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듯한 기분이니까 이거야 말로 조금은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알맞은 시간 감각’이라고나 할까? 이건 확실히 좋은 것이다.
비록 별로 변화 없이 무더운 여름이지만, 의식적으로 ‘의식’을 안 하려고 기를 쓴다. 내가 그것을 어찌한단 말인가. 그래서 요새는 일기예보를 ‘절대로’ 안 보려고 노력을 한다. 조금은 효과도 있다. 연숙에게도 ‘부탁’을 해 두었다. 나에게 가급적 ‘더운 예보’는 말하지 말라고. 속으로 비웃겠지만 어찌하랴.
영성,신앙적으로 6월은 수확이 있었다. 레지오 연차 봉쇄피정에 ‘열심히’ 참가를 했고, 그렇게 매년 듣기만 하고 피해오던 대교구 성체대회에 참가를 한 것이다. 무언가에 끌리는 듯한 기분이기도 했지만 내가 ‘무던히도’ 노력을 한다는 것을 부정한다면 지나친 겸손일 것이다. 나는 현재 노력을 한다. 쉽게 무너지지 않을 믿음을 가지려고… 이런 기회가 아마도..아마도..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
집 일에서 드디어 ‘왕건이’가 걸렸다. 우리 집의 water heater를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조금씩 밑에서 물이 새는 것이다. 다행이 옛날처럼 폭포수처럼 새지는 않는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나 할까.. 이전까지 이것은 pro의 차지라고 생각을 하곤 했는데 이번에는 조금 용기를 내어 보았다. 내가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도 들고, 여름이니까 설사 시간이 지나치게 들어도 큰 문제가 없겠다는 생각에 그만 아마존에다가 Rheem 의 최신 모델을 $470에 order를 하고 드디어 내일 배달이 된다고 한다. 문제는 물론 그 다음이다. size가 현재의 것 보다 조금씩 크다. 그러니까 어떻게 plumbing을 하느냐 하는 것인데.. 역시 실물을 보아야 머리가 돌 것이다. 이것도 성모님께 부탁을 하면 조금 지나친 것일까?
요새는 조금씩 내가 레지오에 다니는 것이 우리 가정, 특히 연숙과의 관계에 어떤 ‘좋은’ 영향을 미치나 생각을 하게 된다. 생각만큼 큰 변화는 없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은 조금씩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 수록 더 나타날 것이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아니 그렇게 될 것이다. 아주 아주 오랜만에 조금은 평화스러운 연숙의 얼굴을 보는 것은 즐거움에 속한다. 고마운 6월이여… 부디 잘 가시오.. 6월과 같은 달이 계속 앞으로도 오기를 빌며..
The harvest is abundant but the laborers are few..(Luke 10:2)
2011년 아틀란타 성체대회가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고국의 육이오 동란 기념일인 6월 25일 토요일에 아틀란타 국제공항 바로 옆에 있는 거대한 Georgia International Convention Center(GICC)에서 유엔총회를 방불케 하는 다양한 문화와 배경을 가진 3만 여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운집을 하여, 하루 종일을 ‘성체’에 대한 대 주제를 놓고 유명한 연사들의 강연, 음악, 간증과 ‘엄청나게’ 많은 사제들의 보조를 받는 그레고리 대주교님 (Archbishop Gregory ) 집전의 특전 미사로 성체대회의 마무리를 지었다.
비록 성체, 그러니까 body of Christ가 이 대회의 변함없는 주제이지만 매년 조금씩 주제의 각도는 변한다. 올해는 루까복음 10장 2절의 말씀에서 나왔다. 쉽게 말해서 추수를 한 후 일꾼을 찾는 것이다. 이것은 간단히 말해서 성소, vocation을 뜻한다. 언젠가부터 이 성소를 위한 기도문도 아틀란타 대교구에서 각 본당으로 전달이 되어서 우리와 같은 레지오 단원들은 이것을 거의 정기적으로 한다. 사실 그만큼 성소에 대한 중요성이 높아졌다고 할까.
수많은 종파를 가진 개신교는 몰라도 단 하나밖에 없는 천주교는 독특한 자격을 가진 사제들이 이끌고 있는 교회이다. 특별한 자격과 각오를 가진 이 ‘심각한 목자’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데 그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지역적인 차이는 있지만 이곳 북미주는 심각하다고 할 것이다. 특히 근래에 들어 극소수의 ‘배반자, 범죄자’들의 소행인 ‘성추행’ 같은 것은 정말 교회자체를 흔드는 치명적인 사건들이었고, 그것이 직접 간접으로 미치는 악영향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대대적인 홍보를 통해서 성소를 가진 젊은 사제,수녀 후보들을 찾는 것이다.
이렇게 거대한 ‘동료,친구’ 신자들이 한 곳에 모인 것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아마도 1989년 6월 초 South bend, Indiana에 있는 Notre Dame University(노틀담 대학)에서 열린 미국 성령대회였다.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비록 인종, 나이, 언어는 달라도, 한데 어울려 나오는 그 열기는 그곳에 가있어 보기 전에는 간단한 말로 표현하기 쉽지 않다. 이번, 성체대회의 경우, 월남(Vietnam) 출신의 신자들이 인상적이었다. 그 숫자가 막강한데다가 어린이들을 첫 영성체를 하게 예쁜 옷들로 정장을 시키고 입장을 하는 모습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아마도 이 지역에서 이 월남 민족 그룹은 앞으로 단단한 신앙의 뿌리를 내릴 것이다. 물론 전통적인 히스패닉 그룹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의 열기와 숫자는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결국, 전통적인 ‘백인’ 신자그룹이 열세로 보일 지경이었다. 한국 community는 이 행사에 전통적으로 아주 소극적이었다고 말을 들어서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다른 그룹에 비하면 숫자로 완전히 열세였다. 하지만 숫자에 비해서 본당 level의 협조와 조직은 상당히 열심히 준비하고 실행 된 것으로 보였다. 문제는 앞으로 어떻게 홍보를 더 잘해서 숫자를 늘리는 가 하는 것이다.
이번 성체대회에서 인상적인 사람들이 있었는데 Iraqi Nun, Olga라는 이라크 출신 ‘올가’ 수녀가 있었고, Ireland(아일랜드) 출신의 Dana, ‘대나’ 라는 여성이 그들이다. 한마디로 두 사람, 다 가톨릭, 맹렬 여성이라고나 할까.. 참 대단한 여성들이었다. 올가 수녀님은 46세의 정말 조그만 체구를 가졌는데 비해 말과 노래는 정말 우렁찬 것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심금을 울리는 말을 잘도 하던지.. 영어를 배운지 10년밖에 되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녀는 완전한 영어로 말을 했다. 어떤 사람은 이분을 이락의 마더 데레사라고도 불렀다. 어렸을 때 성소를 느끼고 완고한 집안의 반대를 물리치고 수녀가 되었고 바그다드에서 집 없는 사람들을 돌보다가 ‘하느님의 인도’로 미국 보스톤 대학으로 유학을 오게 되고 그 대학의 Newman Center(대학내의 공소)를 통해서 학생들을 인도하였다. 그 작은 몸 (4피트 9인치 정도?)으로 어떻게 그 덩치가 커다란 학생들과 어울렸는지.. 인터넷으로 그녀를 찾아보니 역시 대단한 수녀였다. 장래에 무언가 남길 만한 능력이 있는 ‘작은 거인’이라고나 할까.
아주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이번 대회를 ‘레지오의 정신‘으로 참가는 했지만 놀랍게도 나에게 수확이 컸다고 할까.. 물론 가능하면 내년에도 참가하고 싶고, 더 가능하면 이곳에서 volunteer가 필요하다고 하니까 한번 그것도 생각해 보고 싶다. 또한, 은근히, 그것도 즐겁게 놀랐던 사실 중에는 우리 본당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교육분과의 청년 임원님들의 잘 들어내 보이지 않았던 노고였다. 청년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들에 비해서 그렇다는 뜻이다. 그 바쁜 한참의 나이에 ‘진지하고 짜증 없는 모습으로’ 점심준비와 교통편을 헌신적으로 제공한 그들의 얼굴은 ‘진정한 젊은 목자‘를 연상시킬 정도였다. 그래서 자꾸만 연로해가는 본당의 미래가 조금은 밝게 보일 정도였다. 다시 한번 그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육이오, 6.25, 한국전쟁, 조선전쟁, 해방전쟁, 육이오 동란, Korean War, Korean Conflicts, 심지어 박정희를 위시한 꽤 많은 사람들이 “융뇨” 라는 괴상한 발음으로도 불렸다. 이중에 조선전쟁은 아마도 일본 “아해” 들이 쓴 말이고, <해방전쟁>이란 말은 분명히 전쟁을 도발한 1급 전범, 김일성 빨갱이 개XX들이 부른 이름이다. 우리는 자랄 때, 그저 <육이오 동란>이라고 불렀다. 그것이 언제 어느덧 61년이나 흘렀을까..
육이오 동란에 대한 나의 어린, 가장 오래된 기억의 대부분이 1952년부터 1953년 7월 휴전 이후에 해당을 하고 그 때를 어떤 것들은 꿈같이, 어떤 것들은 사진같이 기억을 한다. 하지만 절대로 나는 ‘전쟁이나 전투의 공포’에 관한 것은 눈으로 본 적이 없었다. 이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어떨 때는 한번 쯤 보았었으면 하는 아쉬움 같은 것도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 조국의 엄청난 격동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제일 많은 피해자는 역시 전투를 해야 하는 군인들일 것이다. 죽거나 다치고 다친 군인들 중, 불구자가 된 사람들은 대부분 비참한 일생을 보내야 한다. 그들을 상이군인이라고 불렀다. 어렸을 적에 참 많이 보았다.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인 그들이 거의 거지처럼 구걸을 하는 것을 보았다. 국가는 그들까지 돌 볼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그 다음, 민간인들도 ‘곁다리’로 피해를 보게 마련이다. 특히 육이오 같은 사상전쟁은 민간인들의 피해가 다른 전쟁에 비해서 더 심하다. 사상전쟁은 사실 그 옛날의 종교전쟁과 비슷할 것이다. 무언가 믿고, 홀려서 싸우게 되니 얼마나 더 치열하고 처참할 것인가? 한마디로 증오로 똘똘 뭉친 전쟁인 것이다.
도대체 이 전쟁을 일으킨 사상이란 것이 무엇이길래 평화를 사랑하던 우리 같은 민족끼리 그렇게 저주와 증오로 서로 죽여야 했던가? 전쟁이 없이 해결 할 수 있었던 것일까? 역사는 분명히 말을 해 준다. 전쟁의 원인을.. 하지만 그렇게까지 서로 죽여야 했었을까 하는 것에는 역시 대답이 없다. 모든 전쟁이란 것이 정당성과 비정당성을 다 내포하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무력으로 짧은 시간에 자기의 체제로 바꾸려고 했다는 것은 한마디로 공산주의의 잔인성과 비인간성을 100% 적나라 하게 노출시킬 뿐이다.
50년 뒤에 그들의 체제와 이념은 거의 지구상에서 사라져가고 그들의 주장은 다 허구인 것도 들어났다. 하지만 우리가족과 수많은 동포를 유린했던 제일 범죄자 집단은 아직도 이북에 도사리며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고, 바보 같이 순진한 ‘남조선’의 일부 인사들은 허황된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고.. 참 이날만 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전쟁 발발 초에 납북되셔서 행방불명이 되신 당시 경기고교 영어선생님,평창이씨 익평공파 27세,이정모, 우리 아버지를 꿈속에 다시 그린다. 답답하셨던 어머니, 점쟁이를 통해서 아버지께서 끌려가시다 운명하신 것으로 들었다고, 그것이 전부다. 그 이후 나는 아버지 없는 후레자식이 되었고 그렇게 살아왔다.
어릴 때, 육이오 날이 다가오면 나는 사실 공포에 떨었다. 그때의 반공교육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고, 공산당이 다시 쳐들어 오는 가능성은 항상 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을 모르는 어린 우리들은 그저 공산당이 또 6월 25일 날 쳐들어 온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특히 6월 25일 저녁 때 쯤이 제일 무서웠는데, 그 이유는 그때 만약 저녁 노을이 ‘빨갛게’ 져서 서쪽 하늘이 빨갛게 물들면 그것이 바로 공산당의 포격으로 착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로 우리들은 순진했다. 설마 설마 하지만 그 때 제 2차의 육이오 전쟁의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무서운 꿈도 많이 꾸었다. 한번은 꿈속에 남산을 바라보니 그들의 대포가 일렬로 정열을 하고 우리를 향해서 포격 준비하는 것을 보기도 했다.
전쟁의 결말이 휴전으로 끝이 나면 역사적인 판정을 누가 내려줄 것인가? 왜 휴전으로 끝을 내어야 했을까? 이것은 암만 역사가들이 머리를 굴려도 명확한 해답을 구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거의 종교적인 눈으로 볼 수 밖에 없지 않을까? 나의 종교관의 변화로 이제는 한 단계 높여서 해석을 하고 싶다. 하느님의 한반도에 대한 원대한 계획이 있을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그것을 바꾸려고 해도 할 수 없을 것이고, 그것을 따르는 것이 ‘순리’가 아닐까.
두 명의 세계적인 analog guru (analog electronics engineers) 가 불과 며칠 간격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중의 한 명이 떠났어도 큰 뉴스거리이자 학계, 업계의 큰 손실일 터인데, 이렇게 heavy급 두 명이 거의 함께 사라졌다는 것은 사실 할 말을 잃어버릴 정도다. 처음에 6월 19일에는 나와 동갑인 Jim Williams가 뇌일혈로 급서를 하였다. 사진으로 보기에 그렇게 보이지 않았지만 이런 것을 누가 예측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건강하게 보여도 60세가 넘으면 ‘통계적으로도’ 다음날을 못 볼 수도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케 한다. 다음 사람은 Bob Pease, 이 사람은 70세가 넘었고 도사 풍의 긴 수염이 특징이다. 위에 말한 Jim Williams의 장례식에 ‘늦게’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차가 절벽으로 구른 모양인데 아마도 운전 실수가 아니고 심장에 갑자기 이상이 생겼던 것으로 추측을 하고 있다. 이렇게 세계 정상급의 analog engineer둘이 기이한 인연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나이로 보아서 나와 비슷한 electronics경험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transistor이전의 vacuum tube(진공관)으로 시작한 세대인 것이다. 진공관, 트랜지스터, IC (Integrated Circuit)를 모두 경험한 electronics에서 great generation에 속한다 고나 할까.. 특히 Jim Williams는 ‘경력’이 이채롭다. 그 흔한 학위가 없는 것이다. 대학교라고는 디트로이트의 Wayne State University에서 한 학기 공부한 것 밖에 없는 것이다. 거의 완전히 ‘실무와 독학’으로 세계의 ‘정상’급에 도달한 것이다. 나는 충분히 이해를 하고도 남는다. 그 분야에 대한 강렬한 집착과 노력이 ‘그저 수학 같은 공부만 잘하는’ 엔지니어보다 나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세상이 물론 많이 바뀌어서 ‘납땜’질 한번 안 해보고 그저 computer simulation으로 살아가는 새 세대의 engineer들 천지인 요새 세상, 그렇게 design된 것들이 많은 경우에 의도한 대로 ‘작동’을 못한 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고, 수학적인 것과 땀과 먼지 가득한 실제의 현장과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과연 어디서 누구로 부터 배울 것인가?
한국의 천주교회, 특히 주교회 발행경향잡지 site를 보면서, 자주 보는 잡지나 책 같은 것을 online으로 보는 web applications (web apps)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었다. 특히 ‘글자’들과 멋진 page format등이 많은 페이지를 , 그것도 많은 분량을 읽는 것은 그렇게 편하거나 즐거운 경험은 아닌 듯 싶다. WWW의 역사가 종이로 만든 책의 역사에 비하면 거의 제로에 가까운 만큼, 우리는 아무래도 책을 읽을 때, 책장을 넘기는 기분 정도는 잘 알고 있다. 현재 수준의 웹 페이지는 그것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비록 비디오는 비교적 잘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책 종류는 그것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YouTube style영향으로 바뀌고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이 괴상한 이름의 ISSUU인 것이다. Denmark의 venture인 듯 한데, 비슷한 종류의 service중에서 제일 세련되었고, 우선 느껴지는 맛이 그 중에서 제일 매끄러운 것이다. 이것을 test하려고 내가 손수 scan해서 만든 중앙고 57회 졸업앨범pdf 를 이곳에 올려 놓아 보았다. 과연 소문대로 모든 것이 ‘선전’한 그대로이다. 앞으로는 조금이라도 ‘책’이나 ‘서류’의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들은 이 service를 이용하면 좋을 듯 싶다.
