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Office를 바꾸는 것이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미처 몰랐다. 더위가 닥치기 시작하긴 바로 전 6월초에 이동이 시작이 되었지만 그것은 사실 일의 시작에 불과했다. 거의 10년 이상인 방치 되었던 것들을 이번에도 외면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대부분 버리는 것이 일이었다. 문제는 어떤 것을 버리는가 하는 것이다. 제일 쉬운 것이 책 종류였다. 골동품이나 고서의 가치가 없는 것은 무조건 쓰레기 통으로 보냈다. 다음이 서류 종류인데 이것도 옛 직장에서 쓰던 것들은 이번엔 용감히 버리기로 하였다. 남겨야 하는 것이 조금은 있지만 그건 아주 예외에 속한다.
나의 필적, 사인 같은 것이 있는 것들은 그렇게 많지 않아서 보관하기로 했다. 나머지는 사진인데.. 어떤 사람들은 가차없이 버린다는 얘기도 들었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신발상자에 모조리 보관을 하기로 했다. 이것은 개인의 역사가 아닌가? 누가 보건 안 보건 그것이 문제는 아닌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paper print된 사진이라 수명이 있을 것이고, 앨범에 넣지 않은 것들은 보기도 어렵다. 그렇게 되어서 숨어있던 사진들을 이번에 정말 오랜만에 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거의 잊어버리고 살았던 매디슨의 중앙고 후배들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1989년, 아주 오래 전이고, 같이했던 기간도 짧았지만 그 동안 사진조차 못보고 살아서 기억이 더욱 많이 희미해졌다. 얼마 전에 중앙고 후배 강태중의 생각이 났는데 이번에 그 사진을 찾은 것이다. 그 젊었던 모습들을 다시 보니 이 많은 후배들 이제 다 생각이 난다.
우리가 아파트를 조금 큰 곳으로 옮기고 나서 집들이를 한 모양이다. 바로 전에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간 전기석 후배만 제외하고 모두 모였다. 정태춘의 “시인의 마을”을 정태춘보다 더 잘 불렀던 이주호 후배, (wife는 미스 코리아처럼 예뻤다) 쌍둥이 딸을 두었던 수재 형의 윤정로 후배, (wife도 같이 공부를 했었다) 나와 같이 천주교회에 다니면서 가까이 지냈던 강태중 후배, 씩씩하고 활달하던 강상봉 후배, 통계학과의 이제준 후배.. 문제는 그 나머지 후배들의 이름이 가물거린다는 슬픈 사실이다. 얼마나 미안한 일인가? 하지만 노력을 하면 생각이 날지도.. 이 머리 좋던 중앙고 후배들, 다들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돌아오는 일요일은 이곳의 전통적인 ‘웃기고, 무서운’ Halloween이다. 이 날은 오래 전 내가 처음 보았던 그런 것들 보다 너무나 많이 ‘상업화’가 되어가고 있다. 처음에는 그런대로 간소하고 소박한 것이 이제는 아주 복잡해졌다. 주로 아이들이 즐기던 날이 어찌된 것인지 어른들이 더 난리를 친다. 조금은 천박하고 시끄럽고, 심지어는 지나치게 장난을 치는 느낌이다.
나는 원래부터 귀신이야기 같은 것을 좋아해서 이 즈음이면 그런 영화도 나오고 TV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런 분위기를 띄우고 해서 보곤 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우리 집의 아이들이 한창 이런 날을 즐기던 그런 시절에나 재미있는 법이다. 아이들이 다 크고 나니 이제는 분위기가 아주 썰렁해졌다. 작년까지만 해도 pumpkin carving도 하고 candy같은 것도 사고 했지만 올해는 “처음”으로 모든 것을 중단하기로 했다.
조금은 기분이 썰렁함을 느끼긴 하지만, 이것도 세월 흐름의 한 표시가 아닐까. 이날의 저녁때 trick or treating하는 아이들이 오면 우리 집의 ‘불’을 모두 끄고 지내기로 했다. 그러면 우리 집은 아이들이 그냥 지나 갈 것이다. 옆집에 사는 오래된 이웃 David이 조금은 의아하게 생각하리라.. 이제까지 그런 적이 없었으니까. 아~~ 이제 우리 집도 ‘늙어’가는 구나..
10월도 3일밖에 남지 않았다. 10월을 되돌아 보니, 갑자기 다가온 진짜 가을날씨로 시작된 10월초에 다시 시작된 laminate flooring job은 며칠도 못 가서 보기 좋게 중단이 되고 말았던 것이 제일 쓰라린 기억이 되고 말았다. 새 마루의 모양새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이럴 때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가 나는 것일까? 프로였으면 밤을 새고라도 무슨 해결책을 찾았을 것이지만 나는 그럴 의지와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그대로 중단을 한 것이다. 하지만 다음달에는 Thanksgiving Holiday가 있어서 무슨 일이 있어도 그때까지는 끝을 내야 한다.지금 마루를 깔고 있는 방에는 덩치가 커다란 가구, 심지어는 피아노까지 있어서 사실 근육이 많이 쓰이는 곳이라 더 힘든 곳이다. 이럴 때마다 간절히 생각나는 것이 있다면.. 아.. 등치가 좋은 아들녀석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다. 그렇지 않으면 바로 옆집에 마음에 맞고 힘을 쓰는 “남자 친구”녀석이라도 살고 있다면..하는 정말 꿈같은 상상이다. 대가족이 다 모여 살았던 그 옛날이었으면 그런 것이 가능했으리라. 고국도 이제는 핵가족, 소가족, 떨어져 살기..등등으로 많이 변해서 이곳이나 진배없으리라 생각을 하지만 그래도 이곳보다는 낫지 않을까.
며칠 전에 고국의 평창이씨 종친회에서 우편물이 도착했다. 종친회 website에 나의 종파에 관해서 문의를 했더니 친절하게도 종친회 간행물과 편지를 종친회장이신 “이건모” 회장께서 보내주신 것이다. 간행물은 두 권의 소 책자인데 하나는 “백오세록(白烏世錄)” 이란 것이고 다른 것은 비해당소상팔경시첩(匪懈堂瀟湘八景詩帖) 이란 긴 이름의 소책자이다. 백오세록의 백오는 하얀 까마귀란 뜻인데 여기서는 고유명사로써 통일신라시대의 지금의 강원도 평창의 지명이름이다. 이 책은 평창이씨 족보를 전반에 걸쳐서 요약을 한 것이다. 완전히 고어로 되어있는 정식 족보를 이렇게 한글화하고 뜻을 풀어서 쓰려는 노력은 정말 칭찬할만한 노력이 아닐까.
