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증, 이도영, 배경상..
배경상, 이도영, 이경증.. 나에게는 서울 창신동 삼총사..라는 인상이 깊이 깊이 뇌리에 남아있다. 동대문 옆에 있는 산동네.. 창신동. 나는 물론 그곳의 근처에서도 살아 본 적이 없었다. 서울운동장에 갈 때 동대문 옆으로 보이는 산동네..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곳이다. 그 곳이 내가 알던 이 삼총사가 자라던 곳이었다.
이중에 이도영, 배경상은 모두 이대부고(이화여자대학교 부속 고등학교) 동창이기도 했다. 이경증은 나와 같이 서울 중앙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녔다. 경증이는 고2때 담임 박영세 선생과의 trouble로 학교를 떠나게 되어서 검정고시를 보고 연세대 지질학과에 입학, 졸업을 했다. 그러니까, 경증이는 고등학교 2학년 때 헤어지고 연세대학교 졸업 무렵 쯤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나는 대학교를 군대에 가지 않고 계속 다녔지만 경증이는 연세대에 입학한 후에 곧 바로 입대를 했는데, 거기에 멈추지 않고 월남전에 자원을 했고 그곳에서 맹호부대의 일원으로 케산전투 같은 곳에서 싸웠던 ‘용감한’ 친구였다. 나는 경증이의 이런 ‘인상과 어울리지 않는’ ‘의외의 삶’을 참 좋아했다.
다시 만났을 당시 우리들은 상당히 다른 길을 걸어오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자라온 동네가 서로 아주 다르고 거기에 따른 친구들의 배경이 완전히 달랐다. 한 마디로 그의 동네친구들은 내가 전혀 모르고 경증이도 나의 친구를 모르는 것이다. 그 중간에 중앙중, 고교의 친구들이 서로 다리를 놓는 역할을 했다. 특히 동창 김호룡, 우진규 같은 친구들은 경증이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중간에는 역시 내가 있었다. 그런 이유로, 처음 다시 만났을 때 조금은 서먹서먹한 감정이 조금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그게 진정한 ‘어리고 순진한 우정’이 아니었을까.
그 때부터 나는 경증이의 ‘동네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어울리면서 우선 놀란 것이 그 많은 창신동 친구들의 숫자였다. 그 중에는 그때 한창 인기절정의 통기타 가수 이장희도 그 중의 한 명이라고 들었다. 어찌 그렇게나 많을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사를 자주 다녀서 오래된 동네친구가 많지 않았지만 경증이는 아마도 그 창신동의 토박이여서 그렇게 친구가 많았던 모양이었다. 그 중에서 처음 사귀게 된 사람들이 바로 이도영, 배경상이었다. 어떻게 같은 이대부고를 다니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남녀공학을 다닌 흔적이 여기저기 보였다. 진한 농담으로 이도영은 이대부고 다닐 당시 여학생의 옆에 가면 냄새로 지금 period 인가를 알 수 있다고 해서 모두들 게면 적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자연스레 여자들을 대할 수가 없었다.
이도영은 이미 어떤 재수하는 어떤 귀여운 여자와 동거 중이었고, 배경상은 그 보다 더 야심이 커서 ‘돈 있는’ 여자를 만나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래서 나이에 걸 맞지 않게 최고급 까만 정장 양복을 입고 다녔다. 키도 커서 멀리서 보면 무슨 영화배우 처럼 보이기도 했다. 거기에 비하면 경증이는 사실 여자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다. 나는 그의 그런 초연한 태도가 그렇게 신선하고 멋있게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나이에 맞지 않게 점잖다고나 할까. 또 한 명의 친구가 있었다. 성은 잊어 버렸다. 이름은 경화였다. 꼭 여자이름 같지만 아주 예술가처럼 멋지게 생긴 남자였다. 그 친구는 미술학도인데 참 그림을 재치 있게 잘도 그리는 예술가 타입이었다. 이렇게 성격, 배경, 취향이 다른 친구들이 경증이 주변에서 아주 멋있게 어울리며 청춘을 구가하던 그 시절.. 하지만 모두들 쉽게 풀지 못하는 고민들은 한두 가지 다 안고 ‘밤을 잊은 그대’ 의 청춘을 보내던 시절이 우리젊음의 전성기, 1970년대 초였다.
