나는 우리 골목 팀을 이끌고 꼭 나갔다. 그때 배운 야구실력이 내가 보아도 상당한 수준에 있었다. 그런 배경으로 가끔 학교친구들과도 야구를 학교운동장에서 했다. 고1때도 예외가 아니어서 어느 주말, 그러니까 일요일에 중앙학교운동장에 모여서 우리반의 키 작은 팀과 키 큰 팀이 시합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누가 팀 멤버였는지는 다 잊어버렸지만 우리 팀에는 분명히 정양조가 있었고 다른 팀에는 나종억이 있었다. 그것 밖에 생각이 안 난다.
군사혁명의 여파로 학생들에게 근로봉사라는 과외의무가 있었다. 우리학년은 돈암동, 미아리근처의 야산에서 하루 수업을 쉬고 봉사를 했다. 정말 힘든 노동이었다. 확실히 무엇을 했는지 생각이 까물거린다. 아마도 나무를 심었지 않았을까? 하루 종일 일을 했는데 나는 과히 몸집이 세지를 않아서 아주 힘들어 했다. 그런 것을 보고 감독하는 ‘노가다’ 가 내가 농땡이 치는 줄 알고 뭐라고 했다. 그랬더니, 우리반의 ‘강달훈’이 그 아저씨보고 내가 아프다고 말해주었다. 사실 아픈 것은 아니었지만 나를 보호해준 것이었다. 그때 나는 강달훈, 나와 별로 친하지 않았는데도 그런 것을 고맙게 생각을 했다. 그곳은 정신여학교의 옆에 위치해 있어서 그곳 옆을 지날 때 모두들 흥분해서 학교 안쪽을 향해서 소리소리를 지르곤 했다. 참, 순진하지만 조금씩 이성에 눈이 떠지던 그 시절.. 어찌 잊으랴.
아~~ 또 생각나는 사람, 지옥천.. 이름이 독특한 친구, 아마도 지방에서 온 친구였다. 이름에 ‘지옥’이 들어가서 아주 인상적이었다. 시골사람처럼 구수하게 생긴 친구다. 인상적인 것은 학급대항 축구시합에서 지옥천이 선수로 뛰었는데, 그때 offside란 것을 처음 보았다. 하도 뜀박질이 빠르다 보니 공을 몰고 goal로 뛸 때마다 offside였다. 그러니까 골을 향해서 돌진을 하다 보면 공이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 코믹한 장면이었다.
2003년에 한국의 유명한 TV drama “겨울연가”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Drama에서 춘천의 학교라는 것을 서울의 우리모교 중앙고등학교에서 촬영을 한 것이 아닌가?
담임 선생님 김대붕 선생님은 나의 졸업 앨범에 계시지 않는다. 언제 학교를 떠나셨는지 기억이 안 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성심여대 교수로 가신 듯 했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아마도 음악과 교수가 되셨을 것이다. 아주 아주 이후에 내가 가톨릭 신자가 돼서 가톨릭 성가 책을 보니 김대붕이란 이름이 자주 보였다. 아하.. 우리 고1담임 선생님께서 가톨릭 성가를 작곡 하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어떻게 건강하게 지내시는지 궁금하고, 부디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빈다.
Just moved my home office to a slightly bigger room recently. Now, I can maneuver my main work desk more freely into center as an island. No more wall to hide some ugly pc related stuffs around my beautiful desk! Hiding this mess is no easy task at all, needing some $$ to buy cable conduits, etc. But real annoyance is that fact that the pc hulk has to be as near to the desk as possible: video monitor plus mouse & keyboard, that’s problem!
Solution by chance was in using a product called usb & vga extender. For usb extender, I already had it being used for printer connection. It just worked even though sometimes presented some mysterious hiccups. It would take care of extending keyboard & mouse. Real task is to extend ‘fragile’ analog vga signals beyond 10’. Well, the proliferation of big screen lcd type monitors, extending it already in mature stage with very very reasonable cost.
One I googled today was vgatovideo.com’s very reasonable product called ‘VGA to Video Extension Kit’. It looks like a perfect product for my situation. Only at $33 for 10’ CAT6 version, that’s a perfect fit. Now, question is this: how ‘good’ is this type of product? I would guess it contains some active components like balun(i.e., impedance matcher). Has anyone has some experience with this kind of product?
Follow-up on this blog:
This product turns out too good to be true. After thoroughly having tested this product, I concluded this is not working as advertised at least for my application. I needed to place 1280×1080 resolution LCD monitor at least 12’ from pc box. It initially worked fine at least an hour.. then display turns unstable like flickering. They specified this particular product as resolution up to 1280×1080 at over 12’ distance. I gave up on this so called vga-to-CATx product solution, gone back to ‘classic’ vga coaxial cable which many time supports up to 16’. Too bad, too bad.. I will have to return this ‘bad’ product soon.