우리세대만 해도 학교에서 기초한자를 배웠다지만 요새 세대는 정말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지만, 우리의 전통이 이렇게 한자로 남아 있는 한 아예 이 한자를 배우는 것이 현명할 듯하다. 나와 같이 족보를 “전혀” 모르고 살고 그것도 영어권 문화에서 오래 산 사람에게 이 족보문화는 정말 culture shock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고 비교적 빠르게 족보의 기초를 받아드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제서야 역사 속에 있는 나와 우리가족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족보가 의미하는 진정한 뜻이 아닐까? 아주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부지런히 그런 역사의식을 느끼며 가고 싶은 것이다.
MICROCENTER… 어제는 오랜만에 근처에 있는 MicroCenter 에 다녀왔다. 나의 home office를 지난 6월초에 옮기면서 computer desk를 없애고 (방을 조금 더 넓게 쓰고 싶어서) lawyer style의 main desk하나만 쓰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렇게 넓은 곳이 아니라서 아주 작은 computer keyboard를 사서 쓰고 있었다. 보통의 laptop pc보다도 작은 것은 좋았는데 문제가 있었다. 거의 모든 key들의 ‘촉감’이 정말 엉망이었다. 어떤 key들은 누르는데 힘이 너무나 들고 어떨 때는 숫제 접촉이 되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불량품’이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자꾸 쓰면 길이 들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견뎠지만 나아지지를 않았다. 그래서 조금 비싼 것을 사려고 MicroCenter엘 간 것이다
MicroCenter는 나에게는 남다른 추억이 있는 곳이다. 그만큼 역사가 깊다는 말도 된다. Computer retail store로 이만큼 역사가 있는 곳이 사실 없다. 거의 30년이 가까워 오니까. 내가 오랜 전에 살았던 Columbus, Ohio에서 시작된 곳이 그 오랜 세월을 견디고 아주 건실하게 성장을 해 온 것이다. Ohio State University campus의 바로 옆에 첫 store가 있었고 주요 고객이 그때 시작된 microcomputer의 customer들이었는데 주로 교수, 학생들이 많았고, IBM PC가 자리잡기 전이라서 주로 Apple II가 주 판매 종목이었다. 이 store의 특징은 computer book store를 포함하고 있었다는 것을 비롯해서 computer hardware, software, 그리고 service, 심지어는 training까지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당시 시간만 나면 이곳에 가서 그냥 구경만 하곤 하기도 했다.
이때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retail store가 우후죽순처럼 솟아 났지만 몇 해를 가지를 못했다. 너무 성급히 확장을 하려다 못 견딘 것이다. 하지만 MicroCenter는 10년 가까이 거의 같은 종목만 고집하며 확장을 하지 않고 내실을 기하더니 우리가 Atlanta로 이사 올 즈음에 이곳에 처음으로 분점을 낸 것이다. 나에게는 참 묘한 인연이 되었다. 물론 그 이후로 다른 곳으로 많이 분점이 퍼져 나갔다. 유행과 불경기를 아주 잘 견디고 현재도 착실하게 business를 하고 있다. 이런 류의 technology retail store의 역사가 거의 30년에 가깝다면 사실 요새로써는 믿기가 힘든 업적이 아닐까?
NAKED DSL… 우리 집의 Internet access는 현재 AT&T (formerly Bellsouth), 그러니까 phone company의 aDSL 을 1999년부터 쓰고 있다. 우리 집은 원래부터 cable TV service가 없어서 (의도적으로) cable modem을 쓰는 DOCSIS based Internet은 쓸 수가 없다. 그것은 사실 큰 문제가 아니다. DSL based Internet service가 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몇 년 동안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Cellular mobile phone service 의 사용료가 많이 떨어지고 질도 많이 나아졌다는 사실이다. 쉽게 말하면 이제까지 쓰던 landline based phone service가 없어도 될 지경이 되었다는 뜻이다. 물론 음질과 재해 발생시에 cell phone service는 아직도 문제가 있긴 하지만 예전과는 많이 다르다.
이런 추세와 최근의 나빠진 경제사정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전통적인 전화 서비스를 중단하고 cell phone에 의지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전화회사에서 그것을 잠자코 보고만 있을까? 별로 큰 투자 안 하고 앉아서 돈을 벌고, 세는 곳이 이런 전화회사인 것이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DSL 인터넷과 음성 전화 서비스를 묶어 놓고, 만약 전화를 끊으면 DSL Internet도 끊어 버리는 식이었다. 한마디로 “나쁜 놈“들이었던 것이다.
그런 “개 같은” 관행(business practice)이 2년 전부터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많이 알려져서 많은 사람들이 전화’선’을 “끊어” 버리고 있다. 한마디로 전화서비스가 없어도 DSL 인터넷이 가능해 진 것이다. 이것을 “Naked DSL” 이라고 부른다.다른 말로: dry loop, stand-alone DSL이란 말도 있다. 보통, 전화와 인터넷을 같이 쓰면 한달 사용료가 거의 $80에 가까운데 이것을 “naked DSL” 로 바꾸면 거의 반으로 줄어든다. 참 매력적인 선택인 것이다.이렇게 바꾸기 전에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우선 오래~~~ 쓰던 그 귀에 익은 자기의 전화번호를 잊어버려야 한다. 아주 없어지니까. 그리고 fax를 쓰려면 조금 골치가 아파진다. 물론 Internet fax를 써야 한다.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래도 한 달에 $40이상 save한다면 한번 심각하게 고려해 볼만 하지 않을까?
거북이 마라톤… 어제도 참 날씨가 좋았다. perfect Ten 이라고나 할까. 하기야 요새의 날씨는 매일 매일이 거의 perfect Ten이긴 하지만.. 지독한 지난 여름의 ‘괴로움’을 만회하기라도 하듯이 Mother Nature는 참 자비하시다. 그런 와중에 Buford Highway 한인 타운에서는 아주 조용히 흐뭇한 행사가 열렸다. 이름이 아주 재미있었다. 거북이 마라톤.. 얼마나 이름이 재미있는가? 다른 말로, 빠르게 걷는 마라톤..그것도 5 마일 정도의 거리를 자선의 이름으로.. 얼마나 좋은가?