내일이 하지냐? 하지.. 하지.. 해방 후 미군 군정 사령관의 이름이 하지 Hodge 였지.. 물론 영어 발음은 ‘핫지’에 가까웠지만. 하지면 공식적인 여름의 시작이라고들 하지만 그것은 편리한 생각에 불과하고 사실은 이날부터 낮의 길이가 밤의 길이보다 조금씩 짧아진다는 뜻이 더 맞다. 그렇게 새벽이 빨리 밝고, 저녁 때까지 밝던 것.. 이것도 조금씩 후퇴를 하게 되나? 6월, 하면 재작년에 준수녀석이 왔을 때, 신경질이 나던 그때가 생생하고, 작년의 Washington DC trip이 연상된다. 덥긴 더워도 그래도 7월, 8월을 생각해서 ‘무덥다’고 말하긴 이르다. 올해는 그것이 조금 더 일찍 5월 중순에 찾아왔지만.
6월에는 굵직한 ‘신심행사’가 두 개나 있다. 레지오 봉쇄피정은 이미 ‘성공리’에 끝을 냈고 이번 주말 6월25일에는 그렇게 오랫동안 ‘보고 듣기만’ 했던 이곳 대교구의 연례 성체대회가 열린다. 이것도 올해는 ‘하느님의 은총’ 으로 가게 되었다. 이것에 우리가 간다는 사실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무언가 우리를 ‘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고, 그럴 것이다. 이런 ‘가까이’ 온 것을 놓치면 다시 못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it’s now or never.. 라고 나 할까.. 그럴지 모른다. 우리, 나의 근처에 오는 절대자의 손길은 이제 멀리하지 말고 그저 무조건 잡아보자.
그제 일요일은 아버지 날이었다. 잊고 사는 날이지만 그 날이 되면 잊을 수가 없다. 성당에서도 강복을 받고, 그래도 아버지의 의미를 한번은 일깨워 준다. 하지만 우리 집은, 조금 실망을 했다. 선물을 바래서가 아니라, 느낌이 그렇다. 나는 그래도 전화 한 통이면 정말 족하고 그것도 더 좋다. 이제까지는 아이들의 ‘극성’에 놀아났고, 그것은 물론 고맙지만 그것이 내가 바란 것이 아니고, 그것은 그들이 원한 것인 것을 그들은 모르는 듯 하다. 그날 하루는 ‘나의 식’ 으로 축하를 해 주면 안 될까?
고윤석씨는 비록 전기과의 undergraduate에서 공부를 하고 있긴 했지만 사실 그는 나이 때문에 그의 classmate들 보다는 우리들과 더 잘 어울리고 학교의 규칙에 어긋나지만 우리들과 같이 대학원생의 office를 쓰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활발하고 서글서글한 성격의 호남(好男) 이었다. 하지만 공부를 하는 데는 남모르게 힘들어했다. 우선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관계로 상대적으로 수학실력이 같은 학년의 한국학생들보다 떨어졌고, 그 다음은 전공에 대한 정열이 그렇게 많지를 않아 보였다. 그러니까 그 당시 전기과의 직업전망 때문에 이 과를 선택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가끔 유근호씨에게 ‘전기’에 대한 정열이 없다고 핀잔을 주곤 했다. 나는 속으로 조금 우스웠다. 내가 보기에는 정 반대로 보였는데..
고윤석씨의 부인은 연대 사학과 출신의 연상이었는데 이것도 역시 고윤석씨의 활발한 성격으로 열렬한 구애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기억에, 유학생들의 파티에 가서 보자마자 춤추기를 청하고, 거의 일방적으로 구애를 한 끝에 결혼을 하였다니.. 나는 조금 상상하기가 힘들지만, 영화 같은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녀는 OSU Admissions Office에서 일을 하고 있는 관계로 누가 다음학기에 이 학교로 오느냐 하는 것 뿐만 아니고 대부분 유학생들의 상세한 학력이나 이력 같은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부부와 나는 가깝게 지낸 편이었지만 전혀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나, 특히 나의 성격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아직도 고윤석씨에게 미안한 마음이 많다. 언젠가 편할 때 정식으로 사과를 하려 했지만 그것도 못하고 헤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생각나는 사람은, 비록 나와 가깝게 지내지는 못했지만 기억에 나는 사람이다. 화학과의 박호군씨.. 고등학교는 모르겠지만 서울대 출신으로, 거의 영화배우 같은 느낌을 주는 호남형이고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고.. 그러니까 거의 ‘이상적인 남자’ 의 표본이라고나 할까? 이분은 내가 입학하자마자 부터 유근호씨 덕분에 자주 보게 되었다. 내가 유근호씨와 가까이 지낸 때문에 사진에도 남아있다. 기억에 유근호씨가 참 이 분을 좋아했었는데 지금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아마도 둘 다 천주교 신자였던 것 같았다. 그래서 더 가까이 지냈는지도.. 그리고 이분의 부인이 남편과 같은 화학과에서 함께 공부를 하던 유학생이었고, 남편은 유기화학, 아내는 무기화학을 한다고 해서 아주 인상적이었다. 얼마 전에 아주 우연히 인터넷 으로 한국천주교 주교회 발행 월간 경향잡지를 보다가 어떤 여자분이 화학에 대한 수필을 쓴 것을 보았는데 저자의 이름이 조금 귀에 익어서.. 약력을 보니 역시 Ohio State 출신이었고, 이분이 바로 박호군씨의 부인인 황영애 씨 (상명여대교수)였던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첫 학기, Winter quarter는 나의 ‘기본실력’을 테스트하는 좋은 기회였다. 내가 이곳에서 잘 견딜 수 있는가를 시험할 수 있는 때였다. 내가 좋아하던 나의 passion 이던 control system의 여러 과목을 ‘대거’ 신청, 수강을 하게 되었다. 이것만은 내가 자신을 하던 것들이라 아주 ‘과중’하게 신청을 하고 단단히 별렀는데, 과정과 결과가 아주 ‘참담’하였다. 수강과목이 너무나 많았고, 대부분 ‘어려운’ 것들이어서 겨울을 거의 office에서 먹고 자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한 과목은 결국 withdraw를 하게 되었다. 제일 공을 많이 들인 과목이 digital control system이었는데, 교수가 아주 어려운 사람, Dr. Fenton이어서 사실 A학점 받는 것은 미리 포기할 정도였다. 이것 때문에 나는 사실 classical control system에서 많이 열기가 식었지만, 뜻하지 않게 친하게 된 digital system쪽으로 구미가 당기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이 겨울학기는 유난히도 힘이 들었는데, 공부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나에게는 작은 ‘교통’사고가 있었다. 차 사고가 아니고, 내가 타고 다니던 bike(자전거)사고였다. 이것은 시카고 있을 때부터 타던 그런대로 편리한 12 speed, disc brake이 있었던 것이어서 이렇게 큰 캠퍼스에서는 정말 안성맞춤인 것이었다. 그런데 추운 어느 날 캄캄한 밤에 집으로 돌아갈 때, 학교 내의 어떤 길에서 신나게 달리던 중, 바퀴 밑에 무언가 걸리고, 나는 공중으로 떠서 완전히 얼굴로 아스팔트 도로에 떨어지게 되었다. 너무나 순간적이어서 손을 쓸 수가 없어서 얼굴에 심한 마찰,타박상을 입게 되었다. 정신은 말짱해서 다시 office로 돌아와서 얼굴에 흐르는 피를 씻고 보니, 이것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 때까지 office에 남아서 공부를 하던 고윤석씨와 이규방씨가 보고 놀라서 학교병원에 전화를 하고 구급차까지 와서 나는 졸지에 응급실로 들어갔는데.. 여자 의사가 다짜고짜로, “Who is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하며 물었다. 아마도 나의 머리를 의심한 듯 했다. 그래도 정신은 말짱해서, “Jimmy Carter“라고 대답을 하고 얼굴에 상처를 소독을 한 후 나를 내보냈다. 그 상처는 거의 한 달이 갔는데, 붕대를 얼굴에 처매고 매일 학교 식당을 드나드는 것도 웃기고, 그것을 계기로 한 과목을 withdraw까지 하게 된 것이었다.
그 해 봄학기 때는 조금 모든 것이 안정이 되어서 성적이 오르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 Dr. McGhee의 Automata Theory란 과목에서는 100점을 받게 되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Graduate Research Associate (RA) 자리를 소개받게 되기도 했다. 그 자리는 인도 출신의 digital system교수인 Dr. Jagadeesh 가 일하던 OSU 약학대학의 연구실이었다. 그러니까 전기과와 약학대학간의 공동 연구실인 셈인데 그곳엘 가니 전에 말한 김미영씨와 최희경씨가 있었다. 나는 사실 이 연구실에서 석사학위 논문을 쓰게 되는데, 그것이 1979년 여름까지 계속 되었다. 최희경씨는 경기여고, 서울대 약학과 출신의 전형적인 수재 형이고, 그녀의 남편도 경기고, 서울대 출신의 의사로 조금 있으면 OSU로 올 예정인, 부부 둘이 소위 말하는 KS 마크 부부였다. 김미영씨는 최희경씨의 선배였는데 이분도 은근히 공부도 잘하고 노는 것도 잘하는 그런 재주 있는 분이었다. 그 당시는 처녀였지만 1년 뒤에 수학과의 최봉대씨 와 결혼에 골인을 하게 된다.
가을학기가 되면서 비교적 가족적인 분위기의 우리 전기과에도 조금 찬 공기가 느껴지게 되었다. 새로운 유학생들이 도착한 것이다. 경복고, 서울대 출신의 민위식씨, 용산고, 서울대 출신의 박인규씨.. 완전히 분위기가 이상하게 변해버렸다. 이들은 그런대로 reasonable한 사람들임에는 틀림이 없었지만 절대로 chemistry는 맞지를 않았다. 이것은 참 아까운 노릇이었지만 별 수가 없었다.
Just When I Needed You Most
Randy VanWarmer
1979년 OSU campus를 생각케 해 주는 classic
가을학기가 지나면서 나는 완전히 Dr. Jagadeesh 밑으로(RA) 들어가서 그의 약학대 연구실에서 digital speed control of DC motor 란 주제로 논문을 쓰는 준비를 하게 되었고 실제로 전에 이용한씨가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 만들어 놓았던 centrifuge control system을 내가 물려받아 거기에 쓰일 microprocessor-based(Intel-8085) motor speed control system을 design하게 되었다. 이론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이 조화를 잘 이루어야 하는 과제로 논문을 쓰게 되어서 큰 부담이 되었다. 내가 일하던 곳은 약학대학이라는 인상보다 computer lab같은 인상을 줄 정도로 최첨단의 컴퓨터 시설이 되어있었는데, 그 제일 큰 이유는 나의 지도교수의 약대 상대편 교수가 완전히 컴퓨터 ‘광’에 속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는 대부분 mini computer가 단과대학 연구실의 주 기종이었는데 실제로 전기과나 computer science 쪽 보다 더 그런 것들이 많았다. 그 교수는 Dr. Olson이라는 사람인데 어디에서 돈이 그렇게 오는지 계속 새 것만 나오면 사곤 했다. 하기야 이것 때문에 그곳에서 일을 하면서 참 덕을 많이 보긴 했다.
온통 낮과 밤을 그곳에서 보내게 되었는데, 이때 나는 많이 몸을 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론적인 것과 더불어 실제적인 것을 이때 많이 배우게 되어서 나중에 직장에서 일할 때 두고두고 이것들이 도움이 되었다. 나와는 대조적으로 같이 공부하던 이재현씨는 거의 ‘이론적’인 것에 관해서 논문을 쓰게 되었는데, 아마도 computer hardware쪽에 큰 흥미가 없어서 그런 듯 싶었다. 이런 approach는 나중에 대학에 남게 되면 좋겠지만 실제로 사회에 나가서 일을 할 때 제한을 많이 느끼게 된다. Digital hardware와 일을 하는 것은 밤을 새우고도 결과가 별로 없을 수 있는 고된 일이고, 그것에 맞는 software가 성공을 하면 그것의 ‘임자’가 대부분 ‘칭찬’을 받곤 했다. 이런 것들을 이때 뼈저리게 몸으로 경험을 해서 나중에 나는 완전히(more) software (than hardware) 쪽으로 방향을 잡게 되고, 나의 lifelong career가 되었다.
논문의 결과가 서서히 윤곽을 들어낼 쯤, 1979년 Spring quarter쯤에는 computer science쪽으로 새로운 유학생이 도착하였다. 이름은 김정국씨… 나와 비슷한 나이고 유근호씨와 서울공대 전기과에서 같이 공부를 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서울공대 전기과 출신인 것이다. 청주고 출신이었으니 얼마나 그때 공부를 잘 했던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오자마자 우리 그룹과 잘 어울리며 가끔 모여서 술을 마시기도 했다. 김정국씨는 비록 전기과 출신이었지만 졸업 후 은행에서 이미 전산(computer)쪽으로 경험을 쌓은 경력자였다. 그래서 완전히 computer science쪽으로 공부를 하려고 유학을 온 것이고 그것도 은행에서 ‘보내준’ case여서 우리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대강 어떤 일을 했었는지는 나의 매부가 그 쪽에서 일을 해서 짐작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김정국씨는 도착 후 일년 뒤쯤에 부인도 뒤따라서 오게 되었고, 나도 그 당시 결혼을 해서 두 couple이 만나서 식사도 했는데, 섭섭하게도 곧 바로 Georgia Tech으로 transfer를 하고 말았다. 우리는 사실 비슷한 나이의 부부여서 기대를 많이 했는데 참 섭섭한 노릇이었다. 하지만 인연이 있었는지 우리는 1989년에 아틀란타에서 정말 오랜만의 해후를 하게 되었다. 서로 사는 것이 바쁘다 보니 만날 기회는 많지 않았지만 김정국씨 부인은 다른 인연으로 아틀란타 한국학교 선생님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우리 부부도 그곳에서 가르쳤기 때문에 한참 연락이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세월의 바퀴 속에서 나중에는 거의 잊고 살 게 되었다. 김정국씨는 안타깝게도 몇 년 전에 비교적 일찍 암으로 운명을 하고 말았다. 비록 가깝게는 못 지냈어도 항상 마음 속에 있었던 김형..이었다. 세월로 보아서도 참 오래 된 ‘지인(知人)’ 이었고, 무엇 보다도 “친하게 지내고 싶었던” 그런 사람이었다.
이렇게 해서 1979년 여름학기가 지나가면서 Master’s degree 과정이 다 끝이 나고 나는 곧 귀국을 하게 되었다. 너무나 몸과 마음이 피곤한 상태여서 어딘가 좀 쉴 곳이 그리웠다. 물론 다시 올 것을 예정하고 돌아갔지만 나이 때문에 결혼을 피할 수가 없어서 거의 6개월을 서울에서 보내게 되었다. 다시 Ohio State로 돌아와서 계속 공부를 하게 되지만 전의 2년과는 완전히 다른 마음과 환경이고 주변의 사람들도 거의 ‘완전히’ 바뀌게 된다. 특히 1980년 유학자유화가 이루어 지면서 ‘대거’의 유학생들이 이곳으로 ‘몰려’오게 돼서 더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때가 더 좋으냐고 말할 수 없지만, 아무래도 good ole days를 그리게 되고, 마음이 편할 정도의 학생 수가 있었던 1980년 이전이 더 그리워 짐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6월도 셋째 주로 접어들고, 6월의 세 번째 일요일, ‘아버지 날’을 또 맞는다. 오래 전 미국에 처음 왔을 때, 미국에 아버지 날이 있는 것을 알고 사실 코웃음을 치기도 했다. 그 당시만 해도 Father Knows Best라고 한 가정의 가장이요, 제왕이던 시절에 웬 놈의 아버지 날? 일년에서 어머니 날을 제외하고 모두 아버지 날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세월은 흘러 흘러, 점점 이 날의 의미가 새로워지고 심지어 더 심각하게 되고 있다. 그만큼 ‘남자’와 ‘아버지’의 사회적 위치가 떨어졌다고 보면 된다. 나는 그것을 모조리 보고 느끼며 산 셈이다. 역사는 진보한다고 하니까 이것은 분명히 사회적으로 진보하는 것이다. 모든 것들이 ‘평등화’ 되어가고 있으니까 그 동안 ‘고생’을 하던 여성들의 위치가 거의 일방적으로 올라간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젊은 아빠들은 그런대로 ‘평등교육’을 받고 자라서 잘 적응한다고 하지만 우리 같은 세대는 조금 거부감을 느낄 때도 있다. 어쩌다 ‘가장’들이 이렇게 무기력해지고 아버지 날에나 그런대로 ‘감사’를 받아야 하게 되었나. $$$의 위력이 그렇게 만들었나, 아니면 교육을 그렇게 시켰나.. 남자들이 점점 바보가 되어가나.. 별별 생각이 다 든다.
