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오랜 된 이야기는 사실 아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족도 예전에는 나의 이 이상한 귀신 이야기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니까 남들에게 말을 해도 반응이 그저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을 기억하고 싶고 더 나아가서 이렇게 “개인 역사적인 기록”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제목이 사실은 잘 연결이 되지 않을지도…. 육이오, 원서동, 동섭이네 집, 영구차, 귀신.. 등등이 말이다. 우선 배경이 되는 시기는 나중에 생각을 해 보니 1953년 경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재동국민학교에 들어가기 1년 전 쯤, 내가 5살 정도나 되었을까? 그때의 기억은 사실 아주 또렷하다. 한국전쟁 휴전이 되기 일년 전부터 기억이 나는 것이다. 하지만 아주 가끔 정말 꿈에서나 볼 정도로 가끔 그 이전도 기억을 한다. 그러니까 1952-3년 정도쯤일까?
6.25전쟁이 터질 당시 우리 집은 4가족의 행복한 가정이었다고 들었다. 나보다 세 살 정도 위인 누나와 같이 우리는 평범한 가정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 당시 경기고등학교의 영어선생님으로 계셨고(그 전에는 선린상고에 재직, 심리학교수가 되신 장병림씨와 같이 근무) 어머님은 이화여전 가사과 출신의 가정주부. 언제인지 모른다. 아버님이 납북이 되신 것이.. 그 때의 자세한 상황을 나는 어머님으로부터 자세히 듣지를 못했다. 아마도 인민군(괴뢰군이라고 불렀다)들이 후퇴를 할 때쯤이 아니었을까? 나의 모교인 재동국민학교에 젊은 남자들을 모두 집합시켜서 미아리고개를 넘어 북으로 끌고 갔다고만 들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단장의 미아리고개” 노래의 불씨가 아니었을까? 나의 죽마고우 유지호의 아버님도 그때 같이 끌려가시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을 하셨다고 들었다. 지호 아버님으로 부터 왜 그때의 이야기를 더 자세히 들어보지 않았는지 정말 후회막급이다. 나중에 이곳의 천주교 교우 한 분께서 말씀이 아마도 나의 아버님이 영어선생이라서 끌고 갔을 것이라고 귀 띰을 해 주셨다. 조금 동감이 가는 말씀이었다. 그 이후 우리는 아버님의 생사를 전혀 모른다. 전혀..
어머님은 생활력이 세다는 이북여자였다. 외가댁은 “버들 양씨”로써 모두 함경도 원산의 대 지주였고 어머님을 서울의 이화여전으로 보내셨다. 다른 고모, 삼촌들도 모두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신 그런 개화된 집안이었다고 들었다. 어머님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시고 서울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하셨는데 해방이 되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남북이 갈리고 외가 쪽은 대지주로써 “악질 반동”으로 재산을 다 몰수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가 쪽은 워낙 식구가 많아서 그랬는지 삼팔선을 넘지 않으셨다. 그때의 애기로, 내가 태어났을 때 외 할머님께서 혼자 삼팔선을 넘어서 왔다 가셨다고 들었다. 그리고 김일성(개새끼)의 육이오..
아버님이 납북이 되시고 완전히 혼자 서울에 우리 두 남매를 데리고 남게 되신 어머님의 심정을 누가 알 수 있을까? 나도 사실 요새 그런 상황을 상상하며 눈시울을 적시니까. 그때 우리는 집이 없었다. 남의 집에서 산 것이다. 전쟁 중에 집 걱정보다는 우선 밥을 먹어야 하는 게 급선무가 아닐까? 이남에 일가친척의 수는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완전히 혼자였다. 그때 아버님의 친구이자 나의 친구 유지호의 아버님이 사시던 곳, 원서동에 한옥이 있었다. 1.4 후퇴 때 임시로 그 집으로 가셨다. 어쩐 일인지 지호네 집은 지호만 우리 어머님께 남겨두고 (갓난아기) 전부 전라도로 피난을 간 것이다. 서울이 다시 유엔군에 수복이 되고 지호네 집은 돌아왔고, 우리식구는 같은 원서동에 있던 어느 무당집에서 살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집 무당 아줌마네는 우리같이 남매가 있었는데 남자애(김병세)는 나와 동갑으로 나중에 재동국민학교를 같이 다니고 그 누나(양님이 누나라고 불렀다)는 나의 누나와 동갑, 같이 재동학교를 다닌 인연이 있었다. 그 집에 살던 기억이 나는 그런대로 난다. 무당이 무엇인지는 잘 몰랐어도 대청 마루에 무서운 ‘귀신’ 같은 것이 앉아있었다는 기억이 뚜렷이 난다. 그 때가 아마도 1952년경 쯤이 아니었을까?
그 병세네 집에 살면서 어머니는 원서동 조금 아래쪽, 그러니까 돈화문 근처 (비원 정문)의 어떤 골목에 있던 한옥에 가서 밥과 빨래 등을 하는 일을 하셨다. 그 집을 어머님은 동섭이네 집이라고 부르셨다. 우리도 심심하면 누나와 같이 손을 잡고 그 집에 놀러 가곤 했다. 그 집이 무슨 집인지는 잘 몰랐고 동섭이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그저 동섭이네 집이라고만 알았다. 그러다가 얼마 후에 우리는 그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왜 가야만 했는지는 모른다. 그 집은 무당집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우선 밝고, 아주 마당도 크고 사랑채가 여럿이 있는 제법 큰 집이었다. 거기서 살던 기억이 나는 거의 고스란히 남아있다. 아마도 1952년에서 1953년 사이였을 것이다.