이곳의 Asian community의 봉사단체, 그것도 “여성의 쉼터”라는 단체를 도와주려는 목적으로 열린 행사다. 순교자 천주교회와 이곳의 제일 큰 개신교회 “한인교회”의 공동주최로 열렸는데, 이것은 의미가 더한 것이다. 구교와 신교가 같이 뭉친 것이니까. 원래 천주교는 교황청의 정책으로 다른 종파의 개신교, 심지어는 비 기독교파까지 포용하는 추세다. 하지만 개신교는 아직도 천주교는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경향이 많이 남아있고 극단적으로 천주교는 ‘사교’라는 망언을 서슴지 않는 한인교회 목사도 있는 지경이다. 어떻게 이런 ‘무식한‘ 목회자가 아직도 있는지 참 한심한 노릇이다.천주교회의 안정호 신부님과 한인교회의 김정호 목사님.. 참 진정한 종교 목회자의 밝은 미래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런 분들이 뭉쳐서 이런 ‘거북이 마라톤’ 을 성사시키신 것이다. 이런 배경을 알고 나니 나도 그곳에서 거북이 처럼 걸어볼걸.. 하는 후회가 생긴다. 이번에는 그 바쁜 연숙이 용감히 참가를 해서 이런 배경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깊은 가을
가장 아름다운 빛깔로 멈추어 있는 가을을 한 잎 두 잎 뽑아내며
저도 고요히 떨고 있는 바람의 손길을 보았어요
생명이 있는 것들은 꼭 한 번 이렇게 아름답게 불타는 날이
있다는 걸 알려 주며 천천히 고로쇠나무 사이를 지나가는
만추의 불꽃을 보았어요
억새의 머릿결에 볼을 부비다 강물로 내려와 몸을 담그고는
무엇이 그리 좋은 지 깔깔댈 때마다 튀어 오르는 햇살의
비늘을 만져 보았어요
알곡을 다 내주고 편안히 서로 몸을 베고 누운 볏짚과
그루터기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향기로운 목소리를 들었어요
가장 많은 것들과 헤어지면서 헤어질 때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살며시 돌아눕는 산의 쿨럭이는 구릿빛 등을 보았어요
어쩌면 이런 가을 날 다시 오지 않으리란 예감에 까치발을 띠며
종종대는 저녁노을의 복숭아빛 볼을 보았어요
깊은 가을,
마애불의 흔적을 좇아 휘어져 내려가다 바위 속으로
스미는 가을 햇살을 따라가며 그대는 어느 산기슭
어느 벼랑에서 또 혼자 깊어가고 있는지요
- 도 종 환 -
늦가을
가을엔 모두들 제 빛깔로 깊어갑니다
가을엔 모두들 제 빛깔로 아름답습니다
지금 푸른 나무들은 겨울 지나 봄 여름 사철 푸르고
가장 짙은 빛깔로 자기 자리 지키고 선 나무들도
모두들 당당한 모습으로 산을 이루며 있습니다
목숨을 풀어 빛을 밝히는 억새풀 있어
들판도 비로소 가을입니다
피고 지고 피고 져도 또다시 태어날 살아야 할 이 땅
이토록 아름다운 강산 차마 이대로 두고 갈 수 없어
갈라진 이대로 둔 채 낙엽 한 장의 모습으로 사라져 갈 순 없어
몸이 타는 늦가을입니다.
- 도 종 환 -
도종환의 가을 시는 어찌 이리 아름다울까? 나의 가슴을 아련하게 가을의 추억과 전설로 물들이는 이 시들은 어쩌면 내가 감당하기 힘든 것들이다. 올해의 가을은 너무도 늦게 도착하고 느릿느릿하게 가고 있지만 그 빛깔들은 정말 한 해를 마음껏 정리라도 하듯 몸부림 치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나의 집에서 나가는 길목에 있는 나무 하나는 밤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거의 야광에 가까운 색깔로 어두움을 밝힌다. 아~~ 전설과 추억의 가을이여.. 한껏 나에게 그 이야기를 남기고 가라. 영원히 사라질 2010년의 한가을이여..
1 TB Hard Disk at $54 (with free shipping) from newegg.com…. 오늘 아침, newegg.com의 promotional email에 완전히 걸려들었다. 10% discount에다 free shipping! 얼마나 달콤한 말인가? Order를 하고 나서 생각을 해 보니 나는 이제까지 1TB 를 넘는 hard disk를 산 적이 없었다. 사실 TB (Tera bytes = 1024 Giga bytes) 란 ‘글자’가 언급되기 시작한 건 몇 년이나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magic number가 된 것은 지금이 아닐까. 거의 $50대로 떨어졌으니..
아직도 기억에, 처음 내가 거금을 들이고 산 hard disk는 1985년의 20 MB (Mega bytes!) 였다. 25년 만에 사실 엄청난 변화였다. 하지만 그때 처음 경험한 hard disk의 편리함과 위력(속도)은 요새는 절대로 느끼지 못하던 그야말로 ‘사치’에 가까웠다. 그 전까지는 8″, 5.25″ 크기의 floppy disk가 전부였다. 일일이 넣었다, 뺐다 해야 했고 그 용량이 정말 장난이었다. 물론 거기에 맞는 software을 썼기에 크게 불편한 것을 못 느꼈다.
한때 hard disk industry의 존폐론 까지 나왔었다. 무한정 용량이 커지지 못할 것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그 말도 일리는 있다. 같은 disk의 표면에 들어가는 data의 양은 제한이 있기 때문이다. 이건 물리적인 제한조건이다. 그런 암울한 예보가 있고 거의 10년이 흘렀다. 하지만 hard disk의 capacity, density는 계속 늘어만 간다. 각종 기술을 다 동원한 결과다. 이것은 data중에 video가 Internet download의 큰 인기 물이 되면서 더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비록 compression를 한다고 해도 video file은 다른 data에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크기니까.
Solid state disk가 다음 주자이건만 아직도 hard disk의 price/performance ratio의 근처에도 못 가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런 때가 올 것이다. Hard disk처럼 rotating motor같은 것이 없어서 훨씬 더 견고한 다른 장점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더 기다려야 한다.