그때 우리들이 명동 같은 곳의 다방에서 모이면 주로 여자들이 많이 모이는 그런 곳을 골라서 만났다. 물론 여자들에게 장난스럽게 ‘추군’대려는 의도가 갈려 있었다. 일본에서는 그런 것을 hunting이라고 하던데 우리는 그저 “꼬신다” 고 했다. 심지어는, 그것에 관한 방법론 같은 것은 “꼬셜로지”, 그러니까 sociology같이, 라고까지 했다. 우리는 완전히 아마추어수준에 불과했지만 그런 곳에 가보면 완전히 고정멤버 같은 프로 급 들도 많이 보였다. 우리 팀에서는 배경상이 조금은 프로급이 아니었을까? 주로 장난스러운 게임을 하곤 했는데 여자들이 그룹으로 모인 곳에 혼자 가서 미팅을 하자고 제안을 하는 게임이었다. 다들 잘 했는데 나는 끝까지 그럴 용기가 나질 않았다. 의외로 점잖은 경증이가 그런 것을 대담하게 잘 하곤 했다. 대부분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하지만 아주 가끔은 성사가 되는 수도 있었다. 그런 것 때문에 재미가 있었지 않았을까?
마지막으로 성사가 된 미팅그룹이 생각이 난다. 출신성분이 아주 다양한 여자들의 그룹이었다. 그런대로 정기적으로 만났다. 거기서 만난 사람이 바로 김성혜씨였다. 조금은 도도하고 고고한 척 하는 듯한, 툭하면 영어로 대답을 하곤 했다. 어떤 미국사람에게 영어회화를 배운다고 해서 물어보니 얼마 있다가 간호원취업으로 미국엘 간다고 했다. 또 생각나는 사람, 이대생, 오연희씨.. 우리는 우연희, 라고 불렀다. 밝고, 항상 웃는듯한 얼굴.. 그들은 다 어떻게 살았고 지금은 무엇을 할까.. 간호원 김성혜씨는 나중에 미국에서 다시 만나는 인연을 가지게 된다.
1970년대 초에 그들과 어울리며 찍은 사진이 아주 적게 남아있지만 불행하게도 내가 제일 궁금하던 배경상이 빠져있다. 등산가서 찍을 때 왜 배경상이 빠져있을까? 기억이 안 난다. 돈 많은 여자를 쫓아다니느라 너무 바빠서 그랬는지도..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이도영은 왜 재수생 cute girl friend를 안 데리고 왔을까. 그것도 의문이다. 꼭 붙어 다니고 했는데. 그들과 마지막으로 만났던 것이 1975년이었다. 잠깐 여름에 귀국을 했을 때 정말 반가운 만남을 했다. 몇 년 전 여자들을 쫓아가느라고 명동을 헤매던 때를 서로 그리며 다시 명동을 누비기도 했다.
우리는 그때보다 조금은 더 어른스러워져 있었다. 3~4년은 더 늙은 것이었다. 그들은 어떠한 인생을 살았을까? 이도영은 그 재수생과 결혼을 했을까? 배경상은 정말 부잣집 딸을 만났을까? 경화는 무슨 예술 대상을 받지나 않았을까? 상상의 나래를 펴 본다. 그 중심에 있었던 나의 친구, 이경증.. 1980년 나의 결혼 때 잠깐 보고 다시 없어졌다. 이 친구는 거의 정기적으로 만나고 헤어지고 한 셈이었다. 조금은 방랑자 기질이 있다고 할까. 자식 어디로 증발을 했니..이제는 슬슬 나타날 때가 되지 않았니? 죽기 전에 한번 소식이라도 듣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