나는 아버지를 한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럴싸한 아버지 상을 갖지도 못했다. 김일성 개XX 덕분에 우리 아버지는 전쟁의 희생물이 되셨다. 돌아가시기 전에 얼마나 당신의 두 살배기 아들을 그리시다 가셨을까 생각하면 몸서리까지 쳐진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 없는 설움을 느낄 때가 참 많았다. 비록 표정이나 감정으로 나타내지는 않았어도 그것은 참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저 나는 그런 가정이 우리 말고도 많다고 위로하며 나를 달랬다. 하지만 가정에 아버지가 없다는 것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정상적이라고는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미국본당(Holy Family Catholic Church)의 일요일 미사에서 신부님께서 미사 후가 아니고 미사 중에 모든 아빠들을 기립시키시고 특별히 강복을 주셨다. 나는 이것이 그렇게 기다려지고 고마울 수가 없다. 신부는 영적인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자식들의 아버지라서 더 그 의미를 느끼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우리 신부님들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것이 더 신부님을 존경하게 하기도 하지만.. 머리가 다 큰 우리 집 아이들..그렇게 자기 나름대로 요란하게 선물공세를 하더니, 이제는 그것들도 다 없어졌고, 조금은 귀찮은 눈치들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떻게 보면 가족이 진화하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우리 두 딸에게 어떤 아빠인가..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별로 크게 자랑할 것이 없는 것 같다. 어렸을 때는 그런대로 내 딴에 ‘재미있는’ 아빠가 되어 보려고 노력을 하기도 했는데 10대의 사춘기 때를 거치면서 나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항복을 한 것이 되었다. 그저 나는 “우리 때도 저랬을까..” 하는 물음만 계속했다. 심지어는 큰 딸애는 엔지니어와는 절대로 사귀지 않겠다고 선언까지 했다. 내가 그 만큼 재미가 없었는지.. 도매금으로 다른 엔지니어들까지 인상을 구겼던 것이다. 나이가 조금 들면서 ‘의식적’ 으로 노력을 하는 듯 하지만 역시 황금기는 지난 듯 싶다. 문제는 내가 어떻게 해야 그런대로 ‘기억에 남는’ 아버지의 기억을 그 애들에게 남겨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참, 사는 것, 힘들다..
6월도 어느덧 절반이 훌쩍 지나가고 2011년 하지가 며칠 앞으로 다가오고 있다. 하지는 공식적인 여름의 시작이라고 하지만 이건 허울좋은 말로 변하고 있는 것이, 이미 5월 중순부터 에어컨을 써야 하는 무더위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세상의 기후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조금은 신경이 쓰인다. 극단적으로 변하고 있다. 강추위, 찜통더위.. 그 이외의 것은 점점 기간이 짧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거야 말로 good ole days라고 하더니.. 옛날이 그립다.
우리의 한국본당인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 새로 주임신부, 하태수, 미카엘 신부님이 부임을 하셨다. 올 때, 비자문제로 예정보다 훨씬 늦게 부임을 하게 되셨는데, 약력을 잠깐 보니 신학박사에다 서강대에서 강의를 한 사목경험 제로의 신부님이시다. 조금 우려를 금할 수 없다. 50대가 훌쩍 넘은 학자 타입 신부가 과연 이 교포사목의 전초지인 우리 본당에서 어떻게 효과적인 사목을 하실지 자못 궁금해진다. 노동자사목을 몸으로 하셨던 전 pastor, 안정호 신부님과 대조적인 약력이라서 이런 우려가 생기는 것도 무리는 아닐 듯… 오시자 마자, 주일미사에서 전통적으로 찍어서 본당 웹사이트에 공개를 하던, 강론 동영상 비디오를 없애고 음성만 녹음하라고 하셨다고 해서 조금 나의 우려가 사실화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도 들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이런 것은 조금 시간을 두고 신자들의 의견을 들어 본 후에 바꾸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나로써는 주임 신부로써 얼굴을 보이는 것이 불편하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일단 full benefit of doubt를 주어보자. 시간이 말을 해 줄 것이다.
거의 5년을 써왔던 digital camera가 드디어 말썽을 부린다. 5년을 썼으니까 설사 버리게 된다고 해도 크게 걱정은 안 하지만, 이제 손에 아주 익숙해 진 것이라 조금 섭섭한 것도 사실이다. 역시 고장 난 곳은 mechanical인 것인데, lens가 focusing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electronic과 mechanical의 수명의 차이가 선명히 들어난다. 문제는 이것을 내가 고치기가 아주 힘들다는 것인데.. googling 을 해 보면 어떤 사람은 재수 좋게 고쳤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것은 아주 극소수일 것이다. 갑자기 point-and-shoot camera가 없으니까 불편한 것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사진 찍어서 그대로 그 앞에서 보고 print를 하는 것에 완전히 우리들은 spoil이 된 것이다. 그 언젠가는 한번 찍으면 일주일 이상이나 지나야 볼 수 있지 않았던가?
아틀란타 대교구 연례 성체대회를 올해는 처음으로 연숙과, 레지오 단원 몇 분과 같이 가기로 하고 bus 편을 신청해 놓았다. 6월 25일 (육이오) 토요일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수만 명이 참가하는 아주 커다란 아틀란타 대교구의 연례 행사인 데 올해로 거의 15년이 넘어간다. 그 동안 몇 번 가볼까 생각도 했지만 차로 혼자서 가는 것이 불편하고 해서 계속 미루어 오다가, 올해는 다행히 우리 레지오 단원 중의 한 분이 매년 가셨다고 해서 용기를 얻고 같이 가기로 한 것이다. 이런 행사는 절대로 신앙생활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특히 ‘미국식 축제분위기‘의 이런 행사는 아주 색다른 느낌을 주기도 하는 것이다.
가끔 생각한다. 1974년 봄을.. 미국생활 일년이 조금 안 되던 그 해의 초여름, 5월부터 나는 시카고 N. Clark Street 있던 조그만 한국식당, 서울식당이란 곳에서 dishwasher의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 해 3월 말에 나는 텍사스주의 달라스에서 홀로 차를 몰고, 전혀 연고가 없던 이곳으로 왔다. 달라스에서 잠깐 알고 지냈던 University of Dallas 유학생, 경기고 출신 유승근 형 그룹 중에 경기고 배형(이름은 잊어버림)이라고 있었는데 그 형의 조언으로 이곳에 혼자 오게 된 것이다. 자기가 여름방학 때 시카고에서 일을 했던 경험을 내게 일러준 것이었고, 그 것이 나와 시카고의 인연을 맺어준 계기가 되었다.
그 당시는 사실 유학생들이 여가시간에 할 수 있는 것들이 ‘수두룩 닥상’ 으로 많았다. 비록 이민법에 유학생들의 임시 취업에 제한은 있었지만, 지금에 비하면 거의 자유스러웠다고 할까. 특히 여름방학 같이 긴 기간에는 돈을 꽤 많이 버는 학생들도 많았다. 고국에서의 $$ 송금이 아주 힘이 들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이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일 중에서 제일 손쉽게 할 수 있었던 것이 유학생이면 거의 예외 없이 해 보았던 ‘전설적’인 dishwasher, 그러니까..접시딱기 였다. 이 접시딱기라는 단어를 typing하니까 계속 spelling error가 나와서 살펴보니 사전에 그런 말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유행어, 구어 정도이고 아마도 요새는 그런 말 조차 없어진 것을 느꼈다. 세월이 그렇게 흘렀나?
그 해 3월 말, 음산하게 춥고 눈이라도 올 것같이 흐리던 시카고에 도착을 해서 배형이 가르쳐준 대로 Lincoln Avenue 근처 Cornelia Avenue에 있던 낡은 한국교회를 찾아가서 그 교회의 지하에 있던 “기숙사” 칸막이 방에 짐을 풀고 자세히 살펴보니.. 이것이 바로 아마도 그 당시 서울 청계천변에 있던 봉제공장의 기숙사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곳은 음산하고 습하고, 어두운 곳이었다. 좁지는 않았으나 완전히 칸막이로 만든 방이라 천정이 서로 다 통해서 서로의 말 소리가 모두 들렸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의 기준으로 말을 해서 그렇고 그 당시 그 젊은 시절에는 그것도 ‘재미’로 느꼈다.
나이들이 거의 내 또래인 남자들이 너 댓 명이 있었고, 놀랍게도 여자도 한 명이 있었다. 나의 바로 옆방에는 농업연수생으로 왔다가 그대로 눌러앉은 청년, 그리고 자동차 정비공으로 취업이민 온 청년, 그리고 아직도 이름이 생각나는 사람, ‘최 식‘씨가 있었다. 이 분은 우리보다 나이가 훨씬 위였는데 아주 정이 많고 친절한 분이었다. 그 당시 많은 시카고의 교포들은 소규모 제철공장에서 일을 했는데 그 중에서도 템펠 steel이란 곳에 제일 많았다. 이 분도 그곳에서 일을 했었던 듯 싶다. 비록 힘이 든 일이었지만 그 당시 고국의 경제에 비해서 훨씬 많은 보수를 받으니까 사실 모두들 만족스럽게 일들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의 한국의 경제수준으로 보아서 아무리 이곳에서 고생을 해도 그것은 보람이 있었고, 장래가 밝아 보였다.
나는 비록 수중에 $$은 거의 없었지만 힘차게 잘 구르는 “8기통” 차(’68 Ford XL)가 있었고 한창 젊은 나이로 모든 것들이 새롭고 멋있게 보여서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교회의 지하 기숙사는 월세가 거의 공짜에 가까웠고 식사는 같이 살았던 젊은이들과 어울려서 먹으니 그것 또한 거의 돈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이란 나라의 분위기는 ‘일 없이 놀고 먹는다’는 것이 잘 어울리지 않았다. 무언가 일을 해야 서로 말도 통했다. 그래서 일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달라스를 떠날 때 배형으로부터 시카고의 한 남자를 소개 받은 적이 있었다. 이름은 확실치 않으나 아마도 “이성용” 씨가 아니었을까? 우리들 보다 나이가 조금 밑이었던 이민을 온 친구였다. 이미 결혼을 했는데 부인과 합류를 하기 전이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 친구의 도움을 좀 받았고, 그 때 배형이 이곳에서 여름방학에 일을 할 때 어울렸던 우리 나이 또래의 여자까지 소개를 받게 되었다. 그 여자의 이름은 “박영선” 씨였는데, 물론 처녀였고 시카고 영사관 직원의 친척이었다. 그리고, 그 집의 ‘가정부’ 로 일하는 조건으로 미국엘 왔다고 들었다. 그래서 한 번은 그 아가씨의 아파트에 혼자 초대까지 한 번 받기도 했다. 그녀와 배형, 이성용씨가 어떤 관계인지 나는 전혀 아는 바는 없지만 별로 큰 생각 없이 초대를 받았고 대접도 받은 것이다. 후한 대접을 받고 이들 그룹이 아주 가깝게 지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아주 불미스러운 소문들을 듣게 되었고, 나도 거의 봉변에 가까운 일을 당하게 되어서.. 그 때를 생각하면 조금 기분이 아직도 언 짠다. 간단히 말해서 남자관계가 아주 복잡한, “난순이” 형의 여성이라고나 할까… 정서적으로 아주 불안한, 미안한 표현으로 조금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 타입이라고나 할까.. 이 여성에 관한 이야기는 내가 시카고를 완전히 떠날 때까지 계속 비슷한 스토리로 듣게 되었다.
이런 불쾌한 일도 있어서 다 잊고 일을 찾기 시작했는데, 이것도 역시 이성용씨가 도움을 주었다. 처음에는 우리가 묵고 있던 교회의 한 분이 자기가 일하는 곳을 소개 시켜주어서 가보았는데 연락이 없었다. 그러다가 이성용씨가 같이 서울식당이란 곳에 가보자고 해서 가서 주인 아저씨,아줌마를 만나게 되었는데, 일자리가 현재는 없다고 해서 그냥 돌아왔다. 그런데 그 다음날 그 곳에서 일을 하겠느냐고 연락이 와서 그 다음날부터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Clark Street는 생각이 났는데 확실히 어디쯤인지 생각이 안 나서 36년도 넘은 기억을 살려서 Google Satellite를 보니 거의 확실해 졌다. 그곳은 Clark & Montrose였다. 이 Google Satellite view를 extreme zooming을 하면 곧 street view가 나오는데.. 나의 짐작이 맞았다. 식당의 입구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필리핀 식당으로 변한 것을 보게 되었다. 식당에서 일을 하므로 parking을 건물의 뒤에 하기 때문에 사실 나는 뒤쪽이 더 기억에 남는다. 정말 작은 식당이었다. dining table이 대강 10개 정도가 되었을까? 그래서 일하는 사람도 극소수였는데 주방장은 주인 남자아저씨였고, 손님은 주로 주인 아줌마가 상대를 했다. 그리고 주방 보조를 Mrs. 안 이란 나와 나이가 비슷했던 ‘새댁’이 보고 있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거기에 내가 주방보조의 보조로 들어가게 된 것인데 주로 접시를 닦는 것과 청소를 하는 일이었다. 아침 11시부터 밤 11시까지 완전히 12시간의 중노동에 속하는 일이었는데 일주일(6일)에 $120을 받게 되었다. 그러니까… 하루에 $20을 받으니까 시간당 $2 정도인가.. 그 당시 minimum wage가 얼마인지는 몰라도 아마도 이것 보다는 높았으리라.. 하지만 나는 큰 불만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일주일에 $120은 나에게는 상당히 큰 돈이었기 때문이었다. 2주일을 일하고 번 돈으로 나는 그때 처음 나온 ‘personal’ electronic calculator를 Sears에서 $175을 주고 샀다. 그러니까 지금 쓰는 $10짜리 calculator가 처음 나올 당시에는 그렇게 비쌌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시작한 일은 나에게 상당히 큰 경험과 교훈을 남겨 주었다. 교훈이란 것은 사람은 ‘일을 하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꼭 돈을 번다는 것 보다 인간의 존재는 ‘일’에 의해 더 돋보인다는 평범한 진리랄까.. 내가 그때까지 정말 ‘심각하게’ 일을 해본 적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특히 고생을 해서 번 돈은 쉽게 번 것보다 더 값어치를 느낀다는 사실도 알았다. 여기서 만난 사람, 주인 부부.. 일명 세란이 엄마, 아빠 애석하게도 성함을 다 잊었다. 두 분은 월남에서 군속으로 일을 하다 만나서 결혼을 했다고 했는데, 젊은 아줌마는 무용을 하던 연예인 출신이었고, 아저씨는 훤출 한 키의 멋쟁이였다. 어떻게 그 식당을 시작했는지는 생각이 나지를 않는다. 이 부부는 일이 10시 넘어서 끝이 나면 자주, 거의 정기적으로 멋진 옷으로 갈아입고 Chicago downtown으로 drive를 나가서 영화나 공연 같은 것을 보고 왔다. 어떤 날 밤에는 새로 나온 영화 Exorcist를 보고 와선 완전히 공포에 떨곤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하루 종일의 피로를 푸는 모양이었다. 말이 쉽지 하루 12시간을 그 좁은 곳에서 일을 하며 산다는 것.. 참 힘든 일이었고, 후일 에 나는 식당엘 가면 꼭 그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들.. 얼마나 힘든 일을 하나 생각을 하곤 했다.
설거지만 하루 종일 하다가 나중에는 조금씩 음식 하는 것에 관여를 하게 되었다. 주로 쉬운 것들이었지만 그 당시 등 넘어 보고, 해 본 것들은 지금도 두고두고 도움이 되었다. 특히 만두를 ‘빨리’ 빚는 비결, 비빔밥 재료 준비, 냉면 끓이는 법, 우족 만드는 법.. 등등은 아직도 생각이 난다. 그 식당은 우족이란 것이 유명했는데 불행히도 나는 그것이 비위에 맞지를 않아서 한번도 먹을 수가 없었다. 그 음식을 좋아하는 손님 중에 이지용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당시 이민 초기에 보험(State Farm)을 하던 젊은 남자였고 한국일보같은 신문을 보면 꼭 광고가 나곤 했다. 그는 우족을 좋아해서 자주 오곤 했는데 꼭 주방에 들려서 주인 아저씨와 이야기를 하면서 그것을 서서 먹곤 했다.