What THE HELL is this? 도대체 이 괴물들이 누구냐? 완전히 Nazi Storm Trooper의 거위새끼 행진 같은 이들이 과연 북녘의 동족의 딸들인가 말이다. 동족을 통일의 명분으로 수백만 이나 살상을 감행하고 그것도 모자라 계속 동족을 장난감 핵무기로 위협을 하고, 자기네들의 “인민”들을 굶겨 죽이고, 마지막에 30살도 안 된 젖먹이 새끼에게 별을 4개씩이나 달아주고.. 끝이 없다, 없어.
이런 마당에 아직도 남녘의 어떤 바보집단들은 주체사상을 그리워 하는가? 이 병신들아.. 제발 좀 꿈에서 깨어나라. 틀린 것은 틀린 것이라고 말할 그 최소한의 용기도 없단 말이냐? 제발 한 나라의 역사를 다시 쓰지 말란 말씀이다!
Condoleezza Rice! 얼마 전에 Atlanta History Center에서 일을 하는 작은 딸 나라니가 전 국무장관을 역임했던 콘돌리자 라이스의 자서전 출판기념 강연회의 입장권 2장을 구해 놓았다고 연락을 해왔다. History Center에서 11월 3일 아침 9시에 시작되는 강연이다. 정식 강연은 아니고 아마도 자기 책의 발표에 맞추어 사인을 해주는 그런 것일 듯하다.
Obama와 더불어 미국 흑인의 power를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한 사람이다. 흑인, 그것도 여자.. 다른 그룹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많이 그 지위가 올라간 그룹이다. 한마디로 어떤 (사회적)그룹이던 간에 각자의 노력의 여하에 따라서 성공의 정도가 비례한다는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하지만 그녀에게는 남달리 그녀를 전적으로 믿고 밀어준 아주 건실한 부모가 뒤에 있었다. 한 가정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아닐까?
조금 아까운 것은 그녀의 정열과 재능이 거의 구 소련연방 (Soviet)에 관한 것 이었다는 사실이다. 소련이 ‘망한’ 후에 그녀는 세계도처의 다른 곳에서 그 재능을 어떻게 쓸 것인가? 이락 침공에 관해서 그녀는 아직도 후회가 없다. 그만큼 그 당시 부시 행정부는 사담 후세인을 무서워하고 증오했던 모양이다.
동창회 가입을 하는데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라고? Hell, NO! 참 망할 놈의 세상이 되었다. 동문 친구의 연락처를 알아보려고 연세대 총 동문회 (http://www.yonsein.net) 를 반갑게 찾아서 회원등록을 하려다 아주 씁쓸한 심정으로 포기하고 말았다. 이게 무슨 개 같은 case란 말인가? 이곳의 social security number같은 것을 왜 동창회에서 물어 봐야 하는가 말이다. 도대체가 이해가 가지를 않는다. 이제는 가입해 준다고 해도 할 마음이 없다.
자비의 모후… 오늘은 드디어 이곳 아틀란타 순교자성당 소속의 “자비의 모후” 프레시디움 (레지오 마리애의 제일 작은 모임의 단위: 로마군단의 명칭에서 유래) 정기회합에 참가를 했다. 이것은 나로서는 참 힘든 일을 한 셈이다. 3년간의 연숙과 같이 집에서 한 묵주기도의 결실일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하는 묵주기도와 이렇게 공동체에서 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를 것 같다.
내가 가입한 “자비의 모후” 에는 현재 모두 자매님들 뿐이다. 그리고 거의 나의 인생선배들이시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모처럼 푸근한 기분을 느꼈다. 누님들을 한꺼번에 많이 만난 기분이라고나 할까. 이분들로부터 나는 신앙적으로 인생의 선배로 많이 배우고 싶다. 3개월의 “대기기간”을 마치면 정식단원이 되는 것을 결정한다고 한다. 이제 나에게 하느님을 보는 또 다른 “길”이 생긴 것이다.
드디어 결정의 순간이 왔다. 어제 연숙에게 돌아오는 주부터 아틀란타 한인성당의 레지오 마리애의 회합에 참석을 하겠다고 “통고”를 하였다. 내가 나의 등을 “칼”로 떠 민 것이다. 이번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간단히 때가 온 것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거의 3년이 넘게 뜸을 들인 결과인가.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그 동안 협조단원이었고 거기서 더 적극적으로 정식단원이 될 마음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상태로 3년이 지났다. 그 동안은 연숙과 같이 거의 매일 밤 묵주기도를 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아주 간단한 사실이지만 결과는 나도 예상을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묵주기도의 묘미를 1%나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무언가 나는 믿게 되었고 좋아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협조단원과 정식단원은 아주 다를 것이다. 우선 매주 한번씩 회합에 나가야 하니까. 우선은 그것이 제일 큰 변화일 것이다. 내가 가입하는 쁘레시디움은 현재 모두 자매님들 뿐이다. 아마도 다른 곳도 별로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선 내가 망설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역시 핑계였다. 자매님들만 있으면 어떻고 형제님들만 있으면 어떨까, 그것이 사실 무슨 문제인가? 3개월의 대기기간이 있다고 한다. 그것이 끝나면 정식으로 단원이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모양이다. 한번 해 보자.. 못 할 것이 무엇이냐.
Googling의 위력… 오늘은 아주 우연히 한국에 있는 먼 친척의 이름으로 googling을 해 보았다. 이건 전혀 우연이었다. 나의 먼 친척 동생(1살차), 유명근을 넣었다.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이름이 나왔다. 동명이인도 많았지만 “서울농대” 까지 넣으니까 완전히 찾아 내었다. 이것이 Google의 위력이다. 인터넷에 노출된 것은 거의 모두 그 monster server에 다 index가 된 것이다. 나의 어머님 쪽의 가계를 찾는 것은 지금 거의 불가능하다. 모두 이북 원산에 사실 것이니까. 아주 일부만 남쪽으로 내려왔다. 아버님 쪽의 족보를 찾는 것과 병행을 해서 어머님 쪽도 알아보려는 것이다.
다행히 어머님의 사촌 언니일가가 서울에 사셨다. 혈육이 거의 없어서 그런대로 서로 가까이 다닌 것이다. 그 이모님의 자녀 중에 유명근을 Google에서 찾은 것이다. 아주 성공적인 경력이 보였다. 삼성그룹 방계회사의 사장을 역임한 것으로 나왔다. 문제는 어떻게 연락처를 찾느냐 하는 것이다.