휴.. 덥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6월 달에 over 90 (아마도 섭씨32도?) days가 며칠째 행진을 하고 있다. 별로 반갑지 않다. 아마도 내가 젊었으면 좋았을지 모르지만 이 나이에는 아니다. A/C(에어컨)로 식혀주는 시원함은 정말 ‘강제’적이다. 찐득거리는 피부를 조금 편하게 해줄지는 모르지만 절대로 머릿속을 편안하게 해 주지는 못한다. 우리 집의 에어컨은 조금 오래된 것들이라 energy 를 효율적으로 쓰지 못하는 것을 아는 한 더 신경이 쓰인다. 하지만 이런 high humidity에는 no choice.. 더구나 2층에 있는 home office에선 이런 날씨에 거의 필수적이다.
이런 날씨에 제일 신경이 쓰이는 곳이 바로 2-car garage에 있는 home server closet이다. 이 조그만 closet에는 freezer와 함께 home network hub(Internet router, switches, VOIP devices etc)와 함께 3 physical servers가 있다. 거기서 나오는 heat가 장난이 아니지만 보통 때는 별로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우려가 되어서 온도를 재어보니 95도까지 치솟았다. 부랴부랴 방에서 쓰는 값싼 box type electric fan을 갖다 놓았다. 물론 공기온도는 별 차이가 없지만 server같은 hardware들은 stress가 덜 하리라 생각을 한다. 그래도 좋은 쪽을 생각하자. 이런 날 뒤에 오는 선선함의 즐거움은 어떠한가. 생각,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하다.
6월 달도 절반이 지나간다. 어느새 이렇게 되었나. 4월부터 시작된 physical work이 계속되고 있다. 요새는 더위 때문에 조금 주춤해졌지만 끝이 난 것은 아니다. 바로 다음에 해야 할 일은: pet flap(door)와 Jacuzzi remodeling이다. 둘 다 energy saving과 직접 관련이 있다. 6개월째 같이 살고 있는 Izzie, the cat이 back porch의 view를 너무나 즐기는데, 요새 같은 더위에 일일이 문을 열어 놓을 수가 없어서 pet 전용의 ‘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Home Depot에서 작년에 $30주고 산 pet flap이 있는데 그것은 standard door에 맞게 된 것이라서 standard 2×4 wall에다 설치하기에는 맞지를 않는다. 2×4 wall에 맞게 설치하려면 내가 따로 framing을 해야 한다. 나의 carpentry skill이 그 정도가 아닌 모양이다. 대강 design은 해 놓고 벽도 뚫어 놓고 했는데 framing work을 아직 시작 못했다.
Jacuzzi remodeling은 사실 re-purposing에 가깝다. 거의 20년 동안 그 ‘멋있는’ 곳에서 bath를 한 것이 불과 몇 번이 되지를 않는다. 그러니 그 space가 너무나 아깝다. 더욱이 그곳의 ceiling에는 skylight까지 있어서 view는 아주 멋있을지 몰라도 사실은 여름에 2층 전체를 더 덥게 만든다. 그럴 바에는 아야 storage closet정도로 쓰는 것이 나을 듯 해서 그렇게 결정한 것이다. 이것도 framing work이 필요하지만 이것은 비교적 쉽다. Rigid insulation board와 drywall로 사실상 새로 벽을 만들어야 한다. 천정의 skylight도 마찬가지다.
Wow.. it’s getting hotter and hotter by days for almost 4 days in this Atlanta metro area. Of course, our clunky central a/c is in full force for days only for the living area, not including 2 car garage where our home server closet located.
Now, the small 6×3 closet is in trouble. The garage as well as the closet is not insulated at all. But the closet usually maintains ‘good’ temperature during the whole seasons except this kind of oppressive high heat and humidity condition. Only solution is good ventilation which the closet lacks. The currently the closet’s temperature has reached lower 90s. It has 3 main pc servers which runs NAS, 7 virtual machines (most of them runs desktop pc’s), virtual Asterisk pbx(PIAF), as well as various network devices. So far, they seem functioning normally.
I moved box-type electric fan inside the closet hoping ease down the heat, but thermometer shows almost no difference! This means that somehow the whole garage must be ventilated through window which I did reluctantly last night. I can feel some ‘freshness’ inside the closet but still no temperate moderation. Just hoping everything is alright during this time.
I’m thinking about adding insulation around the server closet. Also adding small opening (with ventilation fan) on the closet wall in future. My only question is this: over 90 (lower 90s) temperature inside this small server closet is acceptable or not? If not, what kind of air temperatures are accepta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