주방 보조였던 Mrs. 안 이라는 여자는 얼마 전에 결혼을 해서 한국에서 온 새댁이었다. 남편의 집안은 그 당시 이미 시카고에 이미 정착을 한 안광순 씨였다. 그 분은 템펠 제철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꼭 Mrs 안을 차로 데려다 주곤 해서 인사도 하곤 했다. 나와 나이가 비슷하고 농담도 잘 통해서 그 분주한 주방 일을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나중에는 내가 혼자인 것이 측은 했는지 집에 데려다가 손수 밥을 해 주기도 했던, 참 마음씨가 따뜻한 새댁이었다. 하지만 2년 후에 Mrs. 안 부부가 이 서울식당을 인수했을 때, 나의 사소한 실수로 바람직하지 않은 이별을 하게 되었고 그 후로 전혀 소식을 못 들었다. 어떻게 사시는지 가끔 생각이 나기도 한다.
그리고 주인 아저씨의 도움으로 거처를 환경이 조금 밝은 시카고 중앙교회로 옮기기도 했다. 그곳은 Lawrence Avenue에 있었는데, 그 당시는 거의 한인들이 그곳에 없을 때였다. 나는 거기서 우연히 중앙고 1년 선배 박현식 형을 만났는데, 그 때의 이야기는 나의 다른 blog에 자세히 나온다. 그 해 여름을 완전히 그 서울식당에서 지냈는데, 한번은 많이 듣던 남자 목소리가 식당 쪽에서 들렸다. 알고 보니 가수 조영남의 목소리였다. 주인 아저씨에게 인사를 하는 소리였는데, 아마도 전에 이곳에서 식사를 했었고 주인 아저씨와 안면이 있었던 듯 했다. 그리고 기억나는 사람들.. 그때 시카고의 다른 식당, 행복원(Lincoln Ave)이란 곳이 있었는데 그 곳은 밴드가 나오는 큰 곳이었다. 그곳의 밴드 매스터 부부가 밤에 일이 끝나면 이곳에 들리곤 했다. 목소리가 아주 husky하고 부인이 아주 미인이었는데 무슨 미인대회에도 나갔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얘기가.. 연주를 하고 보수를 못 받는 다고 불평을 하곤 했다. 그러니까 관객, 손님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그때만 해도 교민들의 숫자가 그 정도였다. 어느 곳을 가보아도 ‘청중’을 만드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들었다.
서울식당의 조금 위로 올라가면 한국사람이 운영하는 자동차 정비소가 있었다. 이름이 재미있고 따라서 기억하기 쉬웠다. USAKO, 유사코.. 그러니까 미국과 한국(USA & KOREA)이라는 뜻이었을까? 좌우지간 이 정비소의 주인이 서울식당의 단골이었는데, 더 자주 보게 되는 이유는 주인부부의 애지중지하던 딸인 세란이를 이 유사코 사장님의 부인이 babysitting을 하고 있어서 저녁 때 일이 끝난 무렵 부부가 서울식당에 세란이를 데리고 들리기 때문이었다. 그런 인연으로 내차도 가끔 문제가 있을 때 이곳에 맡기곤 했는데, 규모가 생각보다 큰 곳이었지만 손이 모자라면 주인아저씨가 직접 차를 고치기도 했다. 아마도 정비기술을 가진 기술자였던 것 같았다. 주말이면 아주 말끔하게 차려 입고 부인과 같이 식당엘 들리기도 했는데, 남편의 ‘보통’ 모습에 비해서 부인은 약간 남편과 어울리지 않게 ‘세련’된 사람이었던 것이 기억난다.
이렇게 해서 하루 12시간, 6일 동안 일을 하면서 그 해 여름을 보냈다. 그 해는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이 나던 여름이어서 더욱 기억이 또렷하다. 처음 해 보는 중노동이었지만 아주 즐겁게 일을 했고, 일의 보람, 일의 중요성, 눈에 잘 안 보이는 곳에서, 뒤에서 일하는 사람들..등등을 일깨워 준 시카고 서울식당, 가끔 회상을 해 본다. 특히 주인 아저씨부부 세란이 아빠, 엄마, Mrs.안, 그리고 가끔 나와서 도와주던 ‘옥분이’ 아가씨.. 그 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If you love me (let me know) – Olivia Newton-John, 1974
그 당시의 top ‘country’ oldie, 그녀의 전성시대가 시작되던 때
시카고의 TV 뉴스 앵커 Jane Pauley 와 더불어 하루의 피로를
풀어 주던 멋진 여성들이었다
그 당시 거의 매일 듣던 hit song: Seasons In The Sun by Terry Jacks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꾸리아 주최 연차 봉쇄피정이 지난 3일간 Norcross에 위치한 Simpsonwood Convention & Retreat Center에서 있었다. 나도 연숙과 같이 참가를 해서 오랜만에 집을 떠나보게 되었다. 비록 같은 지역에 있다고는 하지만 집을 떠나는 것은 먼 곳에 가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처음 가보는 피정센터는 정말로 큰 도시에 있는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주변의 경관이 아름다웠다. Chattahoochee river를 옆으로 끼고 광활한 숲 속에 위치한 이곳은 피정을 하기에 정말 좋은 곳이었다.
몇 달 전부터 예정이 되어 있던 것이기는 하지만 시간이 다가오면서 부담이 많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을 바꿀 그런 생각은 한번도 해 보지 않았다. 그 만큼 이번에 나의 마음가짐은 단단하였다. 어떠한 것들이 나를 기다릴까 하는 불안감만큼 어떤 것을 내가 얻고 갈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던 것이다.
갈 때는 우리 자비의 모후 쁘레시디움의 회계, 요안나 자매님이 같이 가자고 해서 그녀의 Lexus를 내가 운전을 해서 같이 갔다. 이번에 우리 쁘레시디움의 단원 전원이 참가를 하게 되어서 별로 외롭거나 하는 걱정은 전혀 없었다. 그 정도로 이번에 모든 여건이 좋았던 것이다. 이제는 이런 것들이 그저 우연이라고만은 생각하지 않는다. Norcoss,GA 에 있는 피정센터는 도시 속의 시골이라고 하기에 딱 맞는 그런 곳이었다. 식사는 전형적인 미국식 카페테리아 음식인데 재미있는 사실은 대부분 자매님들이 밥과 김치를 그리워 할 줄 알았는데 정 반대였다는 사실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저 집에서 밥을 안 해도 된다는 해방감에 그런 것은 크게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어서 조금은 이해가 간다.
처음 전부 모여서 일정에 대한 소개를 듣고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우리는 부부라서 단장께서 이런 사실을 상기시키기도 했는데.. 이유는 부부가 참가한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역시 우리 쁘레시디움 단원들이, 전원 참가한 것도 특이한 것으로 소개가 되었다. 다른 곳, 콜럼버스(Columbus, GA), 헌츠빌(Huntsville, AL) 등에서 온 열성적인 단원들도 소개 되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더운 날씨에 main conference room의 에어컨이 고장이 났는데, 이런 이상고온인 날씨에 이건 좀 문제였다. 신부님께서 그 미사복을 입고 계신데 얼마나 더우실까. 결국은 임시로 장소를 옮겨서 lobby area로 모두 후퇴를 해서 강의를 들었다. 이번 피정 기간은 ‘성령강림’ 주일과 겹치게 되어서 그것에 대한 강론으로 시작이 되었지만 사실 피정의 큰 주제는 (인간의) 죽음에 관한 것이었다.
첫날은 그렇게 저녁일정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관심사는 나의 room mate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었다. 3명이 한방을 쓰게 되었는데 물론 남녀가 같이 쓸 수가 없어서 우리 부부도 따로 방을 쓰게 되었다. 밤에 내가 자는 방에 roommate로 아주 젊은 두 사람이 들어왔다. 아주 건실해 보였는데, 한 사람은 본당 청년회장이어서 연숙과 주보관계로 전화로 알던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도 청년회에 관여된 사람이었고, 특히 Peter Park이란 청년은 Virginia Tech출신, computer engineer로 내가 사는 Marietta에 있는 Lockheed Co. (aerospace contractor)에서 일을 하고 있어서 참 반가웠다.
알고 보니 둘 다 나이 서른이 채 안 된 ‘모범적인’ 청년들이었는데, 사실 나는 속으로 많이(즐겁게) 놀랐다. 요새 세상에 이런 젊은이가 있었던가 할 정도였다. 그 나이에 종교와 신앙에서 떠나는 것이 무슨 ‘벼슬’인 양 행세하는 그 많은 젊은이 (우리 집 딸들이나, 나의 옛날과 같이)들이 비교가 되어서 심정이 착잡하였다. 우리집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런 것이다.
숙소는 거의 일류 hotel급 정도로 편했지만 역시 크리스천의 배경이 흐르는 곳이라 조금은 단정하고, TV가 없었다. 다음 날 아침 6시 30분에 피정의 일정이 시작되어서 정말 짧은 잠을 자고 강행군의 토요일 일정이 시작되었다. 레지오의 일상 기도와 더불어 레지오 쁘레또리움 단원들이 하는 ‘성무일도’가 곁들여 졌는데, 나는 생전 처음 해 보는 것들이라 상당히 힘들었지만 열심히 따라 했다. 조금 더 이것에 대한 orientation같은 것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도 있었다. 식사 전에 미사가 있었고, 식사 후에는 산책시간까지 주어졌다. 이 피정 센터에는 산책로(trail)가 울창한 숲 속에 있는데 아주 긴 편이었다. 연숙과 가벼운 마음으로 걷다가 시간이 너무 걸리고 길을 잃을 것 같아서 중간에서 돌아와야 했다 .
곧 이어서 점심식사 전까지는 ‘시범 주회’란 것이 열렸다. 그러니까 “모의(simulation)” 주 회합인 것이다. 추첨으로 뽑힌 자매님들이 (남자, 형제님들은 하나도 뽑히지 않았음) 공개적으로 주 회합을 하고 나중에 평을 듣는 것인데 나에게는 참 흥미로웠다. 다른 쁘레시디움 주회에 가서 주 회합 광경을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이것은 나와 비슷한 입장이었을 것이다. 꾸리아 간부가 아니면 남의 주회에 들어 갈 일이 없을 테니까. 그리고 이어서 ‘품평회’ 비슷한 질의응답시간이 있었는데, 대부분 조금은 ‘사소한’ 것들이었다. 너무나 지나치게 레지오의 세세한 법칙에 얽매이는 느낌이었다. 대부분 ‘상식’적인 해답이 제시되고 동의를 얻었다. 하지만 레지오는 거의 군대식이어서 이런 세세한 규칙들은 사실은 중요한 것들이다. 문제는 명문화 되지 않은 것 들을 어떻게 지혜롭게 주 회합에 적용하는가 하는 것이다.
점심 후에는 연차 아치에스 행사 때 하던 봉헌식을 다시 했다. 공개적으로 레지오의 상징인 벡실리움에 손을 얹고 짧은 선서를 읽는 것이다. 3월 달에 한번 해 본적이 있어서 이번에는 조금 나도 익숙하게 이것을 할 수 있었다. 이 시간에는 요한 바오로2세의 유언장이 낭독되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작성, 수정이 된 이 유언장은 하나의 작은 역사적 문서가 되었다. 교황즉위 후부터 암살기도, 소련(연방)의 붕괴에 이르는 역사가 이곳에 영성적인 조명을 받으며 기술이 되어서, 조금 길기는 하지만 지루하지는 않았다.
이날은 두 차례 안정호 신부님의 강의가 있었는데, 오후에 있던 첫 강의는 그 다음날 ‘성령강림‘을 염두에 두고 하신 것이고, 저녁 식사 후에 있었던 것은 이번 피정의 ‘대 주제’인 ‘죽음’에 관한 것으로 아주 심각한 것이었다. 이 강의는 곧 이어서 있을 ‘죽음의 연습’을 염두에 두고 하신 것이라 더 뜻이 깊었다. 중요한 것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죽음을 생각하면 대부분의 것들은 상대적으로 사소한 것으로 보인다.
죽음이란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 인간이 만든 죄에 의한 것이다.
예수님과 같은 고통이 죽음의 단계에서 따를 수도 있지만 이것은 다음 단계로 가는 과정일 뿐이다.
지상의 삶은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영원한 것을 향한다.
죽음은 부활을 전제로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죽음은 계속 성찰을 하면서 살아야 할 과제이다” 라고 선언했다.
이어서 열린 ‘죽음의 연습’은 이번 레지오 봉쇄피정의 절정(climax)에 속한다. 물리적이고, 시각적, 심리적으로 죽음을 경험하게 하는데 사실은 의외로 간단한 것이다. 관(棺) 속으로 직접 들어가 보는 것이다. 장례식에 있던 그런 장면이 자연스럽게 ‘연출’이 되는데 천주교 식의 ‘연도’라는 것이 행해지는 것이다. 이 절정에서 나는 실패를 하고 말았다. 거의 99.9%가 ‘주저 없이’ 관 속으로 들어갔는데.. 나는 못했다. 생각해 보니 못할 이유가 없었는데.. 그저 싫었을 뿐이다. 이것이 후회로 남게 되었다. 하기야 후회가 있어야 다음에 더 잘 할 명분도 생기니까.. 대부분 사람들 생각보다 마음이 평화스러웠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연숙도 들어갔고 우리 단원들 모두 들어갔다. 나만 못 들어갔다.
이상이 이번 피정의 제일 중요한 행사들이었다. 밤 늦게, 헤어지기가 아쉬운지 가벼운 여흥시간이 있었는데.. 꾸리아 단장, 부단장님들의 프로에 가까운 노래와 춤 솜씨에는 나는 죽어도 저렇게 못하겠다는 한숨만 나올 정도였다. 이래서 토요일 main event는 아침 6시 반에서 시작이 되어서 밤 11시까지의 기나긴 여정이었지만 사실 정신적으로는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마지막 날, 일요일의 일정은 신부님의 스케줄 변동의 관계로(공항에 도착하시는 새 본당 신부님 때문이었을까?), 완전히 바뀌어서 아침 6시 30분에 미사를 하게 되었고 곧 바로 강의로 이어져서, 조금은 피곤 했지만, 역시 이것도 신선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니 하나도 문제가 되지를 않았다. 마지막 강의는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로 시작이 되고, 성모님의 레지오에서의 위치로 귀결이 되었다. 성모님과 같이 노력을 하는 레지오의 성격을 잘 이해하게 해 주는 강의였다.
이렇게 해서 대단원의 막이 서서히 내렸고, 마지막 시간에 서로의 간단한 느낌, 소감을 나누었는데, 처음에는 역시 조용하더니.. 웬걸.. ‘마이크 스타일’의 형제,자매들이 줄줄이 나와서 솔직한 소감들을 나누어 주었다. 내년에는 나도 한번 저렇게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기도 했다. 좋은 것은 사실 나누어 주는 것이 더 좋다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나서 서로에게 작별의 인사를 악수나 hug으로 ‘모두가’ 나누었는데.. 이것도 무슨 인연이라고 가슴이 뭉클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해서 2박3일의 일정이 끝났는데.. 한마디로 ‘참, 좋았다‘.
이번 주말에는 아틀란타 본당 레지오 주최 연례 3일간 봉쇄피정이 있어서 연숙과 같이 들어간다. 둘이서 집을 같이 떠나는 것도 오랜만이지만 나에게는 생전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는 피정(retreat)이라서 아무래도 신경이 쓰임은 어쩔 수가 없다. 일년에도 몇 차례씩 이런 곳에 가는 사람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칠 노릇이겠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이름이 아주 거창하다. 봉쇄피정이라.. 한자로 읽으면 아마도 완전히 3일 동안 외부와 연락이 차단이 된다는 뜻일까? 아니면 세상만사를 다 잊으라는 뜻일까? 아직 누구에게도 물어본 적이 없다. 들은 이야기로 이런 곳에 가려면 정신적으로 신앙적으로 준비가 잘 안되어 있으면 가기 전에 꼭 무슨 유혹이 생긴다고 들었다. 나는 ‘치명적’인 유혹은 없었지만 비슷한 것은 벌써 경험을 하고 있어서 이런 말들이 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고 다 타당성이 있다고 믿게 된다.