마찬 가지로 재동국민학교 시절의 친구 정문신도 이곳에 금새 보였다. 그 동안의 의문들이 모조리 풀렸다. 성동중고를 졸업하고 한양대를 나왔다. 금새 성동고 동기회로 연결이 되어서 거의 순식간에 그가 하나모듈의 사장이란 것, 큰 아들이 얼마 전에 결혼을 했다는 것.. 모두 나왔다. 거의 꿈처럼 느껴졌다. 이런 세상이 된 것이다. 한마디로 조금 무서워진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Madison, Wisconsin에서 만난 중앙고 후배 강태중도 이곳에서 찾은 것이다. 교육학 전공이던 그는 비교적 공적인 삶으로 나온다. 신문의 인터뷰기사에서는 웃음을 띤 그의 얼굴도 보인다. 착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그는 성실한 아빠고 남편이었다. 아들 “참”이의 이름이 생각이 난다. 우리 큰딸과 비슷한 나이였으니 혹시나 결혼이라도 한 것이 아닐까? 인연이 되면 알 수도 있겠지. 그는 중앙대학교의 교수로 재직을 하고 있었다. 너무나 반가웠다.
하지만 충격적인 슬픈 소식도 있었다. 중앙고 은사님, 음악선생님, 고1때의 담임 선생님 김대붕 선생님께서 2003년에 타계하신 것을 역시 이곳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자세한 것은 물론 모른다. 최소한 그때쯤 돌아가신 것이다.이럴 수가 있나? 그런 것도 모르고 나는 이곳에서 그 선생님을 추억하는 글도 썼으니.. 내가 한심하기만 하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인터넷의 점진적이고 철저한 확산으로 세상은 많이, 그리고 확실히 바뀌고 있다. 좋건 나쁘건 이제는 피할 수 없는 것들, 어떻게 이것을 유용하게 쓰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더 현명할 듯 하다.
어제는 정말 오랜만에 캐나다에 살고 있는 동창친구 정교성과 통화를 할 수 있었다. 그 전날 “Google Voice@Asterisk PBX” 를 시험하면서 갑자기 교성이 생각이 났다. 물론 그 동안도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나 우리 집의 long distance service를 몇 년 전에 끊어버린 관계로 phone card를 쓰지 않으면 장거리 전화를 하기가 조금 불편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다가 구세주같이 Google Voice가 나타난 것이다. 미국과 캐나다는 무료이고 한국도 대부분이 분당 2센트면 ok인 것이다.(mobile phone은 5c/min) 이것을 계기로 교성이와 더 많이 전화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교성은 이승만 정권 당시 부통령이었고 4.19 학생혁명 이후 5.16 군사혁명 전 까지 국무총리를 역임했던 장면박사의 조카다. 그러니까 교성이 어머님이 장면박사의 여동생인 것이다. 집안은 전통적인 천주교도 집안이었고, 교성이는 분명히 태어날 때 유아영세를 받았을 것으로 생각을 한다. 중앙고 졸업 앨범을 보면 교성이는 천주교 반에 있었다. 그것은 공식적인 학교내의 서클중의 하나였다.
사실 나는 중앙고 재학 당시에 교성이와 개인적인 친구가 아니었다. 하지만 교성이는 나를 몰랐어도 나는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어찌 안 그렇겠는가.. 그는 목소리가 삼국지의 장비같이 천둥벼락과 같았고 통솔력이 뛰어나 중앙 중, 고등학교 6년간 반장을 하는 신기록을 깬 나에겐 참 부러운 존재였다. 왜냐하면 나는 그런 것은 사실 꿈에도 상상을 못하던 ‘업적’ 이었으니까. 그런 그가 그 당시 나와 개인적인 친구가 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대학 3학년 쯤에 다른 친구, 김호룡을 통해서 교성이와 바로 “눈 앞에서” 만나게 된다.
우리들 또래 보다 도 훨씬 믿음직하고 성숙한 그는 참 어울리기 편한 친구가 되었다. 어떨 때는 그가 나의 형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집안, 가문 같은 것을 풍기지 않던 그런 모습도 보기에 참 편하였다. 서울 외대 독문과에 다니던 그는 재학 시 공군에 입대를 해서 나와 처음 만날 당시에 공군에 복무 중이었다. 내가 여자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그는 형같이 나를 도와주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나는 항상 도움을 받기만 했다. 그는 그 70년대 격동기 세대의 일원으로 열심히 정석대로 산 모범적인 친구다. 그런 그가 언젠가 캐나다로 아주 이주를 해 왔다. 그리고 오랫동안 투병을 하던 부인의 타계를 겪었다. 두 딸을 훌륭히 거의 혼자서 키워냈다.
몇 년 전에 거의 우연히 한국에서 나오는 천주교 잡지 “생활성서” 1992년 호를 보다가 어떤 글을 읽었다. 아무래도 누군가를 연상시키는 그런 글이었다. 저자는 “정광숙” 씨.. 글을 읽고 더 심증이 굳어졌다. 바로 교성이의 누나인 것이다. 우리가 처음 만날 당시 그 누나는 미국유학 중이었다. 나는 그때 그 누나가 쓰던 책을 빌려보기도 했다. 그래서 교성이에게 확인을 해 보니 99% 맞는 것 같아서 그 기사의 copy를 보내기로 약속을 했는데 이행을 못하고 서로가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 기사를 보내려 하니 문제가 있었다. 생활성서에서 그 기사를 다시 찾으려고 하니 무려 6년치의 생활성서가 책장에서 먼지를 쓰고 있었다. 6년치면 거의 72권이나 되는 것이다. 한참 씨름을 하다가 결국은 그 기사에 book mark가 붙어 있어서 생각보다 빨리 찾아서 부지런히 scan을 했다. 문제는 거의 컴맹인 그가 이것을 어떻게 쉽게 보게 할까 하는 것이다. 그 동안 한번도 그를 코앞에서 본 적은 없었지만 그를 잊은 적은 한번도 없다. 나의 형같이 나의 식구같이 느낀 친구였으니까. 지금은 새로이 부인을 맞고, coffee shop을 운영하며 잘 살고 있다. 언젠가는 볼 날이 있겠지만 그 전이라도 더 자주 연락을 하면서 지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을 해 본다.
I have 2 Google Voice accounts set up, integrated into my home Asterisk PBX (a PIAF aggregation) which runs on a Linux virtual machine. It provides us free US and Canada calls and very low price International calls (comparable to Skype). Making and receiving call via GV (Google Voice) are nearly transparent thanks to Asterisk integration (it simply means the users can hardly notice they are using GV).
