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파란 하늘의 아침으로 시작되었지만 오후부터는 갑자기 습해지고 찌는 듯이 더워졌다. 남쪽으로부터 열대성 구름이 갑자기 몰려 온 것이었다. Airport쪽은 결국 이날의 최고기온 기록을 세우고 (96F), 우리가 사는 쪽은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풍우가 몰려왔다. 우선은 시원해서 아주 반가웠으나 강풍과 번개가 조금 신경이 쓰였다. 쓰러질 만한 키가 큰 나무들은 몇 년 전에 다 잘라서 그 걱정은 이제 없으나 번개는 별 수가 없다. 전기가 나가면 조금 골치가 아프니까. 그런데 어제는 결국 조그마한 번개의 피해를 입고 말았다.
나의 kitchen office에 있는 pc의 network connection이 번개로 인해서 spark를 보이더니 network이 완전히 끊어져 버렸다. Home server로부터 받아보는 video가 끊어지고 물론 Internet도 끊어지고.. 처음에는 pc의 Ethernet card만 zap이 된 것으로 희망을 하고 그것부터 바꾸었지만 역시 no network, Internet. 다음은 server까지 연결된 모든 wiring을 check, OK. 그 connection에는 두 대의 network switches가 연결되어 있는데 알고 보니 모두 zap이 된 것이었다. 나의 추측에, pc쪽에 있는 network switch의 power adapter (small wall transformer)로 big spike가 들어온 듯 하였다. 거기는 사실 surge protected power strip이 있었지만 그것이 제대로 보호를 못 해준 모양이었다. 이것을 다시 바로 잡는데 오늘 성당에 다녀와서부터 거의 2시간이나 걸렸다. 벼락의 직접적인 피해는 이번이 사실 처음이었다. 이 정도인 것 만도 다행으로 생각해야겠다.
오늘 주일도 큰 일이 없이 연숙이와 둘이서 근처에 있는 우리의 미국 본당 Holy Family Catholic Church의 8시반 미사를 다녀왔다. 예외가 없는 한 우리는 미사 후에 Panera Bread에 들려서 Bagel과 coffee로 아침을 때운다. 요새는 이것이 우리부부의 유일한 social outing역할을 하고 있다. 본당에서 받아 온 주보를 보니, 표제에 Grandparents Day란 글이 들어왔다. 별로 ‘유명한’ 기념일이 아니지만 본 기억은 있다. 이게 나이가 이정도 되니까 들어왔는지도 모른다. 알고 보니 바로 오늘이 그 날이었다. 부리나케, googling 을 해보니 아래와 같은 구절로 설명이 되어있었다.
National Grandparents Day originated in the United States in 1978. President Jimmy Carter signed the proclamation on August 3, 1978 after Congress passed the legislation proclaiming the first Sunday after Labor Day as National Grandparents Day.
The official statute cites the day’s purpose of Grandparents Day as: “…to honor grandparents, to give grandparents an opportunity to show love for their children’s children, and to help children become aware of strength, information, and guidance older people can offer”.
아하, 역사가 그런대로 된 기념일이었구나.. 우리는 아직도 grandparents가 덜 된 상태고 우리의 grandparents는 전혀 안 계시고 하다 보니 이지경이 되었구나. 우리 아이들에게는 우리 부모님들이 grandparents일 텐데.. 하며 생각하니 갑자기 슬퍼진다. 손녀들의 재롱도 거의 못 받아보신 것을 생각하면 더욱 우울해진다.
Barack Obama, 지독히도 재수가 없는 미국 대통령중의 하나가 되고 있다. 정말 놀랍기만 하다. 물론 그에 대한 기대가 너무도 컸다. 거의 실현 불가능한 그런 기대들 말이다. 꿈과 현실은 그 골이 너무나 깊었던 것일까. 그의 능력도 생각보다 일반적인 기대치를 밑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의 2년에 가깝게 유심히 관찰하면서 느낀 것은 그는 절대적으로 ‘성공’을 할 수가 없는 조건이 너무나 많았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야당이 되어버린 Republican(공화당)의 ‘작태’는 정말 역사적인 최저, 최악이었다.
옛날, 고국에서 ‘반대를 위한 반대’의 야당은 비교도 되지를 않는다. 이것은 정말 이조 시대 장 희빈이 중전마마를 해하기 위해서 구중궁궐의 뒤에 숨어서 저주의 화살을 쏘는 정도였다. 한 마디로 Obama가 ‘절대로 성공하는 것을 막는다’ 라는 것을 비공식 당 정책으로 쓴 셈이다. 이것은 정말 이곳에 오래 살면서 처음 보는 거의 추태에 가까웠다. 한마디로 이곳, 이 나라, 이상과 희망이 조금씩 사라지는 듯한 기분이다.
6월초에 home office를 옮기면서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것들을 거의 3 개월 넘어서 조금씩 보고 있는데,대부분이 책이나 서류 같은 ‘종이’ 류이다. 그러다가 ‘정의의 사자 라이파이’ 복간 본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운 동창 친구 양건주가 2003년에 김산호 화백의 친필 사인까지 받아서 보내준 것이었다. 그때 어머님을 잃고 정신적으로 심한 우울증으로 방황을 하던 나를 구해준 건주의 우정에 정말 깊은 감동을 받았고,사실 어떻게 갚아야 할지 난감한 심정이었다.
우리또래 남자들이라면 사실 라이파이를 모른다면 아마도 깊은 산골에서 살았던 친구들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유명했던 대작, 걸작, 산호의 라이파이..를 살아 생전에 다시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질 않았다. 그 지옥 같았던 국민학교 6 학년, 입시공부의 고통에서 조금이나마 웃고, 기뻐했던 순간들은 아마도 ‘산호의 라이파이의 다음 편 들이 나오던 날들’ 이 아니었을까? 너무 감동적이라 산호선생께(나중에 알고 보니 대학생 정도의 나이) 편지까지 보내고 했었다. 그것이 정확히 반세기 전이었다.
세상은 조금 더 오래 살고 볼 것이다. 최고의 악당 소련이 없어지고, 공산당도 크게 무서울 것이 없게 된 세상을 우리는 어렸을 때 ‘절대로’ 기대를 못하던 것이 아니었는가? 그런 류의 작은 사건들 다른 것들도 참 많아서, 빨리 죽는 것이 조금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예외는 진빨갱이,마피아괴수, 김일성일가..겠지만. 하지만 Cuba의 카스트로(Fidel Castro)의 말을 들어보자. 이란의 ‘과대망상증’ 대통령, Ahmadinejad의 계속된 반 유태계 (anti-Semitic) 적인 태도와 정책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을 했는가? “유태인들은 우리들 보다 훨씬 어려운 존재위협 속에서 살았다. 2 차대전 때 독일의 유태인 학살 (Holocaust)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참, 세상 많이 변했다. 조금이라도 오래 살고 볼 것이다.
오늘 같은 날, 갑자기 듣고 싶은 노래는.. 역시 oldies.. 아마도 1975년 경이 아니었을까? 멋있게 생긴 Barry Manilow가 멋있게 불렀던 “I Write the Songs”, 밝았던 그 시절을 추억하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