나의 집을 ‘물리적’ 으로 떠나는 것이 거의 일년이 되어온다. 작년 여름 새로니가 살고 있던 Nashville, TN에 한번 놀러 갔던 것이 전부다. 비록 피정은 Atlanta Metro에서 열리지만 좌우지간 집을 떠나는 것은 사실이다. 이번 피정은 조금 있으면 주임신부에서 물러나시는 안정호 이시도리 신부님이 지도를 해 주신다고 한다. 비록 새 신부님이 곧 오시게 되어서 주임신부직은 물러나지만 아직도 우리들은 그 들이 우리의 ‘영원한’ 주임신부처럼 느껴진다. 그만큼 그분에게서 나 개인적으로 받은 은총이 많음을 느낀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웹싸이트를 보면 그곳 발행,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경향잡지가 1900년 초 부터 연도별로 거의 모두 수록이 되어있다. digital scanning을 한 것인데 원래 책의 상태가 안 좋은 것도 있어서 읽기 힘든 부분도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힘든 것은 특히 해방 전 것들인데 잘 보여도 읽기가 쉽지 않다. 지금의 ‘국어’에 비하면 거의 훈민정음 스타일의 ‘고어’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때는 사실 한글 맞춤법도 없었을 것이고 한자를 많이 쓰고 해서 더 그렇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이 고색창연한 천주교 월간잡지의 가치를 높여주고 있는 것이다.
내가 우선 관심이 갔던 때는 해방 후와 육이오 동란 전후, 그리고 1960년대이다. 내가 태어나기 전 것들은 그 당시의 역사를 천주교의 입장에서 본 것을 알게 되어서 그렇고, 육이오 이후는 내가 어렴풋이 기억이 나던 때를 다시 간접적으로 보게 되어서 관심이 간다. 1960년대는 조금 다르지만 약간 ‘근대화’한 한국의 사회상을 간접적으로 보여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다. 너무나 방대한 분량이라 우선은 주마간산 식으로 보았지만 시간이 나는 대로 조금은 정독을 하려는 희망도 있다.
우선 반가운 그림들을 몇 개 보았다. 광고인 것이다. 천주교 잡지에 광고가 있었다는 사실도 새롭지만 반세기 넘게 잊고 살던 ‘인기 있던’ 상품을 다시 보게 된 것이 더 반가웠다. 이것은 그 당시의 사회상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던 것이기도 하다. 우선 조금 웃음이 났던 것은 “살이 찌는 약”에 대한 것이다. 요새의 기준으로 보면 과연 얼마나 이해를 할까? 나도 살찌는 약에 대한 광고를 많이 보고 자랐다. 나도 갈비씨였지만 그 당시는 갈비씨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리고 독일회사 훽스트.. 거기서 나온 ‘고기 먹으면 필요했던’ 훼스탈.. 고기를 많이 못 먹었던 시절 그것을 소화할 효소가 제대로 안 나와서 그랬던 것일까? 기본적인 위생시설이 부족했던 그 때는 피부염, 종기가 참 많아서 그랬던지 ‘이명래 고약’은 정말 그때의 구세주 였다. 어찌 잊으랴?
박기원씨는 조금 그렇다 치더라도 이진섭씨는 시대적으로 보아서는 완전히 일본식의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이다. 그만큼 그들이 속했던 문화는 조금은 생각해 보아야 할 만큼 복합적일 것이다. 우리들의 부모님 세대가 바로 그 세대여서 사실 우리도 조금은 친숙하다. 일본..하면 우선 정치적으로 ‘죽일 놈의 나라’에 속했지만 확실히 앞서간 근대문명을 악착같이 따라가던 그들을 보고 다르게 봐야 하는, 말하기 싫은 시각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 뒤의 우리세대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1971년 국제회의 참석차 이들 부부는 쉽지 않았던 해외여행을 하게 되고, 일본을 경유해서 귀국을 하게 된다. 그때 느낀 일본에 대한 복잡한 심정이 이렇게 그려진다.
나는 교오토(京都) 등을 관광하고 싶었지만 결국 하지 못했다. 도쿄 시내는 택시로 한 바퀴 돌아 보았고, 식사할 때만 호텔 근처에 나가 사먹었다. 그래도 긴자(銀座)니 록봉기(六本木)니 하는, 옛날 소녀 때 일본 소설에서 읽었던 귀에 익은 거리 이름을 보니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이나 나나 왠지 일본에 대해서는 마음 깊이 아직도 용서 못할 풀리지 않는 감정의 찌꺼기가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이는 공항에서도 절대로 일본 말을 안 쓰고 영어만 쓰는 고집을 부렸다. 우리는 일본에서 아무도 찾지 않고 만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무조건 느낌이 좋은 것을 나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나 보다. 아주 이성적인 감정이라고나 할까. 1968년 이력서에서 ‘요주의 인물’의 딱지가 떨어지고 첫 일본여행 당시 느낌이 대표적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퍽 자유로운 곳이야. 그리고 먼지가 없어. Y셔츠, 신발 닦을 필요가 없으니 잔손이 안 가 참 좋군. 언젠가 가까운 날 당신하고 같이 오고 싶은 곳이야.
위의 글은 1968년 당시니까, 그 당시 서울의 풍경과 비교해 보면 짐작이 간다. 완전히 공해에 찌들었던 서울하늘이 완전히 먼지 범벅이던 그런 시절, 손수건이 없으면 100m도 못 걷던 시절을 생각하면 이미 올림픽 4년 후였던 그곳과 비교가 될 듯하다.
샹송과 이진섭
나의 기억에 이진섭씨는 불란서 풍의 문화를 좋아한 듯 하다. 특히 샹송 풍의 노래에 조예가 깊었고, 한때 샹송가수 <이벳드 지로, Yvette Giraud>가 서울에서 공연을 했을 때 공연무대에서 사회를 보았고 그 기사를 어느 잡지에서 사진과 함께 본 기억도 난다. 그렇다면 이진섭씨는 영어, 일어는 물론이고 불어도 잘 했을까? 그렇다면 과연 그가 팔방미인, 박학다식 하다는 말이 맞는 것이다. 그 당시 어렵게 살던 때 어떻게 세계적인 가수 <이벳드 지로>가 서울에 왔을까.. 생각해보니 이것도 역시 일본 때문이었다. 이 샹송가수는 그 당시 일본에서 활약을 하며 일본어로 샹송을 취입하기도 했던 것이다. 아주 후에 영국가수 Cliff Richard가 왔을 때도 비슷한 경우다. 어떻게 그는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음악에 관심이 있었을까..아마도 좋던 싫던 간에 일본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그이는 음악가는 아니었지만 음악을 좋아했고, 음악에 조예가 깊었으며, 그리고 음악 속에 살다 갔다.
그이는 젊어서 KBS 아나운서를 하던 시절, 한국 최초로 ‘라틴 뮤직’과 ‘샹송’ 음악을 소개하고 해설해서 그 당시 많은 젊은 음악 팬들에게 인기가 대단했었다.
그 후에도 프랑스 샹송 가수 ‘이벳드 지로’가 한국에 와서 공연했을 때 그 사회를 맡아 보기도 했다.
그이는 평상시에 가끔 이런 말을 했다.
“나의 소원은 지휘자가 되는 것이었어. 그래서 형님께 일본에 있는 우에노(上野)음악학교를 가고 싶다고 했더니 정신 없는 소리를 한다고 한 마디로 거절 당했지. 어쨌든 나는 그때 지휘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 꿈이고 소원이었어”
그는 음악을 듣는 귀가 예민하고 정확했다. 음악회에 가서 오케스트라를 들을 때도 어느 파트의 어느 악기가 지금 어떻게 잘못 연주하는지 잡아낼 정도로 그이는 음감(音感)이 예민했다. 악전(樂典)도 혼자 공부했고, 서양 음악사도 독학으로 공부했다고 한다.
Yvette Giraud, 이벳트 지로
파리의 연인
이진섭씨 부부는 어떻게 보면 정말 행복한 부부였을 것이다. 1971년 그 당시 부부동반 파리여행을 한 다는 것은 이미 평범한 부부의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니까. 지극히 낭만적인 이진섭씨는 거의 의도적으로 이런 영화 같은 ‘파리의 연인’의 모습을 연출한 것이다. 낭만인 이진섭씨가 세계적인 낭만의 도시에서 부인과 만나게 여행계획을 짰다는 것은 정말로 부러운 일이다. 이런 기회가 일생에서 한번 올까 말까 한다는 사실은 박기원씨가 느낌으로 알아차리고 100만원 짜리 적금을 이 “일생의 여행”에 투자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9월 27일, 1971년
파리 거리의 가운데를 세느 강이 흐르고 있다. 그 세느 강에는 20개 이상의 크고 작은 다리가 있다.
그 다리에서 파리를 바라보는 경치는 유별난 게 있었다. 세느 강변에는 탐스런 푸른 허리띠 같은 나무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北回歸線)>이라는 소설 속에 이 경치가 묘사돼 있는데, 이 소설에서 제일 아름다웠던 것이 생각 난다.
우리는 그 세느 강변을 걸었다. 강변에는 화상(畵商), 골동품 가게, 그리고 책 가게가 즐비하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여행자의 강변이기도 하다. 우리는 마치 젊은 연인들 같이 어깨를 감싸고 걸었다.
그이는 49세, 내가 42세! 우리는 좀 늙은 연인들인지도 모른다. 세느 강변의 산책은 아마 영원히 우리를 즐겁게 해주리라.
죽음과 재회
거의 영혼의 친구같이 살았던 두 분의 관계를 볼 때, 배우자의 타계는 아주 심각한 것이었을 것이다. 평범한 부부보다 더 고통을 느꼈을까? 일생 문필가로서 서서히 꺼져가는 남편 생명의 촛불을 보며 남긴 일기는 참 감동적이다. 그런 와중에서 글을 쓴 것은 보통사람 같았으면 힘들었을 것이다.
그이, 깊은 잠에 빠지는 혼수 상태 계속, 산소 호흡, 주사로만 지탱한다. … 가사상태.. 집에서 하던 몸부림도 없어졌다. 거친 숨소리뿐 – 무슨 꿈이라도 꾸고 있나? 그래도 그의 숨소리가 내 곁에 있고, 눈은 감았지만 살아 있는 몸체가 내 곁에 있는 실재감(實在感)!
….
저토록 잠잠할 수 있을까? 나에게 들려주었던 그 많은 다정했던 말소리. 나를 당황하고 슬프게 했던 그 많은 일들.. 그 모든 것은 모두 어디 두고 저토록 잠잠하단 말인가.
어쩐지 죽음과 같이 있을 이 시간이 점점 두려워진다. 나의 영혼과 육신이 같이 살던 30년. 그 세월이, 그 순간이 순간마다 단절돼 간다.
…
절대 절명인 이 순간… 도망갈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이 순간….
이 부부는 가까운 분의 감화로 자연스럽게 하느님을 믿게 되었다. 이진섭씨는 비록 열정적인, 모범적인 크리스천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분명히 하느님의 존재를 믿고 갔다. 그래서 남아있게 된 ‘연인’은 저 세상에서의 재회를 믿고 싶고 믿으면 살고 싶은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다 읽고 나서…
처음 읽기 시작 할 때, 이진섭씨가 못 채우시고 가셨던 환갑이 멀게만 느껴졌지만 이제 그것을 넘어서, 이렇게 조금 내 나름대로 정리를 해 보니 이 책의 느낌이 새롭다. 이것은 분명히 나의 나이 때문일 것이다. 많은 부분에 나와 감정이 일치하는 부분은 내가 마음속에 새기며 흉내를 내 보기도 하곤 했다. 그리고 반대로 ‘술’의 멋에 대한 나의 생각에 ‘경고’를 보내기도 했다. 멋도 중요하지만 정도껏.. 그러니까 ‘중용’, 알맞은 멋과 건강과의 균형을 생각하기도 했다. 이제는 박기원 여사도 많이 연로하셨으리라 짐작이 된다. 이렇게 솔직한 “일기의 진수”를 남겨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리고 행복하고 건강하신 노후를 하느님께 기도하고 싶다. 다시 한번 팔방미인, 다재다능 님의 명복을 빌며…
¶ 이곳의 여름이 올해는 정확히 한달 빨리 도착했다. 과히 반가운 소식이 아니다. 물론 암만 덥다고 해도 한여름의 그것과는 조금 느낌이 다르긴 하다. 늦봄 같은 여름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거의 2주일째 계속되는 ‘무더위’가 조금 신경질이 나려고 한다. 이러다가 계절이 주기가 바뀌는 것인가.. 아니면.. 무엇인가? 가급적 생각 안하고 보내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기록’ 정도는 남겨두기로 했다.
¶ 요새는 전문서적이 아니면 ‘쓰면서 읽기’를 시도하고 있다. 그러니까 눈으로 읽으면서 손으로 typing을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쓰면서 공부를 한다. 그러니까 ‘필사’인 셈이다. 제일 힘든 케이스다. typewriter나 computer이후에는 이것이 keyboarding으로 바꾸고 있다. 아마도 쓰는 것보다 훨씬 쉬울 것이다.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쓰는 것이 제일 기억에 남게 된다고 한다. 그것이 너무 힘드니까 keyboarding을 하는데 이것도 그냥 눈으로만 읽는 것 보다 훨씬 기억에 남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이 작업이 끝나면 아주 편리한 ‘복사본’ 이 남게 되는 것이다. 특히 이렇게 하는 것이 효과적인 때는, 아주 어려운 책, 그러니까 딩굴딩굴 편하게 읽기에는 조금 힘든 책들을 읽어야 할 때이다. 이렇게 하면 읽는 것이 쉽게 중단하게 되지 않는다.
지난 해 말 레지오에 들어오면서 레지오교본을 이런 식으로 다 읽었다. 읽은 후에는 soft copy가 남게 되었고 이것이 나의 blog site에 올라가서 쉽게 Internet으로 볼 수도 있게 되었다. 요새 읽는 책은 성녀 파우스티나(St. Faustina)의 <자비는 나의 사명> 이란 책이다. reading by typing을 시작한 것이 4월 말 경인데 이제 거의 끝나가고 있다. 처음 시작할 때 참 어렵고 지루하다고 느꼈는데, 시간이 갈 수록 익숙해지고 내용에 깊이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끝이 나면 이것도 나의 blog page에 올라가게 될 것이다.
¶ 난생 처음으로 ‘피정'(retreat)이란 것을 가게 되었다. 이번 주말 2박3일간 본당 레지오 주관의 연례 ‘봉쇄피정‘이란 것인데 레지오 단원은 원칙적으로 다 가게 되어있는 것이다. 나는 이것은 말할 것도 없고 1982년 천주교 영세를 받은 이후 한번도 피정이란 것에 가본 적이 없어서 정말 처음인 것이다. 어떤 것인가는 대강 짐작이 가지만 아무래도 처음이라 신경이 많이 쓰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 나에게는 지긋한 나이와 계속 배워가는 레지오 신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 좋을 결과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다. 특히 우리 자비의 모후 단원 전원이 참가를 하게 되어서 정말 흐뭇한 느낌이고 인생,신앙선배님들이 뒤에 있다고 생각하니 힘이 나기도 한다.
우리 레지오, 아틀란타 본당 꾸리아의 자비의 모후 쁘레시디움에는 그 동안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장기유고로 자리를 비웠던 자매님이 반가운 소식으로 다시 돌아 오셨고, 새로 자매님이 들어오셔서 어제는 드디어 입단선서를 하셨다. 하지만 고참 단원 두 자매님이 자리를 비우셨는데, 한 분은 장기유고로 자리를 비우시고, 또 한 분은 완전히 퇴단을 하셨다. 이유는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우리들에게는 조금 충격적인 변화였다. 하지만 변화 없이 발전도 없다고 생각을 하며 위로를 한다. 순리적으로 새로운 ‘피’가 수혈이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하면 참 자연스럽다.
¶ 우연히, 아주 우연히 오래 전부터 읽었던 책, <인촌 김성수>에서 모르던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의 모교 중앙학교의 창시자 정도만을 알고 있던 민족진영 정치인이라는 것 정도에서 이번에는 이분의 종교에 관한 것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전통적 양반 유교집안에서 자랐지만 임종 시에 천주교 신자이고 주미대사를 역임한 장면 씨의 권유로 천주교로 입교를 한 것이다. 이것은 참 반갑고도 뜻밖의 발견이었다. 바오로의 이름으로 그는 영세를 받고 하느님께 귀의한 것이다.