This may not sound significant but with this ‘GV trunk‘ setup, virtually all long distance calls are now free. With that in mind, I cancelled my long distance account saving at least $10 a month. I know the proven reliability of existing long distance carrier from my long experience, but how about this free one? For the test, I have used this GV for the last 6 months almost every day while walking my dog around my neighborhood. The call from my cell phone goes to my local GV number (DID) which in turn transfers the call to my other receive-only DID (another free account). This then directly calls my Asterisk PBX. In spite of its complexity, user hardly notice any delay or interruption. This of course only test voice part of calls, but how about notorious fax calls?
I just assumed analog fax would be very hard to go through this ‘unknown’ water. Until now, I just direct my fax calls to my existing local carrier, PSTN. That’s fine with any local faxing, but how about long distance fax? Never tested before. VoIP trunk is notorious dealing with analog fax, they would say, like ‘fax & pray for the best’. Now, time has come to fax to Korea. Is it possible to use GV trunk for this?
I’ve setup a test to send test fax to HP fax-test number (a toll-free number:8884732963). This HP fax-test number is really convenient for quick fax setup test. Upon receiving any fax, it faxes back to the caller. I used WinFAX software via home PBX GV trunk to HP test number. Would it work? Well, it works without any problem! Now, I can send faxes to anywhere at near-free cost..thanks GV!
지난 10월 3일은 고국의 개천절이었을 것이다. 아니.. 혹시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한국달력을 보니 분명히 개천절이라고 표시가 되어있다. 다만 일요일이라 빨간 숫자인지 아니면 아직도 국경일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국경일이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이다. 그것은 국경일이던 한글날이 평일로 추락을 한 사실을 오래 전에 보았기 때문이다.
그날을 전후로 거의 우연히 10년 전의 KBS 인기 프로그램 “역사스페셜”을 다시 보게 되었다. 나는 약 5년 전 고국의 clubbox라는 download site에서 150 편 모두 download를 해서 DVD disc에 copy를 해두었는데, 다시 보려면 그 많은 disc를 찾아서 DVD drive에 넣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그것을 모조리 home server에 copy를 해서 아무 때나 볼 수 있게 하였다. 요새의 hard disk가 커지고, 싸지고..해서 이제는 video file을 번거롭게 optical disc (like DVD)에 “구울(burn)”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 중에서 “환단고기에 대한 열풍”을 다시 보게 되었고 마침 개천절을 맞은 것이다. 요새는 그 당시의 “열풍”이 어떻게 “진화”가 되었는지 궁금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1992년에 정말 우연히 임승국씨의 “한단고기”란 책을 사게 되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열풍”의 훨씬 이전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책을 보고 적지 않게 놀란 것은 사실이었다.
“환”자를 “한”자로 읽은 것부터 그렇고 또한 그 상고사의 기술자체가 그렇게 자세할 수가 없었다. 흡사 그리스 신화를 읽는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다시 KBS 프로그램을 보게 된 것이다. 왜 그 당시에 그 책이 인기를 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조금씩 거북하게 느껴지던 중국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나는 전문적인 역사학도는 절대로 아니지만 아주 심각한 아마추어 역사 mania 정도는 된다. 작은 딸애가 대학에서 역사전공인 것도 도움이 되었고, 나의 나이도 절대로 도움이 되었다. 나는 확실히 이제 진정한 역사의 의미를 느끼는 것이다.
그런 배경에서 나의 환단고기에 대한 입장은 어떤 웹사이트에서 읽었던 저자가 알려지지 않은 “한단고기의 가치성” 이란 글의 저자 입장과 거의 비슷하다. 간단히 말해서 이 책의 알려진 여러 가지 “결함” 때문에 일괄적으로 무시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중도적인 입장인 것이다. 아주 조심스럽게 연구를 하자는 것이다. 역사도 과학적인 고증 기술의 발달로 어떤 새로운 발굴과 그에 따라서 현재의 정설이 하루 아침에 바뀌는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니까. 완전히 위서라는 것을 증명치도 못하고 그의 반대도 증명을 못하는 마당에 조금 열린 마음으로 연구를 해 봄이 옳지 않을까?
평창이씨…. 몇 년 동안 정리를 못하던 서류들을 정리하던 중에 2004년의 것들을 다시 정리하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나의 본관 평창이씨에 관해서 알아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고 고국의 관계 웹사이트에서 결국 평창이씨의 족보의 일부를 copy할 수 있었다. 그때의 감격은 사실 대단했다. 나는 난생 처음 보는 것이었으니까.
나는 어릴 때부터 평창이씨라는 것을 잘 듣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6.25때 납북이 되신 후에 족보를 거의 잊고 살았다. 그리고 평창이씨가 다른 이씨에 비해서 조금은 희귀하다는 것도 알았다. 그저 강원도 평창에 시조가 있으려니 하는 정도로만 알 정도였다. 아버님은 두 누이동생 (나의 고모님)이 계셨지만 거의 왕래가 없이 살았다. 나도 나의 조상에 거의 관심이 없이 산 셈이었다. 족보를 따지는 시대가 이미 아니었기에 그것이 쉬웠는지도 모른다. 결혼을 할 당시에도 본관, 족보를 따지지 않는 그런 집안과 인연이 되었다.
대학시절, 연호회라는 남녀클럽에서 정말 우연히 평창이씨 여대생(이인자씨, 일명 이재임씨)을 만나게 되었다. 그 당시 별로 많지 않은 종친을 만난 것이다. 그때 우스개 소리로 우리는 인연이 없다.. 결혼을 할 수 없으니까..하면서 웃었다. 그 당시만 해도 동성동본끼리의 결혼은 위법이었다.
우리의 아이들이 태어날 때도 우리의 본관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 이 복합문화, 다민족의 미국에서 너희는 평창이씨의 후손이라도 말을 해 보았자 거의 의미가 없었으니까. 한 마디로 우리 집은, 아니 나는 족보가 없었다. 그러다가 1988년 Madison, Wisconsin에 잠깐 살 때 그곳에서 정말 우연히 평창이씨를 만났다. 이번에도 역시 남자가 아니고 여자였다. 그곳의 유지 격인 지금은 고인이 되신 강정렬 박사님의 부인이 되시는 분이 바로 평창이씨였다. 그 때 비록 나이차이는 많이 있었어도 친척을 만난 듯 서로 너무나 반가웠다. 그때 처음으로 본관, 동성동본이 아주 먼 친척이라는 것을 느낀 것이었다.