그 집은 골목(끝에는 휘문학교가 있었다)의 중간쯤에 위치해서 아이들이 나와서 놀기에는 안성맞춤인 그런 골목이었다. 그 골목을 빠져나오면 원서동을 관통하는 큰 도로가 나오고 그곳은 그런대로 차들이 지나다녀서 아이들에게는 조금 위험한 곳이었다. 골목에서 놀다가 아주 심심해지면 그곳으로 잠깐 나와서 놀곤 했다. 원서동 입구, 돈화문 옆쪽으로는 헌병부대, 미군부대들이 있었고 항상 커다란 트럭들이 드나들곤 해서 가끔 아이들이 차에 치어서 죽는 사고도 나곤 했다. 한번은 그 길에 나가보니 어떤 엄마가 길바닥에 깔린 거적 앞에서 땅을 치며 통곡을 하는 것을 보았다. 그 엄마의 아이가 차에 치어서 죽은 것이다. 전쟁 중에 있었던 또 다른 비극이었다. 하지만 미군들은 가끔 먹을 것과 우유 같은 것을 배급으로 나누어 주곤 했고 재수 좋으면 정말 정말 맛있는 쵸코렛도 주었다. 나도 누나와 같이 우유배급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어떤 날, 나는 아주 무서운 것을 보았다. 다른 날과 같이 골목을 오르내리며 놀다가 심심해져서 원서동 대로로 나갔는데, 그날은 이상한 차 한대가 와서 서있었다. 그 당시 차들은 거의가 군용차라서 그런 차가 아니면 다 이상하게 보이긴 했다. 하지만 그 차는 정말로 요상하게 생겼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영구차였다. 기분 나쁠 정도로 요란하게 모서리를 장식한 것이 그 나이에 보아도 으시시했던 것이다. 아주 자세한 상황은 물론 다 잊어버렸지만 그 때 내가 경험한 것 한가지는 아직도 뚜렷하다. 그 영구차의 뒷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안에는 사람들이 앉아서 울고 있었다. 그것 까지는 정상일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바닥이었다. 그 바닥에 “죽은” 사람들이 여럿이서(아주 많았다) 서로 엉켜서 누워있었던 것이다. 나의 어린 눈에는 그 숫자가 그저 많았다. 그 많은 시체들이 서로 엉켜서 누워있었던 것을 나는 “분명히” 보았던 것이다!
너무나 놀라서 나는 곧바로 집으로 뛰어서 엄마를 찾았다. 나는 너무나 놀라면 절대로 울거나 하지 않는다. 그저 얼굴이 굳어지고 더 정신을 바짝 차리는 그런 타입이다. 본대로 그대로 나는 엄마에게 말하면서 몸서리를 쳤다. 물론 엄마는 전혀 믿지를 않으셨다. 암만 이야기를 해도 전혀 믿지를 않으시는 것이었다. 나는 그 당시 귀신이란 것을 잘 믿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이것은 내 눈으로 분명히 본 것이 아닌가? 그 이후 나이가 들면서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하면 그저 상상력이 많았던 정도로 이야기가 끝이 나곤 했다. 과연 그때 내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주 가끔 그때 생각을 떠 올리면서 이성적인 노력을 해 본다. 과연 무엇이었을까? 혹시 장례식에 가는 가족들이 너무 슬퍼서 엎드려서 울던 것이 아니었을까? 가능하다. 하지만 내가 본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분명히 ‘죽은 사람’들이 엉켜있었던 것이다. 그것만은 나는 절대로 확신을 한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나지만 사실 결론이 없다. 하지만 나는 지금은 믿는다. 절대로 ‘초자연적인’ 것은 있다고.. 이렇게 신앙을 가지게 되면서 그런 생각이 더 굳어져간다. 절대로 귀신이나 영을 보는 것은 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러면 그때 내가 본 것들은 정말 정말 죽은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른다. 믿기 힘든 경험이 이렇게 나에게도 있다는 것이 조금은 “대견” 스럽다. 그리고 동섭이네 집의 동섭이가 누구인가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남자의 이름이었고, 이름은 “조동섭”, 그 집 주인의 큰 아들이었을 것이다. 나보다 3살 정도 위였던 듯 하고 역시 재동국민학교를 다녔다. 그 집도 역시 6.25때 임시로 집을 비우고 피난을 갔던 것 같았다. 내가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에 그 집은 다시 돌아왔고 우리는 다시 이사를 가야 했다. 또 나중에 알고 보니 조동섭의 동생이 나와 동갑인 조동주였다. 국민학교를 나와 같이 다니고 그것도 모자라서 중앙 중, 고등학교도 같이 다녔다. 그러고 보니 그 동섭이 형도 중앙중고를 다녔었다. 이것은 참 기묘한 인연이 아닌가? 나의 가장 오래 전의 기억을 온통 차지한 “동섭이네 집”, 요사이 Google Satellite사진으로 보니 그 근처는 완전히 없어진 듯 보였다. 무슨 원서동 공원 비슷한 것으로 “상전벽해“가 되어있었다. 그것이 거의 60년 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