1955년 2월, 인촌(仁村, 김성수의 아호)은 오후 2시경 장면과 함께 온 가회동 성당의 박병윤(朴炳閏) 신부 앞에서 조상봉사(祖上奉祀)를 해도 좋다는 말을 듣고 영세를 받았다. 영세명은 <바오로>라 했다. 성부, 성자, 성신의 이름으로 원죄와 본죄와 그 벌을 사하는 영세의식을 마친 인촌의 얼굴은 평화스럽게 보였다. “마음이 편하고 고통이 없다. 천주께서 나를 보살펴 주시는 것 같다”
Ohio State University, Columbus, Ohio… 나는 1977년 12월 초에 시카고에서 나의 모든 짐을 Plymouth Fury에 싣고 이곳에 도착했다. 같은 해 9월경에 한번 온 적이 있어서 그렇게 낯 설지는 않았다. 그리고 Columbus는 I-80 interstate highway로 지나간 경험이 많이 있어서 더더욱 먼 곳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은 그 해 가을학기, Fall Quarter에 입학을 했어야 했는데 admission office의 사무착오로 한 학기를 기다려야 했다. 대부분의 graduate course가 가을학기에 시작이 되었지만 한 학기 늦는다고 그렇게 불편할 것도 없어서 그냥 한 학기를 편히 쉰 셈이다. 나는 그 당시 그렇게 easy going, 조금 부정적으로 말하면 ‘급할 것 없다’는 자세로 살고 있었다.
OSU의 graduate school로 오게 된 것은 조금은 우연이었다. 특별하게 오고 싶어서라기 보다는 우선 application fee가 없었던 것이 첫째의 인연이었다. 그렇게 내가 $$이 없어서라기 보다는 그저 그것도 한 가지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다음은 이 학교 electrical engineering(EE) program의 brochure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사진 중에 일렬로 늘어선 ‘거대한’ radio telescope (전파 망원경)가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이 EE department의 lab에서 운영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한창 Carl Sagan의 billions of billions of stars.. 에 심취해 있던 시기였고 extra terrestrial(ET)에 관한 것들이 유행하고 있었을 때였다. 이런 것들이 ‘어쩌다’ 나를 그곳으로 가게 만들었다.
이 학교는 그 ‘덩치’가 아주 컸다. 단일 캠퍼스로는 학생 수 50,000 이상인, 아마도 미국에서 제일 큰 캠퍼스에 속했다. (UT Austin이 제일 크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니까 당연히 한국유학생들도 만만치 않게 많았을 것이다. 이렇게 큰 학교는 좋은 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점도 있다. 그 전까지 한국유학생이 거의 없었던 학교를 다녔던 이유로 나는 사실 큰 학교가 좋았다. 덜 외로울 거이라는 생각이었다. 이런 말을 주위에 하면 즉시로 ‘야.. 외로울 시간이 어디 있냐?’ 하는 직격탄이 꼭 나오곤 했지만.
비록 radio telescope의 사진에 반해서 오긴 왔지만 나의 진짜 passion은 그것이 아니고 (feedback) control system이었다. undergraduate에서 나는 이미 advanced control system에 아주 심취해 있었다. 특히 그 당시는 microprocessor(8080-class)의 등장으로 digital control system의 매력이 상당하던 고조되던 시기였다.
이곳에 오기 전에 나는 OSU 대학원 한국 유학생회장인 김광철씨에게 연락을 해서 수고스럽지만 rooming house(자취방)를 알아 봐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리고 내가 갈 전기과(Dept of Electrical Engineering)에 있는 한국유학생에게도 연락을 부탁하고 있어서 정착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다. 내가 도착한 날이 12월 초였는데 모든 것이 완전히 얼어붙는 강추위 속에서 OSU campus 정문에서 조금 떨어진 Summit street에 내가 살 자취 집으로 가 보니 한마디로 환경이 을씨년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때의 나이에는 사실 모든 것들이 adventure처럼 느껴져서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젊음에 따른 ‘자연적인 낙관성향’ 때문이 아니었을까..
학기시작까지는 사실 한달 이상이 남아있고 그 나이에 완전한 자유의 12월은 느낌이 아주 좋았다. 도착하자 곧바로 학생회장 김광철씨의 연락을 받았는데, 주말마다 학교체육관에 모여서 배구를 한다고, 그리고 그곳에 전기과 학생들도 나온다고 귀 띰을 해주었다. . Lane Avenue에 있던 실내 체육관(Jesse Owens?) 으로 가 보니 한국유학생들이 나와서 배구를 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처음 만났던 사람들 중에 전기과에 있던 유근호씨, 이재현씨가 있었다. 그리고 경제학과의 이규방씨도 거기서 처음 만났다.
유근호씨는 나보다 한두 살 위였고, 이재현씨는 반대로 한참 밑이었다. 육사출신의 현역 육군장교인 유근호씨는 성격이 직선적이고 소탈해서 금새 친해질 수 있었고, 이재현씨는 막내 동생 같이 순진한 청년이라 호감이 갔고, 무엇보다도 내가 속한 전기과에 있어서 이들과 더 가까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 이외도 꽤 많은 사람을 만났는데, 그 중에는 여학생들도 있어서 조금 색다른 느낌도 주었다. 이 당시 한국유학생(대학원)의 숫자는 아마도 100명 정도가 아니었을까. 학생회장 김광철씨도 만났는데 약학대학에 다니고 테니스를 프로처럼 치는 유학생인데 부인도 같이 공부를 하는 유학생부부였다.
이렇게 콜럼버스의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12월 달에는 연말과 크리스마스가 있어서 사람들이 모일 기회가 그런대로 많았다. 특히 자주 모인 곳은 Frambese St.에 있는 rooming house였는데, 이곳에 내가 알게 된 유학생들이 많이 몰려 살고 있었다. 여기에는 살았던 사람은 유근호, 안서규, 이규방, 이재현, 국찬표 제씨 등등이 생각난다. 배구를 할 때, 모였다가 우르르 몰려서 그곳으로 가서 놀곤 했다. 나의 자취방은 이곳에서 그런대로 떨어져 있어서 나는 항상 차를 타고 가곤 했다. 이들은 대부분 온지가 한 학기밖에 되지 않아서, 오랜 만에 한국에서 바로 온 ‘싱싱한’ 유학생들과 어울리는 것도 신선하고 색다른 기분을 주었다.
이중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람들, 이규방 씨와 안서규씨, 나보다 나이는 한 둘이 밑이었던 것 같지만 스스럼 없이 어울렸다. 이규방씨는 대전고, 서울대 경제학 전공이고 안서규씨는 서울고, 서울대 출신으로 이곳에서는 Industrial Engineering을 공부한다고 했다. 그리고 조금은 미지의 인물인 국찬표씨라는 사람, 아마도 경영학 전공이었나. 특히 이 분의 이름이 기억나는 것이 나중에 어떤 사람이 이름을 ‘극장표’라고 농담을 한 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부분 미혼이었지만 유근호씨와 국찬표씨는 기혼이라고 했다. 둘 다 배우자들이 이곳에 오는 것을 기다리는 입장이었다.
그때 유학생 연말파티가 두 군데서 있었는데 나는 이 새로 사귄 그룹덕분에 그런대로 어려움 없이 어울릴 수 있었는데, 특히 내가 차를 가지고 있어서 빠질 수도 없었다. 유학생 연말파티에서 인상적인 것 중에는 약학대의 김미영씨, 얌전하게 보이던 분인데 춤을 기가 막히게도 추었다. 여기서는 그날 신시내티에서 올라온 중앙고 후배토목과 고광백을 만났다. University of Cincinnati에서 transfer를 해서 그날 이곳에 도착을 했다고 했다. 그리고 콜럼버스 한인회주최 연말파티도 가보게 되었는데 여기서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교포사회, 한인 교수들을 포함해서 다 보게 되었다. 그 당시 한인회장은 태권도장을 운영하는 최준표씨였는데, 국악의 퉁소를 독주하는 재주를 보여주었고 특이했던 것은 사회를 이규방 씨가 보았다는 것이다. 이규방 씨는 그 이후에도 이야기 거리가 많이 남아있을 정도로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유근호씨(울고 넘는 박달재)와 안서규씨(댄서의 순정) 모두 나가서 노래를 불렀는데 미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이들 모두 ‘한국의 냄새’가 물씬 풍기게 놀아서 아주 나에게는 인상적이었다.
크리스마스 즈음에는 여학생들과 어울리기도 했는데, 그 중에 그들이 몰려 살고 있던 Harrison House란 off campus 고층 아파트에 한 그룹이 놀러 가기도 했다. 그것이 기억에 뚜렷한 것이 사진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남자 중에는 전기과 이재현씨, 이규방 씨(빠질 수가 없는), 미남형 오용환씨, 그리고 여자 중에는 김영라 씨, 백추혜 씨, 김미영씨, 최희경씨, 김진수씨 등등이 있었다. 김영라 씨는 한국의 박물관장을 역임한 김재원씨의 딸이고 서양미술사를 전공한다고 했다. 백추혜 씨는 이화여대 영양학과 출신, 김미영씨, 최희경씨, 오용환씨는 모두 서울대 약학대 출신이고 전공이었다. 이 중에 최희경씨와 김미영씨는 나중에 내가 약학대학에서 RA(research associate)를 할 때 가까이서 보게 된다.
이 중에 이규방 씨는 학기가 시작되면서 계속 우리들(전기과 유학생들)과 가까이서 어울리게 된다. 공부하러 숫제 우리들이 있는 EE graduate student office로 거의 매일 오곤 했다. 그는 비록 경제학도였지만 우리와 어울리는데 그것은 크게 상관이 없었다. 대전고, 서울대, 한국은행을 거친 두뇌형인데, 내가 봐도 무엇이든지 ‘다 알고’ 있었다. 그만큼 말도 많아서 자주 구설수에도 오를 정도였다. 이곳에서의 인연으로 나중에 백추혜 씨와 결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백추혜 씨는 알고 보니 다른 인연으로 아내 연숙과 이대 영양학과 선후배 간이고 조교, 학생 사이로 알고 이미 알고 있었다.
이곳에 와서 느낀 것은 대부분의 유학생들이 흔히 말하는 ‘일류’학교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경기,서울,경복고 출신과 서울대 출신들이 아주 많았던 것이다. 특히 대학교는 서울대가 압도적이었고, 나와 같은 연대출신은 그 당시만 해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2년 뒤, 1980년 유학자유화를 계기로 이런 통계는 많이 바뀌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유근호씨(육사), 이재현씨 (Rutgers)같은 비서울대 출신만 보면 더 가까움을 느끼곤 했다. 그 당시 전기과에는 위의 두 사람 이외에 공부가 거의 끝나가던 이용한씨, 김태중씨가 있었다. 이 분들과는 사실 거의 교류가 없었다. 이용한씨는 내가 나중에 일을 하게 될 약학대학을 통해서 논문을 쓰고 있었다.
1978년 나의 첫 학기는 겨울학기여서 그런지 눈을 동반한 추위가 기억에 남고, Dreese Lab에 있는 EE student office에서 완전히 밤을 지새며 열심히 공부를 하던 것이 즐거운 추억이 되었다. 식사도 Jones Tower근처에 있던 카페테리아에서 세끼를 먹으니까 사실 우중충한 rooming house으로 자러 가는 것도 사실 귀찮았다. 유근호씨, 이재현씨, 그리고 undergraduate에 있던 고윤석씨 (이들 모두 전기과) 등이 같은 방에서 공부를 했는데 여기에 경제과 이규방씨가 특이하게 우리들과 같이 공부를 하곤 했다. 안서규씨는 Industrial Engineering 전공인데 건물이 바로 전기과 옆에 있어서 가끔 그의 office로 놀러 가곤 했는데, 그 office가 으리으리하게 넓고 커서 무슨 사장실을 연상시켰다. 일개 대학원생이 어떻게 그런 방을 쓰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그는 ‘정치적인 재주’ 를 가진 듯 했다. 우리들과 어울릴 때도 ‘무작정’ 어울리지는 않았다.
다른 과의 유학생들은 식당에서 만나게 되는데 항상 같은 table에 모여서 먹곤 했다. 다른 나라 유학생들도 그들끼리 모여서 식사를 하니까 이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 없었다. 그때, 생각나는 사람들.. 수학과의 최봉대씨, 금속과의 최호진씨, 농업경제과의 노영기씨.. 이중에 최봉대씨는 나중에 약학과의 김미영씨와 결혼을 하게 된다. 이들은 물론 대부분 미혼자들이고 기혼자 부부들은 거의 학교 대학원 아파트, Buckeye Village에서 살았다. 나중에 나도 이곳에서 살게 되지만 이곳은 값도 저렴하고, 학교 bus가 있고, 주거환경이 아주 좋았다. 우리는 유근호씨가 이곳으로 들어가게 되어서 자주 놀러 가곤 했다.
이중에 생각이 많이 나는 사람, 고윤석씨.. 어찌 잊으랴.. 나이는 나보다 밑이었지만 아주 건장하고 세련된 친구다. 고등학교 때, 조기유학으로 이곳에 와서 지금은 EE undergraduate(학부)의 졸업반이었다. 이미 기혼자였는데, 부인은 연대 출신, 연상의 여인 (나의 연대(사학과) 선배)이었고, OSU의 Admission Office에서 일하고 있어서 우리들의 ‘학벌, 이력, 신상’을 잘 알고 있었다. 나이 때문인지 대부분이 대학원생들인 우리들과 어울리고 그 인연으로 우리가 쓰는 전기과 대학원생 office를 같이 쓰게 되어서 아주 친하게 지냈다. 덕분에 그 부부가 사는 Riverview apartment로 초대를 받아가서 후하게 식사를 하기도 했다.
5월부터 시작된 불볕더위가 거의 2주째로 접어들면서 슬그머니 6월로 접어들었다. 날씨, 기온, 기후에 조금은 둔감해지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아직도 멀었다. 심할 때는 조금 내가 너무 더위를 무서워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도 될 정도였다. 심지어 연숙에게, “더운 날씨에 대한 예보를 보면 나에게 말하지 말라” 고 간청을 할 정도였으니까. 그 한마디로 나는 기분이 쳐지는 것이 무서워서 그랬지만 이건 내가 생각해도 좀 심하지 않을까? 그래서 이제는 날씨에 둔감해 지도록 의도적으로 노력을 하는 것이다. 조금은 효과가 있나..
6월로 들어서면서 조금씩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제일 큰 이유는 이번 주말에 있는 3일간의 ‘레지오 봉쇄피정’ 때문일 것이다. ‘머리털 나고’ 처음 가보는 조금은 ‘겁이 나는’ 그런 곳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집을 거의 ‘못’ 떠나는 나의 생활에 이런 것도 심리적으로 아주 ‘큰 사건’이라 그런가… 별별 생각이 다 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좋던 싫던 나는 이런 것을 피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확고한 것이다. 아니 확고하여 지도록 노력을 하는 것이다. 결과가 어떨지는 조금 ‘흥미’ 롭기도 하지만 연숙의 ‘예상’에 의하면 그렇게까지 기대를 하지는 말라고 하니까.. 한번 ‘당해’ 보자.
드디어 그것이 찾아왔다. 얼마 전, 비가 많이 온 이후에 차고의 water heater밑에 물이 흐른 것을 보고.. 이거.. 비가 샌 것이 아닌가 의아해 했었다. 그것이 어제 다시 보고 생각을 해 보니 이것은 water heater가 새는 것이었다. 예전 처럼 폭포수처럼 새는 것이 아니라 조금은 다행이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이제 그렇게 내가 예상한 대로 수명이 다 된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가 복잡하다. 최소한 $800이상은 ‘잡아 먹어야’ 하니.. tank 자체는 $500정도일 것이고 나머지는 labor charge일 것이다. 내가 한번 해 볼까? plumbing은 정말 간단해 보인다. 물론 실제로 해 보면 아닐 가능성이 더 많지만.. 아니면 tank-less model로 ‘내가’ 해 볼까.. 이것은 너무 비싸다. 그저 지금 쓰는 것이 제일 무난한 방법일 것이다. 문제는 내가 혼자 하기에는 너무나 무겁다는 간단한 사실이다. $300 의 labor가 과연 우리에게 적당한 것일까? 머리가 복잡해진다. 지금 차고에는 책과 상자로 가득 차 있는데.. 갑자기 이것이 터지면.. 물바다가 되면.. 정말 큰일인데.. 어찌해야 하나?