그 뒤, 일년 후에 아틀란타로 직장이 옮겨져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인연이 이어져서 강박사님 부인의 남동생이 아틀란타에 사신다고 소개를 해 주셨다. 그래서 이곳 아틀란타에서도 평창이씨 가문을 만나게 되었다. 이주황 선생님.. 맙소사.. 이분도 고인이 되셨다. 그 집에 아들 둘(이만수, 이동수)과 따님이 하나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들이 모두 평창이씨의 후계가 되는 것이다.
그 이후로 또 이런 것들을 잊고 살았다. 세파라는 것이 그런 모양이다. 사실 족보가 밥을 먹여주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절대로 생각은 변하는 모양이다. 시간과 역사라는 것이 얽히고 나도 조금씩 역사 속으로 빨려 들어감을 느끼게 되었고, 나의 뿌리는 과연 어떤 것인가 정말 자연스러운 의문이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결정타는 어머님의 타계였다. 건강이 좋지 않은 누님을 생각하면 정말 나는 혼자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님이 알고 계시는 평창이씨의 지식은 거의 전무했다. 거의 일생을 남편 없이 살아오셔서 더 그랬을 것이다. 이제는 내가 조금은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그러다 2004년에 처음 나의 족보를 볼 기회가 온 것이었다. 아마도 울진이씨종친회라는 곳에서 만든 excel-format file이었을 것이다. 족보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던 나에게 그것은 조금 생소했지만 항열 같은 것은 조금 들어서 곧바로 아버님과 같은 항열 대를 찾았고 동명을 찾게 되었다. 분명히 이정모 라는 성함이 있었다.
파는 익평공파(翼平公派) 였다. 27세(世)의 항열이 바로 “모” 자였다. 그곳에 정모, 준모 라는 형제가 있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나는 우리 아버지에게 형제가 있다는 말을 못 들었기 때문이었다. 고모님은 있었어도. 그래서 동명이인이 아닌가..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잊었다. 그것을 며칠 전에 다시 서류정리 끝에 찾은 것이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나에게 친삼촌이 있었을까.. 그런데 희미한 기억이 되살아 났다. 있었다. 물론 호적엔 없었다. 아버님도 호적에는 사망으로 되어있으니까. 그렇다. 민족분단의 비극이었다. 삼촌은 사실 “월북”을 하신 것이다. 6.25때가 아니었을까. 지식층 중에 많은 사람들이 “이론적인 공산주의”에 빠져서 인생을 망친 사람들이 많았다. 삼촌은 바로 그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반공이 국시였고, 연좌제의 서슬이 퍼~렀던 그 시절에 우리의 삼촌은 서류에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아마도 삼촌이 호적에 있었으면 나는 여권 같은 것은 꿈도 못 꾸었을 것이다. 그런 말씀을 어머님께서 돌아가시기 일년 전쯤 나에게 들려주신 기억이 되살아 난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본 족보의 “정모, 준모” 형제는 99% 나의 아버지와 삼촌일 것이다. 그 위로 그러니까 나의 친할아버지는 “경호” 로 나와있고 그 할아버지에게 “철호”, “창호”, “천호” 라는 형제가 있었다. 경호 할아버지는 4형제 중에 세 번째였다.
족보에 의하면 아버님은 6명의 사촌들이 계셨다. 모두 “모” 자 돌림이고. 그렇다면 그 분들은 그 동안 어디에 사셨을까. 그 후손들은 또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문다. 6명의 사촌들이 계셨으니 분명히 그 후손이 꽤 많을 것 같다. 그렇다면 나도 그렇게 외로운 존재가 아닌 것이다. 그들만 찾을 수 있다면..
현재 평창이씨는 본관의 시조를 고려왕건을 도와 개국공신이 된 이윤장(李潤張) 어른으로 하는 파와 그의 8세손인 이광(李匡) 어른을 시조로 모시는 파로 갈려있는 상태이다. 이윤장 어른이 시조라면 평창이씨는 경주이씨의 분파가 된다. 물론 나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공부를 더 하기 전에는 할 말이 없다. 다만 내가 속한 (내가 본 족보가 맞는다면) 익평공파(翼平公派)의 종친회는 이광(李匡) 어른 을 모시는 파로 되어있었다.
우리가 속한 익평공파는 파의 시조이신 이계남(李季男) 이신데, 연산조때 이조판서였고, 중종반정의 공신으로 익평공의 시호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후대에는 조선최초의 천주교 세례신자인 베드로 이승훈이 계시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승훈 “할아버지”가 더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그 분의 앞 뒤로 4대가 모조리 신앙을 지키다 참수를 당한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몇 번 배교를 선언한 탓에 성인 품열에 못 들어간 사실이다. 정말 안타깝다.
이상이 간략한 최근 며칠 동안의 평창이씨 족보여행의 결과지만 문제는 이제 부터가 아닌가 한다. 어떻게 나의 뿌리를 찾을 것인가….나의 족보를 과연 어떻게 구할 것인가? 그리고 나의 먼 친척들을 어떻게 찾아 볼 것인가? 쉽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노력을 해 볼 것이다.
진짜 가을이 되었다. 그리고 10월 3일 개천절이 왔다. 반갑다. 개천절.. 나를 낳게 해준 나의 어머님의 땅, 대한민국의 원류가 시작되던 4000여 년 전의 고조선을 생각하게 하는 그런 날이다. 나의 뿌리를 다시 생각하게 하기도 하는 날, 나는 거의 매년 이날을 나 나름대로 기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동안 글은 많이 쓴 것 같은데 정작 나의 제일 비밀스러운 일기는 거의 반달이나 공백을 남겼다. 그렇게 바쁘던 때도 아니었는데.. 하지만 대담하게도 나는 그 동안 100% 개방된, 그러니까 이 지구의 누구라도 볼 수 있는 그런 글들을 썼던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런 내가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나의 나이또래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을 듯 하니까.
지난 달 눈에 뜨이게 한 일은 별로 없다. 하지만 며칠 전부터는 일단 나의 ‘모든 짐’을 정리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주로 몇 년 동안 방치해 두었던 책,서류 등등이 대부분이다. 물론 그 중에는 나의 monster ‘vital documents’ 도 포함되어있다. 조금 양이 많지만 일단 시작을 하고 나니 조금은 자신이 생기기도 한다. 책들도 정말 정말 많이 ‘정리해고’ 하기로 했다. 내가 몇 년 동안 안본 책들은 과감히 차고로 일단 ‘퇴출’ 시키기로 했다. 그런 과감한 일들은 사실 몇 년 전에 다름 자질구레한 물건들에 적용시킨 경험이 있다. 주로 picture frame, souvenir같은 것들이었지만. 이층 계단으로 올라가는 곳에 ‘전시’ 되었던 사진틀도 그때 ‘퇴출’ 되었었다. 요새는 사실 다시 한번 그것을 보기 싶기도 하다.
