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낙영, 오성준, 최종인 선배..
꽤 오랜만에 추억해 보는 이 세 이름들: 안낙영, 오성준, 최종인. 우선 이 세 사람은 나의 중앙고교 선배들이다. 안 선배는 53회, 오,최 선배는 모두 54회 졸업생. 내가 57회,그러니까 나의 3년, 4년 선배들이다. 그리고, 모두 연세대 전기공학과에서 같이 공부한 선배들이라는 것이다. 1968년부터 1971년 졸업할 때까지 같은 학년, 같은 과에서 공부를 한 것이다. 이 중에서도 나는 오성준 선배와는 다른 선배에 비해서 더 많은 추억이 있다. 그것을 소중하게 추억하고 싶다.
연세대학 2학년이 시작되던 1968년.. 나는 1966년에 입학했지만 1학년 중간에 1년 휴학을 해서 1967년 가을에 복학을 했었다. 입학 때와 달리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재미있는 것이 공부란 것도 그때 알았다. 1학년 1학기 때의 below average를 한 학기 만에 완전히 만회를 해서 이곳의 표현으로 dean’s list를 넘어서게 되었고 심지어(?)는 쥐꼬리만한 장학금까지 받게 되었다. 이때의 느낌은.. 아.. 열심히 하면 꼭 무슨 좋은 결과와 보답이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1968년 초, 나의 생일날 북괴의 김신조 일당이 박정희 “목 따러” 온 후에, 2학년이 되면서 대거 복학생들이 들어오게 되었다. 대부분 군대를 마치고 온 3년 정도 선배들이었다. 그 중에 중앙고 출신이 3명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이 세 선배들이었다. 그때 재학생으로 중앙고 출신이 나까지 5명이 이미 있었다. 나(이경우), 이윤기, 박창희, 김태일, 이상일 등등이었다. 이중 나와 이윤기는 중앙 57회였고, 나머지는 모두 58회 출신이었다. 그래서 중앙고 출신이 8명이나 된 것이다. 이 정도면 과에서 단일 고교로써는 굉장한 숫자였다. 과대표를 뽑는 선거 같은 것이 있으면 그 이(利)점은 상당할 정도였다.
이 세 명의 선배들은 참 쾌활하고, 농담 잘하고, 다정한 선배들이었다. 그 전까지는 나는 선배라고 하면 우선 겁을 내곤 했다. 고등학교 때 사실 그렇게 교육을 받아서 그런가.. 거의 군대식으로.. 일년 선배라도 길에서 보면 경례를 하곤 했으니까. 잘못해서 반말이라도 하는 날이면 그때는 세상의 끝이라고나 할까.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런 환경들이 다 일제시대의 학교전통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하지만 이때는 처음으로 선배들의 ‘포근함’을 만끽하게 된 것이다. 물론 반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로 농담을 할 정도가 된 것이다.
안낙영 선배.. 노란 반팔 셔츠를 좋아한 사나이.. 짓궂고, 야한 농담을 신선하게 하고, 누나 있으면 소개하라는 농담을 즐기는 여유에 반해서 공부는 정말 심각하게 하는 학구파다. 강사나 교수에게 아주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날리는 자랑스러운 선배였다. 최종인 선배.. 정말 구수하고 다정한 얼굴의 선배다. 말도 그렇다. 그런 것에 비해서 말 수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사진이 취미라는 것도 알았다. 연영회라는 연대 사진 서클에서 새 회원을 모집해서 양건주(화공과)와 갔는데 거기서 만났다. 그때 각자 돌아가며 자기를 소개 하는데 최 선배는 군대에서 사진에 대한 경험이 많다고 말을 했었다. 그 당시 연영회의 모임은 갈월동에 있는 연영회 간부학생의 집에서 있었는데, 그때 한창 인기가 있던 그룹사운드 까지 출연을 할 정도로 대 성황인 모임이었다.
그리고, 오성준 선배.. 다른 선배에 비해서 더 많은 추억을 가지고 있다. 별명도 있었다. 오박사..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만물박사처럼 참 여러 가지를 많이도 알고 있었으니까. 봄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안 되어서 나는 몇 명의 고정적인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는데, 양건주, 이윤기, 김진환, 김태일, 박창희, 그리고 김철수 등등 이었다. 이중에 양건주만 화공과였고, 나머지는 모두 우리 과였다. 출신도 다양한데, 양건주, 이윤기는 나의 중앙고 동기이고, 김태일, 박창희는 중앙고 1년 후배, 김진환은 전라도에서 온 유학생, 김철수는 강원도에서 온 유학생이었다. 어쩌다 이들과 어울리게 되었는데 지금도 생각나는 즐거운 기억 중에는 수업이 끝나면 연대입구에 있던 빵집에서 가위바위보를 해서 빵 값을 지불하곤 하던 것이었다. 대부분 다방에서 죽치곤 하던 시절, 고교생처럼 웬 빵집.. 그래서 더 재미가 있었나 보다. 그러다가 날씨가 좋은 봄에 관악산으로 등산을 가기도 했다. 그때 찍은 사진 뒤에는 날짜와 함께 Amigo라는 이름이 있었다. 그것이 Spanish로 friend(남성)란 뜻인데 그 당시 모임의 이름이 없어서 우선 그렇게 붙인 것 같았다. Club Amigo..
