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초부터 나는 지독한 독감에 걸려서 거의 2주간을 고생을 하였고 사실 지금도 깨끗한 몸이라고 볼 수가 없다. 독감 특유의 패잔병들인 가래가 섞인 기침에 아직도 밤잠을 설치고 사람들 속에서는 기침이 나올까 봐 초긴장 상태가 된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평범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이 과정을 통해서 나는 많은 생각과 추억과 기억을 더듬게 되었다. 이래서 사람은 가끔 아프기도 해야 하는 것일까? 이것은 육체적인 아픔이 남기는 긍정적인 여파일지도 모른다.
흔히 겪는 감기 몸살이었으면 하루 밤 정도 Tylenol 두어 번 먹으면 끝난다. 하지만 flu 독감은 다르다. 기분 나쁜 열이 머리 속을 괴롭히고 각종 allergy 반응으로 정신이 없는 것이다. 이런 식의 독감을 나는 근래에 앓아 본 적이 없었다. 기억조차 잘 나지 않을 정도인 것이다. 그래서 심리적인 여파도 컸다. 아~ 내가 늙었나 보다.. 하는 한숨이 나오는 것이다. 이래서 사람들이 부랴부랴 독감예방주사를 맞는구나 하는 후회감도 들었다.
비교적 규칙적이고 바쁜 평소 나의 daily routine들이 all stop이 되고 보니 이런 저런 생각들로 더욱 기분이 쳐지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나는 ‘남이 아플 때’ 나의 자세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나는 남의 아픔을 실감을 못하며 ‘건성으로’ 그들을 대했던 것이다. 아팠던 기억을 잘 못한 탓도 있겠지만 그래도 나는 그들의 아픔에 동참한 기분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새로 느낀’ 생각을 나는 아마도 이것도 성모님께서 나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이 아닐까 추측도 해 본다. 그렇다면 나는 아픔을 통해서 좋은 것을 배운 셈이다. 물론 독감 정도로 이보다 훨씬 고통이 심한 병과 비교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상상은 하게 되었다.
솔직한 고백으로 나는 주변의 아픔, 특히 육신적인 아픔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저 그들의 아픔을 ‘피하기만’ 하는 자세였다. 동정은 할지언정 적극적인 자세로 사랑으로 동참하며 아픔을 반으로 나누려는 ‘용기’가 나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다. 이런 것으로 나와는 정 반대 스타일인 연숙과 항상 갈등을 빚으며 살았다. 아픔을 나누려는 것과 그저 아픔을 속으로 참으며 ‘없는 것’처럼 행세하려는 것은 사실 정 반대가 아닌가? 나의 변명은 항상 ‘아픔은 속으로.. 참고.. 나타내지 말고..’ 하는 나의 성격 탓이라는 것 뿐이었다.
이번에 느끼는 아픔으로 나는 어릴 적, 태고 적의 아픔을 회상하기도 했다. 희미한 기억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또렷한 기억들이다. 어릴 적 나는 비교적 많이 병을 앓았다. 아직도 그때의 ‘열의 고통’을 나는 또렷이 느낀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역시 ‘독감’ 종류였을 것이다. 나이 탓인지 사경을 헤맬 정도를 고열로 치솟고 나는 완전히 며칠을 악몽 속에서 헤 매야 했다. 단출한 우리 식구, 엄마와 누나는 초 비상상태가 되고, 100% 나의 고통을 덜어주는 헌신적인 노력을 했다. 그 때의 그 느낌들은 역시 간단하게 표현해서 ‘사랑’이란 것이었다. 식구간의 사랑이기도 하지만 인간적인 사랑의 표현일 것이다.
내가 제일 사경을 헤맬 정도로 아팠던 것은 내가 원서동에 살았던 국민학교 3학년 시절 그러니까 1956년경이었다. 평소같이 밖에서 신나게 놀다가 나는 갑작스레 치솟은 열로 눕게 되었고 그날 밤으로 나는 심한 고열로 집안이 초비상이 되었다. 당시는 양의원과 한의원이 거의 같은 비율로 있었던 시절이었고 대부분은 동네에서 친근한 한의원에서 병을 고치곤 했기에 ‘주사를 맞는’ 의원은 가급적 피하고 살았고, ‘주사의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고열의 밤을 간신히 보내고 나는 역시 계동에 있었던 ‘계산 한의원’으로 가서 약을 지어다 먹게 되었는데.. 그것이 별로 효험이 없었다. 게다가 당시의 한약은 애들이 먹기에 너무나 고통일 정도로 쓴 것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한약의 특성상 ‘급한 병’에는 ‘약초의 효험’이 뚜렷할 수가 없었다. 그런 상태로 나는 계속 고열에 시달리고.. 그때 내가 꾸었던 ‘꿈’들과 ‘환시’들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고열로 두뇌의 기능이 정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기억을 못했지만 나중에 들으니.. 내가 벌떡 일어나서 해괴한 행동(하늘을 향한 기도 비슷한)을 했다고 했다. 그 이후 나는 ‘별수 없이’ 가회동에 있는 양의원으로 갔고, 결국은 아프기만 한 주사를 맞고 회복이 되었다. 그때의 경험으로 어머님은 우리 집 터가 별로 좋지 않다고 믿게 되었고, 다른 쪽으로는 ‘급한 병’에는 ‘주사가 최고’라는 경험적 진리도 알게 되었다.
이런 병치레는 나이가 들면서 줄어들었지만 어릴 적의 이 고통스런 병치레는 명암이 교차되는 묘한 추억을 남겼다. 아플 때면 제일 호사스런 따뜻한 아랫목에 누어서 최고의 서비스를 받았던 그 아픈 때는 사실 내가 제일 사랑을 많이 받았던 순간들이었던 것이다. 그 당시 모두가 경제적으로 가난하던 시절, 어디서 구해 왔는지 ‘미제 깡통’ 류의 맛있던 snack들, 특히 파인애플의 맛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을 한다. 그런 ‘사랑’ 때문에 나는 우습게도 아플 때를 은근히 기다린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간호적인 사랑을 받기만 했지 주는 방법과 용기를 배우지 못하며 자랐을지도 모른다. 아직도 그렇다. 이것은 내가 남은 여생에서 풀어 나가야 할 큰 과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