시간이 가면 갈 수록 나의 영역을 줄여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마디로 간단히 살자 라는 것이다. 법정스님의 무소유까지는 안 가더라도 말이다. 그렇게 일단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가라앉고 차분해진다. 그 중에는 필요 없는 책들과 서류들, 그 많은 computer, electronic hardware가 포함이 된다. 이번에 방을 옮기면서 그런대로 많이 정리는 되고 있지만 아직도 끝이 보이지를 않고 있다 하지만 할 것이다.
진짜 가을임을 며칠 동안 진하게 느낀다. 거의 흑과 백처럼 하루아침에 여름에서 가을이 된 것이다. 사실 서서히 기온이 내려가야 나무들도 겨울준비를 하여야 하는데 이렇게 급작스러우면 그들도 적응하기 쉽지 않으리라. 그래서 올해는 단풍도 예년처럼 예쁘지 않으리라는 우려다. 거기다 부족했던 비까지 평균치를 채우려고 한다면 완전히 망치는 것이다.
오늘 아침에 하늘을 보니 옛날 옛적 고국의 국화가 만발할 때 국전이 열리던 가을의 하늘이 생각났다. 바로 그런 때의 날씨인 것이다. 특별히 그때는 남녀가 같이 어울려서 국전엘 갔었다. 1968년 가을이었다 그 당시 잠깐 있었던 연호회라는 조그만 그룹이 단체로 국전엘 갔던 것이다. 하지만 사진이 없다. 그러니까 완전히 나의 머리에만 사진이 조금 남아있는 것이다.
너무도 많은 가을을 보냈지만 그때, 1968년의 가을이 또 가보고 싶은 것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 당시의 인물들.. 연호회 남녀회원들, 어떻게 살았고 지금은 어떠한가. 다행인 것은 그 중의 중심적 인물인 양건주가 서울에 건재하다는 사실이고, 그의 부인이 멤버중의 하나인 황인희씨라는 사실이다. 이것보다 더 든든한 사실은 더 없을 것이다.
나머지 인물들 중에 윤인송, 김태일 등이 다시 보고 싶은 친구들이다. 멤버의 한 사람, 김진환은 슬프게도 너무나 일찍 하늘나라로 갔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 슬프다. 한없이 다정하던 멤버 친구였다. 사실은 남자들 보다 도 여자회원들이 더 궁금하다. 이선화씨는 아직도 Iowa City에 살고 있는지 궁금하고, 신언경씨, 이인자(aka 이재임)씨, 조인선씨.. 다 잘들 살고 있을까? 어쩌면 벌써 손주들을 보았을지도 모르고 그러면 다들 명실공히 “할머니”들이 되었을 것이다. 가을이 이렇게 오는 것처럼 너무나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일 것이다.
그때 우리들은 pop/rock등에 많이도 심취해 있었다. 비록 김신조의 무장공비가 그 해 내 생일날 박정희 “목을 따러” 내려와서 학원은 다시 “교련” 이라는 것이 자유를 얽매이기 시작하려던 그런 시절이었지만 젊음이란 것이 모든 것을 자유스럽게 해 주었다. 그 해 가을에는 국전관람과 더불어 그 밝던 가을하늘을 만끽하며 우리 그룹의 회지도 만들고, 박창희네 집에 모여서 pop/rock 음악감상회도 가졌다. 처음에는 연세대 뒷산에 있던 청송대에서 하려고 했는데 음악감상 장비를 그곳으로 옮기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를 않아서 그냥 창희네 집에서 한 것이다.
그리고 같은 가을에 우리들은 서울 중앙방송(테레비)을 견학 가기도 했다. 나의 죽마고우 유지호가 잘 알던 아저씨가 중앙방송의 엔지니어로 일을 해서 그분이 주선을 해 준 것이었다. 덕분에 난생 처음으로 TV 방송국의 내부를 볼 수 있었다. 그때 본 것이 Pearl Sisters(펄 시스터즈)가 신나게 soul music에 맞추어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 것과, 김용기 논설위원이 시사논설을 하며 녹화를 하던 모습, 바로 앞에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더 관심이 있었던 것은 어떻게 그 방송 TV program이 전파로 각 가정의 TV로 전파가 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건물의 옥상에 올라가서 의문이 풀렸다. 거대한 dish antenna가 남산을 향해 서 있었던 것이었다. 남산의 높은 tower에서 받아서 서울 전역으로 방송을 하는 것이었다. 그 dish antenna앞쪽으로는 접근을 못하게 되어있었는데 radiated power가 위험 수준을 넘기 때문이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피부에 화상을 입을 수도 있다고 했다.
1968년의 그렇게 밝고, 아름답고, 멋있던 가을은 이렇게 많은 추억을 남기며 나의 뇌리에 남아있다. 비록 그 해 말과 후년부터 남자들이 군대로 속속 가면서 우리 그룹은 자연스럽게 해산이 되었지만 그것 역시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너무나 짧았던 시간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아주 오랜 동안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밝고, 멋있던 가을을 남겼으니까.
Turn Around Look at Me – The Vogues 1968
The Lettermen과 비슷한 스타일의 남성 화음은 정말 매혹적이었다. 특히 이 노래는 더욱 그랬다. 특히 이곡과 연관되어 생각나는 것이 라디오 프로그램 “나건석의 영어회화” 였다. 한때 이곡의 가사를 주제로 공부를 했던 것이다.
Honey – Bobby Goldsboro 1968
Bobby Goldsboro의 노래는 거의 이곡과 같은 느낌이다. 특히 이곡은 서정적 노래로 일관을 해온 그의 대표적인 것이다. The Beatles의 Hey Jude에 이어 1968년 제2위의 인기곡이기도 했다.
Love is Blue – Paul Mauriat & his Orchestra 1968
이 연주곡은 France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미국에서도 1968년 제 3위로 많이 팔린 곡이었다. Paul Mauriat의 연주곡들은 대부분 티없이 맑은 느낌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