하지만 이 클럽엔 “치명적”, 결정적인 단점이 있었다. 멤버가 모조리 “우중충하고 쾌쾌한” 냄새 나는 남자들 뿐인 것이다. 조금은 하얗고 부드러운 듯한 여자들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는 꿈같은 이야기였다. 하나같이 여자친구 하나 없는 그야말로 숫총각 뿐이었으니까. 어떤 친구들은 숫제 여자에게 관심도 없었다. 아직도 미성년인 것처럼.. 그러다가 오 선배에게 하소연을 하게 되었는데, 뜻밖에도 쾌히 승낙을 하는 것이 아닌가? 오 선배는 그 정도로 다정하였다. 그러더니 나와 이윤기를 데리고 연세대 뒤쪽으로 버스를 타고 가서 어느 아담한 양옥집으로 갔다. 알고 보니 오 선배의 공군복무시절 친구라는 사람의 집이었다. 그 집에 이화여대생 딸이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 여대생을 소개시켜주러 간 것이다. 성격이 이랬다. 아주 화끈하게 일을 즉시로 해 치우는 그런..
그날 그 집에 그 여대생은 없었다. 그래서 나중에 연락처를 받아서 연락을 하게 되었는데, 그 여대생의 이름은 “김갑귀” 씨였다. 이름이 하도 요상해서 물어보니 갑오년에 귀하게 났다고 해서 그렇게 했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우리는 김갑귀씨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 그런 인연으로 오성준 선배는 우리들 클럽의 활동에 ‘고문’격으로 가끔 조언을 하곤 했다. 선배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여대생회원 아이디어는 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김갑귀 씨가 열심히 자기의 classmates들을 소개 시켜주긴 했지만 글쎄.. 어딘가 우리들하고 맞지를 않았다. 키가 너무 크지 않으면 얼굴이 그렇다던가.. 그런 것이었다. 한마디로 우리들이 더 어려 보일 정도였다. 이것을 김갑귀 씨가 알고 아주 섭섭해 했다. 김갑귀 씨는 조금 어리광 끼가 섞인듯한 표정과 다정함이 있었다. 나는 그녀의 그런 면이 참 좋았다.
그녀는 역시 정이 있었다. 어쩌면 우리 그룹에 대한 인상이 좋았는지도.. 곧 바로 자기의 제일 친한 친구를 소개시켜 주었다. 그 친구가 바로 이선화 씨였다. 선화공주를 연상시키는 그런 간호사 지망생이었다. 그녀는 사실 김갑귀 씨와 창덕여고 동창이었다. 김갑귀 씨의 개인적인 친구였던 것이다. 그래서 곧바로 선화씨의 classmates로 대상이 바뀌었고, 지난번의 실패를 거듭하지 않으려고 이번에는 조금 계획적으로 일을 진행하였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뒤에 “연호회”라고 하는 남녀 대학생 클럽이었다. 목적은 단 한가지: 친목도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인연으로 오 선배는 우리와 아주 친한 선후배관계를 유지하였다.
졸업 후에 오 선배는 곧바로 대학원 진학을 했다. 나머지 선배들은 연락이 끊기고, 나는 미국으로 오게 되어서 이 선배들과는 사실상 관계가 끊어진 셈이다. 아주 나중에 오성준 선배의 소식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듣게 되었다. 역시 예상한 대로 직장에서 맹활약을 한다는 것이었다. 안낙영 선배도 거의 우연히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그때는 내가 Ohio State University에 다닐 당시, 어떤 한국유학생하나가 Old Dominion University에서 transfer한 사람이었다. 서로 우연히 얘기 하던 중에 안낙영 선배가 그곳에서 공부를 하고 이어 직장생활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 바로 전화를 해서 서로 소식을 나누었다. 간호사인 아내가 있다고 들었다. 아마도 그쪽에서 계속 살고 계시리라 믿는다. 최종인 선배는 완전한 연락 두절.. 다른 선배를 만나기 전에는 알 길이 없을 듯 하다. 그래서 이 최종인 선배는 조금은 전설적인 이미지로 나의 머리에 남는다. 언젠가 한번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