현재 나를 제일 ‘괴롭히는’ 것 중은 역시 내가 ‘스케줄’ 에 따라 일을 못한다는 자책감이고, 또 스케줄에 따라 ‘정말 해야 할’ 것들을 계속 ‘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아직도 일년 전에 바꾸어 놓은 나의 office room의 정리가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 차고의 정리를 하나도 못했다는 사실, 따라서 지금 나의 ‘보물 같은’ 책들과 서류들의 위치가 다 같이 확실치 않다는 는 것.. 본격적으로 나만의 project을 본격적으로 못 하고 있다는 것 등등.. 그리고 집을 수리하거나 고치는 일.. 정말로 미루고 사는 것들이 많다. 하지만 못 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정말 없다. 할 수 있다.
박기원 씨는 사랑하는 남편 이진섭씨를 통해서 그 당시를 “살아 가야만” 했던 대한민국 남자들, 가장들의 한(恨) 같은 것을 몸으로 느꼈다. 평범하게 매일 매일을 생활하는 엄마, 주부로서만이 아니고 한 지식인, 문인으로서 남보다 더 깊이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남편의 입장을 비록 다 이해는 못하더라도, 더 이해하려 노력을 하며 살았을 것이다. 이진섭씨는 1922년 생이고 박기원씨는 1929년 생, 모두 왜정(주: 그때는 ‘일제강점기’라는 고급스러운 말을 이렇게 불렀다)때 태어나셨다. 특히 이진섭씨는 청년기까지를 모두 왜정에서 교육을 받은 셈이다. 일본식 교육과 충성을 강요 받고 잘못하면 ‘남의 나라’ 전쟁터로 끌려갔을 그런 ‘기가 막힌’ 시대를 사셨던 것이고 우리의 부모님 세대들도 거의 다 그랬을 것이다.
… 어쩐지 한국 남자의 한(恨)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뒤늦게 얻은 이해심도 아량도 아니다. 술을 마셔야만 살았을 것 같은 그 시대에 살았던 남자들!
그 안에서 제일 다치기 쉽고 멍들기 쉽고 상처 받았을 그이의 외로웠던 가슴을 뒤늦게나마 아내인 나는 조금씩 알 것만 같았다. …………
그이는 생전 이런 말을 가끔 했다.
“우리 시대는 턱걸이 제네레이션이야. 무언가 해 보려고 안간 힘을 썼다가는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
그것은 아마 불안정했던 한국의 역사와 격동기를 겪고 살아야만 했던 고뇌에 찬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이의 진정, 깊은 남자의 마음을 나는 그가 살았을 때보다 그가 간 지금 되새겨 보고 있다. 그러나 한편 그것은 진정 그의 아픔이었지 아내인 나에게도 나누어 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한 남자만의 고독이었다. (본문 97쪽)
그이는 살아 있는 동안 가끔 이런 말을 했다.
“어떤 좋지 않은 결과가 생겼을 때, 그것을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원인을 타인에게 미루는 것처럼 비겁한 것은 없다. 모든 결과는 먼저 자시에게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 세대만은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 원인을 시대에 밀어붙일 수밖에 없는 비극을 지니고 있다.
‘턱걸이 제네레이션’이라고 할까? 즉, 철봉 틀에 매달려 혼신의 힘을 다해 기어오르려 하면 철권으로 내리쳐 주저앉게 만든다. 한 번도 그 푸른 하늘을 못 보고 사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시대의 생각 있는 남자의 몰골은 마치 주문진 해변가에 널려 있는 오징어의 모습 같다. 축 늘어져 말라 가는 오징어들 그것일 것이다.” (본문 169쪽)
“최후의 낭만인 이 진섭”
1983년 3월 이진섭씨의 장례 시, 동창, “많이 통하며 많이 비슷하고, 멀리 있어도 가슴 한구석으로 걱정을 해주며 살던 친구” 한운사(韓雲史)씨의 비문(碑文)이 명필 송지영(宋志英)씨의 글로 세워졌다.
비문
무엇인가를 쓰고
예술을 논하고
노래를 짓고, 노래 부르고
인생의 멋과 맛을 찾아 다니며
소유의 노예가 되어 가는 것들에게
욕설을 퍼붓던 우리 세대
최후의 낭만인 이 진섭(李眞燮)이
그 뜻을 다 펴지 못하고
한 잔 술, 두 잔 술로 외로움을
달래다가 마침내 여기 영원히
잠들었다.
새야, 바람아, 교교한 달아
찬란한 태양아
이 사람과 더불어 놀아 주라.
1983년 3월 10일
이 글에서 “우리 세대 최후의 낭만인” 이란 말이 이채롭다. 영어로 하면 “last Romanist among our generation“정도나 될까. 이분의 일생을 알고 나면 이 표현은 정말 설득력이 있다. 또한, 멋과 맛을 찾아 다닌다고 했지만 그 정도와 걸 맞는 철저한 책임 있는 한 가장이기도 했다. 문제는 “한 잔 술, 두 잔 술로 외로움을 달래다가” 건강을 해친 사실이다. 나의 기억에 그 당시를 살았던 아버지 세대 중에는 이런 분들이 꽤 있었다. 지나친 자학과 불만을 거의 모두 ‘술’로 달래다가 일찍 운명을 하신 불쌍한 세대였다. 우리 세대도 이런 것들을 보고 자라서 그런지 많이 술 문화에 영향을 받긴 했어도, 그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100% 그런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다 이진섭씨는 아마도 최후의 “자유인” 이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 이진섭씨는 비록 말년에 세례 기독교 신자가 되었지만, 흔히 말하는 독실한 신자 처럼 같이는 보이지 않는다. 최소한 부인의 눈으로 보아서도 그런 것이다. 종교도 ‘자유’스럽게 받아들이고 싶었을까? 틀에 얽매는 것이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을까?
그이는 감히 남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자기만의 세계를 고집했고, 그 속에서 헤엄치듯 살았다.
술잔을 들면서 혼자 기도도 하고 묵상도 하고 그랬다. 나는 그런 그이 모습이 우스워,
“여보, 술잔 들고 기도하는 사람이 어디 있우? 그건 하나님에게 대한 모독 예요. 하나님을 접할 때는 몸도 마음도 정결하게 해서 경건한 마음으로 임해야죠”
그러면 그이는 너무도 당당하게
“모르는 소리. 술 안 먹은 맑은 정신 속에서도 음모, 살의, 도둑 심보 등 갖은 잡스런 생각을 지닌 채 기도하는 놈들도 있을 거야. 나는 술은 먹어도 마음만은 맑은 거울같이 깨끗해. 성경 말씀에도 있지. 착하고 순진한 어린애 같아야 하나님과 가까이 할 수 있다고 말야. 나는 술잔을 들고 있지만 그런 뜻에서 하나님은 나를 미워하실 수 없을 거야”
나는 이론이 정연한 그의 말에 말을 잃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이는 하나님을 믿는 것도 누구에게 구애 받거나 간섭 안 받고 자기 식대로 자기 마음대로 믿었다.
그러고 보니, 그이같이 모든 것을 철저하게 자기 마음대로 산 사람도 드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본문 110쪽)
위의 글을 보면 이진섭씨는 위선자 부류를 아주 싫어한 것 같다. 올바른 소리에 비해 행동이 다른 사람들, 이진섭씨도 올바르고 이론 정연한 이론을 펼쳤어도 행동이 그것과 그렇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고 나면 그의 ‘자유론’도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특히 율법에 얽매여서 ‘법의 기본 정신’을 모두 잃어버린 ‘바리사이파’ 같이 예수를 팔아 넘길만한 사람들이 ‘수두룩 닥상’인 이 세상을 살면서 어찌 이런 자유인의 행동을 마다할 수가 있을까?
시발택시 위의 해프닝
자유와 멋을 제대로 승화시킨 ‘사건’은 아마도 시발택시 위에서 샹송을 부른 일이었을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얼마나 이진섭씨가 술과 자유와 샹송을 사랑했는지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 해 겨울이었나 보다. 눈이 많이 쏟아지는 밤이었다. 낮에 나간 그이가 통행금지 시간(필자 주: 어린이 들, 그때는 midnight curfew란 것이 있었음)이 다가오는데도 들어오지 않았다. 애들을 재우고 온 정신이 문 밖에 쏠리고 있었다.
그때, 문 밖에서 다급히 울리는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나는 육감적으로 뛰어나갔다. 당시엔 시발택시가 한창인 때였다. 시발택시 지붕은 널찍하고 편편했다.
그이는 흰 눈이 덮인 시발택시 지붕 위에 누워서 늘어지게 샹송을 부르고 있었다.
눈 덮인 길은 달빛이 은색으로 빛나고, 이 진섭씨는 하늘을 향해 황홀경에 젖어 있었다.
“운전 20년에 저런 양반은 처음 예요. 아주머니 빨리 요금 주시고, 같이 끌어 내려요”
어린애 달래듯이 겨우 택시 지붕에서 끌어 내렸다.
그랬더니 이 진섭씨 왈,
“자네는 차만 끌 줄 알았지 이런 멋진 밤을 모르는 불쌍한 놈야. 자 요금”
그이는 호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지폐를 꺼내 한줌 집어 준다.
그 돈이 타고 온 요금의 몇 배가 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제서야 운전수는 갑작스런 횡재에 입이 벌어지며,
“아저씨 감사합니다. 어서 들어가 주무십시오”
하며, 깍듯이 정중한 인사를 하고 가버린다. (본문 159쪽)
물론 이때 이진섭씨는 한잔을 거나하게 걸친 취중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런 행동을 보면 이상하기 보다는 멋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누구라도 마음 속 깊이 이렇게 한번 ‘멋지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있을 것이니까.
여기 나오는 시발택시가 무엇인지 상상이 전혀 안 가는 “어린애”들이 많을 듯 하다. 이승만 정권 때 나온 ‘국산 차’의 이름이었다. 군용 Jeep을 완전히 승용차로 개조한 것이다. 그러니까 body(차체)만 군용drum통을 사용해서 우리 디자인으로 씌운 것이다. 대강 찝 차와 비슷하게 생겼다. 대부분의 택시들이 이차였다. 이것이 없어지기 시작한 것은 오일육 군사혁명 뒤부터 일제 차, “blue bird”가 들어오면서 부터 였다.
65세 만세론(萬歲論)
내가 이 책을 처음 읽게 된 때는 30대 중반이었다. 그 뒤로 계속 읽고 읽고 하다가 이 대목에 이르면 넘어가곤 했다. 아직도 나에게 멀었다는 막연한 생각과 죽음이나 수명 같은 화제는 가급적 피하고 싶었던 것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나이나, 세대가 바뀌면서 생각하며 읽게 되었다. 영어에도 여기의 화제와 비슷한 말이 하나 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 중의 하나.. “dirty old man” 이란 말이다. 이진섭씨도 이런 ‘어감’을 제일 싫어하지 않았을까?
그 이는 가끔 65세 만세론(萬歲論)이란 말을 했다. 즉, 65세까지만 살면 인생은 그만이라는 뜻이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그 이상은 ‘덤’으로 사는 거지, 그것은 사는 게 아니라 그저 생명의 연장일 뿐이라고도 했다. 그것은 곧 사실상 죽은 인생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이는 가까운 친구분이던 윤 현배 선생님과 몇 분이 서 항상 65세 만세론을 강조해 왔다. 그런데 그이는 그 소원이던 65세도 채우지 못하고 가 버렸다.
어떤 때 외출을 같이 나갔다가 길에서 나이 많은 노인이 조깅하는 것을 보고,
“늙은이는 늙은이다워야지, 저렇게 무리한 운동을 하면서까지 오래 살려고 안간 힘을 쓰는 것은 좋게 안 보이는군” 하던 말이 기억난다.
더구나 모든 면에서 노욕(老慾) 같이 추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늙어갈수록 저물어 가는 낙조(落照)를 보듯 담담해야 된다고도 말했다. 또 인간은 어머니 뱃속에서 누구나 두 주먹을 쥐고 나오지만 세상을 떠날 때는 누구나 두 손을 편안하게 펴고 죽은 것처럼, 그 동안 두 손 안에 담았던 천태만상(千態萬象)의 욕심을 미련 없이 버리고 가야만 된다고도 말했다.
그러니까 자식 덕을 보겠다는, 그러기 위해서 오래 살아야겠다는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러고 보면, 자기 몸 움직여 60 평생까지 살고, 그 이상 못 움직이게 되니까 ‘이만하면 너희끼리 살 수 있겠지’ 하고, 미련도 아쉬움도 없이 훨훨 가 버린 것 같다. 그것도 아주 몸 져 눕기 두 달에서 이틀 모자라는 날만 채우고…
어떻게 생각하면 매몰차고, 너무나 명확하게 자기 인생 몫을 살고 간 것 같다. (본문 311쪽)
이진섭씨 세대에선 분명히 60세, 즉 환갑이란 나이는 커다란 개인적 업적에 속했다. 평균수명을 생각해도 그렇지만 전통적인 유교질서에서 장유유서(長幼有序)의 개념을 생각해도 그렇다. 나이가 듦은 ‘무조건’ 가치가 있던 시절이었으니까. 요새는 사실상 완전히 거꾸로 되었다. 젊은 것이 ‘무조건’ 좋게 보이는 세상인 것이다. 강제로 늙어감을 늦추는 것.. 정도의 문제다. 지나치면 ‘노욕’이 되는 것이 아닐까? 자연스러운 것보다 더 추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나이가 자꾸 들어가는 연예인들을 보면서 어떨 때는 깜짝 놀랄 때도 있으니까.. 10년 전 보다 더 젊게 보인다면 이건 좀 이상하다. 그런 배경에서 나는 이 책을 오랫동안 읽으면서 가급적 자연스럽게 늙는 것을 바라게 되었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계속)
나에게는 1983년 서울 학원사(學園社) 발행 넌 픽션, 여류 소설가 박기원씨가 쓴 <하늘이 우리를 갈라 놓을지라도> 라는 긴 제목의 책이 하나 있다. 사실은 나의 책이 아니고 아내 (전연숙)의 책이지만 실제적으로 이제 거의 나의 책이 되었다. 이 책은 1984년 초 연숙이 서울에 갔다 올 때 그녀의 학교선배가 사준 것이었다.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이제 거의 30년이 되어오는 준 고서(準 古書)에 가까운 책인 것이다.
나에게는 이 정도의 역사를 자랑하는 책들이 그런대로 있지만 이 책은 좀 특이하다. 우선 내가 산 책이 아니고, 다른 오래된 책들과 다르게 거의 끊임 없이 자주 읽어 온 책이기 때문이다. 같은 책을 이렇게 읽고 또 읽고 한 것은 이 책이 거의 유일할 case가 된다. 왜 그랬을까 생각을 하지만 아주 특별한 것은 없다. 그저 이 책이 화장실에 항상 있어서 더 도움이 되었다면 조금 우습기도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거의 수십 년 동안 반복적으로 읽는 새로운 즐거움을 배우게 되었다.
이 책의 주인공은 우리가 젊었던 시절 널리 알려진, “직함도 많았던 팔방미인”, 이진섭씨다. 이진섭씨는 아주 유명한 신문인, 칼럼니스트, 방송작가, 시나리오작가로 나이에 상관없이 잘 알려진 분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이진섭씨의 부인이자 여류문인 박기원씨로, 그녀가 남편의 타계 직후에 이진섭씨와의 삶에 대해서 평범하고, 진솔하게 쓴 책이다.
보통 부부들이 살다가 배우자가 먼저 타계를 했을 때, 누가 먼저 간 배우자를 그리며 책을 쓸 수 있겠는가? 요새라면 책을 쓰는 것이 비교적 쉬워졌지만 그 당시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아주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진섭씨의 경우는 다행히, 그의 부인도 역시 문단에 잘 알려진 문학가였기에 그렇게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에 문인부부는 뉴스 감도 되고 흔히 말하는 ‘인기, 연예인’ 그룹에 속하기도 해서 신문, 방송 같은 것에서 어렵지 않게 듣고 볼 수 있어서, 나에게도 이진섭씨의 타계(60세를 못 채우시고 비교적 일찍)는 아주 애석한 소식이어서 관심을 가지고 이 책을 대하기 시작했다.
신문, 방송을 통해서 내가 아는 이진섭씨는 ‘불란서 샹송’을 좋아하는 박학다식, 재능이 많고 양심적인 언론인, 문인.. 정도일까? 그런 것들은 이 책을 통해서 다 사실임이 밝혀지지만, 가장 가까운 아내의 입장에서 본 것은 어찌 보면 평범한 남편, 아빠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또한 이진섭씨가 그렇게 교과서적인 평범한 인생을 살지 못했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서 밝혀진다.
운명적인 만남
조금 놀란 사실은, 저자 박기원여사와의 결혼이 그에게 초혼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또한 육이오 동란이 남긴 한 부부의 파경임을 알 때, 역시 사상적인 전쟁의 파괴력을 실감한다. 한마디로 공산주의자(일명,빨갱이 개xx) 가족 출신인 부인이 육이오 이후 가족을 따라 월북을 했다는 비극적인 이야기다.
6.25 전쟁! 그 전쟁으로 사실상 우리들의 만남의 운명이 결정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의 첫 결혼은 결국 결혼한지 1년도 못되어 전쟁으로 파경에 이르렀다. 그의 첫 번 아내는 폭격이 한창이던 7월에 첫아들을 낳고, 그리고 1.4 후퇴 때 친정을 따라 월북한 것이다. (그녀의 친정 아버지가 공산주의자였고 고향이 이북이었다)
그러나 그 이유만으로 결혼을 파기하고 남편을 떠나 친정을 따라서 월북해 버린 그 여자만이 아는 비애와 깊은 아픔을 알 길은 없지만 이해는 할 것 같았다. (25쪽, 본문 중에서)
새로 알게 된 사실 중에는 육이오 동란 때 잠깐 부역 죄로 인천에서 복역한 것이 조금 특이하다. 그러니까 한 때 사상적인 ‘외도’를 잠깐 한 것이다. 경위는 이해가 간다. 서울대 사회학과 출신인 그의 많은 친구들이 공산주의자로 많이 월북을 했었는데, 전쟁 때 대거 남하를 해서 이진섭씨를 포섭을 했는데, 잠깐 협조를 한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사상적이 아니고 실제적인 이유로 이진섭씨의 친형님의 소식을 알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그의 형님은 그 당시 외교관이었는데 잠깐 귀국을 했다가 6.25 동란을 맞고 곧 바로 납북이 되셨다고 한다. 여기서 나는 100% 이해를 하게 된다. 나의 아버님도 외교관은 아니셨지만 그 당시 ‘지식인’이라는 죄목으로 납북이 되셨으니까..
“그러니까 결국 이유는 어떻든 간에 부역은 한 걸로 됐죠. 그래서 인천서 재판을 받고 1년 집행유예로 풀려 나온 셈이죠.”
다음해 우리가 결혼하기 한 달 전, 수복 후 서울에서 그이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그이는 그때 일로 정신적으로 많은 피해를 입어 결혼 후에도 그 후유증은 오래 갔었다. (31쪽, 본문 중에서)
나는 어떤 부부들을 만나거나 알게 되면 제일 궁금한 것이 어떻게 만나서 가정을 이루게 되었나 하는 것이다. 가끔 내가 집요하게 그것을 알려고 해서 핀잔을 받을 때도 있지만 별 수가 없다. 그저 궁금한 것을 어찌하랴.. 여기서도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더 궁금할 수 밖에. 그 만남의 역사를 감싸고 있는 여러 가지 시대적 배경이 나는 그렇게 흥미롭다. 이진섭, 박기원 부부의 역사는 민족의 비극, 육이오 동란 때의 피난지 부산이다. 그때 그곳에서 박기원씨의 심정이 이렇게 한 마디로 묘사가 되어있다.
직접 눈으로 목격했던 6.25의 공포, 그리고 아직도 전쟁의 판가름이 안 나 생(生)과 사(死)의 확증이 없는 나날은 슬프고도 우울했다. 이대로는 죽을 수 없을 것 같은 내 25세 청춘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은 나를 고독하게도 했다. (28쪽, 본문 중에서)
운명의 재회
그곳에서 그들은 ‘운명의 재회’를 하게 된다. 이미 서울에서 거의 타인으로 만났었지만 거의 우연히 피난지 부산에서 재회를 하게 된 것이다. 전쟁으로 사랑하는 부인과 자식을 잃은 젊은 유부남과 젊디 젊은 신참내기 미혼의 여기자는 여기서 서로 상대의 필요성을 서서히 느끼게 된다. 문학이라는 공통 관심사와 기혼자였다는 미안함은 있지만 그래도 적극적인 이진섭씨의 구애, 전쟁의 공포 등등이 그런 것들을 더 부축이지 않았을까? 특히 박기원씨는 그 당시의 이진섭씨에 대해서 깊은 연민의 정을 가지고 있었다.
왜 나는 그 남자만 보면 비길 데 없는 쓰라림이 오는 것일까? 나는 항상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 모든 일은 나하고 만나기 그 이전의 그의 인생이었고, 나는 상관도 동정도 하기 싫은 모두 그의 것인데…
나는 왜 그이만 보면 가슴앓이 같은 아픔이 오는 것일까? 그이는 너무나 지쳐 있었고, 그리고 너무나 외로워 보였다. 그것은 그대로 그의 분위기, 그의 체취였는지도 모른다. (35쪽 본문 중에서)
나는 비록 남자이지만 남녀에 상관이 없이 ‘연민의 정’ 같은 것이 이해가 간다. 비록 연민이지만 그것은 사실 사랑의 다른 형태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심정의 박기원씨는 그때 이미 이진섭씨에 대한 사랑이 싹트고 있다고 생각이 된다.
소설 같은 논픽션
이렇게 아득한 옛날의 아름다운 첫사랑의 추억에 대한 글은 갑자기 죽음의 그림자가 넘나드는 급박한 현실에 대한 이야기로 돌변을 하기도 한다. 이런 서술방식은 자칫하면 평범한 전기(傳記)같은 인상을 덜 주고 흥미로운 소설적인 맛을 주어서 이 책의 가치를 높여주고 있고, 내가 20년이 넘게 오랫동안 애독을 할 수 있게 해주었는지도 모른다.
저자인 박기원여사는 문인인데다가 매일 일기를 쓰고 있어서 모든 지나간 사실들을 비교적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이진섭씨의 말투, 본인의 말투 같은 것들이 그런 것들이다. 이런 것들도 정기적인 일기를 씀으로 가능하지 않았을까? 이런 것들을 오래 동안 읽으면서 무의식 중에 내가 배우고 나의 것으로 만든 것 중에 이렇게 매일 삶의 생각을 글로 남기는 것도 포함이 되었다. 꼭 거창하게 ‘일기’까지 안 가더라도 무언가 내 삶의 행적을 짧은 글로 남기는 그런 것이다.
술의 낭만, 갈등과 문화
아깝지만 이진섭씨는 오랜 동안의 과음으로 인한 간경화로 돌아가셨다. 그 당시의 풍토는 사실 술과 담배를 못하면 남자로서 제대로 대접을 못 받는 그런 시대였다. 문제는 그러니까 그 정도에 달렸는데, 아마도 이진섭씨는 괴로움과 즐거움을 모두 술로 달랜 듯 하다. 그 괴롭던 시대를 사는 예술인들이 어찌 이런 생명수 같은 술을 피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 나는 여자한테서 질투를 느껴 본 적은 없지만 젊어서 술에 대해서는 질투를 했다. 술은 어떤 마력, 어떤 괴력이 있길래 저이를 저토록 사로잡고, 나에게 있어야 할 시간과 정신을 저토록 앗아 가는 것일까?
박기원여사는 아마도 술을 전혀 못하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술의 맛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이진섭씨는 그것이 조금은 섭섭하고, 심지어는 못 마땅했는지 모른다.
한가지, 가가 나에게 유감스러워했던 것은 그렇게 좋아하는 술을 나는 전연 못했던 사실이다.
그럴 때 나는”하나님이 잘 조화를 이루어 주셨지, 나까지 술꾼이 돼서 부부가 같이 노상 술판을 벌이고 앉았으면 이 집은 어떻게 되겠우?”
“허허, 그렇게까지는 안되겠지만 적어도 글도 쓰고 술꾼 남편하고 살려면 술 맛 정도는 알아야 할 텐데…”
“걱정 말아요. 나는 마시지 않아도 당신 술 냄새만 맡고도 취한 것 같이 살아 왔으니까요. 술 안 마셔도 마신 것 같은 기분 속에 젖어 산다는 내 고역을 당신은 알아야 해요.”
“알구말구. 그러니까 내 마누라지”
위의 대화를 보면 두 분의 부부금슬은 정말 좋으신 듯하다 비록 술에 대한 불만은 있어도 몸을 생각해서 적당히 드시라는 부부사랑의 다른 표현일지도.. 그리고 핀잔을 받는 이진섭씨의 반응도 어찌 보면 참 유머러스 하지 않은가? 나는 그런 여유를 이 분들께서 배우고 싶었는데.. 그게 생각보다 어려웠다. 하지만 술에 대해서 아주 심각한 때도 있었다.
내 남편 되는 사람이 술에 취해 들어온다는 이 현실에 당혹감과 실망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그 로맨틱하고 다정한 눈이 뜨물처럼 흐려지고, 정신 없이 쓰러져 잠이 들었을 때, 나는 두렵고도 서러운 마음에 울기도 많이 했다. 그래도 술 마신 다음날 아침에는 북어 국이 좋다는 말을 듣고, 어머님께 그 국 끓이는 법을 배워 아침상에 놓기도 했다. …. 남자하고 산다는 현실감에서 오는 놀라움, 그리고 술에 취해 들어오는 그이….. 그 모든 것이 놀랍고 나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십시일반(十匙一飯)
가슴에 남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결혼식장보다는 초상집에” 라는 소제목의 대목을 보면,
그이는 생전에도 남의 죽음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지론이 있어, 결혼식장에는 잘 안 가도 초상집에는 빠지지 않고 가서 뒷일을 돌봐 주었다.
그것은 죽음같이 절대적이고도 엄격한 긍정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산 사람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정성과 예우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60세를 못 채우고 이진섭씨는 타계했지만 그런 비교적 ‘젊은’ 나이에도 죽음에 대한 생각은 담 달리 더 생각을 하며 사신 모양이다. 이런 대목을 사실 나는 오랫동안 이 책을 통해서 읽어와서 내가 죽음을 그때 그때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점검을 하는 좋은 기회도 되었다. 특히 요즈음 들어 나의 “망자의 가시는 길”에 대한 생각도 이런 글들이 음양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다.
카사블랑카
피난지 부산에서 둘만이 결혼의 약속을 한 후 박기원씨 가족은 먼저 서울로 올라오게 되어서 잠시 헤어지게 된다. 그 당시의 부산역에서 헤어지는 광경은 흡사 영화 카사블랑카를 연상시킨다.
그때였다. 역사(驛舍) 기둥 한 모퉁이에서 담배를 피워 물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길고 큰 형체가 보였다. 그는 나와 있었다. 어제의 이별이 아쉬워 그이는 약속도 없이 나와 있는 것이었다.
나는 고함이라도 치며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창 밖을 향해 손을 미친 듯이 흔들었다.
그러나 그이는 창가까지 다가오지 않고 그 자리에 선 채 웃으며 손을 크게 한 번 흔들었다. 그이는 하얀 이를 드러내어 웃고 있었다. 그러다가 기차가 떠나기 직전에 그이는 역사 밖으로 천천히 걸어나갔다.
허락 받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 가족의 눈에 띄기 싫어한 그의 섬세하고도 단정한 마음이 나를 소리 없이 울게 했다.
육이오 동란 직후의 기억
이 부산역 이별의 광경은 그 당시, 그러니까 육이오 동란의 휴전이 되는 그런 시기를 기억하면서 더 실감이 난다. 비록 그때 나의 나이가 불과 5살도 채 안 되었지만 서울 원서동에서 뛰놀던 생각과 휴전 전후 서울의 풍경들이 아주 선명하기 때문이다. 그때 들은 이야기에 부산은 비도 많이 오고 불도 하루 건너 났다고 들었다. 그리고 우리 먼 친척도 그 당시 그 절망적인 시기에 결혼식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어서 나는 더 실감나게 이진섭, 박기원 부부의 연애, 결혼을 그려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나는 언제나 책에 묘사된 그 당시 정경을 통해서 나의 ‘어린’ 생각과 기억을 같이 투시하곤 했다.
아버지중의 아버지
이 책을 통해서 이진섭씨의 흔히 알려진 불란서 풍의 섬세함과 학자 풍의 다재 다능한 면이 많이 들어난다. 그 당시 문인들의 풍조였는지도 모르지만 역시 이진섭씨는 이진섭씨만의 자란 배경과 전통적인 집안 내력을 풍기며 그 시대를 살았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양반집안, 족벌의 의미가 거의 퇴색되어버린 일제시대.. 거기서 믿을 것이라곤 아마도 ‘우수한 머리’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이진섭씨는 아주 앞서가는 ‘모범적인 아버지 상’을 남기며 사신 것 같다. 그렇게 어려운 역사적 격동기를 비록 술로 삭히기는 했지만 가정을 ‘절대로’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완전히 성공을 했다는 사실.. 두고 두고 나의 가슴에 남아서 내가 배울 것은 무엇일까 생각하곤 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이 책의 제목에는 “이 시대 마지막 로맨티스트 이진섭” 이란 부제가 붙어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100% 수긍이 가는 표현이다. 비록 커다란 식구의 가장으로 경제적인 압박이 그렇게 커도 절대로 돈에 목을 메는 짓은 못하던 그런 면을 생각하면 이해가 간다. 어떻게 그렇게 멋과 돈의 균형을 잘 맞추며 살았을까? 그것은 이진섭 특유의 타고난 재주였는지도 모른다. 아주 잘 알려진 요절한 ‘천재시인’ 박인환님과의 인연도 그렇다. 그것은 이제 일화가 아니라 역사가 되었으니까.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술집 문화에서 출발한 이 박인환님의 즉흥시가, 이진섭씨의 즉흥 샹송에 접목이 되어 결국은 불후의 클래식이 된 것은 역시 길이 남을 한국 전후 문화사의 일부가 된 것이다.
이 책에 인용된 동료 극작가 한운사 씨의 “잊을 수 없는 인물들’을 보면..
빈대떡 집에서 박인환이 즉흥시를 읊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진섭의 머리를 스치는 번개같은 인스프레이션(inspiration, 필자주) 그는 즉석에서 멜러디를 붙여 노래를 불렀다. 우뢰 같은 박수가 빈대떡집 지붕을 뒤흔들었다. 젊음과 낭만과 꿈과 산다는 것의 슬픔을 그가 타고난 재간으로 융합시킨 이 순간은 명동이 기억해둘 영원한 시간이다.
이 최인환 시, 이진섭 곡의 샹송풍의 노래는 곡이 만들어진 때보다 훨씬 뒤에 리코딩이 되어 일반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내가 알기로는 최양숙씨가 제일 먼저 리코딩을 하지 않았을까? 그녀의 샹송 스타일에 제일 잘 맞는 곳이었다. 하지만 내가 제일 먼저 들었던 것은 역시 박인희씨의 곡이 아니었을까.. 기억이 가물거린다.
여기서 어떻게 이 클래식이 출발했는지 짐작을 할 수 있다. 이것을 박기원씨의 표현을 통해서 짐작을 하면 이진섭씨가 얼마나 음악을 사랑하고 특별한 재주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술 한 잔 들어가면 악보도 없는 자작곡에 바이브레이션을 넣어 피아노도 잘 쳤다. 애들과 우리만이 아는 ‘이 진섭 자작곡의 밤’이 수시로 열렸던 것이다. 싫어도 들어야 했는데, 애가 탔던 것은 그이는 술이 들어가면 시간을 초월해서 완전히 그 시간 속에 빠져 든다는 점이었다……
그이가, 시인 박 인환(朴寅煥)씨가 생존 시 명동 술집에서 낭만의 명동이 사라져 가는 것을 서러워하며 지은 시 <세월이 가면>에다 그 자리에서 작곡을 한 것은 지금도 아름다운 일화로 남아있다.
지금 생각나는데, 그날 밤 그이는 그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내가 시집 올 때 갖고 온 어린이용 장난감 피아노에 키를 맞추어 노래를 부르며 오선지에 채보까지 했던 것이 기억난다.
샹송 풍의 그 노래는 당시엔 어려워서인지 그리 알려지지 않더니 10여 년이 지난 후에는 서서히 대학생들간에 유행이 되었고 몇몇 가수가 불러 레코드까지 나왔다……..
그의 영결식에서는……. <세월이 가면>이란 노래를 최초로 불렀던 최양숙(崔洋淑)씨가 그 노래를 다시 불러 그의 마지막 길을 장식해 주었다